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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인 - 장 콕토
2017년 04월 10일 00시 43분  조회:5596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 1889. 7. 5, 프랑스 파리 근처 메종라피트
사망 1963. 10. 11, 파리 근처 밀리라포레
국적 프랑스

요약 콕토는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 극작가 등 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대표적인 프랑스 예술가 중의 하나이다. 
파리에서 성장한 그는 교양이 넘치고, 부유하고, 음악과 미술, 문학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무대 예술에 실질적인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러시아 발레단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 들은 발레단 감독의 "나를 한번 놀라게 해보라"라는 말이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이후 발레극 뿐만 아니라 다른 극작품도 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나중에 시인이자 소설가가 된 천재 소년 레몽 라디게를 알게 되었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26년에 초연된 <오르페우스>는 당대의 연극에서 비극을 부활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고, 대표적 희곡으로 알려진 <지옥의 기계>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기도 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제로 다루었다. 또한 활동 영역을 넑혀 시나리오 작가 및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장 모리스 외젠 클레망 콕토(Jean Maurice Eugène Clément Cocteau, 1889년 7월 5일 ~ 1963년 10월 11일)는 프랑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영화 감독이다.

파리의 근교 메종라피트(Maisons-Laffitte)에서 출생하였으며, 학교를 싫어하여 문학적 사교계에 출입하였다. 당시 여성 예술가들과 사귀어 다다이즘 시인으로서 출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위파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1917년 사티·피카소·디아길레프와 함께 《파라드》, 《지붕 위의 황소》, 《에펠탑의 신랑 신부》등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시·음악·회화·무용 등의 총화를 꿈꾸었다.

그 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연극에 있어서도 역사·풍속·탐정·발레 등으로 여러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 마술사라는 소리를 들었다. 시작 전념 시기를 거쳐, 1926년부터 극작으로 되돌아와 <로미오와 줄리엣> <오르페> <안티고네> <지옥의 기계> 등 고전적 명작의 현대화를 시도했다. 1930년 코메디 프랑세즈의 상연종목이 된 <소리>를 비롯하여, 그 후 모든 장르와 모든 테마를 이용하여 재기(才氣)에 넘치는 작품을 차례로 발표해 나갔다. <르노와 알미드> <쌍두의 독수리> <무서운 어버이들> 등이 그 대표작이다.

1930년 전위적인 작품 《시인의 피》로써 본격적으로 극 영화 제작에 나섰다. 1955년 프랑스 예술원 회원이 되고, 프랑스 문화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작품으로 소설 《사기꾼 토마》, 《무서운 아이들》, 희곡 《지옥의 기계》, 《무서운 어른들》, 시나리오 《비련》, 《마녀와 야수》, 《오르페》 등이 있다.

장르를 넘나드는 화려한 예술적 역량은 한 장르 안에서도 갖가지 시도와 실험으로 다채로운 색채를 보여주고 있는데, 가령 희곡 장르만 하더라도, 동시대 예술가들(피카소마티스밀로에리크 사티스트라빈스키디아길레브 등)들과 협업하여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는 발레극, 오페라극(《퍼레이드》, 《지붕위의 황소》)을 시도하였는가 하면, 신화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버전으로 발표하였으며(《오르페우스》, 《지옥의 기계》, 《앙티곤느》),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미학적 수술을 감행하여 새로운 셰익스피어를 선보였고(《로미오와 줄리엣》), 부르주아 연극과 낭만주의 연극, 자연주의 연극을((《쌍두 독소리》, 《성스런 괴물들》, 《무서운 부모들》 등) 시도하는 등 다양한 연극적 경험들을 보여주었다...=
 

 

Jean Cocteau

생애와 이력

1889년 7월 5일 프랑스 파리 북서쪽에 위치한 메종-라피트(Maisons-Laffitte)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연극, 영화 등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살 때 집을 떠나 콩도르세 고등학교(Lycée Condorcet)에 진학하지만 학교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졸업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콕토가 19살이 되던 1908년에는 비극 배우 에두아르 드 막스(Édouard de Max)가 콕토의 시 발표회를 페미나 극장(le théâtre Femina)에서 개최하였다. 1909년 콕토는 자신의 첫 시집 『 알라딘의 램프 』(La Lampe d'Aladin)을 출간하였으며, 이듬 해에는 두번째 시집 『 경박한 왕자 』(Prince frivole)을 출간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29년에는 소설 『무서운 아이들』(Les enfants terribles)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요절한 작가 레이몽 가디게(Raymond Radiguet)의 죽음을 추모하는 의미로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세계

1930년 장 콕토는 중편영화 <시인의 피>(Le Sang d’un poète, The Blood of a Poet)를 연출한다. 콕토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와 편집까지 담당한 이 영화는 4부로 구성된 실험적인 작품이다. 이 초현실주의적인 영화는 샤를르 드 노아이유 자작(Le vicomte Charles de Noailles)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는데, 자작은 이 영화 외에도 또 한 편의 초현실주의 영화의 대표작인 루이스 부뉴엘( Luis Buñuel) 의 <황금시대>(L'Âge d'or)를 후원하기도 했다. <시인의 피>는 애초 애니메이션으로 기획되었으나 실사 영화로 제작되었다. <시인의 피>는 콕토의 또 다른 대표작 <오르페>(Orphée, Orpheus, 1950)를 예견하는 작품이다. <오르페>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현대로 옮겨 온 작품으로 상징적인 이미지와 시적인 대사들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인의 피
시인의 피

Le Sang d’un poète

장 콕토는 1953년과 1954년 2년간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55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l'Académie française)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10월 11일, 자신의 친구인 가수 에디프 피아프(Edith Piaf)가 사망한 지 몇 시간후 심장마비로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영화사적 평가

콕토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러시아 발레단의 디아길레프(S. P. Diaghilev), 발레니노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 현대음악가 에릭 사티(Erik Satie),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전방위적인 예술활동을 펼쳤다. <시인의 피> <오르페> 등 그가 연출한 영화들은 당시 문화 전반을 휩쓸었던 초현실주의의 영향 아래 놓인 작품들이다.



[Daum백과] 장 콕토 – 근현대 영화인사전,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 김이석/차민철,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장 콕토 (Jean Cocteau)
장 콕토 (Jean Cocteau)

프랑스의 극작가, 시인

개요

대표작으로는 시집 〈천사 외르트비스 L'Ange Heurtebise〉(1925), 희곡 〈오르페우스 Orphée〉(1926)·〈지옥의 기계 La Machine infernale〉(1934), 소설 〈무서운 아이들 Les Enfants terribles〉(1929), 초현실주의 영화 〈시인의 피 Le Sang d'un poète〉(1930)와 〈미녀와 야수 La Belle et la bête〉(1946) 등이 있다.

유산과 젊은시절

콕토는 파리에서 성장했으며, 말투·교육·사고방식·습관 등에서 언제나 자신을 진정한 파리 사람으로 여겼다.

그의 집안은 명실상부한 파리의 부르주아 계층에 속해 있었고, 그런 집안답게 교양이 넘치고, 부유하고, 음악·미술·문학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어린시절 기억은 극장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기억은 서커스나 고급 유흥장에서 펼쳐지는 흥행물 형태로 남아 있기도 하고,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공연되는 진지한 비극의 형태로 남아 있기도 했다. 19세에 그는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 La Lampe d'Aladin〉를 출판했다.

콕토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몇 해 동안 말하자면 정치적 혼란이 전혀 없이 세련된 예술적 취향이 장려되던 시절의 산물이었다.

그가 무대 예술에 실질적인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러시아 발레단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였다. 콕토가 발레극을 쓰고 싶다고 의견을 밝히자, 당시 러시아 발레단 감독을 맡고 있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나를 한번 놀라게 해보라"(Étonne-moi)라고 응수했다. 이 한 마디는 결국 젊은 시인으로 하여금 〈파라드 Parade〉(1917, 에리크 사티가 곡을 붙임)·〈지붕 위의 황소 Le Boeuf sur le toit〉(1920, 다리위스 미요가 곡을 붙임) 같은 발레극뿐만 아니라 다른 극작품도 쓰게 만든 자극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유명한 한 마디는 그의 연극과 영화에도 종종 인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콕토는 벨기에 전선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이때 관찰한 풍경은 나중에 그의 소설 〈협잡꾼 토마 Thomas l'imposteur〉(1923)의 배경이 되었다. 그는 조종사 롤랑 가로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 공중 비행에서 영감을 얻은 초기 시집 〈희망봉 Le Cap de Bonne-Espérance〉(1919)을 그에게 헌정했다.

1916~17년에 그는 당시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한 현대 예술계에 이따금 출입하면서, 파블로 피카소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같은 화가와 막스 자코브, 기욤 아폴리네르 같은 문인들을 사귀었다.

라디게의 영향

전쟁이 끝난 직후 콕토는 나중에 시인이자 소설가가 된 레몽 라디게를 막스 자코브의 소개로 만났다.

천재로 소문나 있던 16세의 소년 라디게는 단순성과 고전적 명증성의 미학을 옹호했는데, 이때 라디게가 주장한 미학은 뒤에 콕토 자신의 작품의 특성이 될 만큼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라디게가 2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을 때, 34세의 장년인 콕토는 사상과 용기와 열정을 끊임없이 공급해주던 우정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연인이 죽고 나자 슬픔을 견디지 못한 콕토는 아편에 빠져들었고, 이때문에 그는 일정 기간 요양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종교 철학자인 자크 마리탱이 요양소로 그를 찾아왔다. 이 신학자를 통해 콕토는 짧은 기간이나마 그리스도교로 귀의했다. 이 복합적인 체험은 그의 삶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고, 그 기간 콕토는 그의 가장 중요한 몇 작품을 썼다. 장시 〈천사 외르트비스〉에서 시인은 한 천사와 격렬한 다툼을 시작하는데, 이 천사는 뒤에도 그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여 콕토와 싸움을 계속한다.

1926년에 처음 무대에 올려진 〈오르페우스〉는 당대의 연극에서 비극을 부활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다. 이 작품에서 콕토는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 나름의 해석을 심화했다. 1929년 3월의 3주일 동안에 완성한 소설 〈무서운 아이들〉은 폴과 엘리자베스라는 두 남매를 통해 사춘기의 거칠 것 없는 특성을 파고들어 연구한 작품이다.

1950년에 그는 이 작품을 영화화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로 각색했고, 거기에 따른 해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 〈시인의 피〉를 제작함으로써 활동 영역을 넓혔다. 영화로는 첫번째인 이 작품은 그 자신의 정신적 체험을 다룬 것으로, 주제는 그당시만 해도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낯설고 충격적인 것이었으나, 그후 다른 작품들을 통해 종종 표현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덜 사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주제로 느껴진다.

1930년대초에도 그는 흔히 그의 대표적 희곡으로 평가되는 〈지옥의 기계〉에서 그의 개인적 체험이기도 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제로 다룬 바 있다. 이 두 작품에서 그는 인간성의 위대한 주제에 보다 가깝게 다가갔다.

1940년대의 영화 제작

1940년대에 콕토는 영화 쪽으로 다시 돌아와 처음에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고, 다음에는 영화감독으로 뛰어들어, 동화를 각색한 〈미녀와 야수〉와 그 자신이 희곡에서 다룬 바 있는 시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재창조한 〈오르페우스〉(1950)를 제작했다.

당대의 중요한 시각 예술가로서 콕토는 1950년에 생장카프페라에 있는 '빌라 산토 소스피르'의 실내 장식을 맡았고, 일련의 중요한 그림 제작에도 착수하여 망통에 있는 시청사, 빌프랑슈쉬르메르에 있는 생피에르 예배당, 밀리라포레에 있는 생블레즈데생플 성당의 벽화를 그렸다. 프레쥐에 있는 한 성당의 실내 장식은 그가 74세에 죽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끝나 양자인 에두아르 데르미(화가로 나중에는 영화계에서도 활동함)가 맡아서 작업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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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콕토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00X81cm 1916

무희(舞姬) / 쟝 콕토 

 

 

게는 발 끝으로 걸어 나온다

두 팔로 꽃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귀 밑까지 찢어진 듯한 웃음을 짓는다. 

오페라의 무희는

꼭 게 모양을 닮아

색칠한 무대 뒤에서

두 팔로 원을 그리며 나온다.

 

 

너의 웃음은 / 쟝 콕토 

 

장미꽃 잎의 가장자리처럼 위로 잦혀진 네 미소는

너의 변신(變身)에 원망스럽던 내 심사를 달래 준다.

너는 잠이 깨어 이제는 꿈은 잊어버렸다.

나는 또다시 너의 나무에 매어진 몸이 된다.

너는 제 작은 힘을 다하여 내 몸을 얼싸안는다.

우리는 어째서 나무가 되지 않는가, 한 껍질

한 체온(體溫), 한 빛깔의 나무가,

그리고 우리들의 입맞춤이 그 나무의 유일의 꽃이 되지

않는가

 

 

나의 시풍(詩風)이--- / 쟝 콕토

 

이 시집의 시풍이 전과 다르다 해도

오호라,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

나는 항상 시를 기다리기 힘들어

그저 오는 것을 붙잡는다.

 

독자여, 뮤즈 시신(詩神)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 같아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를 무대로 삼아 움직이는

저들의 깊은 책략을 나로서는 추측할 수가 없다.

 

나는 저들이 내 머리 속에서 춤추며 맺었다 풀었다

혹은 중단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저들의 법을 쫓는 길 외에

별다른 무모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

 
장 콕토, 그의 연인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한 예술가의 드라마틱한 애정행각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부르조아 출신의 젊은 장 콕토가 발레를 감상한 후 디아길레프를 찾아가 자신도 발레곡을 쓰고 싶노라 말했다. 그러자 러시아의 이 천재 발레 프로듀서이자 니진스키의 삶을 뒤흔든 대단한 호모인 디아길레프는 다소 거만하게 말했다. 

"나를 놀래켜보게 Etonne-moi."

아마도 디아길레프는 장 콕토가 후에 자신보다 훨씬 더 유명해지리라는 사실을 그 순간 짐작이나 했을까? 나중에 장 콕토는 디아길레프가 자신에게 이때 던진 '나를 놀래켜보게'라는 말을 '오르페우스' 등의 희곡 대사로 즐겨 사용하게 된다. 

장 콕토는 1, 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식자층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집약하는 독특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발레곡, 희곡, 소설, 영화 등 그의 능력을 다방면에서 확인한 놀라운 천재임에 분명할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후대 작가들에게 기묘한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에릭 사티, 디아길레프와 연결된 발레곡, 당대 한창 창궐하던 초현실주의적인 연극, 피카소와의 우정, 그의 몽환적인 삽화들, 케네스 앵거 등의 전위 작가에게 영감을 부여한 그의 실험적 영화들, 평생의 친구이던 에디트 삐아프와 같은 날 함께 죽은 운명 등 소위 장 콕토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사 '그의 삶이 곧 예술이다!'를 증명하듯, 그의 인생은 화려한 파노라마로 점철되어 있다. 

또 장 콕토는 게이였다. 그의 패션 감각은 당시 프랑스 패션을 선도할 만큼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사람들은 재즈가 고요히 흐르는 30년대 씨시 바에 가만히 앉아 담배를 피우며, 춤을 추는 세일러 복의 해군을 감상하는 그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많은 데생 작품들 중에는 당시 해군들에 관한 것들이 많다. 



또 처녀작 '시인의 피'를 비롯한 그의 영화들은 신화적 원형에 호모 에로티시즘이 채색된 가장 훌륭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장 콕토의 평생 애인은 두 명이었다. 첫 번째 애인은 20살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인 레이몽 라디게. 



천재로 소문이 자자하던 라디게를 장 콕토가 만난 건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였다. 라디게는 16세였다. 장 콕토는 첫눈에 라디게에게 반하고 말았다. 콕토는 당장 라디게에게 줄 반지를 주문 제작했다. 세 가닥으로 꼬여진 '삼환반지',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복사되었다는 그 유명한 반지가 바로 라디게와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장 콕토가 제작한 것이다. 

장 콕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라디게는 2년 여에 걸쳐 그의 짧은 필생의 역작인 '육체의 악마'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곧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신고전주의를 대변하는 역작으로 열렬히 환영받았고, 후에 장 콕토의 작품 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잦은 음주와 피폐한 생활로 레이몽 라디게는 스무 살 나이에 장디푸스로 죽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던 장 콕토는 심한 자기 학대와 아편에 빠져 버렸고, 결국 요양원에 실려가고 말았다. 

장 콕토는 라디게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는 자신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내 손의 하늘이 당신을 보호한다'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라디게를 줄곧 따라다니며 그를 즐겨 그렸던 장 콕토의 삽화는 그에 대한 애정이 애틋하게 묻어 있다. 그는 잠자는 라디게 삽화 밑에 '내 손의 하늘이 당신을 보호하다'라고 적어 놓았던 것이다. 




만일 철학자 마르탱이 요양원으로 찾아가 그를 카톨릭으로 인도하지 않았다면 장 콕토의 인생은 거기에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카톨릭에 귀의했던 장 콕토는 그 속에서 신화적 모티브를 찾아냈고, 이후 그의 작품 세계는 보다 더 비의적으로 변해갔다. 라디게를 그리워하며 써내려갔던 그의 걸작 소설 '무서운 아이들'과 그 소설 모티브가 일부분 차용된 영화 '시인의 피'의 일부분은 라디게에게 바치는 그의 사랑의 소네트였다. 

이후 왕성하게 창작 활동에 몰입하던 장 콕토에게 다시 사랑이 찾아온 것은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26세의 마르셀 킬, 그가 바로 콕토의 두 번째 남자였다.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던 마르셀 킬은 콕토에게 마약과 사랑 둘 다를 충족시켜줬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 영감까지 부여한 걸로 알려져 있다. 빈센트 킬은 콕토에게 그의 평생의 멋진 마지막 모험을 선사하기도 했다. 80일간의 세계 여행. 

'80일간의 세계 일주'로 유명한 쥘 베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던 해 마르셀 킬은 콕토에게 재미있는 제안을 하게 된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주인공처럼 세계를 일주해보자는 거였다. 콕토는 이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현지에서 소식을 바로 글로 써서 보낸다는 조건 하에 그는 '파리-수아르'라는 잡지사에서 후원을 얻어냈다. 

실제로 이 여행에서 콕토와 킬은 각각 필리어스 포그와 파스파르투 역을 맡고 있다. 당시 46세였던 콕토는 내기의 주체였고, 26세의 마르셀 킬은 여행에 수반되는 실질적인 흥정, 환전, 운반 등 육체적 힘이 필요한 하인의 역할을 맡았다. 예술가 입장에서 세계 곳곳의 광경을 음미하는 '80일간의 세계 일주' 곳곳에 마르셀 킬에 대한 애정이 또한 녹록치 않게 배어 있는 건 당연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게이임을 떳떳하게 공언하고 다닌 콕토이니만큼 그의 곁에는 남자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돋보이는 그의 평생 연인은 단연 레이몽 라디게, 그리고 마르셀 킬이었다. 

평생을 예술과 함께 살아온 장 콕토는 연애마저도 다소 드라마틱했으며 그의 삶이 하나의 멋진 향연이자 즐거운 퍼포먼스였음을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74세 나이로 죽기 전까지도 한 성당의 실내 장식을 하던 콕토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 샹송의 대모인 에디트 삐아프가 죽은 몇 시간 후에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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