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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애가 서울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흥분까지 했었다. 장춘에서 살았던 우리 부부는 딸 서너살때부터 우리 말 교육을 등한히 한적이 없었으나 그가 열아홉이 된 지금 처음 외국관광을 고국으로 선택해주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일본에 온 후로는 세계배구시합을 구경해도 중국이나 한국이 아니고 일본을 응원하던 딸애였던것이다. 일본에서 혜택을 받고있으니 나도 일본이 이기는데 의견이 없지만 그래도 한일전이라든지 중일전때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나다. 그리고 중학교때부터는 우리 말로 묻는 물음에 일본말로만 대답하는 딸이 더없이 근심되였던것이다.
나는 좋은 기회라 생각되여 중국에 출장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직접 서울에 들려 서울에서 딸애와 합류하였는데 인천공항에서 먼저 도착한 딸애의 마중을 받는 마음은 형용할수 없이 즐거운 일이였다. 우리는 마포에 있는 홀리데인서울호텔에 체크인하였다. 방에 짐을 집어던진채 그 자리로 우리 부녀의 관광이 시작되였다. 관광코스는 서울에 익숙한 내가 결정하기로 돼있어서 나는 심양에서 서울로 떠날때부터 이미 민족전통문화적인것을 원칙으로 코스를 짜기로 했다. 물론 딸애가 먹고싶다는 음식은 값과, 량과 종류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죄다 사준다는 원칙도 세웠다. 사흘동안 3_8군사경계선, 경복궁, 민속촌, 남산탑, 명동, 이태원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니고 일산에 가서 쌈 먹고 춘천에 가서 닭갈비까지 먹을수 있었으니 나 스스로서는 아주 잘된 관광이였다고 생각하고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고장과 맛있는 음식과 함께 잊혀지지 않은것은 민속박물관에 가서 본 신이였다.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우리는 민속박물관에 들어갔는데 여러가지 민족력사가 자상히 그려져있는 가운데 신이 진렬되여있었던것이다. 나도 중국에서 박물관에 많이 들어가보았는데 아마 력사박물관에 시대에 따른 신이 진렬된것은 서울에서 처음 보는것 같다.
그 진렬된 신을 순서대로 적으면 이러하다.
나막신, 눈신, 가죽미투리, 동구니신, 미투리, 짚신, 진신,지총미투리, 흑혜, 녹비해, 태사해, 수해, 복하, 고무신. 그러니 고대때 신부터 순서대로 배렬한것이였다.
그 신을 보며 무심하게 나는 고무신시대의 사람이라고 하니 딸은 신기한듯 나를 쳐다보았다.
응_? 파파두 저런 신 신었어요? 고무신? 고무? 우에랑 다 고무였어요?»
일본말로 아빠를 파파라고 부른다. 가만 내 머리 그래서 파파머리 된거 아닐가?
그럼_. 다 고무지. 남자들의 신은 검은 고무였고 녀자들 신은 파란 고무에 흰줄 두줄 박아넣었지. 그리고 할머니들이나 할아버지들의 신은 다 흰고무신이였다. 코신이라는것도 고무신이거든.»
대개 이러한 대화로 그날 구경을 마쳤던것 같은데 그 진렬대에 나란히 줄을 선 신들이 그냥 이렇게 나의 눈앞에 떠오르는것이 참으로 견딜수 없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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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뽈 차는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우리 소학교는 바로 공사병원앞 큰길 사이두고 있었는데 운동장은 우리 조무래기들이 달아다니기엔 벅찰 정도로 넓었다. 책가방 팽개치고는 편을 짜서 축구를 하는데 잘 차는 애들은 그 위치가 매번 규정되여 있었지만 나는 매번 이 자리 저 자리로 배치되였다. 웃학년애들도 있어서 하라는대로 찍 소리도 못하고 그냥 열심히 뛰여다녔는데 다른 애들의 발밑에서 붙어다니던 뽈은 나의 발에만 마치면 저만치 튕겨나군 했다. 그런데 골문앞에서는 툭 터진 풍선처럼 아무리 힘있게 차도 몇메터밖에 뜨지 않았다. 어떤때는 나의 고무신이 뽈보다 더 멀리 뜰 때도 있었다.
해방신(중국군대들이 신던 신)을 신은 애들은 쇠망치로 쳐박듯 잘도 차버렸지만 고무신을 신은 애들은 거의 다 나와 같이 불발(不發)뿐이였다. 아예 신을 벗고 맨발로 차는 애들도 있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배구는 잘 쳐도 뽈은 잘 차지 못하는 원인이 아마도 이 고무신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 고무신을 닳아서 바닥으로 물이 들어올 때까지 신는다. 가을이 되면 콩긁을 잘못 디뎌 발바닥이 찔리는 때도 있었다. 이렇게 고무신의 시대가 지나자 다음에 온것이 천으로 만든 파란색운동화시대가 왔다. 몇해후에 도문고무공장에 가서 고무를 밀가루 이기듯 이겨대는 기계를 보고 이렇게 많은 고무를 어디다 다 쓰고 우린 고무신도 바로 신지 못했을가 하고 속으로 한탄한적이 있었다.
지금은 손가락 굽히며 세여보니 심양숙소에 세컬레 사두고 온것까지 합하면 나의 신도 열한컬레나 된다. 버버리(BURBERRY)와 같은 브랜드 신도 몇컬레 신고다니는 지금 어릴적 뽈 차던 기억이 새삼스러운것은 오로지 가난에 대한 저주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고무신을 신고다니면서 오늘과 같은 날이 래일이라도 당장 오는가 했다. 맨날 래일 공산주의 나라로 갈것처럼 떠들어댔고 중학생도 공부는 하지 않고 농건반, 기건반이요 하는 해괴망칙한 반을 만들어 매일 중로동만 했는데 그러면 당장 잘사는 세상이 온다고 믿었었다. 의심할바없이 굳게 믿었었던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을 많이 가지려면 이십년, 삼십년씩이나 걸리는것을 오늘에야 터득했다!
아무튼 고무신은 나의 추억으로 조무래기일적에 멋도 모르고 뛰놀던 기억으로 남아있고 또 그것은 이미 옛날로 되여 박물관 제일 마지막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고무신은 후대들에게 신비한 존재로 알려지고 나의 딸 또한 아버지시대를 먼 옛날처럼 생각하게 될것이라는 점, 이젠 쓰라린 그 시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점, 이것이 지금 그냥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것이였다.
내가 체험했던 물건이 박물관에 들어갈 정도로 내가 뭐 오래 산것처럼 느껴지는데 우의 가난에 대한 저주를 털어버린 지금은 오히려 대체 박물관에 들어갈수 있는 물건들의 자격이 어떤 기준에 근거하여 설정한것인지 그게 조금 궁금해 서 못견디겠다.
서울관광중 딸 효정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우리 말 튕겨나왔고 또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수 있었다는 기쁨이 있었을망정이지 그렇지만 않았더면 나는 나 자신을 지나간 력사적인간처럼 만들어놓은 사람을 가만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006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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