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도(成都)ㅡ 미국 직항 비행기체의 "판다" 캐리치...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 까지/이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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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 편의 시는 어느 정도까지는 작자와 관계없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9행에서 12행까지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우리 어른은 어린 시절의 안개가 어린이를 위해 제발 사라져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안개가 걷히면 어린이는 이 세계가 처음에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기분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므로」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린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그 유년시대에 매어두고 싶다, 인생에 상처를 입는 일(<모래더미와 난파>)에서 구해주고 싶다,
누구든 어른이 되면 인생에서 상처를 입는 일은 늘 있는 일이므로. 그러나 시는 이런 결말을 지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역시 아무리 부모라도 자기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다. 비록 부모로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또 사실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 2행에서 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부모를 떠나 성장해 가는지, 마치 안개나 물(<샘>)이 우리의 손끝을 빠져나가듯 빠져나가는 것을 묘사했다. 어린이는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한다. 자기의 경주를 달려야 한다. 시간은 이미 <길가의 깃발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 6행에 대해 뭔가 깨달음이 없는지? 모래더미와 난파의 이미지를 빼면 거기에는 새로운 이미지가 하나도 없다. <길가의 깃발 사이로 빠져나갔다>는 문구 (사실 이 문구도 나의 기억에서 따온 이미지로, 내가 14세의 소년이던 때 2마일의 장애물 경기를 했을 때의 기억이다.) 속에 있는 flag(깃발로 경주로의 표시를 하는)라는 동사는 4행의 flags(깃발)의 반향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새로운 이미지를 쓰는 대신 처음 8행의 이미지―안개와 샘과 하구와(<샘물이 흘러서 개울 폭이 넓어지면 거기에는 모래더미와 난파가 기다리고 있다>) 깃발의 이미지로 반복했다. 이따금 시에서 반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복이란 단순히 단어나 프레이즈에 한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시에서 이미지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마치 우리가 많은 거울이 있는 복도를 지나면 자기 모습을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듯이, 나의 두 개의 주제를 몇 개의 다른 각도에서 보아달라기 위해서다.
끝으로 이들 각각 다른 특정한 이미지의 원천에 대해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이 참고해준다면 한 편의 시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의 씨앗에 해당하는 것이 나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나의 일생의 각각 다른 시기에 내가 겪고 그 뒤에 잊어버린 몇 개의 경험을 내가 전혀 깨닫지 않는 동안에 어찌된 셈인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말았다. 그 씨앗은 데번셔 주의 안개와 아일랜드의 샘과 도우셋 주의 장애물 경주를 잡았다. 그리고 또 요트가 돛을 올리고 달리고 있는 어느 강의 하구를 덧붙였다. (이 광경은 어디서 따오게 됐는지 나도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이 시를 쓰기 시작하고 보니, 이들 네 개의 이미지가 이 시의 주제를 조명하기 위해 나의 마음속에서 자연히 떠올라 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를 쓸 때의 실제의 줄거리는 다이아몬드 브로우치가 만들어지는 순서와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마치 광부가 산허리에서 구멍을 파듯이 자기의 마음속을 파내려 가서 가장 귀중한 보석―시의 주제와 이미지를 발견하려고 한다. 광부가 아무리 그 기술이 뛰어나고 부지런히 일해도 산에 다이아몬드가 없으면 그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속에 시가 없으면, 즉 우리의 상상력이 높은 열을 내뿜고 굳센 힘을 발휘하여 우리의 경험을 시의 소재인 보석이 될 때까지 융합하지 않고는 자기의 마음속에서 단 한 편의 시도 낳을 수는 없다.
그것은 땅속의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데 어떠한 몇 가지 화학적 조건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는 다만 시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시를 쓸 수 없다. 다이아몬드가 캐내어지면 그것을 선별되고 순위가 정해지고 잘리어서, 비로소 장식품으로 쓸 수가 있다. 이 순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시인이 그의 상상력이 낳은 소재로부터 완성된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에 해당된다. 그리고 또 보석쟁이의 손에 들어오는 다이아몬드의 질과 크기에 따라 그가 만드는 브로우치의 디자인이 정해지듯이, 시인의 소재의 성질과 품질이 완성된 시의 바탕무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커다란 힘이 된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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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이영광(1965∼ )
모내기철 기다리는 남양주 들판
해질녘, 논은 찬데
황새는 물 위에 떠 있다
보이지도 않는 긴 다리를
철심처럼 진흙에 박아놓고
가까이서 보면 그는 외발,
가늘고 위태로운 선 하나로
드넓은 수면의
평형을 잡고 있다
물 아래 꿈틀대는 진흙 세상의
혈을 짚고 서 있다
황새는 꿈꾸듯 생각하는 새,
다시 어두워오는 누리에 불현듯 남은
그의 외발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한 발마저 디딜 곳을 끝내
찾지 못했다는 것일까
진흙 세상에 두 발을 다 담글 수는
없다는 것일까
저 새는 날개에 스며 있을 아득한 처음을,
날개를 움찔거리게 하는 마지막의 부름을
외발로 궁리하는 새,
사라지려는 듯 태어나려는 듯
일생을 한 점에 모아
뿌옇게 딛고 서 있었는데
사람 그림자 지나가고,
시린 물이 제자리에서 하염없이 밀리는 동안
새는 문득, 평생의 경계에서
사라지고 없다
백만 평의 어둠이 그의 텅 빈 자리에
밤새도록 새까맣게 들어앉아야 한다
발레의 기본동작 중 하나인 파세(passe)를 하고 있는 듯 우아하게 외다리로 선 모습이 특징처럼 떠오르는 황새. 문득 황새가 왜 외다리로 서 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봤다. ‘두 발을 다 들면 자빠지기 때문’은 웃자고 한 답이고, ‘대개 오래 서 있을 때에 체온이 땅으로 빠져나가는 걸 반으로 줄이기 위해서’가 정답일 테다. 과학 상식이 어떻든 외다리로 서 있는 황새는 고고하고 초연해 보인다.
해질녘, 물이 차 있는 논에 황새가 외다리로 서 있다.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니고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외다리로 선 그 모습을 보며 시인은 ‘한 발마저 디딜 곳을 끝내/찾지 못했다는 것일까/진흙 세상에 두 발을 다 담글 수는/없다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날이 컴컴해져 외다리는커녕 황새도 안 보이자 빛에서 어둠으로 넘어가는 ‘평생의 경계’를 본다. 시에서 외다리는 있음과 없음,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등등 두 상반된 세계를 이어주는 점이(漸移) 지점이다. 중학생 때 영어선생님이 생각난다. 어딘지 고결하게 느껴졌던 건 그분 성품이 닿은 거지만 한쪽 다리를 저셔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두 다리 동물이 두 다리로 굳건히 땅을 딛고 있지 않을 때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보는 이를 긴장시키면서 비세속적 세계로 한 발 이끈다. 시인 이영광의 세밀한 자화상을 보는 듯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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