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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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남영전 토템시에 대한 고찰.2 댓글:  조회:1208  추천:13  2009-09-10
남영전토템시의 이미지성과 남영전시인이 토템시를 쓴것은 하나의 장거이다. 중국현대사에서 토템시를 계통적으로 체계적으로 쓴 시인은 없었다. 일부 시인들이 토템에 관한 시들을 좀 쓰기는 하였으나 토템적자각이 없이 썼던것이다. 그들의 시는 선조를 노래하고 선조의 문화를 노래하는것으로 썼을뿐이였다. 한 시인이 하나의 새로운 시령역을 개척하여 쓴다는것은 그 령역에 대한 심각한 연구와 철학적사고가 안받침되여야 하는것으로서 아무나하는 일이 아니다. 황차 토템령역은 원시사회의 문화로써 아무나 접근할수 있는 령역이 아니다. 사학적연구가 따라서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다. 남영전은 바로 이러한 일을 시적으로 해내였다. 그러하기에 쎄맨이 남영전시인을 <<조선족의 아들이며 더우기는 중화민족의 아들>>이라고 평가한것은 결코 과분한 평가가 아니며 명실에 부합되는 평가이다. 시는 하나의 새로운 령역만 개척하면 다 되는 일이 아니다. 시가 시로 되여야 한다. 시가 시로 된다는것은 시적예술이 시에 무르녹아있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미지는 시라는 예술의 근본이며 핵심이라고 하겠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이미지창출에 모를 박고 신선하고 아름답고 충격적인 새로운 이미지를 많이 창출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와 계발을 주었다. 1.신 화 적 이 미 지 신화는 인류의 최초의 문화로서 인류의 뿌리를 증언하는 보물이다. 신화적 이미지를 창출한다는것은 인류의 원초적인 문화의 맥을 잇는 작업이라고 할수 있고, 인류의 뿌리에서 보물을 캐고, 화폭을 창출하는 그 자체가 예술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곳곳에서 신화적화폭이 펼쳐지고있으며 신화적향기가 그윽하게 피여오르고있다. 산 넘어 바다 건너 저 멀리 박쥐의 날개죽지에 숨었다가 아장아장 걸어오는가 고운 얼굴 가리운 얇은 베일 너울너울 어깨를 감싸고 머리우에 팔락이는데 정겹게 방긋 웃으며 흐리마리한 마음의 요람 나무추리에서 흐느적거리네 삼라만상 무게를 잃은 이 순간 산그림자 해솜마냥 부풀고 바다물결 실타래 풀리듯 넘실거리네 돌멩이도 불룩한 가슴 헤치고 젖을 빨듯 으스름 달빛 빨아들이는데 둥글넘적 환하게 부드러운 빛살속에 상상의 푸른 날개 펼쳐지네 <<달>>의 첫두련 달이 떠오르는 경상을 쓴것이다. 우리앞으로 신화같은 아름다운 화폭이 잔잔하고도 부드럽게 흘러지나가고있다. 우리는 이 시구들을 읽으면서 아늑한 환상세계로 빨려들어간다. 달이란 언어 한마디도 없이 달의 이미지를 신화적으로 써놓음으로써 우리는 시를 보고있는것이 아니라 신비하고 아름다운 신화를 읽고있게 된다. 달이 뜨고있는것이 아니라 <<머리우에>> 얇은 베일을 날리는 절세의 미인이 우리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오고있다. 박쥐의 날개밑에 숨었던 아가씨가 상상의 푸른 날개를 저으며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는 모습은 얼마나 황홀한가! <<나무초리에서 흐느적이는>> 절세의 미인을 바라보는 향연과 미인의 향기를 맡는 모든 사물들이 붕 뜬다. 그 무거운 산도 <<해솜마냥 부풀고>> 바다물결도 <<실타래 풀리듯>> 가볍게 설레이고 돌멩이도 가슴을 헤치고 단젖을 빠느라고 여념이 없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이미지를 남영전은 신화적인 색채로 펼쳐주고있다. 남영전신인은 <<달>>에서 아늑한 황홀을 펼쳐주었다면 <<백마>>에서는 가을바람과 같은 시원한 전설적인 이미지를 우리앞에 그려보이고있다. 짙은 안개 헤치고 타래치는 먹장구름 꿰뚫고 아득한 창천에서 달려오는가 눈부신 번개불 번쩍이고 류황내 배인 향기를 휘몰아 쏜살같이 달려온다 칡덩쿨 뻗은 숲을 지나 가시덤불 우거진 거친 들판을 지나 한낮의 흑풍백우 몰아내고 오밤의 검은 장막 열어제치며 지동치듯 달려온다 해빛 안고 달빛 안고 발길 닿는 곳마다 흰 빛이 깨여난다 <<달>>의 신화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녀성의 신화라면 <<백마>>의 신화는 거치르고 날파람이 있는 남성의 신화이다. <<달려온다>>, <<쏜살같이 달려온다>>, <<자동치듯 달려온다>>라고 달려오는 모습을 세 층차로 나누어 표현함으로써 저 요원한 곳에서 지척으로 박근하는 천하무적 백마의 무드로 하여 긴박성과 긴장성을 가지게 되며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안개도, 타래치는 먹장구름도, 칡덩굴숲에 깔린 산도, 가시덤불 우거진 들판도 백마의 전진을 막지 못한다. 백마가 번개불을 번쩍이며 령기를 휘몰아오며 흑풍백우를 몰아치고 오밤의 검은 장막을 활활 열어제끼는데 뉘감히 앞길을 막으며 뉘 감히 하늘에 사무치는 그 기세를 당한다던가. 백마의 회오리치는 발자국마다에서 해빛이 깨여나고 달빛이 깨여나고있음에랴. <<우뢰>>에서도 신화적인 색채가 추호도 그 기세를 눅잦히지 않는다. 남영전시인은 우뢰를 소나기속에서 묘사하는 일상적인 표현을 떠나서 신화적인 방법으로 다루고있다. 대붕과 룡 하늘을 찢고 땅을 쪼갠다 어둑컴컴한 대지 흐린 하늘에 덩지 큰 대붕은 날개를 퍼덕이며 쇠발톱 번쩍인다 당지 큰 룡은 하늘에 치솟아올라 귀청 째듯 포효한다 우뢰의 화살 우뢰의 도끼 우뢰의 돌멩이 창망한 하늘땅을 짓쪼긴다. 시인은 우뢰를 대붕과 룡이 하늘땅을 갈갈이 찢어버리는것으로 표현하고있다. 대붕과 룡은 모두 신화적인 사물이다. <<우뢰>>를 신화적인 사물의 운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의 신화적색채와 의미를 풍만하게 한 력작이다. 하늘과 땅을 찢어버리는 대붕과 룡의 힘은 언어로써는 표현하기 어렵다. 시인의 표현은 너무 핍진하다. 날개를 퍼덕이며 쇠발톱을 번쩍이는 대붕, 구중천에 솟아올라 귀청이 짜개지는 함성을 지르는 룡, 그들의 동작과 웨침은 <<화살>>이고 <<도끼>>이고 <<돌멩>>이다. <<청조 – 오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뜻을 쌀이라 한다면 문장은 불을 때서 지은 밥이고 시는 양조하여 만든 술이다.>> 신화적색채로 씌여진 남영전시인의 <<우뢰>>는 밥인것이아니라 술이다. 술중에서도 독하고도 향기로운 술이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이밖에도 신화적인 이미지를 창출한 시들이 많다. 그의 신화적이미지는 왕왕 시의 서두를 차지하고있다. 신화적인 이미지를 배치하는것은 필자가 보기에도 안성맞춤의 자리인것 같다. 이렇게 하면 독자에게 돌연적인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되여 독자는 느닷없이 상상의 새로운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가서 시적향수를 누리게 된다. 2.철 리 적 이 미 지 철학은 시의 기초이다. 시는 철학우에 놓여진 건물이다. 때론 시자체가 철학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철학이 없는 시는 기초가 없는 시로서 항구성을 가지지 못한다. 시는 정치에 의하여 지배되는것이 아니라 철학에 의하여 지배된다. 구라파의 현대시들이 이것을 증명하였다. 남영전시인이 토템을 우상으로 이 세상의 원융을 부르짖는 자체가 력사유물주의와 변증법적관점에 발을 붙인 일종 찰학이다. 그는 토템으로 세계를 해석하려 하고 토템으로 인류력사를 해석하려 하고 토템으로 시의 리상국을 주조하고있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서 철리가 두드러지게 안받침된 시구들을 착중해서 보기로 하자. <<달>>의 제4련을 시인은 이렇게 읊조리고있다. 심령의 요람과 날개와 그리고 신전문에 걸린 달은 이지러졌다 둥글어지고 둥글어졌다 이지러지는데 둥글어짐은 이지러지기 위함이요 이지러짐은 둥글어지기 위함이라 둥글고 이지러짐은 영생에로 나아가는 산길이라네 얼핏 보기에는 달이 이지러지고 둥글어지는 현상을 쓴것 같지만 결코 그런것이 아니다. 시인은 <<심령의 요람과 날개>>를 <<신전문에 걸린 달>>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있다. 달을 쓰는것 같지만 실제상에서는 심령의 요람과 심령의 날개를 쓰고있다. 심령의 요람이란 마음의 리상이요 심령의 날개란 마음의 요람을 향하여 가는 인간의 움직임을 표현한것이다. 달이 둥글어졌다 이지러졌다 하는것은 그 리상을 향하여 가는 로정의 풍파를 암시하며 간고성을 암시하는것이다. 그러기때문에 시인은 <<둥글어지고 이지러짐은/ 영생에로 나아가는 산길>>이라고 읊조리고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길이 있다. 오솔길, 신작로, 대통로, 들길, 산길, 이런 길들중에서 가장 걷기 어려운 길이 산길이다. 산길을 걸어간다는것은 여느 길을 걸어가기 보다 맥이 들고 숨이 차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산길은 령을 넘어가는 길로서 가파롭고 구비가 많을뿐만아니라 위험한 짐승도 있을수 있고, 정글도 있을수 있고, 가시덤불도 있을수 있다. <<영생에로 나아가는 길>>은 기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훌떡 가는 길이 아니다. 달의 둥글고 이지러짐이 말하려는것이 바로 이런 길인것이다. 둥글어지는것과 이지러지는것은 모순되는 대립면으로서 그들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전의한다. 달에 대한 시인이 이런 표현은 현실과 상상과 철리가 혼연일체를 이룬 이미지라고 우리는 명명해주어야 할것으로 알고있다. 시 <<물>>에서도 남영전시인은 이미지를 직조하는데 철리를 부어넣는 배려를 돌리고있다. <<물>>의 제2련의 앞부분이 이렇게 이미지화되고있다. 틈만 있으면 파고들어 어디서나 볼수 있지마 발도 없고 날개도 없고 형색 또한 없어라 없는 발이 가장 큰 발이고 없는 날개 가장 큰 날개란다 없는 형상 가장 큰 형상이고 없는 빛이 가장 현란한 빛이란다 땅우를 흐르고 모래밭에 스며들면 하늘에 날리고 … 이 이미지는 일상적인 사유로 보면 모순투성이고 말도 맞지 않는다. 땅속에 스며든 물이 보인다고하는가 하면, 발이 없기때문에 가장 큰 발이라고하는가 하면, 날개가 없는게 가장 큰 날개라고하는가 하면, 형상이 없는게 가장 자유로운 형상이라고 하는가 하면, 빛이 없어야 가장 현란한 빛이 된다고 하는가 하면, 물이 땅에 스며들면 하늘에 날린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황당무계한 소리가 시로 된다면 누구나 다 시인이 되겠다고 혹자는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시이며 철리가 무르녹은 이미지이다. 없는것에 있고 있는것에 없고, 차가움에 더움이 있고 더움에 차가움이 있고, 땅땅한것에 무름이 있고 무름에 땅땅한것이 있고 하늘에 땅이 있고 땅에 하늘이 있고, 물음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속에 물음이 있고 악함속에 착함이 있고 착함속에 악함이 있고, 강함속에 연약함이 있고 연약함속에 강함이 있고, 무리속에 흩어짐이 있고 흩어짐속에 무리가 있다 … 이것이 세상이고 이것이 세월이고 이것이 절대적진리이다 이러한것을 감지해내는 사람이 현인이다. 이러한것을 이미지화 하는 사람은 시인이다. 랭보도 말했다. 일반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보지 못하는것을 보아내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남영전시인의 <<물>>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한것은 황당한것 같으면서도 철리가 담겨져있고 헛소리 같은데 예술이 꽉 차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철리의 힘이며 시인의 상상의 힘이다. 자아완성을 표현하는 시 <<대>>도 철리가 용해된 걸작이다. 대는 땅을 비집고 나오는 강자로서 감히 꽃과 아름다움을 비기고 휘우둥대는 바람과 맞서서 탄탄함을 비기면서 자신을 갈고 벼린다. 그런 대를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자루의 칼로 한자루의 검으로 자신의 속살을 베여내고 자신의 염통을 끄집에내여 끊임없이 피를 흘리네 참을수 없는 아픔을 참으며 자신에게 모질어 자신에게 무자비하여 한마디 속이 비면 그만큼 허리가 실해지네 마음도 속이 빌수록 성결해지고 속이 빌수록 더 충실해지네 <<대>>의 일생은 자학의 일생이다. <<칼>>로 <<검>>으로 <<자신의 속살을 베여내고/ 자신의 염통을 끄집어낸다>>. 피를 흘리며 언어로서는 표달할수 없는 아픔을 감내하는 독한 놈이다. 왜 참대는 독한 놈으로 되는가? 속이 비여야 키가 커지고 속이 비여야 허리가 실해지기때문이다. 속이 빌수록 마음도 성결해지고 속이 빌수록 마음이 충실해진다. 대는 속을 비우며 자라나서 휘여든 몸뚱이가 아니라 <<꼿꼿한 몸뚱이>>로 <<하늘>>을 받치고 <<신령의 집을>> 받친다. 속을 비워야 함은 그의 운명이고 숙명인지도 모른다. 불교에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 있다. 마음을 비워야 심령이 깨끗해지고 마음을 비워야 심신이 건강해지고 마음을 비워야 모든것을 포옹할수 있는것이다. 욕심이 꽉 들어찬 마음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일수 없다. 오직 빈 마음이라야 어디를 가나 어떠한 일을 하나 떳떳하게 된다. 시인은 <<대>>에서 바로 이런 마음을 추구하지 않았나싶다 <<대>>는 불교의 성전같은 경지에 도착하기 위하여 모질고 무자비하게 마음을 비우며 자아완성을 하고있다. 비여야 채울수 있는것은 철리이다. 이런 철리로서 남영전시인의 대는 우리들에게 <<푸른 빛살로 생기 돋우는>> 전범을 보여주고있으며 후세사람들도 찾아들어갈 수 있는 대숲을 마련하였다. 3.환 상 적 이 미 지 모든 토템 자체가 환상적이다. 환상은 남영전시인을 토템의 전당으로 부르고 남영전시인은 환상의 전당에 가서 토템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희희닥거리며 롱지거리도 한다. 남영전의 가장 친한 친구는 토템이고 토템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남영전이다. 시인은 18년동안 토템들과 막역지우로 보내면서 토템들의 속내를 알아보았고 토템들의 소원과 희망을 알아보고 토템시를 썼다. 그 시가 우리가 보는 42수의 토템시다. 시인들은 상상으로 시를 쓴다. 환상은 상상의 최고 류형이다. 시인은 환상의 차를 타고 일초동안에 수억만리 달릴수 있으며, 환상의 나래를 저어 일초동안에 구만리 하늘을 날수 있다. 모종 의미로 말하면 환상이 시인을 예술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린다고 할수 있겠다. 필자는 남영전시인이 쓴 환상적이미지에서 <<신단수>>, <<구름>>, <<토끼>>의 이미지 일부만을 살펴보고저 한다. 창천을 쪼각쪼각 받쳐들고 대지를 갈래갈래 거머쥐고 씨비리의 돌개바람 안고 회오리쳤네 회오리쳤네 회오리쳤네 장대 같은 사닥다리 받치고 높다란 기둥을 세워 대지의 배꼽과 북국성을 이어 해와 달을 긴 가지에 휘감아 넋새에게 보금자리를 지어주었다 <<신단수>>의 제1련이다. 시는 이렇게 쓴다. 빈소리가 한마디도 없다. 하늘과 땅을 이어놓은 신단수가 장쾌하고도 억찬 자신의 모습을 우리들의 눈앞에 그림처럼 낱낱이 보여주고있다. <<하늘을 쪼각쪼각 받쳐든>> 신단수! <<대지를 갈래갈래 거머쥔>> 신단수! <<대지의 배꼽>>에 기둥을 세워 <<북국성>>에 닿은 기둥, <<해와 달을 긴 가지에 휘감아/ 넋새의 보금자리를 지어준>> 신단수! 실존적인 언어는 한글자도 없는 환상이 끓어번지는 이미지다. 이런 이미지가 바로 시의 고차원을 이루는 이미지가 아닐가. 신단수가 하늘과 땅을 이어놓고 해와 달을 가지에 걸고 웅장하게 서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입을 딱 벌리게 된다. 신단수가 왜 하늘과 땅 사이에 기둥을 세우는가? 왜 사닥다리로 되는가? 신단수가 하늘과 땅을 통하는 다린것이다. 시인은 신단수로써 하늘과 땅의 혼연일체, 아니 우주의 혼연일체를 시도하고있다겠다. 천지인화의 위대한 사상이 신단수를 통하여 우리앞에 흐리마리한것이 아니라 확고하고 확연한 이미지로 떠오르고있다. 시인의 흉금은 무연하다. 시인의 흉금속에서 해 달 별들이 모래알처럼 작은 사물이 되여 빙글빙글 돌아가고있다. 환상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정서를 쏟아부을수 있으랴. 바람의 날개처럼 형체없이 나비의 날개처럼 화려하게 새의 날개처럼 가볍게 … 바람의 날개 없는 곳에서도 바람의 날개 퍼덕이고 나비의 날개 없는 곳에서도 나비의 날개 퍼덕이고 새의 날개 없는 곳에서도 새의 날개 퍼덕이네 시 <<구름>>에서 절록하여 온 환상적이미지이다. 부드럽고 우아한 언어로 우리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미지를 펼쳐주고있는가! 구름을 바람날개, 나비날개, 새의 날개라고 누가 말한적이있었던가. 날개들이 모여 구름이 되였다는 이 기기묘묘한 이미지야말로 환상이라도 야릇하면서도 우미한 환상이다. 시란 참 이상한 물건이다. 없는것도 있게하고 (바람의 날개) 그렇지 않은것도 그렇다고 (나비날개, 새날개) 해야 수작이 되니 말이다. 시인은 환상에 잠기기만 하면 마치 요술사마냥 언어의 광산에서 언어를 캐여다가 제련하여 아름다운 이미지를 자유롭게 만들어낸다. 그래서 시인은 사치스럽고 신비한 예술인일것이다. 남영전시인이 <<구름>>에서 창출해낸 환상적이미지가 이를 말해주고있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날개들은 날개로 황페한 산천에 단비를 쏟아주며 말한다. <<모임은 합력이고 생존이요/ 흩어짐도 살길이고 번영이라네.>> 이 말은 구름들의 노란자위이며 날개들의 노란자위이다. <<굴>> 하나를 갖지 못하여 불쌍한 토끼는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뒤다리가 길어지고 두귀가 커진다. 이런 토끼는 도망치다가 어디로 갔는가? 도망, 도망치다가 나중엔 월궁에 뛰여들었다 외로운 넋이 월궁에 뛰여들었다 평생 숙원은 귀향 귀향하려는 소망을 돌절구에 넣어 빻고 찧는다 시 <<토끼>>에서 나오는 옛말이다. 참 구수하고 감칠맛이 난다. 퍼그나 유모아적이고 해학적인 옛말이다. 이런 옛말은 어디에서 나올가? 환상에서 나온다. 환상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구수한 옛말을 만들어낼수 있단 말인가. 너무 도망치다보니 뒤다리가 길어진 토끼, 두귀가 길어진 토끼다. 뛰고 뛰다가 어망결에 월궁으로 들어갔다는것이다. 이런것이 환상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환상이라는 존재가 없을지도 모른다. 월궁은 하늘의 궁전이여서 좋으련만 토끼는 뿌리를 잊을수 없어 귀향하려는 평생의 소원을 돌절구에다 넣고 <<빻고 찧는다.>> 남영전시인도 토끼처럼 돌절구를 차지하고 절구속에다 원융의 숙원을 날마다 빻고 짓찧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환상가이고 환상은 시인을 만든다. 그러기때문에 환상으로 짜놓은 이미지가 신비하고 아름답고 리상적이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싶다. 시를 배우려면 환상을 수렴하여야 하고 시간의 검증을 받을수 있는 시를 쓰려면 환상을 날개로 삼아 하늘을 날아보고 땅속을 날아보며 시를 쓰라고 4. 은 유 적 이 미 지 42수의 남영전시인의 토템시가 줄을 지어 검열대앞을 지나간다. 앞장에는 <<룡>>과 <<봉황>>이 신단수가지를 다듬어 만든 기대를 들었다. 그뒤로 한줄에 토템물이 열씩 넉줄로 섰다. 발자국소리가 쿵쿵 울린다. 원융의 노래소리 우렁차다. 앞장에 선 룡은 하얀 기발을 들고 봉황은 파란 기발을 들었다. 하얀 기발에는 상징이라는 글발이 눈부시고 파란 기발에는 은유라는 글발이 눈시리다. 검열대우에서는 남영전시인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가슴 벅찬 감동으로 대오을 사열하고있다. 그들의 검열을 보는 관중은 독자들이다. 독자들의 얼굴마다에 웃음이 넘친다. 대오는 검열대를 벗어나며 물이 된다. 상징과 은유의 물결이 너울너울 춤추기도 하고 하늘에 솟구쳤다가 와르르 무너지며 금보라 은보라를 날린다. 쌍무지개 일기도 하고 외무지개 일기도 하면서 매혹스러운 광경을 펼친다. 그래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가벼운것 같으면서도 무거웁고, 소박한것 같으면서도 화려하고, 확연한것 같으면서도 몽롱하고, 얕은것 같으면서도 깊이가 있다. 필자는 상징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않고 은유에 대하여서만 살펴보고저 한다. 이 세상 울창한 수림을 드나드는 사슴 수해속에 흔들리는 홍산호런가 설야에 피여난 인삼꽃이런가 ㅡ<<사슴>> 에서 하늘에서 춤추면 아롱진 노을 땅에 내리면 아름다운 산꽃 ㅡ<<나비>> 에서 남영전시인은 <<사슴>>을 <<수해속의 흔들리는 홍산호>>라고 하기도 하고 <<설야에 피여난 인삼꽃>>이라하기도 한다. 이런 은유로 사슴의 귀중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이는 토템의 아름다움과 귀중함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나비>>에서는 날아다니는 나비를 <<아롱진 노을>>이라 하고 풀이나 꽃에 앉은 나비는 <<아름다운 산꽃>>이라고 은유하고있다. <<나비>>에서도 시인은 아름다운 은유의 꽃을 창조하여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게 하고있다. <<백조>>에서는 백조가 불안한 운명의 길을 떠날 때 이런 은유로 표현하고있다. 바람은 길잡이 별은 길표지 번개는 길동무 명명식으로 제시된 이러한 시구들은 은유의 표현이라겠다. 눈물을 흘리며 백조는 고향을 떠나지만 바람은 길잡이가 되여 그와 함께 가고, 별은 길표지가 되여 그의 길을 안내해주고, 번개는 친구가 되여 그와 함께 간다. 자연이 그를 품어주고 자연이 그를 다독여주는 경상을 그리고있다. 더불어 함께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상기한 은유들은 아기자기한 점이 있다면 <<사자>>에서의 은유는 돌발적이다. 사자가 질주하는것을 보고 <<허허 벌판을 질주하는 태양이런가>>하고 서두를 떼고있다. 이 은유는 우리 눈앞에다 푸른 풀이 무성한 무연한 벌판에서 태양이 달리고있는 정경을 펼쳐주고있다. 달리는 사자의 용맹과 기세 그리고 사자의 용왕매진의 눈시린 빛발이 일시에 독자들 충격하고있다. 시적정서 흐름의 분위기에 따라 시인은 은유를 재치스럽게 배렬하고있다. <<우뢰>>에서 <<룡>>이 하늘에 올라서 포효하는것을 이렇게 쓰고있다. 우뢰의 화살 우뢰의 도끼 우뢰의 돌멩이 창망한 하늘땅을 짓조긴다 이 은유는 쌍중의 의미를 가진다. 한가지는 우뢰를 화살, 도끼 돌멩이로 은유한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소나기가 내리는것을 화살, 도끼, 돌멩이로 상징하였다. 때문에 은유의 앞에다 쓴 <<귀청 째듯 포효한다>>와 은유의 마지막에 쓴 <<창망한 하늘땅을 짓조긴다>>는 시구가 은유의 표현과 아주 잘 어울린다. 물샐틈없이 치밀하게 짠 은유조합과 은유마다 행갈이를 하였기에 <<우뢰의 화살/ 우뢰의 도끼/ 우뢰의 돌멩이>>는 격렬한 시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여 쟁쟁한 소리를 낼뿐만아니라 천하무적인 우뢰의 기세와 위력을 확실하게 하여주고있다. 5.사물의 특성을 잡은 이미지 세상의 사물은 특성이 있다. 사물의 특성은 사물존재의 내함으로서 여러가지 방면으로 표현되면서 존재의 가치를 나타낸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시종 사물의 특성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 특성을 집요하게 붙잡고 이미지화를 하고있다. 짐승의 류형에 속하는 토템을 쓸 때면 성칼지고 완강하고 거치른 성격을 이미지화하기에 력점을 두는 경향이 다분하고, 조류의 류형에 속하는 토템시를 쓸 때면 날개나 나는것을 틀어쥐고 이미지화하는데 집착하였고, 하늘의 사물을 토템시로 쓸 때에도 그 사물의 특성에 배려를 돌리였다. 아래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신단수초리에서 회오리쳐 해상천하에 신비왕국 이어놓고 짐승이 덮쳐도 보라매 노려도 갈범이 울부짖어도 겁내지 않았다 큰물이 밀려와도 광야가 한적해도 공포가 휩쓸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언제나 머리 번쩍 쳐들고 두 날개 퍼덕이며 하늘을 날았거늘 영원히 안일을 모르는 자유의 넋 백의 혼이여 날아다니는것은 조류의 특성이다. 두루미는 조류에 속하는 사물로서 두루미도 나는 특성이 있겠다. 시인은 두루미가 하늘에 날아올라 대지를 부감하는 장면으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대지는 살풍경이다. 짐승들은 덮치며 날치고, 보라매는 먹거리를 찾느라고 예리한 눈길로 노려보고, 갈범은 울부짖는다. 홍수는 대지에 범람하고 광야는 쓸쓸하고 적막하다. 공포가 폭풍처럼 대지를 휩쓸고있다. 왜 이런 살풍경이 하늘에 뜬 두루미의 눈으로 들어오는가? 그것은 현대문명과 발달이 빚어내는 악과인것이다. 그 악과를 두루미눈을 통하여 시인은 적라라하게 발가놓고있다. 두루미는 시인의 리상의 체현물이다. <<신단수초리에서 회오리쳐>> 나온 두루미는 <<해상천하에 신비왕국을 이어놓는>> 신령이다. <<해상천하에 신비왕국>>을 건설하려는 웅심을 품은 두루미기에 살풍경속에서도 머리를 번쩍 쳐들고 훨훨 날아예고있다. 살풍경과 대조를 이루는 두루미형상은 우리들에게 원융의 희망의 등불을 밝혀 어두움을 가시는 정경을 보여주고있으며 신심을 북돋아주고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시인의 머리에 떠오른 의식을 어떻게 이미지화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시인은 자신의 사유를 시로써 표현할 때 개념적인 언어를 사용할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언어, 구상적인 언어를 써야 하며 사물들의 운동으로써 표현하여야 한다. 그래야 명확하고 정확하고 확연하고 탄탄한 이미지를 떠올릴수 있다. 남영전신인의 시 <<두루미>>에서는 이런 발휘가 잘되고있어 우리앞에 나타난 이미지가 얼빤한 그림인것이 아니라 한폭한폭이 아주 똑똑하게 안겨온다. 시 <<거북>>에 대한 이미지를 살펴보자. 바다에서도 살고 륙지에서도 사는 거북의 눈은 특별하다. 그 눈은 일반적인 눈이 아니라 바다속에서도 볼수 있고 륙지에서도 볼수 있는 특별한 눈이다. 거북의 껍질 또한 특별하게 딴딴하다. 시인은 거북을 쓸 때 거북의 이 특점을 노리였다. 수정눈때문에 철갑등때문에 매발톱도 두렵지 않았다 산짐승의 발굽도 두렵지 않았다 칼날도 활촉도 꿰뚫지 못하고 화염불길도 당해내지 못했다 넓은 모래불에서, 수풀속에서 깨뜨릴수도 태울수도 없는 불사불면의 넋이여 해적무리 달려들면 등허리에서 칼날이 수풀처럼 곤두서고 아가리에선 불길을 활활 내뿜었다 해적들은 꼼짝 못하고 바다에 쳐박혔다 바다에 뒤엎였다 바다에 삼키웠다 <<돛대에 별무리 걸어놓고./ 돛폭에 금노을 펼쳐놓은>> 거북이를 이미지화한 부분이다. 시인은 이 <<불사불멸의 넋>>을 시화할 때 거북의 특성인 껍질에서 시를 찾아내고있다. 땅우에서 바다속에서 그 껍질이 가지는 의미는 찬하무적이다. 그가 천하무적으로 될수 있는것은 껍질이 딴딴하다는 성질에서 류추해내여 이미지화한데 있다. 시인은 륙지에서는 매발톱, 산짐승의 발굽, 칼날, 활촉, 화염불길을 리용하여 껍질의 작용을 보여주고 바다에서는 <<등허리에선 칼날이 수풀처럼 곤두서고./ 아가리에선 불길을 활활 내뿜었다.>> 는 이미지로 거북껍질의 위력을 현시하고있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시는 어떤 사물의 특성에 대한 새로운 표현의 발굴이라고 할수 있다. 시인은 <<거북>>에서 바로 이런 시작업을 훌륭하게 하고있다. 사자의 포효소리는 천둥치듯 팔방에 울려퍼졌고 사자의 금빛 눈부신 갈기는 번개불이 번쩍이듯 하늘을 후려쳤다 그바람에 눈사태 와르르 무너지고 둥근해 뱅뱅 돌고 별똥이 쏟아지며 어둠이 멀리로 쫓겨났다 악마는 바다끝에 쳐박히고 요귀는 십팔층지옥에 갇혔다 시 <<사자>>에서 짐승의 왕인 사자를 표현한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사자는 짐승들중에서 가장 힘이 장사이고 가장 날파람이 있고 가장 무서운 짐승이라는 사자의 특성에 착안점을 두고 표현한 이미지다. 천둥 같은 사자의 포효, 번개불처럼 하늘을 후려치는 갈기, 이러한 표현들은 짐승의 대왕인 사자를 표현함에 충분하다. 시인은 이런 사자의 위력을 효시하기 위하여 무너지는 눈사태, 뱅뱅 도는 태양, 쏟아지는 별무리, 바다에 처박히는 악마, 십팔층 지옥에 갇히는 요귀 등을 동원시킨다. 정면과 반면의 동시적인 움직임을 통하여 사자의 위력에 대한 이미지를 강대하게 보여주고있다. 사자의 특성을 틀어쥐고 이미지화한 이 이미지에서 우리는 세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미지를 만들 때 시적대상과 련계시킬수 있는 사물들을 찾아 표현하는 방법이 그 하나요, 관계되지 않는 사물이라도 표현에 유조할 때 빌어다 표현하는 방법이 그 둘이고, 이질적인 사물로 변형시켜 표현하는것이 그 셋이다. <<눈사태>>, <<태양>>, <<별무리>>들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사자와 관계되는 사물이니 하나에 속하고, <<악마>>와<<요귀>>는 관계없는, 허망개입시킨 사물이니 둘에 속하고, <<갈기>>와 <<번개>>불은 성질이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사물의 변형으로서 셋에 속한다.
81    남영전 토템시에 대한 고찰.1 댓글:  조회:1426  추천:15  2009-09-06
시는 문학적으로 시적으로 고찰해 보아야 한다. 필자의 일가견으로 남영전 토템시에 대한 고찰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 구조 18년동안에 남영전시인은 <<황소>>처럼 <<느릿느릿>>하게 42수의 토템시를 창출하였다. 우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의 정신ㅡ 원융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였다. 우리는 남영전토템시의 구조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러가지 각도로 살펴볼수 있겠지만 필자는 제재들의 구조와 토템시에 일관된 정신에 대하여 천착해보려 한다. 제재적인 각도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를 보면 하늘과 대지와 그 사이에서 활동하는 사물들을 취급함으로써 천지인화의 경지를 구축하고있다겠다. 하늘의 제재로서는 해, 달, 별, 구름과 같은것이고 대지의 제재로서는 산, 물, 흙, 바다와 같은것이고 대지와 하늘을 이어주는 작용을 하는 제재들로는 두루미, 백조, 매, 바람 등등이다. 다른 방면으로 보면 전설적인 사물과 현실적인 사물들의 교차이기도 하다. 룡, 봉황, 신단수들은 순 전설적인 사물에 속하고 기타의 사물들은 현실적이면서도 토템적인 사물에 속한다고 할수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토템시의 시간과 공간의 호한성을 감안하게 된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인류력사의 수십만년을 포괄하고있으며 공간적으로 말하면 우주를 포용하고있다. 그러므로 토템시의 구축은 하나의 전례없던 방대한 작업으로서 소설로 쓰자해도 몇십권을 써야 할분량으로 되여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남영전시인이 이런 방대한 작업을 42수의 시로 완성하였다는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남영전토템시의 정신은 세가지로 구축되였다고 볼수 있다. 첫째는 모성사상으로 관통되였고 둘째는 자존자강의 사상으로 관통되였고 셋째는 더불어 살자는 사상으로 관통되였다. 이 세가지는 모두가 원융이라는 핵을 받쳐주는 세개의 기둥이라고 할수 있다. 모성사상은 어머니마음이다. 토템의 뿌리는 모계사회에 있다. 토템자체가 모성이다. 모성은 인간에게서 가장 위대한 도덕이며 륜리이며 기치이며 응집력이다. 자연은 이 세상사물의 어머니이고 이 세상 모든 사물이 자연의 자식들이다. 자연은 자식들을 사랑한다. 불효한 자식이 있을뿐이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없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자식이 형제들과 싸우면서 어머니한테 많은 상처를 입히고있다. 남영전시인은 이러한 인간들의 불효를 타매하고 바로 잡기 위하여 토템시를 썼다. 토템시 모두가 모성을 위하여, 모성의 복구를 위하여 씌여졌다고 할수 있겠다. <<바다>>, <<산>>, <<해>>,… 등에서 모성이 집중적으로 표현되고있다. 생명을 낳아키우고 중생을 품에 안은 바다는 세상의 무궁변천과 인간의 창상지변을 낱낱이 엿보아왔다 그 가슴 넓고도 깊어 골육상쟁이 피묻은 칼과 세인이 모르는 비밀도 깊숙이 감추고 언제나 하냥 입을 꼬옥 다물고있다 시 <<바다>>에서 절록한것이다. 바다는 중생을 낳아키우면서 세상의 변천과 인간의 창상지변을 본다. 바다의 흉금은 넓고도 넓어 싸움에서 떨어진 피묻은 칼도 품어주고 세인의 비밀도 말하지 않으면서 침묵속에서 묵묵히 지켜본다. 이것이 어머니 품성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상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안아주고 달래주고 가르쳐주는 어머니의 정과 마음이 바다를 통하여 우리의 가슴을 치고있다. 설렁 버림을 당한대도 설사 알몸이 된다 해도 설약 만신창이 된다 해도 설혹 불구의 몸이 된다 해도 굽히지 않는 신념으로 충천하는 기백으로 우뚝 솟으리 자신의 피 자신의 살 자신의 정기 자신의 팔로 날고 기는 생명 품에 안아주고 춤추고 노래하는 령혼 어루만져준다 쓸쓸하고 차가운 세상에 그래서 활기가 넘쳐나고 그래서 화목한 분위기가 돈다 <<산>>의 이미지다. 우리는 이 이미지를 통하여 어머니 품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자신이 아무리 큰 타격과 상처를 입어도 그것을 속으로 묵묵히 새기며 자신의 팔로 자신의 가슴으로 생명을 안아 보듬어주고 이 세상에 활기가 넘치게 하기 위하여, 화목이 무르녹게 하기 위하여 비바람과 눈보라속에서도 우뚝 서있는 산! 그것은 동구밖에 나가서 집 떠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모습을 떠올리고, 때거리가 없어도 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죽이라도 따뜻하게 끓여주는 그런 녀인을 떠올린다. 아득히 먼 해궁전에 조상의 흰 대문이 열려있다 조상의 흰 령광 검은 도깨비와 사악을 붙잡고 조상의 흰 온정 첩첩 설산과 원하를 녹이고 조상의 흰 자애 귀여운 자손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리하여 까무라진 혼백들 어둠에서 깨여나고 상서로운 부락들 어둠속에 태여난다 <<해>>에서 나오는 이 조상이 누구인가? 인류사회를 탄생시킨 어머니이다. 광의적으로 말하면 세상만물을 낳아준 자연이고, 협의적으로 말하면 모계씨족사회라고도 할수 있다. 모두어 말하면 원초적인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령광은 도깨비와 사악을 물리치고, 어머니의 온정은 이 세상의 차거움을 녹여주고, 원한을 삭여주고, 어머니의 자애는 자손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어머니는 까무라진 흔백을 깨워주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살림을 꾸려가고 가세를 일으켜 세우면서 자신의 모든것을 헌신하고있다. 이 모성은 조상과 자손을 이어주는 <<다리>>로 되여 눈부신 빛을 뿌리면서 언제나 <<흰 대문>>이 열려져있는 원융의 궁전으로 우리를 불러들이고있다. <<해>>, <<산>>, <<바다>>의 너그러움과 포옹, 그리고 헌신정신이 바로 어머니 정신이며 남영전토템시의 골격을 이루는 사상의 하나라겟다. 자존과 자강은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정신이다. 자존과 자강이 없는 사물은 이 세상에서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자존하고 자강하는것은 분발을 의미하며,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과 행위를 의미한다. 남영전토템시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원융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분발하고있으며 자강하고있다. 신비한 불 신비한 빛 날짐승도 얼씬 못하고 길짐승도 얼씬 못하고 도깨비도 얼씬 못한다 주눅이 든 혼백도 그래서 얼어붙은 날개 퍼덕인다 그래서 악마의 공포를 털어버린다 시 <<불>>의 제2련이다. 생존도, 풍년도, 정결도, 강녕도 불을 떠나서는 이룩될수 없다. 불은 이렇게 위력이 있고 이렇게 신성하다. 날짐승도 막고 길짐승도 막고 도깨비도 막는 불의 힘은 위대하다. 불은 인류의 문명을 창조해준 천지신명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어두운 밤을 태우고 태양을 불러오는 존재이다. 시 <<개구리>>도 자존자강하기 위하여 폭력과 싸우며 따사로움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 생령이다. <<북풍>>, <<빙설>>, <<동토>>, 이 삼대산의 잔혹한 형벌속에서 <<인간의 잔인한>> 압제속에서 먹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캄캄한 령어속에서>> 뛰쳐나온다. 왜 뛰쳐나오는가? 시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다시는 묻히우기 싫어 다시는 어둠이 싫어 다시는 외로움과 굶주림이 싫어 논밭에서 련못에서 나무가지에서 밤낮 울며 노래한다 밤에는 어제날의 운명을 울고 낮에는 영원한 봄과 함께 따사로움이 그리워 기도를 드린다. 자존과 자강을 위하여 하늘에 기도드리는 개구리는 잔혹한 압력에 굽어들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개척해나가는 완강한 의지의 실천자이다. 사실 개구리에게도 찬란한 력사가 있었다. 부어신화를 보면 부여왕 해부루의 뒤를 이은 왕은 금와왕이였다. 금와왕은 추방당한 물의 녀신 류화를 도와 궁에 있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을 낳게 하였다. 이것을 물의 생명력(류화의 잉태)과 개구리의 보호(금와왕의 행동)에 의해 탄생한 영웅(주몽)신화로 본다면, 금와왕의 행위는 산파(产婆)의 기능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였다. 물과 같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그가 어찌 력사에 의하여 맥없이 무너지며 매몰될수 있으랴. 시에 등장하는 <<매>>도 자손자강의 한 전범이라겠다. 망망수해 어디나 명명황야 어디나 날고 날 비범한 담력과 흥분으로 우주의 바람 일으킨다… 한생 변함없는 큰 포부 안고 한생 두려움 모르는 추구로 경계의 노를 천지간에 저어간다 싸우지 않으면 망하고 강하지 못하면 망하거늘 날개 돋쳐 나는것만이 이 세상 살아가는 길이다 매는 수림의 바다와 어슴푸레한 황야를 난다. 그는 평상치 않은 담력과 흥분으로 우주에다 바람을 일으킨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경계의 노를 젓는다. 사냥물을 덮칠 때 그의 눈은 예리하고 그의 속도는 번개속도다. 강하기 위하여 싸운다. 매가 싸운다는것은 나는것이다. 날아야 매는 살고 날지 않으면 매는 죽는다. 매는 난다는 자체가 자기에 대한 존중이고 자기의 의무와 희망에 충성하는 길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것이 아니고 만물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엉키여서 더불어 살아가기 마련이다. 더불어 살아간다는것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며 도덕이며 륜리이다. 더불어살아간다는것은 이 세상이 화목해진다는 표징이며 평화로와진다는 표징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때면 토템시대가 다시 오는 때이며 원융의 희망이 실현되는 때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서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정신이 체현되고있다.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자는 사상이 시인의 시에 체현된 주요한 사상의 하나라겠다. 시 <<뻐꾸기>>는 피타게 웨친다. 이 세상이 어두워간다고 피타게 절규한다. <<외로운 그림자 끌고>>, <<백골>>은 <<거친 들판에서 쓸쓸히 한숨을 짓>>기에. 이런 절규를 시인은 이렇게 무드화하고있다. 피 터지는 울부짖음 방울방울 빨간 피로 설설 끓는 피눈물로 갈라터진 가슴을 녹여주고 말라죽는 목숨을 살려준다 화창한 봄을 불러오고 아롱진 색채를 입히여 세상이 목마르게 바라는 금빛동산을 일떠세운다. 피! 피를 바치는것은 최고의 헌신이며 충성이다. 피를 바친다는것은 희생을 각오한 일이며 생명의 마지막 연소를 의미한다. 뻐꾸기는 그런 마음과 의지와 자세로 <<갈라터진 가슴을 축여>> 주려하고, <<말라죽는 목숨을 살려>> 주려하고, 봄을 불러다 아름답게 장식하려고 하고, <<금빛동산을 일떠세우려>>한다. 더불어 화목하게 살기 위한 뻐꾸기정신은 아름다운 정신이며 비장한 정신이다. 뻐꾸기울음소리는 횡적으로 울리는것이 아니라 종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지고있다. 하늘에서 떨어진다는것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것으로써 신성한 하늘의 숙원을 전달하는것이며, 하늘과 땅을 하나로 융합시키려는것이다. 이것이 뻐꾸기의 더불어 화목하게 살려하는 정신이다. 남영전시인의 <<정혼의 집>>이고 <<정혼의 신비한 조각품>>이라 부르는 <<돌>>에서도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자는 의지가 빛발치고있다. 돌은 가장 거룩한 거인이여라 그의 말은 불과 우뢰, 비와 바람이 엮어주고 그의 마음은 천지간의 차고 더움을 헤아려주노라 그의 손은 해와 달을 받쳐들고 그의 힘은 끝없이 뻗쳐 수없이 많고 많은 령체를 움직이노라 돌은 분신쇄골이 되여도 알알이 모래로 되여 대천세계를 끌어안노라 남영전시인은 하늘과 돌의 신비하면서도 상서로운 만남과 어울림을 격조높이 노래하고있다. 거룩한 거인 돌의 말은 <<불과 우뢰, 바람이 엮어주고>> 돌의 마음은 <<천지간의 차고 더움을 헤아려주고>> 돌은 <<해와 달을 받쳐들고>> <<수없이 많은 령체를 움직인다>> <<돌은 분신쇄골이 되여도>> <<대천세계를 끌어안는다.>> 불, 우뢰, 바람, 비, 해, 달, 령체와 돌의 조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로 감싸주고 서로 받들어주고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그 순리가 바로 더불어 살아가는 화목이다. 그래서 돌은 산산이 부서져 알알의 모래로 되여도 대천세계를 달가이 끌어안는다. 생각할수록 그들의 마음의 어울림은 가슴을 찡하게 한다. 토템시를 극성스럽게 쓴 남영전시인의 바람이 바로 이러한것일것이고 이 세상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이런것이리라. 아무 곳에나 똥오줌을 갈기는 개, 애기의 똥도 맛갈스럽게 먹는 개다. 벼슬도, 명성도, 명예도 <<력사에 묻혀버려>> <<세월의 뒤꼬리에 달려/ 오늘도 달랑달랑 흔들거릴뿐>>인 개도 서로 어울려 화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지조 하나만은 잊지 않고있다. 과분한 요구가 없고 주인집 못산다 꺼리지 않는다 예민한 코 밝은 귀 재빠른 네다리 집을 지켜주고 집주인 바래준다 주인의 버림을 당해도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죽어서도 세월의 뒤꼬리에 달려 누울자리 하나면 만족이다 개는 왜 이렇게 바보질하는가? <<세월의 뒤꼬리에 달려/ 죽어도 누울 자리 하나만>> 있으면 되는 개, 애들의 똥이나 맛있게 먹으면 되는 개, 하지만 언제나 주인을 섬기는 개다. 주인이 부자든 빈자던 개는 관계하지 않는다. 주인이기만 하면 <<집을 지켜주고 집주인 바래준다.>> 함께 더불어 살면 되는것을 개는 영광으로 행복으로 숙명으로 간주하고있기때문이다. 인류의 력사에서 개의 공헌은 컸다. 사냥군을 도와 짐승잡이에 나서서 목숨을 걸고 주인을 도와주다가 죽은 개는 얼마이며 군견이 되여 전쟁에서 희생된 개는 그 얼마이랴. 생각해보면 인간중에는 개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어찌보면 개는 바보 같지만 실제상 개는 령물이고 신령한 영웅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원융에 도착하는 날 시인은 <<사람과 개 동시에/ 지평선에 나타난다>>고 했으리라. 모성으로, 자존자강으로, 더불어 사는 정신은 <<원융>>에 도달하려는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의 정신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인간이 이런 정신으로 삶을 대하고 자연을 대하고 인간 서로를 대하면 마음이 편하게 평화의 향연을 누리게 되리라고 필자는 믿고있다.
80    시인의 심미각색 댓글:  조회:1404  추천:18  2009-09-05
필자의 생각에 아주 중요하다는 글 한편을 올린다. 2009년 8월 29일에 문예보에 실린 라이썽의 <<시인의 심미각색>>이란 글이다.  시인은 어떤 사람이고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작자는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여러독자들이 한번 보면서 심사숙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시인의 심미각색 라이썽(萊笙)........ 시단에서는 여러가지 미학추구로 쟁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시인자신의 문제에서 근원을 찾아야 한다. 옳바른 시인각색을 수립하는것은 당전시가발전의 중요한 과제이다.시인은  선사식심미각색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선으로 시에 들어가는것을 즐기였고 선으로 시를 말하기도 하였다. 시와 선은 모두 예리한 내심체험을 요구하고, 모두 언어밖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 량자는 잘 통하므로 시에서 선의 뜻이 나오게 되여 선사도 시를 썼던것이다. 그러나 허다한 경우에 시인은 선으로 시를 설명하기도 하였지만 깊이 들어가서 시인을 선사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시인은 선사의 처세방식으로 자신을 승화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였다. 선종(禪宗)은 유가, 석가, 도가의 융합이다. 선종은 종교이기도 하고 종교가 아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자신은 뭍에 있고 중생은 바다속에 있다고 여기였다. 그래서 손을 뻗치거나 다른 방법으로 중생을 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종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선사는 자신도 바다에 있으면서 중생과 함께 한다고 여기였지 중생의 머리우에서 손을 뻗쳐 중생을 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중생과 한무리로 있으면서 중생을 감화시키는 성불이 된다고 여기였다. 그래서 선종의 처세방식은 중생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졌다. 시인이 이러한 선종처세술을 받아들이는것은 나쁠것이 없다. 시인자신이 성불이 된다는것은 시인이 아주 높은 함양이 있다는것이고 중생과 함께 하면서 깨닫는 바가 있게 되고 중생을 감화시킬수도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이 대중들의 생활속에서 독자들의 심령과 융합하면서 당신의 작품을 접수하게 해야 한다. 시인의 선사식심미각색(禪師式審美角色)은 인격의 매력으로서 시인의 인격소양에서 세가지 추구를 강조한다 첫째추구는 가슴이 넓어 혈기가 왕성해야 한다. 현실에 직면하여 대중을 감화시키는것은 선사식소양의 추구이다. 현실에 소극적으로 응할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해야 한다, 시인은 구세주가 아니며 구세주로 될수도 없다. 그러나 시인은 구세주같은 눈길로 현실을 정시해야한다. 이 각도에서 현실생활의 내용을 처리하여 시화하여야 하며 생활을 승화시켜 예술로 되게 하여야 한다. 대중을 감화시키는것은 시인의 생존사명이다. 시인은 자신의 사상을 잘 표달하여야 한다. 그러나 시는 미적으로 만들어야 하며 미를 전달하는것만이 비로소 시인의 핵심적사명이다. 시인은 미의 사자로 되어야 한다. 넓힌다는것은 천만대중을 가슴에다 품는것이며 미의 화신으로 되여 대중속에서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킨다는것이다. 두번째추구는 품격이 바를것을 추구해야 한다. 정기(正气)가 있어야 한다.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사람을 위한다고 할수 있으며 시인이라고 할수 있으랴. 시인은 정신을 전파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올곧아야 하고 정기를 널리 고양하여야 하고 홀로라도 움직이지 않는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셋째추구는 경계가 높아야 하고 령기(靈气)가 있어야 한다. 시인에 대한 경계의 기본요구는 조화할줄 알고 서로 어울릴줄 알아야 한다. 신과 물(物)이 함께 흐르고 , 물은 신을 따라가고 물은 신의 모습이여야 한다. 시인의 경계는 점차적으로 자연경계, 공리경계, 도덕경계, 천지경계를 이룩하면서 한껏 자유를 향수하면서도 법도를 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천지만물과 융합된 인생자유의 완미한 경계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천인합일, 대립통일, 시종여일이라는 이 세가지를 수련하여야 한다. 천인합일은 령기의 근원이고 ,시인인격소양의 경계추구이다. 최고의 심미경계는 마땅히 시인의 심령의 충분한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사람과 자연의 융합과 소통속에서 오며, 사람의 마음과 우주정신의 합일속에서 온다. 시인은 반드시 속을 비우고 조용히 관조하는 창작습관을 양성하여야 한다. 자신의 생명의식을 우주생명의 내핵(內核)속으로 투사시킬줄 알아야 하고, 감각이 미치는, 구체적이고 한계가 있는 심상을 초월하여야 한다. 시간과 공간과 생명의 한계를 초월하여 인생을 획득해야 하며, 우주의 오묘한 비밀을 획득하고 정신의 무한한 자유에 도달함으로써 창작의 지대한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대립통일은 령기의 체현과 사용으로서 시인의 지혜세계의 생태이다. 령기란 화합할수 없는것을 잘 융합시키는것이다. 대립되는것을 통일하여야 한다. 망망한 곳에서 명랑한것을 찾아내고 대항중에서 화합을 생성하고, 특수에서 보편성을 보아내는 의식이 바로 령기이다. 시종여일하다는것은 꾸준하게 추구하는 시인의 정신이고 시인의 정신이 승화된 성과이다. 심미집중화가 되고 간약화가 될것을 바래야 한다. 시인은 자기의 꿈에 대한 추구가 없을수 없다. 선사적 심미각색은 비교적높은 차원이며, 우리를 인도하여 숭고한것과 비천한것의 한계를 넘게 하고, 웅대한것과 수수한것의 한계를 넘게 하고, 전통과 미래의 울타리를 넘게 함으로써 언어가 해방과 시대의 사명감을 하나로 융합시키게 한다. 그속에서 시인은 가장 큰 심령자유와 심미자체를 획득한다. 2009.8.5.
79    2009년 연변문학반년시에 대한 비평 댓글:  조회:1542  추천:21  2009-08-16
일탈의 창구를 더 크게크게...-2009년 <<연변문학>>반년분 시를 읽고 최흔 들어가는 말 2009년, <<연변문학>>에 실린 반년분의 시를 보고 생각나는바가 많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각자생존이지만 서로 련계되지 않는것이 없다. 시는 사물들의 련계성을 새롭게 파보는 예술이다. 새롭게 파보는것이 바로 창조이다. 시인은 각이한 사물을 련계시켜 균형을 잡으면서 아름다운 조화를 그려내는 작업을 한다. 시인은 또 언어의 요술사로서 맞지 않는 말을 아름답게 맞추기를 한다. 이런것을 폭력적조합이라고 한다. 시의 뜻은 이미지에 함유되여있는것이지 드러내는것이 아니다. 그래서 물아일체란 말이 나왔다. 시는 새로운 상징이다. 새로운 상징은 무의식속에서 시인의 직관에 의하여 산생하는것이다. 시가 계몽의 립장에 서면 격이 낮아지고 예술의 립장에 서면 격이 높아진다. 계몽의 립장에서 쓴 시는 박수를 치는 사람이 많을수도 있지만 예술의 립장에서 쓴 시는 생명이 길게 된다. 계몽시는 중국의 긴 력사에서 작용이 있었지만 <<5.4>>이후의 신시도래로부터 현대예술밖으로 밀려난다. 문학도 독립성을 갖고있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그런데 문학본체론에 접근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사상해방과 언어해방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금년상반년 <<연변문학>>의 시들이 필자에게 준 계시이다. 그래서 <<일탈의 창구를 더 크게크게...>>라는 제목을 달았다. 2009년 <연변문학> 첫기에 나온 시들중에서 지영호시 <비방>을 보자. 이 시는 시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가야하는가? 기성의미의 테두리안에 있을것인가? 기성의미의 테두리밖에서 자유로의 날아다닐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일정한 연구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비방>>은 개념화적인 언어가 없이 이미지적으로 첨부터 잘 흘러갔다고 할수있다. 이것이 <<비방>>이 거둔 성과라면 성과다. 시인은 세가지 층차로 비방의 참혹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마지막에는 죽음을 초래한다면서 비방자들을 질타하고있다. 여기서 <혀>라는 언어를 잘 택하였다고 하리라. 한사물의 어느한 세부를 틀어쥐고 전반 사물을 말한다는것은 시쓰는 사람마다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혀는 인간의 한개 구조로서 옹근 인간을 대용한 언어라겠다. 이 시의 치명적인 약점은 시를 구상하는 상상력이 차하단데 있겠다. 기성관념의 울타리에서 사유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방하여 사람을 잡는다는것은 문화혁명을 거친 사람으로서는 별로 새로운 감이 없는 말이다. 시인의 사유는 여기에서 맴돌고 있다. 시인의 상상은 어떤 사물의 성질에서 일탈하여 만리창공을 날수있으며 고금중외를 메주 밟듯할수 있다. 그런데 이 시는 비방의 나쁜점울타리에 갇혀서 헤여나오지 못하고있는 상태다. 그래서 이미지는 잘 흘러 내려갔지만 사유의 빈약과 상상의 빈약을 초래하게 되었다 <<써레질로 온 하늘에 노을을 일구네>>. (犁耙耕出滿天霞)TV에서 이런 노래를 들은적이있다. 기성관념으로 말하면 써레질로는 밭을 갈지 절대 하늘을 갈수 없으며 또 간다해도 노을을 만들어낼수는 더욱 없는것이다. 그런데 이 가사는 써레질로 하늘에 노을을 일군다고 하였다. 이런 수법은 시인이 한껏 상상을 펼치면서 아름다운 환영을 추출해낸것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이런 수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가. 이런 수법은 기성의 관념을 무시하고 시인의 상상을 확장한 표현인것이다. 앞으로 지영호시인은 이러한 시적사유에 공력을 들이면 보다 훌륭한 시를 쓰리라 생각된다. 제2기 안표지에 실린 김일량시인의 <<눈내리는 밤>>이라는 시가 돋보인다. 시인은 이 시로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연것같아 시우로서 기쁘다. 부드럽고 우아한 선율이 흐르는 시이다. 1련은 하얀 옷을 벗는 하늘, 2련은 깊어가는 밤에 내리는 눈, 3련은 땅에 부리우는 옷벗는 소리, 4련은 감미로운 추억과 꿈, 5련은 화자의 개입이다. 시는 시작이 관건이다. 새로운 이미지창출로 시를 시작하는가 아니면 선입견으로 시를 시작하는가 하는것은 시가 어떤 시로 되는가하는것을 결정하게 된다. 일량시인은 창의적인 발상으로 시를 시작하여 시의 새로움을 획득하고 있다. 밤에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하늘이 옷을 하얗게 벗는다>> 고 한다. 색깔에 의거한 그의 이미지창출이 새롭고 신비하다. 이런 시적이미지 창출은 우리앞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를 눈이 확 뜨이게 안겨주고있으며, 왜 눈을 하얀옷이라고 했는가 하는 의문으로 독자를 사로잡고있다. 제목이 눈내리는 밤이여서 첫행을 삭제했더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다음행의 별스러움으로 아쉬움이 메워지기도 한다. 2련에서는 밤이 깊어가는것을 쓰고있는데 밤이라는 이 정적인 사물을 동적으로 표현하고있으며 밤이 깊어가는것을 우물에 <<드레박이>> 떨어지는것으로 씀으로써 추상적인 사물을 시각화해 내는데 성공하고있다. 이채로운것은 하늘이 옷을 벗는바람에 밤이 쫓기듯 도망치는것이다. 아마 하늘의 라신을 보기 부끄러웠던 모양. 유모아적이고 희극적이다. 하늘이 처녀였는지도 모르지도 않는가. 흔상할 여지를 깔아주는 련이다. 3련은 옷벗는 소리를 땅에 부리운다고 한다. 여기서 <<푸실푸실>>이란 언어의 내함이 다양하다. 눈 내리는 표현과 눈내리는 소리 또 하늘이 옷벗는 소리에 대한 표현 등 여러가지 해석이 닿을수 있어서 <<부려놓는 밤>>이란 시구의 기초를 다지기도 하고 이미지의 참신함을 생동하게 부각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이 옷벗는 소리>>와 <<조용히 부려놓는 밤>>의 조화가 어색한 같지만 시상의 새로움으로 돋보이고있다. 소리란 청각으로서 보이지도 만질수도 없는 사물에 속하지만 시인은 <<부려놓는다>>는 동적인 언어를 씀으로써 청각적인 언어의 흐름을 회화적으로 교묘하게 전의시키고있다. 4련은 눈오는 겨울에 땅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고있는데 <<꽃사슴>>, <<비단바람>>, <<속살 간지러운 그 물소리>> 등 이미지들이 추억의 감미로움을 표현하기에 족하다. 마지막행에서 <<보슴털이 속속 돋는 꿈 꾸는데>>가 과시 의경의 절창을 이룬다 하겠다. <<보슴털>>은 다름아닌 새싹이다. 시인이 만약 <<보슴털>>이라 하지 않고 새싹이라고 하였더라면 시맛을 놓쳐버린 아쉬움을 남겼을것이다. 이 <<보슴털>>은 변형된 시적언어로써 새봄을 표현하는 상징인데 세부를 쥘줄아는 시인의 솜씨가 놀랍다. 마지막련은 눈오는 밤의 황홀을 흔상하던 화자도 참을수 없어 하늘이 옷을 벗는 속으로 용감히 뛰여든다. 화자의 마음속에서도 <<보슴털>>이 돋았다. <<숯불을 벌겋게 지피며/하늘이 하얀 속살을 깎아내는>> <<아픈 소리>>를 찾아가고있단다. <<숯불>>이란 언어가 새로운 탄생을 맞는 시인의 열정과 희망을 표현하기에 걸맞는 상징이라겠다. <<하얀 속살을 깎아내는 소리>>가 과시 명구로 되기에 손색이 없겠으나 일량시인으로 말하면 전철을 밟는 시구인것같다. 아마 그전에 가을달인지 하는것을 쓸때 달의 하얀 속살을 깎아내여 집을 짓는다는것을 쓴것같다. 옷을 벗겼으니 살결을 쓰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중복하는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지 않을가. 뒤에 오는 <<아픈소리>>라는 언어를 창출하기 위한 복선이라 괜찮기도 하겠지만 다른 표현이였더면 훨씬 값진것이 되었으리라는 생각. <<아픈소리>>는 환희의 반어여서 잘 다듬어졌다하겠다. <<눈 내리는 밤>>은 부드럽고 우아한 우리 언어의 맛을 살리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많이 떠올리였다. 김일량시인을 새로운 차원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디게 한 시라고 인정하고싶다. 그런데 후에 발표되는 시들은 이렇지 못했다. 앞으로 너무 전원적인 읊조림에만 집착하지 말고 시적령역을 넓혔으면 한다. <<연변문학>> 제3기에서는 안표지에 실린 김영건의 시 <<빈자리>>를 한번 읽어 볼만 하다. 대립통일이라는 철학사상으로 시를 구축하고 있는것이 특색이다. <<빈자리>>에서 비운다는것은 불교사상의 핵심의 하나로서 많은 학자들과 시인들이 연구하고 표현하는 테마이다. 영건시인은 바로 이 중대한 테마를 시로써 다루어보고있다. 세상은 음양결합의 덩어리이다. 시인은 필을 대자마자 대립물조화의 시각으로 사물을 분해하고 련결시키면서 이미지를 추출해내는데로 촉을 달린다. 비여있는 하늘과 앉아있는 해살, 어둠과 투명. 때리는것과 무흔적. 골짜기물과 천지 이러한 대비속에서 시는 시작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대립적인 두측면을 바탕으로 삼고있다. 시작부터 4행까지 시는 하나의 내용인데 한사물의 대립적측면의 조화로 비움을 노래하는 시의 총적인 구도를 해석하는 첫작업이다. 이 첫작업에서 시인은 한개 사물의 움직임속에서의 대립되는 측면의 화합을 일구어내고있다. 시의 5-6행에서 영건시인은 한사물운동의 대립면을 읊조리던데로부터 사유의 범위를 확장하여 부동한 사물들의 관계를 노래하고있다. 산과 조약돌과 바람과 물고기들이 <<서로를 그리워>>한다는것이다. 산, 조약돌, 바람, 물고기 등 사물들은 각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로서 자기의 존재적가치를 독자적으로 현시할수 있는 사물들이며 서로 어떠한 련계도 가지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한자리가 있다. 산이 없다하여 조약돌이나 바람이나 물고기가 살수 없는것이 아니고 존재하지 못할것도 아니고, 조약돌이 없다하여 산이나 바람이나 물고기가 죽는것도 아니고, 바람이 없다하여 산이나 조약돌이나 물고기가 존재할수 없는것도 아니고, 물고기가 없다하여 조약돌이나 바람이나 산이 소실되는것도 아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들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한다. 왜 그리워한다고 시인은 말하고있을가 . 그것은 이 땅의 모든 사물의 존재는 어떤 유대를 가자고있기때문이다. 어떤 유대인가. 우선 지구라는 이 대지우에서, 하늘이라는 이 사물아래에서 공존하는 사물들이다. 시인은 공존을 말하는데 공존하는 자체가 바로 비우는것이고 비우는것은 공존에 의하여 성립된다는 철리를 성립시키려고 시도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비움과 존재의 대립되는 사물들의 조화로움과 통일을 노래하고있겠다. 그다음 3행은 세번째 내용으로서 시인은 환상의 날개를 활짝 펴고 훨훨 날고있다. <<바위속에 해살로 들어가>> 본다. 해살이 되어 바위속으로 들어간다는 환각적인 시구는 상당한 매력과 시적비약의 운치를 현시한다. 이 시구는 과도구로서 앞에서 읊조린 이미지들이 형이하적이였다면 뒤의 시구들은 형이상학적이다. 바위속에서 시인은 무엇을 보아냈는가? 시인이 보아낸것은 바위속에 돋은 화산의 정열, 이끼의 작은 사랑 그리고 간밤의 별자리다. 여기에서 <<돋아있다>>는 언어의 사용이 이색적이다. 앞에서 렬거한 <화산의 정열>>도 <<이끼의 작은 사랑>>도 <<간밤의 별자리>>도 돋을수 없는 현상이지만 시인은 <<돋아있다>>는것으로 우리들에게 그것들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꾀한다. 이것이 바로 시어와 일상어의 구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의 언어작업이라겠다. 황차 보이지 않는것을 보여주고 들리지 않는것을 들려주는것이 시적장치의 중요한 수법임에랴. 비워서 가득한 하늘 넘쳐서 흐르는 강물/어데라 없이 강물소리 넘친다/세상 모든 자리는 비여서 우주가 출렁인다 마지막 세행이다. 이 마무리가 바로 우의 흐름에 대한 총화이며 시인이 말하고저 하는 핵심이며 추구이다. 비움과 참의 대립면의 통일이나 련결 및 그 동일성. 비여서 가득한 하늘과 비여서 출렁이 우주라는 이 대립적존재와 조화로움이 바로 시인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의 세계이며, 사물의 생명운동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이 세상에 만물이 존재할수있는 리유이며, 사물들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게 되는 바탕이다. 총적으로 이 시를 두가지 각도로 구성을 살펴볼수 있다. 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면으로 확장되다가 환상의 수법으로 다시 해부한후 결말을 도출해내는것이 한가지 방법이고 . 형이하로 출발하여 형의상으로의 전환을 이룩하면서 철리적 마무리를 도출해 내는것이 또 한가지 방법이겠다. 언어사용면에서 지적할것이 있다. <<물은 골짜기를 채워도 천지가 들어있다>>는 시구인데 필자의 생각에는 <<물은 골짜기서 실오리 늘여도 천지가 들어있다>>로 하면 큰것과 작은것의 대립의 조화가 더 도드라질것 같은 감이 든다. 제4기에는 김현순씨의 <<꽃>>이 이채롭다. 시란 어떤것이며 어떻게 써야 하겠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시인은 꽃나무가 소녀이고 소녀가 꽃나무이며 꽃망울이 소녀의 젖가슴이고 소녀의 젖가슴이 꽃망울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시로 다듬어놓았다. 하나는 식물의 일종이고 하나는 소녀이고 소녀의 젖가슴인데 이런 비유가 왜서 성립되는가? 꽃망울도 동그랗고 소녀의 젖가슴도 동그래서 그럴가? 꽃망울이 꽃을 키우고 피여나게 하는것과 소녀의 젖으로 후대를 키울수 있다고 해서 그럴가? 색깔이 고운 희한한 꽃을 품고있는 꽃망울의 신비성과 청춘을 사로잡는 소녀의 젖무덤의 매혹이 비슷해서 그럴가? 아무렴 무엇인들 어떠랴. 시인은 시를 쓸때 세상사물을 얕잡아보고 마음대로 노복처럼 부려먹을수 있는데야. 시의 시작이 지움과 떠올림이다. 지움이란 시적대상의 기성관념을 지우는것이며 떠올림이란 시를 쓰기위한 새로운 대상을 떠올리는것이다. 류협은 이러한 수법을 시의 시작이며 관건이라고 하였다. 이 시에서 시인은 소녀로 꽃나무를 대체하고 소녀의 젖무덤으로 꽃망울을 대체시키면서 은유적인 수법으로 조화를 꾀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시적매력이 점수를 딴다.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인 시적사유의 산물이며, 새로운 창의이며, 꽃에 대한 새로운 표현이라겠다. 시인은 이렇게 새롭게 시를 쓸수 있는 기초를 닦아놓았다. 좀만 시적예술에 능하면 아래는 별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언어에만 신경쓰면 시가 탄생하게 되는것이다. 제목은 꽃이였지만 꽃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고 소녀와 소녀의 젖가슴을 떠올린 시인은 젖가슴이라는 핵심적인 이미지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두사물의 혼연일체를 부드럽고 정이 자르르 흐르는 언어로 엮어놓았다. 시인은 시적변형물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그려내고있다. 시적변형물을 잡은다음 그 변형물의 움직임으로 시를 쓰는가 아니면 이모저모로 립체적인 해석을 가하는가 하는 문제는 시창작에서 자못 중요한 갈림이다. 대개 시는 이 두가지 방법으로 쓰기가 일수인데 결과는 자연히 다르게 마련이다. 김현순시인은 꽃망울과 소녀의 젖가슴이 혼연일체속에서 별빛, 나비, 벌, 아침해살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있는가를 섬세하게 그리고있다. 그래서 계렬화된 아름다운 경상, 명징한 그림. 매혹스러운 장면들이 우리 눈앞을 스치게 한다. 그림으로써 울림을 주고 미적향수를 준다. 김현순시인이 눈박은것은 새로운 이미지 창출이다. 그의 시에 의하면 시는 시인의 관념을 드러내는것이 아니다. 그의 이미지 창출은 사물의 모방이나 재현에서 온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물의 화해와 련결 그리고 조화속에서 사물의 운동을 통하여 표현된것이라고 함이 아마 가장 적절할것이다. 그런데 시화전에서 볼라니까 동시도 <<꽃>>이라는 제목으로 썼는데 이 시와 완연한 시였다. 어느 시가 먼저 창작된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런 장난은 삼가하는것이 바람직하겠다. 제5기 강효삼시인의 <<종소리>>를 보고 필자는 이런 축하를 보내였다. 어 효삼씨 축하! 오늘 <<연변문학>> 5기를 가져다보았지. 먼저 시부터 보는놈인데 보다가 당신의 <<종소리>>올가미에 걸려서 흰둥 넘어졌어. 하늘은 가없이 푸른데 흰구름 두어송이가 둥둥 떠있었지. 그리로 당신의 종소리가 짜르릉 짜르릉 울려가지 않겠나. 무지개 같은 칠색의 종소리가 비끼는것을 보노라고 한식경이나 멍청해졌어. 참 멋있는 시데. 청나라 왕국유(王國維)가 하던 말이 생각나데. 사는 경계(境界)를 최고로 삼는다했잖아. 경계가 있으면 스스로 격이 높아지고 명구가 절로 생긴다 했잖아. 경계란 당신도 알지 쉬운말로 하면 뜻이 있는 경물의 모임이지. 경이 없으면 정이 산생하지 않고 정이 없으면 경이 나오지 못하지. 바로 당신의 <<종소리>>가 경과 정, 정과 경이 융합된거지. 참 기쁘게 놀랐단 말이요. 시는 소리를 쓰기 제일 바쁜 제재인데 멋있게 썼더군. 소리를 길을 떠난 나그네라고 ㅎㅎㅎ 참 멋있소. 시가 문을 열자 새로운 대상물을 찾았으니 신선한 이미지죠. 이미지는 워낙 이런거지 . 원사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던 사물을 시인이 직관으로 보아내지. 종소리가 길떠난 나그네라고 ㅎㅎㅎ. 아마 이것이 제일경인 같소. 멋진 대상물이데. 시를 쓸때 좋은 대상물을 잡으면 그야 80프로 먹은 셈이지. 당신은 시작하자마자 먹었더군 ㅎㅎㅎ. 당신의 나그네는 바삐 돌더구만. 돌아오지 않는 길을 종주먹을 쥐고 달려만 가니 말이요. 그래 서라고 소리라도 칠거지, 뭐 소리쳐도 안 서더라구 ㅎㅎ. 그렇지 설택이 없지. 그는 한번 출발하면 늘 바삐 가기만 하는 나그네니까. 출발하기 직전까지 종속에 죽은듯이 가만히 보이지 않게 있다가 일단 출발하면야 그의 달림을 누가 감히 막을수 있을라구. 참 효삼씬 묘하기두 하구만. 발걸음 소리가 정말 들리던가요. 그 나그네를 세우고 정지상태에서 이것저것 바라본것이 아니라 나그네를 움직이게 한것이 참 이쁘오. 만약 세워놓고 여기저기를 뜯어보았더라면 똘가지를 치겠는데. 나그네가 정말 보이던가요. 이것이 당신이 창조한 제 2경이지. 종은 이렇게 아픈 매로 가슴을 비워/출산의 울음소리 만드네/ 비우고 또 비운 배속 가득/끝없는 울음소리 채우며/ 이것이 제3경인가. 이크 며자를 잘못 쓴같아 응당 -네나 -다로 종결지어야 하지 않을가. 이건 내 생각. 아주 철리적이죠. 종은 정말 그렇지 . 속은 비였는데 누가 두드리면 소리를 날려보내지. 그속엔 숱한 소리가 있지. 때리는데 따라 소리의 높고 낮음이 다르고 음량이 다르고 질감이 다르지만 아무튼 아무리 보내도 그냥 소리가 무한대로 쌓이여있지. 그렇지 당신 시정대로 하면 억만의 나그네들이 종속에 갇히여있으면서 출발을 대기하고있을거야 . 비우다와 찬다는 반대어인데 참 잘 써먹은 같아. 빈것이자 찬것이고 찬것이자 빈것이라 어느 절당에 찾아가서 불교의 념불을 주절거렸나보지 ㅎㅎㅎ. 한번 가면 오지 않는 나그네 그것이 생활이며 인생이지. 내가 지금 효삼씨와 말하는 사이에도 그냥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이 똑딱거리며 가고있소. 실상 현재라는것도 없는같아. 그냥 과거가 점철된뿐인같아. 미래와 과거사이에 현재가 있는데 현재는 바람처럼 한번 슬쩍 스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단말이요. 아마 돌아온다는건 영원히 희망사항이 아닐가 ㅎㅎㅎ. 제4경이. 아직 잠들어있는 그 누구인가를 /소리쳐 깨우기 위하여//전번에 <<님의 눈빛>>을 성냥이라고 하면서 나를 깨우더니 이번에는 종소리로 나를 깨우는구만. 근데 종소리가 더 좋아. <<님의 눈빛>>은 류사성 냄새가 나지만 종소리는 쫄닥 새거야. 이 나그네가 효삼씨한테 메달 하나를 달아준 같아. 참 신선하고 기발하고 시적이야. 시란 뭐겠소.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시인만이 발견한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거지. 나도 당신의 <<종소리>>를 보기전에는 종소리속에 돌아오지 않는 나그네가 있다는걸 생각도 못했소. 종주먹을 쥐고 달려가는 나그네. 종은 나그네를 보내고도 더 많은 나그네를 갖고 있다는걸. 달려가는 나그네들은 아직도 자고있는 사람을 깨운다는걸. 그바람에 나도 깨도가 갔어. 여기서 종소리는 나그네란 내함을 가질뿐만 아니라 새로운것에 대한 추구이고 새로움자체였소. 당신만이 정을 부여한 새로운 나그네는 2중3중의 의미를 가진 뚱보야 뚱보. 의경이 독특하고 째여서 읽을 멋도 있고 흔상할 가지도 있어서 좋았소. 앞으로 이런 시를 많이 쓰기를 ㅎㅎㅎ. 축하! 제6기를 보고나니 동시들이 좋았다. 일년에 한번씩 내는 동시. 시적이미지가 자연물과의 융합으로 이루어진것이 특징적이였다. 자연은 시의 중요한 모체로서 자연은 시를 낳는다. 이점을 절대 홀시할수 없다. 모두 6수인데 다섯수가 자연이미지로 시를 풀어내려갔다. 그중에서 한석윤시인의 <<할머니네 배나무>>, 최문섭시인의 <<새날이 온다>>, 김욱시인의 <<가랑잎>>, 김철호시인의 <<파도와 빛>>이 필자의 눈길을 끓었다. 구체적으로 분류해보면 <<할머니네 배나무>>와 <<가랑잎>>은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새롭게 변형시킨것이고, <<새날이 온다>>와 <<파도의 빛>>은 자연현상에 대한 시인나름대로의 새로운 변형적추구이다. <<할머니네 배나무>>는 배나무를 <<종지부>>로 둔갑시키고, 해, 달 , 바람, 물, 땅과 배와의 융합을 여러 가지 방면으로 해석하였고, <<가랑잎>>은 가랑잎이 눈길우에서 <<또박또박 받아쓰기>>를 어떻게 하고 외우는가를 시적주인공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고있다. <<새날이 온다>>는 수탉의 닭볏을 잡고 날개의 사이 잔등에 앉아온다거니 새별의 빛줄기를 밟고 새날이 온다고 한다. <<파도의 빛>>은 빛이 도망치려하나 파도가 놓아주지 않아서 실랑이질 한다고 한다. 모두가 자연현상에 대한 시인의 새로운 해석으로써 우리 앞에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있다. 자연적인 이미지로 시를 쓰는 수법은 성인시에서도 절대 홀대할수 없는것이다. 시란 인생과 자연의 섭리를 새롭게 발견하고 해석하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인류도 자연의 한 속물이므로 자연을 떠나서 운운할수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자연물과 자연현상속으로 시상을 새롭게 파고 들거나 이미지를 구사하는것은 시인들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중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어찌 보면 모든 시는 자연을 떠날수 없으며 자연속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추출하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천지인설을 떠나서 시라는것은 태여날수 없는 운명임에랴. 나오는 말 2009년 <<연변문학>>상반년의 시를 보고 필자는 이런 말을 하고싶다. 1978-2008년의 <<중국우수시가>>를 편집한 북경사범대학문학원 박사도사인 장청화는 서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시는 마땅히 모든것이 변형이여야 한다.>> <<기교는 제일 마지막에 문학작품의 질을 결정짓는 <유일한 > 요소이다.>>시는 변형, 이 명제는 시가 탄생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또 영원한 래일까지 시본체론의 핵심으로 될것이다. 현실의식흐름의 조류속에서 시를 찾을것이 아니라 당신의 무의식속으로 들어가 시성으로 시를 찾아야 시같은 시가 나올것이다. 그래서 시는 언제나 독자와 낯설게 만나게 되는것이다. 낯설기에 난삽하다는 말로 부정해서는 안된다. 독일당대시인가운데서 가장 커다란 명성과 가치를 인정 받는 첼란의 시도 낯설었다. 낯설어서 일부 사람들이 난삽하다고 하였다. 왜 시가 낯설게 되는가. 시인은 현실사물의 실체를 변형시켜 독자앞에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언어의 일반적인 의미와 개념의 령역을 넘어나게 되는것이다. 시가 몽롱하다 난삽하다는것은 시자체의 특성으로서 나무릴바가 못된다. 시는 원래 그렇다. 시는 변형된 표상의 행진이다. 표상속에 인간의 감정이 용해되여 있어 흔상의 가치를 산생하는것이다. 이미지는 변형을 통하여야만이 참신해 진다. 변형이라는 이 작법이 시의 질을 결정하는 마지막의 <<유일한 요소>>인지도 모른다. 시는 예술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시의 예술은 변형을 통해서만이 가능해진다. 변형은 이미지와 언어의 폭력적조합에 의하여 산생된다. 변형은 현대시의 문턱이며 시문학의 본체론이다. 우리는 이 문턱을 넘어 시의 본체론속으로 들어와야 할 박절성과 긴박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몇기에 걸쳐 <<시교실>>이란 커트를 달고 신인들의 시를 내보냈는데 별로 인기가 없었다. 많은 시들은 아직 시가 되지 않고 시적소재상태였다. 우상렬박사가 제4기의<<시교실>>의 시를 보고 마지막에 <<현대시의 시각에서 볼 때 은유, 상징, 역설 등을 통한 이미지화를 구상하는 수법을 많이 강구했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움을 내놓았는데 적중하다. 이 말씀은 시의 기본인 변형이 안되였다는 말씀이며 시가 아직 여물지 못했다는 말씀이다. 차라리 이런 커트대신 중국과 외국의 현대명시 같은것을 보여주는 명시커트를 하나 꾸렸으면 좋을 같다. <<연변문학>>은 참신한 변형으로 쓴 시들을 대량으로 산출하지 못하고 있다. 좀 선도적이고 전위적인 작용을 발휘할수 있는 시, 계몽시경향을 뒤로 하고 시적예술을 앞세우는 시를 대두로 새로운 개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2009년 7월 8일, 서재에서
78    중국의 저명한 리론가 왕국유어록 댓글:  조회:1642  추천:36  2009-07-03
왕국유(1877-1927) 어록 왕국유(王國維)는 중국근대 중요한 사학가이며 미학가 문예리론가이다 그의 <<인간가화>>(人間詞話)는 미학과 문예리론의 중요한 저작이다. 자는 정안(靜安)이고 호는 관당(觀堂)이다. 아래에 그의 어록을 정리한다. 시란 어떤것인가를 알게 될것이다 시는 경계(境界)가 최상이다. 경계가 있으면 자연히 격이 높아진다. 5대북송사가 절묘한것은 경계가 있기때문이다. 문학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경(境)이고 다른 한가지는 정(情)이다. 전자는 자연과 인생사실을 주로 묘사하는것이고, 후자는 내가 그러한 사물이나 정서에 대한 정신적 태도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객관적이고 후자는 주관적이다 (1) 문학이란 자신의 내심을 잘 진술하여 남을 감동시키는 일로서 의(意)와 경이다. 우수한자는 의와 경을 융합시킨다. 그러지 못한자는 경이 의보다 났거나 의가 경보다 났다. 어느 한가지가 모자라면 문학이라 말하기 어렵다. (2) 경은 만들기도 하고 묘사하기도 한다. 이것은 리상파와 현실파가 구별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경계는 분별하기 어렵다. 대시인이 허구한 경계는 꼭 자연에 부합되여야 하고 경계를 묘사하는것도 꼭 리상의 경지에 접근하여야 하기 때문이다.(3) 유아지경(有我之景)과 무아지경(無我之景)이 있다. ...유아지경은 내가 사물을 관찰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에 나의 감정색채가 묻어있다. 무아지경은 사물로 사물을 보는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사물인지 사물이 나인지 분별이 가지 않는다. 옛사람들이 시를 쓸때 유아지경이 다수이고, 무아지경을 쓴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것은 걸출한 사(詞)인들만이 과감하게 자기의 기치를 세우기 때문이였다. (5) 무아지경은 마음의 고요속에서 얻어지는것이고, 유아지경은 격동이 눅잦혀진다음에 얻어지는것이다. 그러므로 우미하고 웅위롭고 장려하다. 아름다움은 사물에서 오고, 아름다움은 사람들과 리해관계가 없다. 사람들은 아름다음을 감상할 때 자기와 어떤 리해관계가 있는지 모른다. (7) 자연속의 사물은 서로 련계되기도 하고 서로 제약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으로 만들려면 반드시 그것들의 원래의 관계나 제약의 상태를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실가(寫實家)도 리상가에 불가하다. 다른 방면으로 어떠한 허구의 경계도 그것들의 재료는 필연적으로 자연에서 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조직결구가 자연의 법칙과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리상가라 하여도 사실가인것이다.(9) * 사실가는 현실주의 리상가는 랑만주의 경계란 결코 경물묘사만이 아니다. 희노애락도 사람들 마음속의 일종 경계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경물을 쓰고 진실한 마음을 쓴 시라야만이 경계라 할수있다. 그렇지 않으면 경계가 없다고 하겠다.(11) (이에 대한 해설자 릉함혜의 말: 진실한 경물이란것은 경물을 쓸때 묘하게 자연을 만드는것으로서 사물이 신(神)을 얻어야 하지 모방하거나 비슷한 형상을 추구해서는 아된다. 진실한 감정이란것은 감정이 페부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진지하고 심각하여야 하는것이지 허위적이여서는 안되고 무병신음이여서는 안된다. 당연히 진실한 경물과 진실한 감정을 두가지로 나누어서는 안된다. 우수한 시사는 <정은 경물속에 있고>< 뜻과 경물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의경(意境)을 다 잊고 물아일체>가 된다.) 왕국유는 이렇게 요구하였다. 정은 진실해야 하고 경물은 선명하게 써야 하며 글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런것이 경계가 창조하는 예술이다.(88) 시인은 반드시 밖의 경물을 경시하여야 한다. 그래야 바람, 구름 , 달 ,이슬을 노복처럼 다룰수 있다. 시인은 또 반드시 밖의 경물의 뜻을 중시하여야 한다. 그래야 꽃, 새, 곤충, 고기와 동고동락할수 있다.(92) 경계는 대단한것과 작지만 묘한것이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렬이 나누어지는것이 아니다. (14) 시인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사람이다(25) * 적자의 맘이란 동심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격조가 높고 아름다운데는 강사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의경에 공력을 들이지 않은것이 아쉽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언어밖의 의미가 결핍하고 현금줄밖에서 다른 소리가 나지 않아서 결국에는 일류시인의 행렬에 들어서지 못하였다. (70) 86쪽에서 제목에 대한 말을 하였는데 릉함혜는 이런 해석을 달았다 작가는 무리해 무욕망의 심미경계로 들어가야 한다. 현실정치의 리해관계와 공명공록의 현실을 초월하는 리념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시는 제목이 있으면 죽고 사는 제목이 있으면 죽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문학이 정치를 위하여 복무하거나 개인의 공로나 실리를 따지는 공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이것이 왕국유가 주장하는 문학에 제목이 없어야 한다는 진짜 뜻이다. (87) 당조중엽이후 시가 접대에 응하는 공구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5대북송시처럼 우수한것이 매우적었다... 남북송 이후에는 사가 접대에 응하는 공구로 사용되였다 그래서 사도 쇠락의 길로 나아갔다. 이것도 문학이 흥으로부터 쇠락으로 간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다.(98)
77    죽었다 살아난 박장길의 시 댓글:  조회:991  추천:14  2009-06-18
두보 백거이가 민중시를 썼지만 당시 민중보다 하늘 높이에 있었다고 합니다     부정 나는 총을 들고 돌아서서뒤에 있는나를 쏘아눕혔다 불의습격으로나를 쏜나의 총구는 대포아구리만하다 나는 둘일수없다나의 총에 쓰러진나를 세월이 묻어줄것이다 삼십년을 키워온나의 죽음을 뒤로하고돌아서서 봄을 딛는 나   09,6,17
76    영원히 살아있을 시 김창석의 <<순금>> 댓글:  조회:912  추천:22  2009-06-16
김창석시인은 1923년 조선함경북도 명천군 출생 1946년 1949년까지 교원생활 1950년부터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연변문예 아리랑 연변문학 연변등 잡지 문예편집 부주필력임후에 연변가무단 창작원으로 사업. 1991년 병사 생전에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리사 시집<꽃수레>1986년 연변인민출판사출판
75    로신문학원에서 보내온 박장길 어록.6 댓글:  조회:1574  추천:17  2009-06-05
시속에서 사물이 운동한다는 진리와 무의식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이 땅의 최초의 시이며 최후의 시이며 영원한 시의 진리임을  나는 알았습니다
74    로신문학원에서 보낸 박장길 어록.5 댓글:  조회:1322  추천:23  2009-06-03
문심조룡을 깊이 아는 한작가와의 술상에서....중국사람이 7프로밖에 중국문화를 모르고있다 93프로는 짐승수준이다 고아문학가는 전복하는 일이다 끝없이 전복하는 일이다 전복 또 전보!하지만 난 이빨에 명태가시가 끼여 지금 고생입니다           ( 2009.6.2)
73    어 효삼씨 축하! 댓글:  조회:1545  추천:21  2009-06-02
어 효삼씨 축하! 어 효삼씨 축하! 오늘 연변문학 5기를 가져다 보았지. 먼저 시부터 보는 놈인데 보다가 당신의 <<종소리>> 올가미에 걸려서 흰둥 넘어졌어. 하늘은 가없이 푸른데 흰구름 두어송이가 둥둥 떠있었지. 그리로 당신의 종소리가 짜르릉 짜르릉 울려가지 않겠나. 무지개 같은 칠색의 종소리가 비끼는것을 보노라고 한식경이나 멍청해졌어. 참 멋있는 시데. 청나라 왕국유(王國維)가 하던 말이 생각나데. 사는 경계(境界)를 최고로 삼는다 했잖아. 경계가 있으면 자연히 격이 높아지고 명구가 절로 생긴다면서 5대 북송사가 비할데 없이 절묘한것은 바로 경계가 있기 때문이랬지. 경계란 당신도 알지 가장 쉬운말로 하면 뜻이 있는 경물이지. 그래 맞아 뜻과 경물이 하나로 융합되여있는거지. 경이 없으면 정이 산생하지 않고 정이 없으면 경이 나오지 못하지. 바로 당신의 종소리가 경과정, 정과경이 융합된거더란 말이오. 참 보고 놀랐소 기쁘게 놀랐단 말이요. 시는 소리를 쓰기 아마 제일 바쁜 제재인데 멋있게 썼더군요. 한번 차비하고 길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나그네/ 시작이 시원하고 새로워서 참 인기스러웠소. 소리를 길을 떠난 나그네라고 ㅎㅎㅎ 참 멋있소. 시가 문을 열자 새로운 대상물을 찾았으니 신선한 이미지죠. 이미지는 워낙 이런거지 . 원사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던 사물을 시인이 상상에 의하여 균형을 잡고 조화를 시킨단 말이요. 종소리가 길떠난 나그네라고 ㅎㅎㅎ. 아마 이것이 제일경인 같소. 퍼뜩 떠오른 이미지요? 아님 오래동안 맘을 먹고 종소리를 생각하다가 문뜩 떠오른거요 . 아무래면 뭐라나 멋진 대상물인데. 시를 쓸때 좋은 대상물을 잡으면 그야 80프로 먹은 셈이지. 당신은 시작하자마자 먹었더군 ㅎㅎㅎ. 돌아오지 않는 소식을 가지고 /어디로 그렇게 종주먹 쥐고 /바쁘게 가고 있는가/멀리 사라지는 발걸음소리/ 당신의 나그네는 바쁘기도 하구만. 돌아오지 않는 길을 종주먹을 쥐고 달려만 가니 말이요. 그래 서라고 소리라도 칠거지, 뭐 소리쳐도 안 서더라구 ㅎㅎ. 그렇지 설택이 없지. 그는 한번 출발하면 늘 바삐 가기만 하는 사람이니까. 출발하기 직전까지 종속에 죽은듯이 가만히 보이지 않게 있다가 일단 출발하면야 그의 달림을 누가 감히 막을수 있을라구. 참 효삼씬 묘하기두 하구만. 발걸음 소리가 정말 들리던가요. 그 나그네를 세우고 정지상태에서 이것저것 바라본것이 아니라 나그네를 움직이게 한것이 참 이쁘오. 만약 세워놓고 여기저기를 뜯어보았더라면 똘가지를 치겠는데. 나그네가 정말 보이던가요. 이것이 당신이 창조한 제 2경이지. 종은 이렇게 아픈 매로 가슴을 비워/출산의 울음소리 만드네/ 비우고 또 비운 배속 가득/끝없는 울음소리 채우며/ 이것이 제3경인가. 이크 며자를 잘못 쓴같아 응당 -네나 -다로 종결지어야 하지 않을가. 이건 내 생각. 아주 철리적이죠. 종은 정말 그렇지 . 속은 비였는데 누가 두드리면 소리를 날려보내지. 그속엔 숱한 소리가 있지. 때리는데 따라 소리의 높고 낮음이 다르고 음량이 다르고 질감이 다르지만 아무튼 아무리 보내도 그냥 소리가 무한대로 쌓이여 있지. 그렇지 당신 시정대로 하면 억만의 나그네들이 종속에 갇히여 있으면서 출발을 대기 하고 있을거야 . 비우다와 찬다는 반대어인데 참 잘 써먹은 같아. 빈것이자 찬것이고 찬것이자 빈것이라 어느 절당에라도 찾아가서 불교의 념불을 주절거렸나 보지 ㅎㅎㅎ. 한번 가면 오지 않는 나그네 그것이 생활이며 인생이지. 날마다 반복으로 사는 같아도 오늘은 오늘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오늘이지. 내가 지금 효삼씨와 말하는 사이에도 그냥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이 똑딱거리며 가고있소. 실상 현재라는것도 없는같아 그냥 과거가 점철된뿐인같아. 미래와 과거사이에 현재가 있는데 엄격하게 따지면 현제는 없지 . 물처럼 바람처럼 한번 스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단 말이요. 아마 돌아온다는건 영원히 희망사항이 아닐가 ㅎㅎㅎ. 제4경이. 아직 잠들어있는 그 누구인가를 /소리쳐 깨우기 위하여//전번에 <<님의 눈빛>>을 성냥이라고 하면서 나를 깨우더니 이번에는 종소리로 나를 깨우는구만. 근데 종소리가 더 좋아. 님의 눈빛은 류사성 냄새가 나지만 종소리는 아무런 류사성 냄새가 없이 효삼씨만이 발견한 나그네같소. 이 나그네가 효삼씨한테 메달 하나를 달아준 같아. 내 둔한 눈길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신선하고 기발하고 시적이야. 시란 뭐겠소.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시인만이 발견한 새로운 소리를 하는거지. 그래서 깨여나게 하는거지. 나도 당신의 종소리를 보기전에는 종소리속에 돌아오지 않는 나그네가 있다는걸 생각도 못했소. 종주먹을 쥐고 달려가는 나그네. 종은 나그네를 보내고도 더 많은 나그네를 갖고 있다는걸. 달려가는 나그네들은 아직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운다는걸. 그바람에 나도 깨도가 갔어. 여기서 종소리는 나그네란 내함을 가질뿐만 아니라 어떤 새로운것을 추구하고있으며 새로운 나그네였소. 당신만이 정을 부여한 새로운 나그네. 그 새로운것으로 남을 일깨워주기도 한다는것을 나타내였지. 그러니가 종소리가 2중3중의 의미를 가진 뚱보야 뚱보. 의경이 독특하고 째여서 읽을 멋도 있고 흔상할 가지도 있어서 좋았소. 경에는 유아경과 무아경이 있는데 아마 종소리는 무아경이겠지. 그래 생각나겠지. 무아경이 유아경보다 한수 높아서 <<걸출한 사인(詞人)>>들이 써먹는거라고 한 왕국유의 말이. 앞으로 이런 시를 많이 쓰기를 ㅎㅎㅎ. 축하!
72    로신문학원에서 보낸 박장길 어록.4 댓글:  조회:1372  추천:18  2009-05-31
최근에 인민출판사에서 일본작가의 책을 번역출판하여 1만여권을 팔았답니다 작년에 그 작가가 왔을 때 자랑하였는데 그 작가는 대노하더랍니다 그것은 대중문학에서 추구하는것이지 고아한 문학의 가치를 저락시키는 짓이라고 질책하더랍니다
71    비통하게 날리는 비명록 댓글:  조회:1298  추천:22  2009-05-25
땅위의 구름장을 열지 못해땅밑으로 간 당신이여 거기 하늘 정말 구름 한장 없이 구름 한장 없이맑단 말씀 임까!
70    로신문학원에서 보낸 박장길 어록.3 댓글:  조회:1367  추천:21  2009-05-22
세상은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리 촌놈들한테 무슨 세계적인 선진사유가 먹혀들어 흥분하고 제멋에 좋아 이러는지, 대시인은 어린아이와 같다고 합데다 호기심많던 아이로부터 의심을 갖는 아이로 된 시인의 자각한 사명감은 무겁다고 생각합니다
69    로신문학원에서 보낸 박장길 어록 .2 댓글:  조회:1556  추천:42  2009-05-20
오늘 강의도 재밌었습니다 장녕이란 교수인데 모든 혁명적문학의 장애를 넘어서 개인주의에로 돌입하라고 모든 협의서술도 광의서술도 원서술도 뛰여넘어서 개인주의에로 돌입하랍니다 아침을 베이징에서 먹고 저녁을 미국에서 먹으며 서로 모르는 사람을 만나듯이 시와 독자는 영원히 낯선사이로 되랍니다
68    꽃과 소녀의 젖무덤과 시 댓글:  조회:1630  추천:25  2009-05-08
꽃망울과 젖무덤과 시 -연변문학4기 김현순시 <<꽃>>을 보고 연변문학 4기에 실린 김현순의 시 <<꽃>>을 보고 시란 어떤것이며 어떻게 써야 하겠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시인은 꽃나무와 소녀, 꽃망울과 소녀의 젖가슴에다 등호를 치고있다. 꽃나무가 소녀이고, 소녀가 꽃나무이고, 꽃망울이 소녀의 젖가슴이고 소녀의 젖가슴이 꽃망울이다. 이 등호가 왜 성립될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는 식물과 식물의 한 부분이고 하나는 소녀와 소녀의 한부분이다. 그런데 시인은 다 같은것처럼 생각하고 시를 짓는다. 꽃망울도 동그랗고 젖무덤도 동그래서 모양이 비슷하다고 그랬을가? 꽃망울도 새로운 생명을 품고 키우고 젖무덤도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것이여서 그랬을가? 색깔이 고운 희한한 꽃을 품고있는 꽃망울의 신비성과 청춘을 사로잡는 숫처녀의 젖무덤의 매혹이 비슷해서 그랬을가? 아무렴 무엇인들 어떠랴. 시인은 시를 쓸때 맘대로 할수 있는데야. 시의 시작이 지움과 떠올림이라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 지움이란 시인의 잡은 시적대상의 기성관념을 지우는것이고 떠올림이란 시를 쓰기위한 새로운 대상을 구상하여 떠올리는것이다. 이렇게 하는것을 류협은 시의 시작이고 관건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시인은 꽃나무와꽃망울이라는 기성관념을 버리고 소녀와 소녀의 젖가슴이라는 새로운 사물을 시에 등장시키면서 시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꽃나무의 꽃망울과 소녀의 젖가슴은 완전히 성질이 다른 사물인데 시인은 두 사물사이를 화해시키고 조절하여 동일한 사물로 만들어버리였다. 여기에 바로 이 시의 매력이 있지않을가. 시인의 창조적로동의 사유와 령혼활동의 새로움이 여기에서 표현된다고 하겠다. 이런 창조적인 로동은 시를 시로 되게 하는 관건문제를 푸는 일이라고 하겠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김현순시인의 <<꽃>>을 읽어보면 시맛이 더 나리라고 생각된다. 꽃 김현순 언제부턴가 소녀는 가슴이 부풀기 시작했습니다 날따라 커가는 행복을 안고 소녀는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밤이면 별빛이 찾아와 어루쓸어주고 낮이면 벌, 나비들이 입맞춰주었습니다 소녀의 가슴은 날로 태앵탱 부풀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소녀는 파란 하늘을 향해 조용히 가슴을 열었습니다 이윽고 투명한 향기가 세상을 부드럽게 감싸 안을 때 찬란한 아침해살이 내려와 백설같이 하얗고 싱싱한 소녀의 가슴을 따사롭게 애무해주었습니다 해체와 조립으로 시의 시작을 한 김현순시인은 전반시에서 꽃망울이 자라나서 꽃을 피우는과정과 소녀의 젖가슴이 부풀어 열리는것과의 관계를 혼연일치로 상상하면서 부드럽고 정이 자르르 흐르는 언어로 엮어놓았다. 전반시에 시인의 어떤 주장이나 개념을 부여한 시구가 없다. 시인은 꽃망울과 소녀의 젖가슴의 움직임과 별빛, 나비, 벌, 아침, 해살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있는가를 시에서 보여주고있을뿐이다. 그래서 계렬화된 아름다운 그림들이 우리 눈앞을 흘러지난다. 이 그림들이 독자의 마음을 흔들며 울림을선사하고 아름다운 심미적향수를 누리게 한다. 시인이 눈박은것은 이미지 창출이지 어떤 관념을 드러내기위한 작업이 아니다. 시인이 눈박은것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작업이였다. 시의 이미지를 고찰해보면 이미지는 어떤 사물의 모양이나 성질을 그대로 써서 되는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물의 화해와 련결속에서 사물의 운동을 통해서 표현되는것이라는것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시인의 작업은 오늘의 시를 혁신하여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없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2009.5.8
67    가사와 시의 다른 점 댓글:  조회:1316  추천:10  2009-05-07
가사와 시의 다른 점 지금 <<해란강 여울소리>>를 통하여 가사들이 전례없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있다. 이는 우리의 문화생활을 풍부하게 가미하고 있어 많은 가사창작자들의 사랑과 작곡가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가사와 시는 모두 운문에 속하는것이지만 량자는 엄격한 구별이 있다. 이런 구별을 잘 아는것은 가사창작에 미상불 도움이 되고 시창작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필자의 졸견을 말하고저 한다. 가사는 말그대로 노래말이다. 시는 노래말이 아니다. 가사는 한번 노래를 부르면 인차 알아들을수 있는 언어로 된 말이다. 가사의 언어는 직설이 많아야 하고 구두어로 된것들이 많아야 한다. 그러나 시는 그렇지 않다. 시어는 직설적인 본의로 씌여지는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경우에 시는 전의로 씌여진다. 시는 일상적인 구두어로 씌여지더라도 그 언어의 함의가 새로운 내용을 표현하는것이여야 한다. 시에서 직설은 금물이다. 직설로 씌여진 시어는 생경하고 산문화한 언어에 속하게 된다. 시에서는 사전을 둘추어보고 알 수 있는 말을 마음대로 쓸수있지만 가사에서는 사전을 번져보고 알수 있는 말을 삼가하게 된다.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내용이 전달되여야만 하는 가사는 남들이 모르는 사전적언어를 삼가는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어는 모름지기 상징적언어로 조직되지만 가사언어는 상징적언어로 조직되지 않아도 되는 때가 많다. 시인들은 시를 쓸 때 성질이 다른 언어조합이나 공감각같은 여러 가지 언어조합을 내세우면서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특권을 향수하게 된다. 물론 가사도 언어를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시처럼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이제까지 쓰지 않던 새로운 언어조합을 하면 대중성을 상실하게 되여 가사의 맛을 잃을 가능성이 나타나게 된다. 시어는 새로운 문화적인 언어창조를 중시하지만 가사언어는 소박하고 통속적인 언어에 모를 박는다. 가사어의 받침은 ㄴ, ㄹ,ㅁ, ㅇ 와 같은 부드럽고 유연하고 열린 유향자음을 쓰는것이 좋지만 시는 그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시와 가사의 구성은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방식을 쓰게 된다. 시는 어떠한 사물에 대한 시인의 새로운 느낌을 쓰게 되므로 종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경우가 많지만 가사는 시인의 새로운 느낌보다도 대중의 느낌을 종합하여 병렬적으로 꾸미는것이 일상적인 구성이다. 그래서 시는 1련,2련이라고 하고 가사는 1절, 2절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가사는 일상적으로 삼절이상을 쓰는 경우가 매우 희소하지만 시는 네다섯련을 쓰기가 일수이다. 예전에는 가사를 세개절로 쓰던 되로부터 지루하다고 생각되여 지금은 두절로 쓰기가 보통일이 되였고 한국에서는 두절도 길다고 생각되여 한절로 나오는 가사들이 많다. 하지만 시는 이런 경우를 그냥 고려하지 않고있다. 시인이 생각한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열련 스무련이라도 마음대로 쓰고있다. 가사는 곡을 붙혀 노래를 부르기 위한 것으로써 곡이 붙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가사라도 별 볼 일이 없게 되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시는 곡을 붙이기 위한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홀로서기를 할수있는 것이다. 시에 곡이 붙어서 널리 전파되는 시가 있는데 이때의 시도 가사인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은 시이다. 시에 곡이 붙으면 시가 가사로 탈바꿈하는것은 절대 아니다. 아직까지 가사시라는 말이 따로 없는것이 그렇기때문이 아닐가. 시는 몽롱미를 강조하지만 가사는 몽롱미를 강조하지 않는다. 시의 몽롱성에는 사유의 오묘함과 철학의 미묘성이 있지만 가사는 시같은 이런 몽롱미를 찬성하지 않고 오히려 금구로 취급하게 된다. 시는 상징이나 은유를 기초로 간접비유를 쓰는것을 기본 수법으로 하지만 가사는 <<-처럼>>,<<- 마냥>> 등 보조적 수사수단을 동원하는 직접비유를 쓰기가 일수이다. 시가 아름다운 몽롱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시적사유는 일상적사유의 밖에서 사유할 때만이 그 시가 아름다운 시로 되기때문이다. 하지만 가사는 일상적인 사유를 아름다운 말로 엮어놓으면 빛이 나는 경우가 너무도 많고 일상적인 사유의 밖에서 가사를 쓰면 도리여 생경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사는 시보다 흔상적인 가치가 적은것이다. 시와 가사를 놓고 보면 가사는 리해가 인차 되지만 시는 리해가 인차 되지 않는다. 어떤 시는 100년후에야 리해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시는 가사보다 내용면에서도 깊이가 더 깊고 넓이가 더 넓다. 시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가사를 쓸수 있지만 가사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시를 쓴다고 하기 어려운것이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시와 가사는 쓰는 수법이 다르다. 가사는 자기의 생각을 곧이 곧대로 말해도 되지만 시는 생각나는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사실로 표현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시는 말밖에 말이 있다고 한다. 가사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쓰면 되지만 시구가 이러할 때는 개념적인 직설구여서 찬성하지 않는다. 시는 이미지로써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것을 표현하게 된다. 가사의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그려놓은 그자체이지만 시의 이미지는 그려놓은 자체가 아니다. 나는 다신을 사랑합니다를 시로 표현할 때에는 <<나는 당신의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새>> 라고 할수도 있고, <<당신의 얼굴은 보름달/당신의 가슴엔 두송이 차란한 별/당신의 배엔 따슨한 태양/ 당신은 하나의 우주 /나는 그 우주속의 한포기 풀이라도 되고싶어>> 라고 할수도 있다. 그래서 시는 가사보다 이미지가 더 오묘하고 예술성이 더 강하고 흔상가치가 더 높게 되는것이다. 가사는 변형작업이 너무 심각해서는 안되지만 시는 변형작업이 심각할수록 좋게 되는것은 바로 이러한 원인이 아닐가 생각된다. 가사는 하나의 곡으로 일이절을 부르게 되므로 일절의 행수와 이절의 행수가 같아야 하며, 대응한 각행의 글자수자도 비슷하여야 한다. 그러나 시는 그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일련의 행수가 세행이라면 이련의 행수는 열행이래도 되고 한행이래도 된다. 지어 어떤 시는 한행이 한글자일때도 있다. 행수가 달라도 아무런 병집이 생기지 않을뿐만 아니라 글자수도 시인의 감정에 의하여 자유롭게 배치된다. 가사는 정형적인 모식에 의하여 씌여지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시는 다양한 형식을 갖게 된다. 우리들이 보는 일반적인 서정시형태외에도 어떤 때에는 극처럼 인물도 있고 대화도 있게 쓰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상품광고형식으로 쓰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시적대상물의 모양처럼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법정에서의 원고와 피고 법관의 대화형식을 빌어다 쓰기도 하고... 가사는 절대로 시처럼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게 자유로울수가 없다. 시와 가사는 일반적인 경우에 제재방면에서도 다른 점이 크다. 반영의 형태로서의 가사는 일반적으로 실생활에 대한 반영을 쓰지만 표현으로서의 시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표현형태로서의 시는 생활에서 오지만 생활을 그대로 집중괘괄하는것이 아니라 그것을 상상으로 짝을 찾아 재창조를 하게 된다. 어떤 시의 제재들은 가사로써는 근본적으로 표현할수 없는것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모든 가사는 시로써 다시 가공할수도 있을것 같지만 시중에는 가사로써는 다시 반영할수 없는 경우가 있다. 가사와 시는 다 운문에 속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다른것처럼 완전히 다른 성격의 장르라고 할수있가. 이밖에도 여러 가지 구별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필자는 상기한 면에서 시와 가사의 다른 점을 살펴보았다. 졸렬한 일가견일지도 모르지만 참고하기 바란다.
66    북경 로신문학원 박장길씨가 보낸 어록 댓글:  조회:1567  추천:24  2009-05-06
어제 두번 메일을 보냈습니다 아래에 한작영시인의 말을 보냅니다 선생님의 주장과 많이 같습니다  시는 재현이 아니다 시는 주관적이다 때문에 독자를 찾아 내려오지 말아야한다 낮은 작가가 돼버린다  그리고 반서정이 시작법이며 랑만주의 시는 어린이들의 작난과 같다 명시라고 소문난 많은 랑만주의 시가 따져보면 많은 문제가 있다 시는 나이를 먹고 써야한다 고강도의 체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시는 당구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치여 저것을 넣는 그래서 기교를 련마해야 한다 필기한것을 그냥 적었습니다 어릴 때처럼 종소리는 그냥 듣기 아니좋고 시간에 들어가 앉으면 잠이 쏟아 집니다  박장길
65    시조에 대한 유선 글 절록 댓글:  조회:1504  추천:15  2009-05-01
  1. 시조의 이해 시조는 시이다. 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시인이 될 적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요, 늘 시를 감상하고 시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벌써 시인인 것이다. 시조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와 지혜가 어우러져 탄생한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학의 정수이다. 우리 조상들이 천여 년간 즐겨 짓고 불러 온 이 노래야말로 우리 문학의 종가요 종손이라 할 수 있다. 시조는 여러 문학의 종류 중에서 시에 속하며, 형식적으로는 시 중의 자유시가 아니라 정형시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시가인 한시나 일본의 전통시가인 화가나 배구처럼 엄격한 정형시가 아닌 반 정형시 즉, 정형이면서 비정형의 시라 할 수 있다. 2. 시조의 형식 시조의 기본 형식은 시상을 구성하는데 주로 3 장 6 구 12 음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3 장이란 초장, 중장, 종장인데, 이는 마치 논문의 서론, 본론, 결론의 순서와 비슷하나, 이보다는 한시의 기, 승, 전, 결의 구성법과 일치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시조의 초장은 기에 해당하며, 중장은 승에 해당하고, 종장의 제1구인 3∼5. 6. 7. 8. 9는 전에 해당하며. 그리고 종장의 제2구인 4∼3은 결에 해당한다. 시조의 기본형식에서 3장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동양철학에서 우주의 생성과정의 기본원리인 삼재(三才) 즉, 천(天-·) 지(地-―) 인(人-l)의 논리와도 일치한다. 시조의 기본형식인 3 장 6 구 12 음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다음 노산의 <성불사> 첫 수를 보기로 한다. 초장 : 성불사 / 깊은 밤에 / 그윽한 / 풍경 소리 3 4 3 4 제 1 구 제 2 구 중장 : 주승은 / 잠이 들고 / 객이 홀로 / 듣는구나 3 4 4 4 제 1 구 제 2 구 종장 : 저 손아 / 마저 잠들어 / 혼자 울게 / 하여라. 3 5 4 3 제 1 구 제 2 구 이와 같이 초장의 제1구는 3·4, (성불사 깊은 밤에), 제2구도 3·4, (그윽한 풍경소리), 중장의 제1구는 3·4 (주승은 잠이 들고), 제2구는 4·4 (객이 홀로 듣는구나), 종장의 제1구는 3·5 (저 손아 마저 잠들어), 제2구는 4·3 (혼자 울게 하여라)이다. 그래서 평시조(단형 시조) 한 수는 3 장 6 구 12 음보로 구성되어 있다. 김 준 교수는 내용상의 구성원리를 <현대시조 논단>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시조의 초장이 한시의 기구에 해당하고 중장이 승구, 종장이 전구와 결구로서, 선경 후정(先景後情)이라는 구성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해명되어지고 있다. 한시의 경우 기와 승의 두 구는 서경에 해당하여 시인이 대상을 바라보거나 처해 있는 사물의 객관적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게 된다. 반면, 전과 결의 두 구는 이러한 객관적 사실이나 상황을 통해서 시인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터득된 심정이나 객관적 상관관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조에 있어서도 이러한 선경 후정의 법칙이 꼭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지만 초, 중장이 선경에 해당하고 종장이 후정에 해당함으로써 보다 적절한 시상의 효과와 주제의 심화가 기대된다. 이러한 구성원리는 현대시조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데 종장 첫구의 3자가 바로 선경에서 후정으로 전환되는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호우의 시조 <開花>는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겠다.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이 작품은 꽃이 피어나는 상황을 다루고 있으나, 단지 외부적 상황이나 즉물적 감정에서 다루지 않고 있다. 꽃이 핀다는 사실을 자연 섭리의 이법에 의한 본질적 파악이나 생명에 대한 경외감의 토로야말로 놀라운 수법이다. 다시 말해서 꽃이라는 한 생명이 탄생되는 순간에 온갖 사물인 바람도 햇볕도 숨을 크게 못 쉬는 상황과 더불어 시인 자신도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엄숙한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초장에서는 한 잎 한 잎 꽃이 피는 상태를 마치 닫혔던 하늘이 새로 열리는 것에 비유했고, 중장에서는 마지막으로 한 잎이 피는 모습을 노래함으로써 선경이고, 종장에 와서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시인 자신의 심정을 보임으로써 후정에 속하고 있다. 결국 이 시조는 대상인 사물과 서정적 자아가 우주의 질서 속에 관계를 맺고 합일화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3. 시조의 종류 지금까지 시조의 구성원리와 가락의 본질을 평시조 즉 단형 시조에 국한하여 기술하였다. 그러나, 기본 시형이 너무 엄격하여 답답하다고 느낀 나머지 엇시조(중형시조)와 사설시조(장형시조) 등의 변형을 만들어 냈고, 또 평시조를 두 수 이상 연결시킨 연시조 즉 연형 시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를 예를 들어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평시조(단형 시조) 평시조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본형식이 3 장 6 구 12 음보로서 45자 내외가 되는 시조를 일컫는다. 다음, 노산 이은상의 <개나리> 전문을 보자. 매화꽃 졌다 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답장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을 차마 쓰기 어려워서. 이 시조의 구성이 <3·4·3·4 / 3·4·3·4 / 3·5·4·4>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창작된 동기는 무엇일까? 한 여자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매화꽃이 졌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게 사랑을 고백하는 암시임을 알아차린 여자가 \"개나리는 지금 한창입니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남자는 그 여자를 무척 사랑하지만 여자에 비해 나이가 많다든지, 아내를 잃은 처지라든지, 아니면 다른 여러 결함을 가졌으므로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 쪽에서는 그런걸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인생의 봄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창 즐길 수 있는 시절이므로 얼마든지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대답이었다. 조심스런 고백을 받고, 참으로 뜨겁게 암시하여 보낸 멋진 답장이었다. 시인은 그런 편지의 사연을 놓치지 않고 시조로 만들었다. 산문으로 쓰면 상당히 긴 설명이 붙어야 하겠으나 시조의 초장과 중장으로 처리한 다음, 종장에다가 시인의 견해로 마무리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조 속에는 세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다. 노산의 시조 <개나리>는 간결성과 함축성을 잘 살리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 언어예술이다. 자연의 계절 감각을 빌어다가 인생의 계절 감각으로 나타낸 것이 \"매화꽃\"과 \"개나리\"다. 따라서 이는 인생의 봄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 뜻을 빌어 남자는 사랑을 구하고, 여성은 더 적극적으로 불타도록 이끌고 있다. 그 같은 세계에 시인이 뛰어들어 두 주인공이 상징으로 내세운 매화꽃과 개나리의 뜻이 사랑이 흐드러지게 꽃피는 인생의 계절임을 한마디로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2) 엇시조(중형 시조) 엇시조는 평시조의 기본형식인 3 장 6 구 12 음보에서 종장을 제외한 초장이나 중장 중 어느 한 장의 길이가 한 구 더 길어진 형식의 시조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3 장 7 구 14 음보로 구성되는 것이다. 즉, 초장 중장 중 어느 한 장이 기본형식보다 3·4나 4·4자가 첨가된 시조이다. 고시조에서는 여러 작품이 보이나 현대시조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고추밭에 익는 사랑 목화밭에 피는 구름 마을 큰애기는 그리움을 치마로 갈아입는다 모시베 고실고실한 쪽물 자락치마로. -장순하의 <숙추(熟秋)> 제1수 윗시조의 중장 제2구에 \'갈아입는다\'가 덧붙어 늘어난 엇시조이다. 여기서 시인은 \'치마로\'와 같은 말을 넣을 것인가, 넣지 않을 것인가를 무척 고심했을 것이다. 결국 넣어서 엇시조가 된 것이지만, 넣지 않았다면 단형 시조이다. 3) 사설시조(장형 시조) 사설시조는 엇시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종장을 제외한 초장이나 중장 중 어느 한 장이 두 구 이상 길어진 시조 즉, 3 장 8 구 16 음보 이상 무제한으로 길어져 산문적 성격을 띄고 있는 시조를 일컫는다. 대체로 중장 부분 전체가 판소리 성격을 띤 재담 역할로 대폭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초장과 중장, 중장과 종장이 함께 늘어난 경우도 있고, 3 장이 제멋대로 늘어난 것도 더러 있다. 이는 영·정조 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시조의 모습들이다. 그런데, 자유시와 구분되는 특징은 3 장의 성격으로 늘어나서 의미의 구분은 서론, 본론, 결론이 뚜렷하다는 데에 있다. 다음 김옥정의 시조는 사설시조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별이나 달빛이거나 문명의 마파람에 돌아앉은 요즈음. 이별을 예감한 온 산천이 시름시름 앓는데, 고향 마을 전설들을 줄줄 꿰던 서낭 할매, 힘줄 돋군 달구질로 가뭇없이 사라지면, 해묵은 둥지를 잃고 밤새 떨던 산새들은 천근의 저 하늘이 슬픔으로 내려 눌러, 움푹 꺼진 눈자위로 아리랑을 외며 간다. 또 다신 돌아오지 않으리라 아리아리 아라리오. -<세상구경.16, 아라리오> 전문 이는 사설시조 중 수작의 하나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여기서 별, 달빛 등은 산천과 같은 자연의 일부요, 해묵은 둥지와 고향은 동질성이며, 전통을 지닌 할매나 산새는 인정과 순수의 상징으로 문명의 마파람에 피해를 입는 당사자 즉, 아리랑을 부르며 사라지는 슬픈 주체들이다. 현대문명에 쫓겨난 인간, 파괴되는 자연, 그 발붙일 곳 없는 상황은 물질문명이 가져 온 인간의 추방이요, 자연의 살해인 것이다.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거만한 문명이 오히려 사람과 자연을 지배하고 타락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옛날을 그리워하면서도 침통한 방황을 계속하며 사라지는 지도 모른다. 4) 연시조(연형 시조) 연시조는 하나의 제목 아래 3 장이 두 수 이상 구성되는 시조로, 시상이 통일되어야 한다. 개화기 이전의 시조에서는 단수로 된 평시조가 주종을 이루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사상과 감정이 복잡해짐에 따라 우리의 의식 또한 그만큼 깊고 다양하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시조시인들이 단형 시조를 피하고 연형 시조의 형식을 빌어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러면, 연시조를 창작할 때 유의할 점은 첫째, 각 수마다 동일한 이미지나 시어의 반복을 피해야 하고, 독립된 소주제들이 통일성 있는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시상을 전개시켜야 한다. 둘째, 가장 인상적, 충동적이고 집중적인 시상을 종장에 배치하고, 역으로 초장과 중장을 서술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더욱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연시조에서는 맨 마지막 수의 종장이 점층적으로 강한 인상이나 의미를 구현해야 한다. 셋째, 사설시조 형식의 연형일 때, 첫 수는 평시조의 형식으로, 제2수는 사설시조의 형식을 취하는 것도 좋겠다. 세 수의 연형일 때도 첫 수는 평시조, 제2수는 사설시조, 제3수는 평시조의 구성도 생각해볼 일이다. 그러나 세 수는 모두 점층적인 구조로 이루어짐이 바람직하다. 빛나게 찍은 점들 무수한 저 선분들 어떤 건 ㅑ, ㅠ, ㅕ, ㅛ, 어떤 건 로-루-르-리. 쌍받침 받친 글자도 더러 함께 반짝하네. 뜻글자며 알파벳이며 도형 모습 갖가지구나. 어느 먼 기슭에는 알 수 없는 그림 글자. 아침이 지우개로 오기까지 배운 것 다 나와 있네. -서 벌의 <저문 하늘이 큰 칠판 되어> 전문 날이 저물면 하늘은 크나큰 칠판이 되어 무수한 별자리들이 갖가지 글자와 도형의 모습으로 반짝이는 것이다. 그것들이 모두 우리가 실제로 배우고 익힌 학습내용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은 다음 차례의 학습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지우개의 의미로 온다는 것을 두 수로 갈라서 구성해 놓은 연시조 1편이다.
64    디카시 40수 댓글:  조회:1404  추천:21  2009-05-01
디카시 (2009.4-) 1 흰꽃 한송이 조요한 님품인데 티끌 하나 묻히랴 순한 맘 고이여서 옥부로 익히였네 백옥은 부서지여도백옥으로 남소이 2 만개한 복사꽃 님께서 오시다 돌부리에 채이면은 가슴에 쿵 돌이돌이 지천으로 호롱불 들고 모래알 환히 밝히고 섰어요 시름 다 푸시고 가붓이 오세요 님이여 님이여 3 유엔청사앞 권총조각상 묻는다 묻어라 철기를 철기를 천년의 한 만년의 한 이제 다 풀고 청산처럼 살자 청풍처럼 살자 4 모택동유상 산 살아서 해더니 잠들어 청산일세 한시대를 열어놓고 만시대를 살아가누나 모택동 그이가 5 준의성 불불불 료원에 번진불 해해해 천하를 비춘해 세월 흘러 만년이 가도 타오르리 불 불 눈시리리 해 해 6 뉴욕탑 높은가 높잖아 낮은가 낮잖아 당신 만약 높다고 하면 휙 - 뛰여넘으리 허나, 낮다하면 허리 굽혀 경례 7 대리삼탑 하늘을 종이로 글을 쓴다 세자루 붓이 대리의 지변을 눈물도 웃음도 붓끝에서 옛말 되누나 아-언제 다 쓰나 8 홍콩야자수 둥근달 천번만번 이지러졌댔어도 푸른 우산 쓰고서 마냥 우러른 신주여 비바람 우산은 찢겼어도 몸매 한결 기장차 9 부다라궁 선인의 피와 뼈와 지혜의 응어리 광야에 우뚝솟아 천년을 빛날진저 찬연한 오성붉은기 높은 하늘 열어주네 10 붉은꽃 한송이 눈속에 얼음속에 불사르던 이 그리움 이제 내님을 맞이하거늘 어이 한오리 실오리라도 옹이 된 그 한을 맨살로 삭이리 11 가지마다 하얀 복사꽃 꽃이런가 눈이런가 눈이런가 꽃이런가 은은히 들려오는 꽃꿈이 화사해라 아해야 꽃꿈 한다발 목에다 걸렴아 12 천자만홍 분홍꽃은 해님이 하사한 비늘이요 하얀꽃은 달님이 하사한 비늘일세 한마당 해달 비늘들 향기조차 찬란해 13 바위에 새겨진 불손가락 놓지마 놓지마라 비운 손 놓음 당신 안아준 절벽이 등 돌려 14 우리나라 원자탄 기념비 풀 뜯는 양떼를 위하여 창문의 해살을 위하여 세상의 비둘기 위하여 하늘의 흰 구름 위하여 두손으로 추켜들었다 자존 자강 자애 15 자유녀신상 그대는 세상에 자유 해살 보내지만 인간은 그물 늘여 바람도 얽어놓네 그날이 어느때일가 손가락 꼽아보네 16 오줌누는 아이 오줌 한번 갈겨서 폭탄을 죽이였네 비리스의 영웅은 천진한 발가숭이 거두라 모든 철갑들을 살과 살을 부비자 17 하얀 불탑 사성제(四聖蹄) 여기에다 하얀 집을 짓고요 팔정도(八正道) 그 경을 날마다 읊조리네 들려라 엄마죽음 축하하던 장자어른 북소리 18 장군총 선인뼈 모여모여 피줄기로 얽어얽어 구슬픈 그력사의 종지부 찍었고야 하늘아 창해지변을 너희인들 알소냐 19 제일작은 교회당 하느님 죽었다고 그누가 말했던고 요리 작은 뾰족당에도 하느님 계신단다 자유론 새나 짐승들도 예수님을 알가요 20 도강언 물소리 솨아솨아 풍악소리 전하건만 현종양제 어디갔노 무희들은 어디갔노 어허허 인생은 꿈이요 청수만이 만세로다 21 소나무 날숨이 들숨이 시간을 갈고 갈아 해빛달빛에 담근질하여벼리여낸 훈장온몸에 둘렀네 22 측백나무 피흘린 이 상흔 속으로만 삭였나니 바람의 애무눈비 쓰다듬이푸른 시 지었네 23 9마산 아홉말 발굽소리 아홉말 효용소리 청산에 울려울려 명승이 되였나니 청순(淸水)들 그저 흐르랴 밤도 낮도 안고지고 24 나이아가라 폭포 하늘이 산 낳을 때 그 아픔과 그 기쁨 하늘이 물 낳을 때 그 아픔과 그 기쁨 오늘도 나이아가라폭포로 장쾌하게 쏟아내네 25 보살 보살님 왜 하냥 웃는거죠 선(禪)을 쌓았네 살집은 마아냥... 마음을 비워서 씨글버짝 애들은요 달도(達道) 하나니 구름도 모이매 26 청와대뒤 룡두산 멍청히 바라보네 언제 가면 제 정신일가 룡두야 정신춰 하늘 굽어본다 27란주의 모자 조각상 어머니 사랑은 하늘이 내린 도라 황하의 물결이 외우며 바다로 가네물결은 인생이요 어머니는 쪽배라네쪽배는 산실 쪽배는 요람 쪽배는 들판바람이 치솟고 파도가 휘날려도 한없는 쪽배 사랑에 인생길은 잔디길 28 젖무덤산 태초의 정과 빛이 빚어놓은 사랑이여 새도 수초도 그 젖 먹고 모기 늑대도 그 젖 먹어 눈길도오동보동한 젖무덤을 쓰다듬네 29장춘탑 어제도 엄마들은 비둘기를 날렸다 오늘도 엄마들은 비둘기를 날린다 래일은 우리 엄마들 비둘기떼 날릴거다 30아스마석 아스마 써놓은 애정소설 한권을 아스마 출연한 장편대하 드라마를 눈으로 읽지를 마라 마음으로 읽어라 31나무에 감긴 뿌리 감을래 감을래 이 목숨 다하여 칭칭칭 감을래 나,나도 살아야지 나무는 묵묵 잎새 설렁이며 그늘을 펼치여 꼬옥 품어주네 32황학루 날개를 펼치고도 못나는 학들 금가루 바르고 황학루 되었네 33호라이정문 지구의 조각 지구도 빙글빙글 사시(史時)도 빙글빙글 눈물도 빙글빙글 웃음도 빙글빙글 보세나 천당과 지옥이 함께하는 드라마 34지하용동채색주름 바위 하늘이 열리며 폼잡은 주름살들 령롱한 칠색조화 꽃물이 자르르 피카소 여기 왔더라면 던졌으리 화필을 35 비리스 원자기념관 묶어라 묶어라 천오리 만오리로 조여라 조여 손아귀뼈가 부서진대도 풀어만 놓음 주검이 풀처럼 들판에 우거져 우주는 지구를 제명해 버릴걸 36백산시석림의 노란색과 검은색바위 밤뼈를 다듬어 세웠네 날빛을 닳여서 굳히였네 그물에 걸린 연빛하늘 배경 37 보라꽃속 한송이 흰꽃 시간을 장식하는 유월의 정오 시간 뜰안에 향기론 보름달 쨍하네 쨍하네 38석림 개구리바위 개구리 개굴개굴 하늘을 우네 비가 오려는가 아뿔사 우산도 아니 들고 아직은야 비방울도 아니 치는데 마음 먼저 젖어 39유엔청사 언어들 모이여 우람한 유엔청 어떤 언어 앉아있고 어떤 언어 날아다니고 어떤 언어는 유리창에서 버둑             버둑                        버둑 언제 한맘으로 장미꽃 피우나 40목단꽃 한송이 빠알간 자궁에서 향기론 선률 자르르 휘돈다 실밥생명 하나 간질밥 먹인다 바람이 파르르 연주를 나른다
63    천진하고 참신한 상상이 빚어낸 동시 댓글:  조회:1106  추천:17  2009-04-20
편집자의 말: 흑룡강성 동녕에 계시는 신금화씨가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석달동안 필자와 함께 동시창작을 하였다. 그동안에 쓴 동시들을 추려서 <<개구리 셈세기한다>>는 제목으로 흑룡강성 조선민족출판사에서 동시집을 출간하게 되였는데 로시인 한석윤씨가 평어를 달았다. 필자는 그 평어를 소개한다천진하고 참신한 상상이 빚어낸 동시 -신금화의 동시집 <<개구리 셈세기한다>>를 읽고 한석윤 동시는 동심과 시심이 함께 담겨있는 시문학이다. 시문학은 상상의 문학인만큼 동시도 상상을 떠나서는 운운할수 없다. 그러나 동시는 어린이들을 주독자로 하는 시문학이기 때문에 동시의 상상은 천진하고 동심적이여야 한다. 동시의 생명력은 천진하면서도 참신한 상상력에 있고, 독자를 감동시키는 힘도 동심적인 상상력에 있으며, 따라서 동시의 혼을 높일 새로운 시적도전도 참신하고 동심적인 상상력에서 찾아야 한다. 좋은 동시를 보면 어린이들의 심성은 물론 모든 인간심성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있는 동심을, 몸에 걸친 얇고 부드러운 비단옷처럼 동시의 속살이 약간 얼비추듯 들여다보이는 상징과 비유로 빚어내고있다. 어린이들까지 수용이 가능한 쉬우면서도 참심한 이런 상징과 비유는 천진하고 동심적인 상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동시의 성공여부는 천진한 동심적상상력이 빚어내는 참신한 상징과 비유에 있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신금화의 첫동시집 <<개구리 셈세기한다>>을 읽으면서 받았던 가장 큰 감명은 그가 동시창작에 금방 들어선 신인인데도 기성 동시인들을 찜져먹을 만한 천진하고 기발하고 참신한 상상력을 소유하고있다는 그것이다. 물만두 졸망졸망 부두에 정박한 하얀 쪽배 흔들흔들 강 건널 손님 기다린다 깜쪽같이 하얀 쪽배로 변신한 물만두. 정말 천진하고 유치스러운 동심적상상력이 빚어낸 참신하고 앙증맞은 상징이다. 천진한 아이들의 눈이 아니고서는 물만두가 하얀 쪽배로 보일수 없을것이고 물만두를 담아놓은 그릇이 부두로 변신할수 없을것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과 갈구, 그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소유한 오색령롱한 꿈이다. 그런 꿈속에서 크는 아이들이니 식탁우에 올려놓은 물만두에서도 하얀 쪽배를 떠올릴수 있을것이고, 그 배를 타고 물결높은 강을 건너 미지의 세계로 떠날 환상도 키워볼수 있었을것이다. 사과 연지볼 똑 떼먹으니 하얀 이 드러내고 활짝 웃어요 아이들이 고 작은 입으로 똑 떼먹은 빠알간 사과를 상상해 보라. 쬐꼬만 입자국이 폭 패인 사과는 정말 하얀 이를 드러내놓고 해해 웃는 귀여운 아기들의 얼굴을 닮지 않았는가. 이 동시는 시적이미지도 참신하면서 천진스럽다. 밝고 따스한 시인의 동심적상상에 마음이 훈훈해 나고 궂어있던 얼굴에 저도 몰래 웃음이 피여난다. 벽보 꽃사다리 높기도 해요 꼬맹이들 쭁쭁쭁 별나라로 간대요 이 동시의 꽃사다리는 벽보판의 표양란을 상징하는것 같다. 사다리가 꽃으로 되어있고, 사다리를 타고 쭁쭁쭁 별나라로 올라가는 아이들이 꼬맹이들인것을 보면 유치원의 표양란이 분명하다. 학교에서는 표양란에 색종이를 오려만든 오각별이나 비행기를 붙여주지만 유치원에서는 꽃이나 과일같은것을 붙혀주니 말이다. 꽃사다리 , 얼마나 싱긋하고 새맛이 흠뻑 나는 참신한 상징인가. 천진한 동심적상상이 없이는 발견할수 없는 시적이미지이다. 올려붙은 꽃송이의 높이와 함께 아이들의 마음도 자라고 몸도 자라고 지혜도 늘어난다. 아이들마다 자기절로 만드는 자기의 꽃사다리, 그 사다리는 멈춤을 모르고 시시각각 하늘을 향해 우줄우줄 자라는 신비한 꽃사다리이다. 이제 아이들은 자기들이 만든 꽃사다리를 타고 쭁쭁쭁 달나라로 가고 별나라를 가면서 자기의 꿈을 마음껏 꽃피울것이다. 이 동시집에는 천진하고 참신한 상상으로 빚어낸 이런 동시들이 많이 보인다. <<흑판>>, 나무, 보름달, 비, 콤바인, 닭알, 배추김치, 줄뛰기, 분필, 학교 등 동시들도 참신한 상징으로 우리 가슴에 깊은 감동을 준다. 시적인 상상의 힘, 동심적인 상징과 비유의 매력이 눈부신 빛을 발산하고있다. 시는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노래하는 문학이다.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을 찾는것이다. 즉 개인의 정서의 외형이 되는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들을 찾는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감각경험과 관련이 있는 외부경험이 주어졌을 때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도록 하는것이다. >> 라고 말하였다. 그의 말대로 한다면 시를 창작하는 과정는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와 등가를 이룰수있는 객관적상관물을 찾는 과정이다. 동시도 마찬가지이다. 상징과 비유로 빚어지는 상상의 과정이 바로 동심에 맞는 객관적상관물을 찾는 과정이다. 비록 동시창작에 금방 들어선 시인이지만 신금화가 첫시작부터 이렇게 좋은 동시들을 쓸수 있는 비결은 바로 동심에 맞는 객관적상관물을 찾기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싶고, 또 미래가 기대되는 신인이다. 그러나 아수한 점도 없지 않다. 천진하고 참신한 상상력은 돋보이는데 시어나 시어조합이 거칠고 조잡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좋은 동시를 쓰자면 시어 하나를 두고도 몇날, 몇밤을 패는, 지어 몇 달, 몇 년을 모대기는 그런 피를 태우는 추고가 필요하다. 시문학은 언어예술가운데서도 가장 정예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시쓰기는 옥석을 캐내여 구슬로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아무리 좋은 옥석을 캐내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성다하여 깎고 갈고 다듬지 않는다면 번쩍거리는 좋은 구슬로 만들 수 없다. 동심적상상을 통하여 찾아낸 객관적상관물이 좋은 동시로 될수있는 재료로 되고, 시의 령혼으로 되지만 그것을 이미지화하는 시어들이 잘 다듬어지지 않는다면 좋은 동시로 될수 없고 시의 령혼도 자기 빛발을 제대로 뿜을수 없다. 특히 어린이들을 주독자로 하는 동시창작에서는 언어의 역할이 더구나 크다. 앞으로 발표에 너무 급급해 하지 말고 거듭되는 추고에 공력을 넣었으면 한다. 아무튼 신금화는 이번 동시집으로 자기의 동심적재능을 과시하였고 동시단에 성큼 들어섰다. 우리 동시단에 이런 신인이 나타난것을 환호하고싶고 경하의 말씀 다시 들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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