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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디지털혁명시대"와 맞다들다...
2017년 03월 27일 21시 58분  조회:2388  추천:0  작성자: 죽림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시제11호(詩第十一號)>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나, 문덕수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문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도 디지털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단서는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와 “열린 문으로는/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에서 발견된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 감염되지 않은 탈-관념의 영상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최소 단위들 “빨간 저녁 놀, 재떨이, 유리컵 세 개, 라이터 ,청자 담배. 육각형 성냥갑, 한 사나이 등”은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집합적 결합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모듈)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재떨이를 물주전자로, 라이터를 핸드폰으로, 유리컵을 사기 찻잔으로, 청자 담배를 신문지로 변경시키고, 사나이를 20대 젊은 아가씨로 바꾸어도 시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에는 어떤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가상현실은 순수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생동하는 사물성의 공간이 되고, 독자들의 상상과 의미 붙이기가 무한정 허용되는 세계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보다 독자의 상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다. 그 까닭은 이 시는 현실세계에서 직접적으로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의 자료들은 아날로그에서 샘플링 된 자료다. 샘플링의 방법은 1차적인 방법과 2차적인 방법으로 구분된다. 1차적인 방법은 직접 현실세계를 사진 찍듯이 하는 샘플링 방법이고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을 통해서 샘플링 하는 방법이다. 이 때 1차적 방법은 독자가 들어갈 시적공간은 제한되지만 현실과 현장이라는 생명의 감각에 더 접근되어 있어서 정서의 표현이 살아난다. 이에 비해서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펼치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놓아서 독자가 들어 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성의 세계는 현실적인 생명감각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조작성이 쉽게 드러난다. 따라서 시의 정서도 조작된 정서가 된다.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1차적 방법에 해당하는 시이고,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는 2차적 방법에 해당되는 시라고 판단된다.

 

4. 디지털 시의 성립과 조건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

디지털(digital)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을 디지털리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 본다.(2003년 「디지털리즘」1집에서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 선언을 함)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디지털적인 시각, 사유, 지각, 감성, 정서, 언어 등을 망라하여 그것을 현대시에 흡수하여 언어표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상상(시각)과 감각과 감성과 사유의 영역을 열어 보이는 시를 <디지털+시> 즉 디지털 시라고 개념정의를 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의 성립에서 짚고 넘어야 할 문제는 디지털의 특성과 시가 결합할 때, 디지털 시는 기성의 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날로그 시(디지털 시에 대응하는 시로 기성의 시를 의미함)나 디지털 시나 공통적인 것은 시의 현실은 현실자체가 아니고 샘프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원래, 현실 그 자체에서 벗어난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샘플링이나 가상현실은 디지털 시만의 특성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특성은 기성의 시와는 다른 표현방법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언어단위들(unit)에 근거(根據)를 두게 된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시문학>)

 이런 무의미의 탈-관념 언어들이 디지털 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디지털 시가������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가 되기도 하고, 시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한 편의 시가 하나 또는 몇 개의 언어단위로 표현되면서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의 원형은 1930년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와 1950년대 조향의「바다의 층계層階」에서 발견된다.

 

나, 디지털 시의 표현 방법

  이런 원칙을 기본으로 할 경우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파악된다. 그 중 첫 번째의 방법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 1호)에서 구현된 독특한 추상화 기법이다. 탈-관념된 언어 단위들을 사용하여 시인이 상상한 현실의 추상화를 그려서 보여주고 작가의 개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 주는 시의 기법은 디지털적인 구조에 맞는 기법이다. 특히 시 속에 시인이 창조한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어떤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언어의 환상적인 면(언어유희)에서도 새로운 감각과 상상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두 번째 방법은 염사와 접사의 방법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염사와 접사는 현실이 반영(反映)된 마음속의 직관상을 사진 찍 듯이 찍는 것이기 때문에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적 샘플링 기법이 된다. 염사는 직관을 통해서 내면에 잠재된 대상을 드러내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면 세계에 대한 직관과 시각적인 접근을 통해서 원근법을 깨뜨려버리고 대상의 실상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염사와 접사는 병적인 망상(妄想)이나 터무니없는 환상(幻像)과는 구별된다. 염사와 접사는 선적(禪的)인 의식 즉 고도의 집중된 정신의 현상 속에서 발생한 투명한 의식의 그림이다.

 세 번째의 표현 방법은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사물의 충돌, 사물과 사물의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런 사물성의 이미지 세계는 사물성의 감각을 포착하여 직관의 영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사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반영(反映)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시가 된다.

 네 번째 표현방법은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포착된 영상자료들의 변형으로 상상의 세계를 확대시키는 이미지의 세계다. 이것은 디지털 시의 독특한 표현방법이 된다. 이 때 시인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 등을 융합하여 감각의 통합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통합은 디지털 언어의 감각이 된다.

 이 네 가지의 표현방법의 중심에는 샘플링 된 현실이 들어 있다. 샘플링 된 자료(이미지)는 하나의 독립된 단위를 형성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단위들의 결합이나 연결 방법이다. 아날로그 시는 대부분 관념 또는 사유의 연속적인 연결(인과관계)방법을 선호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연결로 의미(관념)와 정서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보다는 감각이나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더 중점을 두는 디지털 시는 단위와 단위의 연결을 “집합적 결합”으로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탈-관념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것에서 디지털의 불연속 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자유롭게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언어 단위들 사이에는 간섭(干,interference) 과 잔상(殘像, afterimage) 현상이 발생하여 아날로그 시와 같은 효과를 구현한다. 이러한 결합은 단위의 조합을 바탕으로 운용되는 디지털의 성격과도 부합된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컴퓨터의 모듈과 같이 시의 언어단위를 독립적인 단위로 인정한다. 그것은 위에 제시한 시인의 추상적인 현실 이미지, 염사․접사, 사물성의 이미지, 영상자료의 변형으로 포착하는 감각 등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시(하나의 시스템)를 형성하기도 하고 집합적 결합을 이룬 종합적인 구조의 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합적 결합은 “대상의 결합이나 구성방법의 종류를 다양화할 수 있고, 구문과 비구문, 의식․무의식의 경계와는 관계없이 시의 구성 영역의 공간을 무한히 넓힐 수 있다.”(문덕수-「문덕수 시전집」“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음은 디지털 시의 정서다. 디지털은 정서나 감각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이기 때문에 아날로그적인 정서와 감각에서서 멀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아날로그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정서를 드러낼 수 있다. 샘플링 된 현실은 사실이 아니고 마음 속 화면에 반영(反映)이 되어서 나타난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 반영 속에는 시인 자신의 의식(관념)의 그림자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것을 순수한 탈-관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실과 밀착된 마음의 영상은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디지털의 생동하는 감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이 생동하는 감각은 추상적인(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아니라, 현실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시의 정서는 샘풀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 될 때 이미지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관념의 위로 솟아올라온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다. 따라서 시의 밑바닥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다. 그래야 인간적인 시가 탄생할 수 있고, 그 시에 담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진 맑은 정서가 될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했을 때 디지털 시는 관념이 가라앉은 후에 떠오르는 맑은 향기 즉 원래의 자연향기를 풍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화된 상태의 자연 본연의 향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굳이 정서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샘플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되는 탈-관념의 디지털 시의 정서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정화시키는 힘을 드러낸다. 그러나 추상적인 상상을 통한 간접적인 샘플링의 방법으로 구성된 디지털 시에는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생길 수도 있다. 

 

다. 디지털 시의 조건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에 전제되는 조건은 디지털 시는 시 본래의 특성(아날로그의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아야 하며 보통의 시와 같이 읽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가 실험시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감각만이 아니라 시가 사유와 정서의 표현이라는 일반적인 시의 조건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가 일반적인 시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디지털 시의 근원(기본원칙)과 전제조건을 만족시키고 디지털 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디지털 시의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을 열 가지로 구분하여서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디지털 시는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한다. 언어 단위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그 언어 단위는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요소 즉 객체지향의 모듈(module)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예시작품: 문덕수의「꽃잎세기」,오남구의「푸른가시짐승-빈자리x.3」,심상운의「빈자리-낮12시25분」)

 2)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 (심상운「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시    문학>참조)

 3) 디지털 시는 현실을 직접 샘플링(1차적 방법)한 자료로 생성된 시와 추상적(2차적인 방법) 샘플링을 통해서 구성된 시로 구분한다. 그러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 시에는 샘플링(sampling견본추출)된 현실세계가 극소화될 수도 있다.

 4) 디지털 시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과 사물성의 순수 이미지를 중요한 요소로 한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순수 감각을 드러내고 사물의 충돌과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은 디지털 감각과 영상언어의 산실이 된다. 이러한 영상언어는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디지털 시는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하는 과정에서 탈-관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아날로그의 노이즈(noise 잡음) 제거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의 심리적 현상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 것은 허용한다. (예시 작품: 심상운의「검은 기차 또는 흰 비닐봉지」)

 6) 직관을 통한 염사와 원근법을 깨뜨리고 실상에 접근하는 접사는 디지털 시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샘플링의 방법이다. 따라서 더 많은 방법들이 원용될 수 있다. (예시 작품 :오  남구의 「밤비」)

 7) 디지털 시의 정서는 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와 현실(관념)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로 분류한다. 증류수 같은 정서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의 시는 송시월의 「입춘무렵」을 예시작품으로 들 수 있다.

 8) 디지털 시는 단일한 시점과 감각과 정서만 고집하지 않고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  합된 감각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도 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다층구조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 「경운동 88번지로 간다-염사」를 들 수 있다.

 9) 디지털 시는 작가(시인)가 만들어낸 완성품의 시에서 벗어나 독자가 참여하여  각자의  사고와 인식과 감정과 감각이 들어가서 만들어 내는 독자 참여의 열린 시를 지향한다. 그 바탕에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受容美學, Rezeptionsasthetik)이 들어있다. 이 때 시인은 시의 설계도를 제시하고 그것의 자유로운 변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참여를 유도하는 연출자가 된다.<예시작품: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 1호)>

 10) 디지털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지향한다. 그래서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 그 가상현실은 환상도 되고 꿈도 되지만 현실의 절실한 감성과 정서를 전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이 열 가지의 조건은 한 작품 속에서 서로 조화로운 비중으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한두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작품을 형성할 수 있다.

 

라. 예시 작품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讀解)

다음은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와 <다. 디지털 시의 조건>에서 예시작품으로 거론된 시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다. 예시된 시들은 탈-관념의 세계를 보여주는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와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시의 방법론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열 가지의 조건(방법)에 대입하여 디지털 시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고 새로운 감상과 해석의 길을 열어보는 것은 실제의 창작을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뽄뽄다리아>

<마주르카>

<디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전문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이 시는 시가 “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서 탈-관념의 순수한 영상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연속적인 각 연의 언어들은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의 각 연은 서로 독립적인 관계 즉 객체지향성(모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인이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입장에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5연 <모래밭에서/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는 통사적 구문에서 벗어난 시의 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단위(단어, 구문)들의 충돌과 간섭을 통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적 면에서 구성이 산만하다. 그 원인은 이 시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의식(의도)이 시 전체를 통제(관통)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마을을 덮은 코스모스 덤불

아무거나 한 송이 골라 꽃잎을 열심히 세어 본들

나비처럼 머무를 수야.

대추나무 밑동을 감고

한창 뿌득뿌득 기어오르고 있는 나팔꽃

푸른 것은 깔때기 모양

흰 것은 나팔주둥이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여섯 세어보지만

실은 한 송이일 뿐이다.

돌담을 돌자 앞장선 나비는 오간 데 없고

순하고 야들야들한 연보라 무궁화꽃

그 한 송이의 여섯 개 꽃잎을 확인한들

내 어쩌랴 어쩌랴.

해바라기는 서른네 개의 황금 꽃잎을 둥글게 박고

들국화는 서른아홉 개로 쪼개진 보랏빛을 빽빽이 둘렀거늘

내 어찌 머무를 수야.

-------문덕수「꽃잎세기」전문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 시의 탈-관념된 언어 단위(unit)들은 결합을 통해서 대상의 모습(현상)을 드러내지만 분리(해체)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꽃은 여섯 잎, 무궁화꽃 여섯 잎, 해바라기 서른 네 개의 꽃잎, 들국화 서른아홉”이라고 대상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들을 분리하고 숫자화 함으로써 색(色)과 공(空), 결합과 분리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구상적인 자연현상을 추상적 디지털 언어로 환원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덕수는 이러한 시적 형상의 방법론을 그의 시론 「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사물이나 대상 하나하나를 1,2,3,4,5.......와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적 특성을 추상화할 수 있고, 추상된 그 대상을 결합하여 한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을 나는 역시 인접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집합적 결합”이라고 명명해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디지털을 형성하는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의 의미 즉 디지털의 최소의 단위의 개념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 시는 디지털 시의 본질인 단위의 분리와 결합의 원리를 보여준 시라고 판단된다. 이 시에서 ”나팔꽃, 무궁화꽃, 해바라기, 들국화“는 디지털 시의 구조를 형성하는 부분 단위(module)가 된다.

 

간밤, 회색담장 ������회색������을 헐고 푸른울타리 ������푸른������을 세웠다.

반짝이는 인동의 사금파리������반짝������을 빼고 가시장미������가시������를 올

렸다. 갑자기 ������푸른가시������짐승이 나와서 달빛을 갈갈이 찢고 온

밤을 으르렁댔다. 다시 ������푸른������을 밀고 가시장미������가시������를 내리고

비워 둔 빈자리 x. 아침, 울타리에 구름 한 쪼각 앉아서 쫑긋 꼬

리를 들었다가 사라진다.

 --------오남구「푸른가시 짐승 -빈 자리x.3 」전문

 

 이 시의 중심점은 빈자리 x의 무한한 변신이다. 빈자리에 무엇이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감각과 상상의 세계가 바뀐다. 이렇게 바뀌는 것(분리와 결합)이 탈-관념된 디지털 단위들의 특성이다. 만약 어떤 고정된 의미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면 감각과 상상의 변신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탈-관념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꾸벅꾸벅 졸던 중년 여인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앉은

꽃무늬 스카프의 아가씨

 

두 꽃의 향기가 흥건하던 자리에

머리에 무스를 바른 청년이 앉는다

그의 핸드폰이 뿜어내는 경쾌한 소리

 

순간, 나는 조금씩 발을 들썩이고

파랗게 살아나는 오래된 바다

흰 목덜미의 그녀는

노란 유채꽃 밭을 뛰어가고 있다

 

그가 훌쩍 일어서서 나간 뒤

하나의 공간으로 돌아간

진홍빛 우단의 빈자리

그 위로

눈부신 햇빛과

신록新綠의 그림자가 번갈아 앉았다가고

 

낮 12시 25분

전동차 안은 계속 섭씨 20도의

환하고 푸른 공기 속에 있다

       ------ 심상운 「빈자리 -낮 12시 25분」전문

     

 이 시도 오남구의「푸른가시 짐승 -빈자리x.3 」같이 빈자리 즉 최소 단위(unit)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는 감각과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전동차 안의 풍경과 감각, 시인의 상상이 생동하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그것은 이 시 속에서 언어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인 감각의 흐름이 시의 저변을 흐르는 시인의 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이미지의 생명력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전문

 

 이 시는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접사와 염사를 통해서 샘플링한 시다. 샘플링 하는 과정에서 사건은 단순화되었으며 탈-관념이 되었다. 그러나 “검은 색과 푸른 색, 하얀 색”의 색채가 의미하는 관념과 “눈물”이라는 관념의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아서 시의 정서가 되고 있다. 그 정서형성의 원리 속에는 디지털 시에서도 관념의 완전한 제거는 시를 성립시키는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과 인지단계의 관념은 오히려 디지털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이 시에서도 장면의 변화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과 디지털의 감각과 상상을 표현하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간섭(干涉, interference)과 잔상(殘像, afterimage)을 통해서 이미지 형성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남구 「밤비」전문

 

 이 시의 중심은 직관을 통한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샘플링이다. 그 잠재의식 속에는 현실이 들어 있다. 그것을 염사와 접사로 나누면 잠재의식 쪽에 더 가까운 것을 염사라 하고 현실 의식 쪽에 가까운 것을 접사라고 한다. 염사와 접사는 대상을 사진 찍 듯이 순간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미지로 재생하는 샘플링의 방법이다. 이 기법은 디지털 시의 기본적인 표현 방법이다. 이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에도 비 오는 밤에 시인의 잠재의식 속에 떠오르는 영상들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의식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햇살에 찔린 잔설 한 토 막, 눈물을 흘린다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메시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 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송시월 「입춘 무렵」전문

 

 이 시에는 디지털적인 감각과 정서가 선명하게 들어난다.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에 들어 있는 감각은 디지털적인 명료한 감각의 표현이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다. 이 데이터는 디지털 시에서 아날로그 시보다 현장의 감각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탈-관념된 언어단위가 된다. 이와 함께 휘파람새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장면 변화의 동영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투명한 의식과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기법이다.

 

 461120-10675xx吳鎭賢

 2002년 12월 29일 57세로 살아 있음.

 빨간 싱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뇌세포의 신

경체계가 잘 유지된다.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고, 잠깐 내 모습의 환영, 팔순 노구가 앞을 멈칫멈칫 가다가

쉰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이 때 번쩍 뇌세포에 녹화된 화면

이 켜진다. 2002년 12월 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 목사가 하늘에서 돈뭉치를 뿌린

다. 파란 만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

한 노구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아우성친다.

 띵-, 붉은 등이 켜진다. 다시 ������복제인간 아기 탄생!������화면이 겹

친다. 몸이 떨린다. 쾅!쾅!쾅! 맥박이 가슴친다 숨이 가빠지고 정

신이 없다 인내천 인내천 소리치고 숨을 고르면서 경운동 887번

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쏴아-.싸늘한 바람,

번쩍,5번 출구의 표시등이 켜졌다. 침략으로 점멸하기 시작

하는 신호,→⑤번 출구, <⑤수운회관이 깜박⑤수협중앙회로 바

뀌었다가 깜박⑤수운회관으로 바뀌었다가 깜박⑤아랍문화원

로>바뀐다.

 시련의 점멸하는 이름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며 내 신호

체계가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오남구「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염사」 전문

 

 이 시는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합된 감각의 세계를 디지털적인 순간순간의 변화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다층구조의 감각과 이미지는 팔순노구→ 목사가 하늘에서 뿌리는 파란 만원짜리 지페→미래의 내 모습의 환영인 노구들의 허우적거리는 아우성→복제아기의 탄생의 화면이 겹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시인은 시공을 이동하며 잠재의식과 현실의식 속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겹쳐져서 나타나는 화면을 생생하게 사진 찍 듯 찍어내고(염사) 있다. 그것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몇 분 사이의 사건이다. 이런 디지털 시의 감각은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섞어서 저장, 전달, 재생하는 디지털적 감성통합과 맥을 같이 한다.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디지털 시의 특징은 운동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 동적 이미지는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가상현실은 흥미로운 환상도 되고 꿈도 된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투명한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이 시의 언어들은 탈-관념의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디지털의 정수로 된 수리적 데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5. 나가는 글-디지털 시의 미래

 

 이제까지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라는 주제의 중심에 “디지털 시”를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21세기의 의사소통 방식은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가 시대의 핵심동력(核心動力)이 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현대시의 방향을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에 맞추어 탐구하는 것은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는 디지털 시의 근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의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덕수의 탈-관념의 사물성의 시도 디지털 시의 존재성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그 시들의 감각과 시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현대 컴퓨터의 디지털 특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부분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 <나, 디지털 시의 표현 방법>, <다. 디지털 시의 조건>은 순수한 독창적 것이 아니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디지털 시와 연관된 재료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합하여 구성한 21세기 디지털 시의 설계도인 것이다.

 <나. 디지털 시의 표현 방법>과 <다. 디지털 시의 조건>은 미래지향의 시창작방법론이다. 예시 작품들은 디지털 시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실험적인 방법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예술에서 완성이란 신기루(蜃氣樓) 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환원하여 21세기적인 새로운 시의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시 운동이다. 현재 이 시운동은 출발선상(出發線上)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디지털 시 운동이 한국을 넘어서 세계화가 될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은 지나친 자만(自慢)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시론은 21세기적인 감각과 의식이 생동하는 젊은 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로

  --- 디지털 시대의 시 쓰기

 

 

                                                      심 상 운(시인)

1.

 동양시의 경전이라고 일컫는 고대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보여주는 인간정서의 자연스런 분출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피어난 ‘감정의 자유로운 유로’(워즈워즈)는 이성보다 감성을 선호하는 한국현대시에서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근원은 ‘시는 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그러나 정서과잉, 상상력의 고갈 등 시적 긴장감이 풀어진 시들은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주었고 시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불러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 리듬, 이미지, 스타일 등에서 시대적 감각에 맞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의 모더니즘 시가 지적인 언어와 회화적인 이미지의 기법으로 정서과잉의 낭만주의에 식상한 지적 성향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영토로 환영을 받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고, 정서의 자연적 노출에서 벗어나 이를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줌으로써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했다. 이는 시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箱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距離의 노을을 벗기지 않는다면....

 

희망.

그것은 너의 寶石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는다면.....

------김현승 <희망이라는 것> 1〜3연

 

 그러나 시에서 의미를 중시하는 지성의 과잉이 일으키는 병폐도 또한 새로운 시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지성의 과잉에 대응하는 반지성(反知性)의 시, 즉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초현실의 시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를 추구하고 언어표현의 과감한 혁신을 지향한다. 그리고 시적대상의 현실적인 공리성이나 합리적인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대상과 대상을 창조적인 새로운 관계로 맺어주는 시작방법(詩作方法)을 내세운다. 이때 시 속에서 현실적 실용성이나 합리성, 공리성을 다 없애버리고 순수한 시적대상으로 재탄생하는 대상을 오브제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시작방법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反動)이거나 모더니즘의 전위(轉位)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초현실주의 시는 난해성을 수반하지만 시의 존재성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부분

 

 나의 영혼은 어느 무당집 촛불로 불타고 있다. 그해 겨울 동자상을 안고 오는 길은 뼈가 갈라지는 어둠이었다. 무당이 주는 병든 본능의 복숭아를 깨물며 내가 사랑했던 개들이 나를 자꾸 물어뜯어도 어디가 아픈지도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잠들 수 없는 어둠, 소리칠 수도 없는 어둠, 껴안을 수도 없는 어둠이 토끼의 눈물처럼 내 손바닥에 쌓이고 그런 날 무당집 뒤뜰의 구렁이는 밤마다 나를 껴안았다. 그 때마다 묻어났던 벌개진 어둠.

                          ----------양준호「나의 영혼은」전문

 

 모더니즘은 이런 도전 속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포용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것이 반지성을 용인하고 지성과 반지성이 서로 어울리게 하는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다. 이런 시작방법과 인식의 변화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시운동의 태동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 현대시에서 디지털 시대의 감각을 시에 도입하고자하는 ‘디지털 시’ 운동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시의 큰 테두리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의 모색과 분출이 가능한 것은 모더니즘의 근본정신 속에는 인습적인 것이나 상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변혁(變革)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21세기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디지털의 시대다. 컴퓨터의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사이버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을 열어 놓고 있다. 이 사이버공간은 개인 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영상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 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디지털의 특성이 만들어 내는 영상과 쉽게 합치될 수 있다. 이 영상(보여주기)은 근대 이성의 ‘문자권’, 을 넘어서는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 시대의 중심 매체다. 현대를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디지털의 특성+시= 디지털 시’는 현대시에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디지털의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언어의 예술인 시의 세계에서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옮겨 온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로 옮겨오는 디지털의 특성에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적인 언어와 상상력’이다.

 ‘디지털 적인 언어’라는 것은 언어를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컴퓨터의 데이터(data)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언어를 기호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선과 색채’와 같이 의미나 실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언어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탈-관념(무의미)의 언어라고도 한다. 이 탈-관념의 언어는 디지털의 감각인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등을 구현하는 언어가 된다.

 이런 디지털 시의 언어는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 (erdinand de Saussure 스위스 제네바 857. 11. 26 ~1913. 2. 22)의「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19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언어는 실제적인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스스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의 상상은 이런 언어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虛像)이지만 실재(실체)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순간의 시학」과「불의 시학」을 강의하는 김융희(서울예술대 교수)는 <바슐라르의 이미지의 시학> 강의(2006,6,26)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강의 개요’에서 요약․정리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도「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 157호)에서,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라고 순수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수평으로 네 개의 막대기가 날아간다.

똑같은 속도로 나란히 열을 지어

때로는 장대처럼 일직一直으로 이어져,

그 중의 하나는 달을 두 쪽으로 쪼개고

그 중 하나는 지구를 툭툭 치고

그 중 하나는 꽃밭을 후려갈기고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쳐 죽인다.

흩어졌던 막대기들이 다시 날아와

수평으로 나란히 열을 짓다가

제각기 머리를 돌린다.

하나는 벽을 후비면서 돌고

하나는 유리창을 뚫고 드나들며

하나는 나비를 뒤좇아 내를 건너고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

뒤얽히던 세 개도 차례로 죽는다.

                        -문덕수 「네 개의 막대기」전문

 

 디지털 적인 상상력은 ‘가상세계(假想世界)’라는 무대를 설치하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 가상세계는 ‘허구적(虛構的)’이란 면에서는 예술적인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디지털적인 상상은 허구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데서 기존의 허구와 차이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뉴 웨이브 문학상>을 제정하고 홍보하는 조선일보(2007,4,9)에 기고한 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의 글,「꿈을 현실로… 이것이 뉴 웨이브 문학!」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는 그 글에서 “정보화 혁명은 문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좌표 위에 위치시켰다.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을 하는, <컴퓨터>: 대화식의)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 라고 21세기 디지털의 세계가 펼치는 가상세계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라고 하면서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판타지문학도, SF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의 마법사’ ‘듄’ ‘유배행성’ ‘로캐넌의 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그리고 있는 현대문학일 뿐이다. 그 반대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현대문학’, 즉 1990년대 이전까지의 현실 개념에 따라 문학을 이해하는 근대문학이 있다.”라고 현대문학과 근대문학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검증을 철저히 거쳐야 하겠지만, 상상의 무한한 확대라는 면에서 21세기 문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Hypertext literature) 은 디지털 적인 순수한 상상력의 확산과 독자참여의 문학공간이라는 면에서 한계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 텍스트의 유동성(流動性)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닌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형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형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인터넷에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리좀은 원래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줄기 즉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용어인데,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J. 데리다, G.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되는 시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과리(문학평론가)는「컴퓨터와 문학- 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6년)에서 “문학의 ‘文’ 그리고 literature의 'letter'는 문학이 ‘언어’ (더 좁혀, 문자)를 중심매체(中心媒體)로 삼는다는 뜻을 포함하고도 있다. 하이퍼미디어에서는 그런 중심매질(中心媒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 또한 그 자체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의 장 속에 종속하여 있어서,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론은 문학에서 중심매질이 되는 언어(문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 예속된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미완성의 시-그림 감상하기」전문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 1834 영국의 서정시인·비평가·철학자.)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연상)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기울게 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추리(知的推理)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무목적성’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공상이 상상보다 현대적인 감각을 더 넓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시의 무목적성 외에 공상이 가지고 있는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낀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이나 유희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거나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이 하이퍼텍스트 시도 ‘디지털 시’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필자의 현대시론「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는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듈 이론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연결 관계보다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이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이다. 이 의식의 흐름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의 맥락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4.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탈-관념의 영상언어 즉 보여주기(Showing)의 세계를 제시한 ‘디지털 시 운동’은 모더니즘의 구조(frame)속에 들어있으며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의 새로운 언어 운동’이다. 이 디지털 시 운동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는 물론 상상의 확대, 자유연상(공상), 영상성과 공연성을 통해서 ‘공연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현대시의 공간 확장방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탈-관념’, ‘기호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 공간을 개척하는 강한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정서 위주의 시나 모든 시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시인들은 사이버 공간과 가상세계, 언어의 기호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들 중에는 ‘디지털 시’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기계의 시로 착각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다. 그런 시인들에게 디지털 시의 넓은 공간과 새로운 감각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쩌면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21세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호흡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의 세계는 현대인의 정신을 정주(定住)에서 이동(移動)으로, 삶의 공간을 지역공동체에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변화시키고 있다. 탈-중심은 다양한 가치의 세계 속에서 어떠한 대상과도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런 현상은 언어예술의 세계에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따라서 현대 시인들은 과거시제의 ‘관념의 집’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유목민처럼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시점에서 볼 때,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문학은 미지의 텍스트의 세계로 떠나가는 예술적 여정에서 다른 예술보다 뒤처져 있다. 언어의 의미성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문화의 집적(集積)인 언어의 의미성이 새로운 텍스트의 원천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일반언어학강의>)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에 게재한 시론(대담형식의 글)「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畵)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에는(2007년 4월호 <시문학>월평「실재 모색하기」)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디워>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디워>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디워>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디워>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7, 8, 30>2007년 12월 사단법인 한국 현대 시인협회 기관지 <한국 현대시> 2호에 발표 (2007,12,24 수정)

 

 

 

 

 

 

 

사단법인 <한국 현대시인협회> 2008년 여름 세미나 주제발표 원고 (수정보완)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 21세기 ‘하이퍼 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 상 운 (시인)

 

 1.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1908년 잡지 <소년>에 발표된 최남선의‘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시발점으로 출발한 한국의 현대시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경제건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면서 시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현대시는 시대적 이념의 시, 개인적 서정시에서 전통적 서정시, 사회계층에 대한 시, 모더니즘의 예술적 감각의 시, 주지적 관념의 시, 언어실험 시 등 시대적 사회적 예술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시의 공간을 대폭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민조시(신세훈),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공연시(신규호), 디카시(이상옥) 등 새로운 시의 형태를 정립하고 있다. 현대시의 이런 변화 속에는‘전통 언어의 계승과 변화’(민조시),‘언어와 실체의 관계’,‘시와 독자의 소통문제’(디지털 시, 공연시, 디카시) 등이 들어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와‘시의 구조(構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설정은 중요성을 더 한다.

 20세기 한국 현대시들은 시의 구조에서 공통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단선구조의 시는 시의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 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말한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윤사월> 전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국화 옆에서> 전문

 

 이 두 편의 시 속에는 인물(눈먼 처녀, 내 누님)이 들어 있지만 그 인물들은 시의 시점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박목월의 <윤사월> 속의 눈먼 처녀는 시적 화자(詩的 話者)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눈 먼 처녀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정서는 화자(시인)의 주관적 인식과 감성의 표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화자와 처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 된다면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가능해 질 것 같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속의‘내 누님’은 비유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단일시점으로 고정된 화자의 사유와 감성에 더 밀접해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독립적인 면이 박목월의 <윤사월>의 눈 먼 처녀보다 약하다. 작품 예시는 안했지만“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시 속에‘그’라는 인물을 삽입하여 정서를 객관화시키고자 했던 유치환의 <깃발>도 단일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런 단선구조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현대시의 고정된 틀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시의 정체(正體)도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 표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향의 <바다의 층계>나 문덕수의 <철원 노동당 당사>와 <마릴린 몬로>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라는 단선구조의 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뽄뽄다리아>

<마주르카>

<디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전문

 

남쪽 북쪽의 불벼락을 맞아

지붕 기왓장 문짝 모두 휴지처럼 날려가버린 유령이네

반세기를 앓는 벽은 3층 윤곽만 남았네

태극기 인공기 번갈아 내걸려 펄럭이었을

그날의 불먼지, 벽귀퉁에서 시나브로 날려 떨어지는 문틈에는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

꽃 피네

 

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

나비 앉네

                  ----문덕수 < 철원군 노동당 당사> 전문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선비화禪扉花로 피었다는 설화가 있음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어 벽에 걸어 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 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새기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 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녹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 개 씩 들고 몰려온다

          -----문덕수 <마릴린 몬로> 전문

  

 조향과 문덕수 시의 공통점은‘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들은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 즉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해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조향의 <바다의 층계>는 연결고리(링크)의 기능이 형성되지 않은 단순 이미지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와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문덕수의 <철원군 노동당 당사>는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사실적 이미지 + 난해한 이미지) 즉 의식의 중층구조를 통해서 다선구조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의식의 중층구조는 이 시의 끝부분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꽃 피네//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나비 앉네>에서“꽃 피네”와 “선비화에 나비 앉네”의 링크(link)가 만들어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꽃 피네”에 링크하여 “선비화에 나비 앉네”로 건너뛰는 의식의 비약이 현실을 초월하는 하이퍼(hyper)인 것이다. <마릴린 몬로>에서는 마릴린 몬로의 다양한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서 현대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욕망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의 환유(換喩)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논리적 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도 “마릴린 몬로”는 연결고리(링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 속에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단선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향과 문덕수가 시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의 탈출은 그들의 시에서 의미의 단절 또는 의미로부터 해방과 함께 시의 공간이동을 보여준다. 이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계에서 형이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 결합 방식은 김춘수의‘무의미 시’의 기법과는 다른‘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여야 하는 시의 정체(正體)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기법의 제시다. 따라서 언어의 링크 기능을 통한 하이퍼(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는 문덕수의 <철원군 노동당 당사> 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여는‘디지털 시 또는 하이퍼 시’의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2.

 21세기의 한국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운동‘디지털 시’또는‘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시의 정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어려웠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 공간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사이버(cyber)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이버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개인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공간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의미의 예술’에서‘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20세기의 단선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서 21세기적인 다선구조의 틀을 세우려는 ‘하이퍼 시 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하이퍼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를 거부하고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이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따라서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선후(先後)가 없으며,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리좀의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 시다. 그러나 전자 하이퍼 시가 아닌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문자 하이퍼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문자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문덕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에서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 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줍니다.”라고 이미지 세계(시)와 가상현실 세계(컴퓨터)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하이퍼 시)’ 이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 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李箱),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 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 화자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나’라면 제2 제 3의 화자는‘너‘와‘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층 시점에서 3인층 시점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   (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위에 예시한  <바다의 층계>와 <마린몬로>는 하이브리드 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철원군 노동당 당사>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만이 아닌 ‘너’나 ‘그’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형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바뀌게 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나’와 일반 서정시의‘나’는 입장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에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  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회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 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나’와‘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은빛 갈치의 회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이다.

      

       4.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3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 시는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사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 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가상현실의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 시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 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와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확장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선택과 집중’‘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가상현실의 세계’라는 디지털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 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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