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詩心)이란 어떤 것인가
구상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할 때 흔히 초심자들로부터 다짜고짜 〈시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마 시의 개론서
나 작법들이 그 서두에다 〈시의 정의〉니 또는 〈시의 본질〉이니 하고서
들 그 해답을 내놓거나 시도하고들 있는 모양이지만, 실상 시가 무엇인가
를 뚜렷하게 몇마디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렵다기보다 불가능한 일이요,
또한 그것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10인 10색이어서 가령 여
기에다 동서고금 굴지의 시인 100명의 시에 대한 정의를 나열해놓는다 해
도 그것이 시라는 것의 전모를 밝혀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에 대한 실제
적 이해나 창작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시에 대한 정의의 어려
움과 불가능함을 20세기 영국의 대시인 엘리어트 (T.S.Eliot, 1888∼1965)는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본 강좌에서는 저러한 성급한 시의 정의나 공소한 본질론을 피
하고 먼저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 즉 〈시심(詩心)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밝혀보기로 하겠는데, 여기서 〈시심〉이란 시를 불러일으키
는 생각[詩想]·느낌[詩情]·흥취[詩興]등을 포괄해서 쓴 숙어요, 또한 〈시
를 불러일으키는〉도 좀더 적극적으로 〈시를 쓰는〉으로 바꿔 생각해도 무
방하다.
그야 어쨌거나 저러한 시심, 즉 시적(詩的) 심리상태가 일상적 생활의
심리상태와 다른 것은 우리 누구나 체험으로 다 아는 바이지만, 그러나 무
엇이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가 모호하고 막연한 상태인
데, 실은 이것이 시를 쓰려는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맹점(盲點)이라 하겠
기에 이야기가 좀 잘아지는 느낌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보겠다.
가령 우리가 일상 속에서 〈배가 고파 무엇이 먹고 싶다〉든가, 〈일을 많이
했더니 피곤하다〉든가, 〈친구가 없어 심심하다〉든가, 〈가족과 헤어져 있
게 되어 쓸쓸하다〉든가, 또는〈무엇이 기쁘다〉든가, 〈슬프다〉든가,〈화가
난다〉든가, 〈좋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심리상태와 가령 절묘한 자연
의 경치를 대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일으키는 흥취나, 또는 연애를 할 때
에 자기를 잊는 황홀감이나, 어떤 죽음을 마주했을 때 이는 까닭없는 슬
픔 등 소위 시적(詩的)이라고 부르는 심리상태와 구별되는 것은 앞엣것,
즉 일상적인 생각이나 느낌은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의 이해(利害)에서 출
발하고 또 그것의 충족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뒤엣것 즉 시적(詩的)인 생
각이나 느낌이나 흥취는 이해를 떠난 맹목적인 것임을 발견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 감동상태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 자기를 잊는 몰아적(沒我
的)이고 무아적(無我的)인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물론 이렇
듯 자신의 이해를 떠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감동상태는 반드시 오묘한 자
연의 경관이나, 열애(熱愛)속에서나, 죽음을 접할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의 아무리 흔하고 사소하고 허접스러운 일이나 물건이나
사건 속에서도 우연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예민한 감성이나 깊은 통
찰로 이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즉, 우리가 어
떤 자연이나 인간이나 세상살이의 그 생성과 소멸 속에서 신비한 본질이
나 진·선·미의 모습을 발견한다는가, 이와는 반대로 아주 고귀하고 아름
답다고 여겼던 사물 속에서 무상감(無常感)이나 연민(憐憫ㅡ가엾게 여기는
생각이나 느낌)을 느꼈을 때 우리는 저러한 감동상태에 드는 것이다. 그래
서 20세기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폴 발레리(Paul Valery,1871
∼1945)는 저러한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을 우주적 감각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거기에다 우주적 연민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 실제로 저러한 우주적 감각이나 그 연민이 시로 어떻게 표
현되고 있는가 살펴보자.
공원
천 년 또 몇천 년이 걸릴지라도
네가 내게 입맞춤하고
내가 네게 입맞춤한
그 영원의 한순간을
말,
다할 수가 없으리.
겨울 햇볕이 쬐는 아침
〈몽수리〉공원에서의 일이었네.
〈몽수리〉공원은 파리의 안,
파리는 지구 위,
지구는 별의 하나,
위의 시는 제2차대전 후 프랑스의 가장 인기가 높았던 시인 자크 프레
베르(Jacques Prevrt, 1900∼77)의 작품으로서 〈몽수리〉라는 한 공원에서 있
었던 연인끼리의 입맞춤을 노래하고 있는데, 흔히 볼 수도 있고 또 체험
할 수도 있는 이 사랑행위가 얼마나 감미롭고 소중하고 신비한 것인가를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에다 확대해가며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
기 또하나의 시,
십자로에서
너는 왼쪽으로 나는 오른쪽으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이별은 하루일지, 하룻밤 동안일지
또는 영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거나 헤어지거나
(우리의 길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벗의 마음에다
우리 모두의 앞길을 위하여 건배하자.
자! 행운을 빈다.
어디로 가는지조차도 모르지만.
도박 같은 인생이어니
우리는 이기거나 지거나
그것은 제 재주도 제 선택도 아니요,
그것은 나누어 받은 패 쪽에 달려 있다.
연애에도 운이 있고 싸움에도 운이 있고
그리고 우리 중의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마침내는 운명에 굴복하고야 마느니 ㅡ
또한 우리가 잘못했든가 잘했든가
때로는 놀랍게도 승리를 맛본다.
자! 행운을 빈다.
우리가 서로 아직은 끝장이 나지 않았으므로.
미국의 전세기말의 방랑시인이었던 리처드 호비(Richard Horey, 1864
∼1900)의 작품으로서 아주 경쾌하게 씌어져 있지만 인간운명의 불가사의
함과 그 허망이 노래되고 있다. 물론 이 시는 운명론이나 허무주의를 부
정하고 배격하는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일으키겠지만, 그런 사람의 삶에도
자기의 의지나 노력만으론 도저히 어쩌지 못할 인간존재의 유한성에서 오
는 불가사의와 허망감이 때마다 엄습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
쨌거나 우리는 위의 두 시에서 보다시피 우리가 입맞춤처럼 아주 무심하
고 심상하게 여기던 일상적 사건 속에서도 저러한 우주적 감각이 발동할
수가 있고 또 우리가 목숨처럼 가장 고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도 그
덧없음이나 가엾음. 즉 우주적 연민을 느낄 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다.
그러면 저러한 우주적 감각이나 연민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또 어떻
게 해서 일으킬 수가 있는가? 그것은 별것이 아니라 의식적이든 무의식
적이든, 자력적든 타력적이든 어떤 존재의 본질성에 대한 자기 나름의
발견과 놀람과 그 깨우침에서 온다고 하겠다. 그 본보기로 일본의 현존 중
견시인인 요시노 히로시(吉野弘)의 시를 음미해보기로 하자.
생명은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결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꽃도
암술과 수술이 갖추어져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버러지나 바람이 찾아와
암술이나 수술을 중매한다.
생명은
그 안에 결핍(缺乏)을 지니고
그것을 타자(他者)에게서 채워 받는다.
세계는 아마도
타자와 총화(總和),
그러나
서로가
결핍을 채운다고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지지도 않고
산재(散在)해 있는 것들끼리가
무관심하게 있을 수 있는 관계,
때로는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도 허용되는 사이,
그렇듯
세계가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왜ㄹ까?
꽃이 피어 있다.
바로 가까이까지
등에의 모습을 한 타자가
빛을 두르고 날아와 있다.
나도 어느 때
누구를 위해서 등에였겠지
당신도 어느 때
나를 위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는 작자가 어떤 꽃에 등에가 화분을 나르는 것을 보고 인간끼리의
나와 남의 관계도 저처럼 협동 속에서 살아간다는 데 생각이 미쳐서 그것
을 노래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고, 이와 반대로 인간끼리의 삶을 살펴보다
가 그 생각이 벌이나 나비나 등에나 바람이 화분을 날라서 꽃을 피우게 하
고 열매를 맺게 한다는 사실을 떠올겼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여하간 작자
는 모든 존재가 서로 다르고 제각기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의 목숨이나 그
삶에 무관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가 의식도 하지 않으 채 서로의 성장이나
성취, 또 행·불행에 직접 관계를 가지고 있고 작용도 하고 있다는 사실,
즉 사물의 본질인 우주만물의 신비한 협동에 눈뜸으로써 놀라고 깨우침에
나아간 그 〈감동〉과 〈감흥〉을 저렇게 한 편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감동〉과〈감흥〉이란 말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데, 왜냐
하면 어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체험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시가 되
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아서, 가령 위의 시에서 어떤 꽃에 대한 충매(蟲媒)
행위를 알기로 말하면 꿀벌 치는 이들이 더 장할 것이고 또 인간의 상
부상조 같은 것은 실제 조직이나 집단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 실상을 더 잘
체험하겠지만, 그러한 전문적 지식이나 풍부한 경험이 곧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우주적 혐동을 스스로 알아내고 깨우친 그 감동이나
감흥, 즉 나대로 말하면 우주적 감각이나 연민이 시를 쓰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또다시 제기되는 것은 그러한 시적 감동이나 감흥이라는
것은 어떤 성질의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가령 우리가 〈무엇이 갖고 싶다〉
든가 〈무엇이 보기 싫다〉든가 또는〈무엇이 즐겁다〉든가〈무엇에 화가 난
다〉든가 하는 일상적인 욕구나 충동과 같은 일상생활의 심리상태는 앞에
서도 말했듯이 그것이 충족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끝나고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지만, 가령 어떤 매혹적인 경치나 낭만적인 행위나 무상감 같은 체험
을 했을 때 그 감동이나 감흥은 그 자체가 이를 지속시키고 전달하려는 욕
구를 수반한다. 이것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가령 어떤 가정주부가
설악산엘 처음 가서 그 경치에 압도당하고 도취되고 매료되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서투르게나마 가족들에게 자기의 설악산에서 받은 감동이나 감흥
들 되살려 전하면서 〈내가 시를 쓸 줄 알았다면 그것을 써서 남길 터인데
……〉하고 아쉬어한다.
저러한 시적 감동과 감흥의 〈지속〉과〈전달〉의 속성을 폴 발레리는 〈시
의 내용이 되는 미적(美的)감동은 다른 감동이 오직 흥분으로 끝나는 것
과는 달리 스스로가 여러 가지 모습과 질서를 스스로 지으려드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이에 덧붙여서〈이러한 시적 감흥이라 하여도 그
대로 놓아두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구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순간, 또 그 신묘한 지각(知覺)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끄집
어내어 항구적으로 보존하려는 것이 바로 시를 쓰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러한 시심을 시인은 말로써 표현하게 되고, 음악가는 소리로
써 나타내고, 화가는 선이나 색채로, 조각가는 흙이나 돌·나무·무쇠같은
물질을 가지고 입체적으로 조형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시심은 모든 예술
을 불러일으키는 모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이 아름답고 훌륭한 예
술을 보면 시가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요, 이와 반대로 시가 없거나 시
심이 빈곤한 예술은 신통치 않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저러한 시의 발생 원인인 시심이라는 것도 오직 수동적 상태만
으로 보면 본래가 지극히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것으로서 오직 그것만으로
는 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기에다 능동적이고 지적
인 활동이 따라야 비로소 표현의 세계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앞
에서 말했듯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이란 스스로가 질서를 지어서 보존하
고 전달하려는 독특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에너지를
능동적으로 발동시켜 그 자연발생적 감동과 감흥을 어떻게 표현하여 정착
시키느냐 하는 방법과 기술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시
의 어러운 작업적 측면으로서, 여기서 다시 폴 발레리의 말을 빌면 〈훌륭
한 시란 뼈를 저미는 고통이 작업에서 빚어지고, 예지(叡知ㅡ여기서는 작
가의 자질의 뛰어남을 가리킴)와 끊임없는 노력의 기념비요, 의지와 분석의
소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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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김록(1968∼ )
24톤의 집이 무너졌다
지은 집이 폐기물이 되는 데 33년이나 걸렸다
무너진 곳을 가보니
인부가 감나무터에서 오줌을 싸고 있었다
오래된 뿌리에, 무엇을 들이대며
거름도 되지 못할 그 같은 짓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성(誠), 인(仁), 인(忍)을 욕되게 하고
남의 집을 허물면서
한 집안의 금붙이 동붙이를 팔아먹고
이웃집에 주기로 마음먹은 화분과 장독까지 깨부쉈다
철거 전 영산홍을 파내어 화분에 옮겨 심고
장독들은 깨끗이 닦아 놓았는데
기나긴 세월 무엇을 참고 있었기에
이같이 하찮게 무너질
어진 마음을 모셔 두고 있었을까
집하장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걸릴까
정든 것에 일일이 경의를 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불도저는
한 집안의 위엄을 뭉갤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다 버리기 위해 또 살아가는 것이다
그 공터에 다다르면
기중기는 허공의 뼛가루만 들어 옮기고 있을 것이다
이미 무너진 집을 또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터에서,
가훈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왔다
이 시가 담긴 시집 ‘불세출’은 강렬한 시어로 광기 어리고 난해한 심상을 이끌어 내는 개성적인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김록의 이름에 값한다. ‘네가 타는 그네를 매단 줄에 목이 졸리는 사람이 있다.’(시 ‘감정 살해자’), 이런 한 줄짜리 시부터 ‘네 뱃가죽에는 십자가 모양의 칼자국이 깊숙하다. (……)./세로로 긴 칼자국은 너를 죽이려고 하는 누군가가 개나 소를 잡는 칼로 너의 배를 길게 베었을 때 생긴 것이다. 가로로 짧은 칼자국은 너를 살리려고 하는 외과의가 메스로 너의 배를 짧게 갈랐을 때 생긴 것이다.(……)/네가 노동가를 위령가처럼 부르니 정말 귀신이 나올 것 같겠다.(……)/곧 좋은 소식이 올 거라고 해서 정말 좋은 소식이 오는 줄 알고 너는 기다린다. 네가 기다릴 때 그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것이다.’(시 ‘누군가는 한다’)처럼 단편소설 길이 시까지 분량도 들쭉날쭉한데, 저마다 쏠리면 쏠리는 대로 젖히면 젖히는 대로 탄탄히 균형을 잡고 있다. 허무와 퇴폐라는 잡목더미로 지어놓은 엄격할 정도로 명징한 의식의 집이라고 할까. 읽어봐야 맛을 알 테니 일독을 권한다.
‘인부가 감나무터에서 오줌을 싸고 있었다’, ‘기나긴 세월’ 살아온 한 생명의 갓 베어나간 자리, 하얀 그루터기에 오줌을 ‘갈기는’ 무례하고 잔인함이여. 실제 그랬을 ‘철거 인부’는 ‘존재의 위엄’을 모독하는 모든 무뢰한의 알레고리이다. 마지막 두 행에서 화자의 날 선 미감과 얽힌 도덕적 보수성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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