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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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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똘똘 뭉쳐야 산다...
2017년 10월 24일 06시 09분  조회:3545  추천:0  작성자: 죽림
조선족은 어떻게 "힘"을 합쳐야 할가?
/ 박광성
2017년 10월 17일  작성자: 정음문화칼럼
       

      20세기초에 미국을 방문했던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미국인들의 생활 곳곳에 “교파”가 영향을 끼치고있음을 발견한다. 례를 들어, 한 치과에서 그는 환자가 의사가 소속된 교파를 확인한후 시름놓고 치료받는 장면을 목격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그 환자에서 무엇때문에 의사의 교파를 확인하는가 묻는다. 환자는 “그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적수양이 높기때문에 신뢰할수 있다”고 대답한다. 즉 그 당시의 미국에 있어 교파는 단순한 신앙의 공동체가 아니라, 상호 신뢰의 공동체로, 그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을 할수 있는 사회적자본의 장(場)이였던것이다. 베버는 당시 미국의 큰 기업가들이 많이는 “침례회”회원임을 확인하면서, 이 교파는 높은 도덕적수준을 전제로 회원을 발전시키기때문에, 이 교파 회원으로 되는 순간 그 사회적신뢰도가 증명되여 타인들과의 협력이 용이한 점을 발견한다. 이것으로 베버는 서로 신뢰할수 있는 사회적자본의 형성이 기업, 경제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된다.
 
  또 다른 례로, 유태인들은 내부의 단결력이 높기로 소문이 나있다. 족내의 끈끈한 협업과 협력을 기초로, 그들은 2000여년동안 나라도 없이 사처로 헤매고 다녔지만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세계경제의 명맥을 쥐고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합작의 기초를 다져왔을가? 그것은 바로 유태인문화에 률령(律令)이 발달했기때문이다. 세계에서 유태인들처럼 반드시 지키야 할 률령이 많은 민족도 드물것이다. 가령, “갚을 능력이 없이 빚을 내서는 안된다”, “세금을 내지 않은 상품을 매매해서는 안된다”, “당지의 법과 어긋나는 초과리윤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등과 같이 생활 곳곳에 지켜야 할 원칙들이 숨어있으며, 유태인이라면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러한 원칙들이 확립되여있기때문에, 유태인들끼리는 돈을 꿔주든 투자를 하든 사기당할 걱정이 없다.
 
  해외의 화교들도 결집력이 높기로 소문이 나있다. 따라서 그들도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하고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결집력은 원천은 또한 무엇일가? 그 답은 바로 종족(宗族)조직에 있다. 북방의 한족들과 달리 남방의 한족들은 종족문화가 발달되여있어, 그들은 씨족을 단위로 사당(祠堂)을 세우고, 종가를 중심으로 하여 혈연적관계를 유지,확장시켜나간다. 근대에 해외로 흘러나간 화교들의 경우만 봐도, 외국에서 돈만 벌면,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당부터 수건한다. 따라서 그들은 뉴대감이 끈끈한 방대한 친족집단을 형성해갈수 있었다. 가령, “세계허씨총련합회”와 같은 종족조직들은 몇년에 한번씩 세계적인 친족회의를 개최하여 내부적결속을 다진다. 혈연을 매개로 뭉친 집단이기때문에 회원들은 다 친척이 되는 셈이며, 따라서 내부에서 사기를 하거나 하면 아예 사회관계에서 매장된다. 따라서 친족내부에서 다양한 협력이 용이해진다.
 
  상호간에 신뢰형성이 집단내의 “힘”의 결집에서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기때문에 당대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아예 이를 “사회적자본”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돈”만 자본인것이 아니라, “서로 신뢰할수 있는 사회적관계”도 자본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경제적자본”으로 전환될수 있기 때문이다. 우에서 얘기한 사례들이 바로 “사회적자본”이 어떻게 “경제적자본”으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주고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은 어떠한가? 조선족의 문화모체는 기본적으로 상업문명이 결여된 농경문화이다. 게다가 근대에 일제의 침략을 겪으면서 파산된 상황에서 국제적이주를 경험하다보니 종족(宗族)관계도 거의 단절되다싶이하였다. 파산된 빈농집단이 국제이주를 겪으면서 파란만장한 력사적과정을 거쳤고, 그 와중에서 혈연과 계층을 초월한 “공동체”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삶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한 공동체였다. 힘들 때 위로해주고, 기쁠 때 같이 기뻐해주었는바 이민생활의 고단함을 공동체의 구성을 통하여 해소하였던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위로의 공동체”, “정의 공동체”, “놀이의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 삶이 고단하고 각박하니 서로 “아픔”을 나눌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이러한 아픔을 나누는 과정에서 “정”이 생겨나고, 그것들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으로 “놀이의 문화”가 필요했다. 이러한 조선족공동체는 해방후에 “마을”이라는 안정된 정착지를 찾으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조선족마을은 바로 “위로의 단위”, “정의 단위”, “놀이의 단위”였다.
 
  공동체생활에서 “정”이 강조되다보니, “계산”, “리익”, “계약”, “신뢰” 등과 같은 도구적합리성이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되기 싶상이였다. 가령, 조선족마을에서는 “리익만 따지고”, “계산적이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나쁜 사람의 전형으로 되기 일쑤였고, 반대로 인심이 후하여 다른 사람과 옴니암니 따지지 않는 사람이 좋은 사람의 전형이였다. 따라서 시장경제에 필요한 도구적합리성을 발전시킬수 없었다.
 
  오늘날 조선족은 비록 도시화되여 대부분이 도시에서 살고있지만, 그 “공동체문화”의 습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있다. 조선족이 모여살고 있는 도시들마다 각종 “협회”가 설립되여 “공동체를 재구성”하고있지만, 이러한 공동체들은 기본적으로 합작을 기초로 “힘”을 키우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보다는 여전히 “정”을 나누는데 치중되여있다. 가령, “기업가협회”의 활동들을 보면, 협회를 통하여 유기적인 경제적합작이 이루어지기보다는, 기업인들이 돈을 모아 공익성활동과 문화활동에 열중하고있다. 따라서 “기업가협회”는 “힘을 결집하는 사회적자본의 장”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공동체를 도시에서 부활시키는 역할을 하고있다. 즉 우리는 아직 “사회적자본”을 “경제적자본”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있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칠수는 있지만, 그것이 “믿을수 있는 사회적신뢰”로 되여 “힘”을 결집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지 못한다. 조선족은 “정”과 “아픔”은 같이 나눌수 있어도, “힘”과 “리익”은 같이 나누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공동체생활에서 우리는 “정”을 나누는데에만 습관되여있기때문이다.
 
  인젠 세상도 변했고, 우리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삶의 환경이 바뀐것에 비하여, 우리의 가치관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다. 조선족의 미래는 물론, 우리 개개인의 미래에 있어서도 어떻게 신뢰를 기초로 “사회적자본”을 형성하고, 이를 “경제적자본”으로 전환하는가에 승패가 달렸다고 볼수 있다. 날로 치렬해지는 시장경쟁속에서 특별한 묘기가 없는 한 령세한 업소는 설자리가 없다. 한 사람의 힘이 부족하니 열사람, 백사람의 힘을 합치여 일단 덩치를 키워야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족공동체는 기존의 “정의 공동체”에서 “합작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이러한 진화를 촉진시키는것이 민족을 사랑하는 이 시대 조선족지성인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인민넷 
======================= 덤으로  <참고하기> ...

(시사저널 유지만 기자)=

1917년 중국 북간도(현재의 옌볜조선족자치주 지역) 명동촌(明東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윤해환. 우리말 ‘해’자에 한자 빛날 ‘환(煥)’자를 붙인 아명(兒名)이었다. 1910년 결혼한 윤영석, 김용 부부 사이에서 7년 만에 태어난 첫 번째 아이였고, 윤씨 집안의 장손이었다. ‘별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는 일제 식민지배하에 조선 땅을 떠나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록 3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시는 지금까지도 생을 이어오고 있다.

 

시사저널은 9월11일부터 14일까지 나흘간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시를 찾았다. 룽징은 윤동주가 태어난 곳이자, 가곡 《선구자》에 등장하는 도시이며 ‘항일 투쟁’의 요람이기도 하다. 올해 12월30일은 윤동주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다. 윤동주 생가(生家)와 룽징시 대성중학교, 묘소 등을 찾았다. 또 조선족 현지 인사들을 만나 윤동주가 현재 문학계 및 사회·역사적으로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중국 현지에서 바라 본 윤동주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곳에서 ‘조선족 시인’ 윤동주와 ‘한국 시인’ 윤동주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이미 상당히 진행된 중국의 ‘동북공정’ 흔적도 엿볼 수 있었다. 중국 조선족이 세대를 지나면서 민족적 유대감이 상당히 끊어져가는 느낌도 받았다. 윤동주 안에는 윤동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민족적 유대감과 조선족 정체성 등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중국 지린성 룽징시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 기념관 © 시사저널 유지만

중국 지린성 룽징시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 기념관 © 시사저널 유지만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은 룽징시에서 차로 10여 분가량 이동해야 한다. 마을 초입에는 ‘윤동주 생가’라고 써 있는 큰 비석과 ‘시인의 고향(詩人的故鄕)’이라 적힌 팻말이 있다. 바로 이곳에서부터 윤동주가 나고 자란 명동촌이 시작된다. 마을 안쪽으로는 예스러운 풍경을 간직한 기와집들이 곳곳에 보였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이곳은 조선인들의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한족들도 많이 섞여 들어온 상태다. 일부 집에는 농사를 짓다가 방치한 옥수숫대들이 우거지게 자라 있었다.

 

윤동주 생가는 마을 어귀를 따라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입구에는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 적혀 있다. 윤동주의 집은 명동촌으로 이주 온 조선인 중에서도 부유한 편에 속했다. 윤동주의 친동생인 고 윤일주 성균관대 교수는 윤동주 생가에 대해 그의 저서 《윤동주의 생애》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 남매들이 태어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 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株)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윤동주의 생가는 재정비한 지 오래되지 않아 보였다. 기자와 동행한 중국 옌볜 조선족 인사는 “현재 룽징시에서 문화단위(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윤동주 연구를 활발하게 하고 있는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이를 두고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중국에서 윤동주를 일컫는 ‘애국시인’의 국(國)은 중국을 의미한다.

 

윤동주의 생가 안쪽은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와 윤동주 전시관, 실제 복원한 생가, 예배당 등으로 꾸며져 있다. 지나가는 길 곳곳에 그의 시를 새긴 돌비석들이 있다. 각각의 시는 중국어로 번역돼 있어, 중국인 관광객들이 올 때도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윤동주 전시관은 현재 정비 중이라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예배당 안쪽에는 가곡 《선구자》의 노랫말이 적힌 액자가 보였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해란강’은 바로 룽징에 흐르는 강이다.

 

윤동주의 실제 생가는 전시관 가장 안쪽에 있다. 생가 안에는 윤동주를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자 서거 72주기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8월초부터 현재까지 약 150명이 다녀갔다. 방명록에는 다녀간 이들이 남겨 놓은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거의 다 한국인이었고, 2~3명의 일본인이 다녀갔다. 관리자는 “요즘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국인들 방문이 부쩍 줄었다. 예전의 10분의 1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자가 생가를 찾은 날에도 백두산 여행을 온 한국인 10여 명이 윤동주 생가를 둘러봤다.

 

생가 바깥에서는 기념품이 판매 중이었다. 주로 윤동주 평전과 시집, 중국 조선족 전통문화에 관한 책들이다. 조선족 사회에선 나름대로 윤동주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윤동주 평전》은 이미 시중에 나와 판매되고 있었고, 10월에는 조선족 향토작가가 집필한 《송몽규 평전》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들은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윤동주 평전》을 집필한 작가 박아무개씨는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 사람들이 잘 찾아내지 못한 부분들까지 찾아냈다”고 자랑했다.

 

그들의 이런 자부심에는 조선족과 한국인의 이질감이 깔려 있다. 현지에서 만난 조선족 인사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한국 사람이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중국 조선족은 옌볜 일대에 터를 잡은 지 100년이 넘었다. 세대로 따져도 현재 3대째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옌지시에서 사업을 하는 한 조선족 인사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여태껏 자랐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 사람일까. 국적은 ‘중국’이지만 우리는 엄연한 조선족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문화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 지린성 룽징시에 있는 윤동주 생가 기념관의 《서시》 시비(위)와 대성중학교의 《서시》 시비. 두 곳의 중국어 변역은 한자 표기부터 다르다.

중국 지린성 룽징시에 있는 윤동주 생가 기념관의 《서시》 시비(위)와 대성중학교의 《서시》 시비. 두 곳의 중국어 변역은 한자 표기부터 다르다.


이 부분에서 윤동주에 대한 묘한 갈등이 발생한다. 바로 ‘조선족 시인 윤동주’와 ‘한국 시인 윤동주’의 충돌이다. 조선족 현지 문인들은 한국에서의 추모활동에 대한 묘한 반감마저 가지고 있었다. 현지 향토작가인 박아무개씨는 “우리는 한국에 입국할 때에도 ‘외국인’으로 취급받는다. 한국에서 ‘한민족’이라고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이방인이다. 일전에 한국에서 상을 준다고 해서 들어간 적이 있는데,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라고 소개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기념사업에 대한 불만도 터져 나왔다. 현지 인사들에 따르면, 윤동주 기념사업은 1990년대까지 한국의 지원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현재 한국이 합작한 기념사업은 사실상 끊겨 있다고 한다. 현지에서 만난 조선족 유력 인사는 “요즘 진행되는 윤동주 기념사업은 사실상 조선족들이 주도하고 있다. 여기다 룽징시에서도 문화재로 지정해 줘서 지원받고 있다. 현재 남한에서 우리와 협업하는 것은 없다고 보면 된다”고 잘라 말했다.

 

이러한 갈등은 대성중학교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대성중학교 안쪽에 자리한 기념관 옆에는 이상설의 서전서숙을 기념한 전시관도 있었다. 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전시관을 구경할 수도 없었다. 입구에 있는 소파에는 하얀 먼지가 자욱이 깔려 있었다. 얼마 전 한국으로부터 ‘서전서숙 기념사업’을 제안받았다는 한 현지 인사는 “서전서숙을 새로 세워주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라고 해서 거절했다”고 말했다.

 

 

“윤동주 詩 중국어 번역, 엉망이다”

 

윤동주의 시 중 대표작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서시》를 꼽는다. 룽징 현지에서도 윤동주 생가와 대성중학교 전시관 앞에는 《서시》를 새겨놓은 시비(詩碑)를 볼 수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일제 치하에서 시인 윤동주가 겪은 고뇌를 잘 표현한 명시로 꼽힌다. 조선족 사회에서도 윤동주를 ‘저항 시인’ 내지는 ‘항일 시인’으로 평가하는 데 이 시가 한몫을 한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번역이다. 윤동주 생가 기념관과 대성중학교에 있는 《서시》의 중국어 번역본은 한자부터가 달랐다. 윤동주 시의 번역 문제는 그동안 늘 제기돼 왔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다. 윤동주 시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에서도 번역 문제는 제기돼 왔다.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려는 의도적인 조작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이에 비해 중국어 번역은 조금 더 원초적인 문제다. 윤동주 생가의 중국어 번역은 전 옌볜조선족자치주 고위급 인사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한 조선족 번역가는 “통탄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조선족 시인으로서 윤동주를 제대로 평가받게 하려면, 중국에서도 충분히 놀랄 만한 번역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중국 문학계에선 윤동주 시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조선족 안에서만’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번역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대성중학교 번역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윤동주 생가에 있는 번역본은 시의 의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중국 시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들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고 혹평했다. 기자가 파악한 바로는 윤동주의 《서시》에 대한 세 가지 중국어 번역본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연구해 만들어진 번역본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윤동주에 대한 관심 더 커지길”

 

윤동주 생가와 룽징 시내 대성중학교를 둘러본 후에는 윤동주의 묘소를 찾았다. 윤동주의 묘소는 룽징시 동북쪽 합성리(合成里) 동산(東山) 8부 능선 즈음에 있다. 윤동주의 묘를 찾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동산 어느 부근에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현장에 도착하니 별다른 안내문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현지인들에게 물어도 중국 한족인 경우에는 전혀 위치를 알지 못했다. 일부 주민들은 “윤동주가 누구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산책 중이던 조선족 주민에게 물어본 후에야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윤동주의 묘소 바로 옆에는 송몽규의 묘소가 함께 있었다. 송몽규의 묘비에는 ‘청년문사송몽규지묘(靑年文士宋夢奎之墓)’라 적혀 있었고 윤동주의 묘비에는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글귀가 있었다. 1988년 《윤동주 평전》을 펴낸 송우혜 작가는 이를 두고 “윤동주 유족들이 송몽규의 묘에 ‘청년문사’라 표현된 것을 보고 묘한 경쟁심이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윤동주 묘비에는 ‘시인’이라는 표현을 넣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묘비 앞에는 먼저 다녀간 이들이 남긴 꽃이 한 다발씩 놓여 있었다. 윤동주의 묘소 옆에 있는 나무에는 종이를 접어 만든 하얀 꽃도 걸려 있었다.

 

지린성 룽징에 있는 윤동주 묘소(위)와 룽징 시내 대성중학교 전시관에 재현해 놓은 옛 교실 © 시사저널 유지만

지린성 룽징에 있는 윤동주 묘소(위)와 룽징 시내 대성중학교 전시관에 재현해 놓은 옛 교실 © 시사저널 유지만


윤동주의 묘소는 그가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뒤 40년이 지나서야 발견될 수 있었다. 처음 윤동주의 묘를 발견한 이는 일본인 윤동주 연구가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와세다대 명예교수였다. 그는 1985년 5월14일 윤동주의 묘지를 발견하고 이를 국내 학계에 알렸다.  문제는 이 ‘동산’이라는 단어였다. 당시 윤동주를 다룬 글이나 책에는 윤동주의 묘소 위치를 ‘동산교회 묘지’ ‘중앙교회 묘지’ ‘동산 중앙교회묘지’ 등으로 표현했다. 실제로 룽징에는 ‘동산교회’와 ‘중앙교회’가 있었고, 지명인 ‘동산’도 있는 터라 묘소의 위치를 특정하기 매우 어려웠다. 오무라 교수는 지난(至難)한 과정을 거쳐 결국 이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이후 1990년 송몽규의 묘소를 찾아 윤동주 묘소 옆으로 이장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현지에서 만난 인사들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인 윤동주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현재 명동촌에는 옛 명동소학교를 재현하는 전시관 공사가 한창이었다. 조만간 일반에 개방될 예정이다. 이 역시 룽징시 주도로 진행되는 사업이다. 현지 공안(公安·경찰) 관계자는 “건물은 모두 완성됐고, 앞뜰 공사를 하고 나면 일반에 공개된다”고 말했다. 조선족 문학계 인사인 김아무개씨는 “중국이 자신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사업”이라고 규정했다. 조선족으로서 독립적인 문화유산을 남기려는 의지와 중국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지적이다.

 

김씨는 윤동주 연구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더욱 활발해지기를 기대했다. 그는 “윤동주가 조선족 시인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을 하기에 앞서, 윤동주 시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조선족 사회에서 윤동주 기념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이는 미미한 수준”이라며 “여전히 연구하고 알릴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윤동주는 그 자체로 소중한 시인이다. 한글로 이처럼 아름다운 시를 썼던 이가 또 있었던가 싶다.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부터 다시금 관심이 높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역시 덤으로 <참고하기>...

@@ 홍익대 앞 잔다리



윤동주가 산책했던 ‘잔다리 마을’은 서울 홍익대 앞 동·서교동의 옛 이름이다.
현재는 ‘잔다리길’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고 경의선 책거리 등 문화시설과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최혁중 기자 
 

서울 마포구 지하철 홍대입구역이나 합정역 언저리 어디에 그의 자취가 있을까. 젊은 영혼들이 반갑게 만나고 헤어지는 번화한 거리는 1938년 너른 들녘이었다. 이 들녘에 연희전문에 입학하고 두 달 보름 지난, 스물한 살 윤동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 것은 
참말 이적(異蹟)이외다. 


오늘따라 
연정, 자흘,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이적(異蹟)’(1938년 6월 19일)
 



윤동주는 ‘이적’ 육필 원고 끝에 ‘모욕을 참어라’라는 단말마 같은 글귀를 남겼다.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보리이까’, ‘나를 불러내소서’라는 구절에서 보듯 기도문이다. 아이 적부터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던 사진이 네 장 남아 있는 그의 시에는 성경에서 얻은 모티프가 많다. 

‘이적(異蹟)’이라 하면 죽을병에서 낫거나, 복권이 당첨되는 기적을 떠올린다. 그가 생각했던 이적은 무엇일까. 호숫가에 가기 전에 그는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왔다고 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를 받을 때 신발을 벗듯 윤동주는 터분한 것, 그러니까 지저분하며 개운치 않고 군색한 것을 버리고 섰다는 말이다. 
 

 

윤동주는 물 앞에 서면 자신을 성찰하곤 했다. 물결 위에 떠있는 달을 보며 내면을 성찰하고(‘달을 쏘다’), 우물 안에 자신을 투영해보기도 하고(‘자화상’), 냇가에 앉아 성찰하기도(‘산골 물’) 했다.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라는 구절은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오는 예수를 보고 자신도 걸어보려 했던 베드로 이야기, 마태복음 14장의 패러디다. 바로 전에 예수는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으로 5000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였다. 게다가 그냥 물 위를 걸었다. 베드로는 예수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있는 서커스 같은 ‘이적’을 흉내 내고 싶었다. 


윤동주는 베드로와 다르다. 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는 ‘부르는 이 없다’는 말과 ‘불리워’ 왔다는 말은 서로 맞지 않는다. 부르는 이가 없는데도, 까닭 모를 이유로 불리어 왔다는 것은 ‘참말 이적’이라고 한다. 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어도, 전혀 모를 황당한 미래 앞에 ‘불리워 온’ 것이 기적이라는 말이다.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는 횡재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살아온 일상 자체가 ‘참말 이적’이라는 말이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적을 체험하는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보다, 그저 ‘따순 햇살’ 아래 살아가며 운명에 부닥치는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를 ‘참말 이적’이라며 그는 감내한다. ‘내사’는 ‘나야말로’, ‘나 같은 것’이라는 겸손한 표현이다. 나처럼 부족한 존재가 부르는 이도 없는데 이 호숫가로 불리어 온 것이 ‘참말 이적’이란다.

이어서 ‘터분한 것’들이 나온다. 원고를 보면 자긍(自矜), 시기(猜忌), 분노(憤怒)라고 써 있는데, 분노를 지우고 맨 앞에 ‘연정’을 써넣었다. 시를 교정할 때 윤동주에게 심각했던 문제는 분노보다 연정이었겠다. ‘이적’과 같은 날에 쓴 시 ‘사랑의 전당’에 그는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라고 썼다.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먼저 떨어졌습니다.’(‘그 여자’)에서 ‘붉은 능금’이라는 구절은 대단히 유혹적이다. 

자기도취인 자홀(自惚)이나 쪼잔한 시기와 함께 터분한 욕구들이 오늘따라 ‘금(金)메달처럼 만져’진다. 바로 그 금메달 같은 ‘모든 것을 여념(餘念) 없이/물결에 씻어 보내’겠단다. 어설픈 너스레를 씻어버리며 ‘참말 이적’으로 살아가겠다니, 당연히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새로운 길’)일 수밖에 없다. 

망망한 ‘호수 위로 나를 불러내소서’라고 마무리한다. 퇴고 전에는 원고를 보면 ‘이 호수 위로/나를 불러내소서/걸으라 명령하소서!’였는데 ‘걸으라 명령하소서!’를 삭제했다. ‘걸으라 명령하소서!’라고 하면 특별계시가 된다. 이 문장을 지웠을 때 물 위를 걷지 않아도 시련을 당하겠다는 다짐이 돋아 보인다.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사랑의 전당’)는 깨달음에는 운명에 당차게 단독자로서 나서는 키르케고르의 자세가 겹친다. 이상섭 교수는 이 시를 쓴 배경을 이렇게 추측한다.
 

 

“지금의 서교동 일대(1960년대까지 ‘잔다리’라고 했다)에는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의 홍익대 앞 신촌 전화국 근처에 아주 큰 연못이 있었는데 1950년대에도 거기서 낚시질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 옛글에 보면 한양 팔경 중에 ‘서호낙일(西湖落日)’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서교동, 합정동 일대, 즉 서강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해 지는 풍경을 가리켰다. 윤동주가 묵던 기숙사에서 잔다리의 연못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기서 10여 분 더 걸으면 강가(서강)에 도달했다. 아마도 1938년 초여름 어느 황혼녘에 그는 잔다리의 그 연못가로 산보를 나왔다가 순간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다.”(이상섭, ‘윤동주 자세히 읽기’)  

잔다리 연못가로 윤동주가 산보 갔다는 확실한 증언은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다. 옛날 연희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렸던 개울이 지금의 서교동 일대에 여러 갈래로 흘러내렸고, 거기에는 많은 작은 다리가 놓여 마을 이름이 ‘잔다리 마을’로 불려 왔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의통방 세교리계, 현재 마포구 동교동의 창천에 있던 작은 다리 ‘잔다리’, 한자로 고친 것이 세교(細橋)다. 
 

 

자주 오랫동안 먼 길을 걷곤 했다는 윤동주, 들녘이었던 홍익대 앞 어디쯤을 거닐었을까. 1938년 그가 마주했던 호수는 그 무렵 그가 보았던 ‘해바라기 얼굴’의 여성 노동자나, ‘슬픈 족속’의 흰옷을 입은 한민족이라는 거대한 호수였을 수도 있겠다. 시 원본 끝에 ‘모욕을 참어라’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그에게 어떤 굴욕적 사건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적었을까. 이 메모와 함께 생각해볼 때, 어찌할 수 없는 자신과 민족의 운명 앞에 ‘나를 불러내소서’라는 다짐은 서늘하다. 물이 흐르던 시내는 복개되어 찾을 수는 없으나, 홍익대 근처에 가면 낮고 고독한 고백이 가슴속에 우직하다. 나를 불러내소서.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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