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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12)
2017년 05월 05일 23시 45분  조회:2564  추천:0  작성자: 죽림
 


 

수필의 허구수용론과 그 한계에 관한 고찰

 

                                                                                                                                권 대 근

 

 I. 서 론

 

 1. 연구 목적

 

  지금까지 수필문학을 정의해 온 진술들은 오늘날에 와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수필문학을 바르게 정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리는 정의도 하나의 시도에 불과할 것이다. 문학 작품은 실제로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문학 작품 자체는 그대로 있지만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아직까지 수필문학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 확고하지 못함으로부터 오는 수필의 경시 현상이다. 문단의 일부 귀족주의자들로부터 수필이 경시 받지 않기 위해서는 수필의 특질론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수필을 다른 장르와 구별하는 데 기준이 되어온 "수필은 사실을 기록하는 문학"이라고 규정한 데서 생기는 혼란과 반론을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수필을 문학성의 시비에서 따로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수필가가 수필을 쓰는 행위는 분명 창작 행위다. 창작이라는 말에는 사실이 아닌 허구가 개입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말은 수필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논픽션이라는 수필문학의 고전적 특성과 정면으로 배치될 수 있는 문제고, 수필의 장르적 특성을 파괴할 수 있는 일이다. 파고 들면 들수록 딜레마에 빠진다고 해서 이미 많은 작가들이 수필을 창작할 때 허구를 수용하고 있는 현실을 덮어 둘 문제도 아니고, 무조건 수필을 사실의 기록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대규는 수필의 개념을 분류적 정의에 의하여 규정하여 '수필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지은이와 작품 속의 말하는 이가 일치하는) 제재 또는 주제 중심의 문학이라고 하여, 다른 문학 장르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수필의 정의를 차별적으로 내리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내린 어떤 정의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정의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탁월한 정의도 수필의 내용에 있어서 사실이어야 하는지 허구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유보하고 있다.

   물론 지은이와 작품 속의 말하는 이가 일치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인칭 시점의 글이라는 것이지 사실과 허구의 한계를 분명히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수필문학의 창작과 허구의 한계를 밝히려는 본 연구의 목적을 위해 필자는 조동일의 언급을 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조동일은 " 수필은 실제로 있는 사실을 전달하며, 전달을 위해 허구나 비유를 사용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수필의 정의와 특성에 대한 조동일의 진술은 수필의 취약점인 상상적 측면을 보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수필의 정의적 특성을 확실히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이는 현대수필의 창작에 있어서, 허구가 수용될 수 있다는 것으로 현대수필의 창작에 있어서 허구의 한계를 밝히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본고는 선행 연구된 수필 창작의 허구수용론 비판을 바탕으로 해서 현역 수필작가들의 창작 후기를 통해 수필 창작 과정에 있어서 허구가 어느 선까지 나아가고 있는가를 알아보고, 수필의 본질과 문학적 특성을 함께 만족시키는 범위 내에서 수필의 허구적 상상과 그 표현의 한계를 나름대로 정해보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2. 연구사 검토

 

  수필의 허구 가능성을 최초로 거론한 이는 수필가 정진권 씨로 알려져 있다. 1982년 계간지『수필공원』에 수필가 김시헌 씨가 '수필과 허구'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수필에 있어서 허구 문제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후 1989년 계간지 '한국수필'에 수필가 이철호 씨가 '수필 창작에 있어서의 구성의 전개'라는 글을 게재, 수필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허구가 허용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 후, 한국체대 교수이자 수필가인 정진권 씨가 1989년 월간지 '수필문학'에 '수필문학의 허구성'을 발표하고 이어서 1990년 『수필문학』지에 '수필문학의 허구성 재론'이란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허구론 수용 논쟁을 불러왔다.

   이러한 수필의 허구성에 동조하고 있는 이들이 속속 수필문학의 허구론이 수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논문으로 발표하고 있는데 ,수용론의 입장에 서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정진권,김열규,정주환,도창회 씨 등이다.

   수필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장하는 한 방편으로 허구 수필의 이론을 정립 제시하는 데 대한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찬반 양론이 엇갈려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체(작품)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론 정립의 과열 현상이 과연 수필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인가는 좀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수필은 다른 문학과 달리 기존의 수필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특질론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비판을 받고 있고, 그러한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에, 허구 수용에 관한 문제는 반드시 정리되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허구수필의 등장은 가뜩이나 난립된 수필이론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수필문학의 개념 정의에 또 하나의 어려움을 보태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수필의 허구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데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싶다.

 

1) 허구수용론에 대한 비판 주지하다시피 허구 수용론은 수필계의 공동 관심사의 하나로 대두되어 있는 채 선명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필에는 일체의 허구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체험론과 완전한 허구도 가능하다는 허구론이 대립되다가 90년대로 와서 수필의 허구 문제는 허구성 수용 차원에서 수필가들 사이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다.

   대체로 허구 문제의 입장은 세 가지 부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하나는 허구는 전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체험론' 다른 하나는 주체험을 제외한 지엽적인 표현에는 주제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 창작적인 표현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절충론',그리고 주체험까지도 허구가 가능하다는 '허구론'이다.

   먼저 수필에 있어서 허구가 완전하게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정진권 씨의 허구 수용론과 도창회 씨의 동조론을 소개하면서 문제점은 없는지 진단해 보도록 하겠다.

    정진권 씨가 수필에 있어서 허구가 완전히 수용될 수 있는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수필도 문학이다'는 관점이다. 그는 문학의 본질을 중시하면서 문학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기저에서 수필도 문학인 이상 문학 본질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한다. 문학은 여러 가지 다양한 인생의 반영이며, 그 인생은 실제의 인생과 똑 같지는 않으며, 작가가 그것을 보충하고 새로이 조직하는 한 그것들을 수정하고, 변형하고 새로이 조직하는 일 또는 그 결과는 허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허구는 창조적 활동 내지 창조적 소산으로서 문학의 장르에 공통되는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문학이 사실의 묘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다창조인 한, 허구 세계의 표출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수필도 문학이라 한다면 허구를 거부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전제 하에서 정진권 씨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허구로 수필을 쓸 수 있다고 보며, 그것은 수필을 쓰는 사람의 자유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진권 씨의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적어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사실만의 기록으로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허구 없는 현실의 모사는 한낱 사실의 소개에 끝나지 않겠는가? 둘째, 허구는 막강한 창조의 힘인데, 이를 부정하고서 어떻게 창조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위의 가설을 통해 결론적으로 수필도 문학인 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 즉 허구는 수필 창작에 있어 과감히 수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씨는 '수필문학의 허구성 재론'이란 논단을 통해서 허구가 제한 받는 경우와 제한 받지 않는 경우를 예문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데, 글 속의 '나'와 그 글을 쓴 사람이 동일한 인물로 받아드려지는 수필에 "굳이 무제한의 허구를 왜 도입하려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허구 도입)이 자기가 그리는 하나의 세계(인물)를 창조하는 데 유용하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그는 '수필이 어떤 문학인가'하는 본질의 문제는 도외시한다. 그의 이러한 답에는 수필 속의 '나'는 그 지은이와 동일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수필의 재래적 정의에 대한 믿음이 없다. 이는 "수필이란 선택된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씌어지는 일인칭 문학이다. 선택된 체험이란 그기에서 어떤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제재를 말한다. 그리고 그 주제를 끌어내는 주체는 작가 자신 ,즉 '나'인 것이다."라는 수필의 전통적, 본질적 특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입장인 것이다.

   글 속의 '나'가 본인이든 아니든 일인칭은 독자가 글 속의 '나'를 그 지은이와 동일한 인물로 받아들이므로, 1인칭으로 수필을 쓰면 글 속의 '나'가 그 행동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허구적으로 3인칭 인물을 설정해 수필을 창작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까지 한다. 3인칭 수필을 통해 어떤 사람의 삶을 보다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가 쓴 수필의 예를 들어보겠다.

 

  예문1. 우리 아빠는 늘 아침 일곱 시면 집을 나가십니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파란 승용차를 타시고요. 참 이상한 일이어요. 차까지 있는 높은 분이 왜 매일 아침 일찍 나가셔야 하나요. // 어제 저녁 때의 일입니다. 엄마를 따라 큰댁엘 다녀오다가 아빠가 다니시는 회사 앞을 지나게 되었어요. "엄마, 우리 들어가서 아빠 좀 보고가" 나는 그냥 가자시는 엄마의 손을 끌고 수위실 앞으로 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저만치 떨어진 본관 현관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그리고 그 뒤를 아빠가 따라 나오시는 게 보였습니다. 그 신사가 차에 오르는 동안, 아빠는 두 손을 마주 모으시고 연방 허리를 굽히셨습니다. 정진권 '나는 언제나 이렇게' 정씨는 상사 앞에서 굽신거리는 월급쟁이들을 볼 때, 비애를 느낀 일이 있어 한 어린이가 되어 봤다는 것이다. 물론 완전히 꾸민 글이다. 정진권 씨 자신이 비록 수필 속의 '나'는 그 지은이와 동일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해도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글 속의 '나'를 정진권 씨로 여길 게 뻔하다 하겠다.

   1인칭의 허구 수필은 독자와의 관계에서 벌써 도덕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독자가 글 속의 '나'와 필자를 동일시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허구의 나를 창조했기 때문에 본인(필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결국은 독자를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데 완전 허구는 문제가 있다.

 

예문2.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은 소년은 뒤안으로 돌아가 그 굴뚝 옆에 섰었다. 어머니가 야속해서 눈물이 났다. 말없는 굴뚝을 바라 보며 소년은 누가 와 달래 주기를 바랬다. 그러면 할머니가 오셔셔 그 때묻은 치마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 소년은 다 자랐고 눈물을 잃어버렸다.

 

   예문3 늦은가을의 산입니다. 억새가 서적서적 바람과 속삭입니다. 바위가 억새를 보고 말했습니다. "얘야, 좀 묵직해 보렴, 원, 그렇게 수다를 떨어서야" 도토리가 뚝 떨어져서 떼굴떼굴 구릅니다. 바위가 도토리에게도 말했습니다. "얘야, 좀 묵직해 보렴. 원 그렇게 가벼워서야" 바위는 수다 스러워서 걱정입니다. 도토리가 가볍게 돌아 다녀서 걱정입니다. 하지만 억새와 도토리는 그런 ㅡ바위가 싫습니다.

 

  예문2, 3도 완전 허구화된 수필이다. 정씨는 1인칭을 3인칭화한 이유로 독자가 글 속의 '나'를 그 지은이와 동일한 인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나'의 행동에 제한을 주지 않으려고 3인칭의 인물을 설정해서 글쓴이가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다 창조적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과연 이런 허구 수필이 수필 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장하는 방법이 될까에 우선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완전히 허구화된 수필은 첫째 수필의 본질적 특성을 거부하는 데서 이미 수필 밖으로 이탈해 있고,

   둘째 독자와의 엄연한 약속을 알면서 일부러 어기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으며,

   셋째, 꼭 사람의 어떤 면을 보다 창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그릇을 굳이 수필의 본질과 특성을 무시하면서까지 수필 용기에 담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정진권 씨가 허구화 수필의 가능성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한 예문들은 전부 동화라는 그릇에 담아 얼마든지 창조적 문학 행위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넷째, 이런 허구화된 수필이 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되면 수필의 고유한 특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며, 다른 장르 특히 꽁트, 동화 소설 등과 같은 산문 문학과의 경계는 더욱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완전 허구수필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정진권 씨 말고도 허구 수용론에 적극 찬동하고 있는 분은 『수필과 비평』지 주간을 맡고 있는 정주환 씨인데 정주환 씨의 허구에 대한 가설도 정진권 씨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속성에 그 기저를 두고 있다.

   그는 허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문학 본래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라고 단정한다. "모든 문학은 사실상 그 자체가 허구다. 창작이나 감상이냐를 막론하고 허구가 아니면 문학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상 그 자체가 허구이기 때문이다. 사실에 뿌리를 두고는 문학은 성립될 수 없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의 소산이며 공상에 대한 현실화다. 문학인 수필에 있어서 허구가 배제된다면 그건 이미 문학임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왜냐하면 문학은 속성상 어떠한 경우에도 픽션 즉 허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은 허구이고 수필은 사실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는 수필이 엄연히 문학인 이상 수필의 허구 수용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며, 수필을 별도로 분류해서 '문학의 본질' 밖에 두려는 데서 수필이 문학의 서자 취급을 받는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문학 일반론적인 논리로 과연 수필의 진솔성과 고백성이란 장르적 특성을 파괴할 필요가 있을까? 무제한의 허구로 수필 장르의 본질과 특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에 의문이 든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 수필문학이 다른 장르처럼 이론 난립으로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을 안타깝게 여긴다. 80년대를 넘어 90년대로 접어 들면서 수필의 개념도 어느 정도 정립되어 가는 마당에서 대뜸 완전한 허구 수필의 수용을 들고 나오는 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 수필의 영역 확장보다 수필장르의 고유성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따라서 필자는 정주환 씨가 문학 일반론적인 접근을 통해서 수필에 있어서 허구를 주장하는 데 대해 반론을 펴보기로 한다.

  첫째, 사실에 뿌리를 두고는 문학은 성립할 수 없다고 하는데 포스네트는 문학의 본질을 '사실보다는 상상이며, 효율성보다는 쾌락, 전문적 지식보다는 보편적 진리'라 하였다. 실용문이냐 예술(문학)이냐의 차이는 그대로의 이야기냐 아니면 프리즘에 통과된 새롭게 탄생된 이야기냐에 있다. 거의 모든 문예창작물은 작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제작된다. 이 실제적 체험에 상상력의 수확인 픽션이 조합되어서 마치 직조물의 씨줄과 날줄처럼 사실성과 허구성이 교차하는 이중 구조로 짜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개성적 성격의 문학인 수필에 있어서는 상상력의 범주가 공동체적 삶의 동일성에만 걸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상상력은 곧 허구라는 등식을 내세워 문학은 허구여야 한다는 논리도 너무 비약된 것이 아닌가? 김시헌은 허구가 아닌 체험 그대로를 수필화할 때도 창작적 상상은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일부를 주제에 맞게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에 뿌리를 두고는 문학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허구 수필의 수용론의 근거를 위한 비약된 논리인 것이다.

   둘째, 문학 본질적 속성을 토대로 수필 고유의 본질과 속성을 무시하는 것은 마치 운문에 있어서 시조가 갖는 고유한 율격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허구 수필의 수용 불가는 결국 문학을 모르는 소치라는데, 크게 예술은 예술의 본령을 가지고 있고 그 속의 문학은 문학으로서 본질이 있고, 문학 장르 속의 수필은 수필대로 시는 시대로 시조는 시조대로 나름의 독특한 속성을 갖고 있다. 그 속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수필이 예술의 본령에서 또는 문학적 본질에 벗어나지 않아야 될 것이다. 수필은 필자의 체험을 직접 문학적 상상력으로 표현하는 것이 수필의 본질적 속성이다. 그것은 작자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사물일 수도, 경험일 수도, 작자의 사고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관념적 실체일 수도 있다. 다만 수필에는 작가의 개성적 내면 세계가 드러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완전 허구화된 수필을 장르 불명의 문학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수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필은 수필의 속성과 문학의 본질이 서로 군형을 이룰 때 성립 가능하다 할 수 있다고 보겠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은 문학의 본령을 이탈한 것이기 때문에 문학이 될 수 없고, 체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완전한 허구로 창작된 '나'가 그려내는 글은 이미 수필의 본령을 이탈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수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문학의 본질을 갖고 있다고 해서 수필의 속성과 본질 밖에 있는 글을 수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도창회는 수필은 허구가 수용될 수 없는 자기 고백의 글이라는 단정에 대해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는 1989년 {수필문학} 7월호에 수필은 1인칭으로 써야 하는가'란 논고를 통해서 '문학의 모든 장르에서 오로지 ,수필만을 자기고백적 문학이라고 하는 논리는 당치 않으며 마치 그것 때문에 수필이 독자적인 것처럼 이유를 붙이는 것은 유치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도창회는 영미수필을 중심으로 한 연구를 통해서 수필이 일인칭이어야 하고, 비허구라야 하는 주장에 반대하며 수필에 있어서 허구니 비허구 하는 것은 문학적 본질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주관 객관 양면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창작의 세계일 것이요, 주관과 객관 두 개의 상관 관계에서 어느 쪽을 강조하든 그것은 작가의 자유라고 강조한다. 그 역시 수필이 문학임을 내세워 수필이 수필다운 수필이 되려면 허구, 비허구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문학적으로 창조되었는가 즉 수필이 얼마나 문학적 본질을 갖추느냐에 그 관건이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허구든 비허구든 수필이 미적 재생내지 승화없이 쓰여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들어 수필문학의 쟁점이 되고 있는 허구론의 수용 논의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3. 연구 방법과 범위

 

   수필은 사실 개념으로 정의할 수도 있고 가치 개념으로도 정의할 수도 있다. 사실 개념으로 정의할 때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 모두 수필의 범위 안에 포함된다.

   그러나 가치 개념으로서 정의할 때는 오직 수필다운 수필만이 수필로 인정된다. 이는 양적으로 팽창한 현대 수필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서 문학수필과 비문학수필을 구분한 개념적 정의로서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수필에 대한 정의는 수필의 정체를 말해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 여기에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지는 수필의 성격 및 기능과 효용, 그리고 그 영역이 밝혀짐으로써 수필의 본질은 더욱 구체화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수필가들이 수필 창작 과정에서의 진실을 여기나 창작 후기 형태로 남겨 놓기는커녕, 함구하고 있기 때문에 수필의 본질과 특성을 규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오늘날 우리 수필문학의 쟁점이 되고 있는 허구 수용 가능성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기존 수필작가들의 수필 창작시 허구 도입의 사례 분석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고 허구 수용의 한계를 규정해 보고자 한다.

 

 

 II. 본 론

 

1. 수필의 본질과 허구와 관계

 

  수필의 허구론 수용에 앞서 '수필이란 어떤 문학인가' 하는 그 본질을 규명해 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동서양의 전래된 수필관에 따르면 수필은 작가 자신이 주체가 되어 그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자유스럽게 풀어 나가는 글로 그 수필의 바탕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진실''사실''체험''경험'임이 익히 알려져 있다.

   이러한 초기 수필관 외에도 수필의 본질에 대해 언급한 정의는 많다. 이태준은 수필을 필자의 심적 나상이라고 했고, 김광섭은 수필은 다른 문학보다도 더 개성적이며 심경적이고 경험적이다 했으며, 김진섭은 수필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이 되는 것은 숨김없이 자기를 말하는 것이라 했다. 일본의 한 작가는 에세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건은 필자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인격적인 색채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데에 있다고 했다. 윤오영 역시 '좋은 수필은 독자의 앞에서 자기를 말없이 부각시킨다. 수필의 대상은 자기다, 결국 수필은 외로운 독백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수필의 개념과 본질이 확연히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필의 영역 확대와 창조적 지평을 확대한다는 측면에서 수필에 대한 기존 인식-수필은 허구일 수 없다-을 타파하는 완전한 허구 수필의 수용은 시기상조를 넘어 문제라 할 수 있다.

   수필도 문학인만큼 문학 본질을 외면할 수 없다는 논리로 수필이 허구여도 된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문학이 그리는 세계가 무조건 허구여야 한다는 논리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수필 창작에 있어서 허구의 수용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허구냐 비허구냐의 판별에 어려움이 따르는 데서 생겨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이렇게 비화되고 있는데 허구의 수용 문제를 작가 개인에게 맡겨두고 그냥 묻어 둘 수 있는 것인가? 허구수용론자들은 수필 창작의 지평을 확대하는 측면에서 허구의 도입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나'를 문학화하는 문학적 특성을 갖고 있는 수필의 고전적 전통적 본질을 붕괴시킴으로써 야기되는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무리 문학의 본질이 허구에 있다고 해도, 수필에 있어서의 허구론 수용은 수필문학의 생명과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인만큼 섣불리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허구성의 수용 과제는 기존 수필관을 떠나서도 문제를 안고 있는데, 독자가 허구적 수필을 읽고 얼마나 감동을 받겠느냐는 것이다.

   수필이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독자들이 허구 수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문학의 생명이랄 수 있는 감동의 창출 문제와 결부된다 하겠다. 수필이 여타 문학 장르와 다른 점은 작가의 '진실'을 작품 속에 담음으로써 수필 나름의 변별성, 고유성, 독자성을 지닌다는 데 있다. 문학장르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수필은 특히 감동을 생명으로 한다. 허구 수필을 읽고 독자가 감명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 열도를 울음 바다로 만들었다는 구리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이란 작품이 그토록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자아내게 한 것은 그 글이 실화라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창작된 동화라는 것으로 밝혀지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면 괜히 울었잖아'하고 투덜댔다고 하는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허구의 수용론은 하나의 실험 이론으로서 연구할 과제이지, 현실적으로 당장 수용하기에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된다.

   수필의 '나'와 지은이를 독자들이 동일시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조작되고 창조된 '나'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수필'이란 글로 발표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허구의 수용으로 창작된 허구수필이 수필 문학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여기에는 무슨 대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립된 이론으로도 수필문학의 개념이 모호해 비수필 수필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는데 여기에다 다시 허구수필까지 나타나면 수필은 독자성을 잃음과 동시에 문학 장르로서의 특성을 버리게 되는 것은 뻔한 것이다.

   수필가 김시헌 씨가 1990년 {수필문학}지에 발표한 '허구와 체험사이'란 글에서 허구수필이 가져 올 수 있는 혼란을 독자와의 관계에서 잘 지적해 놓았는데 여기 소개하겠다.

  '맹장염에 안 걸려 본 사람이 맹장염으로 병원에 일 주일 동안 입원한 이야기를 소장하게 상상으로 썼다고 하자', 그 수필을 읽어 본 친구가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만나 "자네 맹장염으로 앓았더군 입원 중에 문병도 못 가고…" 하고 인사말을 건네 왔을 때, 필자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 "그건 수필이 아닌가?"로 통할 수 있을까?' 위의 인용문은 허구 수필의 해독을 잘 지적해 놓은 글이라 할 수 있다.

    허구를 본질로 하고 그 허구 세계를 창조적으로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수필 말고도 많은데 꼭 허구를 수필의 그릇에 담아 보겠다는 발상은 기발하지만 문제가 많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수필가들이 그렇게 알고 있고 많은 평론가들이 수필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지는 글이라고 규명해 놓은 이상, 수필의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 체험의 주제화를 미적으로 또는 문학적으로 승화, 형상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작품 속에 창조적 상상력을 약간 빌려 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독자와의 공감성 확보를 위해 작품 안의 '나'의 주관을 객관으로 지향시킬 필요 하에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허구성의 불가피한 수용도 수필을 문학으로 만들기 위한 부득이한 기교로써의 역할에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수필관을 피력하고 있는 사람들로는 정목일, 김시헌, 이유식, 강석호, 황정환 등이다.

1) '사실'과 '허구의 사이 수필의 집필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사실'과 '허구'다. 양주동은 <수필 쓰는 법>에서 "소설이 주로 꾸며 낸 이야기로써 만들어지는 데 대하여, 수필은 필자 자신의 진심 그대로 아무런 가작된 스토리를 빌리지 않고, 표현되는 것이므로, 항상 주관적이요, 개인적이다. 그러나 어떠한 자기 이야기를 더 효과 있게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의 스토리를 꾸며서 그것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의 스토리는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차용된 것이다." 윗 글의 요지는 '사실'은 왜곡될 수 없으나, '진실'은 작품을 위하여, 감동을 위하여 꾸어 올 수도 있음을 말하였다.  수필에서는 사진사의 기법보다 화가의 기법이 허용된다는 내용이다.

   김소운은 수필 창작에 있어서 허구가 개입될 소지가 많다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암시하면서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인용한다. " '진실'이란 말은 반드시 '사실 그대로'란 뜻은 아니다. 사실만을 나열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장을 이루는 것은 아니요, 하물며 문학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다. 예술의 방법에는 크게 나눠서 두 길이 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의 위치에 두고 정시하고 추구하려는 방법과, 허구의 유리 그릇 너머로 왜곡된 가상을 통해서 하나의 진실을 발굴하려는 방법, 외국문학에서 그런 예를 든다면, 톨스토이나 플로베르는 그 전자요,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같은 것은 그 후자에 속한다." -김소운 : ,진실과 허구 사이>-

   그러나 '사실'과 '허구'는 물과 기름이다. 어디까지나 수필은 '사실'에 호적을 둔 것이지, 소설이나 희곡이 허구를 단골 메뉴로 하는 것과는 다르다. 만일 수필을 철두철미 허구로 썼다면, 그것은 몽유병자의 잠꼬대거나 백일몽의 기록일 것이다. 윗 글이 지적한 '허구의 부분 긍정론'도 수필과 소설에서 문학적 특성상 최소한도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이지, 전적 긍정론은 아니다. 그 '최소한도'의 범위야말로 수필에서의 '허구'에 대한 면죄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칼로 무 베듯 내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들의 실제 창작 경험에 비추어 다음 사항 정도로 허구의 한계를 유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2) 수필창작과 허구성 도입

 

   수필은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창작의 소산이다. 우리는 수필을 읽고, 그 자체에서 허구성의 증거를 찾기는 대단히 어렵다. 수필 창작시 허구가 개입된다는 것은 수필이 반드시 사실의 기록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필문학의 허구성을 직접 증명하는 일은 못 되지만, 수필이 사실의 기록이라는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데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된다.

   수필가들이 수필 창작시 허구를 부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이다. 제아무리 수필문학에 허구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도 수필가들은 작품 제작 과정에서 허구를 동원하게 된다. 왜냐 하면 독자들의 진실된 영혼을 흔들어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허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필에서 허구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주장은 수필이 문학임을 부인하는 행위와 전혀 다름이 없다. 수필을 논픽션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무엇인가. '사실'을 만일 '실제로 존재했던 것', 또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들의 '존재' 또는 '사건'은 그 자체로서는 사람이 시각이나 청각 그 밖의 다른 지각을 통해서 직접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외적인 착각이나 고의의 왜곡이 없는 한 둥근 것은 누구의 눈에도 둥글고, 어떤 여자가 울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 없는 사실일 터이다. 그들의 '존재' '사건'이 갖는 '물질성' '사실성'은 어느 누구도 이를 침범하거나 바꿀 수가 없으며, 그것은 만인에게 공통의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실'만을 오로지 기술하고 사생한다고 하면 사유는 그다지 복잡할 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은 그 같은 지각적 사실만은 아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는 '존재' '사건'과 같이 단순한 물질적 도는 물리적 사실에는 들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사실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때, 어떤 일에 대해서, 혹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꼈는가 하는 인간의 '심리적' 사실은 '존재'나 '사건'과 같이 지각적, 객관적 인식의 대상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쓰는 사람이 상상력으로써 파악하고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거기에는 앞서 사실간의 관계의 경우에도 불구하고 쓰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까지 오면, 체험을 직접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수필로 볼 때, '사실을 쓴다'는 것은 주관적 판단이란 상상력 즉 허구성이 자연적으로 개입되는 것이다. '사실을 쓴다'고 하지만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쓴다'고 하는 이상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그 사실에 대한 '의미부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이 단순한 지각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쓴다'는 것은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혹은 사실이 갖는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자기 체험을 솔직하게 적는 것을 전제로 하는 수필의 경우도 작가의 사실해석, 의미부여, 즉 작가의 사상이 필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다른 문학 장르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수필은 일차적 소재 즉 대상이 창작에 속하지 않는 실제적 사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 재료로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을 더 진실되게 그려내기 위해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창작적 상상 즉 허구성이 자연적으로 도입된다고 하겠다.

   다만 수필가들의 제작체험이 별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수필의 창작에 허구가 도입된다는 창작의 비밀이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것은 허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결과라 하겠다. 몇몇 수필가의 수필 또는 경험을 토대로 수필창작상 도입되는 허구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김소운의 경우 " 내 글에도 허구 아닌 허구가 얼굴을 내밀 때가 있다. 그런 예의 하나가 여기 붙여 둔 <밥이나 먹어 줄까>란 짧은 글이다. (중략) 주인공인 H는 실상은 일본인이요, 하숙 살이 하는 그의 친구도 역시 일본인이다. (중략)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는 대문에도 픽션이 있다. 싶었던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그와 같이 나오는 길에 나는 을지로3가 근처 큰길에서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겼다. (중략) 어느 여성지가 '증오를 느낀 순간'을 쓰라고 해서 이런 글을 쓴 것이지만, H를 일본인이라고 밝히면 사연은 복잡해지고 글의 초점은 흐려져 버린다. 무위도식의 식객에게 전화를 걸어서까지 식사를 알려 주는 그런 가정은 아마 우리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리라. '꽤나 살림이 넉넉하다는 친척댁'이면 혹시 그런 친절도 있고 전화도 있으리라고 해서 이런 사족이 붙은 것이요, H가 식객 노릇으로 붙어사는 그 일본인 집은 사실은 친척도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아는 이의 가정이었다."

 

2) 차배근의 경우 " 이것은 내가 대학교 4학년이던 1965년 동아일보 <여성살롱>에 <아빠의 편지>라는 제목을 게재한 것이었다. 소재는 나의 군대 생활에서 얻었다. 이것이 신문에 난 후, 독자들로부터 백여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정말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남편을 일선에 보낸 젊은 주부들한테서 오는 동병상련의 정을 담은 편지가 많았다. 이들이 만약 내가 더벅머리 소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기절초풍을 했을 것이다. (중략) 그런데 여기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수필의 허구성 문제이다. 수필이란 자기의 감정과 소감을 붓 가는 대로 담백하게 적어 내려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 수필이 있느냐가 문제이다. 내 좁은 소견으로는, 수필이 일기와 다른 것은 그 허구성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3) 정진권의 경우 " 저자는 물론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안타까워한 일이 있다. 성냥개비로 귀를 후비며 시원해하다가 그만 그 성냥개비를 부러뜨린 일도 있다. 그리고, 귀후비개로 귀를 후비면서 퍽 시원해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날에 겪었던 별개의 체험들이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의 무능을 탓했다든지, 부러진 성냥개비를 욕했다든지, 귀후비개의 공로를 찬양했다든지, 반성하는 자세로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내던진 성냥개비를 주워다가 성냥갑에 넣었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저자는 그렇게 해 본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꾸며야 했던 것일까? 저자는 위에 말한 세 가지의 따로 노는 체험들이 버리기 아까웠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 필연이라는 관계를 부여했다. 그 결과, 아무 관계도 없이 따로 놀던 세 개의 체험들이 '손가락 - 성냥개비 - 귀후비개'의 관계로 짜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를 짜는 과정에서 '새끼손가락의 무능을 탓하는 일', '성냥개비를 욕하는 일', '귀후비개의 공로를 찬양하는 일'이 재료로서 필요했던 것이다."

 

4) 권대근의 경우 " 수필 <분만실 앞에서>는 부분적으로 허구가 삽입된 글이다. 수필의 첫 문장인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도 사실상 그날의 기상과 다르다. 비가 오지 않았다. 이는 아내가 아들을 낳길 바라는 필자의 기대가 어긋난다는 암시적 기능이랄까, 예보적 기능으로 이상기후를 재료로 차용했다. 아내가 딸을 분만하고 난 다음 '김남조의 시 한 연이 생각났다'고 하며 시의 한 연을 적어 놓은 것이나, 회남자의 인간훈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고 적은 대목도 전부 사실이 아니다. 예상 밖의 결과에 담담해 하는 필자의 심정을 부각시키기 위해 상상력을 빌려 왔던 것이다. '허허로운 환상에서 깨어나 하늘을 보니 흰구름 떠 가는 게 한없이 평화롭다. 햇살이 화사하게 퍼져 흐르는 가운데 향기로운 솔잎 내음이 코 끝에 머문다.'는 표현도 퇴원하는 날의 기상 상태와는 다르다. 하늘에 흰구름도, 보지 못했고, 솔잎 내음도 맡지 못했다. 딸을 낳고 무력감에 빠져 우울해진 아내의 기분을 생각하여 남편의 마음을 윤색하였던 것이다."

 

5) 장재성의 경우 "허구가 많이 끼었다. 소설적 구성으로 하자니 대사가 없을 수 없었고, 그 대사는 거개가 개연성의 것이다. 곧 마지막 달래보는 '남편의 애절'은 10년 가까이 독신으로 지낸 그 '고난'과 조응시키기 위함이다. "한 여인이 짓밟아버린 어느 비운"- 그를 강조함으로써 여승에의 증오심에 불을 당기려는 저의를 깔아 보았다고나 할까. 이 작품에 '허구'를 제외한다면, 그건 완전 낭패일게다. '고백적 수필'과 '단편적 수필' -이 둘은 아예 출발부터 다르게 보아야 할 듯 하다. 앞엣것은 '사실의 전달'에, 뒤엣것은 '감화적 전달'에 과녁이 모아져야 할 성싶다.

 

6) 오창익의 경우 "참고로 필자의 작품 '걸객'이 완성될 때까지의 구성의 각도를 예로 든다. '걸객'은 참새를 소재로 한 15매 내외의 수필이다. 구도를 두 번 바꾸어 완성한 작품이다. 편의상 썼다 버린 첫 번째를 <구도1>로 하고, 나중 것을 <구도2>로 한다. <구도1>에서 참새를 거지로 의인화 하고, 참새를 '소심한 인간상'으로 비유하여 종결구에서 '선심'을 관조해 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구성의 각도를 바꾼 것이다. <구도2>에서 거지를 '걸객'으로 승격시키고, 소심한 인간상이 아니라 탯자리를 지키려는 '수구정신'으로 관조하여, <구도1>의 종결구인 "먹이를 주리라. 마당 한 귀퉁이에 눈을 쓸고, 오늘만은 내 쌀 한 줌을 뿌려주리라." 대신, "오늘만은 눈이 쌓여 오갈 데가 없는 오늘만은 제발 바닥까지 싹싹 핥아 빈 그릇을 내놓는 일이 없기를 빌어주자, 빌어주자."라 했다. '실향의 아픔'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산을 높이기 위해서는 반대로 그 산의 골짜기를 더 깊이 팔 수도 있다는 역리적 구성법이다."

 

2. 허구수용과 표현의 한계

 

  수필에 허구가 수용되고 있다는 것은 위의 예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문학 작품은 작가의 정신 작용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문학장르와 비교해, 사실적인 체험이나 생각이 작품의 기저를 이룬다는 것이다. 허구란 논리에서 말하는 것과 오류와는 다르다. 다시 말해 허구를 거짓이란 말과 동일 개념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짓이 남을 속이려고 꾸미는 말이라면, 수필 창작에서 말하는 허구는 일종의 상상력인 것이다. 이는 화장에 비유하면 더 쉽게 이해된다. 얼굴에 있는 점을 감추기 위해 하는 화장이 여인의 화장이라면, 수필의 화장은 얼굴에 있는 점을 더 잘 보이게 하는 화장이 수필의 화장이다. 그러니까 수필의 허구는 감추고 속이려고 하는 허구가 아니라 보다 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더 감동하도록 하기 위해 동원되는 기교상의 장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수필 창작시의 허구성은 다음 네 가지 면에서 부분적으로 문학적 효과를 위해 쓰여질 수 있다. 물론 허구 수용은 개연성을 생명으로 하는 만큼 리얼리티의 인상을 주도록 해야 한다.

   위의 차배근의 예는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수필로 볼 수 있지만 자신의 군대 생활을 통해서 얻은 소재로 '자신이 남편을 군대에 보낸 젊은 아내'가 되어 쓴 창작수필이기 때문에 수필로 인정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겠다. 일단 수필의 본질 즉 일차적 재료는 '사실을 쓴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실의 발견과 의미 부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창작적 상상 즉 허구성도 무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경우에 한정된다고 보겠다.

 

1) 주제의 효과

 

   화제나 종속제재 일부 주제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소재나 화제의 일부분을 변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김소운의 <밥이나 먹어 줄까>란 수필에 대한 김소운 자신의 술회를 토대로, 일본인 아무개라는 실재 인물에서 국적을 떼어 냈다는 점에서 1)번의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렇게 한 이유를 김소운은 "H를 일본인이라고 하면, 사연은 복잡해지고, 글의 초점이 흐려지기"때문이라고 하고, 그래서 "불필요한 가지를 추려 버렸다"고 자신의 작법을 밝혔다.  이는 주제를 살리기 위하여 재료(체험)를 수정하는 수법이다.

 

2) 예술적 구성

 

   부분적 삽입이나 보충 예술적 구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적으로 재료를 삽입하거나 보충할 수가 있다. 정진권의 수필 <귀를 후비며>는 서로 다른 날에 겪었던 별개의 체험들을 버리기 아까워서 이들 사이에 필연의 관계를 부여하고, 세 개의 체험들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새끼손가락의 무능을 탓하는 일", "성냥개비를 욕하는 일", "귀후비개의 공로를 찬양하는 일"이 구성상 재료로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 가지의 체험(사실)과 세 가지의 꾸며낸 재료를 얽어 짜는 것만으로는 저자가 기대하는 어떤 수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반성하는 자세로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내던진 성냥개비를 주워다가 성냥갑에 넣었다는 말을 꾸며서 끝부분에 배치했다는 사실에서 구성상 부득이한 경우 부분적으로 종속재료가 삽입되거나 보충될 수 있다.

 

3) 인과적 관계

   개연적 유추되는 상식 개연적으로 유추되는 인과관계나 어떤 일에 부차적으로 따르는 상식적인 일이나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로서 쓰여질 재료를 부분적으로 변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소운이 "친척도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아는 이의 가정"을 "꽤나 살림이 넉넉하다는 친척댁"으로 고쳐 놓았다는 점, 즉 재료를 수정했다는 것에서 김소운이 허구의 개연성에 대하여 퍽 많은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만일 김소운이 "친척도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아는 이의 가정"을 사실대로 밝혔다면, "무위도식의 식객에게 전화를 걸어서까지 식사를 알려 주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그럴싸하게 들리기 어려울 것이다.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긴 사실"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도록"으로 수정한 것도 개연성과 관련된다. 그만한 일에 큰길에서 주먹으로 후려갈긴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도 잘 믿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 필자의 경험

 

    체험의 부분적인 변용 필자가 경험한 내용도 부분적으로 변용된다. 이때 주체험은 사실이고, 그에 부수되는 종속재료들은 부분적으로 허구로 짜여질 수 있는 것이다. 윤오영의 수필 <달밤>이란 수필을 보면, 허구적일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할 수가 있다. 윤오영이 잠시 낙향해서 있었을 때, 어느 날의 달밤 풍경에서 독자는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한 동양적 인간상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윤오영이 달밤에 술을 등장시켰는데, 술의 처리가 대단히 미숙하다는 데서 허구성을 찾아볼 수 있다. 윤오영의 회고가 없더라도 주인공이 서울에서 이사온 김군을 찾아가다 맞은편 집 사랑에 툇마루에 앉아 있는 노인을 만난 것은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치더라도, 달밤에 노인이 술을 취급하는 일에 있어서는 허구의 개입이 강하게 추측된다. 일반적으로 술을 내놓을 때는 주전자나 술병 같은데 담아 와서 사발이나 대접이나 잔에 따라 주는 법이지, 사발에다 직접 따라서 상에 받쳐 오는 법은 없다. 따라서 "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라든지, "농주가 두 사발 남았다더니",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는 것은 사실로 믿기에 거리감이 든다.

 

 

6. 결 론

 

   필자는 물론 많은 수필가를 포함하여 독자들은 수필이 논픽션 문학이라는 전제로 수필을 창작하고 있으며 감상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면서, 또 무제한 허구의 수용으로 독자와의 관계에서 도덕성 시비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왜 정진권, 김열규, 정주환, 도창회 씨 등은 허구 수필의 수용론을 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알아보았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 같이 수필을 문학의 한 장르로 보는 한, 수필에서 허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허구 수용 불가론을 대충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필의 고유 속성을 버림으로 인해 수필은 기타 장르와의 관계에서 분별성과 독자성을 잃게 되고, 산문문학의 기형아로 떠돌이 신세가 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 독자와의 관계에서 문제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독자들의 생각이 작품 속의 '나'를 작가와 동일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완전히 조작된 '나'는 결국 독자를 속이게 되며, 내용에 따라서는 도덕성, 신뢰성 문제로 그 피해 범위가 엄청나게 확대될 소지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수필이 논픽션의 문학이라는 것은 수필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정설로 인정되어 있는데, 그 정설(속성)을 파괴하면서 작가가 창조하는 허구 세계를 굳이 수필이란 용기에 담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꽁트나 동화, 단편으로 얼마든지 '나'를 중심으로 허구 세계를 창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 수필을 허구라고 독자가 생각할 경우의 가정인데 과연 독자들이 수필을 즐겨 읽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수필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작품을 통해서 작가와 내면적 공감대를 형성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꾸며낸 이야기는 작가와의 공감대는 물론 감동의 창출에도 근본적으로 실패하고 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수필을 외면해 버릴지 모른다. 아무리 잘 꾸며 쓴 수필이라고 해도 그것은 '허구'라는 것 때문에 진정한 감동을 독자에게 줄 수 없다는 것 역시 허구 수필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진권 씨 역시 허구론을 주장하면서도 수필의 내용에는 허구화할 수 없는 것, 즉 허구화하면 개연성을 획득할 수 없음으로써 독자의 신뢰를 상실하게 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문학이 허구를 속성으로 한다해도 작가의 내면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사실)에 대해서는 허구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수필 창작에 있어서 허구는 제한 받는 경우가 있고 제한 받지 않는 경우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수필에 있어서 허구 수용론이 근본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수용론자의 논리대로 라면, 수필이 문학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나 무제한의 허구가 허용되어야만 마땅할 것이 아닌가? 어떤 때라도 허구가 제한 받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주한 교수는 허구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만약 필자가 교수도 아닌데 다만 상상에 의해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서 느끼는 강회를 수필로 발표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해 보면, 허구 수필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허구가 하나도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체험론도 체험론과 허구론을 다 허용해야 한다는 절충론도 완전 허구일 수 있다는 허구론 모두 어느 하나만의 수필론으로는 좋은 수필이 나올 수 없다는 것도 밝혀졌다.

   수필의 본질이 '사실을 쓴다'는 데서 출발한다면, 그 사실의 발견과 의미부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창작적 상상 즉 허구성도 무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경우에 한정된다.

1) 주제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소재나 화제의 일부분

2) 예술적 구성상 어쩔 수 없는 재료의 부분적 삽입이나 보충

3) 개연적으로 유추되는 인과관계나 어떤 일에 부차적으로 따르는 상식

4) 필자가 경험한 내용 중의 일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은 체험과 창작적 상상이라는 허구성을 어떻게 잘 접맥시키느냐에 수필의 문학성 여부가 달려 있다고 하겠다. 체험의 진솔성만으로도 문학적 형성화가 가능하다면 굳이 창작적 상상을 빌어 글을 꾸밀 필요야 없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허구 수필의 수용에는 반대하지만 수필 문학의 창조적 지평의 확장을 위해 수필 이론의 정립 차원에서 허구론을 들고 나온 정진권 씨의 진지한 연구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밝힌다. 수필이 필자의 직접적 체험을 기록한 글이라는 특성으로 비문학의 오해를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수필을 아는 사람이나 수필을 써본 사람은 잘 안다. 수필은 구상화 과정에서 주제를 위해서 체험을 생략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따르기 때문에 결코 체험의 기록 그대로일 수 없다는 사실로 해서 문학으로서의 격과 본질이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체험의 기록'과 '문학의 본질'의 상관 관계를 가지고 수필이 비문학이라는 식으로 접근하거나 이러한 우려를 의식해서 수필의 완전 허구론을 주장하는 발상은 제고해 보는 게 좋은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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