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를 배울 때 고쳐야 할 표현/도종환
* 다음의 시를 보자
세상의 모든 아내들은
한 꽃에 꽃잎 같은 가족을 둘러 앉혀 놓고
지글지글 고깃근이라도 구울 때
소위 오르가슴이란 걸 느낀다는데
노릇노릇 구워지는 삼겹살
그것은 마치 중생대의 지층처럼
슬픔과 기쁨의 갖가지 화석을 층층히 켜켜로 머금고
낯뜨거운 오르가슴에 몸부림친다
그 환상적인 미각을 한 점 뜨겁게 음미할 새도 없이
식구들은 배불리 식사를 끝내고
삼겹살을 구워 먹은 뒤 폐허 같은 밥상은
..........
헐거운 행주질 한 번으로도 절대 깨끗해지질 않는다
하얀 손등에 사막의 수맥 같은 파란 심줄을 세우고
힘주어 밥상을 닦는 아내의 마음속엔
수레국화 꽃다발 사방으로 흩어지고
- 「돼지」 중에서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의 모습을 무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한 꽃에 꽃잎 같은 가족', 그렇게 표현했다.
비유가 신선하다.
돼지고기의 삼겹살을 보며 떠올린 '중생대의 지층' 그리고 '층층히 켜켜로 머금은 슬픔과
기쁨의 갖가지 화석', 이런 비유들은 이 시를 쓴 사람만이 본 독특하고 새로운 시적 발견이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돼지고기와 오르가슴을 연상시킨 비유에 이르기까지 이 시는 전혀 상투적인
데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시가 새로운 느낌을 준다.
3.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드러나야 한다
사람들은 돌아오고 흐느끼는 소리는 없었다
아무도 앓는 소리 듣지 못하고
나도 어딘가로부터 돌아왔다
피는 물 위를 기름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원심분리기 속에서
제 무게 만큼의 속도로 흩어져 간다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유방들이
다가올 봄을 대비해
욕망을 충족시키고
수많은 옷가지들이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면 어느새 나는
벌거벗은 병정이 되어
거리를 간다
속이지 말라고 사람들은 외치고
그래도 나는 속인다
나는 속이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내가 죄를 벗어나는 길은
죄를 잊는 길밖에 없다
나의 원죄는 이토록 망각 앞에 무력하다
또한 그것은 종이 위에서 다소간의
위안을 찾기도 하지만
여전히 노란색 가로등에 뿌리는
외로운 빗줄기 옆에 있다
하염없이 달리는 차창가에
정면으로 달려오는 운명 앞에 있다
- 「갑자기 그러나 천천히」
이 시속의 시적 화자는 지금 죄 때문에 괴로워한다.
죄를 짓고도 그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속이고 있어야 하는 괴로움에 마치 벌거벗은
병정이 되어 거리를 가고 있는 듯한 부끄러움에 싸여 있다.
시적 화자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물론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를 쓴 사람이 이 시를 통해서 결국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는지가 불명확한
데 있다.
1연 3행 '나도 어딘가로부터 돌아 왔다'는 것은 어디일까.
끝까지 읽어보아도 그곳이 어디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2연에 와서 죄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한다는 이야기가 길게 전개된다.
그런데 18~19행 '그것은 종이 위에서 다소간의/ 위안을 찾기도' 한다고 말한다.
무슨 위안을 찾는다는 것일까.
그리고 21행 '외로운 빗줄기 옆에 있다'와 23행 '정면으로 달려오는 운명 앞에 있다'고 했는데,
무엇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죄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끝 구절이기도 한 18행부터 23행까지는 역시 모호한 채로 던져져
있다.
2연 1행부터 7행까지는 이 시 속의 시적 자아가 서 있는 공간적 배경을 나타내는 것들인데,
죄의식을 느끼게 된 원인과 어떤 연관을 갖는다든가 아니면 상징적인 구실을 한다든가 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주제를 향한 응집력도 부족할 뿐더러 '유방' '병정' '종이' '운명' 등의 시어들이
이해되지 않는 채 자꾸만 걸린다.
거기다 제목 「갑자기 그러나 천천히」는 시 전체 내용과 어떤 연관을 갖는 것인지 역시 알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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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의 자세
―이제야 (1987∼)
지내려다가
지나는 때가 있다
너와 지내려다
너를 지날 때,
심장으로 손을 뻗었다가
계절 속으로 너를 집어넣기도 했다
새벽과 지내려다
새벽을 지날 때,
망각을 위한 노래를 부르다
선명해진 악보를 다시 읽기도 했다
한사코 지내려던 것들이
스르르 지나는 때가 있다
여름아, 부르면
소매 밖으로 팔이 나오듯
나와 지내려다
나를 지날 때,
물음표들을 수없이 피우다
마침표 없이 문장을 닫기도 했다
‘지내다’는 ‘살아가다’ ‘머물다’, ‘지나다’는 ‘흘러가다’ ‘끝나다’ ‘엇갈려 스쳐가다’라는 뜻이다. 언뜻 친연관계일 듯싶지만 의미 연결이 없는 동사들, 오히려 대립하고 있는 말 ‘지내다’와 ‘지나다’를 연결시켜 여운 깊은 대위법을 보여주는 시!
인연 닿은 것들을 모두 그러안고 살 수는 없다. 그러기는커녕 우리는 대개의 인연을 지나 보낸다. 잡으려면 연기처럼 사라지고, 잡으려면 연기처럼 사라지고. 잡고 싶었는데,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놓쳐버린 것들. 같이 살고 싶었는데 가버린 것들! 그 아쉬움과 쓸쓸함을 절절하게 뽑아내는 시인의 솜씨가 대단하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왜 그렇게 됐을까? 숱한 물음표가 펄럭거리지만, 알 수 없는 채로 시절이 닫힌다. 아니, ‘물음표들을 수없이 피우다/마침표 없이 문장을 닫기도 했다’, 시인이 시절을 닫는다. 쓸쓸하지만, 쓸쓸함을 삶의 신비로움으로 넘긴다. 그 속이 휴화산일 테지. 언제라도 물음표들이 치받아 오를 테지.
이십 대는 아픔이고 열정이고 미련이고, 크레용처럼 진하다. 어긋나고 스쳐가는 것들에 대해 가슴 찢어지고 미칠 것 같고, 감정의 파도가 산처럼 일어났다 무너지곤 하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면 어지간한 일에는 가슴 치고 발 동동 구르고, 그러지 않는다. 사랑을 잃어도 돈을 잃어도, 그냥 조금 아쉽고 미안하고, 그러다가 며칠 지나면 잊어버리거나 넘겨버린다. 나이 든다는 건 편안하게 쓸쓸한 일이다. 나만 그런가? 아, 어쨌든 있을 때 잘하자! 이 말의 깊은 뜻도 젊을 때는 잘 모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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