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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증언의 토대하에 "비허구 쟝르"로 탄생한 윤동주평전
2017년 09월 30일 01시 19분  조회:2870  추천:0  작성자: 죽림
▲  서울 신촌 연세대 내 핀슨홀 2층에 마련된 윤동주문학관.
윤동주와 관련한 원고와 평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작가 송우혜의 집념으로 탄생한 ‘평전’
 

◇ 비허구 장르의 흐름 

최근 우리의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고 있는 책들 가운데는 이른바 ‘비허구 장르’가 많다. 회고록이나 자서전 같은 전통적 나르시시즘 독서물도 많지만, 사실적 기억에 토대를 둔 이른바 증언문학도 많이 눈에 띈다. 일례로 연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우크라이나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팩트와 픽션의 경계를 허물면서 인류가 겪어온 전쟁과 학살과 재난 현장의 고통을 기록해 왔고, 그렇게 사실성의 기억으로 그녀만의 문학적 기념비를 세웠다. 전통 서사인 소설보다 논픽션에 가까운 기록문학의 요청이 절실해진 측면도 이러한 평가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김숨의 최근 장편 ‘한 명’은 일제강점기 종군위안부 문제를 제재로 하여 증언으로서의 속성과 기억의 문화사로서의 지향을 추구한 확연한 결실이다. 이 작품은 비록 허구이지만, 정밀한 역사적 자료와 기억의 재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최근 흐름을 입증하고 있다.

윤동주와 관련하여 이런 생각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 것은, 그 역시 이러한 기억과 증언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지고 각인된 대표적 사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령 윤동주는 자신의 삶과 생각과 실천에 대한 산문적 정보를 일절 남기지 않았다. 개개 시편에는 꼼꼼하게 창작연월일을 일일이 달아놓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산문, 이를테면 일기나 고백적 에세이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동주에 대한 자료는 그가 남긴 소중한 시편들과 4편의 문학적 산문뿐이다. 하지만 윤동주를 우리가 정확하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가족과 지인과 선후배들의 증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것은 대부분 정확한 기억과 우호적인 증언이었고, 그 기억과 증언에 기초하여 그의 시편들이 낱낱의 풍부함을 얻으면서 윤동주라는 상(像)이 형성, 착근되어간 것이다. 시집 초판에 거의 첫 기억을 남겨준 아우 윤일주, 초판에 서문과 발문을 달았던 정지용과 강처중, 육필 시집 원본을 보관했다 세상에 알린 정병욱, 그리고 윤영춘, 윤혜원 등의 가족들, 김정우, 문익환 등의 북간도 친우들의 기억 속에서 윤동주는 선하고 치열한 생을 살아간 시인의 모습으로 충일한다. 이분들의 기억과 증언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가 아는 윤동주는 텍스트 안으로 옹색하게 갇혀버렸을 것이다. 



◇ 청춘과 사랑과 실천의 기억들 

이러한 기억과 증언의 최전선에 위치하는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은 우리 근대문학사의 비허구 장르 가운데 가장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문제적 개인의 생애를 재현하면서도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하는 ‘사실적 허구’의 양식이 바로 평전일 것인데, 이 책은 가장 순결하고도 고독한 삶을 살아갔던 윤동주 시인을 통해 험난했던 한 시대를 전체적으로 통찰하게 하는 평전문학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방대한 노작(勞作)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송우혜는 북간도 역사에 대해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연구해온 근대 사학자이다. 그 점에서 그가 윤동주 연구에 착수하고 기념비적인 저서를 낸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간도의 가파른 역사를 연구해온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에 가장 적합한 작가임을 알아본 이는 시인 최하림이었다. 최하림의 권면으로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에 착수할 수 있었다. 지난해 개봉해 커다란 호응을 얻은 영화 ‘동주’의 감독 이준익은 “평생을 함께한 오랜 벗 윤동주와 송몽규, 두 사람이 어떻게 시대를 이겨냈고, 그 시가 어떻게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영화로 담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이 작품을 시작했다”는 말을 했는데, 이들의 신산한 세월을 흑백 화면에 담아 고고학적 속성을 높여간 이 영화의 저본이 된 것 역시 송우혜의 이 책이었다.  

어쨌든 송우혜의 평전은 ‘지금 여기’에서 윤동주-송몽규-강처중으로 이어지는 청춘과 사랑과 실천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우리에게 탕진되지 않는 감동으로 전해주고 있다. 송우혜는 평전 서문에서 “나의 아버지 송두규 목사님의 삼종형인 송몽규 어른이 윤동주 시인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점이 더욱 집필의 동력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처럼 윤동주와 송몽규라는 형제요, 친구요, 운명적 동지에 대한 고증과 각인은 송우혜의 노고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  송우혜 작가와 윤동주 평전 표지.
왼쪽부터 1998년 세계사,
2004년 푸른역사,
2014년 서정시학 출간본.

◇ 판을 거듭해간 새로운 기억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열음사 주간이었던 최하림의 정성스러운 부탁을 작가가 오랜 숙고 끝에 받아들인 결실이었다. (이때 우리는 최하림 역시 또 한 편의 명작 ‘김수영 평전’의 저자라는 사실을 삽화처럼 만나게 된다.) 송우혜는 이 책에서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밝혀내는데,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윤동주의 동기 동창이자 함경도 사나이인 강처중에 대한 발견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강처중이 처형되었다는 증언을 기록했는데, 나중에 그 글을 읽은 강처중 가족이 그 기억을 수정해준 과정은 평전문학의 백미였다. 판을 바꾸면서까지 그 변모 과정을 기록해내는 작가 정신은 적지 않은 감동과 외경을 내게 주었다. 나는 지난해 3월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에서 강처중의 가족이 증언하는 것을 보고는, 이 또한 송우혜의 공적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또한 작가는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의 헌신적 증언에 대해서도 깊은 사의를 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 책을 가능하게 했던 분들을 호명하고 있다. 마치 윤동주가 별마다 소중한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간 것처럼 말이다. 

윤동주 시인의 명동소학교 4학년 때 담임이었던 현준명 선생님, 중국 낙양군관학교에서 송몽규와 같이 훈련을 받았고 또 후일 윤동주와 송몽규가 연전 입학시험을 치르러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숙소를 제공해 주었으며 윤동주와 함께 북아현동에 있는 정지용 시인의 집에 찾아갔던 라사행 목사님, 일본 경도(교토)에서 사건의 공범으로 윤동주와 같은 날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고희욱 선생님…. 그런 분들이 별세하기 전에 만나서 직접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고, 두고두고 큰 위로가 되었다. 

이 ‘행운’과 ‘위로’의 끝에 작가는 네 번이나 판을 거듭하면서 새롭게 증보된 윤동주 평전을 태어나게 하였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초간본은 1988년에 ‘열음사’에서 나왔고, 1차 개정판은 1998년에 ‘세계사’에서, 2차 개정판은 2004년에 ‘푸른역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 책은 지금 ‘서정시학’에서 출간되고 있다. 

그렇게 여러 번 판을 거듭할 때마다 작가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그에 대한 예리하고도 전문가적인 해석을 덧보태 갔다. 특별히 소설가로서의 정확하고 소통 지향적인 문장은 이러한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더없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송우혜의 평전은 그야말로 수많은 인터뷰를 하고 발로 뛰면서 귀납한 자료들을 적정한 곳에 배치하고 또 풍부하게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윤동주와 송몽규의 연대기를 차근차근 구축해 간다. 책의 구성은 자연스럽게 전(傳)적 체제를 취하게 되었고, 시인의 출생부터 성장 과정을 거쳐 가혹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치밀한 고증과 필치로 드러나고 있다.



◇ 평전의 세목과 성취 

책의 1장에서는 시인의 출생 과정을 담고 있는데, 이는 윤동주 개인사라기보다는, 2장 ‘지사들의 마을 명동’, 3장 ‘해란강의 심장 용정’과 함께 북간도의 역사이자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이산(離散, diaspora) 역사로서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북간도 근대사 연구자로서의 작가의 역량과 개성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송우혜 득의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4장 ‘송몽규 이야기’는 다른 어떤 책에서도 확인 불가능한 창의적 궤적이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송몽규 개인의 생각과 실천을 올바로 드러냄으로써 한국 독립 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추가했다는 보람을 가질 만하다. 영화 역시 이 장에 많은 빚을 졌다.  

‘평양에서 보낸 7개월’을 지나 다시 용정에 돌아와 공부를 마치는 과정이 삽화처럼 펼쳐져 있고, 7장 ‘젊음의 정거장,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오면 이 책은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편들이 쓰이는 맥락과 배경에 대한 더없는 참고서가 되어준다. 사실 윤동주는 이 시절에 가장 아름다운 절편(絶篇)들을 썼거니와, 이때 윤동주가 겪었던 신앙적 고민이나 시대에 대한 아픔 같은 것은 송우혜의 답사와 서사적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재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8장 ‘6첩방의 고장, 일본’과 9장 ‘체포, 재판, 복역, 옥사’에서는 일본인들의 도움과 증언이 많은 역할을 하였고, 특별히 최근 공개된 판결문들을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해석함으로써 일본 현지에서 일어났던 우리 독립 운동사의 흔적을 선명하게 알려준다. 마지막 10장 ‘시인윤동주지묘’와 11장 ‘민족시인의 영광’은 죽음 이후의 윤동주에 대한 소묘로서, 정지용과 강처중의 역할을 새삼 드러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정연하게 정리된 소중한 연보로 책은 끝이 난다.


◇ 불멸의 기억을 가능케 한 기록 

이처럼 송우혜의 저작은 우리 시대 평전문학의 대표 격이 되어주고 있다. 물론 작가 송우혜의 열정은 또 다른 자료가 공개될 때마다 판을 거듭해갈 것이다. 사실 윤동주 연구의 역사에서 아이러니가 있다면, 하나는 문학 연구자가 아닌 역사학자가 시인에 대한 가장 적확하고 풍부한 기록자가 되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윤동주에 대한 중요한 발굴과 발견에 일본인들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정지용이 시집 서문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기억했던 그 오롯한 ‘고독’이 윤동주를 불멸의 시인으로 남게 했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불멸의 기억을 지금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송우혜의 노고 때문이다. 다행스럽고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나는 윤동주 시 전편 해설서를 쓰고 있다. 평전으로는 송우혜 저작을 넘어설 수 없어서, 작품을 꼼꼼히 읽어내고, 시의 영향사와 수용사를 알리고, 그가 가장 성실한 ‘학생’(윤동주는 평생 학생이었고, 학생으로 죽었다.)으로서 선행 고전들을 수용하며 결국 그것을 넘어서는 성장 드라마를 보여주었다고 논증하려고 한다. 이 또한 윤동주 기억의 결정(結晶)으로서의 송우혜 선행 업적이 없었다면 착수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문화일보 8월 22일자 25면 5회 참조)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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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송우혜가 전하는 '마음의 별로 남은 민족시인'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27년여의 짧은 삶. 그러나 울림은 컸다. 뭉클한 여운이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 길게 이어지고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 살아생전에 별을 헤던 그는 세상을 떠나 마음의 별로 남았다. '윤동주 평전'의 저자인 소설가 송우혜(70) 씨가 그의 삶과 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윤동주 시비 앞에 선 송우혜 소설가 [사진/전수영 기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7월 18일 한낮. 연세대 신촌캠퍼스에 있는 윤동주기념관 주변의 숲이 매미 소리로 요란했다. 기념관은 윤동주 시인이 대학 1학년 때 생활하고 사색하고 고뇌하며 시 쓰기를 했던 기숙사였다. 바로 앞뜰에는 시인의 삶과 예술혼을 기리는 시비가 단아하게 서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서시(序詩)'다. 소설가이자 사학자인 송우혜 씨는 시비에서 기념관 쪽을 바라보며 사뭇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서시'는 '참회록'과 더불어 가장 애송하는 시라고 했다.

"석조건물인 저 옛 기숙사의 지붕밑방에서 시인은 운명적 절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연희전문학교 생활을 시작하며 꿈을 키웠어요. 거목들이 우람하게 서 있는 이 숲을 걷노라면 나도 모르게 울컥해지곤 해요. 수십 년 전에 시인이 걸었던 그 길을 오늘날 내가 이렇게 걷는구나 싶어서입니다."

대표작 '서시'를 비롯해 주옥같은 시를 다수 남겼던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 민족 최대의 경축일인 광복절을 앞두고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감회가 새롭다.

송 씨는 "올해가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이라는 게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다"면서 "남기신 시와 함께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계신 듯하다"며 소회를 밝혔다. 윤동주 시인은 2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200여 편의 시와 산문으로 깊은 울림을 남겼다.

송 씨는 "'명예롭게 유지될 수 없는 평화는 이미 평화가 아니다'는 말이 있다.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멸망한 때가 그랬다"며 "어두운 재앙의 시기에 신은 우리에게 한 시인을 보냈다"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역저 '윤동주 평전'(서정시학)은 시인의 삶과 예술을 집대성한 것으로 현대사의 한 줄기를 새롭게 재정리해 또 다른 울림을 안겨준다.

◇ 우연한 만남이 낳은 '윤동주 평전'

송 씨와 윤동주의 '만남'은 어찌 보면 우연이었다. 운명적 인연이랄까. 아버지의 삼종형인 송몽규(1917~1945)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와 친구 사이인 윤동주에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중반 한국 문단에서는 이른바 '윤동주 폄훼 현상'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평생 공부만 했던 윤동주가 무슨 독립운동을 했겠느냐. 그의 시 또한 저항시가 아니다. 일본 유학생으로서 일제의 과잉단속에 걸쳐 불우하게 옥사한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지요. 역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자의적 해석으로 시인에 대한 평가를 오도한 것입니다."

평전이 출간되기까지 내적 우여곡절도 거쳐야 했다. 윤동주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자 시사잡지에 글을 발표하자 한 출판사의 주간이 제대로 된 '윤동주 평전'을 하나 써달라고 간곡히 주문했다. 하지만 송 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평전을 집필한다는 건 무리다 싶어서였다. 당시 그는 장편소설을 구상 중이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어요. 낮잠에 깜박 빠져들었는데 윤동주의 친구이자 인척인 문익환(1918~1994) 목사님의 모친(김신묵)이 금방 돌아가실 것처럼 자리에 누워 계시는 꿈을 꿨어요. 순간 나는 쇠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지요. 소설은 언제라도 쓸 수 있지만 저분이 돌아가시면 북간도 이야기 역시 영영 사라진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구요."

송 씨는 곧바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고 사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1984년 무렵. 당시 90세였던 문 목사의 모친은 북간도의 역사와 윤동주 시인의 삶을 돌이켜주는 최대의 증언자가 됐고, 시인의 누이동생 윤혜원과 남동생 윤일주도 큰 도움을 줬다. 모두 560여 쪽 분량의 '윤동주 평전'은 집필 4년 만인 1988년에 처음 출간됐다. 그리고 1998년 제1차 개정판에 이어 2004년 2차 개정판, 2014년 3차 개정판이 차례로 나왔다.

"평전을 쓰는 동안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밝히는 걸 목표로 정진했지요. 그 결과 '윤동주'라는 시인을 좀 더 정확하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낍니다. 내년이면 어느덧 출간 30주년이 되네요."

이와 함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준다. 윤동주 평전을 쓰겠노라고 오랫동안 벼르고 있던 문익환 목사가 송 씨의 평전을 읽고서는 "윤동주 평전은 송우혜가 쓴 것으로 충분하다. 정말 잘 썼다. 나는 안 쓰겠다"며 대견해 하더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년 2월 전화를 걸어와 "내가 곧 북간도에 가려는데 평전 두 권만 다오. 그 책을 가지고 가야겠다"고 부탁했다.

그런데 문 목사가 평전을 들고 그해 3월 25일 도착한 곳은 중국 북간도가 아닌 북한의 평양이었다. 순안공항에 내린 그가 도착 일성으로 남북한 온 겨레 앞에 바쳐 낭송한 게 시인의 '서시'. 송 씨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이 내 마음을 후려쳤다"며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 비운의 짧은 삶, 깊은 울림의 시

세계가 1차 대전의 아수라장에 빠져 있던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의 명동 학교촌에 있는 기와집에서는 준수하고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나 첫울음을 터뜨렸다. 결혼 8년 만에 아이를 얻은 부모로서는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의 민족시인 윤동주다.

특기할 사실은 윤동주가 태어나기 석 달 앞서 동갑내기 고종사촌이자 평생 운명을 함께한 송몽규가 탄생했다는 점. 윤동주의 할아버지 댁에서 잇달아 태어난 두 아기는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뒤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났고, 동일한 죄목으로 체포돼 복역하다가 같은 해에 옥사한 운명적 동반자였다.

"다섯 살 되던 해에 송몽규가 새로 장만한 부모의 집으로 이사할 때까지 두 아이는 한 지붕 밑에서 살았는데 일생을 두고 참으로 특이한 관계였지요.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을 빠뜨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명동소학교 시절의 윤동주는 성품이 무척 온순하고 재주 있는 아이였다. 송 씨는 "윤동주에게 명동은 맑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유년기 체험으로 가득한 곳이었다"면서 "하지만 횡행하는 마르크시즘에 환멸을 느낀 민족주의자들은 하나둘 이곳을 떠났고 윤동주 집안도 1931년 용정으로 이사했다"고 들려준다. 윤동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내면에는 이 같은 명동마을의 시대상이 있다는 것.

용정의 은진중학교 생활도 시대적 격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35년 송몽규가 독립운동에 투신해 중국으로 잠입했고, 윤동주는 생애 처음으로 집을 떠나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때의 송몽규 독립운동 경력이 훗날 윤동주의 체포와 옥사에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윤동주가 인간이 지닌 불완전성을 체감하고 이를 '부끄럼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계기는 바로 숭실중학교 시절이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시기인 이때 윤동주는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슬퍼하는 참회의 방식이 바로 '부끄럼'임을 깨달은 것. '서시'는 이 같은 부끄럼 미학의 결정판으로, 수치 앞의 정직함과 성실함은 신의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축복이었다.

신사참배의 격랑 속에 문익환과 함께 숭실중을 자퇴하고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 두 해 동안 다수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중 매우 감칠 맛 나는 작품으로 송 씨가 꼽은 게 동시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 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 먹고 살고//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 졸업 앨범 사진

 

◇ 유순하나 지조 높은 '외유내강' 시인

1938년 광명학원을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와 나란히 자신의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시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활짝 열게 된다.

민족의식이 시편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도 이때였다. 그는 '슬픈 족속'이라는 시에서 '흰 수건을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라며 식민치하의 우리 민족을 의인화해냈다. '한민족'은 곧 '슬픈 족속'이라는 것이다.

송 씨는 "외유내강형이던 시인이 대인관계에서는 매우 유순하고 다정했지만 지조는 누구보다 굳고 강했다"고 들려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요 힘에 겨운 아들이며 따뜻한 오라버니요 형이었고 성실한 학생이자 다정한 동료였고 자상한 선배였던 그의 외형을 벗겨놓고 보면 광야에서 수도하는 고행승처럼 엄격하게 노력하는 시인이요, 동족의 고난 앞에서 신과 그 약속에 대해 감연히 반발한 당당한 반항가였다는 것이다.

연희전문 시절이 낳은 명시 중 하나가 바로 '별 헤는 밤'. 맑은 별빛 충만한 가을의 서정을 청신하게 묘사한 이 시에는 시인의 고운 심성과 기품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중략)…//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연전 졸업 후 윤동주는 송몽규와 일본에 유학해 대학과정을 밟는다. 당시 가장 큰 장애는 '창씨개명'. 창씨개명이 되지 않으면 일본으로 가는 데 필요한 '도항증명서'부터 뗄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연전 졸업 직후 북간도로 귀향했다가 서울로 돌아와 학교에 창씨개명계를 제출한다. 그의 새 이름은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

'참회록'은 창씨개명의 뼈아픔을 통회하는 일종의 저항시였다. 일제에 망한 '대한민국'이란 왕조의 후예로서, 바로 자신의 '얼굴'이 그 '왕조의 유물'임을 절감하면서 '이다지도 욕됨'을 절절하게 참회했다. 송 씨는 "그것은 동시에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을 기약하는 자기 다짐을 동반한 참회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중략)…밤마다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거러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온다'

◇ '동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

일본으로 건너간 지 1년여 뒤인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북간도로 귀성하려던 윤동주는 '교토에 있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돼 전격 체포·수감된다. 요시찰 인물 송몽규는 이보다 나흘 앞서 사상범으로 체포됐다. 이듬해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은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각각 비극적으로 옥사하고 만다.

"윤동주가 민족시인의 영예를 누리게 된 데는 연전 시절에 종로구 누상동에서 같이 하숙했던 후배 정병욱과,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던 강처중이 있었습니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다섯 살 차이의 선후배였지만 흉금을 털어놓고 지낼 만큼 긴밀한 사이였죠. 윤동주에게서 필사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받은 정병욱은 이를 보관했다가 해방 후 월남한 유족들에게 전함으로써 시인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지요. 해방 후 경향신문 기자를 지낸 강처중도 일본 유학을 떠나는 윤동주가 서울에 두고 간 '참회록' 등의 원고를 보관했다가 동생 윤일주에게 전했구요. 현존하는 윤동주 유품 중에서 중학교 때의 시와 동시, 습작을 빼고는 모두 강처중에 의해 세상에 남아 있어요."

윤동주가 평생을 두고 가장 좋아했던 시인은 정지용(1902~1950)이었다. 그가 관념적이고 어려운 시가 아닌,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출하게 된 데는 정지용의 영향이 컸다. 정지용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뒤인 1947년에 '동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라며 윤동주를 극찬한다.

송 씨는 "평전이 나오기 전까진 송몽규의 사망 시기와 무덤 소재지에 대해 중대한 착오들이 있었는데 책의 내용을 토대로 무덤을 찾아내고 사망 날짜도 바로잡혀 큰 보람을 느꼈다"면서 "이와 함께 '좌익 인사'였다는 이유로 유족조차 쉬쉬하던 강처중의 행적과 사상을 개정판에서 새롭게 정리할 수 있어 뿌듯했다"고 말했다.

1968년 서울대 의대 간호학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한 뒤 1978년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해 신학을 공부한 송 씨는 다시 이화여대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은 뒤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1980년 문단에 오른 송 씨는 장편소설 '저울과 칼' '하얀 새' 등을 발표했고 '스페인춤을 추는 남자' 등의 소설집과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라는 산문집도 펴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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