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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적인(avantgarde) 시(시론)의 비극적 종말
<무 의미(탈 관념) 시- 초현실주의 시- 디지털 시- 하이퍼 시 비판>
- 최 이 인
* 글 머리
우리 한국의 현대 <시>문학사를 되돌아 보면, 해방후(1950년대) 조 향 시인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 시작품 활동이 있었고, 나중에(1960년대 이르러) 김춘수 시인을 대표로 하는 “무의미 -탈관념” 시 운동이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문덕수 시인이 사물시 이론을 근거로 시작품을 내놓았었는데, 최근에(2000년대) 이르러 월간 “詩文學“지와 ”현대시인협회“의 일부 회원들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 운동에 이어서 ”하이퍼 시“ 운동을 적극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나라 안에서 시작품의 창작활동이 오로지 시문학 본연의 전통에만 매달려서 천편 일률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말이 옳든 그르든 예술활동의 정체성을 느끼게 해줄 것이고, 진부한 일상성에 싫증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탈(脫) 모던이즘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적극적으로 실험적인 시짓기를 통해 시의 소재와 내용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또 한편으로는 이른 바 아방가르드(avantgarde)라고 하는 전위적인 시작활동을 통해 현대적 사고의 흐름에 부응하며 인터넷 정보화시대의 기술과 그것을 이용하는 젊은 세대의 독자 수준에 부응하는 전달 방식을 찾아서 다양한 방향으로 시도해 보는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하고 거침없는 시 창작활동에 비판적인 검토를 수행하여 문학 정신의 적절성을 따져보며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넓은 철학적 식견을 가지고 그 운동 경향에 반성할 여건을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언어의 예술인 시문학이 예술창작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실로 겉잡을 수 없이 “무-의-미”한 “말놀이, 언어의 유희”에 그칠 위기에 빠지고, 가뜩이나 독자가 떠나간 시 마당에서 시인이라는 이들만이 더욱 외롭게 웅크리고 서로만 바라보고 살 위험이 도사리게 될 것이란 사실은 많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저들 곧 “초현실주의 시- 무의미(탈관념) 시- 디지털 시- 하이퍼 시” 라는 전위적인, 앞서나가는, 시작(詩作) 운동을 주의깊이 관찰하면, 주장하는 사람이나 시기의 앞뒤 그리고 사용된 소재와 용어만 조금 다를 뿐, 심상운시인의 주장처럼 “탈관념을 지향한다”는*1) 관점에서 한 통속에 넣어놓고 분류를 해도 좋을 만큼, 많은 닮은 꼴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정신병환자들을 많이 상대해본 시인의 체험적 입장에서 냉철하게 분석해 볼 때, 정신병 환자 정확하게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이른 바 자유연상에 의한 환상적 이미지들로 풀어놓는<-이는 그 환자들이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사고하고 말을 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홀로 떠들음, 중얼거림, 지껄임 짓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아래서 이 논평문은 먼저 이른바 “무의미(탈관념) 시-초현실주의 시- 디지털 시- 하이퍼 시”운동을 주도한 시인들의 주장을 제시해서 그 유사한 점을 드러내어 한 통속에 넣어 분류할 수 있음을 밝힌다. 다음으로 그 주장하는 이론과 견해 그리고 시작품들이 단순한 의구심을 넘어서, 정신분열증 환자의 증상과 표현에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아 쉬 구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시(문학) 일반의 보편적 정신과 이상을 환기하면서 그에 반성의 자리를 마련해본다. 이 때 각 시(詩)운동의 주의나 주장, 발생 연원(淵源)이나 주도하는 시인들의 활동과 추구하는 이념 그리고 작품에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주제의 목표를 벗어나는 것이라 판단하여 최소한의 언급에 그치는 것으로 한계를 설정한다.
1.무 의미(탈 관념) 시, 초현실주의 시 , 디지털 시, 하이퍼 시의 공통점
무 의미(탈 관념) 시, 초현실주의 시 , 디지털 시, 하이퍼 시는 얼핏 그 제명(題名)만으로 보면 어떤 공통점이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국제적으로 출발한 초현실주의부터 최근에 국내에서 대두한 디지털과 하이퍼-라는 IT기술용어의 낯설음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고찰하면 이 모두를 한 영역(통속)안에 분류할 수 있는 공통의 근거를 찾아낼 수 있는 데, 무엇보다 그러한 시운동을 펼치며 적극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시인, 문학평론가들의 입을 통해 직접 그 공통점을 모아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겠다.
하이퍼 시운동을 주도하는 (시인, 문학평론가) 심 상운은 “극소수의 시인들이 관념을 거부하는 <- 여기서부터 밑 줄은 글쓴이가 침>시운동을 펼치고 있다”면서 ”관념이 침범할 수 없는 의미의 제로 포인트 지점영역으로서“, ① 언어유희의 무의미의 시<김춘수> ②초현실주의 시 <조향, 양준호> ③ 순수이미지의 사물시<문덕수, 이 솔> ④ 21세기 아방가르드 전면에 선 디지털리즘 시<오남구(진현), 송시월>를 들었다. 여기에다가 그이는 ⑤ 하이퍼 시<심상운,김규화,손해일,최진연, 신규호.... >라는 것을 포함시킨다.*2)
덧붙이기를: [...] 일상생활에 밀착된 사실적인 이미지와 환상적이고 초월적인(-초현실적인;글쓴이) 이미지의 뒤섞임을 즐기고자 한다. 이 뒤섞임은 그들에게 관념이나 의미를 넘어선(-무의미:글쓴이) 비약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환상적인 디지털의 감각을 선호하는(-디지털리즘:글쓴이) 현대시의 변화로 파악된다. 따라서 그들의 경향은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 기존관념에 집착하지 않을 때 더 큰 세계가 열리게 된다.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탈관념의 세계이며, 현실과 상상이 결합된 새로움으로 가득한 하이퍼(hyper)의 세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서 중요한 것은기존관념으로부터 과감한 탈출과 창의적인 상상력의 발현이다. 거기에는 우주적인 개안이 들어있다.*3) 곧 하이퍼 시라는 것이 앞의 세가지 유형의 시 경향과 공통하면서도 오히려 모두를 통합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와같은 시각에서 하이퍼 시론을 펼치며 주장을 내세우는 이들의 입장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시인, 문학평론가) 손해일의 주장*4): 하이퍼 시가 음소, 단어, 문장, 의미 단락 간 마디마디에 해체와 단절을 거치고 이를 취사, 선택, 가공해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하이퍼적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상상, 공상, 환상을 망라하고,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현실도 넘나드는 첨단 글쓰기. [...]크고 작은 마디인 시어와 행과 연, 의미단락 등 기본 유니트(unit)들이 거미망처럼 하이퍼링크(hyper link)로 연결돼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이룬다. [...]비논리적, 비선조직이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첨단 글쓰기. [,,,]난해한 암호풀이 하듯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골똘히 캐기보다는 디지털매체의 그림 감상이나 댓글달기처럼 비선형적, 비선조직으로 독자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로 작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저 따라가 볼 일이다. 이 시에서의 하이퍼링크는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조 명 제 의 주장*5): [...]우리 현대시가 여전히 ‘2천여 년 전 예수나 석가 시대의 비유, 상징의 기법으로 정서와 관념을 표현해’ 오고 있는 현실에 일침을 가하며 하이퍼텍스트 시운동에 과감히 뛰어든 김규화 시인은 디지털 시대의 하이퍼적 시쓰기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 가고 있어 주목된다. [...]의식과 무의식, 시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인간의 뇌 구조의 복잡한 그물망처럼 하이퍼시는 합리주의의 근본인 인과적 논리성이나 순차적 질서, 혹은 위계적 시스템을 벗어나 탈중심의 리좀(rhizome) 형태를 구축하며, 일방향적 단선구조에서 쌍방향적 혹은 다방향적 다선구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관계론적 체계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연상과 공상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가상공간을 가릴 것 없이 점핑해 가며 텍스트의 마디들을 연결짓거나 병치, 혹은 나열 등의 방법으로 공존시킴으로써 기계론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4차원적)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를 맛보게 한다.
(시인,목사) 최 진연의 주장*6):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탈 관념적인 사물시와 같은 입장에서 시를 쓰되, 그 구성 양식에 있어서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쓴다.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Hyper하다고 하겠다. [...]아무튼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 특성이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은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다. 이미지 단위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의미론적 혹은 정서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게 하이퍼시의 특징이다.그러나 화자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링크 역할을 하는 유사한 소리나 단어, 구문의 반복 등과 함께 연상에 의해 시의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로 문학적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하자는 것이다. 과거 시적 이미지는 현실세계를 따오는(Sampling) 데 그쳤으나, 하이퍼시에서는 그 이미지들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이로써 우리는 위의 시들이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무의미한 탈관념에 의존하여 현실을 떠난 환상적 이미지들의 자동기술적 연결에 의하여 상상, 공상, 환상을 망라하고,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현실도 넘나드는 글쓰기라는 사실에 의해 한 통속에 넣을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짓기가 정신병 환자 정확하게 말하면 정신분열증 환자의 (보통 “넋두리”라고 불리는) 특정 증상과 아주 유사하다고 보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2. 정신분열병 증상의 특이성
나는 여러 해 전에<1980-1981년> 어느 정신병 환자 요양원에서 상당기간 종교활동과 상담 책임자로 근무한 바 있다. 당시 열악한 수용시설에서 300여명에 가까운 천차 만별의 정신병환자들은 상태나 학력과 나이와 남녀의 가정배경에서 각양각색으로 대부분은 우울증 (manic depressive illness, 躁鬱症)을 함께 가지고 있었는데 15% 내외로(30여명) 이른바 조(躁)증 환자가 있었다. ( 내가 여러 정신병 의원과 정신병요양소를 돌아보며 확인한 바로는, 정신병 환자들 대부분은 말이 없이 우울한 상태로 지내나,- 그들 중 심한 중증의 환시 환청 환자들을 빼고- 약 20 % 내외는 홀로 돌아다니며 지껄이고 떠들었다.) 이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혼자 중얼거리고 지껄였다(떠들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환청(幻聽 Auditory hallucinations,홀로 이상한소리를 듣고 대꾸하며 중얼거림)과 환시(幻視 visual hallucination,홀로 이상한 현상을 보고 대꾸하며 중얼거림)에 고통을 받는 심한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실내에 갇혀 지내야 했으나, 홀로 중얼거리고 지껄여대는 증상만 있지 다른 활동에는 별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는 이들은 밖의 취사장에서 일을 하며 잔 심부름도 맡곤 하였다. 취사장에서 일을 하는 이들 가운데 강씨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온순한 성격으로 말이 거의 없고 어쩌다 물어보는 말에만 간단히 대답을 하는 이였으나(- 꼭 조울증 환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동생은 간 밤 취침전에 모든 수용자들에게 관리실에서 주는 신경안정제의 약기운이 떨어질 무렵인 오전 10경 부터는 저 혼자서 또는 옆에 사람이 있으면 제 말을 들어주건 말건 그 쪽 사람을 향해 (홀로) 말하고 뇌까리기를 계속하는 이였다. 위쪽 병동의 취사장과 아래쪽 병동의 취사장을 오가며 심부름을 해주는 21살의 여성 김귀선은 하루 종일 홀로 중얼거리고 다녔으나 말 소리가 작아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던데 반해, 이 28살 된 강형구의 ‘홀로 중얼거림’은 이른바 “초현실주의(슈르 레알리즘) 시” 라고 할 수 있는 것, 또는 무 의미시라고도 불리우는 것 과 아주 비슷해서 (오늘날의 하이퍼시라는 것과 거의 똑같다) 놀라움을 주었다.
먼저 강 씨의 “지껄임(넋두리)” 을 여기 옮기고 한 마디로 결론을 맺기 이전에*7), 강씨가 지껄인 말씨에서 진단할 수 있었던 정신분열병 환자의 병적증상으로서 일반적으로(사전적으로) 알려진 조증(躁症) 환자의 특이성을 알아보자*8).
정신분열병 환자의 일반적 증상: 정신분열병은 환자에 따라서 제각기 다른 증상을 나타내는 듯하지만 최대공약수로 집약해 보면, 사고과정(思考過程), 즉 연상(聯想)을 하는 데 있어서 정상적인 논리과정이 파탄되어 논리적 연결을 잃거나, 토막토막으로 단절되며, 감정표현의 조화가 안 되고, 기분과 생각 사이가 유리되어 일치되지 않는다. 감정이 둔마되며 양면(兩面)의 극단적인 감정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이런 기본적인 증상의 복합으로 복잡한 증상이 생겨나서, 정상인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묘한 사고와 행동 등의 증세를 나타내게 된다.
*정신분열증 특징:(1) 망상 (2) 환각 (3) 와해된 언어 (예: 대화의 주제에서 빈번한 탈선 또는 지리멸렬한 지껄임) (4) 심하게 와해된 행동이나 긴장증적 행동 (5) 음성증상, 즉 정서적 둔마, 무 논리증
* 정신병중 조(躁)증 환자의 증상:조증 환자는 흥분되어 있고 이야기가 많으며 과잉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말할 때 목소리가 크고 비정상적인 사고의 흐름으로 심한 경우 말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망상이나 환각이 나타나기도 한다. (1) 팽창된 자존심 또는 심하게 과장된 자신감 (2)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거나 계속 말을 하게 됨 (3) 대화와 사고의 비약 또는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는 의식적 -무의식적(잠재적) 표출
3. 위 두 부류의 동일성 및 유사성
위의 1 (하이퍼 시 짓기를 주창하는 시인들의 요지)과 2 (정신분열증 환자의 일반적증상과 보기로 든 강씨의 특이성)에서 각각 밑줄을 그은 데를 비교하여 보면 핵심적인 상태나 증상에서 양쪽은 대부분 일치함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최대한 간추려 적시한 2항의 정신분열증 환자의 증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좀 더 설명을 붙여서 ( 하이퍼 시적 용어로) 해설해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1항의 증상과 같은 상태를 유추할 수 있다.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미지의 뒤섞임. 관념이나 의미를 넘어선 비약의 세계, 현실과 상상이 결합된 새로움으로 가득한 세계, 기존관념으로부터 과감한 탈출과 창의적인 상상력의 발현. 음소, 단어, 문장, 의미 단락 간 마디마디에 해체와 단절을 거치고 상상, 공상, 환상을 망라하고,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현실도 넘나드는, 비논리적, 비선조직이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첨단 말하기. *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 의식과 무의식, 시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인간의 뇌 구조의 복잡한 그물망처럼 합리주의의 근본인 인과적 논리성이나 순차적 질서를 벗어남, *자유연상과 공상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가상공간을 가릴 것 없이 점핑해 가며 마디들을 연결짓거나 병치, 혹은 나열 등의 방법으로 공존시킴으로써 기계론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4차원적)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를 맛보게 함. *초월, 건너뜀의 기법으로 단락과 단락, 또는 한 단락 속의 말과 말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들로 구성 *단락 상호간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 거기에 ‘건너 뜀 초월’이 있게 된다. [...]아무튼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다. 이미지 단위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 의미론적 혹은 정서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특징 *유사한 소리나 단어, 구문의 반복 등과 함께 연상, 가상현실의 세계로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 이미지들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의학사전에 기술된 정신분열증 환자의 특이성에 이렇게 조금 살을 붙여 놓으면, 우리는 양쪽(위 1과 2)의 차이를 얼른 구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흡사하다거나 형식 및 방법론적 동일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도대체 그 정신분열증 환자 강씨와 같은 사람들의 지껄임이 어떠하기에 이들 시인들의 시작품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일까 ? 굳이 앞에서 그이의 뇌까림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다음에서 인용한 시 작품들을 지은 시인들의 이름만 빼고 보면, 그 정신병 환자의 지껄임과 말 그대로 형식에 있어서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정신 분열증 환자의 독백을 옮겨보겠다.
<-취사장 앞 들꽃이 핀 마당에서 옆에 앉아 반찬거리를 다듬는 여성을 흘깃거리며 대화하듯이 지껄임>
나팔 꽃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오늘은 참 많이 컸다. 시집갈만하다<- 옆의 여성을 보고> 그쟈?
팔이 아플텐데, <-마침 나비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나비를 잡고 싶은가 보다
나팔 소리가 시끄럽다. <- 옆의 여성을 보고> 조용히 좀 하래이
나비가 기뻐서 하늘로 춤추고 올라간다 그쟈?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끓어오른다. 어디 저 먼 나라로 여행가나 보다.
나도 엄마랑 놀러가고 싶대이.
<때 마침 하늘에서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비행기가 나비를 싣고 서해바다를 지나간다 우리도 신나게 날아간다. 중국 땅에는 짜장면이 덮여있다. 모택동이 좋아해서 맛있게 먹었다.
인도의 갠지스강을 지나갈 때 시체 타는 냄새를 맡는다.
죽으면 지옥불에 왜 심판받는다고 안카나? 히말라야 눈덮힌 산을 넘어서 나비는 추워서 얼어죽고, 온 땅을 하얗게 덮었다.
몬살겠다. 아라비야 사막으로 가자. 덥다 옷벗고 자자. 않좋나?
네 치마속이 더 뜨겁다. 너도 추우면 못살기라. 그쟈? 지중해는 하늘보다 더 푸르다.
푸른 것은 깨끗하다고 안카나?
제우스 신전에는 깨끗한 사람만 들어간다카이. 물속에서 빨가벗고 고래처럼 놀아보자.
너도 몸 좀 깨긋이 씻고 흰 옷만 입어라. 빤스가 되게 더럽다.
네가 신전에 절 할 줄을 모르니 사람들이 미쳤다고 안카나?
이태리 로마에 곧 도착한다. 바티칸 사원에 너도 가고 싶으면 돈 좀 내놔라. 호떡이라도 사먹고 배불러야 걷지 굶고는 거기 못간다. 국수좀 많이 끓이라
내일에는 스페인에 도착한다. 소싸움은 볼 것 이 없다 안카나?
투우사놈들은 나쁜 놈들이데이. 동물 학대하는 것은 동물보호법 3조에 따라 형법으로다가 의법 처치해야 한다. 민법은 구리다. 그쟈?
말을 타고 달려가야 할텐데 ...말 좀 찾아봐라. <보일러 불을 책임맡은 뚱뚱한 체구의 김씨가 다가오자> 힘센 말 저기 온다. 그만 됐다....
위와 같이 “그쟈? ... 안카나?”를 자주 후렴구처럼 넣어서, 운율감 넘치게 이른바 하이퍼 링크로 연결되는 텍스트처럼 끝없이 이미지를 이어서 사람의 잠재의식의 표출이나 자동기술적으로 역동적 상상력의 세계를 아낌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하이퍼 싯귀를, 초현실주의 시(싯귀)를, 디지털 시를, 무의미 탈관념 시작품(?)을 만들어 냈다.
다음은 2010년 봄 철 2개월 쯤 서울 남산 도서관 정문 마당앞 벤취옆에 거의 매일 서서 (홀로 중얼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꽤 큰 목소리로 연설하듯이) 홀로 떠들어대던 42살의 서울 대방동에서 산다던 김형문이라고 자신을 밝힌( 겉보기 멀쩡한 회사원 같던 ) 한 사내의 지껄임을 간략히 옮긴다.
내일의 날씨는 전국적으로 맑겠고 곳에 따라 소나기가 내리는 곳도 있겠습니다. <퉤- (침을 뱉으며) 씨발>
시베리아 대륙의 건조한 대기와 북 태평양 고기압이 부딪쳐서 한반도에는 살벌한 전쟁의 기운이 감돌겠고
봄 기운도 점차 북상하면서 개나리 진달래 철쭉 꽃 소식이 온 땅을 무섭게 수놓겠습니다.
새학기 등교하는 우리 어린이들의 책가방에서 꽃들이 새싹을 피우기 다투는데
새 나라의 어린이는 꽃나무에 앉아서 지저귀는 새들, 트로트로다가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겠습니다.
김일성이 죽은후 북반부에서는 김정일 장군님이 위대한 교시를 받들고 강성대국 건설에 한창인데
옆 벤취의 두 젊은 남녀 대학생은 오늘도 공부를 않하고 연애에 열을 올리며
입술을 새빨갛게 빨아대서 피가 흐르고 <퉤- (침을 뱉으며) 씨발>
사회주의 와 자본주의의 개념조차 모른채 자유민주주의의 통일 정책에 무조건 찬성할 따름임니다.
봄이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내 마음속에도 피었는데
이명박 정권의 친미 정책을 나는 적극적으로 지지한 탓에 일찍이 시들어버리고,
북한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에 의해 민주투사가 되어 조만간 감방으로 사라지겠습니다.
삼천만이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좃나발 불지마
아버지는 노조운동에 다리 부러져 북해도 탄광에 끌려가고 배가 곺아도
신나게 별보기 운동을 했고, 비가 오고 날 흐리면 동해 바다로 가서 파도와 애기를 나눴습니다.
아 다시 못 올 이 땅의 내 청춘...
다음에는 청춘이 좀먹어서 대머리가 다 된 김형문 기자가 빠리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퉤- (침을 뱉으며) 씨발>
마치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처럼 형식은 시사 보도적이었으나, 내용의 갖춤과 마디 마디는 저 1의 주장자들의 바로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여기서 다시 정신분열증 환자의 병 증상과 “하이퍼” 시론을 펴는 위 네 사람들의 주장하는 요지와 방법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다음에 각각의 시론들을 인용된 시작품을 중심으로 논평한다.
4.무 의미(탈 관념) 시, 초현실주의 시 , 디지털 시, 하이퍼 시(시론) 비판
1.무 의미- 탈 관념 시론
도대체 의미가 없는 시와 관념을 벗어난 시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시라는 문학적 활동을 떠나서도, 언어와 사고행위를 통한 정상적인 사람의 의식의 세계에서조차 불가능하고 말이 성립되지 않는(語不成說) 이 무의미와 탈관념이라는 언어행위를 분석해 보는 것이 먼저 터닦아놓을 일이 되겠다.
“의미”가 무엇인가? 언어학적으로 의미론에 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반 상식에 따른 보편적<일차적인> 통용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의미란 사전적으로 우리말 “뜻”의 한자어이다. 사람이 “말(언어행위)”을 할 때 형식은 소리(발성)와 내용(지시)을 갖는다. 이 경우 내용(지시)이 뜻(의미)이다. 특별한 경우에 소리 자체 만으로도 고저 강약의 발성에 따라 지시기능을 하기 때문에 소리도 뜻을 갖는다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는 반드시 의미를 갖는다. 말(언어)를 문자로 표현할 때 형식은 문자기호와 내용(지시)으로 구성되는데 내용이 바로 뜻이지만, 교통신호처럼 사회적 약속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문자 기호만으로도 뜻이 된다. 따라서 사람이 행하는 모든 표현수단은 뜻(의미)을 갖는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의미가 없다(무의미)”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사람이 의식활동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의미의 부여이고 의미의 추구의 행동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이미는 목적을 지향하고 욕구하는 “의도”나 “의지”와는 다른 것이다.
“관념(觀念)”이란 무엇인가? 사전에 따른 일차적인 뜻은 “사고”, 생각(영어 idea, 동사 think, 독일어 denken)“이다. 한자말로도 본것(觀)을 마음속에 담아두기(念)이다.
사람이 대상(객체)을 감각에 의해서 받아들인 것(감각 자료)을 생각(사고)하여 정리 구별해 놓는 것을 말한다. 사고하여 구별하고 정리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언어에 의해서 수행한다. 언어로 수행한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의미있게 분별한다는 것이다. 만일 언어로 감각자료를 구별하고 구분하여 우리 뇌속에서 정리를 하지 않는다면(곧 관념화가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지 막연한 감각(眼耳鼻舌身에 의한 느낌)에 지나지 않으며, 지렁이가 밟으면 꿈틀거리거나 짐승이 본능적으로 먹이를 보면 달라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관념이 없으면 의미가 형성이 않되고, 의미가 없으면 관념이 생성이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탈관념(관념을 벗어나기)”하겠다고 한다면 의식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곧 죽겠다는 것)이거나 언어를 모르는 짐승이나 하등 동물이 되겠다고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의미가 없고(무의미) 관념을 떠난(탈관념) 시를 쓴다고 하고 그렇게 쓰자는 시인이 있다.
가. 그 주장자와 시작품
김춘수 시인은 「事物詩와 觀念詩의 問題」*9)에서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해서 쓰는 곧 사물의 세계를 아무런 설명이나 哲學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事物詩와 의지적이고 비유적으로 세계를 관념으로 묶어 보는 관념시로 구분하면서, 앞의 것은 탈 관념적으로 서술적(=묘사적-글쓴이) 이고 순수한데 반해 뒤의 것은 도덕적 교훈이나 판단의 목적을 위해 사물을 수단시하고 독자를 강요한다고 지적하면서 보기로서 다음과 같이 든 시 작품(1연)을 김춘수는 탈관념 이고 그래서 무의미한 시라고 하였다:
산은/九江山/보랏빛 石山//山桃花/두어 송이/송이 버는데 <朴木月 시, 산도화, 부분>
이 시가 정말 김춘수의 주장처럼 무의미 하고 탈관념이 된 시란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이 작품을 이해해야만 하는가? 새삼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언어로 쓰여진 모든 시가 ”뜻이 없이“( 무 의미) 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념시라고 비판하며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를 한마디로 통일을 할 수가 없는데, 김춘수는 “관념”이란 단어를 앞에서 풀이한 대로 일상적이고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곧 사전적 의미인 “사고”, 생각이라고 이해를 하지 않고, 주체의 ”의도“나 ”일정한 의지“ 또는 ”목적적인 의식“을 일컫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관념이란 것에서 의미가 나오는 것인 데, 의미= 뜻 이란 1차 사전적이고 통념적인 단어풀이에서라면 ”무 의미“라는 용어가 있을 수가 없으나 ”의미“를 ”의도“나 ”일정한 의지“ 또는 ”목적적인 의식“을 일컫는 것으로 김춘수가 바꾸어서 이해하고 사용하는 한, 비 학문적이고 비 상식적이긴 하지만 거기서는 무의미라는 용어를 납득할 수 있다. 의미란 용어를 이렇게 이해하고 사용하는 한에서 관념을 벗어난다는 ”탈 관념“이란 말도 납득될 수가 있다.
아무리 김춘수 방식으로 의미라는 단어를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와 취사선택한 단어에 의미(=의도나 의지)와 관념이 배제될 수가 있단 말인가? 관념에서 벗어나(脫)있으니, 무 의미하다는 이 주장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김춘수는 지은이가 (어떤 의미-의도부여가 없이) 사물에 단순한 이름만 붙여서 단어를 나열한 것처럼 했기 때문에 사물시요 탈관념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인 박목월이 무의미(無意味)한 시를 쓰려고 이 시를 지은 것은 아니라는 추론을 하기에 앞서, <“꽃”이라는 훌륭한 작품을 쓴 시인의 말이라고 간주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시라는 것과 거기 사용된 시언어라는 것에 대한 김춘수의 혼란된 인식을 엿볼 수가 있다.
이 시는 [구강이란 산이 있는데, 보랏빛을 띈 돌산(석산)이다. 거기에 산복숭아 꽃이 두어 송이 막 꽃 봉우리를 트고 있다]라는 것을 압축한 문장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시는 김춘수의 말처럼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해서 쓴 곧 사물의 세계를 아무런 설명이나 哲學 없이 그대로 드러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독자는 사물 이름으로서의 단어만 나열한 그것을 그대로 감상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 반대로, 시인은 구강이란 산이 하얀색이나 황토색 돌(석)산이 아니라 보랏색을 띈 돌산이고 그 산에 진달래꽃이 아니라 산복숭아꽃이 피었는데 아직 만발해 있지는 않고 두어송이 막 꽃봉우리를 트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는 무르익은 봄의 시기가 아니라 겨우 겨울 기운이 가신 이른 봄의 시기를 보여준다. 봄눈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2연과 끝 연인 3연을 종합해서 감상하면, 구강산이라는 노장사상의 신선교에서 희구하는 도원경(桃源境)은 속세의 사람들이 더럽히지 않은 이상향으로서 옥같이 순수한 물을 새끼를 거느릴(린) 악의 없는 암사슴이 몸을 더욱 깨끗이 가꾸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표출해 내서, 시 지은이는 그러한 순수 자연관의 철학과 그런 생활을 꿈꾸는 의도를 보여주며 속세의 우리 네 삶의 질곡과는 다른 순수한 자연생활의 모습에 대한 희구라는 의미부여를 산도화의 배경에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럴진대 김춘수가 보기로 거든 사물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관념시인 것이다. 한 마디로 사물 이름만(단어만) 나열한 시라고 해도, 지은 시인이나 독자는 압축된 행간의 단어와 생략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짓기를 하는 것이며, 감상을 해야하는 것이 시에 대한 바른 도리(이해)가 아니던가? 이를 부정하고 의미연결이 않되는 단어들만의 나열이라면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정신분열병 환자의 지껄임이나 보고 읽은 셈이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심상운의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을 들여다 보자. 이 논문은 시인 오남구(옛 이름, 진현)와 심상운의 탈 관념시론에 대한 최진연의 비판에 관해 심상운이 다시 반박하다시피 하면서 “탈관념에 대한 논쟁을 잠재우고 탈-관념의 이론을 새로 정립한 글 [...] 이 글의 논리를 바탕으로해서 아방가르드의 시론이 성립된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하였는데*10), 최진연은 자신의 논문에 대한 심상운의 이같은 반박 논문을 읽은 후, 화자의 주관적 생각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에 그치면 탈관념이라고 이해하였음을 밝히면서 “내가 제기한 관념문제에 명료한 답을 제시해주었다.”고 대답하였다. 과연 올바른 말일까?
나 . 그 주장의 오류
김춘수처럼 탈관념을 주장하는 시인 심상운은 그 논문에서 독자적인 많은 연구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이해로써 자신의 주장을 펴내고 있다.
먼저 불교의 인지론을 거론하면서 1.감지(6식의 초기작용) 2.인지(의식의 분별작용) 3. 의미형성(사고와 연관에 의해)의 단계에서, 순수인지는 2항 까지를 일컫고, 이를 직관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우리 사람이 대상을 인지한다는 것이(의식의 분별작용은) 지렁이처럼 조금만 손(촉각)을 대도 꿈틀거리며 반응하는 것(지각)에서가 아니요, 끈끈이 주걱(잡초 식물)이나 호랑이(동물)처럼 어떤 것을 잡으면 뜯어먹는 욕구충동에 따른 본능적 활동이 아니다. 사람이 대상을 서로 달리 분별하여 인지하고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식상태 또는 기본 욕구적 충동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말(언어)을 갖고 자기를 표현하며 의식활동을 하고 사는 사람(호모 사피엔스)은 이미 언어(말)로 지칭된 사물(사람)이나 사태를 통해서 서로를 지각하고 구분하고 구별하는 것이다. “이미 언어로 지칭된 사물”이라 할 때, 거기에는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애)라는 유의미화가 자동적으로 속성화 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관념화 되어있는 것이다. 이름<또는 아직 이름을 모르는 어떤 기호 X) 이라는 언어가 없이는 우리 사람은 어떤 것도 인지하거나 인식한다고 말할 수가 없고 표현할 수가 없다.
이런 점을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Heidegger) 는 사고(유)-언어-존재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서로 共屬하고 있다고 한다. 그이의 유명한 말 “언어는 존재의 집” *11) 이라고 함은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어 그 안에서 존재( 삼라만상 일체의 있음)가 본재 (Wesen) 하는 장소, 지평, 공간(Topologie) 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언어라는 거처에서 살고 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단히 이 집을 통하여 존재(모든 “있음”)에 이르게 된다 그이가 보기를 들 듯이, 우리가 샘에 가고 숲을 통과할 때 우리는 항상 『샘』이라는 언어를 통과해 가고 『숲』이라는 말을 통과해서만 샘과 숲에 도달한다*12). 우리가 샘이나 숲에 가고자 할 때, 샘이나 숲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를 우선 물 마시는 곳 나무가 우거진 산속이라는 언어로서 다가오며 그 의미를 이해하여 나가는데서 우리는 그것의 존재(있음)에 이른다. 우리는 샘이라 하는 또는 숲이라 하는 존재자의 본질 즉 존재가 샘이라고 숲이라고 명명되어 그 의미가 이해됨으로서 샘과 숲에 이른다. 우리는 말로서 묻고 그에 대답하는 말을 듣고, 그 말이 지시하는 말에 가는 것이다.*13)
그런데 심상운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 Kant)의 인식이론을 들고 자신의 주장을 거기에 근거놓는다. 칸트가 말하는 공리와 같은 것은 직관의 대상이고 사실상 관념에 이르기 전의 상태인데, 시작(詩作)에서도 대상을 직관하여 곧 탈관념(관념을 벗어나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잘못 알고 있다.
내가 W. 딜타이의 「역사이성비판」을 알기 전까지는, 칸트의 천재성에 경의를 표명하여 마지않았고 대단히 감동을 받기 까지 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나오는 인식이론에 의하면, 모든 대상은 1차적으로 우리의 감성에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인 직관 형식을 거쳐 걸려진다(아래 도표 참조). 이렇게 걸려진 것은 잡다한 감각 소재의 다발들로서 다만 감관(감성)에 소박하게 수용된 것이지, 아직 인식(인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2차적으로 우리의 오성(Verstand, 쉽게 말해서 지성)에 있는 성질, 수량, 관계, 양상이라는 네 구분에 소속한 각각의 3가지 구별(보기; 數量- 전칭, 특칭, 단칭) 을 넣어서 모두 12가지 (카테고리-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실체/주어와 속성/술어부로 구별한 12 범주) 능동적인 선험적인 범주 형식을 가지고 대상에 관한 분명한 인식을 하게 된다. 칸트가 선험적인(달리 말해서 초월적인) 직관형식으로서 시간과 공간 형식만을 통과한 대상의 단순한 감각자료를 말한 것을, 심상운은 판단과 사고의 이전의 단계로서의 직관을 말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탈관념이 이에 근거하여 가능한 것이라는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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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대상을 안다(인지한다)고 말할 때는 감성의 수용된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의 선천(험)적 형식인 오성의 범주를 통하여 구성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되어졌다 함(곧 성질, 수량, 관계, 양상으로 구별되어진다함)은 언어로 사려분별이 되어져서(관념화가 되어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심상운이 보기를 든 바, 칸트가 수학적 공리나 도덕적 선악이 직관된다 한 것은 무슨 뜻일까? 공리(axiom)란 그 자체로 명증해서 어떤 경험적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반 이론을 가리키는데, 보기로서 유클리트 기하학에서 “두 점간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다”라는 공리가 직관으로 인식된다 함은 감성의 직관형식인 공간( 대상의 외부적 점유)을 다루는 기하학에서 경험적 증명이 필요없이<-오성에 의한 구성이 없이> 선험적(transzendental)으로 인식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고 (남을 상해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라는 )도덕상의 善(좋은 것)과 惡(나쁜 것)이란 것을 분별하여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어떤 경험적이고 이론적인 교육을 통해 배워서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본유한 것이고 보편타당하게 직관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논리적 추리와 사변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감각적으로 단지 느낌으로 이해되고 납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에 의한 표현과 논증을 거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중요한 것은 이들 공리가 “이다, 아니다” 또는 “옳다 , 그르다”라는 명제적 판단을 자체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렇게 (사려분별 지思慮分別 知인) 판단을 내포하는 한 당연히 형식적으로는 선천적인 범주의 틀을 갖고 있다.]
이렇듯 기하학(수학)에서나 윤리학에서 공리나 도덕률이 직관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니, 문학에서도 대상이 (공리처럼) 직관적으로 인식될 수가 있다고 추리하거나 단정한다면, 문학의 본질에 관한 그릇된 지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우리가 사용하는 문학의 제 1차적 도구인 언어의 기능에 대한 이해부족 또는 오해에서 나온다고 비판할 수 있다. 문학이 수학의 기하학처럼 공간위의 도표(기호)양식만 보고 시각적으로 공리를 직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도덕 윤리학처럼 직감적으로 양심의 가책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다만 감각적인 수용과 느낌으로 용납되는 사실이 문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언어에 의한 표현으로 곧 의미의 부여와 추구로 문학이 설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며 이때 언어의 관념화는 필수불가결하게 따르는 것이다.
심상운이 덧붙여 증명하고자 하는 직관상 이란 것도 자신의 말 그대로 상상이나 몽상처럼 “주관적인 시각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만일 이것을 시 창작한답시고 언어로 언표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관념화가 되는 것이며, 언어를 갖는 그 순간부터 이미 의미부여(의미화)가 된 것이다. 사람이 생각한다, 사고(사유)한다는 것은 대상(존재자 또는 존재)을 언어로 지칭하고 분별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 때문에 누군가가 “무의미 시“라는 것을 짓겠다고 주장한다면, 언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소리이며 ‘나무로 된 쇠(鐵) 못’을 만들겠다는 것처럼 어불성설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 된다.
그런데 심상운은 윗 논평문의 “관념과 탈관념의 개념정리”라 하는 부문에서 “감지와 인지의 과정(직관)이 끝나서 일어나는 사유와 지식에 의한 의식의 현상”이 관념이라고 규정한다. 그이가 말하는 감지가 감각적 느낌이라면 인지란 구별이란 판단행위가 따르는 의식의 현상인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의식활동에 통합하여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언어화 단계에서 찰나적인 시간의 순서를 가름할 수 있다. 이 의식의 현상이 언어로 작용될 때 곧 관념(idea) 이 된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모든 인식이 단순 관념(simple idea)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은 감각과 반성이라고 하였을 때, 외부의 자극을 통한 감각이 우리의 감관에 받아들여지면 우리는 그것을 반성하여 지각을 하는데 이 반성이란 필연코 언어를 통한 되새김행위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사람에게는 언어를 떠나서 의식활동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詩 기초이론에서 흔히 원 관념(내 아내) , 보조 관념(꽃 같은)이라고 구분하여 부르는 것도 마찬 가지 언어의 유의미화를 달리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심상운은 “관념”을 김춘수와 좀 달리 설명하나 이해는 함께하고 있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우리의 오성으로 사려분별을 하여 인식(지식)에 이른 것을 관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경우 그이에게서 관념이란 지식을 말하는 셈이다. 심상운이 보기로 든 다음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①“방바닥이 차다”, “굶어서 배가 고프다“, ②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심상운은 위 ①은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요 느낌이고 사실적인 인식이 들어있지 않아서 관념이 아닌데 반해, ②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지식과 의미가 들어있기에 관념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자신이 주장하고자 설정한 가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판단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나 할까? 왜냐면 ①의 “(이것이 벽이 아니고) 방바닥 (이다)” 이라고 지칭한(말한) 것 자체가 관념이고, “(그것<방바닥>이 따뜻하지 않고) 차다”라는 것 자체가 관념의 행위이다.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요 느낌이고 사실적인 인식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인식과 지식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이미 차이와 구별을 오성에 의해서 행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돈이 없어서) 굶어, (머리가 아니라) 배가, (부르다 가 아니라) 고프다”가 각각 관념들이다. ②의 “(사람이 가 아니라) 하느님이 (하늘이 아니라) 세상을, (멸망시키다 가 아니라) 창조했다” 가 각각 관념이요 관념의 행위들이다. “(산이 아니라)물은, (광물이 아니라)생명의, (결말이 아니라) 근원이다” 가 각각 관념들이다. ②에서 지식을 주듯이 ①도 함께 지식을 준다.
그렇다면 심상운이 예시한 ① 과 ②는 무엇일가? 주어와 술어로서 사실을 판단하는 하나의 문장이다(판단문). 곧 명제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하나의 문장, 판단문이 관념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방바닥이 (뜨겁지 않고) 차다”고 하는 말(판단)도 관념이고, “(굶어서) 배가 (아프다 가 아니라) 고프다”는 것(서술, 판단)도 인지의 관념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멸망시켰다 가 아니라) 창조했다” 고 하는 것이 (판단)관념이고, “물은 (생명의) (해악이다가 아니라) 근원이다“ 라는 것도 물에 관한 인지의(지식에서 비롯한) 관념이다. 따라서 심상운에게 반박을 당하였으나, 최진연이 처음 주장한 바 처럼 ”언어자체가 하나의 의미요 관념이다. 어떤 작업으로도 언어에서 관념인 의미를 제거할 수가 없다.*14)
다음으로 탈관념(무의미) 시로서 보기를 제시한 김춘수의 시작품을 검토해 보자.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눈은/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그 날 밤 잠들기 전에/물개의 수컷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김춘수 시, 처용단장 1의 2)
심상운은 이 시를 지은이 혼자서만 이해할 수가 있고, 어떤 의미가 형성되기 이전의, 관념의 때가 묻지않은, 순수한 상태의 언어를 보여주는, 탈관념의 무의미 시라고 한다. 이러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위에서 논의한 “관념”이란 뜻을 잘못 이해한 때문이라 하겠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김춘수가 작정하고 무의미랍시고 아무렇게나 (상념이 떠오르는 대로) 끄적거렸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상정하자. 그렇지만 읽는(감상하는) 이마다 저마다 문장안에서 많은 의미를 찾아내고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화가 피카소가 어린애들 낙서같은 추상화를 그렸을 지라도, 감상자는 예술작품이라는 거기서 제 나름대로 의미를 추구하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듯 인용한 시작품에서도 처용이 막 피어나는 꽃- 산다화(제 아내?)를 적시는(범하는) 때 아닌 3월의 남쪽 바다에서 올라온 눈(이방인)에 황당해하며 수컷 물개의 울음처럼 농염한 정사의 소리에 괴로워하고, 송이가 큰(남性이 큰) 눈(이방인)이 산다화(아내?)의 목덜미를 핥는 모습을 보고 슬픔을 읊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온당하지 않을까? 이렇게 이해할 때 이 시는 무의미 탈관념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와 관념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시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저 시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무 의미와 의미에 대한 착종된 이해와 관념과 사물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 나온 시에 관한 편견을 보게 된다.
철학자 하이데거( M. Heidegger) 는 우리 사람의 사고(생각)와 언어와 존재(또는 구체적인 존재자)의 불가분리한 공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슈테판 게오르게(Stephan George) 의 시 『언어 (das Wort)』를 제시한다.*15)
먼 곳의 경이와 꿈을 / 나는 내 영토의 경계까지 가져왔네 : // 나는 하얗게 머리가 센 운명의 여신이 / 샘속에서 그 이름을 찾기까지 기다렸네- // 그 뒤 나는 그것을 밀도 있고 강하게 파악 할 수 있었지. / 지금 그것은 경계의 전체에서 꽃피어 빛나고 있다네… // 한 때 나는 기분좋은 여행 끝에 / 값지고 은은한 작은 보석을 손에 넣었지. // 여신은 오래 찾다가 내게 알려주었다네: / <여기 깊은 계곡에서 아무도 자서는 안된다고> // 그러면 그때부터 그 보석은 손에서 빠져나가고 / 나의 영토는 그것을 결코 소유하지 못하리라… // 이리하여 나는 슬프게도 체념을 배웠네. // 언어가 없는 곳에 사물은 존재하지 않기에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는 “언어가 없는 곳에 사물은 존재하지(있지) 않는다.”고 했다. 언어는 의미요 관념(생각)이요 관념의 대상인 존재(존재자)를 지시하기에 존재자체이기도 하다. 언어가 없이는 사람은 어느 것도 인식을 할 수가 없어서 존재 대상앞에서 슬픈 체념밖에 할 수가 없이 무력한 미물이 될 뿐이다.
사람이 어떤 것(X)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여 낼 때(전달할 때) 거기에는 필수적으로 의미(뜻, Y) 가 생긴다. 이를 더 설명하자면, 그 어떤 것(X)이 가지고 있는 그 본래의 의미(Y)를 사람이 말이나 글로 재해석하여 낸다(Y’ ) 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 다시 플라톤 철학의 이데아론을 빌려 풀이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어떤 것(X)을 각기 달리 표현할지라도 본래의 의미(Y)의 모사(Y’, Y’‘, Y’‘’ ...)이고 그래서 비슷한 닮은 꼴을 유지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또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일정부분 공유하고 이해할수 있고 감동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셈이 된다. 이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모두 동그라미를 그리라면 각자가 머릿속에 <가치 있는 것으로서>가장 완전한 圓(동그라미)을 떠올리며 그것에 최대한 닮게 그리려고 하는 이치와 같은데, 객체 대상 자체의 본래의 의미(형상)를 각자가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최대한 닮게 형상화(의미화)해내는 것이 예술이요 시문학이다. 그러므로 형상(이데아)과 의미와 가치는 언표의 행위로서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에서 떼어놓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다음에는 이러한 언어의 의미성을 일부러 무시하고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여 사람의 의식의 심층을 드러내보겠다는 초현실주의 시를 들여다 보자.
11. 초현실주의 시론
초현실주의 시란 프랑스의 앙드레 브르통이 1924년「쉬르레알리슴 선언」을 발표한데서 보듯, 이름 그대로 쉬르-레알-리슴(sur-réal-isme 현실, 실재-를 벗어난, 초월한-주의 ) 으로서, 꿈·잠·무의식을 인간정신의 자유로운 발로로 보고 「이성에 의한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또 미학적, 윤리적인 일체의 선입 관념도 없이 행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dictee)」를 해보자는 시의 한 혁신운동이다.
가. 주장자들과 그 시작품
우리 한국의 시문학사에서 많은 시인 평론가들에 의해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손꼽혀지고 있고, 얼핏 초현실주의 대표적인 시작품이라고 간주되는*16) 조향시인의 시작품을 보자.
모래밭에서/ 수화기/여인의 허벅지/낙지 까아만 그림자. (조향, 시,바다의 층계, 일부)
이 시를 앞에서 김춘수가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構文까지 賓辭(述語)를 제거하고 있다. 시나리오의 地文을 보듯이 사물과 정경의 提示에 그치고 있다.[...] 거의 완전할 정도로 관념이 排除되고 있는 <朴木月과> 趙鄕의 경우에 그 構文까지가 軌를 같이하고 있다.[...]” 고 하여 탈관념 무의미시라고 규정하였다.
지은이 조향 시인의 의도는 잠시 접어두고, “바다의 층계”라는 시작품의 이 둘째 연이 다만 사물 대상의 낱말만 나열해 놓아서 정말 관념을 배제한 무의미 시인가? 우리(감상 독자)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위에 나열한 대상들을 통해 바닷물까지에 이르는 어떤 단계(층계)를 묘사하여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가 있지 않을까? 곧 ⑴모래밭- 수화기<-문자적으로 전화기의 수화기라고만 생각하는 이에게는 이해가 않되겠으나, 시인 장 꼭토가 자기 귀를 소라껍질이라고 하여 바다의 소리에 귀를 귀울인다고 표현했듯, 이 수화기를 ⑵“소라 껍질”로 비유했다고 여겨보자> - ⑶(벌거벗은)여인의 허벅지- ⑷(물속의 까만,육감적인 다리를 가진 ) 낙지를 연상해보면, 해변의 모래밭의 풍경이 층계처럼(육지에서 바닷물까지) 차례로 보여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한여름 바닷가의 해수욕장의 정경을 표현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곳으로 당장 달려가 발가벗고 물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바램을 드러내주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도를 시적으로 최대한 제한해서 짧게 표현한 것으로 감상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이해하면 김춘수가 주장하듯이 “이들은 사물의 세계를 아무런 설명이나 哲學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事物詩라고 할 수 있다. 修辭上으로는 그들은 敍述的이다.” 가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의미있는 관념적인 시작품이 된다.
이제 지은이 조향 시인의 시작노트를 읽어 보자:**17)
[...]아무런 현실적인, 일상적인 의미면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동떨어진 사건끼리가 서슴없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 ]이와 같이 의미의 세계를 포기한 현대시, [...]시에 있어서의 시간성이 산산이 끊어져 버리고, 돌발적인 신기한 이마쥬들이 단층을 이루고 있는=>자유연상은 정신의 본도(本道), 간도(間道)를 통하여, 의식의 제한에 방해 당하는 법 없이 사고(思考)와 인상(印象)을 모아서, 그것을 가지가지로 결합시키면서, 드디어 새로운 관계나 형(型) 이 생겨나도록까지, 심리과정을 자유스럽게 헤메도록하는 것이다.[...]자유연상 상태란 곧 자아(ego) 초자아(super ego)의 간섭이 없거나 극히 약해서 상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 이런 방심상태에서는 무의식(無意識) 혹은 전의식(前意識)의 세계, 곧 심층심리면(深層心理面)에 잠겨 있던 것들이 순서도 없이 곡두(환영幻影)처럼 의식면에 떠올랐다간 가뭇없이 스러지고 스러져버리곤 한다. [...]그것을, 적당한 시기에 바리아송(variation, 變奏)을 주어 가면서 몽따쥬(montage)를 하면 한 편의 시가 되곤 한다.
조향은 자신의 시가 시간성이 산산이 끊어져 버리고, 돌발적인 신기한 이미지들이 단층을 이루고 있는 자유연상에 따라 의식의 제한에 방해 당하는 법 없이 사고(思考)와 인상(印象)을 모아서, 그것을 가지가지로 결합시키면서, 드디어 새로운 관계나 형(型)이 생겨나도록까지, 심리과정을 자유스럽게 헤메도록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조향시인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아래의 시(바다의 층계, 1연)
낡은 아코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뽄다리아>/<마주르카>/<디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 왜 그러십니까
를 읽는다면, 그야말로 어느 정신 분열증 환자의 뇌깔임(넋두리)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떠돌고 다니며 사는 정신병 환자의 지껄임을 옮겨 놓으면,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편 이론을 따르는 이와 똑같은 것을 누구든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초현실주의 문제점을 다음에서 자세히 짚어보자.
나. 그 주장의 문제점과 비판
초현실주의에 관하여 또 그 시가 목표(시의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다음의 심상운과 조병무의 시론을 통한 해설에서 간단 명료하게 엿 볼 수가 있으며 동시에 그 안에 담겨진 문제점도 들춰낼 수가 있다.
“시를 교훈이나 쾌락 또는 서정의 표현 정도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초현실의 시들은 난해하기만 하고 존재가치가 없는 무질서한 언어의 집합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고 심상운은 스스로 그 단점을 지적 하고 있다. 나아가 심상운이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중에서 조향시인의 초현실주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기를 든 양준호 시작품을 보자.
꽃잎을 짓밟고 간다. 문득 저승에서 뻐꾸기 세 번 울고/간다.너는 뭐니 너는 뭐니. 노란 파도가 노란 파도를/ 따라간다. 비이슬에 젖은 철조망, 메뚜기의 눈이 등대처/럼 설레고 간다.(양준호 시, 문득. 전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18) 서술 기법은 현대시만의 특별한 기법은 아니다. 고대 소설에서도 꿈을 통한 암시나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상투적이라고 할 만큼 흔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통해서 보여 주는 시인의 내면의식[잠재의식]이 현대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식의 총체적인 파악을 위해서는 빙산의 일각 같이 겉에 드러난 의식보다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무의식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하기 때문이다. 양준호 시인의 시편 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뛰어넘는 언어들의 현란함은 단순한 언어유희의 차원이 아닌 의식과 무의식의 교직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무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속에서 심상운은 한국 현대시에서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혀지는 조향(趙鄕)의 시를 무의식 상태에서의 자동기술로 "망각의 강 깊숙한 저변에서 건져 올리는 고향의 언어‘ 라고 했다. 무의식은 의식의 고향이며 가장 본질적이고 원형적인 순수의식의 세계여서 그것은 자연히 탈현실, 탈관념의 세계가 되는 것이라 한다.
같은 시각에서 평론가 조병무도 “양준호의 시세계 <의식과 실상>”이라는 논평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기 시작한 초현실주의에 많은 예술이 공감한 바가 있었다.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의 세계를 추구하여 새로운 세계에 정착하고팠던 운동의 하나였다. 양준호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 있었던 문학의 한 명맥을 보는 것 같다. 정신의 바닥에 내재해 있는 수많은 의식의 한 덩어리를 실상의 형태에 몰입시키면서 새로운 해석의 차원을 넘나들려는 의도는 다른 면이 있다. 그에게는 잠재의식이라는 세계를 실제의 실상에서 이를 해체하여 새로운 의식의 면모를 구축하려는 데 있다. 그에게 부딪치는 모든 것은 경이로운 것이며 그 경이가 실상의 합리적인 것에서 비이성적 형태의 상태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양준호의 시를 여기서 어떤 사상적 이즘에 한정시키려는 것은 아니나 몇 가지 그의 시에서 특이한 점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의식의 변화 및 해체, 잠재의식과 실제 실상의 변모에 따른 차이, 강박관념의 몰입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조병무의 해석은 심상운의 다음의 해명 글에서 크게 부각된다. “ ”간다“라는 동사가 이끄는 네 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네 개의 문장은 논리적(객관적)인 의미의 연결이 안된다 어떤 의미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네 개의 문장이 담고 있는 영상은 그의 무의식의 내면에서 포착된 영상같기도 하다.”
이렇게 논평하는 두 사람이 시인이란 것을 모르는 이라면, 어느 의사가 정신 분열증 환자의 증상을 설명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말 것이다.
여기에 조향의 노트를 참조해서 말하면, 내가 맨 앞에서 정신 분열증 환자의 한 증상으로서의 홀로 중얼거림현상과 거의 일치하는 설명에 해당한다. “현실을 벗어나서, 초월해서” 라는 초- 현실(sur- réal)이란 말은 * “(현실인식의)실재,사실 (réal) 를 벗어나서,넘어서 (sur -)”, 달리 말하면 ”현재의 사실을 그대로 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않아 정신이 -미쳐서, 돌아서“, ”제 정신이- 아니어서“ 라는 뜻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초현실주의 시작품 이라는 것도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냥 정신분열증 환자의 떠벌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이 점을 프랑스 쉬르레알리즘 문학가들이 미쳐 생각지 못한 것처럼 지금까지 한국의 문학가들도 그 불행한 증상을 아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신경정신과 의학을 공부한 의사들도 시문학의 이런 초현실주의의 현상을 비교적으로 제대로 간파하거나 지적할 줄을 몰랐다.
이제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순수하게 대상의 이미지만을 드러낸다고 보아서 “사물 시”라고 규정이 된 시작품들을 검토해보자.
III . 순수 이미지의 사물시
사물시란 무엇인가? 최진연시인은 [...]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시란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시는 ‘탈 관념(무의미)’의 시이다 라고 정의를 한다. 이러한 사물시 이론은 먼저 무의미 탈관념 시쓰기와 그 이론을 주창한 김춘수에게서 제시되었는데, 그이에게서 무의미(탈관념) 시를 잘 쓰기 위한 한 방법론처럼 모색된 것이 사물시 이론으로 발전된 것이 라고 여겨진다. 이를 나중에 문덕수시인이 뒤따르고 있는데 둘 사이의 차이점을 굳이 들자면 문덕수에게서는 무의미 탈관념이 아니라 사물 대상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현저하게 눈에 띈다.
최진연 시인은 문덕수 시인의 이른바 사물시의 특징을 무의미-탈관념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하이퍼시와의 깊은 연관성을 간추려서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19).: “관념시는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주류로 군림해왔다.” [...]이런 한국시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의 모색은 문덕수에 의해 주창되어왔다. [...]그는 2천 년대 들어와서 탈 관념의 사물시를 비롯한 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 문덕수 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창하고 그의 시에서 적용해온 시적 방법으로서 “집합적 결합” 이론[...] 예컨대 컴퓨터, 책, 확대경, 볼펜, 찻잔, Secret Card, … 이런 물품들은서로 필연적 인과 관계가 없으나[...] 이와 같이 시에서 행과 행, 연과 연 상호간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
위 인용문에서 우리는 사물시의 특징을 탈관념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하이퍼시와의 깊은 관련성을 제시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휑하니 열린문으로는/바람처럼 들이닥치듯이 차들이/힐끗힐끗지나간다./ 세 유리 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있었다./ 열린 문으로는/서있는 한 사나이,/ 길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세 유리 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 성냥갑이 앉아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시,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부)
보기로 든 윗 시를 심상운은 사고 이전의 언어들 모음이기에 어떤 의미도 내포하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의도)를 띄지 않고 사물의 놓여있는 상태와 주변 정경만을 객관적인 눈으로 묘사하여 사물성의 존재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시인의 지각작용이 포착한 생동하는 사물성과 한 순간에 집중된 감각적인 순수이미지를 보여줄 뿐이라고 한다. 덧붙여 시도 관념이전의 순수한 사물성만을 제시해주는 기능을 함으로써 창조적인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케 해준다며 이 솔 시인의 시를 지적한다.
욕조가득 비누거품이 부풀고 있다/거품속에 색들이 팔딱거린다/거울속에서 허물이 흘러내린다/구석구석 비누거푸을 벗겨낸다/동그랗게 굴러가는 색깔들//텃밭에서 갓 따온 가지빛깔/ 처음 우러나온 치자빛깔/옥수수 수염색깔/샘물바닥에서 솟아나는 모래빛깔/청심환을 싸고 있는 금박지/씨가 환히 비치는 청포도 빛깔// 바구니 가득한 캔디/ 눈에 담기는 색깔부터 입속에 넣는다/달콤하다가 시다가 씁쓰레하기도/켄디 맛인지,색깔맛인지/욕조가득 넘치는 맛과 색/맛으로 빛으로 춤춘다 (이솔 시, 맛의 빛, 빛의 맛, 전부)
정말 이들 시작품이 관념을 벗어나서(탈-) 사물성만을 제시하고 마는가?
시를 지은 문덕수가 의도한 바가 심상운의 주장 그대로 무의미하게 탈관념을 노리고 詩作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독자)는 그 작품속에 든 문덕수의 (비의식층인 잠재적인) 온갖 의도를 케어 볼 수가 있어야 하고 끌어내어 밝혀보아야 한다. 왜냐면 앞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작가가 선택하여 사용한 언어는 그것 자체로 나름의 질서와 의미(관념)을 지니고 예술작품으로서 객체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윗 시에서는 사람이 서로 만나서 대화하고 웃고 떠들며 인정을 나누게 마련 된 의자는 텅 비어있고, 탁자위에는 유리잔과 라이타와 잿털이만 모여있는 사물위주의 퐁경을 우선 보여준다. 대화가 단절된 고독한 도시인의 삶의 울타리 안에 어느덧 저녁 황혼기의 황량한 기운만 기웃거리고 있다. 이를 묘사함으로서 빌딩으로 둘러쌓여 갇힌 현대인의 낭만이나 우정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바로 이를 탁자를 주변으로 하는 풍경이 지적하고 있다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때, 이 작품은 그런대로 관념을- 의미를 지닌 값을 다하는 작품이다. 무엇을 쓰고 그리느냐(표현하느냐)? 의 문제 보다 어떻게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감상하느냐?)가 예술의 본래 면목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것이 최종적이고 작가의 손을 떠난 일반대중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도구화된 사물들만의 기하학적 위상을 묘사함으로써 대화의 단절로 인한 도시인의 고독과 상호 이해부족이나 오해 속에 사는 인간성의 소외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물이 주체가 되고 사람이 객체가 된 이 시대의 비극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솔의 시-이를 사물시로 보든, 하이퍼시로 보든 상관없이-에서도 심상운처럼 관념이 없이<-이 일은 가능하지도 않으나> 사물의 사물성만을 감지하고 비누거품의 빛과 맛의 세계만을 감상하는 소수의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욕조에 비누거품처럼 넘치는 관념과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를 되새김하며 다양한 일상적 활동에 이를 적용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곧 1연의 더러운 욕조(안에서의)와 그것(어떤 것 y)의 비누 세척 하기. 2연의 비누거품들(x)의 갖가지 색깔(빛)의 열거를 통한 그 깨끗한 모습. 3연에서 욕조가 바구니로, 비누거품(x)은 켄디로 지칭 전환되어서 빛(색깔)을 맛으로 치환하여 입에 들어갈 만큼 깨끗하게 씻겨진(정화된) 어떤 것(y)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더럽혀져서 손으로 만진 것이- 눈으로 들어오고 -다시 입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된 어떤 (Y)것의 오염- 세탁-정화의 단계가 1연의 촉각화 2연의 시각화 3연의 미각화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고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철학자 M. 하이데거가 예술이란 것도 철학(존재론)처럼 존재자의 존재 양태를 그대로 밝혀서 보이는(드러내는=현상) 것이라 했는데*20), 만일 문덕수가 이 철학에 근거하여 자신의 “순수이미지-사물시” 이론을 시도하였다면, 심상운이 말하듯이 무의미나 탈관념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내가 바로 위에서 해석한 대로, 존재양태의 의미를 현상시키려 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하이데거는 사물들(존재자들)의 존재상태나 양태에서 도구성과 정황성을 통하여 의미연관성을 드러내주고 실존적인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또 케낸다. 존재하는 사물(대상,객체)의 상태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준다고 할 때, 무의미나 탈관념을 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큰 오류이다. 그것은 본질을 케내는 일이 아니라 현상을 은폐하지 않고 드러내어 존재(있음), 또는 있는데 어떻게 있는가? 를 더 뚜렷하게 보임으로써 그 자체가 가진 의미를 밝혀준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시가 언어로서 존재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하이데거가 규정을 했을 때 거기에는 필연코 존재자와 언어를 선택하고 사용하는 순간에 의미화와 관념이 생기고 짓는 이의 심상이 투영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의미있는 관념화된 시작품이 창작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보기를 들어, 하이데거가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구두”를 해명하듯이, 화가 고흐가 구두를 가장 그럴듯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냈을 때, 그 구두가 어느 농부의 가난과 일상화된 노고와 뼈아픈 가족의 생계부양의 짐이 투영된 것을 보여주고자 화가가 그림을 그렸고, 감상자는 또한 이를 잡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동하는 사물성과 순수 이미지의 시라고 주장하는 심상운의 논평은 시 제명인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이라는 풍경에만 사로잡혔거나 이솔의 “맛의 빛, 빛의 맛”이라는 그 사용된 언어와 관련된 의미의 심층적 맥락과 시인의 창작과정에서 이면에 놓여지는 잠재의식을 간과했거나 무시한데서 발생된 것이라 추측된다. 만일 이를 부정한다면 특히 이솔의 작품에서 드러나듯이 정신분열증환자의 두서없는 말지껄임에 불과할 것이거나, 정상인이 자신도 잘 알아차릴 수가 없는 잠재의식속의 정신병적 징후를 그대로 토로한 것이 될 뿐이다. 이를 변호해서 말한다면, 의학적 식견이나 정신병적 증상을 잘 알지 못하는 이가, 현실을 넘어선 자유로운 의식-잠재의식적 사고를 표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다음으로 탈관념과 디지털리즘시를 주장하는 현대적 시운동의 전위에 서있다고 일컬어지는 오남구시인의 시를 검토해보자.
IV. 디지털 시론
디지털 시란 무엇일까? 디지털리즘 선언이란 글에서 밝히는 오남구의 정의를 직접 들어보자. “지금까지 아날로그 시대의 시가 기술 또는 자동기술하는 것이라면, 미래 디지털시대의 시는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사(念寫) 또는 접사(接寫) 곧 ‘찍는다’는 행위로 구분짓는다.[...]시인의 생각과 의식을 배재시키는 방법으로 나는 언어 이전의 언어(사물언어)로 사물을 사진찍듯이 찍는다”*21)고 했다.
오남구의 이 디지털 시론을 최진연은 같은 논평에서 오남구의 탈관념시에 관한 설명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즉 오남구가 말하는 디지털시가 탈관념시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덧붙이기를, “전통적인 시가 대체로 연속적인 사유의 산물이란 점에서 아날로그방식이라 한다면, 그의 디지털시는 단속적인 직관에 의해 찍는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 ‘찍는다’는 말은 관념을 배제<곧 의미부여를 않>하고 보이는 현상 그대로를 직관적으로 옮겨놓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최진연은 탈관념시=디지탈 시= 하이퍼 시의 등식을 상정한다. 강조하건대, 그들 시작품이 큰 틀에서 크게 차별이 않되고 같다는 것이다. 다음의 오남구의 시 작품을 보자.
겨울 조소리 천태산 달이 비껴가고/바람 소소히 고라실 억샐 베는 머슴 심심한 머슴이/도리께 명당 솔밭 후미 으슥한 골마릴 풀고/무당네 골방 선반 지른 시렁가레 깊은 어둠을/밤새 봉준이는 과년한 계집을 안고 운다.//(오남구 시, 조소리 구름밭, 전부)
심상운은 이 시를 “어떤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가락과 호흡 그리고 토착어에 깃들인 민족 心靈의 흐름은 첫 새벽 淸水를 앞에 놓고 한울님과 接神하는 맑은 영혼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법이다”라고 하였다. 얼핏 피상적으로만 생각하자면 “겨울- 조소리- 천태산- 달이 비껴 감-바람-고라실- 머슴-도리께-골마릴 풀고- 무당네 골방- 시렁가레- 어둠- 봉준이- 과년한 계집” 이런 단어들 만이 두서 없이 늘어놓은 느낌이 든다.
심상운은 또 오남구의 “부드러움의 단상”이란 시에서도 “비- 파란 신호등-부드러운 선- 녹색 빗물-나무들-빨간 신호등-차다 단단하다 날카롭다”에서 어떤 지각의 속도만 있을 뿐 의미가 없다고 논평을 했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 오남구 시, 부드러움의 단상, 전부)
나아가 송시월의 시에서도 비 그친 날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려낸” 이 아닌 “찍어낸” 시라는 것이다.
비 그친후, 물 웅덩이/붉은 하늘 한 조각/하늘 속의 물구나무선 가로수/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육교 한 토막./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언뜻 맷새 한 마리가 획 일렁이며 간다 (송시월 시, 물 웅덩이, 전부)
물웅덩이, 하늘 한조각, 하늘속의 물구나무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 육교 한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조각, 멧새한마리가 동시적으로 눈에 포착되어서, 관념을 벗어났고 직관을 통한 엽사,접사의 기법이 적용된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시인의 ①생각과 의식을 배재시키는 방법으로, ②언어 이전의 언어(사물언어)로 사물을 ③사진찍듯이 찍는다”는 오남구의 주장에는 시문학 일반개념과 언어행위에 관한 오해나 무시에서 오는 억지가 깃들어있고, 시와 그림(사진)간의 예술 분야의 혼동이 내재한다. 시인에게서 생각과 의식을 배재시킨다는 것은 시체나 되라는 말이나 다름없고, 언어이전의 사물언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을뿐더러, 사물을 사진을 찍듯이 한다면 굳이 시란 것이 왜 필요할까?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시는 대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찍는 예술이 되어서도 않되고 될 수도 없다. 시인에게서 재 창조가 되어 나와야하는 창작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심상운처럼 우리가 오남구의 작품 “조소리 구름밭”의 시적 배경과 쓰인 지명과 인명에 대해 알지 못하고 감상하려 든다면, 어떤 논리적 설명을 할 수가 없고 단어들의 나열속에서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가락과 호흡”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조소리 천태산이 동학군의 지도자 전봉준이 태어난 고향땅 이름이고 그 전봉준이 겨울 긴긴 밤을 단잠 못이루고 과년한 계집을 끌어안고 울음운다는 장면을 이어놓으면, 우리는 “관념을 벗어난 장면만을 다양하게 엮어서 찍은 것”이 아니라, 동학혁명운동에 떨쳐일어선 농민군들과 지도자 전봉준이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의 협공에 시달리며 머슴처럼 노예살이 신세였던 농민들과의 생사를 건 봉기가 일시에 꺾이고 절망적인 형편에 괴로워하는, 구름밭의 새울음(조소리) 소리를 헤아려 감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깊은 민족사적 비애를 품고 종교적 천지개벽을 꿈꾸던 이들의 슬픔이 절망을 감싸서 자아낸다 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송시월도 순간의 물웅덩이를 포착하여 그 상황을 재현했는지 모르겠으나, 감상자는 물웅덩이 같은 세상과 거기에 처박힌 “나”의 몰골을 반사해보면서 멧새 한 마리가 상징하는 자유와 비상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아직은 꿈과 희망을 품을 수가 있는 삶을 보여주었다고 음미할 수가 있는 것이며, 그것은 나쁜지 않은 독법에 해당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송시월이나 오남구 시를 손해일이나 조명제의 주장에 따라서 읽는다면, 우리는 그저 정신병 환자의 뇌깔임이나 다름없는 소리를 보고 들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혀 의미연결이 않되는 단어와 어휘들의 진열과 이미지들을 지껄인 수준이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상운이 “종이(책) 문화의 시대에 본질적이었던 의미의 예술에서 디지털시대에 맞는 영상(이미지)의 예술에로 전환을 주장하고 특정한 경계를 벗어난 상상과 공상(fancy)을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삼고자 했을 때, 언어의 예술인 시문학의 본질적 특성을 망각한데서 이처럼 암초에 좌초하고 말 항해의 운명은 예정된 것이었다. 영상의 예술로 전환 했을 때, 언어예술인 시라는 고유의 영역은 사라지고 디지털시대의 영상속 한 부수적인 설명귀나 장식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마치 신문지 나 TV의 광고판 속에 나오는 설명귀쯤으로 한쪽을 차지하고 말 것이다.
V. 하이퍼 시론
나는 맨 앞에서 전위적인 몇몇 시론들의 시가 하이퍼시에 공속하고 공통적인 요소를 나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심상운,손해일,조명제,최진연의 하이퍼 시론의 핵심을 간추려서 이미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몇몇 하이퍼 시 작품을 읽어가면서 앞의 평론가들의 해설을 곁들여 감상하고, 지금까지 내가 비판하면서 정신병적 증상과 다름없다고 예증한 바를 전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으로 삼고자 한다.
최진연에 의하면, 하이퍼시론을 처음 주창한 이는, 오남구시인과 “탈관념- 디지털 시론”을 함께 전개한 심상운 이다. 심상운은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라는 논문(책)에서 하이퍼 시론을 터닦아 놓았는데,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에 따라서 ‘순수한 영상언어를 지향하고 추상화적 기법과 오남구의 염사와 접사의 사진찍기 기법 그리고 사물성의 강조와 다양한 시점에서의 순간포착에 의한 감각적 이미지의 표현(기법)에 중점을 둔 언어단위들의 집합적 결합방법을 제시하였다’ 고 하였다. 이것이 하이퍼 시론의 출발점이면서 종착점이다. 먼저 심상운이 하이퍼시라고 규정하는 오남구의 시작품을 눈여겨 보자.
싹이 트려나, 배낭을 벗어 놓고 양지 볕에 앉아 몸이 근질근질하다. 긴다리로 떼지어 서있는 계곡의 진달래며 철쭉 싹이 트려나, 아른아른 기척 없이 날아든 작은 새, 까맣게 잠이 든 앙상한 가지 부리를 부비어 흔들다가, 새싹에 대고 내 어머니의 맑은 목소리 깍궁! 소리치고 포르르 다른 가지로 날아간다. 또 한 마리 뒤따라 깍궁! 하고 포르~ 포르~ 포르르 ~ 포르~ 앞을 서거니 뒤를 서거니 두 마리 작은 새 깍궁! 깍 궁! 소리치고 새싹의 잠을 깨우며 날아다닌다. 싹이 트려나, 진달래 철쭉의 앙상한 가지들이 꽃샘바람에 흔들리어 이~잉~잉 울어댄다. 일시에 아가야 깍궁! 깍궁! 계곡에서 일어나는 맑은 목소리 환청이 돈다. (오남구 시, 깍궁, 전부)
위의 시에 관해 심상운은 “이 시의 화자는 늦겨울 산행중에 대지가 혼곤한 잠속에서 새싹을 피우려 기지개켜는 듯한 초 봄의 정경을 의식과 무의식간 상상으로 넘나들고 있다. 소재나 정서는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기법은 매끄러운 언어구사와 하이퍼텍스트적 구성이다. [...]이 시의 연상 고리는 양지에 앉은 화자-계곡의 진달래, 철쭉- 작은 새의 재재거림-어머니의 깍궁! -새싹을 어르는 작은 새들의 깍궁! -이에 화답하는 진달래 철쭉들의 잉잉거림 등 엄마와 새들의 깍궁을 회상하는 리드미칼한 환청 하머니이다. 그리고 시상의 각 유니티들을 매끄럽게 하는 하이퍼링크로 ‘깍궁!’ ‘ 포르~포르르~’ ‘이~잉~잉’ 같은 의성어들이 유려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고 해설한다.
바깥 세계 정경을 의식과 무의식간 상상으로 넘나들고 있고, 리드미칼한 환청 하머니라고 지적한것을, 우리는 정신분열병 환자의 지껄임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고 더구나 (시)상의 각 유니티들을 매끄럽게 하는 하이퍼링크로 ‘깍궁!’ ‘ 포르~포르르~’ ‘이~잉~잉’ 같은 의성어들이 유려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고 한데서는 그 환자가 지껄이면서 리드미컬하게 내뱉는 특정한 의성어 “...그쟈?, 안카나? ” 또는 “ 퉤, 씨팔” 같은 테크닉(?)을 생각케 한다. 다만 정신병 환자의 그것에서는 문장?(말)이 세련되게 보이지 않고 다소 투박해서 배움이 많지 않은 티가 나 는 것이 하이퍼 시와 차이점이라고 비판이 될까?
햇빛은 무색이다가도 단풍나무에 가 닿으면 단풍잎이 된다/ 노랑은 노랑금빛 빨강은 빨강금빛/ 갠지스강가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빨간 불꽃을 당긴다/ 빨간 불꽃에 금빛 영혼이 하루종일 번쩍이며 탄다/ 아무 말 없이 타는 시체 위로 허공에 고루 숨어 사는 햇빛이/ 모조리 몰리어간다. 타다닥 탁탁 단풍무더기/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 단풍에 닿자 마자 크게 웃어/ 마릴린 몬로는 입을 약간 벌리고 금빛 머리칼을 / 신사의 가슴에 올려 놓는다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포스터를 보는 18살 소녀도 크게 웃어/ 학교가 끝 나면 곧바로 동방극장엘 갔지 내친구와 몰래/ 웃음소리가 크게 퍼지고 먼 마을로 간 마 릴린 몬로가 /타는 단풍속으로 들어와 앉는다 , 햇빛이 심지를 돋운다 ( 김규화 시, 햇빛과 단풍, 전부)
심상운은 “위 인용 시에서는 햇빛과 단풍을 매개로 한 자유연상과 의식. 무의식의 가지치기, 청소년 시절 추억 등이 행간에 배어 있다. 시상전개의 각 유니트와 연상단락의 하이퍼링크적 징검다리로 동서양과 현재, 과거를 넘나들고 있다. 무색인 햇빛이 단풍잎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노랑 빨강 금빛-갠지스강 나무더미- 빨간 불꽃-금빛 영혼 -타는 시체-단풍무더기 -단풍에 웃는 햇빛으로 확산된다.” [...] 여기서 하이퍼링크적 연결고리는 햇빛과 단풍의 교호작용을 통해 마치 끝말잇기 놀이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미지군이며, 이것이 매끄러운 시읽기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독자로서는 이런 하이퍼시에서 의미나 결론을 애써 찾기보다는 파노라마 경관 감상하듯 화자의 자유분방한 공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즐기며 음미할 일“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이퍼 시라는 것의 정신분열병적 증상에 관한 설명을 다시 보게 된다. 곧 자유연상과 의식- 무의식의 가지치기, 전개의 각 유니트와 연상단락의 하이퍼링크적 징검다리로 동 -서양과 현재 와 과거를 넘나들고 있고, 마치 끝말잇기 놀이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미지군들이 나오니, 거기서 의미나 결론을 애써 찾기보다는 화자의 자유분방한 공상과 의식의 흐름을 그저 따라 즐기며 음미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검은 철제 의자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 밭의 환한 햇빛속으로 들어 갔을까? 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장수가 떨어 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고 쓴다. 그는 그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 ”라고 또 쓴다. (2연 생략)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시,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1연, 3연 )
최진연에 따르면, 이 시는 “ [...]자유연상과 분방한 의식, 무의식의 흐름을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난해한 암호풀이 하듯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골똘히 캐기보다는 디지털매체의 그림 감상이나 댓글달기처럼 비선형적, 비순조적으로 독자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로 작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저 따라가 볼 일이다. 이시에서의 하이퍼링크는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이다 “ 라고 하였다.
위에서 김규화 시작품에 관해 심상운이 해설한 것이나, 심상운의 시작품에 관해 최진연이 해설하는 것이나 양쪽에서 동일한 표현기법이나 해설을 다시 읽을 수 있는데, 이는 하이퍼 시 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공통적이라서 새삼스럽지가 않다. 그 때문에 정신분열증 환자의 다양한 병적증상에 관한 임상의학 병실 의사의 일관된 진단 소견서를 읽는 기분이 드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가 않을 노릇이다.
이 때문에 최진연이 인용한 논문에서 “일반 독자입장에서는 난해하고 생경한 이 시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나 순서, 상식적 질서, 교훈을 찾으러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디지털적 하이퍼시의 특성을 따라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지금 이 시공간에도 미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차원적 상황들이 앞뒤 없이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천지만물의 존재나 사건, 사물들이 불가측, 불연속적이어서 어찌 보면 뒤죽박죽이지만 나름대로 혼돈 속에 우주순행의 질서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뒷풀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최진연의 해석에서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아온 정신분열병 환자의 조(躁)증 증상을 다시 겹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증 환자는 흥분되어 있고 이야기가 많으며 과잉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데, 목소리가 크고 비정상적인 사고의 흐름으로 심한 경우 말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고, 망상이나 환각이 나타나기도 한다. 팽창된 자존심 또는 심하게 과장된 자신감을 나타내며,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거나 계속 말을 하게 되고, 대화와 사고의 비약 또는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는 의식적 -무의식적(잠재적) 표출이라는 점에서 저 시라는 것의 해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뻘건 피 떨어지는 누우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다 )//그녀는 구름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무거운 가방을 든 검은 외투의 사내에게 손을 흔든다/ 사내도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짓한다 //버스 안은 침묵들이 움직이고 있는 빈 악보 속 같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이 투명한 물방울로/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그 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터뜨린다/ 그럴 때마다 방울 속에서 나온 노란 알몸의 소리들이/ 쪼로롱거리며 버스 안에서 뛰어놀다가 바람에 실려서/도시의 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녀를 덮친다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뛰쳐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 은빛 지느러미를 퍼들거리며 튀어오른다 //순간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센타 쌍둥이 빌딩/ 눈부신 유리창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은빛 비행기 //(그 은빛 비행기에는 검은 외투를 벗어버린 알몸의 사내가 타고 있었고?)//아침 11시, 빨간 버스는 아마존 숲 위를 날아가고/그녀의 파란 의자는 더 반짝이기 시작한다 ( 심상운 시, 파란 의자, 전부)
이들 하이퍼 시가 장차 세계무대에서 한국시인들에 의해 독창적으로 창안된 새로운 시 모형들의 큰 성과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최진연은 위 인용한 논문에서 이 시작품에 관해 “이런 표현은 현실을 벗어난 공상의 산물이다. 그(심상운)는 현실세계뿐 아니라 가상현실에서도 시적 공간을 공상에 의해 확장하고 있다. 문학에서 공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어본 사람이면 실감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상세계를 무대로 전개되는 그 소설뿐 아니라 그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7편이 평균 7억 달러쯤 벌어들였다니 엔터테인먼트 측면에서도 문학에서 공상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심상운이 공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시에 도입하여 시적 공간을 획기적으로 넓힌 최초의 시인이 아닌가 한다.[...] 그가 현실과 가상현실을 아울러 감각적인 시적 공간을 공상세계로 확장하고 있음은 일찍이 우리 시사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공상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종래의 시<형이상학파 시-글쓴이>에서 흔히 말하는 기상(奇想conceit)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 범위에 현실과 가상현실의 제한이 없다“고 논평을 한다.
최진연의 해설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과 공상과 환상의 세계에서 얘기 줄거리를 따라 주인공들의 행동이 묘사되며, 어둠과 밝음- 순수한 어린이 세계와 흉악한 어른들의 세계를 대조하여 수수께끼같은 사람의 삶의 다양성을 제시해서 깨닫게 해주고 한층 성장-성숙케 해주는 소설과 영화와 달리, 저 시는 그저 “현실을 벗어난 공상의 산물로서, 가상현실에서 공상만을 확장하고 있기에“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아닌,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는 이의 시작품으로 보아줄 수가 없다는 진단에서만 그렇다. 불행하게도 위 시를 정신분열병 조울증 증상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으나, 어느 시인이 쓴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사람이 읽었다면, 결코 시라는 예술 작품이라고 인정해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반문을 할 수 있다:
공상, 망상, 환상의 세계를 시인이 말하면 한편의 시-예술 작품이 되고, 정신이 미쳤다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말하면 “현실과 가상현실을 아울러 감각적인 (시적) 공간을 공상세계로 확장하고 있음은 일찍이 우리 시사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 이 아니되는 것인가? 어떤 이는 이렇게 변명을 할지 모르겠다.: “개 장난같은 모형이라도 피카소가 그리면 수백억원짜리 값나가는 그림이 되지만, 어린애가 그리면 욕먹는 낙서가 된다.” -말되는 소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는대로 느껴서 그리는 그림(畵)과 달리, 시라는 것은 언어로 창작하는 2차적인(철학적인 말로 “메타-”) 예술행위이다. 언어의 취사 선택이라는 고도의 사고작용의 산물이기에 단순한 시각예술과 구별이 되는 것이고 그만큼 지적판단 행위가 따르는 짓인 것이다. 언어의 취사선택이 없이 의미를 저버린 문장 나열하기는 글장난이나 말장난에 다름없는 짓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정신이 건강하냐 병들었느냐의 판가름이 된다.
나. 그 주장에 대한 비판
바로 위에서 하이퍼 시작품을 감상하면서 나는 동시에 그 문제점도 정신분열증환자의 증상과 나란히 비교하여 지적한 바 있는데, 이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할 차례이다.
최진연은 앞에서 언급한 논문에서 디지털 시, 탈관념 시, 사물 시, 하이퍼 시 간의 차별성이 없음을 다음과 같이 짧게 정리한다.: 하이퍼시와 디지털시의 차별성은 없어 보인다. 사이버 공간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현실성을 지적하면서 사이버시대의 시에 있어서 탈관념의 근거를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이미지의 실재성을 가스통 바술라르의 시학에서 찾은 그(심상운)는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해야 함을 강조한다. 디지털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탈관념의 원초적 언어로 쓰는 디지털 시 쓰기에서 상상과 공상을 강조하는데, 이는 오남구의 탈관념시에서 영감(inspiration)과 관찰에 의한 ’직관을 강조한‘ 것과 다른 면이라 하겠다. 상상과 공상(fancy)을 강조하는 점이 심상운의 하이퍼시론의 차별성으로 보인다. 심상운이 사물에 대한 감각과 인지에 그치는 ’관념의 그림자‘ ’지장수 같은 의미‘를 인정하는 감각적 이미지의 표현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물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시화(詩化)하자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고정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언어(의미)창조로서 사물시(physical poetry)에서도 강조하는 바이고, 하이퍼시에도 그대로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최진연의 차별성에 관한 비교 발언에는 디지털 시론을 주창한 오남구와 하이퍼 시론을 주창한 심상운간의 차별성을 중심으로 탈관념시와 사물시론의 불가분리성이 언급되어있을 뿐, 이들 시론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는 데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독자에게 감상의 태도 전환만을 요구하고 일방적인 희망적 예측만을 내놓는다. “[...]의미론적인 소통의 독해보다 읽고 느끼는 감성적 소통에 그쳐야 할 것이다. 읽고 느끼는 재미 이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상과 공상을 통해서 현실에서 볼 수 없거나 있을 수 없는 가상의 세계를 영상언어의 투명한 이미지로 그려 확장해보이는 것은 시인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세계를 떠난 신선한 해방감을 주므로 환영하리라 생각된다.” 과연 그런 시를 읽는 독자들 중에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세계를 떠난 신선한 해방감을 맛보고 환영하게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이퍼 시쓰기를 적극 옹호하며 지지하는 조명제도 앞서 언급한 자신의 논문에서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는 막연한 기대점에서는 동일하다. “지금까지 하이퍼시 텍스트를 접해 온 시인들 가운데는 이념과 용어, 이론과 작품, 자기 모방과 유행어, 감동 부재 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이런 문제는 하이퍼 시를 쓰고 있는 당사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논의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난관을 차근차근 극복해 나갈 때 하이퍼 모더니즘의 시대는 보다 빨리 열릴 것이다.”
그에 지지하는 점에서는 뒤쳐져있지 않지만, 문제의 주요한 맥락만은 언급된 논문에서 손해일이 잘 짚어냈다. “하이퍼 시가 비논리적, 비선조적이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첨단 글쓰기라 해도 이를 어느 정도 조정하는 하이퍼링크적 기능이 없다면 현대시의 ‘낯설게 하기’를 넘어 난삽한 글쓰기나 시인 개인의 극히 편향되고 혼란스런 의식의 나열에 그치고 말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시대라 하더라도 인간의 기본욕구는 혼돈과 무질서보다는 정서적 안정과 예술적 즐거움을 선호할 것이다. 이미 수 십 년 전에 선보인 이상(李箱) 시인의 난해한 문제작들이 호사가들의 지적 호기심과 분석 텍스트로는 적합할지 몰라도 일반 독자대중들의 애송시는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독자를 먼저 의식하고 첨단을 리드한다는 하이퍼시가 수위 조절없이 의욕이 지나쳐 난해시로 편향될 경우 오히려 독자들의 외면을 자초할 위험이 크다.”
그러면서도 손해일은 다음과 같이 비상식적인 시 쓰기를 통해서 시작품의 일반적인 고정된 개념과 틀을 허물려고 시도한다.
“셔블 발기다래 빔드리 노니다가” 을지로-충무로통 골뱅이 골목 번개팅, 을지문덕-이순신장군,살수-한산대첩 축하연,생백주에 골뱅이 안주로 우리가 남이가! 나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e-mail을 날린다.클릭! 골뱅이복음@KOREA.COM, 오픈 세사미! 오우,베리 굳! 그란데 억수로 유감인기라,구텐베르그선생! 당신의 튻허 활자체를 1972년 미굴 BBN사 레이텀 린슨이 이메일 발신자 표시 약호로 처음 썼다 카는데...앹 사인(at sign) 앹심볼(at sinbol)이라나 뭐라카나,오우,노우! 바벨탑의 징벌! 나라마다 말쌈이 달라 헷갈리기 짝없으니 X-Y@#&{^6^}-(/+$)%=??? 줄줄이 사탕-링크-링크-<글러벌 골뱅이@명명식 중계> 프랑스,이태리는 별미 끝내주는 달팽이- 됙일은 귀바퀴 동그란 오이-네델란드는 앞에 스라지(ape slaggi) 원숭이 꼬리-폴란드,루마니아는 똥구녁 뻘건 원슁이-스웨덴은 두르르말린 코끼리 코 [다음 생략...] *22)
위에 든 글을 나의 체험적인 정신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진단을 내릴 수가 있을까? 정신병 초기에서 최악의 상태까지를 1-10 단계로 구분해본다면, 무의미(탈관념) 시- 1~2단계, 디지털 시– 3~5 단계, 초현실주의 시– 6~8단계, 그리고 위에 인용한 손해일의 하이퍼 시 는 9~10단계 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이러한 단계는 죽음을 최소한 5~6개월을 앞에 둔 환자의 말기상태인데, 극심한 환시(幻視)증 정신분열 환자가 간헐적으로 토해내는 말씨들을 주워 모아 놓으면 저런 글이 나올 수 있다.
저런 상태일 경우 환자는 거의 음식을 먹지를 못하기 때문에 신체는 말라서 뼈만 남아 뵌다. 깍두기가 사람 손톱처럼 보인다거나 얼큰하게 끓인 찌개가 피를 흘린 살점으로 보이고 김치가 돼지 창자처럼 보여서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 환자의 경우 치마도 팬티도 다 벗어던지고 펄쩍 펄쩍 날뛰다가 자절하기에 손발을 묶어서 독방에 가두고 안정제를 투여하여야만 어느 정도 주변사람이 여유를 가질 수가 있는 때이다. 사물과 사람이 그 형체나 활동이 혼동되고 혼난스러워서 자신의 감각기관이 주체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쯤 되면 주변의 건강한 사람이 볼 때 하염없이 인간으로서 무력감을 느끼고 전혀 도움의 손길을 뻗칠 수가 없어 절망감과 자괴감을 갖고 괴로워하게 되는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하이퍼 시짓기를 주장하고 고집하는 이유는 “비논리적, 비선조직이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첨단 글쓰기”가 정신분열병 환자의 “비논리적, 비선조직이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첨단 말하기” 나 다름없음을 알지 못한데서 기인하고, “개인의 극히 편향되고 혼란스런 의식의 나열에 그치고 말 것” 이 정신분열병 환자의 증상에서 나오는 지껄임투와 다름없다는 사실에 무지하여 그런 병자와 같은 짓을 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날 의(醫)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신 신경계통의 질병치료수단에 관해서는 아직도 커다란 진보를 하지 못하였다. 왜 신체가 멀쩡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정신 이상상태를 보여서 완전히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을 하고 나중엔 불행한 생애로 마감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이 유전적인 요인인가 아니면 충격받은 환경적 요인인가가 아직도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정신 병의원이 있지만 모든 정신병을 말끔히 완치시키는 곳은 없고 의사도 신경을 안정시키는 선에서 개선을 많이 하느냐 않하느냐에 치료효과를 두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업무를 보던 정신병자 요양원은 이름난 정신병원을 많이 돌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으나 완쾌를 못보고, 많은 치료비로 재산을 거의 바닥을 내서, 지친 가족이나 환자나 이제 마지막으로 신체를 위탁하는 곳이었다. 이 병은 사람의 뇌와 심리상태의 미묘한 시스템에서 기인하기에 의과학을 공부한 의사들도 뇌 신경 조직을 다 뜯어 살펴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두 손을 들고만 있는 지경이다. 그리하여 차라리 종교적인 신비하고 기적적인 카리스마에 의한 치료술을 기대하는 것인데 이는 전통적으로 무속에 의해서 무당들이 굿으로 악귀를 축출하여 본래의 심리를 되찾으려한 방법과 비슷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말은 달리 신앙지도에 의해서 심신을 추스르고 정신건강을 회복시키는 종교교육자의 능력도 정신과 의사 에 못지않은 치료효과를 거두기도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60년대에 새로운 시적 실험으로서 ”무의미 시“운동을 하게 된 김춘수가 ”무의미 시“의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의미의 시“세계로 돌아와 고백한 말을 경청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나의 무의미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23) 이는 그 시 이론을 다루면서 처음에 내가 지적한 모순성을 늦게야 깨달았다는 자기 고백이요 솔직한 증언이다.
그 러면서 늦게야 철이 든 사람처럼 김춘수는 전위적인 시 쓰기를 하는 시인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우선 내가 봐도 이해 안 되는 시들이 있다. 박상순, 송찬호의 시 같은 시들이다. 이들의 시는 전위적이다. 이들에게는 이미지가 그려내는 환상세계만 있을 뿐이다. 허무적이다. 의식상태가 그런 거 같다. 믿고 기대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철저한 비대상 세계, 말하고 싶은 대상이 없는 거다. 환상세계가 이미지를 통해서만 펼쳐지고 있는데, 아무 의미없는 세계다. 그 허무를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허무는 견뎌내기 어렵다. 뭔가 기대는 게<가치있는게- 글쓴이> 있어야 된다. 사람이라고 하는 육체를 가진 이상, 허무를 이겨내지 못한다. 허무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자유, 완전히 해방된 상태다. 그 자유를 견디지 못한다. 내가 무의미시를 견디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계속 이런 시만 못 쓴다. [...]의식이라고 하는 건 언어다. 언어와 의식<관념-글쓴이>은 동일한 것이다. 언어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건데 결국 언어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건 시를 못쓴다는 것이다[...]시적 진일보라는 게 어느 한계에 가면 막다른 골목이다. 우리 시도 막다른 골목에 가 있다. 시가 없어지는 단계에까지 와있다.”*24)
여기서 전위적인 실험시, 무의미시에 대한 솔직한 김춘수의 비판은 하이퍼 시 뿐만이 아니라 거기 공속한다고 지적한 다른 전위적인 시-이론들에도 해당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가 없어지는 단계에까지 와 있다.”
* 글 맺음
지금까지 나는 이른 바 무의미(탈관념) 시, 초현실주의 시, 디지털 시, 하이퍼 시라고 또 불리는 것들을 평론하였다. 이들 시론을 펴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으로부터 우리는 그것들이 이름을 달리하고 있음에도 (1) 전위적인 실험적 시, 또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론에 입각한 시류(詩流)에 속한다는 점 (2) 무의미는 탈 관념적이고 그러는 한 현실을 벗어난 가상적인 공간과 이미지를 중시하여 의식과 잠재의식(=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고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있다는 점이며, 바로 그런 수단과 방법들로 인하여 아날로그의 시대를 마감하고 디지털의 기술 시대에 걸맞는 시 운동이고 이 디지털 기술을 응용한 문자, 동영상, 이미지, 시적 상상력 등이 쌍방향 또는 방사형 네트워크로 가지를 치고 얽히고 설켜 복합구성을 이루고, 크고 작은 마디인 시어와 행과 연, 의미단락 등 기본 유니트(unit)들이 거미망처럼 하이퍼링크(hyper link)로 연결돼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이룬다는 점에서 하이퍼 텍스트(링크)적 글 쓰기로 하이퍼 시작법 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다는 방식에서 한 통속에 넣을 수가 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가 있음을 알았다.
뒤돌아보면, 일찍이 프랑스에서 일단의 예술가들이 “쉬르레알리즘(surrealism, 초현실주의)” 운동을 선언한 때부터 오늘날까지도, 창조적인 상상력과 자유로운 이미지의 구현이라는 목표에만 이성(理性)이 함몰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와 같은 아류로서 무의미 시니 디지털 시니 하이퍼 시니 하면서 전위적인 시운동과 그런 이론들이 아무런 반성이 없이 마구 내뱉어졌다. 심지어 차 영한 시인처럼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처럼 허무적이거나 파괴적인 격렬한 반응이 아닌 초현실과 정신, 신비한 꿈이 결합한 가장 위대한 정신의 자유”라는 극 찬양까지 서슴없이 하기에 이르렀다*25). 이럴진대 지금까지(나의 이 비판 논평문이 나오기 까지) 아무도 그것의 부정적이고 치유되지 않는 병적인 이면까지 파헤쳐 보는 노력도 없었고 아무도 이를 밝힌 이도 없었다.
어떤 이들은 강 건너편(피안)을 동경하고 그리로 가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며 산다. 지금 이곳(차안)의 일상적 생활이 불편해서이기도 하고, 너무 안락한 나머지 싫증이 나서 모험심을 가지고 여기와는 또 다른 경험을 해보고자 하는 이유도 있다. 온갖 상상과 공상으로 저쪽 강건너 쪽을 묘사하고 꿈을 꾸어 채색하고 황당한 이야기도 해댄다. 그러나 강 저쪽을 건너간 사람들은 다시는 강 이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이 강을 건너간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말하고 행동을 했고 더는 이 쪽 세상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 저쪽의 비참한 생활은 강 이 쪽 사람들도 알 수가 없었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강 저쪽의 세상을 가 보았다. 가서 보고 이쪽으로 건너와서 지금 저쪽의 세계의 불행과 슬픔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하거나 믿지를 않으려들고 여전히 자신의 상상과 공상과 망상이 만들어 낸 저쪽 세계만을 동경하고 그 쪽을 찬탄하며 계속 글쓰기를 고집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고뇌에 찬 독창적인 시 예술작품을 정신분열증 환자의 넋두리라느니 지껄임이라느니... 하여 명예를 훼손하지 말라”고 달라들지도 모른다.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자만행위에 마침내 이 글쓰는 이는 고통스럽게도 침묵하기로 할지 모른다. 그러나 비판의 정당성이 별처럼 밝다면 이를 막으려는 어떤 횡포의 암흑도 당해낼 수가 없을 것이란 사실은 이성을 신뢰하는 역사의 징표이다.
상상(imagination)과 공상(fancy)은 예술(문학) 창작의 바탕이 되는 세계이다. 그것이 없이는 예술이 설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치있는) 주제를 표현해내고자 사용하는 수단이 되어야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 단지 오락(유희)를 위한 방법이 될 때는 문학이든 예술이든 한갓 만화책같은 휴지조각으로 전락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결국에 와서 본질적인 질문앞에 당도하였다. 불행한 정신병자들이 지껄이는 짓을 왜 그토록 배운 지식층 시인과 평론한다는 이들이 흉내내려고 안달을 하는가? 애지중지 키워서 많은 돈을 들여 대학교를 보내고 세상에서 출세하기를 바랬는데, 시인인가 평론가인가 되어서 외롭게 글짓기를 하고 함께 모여 연구하고 기를 쓰고 공부하더니, 한다는 소리가 기껏 “ 쯪쯪... 젊은 놈이 사지는 멀쩡해가지고, 정신이 돌아서 미친 넋두리나 지껄이고 다니다니...”하는 탄식의 소리를 듣는 정신분열증환자의 지껄임짓이나 하겠다는 말인가? 도대체 왜 이 지경에 이르고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온갖 미사여귀를 동원한 수식어를 앞세워 시문학의 예술에 전위대요 선구자요 창조적인 활동가라는 허위의식속에 자기를 망각하고 독자를 우롱케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그 이유는 첫째로 사태의 한쪽 면만을 보고 이를 전부로 생각하고 눈딱감고 덤벼들어서 다른 쪽 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탓이고 둘째로는 특수한 개성있는 시작품을 선보여서 남의 이목을 집중해보자는 시선끌기 예술의 의도적 일탈일 수도 있고 셋째로는 창작활동에 나침판 구실을 할 문학의 이념에 대한 정립 곧 문학의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된 정의에 관한 확고한 인식이 결여된 탓이라고 비판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시(문학)의 이상과 가치관 확립하기가 마지막에 와서도 우리의 제일의 관심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문학이란, 웰렉과 워렌(R. Wellek & A. Warren)이 그들의 저서 『문학의 이론」*26)에서 주장하듯이, 작가의 체험을 통해 얻은 진실을 함축적·내포적이며 비유·상징 등의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예술로서 인생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창조의 세계이다. 비록 허구화된 현실일지라도 실제 현실의 모방이며, 현실의 모습중 의미있는 내용을 선택하여 상상력과 작가의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 때 문학은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제시하고 현실의 문제를 바로잡는 힘으로 작용하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 사상과 정서의 표현 의식이 생기는데, 미의식이 정서와 관련이 있는 형성적 요소라면, 윤리성이나 이념의 문제는 문학의 내용을 이루는 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곧 미적(美的)으로 정화되고 정서화된 사상의 표현만이 문학일 수 있다. 문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로서 미적인 즐거움(오락성)을 주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언제나감동을 주고 삶의 바람직한 의미를 줄 수 있는 사상을 상징적으로 그려내어 Paul Ricceur가 말한바 처럼, “<시는>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달리는 포착되지 않는 우리의 존재상황에 대한 깨달음을 가능케 하는 힘을 주는 것이” *27)어야 한다.
인류 역사에 불멸의 영원성을 띠고 시대와 장소와 인종을 초월하여 독자들에게 늘 읽히는 문학서들- 소설이든 시이든 희곡이든 -은 재미(오락성)와 감동(깨달음)을 함깨 지닌 것들이었다. 여기서 재미(오락성)을 단순히 유희나 장난같은 놀이로 착각해서 이해하지 말라. 감동을 주는 웃음 울음이나 감정의 진폭을 다스려서 카타르시스(치유)를 겪게 하는 그런 재미를 말한다. 그러한 카타르시스적 오락성(재미)이 유감스럽게도 하이퍼 시라는 것에는 들어있지도 않고 들어올 수가 없다.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시 짓기의 실험 정신과 다양한 기법에 대한 욕구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무의미(탈관념) 시, 초현실주의 시, 사물 시, 디지털 시, 하이퍼 시라는 것들은 감동(깨달음)성을 교훈적인 것이거나 의도적인 것이라 하여 문학에서 배제하고, 단순히 사물성이나 오락성만을 강조하여 이를 무의미 또는 유희화 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다. 시가 꼭 교훈적이거나 교육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없다. 또 모두가 그러한 시만 쓴다면 시는 도덕 과목이거나 윤리과목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시가 단순히 오락성과 유희의 도구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문학 예술이 될 수가 없고, 놀이(게임)의 한 가지로 추락해버릴 것이다.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시문학은 영화(영상)나 그림(회화)이나 건축이나 조형예술을 흉내 낼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는 것이다. 만일 그것을 노린다면 시문학은 다른 영상매체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최진연은 상상력과 환상속에 펼쳐지는 오락성으로 한 시대를 석권한 영국의 환타지 소년소설 해리포터를 보기로 들면서 시짓기도 그에 따라하기를 권고하나 그 환타지 작품의 겉 맛을 파고 들어가 숨겨진 권선징악(또는 어두운 어른들의 세력에 대한 순수한 동심의 세계의 극복)의 측면까지 엿보지 못하여서 유감이다. 소설과 달리 詩가 하이퍼 시인들이 주장하듯이 사이버시대에 걸맞는 현대인들에게 오락성을 주자고 그 쪽으로 경도된다면, 엄청나게 다양한 오락을 주는 기기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서 외면받고,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자신들의 시와 함께 파묻히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굳이 하이퍼시와 같이 이해가 어렵고 까다롭고 고통스런 글을 읽겠다고 돈을 들여 시집을 사거나 시간을 낼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김춘수가 자기 삶의 말년에 와서 시문학계에 권고하는 다음의 말을 경청해보자.:시에 대한 자의식이 있어야 된다. 자기 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왜 이런 시를 썼는가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냥 충동적으로(전위적인 詩들 처럼-글쓴이) 쓰고 마는 것은 아마추어가 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예술가적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시는 자연발생적으로 나올 수가 있지만 그걸 의식하고 제어하는 이성이 있어야 한다. 19세기 시대의 로맨티스트들처럼 자연발생적으로 부르짓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28) 이같이 김춘수가 시인 자신의 시작활동에 반성과 비판을 요구하는 것은 문학의 본질적인 전통적인 정신을 향해 깨어있으라는 주문이나 다를 게 없다.
시(문학)이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치를 매겨서 의미있는 세계, 가치있는 세계를 건립하여, 인간성을 회복하는데 기여하고 인본주의를 고양시킴으로서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새로울수록 우리의 삶은 건강하고 우리의 내일은 더욱 정신적으로 풍요로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아니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같은, 중세 암흑기를 거쳐 르네상스운동에 목숨을 바쳐온 인류의 고귀한 재산은 문학을 통한 휴메니즘의 구축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시 창작의 자유에 바로 이 근본 정신은 깃발처럼 늘 펄럭여서 살아있어야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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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 풀이
1)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월간,시문학 2006.8월호, 시문학사 2)심상운, 위의 논문 , 같은 곳 3)심상운“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젊은 시 운동-‘하이퍼시’-기존관념에서 해방,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현, 우주적 개안” 4)손해일, “의식- 무의식-언어의 징검다리와 하이퍼 링크” 월간. 시문학 2008.6월호 .시문학사 5)조명제, “하이퍼모더니즘의 시대는 오는가”. 월간.시문학 2008.10월호 6)최진연, “하이퍼시(hyper poetry)의 이해” . 월간. 시문학 2010.10월호 7)당시 글쓴이의 경험에 의하면, 김양이나 강씨는 조증(=기분의 고양상태,흥분)의 상태에 빠져있지 않고 성격적으로도 차분한 편인인데도, 홀로 중얼거리며 돌아다니거나 옆에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지껄여댔는데, 그런 이들이 꽤 있었다. 8)이홍식,정신분열증, 진수출판사,1995, 88쪽,94, Pychopathology, Milyn R.Zide & Susan W. Gray. (역) 전석균, 권구영, 서미경 , 71,72쪽. 하나 의학사,2003. 학원 세계대백과사전26. 12쪽 정신분열병. 학원사,1993. 그밖에, 포탈- 네이버 관련항 참조 9)심상운: “이 글은 1981년 12월호 월간 <詩文學>에 김춘수 시인의 現代詩의 探究로 발표된 글로서 현대시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되는 매우 중요한 논문이다.”라고 하면서 심상운 시인이 옮긴 것이다. 10)심상운: “이 글은 1981년 12월호 월간 <詩文學>에 김춘수 시인의 現代詩의 探究로 발표된 글로서 현대시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되는 매우 중요한 논문이다.”라고 하면서 심상운 시인이 옮긴 것이다. 11)M. Heidegger, HU。S。313 12)M. Heidegger,HW。S。310. 13)최이인( 엣이름; 최성도), 시작적 사유(사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1990, 석사학위 논문 참고 14)최진연, 탈관념은 가능한가? 월간,시문학 2006. 7월호 15)M. Heidegger,US. S. 208. 16)심상운.위의 논문, 같은 곳 17)심상운; “이 글은 <한국 전후 문제시집>(신구문화사 1961년11월)의 "시작노트"에 실려 있는 시인 조향의 시작노트를 원문 그대로 수록한 글입니다. 앞서 감상문에서 언급했던, "바다의 층계"에 관한 시인 자신의 해설도 있고 해서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생각되어 옮겨 봅니다”. 18)여기서 無意識 이란 용어 자체가 성립 될 수가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의식과 잠재의식 이라고 바꾸어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무의식 이란 의식이 없다는 말인데, 혼절했거나,죽은 상태인데 어떻게 경계를 넘나드나? 19)최진연, 하이퍼시의 이해, 월간, 시문학 2010.9월호 20)마르틴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론의 핵심임 21)최진연, 위 논문, 같은 곳 22) 현대시인협회 발행, 2011년 사화집 23) 김춘수 시전집, 서문, 현대문학사, 2004 24) 김춘수- 이재훈과의 인터뷰, 현대시 2004년 4월호 25) 차영한, 초현실주의 시와 시론, 한국문연, 2011 26) 웰렉과 워렌(R. Wellek & A. Warren), 『문학의 이론』 ,김병철 역, 서울 을유문화사,1993 27) Paul Ricceur, Interpretation Theory, Fort Worth, Texas, 1976, p. 37. 28) 김춘수- 이재훈과의 인터뷰, 현대시 200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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