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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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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라, 당신의 심원한 일부와 함께 비상하라...
2016년 11월 26일 21시 26분  조회:3152  추천:0  작성자: 죽림
 

 
 
언젠간 읽고말거야, 테드 휴즈의 시작법
 
테드 휴즈의 시작법, (시작하는 방법이 아니라, 詩를 作하는 法이다. 연애를 시작하는 법, 뭐 이런 거 아니다.) 한번 읽어봐야 할...
 
시인 지망생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읽고 나서 보니, 꼭 읽어볼만한 책이 맞다. 꼭 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시적 감수성이나 글쓰기, 생각하기 등 여러모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이다. 학생들을 위해서 쓴 책인데, 실제로 학생들이 읽으면 참 좋을 책이다. 문제는 학생들은 이런 책 읽을 여유가 없다는 거.
 
어줍잖은 방법론이 아닌 근본적 접근
 
책 구성도 상당히 흥미롭다. 시를 쓰는 법 혹은 글쓰기에 대한 방법이나 기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동물과 시, 바람과 기후, 사람들에 관한 글쓰기, 생각하는 법, 풍경에 대한 시 쓰기, 산문 쓰는 법, 주변 인물에 관한 글쓰기, 달에 사는 (환상 속의) 생물에 대하여 등 글쓰기를 위한 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부분들을 다룬다. 이 흥미진진한 주제들에 대해 장황하지 않게 엑기스만 전해준다. 그렇다고 쪽집게 과외는 아니다.
 
백 가지 설명보다 시 한 편으로 주제를 전달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핵심과 뼈대 위주로 전달하고는 바로 시를 소개한다. 해당 주제에 관해 생각해볼만한 시를 선별해서 수록했다. 시에 대한 구차한 설명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 주제를 알려줬으니 한번 음미해보라는 식이다. 시를 이해하는 법은 시를 그대로 호흡하는 것이고, 한번 읽어서 잘 모르겠으면 설명이 필요한 게 아니라 느껴질 때까지 다시 호흡하는 것이다. 라고 테드 휴즈가 말한 건 아니고, 그냥 내가 한번 해본 말이다. 말하자면, 돌팔이 처방.
 
원서보다 번역본이 더 좋은 점
 
원서는 Poetry in the Making인데, 영어로 시를 쓸 계획이 아니라면 굳이 원서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난 안 읽어봐서 모른다. (영어를 못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겐 번역본이 원서보다 좋은 점이 있는데, 역자인 한기찬 시인이 주제에 부합하는 비교 한국시들을 각 장마다 몇 편씩 수록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오소리, 파리, 모기, (에프킬라..는 아니고..) 당나귀, 나의 고양이 죠프리, 알프레드 코닝 클라크 등 도무지 와닿지 않는 번역시들만 있는 것보다는, 화사, 풀, 풀잎, 남사당, 성북동 비둘기, 해, 별 헤는 밤 등의 주옥같은 시들을 비롯한 잘 와닿는 우리 시들이 더 반갑다. 각 장의 주제와 비교적 가까운 시들이 수록되어 한번 음미해볼 만하다.
 
상상하라, 나의 심원한 일부와 함께 침잠하라
 
"이제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라는 순 뻥에 가까운 홍보문구가 뒤표지엔 적혀 있지만, 테드 휴즈가 본문에서 실제 숙제로 내는 건 소설 쓰기다. 생각하고 표현해보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해보는 것과 글로 옮겨보는 것은 천지 차이기 때문이다. 생각도 그냥 해선 안된다. 낚시할 때 추를 뚫어지게 보면서 그것과 연결된 물 속 세상 전체를 머리 속에 생생하게 그려보듯이, 에너지를 모아서 쏟아부으면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동물도 풍경도 바람까지 깊이 느끼고 생각해서 표현해보도록 가이드한다. 텅 빈 사고가 아닌 생명으로 가득찬 사고를 해야 하고, 흩어지려는 사유를 붙들어 움켜쥐고 깊숙이 침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게 시작법이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나는 내가 동물들의 삶을 휘저은 데 대해 나 자신을 꾸짖었다. 나는 동물을 동물들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 그리고 거의 그와 같은 시기에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p.23)
 
낱말이 생명적이며 시적인 것은 바로 낱말 속에 있는 이 작은 마귀 때문이며 시인이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바로 이 작은 마귀인 것이다. (p.25)
 
당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과 더불어 살아보라. 마치 마음으로 산수셈이라도 하듯 그것을 힘들여 생각하지는 말라. 단지 그것을 바라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귀기울여 보고, 스스로 그것의 속으로 침잠하라. (p.25)
 
시는 사상이나 일시적인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찰나적으로든 영구적으로든 간에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변화케 하는 경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p.45)
 
글쓰기의 전기술은 당신의 독자의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일인 것이다. (p.67)
 
어떤 것이 여러분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상상력으로 움켜쥐고는 그것의 모든 조각조각을 조사할 때까지 놓아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남아 있어서 존속하려고 들지 않는다. (p.90)
 
삶조차도 더욱 흥미로운 것으로 되는데 왜냐하면 글쓰기가 우리 대부분에게 가르쳐 주는 한 가지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 사물들을 밀접하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필요한 만큼 그것들을 깊이 이해하고 있지도 않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p.142)
 
(어떻게 해야만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직 진실로 여러분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재미있게 쓰면 된다는 것이다. (p.153)
 
이런 참된 관심들, 즉 여러분이 그것에 대한 진정한 개인적 감정과 진정한 경험을 갖게 되는 것들은 여러분이 쓸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 그래서 글을 쓸 때 여러분은, 단순히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지난 주에 들었거나 어제 읽은 것-과 여러분의 삶에 있어 심원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사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따라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있어서도 오로지 생명력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p.157) 
==================테즈 휴즈  <시작법>=========

제 1장 동물과 시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잡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동물들을 잡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차 이러한 열정이 식어가기 시작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동물을 잡는 일과 시를 쓰는 일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내게 이 두 가지 일에 대한 관심은 동일한 것이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어릴 때 볏가리에서 짚단을 들어낼 때마다 그 밑에서 생쥐를 잡아 서른 마리나 마흔 마리가 내 코트 안감 속을 기어다닐 때까지 주머니 속에 집어놓곤 했던 쥐사냥과 현재의 내 시쓰기는 내게 마치 같은 정열의 다른 단계인 것처럼 여겨진다.

어떤 면에 있어 나는 시를 일종의 동물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시는 동물과도 같이 생명을 지닌다. 이 말은 시가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심지어 그 시를 쓴 시인에게서도 완전히 독립해 있어 그 시에 다른 것을 첨가하면 상처를 입거나 나아가서는 죽어버리고 만다는 뜻이다.

또 시에는 지혜도 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것…우리가 매우 알고 싶어하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내 관심은 어떤 특정 동물을 잡거나 특정 시를 쓰는 데 있지 않고 단지 나의 외부에서 그것 나름의 생생한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을 잡는 데 있었던 것 같다.
(중략)

나는 광부나 철도직원의 아들 같은 도시아이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그들과 함께 또 하나의 생활을 영위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전원에서 나 자신의 생활을 누리며 보냈다. 한두번의 불운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이 두개의 생은 서로 뒤섞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당시에 썼던 일기장을 갖고 있는데 거기에는 사냥 이야기만 적혀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15세가 되자 내 생활은 더욱 복잡해졌고 동물들에 대한 나의 태도도 변했다. 나는 내가 동물들의 삶을 휘저은 데 대해 나 자신을 꾸짖었다. 나는 동물을 동물들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의 그와 같은 시기에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 쓴 것은 동물시가 아니었다. 동물시라 불릴 만한 것은 몇 년 후의 일이었고 시쓰기가 어렸을 때의 동물 사냥의 부분적인 연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보다 더 더 나중의 일이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 마음 속에 새로운 시 한편을 움트게 하는 특이한 흥분, 가볍게 도취된 채 아주 무심결에 이루게 되는 집중, 그런 다음엔 윤곽, 부피와 색채와 깨끗이 마무리된 형태, 평범한 무생명체의 한가운데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실체, 이 모두는 너무도 친숙해서 오인할 여지도 없는 것들이다. 이것이 사냥이며, 시는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 여러분 자신의 생명 외부에 있는 생명을 지닌 새로운 종인 것이다.

지금 나는 시쓰기에 있어 내 관심의 근원과 성숙이라고 믿는 바를 간략히 말했다. 당신은 몇 가지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어떻게 비 속의 산책에 대해 쓴 시가 동물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일까? 글쎄 아마 그건 기린이나 낙지, 그밖에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어떤 동물과도 비슷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그것을 하나의 정신이 움직이게 만드는, 살아 있는 부분들의 총합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 살아있는 부분들이란 낱말이며, 이미지며 리듬이다. 정신은 그 부분들 모두가 함께 움직일 때 그 속에 거주하는 생명인 것이다. 부분과 총체인 정신 중에서 어떤 것이 먼저 오는지를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부분들이 모두 죽었다면..당신이 그 작품을 읽을 때 낱말이나 이미지나 리듬들이 뛰어올라 살지 못한다면..그 생명체는 상한 것이고 그 정신은 병든 것이다. 그래서 시인으로서 당신은, 당신이 관할하는 모든 부분들, 낱말과 리듬과 이미지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난점이 시작된다. 우선 최초의 규칙들은 상당히 단순하다. 살아있는 낱말들이란,째깍이나 낄낄처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 주근깨나 엽맥처럼 볼 수 있는 것, 식초나 설탕처럼 맛볼수 있는 것, 가시나 기름처럼 만질 수 있는 것, 타아르나 양파처럼 냄새맡을 수 있는 것 따위다.

즉 직접적으로 우리의 오감 중 어느 하나의 감각에 속할 수 있는 낱말들인 것이다. 아니면 <탁 때리다>나 <균형르 잡는다>처럼 움직이고 근육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낱말들이 살아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째깍>은 소리만을 줄 뿐만이 아니라 혀로 <째깍>이라고 발음할 때와 같은…날카로운 동작에 대한 개념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 낱말은 또 딱 소리를 내는 나뭇가지처럼 가볍고도 부서지기 쉬운 물체에 대한 느낌도 준다. 무거운것도, 부드럽고 구부러지기 쉬운 것도 째깍 소리를 내지 않는다.

같은 식으로 타아르는 코를 찌르는 냄새만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텁고 빽빽하며 끈끈해서 만지기에 끈적끈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 그것은 부드러울 때에는 검은 뱀처럼 움직이며 아름답고도 검은 광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 낱말은 다른 많은 낱말들과 연관된다. 마치 각각이 눈과 귀와 혀를, 혹은 귀와 손가락과 움직일 수 있는 몸체를 갖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여러 개의 감각에 속하는 것이다. 낱말이 생명적이며 시적인 것은 바로 그 속에 있는 이 작은 마귀 때문이며 시인은 바로 이 작은 마귀를 다뤄야 한다.

(중략)
좋지 않은 시에서는 바로 이러한 일이, 말들이 서로를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다행히도 한 가지만 해낼 수 있다면 그런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 한가지란 당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과 더불어 살아보라. 마치 마음으로 산수셈이라도 하듯 힘들여 생각하지는 말고, 그것을 바라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귀기울여 보고, 그 속으로 침잠하라. 이 일을 해내면 말은 마술처럼 스스로를 보살피게 된다. 이때 당신은 쉼표라든가 종지부, 또는 그런 류의 것 때문에 고심할 필요는 없다. 낱말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다. 오직 당신의 눈, 귀, 코, 미각, 촉각, 전존재를 당신이 침잠하고 있는 사물을 향해 계속 나아가게 하라.

(중략)또 그 낱말이 아무리 낡았다 하더라도 당신이 그 낱말을 쓰는 그 순간 올바르게 여겨졌다면 스스로 놀라게 될 것이다. 자기가 써놓은 것을 죽 다시 읽고 나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당신은 하나의 영혼, 하나의 생물을 잡았을 것이므로.    

이제 몇 가지 실례를 제시하겠다. 내가 산채로 잡지 못했던 짐승 중에 여우가 있다. 두번을 실패했는데, 한번은 내가 잡은 여우새끼를 가지러 가기 전에 농부가 그것을 죽여버려서, 그리고 또 한번은…(중략)

몇 년뒤 나는 런던의 쓸쓸한 하숙방에서 눈오는 밤 늦게까지 앉아 있었다. 일년 동안이나 아무것도 쓰지 못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어떤 것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불과 몇 분만에 다음의 시를 썼다. 이는 내가 처음으로 쓴 동물시이다.


나는 상상한다, 이 한밤의 순간의 숲을.
무엇인가가 살아있다
시계의 고독 곁에서
그리고 내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는 이 텅 빈 백지 곁에서.

창 밖에는 어떠한 별도 보이지 ㅇ낳는다
한결 가까운 무엇인가가
어둠 속 더욱 깊은 곳에서
고독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차갑게, 어둠 속의 눈발처럼 섬세하게,
여우의 코가 스친다, 가지를, 잎새를,
두 눈이 하나의 동작을 돕는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나무사이 눈 속에 깨끗한 자국을 찍으며.
그리고 조심스레 개간지를 대담하게 가로질러 온
절름거리는 그림자가
그루터기 곁에 움푹 들어간 곳에서

꾸물거린다. 하나의 눈
넓어지며 깊어지는 녹색,
번쩍거리며, 집중하여,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며

그때, 갑작스레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고
여우는 머리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들어온다.
창에는 여전히 별이 없다, 시계가 째깍거린다,
백지는 채워졌다.

-생각속의 여우



이 작품은 의미라고 쉽사리 불릴 만한 것이 없다. 이 시는 확실하게 여우에 대한 시지만, 그 여우는 여우인 동시에 여우가 아니다. 대체 어떤 여우가 개들이 짖어도 미소지으며 내 머리 속으로 걸어들어올 수 있을까…추측컨대 아직도 그 여우는 내 머리속에 앉아 있으리라. 그것은 여우이기도 하고 영혼이기도 하다. 그것이 진정한 여우인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을 때 난 여우가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여우가 발자국을 찍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림자가 눈의 고르지 못한 표면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본다. 낱말들이 이 모든 것을 보여주며 여우에게로 가깝게 나를 데려간다. 그 여우는 매우 사실적으로 여겨진다. 언어는 여우에게 육신과 그것이 걸어다닐만한 장소를 부여한 것이다.

(중략)내가 언어 속에서 진정한 여우를 사로잡지 못했다면 나는 이 작품을 남겨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략)실제로는 그 시를 읽을 때마다 여우는 어둠 속에서 다시 나와 내 머리 속으로 걸어들어 오곤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죽고난 뒤 오랜 뒤에도 그 시의 사본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 그 작품을 읽을 때마다 여우가 어둠의 어느 곳으로부터에선가 일어나 그에게로 걸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여우는 몇 가지 면에서 평범한 여우보다 좋다. 영원히 살아갈 것이며 굶주림이나 사냥개 때문에 고통받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여우를 내가 가는 곳 어디든지 데리고 다닌다. 나는 여우를 만든 것이다. 아주 선명하게 상상함으로써 그리고 살아 있는 언어를 찾아냄으로서.

(중략) 나는 어린 시절 아주 작은 호수, 실제로는 커다란 연못에서 주로 낚시를 했다. 이 연못은 한군데 아주 깊은 데가 있었다. 때때로 무더운 날에는 수면 가까이 철로 침목처럼 생긴 것이 떠 있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거대한 창꼬치였다.

(중략) 최근에 나는 창꼬치 낚시를 하고 싶었지만 갈 형편이 아니었는데, 며칠이 지나 그 낚시의 형언키 어려운 즐거움을 상기하고 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중략) 나는 바로 창꼬치를 사로잡은 것이 아니고 내가 낚아 본 일조차 없는 그 괴물이 살고 잇는 연못 전부를 사로잡았다.

여기 내가 창꼬치라고 제목을 붙인 시가 있다.

삼 인치의 가시, 모든 부위가
완전한 가시, 금빛이 얼룩진 녹색.
나면서부터 살인자, 짖궂은 늙은 미소.
파리 떼 사이로 수면 위에서 춤춘다.

혹은 움직인다, 자신의 위엄으로 겁주며,
에메랄드빛 연못 바닥 위, 잠수함의
우아하고도 소름끼치는 그림자 던지며.
백 피이트의 그 세계 속을.

연못 속, 더위 먹은 수련 잎사귀 아래-
움직이지 않는 어둑한 그림자.
지난 해의 검은 잎새 위에 누워 하늘을 본다.
혹은 잡초 사이 호박색 구멍 속에 떠 있다.

턱에는 갈고리 모양의 집게와 엄니
지금도 변치 않았던 것이다.
도구에 지배된 삶.
아가미는 조용히 반죽한다, 그리고 가슴 지느러미도.

먹이로 유리병 속에
삼인치, 사인치, 사인치 반짜리
유어들을 넣어 수초 속에 묻어놓자마자-
삽시간에 두 마리가 나타났다. 마지막 한 놈은

늘어진 복부와 타고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정말 그놈들은 아무에게도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2피이트가 넘는, 각각 6파운드 짜리 두마리,
분홍바늘꽃 사이에서 의기양양하며 인정머리 없고 죽은 듯한-

한 놈이 아가미로 다른 놈의 목덜미를 밀어붙인다.
튀어나온 눈알이 응시한다, 죔자물쇠처럼-
눈알 속에도 예의 그 쇠붙이가 있지만
그 막은 죽음 앞에서 오무라든다.

내가 낚시질한 연못은 지름이 50야드, 그 속의
수련과 활기찬 잉어들은 그것을 길러준
수도원의 눈에 보이는 어떤 묘비보다도
오래 살아남았던 것이다-

전설의 깊이에 멈춰서서.
그것은 영국 만큼이나 깊다. 그것은
움직이기엔 너무나 거대하고, 또 너무 거대하고 늙어서
땅거미 지면 감히 낚시줄 던질 수 없는 창꼬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낚시를 던졌다
무엇이 움직일지 어떤 눈이 바라볼지
두려워 머리가 오싹해져서.
정적이 어두운 연못 위에서 튄다,

밤의 어둠 아래의 어둠이 풀어놓은
꿈보다도 내 귓전에 부서지기 쉬운
부초를 침묵케 하는 부엉이들,
그런데 그것은 천천히 치솟아 내게로 다가왔다, 응시하며.


==========풍경에 대한 시쓰기(2)==================

그러면 사람들이 바다에서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선박이 아니다. 물론 선박이 연기를 뿜으며 수평선을 따라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열심히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 모두를 휩쓸어갈 해일을 찾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찾는지를 모른다. 그들은 거대한 자석과 핀처럼 해변에 빨려들어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그 일을 좋아할 뿐이며 또 그 일은 즐겁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은 크게 펼쳐져 있는 어떠한 풍경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 만일 그곳 어디엔가에 물이 있다면 더욱 좋지만 실제로는 그것에 마음을 두는 것도 아니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차를 타고 가다가 심하게 굴곡진 길이나 갑작스럽게 트인 시야에 계곡과 강이 눈에 들어오거나 깎아지른 듯한 산의 뚜렷한 모습을 본 경험이 있다. (중략)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왜 우리가 그림이나 글에서 표현된 그와 같은 장소를 발견하고는 그토록 여러 번 즐거워하는가에 대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식물에게 있어 물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건강에 중요한 감정들을 우리 내부에 부활시킨다.

다음은 시인인 에드워드 토마스가 쓴 글로, 내가 뜻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는 시도, 최소한 운문도 아니다. 바다에 대한 묘사인데, 그는 이른 아침 바다와 마주쳤을 때 방금 언급한 그런 감정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이, 그 가장 특징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는 바다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반응을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다는....육지처럼 변하지도 움츠러들지도 성장하지도 않았다. 또 태양열로 더워지지도 않았다. 바다는 인간과 동물들을 현재의 그 모습으로 바꿔온 시간의 문 밖에서 잠자고 신음하며 시간에 의해 흔들리지 않은 채로 누워 있는 괴물이다.(중략)
지금의 바다는 바로 산과 숲과 늪이 태연한 적(敵)이었을 그때의 바다이어서, 그것을 바라보면 그 옛날의 공포가 되살아난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복원이 완벽했던 한 새벽을 기억한다. 아직 어두웠고 바람은 낮은 잿빛 하늘 아래를 솟구쳐 오르며 질주했고 종다리 한 마리가 가시금작화 덤불의 신음소리와 문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만조의 깊게 들여 쉰 숨소리 한가운데에서 노래하고 있을 때였다. (중략)
그것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곤두선 바다, 그리고 색채도 없는 새벽 속에서 어둡고 차갑게 곤두선 바다, 어둡고 차갑고 거대한 바다였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서 육지는 날아오르는 작은 새의 울음소리와 최고 금빛인 작은 꽃들의 아름다움을 그 우상들에게 바치며 무릎을 끓었다.그것들은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바다는 더 무서웠다.

이 인용문이 지닌 효과를 정말로 힘차게 해 주는 것은  적어도 내게 있었서는 종다리와 문과 배와 갈매기와 작은 꽃들-거대하고 죽은 듯이 어두운 바다에 정반대되는 작고도 생기에 찬 사물들-을 뒤덮고 있는 바다에 대한 그 섬뜩한 설명인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풍경을 가치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단지 그 속에 있는 요소들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그 요소를 이루는 사물과 생명체, 즉 아마도 인간 사이의 만남을 부여하는 데 있어서. 진술한 바대로 이것이 우리가 풍경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의 표출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라. 넓은 호수와 멀리는 칠턴스가 보이며 유원지와 해안림이 섞인 천 오백에이커의 땅. 이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다. 꼭 초라한 광고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면적의 땅이 영국 화가인 터너의 그림 속에 나타나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장소가 된다. 그는 그것을 힘차고 풍부한 감정의 렌즈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풍경을 언어로 표현하기는 아주 어렵다. 작은 범위에서조차, 물감으로 아주 신속히 해치울 수 있는 완벽함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언어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을 보면 얼마나 생생한 영상을 그릴 수 있는가. 이 시의 제목은 '버지니아주'이며 T.S.엘리엇의 작품이다.


붉은 강, 붉은 강,
천천히 흐르는 더위는 고요하다
어떠한 의지도 고요한 강물처럼
고요하지 않다. 더위는
언젠가 들었던 입내새를 통해서만
움직일까? 아마도 언덕들은
기다린다, 문들이 기다린다. 자주색 나무도,
흰 나무도 기다린다, 기다린다,
유예를, 부패를, 결코 움직이지 않는
삶, 삶, 한번은 움직이는
냉혹한 생각들이 내게 떠올랐지,
그리고 지금은 나와 함께 가고 있다.
붉은 강, 강물, 강물이.


(중략) 여러분은 이 시를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다고 느끼리라. 그런데 이 시는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흰 나무들 곁의 자줏빛 나무들일까? 그 문들이란 정원의 문일까 아니면 들판의 문일까? 그 문은 나무 곁에 있을까 아니면 강가에 있을까?(중략)  이 시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그토록 힘찬 연상을 창조한 것인가? 좀전의 인용문처럼 이 시도 강렬하고 생생한 감정을 창조함으로서 생생한 영상을 창조하고 있다. 이 시가 묘사하는 것은 천둥과 번개로 변하게 될 어느 뜨거운 오후, 버려진 서남부의 어느 느른한 대낮처럼, 짓누르는 위기감이 낮게 깔려 있는, 열기와 건조함과 피로, 정지된 시간, 널리 퍼지고 있는 정적과 더불은 완만함의 감정인 것이다.

모든 것은 천천히 감겨들고 있는 제국면의 진행 속에 놓여있다. 아마도 이 작품을 파악하는 그럴 듯한 방법은 이 더위로 망연해진 땅 밑으로 가라앉아 흘러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강물에 대한 표현으로 이 작품을 생각해보는 것이리라. 언덕들, 물들, 흰 나무들, 자주빛 나무들 모두가, 강이 천천히 여행을 하고 있는 그 위 지표면에 반사된 것들처럼 움직이면서도 정지한 채 뒤집혀 있는 것이다.

(중략)
이러한 시의 가치는 몇 가지 점에서 실제 풍경보다도 우수하다는 데 있다. 우리가 실제로 그런 장소에 있을 때 받는 혼란스럽고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감정들이 이러한 시 속에서는 집중되고 순화되며 강렬하게 된다. (중략) 풍경과 더불어 이 일을 해 내기는 어려운데, 왜냐하면 풍경은 너무도 많은 세부를 수반하고 너무도 많은 징후를 제시해서 우리가 압도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전부는 다만 우리의 인간적인 흥분, 그 장소에 대한 아주 깊은 감정을 개진해 주는 약간의 실마리뿐이다.우리는 사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들어맞는 음악이 수반된 감광막을 원하는 것이며, 그 음악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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