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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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조본산 억대 재산 어디서 왔나? 댓글:  조회:4014  추천:0  2009-04-30
절강성 운화현에서 각종 명의로 소녀들을 협박하여 매음하게 한 29명의 조직범죄집단이 일망타진됐다. 이번 사건은 당지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절강성공안청에서는 깊은 중시를 돌리고 속히 이 사건을 조사처리하도록 운화현공안국에 지시했다. 운화현공안국에서는 4개월동안 호남, 중경 등지를 돌아다니며 간고한 수사끝에 끝내 협박공갈 등 수단으로 소녀들을 매음하게 한 특대사건을 성공적으로 해명했다.   소녀가 지혜롭게 탈출하여 제보   올해 15살밖에 안되는 정정과 리리는 2008년 3월 8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다. 그날 저녁 품팔이를 하는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있던 리리는 함께 PC방에 나가 놀자는 친구 호동승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인테넷에 올라 QQ를 즐겨온 리리는 전화를 받자마자 집에서 뛰쳐나와 친구 정정이를 끌고 호동승을 찾아갔다. 정정과 리리가 약속한 지점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호동승뿐만아니라 낯모를 두 남자애도 함께 있었다. 호동승은 녀자애들이 긴장해하는것을 보고 이자들은 자기 친구인 왕수와 지원이라고 소개했다. 호동승의 친구라고 하니 정정과 리리는 안심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 PC방으로 갔다. 정정과 리리는 인테넷에 올라 재미나게 놀면서 위험이 한발자국씩 자기들에게 다가오는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지원은 정정과 리리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공범 장달유에게 2명 녀자애가 덫에 걸려들었다고 전화했다. 장달유는 “반가운 소식”을 받자마자 승용차를 몰고 지원이 알려준 PC방으로 달려왔다.새벽이 되여서야 정정과 리리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PC방에서 나왔다. 지원은 집으로 데려다주겠으니 차에 오르라고 했다. 정정과 리리는 자기절로 가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거절했다. 정정과 리리가 견결히 차에 오르지 않으려 하자 지원 등은 때리고 욕하면서 강박적으로 그녀들을 차에 밀어넣었다. 장달유와 지원, 호동승은 두 녀자애를 모 호텔로 끌고가 매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때에야 정정과 리리는 잘못 걸려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련 며칠동안 장달유 등은 정정과 리리를 여러 호텔과 미용원으로 끌고다니며 매음하게 하고 오입쟁이한테서 돈을 받아먹었다. 3월 15일 아침, 호동승이 정정이를 데리고 아침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정정이 공안기관에 꼭 제보하겠다고 하자 호동승은 겁을 먹고 그녀를 데리고 타현으로 피신했다. 장달유 등은 호동승과 정정이 감쪽같이 사라진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함을 느끼고 리리를 놓아주었다. 정정은 기회를 타 호동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당지 파출소를 찾아가 제보했다. 경찰들은 즉시 행동하여 호동승을 체포했으며 이 사건을 운화현경찰측에 통보했다.   야밤에 행동하여 소녀를 구원   통보를 받은 운하현경찰들은 그날 저녁으로 즉시 행동하여 장달유가 숨어있는 미용원과 세집에서 장달유, 후목림, 장림 등 7명 주요혐의자들을 체포했다. 경찰들은 그자들의 몸에서 식칼과 비수, 노트북 등 범죄용도구와 몇만원의 돈을 사출해냈다. 그리고 귀주, 사천, 호남 등지에서 강박으로 끌려온 10여명 소녀를 구해냈다. 경찰들은 조사가운데서 구원된 소녀들의 경력은 서로 부동하나 결론은 동일함을 료해했다. 2008년 2월, 장달유의 공범 지명은 자기의 녀자친구 매매를 기만하여 온주에서 운화현으로 끌고와 장달유에게 넘겨주고 소개비 2200원을 받아먹었다. 그후부터 매매는 장달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음을 했다.  2008년 3월 2일, 장달유의 또 다른 공범 등명무는 온주 기차역부근에서 령령, 화화, 총총 3명 녀자애를 얼려서 운화현으로 데리다 장달유에게 넘겨주었다. 장달유는 세 녀자애를 세집에 가두어넣고 장림더러 집을 지키게 했다. 밤중에 화화와 총총은 가만히 세집에서 빠져나와 도망하다가 발각되여 다시 잡혀갔다. 장달유는 화화와 총총에게 다시 도주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을러메며 때리였고 2만원의 빚을 졌다는 쪽지에 싸인하라고 협박했다. 화화는 물매를 이겨내지 못해 놓아달라고 빌고 또 빌었으며 집식구들에게 돈 5000원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화화는 돈 5000원을 팔고 장달유의 손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령령이는 장달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음하다가 경찰들에 의해 구원되였다.   강도집단 분공이 명확하고 수단이 잔혹   경찰들은 4개월간 호남, 중경, 태주, 온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세심한 조사를 거쳐 법죄집단성원 29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체포했다. 운화현에 들어박혀 강박적으로 소녀들을 매음하게 한 법죄집단의 우두머리는 장달유(호북사람)이다. 이 법죄집단은 내부조직이 엄밀하고 분공이 명확했다. 전문 호텔에서 망을 보는자가 있는가 하면 전화련계를 맡아보는자가 있고 매음녀를 호텔까지 데려가고 데려오는자가 있으며 또 전문 돈과 재물을 관리하는자가 있고 외지에 나가 소녀를 물색하는자도 있었다. 두목 장달유는 련계전화번호를 운화현의 여러 호텔과 미용원에 널어놓아 “업무련계”를 하는외 매음녀들이 도망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음녀들의 각종 증권을 압수했고 또 위협공갈 등 수단으로 고분고분 말을 듣게 했다. 그는 또 비법적으로 긁어모은 돈을 소개인에게 소개비용으로 준외에 나머지 돈은 전부 자신이 독점했다. 말을 듣지 않거나 달아나는 녀자애가 있으면 장달유는 순종할 때까지 때리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으며 또 협박으로 집주소와 친인들의 이름을 알아냈다. 만약 누가 공안기관에 제보하면 그집의 친인들에게 꼭 보복할것이라고 위협했다. 법원에서는 주요성원인 장달유와 등명무가 공갈협박매음죄, 랍치죄, 강탈죄가 구성되므로 사형 집행유예 2년으로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한다고 판결했다. 또 다른 주요성원인 후목림을 무기도형에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했으며 정대송, 장림, 왕수 등 10명에게는 징역 2년부터 5년 등 부동하게 언도했다. 소녀들에게 해를 주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범죄자들은 응당 받아야 할 징벌을 받았다.   권력을 람용한 대가 장사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하남성 략양시 원 시장조리 고원지의 회뢰사건을 심사처리했다. 공소에 의하면 2000년부터 2007년사이에 고원지는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7명 부동산업주한테서 10여차에 거쳐 인민페 158만원과  2만딸라를 수뢰했다. 또한 고원지는 시장조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이 벼슬하려고 2002년부터 2005년사이에 여러번 시당위서기 손희무(따로 조사처리함)에게 회뢰하였는데 그 가치가 39만원에 달했다.   부동산업주한테서 100만원을 수뢰 1950년 4월에 태여난 고원지는 교원출신이다. 그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략양시건설위원회 주임 겸 당조서기로 있었다. 후에 그는 략양시인민정부 당조성원 겸 시장조리, 략양시정치협상회 부주석으로 사업했다. 검찰기관의 공소에 의하면 고원지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략양시캐서부동산유한회사 리사장 왕신립한테서 9차나 수뢰했는데 도합 인민페 40만원과 1만딸라였다. 2000년부터 2006년초까지 고원지는 략양시대지부동산유산회사 리사장 진치공한테서 14차 수뢰했는데 도합 41만원이였다. 2002년부터 2005년초까지 고원지는 략양시윤봉집단유한회사 리사장 왕약봉에게서 4차나 수뢰했는데 20만원에 달했다. 고원지에게 회뢰한 7명 사람들은 모두 당지에서 부동산을 경영하는 리사장이였다. 고원지는 많은 돈을 받아먹은후 손에 쥔 권리를 람용하여 개발상인들에게 편리를 도모해주고 많은 수고비를 받아먹었고 또 세금을 감소해줌으로써 나라에서 큰 손실을 보게 했다.   시당위서기에게 38만원을 회뢰 고원지는 략양시건설위원회 주임으로 승급한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벼슬자리가 욕심나서 2002년부터 2005년사이에 여러번 시당위서기 손희무에게 39만원을 회뢰했다. 이런 관계로 하여  2005년부터 고원지는 선후하여 략양시 시장조리, 략양시정치협상회 부주석자리에 오르게 되였다.2002년 5월의 어느날, 하남성당위에서는 략양시에 내려와 시당위 지도자들에 대한 고찰을 진행했다. 고원지는 이번 기회를 잘 리용하면 벼슬하기 좋은 때라고 생각하고 시당위서기 판공실에 10만원을 보내주었으며 여러번에 거쳐 시당위서기 손희무에게 돈을 가져다주었다. 2003년, 손희무의 제발로 고원지는 략양시정부 시장조리로 임명되였고 략양시도시건설을 주관했다. 후에 그는 략양시정치협상회의 부주석으로 승급했다. 고윈지의 사건은 진일보 심사중에 있다.   (사진: 일심에서 심사를 받고있는 고원지)      
18    지혜롭게 마귀소굴에서 탈출한 소녀 댓글:  조회:4236  추천:0  2009-04-28
림선생은 하루의 피곤을 풀려고 온주룡만구에 위치한 한 족부안마원을 찾아갔다.  안마를 받은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쩐지 발이 불편하여 신을 벗고 검사해보니 신바닥에 꼬깃꼬깃 감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림선생이 쪽지를 펼쳐보니 소운이라고 하는 안마원아가씨가 자신을 구해달라는 구원편지였다. 림선생은 즉시 구원편지를 들고 부근의 파출소를 찾아가 이 정황을 제보했다. 경찰들은 소운아가씨가 제공한 단서로 한무리 매음집단을 짓부시고 소운아가씨를 구해냈다. 위협공갈수단으로 소운아가씨를 강제적으로 매음하게 한 범죄협의자 리모는 위협공갈죄, 강박매음죄로 룡만구검찰원에 의해 기소되였다.   하남소녀 속히워 온주로 가다   소운은 사회물정을 모르는 순박한 하남성 편벽한 농촌마을의 소녀이다. 그는 일자리를 찾으러 집을 떠나 상해로 왔다. 하지만 배운것이 없어 일자리를 찾는다는것이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작년 9월의 어느날 그는 전선대에 나붙은  “본 미용원에서 아가씨를 모집함. 대우가 좋으니 의향이 있는분은 면접하기 바람”이라는 광보문을 보고 그 미용원을 찾아갔다. 미용원의 책임자라고 자칭하는 일남일녀가 찾아온 소운을 보더니 두말없이 초빙되였으니 온주로 함께 가야 한다면서 소운을 온주로 데리고갔다. 두 사람은 길에서 소운에게 미용원은 어떻게 좋고 보수도 높다면서 자랑을 늘여놓았다. 그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해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렇게 쉽게 풀리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소운은 자신을 받아준 이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소운은 이렇게 되여 낯선 온주로 오게 되였다. 일남일녀는 소운을 “형님”이라고 하는 온주사람에게 넘겨주었다. “형님”은 소운을 룡만구 영흥거리의 한 족부안마원으로 데리고갔다. 소운은 “형님”을 보고 자기는 미용원에 초빙되였으니 미용원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형님”은 “뭐? 미용원? 소웃다 꾸레미 터지겠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입을 여는거야? 너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을줄 알아. 알았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때에야 소운은 자신이 잘못 걸려들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도망칠 생각을 하다   소운은 이곳에 와서야 소위 안마라는것은 가짜이고 매음이 진짜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소운은 죽어도 매음은 할수 없으니 자신을 놓아달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족부안마원 주인인 리모와 그의 녀자친구는 “뭐? 못하겠다고? 이년이 매맛을 보아야겠네.”하고 욕하더니 소운을 어두운 단칸방에 가두었다. 소운은 제발 놓아달라고 애원했다. 이때에 와서 그는 아빠, 엄마가 그리웠으며 집이 생각나 통곡했다. 그러나 리모는 노기등등하여 소운의 귀뺨을 후려치고는 다시 소리치면 때려죽이겠노라고 위협했다. 그날 저녁 소운은 족부안마원 지하실에 갇혀있었다. 이튿날 리모는 소운더러 손님을 접대하라고 했다. 소운이 견결히 거절하자 리모는 “이년이 죽고싶어 환장했구나”하고 화를 내면서 사정없이 주먹질, 발길질을 해댔다. 리모는 또 경찰에 제보하면 때려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소운은 핍박에 못이겨 하는수없이 죽부안마원에서 손님들에게 안마도 해주고 매음도 해야 했다.저녁이면 소운은 지하실에 갇혀 나오지도 못했다. 평소에 소운이 일용품을 사러 밖에 나가도 리모가 뒤를 따르면서 감시했다. 소운은 겉으로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것 같았지만 사실 한시도 도망칠 생각을 잊지 않았다. 소운은 조사를 받을 때 경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꼭 기회를 타 이 소굴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도망치려면 돈이 있어야 했는데 나에겐 일전한푼도 없었습니다. 평소 나는 손님들한테서 팁을 더 요구하여 도망칠 로비로 모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리모에게 발각되여 매도 맞고 겨우 모은 돈 50원도 빼앗기고말았습니다.”   구원편지를 손님의 신발에 감추다   그번 일이 있은후 소운에 대한 리모의 감시가 더욱 심했으며 일전한푼도 주지 않았다. 소운은 이 방법으로는 도망칠수 없다고 생각되여 다른 방법이 없을가고 생각해보았다. 나중에 생각한것이 안마를 받으러 온 손님들에게 도움을 구하는것이였다. 첫번째, 소운은 구원편지를 썼지만 감히 손님에게 주지 못하고 찢어버리였다. 두번째, 소운은 용기를 내여 리모의 눈치를 피해 손님의 손에 쥐여주고 경찰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두번이나 실패했지만 소운은 락심하지 않고 한번 더 시도해보려 했다. 작년 10월 28일 저녁, 소운은 세번째 구원편지를 썼다. “난 나쁜놈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이곳에 오게 되였어요. 고마운 분들, 불쌍한 나를 제발 구해주세요.” 이튿날, 소운은 강서에서 온 림선생에게 족부안마를 해주었다. 소운은 림선생이 착한분이라고 생각되여 남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미리 준비한 구원편지를 그의 신안에 쑤셔넣었다. 소운은 긴장하여 가슴이 쿵쿵 뛰였으나 이번에 꼭 성공하였으면 하고 빌고 또 빌었다. 소운은 말없이 정성을 다해 림선생을 안마해주었다. 안마가 끝나자 림선생은 아주 만족해하면서 신을 신고 문을 나섰다. 문을 나선 림선생이 신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느낌이 들어 신을 벗고 살펴보니 구원편지가 들어있었다. 이름은 소운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아까 안마를 해준 그 아가씨가 틀림없었다.   경찰들이 소녀를 구해내다   림선생은 소운이 보낸 구원편지를 부근에 있는 파출소에 바치였고 자신이 알고있는 정황을 제공해주었다. 경찰들은 즉시 행동하여 리모가 경영하는 족부안마원을 불의습격했다. 리모는 자신은 불법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딱 잡아뗐다. 경찰들은 족부안마원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지하에 철문으로 된 단칸방이 있었는데 큰 자물쇠로 잠그어져있었다. 경찰들은 어서 철문을 열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리모는 낡은 창고라고 하면서 열려 하지 않았다. 경찰들은 더욱 의심스러워 즉시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리모는 손을 떨면서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었다. 지하실 침대에 한 녀자가 누워있었는데 그 녀자가 바로 소운이였다. 인증, 물증앞에서 리모는 자신의 범죄행위를 탄백했다. 2008년 9월, 리모는 녀자친구와 함께 영흥거리에게 족부안마보건원을 꾸리고 경영했다. 하지만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리모는 손님을 끌기 위해 아가씨를 “초빙”하여 색정봉사를 하게 했다. 리모는 “형님”을 찾아가 아가씨를 물색해달라고 청을 들었다. “형님”은 기만수단으로 소운을 리모에게 넘겨주었고 소개비 3000원을 받아먹었던것이다. 이번 사건을 책임진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농촌녀자애들이 일자리를 찾으러 도시에 몰려들고있다. 하지만 대부분 배운것이 없어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왕왕 거리에 나붙은 비법적인 광고에 속히울 때가 많은데 각별히 주의하길 바란다. 정규적인 광고회사를 통해 자신에게 알맞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또 여러사람들과 많이 상론하여 결정하는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나쁜 사람에게 속히웠을 때 제때에 공안기관에 제보하여 자신을 보호할줄 알아야 한다.”             《법률과생활》    
17    소녀매음집단 훼멸 댓글:  조회:3989  추천:0  2009-04-20
절강성 운화현에서 각종 명의로 소녀들을 협박하여 매음하게 한 29명의 조직범죄집단이 일망타진됐다. 이번 사건은 당지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절강성공안청에서는 깊은 중시를 돌리고 속히 이 사건을 조사처리하도록 운화현공안국에 지시했다. 운화현공안국에서는 4개월동안 호남, 중경 등지를 돌아다니며 간고한 수사끝에 끝내 협박공갈 등 수단으로 소녀들을 매음하게 한 특대사건을 성공적으로 해명했다.   소녀가 지혜롭게 탈출하여 제보   올해 15살밖에 안되는 정정과 리리는 2008년 3월 8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다. 그날 저녁 품팔이를 하는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있던 리리는 함께 PC방에 나가 놀자는 친구 호동승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인테넷에 올라 QQ를 즐겨온 리리는 전화를 받자마자 집에서 뛰쳐나와 친구 정정이를 끌고 호동승을 찾아갔다. 정정과 리리가 약속한 지점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호동승뿐만아니라 낯모를 두 남자애도 함께 있었다. 호동승은 녀자애들이 긴장해하는것을 보고 이자들은 자기 친구인 왕수와 지원이라고 소개했다. 호동승의 친구라고 하니 정정과 리리는 안심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 PC방으로 갔다. 정정과 리리는 인테넷에 올라 재미나게 놀면서 위험이 한발자국씩 자기들에게 다가오는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지원은 정정과 리리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공범 장달유에게 2명 녀자애가 덫에 걸려들었다고 전화했다. 장달유는 “반가운 소식”을 받자마자 승용차를 몰고 지원이 알려준 PC방으로 달려왔다.새벽이 되여서야 정정과 리리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PC방에서 나왔다. 지원은 집으로 데려다주겠으니 차에 오르라고 했다. 정정과 리리는 자기절로 가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거절했다. 정정과 리리가 견결히 차에 오르지 않으려 하자 지원 등은 때리고 욕하면서 강박적으로 그녀들을 차에 밀어넣었다. 장달유와 지원, 호동승은 두 녀자애를 모 호텔로 끌고가 매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때에야 정정과 리리는 잘못 걸려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련 며칠동안 장달유 등은 정정과 리리를 여러 호텔과 미용원으로 끌고다니며 매음하게 하고 오입쟁이한테서 돈을 받아먹었다. 3월 15일 아침, 호동승이 정정이를 데리고 아침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정정이 공안기관에 꼭 제보하겠다고 하자 호동승은 겁을 먹고 그녀를 데리고 타현으로 피신했다. 장달유 등은 호동승과 정정이 감쪽같이 사라진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함을 느끼고 리리를 놓아주었다. 정정은 기회를 타 호동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당지 파출소를 찾아가 제보했다. 경찰들은 즉시 행동하여 호동승을 체포했으며 이 사건을 운화현경찰측에 통보했다.   야밤에 행동하여 소녀를 구원   통보를 받은 운하현경찰들은 그날 저녁으로 즉시 행동하여 장달유가 숨어있는 미용원과 세집에서 장달유, 후목림, 장림 등 7명 주요혐의자들을 체포했다. 경찰들은 그자들의 몸에서 식칼과 비수, 노트북 등 범죄용도구와 몇만원의 돈을 사출해냈다. 그리고 귀주, 사천, 호남 등지에서 강박으로 끌려온 10여명 소녀를 구해냈다. 경찰들은 조사가운데서 구원된 소녀들의 경력은 서로 부동하나 결론은 동일함을 료해했다. 2008년 2월, 장달유의 공범 지명은 자기의 녀자친구 매매를 기만하여 온주에서 운화현으로 끌고와 장달유에게 넘겨주고 소개비 2200원을 받아먹었다. 그후부터 매매는 장달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음을 했다.  2008년 3월 2일, 장달유의 또 다른 공범 등명무는 온주 기차역부근에서 령령, 화화, 총총 3명 녀자애를 얼려서 운화현으로 데리다 장달유에게 넘겨주었다. 장달유는 세 녀자애를 세집에 가두어넣고 장림더러 집을 지키게 했다. 밤중에 화화와 총총은 가만히 세집에서 빠져나와 도망하다가 발각되여 다시 잡혀갔다. 장달유는 화화와 총총에게 다시 도주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을러메며 때리였고 2만원의 빚을 졌다는 쪽지에 싸인하라고 협박했다. 화화는 물매를 이겨내지 못해 놓아달라고 빌고 또 빌었으며 집식구들에게 돈 5000원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화화는 돈 5000원을 팔고 장달유의 손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령령이는 장달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음하다가 경찰들에 의해 구원되였다.   강도집단 분공이 명확하고 수단이 잔혹   경찰들은 4개월간 호남, 중경, 태주, 온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세심한 조사를 거쳐 법죄집단성원 29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체포했다. 운화현에 들어박혀 강박적으로 소녀들을 매음하게 한 법죄집단의 우두머리는 장달유(호북사람)이다. 이 법죄집단은 내부조직이 엄밀하고 분공이 명확했다. 전문 호텔에서 망을 보는자가 있는가 하면 전화련계를 맡아보는자가 있고 매음녀를 호텔까지 데려가고 데려오는자가 있으며 또 전문 돈과 재물을 관리하는자가 있고 외지에 나가 소녀를 물색하는자도 있었다. 두목 장달유는 련계전화번호를 운화현의 여러 호텔과 미용원에 널어놓아 “업무련계”를 하는외 매음녀들이 도망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음녀들의 각종 증권을 압수했고 또 위협공갈 등 수단으로 고분고분 말을 듣게 했다. 그는 또 비법적으로 긁어모은 돈을 소개인에게 소개비용으로 준외에 나머지 돈은 전부 자신이 독점했다. 말을 듣지 않거나 달아나는 녀자애가 있으면 장달유는 순종할 때까지 때리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으며 또 협박으로 집주소와 친인들의 이름을 알아냈다. 만약 누가 공안기관에 제보하면 그집의 친인들에게 꼭 보복할것이라고 위협했다. 법원에서는 주요성원인 장달유와 등명무가 공갈협박매음죄, 랍치죄, 강탈죄가 구성되므로 사형 집행유예 2년으로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한다고 판결했다. 또 다른 주요성원인 후목림을 무기도형에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했으며 정대송, 장림, 왕수 등 10명에게는 징역 2년부터 5년 등 부동하게 언도했다. 소녀들에게 해를 주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범죄자들은 응당 받아야 할 징벌을 받았다.   권력을 람용한 대가 장사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하남성 략양시 원 시장조리 고원지의 회뢰사건을 심사처리했다. 공소에 의하면 2000년부터 2007년사이에 고원지는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7명 부동산업주한테서 10여차에 거쳐 인민페 158만원과  2만딸라를 수뢰했다. 또한 고원지는 시장조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이 벼슬하려고 2002년부터 2005년사이에 여러번 시당위서기 손희무(따로 조사처리함)에게 회뢰하였는데 그 가치가 39만원에 달했다.   부동산업주한테서 100만원을 수뢰 1950년 4월에 태여난 고원지는 교원출신이다. 그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략양시건설위원회 주임 겸 당조서기로 있었다. 후에 그는 략양시인민정부 당조성원 겸 시장조리, 략양시정치협상회 부주석으로 사업했다. 검찰기관의 공소에 의하면 고원지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략양시캐서부동산유한회사 리사장 왕신립한테서 9차나 수뢰했는데 도합 인민페 40만원과 1만딸라였다. 2000년부터 2006년초까지 고원지는 략양시대지부동산유산회사 리사장 진치공한테서 14차 수뢰했는데 도합 41만원이였다. 2002년부터 2005년초까지 고원지는 략양시윤봉집단유한회사 리사장 왕약봉에게서 4차나 수뢰했는데 20만원에 달했다. 고원지에게 회뢰한 7명 사람들은 모두 당지에서 부동산을 경영하는 리사장이였다. 고원지는 많은 돈을 받아먹은후 손에 쥔 권리를 람용하여 개발상인들에게 편리를 도모해주고 많은 수고비를 받아먹었고 또 세금을 감소해줌으로써 나라에서 큰 손실을 보게 했다.   시당위서기에게 38만원을 회뢰 고원지는 략양시건설위원회 주임으로 승급한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벼슬자리가 욕심나서 2002년부터 2005년사이에 여러번 시당위서기 손희무에게 39만원을 회뢰했다. 이런 관계로 하여  2005년부터 고원지는 선후하여 략양시 시장조리, 략양시정치협상회 부주석자리에 오르게 되였다.2002년 5월의 어느날, 하남성당위에서는 략양시에 내려와 시당위 지도자들에 대한 고찰을 진행했다. 고원지는 이번 기회를 잘 리용하면 벼슬하기 좋은 때라고 생각하고 시당위서기 판공실에 10만원을 보내주었으며 여러번에 거쳐 시당위서기 손희무에게 돈을 가져다주었다. 2003년, 손희무의 제발로 고원지는 략양시정부 시장조리로 임명되였고 략양시도시건설을 주관했다. 후에 그는 략양시정치협상회의 부주석으로 승급했다. 고윈지의 사건은 진일보 심사중에 있다.   (사진: 일심에서 심사를 받고있는 고원지)      
16    가짜경찰한테 심신을 유린당한 처녀 댓글:  조회:4055  추천:0  2009-04-17
“공안국 부국장” 장무강이 미녀경리를 꼬시여 랑만적인 사랑을 해오다가 한달만에 모든것이 들통나 공안기관에 잡혀갔다. 장무강은 일찍 보안일군으로 있다가 정리실업당한 무직업자였다. 그는 가짜경찰복을 입고 시장에서 팔리고있는 놀이감권총과 놀이감수갑을 마련한 뒤 “공안국 부국장”으로 가장하고 미녀경리의 환심을 샀던것이다. 만일 녀자집의 사람들이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둘은 10일후에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3월 29일 저녁, 기만당한 녀자집 사람들은 공안기관에 제보를 했으며 경찰들이 달려와 “동료”인 범죄협의자 장무강을 나포했다.   “공안국 부국장”이 미녀경리와 사랑 하남성 농촌마을에서 태여난 리정은 올해 26살인데 아주 이쁘게 생긴데다 말주변도 좋아 정주시 모 자동차판매부에 취직했다. 리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경리로 승진했다. 올해 2월말의 어느날, 리정이 아침 일찍 출근했을 때 회색경찰복을 입은 중년남자가 전시청에 나타났다. 그 남자는 새로 전시된 “동남패”상무용차를 살펴보고있었다. 리정은 웃으면서 다가가 그 손님에게 승용차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주었다. 중년남자는 이 차가 딱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서 값이 얼마인가고 물었다. 나중에 쌍방은 15만원으로 값을 흥정했다. 하지만 그후 남자는 일이 바쁘다면서 승용차를 찾아가지 않았다. 리정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서야 그 남자의 이름이 류과이고 올해 35살이며 모 시공안국에서 사업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날 저녁 류과는 리정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전화에서 자기는 시공안국의 형사경찰대장이며 하남성 개봉경찰학교를 졸업했고 리혼한후 혼자 지내고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전시청에서 리정을 만자자마자 첫눈에 정이 들어 사모하고있다고 했다. 류과의 돌연적인 사랑고백에 리정의 마음은 평온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리정은 또 류과의 전화를 받았다. “나 지금 경찰들을 거느리고 도주범을 잡으러 료녕으로 떠나오. 떠나기전에 리정과 하고싶은 말이 있소. 이번 추적행동이 아주 위험하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소. 난 상관없는데 리정이 걱정되는구만.” 류과의 전화를 받은 리정은 너무도 감동되여 꼭 안전에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헌데 료녕으로 갔다던 류과가 이튿날 생각밖에 리정의 앞에 나타났다. “료녕에서 우린 아주 성공적으로 단꺼번에 8명 도주자들을 붙잡았소. 상급에서는 나의 지휘능력을 인정해주었소. 이제 곧 현급시로 내려가 공안국 부국장으로 부임될것이요. 엄하게 타격하는 사업을 주관할것 같소.” 류과는 재차 리정에게 사랑를 고백했다. 리정은 류과가 마음에 들었다. 그날 저녁 둘은 함께 밤을 지냈다. 이틀후 류과는 리정에게 “성공안청에서 60명 경찰을 뽑아 서장지원을 보내는데 그속에 나도 들어있소. 서장에 가면 고생이 많다는것도 리정이 잘 알고있으리라 믿소. 만약 결혼하면 신청하여 서장에 가지 않을수도 있소. 그러니 우리 속히 결혼하기요. 그리고 이 기회에 리정을 공안국에 출근할수 있도록 전근시켜줄수도 있소.” 리정은 자신도 남들이 우러러보는 경찰제복을 입고 다닐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하여 의견이 없으니 결혼날자를 속히 정하라고 했다. 류과는 점쟁이를 통해 알아보았는데 4월 11일 좋다면서 이날을 결혼날자로 정했다고 전했다.   빌려온 승용차를 타고 “장인장모”를 만나뵙다 리정은 류과에게 시간을 짜내여 부모님들을 만나러 가자고 제의했다. 며칠후 류과는 검은색 승용차에 앉아 리정의 집으로 찾아갔다. 사실 이 승용차는 류과가 빌려온것인데 운전수까지 포함하여 하루 세값은 200원이였다. 류과는 리정의 부모님들에게 이 승용차는 상급에서 자기에게 배치해준것이며 함께 따라온 두 젊은이중 한명은 전직운전수이고 다른 한명은 자신의 뒤를 물려받을 형사경찰대장이라고 거짓말을 꾸미였다. 한담중에서 리정의 아버지는 누군가가 자기 돈 1만원을 꿔간지 오래되는데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류과는 이런 사소한 일은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면서 옆에 있는 “형사경찰대장”에게 시급히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형사경찰대장”은 “네, 명심하겠습니다. 류국장님 안심하십시오. 꼭 임무를 잘 완수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리정의 일가에서는 좋은 사위감이 생기였다고 아주 만족해하면서 고급술과 고급담배로 손님을 초대했다. 류과는 리정의 부모님들에게 결혼한후 리정을 정주시공안국에 전근시켜 호적부를 관리하는 경찰로 배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리정의 남동생 리강은 지체장애자이다.  류과는 돌아가 즉시 리강에게 지체장애자증을 신청하여 달마다 660원의 생활보장금을 받을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리강은 “2.7기념탑”광장에서 차입닭알장사를 하고싶다고 말했다. 류과는 그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나 류과요. 동무 즉시 ‘2.7기념탑’광장에 가서 가게로 하기에 알맞는 집을 알아보오. 돈걱정은 하지 마오.” 류과는 또 리정의 부모에게 집이 너무 낡아보이니 새로 수리하자고 제의했다. 집을 새로 수리할 때 류과는 리정과 “장인”한테서 돈을 홀려냈다. 류과는 리정과 돈을 요구할 때는 “장인”에게 절대 알려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했고 또 “장인”한테서 돈을 요구할 때 딸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꼼꼼하고 세심한 리강은 그사이에 어쩐지 류과에게서 의심되는 점을 많이 발견했다. 명분이 “공안국 부국장”인데 왜 남한테서 돈을 요구할가? 이 사람이 진짜 공안국 부국장이 옳은지? 리강은 의심되는 점을 부모와 누나에게 말해주면서 그자에 대해 경각성을 높이라고 일깨워주었다. 류과가 집에 없는 사이에 리정은 그가 근무한다는 공안국에 전화하여 문의했다. 상대방은 류과라고 부르는 부국장이 근본 없으니 그런 사기군에게 절대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때에야 리정의 집에서는 류과가 사기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약점이 많았는데 왜 보아내지 못했을가? 리정의 일가는 화가 나고 억울하기도 했다. 3월 29일 오전, 류과는 리정에게 전화하여 집을 장식할 예산금이 나왔으니 돈을 준비하라고 부탁했다. 리정은 전화로 말하기 불편하니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류과는 리정의 집으로 왔다. 리정은 류과를 집에 앉혀놓고 가만히 공안기관에 제보했다. 등봉시공안국 형사경찰들이 즉시 달려왔다. 형사경찰중대장 왕국정이 류과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후 즉시 형사경찰대에 가서 심문을 받아야 하니 따라오라고 했다. 그러자 류과는 “보잘것 없는 중대장이 감히 부국장을 보고 오라가라고 마음대로 호령하는거야? 누가 너에게 이런 권력을 주었나?”라고 소리를 쳐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도원 원소룡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개자식, 연극을 그만 놀아”하고 말하고는 단매에 류과를 꺼꾸러뜨리였다. 형사경찰대에 끌려간 류과는 모든것을 탄백했다. 사실 류과의 진짜이름은 장무강이고 올해 43살이며 등주시 라장진의 사람으로서 소학교문화정도였다. 그는 일찍 외지에서 보안일군으로 일하다가 정리실업당해 정주로 왔던것이다. 장무강은 정주에서 여직껏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올해 2월, 할일없이 한가하게 거리를 쏘다니던 류과는 리정이 출근하는 자동차판매부를 지나다가 이쁘게 생긴 리정을 한눈에 보아냈다. 장무강은 자동차판매부 부경리로 있는 리정의 환심을 얻을 방법이 없을가 고민하던끝에 나중에 생각한것이 가짜경찰극이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인민경찰을 신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리용해 가짜 “공안국 부국장”연극을 놀았던것이다. 리정은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되는것이 많습니다. 꼼꼼히 생각해보면 그자에게서 많은 약점이 드러났죠. 하지만 당시 나는 상대방을 너무 경솔하게 믿었습니다. 공안부문에 전화 한통이면 모든것이 밝혀지겠는데 참…자매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싶습니다. 모든 일에서 너무 경솔하게 남을 믿지 말고 경각성을 높이세요. 그리고 사기군을 만나면 나처럼 봉변을 당하지 말고 경각성을 높여 즉시 공안기관에 제보하여 잡아들이도록 협조하세요.”                                                《하남일보》    
15    올림픽우승이 걸어온 사랑의 고개길 댓글:  조회:4071  추천:0  2009-04-10
1996년은 왕군하에게 있어서 가장 자랑할만한 한해였다. 미국 아틀란타올림픽경기대회에서 그녀는14분 59초 88의 성적으로 녀자장거리달리기 5000메터 우승을 하여 금메달을 따낸 뒤를 이어 31분 02초 58의 성적으로 녀자장거리달리기 1만메터 준우승을 하여 은메달을 더 따냈다. 그녀가 오성붉은기를 들고 경기장을 돌 때 전세계의 시선이 그녀를 주목했다. 그녀는 삽시간에 중국뿐만아니라 미국인들도 숭배하는 영웅으로 되였고 “동방신록( 方神鹿)”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1973년 1월 19일에 길림성 교하시에서 출생한 왕군하는 1988년에 대련체육학교에 입학했고 1991년에 료녕성륙상팀에 들어갔으며 1995년에 국가륙상팀 선수로 되였다. 1999년, 주용기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왕군하도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땅을 다시 밟았다. 미국인들은 왕군하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왕군하는 하나 또 하나의 도시를 넘나들면서 마침내 이번 미국행에서의 마지막 역인 꿈의 도시 덴버(丹佛)에 도착했다. 덴버에서는 왕군하를 위해 환영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화교들이였다. 같은 민족이였기때문에 자연스럽게 어울려 즐겁게 놀았는데 사회자의 요청에 의해 왕군하는 무대에 올랐다. 그녀가 밤례복을 입고 무대에 오를 때 치마가 살짝 들렸는데 “동방신록”의 다른 한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숱한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였다. 그녀를 숭배의 눈길로 바라보고있는 사람들속에는 황천문이란 화교도 있었는데 그의 눈길이 제일 오래도록 왕군하의 몸에 가서 멎으면서 떠날줄을 몰랐다. 상해출신인 황천문은 1983년에 미국 덴버대학에 입학했다. 그후 음악석사학위를 따내고 미국에 남아서 몇년간 분투한 결과 이름난 “편직주머니대왕”으로 되였고 덴버화교들의 존경을 받는 령수급인물중의 하나로 되였다. 황천문은 왕군하의 날씬한 뒤모습을 보는 순간 3년전 올림픽경기장에서 달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현장에서 소리치면서 응원했는데 검고 건장한 몸매를 가진 그녀가 번개같이 달리는 모습에 자호감을 느꼈던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어깨가 드러난 밤례복을 입고 옅은 화장을 한 왕군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경기장에서 남자처럼 달리던 “동방신록”이 녀자라는것을 이때에야 느꼈다. 그것도 매우 아름다운 녀자라는것을 발견했다. 그는 약간 마른 몸매인 그녀에게 애틋한 감정까지 품었다. 연회가 끝난후 황천문은 왕군하의 앞에 가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청을 들었다. 왕군하는 황천문을 처음 보았을 때 이상한 감을 느꼈다. 미국사람들은 옷차림에 대해 매우 중시했다. 특히 정규적인 연회에는 정장을 입고 나오는데 황천문은 반소매적삼에 청바지차림이였던것이다. 곁사람이 황천문을 덴버화교의 령수인물이라고 소개하자 왕군하는 눈앞의 남자에게 흥미를 느끼게 되였다. 사진을 다 찍은후 성격이 직방배기인 왕군하는 웃으면서 “전 처음로 당신같은 령수를 봅니다. 반소매적삼을 입고 산보하러 나왔습니까?”라고 물었다. 황천문은 구속을 원하지 않는 예술가의 특징이 몸에 배여서 편안한대로 입는 성격이였다. 왕군하가 그렇게 말해서야 그는 주위사람들이 모두 정장을 입고 나온것을 알고 계면쩍게 웃으면서 “아, 이거 실례했소”라고 말했다.며칠후 황천문은 왕군하에게 사진을 부쳐주려고 하다가 그녀의 주소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오는 사람에게마다 자랑을 했다. 그는 대륙의 신문과 인터넷에서 왕군하의 소식을 알아보면서 그녀가 경기에 나가면 응원해줄 준비를 하고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군하가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창 운동선수로 활약할 황금시기인데 이렇게 포기하다니? 그는 몹시 아쉬워했다. 2001년, 황천문은 중국의 환경오염문제가 매우 엄중한것을 보고 자금과 기술을 가지고 상해로 찾아가서 락기산환경보호기술유한회사를 세운후 전문 환경보호사업에 몰두했다. 그때 안해와 리혼한 그는 자녀의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아들과 딸을 잠시 미국에 남겨놓았다.왕군하는 미국에서 돌아온후 얼마 안되여 전우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2006년에 왕군하는 성격차이로 남편 전우와 리혼했다. 2008년 3월, 왕군하는 어느 은행의 년말야회에 참석했는데 뜻밖에도 한 남자가 다가와 웃으면서 인사하는것이였다. “당신은 왕군하지? 날 기억할만하오?” 왕군하가 머리를 가로 젖자 그 남자는 돈지갑에서 한장의 사진을 꺼내여 그녀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이건 9년전에 당신이 미국 덴버에 왔을 때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요.” 그 사진을 보고서야 왕군하는 생각났다. “아, 당신은 덴버의 화교령수이죠. 성함은 황씨 맞죠? 그땐 반소매적삼을 입었는데 지금은 달라진 모습이군요.” 이튿날, 황천문은 왕군하를 청해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말했다.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가는군. 9년전에 미국에서 당신과 함께 식사한적이 있는데 지금은 상해에서 이렇게 함께 식사하게 되다니.” 왕군하가 리혼한후 상해에 왔다는 말을 들은 황천문은 자신도 혼자 상해에 와서 창업을 하게 된 경력을 이야기했다.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황천문은 왕군하에 대해 더 많은것을 료해하게 되였다. 그는 인생에서도 경기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 왕군하의 정신에 탄복되였으며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였다. 왕군하도 황천문을 지기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친근한 감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운동선수로 뽑혀 훈련하느라고 정규적인 공부를 하지 못한 그녀는 학식이 있고 사업과 생활에서 가르침을 받을수 있는 선생을 모시고싶었다. 그런데 황천문과 같은 적임자가 눈앞에 나타났던것이다. 그때로부터 왕군하는 시간만 있으면 황천문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황천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세심하게 돌봐주었다. 왕군하는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황천문은 이 기회를 리용하여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는 왕군하가 달리기를 하는 곳을 알아두었다가 일찌감치 그 곳에 나가서 그녀를 기다리면서 우연히 만난척했다. 이러한 “우연”이 여러번 반복되자 왕군하는 알아차리고 황천문이 먼곳에서부터 보이면 일부러 피해서 다른 길로 달렸다. 그런데 뒤에서 황천문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쫓아오는것이였다. 왕군하가 “왜서 나를 따라다니면서 달리기를 합니까?”라고 물어보자 황천문은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라고 대답했다. 황천문의 고백에 왕군하는 깜짝 놀랐다. 2008년 8월, 왕군하와 황천문은 상해의 어느 한 고전식의 차집에서 함께 차를 마셨다. 두 사람은 모두 핸드폰을 꺼버리고 둘만의 행복을 만끽했다. 황천문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왕군하의 손을 꼭 잡고 “나의 안해가 되여주오. 우리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것이 어떻소?”라고 청혼했다. 순간 왕군하는 가슴이 활랑거렸다. 한번 혼인에서 실패한 그녀는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황천문의 고백을 듣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이 남자를 사랑하고있다는것을 느꼈다. 왕군하는 결혼은 두 사람의 일만이 아니라는것을 느꼈다. 황천문에게도 두 아이가 있고 자신에게도 아들이 있지 않는가. 쌍방의 아이들을 생각하자 그녀는 이런저런 근심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황천문은 총명한 사람인지라 왕군하의 심정을 알수 있었다. 그는 “군하는 계모노릇을 잘하지 못할가봐 두려운거지? 나의 두 아이는 미국에서 태여나서 관념이 서구화되였기때문에 어울리기도 쉬울거요”라고 왕군하를 위안했으며 아들을 중국에 데려오기도 했다. 황천문의 아들은 왕군하를 만나자마자 그녀를 좋아했다. 아이는 왕군하를 보고 “난 아지미를 알아요. 아지미는 올림픽우승을 한 녀영웅이죠. 우리 학교에는 아지미의 그림이 붙어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아빠가 왕군하와 결혼한다는것을 알고는 “아이, 좋아라! 올림픽우승이 나의 엄마가 된다니”라고 박수를 치더니 즉시 미국에 있는 누나한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왕군하가 리혼한후 아들은 줄곧 전 남편과 함께 있었다. 황천문은 왕군하가 두고온 아들때문에 가슴아파한다는것을 알고는 아들이 미국에서 가져온 놀이감을 왕군하의 아들에게 부쳐주었다. 그리고 왕군하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명년여름방학에 널 데리고 미국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전화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환성을 듣자 왕군하는 자신이 이 길을 선택해도 된다는것을 느꼈다.2008년 10월, 단풍이 곱게 물든 아름다운 계절에 왕군하는 또 한번 행복한 신부로 되였다. 아름다운 혼례복도 없고 성대한 혼례식도 없었지만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어온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소원을 이루었다. 이는 왕군하가 바라는 생활이였다. 좌절을 겪어온 사람일수록 행복의 의의와 안정된 생활의 소중함을 아는것이다. 왕군하,  그녀의 앞날은 행복할것이다.                                                                              《지음》  
14    계부는 마귀인가 천사인가 댓글:  조회:3961  추천:0  2009-04-10
2008년 2월 1일, 산동성 평도시 장과장진에 살고있는 송씨네 집에서 뜻밖의 재난이 벌어졌다. 12살되는 주병이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조심하지 않아 방바닥에 불이 붙었다. 집에 돌아온 송명성은 온 집안에 검은 연기천지인것을 보고 급히 불을 끈후 화가 나서 주병을 불러놓고 “내가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집이 싹 탈번했잖아? 너 집을 싹 태워버리려고 작정했잖아?!”라고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후 일보러 밖에 나갔다가 15분후에 돌아온 그는 주병이 창살에 목을 매고있는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목을 맨 목수건을 풀어던진후 아이를 안아다가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촌위생소와 120구급중심에 전화를 걸었다… 주병은 구급을 거쳐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식물인으로 되고말았다. 주병의 어머니인 주원향은 당시 12킬로메터밖에 있는 청도흠풍가구유한회사에 출근하고있었다. 이 기막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주원향은 아들이 자살한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들을 살해한것이라고 의심했다. 1973년에 출생한 송명성은 2004년에 아는 사람의 중매로 한살 년하인 주원향을 만났다. 주원향은 약혼할 때 송명성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나의 오빠와 올케가 일찍 사망되여 내가 오빠의 아이를 키우고있어요. 난 시집갈 때 이 의지가지없는 아이도 함께 데리고가려고 하는데 동의하나요?” “동의하오!” 선량한 송명성은 주저없이 통쾌하게 대답했다. 송명성은 처녀의 몸으로 오빠의 아이까지 키워주고있는 주원향을 정이 깊은 녀인이라고 존중했다. 2004년 봄, 송명성과 주원향은 결혼했는데 그때 8살된 주병도 그들과 함께 살게 되였다. 결혼후 송명성은 주병이 주원향을 “고모”라고 부르는것이 아니라 “엄마”라고 부르는것을 보고 의심이 들었다. 이에 대해 주원향은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엄마의 사랑을 주기 위해 그렇게 부르라고 했어요”라고 설명했다. 송명성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딸까지 본 그들 부부는 행복하게 살았다. 2006년 7월, 주원향은 흑룡강에 있는 조카 주병의 호적을 산동성 평도시로 옮겨오려고 했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데 유익한 일이였기때문에 송명성은 주병의 호적을 수속하러 바삐 뛰여다녔다. 그런데 원 호적부에는 주병이 주원향의 조카인것이 아니라 친아들이라고 적혀있었다. 송명성이 깜짝 놀라서 따져묻자 주원향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1994년, 20살인 그녀는 산동성 명수시의 한 가구점에서 판매원으로 있을 때 총경리 축강의 눈에 들었다. 축강은 그녀보다 18살이나 년상이였는데 “나는 원향처럼 예쁘고 현숙한 녀자를 안해로 맞아들이려고 다른 녀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태껏 기다렸소”라고 하면서 그녀를 꼬셨다. 그녀는 축강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그와 동거하여 임신까지 했다. 주원향이 결혼등록을 하자고 했으나 축강은 이런저런 핑게를 대면서 거절하고 간단하게 결혼식만 올렸다. 1996년 5월 1일, 주병이 태여난후 축강은 주원향을 보고 “나는 안해도 있고 딸도 있소. 그런데 딸이 바보여서 원향의 배를 빌려서 아들을 보려 한것이요. 내가 대가를 돈으로 보상해줄테니 아이를 나한테 두고 다른 남자를 찾아 시집을 가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원향은 법원에 기소하여 아들의 부양권을 쟁취했다. 주원향은 나중에 송명성을 만났을 때 그가 아이까지 있는 녀자를 받아들이지 않을가봐 이런 사실을 숨겼던것이다. 주병이 안해의 조카가 아니라 안해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송명성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정서가 저락되여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송명성은 이때로부터 주병을 대하는 태도에 약간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때문에 주원향은 남편이 옹졸하여 아이를 잘 대해주지 않는다고 의심했다. 한번은 주병이 랭장고에서 도마도를 꺼내먹으려고 했는데 송명성은 찬음식을 먹으면 위에 해롭다면서 먹지 못하게 했고 또 한번은 주병이 발을 씻지 않았다고 침대에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 그때마다 그들 부부는 한바탕 다투었는데 주병도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 송명성을 “아빠”라고 부르던데로부터 “아저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주병이 화재를 일으킨 일로 계부한테 욕을 얻어먹은후 자살하려고 한 사건이 벌어졌던것이다. 오후 3시 40분, 구급이 끝난후에야 송명성은 안해한테 전화를 걸어 주병이 목을 매여 자살하려고 한 일을 알려주었다.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온 주원향은 아들이 자살하려고 했던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아이를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하고있는 남편이 아이의 목을 매여 죽인것이라고 의심했다. 송명성이 억울하다고 가슴을 쳤으나 주원향은 아들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병상에 누워있는것을 보고 통곡하면서 따져물었다. “당신은 왜서 아이한테 일이 생긴후 나한테 인차 알리지 않고 몇시간이 지나서야 알렸어요?” “아이를 구급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을 못했소.” 주원향은 또 아이의 목에 난 상처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당신은 아이가 목수건으로 자살을 하려고 했다고했는데 아이의 목에 난 상처는 왜 이리 가는가요?” 송명성이 보니 과연 주병의 목에 난 상처는 목수건으로 인한 상처같지 않고 전기줄이나 가는 바줄 같은데 매인 상처같았다. 주원향은 송명성이 “나도 똑똑히 모르겠소”라고 대답하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송명성은 “무턱대고 의심하지 말고 아이가 깨여나면 물어보는것이 어떻소? 이제부터 우리가 아이의 의식이 하루 빨리 회복되게 하기 위해 잠시 다투지 말고 힘을 합쳐 아이를 치료하기요”라고 말했다. 그때로부터 송명성은 안해와 함께 아이를 돌보는데 정력을 다 쏟아부었다. 그는 매일 아이에게 전신안마를 해주었고 몸을 씻어주었으며 대소변을 받아냈다. 2008년 7월부터 송명성은 척추에 극통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병원게 가서 검사해보니 골질증식이였다. 한달후 그는 오토바이를 몰고 출근하다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났다. 간신히 오토바이를 급정거했으나 넘어져서 상하고말았다. 2008년 8월 21일, 주병이 갑자기 열이 40도로 올랐는데 송명성은 아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끼던 오토바이를 300원에 팔았다. 주병의 병세는 점점 호전되여 우유를 마시던데로부터 닭알도 먹고 밥도 먹을수 있게 되였다. 식사량도 정상으로 회복되였다. 주병이 매일 닭알 9개와 우유 2봉지를 먹었기때문에 송명성은 매달 몇백원의 생활비를 더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이의 병세가 호전되였기때문에 몹시 기뻐했다. 2008년 10월 15일, 송명성은 비닐주머니로 아이의 오줌을 받아낼 때 주병의 입이 약간 움직이는것을 발견했다. 그후 텔레비죤에서 조본산의 소품을 시청할 때 주병은 듣기도 하고 입을 꿈틀거리기도 했다. 평도시제2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니 아이의 의식이 회복되고있는 중이였다. 아이의 의식이 점점 회복되여가는것을 보고 송명성부부는 모두 아이에게 사건의 진실을 물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11월 2일 저녁, 송명성이 먼저 안해을 보고 말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억울했는지 아오? 이젠 해명할 때가 된것 같소.”   “그래요. 응당 사실을 밝혀야죠.” 그들 부부는 모두 아이의 침대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주원향은 아이의 귀에 입을 대고 나직하게 물었다. “주병아, 엄마가 너에게 한가지 일을 물어보려고 한다. 금년 2월 1일의 그날에 아저씨가 너의 목을 졸라 죽이려고 했느냐?” 그 말을 들은 주병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것이였다. 그후 여러번이나 반복하여 물어보았으나 주병은 말없이 눈물만 흘릴뿐이였다. 그 정경을 보고 주원향은 화가 나서 남편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소리쳤다. “아이가 이렇게 속상해하는것을 보면 당신이 해친것이 분명해요!” 아이의 눈물은 무엇을 말해주는것일가? 피해를 입은 자신이 슬퍼서일가, 아니면 계부가 억울함을 당하고있는것이 속상해서일가? 그 답을 알려면 아이가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기를 기다리는수밖에 없었다. 2008년 12월 1일, 주원향은 기자의 취재를 접수할 때 “송명성은 거짓말을 하고있습니다. 그가 주병을 살뜰하게 돌봐준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자책감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새로운 의문까지 제기했다. “당시 사건을 기록한 그 쪽지에는 주병이 목을 맬 때 수건이 매우 짧아서 동그랗게 올가미를 만들었을 경우 주병의 머리가 들어갈수 없다고 했습니다. 유감스러운것은 이웃의 태선생이 그 수건을 남기면 불길하다고 하면서 태워버려야 아이의 병이 낫는다고 했기때문에 급한김에 그 수건을 태워버린것입니다. 이것도 사전에 미리 짜고든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원향이 이토록 송명성을 불신임하는것은 송명성이 주병의 출생비밀을 알게 된후 아이를 잘 대해주지 않고 암암리에 보복하려고 했기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사를 받을 때 어떤 사람들은 량심에 물어 부끄러울게 없는 사람은 떳떳하다고 했다. 송명성이 발벗고 나서서 아이를 치료해주면서 아이가 깨여나기를 기대하고있는것을 보면 모든것을 알수 있다는것이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책감으로 그럴수도 있는것이라고 말했다. 자책감으로 출발한것이든 자신의 청백을 증명하기 위한것이든 아이를 구하기 위한 길에서 송명성부부는 함께 애써왔으며 아이가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것은 그들의 공동한 소망이였다. 송명성은 기자의 취재를 접수할 때 이렇게 말했다.  “있는 힘과 정성을 다 한다면 주병은 깨여날것입니다. 그때면 내가 마귀인지 인자한 아버지인지 하는것은 자연히 밝혀질것입니다!”                  《법제일보》  
13    생명의 기적을 창조한 첫사랑의 입김 댓글:  조회:4193  추천:0  2009-04-09
1989년, 호국과는 우수한 성적으로 호북성 경산현 2중에 입학하여 반장으로 되였고 가무에 능한 좌홍연은 문체위원이 되였다. 반에서 골간간부로 있으면서 접촉이 잦게 된 그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깊어져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1992년, 대학입학에서 좌홍연은 화중사범대학에 입학했지만 호국과는 보통 전문과대학에 겨우 붙었다. 좌홍연이 찾아와서 “네가 어느 대학에 붙었건 난 널 끝까지 사랑할거야”라고 위안했지만 호국과는 스스로 그녀와 짝이 기운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대학에 입학한후 좌홍연이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왔지만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회답하지 않았다. 1993년 양력설에 호국과는 좌홍연에게 자신은 이미 새 녀자친구를 사귀였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절교신을 써보냈다. 그 편지를 받은후 좌홍연은 상심의 눈물을 흘리면서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호국과는 대학전문과를 졸업한후 경산현전신국에 취직했다. 몇년후 결혼한 그는 아들까지 보고 전신분국의 국장으로 승진했다. 2005년 8월의 어느날, 호국과는 10여년만에 고중동창생 리용을 만났는데 리용은 그에게 “좌홍연이 식물인이 되여 집에 누워있는다오. 돈이 없어 치료도 못받고있는데 오래 살지 못할거요”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 호국과는 즉시 경산현 송하진 파초사촌에 있는 좌홍연의 집으로 찾아갔다. 좌홍연의 어머니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식물인처럼 누워있는 딸을 가리키면서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었다. 좌홍연은 대학을 졸업한후 중국생명보험 무창분회사에 취직했다. 호국과가 이미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2001년에 호국과를 닮은 남자와 결혼했다. 2003년, 임신 6개월인 좌홍연은 구토와 밥을 먹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났다. 남편은 그녀를 무한동제병원에 호송했는데 의사는 인산(引 )해야 생명을 보장할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당시 좌홍연은 30살이였는데 아이를 낳으려는 욕망에 인산을 하지 않았다. 그후 40여일동안 좌홍연은 고열에 시달렸는데 이를 악물고 약물에 의지해 생명을 유지했다. 갈수록 병세가 엄중해지는것을 본 남편은 주사를 놓아 열을 내리우는데 동의했다. 그런데 열이 내린후 좌홍연은 혼미상태에 빠졌고 하복부출혈로 복중태아도 요절되고말았다. 그후 그녀는 줄곧 혼미상태에 빠져있었으며 지각을 잃었다. 2년남짓한 동안 로인들은 딸을 업고 무한의 여러 큰병원을 돌아다녔지만 모두 치료할수 없다는 대답뿐이였다. 그들은 딸의 병을 치료하지도 못하고 도리여 딸이 저금한 돈을 모두 써버리고말았다. 이때 좌홍연의 남편은 일이 있다는 핑게를 대고 가버린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해결책이 없어서 딸을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수밖에 없었다. 좌홍연의 아버지는 재작년에 암세포제거수술을 받아서 의사가 중로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밭일을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딸을 치료하려고 해도 치료할 돈이 없었던것이다. 이런 사연을 들은 호국과는 가슴이 터지는것 같았으며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그는 집에 돌아온후 안해를 불러놓고 좌홍연이 당한 전후사연을 털어놓고 그녀가 자신의 첫사랑이였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으면서 “지금 난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오. 이후 그녀한테 가서 있는 시간이 많을수도 있는데 오해하지 말고 량해하여주기를 바라오”라고 말했다. 그의 안해는 생각밖에도 조용한 어조로 “당신은 나의 남편인데 내가 어찌 당신을 믿지 않을수 있겠어요. 난 당신이 동창생을 도와주는것을 지지해요”라고 말했다. 호국과는 로임이 높지 않았기때문에 좌홍연을 도와주려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힘에 의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화번호책을 펼쳐들고 경산현 2중 89년급의 부분적 고중동창생과 련계했는데 동창생들이 신속히 호응해나섰다. 2005년 9월 7일, 호국과, 단선군, 리용, 황성 등 10여명의 동창생들이 4000여원을 모아가지고 좌홍연의 집을 찾아갔다. 동창생들이 공부할 때의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고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 “네 동창생들이 널 보러 왔다”고 말했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2006년 음력설이 다가오자 호국과의 안해는 이쁜 저고리와 속옷 그리고 선물꾸레미를 가득 사가지고와서 현금 1000원과 함께 남편에게 주면서 좌홍연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다. 음력 섣달 그믐날, 호국과가 좌홍연의 집을 찾아가자 좌홍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감동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딸에게 새옷을 갈아입혔다. 호국과는 새옷을 갈아입고 누워있는 좌홍연의 침대앞에 다가앉아 그녀의 창백하고 붓긴 손을 꼭 잡고 “홍연이, 난 오늘 홍연의 집에서 명절을 쇠오. 홍연이는 생각도 못했겠지? 홍연이, 이렇게 오래 잠들어있지 말고 어서 깨여나오. 이젠 깨여날 때가 되였소”라고 안타깝께 속삭였다. 그는 좌홍연의 입을 주시하면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가 1시간 30분이나 다정한 이야기를 하면서 깨여나라고 호소했지만 좌홍연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좌홍연의 어머니는 호국과를 보고 “자네가 왔다가면서부터 우리 홍연이는 비록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지만 왜서인지 이전보다 더 안정되고 호흡도 더 고르롭게 쉬고있네. 자네는 사업도 바쁘고 가정도 있어 늘 올수는 없겠지만 짬이 있으면 자주 와주었으면 좋겠네”라고 말했다. 호국과는 이후 늘 좌홍연을 보러 오겠다고 대답했다. 그후 1년동안 호국과는 주말마다 찾아와서 의식이 없는 좌홍연을 동무해주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공부할 때 있었던 재미나는 이야기들을 해주었고 그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도 들려주었으며 신문과 방송에서 들은 새로운 정보도 알려주었다. 이 기간 그는 몇번이나 안해와 함께 오기도 했다. 2007년초의 어느날, 호국과의 안해가 불쑥 호국과를 보고 “이전에 당신이 좌홍연과 련애할 때 그녀를 뭐라고 불렀는가요?”라고 물었다. 호국과는 안해가 무슨 의심을 갖고있는가 해서 “그건 다 지나간 일인데 물어선 뭘하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안해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내가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식물인의 귀가에다가 이전에 가장 즐겨듣던 다정한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면 식물인의 신경을 자극하여 점차 깨여날수 있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이전에 꼭 그녀를 다정하게 부르던 이름이 있을것이예요. 한번 시험해보세요. 꼭 효과가 있을것이예요.” 호국과는 자신이 이전에 좌홍연을 “좌좌”라고 부르던 생각이 났다. 그후 그는 좌홍연의 귀가에 입을 대고 깊은 정이 담긴 다정한 어조로 “좌좌, 좌좌!…”라고 속삭이기도 하고 “좌좌, 나 국과요. 좌좌, 좌좌…”라고 애타게 부르기도 했다. 옹근 두달동안 그렇게 부르자 기적이 일어났다. 2007년 2월 6일, 호국과가 또 한번 애타게 부르자 좌홍연의 눈섭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입에서 무슨 소리가 몇마디 나왔다. 호국과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하면서 다시 “좌좌! 좌좌!…”라고 몇번 불렀다. 그러자 또 그녀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새여나왔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녀의 부모들도 그녀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자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국과는 이 기쁜 소식을 안해한테 알린후 매일 와서 좌홍연의 귀가에 “좌좌, 좌좌…”라고 속삭였다. 2007년 2월 16일,좌홍연은 입을 열어 말할수 있게 되였다. 그녀의 부모들은 “엄마”, “아버지”라고 부르는 딸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도 기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좌홍연은 목을 돌려 호국과를 오래오래 바라보더니 “고마와요”라고 말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호국과는 좌홍연을 일어설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한의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다가 그녀의 병에 특효가 있다는 약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약을 쓰려면 달마다 880원이란 비용을 이어대야 했다. 호국과부부가 7000원을 내놓고 동창생들이 1만여원을 기부하여 그 약을 구매했다. 그 약을 복용한후 그녀의 병세는 현저하게 호전되였다. 2008년 음력설, 좌홍연은 휠체어에 앉아 물만두를 빚을수 있었고 점차 땅바닥을 딛고 발걸음을 옮길수 있게 되였다. 5년만에 그녀는 혼자서 실외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걸을수 있었다. 2008년 11월초, 기자가 찾아갔을 때 호국과는 이렇게 말했다.  “좌홍연은 현재 계단을 오르내릴수 있는 정도가 되였는데 병을 완치하려면 아직도 거액의 돈이 수요됩니다. 병이 호전되면 그녀의 능력으로 취업하는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나와 동학들은 그녀에게 알맞는 남자를 소개해주려고 합니다. 그녀가 그렇게 많은 고난의 세월을 겪어왔는데 이제는 행복한 생활을 누려야 될게 아니겠습니까?”                                                                                                     《지음》    
12    잊을수 없는 결혼식 댓글:  조회:4169  추천:0  2009-04-09
나는 얼마전에 장선생의 결혼식에 친구와 함께 참석하게 되였다. 장선생은 어느 중학교의 교원인데 친구를 통해 몇번 만난적이 있었다. 나는 친한 사람이 아니면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성질이지만 장선생이 하도 사람이 좋아서 그의 결혼식에 두말없이 참석했던것이다. 그런데 친구의 말에 의하면 장선생이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기까지는 마치 한편의 련애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사연이 많았다고 한다. 장선생의 부모들이 어찌나 심하게 반대했는지 상상도 할수 없었다고 한다. 신부는 선녀처럼 아름다왔다. 내가 보기에는 반대할 리유가 전혀 없어보였다. 주례자는 장선생의 대학선생님이라고 한다. 머리카락이 몇오리 남지 않은 주례자의 머리는 불빛을 받아 잘 닦아놓은 거울처럼 반짝이고있었다. 이윽고 주례사가 시작되였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는것도 좋지만 검은 머리가 저처럼 대머리가 될 때까지 변함없이 서로 사랑하는것도 좋습니다.” 그 순간 결혼식장안의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어지는 주례사는 신랑신부와 하객들에게 재차 웃음을 던져주었다. “제 대머리는 반들반들 빛이 납니다. 신랑신부가 백년해로 하려면 빛이 나는 말을 아끼지 말고 해주어야 합니다.”하객들은 모두들 진지한 눈빛으로 주례자를 바라보면서 그의 말을 듣고있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례의를 지키라는 빛같은 말이 있습니다. ‘여보, 사랑해. 당신이 최고야!’라는 말은 빛나는 말이기때문에 검은 머리가 대머리가 될 때까지 계속해도 좋은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얀 장갑을 낀 장선생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고있는것이 눈에 들어왔다. 장선생은 신부에게 수화(벙어리말)로 주례내용을 알려주고있었던것이다. 아, 원래 신부는 벙어리였구나. 나는 코끝이 찡해나는 감동을 느꼈다. 장선생의 그 모습에 눈물을 흘린것은 나뿐이 아니였다. 주례자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여기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신랑이 가장 아름다운 신부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해주고있습니다. 군자는 행위로써 말하고 소인은 혀로써 말한다고 합니다. 오늘 저는 혀로써 말하고있고 신랑은 행위로써 말하고있습니다. 신랑신부 모두 군자의 자격이 있는것입니다. 두 군자님의 제2의 인생에 축복이 가득하길 빌면서 이만 소인의 주례를 마치겠습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랑신부를 보며 힘껏 박수를 쳤다. 혼례식장은 하객들의 박수소리에 떠나갈듯했다.    《가정백과보》    
11    내 삶에 빛이 되여준 부부 댓글:  조회:4292  추천:0  2009-04-09
몇년전 나는 고향을 떠나 광주의 어느 음식점에서 품팔이를 했다. 어디로 가나 키가 작다고 업신여김을 당할가봐 첫날부터 주인아주머니가 시키는대로 수걱수걱 일만 했다.   새벽부터 힘들게 일하면서도 고되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그건 마음씨가 뜨거운 주인아주머니의 덕분이였다. 복장모델을 해도 손색이 없는 키에 영화배우 못지 않은 미모를 겸비한 주인아주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저분의 남편은 얼마나 멋진 분일가) 하고 상상했다.그러나 물건구입을 나갔다가 이튿날에 돌아온 주인아저씨를 본 순간 너무 놀라서 하루종일 멍해있었다. 키가 1.52메터인 나보다도 더 작은 “난쟁이”였기때문이다. 외모 역시 잘난축이 아닌 주인이 어떻게 주인아줌마같은 미인을 안해로 맞아들였을가. 나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것을 깨우쳤다. 주인아저씨와 주인아주머니는 고향에서 이웃으로 지내던 사이였다. 주인아저씨는 재간도 많고 일도 잘했지만 키때문에 중매군도 나타나지 않아 로총각으로 되였다. 하지만 비관하지 않고 부모와 동생들을 도와 부지런히 농사일을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그런 아저씨를 사랑하게 되였는데 부모들의 극심한 반대로 결국 두사람은 결혼식도 못올리고 집에서 나와 품팔이를 하면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런데 계획에도 없던 아이가 덜컥 생기고보니 주인아저씨는 임신한 안해를 돌보다가도 가끔씩 문밖에 나가 애꿎은 담배만 피우군 했다.   남편의 근심을 알아차린 아주머니는 “당신을 닮은 아이를 낳을가봐 걱정이 되나보죠? 외모는 나를 닮고 재간은 당신을 닮은 아이를 낳을테니 근심하지 마세요”라고 남편을 위안했다. 주인아저씨는 물론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소중한 생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랑의 결실인 아들이 태여났을 때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금 아이는 18살인데 키가 1.80메터가 넘어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남편을 난쟁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짝이 기운다고 했지만 난 남편을 믿었소. 열심히 일하는 남편이기때문에 꼭 성공할것이라고 믿었소. ”사랑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에 이르렀다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아주머니를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지금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변함없는 그분들의 삶은 내 가슴속에서 항상 빛이 되여주고있다.                                                                                                                  《도시생활보》  
10    일시적인 욕망과 충동의 대가 댓글:  조회:4315  추천:0  2009-04-09
1973년 6월에 산서성 농촌에서 태여난 조화동은 북경외국어대학 연구생공부를 마친후 북경중관촌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2002년 5월, 조화동은 북경처녀 류아와 결혼하여 이듬해 딸 조첨첨을 보았다. 류아의 아버지 류극례는 북경십리하건축재료성에 6개의 상점을 경영하고있었는데 자산이 수천만원에 달했다. 2004년 12월 5일 저녁, 류아는 한국에서 온 동창생을 맞이하러 수도공항으로 가다가 얼음길에 자가용차가 미끌면서 교통사고로 사망되였다. 안해를 잃은 조화동이 어린 딸을 안고 대성통곡하자 딸을 잃은 류극례는 “류아는 이미 갔지만 자네와 첨첨이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인이요. 이후 내가 자네를 아들처럼 대해주겠소”라고 사위를 위안했다. 딸이 사망된후 류극례는 딸에 대한 사랑을 모두 외손녀에게 몰부었다.   2006년 4월, 조화동이 어린 딸을 데리고 살아가기 힘들어하는것을 보고 친구들이 손매라는 내몽골처녀를 소개해주었다.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은 얼마후 동거했다. 2006년 6월의 어느날, 손녀를 보러 조화동의 집으로 갔던 류극례부부는 손매라는 녀인이 집에 있는것을 보고 딸이 생각나서 몹시 가슴이 아팠다. 더구나 시체옷을 입고 멋만 따는 손매를 보자 “저런 녀자가 어떻게 우리 손녀의 계모노릇을 잘할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몹시 걱정되였다.저녁에 집에 돌아온 류극례는 조화동한테 전화를 걸어 “난 자네가 재혼하는것을 반대하진 않네. 하지만 녀자의 인품이 중요해. 자네들이 결혼한후 첨첨이를 잘 대해주지 않는다면 우린 가만있지 않을거네. 지금 나와 자네 장모는 점점 늙어가고있네. 앞으로 이 집 재산은 모두 자네와 첨첨의것이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장인의 말뜻을 알아차린 조화동은 손매가 첨첨이를 친딸처럼 대해주지 않으면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장인의 귀띔이 아니더라도 조화동은 그런 뜻을 가지고있었다. 그가 손매를 보고 첨첨이를 친딸처럼 대해줄수 있느냐고 물어보자 손매는 “내가 처녀로서 어떻게 계모노릇을 하겠어요. 우리가 결혼하려면 첨첨이를 외가집에 줘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조화동은 화가 나서 그 즉시로 그녀와 헤여졌다. 그 소식을 들은 류극례는 몹시 감동되였다.그후 조화동은 몇몇 녀자를 만나보았지만 모두 첨첨이를 키우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문에 조화동은 번뇌에 쌓여있었는데 마침 그때 류극례에게도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3년전부터 딴살림을 차리고 같이 동거하던 주산이란 처녀가 그를 보고 리혼하라고 핍박했던것이다. 원래부터 안해를 버릴 생각이 없었던 류극례는 주산을 보고 계속 “첩”으로 살든지 얼마간의 돈을 줄테니 다른 남자를 찾아 시집을 가든지 량단간에 결정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산은 그의 정식부인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고집했다. 류극례는 주산과 관계를 끊고싶었지만 북경사범대학을 졸업한 재녀인데다가 젊고 아름답고 성감적인 그녀의 몸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류극례는 생각하다못해 그녀를 전 사위 조화동에게 소개해주려고 생각했다. 그는 주산에게 조화동의 정황을 사실대로 말해주고나서 조화동한테 시집을 가라고 했다. 처음에는 펄쩍 뛰면서 거절하던 주산은 류극례가 “나와 나의 안해가 죽은후에는 나의 모든 재산이 조화동과 첨첨이가 차지하게 되는데 주산이가 첨첨의 계모가 되면 그 재산은 곧 주산의것이 될게 아니겠소”라고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조화동을 만나보겠다고 했다. 2007년 양력설에 류극례는 조화동에게 주산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소개해주었다. 조화동은 예쁘고 성감적인 주산에게 반했고 그녀가 첨첨이를 잘 대해주는것을 보고 그녀를 안해로 맞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2007년 5월 1일, 조화동과 주산은 북경신세기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하지만 류극례는 정부를 전 사위한테 시집을 보낸후에도 가끔씩 주산을 불러다가 정욕의 밤을 불태웠다. 그러다가 결국 조화동에게 꼬리를 잡히게 되였다. 조화동은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서 견딜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날마다 안해한테 몇시간씩 “화냥년”이라고 줄욕을 퍼부었다.   2008년 6월 27일, 주산은 더는 견딜수가 없어 조화동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난 이렇게 더는 못살겠어요. 우리 리혼합시다!”라고 애원했다. 조화동은 주산을 발길로 차던지면서 “난 리혼하지 않을테야. 난 널 죽지도 모하고 살지도 못하게 할테야!”라고 소리쳤다.   그날밤, 조화동은 바깥에서 집으로 들어오다가 딸이 객실에서 혼자 노는것을 보고 “아지미는 어디로 갔느냐?”라고 물었다. 첨첨이는 “아빠, 이후엔 아지미와 싸우지 말아요. 아지미는 오늘 온 오후 울었어요. 지금 침실에서 주무셔요”라고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조화동이 침실문을 열고 보니 주산이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데 낯색이 창백하고 곁에는 빈 수면제병이 놓여있는것이 보였다. 조화동은 급히 그녀를 자가용차에 실어 부근의 공군병원으로 호송했다. 구급을 거쳐 그녀는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의사는 조화동을 보고 “당신의 안해는 적어도 70여그람의 수면제를 삼켰습니다.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목숨을 잃을번했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주산은 깨여난후 눈물을 흘리면서 조화동을 보고 “미안해요. 모두 내가 잘못했기때문에 당신에게 이렇게 큰 치욕을 가져다주었어요. 당신이 날 어떻게 대하든지 나는 절대 당신을 나무람하지 않을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꼭 믿어주세요. 그와 난 지금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나의 마음은 이 집에 있고 당신과 첨첨이만 위해서 살것이예요”라고 말했다. 안해의 고백에 조화동은 가책감을 느끼면서 “주산이, 나는 당신을 이렇게 못살게 굴지 말아야 했소. 잘못은 그놈한테 있소!”라고 말했다. 다음 순간 그들 부부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얼마후 주산의 일은 소문이 나서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되였다. 조화동은 안해와 상의한후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가서 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새로운 고장에 가서 산다는것이 말은 쉽지만 실천에 옮기기엔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주택 한채를 구매하자고 해도 몇백만원이 있어야 했다. 조화동은 류극례가 자신의 가정에 이처럼 해를 끼쳤으니 응당 돈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9년 9월 5일, 조화동은 류극례의 회사로 찾아가서 단도직입적으로 300만원의 손해배상을 내라고 요구했다. 류극례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화가 나서 “너 사내대장부로서 안해의 사생활을 내걸고 협잡을 하려고 하다니. 창피하지도 않느냐?”라고 욕했다. 이렇게 되여 두 사람은 싸우게 되였는데 류극례는 보안일군을 불러 조화동을 쫓아내게 했다. 류극례는 문밖으로 쫓겨나가는 조화동을 보고 “지금부터 너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다시 날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조화동은 몸을 돌리면서 “좋습니다. 그럼 난 이 일을 장모님께 알려주겠습니다. 당신이 보상해주지 않으면 난 장모님을 찾아가서 달라고 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류극례는 겁이 나서 “그렇게 서두르지 말아. 내가 생각해볼테니”라고 말했다.   이튿날 오후, 류극례는 조화동의 집으로 찾아갔다. 조화동은 사전에 안해와 딸을 밖으로 내보내고 두 남자끼리 배상문제를 상의했다. 류극례가 “나의 재산이 천만원이 된다고만 생각하지 말아. 지금 장사가 잘 되지 않아 현금을 빼낼수 없어. 내가 상점 하나를 주면 안되겠느냐”라고 물었지만 조화동은 기어코 현금 300만원을 내라고 고집했다. 류극례는 조화동을 보고 “안해의 사생활을 팔아서 밥을 먹는 못난이”라고 욕했고 조화동은 화가 나서 류극례의 귀쌈을 힘껏 후려쳤다. 두 사람은 싸우기 시작했는데 힘이 약한 류극례는 밀리고 밀려서 객실밖의 베란다쪽으로 밀려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조화동은 리지를 잃고 류극례를 번쩍 들어서 6층아래로 던져버렸다. 류극례는 처참하게 부르짖으며 마당의 승용차우에 떨어졌다…   소구역의 보안일군은 일이 생긴것을 보고 급히 120구급중심에 전화를 한후 공안국에 제보전화를 걸었다. 몇분후 류극례는 구급차에 실려 공군병원에 갔고 조화동은 현장에 달려온 경찰들에게 붙잡혀갔다. 류극례는 구급을 거쳐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척추가 골절되여 한평생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 살아가야 했다. 조화동은 타인을 고의상해했기때문에 해정구검찰원에 의해 체포되였으며 차디찬 철창속에서 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사건이 발생한후 조화동은 일시적인 충동때문에 자신을 망치고 가정을 망쳐놓았다고 후회막급이였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류극례의 안해는 이 사건을 알게 된후 이 기막힌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딸이 사망된데다가 남편까지 장애자가 되였으니 그녀는 미칠것만 같았다. 그녀는 류극례를 증오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의지해야 할 유일한 친인이 아닌가. 가장 가슴이 아픈 일은 어린 첨첨이가 날마다 울면서 아버지를 찾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였다.                                                                        《중국법제보》  
9    빈민산골에 넘치는 사랑 댓글:  조회:3787  추천:0  2009-04-08
2008년 4월 2일, 호남성 침주시 북호구 영춘향 재수구촌에 살고있는 류문영은 골치아픈 문제에 봉착했다. 아들 류시중이 며칠후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던것이다. 아들이 결혼하는것은 원래 기쁜 일이였지만 류문영에게는 골치아픈 일이 아닐수 없었다. 류시중은 호남학원 계산기학부 2학년생이였다. 방금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았을 때 어머니가 앓아서 1만원을 쓰고 2000여원의 빚까지 지는 바람에 류시중은 공부를 그만두고 품팔이를 하여 집살림에 보탤 생각을 했다. 그때 이 정황을 알게 된 그의 고중동창생이며 친구인 황은화가 발벗고 나서서 그를 도와주었다. 그녀는 직업전문학교에 갈 기회를 포기하고 광주의 어느 전자공장에 들어가 품팔이를 하면서 그의 대학공부뒤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때로부터 두 사람의 감정은 신속히 발전하여 서로 떨어질수 없는 사이가 되였다. 2007년 8월, 황은화는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서 병원에 가서 검사해봤더니 급성림파세포백혈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류시중은 즉시 대학공부를 그만두고 품팔이를 하면서 입원치료를 받고있는 황은화를 돌봐주었다. 녀자친구가 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치료를 거부하겠다고 핍박했지만 류시중은 고집스레 자기의 선택을 견지하면서 하늘을 감동시켜 녀자친구의 젊은 생명을 구할수 있기만을 고대했다. 소식을 들은 류시중의 아버지 류문영과 어머니 왕초래는 침주시로 달려와서 아들더러 대학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 “널 대학공부시키는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네 공부뒤바라지를 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돼지를 길렀고 얼마나 많은 닭알을 팔았는지 아느냐?  우리 촌에서 어쩌다 너같은 대학생이 나왔는데 너는 이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걸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에 취업하면 이후 대대손손 가난한 산골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될게 아니겠냐?  넌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아름다운 미래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류시중은 실망하여 한숨을 쉬는 부모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도 그런 도리를 압니다. 그러나 은화가 없었다면 난 대학문에도 들어갈 기회가 없었을것입니다. 은화가 날 위해 힘든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병에 걸리지 않았을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을 희생하면서 나를 대학에 가게 한 녀자친구가 병원의 침대에 누워 죽기를 기다리고있는데 내가 어찌 마음놓고 공부할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남의 은혜를 입었으면 꼭 보답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왕초래는 화가 나고 조급해서 비자루로 아들을 때리려고 했다. 류문영은 막아나서면서 “시중의 말에도 도리가 있소. 우리가 시중을 핍박하여 대학교에 가게 한다고 해도 이 아이의 마음은 은화한테 가있을것이니깐 이 아이의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는것이 좋겠소”라고 말했다. 2008년 3월말, 황은화의 병세는 악화되였다. 의사는 골수이식수술을 하든지 환자가 이루고싶어하는 마지막 소원을 이루게 해주든지 빨리 선택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류시중은 급해났다. 골수도 찾기 어렵지만 40만원에 달하는 수술비용을 마련한다는것도 오르지 못할 큰 산을 바라보는것과 같았다.류시중은 두 사람이 나란히 손을 잡고 혼인의 전당으로 걸어들어가는것이 은화의 마음속의 가장 간절한 소원일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그녀에게 유일하게 해줄수 있는것은 그녀에게 혼례복을 입혀 아름다운 신부로 되게 해주는것이야.) 병상에 누운 황은화는 머리가 빠지고 얼굴이 부었는데 혈색이라곤 보아낼수 없었다. 황은화의 병문안을 왔던 류문영은 그녀의 가엾은 모습을 보고 그날밤으로 아들을 데리고 황은화의 부모를 찾아가서 결혼날자를 잡았다. 2008년 4월 8일 오전 11시 30분, 침주시 북호구 영춘향 재수구촌의 농가에서 류시중과 황은화의 간단한 결혼식이 거행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사람들은 일하던 맵시로 류씨네 집마당에 모여들어 신랑신부를 축하해주었다.   주례자가 류시중을 보고 “신랑은 정말로 중병환자를 안해로 맞아들이기를 원합니까? 만약 신부의 병이 치료될수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묻자 류시중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종래로 은화의 병이 치료될수 없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습니다.나의 가장 큰 소망은 은화의 병이 하루 속히 낫는것입니다. 나는 우리의 사랑이 하늘을 감동시키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될 때까지 한평생을 함께 살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주례자가 또 류문영을 보고 “아들이 대학공부를 포기하고 중병환자를 안해로 맞아들이는것을 동의합니까?”라고 묻자 류문영은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은화는 시중의 은인이고 시중이 또한 생명처럼 사랑하고있는것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오늘부터 은화는 우리 가족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결혼후 황은화의 건강상태는 괜찮아 매일 시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할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몸보신하라고 닭곰을 해주었지만 며느리는 한술도 먹지 않고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드렸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8년 6월 26일 오전,황은화는 갑자기 방바닥에 쓰려졌는데 코와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류시중은 결혼식때 부조로 받았던 5000원과 3000원의 저금을 몽땅 찾아가지고 안해를 데리고 침주시제1인민병원으로 갔다. 검사결과를 본 의사는 매우 놀라면서 “환자의 정황이 아주 나쁩니다. 골수이식수술을 하지 않으면 3~4개월밖에 더 살지 못합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급해난 류시중은 사처로 뛰여다니면서 백혈병치료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했다. 2008년 7월 3일, 류시중은 안해를 데리고 광주시중산대학부속제2병원에 가서 검사했는데 역시 3개월밖에 더 살수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5일후 황은화의 세 언니와 동생이 와서 골수를 검사받았는데 셋째언니 황동화의 골수가 황은화의 골수와 딱 맞았다. 하지만 이미 13만원이나 써버린 빈민산골의 가정에서 이제 골수이식에 수요될 비용 40만원을 모은다는것은 천방야담이나 다름없었다.재수구촌은 매인당 년평균수입이 3000원도 되지 않았다. 류문영은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집에 청해놓고 며느리의 정황을 말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황은화의 처지를 동정한 마을사람들과 친척들은 집을 저당잡히고 대부금을 맡아서 2만 5000원, 3만원, 3만5000원, 5만원씩 지원했고 그외 사처로 다니면서 1만원, 2만원씩 꾼 돈을 모으니 5일만에 40여만원이 되였다. 한달남짓한 강화화학치료를 받은 황은화는 골수이식을 받을 준비가 되였다.  2008년 10월 8일, 황은화는 무균창에 들어가 소독처리를 받았다. 그와 동시에 황동화도 병원에 들어가 100리터의 조혈간세포를 기증했다.2008년 10월 10일 10시 30분, 이식수술이 시작되였다. 1시간 30분후 황동화의 조혈간세포가 성공적으로 황은화의 체내에 주입되였다. 두주일이 지난후 황은화의 조혈기능은 성공적으로 회복되였다. 보통병실로 들어가 두주일동안의 재활치료를 받은 황은화는 퇴원하여 집에 돌아가 료양할수 있게 되였다. 이 기간의 치료비는 53만여원에 달했는데 이는 가난하지만 선량한 사람들이 창조한 생명의 기적이였다. 11월 15일 오후 5시, 류시중은 안해를 부축하여 침주시에 있는 집으로 데리고왔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전 촌의 남녀로소들은 모두 동구밖에 모여와 폭죽을 터뜨리면서 그들을 맞이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준 마을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황은화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온 황은화는 남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대성통곡했다. “시중씨, 난 마을사람들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었어요. 이렇게 많은 대부금을 우리가 어떻게 다 갚겠어요? 어느 친척이 못갚으면 집을 내줘야 하는데 우린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그 말을 들은 친척들은 “대부금은 근심하지 마오. 우리는 꼭 품팔이를 하여 갚을거요. 우리의 소원은 은화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는것이요.”라고 그녀를 위로해주었고 류시중도 “우린 이미 엄청난 기적을 창조했는데 이만큼한 대부금을 갚지 못할가봐 근심할게 뭐요?”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지자 침주시공청단위원회 부서기 왕홍찬은 직접 류시중의 집으로 달려와 1000원을 기부했고 2008년 11월 18일, 침주시공청단위원회에서도 의연금을 모아 보내왔다. 침주시 제1인민병원에 입원한 환자들도 크나큰 고무를 받았다.우리는 이처럼 불가사의한 기적을 창조한 선량한 사람들의 힘에 감동되면서도 그들의 앞으로의 생활을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 그들이 대부금을 갚지 못할 때 어떻게 할것인가? 더구나 황은화는 계속 매달 1000여원의 비용이 드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들이 대부금을 갚을 희망이 묘망했다. 빈곤한 농민들에게 사랑을 주는것도 중요하지만 의료보장이 있게 하는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는가?   《지음》  
8    돈에 눈이 어두워 타락된 형사경찰대장 댓글:  조회:4320  추천:0  2009-04-08
장위는 남방 모 도시의 형사경찰대 대장이고 리청은 라지오방송국 인기사회자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정이 들어 번개식결혼을 했다. 결혼후 리청이 성라지오방송국으로 전근되여 신혼부부는 아쉬운대로 갈라져 생활해야 했다. 리청은 중층간부로 승진했지만 장위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고있었다. 장위는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몇년간 애써 분투하여 따낸 형사결찰대 대장직을 버리더라도 돈을 벌려 했다. 나중에 그가 찾은것이 년봉30만원인 해외 보안직이였는데 출국꿈이 깨지고말았다. 후에 장위는 돈많은 “누님”을 만나서 그와 손잡고 비법적인 수단으로 많은 돈을 긁어모았다. 장위는 안해뿐만아니라 지위, 명예 모든것을 잃었다…   영웅과 미녀 첫눈에 반하다 장위(1973년생)는 우수한 성적으로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공안파출소에 배치받았다. 장위는 그동안 여러번 공을 세웠고 2003년 8월에 공안분국형사경찰대 대장으로 승급했다. 장위는 출근하자마자 “경원사회구역에 도적이 들었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는 경찰들을 거느리고 사건현장에 달려갔다. 젊고 예쁜 한 녀자가 열정적으로 경찰들을 맞이했다. 그 녀자를 본 장위는 일순간 멍해졌다. 이 녀자가 바로 라지오방송국의 인기사회자 리청이였다. 리청은 장위에게 도적이 든 사연을 말했다. “국경절휴가에 향항으로 관광을 떠난 사이에 집에 도적이 들었습니다. 금손목시계와 노트북이 없어졌어요.” 장위는 조사를 끝마치고 리청에게 명함장을 주면서 일이 있으면 련계하라고 했다. 명함장을 받아쥔 리청은 놀라했다. “며칠전에 국제마약사건을 해명한 그 유명한 형사경찰이 바로 당신인가요? 참 반가습니다. 이렇게 만나다니.” 리청은 며칠전에 장위의 영웅사적을 보도한적이 있었다. 장위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사건도 꼭 밝혀내여 물건을 되찾아주겠습니다.”고 말했다. 이틀후 리청은 장위의 전화를 받았다. “사회자님, 도적을 붙잡았습니다. 물건을 찾아가십시오.” 리청은 돌려받은 노트북이 켜지지 않는다고 장위에게 전화를 했다.  장위는 도적을 다시 심문했다. 도적은 부속품을 뜯어내여 팔았다고 탄백했다. 장위는 리청에게 설명하고나서 퇴근후 자기가 부속품을 사주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장위와 리청은 첫 만남에서 서로 눈이 맞아 사랑하다가 2003년 12월 25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후 장위와 리청은 샹그리라로 밀월을 떠났다. 하지만 도중에 리청이 성라지오방송국으로 전근되였으니 속히 돌아와 수속을 밟아야 한다는 긴급전화가 올줄이야. 리청과 장위는 아쉬운대로 밀월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음성양쇠”배후의 실망과 고통 교통이 좋아 이 도시에서 성소재지로 가려면 아주 편리했다. 하지만 장위는 사업때문에 성소재지로 갈 시간이 없었고 리청도 일이 바빠 남편을 찾아가지 못했다. 하여 신혼부부인데도 한달에 겨우 한번 만날 정도였다. 장위는 안해가 있는 성소재지로 전근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리청도 큰 압력을 받고있었다. 청취자들은 원 사회자의 풍격에 습관되여서인지 리청의 사회에 불만이 많았다. 총편집이 리청을 찾아 청취률이 계속 하강하면 자리를 내놓으라고 했다. 리청은 청취률을 높이려면 원래의 틀에서 벗어나 프로를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개편한후에도 청취률이 올라가지 못하면 그때에 가서 스스로 물러나겠으니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다. 리청이 개편하여 새로 꾸린 프로가  인기를 끌었고 청취률도 대폭 늘어나 라지오방송국의 명프로로 탈바꿈했다. 이때로부터 리청은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각종 사회활동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2004년 6월, 장위는 승급할 기회를 놓치고 너무도 상심해 안해한테 놀러갔다.  리청은 교제가 빈번했고 남편과 같이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주말에 리청은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고 친구의 자가용차를 빌려와 교외에서 하루를 보내자고 제의했다. 남편이 차를 몰고 교외로 가는데 리청의 핸드폰이 울리였다. 리청은 미안해하면서 남편을 보고 말했다. “여보, 오늘 안되겠어요. 급한 일이 있으니 지금 돌아가야 해요. 차를 돌리세요.” 장위는 못들은척하면서 계속 차를 앞으로 몰았다. 리청은 화를 냈다. “단위에 급한 일이 있으니 돌아가야 해요. 차를 세우지 않으면 난 뛰여내리겠어요.  50만원 광고계약과 관계되는 일이니 빨리 차를 돌리세요.” 장위는 성소재지에 더는 있을 멋이 없어서 인차 돌아갔다. 리청은 그동안 남편을 너무 랭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시간을 타서 2000원짜리 고급양복을 사들고 친구의 고급승용차를 몰고 남편에게로 왔다. 리청은 집에 가지 않고 남편이 근무하는 공안분국마당에서 남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때마침 남편이 동료들과 함께 퇴근하느라 대문을 나왔다. 리청이 차에서 내려 남편에게로 다가가는데 생각밖에 남편은 리청을 본체만체하면서 자기 오토바이를 타고 자리를 피하는것이였다. 집에 돌아와 리청은 왜 그러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남편이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돈이 없는줄 나도 잘 알고있소. 당신이 유명한 사회자라는것도 모두들 알고있소. 고급승용차를 몰고와 날 망신주려고 그러는거요? 남들이 날 어떻게 보겠소?” 리청은 “당신 참 이상해요. 남들이 뭐라 말하든지 뭐가 대수죠? 우리 둘만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지내면 안되나요?”라고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날 망신주고도 우리 행복할수 있소?” “체면따위가 그리 중요해요? 당신이 능력있으면 난 집에서 애를 낳아 키우면서 가정주부로 되겠어요. 누군 사회교제가 좋아서 그래요? 나도 인젠 너무 힘들고 지겨워요. 하지만 사업때문에 별수 없어요. 당신 왜 조금도 리해 못해요?” 이튿날 리청은 성소재지로 떠나면서 남편을 위로했다. “여보, 너무 상심해하지 말아요. 난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장위는 안해의 생일선물로 7만원을 주고 자가용차를 샀다. 하지만 생각밖에 리청은 살바엔 돈을 좀 보태여 더 좋은것을 사면 좋지 않는가, 이런 차는 모양도 없고 기능도 차하다고 나무리였다. 장위는 안해의 생일연회에 참석했다. 안해의 동료와 친구들은 모두 고급자가용차를 몰고왔다. 이때에야 장위는 자신이 너무 비천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리청이 성소재지에서 사회교제가 많으며 늘 돈많은 부자들과 휩쓸려다니고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장위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어쩐지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는 아이가 있으면 부부의 감정이 흔들리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다. 2005년 국경절휴가에 장위는 안해보러 성소재지로 갔다. 이때 리청은 보도부주임으로 승진하고 새집도 분배받았다. 저녁에 장위는 안해를 품에 안고 말했다. “친구들이  모두 아이를 낳아 키우고있는데 참 부럽습데. 우리도 아이를 낳아 키우기요.” 리청은 사업에서 한창 성과를 올리고있는 시기에 아이를 낳고싶지 않았다. “당신의 심정을 리해해요. 하지만 2년만 더 기다려주세요. 나의 사업이 안정되면 그때에 가서 아이를 낳아 키우자요..” 남편은 당금 아이를 낳아 키우자고 우기였고 안해는 안된다고 견결히 반대했다. 하여 둘은 처음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다투었다…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다 범죄길로 2006년 음력설에 대학교 동창생들의 모임이 있었다. 동창생들은 장위가 좋은 안해를 만났다면서 부러워했다. 하지만 장위는 시뿌둥했다. “난 너희들이 생각하는것처럼 행복하지 않아. ” 이때 리청이 부국장으로 제발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위는 이대로 계속 발전하면 사회적직위차이로 혼인도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위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지위를 높일수 있고 안해와 짝지지 않을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한 동창생이 장위를 보고 말했다. “너도 알고있지? 종위말인데, 그자식이 지금 오스트랄리아에서 보안원으로 일하고있는데 1년수입이 30만원이래.” 며칠후 장위는 종위의 소식을 알아내고 QQ로 그와 대화를 했다. 종위는 “헛생각을 버리고 착실히 살거라. 보안일이 뭐가 좋다고 출국하려 하니? 그 좋은 직업을 버리면 후회할거다.”라고 권고했다. 그러자 장위는 출국하여 꼭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출국할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사정했다.장위는 그날 저녁으로 안해에게 전화를 했다. “오스트랄리아에 있는 동창생이 경찰자리를 알선해주었소. 1년수입이 지금 내 로임의 10배나 된다고 하오.” 장위는 체면때문에 차마 보안일군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경찰직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리청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잘 생각한후 결정하세요. 외국생활이 생각한것처럼 쉽지는 않을겁니다. 신중하세요.”라고 타일렀다. 2006년 4월, 장위가 북경에 가서 로무송출에 관해 알아보니 중개비용이 18만원이였다. 장위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친구의 알선으로 장위는 조연홍이란 녀성을 만났다. 조연홍은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는 녀자였지만 1000만원을 가진 대부자였다. 조연홍은 장위가 가지고온 서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형사경찰대장이 외국의  보안일군으로 가려 하니 참 우스워요. 돈을 위해서라면 나가지 말고 나와 함께 일해보자요. 돈을 많이 주겠어요. 어때요?” 그날 저녁 조연홍은 술상을 차리고 장위를 대접했다. 밤중에 장위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불을 켜니 조연홍이 알몸으로 자기옆에 누워있었다. 장위가 그녀를 밀어내자 그녀는 장위의 품에 감겨들면서 “나와 함께 일해보자요. 난 당신과 같은 영웅이 마음에 들어요.”라고 말했다. 이튿날 저녁, 장위는 비행기를 타고 성소재지로 돌아갔다. 떠날 때 조연홍은 장위에게 돈 2만원을 주면서 “그동안의 수고비입니다. 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라고 말했다. 저녁 8시에 리청은 자가용차를 몰고 공항에 나가 남편을 마중했다. “지금 우리 힘들더라도 참고 이겨내자요. 나도 줄을 달아 당신을 꼭 성소재지로 전근시키겠어요.” 장위는 안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큰돈을 벌고싶었다. 그는 큰 결심을 내리고 북경에 있는 조연홍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 조연홍이 남을 도와 밀입국하는 일을 하고있었다. 장위는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밀입국자들에게 가짜호적부와 가짜신분증을 만들어주면 된다고 하면서 매 사람에게서 1만원 내지 4만원을 벌수 있다고 했다. 그후 성소재지에 있는 리청은 남편이 한 녀성과 부정당한 관계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또 남편에게 출처가 불투명한 돈이 있는것을 발견했다. 장위는 돈벌이에 정신을 팔다보니 사업에서 오차가 많이 생겨 비판을 받았다. 결국 그는 죄가 두려워 사직하고 북경에 있는 조연홍을 찾아갔다. 2007년 10월, 장위와 리청은 리혼했다. 2008년, 조연홍은 장위을 보고 오스트랄리아로 피신하라고 알려주고는 자기는 미국으로 도망쳤다. 장위는 부모님들을 만나보려고 고향에 갔다가 경찰에게 잡혔다. 조사결과 장위와 조연홍이 손잡고 선후로 50여명의 밀입국자들을 외국에 보내주고 장위 혼자서만 비법적으로 90여만원을 받아먹은 사실이 밝혀졌다. 《지음》    
7    죽음보다 강한 모성애 댓글:  조회:4592  추천:0  2009-04-07
깊은 산속에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살고있었다. 어느날 남편이 시내에 볼일이 있어 사흘동안 집을 비우게 되여 안해는 혼자서 아이들을 보살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난 안해는 뒤뜰의 장작더미를 가져다가 불을 지펴 밥을 지을 생각으로 뒤뜰에 갔다가 그만 장작더미속에 숨어있던 뱀에게 물리고말았다. 그 순간 안해의 머리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뱀에게 물렸으니 독이 온몸에 퍼질테고 남편은 사흘뒤에나 돌아올텐데 꼼짝없이 죽게 생겼구나.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사흘동안 어떻게 지낼가?)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빨리 아이들을 위해 사흘동안 지낼수 있도록 일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작더미를 가져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큰딸에게 불을 지피는 방법을 가르쳐주어 사흘동안 계속 불을 지필수 있도록 하고 먹을것을 준비해서 아이들의 손이 닿는 곳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이야기를 했다. “얘들아! 엄마가 깨여나지 않아도 놀라지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아라. 잘 지내고있으면 곧 아빠가 돌아오신단다.”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애를 썼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는 땀이 물 흐르듯 흘러내렸다. 그렇게 흘러내리는 땀이 그녀 몸속의 독기를 제거해주었다. 하루밤이 지나고 이틀밤이 지나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아마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죽음조차도 머리를 숙였는가보다.                                      《가정문적보》  
6    오토바이를 탄 남녀 댓글:  조회:4442  추천:0  2009-04-07
어느날 남자와 녀자가 오토바이를 타게 되였다. 남자는 녀자를 깊이 사랑했지만 녀자는 남자에게 별로 호감이 없었다. 그저 친구정도로 좋아하고있을뿐이였다. 달리는 오토바이에 처음 앉아보는 녀자는 처음에는 즐거워했지만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무서워서 앞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나 무서워! 속도 좀 죽여!” 그때 남자가 말했다. "나를 꽉 안아주면 속도를 죽일게.” 이 말에 녀자는 남자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속도는 죽어들지 않았기때문에 녀자는 남자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난 정말 무서워! 장난치지 말고 속도 좀 죽여줘!” 남자는 말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 그럼 속도를 죽일게.” 녀자는 속도가 빨라지는것이 너무 무서워서 남자에게 말했다. “사랑해! 난 널 사랑해! 그러니깐 제발 속도좀 죽여줘!” 그러나 속도는 계속 빨랐다. 이에 약간 화가 난 녀자는 “야, 정말 속도 좀 죽이라니깐!”라고 소리쳤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녀자에게 말했다.“네가 지금 내 안전모를 벗겨서 쓰면 정말로 속도를 죽일게.” 녀자는 무서워 떨면서 간신히 남자의 안전모를 벗겨 자신의 머리에 썼다. 얼마후 오토바이사고가 났는데 남자는 그 자리에서 사망되고 뒤에 앉았던 녀자는 경상을 입었다. 교통경찰이 녀자에게 사고원인을 알려주었다. “원인은 제동기고장입니다!” 녀자는 울면서 남자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정백과보》    
5    사랑의 진실 댓글:  조회:4447  추천:0  2009-04-07
어떤 남자에게 사랑하는 녀자가 생기게 되였다. 하지만 녀자는 질투심이 강하여 자꾸만 남자에게 “당신은 내가 좋아? 아니면 당신 어머니가 좋아?” 라고 물어보았다. 그때마다 남자는 “그…글쎄…”하면서 냉큼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두 녀인 모두 남자에겐 소중했기때문이다. 하지만 질투심 많은 녀자는 그냥 따지고들었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아…아냐…사랑해.” “그럼 증명해봐!” “어…어떻게?” 남자는 (이 녀자가 설마 무식하게 하늘의 별을 따오라고 하진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녀자는 더 무서운 말을 했다. “날 더 사랑한다면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내게 가져와봐요!” 남자는 순간 갈등했다.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를 택하느냐, 아니면 자기의 인생을 같이 할 사랑하는 녀자를 택하느냐? 남자는 한참동안 갈등하다가 끝내 사랑하는 녀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남자는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가지고 사랑하는 녀자에게로 달려갔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다가 그만 돌뿌리에 걸려서 넘어지고말았다. 그러자 넘어지며 땅바닥에 나뒹굴어진 어머니의 심장이 아들을 보고 말했다. “아가야! 어디 다친 곳은 없니?”                                                                      《도시생활보》    
4    욕망의 심연 댓글:  조회:4437  추천:0  2009-04-07
반옥매는 22살에 입당했고 31살에 남경시 서하구민정국 부국장에 임명되였으며 38살에 남경시 지도간부 첫 출국양성반에 뽑혀 전도가 유망한 녀간부로 소문났다. 그녀는 남경시와 서하구 인민대표, 강소성과 남경시 당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였으며 가두기층지도직무를 10년동안 맡으면서 로임도 변변히 내주지 못하고있던 가두를 경제총량이 일약 전 시에서 앞장선 가두로 만들어서 재무세금수입만 해도 5억원에 달하게 했다. 원 남경시 서하구 구장조리이며 매고교가두사업위원회 서기였던 그녀는 처음 1만원을 수뢰하면서부터 점차 수백만원의 거액을 수뢰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였다. 심사를 받기전까지 그녀의 호주머니에는 이미 인민페 792만여원, 미국화페 50만딸라의 거액이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악몽과도 같았다. 꿈속에서 나는 깊고도 어두컴컴한 우물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결사적으로 두손을 내밀어 우물밖으로 나가려고 아득바득거렸지만 그럴수록 수렁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갔다. 주위는 온통 어둠뿐이였다. 나의 령혼은 이렇게 스스로 깊이 매장되였고 나의 인생은 이렇게 스스로 죄악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이것은 반옥매가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을 때 참회서에 쓴 내용이다. 2007년 1월,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에서 부패사건을 조사할 때 심사를 받던 고모의 입에서 “나는 반옥매서기한테 몇십만딸라를 가져다준적이 있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무심중에 튀여나온 이 말은 사건수사일군들의 의문을 자아냈다. 처급간부가 이렇게 담이 클수 있을가? 은행에서도 한번에 내올수 없는 거액의 외화가 어디서 왔을가?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의 지도부에서는 이 정황을 회보받은후 고도의 중시를 돌리면서 의심되는 점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모든 힘을 다해 사건을 해명라고 지시했다. 수사일군들은 주밀한 방안을 세우고 사건해명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자금원천부터 착수하여 비밀리에 조사하기 시작했다. 법률대학본과를 자습한적 있는 반옥매는 냄새를 맡고 조사에 항거하기 위해 대책을 마련했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해당인원들과 입을 맞추면서 공수동맹을 맺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처에 뛰여다니면서 관계망을 통해 수사소식을 탐지하면서 물증을 없애여 조직의 심사를 피면하려고 시도했다.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에서 반옥매의 위법문제를 초보적으로 장악했을 때는 2007년 음력설이였다. 음력설기간의 복잡한 원인을 고려하여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에서는 잠시 움직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2007년 2월 26일,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의 지도자들은 사건수사일군들을 데리고 서하구에 와서 서하구위원회의 주요지도자에게 사건정황을 알렸다. 그날 점심에 반옥매는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의 사건수사사무실로 붙잡혀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변고에 반옥매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칫하면 아름다운 꿈이 순식간에 사라질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모가 자신을 팔아먹지 않을것이라고 믿은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있으리라 마음먹었다. 고모는 2005년 5월에 회뢰혐의로 조사를 받은적이 있었는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기때문에 그 일이 있은후 반옥매는 그를 보고 “조직의 고험을 겪은 사람”이라고 칭찬했으며 그를 더욱 믿게 되였다. 이번에도 반옥매는 고모를 믿고 “나는 다른 사람의 돈을 받은적이 없습니다. 나는 경제문제에서 깨끗한 사람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사건수사일군들이 조사자료를 보여주자 그녀는 조직에서 장악한 정황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수뢰한 돈이 천문학적인 수자이기때문에 자신이 입을 열기만 하면 중병을 앓고있는 남편이 혼자서 어린 아이를 돌볼수 없게 된다것을 알고있었다. 이런 모성애가 그녀를 더욱 침묵을 지키게 했다. 그녀는 매일 라지오방송체조를 하면서 자신의 투지를 다졌다.하지만 사건수사일군이 거듭 공세를 들이대자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마음의 방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옥매가 가장 근심하는것이 초중 3학년에 다니는 아이라는것을 알게 된 수사일군들은 그녀의 아이가 공부하고있는 학교를 찾아가서 마음놓고 공부하도록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아이는 중점고중에 입학할수 있게 되였다. 조직에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렇게 관심해주자 감화를 받은 반옥매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2008년 3월 10일 오후 4시, 반옥매는 고모에게서 거액의 뢰물을 받은 경과를 털어놓았으며 가족에게 편지를 써서 뢰물로 받은 돈을 바치게 했다. 그날밤 9시,  사건수사일군들은 반옥매의 부모집에 감추었던 미국화페 53만딸라와 인민페 170만원을 전부 찾아냈는데 저울에 달아보니 26킬로그람이 넘어되였다. 은행사업일군이 이 돈을 기계로 세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군인가정에서 태여난 반옥매는 중학교를 졸업한후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부대에서 입당했으며 제대후 남경시 서하구에 돌아와 사업했다. 처음에 사업을 착실하게 하여 조직과 지도자의 신임을 얻은 그녀는 선후로 서하구쌍옹판공실 주임, 서하구민정국 부국장, 매고교진 진장, 매고교가두판사처 주임 겸 서기, 서하구 구장조리 등을 력임했었다. 일부 기업의 총경리들과 하급단위에서는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명절마다 뢰물을 들고왔으나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점차 사업압력이 커지고 사회암흑면을 접촉하면서 권력을 리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욕망이 생겨났다. 그녀는 참회서에 “나는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는 사업을 잘하여 자아가치를 실현하려고 했지만 점차 권력을 마음대로 리용할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을 때는 심리균형을 잃고 범죄의 심연속으로 빠져들어갔다”라고 썼다.   반옥매의 수뢰는 고모로부터 시작되였다. 고모는 반옥매가 관할하는 매고교가두 어느 촌의 지부서기였다. 처음에 반옥매는 고모의 잘못을 회의에서 비판했는데 고모는 상급인 그녀에게 잘보이려고 2000년 음력설에 2병의 고급술과 1만원의 현금을 들고 반옥매의 집을 찾아왔다. 그 당시 반옥매는 집에 없었는데 후에 그 돈을 돌려주지 못했다. 돈을 받은 그녀는 더는 고모를 비판할수 없었다. 2001년 9월, 반옥매가 경외양성반에 뽑혀 출국할 때 고모는 1만딸라의 현금을 가져다주었는데 반옥매는 자신이 고모의 일을 해주었으니 응당한 보수라고 생각하면서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2002년, 반옥매가 매고교가두판사처의 당위서기로 승진하여 제1책임자로 되자 고모는 더욱 바싹 달라붙었다. 2003년, 남경시에서 화서촌을 따라 배워 농민의 새마을을 집중건설하면서 토지개발은 황금알을 낳을수 있는 노다지판이 되였다. 고모는 회사를 세우고 자기가 관할하는 중심촌의 집체토지개발을 도맡았다. 그후 얼마 안되여 중심촌의 항목이 규범화되지 않는다는 리유로 시에서는 공사와 판매를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반옥매는 세금징수를 완성하였다는 리유로 고모를 도와 순조롭게 관을 넘게 했다. 그후 고모는 짐을 벗어던지고 회사를 더욱 크게 발전시켰다. 2005년 11월, 고모는 현금 80만원을 반옥매에게 주었는데 반옥매는 웃으면서 받아넣었다. 제1책임자의 자리에 앉은 반옥매는 직위가 높지 않았지만 권력은 상당했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그녀는 더욱 대담하게 부패의 길로 나아갔다. 반옥매는 권세를 장악한 몇몇 친구들과 불법상인들을 모아놓고 동맹을 맺은후 부패의 길로 나아갔다. 서하구 매고교가두에서 원예구역을 건설할 때 반옥매와 진녕(원 매고교가두 주임, 원 서하구재정국 국장)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국가재산을 갉아먹었다. 그들은 먼저 향항상인 진모와 결탁하여 남경 모 공업무역유한회사를 세운후 원예구내의 100무나 되는 토지를 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매무에 8만원)에 진모한테 팔았다. 그후 진모는 공업무역유한회사의 명의로 이 100무의 토지를 매무에 24만원의 가격으로 남경 모 체육용품회사에 넘겨주어 1500여만원의 폭리를 얻었다. 사후 반옥매와 진영은 진모한테서 각각 480만원을 받아서 챙겼다. 신분이 폭로되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반옥매는 공업무역유한회사를 세우고 등록할 때 친척의 이름으로 등록하고 회사의 34%의 주권을 차지했으며 진녕도 친척의 이름으로 등록하고 회사의 33%의 주권을 가졌다. 그들은 회사를 통하여 토지를 되넘겨 팔아먹으면서 끝없는 탐욕의 주머니에 검은돈을 채워넣었다. 남경시규률검사위원회 사건수사일군은 “반옥매의 사건은 표면상에서는 단독으로 고립된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복잡한 관계망이 얽힌 규모가 큰 부패사건이다”고 말했다. 특히 소수의 “제1책임자”들은 토지를 눅은 가격에 사서 비싼 가격에 되넘겨 팔아먹으면서 집단화부패의 길로 나갔다. 이미 반옥매사건과 관련된 규률과 법을 위반한 당원간부 15명을 조사해냈는데 그중 처급간부가 8명이고 청급간부가 1명이다.   2009년 2월25일, 남경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1심판결에서 반옥매를 사형 집행유예 2년에 처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하며 전부의 개인재산을 몰수한다고 판결했다. 반옥매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만약 나에게 삶의 길이 주어진다면 꼭 법을 지키며 한평생 속죄하겠다”고 말했다. 금년에 46살인 반옥매는 일시적인 탐욕의 대가로 인생의 황금기에 차디찬 철창속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양자석간》    
3    돌아갈수 없는 마음 댓글:  조회:4299  추천:0  2009-04-03
몇년전 어느 시골마을에 서로 사랑하는 처녀와 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뿐 결혼할수 없었다. 총각은 너무 가난했고 처녀는 가난한 시골이 싫었기때문이였다. 그러다가 처녀는 도시의 갑부집에 시집을 갔고 총각은 처녀만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도시로 시집간 처녀는 궁전같이 호화로운 집에서 살면서 먹고싶은것을 다 먹고 입고싶은것을 다 입고 고급술집에도 출입하면서 날마다 호강했지만 고요한 밤이면 시골총각이 그리워 눈물로 베개잇을 적시기도 했다. 그녀의 도시남편은 착한 남자였다. 이미전에 그녀와 시골총각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안해가 시집와서도 시골총각을 그리고있는것을 보고 마음이 몹시 아팠다. 어느날 남편은 안해를 불러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옛날에 예쁘게 생긴 강아지가 양떼를 모는 일을 하고있었어. 그런데 어느날 도시에서 한 부자가 놀러왔다가 양치기를 하는 개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맨날 사람들이 먹다 남은 밥이나 먹고 컹컹 짖느라고 목도 쉬여있고) 양치기주인한테 사정을 했대. 부자는 그 강아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도시로 데리고왔어. 그리고 몸도 깨끗하게 씻어주었고 시골에선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것도 주었으며 침대에서 재워주기까지 했대. 그랬는데도 이 양치기 개가 가끔씩 하늘을 보면서 하루종일 짖었다고 해. 처음엔 몰랐는데 알고보니깐 그런 날에는 하늘에 양떼같은 구름이 있더래. 양치기개는 도시에 와서도 양떼가 그리워서 구름을 보고 그렇게 짖었던거지. 그래서 부자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양치기개를 다시 목장으로 데려다주기로 결심했대. 여보, 난 양치기개가 시골로 돌아가서 다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들은 안해는 남편의 뜻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그 양치기개는 다시 행복해질수 있을가요?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예전과 똑같아질가요? 만약 양치기개가 목장으로 돌아갔는데 양들이 이미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면? 양떼 모는 법을 잊어버렸으면? 혹은 그곳에 이미 다른 양치기개가 있으면? 돌아갔는데 차가운 목장바닥 대신 부자의 따뜻한 집이 그리워진다면? 사람들이 먹다 남은 밥 대신 부자가 주던 기름진 음식이 그리워진다면? 그리고 강아지는 다른 주인을 따라왔으니 새 주인에게 충성해야죠. 이젠 당신이 보내준다고 해도 나는 못 돌아가요. 당신이 내가 힘들어보여서 여기까지 데리고왔잖아요. 그러니깐 끝까지 책임져야 해요. 미안해요. 이제는 양떼를 잊고 당신만을 사랑할게요.” 안해는 남편의 품에 안겨 울었다. 남편도 안해를 꼭 껴안아주었다.          《가정백과보》  
2    안해의 호흡기를 빼버린 남편 댓글:  조회:4231  추천:0  2009-04-02
1975년에 무한시에서 태여난 호청은 1999년에 심수의 갑부한테 시집을 갔다.   2009년 2월 9일, 호청은 자택에서 갑자기 혼미상태에 빠져 심수시제2인민병원의 중병간호실에 실려가 치료를 받았다. 2009년 2월 16일, 안해의 병문안을 갔던 호청의 남편은 갑자기 의료일군들의 저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안해 몸의 호흡기를 빼버렸다. 그때문에 그의 안해는 순식간에 사망됐다. 현재 호청의 남편 문모는 심수시 복전구공안국에 의해 형사구류되였다. 문모는 경찰의 심문을 받을 때 “제가 호흡기를 빼버린것은 안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문모의 이런 행동은 안해를 사랑해서인가? 안해를 살해하기 위해서인가? 이 사실은 심수시민들과 네티즌( 民)들의 화제를 모았다.   호청의 어머니와 언니는 지금 심수에서 후사를 치룬후 호청의 9살된 딸과 4살된 아들을 보살피고있다. 호청의 어머니와 언니는 가정형편이 어렵기때문에 변호사를 청하지 못하여 《무한석간》을 통하여 면비봉사를 해줄 변호사를 찾고있다.   10년전 호청은 중남정법학원에서 공부할 때 동창생이며 재벌2세인 문모를 알게 되여 졸업후 결혼했다.그녀는 2009년 2월 9일인 보름날 저녁에 침실에서 혼미상태에 빠져 병원에 실려갔는데 구급을 거쳤으나 깨여나지 못했으며 식물인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2009년 2월 16일 오후, 호청의 남편 문모는 호청이 끼고있는 산소호흡관을 빼버렸는데 10분후에 호청은 사망됐다.   2009년 2월 18일, 공안국에서는 호청의 시신을 검사했는데 2~3일후 검사결과가 나오면 소식공개회를 열고 사회에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호청의 가족에서는 변호사를 청해 진실을 밝히는것으로 억울하게 사망된 딸을 위로하겠다고 말했다.   호청과 문모는 결혼후 5층짜리 별장에서 살았다. 호청부부는 4층에 거주했고 아들과 딸은 3층에 거주했다. 심수의 날씨가 더웠기때문에 호청의 어머니가 무한에서 딸의 집으로 놀러왔을 때 2층에 거주했다. 보름날 저녁 8시, 호청의 어머니는 딸의 침실에서 사위가 “어머니, 큰일 났어요! 빨리…” 라고 급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급히 4층으로 올라가보니 딸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사위와 손녀가 인공호흡을 시키고있었다. 호청의 어머니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사위는 내딸이 저절로 침실에서 넘어져 혼미상태에 빠졌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사위가 내 딸과 다투다가 내딸을 때려서 쓰러뜨린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호청의 남편 문모에게는 문샘이란 형님이 있었는데 문샘은 옆집 별장에 살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문샘은 즉시 호청을 자기의 자가용차로 병원에 실어다주었다. 구급을 거쳐 호청은 호흡을 회복했고 심장도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날밤, 호청은 심수시제2인민병원으로 옮겨갔는데 의사는 병이 위급하다고 했다. 다시 구급을 거쳐 호청은 병세가 안정되였고 산소호흡기를 낀채 중병실로 들어갔다.   그후 며칠동안 병원에서는 병이 위급하다는 통지서를 내보내지 않았다. 7일동안 호청은 줄곧 혼미상태에 빠진채 깨여나지 못했다. 무한에 있는 호청의 언니는 호청의 시집에서 호청의 치료를 포기할가봐 무한의 일을 제쳐놓고 심수로 달려왔다. 호청의 어머니와 언니는 문모가 호청의 치료를 포기할 뜻이 있었다고 느꼈다. 2000년초에 호청의 시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토하다가 구토물이 기관에 들어가 대뇌산소결핍을 초래하여 식물인이 되다싶이 됐다.   회복될 가망이 없는것을 본 호청의 시집에서는 치료를 포기했는데 결국 호청의 시아버지는 사망되고말았다. 그러나 문모의 형님 문샘은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된것은 다른 원인때문이지 치료를 포기하여 조성된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를 부인했다.   호청의 언니는 정성을 다 바치면 녀동생이 꼭 깨여날수 있을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여러번이나 문모에게 “호청은 꼭 깨여날수 있을것이요. 믿어야 하오.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하오”라고 말했다. 의외의 일이 발생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호청의 언니는 의사를 보고 “만약 치료를 포기한다면 환자의 친정과 시집 쌍방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일방에서 마음대로 치료를 포기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2009년 2월 16일 오전에 호청의 시어머니, 문모, 문샘은 의사에게 호청의 병세에 대해 물었다. 의사는 “환자가 호흡기를 달고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입의 통기관이 몸의 점막과 한데 붙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수술을 하여 기관을 가르고 담액을 끄집어내온후 다시 산소관을 꽂아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환자의 치료에는 큰 효과가 없을것 같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날 오후였다. 매일 한시간의 면회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기때문에 문모가 들어갈 때 호청의 언니는 “20분만 있다가 나와야 하오. 그 다음 내가 들어가겠으니깐”라고 말했다. 20분이 지나자 호청의 언니는 들어갈 준비를 하느라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그때 병실안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즉시 안으로 달려들어가보니 문모가 한손으로 호청의 머리를 안고 자신의 머리를 호청의 가슴에 파묻고는 울면서 호청의 몸에 있는 산소호흡관, 수액관, 많은 검측의기가 련결되여있는 관을 일시에 콱 빼버리는것이였다.   “이게 무슨 짓이예요? 왜서 호흡관을 뽑는가요?”   간호원들이 다급하게 소리쳐서야 멍해있던 호청의 언니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를 알게 되였다. 문모는 울면서 “난 안해가 고통스러워하는것을 더는 볼수가 없소!”라고 소리쳤다. 문모는 안해의 머리를 안고 안해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 계속 울어댔다. 10분후 호청의 낯색이 파랗게 변했는데 의사가 왔을 때는 이미 사망된 상태였다. 문모는 안해의 시신이 사체실로 실려가기전까지 줄곧 안해의 시신을 꼭 껴안고있었다.   그날 오후 4시 4분에 호청의 언니는 공안국에 사건을 제보했다. 심수시 복전구공안국 화부파출소의 경찰들이 현장에 와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의사와 간호원 그리고 환자의 가족을 모두 파출소에 불러다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날, 문모는 고의살인죄혐의로 공안국에 형사구류되였다.   2009년 2월 18일, 기자는 심수시제2인민병원에 찾아갔는데 병원 중병실사업 일군들에 따르면 그당시 중병실에는 7~8명의 간호사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문모가 산소호흡관을 뽑는것을 보고 제지하려고 했지만 문모의 힘을 당할수 없었다고 말했다.   의료일군들은 문모의 행위에 대해 부동한 각도로 보면서 부동한 결론을 내렸다. 어떤 사람들은 문모의 행위는 살인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문모가 안해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한 행위이니 리해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기자는 또 비통에 쌓여있는 호청의 어머니와 언니를 만나보았다. 그들은 사위의 집에 거주하면서 호청의 아들과 딸을 보살펴주고있었다. 그들은 기자를 보자 울면서 경제형편때문에 심수에서 변호사를 청할수 없으니깐 기자더러 무한에 돌아가면 무료봉사를 제공해주는 변호사를 청해달라고 부탁했다.   호청의 9살된 딸은 이미 엄마가 사망된것을 알고 통곡했지만 4살된 아들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엄마는 어디 갔어?’라고 자꾸만 물어보았다..호청과 문모는 처음에 부부감정이 매우 좋았지만 최근에 와서 문모가 늦게 귀가하지 않으면 외박하는 바람에 자꾸만 다투었다. 호청의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치료를 받아도 식물인이 된다는 말을 듣고 아들을 불러서 “호청이 향항에 수백만원의 보험에 투자했는데 만약 식물인이 되면 보상금을 받을수 없을뿐만아니라 치료비까지 지불하게 되잖아. 빨리 죽는게 낫지”라고 말했다. 호청의 어머니는 당시 그 말을 듣고 몹시 분개했다.   문모의 형님 문샘도 호청의 어머니를 보고 “만약 호청이 식물인이 된다면 잠시는 모르지만 시간이 오래되면 문모도 부부의 감정이 없어지고 남과 같아질것입니다. 본인에게도 식물인이 되여 사는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호청의 시집에서는 처음부터 문모와 호청의 결혼을 반대했었다. 문모는 심수의 본지방사람이고 호청은 무한 사람이였기때문이였다. 문모의 3남매는 나란히 붙은 3채의 5층짜리 별장을 가지고있었고 저마다 바오마(  )를 몰고다녔다. 또 한해에 수십만원씩 세를 받는 부동산까지 가지고있었는데 이 부동산이 파가이주하면 수천만원의 보상을 받을수 있었다. 호청은 생전에 늘 친정어머니한테 “시어머니는 돈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돈을 탐내요. 심수의 본지방사람들은 모두 돈이 많아서 딸이 시집가면 거액의 재산을 주어서 보낸다면서 외지의 가난한 지방에서 온 저를 자꾸만 업신여겨요”라고 말했다.   호청의 어머니는 “법률공부를 한 사람(사위 문모)이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요?”라고 몹시 분개해하면서 꼭 변호사를 청해서 진실을 밝히는것으로 억울하게 죽은 딸을 위로하겠다고 말했다.   《무한석간》  
1    라체사진 찍은 강탈법을 잡은 녀성 이야기 댓글:  조회:5940  추천:0  2009-03-27
2008년 4월, 중경시의 한 녀공무원 배문려는 인터넷에 집을 세준다는 광고를 냈다. 하지만 이 광고가 “원앙새강도”를 불러들일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4월 8일 집을 세맡겠다던 “부부”가 배문려를 랍치하고 그녀가 휴대한 은행카드, 목걸이, 금반지 등을 모조리 략탈해갔으며 또 비렬하게 라체사진을 찍어낸후 인테넷에 올리겠다고 위협하면서 협잡하려 했다. 결국 배문려는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용감하게 맞서 싸웠으며 공안기관을 협조하여 한무리 강도집단을 일망타진했다. 집을 세주려다 화를 자초 올해 26살인 배문려는 2004년 9월에 대학본과를 졸업하고 공무원시험에 합격되여 중경시 모 사업단위에 취직했다. 총명하고 진취심이 강한 배문려는 몇년후 부주임으로 승급했으며 2006년에는 연구생시험에 합격됐다. 석사공부를 마친 남자친구 단학수는 중경시당위 모 기관에서 사업했다. 사귄지 오래된 이들은 2009년 상반년에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2008년 2월, 이들은 양광화원단지에 새 아빠트를 사서 장식해놓고 결혼하면 함께 생활하기로 했다. 하지만 새집을 너무 오래 비워두는것 같아 상론을 거친후 집을 세주기로 했다. 2008년 3월 28일, 배문려는 중경시가옥정보넷에 집을 세준다는 광고를 냈다. 4월 8일 오후 4시경, 배문려는 집을 세맡겠다는 한 녀자의 전화를 받았다. 두 사람은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날 저녁 남차친구가 연장작업을 하기에 배문려는 혼자 떠났다. 저녁 8시쯤에 실팍한 30대녀자가 한 남자를 데리고 양광화원단지에 나타났다. 배문려는 그들을 데리고 집구경을 시켰다. 배문려와 실팍한 녀인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남자가 가만히 출입문을 닫아걸었다. 사실 그들은 집을 세맡는다는 명의로 전문 사기치고 강탈하는 한쌍의 “강도련인”이였다. 남자는 위강이라고 하는데 중경시 남안구사람이며 1981년생이였다. 녀자는 묘신이라고 하는데 남자보다 8살 더 많았다. 두 사람은 고정된 직업이 없었다. 10분후 집을 돌아보고나서 그들은 한달에 500원으로 집을 세맡겠다고 했다. 그런데 배문려가 탁자에 엎드려 계약서를 쓰고있을 때 뒤에 있던 위강이가 갑자기 달려들어 배문려의 목을 조르면서 “소리치면 죽여버릴테다”고 위협했다. 묘신은 침실에 들어가 침대보를 갈기갈기 찢어 끈을 만들었다. 그 끈으로 두 사람은 배문려를 꽁꽁 묶어놓았다. 묘신은 배문려의 목걸이와 약혼반지를 빼앗아내고 또 배문려의 핸드빽에서 현금 1500여원과 일본제 디지털사진기, 삼성표 핸드폰, 6장의 은행카드를 들춰냈다. 하지만 6장의 은행카드에 9000원밖에 없는것을 확인한후 그들은 아주 실망했다. 노기등등해진 위강은 날카로운 비수를 뽑아 배문려의 얼굴에 대고 “오늘 네년의 얼굴에 칼흔적을 남겨놓을테다. 명심해, 이후 낯선 사람을 경솔하게 믿지 말기를 바란다”고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배문려는 짐짓 가련한 표정을 짓고 애원했다. “오빠, 언니, 집에 욕심나는것이 있으면 몽땅 가져가요. 난 당신들과 원쑤진일도 없는데 제발 놓아주세요. 그리고 빨리 이곳을 떠나세요. 이제 곧 남자친구가 친구들을 데리고 마작놀러 올것이니 서둘러야 해요.”  묘신도 배문려가 가련해보이는지 위강을 보고 “그만해요. 이년도 불쌍해요. 값진 물건을 가지고 빨리 떠나자요.”라고 말하면서 그만두라고 했다. 그리고 은행카드를 가지고 밖에 나가 망을 보는 짝패와 함께 자동인출기에서 현금을 꺼낸후 다시 올라와 집을 털기 시작했다. 그들은 손목시계 2개, 금반지 2개, 황금목걸이 1개, 고급화장품 등 값진 물건들을 들춰냈다. 이때 위강은 배문려를 침실로 끌고간후 침대에 묶어놓고 돈과 재물을 숨겨놓은 곳을 대라고 협박했다. 배문려는 자신이 강하게 나오면 해를 입게 될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는 이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놓아주면 집에 돌아가 결혼준비로 부모님들이 저금해놓은 10만원을 주겠다고 말했다.위강은 더는 돈이 나올수 없음을 느꼈는지 얼굴이 반반한 배문려에게 딴 마음을 먹었다. 그는 침실문을 닫아걸고 손수건으로 배문려의 입을 틀어막은후 가위로 그녀의 옷을 갈기갈기 오려내기 시작했다. 위강이 달려들자 배문려는 결사적으로 반항했고 결국 위강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위강은 침실밖에 있는 묘신이 들을가봐 배문려의 귀빰을 후려갈기고는 그만두었다. 묘신은 침실에 들어와서 거의 알몸으로 된 배문려를 보더니 뭐하느냐고 위강에게 따지고들었다. 그러자 위강은 핸드폰으로 배문려를 사진찍으면서 “이년이 우릴 찾아와 시끄럽게 굴면 라체사진을 인터넷에 올릴것이야.”라고 말했다. 이때 아래서 망을 보던 짝패가 현금 1.9만원(배문려의 신용카드는 透支信用 였기에 1만원을 더 내올수 있었음)을 꺼냈다고 하면서 어서 떠나자고 재촉했다… 광고를 미끼로 강탈범을 낚다 그날 저녁 10시 30분경에 단학수가 연장작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배문려가 집에 없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배문려가 낮에 집을 세맡으려는 사람이 있어 세양광화원단지에 간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는지 걱정된 단학수는 택시를 잡아타고 세양광화원단지로 달려갔다. 단학수가 집문을 열고 보니 집안이 란장판이 되였고 침실에서 한 녀자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실문을 열어보니 배문려가 알몸으로 된채 꽁꽁 묶여있었다. 단학수는 인차 배문려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의사는 외상이 좀 있지만 치료받으면 인차 나을것 같다고 하면서도 정신상 심한 타격을 받았기에 잘 위로해주라고 부탁했다. 4월 12일, 배문려는 단학수와 함께 공안기관을 찾아가 강탈당했다고 제보하면서 혐의자들의 외모특징을 제공했다. 경찰들은 배문려가 제공한 정보에 근거하여 분석을 거친후 이자들이 근간에 련속 발생한 입실강탈강간사건과 관계있다고 판정했다. 배문려는 이처럼 많은 자매들이 무고하게 피해를 본것을 보고 더욱 격분했다. 그녀는 경찰을 도와 입실강탈범을 꼭 잡아내리라 다짐했다.배문려는 이자들이 계속 입실강탈하는것을 보면 긍정코 새로운 목표를 노릴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신문과 인터넷에 집을 세준다는 광고를 내면 강탈범들이 꼭 올가미에 걸려들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는 전번처럼 위험성이 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2008년 5월 10일, 배문려와 단학수는 중경의 여러 신문사와 광고회사를 찾아가 집을 세준다는 광고를 냈다. 이름도 왕설이라는 가명으로 하고 집도 황관명주단지이며 련계전화도 새로 바꾸었다. 5월 16일 저녁, 집을 세맡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배문려는 이튿날 저녁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튿날 오전 배문려는 파출소에 알렸다. 저녁 8시에 단학수가 들어있는 아빠트부근에 그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자들은 배문려를 발견하고 속았다고 소리치면서 차를 돌려 뺑소니쳤다. 5월 20일, 배문려는 위강의 공갈전화를 받았다. “너 감히 경찰에 알려? 꼭 복수할테야. 3일내에 현금 10만원을 내 구좌에 넣지 않으면 너의 그 잘난 라체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공개하겠다.” 공갈전화를 받은 배문려의 심정은 무거웠고 불안했다. “제발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지 말아요. 돈은 요구한대로 주겠어요. 먼저 3만원을 주고 당신이 나의 앞에서 그 사진을 없애버리면 나머지 돈은 현금으로 주겠어요.” 위강은 배문려의 QQ주소를 요구했다. 배문려는 이자들의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려고 QQ주소를 알려주었다. 이튿날 배문려는 공안기관을 찾아가 그자들이 인터넷에 꼭 오를것이라고 알렸다. 기술인군들은 그자와 대화할 때 될수록 시간을 끌라고 알려주었다. 저녁에 배문려와 위강이 인테넷에서 만나 대화를 했고 경찰들은 위강이 머물러있는 지점을 알아냈다. 하지만 경찰들이 찾아갔을 때 집은 텅 비여있었다. 5월 30일, 위강이 인터넷에 또 나타났다. 위강은 돈을 주지 않으면 라체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협박했다. 배문려는 위강과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끄는 한편 또 경찰에 알렸다. 기술인군들은 마침내 위강 등이 들어박혀있는 곳을 알아내고 형사경찰대대에 알렸다. 형사경찰들은 즉시 행동하여 위강과 묘신 그리고 공범인 묘항, 리치 등 4명 강탈혐의자를 나포했다. 2009년 1월 16일, 중경시인민검찰원 제5분원에서는 위강, 묘신 등 4명을 강탈죄, 강간죄, 부녀희롱죄 등으로 법원에 기소했다. 이 사건을 책임진 검찰관은 집을 세주려는 주인들에게 충고를 주었다. 집을 팔거나 세를 주는 광고를 낼 때 정규적인 신문이나 광고회사를 통해 내야 하고 낯선 사람이 집을 사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만나는것이 좋으며 상대방의 신분증을 꼭 확인하는것이 바람직하다. 또 낯선 사람이 집을 보려 할 때 녀주인 혼자 만나지 말고 동행자 혹은 남편이 동반하는것이 안전하다. 그리고 출입문을 잠그지 말아야 한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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