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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신론"을 알아보다...
2016년 11월 10일 21시 37분  조회:4376  추천:0  작성자: 죽림
 
20세기 2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와 량백화의 로신론(鲁迅论)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1)
 
위대한 사상가이며 문학가인 로신은 20세기 20년대부터 조선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한 시기 연구고조를일으켰고 그 맥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광복전 조선에서의 로신연구는 시기와 연구자에 따라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본문은 광복전 조선에서의 로신연구를 중심으로 하면서 조선에서의 로신연구의 일단을 짚어보는데 목적을 둔다. 
 
1.       량백화(梁白华)의 로신론과 《두발의 이야기》
 
 광복전 조선에서 처음으로 로신을 알게 된 것은 20년대 초기에 중국의 문학혁명이 조선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고대한문에는 익숙하나 현대한문에는 아직 숙련치 못한 당시 조선문인들은 처음에 일본을 통해중국의 신문화운동과 문학혁명에 접하게 되였다. 
 조선에서 최초로 로신을 소개한 문장은 량백화의 번역으로 된 《호적(胡适)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문학혁명》이였다. 이것은 일본의 중국문학연구학자 아오끼 마사루(青木正儿)의 문장인데 1920년 11월부터 《개벽》지에 4기로 나누어 련재되였다. 
 로신을 소개할 때 이 문장은 《소설로 로신은 미래가 유(有)한 작가이니 그 <광인일기>와 여(如)한 것은일(一)박해광의 경포적 환각을 묘사하야 지어금(至于今) 중국소설가의 미도(未到)한 경지에 족(足)을 입(入)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신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된다. 그뒤로 중국문학에 관계되는 문장이 속출되였는데 그런 문장들에서 로신이 간간 론의되고 있다. 
 20년대에 조선에서 가장 열심히 로신을 소개한 사람은 량백화(梁白华)이다. 량백화는 조선의 한학자(汉学者)로서 중국고전문학명작들을 연구, 번역한 동시에 중국신문학(新文学)에도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1924년에 그는 《개벽》지 제 44호에 《반(反) 신문학의 출판물이 류행하는 중국문단의 기(奇)현상》이라는문장을 발표하였다. 이 문장에서 그는 신문학의 허울을 빌어 신문학을 반대하는 《사이비(似而非) 신문학자》들과 《속(俗) 신문학》의 작품들을 비난하고 있다. 뒤이어 그는 중국문단에서 존경을 받아야 할사람들은 《주수인(周树人-로신) 형제 몇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시류(时流)》에 좇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있다. 
 량백화는 1929년에 《중국단편소설집》(개벽사)을 펴냈는데 자기가 번역한 로신의 소설 《두발의 이야기(头发的故事)》를 거기에 수록하였다. 이 소설에 대한 국내외 연구가들의 평가는 일치하지 않은데 중국의 리장지(李长之), 일본의 다께우찌 요시미(竹内好) 등 학자들은 실패작으로 보고 있다. (《竹内好全集》제1권 제88-89페지) 그러나 당시 조선문인들은 이 소설이 조선에 힘을 주었다고 인정하였다.  중국 신문학작품에 대한 이런 태도는 마치 로신이 일찍 일본 도꾜에서 문예지를 창간하기 위해 외국의 피압박민족의작품을 수집하면서 이런 작품들에는 《웨침과 반항》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 (로신:《남강북조집 ㆍ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가》) 
봉건시대에 조선인 남자들은 거개가 긴 머리태를 드리우거나 머리를 얹고 다녔다. 그러나 문호를 개방하고 서방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자 애국문화운동의 선구자들은 상투와 머리태를 잘라버릴 것을 적극 제창하였다. 이런 시대적 움직임 속에서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는 하는 수 없이 1895년에 전국에 단발령(断发令)을 내리였다. 이는 복고세력에 대한 한차례의 큰 충격이였다. 
 그러나 복고세력의 영향은 매우 커 20년대에 이르러서도 남자들의 상투와 머리태는 상당한 정도로 존속되여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신의 《두발의 이야기》가 조선문인들의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30년대에 정래동은 《두발의 이야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단발부단발(断发不断发)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일진회》 당시부터 최근까지 혹은 향촌에 있어서는 현금(现今)까지 가정 급(及) 일반사회에서 문제되였던만큼 중국의 그것과 공동한 정형을 볼 수 있어서 우리로서는 펵 흥미있는 작품들이다.》(《중국단편소설가 로신과 그의 작품》) 리륙사도 로신의 중요한 소설이라고 인정되는 소설을 9편만 렬거하였는데 그속에도 《두발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리륙사전집》 제11페지) 이로부터 《두발의 이야기》는 당시 조선문인들의 심목 중에 특수한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년대에 조선의 로신연구는 그다지 계통적인 것이 아니였고 신문, 잡지에서 간간 소개나 하는 정도였다. 작품 번역도 많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사이 번역된 로신소설로는 《광인일기》, 《두발의 이야기》,《아Q정전》,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다(伤逝)》 등으로 헤아려 볼 수 있다. (정래동:《중국단편소설가 로신과 그의 작품》) 그러나 많은 문인들은 중국 원작과 일본문 번역본을 통해 로신의 작품에 접할 수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으며 그들이 로신문학의 가치를 피상적이나마 리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 <조선언어문학 론문집>.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정래동(丁来东)의 로신론(1)
--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2)
 
 20세기 30년대 초반에 조선에서의 로신연구는 상대적인 고조기를 맞이한다. 이는 일본의 사정과 비슷하다.(刘柏青:<鲁迅与日本文学>. 제183페지, 제188페지)  30년대에 비교적 계통적으로 로신을 소개한 연구가들은 정래동, 신언준, 리륙사를 들 수 있다. 
 정래동(丁来东)은 일찍 일본 도꾜대성중학을 거쳐 중국 북경민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동아일보>사 학예부장 등 직을 담임한 사람이다. 그는 장기간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현대문학을 연구하였고 만년에는 서울대학교 중국문학과 주임교수를 담임하기도 했다. 
 정래동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로신 작품을 계통적으로 소개한 학자이다. 1931년에 그는 장편론문 <중국단편소설가 로신과 그의 작품>을 <조선일보>에 20기로 나누어 련재하였는데 여기에서 로신의 생애와 함께<납함(呐喊)>, <방황(彷徨)>, <야초(野草)> 등 작품집, 그리고 로신 작품의 예술적 특점이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어져 있어 로신관계 연구의 새로운 업적이라고 할만한 글로 인정되고 있다. 
 이 문장의 서두에서 저자는 <중국의 문예부흥이라고 하는 문학혁명을 호적, 진독수 등 제씨가 제창하였다고 한다면 문학혁명을 실행한 사람은 여기에 론하려고 하는 로신(본명은 주수인)일 것이다. >라고 높이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문학작품, 특히 단편소설을 능란한 백화(白话)로 쓰고…… 처음으로 새 형식과 새 내용과 새 체재를 창용한 사람은 곧 과거 10수년간 중국 문단에서 독보하다싶이 한 로신일 것이다.> <그의 작품이 일반 청년들에게 환영을> 받게 된 것은 <랭정한 필봉으로써 중국 인민의 보편적 성격을 폭로하여 일반 청년들에게 자성할 ‘힌트’>를 주었기 때문이다. 로신의 공적은 <전통적 봉건사상에 대하여 도전, 전승한 것이라 하겠으며 신흥 중국에 자성, 자기인식을 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래동은 이 문장에서 로신의 문학관을 전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허점도 드러내고 있을뿐만아니라 문학과 혁명의 관계에 대한 로신의 견해도 오해하고 있었다. 정래동은 이 문장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로신은 철두철미 문예는 혁명에 인연이 가장 먼 것임으로 암만 문학자가 혁명, 혁명하고 떠들어도 제3선의 전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여 왔었다.> 정래동의 이런 관점을 이 문장의 부제 <그의 시대는 지났는가>와 련관시켜 보면 그 사정이 더 분명해지는데 이는 중국혁명문학 론쟁에서 로신의공적을 부정하려는 경향에 대한 불만이였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이 문장은 또 소설과 산문시에 대한 분석 연구에만 치중하고 잡문은 별로 론하지 않고 있다. 이로부터 정래동이 당시에 로신의 잡문에 대한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로신의 사상발전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일부 관점에서 편차를 가져왔다는 론리가 성립된다. 사실 로신잡문에 대한 홀시는 20-3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한 결함이였는데 정래동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정래동의 이 론문은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리경손(李庆孙)은 1931년 2월 말에 <그 후의 로신—정군(丁君)의 로신론을 보고>라는 문장을 <조선일보>에 2기로 나누어 발표하였다. 리경손은 정래동의 로신론을 읽은 후의 감수와 곁들어 당시 항간에서 떠들던 로신의 일상 생활에 대한에피소트들을 두루 쓰면서 로신에게는 새로운 창작이 없다는 것을 거듭 지적하고 있으며 로신이 <좌련>에 참가한 것을 시답지 않다는 투로 가볍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는 결말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장)자평, (욱)달부, (곽)말약, 로신 등은 옛사람들이요, 그중 (곽)말약, 로신만이 재생하였으나 그보다도신인으로 문단을 움직이고 있는 이가 더 많음을 일반 중국문학연구인께 일러둔다.>
 리경손은 장자평 숭배자이다. 그는 장자평의 장편소설 <최후의 행복>을 번역한 후 <역자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장)자평은 중국 신문예운동의  공로자로…… 중국서 시인에 곽말약이요, 소설에 장자평이라 하야 이 정평대로 그는 사계(斯界)의 제일인자이다. …… 재작년(1929년) 이래 중국에도 좌우파의 소동이 있으나 신파인 좌편에 안즉 완성된 건필(健笔)이 없니만치 자평의 형세를 누르기는 안즉 시세가 멀다하리라.>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리경손은 장자평을 로신보다 더 월등한 것으로 보았고 정래동의로신론에 대해서도 관점상 다소 별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래동은 그 뒤에도 중국현대문학연구에 전력하면서 로신관계 론문을 거듭 펴냈다. 1932년에 그는 중국평론가 화간(华侃)의 문장 <최근 중국문학의 새 경향>을 번역하였다. 이 문장은 소설창작에서 로신이 첫째, 소품문 창작에서는 주작인이 첫째, 로신이 버금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정래동은 <역자의 말>에서 이론문은 지나간 중국문단을 총화함에 있어서 루락이 없고 편견이 없는 귀중한 문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 <혜성> 제2권 제4호)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조선언어문학 론문집>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정래동의 로신론(2)
--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3)
 
 1934년 정래동은 《중국문학과 조선문학》이라는 문장을 발표하여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중조 두 나라신문학(新文学)의 특점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의 현대소설 개척자로는 각각로신과 리광수(李光洙)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에 류학갔고 일본문단을 통해 로씨야문학을 수용하였다.그런데 로신은 주로 체홉을 배웠고 리광수는 주로 똘스또이를 배웠으며 로신은 자연주의작품을, 리광수는 리상주의작품을 창작하게 되였다. 
 정래동은 조선의 개별적인 문인들이 일본의 로신연구 문장을 번역, 소개할 때 맹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불만을 표하였다. 그는 일본의 《개조》지의 문예시평이 일본문판 《로신전집》을 소개할 때 로신작품을 《프로작품》이라고 한 것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로신은 3,4년전부터 맑스주의화한 것이 사실이다. …… 그전 작품 ‘납함’, ‘방황’ 등은 조금도 현재 맑스주의작품에 맞출조건이 없다. …… 로신의 ‘납함’, ‘방황’은 맑스주의에 들어맞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맑스주의자로전변하기 이전의 작품들이다.》 (《조선문학》 제2권 제1호) 이로부터 정래동은 로신을 중국 신문학의 개척자로 긍정하였지만 로신의 문학성과를 맑스주의와 련관시키는 데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4년 3월에 정래동은 《중국 문예작품 중에 나타난 농촌의 변천》이라는 문장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서 비교연구방법으로 로신의 《고향》과 파금(巴金)의 《환향(还乡)》(중국 《현대》지, 1933년)을비교, 분석하고 있다. 이 글에서 정래동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고향》과 《환향》은 모두 지식인이 자기의 고향에 돌아가 목격한 바를 묘사한 작품인데 《고향》은 소극적인 회억으로 농촌을 묘사했고 《환향》은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한 농민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두 작가가 부동한 태도로 변해가는 농촌의 시재적 풍모를 관찰하고 있다고 정래동은 파악하고 있다. 《고향》 창작 시 로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였고 그에게는 아직도 허무주의경향이 있었으며 문학표현방식은 자연주의적 방법이였다. 반면에 파금은 원체 무정부주의자였으므로 창작상 흔히는 《격동적 사실주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조선《중앙》 1934년 3월호)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정래동이 로신의 전기 창작방법을 자연주의라고 거듭 강조한 것인데 이는 20-3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에서 보여지는 독특한 견해의 하나이다. 20년대 조선의 문학가들에게 있어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뚜렷한 것이 아니였다. 그들이 리해한 자연주의문학이란 《진실》을 추구하는 것, 다시 말하면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였다. 자연주의문학이 보여주는 현실은 대체로 일상생활의 암흑면과 인간성의 리면에 매장되여 있는 야수와 같은 성격들이였다. 주인공은 위대한 인물이거나 영웅인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이거나 무지한 군중이였다. 묘사에 있어서는 과학적이며 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로신의 소설을 평가한 결과 그들은 로신의 창작방법은 자연주의라는 결론을 얻어냈다. 정래동은 로신소설의 창작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아Q정전’에 나타난 로신의 공로는 과학적 태도로써 중국 신해혁명 당시의 사회를 관찰하고 해부하였으며……당시 중국 국민성의 일면을 잘 표현하였다. 곧 문예상 술어를 쓴다면 중국문단에 자연주의를 수입한것이였다. 이것은 성방오(成仿吾) 씨가 《납함의 평론》에서 말한 것과 같이 로신이 일본에 류학할 당시에 일본문단에 성행하는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로신은 혁명 당시의 위인(伟人)들을 그리지 않고 농촌의 평범한 사람 즉 아Q 같은 사람을 그리고 또한 자기 리상한 사회나 사실을 그리지 않고 중국 어디나 있는 농촌 즉 미장(未庄)같은 곳을 배경으로 하며 인간대사를 쓰지 않고 인간사사(些事)인 아Q의 전승, 단발부단발(断发不断发) 등 일상 사실을 쓰는 것이 다른 자연주의자들이 범한 것과같이 병적 심리, 병적 인물을 그리게 된다.》(《중국단편소설가 로신과 그의 작품》) 그런데 사실상 로신은 일본 류학 시에 벌써 자연주의문학을 그닥 찬성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연주의를 배격한 작가 나쯔메 소우세끼(夏目漱石)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刘柏青《鲁迅与日本文学》 제 76페지)
 여하튼 정래동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전문적인 테마로 로신을 연구했고 그후 몇편의 론문에서도 로신이중국신문학에서 으뜸가는 우수한 작가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그후 시기 조선에서의 로신연구에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조선언어문학 론문집》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신언준(申彦俊)의 로신론
--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4)
 
1934년 조선 《신동아》지 제4기에 신언준의 《중국의 대문호 로신 방문기》가 발표되였다. 이것은 20-3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에서 매우 돋보이는 문장이다. 신언준은 30년대 초기 조선 《동아일보》사 중국 주재 특파기자였다. 그는 일찍부터 로신을 숭배하면서 로신과 만나볼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가 상해에 있을때 로신은 국민당 당국의 체포령으로 하여 처지가 매우 위험하였다. 그러나 채원배(蔡元培)의 소개로 그는 1933년 5월 22일에 로신과 대면할 기회를 가지였다. 
 신언준은 로신이 자기와의 면회를 약속하는 친서를 공개하였는데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언준 선생, 편지를 받았습니다. 월요일(22일) 오후 2시에 우찌야마(内山) 서점에서 기다리오니 광림하시길 바랍니다. 문장에 관해서는 평소에 조선문단의 상황을 잘 모르기에 망설이고 있는데 아마 쓸 것 같지 못합니다.그러나 이 일을 그날에 면담할 수 있습니다. 이에 회답을 하옵니다. 로신 드림. 5월 19일》
신언준은 로신과 면담한 후 《중국의 대문호 로신 방문기》라는 글을 썼다. 《로신—중국이 낳은 ‘동양의 대문호!’ 그의 이름은 들은 지 오래다. 그러나 면회해 볼 기회는 없었다.》 《(그는) 마치 메스를 들고…… 환부를 해부하는 괴의생(怪医生) 같이 보이였다. …… 그의 해부는 랭혹무정하지만 그의 메스의예첨(锐尖)이 찌르는 곳은 아프면서도 통쾌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알었다.》
 신언준은 로신의 피신처에서 그의 검소한 살림살이를 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로신의 옷차림은 《순전한 향촌 로농인(老农人)》이였고 침대, 이불, 그릇까지도 《중국 하층민의 생활 그대로이고 돈길 갈만한 값있는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생활은 전부가 프로레타리아의 모형이다.》 《(로신은) 중국유일의 최고봉의 수입을 가진 작가로서 그의 일신 생활이나 호화롭게 살기는 어렵지 않을 터인데 그의 생활은 향농(乡农)의 생활이다. 그의 수입은 문화운동 단체에 전부 기부한다고 한다.》 신언준은 이렇게 로신의 일생생활에 대해 쓰면서 그의 대공무사한 정신을 찬양하고 있다. 
 신언준은 《중국의 대문호 로신 방문기》에서 일문입답의 형식으로 로신이 문예사업에 종사한 동기, 《아Q정전》의 창작과정과 당시 중국문단의 현상태에 대한 담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문: 선생은 문학이 위대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그렇습니다. 대중을 깨우침(唤醒함)에 대한 가장 필요한 기술이오이다.
 문: 남들이 선생을 인도주의라 하니 그럽니까?
 답: 그러나 나는 톨스토이나 깐디같은 인도주의는 절대 반대합니다. 나는 전투를 주장합니다.    
 문: 중국문단의 대표적 프로작가는 누구인지요?
 답: 정령(丁玲)녀사가 유일한 프로레타리아 작가지요. 나는 소자산계급의 출신이므로 프로레타리아작품을 짓지 못합니다. 나는 다만 좌익편의 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로신이 여기에서 정령에 대해 이처럼 높은 평가를 하게 된 것은 당시 정령이 국민당 당국에 의해 피살되였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 아닌가고 필자는 추측한다. 
신언준과의 담화에서 로신은 중국 지식인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개석(蒋介石)이 중국혁명을 령도하지 못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산계급의 문인의 의식은 무용의 몽환이 되였다. 》 이에 신언준은 로신이 《자산계급의 문인의 몰락을 설파하고 프로문학의 발흥을 력설하여 좌익문호의 본색을 폭로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언준은 조선에서 로신을 좌익작가로 점찍고 그 생활의 무산계급화 및 문화운동에서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문화인이다. 30년대 초반기의 조선에서 이처럼 로신을 높이 평가할 수 있은 것은 실로 경하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조선언어문학 론문집>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리륙사(李陆史)의 로신론(1)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5)
 
 20세기 3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에서 다른 하나의 중요한 론문은 리륙사(李陆史)의 <로신 추도문>(<리륙사 전집>에서는 <로신론>으로 고쳤음)이다. 이 문장은 로신이 서거된 4일 후인 1936년 10월 23일부터 <조선일보>에 5기로 나누어 련재되였다. 이 문장의 집필속도의 빠름과 내용의 광범성은 당시 조선의 로신연구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리륙사(1904- 1944)의 본명은 리원록(李源禄)이며 리활(李活)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1926년 이후 중국 북경에서 여러 해 공부하였다. 그는 조선 민족주의 혁명단체인 의렬단에서 반일투쟁에 종사하면서 중국사회 정치국세와 중국현대문학에 대한 연구에 집념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창작에 종사하여 시집 <광야>를 펴냈다. 
 리륙사의 자술에 의하면 1933년 6월 양행불(杨杏佛) 추도식에서 다른 사람의 소개로 로신을 만나보았다한다. 후에 그는 반일운동에 참가했다는 리유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여 투옥되였다가 1944년에 북경감옥에서 병으로 옥사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조선(한국)에서는 리륙사를 죽어도 굴하지 않은 <저항시인>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리륙사는 중국현대문학연구에서 주로 로신, 서지마(徐志摩)에 치중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특히 로신을숭배하였다. 때문에 그의 조카 리동영 교수는 70년대에 리륙사의 사상은 어느 정도로 사회주의 계통에 속하며 아마 그 자신이 한국의 로신이 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한국현대문학사 탐방> 제 290페지)
 <로신 추도문>에서 리륙사는 로신과 만났을 때의 정경과 그의 부고를 접했을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쓰고 있다. <그때 로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큼 다만 근신과 공손할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였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 시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노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서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여기에서 로신에 대한 리륙사의 경모의 감정은 신언준보다 더 강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리륙사가 로신에 대해 이런 경모의 감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로신연구는 경향성이 선명하다. 그는 로신을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끼>, <문화의 전사>라고 찬양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의선명한 경향성이 보여진다. 
 리륙사는 <로신 추도문>에서 <아Q정전>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는데 그 분석은 대체로 정래동, 신언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리륙사는 <광인일기(狂人日记)>를 분석하는 데 각별한 주의를 돌리면서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로신의 백화소설 <광인일기>가 발표된 후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 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그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도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페를 통매하였다.>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은 <당시에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순결한 청년들에 의하여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로신을 가리킴—필자 주)의 리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아Q정전>을 분석하면서 리륙사는 또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로신을 리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먼저 ‘아Q정전’을 리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유명한 ‘아Q정전’이 련재되면서부터는 로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일인적 작가>였기 때문이였다. 리륙사는 아Q성격을 분석한 후 그 성격의 보편성을지적하면서 공을기와 같은 지식인들도 류랑농민 아Q와 일맥상통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뒤이어 그는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Q시대’였으며 로신의 ‘아Q정전’이 발표될 때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아Q상(相)’이라거나 ‘아Q시대’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에 남겨놓은 로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개의 재료>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해 1월에 리광수(李光洙)는 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와 같은 빛나는 사시적 작품을 창작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반면적인 례로 로신을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로신의 ‘아Q’나 ‘공을기(孔乙己)’는 로신의 소설가적 재분의 표현으로는 영광일는지는 모르나 그 꽃을 피게 한 흙인 중국을 위하여서는 수치요, 모욕이다. …… 관우, 장비는 아Q와 공을기로 퇴화해 버린 것이다.>(<조선일보> 1936년 1월 6일)이러한 견해는 조선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여기에서 리광수는 본의가 여하하든지간에 로신의 창작동기와 그 효과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 반면에 리륙사는 <아Q정전>의 현실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실로 수많은 아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로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로동층들은 남경로(南京路)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서 흔들리는 것을느끼며 시고탑로 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조선언어문학 론문집>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리륙사의 로신론(2)
--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6
)
 
 리륙사는 남달리 로신 잡문을 중시했고 로신의 사상발전에 대한 연구에 중시를 돌렸다. 정래동은 로신의문학이 혁명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설명하려 했지만 리륙사는 로신이 국민성을 개조하고 봉건제도를 개변하려는 목적에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조선문단에서 일으킨 예술과 정치에 관한 론쟁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로신에게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데서 문호 로신의 위치가 높아갔고 아Q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뿐더러 리륙사는 《이이집(而已集)》의 잡문을 리용하여 로신이진화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에 들어섰다고 찬양하고 있다. 
 중국 태양사의 비평가 전행촌(钱杏邨)이 로신을 공격한 데 반해 리륙사는 로신의 《상해문예일별》, 병신(茅盾의 필명- 필자 주)의 《’5.4’운동의 검토》 등 문장의 내용을 인용하여 로신을 부정하려는 견해를반박하고 있다. 
동시에 리륙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민당의 구테타로 하여 상해에 모여 온 《원기왕성한》 《젊은프로문학자》들이 극좌적인 테도로 로신을 공격할 때 로신은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하여 아버지 같은 애무로써 푸레하노프, 루나차르스키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였다. 
 리륙사는 북양군벌 정부와 국민당 당국이 로신을 박해한 데 대해서도 통분해 마지않았다. 그는 로신의창작 생애가 너무 짧은 것을 한탄하면서 로신이 후기에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된》 원인은 반동정권이 악렬한 환경을 조성하여 로신으로 하여금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에 더 바쁘게》 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로신에 대해 편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로신의 후기에 창작원천이 고갈되였다고 하는 의론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리륙사는 반일 투사였기에 전공자들처럼 로신연구에 종사할 수 없었다. 《로신 추도문》은 로신을 추모하기 위해 총망히 집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작자는 이 문장의 결말에서 《문호, 로신의 륜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참괴히 알며 붓을 놓기로 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문장의 내용과 구성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리륙사는 정확하게 로신의 작품을 해석하려 하였고 로신 생애와 사상에서 나타난 중요한 발전단계를 비교적 전면적으로 제시하려 하였는데 이것은 인정받아야 할 바이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조선언어문학 론문집>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후일 계속)
카프 등 좌익작가들의 로신론
--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 개황(7)
 

 조선의 프로레타리아문학운동은 비교적 일찍 전개된 편인데 1925년 8월에 이미 《조선프로레타리아문학운동》(《카프》)이 창립되였다. 그러나 20-30년대에 조선의 좌익 문예비평가나 좌익작가들은 로신연구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이는 일본문단의 상황과 대체로 비슷하다.(刘柏青:《鲁迅与日本文学》) 단조선의 저명한 좌익작가 한설야(韩雪野)만은 1936년 8월에 쓴 《고향에 돌아와서》라는 문장에서 자기가 3부작 《탁류》, 중편소설 《귀향》, 장편소설 《황혼》을 쓸 때 로신의 《고향》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현대조선문학평론집》 제137페지)
 로신의 명망이 조선 인민들의 마음 속에서 날로 높아지자 많은 진보적인 조선청년들이 로신과 만나볼 것을 갈망하였다. 신언준, 리륙사를 제외하고도 또 리유관, 김구경, 류수인 등 몇 사람들이 로신을 만나보았다. (李政文: 《鲁迅在朝鲜》 ) 이밖에 중국 《좌련》 회원인 조선사람 김담연도 왕지지 등 사람들을 통하여 로신과 련락을 맺었다. (두원명:《외국에서 본 장천익 작품》, 《新文学史料》 1982년 제3기) 이런 사람들은 부동한 정도로 조선인민들에게 로신을 소개하였다. 
30년대 말부터 일본이 패전하고 투항하기까지 조선은 가장 암흑한 시기였다. 당시 일곱 가지 로신문집이금서로 인정되였다.(《일제 금서 33권》 신동아사) 그리고 리륙사와 같은 로신연구자들이 체포, 투옥되였기에 한 시기 고조에 이르렀던 로신연구도 정지되고 말았다. 광복 후에야 로신연구는 새로운 모습으로 맥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론의는 본문의 범위가 아니므로 략하기로 한다. 
 
요컨대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는 비교적 일찍 시작되였지만 20년대에는 단편적인 평론에 그쳤고 계통성이 결여한 사정이다. 30년대 초반기에 이르러 로신연구는 상대적으로 열을 올리고 있는데 그 주요 연구자들로는 학문적 립장에서 다각적으로 로신을 다룬 정래동이 있는가 하면 경모의 정으로 로신의 위대한공적과 빛나는 인격을 열정적으로 소개한 신언준, 리륙사 등도 있다. 그들에 의해 20-30년대 조선의 로신연구는 학문연구의 차원에 진입하였고 그후 각 시기의 로신연구의 기반과 터전이 마련되였다. 
 
[김병활. 1997. 광복전 조선의 로신연구개황. 《조선언어문학 론문집》 연변대학 조문학부 편.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P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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