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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문뉴우스] - 두만강수석박물관 이모저모
2018년 02월 27일 00시 19분  조회:6249  추천:0  작성자: 죽림

 

(흑룡강신문=하얼빈)
8월 15일(2011년), 오전 길림성 도문시 일광산공원기슭에 자리잡은 두만강수석박물관이 정식으로 오픈하였다.

  도문시 두만강수석박물관은 연변의 첫 두만강수석박물관으로서 관내에는 도문시 애석인들이18년간이 꾸준한 노력으로 수집한 100여종의 진귀한 수석 200점과 조선, 한국, 인도네시아 등 나라에서 온 진귀한 수석들로 수장성, 감상성, 지식성, 취미성이 일체화된 고품격 수석관이라고 도문시부시장 박봉이 오픈식에서 소개했다.

  박봉의 뒤를 이어 두만강수석관 김학송관장이 격동된 어조로 감명이 깊은 발언을 하였다.김학송관장은 두만강수석은 중국수석계의 한떨기 ‘처녀 꽃’이라고 하면서 도문시 두만강수석관을 도문을 세계에 홍보하는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꾸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표시했다.

  김학송은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최초로 ‘재미나는 수석(壽石)’이란 수석전문저서를 펴낸 시인으로서 체계적으로 수석리론을 익힌 연변수석분야의 제 1 인자로 불린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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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룡희주장 수석애호가 김학송씨에게 수석문화발굴 발전을 부탁

연변에서 두만강수석을 기반으로 한 자연문화재산업을 크게 발전시킬 조짐이 보인다.

지난 5월 말, 연변주당위 선전부 리흥국부장일행이 도문《두만강수석박물관홍보청》을 찾아 사업시찰을 한 뒤를 이어 6월 11일 연변주 정부 리룡희주장이 주정부 비서장 조리, 주재정국 국장 조룡호의 배동하에 연변수석분야의 제 1 인자로 꼽히는 김학송씨를 찾아 《돌이 심어진 농가 뜨락》과 《두만강수석박물관홍보청》을 사업시찰하였다.

김학송씨는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최초로 《재미나는 수석(壽石)》이란 수석전문저서를 펴낸 시인이다.

김학송시인이 체계적으로 수석리론을 익혀 연변수석분야의 제 1 인자로 불리게 된 데는 1993년 그가 한국서 《수석문화》라는 월간지를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를 인연으로 김학송은 한국수석총련합회 정형태부회장을 알게 되였고 정형태부회장도 한국의 각 도(道)수석협회 회장들을 거느리고 도문에 와서 한달간 김학송의 동생집에 행장을 풀어놓고 연변지역 탐석활동을 벌렸다.

정형태일행은 모두 한국 수석분야의 고수들로 김학송씨는 그 분들을 안내하며 본격적으로 수석리론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또 장봉택 등 한국수석전문가들과 빈번히 래왕하며 그 분들의 수제자가 되여 부지런히 갈고 닦으며 수석애를 불태웠다.

연변서 탐석활동을 거의 마무리한 한국수석전문가들은 두만강에서 탐석되는 오석이나 가야하에서 산출되는 청석계렬의 수석은 아직까지 중국수석계에서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연변이 현대수석의 종주국이라며 한국의 애석인들에게 연변수석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사업차로 연변에 왔던 모 한국 분은 한 시골집 마당에서 엄청나게 잘 생긴 대석을 보고 당장에서 그 돌을 매입하여 한국에 내갔는데 그 돌이 한국서 인기가 대단하였다.

이렇게 지난 세기 90년대 초반에 한국석상들로부터 연변붐이 일어나기 시작해 이곳 사람들이 아직 수석눈을 뜨기도 전에 수백톤의 수석과 정원석이 한국으로 나갔다.

김학송씨는 그제야 수석은 복제나 재생산이 불가능한 귀중한 자원인줄을 알게되여 애석을 제 2 생명으로 근 20년간 수석연구와 발굴에 혼신을 다했다.

몇 년전 사천성에서 온 한 수석애호가는《연변돌이 이렇게 질이 좋을 줄은 미처 몰랐다. 두만강돌은 립자가 치밀하고 수마가 잘 되고 색상이 아주 좋다. 중국땅에서는 연변과 청해에서만이 이런 질 좋은 오석이 산출된다.》고 연변석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작년 7월, 김학송은 2010년 두만강문화축제를 맞아 도문시 도심에 《두만강수석박물관 홍보청》을 꾸리고 그들 3형제가 근 20년간 피땀으로 수집, 발굴한 200여 점의 두만강수석을 해내외 관광객들에게 첫 선 보였다.

6월 11일(2011년), 오후 2시 반, 리룡희주장일행이 연변수석 수천점이 심어져 있는 곡수6대 《농가뜨락》에 도착하였다.

《여기의 돌들은 모두 연변의 산하가 낳은 연변수석입니다》

《그야말로 희한합니다. 나는 이런 돌이 연변에 있다는 얘기를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김학송의 소개에 리룡희주장은 감개무량해 했다.

리주장 일행은 앞뜰과 뒤뜰에 웅크리고 있는 수석들을 일일히 살펴보면서 수석과 수석문화에 대한 드높은 관심을 표했다.

리주장은 오석 한점을 들어보며 어디에서 나온것인가고 물었다.

《이건 두만강돌입니다.》

《두만강에서 이런 돌이 나는군요!》

《장백산의 돌도 있습니까?》

《몇점 밖에 없습니다. 장백산은 아직 젊은 산이라 석질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이런 수석들은 어떻게 형성됩니까? 》

《큰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덩이들이 수천만년 강의 모래나 물살에 의해 마모되여 예술적인 수석으로 태어납니다.》

농가의 수석을 둘러본 다음 리주장일행은 집안에 들어와 집 벽면을 꽉 채운 수석장의 수석을 흥미깊게 감상하였다.

《집안의 돌이 더 좋은 돌입니까?》

《꼭 그렇치는 않습니다. 비교적 좋은 돌은 도문수석박물관 홍보청에 있습니다.》

《지금 수석애호가들이 많은 편입니까?》

《현재 중국에 약 3천만명가량 되는데 한창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주장님과 이처럼 마음을 풀어놓고 석담을 나눈다는 것은 김학송시인으로서는 너무나도 뜻깊고 행복한 시간이였다. 계속하여 김학송씨는 주장님일행을 마을 뒤편의 공지로 안내하였다.

《국가수반들도 수석을 고차원의 선물로 주고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 연변도 앞으로 고급문화로 수석이 통할것으로 전망됩니다.》

리주장은 김학송시인과 수석이며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구김없이 나눴다.

과수원 기슭에 자리 잡은 돌들은 두만강, 가야하, 훈춘강 등 여러 산지에서 탐석한 정원석과 장치석으로 거개가 대석이였다.

그 중에서도 황소의 모습을 빼어 닮은 3톤짜리 대석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온몸이 굵은 힘줄로 툭 불거진 황소, 고개를 푹 숙이고 오르막을 톺아 오르는 아주 근사한 형상석이였다.

《이 황소는 연변과 연변정신을 상징합니다》

김학송씨의 소개에 주장님이 수긍하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셨다.

풀속 여기저기서 고개를 비죽이 내민 백여점의 대석들을 쭉 훑어 본 다음 저쪽켠의 백사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백사장은 색과 질이 좋고 수마가 뛰여난 두만강 화강암 들이 옹기 종기 모여 사는 동네였다.

리룡희주장은 포석정처럼 골이 길게 패인 화강암 앞에 멈춰서더니 이렇게 물었다..

《참 이렇게 골이 패이자면 오랜 세월이 흘렀겠는데,,,》

《그렇습니다. 순전히 물살과 모래에 씻겨 이렇게 패였습니다. 적어도 수백 만년이 걸렸을 겁니다.》

골이 패인 돌은 3천근짜리 자연석이다. 그 옆에는 대형거북이가 머리를 잔뜩 쳐들고 오만한 기세로 앉아 있었다. 《허참, 신통하게도 눈까지 제 자리에 박혔군요.》

주재정국 조룡호국장이 가까이 다가가 거북이의 눈을 손으로 슬슬 만져보기까지 한다. 그 호기심 어린 거동을 보며 리주장은 허허 웃으셨다. 돌도 웃고 풀도 웃고 햇님도 웃었다…

《두만강수석박물관 홍보전시청》은 두만강과 두만강 지류들인 가야하, 훈춘강 등에서 수집한 연변수석 2백여점이 전시된 문화공간이다.

전시관 첫 코너에 자리잡은 커다란 산수경석 앞에 멈춰선 리주장에게 김학송이 소개했다.

《<두만강의 혼>이라는 수석입니다, 이 산수 경석은 수석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수석으로 연변수석의 자존심입니다.》

리룡희주장은 애정어린 눈길로 매 하나의 돌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이모 저모로 물었다.

《이 돌은 어떤 성질의 돌입니까?》

《변질암, 화성암들이 많습니다. 규소함량이 높은 강돌이여서 물발을 잘 받고 석질이 아주 좋습니다.》

김학송씨가 매처럼 생긴 형상석을 손에 들고 보였더니 리주장이 매의 부리를 손으로 만져보며 너무나 예뻐하였다.

초가석을 가르키며 김학송이 소개했다.

《이런 돌이 좋습니다. 이렇게 2중 석질이 교합된 돌들이 좋습니다. 자연미가 풍깁니다. 정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법 제자리에 알맹이 돌까지 박힌 음석을 보던 리주장이 돌알이 진짜 자연적으로 박힌것인가고 물으며 자연석에 절대로 인공이 가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리주장은 금후 수석활동에서 시야를 더 넓혀 한국의 전문가들만이 아닌 중국의 전문가들도 모셔와 그들의 평가와 자문을 받는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밝혔다.

《수석은 인류의 공동재부입니다. 뜰에 놔두면 그냥 돌이지만 북경의 고궁 같은 명소에 자리하면 보물이 됩니다.》 《여기에 있는 향토석들은 연변의 보물이며 자연문화재입니다. 앞으로 조건을 만들어 만인이 그 예술을 공유하게 해야 합니다. 새로 짓는 연변박물관에 수석전시관을 따로 앉히고 이 수석들을 전시하도록 적극 밀어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리주장은 즉석에서 정부비서장 조리에게 차후에 수석관련일들을 알아서 잘 처리하도록 당부하였다.

리룡희주장이 방명록에 친필로 쓴《기석은 그래도 고향석이 아름답다》

《기석(奇石)은 그래도 고향석이 아름답다》

《두만강수석박물관홍보청》을 떠나기 전 리주장은 특별히 방명록에 고향석을 찬미하는 글문을 남기셨다. 연변수석에 대한 주장님의 강한 자부심과 애정을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

《좋은 수석을 수집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귀한 돌이니 잘 건사하십시오. 보안에 주의를 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리주장은 수석개발유공자에 대한 치하와 보안사업에 대한 걱정을 남기며 귀로에 올랐다.

실로 짧은 만남, 긴 여운이였다.

연변주당위선전부 리흥국부장이 쓴 친필 《두만강기석박물관》

수석은 목숨 《壽》로 작명한 생명있는 돌로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동양사상에 뿌리를 둔 문화적차원의 백미다. 수석의 력사는 이미 3000년이나 된다고 한다. 하나의 자연석에는 삼라만상의 오묘한 형상들이 축소되여있다.

수석은 불변의 힘을 내부에 지니고 변치 않는 강인함으로 존재의 철학을 가르친다. 수석은 건강하고 고상하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문화다. 이제 연변수석이 자신만의 매력으로 보다 많은 세인들 앞에서 연변자랑을 떨치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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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의 첫 두만강수석박물관
도문시 두만강수석관 정식 오픈

편집/기자: [ 김성 ] [ 길림신문 ]  [ 2011-08-15 ] 

8월 15일 오전 도문시 일광산공원기슭에 자리잡은 두만강수석박물관이 정식으로 오픈하였다.

도문시 두만강수석박물관은 연변의 첫 두만강수석박물관으로서 관내에는 도문시 애석인들이18년간이 꾸준한 노력으로 수집한 100여종의 진귀한 수석 200점과 조선, 한국, 인도네시아 등 나라에서 온 진귀한 수석들로 수장성, 감상성, 지식성, 취미성이 일체화된 고품격 수석관이라고 도문시부시장 박봉이 오픈식에서 소개했다.

박봉의 뒤를 이어 두만강수석관 김학송관장이 격동된 어조로 감명이 깊은 발언을 하였다.

김학송관장은 두만강수석은 중국수석계의 한떨기 《처녀 꽃》이라고 하면서 도문시 두만강수석관을 도문을 세계에 홍보하는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꾸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표시했다.

김학송은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최초로 《재미나는수석(壽石)》이란 수석전문저서를 펴낸 시인으로서 체계적으로 수석리론을 익힌 연변수석분야의 제 1 인자로 불린다.

오픈식에서 도문시당위 김기덕 등 도문시 당정지도자들이 개관테프를 끊자 주 내외에서 온 많은 애석인과 문화관광인들이 두만강수석관을 돌아보며 풍성하고 향기로운 《수석만찬》을 한껏 만끽하였다.

/김성걸 오기활기자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길림성) 도문시에 있는
두만강수석박물관 전시석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박물관 앞마당에 있는 간판석

오른쪽 두 분 - 김학성 관장, 김학길 부관장

 

거북(두만강)

광개토대왕비(두만강)

괴석(두만강)

담(두만강)

담(두만강)

대산경관(두만강)

문양(두만강)

문양(두만강)

문양(두만강)

문양-중화신룡(두만강)

보살암(두만강)

부귀산(두만강)

불(두만강)

'산호도'라고 표기했는데 나는 아기코끼리 같다고 했다(두만강)

선녀탕(두만강)

신선도(두만강)

신선봉(두만강)

우산미호-뛰어난 산에 아름다운 호수(왕청)

유납사(두만강)

유유평원(두만강)

 



두만강국제기석전시회 개막식에서 연변수석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김부식박사.

전시작품을 둘러보는 수석애호자들.

8월 20일(2014년) 오전, 《2014 연변의 여름-중국두만강문화관광축제》의 제 1 막으로 꾸며진 두만강국제기석전시회가 도문시두만강수석박물관에서 막을 올렸다.

수석문화는 물과 돌의 자연적인 조화로 오랜 풍파를 겪으며 이루어진 자연석으로 대자연의 경치가 축소되여있는 기묘함과 추상미를 감상하는 문화이다. 수석은 전 인류의 공동언어이며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가장 빼여난 선물이라고 한다.

이날 도문시 두만강수석박물관에서는 세계적인 희귀종인 두만강오석을 중심으로 청석, 력석 등 다양한 품종의 연변수석 300여 점과 한국, 조선, 인도네시아 등 해내외의 우수한 수석작품을 전시하였다.

전시회 축하의식에서 한국문화진흥원 원장이며 한중문화협회 연길지회 회장, 문화인류학 박사 김부식선생은 《나는 40여년간 한국과 중국에서 수석문화를 탐구해왔다. 연변은 제일 좋은 돌의 산지로서 연변은 두만강수석을 잘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며 도문시 두만강수석박물관을 《대자연의 신비가 아름다운 꿈이 되여 머무는 곳이다》라 흥분조로 말하였다.

/ 오기활 기자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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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수석 지킴은 민족혼 지킴입니다》

편집/기자: [ 홍옥 ]  [ 길림신문 ] [ 2014-08-31 ]

-한국문화진흥원 김부식원장과의 만남

《이 수석은 내가 두만강변에서 만난것입니다》

지난 8월 20일 2014 중국 두만강문화관광축제의 첫막으로 올린 두만강국제수석전시회에서 한국문화진흥원 김부식(58세)원장을 만났다.

두만강국제수석전시회 축하식에서 불편한 걸음으로 앞에 나서 두손으로 형용하며《나는 40여년간 수석문화에 빠져있다》, 《연변은 두만강수석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하는 그의 말에 그 의무가 무엇이며 왜 지켜야 하는가를 알려고 김부식원장을 찾았다.

김원장은 사고로 지체장애자로 되였고 일찍 1992년에 연변에 진출하여 연변장애자련합회와 손잡고 자선사업으로 장애인기술학교를 운영하고있다. 최근 10년간 1000여명의 장애자들을 대상해 기술교육을 시켰다.

김원장이 장애인사업에 지불한 사재만도 인민페로 근 400만원 되며 첫 종자돈은 한국의 자택을 팔아 마련한것이다.

문화인류학박사인 김부식은 한국문화진흥원 원장외에 한중문화협회 연길지회 회장, 재중동포지원사업단 단장, 한국국제장애인복지회 회장 등 직을 떠메고있고 수석문화에도 혼이 빠져 중국에서만 20년을 돌과 동무하며 살고있다.

김원장에 따르면 수석은 가장 깨끗한 물, 물 흐름이 좋고 산수가 아름다워야 좋은 수석이 만들어 진다. 연변에는 두만강, 가야하, 훈춘강, 양수강 지역의 돌질이 좋다. 특히 두만강과 가야하에서 나오는 돌이 석질이 아주 좋다. 그러니까 연변서 좋은 돌이 나오는 지역이 극히 좁다.

연변의 돌이 한국에 나가면 다시 돌아 올수 없으며 그렇다고 연변서 다시 만들수도 없다. 그래서 그는 연변에서 연변의 돌을 지키는것이 극히 중요하다고 늘 말한다.

더우기 연변은 우리 민족의 혼이 흐르는 곳이다. 그래서 그는 두만강돌을 지키는것이 바로 민족의 혼을 지키는것이라 말한다.

《수석은 상업성이 필요하지만 그보다도 문화적존재 가치로 부상되여야 한다.》 김부식원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연변수석은 개발이 안된다. 개발지역이 넓고 많으면 상업성이 따르기 마련인데 연변은 좋은 돌이 나오는 지역이 적으니 소장의 가치에 중시를 돌려 세세대대로 전해야 한다.》고 했다.

도문의 두만강수석관은 바로 두만강변에 자리를 했으니 두만강수석관이 의의가 깊은, 격에 맞는 《대자연의 신비가 아름다운 꿈이 되여 머무는 곳》이라 김부식은 말한다.

김부식원장은 두 자녀를 중국에서 학교를 졸업시키고 한국에 보내고 지금 부부는 《연변집》을 지키는 《신조선족》이라 한다. 중국이 어떤가는 물음에 《편안하고 급하지 않아서 살기 좋다》고 한다.

/오기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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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수석리론가인 김학송선생과의 대담

 

기자는 일전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최초로 《재미나는 수석(寿石)》이란 수석전문저서를 펴낸 시인이며 수석리론가인 김학송씨를 만났다.

두만강수석을 널리 알리고싶었고 훌륭한 취미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싶었다.

기자: 근자에 수석에 대한전문저서를 출간한걸로 알고있는데요. 그 경위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시지요.

대답: 알고있다싶이 연변은 유명한 수석산지입니다.

두만강에서 탐석되는 오석이나 가야하에서 산출되는 청석계렬의 수석은 중국수석계에는 아직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고있지만 현대수석의 종주국이라고 할수 있는 한국의 애석인들속에서는 인기가 대단히 높습니다. 그처럼 우수한  두만강수석을 널리 알리고싶어 14년간의 애석생활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두만강수석을 소개하는 《재미나는 수석》이란 취미생활의 지침서를 펴내게 되였습니다. 훌륭한 취미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싶었지요.

기자: 김시인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깊이있게 수석을 공부한 조선족사회의 유일한 수석리론가로 알고있는데요. 어떻게 수석에 입문하게 되였는지요?

대답:  1993년,  한국에서 《수석문화》라는 월간지를 보게 된것이 수석과의 첫 인연이였습니다. 그후 한국수석총련합회의 정형태부회장이 각 도 수석회의 회장들을 거느리고 도문에 있는 저의 동생네 집에 한달가량 머물며 탐석활동을 벌인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최고라고 할수 있는 말짱 수석계의 고수들이 모였지요. 그때 그분들을 안내하며 본격적으로 배운게 나에게는 큰 행운이였습니다. 장봉택 등 전문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분들의 수제자가 되여 부지런히 갈고 닦는 치렬한 수석사랑을 불태우다 보니 조금은 어섯눈을 뜬것 같습니다.

복제나 재생산이 불가능한 귀중한 자원인줄 미처 몰랐다

기자: 조선족사회의 수석의 현황은?

대답: 사업차로 연변에 왔던 어느 한국분이 한 시골집 마당에서 엄청 잘 생긴 대석 한점을 보고 홀딱 반하여 당장에서 그걸 매입하여 한국에 내갔는데 인기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장안에 큰 화제가 되도록 소문이 퍼져 급기야는 한국석상들의 연변붐을 일으킵니다. 그때가 90년대 초, 그러니까 연변수석은 한국석상들의 영향을 받아 90년대 초부터 시작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기자: 그럼 좋은 돌들이 많이 한국에 빠져 나가겠네요?

대답: 그럼요. 우리가 수석의 진가에 미처 눈 뜨기도 전에 대량의 우수한 수석과 정원석들이 한국으로 흘러나갔습니다. 적어도 수백톤이 나간 걸로 알고있습니다. 그것이 복제나 재생산이 불가능한 귀중한 자원인줄 미처 몰랐지요.

기자: 참 아쉽네요.  지금부터라도 잘 보존하고 아껴야겠군요.

대답: 그렇습니다. 수석은천공(天工)이 수억년의 노력으로 빚어낸 천연예술품입니다. 작은 자연석 속에 우주의 삼라만상과 그 신비경이 각인돼 있습니다. 수석은 무언의 시이며 응고된 세월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수석을 소장하는것은 자연골동을 소장하는것이며 더우기는 예술을 소장하고 건강을 소장하고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을 소장한다는 내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볼수 있습니다.

천인합일의 동양사상에 근원을 둔 수석은 동양문화의 꽃이다

기자: 얼마전에 열린 제1차 두만강 수석전시회 때 연변수석의 인기가 높았다고 하던데요?

대답: 맞아요. 사천성에서 찾아온 한 애석인은 《연변돌이 이렇게 질이 좋을 줄은 미처 몰랐다. 두만강돌은 립자가 치밀하고 수마가 잘 되고 색상이 너무 좋다.  중국을 통털어도 연변과 청해성에서만 이런 질 좋은 오석이 산출될뿐이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어요. 수석에서 중요한건 석질, 형태, 색상인데 연변의 오석과 청석은 이 3박자에 딱 들어맞기에 수석으로서는 최상의 조건을 다 갖춘 흔치 않은 돌이라고 할수 있지요. 연변돌의 주요한 우점은 적당한 경도에 고태미와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데 있습니다.

기자: 수석취미는 늘쌍 그뒤에 《문화》라는 타이틀이붙던데요. 이렇게 특별히 강조하는 리유는?

대답: 수석은  천인합일의 동양사상에 뿌리를 둔 문화적 함금량이 비교적 높은 취미생활의 백미입니다.  시, 미술, 미학,  지질학,  광물학, 철학 등 여러 과학이 종합적으로 침투되여 상징성이 워낙 뛰여난 형상체이므로 동양문화의 꽃이라고도 하지요. 선택의 미학, 마지막 취미라 하는것은 과장된 표현만이 아닙니다.

기자: 수석의 력사가 3000년이나 된다고 하는데 수석의 원류와 본질에 대해  좀 얘기해 주십시오.

대답: 수석은 목숨 《수》자를 쓰니깐 생명있는 돌이라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의 자연석속에는 삼라만상의 오묘한 형상들이 축소되여있습니다. 질이 좋고 특정한 모양을 갖고있으며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석은 수석이 될수 있습니다.

수석은 불변의 힘을 내부에 지니고 변치 않는 강인함으로 존재의 철학을 가르칩니다. 수석에 깊이 심취하다 보면 점차 그속에 빠져들게 되는데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면 돌과의 령적인 대화도 가능합니다. 이를 가리켜 산수풍물시세계에 노닌다고 합니다. 심신이 자유와 평화를 찾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수석은 건강하고 고상하며 즐거운 취미이다

기자: 수석의 구체적 분류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대답: 수석은 산지에 따라 강돌, 토중석, 해석 등으로 분류하며 크기에 따라서는 소품석, 표준석, 대석 등으로 분류합니다. 용도에 따라서는 수석, 장치석,  정원석 등으로 분류하기도 하지요. 돌은 많지만 수석의 구체조건을 두루 갖춘 명석은 극히 드물게 봅니다.

기자: 어떤 돌이라야 명석으로 칩니까?

대답: 수석의 3대요소인 질, 형, 색이 빼여나고 자연미와 고태미를 갖춘 돌을 명석으로 칩니다.

기자: 연변의 주요한 수석산지는요?

대답:  두만강,  가야하, 부르하통하, 륙도하, 구수하 등 하천과 왕청, 화룡,  훈춘, 천보산, 보원 등지에서 오석, 청석계렬의 다양한 수석감이 나옵니다.  모오스경도 5도좌우인 연변돌은 수석으로는 가장 적합한 경도와 색감을 갖춘 외에 물발을 잘 받아 한국의 베트랑급 수석인들이 특히 선호합니다.

기자: 수석취미의 효용성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대답: 수석을 배우면 정신상의 기탁이 있게 되고 심적인 편안함과 즐거움을 감수하게 된다는 점이 수석의 가장 중요한 매력입니다. 그 밖에도 건강도모에 그만이고 이심전심의 친구를 사귈수 있습니다. 인간수양에 도움이 됩니다. 자기 한사람이라도 즐길수 있습니다.  많은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이런 수석이야말로 건강하고 고상하며 즐거운 취미가 아닐수 없습니다.

{필자 주: 기자 미상, 살춘각에서 퍼옴}.

제1회 두만강수석전람회 도문서

편집/기자: [ 김성걸 김태국 ]  [ 길림신문 ] [ 2012-08-02 ] 

8월 2일 오전, 도문시정부에서 주관하고 도문시외사관광국, 도문시두만강문화관광자원개발유한회사, 두만강수석박물관에서 주최한 제1회 두만강수석전람회가 도문시 일광산자락에 위치한 두만강수석박물관에서 개최되였다.

전람회에는 원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 리흥국, 도문시당위 상무부서기 리충문 등 지도자들과 해당 부문 책임자 그리고 연변수석협회, 연변수석문화협회, 도문시두만강문화발전촉진회, 도문시수집가협회, 훈춘시천연수석협회의 책임자들과 사회 각계 인사 150여명이 참석하였다.

전람회에서는 두만강수석박물관에서 수장한 수석과 광서, 사천, 조선, 한국, 인도네시아 등 국내외 수석예술품 220여점을 전시, 도문시 및 두만강류역의 찬란한 수석문화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특히 평양수석이 처음으로 전시되여 참관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연변주의 첫 수석박물관인 두만강수석박물관의 김학송관장은 《연변의 여름》 2012중국두만강문화관광축제기간에 제1회 두만강수석전람회를 개최한것은 두만강수석문화를 발양하고 도문시관광업의 문화내포와 예술수준을 한층 제고시키며 문화관광산업의 쾌속적인 발전을 추진하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실습생: 조미령 오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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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한사장

                         연변대학문학박사 신철호교수

 

한사장(韓社長)이란 그가 여러 해 전에 연변인민방송국 소속의 <생활안내>신문을 책임지고 꾸린 일이 있어다들 나이구분을 떠나서 듣기 좋게 또는 부르기 좋게 쓰는 호칭이다.  <수호전>에서 요용이 학구로 있었다고 다들 오학구라 부른 것이나 <삼국연의>에서 류비가 헌제의 삼촌벌이 되니 다들 류황숙이라 부른 것과 일맥상통하는 호칭이다.

     한사장의 명함은 한태익(韓太益), 시인이고 수필가이다.

     지금은 50고개에 오른지도 이슥하니 행정직을 죄다 털어버리고  평기자로 근무하지만 위인이 원체 선량하기로 동곽선생(東郭先生)의 선생이라사회적으로는 그냥 변함없이 인정을 받아서 한때 백두산문인산악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고 지금은 두만강수석회 총무장을 맡고 불철주야하고 있으니 차후에는 아마도 호칭을 한회장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1. 첫만남

     필자가 한사장과 처음 상면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이 넘는 1986 9월이다그 무렵에 필자는 대학교 졸업학년이라 연변인민방송국에 자원하여가서 실습기자로 있었는데매양 당치 않게 이도 아니 나서 콩밥을 씹는 격으로 어떻게 하나 단독취재를 하고 훌륭한 기사를  써서 일약 이름을 날릴 궁리만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때 화룡시 남쪽 교외에 돌배즙가공공장이 새로 서서 개업식을 하게 되었는데 방송국에서는 화룡으로 보낼 기자를 불시에 배치할 수 없어 꿩대신 닭으로 필자를 보내게 되었다실상 실습기자만을 달랑 보낸다는 것이 어찌 보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필자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행운이였다집이 화룡시내에 있으니 취재도 할겸 집에도 가볼겸 내게는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일거량득이였다

     취재는 아침에 일찍 찾아갔던 관계로 쉽게 이루어졌다점심때가 되어 공장측에서 행사참가자들을 륭숭하게 대접하는데를 따라가서 현정부 간부들과 한 술상에 앉았댔는데그때 곁에 앉았던 한사장과 초면인사를 나누었다한사장은 당시 화룡현방송국 기자였는데 여러 상에 앉은 하객들 속에 류행도 아니게 캡을 쓴 사람은 그와 나 딱 두사람이였다.

     한사장을 처음 보는 순간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일것 같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굳이 초상묘사를 한다면 뭐라고 할까어려서 본 영화 <우리마을 젊은이들>의 조무림이나 <폭풍취우>의 조옥림 또는 조선영화 <남강마을 녀성들>의 덕수-털보전사같은 모습들의 복합형이라고 할까? 여하튼 수더분하기를 이르데 없는 모습이였다.

     한사장은 말수가 적었다남자들만 앉은 술상이라 술이 둬순배 도니 고담준론들이 터져나오는데 한사장은 고개를 갸울이고 듣기만 하였다.  배갈 몇잔에 기분이 붕 뜬 필자도 입건사를 못하고 가리산지라산을 헤맸는데 한참 년상인 한사장에게 본새가 나쁘게 감히 하오체를 들먹이며 팔을 마구 내흔들었건만  한사장은 “, ”하고 오히려 존칭을 쓰며 들어주기만 하였다지금 생각하여도 참으로 막돼먹은 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에 깊숙하게 빠진다.

     필자가 6년간 잡았던 교편을 동댕이치고 1993 7월에 평생의 직업으로 갈망했던 연변TV방송국 기자로 전근하고 보니 한사장은 진작 화룡에서 전근하여  연변라디오TV신문사 기자로 와있었고 같은 분야이다 보니 가끔가끔 함께 취재도 나가게 되었다. 1995년도에 연변에서 “1차 두만강하류국제무역투자상담회를 조직하였는데 둘 다 열심히 뛰면서 취재하고 같은 특집프로를 만들어 각각 상을 탄 일이 있었다.

   

     2. 여드레에 팔십리  

     중국 당대문학사에서 마봉(馬烽)은 조수리와 비견하는 유명한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단편소설 <나의 첫 상급>에는 성이 전()씨인 농업건설국 부국장이 나오는데평소에는 남달리 느리다가도 관건적일 때에는 무비의 침착성과 결단력을 발휘하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다이 전국장이 하루는 농촌에 내려가 사무를 보고 그곳에서 홀로 자는데 밤중에 큰 바람이 휘몰아치였다와지끈 하는 무서운 소리가 천정에서 울려 눈을 떴지만 그는 일어날 대신 이불밑에 꼼짝도 아니하고 누운채로 태연하게 손전지를 켜들고 천정을 비춰보았다.  대들보가 거의 끊어져 곧바로 무너져 내릴 지경이였다

     “래일까지는 별 일이 없어.”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돌아누워 그냥 잠들었다.

     필자는 한사장을 만날 적마다 이 전국장을 떠올리군 한다한사장은 행동이나 말이나 다들 느린 “천천히파이다.

     1995년도 12월에 백두산빙설제 취재차로 이도백화에 갔댔는데저녁식사후에 기자들은밖이 엄청 추운데다가 짐을 푼 려관이 동떨어진 곳이다보니 끼리끼리 갈데가 없어 방에 모여서 트럼프판을 벌렸다. TV기자들은 평소 자주 어울려 놀다보니 눈치만으로도 편을 척척 알아맞히는데 그 속에 한사장이 홍일점으로 끼여들어 다른 사람의 눈치에 전혀 맞지 않는 전술을 혼자 펼치니 같이 판을 벌린 셋은 속이 곪아터질 지경이였다.

     트럼프 한장을 내리는 것도 머리를 몇번씩 긁적이고 내리는가하면 판국이 다 글렀는데도 손을 드는 기미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아서 성질이 급한 다른 친구들은 하품을 쩍쩍 할 지경이였다그러다 보니 가끔 원인도 모르게 셋의 집중폭격을 맞기도 하였고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남들은 수지가 조금만 탈려도 거무락푸르락인데 그는 안색이 변하는 일이 없었다끝날 때면 그저 머리를 둬번 긁적거릴뿐 항상 시작할 때의 태연한 모습이였다.

     “잘못 앉아서 오늘 지출이 꽤 컸겠습니다?”

     “오늘 잃으면 래일에 얻고…….”

     대답은 묻는 말보다 짧았으나 마디마디의 휴지는 꽤 길었다.

     2002도에 필자는 대학교 교원으로 자리를 옮겼다동분서주를 직업으로 하던 것이 조용히 앉아만 있자니 사지에 좀이 쑤시는 것을 당초 참을 수가 없어서 2003년 초봄에 백두산문인산악회에 참가하였다동갑이지만 두학년 선배라고 언제나 형님을 앞세우는 우상렬교수에게 산악회 성원들을 일일이 물었다.

     “니가 거지반 아는 사람일거야우선 김관웅교수와 김호웅교수그리고 가무단의 김학송시인방송국의 채선애와 한태익기자교통은행의 류광철문련의 신영애가수로인아파트의 이정옥원장…….”

     그가 념불하듯 줄줄 섬기는 명단 속에 한사장이 있었는데 그때  방송국 소속의 “생활안내신문사 사장을 맡고있었다아니게 아니라 20여명되는 성원중에 절반은 아는 사람들이거나 알만한 사람들이여서 첫날부터 제법 정이 들어 서슴없이 육담판에 끼여들기도 하였다.

      한사장은 필자보다 키도 훨씬 컸고 체력도 좋았다필자는 산골에 태를 묻은 경력을 믿고 항상 일행의 앞장에 서서 길안내행세를 했지만  한사장은 불쑥불쑥 앞지르는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또 한참 뒤에 처지는 일도 없었다항상 가운데쯤에 서서 김관웅교수의 수필창작에 관련한 무료강좌를 말없이 귀담아 듣군 하였다.  김관웅교수는 학부생들의 교수평의에서 최고점수를 따는 분이라 아무 때나 시작되는 통속적인 무료강좌에 푹푹 빠지는 사람들이 많았다그래서 걸음들이 늦기로 여드레에 팔십리다보니  밖에서는 우리를 “산보팀라고 부르고 있다평지길을 걸으나 비탈길을 걸으나 한사장은 속도가 균일하여 “산보팀의 대표자이고 팔자걸음의 일인자이다아무튼 뒤에서 호랑이가 쫓아온다고 해도

     “그놈이 십분전에는 안올거야.”

     하며 그냥 바지호주머니에 두손을 지른 채로 유유히 걸어갈 사람이다

     한사장은 2006년도 년말총화모임에서 만장일치의 박수가결로 2007년도 백두산문인산악회 회장으로 선거되었다말씀을 열흘에 한마디나 하는 분이라 취임사는 아주 짧았다.

     “일년간 열심히 하겠습니다대신 류광철전임회장께서 부회장이 되어 도와주십시오.”

     우스개을 전담하는 김익교수가 그 취임사에 꽃을 큼직하게 달아줬다.

     “명년에도 막걸리를 10근씩 그냥 메고 오면 련임은 문제없습니다.” 


      3. 갓마흔에 첫 버선

     2004년도 여름에 백두산문인산악회에서는 력사가 유구한 성자산성에서 야유회 겸 문학작품집 발간식을 가졌다작품집 제목은 산악회라는 특징을 살려서 <저 높은 산에 푸른 꿈을 안고>라고 달았다.

      이 출간식에후일 발족한 두만강수석회 제2임 회장 리광인선생이 참가하였는데 그는 그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대외사무를 관장하고있었다김학송시인(당시 산악회 회장이였음)과 리광인선생은 원체 구면인데다가 다들 연변의 수석문화을 개척한 원로급들인지라 만나자마자 의기상투하여 오가는 말씀들이 문학과는 숫제 거리가 먼 수석이야기들이였다.

     “장마철이 오래지 않는데  큰비가 몇축 내렸으면 좋겠소.”

     86년도 경신란리때처럼 말이가?”

     “장마야 크게 지면 질수록 좋지만 자금자금하게 여러번 터지는것도 좋소.”

     “두만강과 가야하의 물때가 일년에 서너축씩 벗겨져야 하는데 말이요.”

     경신란리란, 1986년도 여름에 류례없었던 장마가 져서 훈춘 경신벌이 온통 물바다로 변해버린 재해를 민간에서 이름하여 부르는 말이다두 어른은 장마니 란리니 하며 농민들이 들었다가는 대번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 말씀들을 서슴없이 “람용하고있었는데 이들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사람은 일행중에서 한사장과 필자였다한사장은 잠자코 듣기만 하였고  필자는 입건사가 허술한것이 문제이다보니 아 대화속에 무작정 빠져들었다그래서 이광인선생과 초면인사가 이뤄졌는데 신정이 여구해져 지금까지 끈끈한 수석인연을 엮어가고 있다남녀사이라면 첫눈에 정이 들어 어쩌고저쩌고 하겠는데 말이다.

     출간식이 끝난 한주일 후약속대로 우리 네 사람과 연변병원의 김봉세선생방송국의 전임 부주필 김대현선생 등이 도문시 신기동에 가서 탐석을 하며 하루해를 보냈다함께 즐기는 즐거움이라 조직의 필요성도 제기되어서 이듬해 여름에 현임 주당위 선전부 리흥국부장(당시에는 연변라디오TV방송총국 국장서예가)을 초대회장으로 하는 연변두만강수석회를 성립하였고 2006 6월에 연변박물관에서 제1차두만강수석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람일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였다등산에서는 여드레에 팔십리를 가는 한사장이 돌밭에 들어서서는 아주 신행태보였다직업적 성향이라고 할까같은 방송국출신인 김대현고문님(두만강수석회 초대고문골동품수집가장서가)은 한사장보다 한수 앞선 신행태보였다.   

     탐석(探石)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끈기와 인내력이 기본이여서 조밭 초벌기음을 매는 자세로 열심히 주위를 차근차근 살피고 조심조심 뒤져야 하는데 한사장은 전혀 그러지를 않고 두손을 호주머니에 지른채 동에 가서 번쩍 서에 가서 번쩍하며 돌밭을 휩쓸고 다녔다그러다보니 이미 탐석경력만도 10년을 넘나드는 김봉세김학송,리광인 등 선생들은 이미 발에 익고 눈에 익어서 매번 탐석때마다 수확이 있었건만 한사장만은 도로무공이라 올 때의 배낭보다 돌아갈 때의 배낭이 항상 더 가벼웠다.

     일이란 생각대로 안되면 투정이 많기마련인데 한사장은 투정도 없었다훌쭉한 배낭을 메고 귀가할 때면 락망도 어지간히 크련만 내색을 근본 보이지 않았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1년반 되는 사이에 열 번도 더되는 탐석활동이 있었건만 한사장은 개근에서 보여주는 열성과 정반대로 성과는 거의 없었다.  완전히 공수거(空手去)하고 공수래(空手來)했다.

     그러나  아무리 신행태보로 돌밭은 휘젓고 다니다 해도 그냥 헛물만 켜라는 법은 없다일생일석(一生一石)이란 일생에 명석 하나만 갖고 있어도 만족이라는 말인데 한사장에게 일생일석 감을 선사하려고 하느님이 의식적으로 한사장을 자꾸 헛걸음시켰는지 누가 알랴?   

     드디어 기회가 왔다갓 마흔에 첫 버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2006 5 1일에 또 한번의 합동탐석이 도문시의 신기동에서 이루어졌는데 한사장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습성이 아침부터 오후까지 변함이 없이 표현되였다신기동 돌밭은 연변에서 가장 큰 탐석지의 하나이지만 교통이 편리하여 수석인들이 날을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통에 자원이 거의 고갈된 상태이다.  그래서 다들 이날 소품석들을 얻은 것에 그쳤고 한사장은 역시 종전대로 빈손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 거의 왔을 때올적 갈적 그냥 생각 없이 지나쳐버리던 돌무지(집을 짓자고 모여놓은 돌무지)에 이르러 한사장이 우리 모두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고함소리를 질렀다.

     “야메주다메주!” 

     모두 고개를 돌려보니 뒤처져 오던 한사장이 과연 메주처럼 생긴 돌을 안고 흥분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보통 화강암이지만 금 하나 없이 둥글둥글 륜곽이 자연스럽게 생긴데다가 밑둥치를 칼로 벤듯 잘려진 것이 흡사 알뜰한 새색시의 손에 잘 다듬어진 메주같았다김학송시인이 연신 감탄하면서 물을 뿜으니 노오란 색상이 돋아나는 것이 구미도 당겼다.

     “명석이야물형석으로는 제격이야그리고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지 않는가?”

     “밑둥치가 딱 비례에 맞게 잘려진것이 신기하오.”

     “오늘밤에는 사모님을 객실에 내보내고 이 메주석을 안고 자는게 좋겠습니다.”

     남들이 중구난방으로 칭찬을 하는데 한사장의 생각은 벌써 한달후의 일로 가 었다.

     “내게는 이것밖에 없는데 전시회에 내놓으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하지관상석으로는 일품인데.”

     김대현고문은 적극적으로 전시를 주장하였다.

     2006년도 년말에 리광인선생이 절강성 월수 외국어대학 초빙교수로 가게 되면서 두만강수석회는 인사변동을 하였다김대현선생은 종신고문으로 되고 김봉세선생이 제3임회장으로한태익선생이 총무장으로 되었다필자는 2007 3월에 늦깍이 공부를 하느라 한국행을 하다보니 지금껏 탐석을 못하고있다그러다보니 거의 2년이 되는 사이에 한사장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감감 모르고있지만기왕 메주석이 큰 행운을  얻는 길을 열어주었으니 필경 좋은 성과를 거뒀으리라 또 거두고있으리라 믿는다.
 

     4. 다만지 손이 성하니

     송인(宋寅,1516~1584)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고 해서(楷書)에 능한 서예가이다학식이 뛰여나고 성품이 고결하여 퇴계 리황(李滉)과 율곡 리이(李珥), 남명 조식(曺植), 우계 성혼(成渾등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리황에게 비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리황이 "비문은 제일 잘 쓰는 사람에게서 받아야 하는데 송인과 성수침(成守琛.즉 성혼의 부친)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그러나 성수침의 글씨는 힘은 있으나 허술한 곳이 있으므로 송인이 가장 좋을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송인이 쓴 시조 중에 <들은 말 즉시 잊고>가 있는데 가히 한사장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적어둔다.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듯이

                             내 인사 이러함에 남의 시비 모르노라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 잡기만 하노라

 

     한사장은 열흘에 한마디 할 정도로 말문이 무거운 사람이다시도 쓰고 가사도 쓰고 수필도 쓰지만 술을 반겨 흥분하는 일이 없다그러니 그의 입에서 누구는 어떻고 누구의 작품은 어떻고 하는 “평론을 듣는다는 것이 하늘에서 별을 따는 일이다확실히 들은 말을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듯 하는 사람이다. “다만지”  “손이 성하니” 글을 열심히 쓰고 “다리가 성하니” 등산과 탐석에 여가를 모두 바치는 사람이다.

     새해에도 메주석과 같은 행운이 깃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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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동네방네] - 독수리, "드론 사냥"한다?... 글쎄...?! 2018-02-26 0 4934
2007 동서양을 잇는 중계자 역할을 한 음악가 - 윤이상 2018-02-26 0 5735
2006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23년만에 고향 오다... 2018-02-26 0 5024
2005 [이런저런] - "평화 + 사랑" = 꽈당... 2018-02-26 0 3526
2004 [동네방네] - 찰떡아, 찰떡아, 나와 놀쟈... 2018-02-26 0 3218
2003 [이런저런] - "8년간 복무"하고 무지개다리를 건느다... 2018-02-26 0 5184
2002 [이런저런] - 개보다 못한 강도들과 개보다 더 이상인 "영웅견" 2018-02-26 0 5627
2001 [이런저런] - 꽁꽁 얼다... 사르르 녹다... 2018-02-26 0 3414
2000 [이런저런] - 10억, 9년, ... 2018-02-25 0 5593
1999 [그것이 알고싶다] - 지신(地神)밟기의 유래?... 2018-02-22 0 6084
1998 [별의별] - 남자와 녀자와 "1000분의 1초" 2018-02-22 0 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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