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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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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속 밤중 詩]- 한둬서넛댓바구니
2016년 06월 17일 21시 16분  조회:4790  추천:0  작성자: 죽림

- 캐머런 스콧(Cameron K. Scott·1977~ )


 
기사 이미지
장작을 자르고 힘들게 끌어당기는 사이, 시가 연기가 트럭의 운전석을 메운다. 내가 창문을 내리자 마이크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소리친다. 저기 봐, 매야. 그는 더 소리쳤으나 나는 들을 수가 없었다. 매가 눈 덮인 들판으로 쏜살같이 곤두박질치더니 금세 들쥐 한 마리를 물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몇 주 안에 저들도 툰드라를 향해 북쪽으로 떠날 것이다. 나의 일부분도 저들과 함께 떠나고 싶다. 트럭 바퀴는 다시 앞으로 구르고 나는 여전히 저 하늘 위 어딘가에 있다.

 

 



///
2016년 ‘블루 라이트 북 어워드(Blue Light Book Award)’ 수상자인 캐머런 스콧은 현역 미국 시인이다. 그는 또한 소문난 낚시광이다. 낚시는 그가 자연과 소통하는 창구다. 자연은 그의 외부가 아니라 일부다. 눈 덮인 들판을 수직으로 하강했다가 다시 창공으로 치고 오르는 매의 동작은 서슬 푸른 결기를 보여준다. 툰드라의 추위조차 압도하는 매의 고독한 위용은 어느새 시인의 일부가 됐다. 그가 툰드라에 함께 가고 싶은 이유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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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편대
- 정수자(1957~)


 
기사 이미지
허공을 찢으며 우는 기러기떼 발톱이여

 

 


멀건 국물에 뜬 노숙의 눈발들이여

한평생 오금이 저릴 저 강변의 아파트여




///
누군가는 슬피 울며 유랑의 길을 간다. 누군가는 “멀건 국물”밖에 없는 부랑의 삶을 산다. 유랑의 삶과 나란히 정처(定處)의 삶(“강변의 아파트”)도 있다. 눈발이 쏟아져 더욱 궁핍해진 유랑의 삶 곁에서 정처의 삶은 “오금”이 저린다. 민망하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이 동일한 시공(時空)을 지나가는 “슬픈 편대”. 그러나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이 슬픈 그림을 따뜻하게 덥힌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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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 황병승(1970~ )


 
기사 이미지
달빛은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주머니가 텅 비도록 지껄였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떴고

등 뒤로 잎이 지고 있었다

곧 겨울이었다

무섭도록 쭉 뻗은 선로를 따라 걸었다

덜컹거리는 정신을 목적지로 이끄는

이 긴 사상(思想)의 회초리

걸음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비둘기들이 구구 울었다

불 주위로 빙 둘러선 늙은 사내들이

 

 

무질서하게 타오르는 불길과 묵묵히 악수놀이를 했다

(…)




///
세계는 정해진 길, 규정된 길, “무섭도록 쭉 뻗은 선로”를 강요한다. 세계는 우리가 “앵무새”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모든 종결은 종결 불가능한 것을 강제로 종결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폭력이다. 대상은 최종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종결하는 순간 다시 시작된다. 때로 “무질서”는 나쁜 “집중력”을 탈중심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미리 정해 놓은 길을 강제하는 “사상의 회초리”를 피하기 위해 걸음을 “엉망으로” 흐트러뜨리는 것, 줄 맞추어 가기를 거부하는 것. 자유로운 영혼의 ‘무의식적’ 행위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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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는 풍경 ―안주철(1975∼ )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 
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 
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 
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 
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 병일 때 
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
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릴 지를 때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 
이런 때 
나와 엄마는 꼭 밥을 먹고 있다  


구멍가게는 누구나 수시로 드나들게 개방된 공간이다. 눈에 거슬리는 손님을 맞는 스트레스도 여간 아닐 테다. 이문이 많이 남는 물건을 얼른 사 가는 손님만 있으면 좋으련만, 동네 어느 집에 집들이라도 온 사람이 드문드문 그럴까, 코흘리개와 모주꾼이나 들락거린다. 종일 가게를 열고 있어도 장사가 별로이니 물건도 변변히 갖춰 놓지 못한다. 그러니 모처럼의 번듯한 손님도 그냥 나가버리고, 악순환이다. 아이스크림 하나 사러온 아이는 얼른 골라들지 않고 전기 닳게 냉장고 문을 오래도 열고 들여다본다. 사내들은 딸랑 소주 두어 병 사서는 평상에서 우렁우렁 오래도 떠들며 마시고 있다. 살림집에 ‘엄마’가 낸 구멍가게, 밥은 당연히 가게에 딸린 방에서 먹을 터. 코앞에서 펼쳐지는 단작스러운 장사, 외면할 수 없이 드러나는 제 가족의 생활 밑천에 화자는 울컥해서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에 대한 ‘엄마’의 즉각적인 대답은 아들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이놈아, 지금 네 목구멍에 넘어가는 밥이 어디서 난 줄 아느냐!’ 생의 구질구질함에 속이 꽉 막혔을 화자는 외려 후련하고 정신이 번쩍 났을 테다.  

이런 구멍가게가 변두리 옛날 동네에는 아직 남아 있다. 시인은 대한민국의 빈곤을 모르는 첫 세대라는 1970년대생, 빈곤이 한층 싫고 힘들었을 테다. 이 시가 담긴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은 가난한 집에서 1막을 시작한 생은 2막도 3막도 똑같이 지리멸렬 이어지고, 그렇게 인생이 끝나리라는 비관적 세계관을 유머러스하고 서글프게, 또 냉소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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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치꽃 아욱꽃

                   ―박용래(1925∼1980) 

상치꽃은 
상치 대궁만큼 웃네. 

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잔 한잔 비우고 
잔 비우고 

배꼽 
내놓고 웃네. 


이끼 낀 
돌담 

아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다는 

시인의 이름 
잊었네.
 


아욱 잎은 국 끓여 먹고, 상추 잎은 생것을 쌈으로 먹고. 먹을거리로만 그 잎을 보아 온 사람들은 상추와 아욱도 꽃이 핀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기 쉬우리. 때는 한여름, 해는 저의 긴 날을 늘어지는 걸음으로 지나고 있었을 테다. 마루에 앉아 ‘잔 한잔 비우고/잔 비우’며 건너다보는 마당 텃밭에 ‘상치꽃은/상치 대궁만큼 웃네.//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웃네. 남겨진 대궁마다 함초롬히 상추꽃 아욱꽃, 화자가 보기 좋은 높이로 피었으리.

 
화자는 ‘배꼽/내놓고 웃네’. 자기 집에 있는데 무더운 날에 옷을 대충 걸친들 어떠랴. 화자는 러닝셔츠를 가슴께로 훌떡 걷어 올리고 있을 테다. 어쩌면 웃통을 벗고 있을지도. 상추와 아욱도 ‘배꼽/내놓고 웃네’. 꽃은 식물의 배꼽, 씨앗의 근원이라네. 꽃이 없으면 세대에서 세대로 어찌 이어지리. 그러니 상추와 아욱의 꽃은 임부의 자랑인 불룩한 배인 것, 그 배꼽인 것. 꽃 핀 텃밭을 정답게 완상하며 술을 마시는 나른한 흔쾌함이 ‘이끼 낀/돌담’부터 편치 않은 정조로 바뀐다. 하루 이틀 전까지 이어졌을 장마에 이끼 무성해진 돌담은 볕이 안 들어 축축하리라. 그 위로 저물어가는 하늘 동편에 실낱같은 달이 뜨고, 문득 ‘이즈러진 달이/실낱같다는’ 시구가 떠오르는데 그 ‘시인의 이름’ 떠오르지 않고. 어떤 부분은 더 선명하고 어떤 부분은 더 가물가물한 명정 상태에서 왠지 화자의 기분이, 술 잘 마셔놓고, 자욱이 가라앉는 듯.

박용래의 시들은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세계를 담는 게 미덕인 시의 전범으로 삼을 만하다. 독자는 그 간결한 시들이 우아하게 이끄는 정답고 소박한 세계에서 가슴 아릿한 원초적 향수에 젖어든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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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마을을 지나며 ―김남주(1946∼1994)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옛 마을 풍경의 서늘한 아름다움이여, 시인의 서늘한 시선이여. 10년이나 투옥 생활을 하도록 시대의 억압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온몸으로 ‘전사(戰士)의 시’를 쓴 ‘시의 전사’ 김남주. 격정적으로 독설을 분출하던 그 뜨거운 심장에서 이리 지순한 서정이라니. 시인 김남주에 대한 평가는 이념적 평가만이 아니라 예술적 평가도 엇갈린다. 그의 시가 예술에 미달한다고 평가하는 이들은 시에 정치가 전면에 내세워져 있으며 시어가 사납다는 이유를 든다. 하지만 그의 시는 마디마디 장단이 딱딱 맞으며 리드미컬하다. 과격한 언어로 펼쳐지는 그 서사에 동의하건 반대하건 거기 뛰노는 맥, 줄기찬 가락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다. 

 
‘저렇게 많은 별이 있구나 하늘에는/그것도 모르고 갑석이 마누라는 일만 하는구나/늦도록 밤늦도록 아이고 허리야/허리 한번 못 펴고 손톱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저렇게 많은 논과 밭이 있구나 땅에는/그것도 모르고 바보 갑석이는 고향을 뜨자는구나/지게질을 해도 서울로 가서 하자고/품팔이를 해도 대처에 가서 하자고//저렇게 많은 학교가 있구나 도시에는/그것도 모르고 재순이 아버지 갑석이는/재순이를 공장으로 내모는구나/열 살 먹은 막내까지 내모는구나//저렇게 많은 불빛이 있구나 강 건너 마을에는/그것도 모르고 재순이네는 다리 밑에 자리를 까는구나/마침 겨울이라 함박눈이 와서 그들을 덮어주는구나.’(시 ‘재순이네’) 김남주는 약소국이었던 나라의 사회주의자답게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농촌과 도시에서 착취당하며 사는 힘없이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시인이 그토록 격렬하게 쟁취하고자 한 것은 이 하나,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조선의 마음’이었나. 

김남주 같은 사람은 드물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불의가 없는 세상, 이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을 갖고 있더라도 대개는 행동으로 나서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주의자는 항상 패배하게 마련이다. 김남주가 꿈꾼 세상은 오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세상을 꿈꾸고 꾸준히 써왔기 때문에 반 발짝이라도 그 세상에 다가갔을 것이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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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希望) ―전봉건(1928∼1988) 

아름다운 
어느 한 아름다운 날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가슴께에서 
꽃과 사과이고 싶은 것은 
꽃바구니의. 

달빛에 씻긴 이슬을 
이슬 머금은 배추가 진주(眞珠)처럼 아롱지며 트이는 아침을
푸른 바다 어리는 비둘기의 눈동자를 
태양(太陽)이 웃으며 내려오는 하늘… 그 눈부신 계단에 핀
진달래를 
또 신문(新聞)이 음악(音樂)처럼 뿌려지는 거리를 
생각하는 것은. 

여기 
무수히 검은 총(銃)알 자국 얼룩진 
나무와 나무 사이 
눈이 깔린 밤 
… 여기에서. 


 
오 두 마리 
버들강아지 꼼지락이는 은(銀) 목걸이를 생각하며, 
꽃바구니의 꽃 그리고 
사과이고 싶은 것은… 당신의 
가슴께에서. 

구름도 
지구(地球)도 
인간(人間)도 
생활(生活)도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다 함께 그리운 내가 
전쟁(戰爭)의 숯검정이 자욱이 얼어붙은 
내 눈시울 속에 
서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 겨울날 아지랑이처럼 
아스라이 서 있는 
까닭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의 소용돌이인데 겨울이 오고, 탄흔 무수한 ‘나무와 나무 사이/눈이 깔린 밤’, 깨어 있는 한 병사가 있다. 방한복이나 제대로 입었을까. 어쩌면 닳아진 군복과 군화, 배도 고플 테다. 떠나지 않는 공포와 고통이 병사에게 ‘아름다운/어느 한 아름다운 날을’ 절절히 떠오르게 한다. ‘꽃바구니’ 같았던 사랑의 시간, 아 너무도 그리운, 눈에 삼삼한 ‘당신의 가슴께’ ‘꽃과 사과’! 달콤한 안식과 평화의 그런 날이 다시 올까. ‘푸른 바다 어리는 비둘기의 눈동자’ 같은 그날이. 소중한지 모르고 흘려보내던 일상이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다 함께 그리운’ 병사다. ‘구름도/지구도/인간도/생활도’! 신문도 참 오래 못 보았구나. 신문 파는 소년들이 손님을 부르는 외침으로 들썩거리던 거리, 시내 한복판의 소요며 분답도 평화의 그것인 양 어찌나 가슴 저리게 그리운지 ‘신문이 음악처럼 뿌려’진단다. ‘전쟁의 숯검정이 자욱이 얼어붙은’ 병사의 눈시울에 이 모든 것이 꿈인 듯 ‘아스라이’ 들어선다. 

시 속의 병사는 시인 자신일 테다. 시인은 살아남아 시를 쓰는데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병사, 전쟁이 끝난 뒤에도 욱신거리는 이 상흔이 전봉건의 많은 시에 담겨 있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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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봄
―김병호 (1971∼ )

수도원 뒤뜰에서
견습 수녀가 비질을 한다

목련나무 한 그루
툭, 툭,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꽃잎은 금세 멍이 들고
수녀는 떨어진 얼굴을 지운다

 

샛길 하나 없이
봄이 진다

이편에서 살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꽃이 다 그늘인 시절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깡마른 가지에 목련이 얹혀 있다

여직 기다리는 게 있냐고
물어보는 햇살

담장 밖의 희미한 기척들이
물큰물큰 돋는, 세상 끝의 오후

 

봄 풍경으로 ‘세상의 모든 가을’을 보여주는 듯, 정갈하고 고적한 시다.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어쩌면 이렇게 표현했을까! 견습 수녀의 수도원에 들기 전 마음 한 자리를 엿보게 하는 한편, 깡마른 나뭇가지에 해쓱하게 얹힌 목련 꽃이 선연히 떠오른다.

‘꽃이 다 그늘인 시절.’ 젊음이 다 그늘인 어떤 인생. 봄기운으로 생동하는 속세의 기척에 수도원 담장 안 오후의 햇살이 세상 끝인 양 아득해진다. 아득하면 깊으리. 울림이 깊은 이 시처럼, 시 속의 견습 수녀도, 그리고 젊어 본 적 없이 나이 든, 봄여름 없이 훌쩍 가을인 사람들도 그 삶이 더욱 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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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발
―문정희(1947∼ )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을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음을 흘리며 베일을 걷어 올렸네
난해한 행복이 출렁이는 바다를 향해
풍덩! 몸을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네
무사히 아름다운 혼례가 치러지고 있었네


생애 가장 정성껏 아름답게 꾸민 신부가 예식을 앞두고 대기실에 앉아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 고독을 보여주는 시다.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는 결혼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할 수 없는, 여태와는 멀고 다른 삶으로의 이민을 눈앞에 둔 소스라침이다.

많은 기혼여성이 가장 아름다웠고 행복했던 날로 자기 결혼식 날을 꼽는다. 모든 신부에게 이날이 행복한 첫날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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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최승호(1954∼)

창호지로 엷은 꽃향기 스며들고
그리움의 푸른 늑대가 산봉우리를 넘어간다.
늘 보던 그 달이 지겨운데
오늘은 동산에 분홍색 달이 떴으면.
바다 두루미가 달을 물고 날아 왔으면.
할 일 없는 봄밤에
마음은 멀리 멀리 천리(千里) 밖 허공을 날고
의지할 데가 없어 다시 마을을 기웃거린다.
어느 집 핼쓱한 병자가
육신이 나른한 꽃향기에 취해
아픔도 없이 조용히 죽어가나 보다.
아름다운 용모의 귀신들이
우두커니 꽃나무 그늘에 서서
저승에도 못 가는 찬기운의 한숨을 쉬고
인간축에도 못 끼는 서러운 낯짝으로
누가 좀 따뜻이 나를 대해줬으면 하고
은근히 기다리는 봄밤
때에 절은 묵은 솜뭉치처럼
짓눌린 혼(魂)들을 꾸겨 담은 채
저승열차는 내 두개골 속을 지난다.


삶과 죽음이 섞여 있는 어둠의 세계가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이미지화돼 있어, 아찔하게 탐미적이다. 죽음과 혼(魂)과 귀신의 냄새가 시인의 외로움과 짝을 이루면서 물씬 꽃향기로 어지러이 휘돈다. 아편에라도 취한 듯 만드는, 이 쓸쓸하고 몽환적인 봄밤의 파토스! 세상에, 이토록 섬세하고 적나라한 귀기(鬼氣)라니! 시리고 아름다운 봄밤, 귀신들도 용모가 아름답다. 환상의 세계에는 추함이 있을 수 없다. 현실을 떠났기 때문에 귀신도 아름답다! 허나, 환상이 하늘 끝까지 올라가면, ‘때에 절은 묵은 솜뭉치처럼/짓눌린 혼(魂)들을 꾸겨 담은 채’ 슬픈 환멸이 땅바닥 저 밑까지 곤두박질한다. 봄밤의 꽃향기여, 다시 짙어라. 시인이 거듭 취해 ‘그리움의 푸른 늑대가 산봉우리를 넘어’가게 하라.

가령 라일락 꽃향기가 바람결에 실려 오면, 함께 밀려드는 아득한 그리움에 문득 코끝 치켜들고 발걸음 멈추게 되는 봄날. 그러하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봄밤과 완연히 다른 최승호의 독한 ‘봄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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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집에서
―복거일(1946∼ )

입 다문 소설(小雪)의 하늘
돌쩌귀 하나로 걸린 문짝의 나섬,
테만 남은 물동이가 대담하게 소묘해주는
목적의 틀,
마른 풀줄기들 사이 팔 없는 펌프의
좀 어색한 단아함―
재생의 단계를 넘어선 것들의
자부심에 가까운 몸짓들 앞에선
늙어가는 목숨이 아니더라도
경외의 몸짓이 어색하지 않으리라.

사람은 깊은 자국을 남긴다.
벌써 지붕을 뚫은 황무(荒蕪)는 결국 이기겠지만
사람의 자취를 말끔히 지울 수 있을까?
숨결을 불어넣는 것처럼
사람은 만진 것들에 완강함을 남긴다.
그 생각은 어쩐지
위안보다는 절망을 불러낸다.
그래도 절망은 지녔다
허무의 흐릿한 선과는 다른,
든든할 만큼 단단한 얼굴을.

나에게선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허물어진 돌담 한구석
덜 불편한 자세로 돌아눕는 돌의
과묵한 소리가 들린다.
하긴 새로워질 수 없을 만큼 짙은
절망은 없다.
믿음의 따스함이 없이 나이 들어가는
이 허름한 풍경
그래도 햇살은 새로운 욕망들을 깨워서
그림자 문득 또렷해진다.

전아한 산문으로 그림과 시를 이끄는 3중주(三重奏) 같은 책, 복거일의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은 페이지마다 깊고 아름다운 생각과 마음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렇다, 삶은 이어진다. 아무리 재앙의 골짜기가 깊어 보여도, 삶은 그 골짜기를 지나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어려운 시절에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멀리 보아야 한다’ 같은 문장이 대표적이다. 선생은 문제에 매이기보다 그걸 풀 방도를 생각하는, 과거보다 미래를 지향하는 이성적인 현실주의자다. 그런데 미래를 소중히 생각한다는 건, 당장 현재만 움켜쥐고 있는 현실주의자가 득세하는 부박한 현실에서 얼마나 이상주의적인가. 이 독특한 현실주의자가 ‘현실’을 옹호하는 전망을 발랄한 지성으로, 그러나 완강히 보여주는 사회비평 산문만 읽은 이들은 그의 시에서 배어나는 페이소스가 색다를 테다.


남자들은 오십 줄에 들어서면서 제 늙음을 느끼는 것 같다. 늙은 것도 서럽거늘 생활의 안정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거의 찌그러져 있다. 어르신들은 병들고 아이들 앞날은 불안하고, 제 노후도 대책 없는 우리들 오십대.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의 따스함이 없이 나이 들어가는’ 화자의 절망감이 버려진 집의 허름한 풍경에 버물린다. 젊은 날 열심히 산 이들은 그 자부심으로 단단할 수 있으리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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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커피
―윤성택(1972∼)

 

 

갓 내린 어둠이 진해지는 경우란
추억의 온도에서뿐이다

 

커피향처럼 저녁놀이 번지는 건
모든 길을 이끌고 온 오후가
한때 내가 음미한 예감이었기 때문이다

 

식은 그늘 속으로 어느덧 생각이 쌓이고
다 지난 일이다 싶은 별이
자꾸만 쓴맛처럼 밤하늘을 맴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각자의 깊이에서
한 그루의 플라타너스가 되어
그 길에 번져 있을 것이다

 

공중에서 말라가는 낙엽 곁으로
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분다

 

솨르르솨르르 흩어져내리는 잎들

 

가을은 커피잔 둘레로 퍼지는 거품처럼
도로턱에 낙엽을 밀어보낸다

 

차 한 대 지나칠 때마다
매번 인연이 그러하였으니
한 잔 그늘이 깊고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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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온도가 있을까? 그 온도라는 것은 내 속의 열기. 내가 슬프면 태양도 춥게 느껴지듯, 같은 추억이라도 그에 대한 내 열기에 따라 온도가 달라진다. 쓸쓸한 추억이라도 내 속에 열기가 있으면 달콤하게 느껴지고, 따뜻한 추억이라도 내 속에 열기가 없으면 미적지근하게 느껴질 테다. 혼자 사는 젊은이일 화자는 커피와 함께 추억의 씁쓸함을 음미한다.

화자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 소슬바람에 가로수 가랑잎들이 ‘솨르르솨르르 흩어져내리고’ 도로 위에 구른다. 진한 커피향처럼 번지는 저녁놀. 그 사람이 생각나는구나. ‘한때 내가 음미한 예감’, 예감이라기보다 직감이었지. 어쩐지 전화가 올 것 같은, 그러면 여지없이 전화가 오곤 했던 그 오후들…. ‘다 지난 일이다’!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리던 날들이여, 까마득히 안녕! 입맛이 쓰다. 이성적으로는 납득하지만 쓸쓸한 건 어쩔 수 없다. 누가 전화할 것 같은, 아무런 예감이 없는 나날. 가을은 깊어가고, 오늘은 좀 슬퍼진다. 차분하게 서정적으로, 담담히 잘 쓴 시다. 인생의 그늘이나 그림자를 우려낸 듯 진한 커피가 문득 당긴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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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정원
―정용주(1962∼)

다래 덩굴처럼
산속으로 이어진 오솔길
죽어 쓰러진 나무들 스스로 껍질을 벗겨내고 있다
엉킨 덩굴에 매달려 쪼그라든 몇 개 산열매처럼
지워져가는 길의 가지 끝에서
돌무더기 쌓아놓은 흔적만 남아 있는
화전민들의 옛 집터
증거해야 할 아무 자랑도 없이
부서져 내리지 못하는 이끼 덮인 돌 위의 돌
언제부터 자란 오미자 덩굴이
쓸쓸한 흔적의 정원에 공중 그물을 엮었다
스웨터를 장식하는 구슬 같은
오미자 송이가 주렁주렁 열렸다
햇살의 정적을 빨아먹으며 몸을 붉혀가는 오미자 열매
스스로 제 고독을 완성시켜가고 있다


시인 정용주가 책 보따리와 CD 보따리, 쌀 한 자루를 짊어지고 치악산 깊은 산속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이 2003년이란다. 이 시가 실린 시집 ‘그렇게 될 것은 결국 그렇게 된다’에는 그 ‘몽유거처(夢遊去處)’에서의 10년 세월이 녹아들어 있다. 늘 쫓기듯 움직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쳇바퀴에서 벗어난 건 부럽지만,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자연 속에서 늘 지낸다는 건 얼마나 외로운 일일까.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외로운 순간을 주지도 않고, 또 우리 도시인은 외로운 순간을 두려워한다. 스스로 로빈슨 크루소가 된 그는 강한 사람이다. 강한 자만이 자연을 얻는다. 비밀정원도 있고, 고독이 여물어가는 삶을 사는 복 받은 사람! 우리는 어쩌다 한 번 이런 기회를 갖는다.

여가문화가 확산되면서 삼십대 사십대 남성들이 가족과 캠핑을 많이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혼자 캠핑을 간단다. 여름뿐 아니라 가을 겨울에도 혼자 야영장에 가서 하루 이틀씩 지내다 온단다. 혼자 불을 지펴 밥을 해먹고, 랜턴을 켜고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고, 혼자 걸으며 나무도 보고 하늘도 보고. 식구들이나 조직, 연인과 너무 붙어 있는 게 좋기만 한 게 아니다. 자연과 일대일로 대면하면서 원초적인 힘을 느끼고 고독을 맛보는 시간에 힐링도 되고 생기를 되찾으리라.

열매도 풀도 제 고독을 빨갛게 완성시키는 풍경이 고즈넉이 생생한 ‘비밀정원’. 서경시(敍景詩)가 이리 실할 수 있구나!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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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나라

―함기석(1966∼ )

없는 초원에서없는 말들이없는 갈기를 휘날리며없는 꿈길을 달려 내게로 온다없는 안장에 나를 태워없는 나라로 간다없는 나라에 도착해 보니없는 사람들이 보인다없는 길들이 보인다없는 시계들이 걸어다닌다없는 거울들이 나무들이 걸어다닌다없는 시인들이 없는 시를 쓴다없는 화가들이 0차원 그림을 그린다없는 영화관에선 없는 영화가 상영되고없는 개들이 없는 담배를 피며 내게 묻는다없는 당신!없는 삶을 끌고 왜 여기까지 왔소?

 

하도 '없는'이란 말이 많이 나오니까 얼핏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허망한 삶의 양태에 대해 역으로 묻고 있는 것 같다. 내 삶이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 이 삶이 실제냐, 허구냐? '없는'의 피수식어들이 휘적휘적 수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장면들이 무성영화처럼 돌아가다가 돌연 능동적 장면으로 강렬하게 마무리한다. '없는 당신!/ 없는 삶을 끌고 왜 여기까지 왔소?' 이 시에서 유일한 능동적 행동인 발화(發話), 발화 중에서도 능동적 발화인 질문! 독자의 몽몽했던 정신이 확 깬다. 그 질문을 하는 게, 내가 특별히 개를 낮추어 보는 건 아니지만, 하필 개들이다. 그것도 담배를 피우는 개들. 담배를 피우고 철학적 질문을 하는 개가 실제로는 없기 때문에, 수식어 '없는'이 개와 담배에 외려 실체감을 준다. 말장난 속에 뼈가 있다. 재밌으면서도 서늘한 감동을 주는 시다.

그런데 왜 세계는 없지 않고 있지? 없으면 안 되는 걸까? 도대체 있다는 건 뭐고 없다는 건 뭔가? 왜 사물은 있는가? 없지 않고 있는가? 왜 우리는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할까? 왜 있어야 해? 없을 수도 있잖아. 시간이고 공간이고 사물이고 없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있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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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일

―임강빈(1931∼ )

백목련 자리가 너무 허전하다누가 찾아올 것 같아자꾸 밖을 내다본다우편함에는공과금 고지서 혼자 누워 있다이런 날엔 전화벨도 없다한 점 구름 없이하늘마저 비어 있다답답한 이런 날이 또 있으랴마당 한 구석에 노란 민들레반갑다고 연신 아는 체한다그래그래 알았다오늘은 완전 공일이다

공일(空日)은 휴일, 곧 쉬는 날이다. 전에는 일요일 하루가 공일이었지만 주 5일 근무가 대세인 요즘은 토요일도 공일이다. 젊은 사람들은 일주일에 이틀 공일도 짧게만 느껴질 것이다. 밀린 잠 벌충하랴, 데이트하랴, 혹은 가족에게 봉사하랴, 거기에 더해 정신과 체력을 충전하고자 바쁜 여가를 보내다 보면 시간이 후딱 갈 것이다. '인생은 무료하면 길고 충실하면 짧다'고 독일 시인 실러가 말했다지. 싱겁기도! 하나 마나 한 말인 만큼 맞는 말씀이다. 누구 입에서 처음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싱겁지 않게 가슴을 치는 말이 떠오른다. '하루는 길고 일생은 짧다.'

 

'백목련 자리가 너무 허전하다', 꽃 진 지 하루 이틀 아니련만 '백목련 자리'에 유독 가슴 허해지는 화자, '누가 찾아올 것 같아/자꾸 밖을 내다본'단다. 평일에도 배달되는 우편물이라고는 공과금 고지서요, 전화벨을 울리는 건 마케팅 전화이거늘 오늘은 공일, 아무도 화자를 찾지 않는다. '한 점 구름 없이/하늘마저 비어 있다', 화자의 마음 상태는 가문 봄날의 공기처럼 촉촉함과는 거리가 멀다. 화자의 마음을 설렘과 기대로 그윽이 채워주던 봄의 생기는 꽃들과 함께 지고 여름을 향해 가는 긴긴 낮의 아무 자극 없는, 권태롭고 막막한 공일. '답답한 이런 날이 또 있으리'! 누구라도 반갑겠지만 화자가 정말 애타게 기다리는 건 시심(詩心)이리라. 세상에서 잊힌 듯 외롭고 답답해하는 화자는 '마당 한 구석에 노란 민들레'를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 홀연히 날아와 홀연히 핀, 홀연히 떠나갈 노란 민들레, 그것이 인생이거늘. 우리 비자꾸나, 비우자꾸나! '오늘은 완전 공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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