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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 현대시의 특성
권대근
스피어즈는 현대의 특성을 '단절'이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있다.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 자욱한 풀벌레 소래 발길로 차며
김광균의 <추일서정> 일부
이 시는 도시 문명에 의한 인간의 고독과 소외를 다룬 시다. '급행차'와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보이는 '공장의 지붕'과 '꾸부러진 철책'에 대한 표현은 모더니즘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표방하는 도시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라는 개념은 산업화 이후의 도시화된 인간의 삶 양식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상업화, 도시화 이후의 인간의 삶을 집약하는 말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 소외의 현상이다.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분업화로 인한 일로부터의 소외 등이다. 이것을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리는 것을 '담배연기'로, '공장의 지붕'을 '흰 이빨을 드러내인'으로 , 꾸부러진 철책'을 '바람에 나부끼고'로 각각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시적 자아와 거리감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어, 이 거리감 자체가 현상적 세계로부터 자아의 소외 현상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어두운 방 안엔 / 바알간 숯불이 피고 //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 이윽고 눈 속을 /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종길의 <성탄제> 일부
이 시는 옛날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 시인이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 내용이다. 즉 이 시의 주제는 현재 도시의 삶 속에서 옛날의 따뜻하고 진실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를 시인은 어린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붉은 산수유 열매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편리한 삶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인간적인 따뜻한 사랑이 결여된 오늘의 현실을 과거의 농촌 사회에서 힘들고 어려웠지만 따뜻한 사랑이 있었던 것과 대비시켜 넌지시 비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시는 모더니즘시라고 할 수 있다. 사방이 꽉 막힌 엘리베이트 거울 앞에서 주름진 얼굴과 희긋희긋하게 돋아난 흰머리카락을 보고 있는 모습이 바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애써 달려온 삶이 어느 날 공허하게 느껴지는 그 범상인의 감정은 보지 않아도 될 거울을 보게 되는 도시 문명의 상징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자의식에서 잘 드러난다. 직장일로 지치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바라본 거울, 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젊은 날 땀흘려 맹렬하게 살던 노력들이 한갓 쓸쓸함으로 느껴지는 건 어쩌면 현대 사회의 특성상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느끼게 되는 그 스산한 삶의 과정을 진경옥은 놓치지 않고 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쉬지 않고 흐를 것이다 / 11월의 달력이 또 찢겨 나가고 / 그득하던 들판도 비어 / 흙빛이 될 것이다. / 낡은 겉옷을 걸치고 / 주머니에 넣어보는 걸끄러운 손 안에 부스스 마른 잎이 몇 장 그나마 으스러질 것이다.
진경옥의 <겨울 생각> 일부
한 계절이 아니면 한 해, 그것도 아니면 어느 시간적 단위를 끊어서 그것을 보내는 것은 비애다. 그리고 우수다. 그 비애와 우수의 이미지를 겨울에서 끌어오고 있다. 겨울은 어둡고, 겨울은 불안하고, 겨울은 절망적 이미지를 안고 있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심상, 으른바 원형적 심상이다. 이 원형적 심상에 정확히 들어맞는 '11월'과 '흙빛'과 '마른잎'의 이미지가 바로 시에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세계관과 독자의 세계관에서 폭넓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하나의 의미망이다. 그는 현대적 심상을 시화해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진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현대적 인간의 특성 중에 큰 하나가 외로움이다. 이 외로움의 감정은 불안과 공포와도 오버랩된다. 싸르트르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인간 실존을 표상하는 심리적 기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외로움의 구체화로서 방랑을 들 수 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란 말이 있듯이 방랑 역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적 모습이다. 미로를 가고 잇는 인간의 모습이 때로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데서 그의 세계 인식은 현대적 특성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경옥은 방황하는 자아, 방황하는 동시대인의 삶을 '수묵화'라든지 '운무'와 같은 낱말을 구사하면서 적절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낮불을 켜고 / 수묵 속을 달린다 / 길은 간 곳이 없고 / 폭우와 운무 / 길 없는 길을 가며 / 수묵화로 젖는다 / 이정표도 다 지운 장대비 속을 / 하늘에나 걸리듯 / 아슬한 질주 / 겹겹의 산 속으로 헤매어 간다
진경옥의 <내륙행, 길 없는 길> 일부
'낮불'은 시인의 공포의식과 접합되어 길 찾기의 방안으로서 제시된 단어다. 어두운 낮의 불이 필요하다는 정신적 갈구는 현대인의 방황의식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겹겹의 산 속에서 폭우와 운무 속을 헤매는 것은 산을 오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방향 상실이 수묵화로 침잠하면서 어두운 백주에 '낮불'을 켜드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도, 또 생각하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산 속에서의 방황은 단순한 체험으로서 시의 재료에 머물지 않고 시로서 승화되는 것이다. 현대적 삶이란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득한 질주'이거나 또는 '겹겹의 산 속으로 헤매어' 가는 일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산 속의 방황이 삶의 모습임이 <내륙행, 운무 속으로>란 시에 잘 나타난다. 겹겹 산중, 끝없는 안개, 거기다가 밤은 깊어지는데 길이 없어 방황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생행로일 것이다. 가고자 하는 심리 또한 살아있는 사람의 심리다. 그러나 가고자 한다고 해서 어디나 함부로 갈 수도 없는 현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강은 흘러서>란 시에서는 이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의 본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현대로 오면서 단절이 우리들의 삶의 특성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요구한다. 그것은 19세기적 인간관을 벗어나 소위 20세기적 인간관을 형성한다. 19세기 인간관이란 다윈이나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읽을 수 있었던, 인간은 자연과 연속된 존재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한다. 다윈의 경우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 사이에는 어떤 단절도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적 삶의 투쟁 원리가 그대로 인간적 삶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삶의 하부구조가 삶의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논리나 역사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이 결론은 동물적 삶과 인간적 삶의 동일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은 전복된다. 이제까지 한결같이 수용되던 소위 자연과 연속된 존재로서의 인간,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인간, 무엇보다도 합리적이고 결정적인 세계관에 종속되어 온 인간이라는 개념을 벗어난다. 우리의 삶 속에는 어떤 정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식, 모든 사물의 본질 속에는 근본적으로 불연속성, 곧 단절이 존재한다는 의식이 팽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송유미는 <허난설헌은 길을 잃었다>란 시집에서 인간의 순결함을 보증할 현실이 없다는 인식에서 자기만의 위안의 세계를 찾고 있다.
가슴에 묻은 아가의 얼굴이 북두칠성이 되어 반짝인다 / 그 어느 것도 나의 구원이 될 수 없는 세상의 것들은 잠이 들었다 / 잠이 들었거든 깨어나 나의 괴로움이 되지 말고 / 이미 세상의 그 어디에도 나의 길은 무너져버렸다면 / 갑산으로 가는 길조차 폭설에 덮였으리라
송유미의 <허난설헌은 길을 잃었다> 일부
이처럼 순결함은 자아와 세계를 단절시킨다. 세상의 것들, 인간을 포함한 사회 제도 온갖 인공적인 것들은 자아의 순결함에 대한 충분한 보증이 되지 못한다. 세상의 길은 무너지고 가야 할 길은 폭설로 가려져 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존재의 내면은 고갈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길을 잃은 자아의 고립주의는 가중된다.
여기는 지상의 천국 / 숨쉬는 존재는 당연히 없다 / 여기서는 아무도 살지 않지만 / 계산되고 잇다 정보를 교환하는 신과 인간 // 유한(1)과 무한(0)이 만들어내는 / 무가치한 존재의 더미 / 전세계의 사막이 점점 넓어지고 있듯이 / 묘지가 자리 넓혀 지구를 뒤덮고 있다 / 비석도 없는, 생몰년대도 모르는 / 주검들, 주검의 산, 산맥
이승하의 <이 거대한 세기말 병동에서 9>
시인은 현대를 특히 세기말을 '거대한 병동', 즉 환자들이 사는 곳으로 파악한다. 그 환자들인 인간 존재의 모습을 매우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숨쉬는 존재가 없다. 주검들의 산맥 같은 구절들이 이것을 잘 말해 준다.
숨차하는 만년필아 / 앙상한 뼈가 드러나는 말라빠진 종이야 / 내 목구멍에서 몰아치는 탄식 때문에 /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채호기의 <수련> 첫 연
채호기는 '수련'을 통해 세기말의 불길한 징후를 읽는다. 우울한 어조로 현대적 특성인 단절과 불안, 소외를 함축하고 있다. '숨차하는 만연필', '말라빠진 종이'등의 시적 수사는 독특하다. 그 독특함은 세계 안에 놓인 대상을 비틀어 보는 시인의 시각에서 비롯한다. 숨차하고 말라빠진이라는 관형어가 결코 긍정적이고 밝은 세계 인식의 소산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젊은 시인들은 대부분 오늘의 세계에 대해 많이 실망하고 부정하고 절망하는 것 같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의식, 새로운 사물의식은 이 시대의 시가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양상이다. 시는 20세기에 오면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을 그때까지의 결정론적 태도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다. 현대의 특성인 단절의식은 결국 사물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전망과 연결되고, 결정론적 태도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의의를 드러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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