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살 윤동주(1917~1945)도 고향이 그리운 평범한 청년이었다. 북쪽 하늘로 날아가는 까마귀떼를 보면서 고향 북간도(중국 지린성 허룽현 명동촌)를 생각했다. 1936년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 중에 쓴 시 `황혼`에서 이 까마귀떼처럼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고 썼다.
두 그림은 28일부터 내년 1월 10일까지 서울 청담동 갤러리서림 `시가 있는 그림전`에 걸린다. 31회를 맞은 이 전시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윤동주 시를 그림과 조각으로 옮겼다. 박돈, 조광호, 김병종, 신철, 이명숙, 정일, 노태웅, 황주리, 임상진, 금동원, 황은화 안윤모, 정춘표 등 작가 13명이 참여했다. 28년이란 짧은 생애에도 긴 여운을 남긴 윤동주 시는 동양화와 서양화, 조각작품으로 형상화됐다.
인천 가톨릭대 미대 학장을 역임한 화가이자 스테인글라스 설치미술가인 조광호 신부는 일본 제국주의 희생양이 된 윤동주의 시 `십자가`(1941)를 화폭에 담았다. 부서져 내리는 잿더미 속에서도 살아남은 십자가의 흔적을 그린 작품이다.
윤동주는 1943년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에 연루돼 후쿠오카 형무소 수감 중에 생체실험으로 목숨을 잃었다. 조 신부는 시인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종교적 성찰과 순교의 높은 정신으로 승화시켰다.
실제로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순교자의 삶을 지향했다.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색면추상으로 유명한 이명숙은 윤동주 시 `창공`을 하늘색과 분홍색, 노란색, 연두색 등 한국적인 오방색으로 표현했다. `그 여름날 / 열정의 포플러는 / 오려는 창공의 푸른 젖가슴을 / 어루만지려 /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 끓는 태양 그늘 좁다란 지점에서`로 시작되는 시를 역동적인 추상 이미지로 풀어냈다.
황주리 작가는 특유의 상상력으로 윤동주 시 `자화상`과 `해바라기 얼굴`을 그려냈다. 시 `자화상`은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는 구절로 내적 혼돈을 보여준다. 황 작가는 머릿속에 계단을 올라가는 두 사람이 그려진 반추상화를 통해 이 시를 형상화했다. `누나의 얼굴은 / 해바라기 얼굴. / 해가 금방 뜨자 / 일터에 간다`로 시작하는 동시 `해바라기 얼굴`은 단란한 가족을 품은 꽃으로 그렸다.
화가 신철은 소녀와 꽃을 통해 시 `봄` 속의 화사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구상 작가 노태웅은 두터운 질감의 풍경화로 시 `여름바다`를 담았다. 조각가 정춘표는 `별 헤는 밤`을 순수한 흰색 별 모양 도자기로 형상화했다.
1987년 시작된 `시가 있는 그림전`은 그동안 작가 116명이 참여해 시 506편을 화폭에 옮겨왔다. 여느 시화전과 달리 글자가 들어가지 않는 게 특징이다. 출품된 작품들은 다음해(2018) `시가 있는 그림 달력`으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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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25일 돌연 평양 방북한 문익환 목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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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슨 한밤중 날벼락입니까 / 신문사 사회부장의 다급한 전화에 / 목간통에서 수건도 비누도 떨어뜨렸습니다 / 눈물 한 방울 나오지 못한 채 / 가슴이 꽉 막혀 / 어쩔줄 몰라라 했을 따름입니다" 고은 시인은 1994년 1월19일 한 일간지 1면에 이렇게 썼다.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라는 제목에 '늦봄 문익환 선생님을 조상하면서'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전일인 18일 세상을 떠난 문익환 목사를 애도하는 조시였다.
이 시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아직도 겨레는 하나 아닌 채 / 아직도 겨레는 / 겨레 만년의 땅 허리 잘린 채 / 하나일 수 없는 채 / 당신의 생애를 / 너무나 뜻밖에 끝장냈으나 / 그러나 그러나 당신께서는 / 영혼은 겨레의 창공에 두고 / 육신은 겨레의 땅에 둔 그대로 / 이로부터 당신이야말로 마감입니다" 이는 문 목사의 삶을 관통하는 통일에 대한 신념을 표현한 대목이었다. 그는 1989년 3월25일 통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믿음에 따라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하기도 했다. 당시 문 목사의 방북은 정치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문 목사는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3년 3월 가석방됐다. 석방 후 채 1년이 안 돼 심장마비로 1994년 1월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문 목사와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장례 소식을 함께 다뤘다. 정 전 총리는 문 목사 별세 하루 전인 1월17일 사망했다. 두 사람 다 용정의 광명중학교를 다닌 동문이었지만 너무 다른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은 것이다. 문 목사는 1976년 당시 박정희의 유신통치에 맞서 명동성당에서 김대중, 함석헌, 윤보선 등과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으며 이 사건으로 처음 구속됐다. 이후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정 전 총리는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너무나 달랐던 이 둘의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이 붙는다. 1930년대 중반 학교를 다니던 네 명의 친구들이 찍은 것이다. 세 명은 뒷줄에 나란히 서있고 앞 줄 가운데는 약간 비딱하게 한 명이 앉아있다. 세간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는 뒷줄 왼쪽부터 장준하 선생, 문 목사, 윤동주 시인이며 앉아 있는 이가 정 전 총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 사진은 소설가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을 집필할 때 문 목사가 인터뷰를 하며 제공한 것인데 뒷줄 가운데는 문 목사, 그 오른쪽이 윤동주 시인인 것은 맞다고 한다. 문 목사는 사진 속 나머지 두 친구가 누구인지도 밝혔다.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온 네 명이 찍은 것인데 그의 왼편은 이름을 잊었고 앞에 앉은 이는 장로신학대 교수를 지낸 이영헌이라고 했다. 장준하로 알려진 사진 속 인물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정일권으로 알려진 이는 이영헌 목사라는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유족도 사진 속의 인물이 선생이 아니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게다가 은진중학교 출신 전학생들이 찍은 사진이라는 문 목사의 설명과 달리 정 전 총리는 은진중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그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도 친구 장준하의 죽음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1975년 8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장준하의 죽음을 박정희 정권에 의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아직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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