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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둥거리고 어슬렁거리고 게을러져라
- 발효와 숙성 -
젊은 이형기 시인이 대선배 조지훈에게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그저 방치해둘 수밖에 없는 일이오”라고 말했다 한다. 시를 방치하는 일, 그게 시를 잘 쓸 수 있는 길이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그러나 오해하지 마라.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무조건 한가하고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빈둥거리며 노는 시간을 발효와 숙성의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만약에 당신이 맛있는 술을 마시고 싶거든 술이 제대로 익기를 기다려라. 좋은 술일수록 절대로 혼자 병마개를 따고 홀짝이며 마셔서는 안 된다. 함께 마실 친구가 저녁 어스름에 당신을 찾아올 때가지 기다려라.
나는 어슬렁거리며 걷는 시간을 좋아한다. 어슬렁거려야 미세한 데 눈길을 줄 수 있고 세상의 뒤편을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공부하는 학생에게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되도록 많이 걸을 것을 주문한다. 한적한 오솔길이나 들길이 아니더라도 좋다. 모든 길은 세상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통로다. 그러나 시가 오지 않으면 아등바등 시를 찾아 나서지 마라. 그냥 놀아라. 시를 써서 무슨 이름을 얻겠다는 허영심을 버리고 시가 실패할지 모른다고 초조해하지도 마라.
-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시간 -
시를 쓰다가 슬럼프에 빠지면 어떻게 해결하나 물어보지 마라. 시를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슬럼프인 것이니 정말 시를 쓰고 싶거든 슬픔마저 사랑하고 즐길 도리밖에 없다.
시를 다시 쓰면서부터는 신문을 끊었고 티브이를 거의 끊었고 외출을 거의 끊었다. 내가 문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침저녁 아파트 옆 구릉 위로 난 산책로를 걷는 때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시를 생각하고 머릿속에다 집을 짓듯 시를 짓고 지는 시를 외우며 돌아와서는 외워온 시를 입력하고 한 밤중에도 일어나 앉아 시를 고쳐 쓰곤 했다.
이렇게 말하는 위선환 시인은 30년간 시를 끊었다가 근래에 빛나는 시를 생산해내고 있는 분이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묵화> 전문
비록 여섯 줄밖에 안 되는 짧은 시이지만 행간과 행간 사이에 여백은 무한하고 시행은 끝났지만 마지막 쉼표는 소와 할머니의 상처와 그 둘 사이의 적막이 오래 지속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적막을 사랑하라. 적막에 사로잡힌 적막의 포로가 되라. 적막 속에서 빈둥거리다보면 문득 소란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세상의 소란 속으로 단번에 뛰어 들지 말고 가능하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라. 그러다보면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감정을 쏟아 붓지 말고 감정을 묘사하라
- 함축인가, 비유인가 -
교과서에서 시를 이렇게 정의한다. ‘시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고. ‘함축과 운율’은 시의 형식적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임에 틀림없다. 시에서의 함축은 긴 내용을 ‘줄여 말하기’가 아니라 ‘비유해서 말하기’이다. 시의 함축은 ‘감추어 말하기’에 가깝다. 독자의 입장에서 함축의 의미는 ‘시인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시인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즉 함축이란 겉으로 드러난 언어의 뜻을 좇는 게 아니라 언어가 내포한 속뜻과 암시하는 바를 살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다. 시의 함축성보다는 오히려 시가 비유적 표현을 뚜렷이 할 필요가 있다. “긴 이야기를 짧게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비유적인 표현의 사용이 시의 특성에 가깝다는 말이다”라고 이남호는 강조한다. 매우 정확하고 적절한 의견이다.
- 고백 · 감상 · 현학 -
감정을 드러내고 쏟아 붓는 일은 시작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슬프다 기쁘다 보고 싶다 아름답다거나 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우리는 ‘고백’이나 ‘넋두리’ 혹은 ‘하소연’이라 부른다. 그런 것은 시의 일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시의 모든 것은 아니다.
시가 고백적 양식이라 믿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과장이다. 제발 그리운 척하지 마라.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 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우습다. 두 번째, 감상(感傷)이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 마라.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하지 마라. 질질 짜지 마라. 그런 것들은 역겹다. 세 번째, 현학이다. 무엇이든 다 아는 척, 유식한 척하지 마라. 시에다 제발 각주를 좀 달지 마라. 그런 것들은 느끼하다. 시는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라 감정의 정화조다.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고 여과시키는 일이 바로 시인의 몫이다.
- 묘사의 힘 -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 해준다.” 고 말한 이는 연암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감정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하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시인의 받아 적기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감정을 언어화 하는 과정을 ‘묘사’라고 한다. 묘사란 감정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그려내는 것이다. 시인이 묘사한 언어를 보고 독자는 머릿속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되고 그 그림을 이미지라고 한다.
달개비 떼 앞에 쭈그리고 앉아 꽃 한 하나를 들여다본다 이 세상 어느 코끼리 이보다도 하얗고 이쁘게 끝이 살짝 말린 수술 둘이 상아처럼 뻗쳐 있다.
황동규, <풍장58> 부분
혹시 들길을 걷다가 당신은 달개비 꽃잎 속에 코끼리 한 마리가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식물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고 귀에 들리는 새소리를 언어의 그림으로 그릴 준비를 해야 한다.
어떤 시가 언어예술로서의 기본적인 꼴을 갖추었는가의 여부는 묘사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사물에 대한 묘사능력으로 시의 품격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묘사는 시를 습작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오랜 시간을 들여 공부해야 하는 필수과목이다. 시인은 세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세밀하게 그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최대한 정확하고 절실하게 언어로 그릴 책임이 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을 그대로 까발려 드러내면 시가 추해 진다. 내 마음을 최대한 정성들여 그려서 보여주기, 그게 바로 시다.
산등에 붙은 오막살이 까치둥지 같다 그래도 울타리에는 가지마다 봄꽃이 곱다 집이 너무 헐어서 바람도 딱하게 여기나 보다 꽃이파리 휘몰아다가 낡은 지붕을 깁는다
조선 후기 한욱의 한시
서정시에서 자아가 대상에 스미는 것을 ‘동화’ 혹은 ‘감정이입’이라 하고, 대상한테 자아를 맡기고 비춰보는 것을 ‘의탁’ ‘투사’ 혹은 ‘투영’이라 한다. 주체와 객체의 동일시라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이 여기서 발생한다. 이 시에서 1, 2연은 자아가 풍경에 동화되는 순간을 제시한다. 3, 4연은 자아의 감정을 바람에 의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산등성이 오막살이집의 낡은 지붕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화자의 심정을 바람이라는 자연현상에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애처롭고 딱한 감정을 단순 토로하는 게 아니라 꽃잎이 낡은 지붕을 덮는 객관화된 풍경과 동일시하는 이 기법은 묘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묘사는 무엇보다도 구체적 형상화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시에서 구체성은 감동의 원천이고 삶의 생생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묘사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는 대상의 현상을 생생하게 그리기위해서만 아니라 대상의 본질에 이르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묘사는 시의 화자인 ‘나’를 객관화하는 데 기여하는 형상화 방식이므로 묘사를 통해서 대상과 시적 화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게 많은가?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 한 줄 없이 뱃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 놓기만 하는 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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