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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쓰기는 텅빈 종이장 피땀같이 들여다보기
2016년 03월 18일 22시 22분  조회:4023  추천:0  작성자: 죽림
 ‘무엇’을 쓰려고 하지 말 것

                                          /안도현시론1


무엇을 쓸 것인가? 한 미국 작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마에 피땀이 맺힐 때까지 그저 텅 빈 종이를 바라보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파울러)라고. 말이 쉽지 그건 또 얼마나 고역일 것인가. 그렇게 했는데도 단 한 줄의 글도 써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이 말은 어떤 소재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 글을 쓰려면 집중적인 몰입의 자세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이다.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는 일은 글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퇴고를 완료할 때까지 당신을 따라다닌다. 그 ‘무엇(내용)’과 ‘어떻게(형식)’ 때문에 쩔쩔매는 아이들을 위해 이오덕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일갈하셨다. “똥 누듯이 쓰라”고. 괜히 어깨와 펜 끝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쓰라는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찾고, 예쁘게 꾸미려는 마음을 없애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뜻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똥을 누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면 다시 묻자. 도대체 무엇을 쓸 것인가?
첫째, 단 한번이라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써라.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 책을 읽어서 알게 된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경험에 속한다. 하지만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직접적인 경험만큼 생생하지는 않다. 남의 입을 통해 빠져나온 말을 받아 적다 보면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할 우려가 있고, 책으로 얻는 지식과 지혜를 말로 옮겨 적다 보면 현학이나 지적 허영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시인 김용택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만 시를 쓴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면서, ‘너희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나는 그것을 쓰겠다’는 그만의 독특한 창작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적었더니 시가 되더라”는 말도 했다. 이때의 ‘어머니의 말씀’은 바로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라는 의미다.
둘째,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써라. 시인 이정록의 말을 잠시 경청해 보자.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당신이 지금 전화를 하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는 것을 말해 보라고 한다. 그걸 쓰라고 한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고 한다. 단언컨대,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안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다면 어찌 문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그는 ‘문지방 삼천리’라는 말로 기발하게 압축했다. 삼천리는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다 둘러보지 못한다. 애써 둘러볼 필요도 없다. 문지방 안에 삼천리가 다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시를 찾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한마디 더 귀띔한다. “오래 들여다보면 모두 시가 된다.” 역시 이정록의 어록이다. 기억해 두자.

어떤 시를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좋은 시를 쓰려면 당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젊은 우리나라 시인의 시부터 읽어라. 젊은 시인의 시는 교과서요, 늙은 시인의 시는 참고서다. 우리나라 시인의 시는 한 끼의 밥이지만, 외국 시인들의 시는 건강보조식품이다. 제발 릴케와 보들레르와 엘리어트를 읽었다고 거들먹거리지 말라. 두보와 이백을 앞세우지 말라. 볼썽사납다. 그들 대가의 시집은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라.

셋째,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써라.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쓰지 말고, 낮은 곳에서 돌아앉아 우는 것에 대해 써라. 시는 절대로 ‘초월한 자의 향기’가 아니다. ‘고귀한 사랑’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 아니다. ‘고행을 이겨낸 구도자의 경지’가 아니다. 시는 초월하지 못한 인간의 발가락에서 나는 냄새고, 지저분한 사랑이며, 인간과 자연의 불화이며, 한 시간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렵게 번 돈 3천원이다.

시를 쓰려거든 두꺼운 문학이론서를 독파하지 말라. 창작보다 고매한 철학적 사유로 무장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지 말라. 이론이나 세계관이 시를 낳는 게 아니다. 당신의 시가 당신의 이론과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믿어라.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이다.”(김상욱의 <다시 쓰는 문학에세이>)

넷째,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을 써라. 나의 경험 중에 행복했던 시간들이 남에게도 반드시 행복한 시간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행복과 충족은 남의 불행과 결핍의 증거임을 잊지 말라. 장미와 백합의 우아한 향기에 취하지 말고, 저 들판의 민들레와 제비꽃의 무취에 취하라. 금메달을 목에 건 승리자의 영광보다는 꼴찌로 들어오는 선수의 실패를 경배하라. 성형수술 한 처녀의 얼굴을 경멸하고 주근깨로 뒤덮인 소녀의 얼굴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라.

◇시는 ‘고귀한 사랑’ 아냐 … 하찮은 것 써야
◇나만의 경험 살려 어떻게 쓸 것인지가 관건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졸시 <애기똥풀>)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소재를 택해 쓰느냐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소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적 경험은 나의 경험의 일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경험 중에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 것을 우리는 시적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인은 경험한 것에 대하여 쓴다. 하지만 경험한 것을 곧이곧대로 쓰지는 않는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해 본다고 많은 시적 경험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바쁘게 한 세상을 살아왔다고 그 수많은 경험들이 글쓰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재를 해석하는 능력, 즉 상상력의 도움 없이 어떤 소재에 매달리는 것은 소재주의의 늪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무엇’을 쓰려고 집착하지 말라. 시에서 소재주의는 시단의 특정한 경향을 답습하거나 이미 규범화한 유파의 문법을 비판 없이 추종할 때, 그리고 글쓰기의 목적의식이 지나치게 앞설 때 생겨난다. 초보자의 경우에는 시가 생겨나는 지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곧잘 소재주의에 빠진다. 그러므로 ‘무엇’을 쓰려고 1시간을 끙끙댈 게 아니라 단 10분이라도 ‘어떻게’ 풍경과 사물을 바라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아이칭(艾靑)의 생각도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무엇을 쓰는가에 있지 않고, 당신이 어떻게 쓸 것이며, 어떻게 이 세계를 볼 것이며, 어떠한 각도에서 세계를 볼 것이며, 당신이 어떠한 태도로 이 세계를 포용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 시의 소재로서 한 알의 사과가 있다. 당신에게 이 한 알의 사과에 대해 시를 쓰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적어도 다음에 제시하는 열 가지 정도의 행동을 수행하거나 사유를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시의 첫 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1) 사과를 오래 바라보는 일
2) 사과의 그림자를 관찰하는 일
3) 사과를 담은 접시를 함께 바라보는 일
4) 사과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뒤집어보는 일
5)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어보는 일
6) 사과에 스민 햇볕을 상상하는 일
7) 사과를 기르고 딴 사람과 과수원을 생각하는 일
8) 사과가 내 앞에 오기까지의 길을 되짚어 보는 일
9) 사과를 비롯한 모든 열매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일
10) 사과를 완전하게 잊어버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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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

                                                        /안도현시론2


나는 음식점을 고를 때 간판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간판에 적힌 상호, 간판의 크기, 글자체, 디자인에 따라 그 음식점의 역사와 음식의 맛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조’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 일단 의심한다. 역사성의 과잉이거나 후발주자의 과장 광고일 수도 있다. 또 무슨 텔레비전에 출연했다고 요란하게 써 붙인 곳이 있으면 경계한다. 그게 설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맛없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는 문장도 아주 싫어하며, 할인가격을 보란 듯이 써 붙여 놓은 음식점도 꽝이다. 또 있다. 터미널 앞 식당가처럼 한 집에서 조리하는 음식의 수가 많아도 기피 대상이다. 최근엔 ‘웰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간판을 달고 있는 보리밥집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 웃기고 있네, 비웃어주고 만다.

◇백석 시엔 멧새 깃털도 없어 후대 독자들 궁금할 수밖에

한 끼의 밥을 위해서도 이모저모 간판부터 살피는데, 하물며 시에서 간판이라고 할 제목을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으랴. 시의 제목을 이승하는 ‘첫인상’이라 했고, 강연호는 ‘이름’이라 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글을 병법에 비유하면서 “글의 뜻은 장수와 같고, 제목은 맞서 싸우는 나라와 같다”(<연암집>)는 문장을 남겼다.
그만큼 제목은 중요하다. “한 편의 시작품은 여러 부분이나 요소들이 모여 전체의 구조를 이루는데, 이때 제목은 전체 구조를 한 곳으로 응집하는 역할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조의 확장에 기여하기도 한다.”(강연호, <주제의 구현과 제목 붙이기>)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백석의 시다. 이 시의 제목은 <멧새 소리>이다. 그런데 시의 전면에 멧새 소리는커녕 멧새가 빠뜨리고 간 깃털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처마 끝의 명태와 이를 동일시 한 시적 화자 ‘나’만이 꽁꽁 얼어 있을 뿐이다.
백석은 왜 이런 제목을 택했을까? 독자가 전혀 뜻하지 않은 의외의 제목을 제시함으로써 제목과 내용 사이에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노리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시각과 촉각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이 시의 배경음악으로 멧새 소리를 삽입해 청각적 효과를 가미한 것일까? 후대에 이 시를 읽는 독자인 우리가 심심해 할까봐 일부러 그랬을까?(이 짧은 시 한 편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접었다 폈다 하는 이유도 시에서 제목이 그만큼 중요한 탓이다)

김춘수는 <시의 이해와 작법>(자유지성사)에서 시인이 제목을 붙이는 방식에 따라 시인의 태도가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를 쓸 때 제목을 붙이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미리 제목을 정해 두는 것, 둘째는 시를 완성한 뒤에 제목을 다는 것, 셋째는 처음부터 제목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그는 스타일리스트답게 시의 의미와 내용을 중시하는 휴머니스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한다. “제목이 정해져야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내용에 결백한 나머지 시의 기능의 중요한 면들을 돌보지 않는 일”이 있다며 시의 형식에 따라 내용이나 제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제’ 있지만 좋은 시 드물어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제목을 처음부터 붙이든 나중에 붙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고심하는 그 과정이 창작자에게는 중요하다. 제목을 붙이는 일이 시 쓰기의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제목이 시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제목을 고치거나 바꾸는 사이에 시는 진화하거나 퇴보하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간다. 그것은 제목이 시의 내용과 서로 밀고 당기는 관계에 놓여 있어서다.

실제로 제목을 이렇게 붙여야 한다는 시인들의 조언도 적지 않다. “시의 내용이 추상적일 때는 구체적인 제목으로, 구체적일 때는 추상적인 제목을 붙여주면”(박제천, <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문학아카데미>) 좋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이지엽은 “제목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것이 시의 격조와 긴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면서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는 방법”과 “술어를 생략하거나 놀라움을 나타내거나, 감탄형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적 호기심이나 관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선정적인 제목을 다는 경우”도 예를 든다.(<현대시 창작 강의>, 고요아침)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 그럴 때는 <무제(無題)>가 기다리고 있다.

대구 근교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 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박재삼의 시 <무제>다. 사실 나는 평소에 시든 그림이든 작품 앞에 ‘무제’라는 제목을 턱, 갖다 붙이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이 없다니! 그건 자기 작품에 대해 창작자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무제’라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제’를 제목으로 내건 작품 치고 제대로 된 작품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대체로 예술가연 하는 허위의식이 발동하거나, 작품의 미숙성을 눈가림하거나, 작가의 상상력이 부족할 때 궁여지책으로 갖다 붙이는 제목이 ‘무제’를 제목으로 단 시나 그림일 터이다. 특히 비구상 계열의 그림이 이런 제목을 붙이고 화랑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 나의 이런 편견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도록 만든 시가 박재삼의 <무제>다. “허리에 감기는 비단”이 왜 아픈지 나도 아니까!

대체로 제목은 시의 중심 소재를 앞에 제시하는 경우(밋밋하고 단순해서 재미는 없지만 내용보다 어깨를 낮춤으로 해서 내용을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나 공간적인 배경을 취하는 경우(‘-에’'-에서’가 붙은 모든 제목이 그렇다), 주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경우(김중식의 <완전무장>을 읽어보라), 첫 행을 아예 앞에다 내세우는 경우(최승자의 <개 같은 가을이>가 대표적이다)가 있다. 어떤 경우든 간에 호기심을 유발하되 난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무겁되 가볍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연암의 호쾌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라.

“억양을 반복하는 일은 맞붙어 싸워 죽이는 일과 같고, 제목의 뜻을 드러내 보인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군을 사로잡는 일과 같다. 짧은 말이나 글로 깊은 뜻을 담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은 함락된 적진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일과 같고, 글의 여운을 남겨 놓는 것은 전열을 잘 정비하여 개선하는 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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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연애하는 법'

                                              /안도현시론3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독(多讀)·다작(多作)·다상량(多商量), 곧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이 세 마디의 가르침은 10세기 중국 북송 때의 문인 구양수가 남긴 말이다. 자그마치 천 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때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순서를 편의대로 바꾸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엔 실로 벅차기 짝이 없다. 시간도 많지 않다.

◇나는 시를 쓰려는 당신에게 색다른 세 가지를 주문하려고 한다.

첫째, 술을 많이 마셔라. 그렇다고 혼자 마시면 안 된다. 술이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이지 주정을 부리기 위한 약물이 아닌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지루한 일상 너머를 꿈꾸는 일은 시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시인은 일상이라는 유리그릇을 박살내는 자가 아니다. 유리그릇에 빗금을 긋는 자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거든 백 잔의 술을 마신 다음에 쓰라. 그렇다고 해서 술이 깨지 않은 비몽사몽의 시간에 펜을 잡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은 있어도 ‘취중진문’이라는 말은 없다. 나는 지금도 ‘주력(酒力)은 필력(筆力)’이라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말로 학생들을 꼬드겨 술잔을 권한다.(단, 마시기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권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하고는 상종할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둘째, 연애를 많이 하라.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무릇 모든 연애는 나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연애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연애는 시간과 공을 아주 집중적으로 들여야 하는 삶의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연애감정도 없이 시를 쓰려고 대드는 일은 굳은 벽에 일없이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다. 담쟁이넝쿨은 담하고 연애하면서 담을 타고 오른다.

셋째, 시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많이 쓰지 말고, 많이 생각하지 말고, 제발 많이 읽어라.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시를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초보자가 쓴 시의 성패는 분명히 독서량에 비례한다. 여기에서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쓰기의 준비 단계이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접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선별할 수 없으며, 좋은 시를 쓸 수도 없다.(좋은 시가 무엇인가 하는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자.)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그의 방대한 저서 <인정>에서 “문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노력이 쌓여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읽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삼대 이상 의원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병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 또한 그렇다. 반드시 오래도록 노력한 다음에야 능숙하게 글을 지을 수 있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세상을 다스리는 경학(經學)을 읽어서, 문장의 기초와 뿌리를 단단하게 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역사 관련 서적들을 두루 공부하여 나라와 개인이 흥망성쇠하는 근원을 알아야 하고, 일상생활에 유용한 실용 학문에도 힘을 쏟아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경제서를 즐겨 읽어야 한다. …내가 말한 대로 해 본 다음에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밤, 짙은 나무 그늘과 가랑비 내리는 때를 만나면 문득 감흥이 일어나 시를 읊게 되고, 문장의 구상이 떠올라 글이 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생동감 있는 글을 짓는 문장가의 창작 활동이다.”

나는 시창작 강의 첫 시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시집 목록을 프린트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모두 200권쯤 된다. 목록을 받아든 학생들의 입이 딱 벌어진다. ‘어느 세월에?’ 하는 표정들이다. 내가 강의하는 건물에는 국악과가 있어 가야금이나 거문고 따위를 들고 오르내리는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집이 악기라고 설명한다. 시집은 악기처럼 비싸지 않고, 무겁지 않고, 고장이 나지도 않는다.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연주 연습을 하듯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 어디에서든 가방에서 잠깐 꺼내 읽을 수 있다.

고등학교 때는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드는 시를 만나면 노트에 적어두었다. 그렇게 필사한 시가 대학노트 세 권에 가득하였다. 지금도 문예지를 읽다가 좋은 시를 만나면 반드시 따로 옮겨 적어 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필사를 권한다. 아니, 거의 강요한다. 한 학기를 마칠 때쯤이면 수백 편의 시가 적힌 자기만의 시집이 오롯이 남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다양한 시를 읽는 것은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다. 나는 음식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내가 요리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거기에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빛깔과 요리방법에 대해 꼼꼼하게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한 번 먹어본 특이한 음식은 집에서 혼자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훌륭한 관찰의 소재가 되고, 그 기억은 또한 멋진 시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본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법이다. 곧 맛있는 시를 많이 음미해본 사람이 맛있는 시를 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 막상 주위에 시 한 편도 시집 한 권도 옆에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그때는 귀를 열고 들으면 된다. 세상의 여러 소리를 듣는 행위도 책을 읽는 행위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기형도는 어릴 적에 열무를 팔러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새어드는 빗소리를 들었다. 황동규는 <풍장 27>(아래 시)에서 빗소리를 듣기 위해 세상 뜰 때 귀만 두고 가겠다고 한다. 손과 발과 입과 눈은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오직 귀만 두고 가는 이 마음 역시 세상을 귀로 읽으려는 귀한 자세다.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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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써라'

                                                    /안도현시론4


좋은 시란 어떤 시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모든 시는 그 낡은 기준에 갇혀버리는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다. 시가 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양식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감히 정리해본다면 어렴풋하게나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새로운 언어로 표현된 시. 둘째, 새로운 인식을 도출하는 시. 셋째, 새로운 감동을 주는 시. 여기에다 시인의 시작 태도가 공자의 말씀대로 ‘사무사’(思無邪) 바로 그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감동은 일차적으로 시인과 독자와의 교감, 즉 소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모든 시가 다 울림을 갖는 것은 아니다. 허망한 소통보다는 고독한 단절이 오히려 서로를 행복하게 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시를 보는 미학적 관점과 언어에 대한 경험이 자연스럽게 일치할 때 시적 감동은 증폭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언어란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인 가교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훼방꾼이기도 하다. 저 유서 깊은 ‘낯설게 하기’는 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자 할 때 여전히 유효한 시적 방법이다. 독자를 편하게도 하고 불편하게도 하는 시,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인 시, 바른가 싶으면 이미 비뚤어져 있는 시….

좋은 시를 쓰고 싶다면 당신은 표현의 리얼리티 속에서 감동의 요소를 찾으려고 끙끙대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일차적으로 당신은 가장 물기 많은 말, 가장 적합한 어휘를 행간에 배치하기 위해 헤매야 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언어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만날 때까지 찾고, 지우고, 넣고, 비틀고, 쥐어짜고, 흔들기를 마다하지 마라. 적어도 당신 하나쯤은 감동시킬 때까지 언어하고 치고 받고 싸워라. 완벽한 세계관과 정돈된 문학적 관점이 훌륭한 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하나씩 껍데기를 벗고 성장하는 존재이다.

◇텍스트를 시가 되게 하는 건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

황지우는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찾아 쓰겠다고 말한 적 있다. “어떤 텍스트를 얻은 문장을 시가 되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한마당) 때문이라고. 이 말은 이미 ‘시’로 규정된 모든 규격화된 정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과 시를 갱신해 나가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러므로 ‘시적인 것’은 딱히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 모험과 도전을 요구하는 지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적인 것’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손에 잡는 순간 또 달아나버리는 유기체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일찍이 간파한 고은 시인은 “시는 심장의 뉴스다”라고 멋들어진 화두를 토하기도 했다.

중국 송대의 시인 강기는 그의 시론집 <백석도인서설> 에서 시에는 네 종류의 높은 경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이치가 높은 경지요, 둘째는 뜻이 높은 경지요, 셋째는 상상력이 높은 경지요, 넷째는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다. ‘시적인 것’을 탐구하는 우리에게 꽤 유익한 사색을 제공해주는 시론이다.
그는 먼저 “막혀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통하는 것을 이치가 높은 경지”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이치란 인간의 도리와 자연의 섭리를 두루 포괄하는 개념이다. 정경융합(情景融合)을 중요한 시의 가치로 여긴 동아시아의 시학과 동일성의 미학을 강조한 서양의 시학이 모두 이런 경지를 향한 시적 모색이라 할 수 있겠다.

천둥번개 지나간 곡우날 아침,
때아닌 우박과 꽃잎 사이

들숨과 날숨
부딪쳐 살아 오르며
낯선 우박이 자기를 녹여 꽃잎을 깨우네
낯선 꽃잎이 자기를 찢어 우박을 맞네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설레설레 봄꽃은 번지네

이안의 <숨길 1>이다. 우박은 꽃잎을 찢는 공격적 주체가 아니고, 꽃잎은 우박에 찢어지는 소극적 객체도 아니다. 엄연한 자연의 질서 앞에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우박은 꽃잎을 깨우고 꽃잎은 우박을 맞이할 뿐이다. 낯선 우박과 꽃잎 사이의 작지만 소중한 소통의 숨길이 우주 전체의 봄을 불러온다는 이치를 말하고 있는 시다. 이때 이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속으로도 분명 “설레설레” 봄의 기운이 스며들 것이다.

◇내 자신의 언어 만날 때까지 찾고 넣고 비틀고 흔들어라

두 번째로는 “표현해낸 것이 표면적인 의미를 초월하게 되는 것을 뜻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문태준의 짧은 시 한 편(<황새의 멈추어진 발걸음>)을 보자.

무논에 써레가 지나간 다음 흙물이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
그는 한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을 본다
한 획 필체로 우레와 침묵 사이에 그는 있다

표면적으로는 써레질이 끝난 뒤 흙물이 가라앉는 모습이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흙물이 그저 가라앉는 게 아니라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이라고 말하는 것도 범상하지 않지만, 그것을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으로 확장하는 상상력은 놀랍다. 그리하여 “우레와 침묵 사이에” 있는 존재의 고독과 무상함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황새는 단순한 조류가 아니라 드높은 정신주의의 한 표상으로 읽힌다.(‘써레’와 ‘우레’라는 유사한 음성기호가 동일한 의미로 나란히 서 있는 언어유희도 볼만하다.)

세 번째로 “깊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마치 연못이 맑아 밑바닥이 다 보이듯이 훤하고 분명하게 써내는 것을 상상력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나희덕의 시 <누에>를 보자. 두 딸과 꼽추인 어미 사이에 이어진 보이지 않는 실을 이토록 선명하고 감동적으로 부조한 것은 시인의 상상력이다. 그 실은 급기야 모녀를 바라보는 화자에게까지 연결되고,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사람이 시인이다. 다음은 김종삼의 <장편(掌篇)·2>인데, 이 시에서도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결된 실을 본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일제 때 10전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밥 한 상에 10전이라니 그리 많지는 않은 액수였을 것이다. 분명 구걸로 얻게 되었을 10전짜리 두 개를 부모의 생일 밥값으로 당당하게, 그러나 가련하게 내미는 어린 소녀의 손목이 보일 듯하다. 그 눈망울도 보일 듯하다. 이렇게 서럽도록 아름다운 시를 읽다가 보면 사랑이니 효도니 인정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낡고 뻔뻔한 소리인지 깨닫게 된다. “특이하지도 않고 기이하지도 않으면서 문채를 벗어 떨치고, 그것이 오묘하다는 것만을 느낄 뿐 그 오묘하게 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을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묻자. 시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시적이라는 말을 배반하는 방식을 통해 시적이라는 말을 진화시킬 수는 없을까”(이원, <시와 세계> 2007년 가을호)를 고민하는 사람이 시인이 아닐까?

(안도현/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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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마종기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하나씩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뜨겁게 끓던 그 어려운 시대에도
며루치는 곳곳에서 온몸을 던졌다.
(며루치는 비명을 쳤겠지. 뜨겁다고,
숨차다고, 아프다고, 어둡다고, 떼거리로
잡혀 생으로 말려서 온몸이 여위고
비틀어진 며루치떼의 비명을 들으면.)

시원하고 맛있는 국물을 마시면서
이제는 쓸려 나간 며루치를 기억하자.
(남해의 연한 물살, 싱싱하게 헤엄치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며루치떼를 생각하자.
드디어 그 긴 겨울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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