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詩人 대학교
브르통과 초현실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한
초현실주의의 뿌리는 다다이즘입니다. 다다이즘은 1차 세계대전 후의 기존의 전통, 질서에 대한
초현실주의의 도덕적, 실천적 지도자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었습니다.
상상력과 감정적인 힘이 늘 과학과 이성주의의 실추를 상쇄해왔다고 믿은 그는
군복무 후 파리에 정착하고 재능 있는 새로운 미술가들과 특히 다다운동을 지원하고 장려하던
브르통은 1924년 친구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헌정한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초현실적surrealiste’이라는 용어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1917년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초현실주의: 남성 명사. 순수한 심리적 자동주의로서, 이를 통해 말이나 글,
백과사전: 철학 용어. 초현실주의는 이제까지 소흘히 해온 연상 작용과 관련된
초현실주의는 문학, 미술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며 철학적 견해의 표현으로 진전되었습니다.
|
브르통의 자동주의
자동주의automatism는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에 의해서 회화가 초현실주의에서 타당한 위치를 가지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자 브르통은 말했습니다.
“시각은 가장 강력한 감각이므로, 시각적인 이미지를 명확하게 하는 능력은
브르통은 회화 자체의 미학적 목적보다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
‘초현실주의의 첫 선언문’
1942년 10월 14일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처음으로 그들을 위한 전람회를 메디슨 가에 있는 ‘화이트로 라이드 Whitelaw Reid ’에서 개최했다. 전람회의 명제는 ‘초현실주의의 첫 선언서 First Papers of Surrealism’이었는데, 미국 작가들은 아직껏 그처럼 왁자지껄하고 요란한 전람회를 본 적이 없었다. 전람회는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이 주최했고, 뒤샹은 2마일 가량의 기다란 끈을 사용하여 내부를 장식했다. 그들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 안에 아이들이 놀며 떠드는 소리가 울려퍼지게 했고, 뒤샹은 사람들을 고용하여 전시장 안에서 미식축구나 돌차기 놀이(hopscotch), 줄넘기를 하게 했다. 뒤샹이 기획하고 건축가 프레데릭 키슬러가 공간을 구성하여 탕기, 뒤샹, 마타, 에른스트, 마송, 그리고 미국작가 만 레이의 작품들을 배치했다. 전람회장의 실내에서는 지하철역에서 들을 수 있는 기차소음이 재생되었으며 기차소리가 날 때마다 전람회장의 불들이 껌뻑거렸다. 그러나 그런 장치들이 작품을 자세히 관람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미로, 에른스트, 쿠어트 셀리그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 옆에는 피카소와 클레의 그림이 함께 걸려 있었는데 피카소와 클레는 자신이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불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미국 작가들로는 바지오츠, 마더웰, 데이비드 헤어가 참여했으며 마타와 달리의 그림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는 그들이 미국인들에게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유럽 예술가들 중 꿈, 정신이상, 시에 관심이 많았던 브르통은 당시 마타의 아파트 윗층에 살고 있었다. 브르통은 뉴욕에 5년 동안 체재했는데 문화적으로 아주 뒤떨어진 미국생활에서 만족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어를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고, 예술가들의 모임에도 덜 참석했으며, 돈이 떨어지자 라디오 방송국에 취직하여 나치를 비난하는 방송을 했다. 그는 미국인 조각가 데이비드 헤어와 우정을 나누었고, 그와 함께 잡지 『VVV』를 창간했다. 번역은 브르통의 아내가 맡았다. 그러나 브르통과 헤어는 우정관계에서 연적의 상대로 돌변했는데 이는 브르통의 아내 재클린이 헤어와 사랑에 빠져 브르통의 아이를 데리고 헤어에게로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성적으로 더욱 자유분방했다. 달리도 친구인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카라를 자신의 아내로 낚아챘었다. 브르통은 뉴욕 생활에 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이 빨리 끝나 파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레제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식당에서 예술가들을 종종 만났는데 그들은 레제를 늘 주인공으로 여겼다.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던 레제의 유물론에 근거한 기계주의 미학은 그 논리적 귀결로서 당연히 그로 하여금 공산당에 입당하게 했다. 레제와 피카소의 공산당 입당은 당시 신문에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몬드리안은 재즈를 좋아했으므로 할렘(Harlem)에 있는 댄스홀에 자주 갔고, 여가가 생기면 블루스를 추었다. 페기와 결혼한 에른스트는 이스트 51번가에 있는 페기의 고급주택에서 살고 있었으며, 뒤샹은 1915년 뉴욕에 온 이래로 파리를 자주 방문하고 있었다. 피카소, 마티스, 미로는 유럽에 남아 있었지만 나치의 반(反)모더니즘적 태도로 인해 활동할 수가 없었다. 피카소의 경우 나치는 언론이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대부분의 중요한 예술가들이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파리는 텅 빈 것처럼 보였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주제들에 매료되었던 것이 아니라 학문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들의 회화방법에 감동했고 그들의 무의식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험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특히 미로의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좋아했고, ‘자동주의’ 기교의 창시자인 마송의 그림들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송은 그때 코네티컷 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입체주의는 하나의 화법으로서 그 우수함이 알려졌지만 초현실주의는 하나의 미학운동으로서 그 영역을 계속 넓혀가고 있었다.
초현실주의 선언/앙드레 브르통 지음·황현산 옮김/미메시스 발행·296쪽·
피카소, 자코메티, 달리, 엘뤼아르, 아라공 등 1920년대 파리에서 활동했던 문학ㆍ미술 거장들의 교유 관계를 살피다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앙드레 브르통(1896~1966). 독자에겐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매혹적인 여성과 교제했던 몇 달 간의 경험을 두서없고 몽환적으로 기술한 산문집 <나자>의 작가로 기억되는 프랑스 태생의 시인이자, 평론가, 편집자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예사조인 초현실주의를 주창하고 일군의 작가 그룹을 주도, 당대에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브르통이 1924년 사실주의 문학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무의식을 중시하는 창작론을 제시한 '초현실주의 선언'(이하 '제1선언')은 그를 일약 새로운 미학의 리더로 자리매김했고,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모여든 젊은 작가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그룹의 내분, 비시정부(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면서 수립된 괴뢰정부)의 탄압에 의한 미국 망명 등의 시련을 겪으며 존재감이 약화되는 와중에 제2, 제3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다. 이 세 건의 선언문과 브르통의 강연문, 잡지 기고를 묶고, 프랑스 시 분야의 권위자이자 빼어난 번역가인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가 우리말로 옮기고 해설한 책이 이번에 출간된 <초현실주의 선언>이다.
브르통이 세우고자 했던 초현실주의의 이론적 뼈대를 보여주는 이 책에서 요체가 되는 글은 시기적으로도 가장 앞서는 제1선언이다. 선언문이라는 형식이 말해주듯, 정교하고 체계적인 설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그래서 오히려 변혁을 향한 당시의 열정과 의지가 오롯이 묻어나는 이 글에서 브르통은 창작자에게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수동적인, 또는 가장 수용적인 상태에 자신을 가져다 놓으라"(95쪽)고 주문한다. 여기서 초현실주의 문학의 대표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자동기술법이 도출되는데, 이는 무의식 영역에서 자유롭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포착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묘사와 심리분석을 통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존 사실주의 문학과의 완전한 결별 선언인 셈이다. 브르통은 이어 "어떤 종류의 연상으로부터 바람직한 돌발성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좋다"(111쪽)면서, 신문에서 잘라낸 표제들을 아무렇게나 이어붙인 콜라주에 '시(詩)'라는 제목을 붙이는 도발을 감행한다.
'무의식'을 끌어들여 인간 존재의 확장을 꾀한 프로이트와, 세계의 변혁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의 사상의 수혜를 받은 브르통이 주창하고 이끌었던 초현실주의를, 황 교수는 "존재의 총체성을 문제 삼은 거의 유일한 운동"(48쪽)이라고 평가한다. 철 지난 듯한 20세기 문예사조의 본질을 짚는 이 날카로운 안목이 초현실주의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린다. 예컨대 '미래파'를 위시해 2000년대 한국문단에 대거 등장한 젊은 작가군의 반(反)리얼리즘 작풍의 저변에 깔린 정신은 90여 년 전 파리에서 사실주의의 아성에 맞섰던 초현실주의 그룹의 그것과 거리가 멀지 않아 보인다. 브르통의 선언문을 그의 개인사, 당대 파리 문화계의 사정과 연결 지어 47쪽에 걸쳐 자세히 다룬 황 교수의 해설은 그 자체로 이 책의 값어치를 톡톡히 해낸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