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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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비오는 날의 그리움
2009년 02월 11일 15시 13분  조회:493  추천:6  작성자: 허무궁

 오래간만에 만나는 비다.
    비오는 침침한 초가을날.
    말만 들어도 마음이 우울해지는데 홀로 밖을 바라보며 앉아있노라니 나의 마음은 처량하기로 한량없어졌다.
    옛날엔 비가 오면 개를 엎어놓고 이웃들과 술 나눈다고 잘들 말했다. 밖의 일을 할수도 없고 하니 로동의 피로나 푼다는 얘긴데 왜서 하필이면 개추렴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것을 따질것없이 친구들이 그리운 이런 곳에서는 비가 오는 이런 날이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메일 보내고 전화해보고 채팅도 열어보고 하지만 응대해주는 이는 없다. 컴퓨터의 화면만이 눈이 부시게 나를 쳐다보고있는데 노트북과 술잔을 기울일수도 없지 않는가.
    별수없어서 나는 음악 틀어놓고 혼자서 안주도 없이 깡통맥주 하나 집어든다. 아침에 깨끗이 물걸레질해놓은 마루바닥에 엉뎅이를 붙이고 비가 힘없이 내리는 밖을 내다보며 나는 맥주잔을 기울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미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듯 이름모를 새가 애처롭게 울어대고 가끔씩 시끄럽게 자동차가 집 옆길로 달려간다. 비오는 날엔 좀 조용히 집에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가.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이 비오는 날에도 소음 내며 시끄럽게 구냐. 모두가 내 말처럼 될수도 없는 일 가지고 괜히 신경질도 부려보지만 생각보다는 난 그렇게 성나 있지는 않았다.
    비물에 차분히 젖은 화분통이 그래도 나의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파란 잎이 길게 드리운 화분, 살 때 행복의 나무라고 써놓아서 행복 하나 사는셈치고 사다놓은것인데 토요일 물주는것만 받아먹고 잘도 커준다. 내가 행복한지 네가 행복한지 모르게 정말 아무런 근심도 없이 커주었다. 전번에 상해로 갔을 때 이 나무의 이름이 금전수(金錢樹)라고 배웠다. 너무나 속된 이름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거부감이 들었다. 무슨 옛날 전설에 나오는 나무처럼 흔들면 돈이 나오기나 할듯 이름을 요란하게 지어놓았는데 그것이 우리 인간들의 가냘픈 마음의 기대와도 같은 갈망이였다고 생각하며 요란한 이름에 대한 불만을 참아버렸다.
    중국사람과 우리 민족의 다른점이 이런데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리 민족은 원하는것을 감추는것에 미덕이 있다.자식의 이름을 개똥애라 부름은 귀엽게 자라라고 지은것이요, 돌쇠라고 지음은 똑똑해지라고 지은것이다. 장사군이 돈 벌었을 때 오픈 첫날의 수입으로 들어온 지페에 침 뱉으라 한다. 돈이 싫어서도 아니고 돈이 더러워서도 아니고 이렇게 돈을 싫어하는척 하면 더 많이 들어온단다. 나 원 우스워서. 사실 이는 경제법칙에 어긋나도 웬간히 어근난게 아니다. 재래로 돈을 잘 버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돈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로 간다고 한다. 사람 많은 곳으로 돈이 흐르고 돈이 많은 곳에 사람이 가게 된다. 아마 그래서 우리 민족이 가난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조상의 대통에 정수리 맞을 소리 한마디 해놓고.
    행복의 나무, 금전수. 이를 우리가 먼저 이름 지었다면 과연 뭐라고 지었을가? 이런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앉은 문밖으로 베란다의 문쯤새로 저 아래 뽕나무가 정답게 보인다. 다행이라 할가 우리집앞에도 고맙게도 뽕나무가 어깨 나란히 서있다. 해마다 어김없이 까만 열매를 가득 열어주어 나는 그걸 고맙게 뜯어다가 먹군한다. 일본사람들은 먹지 않기에 저기 있는 뽕은 다 내거다. 뽕도 따고 님도 볼겸 하면서 따야 원래는 제격인데 그런 랑만은 이젠 가버리고 나는 뽕도 딸겸 옛고향도 그려볼겸 하면서 그 자연의 세례에 감사하고있었다. 나는 우리 말중에, 아니, 우리 이름으로 불리우는 나무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이름이 뽕나무이다. 뽕하고 나무라 이름 지은것이다. 얼마나 해학적이고 사랑스럽고 귀한가.

    내가 소학교 3학년때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지신소학교의 뒤마당에 무릎까지밖에 자라지 못한 뽕나무 몇대가 있었다. 그때 나는 학교마당에서 한참 뛰놀다가 까만 열매가 달린 이 나무를 발견하고 무엇인지 몰라 한나절이나 쳐다봤다. 누군가가 이거 뽕이다. 하고 알려줘서 나는 뽕을 처음 알았다. 그해 여름 나는 짬만 있으면 뽕나무를 찾아갔다. 내가 가면 뽕나무는 꼭 까만 열매를 풀잎에 숨겨둔채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나는 헤헤 입이 함박만해서 그걸 조심스레 뜯어서는 입안에 넣고 그 맛을 오래오래 음미하였다. 쑥떡보다 구운 두병보다 얼마나 맛좋은 음식인지 몰랐다. 그 이듬해도 그랬고 그 다음해도 그랬다. 박해받던 시절, 가난의 시절을 지내온  지신이여서 불행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이지만 거기엔 이렇게 나의 자그마한, 정말로 가냘플 정도로 가는 나의 랑만의 기억의 실오리도 함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뽕나무란 이름이 얼마나 다정하게 들려오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때의 나에게는 유일한 랑만이였는지도 모른다.
    썩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뽕나무는 꽃을 피워도 암꽃과 수꽃을 피운단다. 다른 꽃은 꽃 하나에 수꽃술과 암꽃술을 달고있는데 뽕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암꽃에 여름이면 포도처럼 차례로 열매를 맺는다. 달콤하고 시큼한 맛이 먹는 사람의 얼굴을 벙긋 웃겨준다. 음양의 철리가 뽕에도 있을줄이야.
    그러고 보면 일본에 와서야 알았지만 은행나무는 아예 숫나무와 암나무로 따로 자라고있다고 한다. 암나무에만 은행이 열매 맺어 가을이면 암은행밑에 무릎꿇은 사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정력제라고 하면서 기를 쓰고 먹고있는 일본의 사내들이다.
    이런 생각하고있노라니 어느새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있었다. 뽕의 랑만도 모르고 행복의 나무를 금전수라고 하는것도 모르고 은행이 정력제인줄도 모르고 하늘은 그냥 비만을 쏟아붓고있다. 나와 같이 고독한 모양으로 눈물만 흘리고있는것이더냐? 나의 처량한 마음을 알기나 한듯, 나의 고독을 알기나 한듯. 내가 누구를 그리워하는줄 알기나 한듯 제멋대로 비만을 나한테 쏟아붓고있다.
    나의 발등에, 나의 어깨에, 나의 머리에 비물이 퍼부어졌다. 뽕이 그리워 행복의 나무와 함께 베란다에 나가섰더니 이렇게 비가 나의 고독을 씻어주고있었다.
    동년의 랑만이 찾아올것 같은 기분에 나의 그리움이 새롭게 시작된다.
                                 2005년 9월 24일 태풍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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