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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저승사회 고찰 보고 --성원작품
2012년 07월 23일 10시 13분  조회:5012  추천:0  작성자: 백화상조
저승사회 고찰 보고
성원 저 (2012.
5~)

 
1, 바위봉 밑에서 저승문 찾았다.
이제 이틀만 있으면 추석이다. 추석날에 면례와 제사를 보아달라고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장의사들과 역사할 사람들까지 일일히 배치하여 놓았다. 하지만 한집에서만은 기어코 회장이 직접 와서 보아 달라며 통사정하니 어차피 밀어버리는 수가 없다. 그리하여 추석날 아버지 산소의 벌초때문에 이틀 앞당겨 팔가자 약암동을 찾았다.
그렇게도 번화하던 고향마을인데 지금은 모두들 성시로 외국으로 돈벌이 떠나가 버리여 이렇게 큰 마을이 거의 텅 비여 있다. 너무나 허전해지는 이 마음을 어디다 기탁할 곳이  없어 즉흥시 한수를 지어 읊었다;

고향 마을은 쓸쓸히 비였습니다,
골목마다엔 쑥대들이 무성합니다.
초가집들은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벽돌집들은 문마다에 널판자로 막았습니다.

눈앞에 삼삼하는 익숙한 그 얼굴들
저절로 불려지는 정다운 그 이름들
외국으로 갔답니다,
관내로 갔답니다,
성시로 갔답니다,
어디론가 갔답니다.
 
한고향에 모여 산것이 연분이였다면
오늘에 흩어진것은 운명이였으리라.
웃고 울면서 살았던 그 시절이
이대로 잊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워
당년에 첫사랑이 불러주던 그노래
입속으로 씁쓸히 되뇌여 봅니다.

어쩌면 쇄망이 복이 될수도 있습니다.
적은것을 버리고 큰것을 얻어야죠.
사람마다 자기가정 다시찾는 그때가서
우리 세상은 더욱 번창할 것입니다.

저절로 시노라고 지어 읊었더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되였다.
역전앞 량식창고 옛터에는 높은 굴뚝이 일어서고 강철공장이 들어앉아서 많이 이채를 돋군다. 그런데 역전을 중심으로 동서로 철로연선을 따라 너무나 긴 구간을 가시철망으로 교통통제를 해 버렸다. 그 까닭에 마을에서 철로를 건너 남산으로 나가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반시간 남짓이 애매한 길을 에돌아 더 걸어야만 하였다. 마치도 "자가용 없는 분들은 성묘하러 고향에 오지 마세요." 라고 하는듯 하였다.
나는 철로를 건넌후 비탈길을 따라 동글산 묘지를 바라고 올라가며 눈길이 가는대로 두루 바라보았다. 칠분회 옛터를 중심으로 남산언덕 너른 구간에 익어가는 가을의 옥수수밭외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사위는 마치도 버려진 세상인듯 너무나 조용하다.
아버지 산소에 도착하여 먼저 후토를 찾아 제지내며 山神靈한테 앞당겨 오게된 사연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낫을 꺼내여 조심스럽게 벌초를 시작하였다. 삼십여년 해마다 해온 일인지라 인젠 너무나 익숙하다. 몇해전부터 봉분에 잔디풀을 조금씩 심어놓았더니 인제는 봉분이 잔디풀에 곱게 덮이워 다른 잡풀은 별로 나지도 못한다.
벌초를 끝내고 갖고간 제물들을 공단에 차려놓고 나름대로 이름을 지어 술을 부어올리며 제사를 간단히 올렸다; 하느님전 天福을 빌어서 초헌으로 삼절이요, 염라왕전 地福을 빌어서 아헌으로 삼절이요, 신령님전 財福을 빌고 조상님전 家福을 빌고 考妣님전 安福을 빌어서 종헌으로 삼절이요하니 모두 아홉절을 올렸다.
제사를 끝내자 어쩐지 심정이 울적해 진다.  남은 제사술을 혼자서 찌워 마이며 음복하고 있노라니 저앞에 보이는 저 바위봉에 어쩐지 무지개가 서려 있는듯 하다. 불연듯 머리속에 저 바위봉에 오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리하여 부랴부랴 나머지 제물들을 종이에 싸서 공단옆에 묻어놓고 쓰레기를 깨끗이 처리하여 묻은후 약암동 바위봉을 바라고 오르기 시작하였다.
약암동 바위봉 밑에 가면 작으마한 동굴이 하나 있는데 이전 사람들은 그 동굴을 효녀동굴이라고 불렀다.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울때의 일이라고 하는데 한 효녀가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꿈의 제시를 받고 이 동굴에 들어가 육육삼십육일동안 열심히 효공을 들였다고 한다. 산신령이 그 효녀의 효성을 기특히 여겨 바위돌우에 풀이 돋아나게 하였으니 그 풀을 뜯어 달여서 어머니한테 대접하였더니 어머니의 병은 가신듯 낳아졌다고 한다. 藥岩洞이란 이름은 이렇게 온것이다. 지금도 바위위에는 그 풀들이 돋아 있는데 부녀병에 특히 효험이 있다고 한다.
나는 약암동 바위봉에 올라 제일 높은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제사술을 좀 마였더니 몸이 후끈후끈 달아 오른다. 나는 설렁설렁 불어오는 시원한 가을바람에 가슴을 헤치고 북쪽을 향해 멀리 바라보았다. 해란강이 구불구불 누벼 흐르는 60리 허래성벌판과 평강벌판이 한눈에 안겨온다. 허래성벌판 북쪽 변두리에는 북고성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먼 옛날 발해(기원698년~926년)왕때 한때는 首府로까지 되면서 흥성하였던 중경현덕부 옛터다. 1966년 전까지 팔가자는 서성향에 귀속되여 있어, 운동대회를 하거나, 그 무슨 명절축제가 있게되면 친구들과 떼를 지어 장난치며, 도보로 10여리 되는 길을 걸어 서성으로 갔었다. 그때 가장 인상 깊은것이 상남마을을 북쪽으로 금방 벗어나면, 길 량옆에 널려있는 스산한 돌무덤터였는데, 어른들 한테서 고려장터라고 익히 들어 왔었다. 그리고 그 유래도 대체로 우리의 고려장 전설과 비슷하였는데, 부모가 늙어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이곳에 돌각담을 쌓아놓고, 부모를 돌각담 안에 모시고, 먹을것을 얼마간 넣어 주는데, 그 먹을것이 떨어지면 부모는 곧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큰 돌로 돌각담을 봉해 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유관 고고자료에 의하면 이 돌무덤터는 발해왕때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능하게 이 돌무덤들은 발해국 백성들 중의 고구려 후예들의 무덤들일수 있다. 고려장 전설은 우리민족 전통례의에 어긋난다고 여겨져, 고국의 많은 학자들은 이것은 전설일 뿐이지, 실제 력사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당시는 해마다 전란으로 남정북전 해야하는 어려운 형편이였다고 감안할때, 고려장이 실제 력사사실이라고 해도 어느정도 리해할수 있을것 같다. 지금은 이 고려장터가 언녕 혼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직공 아빠트가 빼곡히 들어앉아 있다.
발해가 망해서부터 우리 조상들이 다시 북간도에 이민와서 개척을 시작하기까지는 거의 천년이 지났다. 이 기간에 중국 동북지역은 선후하여 료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여러조대가 바뀌였지만 이 고장만은 인적이 거의 끊긴 봉페지역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이 벌판에 화룡시에 소속된 네개의 鎭級 행정구역이 들어 앉아 있는데 원주민은 원래 대부분 조선족이 였으나 지금은 한족주민들이 더 많은 비례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굴리면서 시간을 보니 정각 열두시다.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 나는것 같아서 납작한 돌을 베개삼아 머리밑에 괴고 바위위에 잠시 누웠다. 갑자기 바위아래에서는 옅은 흰 안개가 뭉게뭉게 피여 오르면서 아름다운 무지개가 서린다. 흰 안개는 내 앞에서 이리저리 엇갈리며 춤을 추다가 사라지자 바위아래에는 크고도 깊은 웅덩이가 서서히 나타났다. 학교운동장만큼의 크기에 어림증 날 지경으로 아찔하게 깊은 웅덩이다. 전에도 여기에 수없이 많이 왔었지만 이런 웅덩이를 본적이 없다. 신기하다. 내 발밑에 그 웅덩이 바닥까지 내려갈수 있는 붉은 천필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아마도 여기로 아래를 내려가라는 뜻이이리라. 나는 호기심에 그 붉은 천필을 타고 별로 어렵지 않게 바닥으로 내려갈수 있었다.
 
2, 천년 기다려 한번기회.
웅덩이 밑바닥에 내려가니 사위는 눈부시게 새하얀 세계인데 숨막힐 지경으로 괴괴하다. 바라보니 웅덩이 동쪽벽에 篆体로 커다랗게 《陰間》이라는 두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어느결에 저승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언녕부터 저승에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오늘 드디여 숙원이 이뤄지는 건가?
바깥에서 나는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傳承人이므로 소위의 저승세계와 사무적으로 련관이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40여년전부터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가 버리여 지면서 지금은 거의 근절이 되였다. 그리하여 자식들을 위하여 평생 고생하시다가 노문하여 타계하시는 부모님들에게 우리식으로 장례도 변변히 치려 드리지 못하고 있다. 살아서는 그런대로 우리민족이요, 우리문화요 하면서 대단히 고귀한 신분이나 가진것처럼 자부하다가 일단 사망하면 자기민족 빈소조차 없어서 어쩔수 없이 어설픈대로 남의 빈소에 가서 우리례식을 깎아 맞추면서 장례를 대강 치루어 마지막 길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우리민족이 당금 망하는것은 아니지만 형편이 이쯤 되였으니 우리 민족 기강이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는 표징이 아닐수 없다.
우리민족 가운데는 지성인들이 많고도 많지만 어쩐일인지 오늘까지 그 누구도 우리의 장례문화만은 관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건강한 민족이라면 생일과 혼례등 맞아들이는 문화가 건강해야 할뿐만 아니라 장례와 제사등 보내는 문화도 건강해야 하는 것이다. 맞아들이는 문화는 기쁨의 문화이기 때문에 그것만 잔뜩 중시하고 보내는 문화는 슬픔의 문화라고 해서 누구나 싫어한다면 그것은 아직 성숙되지 못하였거나  혹은 퇴화되였다는 표징이다. 하여튼 중국의 민족정책은 동화정책이 아니라 단결, 평등, 공동발전의 정책이므로 중국에서 줄곧 선진 소수민족이라고 자부하여 온 우리민족에게 자기의 장례문화가 없는것이 큰 허물이 아닐수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민족 장례문화를 살려내고 부흥시킬 사명이 나에게 차려지게 되였다. 먹을 나이 다 먹고 이제와서 이런 사명이 차려지니 좀 당황하기는 하였지만 숙명으로 받아드릴수밖에 없다. 많은 품을 들여서 낡은 자료를 뒤지며 버려진 우리민족 전통장례문화를 다시 주어내여 알맹이를 골라 정리한후 무형문화재로 신청하였다. 이미 자치주정부와 길림성정부의 비준을 받았으며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代表傳承人 자격도 가졌다.
학문이 짧고 능력이 모자라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뜻이 있고 능력도 있으면서 나한테 찾아와 《우리 좀 같이 해 봅시다.》하는 지성인이 나타나기를 고대하여 기다리고 있다. 주관국에서는 많은 지지를 주고 있는데 나의 능력이 제한되여 있어서 진전이 너무나 꿈뜨다. 그리하여 매일 고민하던 중인데 우연히 이렇게 한번 저승사회에 내려와서 현지고찰을 할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참으로 천년을 기다려서 한번이나 있음직한 희귀한 기회이다. 우리 선인들이 현령하시여 나를 특히 부른것이이리라. 에라 만수!
아차! 혹시 내가 지금 죽고 있는 것이나 아닐가? 내가 제 좋은 생각만 하고 있었네. 이제 금방 바위위에 누워서 몸을 뒤척이다가 곧장 굴러 떨어지면서 머리가 박살이 나서 지금 한창 피를 토하며 숨이 끊어지는 과정이나 아닐가?
글쎄! 그건 아닐거야. 나는 저승을 위하여 좋은일을 하는 사람인데 저승에서 나를 징벌할 리유가 없다. 지금 바깥에서는 우리식 빈소 한칸 변변한것이 없다. 그리하여 내가 책임지고 연길장의관에 우리식 빈소를 한칸 꾸리기로 주,시민정국과 약속이 되여있다. 우리식 빈소를 꾸린다는 것은 우리식 저승문화가 중시를 받음을 의미하는데 저승 령도들의 체면도 서게 되는것이다. 이렇듯 자기네를 위하여 좋은일을 하려는 사람을 징벌할 리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아직 많은 일들을 해야 하는데 내가 죽으면 나를 계승할 사람을 아직까지 물색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가령 나의 수명이 오늘로 정말 끝났다 하여도 우리민족의 저승령도를 찾아가서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대로 죽어서는 안된다. 민족대의는 이승이나 저승이나 모두 책임이 있다고 큰 소리를 쳐 봐야지. 그리하여 여기 판관에게 잘 부탁하여 무슨 방법을 대서라도 도로 이승에 나가서 계승자를 물색해 놓고 계획한 일만이라도 해놓고 다시 오기로 약속하리라.
 
3, 신기한 저승입구의 이모저모
나는 질서없이 생각을 굴리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陰間》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동쪽벽 밑에는 커다란 샘못이 세자리나 있는데 노란샘물이 퐁퐁 솟아 오르고 있다. 말그대로 黃泉이다. 노란샘물들은 흘러나와 강을 이루어 서남쪽으로 급히 흐른다.
강 량안에 《曼珠沙华》라는 이름을 가진 붉은 꽃들이 타는 불처럼 강을 따라 피여 있는데 꽃모양이 마치도 하늘에 대고 그 무슨 사연을 간절히 기원하는듯 두손을 합장한것처럼 생겼다. 원래 曼珠는 꽃요정의 이름이고 沙华는 잎요정의 이름인데 꽃이 필때면 잎이 없고 잎이 나오면 꽃이 지고 하여 한줄기에서 자라면서 종래로 서로 볼수가 없었다고 한다. 천여년을 이렇게 미친듯이 서로 그리워 하며 살다가 한번은 드디여 용감히 천규를 위반하고 사사로히 만났는데 그로하여 천벌을 받아 이렇게 저승에 와서 핀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이승의 다른 꽃들은 한줄기에서 잎과 함께 자유로히 필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량산백과 축영대》 못지않은 애틋한 사연이다.
강을 건널수 있게 서북쪽으로 돌로 쌓은 궁형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그 다리 교두에는 《奈何橋》라고 씌여져 있다. 《奈何》란 옛문구로서 우리말로 《어찌하리오?》하는 뜻인데 혼령이 일단 이 다리를 건너 갔다고 하면 다시는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병원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모두들 혼령이 아직 이 다리를 건너기 전이여서 가능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 앞에서 흐르고 있는 이 강이 바로 이승과 저승의 분계선인 《忘川河》이리라. 강옆에는 큰돌이 박혀 있는데 《三生石》이라고 씌여져 있다. 저돌은 옛날 圓澤이란 중이 원숙한후 이승의 자기 친구를 여기로 불러와 이 강을 사이두고 만나서 륜회를 약속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후 그 중의 혼령은 한 임신부의 태를 빌어 그 임신부의 아기로 다시 태여났다. 저돌앞에 가서 서면 자기의 前世, 今世, 來世의 因果緣分을 한눈에 볼수 있으며 인생에서 채 마무리 하지못한 인정 여건들을 팔을 한번 휙-저어서 깨끗이 끝내 버릴수 있다고 한다.
교두아래에 《望鄕臺》가 있어서 다리를 거느기전에 마지막으로 자기가 살던곳과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영화를 보듯이 한번 휘-돌이켜 볼수 있다.
그 옆에 허술한 초막이 하나 있는데 초막앞에는 《孟婆茶亭》이라고 쓴 茶旗가 걸려 있다. 여기서 다리를 건느기전의 제일 마지막 사무을 끝내야 한다. 맹파녀신이 큰 바가지로 큰 차물독의 차물을 푹 떠서는 넘겨 주는데 그 차물을 받아서 꿀꺽꿀꺽 단모금에 마여야 한다. 그러면 여태까지 이승에서의 기억들이 말끔히 지워진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초막안에는 맹파녀신이 보이지 않고 큰 차물독 옆에 작은 걸상이 하나 놓여있고 허술한 차탁 량옆에 긴 걸상이 하나씩 놓여 있을 뿐이다.
물을 보니 갈증이 나서 차나 좀 얻어 마일가 하여 두리번 거렸다. 그때 다리 북쪽에서 한 목동이 소잔등에 앉아 피리를 불면서 상운을 타고 다리를 건네온다. 그 목동과 소는 모두 투명한 우유빛 형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미묘한 피리소리는 아주 먼곳에서 들려오는듯 하였다. 목동은 소잔등에 앉아 나의 앞을 지나가면서도 나를 무시한채 피리만 불어댄다.
문뜩 당조시인 杜牧의 명시 《淸明》이 생각난다;

청명절날 구질구질 비가 내리니,
길손들은 저마다 혼이 끊길 지경입니다.
술집은 어디쯤 있는가고 물었더니
목동은 저멀리 행화촌을 가리킵니다.
(清明时节雨纷纷,路上行人欲断魂。借问酒家何处有,牧童遥指杏花村。)

그런데 이 목동은 너무나 무례하다. 아무리 신동이라 하여도 이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는건가? 저으기 자존심 상한다. 그리하여 소앞에 질러가서 조금 어성을 높여서 말을 걸넸다; 《이승에서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목동이 소잔등에서 와뜰 놀라더니 피리소리가 뚝 끊긴다. 목동은 나를 알아보고는 소잔등에 앉은채  두손 모아 쥐고 나를 향하여 조금 허리굽혀 인사한다.《이승에서 오신 손님! 안녕하십니까? 신은 오늘 우리 倍達村 당직입니다. 오늘 이승에서 손님이 오신다는 통지를 받고 겸사 여기로 마중 나왔습니다. 이승과 저승은 지척이 십만팔천리라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우리마을 부락장님께서 손님을 요청하셨습니다. 손님께선 여기 이 <玉符>을 목에 거시면 저 다리를 건너 가셨다가 다시 건너 오실수 있습니다. 저 다리를 건너 가신후 곧장 우리마을로 들어가시여 부락장님을 찾으십시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목동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일장 설명을 끝내고 그대로 소잔등에 앉아서 나에게 《玉符》을 넘겨 주고는 또다시 피리를 불면서 유유히 떠나가 버렸다. 신선의 도고한 그 기품에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4, 저승부락 부락장님을 만나다.
우리민족의 전통 저승문화는 오늘까지도 그 완미한 체계가 아직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여기 저기에 널려있는 귀신이나 신선이야기들을 모아서 살펴볼때 대체로 불교에서 기원한 이야기가 많으며 또 중국 귀신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우리민족의 저승이야기에서는 대체로 중대한 직책을 맡고 있는 혼령을 王이라고 하고, 부문별 직책을 맡고 있는 혼령을 神이라고 하며, 구체적인 직책이 없이 떠돌아 다니며 좋은일을 찾아하는 혼령을 仙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집장가 못가고 처녀총각이나 유아신분으로 저승에 오게된 혼령을 鬼라고 하고, 죄를 범하고 저승에 오게된 혼령은 魔라고 한다. 鬼와 魔는 정상사망한 혼령의 보증이 있어야만 저승사회에 입적할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소위의 육도륜회에 참여할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鬼와 魔는 자기를 보증하여 줄 혼령을 찾아 갈팡질팡 헤매다가 왕왕 멀정한 사람을 잘못 해치군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화제는 다른기회에 말하고 다시 본 화제로 돌아가자.
나는 목동한테서 《玉符》을 받아 목에 걸고 《奈何橋》를 조심조심 건너니 맞은켠에 동굴입구가 보인다. 입구위에는 篆体로 《倍達千年洞》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니 여기가 바로 배달족 망혼들이 모여사는 저승마을이렸다.
입구의 량옆에는 篆体내리글로 이렇게 새겨져 있다;

《淡泊以明志(탐욕이 없으니 뜻이 밝아지고)》
《寧静而致遠(그윽이 있으니 멀리 들리누나)》

동굴안에 들어서니 앞에는 또 굳게 닫긴 큰 돌문이 나타나는데 篆体로《千年門》이라고 크게 새겨져 있다. 그 량옆에 나무로 깎아만든 《大門神左將軍》과 《大門神右將軍》이 눈을 뚝 부릅뜨고 지켜서 있다. 내가 두 문신장군앞에 다가가 《고찰원 도착이요. 부락장님의 초청을 받고 왔으니 어서 안내하시요!》 하고 전달하니 좌장군이 나를 왼쪽 현관으로 안내하여 한 자그마한 돌문앞까지 와서는 머리를 숙이고 서 있는다. 내가 바라보니 돌문틀우에는 《退世人員登記事務室》이라고 쓴 문패가 걸려있다. 돌문이 스르르 열리기에 들어서니 너른 대청이 나타나는데 중앙에 큰 사무상이 하나 놓여 있고 사무상 우에는 컴퓨터가 켜지여 있다. 그리고 대청 네벽의 웃부분은 몽땅 커다란 형광막으로 가리워져 있는데 마치도 증권 교역소에 들어선 감이 난다. 그 형광막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각기 《三百年修練進度表》,《五百年修練進度表》,《八百年修練進度表》,《一千年修練進度表》, 이렇게 분류되여 있다. 보아하니 지금 저승의 사회관리수준과 과학기술 수준이 바깥세상보다 별로 락후하지 않은것 같았다.
갑자기 형광막들이 동시에 세번 껌벅이더니 《歡迎到陰間考察!》이라는 자막이 나타난다. 이윽고 형광막에 거룩한 혼령의 영상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상운을 타고 내려와 나의 앞에 와서 나의 손을 잡아준다. 그 혼령은 투명한 우유빛 형체였지만 나는 분명히 그 혼령의 우렷한 존재를 보았다. 그이가 바로 우리 자치주 초대주장 주덕해의 혼령이였다.
우리민족의 현대 저승사회에서는 주덕해주장님의 혼령을 왕으로 추대하여 모시고 있으며 그이는 현재 倍達村이라는 우리민족 망혼들이 모여사는 저승부락에서 부락장을 맡아보고 계신다. 주덕해주장왕님께서는 倍達村부락에서 현명한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18층 지옥제도와 마귀제도를 전면 페지하였으며 大同神仙제도를 건립하고 실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倍達村에서는 다른 저승구역과는 달리 혼령마다 일률로 평등하며 통일적으로 능력과 취미에 따라 우주과제를 맡아 열심히 수련하면서 조화로운 저승사회의 도화원을 건설하고 있다.
혼령이란 우주의 한개 현상이다.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는 혼령들이 우주과제를 수련하는 과정에 생명현상을 체험하기 위하여 잠깐 들리는 곳이다. 수련과제가 많지 않은 혼령은 하루 과제만 마치고 돌아 가지만 수련과제가 많은 혼령은 좀 긴 세월을 살면서 파란만장을 체험해 보고 돌아 간다. 그러나 보통 백년을 초과하지 않는다.
《천년의 한번 기회를 축하. 고찰의 원만 성공을 축원.》 주덕해주장왕님께서는 나한테 축하와 축원의 멧시지만 전달했을뿐이다. 여태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저승사회의 많은 신비한 현상들에 대해선 저절로 고찰을 통해서 하나하나 그 비밀을 풀라는 뜻이이리라.
옛날에 공자가《살았을 때의 일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죽은후의 일을 어떻게 알수 있겠냐?(未知生,焉知死)》하고 말했는데 그때로부터 이미 2500여년이 지났으니 인젠 《살았을 때의 일을 계속 알아야 하겠지만 죽은후의 일도 좀 알아야 (續知生,始知死)》할때가 된것 같다.
갑자기 대청안이 온통 금빛으로 환해지더니 한마리의 금빛수탉이 날아와 주덕해주장왕님의 왼쪽어깨에 내려 앉는다. 주덕해주장왕님은 그 금빛수탉의 부리에서 금빛 카드를 한장 뽑아 나한테 넘겨준다. 그리고는 손을 저어 작별하며 다시 상운을 타고 형광막으로 올라가서 사라진다.
나는 주덕해주장왕님을 작별하고 금빛카드를 살펴보니 《無極》이란 두 글자를 박아넣은 저승 기자증이였다. 이 기자증을 가지고 저승에서는 시공간의 제한이 없이 그 어디에서, 그 어느때에, 고금중외의 그 어떤 력사인물과도 자유로히 인터뷰할수 있는 자격이 있다.
 
(아래의 편장은 공개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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