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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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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시짓기에서의 비법
2016년 01월 01일 22시 49분  조회:4347  추천:0  작성자: 죽림
  • 안녕하세요^^

     

    시는 내마음 내생각을 글로 노래하듯이 표현하면 됩니다.

     

    시를 지을때 필요한 것은'ㅡㅡㅡ

     

    우선 책을 많이 읽어서 다양한 표현 어휘력을 키우는게 좋구요,

    다른 분들의 시를 많이 읽어봄으로써 시에 대한 운율이라던가 표현법을 익히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세상과 사물을 보며 생각을 가지는게 좋습니다.

    중요한것은 자기 생각에 솔직히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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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1) 한 작품에 많은 사연을 담지 말것. 한 편의 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정서든 이미지든 하나여야 하고, 다른 모티프들은 그것이 뿜는 자장(磁場)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때 시는 통일성을 얻는다.

     

    2) 비유와 상징을 아낄 것. 비유는 아낄 수 있는 데까지 아껴야 오롯한 품위를 갖는다. 상징은 시인이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숨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3) 긴 시를 경계할 것. 시의 참된 맛은 행간에 있다. 행간에는 침묵의 언어와 정서의 긴장이 깃들여 있다. 긴 시는 행간을 매립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4) 시상을 풀어가는 수단으로써, 분명하게 몸으로 감촉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할 것. 불투명한 관념이나 감정을 시 비슷한 문법으로 채색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

     

    5) 정서의 결을 잘 다듬을 것. 몇 번의 침전과정을 거친 그리움이라면 슬픔 따위가 개운하게 세척된 상태라야 한다. 물기가 없이 잘 마른 상태라면 더욱 좋다.

     

    6) 구문이 거추장스러운 것, 관형구나 부사구가 무거운 것은 금기다. 줄기가 가지를 지탱하기 어렵다. 관형어나 부사어가 상쾌하게 오려진 문장은 조촐하고 산뜻하다.

     

    7) 시로 삶의 각성이나 잠언적인 의도를 노출시키지 말것. 시는 철학이 아니라 미학이다.

     

    <노트> [시안] 2002년 봄호에 실린 글을 축약해둔다. 시를 쓰면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일들을 찬찬하게 지적해주었다. 두고 읽을 만 하다.


     

    <추기> 다음은 <시안)2003년 봄호에 실린 박남희의 신인상 예심평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심사과정에서 제외된 작품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결점을 안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1)알맹이는 없이 장식적인 어구를 구사하고 있는 경우

    2)미처 객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감상성이나 관념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경우

    3)생각이 너무 단순하고 너무 빤한, 평면적인 상상력에 기대고 있는 경우

    4)치기 어린 사랑시에서 못 벗어나 있는 경우

    5)너무 낯익고 관습적인 묘사나 비유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

    6)시와 산문의 차이점을 모르고 평면적인 서술로 일관하고 있는 경우

    7)<-하노라> <-구나> <-어라>등과 같이 의고체나 감탄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경우, 등인데

    8)개중에는 앞부분의 몇 작품은 괜찮은데, 중 후반부의 작품들이 편차가 너무 심해서 제외된 경우도 있다.


     

    <추기) <현대시> 2002년 5월호에 실린 오세영시인의 다음 말에도 귀를 기울이자

     

    첫째는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시는 무의미다, 유희다, 그런 입장과 변별되지요. 시는 일단 진지하게 쓰는 거라는 것이 나의 첫째 원칙이에요. 둘째는 시의 원리는 건강성이라고 보는 거죠. 시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데 기여해야지, 인간의 존재를 해체하고 감수성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건강한 정서는 시의 아름다운 덕목 아닐까요? 셋째는 아름다운 것을 쓴다는 입장이에요. 아름다운 것만 가지고 써도 다 못 쓰잖아요. 굳이 혐오스럽고 추한 것까지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문제고요. 마지막으로 넷째 원칙이 있다면 쉽게 써야 한다고 봐요.

     

    ....독선적으로 문학이 아닌 하나의 이념을 고수한다든지, 시류에 속박되어 버린다든지 하는 것은 대단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가령 한바탕 포스트모더니즘이 휩쓸고 지나갈 때도 그러했지만, 요즘도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앞선 시인의 아류적 모방이거나 시류적 타협의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맹목적으로 시적인 기류에 섞여드는 것은, 창조적 상상력을 오히려 구속하고 억압하는 획일화의 한 예가 될 수 있지요.(... 획일화된 사유는 안됩니다.)


     

    <추기>평론가 박재열은 <포에지>2001년 겨울호에서 멜로우 포에츄리의 예로서 다음 몇 가지를 들었다.

     

    1)잠언이나 금언 경구 같은 것을 과다하게 사용하는 것

    * 시인 황동규는 서정시학 2002년 여름호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아포리즘으로서 유머와 슬픔의 반경 안에 들어 있다고 평가되는 이정록의 "슬픔"의 전문인, '열매보다 꽃이 무거운 생이 있다'를 들어 보이면서 '그러나 이 멋진 아포리즘은 시의 근원인 노래에서 멀어지기 쉽다'고 지적한다.

    2)대상 자체의 물질성이나 즉물성에 대한 깊은 통찰 없이 자신이 즐겨 쓰는 시어에 의탁하여 통속적인 정서를 불러내는 것

    3)이미 여러 시에서 도식화해 놓은 등장인물, 주제, 시적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

    4)도식적으로 소재를 인식하는 것, (양식화한 자연관, 이분법적 사고와 고식적인 태도를 포함한다)


     

    <추기>

    .......그(윤동주)는 한 마디의 시어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 <또 다른 고향>에서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라는 구절에서 '풍화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 하지를 않았다.

     

    위와 같이,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 2년 후배인 정병욱씨가 1976년 <나라사랑> 23호에 발표했던 회고담 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강인한 시인은 "시의 어법이 결국은 합리적, 보편적 상식과 바른 문장 표현으로부터 출발한다" 는 점을 강조했다.(현대시 2002년 7월호)


     

    <추기> 시인 송수권은 자선시집 <여승>에 실은 배한봉 시인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시는 사유재산이고 비밀재산이에요. 그런데 대중을 상대로 유통언어를 얼마나 많이 뿌리는가요? 그런 시를 나는 '뽕짝조' 타령이라고 부르거든요. 그것이 카페정서지 민족정서라곤 볼 수 없어요. 대학 강단에선 언급도 안되는 시들이 바깥 세상을 얼마나 오염시키는가요. 베스트셀러 시집들의 속성이 그렇잖아요. 말초적 감각을 흔드는..., 그래서 잘 팔리는 시인들이 따로 있지요. 이런 현상은 저널리즘이 문제입니다. 아카데미즘이 아닌...., 시를 보는 눈이 천박한 독자 수준을 넘지 못해요. 문창과 신입생들에게서 이 유통언어를 걷어내는 데 1년이 넘게 걸려요. 또 사회교육원 시 전문반만 해도 뽕짝조에 물들어 자기 사적인 비밀언어를 무덤 쓰고 살아요. 시가 기본수준도 안되는 원인이 이 때문인 줄 모르니 여고생 때 썼던 시를 평생 쓰고 있는 우스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추기> 시인 유용주의 다음 "고백"을 들어보자

     

    .....참 부드럽고 아늑하고 겉보기에 풍성한 곳을 많이도 찾아 다녔다네. 사근사근 혓바닥에 구르는 당의정처럼 독이 더 많이 들어 있는 연애시의 마을, 자기가 쓰고도 무슨 말을 썼는지 모른 해독 불가능한 난해시의 패거리, 요설과 장광설 하나로 포스트모던의 적자임을 강조하는 외국 입양을 못해 안달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임, 엄살과 광기로 얼룩진 반장들 동네, 공식을 만들어 놓고 언어를 조립하는 조립식 건축업자들의 단체,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도사풍의 시, 끊임없이 남의 시를 조금씩 베끼는 쥐새끼들의 시, 주제만 너무 주장하다가 그 주장에 치어 저도 감당하지 못할 말을 주저리주저리 동어반복하는 사람들까지 수없는 마을과 동네를 기웃거렸다네.

    한때는 그 사람들과 들고나면서 만고풍상을 겪었지만 결국 문학이란 사람살이에서 오는 눈물겨움 아니던가. 잘 드러나지 않은 그늘의, 배면에 깔려 있는, 생명 있는 것들의 안쓰러움 아니던가. 모시고 섬기는 일에 너무 인색해. 모두들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지금 말한 내 말도 내가 그런 과정을 거쳐 오면서 부화뇌동했다는 고백을 하기 위함일세.

    - 서정시학 2002년 여름호


     

    <추기>오늘의 우리 시를 읽는 대중들은 김소월을 뛰어넘지 못하는 소박한 수준임에 비추어 정지용 이상의 수준은 잘 모르겠다고 손사래를 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요즘의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시들을 한두 편 예로 들면 대체로 이런 부류의 시들이다.

     

    ①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 뛰어든 / 나는 / 소금인형처럼 / 흔적도 없이 / 녹아 버렸네

     

    ② 그대를 만나던 날 /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 착한 눈빛, 해맑은 웃음 /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에도 / 따뜻한 배려가 있어 / 잠시 동안 함께 있었는데 / 오래 사귄 친구처럼 /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①은 류시화의 '소금인형' ②는 용혜원의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이라는 시들이다. 그래도 류시화의 경우는 깊이 있는 명상을 동반하는 시이므로 나은 편이지만 용혜원의 경우는 사춘기 소년 소녀들을 겨냥한 얄팍한 감상주의의 옷을 입고 있으며 그것을 한 꺼풀 벗기면 에로틱한 연애편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글에선가 이승하 시인이 지적했듯이 류시화의 시는 이 땅의 현실이 완전히 제거된 신비주의적 명상 내지는 잠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제가 있고, 목사 시인인 용혜원의 시는 소녀적인 감상을 포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둘 다 상업적인 전략의 차원에서 쓰여진 시라 할 것이다

     

    - 강인한 '시와 시인, 독자와 시의 거리'―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중에서


     

    <추기> 시는 언어예술이기에 시인은 말을 잘 부릴줄 알아야 한다. 또한 시는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이른바 진정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시는 새로워야 한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참신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시와는 다른 목소리와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런 것들이 또다른 시와의 변별성이며 개성이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의 모험을 해야 한다. 그 결과 얻어지는 것이 시의 독창성이며, 시의 진실이며, 시의 감동이며, 시의 진정한 모습으로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이다.

    - 제13회 <시와 사람> 신인상 심사평 중에서


     

    <추기>...딸의 신발이 작다고 신발을 벗기고 발가락을 자르는 아버지, 내 몸을 둘둘 말아 접시에 올려놓았더니 나를 집어 먹으려는 어머니, 몸이 기우뚱거리지 못하도록 아버지에게 자신을 쾅쾅 박아달라는 딸..., 그러나 여성시에 관한 한 이런 진술들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조말선의 시에는 박서원의 자기 신체 훼손, 노혜경의 카니발리즘, 김언희의 도발적 상상력 등 선배 여성시인들의 언어가 큰 변주 없이 한 집에 모여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의 낡음이 사유의 낡음과 무관하지 않다면, 언어의 답습은 적지 않은 결함으로 지적될 수 있다.

     

    ...한국시에 관한 한, 서정적 경향의 시라고 분류되는 것에는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부정적 측면이 존재한다. 대체로 자연친화적이고, 복고적이며, 전근대적 삶에 향수를 느끼고 있고, 세계의 불화나 갈등 보다 화해나 조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안이한 감상성에서 탈피하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문단에서 여전히 주류를 점하고 있는 이러한 시들의 생산은, 정치적 현실로부터 독립성을 지키지 못했던 제도권 문학의 탓도 있지만, 최근 생태주의적 인식의 대두에 고무되어 목소리를 더 높이는 경향이 있다...안이한 서정시일수록 세계의 복잡다단함과 폭력성을 직시하기보다는 대상과의 합일이 가능하다는 사고에 기울어지는 추세가 있다. 그를 위해 순진무구한 자아를 설정하거나, 세계와의 합일이 가능한 시대나 지역이라고 생각되는 전근대 또는 문명화되지 않은 영역이 등장하는 경향이 한국 서정시에 빈번하다.

    - 정문순 (다층 2002년 겨울호 '2002년 시를 점검한다' 중에서)


     

    <추기> 요즘 읽는 시들 중 많은 것은, 비록 말장난의 시라도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이라는 개념도, 대화라는 개념도 없다. 중언부언 도대체 요령부득인, 그래서 안일하고 탄력 없는 시가 새로움이란 가면을 쓰고 난무한다.

    - 신경림, 시집<뿔>에 실은 '시인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추기> 다음은 시의 문장에 관한 이희중의 글이다.

     

    시에 쓰이는 문장이 모두 통사적으로 완벽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까다롭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그래야 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일상의 말도 마찬가지이지만, 자명하게도 시가 요구하는 통사적 완성은 표현을 제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 요청된다. 시인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표현할 통사구조를 구하지 못했을 때, 또는 정확한 전달을 원하지 않을 때, 통사적 완성을 포기할 수 있다. 이때 시인은 이를테면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도 깊은 뜻을 눈치 채지 못할 때도 생기므로.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3년 3,4월호에 실린 평론가 이재복의 글이다.

     

    요즘 젊은 신인들의 가증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시어의 요설과 사설이다. 언어를 응축하고 갈고 닦아 가려서 조금씩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생각들을 가감 없이 밖으로 쏟아내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시적 환경의 변화가 그 이유일 것이다.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고 파편화 되어가는 시대에는 오히려 이런 식의 어법이 더 적절할 수 있다. 그러나 시어의 요설과 사설로 인해 고전적인 시의 양식이 가지는 응축과 균형의 묘미를 잃어감으로써 운문의 참맛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추기> 다음은 산문집 <멀리 보이는 마을>에 있는 최하림의 말이다.

     

    명사나 동사, 형용사만을 중시하지 말아라. 현 편의 시에서는 토씨도 명사나 동사 이상으로 율조에 큰 역할을 하며 울림에 크게 기여한다.


     

    <추기> 다음은 평론가 이형권이 쓴 김선태시 <동백숲에 길을 묻다>의 리뷰에서 발췌했다. 따라서 인용된 시는 모두 같은 책에 실린 김선태의 시이다.

     

    1)오호라, 지천으로 지천으로 물이 올라, 어디를 가도 한참은 정신이 몽롱한 남도의 봄 연애사태여, 그리하여 나도 대지 위에 벌렁 누워 뒹굴고 싶은 아흐, 더는 참을 수 없는 봄의 오르가슴이여 ("봄의 오르가슴' 부분)

     

    사실 감탄사는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거나 그 영향권 내에 있는 시인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다. 감탄사는 명징한 이미지를 형상화하거나 지적인 인식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남발되는 수준이 아니라면 감탄사는 낭만적 감정이나 서정적 영감을 드러내는 데 여간 유요한 게 아니다. 이 시에서 사용된 감탄사 '오호라'와 '아흐'는 시상을 고양하여 여운은 길게 늘어뜨리는 데 긴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딱따구리 소리 또 한 번 딱따그르르/ 숲 전체를 두루 울릴 수 있는 것은/ 숲의 나무와 이파리와 공기와 햇살/ 숲을 지나는 계곡의 울음소리까지가 서로/ 딱,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딱따구리 소리" 부분)

     

    '딱'은 의성어이자 의태어이다. 새가 내는 소리의 한 부분으로 들을 때는 의성어이지만,아귀가 잘 드러맞는다는 뜻으로는 의태어 구실을 한다. 이것은 일종의 음성상징어로서 '숲 전체'를 구성하는 것들인 '나무와 이파리와 공기와 햇살' '물소리'등이 '하나'로 조화된 국면을 형상화하는 데 적잖은 효과를 발휘한다.

     

    3)마음은, 지금, 어느, 남쪽, 섬, 기슭, / 한, 마리, 갯고동, 처럼, 엎으러져, 있어라("마음의 거처" 전문)

     

    불과 12단어(혹은 어절)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쉼표가 11개나 사용되었다. 이 쉼표들은 시의 중심 매타포인 '갯고동'의 생리를 적실히 드러내는 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쉼표가 일반적인 용법에서 벗어나 시상의 흐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3년 5,6월호에 실린 정한용의 글 중 부분이다.

     

    '깊은 어둠 속에서 힘차게 빨아들이던 희망/ 돌밭에 뿌리 드러내고 아침처럼 서 있는 나무/텅빈 허공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헛된 뿌리/ 날선 빛들로부터 얻은 굳은 상처/'

    (시의) 각 시행이 거의 전편에 걸쳐 수식어구와 피수식어로 이루어져 있어 답답하다. 이런 수식은 시인이 대상을 묘사하면서 자의식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데에서 오는 오류이다. 수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상상이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의 감상폭을 옥죄는 감옥이 된다.


     

    <추기> 다음은 [시와 사람] 2003년 여름호에 실린 신인작품심사평의 일부이다.

     

    이상하게도 비슷비슷한 시들이 많다. 곁보기에는 매끈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알멩이가 없고,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여기에는 대학안팎의 각종 시창작강의의 영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쓸것인가는 배워서 아는데 무엇을 쓸것인가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에 대들어 이렇게 되는 것일까? 요컨데 억지로 만든 시에 삶의 무게가 실릴 턱이 없다.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3년 7,8월호에 실린 이승훈시인의 말이다.

     

    따지고 보면 시는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무슨 관념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심낱말을 반복하고 혹은 변주하는, 그러니까 결국은 동어반복의 세계이다. 최근의 우리의 시가 재미없는 것은 이런 미학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안하고 무슨 말들만 많이 하면 시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승훈 시인은 이 글에서 '낱말을 반복하라', '구와 절을 반복하라', '문장과 연을 반복하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추기> 다음 두 글은 [시안]2003년 가을호에 실린 신인상 심사평이다.

     

    세련된 언어감각은 정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사유나 감정이나 관찰이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지 않다면 그것을 드러내는 언어는 허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는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다. 시에서 인정되는 애매모호함이란 것도 실은 단순하게 드러낼 수 없는 의미나 느낌의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한 방식이 되어야 한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언어를 세공하고 조탁하려는 큰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는 곧 사유와 인식의 정확함을 높이는 노력이 될 것이다.(이남호)

     

    시를 쓰는 것은 일종의 창조행위다....따라서 시를 구성하는 데 다른 사람들이 한번은 써먹었음직한 상식적 언술의 사용은 피하는 것이 좋다.

    작품중에는 산문체시를 즐겨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유행처럼 관례화되어 시의 긴장감과 응축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행 구분을 하지 않고 산문시 스타일로 이어가는 것은 병폐라 아니할 수 없다.

    ....형식의 절제가 필요하다. 긴 시행은 반으로 줄이고 시행의 수도 삼분의 이로 줄여보라. 시는 서정이지 서사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시상의 포인트를 중심으로 잔가지를 쳐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있었다>라든가 <-했네>등의 과거형 어사를 남발하는 것도 시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이숭원)


     

    추기> 다음은 현대시 2003년 9월호에 실린 이기와의 말이다.

     

    우리의 생각은 모두 불완전한 메타포로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라는 것이지요. 현실에 상상력의 양념을 쳐서 맛깔스런 시의 요리가 완성된다기 보다, 상상력도 관념의 일종이라고 볼 때, 관념 투성이인 우리네 생각들이 현실이라는 구체적이고 명료한 양념을 얻어 시의 요리가 완성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불완전한 상상력에다 현실이라는 옷을 입혀야 공감할 수 있는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상상력은 현실의 옷을 입지 않고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넘치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기에 따로 더 과다한 상상력을 욕심 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현실을 상상력으로 끌어올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호한 상상력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작업이 요즘 난해한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한테 특히 요구될 것이라 봅니다. 저를 비롯해 요즘 사람들은 그냥 자리에 앉아 머리로 모든 일을 해치우려고 하는데요. 그러다 보니 드라마틱한 현실의 체험은 찾아 볼 수가 없고, 공허한 상상력으로 조합된 시들이 무성하게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상상력에 목숨 걸지 맙시다(웃음)


     

    <추기> 다음은 월간 [현대시] 2003. 10월호에 실린 이은봉 시인의 말이다. 시인은 프로시인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지만, 구태여 프로시인에게만 한정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프로시인은 절제된 가운데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시를 쓰려면 무엇보다 시인이 저 자신의 고유한 언술방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읽어도 누구의 작품인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가령 신경림 시인이나 고은 시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문인이 된다는 것, 혹은 시인이 된다는 것이 단순히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일로 끝나는 것 같아 서글퍼질 때가 있다. 특히 시를 장신구로 활용하고 싶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문예지를 보면 역겨움이 느껴진다. 등단 기회 제공을 최후의 목적으로 하는 정체 불명의 문예지의 범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 잡지에 유혹 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에 시인이라는 명찰을 달아준 대가로 정해진 거래를 따라야 한다. 수백 부씩 그 잡지를 구매해야 하고 편집자에게는 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향응도 제공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인을 사고 파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들이 특정 문인단체에 가입을 하고 회장 선출 등의 투표권을 행사하면서 또 하나의 문단 권력 만들기에 기여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이 바로 이상한 시인의 나라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제대로 된 시인의 나라는 진정 만들 수 없나. 시인이 되는 일에 급급해 문학의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가 되지 말고 시를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가 맑아지는 꿈을 꿀 수는 없나. 시인이라는 간판을 그럴싸하게 걸어 놓고 전을 펼치지 않아도 그 삶이 곧 시인인 사람 어디 없나.

     

    - 안도현의 "이상한 시인의 나라" 부분


     

    <추기> 다음은 라즈니쉬의 '남전' 어록강의(손민규 옮김)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 경우에는 예이츠의 역할을 스스로 한 점이 다르다.

     

    인도 시성 타고르가 노벨상을 받았을 때에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키탄잘리』라는 작은 시집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원래 그 시집은 타골의 모국어인 벵골어로 씌어졌다. 그 다음에 그는 자신의 시를 영어로 옮겼다. 그런데 그는 영어로 옮기면서 망설이게 되었다. 영어로 옮긴 시가 그의 모국어만큼 아름다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인도에 살고 있던 유명한 선교사 엔드류에게 부탁했다.

    「당신이 살펴보고 만일 문법적으로 틀리거나 언어학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내가 고칠 수 있도록 지적해 주시오.」

    엔드류는 해박한 지식을 갖춘 선교사였다. 그는 타고르의 시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만 네 구절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이 네 구절만 바꾸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시가 될 겁니다.」

    그래서 타고르는 엔드류의 의견을 따라 네 구절을 바꾸었다.

    타고르의 친구이며 훌륭한 시인인 에이츠가 타고르를 시인들의 모임에 초대했다. 그 모임을 통해 타고르는 런던에서 처음으로 키탄잘리를 읊기로 되어 있었다. 타고르의 시를 듣고 모든 사림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시집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책이다. 세상에 그와 비교될 수 있는 문학작품은 극소수이다.

    그런데 예이츠는 다소 석연치 않은 기색을 보였다. 그가 타고르에게 말했다.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데 네 구절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어요.」

    그 네 구절은 엔드류가 집어넣은 것이었다. 예이츠는 그 네 구절을 정확하게 지적하면서 말했다.

    「여기에서 시의 흐름이 끊겼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개입했어요. 지식에 얽매인 사람이...., 원래 당신이 쓴 구절은 문법적으로 틀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언어의 규칙이나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가슴에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시인의 자유입니다. 여기에다 당신 자신의 구절을 집어넣으십시오.」

    그래서 타고르는 엔드류가 써넣었던 구절을 자신의 언어로 바꾸었다. 그러자 예이츠가 말했다.

    「이제 시의 흐름이 완벽해졌습니다.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요.」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3년 11, 12월호에 실린 양애경 시인의 글이다.

     

    '시라는 것은 웬지 모를 모호한 부분이 있어야 멋져 보이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여러 번 보았다. 필자의 생각에는 습작기에는 '모호함의 문학적 효과' 보다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기술'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을 납득시키기가 참 힘든다. 시에는 기교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며, '그럴듯해 보이는 기술'이 좋은 시를 쓰게 해 주지는 않는다. 쓰는 이의 영혼이 담겨야 할 것이다.


     

    <추기> 다음은 [시작] 2003년 겨울호에 실린 이명원의 평론 ‘속도성을 거슬러서’에서 발췌한 글이다.

     

    적어도 동일화를 기본원리로 하는 시의 장르적 특성 때문에, 새로움에 대한 속도전이 마냥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자기와 세계를 유기적인 연관 아래 포섭하고 미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의 원칙, 즉 ‘은유의 수사학’으로 지탱되었던 전통적인 수사체계의 급격한 붕괴는, ‘환유의 수사학’으로 명명될 수 있는, 의미의 중심을 분산시키고 파편화시키는 새로운 시적 언술방식의 출현과 함께, 사실상 시의 언어를 분열증환자의 언어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상태로 하강시킨다. ‘무의식이 나를 말한다’로 표현할 수 있는 이러한 시적 상황의 변모는, 그것이 필연적인지 아니면 불가피한 것인지는 모르나, 시에 대한 독자들의 향수 권리를 박탈시키는 새로운 역리(逆理)룰 파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문명의 혁신과 속도성에 대한 숭배, 새로움의 특권화는 역설적으로 문화적 문맹화를 더욱 부추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새로움과 속도성에 대한 숭배는 심원한 사유에 기반한 지혜와는 사실상 무관한 지식과 정보의 파편 속에서, 대중들의 감수성을 이른바 ‘문명 속의 야만인’의 상태로 구조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번성하는 것은 안일하면서도 말초적인 감상주의에 기반한 상투적 감정배설의 언어들이다.

     

    역설적이게도,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사실상 역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들은 우리시대의 시적 새로움을 이 악무한적 속도성을 ‘거스르는’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시를 알쏭달쏭한 담론의 수준으로 퇴행하게 만드는 관행화된 시작법의 매너리즘에서 탈피하여 삶에 대한 연속성의 감각을 복원시키고, 이제는 거의 멸종되다시피한 ‘육성(肉聲)을 되살리는 한편, 공감과 감흥을 기반으로 한 ’감정교육‘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복고적이며 관조적인 서정의 세계로 귀한하는 시대착오를 반복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감흥이랄까 공감이 전제되지 않은, 싸늘한 개념적 원리에 입각한 시쓰기는 새로움이라기보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폐기될 ‘미래의 골동품’일 것이기 때문이다.


     

    <추기> 다음은 월간 [현대시] 2003년 12월호에 실린 좌담 내용 중 부분이다. 발언자는 평론가 이재복이다.

     

    저도 올해 신인들을 대상으로 몇 편 글을 썼는데 신인들의 시에서 참신하다는 작품을 발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과 함께 시가 서술화되면서 긴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이것의 원인은 '지금' '여기'에서의 문화의 획일성과 가치의 무차별화에서 찾을 수도 있고 또 제도화된 문학교육 속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는 붕어빵처럼 제도화된 교육을 통해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삶의 현실이 배제되면서 함께 배제된 것이 아웃사이더적인 의식과 지적인 모험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도적인 보호라고나 할까, 이 제도에 길들여지면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나 진리에 대한 지적인 모험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시가 대체적으로 그 수준의 평범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의 국문과나 문창과를 다니면서 특히 문창과를 다니면서 제도화된 교육을 받은 신인들의 시가 등단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사실입니다. 문학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학과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학의 왜소성과 매너리즘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앞장 서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식의 교육을 받고 문단에 나온 올해의 신인들의 시가 대부분 그렇다고 봅니다.


     

    <추기> 다음은 중앙일보 이경철 기자가 쓴 '신춘문예에 응모하려는 분들에게' 중 부분이다. 현장의 발언이다.

     

    예전, 좀더 정확히 말해 1990년대 이전까지 문학도들은 선배 문인들의 작품을 읽든지, 직접 개인적으로 찾아가 지도를 받든지 하는 직, 간접의 사사(師事) 방식으로 창작 수련을 했습니다. 신경숙씨 같은 작가는 좋아하는 작품을 꼼꼼히 옮기는 방식으로 문학 수업을 했다합니다. 찬찬히 음미하며 필사하다보면 문체의 향기는 물론 작가의 숨은 의도도 그냥 읽을 때보다 더 잘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특히 시일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필사로서도 성에 안차면 존경하는 기성작가에게 자신의 창작을 직접 들고 가 문인으로서의 가능성은 물론 작품의 잘잘못을 지적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사식 창작교육에서는 문학도로서 가장 중요한 개성은 물론 문학, 문인으로서 끝끝내 지켜내야만 할 진정성과 절실성을 견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충동된 그 어떤 절실한 것이 먼저 창작으로 나아가게 했으니까요.

    그러나 문학 수업이 학원화, 실기화 되면서 사정은 달라진 듯 합니다. 90년대 초반은 각종 문화센터의 문학창작반 수강생들이 신춘문예, 특히 소설 부문을 싹쓸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렇게 나온 당선자 중 지금까지 창작활동을 펴고 있는 작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창작 교육을 잘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취재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몇 명씩 그룹으로 유명 작가 밑에서 자신들의 창작품 1, 2편만 가지고 1, 2년씩 교육을 받았습니다. 시류에 걸맞는 주제의 작품을 계속 지적을 받아가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고치고 가다듬었으니 주제 좋고 소재 좋고 구성 기막히고 문장 정갈하여 신춘문예의 예, 본심을 미끈하게 통과할 수밖에요.

    그러나 등단 후가 문제입니다. 이제 홀로 놓여져 써야할 기성 문인의 입장으로 작품 구상도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요. 신춘문예 당선자로서의 자존심은 강하고, 작품은 안나오니 이중으로 죽을 맛이겠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차라리 좋은 문학 독자, 애호가로 남아 더 행복했을 많은 사람들이 문인으로 들어와 고통을 당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런 관계로 90년대 후반 들어서부터 신춘문예 심사에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 참신성, 개성, 실험성 등을 더 따지게 됐습니다. 물론 각 장르의 문법에 맞고 문장이 정확해야 함은 기본입니다. 80년대 후반에 나온 일부 젊은 여성 작가들 중 여성의 은밀한 욕구과 감성을 발랄하게 까발리며 주목은 받고 있으나 문학의 기본기가 의심스러운 작가들 또한 도태됐거나 문인으로서의 생명 또한 길지 않을 것은 뻔하기 때문에 자기만의 문장이면서 정확한 구사야말로 문학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추기> 다음은 대구카돌릭문학 13호에 실린 강희근의 글 중 일부이다.

     

    시에서 종교를 다루게 되면 실패율이 높다. 주제가 시의 전면에 서기 때문이다. 형식과 세계의 일원적 성취가 종교를 다룰 때는 이루기가 힘들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세계가 형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추기> 다음은 남진우의 "신서정과 젊은 시인" 중의 일부이다.

     

    ......다시 말해서 신서정은 이미 그 태동 자체에서 어느 정도 복고성과 회귀성을 요청받고 있는 셈이며 무분별한 궤도 이탈 대신 원상복구에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시나 해체시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시인들이 이전의 과격하거나 방만한 몸짓을 지양하고 서정시가 가진 본래의 성격을 점차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부류의 시에서 느껴지는 것은 세계와의 긴장된 대결의지이기보다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의 소용돌이에서 한 걸음 물러선 채 사태를 관망하는 성찰적 시선이다. 한결 정돈되고 정제된 어조로 내면을 깊숙이 응시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들 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소통과 호환을 중시하는 유기체적 세계관에 경도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형의 작품에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암시한 바와 같이 1990년대 젊은 시인들은 다들 도전적인 정복자가 되어 제위 찬탈에 나서기보다는 물려받은 영지를 잘 관리하고 가꾸는 제후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새로운 시문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야심을 불태우기보다는 기존 문법에의 적응 및 숙달에 더 민감한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개개 시편의 완성도는 더 높아진 편이다. 이처럼 조숙한 젊은 시인들이 많아지는 것은 한편으로 안심을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왠지 맥이 빠지게 만든다. 다들 너무 안전한, 성공이 보장된 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더욱이 그 성공이란 것이 일정한 높이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계열의 시인 가운데 상당수는 종종 따뜻한 감성 탓이기도 하겠지만 낙천적이라 할 만큼 세계와 쉽게 몸 섞는, 그래서 때로 시를 예정된 화해의 공간으로 인도하는 부정적 효과를 산출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신서정 또한 이제 해체와 갱신의 역학에 몸을 맡길 시점에 이른 듯하다. 이 시대의 서정은 좀더 사납고 가혹한 언어에 의해 단련될 필요가 있다.(1998)


     

    <추기>다음은 이성부 시인이 [열린시학] 2003년 겨울호에 자선한 대표작 "봄"에다 붙인 시론 중 일부이다.

     

    사물(대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여 얻어진 것을 시라고 합니다. 이때 사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에 따라 시의 성패가 갈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각을 여늬 사람들과 달리 한다든가, 사물을 주체화, 또는 의인화시킨다든가, 아니면 나(주체)를 객체화(사물화) 시킨다든가, 하는 일들이 모두 어떻게 보느냐와 관계가 있습니다.

    느낌과 생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하고, 이렇게 다른 느낌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호소력을 지닐 때, 좋은 시의 몫에 값한다고 하겠습니다.


     

    <추기> 다음은 박시교 시인이 '열린시학' 2003년 가을호에 쓴 '시를 위한 변명' 중 부분이다. 관련하여 자선한 대표작 "전봉건(全鳳健) 추억" 전문을 아래에 싣는다.

     

    말의 홍수시대를 살면서 시마저 길고 복잡(?)하게 써야할 이유가 있는걸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삶의 다난한 이야기를 하면서 군더더기를 철저하게 발라내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시는 짧아야 한다. 그 짧은 행간에 넓고 아득한 그 무엇을 담아내는 일, 그 것이 시가 열어야 할 지평이라고 나는 믿는다.

     

    양평 지나 가산 근처 남한강 가 돌밭// 해오라기 한 마리 긴 목 추스리고 섰다// 강물은 저만한 풍경 위해 천년을 뒤척였으리.// 수면 위로 반짝이며 부서지는 푸른 햇빛// 애초에 그리움은 순간의 꽃이었다// 오석(烏石)에 칼자국 같은 차고 흰 선(線) 한 획.


     

    <추기> 다음은 [현대시]2004년 신년호 '기획특집/ 새 시대 새로운 시인들' 에 실린 정과리의 글 "파열된 연대의 시적 기록, -2004년의 젊은 시인들" 冒頭이다.

     

    2004년 벽두 젊은 시인들의 풍경은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는 헛간과도 같다. 모가지가 달아난 병, 헌 책들, 용도를 잃은 나무토막들, 해체된 나사들, 그리고 부러진 언어들, 부은 목젖, 갈라진 입술, 뽑힌 혀, 이 모든 것들이 어떤 개별성도 없는채로, 그렇다고, '뭉치면 산다'식의 집단 농성도 아닌 채로, 아주 오래 전에 무너져서 빛까지 우중충한 토막 더미들처럼, 그렇게 시는, 시들은, 시들은 채로, 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4중의 고갈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소재의 고갈, 영감의 고갈, 표현의 고갈, 그리고 리듬의 고갈. 이 고갈들은, 실은, 어쩌면, 포만에서, 생각만 해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물림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추기> 다음은 [현대시]2004년 1월호에 실린 이지엽 시인의 "현대시 창작 강의"의 말미이다. 이미지를 잘 쓰는 것이 시를 완연하게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하며 시인이 정리해둔 창작 포인트를 아래에 옮긴다.

     

    1. 이지지의 생명은 명확성과 새로움이다. 모호한 이미지는 오히려 시상의 전개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2. 내 시가 힘이 없어 나약하다면 시각적 이미지로 표출되는 동태적인 장면을 묘사해보자. 더 나아가 청각이나 후각, 근육감각적인 이미지 등을 활용해보자.

     

    3. 내 시가 너무 들떠 있다고 판단되면 동태적인 면보다는 정태적인 가운데 아주 느릿한 움직임들이나 존재하는 것들을 촘촘한 사고로 엮어보자.

     

    4. 시각적 이미지는 집중의 효과를 나타내는데 적합하고 청각적 이미지는 분산과 확산의 효과를 나타내는데 적합하다.

     

    5. 한 이미지만을 즐겨 쓰는 것은 시인의 개성일 수 있으나, 그것에 대해 특별한 신념이 없다면 서로 다른 이미지를 적절히 교차해서 써보자. 훨씬 더 탄력적이고 긴장감이 높은 시를 만들 수 있다.

     

    6. 이미지 너머의 것을 생각해보자. 보이는 것의 미세한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너머의 것이 보인다. 보인다면 과감히 잡아라. 보이는 것보다 더 명료하게 그려내라.


     

    <추기> 다음은 정진규 시인의 산문집 [질문과 과녁]에서 따온 글이다.

     

    그냥 보아서는 어렵다 팔색八色조차 우리 눈은 한 눈으로 가려내지 못한다 팔색조八色鳥의 팔색八色은 따로따로 놀지 않는다 이음새가 절묘하다 서로 끌고 당겨서 일색一色을 빚어낸다 조류보호협회鳥類保護協會 회원 이향란이가 가져다 준, 가만히 바위 위에서 졸고 있는, 경남 거제도 동부면 학동리에서 윤무부 새박사가 직접 찍었다는 팔색조八色鳥의 사진을 며칠 들어다보다가 또 한 수手 배웠다 오, 일색一色이여 미인美人이여

     

    -팔색조(八色鳥), 몸시(詩) 별편(別篇)

     

    이 시를 발표한 뒤에 나는 위의 시에 나오는 <이음새>라는 말을 <이음매>로 바꾸어 놓고 있다. 왜냐하면 <이음새>의 <새>라는 말은 아무래도 이어진 부분이 노출된 느낌을 준다. <새>라는 말은 아무래도 <사이>가 축약된 말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음매>의 <매>는 <새>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접미사이지만 훨씬 아름다운 상징성을 음성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아주 잘 빠진 조화의 실체를 보이기에 그렇게 고쳤다.


     

    <추기> 다음은 [시와 사람] 2004년 봄호에 실린 오탁번 시인의 글중 부분이다.

     

    어떤 하찮은 사물을 보는 순간에도 이상한 울림이 가슴에 와 닿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울림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수첩에다 그냥 몇 자 적어두곤 한다.

    짐짓 모른 채하고 내버려두면 이내 잠잠해져서 내가 왜 그런 기록을 했는지 스스로도 땅띔 못할 때가 있고,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별별 심상과 이야기로 피어나면서 수첩 속에서 얼른 해방시켜 달라고 조를 때도 있다. 그러나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이것이 나의 絶筆이라는 독한 마음을 먹고 유혹을 뿌리치고 또 뿌리친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과정은 정말 지루하고 괴롭다. 아기를 낳는 산모의 지독한 아픔과 기쁨이 바로 시라는 것을 왜 모르랴.

     

    '杏字板 검자주 옻칠 소반에 정갈한 백자 대접 흰 달 같이 놓이고, 다른 반찬 소용없이 간장 한 종지 앙징맞게 동무하여 따라온 것이, 벌써 마른 속에 입맛 돌게 하는데, 간장 한 숟가락 끝에 찍어 흰죽 위에 떨구어 한 술 뜨면'

    -'魂불'에 나오는 흰죽 먹는 장면이라네

    말 하나하나 고르며 밤을 밝힌 최명희는

    시 짖는답시고 죽을 쑤는 시인보다

    정말 진짜 시인이었네

    - 오탁번의 시 "시인" 부분


     

    <추기> 다음은 [시작]2004년 봄호에 실린 평론가 정효구의 글 중 부분을 축약한 것이다.

     

    사람은 홀로서기와 함께살기를 같이 한다. 한 사람이 ‘나 자신, 혹은 나 자신의 삶이 진정 자유로운가?’ 라는 질문 앞에서 ‘진정 그렇다’라는 답이 나오기까지 5단계에 걸치는 치유의 방법을, 우리 시단의 현황과 관련해서 말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들 각자가 인간사회 속에서 ‘사회적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저항시, 카프시, 해방후의 다양한 사회비판시, 민중시, 노동시, 문명비판시 등이 그렇다.

    둘째 사회인으로서 홀로서기와 함께살기를 가능하게 한 사람은 그 범위를 넓혀 자연인으로서, 자연생태계 속에서 역시 홀로서기와 함께서기를 가능하게 하여야 한다. 즉 자연인으로서 자연에 지배당하지도, 그렇다고 자연을 침범하지도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자유를 얻고, 자연 속에서 자유를 얻은 다음, 인간은 ‘몸적 세계’ 속으로 자신을 확대하거나 내려 보낼 수 있다. 여기서 몸적 세계란 생의 첫 자리, 다시 말하면 아무런 사회적 의미나 장치가 덧붙여지지 않은 시원의 상태를 뜻한다. 몸적 세계로 내려갔을 때, 그곳에는 알, 밥, 쌀, 자궁, 살 등과 같은 것이 의미하는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거기에서 시작했고, 그곳으로 돌아간다. 정진규가 그렇다.

    넷째 몸적 세계의 차원으로까지 자신을 확대 혹은 침잠시킨 사람이 갈 수 있는 다음 단계는 물질적 세계로 그 자신을 들여놓는 것이다. 물질적 세계로 가면 모든 존재는 해체되고 뒤섞인다. 여기서 개체는 무의미해진다. 처음도 끝도 이곳엔 없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 뿐이다. 여기선 어떤 화학작용도 다 일어난다. 그러므로 무엇이 될 가능성은 무한대이다. 나는 무엇이 될 수도 있고, 개체와 개체 사이의 경계는 무화되며, 나는 존재를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현상계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나온 것이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는 현상계를 넘어선 ‘虛’‘空’‘無' 와 같은 세계이다. 이것은 실제하는 세계도 아니며, 있거나 없는 세계도 아니며, 현상계의 언어로 설명하기도 어려운 세계이다. 無邊의, 無限의, 無形의 이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우리는 진정 현상계의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자유인으로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 최승호의 시집 ’달마의 침묵‘에서 이 단계에 이르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는 전술한 다섯 단계를 다 탐구해본 시인이다.


     

    <추기> 다음은 [시작] 2004년 봄호에 실린 평론가 유성호의 글 중 부분을 축약한 것이다.

     

    교과서를 통한 문화전수 행위나 우리 문화의 전통수립 작업에서 배제되어 왔던 타자를 일별하면

    1) 종교적 상상력, 이를테면 영원에 대한 추구, 신성의 지상적 복원에 대한 의지, 초월의지, 영성에 대한 내밀한 감각과 그것의 추구, 사랑의 구현, 그리고 모든 불가시적 세계에 대한 見者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는 지향성 등,

    2) 몸의 발견과 해석

    3) 아방가르트 미학, 이를테면 李 箱, 초현실주의 지향, 모더니즘의 가장 진보적인 형식, 해체지향의 시학,

    4) 노동시와 민중미학

    5) 대중 친화력의 시 등이다.


     

    <추기> 한명희 시인이 여러 문인들과 인터뷰한 글을 모아서 책(삶은 조심스럽게 문학은 거침없이)을 냈다. 다음은 천양희 시인과 인터뷰한 내용 중의 부분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저도 시를 잘 쓸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시를 쓸려는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으세요?”로 바꾸어 물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거나 강연을 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찢어버리라는 말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꼭 하루살이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고 했다. 하루살이는 물속에서 천일을 있다가 스물다섯 번 허물벗기를 한 후 태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꼭 하루를 날고 짝짓기를 한 후 죽는다고 한다. 하물며 하루살이가 이러한데 문학작품이 태어나는 과정이 어떠하겠는가. 그녀는 문학을 쉽게 보려면 차라리 연예계로 가라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요즘 학생들이 시 보다는 영화나 광고쪽 일을 더 하고 싶어하는 세태에 대해서 나름대로 진단을 내렸다. 그녀는 좋은 글을 쓰면 먹고 살아진다면서, 잘 산다는 건 “정신 있게 사는 것”이라고 부연설명 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옛날 선비잖아요? 선비가 장사꾼 보다 못하면 안 되잖아요” 라고 말했다. 좋은 시에 대해 묻자 그녀는 공감을 주고 감동을 주는 글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시에 순정을 바치면 정말 좋을 시를 쓸 수 있다고, 운명을 걸고 써야 한다고 말했다.


     

    <추기> 소설가 김훈이 'TV 책을 말하다'에 나왔다. 화제는 그의 소설 "현의 노래" 였다. 받아 쓴 것은 아니나, 대담 내용 중 일부를 줄여서 적어둔다. 치열함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말들이다.

     

    - 나는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를 쓰면서 이빨 8개를 뽑았다. 몰아서 쓰다보니 이빨들이 들솟았다. 빼서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썼다.

    - 나는 많은 작품을 쓰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아마 두세 편, 또는 단편을 포함해서 다섯 편쯤 글을 쓸 것이다. 그 다섯 편을 다 쓰고 나면 자연사 할 것이고, 아니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당대에 이름을 날린다거나,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만, 그 두세 편 (또는 다섯 편)의 작품을 쓰는 일에는 관심이 있다.

    - 전작인 "칼의 노래"의 문장은 칼의 이미지에 걸맞게 짧고 날카롭더니 이번 "현의 노래"의 문장은 거문고의 이미지에 걸맞게 유현하고 음악적이었다는 한 평론가의 지적에 대하여 그가 대답했다 "저는 문장의 리듬을 정하지 못하면 글을 쓰지 못합니다."


     

    <추기> 다음은 [현대시] 2004년 4월호에 실린 시인 원구식의 '선후감' 중의 일부이다.

     

    이번 심사를 통해 느낀 바를 한 가지 말한다면 읽히지 않는 지루한 산문시가 너무 많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유행처럼 마침표 쉼표 등 부호를 생략해버리는 경향이다. 이것은 시쓰기의 옳은 방향이 아니다. 특히 부호의 생략은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정확한 의미 전달은 차치하고 다른 언어로의 자동번역이 이루어질 머지않은 미래를 살아야 할 시인들이 부호가 없어 번역이 되지 않는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심각하게 고려해 볼 문제이다.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4. 5,6월호에 실린 시인 유안진의 대담내용 중 일부이다.

     

    -시를 잘 쓰는 비결은 없잖아요. 남이 해놓은 것이 아닌, 자기만의 것을 써야 하니까, 그게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한때 우포늪이 각광을 받았을 때, 많은 시인들이 우포늪 시를 쓰곤 하는 예가 있었는데, 물론 유행에 기대 써보고 싶기도 하겠지요. 남의 시가 자기 시의 촉매가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렇더라도 가급적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 해야 되지 않을까 싶네요, 본래 새로움의 추구라는 것이, 독창성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요즘 지나치게 기괴한 것도 자주 등장하는데, 글세요 그것도 유행이 될 듯 해서....

     

    사실 시란 웬수잖아요. 눈뜨면 떠오르는, 시를 쓸 생각을 안 하면 참 행복할 것 같은데, 이 웬수 때문에 늘 불행하고, 긴장되고 그렇게 사는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까, 시인이 되는 길은 모든 걸 다 해보고 나서 그걸 다 잃어버린 자가 걸어야 할 길 같아요. 무엇을 해보아도 만족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거나, 다 해봐서 다 실패한 자가 마지막으로 할 수밖에 없는 하나뿐인 그것이 시밖에 없다고 결론을 얻은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인데....


     

    <추기> 다음은 [시와 사람] 2004년 여름호 '시인연구'에 실린 신경림의 짧은 시론 "부질없는 소리" 전문이다.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지 어언 반백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도 내가 지금 가장 당혹하는 것은 내 시에 대하여 한 마디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경우이다. 초기에는 나도 제법 내 시에 대하여 변명도 하고 설명도 했다. 돌아보니 다 부질없는 소리들이다. 뻔한 소리이겠으나, 역시 시는 어디까지나 시 자신이 얘기할 뿐이다. 그밖에는 한갖 불필요한 군더더기일 뿐이다. 다만 시를 쓰면서 언제고 시 한 편 한 편이 바로 완성된 세계이고 우주라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만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추기> [현대시] 2004년 6월, 이달의 시인으로 선정된 김백겸 시인의 대담내용중 부분이다. 화제는 '言'과 '覺'이다.

     

    시에 있어서 覺이 지나칠 일은 없습니다. 인식은 깊을수록 좋지요. 누구 말씀을 흉내내어서 覺을 이룰 수만 있다면 言은 버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言 없이 이루어지는 覺이란 인간의 의식을 가지곤 불가능하지요. 선가에서 '直指人心 不立文字' 를 말하지만 손가락이 이미 언어 아닌가요? 그렇지만 저는 覺이 言의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수사가 내용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시인은 말을 다루는데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화려하게 표현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저도 이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고요.

    시인이 언어로 창조한 허구의 세계가 독자로부터 믿음을 받으려면 그 언어가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은 시인의 覺과 정서의 깊이가 획득하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추기> 다음은 [열린시학] 한국 젊은 시인상.작가상 예심평이다. 본심 해당작이 없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문학의 담론은 큰 줄기를 잡기가 어렵다. 지극히 사변화되고 말초화된 실뿌리가 모래밭에 위태롭게 심어져 있는 형국이다. 속도와 죽음과 욕망의 화두에 얽매이면서 극심한 개인주의로 매몰되고 있다.문학적 상상력도 실종되고 있다. <한국의 젊은 작가상. 신인상>은 당초 이러한 한국의 문학적 풍토를 일신하고자 하는 젊은 문학도를 발굴한다는 취지 아래 제정되었기 때문에 보다 새로운 패기와 도전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응모된 작품들의 수준이 기대에 못미쳐 본심에 회부하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문학적 사고를 답습하여 어느 정도의 적당한 실력만을 갖춘 적당한 인재를 발굴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안일함을 부추기는 경과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추기> [생각과 느낌] 2004년 여름호에서 인용한 '마광수 문학론집' 중 '평폐론(評弊論)의 부분을 옮긴다.

     

    요즈음 비평가들에게는 심금을 울리는 문학적 감동이란 우스운 것이고, 어떤 기발한 문체, 신기한 사건의 전개, 이상심리적인 주인공의 변태가 더 재미있고 가치가 있다. 그럴듯하게 수식해 놓은, 평론에는 도무지 맞지 않는 번드레한 문체가 이제는 우수한 평론 문체가 되어 버렸다. 평론은 실로 이제까지 가졌던 문장정신의 예언자로서의 고매한 영역을 떠나 언어적 유희로서의 상완(賞翫)의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평론 자체로서만 끝나면 괜찮겠는데, 그러한 평론들은 스스로의 궤변을 계속 고집해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 폐는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다. 창작가들은 자연히 종당에는 평론가들의 눈치를 살피기 마련이며, 그러한 터무니없는 문학적 가치기준 위에서 글을 쓰게된다. 그릇된 평론이 문학 자체와 독자들에게 주는 해는 보통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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