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이것이 시다, 라고 쓴 대부분의 것은 시가 아니다
설령
이것이 시가 되지 않더라도, 라고 쓰여진 것은 대부분 시다
가령(佳嶺)은 도처에 있다 가령 화사하고 화려한 것 가령 사랑이란 단어, 가령 그리움이란 단어, 봄날 꽃놀이 관광버스가 가 닿는 곳, 그곳이 가령이다
설령(雪嶺)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스며 있다 어둡고 춥고 배고픈, 눈과 귀와 혀의 뿌리 설령 어시장 좌판이라도, 설령 공중화장실이라도, 설령 무덤이라도,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그곳에 있다
등반자여 혹은 동반자여
가령은 도처에 있고 설령은 도무지 없다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
- 박제영, 「가령과 설령」 전문
강희안의 시가 '신'과 '인간'의 관계성에 관심을 둔다면 박제영의 시는 '가령'과 '설령'이란 부사어의 차별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시의 화자는 부사어 '가령'을 '佳嶺', '설령'을 '雪嶺'이란 말로 치환하여 해학적인 말재롱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 '가령'이란 부사어는 '~일지라도'라는 긍정적인 용언과 결합하는 말이다. 따라서 시의 화자는 "가령/이것이 시다, 라고 쓴 대부분의 것은 시가 아니"라고 말한다. 시란 어떤 확정적인 언술로는 도달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를 통해 시(언어)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갈파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설령'이란 부사어는 '~이 아닐지라도'라는 부정적인 용언과 결합하는 말이다. 따라서 시의 화자는 "설령/이것이 시가 되지 않더라도, 라고 쓰여진 것은 대부분 시"라고 말한다. 시란 역설적으로 어떤 불확정적인 언술로서만 도달할 수 있는 가시적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일차적으로는 '가령(佳嶺)'을 '아름다운 고개', '설령(雪嶺)'을 '눈으로 덮인 고개'라는 의미로 구분하지만, '이를테면'이라는 부사어와 함께 차용하면서 말재롱의 효과를 배가한다. 화자에 따르면 '가령'(이를테면) "화사하고 화려한 것, 가령 사랑이란 단어, 가령 그리움이란 단어, 봄날 꽃놀이 관광버스가 가 닿는 곳"이 '가령'인 셈이다. 이렇게 화자는 즐김의 장소인 '가령'이 "도처에 있"는 반면 '설령'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스며 있다"고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설령'(이를테면) "어둡고 춥고 배고픈, 눈과 귀와 혀의 뿌리 설령 어시장 좌판이라도, 설령 공중화장실이라도, 설령 무덤이라도, 설령 보이지 않"는 까닭에 춥고 배고프다는 전언이다. 따라서 화자는 '가령'에는 '등반자'가 필요하지만 '설령'에는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시적 인식의 메시지를 말재롱의 효과를 통해 긴요하게 함축한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에 대해 독자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강희안 시인
[ 2016년 03월 18일 08시 36분 ]
하남성 정주시 윤하로(河南省郑州市伊河路)에서ㅡ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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