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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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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란 주사위 던지기와 같다...
2016년 10월 02일 23시 35분  조회:3370  추천:0  작성자: 죽림
[ 2016년 09월 08일 09시 01분   조회:1600 ]

 

 

구불구불한 숲길을 공중에서 바라보니 마치 긴 용과 같은
복주(福州) 금우산(金牛山) 숲의 ‘푸다오(福道)’ 길


 

가을입니다.

풍요에 계절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저는 망각의 계절, 쇠퇴의 계절이란 생각이듭니다.

며칠 가을비가 내리네요.

시 한 편 생각나지 않나요? 

옛 날의 추억들이.............

왜 비가 오는걸까요.

이유가 뭘까요.

 

 

가을비      /     하지연

 

창밖에 배롱나무 한그루

온 몸이 비에 젖는다

하늘은 창백해지고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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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60주기 기념 특집/윤동주 시 다시 읽는다>



    길

             윤 동 주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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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길
     -윤동주의 시 「길」에 대하여



     박남희



  윤동주의 시를 떠받치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거울과 길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윤동주를 부끄러움의 시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윤동주 시의 거울 이미지와 연관이 있고, 반면에 그를 저항시인으로 보는 것은 그의 길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늘 자신을 내성적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이 땅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소망한 시인이고,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순교의 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지닌 시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거울과 길은 윤동주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간과될 수 없는 중요한 이미지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거울과 길의 이미지가 서로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으로 존재하면서 서로에게 발원지 역할을 하고 있다. 윤동주의 서시를 보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의 ‘하늘’은 일종의 거울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하늘이라는 거울을 보면서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기를 다짐해 보는 것이다. 윤동주 시에서 거울 이미지의 대표적인 것은 ‘우물’과 ‘하늘’인데, 우물이 자의식적 거울이라면 하늘은 종교적, 윤리적 거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시인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걸어갈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즉 거울로 인하여 시인은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길을 그냥 식식하게 걸어가지 못한다. 그는 길을 가다가 다시 거울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그가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자신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길은 늘 거울이 필요한 길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시에서 길과 거울은 한 몸이다. 따라서 여기서 분석해 보려는 윤동주의 「길」은 일종의 ‘거울 속의 길’인 셈이다.
우선「길」의 첫 연을 읽어보자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1연을 보면 윤동주의 ‘길’은 결핍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것은 본래 있던 것이 없어졌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연에서 시적 화자는 무언가 어디다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그가 걸어온 길을 다시 더듬어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시대적인 상황과 결부시켜보면 일제 식민지 치하의 ‘잃어버린 조국’에 연결되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그런 정황은 보이지 않고 다만 무언가 어디선가 잃었다는 것만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잃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이 시의 6연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라는 구절로 미루어보면 시인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나’를 찾기 위한 과정임이 드러난다. 시인은 결국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걸어가는 길이 “풀 한포기 없는” 길이라는 점에서 그가 걸어가는 길 자체가 척박한 길이고 결핍으로서의 길이다. 그의 길은 2연에 보면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있는 돌담길이다. 여기서의 ‘돌’은 ‘풀’과 대비되는 이미지로 척박한 상황을 암시해주는 사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돌담으로 이루어진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있다는 점에서, 시인이 걸어가는 길이 무언가 폐쇄된 상황과 끝없이 이어져 있는 길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김현자는 윤동주의 「길」을 해설하는 자리에서 돌담을 경계선으로 해서 ‘담 밖의 나’와 ‘담 안의 나’, ‘현재의 세계’와 ‘잃어버린 세계’,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로 양분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명이 언뜻 보면 수긍이 가는 것도 같지만, 엄밀히 따져서 읽어보면 잘 수긍이 가지 않는다. 우선 돌담을 경계선으로 해서 ‘담 밖의 나’와 ‘담 안의 나’로 양분해서 보는 것은 담 안에도 ‘나’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시를 읽어보면 ‘나’는 담 밖의 길 위에 있을 뿐 담 안에 또 다른 ‘나’가 있으리라는 암시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어디까지나 시적 상황은 담 밖의 길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시인이 찾고 싶어하는 ‘나’는 길을 한참 더듬어 가야 도달하게 되는 “담 저쪽에” 남아있는 나를 찾기 위한 것이다. 김현자는 여기서의 “담 저 쪽”을 폐쇄된 담장 안쪽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내가 길을 걸어가는 것이 담장 안쪽의 나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 시의 마지막 연을 보면 시인은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고 하여 소망이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다음으로 ‘현재의 세계’와 ‘잃어버린 세계’의 대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잘못 해석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시의 5연을 보면“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돌담을 더듬어 가다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은 담 안쪽의 ‘잃어버린 세계’로 가기 위해서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담은 막힌 세계의 경계이면서 시인이 걸어가는 길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돌담을 더듬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시인은 길을 가다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담을 더듬어 눈물을 지으면서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물론 여기서의 ‘하늘’은 이 글을 초두에서 밝힌 바 있듯이 ‘거울’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하늘이 푸른 것을 보면서 그것을 “부끄럽게 푸릅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늘이 부끄럽다는 것은 즉 자신이 부끄럽다는 의미와 동의어로서 하늘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즉 푸른 하늘에 비친 자아는 푸르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자아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상적인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현자가 담을 경계로 ‘현실적인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로 나눈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쇠문으로 굳게 닫힌 공간이 이상적인 자아가 있는 공간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이 시의 4연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는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해있는 길은 삶과 죽음이 끝없이 순환하는 인생길을 상징하는 것으로 시인의 부활신앙과도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하면 시인의 인생을 상징하는 ‘길’은 담 안쪽과 두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걸어가야 할 길인 것이다. 시인이 여기서 걸어가는 길은 ‘현실적 자아’가 ‘이상적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고, 결핍된 현실 속에서 담 저쪽 편 길에 있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어찌 보면 여기서의 돌담 역시 암담한 현실을 끊임없이 인식시켜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 시인이 걸어가는 길은 결핍된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고, 하늘이라는 이상적인 거울과 돌담이라는 현실적인 거울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끝없는 인생길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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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 던지기
―신해욱(1974∼)

주사위의 내부에는
반듯한 모서리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아, 이런 방에서 하녀로 일하며
정성스레 걸레질을 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어.

동생의 그릇은 너무 아름다워서
물밖에 담을 수가 없고

나의 사념은 산성액에 녹아
기포가 되어 올라오고

 

 

모서리는

모서리는

함부로 망가지는 법이 없지.
방수가 되기도 하지.

세상의 주사위들이 한꺼번에 던져지면
진짜 복소수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이야기를 잃은 사물들아, 그러니 근심을 접고
이리 와봐.

여기가 아주 좋아.



화자는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보는 중일 테다. 주사위는 여섯 면으로 이루어졌으니 모서리가 열두 개, 각각의 면에는 한 개에서 여섯 개까지 점이 찍혀 있다. 던져 올린 주사위가 떨어진 뒤 윗면에 보이는 숫자의 크기로 승패를 가르는 게 주사위놀이다. 어떤 숫자가 나올지 점칠 수 없고, 원하는 숫자가 나오게 할 묘수도 없다. 그저 우연에 맡길 뿐이다. 주사위라는 작은 육면체에서 우연의 무변세계를 보며 화자는 ‘주사위의 내부에는/반듯한 모서리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감탄한다.
 

 

우리는 이미 던져진 주사위일까. 거기서 거기인 몇 개 안 되는 숫자로 운명이 결정되는데, ‘모서리는//모서리는//함부로 망가지는 법이 없지’. 복불복(福不福)으로 저마다 담겨진 운명의 그릇대로 살 수밖에 없을까. 곡절 많은 삶을 사는 기구한 사람들은 사람의 운명을 주사위놀이하듯 한 신에게 따지고 싶을 테다. 아,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주사위 한 번 던진 것으로 결판 짓다니. 삼세판으로 합시다!

‘세상의 주사위들이 한꺼번에 던져지면/진짜 복소수가 나올지’ 모른다. 복소수는 실수와 허수를 아우른다. 허수라는 알지 못할 체계에 실수라는 인간의 의지가 미치는 복소수! 신해욱은 관념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는 듯 갖고 노는 시인이다. 마지막 두 연의 어조를 보라. 얼마나 살가운지! ‘여기’는 주사위의 내부, 복소수의 세계며 신해욱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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