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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는 리별의 노래
2016년 10월 01일 17시 40분  조회:3639  추천:0  작성자: 죽림


 

어렸을 때, 할머니는 침침한 눈을 씻어내며 “아가, 저 속에 있는 토끼 보이쟈? 저기 저 방아찧고 있는 놈 보이쟈?” 하고 물으셨다. 할머니께서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달 속에는 희미하게나마 토끼 한 마리가 방아를 찧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 맘에도 왜 토끼가 저기서 방아를 찧고 있는 지, 달까지 어떻게 올라갔는지 궁금했다. 더구나 토끼가 갔다면 나도 갈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에 ‘토끼 잡으러 가자’고 한밤내 할머니를 졸라댔다.

할머닌 이가 빠져 주름진 입을 오몰오몰 하시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자 하시고, 다음날엔 낮에는 달이 안 보이니 이따 저녁에 가자 하신다. 저녁이 되면 너무 늦었으니 다음날에 일찍 나서자 하시고…,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던 토끼잡이는 어느 순간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나버렸고, 그후 달 속에 산다는 토끼 이야기는 그리움처럼 내 기억에 남아있다.

같은 이야기를 요즘 아이들에게 해주면 대번에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다. 정말이라고 끝까지 우기려고 들면 인터넷을 검색해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사람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했는지, 달에는 토끼는커녕 어떤 생물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조목조목 가르쳐준다. 

이에 질세라 부처의 ‘본생담’을 검색해 달로 올라간 토끼 이야기를 찾아주면 그건 옛날이야기라며 믿으려들지 않는다.

사설이 길어진 이유는 우리의 과거와 오늘의 과거를 살아가는 요즘 아이들을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과거가 아름다웠다느니, 정서적으로 풍요로웠다느니 하는 입발린 소리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구지일수일지俱狙一竪一指에 구지화상이 스승의 흉내를 내기 좋아하는 어린 동자의 손가락을 칼로 잘랐다는 일화 즉,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고 있느냐.’ 라는 말이 조경옥의 「모자란 달이 만월을 꿈꾼다」를 통해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팔월 열사흘 밤
덜 여문 달빛 아래서
만월을 꿈꾼다.

제각각 작은 섬으로 떠돌다
길다랗게 달빛 길이 열리면
이끌리듯 달빛 아래 모여든다.
주춤거리던 산들도
허리에 하얀 띠를 두르고 가만가만 내려선다.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밤
달빛 받아 안으니
시원의 노래가 터져나온다
노래를 더한 달빛
중천을 지난다
얼추 보름달이다.

때때로
서로에게서 떠나
달빛 아래서 만나야겠다
열사흘 달 같은 우리,
조금 모자란 곳에 서로를 채워
우리의 만월을 뜨게 해야지.

모자란 달이 만월을 만든다.

―조경옥 『모자란 달이 만월을 꿈꾼다』 전문




같은 달을 보고서도 어떤 이는 ‘달’만 쳐다보고 어떤 이는 ‘달 속의 그 무엇’을 찾아낸다. 그 무엇이 시인의 눈에만 보이는 것일까. 아니다. 눈이란 보이는 것만 인식認識하기 때문에 그 너머의 세계는 눈과 마음으로 인지認知해야 한다.

다 같은 눈이라 하더라도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상의 다가옴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하는 것과 ‘모자란 달이 만월을 만든다’는 것은 대상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 느낌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시인이 언어의 연금술사라 불리는 이유기도 하며 토씨 하나 때문에 밤을 지새는 원인이기도 하다.
조경옥에게 있어 달빛은 “제각각 작은 섬으로 떠돌다”가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열린 길이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다가 시원始原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때때로/ 서로에게서 떠나” 있어야 하는 삶의 지혜마저 얻게 된다. 여기서 조경옥이 말하는 “열린 길”이란 “조금 모자란 곳에 서로를 채워”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달의 속성처럼 채우고 비워내는 과정 즉, 제각각 작은 섬으로 떠돌다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다. 그것이 조경옥이 ‘달’을 보고 인지하는 ‘그 무엇의’ 세계이다.

우리는 이러한 바라봄의 시선을 통해 조경옥이 지향하고 있는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보름달’, ‘달빛’, ‘열린 길’로 제시되는 시어들은 둥근 세계를 꿈꾸며 ‘덜 여문’, ‘제각각 작은 섬’, ‘모자란’ 등과 같은 시어들을 한데 아우른다.

이는 둥근 것(긍정)이 모난 것(부정)을 끌어안음으로써 나와 너, 나와 대상을 하나로 만들고 화합된 세계를 창출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화합하려는 과정 속에서 상처를 받는다. 



불 곁에 가지 않아도
화상으로 뒤척이는 밤이 있다

설익은 말․말․말
깍두기로 썰어진 말꼬리가

한밤중 불티로 살아나
가슴에 지지직 화인을 찍는다

얼음주머니 얹고 연고로 달래도
세포마다 일어서는 얼얼한 이 아픔

맞불이라도 질러야 할까보다
산불이라도 내야 할까보다

―한영숙 『화상』 전문



신체에 가해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새살이 돋아 아픔을 잊는다. 하지만 말로 받은 상처는 가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앉았다가 어느 순간 불쑥 치받쳐 오르기도 하고, 심하면 곪아서 덧나기도 한다. 한영숙이 “설익은 말” 때문에 받은 상처는 “한밤중 불티로 살아나” “세포마다 일어서는 얼얼한” 아픔을 준다. 시에 있어 시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듯 인간관계 역시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말 한 마디가 깊은 상처를 내듯, 시어 하나가 그 작품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시어가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씌어져 시의 이미지와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작품의 완성도를 운운하게 된다.

굳이 시에 관한 이론이나 창작기법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좋은 시를 찾아낼 수 있다. 좋은 시란 그 어떤 훌륭한 이론보다 마음이 먼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다 나쁘다’의 판단은 순전히 읽어내는 자의 몫이다. 

그 몫을 ‘달’에서 찾든 구지화상의 ‘손가락’에서 찾든 그것은 읽는 자의 시선(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에 있어 한영숙이 말하는 것처럼 “맞불이라도 질러”서 그 아픔이 치유될 수 있다면, “산불이라도 내”서 활활 타오르는 시의 화상火象을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그것은 시를 쓰는 시인들의 간절함이기도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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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정호승 (1950 - )「이별노래」전문


떠나지 말아달라는 게 아니다. 단지 조금만 더 늦게 떠나달라고 한다. 그러면 참으로 멋있는 이별장면이 연출될 참이다. 떠나는 그대의 배경으로 노을이 깔리고 별이 부르는 노래가 주제가로 연주되는 기막힌 영화의 한 장면이 되겠다. 그래서 조금만 더 그대가 늦게 떠나준다면 떠난 뒤에도 사랑하기에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기다려주는 이별을 보았는가. 야속한 이별은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갑자기 들이닥치곤 해서 늘 사랑하기에 늦어버리곤 한다. 그리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늦게 떠나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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