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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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시) 가시북채들 댓글:  조회:1638  추천:0  2014-01-25
가시북채들 최룡관 바이올린이 연주를 하고있다 폴란드 타트라산골짜기가 마신다 사품치며 쏟아져내리는 안개의 강물을 강물에 새벽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검은 곰이 물속을 헤염치고있다 벌새가 날개를 팔랑거리며 가는 주둥이로 꽃에 키스를 퍼붓고 앞뜨락의 오이밭에서 파란 부채들 바람을 일으키고 가시북채들 바람북을 두드린다 도라지 2013/5호 총200호
121    (시) 연길강 속사 댓글:  조회:1041  추천:0  2014-01-25
연길강 속사 최룡관 토끼가 두귀를 쫑긋 세우고 서있다 하얀 갈매기가 날개를 펼치고 파릉거린다 밤이 오면 귀바퀴에도 날개두리에도 총총총 별들이 가물거린다 홀드의 망망한 호수에서 물속에서 휘휘 돌아간다 뫼들은 바다를 향하여 뛰여가고 강들은 하늘우에 누워 헐떡인다. (홀드:덴마르크의 한 도시) 도라지 2013/5호 총 200호
120    (시) 기발 댓글:  조회:984  추천:2  2014-01-25
기발 최룡관 조의의 기발이 구름을 휘감아치고 태산도 천군의 발바닥을 핥으러 달려오네 청마는 소리없이 아우성이라 하고 마야꼬브스끼는 회의 꾸러기라고 하고 룡관이는 나붓기는 절망이라고 한다 제비들은 봄자와 가을이라는 글자를 쓰며 북으로 남으로 날아오르고 송어들은 죽음의 굽이를 돌고돌아 물방아도 그림자를 남길수 없는 삼도천의 자갈을 찾는다 (조의:고구려애국랑도 명칭) 도라지 2013/5 총 200호
119    진달래.3 댓글:  조회:895  추천:0  2013-09-05
진달래.3 어젯밤 하늘에 퍼지던 불티들 하늘 태우려다 타지 않으니 불티비로 쏟아졌다나 이 아침 남산에 불이 달렸다 버들피리 불던 아이들 우야우야 소리치며 불 끄러 산으로 간다 아이들은 불은 끄지 않고 도리어 불길 휘날리며 달려내려와 냇가에다 불 지른다
118    새싹.2 댓글:  조회:1010  추천:0  2013-09-05
새싹.2 파아란 열쇠로 겨울이 채운 자물쇠를 찰칵 연다 대문을 열어 젖히며 따슨 바람이 땍때그르르 굴러 나오고 꽃망울들이 까르르 웃음을 쏟고
117    줄뛰기 댓글:  조회:985  추천:0  2013-09-05
줄뛰기 뜀줄이 빙빙 돈다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 하늘 한자락 베여낸다 베여서는 퐁퐁 뛸 때마다 내 발밑에 깔아준다 나는 고무풍선처럼 가벼워져 살짝살짝 하늘만 밟는다
116    댓글:  조회:914  추천:0  2013-09-05
비 5월의 구름을 반죽하여 하늘이 국수 누른다 해님 분틀에 누른건 금빛오리 달님 분틀에 누른건 은빛오리
115    봄은야 댓글:  조회:872  추천:0  2013-09-05
봄은야 봄은야 알을 까는 암탉 풀병아리 잎병아리 꽃병아리 자꾸자꾸 까낸다 산에서도 삐약삐약 들에서도 삐용삐용
114    그림 댓글:  조회:892  추천:0  2013-09-05
그림 네가 한줄 긋고 내가 한줄 그어 우린 병아리 하나 그렸죠 삐악삐악 우는 소리에 봄이 왔나 하고 뜨락에 살구꽃 서너 송이 망울 터치웠어요
113    뒤동산사과꽃 댓글:  조회:1068  추천:0  2013-09-05
뒤동산사과꽃 해빛이 뛰놀던 가지가지에 하얗게 하아얗게 애기학들이 날개를 파닥이며 놀다간 자리 파아란 애기알들 조롱조롱
112    겨울산 댓글:  조회:858  추천:0  2013-09-05
겨울산 까아만 가시 총총총 하얀 고슴도치 눈보라 앵앵 울어도 두눈 판들판들 움쩍 안한다
111    흑판 댓글:  조회:1020  추천:0  2013-09-05
흑판 최룡관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비옥한 땅 빨간 분필 해씨 심고 하얀 분필 달씨 심고 해씨에선 해나무 자라 열리네 열리네 둥그런 해님이 달씨에선 달나무 자라 열리네 열리네 둥그런 달님이
110    나의 가방속에는 댓글:  조회:1020  추천:0  2013-09-05
나의 가방속에는 나의 가방속에는 책가방속에는 새들이 우는 소리 가득하다야 꽃들이 피는 소리 가득하다야 나의 가방속에는 책가방속에는 나무들이 크는 소리 가득하다야 열매들이 익는 소리 가득하다야 나의 가방속에는 책가방속에는 바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야 별들의 속삭임도 가득하다야
109    하이퍼시 4수 댓글:  조회:1343  추천:0  2013-08-09
하이퍼시 4수   최룡관   해살 하늘에서 빛분수가 쏟아지다 다람쥐 나비 수초들이 빛물장구를 치다 안개의 물결이 산을 삼키다   노란 동공을 켜들고 별유천지가 줄줄이 일어서다 두줄로 늘어선 정령의 눈알들이 길을 지키다   삼족오의 거대한 새가 쩌르릉 하늘을 열며 저 멀리서 나를 향하여 거대한 날개를 저어오다   금반지가 타번지는 불길에 데여서 쓰러지는 무리들.   비 하늘의 이발이 와르르 내려와 보송보송한 땅을 뭉텅뭉텅 씹어삼킨다   지렁이들이 몸으로 락서를 하기에 분주하고 새들이 노역자들을 뚝뚝 찍어먹기다   만리장성우에 여러색 꽃물결이 사품치고 태양은 무수한 빨대로 땅이며 풀이며 나무의 물을 빨아 목을 추기다   시인은 사물들 사이를 뛰여다니며 징검다리를 놓아주고있다. 땀방울이 뚝뚝 이마에서 떨어진다.   노을 아침자궁에서 뚝 피방울이 떨어지다 천만방울이 떨어져 하늘을 흥건한 피로 물들이다 산이 뚝 떨어지고 들이 뚝 떨어지고 나무며 풀이며 개미며 나비며 줄줄이 줄줄이   어둠속에는 공장이 있었다 장밤을 마치질로 망치질로 장인들이 퍼붓는 땀소나기 생명의 폭포가 쏟아지다   밤의 지옥은 찬란을 빚어내고 낮의 천당속에서 비극이 뛰여다니다.   잔디 잔디들이 무수한 날창을 추켜들고 비탄알들의 습격을 까부신다 천지가 요동치는데 쌍뿔의 천군만마가 하늘을 주름잡는다 해일이다 해일 하늘에서 터져내리는 해일 번뜩이던 검(剑)무리를 한입으로 삼키며 해상을 휩쓸던 전함들 가랑잎으로 강물은 흐르지 않고 서있다 력사의 붓이 그은 금이여.
108    하이퍼시(다선시)에 대한 탐색 댓글:  조회:2330  추천:1  2013-07-10
하이퍼시(다선시)에 대한 탐색 최룡관 들어가는 말 필자의 저서 [이미지시창작론]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여 있다.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 방법은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필자는 이 일곱가지 방법을 치중하여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 일곱가지 방법은 어떤 근거를 잡으면서 한 방법이다. 그러나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데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는것들이 있다. 이미지란 현실을 초월하여 쓰는것이 중점의 하나인데 무슨 근거가 필요한가? 이 말은 맞는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것은 지적인 지위를 삭감해버리는것으로서 우리들이 연구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당대 영미 초현실주의자들이 이에 속한다고 생각 된다. 그들은 환상적이고 몽상적인 이미지를 제작해내고 파편문체를 많이 쓰는데 필자는 그런 이미지에 대한 연구가 너무 천박하여 여기에서 피력하지 못하고 과제로 남기면서 독자들에게 량해를 구하는 바이다.] [이미지시창작론]을 쓰기 시작해부터10년이 지난후인 2007 년에 필자가 한 말이다. 그로부터 어느덧 또 여러해가 지난 2013년이 돌아왔다. 오늘은 2013년 2월 20. 오늘부터 [독자들에게 량해를 구하던것을] 나름대로 풀어보려고 펜을 들었다. 그답을 한국의 하이퍼시클럽시인들과 그들의 시에 대한 글에서 찾게 되였고 그 원천적인 근거를 조지P 란도의 [하이퍼텍스트]에서 찾아볼것 같다. 2011년에 한국의 김규화와 심상운이 편찬출간한 시집 [하이퍼시]시집과 심상운시론 및 문덕수의 많은 시론들이 해답을 주었다고 생각되여 나는 컴퓨터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게 되였다. 그 고리는 다선 한국의 하이퍼시클럽에는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들이 [하이퍼시] 시집을 묶어낸데는 20명시인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들로는 강영은, 고종목, 김규화, 김금아, 김기덕, 김영찬, 김은자, 박이정, 손해일, 송시월, 신규호, 신진, 심상운, 안광태, 위상진, 이선, 이솔, 정연덕, 조명제, 최진영이다. 한국에 시인이 만명이라고 하는데 이 20명시인들은 사막속에 있는 한알의 모래알에 불과할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혁신은 언제나 다수가 하는 일이 아니다. 언제나 한줌도 안되는 혁신자, 개혁자들이 먼저 시작을 하게 되는것이다. 지금 연변도 그렇다. 다선시를 하는 시인들이 열명정도이다. 비례를 따지면 한국보다 많지만 한국보다 우리가 더 어려운것이다. 한국은 그래도 시문학이란 잡지를 거점으로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시잡지가 없는 연고로 다선시를 연구하고 창작하는 시인들이 독안에 갇겨있다고 할수 있겠다. 갇겨있고싶어서가 아니라 여러가지 문화여건이 따라가지 못하고있다. 다선시의 개념을 어떻게 인식할것인가? 다선시라는 언어는 우리로 말하면 너무 생소하다고 할수 있겠다. 하지만 확실히 다선시가 존재하였으며 존재하고 있다. 다선시라는 말은 최근에 한국의 시인이며 리론가인 심상운이 내놓은것으로 알고 있다. 다선시는 지금 여러가지 명제로 해석되고 있는 같다. 하이퍼시라고도 하고 디지털시라고도 한다. 다선이란 쉬운 말로 하면 선이 여러개란 말이 되겠다. 한수의 시에서 한가지 이미지를 둘러싸고 쓰는 재래종의 시인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여러가지로 나타난다는 말이 되겠다. 필자가 알건대는 다선시를 제일 왕성하게 쓴 시인은 프랑스의 S.J 페르스인것 같다. 물론 보들레르나. 랭보나 몰리에르나 발레리나 엘리아르와 같은 시인들한테서 다선적인 시들이 나왔지만 다선으로 시를 쓰고 시집을 내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은 생종.페르스가(1960년노벨문학상) 아닌가 싶다. 독일 류학을 하고 외교관 시험에 합격되여 북경, 조선, 외몽골 등 나라에서 사업한적이 있는 외교관 생종페르스는 전문적으로 다선시를 창작한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는) 독일의 후고. 프리드리히 말씀을 들어보면 오늘의 다선시를 당년의 파편문체시로 해석되는 같다. 필자는 다선시=파편문체시라고 생각한다. 2011년 수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그의 시도 파편문체로 된 다선시였다. 그러고 보니 21세기 시의 시대는 다선시 시대가 도래한것이 아닐가 하고 필자는 생각해본다. 먼저 생종. 페르스의 시 [비]의 전문을 보기로 하자. 비 생종페르스 비의 용수(榕树)는 거리에 뿌리 내리고 때이른 호수가의 탁한 물속의 벌레들, 산호의 혼인을 향해 솟아오르고 그물로 싸우는 투우사와 같이 벌거벗은 ‘사고’ 공중의 뜰에서 헝클어진 녀인의 머리카락을 빗긴다. 파도의 웨침에 주제의 절박함을 노래하라 시여, 파도의 출렁거림에 도망하는 주제를 노래하라 시여 예언하는 처녀들의 허리에 지나친 애욕 밤에 황갈색의 늪에서 부화하는 금빛의 알 오 기만이여! 이같은 꿈의 기슭에도 나의 정돈된 잠자리 그곳에서 음란한 장미는 시로 선명히 자라 바퀴되여 돌기 시작한다. 나의 비웃음인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것은 짐승의 고기맛에 김 뿜는 땅과 처녀수밑의 과부의 점토, 잠 못 이룬 내 사내의 발에 다져진 땅이니 포도주처럼 가까이 가 냄새를 맡을 때 그 땅은 진정 기억의 상실을 시인할것인가? 주여, 내 비웃음의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것은 층을 이룬 바다의 겹쳐진 부분의 높은 모래언덕의 응답과 같은, 지상에서 표현되는 꿈, 여기 이곳에 있는 땅은 모두 씁쓸한 땅 새로 태여남의 시간, 그리고 알수 없는 모음의 방문을 받는 나의 령혼. 생종페르스의 [비]를 읽노라면 무엇이 무엇인지 알수 없다. 시행마다 거이 모두가 이질적인 이미지로 라렬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는 련계되는것이 아니라 서로 단절되여 있고, 그런 단절들이 모여서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어떠한 통일적인 해석을 요구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는것이다. 프랑스의 외교관이였지만 시에서 그가 추구한것은 어떤 윤리도, 사상도, 철학도 아니다. 그저 그의 령혼에 떠오른 이미지들을 집합하여 한수의 시로 만들었을뿐이다. 한국 태학당에서 출판한 생종페르스의 시집은 [이국의 녀인에게 바치는 시]라는 제목으로 되였는데 모든 시가 다 이런 파편문체의 시 즉 다선시다. [감각적 비 실재성이란 말은 생종페르스 시에도 유용한 말이다. 그의 시를 내용상으로 리해하기란 거이 불가능하다] 하고 독일의 석학 후고 프리드리히는 론하고 있다.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생소한 이미지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반짝이는 이미지들이 장엄한 소리를 내면서 독자를 아연해지게 한다. 그것은 상상력에 대한 자극이다. 이미지들은 조밀하게 배렬되여 어느 한 이미지도 부정할수도 없다. 령혼속에서 끓고 있는 이미지들은 낯설고도 환각 적이여서 이방의 나라에서 온 사물들의 움직임이라고 밖에 할수 없다. 아래에 201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를 한수 보기로 하자 기상도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월 바다가 신기루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경기의 백색 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슴프레한 호박빛이 마을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위의 대기중에 그려진 상형문자다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 멋대로 떨어진다. [기상도] 전문이다. 기상도란 날씨를 알려주는 도해라고 해석할수 있다. 그런데 날씨를 알려준다는것이 오늘은 몇도며 바람이 몇급이며 구름이 어쩌며 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비가 오는가 눈이 오는가 하는 말따위도 물론 없다. 기상도를 보면서 10월의 바다, 요트경기, 호박빛, 개짓는 소리, 정원의 과일나무들을 쓰고 있다. 사실 이러한 사실들은 또 너무 낯선 사물들로 변형되고 있다겠다. 10월의 바다는 신기루등지느러미로, 요트경기는 백색현기증으로, 호박빛은 음향으로 , 개짓는 소리는 상형문자로, 과일은 나무를 바보로 만드는것으로 변형되고 있다. 각련들은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데 이미지들마다 어떤 련계성도 보이지 않는다. 각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각자의 독존이 집합되여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한국의 조향의 시 [바다의 층계]도 이러하다. 바다의 층계 조향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手话机 녀인의 허벅지 낚지 까만 눈동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웅에 손을 흔드는 하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끝에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의 전문이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는 단절되여 있고 아무련 련계성도 없다.. 우리는 아주 괴상하고 기이한 그림앞에 서있게 된다. 여러가지 기이하고 괴상한 사물들이 모여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다겠다. 여기서 그 어떤 사상을 추구한다는것은 거이 불가능하다. 시인의 의식의 뛰여다니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을뿐이라겠다. 의식은 그 어떤 장애도 받지 않고 한순간에 자유자재로 번개처럼 하늘을 가를수도 있고 산처럼 솟을수도 있고 물처럼 흐를수도 있고 천년만년을 거스를수도 있고 고금중외를 빛의 속도보다도 더 멀리 날아다닐수도 있는것이다. 조향의 가 바로 이런한 시라고 볼수 있을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의 생종페르스의 나,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의 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시라고 볼수 있겠다. 이러한 시를 필자는 후고프리드리히 말로 하면 파편문체시라고 할수 있고 심상운의 말대로 하면 다선시라고 할수 있겠다. 모두어 말하면 시에 등장하는 사물이 하나인것이 아니라 여러가지이다. 이 여러 가지 사물들은 다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미지들은 각각 홀로걷기를 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한수의 시에 하나의 주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주제가 동시에 병존하고, 여러가지 주요 인물(혹은 사물)들이 활동한다고 하겠다. 뒤의 이미지는 앞의 이미지와 아무런 련계성도 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미지들은 물결이 흘러가는것처럼 흘러간다고 하겠다. 료리로 말한다면 순수한 닭고기로만 된 료리인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고기와 여러가지 채소로 된 잡탕료리라 하겠다. 과거에 우리는 이러한것을 구성이 흩어졌소 째이지 못했소 이런 시가 어떻게 시로 되오 하면서 나무리였다. 그런데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할 시가 오늘은 탐구되고 있다. 이러한 시를 심상운 시인과 김규화시인은 [하이퍼시발간사]에서 이렇게 긍정하고 있다. [한국현대시를 오래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벗어나 다선구조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서술을 객관적이미지로, 정적이미지를 동적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개혁성(改革性)이 들어있다.] 두 시인은 재래의 현대시와 하이퍼시(다선시)와의 다른점 6가지를 론하였는데 우리가 심사숙고할만한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할수 있다. 이 여섯가지 구별을 잘 인식하고 리해하는것은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에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오늘의 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되는가를 가리켜준다고 생각된다. 다선구조시를 일종 하이퍼시라고도 하는데 하이퍼시란 어떤것인가? 이에 대한 문덕수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면 꽤도가 올것같다. 문덕수는 [하이퍼(hyper)란 말은 ‘과도(过渡)한’, ‘과다(过多)한’, ‘초월하여’, ‘넘어서’, ‘초(超)…’, ‘3차원보다 높은’ 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 일종의 련결어]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해석하고있다. [하이퍼는 본의의 세계에서 유의의 세계로 뛰여넘는(초월해서), 현실세계의 상식을 초과할 때 일컫는 일종의 하이퍼적특징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 하는것은 시의 본질적구조자체를 부정하는것과 같습니다… 하이퍼시는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불연속성적 균열을 초월하여 ‘’상상세계’’와 연결하는 작시에서 얻어진것입니다… 하이퍼시는 초월세계와 연속하려고 하는 정신적, 언어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시 209쪽) 문덕수는 하이퍼시에서의 현실과 초월의 관계를 극명하게 밝히면서 하이 퍼시에 대한 사유방식은 시의 본질적구조에서 나온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특성은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불연속성격 균열을 초월하는것이며 현실과 초월세계를 연속하는것이라고 하였다. 재래의 현대시는 이렇지 못하였다. 유추되는 사물이 꼭 어떤 련계성이 있어야 하고 한수의 시는 하나의 단선구조로 되여야 하였다. 시력사를 보면 우리 시가 백여년을 (아니 수백년동안이래도 과언이 아닐것임) 단선구조를 추구하여 왔다고 할수 있다. 오늘 21세기 디지털시대를 맞으면서 우리 시에도 그것을 타파하라는 나팔소리가 울리였다. 나팔소리는 그렇듯 우렁차다. 이는 시에서의 신생사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신생사물은 력사의 근본 흐름을 대표하는것으로서 낡은것은 그앞에서 점차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게 될것이다.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시]에서 조향의 [바다의 층계]와 문덕수의 [마릴린 몬로] 등 시를 례로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론리적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가진다…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게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게에서 형의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게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결합방식은 김춘수의 ‘무의미시의 기법’과는 다른 ‘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할수있다](하이퍼시224-225쪽) 심상운은 하이퍼시를 아주 쉽게 [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이라고 명명하고있다. 초월성과 의식의 건너뛰기가 하이퍼시의 핵심이라고 해도 무방할것이다. 현대시와 다선시는 어떤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는가를 살펴보는것은 다선시를 리해하는데 큰 도움으로 될것이다. 문둥이 서정주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시 [문둥이]에서는 전반시에 하나의 사물의 이미지에 대한 서술만 있는것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시는 문둥이가 어쩌는가만 쓰고있는것이다 아마 서정주시의 다른 시들도 이렇게 한가지 사물을 둘러싸고 씌여져있는 같다. 하지만 오늘의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는 이와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문둥이가 아주 짧은 시니까 [하이퍼시]시집에서 짧은 시 한수를 보자 북소리 김은자 Scene# 8 고무줄놀이를 한다 엄마는 장사 나가고 저녁이 줄을 뛰여넘는다 나는 엄마를 기다린다 지구를 한바퀴쯤 돌면 아빠가 나올가 이 시는 [문둥이]보다 한줄이 더 많다. 하지만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단선이 아니라 다선이다. 소제목부터 야릇하다. 영어에다 우물정자같은 글이 아닌 부호에다 아라비아수자 8을 조합하여 쓴것이 이색적이 아니라 할수 없다. 시가 시작되자 북소리가 고무줄놀이를 한다는 변형부터 창의적이다. 청각을 시각화한 공감각의 응용이 이채롭다. 그아래에 엄마가 나오고 저녁이 나오고 지구가 나오고 아빠가 나온다. 시의 행마다 성질이 다른 사물들이 나타난다. 이 성질이 다른 사물들 자체가 련계성보다도 분리성이 강하다. 시에서 이런 이미지들의 횡적배렬을 파편문체라고 할것이며 다선시라고 하지 않을가 생각된다. 이질적인 사물들의 이미지라렬이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이미지와 이미지사이에는 일상적인 사유로는 넘지 못할 벽이 장용하고 있다겠다. 북소리가 줄뛰기를 한다는것은 청각적이미지를 시각적이미지로의 전환이 이색적 이다. 그다음은 엄마는 장사 나가고 했으니 뒤에 엄마에 대한 해설이 있으려니 했는데 저녁이 줄뛰기를 한다고 한다. 엉뚱하다. 그담 엄마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다음에 나오는것은 지구를 한바퀴도는 일이나오고 기다 리는 엄마대신 또 아빠가 나온다. 시를 통하여 어느 하나도 [나]라는 사람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는것이 없다. 좌절에 좌절을 거듭하다 생을 마감하게 되는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 시라고 할가. 시의 구성이 여러가지 색갈의 쪽을 묶어서 하나의 담요를 만든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쪽들의 색갈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현현이라는것이다. 다선시의 합리성 다선시가 왜 오늘에 우리의 훈민정흠시단에 나타나게 되는가를 필자는 생각해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아래와 같은 원인이 아닐가 생각한다 다선시는 오늘의 시대에 부응하는 시적구조가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해본 다. 지금은 생산이 다국적인것이 많다. 자동차공장하면 여러나라에서 부속을 끌여들여 하나의 차를 만드는가 하면 한나라에서 생산하는것도 여러지구에서 부속품들을 모아서 조립하는 경우가 있는같다. 유리는 어디서 생산하고 바퀴는 어디서 생산하고 엔징은 어디서 생산하고 모형은 어디서 생산하고 등등. 아마 어느 자동차공장이 한공장에서 모든 부품을 생산하여 차를 만드는 공장은 아마 없을것이다. 어느 한 나라에 어떤 큰 일이 벌어져도 영향이 그 나라에만 미치는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반응을 일으키거나 세계적인 참여를 초래하게 되는경우가 많다. 이런 이미에서 한시인이 시를 쓰자면 여러가지 인소들이 작동 하게 되는것이고 여러가지 사물과 사건들이 현실을 초월하여 상상도 되고 환상도 되는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사고의 바탕이 되여서 그런 같다.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다선적이다. 한사람이 동시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는것이다. 누구와 대화하면서 그가 아닌 어떤 사람의 어떤 모습이나 일을 생각할수도 있고, 미국의 뉴욕이나 오스트라리아의 사자, 중국의 고궁…. 이러한것들을 거이 동시에 생각할수도 있고 련속적으로 생각할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떠오른 사물들은 실제상 아무런 련계도 없고 성질이 완전히 이질적인것들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다각적이고 다시점이라고 할수 있다. 그것이 오늘의 다선시에 사유의 기교를 주지 않을가고 생각된다. 자연도 다종적으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다. 한마을이 있다고 하자. 거기에 사람이 있고 물이 있고 나무가 있고 흙이나 돌이 있고 또 도야지가 있고 닭이 있고 개가 있고 소가 있고,,,,,,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들을 종합하여 버들골이요 남평이요 도문이요 하고 말하게 된다. 손바닥만큼 자그마한 땅의 구조도 그렇게 된다. 거기엔 흙이 있고 풀이나 나무가 있고 또 귀뚜라미나 개미같은것, 지렁이, 혹시 토끼도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여러가지 사물을 통칭해서 어느한 자그마한 곳이 어떤 개념으로 존재하게 되는것이다. 다선시란 이런 자연의 특성과 무관한것이라고 말할수 없을것 이라고 생각할수 없게 된다. 인간의 문화는 또한 다층차적이다. 연길하면 고층건물이 즐비한 거리가 있고 거리에선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다니고 여러가지 백화나 가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게 된다. 백화에 들어가면 적어도 수천종에 달하는 여러가지 상품들이 있는데 이러한 상품들은 다 성질도 다르고 용처도 다르다는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진렬해 놓은 과자와 옷들, 전기제품들, 악세사리들, 시계들… 다 상품이라는 이름으로도는 통용으로 명명하겠지만 그 한종한종의 상품들의 용도와 성격들은 각각 다른것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선시는 현실문화에 부응하는것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눈, 귀, 코, 입, 귀, 눈섭 등이 보인다. 이 눈귀코입눈섭은 다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모임이라고 할수 있으며 이것들이 모여 얼굴이라는 명명을 받게 된다. 어느 한가지를 가지고는 얼굴이라는 이름을 받지 못할것이다. 한수의 시에도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고 눈섭이 있게 되는것이 오늘의 다선시라고 생각하게 되는것이 아닐가. 얼굴의 오관은 겉으로는 살에 의하여 련결되였고 안으로는 뼈에 의하여 련결되였다. 살에 의하여 련결되였다는것은 누구나 다 직감할수 있지만 뼈에 의하여 련결되였다는것은 조금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것, 보아내는 사람과 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다선시의 이미지들이 어떤 련관성이 있는가를 보아내는 사람과 보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마 따로 있을것 같다. 실제는 이러한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사물은 모두 각자의 개성이 있지만 모두 이 세상에서 살아 간다는것만으로 벌써 련계되여 있는것이다. 더 나아가 말한다면 광활한 우주속에 있는것이며 한시인의 령혼속에서 산생되는 상상이나 환상일것이다. 사유하는 방법, 추구하는 예술기교가 다를뿐이라고 해야할것으로 알고있다. 오늘의 시대는 디지털시대라고 하는데 이 디지털시대는 컴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컴은 인간의 사유를 초월한 마술을 부리고있다하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것이다. 쑤뾰로 툭 찍으면 술이 나오기도 하고 노루가 나오기도 하고 나비가 나오기도 하고 삼국연회소설이 나오기도 하고 북경이 나오기도 하고 미국이 나오기도 하고 단마르크가 나오기도 한다. 그외에도 현실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모든 상황이 그것도 미세한 상황까지 다 드러낸다. 이렇게 바뀌는 시간은 정말 눈깜박할사이이다. 툭찍으면 변하니까. 이러한 컴은 우리에게 다시각, 다시점 사유를 부여한다고 하겠다. 이것도 다선시의 한개 기초가 되지 않을가 나오는 말 21세기는 21세기의 문학이 있어야 하고 시가 있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다선시가 21세기 시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 조지P란도와 한국의 다선시주창자들의 어록이나 일부문장들을 중요한 참고서로 절록해 본다. 《하이퍼텍스트3.0>>의 말씀 조지p 란도 하이퍼텍스트와 문학리론에 관한 글을 쓴 [자크데리다. 롤랑 바르트, 데오도오 넬슨 안드리에스 반담을 가리킴.] 많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 네명은 중심, 주변, 위계구조와 선형성에 대한 생각에 바탕을 둔 개념체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중선형성, 노드, 링크, 네트워크중의 하나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사고에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런 패러다임이다[2쪽]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 리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많은 네트워크가 상호작용 하며 그중 하나가 다른것보다 우위에 서지 못한다. 이 텍스트는 기의의 축조물이 아니라 기표의 은하계이다. 이것은 시작이 없으며 되돌아갈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출입구를 통해 이 텍스트에 접근할수 있으며, 그 경로중 어떤것도 주된 출입구라고 강변할수 없다.[3쪽] 하이퍼텍스트[넬슨이 1960년도에 만들어낸 말]라고 할때 나는 비연속적인 쓰기를 의미한다. 즉 분기점이 있어서 독자가 선택할수 있도록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다른 경로를 제공하는 링크들로 련결된 일군의 텍스트덩어리이다. [4쪽] 하이퍼텍스트는 비선형적, 아니 좀더 적절하게는, 다중선형적 혹은 다중순차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동상] 사람의 마음은 … 련상에 따라 움직인다. 한가지 생각을 부여잡게 되면 련상을 통해 제시되는 다음 생각을 바로 붙잡게 된다. 이때 뇌세포가 수행한 흔적들의 복잡한 거미줄구조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16쪽] 하이퍼텍스트는 현대문학과 기호학리론의 일부 주요 론점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갖고있다. 특히 탈중심성에 대한 데리다의 강조, 읽기텍스트와 쓰기텍스트라는 바르트의 개념이 특히 그렇다. 실제로 하이퍼텍스트는 바르트와 데리다의 두 개념과 당혹스러울 정도로 유사한 문학적형상들을 창조해냈다. 그리곤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낸 문학적 형상물은 그 개념들, 통찰과 력사적관련[혹은 새겨넣기]의 흥미로운 결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80쪽] 하이퍼텍스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용과 분리가능성에 대한 암시는 데리다가 다음과 같이 추가할 때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주어진 문맥과의 관계를 끊을수 있으며, 전적으로 제한이 없는 방식으로 새로운 문맥을 무한대로 만들어낼수 있다[82쪽] 바흐친은 다의적문학에 대해 ”한가지 감각으로 구성한뒤 다른 감각을 객체로 끼워넣는 방식으로 구성된것이 아니라 여러감각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한다 감각들중 어떤것들도 다른 감각의 객체가 되는 일은 없다.” [86쪽] 하이퍼텍스트는 무제한으로 재중심화할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 시스템에서 일시적인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는것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독자가 된다. 하이퍼텍스트의 기본적인 특징의 하나는 조직의 중심축이 따로 없이 링크로 련결된 텍스트 몸체들로 구성되여 있다는 점이다. [87쪽] 데리다는 “민족학은 탈중심이 생기는 순간에만 과학으로 탄생할수 있다” [89쪽]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련결접속되여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91쪽] 하이퍼텍스트의 읽기와 쓰기의 하나는 –인쇄본이 보관된 도서관을 탐구하는 것처럼- 아무곳에서나 시작해 서로 련결할수 있다는 점이다.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처럼 “각 고원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읽어도 상관 없으며, 이들은 다른 고원들과 서로 련결되여 있다.” 이런 특징적인 조직 [혹은 그것의 결여]은 리좀이 기본적으로 위계질서와 반대되는 특징, 즉 들뢰즈와 가타르가 나무에서 발견했던 구조적형태로부터 유래된것이다.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련계된다. 하지만 리좀의 특질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특질들과 련계되는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다른 기호체계들, 심지어는 비-기호상태를 작동시킨다.” [92쪽] 하이퍼텍스트는 위계보다는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어떤것을 구현한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는 가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정보를 결합하며, 또 가끔은 우리가 독립된 인쇄텍스트와 장르, 형태라고 리해하고 있는것을 위반하면서 “어떤 지점을 다른 지점과 련결한다” … 다의성은 리좀적이며, 그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수목적인 사이비다의성을 드러낸다. 객체에서 주측역활을 하거나 , 주체를 나눌수 있는 독립성은 없다”하는 들뢰즈, 가타리의 론점에서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따라서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려되는 하이퍼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리좀은 어떤 구조적 혹은 발생적모델에 순종적이지 않다. 계보학축이나 심층구조라는 생각에는 낯선 존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설명하듯이 리좀은 “지도적이지 사본이 아니다” 【94쪽】 리좀을 담론의 한 모델로 묘사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의미작용이 없는 단절의 원리 즉 근본적으로 예측불가능하며 불련속적인 경향을 불러온다….들뢰즈와 가타리가 리좀은 “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중간뿐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성장하고 넘친다” [95-96쪽] 푸코는 사물의 질서에세 자신의 프로젝트는 동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은 “찬양받을 론쟁”을 거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동시적인 그리고 외견상으로 모순된 의견이 상호작용할수 있도록 하는 사고의 일반적인 시스템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논쟁이나 문제를 가능하게 만들고 , 지식의 력사성을 떠맡도록하는 조건을 규정하는것은 바로 이 시스템이다” [99쪽] 전자컴퓨팅, 특히 하이퍼텍스트와 과거 30,40년의 문학리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힐리스 밀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 관계는… 다중적이며, 비선형적, 비인과적, 비 변증법적이고 몹시 과잉결정적이다. 그것은 관계를 결정하는 대부 분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는 맞지 않는다”[101쪽] 하이퍼텍스트는 두가지 방식으로 텍스트를 조각내고 , 흩어놓고 원자화한다. 첫째, 인쇄물의 선형성을 제거함으로써 개별구절을 단일한 순서로 배치해야 한다는 원칙 -즉 련속성-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해서 텍스트를 혼란상태로 바꿔놓는것이다. 둘째, 하이퍼텍스트는 고정된 단일한 텍스트라는 개념을 파괴한다. 조각은 첫번째 형태를 만들어내는 부품과 관련하여 전체 텍스트를 고려하며, 변형적읽기와의 련관성상에서 그것을 고려하게 되는것이다. [152쪽] 텍스트를 설정하는 방식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텍스트 다형태성은 텍스트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있으며, 변화하고 , 역동적이며, 열린 형태를 갖게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167쪽]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그리고 경험]은 선형성을 암시한다. 선형성의 주된 지배를 받지 않는 텍스트성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이퍼텍스트성에는 선형성과 련속성이란것이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다중련속성을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엔 여러개의 시작과 끝을 갖고있다는것이 앞의 질문에 대한 한가지 대답이 될것이다.[169쪽] 간단하게 말해서 시작은 일반적으로 결과로 나타나는 의도라는 의미를 포함하는것이다. [171쪽] 마지막 단어라는것은 없다. 마지막판본, 마지막 생각도 없다. 항상 새로운 관념과 아이디어, 재해석이 있다. … 바흐친에게 전체는 종결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관계이다. 따라서 전체는 종결지을수도 무시할수도 없다. 전체가 실현될 때 개념상으로는 벌써 변화를 면할수 없다…. 하이퍼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용어들로 규정하고 묘사하기 어렵다. [172-173쪽] 글쓰기는 결코 존재하기를 멈춰서서는 안되는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즉 하나의 부속물, 사건, 그리고 잉여로 말이다. …. 우리는 플라톤적인 텍스트, 즉 그자체로 닫혀있으며 내부와 외부를 갖고있는 완성된 테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텍스트라고 불리곤 했던것, 한때 이 단어가 동일시한다고 생각했던것-즉 작품의 시작과 끝, 한가지 총체의 통일성, 제목, 여백, 쪽지표시, 기본구성의 바깥에 있는 참고문헌령역 등- 의 지속적인 경계를 형성하는 모든 한계를 무력화 한다.[174-175쪽] 중심성이란것은 오로지 순간적으로 존재한다. [189쪽] 하이퍼텍스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저자를 재구성-재작성-한다 [190쪽] 상징으로서의 유추는 그것이 뛰여넘는 경계로부터 힘을 얻는다. 경계가 없다면 링크에 의해 만들어진 링크들은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것이다. … 내가 빈약하거나 비효률적이라고 한것은 그것들이 명백하게 선형적인 텍스트에 멋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308쪽] (소설에서) 개별 렉시아((돌진, 급격한 증가)는 독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부가적인 링크들을 따라가길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국 하이퍼텍스트는 여전히 텍스트이며, 글쓰기이다. 우리는 좋은 글쓰기의 많은 장점들과 링크가 있는 글쓰기를 구분한는것이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말로 하면 뛰여난 하이퍼텍스트는 링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것은 아니라는것이다. 링크를 둘러싸고 있는 텍스트가 또한 문제로 된다. 왜냐하면 개별 렉시아안의 글쓰기와 이미지의 품질이 하이퍼텍스트의품질에 핵심적인 역활을 하기때문이다. 특정 렉시아의 콘텐츠(내용, 목록)에 만족한 독자가 그 렉시아에서 다른 렉시아로 향하는 링크를 따라가고싶어 하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작가든, 아니면 단순한 텍스트 작가든, 작가라면 누구나 직면하는 문제는 단순하게 정의하면 어떻게 하면 독자를 계속 읽게 만들것이냐로 요약할수 있다.[309쪽] 하이퍼텍스트시를 써왔던 월리엄 디키는 다음과 같은것들이 하이퍼텍스트시의 훌류안, 혹은 유용한 특징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하이퍼텍스트시는 그것의 부분, 연, 이미지 중 어떤것으로부터 시작한 뒤 시의 다른 부분이 그것을 이어갈수 있을것이다. 이런 조직체계는 어떤 한 카드에 기술되는 시의 부분은 그 시에 포함된 다른 어떤 진술의 뒤나 앞에 나올 때도 시적의미를 생성할수 있도록 충분히 독립적인 진술이 되여야 한다 ” [340쪽] 시의 목적은 텍스트의 조건을 보여주는것이다. 시는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의 텍스트적활동을 자신의 기본주제로 삼는것이다. …시는 또한 하이퍼텍스트 웹내에서 가장 예기치 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399-400쪽] 아래에 에서 인용한 하이퍼시 한수 영웅의 얼굴 조슈아 래파포트 늙은 바이나모이네넨이 노래부른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지구가 흔들리며 구리산이 떨어진다 억센 옥석들이 덜커덕 굴러가며 절벽이 둘로 갈라지고 돌들이 해변을 철썩 때린다 그는 젊은 요우카하이넨을 노래한다 그의 칼라활에 묘목을 얹고 말의 멍에엔 버드나무 관목 발자국끝에는 호랑버들 그의 금테 두른 썰매를 노래하며 바닷가에 있는 갈대에 구슬로 매듭지은 그의 채찍을 노래한다 바이나모이넨; 영원한 현자라는 뜻, 칼레라바의 주인공 요우카하이넨; 바이나모이넨의 라이벌. 둘은 노래 경연을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면 녀동생을 바이나모이겐에게 주기로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고 그의 녀동생이 자살을 택하자 요우카하이넨은 바이나모이넨을 죽이려고 하나 성공못함.
107    부드러움의 단상 ― 접사 댓글:  조회:1482  추천:0  2013-07-06
    20인 사화집 ‘하이퍼시’ 출간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물결   통일신문           ▲ 현역시인 20인의 사화집 ‘하이퍼시(hyperpoetry):시문학사 240쪽 17000원     ©통일신문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변화를 보여주는 현역시인 20인의 사화집 ‘하이퍼시(hyperpoetry):시문학사)’가 출간됐다. 이 사화집은 ‘IT시대를 배경으로 한 현대인들의 복합의식(의식+무의식, 현실+가상현실)을 시로 표출하고 있다. 사화집의 시들은 일상의 사실적 이미지와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미지의 뒤섞임을 통해 기존관념이나 의미를 넘어선 비약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관념에서 해방된 이미지 세계의 밑바탕에는 한국 현대시를 오래 동안 지배해온 관념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저항의식이 깔려있다. 이는 “단선구조의 틀을 다선구조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정적 이미지를 동적 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라는 발간사(편집발행인 김규화 시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화집은 강영은, 고종목, 김규화, 김금아, 김기덕, 김영찬, 김은자, 박이정, 손해일, 송시월, 신규호, 신진, 심상운, 안광태, 위상진, 이선, 이솔, 정연덕, 조명제, 최진연 등의 시인들이 참여해 100편의 시로 엮었다. 사화집 끝부분에 「하이퍼시 개관」(문덕수시인),「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심상운시인)라는 ‘하이퍼시론’이 실려 있어 독자들에게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자생적인 시론인 하이퍼시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와 함께 중견시인 동인지 시현장(詩現場, 발행인 겸 주간 정연덕) 5호도 출간됐다.       부드러움의 단상 ― 접사                                                  오남구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산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 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 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 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겹쳐 그리기 기법 - ‘다시점’, ‘다초점’   Ⅱ 하이퍼 시의 개념과 정의     1965년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서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그는 이 조직체들이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는 하이퍼텍스트이론을 발표함으로써 문서의 열람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링크는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을 뜻한다. 문덕수는 넬슨의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시에 대입하여 새로운 하이퍼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것이 이 시론집에 인용된 문덕수의 의 시론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시론은 이미지의 가지치기를 가능하게 하는 컴퓨터의 링크(link)이론이다. 이 링크(link)시론은 디지털시론에 없는 새로운 시론이다. 심상운은 이런 시론의 개발을 적극수용하고 그 시론을 근간으로 하여 하이퍼시의 시론을 종합하여 구체화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론집은 하이퍼 시론 정립의 중요 자료가 된다. Ⅳ.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 시론집에서 주장하는 ‘다선구조론’은 하이퍼시에서 보여주는 ‘다시점’에만 초점을 맞춘 이론은 아니다. 다선구조론은 시창작 과정을 총체적이며 다각적인 복합 텍스트 이론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나 심상운의 다선구조론이 모든 하이퍼시 이론을 수용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과제로 남을 것 같다. 필자는 시론집에 실린 심상운의 아래 시를 통하여 그의 다선구조의 한 형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   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    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   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    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       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 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線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   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   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전문 정리하고 있다. 이 9가지 조건은 하이퍼시가 어떤 형태의 시를 지향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하이퍼시의 9가지 조건들은 디지털시의 10가지 조건과 맥락을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1,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와 집합적 결합 2, 인지단계의 관념수용 3, 현실의 샘플링과 가상현실 4,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바탕으로 한 사물 이미지의 충돌과 융합 5, 심리적 현상 속의 관념허용 6, 직관을 통한 염사 접사 7, 순수한 가상현실의 증류수 같은 정서와 순수한 현실감각의 지장수 같은 정서 8, 다시점 다감각의 세계지향 9, 독자 참여의 열린 시 지향 10, 동적인 영상의 시 구현   하이퍼시 성립조건의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가상현실의 보여주기, 다시점과 동영상의 이미지, 탈관념 등은 디지털시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와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는 두 가지 조건이 하이퍼텍스트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06    종이하이퍼텍스트와 전자하이퍼텍스트 댓글:  조회:1715  추천:0  2013-07-06
종이하이퍼텍스트와 전자하이퍼텍스트 오남구      1. 하이퍼텍스트의 문학에 관한 전망   다음의 글은  정과리교수의 하이퍼텍스트의 문학에 관한 전망이다.   문자와 동영상(動映像)과 음향이 한데로 겹치는 하이퍼미디어의 문학, 또는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을 유기적 계층구조로 연결한 하이퍼텍스트의 문학이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아직은 전망의 수준에 머물러 있고, 한국의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게다가 그러한 하이퍼미디어, 하이퍼텍스트에 대하여 여전히 ‘문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문학의 ‘文’ 그리고 literature의 ‘letter’는 문학이 ‘언어’ (더 좁혀, 문자)를 중심매체(中心媒體)로 삼는다는 뜻을 포함하고도 있다. 하이퍼미디어에서는 그러한 중심매질(中心媒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 또한 그 자체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의 장 속에 종속하여 있어서,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符號)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이다. 중심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해,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할 수가 있을까? 차라리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정과리, 컴퓨터와 문학, "문학의 새로운 이해" 중에서, 문학과 지성사, 1996년]   다음의 글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하이퍼텍스트의 문학에 관한 전망이다.   디지털 텍스트가 시간과 존재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요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언젠가 엠아이티 스쿨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미디어랩에서는 플라스틱으로 된 전자 종이를 내게 보여 주었어요. 양피지에서 펄프 종이를 거쳐 플라스틱 종이 시대가 오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이퍼텍스트가 결코 전통적인 텍스트를 대체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음악에다 비유하면 전통적인 텍스트는 권위 있는 악보에 바탕을 둔 클래식 음악에 해당하며, 누구나 한 줄 즉흥적으로 써 넣을 수  있는 열린 텍스트인 하이퍼텍스트는 재즈 음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재즈의 즉흥 연주가 클래식의 악보 위주 연주를 대체하지 않는 것처럼, 하이퍼텍스트와 전통적 텍스트 역시 서로 공존(共存)해 갈 것입니다. [시사저널 1996년 12월 4일자, [뉴미디어] "디지털 매체, 책 말살하지 못한다"]   정과리교수는 종이책(전자책의 상대적 개념으로 사용)을 떠난 미디어의 문학을 말하고 있다. 에코(Umberto Eco)는 미래의 신개념의 종이까지 확장하고 있다. 미디어는 소통의 모든 매체를 망라하는 개념이다. 그들은 소통의 도구로서 아주 기본적인 미디어의 하나인 기호, 즉 언어가 표현하는 하이퍼텍스트를 간과해 버린 듯이 보인다. 확장된 개념의 하이퍼텍스트 방법의 문학,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문학(하이퍼시)은 불가능한 것인가?     2.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   다음의 글은  '하이퍼택스트 지향의 동인지' 대담( 월간『시문학』4월호, 2008년 )에 붙이고 있는 문덕수시인의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이다.   종이 위에 쓴 하이퍼텍스트와 인터넷이나 TV 모니터에 비친 하이퍼텍스트(전자 하이퍼텍스트)는 원리 면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으나, 일단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터넷이나 TV 화면의 세계를 가상공간(假想空間)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사이버 세계 또는 ‘버추얼’(virtual) 세계라고도 말합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이 버추얼세계에서 결합되는 이미지, 텍스트, 음성이 합성된 네트워크를 말합니다.   (1)종이 위에 글자로 씌어진 시의 언어는 버추얼화(virtual化)된 언어라고 합니다. 흔히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를 ‘가상현실’이라고 번역합니다만, 종이에 씌어진 시의 언어도 버추얼 리얼리티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원을 산책하다가 미끈하게 잘 성장한 적송 소나무를 보고, 그것을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마음속에 떠올린다고 가정합시다. 이것은 분명히 ‘기억’입니다만, ‘기억’이라고 해도 좋고, ‘회상’이라고 해도 좋고, ‘재생(再生) 이미지’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또 소나무가 아닌 산수유꽃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쨌든, 소나무나 산수유꽃은 언어화(기호화) 하여 기억해 둔 것을 다시 상상하여 떠올린 것입니다. 시인은 언어화 하여 기억해 둔 이러한 여러 가지 자원을 소재로 하여 시작품을 쓰고 있음은 이미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고, 또 늘 경험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기억해 낸 ‘소나무’나 ‘산수유꽃’은 어제 공원이나 길가에서 보고 인식한 그대로의 소나무나 산수유꽃이 아니라, 즉 실재(實在)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그것을 의식 속에 대리해서 떠올려 나타내는 이미지이거나(이때의 이미지를 철학에서는 表象 representation이라고도 합니다.) 가상현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현실이 소멸된 이미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심상(image)라고 말하지요. 심상은 현실에 있는 사물의 모습 그대로라고(즉 사물 자체) 할 수 없으나, 그 사물을 가리키는 어떤 관련성은 있습니다. 대상에 관련되는 사실을 가리키는 성질을 ‘지향성’이라고 하고, 지향성이 가리키는 바깥의 대상을 지향대상(指向對象, referent)이라고 합니다. 시는 언어예술이면서도 언어를 넘어선다고 하는 주장(문덕수 지음 『오늘의 詩作法』, 시문학사, 2004)도 언어가 가지는 지향대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한 것입니다.   둘째, 기억해 둔 언어기호를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끄집어내어 되풀이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끄집어내어 되풀이할 때마다 언어기호가 가지는 법칙에 따라서 조금 다르게 현세화(顯勢化) 또는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소나무나 산수유꽃이라는 사물이 언어에 잠세된 모양(潛勢態라고도 함)으로 그것의 원래 지위를 바꾸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잠세태로 전위(轉位)하는 것인데, 이것을 언어의 버추얼화(化)라고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다면 인터넷이나 TV 등의 IT기기가 탄생되기 이전에 이미 언어 자체에도 버추얼화의 성질이 있었다고 보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상(李箱)의 시나, 60년대 시집 『선․공간』(문덕수 지음, 성문각, 1966)의 수록 작품을 하이퍼텍스트 시의 남상이나 선구작(오남구 시인이 이상옥과의 대담에서 문덕수의 시를 하이퍼텍스트의 선구작으로 거론함.)으로 거론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언어의 이러한 버추얼 기능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2)그런데, 문제는 예상하는 만큼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령 “작난감 신부에게 내가 바늘을 주면 작난감 신부는 아무것이나 막 찌른다”(이상, 「I WED A TOY BRIDE」의 2)의 경우, “작난감신부”는 생명이 없는 작난감이므로 ‘찌르는 현실적 동작’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가상세계에는 얼마든지 가능한 동작입니다. “白紙 위에 한 줄기 鐵路가 깔려 있다”(이상,「距離」)의 경우에도,‘백지’(白紙)라는 언어화된 세계가 있고(즉 버추얼화된 언어가 있고), 다시 그 ‘백지 위에 깔려 있는 철로’라는, 버추얼 세계에서만 가능한 이미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백지 위에 깔려 있는 철로’라는 언어 기호를 그대로 한꺼번에 기억한 단일한 의미 체험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시나, 그 후의 이 계열의 실험시는 모두 이와 같이 이중(二重)의 버추얼화한 현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버추얼화가 겹쳐 있는 복합적 특성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3)컴퓨터에서는 입력 때 이미지, 문자, 소리(음성) 등이 모두 이진법(二進法:0,1)이나 화소(畵素) 인공기호(컴퓨터 언어)로 바뀌게 되고, 출력시에는 화상, 언어, 음성이 합성되어 다시 ‘자연기호’로 바뀌어 화면(모니터)에 나타나게 됩니다. 자연기호로 바뀌게 된다고 했지만, 지향대상(즉 사물), 언어, 음성 등을 다시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변화를 기호의 ‘시뮬레이션’(simulation)이라고 합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나 사물, 어느 곳에도 볼 수 없는 인간의 얼굴, 누가 지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이야기나 음성 등을 마음대로 합성하여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컴퓨터의 공간 안에서 컴퓨터 언어로 전위(轉位)되고 합성되어, 그 인공기호로 다시 시청자가 시청할 수 있는 현실세계로 시뮬레이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컴퓨터라는 버추얼세계의 원리입니다.   컴퓨터의 인공언어(이진법과 화소 등)가 합성해서 만들어내는 이러한 버추얼 리얼리티(가상현실)의 원리는 시쓰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사(示唆)를 던져줍니다. 그것은 교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원고지 위에 우리가 쓰는 언어기호에도 이러한 버추얼 리얼리티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 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 줍니다.   물론 디지털 기술에 의해서 인공언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컴퓨터의 인공언어(인공기호)가 형성한 커뮤니케이션 공간을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電腦空間. 컴퓨터의 네트워크로 맺어진 가상세계)라고 말한다는 것은 여러분들께서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의미세계가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가를, 그 변용의 여러 가지 방법을 안다는 것은, 그대로 종이 위에 쓰는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에 의한 컴퓨터 공간에서의 의미 변용에는 ‘인터페이스’(interface:화면의 ‘접촉면’을 의미하나, 특히 유서(user)가 직접 접촉하는 면을 의미함), ‘인터랙티비티’(interactivity:쌍방향 대화 또는 상호작용성), 그리고 여기서 화제가 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 등 여러 가지 의미 변용의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시급한 ‘하이퍼텍스트’의 문제부터 보기로 하겠습니다.   (4)대담 중에는 ‘hypertext’라는 말은 넬슨(Theodore Nelson)의 조어라든지, 또 시쓰기의 방법 면에서 ‘건너뛰기’등의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종이 위에 쓰는 언어기호(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에서도 그 성립이 가능한 사실을 먼저 지적해 둡니다. 이 사실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시집의 부록인 「한국시의 동서남북」(문덕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에 수록, 2007)에도 예시를 들어 설명되어 있습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①내 귀 속으로 한 새가 검불을 물어나르듯 종일 소리를 물어다 나르고 ②나는 것을 못견뎌 하는 소리를 지를 듯 말 듯 ③어머니! 이제 고압선에 옹크리고 있는 새만 보아도 무섭습니다. ― 양준호 「바다.1」 전문   편의상 ③문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①문의 “소리”와 ②문의 “소리”를 맥락이 갈라진 실례로 볼 수 있을 것 같고, ①문의 “새”와 ③문의 “새”도 역시 같은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이퍼텍스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까요. 맥락을 의미하는 ‘컨텍스트’(context)의 어원은 하나의 텍스트와 함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텍스트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마치 나방이 같지?/시궁창에 처넣어진 거야”(초현실주의 문학,예술 시리즈 (3) 『오브제』, p.43)와 같은, 일종 선문답 같은 예도 하이퍼텍스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문덕수,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 월간『시문학』4월호, 2008년 4월]     3, 고소영S라인 하이퍼텍스트   긴 인용문을 들었다. 필자가 하이퍼텍스트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의 무한한 가능성에 놀라고 있다. 상상이 끝없이 이어지는 하이퍼텍스트많큼 인간의 머리 속을 닮은 것은 없는 듯 하다. 실재로 무의식 세계의 초현실의 시와 포스트모던의 언어유희라든가 파편적 시쓰기에서 유사하게 사용된 방법이기도 하다.  다음의 글은 필자의 ‘하이퍼텍스트 문장 강의’ 내용이다.   이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 은 실재로 낯설지 않다. 단지 하이퍼텍스트로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오늘의 미디어문화 특성의 하나로서 세태를 잘 풍자하고 언어유희 하는 ‘고소영S라인’은 하이퍼텍스트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1)하이퍼텍스트의 문장 구성은 마디, 링크, 경로로써 이루어진다. 예문의 ‘고 소 영 S라인’으로 설명하면 ‘고’ , ‘소’ , ‘영’ , ‘S라인’ 4개의 소리 ‘마디’가 있다. 원래 이 말은 인기 탤런트 고소영의 몸 S라인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말을 유전공학에서처럼 난자에서 원래의 염색체를 빼어내고 다른 염색체를 집어넣듯 원래의 의미를 빼어낸다. 즉 해체한다. 그리고 다른 의미를 다시 집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방법이 하이퍼텍스트의 ‘링크’로 보면 된다. 즉 ‘고’ 라는 소리에 ‘고려대 인맥’ 이란 내용을 링크(연결)시켜 놓고 ‘소’ 라는 소리에 ‘소망교회 인맥’ 이란 내용을 링크시켜 놓고 ‘영’ 이란 소리에 ‘영남 인맥’ 이란 내용을 링크시켜 놓고 ‘S라인’ 이란 소리에 ‘서울시 인맥’ 이란 내용을 링크시켜 놓는다. 그리고 나서 “고 소영 S라인 아는 사람?” 하고 언어유희(언어게임?)가 시작된다.   좌중은 ‘고소영 S라인’ 이란 말을 놓고 수수께끼를 풀듯 각기 ‘고’ 와 ‘소’ 와 ‘영’ 과 ‘S라인’ 이란 소리마디에서 상상할 수 있는 의미를 찾는다. ‘고’ 소리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무수히 많다. 그래서 각 각의 소리마디에 연결해서 상상할 수 있는 의미는 너무 많아서 미로의 여행이 된다. 하이퍼텍스트의 ‘경로’는 이런 미로의 여행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기에는 많은 경로가 탄생하고 미지의 흥분이 있다. 이때 미로에 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청문회' 등  숨겨 논 링크의 힌트를 주고 분위기를 잡고 원하는 경로로 유도한다. 인맥 에는 청문회가 링크되어 있고 다시 청문회에 세태를 풍자하는 말들이 링크되어 있다. 많은 땅에 대한 질문에 "투기는 하지 않고 땅을 사랑했노라", 골프회원권 두 개에 대한 질문에 "싸구려입니다" 등의 많은 말들이 링크되어 있다. 청문회를 듣고 있는 사람들, 서민 대중은 소외와 이질감과 자괴감으로 벼랑에  내몰리고 이를 카타르시스하기 위해서 하이퍼텍스트의 언어유희를 하게 된다.      (2)이상은 하이퍼텍스트 문장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히 단편적인 일면인 포스트모던 한 언어유희를 실례로 든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마디와 링크 그리고 하이퍼/hyper 경로를 갖는 하이퍼텍스트는 상상의 미로에서 경로를 찾아가며 즐기는 언어게임에서 보듯이 기존의 텍스트(아날로그)와는 상대적으로 많은 차이를 나타낸다(「하이퍼텍스트시와 디카시 대담. 2008. 시문학 3월호」참조). 대담에서 상상의 경로를 우주의 별자리를 이어가는 것에 비유했으며 먼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경로로 비유하여 말한 바 있다.     링크와 경로는 포스트모던의 종점에서 나타난 것으로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미 기호는 ‘고소영S라인’의 언어유희와 같은 형식으로 의미가 탄생된 것이다. 언어는 실재 사물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기표에 기의가 링크(약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던 것이 문장에서 의미(관념)가 연결됨으로써 인과 등의 선조적 구성을 가지게 된다.  기존의 텍스트를 해체하고 다시 의미를 집어넣은 ‘고소영S라인’ 하이퍼텍스트는 요즘의 세태를 풍자하며 대중이 카타르시스를 하고 있다. 현대 미디어 문화의 하나인 하이퍼텍스트는 새로운 시론으로 실용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105    하이퍼시 창작기법 연구 댓글:  조회:1809  추천:0  2013-07-01
하이퍼시 창작기법 연구 -회화적 요소를 중심으로 이선 Ⅰ. 서론 1. 하이퍼시의 정의 ‘하이퍼시란 무엇인가?’거부하면서도 하이퍼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하이퍼시는 기존의 시와 어떤 변별력을 갖는지 아날로그 시인들은 증명해보라고 한다. 본 논문은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연구하여 새로운 실험시의 모습을 밝혀 보려고 한다. ‘하이퍼텍스트 문학’(Hypertext literature)은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드 넬슨(Ted Nelson)이 만든 말이다. ‘하이퍼시’(Yyper Poety)는 조지 P. 랜도(George P. Landow)의『하이퍼텍스트』라는 책에 쓰였다. 랜도가 처음 사용한 말일 것이다. 이 마을 한국시단에 처음 도입해서 쓴 사람은 문덕수 시인과 하이퍼시 동인들(심상운, 김규화, 오남구)이라고 생각한다.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서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한다. 하이퍼시는 하이퍼텍스트의 일종이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의 link(연결)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링크는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의 큰 네트워크로 연결시킨다. 링크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의‘연결 편집기’라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하이퍼 시인은 머릿속에‘연결 편집기’기능을 가지고 결합과 삭제, 교환, 편집을 자유자재로 하여야 한다. 종이 위나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서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것처럼, ‘하이퍼시’도 가상현실을 재현하여 시를 제작한다. 모든 문예사조는 작품이 선행하고, 작품 뒤에 이론이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하이퍼시는 시론이 먼저 주장되고 시가 후속하고 있다. 심상운과 김규화, 작고시인 오남구는‘하이퍼시 동인’(심상운, 김규화, 오남구)을 결성하여 한국시단에 하이퍼시를 소개하고, 하이퍼시 확산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렇게 하는 동안, 이론이 작품 창작에 앞서고, 작품이 후속하게 된 것이다. 2. 하이퍼시 창작기법 시는 이미지를 기본으로 하는 표현예술이다. 이미지는 사물성과 회화성을 추구하며 관념을 배척한다. 영국의 비평가 시드니(Sir Philip Sidney, 1554-1586)는‘시를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가르치고 즐겁게 할 목적을 가진 “말하는 그림”(speaking picture)이다.’라고 하였다. 시에서의 회화성은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으로 감각화하여 객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본 논문은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밝혀 하이퍼시와 일반시의 차별화된 분류 기점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 논문에서는 널리 알려진 미술의 회화 기법을 차용하여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7가지로 정의하였다. 첫째, 정물화 기법- ‘탈관념’ 둘째, 겹쳐 그리기 기법- ‘다시점’‘다초점’ 셋째, 움직이는 그림 기법- ‘상상력의 이동’ 넷째, 옴니버스 기법- ‘낯설게하기’ 다섯째, 기호시 기법- ‘무의미’ 여섯째, 모자이크 기법- ‘이미지 결합’ 일곱째, 추상화(구성) 기법- ‘시스템(디자인) 바꾸기’ 본 논문에서 소개하는 7가지 하이퍼시 창작기법은 예시된 시 작품을 통하여 다음 장에서 그 타당성을 증명하려 한다. 하이퍼시는 통합적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한 가지 기법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하이퍼시의 대표성을 수집하여 시의 제목과 내용, 구성요소와 디자인을 분석하여 변별력있는 하이퍼시 성립조건을 제시하려 한다. ∏. 정물화 기법-‘탈관념’ 하이퍼시의 ‘정물화 기법’은 ‘탈관념’의‘보여주기’시다. 사물은 화가의 주관과 관념을 배제하고 ‘존재’할 뿐이다.‘탈관념’시는 설명적이지 않으며 해석적이지 않다. 작가는 냉정한 관찰자 시점이다. 최근의 극 예술영화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독자에게 지시나 명령을 하지 않는다. 작가의‘의도성’이 배제된 만큼 독자의 참여공간이 커진다. ‘사물성의 시어들은 사물간의 대립이나 긴장관계를 통하여 새로운 정서나 감수성을 유발하고 언어를 병치시키는 역설적인 비유다.’(시어론, 홍문표, 창조문학사, 2004, 2, pp. 153) 아래 시는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전문이다.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 문덕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전문 위의 시에서 하이퍼시의 ‘정물화 기법’을 살펴보자.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냉정한 관찰자 시점이다. 이 시에는‘사물’만 등장한다. 사람인‘사내’도 철저한 사물로써 유리컵이나 성냥갑, 라이터와 동격으로 배경구실만 한다.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냉정하게 최소한의 요소만 조건적으로 ‘보여주기’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극적인 사건이 ‘침묵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음모처럼 숨어 있다. 최소한의 상황제시를 하면서 시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은 작가가 의도한 최소한의 개입이 냉정한 지적 분위기를 준다. 한껏, 독자의 호기심을 부추겨놓고는 짐짓 모르는 척‘시침떼기’다. 이 시는 불안정한‘삼각형’구도를 갖고 있다. 사물에 ‘의식’을 넣어 사물의 감정을 대립시키고 있다. 이 시는 퍼포먼스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사나이의 등’이 ‘노려보고’ 있는 ‘세 유리컵’은 세 사람의 불편한 관계와 거부의 구도다. 이혼서류를 찍기 직전의 풍경일까? 마약 밀거래가 이루어지는 흥정과 배반의 현장일까?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위의 시는 문덕수가 하이퍼시에서 강조하는‘탈관념’을 그 방법론으로 하고 있다. 심상운이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으로 제시한 ‘제작성’과 ‘사건’조건도함의하고 있다. 또한 작가의 의도성을 최소화하여 제한하였으므로 하이퍼시의 최대 장점인‘독자 중심성’(『하이퍼텍스트』, 조지 P. 란도, 김익현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09, 2. pp. 295)을 강력하게 확보하고 있다. Ⅲ. 겹쳐 그리기 기법-‘다시점’‘다초점’ ‘겹쳐 그리기 기법’은 피카소의 그림 과 같은 시 창작 기법이다. 사람의, 앞, 뒤, 옆을 한 평면 위에 그린다. 피카소는‘다시점’,‘다초점’그림을 그렸다. 점선으로 눈 표시를 하여 여러 방의 성행위를 훔쳐보는‘엿보기’그림도 있다. 시에서 여러 관점이 동시에 진행되거나 여러 개의 화자가 등장하거나 묘사와 진술, 대사가 혼합되기도 한다. ‘겹쳐 그리기 기법’의 시는 건축물의 투시도나 단면도처럼 양방향성과 쌍방향성을 추구한다.‘다시점’과 ‘다초점’하이퍼시는 보이는 사실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사실을 한 화면에 한꺼번에 펼쳐 보여준다. '겹쳐 그리기 기법‘은 ‘외면 겹쳐 그리기’와 ‘내면의 겹쳐 그리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음은 오남구의 시「부드러움의 단상」전문이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산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로운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 오남구,「부드러움의 단상」전문 오남구의 ‘비’는 아날로그 시대의 ‘슬픔’과 ‘이별’의 대명사인 관념의 비가 아니다. ‘비’를 여러 방향, 여러 각도에서 절개하고 분류하여 한 화면에 펼쳐 보이고 있다.‘신호등이 켜진’ 거리에서 아주 짧은 찰라의 순간 직관한 ‘비’를 여러 방향에서 관찰하였다. 내면의 눈과 피부로 접촉한 비다.‘겹쳐 그리기 기법’으로 그린 하이퍼 그림이다. 위의 시는 심상운이 ‘다선구조론’에서 주장한 ‘다시점’과 ‘다초점’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갖고 있다. Ⅳ. 움직이는 그림 기법-‘상상력의 이동’ ‘움직이는 그림 기법’은 조지 P. 랜도(George P. Landow)가 말하는‘움직이는 텍스트’와는 다른 개념이다.(『하이퍼텍스트』, 조지 P. 랜도, 커뮤니케이션북스, PP. 137-143) 하이퍼시는‘움직이는 디지털 그림’이다. ‘움직이는 그림 기법’의 하이퍼시는 화면이 선명하고 장면 전환이 빠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으로 공감각적 운동 이미지를 만든다. 블레이크는 “상상은 영혼의 감각이다”라고 하였다. 시에서의 새로운 상상력은 새로운 철학이다.‘하이퍼시는 합성과 분리, 삽입이 가능하다. 상상력의‘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져 새로운 움직이는 여러 개의 이미저리(imagery)를 만든다. 아래 시는 김규화의 대표시「한강을 읽다」전문이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 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 김규화, 「한강을 읽다」전문 김규화의 시는‘어머니’라는 보통명사를 특별한 그림으로 다시 그렸다.‘한강’이 ‘거꾸로 이젤’을 들고 순행적인 시간의 시점을 거꾸로 돌려 ‘반시계 방향’으로 진입하며 시에 감각적인 미의식을 준다. 아날로그 시가 시인의 관점에서 시에 접근했다면 이 시는 사물, 즉 피사체의 관점에서 관찰한다.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공간이동을 하여‘아파트- 하늘- 구름- 어머니- 돛단배- 새’로 그림의 화면이 바뀐다.‘부우우, 출렁, 올랑촐랑’등의 의태어는 시에 운동감을 준다. 사물에 운동성을 주며 장면전환을 한다.‘움직이는 그림’을 그린다. 고정성과 획일성에서 벗어난 시어들은 정서환기를 시킨다. 사실적인 표현과 정서적인 표현이 아우러져 심상에 한 폭의 그림을 그린다. 수채화의 여백처럼 시적 여운을 길게 남긴다. 문덕수는 ‘심상의 중요한 기능은 정서환기를 하는 것’(『시론』, 문덕수, 시문학사, 2002, 9, PP. 238)이라고 하였다. 김규화의 「한강을 읽다」는 파스텔톤의 ‘움직이는 풍경화’다.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공간이동으로 여러 번 출렁거림을 주어 ‘풍경화’에 ‘움직임’을 준다. 장면전환과 운동성은 이 시를 입체시로 만들었다. ‘한강, 구름, 돛단배, 물새’라는 사물을 공간이동하여 감각적인 붓으로 사용한다. 김규화는 독창적인 새로운 하이퍼시 창작기법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Ⅴ. 옴니버스 기법-‘낯설게하기’ 옴니버스기법은 여러개의 이야기를 배치하여 시의 새로운 구조를 선보이는 하이퍼시창작기법이다. ‘낯설게 하기’는 로만야콥슨 등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사물,언어, 사건을 충돌하여 낯선구조와 낯선의미의 새로운 감각과 미의식을 추구하였던 이론이다. 옴니버스 기법은 제목과 내용, 연과 연의 연결고리를 끊어 낯설게 하기를 최대화하였다. 낯설게 하기를 최대화하면 구조의 새로움, 의미의 새로움, 감각의 새로움이라는 하퍼시성립조건을 충족시킬수 있다. 아래는 심상운 맨살에 링크하기 전문이다.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 심상운,「맨살에 링크하기」전문 이 시는 제목과 내용, 구성이 신선하고 하이퍼적 감각을 갖고 있다. 특히 4연은 완전 독립된 ( )를 사용하여 독자의 참여를 유도한다. 조지 P. 랜도(George P. Landow)는 『하이퍼텍스트』(1992)라는 그의 저서에서 인터넷의 블로그를 인용하며 ‘저자와 편집자 역할을 하는 독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조지 p. 랜도, 하이퍼텍스트, 김익현 역, 2009, 542쪽) 작가와 독자가 50%씩 시를 쓴다. 필자도 작가의 제안대로 ( ) 안을 메워 협동작업을 시도해 본다. (아가씨 입술과 이빨 사이에 끼어/ 신음하는 빨간 사과,/ 하얀 맨살이 아~ 아 몸부림친다) 1, 2, 3, 4연은 각각 다른 사물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독립되어 있지만 서로 링크된다. ‘통조림, 비누, 어항’은 또한 제목인 ‘맨살’과 링크된다.「맨살에 링크하기」는‘맨살’의 선정적 이미지와 ‘링크하기’란 컴퓨터 용어가 낯설게 맞물려 있다.‘옴니버스 기법’【여러가지를 한곳에 모인다는 뜻】은 새로운 하이퍼시 창작기법이다. Ⅵ. 기호 시(詩) 기법-‘무의미’ 소쉬르는 단어를 기표(記表:signifiant)와 기의(記意:signifié)가 결합하여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하는 기호라고 정의하였다. 기표는 사물의 본질이 아닌 형식이다. 가상의 무의미한 문자인 기호는 송신자의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수신자의 수용 태도에 따라서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기표란 단일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의적이고 상징적 의미작용을 하기도 한다. 자연과 사물에 인간이 이름을 붙이기 전, 원래의 자연과 사물은 감정이 없다. 기호 시는 소쉬르의 기호학을 바탕으로 문자를 원래의 무의미한 원상태로 돌려주자는 것이다. 따라서 기호시론은 ‘무의미’와 동일한 개념으로 본다. 문덕수의 하이퍼시론은‘무의미’를 추구한다. 기호의 무의미성을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으로 본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 「( )와 ( ) 사이에」전문이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사이로 빌딩이 자란다 가로수, 긴 괄호[ ] 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덥쳐 (((())))먹어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 )가 화르르, 열린다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는 ― 이선, 「( )와 ( ) 사이에」전문 위의 시는 제목에 ( )라는 기호를 사용하여 새로운 감각을 주고자 하였다. 기호를 기표인 ( )라고 생각해 보자. ( )는 미끄러져 여러 개의 기의로 해석된다. 따라서 ( )라는 기호를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성인 ( )라는 미지수로 보았다. 말이 존재하지 않는 태초에는 포옹과 입맞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 )라고 몸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사물에 이름이 없으므로. 모든 사물과 사건과 상황을 ( )로 인식하였을 것으로 상상하여 본 것이다. ‘사내의 주검’에 달라붙어 ( ) 속 말을 열려고 버둥대는 ‘쇠파리’처럼. 우리는 해석 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현대인이 관계장애와 소통장애를 갖는 것은 ( )라는 기표를 해석하려고 집착하기 때문은 아닐까? ( )라는 기호시를 쓴 것은 하이퍼시의 ‘무의미’성과 다의성을 추구한 것이다. 본래의 사물을 무의미 기표인 ( )로 다시 환원하여 본 것이다. 문덕수의 하이퍼 시론인 언어의‘무의미’를 추구하여 하이퍼시의 창작기법을 새롭게 찾아보려 시도한 방법론이다. 과연 해석되지 않는 시가 있을까? 아이러니 하다. Ⅶ. 모자이크 기법-‘이미지 결합’ ‘모자이크 기법’[여러가지 빛갈의 나무,유리,조개껍질, 돌따위 등을 박거나 붙혀서 만든 도안한 장식물]은 색의 스펙트럼과 같은 초현실주의적 시 창작기법이다.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작가인 Breton과 Aragon의 시는‘의식과 무의식의 교차, 자동기술법, 비논리적, 비합리적, 우연적, 임의적, 본능적인 힘에 의존하여 단어와 구조가 자율성을 부여받는다.’(『현대시론』, 김영철 저, 건국대학교출판부, 2009, 8, PP. 340-342) 하이퍼시는 모자이크처럼 단절과 결합이 연속적으로 교차한다. 샤갈의 그림처럼‘이미지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닌다. 배열과 구성은 순차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불특정하게 결합한 하이퍼시의‘모자이크 기법’은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우연적인 미술기법과 같다. 무의미 단어들의 충돌과 투척은 그로테스크하고 추상적인 언어그림을 그린다. 아래 시는 양준호의「비상구」전문이다. 바람은 비늘 흔든다 귓속에 파란 새 날아간다 꽃은 피어라 말의 콧등에도 소금은 준비되었을까 뼈들 파도처럼 춤춘다 눈알만 남아 귀만 남은 고무공 뛰어간다 ― 양준호,「비상구」전문 양준호의「비상구」는 의미해석을 하려고 하면 전혀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의미추구의 시가 아니다. 무의미한 ‘단어던지기’나 ‘언어충돌’과 ‘단어’의‘결합’과‘분리’가 만든‘모자이크’이미지다. 이 짧은 시가 주목받는 것은 ‘단어’를 허공중에 흩트려 놓은 것 같다. ‘바람- 비- 파란 새- 꽃- 소금- 뼈- 파도- 눈알만 남은 고무공- 귀만 남은 고무공’은 「비상구」라는 제목과 부조리하게 흩어졌다가도 묘하게 단어들이 결합하여 이미지를 생성한다. 꽉 막힌, 비상구도 없는 곳에서 새처럼 날아보려고 애쓰는 단절과 고독의 현대인. 침묵의 몸부림과 저항이 감지된다. 몸통만 남은 현대인이 ‘고무공’으로 투사된다. 양준호는 무의미 단어들을 결합하고 분리하여 흩뿌림으로써 새로운 ‘모자이크 이미지’의 하이퍼시의 방법론을 제공한다. 한국에 하이퍼 시론이 나오기 훨씬 전인 80년대부터 양준호는 이미 하이퍼시를 써 왔다. Ⅷ. 추상화(구성) 기법-‘시스템(디자인) 바꾸기’ ‘추상화 기법’은 여러 개의 선과 면을 사용하여 새로운 구성과 디자인을 하는 하이퍼시 창작 방법론이다.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추상적이고 현대적 구성의 시 창작법이다. 하이퍼시는 이름만 가리면 누구 시인지 모른다는 비난을 듣는다. 조지 랜도가 의심한 것처럼 하이퍼텍스트의 양방향성과 쌍방향성의 열린 지평은‘방향상실’(하이퍼텍스트, 조지 P. 랜도, 커뮤니케이션북스, 2009, 2, pp. 218-225)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하이퍼시가 무의미 단어의 조합이나 단어투척만 추구한다면 비개성적인 작품들이 양산될 수 있다. 하이퍼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시스템의 변화를 시에서 시도한다는 것은 형식과 내용, 디자인, 기법, 표현의 다양한 요소, 즉 시의 구조를 바꾼다는 뜻이다. 필자의 졸시「귓속말하기」전문을 소개한다. 개미가 벌에게 엉덩이를 한방 냅다 쏘였어요 이를 악 물고, 입술이 노랗게 물들도록, 호박꽃잎 물어뜯는데 ( “꿀맛 좋니?”- 귓속말로 ) 오랫동안 기우뚱한 안방 벽이 너덜너덜 갈라지고 금이 간, 건넌방 벽에게 묻는다 ( “나한테 너무 오래 기대고 살지 않았니?”- 귓속말로) 숫모기만 보면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애~앵 앵앵, 암모기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끈질긴 구애 여자 뒤통수치기 여왕모기, 그녀 (질투도 힘이니? - 귓속말로) 초생달이 허공에 밀려 헛바퀴 돌아, 돌아 거꾸로 매달려, 그믐달로 서 있네요 ( “하늘이 노랗게 보이니?” - 귓속말로) 나뭇잎은 하늘을 한 입 베어 물고 파랗게 멍든 입술로 벙긋거린다 ( “후욱 불어 버릴까?”- 귓속말로) 보슬비, 속눈썹에 내려앉아 소곤댄다 ( “슬픔도 키스처럼 부드럽지 않니?”- 귓속말로) ― 이선, 「귓속말하기/-때, 장소, 시간, 그리고??」전문 위의 시는 몬드리안의 추상화 구성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디자인을 새롭게 구성하려하였다. ( ) 속에 반복적인 ‘귓속말로’라는 똑같은 후렴구를 넣어 보라색을 주조로 한 그림을 그렸다. 소통이 되는 의미의 시를 쓰되, 새로운 언어 디자인을 하여 ‘추상(구성)화 기법’으로 ‘시스템(디자인) 바꾸기’를 실험하였다. 「귓속말하기」에 ‘-때, 장소, 시간, 그리고??’라는 부제를 붙인 것은 각각의 사건의‘현장성’을 강조한 것이다. 프로이드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서 승화하여 치유하는 과정을 문학창작 과정으로 보았다. 누구나 인생에서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뒤통수를 맞은, 억울하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한 당혹스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잔혹성과 비열한 속성을 추적하여 진정성을 드러내고 싶었다. Ⅸ. 결론 본 논문은 하이퍼시의 구성요소와 시창작 기법을 연규하여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을 미술의 회화에서 차용한 것은 미술의 회화기법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객관화되었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일곱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정물화 기법- ‘탈관념’ 둘째, 겹쳐 그리기 기법- ‘다시점’‘다초점’ 셋째, 움직이는 그림 기법- ‘상상력의 이동’ 넷째, 옴니버스 기법- ‘낯설게하기’ 다섯째, 기호시 기법- ‘무의미’ 여섯째, 모자이크 기법- ‘이미지 결합’ 일곱째, 추상화(구성) 기법- ‘시스템(디자인) 바꾸기’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7가지로 정리하여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하이퍼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하이퍼시란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대답이 되기를 바란다. 본 기법들은 필자가 실제로 하이퍼시를 쓰면서 체험한 하이퍼시의 구조와 조건, 하이퍼시의 구성요소들이다.“이 시가 과연 하이퍼시가 될수 있을까?”자신에게 무수히 던진 질문들에 대한 결론이다. 그러나 하이퍼시는 공감각적 이미지와 시의 총체적인 기법들이 합성된 다양하고 다각적인 현대의 새로운 시 창작방법론이다. 한 가지 기법으로 간략하게 정의하여 분석하려면 무리가 따른다. 여러 가지 기법의 혼합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감각의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연구하는 것은 의의있는 일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소개한 일곱 가지 하이퍼시 창작기법이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하이퍼시를 객관적으로 모두 언급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하이퍼시는 내용, 기법, 형태, 디자인 등 여러 방향에서 다각적으로 연구하여야 한다. 하이퍼시는 조지 P. 랜도가 그의 저서 『하이퍼텍스트』에서 처음 사용한 문학이론을 문덕수가 한국시단에 처음 도입하였다. 심상운, 김규화, 오남구는 을 결성하여 실험적으로 하이퍼시를 발표하였다. 많은 토론과 대담, 연구를 통하여 하이퍼시 확산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앞으로 하이퍼시는 시인과 비평가들의 많은 공격적 질문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작품으로 하이퍼시를 증명하도록 치열하게 정진하여야 한다. 훌륭한 하이퍼시 작품이 많이 창작되어 새로운 문예사조로 인정받고 문학사에 남는 기록될 날이 곧 올 것이라 믿는다.
104    유치환<수>(首)는 수(秀)작이다 댓글:  조회:2435  추천:0  2012-09-19
한국제5회 청마문학연구상수상작 청마 유치환의 시 (首)는 수(秀)작이다 최룡관 들어가는 말 필자가 청마유치환시를 제일 처음으로 접촉한것은 지난세기 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후의 일이다. 한국에서 우리 작가협회에 많은 책을 보내왔는데 그속에는 홍윤기선생이 집필한 이란 책도 있었다. 거기에 실린 청마유치환의 시 이 인상이 깊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며 노스탈쟈의 손수건이며 하는 시구들과 처음으로 표대 끝에 기발을 단 이가 누구인가고 질문하는 종결구는 필자를 진동시키고도 남은이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의 리상규씨가 찍어낸 제6집에서 유치환의 시 룰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6집에 실린 시가 죄다 친일시라는 모자를 씌운 작품들이였다. 를 찬찬히 읽어보고 필자는 어리둥절하였다. 이 시는 친일시 같지 않는데 아니, 친일시가 아닌데 왜 친일시라고 했을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느날 친일문학을 연구편집한 연변의 최삼룡선배님과 이런 말을 했다. 최형은 한국에서 친일시로 이미 정평이 난지가 오래다는것이였다. 그후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필자의 졸견도 한번 내놓을 필요가 있지 않을가 하는 념원을 품었댔는데 오늘 기회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왜 필자는 청마의 시 를 친일시로 보지 않는가를 아래에 설명해 보려한다. 1. 시 의 층차 시 의 전문을 먼저 읽어보자. 首 유치환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너희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던 무뢰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시 는 현대적인 기법으로 쓴 시이다. 이 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가고 생각하니 폴 발레리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 242쪽. 민음사출판)현대시란 이런것이 아닐가. 외연속에 외연과 다른 내연이 잠재해 있는 시가 현대시일것이다. 시 가 말하는 외연속에는 어떤 내함이 잠재해있을가? 이미지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가? 이러한것을 알자면 시를 구성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분석을 해보아야 할것이다 . 청마의 시 는 세 개층차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첫층차는 처음부터 까지이고, 두 번째층차는 로부터 까지이고, 로부터 마지막까지 세 번째층차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2. 첫번째층차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상기한 것이 의 첫층차로서 시의 서두라고 할수 있겠다. 청마는 시적대상의 환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시적대상을 어떤한 것이란것을 떠올리고 있다. 어떤 환경인가? 다. 시인은 점층적인 방법으로 큰 것으로부너 작은 것에로 환경을 이동시킨다. 12월의 북만으로부터 흑룡강, 흑룡강으로부터 다시 가성네거리로 초첨을 맞추고있다. 하는데 12월의 북만은 눈의 계절이여서 눈이 안올 리가 없다. 그런데 왜 눈도 안오고 하였겠는가? 필경 눈은 왔겠는데 시인은 왜 눈도 안오고 하였는가? 북만에 눈이 안 왔다는 것은 북만이 자연의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바로 청마의 의도가 슴배여 있다고 할수 있다. 청마가 북만에 있을 때는 그곳이 일제침략자의 구두발에 짓밟혀 황량한 고장이 되었을 때다. 사람이 살곳이 못되는 고장이다. 그래서 청마는 눈도 오지 않은 곳이라고 했을것이다. 일제가 통치하는 고장은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설정은 일제에 대한 청마의 타매이고 야유이며 조소이다. 로 시적환경을 마무리짓고 있는데 이것은 눈이 와야 할 곳에 눈이 오지 않는 원인을 밝힌 것이라고 할수 있다. 오직 만물에 대한 가혹과 혹독만으로 넘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흑룡강 또는 가성 네거리다. 그러니 하늘도 노여워서 12월이 되었건만 눈도 보내지 않는 고장이다. 이 고장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대답하지 않아도 불보기처럼 뻔하다. 일제침략자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로선이 빚어낸 것이라고 삼척동자라도 말할수 있는 대답이 나오게 된다. 이런 악렬하고 암흑한 고장에서 의 사건은 벌어지고 있다.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비적의 머리 두 개 내결려있는데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서 소년같이 작다. 반쯤 뜬 눈은 저물어가는 차디찬 하늘과 삭북의 산하를 모호하게 바라보는 일이 발생하였다. 당년에 은 누구였던가? 민족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일제와 싸운 사람들이 이였다. 다시 말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항일하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을 잡아 릉지처참을 만들고도 성차지 않아서 머리를 베여 네거리에 높이 걸어놓고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으며 왕도락토에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일제의 만행인 효수였다. 효수자체가 극악무도한 짓인 것이다. 청마는 아주 대담하게 일제의 만행을 시로써 질타하고 있는것이다. 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겠다. 이따위 망년된 짓으로 민중을 억눌러 식민통치를 보호유지하려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는 이런 짓을 하루이틀에 벌린것이 아니라 검푸른 얼굴이 말라서 소년같이 적게 될 때까지 장시간으로 하였다는것이다. 그래서 하느님도 보다못해 노하여 12월의 북만에 눈도 보내주지 않았으리라. 시구는 청마의 마음을 한결 명징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직도 반이라도 눈을 뜨고 있다는 자체가 이라는 죄명에 대한 불복과 원한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세상에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는것이다. 그야말로 이다. 여기서 고 하였는데 흑룡강의 삭북에는 만백성이 우러러보던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이 있었다. 우리의 많은 항일용사들은 쏘베트처럼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면서 민족의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몸을 던져 항일하였던 것은 당년의 현실이였다. 일제의 압박과 착취와 략탈이 없는 사회가 들의 추구였고 리상이였던 것이다. 시인청마유치환은 시 에서 언어의 기능을 변화시켜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는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3. 의 두 번째층차 두 번째 층차를 고찰하기 전에 당년에 청마유치환시인이 어떠한 사상으로 살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두 번째층차의 분석에 유리한 길을 닦아주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서려명박사가 쓴 를 론한 문장에 이런 단락이 있다. 청마는 김좌진의 희생에 대하여 (15쪽) 청마유치환은 김좌진 장군의 희생을 이라고 명백하게 밝히였다. 이 이란 말은 청마의 당년의 사상을 말해준다. 청마유치환이 당년에 항일을 옹호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옥같은 말이라고 아니 할수 없다. 그런데 청마는 두 번째층차를 이렇게 쓰고있다. 너희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이 시구들은 일제침략자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고 중국의 동북까지 강점하고 허세를 부리면서 자신의 악착스러운 정체를 변호하기 위하여 애쓰던 당년의 선전구들과 일맥상통하다. 아마 이 단락의 내용이 있어서 박태일교수가 를 친일시라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왜 이 시에 이런 얼토당토 않는 말을 차용하였는가이다. 을 내세웠던 청마가 이 시구들로 일제의 침략을 변호하거나 효수를 당연지사라고 한 증거가 아닌가 하고 혹자는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대답은 간단하다. 아니다! 이 시구들은 일제침략자가 어떻게 눈을 감고 야웅하는가를 표현한것이다. 중국에 독은 독으로 친다는 속담이 있다. 청마는 독은 독으로 친다는 수법으로 피는 피로 값는다는 수법으로 두 번째 층차를 쓴 것이다. 원쑤의 말로 원쑤의 론리로 원쑤의 악랄함을 백일하에 드러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인정된다. 1련에서 12월에도 북만에 눈이 오지 않았다는 그 원인을 사회적인 각도에서 다시 한번 해명해 본 것이기도 하다. 바로 네놈들이 효수까지 하면서 이런 지껄이를 하고있으니 12월이 되어도 눈이 오지 않는 다고 증언을 하고 있는것이다. 앞에서는 자연환경을 빌어서, 효수라는 문명치 못한 수작을 부리는 사실을 빌어서 원인을 까밝히였다면, 여기서는 일제침략자들이 괴까리는 유론으로 한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는 북만이 되었다고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억지공사인가? 아니다. 청마는 일제침략자의 이런 황당한 유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이라고 밝히고 있다. 시를 보면 을 그리는 내용이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효수이고 다른 한가지는 일제침략자가 자신의 통치를 변호하는 제2층차의 말이다. 제2층차의 말이 효수를 비호하고 있는 일제의 더러운 낯짝을 드러낸것이며 식민통지를 합법화하려는 본질을 드러낸것이다. 청마는 일제의 말을 빌어 일제의 뺨을 치며, 일제의 허울을 효수로써 벗겨버리여 만천하에 그 죄악을 밝아놓고 질책하고 있다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언어표현속에 시인의 예리한 마음이 숨겨져있다고 하겠다. 이런것을 두고 (문심조룡 557쪽. 연변인민출판사.)라고 하였으리라. 사실 시에서 이런 수법을 쓴다는것은 용의한 일이 아니다. 독을 독으로 치는 수법은 일상적으로 말하면 어떤 비평문장이나 서사작품에서 쓰는 수법이지 정서를 읊는 시의 수법이 아니다. 청마는 간이 크게 다른 장르에서 쓰는 수법을 운문인 시에 도입하였다. 이런 수법을 쓴 시는 찾아보기 힘든 흔치 않는 사례이다. 언어마다 시구마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풍자와 조소의 운치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제2층차라 하겠다. 중국의 에 이런 말이 있다. (문심조룡 389쪽. ) 제2층차의 시구들은 왜놈들 말이였지만 표현으로써 청마의 가 되게 한것이다. 이 층차는 청마유치환시인의 시적재능이 발휘된것으로서 시의 을 획득시키며 시인 풍격의 을 현시하고 있으며, 학식이 있고 하면서도 신랄하다는 결론을 우리들에게 시사한다. 여기서 청마는 풍자와 조소로, 독은 독으로 친다는 수법으로 한 층차를 구사함으로써 시의 기이함과 신선도를 높이고 있다겠다. 4.의 세 번째 층차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던 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이것이 세 번째 층차이다. 이 마지막 층차를 따져보면 두가지 내용으로 나뉘여져 있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여기까지 하나의 내용이라고 하겠다. 풍요로운 거리가 아닌 각박한 거리를 지나가면서 시적 자아는 생명의 위험함과 그 결의를 깨닫는다. 끝내 다스릴수 없던 무뢰한 넋을 청마는 눈을 감으라고 한다. 눈을 뜨고 죽은 자를 눈감기는 일은 사랑이 없으면 할수 있는 일이 아니고 친근하지 못하거나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아니 하는 일이다. 눈을 감으란것은 효수된 자에 대한 련민과 동정과 사랑을 보여주는것이며, 효수된 자에 대한 명복을 비는 주정토로이며 호소이다. 여기서 시인의 애증이 더욱 분명하고도 명랑하게 드러난다. 아아 불모한 사변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청마는 아아 탄식하면서 이라고 현실을 질타하고 있다. 불모한 사변의 풍경, 이 시구는 전반시의 핵심이고 주제이며 당년의 사회에 대한 청마의 개괄이며 효수에 대한 청마의 태도이다. 청마는 도리도 시비도 통하지 않는 불모지라고 당년을 못밖는다. 그러니 어찌 12월이 온들 눈이 내릴 수 있었으랴. 하늘이여 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시인이 웨친 마지막 시구이다, 이 시구는 청마의 마지막 바람을 보여준다. 속에서는 그어떤 구도도 구할수 없으므로 시인은 자기의 소원을 하늘에 대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내려달라고 빈다. 눈이 내리면 겨울도 겨울 다와지고, 12월도 12월 다와지고, 북만도 북만 다와지고, 가성네거리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될것이다. 눈이 내리면 그 의 머리도 눈에 파묻치게 되어 다른것으로도 보일수 있는것이고, 눈이 내리는 틈을 타서 누군가가 효수를 없애버릴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이 마지막 한마디 시구는 말그대로 천만냥이 싸다. 효수당한 자에 대한 청마의 련민과 사랑의 감정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각인시켰다고 하겠다. 하는 호곡소리를 가슴에 담노라면 를 평할 때 서려명 비평가가 청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 또다시 떠오른다. 유치환은 1940년대 초기의 할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바가 있다. ( 6쪽) (동상 10쪽) 청마유치환의 이런 말씀들은 당년의 그의 심정의 고백으로써 청마는 극한의 상황에서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무주의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오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부정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월인데도 눈이 오지 않는 북만, 효수를 하고있는 가성네거리, 식민지유설로 백성을 유린하는 세상, 량심이 있는 지성인이라면 그 누구인들 허무속에서 몸부림치지 않으랴. 일제치하의 백색공포속에서 허무를 초극할수 없는 청마, 그래서 를 부르짖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청마가 아니였으랴. 시인은 허무에 빠졌을 때 자연스럽게 고독하게 되고 증오하게 되며 분노하게 되고 심장으로 부르짖게 된다. 그 부르짖음을 가슴속으로부터 토해놓은 것이 시 가 아니랴! 나오는 말 이 백번지당한 말은 얀 무카로브스키가 에서 한 말이다. ( 44쪽) 시적언어의 기능으로 하여 시언어는 일상어와 다르다. 시언어는 일상어보다 다른 내포를 가지고 있다. 즉 시인은 일상어로 시를 쓰지만 일상어속에다 다른 함의를 부여하게 되는것이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하여 시인은 언어를 재구성함으로써 다른 함의를 부여하여 언어를 다시 깨우고 새롭게 하며 그로인하여 시의 새로운 창의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시인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게 되고 언어의 연금사라고 하게 된다. 청마의 시 를 읽을 때 우리는 청마가 쓴 시어의 새로운 함의에 모름지기 류의하여야 한다. 이나 과 같은 반어에 대하여 잘 리해하여야 이 시의 진실한 맛을 볼수있다. 시의 이미지는 어떤 사실을 알려주려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상적일지라도 ) 그런 이미지를 통하여 새로운 깨침을 주려는데 있다. 우리 눈앞으로 흘러가는 시의 이미지 밑바닥에는 언제나 새로운 함의가 용해되여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은 직설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사물에 의탁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통하여 새로운 감수를 받는것이 시의 기쁨인것이다. 청마의 시에서 나 같은 이미지들은 말밖에 말이 있는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에 대한 음미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청마의 시 를 헛 읽게 되며 시의 진미를 감수할 수 없게 될것이다. 독을 독으로 치는 청마의 표현력은 뛰여난 표현력이다. 이 장치를 수용한 청마의 스찔에 대하여 심각하고도 올바른 리해를 가져와야지 텍스트에 나타난 그대로 수용한다면 오독을 초래하게 된다. 수박 겉 핥기를 하지 말고 수박을 깨여서 달콤하고 시원한 맛을 보아야지 타매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총적으로 청마의 시 는 친일로 표현된 시인 것이 아니라 일제침략자에 대한 반발이며 공소이며 단죄이며 이다. 는 친일시가 아니라 는 반일 수작秀作이다. 문화시대 2012.4
103    노벨문학상 수상자 시.1 댓글:  조회:1039  추천:0  201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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