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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7일 20시 03분  조회:4154  추천:0  작성자: 죽림
 

  2) 암울한 현실에의 대응

 

  일제강점기 괴뢰만주국이라는 강역(疆域)내에서 생활해야 했던 우리 이주민에게 있어 현실은 암울했다. 이런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줄 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암울한 현실을 느끼고 인식한대로 표현할수 없는 일제 괴뢰정부치하라는 정치적환경이다. 즉 우리의 문학풍토가 현실에 대한 시인들의 느낌이나 인식을 직설적으로 표현할수 있는 자유를 박탈했던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인들은 그러한 모순된 현실을 어떤 시적인 수단 혹은 방법으로 대응했을가?

  먼저 함형수(咸亨洙)의 《비애(悲哀)》1)라는 작품을 보자.

 

나는 이 괴로운 地上에서

살기만은 조곰도 希望치는 안는다

어한 달가운 幸福과 快樂이

나를 부고 노치안는다 해도

그러나 나는 저 아득한 한눌을 치어다 볼

마음은 슬퍼지고 외로움으로 눈물이 작고 난다

저 나라에서도 나는  여기서처럼 이러케 孤獨할바

 

  여기서 화자는 천상과 지상을 두개의 세계로 갈라놓고있다. 그런데 화자는 첫 두행에서 지상의 괴로운 삶을 조금도 희망치 않는다고 하면서도 천상의 세계에 가기를 두려워한다. 천상의 세계 또한 지상의 세계처럼 고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때문이다. 또한 지상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달가운 행복이나 쾌락이 붓잡고 놓지 않는다 해도 미련은 조금도 없다고 했다. 왜서 그런지를 확대해석하지 않더라도 이는 현실에 대한 분명한 부정이다.

  채정린(蔡禎麟)의 《밤》2)에서도 현실은 밤과 같은 두려움의 이미지이다. 특히 《나도 내가 업시 낫선 곳에/어디서 흉한 우슴이 히히 우슴인가.》라는 표현은 소름이 끼치는 섬찟한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마지막 행의 《허이연 이마는 별처럼 추웁다》는 밤이라는 어두움과 두려움의 이미지에 대응되여 차가움의 이미지를 드러냄으로써 역시 현실을 어둠과 두려움, 그리고 차가움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써 인식한다.

  손소희(孫素熙)의 《어둠속에서》3)를 보면 제목부터 암울한 이미지이다. 그리고 《맥진한듯이 식컴언 밤 석냥 좀 주어라고 불숙 내미는 손/그 검은 얼골에 힌 잇발이 河馬와 같고》라는 싯구로 시작된다. 《식컴언 밤》, 《검은 얼골》 등 표현들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기본적인 이미지 또한 《암흑》이다. 석냥을 구걸하는 손은 물론 빛에 대한 갈구를 암시하겠지만 그렇게 빛을 갈구하는 손은 기진맥진한 걸인의 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모습은 단순한 걸인이 아니라 귀기(鬼氣)가 음산한 광인의 이미지에 가깝다. 다음의 시구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蒼空을 向해/별빛의 우름을 엿듯는 눈물의 女人아/내가 怪物이면 너는 妖魔와 같다.》에서 이점은 쉽게 확인할수가 있다. 거기다가 《우슴 이리 흉측한 눈쌀》, 《깊은 골에서 키- 키- 하는 우슴소리》도 이점을 확인시켜준다. 그런데 화자에 의해 그려진 녀인과 화자 자신은 요마(妖魔) 대 괴물(怪物)로 광인중에서도 광인이다. 그리고 마지막 3행의 《主여 이건 당신의 音聲임니가 그 무서운 魔像의 嘲弄입니가?/아모튼 中毒이 너무 甚하외다./노래를 잊었구 우슴을 잃은지 벌서 오랜데!》 라는 표현은 암흑속에서 분출해낸 절규요 분노라 할수 있다. 전편이 암울한 이미지들로 넘쳐나지만 요마, 괴물 등의 표현들에서, 그리고 광기어린 웃음의 표현에서 아직은 그러한 암울함에 완전히 추락하지는 않은, 어떤 분노를 보여줌으로써 생명의 존재를 확인시키고있다.

  그러한 현실의 삶에 대한 분노는 동시에 저항의 심리를 동반한다. 그래서 분노는 어둠이나 차가움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한차원 높다고 할수 있다. 류치환의 《怒한 山》4)은 그러한 분노를 울분으로 풀어낸다.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저항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지는 않고있으나 이 작품의 화자는 어딘가에 울분을 토한다. 어쩌면 하늘과 산의 대결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그 하늘(寒天)과 그 산은 그냥 하늘과 산이 아니라 화자의 심상이 부여된 하늘이요 산이다. 그것을 우리는 《사람들은 다투어 貪람하기에 餘念없고》라는 표현에서 조금은 감을 잡을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늘도 노한 모습이다. 《陰寒히 雪意를 품》었다고 한것은 그런 하늘을 우러러 증오하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분노를 잉태한것이라 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화자는 산더러 더 높이 노하여 그러한 한천에 굽어들지 말라고 호소한다. 결국 화자 자신이 음한히 설의를 품은 하늘보다도, 그에 굽어들지 않고 분노하는 산보다도 더 울분에 차있음을 드러낸것이 아닐가 한다. 《神도 怒하시기를 그만두섰나니》나 《地獄의 惡靈같은 주린 그림자를 끌고/因果인양 피의 復讐를 헤이는/아아 너 이 슬픈 陰樹.》라는 류치환의 또다른 시 《陰獸》5)의 표현에서 이점은 좀더 뚜렷해지는것이다.

  그러나 류치환에게 있어 그러한 울분이나 분노는 메아리도 없이 사라지는 부질없는 웨침만은 아니다. 강한 생명의 욕구가 내재해있다. 《生命의 書》6)에서 류치환은 그러한 생명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그리고 왜 분노하는지를 은근히 내비친다.

 

뻐치뻐치 亞細亞의 巨大한 地檗 알타이의 氣脈이

드디어 나의 故鄕의 조고마한 고흔 丘陵에 다었음과 같이

내 오늘 나의 핏대속에 脈脈히 줄기 흐른

저- 未開쩍 種族의 鬱蒼한 性格을 깨닷노니

人語鳥 우는 原始林의 안개 깊은 雄渾한 아침을 헤치고

털 깊은 나의 祖上이 그 廣漠한 鬪爭의 生活을 草創한 以來 敗殘은 오직 罪惡이었도다-.

내 오늘 人智의 蓄積한 文明의 어지러운 康昧에 서건대

오히려 未開人의 朦衡(?)와도 같은 勃勃한 生命의 몸부림이여

머리를 들어 우르르면 光明에 漂渺한 樹木우엔 한點 白雲!

내 절로 삶의 喜悅에 가만히 휘파람 불며

다음의 滿滿한 鬪志를 준비하여섰나니

행여 어느때 悔恨없는 나의 精悍한 피가

그 옛날 果敢한 種族의 野性을 본받어서

屍體로 업드린 나의 尺土를 새밝앟게 물드릴지라도

아아 해바라기같은 太陽이여

나의 좋은 怨讐와 大地우에 더 한층 强烈히 빛날지니라.

 

  《生命의 書》 전문이다. 울분에 넘치는 생명의 원천을 화자는 알타이산맥과 닿아있는 종족의 피줄에서 찾는다. 《저- 未開쩍 種族의 鬱蒼한 性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말이 알타이어계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개 알고있는데, 그렇다면 인종도 알타이산에 뿌리를 두고있다고 볼수 있는것이다. 미개적 종족의 생명력은 패배를 모르며 오히려 패잔은 죄악이였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내 오늘 人智의 蓄積한 文明의 어지러운 康昧에 서건대/오히려 未開人의 朦衡(?)와도 같은 勃勃한 生命의 몸부림이여》 라는 두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인간의 지혜에 의해 축적된 현대의 문명은 《어지러운 康昧》인 반면에 미개인의 생명력은 발발하며 몸부림친다. 원시와 현대를 대결시키고있는 형국인데, 여기서 현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고 해도 문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문명비판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수 있는데, 일제하의 현대 도시문명이라는 현실적인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문명비판의 의미는 그리 단순치가 않을것이다. 그것을 뒤에 나오는 悔恨없는 자신의 精悍의 피가 그 옛날 종족의 과감한 야성을 본받아서 죽으면서 자신이 없드린 작은 땅을 새빨갛게 물들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와 련관시켜보면 현실에 대한 저항의 의미는 더욱 강해진다. 물론 그러한 저항을 일제의 식민지통치나 일제에 의해 조작된 괴뢰만주국의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비약하여 인식하기는 어려울것이지만 현실에 대한 부정인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마지막 행인 《나의 좋은 怨讐와 大地우에 더 한층 强烈히 빛날지니라.》에서 그러한 생명욕구와 과감한 야성의 죽음에 대한 환희는 절정을 이룬다. 다시 말하면 암울한 현실에서 시인 류치환이 추구했던것은 미개적 종족의 과감한 야성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본연적인 생명력이였다고 할수 있다.

  류치환의 상기 작품에서 문명비판은 인간 지혜의 축적에 의해 이루어진 현대문명과 종족의 과감한 야성 사이의 대결을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작품의 중심은 오히려 미개인의 야성에 대한 지향성에 놓여지지만 조학래의 《街燈》7)에서 현대문명은 현실 부정의 한 상징물로 등장한다.

  이 시에서 가등은 일종의 문명의 상징 내지는 징표로 설정된것 같다. 화자는 열두층계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러한 가등을 내려다본다. 이때 가등은 《까놓은 병아리색기들처럼 조잘》댄다고 했다. 그리고 《…위선 무수한 불빛들이요/그다음에는 사랑이요 춤이요 울음이요 싸흠질이요/하루사리와 모기떼와 빈대와 파리와 심지어 이슬먹음은 뚝거비 노래까지/그 모-든것들이 한시도 쉴새없이 들복는판이다.》 즉 가등이라는 인공의 빛속에서 벌어지고있는 인간들의 행위는 모두 부정적이다. 하루살이나 모기떼, 빈대와 파리 그리고 뚝거비까지 비문명사회에서도 존재하는 부정적인 존재들이 이른바 문명사회의 인간의 행위들과 거의 등가를 이룰 정도로 화자에게 있어 문명인의 행위는 부정적이다. 《내 하는데 네 못하겟니 네가 하는데 내 못하겟니 하면서 들석들석 나는것처럼-.》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부정적인 행위들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서 비롯되였음을 암시한다. 한마디로 조학래에게 있어 문명의 이기에 속하는 가등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의 행위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적인 행위를 대신할 어떤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인의 이런 부정은 문명비판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심지어 분노의 표현이라 보는것이 나을것 같다.

  이 시인의 다른 작품 《心紋》8)에서는 그러한 불만이나 분노를 역설적인 방법으로 드러낸다. 이 작품의 화자는 심문(心紋) 즉 마음의 무늬 혹은 주름살이다. 확대해석하면 인간의 마음, 의식, 령혼 등이 될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의 무늬가 바람에 불려서 어느 나무가지에 앉고싶다고 했다. 나무가지에 앉아서 비를 맞은 까마귀같이 떨지라도 단지 《落葉만 지지 말었으면 좃켓다》고 한다. 즉 춥고 외롭더라도 락엽만 지지 않으면 된다고 했으니 여기서 락엽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락엽은 나무의 한 주기 생명의 끝을 의미한다. 가을이 되면 다수의 나무는 락엽이 지면서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가 겨울을 지나 다음해 봄이 되면 다시 새잎이 돋아나오고 새움이 트며 여름이 되면 록음이 우거지게 된다. 나무의 무성한 잎이 이루는 록음은 나무에게 있어서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락엽이 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는것은 강한 생명력의 보존을 의미할것이다.

  이어서 화자는 락엽만 지지 않는다면, 즉 생명력만 보존한다면 《이 季節으(의) 勝利를 되는대로 宣傳하며/입이 아푸도록 휘파람이라도 불겠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역설보다도 은유에 가깝다. 그러나 다음 시행에서 그것을 부정한다. 승리한 기사의 과장한 심리가 아니여도 좋고 무지한 물체라도 좋다고 한다. 심지어 《光明이 머러지면 그저 검은 存在요/光明이 밀려들면 스산하계 을쓰녕한 動物이라도 무관하다.》고 한다. 그것으로 만족한다는것이다. 이쯤 되면 더러 체념한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결코 그게 아니다. 다음의 례문은 이 작품의 주제를 도출한 부분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岩石갓튼 運命에 살어왓길내

오늘은 北西風이 불어서 눈보라 처도

來日은 東南風이 불어서 草花가 滿發한대도

나는 놀래지 안흐리라.

놀래지 안흐리라.

 

  이 부분을 읽으면 앞에서 투정같이도, 체념같이도 내뱉은 넋두리가 일종의 역설적인 표현임을 금방 알수가 있다. 좀더 나은것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부정하고 다만 락엽만 지지 않으면 만족한다고 한것은 그만큼 현실의 암담함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의 무늬 즉 의식을 소유하고있다는, 혹은 지키겠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부정적인 현실에 저항할 힘은 없지만 그것을 감내할 인내력은 가지고있으며 그렇게 인내할 생명력도 가지고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생명력과 인내의 바탕에는 당연히 현실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저항의 의지가 깔려있을것이다.

  현실 부정은 현실 비판과 차이가 있지만 정상적인 언로가 막혀있던 일제강점기에 있어서는 같은 의미로 리해해도 무방할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 시인들은 용인할수 없는 현실의 암흑을 부정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것이라 하겠다.

  이 시기 시인들은 현실을 부정하는 또다른 방법으로 과거에 대한 추억을 즐겨 시화시킨다. 송철리(宋鐵利)의 시적상상력은 그러한 추억에 상당히 익숙해있다. 《追憶》9)이라는 표제의 작품이 대표적인 례가 될것이다.

 

새하-얀 눈위로

외사슴 울고간 자욱마다

언 달빗치 파라케 멍든다는 밤이면

닥도 업시

나의 추억은 슬픈 부헝새

슬픈 부헝새.

 

  모두 6행으로 된 이 단시의 기본적인 정서는 차가움, 고독, 슬픔이다. 흰눈, 언 달빛, 파랗게 멍든 밤 등의 이미지는 차가움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차가움은 밤이라는 어둠의 이미지와 련결되여있다. 그러니까 차갑고 암울한 밤에 부엉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떠오른것이 추억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그 추억은 행복할수가 없다. 슬픈 추억이다. 그런데 추억 자체가 슬픈것은 결코 아닌것 같다. 시인의 또다른 시작품인 련작시 《爐邊吟》10)의 세번째 작품인 《反芻》에서 그것을 확인할수가 있다. 과거는 석류알같이 붉고 빛난다고 했다. 씹으면 씹을수록 향기롭다고 했다. 그래서 마구에 누워 청초를 모리는 황소처럼 《나는 過去의 反芻로 現在를 享樂》한다고 했다. 과거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것은 현재가 불행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역시 현재에 대한 부정 내지는 현실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다분히 드러낸다. 그러나 이 시인의 다른 시작품인 《북하늘엔 별도나 서글퍼》11)에서는 그러한 부정이 내면으로 침잠하여버린다.

 

(전략)

 

옛날은 부서진 기둥인데

추억은 깨여진 란간(欄干)이여서

피무든 손으로 노아도 노아도

오작(烏鵲)의 다리는 허무러만지고

 

(중략)

 

북하늘엔 별도나 서글퍼  

외로운 이 오들오들 는밤이다.

 

  이 작품의 기본적인 정서는 차가움과 상실감이다. 앞의 《追憶》에서도 이점은 확인되고있다. 단 여기서는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뿐이다. 이제 추억은 부서진 옛날이라는 기둥에 붙은 깨여진 란간에 불과하다. 과거의 삶은 그것이 슬픈것이였든 즐거운것이였든 이제 부서지고 해체되여 폐허가 되여버렸다. 따라서 외롭게 꿈꾸고 있는 꿈은 오들오들 떨수밖에 없다. 상실감을 넘어 거의 절망에 가까운 신음소리라 할수 있다.

 

  문학인의 립장에서 보았을 때 일제의 중국 동북강점기간은 현실에 대한 부정이나 비판의 자유를 빼앗긴 시간이였다. 따라서 우리 시인들은 여러가지 시적인 장치를 리용하여 우회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이나 인식을 표현할수밖에 없었다. 현대문명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한편 그것을 원시적인 삶의 야성과 대립시킴으로써 일종의 울분과 비분강개의 정서를 드러내고있다. 따라서 이 시기 시작품중에서 원시적인 야성을 생명력의 원천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환희로 표현한것은 저항적인 의미마저 지닌다고 할수 있다. 현실대응의 또다른 방법은 현실에 대한 암울한 느낌을 시화하는것이였다. 현실적인 삶의 고통을 어두움, 차가움, 외로움, 슬픔 등의 내적인 정서에 담아냄으로써 현실을 부정한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는 전체적으로 어두움이라는 공간 환경속에서 드러냄으로써 현실 부정의 의미를 극대화하고있다.

  그러나 어두움, 외로움, 슬픔 등 소극적인 정서는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정신활동의 한 부분이기때문에 그것이 지나치게 반복되고 내면화되면 자페적인 성향을 동반하게 되며 그러한 자페적인 정서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될뿐만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심지어 삶 자체에 대한 부정에 빠질 위험을 안고있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정서적인 부정은 이제 뒤에서 론의하게 될 현실도피라는 부정적인 시작현상을 유발하기도 한다. 꼭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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