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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그림자의 소리를 들을줄 알아야...
2017년 07월 24일 03시 24분  조회:2051  추천:0  작성자: 죽림

 

-허공의 시학
존재와 존재 사이… 허공에 숨은 빛을 보다
화가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날이미지로 읽어내

 

 

오규원 시의 화자들은 주변의 사물을 꼼꼼히 바라보며 제 망막에 도달한 빛을, 시인이 날이미지라고 부르는 그 빛의 느낌을 언어로 옮긴다. 상투적이지 않게, 새롭게 본다는 점에서 오규원은 견자다.

오규원(64)은 한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준 시학 교사이자 시학자다. 유사성에 바탕을 둔 은유체계에서 인접성에 바탕을 둔 환유체계로의 이행, 개념적 사변적 의미에서 벗어나 날것으로서의 사물현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날이미지’의 직조 같은 것이 최근 10여 년 그가 벼려온 시학의 핵심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시인은 이미지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지의 의식이다. 그리고 이미지가 세계의 구조를 결정하는 한에서 나는 세계의 구조를 결정하는 의식이다”라는 우아한 선언을 제출한 바 있다. 이 선언은 시인 나름의 견자(見者) 시론의 고갱이라 할 수 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에 대한 시인의 의지나 욕망을 의심할 이유가 없는 만큼, 최근에 나온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 이하 ‘새와 나무’)를 견자 시론의 옹근 실천으로 보아도 좋겠다. 그렇다는 것이 이 시인-시학자의 작품을 곧이곧대로 이 시학자-시인의 가르침에 따라 읽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규원 자신의 말마따나 은유에서 환유로의 이행은 중심과 주변의 자리바꿈일 뿐이다. 은유가 가뭇없이 소멸하고 느닷없이 환유라는 신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사태는 아닌 것이다. 실상 은유를 팽개친다면, 그가 ‘느낌의 구조화’라고 정의한 ‘(시적) 묘사’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개념이나 사변 이전의 ‘날이미지’라는 것도 그렇다. 설령 그런 순수한 이미지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언어로의 재현 통로에는 무수한 개념과 사변의 병균들이 우글거리고 있어서, 말끔히 살균 처리된 위생공간으로서의 ‘날이미지시’가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돌아간 평론가가 조금 다른 맥락에서 거론했듯, 진실이란 결국 진실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 현상을 관념이나 사변으로 비틀지 않고 고스란히 옮겨놓으려는 시인의 안간힘은, 그러므로, 진실화 과정인 동시에 진실에의 착지(着地)이기도 하다. 시인의 그런 진실화 과정을 염두에 두고, 그러나 거기에 얽매이지는 않은 채 ‘새와 나무’를 읽어보자.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이 시집을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이런 물물(物物)과 나란히 앉고 또 나란히 서서 한 시절을 보낸 인간인 나의 기록”으로 규정하고 있다.

시인은 ‘날이미지’를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전 두두물물(頭頭物物)의 현상”이라 정의한 바 있으므로 이 자서는 날이미지 시론의 되풀이랄 수 있지만, 바람결에 들은 그의 투병 소식 탓에 물물이라는 말이 문득 을씨년스럽다.

실제로 이 시집에는 화자말고는 사람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따금 드러난다고 해도, 그들은 풍경의 일부분, 곧 물물일 뿐이다. 시인은 그런 물물과 나란하다. 그는 물물을 내려다보지도 않고 올려다보지도 않는다.

그는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자도 아니고 원시적 물신숭배자도 아니다. 물물과 나란히 앉아서, 또 나란히 서서 시적 자아는 무엇을 하는가? 그는 본다. 그는 주변의 사물을 꼼꼼히 바라보며 제 망막에 도달한 빛을, 시인이 날이미지라고 부르는 그 빛의 느낌을 언어로 옮긴다.

그러니까 ‘새와 나무’는 물물의 시집이자 빛의 시집, 가시광선의 시집이다. 이 시집이 견자의 언어인 만큼, 그 언어가 빛의 언어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시인의 눈은 인상파 이후 화가의 눈이다.

‘새와 하늘’에 묶인 시들은 죄다 접속조사 ‘와/과’로 묶인 명사 둘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이 엉성한 접착제 ‘와/과’는 어쩔 수 없이 이음매를, 사이를 남긴다. 시인이 공들여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 ‘사이’다.

이 ‘사이’는 “강과 나 사이 강의 물과 내 몸의 물 사이”(‘강과 나’)에서처럼 공간적이기도 하고, “새가 날아간 순간과 날아갈 순간 사이, 몇 송이 눈이 비스듬히 날아 내린 순간과 멈춘 순간 사이”(‘뜰과 귀’)에서처럼 시간적이기도 하며, “강의 물과 강의 물소리 사이”(‘강과 둑’)에서처럼 감각적이기도 하다.

이 사이는 비어있음이고, 침묵이자 허공이다. 그리고 “침묵과 허공은 서로 잘 스며서 투명하다”(하늘과 침묵). 이 투명한 침묵과 허공은 라이프니츠가 존 로크를 비판하며 거론한 ‘빈 서판’(타불라 라사) 같은 것이다.

침묵은 “잎에 닿으면 잎이 되고/ 가지에 닿으면 가지가 된다”(‘하늘과 침묵’). 허공은 “나무가 있으면 나무가 됩니다/ 나무에 새가 와 앉으면 허공은 새가 앉은 나무가 됩니다”(‘허공과 구멍’).

여기서 우리는 ‘새와 나무’의 핵심 어휘 ‘허공’에 다다랐다. 실상 ‘새와 나무’는 허공의 시집이라 할 만하다. ‘새와 나무’에서 허공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는 작품은 거의 없다.

이 허공의 이미지가, 한 발 물러서 세상을 관조하는 시인의 지적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시집 전체를 가슴 시린 적막의 정조로 물들인다. ‘새와 나무’의 공간은 결코 어둡지 않다. 어둡기는커녕 하얗게 밝은데도, 적막하고 스산하다. ‘새와 나무’에서 허공은 위에 인용한 시에서처럼 곧이곧대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사이, 침묵, 캔버스, 천지간, 하늘, 시간, 유리창 따위로 변주되기도 한다.

그 허공은 부재하는 존재이자 존재하는 부재다. 그것은 배경이자 전경이다.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새와 나무’) 같은 시행에서,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는 예컨대 ‘루빈의 술잔’이나 ‘마하의 책’ 같은 일종의 반전도형(反轉圖形: reversible figure)이라 할 만하다.

아닌게아니라 시집 ‘새와 나무’의 뛰어난 묘사들은 드물지 않게 반전도형을 연상시킨다. “빗방울 하나가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순간 유리창에 잔뜩 붙어 있던 적막이 한꺼번에 후두둑 떨어졌습니다”(‘유리창과 빗방울’) 같은 시행에서도, 상투적으로는 배경이 돼야 할 적막(침묵)이 전경이 되고, 전경이 돼야 할 소리가 배경이 된다.

적막이 후두둑 떨어진다! 경이로운 광경이다. 루빈의 술잔에서처럼 형(形: figure)과 지(地: ground)가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규원의 날이미지란 살아있는 이미지, 진짜 이미지, 본질에 닿아있는 이미지라기보다 상투적이지 않은 이미지, 익(숙하)지 않은 이미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오규원은 새롭게 본다. 그가 옳게 보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옳음은 인간의 인식 능력 너머에 있는지도 모른다.

‘새와 나무’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일급 화가의 터치가 묻어난다. 심상한 풍경이 시인의 눈에는 얼마나 심상찮게 보이는가의 한 예로 ‘아이와 망초’라는 작품을 찬찬히, 그러나 시학자의 가르침 바깥에서 읽어보자.

“길을 가던 아이가 허리를 굽혀/ 돌 하나를 집어들었다/돌이 사라진 자리는 젖고/ 돌 없이 어두워졌다.” 돌이 사라진 자리가 젖었다는 것은 들린 돌이 옴폭 남긴 공간이 축축하다는 뜻이겠지만, 독자는 거기서 정든 돌을 떠나보내는 구멍의 젖은 눈시울을 떠올릴 수도 있다. 넷째 행의 돌 없는 어둠에서도 독자는 구멍의 어두운 정조를 읽자면 읽을 수 있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 반복했다 그 때마다 날개를/ 몸 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수직 운동을 되풀이하는 돌멩이에서 숨겨진 날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나이 지긋한 시인의 젊은 감각이 싱그럽다. 시인 자신은 어느 자리에서 이 대목을 ‘환상적 날이미지’라 규정한 바 있다.

“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웠다.” 그 지움 때문에 허공은 옛 허공과 똑같아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전후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이제 그 허공은 어떤 돌멩이가 지나간 허공이고, 그 사실을 지웠다고 하더라도, 지웠다는 사실 자체는 영원히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손에 멈춘 돌은/ 잠시 혼자 빛났다/ 아이가 몇 걸음 가다/ 돌을 길가에 버렸다.” 아이가 돌 하나를 집어 들어 장난을 하다 길가에 버린 것은 무심코 한 일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굳이 혼돈이론의 나비효과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주에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는 자신의 무심한 행동으로 젖은 자리를 만들어내고, 존재와 부재를 교환하고, 허공과 돌을 조우하게 했다. 그것은 무한한 인과의 사슬을 통해 우주에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낼지 모른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 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 이 역시 시인이 환상적 날이미지라 지목한 대목이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돌에서 시인은 돋아난 발을 본다. 그 돌이 멈추어 설 때, 시인은 (돌의) 몸 속으로 들어간 발을 본다. 새롭게 본다는 점에서, 이미지가 사고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오규원은 과연 像渼?

◎ 9월과 뜰

8월이 담장 너머로 다 둘러메고
가지 못한 늦여름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뜰 한켠
까자귀나무 검은 그림자가
퍽 엎질러져 있다
그곳에
지나가던 새 한 마리
자기 그림자를 묻어버리고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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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라는 고도 
―신영배(1972∼)

그림자를 기다린다
나무 밑이다

그림자의 방향을 본다
바람이다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는다
어깨가 들어간다
머리통이 들어간다
불룩하다

그림자의 소리를 듣는다
비다

 

 

그림자의 색깔을 본다
불이다

주머니 속으로
발을 넣는다
다리가 들어간다
골반이 들어간다
불룩하다


그림자의 냄새를 맡는다
꽃이다

그림자의 맛을 본다
하수구다

주머니가 툭 떨어진다

(사라지며)


그림자를 기다린다

동네에 서 있는 이동도서관에서 시집 몇 권을 빌렸다. 그중 한 권이 이 시가 실린 신영배 시집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다. 정말 시를 잘 쓰는구나! 흠뻑 빠져서 읽었다. 그의 다른 시집 ‘기억이동장치’랑 ‘물의 피아노’도 찾아 읽고 싶었다. 이렇게 매력적인 시를 쓰는, 시집을 세 권이나 낸 시인을 나는 여태 이름도 몰랐다. 반성한다.

 

빛이 있는 곳에서 물체에는 그림자가 생긴다. 그 그림자를 호기심이나 두려움을 갖고 대하던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지만 어느덧 우리는 그림자를 과학적 현상으로만 받아들이고 관심을 거둔다. 그런데 ‘그림자의 소리를 듣는다/비다//그림자의 색깔을 본다/불이다’라니! 시인의 감각적인 묘사로 영혼이 옮겨 붙은 듯 그림자의 세계가 생생히 살아난다.

이 시의 열쇠 말은 ‘그림자’와 ‘주머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행위는 자기 세계를 보호하려는, 혹은 자기 존재를 보이지 않게 하고 싶은 심리를 나타낸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에게 손을 넣을 호주머니는 얼마나 큰 위안인가. 그림자의 세계에서는 주머니에 발도 넣을 수 있다. 화자는 아주 숨지는 않는다. 그림자로 숨고, 주머니의 불룩함으로 숨는다. 냄새 향기로운 그림자에서 하수구 맛을 보는 순간, 그림자가 쑥 벗겨져 사라지고 화자는 주머니에서 굴러떨어진단다. 내공 깊은, 참신하고 독특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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