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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는 추상의 반죽 덩어리...
2016년 10월 06일 00시 13분  조회:3919  추천:0  작성자: 죽림

3. 비극적 세계관의 추체험적 인식 

90년대의 시는 세기말적 불안과 휴머니티의 상실이라는 위협 속에서 비극적 현실 인식이 문면에 전포되어 있었다. 절대적 권위를 누리던 담론들과 결핍된 욕망만의 분열된 주체의 몸 안에 기생하고 있었다. 90년대의 시는 인문학적 사유가 사라진 파편화된 욕망을 환유한다. 과학에 지배된 반윤리가 새로움의 이름으로 시를 감염시키기며 폐허에 풍경을 만들어 냈다. 남진우, 송찬호, 박형준의 시는 이같은 비극을 내면화시키며 그 내면 속에서 겪는 불화와 혼돈을 정합화시킨다. 80년대에 독특한 개성의 시세계를 보여준 바 있는 남진우는 죽음과 소멸, 종말과 허무와 같은 비극적 세계관을 몽유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어두운 영혼의 그림자를 떨쳐 버리기 위해 전부 그의 사유를 할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철저하게 죽음의 이미지에 천착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불안은 외부로부터의 단절이나 소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비극적 에너지에서 온다. 그는 죽음을 넘어서려 하거나 죽음 앞에서 무력한 비굴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내부에 가득찬 소멸과 죽음의 목소리를 그로데스크하면서도 깊이 있는 언어로 낯설고 진기한 죽음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밤 죽은 자를 태운 배가 내 집 앞에 도착했다

새벽이 오기 전 그 배에 불을 질러 

더 먼 바다에 떠나보내야 한다

그 배가 삐걱이며 내 잠 속으로 가라앉아버리기 전에

죽은 자들과 한 모든 계약을 끝마쳐야 한다


식인 상어와 암초들을 피해 어렵게 흘러든 해안

간신히 잠에서 빠져나온 내가 눈을 비비고 일어서면

희미하게 밝아오는 창문 저편

죽은 자를 태운 배는 서서히 떠나고 있다

-남진우「검은 돛배」부분

죽은 자를 태운 배가 집 앞에 당도했다고 믿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의식은 세계를 인식하는 그의 태도가 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 대해 사로잡힌 망령은 지극히 병적이다. 그에게 공간은 죽음을 인식하는 기제에 불과할 뿐 그가 죽음을 인식하는 공간이 도시이거나 그의 집 혹은 그의 내부이거나 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시간 역시 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적 환경에 불과할 뿐 시간이 주는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집요한 죽음에 대한 천착은 그러나 우리들 의식 저 편 깊숙히 허무로 자리잡고 있는 세계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 외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무의식 속에서 역동적으로 파동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고 침묵적이다. 

남진우가 우리들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세계를 비정하게 파헤치며 음울의 벽화를 통일성 있게 그려내고 있다면 유추의 언어로 건조한 서정을 펼치고 있는 송찬호는 비약과 절제 같은 지적 조작을 통해 시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의 시는 감정을 최대한 감춘 채 대상을 장면화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시는 시적 해석의 다양성을 제공하는 한편 이러한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조합을 보다 새로운 시각에서 맥락화시키고 보다 심원하게 의미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고소하고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

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러가는 달빛처럼 단단한 근
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송찬호,「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전문

송찬호의 서정은 고정되어 있는 사물의 관념을 일탈시키며 시적 주제까지 관습적 의미로부터 탈골시키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의 시는 언어가 서로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텍스트 내 숨기거나 허구화된 관념을 코드화시킨다. 이로 인해 그의 시는 현실이 현실로서 읽히지 않은 채 우리에게 새롭게 부가되는 낯선 힙들을 강화한다.「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도 마찬가지다. 이 시 역시 우리의 보편적 인식을 거세시키며 관념들이 빚어내는 추체험 인식을 요구한다. 그의 시는 명료성을 유예하는 대신 의미를 다중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는 언어가 빚어 내는 미적 세계로 관습적 시 문법에 감금되어 있는 담화 방식을 깨뜨린다. 송찬호가 언어적 상상력으로 낯선 힘들을 강화는데 비해, 박형준은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의 불화를 드러내며 자아를 속박하고 있는 억압을 끊임없이 해방시키고자 한다. 


자전거를 타고 방죽에 왔다.

들끓는 잎의 물결이 바퀴살에 갈라져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섬을 지고 있는 거북처럼 논 사이에서 

파닥거리는 수금 방죽에 자전거를 타고 왔다.



침례교도들이 차가운 물을 헤치며

소름이 돋는 몸을 움직여 세례를 받는다.

(····················)

아침 방죽을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거닌다.

산책만이 살아 있는 유일한 형식,

누군가 모과나무 사이에서 바라본다면 좋으리라

- 박형준,「수금 방죽」부분 

박형준 시의 균형은 자아와 시적 대상과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며 상호 교환적 태도를 유지하는 데 있다. 자아와 대상이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서로 습합되고 있는 그의 시는 흥분이나 과장 대신 치밀한 질서를 계량하고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되살려 놓는다. 이완과 긴장을 번갈아 가며 시의 전면에 펼쳐는 그의 서정은 시적 대상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불순과 모멸을 정화시킨다. 그의 세계관은 우울하면서도 힘이 있다. 자아의 비극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음울하게 드러나는 그의 시는 우리의 감성적인 에너지를 자극하며 자아의 내부에서 충돌하고 있는 정서를 스팩타클하게 보여준다.

남진우, 송찬호, 박형준의 시는 자아 내부에서 일고 있는 감정을 감춘 채 현실에서 유추된 세계를 언어 미학적으로 구조화시키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의 시는 현실의 세계가 거의 거세된 채 상상력과 추체험적 인식들로 채워지는 은유 구조를 갖는다. 비록 생경스럽지만 우리 시의 관습에서 벗어나 현대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는 우리 시의 영역을 한층 더 넓히며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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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1946∼)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가을이 되면 소개해야지, 이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넣어 두었던 시가 이 작품이다. 이상국 시인의 이미지 자체도 쓸쓸하면서도 꽉 찬 느낌이어서 가을의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데 작품 중에서도 ‘국수가 먹고 싶다’는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가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국수가 국수답게 먹히는, 이런 가을 말이다.
 

 

제목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이 시는 국수 예찬론처럼 비치지만, 절대 그런 내용이 아니다. 이 시는 울고 싶다는 말의 국수 버전, 즉 눈물 대신 삼켰던 국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을은 풍요한 계절이기도 하지만 쓸쓸한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 하늘은 깊어서 더 멀어 보이고 가을 노을은 울음처럼 붉어서 마음의 응어리를 꺼내 놓은 듯하다. 바람은 차가워 빈손은 더욱 허전해져만 가고 이래저래 허전한 마음이 더욱 황량해지는 때가 요즘이다. 그런 가을의 심사, 꼭 계절적으로 가을이 아니래도 지극히 가을스러운 심사에 대해 이상국 시인은 ‘허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삶은 언제고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울고 웃는 순간의 연속이다. 이 시를 쓰게 된 날은 아마도 우는 날에 해당했나 보다. 시인은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게 되었다고 썼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식으로 마음을 다치고 보니 잘난 사람, 이긴 사람보다 조금 부족하고 역시 마음을 다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인처럼 순박하고 속이 훤히 보여서 남을 속이지도, 잘 이기지도 못하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시인은 그런 사람들 곁에서 뜨겁게 울고 싶다는 말을 국수가 먹고 싶다는 말로 대신했다. 서글프게도 나이가 들면 마음껏 울지도 못한다. 눈물 대신 콧물을 흘리며 뜨거운 국수를 먹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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