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http://www.zoglo.net/blog/china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사회 이야기

전체 [ 99 ]

39    사기함정인 인터넷사랑에 빠져 댓글:  조회:3853  추천:0  2009-07-23
남경시 시민 조군은 남경시 한 번화거리에서 pc방을 경영하고있었다.  어느날 그는 인터넷에서 사귄 녀자친구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조군씨, 사랑해요. 아버지가 꾸린 새 공장이 곧 개업해요. 당신이 이번 기회에 장인어른되시는분에게 잘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조군은 통쾌하게 승낙하면서 즉시 2만원을 부쳐보냈다. 하지만 조군은 자신이 인터넷을 리용하여 사기치는 한무리 사기군들에게 협잡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있었다.  나중에 자신이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군은 남경시 고루파출소에 제보했다.  경찰들은 즉시 출동하여 광주에 가서 한무리 사기집단을 짓부시고 사기혐의자 6명을 나포했다. 올해 35살인 조군은 일찍 pc방을 경영하여 많은 돈을 벌었지만 여직껏 마음에 드는  대상자를 만나지 못했다.  올해 4월에 그는 우연하게 한 인터넷혼인소개소사이트( 站)에 뜬 미혼녀자들에 관한 리력서를 보게 되였다. 이들의 리력서를 하나하나 펼쳐보니 모두 예쁜 용모를 가진 녀자들이였다. 조군은 아주 흥분되여 즉시 이 사이트의 회원으로 가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군의 우편함에 “사랑의 꽃편지”가 날아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려려라고 하는 아주 예쁘게 생긴 광동의 녀자가 조군의 마음을 끌었다.  두 사람은 인터넷에서 자주 만나 잡담을 했으며 나중에 사랑하게 되였다.“조군씨, 사랑해요. 우리 아빠는 대기업의 보스얘요. 나는 아빠의 기업을 관리하고있어요. 결혼할 나이가 퍽 지났지만 사업때문에 합당한 대상자를 만나지 못했어요.” “그렀소?  돈많은 부자집의 공주님이 왜서 나같은 남자를 사랑하오?  난 돈도 없고 배후도 없는 보통시민에 불과하오.” “호호호, 아빠엄마는 돈보다는 성실하고 정직한 남자를 사위로 삼으려고 해요.” “허허허, 돈없는 나같은 남자도 그 요구에 부합되나보군?” “그럼요, 내가 딱 마음에 들면 그만이죠. 그리고 장차 아빠의 재산은 자식이 하나뿐인 내가 물려받을걸요.” “그렀소?  딸의 몫이면 사위몫이 아닐가?” “참 총명하시네.  당연히 그렇죠.  날 이뻐해주세요.” 여직껏 마음에 드는 대상자를 만나지 못한 조군은 그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수 있다고 하니 저도몰래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리였다. 올해 5월 2일에 조군은 인터넷에서 또 려려를 만났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나의 사랑하는 조군씨!” “그냥 려려만 생각하면서 지냈소.” “이봐요, 아빠가 여러개 공장을 가지고있어요. 나 지금 새 공장의 개업식현장에 와있어요.  핸드폰으로 들어봐요.  밖에서 폭죽이 터져요.” 조군이 핸드폰을 켜니 폭죽소리가 들려왔다. “조군씨, 개업식에 친척과 친구들이 축하례물을 보내왔어요.  미래의 사위인 당신의 축하례물은요?” “난 돈이 별로 없는데 얼마면 되겠소?” “돈은 그만두고 꽃바구니면 족해요.” 돈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조군은 더욱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꽃바구니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려려에게 물었다. “꽃바구니면 되겠소?  그런데 어떻게 보내오?” “우리 집 부근에 꽃상점이 있어요.  꽃상점의 전화번호를 알려줄테니 아빠에게 꽃바구니를 전해달라고 주인에게 부탁하면 돼요.” 조군은 려려가 알려준 전화번호대로 꽃상점주인과 련계를 취했다. 그러자 꽃상점주인은 당지의 풍속대로 값이 가는 꽃바구니를 보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조군이 알아본데 의하면 그 꽃상점에 3000원짜리 꽃바구니와 5000원짜리 꽃바구니도 있고 1만원짜리 꽃바구니도 있었다. 조군은 미래의 장인에게 잘 보이려고 5000원짜리 꽃바구니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면서 알려준 구좌에 5000원을 부쳐보냈다.  그런데 생각밖에 려려한테서 전화가 왔다. “조군씨,  당신이 이렇게 린색한줄은 생각못했어요. 당신이 보낸 꽃바구니가 너무 초라해서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하겠어요. 미래의 사위라는 당신이 참 너무 째째해요.” 려려가 화를 내니 조군은 당황했다. 이 일로 하여 려려가 당금 자기곁을 떠날것만 같아 인차 꽃상점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시오,  돈을 더 보내줄테니 더 좋은 꽃바구니가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비싸서 그렇죠.” “얼마면 돼요?  돈은 걱정말고 제일 좋고 제일 비싼걸로 골라 보내주세요.” “이곳에 제일 비싼 ‘도금화’란 꽃바구니가 있소. 하지만 1만 5000원이여서 너무 비싸…” “그럼 그걸로 하십시오.  즉시 돈을 보내겠습니다.” 조군은 전화를 끊자마자 돈 1만 5000원을 또 부쳐보냈다. 조군은 돈을 부쳐보낸후 려려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화가 련결되지 않았다. 련 며칠동안 계속 전화를 해보았지만 계속 끊어져있었다.  이때에야 조군은 려려에게 사기당했다는것을 알아차리였다.조군은 려려에게 사기당한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처음에 파출소에 제보하지 않았다. 그는 려려를 잊지 못해 그에게 메시지(短信)를 보냈다. “당신이 어찌 이럴수가 있소? 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오.  당신은 나의 감정을 희롱했고 나의 돈을 사기쳤소.  이는 비도덕적인 행위요.” 며칠후에 생각지 못했던 려려한테서 이런 메시지가 날아왔다. “조군씨, 노여워말아요. 난 확실히 당신의 감정을 리용하여 돈을 홀려냈어요.  하지만 보스에게 바치다보니 지금 그 돈이 없어요. 용서해요.” 그번 일이 있은후에도 조군은 인터넷에서 자주 려려를 만나 잡담을 했다. “려려,  난 당신을 잊지 못할것 같소.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될가?” “난 당신을 한번 사기친 나쁜 녀자인테 괜찮아요?” “모두 지나간 일인데 잊어야지.” “그럼 좋아요. 나 시간을 잡아서 한번 남경으로 놀러가겠어요.”두 사람은 이렇게 남경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번에 조군은 전번처럼 어리석진 않았다. 조군은 남경시 고루파출소에 자신이 사기당한 사실을 적발하고 그 사기군이 곧 남경에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5월 19일에 려려는 남경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공안경찰들에게 잡혔다. 알고보니 이는 한차례 인터넷혼인소개소를 리용한 사기사건이였다.  려려는 올해 23살이고 광동사람이며 이미 결혼까지 한 가정부녀였던것이다.  그는 고향사람들과 함께 사기친 사실을 탄백했다. “호씨성을 가진 고향사람이 나를 찾아와 나더러 미혼녀자로 가장하고 인터넷혼인소개소에 등록하면 청혼하는 남자들의 돈을 홀려낼수 있다고 알려주었어요. 하여 돈에 눈이 어두워 그들과 손잡고 나쁜 일을 했습니다.  꽃상점주인도 가짜였습니다.” 경찰들의 교양하에 려려는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법죄혐의자들의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경찰들은 려려의 도움으로 즉시 출동하여 광동에 가서 련속 이틀밤을 새우면서 한무리 사기집단을 짓부셨다. 조사해본 결과 이 사기집단 성원들은 모두 한고향사람들이였다. 이들은 선후하여 항주, 복건 등지에서 도합 4번이나 사기사건을 저질었는데 액수가 10여만원에 달했다.  현재 6명의 사기혐의자들이 경찰에 의해 구류되였다. 당지경찰들은 시민들에게 인터넷혼인소개소에 등록할 때 정규적인 인터넷혼인소개소인가를 꼭 확인해야 하며 경솔하게 상대방을 믿지 말아야 할뿐만아니라 맹목적으로 돈을 부치지 말고 꼭 부쳐보내야 할 경우 개인의 상세한 정보를 루설하지 말것을 신신당부했다.                                           
38    친누나에게 칼부림한 내막 댓글:  조회:3666  추천:0  2009-07-21
2009년 3월 23일 오후 3시 20분경, 북경시 해정구 모 아빠트층계에서 30살되는 한 남자가 과일칼로 누나를 여러번 찌른후 층계에 밀어뜨려 장애자로 되게 한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오누이가 왜 원쑤로 되였으며 동생은 무엇때문에 이처럼 잔인한 일을 저질렀을가?   사실은 누나가 돈에 미쳐 올케더러 녀색으로 한 관계자와 판매계약을 체결하게 한후 돈을 챙기였고 올케는 그 남자와 눈이 맞아 남편과 리혼을 했으며 내막을 알게 된 동생은 누나를 용서할수 없어 칼부림을 했던것이다.   올케를 내세워 1000만원 판매계약을 체결   2006년 11월초, 북경시 모 열공급회사 업무경리인 소효운(35살)은 한 부동산회사에서 해정구 원명원부근에 부동산을 개발하면서 대량의 난방설비를 구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소효운은 부동산회사와 판매계약을 체결하게 되면 공제금(提成)을 최소한 50만원 챙길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11월 10일 오전, 소효운은 이번 항목을 책임진 부동산회사 부총경리인 왕강의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거절을 당했다. 소효운은 “곡선사교”로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되여 왕강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통해 그의 애호와 가정배경을 알아냈다. 사실 왕강(40살)은 안해와 감정이 좋지 않아 따로 살고있었다.   어느날, 소효운은 왕강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앞세워 왕강을 술집에 청했다. 소효운은 의식적으로 왕강에게 달라붙으면서 술도 권하고 웃음도 던져주었지만 왕강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술에 취한 소효운은 돌아갈 때 올케인 정정에게 전화하여 마중오게 했다. 금방 요가(瑜伽)운동을 끝낸 정정이 하얀 운동복을 입고 자가용차를 몰고 20분후에 도착했다. 소효운은 올케의 출현으로 얼굴표정이 변한 왕강의 속심을 대번에 들여다보았다.   이튿날 소효운은 왕강에게 전화했다. “왕경리, 지난 밤 잘 주무셨나요?  이번 장사를 나에게 줘요, 네?”   “전번에도 말했지만 절대 안되오.  헌데 어제 당신을 마중온 그 녀자는 누구요? 참 이쁘던데…”   “그 녀자요? 아, 외사촌동생인데 명문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래요? 참 이쁘고 귀엽던데…흐흐흐”   사회에 물젖은 소효운은 올케를 내세워 왕강을 공략하면 꼭 성공할것이라고 생각했다. 올케 정정(27살)은 북경 모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한 장식회사에서 비서로 일하고있었다. 2년전 정정은 소효운의 동생 소건군과 결혼했다.  소건군도 명문대학에서 연구생공부를 마치고 해정구의 한 생물공정회사에서 기술원으로 있다가 1년전에 카나다로 해외연수를 떠났다. 아직 아이도 없기에 정정은 독신귀족생활을 하고있었다.   저녁에 소효운은 올케를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정정은 정색해서 이렇게 말했다. “뭐래요? 언니, 난 언니의 친올케입니다. 어찌 이럴수가?…”   “올케, 언니말 들어봐.  언니가 어찌 올케를 불속에 밀어넣겠어.  다만 그자와 차나 마시고 춤이나 추고 말동무나 해주라는거지.  더이상 깊숙이 빠지라는것도 아니야. 우리 목적이 성사되면 발을 빼면 되는거야.”   “정말 그 정도면 되는거예요?”   “되구말구, 그리고 이번 일이 성사되면 수고비로 올케에게 10만원을 줄게.”   “10만원이나?  차나 마시고 말동무나 해줄 정도라면 한번 해보죠 뭐.”   2006년 12월의 어느날, 소효운은 올케를 데리고 왕강의 사무실을 찾아가 밖에 나가 차를 마시고싶으니 사양하지 말아달라고 청들었다. 왕강은 소효운과 함께 나타난 정정을 보고 아주 흥분해하면서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소효운은 그들과 함께 차를 마시다가 일이 있다는 핑게를 대고 자리를 떴다. 정정과 왕강은 차를 마시면서 아주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정정은 돌아오자마자 시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왕강이 돈이 많아보이지만 참 불쌍도 해요. 마누라와 감정이 안좋다나. 크게 상처받았나봐요.  그리고 나와 같은 녀자를 사모한대요. 재미나죠?”   “올케, 왕강에게 희망과 환상을 주되 도를 넘지 말아야 하오. 우리 건군도 있는데 안그렇소?”   “참 언니도 걱정이 과분하시네. 날 바보취급하시네. 랑군님에게 미안한 일은 절대 없을거예요.”   그번 일이 있은후 정정은 시누이의 지시를 받고 여러번 왕강을 찾아갔다. 나중에 둘의 관계는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2007년 2월, 정정의 열정적인 공세하에 왕강은 소효운과 판매계약을 체결했다. 소효운은 53만원 공제금을 받아쥐고 정정을 찾아갔다.   “올케, 기쁜 소식이야. 이번 장사에 올케의 힘이 컸어. 이 돈은 10만원인데 올케의 몫이요. 올케와 왕강의 유희도 인젠 끝난셈이지. 이쯤에서 끝내야 하오.”   하지만 두달후의 어느날 소효운은 외국손님을 모시고 쇼핑하러 갔다가 뜻밖에도 정정이 왕강의 허리를 잡고 다정하게 쇼핑을 하는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어찌 저럴수가?!”   시누이와 올케가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   그날 저녁 소효운은 정정을 찾아가 얼굴을 붉히면서 화를 냈다.   “왕강과 관계를 끊으라고 했는데 왜 계속 그자와 래왕하오?”    “그런 일이 없어요.”   “올케는 참 뻔뻔스럽구만. 나 오늘 올케가 왕강과 함께 쇼핑하는것을 내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건군에게 미안하지도 않소? 그자와 당장 관계를 끊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건군에게 알리겠소.”   “언니가 날 질책할 자격이 있어요? 당초 언니가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찌 왕강을 만날수가 있어요? 모든것은 언니가 저지른 일이니 동생도 누나를 용서하지 않을걸요.” 소효운은 동생이 모든것을 눈치차릴가봐 두려워 카나다에 전화를 했다.   “건군아, 그동안 잘 보내고있겠지? 올케를 많이 생각해주고 종종 전화를 해주렴.”    “누나,  알았소. 젊은 나이에 그도 많이 불쌍하오. 내가 없는동안 누나가 정정을 많이 보살펴주오.”   이틀후 소효운은 과일을 사가지고 정정을 찾아갔다.   “올케, 건군이 올케를 많이 생각하더구만.  이 과일은 건군이 보낸것이요. 건군이 곧 귀국한다더구만.”    “언니, 난 왕강을 만나서부터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그는 나에게 많은것을 주었어요.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거절할수가 없었어요…”   곧 귀국하게 될 소건군을 응부하기 위해 시누이와 올케는 서로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소효운은 올케와 왕강의 관계를 동생에게 말하지 않을것이고 정정도 시누이가 올케를 부추겨 녀색으로 왕강을 공략하게 한 사실을 건군에게 알려주어선 안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10만원을 게워내야 했다.   2007년 10월, 소건군은 귀국했다. 젊은 부부가 1년만에 서로 만났지만 안해는 어쩐지 긴장해하면서 불안해했다.  그러던 어느날 소건군은 우연히 서랍에서 콘돔을 발견하고 안해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하여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안해를 불러서 따지고들었다.   “나 없는 동안에 바람을 피운거야?”   “그래요. 난 딴 남자를 사랑해요.”   리지를 잃은 소건군을 화를 내면서 정정을 패주기 시작했고 정정은 매를 맞고 집에서 뛰쳐나갔다.  소건군은 누나를 찾아가 자신이 너무도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건군아, 젊고 이쁜 녀자가 하루도 아니고 어찌 1년을 참고 견딜수 있겠니?  너 올케의 처지를 리해해줘라. 한번 용서해주렴.”   그날 밤 정정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소건군은 안해에게 할말이 있으니 속히 돌아오라고 전화를 했다.  그러자 정정은 “할말이 없어요, 우리 리혼해요”라고 랭정하게 대답했다.   내막을 알게 된 동생이 누나에게 칼부림   2007년 11월, 소건군과 정정은 리혼을 했다. 2008년 12월 8일, 소건군은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하게 정정을 만났다. 헤여진지 1년도 안되는데 정정은 많이 초췌해보이였다.   “정정이 잘 보내고있소?”   “그럭저럭 살아요. 첫발을 잘못 디디면 인생을 망치나 다름없겠죠? 그자가 안해와 리혼하려 하지 않으니 우린 갈라졌어요. 당초 당신의 누나가 아니였으면 나도 이런 신세가 아닐턴데…”   “우리의 리혼이 누나와 무슨 상관인데?”   왕강은 명예와 자식을 위해 안해와 리혼하지 않고 그냥 정정과 정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던것이다. 정정은 정부로 되고싶지 않아 그와 갈라졌으며 이 모든 책임이 시누이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던것이다. 하여 그는 시누이와 한 약속을 깨고 사실의 진상을 소건군에게 털어놓았다.   소건군은 남도 아닌 친누나가 올케를 팔아먹은데 대해 전혀 리해되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소건군은 펄펄 뛰면서 누나를 찾아갔다.   “누나가 어찌 이럴수 있단말이요? 돈이 그렇게도 욕심나서 올케를 팔아먹었소?” “뭐야? 누가 널 공부시켰는데? 그리고 당초에 돈만 벌면 더는 래왕하지 못하게 노력했어.  이렇게 되는걸 나도 원하지 않았어.  자기 안해도 단속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디와서 행패를 부려?”   이 말에 소건군은 더욱 화가 났다. 완전히 리지를 잃은 소건군은 손에 닥치는대로 과일칼을 주어들고 누나의 뒤잔등에 칼부림을 해댔다. 그리고 누나를 층계에서 밀어뜨렸다.  소효운은 층계에서 굴러떨어져 심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갔다…   심한 중상으로 장애자가 된 소효운은 병석에 누워서 눈물을 흘렸다. 이런 결과가 있을줄을 알았더라면 금산을 준다고 하여도 절대 올케를 “교역”에 내몰지 않았을것이다.   소건군은 심문을 받을 때 리지를 잃고 누나를 해친 자신의 과분한 행위를 몹시 후회했다.                                                                                                      《지음》        
37    우수생이 매음녀로 타락되기기까지 댓글:  조회:4116  추천:0  2009-06-16
산동성 하택시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여난 올해 28살의 소매는 매음죄로 철창속에 갇히였다. 소매는 비록 시골에서 태여났지만 백설같이 하얀 살결, 짙은 눈섭아래 물기를 머금은 어글어글한 눈, 미끈한 체격에 탄력있고 풍만한 몸매 등은 아주 성감적이여서 이전에 뭇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녀인이였다는것이 엿보였다. 소매는 고중시절에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 학생회 문예부장으로 활약했다. 아름답고 정파다왔던 소매가 매음을 한 죄로 철창속에 갇히였다니 동창생들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였고 그에게는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소매가 18살되는 해에 한 날강도가 그의 운명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해 가을의 어느날, 소매가 교실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저녁무렵에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갑자기 수수밭에서 한 날강도가 뛰쳐나와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허허, 참 이쁘구나. 우리 한번 놀아보자.”이렇게 말을 던진 날강도는 소매를 수수밭으로 끌고갔다. 소매는 힘껏 두손으로 떠밀고 허비고 발버둥질치면서 반항해보았으나 짐승같은 야성이 발작한 그놈을 당할수 없어 끝내는 강간당하고말았다. 사건제보를 받은 공안기관에서 강간혐의자를 나포하고 마땅한 징벌을 주었다. 소매가 수수밭에서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기 시작했다. “교정의 꽃”으로 불리우던 소매는 학교에서 강간당한 “녀건달”이라고 놀림을 당하였고 마을에 돌아와서는 “녀요귀”라고 욕을 먹었다. 지어 부모들마저 가문의 망신이라면서 소매를 랭대했다. 육체적고통과 심리적압력으로 소매는 더는 머리를 들고 학교를 다닐수 없게 되여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일자리를 찾으려고 뻐스를 타고 하택시로 왔다. 하지만 고중도 채 다니지 못한 그녀가 일자리를 찾기는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그녀는 식당복무원일이라도 하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였다.  하지만 복무원을 구하려던 식당아줌마들은 너무 이쁘고 어린 소매가 자기 남편을 꼬실가봐 걱정되여서인지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떤 식당아줌마들은 입을 비쭉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뭐? 식당복무원은 아무나 하는줄 알아요? 너무 이쁘면 안되는거지. 그 얼굴이면 노래방이나 안마원에서 아가씨노릇이나 해봐요. 사내들의 간을 잘 녹이겠네.” 소매는 바람둥이들의 노리개나 다름없는 아가씨노릇을 하기는 싫었다. 일자리를 찾느라고 이곳저곳을 헤매다보니 해는 져가는데 호주머니에 돈도 없어 먹지도 못해 배가 고팠다. 더구나 오늘밤에는 어데서 잘가고 근심되자 더럭 겁이 났다. 그녀는 기차역에 나가 대합실에서라도 자려고 기차역앞광장으로 갔다. 그녀가 식료품매대옆으로 지나가면서 너무도 배가 고파 군침을 흘릴 때였다.  어떤 중년녀성이 다가와 그녀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다. “얘, 차림새를 보니 너 시골에서 왔지?  아직도 저녁을 먹지 못했지?” 소매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왕씨라는 중년녀성이 소매를 데리고 역전앞광장옆에 늘어선 한 음식점에 가서 료리에 국밥을 사주었다. 그리고나서 왕씨는 자아소개했다. “얘, 난 려관방 주인이다.  우리 려관에서 복무원일을 할 생각이 없니? 밥도 공짜고 잠자리도 공짜야. 나 지금 복무원을 모집하는중이야.” 소매는 오늘 참 좋은분을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두말없이 그 주인녀인을 따라갔다.려관에 도착하자 녀주인 왕씨는 소매더러 입던 옷을 벗어던지고 옷을 갈아입으라면서 옷꾸레미를 던져주었다.  소매가 옷꾸레미를 헤쳐보니 짧은 팔소매적삼에 짧은 치마였는데 아주 성감적이였다. “아니? 내가 어찌 이런 옷을 입어요? 난 이런 옷을 입지 못하겠어요. 싫어요.” 그러자 왕씨는 이렇게 말했다. “뭐?!  여긴 너의 집인줄로 생각하느냐? 여긴 영업집이야. 촌티나는 그 옷을 벗어던지고 이런 옷을 갈아입어야 해.  살결이 보이는 하얀 팔로 사내들의 팔이나 몸을 툭툭 건드리거나 팔을 끼면서 아양을 부리면서라도 려관에 끌어들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밥을 먹고 살수 있단 말이다.” 소매는 이런 옷을 입기 싫었지만 갈곳도 없는지라 왕씨네 려관에 남게 되였다. 소매는 팔소매 짧은 적삼에 짧은 치마를 입고 기차역에 나가 손님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나게 끌어들여보았자 숙바료 10원에서 소매에게는 2원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어떤 손님들은 소매가 아가씨인줄로 알고 흐뭇하게 따라왔다가 흥이 깨져 돌아갈 때도 있었다. 소매는 며칠동안 애나게 손님을 끌어들이면서 달아다니다가 맥이 풀려 물앉고말았다. 이때라고 생각한 왕씨는 소매를 불러놓고 이렇게 구슬렸다. “애, 그동안 애를 썼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벌겠으면 모셔온 손님방에 들어가 말동무라도 하렴. 손님들이 흥이 나면 많은 팁을 줄것이야. 팁을 벌어야 큰돈을 벌수있다. 지금처럼 손님만 끌어들여서야 얼마나 벌겠니. 안그래?”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매는 손님의 말동무나 하고 돈을 버는것이 꿩먹고 알먹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소매는 기차역광장에서 아주 우연히 한 대만손님을 만났다. 대만손님은 그녀를 보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참말 이쁘군요.  그 려관에 아가씨처럼 이쁜 아가씨가 많은가요?” 소매는 돈냄새나는 큰 고기를 놓쳐버릴수 없다고 생각하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추파를 보냈다. “아저씨, 참 눈치 빠르네요. 있고말고요. 이쁜 아가씨도 있고 우아하고 조용한 단칸방도 있어요.”그러자 대만손님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그녀를 따라 려관에 왔다. 대만손님은 려관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소매를 와닥닥 안아 쓰러눕히더니 겁탈하려고 달려들었다. 생각지 못했던 대만손님의 행동에 소매는 와뜰 놀랐다. “왜 이래요? 난 복무원이지 몸파는 기생이 아니예요.” 소매는 음탐한 눈길로 자기를 노려보는 이자와 수수밭에서 자기를 강간한 날강도가 겹쳐보이면서 몸이 으스스 떨렸다. 이때 문이 열리더니 왕씨와 몇몇 남자들이 뛰쳐들어왔다. 왕씨는 노기등등하여 이렇게 입을 열었다. “옳지, 잘하는구나. 손님과 말동무를 하라고 하였지 누가 이런짓을 하라고 했어? 이게 무슨짓이냐? 그리고 손님은 대만에서 왔다죠? 꼴보기 좋네. 대륙에 놀러 왔다가 감옥생활까지 하게 되여서. 당장 공안기관에 적발하겠어.” 이때 대만손님은 눈치를 차리고 딸라 몇장을 왕씨의 손에 찔러주고는 귀에 대고 뭐라고 쑤군덕거리였다. 그러자 왕씨는 당금 해시시해서 소매를 불러내여 돈 200원을 꺼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저 손님은 참 좋은분이야.  통이 크고 돈도 있어보여. 계속 ‘말동무’나 해주렴, 팁을 넉넉히 줄거야.” “저 손님이 날 겁탈하려고 드는데? 난 무서워요. 그리고 난 그런 일은 절대 안해요.” “뭐? 니가 감히 거절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매음했다고 경찰에 알리겠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매는 경찰에 알리는것이 무서웠다. “제발 경찰에 알리지 말아요. 난 아직 어려서 무서워요.” 소매는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손님방에 들어가 이말저말 하면서 말동무를 하였다. 대만손님은 아까와는 달리 아주 점잖게 행동했다. 그는 커피를 한잔 마시자면서 자기 가방에서 손수 커피를 꺼내 타서 그녀에게 권했다. 소매는 그것이 함정인줄도 모르고 대만손님과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어느사이에  커피잔을 굽냈다. 순간 머리가 뗑해나고 눈앞이 아찔해나더니 저도 몰래 스르르 쓰러졌다. 대만손님은 쓰러진 소매를 안고 침대로 올라갔다. 소매가 밤중에 깨여나보니 자기가 글쎄 대만손님의 품에 안겨있었다. 소매가 흐느껴 울자 대만손님은 소매를 보고 빈정거리며 달래였다.“울긴 왜 울어? 보아하니 숫처녀도 아니던데? 뭘 그리 슬프게 울어. 그까짓 정조가 다 뭐야? 이 세상에 돈이 최고지. 나 마님 몰래 너에게 팁을 넉넉히 줄거야.” 소매는 처음으로 대만손님이 던져준 100원짜리 돈을 쥐여보았다. 소매는 이미 몸을 더럽힌바하고는 이튿날부터 기차역광장에 나가 사내들을 려관에 끌어들여 더러운 교역을 벌려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얀 살결, 미끈한 체격에 용모까지 예뻐서 소매에게 달려드는 사내들이 많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라고 소매가 어느날 밤에 한창 손님과 한침대에서 뒹굴고있을 때 경찰들이 뛰여들어왔다. 녀주인 왕씨는 자기는 말동무를 하라고 하였지 매음하라고 한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였다. 한때 이쁜 용모에 공부도 잘해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소매는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법을 어기고 더러운 돈을 번 매음녀로 전락되여 사람들의 질책과 비난을 받게 되였다. 철창속에 갇힌 소매는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슬프게 울었다. 그녀는 녀자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품을 팔아 한푼두푼 모아야지 절대 자기처럼 법을 어기고 몸을 팔아 더러운 돈을 벌지 말라고 자매들에게 충고했다.                                                    《법제일보》    
36    농촌녀성 혼인을 미끼로 수만원 협잡 댓글:  조회:3919  추천:0  2009-06-09
돈화시 한장향 해흥촌의 농촌녀성 리국화는 혼인을 미끼로 남자친구의 돈 몇만원을 협잡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2007년에 리국화는 가짜이름으로 방송국에 구혼광고를 냈다. 최씨성을 가진 남자는 구혼광고를 통해 리국화를 만나본후 첫눈에 정이 들었다. 후에 한국으로 로무송출을 나간 최모는 한국에서 번 돈을 리국화에게 부쳐보냈다. 그러나 리국화는 최모 몰래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계속하여 최모의 돈을 협잡했다.   올 4월 13일, 홍석향 림강촌 농민 최모는 돈화시공안국 민주파출소에 찾아와 자기와 사귄지 3년이 되는 약혼녀 리미란이 가출했다고 신고했다. 경찰은 조사를 거쳐 리미란이란 이름은 가짜이며 혼인을 핑게로 재물을 협잡했다는 사실을 료해했다.   경찰은 여러번 연길 등지로 가서 조사한 결과 리미란의 본명은 리국화인데 몇년전 전남편과 리혼한후 지난해말에 박모와 결혼했으며 집은 연길시 북산가에 있다는 사실을 료해했다. 4월 20일 경찰들은 리국화의 집에서 그녀를 붙잡았다.   조사에 따르면 2007년 리국화는 혼인광고를 통해 최모를 알게 됐고 최모가 한국으로 나간후 줄곧 전화련계를 했으며 최모가 부쳐보낸 돈을 받았다. 지난해말에 리국화는 박모를 알게 됐고 후에 결혼했으나 최모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올 3월 5일, 리국화는 최모의 신임을 얻기 위해 둘째딸과 함께 승용차를 몰고 장춘으로 가 귀국하는 최모를 맞이했으며 그가 벌어온 돈 1만원을 협잡했다. 4월 13일, 리국화는 또 최모로부터 인민페 1만 6000원과 1000딸라를 협잡한후 종적을 감추었다.   경찰에 붙잡힌후 리국화는 최모에게 1만원을 돌려주었다.   “랑만적인 사랑”에 빠진 녀공무원   올해 40살인 강림은 안휘성 안경시 모 기관에 출근하는 공무원이며 남편은 연해지구 모 대학교 교원이다. 그들에게는 총명하고 이쁘게 생긴 초중을 다니는 딸이 있다.  2006년 8월의 어느날, 강림은 망강현법원 원장이라고 자칭하는 왕민을 알게 되면서부터 몰라보게 변했으며 “랑만적인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것이 왕민이 파놓은 “함정”이였다는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왕민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다   강림은 남편이 연해지구에서 사업하고 딸이 외지에서 공부하기에 혼자 있는 밤이 되면 너무 적적하여 심심풀이로 마작을 놀기 시작했다. 강림은 마작판에서 여러 이성친구를 사귀였는데 그속에 영준하게 생긴 왕민도 들어있었다.   왕민은 강림보다 10살 어리였는데 망강현법원 원장이라고 자아소개했다. 강림은 전도가 유망한 왕민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이날도 여느때와 같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강림이 마작을 놀려고 활동실을 찾아갔다. 하지만 늘 먼저 와서 강림을 기다리던 왕민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 활동실 주인이 강림을 보고 왕민이 차에 치여서 올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근 한달간 강림은 하루도 빠짐없이 늘 전화로 왕민에게 안부를 전했으며 치료를 잘하고 속히 병석에서 일어나라고 고무격려했다.   어느날 저녁, 강림이 너무도 심심하여 TV를 보고있는데 왕민한테서 전화가 왔다. “누나, 그동안 잘 지냈소? 나 누나가 보고싶고 또 할말이 있으니 급히 만나야 하오. 강변에서 기다리겠소. 속히 나와주오.” 강림은 왕민의 전화를 받자마자 약속한 지점으로 달려갔다. 강림이 약속한 지점에 도착하니 왕민이 이미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있었다. 왕민은 만나자마자 강림을 보고 자기는 리혼하려 하는데 마누라가 동의하지 않아 크게 싸웠다고 말하며 살멋이 없어서 당장이라도 죽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다고 털어놓았다. 왕민은 또 “태호현에 불쌍한 한 녀자애가 있는데 난 그애를 도와주는것이 소원이였소. 나에게 지금 1만원이 있는데 그 애가 고중공부까지 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했소. 하지만 난 살 생각이 없으니 누나가 날 대신해서 이 일을 맡아주었으면 하오. 그러니 누나의 단위주소와 이름을 나에게 상세하게 알려주오. 내가 돈 1만원을 부쳐보내겠소.”라고 말했다.   강림은 자신의 이름과 단위주소를 왕민에게 알려주고 바보같이 왜 죽을 생각을 하냐고 질책하면서 곤난이 있으면 자기가 나서서 도와주겠으니 그런 생각을 버리라고 권고했다.   “사랑”에 빠져 30만원을 잃다   강변에서 서로 갈라진후 강림은 왕민이 돈을 부쳐보내겠다고 한 약속을 믿었지만 종무소식이였다. 그러던중 어느날 왕민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생각밖에 강림을 사랑한다는 전화였다. 처음에 강림은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지만 왕민이 끈질기게 달라붙으면서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결국 자신보다 10살 어린 “법원 원장”을 “사랑”하게 되였다.   후에 강림은 “사랑”에 빠져 왕민에게 몸까지 맡겼고 그의 요구라면 뭐든지 다 들어주었다. 서로 사귄지 1년남짓한 동안에 왕민은 12번에 거쳐 강림한테서 돈 29.3만원을 홀려냈다.   왕민이 강림한테서 처음으로 돈을 “빌린”것은 2006년 12월의 어느날이였다. 당시 왕민은 강림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위가 몹시 아파 병원에 가서 의사를 보였더니 위암인것 같다고 하면서 큰병원에 가 보이라고 하더구만. 하지만 나에게 그만한 돈이 없소. 누나가 먼저 나에게 돈을 꿔줄수 없겠소?”   강림은 위암이란 말을 듣고 두말없이 4000원을 내놓으면서 어서 합비로 가서 병을 보이라고 권고했다. 합비에서 돌아온 왕민은 강림을 찾아갔다. “고맙소 누나, 위암이 아니고 그냥 보통 위병이라오. 누나가 아니였으면 나 자살했을지도 모르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그번 일이 있은후 왕민은 달마다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강림한테서 돈을 “빌려”갔다. 자신이 병에 걸렸다든지 누이동생이 병이 위중한다든지 혹은 집을 사려는데 급히 돈이 수요된다든지 갖가지 구실을 대여 돈을 빌려갔는데 가져간 돈이 도합 29.3만원에 달했다. 제일 많이 꿔갈 때는 6만원이였다.   후에 강림은 돈이 급히 수요되여 왕민을 찾아가 빌려간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생각밖에 왕민은 돈이 없다고 딱 잡아떼면서 3000원밖에 내놓지 않았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왕민은 강림한테서 사기친 돈으로 도박빚을 갚고 나머지 돈은 탕진해버리였다.   “법원 원장” 원래는 사기범   왕민은 강림한테서 돈을 “빌릴” 때마다 차용증서를 꼭꼭 쓰군 했는데 이런 수단으로 강림의 신임을 얻었던것이다. 2008년부터 강림은 더는 꿔줄 돈이 없다면서 예전처럼 잘 꿔주지 않았다. 이때 왕민은 강림을 죽이거나 가족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둘의 관계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강림은 자신때문에 가족이 피해를 보는것이 두려웠고 안해가 밖에서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이 터지면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남편의 심장병이 발작할가봐 무서워서 돈을 “꿔”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때에야 강림은 왕민에게 잘못 걸려들었음을 알게 되였다. 하지만 그녀는 사업때문에 왕민의 신분을 밝힐 시간마저 없었다.   올해 6월 17일, 한 친구가 강림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강림아, 네가 말하던 그 사람이 법원사람이 아니라더라. 네가 그자한테 속히운것이 분명하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때에야 강림은 모든것을 알아차리고 남동생에게 자신이 사기군에게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나서 왕민에게 전화하여 돈을 가져가라고 전했다. 저녁 20시 30분경에 왕민이 약속한 지점에 나타났다. 하지만 전과 달리 강림이 혼자 온것이 아니라 남동생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셋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거리를 거닐었다. 세 사람이 안경시공안국 대남문파출소를 지날 때 강림이 남동생에게 눈치질했다. 왕민이 상서롭지 못함을 느끼고 도주하려 할 때 두 형제가 달려들어 왕민을 제압하고 파출소로 끌고갔다.   경찰들의 심문과정에 인증물증앞에서 왕민은 모든것을 탄백했다. 왕민은 올해 32살이며 동성시 교외의 농민이고 사기군이였다. 2006년 1월 6일, 왕민은 한가하게 거리를 거닐다가 우연하게 경관증을 주었다. 그는 주은 경관증을 리용, 경찰로 가장하고 직업을 소개해준다는 구실로 선후하여 다른 사람들한테서 6만여원을 사취했다. 왕민은 사기죄로 유기도형 1년 6개월 집행유예2년 판결을 받았다. 집행유예기간 왕민은 안경에서 일자리를 찾아 일했으며 안해와 함께 안경에서 생활했다.   6월 25일, 왕민은 사기죄로 형사구류되였다.                                                             《법제일보》      
35    “내부규칙”의 악과로 인생을 망친 연출 댓글:  조회:4133  추천:0  2009-06-08
2008년 3월의 어느날, 북경 모 텔레비죤방송국의 유명한 연출 하수성이 강간혐의범으로 체포되였다.  이번 일로 하수성은 단위에서 제명당했고 안해 류화도 남편을 절대 용서할수 없다면서 리혼을 제기했다…   인테넷에서 미녀자매를 만나다   북경의 한 간부가정에서 태여난 하수성은 1999년에 중국매체대학 신문학부를 졸업한후 북경 모 회사에서 선전간사로 있다가 2003년에 북경 모 텔레비죤방송국에 초빙되여 연출로 일했다.   2004년에 하수성은 은행직원 류화를 만나 결혼했으며 이듬해 귀여운 아들을 낳아 키웠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 있고 행복한 가정이 있음으로 하여 하수성의 생활은 안정되고 충실했다. 하지만 이 모든것이 “단풍잎”의 출현으로 산산쪼각이 날줄이야.   “단풍잎”의 본명은 호려원이고 올해 23살이며 광서 계림사람이다. 호려원은 북경 모 중점대학 외국어학부를 졸업하고 북경의 모 번역회사에 취직했다. 하수성은 “버들가지”라는 아이디로 자주 인터넷에 올라 채팅을 했다. 어느날 “버들가지”와 “단풍잎”이 우연히 만나 재미나게 잡담을 했다. 첫 대화가 있은후부터 하수성은 매일 잠들기전에 “단풍잎”과 잡담을 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2007년 10월의 어느날, 하수성은 꿈속에서 그리던 “단풍잎”을 직접 만나고싶어 전화를 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커피점에서 만났다. 호려평은 “버들가지”가 텔레비죤방송국 연출이라는 말을 듣고 아주 흥분해면서 자신에게 녀동생이 있는데 도와달라고 청을 들었다. “광동 모 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하는 녀동생이 있는데 대학을 나오면 나를 찾아올것이예요. 녀동생을 많이 도와주세요.” 2008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또 인터넷에서 만났다.   “단풍잎”: “녀동생을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많이 관심해줘요.”“버들가지”: “당신 중매를 서는거요? 아니면 나에게 아가씨를 소개해주는거요?”“단풍잎”: “참. 롱담도 과하시네. 나의 동생이면 당신의 동생이 아닌가요? 안그래요?”“버들가지”: “무슨 뜻이죠? 그가 나의 처제란 말이요?”“단풍잎”: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 그럼 언제 날 안해로 삼겠어요? 그날이 오길 기다리겠어요.”   언니가 “내부규칙”을 허락   2008년 2월 14일, “단풍잎”과 “버들가지”는 인터넷에서 또 만났다.   “단풍잎”은 아주 정색해서 말했다. “하선생님, 이전의 말은 모두 롱담이였어요. 이번에 정식으로 들어주세요. 현재 광동의 모 중점대학을 다니고있고 녀동생이 아무리 우수하다 할지라도 북경에서 발전하려면 어림도 없죠. 실습할 단위조차 찾기 힘든 형편입니다. 동생의 취직문제에서 선생님이 많이 신경을 써주세요. 만약 선생님이 출근하는 텔레비죤방송국에 취직할수 있다면 더욱 좋겠어요. 그럴수만 있다면 우리 자매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꼭 보답하겠어요.”   그러자 “버들가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텔레비죤방송국에 취직하기 쉽지 않소. 나에겐 그런 권리가 없소. 하지만 난 녀동생을 우리 부서에 와 실습할수 있도록 추천할수 있소. 실습이 끝나면 남아서 일할수 있는지는 모르겠소. 녀동생의 개인서류를 먼저 나에게 보내주오.”   사실 그동안 호려화는 자신의 개인서류를 여러 매체에 올렸지만 와서 면접보라는 단위가 하나도 없었다. 하여 그녀는 광서로 돌아가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언니가 북경에 남아 서로 의지하면서 살고싶다고 하기에 꾹 참고 기다리던 참이였다.  “단풍잎”은 녀동생의 개인서류를 보낼 때 일부러 녀동생의 생활사진 여러장을 더  보냈다.   호려화의 개인서류를 받아쥔 하수성은 멍해졌다. 광서에 이처럼 잘 생긴 미녀가 있다니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하수성은 엉뚱한 생각까지 하면서 호려원에게 전화했다. “녀동생이 당신처럼 참 예쁘군요. 하지만 당신처럼 세상물정을 아는지는 모르겠소.”   호려원은 하수성의 말뜻을 알아차린듯 이렇게 말했다. “하연출님, 당신이 ‘내부규칙’을 말하는것은 아니겠죠? 녀동생은 이름있는 ‘교정의 꽃’이고 원근에 소문난 미녀입니다. 왜요? 마음에 드나보죠?”   그동안 하수성의 안해 류화가 부처장자리 경쟁준비에 눈코뜰새 없이 바삐 보내는 바람에 젊은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한지도 오래되였다. 정력이 왕성한 젊은 남자는 예쁜 녀자의 사진을 보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붉히였다…   2008년 2월 27일 저녁 10시, 하수성이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과 보모는 이미 자고있었으며 안해는 귀가하지 않았다. 이때 하수성의 머리속에 호려화의 이쁜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호려화가 생각나 짤막한 메시지(短信)를 보냈는데 인차 회답이 왔다. “하선생님, 전 지금 인터넷에 올랐어요. 아이디가 ‘정조옥’이예요. 선생님을 기다리고있던 참이였어요.”   “버들가지”: “아이디 참 재미있는데. 누굴 위해 정조를 지키려 해요?”   “정조옥”: “난 자신을 위해 정조를 지키고싶어요. 마음에 드는 백마왕자가 나타나면 그에게 활짝 열어주겠어요.”   “버들가지”: “당신은 참 훌률하고 이뻐요. 난 당신을 우리 텔레비죤방송국에 와서 실습할수 있도록 추천하겠소. 만약 모든것이 잘 풀리면 텔레비죤방송국에 남게 될지도 모르오.”   “정조옥”: “너무 고마와요. 소녀라지만 은혜를 갚을줄 몰라서야 되겠어요?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을거예요.”   은혜를 꼭 갚아주겠다고 하니 하수성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내부규칙”착각으로 인생을 망치다   2008년 3월 13일 저녁, 하수성은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후 인터넷에서 호려원을 만났다. “버들가지”: “녀동생의 일은 잘 되여가고있소. 하지만 준비를 잘하라고 전하오.” “단풍잎”: “준비요? 무슨 준비죠? 혹시 ‘내부규칙’말인가요?” “버들가지”: “참, 별소릴 다하네. 상대방은 당신의 친동생이란걸 모르오?” “단풍잎”: “난 동생을 도와주고있어요. 그런데 동생이 아직 철들지 못해서 많이 가르쳐줘요. 그럼 둘이 래일 만나세요. 내가 동생에게 전하겠어요.”   3월 14일 오후 5시, 하수성은 퇴근을 앞두고 안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오늘 저녁 일있어 좀 늦을것 같구만. 그런줄로 알고 먼저 휴식하오.”   하수성과 호려화는 약속한 지점에서 만났다. 직접 만나고보니 호려화는 사진보다 더 예뻤다. 하수성은 가슴이 쿵쿵 뛰였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료리를 청한후 호려화에게 양주를 부어주었다. 술이 서너잔 돌아가자 하수성은 말이 많아졌다. 그는 대학교시절의 자랑거리와 련애경력을 늘여놓기 시작했는데 대학교때에 많은 녀자들이 줄지어 따랐다고 자랑했다. 그는 또 “텔레비죤방송국에 취직하게 되면 평생 평온한 생활을 할것이고 친척친우 이웃까지도 당신때문에 자호감을 느낄것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호려화는 언니와 달리 그냥 조용하게 그의 말만 듣고있었다. 하수성이 흥분되여 호려화의 손을 잡으려 하자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피하군 했다. 식사후 하수성은 호려화를 집까지 바래주겠다며 그녀를 차에 태웠다. 집근처에 도착하자 호려화는 미안해하면서 인젠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하수성은 언니의 부탁이라면서 끝까지 바래주겠다고 우기였다. 호려화가 집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하수성도 따라들어서서는 문을 안으로 잠그어버렸다. 상서롭지 못함을 느낀 호려화가 막 집문을 나서려는데 하수성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호려화가 안된다면서 견결히 반항하자 하수성은 화를 내면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어? 그런데 넌 왜 거절하는거야?”   “뭐요? 언닌 절대 그럴수 없어요. 난 자신의 정조와 절대 교역을 하지 않아요.”   하수성은 굶주린 승냥이처럼 나약한 호려화에게 덮쳐들었다… 경황중에 호려화는 과일칼을 집어들고 하수성의 목을 찌르려 했다. 하수성은 겁을 먹고 호려화의 몸우에서 내려왔다…   호려화는 통곡했고 하수성도 제정신이 들었다. 하수성은 옷을 주어입고 도주하려다가 이대로 갈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호려원에게 전화하여 사실경과를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속히 와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호려화도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집에서  폭행당했으니 즉시 경찰에 제보한후 이곳으로 속히 오라고 전했다.   북경의 모 증권회사에서 실습하고있는 남자친구와 호려원 그리고 경찰들이 거의 동일한 시간에 도착했다. 도주하려던 하수성은 사회구역 대문어구에서 경찰에게 덜미를 잡혔다.   언니 호려원은 조사를 받을 때 이렇게 실증했다. “나는 하수성과 채팅을 할 때 과분한 롱담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롱담에 불과합니다. 내가 어찌 친동생더러 ‘내부규칙’을 범하게 하겠어요? 하수성처럼 고급교육을 받은 지명인사가 이런것이 법을 어기는 행위임을 어찌 모를수 있단 말입니까?” 2008년 7월 8일, 하수성은 강간죄혐의로 체포되였으며 단위에서 제명당했다. 안해도 전혀 용서할수 없다면서 리혼했다…      《지음》    
34    운남녀성 연변까지 유괴 댓글:  조회:4113  추천:0  2009-05-26
일전에 안도현경찰은 만리길을 넘나들며 특대녀성유괴사건을 해명하여 범죄혐의자 3명을 나포하고 유괴된 녀성 1명을 구출해냈다.   안도현 량병진 모 촌 농민 장씨의 외아들은 나이 40살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였다. 장씨는 사처에 수소문하여 며느리감을 물색하였다. 그러던 2007년 3월, 장씨는 이웃의 소개로 안도현의 리씨녀성을 알게 되였다. 리씨는 2만 5000원만 주면 장씨의 아들에게 색시감을 소개해주겠다고 답복하였다.   비록 년간수입이 몇천원밖에 안되는 장씨네 가정이였지만 40살 넘은 아들이 장가들면 대를 이을수 있다는 생각에서 돈을 꾸어서라도 며느리를 들이기로 결정하였다.   2007년 9월 8일, 리씨와 리씨의 남편 왕씨는 소옥이라고 부르는 녀성을 장씨집에 데리고왔다. 소옥에게 흡족해난 장씨네는 당장에서 2만 5000원을 리씨부부에게 주었고 이튿날에 소옥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아들에게 결혼식을 치러주었다.   며느리 아기 안고 도망   하지만 장씨네가 생각지도 못한것은 2년후의 어느날 소옥이가 7개월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을 안고 갑자기 가출한것이다. 장씨부자는 며칠동안 찾아헤맸지만 결국엔 찾지 못하였다. 온집 사람들은 뒤늦게야 혼인사기를 당했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남보기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장씨일가는 꾹 참고 소문내지 않았다. 장씨가 화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하루종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장씨의 아들은 파출소에 신고를 하였다.   녀성유괴사건에 련루돼   신고를 받은 안도현공안국에서는 녀성유괴사건전문조사조를 무었다. 조사를 거쳐 전문조사조에서는 안도현 명월진의 리씨녀성과 남편 왕씨에게 중대한 혐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금년 4월 11일, 안도경찰은 주요혐의자인 리씨와 왕씨가 운남성에 은닉해있다는 제보를 받게 되였다. 경찰은 즉시 항공편으로 운남에 가서 당지 경찰의 배합하에 4월 13일 리씨와 왕씨를 운남성 곤명에서 나포하였다.   심사를 거쳐 리씨와 왕씨는 2007년에 운남사람 리안에게 선후로 각각 2만원과 2만 5000원을 내고 2명의 녀성을 안도현 량병진으로 유괴해다 팔아넘겨 2만 5000원을 챙긴 범죄사실을 탄백하였다.   4월 14일, 범죄혐의자 리안도 운남성 대리에서 나포되였다. 리안이 승인한데 따르면 2007년에 선후로 1만원과 1만 5000원의 가격으로 2명의 운남녀성을 유괴해다가 리씨에게 팔아넘겨 1만 5000원을 챙겼다.   일자리구실로 유괴   경찰이 조사한데 따르면 2007년 8월에 운남소녀 소운과 소옥은 리안의 소개로 안도현의 리씨부부를 알게 되였고 리씨부부는 직업을 소개해준다는 구실로 안도까지 유괴해다가 장가들지 못한 농촌의 로총각들에게 팔았던것이다. 이미 성공적으로 구출된 소운은 경찰에 의해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갔고 소옥의 행방은 경찰이 찾고있는중이다.   왕씨와 리안은 이미 구속되였으며 리씨는 임신하였기에 불구속립건되였다.   《길림신문》      
33    안해탓에 들통난 시당위부서기의 비리 댓글:  조회:4012  추천:0  2009-05-26
2009년 4월중순, 하남성규률검사위원회는 2008년 성내정청장급이상 간부들에 대한 조직심사결과를 공포했다. 공포문에는 원 정주시당위 부서기 겸 규률검사위원회 서기 왕치업의 당적을 제명하고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하며 비법적으로 소득한 돈 387.2만원을 법에 따라 몰수하고 국고에 바친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 핵폭탄급사건은 정주시뿐만아니라 하남성 나아가서 전중국을 놀래웠다.   왕치업이 권력을 람용하여 뢰물을 받아먹은 사건이 밝혀진것은 아주 희극적이였다. 왕치업의 마누라가 8개 저금통장이 들어있는 차통을 페품으로 처리하였다. 2명 페품수매자는 차통속에 들어있는 8개 저금통장을 발견하고 이 기회에 왕치업을 협박해서 돈을 갈취하려 했다. 제보를 받은 경찰들은 즉시 행동하여 이 2명 페품수매자를 나포했다. 후에 두집 페품수매자가족들이 나서서 사건의 진상을 여러 보도매체에 반영하여 해당부문의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왕치업의 부패사건은 극적으로 적발되였다.   “친절한” 안해 협박자들에게 단서 “제공”   2007년 8월의 어느날, 하남성 신밀시에서 온 농민 장강과 조룡은 예전처럼 삼륜차를 끌고 페품을 수매하고자 정주에 왔다. 두 사람은 시정부가족들이 모여 살고있는 백화화원아빠트단지로 왔다. 헌데 보안일군이 대문을 지키고있었다. 두 사람은 보안일군의 호주머니에 고급담배 두갑을 넣어주고는 안으로 들여보내달라고 사정했다. 보안일군은 “이곳은 시정부간부가족들이 살고있는 단지여서 눈치있게 행동해야 하오.”라고 말하면서 들여보냈다. 때마침 왕치업의 마누라가 창문을 열고 집안청소를 하고있었다. 그가 무심결에 밖을 내다보니 장강과 조룡이 페품을 수매하고있었다. 그녀는 장강과 조룡에게 손을 저으면서 “이봐요, 5층으로 올라와요. 페품들이 많으니 모두 가져가요”라고 소리쳤다.   장강과 조룡이 5층에 올라오니 왕치업의 마누라가 페품이라며 내놓은 물건들이 한아름이 되였다. 그속에 낡은 옷들도 있었고 한번도 입어보지 않은 상표까지 달려있는 새옷들도 있었다. 장강은 놀라면서 물었다. “이 모든것을 페품으로 처리하려 합니까? 모두 새것으로 보이는데 페품으로 처리하기엔 너무 아까운것 같은데요?” 그러자 왕치업의 마누라는 “가져가기 싫으면 그만두세요. 그 주제에 무슨 잔말이 그리도 많아요?”라고 화를 냈다. 장강은 “노여워마십시오. 우리야 이런 물건들을 가져가면 더없이 좋지요.”라고 말했다. 장강과 조룡은 페품들을 종류별로 정리하여 저울에 달아보는 일을 2시간만에 끝마쳤다. 두 사람은 페품을 삼륜차에 다 싣고는 돈 200원을 주고 떠나려 했다. 이때 왕치업의 마누라가 장강을 보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객실에 들어가 오래된 차통( 茶)을 가져왔다. “두 사람 오늘 수고가 많았어요. 이 차는 오래 묵은 차라지만 고급차여서 맛이 좋아요. 당신들이 가져다 맛보세요. 차가 싫으면 차통을 페품으로 수매해도 좋아요.”   장강은 미안해하면서도 10전짜리 엽전 3개를 주고는 그 차통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오후 신민에 돌아온 장강과 조룡은 정주에서 수매한 페품들을 페품수매소에 날라갔다. 장강은 왕치업의 마누라에게서 받은 그 차통을 페품수매소 주인 리봉에게 주면서 “고급차요. 한번 맛보시오. 우리같은 촌놈들에게 이런 고급차는 필요없소. 돈이 제일 좋소.”라고 말했다. 그동안 리봉은 페품을 수매하면서 많은 일들을 겪여보았다. 차통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리봉은 뭔가 의심스러웠다. 가위로 차통의 밑굽을 베자 밑굽에 접어놓은 저금통장이 들어있었다. 모두들 놀라서 소리쳤다. “저금통장이다. 차통에 저금통장이 들어있었구나.”   워낙 차통밑굽에 8개의 저금통장이 들어있었던것이다. 저금통장의 주인은 왕치업이고 금액은 모두 합쳐 200여만원이였다. 하지만 이들을 놀라게 한것은 저금통장의 주인이 당시 정주시당위 부서기 겸 규률검사위원회 서기 왕치업의 이름과 일치하였던것이다.   극적으로 뢰물수수사건 들통   세상물정을 많이 겪은 리봉은 저금통장에 들어있는 금액과 저금통장을 감춘 방식을 보면 임자는 일반사람이 아닐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이 기회에 왕치업한테서 많은 돈을 우려내자고 합의를 보았다. 리봉 등은 정주에서 도매장사를 하는 로건평을 찾아갔다. 로건평은 왕치업의 아들과 친분이 있었다.   로건평 등은 처음에 “수고비” 50만원을 요구했으나 왕치업측에서 동의하지 않았다. 후에 여러번 담판을 거쳐 30만원으로 정했다. 쌍방은 한 커피점에서 만나 저금통장과 현금을 교환하기로 약속했다. 그날 저녁 8시경에 로건평 등 5명이 약속한 커피점에 나타났다. 사전에 이곳에 매복하고있던 경찰들이 즉시 조치를 취해 로건평 등을 “공갈사기죄”로 나포했다.   로건평 등 다섯명이 “공갈사기죄”로 나포되였다는 소식을 접한 가족들에서는 리해되지 않았다. 가족들은 보도매체에 사실의 진상을 공개하여 “피해자”를 구출하려 했다. 가족들은 당지 보도매체뿐만아니라 신화사 하남지사매체에 고소장을 올려보냈다. 신화사 하남분사에서는 내부참고의 방식으로 이번 사건을 공개하여 해당부문의 고도로 되는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하여 권력을 람용하여 많은 뢰물을 받어먹은 왕치업의 부패사건이 공개처리되였다.   《전강석간》     
32    남편의 검은색가방 댓글:  조회:4688  추천:0  2009-05-25
방을 따로 쓰자는 남편의 전격적선언은 리나에게 실로 충격적이였다. 결혼후 지금까지 리나의 머리냄새를 맡아야 잠이 온다던 남편이였다. 그런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방을 따로 쓰자니 이건 뭐가 잘못되여도 크게 잘못된 일이였다.   그동안 사실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는 구실로 남편에게 소홀한 점도 없지 않았다. 아침저녁 꾀죄죄한 몰골로 대문을 나서는 남편이 안스러운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야 한다는 구실로 사사건건 남편의 일상사에 제동을 걸며 꾸려온 살림이였다.그덕에 요만한 집 한채나마 장만할수 있었다고 위안해보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개운치 못한것도 사실이였다.   여하튼 남편의 돌연적인 행동은 리나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렇다면 혹시 남편에게 새로운 녀자라도 생겼단 말인가? 그러나 리나는 인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새로운 녀자를 거느리려면 환한 용모, 넉넉한 지페, 녀자를 꼼짝 못하게 할 기술 등이 있어야 하는데 리나가 보기에 남편은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그 어느 한가지도 해당사항에 없었다.   그날 아침의 선언이후 가뜩이나 말수 적은 남편이 저녁을 먹기 무섭게 서재를 겸한 자기방에 밤새도록 들어박혀있는것이였다. 그렇다고 잠을 자는것도 아니였다. 남편방의 불은 거의 밤새도록 켜져있었다. 이런 불안한 날들이 보름째로 접어든 어느날, 리나는 뜻밖에도 남편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것은 어느날부터인가 남편의 손에 들린 검은색가방이였다.방을 따로 쓰자고 제의한 다음날부터 남편은 검은색가방을 신주모시듯 가지고다녔다.   가방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가? 리나는 몹시 궁금했다. 어느날, 리나는 남편이 화장실로 간 틈을 타서 남편의 그 검은색가방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5개의 사진첩이 들어있었는데 펼쳐보니 리나가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여태까지 찍은 사진들이 년대순으로 배렬되여있었다. 어떤 사진은 리나 자신도 잃어버려 못보던 사진이였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돌아온 남편을 보고 물었다.   “당신, 이 사진들을 어디서 모았어요?”   “당신이 시집오기전의 사진은 내가 장모님과 처가집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모은것이고 당신의 유치원때의 사진과 졸업사진은 유치원선생과 당신의 유치원동창들을 찾아다니면서 모은거라오.”   놀란 표정을 짓는 리나를 바라보면서 남편은 나머지 말을 이었다.   “래일은 당신의 40돐 생일이요. 이건 당신의 생일선물로 준비한것이요. 우리가 방을 따로 쓰는것은 일시적인 일이요. 하지만 당신의 40돐 생일은 한번밖에 없음을 생각하면…”   “여보…”   어느새 리나의 두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정문적보》      
31    안해에게 바치는 노래 댓글:  조회:4048  추천:0  2009-05-25
호북성 천문으로 하향했던 호발운은 1970년에 무한으로 돌아와 7435공장에서 3년간 용접공으로 있다가 통계원으로 되였다. 1974년의 어느날, 공장책임자가 와서 방송국에서 그를 한번 왔다가란다고 전해주었다. 그날 호북성인민방송국 문예부에 찾아간 호발운은 거기서 처음 리홍이란 처녀를 만났다. 호발운이 자리에 앉자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한대를 그에게 권하고 자기도 한대를 꺼내 피우는것이였다. 호발운은 그 년대에 젊은 녀자가 담배를 피우는것을 처음 보았다.   리홍은 호발운의 작품을 방송하는 문제를 상의하려고 그를 불렀던것이다. 호발운은 리홍을 보고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가고 물었다. 그녀는 서안에서 출생했는데 초중69기를 졸업하고 집체호에 내려가지 않고 군대에 나갔다고 했다. 문화대혁명시기의 초중69기면 소학교졸업정도였다. 집체호에도 내려가지 않고 군대에 나갔다가 제대한후 성방송국에 들어간다는것은 일반인의 자제에게는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당시 반특권주의자였던 호발운은 단도직입적으로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방송국에서 사업하니 정말 세상이 망태기이지”하고 욕을 내뱉었다.   그런데 리홍은 화를 내지 않고 “군대에 나갔다고 해서 복을 누린것은 아닙니다. 당신들만 고생한건 아니지요”라고 말했다.   열흘후 호발운은 리홍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녀는 그더러 자신이 만든 프로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뜻밖에도 그녀가 만든 프로는 매우 수준이 높았다. 특히 극좌적인 년대에 그녀는 우아한 피아노협주곡을 리용했는데 매우 듣기 좋았다. 호발운은 그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였다. 리홍은 륙속 호발운의 작품을 방송해주었다.   1975년 늦봄, 리홍은 호발운의 집에 책을 빌리러 찾아왔다. 그녀는 영광표 담배 2갑과 과일병졸임 한병을 사가지고왔다. 그들은 온종일 이야기하면서 담배 2갑을 다 피웠다. 그 병졸임은 점심술안주로 되였다. 리홍은 담배를 피울뿐만아니라 술도 잘 마셨다.   그녀는 부대에서 영화를 상영했는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상영기구들을 자동차에 싣고 책가방에 찬만두와 짠지, 물병을 넣고 먼길을 떠나군 했다. 그리고 부대에 도착하면 나무막대기를 땅에 박고 영화화면으로 될 하얀 천을 걸어놓은후 깊은 밤까지 련속 몇부의 영화를 돌리군 했다. 영화가 끝나면 상영기구들을 수습하여가지고 돌아갔고 또 돌아가서는 필림을 원상태로 돌려놓고 설비들을 잘 보양해야 했다. 그녀가 영화를 돌릴 때엔 병사들이 늘 머리 를 돌려 그녀만 뚫어지게 바라보군 했다. 부대에서는 녀자를 볼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녀는 로병들처럼 담배로 답답함을 달래고 술로 추위를 막군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마침내 병을 얻어 두번이나 위출혈을 했다.   리홍이 호발운한테서 처음 빌린 책은 《쑈팡평전》이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기때문에 쑈팡의 피아노협주곡에 대해 알고있었다.그 다음 그녀는 《뿌쉬낀시선집》, 《체호브단편소설선집》, 《안나 까레니나》 등 책을 빌려갔다. 리홍은 그 당시 군이상간부들만 볼수 있는 내부서적들을 가져다주었다. 문학과 음악이란 두가지 공동한 애호를 가진 그들은 이렇게 사귀게 되였다.   1977년 10월 6일,호발운은 갑자기 “반동언론”을 퍼뜨렸다는 죄명으로 공장에서 격리심사를 받게 되였다. 그는 공장의 한 자그마한 방에 갇혀있었는데 방에는 자그마한 창문이 있고 밖에는 높다란 담장이 막혀있었다. 그 당시에는 경상적으로 정전이 되여 밤에는 초불을 켰다. 호발운은 다 쓰고 남은 물렁물렁한 양초로 고니, 토끼, 코끼리, 꽃사슴 등 여러가지 동물을 만들었다.   어느날, 밤중에 담장밖에서 웬 녀인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리홍의 목소리였다. 그는 감시일군에게 자신이 만든 양초조각품을 주면서 나가서 리홍에게 갖다주라고 부탁했다.   그후부터 밤마다 리홍은 담장밖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마다 그는 감시일군에게 부탁하여 여러가지 모양의 양초조각품을 그녀에게 갖다주게 했다. 리홍도 감시일군을 통해 담배, 과일, 과자, 통졸임, 고기졸임, 털실옷, 털수건 등을 보내주었다. 그녀는 경상적으로 담배갑속에 편지를 써서 그에 대한 그리움을 표달했다. 그런데 그 편지가 끝내 조사소조 일군들에게 발각되였다. 조사소조에서는 리홍의 단위에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방송국에서는 리홍을 비판하고 감시했으며 직무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한테 통지하여 리홍이 현행반혁명분자를 사랑하고 매우 위험한 일을 저질렀다고 알려주었다.   호발운은 정식으로 현행반혁명분자로 정해져서 처리를 기다려야 했다. 1978년 11월, 리홍은 호발운을 면회하러 왔다. 그녀는 호발운에게 “어머니는 처음에는 저를 미워하던것이 가슴이 아파서 편지를 보내여 집으로 오라고 해요. 저는 당신을 위해 2년동안이나 부모를 보러 집에 가지 않았어요. 당신이 자유를 얻기전에는 집에 가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호발운은 “우리가 이후에 어떻게 되든지 그분들은 영원히 리홍의 부모요.꼭 부모를 보러 가야 하오”라고 설복했다. 그녀는 부모를 보러 가는데 동의하면서 가기전에 호발운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가서 부모들과 고별하고 와서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나는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1978년 11월 28일, 호발운은 마음씨 고운 감시일군의 도움을 받아 가만히 공장감방에서 빠져나가 약속한 골목에서 리홍을 만났다. 그날은 몹시 추웠는데 그들은 량쪽에서 마주 걸어왔다. 리홍은 붉은색솜옷을 입고 붉은색수건을 두르고 왔는데 손에는 사탕 한주머니와 빠나나송이가 들려져있었다. 호발운은 너무 씻어서 색이 바랜 옷을 입었다. 한 친구가 빌려준 집이 그들의 혼례식장이였다. 친구가 주는 열쇠를 쥐고 그들은 낡고 자그마한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들은 신성하고 랑만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진정한 부부로 된후 그들은 붉은기사진관에 가서 결혼기념으로 4촌짜리 흑백사진을 찍었다.한달후, 력사적인 11기3중전회가 열렸다. 그 황당한 사건도 황당한 시대와 함께 결속되였다. 1979년 1월 6일, 호발운은 현행반혁명분자란 모자를 벗고 자유의 몸이 되였다. 출근하는 첫날 그들은 각자의 단위에 결혼신청서를 바쳤다. 그들은 서안에 있는 리홍의 친정집에 갔는데 리홍의 어머니는 그들을 위해 성대한 결혼잔치를 차리고 가정무도회를 열어주었으며 그들을 데리고 명승고적을 관광했다. 그들은 또 북경에 가서 중앙당학교에서 학습하고있는 리홍의 아버지를 만나보았다. 로홍군간부인 리홍의 아버지는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1980년 봄에 리홍은 아들을 낳았다. 1986년, 리홍은 북경방송학원에 시험쳐서 들어갔으며 졸업한후 호북촉촌경제방송국의 문예부 주임으로 되였다. 1989년 여름, 리홍은 방송국을 떠나 텔레비죤극중심에 들어가 편집사업을 했다. 2001년, 리홍은 또 위가 아파 병원에 가서 검사했더니 위암중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후 수술을 받고 화학치료를 받는 동안 호발운은 안해의 곁에서 한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2003년 11월 28일은 그들의 결혼기념일이였다. 이날을 어떻게 보낼것인가를 상의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25년전에 신혼의 첫날밤을 보냈던 그 잊을수 없는 거리를 다시 걸어보려는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그날 안해와 함께 뜻깊은 려행을 하고 돌아온 호발운은 안해를 원형으로 하는 장편소설을 써서 안해에게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3개월후 그는 안해에게 바치는 장편소설 《여언》을 써서 원고예약이 있었던 인민문학출판사와 당대문학잡지사에 보냈지만 민감한 내용이 있다는 원인으로 발표되지 못했다.   그후 호발운은 안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으며 안해가 가는 마직막 순간까지 곁에서 병시중을 해주었다. 그는 또 《안해에게 바치는 노래》를 창작하여 작곡가에게 부탁하여 곡을 붙였다. 그후 그는 늘 안해를 안고 조용히 《안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2004년 11월 28일은 그들의 결혼기념 26돐이였다. 이날이 오기를 고대하여 기다리던 리홍은 힘겹게 병상에서 일어나 남편의 어깨에 몸을 기대였다. 아들이 그들 부부의 마지막 사진을 찍어주었다.   2004년 12월 2일 7시 38분, 리홍은 호발운의 곁을 영영 떠났다. 호발운은 병원에서 파견한 화장사를 거절하고 직접 안해에게 화장을 해주었다. 그는 안해를 보내면서 “천국에서 기다려주오”라고 부탁했다. 2009년 1월, 장편소설 《여언》이 독자들과 대면하게 되였다. 그는 책의 첫페지에 안해와 함께 찍은 사진을 싣고 사진아래에 “먼저 간 안해에게 바친다”는 글을 써넣었다.       《지음》      
30    총각만 찾는 리혼한 녀자 댓글:  조회:3977  추천:0  2009-05-22
  소홍이가 리혼한지 3년만에 련락을 한것은 뜻밖이였다. 새로 만나는 남자가 있는데 곧 결혼할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래도 친구인데 널 꼭 만나게 해주고싶다는 전화였다. 그녀와 나는 함께 회사에 들어가 친구로 되였는데 하루 20시간은 붙어다닐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작스런 리혼결정으로 회사도 그만두고 나와 련락도 끊어버린 상태였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결혼할 남자를 소개하겠다니 괘씸하지만 그 남자가 총각인데다 년하이고 의사라는 얘기를 듣고 만나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홍의 전 남편은 소홍이에게 헌신적이고 착하기만 했지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의 새 남자는 첫인상부터가 괜찮아보였다. 저 남자 왜 소홍이같은 리혼한 녀자에게 결혼하자고 매달리는걸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나 서로 보듬어주고 의지하여 새출발하겠다는 두 사람이 참 예뻐보이기까지 했다.   “소홍아, 네가 이제 네 짝을 진짜 만났구나.”라고 하며 감격스러워 코끝이 찡했다. 서로 한발씩 뒤늦게 만난 인연을 안타까와하며 이제라도 만났으니 알콩달콩 잘 살것이라고 내 앞에서 두손을 꼭 마주잡아보였다.그후 소홍은 총각을 따라 경성으로 들어갔는데 3년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한테서 소홍이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녀가 새로운 회사 를 꾸려 엄청나게 잘나가는 녀사장이 되였다는것이였다. 내가 결혼이야기를 꺼내니 그 총각은 사기군이여서 헤여졌다고 했다.그후 3년이 지난 지금 소홍이와 다시 련락을 하고 지내는데 얼마전 새로 사귄 남자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하고있는 회사의 직원인데 나이도 많고 리해심 많은 총각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고있는 일을 잘 도와주고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며 자신을 녀자로서도 아끼고 사랑해준다고 했다. 난 그 남자가 소홍이보다는 회사를 집어삼킬 욕심에 그녀에게 접근하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리혼한 녀자라면 같은 아픔을 지닌 리혼한 남자와 재혼할 가능성이 많고 그러는것이 어찌보면 공평하다고 생각했는데 소홍이는 왜 매번 총각을 만나려고 하는지 의아했다.   소홍이는 그 남자와 다음달에 결혼하기로 결정했다면서 청첩장을 보냈다.“정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것이다. 그동안 해온 내 실수를 절대로 반복하지 않으려면 하얀 백지가 필요했거든. 정말 하얀 백지 같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축하해달라.”청첩장과 함께 온 편지를 받고 울컥했다. 하얀 백지에 다시 쓰고싶었다는 말에.“총각을 찾아 재혼하려니 내가 가진것이 없어선 안되겠더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성공했지. 내가 총각과 결혼해도 욕먹지 않을 정도로 내가 당당해지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 이제 애도 낳고 너처럼 아줌마가 되여서 살거다.”그래, 소홍아. 너만 행복하게 살수 있다면 결혼을 축하해줄게!      《녀성생활보》    
29    장하고 갸륵한 사랑의 용기 댓글:  조회:3722  추천:0  2009-05-22
  강소성 계동시 회동진 만영촌에서 출생한 황신은 2005년 8월에 고중을 졸업한후 광서쫭족자치구 의주시에서 품팔이를 하고있는 큰 아버지의 소개로 의주시 사해운수회사에 들어가 품팔이를 하였다.   2개월후의 어느날, 20살에 나는 황신은 룡강로자연미화장품상점에서 샴푸를 고르다가 조심하지 않아 고급화장품 한병을 땅바닥에 떨어뜨려 깨버렸다. 상점의 판매원은 소매가격에 따라 220원을 배상하라고 했으나 몸에 200원밖에 없는 황신은 도매가격에 따라 배상하겠다고 고집했다. 쌍방에서 떠들자 숱한 구경군들이 몰려와서 황신은 난처한 립장이 되였다. 그때 한 젊은 녀판매원이 다가와서 도매가격에 따라 180원을 배상하도록 배려해주었다.   황신은 감격의 눈길로 그 녀판매원을 바라보았다. 키가 크고 예쁘게 생긴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황신은 이튿날 또 화장품상점에 찾아갔다. 그는 그녀와 한담을 하다가 함께 식사를 하자고 요청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황신은 그녀에 대해 많은것을 알게 되였다. 반효문이라고 하는 그녀는 그보다 4살 년상이였는데 광서쫭족자치구 합산시에서 출생하였다. 2살때 아버지를 여읜 그녀와 그녀의 오빠는 초중을 졸업한후 사처로 돌아다니면서 품팔이를 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황신은 불쌍한 그녀를 꼭 도와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때로부터 황신은 저녁마다 반효문을 청해 함께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하였다. 황신은 반효문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그녀가 매우 단순하며 선량하다는것을 발견하고 점점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매우 허약하다는것을 발견했다. 번마다 산보를 오래 하면 땀을 흘리고 다리가 나른해서 더 걷지 못하는것이였다. 황신은 여러번이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했으나 반효문은 번마다 거절했다. 어느 한번 황신은 너무도 안타까와서 효문이, 난 효문이를 몹시 사랑하오! 그런데 효문이가 자신의 몸을 이렇게 아끼지 않으니 내 마음은 칼로 에이는듯 아프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반효문은 몸을 돌려 달아나는것이였다.   그후 반효문은 황신을 멀리하면서 만나자는 황신의 요구를 번마다 거절했다. 반효문이 자신을 싫어서 그러는것이라고 생각한 황신은 정서가 저락되여 울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그녀를 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15일도 안되여 그는 그녀를 보고싶어 화장품상점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반효문이 병이 들어 며칠전에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것이였다. 조급해난 황신은 한달음에 반효문의 집으로 찾아갔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던 반효문은 집까지 찾아온 황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황신의 신분을 알게 된 반효문의 어머니는 딸이 직장암에 걸렸는데 1만원의 수술비용이 수요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반효문은 2004년에 갑상선암에 걸렸다. 수술하기 위해 숱한 돈을 꾸느라고 빚을 졌기때문에 이번에는 수술비용을 마련할수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병상에 누워만 있었던것이다.   황신은 반효문의 암증을 치료는 못한다고 해도 그녀의 생명을 연장해주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졌다. 그는 곧 사직하고 저금한 돈 2000원을 가지고 왕효문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녀를 돌봐주기 시작했다.   심수에서 품팔이를 하고있는 반효문의 오빠가 4000원을 부쳐보냈으나 수술비용은 엄청나게 모자랐다. 황신은 자신이 급성담낭염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한다고 부모를 속여서 8000원을 얻었다.   2006년 7월초, 황신은 반효문을 데리고 광서의과대학제2부속병원에 가서 직장암근치수술을 받게 했다.2007년 9월 2일, 1년이란 고통스러운 화학치료를 거친후 반효문의 체내의 암세포는 완전히 소실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여 또 무서운 암증이 반효문에게 덮쳐왔다.   2007년 10월초, 반효문은 배에 바람이 차고 위가 불편한 감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위염인가 하여 별로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3개월을 지체한후 증상이 심해지자 남녕시제1인민병원에 가서 검사해보았더니 중기란소암이란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그녀의 량측 란소에 모두 악성종양이 나타났고 자궁과 기타 부위도 전부 수술로 제거해야 하기때문에 10만원이란 비용이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황신은 단위의 사장한테 가서 돈을 꿔달라고 하다가 거절당했 고 병원에 가서 애걸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그는 부모한테 사정을 말하고 돈을 꿔달라고 전화를 걸었으나 부모는 페인이 된 녀자를 상관하지 말고 그녀한테서 떠나라고 그에게 “명령”했다.   다른 방법이 없게 되자 황신은 반효문의 사정을 적은 패쪽을 목에 걸고 구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구경만 할뿐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2008년 2월말, 황신은 거리에서 구걸하다가 귀인을 만났다. 남녕에 출장을 나왔던 서안홍운이사회사 경리 등지홍은 황신과 반효문의 이야기를 들은후 감동되여 당장에서 3만원을 내놓았다.   3월 9일, 반효문은 광서민족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을 준비를 했다. 수술하기 전날밤에 반효문은 황신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란소를 제거하면 페인이 되여 당신과 결혼할 자격이 없어요. 그러니 어서 내곁을 떠나세요”라고 말했다.  반효문의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딸이 더는 자네의 짐이 되게 할순 없네. 어서 떠나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횡신은 “효문이 어떻게 되든지 난 영원히 곁에 남아 돌봐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튿날, 반효문은 순조롭게 란소제거수술을 받았다. 그후 2개월동안 그녀는 5번이나 되는 화학치료를 받아 병세가 점차 안정되였다. 그녀는 더는 은인의 돈을 쓰고싶지 않아 퇴원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란소를 제거했기때문에 그녀의 체내에는 녀성호르몬이 엄중하게 결핍되여 인공합성한 녀성호르몬제를 복용하는것으로 녀성의 제2성징이 퇴화되는것을 통제해야 했다. 의사는 또 반효문과 황신이 적당한 성생활을 하여 음도를 자극함으로써 음도가 위축되는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후 인심을 격동시키는 시각 황신은 온화한 애무로 반효문의 격정을 불러일으켰고 두 사람은 완전히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였다. 성관계가 끝난후 반효문은 황신의 품에 안겨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   수술후 반효문의 몸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날 아침, 화장을 하던 그녀는 처참한 소리를 지르더니 미친듯이 거울과 화장품을 방바닥에 팽개쳤다. 원래 그녀는 거울속에서 자신의 얼굴에 옅은 수염이 돋은것을 발견했던것이다. 자신의 몸에 남성의 특징이 나타나자 반효문은 성격이 거칠어져서 쩍하면 황신에게 화를 내군 했다. 황신은 그녀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퇴근후 모든 활동과 모임을 물리치고 일찍 집에 돌아와 그녀의 손을 잡고 산책하였다. 그는 또 음반과 중고풍금을 사다놓고 자신이 출근한후 그녀가 혼자 오락에 빠져 모든 번뇌를 잊도록 해주었다. 그외 그는 남녕시건강미협회와 재활협회에 련계하여 반효문을 요청하여 암과 싸운 이야기를 강의할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청을 들었다.   황신의 노력으로 반효문은 점차 자신심을 얻었다. 그녀가 병이 나으면 품팔이를 하여 황신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생각하고있을 때 또 무서운 병마가 덮쳐왔다. 2008년 9월초, 피부가 노랗게 변하고 식욕이 없어졌다. 광서의과대학제2부속병원에 가서 검사해보았더니 수담관암( 管癌)이라는것이였다. 의사는 유일한 치료방법은 수술하여 수담관을 제거하는것인데 수술난이도가 높고 10만원의 수술비용이 수요된다고 알려주었다.   거듭되는 암증의 타격을 받은 반효문은 몸을 더 지탱할수 없을 지경이였다. 집세마저 내기 어려웠던 황신은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수밖에 없었다. 15일후 반효문은 전신에 열이 발생하면서 암세포가 초기확산되는 증상이 나타났다.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여러번이나 자살하려고 했으나 황신에 의해 성사하지 못하고말았다. 반효문에게 병마와 싸울수 있는 용기를 주기 위해 황신은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부모 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을 알려주었다.   2008년 10월 1일, 합산시 하리광구의 한 자그마한 집마당에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결혼식이 거행되였다. 신랑이 병색이 짙은 신부의 손을 잡고 입장했을 때 축하하러온 마을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첫날밤, 황신은 반효문을 끌어안고 “지금 당신은 나의 안해로 되였소. 당신은 약속해주오. 나를 위해 잘 살겠다고말이요. 우리 부부 일심동체로 되였으니 함께 병마와 싸웁시다!”라고 말했다. 그 시각 반효문은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   《지음》      
28    남의 자가용차를 탐낸 경비원의 비참한 후과 댓글:  조회:4020  추천:0  2009-05-21
하북성 형수시 안평현에서 출생한 왕경양은 2004년에 고중을 졸업하고 4촌형님을 따라 중경시 복지거소구역에 와서 경비원일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대부분 갑부들이 거주하는 고급소구역이였다. 매일마다 호화로운 자가용차를 몰고 출입하는 갑부들을 보면서 로임이 700원밖에 안되는 왕경양은 늘 마음속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복지거소구역은 매일밤 12시에 문을 닫는데 12시후에는 문어구에 서서 지키지 않고 방안에 들어가 지키는것이 규칙이였다. 모두 젊은이들이여서 졸음이 많기때문에 경비원들은 모두 1시후에는 접이식침대에서 잠을 자군 했다. 이때 만약 누가 문을 두드리면 누구도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 소구역에는 바오마표승용차325i를 몰고 다니는 주민이 있었는데 늘 새벽 2시쯤에 귀가하기때문에 경비원들은 모두 귀찮고 성가시게 생각되여 그가 아무리 요란하게 경적을 울려도 일부로 못들은척 했다. 그런데 왕경양만은 례외였다. 그는 늘 먼저 일어나 웃는 얼굴로 문을 열어주군 했다. 그때문에 바오마주인은 왕경양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았다. 그들은 점차 익숙해지자 친구로 되였다.   이 바오마주인은 진영비라고 하는데 절강성 금화시에서 출생했다. 그가 출근하는 회사의 본부는 금화시에 있고 분회사는 중경시에 있기때문에 그는 늘 금화시와 중경시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그는 의리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여서 늘 왕경양을 불러 차에 앉히고 시내돌이를 하군 했다. 왕경양은 차에 앉아서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이런 차를 가진 주인을 몹시 부러워했다. 차에 앉는 차수가 늘어나자 왕경양은 차에 대해 미친듯한 애착을 가지게 되였다. 복지거소구역의 주민들은 모두 자가용차를 1~2대씩 가지고있었기때문에 소구역앞에는 각양각색의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었다. 왕경양은 진영비가 매달 13일부터 25일까지는 금화시의 본부로 가기때문에 그 시간에는 바오마차를 소구역주차장에 세워두고 간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왕경양은 차를 몰고싶은 욕망이 갈수록 강렬해졌다. 2006년 7월, 그는 1980원을 지불하고 자동차운전을 배워서 그해 11월에 자동차면허증을 따냈다. 면허증만 있고 차가 없어 그는 더욱 참기 힘들었다. 왕경양은 진영비의 바오마차를 볼 때마다 그 차를 몰고 거리를 달리고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어느날, 왕경양은 관음교로 물건구매를 나갔다가 한 열쇠수리공이 각양각색의 자동차열쇠를 만드는것을 보고 바오마차의 열쇠도 만들수 있는가고 물었다. 열쇠수리공이 200원을 내면 만들어준다고 하자 왕경양은 바오마차의 열쇠를 만든후 진영비가 금화시로 갔을 때 그의 바오마차를 몰고다니고싶은 생각이 불붙듯했다. 그는 이튿날 진영비의 집으로 달려가서 “우리 아버지가 하북성에서 나를 보러 오는데 진형의 차를 2시간만 빌려주오”라고 사정해서 차를 몰고가서 열쇠수리공한테서 200원을 주고 차열쇠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열쇠로는 차문만 열수 있을뿐 차의 발동은 걸수 없었다. 다시 열쇠수리공한테 가서 물어보니 고급차의 발동기에는 모두 비밀번호로 보호시설이 되여있어 차를 몰수 있는 열쇠는 만들수 없다는것이였다.   2007년 6월, 암시장에서 어떤 자동차의 열쇠나 다 만들어준다는 말을 들은 왕경양은 또 한번 진영비한테서 차를 빌려가지고 그 암시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암거래장사군은 핸드폰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그보고 다시 발동을 걸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핸도폰처럼 생긴 물건의 전자화면에 두줄의 수자가 나타났다. 그다음 암거래장사군은 왕경양의 손에서 열쇠를 받아가지고 모양을 뜨더니 50분후에 돈을 가지고와서 열쇠를 찾아가라고 했다. 50분후에 그가 약속한 지점으로 찾아가 열쇠를 찾아서 시험해보니 신기하게도 발동이 걸리는것이였다. 원래 핸드폰처럼 생긴 물건은 차열쇠의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기계였다. 그는 기뻐서 2000원을 지불했다.   그후 왕경양은 진영비가 금화시로 갈 때마다 바오마를 몰고 나가서 거리를 질주했다. 그 시기 그는 금제술집에서 품팔이를 하고있는 고천이란 처녀와 련애중에 있었다. 고천은 하북성 한단시 영년현 소룡향 고장촌에서 태여났는데 허영심이 많아서 남자친구가 남의 차를 몰고다니는것을 알면서도 고급승용차에 앉아다니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왕경양은 녀자친구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늘 녀자친구와 녀자친구의 친구를 바오마에 태우고 거리를 질주했다.   2008년, 고천이 음력설을 쇠러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그와 함께 품팔이를 나갔던 한마을의 처녀들이 “너의 남자친구가 바오마차를 몬다고 하던데 왜 그 차에 앉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음력설을 쇤후 중경으로 돌아와 출근하면서 왕경양을 만난 고천은 한번 바오마차를 몰고 자기의 집으로 갈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왕경양은 놀라서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이건 시내에서 달리는것도 아니고 1000여킬로메터거리를 달려야 하니 필경 흔적이 남게 될것이요. 만약 발견된다면 큰일이요. 더구나 이건 차를 빌리는것도 아니고 훔치는 일인데 안되오!”   하지만 한참후에 왕경양은 한번 바오마차를 몰고 녀자친구의 집에 가서 뽐내고싶은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2008년 7월 12일, 고천은 갑자기 할아버지가 사망되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고천은 왕경양에게 전화를 걸어 “진영비가 곧 금화시로 가게 되잖아요? 바오마차를 몰고 집으로 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꼬드겼다. 왕경양은 그녀의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통쾌하게 대답했다.   2008년 7월 13일 오전, 진영비가 바오마차를 세워둔채 금화시로 가려고 소구역의 문을 나서자 왕경양은 휴가를 맡았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진영비의 바오마차를 몰고 금제술집앞에까지 달려가 고천을 조수석에 앉인후 중경시교외 고속도로로 달렸다. 길에서 그들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음악을 들으면서 코노래를 흥얼거렸다.   2008년 7월 15일밤, 왕경양은 바오마를 몰고 한단시 영년현 소룡향 고장촌에 있는 고천의 집에 들어섰다. “고천의 남자친구가 바오마차를 몰고왔다”는것은 전 촌의 특대뉴스로 되여 고천의 할아버지장례보다 더 큰 관심사로 되였다. 전촌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둘러서서 엄지손가락을 내밀자 왕경양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때 갑자기 왕경양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뜻밖에도 진영비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정말 담이 크구나! 네가 감히 내 차를 도적질해 몰고 하북성으로 가다니! 내 평소에 널 동생처럼 대해주었는데 네가 어찌 내게 이럴수 있어? 빨리 차를 몰고 돌아와. 만약 차가 조금이라도 고장나기만 하면 넌 감옥살이를 할줄 알아라!”   원래 왕경양이 최근에 보인 반상적인 행동은 동료들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던것이다.  그와 다툰적이 있는 한 동료는 왕경양과 바오마차가 동시에 보이지 않는것을 보고 왕경양이 그 차를 몰고 하북성에 있는 집으로 갔을것이라고 추측하고 등록부에 있는 진영비의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어 진영비한테 이 사실을 고발했던것이다.   진영비의 전화를 받은 왕경양은 일시에 멍해졌다. 삽시에 얼굴이 창백해진 그는 “끝장이야”라고 중얼거리면서 바오마차에 올라 발동을 걸고 차를 뒤걸음시켰다. 모두들 그의 반상적인 행동에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의 머리는 공백이였다. 바로 그때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왕경양이 정신이 황황하여 차를 뒤걸음칠 때 바오마차는 돌연히 속도를 가하면서 고천의 집의 흙벽을 쳐놓았다. 고천의 집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더욱 비참한 일은 집안에 있던 고천의 아버지가 갑자기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산채로 깔려서 사망된것이였다. 고씨집에서는 격분하여 왕경양에게 물매를 안겼다. 고천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남자친구를 발길로 차면서 “이 바오마차도 이자의것이 아니라 도적질해온것이예요”라고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더욱 분노하여 그에게 물매를 안겻다.   2008년 7월 16일, 왕경양은 촌민들에 의해 당지의 공안국에 끌려갔다. 그날 한단시 영년현공안국에서는 그를 형사구류시켰다. 간수소에 갇힌 왕경양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차를 도적질해서 몰고갔다가 사람을 죽인것을 생각하자 너무도 무서워서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사건발생후 석가장시지공변호사사무소의 금정주임은 중화인민공화국형법 제133조의 규정에 의해 왕경양의 행위는 교통사고죄로 구성되며 3년이하의 유기도형에 민사배상책임을 져야 한다고 인정하면서 왕경양의 행위가 절도죄로 구성되는가 하는것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호화소구역의 경비원이 매일 각양각색의 자가용차들이 출입하는것을 보면서 부러워하는것은 정상적인 심리이다. 그러나 부러워하는것은 부러워하는것이고 심리상태를 잘 조절해야 한다. 자신이 자가용차를 살 능력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자가용차를 몰고 위풍을 부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위법범죄행위로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는 후회막급이고 일생을 망치게 되기때문이다. 왕경양의 비극은 우리들에게 누구나 욕망이 있지만 이런 욕망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노력에 의거해야지 위법범죄행위로 실현하려고 한다면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깐다는것을 말해준다.                                                                       《법제생활》      
27    은혜을 갚으려고 몸을 헌신한 시골녀인 댓글:  조회:3771  추천:0  2009-05-12
올해 52살인 주상은 상해시 모 직업기술양성중심 주임이다. 주상은 우연한 기회에 상해에 와서 품팔이를 하는 농민공부부를 알게 되였다. 주상은 농민공부부가 어렵게 생활한다는것을 알고 그들에게 돈도 보내주고 생활용품도 가져다주었다. 지어 주상은 그들을 도와 가게까지 꾸려주었다.   젊고 예쁜 농민공안해 정정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저 주상에게 자기 몸을 바치였다. 그후 두 사람은 정이 깊어져 정부관계로 되였다. 농민공남편인 원청은 안해와 주상이 정부관계를 유지하고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주상에게 돈 60만원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결국 원청은 위협공갈죄로 법원의 판결을 받게 되였다.   농민공부부를 만난 주임   2008년초, 상해 모 직업기술양성중심 주임 주상(51살)은 상해 포동개발구에 가서 양성반을 꾸리였다. 하여 주상은 늘 밖에서 식사를 하다보니 자주 음식점에 드나들었으며 젊고 예쁜 복무원아가씨 정정을 알게 되였다. 정정은 사천성의 빈곤한 시골에서 온 복무원이였다. 정정은 아침일찍 일어나 저녁늦게까지 음식점에서 힘들게 일했지만 한달로임이 몇백원밖에 되지 않았다. 정정은 고향에 있는 남편이 상해에 오면 함께 자그마한 음식점을 꾸릴 생각을 해보았다. 주상의 도움으로 정정은 남편과 함께 자그마한 음식점을 경영했다.   어느날 오후, 주상은 정정이 보고싶다면서 정정이 경영하는 음식점을 찾아가는중이라고 전화를 했다. 오전에 비가 내리여 길이 몹시 미끄러웠다. 주상은 부주의로 길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주상이 길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한다는 전화를 받고 정정은 다급히 달려와 구급차를 호출하여 주상을 병원으로 호송했다. 진단결과 주상은 다리뼈가 골절되였다. 주상의 집이 멀리 떨어져있고 또 안해의 몸도 허약하다보니 그를 간호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정정은 어려모로 주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남의 도움을 받았으면 갚을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정정은 선뜻이 나서서 림시간호를 책임졌다. 정정은 병상에 누워있는 주상의 똥오줌도 받아내고 더운물로 그의 몸도 깨끗이 닦아주면서 정성을 다해 간호했다.   한병실에 누워있는 다른 환자들은 정성을 다해 간호하는 정정을 몹시 부러워했으며 착한 딸을 두었다고 칭찬했다. 그러자 주상은 얼굴을 붉히면서 “참 착한분이죠. 하지만 저의 딸은 아니고 그냥 사이좋게 지내는분입니다. 이 은혜을 잊지 않고 나중에 꼭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상은 퇴원한후 정정의 음식점으로 찾아가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다면서 인사를 했다. 정정의 남편 원청은 “신세라니요. 오히려 우리가 주임님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지 모르겠는데 이렇게까지 찾아오니 몸둘바를 보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미안해했다.   주상은 입원치료를 받을 때 정정이 자신을 간호하느라 많이 허약해졌다면서 몸보신을 하라고 돈 2000원을 내놓았다.   시골에서 온 이들 부부에겐 돈 2000원이 적은 수자가 아니였다. 그들은 절대 받을수 없다면서 극구 사양했지만 주상의 “성화”에 못이겨 받고말았다. 정정과 원청은 자신들을 진심으로 보살펴주고 돌봐주는 주상의 은혜를 꼭 갚겠다고 약속했다.   은혜에 보답하고저 몸을 바치다   그번 일이 있은후 주상은 쩍하면 음식점으로 찾아와 정정을 만났다. 이날도 주상은 정정을 모터찌클에 태우고 칠포거리에 나가 쇼핑했다. 정정은 주상의 허리를 꼭 잡고 상해에 온지 몇해 되지만 한번도 상해구경을 해보지 못했다면서 오늘 신나게 놀아보자고 애교를 부리였다.   그러자 주상은 “상해구경을 마음껏 시켜줄수 있소. 하지만 이 손을 놓소. 남들이 보면 뭐라겠소. 괜히…”라고 긴장해하면서 말했다. 정정은 그러는 주상이 우스운듯 웃으면서 “사실 난 시골녀자이고 배운것도 별로 없어요. 그동안 우린 주임님의 신세를 많이 졌어요.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어요. 하여 난 자신의 깨끗한 몸을 당신에게 바치려 해요. 당신이 거절하면 안돼요.”라고 말했다. 젊고 예쁜 녀자의 애교어린 열정이 주상의 격정을 불러일으켰다. 주상은 자신의 품에 안긴 정정을 꼭 껴안고 열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올해 3월초, 주상은 원청에게 술장사를 소개해주어 돈을 벌게 했다. 원청은 한상을 차리고 주상을 청했다. 주상은 취중에 “명년에 기회를 잡아 우리 큰 장사를 해보기요. 40만원쯤은 어렵지 않으니 내가 자금을 대겠소. 당신들이 열심히 뛰면서 일해보오.”라고 큰소리를 쳤다. 원청은 “주임님, 보잘것 없는 이 시골놈을 이렇게 잘 대해주니 난 더 할말이 없습니다.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그러자 주상은 “‘3.8’절에 단위에서 해남관광을 조직하오. 마침 한 녀교원이 시험일때문에 관광을 떠니지 못하오. 명액이 하나 남았소. 려행사에서 돈을 돌려주지도 않소. 자넨 정정을 보낼 생각이 없소? 단위측은 내가 잘 말해보겠으니 별 문제 없을것 같소.”라고 시탐적으로 원청을 보면서 말했다. 원청은 단모금에 술잔을 비우더니 “주인님이 나서서 그를 보내려고 하는데 나는 반대할 리유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곳의 일을 내가 책임지고 보살피겠으니 그렇게 합시다.”라고 사나이답게 찬성했다.   원청이 어찌 알았으랴. 이 모든것이 바로 몇시간전에 주상과 정정이 남몰래 획책한 “밀월관광”이었음을.   남편 현장에서 간통범을 잡다   주상과 정정은 해남도관광을 떠났다. 10일간 해남도관광의 “부부생활”을 통해 주상과 정정의 감정은 더욱 깊어졌다. 상해로 돌아온 주상은 갈라질 때 정정의 손을 꼭 잡고 “이후 우린 서로 자신을 단속해야 하오. 하지만 난 당신들을 돌봐주는것을 잊지 않겠소. 그래야 나의 마음도 편안할것 같소.”라고 말했다. 정정은 “당신의 마음을 리해해요. 그동안 신세가 많았어요. 부디 건강하세요. 생각나면 아무때건 찾아오세요.”라고 아쉬워하면서 말했다.   두달후 원청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중병에 걸리여 당금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원청에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부쳐보낼 치료비가 없었다. 주상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돈 5만원을 가지고 원청을 찾아왔다. “자넨 이 5만원을 먼저 가져다 쓰게. 모자라면 나에게 알리오. 내가 방법을 대여 해결해보겠소.”   주상은 또 이렇게 말했다. “이 음식점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것 같소. 차라리 문을 닫고 손재간을 배우란 말이요. 우리 양성중심에서 전공공부를 하여 전공자격증을 취득하는것이 어떻소. 전공자격증이 있으면 내가 공장에 취직시켜주겠소. 로임은 2000원정도는 잘될것이요. 이 음식점보다 퍽 낳을것이요.”   주상의 소개로 원청은 양성중심에서 전공공부를 하여 전공자격증을 취득하고 모 공장에 취직했다. 정정도 음식점을 남에게 넘겨주고 모 장식회사에 취직했다.   어느날 주상이 정정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원청이 몰래 세집을 맡을 일을 상론했다. 한주일이 지난후 주상과 정정은 세집을 맡고 “신혼부부”생활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청은 안해와 주상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눈치를 차리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했다. 어느날 아침 원청은 안해보고 “오늘 단위일로 며칠간 출장을 가오. 그동안 잘 지내오. 그리고 일이 있으면 주상주임을 찾아가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정은 남편의 짐을 꾸려주면서 “잘 다녀와요. 나 뭐 어린애인가봐요? 참 걱정하지 말아요. 나 당신을 기다리면서 잘 지낼게요.”라고 말했다. 남편이 집문을 나서자마자 정정은 주상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사랑해요. 오늘 우리 남편이 출장을 떠났어요. 며칠 걸린대요. 어서 세집에 와요. 그동안 몹시 보고싶었어요.” 정정은 화장을 곱게 하고 집을 나섰다. 원청은 정정의 뒤를 미행했다. 정정은 그런줄도 모르고 시장에 들리여 남새를 사가지고 세집으로 갔다. 주상도 모터찌클을 타고 세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술상을 차려놓고 술을 마신후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이때에야 원청은 모든것을 알게 되였다. 원청은 그동안 속히운것이 너무도 화가 나서 미칠것만 같았다. 그는 세집문을 차고 뛰여들어 안해와 한이불속에 있는 주상에게 매질을 가했다. “이 더러운놈아. 감히 나의 녀자를 다치는거야? 오늘 잘 만났다. 시골놈의 주먹맛을 봐라.” 주상은 부들부들 떨면서 “용서하오. 나 잘못했소. 제발 살려만 주오.”라고 빌고들었다.   원청 60만원 공갈혐의로   주상에게 주먹질을 들이대던 원청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밖에 나가 벽돌장을 들고와 주상을 때리려 했다. 인명사고가 일어날가봐 두려워 정정이 막아나섰다. 주상은 옷을 주어입고는 원청을 보고 말했다. “동생, 정말 미안하오. 내가 잘못했소. 그동안 사귀여온 정을 봐서라도 용서해주오.” 그러자 원청은 “흥, 이대로 끝날수는 없소. 정신손해비로 60만원을 내놓지 않으면 당신의 단위에 고발하고 당신의 집에도 알리겠소.”라고 을러멨다.   주상은 이때에야 잘못 걸려들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쯤 새 단위에 전근된 주상은 성과를 올려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있을 때였다. 만일 새 단위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모든것이 끝장이였고 또 집에까지 알려지면 심장병으로 앓고있는 안해가 기절해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주상은 “동생, 나에게 그만한 돈이 없소.”라고 사정했다. “안돼, 일전한푼도 골아선 안돼. 전에 40만원으로 장사를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인제와서 없다고?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오?” 이때에야 주상은 취중에 허풍을 친 자신을 원망했다. 사실 주상에겐 그만한 돈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원청의 요구대로 정신손해비 60만원을 주겠다는 “빚문서”에 억지로 싸인을 했다.   6월 12일, 주상은 심장병으로 앓고있는 안해 몰래 저금통장의 돈을 전부 찾아냈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니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아 돈 60만원을 만들어가지고 원청에게 넘겨주고 싸인한 “빚문서”를 찾아냈다.   집으로 돌아온 주상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단 한번의 잘못으로 60만원을 한꺼번에 떼우는것이 너무도 분통했다. 안해의 병도 치료해주고 후반생을 보내려고 아글타글 모은 돈이 아닌가? 주상은 일주일후 공안기관을 찾아가 원청을 사기협박죄로 고소했다. 일전 민행구검찰원에서는 사기협박죄로 원청을 법원에 기소했다.                             《뉴스석간》      
26    장애자부부가 부른 사랑의 노래 댓글:  조회:4020  추천:0  2009-05-06
1962년 상해시 민행구 란평로에서 출생한 장가평은 2살때 부모가 리혼하여 아버지 장대군과 함께 살았다. 1979년 6월 18일 오후, 학교에서 조직한 수영활동에 참석한 장가평은 머리가 수영장의 단단한 세멘트바닥에 부딪쳤는데 선생님과 동학들이 건져서 상해민행구45병원(지금의 상해제5인민병원)에 실어갔다. 검사결과 의사는 “중추신경이 엄중하게 손상을 입었고 경부이하가 전부 마비되여 한평생 다시 일어설수 없게 될것입니다. 만약 회복이 잘 된다고 해도 손가락의 일부분 기능만 가능할뿐입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장가평이 페인이 된것을 보고 계모도 모른다고 달아나고 리혼한 생모도 관계하지 않았다. 장가평은 자살하고싶어도 머리만 움직일수 있을뿐 다른 부위는 지각이 없었기때문에 자살할수도 없는 처지였다. 부모도 없고 동무도 없이 장가평은 장장 6년을 입원해있었다. 1983년 5월, 라지오를 통해 중앙인민방송국의 영어학습프로를 듣던 장가평은 영어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이를 악물고 영어를 자습했다. 1986년 7월, 장가평은 치료비용을 이어댈수 없어 퇴원하는수밖에 없었다. 계모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그는 갈곳이 없었다. 다행히 민행구정부에서 장가평에게 30평방메터되는 집을 해결해주었다. 생존을 위해 장가평은 번역문장을 잡지사에 투고했는데 퇴고만 맞았다. 1993년 5월 15일, 장가평이 번역한 글이 《세계의 창문》에 발표되여 30원의 원고료를 받게 되였다. 1993년 10월 25일, 항주시장애자직업기술학교에서 공부하고있던 장애자처녀 오은교는 라지오방송에서 장가평의 사적을 듣고 감동되여 그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편지거래를 통해 감정이 깊어진 오은교는 자신의 일생을 장가평에게 바치기로 결심하고 동생의 도움을 받아 장가평을 찾아갔다.오은교는 초기에 장가평과 한담을 하면서 불쌍한 남자를 위해 방안을 청소해주군 했다. 그녀는 3급장애자였기때문에 지팽이에 의지하여 간신히 걸을수 있었다. 이런 몸을 가지고 장가평을 도와준다는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였다.  이는 오은교 자신도 알고있고 장가평도 알고있었다. 편지거래가 두 사람의 마음에 따뜻한 봄날의 희망을 안겨주었다면 현실은 그들에게 잔혹한 답안을 남겨놓은것이다. 오은교가 힘들게 방안을 청소하는것을 보면서 장가평은 침묵을 지켰다. 오은교도 마음이 몹시 괴로왔다. 그녀는 눈물을 참으면서 될수록 일손을 멈추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견지했다. 이튿날, 오은교는 장가평의 침대밑에서 두꺼운 원고를 들추어냈는데 이것은 장가평이 1년남짓한 시간을 들여 번역한 장편소설 《유리불뱀》이였다. 45만 5000자에 달하는 이 번역작품은 이미 여러 잡지에 투고했다가 퇴고된 “페지”였지만 한글자 한글자 알심들여 쓴것이였다. 오은교는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장가평의 의력에 감동되기도 했다. 그녀는 “당신은 편지에서 모든것이 다른 사람의것이라고 했지만 그 말은 틀린거예요. 오늘부터 전 당신에게 속할것이예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장가평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온령에 돌아간 오은교는 부모한테 장가평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놀라서 “저절로 자기도 돌보기 힘든 네가 너보다 더 심한 장애자를 어떻게 돌본다고 그러냐”라고 하면서 견결히 반대했다. 그녀의 부모들은 그녀를 가둬놓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6개월후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늘 남몰래 장가평이 이전에 보내온 편지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있는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부모는 날마다 초췌해가는 딸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수 없어 결국 장가평과 결혼하는것을 동의하고말았다. 1997년 9월말, 오은교는 동생의 부축을 받아 휠체어에 앉아서 장가평을 찾아갔다. 1997년 10월 1일, 장가평과 오은교는 결혼수속을 밟았다. 신혼부부는 음료 한병 앞에 놓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들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웃들은 “3급장애자가 어떻게 1급장애자를 돌볼수 있겠는가”고 의심했다. 오은교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확실하게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어려운 문제였다. 집안일을 해보지 못했던 오은교는 남새를 사들이고 밥을 짓는 일부터 해결해나가야 했다. 처음 시장에 나간 오은교는 장사군에게 속히울가봐 지팽이를 짚고 온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남새가격을 알아보느라고 늦어졌다. 집에서 기다리던 장가평은 아무리 기다려도 안해가 오지 않자 무슨 일이 생긴것이 아닐가 하고 걱정하던 끝에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이웃들이 그의 안해를 찾으러 가려고 할 때 오은교가 기분이 좋아서 한광주리의 남새를 사들고 들어섰다. 그녀는 장가평을 보고 “제가 오늘 시장에서 제일 눅은 남새를 샀어요”라고 말했다.   장가평에게 밥을 먹여주는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였다. 장가평은 하반신이 감각을 잃었기때문에 지탱물을 잃으면 뒤로 넘어지군 했다. 오은교는 헌이불로 20여개의 크고 작은 방석을 만들었다. 그리고 매번 남편을 부축하여 앉힐때마다 쉴새없이 그의 뒤에 방석을 밀어넣군 했다. 남편이 편안한 감각을 느낄 때까지 방석을 밀어넣은 다음 바줄로 그를 묶어놓군 했다. 장가평을 보살펴주기 위해 오은교는 나가서 일자리를 찾지 않았다. 이들 부부는 가두에서 내여주는 400여원의 최저생활보장금에 의해 생활했다. 어떤 때는 장가평의 원고료가 몇백원씩 생겼지만 소비가 높은 상해에서 고까짓 수입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1988년 2월의 어느날, 오은교는 50전에 만두 하나를 사왔는데 먹기 아까와 남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남편도 먹지 않고 안해에게 밀어주었다. 두 사람이 서로 권할 때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오은교의 어머니 장계화가 이 정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원래부터 딸을 1급장애인에게 시집보내놓고 밤잠도 못자면서 걱정하고있던 장계화는 이 정경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장계화는 한달음에 시장에 달려가서 먹을것을 사온 다음 다시 나가 옷궤, 랭장고, 세탁기 등 물건을 사들였다.   그날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것을 본 오은교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우리는 힘들게 보내지만 매우 행복해요.이전에 저는 남에게 부담만 주는 사람이였지만 지금은 남편을 도와줄수 있는 사람이 되였으니 살아도 보람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1988년 5월,그들의 정황을 알게 된 란평로주민위원회에서는 해당부문에 반영하여 그들에게 영업집이 차례지도록 알선해주었다. 그들은 이 집을 매달 800원씩 세를 주어 기본생활을 해결할수 있게 되였다.   2000년 6월 25일, 백가출판사의 책임자 강일청은 6명의 번역가를 청하여 미국계렬탐험소설을 번역하게 했는데 《운약》의 번역을 책임진 번역가가 사유가 있어 퇴출했다. 강일청은 번역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장가평에게 이 책의 번역임무를 맡겼다.처음 탐험소설을 접촉한 장가평은 자료와 공구서적이 없어서 번역속도가 매우 늦었다. 오은교는 서점이란 서점은 다 돌아다니면서 남편이 적어준 서적을 사들였다. 그들은 또 아껴먹으면서 중고컴퓨터 한대를 샀다. 오은교는 장가평이 쓴 번역원고를 컴퓨터에 타자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날마다 장시간씩 글을 쓰고 타자한 그들은 신체가 쇠약해졌다.   2000년 11월, 장가평은 번역원고를 강일청에게 바쳤다. 2002년 12월, 장가평이 번역한 《운약》이 순조롭게 출판되였다. 책을 받아쥔 장가평부부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운약》이 출판되자 장가평은 1만원의 원고료를 받게 되였다. 2003년 1월 25일, 장가평은 정식으로 상해번역가협회에 가입했다. 그후 그는 여러 신문과 잡지에 륙속 많은 번역작품을 발표했다. 장가평은 외국영화의 번역도 맡아했다.   2008년 6월 14일, 제11기상해국제영화절에서 장가평은 또 영화의 번역을 완성했다. 갈수록 이름을 날린 그에게는 륙속 청탁원고가 날아들었다. 2009년 1월 15일,장가평은 5000원의 원고료를 받자 즉시 오은교에게 자동휠체어를 사주었다. 2009년 음력설전야, 상해영특송도서회사출판부 주임 염소청은 장가평의 사적을 알게 된후 탄복되여 장가평에게 《스티븐 호킹》이란 책의 번역을 맡겼다. 스티븐 호킹의 학생이 지은 이 영문전기는 분량이 큰 과학기술저작으로서 장가평이 처음 접촉하는 과학기술류의 번역작품이였다. 《스티븐호킹》의 번역을 체결한 날은 이미 음력 섣달 28일이였다. 그날 저녁, 오은교는 몇가지 료리를 볶아놓고 포도주 한병을 들고와서 축하해주었다. 장가평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안해에게 “여보, 그동안 당신이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는데 나를 만난것을 후회하지 않소?”라고 물었다. 오은교는 웃으면서 “만약 그때 제가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사랑의 가치를 실현할수 있었겠어요? 또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생명의 의의를 체험하게 할수 있었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장가평은 감격에 목이 메여 안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의 성공은 당신의 생명과 심혈로 바꿔온것이요.당신이 없었다면 나의 오늘이 있을수 없었을것이요!”   《지음》  
25    흉수를 추적하여 24년 댓글:  조회:4148  추천:0  2009-05-06
2009년 4월 12일,  임개명은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서 “어머니, 어머니를 살해한 흉수를 붙잡았으니 이제는 눈을 감고 고이 잠드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세번 절을 한후 다시 녀동생의 무덤을 찾아가서 위안해주었다. 1985년 9월 9일은 임개명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였다. 그날 오전 10시쯤 그의 어머니 장종란은 마당에 곡식을 너는 일때문에 이웃집 녀인 장종방과 다투다가 손찌검이 났는데 장종방의 남편 류이초가 쏜살같이 달려와 몽둥이로 장종란을 때려서 당장에서 숨지게 했다. 그때 장종란의 13살되는 딸 임개용이 산에서 일하다가 내려와서 어머니가 맞아죽은것을 보고 대성통곡하면서 류이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류이초는 화가 나서 또 몽둥이를 들고 미친듯이 임개용에게 달려들었다. 임개용은 황급히 달아났지만 200메터도 못가서 류이초가 내리치는 몽둥이에 맞아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사건발생시 장종란의 남편은 마을밖에서 일하고있었고 장종란의 셋째아들 임개기는 집에 있었는데 어머니와 녀동생이 맞아죽은것을 보고 울면서 사건을 제보하러 향정부 치안실로 달려갔다. 산길이 험했기때문에 현공안국 형사경찰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흉수 류이초가 이미 멀리 도망친 뒤였다. 경찰들은 세밀하게 조사한후 류이초를 인터넷에 도주범으로 전국에 통보하고 수배령을 내렸다. 사건발생시 피해자 장종란의 둘째아들 임개명은 어느 한 벽돌공장에 출근하고있었다. 이튿날 친척이 전화를 걸어 그에게 이 악몽과도 같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울면서 달려간 임개명은 관속에 누워있는 어머니와 녀동생을 보자 기절하고말았다. 얼마후 정신을 차린 그는 전국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꼭 흉수를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나 마음만 먹으면 꼭 해내고야 마는 성미인 임개명은 그때로부터 장장 24년동안이나 흉수의 종적을 따라 추적했다. 임개명이 흉수를 찾아 처음 쫓아간 곳은 파남구 안란진이였다. 당시 친구한테서 흉수 류이초가 안란진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한달음에 그 곳으로 달려가서 한달동안이나 찾았지만 헛수고만 하고말았다. 그후 류이초가 귀주성의 준의시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접한 그는 또 4개월동안이나 준의시를 골목골목 뒤지면서 찾았다. 그 시기 그는 인력삼륜차를 사서 넝마주이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92년의 어느 하루, 아는 사람이 성도와 면양에서 류이초를 보았다는 말을 듣고 밤도와 성도로 달려가 찾아보았으나 역시 헛고생만 하고말았다. 다시 면양에 가서 이잡듯이 뒤졌으나 흉수의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돈을 다 써버린 그는 한달동안 당지 농민의 밭일을 해주고 400원을 받게 되자 계속 흉수가 숨었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을 찾아다녔다. 임개명은 24년동안 호북성, 귀주성, 복건성, 광동성 등지의 근 20개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흉수의 종적을 추적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품팔이를 하면서 류이초가 나타났다는 소식만 들으면 사직하고 그 곳으로 달려가군 했다. 2008년 그가 파남구의 한 식료품공장에서 품팔이를 할 때 1년동안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2개월만에 하문에 흉수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주동적으로 사직하고 떠났기때문에 로임도 받지 못했다. 흉수를 찾기 위해 임개명은 록음기능이 있는 핸드폰을 사서 가는 곳마다 증거를 록음해둔후 당지 공안국에 제공해주군 했다. 2009년 2월말, 류이초가 준의시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임개명은 밤도와 준의로 달려가 조사한후 록음한 증거를 당지 공안국에 제공했다. 공안국에서는 그가 제공한 단서에 근거하여 포위망을 늘였다. 임개명은 2009년 3월 3일, 준의시 홍화강구 경찰들의 도움을 받아 수년간 당지에서 과일상점을 경영하던 류이초를 붙잡는데 성공했다. 임개명은 24년동안 혼자서 흉수를 추적하느라고 수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26살에 결혼한 그는 딸이 태여난지 얼마 안되여 흉수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는데 딸이 3살되던 해에 집이 가난한 원인으로 안해가 리혼하고 다른 남자한테로 시집을 갔다. 그후 안해는 딸도 데리고갔다. 게다가 2001년에 고향에 있는 집까지 다른 사람이 불을 놓아 태워버렸기때문에 지금까지 돈이 없어서 집없는 나그네로 되고말았다. 임개명은 꼭 흉수를 붙잡고야 말겠다고 맹세했지만 수십차 추적하여 헛물만 켜자 맥을 잃고 포기하려고 마음먹은적이 있었다. 그러나 밤에 눈을 감으면 억울하게 살해된 어머니와 녀동생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서 흉수를 꼭 잡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다시 다졌다. 현재 임개명은 가정이 파탄되고 돌아갈 집이 없게 되였지만 이런 방식으로 어머니와 녀동생의 원한을 풀어주었기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사업과 생활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덧붙였다   《중경석간》  
24    세번 몸 맡기고 양할아버지를 랍치 댓글:  조회:4768  추천:0  2009-05-06
2008년 4월,  22살인 젊은 녀인 장모는 고향 강서성을 떠나 석사시에 와서 품팔이를 하면서 석사시구에 세집을 맡았는데 맞은켠에는 71세되는 할아버지 뢰모가 살고있었다. 뢰모는 영춘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퇴직후 네 딸을 따라 석류에 왔는데 평소에는 혼자서 살고있었다. 집을 드나들 때마다 마주치면서 장모와 뢰모는 잠간사이에 친해졌다. 그 당시 독신이였던 장모는 로인이 혼자 사는것을 보고 밥도 지어주고 빨래도 해주면서 도와주었다. 그후 장모는 뢰모를 양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뢰모는 점차 젊은 양손녀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몸을 만지고 포옹하려고 했다. 그때마다 장모는 교묘하게 피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후 장모는 혜안에 가서 품팔이를 하면서 난전장사를 하는 35살나는 남자 원모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품팔이가 매우 힘들었기때문에 장모는 자그마한 가게를 경영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금이 모자랐다. 자금을 마련하려고 여기저기 뛰여다니다가 헛물만 켠 그녀는 석류에 있는 양할아버지가 생각났다. 2009년 4월 9일, 장모는 혜안에서 석류로 달려가 양할아버지를 보고 2만원을 꿔달라고 했다. 원래 다른 마음을 품고있었던 뢰모는 장모를 보고 음험하게 웃으면서 “돈을 꿔줄수는 있지만 세상에 공것이 없다는 말을 너도 알겠지?”라고 말했다. 장모는 “리자를 넉넉하게 드릴테니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뢰모는 “리자같은건 필요없어. 그 대신…”라고 하며 양손녀를 끌어안았다. 장모는 “이러면 안돼요”하면서도 돈을 꾸기게 급급했던지라 양할아버지에게 몸을 맡겼다. 일이 끝난후 뢰모는 “돈이 딸한테 있으니깐 딸과 상의한후에야 줄수 있다”고 말했다. 장모는 하는수없이 혜안으로 돌아갔다. 2009년 4월 11일,  장모는 또 석류로 가서 양할아버지에게 돈을 꿔달라고 독촉했다. 한번 젊은 녀인의 맛을 본 뢰모가 이런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양할아버지가 또 끌어안고 요구하자 장모는 이번에도 “이러면 안돼요”하면서도 양할아버지한테 몸을 맡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뢰모는 같은 리유로 돈을 주지 않았다. 장모는 다른 방법이 없게 되자 “2만원이 없으면 2000원만 주세요”라고 했다. 그러나 뢰모는 “2000원은커녕 200원도 없다”고 대답했다. 두번이나 몸을 맡기고도 2000원도 꾸지 못하게 되자 장모는 화가 치밀어 남자친구 원모를 찾아갔다. 그녀는 자신이 양할아버지와 성관계를 발생한 세부는 빼놓고 두번이나 돈을 꿔달라고 하니 양할아버지가 성관계를 요구하더라고 말했다. 그녀는 “차라리 우리 함께 양할아버지한테 가는게 어때요? 그 령감의 성요구를 들어준후 령감이 돈을 꿔주면 좋고 만약 사후에도 돈을 꿔주지 않으면 당신이 나서서 간통한 현장을 잡았다고 하면서 협박하여 돈을 요구하세요”라고 말했다. 장사에서 밑진 원모는 그녀의 제의를 동의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상의했다. 2009년 4월 16일 밤 11시, 장모는 또 양할아버지를 찾아가 세번째로 몸을 맡겼다. 그런데 이번에도 뢰모는 여러가지 리유를 대면서 돈을 꿔주려고 하지 않았다. 장모는 슬그머니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 남자친구한테 통지했다. 그리고 다시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있는 양할아버지를 끌어안았다. 그때 원모가 들어와서 “간통현장”을 잡는 연극을 놀았다. 원모가 배상을 요구하자 뢰모는 더는 다른 핑게를 대지 못하고 은행카드를 내놓았다. 원모가 은행카드의 돈을 모두 찾았으나 700원밖에 되지 않았다. 장모는 세번이나 늙은이한테 몸을 맡기고도 700원밖에 얻지 못하게 되자 화가 나서 원모와 함께 양할아버지를 혜안현의 한 려관으로 랍치해갔다. 이튿날, 장모와 원모는 뢰모를 발가벗겨놓고 사진을 찍은후 뢰모를 협박하여 편지를 쓰게 했다. 뢰모는 핍박에 못이겨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 못난 애비가 술을 마신후 미혼인 양손녀의 정조를 짓밟았으니 정신손해비 6만원을 장모에게 주거라.” 2009년 4월 18일 오전, 원모는 편지와 뢰모의 모자를 뢰모의 딸에게 부쳐주었다. 그때에야 아버지가 실종된것을 알게 된 뢰모의 딸은 공안국에 사건을 제보했다. 공안국에서는 사건을 조사한후 장모에게 중대한 혐의가 있다고 인정했다. 2009년 4월 19일 저녁 6시, 장모와 원모는 뢰모의 핸드폰으로 뢰모의 딸에게 전화를 걸어 래일 점심전으로 돈을 부쳐보내라고 통지했다. 공안국에서는 주밀한 방안을 세운후 2009년 4월 20일 오후 2시에 공원에서 전화를 걸고있는 원모를 붙잡았고 성공적으로 인질인 뢰모를 구해냈으며 장모도 붙잡았다. 현재 장모와 원모는 형사구류되였는데 이 사건은 진일보 심사중에 있다.                                                           《법제일보》    
23    쌍둥이아들을 구하기 위해 댓글:  조회:3973  추천:0  2009-05-06
1998년 5월 29일, 단오절 전날이였다. 무한시 강하구 오리계진 라립촌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폭죽을 터뜨리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원래 농민 리공부와 채려평부부가 쌍둥이아들을 보았던것이다. 이날 리공부와 그의 안해 채려평은 쌍둥이아들 리남삼과 리남빈을 안고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줄을 몰랐다. 채려평과 리공부는 광동성에서 품팔이를 할 때 서로 알게 되여 사랑을 나누다가 1997년 5월에 결혼했다. 이번에 쌍둥이아들을 보게 되자 그들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기뻐했다.1999년 5월, 채려평은 첫돌이 된 쌍둥이를 아이의 할머니와 고모에게 맡기고 광동성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품팔이를 하면서 음력설에 한번씩 아이를 보러 왔다. 2003년 5월 29일은 리남삼과 리남빈의 5살 생일이였는데 채려평은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생일을 축하해주면서 얼마후 돌아가서 집을 사놓고 다시는 외지로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그때 아이들의 고모가 전화를 바꿔가지고 “올케, 빨리 돌아와요. 쌍둥이가 자꾸 넘어지는데 내가 보살피기 매우 힘들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채려평은 그 길로 휴가를 맡고 밤도와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쌍둥이가 여러번이나 절룩거리면서 걷다가 넘어지는것이였다. 무한아동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니 의사가 “두 아이는 ‘진행성근육영양불량’이란 병에 걸렸는데 쌍둥이가 동시에 이 병에 걸릴 확률은 억만분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런 병은 세계적으로 불치의 병인데 10살정도가 되면 완전히 전신마비가 되고 18살전에 죽게 됩니다”라고 알려주는것이였다. 그 말을 들은 채려평은 눈앞이 캄캄해났다. 광동성에서 품팔이를 하고있던 리공부는 이 기막힌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달려왔다. 그는 쌍둥이아들을 안고 아무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채려평은 비통에 싸여있는 남편을 위안해주고나서 “앞으로 아이들을 치료해주려면 많은 돈이 있어야 할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돌아가 츨근하세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다니면서 치료해주겠어요. 어찌 이 큰 중국에 우리 아들을 치료해줄 병원이 없겠어요”라고 말했다. 채려평은 오진이였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아이들을 데리고 호남성 장사시의 상아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해보았는데 무한아등병원에서 내린 진단과 똑 같은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이런 병은 치료할 가망이 없으니 아까운 치료비만 허비하지 말고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채려평은 쌍둥이의 병을 꼭 치료해주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2004년 봄, 채려평은 광서의 계림에 있는 로중의가 이런 병을 치료할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쌍둥이를 데리고 그 로중의를 찾아갔다. 로중의는 비방이라면서 이름모를 약을 끓는 물에 넣은후 그 약물로 두 아이의 관절부위를 찜질해주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따가움을 참지 못해 울고 몸에 물집이 생기는것을 보고 가슴이 아파서 “이런 방법은 너무 잔인해요. 치료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한후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채려평은 크고 작은 병원은 다 돌아다니고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보았으나 쌍둥이의 병은 하루하루 더 엄중해질뿐이였다. 2006년 3월, 쌍둥이는 완전히 마비되여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저금한 돈을 몽땅 써버린 채려평은 친정에 가서 돈을 꿔다가 아이의 약비를 대는수밖에 없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며칠동안 내린 소낙비로 집이 무너져서 채려평은 위급한 병에 걸린 두 아이를 데리고 남의 헐망한 집을 빌려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느날, 남편한테 돈을 부쳐달라는 전화를 걸고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밥을 지어주려고 하는데 침대에 누워있던 쌍둥이중 형이 갑자기 “엄마, 엄마는 우리더러 웃으면 이쁘다고 했는데 난 아무리 웃으려고 애써도 웃을수가 없어요.이러다가 우리가 곧 죽게 되는것이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채려평은 가슴이 덜컥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이후엔 죽는다는 말을 입밖에 내서는 안되다”고 말했다. 일찍 셈이 든 8살된 리남삼은 인차 “엄마, 미안해요. 그런데 웃을수 없으니깐 가슴이 답답해요”라고 말했다. 채려평은 “아이들이 10살이 되면 전신이 마비되고 18살이 되면 죽게 됩니다”라고 하던 의사의 말이 생각나자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들이 2년 앞당겨 마비되였는데 이러다간 정말로 18살이 되기전에 죽는건 아닐가? 아니야. 우리 쌍둥이는 절대 죽을수 없어. 어떻게 하나 꼭 살려내야 해! 2006년 7월 5일, 채려평은 쌍둥이를 데리고 북경병원에 가보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이 꿔온 돈 2만여원을 가지고 북경행 렬차에 몸을 실었다. 북경에 도착한 채려평은 돈을 절약하기 위해 60원을 내고 지하실려관의 침대 하나를 빌렸다. 너비가 1메터밖에 안되는 침대에 두 아이를 눕힌후 그녀는 침대곁에 엎드려 잠을 잤다. 려관주인이 그녀에게 침대 하나를 더 놓으라고 하자 그녀는 돈을 더 팔지 않기 위해 다른 곳에 주숙하려고 자리를 떴다. 쌍둥이를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안고서 북경의 거리에 나선 채려평은 가로세로 뻗은 립체교와 쉴새없이 질주하는 차량들을 보노라니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가는것만 같았다. 그녀는 달리는 차앞으로 막 뛰여들어가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에 두 아이의 무게가 느껴지자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때 거리에서 음료를 파는 로인이 그녀에게 한 려관을 알려주었다. 그 려관의 주인은 그녀를 매우 동정하여 30원을 받고 침대 2개가 있는 방을 내여주었다. 주숙할 곳이 있게 되자 그녀는 쌍둥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그녀는 두 아이를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안고 걸어서 북경의 여러 큰 병원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매일 5원어치의 밥을 사서는 아이들에게 먹이고는 나머지가 있으면 먹고 나머지가 없으면 굶군 했다.엄마가 가끔씩 머리가 어지러워하는것을 본 쌍둥이는 엄마더러 먼저 밥을 들라고 권했다. 엄마가 먹으려고 하지 않으니 두 아이는 울면서 “엄마, 엄마가 자시지 않으면 힘이 없어 우리를 업고가지 못할거예요”라고 말했다. 채려평은 할수 없이 몇입 먹는체했다. 4개월이 지났으나 아이들의 병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그때는 가지고간 돈도 다 써버렸다. 다행히 중국적십자총회 아동중병소조에서 쌍둥이의 정황을 알고 《북경석간》의 기자를 통해 쌍둥이의 이야기를 발표하게 했다. 마음씨 고운 시민이 500원을 기부했지만 그 돈으로는 며칠밖에 더 지탱할수 없었다. 중국적십자총회 아동중병소조의 만주임은 채려평을 보고 “먼저 집에 돌아가 소식을 기다리시오. 우리는 이미 쌍둥이의 정황을 서류에 기록해두었으니깐 새로운 의료소식이 있으면 꼭 당신한테 전해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2006년 10월, 채려평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그녀는 북경에서 언제면 소식이 올가 하고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냈다. 하지만 북경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2007년 3월, 쌍둥이는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는데 온종일 한가지 자세로 있으면서 눈도 뜨려고 하지 않는것이 조각을 해놓은것만 같았다. 말할수 없는 공포에 휩싸인 채려평은 두 아들에게 큰소리로 “지금은 대낮인데 잠을 자선 안된다! 빨리 눈을 뜨거라. 너희들이 잠을 자면 다시는 이 어머니를 볼수 없단다. 엄마가 부탁한다. 엄마 말을 들어다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집의 텔레비죤의 음량을 가장 큰 소리로 높여놓았다. 두 아들은 맥없이 말했다. “엄마, 우리도 눈을 뜨고 엄마를 보고싶지만 너무 졸려요.” “졸려도 눈을 감아선 안된다. 너희들은 굳세야 한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가서 2007년 4월에 들어섰다. 어느날 채려평은 심양해방군463병원 세포치료중심의 양효봉주임이 간세포이식수술로 혈전페쇄성맥관염환자를 치료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이를 데리고 심양해방군463병원으로 찾아갔다. 양효봉은 직접 심양기차역에 나가 채려평과 두 아이를 맞이했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진행성근육영양불량환자를 치료한 사례가 없었다. 양효봉과 그의 연구소조에서는 10여년래 줄곧 흰쥐와 토끼의 몸에 독특한 간세포쌍이식방법을 시험하여 모두 성공했다. 양효봉은 채려평의 동의를 얻은후 자체간세포쌍이식방법으로 쌍둥이를 치료해주기로 결정했다.쌍둥이의 생명이 위급했기때문에 병원에서는 빠른 시일내에 수술방안을 확정했다. 양효봉은 먼저 두 아이의 체내에서 일정한 량의 골수간세포를 채취한후 세포분리, 배양, 유도분화를 하여 세포가 다른 일종의 세포로 변화되게 한후 두 아이의 체내에 이식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기술은 치료비가 36만원에 달하며 2년내에 적어도 세번 간세포이식을 해야 하는데 매우 큰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채려평이 1전도 낼수 없다는것을 안 해방군463병원에서는 수술비용을 줄이는 한편 보도매체를 통해 사회의 기부를 받게 하였다. 2007년 5월 4일, 쌍둥이에게 처음 간세포이식수술을 해주었는데 수술후 20일도 안되여 기적이 나타났다. 두 아이는 물건을 잡고 몇분씩 일어설수 있었고 눈도 맑아졌다. 2007년 10월, 전문가소조에서는 쌍둥이에게 두번재 간세포이식수술을 해주었다. 1개월후 두 아이는 자연스럽게 웃을수 있게 되였다. 리남삼과 리남빈은 너무도 격동되여 큰소리로 “어머니, 어서 보세요. 우리는 웃을수 있게 되였어요”라고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고있던 채려평은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면서 머리만 끄덕였다. 2008년 7월,양효봉은 쌍둥이에게 세번째 간세포이식수술을 해주었다. 2개월후 기타의 보조치료를 거쳐 거의 정상인처럼 회복되였다. 리남삼은 기계에 의해 일어서 걸을수 있었고 리남빈은 자유롭게 걸어다닐수 있게 되였다.                                                                      《지음》      
22    인질 랍치범과 녀간호원의 대결 댓글:  조회:3987  추천:0  2009-05-05
곤명시 동인신화병원 수술실의 간호원 주일단은 연분이 그렇게 빨리 맺어질줄은 몰랐다.2007년 국경절휴가를 앞두고 그녀는 친구와 상의한후 인터넷에 “함께 려행갈 낯선 친구들을 찾는데 남자들은 자가용차를 가지고오면 좋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글을 올리자마자 련계인인 주일단의 핸드폰은 불이 날 지경이였다. 그날밤에 그녀의 핸드폰이 또 울렸다.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손운천이라고 하는데 남자이고 29살입니다. 나도 당신들의 려행에 참석하려고 하는데 자가용차가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은지요?” 낯선 남자의 솔직한 고백에 그녀는 웃음이 나오는것을 참으면서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네바퀴차가 없으면 11호차가 있잖아요. 거기에 생활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있는데 안될게 뭐예요.” 이렇게 되여 려행을 함께 간 두 사람은 서로 아름다운 연분을 맺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였다.2008년 11월 29일 오전 10시, 룡천로 가락복에서 인질랍치사건이 발생했는데 인질이 심하게 상했다는 전화를 받고 주일단은 의사들과 함께 구급차에 앉아 현장으로 달려갔다. 리장룡의사가 집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구하려고 문을 두드렸는데 안에서 “녀자만 들어와!”하는 흉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일단은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약상자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문이 안으로 잠궈졌다.   이 집은 안과 밖이 격리되여있는 자그마한 물건저장실이였다. 주일단에게 문을 열어준 남자가 비수를 들고 흉악한 몰골로 쏘아보자 주일단은 순식간에 온몸이 떨려났다.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피투성이된 녀자가 누워있는것이 보였다. 주일단은 앉으면서 “어디를 상했어요?”라고 물었다. 그때 그 남자는 비수를 부상당한 녀자의 목에 들이댔다. 주일단은 무서워서 도망치고싶었지만 방바닥에 누워있는 부상자를 보자 차마 외면할수 없어 떨리는 두손을 꽉 잡고 주저앉았다. 인질로 된 녀인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으로 잠간 혼미상태에 빠졌다가도 다시 정신을 차리군 했다. 주일단은 인질의 상처를 살펴보고나서 옅은 상처는 처치해주었지만 깊은 상처는 조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처지할수가 없었다. 그때 랍치범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이 녀인이 죽게 되는거냐?”   “피를 많이 흘려서 병원에 호송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그 말을 들은 랍치범은 주일단의 앞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그럼 이 녀인을 나가게 하고 네가 인질로 남아라!”   주일단은 위험이 다가온것을 느꼈다. 랍치범은 주일단의 목에 비수를 들이댔다. 랍치범은 주일단에게 문을 열고 부상당한 녀인을 내보라고 호령했다. 주일단이 문을 열자 부상당한 녀인은 결사적으로 기여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다시 문이 닫겼다. 부상당한 녀인은 안전하게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혼자서 랍치범앞에 선 주일단은 너무도 무서워 울기 시작했다.   시간은 일초일초 흘러갔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주일단의 생명은 더욱 위험할수 있었다. 11시쯤 공안국에서 제일 경험이 풍부한 담판전문가가 현장에 도착하여 랍치범과 대화를 시작했다.   주일단은 이때에야 인질랍치사건의 전후과정을 알게 되였다.원래 이 랍치범은 륙지문이라고 하는데 39살이고 상해사람이였다. 륙지문은 2003년에 살인미수죄로 감옥살이를 했는데 만기석방된후 상해의 집을 팔고 곤명으로 들어왔다. 그는 곤명에서 뢰씨성을 가진 녀인을 알게 되여 동거했는데 나중에 뢰씨가 다른 남자와도 성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2008년 10월 23일, 륙지문은 뢰씨와 다투다가 그녀를 인질로 삼고 주동적으로 공안국에 전화를 걸었다. 결과 그는 한달남짓이 구류되였다가 사흘전에야 석방되였다. 구류소에서 나온 그는 사처로 수소문하면서 뢰씨를 찾아다니다가 못찾게 되자 인질랍치사건을 저질렀던것이다.그는 인질의 목숨을 위협하는것으로 경찰을 핍박하여 뢰씨를 찾아달라고 요구했던것이다.   경찰들은 강탈자가 후과를 돌보지 않고 주일단을 해칠가봐 벽에 물을 뿌린후 될수록 소리를 가볍게 내면서 벽을 뚫기 시작했다. 륙지문은 벽을 허무는 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서 큰소리로 고함쳤다.   “내 경고한다. 너희들이 속히 나의 녀자친구 뢰씨를 찾아서 내앞에 데리고오지 않으면 이 녀인을 죽여버리겠다! 그리고 벽을 뚫고 들어오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 지금부터 벽을 뚫는 소리가 들려오면 이 녀인을 찔러 죽이겠다!”   벽을 뚫는 소리가 멎고 주위는 잠시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륙지문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정신이 고도로 긴장했던 그는 지쳐있었다. 그는 한손으로 주일단의 몸을 안고 다른 한손에 든 비수로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그리고 잠시후 그녀의 어깨에 기대여 졸기 시작했다. 주일단은 도망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몸을 빼려고 할 때 륙지문이 깨여났다. 륙지문은 비수를 주일단의 목에 바싹 들이대면서 “네가 움직이기만 하면 이 칼로 네 목을 베여버리겠다!”라고 위협했다. 주일단은 너무도 무서워 부들부들 떨면서 울기 시작했다.   녀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밖에서 지키고있던 경찰들은 몹시 근심되였다. 인질이 놀라면 강탈자를 자극하여 더욱 미쳐날뛰게 할수 있고 인질이 침착하면 생존의 기회를 얻을수 있다. 그러나 경찰들은 문밖에서 지켜보면서 아무일도 할수 없었다.그때 주일단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니 익숙한 전화번호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손운천이 걸어온것이였다. 원래 주일단이 인질로 잡혔을 때 손운천은 해구파출소에서 당직을 서고있었다. 파출소는 사건현장과 멀리 떨어져있었기때문에 그는 가락복에서 발생된 일을 감감 모르고있었다. 점심 12시에 주일단의 친구 라사사가 주일단이 인질로 잡힌 소식을 듣고 다시 전화로 손운천에게 전해주었다. 손운천은 녀자친구가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깜짝 놀라서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면서 전화를 걸었던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요? 괜찮소?”   주일단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울먹거리자 손운천은 더 급해나서 “울지말고 랭정해야 하오. 절대 강탈자를 자극해서는 안되오”라고 부탁했다. 주일단은 륙지문이 쏘아보자 급히 핸드폰에 대고 “류정을 찾는가요? 120구급중심에 걸어 물어보세요. 우리 부모한테는 말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손운천은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보아하니 녀자친구의 정황은 매우 위급한것 같았다. 평소에 벌레마저 무서워하던 녀인이 흉악한 랍치범의 앞에서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그의 마음은 돌아가는 차바퀴보다 더 급했다.   남자친구의 전화는 주일단에게 힘을 주었다. 한참후 손운천은 또 전화를 걸어 “급해하지 말고 떨지도 마오. 더구나 그 사람을 화나게 해서는 안되오. 무슨 일이 생기든지 절대 울어서는 안되오. 내가 도착했으니 마음을 놓소”라고 말했다.   륙지문은 배가 고파서 밖에 있는 경찰들에게 라면을 끓여오라고 소리쳤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경찰들은 주일단에게 전화를 걸어 “그자가 당신더러 문을 열라고 하면 문이 열리는 순간 엎드려야 하오”라고 말했다.   경찰들이 라면을 끓여왔다고 소리치자 륙지문은 주일단에게 비수를 들이대면서 문을 열라고 했다. 주일단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번개같이 방바닥에 넘어지는것처럼 하면서 엎드렸다. 순간 “땅!”하는 총소리와 함께 륙지문은 쓰러졌다.륙지문은 쓰러지면서 비수로 주일단의 목부위를 긁어놓았다.   “일단이!”   손운천은 첫사람으로 방안에 뛰여들어가서 피가 흐르는 사랑하는 사람을 꼭 껴안았다.   주일단은 그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울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달려들어와 주일단을 안아서 구급차에 실어갔다. 손운천은 달리는 구급차안에서 주일단의 손을 꼭 잡고있었다.   구급을 거쳐 주일단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였다.주일단에 의해 구원된 녀인질은 가락복의 22살되는 직원 왕려화였다. 왕려화는 주일단이 제때에 인질로 되여 몸을 바꿔주었기때문에 구원될수 있었다.   2008년 12월 5일, 운남성위생청에서는 주일단에게 “운남성위생계통공청단원기준병”이란 칭호를 수여하였고 운남성총공회에서는 주일단에게 “운남성5.1로동훈장”을 수여하였다. 《춘성석간》에서 선발한 “2008년운남성10대뉴스인물”평선이 방금 결속되였는데 주일단은 서렬 5위에 올랐다. 하지만 주일단은 이 모든 영예를 매우 담담하게 여겼다. 그녀는 기자의 취재를 접수할 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보통사람입니다. 그 당시 저는 마음속으로는 몹시 무서웠습니다. 정황이 급했기때문에 의료일군으로서 보고만 있을수 없어 자신의 책임을 다 하려고 한것뿐입니다.저는 이런 기회가 있었기때문에 진정한 사랑이란 달콤한 말에 있는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배려하면서 잘 살아가는것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손운천씨는 제가 퇴원한 이튿날에 저를 데리고 취호에 가서 갈매기에게 먹이를 뿌려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갈매기에게 먹이를 뿌려주는 느낌이란 정말 달콤하고 랑만적이였습니다.”               《법제일보》      
21    처녀의 넋이 담긴 물망초 댓글:  조회:4069  추천:0  2009-05-05
2007년 10월의 어느날, 절강과학기술학원 4학년생인 대군이는 거처에서 나와 도시 중심에 있는 누나의 집으로 가려고 정류소에서 차를 기다렸다. 그때 대군이와 가까운 곳에서 한 처녀가 길을 건너고있었는데 갑자기 자동차 한대가 쏜살같이 질주해왔다. 처녀가 차에 치이려는 위기일발의 시각에 대군이는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번개같이 달려가서 처녀를 밀치면서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 순간 자동차는 지나갔고 처녀와 대군이는 모두 무사하게 되였다.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해있던 처녀는 정신을 차리고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대군이보다 7~8살이나 어려보이는 애된 처녀였다.   “어디 다친데 없소?”   대군이가 관심조로 묻자 그녀는 일어서서 걸어보았다. 아무데도 상한 곳은 없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대군이를 가리키면서 “이 젊은이가 아니면 처녀는 잘못될번 했소”하면서 대군이가 처녀를 구한 과정을 이야기해주었다. 처녀는 연신 “감사해요”라고 대군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나서 련계전화를 물었다.   대군이는 처음에는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처녀가 하도 간절하게 묻는 바람에 결국 알려주고말았다.   이튿날 처녀한테서 전화가 와서 만났는데 처녀는 “집에 돌아가 오빠이야기를 했더니 엄마와 아버지는 구명은인에게 저녁이나 한끼를 대접하겠으니 꼭 데리고오래요”라고 말했다. 대군이는 몇번 사양하다가 처녀의 간절한 청을 물리칠수 없어서 따라갔다. 처녀의 부모들은 아주 열정적으로 대군이를 맞아주면서 딸에게 “넌 한평생 너의 생명을 구해준 이 구명은인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처녀의 이름은 척소연인데 항주의 어느 중학교에 다니고있었다. 대군이는 학교기숙사에 들지 않고 어느 큰회사의 총경리로 있는 누나가 마련해준 집에 들어있었다. 그후 소연이는 주말마다 찾아와서 온종일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집안청소도 하군 했다. 소연이는 온통 귀여움으로 만들어진 처녀같았다. 소연이는 대군이의 동학들보다 더 자주 들렀지만 동학들과는 달리 어지럽히는 대신에 청소를 했고 꼭꼭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군 했다. 대군이가 하려고 했지만 소연이는 자기가 있는 날에는 주방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사실 대군이가 만든 음식은 맛이 없었다. 혼자 있을 때라면 몰라도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할 땐 대군이가 만든 음식으로 상을 차리기는 멋적었다. 대군이는 라면을 끓여먹는 때가 많았다. 소연이는 집에서 짠지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밑반찬을 만들어 가지고 오기도 했다. 17살 처녀가 냄새를 풍기며 짠지통을 들고 뻐스에 오른다는것이 부끄럽기도 했으련만 소연이는 짠지가 떨어지기 무섭게 가져오군 했다. 가끔 빨래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건 너무 미안해서 대군이는 빨래가 밀리지 않도록 그날그날 빨아 입게 되였다. 빨래를 하다가 들키게 되면 소연이의 눈이 곱지 않았다. 가끔 대군이가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에도 소연이가 왔다간 흔적이 있었다. 어지럽히고 나간 방안이 잘 정돈되여있었고 물만두가 아니면 밥과 반찬이 만들어져있었다.   소연이와 대군이는 함께 공부를 하기도 하고 서로 학교에서 있은 일을 얘기하기도 하면서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군이는 소연이가 오기 시작한후 동학들이 집에 오는걸 좀 삼가하게 했다. 동학들이 귀찮아서 그런것은 아니였다. 소연이에게 미안해서였다. 동학들이 어지럽힌 방을 청소해야 하는 소연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되도록 동학들을 방에 들이지 않았다. 대군이에게는 또 련애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기해라는 녀학생이 있었는데 기해한테도 소연이와의 관계를 숨겨두었다. 대군이는 늘 소연이를 집에까지 바래다주었다. 늦은 날에는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소연이의 부모님께 반드시 인사를 드리고왔다. 소연이의 가정은 어떤 가정보다 평화롭고 정이 넘쳐보였다. 그렇게 대군이는 소연이와 우정을 쌓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오랜만에 대군이는 녀자친구 기해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사실 대군이는 당시 기해와 소연이가 만나게 될가봐 조심했다. 오해를 받기가 싫었다.아무리 소연이가 어리다지만 소연이는 녀자였고 대군이는 남자였다. 더구나 거의 매일 집에 와서 함께 살다싶이 하는걸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오해할게 빤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노력은 얼마 안되여 기해에게 들통나는 바람에 헛되게 되고말았다.   소연이가 집에 있을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기해와 둘이서 오랜만에 집에 들어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창 수업을 받고있어야 할 소연이가 와있었다. 소연이를 녀동생이라고 소개했지만 대군에게 친녀동생이 없다는것을 알고있는 기해는 대군이와 소연이의 관계를 의심했다.   그러나 대군이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는 인차 의심을 풀었고 소연이와 친해졌다. 기해도 가끔 대군의 집에 왔는데 소연이는 그런 기해한테 매달리며 물었다.   “언니 우리 오빠 사랑해?”   “응, 넌? ”   “나도 오빨 사랑해. 그러나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야. 언닌 이후 내가 없더라도 오빨 잘 돌봐줘야 해. 밥도 지어주고 빨래도 해주고 집안청소도 해주고…그런데 대학생인 언니가 이런 일을 할수 있겠어? 안되겠다. 아무래도 내가 배워줘야지.”   소연이는 한동안 기해한테 료리하는 법과 집안일을 배워주느라고 바삐 돌아쳤다. 대군에게 소연이는 너무 사랑스러운 녀동생이였다. 이성의 감정을 느끼기엔 나이차이가 너무 많았다. 나이차이보다는 소연이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하지만 대군이는 만약에 녀자친구가 생긴다 해도 지금 소연이와의 정보다는 깊지 않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녀자를 놓고 한 녀자를 선택하라고 하면 대군이는 당연히 소연이를 선택할것이였다. 소연이를 향한 지금의 감정도 분명 사랑의 일종이였다. 사랑이라 해서 반드시 이성의 감정이 깃들어야 하는건 아닐테니깐. 그렇다. 대군이는 소연이를 사랑했다. 대군이는 소연이를 사랑하고있었다. 단지 이성의 감정만 없을뿐이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소연이에게서 이성의 감정을 느끼게 될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였다. 지금은 그저 사랑스러운 녀동생일뿐이였다.   2008년 5월, 소연이는 물망초(勿忘草) 한묶음을 들고와서 대군이한테 건네주며 “오빠,이 꽃이 이뻐?”라고 물었다. 대군이는 꽃향기를 맡아보면서 “너무 이쁘진 않지만 사연이 깊은 꽃이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소연이는 두눈을 반짝 빛내더니 말했다.   “오빠도 이 꽃에 깃든 사연을 아세요? 한 청년이 섬에서 자라는 이 꽃을 사랑하는 녀인에게 꺾어주기 위해 그 섬까지 헤염을 쳐서 갔다고 해요. 그런데 그 청년은 꽃을 꺾어가지고 오다가 급류에 휘말리자 가지고있던 꽃을 사랑하는 녀인에게 던져주고는 ‘나를 잊지 말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고 해요. 녀인은 사라진 남자를 생각하면서 일생동안 이 꽃을 몸에 지니고 살았대요. 그래서 이 꽃의 이름이 ‘나를 잊지 마세요’란 뜻으로 물망초가 되였대요. 오빠도 어느날 갑자기 내가 사라지면 날 잊지 마세요.”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네가 왜 사라져? 출국이라도 하는거야?”   “아니, 만약에 그렇다는거죠.”   “만약이라도 그런 말을 하면 못써.”   대군이는 손으로 소연이의 코를 눌러주면서 나무람했다. 소연이는 막 까불다가도 갑자기 심각해져서 대군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기도 했다. 사춘기소녀의 변덕이라 하기엔 좀 심했다. 하지만 그에겐 소연이의 그런 모습마저도 귀엽고 사랑스러워보였다.   그후 소연이는 한달에 두번정도 오더니 얼마 안가 한달에 한번정도 찾아왔다. 대군이 또한 취업문제로 바빠져 소연이를 찾아가기가 힘들었고 가끔 찾아가도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아 만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대군이가 졸업식을 하는 날 소연이는 꼭 오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졸업식날 소연이는 오지 않았다. 집에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도 오지 않았다. 집에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며칠동안 계속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감이 습격해왔다. 아무것도 할수 없을것 같았다. 열흘후 소연의 집에 찾아갔더니 소연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그렇지 않아도 오늘쯤 련락을 하려던참이였네. 소연이 갔네.”   “네? 가디니요?!”   “하늘나라로 갔네.”   소연이의 엄마가 울먹이며 모든것을 말해줬다. 소연이는 대군이를 만나기전에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말기암환자였다. 그날도 죽음을 앞두고 고민하다가 자동차가 오는것도 보지 못하고 하마트면 교통사고로 죽을번했던것이다. 대군이의 구원을 받아 죽음에서 구원된 소연이는 남은 삶을 구명은인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살려고 마음먹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맑게 살아온 처녀, 대군이는 가슴이 찢기는 아픔에 통곡하면서 물망초 한묶음을 들고 소연이의 묘지를 찾아갔다. 소연이와의 추억이 떠오르며 이젠 소연이를 추억할수밖에 없는 사실이 가슴을 저리게 했다.                      《현대도시보》    
20    강간살인의 억울한 루명을 벗기까지 댓글:  조회:4288  추천:0  2009-05-05
황신은 1970년에 정주시의 한 고급지식분자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황소량은 신화사 하남성분사의 기자였고 어머니 리해방은 하남성인민검찰원의 정처급간부였다. 황신은 1992년에 상해복단대학 전자공정학부를 졸업한후 북경의 어느 한 중일합자기업에 높은 로임으로 초빙되였다. 황신은 1997년 가을에 정주의 부모집에 놀러왔다가 리맹이란 예쁘게 생긴 처녀를 알게 되였는데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여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1년후 황신은 카나다의 한 회사에 초빙되였다. 두 사람은 부모들과 상의를 거쳐 황신이 먼저 카나다로 이민가서 자리잡은후 리맹을 카나다로 이민시키고 거기서 두 사람이 결혼하여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민을 며칠 앞두고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여 황신의 운명을 개변해놓았다. 1997년 10월 23일 저녁, 황신과 리맹은 친구들과 함께 트럼프를 놀았는데 황신은 리맹이 패를 잘못 던졌다고 나무람했다. 밤 11시 30분에 놀음이 끝난후 황신과 리맹은 리맹의 거처인 3층에 들어가 함께 잠을 잤다. 10월 24일 아침 8시 40분쯤 황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으면서 그때까지 누워있는 리맹에게 입을 맞춘후 외출하려고 했다. 그때 리맹은 잠에서 덜깬 목소리로 “나갈 때 빈 가스통을 들고 내려가세요. 내려다놓으면 아버지가 사람을 불러 가스를 넣어올거예요”라고 부탁했다. 황신이 가스통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리맹의 어머니가 그를 보고 점심을 먹으러 오는가고 물었다. 그는 일이 있어 밖에서 먹고온다고 대답했다. 장모와 작별인사를 한후 황신은 장인이 사준 승용차를 몰고 누나를 불러 컴퓨터부속품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1997년 10월 24일 오전 10시 30분, 누군가 리맹의 부모가 꾸린 공용전화를 치려고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1층에 있는 전화선이 3층에 있는 리맹의 침실전화와 련계되여있었기때문에 리맹의 아버지는 딸이 통화를 한후 전화기를 잘못 내려놓은것이라고 생각되여 3층으로 올라갔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깜짝 놀랐다. 전화기가 침대머리궤우에 떨어져있고 피투성이가 된 딸이 방바닥에 누워있었는데 목에 전기술이 매여져있고 가슴에는 칼이 박혀있었다. 현장에 달려온 경찰들은 리맹이 이미 사망된것을 확인했다. 창문은 잠겨진 그대로 있었고 낯선 사람의 지문도 없었다. 법의가 리맹의 사체를 검사해보니 그녀의 체내에는 두 남자의 정액이 들어있었는데 하나는 황신의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누가 어느 시간에 남겨놓은것인지 알수 없었다. 법의는 리맹이 1997년 10월 24일 새벽 1시부터 2시사이에 피살된것이라고 판단했다. 현장을 분석한 결과 리맹이 피살된 시간에 현장에 있은 사람은 황신밖에 없었다. 현장에 남은 지문도 황신의것이였고 리맹의 체내에 남은 정액도 황신의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황신은 혐의범으로 잡혀 간수소에 들어가게 되였다.황신은 입이 열개라도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1년남짓한 동안 그는 선후로 6개의 간수소로 옮겨졌는데 새로운 간수소에 갈 때마다 장시간에 달하는 심문을 받아야 했다. 그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말해도 경찰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이 간수소에 갇히게 된 원인을 알게 된 황신의 부모는 아들이 살인범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관계를 통하여 아들이 간수소에서 보내온 편지를 본후 더욱 아들의 결백을 믿게 되였다. 황신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 어머니! 이 아들을 믿으십시오. 법의의 감정이 틀린겁니다. 리맹이 그날 아침 8시가 지나서까지 살아있었는데 어떻게 새벽 1시부터 2시사이에 살해될수 있습니까? 리맹은 내가 떠난후에 살해된것이 틀림없는데 말입니다. 난 억울합니다. 나는 죽는것은 두렵지 않지만 억울하게 죽는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정말로 리맹을 살해했다면 백번 죽어도 마땅할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리맹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래동안 검찰관사업을 해왔던 황신의 어머니 리해방은 살인하려면 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아들에게는 살인동기가 없다는것을 발견했다. 단지 트럼프를 놀다가 다툰 일때문에 아들이 리맹을 살해했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였다. 리해방은 아들이 리맹과도 감정이 매우 깊고 처가집 사람들과 매우 화목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리해방은 남편과 함께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사처로 뛰여다녔다. 하지만 어디서나 퇴직한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시에서나 성에서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때 거듭되는 심문에 정신과 육체상에서 말할수 없는 고통을 받은 황신은 여러번이나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부모는 억울한 루명이 벗겨질 날이 꼭 있을것이니깐 절대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름있는 변호사를 청하면서 아들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기 위해 사처로 뛰여다녔다. 2002년 7월 30일, 법원에서는 “황신이 리맹을 살해했다는 증거가 부족하기때문에 죄명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리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후 공안국에서는 리맹의 체내에 정액을 남긴 다른 한 남자를 찾기 위해 100여만원의 거액을 써가면서 수사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2008년 3월말, 상해시공안국에서는 모든 범인들의 혈액을 채취하여 검사했는데 방순이라고 하는 범인이 혈액유전자가 10년전 정주에서 피살된 녀자의 체내에 있던 무명남자의 정액유전자와 완전히 일치했다. 이렇게 되여 절도죄로 곧 풀려나게 될번했던 방순에게서 련속 4명이나 살해한 죄행이 드러나게 되였다. 금년에 32살인 방순은 내몽골에서 출생했는데 어릴 때 재가한 모친을 따라 하남성으로 이사갔다. 부모가 리혼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심성이 비뚤어지고 보복심이 강했다. 그는 정주시 금수로에 위치한 어느 대형오락성에서 보안일군으로 있으면서 단골손님인 리봉이란 녀인과 약혼했다. 그는 리봉과 사귀면서부터 리봉과 함께 춤추러 오는 리맹을 알게 되였다. 그런데 몇달후 리봉은 그와 헤여지자고 했다. 방순은 리봉이 자신을 가난한 보안일군이라고 꺼리는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왜 꺼리지 않고 나와 약혼까지 했을가? 리봉의 마음이 변한것은 리맹때문일거야. 리봉은 친구인 리맹이 나보다 나은 남자친구를 사귄것을 보고 마음이 변한거야.) 이렇게 판단한 방순은 가슴에서 복수의 불길이 타올랐다. 실련의 고통에 모대기던 방순은 리맹을 죽여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방순은 이전에 리봉을 따라 리맹의 집으로 가본적이 있었고 거기서 리맹의 남자친구 황신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황신은 그를 몰랐다.   1997년 10월 24일 오전 8시 30분, 방순은 리맹의 집부근에 숨어서 집안동정을 살펴보았다. 얼마 안되여 황신이 리맹의 집에서 나와 승용차를 몰고가고 리맹의 어머니가 계단쪽에 엎드려있는것을 보고 방순은 슬그머니 3층으로 올라가서 리맹의 방문을 두드렸다. 리맹이 안에서 “누구세요?”라고 묻자 그는 “나는 방순이요”라고 대답했다. 리맹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었다. 집으로 들어간 방순은 신속히 안으로 문을 잠그고 번개같이 달려가 리맹의 목을 졸라서 혼수상태에 빠지게 했다. 리맹이 잠옷을 입고있는것을 본 방순은 욕정을 참을수 없어 리맹의 잠옷을 벗기고 강간하려고 했다. 이때 혼미상태에서 깨여난 리맹은 결사적으로 반항했다. 방순은 침대머리에 있는 전기줄로 리맹의 목을 꽉 졸랐다. 그리고 계속 강간했다. 그런데도 리맹이가 다리로 자기를 걷어차는것을 본 그는 몸에 품고다니던 칼을 꺼내여 리맹의 가슴을 찔렀다. 교활한 방순은 리맹의 집에 들어갈 때부터 장갑을 끼고들어가서 범행을 저질렀기때문에 현장에 지문이 남지 않았던것이다.   방순은 리맹을 살해한후에도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은 아무때든 붙잡히면 죽는 목숨이기때문에 붙잡히기전에 더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1999년 가을, 방순은 정주의 한 산장에 가서 23살의 처녀를 강간한후 살해했다. 그리고 1년후 또 14살의 소녀를 “살해”한후 강간했는데 그가 간후 목이 졸려 혼미상태에 빠졌던 소녀는 다시 살아났다. 소녀의 부모는 제보전화를 건후 광주로 이사갔다. 련속 세 사람을 살해한후 도망치느라고 굶은 그는 빌어먹는 도중에 또 한 농촌녀인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2003년, 상해에 기여든 그는 주머니에 돈이 없자 도적질을 하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5년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2008년초, 방순은 이제 감방에서 나가 활개를 치고 다닐 날이 곧 다가온다고 손을 꼽으면서 기뻐했다. 그런데 경찰이 그의 혈액을 채취하여 10년전의 살인사건을 들춰낼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2008년 11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진짜범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황신은 매우 격동되였다.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년래 나는 창업에 모든 힘을 다 바쳤지만 이 미해결사건이 줄곧 마음에 걸려있었습니다. 진짜범인이 잡히지 않았기때문에 그냥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모든것이 밝혀졌습니다. 나는 그 방순이란 살인악마가 재판받는 날 꼭 정주에 가서 그자의 낯짝을 볼 작정입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살해된 리맹에게 위안의 꽃다발이라도 드리고싶습니다.” 진짜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황신의 부모나 리맹의 부모나 모두 기뻐했다. 방순의 살인사건은 현재 진일보 심사중에 있는데 살인악마는 마땅한 징벌을 받게 될것이다.                       《북방법제보》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