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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조선족대학생의 첫 모임
정인갑
1979년 5월 20일 일요일, 북경시 조선족대학생의 첫 모임이 있었다. 북경에서 5월 하순이면 날씨가 더운 계절이긴 하지만 그날은 각별히 화창하고 더워 반팔의 티서츠를 입어야 할 정도였다. 장소는 북경대학의 제2체육관(바로 학교 도서관에서 서남쪽으로 약 80m정도 떨어진 곳)이였다. 체육관 문지기는 피부색이 검고 눈이 좀 이상하게 생긴 50대 후반의 분이였는데 선심을 써 우리에게 빌려주었던것이다. 후에 이 체육관에서 우리는 여러 번 활동하였다.
이 모임은 필자가 소집한 것이다. 한달전부터 신경을 썼으며, 전화가 불편한 때라서 각 대학의 조선족에게 초청편지를 십여통 썼었다. 단 민족대학만은 직접 가서 구두로 알렸다. 약 50명 좌우의 대학생이 모였다. 민족대학 조선어전공 78급이 대부분 참가하였고 다른 계의 김성화, 최강, 김**, 우**등도 참가하였다.
우리의 모임에 참석하여 달라는 편지를 북경시민족사무위원회에도 하였다. 그들이 우리 회의에 참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상상밖으로 민족사무위원회 조선족간부 崔雄济(중국 摇滚乐 창시자 崔键의 부친)선생이 그의 친구 徐辅日(중악악단의 클라리넷 연주가)을 데리고 참석하였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사망될 때까지 필자와 최웅제는 근 30년간 친하게 지냈다. 북경대 조선족 녀교직원도 몇몇 참가하였는지 지금 기억이 잘 안 난다. 민족대학의 임국현, 북경대학의 리홍걸, 리응수 등도 이 모임을 위한 수고가 많았다.
학생 1인당 인민폐 1원씩 거둔 것이 이번 모임 경비의 전부였다. 그 돈으로 원추형 나무통에 담긴 맥주 두통(약 100kg정도)과 기름에 튀긴 땅콩, 기름에 튀긴 작은 물고기를 각각 몇근씩 샀고 김순금 선생님을 수반으로 하는 북경대 조선족 녀교직원 몇몇에게 부탁하여 김치를 몇 버치 장만하였다. 맥주 한 사발에 20전하는 때인지라 맥주 100kg라고 하여도 돈이 얼마 들지 않았다.
필자는 이번 모임을 북경시조선족운동회를 개최하기 위한 여론 조성으로 소집한 것이다. 필자는 중앙민족대학에 자주 드나들며 이런 현상을 발견하였다. 다른 소수민족은 대개 자기 민족의 명절이 있으며 명절날이면 기념활동에도 참가하고 한끼 잘 얻어먹고 배를 쑥 내밀고 어깨를 쭉 벌리고 얼굴이 벌개서 우쭐거리며 걸어 다니지만 조선족은 자기의 명절이 없어 너무나 어설프다. 그리하여 1978년 하반년에 북경시 민족사무위원회에 편지를 써서 ‘북경시에서 조선족 활동, 좋기는 운동회를 조직해달라’,‘당신네가 안 해주면 우리 스스로 할 터이니 명단을 제공해 달라’는 요구의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족 활동 및 운동회를 조직할 필요 없다’ ‘명단을 제공해 줄 의무는 더더욱 없다’의 회답을 받았다. 생각 끝에 필자는 부득불 이번 모임을 조직하였다.
학생들은 맥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즐겁게 놀았다. 단 나이가 서른이 넘은 몇몇─필자, 김명철, 최강, 김** 등은 최웅제와 서보일을 붙들고 운동회 조직에 힘쓸것을 ‘강요’하였다. 그들의 입에서 ‘그 일은 쉽지 않으므로 참여하지 않겠다’따위의 말이 나오면 다짜고짜로 술을 ‘강제’로 권하곤 하였으며 끝내 ‘이 일을 위해 힘껏 노력해보련다’의 답복을 받아냈다. 북경시조선족운동회를 위한 노력은 이로부터 시작된셈이다. 후에 최웅제는 위에서, 우리 대학생들은 아래에서 노력한 결과 1980년 9월 14일에 사상 처음인 복경시 조선족운동회가 민족대학 운동장에서 거행되였다.
이번 모임을 처음으로 하여 필자는 대학 졸업까지 북경시 조선족대학생의 모임을 약 6번정도, 북경대 내부 조선족대학생의 모임을 약 6번 정도 조직하였다. ‘북경시조선족대학생 연의회’따위의 이름으로 조직하자고 하니 다른 학생들이 ‘그러다가 정치상 문제될 까봐, 졸업분배에 영향을 받을 까봐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하여 모두 필자 개인의 명의로 조직하였다. 유감스러운것은 조선말을 모르는 조선족대학생들이 거의 이런 활동에 참가하지 않는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민족언어는 민족성의 핵심이며 민족언어가 소실되면 그 민족은 끝장이라고 생각한다. 북경대학에도 조선어를 모르는 조선족학생이 약 4명가량 있었는데 모두 조선족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중 1978학번 력사계 고고학전공 윤길남(尹吉男)은 조선족 집거구인 단동에서 왔고 그의 부친은 1960년대에 있었던 료녕성조선족문공단의 단장이였다. 필자는 1963년부터 무순시 교향악단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였으므로 해당문공단의 연출을 관람하였을 뿐만아니라 윤길남의 부친을 만나 이야기도 나눈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길남만은 꼭 우리의 활동에 참여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루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그와 부딪혔다. 필자가 “당신 오늘저녁 조선족 모임에 참가할거야 안 할거야?”라고 압박의 어조로 들이대니 그는 다소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참가하겠다”고 대답하였다. 필자는 그의 손목을 잡고 필자의 기숙사까지 끌고 들어가 앉히고 조금 있다가 나와 같이 가자고 하였다. 하지만 필자가 화장실에 갔다 오는 사이에 그는 뺑소니치고 말았다. 이 일로 필자는 윤길남을 꾀나 아니꼽게 보았으며 또한 그로부터 조선말을 모르며 활동에 거부하는 학생을 거의 포기하고 말았다. 졸업후 그는 중앙미술학원의 연구생 공부를 마치고 지금은 대단히 큰 인물로 되였다. 그에 대한 baidu의 소개는 아래와 같다:
尹吉男(1958——),辽宁丹东市人,朝鲜族。著名艺术史学者,当代艺术评论家,中国古代书画鉴定专家。被誉为“敏感而又冷静的艺评家”。现任中央美术学院人文学院院长,中国美术史教授。中央美术学院学术委员会常务委员,人文学科组主任。中央美术学院美术学研究所美术知识学研究中心主任,中国社会科学院研究生院考古学系特聘教授。故宫博物院古书画研究中心特聘研究员。教育部国家级教学团队(美术学)带头人,国家级特色专业(美术学)带头人。2009年获全国高等院校科学研究优秀成果奖。现为国家重大攻关项目——马克思主义理论工程、国家教材《中国美术史》的第一首席专家。
중국력사상 조선족으로서 인문학 학술분야에서 윤길남은 최고로 출세한 사람이겠다. 조선족이 자기 민족에게 너무나 집념하고 민족활동에 집착하면 그만큼 주체사회에 데뷔할 길이 좁아진다. 윤길남은 이 길을 걷지 않고 학술에 집념하고 주체사회에 적극 뒤여들어 대성공을 이룩하였다. 이렇게 볼 때 학창시절 및 그후 조선족 활동을 외면한 것이 잘한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늙은 나이가 되면 자연히 민족향수에 빠지며 자기의 민족성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약 1997년경 윤길남은 한국대사관 문화원에서 꾸린 한국어학원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며 필자의 강의를 들은적이 있다. 그날 뺑소니친 일 때문인지 얼굴을 숨기고 있다가 끝내 필자와 서로 알은체를 하였다. 윤길남도 이젠 50이 넘었으니 오라지 않아 ‘나는 조선족이다’라는 정체성을 나타내며 이로써 자부감을 가지기 바란다.(본 문장은 북경대 조선족 졸업생 사이트에 실린 필자의 회고록 <나의 북경대 생활.2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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