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의 연구서 속엔 <시인 김용제 연구>(1992)가 있거니와, 여기에서 씨는 한국에서는 김용제를 친일문학자라 규정하여 돌보지 않았고 일본문학계에서도 그의 존재가 잊혀졌음을 지적했소. 한국 쪽의 망각은 그럴 만할지 모르겠으나, 일본 쪽의 망각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태만’이라 규정했소. 국제적인 벗이 행한 역할에 둔감함이 그 하나. 이웃나라의 진보적 문학자에 친일문학을 강요하고 그로 하여금 전투도 제대로 못할 만큼 기진맥진케 한 사실을 통렬히 직시하고자 하지 않았음이 그 다른 하나. 나프(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의 서기이며 옥중투쟁으로 크게 활동한 조선인 시인 김용제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한 한 성실한 일본인 연구자의 모럴 감각이 거기 있었소.
씨의 최종강의에서는 이 점이 어떤 형태로 묻어날까. 이러한 내 기대는 조금 어긋났소. 평생을 공부하면서 느낀 이런저런 감회를 걷어낸 최종강의의 알맹이인즉 시인 윤동주와 시인 김종한에 집중된 까닭이오. 전자에 대해서는 적어도 실증적 연구에서 국내 어느 학자보다 앞서 있었던 만큼 감회가 남달랐을 터이나, 김종한에 그토록 씨의 관심이 깊었음은 의외였소. 그러나 조금 깊이 살펴보면 그 곡절이 조금 드러나오.
일찍이 씨는 이렇게 말한 바 있소. “한국문학사는 ‘일제 말 암흑기’에 민족의 빛을 가져온 시인으로 윤동주를 내세운다. 문학사상 김종한의 자리는 없지만 만일 설정한다면 윤동주의 대극의 마이너스 좌표에 놓일 터이다”라고. 그렇기는 하나 “두 시인의 나이, 작풍, 삶의 방식 등이 다르나 1936, 7년의 시점에서는 공통항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라고.
대체 김종한(1914~1944)은 어떤 시인인가. 31세로 요절한 <문장> 출신의 김종한을 처음으로 평가한 논자는 <친일문학론>(1966)의 저자 임종국(1929~1989) 씨였소. 황민시(皇民詩)가 일반적으로 예술성이 빈곤한 선동이기 쉬웠다는 통례를 깨고 시로서의 품격을 갖춘 것을 썼다고 전제한 임씨는 또 이렇게 지적했소. “비록 황민시이지만 <원정>이나 <조망> 같은 시는 기교나 예술성에서는 흠을 찾기 어려운 작품”(<실록 친일파>, 1991)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황민시에 주목할 것이오. 조선어로 쓴 친일시 따위와는 변별되는 용법으로 보이기 때문. 일어로 시국적인 시를 쓰되, 기교와 예술성에서 흠을 찾기 어렵다면 이는 한일간의 문학공간에 놓인 ‘작품’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씨의 마음의 흐름이 감지되오. 가령 일어로 된 <원정(園丁)>(1942)을 우리말로 옮기는 자리에서 임씨는 이렇게 말했소. 당시 일반적 풍조가 ‘내선일체’의 근거를 동근동조(同根同祖)에 두고 있음에 반해 <원정>에서는 돌배나무와 능금, 곧 이질적 종자의 접목이라는 시선으로 읊었다는 것.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임씨가 미처 지적하지 않은 부분이오. 발표 당시 <원정>엔 이른바 반가(反歌)가 붙어 있었다는 점이 그것. 이는 중요한데, 일본의 고대 시집 <만엽집(萬葉集)>에 견주었다는 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오. 장가의 뒤에 이를 요약, 보충하는 단가를 두고 반가라 하거니와, <원정>의 반가는 이러하오. “어머니의 의향에 거역하면 너도 나도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대의) 그렇다면 어머니란 무엇인가. 돌배나무 그것이 아니겠는가. 시집 <어머니의 노래(垂乳根之歌)>(1943)에서 시인은 <원정>의 이 반가를 삭제해버렸지요. 왜 그랬을까.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오. 이 시집 전체가 <만엽집>에 맞서기라는 점. 시집 후기에서 김종한은 이렇게 적었소. “내선일체에 헌신하는 한 사람의 문화인의 운명을 갖고 있는 인과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우의(寓意)하려 했다”라고. 그것은 태평양전쟁(1941. 12. 8)이 난 지 만 일 년을 겨냥해 쓴 시 <대기(待機)>(1942)에서도 엿볼 수 있소. “긴 창경원 돌담을 끼고/그렇게도 계절의 가혹함에 고분고분해진 그들에게/대체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해질 때, 이 양가적 애매성은 음미의 사항이라 할 만하오.
임씨의 지적이 새삼 음미의 사항으로 우리 앞에 던져져 있소. ‘황민시’이긴 해도 예술성에 흠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이 음미 사항으로 ‘우리’ 앞에 던져져 있다고 할 때 그 ‘우리’란 오무라 교수의 시선에서 보면 한일 근대문학의 관련 양상이오. 내 시선에서 보면 어떠할까.
이중어 글쓰기 공간(1942~1945)에서의
조선인의 이중어 글쓰기의 제6형식이겠소.
제1형식(유진오, 이효석, 김사량),
제2형식(이광수),
제3형식(최재서),
제4형식(한설야),
제5형식(이기영) 다음 차례에 오는 것.
이처럼 글쓰기의 유형들이 거기 있었소.
그러기에 이중어 글쓰기의 공간이
제7형식으로도 응당 열려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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