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월앞에 무릎을 꿇고(허창렬) 외 4 수
흰수건에 무명모시
하얀 코신 살짝 받쳐신고
무거운 세월
무거운 방아
두발로 엇갈아
스리슬쩍
들어 올리며
쿵더쿵
쿵더쿵
살을 찧던 엄마의 이야기가
쿵더쿵
쿵더쿵
뼈를 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이제는 너무 그립습니다
이제는 뼈저리게 너무 너무
아쉽습니다
그때가 그리워
방아간 참새는 오늘도
구슬피 울고
살아온것만큼
깨달아가는
진부한 사실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주저없이 털썩 무릎을
꿇습니다
묻노니 강산에
저 빈뜰에 하얀 그림자는
어느 시절
어느 누구
살다 간 흔적인가?
어머니 이야기는
오늘도 나의 슬픈 시가 되고
아버지 이야기는 나의 소설이 되여
강처럼 출렁출렁
하염없이 먼곳으로
흘러 흘러 갑니다
2013년3월15일
쓰레기는 제멋에 쓰레기가 된다
빚이라곤 져본적이 없던
내가 덜컥 빚을 진다
세상빚
인정빚
자식빚
마음빚
술이라곤 입에 대지도 않던 내가
가끔 술도 마신다
한잔
두잔
석잔
그리도
또 한잔
도박이라곤 모르던 내가 가끔
도박도 시작한다
어차피 인생은 한판 승이라던가ㅡ
세상빚
인정빚
자식빚
마음빚
갚아야겠는데 도무지
갚을 방도가
생각이 나질 않고
마음은 아프고
가슴은 쓰리고
어깨는 무겁고
이런 나를 남의 눈알 한개쯤 제꺽 빼먹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제법 늠름한 이들이
비웃고 있다
말세다!
조금 남은 기억마저
휴지통에 주저없이 던져버린다
쓰레기는 그렇게 항상 제멋에
쓰레기가 된다…
마음 1
마음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마음이 너무 무겁고
마음이 너무 울적하고
마음이 쓰라린 날이면 나는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서슴없이
마음이 부르는 곳을 찾아 나선다
거기ㅡ
청청한 가을하늘이 거울보다 맑고
산과 들과 숲이 아직 파아랗게
살아서 숨을 쉬고
조리졸졸 시내물이 시원하게
발목 적셔주는 곳
그곳에서 나는
마침내ㅡ
마음의 무거운 짐을 풀어 강물에 푸욱 잠근다
분명 내것이면서도 내것만이 아닌
마음의 부담을 이리저리 시내물에 휑군다
마음의 찌든 때를 깨끗이 씻고 또 씻는다
주름살 하나없이
구김살 하나없이
마음이 거울처럼 반짝반짝 빛이 날때
나는 다시 부끄럽지않은 마음으로
부처님 경전을 골똑 가슴에 담는다
이 세상 천갈래 만갈래 길도
마음에 담으면 오직 한갈래뿐임을
결국 마음으로 느낀다
선(禅)은 선(善)이다
어설프게
남의 한계를 시험하지도 말라
그리고
어설프게
남의 인내에 도전하지도 말라
즐거운 디아스포라를 꿈꾸는
너의 그 값싼 인생과
너의 그 값싼 저작권에서는
문명속의 문맹이 지금한창 발버둥치고 있다
피타고라스
마이거스뮤러
아인슈탄
이 세상 허다한 명인들은
공존의 그늘을 알고 해살같은 웃음으로
가볍게 우리들에게 해박을 선물해주었고
모자라는 부분은 언제나 묵묵부답
인생숙제로 어깨우의 가벼운 먼지 톡톡 털어가며
자세 또한 항상 묵직하였다
따뜻한 욕실에 앉아 방귀를 뀌고도 즐거운 그 방대한 시리즈보다야
살아가는 지혜로 남의 인생을 베껴쓰는 그 고상함보다야
차라리 하루종일 말없는 저 산이 더욱 가깝고 친숙한 법
선(禅)은 선(善)이다
선은 자연의 부름이다
자연의 부름을 받으면 마침내 깨달음이 온다
깨달음은 해탈의 첫발자국이다
허울을 다 벗고 마침내 자신을 뒤돌아보노라면
어느새 도약의 새길을 열쇠로 열어가고있다
2013년6월5일
다시 성자산에 올라
ㅡ을지문덕장군의 싸움터를 찾아서ㅡ
1
력사는 이 성을 무슨 성이라
불러야 합니까?
우리는 그때 그 가렬처절 용감무쌍했던 싸움을
또 무슨 대첩이라 불러야 합니까?
살수대첩은 청천강입니까? 아니면
저 푸른 료하수 건너 영주땅 어느 근처입니까?
산은 말이 없다
산은 말하려 하지 않는다
산은 오늘도 아무런 말이 없다
천만년 묵묵히 침묵해온 산아
억천만년 묵묵히 삶을 고스란히
쌓아 온 산아 산아
2
너는 정녕 보았으리
먼 옛날 태고적 돌멩이 들고 몽둥이 들고
허기영차 허기영차
알따이산맥을 넘었을 우리 겨레를
너는 정녕 기억하고 있으리 그젯날
정의의 싸움에 용감했던
고구려 용사들의 그 비장한 최후를ㅡ
산은 너무나도 많은것을 가슴에 껴안았다
산은 너무나도 아름찬것을 가슴에 품었구나
골짜기가 너무 깊어 슬픈 산이여
늑대가 우글거려 근심이 많던 산이여
산이 돋보이는 까닭은 험난하기때문
산이 우러러보이는 까닭은
우리들 지척에 우뚝 섰기때문…
3
산은 그냥 그저 산이 아니다
그네들의 아픔은 우리네 아픔
그네들의 미련은 우리네 미련
산이 움직였는가 바람아 묻지마라
산은 오늘도 의연히
한 자리에 우뚝 서있다
산은 산답게 너무 고즈넉하다…
2012년9월5일
**성자산은 료녕성 서풍현경내에 있음, 현지에 따르면 이곳이 을지문덕장군의 주요 싸움터임, 산기슭엔 아직도 허물어진 성터자리와 매돌, 고구려군졸들이 마셨을 우물이 그대로 남아있음**
이 시가 참 좋네요!
특히 마지막 한마디가 쾅하고 가슴에 와 닿습니다.
허창렬선생님의 시를 자주 읽을수가 있게 되여 참 기쁩니다.
이런 작품들이 거의 대부분 미발표작이라는것에도 놀랍구요.
자주 오겠습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