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추상적인 표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런 놈끼리
저런 놈끼리
요런 놈끼리
끼리끼리 모여 사는 세상
작은 괄호로 묶고
큰 괄호로 묶고
묶고 묶다 보면 결국은 하나
하나라는 것을
이런 놈도
저런 놈도
요런 놈도
알고 있을까?
- 「하나로 살기」
시는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때
더 생동감이 있다.
이른바 객관적 상관물을 빌어 생생하게 그려갈 때 느낌이 더 살아난다.
이 시는 끼리끼리 집단 이기주의로 모여 살지 말고 하나되어 살아야 한다는 심정을 표현하려
한 시다.
만약에 다음과 같이 고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비교해 보자
모래알은 모래알끼리
조약돌은 조약돌끼리
버려진 돌들은 버려진 돌끼리
끼리끼리 모여 사는 세상
개울가에서 만나고
여울로 가다가 만나고
골짝을 넘는 구비구비에서 만나는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모래알도
조약돌도
버려진 돌들도
알고 있을까
조금은 더 생동감이 있을 것이다.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내용을 가질 때 시는 더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들에는 이름 없는 숱한 꽃들이 피어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빽빽히 숲을 이루었다'
라는 식의 표현보다는, 꽃 이름 나무 이름 새 이름이 적재 적소에 살아 있도록 표현한다면 시의
내용은 그만큼 더 풍부해질 것이다.
다만 진부한 느낌이 들거나 설명적이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주의도 있어야 한다.
자칫하면 상상력의 공간이 그만큼 줄어 들 수도 있고, 시의 중요한 장점 중의 하나인 다의적
해석의 공간이 그만큼 좁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7. 사실에 맞게 표현해야 한다
시를 쓰다 보면 욕심이 나게 마련이다.
더 잘 표현하고 싶고, 더 적절한 비유를 만들어 보고 싶고, 새롭고 신선한 느낌이 들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상상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운 것을 찾아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사실과 다르게 표현해 놓는
경우가 있다.
성장이라는 단어의 배를 갈라 내장을 뒤져볼까
그 속 어딘 가엔 분명 숱한 만남과 헤어짐을 주선하는
장기라도 있을까
만남 우혈관과 헤어짐의 좌혈관의 혈액이 감미로운
리듬에 따라 춤을 추다가 혹
장애라도 일으켜 좌충우돌로 뒤범벅되진 않을까
- 「자라기 위한 수술 준비」
이 시는 우리가 성장하면서 겪는 고통의 원인이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데서
착안하여 성장 과정과 관련한 정신적인 개념들을 육체의 일부분과 결합해보는 기발한 착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몸에 좌심방 우심실 이런 이름은 있어도 좌혈관 우혈관은 없다.
상상력의 자유로운 전개는 얼마든지 좋지만, 부정확하거나 논리적 모순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런 한 부분의 오류가 시 전체의 결정적인 결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 본 시 중에 이런 부분도 마찬가지다
피는 물 위를 기름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원심분리기 속에서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흩어져 간다
피는 물 위를 정말 기름처럼 흐를까? 물과 기름은 서로 겉돌지만, 피와 물은 그렇지 않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시이지만 사실에 맞지 않게 표현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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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이우성(1980∼)
금요일 밤인데 외롭지가 않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집에 있는 게 부끄러울 때도 있다
줄넘기를 하러 갈까
바닥으로 떨어진 몸을 다시 띄우는 순간엔 왠지 더 잘생겨지는 것 같다
얼굴은 이만하면 됐지만 어제는 애인이 떠났다
나는 원래 애인이 별로 안 좋았는데 싫은 티는 안 냈다
애인이 없으면 잘못 사는 것 같다
야한 동영상을 다운 받는 동안 시를 쓴다
불경한 마음이 자꾸 앞선다 근데 내가 뭐
그래도 서른 한 살인데
머릿속에선 이렇게 되뇌지만 나는 인정 못하겠다
열 시도 안 됐는데 야동을 본다
금방 끈다
그래도 서른 한 살인데
침대에 눕는다
잔다 잔다 잔다
책을 읽다가 다시 모니터 앞으로 온다
그래도 시인인데
애인이랑 통화하느라 못 쓴 시는 써야지
애인이랑 모텔 가느라 못 쓴 시는 써야지
야동 보느라 회사 가느라 못 쓴 시는 써야지
만두 먹어라 어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다행히 오늘은 바지를 입고 있다
제목도 재미있다.
‘이우성’은 가족과 사는 서른한 살 미혼남, 직장인이며 시인이다.
화자의 사생활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가 엿보인다. ‘어제는 애인이 떠났다’니 오늘은 혼자 밤을 보내는 첫 금요일인데 화자는 아무렇지도 않다. 화자가 워낙 ‘쿨’해서가 아니라 ‘원래 애인이 별로 안 좋았’기 때문에. 그래도 싫은 티 안 내고 사귀었던 건 ‘애인이 없으면 잘못 사는 것 같’은데 얼굴이 그만하면 괜찮아서다. 화자의 전 애인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런데 친구가 전화를 한다. 술집에서 여럿이 불타는 금요일을 보내다가 “야, 뭐하냐? 여기 홍대 앞인데 나와라!” 불러내는 전화였을까. 외롭지는 않은데 ‘집에 있는 게 부끄러울 때도 있’단다. ‘애인이 없으면 잘못 사는 것 같다’는 자의식이 또 발동되는 것이다.
시시한 연애도 연애는 연애. 그동안 데이트다 뭐다 얼마나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됐는가. 이제 시를 써야지! 외출하지 않고 진득하니 앉아서는 습관처럼 야동을 다운 받는다. 문득 떨떠름하다. 시 쓰겠다는 놈이 야동을 보냐? 야동이 뭐 어때서? 내 나이가 몇인데…. 어이구, 그 연세에 혼자 야동이나 보고 앉았냐? 자신이 한심해서 이내 야동을 끄고, 어쩐지 기운이 빠져 ‘침대에 눕는다’. 그렇게 잠이 들어, ‘잔다 잔다 잔다’! 늘어지게 자고 책을 읽고 시를 쓰고, 모처럼 한갓지게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주말. 끝 두 행이 웃음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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