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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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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시인의 문학관 댓글:  조회:4100  추천:0  2015-02-19
  故鄕愛와 영원한 생명의 만남이 연작시 「고향산천」 시인은 자기의 全生涯를 시에 투여하면 그만인 것                                                 심상운   나는 오늘 도시의 매연으로 더렵혀진 눈을 소금물로 씻고 시의 창문을 통해 고향산천에 환히 쏟아져 내리는 겨울 햇빛을 본다. 이때 나는 고향에 돌아온 내 정신의 싱싱함을 느낀다. 어두운 구석구석을 사랑의 따스함으로 어루만져주고, 산기슭 죽은 풀잎들의 차디찬 가슴에 훈훈한 생기를 넣어주는 겨울 햇빛. 나는 생명의 봄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시의 문을 활짝 열고 눈 덮인 들판으로 뛰어나가 봄의 햇빛을 껴안고 그의 가슴에 내 가슴을 묻는다. 그리고 어둠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환한 빛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때 나의 시는 탄생하는 것이다. 신생아의 울음소리를 내며.... 연작시 「고향산천」은 이러한 정신작업의 산물이었다. 나는 이 연작시를 통해 ‘고향의 하늘’ ‘산천의 햇빛’ ‘이웃의 아픔’ ‘죽은 풀잎의 말’ ‘분단의 문제’등과 만났으며 끝내 새봄의 소리를 들었다. 나는 시작을 통해 고향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바로 보고 느끼고 그것들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아픔을 극복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삶의 봄을 향유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시인은 정신의 밭을 갈고 생명의 씨를 뿌리는 정신농부인 것이다. 정신은 생명의 원천이며 어둠을 이겨내는 빛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훌륭한 시인의 작품에서는 항상 싱그러운 생명냄새가 난다. 이 생명냄새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신신한 향기까지 뿜는다. 그런데 나의 시는 어떤가. 내 시의 밭에는 정신의 작은 풀씨 하나라도 잠자고 있는가. 나는 이런 물음에 가슴 깊이 저어함을 느낀다.   고향산천 . 12 -싸리꽃   이른 여름 강원도 산비탈엔 살내음 환한 싸리꽃   스물 두 살의 나는 小銃을 버리고 한 아름 싸리꽃과 함께 땅바닥에 누웠다.   여름은 온통 치마폭 가득 푸른 불길   나는 방금 불속에서 새로 태어난 청록색 풀잎이었다.     고향산천 . 18 -어느 소년병의 잠   그는 이제 눈 감고 풀잎에 내리는 흰 눈을 보고 있다. 새소리도 마침내 맑은 이슬로 내리고 질경이 뿌리에 닿는 볕이 손등의 눈을 녹이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소총 멜방에 끌려 청솔 돋는 마을을 떠나갔을 뿐 죽은 것 같지 않다.   눈감고 편안히 누워 산천의 흰 눈 맞으며 언 땅 밑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소년병의 잠   「고향산천 . 12-싸리꽃」은 81년 봄 시문학회 사화집에 발표한 작품이다. 나는 이 시의 시상을 어느 해 여름 강원도 원통 골 산비탈에서 무더기로 피어 있는 싸리 꽃 속에서 만났다. 그때 나는 소총을 들고 낮은 포복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앞에 소박한 보랏빛 향기로 피어있는 싸리 꽃. 나는 무릎이 벗겨져 뻘겋게 번지는 혈흔의 아픔도 잊고 싸리 꽃 무더기 속으로 내 온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고향산천 . 12-싸리꽃」은 고향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영원한 생명과의 만남을 내 나름의 체험을 통해 노래한 작품이 되었다. 나는 이 시에서 역사 속의 나와 자연본래의 나를 결합시켜 새로운 생명적 창조의 나로 그려 보았다. 스물 두 살의 나는 분단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다. 그런 내가 이 시대에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소총(증오심, 적대감)을 버리고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 고향산천에 환히 핀 싸리꽃(순수한 사랑)을 가슴으로 껴안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싱싱한 자연인(본질적인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나는 드디어 분단의 역사를 극복한 내가 되는 것이다. 1연의 ‘이른 여름’ 3연의 ‘푸른 불길’은 계절적 배경이라는 단순한 의미망을 벗어나 냉랭한 현실과 함께 서로의 가슴을 겨누는 쇠붙이까지도 완전히 녹여 재생시키는 민족혼의 왕성한 표상으로 상징화된 말이다. 또 4연의 ‘청록색 풀잎’은 자연과 동화된 나이며 분단시대의 아픔을 극복한 나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속의 나는 겨레의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이 땅의 사나이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겨레의 평화를 염원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이 땅의 한 사나이의 올바른 정신적 모습을 이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해도 가능할 것 같다. 겨레니 고향이니 하는 좁은 사고의 공간을 벗어나 이 살벌의 시대에 생명의 존엄함을 지키려는 순수한 인간적 행위의 한 표현이라고. 여하튼 이 시는 증오심(소총)을 버리고 사랑(싸리꽃)을 껴안고 국토지상(땅바닥)에 누운 순수한 인간(스물 두 살의 나)은 뜨거운 자연의 용광로(여름, 푸른 불길) 속에서 드디어 새로운 생명(청록색 풀잎)으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과의 만남이요, 자연과 인간의 합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 시를 통해 인간회복의 기쁨을 안게 된 것을 무엇보다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이 시의 표현은 서정적으로 하였다. 암시와 상징의 옷은 되도록 얇은 천의 옷으로 하였다. 시의 겉옷이 너무 단단하고 두꺼워서 그 속살을 만져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서운한 일일까. 나는 속살이 살짝 내비치는 옷 속에 내 시의 비밀을 감추었을 뿐이다. 「고향산천 . 18-어느 소년병의 잠」은 어릴 적 기억의 재생이다. 6,25 때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춘천에서 30리쯤 떨어진 시골 ‘곰실’이란 곳으로 피란을 갔다. 시내에서는 식량도 없고 횡포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후퇴하는 한패의 병사들을 보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은 그들은 패잔병으로 기진맥진한 몰골이 처참했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다리를 절며 걸어와선 쓰러지던 그들의 모습. 그 중에는 총신을 질질 끄는 소년병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특히 울고 있던 소년병의 모습이. 그들은 비인간적인 힘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나온 이 땅의 선량한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시화하며 그들의 죽음은 결코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언젠가 깨어나야 할 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봄이 오면 그들은 깨어나리라. 그들은 잠을 자면서 비로소 산천의 햇빛과 만나고 맑은 새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언 땅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의 의지를 그려 보았다. 그러나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것은 나에게 퍽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시가 독자와의 만남에서 다시 창조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작품의 진정한 가치와 판단은 오로지 독자의 판단에 달린 것이다. 그러기에 작품에 대한 작자의 변명은 (해명)은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변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은 蛇足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시인은 자기의 전 생애를 시에 투여하면 그만인 것이다.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진다.  
82    김수영 론, 박치원 론 댓글:  조회:4450  추천:0  2015-02-19
김수영 론 -- 생애와 시적 경향을 중심으로                                             심 상 운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식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1968, 「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발췌)   1960년대 치열한 의식(意識)을 무기로 시대의 한 복판에 뛰어든‘현실참여(앙가주망)’의 시인 김수영은 1921년 11월27일 서울 종로2가 관철동 15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선린상고(善隣商高)를 거쳐 도일, 1941년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했으나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만주로 이주, 8·15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다. 1949년 김경린(金璟麟)·박인환(朴寅煥)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도시문화사1949)을 간행하여 젊은 모더니스트로서 주목을 끌었다.   6·25전쟁 때에는 미처 피난을 못해 의용군으로 끌려 나갔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그 후 교편생활, 잡지사·신문사 등을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그 결실로 1958년 제1회 을 수상하였으며, 1959년에 시집『달나라의 장난』( (춘조사1959)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작활동은 1960년 4,19 이후 모더니즘에서 현실참여로 전환하면서 왕성한 열기를 뿜어냈다. 모더니즘적인 지성을 바탕으로 시를 통한 사회적인 발언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그림자가 없다」,「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기도」,「육법전서와 혁명」,「푸른 하늘은」,「만시지탄은 있지만」「나는 아리조나의 카보이야」,「거미잡이」등 현실참여의 시편들은 그를 1960년대 한국현대시의 중심에 서게 했다. 그는 시 창작을 넘어서서 자신의 신념을 현실적인 행동으로도 실천하였다.1965년 대학생들의 ‘6.3 한일협정 반대시위’에 동조하여 박두진, 조지훈, 안수길, 박남수, 박경리 등과 함께 에 서명을 한 것이 그 예(例)다.   1968년에는『사상계』1월호에 발표한 평론「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발단으로,「조선일보」지상을 통하여 이어령과 3회에 걸친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여 주최 문학세미나에서「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였는데, 현실참여시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치열한 삶은 짧게 끝났다. 1968년 6월 15일, 밤 11시 10분경 귀가하던 길에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부딪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6월 16일 아침 8시 50분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대상으로 시작활동을 시작한 그는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참여시’로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한국현대시사에 1960년대 대표적인 현실참여의 시인으로 각인되었으며, 한국참여시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한 이래 마지막 시「풀」에 이르기까지 23년 간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김수영의 시는 초기의 모더니즘 시, 1950년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인간의 삶의 문제와 그에 대응하는 개인적 정서에 초점을 맞춘 시기의 시, 1960년 4·19 기간의 감격과 1961년 5,16의 좌절을 표현한 시기의 시, 그 이후 1960년대 중반의 소시민의식(小市民意識)에서 벗어나 사회적 삶의 조건을 비판한 시기의 참여시로 논의될 수 있다.     그는 생전에 에머슨의 논문집 『20세기 문학평론』을 비롯하여 『카뮈의 사상과 문학』 『현대문학의 영역』등을 번역하였다. 사후에는 시선집 『거대한 뿌리』 (민음사1974년) 산문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년) 시선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민음사1979) ,산문선집 『퓨리턴의 초상』(1976년),『김수영 시선』,『김수영 전집 1-시』,『김수영 전집 2 - 산문』(1981년)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전집 출간을 계기로 민음사(民音社)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을 제정했고 매년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사망 1주기를 맞아 도봉산에 시비(詩碑)가 건립되었고(1969), 미완성의 장편소설 『의용군』이 『월간문학』(1970)에 발표되었다. 1988년에는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창작과 비평사)이 간행되었다.     김수영 시의 시사적(詩史的) 맥락에 대해 평론가 김현은“1930년대 이후 서정주, 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難澁性)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하였다. 김현은 시의 예술성을 난삽성으로 보았으며, 김수영의 시편들을 예술성보다는 시의 사회적 발언과 참여라는 시각에서‘구체적 개념의 시’로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1960년대 프랑스의 장폴 사르트르가 벌인 앙가주망(engagement) 운동이 한국의 젊은 문인들에게 끼친 정신적인 영향의 결과인 것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사르트르가 주장한 앙가주망은 정치행동이나 사회참여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며, 시대와 상황의 구속에서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앙가주망은 각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극히 윤리적인 사상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4.19의 승리감 속에서‘역사’와‘민중의 실체’를 인식한 김수영에게 5.16의 억압감은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극복의 에너지를 당시의 젊은 지성들이 지지하고 합세하는 현실참여 사상(앙가주망)에서 얻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일본의 「진보적」지식인들은 소련한테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흰 원고지 뒤에 낙서를 하면서 그것이 그럴듯하게 생각돼서 소련을 내심으로도 입 밖으로도 두둔했었다 ---당연한 일이다   (중략) 五·一六 이후의 나의 생활도 생활이다. 복종의 미덕! 思想까지도 복종하라! 일본의「진보적」지식인들이 이 말을 들으면 필시 웃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전향기(轉向記)」에서   「전향기(轉向記)」는 자신의 사상과 의식의 전향경위를 회고담(懷古談)같이 시에 담고 있지만, 그 속에는 지적인 풍자와 비판을 통한 현실안주(現實安住)를 거부하는 의식의 표출이 들어 있다. 따라서 당시 지식인들에게 자신과 같은 현실의식을 고취하고자하는 사상적(思想的) 메시지로 해석된다. 그래서 시의 형태가 산문과 구별할 수 없는 형태가 된 것 같다.   그의 시편 중에서 마지막 시가 된「풀」은 그의 현실참여 사상을 뿌리로 한 시로서「폭포」「눈」과 함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전향기(轉向記)」의 지적인 풍자와 비판의 메시지와는 다른 면에서 시적인 형상화에 성공한 시로 인식된다. 시를‘관념의 진술(陳述)’이 아닌‘관념의 비유(比喩)’로 치장한 점에서 차이가 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전문   이 시의 풀과 바람을 자연의 풀과 바람이 아닌 비유의 대상로서의 풀과 바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김수영의 사회참여의 경향성에 비추어 볼 때 타당성을 갖는다. 그래서 이 시는 저항적이고 주지적이고 상징적인 성격의 관념시로 분류된다. 따라서 이 시의 의미는‘풀(민중)⟷바람(권력), 눕다(굴복) ↔ 일어나다(저항), 울다(패배) ↔ 웃다(승리)’라는 대립구조에서 파악된다. 그리고 부정적인 것(바람, 비⟶ 반민중 세력, 억압, 독재 권력, 가혹한 현실,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힘)과 긍정적인 것(풀 ⟶ 권력자에 천대받고 억압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불의에 저항해온 민중)으로 분리된다. 이 시의 시적효과는 네 개의 동사(눕는다, 울었다 일어난다, 웃는다)가 반복해서 만들어 내는 역동적인 리듬에서 발생한다. 이 리듬은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민중의 수동성과 능동성 즉 권력에 대한 굴복과 저항이라는 양면성을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민중의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을 깊이 있게 드러낸다.   그러나「풀」을 민중과 권력의 대립구도로만 해석할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시해석의 단선화(單線化)다. 그리고 풀의 자연적 생태적 환경을 도외시(度外視)한 점이다. 비를 몰아오는 바람이 없으면 풀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풀의 생명력은 바람과 비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런 관점은 시적사유(詩的思惟)와 상상력(想像力)도 자연환경의 원리(原理)에서 이탈하지 않고 부합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래서「풀」을 관념에 의지(依支)하지 않고 시의 독자성을 살려서‘시 속에 표출된 풀의 생태’를 그대로 음미해보는 것도 이 시의 감상법이 된다. 그럴 경우「풀」은 비유에서 벗어난 ‘사물시(事物詩)’로 읽히고 시의 해석도 단선화에서 해방되어 독자들의 상상영역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열린다.   김수영의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시를 지나치게 사회적 발언의 도구로 몰아간 것이다. 시를 예술적 목적에서 사회적 발언도구로 전환한 후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것은 의식화 되고 편향된 관념의 노출이다. 그는 자신의 관념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시를 썼다고 할 수 있다.「전향기(轉向記)」에서와 같은‘시의 산문화(散文化)와 의식화(意識化)는’는 김수영 시의 사상적 경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시를 1920년대 계몽주의를 내세운 이광수의 문학과 같은 경향으로도 읽을 수 있게 한다.     송욱 론 -- 생애와 시와 시론의 특성을 중심으로                                                                                          심 상 운     1925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일본 교토(京都)대학을 거쳐 서울대학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1948년). 미국 시카고대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 문리대 교수를 거쳐 인문대학장을 지낸 송욱은 시「장미」「비오는 창」이『문예(文藝)』(1950)지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제1시집『유혹(誘惑)』(1954)을 상재한 이후 1956년 영미 주지주의(主知主義)의 영향을 받은 12편의 풍자 연작시「하여지향(何如之鄕)」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1년에는 하여지향 (何如之鄕)」과 「해인연가 (海印戀歌)」등을 수록한 제2시집 『하여지향(何如之鄕)』을 펴냈다. 이어 1971년에는 이데아와 관능, 사상과 육체의 조화를 밀도 있고 간결하게 읊은 제3시집 『월정가 (月精歌)』를 펴냈다. 제4시집『나무는 즐겁다』(1978)와 사후(1980,4,21)에 엮어진 제5시집 『시신(詩神)의 주소(住所)』(1981) 등에서 보여준 그의 모더니즘의 시편들은 그의 시세계의 독특한 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탐미(眈美)와 서정(抒情) 그리고 풍자와 익살을 통한 현실비판의 기법으로 평가 받은 그의 제2시집『하여지향(何如之鄕)』(1961)에 대해「풍자, 자기 비하의 아이러니―송욱론」,(『 문예2000』, 1997. 1.)을 발표한 이승하(시인, 중대문창과교수)는 편저『송욱』(새미작가론 총서·13, 2001)에서 “1950∼60년대에 있어 송욱의 의미는 각별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 독특한 시세계는 전통지향의 서정시와 모더니즘 계열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그 당시 우리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엄혹한 일제 36년을 통과하면서 거의 완벽하게 사라진 현실풍자시의 전통이 송욱에 의해 되살아난 것도 그렇거니와, 서구 작시법을 응용하면서도 우리말과 한자를 갖가지 방법으로 배치하여 실험한 실험정신은 높이 사주어야 할 송욱만의 덕목이다.”라고 하였다.   다음은 연작시「하여지향(何如之鄕)」의 시편 중에서 뽑은 시다.   청계천변 작부를 한 아름 안아 보듯 치정 같은 정치가 상식이 병인 양하여 포주나 아내나 빛과 살붙이와 현금이 실현하는 현실 앞에서 다달은 낭떠러지!   ---「하여지향(何如之鄕) 5 」전문   이 시에서 송욱 시의 개성을 드러낸 표현은‘치정 같은 정치’라는 풍자어구(諷刺語句)다. 언어유희 같지만 단어의 앞뒤를 바꿈으로써 벌어지는 의미의 차이가 환기시키는 풍자는 현실과 부딪칠 때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언어폭탄이 된다. 이와 함께‘현금이 실현하는 현실 앞에서’의 현금과 현실의 첫소리와 한자의 동일함이 빚어내는 감각은 이 시가 얼마나 서민적이고 현실적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의 풍자시는 동영상의 이미지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시의 끝 구절‘다달은 낭떠러지!’는 금방이라도 추락하는 듯한 동적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이런 풍자시를 통한 그의 사회적 발언은 1950〜60년대의 한국 사회상을 날카로운 비판의 눈으로 응시하고 그려내고 있다는 데, 시적 의미가 부여된다.   그대 알몸은   관세음 보살   묵직하고 보드라와   신비로운 바윗덩이 궁둥이   한 아름 안에   우주가 현신한다   -「나체송 (裸體頌)」전문   송욱은 자신의 시가 프랑스의 보들레르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나체송 (裸體頌)」에는 육체를 통해 지성을 표출한다는 영미 주지주의의 영향이 묻어 있다. 그러나 그는 서구의 비너스가 아닌 한국의 관세음보살을 대상으로 인간의 아름다운 육체와 우주의 합일(合一)을 표현함으로써 서구 미학의 틀에서 벗어난 송욱만의 독자적인 시선을 확보한 것으로 인식된다.   이런 사회풍자와 관능 미학의 시편들과 함께『사상계』에 연재될 때부터 관심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끈『시학평전(詩學評傳)』은 그의 독자적인 안목에 의해 동서(東西)의 문학사상과 작품을 비교 연구한 시의 이론서라는 점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1969년에 나온 『문학평전(文學評傳)』역시 동서의 시인ㆍ소설가ㆍ문학사상가 등의 작품과 이론을 비교ㆍ분석했다는 점에서 뜻 깊은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승하는『시학평전(詩學評傳)』에 대해“영미 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1950∼60년대 상황에서 국적 있는 비평을 했다는 것도 후학이 본받아야 할 사항이다. 외국문학 전공자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데 머물지 않고, 외국과 자국의 문학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의식을 갖고 연구 비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론서『시학평전(詩學評傳)』, 문학평론집『문학평전(文學評傳)』,『문물(文物)의 타작(打作)』, 시집해설서『님의 침묵(沈默)』은 다 일정한 문제점도 지니고 있지만 이들 책이 없는 그 시절의 비평사(批評史)는 다소 공허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라고 한다.     송욱은 1964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인류가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사상과 체험을 나의 환경과 배경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과대망상(誇大妄想)을 가끔 가진다. 이에 대한 교정책(矯正策)은 분석과 종합과 통일이 작용을 할 수 있는 건축적인 기술밖에는 없는 것 같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두 문학론(『시학평전』,『문학평전』)은 그의 이런 학문적 방법과 인식의 소산으로 이해된다.   『송욱의 삶과 문학』(한국학술정보, 2009)을 저술한 박종석(울산대 강사)은 “한국문학계에서 철저히 소외당한 송욱. 그가 남긴 문학사적 업적만 살펴본다면 그 면면이 한국문학사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해야 마땅하건만, 그의 타고난 비타협적이고 옹고집인 성격과 거침없는 의견표출 등은 그에 대한 진지한 문학사적 고찰을 막았다. 그러나 송욱의 문학적 가치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의 문학사적 조명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르 밀리언』지는 한국문학을 소개하면서 송욱의 「하여지향(何如之鄕)」을‘이데올로기를 떠난 앙가쥬망의 시인’의 작품으로 소개하였다. 유고시집인 『시신(詩神)의 주소(住所)』(일조각, 1981)는‘용사(用事)의 패러디화’라는 독특한 시적 장치와 함께 노장 사상의 철학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확신과 원칙, 그리고 지식과 인생 경험을 가진 진정한 비평가였던 그의 문학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송욱 문학의 진정한 뿌리를 밝히는 자료’로서 이 책은 기능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대시비평가(現代詩批評家)로서의 송욱은 1960년대 한국 시론 연구에 앞장서서 체계적인 연구, 분석적인 태도, 다양한 문학론의 소개 및 접목 등으로 한국시의 비평수준을 높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래서 그는 서구문학론의 수용과 비판을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주체적 비평 의식을 가진 시론가(詩論家)로 평가된다. 구미(歐美)의 시론을 체계화한 학문을 바탕으로 그가 이루어 놓은 실제 비평의 성과는 이후 비평가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지고 분석·비판한 김소월, 김기림, 정지용 등 한국시사의 중심 부분은 한국시비평사에서 의미 있는 내용으로 남을 것으로 판단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박치원 론 -- 생애와 시적 경향을 중심으로                                       심 상 운     1927년 서울에서 태어나서 국학대학교 문학부 국문과를 졸업하여 시인으로서, 고등학교 교사로서 한 생애를 살다 1990년 별세한 그는 1955년 시집『하나의 행렬』을 발간함으로써 시단의 인정을 받고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생전에 데뷔 시집 『하나의 행렬』(시작사1955년) 을 비롯하여『위치(位置)』(한국자유문학자협회.1957년)『사월이후(四月以後)』(신조문화사.1960)『공휴일(公休日)』(양우사.1968) 『꽃의 의지(意志)』(1975) 『얼굴을 주제(主題)로 한 다섯 개의 시(詩)』(1985)등 여섯 권의 시집을 남겼다. 그리고 평론으로는 「이육사논고(李陸史論考)」가 있다.   그의 시적 경향은 대체로 현대문명과 도시인의 일상적 생활상을 서정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그의 시는 도시인의 감성이 담긴 주지적(主知的)인 경향의 시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의 시편 중 연작시「서울」에는 1940년대의 마포나루의 풍경이 사실적(事實的)으로 그려져 있어서 시대적 풍물시(風物詩)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봄이면 강물이 풀리는 쌉쌀한 바람 불면 인천에서 배가 온다 누런 조기를 가득 싣고 소금 배며 새우젓 배들이 줄이어 들어온다 황포돛단배가 강물위에 깃발을 흔들 듯이 민어 대구도 싣고 마포나루에 돛을 내린다 --연작시「서울」전반부   “박치원시인의 연작시「서울」에 나오는 마포나루의 풍경이다. 물론 서울대교며 양화대교 등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의 얘기다. 당시 마포나루터에는 매일 수십 척의 황포돛배가 드나들어 그야말로 파시(波市)를 이루었다. 이 배들은 주로 황해(黃海)에서 잡은 수산물을 잔뜩 싣고 왔는데 그중에서도 새우젓이 특히 유명했다. 그래서 마포나루터에는 언제나 새우젓 독이 산처럼 쌓였고 새우젓 비린내가 진동했다. 이 마포나루는 6ㆍ25로 강화도 쪽 한강하구가 막히면서 뱃길이 끊어졌다. 그리고 그 물길을 요즘은 황포돛배대신 최신형 유람선이 떠다니고 있다.” (중앙일보 「분수대」에서 발췌) 1927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청소년시절 경험한 서울의 풍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던 것 같다. 그래서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이제는 먼 과거의 시간 속에 매몰된 1940년대의 서울의 풍물을 연작시「서울」에 담은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현대시에서 풍물시의 면모를 보여준 시인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36년 시집『사슴』으로 문단에 데뷔한 백석이다. 그는 시 속에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였고, 당시 북방지역의 토착풍속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한국 민중의 삶을 형상화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치원의 연작시「서울」도 급변하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1940년대의 서울의 모습을 흑백사진같이 보관했다는 점에서 평가된다. 그래서 그의 시는 1930,40년대의 서울을 이야기할 때 인용 시로 쓰이고 있다.   「어항」은 서울의 도심을 어항으로 비유하여 도시인(서울사람)들의 생활상을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그려낸 시로서 연작시「서울」의 사실적인 기법과는 대조(對照)되는 시다.   유리 컵 같은 어항, 유유한 체 하는 금붕어 서너 마리 연 신 몸 놀려, 고 자리를 선회, 고 자리 흔 적 없는 물무늬 진공의 深層, 그 심층의 언덕 바지 가는 호흡 고스란이 어여뻐 새끼 낳고 새끼 어미 고대로 줄줄이 뻗어 내린 生活史, 진공 속 時流의 한 점 나는 지금 어항 속 淡水族을 문득 기뻐 즐겨 위안하는 어진 우리 종족의 나 의 선회라는 생활의 시류 심층의 언덕바지. 얼 굴의 웃음, 가는 입김, 콧수염을 웅켜잡은 가 는 손아귀, 저편 하늘은 빛 뿌려 가로수.   싱싱한 鋪道의 아우성, 향기찬 우리들, 초여름 안 에 어항의 숨가뿐 숨소리, 어서 나는 물이라도 갈아 주어야겠다. -----「어항」전문     시의 문맥이 잘 풀어지지 못하여 이미지가 불투명하지만,「어항」속에는 시인의 그림자가 투영(投影)되어 있다. 그는 여름날 어항 속의 물고기들을 들여다보고‘진공의 深層, 그 심층의 언덕/ 바지 가는 호흡 고스란이 어여뻐 새끼 낳고/새끼 어미 고대로 줄줄이 뻗어 내린 生活史,’라는 사유(思惟)에 잠기면서 도시 속에서 어항의 물고기같이 사는 자신의 존재를 그 속에 투영한다. 그리고‘싱싱한 鋪道의 아우성, 향기찬 우리들, 초여름 안/에 어항의 숨가뿐 숨소리’라는 밝고 긍정적인 도시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사유를 메시지가 아닌 이미지로 나타낸 것이 이 시에 들어 있는 박치원의 모더니즘 기법이다.「손목 時計를 차고」에서도 밝고 긍정적인 감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추구하는 주지적(主知的)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손목시계를 차고 왼팔을 휘둘며 덤벙덤벙 살아왔다 나는 내 팔뚝 시계에 갇혀서 半徑을 分秒처럼 돌면서 제법 똑닥거리며 줄기차게 지겹도록 그것이 반복과 무의미를 동반한 그것이 아무리 내 왼 팔을 휘젓는다고 해도 유리 안의 숫자가 너무 뚜렷하고 平面이 낭떠러지가 되는 이유를 알 수 없듯이 한여름 무자비한 광선과 한겨울 눈의 폭력처럼 유리 안 時間을 올라탈 수 있을까 나는 시계 안 分針처럼 또렷이 똑딱거리면서 내 심장소리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도 난 손목시계에 밥을 주면서 너무나 또렷한 유리 안 半徑, 낭떠러지 숫자 판을 들여다보면서 무한한 행복감에 젓는다. 내 죽음의 시간을 바라보듯이 ----「손목 時計를 차고」전문   현대 문명의 산물(産物) 중에서도 도시인들의 손목에서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 손목시계다. 그것은 시간의 개념이 현대 도시인들의 생활 속에 깊이 침투했기 때문이다. 박치원시인은 그 작은 시계 속에 자신의 존재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그래서‘유리 안 半徑, 낭떠러지 숫자 판’이라는 이미지로 냉엄한 시간의 원리를 인식하고 분침(分針)의 소리를 자신의‘심장소리와 닮았다고’한다. 그러면서‘무한한 행복감’이라는 긍정적인 시선으로‘죽음의 시간’까지 바라본다. 이런 시적 사유는 그의 형이상학적인 주지시(主知詩)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치원은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자기만의 시적 방법에서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함으로써 시단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고, 시사적(詩史的)인 면에서도 기록될만한 업적을 보여주지 못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81    구조주의 리론 댓글:  조회:4744  추천:0  2015-02-19
구조주의 [構造主義, structuralism] 이론                                                                                                                                               발표자 : 심 상 운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는 문학에서도 작가들은 기존의 글들을 혼합하는 능력, 재조립하거나 재배치하는 능력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미 씌어진”언어와 문화의 방대한 사전에 의존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존 베일리는 구조주의 문학론이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조적 삶의 산물이며 작가의 본질적 자아를 표현한다는 기존의 관념을 거부한다는 것, 소설이나 희곡이 ‘사물을 있는 대로 말해’주려 한다는 종래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 ‘작가는 죽었으며’ 문학 담론은 어떤 진리의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론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호학의 죄는 픽션에서 진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파괴한 것이다. 훌륭한 이야기에서 진실은 허구보다 앞서고 허구와 분리될 수 있다”는 반구조주의의 이론을 펼친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문학에서도 철학과 같이 ’반인본주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1. 언어학적 배경     언어는 그 자체 안에 독립된 상관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은 글이나 말 속에서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끌어낸다는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스위스 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구조주의 형성의 토대를 만들었다. 소쉬르는 20세기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체계의 개념’을 언어학에 도입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구조주의적 사유방식의 기초가 만들어졌으며 그의 언어학적 모델은 다양한 사회 문화 현상들에 폭넓게 적용되었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일반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에서 그는 ‘언어학 연구의 대상은 무엇인가’와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세 가지의 이론으로 내놓았다.   그 첫째가 언어의 체계를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별한 것이다. 랑그는 한 언어의 발화들의 기저를 이루는 형성 규칙들과 패턴들의 총체이며, 빠롤은 실제적인 발화들 자체를 말한다. 따라서 랑그는 언어의 사회적 측면으로서 우리가 화자로서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공유체계인데, 반해서 빠롤은 이 체계가 언어의 실제 용례를 통해 개별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랑그와 빠롤은 그의 언어학에서 기본적인 연구 대상이 된다.     둘째는 언어학에서 언어의 통시태보다 공시태를 강조한 것이다. 공시태는 정해진 시점에서 작동하는 동시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며, 통시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언어 체계와 그 요소들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소쉬르는 통시태보다 공시태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하여 언어가 변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특정한 시점의 언어 구성요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빠롤에 대한 랑그의 강조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곡이 다른 기회에 다른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어도 같은 곡으로 인정되듯이, 빠롤은 같은 형식이 다른 실체로 실현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랑그는 개인적인 화자가 처한 사회적인 맥락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호들의 체계를 의미한다. 이런 랑그에 대한 논의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대한 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즉, 소쉬르는 언어 상태가 변한다는 사실도 언어가 공시적인 체계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셋째는 언어를 기호의 체계로 본 것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기호들의 체계이다. 여기서 기호란 개념을 의미하는 시니피에(signifie')와 청각 이미지를 의미하는 시니피앙(signifiant)이 결합된 것이다. 즉,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의 결합은 어떠한 필연성 없이 결합한 것으로 단지 그 언어집단의 사회적인 약속에 의해 자의적(恣意的)으로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기호의 의미는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기호가 속해 있는 체계 안의 다른 가치들과 맺는 관계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므로 기호의 의미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그 기호가 언어체계 안에서 다른 기호에 대해서 갖는 ‘차이’에 관해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종래의 ‘기호=사물’의 모델이 ‘기호=기표/기의’의 모델로 바뀐 것이다. 이 모델에는 사물의 자리가 없다. 언어의 요소들은 낱말과 사물 사이의 결속의 결과로서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체계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얻는다는 것이다. 기호체계로서의 언어의 독자성은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교통신호체계에서 신호가 ‘빨강-노랑-파랑’ 세 가지일 때, 기표(빨강)/기의(서시오), 기표(파랑)/기의(가시오), 기표(노랑)/기의 (기다리시오)의 약속체계를 갖는 것과 같다. 이때 체계는 일종의 임의적 약속으로 빨강과 서시오 사이에 고유의 절대적인 의미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색깔의 차이에 의해서 생길 뿐이다. 그것은 파랑과 노랑도 같다. 여기서 차이란 대립 및 대조의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이다. 예컨대, 신호등 빨강은 파랑이 아님이며 파랑은 빨강이 아니라는 뜻이다. 음성언어도 소리의 차이로 형성된다. 음성언어의 최하위단위인 음소(音素)는 유의미한 음 즉 언어 사용자(발화자, 청취자)에게 인지·지각되는 음이다. 음성언어의 체계는 음들의 관계 즉 대립항들이 짝을 이룬 이항대립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음소의 차원에서 보면 이 대립항은 ‘비음/비(非)비음, 모음/비(非)모음, 유성음/무성음, 긴장음/이완음 등이 있다.    이런 언어관의 요점은 언어 사용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하나의 ’체계‘ 즉 구조라는 점이다. 이런 구조는 화자들이 내재화하고 있는 언어능력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저절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구조주의와 기호학은 동일한 이론적 영역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미국의 철학자 C.S 퍼스는 기호를 1)도상적인 것(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화상 따위), 2) 지표적인 것(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3) 싱징적인 것(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상징기호는 기호가 그 지시 대상과 자의적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언어가 여기에 속한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언어학의 구조를 인류학의 연구방법으로 활용하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문화체계의 보편적 유형은 인간 정신의 불변적 구조가 낳은 산물이다. 그의 인류학은 문화체계의 보편적 유형을 금제(禁制), 신화(神話) 혹은 제의(祭儀)의 기원이나 원인 대신 특정한 인간의 행위의 저변에 깔린 차이의 세계에서 찾는다. 친족관계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도 객관적인 혈연이나 혈족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인간의 정신활동을 규제하는 보편적 법칙이 모든 형태의 사회생활에 반영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인류학은 신화, 제식, 친족관계의 구조에 대한 ‘음소적(音素的)’ 분석을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란 정신구조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는 친족관계, 신화에 나타나는 유형, 예술, 종교, 의례, 요리의 전통 등을 폭넓게 분석하여 문화체계의 보편적 유형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처럼 인류학의 예들이 보여주다시피,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이 구성한 의미체계의 ‘문법’, ‘구문’, 혹은 ‘음소적’ 패턴을 밝히려 한다.   『신화학』『유행의 세계』를 저술한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이론의 근거를 기호학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공인된 변별적 관계의 체계(기호)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원칙을 사실상 모든 사회적 행위에 적용시킨다. 이는 어떤 실제의 발화(빠롤)도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체계(랑그)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체계는 변화가 가능할뿐더러 그 변화는 발화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작용중인 언어체계의 규칙에서 모든 발화가 비롯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그것을 의복착용에 적용하고 있는데, 일상적인 의복착용을 개성의 표현이나 개인적인 스타일의 문제로 보지 않고 의복체계 내에서 찾는다. 어떤 한 개인이 만들어 내는 개성적인 의복스타일은 의복의 체계에서 그가 선택한 형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성적인 스타일은 개인의 선택 능력을 나타낸 것이 될 뿐이다. 이것을 음식에 대입하면 식사 중에 선택된 음식의 연쇄는 메뉴라는 것이다.   2. 구조주의 서술학     구조주의자들은 문학이 언어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는 데에 동의한다. 문학은 언어의 본성과 특수한 성질들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구조주의 시학은 러시아 형식주의와 밀접하게 연결 된다. 구조주의 서술이론은 문장구성규칙(구문론)이 서술규칙의 기본 모델이 된다. 문장 단위의 가장 기초적인 구문론적 모델은 ‘주어+서술어’로서, “기사(주어)는 칼로 융을 죽였다(서술어)”는 식의 문장이 그 예다. 이 문장이 어떤 삽화나 전체 이야기의 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기사’를 특정한 이름(란슬롯이나 거웨인 따위)으로, ‘칼’을 ‘도끼’나 다른 것으로 바꾸어 넣어도 그 본질적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문장구조의 이런 유추에 따라 블라디미르 프로프는 러시아 동화의 이론을 개발했다. 한 문장의 주어를 전형적인 인물들(주인공, 악당 등)에 대입하고 ‘술어’를 이런 인물의 전형적인 행동에 대입하는 것이 프르프스식 접근법이다. 따라서 그의 31가지 기능의 이야기 구조는 하나의 모델을 형성한다. 이 구조는 논리적 연쇄 관계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25, 어려운 과제가 주인공에게 부과된다. 26. 그 과제가 해결된다. 27. 주인공이 인정을 받는다. 28. 가짜 주인공 혹은 악당이 폭로 된다. 29. 가짜 주인공에게 새 모습이 주어진다. 30. 악당이 벌을 받는다. 31. 주인공이 왕 위에 오른다.     이런 이야기의 모델은 특정지역이나 특정 장르(동화, 희곡, 소설, 시 등)에 국한되지 않는 일반적 보편성을 내포하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   레비 - 스트로스는 언어학 모델을 사용하여 구조주의 방식으로 오이디프스 신화를 분석한다. 그는 신화의 단위를 신화소 (언어학의 음소 및 형태소와 비교됨)라 부른다. 신화소(神話素)는 언어학의 기본 단위처럼 이항대립으로 구성된다. 그가 구성한 오이디프 신화소는 1) 친족관계의 과대평가(오이디프스가 어머니와 결혼 한다. 안티고네가 법을 어기고 오빠를 매장한다)와 2)친족관계의 과소평가(오이디프스가 아버지를 죽인다. 에테오클레스가 형제를 죽인다.)이다. 그는 이 신화소를 통해서 연쇄적 관계의 이야기 구조가 아닌 신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패턴을 만들어 내고, 그런 패턴을 적용하여 인간정신의 기본구조, 인간의 온갖 제도, 구성물, 지식의 형태들의 형성방식을 지배하는 구조를 밝힐 수 있다고 한다.     A.J. 그레마스는 그의 저서『구조주의의 의미론』에서 프로프의 일곱 가지 ‘행동영역’ 대신에 주체/객체, 송신자/수신자, 조력자/반대자라는 여섯 가지 역할 (행위자)을 세 쌍의 이항 대립으로 제시한다. 이 쌍들은 모든 서술에서 되풀이 되는 세 가지 기본 유형을 나타낸다. 1, 욕망, 탐색, 혹은 목표 (주체, 객체) 2, 전달 (송신자, 수신자) 3, 보조적 도움 혹은 훼방(조력자, 반대자). 이것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 왕」에 적용하면 프로프의 범주를 사용할 때보다 더 깊이 있는 분석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레마스는 형식주의자 프로프보다 더 본격적인 구조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실체들 자체의 성격 대신 그것들 사이의 ‘관계’의 맥락에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그는 있을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의 연쇄를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의 기본 구조를 ‘계약적(契約的) 구조’, ‘수행적(遂行的) 구조‘, 이접적(離接的) 구조’라는 세 가지의 구조로 묶는다. 이 중 첫 번째의 계약적 구조는 ‘계약(혹은 금지)→위반→징벌, 계약 없음(무질서)→계약수립(질서)’라는 구조로서, 오이디프스 서술이 여기에 해당된다. 오이디프스가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를 위반하여 자신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계약(금지)→위반→징벌의 구조다.     츠베탕 토도로프는 프로프와 그레마스의 성과를 종합하여 오이디프스의 신화를 ‘X는 왕이다. X는 Y와 결혼한다. Y는 X의 어머니다. X는 Z를 죽인다. Z는 X의 아버지다.’라고 다섯 개의 명제로 구조화 한다. 이 명제들은 연쇄체를 이루고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이 연쇄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텍스트의 세부를 구성한다. 예컨대, 끼워 넣기(이야기 속의 이야기, 옆길로 빠지기), 연결짓기(일련의 연쇄체들), 바꾸기(연쇄체들을 섞어짜기) 등도 가능하고 여러 방식들을 혼합한 경우도 있다.     제라드 쥬네뜨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연구를 통해서 스토리, 담론, 서술의 세 가지 이론을 전개한다. 예를 들면 「아에네이드」2부에서 아에네이스는 청중에게 이야기하는 이야기꾼이고(서술), 하나의 언어적 ‘담론’을 제시하며, 그의 담론은 그 자신이 인물로 나오는 사건들을 재현(스토리)하는 것이다. 그는 서술의 세 차원을 동사의 세 가지 성질에서 끌어 낸 세 가지 상(相)(완료상, 진행상 따위.) 즉 시제, 법, 태(능동태·피동태·사동태 따위)와 연결시킨다. 그의 ‘법’ ‘태’의 구분은 시점이 초래하는 문제점을 해소시킨다. 예컨대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서 주인공이자 화자인 핍은 성숙한 자아의 서술 태도를 통해서 어린 자아의 시각을 제시한 것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그는 서술을 1) 이야기와 모방, 2) 서술과 묘사 3) 서술(이야기)과 담론 등 이항대립을 통해 고찰한다. 첫 번째의 이야기와 모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단순서술(발화자가 작가자신인 경우)과 직접모방(작가가 등장인물을 통해서 발화하는 경우)을 구별하는 것이다. 쥬네뜨는 이 구별이 유지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문학작품이 문학적 재현이라고 할 때, 작품 속 발화자가 작가 자신인 경우와 작중 인물의 경우를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야기는 오직 이야기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서술과 묘사는 서술이 행동, 사건 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스토리에서 본질적인 것처럼 보이고 묘사는 보조적 장식적인 것 같이 보인다는 것을 비판한다. 그 예로 “그 남자는 탁자로 가서 칼을 집어 들었다.”라는 문장에서 명사와 동사가 서술적일 뿐 아니라 묘사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세 번째의 서술과 담론의 대립은 주관적 채색이 배제된 순수한 서술이 있을 수 없음을 입증함으로써 이 대립을 해소한다. 어떤 서술이 아무리 투명하고 무매개적으로 보일지라도 판단하는 어떤 정신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서술과 담론의 대립을 해체하는 제라드 쥬네뜨의 이론은 자크 데리다가 해체적 철학의 문을 여는데 큰 영향을 준다.       3. 은유와 환유   구조주의는 실제 비평가의 해석상 적용을 위한 토대를 마련 해주는 몇 가지 사례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은유와 환유로 요약된다. 로만 야콥슨은 언어의 수직적 차원(랑그)과 수평적 차원(빠롤)으로 텍스트의 해석에 접근한다. 그는 수직적 차원에서는 서로 대체될 수 있는 요소들의 언어들을 제시한다. 그 언어에는 동의어와 반의어가 섞여 있다. 예를 들어 ‘오두막’이라는 말의 대체어로 ‘오막살이, 초가집, 대궐, 우리, 굴’ 등이 선택된다. 수평적 차원은 연쇄체를 이룰 수 있는 언어들의 결합이다. 예를 들면 ‘오두막은 타 버렸다.’ ‘오두막은 보잘것없는 작은 집이다’라는 식이다. 그는 수직적 차원은 은유, 수평적 차원은 환유와 상응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문학적 스타일도 은유적인 것이거나 환유적인 것 어느 한 쪽으로 경사되어 표현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한다. 야콥슨의 이론에 따르면 문학사조의 낭만주의→사실주의→상징주의는 스타일상으로는 은유적→환유적→다시 은유적인 것으로의 변화로 이해하게 된다.     데이비드 로지는 『현대적 글쓰기의 양식』에서 야콥슨의 이론을 현대문학에 적용했다. 그는 은유적→환유적→은유적의 순환 과정에 몇 단계를 추가하여 모더니즘과 상징주의는 본질적으로 은유적인데 비해 반모더니즘은 사실주의적이고 환유적이라고 한다. 넓은 의미에서의 환유는 한 연쇄체 혹은 한 문맥 내의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의 전이를 말한다. 가령 우리가 ‘한 잔들 게’라고 했을 때 ‘잔’은 잔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잔속에 든 내용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유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문맥이 필요하게 된다. 야콥슨이 환유를 사실주의와 연결시킨 것도 사실주의가 하나의 전체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대상의 여러 양상, 부분, 문맥상의 세부묘사 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야콥슨의 이론을 쓸모 있게 다듬은 데이비지 로지는 “문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하면서도 다음의 예를 제시한다.   사전검열을 받는 영화에서는 성교의 영상적인 비유로 불꽃놀이와 해안에 부서지는 파도가 애용되는데, 그 절정이 독립기념일의 해변에서 일어났다면 환유적인 배경으로 위장될 수 있겠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내의 곁채에서 일어난다면 두 말할 여지없이 은유적인 것으로 받아질 것이다.   이 예로 보아서 야콥슨의 이론을 너무 고지식하게 사용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4. 구조주의 시학   1975년「구조주의 시학」을 저술한 조나단 킬러는 처음으로 프랑스의 구조주의를 영미의 비평론에 융합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는 언어학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위한 최상의 인식모델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소쉬르의 랑그와 빠롤 이론에서 벗어나서 노엄 촘스키의 ‘언어능력’과 ‘언어수행’ 사이의 구별을 선택했다. 언어능력은 언어체계에 대한 지식에 무의식적으로 동화되어 그 지식을 바탕으로 올바른 문장을 만들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이 같은 관점이 의미하는 것을 문학 이론에 적용시킨다. 독자들은 교육제도를 통해 문학의 문법을 습득하게 되고, 시인과 작가는 독자들의 언어 능력에 기반을 둔 읽힐 수 있는 것을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이론의 초점을 텍스트에서 독자로 이전하는 것이다. 그는 “시학의 진정한 대상은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 작품의 가해성(可解性)이다. 우리는 작품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독자로 하여금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은연중의 지식 내지 관습이 형성 되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규칙은 텍스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해석 행위 속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해석의 다양성에 좌절하지 않고 통일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어떤 특정한 시에서 통일성을 발견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이 찾는 의미의 기본형식들(즉 통일성의 기본 형식들)은 동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해석의 관습(동일성)을 구조주의의 특성에 따라 통시적이고 역사적인 의미 체계가 아닌 정태적·공시적 의미 체계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의 텍스트 접근법에서 가장 난제는 독자가 사용하는 해석의 규칙을 얼마나 체계화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다. 개별 텍스트에 관해서 한 시기에 산출할 수 있는 다양한 해석들을 설명해 낼 단일한 틀, 단일한 규칙과 관습의 틀을 생각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988년「기호 만들기」에서는 순수 구조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적 능력의 제도적 이념적 토대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를 하게 된다.   구조주의는 텍스트의 언어란 작가 정신의 반영이며 작가의 언어는 그의 개성과 분리 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인문주의적 유형을 비판한다. 그리고 언어는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무엇이라는 관점을 가진 신비평(新批評)에 동조하고 도전한다. 이는 태초에 말씀(언어)이 있었고 말씀이 텍스트를 창조했다는 언어의 선재성(先在性)을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적이고 낭만적인 문학론에서 작가는 텍스트의 기원이며, 창조자이자 조상이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쓰기에는 기원이 없고 언어가 모든 개별적 발화보다 앞선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텍스트와 작가를 분리할 뿐 아니라, 역사적인 변화의 문제를 텍스트에서 배제하고 이야기의 구조 자체와 한 시대를 지배하는 미학 체계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구조주의자들은 작가의 언어가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지 않고, 언어의 구조가 현실을 산출(産出)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의미의 근원은 작가와 독자의 경험이 아니고 언어를 지배하는 작용과 대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언어(문학)의 탈신비화(脫神秘化)라고 말할 수 있다.     * 이 글은 라만 셀던· 피터 위도 우슨· 피터 부루커 지음 정정호· 윤지관· 정문영· 여건종 옮김『현대 문학이론 개관(A Reader's Guide to Contemporary Literary Theory)』의 4. 구조주의 이론을 정리·요약한 것에 사전의 지식을 보충한 글임.      
80    포스트 구조주의 리론 댓글:  조회:4312  추천:0  2015-02-19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정리 : 조 명 제     ☞ 구조주의의 한계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작품의 구조에 집착하는 데서 오는 공허하고 분명치 못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면을 ‘언어의 감옥’이라고 비판한 경우도 있다(프레드 리 제임슨『언어의 감옥-구조주의와 형식주의 비판』, 까치, 1972).   ②본디 반역사주의적인 성향에서 오는 문학의 배경 등에 걸친 입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③언어구조 등에 치우치는 데서 오는 탈사물화(脫事物化) 현상을 피하지 못하고 있 다.   이런 취약성을 안고 있는 구조주의는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 포스트구조주의 내지 해체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구조주의의 특성과 제문제   196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구조주의의 기본적 특성은, 우선 그것이 ‘언어(기호)’를 모든 체계의 기본으로 상정한다는 점, 그리고 개개의 특성보다는 그것들의 근간을 이루는 어떤 체계나 문법, 곧 구조의 발견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대별된다. 이 같은 관념은 언어 자체만이 아니라 문화, 문학, 인류학, 신화 및 기타 사회적 관습들을 연구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구조주의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보다는 그 근저에 숨어 있는 공통된 체계나 법칙, 혹은 틀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그 특성 자체가 애초부터 스스로의 숙명적인 해체 요인이 되어 왔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개별 텍스트들의 특성과 가치는 무시한 채, 전체적인 ‘구조’만을 중시함으로써 개체를 전체에 종속시켜 버리는 전체주의적 독선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첫째 구조주의자들은, 리얼리티는 작가의 언어가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구조가 창조한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한 문학작품의 의미는 작가나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개인을 지배하는 언어 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둘째,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구조’, ‘문법’ 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립하려는 과정에서 스스로 경직된 과학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구조주의는 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의 서술적 분석을 통해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학적 태도를 배격하며, 따라서 모든 경험적 리얼리티와의 연계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셋째, 구조주의는 공시적인 연구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통시성을 무시하는 비역사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은 텍스트가 씌어진 시대나 그것의 역사적 배경과 수용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넷째, 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연히 자아나 주체, 개인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키는 비인본주의적, 비실존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 역시 하나의 고정된 틀 속에서 생성되고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곧 모든 ‘개체’의 기원이나 센터가 되며, 특권을 부여받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랑그/빠롤, 말/글, 심층구조/표면구조, 자연/문명, 서술/묘사 등으로 모든 것을 이분화한 다음, 전자(前者)에 특권을 부여하는 구조주의의 이분법적(이항대립적) 관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섯째, 구조주의는 모든 것의 근본이 언어 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기호의 재현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주의가 등장한 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한 포스트(탈)구조주의는 위에 지적한 구조주의의 여섯 가지 특성 모두를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내부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단순한 연장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것의 완전한 배제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가 없는 포스트구조주의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을 뿐더러, 포스트구조구의는 구조주의가 구축해 놓은 구조를 그 내부에서 ‘해체’ 또는 ‘탈구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면적 속성을 가진 포스트구조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우선 전술한 여섯 가지 구조주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해체하면서 시작된다.     1) 전체적인 ‘구조’보다는 ‘개체’의 존엄성과 자유를 인정한다. 2) 사고의 경직화 및 문학과 학문의 과학화를 배격하며, 이성 중심적 태도를 지양 한다. 3) 역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명하며, 과거를 향수 가 아닌 탐색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4) 자아와 주체를 중요시한다. 5) 절대적인 진리나 센터, 근원의 독선과 횡포를 거부하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부터 탈피하여 ‘타자’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이는 곧 형이상학의 부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6) 모든 기호와 그것들의 재현 능력을 불신한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으로서 하라리는 여섯 번째 것, 즉 재현에 대한 차이를 든다. 그에 의하면 언어 체계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구조주의는, 언어를 포함한 모든 기호들의 재현 능력과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현존, 그리고 기호와 대상 사이의 연계성을 믿는 이상주의적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인데, 포스트구조주의는 바로 구조주의의 그러한 이상주의적 가정에 회의를 표명하고 구조주의가 제시하는 안정을 뿌리째 뒤흔들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낙관적인 생각이 틀린 것이며, 사실 의미란 본질적으로 불안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호’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고, ‘의미’ 역시 유동적이고도 유보적인 상태일 뿐이며, 따라서 지시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는 이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 및 기호학 이론가로 자신을 해체시켜 가면서 탈바꿈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이 계열의 주요 저작으로는『S/Z』(1970)가 있다. 발자크의 사실주의 소설인「사라진느(Sarrasine)」가 어떻게 포스트구조주의적 책읽기를 통해 반재현적 독서를 유발하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다.『S/Z』에서 바르트는 독자가 어떻게 고정된 의미의 단순한 소비자에서 다원적 의미의 적극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후기의 바르트는, 언어란 결코 명료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언어를 통해 독자가 분명한 진실이나 리얼리티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훌륭한 작가와 가치 있는 텍스트는, 언어의 그러한 속성을 인정하고 글쓰기를 통해 ‘유희(play)'할 줄 아는 작가와 텍스트를 의미했다.   롤랑 바르트의 초기 저작인『글쓰기의 영도』를 보면, 당시 사상의 중심이었던 사르트르의 문학관과는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여는 작가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르트르의 언어의 도구성을 중심으로 한 언어관과는 달리, 바르트는 글쓰기에 있어서 형식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데올로기가 드러나는 방식을 분석할 수 있는 ‘신화(myth)'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바르트에 의하면, 기호의 의미작용에는 두 수준의 질서가 있다. 제1차의 질서는 현실의 수준 또는 자연의 수준이며, 제2차의 질서는 문화의 수준이다. 의미작용의 제1차 질서는 기호가 그것이 표상하는 현실의 외시(外示) 의미만을 생산한다. 이 수준에서 ‘한 알의 모래’는 모래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제2차 질서는 기호의 두 기본 소자들, 즉 기표와 기의가 함축하고 있는 특성들로부터 비롯된다. 기호가 두 개의 기본 소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2차 질서 또한 두 가지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함축적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신화의 질서이다. 먼저, 함축은 기표의 제2차 의미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표가 기호의 형태를 결정한다. 기호 형태의 변이와 변용들이 여러 가지 주관적 함축 의미를 일으킨다. 이 수준에서 예의 ‘한 알의 모래’는 모래 이상의 것이 된다. 영국의 시인 W.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본다’고 했다. 토목 건축업자들이라면 ‘한 알의 모래’라는 기표에서 거대한 건축 구조물을 떠올리고, 반도체 공학자들은 거대한 인공 통신조직을 볼지도 모른다. 이처럼 기표는 보는 사람의 문화적 배경과 체험에 따라 천차만별의 함축 의미들을 일으킨다. 기호가 지니는 함축 의미는 특수하고 자의적인 뜻으로 이루어진다. 함축 의미는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기호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 오해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둘째로 기호를 통하여 현실을 설명하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신화에 의한 것이다. 신화란 함축적 기의들로 엮인 고리의 체계를 말한다. 이렇듯 바르트는 신화를 ‘함축 의미의 체계’라고 정의하는데, 이 신화는 끊임없는 변형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화라는 것은 고전적인 신화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화란 ‘하나의 이야기’ 혹은 ‘하나의 특수한 언술’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기호의 ‘의미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섬유조직 자체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분석은『패션의 체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데, 그 텍스트는 한마디로 말해서 여성의 의상에 관한 기호학적 분석을 시도한 책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실제 의상이 아니라 패션잡지에 글로 기술된 의상이라는 점이다. 그 글이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이미 소쉬르의 제안들을 뒤집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문에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적 기호학이 언어학에 속해 있는 학문임을 주장한다. 그러한 면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언어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쉽게 말해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하나의 의미 있는 것으로 인지할 때는 항상 그 대상을 언어화해서 이해하도록 되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현실은 피할 도리 없이 의미를 짓는 언어체의 중재에 의해 일어나며, 나아가서 언어체는 현실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언어체이며 그 어떤 것도 언어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 같은 주장은 바르트의 뿌리 깊은 신념인 것이다.   후기의 바르트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영향과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 아래에 서 새로운 지형도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텍스트이다. 그는 텍스트의 유희성을 다룬『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비롯해서, 포스트구조주의 문학 논쟁으로 번진『저자의 죽음』(1968)을 썼는데, 다원적 텍스트론의 바르트는 텍스트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쓸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읽을 수 있는 텍스트는 흔히 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게 있어서 책의 개념은 고정적이고 잘 변하지 않는 이미지이다. 그에 비해 쓸 수 있는 텍스트는 수용미학적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또한 창조적인 하나의 저자가 된다. 이러한 텍스트 개념은 문학비평에 있어서, 수용미학(독자 지향 이론)과 더불어 독자의 위치를 높이고 독자의 능동적 독서 행위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일반적인 텍스트의 개념은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산물(글로 씌어진 것, 말로 된 것, 그림으로 그려진 것, 영화, TV프로그램, 화장한 얼굴, 몸치장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며, 또한 이런 것들 하나하나를 일컫는 일반적 용어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담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도 이해된다. 텍스트는 기호들이 어떤 코드(code)에 입각해서 통일성을 이룬 구체적인 기호학적 체계를 가리킨다. 텍스트가 구조적임에 비해 담론은 과정적이다. 담론은 텍스트를 배태한 채 수행되는 기호학적 과정이다. 이러한 텍스트 중심주의는 나중에 데리다의 유명한 명제 “텍스트 바깥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낳게 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변화를 데리다, 크리스테바와 같은 학자들과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데리다의 초기 3부작인『목소리와 현상』『글쓰기와 차이』『그라마톨로지』에서 수행했던, 후서얼의 기호학 체계 비판과 소쉬르의 언어 중심주의 비판에는 흔히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알려진 ‘이성 중심주의’의 비판에 있었다. 그래서 존재신학 혹은 서구 중심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공격하는 이런 데리다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롤랑 바르트의『저자의 죽음』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 논문의 핵심은 섣부르게 오해되고 있는 인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단 하나의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과거 작가들에 대한 신화를 전복하자는 데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바르트 역시 단일한 의미란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비롯된 서구의 뿌리 깊은 전통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효과」라는 논문에서 바르트는, 플로베르의 소설이나 미슐레의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체적 세부 사항에 주목한다. 그것은 지시 사항과 기표의 직접적인 공모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기의는 기호에서 추방되고 지시 대상적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형성된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러한 장치는 사실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J.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의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즉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기호(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기 바르트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연구는 초기 구조주의자들에 대한 정형화된 분석을 바탕으로 그 위에 기표의 물결을 뒤덮는다. 데카르트 이래 소쉬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의였으며, 그것은 구조주의자들과 초기 롤랑 바르트에게까지는 중요한 입장으로 실천된다. 그러다가 후기에 와서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전복되는데,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방한 사람은 자크 라캉이다. 라캉은 그의 강의 속에서 그 같은 전복의 관계를 설명한다. 어떤 구조 속에서 서로 배타적이면서 공존하는 두 가지 실체나 개념을 이항대립쌍(또는 이원항)이라고 할 때, 그 두 줄기의 상호작용을 라캉은 Sr/Sd(기표/기의)라는 형식으로 표시하면서, 기표의 우위를 주장한다. 기의란 언제나 제시된 기표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미끄럼'을 타는 그런 것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나중에 보드리야르에 이르게 되면 기의는 사라지고 오직 기표만이 남아 있게 된다. 이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데리다는 라캉과 보드리야르 사이에서, 라캉식으로 보자면 기존의 담론 질서에 대한 전복을 꾀하고, 보드리야르식으로 보자면 기표들의 유희를 만들어 낸다.   데리다가 문학 이론적 측면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프랑스 내부에서가 아니었다. 데리다의 이론은 동시대인인 미셀 푸코와 함께 빠르게 미국 학계에 전해졌는데, 미국의 예일대학 교수인 폴 드 만을 비롯해서 해롤드 블룸에 이르기까지 해체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강단에서 환영받게 된다.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한 이 일파는 버로우즈나 토머스 핀천 같은 기존의 비평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작가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적용하면서 이른바 해체비평을 전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정신분석학 이론들   언어로 표명되는 성욕에 근본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정신분석 비평은 문학적인 ‘무의식’을 추구하면서 특히 세 가지 주요 양상, 즉 저자(‘등장인물’), 독자, 그리고 텍스트를 취급했다. 정신분석 비평의 시작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학작품을 예술가의 징후로서 분석한 것이었다. 그 뒤 정신분석 비평은 정신분석적 독자반응 비평을 통해 포스트프로이트주의자들에 의해 변형되고, 문학작품은 집단 무의식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재현한다는 칼 융의 ‘원형’ 비평에 의해 논박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와서는 자크 라캉과 그 추종자들의 저작에 의해 포스트구조주의 맥락에서 재구성되었다. 이들은 ‘욕망’의 역동적인 개념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모형을 결합시켜 영향력 있는 쇄신 작업을 해 왔다.   1.자크 라캉의 언어와 무의식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소쉬르의 언어 이론을 혼합한 것 같은 자크 라캉의 이론은 우선 주체(주관Subject)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구조주의와 정면 충돌한다. 라캉은 무의식을 불안정한 지시어에 비교하며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처럼 지시 어와 지시 대상 사이도 역시 불안하고 단절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언술행위는 만족이 아닌 욕망만을 가져다 주는데, 이 욕망은 물론 무의식과 상통하고 있다. 모든 지시어는 이미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의 힘에 대한 믿음을 버리라고 권하며 의미의 자유로운 유희를 제안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따르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미끄러진다’).   2.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언어와 혁명     문학적 의미에 관한 크레스테바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시적 언어의 혁명』(1974)을 들 수 있다. 바르트의 이론과는 달리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이라는 특별한 사상 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책은 정렬되고 합리적으로 수용돤 것이 ‘이질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에 의해 계속 위협당하는 과정을 천착하려 한다. 크리스테바의 제목에 나오는 ‘혁명’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은유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녀의 견해로는 급진적인 사회 변화의 가능성은 권위 있는 담론들의 분열과 연루되어 있다. 시적 언어는 사회의 ‘닫힌’ 상징적 질서를 ‘가로질러서’ ‘기호학적’인 것의 전복적인 개방성을 도입한다.   3.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 분석   질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저서『앙띠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5)과『카프카:소수문학을 위하여』(1972)에서 정신분석을 과격하게 비판하고-라캉을 끌어들이나 그를 초월하면서-동시에 그들이 ‘정신분열 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인 텍스트 자세히 읽기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그들은 욕망이란 무의식을 흉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기재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열 분석’은 욕망의 해방을 의미하며, 편집증적 무의식적 욕망과는 달리, 분열증적 욕망은 자본주의적인 총체성의 전복을 제공하면서 ‘탈영토화’를 한다. 문학과 정신분열의 관계는 문학도 역시 체계를 전복시킬 수 있고 체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텍스트도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담론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욕망을 해방시키는 독자’, 즉 ‘분열 분석가’를 필요로 한다. 그들의 개념 속에서 카프카의 작품은 ‘리좀’(rhizome)이다[엘리자베스 라이트].   해체 이론     해체비평(Deconstruructive Criticism)은 더러 포스트구조주의 또는 탈구조주의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해체주의는 어디까지나 포스트구조주의의 하부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게 좋겠다.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비평방법을 지니고 있는 해체비평은 재래적인 작품 읽기나 해석방법을 부정하고 새로운 텍스트 읽기를 주장한다. 소쉬르와 그에 바탕을 두고 있는 구조주의 기호학에 의해 발달된 개념들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모태를 무너뜨리는 성격을 띤 이론이다.     1. 자크 데리다의 해체 이론     롤랑 바르트가 구조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환한 대표적 인물이었다면, 자크 데리다는 구조주의의 기본 명제들을 그 근본부터 뒤흔들며 등장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36세 무렵의 무명학자이던 그는 1966년 미국의 존즈 홉킨즈 대학에서 열린 이라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여 세계적인 구조주의 석학들을 놀라게 한 논문「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그리고 유희」를 통해, 레비-스트로스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이론은 물론,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의 근본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문을 제시했다.   그의 해체적 이론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구조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이지만,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전형적인 구조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의미의 궁극적인 근원으로서의 구조 개념까지도 해체함으로써 첨예한 포스트구조주의의 시대를 연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의 임의적인 관계에 새삼 주목한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동전의 앞뒷면처럼 안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 사이는 불안정하며, 기표와 기의는 그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경계선을 두고 서로 끊임없이 흐르다가 아주 순간적으로 의미가 형성된다고 여겼다. 하나의 기표는 시대의 흐름과 변천에 따라 새로운 기의가 덧씌워지곤 한다는 뜻이다.   무릇 사람들은 ‘중심’을 원한다. 중심은 ‘현존으로서의 존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예(例)의 논문에서 데리다는 구조나 기호의 내면에서 그것들에게 통일성을 부여해 주는 어떤 의미의 ‘중심(center)’이 ‘완전한 현존’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다만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의미의 중심에 대한 서구 형이상학의 욕망과 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로서 데리다는 서구의 ‘말(말씀) 중심주의(logocentrism)’ 또는 ‘음성 중심주의’(『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를 들고 있다. ‘로고스’(희랍어로 ‘말’을 뜻함) 는 신약성서에서 최대로 가능한 현존의 중심화의 의미를 가진 용어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모든 사물의 기원이 되는 ‘말씀’은 세계의 완전한 현존을 승인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이 하나의 원인의 결과이다. 글은 말의 대체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데리다는 음성을 글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말 중심주의의 고전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호 체계 즉 글은 현존해 있다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회의를 던지며, 근원과 현존의 부재를 주장한다. 만일 현존에 도달, 완전한 재현이 가능한 것이라면 모방이 필요 없어지고 따라서 예술이나 언어도 그 존재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현존이나 완전한 재현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말이나 글 모두가 일종의 글쓰기라고 말함으로써 말/글의 서열제도를 없애 버렸다.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이론, 즉 언어의 의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통해 언어체계 속에서 구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기호는 횡적으로 다른 기호들과의 변별된 차이에 따라 그 의미가 정해질 뿐만 아니라, 종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나타난 기호들은 물론 앞으로 나타날 기호들과의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 결국 기호의 의미는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결코 최종적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연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미작용의 이 같은 끝없는 운동, 즉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을 동시에 나타내기 위해, 다시 말해 왜 기호는 완전한 현존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말 중심주의는 틀린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差延/differanc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다. 의미가 기호들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차이의 개념을 차연의 개념으로 대치한 것이다. 프랑스어 동사인 ‘differer’는 ‘차이나다(다르게 하다), to differ’와 ‘연기하다(지연시키다), to defer’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간적 개념인 ‘차이’는 언어와 그것이 재현하려는 것과의 숙명적인 차이를, 그리고 시간적 개념인 ‘지연’은 언어가 재현하려는 현존의 끝없는 유보를 의미한다. 즉 하나의 텍스트 속에서 어느 한 요소의 의미는, 그것이 연관과 맥락에 의해 그 텍스트 내의 다른 요소들과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현존할 수는 없게 된다. 따라서 그것의 의미는 영원히 ‘차이’를 갖게 되며 끝없이 ‘유보’되는 것이다. 데리다의 중요한 이론 중의 하나인 상호텍스트성 또는 범텍스트성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와 중심과 근원이 유보되어 있는 현 상태는 작가들에게 활발한 유희 를 유발시키며, 현실은 곧 꿈의 속성을 띠게 된다. 또한 절대적 진리의 유보는 곧 해석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요컨대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언어 외적인 의미의 원천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고정된 결합까지도 부정하고 시니피에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시니피앙의 끝없는 유희를 강조함으로써 재현 가능성을 부정하고 시니피앙의 의미화 기능을 열린 지평으로 개방한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이러한 태도나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상호텍스트성 이론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비이데올로기적이고 비투쟁적이며 텍스트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현실과 괴리된 비평가라는 비판을 가져다 주고 있다.   2. 미국의 해체 이론   미국의 비평가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신비평의 형식주의를 떨쳐 버리고자 수많은 외국의 이론들을 자유롭게 섭렵하고 있었다. 노드롭 프라이의 과학적 ‘신화비평’, 루카치의 헤겔적 마르크스주의, 뿔레의 현상학, 그리고 엄격한 프랑스 구조주의가 각각 유행하였다. 데리다가,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비평가들을 매료시켰다는 사실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미국의 해체론과 프랑스 해체론 간의 두드러진 차이의 하나는 비평적 글쓰기의 양 식에 있다. 예컨대 데리다와 바르트가 때로(특히 1970년대 이래로) 파편화되고 장난스러운 담론을 선보이는 데 반해, 드 만과 밀러 그들은 잘 짜여진 관습적 텍스트를 내놓는다. 그러니까 미국의 해체론자들은 온갖 텍스트성의 자유 유희를 주창하면서도 전통적인 담론 양식을 실천한다.   ✿폴 드 만(Paul de mann)/ 드 만은 모든 언어는 동시에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반대의 뜻을 갖는 것은 언어의 지칭력에 대한 회의를 의미한다. 그는 이것을 ‘언어의 수사성’이라고 불렀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상반된 뜻을 갖는 경우에 해석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신비평의 모호성과는 다르다. 모호성은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한다는 전제 아래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것이지만, 드 만의 수사성은 이미 언어 자체가 서로 반대 의미를 품고 있어 해체되어 버리므로 엄밀히 어느 쪽 의미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   ✿헤이든 화이트/ 포스트구조주의의 수사적 유형은 여러 형태를 취하는 바, 역사 편찬학(역사 이론)에서 화이트는 잘 알려진 역사가들의 저작들에 대해 과감한 해체를 시도했다.『담론의 수사학』(1978)에서 그는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서술을 객관적이 라고 믿지만, 구조와 관계되는 그들의 기술 행위는 텍스트성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해롤드 블룸/ 블룸은 전통에 대항하는 시인의 강한 자기 주장이 괴기한 오독을 낳는다고 했다. 시인은 늘 앞선 시인의 영향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 강한 에고는 선배의 시를 잘못 읽는다. 그러나 억압된 선배의 시는 흔적으로서 후배의 시에 수정되어 나타난다. 블룸은 ‘시적 오독’에 관한 4부작을 통해 계몽주의 이후 영미의 주요 시인을 탐구했다.   ✿제프리 하트만/ 하트만은 모든 것이 자리바꿈이고, 다만 과정에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비평의 사회적 책임 역시 텍스트를 서로 공유하는 상호 관련성에 있을 뿐이다. 그는 ‘연기(delay)’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리면서 의미의 결정이 늦춰지는 게 아니라 의미 자체가 끊임없이 지연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해체 이론은 텍스트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이미 스스로 해체해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J. 힐리스 밀러/ 밀러는 “모든 독서는 오독이다.”라고 설파한다. 그의 수사비평은 데리다의 ‘차이’와 폴 드 만의 수사성이 묘하게 혼합되어 단어, 이미지, 작품들의 관계가 모두 반복이고 자리바꿈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셸 푸코의 언술과 권력     미셸 푸코는 데리다의 상호텍스트성 이론이 언어를 모든 역사적, 사회적 틀에서 분리시켜 언어가 마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포스트구조주의 계열의 사상가이다. ‘텍스트의 밖이란 없다.’ 즉, 우리는 결코 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텍스트와 언어의 문제로 귀결시켰던 데리다와는 달리, 푸코는 ‘글쓰기’란 복합적인 힘을 창조하는 행위이고 ‘텍스트’란 곧 이 복합적인 힘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예컨대「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푸코는 언술의 힘을 통해, 그리고 특정 의미의 부여를 통해 저자가 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독자들을 억압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지식과 권력과 억압 사이의 함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푸코가 말하는 언술행위라는 것은 곧 지식과 권력이 담합하여 만들어 놓은, 그래서 우리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말하기와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정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배 권력이 내세우는 정의의 개념이란 사실 그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합법화시킨 것일 뿐, 혁명 후에는 그것이 곧 불의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이성적이고 절대적이며 고정된 기준은 곧 임의적인 것이 되고 불안하게 되며, 드디어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영합한 공식적인 언술행위와 그것의 억압에 대한 관심은 푸코로 하여금 그러한 공식적인 언술행위가 오랫동안 제외해 온 또 다른 소외된 언술행위로 눈을 돌리게 해 주었다. 지식과 권력의 결탁은 곧 규율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타자에 대한 온갖 억압을 합법화, 정당화시켜 주게 된다. 그런데 이 정당화는, 압제자에게는 스스로 당연한 지배자로 군림하도록, 그리고 피압제자에게는 압제가 당연한 것으로 순응토록 만든다는 점에서 압제자와 피압제자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감시와 규율과 교화의 목적은 비정상인의 정상화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 정상화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문제려니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다소간 정상화되었다고 판정을 받는 비정상인들은 대부분 모범수가 되어 이번에는 제도적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동료들을 억압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권력과 지식의 이러한 결탁과, 제도적 폭력과 억압에 대한 문제는 정신병원뿐만 아니라 형무소, 복지원, 고아원, 학교, 정부, 성(性) 등의 모든 사회제도에 해당되는 것임을 푸코는 시사한다. 그것들은 너무도 교묘히 모든 것 속에 들어가 있고 너무도 널리 편재해 있어서 밖으로 태어나고 교육받으며 성장해 가기 때문이다. 푸코는 바로 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탐색하여 보이도록 해 주는 것이 비평가의 작업이라고 했다.『광기의 역사』『말과 사물』『지식의 고고학』『감시와 처벌』『감옥의탄생』『性의 역사』등 그의 저서들은 구조주의적 분석 방법에 큰 획을 그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시작 이론/ 푸코의 미국쪽 제자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중요한 저서『오리엔탈리즘』(1978)에서 푸코의 담론 이론을 차용하고는 있지만, 푸코와 데리다를 세속성(worldiness)이 부족한 인물로 규정하고 비판을 가한 더욱 급진적인 비평가이다. 사이드는 텍스트가 산출되고 위치해 있는 역사적 순간이나 그 것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은 무시한 채, 텍스트 내면의 미궁 속으로만 빠져들어가고 있는 현대 문학비평의 현황을 개탄하며, 텍스트는 고고한 고립에서 벗어나 보다 더 세속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사이드가 말하는 세속화란 물론 텍스트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 그리고 텍스트와 현실 세계와의 긴밀한 연관을 의미한다. 사이드의『시작 이론』이 가지는 중요성은, 우선 그것이 그 동안 인류 역사를 주도해 온 지배적 언술행위의 군림과 횡포에 저항하여, 그것과 다른 언술행위를 찾아 내고 인정하며, 또 창조해 내는 데 있다.   신역사주의와 문화유물론   신역사주의 비평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폭넓게 전개되었던 해체론이 80년대 후반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자, 역사 또는 역사주의를 다시 되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는 비평 이론의 하나로 등장했다. 지나치게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비평 이론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신비평과 해체비평에 이르는 여러 비평 경향들을 원용하여 낡고 고착된 ‘역사’의 개념을 다시 꺼내어 재조정하고 재조합해 보려는 일종의 역사 새로보기 작업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모든 표현적 행위는 유물론적 실천의 그물망에 내재되어 있고, 문학과 비문학적인 텍스트들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보는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그 전략을 살펴보면 신역사주의 이론이 해체비평의 견해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신역사주의와 해체주의와의 근친성을 짐작할 수 있지만, 신역사주의가 푸코의 역사주의, 후기 마르크스주의, 바흐찐의 다성성(多聲性) 이론과 카니발 개념까지 넘나들면서 해체주의와 변별성을 유지하고 이는 것은 분명하다.   문화유물론이란 용어는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의 좌파 전통의 진보적 정치비평가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마르크스주의와 문학』(1977)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것의 실천적 활동은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에서 진행되어 온 문화 분석의 여러 형태를 토대로 하여 시작되었다. 이 작업을 통해서 역사학, 사회학, 문학연구 분야의 영문학, 여성론, 대륙의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혼합, 수렴되어 왔다. 알뛰세와 미하일 바흐찐의 영향하에 있는 영국 문화유물론의 기본 가설과 개념의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깔려 있는데, 문화유물론은 지금까지의 문학비평의 경향과는 달리 문학을 특권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설사 실천으로서 그 나름의 특수성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회적 과정으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이렇듯 사회적 과정으로 보게 되면 이른바 보편적 진리라든가 인간의 본질적 본성 등에 집착해 왔던 관념적 문학비평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결코 한두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사조의 이론이다. 포스트구조주의가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도록 강요되거나 부과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거나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속성은 그 스스로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심문을 하면서 비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서구 형이상학 전체의 전제와 가정을 극한으로까지 몰고 가 그것이 스스로의 모순으로 인하여 스스로에 대항해 해체되도록 하는 비평태도를 보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현대 서구 문학비평의 지평을 확대시켜 준 방대한 지적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그 동안 경직되고 고정된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에 종말을 고함으로써 문학비평의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었으며, 다음과 같은 면에서 문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우선 포스트구조주의는 모든 절대적 의미의 안정된 근원을 교란시키고 해석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며 모든 결론을 유보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 체제나 지배 구조에 의해 억압받는 ‘개체’의 해방을 외치며 경직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열린 사회를 지향한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가끔 인정하듯이 주장들에 대해 저항하려는 그들의 욕망은 숙명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만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그들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견해를 요약하려는 것조차도 그들의 실패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와 신역사주의자들은 그 이론이 과거를 다시 만드는 것을 도와 주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개입주의적인 이론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종류의 상호 텍스트적인 역사 이론을 창시한다. 문화유물론의 경우 그 자체는 포스트구조주의에 의존하는 반면에 의미의 순진한 자유 유희를 해방시키기 위해 포스트구조주의가 제시한 몇 가지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 ❧   ⓛ.담론(談論): ‘discourse’의 역어인 ‘담론’은 담화(談話), 언술(言述), 언설(言說)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현재 다양한 학문분야와 사상조류들에서 각기 다른 목적과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담론은 말로 하는 언어에서는 한 마디의 말보다 큰 일련의 말들을 가리키고, 글로 쓰는 언어에서는 한 문장보다 큰 일련의 문장들을 가리키는 언어학적 용어이다. 한 마디 말 또는 한 문장만을 분석하는 언어학적 방법은 한 마디 말이나 한 문장이 다른 말 또는 다른 문장과 어떤 방법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는가를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담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담론이란 한 문장보다 긴 언어의 복합적 단위를 가리킨다.   담론 이론의 범위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셸 푸코는 담론을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력 있고 자기 지시적인 집합체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법률적 담론’, ‘미학적 담론’과 같은 말이 생겨나게 된다. 푸코는 지식의 생산과 형성, 권력의 체계 및 행사에서 담론과 권력은 구분하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보았다. 한편 담론이 비평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전개, 편입되면서 담론비평이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담론비평의 이론적 원류는,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 반기를 든 바흐찐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바흐찐은 마르크스주의가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간 언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언어를 이데올로기, 물질성, 계급 투쟁과 분리시키려는 일체의 언어론에 맞서고 있다. ②.의미작용(의미화):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③.코드와 코드화: 코드화란 기의와 기표간의 관계를 약속에 의해서 기호 사용자들에게 수용시키는 기호학적 조작을 말한다. 의미 작용과 코드화는 동시에 일어나는데, 코드화가 자의적 조작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되려면 기호 사용자들에게 코드화된 것을 관습화시켜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코드화를 필요로 하지만, 의미 작용은 코드화와 동시에 탈코드화를 허용한다. 탈코드화는 예술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예술의 가치를 상실케 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예술에 생명을 주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코드란 메시지를 한 가지 표현에서 다른 표현으로 변환시켜 주는 명료한 규칙들의 묶음이다. 즉, 코드란 ‘기호를 위한 명료한 사회적 관습들의 체제’이다. --------------------------------------------------------------------------- ❧ 라만 셀던 외(정정호 외 譯)-현대문학 이론 개관(한신문화사), 레이먼 셀던(현대문학이론연구회 譯)-현대문학 이론(문학과지성사), 문덕수-현대의 문학이론과 비평(시문학사), 이명재-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권택영-후기 구조주의 문학이론(민음사), 김용권-현대문학 비평론(한신문화사), 윤호병-후기구조주의(고려원), 인문과학연구소(편)-현대 문학비평 이론의 전망(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움베르토 에코-기호학 이론(문지), 자크 라캉(권택영 엮음)-욕망 이론(문예출판사), 김경용-기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한국기호학회 엮음-문화와 기호(문지), 한국기호학회 엮음-현대사회와 기호(문지), 이상우 외-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이승훈(편집)-현대시사상ㆍ2(고려원, 1988) 외. ------------------------------------------------------------------------ ❧   ‘살려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오늘 하루만이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을 때까지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은 뒤에 죽여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김춘수「처용단장-제2부, 3」, ‘불러다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불러다오./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同,4). ☞ 대상과 주제가 없이도 시가 될 수 있을까라는 해체적 인식 끝에 얻은「처용단장」제2부는 일체의 관념이나 설명이 제거되고 증발된 탈관념의 세계요, 통일된 어떤 아이콘[像]으로서의 이미지도 없는 탈이미지의 세계이다. 언어와 언어, 또는 문맥과 문맥 사이의 단절과 차단으로 중심이 사라지고, 어느 것 하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 기호는 그 고유한 의미를 잃고 오직 무한한 상호지시의 관계로 존재할 뿐 재현적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아내의 간통 장면을 목격하고도 춤추며 노래한 처용의 그 기이한 행위처럼, 일상적 혹은 논리적 의미체계를 일거에 소거시킨 이 비논리적 리듬의 연속성은 의미가 스며들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오직 애절한 분위기의 주술적 충격으로만 전해 온다.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시니피에의 끝없는 미끄러짐을 뒤덮고 물결치는 시니피앙의 화려한 유희, 즉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전복된 탈중심의 소용돌이(궤적)가 현저한 상태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돌아가는 긴장으로 하여 팽이가 일어서듯, 그리고 현기증 나는 회전으로 하여 울음 울 듯 시니피앙의 유희와 울림의 효과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 탈중심 탈이미지의 세계는 현기나는 리듬의 실존적 환열 바로 그것이다. (조명제). ------------------------------------------------------------------------ ✯   (1) p.184-7~9행:만일 구조주의가 영웅적으로 인위적인 기호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었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희극적이고도 반영웅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한신문화사)/만일 구조주의가 인간이 만든 기호의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웅적인 것이라면, 후기 구조주의는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희극적이고 반(反)영웅적인 것이 된다.(문학과지성사), p.185-4~6행:이것은 마치 다양한 언어들이 한편으로는 사물들과 이념들의 세계를 다른 개념(기의)들로 조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단어들(기표)로 구성하는 것과 같다.(한신)/그것은 마치 여러 언어들이 사물과 관념의 세계를,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개념(‘지시어’)과 또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언어(‘지시 대상’)로 분리하는 것과도 같다.(문지), pp.185-맨 아래~186-1~2행:소쉬르는 언어가 물리적 현실과 독립된 하나의 총체적 체계라고 설정한 후, 비록 기호를 두 부분으로 분리시킨 것이 기호의 일관성을 없애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호의 일관성에 관한 감각을 보유하고자 노력했다.(한신)/언어를 외적 현실과 독립된 완전한 체계로 확립시킴으로써, 그는(*소쉬르) 비록 기호를 둘로 나누는 것이 그것의 응집력을 위협하는 것이긴 했지만, 기호의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문지)☯  
79    현대시의 리해 댓글:  조회:4206  추천:1  2015-02-19
현대시의 이해   『世界 戰後問題 詩集』(1961년 신구문화사) 독일 편에서   시   알베트 아아놀드 숄 (Albert Arnold Scholl) 이동승(李東昇) 역         시는 내용이 끝나는데서 시작된다.   신비로운 장미는 피어난다 황금의 언어의 피안에서 성곽의 저 바깥에서 논의되는 형태의 피안에서 思考體系의 바깥에서   서릿발의 불꽃 속에서 壁紙의 白馬 무늬에서 제단의 背面에서 生起하지 않는 것의 焦點에서,   母音으로 된 시는 分子模型 名詞로 된 교회의 창문 회상으로 된 거미줄 理想鄕에서 온 分光器 버려진 것으로 된 星座圖   太陽系 너머의 태양계   무상하기에 무상하지 않고 일시적이기에 결정적이며 시간적이기에 무시간적이고 단편적이기에 완전하며 무방비이기에 강력하며 모방할 수 있기에 반복할 수 없고 非論理的이기에 논리적이며 비현실적이기에 현실적이고 포착할 수 없기에 포착할 수 있다.   가까이 있기에 宇宙船으로도 도달할 수 없고 다치기 쉽기에 전술적, 전략적 무기로도 다칠 수 없다.   사람들은 시를 조그마한 사슬에 달아 내복 밑 발가벗은 피부 위에 달고 있다.         李東昇에서 발췌   (전략)  詩는 인간의 與件에 대한 地震計이어야 하고 시 이외의 아무것도 代置될 수 없는 생명의 有機體이어야 한다. 현대시인은 급격히 진척되어 가는 현대인의 의식의 범위의 확장을 命名해야하고 核分裂이라든지 宇宙旅行이 爐邊에 불꽃이나 家庭事들과 마찬가지로 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知性의 尖端에 서고 蓄積된 지식의 總動員이 요구된다. 현실을 한 개의 單一體로 잡으려면 통합이 요구된다. 內面世界와 外的世界가 시 속에서 同時에 反影되어야 한다. 이런 통합은 자주 瞬間의 竝列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分裂되지 않은 상태의 표현을 하기 위해 언의의 최고도의 凝固가 요구된다. 이것은 일종의 瞬間을 수단으로 한 시간성의 극복을 뜻한다. 이런 과중한 부담 앞에 현대시인은 과거의 언어를 수단으로 造花를 만들어 낼 수 없게 됐고, 현대시인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고 새로운 언어의 表現可能性을 모색하고 있다. (중략) 적어도 1920년대 이후에 출생한 시인들에게 있어서는 시란 이제는 사상의 표현도, 교훈적인 언어의 나열도, 재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調和의 추구도, 우주관, 인생관의 표현이나 탐색도 아니며, 감정의 솔직한 流露도, 자연의 謳歌나 形而上學的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다. 현대시는 魅惑의 曲藝를 전제로 하는 언어의 遊戱인 것이다. 시는 표현하기 이전에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에서 사용되는 시어는 그가 지니는 역사성을 無視 내지는 輕視하고 所用의 한계에서 벗어나서 언어에 대한 狂躁曲을 형성한다. 언어는 현대회화에 있어서의 色彩나 현대음악에 있어서의 音과 같은 뜻을 갖게 된다. 詩中의 단어는 그 의미 내용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音響에다 더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오스카 뢰르케(Oscar Loerke)의 말을 빌리면 라고 한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의미의 전달이 아닌 이미지의 전달 밖에는 문제로 삼고 있지 않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다만 자기자신을 통해서만 論證되는 旣存하는 모든 詩形態에 대한 항의가 되고 극히 自律的인 것이 된다. 내용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내용에 先行하는 것이다. 현역작가이며 문예학자인 훨레러(Walter Hollerer)는 을 수단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시인은 심중에서 일어나는 幻覺을 예리하게 오려내서 언어를 수단으로 모자이크한 벽처럼 한 편의 시를 組立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시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은 그 역사성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것이 극단으로 나가면 순수상징에 의한 감각적 경험의 파괴에 도달한다. 이 수단으로 현대시는 時空의 한계를 극복해서 한 새로운 차원을 모색하려고 하고 이른바 에까지 가려고 한다. 이 태도가 재래의 시와의 단절을 가져온다. 이리하여 현대시에는 언어에 대한 신앙이 그 근저에 놓여 있고 언어가 그 綜合的機能을 발휘하지 못할 때 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게오르게 (Stefan George)는 고 한 말이 이런 입장을 입증하고 있다. 이런 純粹象徵으로서의 언어는 그 자체로서 벌써 역사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차원을 구성하는 것이며, 이런 언어를 수단으로 시는 몽타주의 방법을 통해 조립되는 것이다. 이른바 을 시인은 수집하고 분석하고 해부하고 琢磨해서 꿰어 맞춤으로써 현대시는 구성될 수 있다고 본다.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서 絶對的 自律性에 도달하려는 피나는 시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른바 가 시도되고 있다. 새로운 공간, 시를 위한 새로운 차원을 찾기 위한 도상에 오른 현대시는 과거와의 訣別을 선포했고, 소재의 선택에서도 과거의 것과 판이해서 古典的詩에서 있어서의 調和 대신에 不調和를, 정상적인 것에 대신해서 非正常的인 것을, 자연적인 것 대신에 人工的인 것을 표방하고, 否定을 통해 긍정에로 도달하고자 하고 언어의 幾何學的 조립을 통해 불협화를 구성하고자 하고, 종합 대신에 解剖를 통해 재래의 형태의 파괴를 기도하는 까닭에 현대시에서는 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현대시에서는 논리가 아닌 幻想이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언어를 수단으로 한 暗示力의 최고의 驅使를 통해서 성립되는 상징을 매개로 旣存限界의 突破가 試圖되고 있다. 보다 큰 협화음은 不協和音까지도 그 자신 속에 내포하는 것이다. 현대시는 否定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려고 하고 不調和 너머의 조화를 추구한다. 현대시는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는 과거와의 斷絶의 시이며 언어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이며 철학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라고 命名될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언어를 수단으로 현대시가 성립되는 까닭에 현대시는 어떤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의 魔術師이며 자기 언어가 가져오는 이미지의 空間에서 절대적 고독과 대결하게 된다.   현대시는 릴케가 『두이노의 悲歌』를 쓸 때 겪었다고 하는 靈感의 폭풍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意識的인 知識의 동원을 요구한다. 현대시인에게서는 詩作과 自己觀察 및 批評의 과정이 竝存한다. 感性的인 孕胎를 전제로 하지 않고 바로 頭腦의 소산인 것이다. 골프리드 벤에서 자주 언어의 曲藝라는 말이 나오는데 현대시는 이 언어의 曲藝로써 성립된다고 했다. 이 사람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라고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언어와 內容은 분리할 수 없고 형태가 바로 내용임을 뜻한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는 독자의 理解可能與否에 아무런 介意도 하지 않고 독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시가 성립하는가 하는 것을 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 했다. 이런 까닭에 시는 써지기 전에 시인에게 內在하고 創作過程은 이 내재하는 것을 언어라는 실마리를 통해 표현하는 과정이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에 있어서 시의 각개의 단어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 할 수 없는 것이며 飜譯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대시는 또 그를 구성하는 각개의 단어의 槪念의 外延을 거의 無視 내지 輕視하는 까닭에 意味以前의 것이며 형태와 내용은 동일한 것이 된다. 에밀 슈타이거(Emil Staiger)는 라고 極言하고 있다. 外界의 대상들은 시인의 창작의 욕구를 자극하는 誘引에 불과하고 시는 외계의 具象的 세계의 再現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자신 외의 아무 것도 眼中에 없다. 라고 벤은 말한다. 고 호프만슈탈도 일찍이 말했었다. 이리하여 알베트 아아놀드 숄(Albert Arnold Scholl)의 말을 빌리면, 현대시는 내용이 끝나는 데서 시작되고, 시는 존재하는 것이고 太陽系 너머의 太陽系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릿발의 불꽃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란 신앙도 희망도 안중에 없고 누구를 위한 시도 아니며 시인이 매혹되어 조립하는 언어에 의한 시라고 벤은 말하고 있다. 언어가 지니는 시간적 制約性의 무시를 통해 현대시는 시간과 공간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하고 논리적 체계에 대한 체념으로서 절대적 자유를 얻고자 한다. 이것은 모두 限界의 擴張을 위한 피나는 기초공사이다. 하이데거(Heidegger)가 말한 것처럼 바로 현대시에서는 언어가 인 것이다. 라고 크로이더(Ernst Kreuder)는 말하고 있고 라고 로마노 구바르디니는 말했다. 지금까지의 論述은 戰後獨逸詩의 주류를 이루는 이른바 벤을 鼻祖로 하는 超現實派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78    하이퍼시에 관한 고견 댓글:  조회:4388  추천:0  2015-02-19
하이퍼시에 관한 소고(小考) -심상운의 평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를 읽고                                                                   최 진 연     1. 하이퍼시 출현의 필연성     먼저 심상운 시인의 평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의 출간을 축하한다.   이 평론집은 한국시사(詩史)나 세계 문학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론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나는 그의 시론이 보완되어져서 서울의 세계펜클럽대회(2012년) 때 소개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시인들 앞에 내놓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의 하이퍼시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 시대의 필연적 산물로 보인다. 현대는 탈구조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지배하고 있다. 절대자, 절대자아, 절대가치, 권위주의, 중심주의 등이 부정되고 다양한 개성과 상대성이 지배하고 존중되는 현대는 예술 표현에 있어서도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절대유일의 재현(representation)이나 동일성을 거부하며 어느 것만을 절대시하지 않고, 복잡 다양한 현대사회를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또 현대는 IT를 비롯한 새로운 전자기술의 발달로 A. 토플러가 예언한 ‘제3의 물결’이 산업 및 생활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황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도체 기술의 진화가 야기하는 IT 등의 신기술은 혁신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질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데, 이 변화는 한마디로 말해서 종래의 아날로그문화에서 디지털문화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는 유‧무선인터넷과 PC, 스마트 폰 등으로 어느 곳에서나 거의 동시에 접속, 통신 또는 샘플링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 지식 정보(데이터)는 주지하다시피 0과 1의 2진법 형태의 비연속적 단속적 신호체계 즉 디지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 디지털문화를 수용하고 적응하기 위해 예술분야에도 혁명적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이 두 가지 시대적 특성을 배경한 예술의 변화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한국인 백남준이 열어놓은 비디오아트는 미적 상상력에 의해 디지털 기기와 기술을 채용 구성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디지털아트로 발전하고 있음을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시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작가들도 이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하이퍼텍스트문학을 시작한지 오래다. 심상운의 하이퍼시 및 시론의 출현은 이런 시대적 요청에 따른 필연적 산물이라 생각된다.   이 평론집은 하이퍼시의 성격, 그 작법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지금은 시작(詩作) 참여자가 소수이지만, 가령 문예부흥기에 고전주의 문학사조가 거세게 일어나 그 시대를 풍미한 것처럼 장차 디지털문화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될 때 하이퍼시(문학)는 21세기를 대표하는 문학 유파로서 가장 지배적인 양식이 될 듯하다.     2. 하이퍼시론의 탄생 및 확산 과정     심상운의 첫 시집 『고향 산천』이나 그 다음의『당신 또는 파란 풀잎』에 탈관념 등 하이퍼시가 보여주는 요소는 거의 없다. 특히 첫 시집은 역사의식과 토속성의 관념이 강해서 신군부 정권의 금서(禁書)가 되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시문학』지에「한국 현대시의 동향과 새로움의 모색」이란 논문을 발표한① 뒤 ‘디지털리즘;이란 새로운 용어를 쓴 오진현 시인의 시론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오진현은 그의 시론집 『꽃의 문답법』(1999.1.4)과 『이상의 디지털리즘』(2005.4.15) 등에서 탈관념을 계속 주창해왔거니와, 그 무렵 그를 중심으로 시에서 관념을 배제해야 한다는 ‘탈관념’의 주장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강조되고 있었다. 그 현상을 보다 못한 나는, 시가 관념 덩어리인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기에 언어본질상 시에서 관념을 배제하기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관념도 중요한 시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는 글「탈 관념은 가능한가?」를『시문학』에 발표하였다(2006.7). 그 논문 말미에 밝혔듯이 관념의 중요성도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관념’과 ‘탈관념’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누군가가 시단을 향해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진현이 내 논문의 근본취지를 간과했음인지 그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때 나는 ‘그 글을 쓰지 말 것을!’하는 일말의 후회도 했다. 어차피 “기표의 표류(데리다)나 기의의 미끄러짐(라캉), 거짓말 이론(에코), 커뮤니케이션은 끊임없는 오해의 과정에 불과하다(그래마스).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는 없다(발레리)”②는 등에 근거하면, 관념(의미)은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오해를 풀고 그 마음을 위무해주려고 화해자로 심상운도 청해 그와 함께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우리는 더 좋은 시를 쓰자는 마음에서 다를 수 없기 때문에 오해를 풀고 담소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 달의『시문학』에 오진현의 내 논문에 대한 다분히 감정적인 글과 함께 심상운의「탈관념시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이 실려 있었다.(2006.8), 오 시인의 글을 읽고 나는 두어 주 전의 만남이 생각나면서 허탈해졌다. 당시 해명하는 글을 다시 발표할까 하다가 가치 있는 일이 못 될 듯해서 참았다. 그 얼마 뒤 한 모임 끝에 심상운이 내게 말하기를, 내가 앞의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다면, 그는 탈관념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거나 그에 관한 논문도 쓰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이런 아픔을 거쳐 태어난 이 논문에서 심상운은, 내가 제기한 관념문제에 명료한 답을 제시해주었다. 관념(의미)과 탈관념(무의미)의 다름을 예문(例文)을 들어 설명한 요지는 대체로, 화자의 주관적 생각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에 그치면 탈관념이라 하였다. 우선 관념과 탈관념의 구별 기준을 세웠다는 점에서 오 시인의 막연한 탈관념 주장에 비해 논리적 근거를 확보하였고, 타당성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기의(記意)에 해당하는 의미를 인지언어학에서는 인지과정으로 본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의미란 일정한 사태가 환기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③ 이 견해는, 그가 관념과 탈관념 사이에 세운 구별의 담도 허물어뜨려버릴 것이다. 그가 탈관념의 예문(例文)으로 든 “방바닥이 차다.”는 분명히 ‘일정한 사태가 환기되는 상태’라는 의미(meaning)의 정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관념(의미)를 가진 문장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도 이 구별의 기준을 세웠지만 하이퍼시에 관념의 잔재를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는다.④ 그래서 나는, 심상운의 ‘탈관념’ 개념을 가지면서도 관념을 부정할 수 없는 언어본질과 충돌하지 않는 용어로 ‘언어의 사물화’란 말을 써왔다. 요컨대 심상운이 설정한 탈관념의 기준에 따른다면 대상에 대한 인지단계를 넘어선 관념에서 벗어나게 되리라는 점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심상운은「디지털시에 대한 이해」란 논문(2006.11)에 이어서 하이퍼시론의 단초라 할「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라는 표제 논문을『시문학』에 발표한 것이 2008년.6월이었으니, 이런 일연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디지털시 하이퍼시에 관한 글을 쓴 게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하이퍼시의 특성과 작법을 좀 더 구체화한 논문「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를 한국현대시인협회 여름세미나에서 발표하였다(2008). 필자는 그때 협회가 지명한 질의자로서 ‘하이퍼시가 독자와의 소통(疏通)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회원들의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그 논문은 그해 『시문학』10월호에 발표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심상운이 오진현의 탈관념시론과 디지털시론을 보완해서 발전적으로 자기화했으며, 이 두 논문을 기초로 다시 하이퍼시론으로 진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상운은 자신의 시론에 따라 최초로 ‘하이퍼시’라는 명칭으로 2008년『시문학』5월호에 '구멍가게집 여자' '바람소리' '이미지여행''북한산 레몬 향기' '미완성의 시‘ 등을 발표했다. 그때 김규화, 오남구(진현)도 작품을 함께 발표했으며, 이후 이 세 사람은 동인지를 따로 발간하지는 않았지만, 하이퍼시 동인으로 『시문학』을 통해서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 해 9월호 심상운의 작품은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그림 또는 링크' '사각형 스크린' ’파란색기차' '헤트라이트‘ 등이었고, 2009년 1월호와 2010년 3월호에도 이어졌다. 그 시운동의 확산을 위해 『시문학』2009년 11월호에 전기 3인과 함께 최진연, 조명제, 이 솔, 송 시월이 참여하였고, 그 무렵 신규호, 손해일, 위상진 등 몇 사람이 더 참여하였다. 2010년 7월호에는 앞에 열거한 시인들에 더하여 신 진, 정연덕, 안광태, 고종목, 강영은, 김금아, 김기덕, 김은자, 김영찬 등 무려 17인이 참여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현대시의 길닦기, 길잡기, 길트기’를 표방하고 있는『시문학』이 하이퍼시의 확산을 위한 특별한 배려 덕택이라 생각된다.   3.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유사성과 차별성   나는 우선 ‘디지털시와 하이퍼시가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살펴보았으나 그의 논문집 어느 글에도 그 차별성을 명시적으로 대비시켜 밝혀놓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탈관념시와 디지털시를 먼저 주창해온 오진현의 말을 들어봤다. “지금까지 아날로그 시대의 시가 ‘기술 또는 '자동기술’하는 것이라면, 미래 디지털시대의 시는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사(念寫) 또는 접사(接寫)의 ‘찍는다’는 행위로 구분 짓는다. (…) 그러므로 시인의 생각과 의식을 배제시키는 방법으로 나는 언어 이전의 언어(사물언어)로 사물을 사진 찍듯이 찍는다.”⑤ 이것은 오진현의 ‘디지털리즘 선언’의 일부인데, 이 말은, 그의 탈관념시에 관한 설명 그대로이다. 즉 디지털시가 탈관념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지면 관계상 인용 비교 설명하지 못하나, 그의 작품에 있어서도 구별되지 않음을 그의 시 전집을 읽어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그의 디지털시론의 핵심은, 대상에 대한 시점을 달리한 관찰이나 명상에 의한 직관으로 사진 찍듯이 시를 찍음으로써 탈관념의 시를 쓰자는 것이다. 그가 ‘탈관념시’를 ‘디지털리즘 선언’ 이후부터 ‘디지털시’라고 고쳐 부르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전통적인 시가 대체로 연속적인 사유의 산물이란 점에서 아날로그 방식이라 한다면, 그의 탈관념시는 단속적인 직관에 의해 찍는다는 점에서 디지털 방식이라는 데에 둔 듯하다,   심상운의 탈관념시론이나 디지털시론 역시 오진현의 경우처럼 차별성이 없어 보인다. 다만 심상운의 시론이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듯하다. 또 심상운의 논문집을 읽어보면 하이퍼시론 역시 디지털시론과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디지털시론에서 그는, 디지털(digital)이란 용어와 디지털시대의 문화감각 및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을 설명한 다음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를 이상과 문덕수의 시에서 찾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오진현이 선언한 ‘디지털리즘’을 이라고 의미규정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그는 디지털시가 되려면 순수영상언어를 지향하고, 통사론에 구애받지 않는 시적 공간 확장이 있어야 하며, 시인은 독자가 시를 완성시키는 위치에 비켜서야 한다는 것이다.⑥ 그리고 디지털시의 표현방법으로서 이상의 시에서 구현된 추상화 기법과 오진현의 염사와 접사의 기법, 사물성의 강조와 다시점의 순간포착에 의한 감각과 이미지 표현에 중점을 둔 언어단위들의 집합적 결합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 디지털시가 종래의 시와 다름은 정서나 감각의 변화가 아니라 표현기법이므로 초현실주의 시와 달리 종래의 아날로그적 정서와 감각을 투명하게 살려 써야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들은 탈관념시의 특색과 다르지 않으며 하이퍼시론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⑦   4. 상상과 공상을 바탕으로 한 가상현실의 공간 확대   이와 같이 하이퍼시와 디지털시의 차별성은 없어 보인다. 사이버 공간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현실성을 지적하면서 사이버시대의 시에 있어서 탈관념의 근거를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이미지의 실재성을 가스통 바술라르의 시학에서 찾은 그는.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해야 함을 강조한다. 디지털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탈관념의 원초적 언어로 쓰는 디지털시 쓰기에서 상상과 공상을 강조하는데, 이는 오진현의 탈관념시에서 영감(inspiration)과 관찰에 의한 ’직관‘을 강조한‘⑧ 것과 다른 면이라 하겠다. 상상과 공상(fancy)을 강조하는 점이 심상운의 하이퍼시론의 차별성으로 보인다. 심상운이 사물에 대한 감각과 인지에 그치는 ’관념의 그림자‘ ’지장수 같은 의미‘를 인정하는 감각적 이미지의 표현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물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시화(詩化)하자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고정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언어(의미)창조로서 사물시(physical poetry)에서도 강조하는 바이고, 하이퍼시에도 그대로 강조되고 있다. 사실 참신한 감각적인 시 쓰기는 하이퍼시만이 아닌 모든 시에도 요청되는 전통적 명제라 할 것이다.   심상운은 즉물적 감각적 언어는 직관뿐 아니라 상상 내지 공상이란 사유(思惟)로도 얻게 됨을 시론과 작품을 통해서 말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공상이다. 한국문학에서 경시되어온 점을 환기한⑨ 그는, 시에서 공상을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시문학』(2010.7)에 발표된 그의 작품을 보자.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후략)   -심상운, 「파란 의자」 부분,     이런 표현은 현실세계에서 현실을 벗어난 공상의 산물이다. 그는 현실세계뿐 아니라 가상현실에서도 시적 공간을 공상에 의해 확장하고 있다. 문학에서 공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어본 사람이면 실감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상세계를 무대로 전개되는 그 소설뿐 아니라 그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7편이 평균 7억 달러쯤 벌어들였다니 엔터테인먼트 측면에서도 문학에서 공상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심상운이 공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시에 도입하여 시적 공간을 획기적으로 넓힌 최초의 시인이 아닌가 한다. 또 그는 종래의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感覺)하는 시’로 바꾸자는 오진현의 주장을 받아들여 하이퍼시에도 적용하고 있다. 오감(五感)에 의해 감각 인지되는 시를 써온 시인들에겐 그리 새로울 게 없으나, 그가 현실과 가상현실을 아울러 감각적인 시적 공간을 공상세계로 확장하고 있음은 일찍이 우리 시사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공상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종래의 시에서 흔히 말하는 기상(奇想conceit)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 범위에 현실과 가상현실의 제한이 없고 시편마다 가히 단골 메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일반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공상은 기상과 다르다고 하겠다.   하이퍼시 읽기에서도 의미론적인 소통의 독해보다 읽고 느끼는 감성적 소통에 그쳐야 할 것이다. 읽고 느끼는 재미 이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상과 공상을 통해서 현실에서 볼 수 없거나 있을 수 없는 세계를 영상언어의 투명한 이미지로 그려 보이는 것은 시인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세계를 떠난 신선한 해방감을 주므로 환영하리라 생각된다.   또 그가 정서 결핍의 초현실주의시와 달리 하이퍼시에 ‘축축한 정서적 수분’이 공급하고 있다는 점은. 전기 작품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하이퍼시의 장점이라 하겠다. 의미에서 벗어난 시에 정서마저 없게 된다면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한 무의미한 시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흐리게 만드는 관념을 제거하는 대신 “칸트의 ‘보편적주관성’에 암시되는 바처럼 객관성이 있는 정서”⑨를 받아들여 시를 투명하면서도 축축하게 만들어낸다는 것은 하이퍼시가 독자들에게 환영받을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유희성만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선 자꾸만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것은 내가 관념의 포로가 된 때문일까? 나는 어떻게 하면 심상운이 말하는 하이퍼시의 장점들을 살리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의미)을 무리 없이 그 속에 녹여 넣을 수 있을까 애쓴다. 하이퍼시를 쓰려는 시인이면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해서『시문학』에 발표된(2009.11) 졸작 한 편을 내놓고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시인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황제*를 읽어서인지 내 심장이 핑크빛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여름 태양보다 뜨겁게 운동장을 달구는 관중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는 나라에서 지하철 칸칸마다 하얗게 죽어서 밟히는 시간의 시체들을 보고   피라미 같은 낱말들의 떼죽음을 보자니, 눈사람 같은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를   위한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하나님과 불타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서 돌아올 때 푸줏간의 고깃덩이들 틈에   어느 시인의 심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났다. 아침에 죽은 팝송 황제   마이클 잭슨의 새까만 안경과 하얀 페인트 얼굴의 입술에 칠한 빨강, 아이스크림 황제를   모르는 그 황제는 죽어서 더 날뛰면서 그 입술 색깔로 노래하고 있었다.        새싹 밥이 소화되는 그날 밤, 낮에 본 지하철 공사장에 쌓인 철 빔들이 모두 일어서서 금강산에 울울한 적송의 숲을 이루고, 수십 개의 주사바늘이 꽂혔던 50kg으로 죽어서 더  활기찬 그 황제를 위해 노래하는 나뭇잎들과 춤추는 새들, 흰 머리털과 아이스크림 황제  생각에 하얗게 죽은 시간과 낱말들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월리스 스티븐스의 시 제목                                        - 최 진연,「아이스크림」전부   이 시가 하이퍼시로서의 특성을 갖췄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첫 연에서 이 시대에 외면당하고 있는 시와 시인의 처지를 창궐하는 스포츠 중심의 저질 문화와 대비하면서 눈사람처럼 녹아버리는 슬픔의 아이스크림 황제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의 표현가치가 인정된다면 심 상운이 하이퍼시에 “관념의 표현방식들-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 없다.”⑩는 주장에 재론의 여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둘째 연에서는, ‘아이스크림 황제(시)’를 알 턱이 없을 팝송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사후에 더욱 애도와 사랑을 받는 모습과 대비되는 소외된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연에서도 머리가 희게 되도록 시를 써왔으나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시인의 처지를 마이클 잭슨의 경우와 대비시켜 형상화 한 것이다. 독자들이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시 속에 시즌이 중반에 접어들기도 전에 관객 1억 명이 넘는 야구를 비롯하여 월드컵이나 올림픽 경기 때 국민의 절대적 관심과 아낌없는 지원을 받고 있는 육체(스포츠) 중심의 저급문화가 정신세계를 압살하는 이 시대에 설자리를 잃고 있는 문학을 비롯한 고급 문화예술의 비애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데아가 시의 전면(前面)을 가리지는 않고 있다고 본다. 심상운이 말하는 하이퍼시에 좀 덜 미칠지라도 나는 하이퍼시의 장점을 살려서 내 나름의 시를 쓴 것이다.   심상운은「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말미에 하이퍼시의 특징을 9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가장 강조된 하나는 ‘다선구조’로 보인다. 하이퍼시의 발전을 위해 하는 말이지만, 나로서는 하이퍼시에서 종래 시에서와 같은 분명한 여러 개(多)의 선(線)을 찾기 어렵다.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거의 무제한의 자유로운 접속 링크(link)는 인쇄텍스트 특성상 원천적으로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지만, 몇 개의 선으로 서로 이어지는 최소한의 동일성이나 통일성을 가진 구성단위(단어 문장)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문덕수 시인의 『우체부』가 보여주듯이 장시의 경우는 다선구조가 가능하겠지만, 보통의 단시에서는 사실상 뚜렷한 다선구조의 실현이 어렵지 않나 싶다. 그 때문에 하이퍼텍스트문학과 인쇄텍스트문학의 다른 점으로 참여자들(작자 독자)의 상호작용성, 텍스트와 함께 이미지 음향(소리) 동영상 이메일 링크 등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의 요소들이 편입되는 다매체성과 함께 비선형성 및 그로 인한 탈중심구조를 들고 있다.⑪고 생각된다. 하이퍼시 구조(構造)는 문덕수 시인이 그의 시에서 흔히 보여 온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심상운은 하이퍼시의 구성단위(Unit)들이 하나의 시스템(프로그램) 속에 전체로서 작용하면서 독립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모듈성(Modularity)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시의 구성단위들 사이에 존재하는 시인의 의식의 흐름을 말하는 점으로 미뤄볼 때 들뢰즈의 리좀과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요컨대 하이퍼시의 구조는 다선구조라 하기보다 집합적 결합 또는 비선형구조⑫라고 함이 더 적합할 듯하다.   5. 맺는 말   우리는 심상운의 하이퍼시론과 그에 따른 새로운 시의 출현의 필연성과 그 탄생과정,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유사성과 차별성 등을 대강 살펴보았으며, 특히 이 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출현시킨 사실의 문학사적 의의도 생각해봤다. 이제 심상운을 포함한 하이퍼시 쓰기에 참여하는 시인들은 하이퍼텍스트문학의 장점들을 포함하는 하이퍼(건너 뜀, 초월)적 요소들을 인쇄 텍스트인 하이퍼시에 어떻게 좀 더 풍부히 그리고 정교하게 접목시킬까를 활발히 연구 논의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해서 하이퍼시가 한국시단 전체와 세계문학으로 확산되기를 바라면서 심상운의 귀한 논문집의 출간을 다시 한 번 축하한다. (필자: 시인 ‧ 목사)     --------------------------------------------------------------------   ① 한국현대시인협회, 『새는 휘파람소리로 날면서』, 샤문학, 2005, p 301 ② 김윤찬, 「기호와 거짓말」, 『기호, 텍스트 그리고 삶』(신 현숙, 박 인철 편), 월인, 2006, p 10 ③ Y.Tsuji 편, 임 지룡 등 옮김,『인지언어학 키워드 사전』, 한국문화사, p 6「개념화」부분 ④ 심상운, 본 논문집 p 52 상단에 “그 반영(시, 언어) 속에는 시인 자신의 의식(관념)의 그림자가 들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수순한 탈관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라고 하였음. ⑤ 오진현,『시향 별책.1 』「디지털리즘 선언」글나무, 2003, 머리글 ⑥ 심상운, 본 논문집, pp 47~48 ⑦ 심상운, 앞의 책 p.113 「디지털시에 대한 이해」, 인용 부분 ⑧ 최재서, 『문학원론』ⅩⅢ 부분, 春潮社, 단기 4290.7.5 ⑨ 최재서, 「Ⅻ.정서(情緖)」, 앞의 책 P 179 ⑩ 심상운, 앞의 책 P 48 인용문 중 ‘암시’는 여러 가지 비유를 말하는 게 아닌가 한다. ⑪ 유현주, 「무엇이 하이퍼텍스트를 인쇄텍스트와 구분하는가」,『하이퍼텍스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3, p 36 ⑫ 앞의 책, pp19~20 내용 중 “하이퍼텍스트란 비선형적 글쓰기를 말한다.” 고 넬슨의 말이 인용되어 있음.  
77    하이퍼시의 리해 댓글:  조회:4057  추천:0  2015-02-19
하이퍼시(hyper poetry)의 이해                                               최 진 연      1. 하이퍼시란 용어와 개념   지는 몇 년 전부터 하이퍼시라는 새로운 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시인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하이퍼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심상운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시론집을 낸 바 있고, 필자는 그에 대한 서평을 주로 그의 하이퍼시론을 중심으로 써서 (2009.9)에 발표한 일이 있다.   하이퍼시(Hyper poetry)란‘하이퍼+시’를 뜻하는 조어(造語)이다. 인터넷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문학(Hypertext Literature)에서‘Hyper’를 차용해서 만든 말이다.Hyper는 ‘과도, 초과, 초월, 건너뜀, 최고도’를 의미하는 접두사로서 Hyper-bole(과장법),Hyper-optic(원시), Hyper-content(대만족), Hyper-sensitivity(과민증) Hyper-bo-rean(북극의, 북극인),등 그 용례는 볼 수 있다.   하이퍼시가 어떤 점에서 Hyper한 시인가? 그 대답을 단순하게 하자면, 표현형식에서 Hyper하다고 할 것이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탈 관념적인 사물시와 같은 입장에서 시를 쓰되, 그 구성 양식에 있어서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쓴다.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Hyper하다고 하겠다. 하이퍼시 상론은 뒤로 미루고, 우선 하이퍼시가 출현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2. 관념시와 사물시   하이퍼시(hyper poetry)를 말하려면 먼저 관념시(觀念詩)와 사물시(事物詩)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사물시를 쓰는 시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시단에서 의식적 집단적인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서 시 쓰기는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근래에 와서 시작되었고, 하이퍼시는, 라는 진화과정을 거쳐 출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랜섬(J. C. Ransom)은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 사물시(Physical poetry),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로 구분하였다.   관념(Idea)은 사물(Thing)의 대칭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떠나 시론상의 개념을 범박하게 말하면, 시에 담긴 감정이나 의미(사상, 주장, 의도 등)를 뜻한다. 관념시는 이런 관념들을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워즈워드(W. Wordsworth)가, “모든 좋은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다.”라고 한 말이나, 아널드(M. Arnold, 1822.12.24~1888.4.15)가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라는 말은 시의 관념성을 강조하고 있다. 동양시론의 근원인 상서(尙書)의 순전(舜典)에 나오는 ‘詩言志’란 말은, ‘마음(心)이 가는(之) 대로(志) 표현(言)하는 것이 시(詩)라는 말인데, 이는, 시가 마음-사상 감정을 표현한다는 관념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 시론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思無邪’란 말도 그렇다. 공자가 자신이 편집한『詩經』의 시편들을『論語』「爲政篇」에서 총평한‘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에서 따온 이 말도 시가 ‘사특한 마음이 아닌 바른 마음이 담겨 있다.’는 뜻이니, 시의 관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런 전통적 인식이, 관념시가 전통적으로 우리 시의 주류를 이루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문학은 시대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한국시의 연원인 창가(唱歌)와 그에 이어진 신체시(新體詩)가 발생 ․ 전개된 시기가 국권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10 전후의 개화기여서, 우국충정의 감정과 의지 곧 관념이 그 시가(詩歌) 속에 강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시의 효시인 주 요한의「불놀이」도 민족 수난기를 맞은 비애의 감정이 충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이후의 작품들 역시 국권을 침탈당한 시대의 고통과 분노, 인고의 감정, 투지와 희망의 의지 등의 관념이 그대로 또는 굴절되어 반영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식민지 한국의 작가 ‧ 시인으로서 그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시는 그 관념시의 전통을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시에서 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관념을 떠난 이장희, 정지용 등 순수시, 이상의 기호시나 조향 등의 초현실주의 시, 김춘수의 무의미 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속할 시도 없지 않았으나, 이육사, 한용운, 윤동주 등의 경우처럼 정신과 의지가 강하거나 아니면, 이상화, 김소월 등과 같이 감정 노출이 심한 관념시들을 지금까지도 이어받아 쓰고 있다. “관념시는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주류로 군림해왔다.”   이런 한국시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의 모색은 문덕수에 의해 주창되어왔다. 주지하는 대로 문덕수는 모더니스트로서 처음부터 주지성이 강한 사물시 내지 형이상시로 간주될 수 있는 시를 주로 써왔는데, 그는 2천 년대 들어와서 탈 관념의 사물시를 비롯한 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그 뜻을 확산하기 위해 그의 주도로 2004년에《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개설, 배재학당 건물에서 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그 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은 시론집『새로운 시론 탐구』의 제목부터가 관념을 떠난 새로운 시 쓰기를 모색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사물시란 사물을 다시점(多視點)에서 현상학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을 기초로 쓴 시이다. 다시점이란 동일한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위치, 때, 광선의 밝기, 조명의 색깔, 양의 다소, 다른 사물과의 매치, 원근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므로 그런 다양한 모습을 객관적이나 개성 있는 눈으로 포착해서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시란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시는‘탈 관념(무의미)’의 시이다. 문덕수는 사물시를 설명하면서 “시에서 관념이나 어떤 사상보다 물리적 이미지를 중요시한다는 뜻이다.…관념도 반드시 물리적 이미지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관념을 형상화해서 사물시로 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추상적 관념 예컨대 애국, 사랑, 증오, 분노 등을 대상으로 쓸 경우도 오감(五感)에 의해 감각되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것을 T.S. 엘리엇은 “사상의 감각화”라고, E. 파운드는 "관념의 형상화“라고 말했다. 심상운은, 관념덩어리인 언어로 표현하는 시에서 사전적 의미의 관념을 벗어날 수는 없으나, “시인(화자)의 주관적 생각(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 제시에 그치면‘탈 관념”이라는 말로 관념과 탈 관념의 기준을 세웠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관찰에 의한 현상의 인지적 묘사에 그친 시가 사물시라는 것이다.   이 시운동에 적극 나선 시인은 오진현이다. 그는 탈 관념을 강조한 시론집『꽃의 문답법』을 내면서 직관에 의한 사물시를 써왔다. 그는 『이상의 디지털리즘』출간 전후로 사물시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작품을 ‘디지털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직관적인 사물시 쓰기에 뛰어났으나, 시론은 정리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의 시론을 정리, 발전시킨 심상운은 디지털시론에서 나아가 하이퍼텍스트문학의 요소를 살린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하이퍼시’에 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시론에 따른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3. 하이퍼시 출현의 필연성   우리는 앞에서 하이퍼시가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사물시와 디지털시를 거쳐 출현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하이퍼시의 출현은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 본다.   하이퍼시 출현의 더욱 두드러진 필연성은, 현대의 철학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는 탈구조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다. 절대자, 절대자아, 절대가치, 권위주의, 중심주의 등이 부정되고 복잡다단한 현대에 맞는 다양한 개성과 상대성이 지배하고 존중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예술 표현에 있어서도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절대유일의 재현(Representation)이나 동일성(Sameness)을 거부하며, 어느 것만을 절대시하지 않고, 현대사회를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지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시에서도 작자의 일방적인 정서나 사상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전통적 관념시에서 떠나 다원화되고 전문화된 이 시대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시를 써보자는 것이다.   또 전자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시대가 우리 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하이퍼시 출현의 세 번째 필연성이라 하겠다. 현대는 IT를 비롯한 새로운 전자기술의 발달로 A. 토플러가 예언한 ‘제3의 물결’이 산업 및 생활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황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도체 기술의 진화가 야기하는 IT 등의 신기술은 혁신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질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데, 이 변화는 한 마디로 말해서 종래의 아날로그문화에서 디지털문화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는 유‧무선인터넷과 PC, 스마트 폰 등으로 어느 곳에서나 거의 동시에 접속, 통신 또는 샘플링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 지식 정보(데이터)는 주지하다시피 0과 1의 2진법 형태의 비연속적 단속적 신호체계 즉 디지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이 두 가지 시대적 특성은 예술 분야에도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변화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한국인 백남준이 열어놓은 비디오아트는 미적 상상력에 의해 디지털 기기와 기술을 채용 구성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디지털아트로 발전하고 있음을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시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작가들도 이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이 시작된 지 오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줄 안다.   디지털시에 이어 거의 동시에 하이퍼시가 출현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과 필연성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라 본다.   3. 하이퍼시의 특성   필자는, 오진현이 탈 관념만을 강조하면서 언어의 본질적 가치인 관념을 도외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에 한 마디 하는 것이 언어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는 데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탈 관념은 가능한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시문학,2006.7). 심상운은 사물시를 쓰는 입장에서 오진현의 생각을 옹호하는‘탈 관념시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시문학,2006.8). 그 이후 사물시 내지 디지털시론을 다수 발표하다가 하이퍼시에 관한 본격적인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이퍼시의 특성은, 무엇보다 그 구성에 있어서, 문덕수 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창하고 그의 시에서 적용해온 시적 방법으로서 “집합적 결합”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컴퓨터, 책, 확대경, 볼펜, 찻잔, Secret Card, … 이런 물품들은 서로 필연적 인과 관계가 없으나 지금 필자의 책상 위에 놓인 물품이란 점에서 하나의 집합으로서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시에서 행과 행, 연과 연 상호간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건너 뜀 초월’이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을 미술에서 말하는 구성(Composition)이라 생각한다. 가령 클레의 나 큐비즘을 연 피카소의 등 서양 그림 가운데 구성적인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사실 이 기법을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용해왔다. 심상운이 말하는 하이퍼시와 전혀 다를 것이 없음을 하이퍼시인들의 모임에서도 확인되었다.⒟ 아무튼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심상운은 이를 종래의 관념시처럼 단선구조가 아닌 다선구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종래와 같은 단선(單線)구조도, 다선(多線)구조도 아닌 뚜렷한 여러 가닥의 선을 찾을 수 없으므로 비선(非線) 또는 무선(無線)구조라고 함이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하이퍼텍스트문학의 특징을 인쇄텍스트인 하이퍼시에 살린 점에서도 그렇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은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다. 이미지 단위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디지털의 모듈(Module)이론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Rhizome)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미론적 혹은 정서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게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그러나 화자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링크 역할을 하는 유사한 소리나 단어, 구문의 반복 등과 함께 연상에 의해 시의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세 번째 특성은 상상력에 의한 시적 공간 확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컴퓨터에 의한 사이버공간에서 3차원의 입체적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또 다른 현실이 현실세계와 조금도 다름없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이퍼시는 클릭에 의해 즉시 열리는‘준비된 현실’이라는 이 가상현실의 세계로 문학적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하자는 것이다. 과거 시적 이미지는 현실세계를 따오는(Sampling) 데 그쳤으나, 하이퍼시에서는 그 이미지들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술라르가 그의 공간시학에서 말하는 이미지의 보편성이란 질서를 잃지 않는다. 독자 누구나가, 시인이 이 두 현실의 구별이 없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을 상상에 의해 교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이퍼시의 또 다른 특징은 그 표현에 디지털 감각의 영상성과 동시성, 정밀성을 강조하는 점이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이 동영상과 유사한 동적 입체적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단위(Unit, 연과 행)의 이미지들은, 앞에서 말한 상상과 공상에 의한 이미지 창출과도 관계가 깊은 말이거니와, 마치 TV장면이 순간적으로 제한 없이 바뀌거나 또 채널을 돌릴 때 순간적으로 전혀 다른 화면이 나타나는 것과 흡사한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에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직관이나 관찰의 경험이 의식 무의식을 통한 사유에 의해 표현의 정확한 정밀성을 가지되 디지털의 이 순간적 단속적 사실(寫實)적 특성을 시에 원용하고 있다. 종래의 단선적인 시는 지속적 사유의 산물로 디지털의 순간적 단속의 직관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하이퍼시에는 이런 생동하는 이미지의 현장성이란 리얼리티가 강하다.   아날로그적 종래의 시에도 없지 않으나, 하이퍼시는 서사(敍事)구조라는 특성도 가진다. 물론 시의 얼굴은 각 편마다 다르게 되기 때문에 천편일률로 서사적인 짜임으로 되지 않을 수 있으나 대체로 서사구조를 갖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여러 특성을 살려서 관념성을 탈피하고, 디지털문화가 보편화됨과 동시에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현대문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시의 패러다임이 하이퍼시라 하겠다.   이제 이쯤에서 하이퍼시와 그 시 형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있어온 여러 가지 양상의 시들을 괄호문자로 표시한 대로 살펴봄으로써 하이퍼시와 종래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를 작품을 통해 직접 이해하기를 바란다.   ⒜ 관념시   꿈을 아느냐 게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 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김 현승, 「가로수」6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가로수인 플라타너스가 푸른 잎으로 행인의 반려자가 되어준다는 일관된 관념을 볼 수 있다. 이 시에 상상력에 의한 창조적 이미지는 첫 연의 제3행에서 볼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념시는 관념의 평면적 설명의 서술에 그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 순수사물시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船窓으로 눈썹까지 차오른 水平이 엿보고,   하늘이 한 폭 나려앉어 큰악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透明한 魚族이 行列하는 位置에 홋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정지용, 「海峽」7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감각적 즉물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순수 사물시이다. 화자의 어떤 의견이나 주장의 관념이 전혀 없다. 이런 이미지 창조는 곧 언어창조로 고정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생명력을 언어에 불어넣는다. 자기만의 이런 언어창조가 없는 시는, 엄격하게 말해서, 창작물로서 시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관염이 깔려 있는 사물시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 화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하고 바로 눈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서 내 앞에 선다. -오 진현,「꽃!」전문   이 시는 사물시이지만 화자의 의도가 들어 있다고 본다. 사물을 물리적 언어로 쓴 작품이므로 사물시에 속하나, 이 시는 화자(시인)가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볼 때 국어사전적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감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그 감격을 시화하겠다는 의도가 녹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시는 순수한 의미에서 사물시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 하이퍼시와 다름없는 종래의 시 보기   빛의 그물에 걸려 대롱거리는 녹색 공 오늘 아침 내 귀는 컴퓨터의 그래픽 속에 남쪽 하늘 반달처럼 떠 있더라.   스치로폼 눈이 내리는 겨울 밤 비닐 순대를 먹은 창자가 밤새 꿈틀꿈틀 페르시아 만(灣) 쪽으로 기어간 자국.   연필을 깎아 향나무 냄새가 나는 시를 쓰는 수녀님의 시간은 그녀 생가의 마루 밑에 잠든 청동(靑銅)화로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찍어내는 L. 다빈치의 키 펀칭 고난 주간 마지막 밤에 흘리던 피땀 우리 구주 로봇 씨의 이마에도 수은빛 진짬이 베어 나더라. -최진연, 「그래픽 ‧ 1」전문   이 시는 80년대에 쓴「그래픽」이란 제목의 연작 중 첫 작품이다. 이 시의 이미지들은 낡은 지폐처럼 때 묻은 이미지들이 아닌 독창성을 보여주며, 각 연의 그림언어들이 상관성이 거의 없이 구성되어 있다. 맨 끝 연에 관념성을 약간 노출하고 있으나 종래의 관념시와는 다른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 시 전체가 앞서 설명한 요즘의 하이퍼시와 다를 게 없다는 평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라고 종래의 시와 전혀 관계없는 게 아니다. 시인들에 따라서는 이미 하이퍼시적 특성들을 시작에 사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이제 하이퍼시를 써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하이퍼시 보기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무장한 미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업은 40대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거품을 토하여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들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상운 『빨간 방울토마토 또는 여름 바다 사진』전문   이 시는 화자가 식탁에 앉아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 여름 바다 사진을 보고 느낀 것을 서술형식으로 쓴 하이퍼시이다. TV에서 본 것으로 되어 있는 이라크 아이나 미군, 겨울풍경은 화자가 상상으로 만들어내었거나 샘플링 한 가상현실이다. 이 시가 위에 설명한 하이퍼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 공상에 의한 이미지 보기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후략) -심상운,「파란 의자」부분   이 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나,의 쾌락을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칸트의‘무목적의 목적’라는 말로 일컬어져온 문학의 유희성을 생각하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詩史에서 심상운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하이퍼시 몇 편을 감상 자료로 더 제시하겠다.   시인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황제*를 읽어서인지 내 심장이 핑크빛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여름 태양보다 뜨겁게 운동장을 달구는 관중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는 나라에서 지하철 칸칸마다 하얗게 죽어서 밟히는 시간의 시체들을 보고 피라미 같은 낱말들의 떼죽음을 보자니, 눈사람 같은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를 위한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하나님과 불타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서 돌아올 때 푸줏간의 고깃덩이들 틈에 어느 시인의 심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났다. 아침에 죽은 팝송 황제 마이클 잭슨의 새까만 안경과 하얀 페인트 얼굴의 입술에 칠한 빨강, 아이스크림 황제를 모르는 그 황제는 죽어서 더 날뛰면서 그 입술 색깔로 노래하고 있었다.   새싹 밥이 소화되는 그날 밤, 낮에 본 지하철 공사장에 쌓인 철 빔들이 모두 일어서서 천년을 꿈꾸는 숲을 이루고, 팝송 황제를 위해 노래하는 숲의 나뭇잎들. 꽃다발을 바치는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나는 더위를 식히라고 아내가 주는 아이스크림을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가 생각나서 먹을 수 없었다. - 최진연,「아이스크림」전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Wallace Stevens)의 시 제목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불룩한 가슴선에선 노란 분꽃냄새가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 있던 붉은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잔뜩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 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 심상운,「환각제 복용」전문   청계천 늪지대, 하늘 장대에 양 팔을 끼운 꽃무늬 바지저고리 바람이 십육 배 속으로 끌어올렸다내렸다 한다.   살수차가 엎어진 도로 위, 버스는 오후의 해를 끄려고 허공으로 올라가고 소풍 나온 아이들의 구름 모자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시간을 ‘뒤로뒤로’ 클릭 해보세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음” 담임선생의 긴 손가락이 남아 있는 생활통지표. 전학 간 친구가 건네준 올챙이 편지, 살구색 치맛자락을 치켜든 어머니 오월의 꽃그늘로 걸어가신다. 나는 은하철도를 타고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디지털이 무엇입니까?” “자연이 진화한 것이다.   디지털 이후는 무엇이 올까? 잭슨 폴록은 아직도 바람의 염료를 뿌리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물결은 세이랜의 노래를 내 방으로 쏟아놓는다. - 위상진,「설치미술」전문   맺는 말   우리는 앞에서 사물시에서 관념을 함유하고 있는 경우를 보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퍼시에서도 사물에 대한 인지적 단계를 넘어 무엇을 지향하는 의미를 외표하지 않는다면 형상화 된 관념은 허용해도 상관이 없으리라 보고 그런 작품을 쓰고 있다. 위의「아이스크림」이 그 한 예이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문학의 양대 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심상운의 표현을 빌자면‘지장수 같은 관념’을 살려 쓰고 있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해서이다.   또 초현실주의 시 등에서 볼 수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시는 문제가 되므로 하이퍼시에서도 정서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래의 시와 다를 게 없다는 점도 부기해둔다.   관념의 과잉은 한국시가 벗어나야 할 당면 과제로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시는‘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하지 않고‘어떻게’표현하느냐 하는 표현 방법과 형식이 더 중시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무엇인가를 써내려고, 시 속에 감정이나 생각들을 많이 담으려고 해서 시가 무겁고 재미가 없게 된다.   시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시’입네 하고 시 이전의 자기감정과 주장을 늘어놓은 잡초 같은 글을 발표하고 있어서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 필자: 시인 ․ 목사)
76    의식, 무의식의 징검다리 댓글:  조회:4278  추천:0  2015-02-19
의식-무의식-언어의 징검다리와 하이퍼링크                                                     손 해 일(시인, 문학평론가)       지난달 시문학 5월호에는 의미 있는 특집과 풍성한 읽을거리가 넘쳤다. 새로운 서정시 찾기를 주제로 한 박재릉-김용오 시인의 대담, ‘서정의 생산조건을 찾아’ 라는 문덕수 선생의 탁견을 비롯해, 심상운, 오남구, 김규화 시인의 하이퍼시 작품 기획특집, 하이퍼이론에 근접한 김은자 시인의 유니크한 소시집 등이 괄목할 만하다. 그중 하이퍼시(하이퍼텍스트시) 기회특집은 지금까지 우리시의 대종을 이뤘던 서정위주의 전통시를 지양하고, 디지털 첨단문명시대에 걸 맞는 현대시의 미래를 선도할 시금석이 되리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시문학 4월호의 하이퍼텍스트시 특집 대담의 후속편으로 심상운, 오남구, 김규화 세 시인이 각기 5편씩의 실험적 하이퍼시 작품을 선보여 주목된다. 이미 디지털시대의 생활 문화적 환경이나 의식구조 변화는 물론이요, 그 핵심인 디지털이론과 하이퍼텍스트, 의의 등에 대해서는 여러 지면과 이론서 등에 소개되고 있으나 정작 이에 입각한 시작품들은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특히 문자위주의 종이시 하이퍼텍스트라는 한계로 인해 문자, 부호, 음성, 동영상 등 디지털 전자미디어의 하이퍼텍스트적 속성 모두를 다 활용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시대적 특성과 이슈를 에콜화하고 하이퍼시라는 슬로건아래 실제 작품창작을 시도하는 자체가 선구적인 일이다. 이토록 시대 상황이 급변함에도 여전히 전통적 서정시 또는 관념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진부함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하이퍼시는 신선한 충격이 될 것이다. 기본적인 글쓰기의 원리는 같다 할지라도 하이퍼시가 음소, 단어, 문장, 의미 단락 간 마디마디에 해체와 단절을 거치고 이를 취사, 선택, 가공해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하이퍼적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낡고 구식인 구조물 하나를 헐 때 일단 해체작업을 거친 후 쓸 만한 자재와 파편들을 수습한 후 설계와 재구성을 거쳐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과 비유할 수도 있다. 하이퍼시라는 이름이 아직 낯선데다 실험단계이긴 하지만 전자미디어의 하이퍼텍스트적 첨단기능활용은 물론이요, 상상, 공상, 환상을 망라하고,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현실도 넘나드는 첨단 글쓰기라는 점에서 재미와 매력을 느낄 것이다.  하이퍼시는 얼핏 초현실주의 슈르시, 의식의 흐름을 좇는 자동기술법,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즘시, 해체시 등과도 맥락이 닿아 있지만 특히 디지털사고와 하이퍼텍스트적 속성을 기본틀로 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하이퍼텍스트시는 문자, 동영상, 이미지, 시적 상상력 등이 쌍방향 또는 방사형 네트워크로 가지를 치고 얽히고 설켜 복합구성을 이룬다. 또한 크고 작은 마디인 시어와 행과 연, 의미단락 등 기본 유니트(unit)들이 거미망처럼 하이퍼링크(hyper link)로 연결돼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이룬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시읽는 재미나 정서적으로도 사실적 묘사나 쭈욱- 이어진 다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묘미가 더 크지 않은가.  그러나 하이퍼시가 비논리적, 비선조적이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첨단 글쓰기라 해도 이를 어느 정도 조정하는 하이퍼링크적 기능이 없다면 현대시의 ‘낯설게하기’를 넘어 난삽한 글쓰기나 시인 개인의 극히 편향되고 혼란스런 의식의 나열에 그치고 말 것이다. 기거너는 달 작으로는 죽이진 아무리 복잡한 시대라 하더라도 인간의 기본욕구는 혼돈과 무질서보다는 정서적 안정과 예술적 즐거움을 선호할 것이다. 이미 수 십 년 전에 선보인 이상시인의 난해한 문제작들이 호사가들의 지적 호기심과 분석 텍스트로는 적합할지 몰라도 일반 독자대중들의 애송시는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독자를 먼저 의식하고 첨단을 리드한다는 하이퍼시가 수위 조절없이 의욕이 지나쳐 난해시로 편향될 경우 오히려 독자들의 외면을 자초할 위험이 크다. 이런 조정장치의 하나인 소위 ‘하이퍼링크’에서, 비행기가 장시간 비행후 돌발적인 동체착륙의 위험과 충격을 피하고, 활주로 연착륙으로 승객을 안착시키는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전제아래 먼저 오남구(본명 오진현)시인의 작품부터 살펴본다. 오남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탈관념시, 디지털시 등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해오며 최근엔 이를 반영한 시집 를 상재해 주목받고 있다. 오남구의 주장을 요약하면 ‘빈자리x’는 관념이나 정서가 배제된 시텍스트의 텅빈 공간을 의미하며, 텍스트는 시인이 쓰지만 개입을 최소화해 의미를 독자가 만들도록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독자는 막연한 독자대중이 아니라 1960년대의 수용미학과 독자반응비평이론 중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의 소위 내포독자(implied reader)를 지향하는 듯하다. 이저의 주장은 독서행위자체가 텍스트와 독자와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및 공동창작이라는 점에서 독자의 참여와 역할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오진현의 5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싹이 트려나, 배낭을 벗어 놓고 양지 볕에 앉아 몸이 근질근질하다. 긴다리로 떼지 어 서있는 계곡의 진달래며 철쭉 싹이 트려나, 아른아른 기척 없이 날아든 작은 새, 까맣게 잠이 든 앙상한 가지 부리를 부비어 흔들다가, 새싹에 대고 내 어머니의 맑 은 목소리 깍궁! 소리치고 포르르 다른 가지로 날아간다. 또 한 마리 뒤따라 깍궁! 하 고 포르~ 포르~ 포르르 ~ 포르~ 앞을 서거니 뒤를 서거니 두 마리 작은 새 깍궁! 깍 궁! 소리치고 새싹의 잠을 깨우며 날아다닌다. 싹이 트려나, 진달래 철쭉의 앙상한 가 지들이 꽃샘바람에 흔들리어 이~잉~잉 울어댄다. 일시에 아가야 깍궁! 깍궁! 계곡에서 일어나는 맑은 목소리 환청이 돈다. --- 오남구 < 깍궁 >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늦겨울 산행중에 대지가 혼곤한 잠속에서 새싹을 피우려 기지개켜는 듯한 초봄의 정경을 의식과 무의식간 상상으로 넘나들고 있다. 소재나 정서는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기법은 매끄러운 언어구사와 하이퍼텍스트적 구성이다. 한국인이라면 깍궁놀이 하던 모성에의 추억과 그리움이 애잔할 것이다. 엄마가 사랑스런 갓난애와 눈을 맞추고 깜짝 숨었다 깍궁! 하고 다시 나타나면 까르르르~ 아이의 천진한 웃음이 폭발되는 전통적 사랑놀이요, 육아법이다. 엄마나 아이 둘다 실존재이지만 갓난애 입장에서는 깍궁하는 엄마는 현실이요, 잠시 안보이는 엄마는 부재의 가상현실이기에 느닷없는 재출현에 그토록 자지러질 것이다. 배낭을 벗고 양지에 앉은 화자 자신도 싹이 트려는 듯 몸이 근질근질하고, 산곡을 넘나드는 작은 새와 진달래, 철쭉과의 정겨운 수작이 새싹들의 겨울잠을 일깨우는 깍궁놀이로 들린다. 이 시의 연상 고리는 양지에 앉은 화자--계곡의 진달래, 철쭉-- 작은 새의 재재거림--어머니의 깍궁! ---새싹을 어르는 작은 새들의 깍궁! --이에 화답하는 진달래 철쭉들의 잉잉거림 등 엄마와 새들의 깍궁을 회상하는 리드미칼한 환청 하머니이다. 그리고 시상의 각 유니티들을 매끄럽게 하는 하이퍼링크로 ‘깍궁!’ ‘ 포르~포르르~’ ‘이~잉~잉’ 같은 의성어들이 유려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햇빛은 무색이다가도 단풍나무에 가 닿으면 단풍잎이 된다/ 노랑은 노랑금빛 빨강은 빨강금빛/ 갠지스강가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빨간 불꽃을 당긴다/ 빨간 불꽃에 금빛 영 혼이 하루종일 번쩍이며 탄다/ 아무 말 없이 타는 시체 위로 허공에 고루 숨어 사는 햇 빛이/ 모조리 몰리어간다. 타다닥 탁탁 단풍무더기/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 단풍에 닿자 마자 크게 웃어/ 마릴린 몬로는 입을 약간 벌리고 금빛 머리칼을 / 신사의 가슴에 올려 놓는다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포스터를 보는 18살 소녀도 크게 웃어/ 학교가 끝 나면 곧바로 동방극장엘 갔지 내친구와 몰래/ 웃음소리가 크게 퍼지고 먼 마을로 간 마 릴린 몬로가 /타는 단풍속으로 들어와 앉는다 , 햇빛이 심지를 돋운다 --- 김규화 < 햇빛과 단풍 > 전문      시문학 발행인이며 왕성한 창작으로 수 십 년의 시력을 지닌 김규화 시인이 뒤늦게 하이퍼시에 경도되면서 시적변신에 나서 주목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시에 대한 김규화 시인의 인식은 시문학 4월호의 심상운-김규화의 대담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에서 엿볼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외에도 등에서 하이퍼텍스트시의 실험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인용 시에서는 햇빛과 단풍을 매개로 한 자유연상과 의식. 무의식의 가지치기, 청소년 시절 추억 등이 행간에 배어 있다. 시상전개의 각 유니트와 연상단락의 하이퍼링크적 징검다리로 동서양과 현재, 과거를 넘나들고 있다. '무색인 햇빛이 단풍잎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노랑 빨강 금빛--갠지스강 나무더미-- 빨간 불꽃--금빛 영혼 --타는 시체--단풍무더기 --단풍에 웃는 햇빛으로 확산된다. 이어서 -- 마릴린 몬로의 금빛 머리칼----영화 포스터 보는 18살소녀--친구와 몰래 간 동방극장으로 증폭되고 --단풍속으로 돌아와 앉는 마릴린 몬로--심지 돋는 햇빛'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여기서 하이퍼링크적 연결고리는 햇빛과 단풍의 교호작용을 통해 마치 끝말잇기 놀이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미지군이며, 이것이 매끄러운 시읽기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독자로서는 이런 하이퍼시에서 의미나 결론을 애써 찾기보다는 파노라마 경관 감상하듯 화자의 자유분방한 공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즐기며 음미할 일이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검은 철제 의자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 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 밭의 환한 햇빛속으로 들어 갔을까? 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 영하 10도 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장수가 떨어 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고 쓴다. 그는 그밑에 “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 ”라고 또 쓴다. --2연 생략--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 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 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1연, 3연      심상운 시인은 최근 몇 년 논란의 초점이었던 탈관념시, 디지털시에 대한 명쾌한 해설과 이론적 배경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촉구해 왔다. 그런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시문학 4월호에서는 김규화 시인과의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 라는 대담을 통해 하이퍼시론을 피력하고 이를 토대로 창작과 동인활동을 시도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물꼬를 틀고자 노력하고 있다. 시문학 5월호에는 하이퍼시 특집으로 < 북한산의 레몬 향기> < 미완성의 시>도 선보이고 있다. 심시인이 수십년 동안 추구해온 토속적 서정과 이미지 위주의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디지털리즘과 전자미디어의 하이퍼텍스트적 특성에 주목하고 동인 에콜로 변신을 시도하는 노력을 높이 살만하다.  인용한 에는 하이퍼시에 대한 그의 애착과 기법적인 특성이 나타나 있다. 하이퍼시가 방사성 자유연상, 공상적 의식의 흐름 따라가기이면서 말하기 보다는 보여주기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그림감상하기’라는 부제를 달고, 실험단계라 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추측된다. 일반 독자입장에서는 난해하고 생경한 이 시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나 순서, 상식적 질서, 교훈을 찾으러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디지털적 하이퍼시의 특성을 따라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추상화 감상의 요점이 그림 자체의 감흥을 중시하고 사실에 입각해 무엇을 그렸는지, 무슨 의미인지는 부차적인 사항인 것과 같다. 실제로 지금 이 시공간에도 미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차원적 상황들이 앞뒤 없이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천지만물의 존재나 사건, 사물들이 불가측, 불연속적이어서 어찌 보면 뒤죽박죽이지만 나름대로 혼돈 속에 우주순행의 질서가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 시는 그의 방에 걸린 다섯 개의 그림 중 첫 번째 그림 감상을 시작으로 자유연상과 분방한 의식, 무의식의 흐름을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시 첫 연의 골격은 첫 그림: 검은 철제의자위에 불타는 붉은 꽃다발--그 글 밑에 그와 내가 주고받는 컴퓨터 댓글 형식으로 -- “ 꽃밭의 햇빛 속으로 들어 간 죽은 뱀의 영혼” ”영하 10도의 겨울밤 시멘트 도로 위 귤의 꿈“ ”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시인의 여행“ 등 다소 난해한 글귀들이 화답한다.  다섯 개의 그림 감상도 차례대로가 아니라 1.3.5.4.2로 비순서적이며 세 번째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그림으로 가자 네 번째 그림에서 태평양의 물이 흘러내리고 동시 다발적으로 두 번째 그림에서 나온 색색공이 굴러다니다 식탁 , 놀이터, 침대,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아이들이 뛰고,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뜬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난해한 암호풀이 하듯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골똘히 캐기보다는 디지털매체의 그림 감상이나 댓글달기처럼 비선형적, 비순조적으로 독자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로 작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저 따라가 볼 일이다. 이시에서의 하이퍼링크는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이다.    이상에서 필자 나름의 독법으로 세시인의 하이퍼시를 읽었지만, 작가의 의도와 달리 추상화감상처럼 개개 독자들에 따라 천차만별인 시읽기의 무정부상태가 불가피 한듯하다. 이 점이 하이퍼시의 묘미라 할 수 있고, 살펴본 세 시인의 작품도 각기 개성이 보인다. 아직 실험단계라 확언할 수는 없지만 하이퍼링크에서도 오남구 시인은 매끄러운 언어구사를, 김규화 시인은 의식의 흐름과 링크의 완성도 여부를, 심상운 시인은 이미지 마디간의 집합적 결합을 중시하는 듯하다. 수용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시 텍스트 제공자인 시인과는 별도로 이를 수용하는 독자태도에 따라 한스 야우스의 ‘현실독자’, 리퍼테르의 ‘초독자’, 스탠리  피쉬의 ‘정통독자’, 조나단 컬러의 ‘이상적 독자’, 볼프강 이저의 ‘내포독자’, 움베르트 에코의 ‘모범독자’ 등으로 분류될 만큼 독자의 역할과 중요성이 부각된다. 독자는 작품의 주제나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이미지 등에서도 즐거움을 향유한다. 특히 오랫동안 전통을 답습해온 재래시의 진부함에 질린 독자에게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 부응하고, 미학적 제약을 벗어난 하이퍼텍스트시의 정서적 해방감과 자유분방함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75    김기림 시론 ( - 한국 현대시의 최초 시론) 댓글:  조회:4056  추천:0  2015-02-19
* 1947년 발간 된 김기림의 은 한국현대시의 최초 시론이다. 그의 에서 '과학과 비평과 시'는 현대시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논문이다. 과학과 형이상학과의 관계에는 근대시와 현대시를 가름하는 기초적인 이론이 들어 있다.*                         科學과 批評과 詩                                                               金 起 林                                                       1.    우리 詩壇의 通弊가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 수많은 文學原則論이나 創作方法論이 써지는 대신 실제로 具體的 作品에 대한 科學的 分析과 그것을 基礎로 한 批評이 지극히 드물었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新詩運動이 있은 후 20年 가까운 동안 수천 편 발표된 詩에서 거푸 두 편이 科學的으로 分析 批評되었다는 소문을 우리는 듣지 못하였다. 오늘의 詩는 또한 文學上의 亡命處가 되도록 적당한 密林은 아니다. 우리는 詩에 아무러한 形而上學的 도 神學的 秘密도 붙일 필요가 없다. 詩는 일찍이는 神과 함께 살았다. 다음에는 詩神의 傳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이 ‘우리 소리’에 틀림없다. 그것은 科學的 分析과 究明에 견딜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絶對한 價値가 있다. 새로 씌어져야 할 詩學은 美라든지 靈感이라든지 超時間的 價値라든지 한 形而上學的 術語는 한 마디도 쓰지 않고도 써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時期에 어떠한 詩人이나 詩壇이 昏迷에 빠져 있다면 그 原因의 적지 않은 부분은 詩에 대한 科學的 追究의 부족에 있을 것이다. 물론 과학으로서의 詩學은 이미 確立된 것은 아니다. 詩의 歷史的 社會的 關聯의 연구는 社會學에 속하고 詩的 經驗에 대한 具體的 解明은 心理學에 속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사이에 詩學을 위한 일의 領域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처럼 실망할 것은 없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의 목적은 詩學의 救濟에 있는 것이 아니고 詩의 진정한 認識을 얻는데 있는 까닭이다. 形而上學的 講堂 美學이나 詩學이 우리에게 준 것은 아름다운 觀念과 그리고 失望이었다. 詩에 대한 진정한 智識이 아니고 머릿속에서 꾸며낸 精妙한 論理였다. 詩에 대해 말하면서도 詩의 事實과는 들어맞지 않는 빌려온 禮服이었다.  나는 여기서 잠간 以來의 學問의 새 傳統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를 느낀다.                                                            2     우리는 보통 學問의 形式分野를 대개 세 가지로 나누어도 무방할 것 같다. 1. 博識: 東洋流의 在來의 學問 形式은 대체로 여기 속한다. 그 決定的 缺陷은 體系가 없다는 점이다. 2. 形而上學: 그 자체의 精妙한 論理는 갖추고 있다. 누가 더러 그 體系는 現實하고 맞지 않는다고 말하였더니 은 즉석에 그것은 自己의 體系가 나쁜 것이 아니고 現實이 나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3. 科學: 이래의 新傳統이다. 主張을 품은 모든 命題는 事實의 檢證에 비추어서 그 眞假를 결정하는 것을 眼目으로 한다. 論理 自體는 權利가 없다. 그것이 事實-실로 事實과 相應하지 않을 때는 거짓이라는 烙印을 얻어맞는다. 科學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理論物理學이다. 形而上學이 科學 앞에서 드디어 그 地位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 學問으로서의 생명인 眞理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形而上學的 뭇 命題는 事實에 대한 주장일 수 없는 점에 결정적인 陷穽이 있었다. 는 벌써 形而上學의 不可能을 주장하였고 그 認識論은 科學的 認識에 대한 연구였다. 그 뒤에도 여러 가지 모양을 한 形而上學이 곳곳에서 나타났지만 오늘의 哲學이 科學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는 結論은 도처에서 實證되고 있는가 한다. 학문의 全 領域에서는 아직도 在來의 博識 또는 形而上學이 혹은 단독으로 혹은 어울려서 혹은 뚜렷하게 혹은 隱然中에 숨어서 널리 남아있다. 아직은 科學은 여러 세기 不安의 苦鬪에도 불구하고 낡은 인습의 城壘를 완전히 깨드리지 못했다. 그것은 사람의 뿌리 깊은 蒙昧 때문이다. 조만간 學問은 모조리 科學으로 統一되어야 할 운명에 있다고 본다. 오늘의 科學의 未熟을 가지고 곧 科學을 훼방하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先史時代 이래의 인류의 깊은 迷信을 분쇄해야할 큰일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완전한 精神的 一新을 企圖한다. 이렇게 多事多難한 科學은 그 目的을 達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時日을 요망할지도 모른다. 오로지 사람의 蒙昧의 退却과 反比例해서 목적에 점점 가까이 갈 것이다. 科學은 科學的 方法 위에 선다. 개개의 특수한 科學은 그 특수한 방법의 면을 가지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事實에서 出發한다는 것-그래서 事實의 면밀한 觀察과 分析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공통된 일이다. 그 뒤에는 모든 우상에서 (독자는 베이컨의 네 우상-인류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을 생각하라) 極力 떠나서 事實을 응시해서 마지않는 科學的 態度가 숨어 있음은 물론이다. 科學-科學的 方法-科學的 態度는 일련의 새로운 世界觀 人生觀 생활 태도와 조응한다.    批評이 만약에 한 作品이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 오직 한 개의 命題를 내세움으로써 일이 끝난다면 혹은 科學的 態度나 方法을 떠나서 幻想的 感歎詞 몇 마디만 준비하면 그만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批評은 있을 수 없다. 批評은 長期間 그 作品에 대한 敍述을 해야 한다. 그 敍述은 그 作品에 대한 실로 그 作品에 대한 것이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 作品이 일으키는 效果를 事實에 기해서 記述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作品이 일으키는 效果와 대체로 一致해야 한다. 批評家가 判定을 내리는 것은 실로 그 準備가 십분 되었을 때 그 위에서 비로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批評家는 그의 判定을 보일뿐 아니라 그 判定의 理由를 보여주어야 한다. 批評은 分析과 判定을 그 일의 부분으로 삼는다. 그러면서도 分析은 그 일의 가장 중대한 大部分을 차지한다. 우리는 理由를 보여주기 전에는 어떤 判定도 信用할 수 없다.                                                          3.    따라서 批評은 실로 가장 진지한 科學的 態度와 方法에서만 가능하다. 오늘의 作家나 詩人은 단애 위에서 一步轉落을 늘 발아래 위태롭게 느끼면서 죽음과 싸우듯이 製作한다. 그러한 진지한 노력의 결과인 작품에 대해서 自己流의 幻想이나 機智나 印象만을 가지고 處斷하려고 하는 것은 現代批評의 倫理일 수도 없다.  우리는 다시 詩로 돌아가서 얘기를 계속하자. 形而上學的 방법이 破産한 地帶를 收拾할 과학적 방법에 의한 詩의 硏究는 詩의 事實에서 出發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것이 치밀한 觀察과 分析에서 일을 始作해야할 것이다. 詩의 批評은 또한 논하려는 詩篇의 效果의 그러한 科學的 分析과 計算을 토대로 하고 그 위에 내리는 判定을 품은 것이다. 우리는 다시 詩의 認識 및 批評에 있어서 과학적 태도와 과학적 방법이 不可避하다는 지금까지의 논의보다도 더 중요한 命題로 옮겨 가자. -즉 科學的 態度는 오늘의 詩人의 새 모럴이며 뿐만 아니라 과학의 勃興과 함께 자라난 世界의 새 情勢가 요구하는 唯一한 진정한 人生態度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거기에 現代詩의 최대의 問題가 숨어 있다. 詩의 문제는 결코 人生問題에서 떨어진 한가한 題目이 아니라는 것을 再認하게 한다.    讀者는 詩의 事實에서 이를 論證하려고 한다. 詩의 製作의 材料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이 소리나 글자의 모양을 한 記號가 아니고 우리의 經驗을 代表하고 組織하고 傳達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意識의 활동을 代表한다. 意識이 역사적 사회적 규제를 받는다는 命題는 ‘말’이 역사적 사회적 規制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명제의 同意反覆이다. 편 편의 詩는 한 全體로서 意識의 어떤 統一된 활동을 代表한다. 그래서 讀者의 意識에 한 態度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人生에 대한 態度다. 詩의 散文的意味가 어떤 人生態度를 說敎한다는 말이 아니고 讀者의 마음에 한 편의 詩가 全體的 反應으로서 불러일으키는 心理的 態度다. 이 점에서 詩에서 모럴을 去勢하려는 모든 藝術至上主義者의 辨說은 결국 그들이 변호하려는 詩가 人生을 도피하려는 태도를 지지하는 詩라는 것을 그릇 告白했음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詩의 人生態度에 대한 關係를 역사적으로 回顧하기로 하자.  어떠한 時代에도 사람은 그가 사는 宇宙에 대해서 한 世界像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과 調和된 人生態度를 選擇한다. 神話는 古代人의 世界像이요 동시에 그 모럴의 源泉이다. 호머의 시가 희랍 神話를 人生態度의 詩的 經驗으로서가 아니고 더 노골한 具體的 記號로써 대표한 일은 너무 유명하다. 그 뒤에도 단테의 이 르네상스 前夜의 神話였고 밀턴의 이 淸敎徒의 神話였고 괴테의 도 神話 속에 들 수 있을 것이다. 歐羅巴 사람의 생활이 지금보다는 統一이 있었던 시절에는 詩人은 全歐羅巴 또는 한 國民의 生活上의 指導者인 적도 있었다. 허버트리드는 英詩에 있어서 民謠詩人은 그 集團과 一致했고 다음의 휴머니즘의 詩人은 그 集團의 中心點에 있었고 그 다음의 宗敎詩人은 그 圓周 위에 섰고 로맨티스트들은 自己들의 世界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4.     19世紀를 일관해서 西洋의 詩는 대체로 前代의 貴族의 意識을 반영한다고 筆者는 본다. 사회의 새 變革에 대해서 詩人은 늘 귀족적 결벽에서 소극적으로 非難하고 逃亡하려고만 했다. 科學과 새 産業機構의 主人으로서 市民들이 멋대로 자라날 때에 19世紀의 시는 슬픈 敗北者의 노래였다. 宮廷과 莊園과 지나간 날에 대한 달콤한 回顧와 鄕愁에서 언제고 깨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異國에 대한 憧憬으로 나타나서 世紀末에는 東洋에 대한 꿈을 불타게 했다. 타골이 登場한 것도 그러한 분위기 속이었다.와 가 英國의 世紀末 詩人들과 끌어안고 우는 동안 印度와 近東에는 英國의 支配가 날로 굳어갔던 것이다.  우리 新詩運動의 當初에 先驅者들이 輸入한 것은 바로 이러한 19世紀의 傳統이었다. 象徵派의 황혼 ‘센티멘탈. 로멘티시즘’..... 그것들은 다시 말하면 ‘센티멘탈리즘’으로 어느 정도 까지는 槪括할 수 있는 逃避的인 패배적인 回顧的인 人生態度를 代表했다.    우리가 先驅的 功勞에도 불구하고 어느 부류의 先輩들과 그 末流의 詩를 19世紀와 함께 경멸하는 것도 주로 그러한 까닭이었다. 20世紀의 機械體操場에서 19世紀의 춤을 추는 그 우스꽝스러운 嬌態 때문이다. 退步와 隱退를 사랑하는 東洋의 禮儀다. 20世紀의 初頭까지는 그래도 어떤 詩人은 그 國民의 꽤 넓은 範圍에 향해서 統一的 영향을 주었다. 가령 이라든지 에게는 어찌 보면 ‘國民的’이라는 形容詞가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1차 世界大戰이 지나간 뒤의 歐羅巴에는 국민의 생활이 支離滅裂해지고 같은 知識階級 안에서도 다시 分裂을 시작했다. 詩人의 소리는 거의 微視的으로 分裂해버린 그가 속한 지극히 적은 한 黨派 속에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는 그 일을 가리켜 오늘의 詩人은 “혼자 呼訴한다.”고 했다. 그 자신의 괴로움 아픔 및 理想의 세계와 미운 現實의 不均衡을 뿜어 놓을 뿐이라고 했다. 그것은 大戰後의 한 世代- 가 말한 소위 “不安한 時代‘를 통한 시인의 속임 없는 모양이다. 깨어진 神話의 조각을 집어 들고 그들은 너무나 어이없어서 찌푸린 時代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 悲慘은 결코 약속된 未來 때문에 榮光이 있는 受難이 아니다. 과거의 怠慢에서 온 차라리 不美한 刑罰이다. 즉 人類의 생활에 새로운 情勢가 전개되어가는 동안에 詩人은 그것에 無關心하였고 도리어 反撥을 꾀한 刑罰이다.    조만간 時代는 秩序를 回復해야 했다. 도 그렇게 말하고 도 그렇게 말했다. 秩序는 어떻게 回復할까? 問題는 共通되면서도 解答은 아무도 잘 몰랐다. 성급한 사람들- 가령 같은 사람들은 中世紀의 復活을 解答으로서 제출하였다. 은 이러한 歷史의 龜裂을 가장 巧妙하게 利用했다. 秩序는 오직 神學的인 形而上學的인 先史以來의 낡은 傳統에 선 世界像과 人生態度를 버리고, 그 뒤에 科學 위에 선 새 世界像을 세우고 그것에 알맞은 人生態度를 새 모럴로 파악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허나 그것은 벌써 刑罰이 아니었다. 希望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歷史의 中流에서 詩人의 發言이 한 커다란 진폭을 가지고 울리는 것을 다시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詩人은 비로소 아무 奇蹟도 神들의 이름도 그 속에서 구경할 수 없는 20世紀의 神話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드디어 詩와 科學은 결코 서로 對立하고 否定하는 것이 아니고 調和할 수 있는 것임을 또 調和해야 할 것을 깨달아야 했다. 詩가 組織하고 통일할 것은 科學的 世界像에 알맞은 人生態度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科學的 態度와 근저에 있어서 일치하는 것이다.                                                        5   우리는 다시 우리 詩壇을 살펴보자.  新詩運動의 始初에 대해서는 이미 論及한 바 있지만 그 뒤에 한 중요한 시기는 1920年代의 後半期였다. 한 時期를 다만 幻想以外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一笑해버리는 것은 歷史에서 무엇을 배우려는 사람의 態度가 아니다. 우리는 한 時期의 動機와 成果를 냉정하게 分析해서 그 중에서 失手와 收穫을 잘 가려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焦燥와 獨斷에 차 있으면서도 이 時期는 우리 詩속에 科學的 要求가 처음으로 눈뜬 때이므로 우리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1930年代의 前半期에 모색한 것은 바로 詩의 科學的 파악과 그것에 의한 詩의 實踐에 대한 努力이었다. 그 努力과 분투에 비해서는 혹은 얻은 것이 成果보다도 失敗가 더 많았을지 모른다. 여하간 1930年代의 後半期가 그 前半期의 失敗와 成功 위에서만 一步 前進을 꾀한 것은 事實이다.  젊은 세대는 앞에서 제시한 歷史를 兩分하는 새 神話의 建設을 최대의 과제로 가졌었다. 그리고 가장 綿密한 ‘말’의 科學者이려 했다. 그들은 時代와 社會의 움직임에 대한 根氣있는 凝視者이려 했다. 인생에 대한 미쁜 實驗者이려 했다.  筆者는 逆說이 아니라 참말로 이렇게 새로 詩를 하려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낡은 美學이나 詩學을 읽기 전에 우선 詩를 읽으라고-. 또 한 권의 美學이나 詩學을 읽느니 보다는 한 권의 ‘아인슈타인’이나 ‘에딩튼’을 읽는 것이 詩人에게 얼마나 有用한 敎養이 될는지 모른다고. 우리가 가진 가장 뛰어난 近代派 시인 李箱은 일찍이 「倦怠」에서 적절한 現代의 診斷書를 썼다. 그의 우울한 時代 病理學을 기술하기에 가장 알맞은 暗號를 그는 考案했었다. 다만 우리는 目標를 바로 본 이상 다음에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일찍이 20世紀의 神話를 쓰려고 한 「荒蕪地」의 詩人이 겨우 精神的 火田民의 神話를 써놓고는 그만 歐洲의 焦土 위에 무모하게도 中世的 神話를 再建하려고 한 전철은 똑 바로 보아 두었을 것이다. (1937년 조선일보) 김기림 「시론」(1947년 11월 15일 백양당)          
74    조향 시론 댓글:  조회:4212  추천:0  2015-02-19
  이 글은 (신구문화사 1961년11월)의 '시작노트'에 실려 있는 초현실주의 시인 조향의 시작노트를 원문 그대로 수록한 글이다. 한국 현대시 이해의 중요한 길잡이가 되는 글이라고 생각된다.                           조향(趙鄕)의 시작노트                          데뻬이즈망의 미학       1   요 몇 해 동안 글을 쓰지 않는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발달된 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손해가 아니냐고 날보고 말하는 사람이 흔히 있다. 그러나 손해니 이익이니 하는 그런 실리적인 사고방식보다도 나는 나대로의 계산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첫째로, 나는 스무 장, 열 장.......씩의 나부랭이 글을 쓰기 위하여 정력 소모하는 것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한다. 둘째는, 이상한 걸작의식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늘 나의 머릿속에 도사리고 앉아서, 냉큼 펜을 들지 못하게 한다. 일년에 시 너댓 편 정도 밖엔 쓰지 않는다. . 그렇다고 해서 그 너댓 편이 모조리 걸작이라는 말은 아니다. 할 수 없이 내어 놓는 수가 많다. 어떻게 했으면 “Ulysses"와 겨룰 수 있는 소설을 한 번 쓸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만 하면서, 이론으로만 꼭꼭 메꾸어져 있는 강의실을 드나드는 것이 나의 일과다. 그러한 나에게 장만영(張萬榮) 형이 사신(私信)까지 붙여서 청탁을 해 왔다. 나의 시법의 비방을 원고지 스무 장에다가 통조림을 해서 공개해 달라는 것이다. 모처럼의 청탁을 아무런 뾰족한 이유도 없이 저버릴 수도 없고 해서 쓰기로는 하는데, 사실인즉 자기 자신의 작품을 뇌까려서 다룬다는 것은 약간 쑥스러운 일의 하나에 속한다. 무슨 허세를 부리고 뻐기는 것 같아서 나는 강의 시간에서도 나 자신의 작품을 교재로 하는 일은 별반 없다. 그저 현대시, 현대예술 전반에 걸친 이론을 꾸준히 강의할 따름이다. 그러나 내 작품에 관한 질문이 있을 때엔,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간에 열심히 이야기해주는 친절을 나는 잊어버리지는 않고 있다.     2     낡은 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이것은 나의 「바다의 층계」라는 시다. 시에 있어서 말이라는 것을, 아직도 의미를 구성하고 전달하는 단순한 연모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 나의 시는 대단히 이해하기 곤란할 것이다. 의 구성에 의하여 특수한 음향(운율이 아니다) 이라든가, 예기하지 않았던 , 혹은 활자 배치에서 오는 시각적인 효과 등, 로서의 기능의 면에다가 중점을 두는, 이른바 . 이것에 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면 위의 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 , . 이 셋째 에 모여 있는 들을 두고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거기엔 아무런 현실적인, 일상적인 의미면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동떨어진 사건끼리가 서슴없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이와 같이 사물의 존재의 현실적인, 합리적인 관계를 박탈해버리고, 새로운 창조적인 관계를 맺어 주는 것을 데빼이즈망 (depaysement)이라고 한다.  그 움직씨 데빼이제 (depayser)는 (혹은 환경, 습관)를 바꾼다는 뜻이다. 국적을 갈아버린다는 뜻이다. 초현실주의 (앞으로는 ‘sur.’라고 생략해 쓰기로 한다.) 에서는 전위(轉位)라고 한다. sur.의 화가들은 데빼이제 하는 방법으로서 빠삐에. 꼬레 (papier colle 서로 관계없는 것 끼리를 한데다 갖다 붙이는 것), 이것의 발전된 것으로서 꼴라아주 (collage) 그리고 프로따쥬 (frottage) 혹은 Salvador Dali의 유명한 편집광적 기법 (methode paranoiaqure) 등을 쓴다. sur.의 선구자로서 봐지고 있는 Lautre'amont (본명은 Isidor Dur-casse) 의 의 미학이며, Dali의 라고 한 말들을 참조해 보면 석연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들에 의해서 데빼이제 된 하나하나의 사물을 sur.에서는 오브제(oobjet)라 부른다. 오브제란 라틴말 “...의 앞에 내던져 있는 물건”에서 온 말로서 사전에서의 뜻은 , , , 등이지만 sur.의 용어로서는 일상적인, 합리적인 관념에서 해방시켜버린 특수한 객체를 의미한다. 주로 sur. 계통의 미술용어로 쓰이지만, 시에서도 물론 쓸 수 있는 말이다. term(논리학 용어로서 ‘명사’라고 번역 된다. 개념을 말로써 표현한 것)의 기묘한 결합, 합성에 의하여 어떤 특수한 , 돌발적인 이마쥬를 내려고 할 때, 거기에 쓰인 term의 하나하나는 훌륭히 오브제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를 비롯한 여러 작품은 뽀엠.오브제(poeme objet)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레뗄이 붙은 통조림통이 아직 부엌에 있는 동안은 그 의미는 지니고 있으나, 일단 쓰레기통에 내버려져서 그 의미와 효용성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비로소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입체파   운동의 영도자 브라끄 (Bracque)의 이 말은 오브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브제는 서양의 모더니스트 들이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정원을 꾸미기 위해서 우리가 흔히 주워다 놓은 괴석(怪石), 일본 사람들의 이께바나(生花)의 원리, 동양 사람들이 즐기는 골동품 등은 모두 오브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3      이와 같이 의미의 세계를 포기한 현대시, 19세기적인 유동(流動)하는 시에 있어서의 시간성이 산산이 끊어져 버리고, 돌발적인 신기한 이마쥬들이 단층을 이루고 있는 현대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그것은 의미도 음악도 아니고, 순수한 이마쥬만 읽으면 그만이다. 사람에게 순수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곧 카타르시스다. “이마쥬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다.”(Reverdy) “이마쥬의 값어치는 얻어진 섬광(閃光)의 아름다움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그것은 두 개의 전도체(電導體)사이의 단위차(單位差)의 함수(函數)다.”(Adntre' Breton)  시인에 있어서 이마쥬는 절대와 본질로 통하는 유일의 통로요, 탈출구다. '절대 현실'은 곧 초현실(超現實)이다. 이렇게 따져 봤을 때, 나의 는 순수시다.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의 후예 발레리의 ‘순수시’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순수시’요 ‘절대시’다. 쟌 . 루스로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말라르메가 의식론(意識論)에다 구한 것을 마술(魔術)에다 구하긴 했으나 그 덕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공통된 갈망을 갖고 있었다. 곧 ‘순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의 갈망을”이라고. 상징주의자들이 갈망한 순수는 음악적(시간적)인 것이었고, 초현실주의자들이 갈망하는 것은 조형예술적(造形藝術) 곧 공간적인 순수 그것이다. 두 가지의 순수가 다 현실이나 일상생활에서 떠난 동결(凍結)된 세계임에는 다름이 없다.  나는 순수시만 쓰지는 않는다. 꼭 같은 방법으로서 현대의 사회나 세계의 상황을 그린다. 곧 나의 (어느 날의 지구의 밤) 등 일련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상황악(狀況惡)이란 곧 을 말한다.     4      자유연상(自由聯想)은 예술가나 과학자의 마음이 창조를 할 때의 자연의 과정이라는 것이 언제나 잊어버려지고 있다. 자유연상은 정신의 본도(本道), 간도(間道)를 통하여, 의식의 제한에 방해 당하는 법 없이 사고(思考)와 인상(印象)을 모아서, 그것을 가지가지로 결합시키면서, 드디어 새로운 관계나 형(型) 이 생겨나도록까지, 심리과정을 자유스럽게 헤메도록하는 것이다. 과학에 있어서나, 예술에 있어서나, 자유연상은 창조적 탐구의 과정에 없지 못할 수단이며, 이렇게 해서 얻어진 새로운 형은 거기에 잇닿은 논리를 찾아내는 것에 의하여, 필요한 제2의 과정인 검사(檢査) 또는 시험에 들어가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자유연상은 환자가 하고, 논리를 찾아내는 것은 분석기(分析機)가 하는 것이다. -Lawrence S. Kubie: Practical and Theoretical Aspects of psychoanalysis-  정신분석의 임상의(臨床醫)인 큐비의 이 글에서도 밝히 알 수 있다시피, 자유연상이란 예술가에겐 없지 못할 것으로 되어 있다. 자유연상 상태란 곧 자아(ego)초자아(super ego)의 간섭이 없거나 극히 약해서 상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일종의 방심상태(放心狀態)를 말한다. 벨그송 (Bergson)의 ‘순수지속(純粹持續)’의 상태와 흡사하다. 이런 방심상태에서는 무의식(無意識) 혹은 전의식(前意識)의 세계, 곧 심층심리면(深層心理面)에 잠겨 있던 것들이 순서도 없이 곡두(환영幻影)처럼 의식면에 떠올랐다간 가뭇없이 스러지고 스러져버리곤 한다. 그런 현상을 옛날 사람들은 영감(靈感)이라고 불렀다. 나의 시채첩(詩債帖)에는 이러한 순간적인 이마쥬의 파편들이 얼마든지 속기(速記)되어 있다. 나의 에스키스 (esquisse)다. 그것을, 적당한 시기에 바리아송(variation, 變奏)을 주어 가면서 몽따쥬(montage)를 하면 한 편의 시가 되곤 한다. 나는 시를 이렇게 쓴다. 시인으로서의 재간은 이 몽따쥬하는 솜씨에 결정적인 것이 있다. 현대의 영상미학의 근본이 되어 있는 몽따쥬 수법은 현대시의 수법에서 빌려간 것이다.       5      다시 나의 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낡은 의 서투른 연주가 끝났다. 막이 열린다. 고요가 있다. 어디선지 “여보세요?” 소녀의 부르는 소리. 그것은 먼 기억의 주름주름 사이에서 잠자고 있던 청각인지도 모른다. 다시 고요가 돌아와서 도사린다. 앞에서 말한 오브제의 모꼬지. 그 가운데서도 메커닉 하고 거창한 과 연약하고 서정적인 의 결합은 엑센트가 꽤 세다. 이렇게 거리가 서로 먼 것끼리일수록 이마쥬의 효과는 크다.  새삼스럽게 어디선지 아까번의 소녀의 부르는 소리에 응하는 소리가 있다. “왜 그러십니까?” 음향의 몽따쥬로서 바리아송을 주기 위한 수법이다. 다시 고요가 도사리고 앉는다. 다음엔 제2의 의 심포지움. 장소는 하얀 모래밭. 메커닉하고 딱딱한 와 휴먼(human)한, 보드랍고 오동통한 와 그로데스크한 의 대비에서 빚어지는 강렬한 뽀에지! 새로운 시적 공간 구성. 그리고 여기에선 하나하나의 오브제에다 위치적인 바리아송을 추가하기 위하여 포르마리슴 (formalisme)을 시험해 봤다. 포르마리슴은 언제나 언어단편(言語斷片) 아니면 단어문(單語文)으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명사 종지법이 많이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엔 와 와 와 . 이 시 가운데서 가장 서정적이고 로망이 풍기는 스탄자다. 이 스탄자 때문에 이 작품 전체에 서정적인 색깔이 유독 더 짙어 뵌다. 나는 항상 시에다가 이러한 바운딩(bounding) 곧 ‘넘실거림’을 끼워 두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로 하고 있다. 나의 밑창에 로만티스트(romanticist)가 살고 있다는 증거다. 맨 끝 스탄자에서는 연약한, 서정적인 와 육중하고 메커닉한 가 가지는 원거리로서 효과를 내보려고 했다. 로서 맺으면서 서정적인 여운을 남겨 놓았다. 혜안을 가진 독자라면 여기에서도 포르마티슴이 시도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리인의 구성을 층계처럼, 원근법에 의하여 층을 지어 놓았다. 이와 같이 현대시는 여러모로 퀴즈다운 데가 많다. (단기 4291년 10월호 신문예新文藝)     참고: 여태까지의 시란 ‘진보(進步)’만 해왔으나 20세기의 시는 ‘조화(造化)’를 했다. ‘진보’는 ‘수정(修正)’이고 ‘조화’는 ‘혁명’이다. 공산주의의 시는 기껏해야 ‘퇴행적 수정’밖엔 아무것도 아니다. 진보만 알고 있던 시인이나 속중(俗衆)들은 이 조화를 보곤 꽤들 당황했다. 특히 한국의 풍토에선 지금도 한창 당황하고 있는 중이다. 시가 조화해 나간다는 것을 이상하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뇌가 발달해 나간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벽창호씨(壁窓戶氏)가 아니면 혼돈씨(混沌氏)다. 인간 자체가 조화의 첨단에 놓여 있지 않은가!    
73    김춘수 시론 댓글:  조회:4298  추천:0  2015-02-19
이 글은 1981년 12월호 월간 에  발표된 글로서 현대시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되는 매우 중요한 논문이다. 그래서 발표당시의 원문 그대로 싣는다.                           現代詩의 探究/事物詩와 觀念詩의 問題                    存在感覺과 意味意志                                                                  金 春 洙      1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하는 아주 素朴한 태도가 한쪽에 있고, 세계를 觀念(意味附與)으로 묶어서 보려는 태도가 다른 한쪽에 있다. 앞의 것은 感覺的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註)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原始的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러니깐 觀念(意味)이전의 관념이 장차 거기서 태어날, 관념의 제로地帶이기도 하다. 이 지대에서 야기되는 사건들은 질서가 없는 듯하지만, 그것은 관념 쪽에서 바라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그렇지가 않다. 明暗도 있고 濃淡도 있다. 말하자면 석연하지는 않지만 未分化된 상태 그대로는 아니다. 뭔가 그 나름의 코스모스를 지니고 있다.     산은 九江山 보랏빛 石山   山桃花 두어 송이 손이 비는데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朴木月과 趙鄕은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構文까지 賓辭(述語)를 제거하고 있다. 시나리오의 地文을 보듯이 사물과 정경의 提示에 그치고 있다. 설명이 없다는 것은 判斷을 留保하고 있거나, 判斷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판단은 가치판단이다. 가치란 세계에 대한 의미부여라고 할 수 있으니깐 결국은 그 자체가 觀念이다. 거의 완전할 정도로 관념이 排除되고 있는 朴木月과 趙鄕의 경우에 그 構文까지가 軌를 같이하고 있지만, 明暗과 濃淡은 다르다. 그리고 登場한 사물이나 정경들의 生態도 서로 다르다. 이런 것들이 빚는 感情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志向하는 바가 아주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사물의 세계를 아무런 설명이나 哲學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事物詩라고 할 수 있다. 修辭上으로는 그들은 敍述的이다. 이미지의 機能面으로도 그들의 이미지는 서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傾向은 이미지즘에 연결된다. T. E 흄이 말한 대로 언어의 造型的 사용이라든가 限定된 사물의 觀照라든가, 뭣보다 이미지 그자체가 시라고 하는 관점은 그대로 朴木月과 趙鄕의 경우를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경향은 또한 韓國의 現代詩史에서는 하나의 系譜를 이루고 있다고 해야 하리라.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李章熙는 20年代에 이미지즘을 모르고도 이 같은 선명한 이미지만의 아주 서술적이고도 조형적인 言語使用을 하고 있다. 시를 메시지나 감정의 露出이나 惑은 怪奇趣味로 생각하고 있었는 듯한 20年代에서 이런 일은 하나의 個性의 結晶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2  觀念詩는 意志의 詩라고도 한다. 세계를 관념(의미)으로 묶어서 그 관념을 독자에게 强要하려고 한다. 독자는 구속을 받게 된다. 관념이 타당성을 띠고 있으면 있을수록 독자는 불안해진다. 시인이 제시해 보여준 관념에 따르지 않으면 뭔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은 도덕적인 가책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 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命令形으로 끝나곤 하는 이 몇 개의 센텐스는 어떤 의지의 단호함을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그 의지가 옳은 것이라는 自信感에 넘쳐있다. 독자는 이러한 시인의 표정에 압도될 따름이다. 시는 독자들을 解放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자기의지 속으로 監禁하는 것이 된다. 修辭는 敍述的이 아니고 比喩的이다. 이미지도 비유적이다. 사물을 사물로서 보지 않고, 어떤 관념의 等價物로 보고 있다. 사물이 目的이 아니라 手段이 된다. 사물은 이리하여 觀念詩에서 자기의 純粹를 잃게 된다.  修辭와 이미지가 비유적이라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寓話的이라는 것이 된다. 우화는 敎訓이 되고 교훈은 도덕을 전제로 한다. 이리하여 관념시는 자칫하면 道德의 詩가 되고, 그 내용은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朴斗鎭에게 있어 는 사물로서의 해가 아니라, 과 같은 것의 비유가 된다. 引用한 구절의 설명은 간단하다. 暗黑은 가고 光明한 세상이 빨리 오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상식이지만, 상식이 시의 허울을 쓰고 나타날 때, 그 허울이 아주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독자는 어떤 착각에 빠지게 된다. 즉 比喩가 곧 시고, 시는 도덕의 강요가 아닐까? 하는 그런 착각 말이다. 도덕 이전의 세계-새로운 도덕이 태어날 수도 있는 그런 지대가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세계는 도덕 일색으로 뒤덮이게 되고 독자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도덕이 어떤 관념(의미)이라는 것을 잠시 잊게 되고 그것이 現實인 것처럼 느끼게도 된다.  觀念詩는 시를 言志라고 했듯이 古來로 가장 흔한 類型이다. 韓國의 現代詩史에도 자주 등장한다.     山아 말 듣거라 웃음이 어인일고 네니 그 님 손에 만지우지 않았던가 그 님을 생각하거들란 울짓기야 왜 못하랴 네 무슨 뜻 있으료마는 하 아숩어                                              10年代에는 이런 식의 言語使用이 범람하고 있다. 그야말로 詩言志다. 여기서의 은 祖國의 비유라고 해야 할 듯하다. 存在(事物)에 대한 신선한 驚異感은커녕 몹시도 따분한 상식이 陳述되고 있을 뿐이다. 이 비유라고 했지만, 그것은 修辭上의 性格이고, 心理的으로는 이 引用部分 전부는 한갓된 진술에 그치고 있다. 朴斗鎭의 경우에 비하면 비유의 밀도가 훨씬 약하기 때문에 시를 느끼는 感度도 약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思想으로 詩를 決定하는 경우(그런 경우가 非一非再하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요구하게 된다. 극단의 경우에는 메시지만 露骨化되는 수도 있지만, 그 메시지가 상식에 의지하고 있는 이상은 시로서는 역시 二重으로 따분한 것이 된다.  觀念詩는 그것대로의 결함을 지니고 있고, 事物詩 또한 그것대로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감각적 향락주의에 떨어지는 경우가 그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敍述的 이미지와 比喩的 이미지의 差異를 식별하는 일 그것이다. 超現實主義系統의 시에서 자주 대하게 되는 이미지와 朴斗鎭의 경우와는 다르다.     낡은 아코뎡은 對話를 관뒀습니다 -- 여보세요-- --왜 그러십니까?                            朴斗鎭의 는 心理的인 것의 수단이 아니고 觀念的인 것의 수단이다. 그것은 어떤 의지(세계를 자기 관념으로 묶으려는)의 작동이다. 그러나 趙鄕의 경우는 다르다. 는 비유가 아니라, 심리의 서술이다. 그것은 회화로 치면 內觸覺的 haptic이라는 것에 해당한다. 狩獵時代의 壁畵를 보면 사람의 팔이나 다리가 非現實的으로 길게 뻗어져 있다. 그것은 앞으로 달릴 때의 心理的인 構圖인 것이다. 趙鄕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非現實的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內的 現實-心理現實일 수가 있다.   *(註)시르레르의 參照  
72    시와 아이러니 댓글:  조회:4221  추천:0  2015-02-19
시와 아이러니                                                                              김춘수< 시인 한국>   이 논문은 1990년에 개최된 제12차 서울 시인대회 때에 발표한 것이다.      영어의 아이러니는 위장을 뜻하는 희랍어 eironci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위장, 즉 거짓 꾸민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의도를 감춘다는 것이 된다. 그것(의도)을 직설적으로 노출시키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 즉 의도의 내용이 뉘앙스가 죽어 그 밀도와 강도가 훨씬 덜해진다. 단순히 사전적 뜻만을 알리고자 할 때, 즉 보통의 산문의 경우는 굳이 뒤틀린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시와 같은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코자 할 때는 산문이라는 다른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시적 의도가 죽는 수도 있다. 뉘앙스가 사전적 뜻보다 더 시적 의도를 살리는 경우가 있다. 아이러니는 그러니까 일차적으로는 시의 표현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소박한 시에도 그것이 시인 이상 표현상의 아이러니는 있게 마련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위의 소월의 시 「진달래 꽃」의 끝 행은 아이러니가 되고 있다. 외연과 내포(감추어진 의도)의 긴장상태가 시적밀도를 빚어내고 있다. 이 대목이 이 시의 전체 내용에도 뉘앙스를 주고 있다.   아이러니는 한편 발상과 관계가 있다. 가령 클리언스 브룩스가 워즈워드의 14행시 「웨스트민스터橋上에서」를 분석한 것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도다 이처럼 장대함, 몸에 다가서는 광경을 지나치며 돌아보지 않는 자는 둔하도다. 거리는 지금 의상처럼, 새벽의 아름다움을 걸치고 있도다. 묵묵히 숨김없이, 배도 탑도, 원탑도, 극장도, 사원도, 푸른 들에 큰 하늘에 스며 누웠도다. 연기 없는 대기 속에 모두 찬연히 빛나도다. 새벽녘의 밝음에 해는 이처럼 아름답고 골짜기를, 바위를, 언덕을 빛으로 덮은 일은 없었도다. 이처럼 깊은 고요함을 본 일도 느낀 일도 없었도다. 강은 스스로의 마음 그대로 절로 흐른다. 아 신이여, 집들마저 잠자는 듯하고, 크나큰 심장은 지금 소리없이 누워 있다.   템즈 강이 새벽녘에 잠이 아직 깨지 않고 있을 때에 오히려 아름답게 살아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칼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낮이 되어 활동이 시작되면 템즈강은 오히려 오염된 더러운 흐름으로 변한다. 따라서 낮의 살아 움직이는 시간이 오히려 죽어 있는 시간이 된다. 워즈워드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 잠에서 아직 깨지 않은 시간의 템즈 강이 살아 있다고 본다는 것이 된다. 이런 해석이 타탕하다면 호반시인인 워즈워드의 자연예찬의 진가가 이 시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해야 하리라. 동시에 발상의 시적 호소력은 배가한다.   아이러니는 시의 표현이나 시의 발상과의 관계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케 한다. 먼저 시의 효용과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장자의 「人間世篇」에 나오는 가죽나무의 비유는 아주 적절한 예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장인 石이 제나라 곡원을 지나다가 거대한 가죽나무를 보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무시해 버린다. 그날 밤 꿈에 가죽나무의 신령이 나타나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을 깨우쳐 준다. 石은 그가 너무도 장인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답답하게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죽나무가 天壽를 다할 수 있어 그처럼 자란 것은 목재로서의 이용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과연 쓸모없는 잉여물일까? 아니다. 다른 차원에서는 그는 가장 쓸모 있는 것이 된다. 백 아름드리나 되는 그의 몸피에 달린 잎들이 한량없이 넓은 그늘을 만들어 수많은 행인들의 더위를 씻어주고 휴식의 장소가 되어준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속이 다 후련해진다. 이런 일들은 가죽나무의 크나큰 덕이라고 해야 하리라. 시가 실용에 대하여 이와 같은 이치에 있다. 「碧巖錄」의 德雲의 偈는 장자의 가죽나무 비유와 흡사한 효용의 아이러니를 말해준다. 덕운은 우물을 메우기 위해여 눈을 퍼붓는다. 눈은 녹아 물이 되고 물은 차면 밖으로 흘러날 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 짓을 되풀이 한다. 그러는 그 자체가 즐거워서 그러고 있는 것 같다. 시지프스는 돌을 짊어지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간다. 돌은 내려놓기만 하면 굴러 산발치로 떨어져간다. 그것을 따라가서 또 짊어지고 올라간다. 산꼭대기에 갖다 놓기기만 하면 다시 또 산발치로 굴러 떨어진다. 또 따라간다. 그 徒勞에 지나지 않는 돌 나르기는 그에게는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통을 무릅쓰고 그 일에 도전해 간다. 비극적이다. 이에 비하면 덕운의 경우는 일종의 놀이가 되고 있다. 이 놀이는 하잘 것 없는 것이 아니라 무상을 유상(즐거움)으로 만드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덕운의 행위는 실용에 대한 아이러니가 된다. 실용과 똑 같은 아이러니칼 한 효용을 가진다는 말이다. 호이징어의 놀이인간(Homo Ludens)이 바로 그것이다. 문화는 놀이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그가 말할 때 그는 놀이의 아이러니칼 한 효용성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놀이의 즐거움과 함께 공리를 떠난 행위라고 하는 인간의 품위를 일깨워준다. 그것이 놀이의 효용성의 핵이다. 시의 순수성도 이와 같다.   실험시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하여 아이러니 관계에 있다고 할 때, 실험시의 부르주아 사회에 있어서의 효용성을 또한 말한 것이 된다. R.M.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말했듯이 부르주아 사회란 속물사회이고 규격화된 상식이 판을 치는 사회다. 예술보다도, 즉 개성보다도 상품, 즉 획일화가 생활의 구석구석을 뒤덮어버린 사회다. 릴케에 따르면, 옛날의 가재도구도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예술품이 된다. 거기에는 그것을 만든 이들의 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부르주아 사회는 속물근성과 상식적인 획일성에 잠들어 있는 사회다. 아니, 부르주아 사회는 스스로를 오히려 깨어 있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실험시는 그 상태가 잠들어버린 상태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실험시의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효용성이다. 부르주아 사회는 그러나 실험시의 非 내지는 反 상식적 획일성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불온시 한다. 그러나 불온하고 두려운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케 하여 불안을 유도하는 것이(불안에서의 감각을 일깨워 주는) 또한 실험시의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하에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프롤레타리아도 시나 예술에 있어서는 부르주아 이상으로 보수적이다. 전위예술을 적대시하고 부르주아 예술이라고 매도한 것은 그들이다.   다음은 아이러니와 세계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여기서 먼저 處容說話를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처용은 동경 밝은 달에 취하여 놀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역신이 아내를 범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도 歌舞而退한다. 이 장면은 해학이다. 역신이 운명이라고 한다면, 운명이 안겨주는 고통을 해학적으로 처리한다. 여기에는 세계관적 아이러니가 깃들어 있다. 운명은 불가항력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반항하여 싸우는 것을 인간의 용기라고 하는 시지프스적 유럽인의 세계관이 있다. 비극을 비극으로,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그러나 처용의 경우는 다르다. 비극적인 장면을 희극적으로 처리한다. 비극을 심리적으로 극복 내지는 無化시키는 視點이다. 다르게 말하면, 물리적으로는 운명에 굴복한다는 뜻이다. 운명에 부딪쳐서 인간의 자기능력에 절망한다. 그 절망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는 낙천적인 태도가 나온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몹시도 쓸쓸하고 서글프다. 해학에는 그런 뉘앙스와 분위기가 뒤따른다.   塞翁之馬의 고사도 그렇다. 고통이 기쁨으로 변하고, 고통으로 변한다는 달관은 숙명론에 연결되지만, 한편 매우 아이러니칼 한 뉘앙스를 풍긴다. 이런 類의 세계관에 관계되는 아이러니는 18세기말 독일 낭만주의 미학에 잘 드러나고 있다. 장 폴의 후모오르(hu-mor)의 미학이나 프리드릿히 슈레게이의 낭만적 이로니(ironie)라는 것들은 기독교 세계관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비극적 상황을 희극적으로 잘 처리한다는 점에서 처용설화와 비슷하지만, 독일 낭만주의의 경우는 운명이라는 관념보다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의 차원에서 인간을 볼 때, 인간의 차원이란 희극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온갖 짓거리가 하나로부터 열까지 모두 우스꽝스럽다는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의 후모오르는 이리하여 인간을 아주 卑小하게 만들고, 인간의 비소함을 통하여 반대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짚어 알게 한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이리하여 하나의 형이상학이 된다. 독일 낭만주의 때의 시인들이 대개가 철학자였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존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의 성격을 띤다.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면서 천사가 되고 악마가 될 가능성은 늘 가지고 있다. 이런 모순갈등과 아이러니컬한 위상을 본능적으로 예민하게 느끼는 능력의 소유자가 결국은 시인이 아닐까? 형이상학으로까지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비상한 아이러니는 마침내 다시 또 시의 표현이나 발상의 문제 쪽으로 回歸한다. 시는 형상을 갖춘 구체적인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71    디지털시대 시 전망 댓글:  조회:4117  추천:0  2015-02-19
  이 글은 2006년 11월 1일 제 20회 강연 원고로 21세기 아방가드로 시론인 '디지털 시에 대한 전망'을 오남구 시인이 요약한 글이다.  이 글에는 오남구, 문덕수, 심상운의 디지털 시론이 들어 있다. 오남구는 오진현의 필명이다.   [11월 1일 시의 날 강연 원고/수정 보완]                                         디지털 시대의 시(詩)  전망(展望)                                                              오남구 (吳南球)   지금은 디지털 영상 시대이다. 드브레(Regis Debray, 프, 1941~)는 현대를 메디올로지 시대라고 한다. 메디올로지는 단순히 매스컴론이 아니라 IT의 기술, 제도, 조직 등을 다 포함한다. 순간적으로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는가라는 문제보다 장기적으로 어떠한 정보가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다. 그는 네 개의 권역으로 구별하여 원시부족 사회의 ‘기억권’, 제국주의 시대의 ‘언어권’, 근대 이성의 ‘문자권’,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의 ‘영상권’으로 나눈다. 현대는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이다.  따라서 시도 영상의 보여주는 시가 되고 있다. 그런데 보는 시란, 시는 언어로 표현되므로 묘사하여 사물의 표상이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즉 ‘보여주기’가 되겠다. 독자는 보여주는 대로의 상을 마임을 보듯, 마음 속 화면에 떠 올리고 그 의미를 상상하여 읽고 감상할 수 있다. 시인은 연출자와 같은 입장에서 사물의 표상과 이미지를 보여주는 형식에 그치고 시를 완성하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가 된다.   이 ‘보여주기’는 주체가 바뀌는 시 쓰기이다. 즉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나 강요가 아니라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쓰기의 방법이다. 이 형식은 시인이 직접 말하지 않고 다만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을 묘사하여 보여줌’(디지털적)으로 시인의 어떤 생각이나 판단 등이 빠져서 관념 빼기가 이루어진다. 관념 빼기는 곧 탈-관념으로, 고정되어 있는 관념 언어의 벽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독자가 무한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특성은 미래에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시 쓰기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나타날 것이다.   최근 주목되는 탈-관념의 내용을 ① 언어에서 관념 빼기 ② 사물성의 쓰기 ③ 사이버성의 쓰기로 간단히 요약해서 살핀다. 이로써 디지털 시대의 시 특성의 일단을 소개하며 전망한다. 실험은 미완성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그 성과는 시의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언어에서 관념 빼기에는 ①단어에서 관념 빼기 ②어구(단어+단어)에서 관념 빼기 ③문장에서 관념 빼기 ④ 시 전체에서 그 무엇이라고 하는 주제 등의 관념 빼기가 있다. 이러한 네 가지의 관념 빼기를 살펴본다.   붉은 공이 튄다. 목련 담장 넘어서   깍 깍 깍 세 번 짓는다   붉은 공이 튄다. 소리 계곡 넘어서   울긋불긋 몇 점 핀다   붉은 공이 튄다. 진달래 암벽 넘어서   日 - 出 - 山 - 行   붉은 공이 튄다. ―吳南球 「日出山行」전문   이 시에서 첫째, 단어 ‘공’을 보자. 공에 무슨 관념이 붙어 있는가, 이를테면 인생의 비애라든가 희망이라든가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상징성이나 배경의 의미도 없이 탁구공이라든가 축구공이라든가 하는 그저 사물인 공이라는 단어만 있다. 둘째, 어구(단어 + 단어) ‘붉은 공’에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 관념이 없다. ‘붉은+공’이라고 해서 공에다가 이데올로기 이미지를 더하지 않았을 뿐더러 잘 익은 사과라든가 하는 아무런 뜻도 없다. 셋째, ‘붉은 공이 튄다.’라는 이 문장에도 어떤 의미를 뜻하지 않고 있다. ‘붉은 공’이 공산주의의 공이 아닐 뿐더러 ‘튄다’에는 그저 튀는 그 사물성만 있다. 넷째, 또한 이 한 편의 시 전체에는 ‘붉은 공’이라는 사물이 심리적인 공간에서 감각적으로 튀고 있을 뿐, 무슨 주제니 주의주장이 있지 않다. 이 시는 공이 튀고 있는 동영상의 환상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이러한 심리적 이미지를 묘사해내는 것을 필자는 ‘염사’라고 한다).   위의 텍스트는 ‘탈-관념의 시쓰기’(吳南球.『이상의 디지털리즘』범우사.p37~p51)로 ‘관념 빼기’를 하고 있다. 이 쓰기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사진 찍듯(접사와 염사) 묘사하는 방법으로 독자에게 영상 이미지를 보여준다. ‘접사’는 사진기술을 시 쓰기에 도입한 말로서 사물을 보는 하나의 관법이다. 원근법이나 방위감각에 끼어든 오염된 관념을 제거하여 외부세계의 사물을 직관하고 생생하게 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지금 앞에 유리컵에 바짝 눈을 대어보면 일상적인 컵의 모습은 갑자기 사라지고 유리만 보인다. 새로운 질감과 함께 긴장감을 느낀다. 염사 또한 내면의 의식세계를 염사(念寫)한다. 이 쓰기는 이와 같이 사물을 인지하고 언어로 묘사하여 서술하고 독자가 이미지나 표상을 통해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관념 빼기의 시와 비교되는 관념의 시를 보자.   일본의「진보적」지식인들은 소련한테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흰 원고지 뒤에 낙서를 하면서 그것이 그럴듯하게 생각돼서 소련을 내심으로도 입 밖으로도 두둔했었다.   ―김수영「轉向記」에서   이 시의 일본, 소련, 진보적 지식인이란 단어와 어구에는 시인의 어떤 관념이 있다. ‘일본’은 자유 민주주의, ‘소련’은 공산주의,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은  ‘공산주의를 두둔하는’ 등의 관념이 있다. 여기서 ‘나’는 ‘내심으로도 입 밖으로도 두둔 하는 지식인’이며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는 그러했는데, 그가 ‘전향’(轉向)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독자는 그의 회고담을 듣는다.   2.   사물성의 쓰기는 언어 이전의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이다. 사물이란 무엇인가, 추상의 슬픔, 미움, 사탄, 하나님, 사회주의는 관념이다. 관념이 아닌 사물이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만나는 일과 물건이다. 존 로크(John Locke, 1632 - 1704)는 고성(固性)이 사물의 1차적 성질이라 한다. 다른 요인의 침입을 막고 사물 자체의 성질을 고수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사물의 넓이, 무게, 부드러움, 단단함은 고성이다. 책상을 탕 치게 되면 손이 아픈데 이것은 사물이 갖는 저항감이다. 이 순간 ‘사물의 언어와의 만남’은 관념이 들어갈 틈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1차적 사물성의 즉 고성은 색, 소리, 향, 감촉 등 거의 무한하다. 사물성의 시 쓰기는 이러한 사물이 갖는 1차적 성질의 감각적 요소가 관념의 제로 포인트인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이다. 이를 기호화(추상화)하는 것이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사물들, 즉 유리 컵, 재떨이, 열린 문, 신사, 금, 금 밖의 청자담배, 라이터, 숨 ... 이렇게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만나는 것들이 탁자 위에 모여서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다. 모이는 것을 ‘집합’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수학적 개념을 도입해서 말하게 되면, 사물이 집합하여 ‘순열’ 또는 ‘배열’되어 있는 모습이다. 문덕수는 이것을 ‘모여서 결합’되어 있다 하여 ‘집합적 결합’이라 한다. ‘집합적 결합론’을 이렇게 보면 이해가 쉽다. 여기서 좀 더 이학적인 논리를 전개시키게 되면, 모여 있는 사물들은 하나하나가 집합을 이루는 ‘원소(原素)’이다. 이 원소는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집합하여 조합하고 순열되어 있을 뿐이다. 다시 사물성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원소의 개념으로 파악된 이 사물의 단어들이 상징 등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면, 아니 그것들이 논리적인 인과로 놓이게 되면, 즉 시인의 생각을 설명하게 되면 자연스럽지 않다. 인위적이다. 인위적이라면 곧 관념적이 된다. 그러면 존재하고 있는 진실이 왜곡되고 만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시인의 어떤 의미인 사상이나 주의주장을 강요받음으로써 독자의 시적 공간이 극히 좁혀진다.   위의 시를 살펴보면, 앞의 ‘관념 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어, 어구, 문장에 어떤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관념 이전의 순수한 사물들이 그저 탁자 위에 놓여 있고, 여기서 시인이 직관(直觀)하고 직각(直覺)하고 있다. 세 유리컵이 놓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된다. 물론 삼각형이 계급적 의미라든가 사회적 상징적인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저 삼각형이라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 삼각형 금(선) 안에는 재떨이가 금 밖에는 한 사나이, 청자담배, 라이터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사물들이 ‘오롯이 앉아 있었다.’ ‘노려보고 있었다.’ ‘밀려나’ ‘틈새’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한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심경의 어떤 배경 의미를 느끼게 하는 것들이 사물에 얹히어 있다. 이런 시 쓰기가 바로 물리주의(?)인 듯싶다.   3.   사이버성의 쓰기는 가성현실의 이미지의 분리와 결합이다. 예를 들면, 물고기에다가 사람의 얼굴을 붙이면 인어가 된다. 인어를 가상현실의 시라고 보면 된다. 현대는 이미지를 분리하고 결합하는 이러한 기능이 컴퓨터 그래픽에서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스캔(데이터화)하여 그림이 모니터에 뜨면 이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창의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그림을 찌그러뜨리거나 늘어 빼거나 할 수 있고 어느 부분을 떼어낼 수 있고 두 사람의 얼굴을 바꾸어 놓을 수 있고 그래서 분리와 합성이 마음대로 되므로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가게 할 수도 있다.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배경(육지)을 바다로 바꾸면 된다. 이런 가상현실은 실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가상현실과 현실 사이에는 중요한 차별성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의 물질(아날로그)인 시계를 보자.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을 순간적으로 읽을 수 없고 정확하지도 않다(상대적으로 디지털과 쉽게 비교되는 특성). 더구나 이것이 거울(물질) 속에 비치게 될 때는 시계바늘이 거꾸로 보이고 잘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거울 속처럼 보이는 컴퓨터 화면의 시계는 정확하다. 왜곡되고 굴절되어 보이는 것은 물질이 서로 간섭하는 성질 때문인데, 소리의 잡음(노이즈 현상)은 좋은 예이다. 가상현실에서는 이런 노이즈(관념과 같은 성질)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데이터화, 즉 샘플링(sampling. 현실에서 견본 추출하여 데이터화, 즉 디지털화 하는 것)하는 과정에서 노이즈가 제거된다.   시의 현실은 가상현실이다. 이것은 현실을 샘플링 한 세계다. 바꿔 말하면 시는 시인에 의해서 기호화된 것으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런데  디지털 시는 기호화하는 과정에서 염사와 접사 등의 방법으로 관념빼기를 한다. 그래서 기호에는 순수 이미지만 남게 된다. 그 순수 이미지에는 심리세계나 현실의 표상이 담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 적인 개념으로 바뀐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임으로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디지털 시 즉 사이버성의 시 쓰기이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에서   이 시는 지하철역 사고현장을 설명 없이 최대한 간략하게 보여준다(이것은 가상현실이다). 독자는 시인이 보여주는 대로 마음속에 한 장면씩 떠올리고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 이때 장면과 장면이 서로 간섭하고 잔상을 일으키어 이미지형성의 효과를 빚는다. 이 공간엔 내면의 의식이 흐르고 영상이 움직인다.   가상현실을 만들고 있는 기법을 보자. 그는 컴퓨터 그래픽처럼 기차의 색깔을 파란색으로 바꾼다. 그때 먼지가 반짝인다. 이 두개의 장면은 기본적으로 사진 찍듯(염사접사) 샘플링(기표화)한 것으로, 어떤 의미도 없이 사물성의 산뜻한 이미지만 있다. 그래서 독자를 가상현실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는데, 일상적으로 칙칙하고 그을리고 무거운 기차의 관념을 파란색으로 바꾸어서 가볍고 유쾌한 환상을 펼쳐 놓는다. 그런데 특이하게 시 속의 괄호로 묶은 곳이 시나리오 지문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디지털(탈-관념)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실험하는 아날로그의 퓨전이라 할 수 있고 소위 디지로그(디지털과 아날로그)일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디지털 시의 실험이 한발 더 앞서가고 있는 셈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최근 주목되는 탈-관념의 시 쓰기를 살폈다. 현실은 시간과 공간의 규제를 받는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노예가 되어 유한한 수명(목숨)을 가지고 있다. 유승우(시인, 인천대 명예교수)는 「시와 현실-시의 소재로서의 현실」이란 글에 “시의 소재로서의 현실은 시간과 공간의 규제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규제의 극복이 시적 형상화 작업이며 시의 영원성이라는 예술적 가치를 획득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디지털의 가상현실은 시간을 살해하고 공간을 살해하고 전 세계가 현실의 공간을 극복하고 공간적 마주보기를 하고 있다. 또한 현실의 시간과 원근을 극복하고 동시적 마주보기를 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시 세계는 현실이 가지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파괴하고 탈-관념의 시간과 공간이 확장된 새로운 질서와 형태를 만든다.  
70    하이퍼와 잡종(?) 댓글:  조회:3961  추천:0  2015-02-19
하이브리드                                                                         오남구   1. 잡종강세    하이퍼텍스트는 구조적으로  여러 기능을 갖는  하이브리드이다. 세간에서 “너나 잘하세요.” 이렇게 기존의 화법을 깨뜨리고 ‘하대하는 말과 높임말’을 뒤섞어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한 사회현상으로 기존의 순수한 언어가 뒤섞인 일종의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다.    하이브리드는 생물학적인 용어로서, 식물이나 동물을 육종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특정의 형질들을 가진 순종(純種) 2종류를 교잡하여 잡종강세를 개발한다. 이때에 부모에 비해 자손의 크기나 성장속도 등이 강하게 되는데 잡종 생장력(hybrid vigour)이라고도 한다. ‘너나 잘 하세요’는 이런 ‘잡종 생장력’의 현상이 일어나듯이 원래의 말보다 메시지의 기능이 크게 증폭되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무안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기존의 텍스트와는 다른 새로운 언어의 기능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 문장 구조를 살펴보면 하이퍼텍스트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①과 ②의 2종류의 언어가 있다. ①은 하대하는 말이고 ②는 높임말이다.   ① 너나(A) 잘 해(B) ② 당신이나(C)  잘 하세요(D)    말들을 구성하고 있는 마디를 ① A, B  ② C. D로 나누어 마디를 서로 뒤섞어 놓는다. 그러면 A, B와 C, D의 마디가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③ 너나(A) 잘 하세요(D) ④ 당신이나(C) 잘 해(B)    여기서 ①과 ②의 문장을 순수한 것이라 할 수 있고, ③과 ④의 문장을 순수함이 깨뜨려져 있는, ‘높임말’과 ‘하대하는 말’이 뒤섞여 있어 잡종 즉 하이브리드의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은 말의 마디가 서로 비꼬여서 ‘비틀기’가 되어 있고 파편화된 말의 마디가 (A)에서 (D)로 뛰어(hyper) 하이퍼텍스트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을 달리 보면 ‘해체된 말마디가 다시 통합된 문장’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교잡에 의한 통합으로서 새로운 텍스트이다.       2. 하이퍼시의 하이브리드     새로운 텍스트는 현실이다. 문덕수시인의 ‘종이하이퍼텍스트와 전자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4월호, 2008년)’는 하이퍼시('하이퍼텍스트+시'-하이퍼시로 명명-시향29호)의 논리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요즘 담론이 되고 있는 이상옥 시인의 ‘디카시’ 는 디카로 순간 포착한 사진과 기호(언어)가 섞인 시를 발표한다. 디카시는 하이브리드적인 종이하이퍼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텍스트와 사진이 하이퍼성(하이퍼텍스트의 특성-탈 중심, 탈 경계, 탈 관념 등)을 갖지 못하고 기존의 텍스트와 같다면 결과적으로 기존의 포토포엠과 구별되지 않는다. 하이브리드는 이미 기존의 시속에 들어와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컴퓨터의 발달로 하이퍼미디어 시대가 열리고 소리, 영상, 기호의 소통이 가능하게 되면서 이러한 인터넷의 텍스트를 철학자 넬슨이 ‘하이퍼텍스트’라고 명명하였다. 그래서 하이퍼텍스트라고 하게 되면 통상적으로 인터넷 상의 텍스트를 말하게 되는데, 문덕수 시인은 이것을 전자하이퍼텍스트라고 말하고 제2의 하이퍼텍스트라 한다. 제1의 하이퍼텍스트는 종이하이퍼텍스트라고 하는데 종이책을 매체로 하는 기호(언어)는 실재와는 관계가 없는 가상현실(버추얼)로서 하이퍼텍스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이퍼시론의 논리적 기반이 되고 있다. 여기서 기호만의 텍스트를 순수로 보면 영상(사진, 그림이미지) 등이 섞인 텍스트는 하이브리드(잡종) 적이다. 미래의 신개념의 종이(필름)에 소리가 함께 섞어 나오는 텍스트나, 제2의 하이퍼텍스트는 당연히 하이브리드로 분류될 것이다. 그런데  앞의 잠종강세의 예문에서 보듯이  기호만의 텍스트에서도  ‘높임말’과 ‘하대하는 말’이 뒤섞여서 하이브리드 적인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하이브리드 현상은 원래 생명의 존재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산이나 들에 집합되어 있는 나무와 풀이 한군데 뒤섞이어 존재한다. 여러 기능의 중심이 없는 탈 중심 그리고 탈 경계가 자연스럽다. 일찍이 자크 데리다가 자연의 사물을 텍스트로 보았는데 나에게는 자연의 이미지가 하이퍼텍스트로 다가온다.      (1) 탈 경계, 탈 중심의 이미지/ 신발   다음의 「신발」은 삶의 현장에서 찾은 하이브리드의 탈 경계, 탈 중심의 이미지가 있다.     1    시장 정육점 갈고리에 생고기와 나란히 걸린 가죽, 가족?   *         2    냉장고 쇼 케이스 안의 내 신발은 260미리입니다 아내의 신발은 235미리입니다 아들은 나와 똑같은 260미리입니다       *sbs 동영상 갭쳐  — 「신발」 전문    위의 그림이미지는 실재 TV에서 방영한 동영상에서 캡쳐한 것이다. 정육점에 신발과 생고기가 갈고리에 걸려 있다. 정육점도 아니고 신발가게도 아닌 하이브리드의 ‘신발정육점’이다. 이처럼 생활공간에서 경계가 무너지는 하이브리드의 현상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컴퓨터, 전자제품, 자동차 등은 말할 것도 없으며 생활 언어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 인용한 「신발」의 그림은 설명이 필요 없이 독자가 바로 알 수 있는 하이브리드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기호(언어)와 섞여 있다. '하이브리드의 하이퍼시' 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생고기와 신발을 본 작가의 직관이 ‘가죽’이라는 본질의 링크를 발견하게 되고,  ‘가죽’이 ‘가족’으로 기표가 흘러가고, 정서가 경로를 따라 흘러가 시의 맥락을 이룬다. 쇼 케이스 안에 든 신발 가족은 곧 시인의 가족이 되며 알 수없는 아련한 삶의 모습이 배어난다.    (2)마당놀이의 해학과 조소 / 피켓   문화의 공간으로서 마당은 무대의 원형일 것이다. 판소리의 마당은 광대와 청중이 창을 하고 추임을 하면서 한자리에 어울려 공연이 완성된다. 이렇게 관객이 공연에 동참함으로써 ‘관객과 연기자’라는 경계가 없다. 이러한 소리 ‘판’은 남녀노소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원시 ‘하이브리드 판’이라고 보아진다. 판을 만들어 가는 것은 ‘놀이’다. 놀이의 바탕에는 유희와 해학과 조소 등이 있고, 유희성이 없는 놀이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근래는 시위도 하이브리드 한 놀이 문화로 바뀌어 축제를 벌이고 있다. 촛불 문화축제는 그 예로서 손자와 아들과 며느리와 할머니가 한자리에 모여 촛불로 하트 모양을 만들거나, 광장에 수십 킬로나 되는 불길을 만들어 놓고 즐긴다. 이때 피켓은 소통의 도구로서 공간에 있는 하나의 미디어이다. 다음의 텍스트는 이런 피켓을 들고 있는 광장의 이미지(사진)와 기호가 나열된다. 순수 기호의 시에  대한 상대적인 것으로서 하이브리드이다.         2MB = 2 Mega Byte (약 3.5원) 2MB = 2 Micro Byte (가격산출 불가능) 2MB = 2 Mad Bull(미친 소) MB = My Bush(나의 부시) 2MB = 2 M(멍청하고) B(부지런한) 놈 2MB = 2(이) M(뭐) B(병) -> 이거 뭐 병신도 아니고... MB = Moues Baby  — 「피켓」 전문      놀이마당에 들고 나온 피켓. 이니셜 2mb를 하이퍼텍스트로 읽어본다.  2와 M과 B는 각기 마디가 되고, 마디와 마디 사이 숨겨진 링크을 걸면 많은 언어를 상상하여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위에 나타난 7가지 외에도  무수히 많은 의미의 경로가 나타나게 되는데, 독자는 읽고 싶은 대로 여러 방법으로 읽어가면서 유희하고 카타르시스 한다.      3,순수와 하이브리드     유전공학으로 만들어낸 하이브리드의 철쭉이 종로의 거리에 나와 있다. 명품이라고 내놓는 것을 보니 가지에 티 없이 깨끗한 바탕의 흰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고 같은 가지 속에서 진분홍의 꽃 몇 개가 피어 있다. 그런데 진분홍 또한 티 없이 맑은 바탕을 하고 있어서 순수/(순종,true)하기 이를 데 없다. 언뜻 보기에 한그루 철쭉 조화 같다. 여기에 다른 화려한 작품들을 비교하니 호화로우나 곧 싫증이 나고 산만하다. 결국 티 없이 순수한 격조 높은 두 가지의 특성이 명품의 하이브리드로서 탄생하고 있었고 절제된 심플한 구성이 예술성을 높이고 있다. ‘하이퍼시’에서 절제된 심플한 하이브리드의 구성이 요구되는 것이 이렇듯 자연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순수/(순종,true)는 하이브리드의 바탕이 된다. 격조가 높고 개성이 뚜렷해야 한다. 하이퍼텍스트가 여러 가지 특성을 싣는 수레라고 볼 때에 열린 개념의 또는 탈 관념의 대승적 기능을 하고 있다. 곧 하이브리드의 프레임은 하이퍼텍스트이다. 그래서 종이하이퍼텍스트의 언어(기호) 예술은 격조 높은 하이퍼시를 만드는 바탕이다. 다음의 「사과」는 언어의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이다.   배들녘은 풋벼의 바다, 아침 고요로운 지평선에 풍! 떠올랐다가 풍선처럼 서서히 내려오고 있는 붉은 사과, 동진강 하구에서 쌀을 실으러 거룻배가 들어왔었다는 ‘배들이’ 들판! 손에 든 들판은 피켓! 손해난 '배 들이'어서 빚으로 들들 볶일 판 피켓 들고 전봉준이 들이칠 판, 숨을 멈추고 있는 풋벼의 바다 황혼에 내가 주먹 속에 받아 쥔 해 사과를 굴린다, 굴러가며 가르마 같은 선을 긋는다 선을 따라 불이 화~ 화~ 일어난다    —「사과」전문   배들녘은 동진강 상류가 흐르는 들녘. 여기에 만석보가 있다. 조병갑이 보를 쌓고 물세를 받다가 농민들이 저항하여 동학란이 일어났다. 손에 든 들판, ‘피켓’은 시위 현장의 미디어이다. 이 하이퍼텍스트는 ‘시위 현장’과 ‘동학란’이란 배경의미가 시인의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언어와 언어의 마디를 링크시킨다. 그래서 기표가 자유자재로 ‘판’이 들의 ‘들판’으로, 손에 들고 있는 ‘들판’이 ‘피켓’으로, 그리고 붉은 사과(과일) → 해(日) → 사과(謝過)로 흘러가면서 상상의 무한한 이미지 공간이 확보된다. 그래서 붉은 사과가 굴러가면 선을 만들고 선에서 붉은 불이 일어난다. 감각적인 이미지 드림(imige-dream)이다.   하이브리드의 잡종강세 같은 새로운 기능을 확인한다. 순수는 바탕이 되고 격조가 높고 개성이 뚜렷했을 때에 명품의 하이브리드가 탄생한다. 절제된 심플한 구성이 예술성을 높일 것 같다.    
69    하이퍼시에서 내면세계 미학 댓글:  조회:4198  추천:0  2015-02-19
  이 시론은 1966년 3월호에 발표된 시론으로서 한국 현대시에 '내면세계'라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상에서 해방된 '순수 이미지의 세계'라는 창조적 영역을 개척한 시론이다. 21세기의 한국 현대시에서 '하이퍼시' 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시론이라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 된다.    내면세계의 미학                                                                 문 덕 수 (시인, 예술원회원)     이미지의 시대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라고 한다. '추상예술의 모험'의 저자인 미술 평론가 미셸 라공은 말의 시대가 있은 후 기술記述의 시대를 거쳐 우리는 오늘날 새로운 시대, 즉 이마쥬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한 바 있다. 범람하는 텔레비전, 영화, 간판, 사진 등 우리 시대의 전반을 ‘이미지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라는 특수 분야에 한정해서 보아도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시어에는 소리, 의미, 이미지의 세 국면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 세 국면을 고려한다면 ‘소리의 시’와 ‘의미의 시’를 거쳐 ‘이미지의 시’에 도달한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시는 소리의 시였다. 서정시를 의미하는 Lyric이 그리스의 악기 라이어(Lyre)에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더라도 고대의 서정시가 악기의 음률에 맞추어 노래로 불리어졌다는 것은 명백하고, 또 중세의 서정시가 음유시인들에 의하여 음송되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근대의 시는 의미의 시였다. 근대 로만주의시가 풍부한 감정과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요구하여, 형식보다는 내용편중의 방향으로 줄달음쳤다. 그래서 니체의 와 같은 철학시가 나왔고, 워즈워드를 위시한 근대 로만파 시인들의 작품에서 심원한 주정적․주관적 세계를 보게 된다 그러나 현대시는 이미지의 시이다. 시를 정의해서 이미지라고 하고, 시의 구조가 바로 이미지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이미지가 단지 ‘언어가 그리는 심적心的회화’라든지, ‘유추’라든지 하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를 주장한 영미의 이미지즘 운동과,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운동은 이미지에 대한 현대적 관심의 적극적 표시라 하겠다. 그리고 193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분석비평가들의 초점도 이미지의 분석에 두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술 운동과 비평 운동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현대적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줄 안다.    이미지의 미적 주권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즉, 우리가 탐구해 보려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이미지란 언어로서 그리는 심적 회화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지를 그 구조상에서 본다면 유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로서 그리는 심적 회화라든지, ‘유추’라든지 하는 정도의 이미지는 20세기의 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의 시에도 편재하고 있었던 것이므로, 그러한 개념정의를 새삼 문제로 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미지즘 운동의 지도자였던 에즈라 파운드는 이미지를 정의하여, “일순에 시현示現하는 지적․정적 복합체”라고 하였고, 이미지즘 운동의 창시자인 T.E. 흄은 “아날로지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그 양자에 각각 뭔가를 부가하고 하나의 경이감을 부여하는 것을 찾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 있어서의 아날로지의 주된 작용은 흥분을 일으키는 일 점一點에 독자의 주의를 끌어 붙들고, 그리하여 불가능한 일도 이루어서 그 일 점一點을 일 행으로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지스트들이 탐구한 이미지는 결코 단순한 심리회화도 아니요, 단순한 유추도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또 이 점에 이미지즘 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안다. 초현실주의도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미지의 정의에 만족하지 않고, 초현실주의적 변증법에 입각한 이미지의 탐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초현실주의 이론의 지도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이 어느 날 밤 잠들기 직전에 ‘유리창에 둘로 절단된 한 사나이’라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았는데, 이러한 ‘초현실적 이미지’는 브르통의 말대로 인간이 두 번 다시 생각해 낼 수 없는, 아편阿片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같은 것이다. 브르통은 이미지의 창조에 있어서 ‘우연’이라든지, ‘전도체(conducteur)의 전위차電位差’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는 두 말의, 말하자면 우연한 접근에서만이 어떤 특수한 빛을 자아내게 하며, 이와 같은 이미지의 번쩍임에 대해서는 우리의 눈이 한없이 민감한 것이다. 이미지의 가치는 이와 같이 해서 획득한 불꽃의 미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두 전도체傳導體 사이의 전위차에서 생기는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미지의 번쩍임이라든지, 두 전도체 사이의 전위차라든지 하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상과 같은 이미지 정의는 브르통 이전에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또 브르통 이후에도 들어 본 일이 없다. 시사상詩史上에 있어서의 초현실주의의 참된 의의는 말하자면 초현실적 이미지의 탐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현실주의 이론이 갖는 변증법적 우주론, 무의식의 영역의 발견과 중시, 상상력의 무한한 확대, 오토마티즘 등도 따지고 보면 초현실적 이미지의 탐구를 위한 방법이요, 배경적 이론에 지나지 않다. 나는 시사상詩史上에 있어서 오늘이야말로 이미지의 미적 주관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이미지가 시에 있어서의 모든 미의 주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20세기의 모든 전위 예술 운동의 중심 과제가 이미지의 추구였다는 점과, 그러한 운동이 성취한 이미지의 순수한 가치면에서 볼 때 조금도 과장된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주권이라는 말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주된 권리’라는 의미의 정치 용어이다. 우리가 국가주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대내, 대외의 양면에서 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적 주권美的主權’의 경우에도 그렇다. 시 자체의 내적 면에서 이미지를 본다면, 그것은 시의 구조의 핵심이며, 또 시의 본질 그 자체이며, 시가 갖는 모든 미감美感의 결정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의 외적 면에서 본다면, 대상과 주제(주제는 시의 내부에도 있고 외부에도 있다)에 관련이 없는 순수한 자주성自主性을 의미한다. 나는 특히 후자를 강조하고 싶다. 말하자면,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심리적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   대상에서의 해방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상이 있는 시요, 대상의 존재에서만이 그 존재가 가능한 시였다. 그 대상이 자연이건 사회 현상이건, 또 순전히 관념이건 간에, 대상이 없는 시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소나무, 포플러, 장미, 하늘, 구름, 대지, 강물 등의 이미지가 나오면, 그것들은 곧 시 바깥에 있는 세계의 대상과 연상이 되고 결부된다. 그래서 이 시는 장미를 노래한 시라든지, 저 시는 하늘을 노래한 시라든지 하는 등의 대상이 지적된다. 교통 사고, 전쟁, 혁명, 데모, 시장 풍경 등의 사회현실을 노래한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또 이별, 희망, 소원 등의 관념을 대상으로 노래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시가 시 밖의 객관 세계와의 달갑지 않은 주종관계主從關係, 예속 관계가 성립되면, 시 자체의 순수한 자주성이 없어지게 된다. 생각해 보라! 시가 ‘무엇’을 노래했다고 한다면, 그 ‘무엇’이라는 대상이 시에 앞서서 객관적으로 존재해야만 시가 존재할 수 있고, 그 ‘무엇’이라는 대상이 갖는 형태, 빛깔, 의미 등에 의하여 시의 내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시는 그 무엇을 닮거나 흉내를 내게 되니, 시의 자주성은 객관 세계의 대상 앞에 완전히 무색하게 되고, 객관 세계의 대상에 예속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관계는 회화의 경우를 예로 들면 더욱 명백해진다. 자연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데 시종 충실하는 사실주의 회화는 자연이나 그 대용물인 모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회화의 운명은 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을 ‘모방기술模倣技術’이라고 말하고, 시를 ‘자연의 모방’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모방에 관한 논의는 플라톤의 에서도 전개되었다. 몇 세기를 두고 그 위력을 변함없이 발휘해 온 이 고전적 명제와, 19세기의 근대적 리얼리즘을 우리는 맹목적으로 묵수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제 이 고전적 명제와, 19세기의 리얼리즘에 치명적인 일타를 가하고, 객관적 대상과의 주종 관계를 완전히 끊음으로써 시의 이미지의 미적 주권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신이여, 모델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하고 열렬히 기도한 화가가 있었고, 또 “내 그림이 자연自然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내 그림을 모방했다”고 말한 화가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화가들의 이러한 반고전적, 반자연적 발언 속에 대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려는 강렬한 충동이 얼마나 꿈틀거리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으리라.  사실 20세기 전반의 유럽을 휩쓴 각종 모더니즘 예술 운동은 대상에서의 해방 운동이었으며, 이미지의 미적 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혈투였다고도 볼 수 있다. 시와 회화에 있어서, 대상과 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인상주의 이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물의 묘사에 충실했던 사실주의에 반하여, 인상주의는 대상 그 자체의 충실한 묘사보다는 대상에서 받은 인상과 분위기에 중점을 둠으로써 예술의 주관화․내면화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상주의 회화도 객관적 대상에서 완전히 절연된 것은 아니었다. 인상주의 회화는 색채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를 중시한 것은 사실이나, 그 색채도 대상의 광선적光線的 반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야수파는 고갱과 고흐의 수법을 이어받아,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마침내 대상과는 관계가 없는 색채 자체의 독자적 가치를 발견하였고, 그 직접적인 효과를 대담무쌍하게 표현했다. 그들이 적․흑․녹과 같은 색도 높은 원색을 좋아했던 것은 객관 세계의 속박에서 해방된 인간의 감정적 본능을 그것이 노출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대상을 무시하고 색채 자체의 가치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야수파가 현대 예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 큐비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세잔느의 영향을 받은 입체파立體派 화가들은 자연의 수많은 형태를 몇 개의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추상․변형시킴으로써, 대상 그것의 충실한 표현에 반기를 들었다. 이렇게 되면 이미지는 단순히 자연의 사물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을 분석․해체하여 다시 구성하게 되는 과정을 밟게 되며, 그 결과 종국적으로는 대상과의 직접적 관계를 끊게 된다. 그러나 입체파의 회화에 있어서, 설령 대상을 샅샅이 분석하고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심한 메타모르포즈가 있었다 할지라도 완전히 대상과의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고, 대상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추구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입체파의 회화에 있어서도 여전히 대상과의 관계가 있었고, 또 객관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대상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이미지의 순수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였다.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도입하여 그것을 배경으로 삼고,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고, 그 기술방법으로서 오토마티즘을 발명한 초현실주의는 시를 내면세계로 전회시키고 말았다. 물론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꿈과 현실을 지양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의식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시의 새로운 영역으로 삼았다는 것은 현대시를 내면화하고, 이미지에서 객관적 대상을 끊어 버린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외면세계와 내면세계   시는 인간의 심리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모든 시는 내면세계의 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상에 있어서 모든 시는 내면세계의 시 아닌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근본적 차이를 모르는 데서 오는 그릇된 견해에 지나지 않다.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에 관해서는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손쉬운 예로서 ‘꿈’과 ‘현실’과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우리는 수면 중 꿈 속에서 날개가 돋혀 새처럼 공중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날개가 있다는 것도 현실의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요, 더구나 새처럼 하늘을 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이러한 현실과는 반대로 꿈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없다. 꿈은 현실의 모든 속박을, 모든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리고 만다. 그러기에 꿈의 세계, 즉 내면세계는 외면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반대 세계임을 알게 될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는 자기의 형이 상자 속에 있는 것을 꿈에 보았다는 대목이 있다. ‘상자’는 ‘금고金庫’를 연상하게 되므로, 이 경우의 꿈은 형이 절약가임을 의미하지만, 그러한 개념적 해석의 정오正誤 여부는 둘째로 하고, 사람이 상자 속에 들어 앉아 살고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꿈 속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여신, 인두人頭의 해사海蛇, 용, 봉황, 반인반마의 괴물, 새처럼 날아다니는 양의 다리와 뿔이 난 목신牧神, 가락국의 건국 신화 등도 모두 꿈의 세계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다. 외면세계에 있어서, 우리를 제약하는 두 가지 조건은 ‘공간’과 ‘시간’이다. 우리가 여행한다든지 누구와 만난다든지 할 때, 반드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곳과 때, 어느 장소, 어느 때라는 이 두 조건을 벗어나서는 외면세계에 있어서의 생활은 불가능하다. 외면세계의 기본 구조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개의 질서로 형성되어 있다. 우선 공간 질서부터 보기로 하자. 먼 사물은 작게 보이고, 가까운 사물은 크게 보인다. 이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원근법이다. 외면세계에서는 동서남북의 방위가 결정되어 있다. 동이 서가 되고, 남이 북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내면세계에서는 이러한 원근법과 방위 감각이 적용되지 않는다. 내면세계에 있어서는 먼 사물이 가까운 사물보다 더 크게 보일 수도 있고, 동이 서로 뒤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면세계의 공간은 외면세계의 공간 질서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다. 내면세계의 공간은 애너키즘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시간 질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외면세계의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라는 기계적인 일방적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것은 어길 수 없는 객관적․자연적 법칙이다. 그런데 내면세계에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의 진행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서 과거로 역행할 수도 있고, 또 과거에서 현재를 거치지 않고 미래로 뛰어 넘어 직행할 수도 있다. 다방에서 애인과 커피를 마시다가, 그 커피 빛깔에서 문득 낙엽을 연상하게 된다. 그 낙엽은 몇 년 전 B라는 친구와 금강산에 관광 여행을 한 사실을 연상하게 되고, 또 그 낙엽의 빛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정에서 벗들과 싸우다 흘린 비혈鼻血을 연상하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리적 연상은 시간의 역순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이러한 시간의 의식에서 의식의 흐름의 수법이 발생하는 것이다. 프루스트, 조이스, 포크너 등의 현대 심리주의 소설가들의 수법은 이러한 내면세계의 시간 질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외면세계와 내면세계의 이와 같은 차이는 시의 구조에도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게 한다. 시가 외면세계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외면세계의 구조가 그대로 시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외면 세계의 속박을 끊고 내면세계로 옮기면, 외면세계의 합리적 구조를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내면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구조의 차이를 의식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식의 구조’ 와 ‘무의식의 구조’로 구분될 것이다. 외면세계의 대상에 의존했던 지금까지의 우리 시는 말하자면 의식의 구조의 산물이었지, 무의식의 구조의 산물은 아니었다. 물론 내면세계의 시라 할자라도 무의식과 의식, 꿈과 현실의 통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무의식이라는 광활한 영역이 의식의 기초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구조의 아나키즘적 성격을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에필로그   원시인은 태양을 톱니바퀴의 형태로 그렸다. 우리의 조상도 단군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적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불교와 도교의 세계는 환상적이긴 하나 실재성이 있는 무진장의 이미지가 있는 줄로 안다. 우리는 섭섭하게도 ‘용龍’, ‘봉황鳳凰’ 등에 해당할 만한 상상적 동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꿈조차 없다. 우리는 원시인에 비해서 너무도 합리적인 세계에만 살고 있고, 또 원시인이 가졌던 것과 같은 건강한 꿈과 강렬한 상상력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조건하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눈을 돌려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주력해야 하겠다. 비단 과거의 이미지를 메타모르포즈하여 현대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현재 한국시의 한 경향이 내면화의 방향으로 전회하면서, 내면세계의 구조가 요구하는 방법을 확립하고, 순수 이미지의 창조에 노력하고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68    하이퍼시에서 사물적, 상상적 가능성 댓글:  조회:4513  추천:0  2015-02-19
    사물적 가능성과 상상적 가능성                                                 문 덕 수    1. ‘돌멩이’는 돌멩이지 사회주의나 휴머니즘이 아니다. 그런데 시인들이 돌멩이를 돌멩이라는 ‘물리적 존재’로 보지 않고 ‘관념적 존재’로 보려고 한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관습이 되어 있으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정말로 무엇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테이블을 테이블로, 꽃을 꽃으로, 구름을 구름으로, 컵을 컵으로 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데, 그렇게 보지 않고, 무언가 그 사물 뒤에 있는 인생이나 문화나 역사나 관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관념화 하는 것은 전혀 그 사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물리학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사상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보려고 한 시인은 정지용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지용(鄭芝溶)은 한국 이미지즘의 효시요 사물시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를 직접 보자.   나직이 한 하늘은 白金빛으로 빛나고 물결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 동글동글 굴러오는 짠 바람에 뺨마다 고운 피가 고이고 배는 華麗한 짐승처럼 짖으며 달려나간다. ―정지용, 「甲板 위」에서   이 시에는 관념어가 없다. 전부 사물어다. “하늘”, “白金빛”, “물결”, “유리판” 등은 모두 사물이다. 의도적으로 관념어를 배제하고 사물어만을 사용했는지, 어쨌든 그렇다. 철저하다고 할 수 있다. 세인들은 그를 모더니스트 또는 이미지즘이라고 말하지만, ‘사물시’임을 말해 준다. 우리 시단에서 탈관념(脫觀念)을 주장하고 사물을 ‘사물 그대로의 날것’으로 보자고 주장한 시인은 오남구(1946~2010), 심상운 등이었다. 오남구는 여러 시인들 앞에서 장미꽃을 들고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었다. “장미꽃”이라고 대답하자, 그 꽃을 갑자기 쓰레기통 속으로 홱 던져 버리고, “이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또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덫에 걸린 짐승처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모두 장미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오남구는 “쓰레기” 하고 말했다. 기존관념에 사로잡혀서 사물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오남구는 이렇게 탈관념시론을 내세우면서 혁명적인 방법을 썼다. 기존관념으로 써온 작품을 보고는 일언지하에 “이것이 시냐”하고 내던져 버렸다. 이런 모욕을 잘 참은 시인들은 자기 시의 새로운 방향을 찾았지만 그렇지 못한 시인은 아직도 그의 문하에서 이탈하여 구태의연한 시를 쓰고 있다. 이러한 사물시나 사물주의시의 특징은 무엇일까. 먼저 “하늘은 白金빛으로 빛나고”를 보자. 하늘이 白金빛으로 빛나는 현상은 우리가 항해할 때에나 페리호를 승선했을 때 흔히 경험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자연의 한 현상이다. “물결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는 조금 주관성이 들어 있는 점도 있으나 역시 객관적인 묘사로 볼 수 있다. “물결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도 항해 때 배의 이물이나 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닷물의 현상이므로, 이 장면 역시 자연스러운 물리적 현상의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동글동글 굴러오는 짠 바람”은 은유이나 바다 바람을 쐬는 감촉을 잘 묘사한 대목이다. “동글동글 굴러오는”이라는 이미지에서 탁구공이나 놀이용 고무공 같은 신체적 감촉 즉 촉각이나 신체적 감각을 느끼게 된다. “바람”과 “공”은 물리적으로 보아서 전혀 다른 사물이지만 감촉면에서 받는 촉감만을 특정화하여 강조하면 물리적으로도 그러한 표현이 가능한 느낌이다. “배는 화려한 짐승처럼 짖으며 달려나간다”는 뱃고동 소리와 짐승의 짖는 소리를 결부시킨 비유이다. 배는 비생명체이고 뱃고동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배를 젖혀두고 그 “소리” 즉 그 시니피앙만을 특정적으로 강조하면, 생명체인 짐승의 짖는 소리(‘개’나 ‘강아지’의 짖는 소리 등)와 결부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초현실적이거나 하이퍼성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시에 어떤 관념을 덧붙이기 위하여 내용을 고치거나 어휘를 더 보탤 수는 없다. 가령 “항해의 즐거움”이라고 그 주제를 관념화 할 수는 있지만, 이 시의 어디에도 항해의 즐거움이나 항해의 기쁨이나 항해의 매력 같은 관념은 없다. 그것을 덧붙인다면 그것은 독자(비평가)가 그렇게 해석하여 뭉뚱그려서 덧붙인 관념에 지나지 않다. 철저하게 사물만으로 된 사물시는 이와 같이 사물만으로 되어 있고, 독자가 자유롭게 해석한 관념을 덧붙일 수 있다. 전혀 별개의 것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물시의 사물은 이와 같이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 실현이 가능하므로 ‘물리적 가능성’의 시라고 할 수 있다. 2. 다음에 서정주의 시를 보자.(이미 발표한 논문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내 너를 찾아 왔다. 臾娜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鐘路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서정주, 「復活」에서   서정주는 사물과 관념을 잘 연결하여 조화시킨 명수(名手)였다. 이 시도 그런 일례다. 연인이나 아내와 이별하거나 사별하게 되면 다시 만나고 싶은 그리움이 절실해진다. 실연, 실의, 절망 즉 비탄 속에 있는 마음을 ‘브로큰 하트’(broken heart)라고 한다. 이러한 관념은 멀리 구약성서시대에까지 소급할 수 있다. 54세나 된 사람이 남편이나 배우자의 죽음으로부터 5, 6개월 이내에 사망하는 비율은, 같은 연대의 일반적 사망률 비율에서 볼 때 40% 더 높은데, 그 원인은 대부분 심장병 특히 심근경색(心筋梗塞)이었다고 하는 한 보고서가 있다. 실제로 심장이 파열한 것은 아니지만 그 비탄은 ‘브로큰 하트’에 비견할 수 있다.  그리움이 절실할 때, 사방에서 오는 여인이 모두 자기 연인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어떤 감각을 다른 관념과 동일시하는 것을 ‘동화적(同化的) 착각’이라고도 한다. 이는 대상 상실을 메우려고 하는 어쩔 수 없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 모두가 자기 연인으로 보인다는 것은 착각(錯覺, illusion)임이 분명하나, 그럼에도 이 시가 강력한 공감을 얻고 있는 이유는 ‘어떤 보편성’이 있고, 그것의 물리적 착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생각되고, 그 이유는 어떤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상상적으로 타당성 있는 가능성으로 보면, ‘상상적 가능성(想像的 可能性)'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체의 심리상태를 중시하면 물리적 가능성으로도 볼 수 있어서 애매모호한 점도 없지는 않다.   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밀 듯이 香丹아. ―서정주, 「추천사」에서   이 시는 ‘사물시’라기보다는 정서(그리움) 중심의 서정시다. 그러나 “머언 바다로/배를 내어밀 듯이”는 낭만적 이미지이지만 물리적 가능성도 있다. 머언 바다=그넷줄을 밀다, 어부=香丹 등의 등가어로 된 직유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중요 포인트는 동기와 현상(수단)의 등가성이 아닌가 싶다. 즉 머언 바다에 많이 나가 있는 고기잡이로서의 배타기=그네타기(그리움의 정서적 운동) 등이 그 핵심인 것 같다. 배를 두 손으로 바다로 밀어내는 행동과 그넷줄을 머언 하늘로 밀어올리는 행동의 유사성은 직유를 성립시키는 근거도 되지만, 동시에 그넷줄을 밀어내는 행위라는 물리적 가능성의 근거도 된다. 즉 물리적 가능성도 있는 시다. 그런데 ‘물리적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물시로 보지 않고 「추천사」를 ‘서정시’로 보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 시는 「춘향전」의 한 장면이다. 춘향의 그네 타기는 이도령에 대한 그리움, 즉 상실할지도 모를 연인이라는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심적 동요가 반영되어 있고, 특히 “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라는 명령조의 어조에 그리움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한가한 춘향의 유희적 그네 놀이는 결코 아니다. 즉 시의 어조에 그리움의 정서라는 진실성이 진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물리적 가능성이 있는 사물시나 서정시의 기초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다음엔 하이퍼의 가능성을 몇 편의 작품에서 보기로 한다.   나무를 보면 흰색이다 하늘을 보면 흰색이다 나는 종이로 오린 사람처럼 벽에 붙는다 납작한 종이가 되어 흐느적 흐느적 붙는다 ―金善英, 「공포」에서   나는 이 작품을 하이퍼시로 보고 싶다. 그렇게 보지 않고 단지 현실의 한 부조리를 지적한 시로 볼 수도 있다. 결론을 서두른다면 이 시는 ‘비유’나 ‘상징’을 보류한 언어 자체의 표면적 의미로서만 보면 ‘물리적 가능성’이 없고 ‘상상적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나무를 보면 흰색이다”, “하늘을 보면 흰색이다”도 물리적 가능성이 없는, 상상 세계로서만 가능할 뿐이다. 하이퍼시는 원칙적으로 상상적 가능성의 시다. 특히 사람을 종이처럼 오린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고, 상상 세계에서만 가능한 메시지다. 그러나 “나는 종이로 오린 사람처럼 벽에 붙는다”를 비유나 상징으로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나”는 생명체이고 “종이”는 비생명체다. 지류(紙類)와 같은 사물의 절단을 생명체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체가 가진 속성, 여러 가지 장기나 내장을 가지 신체적 특성, 호흡과 맥박, 소화와 배설, 인격적 여러 가지 사유의 판단과 성격 등 정신활동은 전부 삭제 내지 도외시되고, 신체적 기능을 비롯한 모든 생명적 기능을 무시한 지류(紙類)와 같은 존재로 전락한 현실적 입장에서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즉 인간적·인격적 속성이 박탈된 지류(紙類) 같은 존재로 바뀌고(현실의 상황에 따라 그러한 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배 권력의 종이 오리기에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성→종이 같은 비생명체로의 변화에서는 물리세계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의 레벨에서 하는 말이요, 결코 사물 자체의 생물학적 변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가능성으로서는 불가능한 시다. 즉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는 상상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이퍼시의 한 보기다. 그런데 金善英의 시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지류(紙類), 사람, 종이로 오린 사람” 등이 모두 현실의 물리적 세계에 속하는 사물이라는 점이요. 하이퍼시는 원칙적으로 상상적 세계에 속하는데 김선영의 시를 하이퍼로 간주하면 이 원칙에 어긋난다. 즉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에도 하이퍼성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은 상상적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갈대다”라는 은유는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인간’과 ‘갈대’는 모두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다. ‘인간’은 인격적 생명체이고, ‘갈대’는 식물계에 속하므로, 전혀 카테고리가 다르지만, 연결되어 의미상의 어떤 교류가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갈대다”라는 은유는 아마 초기엔 하이퍼적 충격을 가졌을지도 모르나 점차 풍화되어 지금은 보통의 비유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는 사자다”와 “그는 여우다”와 같은 은유도 똑 같은 경우다. 사물시는 사물의 세계 즉 현실의 가능성의 시요, 하이퍼시는 상상의 세계 즉 상상적 가능성의 시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는지 모르겠다.   신라 천년의 시간 위를 天馬가 갈기를 날리며 달린다 하늘 초원 위를 준마가 갈기를 날리며 달린다 바다 파도 위를 백마가 갈기를 날리며 달린다 영혼 속을 詩의 천마가 갈기를 날리며 달린다 ―김여정, 「갈기에 억겁과 시간을 휘날리며 달리는 말」에서   이 시(『레토피아』 2009 겨울 수록)의 ‘천마’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노정(露霆)을 운반하고 발굽으로 땅을 차면 많은 샘물이 분출했다고 전하는 날개 달린 말이다. 즉 신화 속의 말이므로 상상의 말이며, 이 시 전체도 상상적 가능성 속의 이미지를 형상한 것이다. 말에 날개가 달려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일상적 상식에서고 불가능한 이미지다. 즉 물리적 가능성이 없는 이미지다. 더구나 대지(大地)가 아닌,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시간 위’로 말이 갈기를 날리며 달린다는 것은 준마(駿馬)의 극단적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현실에서의 물리적 가능성은 전혀 없다. 더욱이 이 시간은 신라 천년의 시간인데, 이는 신라의 왕조의 역사를 추상하여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 왕조의 장구한 역사를 신화 속의 天馬의 이미지를 빌려와서 추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사고(思考)와 상상으로 형상된 이러한 추상 속에서 구체적 개념의 가닥들을 찾아낸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상상적 가능성을 기조로 씌어진 시이며,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이 하이퍼시는 ‘상상적 가능성’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하이퍼시는 상상적 가능성에 속함을, 김여정의 「갈기에 억겁의 시간을 휘날리며 달리는 말」이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앞에서 물리적 세계에서도 하이퍼 성이 성립할 수 있음을 말했다. 여기서는 물리적 가능성 속에서도 하이퍼성 존재의 여부를 논의해야 할 것 같다.   뇌혈관 어디쯤에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 내 피는 샤갈의 세균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이선, 「셀룰러 메모리」에서   이 시는 종래의 시에 비해 ‘새롭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하이퍼적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시에서 혈관을 DNA로 바꾸어 보면, 인간의 유전자에는 순종이라는 것이 없고 우리의 조상, 타자(他者)들의 유전자가 뒤섞여 있다는 것은 이미 과학에서 밝혀졌다. 이 시는 자기자신이 자기의 ‘유전자 진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혈관, 지능, 충성심, 뭔가의 중독체질 등…. 문제는 이러한 ‘인간 genome’의 분야를 시에 도입한다는 것은, 시의 참신성, 시와 하이퍼성과 관계를 갖게 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지만, 그리고 그렇게 보는 것은 독자(비평가) 개인의 관심과도 관련되지만,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게놈에 타인의 게놈이 들어와 있다는 점은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전자의 자기진단은 또 별개의 문제다.   내가 깎아낸 부사,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송시월, 「사과를 깎으며」에서   과도로 깎아낸 사과의 껍질을 ‘꽃뱀’이라고 말하고 있다. 두 사물(사과껍질과 꽃뱀)의 연결 방식에 따라 은유도 되고 직유도 될 수 있다. ‘꽃뱀’은 상상세계의 사물이 아니라 사물 세계에 속하는 동물이다. ‘사과’는 본의(本義: 원관념)가 되고, ‘꽃뱀’은 유의(喩義, 보조관념)가 되므로 두 사물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는 시인의 비밀에 속한다. 그런데 사과 껍질을 “꽃뱀”이라고 했는데, 사과껍질이 물리적으로 꽃뱀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내 너를 찾아 왔다. 臾娜?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서정주)와 같은, 어떤 착각(錯覺)의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든다. 그리움이나 사랑이나 그러한 정서의 절실성이 밑받침되면 감각에 영향을 미쳐 착각도 시 성립의 타당성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착각의 심리학도 하이퍼를 만들어낼 수 있고, 새로운 레토릭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과껍질과 꽃뱀 사이의 촉각의 유사성을 말한 것일까. 어쨌든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사과(사과 껍질)/꽃뱀” 등은, 첫째, 현실 내의 물질이거나 동물이라는 점, 현실 내의 사물이면서도 상상세계가 개입되어 그 가능성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 셋째, 그러나 상상 이미지로 그 가능성을 더더욱 강조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하이퍼적’이라고 해야 할지, 하이퍼적인 어떤 특수한 언어 형태(직유, 은유, 환유 등)라고 해야 할지….   4.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는 원칙적으로 하이퍼적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가령 하이퍼의 세계에 현실의 물리적 이미지가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하이퍼 시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심심할 때, 크레파스를 들고 내 뇌(腦)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서 저장된 기억을 뽑아내어 색칠을 한다. 그러면 파란 기억, 노란 기억, 발그레한 기억, 푸른 기억, 희뿌연 기억. 그들은 색유리가 되어 제각기 반짝이다가 아주 가끔 새로운 모자이크 그림이 된다. 그들은 타다 남은 내면의 불꽃같이 아니면 무덤 속에서 살아나온 시간의 눈빛같이 아니면 버스 창문 밖으로 지나가버린 아카시아 숲의 향기같이 이제는 만져볼 수 없는, 냄새도 없는, 단지 모니터의 영상 속에 숨어 있는 그러다가 아, 하는 순간 시퍼런 손자국을 남기고 심장을 관통하는 전율.                                                                 ―심상운, 「기억에 대한 명상」에서   이 시는 의식의 내면 세계를 그린 하이퍼시다. 그러나 “뇌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서” 같은 대목은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로 볼 수 있다. ‘공간’이나 들어가서(들어간다나 나온다와 같은 비유는 모두 현실의 사물을 기준으로 그 안과 밖을 정하고, 들어가고 나온다도 그 기준에서 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상상적 세계 속의 물리적 가능성이 들어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색유리가 되어 제각기 반짝이다가…”도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 속에 들어가 있는 물리적 이미지들이다. 다시 말하면 상상적 가능성 속의 물리적 세계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하이퍼시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더구나 이 이미지들은 하이퍼의 단위인 유니트(unit:연과 연에 배채된 모듈, 리좀 등), 즉 여러 가지 의미 레벨의 단위들이 동시적으로 혹은 거리를 줄여 근접적으로, 혹은 시간과 공간을 무화시켜 동시 또는 동공간으로 병존 또는 몽타주 되어 한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물리적 가능성 속에서의 여러가지 현상이다. ‘물리적 가능성’은 사물시의 기조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사물시’로 규정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다른 시인의 작품에서 그 실례를 보자.   따릉 따릉 따르 따르 딸 딸 핸드폰 저쪽에 웅크려앉아 있다가 큰 바다를 달려와 딸딸거리는 소리 밥그릇을 뺏어버리면 딸딸이 딸꾹 멈추다가 또다시 밤새도록 딸국질을 해댔지, 벼개 밑에 흥건히 고여 있는 소리 딸꾹 멈추면 조마조마하다가 딸꾹 하고 또 멈추다가 밤새도록 따릉따릉 해댔지, 밥을 넣어주면 ―김규화 「따릉 딸딸」 에서   위 시는 언어의 소리의 청각 영상인 시니피앙을 찾아나선 일종의 기표 모험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청각 영상의 이미지와 다른 이질적 청각 이미지를 연결하는 실험시운동도 가능할 것 같지만, 여기서는 이런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 속에서의 또 다른 물리적 가능성의 연결에서 생산되는, 즉 이미지 몽타주에서 일어나는 하이퍼시 문제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이 시에서는 휴대폰의 시니피앙(기표: 따릉 따릉 따르 따르…)과 인체의 딸꾹질에서 나오는 시니피앙(기표: 딸꾹 딸꾹…) 끼리 연결되는 희귀한 현상을 지적할 수 있다. 이 경우, 휴대폰의 기표는 큰 바다(‘태평양’으로 연상된다. 즉 태평양을 건너온 것도 하이퍼적이다.) 이 이질적인 두 시니피앙의 병치가 하이퍼냐, 아니면 보통의 언어 배열에 지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앞에서 거론한 송시월의 ‘사과껍질과 꽃뱀’의 경우와 흡사한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따릉 따릉 따르 따르…” 하는 휴대폰 신호 즉 휴대폰의 시니피앙과 인체의 식도에서 일어나는 시니피앙적 연결은 모두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이다. 그러나 휴대폰의 신호와 식도에서 일어난 소리가 물리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 만큼의 어떤 유사성(동일성)이 있을까 의문이다. 그런데,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두 시니피앙은 휴대폰과 식도라는 물리적 사물 이상이라는 이미지를 연결시켜주고 있고, 이 두 이미지의 병존은 분명 하이퍼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이는 거의 상상세계라고 할 만큼의 거리를 뛰어넘어 마치 태평양을 건너온 휴대폰의 기표처럼 연결되어 있으므로.   5. 하이퍼시와 비 하이퍼시에 관한 두어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토끼가 하늘을 날아간다”와 “산문(山門)의 저녁 종소리가 들린다”의 두 텍스트가 있다고 하자. 전자는 하이퍼시이며, 후자는 사물시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1)하이퍼시는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이나, 사물시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물의 세계 즉 ‘현실적 가능성’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이퍼와 비 하이퍼를 가르는 대원칙이다. 그런데    1)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에도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물들만이 들어 있는 경우와 경험할 수 없는 존재가 부분적으로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2)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주어부나 술어부를 가리지 않고 다 들어 있는 경우는 없다.   3) 즉 상상적 가능성 세계에 일상적 사물과 상상적 사물이 뒤섞여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비현실적 세계나 상상적 세계를 표현한 것은 모두 하이퍼 시다.    하이퍼시의 구조란 그러한 것이다. “분노의 불을 뿜는 용”의 경우, ‘용’은 상상적 동물이나, “분노의 불을 뿜는”은 일상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반수반인의 신화적 동물은 모두 그렇다. 이와 같이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에서의 사물과 상상이 뒤섞여 연결된 텍스트의 경우는 하이퍼시다.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에 상상적 존재만 등장하여 연결되는 경우는 말할것도 없이 하이퍼시지만, 그러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일상의 사물이 각각 그 자체만을 고립해서 보지 말고 ‘연결 할 때만 상상적 가능성’을 이루는 텍스트도 하이퍼시로 간주된다. 이를테면 “둥근 삼각형”, “포효하는 오각형”, “사과껍질처럼 한꺼풀 벗겨지는 지구” 등이다. 문법적으로도 완전한 하이퍼시다. 여기서 이른바 “재버워키(Jabberwocky) 문”이 연상된다. “재버워키”란 루이스 캐롤의(1832~98) 『거울 속의 나라』(Through the Looking Glass, 1872)에 나오는 시의 한 제명(題名)이라고 한다. 이 시는 재버워크라는 이름의 괴물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시작과 끝에 재버워키 문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것이 그 일례다.(사카이 쿠니요시(酒井邦嘉)의 『언어의 뇌과학』(中公新書, 1947)에서 재인용)   Twas(=It was) brilling, and the slithy toves Did gyre and gimble in the wabe: All mimsy were the borogoves, And the mome raths outgrabe.   시전에도 없는 비단어(非單語)가 사용된 문장인데, (이야기 중에 해석이 실려 있다.) 이 문장 중의 and, the, in, Did 같은 의미가 없는 접속사, 전치사, 조동사, 관사 등이나 All, were 같은 말은 그대로 사용해서 문법적으로 맞는 문장처럼 보여주고 있다. 앞에 든 “둥근 삼각형”이나 “포효하는 오각형” 등은 문법적으로는 맞는(?) 일종의 ‘재버워키 문’이지만 그러나 하이퍼시의 한 대목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재버워키의 텍스트가 전부 하이퍼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알 수 있다.(문법도 안 맞고 맞춤법 통일안에도 없는 요즘의 인터넷상의 전자언어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① 무색(無色)의 숲의 관념이 맹렬하게 잠잔다.(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 ② 잠잔다 맹렬하게 관념 숲의 무색(無色)의(Furiously sleep ideas green colorless)   이 두 예문은 촘스키(1928~ )의 『문법의 구조』의 첫머리에 나온다고 한다. ①문은 문법에도 맞고 시로서는 상상적 가능성의 시다. 하이퍼시다. ②문은 문법도 안 맞는 이상한 센텐스시다. 여기서 재버워키 문이 다 하이퍼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②문은 그러한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재버워키 문과 더불어 하이퍼시의 이론에 문법 문제가 개입하면 또 다른 논의가 야기될 수 있다.              
67    하이퍼시의 구조 댓글:  조회:4349  추천:0  2015-02-19
하이퍼시의 구조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무엇이냐?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 두 단위의 초월 관계를 연결하여 완성한 시다                                                                                      문 덕 수     [1] 가끔 하이퍼시란 무엇이냐고 묻는 시인들이 의외에도 많습니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 중에도 그렇게 묻는 이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우나,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두 단위의 구조를 이룹니다. 결국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점으로 귀결되고, 그 두 단위를 연결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말에 ‘비근’(卑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상하거나 웅승깊지 아니하고 주변에 가깝게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하이퍼시는 비근한 사물을 묘사하여 A단위를 먼저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즉 ‘이성’(理性)이나 ‘정의’나 ‘선(善)’이나 하는 말이 아니라, 즉 관념이 아닌, 우리 주변에 가깝고 낮은 모든 사물들(집, 부엌, 그릇, 호미, 쟁기, 나무, 펜, 그릇, 종이 등)을 가지고 묘사하여 시를 쓰라는 것입니다. 영어에 ‘아우트리치’(outreach)라는 말이 있습니다. “팔을 뻗는다”는 뜻입니다만 동시에 팔을 뻗은 범위 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곧 비근한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 팔을 뻗어 그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이 비근한 사물입니다. 즉 하이퍼시란 ‘아우트리치의 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탈관념 사물과 상상 이미지가 연결된 구조의 시라는 것이 제일 정확한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이퍼시를 쓰기 위해 칸트나 사르트르 같은 위대한 철학적 저서를 읽기 위해 인공위성을 탈 필요가 없습니다. 장자나 맹자나 불교학자인 용수(龍樹, Nagrhuna, 150~250)의 저서인 「중론」(中論)을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물론 읽으면 더 좋지요) 지금은 아득히 높고 먼 시대가 아니라 아주 낮고 가까운 시대입니다. 즉 아우트리치의 시대입니다. 아우트리치의 시대에는 아우트리치의 시를 써야 하겠습니다. 아우트리치의 사물로 하이퍼의 A단위를 만들고, 그 다음에 상상세계의 이미지로 B단위를 만들어 연결함으로써 완성해야 합니다. A단위와 B단위의 연결을 ‘초월’(超越)이라고 합니다. A와 B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나 그 사이에 함부로 뛰어 오르거나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닌 ‘갭’(gap)이 있으므로 ‘초월’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 하이퍼 시는 표현에 있어서 설명보다(특히 관념적 설명보다) 묘사(描寫)를 더 강조합니다. 묘사에는 암시적 묘사(suggestive description)를 중시하고, 설명적․기술적 묘사(technical or expository description)도 섞어 쓰기도 합니다만(문덕수 지음, 『문장강의』, 시문학사, 1994) 암시적 묘사를 더 중시합니다. 또 객관적 묘사보다 주관적 묘사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먼저 객관적 묘사의 실례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사십이 가까운 처녀인 그는 죽은깨 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시들고 꺼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공팍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 겹 주름이 잡힌 벗겨진 이마라든지, 숱이 적어서 맘대로 쪽지거나 틀어올리지 못하고 엉성하게 그냥 벗겨 넘긴 머리꼬리나 뒤통수의 틈에 염소 똥만 하게 붙은 것이라든지... -현진건 「B사감과 러브레터」에서     전체적으로 또는 당시의 시조적 입장에서는 객관적 묘사입니다만, 그러나 관찰자의 심리적 반영이 도처에 나타나 있어서 객관 묘사와 주관적 묘사가 섞여 있다고 하겠습니다.     [A] 매력적인 케이프 코드(Cape Cod)의 별장, 큰 거실(13×25), 매듭무늬 소나무 모양이며 돌로 된 벽난로, 햇볕이 잘 들어오는 식당(12×14), 작은 서재, 현대식 전기 스토브, 개스 냉장고, 접시 닦는 기계가 있는 부엌(모두 실제로 새것임)...     [B] 만추는 햇살이 만든다. 햇볕이 나면 풀과 나무가 활짝 꽃피며 웃다가 해만 구름에 가리면 금방 시무룩하니 몸을 움츠린다. 코를 찌르던 여름의 풀냄새는 없고 산에는 마른 풀 향기가 희미하게 떠돈다 -진웅기의 「가을풀」에서     [A]는 설명적·기술적 묘사문이고, [B]는 암시적 묘사문입니다. 한 가지 더 들겠습니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피 떨어지는 누우 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심상운, 「파란의자」에서)는 객관묘사이면서 주관적 인상(印象)을 강조한 글입니다. 설명적 묘사와 암시적 묘사를 구별하는 것은 인상을 얼마만큼 강조했느냐 하는 점에 있습니다. 심상운의 대부분은 암시적 묘사입니다.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선생의 두 권 시집(『정지용시집』과 『백록담』)의 시는 대부분 암시적 묘사로 되어 있습니다.     [3] 하이퍼시는 단위(unit)를 모아 구성됩니다. 연(聯)이나 절(節), 리좀 덩어리 등과 구별하여 ‘단위’라고 부르는 것이 편리하고 좋겠습니다.     들판에서 순산한 어머니는 탯줄을 짚으로 묶고 이빨로 끊었단다. -김기덕, 「끈 자르기」에서     김기덕의 「끈자르기」라는 하이퍼 시의 제1 단위입니다. 센텐스 하나로서 한 단위를 이루고 있습니다. 굉장히 짧습니다. 이 첫 단위 다음에 다섯 개의 단위가 연속되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하수 흐르는 밤의 자궁 속에서 별들이 태어나는 밤, 또 유성 하나 푸른 목숨 줄을 끊는다”라는 마지막 단위가 끝맺음으로 접속됩니다. 이 단위도 한 센텐스로 이루어져 짧습니다. 들에서 일하다가 순산한 어머니와, 은하수의 자궁 속에서의 별(천체) 탄생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탄생과 별(천체)의 탄생이 우주적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A] 길이 1cm 쯤 될까 말까 한 배추벌레 한 마리가     [A-1] 파란 배추 잎 위로 배밀이하며 올라가고 있다(....)     [B] 마추픽추의 무너진 돌계단 위에 노랑나비가 하늘하늘 날고 있다 -심상운, 「길」(『시현장』4호, 2008.11)     [A] 단위에 [A-1]의 단위가 갈라져 있으나 이것은 하이퍼시의 구조상으로 볼 때 한 단위로 묶을 수 있습니다. [A]와 [A-1]의 연결은 단위를 달리 해야 할 이유보다 한 단위로 묶어야 할 이유(이렇게 연처럼 갈라서 표현해도 괜찮습니다만)가 더 큰 것 같습니다. 굳이 따진다면 [A-1]은 [A]를 전제로 해서 성립되며 따라서 인과관계로 연결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손해일의 「떴다방 까지집」(『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도 두 단위가 한 단위로 합쳐진 것 같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김규화의 「매미소리」는 한 단위에 두 개의 단위가 합쳐서 구성되고 있는 듯 합니다.     역사박물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 마당 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미륵 미륵 미륵, 미르 미르 미르 르르르 흘린다 -김규화 「매미소리」에서     그리고 김금아의 「오후의 스케치」(『하이퍼시』, 시문학사, 211), 「내시경」, 김은자의 「꽃과 물고기 정물」(동상), 고종목의 「소리」, 신진의 「작은 눈사람」 등은 모두 한편 전체가 한 단위로 구성된 것들입니다. 따라서 단위 구성의 길고 짧음, 연(聯)과 구별된 단위의 분석 등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4] 심상운 「길」제 1, 2단위입니다. 이 시에서 배추벌레/노랑나비는 자연/역사, 생명체/비의식의 존재, 현재/과거, 흔적(자취)/소멸 등의 대립이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각각의 대립 사이에는 그냥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어떤 논리로도 메울 수 없는 심연(深淵)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김기덕의 「끈 자르기」에서 인간의 탄생과 천체(千体:별)의 탄생이라는 두 현상 사이의 심연의, 운명적 연결을 본 바 있습니다만, 바로 그러한 분열, 틈, 단절 등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두 존재의 관계 사이에 있는 심연, 단절, 틈을 ‘갭’(gap)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포괄적으로 ‘초월’(超越, transcendence)이라고 하면 괜찮을 듯도 합니다. 모든 하이퍼시 속에는 초월의 공간이 두 세계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초월의 이쪽과 저쪽의 세계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고종목의 「퍼즈놀이」에는 “바늘 외다리 축지법을 읽는다/서울 잠실에서 만리장성으로 건너 뛴다”의 바늘 외다리가 있는 곳(만리장성)과 잠실 사이엔 지리적으로 서해(西海)라는 심연이 있습니다. 중국에는 고대에 ‘기’(夔)라는 외다리 짐승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믿을 수 없습니다.   미륵과 매미 우는 소리의 사이에도 초월이 있습니다.(김규화 「매미소리」에서), 백암학교 이 선생이 거주하는 한국과, 도롱뇽알 같은 눈을 가진 인도인이 사는 지역의 사이에도 초월이 있습니다.(이솔 「도룡뇽알 까만 눈이 나를 보고 있다」에서), “까순이 까돌이가 돌아온 주상복합 아파트와 난 거지 뜬 부자 윤봉길의 민족정기”(손해일 「다시 떴다방 까치집」에서) 사이에도 초월이 있습니다. 막장과 기미독립선언문 사이에(송시월 「막장」에서)도 초월이 있습니다.   초월(超越)의 어원은 “올라가 넘다”라는 뜻입니다. 접두사 trans는 ‘넘어서’의 뜻입니다. 즉 ‘넘는다’라는 뜻입니다. ‘넘어서’라는 접두사 trans가, ‘오르다’라는 동사 scandere와 조합되어서 transcendere가 되고, 이것의 분사형인 ‘초월’(transcendence)이 됩니다. 사전에는 표준을 훨씬 넘어버리는 것, 속사(俗事)로부터 빠져나가버리는 것,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양, 성질, 장소, 관계 등 열 가지의 카테고리를 들고 있으며, 중세에는 이 카테고리를 넘어서는 것을 ‘초월’이라고 했으나 현재의 의미와는 관계가 희박한 것 같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인간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초월론적’이라고 하여, ‘초월’과 ‘초월론적’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문제를 여기서 굳이 다룰 필요가 없습니다.   앞에서 초월(超越)의 어원을 설명할 때 ‘올라서 넘는다’라는 뜻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춘하의 「종이로 만든 집」(『시현장 6집』)에는 “언덕에 오르면 아직도 무지개 마을이 있을까요”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목은 초월의 행동을 보여줍니다. ‘무지개 마을’은 상상 세계 속의 마을입니다. 하이퍼시에 초월이라는 특징이 없으면 하이퍼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하이퍼시에는 초월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이 초월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만드느냐)에 하이퍼시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할 핵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올라서 넘는다’라고 할 때, 두 세계가 평탄하게 이어지지 않고 반드시 그 사이가 갈라져서 틈이나 균열이 있다는 뜻이고, 지옥과 천국의 사이나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의 사이처럼 그 틈이나 균열을 쉽게 넘거나 건널 수 없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이퍼시의 생명은 이 초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월의 이쪽과 저쪽은 마치 절벽 밑의 심연(深淵)과 같습니다. 그 사이에는 함부로 뛰어 넘거나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월의 이쪽과 저쪽은 하나의 세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완전히 분리시키지 않고 이어져 있으면서 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이접(離接)과 연접(連接)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초월을 어떠한 관계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 하이퍼시의 비밀입니다. 틈이나 단절을 역사와 관련되는 것으로 연속시키면 유심적(唯心的)과 유물론적(唯物論的), 권력과 소외 등이 될 것입니다. 종교와 관련시켜 말한다면 신(神)/신자 또는 천국/지옥의 연속이 되겠지요. 사물의 연접과 이접은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가령 전쟁과 관련되면 승리/패배 또는 정복/피정복으로, 단순히 반대나 대립으로 본다면 밤/낮, 빛/어둠, 먼 것/가까운 것, 존재/부재(不在), 유(有)/무(無), 이 밖에도 긴 것/ 짧은 것, 안/밖, 기쁨/슬픔, 남성/여성, 땅/하늘, 아름다움/추악한 것, 강함/약함, 비쌈/헐함, 선(善)/불선(不善), 정의/불의, 완전/불완전, 적음/많음, 높음/낮음, 사람/짐승 등 초월을 이루는 계기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하이퍼시는 이러한 계기를 발견하여 시로서 잘 살려야 합니다.   중요한 부분이므로 예를 조금 들겠습니다. 심상운의 「길」(『시현장』 4집)에서는 배추벌레와 마추픽추의 돌계단 사이, 김규화의 「매미소리」(『하이퍼시』, 2011)에는 미륵보살과 매미울음 사이, 송시월의 「막장」(『하이퍼시』, 2011)에서는 막장과 기미독립선언문, 신진의 「행락」(『하이퍼시』, 2011)에서는 일상의 현실(잠재되어 있음)과 행락(行樂)지의 풍경, 박이정의 「북두칠성 돌리는 여자」(『하이퍼시』, 2011)에서는 성산동 진관동 등 현실과 북두칠성을 돌린 뒤의 상황, 이솔의 「도룡뇽알 까만 눈이 나를 보고 있다」(『하이퍼시』, 2011)에서는 도룡뇽 알의 눈과 인도의 짐꾼 사이엔 각각 초월이 있습니다. A와 B의 두 단위로 이루어진 시라면 A단위와 B단위의 초월이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어져 있을 것입니다. 단위가 많을 때에는 적절하게 A와 B로 나누어 보면 될 것입니다.     [5] 하이퍼시의 한 단위와 단위 각각의 관계를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한다면 ‘초월’이라고 할 수 있고, 유무(有無)의 대립적 관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有니 無니 하는 개념은 철학적 어휘여서 어렵게 생각됩니다만,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시를 껴안고 자다가 깨어난 아침 문득 떠오르는 시상(詩想)이 있어 -조명제, 「물끄러미」(시현장 2010)에서     이 시의 “시를 껴안고 잔” 간밤은 無이고, 깨어난 아침은 有입니다. “문득 떠오른 시상(詩想)은 무입니다만 이것은 시의 한 단위에 부분적으로 들어 있는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66회 광복절 경축식이 진행되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식장을 가득 채운 애국가 합창이 바람을 타고 훠이훠이 날아간다     쿰부 히말라야 높고 험한 고갯마루에 찢길 듯 바람에 휘날리는 오색 타르초 절절한 바람의 끈을 움켜쥐고 파르르 파르르 말 울음소리를 낸다 -안광태, 「바람 바람 바람」에서     안광태의 시에 보이는 광복절 경축식의 바람인 통일의 열망은 有이고, 그 다음 단위의 그곳 선주민(先住民)의 “오색 타르초”는 無입니다. 옛날의 경험인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無입니다. 앞 단위의 有는 시간적으로 현재의 경험이며, 그 다음 월남전에 참전한 친구 이야기인 단위는 공간적으로 볼 때 멀고 먼 有이긴 하나 현재 경험할 수 없으므로 無입니다.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은 민족적․역사적으로 전혀 다르므로 無로 간주됩니다.     통곡의 벽 앞에 검은 복장을 한 유태인들이 기도하고 있다 -신규호, 「인터넷망을 타고·2」에서   전행(前行)은 검은 복장을 입은 유태교 신자인 유대인들로서 사물 묘사의 단위이고, 후행(後行)의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있는 이미지 자체는 사물묘사이나 ‘기도하는 마음의 내용’은 다 다른 것으로서 독자가 경험할 수 없는 무(無)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시에서 무의 세계 묘사가 좀 모자라기는 하나 역시 유와 무의 대립에 있습니다. 신규호의 최근의 시집 『허무의 물레』는 무의 세계를 추구한 희귀한 시집입니다. 대부분의 하이퍼시는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무의 세계를 현실에서는 경험이 불가능한 ‘상상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A] 망치를 들고 깨진 유리창 조각들을 더 잘게 부수고 있는 인부들의 얼굴이 점점 환해지고 있어요. 그들은 망치질에 신명을 풀어내는 듯 리듬을 타고 있어요. 작은 알갱이로 돌아간 유리들도 햇빛에 반짝이고 있어요.   [B] 아아, 여보세요. 조주 선사가 신발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한강대교를 걸어가고 있다구요? -심상운, 「통화」에서     심상운의 다른 작품인 「길」에 보이는 마추픽추의 무너진 돌계단은 역사적인 실재(實在)이나 현재 경험이 안 되는 無입니다. 앞의 심상운의 [A] [B]도 有無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독자의 해석을 장황하게 하는 이 하이퍼시는 有의 특질과 無에 특질이 잘 병존하고 있습니다. 하이퍼시는 有와 無의 초월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종전처럼 한 테마에 하나의 이미지를 펼쳐보이는 시여서는 안 됩니다. A. B 두 단위가 있을 때, A의 유와 B의 무가 초월적으로 관계를 맺고 결합되면서 하이퍼시가 성립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구조적 특징입니다.     저녁은 고해신부의 귀처럼 비밀을 향해 자라기 시작했다 -위상진, 「가방 속의 탁상시계」에서     이 시의 전행(前行)은 유(有)이며, 후행(後行)은 무(無)인 것 같습니다. “고해신부의 귀처럼 자라기 시작했다”라는 대목은 놀랍고 매우 인상적인 비유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줄시계처럼 늘어졌다”(「여름감기」)에서처럼 일상적인 나와,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시계줄처럼 늘어진 나를 각각 한 단위로 그 속에 ‘초월’이 끼어든다면 굉장한 하이퍼시가 될 것입니다.” “얼음조각 같은 연인들”(「여름감기」), “죽은 사람의 전화번호”(「여름감기」) 등은 이 자체로서도 뛰어나고 놀라운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저녁”과 고해신부 사이에 초월의 세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스크린도어 앞에서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줄시계의 사이에도 유무(有無)의 대립에 의한 심연이 있고, 그 초월이 하이퍼시를 탄생시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6]   꾸역꾸역 도시인을 삼키며 검은 입 벌리고 있는 4번 입구   전파상에서 밀려오는 쓰나미 검은 화면을 계속 뱉어내고 있다 -신규호, 「전철역, 입 벌리다」에서     신규호의 이 시 속에 비유가 들어 있습니다. “도시인을 삼키며”나 “입 벌리고” 등은 모두 은유입니다. 이 은유의 본의와 유의가 각각 하나의 단위로 나뉘어져 구성된다면 굉장한 하이퍼적 특질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심상운의 「아우슈비츠」에서도 진술의 부분적 비유(예를 들면 “하늘 한 자락을 꺼내들고”)를 발견하게 됩니다. “야크가 만들어 놓은 히말라야 설산고봉을/철새들이 넘는다”(최진연, 「목화꽃」)에서도 “야크가 만들어 놓은 히말라야”는 진술 속의 비유입니다. “정신의 히말라야”도 그렇습니다. 최진연의 「목화꽃」에선 “히말라야 설산고봉”과 “설악의 울산바위” 그리고 “청량산(淸凉山)” 등의 지리적 원거리의 대조관계가 있습니다만 그 사이에는 초월을 만들어 하이퍼시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에서는 이미지들이 평면화(平面化) 되어 비유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손해일의 「떴다방 까치집」에도 있습니다. ‘초월’은 모두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A] 막장을 먹는다 강원도 태백 지인이 부쳐온…     [B]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을 선언하노라” 이명처럼 들려오는 33인의 목소리 대한독립만세소리…… -송시월, 「막장」에서     송시월의 [A][B]의 관계는 부분이 전체 구조로서의 비유구실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입니다. [A]와 [B]의 연결에서 “같이, 처럼, 듯이, 듯”의 직유의 특징인 연결사가 없고, “사람은 갈대다”, “그는 온순해서 양(羊)이다”와 같은 은유 등과 구별해 보아도 본의(本義)와 유의(喩義)가 분명하지도 않고, 두 사항의 유사성이 드러남이 없어 즉, 보통의 은유와 같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비유일까요. [A]와 [B]의 연결과 같은 하이퍼시의 단위간의 연결을 나는 ‘교유’(交喩, diaphor)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교유’는 휠라이트(Philip Ellis Wheelwright)라는 사람의 처음 한 말입니다. 서강대의 김태옥(金泰玉) 교수의 『은유와 실재』(문학과 지성사, 1982)는 휠라이트의 책의 역서입니다.     [7] 앞에서 예를 든 바와 같이, 하이퍼시의 구조는 거의 교유(交喩)로 되어 있습니다. 교유이니까 비유의 일종이며, 따라서 비유의 일반적 구조의 특성인 본의(本義)와 유의(喩義)의 간의 유사성에 의해서 결합되어야 합니다만 그것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비유는 (1)본의(本義, tenor)나 유의(喩義, vehicle)가 있고, 그 본의와 유의는 (2)유사성(類似性, similarity)과 근접성(contiguity)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가 모두 비유를 성립시키는 구조의 기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의’란 본디 표현하고자 한 고유의 관념이며, 실제로 말하거나 생각된 사물입니다. 유의란 이와 비교된 사물로서 상상에 의해 도입된 사물이며, ‘차용관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의와 유의라는 말이 도입되기 전에는 ‘고유관념’과 ‘차용관념’이라고 말해졌습니다. 이 밖에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먼저 앞에 든 송시월의 「막장」은 [A]와 [B]의 두 단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만, 이 경우 어느 단위가 본의이며 어느 단위가 유의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강원도 태백의 지인이 보내온 막장을 먹는 장면([A])이 본의인지,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인의 독립국임과...”의 독립선언문이 본의인지 구별이 잘 안됩니다. 본의와 유의 구별이 잘 안된다고 해서 하이퍼시를 비유구조와 같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본의/유의의 위치변경이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해도 하이퍼시라고 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바로 그 점이 하이퍼의 특징 중의 또 다른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심상운의 「길」이라는 하이퍼시도 ‘교유’(交喩)로 되어 있습니다. “배추벌레/노랑나비, 배추잎/마추픽추의 벽돌계단”의 대립(차이성) 등이 현재/과거, 생명/역사(문명), 현실/상상 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배추벌레는 현실의 생명체이고, 노랑나비는 북미 마야문명 유적지인 마추픽추의 벽돌이며 이는 역사입니다. 따라서 배추벌레와 노랑나비의 관계를 유추하기는 거의 어렵지만, 도리어 유사성(類似性, similarity)과 차이성(差異性, differenc)은 근접성에 의하여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유사성이란 무엇일까요. 배추벌레가 배밀이로 기어가고 있는 ‘자연’(배추)과 마야문명 유적지인 ‘역사의 벽돌’이 생명의 시간적 경과에서의 공통성이 드러나는 어떤 시간성이라고 할까, 소실성(消失性)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시에서 은유 구조의 일반적 특성인 본의와 유의의 구별이 아주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교유’(交喩)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설령 이러한 암시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교유에 의한 하이퍼시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휠라이트라는 사람은 은유가 되느냐의 여부는 문법적 형태의 법칙 문제가 아니라 “의미 변환(semantic transformation)의 질”이라고 말합니다. 의미 변환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송시월의 「막장」의 [A][B]나, 심상운의 배추벌레와 노랑나비는 서로의 영향 하에 어떤 의미로 변한 것은 분명하며 모두 교유임이 확실합니다.     [8]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연(聯)을 ‘리좀’이나 ‘모듈’ 같은 이름을 말하지 말고 그냥 단위(單位, unit)로 통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앞에 예를 든 심상운의 [A][B]나, 송시월의 [A][B]는 연으로서 단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때의 [A]와 [B]를 하이퍼시의 단위로 보고 해설했습니다. 그런데, 이솔의 「저는 지금 세느강가에 있어요」(『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 최진연의 「재채기」(『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 조명제의 「풀밭에서의 저녁식사」(『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 김규화의 「한강을 읽다」 등은 단위 구별이 없고, 한 단위로 한 편의 하이퍼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손해일의 「동편제」(『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 김규화의 「매미소리」(『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는 한 단위(한 연)에 하이퍼적 특성이 둘 이상 있습니다. 이 단위는 A B C D의 네 단위로 된 하이퍼시의 첫째 단위입니다. 그런데 이 시의 제1 단위 속에는 하이퍼인 두 개의 단위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역사박물관에서 청강한 은 불교의 미륵보살(彌勒菩薩)의 ‘미륵’과 같은 시니피앙인데, 미루나무 숲의 미륵은 실제 매미의 울음소리입니다. 이 단위에는 이질적인 두 개의 시니피앙이 그 사물인 시니피에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단위 속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위를 하이퍼시의 구조의 뼈대라고, 반드시 그렇게 우기면서 볼 수는 없습니다.     말죽거리 지나 양재천 다리 마악 건너면 분당 가는 1005-1번 좌석 서는 들머리 ‘시민의 숲’ 키 껑충한 미루나무 꼭대기마다 둥게둥게 까치집 아슬하다. 여름내 은폐엄폐 짙푸르던 잎새 죄 떨구자 줄줄이 들통난 로빈후드 숲속 아지트들 얼짱 몸짱 까순이 까돌이 철떡궁합 눈맞아 몇 배 새끼깐 뒤 늦동이 막내 보기까지, ‘맹부 삼천지교’라 이왕이면 매헌 윤봉길 의사 민족정기부터 내려받고, 양재천 물길따라 강남 8학군의 배꼽 대치동 아랫녘까지 나와바리 넓혔더라 -손해일, 「떴다방 까치집」에서     손해일의 「떴다방 까치집」 6연 중의 제2연이다. 이 시는 하이퍼시인지 현실에 대한 풍자시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그러나 하이퍼적 특색이 없지는 않습니다. 넓은 의미의 하이퍼시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제1연 [A]에 “발리에서 생긴 일”이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지리적으로 인도네시아의 관광지 ‘발리’라는 지명이라면 그 발리와 서울의 ‘강남’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로빈후드’라는 말까지 있으니까 영국의 전설상의 의적(義賊)인 로빈후드가 그 거점인 영국의 숲속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 ‘얼짱 몸짱 까순이 까돌이’ 등의 말은 이 시가 부분적으로 해학적인 풍자시임을 보여줍니다. ‘까순이 까돌이’는 까치집의 ‘까치’와 연결되는 말이어서, 시니피앙을 연상케 하는 조어로서는 매우 재미 있는 말입니다. 다시 「떴다방 까치집」에는 “한동안 안 보이던 까순이, 까돌이가 돌아왔다”라는 대목이 돋보입니다.     [9] 신진(辛進) 시인이 “차유”(差喩, transphor)라는 말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은유나 환유 등의 비유는 비유구조의 요소인 본의(本意, tenor)와 유의(喩義, vehicle)가 유사성(類似性)이나 차이성(差異性)에 의해서 형성됩니다. 이 주장은 굉장히 중요하고 흥미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든 비유는 1)본의(本義, tenor, 본관념, 고유관념, 실재로 말해지거나 생각된 사물), 2)유의(喩義, vehicle, 비교된 사물, 상상된 사물, 차용관념), 3)유사성(類似性, similarity), 4)상이성(相異性, 差異性, difference) 등의 네 가지가 어울려 성립됩니다. 그런데 모든 비유는 본의, 유의, 유사성으로 성립한다고 하면서 ‘차이성’만 쏙 제외합니다. “사람은 갈대다”라는 은유에서 본의는 ‘사람’이며 유의는 ‘갈대’이며, 유사성은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비유구조를 설명할 때 본의, 유의, 유사성은 다 들면서 차이성만은 배제하는가, 라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은 인체(인격체)이고 갈대는 식물(식물성)이므로 사람은 갈대같이 연약한 존재다라고 말할 때 그 차이성도 드러난다고 본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왜 제외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심상운의 「길」에서 보이는 배추잎과 마추픽추의 돌계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또 송시월의 막장과 기미독립선언문과의 차이성은 무엇일까요? 얼른 답이 안 나옵니다. 그만한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본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차이성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요. 이런 점에서 ‘차유’(差喩)라는 비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면 신진은 차유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차유는 은유와 환유에 대비되어 문자 그대로 차이성의 비유라는 의미다. 은유가 유사성에 의한 대치(substitution)를, 환유가 인접성에 의한 연결(contexture)을 지향한다면 차유는 차이성에 의한 긴장(tension)을 지향한다. 꿈의 작용과 관련하여 추론하자면 응축과 치환이 환유의 원리이고 상징이 은유의 원리이며 모순은 차유의 원리가 된다. 차유에는 언어의 표현과 실제의 의미 사이에 간극(대조를 포함)이 있는 경우가 있고, 언어 표현 전체가 모순되거나 불합리가 있는가 하면 상식파괴나 언어의 우연적 만남 같은 차이 자체가 목표인 경우가 있습니다.”(신진 저 『한국시의 이론』 산지니, 2012, 75쪽)   신진의 차유의 예로서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을 들고 있다. 이 시에서 그는 “언어적 불합리와 모순에 내재하는 맥락”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텍스트 전반에 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신진은 윤동주 외에 이상(李箱)의 「절벽」(絶壁)도 들고 있습니다. 신진은 특히 상황적 맥락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휠라이트(Pulilp Ellis Wheelwright, 1901~1970)가 말한 디아포르(diaphor)는 우리 나라에서 ‘교유’(交喩)라는 역어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서강대학의 김태옥(金泰玉) 교수가 휠라이트의 저서, 『은유와 실재』(Metaphor and Reality, 문학과 지성사, 1982)를 번역했는데, 이 책에서도 교유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진 교수가 제기한 ‘차유’도 이 교유와의 넓은 접점이 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휠라이트는 미국의 이미지즘 시인이나 주지주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의 「지하철 정류장에서」를 그 실례로 들고 있습니다.     군중 속에 낀 이 얼굴들의 환영(幻影) 비에 젖은 검은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 -파운드, 「지하철 정류장에서」의 전문   첫 행과 둘째 행의 관계를 휠라이트는 ‘교유’라고 봅니다. 휠라이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전의(轉義, transterence)라는 말 대신에 “의미의 변화(semantic transformation)의 질”이라고 말합니다. ‘같이, 처럼, 듯이’ 등의 연결어가 없으므로 직유(直喩)가 아닌 것은 확실하고, 또 위의 제1행을 본의(本義)라고 하고, 제2행을 유의(喩義)라고 하고, 거기서 두 사항 사이의 유사성(類似性)을 발견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람은 갈대다”라는 은유에서는 ‘연약함’이라고 하고, 그 유사성은 사람과 갈대의 두 사물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즉 유사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만, 앞에서 예를 든 파운드의 「지하철 정류장에서」의 제1행(본의)과 제2행에서는 그 유사성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휠라이트는 은유에 대하여 문법적 형태의 변화가 아니고 의미의 변환(semantic transformation)이라고 하고, 의미 변환의 은유에는 의미의 탐색과 의미의 결합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유는 ‘의미의 결합’에 의하여 성립하는 비유라는 것입니다. 일반적 은유는 의미탐색입니다. 예를 들면 “그녀는 꽃이다”, “그녀는 양이다”와 같이 앞에 예를 든 파운드의 시의 제1행과 제2행은 의미의 결합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송시월의 「막장」에 보이는 [A][B]도 의미의 결합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심상운의 「길」에서 의미의 결합에 의한 교유가 드러납니다. 교유가 의미의 탐색에 의하여 성립하는 은유가 아니라, 의미의 결합에 의해서 성립하는 교유라는 점은 하이퍼시의 구조 이해에 큰 도움을 줍니다.     [10] 하이퍼시를 성립시키는 요소는 단위(單位, unit)이며 ‘연’과는 다릅니다. 그 단위와 단위의 관련은 교유(交喩, diaphor)에 의하여 관계를 맺어 구성된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이 교유는 결합에 의해서 발생하는 은유의 일종입니다. 종래에 우리는 병치(竝置, 竝存)나 대구(對句)라고도 막연히 일컬어왔습니다만 이제부터는 ‘교유’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직유나 은유 같은 비유는 본의(本義, 본관념)와 유의(喩義, 보조관념) 등이 있고, 이 두 사항은 어떤 유사성에 의해 연결됩니다. “그녀는 꽃이다”, “그녀는 양(羊)이다”와 같은 경우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꽃에서 느끼게 되는 아름다움과 같다는 유사성이 결합되어 “그녀는 꽃이다”라는 비유가 성립됩니다. 그러나 교유는 은유의 일종이기는 하나 의미의 탐색에서 그 유사성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결합’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의미의 탐색에서 본의와 유의 같은 두 요소에서 어떤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 외에도 다양한 관계의 결합이 있고, 그 결합의 범위가 깊고 넓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모두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단위간의 결합은 원칙적으로 교유이지만, 예외를 인정한다면 그 범위는 더욱 광대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이퍼 단위간에도 의미 탐색에 의한 은유(교유를 제외한 일반적 은유)도 있고, 심지어 직유적 비유의 하이퍼시의 가능성도 말할 수 있습니다.     칠레 샌디아고 지하 700m 막장에 69일 동안 갇힌 광부 33명 나는 숟가락 슈퍼캡술을 막장에다 집어넣어 360도로 회전시키며 한 사람 한 사람 끄집어 올린다. -송시월, 「막장」에서     송시월의 「막장」의 제5 단위입니다. 이 단위는 앞의 제1 단위로서 음식물인 막장과 연결됩니다. 이 때 연결된 고리는 이질적인 사물인 막장과 칠레 광산의 갱도의 막장이 갖고 있는 청각적인 소리(즉 ‘시니피앙’입니다)의 유사성 자체입니다. 물론 교유라고 볼 수 있으나, 교유로 본다면 교유에도 이러한 연결고리(또는 유사성)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플랫폼에 혼자 두고 기차가 소리 한 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   맴맴맴 매애애 매앵매앵 앵앵앵 미잉미잉 잉잉잉 -김규화, 「매미소리」에서     위의 예는 「매미소리」의 제4 단위입니다. 여기서는 기차가 “매앵!” 소리를 지르고 바퀴를 굴리며 떠나버립니다. 기차 소리와 매미소리 사이는 소리의 유사성을 실제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매앵”이라는 유사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의미의 변환’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변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기차의 출발이라는 기계 소리는 생명체인 매미소리와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이 시에서는 “매앵”이라는 유사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차 소리도 듣는 주체에 내재화(內在化)하면 주체의 안에 존재하는 것과 동화(同化)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표현에서는 “매앵”이라는 유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실재의 소리는 다른 것이니까. 매미/기차의 대립과 마찬가지로 매미울음(매앵)/기차소리의 대립이 있다고 볼 수 있고, 여기서 실재로는 단위간의 교유(交喩)가 존재한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논리가 조금 이상 방향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풀벌레 한 마리 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가 밑둥으로 내려온다 종일 사삭사삭 발효향 그윽한 노자를 끄적거리고 있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지껄이는 자는 알지 못한다 변솟간 벽에다 낙서 한 줄 누고 나온다   어이! 시원하다 -박이정, 「노자의 벌레」에서     「노자의 벌레」의 제2 단위, 제3 단위, 제4 단위입니다. 3단위와 4단위가 있어서 하이퍼 시의 특색을 갖추고 있습니다. 가지 끝에 매달린 풀벌레가 밑둥으로 내려온 제2 단위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기술한 제1 단위와 문맥적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3 단위는 노자(老子)가 말한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를 옮긴 말이기에 인용부를 썼습니다. 선자불변 변자불선(善者不辯 辯者不善)과도 연결됩니다. 고전(古典)은 풍부한 시의 귀중한 원천적 소재원입니다. 제3 단위와 제5 단위의 연결은 교유(交喩)라고 할 수 있고, 의미 변화의 연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단위와 마지막인 4단위 사이엔 어떤 맥락을 찾기 어렵습니다.  
66    시에서 인식의 혁명 댓글:  조회:4424  추천:0  2015-02-19
인식의 혁명                                                                                                                            문 덕 수(시인, 예술원회원)        1.  거의 1세기가 지난 한국시는 현재 한계의 벽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벽의 정체는 시인마다 달리 보일지 모르나, 지각 있는 시인이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쉽사리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언젠가 “ 시는 언어 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 선다”고 말한 바 있다. 언어를 넘어 선다는 뜻은 지각 레벨에서의 사물의 인식 문제이다. 사물에 대한 지각(知覺)은 복잡한 문제를 내포한다. 유럽의 근대적 자아의 표징으로 간주할 수 있는 단일시점(單一視點)은 예술을 오랫동안 지배해 왔다. 그 뒤를 이어 단일 시점이냐, ‘복수로서의 나’를 공관화하는 다시점(多時點)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다시점은 피카소의 에게서 시도되었고, 이 시도는 다시점 자체가 원근법을 뒷받침해 온 초월적인 단일시점의 붕괴를 가져왔다.  테이블 위의 ‘술병’은 누구에게나 ‘술병’으로 보인다. (먼 거리를 두고 보면 달리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까지는 같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그 앞의 세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인다. 아마도 알코올 중독증과 투병하고 있는 사람에겐 ‘악마’로 보일 수도 있고, 그러한 중독증과 관계없는 사람에게는 ‘감로(甘露)’로 보일지도 모른다. 창문을 ‘창문’으로 보고, 꽃을 ‘꽃’으로 보고, 소나무를 ‘소나무’로 보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주관적인 생각(선입관)이나 자의적 분별(分別)로 인해서 미혹의 세계 즉 ‘언어의 세계’에 빠진다.  보는 사람의 위치, 조명(照明)의 가감이나 장애물의 유무 등도 큰 영향을 미친다. 보는 사람의 위치가 산정(山頂)이거나 지하철역, 그리고 햇빛이나 기상의 조건 등에 따라 사물이 달리 보인다. 원추(圓錐)나 입방체 같은 3차원의 입체도, 바로 밑이나 바로 위에서 보면 2차원 평면으로 보인다. 동일한 대상의 현상이 이같이 달라지는 것을 ‘퍼스펙티브 현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퍼스펙티브 현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각설하고, 본론에 직접 관련되는 사례를 하나 들어 보자. 창문을 열고 도시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자. 전신주와 전선 위의 비둘기, 주택가 지붕의 연연(連延), 고층 아파트의 입립, 올막졸막한 높고 낮은 빌딩들, TV안테나와 그 너머의 산들, 산 위의 구름과 하늘 이런 바깥 도시의 풍경은 언어의 성질상 선조적으로 열거되겠지만, 사실은 우리의 시계에 한꺼번에 들어온다. 일망무제라고나 할까, 우리 망막에 한 순간 동시다발적 현상으로 비치는 것이다. 우리의 조그마한 시각에 이같이 광대하고 방대한 사상들의 양이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우선 이러한 지각현상 또는 인지(認知) 시스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마치 수많은 특수한 컴퓨터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처럼, 이러한 동시다발현상의 지각은 인간의 신경회로망의 성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신경)회로망 모형에 따르면 인지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병행처리과정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마디들이 각자가 하는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이다. 신경회로망 모형을 병행분산처리 모형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에 예시한 창밖의 도시풍경의 순간적 동시다발적 지각은 이러한 인지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 우리 시에 있어서의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결정적 조건들이 이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문 밖의 도시풍경의 지각은, 인간의 신경회로망(neural network)이 동시적이며 다발적인 시스템임을 보여준다. ‘동시적’이라 함은 계열적, 순차적, 선조적이 아님을 말한다. 심적현상이 형식적 시스템이거나 구문론적 법칙을 가지고 있다면, ‘주어+서술어+목적어’와 같은 성분의 선조적, 시간적 연결구조로 지각 될 수밖에 없지만, 동시다발적 지각에서는 계열적 인식이 불가능하다. 또 ‘다발적’이라 함은 사물들이 분산되어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그 지각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흔히 신경회로망의 인지할동이 ‘병렬분산처리’를 한다고 하는 것도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한 대상이나 유니트가 앞뒤의 차례대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병렬적으로 일어나며, 지각기능을 가지는 인간의 뇌도 이와 같은 구조라는 것이다.  지각(신경회로망)의 동시다발성 병렬 분산처리 모형은 사물의 지각적 인식은 물론이요, 나아가 시쓰기나 작품의 구성방법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창밖의 도시 풍경에 대하여, 그 중 어떤 대상 하나(아파트면 ‘아파트’ 비둘기면 ‘비둘기’ 소나무면 ‘소나무’ 식으로)만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이미지화 하고,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관습을 지니고 있다. 편협하고 국부적이다. 지각의 전체를 이같이 분할할 것이 아니라, 각각의 유니트들을 살리면서 전체를 집합적으로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주제의 복수화보다 단일화, 형식의 다중구조보다는 단순화를 지향한 지금까지의 시쓰기의 관행을 부숴버릴 수는 없을까.      2.  그러면 한국시가 구문론적 요새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어떤 몸부림을 쳤던가 보기로 하자. 먼저 이상(李箱)의 시를 보자. 이상의 작품은 언어의 한계에 직면한 난파선의 비극상을 보여준다. “1+3/3+1”과 같은 숫자의 수식이나 그 변형형태의 혼용은 이미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언어 자체에 대한 절망행위일까, 아니면 단순한 언어유희일까. 어쨌든 통사론적 구문구조를 깨려고 한 실례를 보기로 한다.          오렌지      大砲      匍匐 萬若자네가重傷을입었다할지라도피를흘리었다고한다면참멋적은일이다 -----이상의 「BOITEUX·BOITEUSE」에서     「BOITEUX·BOITEUSE」는 시 전체가 구문구조를 벗어 난 것은 아니지만 위의 3행은 구문구조를 깬 것으로 보인다. “오렌지/대포/포복”의 열거는 주어인지, 보어인지, 또는 어떤 문법적 기능을 맡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구문구조와의 관계가 없는, 단지 세 단위(unit)의 병렬적제시가 아닌가로 생각된다. 오렌지는 ‘여성의 성기’, 대포는 ‘남성 성기’, 포복은 ‘성교의 상징’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이런 식의 폐쇄적 의미규정을 넘어서는 다양한 의미망의 지평을 열어두고, 그러한 의미의 병렬성, 다양성, 다중성을 살려야 할 것이다.  같은 제목의 시 머리에 “긴 것/짧은 것/열십자”와 같은 세 단위의 제시도 있는데 이것 역시 구문구조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시 「수염」에는 “홍당무”, “삼심원(三心圓)” 등의 한 단위 (한 어휘)가 하나의 연(聯)을 구성하고 있다. 이상(李箱)은 언어에도 절망했다고 말한 바가 있지만, 실제의 시쓰기에서 통사론적 구문구조의 제약에 빈번하게 직면하여, 이 구조의 법칙성을 깨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이 그의 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러면 김춘수(金春洙)의 경우는 어떠한가. “말의 긴장된 장난 말고 우리에게 또 남아 있는 행위가 있을까?”(김춘수 전집 시론, 문장사,1999,p.389)라고 말한 김춘수의 무의미 시의 실험은 완벽하게 구문 구조 안에서의 ‘언어유희’였다고 할 수 있다. 의미론과 통사론 구조 안에서의 언어유희가 정말로 가능할까? 자신의 무의미나 허무를 추구하는 실험이 언어유희라는 사실을 알면서 탐닉했지만, 실험한 언어가 구문론적 구조의 형식성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었고, 또 깨닫지도 못한 것 같다. 그의 한계성의 하나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처용단장 제1부의 Ⅳ〕에서      주목을 끄는 대목은 “바다는 가라앉고”와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이다. 무의미시의 실례다. “돌이 바다에 가라앉고”는 유의미인데, “바다는 가라앉고”는 무의미가 된다. “사냥꾼이 총으로 늑대를 쏘았다”는 유의미인데, “늑대가 총으로 사냥꾼을 쏘았다”는 무의미가 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구조상으로 이러한 예와 큰 차이가 없다.  이리로 오고 있는 한 사나이가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와 같은 대목은 관념세계에서는 가능한 물리적 실현의 불가능성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예는 이상의 시에서는 흔하게 발견된다. 무의미시야말로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고 믿었던 이 시인이 ‘무의미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만들었는가의 일단을 보여 준다. ‘바다가 가라앉는다.’는 표층구조의 의미는 현실적, 물리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때인가는 지진이나 지각의 변동으로 바다가 가라앉을 물리적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심층구조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김춘수는 이러한 심층구조의 의미보다는, ‘바다가 가라앉는다.’는 물리적 불가능성과, 그것을 뒤집어엎는 관념적 가능성과의 충돌에서 어떤 의미(언어유희)를 찾은 것으로 생각된다.  김춘수가 “언어에서 의미를 배제하고”라고 한 말은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뜻이다. 또 “언어와 언어의 배합, 또는 충돌”(동상)이라고 할 때, 언어의 지향성의 물리적 가능성과 비가능성과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김춘수의 무의미 시쓰기는 단출해 보인다. 이를 테면, 후속 시행(詩行)에 의한 선행시행의 차단(김춘수는 ‘차단’이라고 하지 않고 ‘처단’이라고 하고 있다.), 후속의 소리나 장면에 의한 선행 이미지의 차단, 연작시에서는 후속 시에 의한 선행 시의 차단 등이다. 이러한 무의미시 쓰기의 장치는 다양한 듯하지만 의외에도 단출하다. 즉, 그의 무의미시 쓰기의 장치는 주어+서술어라는 구문구조 안의 인과 관계거나, 아니면 구문(구문구조를 가진 센텐스)과 구문과의 관계 속에 갇혀 있다.  그러니깐, 김춘수의 실험은 구문론적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다. 음운 규칙 일탈, 동음이의어, 의미의 중층형성, 독립어적 병치 이러한 구문구조 내의 다양한 실험 기능의 과제를 두고 실험을 중지했다. 그러나 문제는 실험의 이러한 협소성보다는, 의미 생산구조인 통사론 안에서의 무의미 추구라는 역리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3.  유리컵, 탁자, 비둘기, 재떨이 등을 본다고 하자. 눈앞에 있는(혹은 우리의 심적 표상 속에 있는) 사물들 하나하나는 물론, 이것들의 상호연결에서도 어떤 법칙성, 규칙성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유리컵’이라는 물리적 표상에 주술 관계와 같은 통사구조가 내재되어 있을 리 없다. 처음부터 언어 구조를 가지고 빚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유리컵은 한 시간 전에 나타나고, 탁자는 30분 뒤에 나타난다는 선조적 계열성도 없다. 이러한 모든 법칙은 사람(시인)이 둘러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술관계뿐만 아니라 동서남북, 상중하, 원근법 같은 규칙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유리컵은 탁자의 동쪽 모서리에 놓여 있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것은 주관이 그렇게 사고(思考)한 것이지 , 물체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방위가 아니다.    이러한 모든 규칙은 우리의 주관, 즉 언어가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는 흔히 주관/객관, 의식/무의식, 나/타자 등으로 분할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유럽 근대 이성의 기반이지만, 그것의 분별력의 폭력은 엄청난 것이다. 이러한 근대 이성의 산물인 주관/객관이 유리컵이나 탁자나 비둘기의 실재(實在) 인식에 별 소용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고자하는 실재는 주/객관의 문화이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유리컵, 탁자, 비둘기 등에 주객관이라는 구별이 있을 리 없다. 근대 이성이 그렇게 분류해 놓은 노선을 계속 맹목적으로 따라갈 필요도 없다. 또 유리컵, 탁자, 꽃 등의 사물에 의식/무의식의 구별이 내재해 있을까. 그러한 구별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유의 판단 이전, 주객관이나 의식/무의식이나 구문론적 언어분별 이전의 ‘순수직관’으로 돌아 갈 수 없을까. 김춘수는 의식/무의식에 시달렸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결국 사유나 판단 즉 이성언어에 시달렸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도에서 사생(寫生)을 포기한 그로서는 도리 없이 ‘언어의 요새’ 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고(思考)의 언어 (Language of Thought) 라는 개념이 인지관계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다. 자연언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언중(言衆)의 마음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아 이른바 ‘사고의 언어’를 형성하게 된다. 사고의 언어는 사물과의 직접적인 직관적 관계영역을 뭉개고 통사론과 같은 어떤 규칙으로 인식하게 한다. ‘마음’이라는 인식 기능까지 형식적 시스템으로 굳어져 버리게 한다. 우리는 구문론적 구조를 비롯하여 동서남북이나 상중하, 의식/. 무의식, 주관/객관 같은 이런 여러 가지 규칙들의 그물을 일단 무화 또는 폐기시킬 수는 없을까. 적어도 사고(思考) 레벨 이전인 지각(知覺) 또는 감각 레벨에서 말이다.      
65    언어와 사물, 그리고 시 댓글:  조회:4520  추천:0  2015-02-19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                                                                                                            문 덕 수 (시인, 예술원회원)   1 시쓰기는 제재(또는 사물), 언어, 시인, 독자, 미디어(잡지, 신문, 방송), 출판, 서점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어울려 상황을 구성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관점에 따라 輕重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실 어느 한 가지인들 중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요소들의 중요성의 경중을 따져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요소들 중에서 특히 '사물'과 '언어'라는 두 요소에 집중하여, 이른바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이라고 할까, 관계라고 할까, 그런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한 마디로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 또는 관계라고 하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잠재되어 있다. (1) 사물과 언어 또는 관념과의 일치 여부 또는 준별 가능성, (2) 사물(thing)이라는 개념의 범주 확정, (3) 이 문제에 불가피하게 관련되는 비유, 상징, 이미지, 지성, 정서, 상상력, 구조, (4) 시쓰기의 原點 또는 출발점 등이다. 이렇게 열거하고 보면,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사실상 시의 모든 문제를 전부 포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볼 수는 없고, (1)번 문제에 집중하되 나머지 문제도 관련되거나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언급해 보기로 한다.     누군가 이미 한 말 같다만 사물은 시간마다 달리 보이는 법, 그래도 관념은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까닭 없는 슬픔은 온몸 가득 번져 나른한데, 다탁 위에 놓인 내 손끝을 잡고 애써 웃는 그대를 새롭게 부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구나. ―윤석산, 「칸나꽃 뒤로 보이는 풍경을 위하여」에서     이 시에서, 尹石山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사물과 변하지 않는 언어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고, 따라서 사물과 언어는 다른 것이며, 변화하는 그 사물에 알맞은 새로운 이름을 부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존재다"라든지, "언어는 사물이다"라고 말하는 시인들이 있는데, 尹石山은 사물과 언어, 사물과 관념과의 불일치 또는 구별을 의식하고 있다. 바다를 언제나 항상 '바다'라고 부르는 것, 빗속에 흔들리는 칸나꽃을 항상 '붉다'고만 하는 것은 확실히 사물과 언어와의 불일치를 무시한 언표일 수 있다. 하물며 연인의 경우, 사랑하기 이전과 이후는 그 이름이 마땅히 달라져야 할 것이다. 같은 하나의 사물에 대하여, 집단(종족, 민족)이나 언어나 개인 등에 따라 달리 언표되는 사례는 늘 경험하는 일이다. '개 짖는 소리'에 대하여, 한국인은 '컹컹'이라고 하고, 일본인은 '완완'(ゆんゆん)이라고 하고, 미국인은 '바우와우'(bowwow)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일례다. 또 '컹컹'은 개가 짖는 소리에만 국한되지 않는 예도 있다. 이를테면, 沈相運은 "아직도 몇몇 목공들은 살아서 / 컹컹 기침을 하며 / 환한 속살의 각목을 켠다"(「木工幻想」에서)라고 하여, 목공들의 기침 소리를 '컹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기침소리의 음성상징(의성어)에도 리얼리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전에서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매암, 매암'(준말은 '맴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울시내, 아파트 틈새의 매미소리는 '맴맴맴'을 7번~10번 정도에서 끊고, '매애앰'하고 길게 뽑는다. 몇 년 전 강화도의 전등사에 갔었는데, 경내의 숲에서 들은 매미소리는 15번~17번이나 울고서는 그 다음에 '매애애애앰' 하고 길게 뽑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등사 경내의 매미는 '맴맴'이 아니라 '맹맹' 또는 '매앵, 매앵' 하고 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운이 없는, 또는 공해에 병든 매미는 '미미' 또는 '매매'로 울고, 건강하고 생기 있는 매미는 '맹맹' 또는 '매앵, 매앵'으로 탄력이 넘치는 소리로 들린다. 이러한 매미소리의 분석도 실제의 매미소리와 얼마만큼 일치하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시인은 시쓰기에 있어서 사물과 언어와의 완전한 일치를 가장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물과 언어 사이에는 분열, 틈이 있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완벽한 답은 神의 몫이겠지만, 대충 말한다면 사물에 대한 언어의 양적 빈곤, 사물과 떨어져 있는 언어의 독자성, 그 可動性(mobility), 언어의 추상성과 언어의 구조적 결함, 언어 사용자의 주관, 등등을 들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을 이런 정도로 해둘까 한다.     2 사물과 언어의 불일치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우리가 잘 아는 시가 있다. 이 시는 그러한 문제를 사물 쪽에도 있고, 언어 쪽에도 있고, 그리고 언어 주체(사람) 쪽에도 있음을 암시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물상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1」에서     이 작품은 어떤 사물(절대 존재, 또는 사람, 연인 등)에 이름을 불러주기 이전과 이름을 불러준 이후의 차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 사물, 이름(언어),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는 주체(사람) 등이 다 표면화되어 있으므로, 사물과 언어의 불일치 또는 일치 문제의 요인들이 다 암시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물상'(物象)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름을 불러주자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름'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물상'과 '꽃'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여기서의 '이름'은 동식물이나 사람이나 무기물 등 상호간을 구별하기 위하여 부르는 명칭, 성명이나 명의(名儀) 등의 사전적 의미라기보다는, 특별한 관심(동정, 연민, 사랑, 믿음 등)을 가지는 어떤 존재(신, 절대자, 연인, 친구, 존경의 대상)에 대한 특별한 의미나 가치에 대한 명칭, 또는 호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호칭(명칭)은 언어화 또는 언어로 표출되는 명명행위라는 점에서, 견강부회가 될는지 모르겠으나 간략하게 '언어'라고 해둔다. 아담이 만물에게 이름을 지어 불러준 그런 의미의 이름 불러주기라고 하더라도 역시 언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한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물상에 불과했는데, 이름을 불러주자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꽃도 물상의 일종이지만, 金春洙의 이 작품에서는 물상과 꽃이 준별되어 있다. 그러니까, '물상'은 이름을 불러준 이후의 '꽃'과는 다른, 말하자면 이름 이전, 이름이 없는, 다시 말하면 언어 이전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만물을 창조한 이후, 아담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기까지의 기간에 존재했던 사물이 물상이 아닐까. 그러한 사물에 이름을 불러주니까, 그 사물이 모두 내게로 와서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소중한 존재(꽃)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해석이 가능할 줄 믿는다. 또, 언어(이름)는 물상을 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意味가 되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다"든지,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것은, 애벌레가 나방으로 변신한다든지, 개구리가 땅 속의 동면에서 깨어나고 싶은, 그런 '변신'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존재의 근원적 상황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즉, "나는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 물음이 내포되어 있고, 그러한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데카르트식의 근대적 자아의 존재방식이 아니라, '나와 너'(Ich und Du)라는 부버(M. Buber)식의 존재방식임을 알 수 있다. '나'란 무엇인가 라는 근대적인 물음이, '나'에게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일방적'폐쇄적 코스가 아니라 '나'에게서 출발하여, '너'에게로 나아가는 쌍방적•개방적 코스를 통해서, '개인'이나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더불어' '함께' '共生'의 범주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부버가 인간존재의 원범주로서의 인간의 '간'(間, das Zwischen)이라는 개념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내가 너를 대상화하여(즉 물상화하여)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서로 마주보는, 서로 '꽃'의 의미를 지닌 주체로서의 공생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金春洙의 「꽃1」에서 이상과 같은 해석을 전제로 하여 두 가지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이름을 부르기 이전(즉 언어 이전)의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춘수는 그것을 '물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특유한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불렀던 간에, 아직은 이름이 없는 언어 이전의 적나라한 사물세계임이 분명하다. 둘째, 작자는 이 시에서 신화적•창조적인, 어떤 점에서 아담과 비슷하기까지 한 명명행위를 체험하고(?)있다. 즉,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름이 없는, 언어의 인공적 가공의 퇴적이 아닌, 언어 이전의 사물의 원점에서 이름을 지어 불렀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기존의 관념이나 선행언어들을 고친 것, 즉 개명도 추가도 아닌 새로운 명명행위라고 할 수 있다.     3 사물과 언어와의 분열•불일치는 여러 가지 이유에 기인한다는 점을 앞에서 말했다. 그러한 분열․불일치가 있으므로, 그것을 극복하여 일치시켜보려는 시도(즉, 진실과 진리의 추구나 노력)에서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의 양상도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사물과 언어와의 분열•불일치의 여러 원인 중이서, 사물을 관찰하는 주체 즉 시인의 입장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큰 다른 양상을 가정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먼저 어떤 관념을 정해 놓고, 그 관념에 알맞은 사물을 찾아 그 관념을 해석하거나 그 관념에 사물을 끌어다 연결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태도의 근원은 낭만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에 있다고 하나, 고전주의에도 있다. 사물보다 관념을 선행시키는 태도는, 사물을 이데아의 가상(假像)이나 모상(模像)이라고 하여 참된 실재로 보지 않고, 참된 사물의 실재는 '이데아'라고 주장한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그 이론적 연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관념'을 먼저 만들지 않고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의식하려고 하는 리얼리즘의 방법이다. 이 경우, 그 사물에서 가급적이면 인생론이나 사회론 같은 관념을 배제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그 사물에서 어떤 관념을 귀납적으로 끌어내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의 양상에서, 낭만주의(휴머니즘)와 리얼리즘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분기점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음도 흥미롭다고 하겠다. 먼저 전자의 경우부터 살펴보겠다. 관념을 먼저 만들어 놓고(정해 놓고), 그런 다음에 사물을 찾아 연결시키는 방법을 관념의 감각화, 관념의 肉化(incarnation)라고도 말한다. 관념을 관념 그대로 표현하는 방법도 물론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의 전형적인 예로서 이방원의 「何如歌」(관념을 설정한 후, 사물을 끌어다 연결시킨 것)와 답가인 정몽주의 「丹心歌」(관념 즉 일편단심이라는 의지를 의지 그대로 표현한 것)를 들 수 있다. 현대시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가장 성공한 시인은 金顯承일 것이다.                                      나의 희망,                             어두운 땅속에 묻히면                             黃金이 되어                             불 같은 손을 기다리고,                               너의 희망,                             캄캄한 하늘에 갇히면                             별이 되어                             먼 언덕 위에서 빛난다                                          ―김현승, 「희망」에서     이 시의 제목은 「희망」인데, 그것은 앞으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어떤 가망, 염원을 의미하는, 보편성을 띤 관념이다. "나의 희망(이) / 어둔 땅속에 묻히면 / 黃金이 되어"라는 선조적(線條的)•축자적 표현을 차례대로 분석해 보면, "어둠의 땅속"이나 "黃金"이라는 사물에 앞서서 먼저 "희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또 "나의 희망은 무엇이며, 너의 희망은 무엇일까" 등 일련의 의문이 결합된 문제 즉 관념이 형성되고, 그런 연후에 그런 관념에 적합한 '사물'(땅속, 황금)을 발견하여 연결시켜 감각적으로 구체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주지주의에서 강조하는 "사상의 감각화"라는 것은 이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 경우, 혹자는 작자가 '희망'이라는 관념을 떠올리기 이전에 "어두운 땅속에 묻힌 黃金"이라는 사물(또는 사물 이미지)을 먼저 발견하고, "이 사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숙고한 끝에 '희망'이라는 관념을 찾아낸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사물에서 어떤 관념을 해석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작품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작자의 심리세계, 즉 역순(逆順)이 자유로운 혼돈의 상상세계와, 그것을 정리하여 작품(텍스트)으로 일단 조직화한 후의 축자적․선조적 질서와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어떤 성질의 해석과 분석이든, 어떤 관념(예를 들면 '희망' '자유' '고독' 등등)을 먼저 설정하고, 연후에 그 관념을 구체화•감각화 할 수 있는 사물을 찾아서 그것에 결부시켜 표현할 작품임이 분명할 때, 그 작품의 축자적•선조적 질서를 뒤엎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관념을 먼저 설정하고, 연후에 그것을 구체화•감각화 할 수 있는 사물을 찾아 결부시키는 방법을 중시할 때, 그러한 작품의 의도나 목적은 '관념탐구'(또는 어떤 사상의 선전)에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실재(참된 사물의 모습)를 탐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즉 사물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더 중시하고, 그 관념을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先觀念 後事物의 방식을 취할 때, 관념(언어)과 사물과의 일치여부, 적합여부를 분석하는 기준은 사물이 아니라 관념 쪽에 있다고 하겠다. 즉, 진리로 정립된 관념을 얼마만큼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그 기준을 둔다. 앞에 든 김현승의 작품을,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조금 살펴보자. "나의 희망, 어두운 땅속에 묻히면 / 黃金이 되어(「희망」)"라는 대목은 어떤가? 자기의 희망이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땅속에 묻혀 있으면 도리어 고귀하고 아름다운 '黃金'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즉, 내가 추구하는 '희망'이 실현될 수 없는, 손에 잡히지 않을 경우에는 과연 '황금'과 같은 물질(상징)이 되고, '돌'이나 '마른 나뭇가지' 같은 다른 사물은 될 수 없을까. 즉, 관념(내 희망)과 사물(황금)이 일치된 상태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 다음에는 "너의 희망 / 캄캄한 하늘에 갇히면 / 별이 되어"(「희망」)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관념(희망)과 사물(별)과의 일치여부가 문제로 제기된다. 즉 '별'만 되고 '달'이나 '태양'이나 '무지개' 같은 다른 사물은 될 수 없는가. 또, 나의 희망의 경우에는 '황금'과 결부되는데, 너의 희망의 경우에는 '별'과 결부되는 까닭, 그리고 황금과 별의 차이는 무엇인가 ― 이런 의문도 제기된다.(이러한 의문 제기는 부질없는 것일까).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김현승, 「堅固한 고독」에서     '견고한 고독'은 이 시인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 개인 레벨을 초월하려고 하는 의도도 엿보인다. '고독'이라는 인간조건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삶에 대한 부정적 측면이 더 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독을 혐오하거나 기피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며 확고부동한 자세로서 수용하고 고수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견고한 고독」이라는 제목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껍질을 더 벗길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깡마른 흰 얼굴은, 작자를 접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작자의 실제 몰골을 연상할 수 있을 만큼 유사한 것이다. 일종의 고독 나르시시즘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작자는 고독을 사랑하고, 그러한 고독의 여러 양상 중에서도 '견고한 고독'을 특히 중시하고 강조하는 그런 인생태도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도대체 견고한 고독이란 어떤 고독일까, 이런 의문이 제기된다. 이런 의문에서, 작자는 삶의 어떠한 불리하고 부정적인 조건에서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확고부동한 '고독'의 고수야말로 '진실한 삶'이라는 의지를 정립한 것이다. 아마 그러한 고독의 관념은 양심이나 정의와 연결되어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관념(견고한 고독)을 구체적•감각적으로 밑받침할 수 있는 사물로서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 단단하게 마른 / 흰 얼굴"을 연결시킨 것이다. 문제는 견고한 고독을 구체적•감각적으로 밑받침할 수 있는, 더욱 더 적합한 다른 사물은 없는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제기된다. 껍질을 더 벗길 수 없는,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만이 견고한 고독과 완전히 일치하고, 이를테면 '바위'나 '마른 논바닥'이나 '양철' 같은 사물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어쨌든, 이 경우 판단의 기준은 신념화된 '견고한 고독'이라는 관념 쪽에 있다고 하겠다.     4 시쓰기의 또 다른 중요한 하나의 방향이 있는 것 같다.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는 방향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한 만물에 이름을 지어준 이후, 수많은 시인들의 명명행위는 되풀이되고 있는데, 사물이란 되풀이되는 그런 명명행위의 축적으로 가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물은 언어에 의하여 왜곡되거나 오염되어 진실한 모습이 은폐되거나 훼손되어 있다. 그러한 선행관념은 모두 인공적 가설(?)이므로 제거되어야 한다. 시쓰기에 있어서, 그러한 선행관념의 부정은 물론이요, 사물의 체험에 앞서서 먼저 관념을 설정하는 일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직접 체험하여 사실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태도를 지향하려고 한다. 그런 태도가 사물이나 세계의 진리나 진실을 추구하는 기본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물을 가리고 있는 누적된 언어적 인공물을 제거할 수 있는가, 또는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언어 이전의 사물을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만약 가능하다면, 사물과 언어(또는 세계와 언어)를 분리시키려고 하는 2분법 사고의 소산이라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 "언어는 사물이다"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고, 또 그런가 하면 자연의 風景은 자연과 문화의 교환관계에 의한 매개적•이중적 장소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러한 논란은 언어의 의미기능, 언어구조, 언어의 언급성(referentiality) 등의 문제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어서, 여기서 꼬치꼬치 따질 계제가 아니다. 언어를 거두어 낸 뒤의 사물, 또는 언어 이전의 사물의 세계라는 것이 있을까. 시쓰기에 있어서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진실, 진리의 세계이고, 그것은 일단 있는 그대로 사물의 참된 실재를 추구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플라톤이 이데아와 가상을 구별하고, 칸트가 물자체와 현상을 구별하는 식의 이론에 대한 왈가왈부는 일단 젖혀두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구약성서』 창세기 2장 19-20     시인이 사물을 직접 관찰하고 체험하는, 아담이 사물에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하여 사물(피조물)을 보고 듣고 체험한 행위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물창조(창조설을 믿든 안 믿는 별문제로 하고 일단 창세기의 창조설을 상징적 의미로 수용한다)와 아담의 명명행위에 대한 창세기 이야기는 두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신의 창조 이후 아담의 이름 지어주기까지 사이로 '이름이 없었던 사물세계'(무명의 사물세계)요, 다른 하나는 아담의 '이름지어주기'(명명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첫째 문제부터 보기로 하자. 엿새 동안의 창조행위가 끝나고, 며칠 뒤에 아담이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성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이 문제는, 신의 창조 이후 아담의 명명 이전의 기간을 이름이 없었던 사물세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어쨌든, 신의 창조행위가 완료한 직후의 하루만에 아담의 명명행위가 끝났다고 가정하자(하루만에 모든 사물의 명명행위가 다 끝났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엿새 다음은 일요일이니까 하루는 휴식한 셈이고, 월요일부터 아담의 이름지어주기가 시작되었으므로, 전주의 첫째날(월요일)에 창조한 사물(빛과 어둠, 낮과 밤)은 7일간이나 이름이 없는 상태로 있은 셈이고, 둘째날(화요일)에 창조한 사물(궁창 즉 하늘,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은 6일간, 셋째날(수요일)에 창조한 사물(뭍, 바다, 풀, 채소, 과목 등)은 5일간, 넷째날에 창조한 사물(궁창의 광명, 사시와 일자와 연한, 해, 달, 별)은 4일간, 다섯째날에 창조한 사물(물고기류, 조류 등)은 3일간, 여섯째날에 창조한 사물(땅의 생물 즉 짐승, 육축, 기는 모든 동물 등)은 2일간으로 각기 이름이 없는 사물 그대로의 세계로 있었던 셈이 된다. 즉 언어 이전의 사물, 또는 언어라는 의상을 완전히 벗어버린 적나라한 사물로서,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문제를 보기로 하자. 아담의 이름지어주기에 대해서, 성서는 단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세기, 2장 19절)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더 이상 구체적 언급이 없다. 아담의 명명행위의 현장에는 명명행위의 근원인(이름을 지어 부르도록 지시한 주체) 여호와가 보고 있었고, 여호와신이 보는 앞에서 이름을 어떻게 짓는가 하는 '명명방법'은 아담에게 일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명방법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신의 명령(지시), 신의 피조물에 대한 이름짓기, 신이 만든 인류 최초의 인간에 의한 이름지어 부르기라는 점에서, 적어도 神聖性과 神話性 및 창조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기존의 어떤 관념이나 언어도 없었으므로,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다만 신 또는 창조라는 우주적 질서와의 동화 내지 일체가 된, 主客 미분의, 그리고 사물(피조물)에 대한 신성한 외경감 같은 순수직관에 의해 이름이 지어지고 불리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어떤 관념을 설정하고 사물의 이름을 지어 부른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직접적, 구체적 체험에서의 명명행위였으리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5 이제, 鄭芝溶의 작품을 통하여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는 시쓰기의 한 방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정지용, 「春雪」에서     정지용의 「春雪」의 첫연인데, 그 다음에 "우수절 들어…"라는 말이 계속된다. '우수'는 입춘과 경칩의 사이에 있고, 양력으로 2월 18일 무렵이다. 2월이면 아직도 겨울철이므로, 이 때에 내린 눈을 '춘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러나 달력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춘설'이라는 그때의 실제 계절감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겨울이 거의 다 끝난 계절이라, 눈이 내리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절기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창문을 열자, 그 찰나 뜻밖에도 밤새 춘설이 하얗게 덮인 먼 산봉우리가 이마에 선뜻 와 닿아 매우 차다(寒)는 것이다.('차게 느껴진다'가 아니라 바로 '차다'이다.) 단지 이것뿐이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문 열자"와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사이에는 단절이나 연장(延長)이 없는 찰나의 감각경험 뿐이다. 즉 동작(문 여는 것)과 풍경 및 감각(먼 산이 이마에 차라)이 연속되어, 미처 다른 생각(관념이나 사상)이 끼어 들어갈 틈이나 여유가 없다. 그래서 어떤 동작이나 사태의 찰나적 신속성을 나타내는 부사 '선뜻'이 알맞게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 열자"는 이른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는 동작이고, 그 찰나 간밤에 모르게 내려서 하얗게 덮인 먼 산봉우리의 봄눈이 선뜻 이마에 와 닿는 찬(寒) 감각, 그 찬 느낌이 가득 차는(滿) 촉감은, 그 자체 어떤 인생론이나 자연철학 같은 관념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개념에 의한 조직이나 구성 같은 인위적 加工도 배제된 순간의 감각적 체험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먼 산봉우리에 내린 봄눈의 감각과, 작자인 시인이 느끼는 감각을 객관과 주관, 객체와 주체로 분리하여 구별할 수 있을까. 간밤에 내려서 덮인 산봉우리의 봄눈이 내게 차게 느껴지고, 차게 느껴지는 그 감각을 사유(思惟)하는 과정을 거쳐서 인식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산봉우리의 봄눈을 객체나 대상으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마에 선뜻 와 닿는 찰나의 감촉을 주관적 사유에 의한 인식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대상'과 '나' 사이에 티끌만큼의 간격이나 틈이 없다. 사물과 체험, 대상과 인식 사이의 분열이나 거리가 없다는 것은 主客未分의 상태, 언어 이전의 세계라고 할 수 없을까. 이러한 경지에서 시는 생명, 사물, 진실 그 자체의 참된 실재로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몇 대목 더 실례를 들어보자.                                           선뜻! 뜨인 눈에 하나 차는 영창                                       달이 이제 밀물처럼 밀려오다.                                                             ―정지용 , 「달」에서                                           프로펠러 소리                                        鮮姸한 커브를 돌아나갔다                                                               ―정지용, 「아침」에서                                            담장이                                        물 들고                                          다람쥐 꼬리                                        숱이 짙다                                                             ―정지용, 「毘盧峯」에서     앞에 든 「달」 「아침」 「毘盧峯」 등은 모두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의 직접적•감각적 체험을 그대로 드러낸 것들이다. 뜨인 눈에 하나로 영창에 가득 차버리는 달빛, 선연(鮮姸)한 커브를 돌아나간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 물이 든 담장이, 숱이 짙은 다람쥐의 꼬리 ― 이러한 순간적•찰나적 감각체험 속에는 어떠한 사유도 분석도 판단도 끼어 들 틈이 없다. 이러한 감각체험에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든지, "그렇게 느꼈다"든지, 그러한 체험 후의 관념 활동이 꼬리표처럼 붙어 있지 않고, 또 "나는 이러저러한 인생관, 세계관을 가리고 사물을 본다"와 같은 관념의 선행활동도 없는 것이다. 만약에 사물의 찰나적 체험 전이나 후에 그러한 관념활동이 추가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사물의 실재를 대상이나 객관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대상이나 객관을 의식하는 '나'나 '주관'과의 대립•대응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객관과 주관, 객체와 주체, 타자와 자기의 분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 든 정지용의 사물체험에서는 전혀 그런 것을 분석해 낼 수 없다고 본다. 즉, 주객미분의 상태, 知情意 미분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언어 이전, 관념 이전, 주객분열 이전의 사물의 실재 그 현장 ― 이것이 정지용이 지향했던 시의 원점이고, 또 출발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관념으로 시를 쓰지 않고 '사물'로 시를 썼다. 정지용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해석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 쟁론하고 좌단할 수는 있으나 정확한 견해는 논설 이전에서 이미 타당과 和協하고 있었던 것이요, 진리의 보루에 의거되었던 것이 오……"(「시의 옹호」). 사물에 대한 "정확한 견해"는, 관념을 거치지 않고 사물로 직행하여 체험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논설 이전에서"는 기존의 퇴적된 언어 이전, 관념 이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정지용의 말은, (1) 관념을 먼저 설정한 뒤에 사물을 끌어다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참된 실재를 감각적으로 직접 체험하는 사물주의, (2) 기존의 언어를 완전히 벗어버린 뒤의 발가벗은 사물 그 자체, (3) 주객미분의 사물세계 즉 사유나 사고나 분석이나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찰나적 체험 ― 이러한 특징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정지용이 지향한 적나라한 사물과 그 현장이 그의 시의 원점이며 출발점이라면, 우리는 이 점을 매우 중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토포스는 모든 것이 자유스러운, 즉 어떤 기존관념이나 기존 언어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고, 따라서 창조행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관념을 거치지 않는다든지, 선행 관념을 설정하지 않는다든지, 또 누적된 기존 언어에서 벗어난다는 등의 말을 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념•사고•분석•판단 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주객을 버리라는 뜻도 아니다. 이 점을 곡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로(zero) 지점과 같은 원점, 또는 출발점 즉 사물 자체의 참된 실재와 그 현장의 직접적•감각적 체험을 통해서, 그 체험을 수용하여 그 속에서 다시 관념이나 사고나 주객(主客)이 발생하는 과정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물의 참된 실재, 그 자유로운 원점의 체험이 없이,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을 추종한다든지, "나는 낭만주의자다, 근대주의자다, 모더니스트다"라고 하는 것은, 스타트 라인에까지 가지 않고 중간 지점에서 경주에 참가하는 반칙행위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64    시와 독자와 난해성 문제 댓글:  조회:4369  추천:0  2015-02-19
  “시인도 알 수 없는 시, 그저 한때 소나기였으면 … ”에 대한 반론 『시가 있는 아침』 출간회 모인 시인·평론가 30여 명 말하다                                                                                       심  상  운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한국시단의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진단하고 근본적인 문제점을 몇 가지 짚어보았다. 먼저 짚어본 것이 “시가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명제(命題)다. 시에 대한 이런 견해는 너무 당연한 것 같다. 시는 언어예술이고 감동은 예술이 존재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서 감동(感動)은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풀이 하고 있다. 이 말을 분석하면 먼저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느낌이 발생하고 그 느낌에 의해서 마음의 움직임이 생기는 것이 감동이다. 따라서 감동에는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형이하학적감각으로부터 오는 즉물적(卽物的)인 감동, 가슴으로부터 오는 정서적(情緖的)인 감동, 형이상학적인 지적(知的)인 감동, 종교적인 영혼(靈魂)의 감동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 느낌은 주관적인 지각(知覺)이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 대해서 “나는 느낌이 오는데 너는 왜 느낌이 오지 않느냐?” 라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가 된다. 느낌은 강요나 관념적인 당위성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느낌은 과거의 경험을 재생해주는 대상에서도 오지만, 새로운 현상이나 경험에서 더 강하게 분출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선한 느낌’과 ‘감동’은 과거시제보다 현재시제의 것이 된다. 과거시제의 느낌을 상투적, 구태의연한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가슴의 정서’ 속에만 갇혀있는 서정파(抒情派) 시인들이 “시는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새로운 시대의 지성, 감각, 정서, 영혼을 담고자 하는 ‘미래파(未來派)’ 시를 폄하하는 무기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둔감한 것만이 아니라, 현대시의 즉물적 이미지가 주는 신선한 감동을 비롯하여 독자들에게 정신적 전율을 주는 수준 높은 지적감동과 영혼의 감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만족의 좁은 울타리에서 활개 치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시를 머리로 쓰지 말고 가슴으로 쓰자는” 것은 18,19세기의 낭만주의적(浪漫主義的) 경향의 시 쓰기이다. 낭만주의 시는 당시에 금기(禁忌)였던 구어체(口語體)의 시어를 사용함으로써 영국의 시단을 혁신하는 새로운 시운동으로 부상하였다. “콜리지와 워즈워스의 서정민요집(抒情民謠集, Lyrical Ballads,1790) 제2판(1800년)의〈서문 Preface〉에는 시가 '강렬한 감정의 자연스러운 넘쳐흐름'이라는 워즈워스의 유명한 정의와, 시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쓰여져야 한다"는 그의 이론을 담고 있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     이 운동은 당시 귀족적인 고전주의(古典主義) 시의 틀을 부수는 강한 동력이 되었으며, 시를 귀족의 언어에서 평민들의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성과로 해서 낭만주의 시는 영국에서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시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의 “자연, 사랑, 인생의 안일한 가정생활과 전원풍경, 소박한 시어와 운율형식”(안영수, 「형이상학시와 모디니즘 시: 신비평읽기」, 2009,8월호)과 정서과잉의 상투적인 언어는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주어서 이를 혁신하려는 시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20세기 대표적인 시인 T.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 등이 중심이 된 모더니즘 시 운동이다. 이 모더니즘 시 운동은 정서위주의 주관적인 서정시를 ‘객관적이고 지적(知的)인 사유(思惟)의 시, 이미지의 시’로 바꾸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19세기의 유물론과 관계 깊은 사실주의를 개인정신의 부자유라는 측면에서 배격하고, 시의 영역을 인간의 의식세계에 한정하지 않고 내면의 무의식(無意識) 세계로 확장했다. 이와 함께 초현실(超現實)이라는 개념을 포용하여 시를 의미로부터 해방시켜서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의 영역을 시에 부여하였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모더니즘(초현실주의 포함)으로 변화해 온 시의 역사에서 변화의 원동력이 된 것은 과거의 시에 대한 개혁(改革)이다. 이 개혁 속에는 시대정신과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고, 의미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시의 독자적인 생명력이 들어있다     20세기 초엽 근대화의 과정에서 서구의 시를 받아들인 한국 현대시 100년의 역사도 서구시의 역사와 궤도를 같이 한다. 정지용, 김기림, 이상, 조향, 김춘수, 문덕수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한국 모더니즘 시의 계보가 그것이다. 그것은 현대 한국인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이 과거의 조선시대로 회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한국 현대시의 변화도 19세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 한국 현대시는 신준봉 기자가 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구충돌’의 와중에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는 젊은 시인들이 시단의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일부의 실험적인 젊은 시인들은 김남조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해부칼로 인체를 갈라 보여주는 것 같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보여주기(showing)’는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에 접근하여 시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다.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혁신적 표현의 중심에는 대상을 실제의 상태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실주의의 객관적 시각과 디지털적 감성(영상성, 현재성, 정밀성)이 들어 있다.      디지털적인 감성(感性)은 가상현실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하기도 한다. 가상현실은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같이 현실과 비현실을 통합하는 제 2의 새로운 공간이다. 그래서 19세기적 자연발생의 서정시와는 전혀 다른 시적 공간을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시적 공간의 시는 구시대의 관념에 안주하는 보수적인 서정시인 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시가 되기도 한다.     ‘시의 난해성(難解性) 문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에서 ‘서정파 시인들’이 새로운 형식, 표현, 사유의 시를 공격하는 무기의 하나다. 난해성 때문에 독자와의 소통이 단절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서정시인 들이 사용하는 난해성이라는 단어 속에는 시는 ‘해석의 대상’이라는 시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들어있는 것 같다.     시를 해석한 다는 것은 시를 분해하여, 시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시를 그 의미의 망(網) 속에 가두는 것이다. ‘이 시의 소재는 무엇이고 형식은 어떠하며, 주제가 무엇이라고’, 시를 지식화(知識化)하여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 지식을 시험문제로 출제하여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발랄하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정답 아닌 정답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왜 난해성을 시의 본질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가? 시는 해석(解釋)의 대상이 아니라 감상(鑑賞)의 대상이며, 의미보다는 상상력(想像力)이 우선되는 언어예술(言語藝術)이라는 것을 왜 외면하려고 하는가?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의 대표작 「동천(冬天)」은 현대시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暗示)하고 있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공간은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의 공간이다. 그리고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은 실체와 관계없는 언어 기호일 뿐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해석보다는 감상에, 의미보다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따라서 의미의 난해성이 이 시의 생명력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가 산문처럼 명백한 논리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면, 시의 예술성(藝術性)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예술성은 난해성 속에 들어있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시를 머리로 쓰지 말고 가슴으로 쓰자는” 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한국의 서정시인 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주관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 독백적인 시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을 거부하고, 매스컴의 비예술적 대중영합주의에 옹호를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매스컴은 대중성에 영합할 수밖에 없는 매체다. 그러나 이런 매체가 앞장서서 시의 무한한 가능성과 예술성을 무시하고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를 공격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그것은 매스컴의 횡포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2010년 1월 18일자 “시인도 알 수 없는 시, 그저 한때 소나기였으면 … ”은 시의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답답함을 안겨 주는 독선적이고 편향적인 기사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63    3.0 댓글:  조회:3768  추천:0  2015-02-19
《하이퍼텍스트3.0>>      조지p 란도   하이퍼텍스트와 문학리론에 관한 글을 쓴 [자크데리다. 롤랑 바르트, 데오도오 넬슨 안드리에스 반담을 가리킴.] 많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 네명은 중심, 주변, 위계구조와 선형성에 대한 생각에 바탕을 둔 개념체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중선형성, 노드, 링크, 네트워크중의 하나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사고에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런 패러다임이다[2쪽]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 리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많은 네트워크가 상호작용 하며 그중 하나가 다른것보다 우위에 서지 못한다. 이 텍스트는 기의의 축조물이 아니라 기표의 은하계이다. 이것은 시작이 없으며되돌아갈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출입구를 통해 이 텍스트에 접근할수 있으며, 그 경로중 어떤것도 주된 출입구라고 강변할수 없다.[3쪽]   하이퍼텍스트[넬슨이 1960년도에 만들어낸 말]라고 할때 나는 비연속적인 쓰기를 의미한다. 즉 분기점이있어서 독자가 선택할수 있도록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다른 경로를 제공하는 링크들로 련결된 일군의 텍스트덩어리이다. [4쪽]   하이퍼텍스트는 비선형적, 아니 좀더 적절하게는, 다중선형적 혹은 다중순차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동상]   사람의 마음은 … 련상에 따라 움직인다. 한가지 생각을 부여잡게 되면 련상을 통해 제시되는 다음 생각을바로 붙잡게 된다. 이때 뇌세포가 수행한 흔적들의 복잡한 거미줄구조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16쪽]   하이퍼텍스트는 현대문학과 기호학리론의 일부 주요 론점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갖고있다. 특히 탈중심성에대한 데리다의 강조, 읽기텍스트와 쓰기텍스트라는 바르트의 개념이 특히 그렇다. 실제로 하이퍼텍스트는바르트와 데리다의 두 개념과 당혹스러울 정도로 유사한 문학적형상들을 창조해냈다. 그리곤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낸 문학적 형상물은 그 개념들, 통찰과 력사적관련[혹은 새겨넣기]의 흥미로운 결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80쪽]   하이퍼텍스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용과 분리가능성에 대한 암시는 데리다가 다음과 같이 추가할 때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주어진 문맥과의 관계를 끊을수 있으며, 전적으로 제한이 없는 방식으로 새로운문맥을 무한대로 만들어낼수 있다[82쪽]   바흐친은 다의적문학에 대해 ”한가지 감각으로 구성한뒤 다른 감각을 객체로 끼워넣는 방식으로 구성된것이 아니라 여러감각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한다 감각들중 어떤것들도 다른 감각의 객체가 되는 일은 없다.” [86쪽]   하이퍼텍스트는 무제한으로 재중심화할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 시스템에서 일시적인 초점을 어디에맞추느냐는것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독자가 된다. 하이퍼텍스트의 기본적인 특징의 하나는 조직의 중심축이 따로 없이 링크로 련결된 텍스트 몸체들로 구성되여 있다는 점이다. [87쪽]   데리다는  “민족학은 탈중심이 생기는 순간에만 과학으로 탄생할수 있다” [89쪽]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련결접속되여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91쪽]   하이퍼텍스트의 읽기와 쓰기의 하나는 –인쇄본이 보관된 도서관을 탐구하는 것처럼- 아무곳에서나 시작해서로 련결할수 있다는 점이다.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처럼 “각 고원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읽어도 상관 없으며, 이들은 다른 고원들과 서로 련결되여 있다.” 이런 특징적인 조직 [혹은 그것의 결여]은 리좀이 기본적으로 위계질서와 반대되는 특징, 즉 들뢰즈와 가타르가 나무에서 발견했던 구조적형태로부터 유래된것이다.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련계된다. 하지만 리좀의 특질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특질들과 련계되는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다른 기호체계들, 심지어는 비-기호상태를 작동시킨다.” [92쪽]   하이퍼텍스트는 위계보다는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어떤것을 구현한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는 가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정보를 결합하며, 또 가끔은 우리가 독립된 인쇄텍스트와 장르, 형태라고 리해하고 있는것을 위반하면서 “어떤 지점을 다른 지점과 련결한다” … 다의성은 리좀적이며, 그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수목적인 사이비다의성을 드러낸다. 객체에서 주측역활을하거나 , 주체를 나눌수 있는 독립성은 없다”하는 들뢰즈, 가타리의 론점에서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점을발견하게 될것이다. 따라서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려되는 하이퍼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리좀은 어떤 구조적 혹은 발생적모델에 순종적이지 않다. 계보학축이나 심층구조라는 생각에는 낯선 존재이다” 들뢰즈와가타리가 설명하듯이 리좀은 “지도적이지 사본이 아니다” 【94쪽】   리좀을 담론의 한 모델로 묘사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의미작용이 없는 단절의 원리 즉 근본적으로 예측불가능하며 불련속적인 경향을 불러온다….들뢰즈와 가타리가 리좀은 “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중간뿐이다.그들은 이곳에서 성장하고 넘친다” [95-96쪽]   푸코는 사물의 질서에세 자신의 프로젝트는 동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은 “찬양받을 론쟁”을 거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동시적인 그리고 외견상으로 모순된 의견이 상호작용할수 있도록하는 사고의 일반적인 시스템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논쟁이나 문제를 가능하게 만들고 , 지식의 력사성을떠맡도록하는 조건을 규정하는것은 바로 이 시스템이다” [99쪽]   전자컴퓨팅, 특히 하이퍼텍스트와 과거 30,40년의 문학리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힐리스 밀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 관계는… 다중적이며, 비선형적, 비인과적, 비 변증법적이고 몹시 과잉결정적이다.그것은 관계를 결정하는 대부 분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는 맞지 않는다”[101쪽]   하이퍼텍스트는 두가지 방식으로 텍스트를 조각내고 , 흩어놓고 원자화한다. 첫째, 인쇄물의 선형성을 제거함으로써 개별구절을 단일한 순서로 배치해야 한다는 원칙 -즉 련속성-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해서 텍스트를 혼란상태로 바꿔놓는것이다. 둘째, 하이퍼텍스트는 고정된 단일한 텍스트라는 개념을 파괴한다. 조각은 첫번째 형태를 만들어내는  부품과 관련하여 전체 텍스트를 고려하며, 변형적읽기와의 련관성상에서 그것을 고려하게 되는것이다. [152쪽]   텍스트를 설정하는 방식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텍스트 다형태성은 텍스트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있으며, 변화하고 , 역동적이며, 열린 형태를 갖게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167쪽]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그리고 경험]은 선형성을 암시한다. 선형성의 주된 지배를 받지 않는 텍스트성에서는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이퍼텍스트성에는 선형성과 련속성이란것이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다중련속성을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엔 여러개의 시작과 끝을 갖고있다는것이 앞의 질문에 대한한가지 대답이 될것이다.[169쪽]   간단하게 말해서 시작은 일반적으로 결과로 나타나는 의도라는 의미를 포함하는것이다. [171쪽]   마지막 단어라는것은 없다. 마지막판본, 마지막 생각도 없다. 항상 새로운 관념과 아이디어, 재해석이 있다. … 바흐친에게 전체는 종결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관계이다. 따라서 전체는 종결지을수도 무시할수도 없다. 전체가 실현될 때 개념상으로는 벌써 변화를 면할수 없다…. 하이퍼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용어들로 규정하고 묘사하기 어렵다. [172-173쪽]   글쓰기는 결코 존재하기를 멈춰서서는 안되는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즉 하나의 부속물, 사건, 그리고 잉여로 말이다. …. 우리는 플라톤적인 텍스트, 즉 그자체로 닫혀있으며 내부와 외부를갖고있는 완성된 테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텍스트라고 불리곤 했던것, 한때 이 단어가 동일시한다고 생각했던것-즉 작품의 시작과 끝, 한가지 총체의 통일성, 제목, 여백, 쪽지표시, 기본구성의 바깥에 있는 참고문헌령역 등- 의 지속적인 경계를 형성하는 모든 한계를 무력화 한다.[174-175쪽]   중심성이란것은 오로지 순간적으로 존재한다. [189쪽]   하이퍼텍스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저자를 재구성-재작성-한다 [190쪽]   상징으로서의 유추는 그것이 뛰여넘는 경계로부터 힘을 얻는다. 경계가 없다면 링크에 의해 만들어진 링크들은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것이다. … 내가 빈약하거나 비효률적이라고 한것은 그것들이 명백하게선형적인 텍스트에 멋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308쪽]   (소설에서) 개별 렉시아((돌진, 급격한 증가)는 독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부가적인 링크들을 따라가길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국 하이퍼텍스트는 여전히 텍스트이며, 글쓰기이다. 우리는 좋은 글쓰기의 많은 장점들과 링크가 있는 글쓰기를 구분한는것이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말로 하면 뛰여난 하이퍼텍스트는 링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것은 아니라는것이다. 링크를 둘러싸고 있는텍스트가 또한 문제로 된다. 왜냐하면 개별 렉시아안의 글쓰기와 이미지의 품질이 하이퍼텍스트의품질에 핵심적인 역활을 하기때문이다. 특정 렉시아의 콘텐츠(내용, 목록)에 만족한 독자가 그 렉시아에서 다른 렉시아로 향하는 링크를 따라가고싶어 하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작가든, 아니면 단순한 텍스트 작가든, 작가라면 누구나 직면하는 문제는 단순하게 정의하면 어떻게 하면 독자를 계속 읽게 만들것이냐로 요약할수 있다.[309쪽]   하이퍼텍스트시를 써왔던 월리엄 디키는 다음과 같은것들이 하이퍼텍스트시의 훌류안, 혹은 유용한 특징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하이퍼텍스트시는 그것의 부분, 연, 이미지 중 어떤것으로부터 시작한 뒤 시의 다른부분이 그것을 이어갈수 있을것이다. 이런 조직체계는 어떤 한 카드에 기술되는 시의 부분은 그 시에 포함된다른 어떤 진술의 뒤나 앞에 나올 때도 시적의미를 생성할수 있도록 충분히 독립적인 진술이 되여야 한다 ” [340쪽]   시의 목적은 텍스트의 조건을 보여주는것이다. 시는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의 텍스트적활동을 자신의 기본주제로 삼는것이다. …시는 또한 하이퍼텍스트 웹내에서 가장 예기치 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399-400쪽]   아래에 에서 인용한 하이퍼시 한수   영웅의 얼굴 조슈아 래파포트    늙은 바이나모이네넨이 노래부른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지구가 흔들리며 구리산이 떨어진다 억센 옥석들이 덜커덕 굴러가며 절벽이 둘로 갈라지고 돌들이 해변을 철썩 때린다 그는 젊은 요우카하이넨을 노래한다 그의 칼라활에 묘목을 얹고 말의 멍에엔 버드나무 관목 발자국끝에는 호랑버들 그의 금테 두른 썰매를 노래하며 바닷가에 있는 갈대에 구슬로 매듭지은 그의 채찍을 노래한다   바이나모이넨; 영원한 현자라는 뜻, 칼레라바의 주인공 요우카하이넨; 바이나모이넨의 라이벌. 둘은 노래 경연을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면 녀동생을 바이나모이겐에게 주기로 한다. 요우카하이넨이지고 그의 녀동생이 자살을 택하자 요우카하이넨은 바이나모이넨을 죽이려고 하나 성공못함   ”  
62    퍼포먼스 시집 평설 댓글:  조회:4463  추천:0  2015-02-18
    머리말과 평설 하이퍼, 퍼포먼스, 기타   문덕수     [1] 이선(李仙: 본명 李因仙)은 2007년 ������시문학������신인작품당선작의 종심에서 이선이라는 펜네임으로 등단했습니다. 그 후에 하나은행이 공모한 시부문에 특선(2004),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은상(2004), 웹진의 ������올해의 좋은시������100선에 선정(2011), 제8회 푸른시학상수상(2011)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이선은 현대시인협회 사무국장입니다.(그의 신인작품상 심사한 심상운님이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으로 당선된 후 그를 사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번에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의 상재를 축하합니다. 말하자면 이 글은 축하하는 머리말과 평설을 겸한 사족(蛇足)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선은 잠자는 시인이 아니라 늘 깨어서 눈을 뜨고 사물을 관찰하고 그 참 모습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톡톡 튀는 시인’입니다. 그의 시에 “하이힐의 또각또각”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만, 그의 톡톡 튀는 발랄한 모습을 연상시켜 그의 시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톡톡 튄다”는 무슨 뜻일까요? 사전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바로 이 시인에게 해당되는 몇 가지를 골라봅니다. 1)무엇이 여러 번 터지거나 부러지는 소리, 2)나가다가 여러 번 거치는 모양이나 부러지는 소리, 3)여러 번 튀는 모양이나 소리 등. “여러 번 슬쩍 하는 모양이나 소리”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슬쩍”은 이 시인에게 적용하기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선이라는 시인 을 특히 괄목(刮目)하는 것은 톡톡 튀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냥 특이하다,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차원에서 이선은 톡톡 튀는 시인입니다. [2] 이선은 다소 예언적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 젖혀두고 이미 유명해진 여러 여류들과 비교하면서 연상해봅니다. 이것은 이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것보다 그녀에게 무엇인가의 기대를 은밀히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프랑스의 여류작가인 조르즈 상드(George Sand, 1887~1961)입니다. 처녀작 『앵디아나』(Indiana)를 비롯하여 100여 편의 소설을 쓴 여류입니다만, 상드와 이선을 등가의 인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선에게 상드와 같은 많은 작품의 생산을 기대하는 그런 은밀한 소망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선은 가끔 한국의 ‘사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신화적 존재인 여류시인 사포(sapphōp, 기원 전 7세기 무렵의 그리스 여성 서정시인)와 연상해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근거 없는 부정적인 소문과 연관짓고 싶지 않으며 다만 사포와 같은 높은 성가(聲價)를 지닌 서정시인이 되기를 바라는 은밀한 소망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나혜석(羅惠錫 1896~1949)은 어떨까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나혜석처럼 가정을 무시하는 페미니즘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선의 부군은 정말 너그럽고 훌륭하고 이선의 시를 소중히 여기며 일가가 모두 그녀의 시의 온상이 되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여러 다른 여류와의 연상작용은 그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이선의 시는 프리다 칼로(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여성화가)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브르통(1896~1966)이나 데스노스(1900~ 1945) 같은 사람이 아니라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칼로” 같은 엉뚱한 인물을 등장시킨 것도 이선의 톡톡 튀는 성격에 그 원인을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프리다 칼로」라는 작품부터 들기로 합시다. 이 작품의 배경은 거의 누드나 다름 없이 얼굴과 두 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발가벗고 있고, 가슴과 배꼽까지 두 유방을 드러낸채 띄엄띄엄 흰 고정대로 감기어 있고 거기에 ‘못’ 같은 것이 꽂혀 있습니다. 엉덩이 이하는 침대 시트 같은 천으로 걸쳐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신이 못으로 박혀 있음은 주체의 내면적 고통을 암시한 것 같습니다.   “똑바로 서! 총구가 흔들리지 않도록…” 흰 가죽 고정대가 내 몸을 긴장시킨다 서른 번 수술하고 가까스로 살아낸, 성스런 몸 내 몸의 신전 기둥에 열대 모래바람이 탕탕, 못질을 해댄다 (지금, 춥고 아픈데…) -「프리다 칼로·1」에서 이런 대목의 사건 진상은 알 수 없으나 30번이나 죽을 고비에 직면했다가 병원에서 수술로 살아난 절망적인 고통 속에서 30번이나 소생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의 주체가 겪은 고통은 물론 이것만이 아닙니다. 특히 “여동생이, 남편 디에고와 잤어...”라는 대목은 이 주체인 내면적 고통의 가중(加重)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2」로 옮겨가서 봅시다. 「자화상·다친 사슴」 의 부제가 있습니다. 이 시는 먼저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의 그림을 제시하고, 그 다음에 시가 있습니다. 디카시를 연상하게 합니다. 밀림 속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은 사슴의 주행 그림입니다. 앞발이 몸 앞으로 내닫고 있고, 두 발이 그 뒤를 따르는 이 모습은, 전신에 화살의 고통이 꽂혀 있는 모습으로 매우 참담함을 느끼게 합니다. 모가지 밑으로 네 개의 화살이 꽂혀 있고, 배와 등에 다섯 개의 화살이 꽂혀 있습니다. 어쨌든 화살의 수가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화살이 영혼의 내면적 고통을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의 삶의 고통이 역설적으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즉 패러독스의 시입니다. 이 역설의 사슴은 바로 초현실주의의 화가인 프리다 칼로 자신이며 자신의 고통의 현실과 그것을 초월하지 못하고 있는 형이하학적 삶을 그대로 노출시킨 그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름달 삼킨, 앞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별들의 왕녀인 안드로메타가 가장 사랑한, 라임나무 열매를 훔쳐먹은 죄로, 나는 노새 사슴이 되었다 목자자리, 아르크투르스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2」 부분   여기서 프리다 칼로의 그림 「다친 사슴」은 바로 프리다 칼로 자신이며, 동시에 이 시인(李仙)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 예민한 입맛,/ 가는 목소리, 큰 창자 길이와 작은 창자 길이,/ 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합한 거다”(「셀룰러 메모리」에서. 윗 부분은 이선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일성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고 있는 작자의 태도에서 이 작자의 자화상의 실존적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 다친 사슴은 벗어날 수 없는 2중의 고통 현실에서 동작(주행)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냥꾼의 표적이라는 점, 둘째는 이 밀림에서의 탈출 불가능이라는 사실, 이러한 겹친 고통 속에서의 삶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고통을 짊어진 동작은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삶 자체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1연에 나오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는 바로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면서 멕시코의 유명한 민중화가입니다. 그런데 이 남편은 믿음의 존재가 아니라 프리다 칼로의 작품(「프리다칼로·1」)을 보면 바로 그녀의 여동생과 동침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프리다 칼로는 애인인 남편을 여동생에게 빼앗기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자기 몸에 살인적인 많은 화살을 빼지 말라고 타자와 자기에게 다짐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힘들다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4] 이선의 시집 앞쪽에 「( )와 ( )사이」라는 시에는 ( ), { }, [{((( )))}], 《 》 등의 기호가 보입니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의 대목이 보입니다. 너와 나 사이 흐르는 강물,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 사이로 빌딩이 자라고 있는 장소는 모두 그 형태가 안 보이는 허처(虛處)입니다.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허무나 여백(餘白), 공백(空白)을 여러 가지 괄호(기호)로 처리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호를 대동하고 사는 존재입니다. 이 시의 3연은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이/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라고 하는데, 이 대목의 ( )는 상실한 연인 또 헤어진 연인, 혹은 단절된 절친한 믿음 등을 가리킵니다. 즉 상실(喪失), 이별(離 別), 단절(斷絶), 배신(背信) 등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기호를 지닌 실존입니다만, 그 기호에 어떤 의미나 기능을 부여한다는 점은 삶의 뭣인가를 부가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 )  { }   [ ] 《 》 이러한 도형을 흔히 기호(sign)라고 합니다. 시에서 이러한 도형을 처음 쓴 시인은 이상(李箱)입니다. 나는 이상을 초현실주의 시인이라기보다 ‘기호시인’으로 간주한다는 말을 다른 논문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기호는 오남구(오진현), 김영찬 시인 등이 즐겨 썼습니다만, 이선의 이 기호는 이들과는 또다른 의미의 것입니다. 이러한 기호 쓰기는 시에서 거의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되며, 넓은 의미의 하이퍼시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5] 이선의 시에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가 있습니다. 부제는 「샤갈의 잠」입니다. 이 시는 이선의 하이퍼적 이미지 만들기의 원인을 알려주는 좋은 보기입니다. 「빨간 손바닥의자」도 매혹적인 하이퍼시입니다.   꽃사과 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놓았다 바람타고 줄기타고 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의 1연   이 시는 제목부터 하이퍼시입니다. “물고기의 레이스”라는 대목에서, 수족관이나 연안바다나 심해에서 많은 물고기들이 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어군을 TV영상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만, 바로 그 어군 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상 이미지의 대조에서, 우리는 보이는 어군과 안 보이는 어군의 역설적 대조를 느끼게 됩니다. 이선의 하이퍼시에서 느낄 수 있는 패러독스입니다. 하이퍼시를 패러독스의 시라고 하는 이유의 일단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전봇대 위를 날다”라는 대목의 기발한 초월적 이미지를 느끼게 됩니다. 물고기의 대군(大群)이 이동하는 바다 속의 “전봇대 위”라는 이미지가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러한 불가능이 가능성의 현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전봇대”는 육지에서만 가능한 이미지입니다만 물고기만의 레이스가 있는 바다에는 육지의 연결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를 시 독자는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시가 생산하는 신비적 이미지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의 ‘꽃사과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놓았다고 합니다. 이선의 하이퍼적 방법의 비밀을 말한 대목입니다.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며, 통일 왕국의 확립자인 (히)dāid, (영) David(재위 B.C. 999~B.C.966)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통일은 북쪽의 다마스커스에서 남쪽으로는 홍해(紅海)에까지 미쳐 이스라엘의 전성기가 됩니다. 다윗의 도상(圖像)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며, 특히 구약 시편의 작자이고 수금(竪琴)의 명수(名手)로서 악사(樂士)와 무용수(舞踊手)들의 중앙의 왕좌에 앉아 수금을 연주하거나 수금을 손에 들고 춤을 추는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선이 인용한 ‘다윗’은 바로 이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바람 타고/ 줄기타고/ 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라는 대목에서 숨겨 놓은 비파가 하얗게 소리지르는 것은 이선의 하이퍼적 감각적인 장치가 어떤 것인가를 추측할 수 있게 하고,(숨 겨 놓은 것은 이선의 하이퍼 이미지 창조의 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옛날 장자(莊子: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의 “천뢰”(天籟)와 “지뢰”(地籟)도 연상하게도 합니다. 장자의 천뢰는 어떤 소리일까요. “너희들은 인뢰(人籟)는 들었지만, 아직 지뢰(地籟)는 듣지 못했지. 인뢰란 피리나 퉁소 소리를 말하는데 이것은 소리를 내는 기물이지. 지뢰라는 것은 바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천지의 울림이다. 그것은 나뭇가지를 흔들어서 내는 소리다. 이쪽에서 쪼톡쪼톡 하는 소리가 난다. 저쪽에서 살랑살랑 나뭇잎이 흔들린다. 나무 속에는 구멍이 길게 뚫려 있어서 바람이 와서 그것에 닿으면 소리가 난다. 바람에게 물어보면 바람인 자기가 그 소리를 냈다고 하고, 구멍에게 물어보면 구멍인 자기가 그 소리를 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하면 무엇이 바람을 불게 하고 무엇이 바람으로 하여금 구멍에 닿게 하는가, 다시 말하면 우주의 진정한 지배자(장자는 이를 “진재”(眞宰)라고 한다)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천뢰”(天籟)를 진정으로 듣게 됩니다.” 라고 말한다. 이선의 시는 단지 다윗의 수금 소리만을 듣게 하지 않고, 장자의 “천뢰”(天籟)까지 연상하여 듣게 합니다. 이 시는 물론 1연에서 다윗, 2연에서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 3연에서 신데렐라의 설화 등과 연결되어 하이퍼시로서의 여러 가지 다양성을 풍부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샤갈 꿈이 동시에 이 시인의 꿈입니다. [6] 시 「숨은그림찾기」는 하이퍼시인지 아닌지 잘 분간이 안 되나 그림(‘그림’도 기호의 일종이다)과 언어시와의 융합과 보완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하이퍼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림에서 숨은 그림을 찾는 것은, 시를 수수께끼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 작품 (시의 의미 찾기를 무슨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는 것과 같은 식으로 쓰는 시인도 볼 수 있습니다)입니다. 그림도 기호(sign)의 일종이고, 그림에서 숨은 그림을 찾는 것은 꼭 어떤 퀴즈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어떤 유희(play)가 내재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시가 너무 엄숙한 방향으로 기우는 것을 가능한 한 막는 것 같습니다. [7] 어떤이는 하이퍼시를 “미친놈의 잠꼬대”라고 말하고, 어떤이는 출판기념회 석상에서 “군소리”라고도 말합니다.(한 단체의 수장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의 욕설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만, 시인이면 시의 구조가 무엇인가를 알고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이퍼시의 본격적 논의를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는 비유구조로 되어 있고, 모든 시는 비유와 비유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인을 두고 미친사람의 잠꼬대라는 말은 모든 시인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 의하여 환기된 새로운 인지(認知)의 도식은, 파악할 수 없는 애매한 존재를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인식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인식”이라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비유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인식은 결코 ‘진실 자체’일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관념시가 그렇고, 관념을 벗어나 탈관념의 시에서도 그렇습니다. 가령 “사람은 갈대다”라는 은유는 결코 사람과 갈대를 완전한 동일성 또는 유사성으로서 납득시키면서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은유나 상징을 사용해도 사람과 갈대를 그 일부밖에는 동일시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사람과 갈대를 결부시킨 것은 넓은 의미에서 하이퍼적이라고(적어도 처음에는)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빌딩이다”도 하이퍼적 은유입니다만 사람과 빌딩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 관계는 그래도 가능한 연결입니다. “은유는 천재의 표지다”라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의 심성(心性)은 양(羊)이다”도 은유입니다. ‘그’와 양(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만, 이 경우 ‘그’는 본의(本ム義)이며 양(羊)은 유의(喩義)라고 합니다. 하이퍼시의 경우에 도입되는 양, 강, 바다, 신(神), 표범, 빌딩 등 무엇이든지 유의의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이퍼시에 있어서 일반적 스타일입니다. 하이퍼시의 하이퍼성은 시의 일반적 비유 구조를 극대화한 것입니다. [8] 이선은 「프리다 칼로」라는 시를 3편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리다 칼로 그림을 시의 머리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프리다 칼로의 그림도 일종의 비유로 생각한 것입니다. 전신에 못이 박힌 칼로나 모가지 밑과 배와 등에 화살에 꽂힌 이 다친 사슴의 그림, 이 그림은 비유(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교유(交喩 diaphor)라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못에 박힌 자화상이나 화살에 꽂힌 사슴은 고통, 신음, 죽음, 절망(絶望) 등의 유추로서 이 그림을 통하여 시인 자신의 처한 환경적, 또는 내면적 고통의 어떤 유사성(동일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삶이란 이런 것임을 적나라하게 유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교유(交喩)라고 할 수 있고, 모든 하이퍼시는 기존의 시가 가지고 있는 유추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가 나는 것들은 제 속을 비우고 산다」라는 이선의 다른 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피리, 북, 장고 내장을 모두 비워낸 소리를 낸다 세상 밖으로 제 살을 모두 밀어내고 속을 후벼 파내어 바람의 계단을 밟고 홀로 허공을 울리며 올라가는 소리 -「소리가 나는 것들은 제 속을 비우고 산다」 부분   이 시에선 피리, 북, 장고 등의 악기를, 내장을 지닌 생명체라고 본 것 같습니다. ‘내장’이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합니다. 은유이긴 하나, 신진(辛進)이 말한 ‘차유’(差喩)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 같습니다. 피리의 내장, 북의 내장, 장고의 내장이라고 하여 생명체로 본들, 결코 본래의 악기(피리, 북, 장고 등)와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이를 더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시는 어떤 결론이나 결과를 나타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시라는 것은 진실의 세계로 접근하는 멀고 먼 그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선이 「프리다 칼로·1, 2」에서 아무리 칼로를 유추하여 인용했다고 하더라도(인용해서 비유하는 것을 引喩라고도 한다) 온 전신에 못박힌 것이나 화살이 꽂힌 그 고통은 프리다 칼로라는 화가 자신의 고통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이퍼시의 비유로 도입한 본의는 결코 처음 나타내고자 한 고통과 동일하지도 유사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갈대다”에서 사람과 갈대가 동일하게, 유사하게 같지 않음과 같은 것입니다.   [9] 여기서 신진(辛進:부산동아대학교 교수, 시인)의 “차유”(差喩)에 대하여 언급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대만대 인문사회계 고등연구원장인 황준채(黃俊蔡)의 정다산(丁茶山)에 대한 연구논문으로서 다산 25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연구논문도 언급해야 하고, 특히 다산의 “사물이 원리에 앞선다”(事先理後)의 정신도 말해야 합니다만 논문을 구하지 못해서 언급을 보류합니다. 신진의 ‘차유’의 제기논문은 「시의 4형 고」(한국시학연구 제16, 2006)인데, 볼프강 카이저(Wolfgang Kaiser)의 ������언어예술작품론������(대반출판사, 1982)에서 언급한 서정시의 세 가지 양식에서 힌트를 받고, 카이저가 제시한 3유형 외에 “거부의 시”를 첨부한 데서, 시의 기본구조라고도 할 수 있는 유추구조인 은유, 환유 외에 차유로서 도입함을 암시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차유론은 최근의 신진의 논저 ������한국시의 이론������(산지니, 2012)에서도 상론되어 있습니다. 신진의 이 논저에서 “차유는 은유와 환유에 대비되며 문자 그대로 차이성의 비유란 의미이다. 은유가 유사성에 의한 대치(substitution)를, 환유와 인접성에 의한 연결(contexture)을 지향한다면 차유는 차이성에 의한 긴장(tension)을 지향한다. 꿈의 작용과 관련하여 추론하자면 응축과 치환이 환유의 원리이고, 상징이 은유의 원리이다. 모순은 차유의 원리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진(辛進)이 처음으로 제기한 “차유”(差喩, transphor)는 혹시 하이퍼적 이미지의 연결 원리가 차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기인합니다.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10] 이제 이선의 작품을 예로 들어 차유의 실례를 조금 검토해 볼까 합니다. 이선의 시에는 하이퍼시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녀는 체질적으로 하이퍼시인입니다.   우울증 80%로 벽 속에 갇힌, 여자 고양이 아홉 마리 애꾸눈, 절름발이 개 두 마리와 산다 -「점검 안내」 전문   이 작품은 어떻습니까. 하이퍼시입니까. “…벽속에 갇힌 여자”라는 대목은 아날로그 시로 간주됩니다. 갇히지 않고 벽 바깥에 있는 여자와 벽 속에 갇힌 여자와의 관계에서 그 사이에 초월의 의미가 심각하게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만, 그 다음의 “고양이 아홉 마리” 이하의 대목에서는 초월의 의미가 너무 심각하게 느껴져서 하이퍼시라는 확신이 듭니다. ‘초월’의 의미도 독자의 수용하는 감각의 정도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꾸눈, 절름발이 개 두 마리와 산다”는 대목은 전연 현실적 가능성이 없고, 그것은 현실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프리다 칼로」에서 프리다 칼로의 「다친 사슴」 같은 그림은 이 작자의 고통 즉 삶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를 비유구조라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전신이 살인적 화살이 꽂힌 상황과 이 시의 작자인 주체(이선)의 고통이 꼭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 경우 고통의 차이성에 관심을 집중하면 이 그림의 도입(보조관념의 도입이며, 본관념은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은 신진 교수께서 제기한 차유(差喩)라고 할 수 없을까요. ‘고통’이라는 추상에서는 유사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고통의 구체적 감각은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의 비유는 ‘차유’인지도 모릅니다. 은유나 환유라고 말하기보다는 ‘차유’라고 하는 것이 더 실감이 납니다. 이선의 시에 “페이지가 접혀/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 도입된 니체,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은 모두 유의(喩義:보조관념)입니다.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는 니체”는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는 니체적 기질(또는 니체적 이단자의 반 기독교적인 기질)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하의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은유도 니체의 예와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의 비유는 모두 은유(隱喩)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설사 하이퍼 시의 본질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시의 일반적 비유구조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은유’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이퍼라고 해서 시의 본질적 구조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이퍼시의 하이퍼는 은유, 환유, 차유 등의 본질적 구조에서 벗어나 있지 않음을 여기서 강조해 두고자 합니다. 차유는 하이퍼시에서 굉장히 큰 기능을 합니다. [11] 이선의 시는 일률적으로 하이퍼시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시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녀는 하이퍼라는 전제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모더니즘, 이미지즘, 전통시, 낭송시, 드라마 ―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의 영향이 돋보입니다. 어느 시를 읽어도 톡톡 튀는 이선의 특색이 보입니다. 뭔가 다른 시인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특색이 있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간주됩니다. 이선의 시에 “나를 쏟아내어도 쓸 것이 없네요,/ 내가 없어요/ 낡은 잔소리 웅얼거리는”(「이력서」)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 “내가 없어요”라는 시구도 있습니다. “내가 없어요”는 무슨 의미일까요? 자기의 기준을 무화(無化)시킨다는 의미이겠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서 는 먼저 사물존재라는 대상을 보며, 그 대상과 어느 정도의 알맞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자기를 무화시킨 후의 객관적 감각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 경우 “대상 -언어-시인”이라는 이 관계구도는 대상인식의 형식입니다. 나는 여기서 특히 대상과 주체(시인) 사이의 ‘거리’를 중요시 하고, 이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거리를 무시하고 대상과 시인이 일체(一体)가 되어야 대상을 자기화(自己化)하는 것은, 그것이 서정시 제작의 기본이라고 하더라도 하이퍼시를 쓰기엔 부족한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대상-주체(시인) 사이의 ‘거리’를 가져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을 ‘심미적 거리’(審美的距離aethetic distance)라고 합니다. 미국의 1970년대 비평가인 J.C. 랜슴이 주장한 이론입니다. 누가 주장했던 간에 대상과 주체가 접근하여 하나가 되면 대상은 보이지 않고, 또 반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대상은 조그마한 점으로 소실되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대상의 보임에는 여러 가지 객관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아르케올로지(arckeologie)라는 말은 원래 고고학(考古學)을 의미합니다만, 아르케올로지는 ‘시원’(始源)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앞에서 말한 대상- 주체 사이에 알맞은 거리를 설정하는 것은 하이퍼시의 아르케올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적 틀을 이선은 나름대로 체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필자는 1)하이퍼성(性)은 시의 본질적 구조의 확대라는 점, 2)하이퍼시에서 대상과 주체 사이에 반드시 ‘거리’를 두어야 함을 특히 강조했습니다. 이선의 첫 시집 상재를 축하하면서 이만 펜을 놓습니다.  
61    하이퍼시와 퍼포먼스시 댓글:  조회:4009  추천:0  2015-02-18
퍼포먼스 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인 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                  -이선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                                                      심 상 운(시인, 평론가)   1. 들어가는 글    이선 시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에 담긴 55편의 시들은 도전적인 자세와 거침없이 펼쳐지는 창조적인 이미지의 공간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 충격은 첫째로, 이 시집의 1부에 수록된 퍼포먼스 시편들이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공연시(perfomance poetry)의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체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작은 현상 같지만 시사적(詩史的)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극시나 시극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1시간 이상 공연되는 연극의 대본(희곡)이지만, ‘퍼포먼스 시’는 보통의 짧은 서정시를 시인이 5~7분 동안 무대에서 연출하여 보여주는 시이다. 그래서 퍼포먼스 시는 이미 존재하는 극시나 시극과는 성격이 다른 독립성을 갖고 시사적인 면에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 시집의 퍼포먼스 시편들은 ‘공연을 위한 시’의 극적 요소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이 공연을 통해서 시의 이미지를 온 몸으로 시현(示顯)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이선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면서 배우라는 투철한 자기인식 속에서 자신의 시를 적극적으로 공연(公演)하고 있어서 다른 시인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퍼포먼스는, 획일적인 무대에게 주는 나의 문학을 향한 ‘사랑 이벤트’다. 시낭송 퍼포먼스에 대한 사랑, 완성된 무대를 향한 노력과 열정은 평생 내 문학적 목표가 될 것이다.”(시인의 말)라는 그의 말이 시에 대한 열정을 얼마나 뜨겁게 나타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런 그의 열정적 행위는 1960년대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현실참여시의 깃발을 들고, 큰 충격의 결과를 남기고 간 김수영 시인이“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1968,「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발췌)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와 김수영의 현실참여시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곳에 위치하지만 시에 자신의 온 몸을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둘째로는 에 대한 도전이다. 그는 21세기 새로운 시론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예리한 언어적 감성으로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써 내고 있다. 이 시집 2부에 수록된  하이퍼시에 대해 그는 “하이퍼시의 목표는 ‘새로움’과 ‘초월적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이퍼시를 쓰면서 ‘회화성’과 ‘공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디지털적 영상감각을 도입하여 시를 디자인한다.”(시인의 말)라고 하면서 하이퍼시와 퍼포먼스 시의 창조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의 영상성을 퍼포먼스 시에 도입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 밖에도 3부에서 보여주는「가족(이웃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존재론적 의식 추구와 그늘진 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던져주는 전율감도 충격적이다. 4부 「야생화」, 5부「표절시비」등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왜곡된 현실에 대한 그의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은 독자들을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이 시집의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문제에 대한 친절한 해답을 주는 대신 문제에 대한 ‘화두(話頭)’를 던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이선 시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작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의 제목을 라고 했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이미지에는 무의식 속을 흐르는 사유(思惟)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포퍼먼스 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은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고 했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기표의 이미지는 인간의 의식구조와 같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있다.  따라서 무의식(無意識) 속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는 이런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현대시의 창조적인 변화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는 ‘시+공연’의 방법으로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형성된 신명나고 즐거운 새로운 시의 마당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이 시집의 표제가 된 첫 번째 시 「빨간 손바닥 의자」에는 그런 시인의 의도가 표출되어 있다.   눈 덮인 수명산 공원까페, 빨간 손바닥의자/(지금 여기)/앉아있는, 긴 머리 여류시인//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가 그녀를 떠나버린 뒤부터였을까?/ ―뒤가 늘 허전한 그녀//지금 그녀를 떠받들고 있는 손들도/ 언제 갑자기 빼버릴지 몰라,/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지난번보다 빨간 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불안하다,//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한 컵 푸른 사과향기// 하얀 접시 위, 피자 위, 소년의 잘 익은 눈빛 위,/ ―토마토페이스트처럼 붉은 뺨, 소녀/소녀 엉덩이 아래, 의자 엉덩이 아래,/ ―가볍게 눌려 킥킥대는 농담// “빨간 손 줄까?”/ “파란 손 줄까?”// 고무줄 끊던 짓궂은 소년, 새까만 손/ (그때 거기)/ 싱거운 농담도 따뜻했다,// 빨간 손바닥 의자,/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를/ 다시 끌어다 앉힌다// ―「빨간 손바닥 의자」전문    이 시에서 무엇보다 먼저 감지되는 것이 퍼포먼스의 기본이 되는 ‘행위(行爲)’이다.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등 시 속에서 벌어지는 동적상황이 그것이다. 시인은 리포터의 위치에서 은유와 환유로 형성된 상상의 언어와 행위의 이미지로 하나의 상황을 제시하고 독자(관객)를 그 세계로 유인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빨간 손바닥의자, 긴 머리 여류시인, 그녀의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소녀/ 소녀,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 등은 한 여자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은유와 환유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런 추상적(抽象的) 상상은 이선 시인의 무의식의 표출이라고 유추된다. 시인은 자신의 무의식을 객관화하여 시적상황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의해 불안한 현재, 푸른 사과 향기 같은 환상적인 과거의식, 그리고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모습(미래)은 시인자신의 존재의식이 담긴 이미지로 드러난다. 이선 시인은 이 시를 각색(脚色)하여 보여줌으로써 퍼포먼스 시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9)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7-9행 모션: 의자를 바닥에 꽈당, 소리가 나게 쓰러뜨린다)/ 10)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11) 지난번보다 빨간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12) 불안하다,/ 13)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14)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15)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16)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 17) 한 컵 푸른 사과향기/ (10-12행 모션: 일어나서 의자를 의리저리 만져본다)/ (의자를 툭툭, 두드려본다)/ (13행 모션: 손을 치켜들어 관객에게 보이며 손가락을 앞으로 오므린다)/ (14행 모션: 손가락을 펴서 엉덩이를 찝는다.)/ (15행 모션: 탁자위의 유리컵을 든다) / (16행 모션: 컵을 들고 물을 주르르, 흘러넘치도록 따른다)/ (17행 모션: 컵을 코에 대고 행복하게 냄새를 맡는다) ―퍼포먼스「빨간 손바닥 의자」부분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도 존재의식의 객관화라는 점에서「빨간 손바닥 의자」와 같은 무의식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추상적인 상상에서 벗어나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라는 사실적 화두(話頭)를 제시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유전자(遺傳子)로 추적하는 사유가 자유분방한 상상과 결합되어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그리고 시의 화자로 ‘나’를 등장시킨 직접 화법의 기법이 시적감각을 상승시키고 독자와의 거리를 밀접하게 한다.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 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 해와 달, 별이 내 줄기세포를 키우는가보다/누군가 나를 지었다, / 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 예민한 입맛,/ 가는 목소리, 큰창자 길이와 작은창자 길이,/ 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립한 거다 //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 페이지가 접혀, /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 토스토에프스키,/ 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 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 / 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 나의 詩도 파랑색이다,/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 나의 詩에는 적도의 피가 들끓고 있는데/ 러셀의 연애론보다 더 겁쟁이인 불쌍한 나의 詩, / 감염되지 않은 단어가 내 시에 한 줄이라도 있을까?/ 내 생각의 껍질까지, 타인의 유전자가 흐른다 / (어머니의 눈으로 본 아버지,)/ (언니의 코로 맡은 돈 냄새,) / 내 몸의 세포조직엔 적도의 바람과 햇빛이 녹아 있다/ (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인이라고 흥분하던 KBS,/ 9시 뉴스앵커, 내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는 분명 남방계다) // 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나무들 밑둥 잡고, 땅에다 오늘도 열심히 글씨를 쓴다/ 제 생각을 뿌리째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 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 / 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 내 굴절된 파장이/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 내 할딱이는 심장에 붙여주고 갔듯이, // 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전문 *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장기이식 후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 애리조나주립대학 심리학 교수, 게리 슈왈츠(Gary Schwartz)가 처음 발견함.    이 시도 각색한 시를 보여주고 있다. 3인이 등장하는데, 2인은 보조 출연자이고 1명이 주도하는 1인의 포퍼먼스 시다. 시의 내용과 퍼포먼스가 예상치 못하는 결합을 하지만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를 얻는다.   #1 1) 남녀 2명이 무대에 나와서 를 부른다./ 2) 1절― 여자, 2절― 남자, 3절― 남녀 같이/ 3) 1―2절 노래하는 동안 낭송자 1은 파란 의상과 파란색 긴 스카프를 휘날리며/ 무대 아래에서 춤을 추며 행위예술을 한다. / 4) 춤을 추는 사람이 따로 있고, 낭송자는 시만 낭송하여도 좋다./ 5) 스카프를 휘날리며 관객 사이를 뛰어다니며 춤을 춘다./ 6) 파란색 구두를 벗어 무대 옆에 가지런히 놓는다./ 7) 스카프를 앞으로 높이 들고 관객을 스텝을 밟으며 무대와 관객을 가른다./ 8) 다시 스카프를 높이 하늘로 치켜들고 춤을 춘다./ 9) 다시 관객 사이로 뛰어다니며 스카프를 뒤로 휘날린다./ 10) 관객 머리 위로 스카프를 가볍게 휘날리며 무대 쪽으로 나온다.// ―퍼포먼스「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앞부분   「커닝 페이퍼」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존재의 모습에 잠입(潛入)하고 있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의 잃어버린 자유와 시인자신의 모습이 무의식의 공간에서 만나는 상상이 이 시의 밑그림이다. 시인은 오랜 시간 모딜리아니의 광기어린 눈과 그의 모델 쟌느에 대한 연민(憐憫)의 이미지를 무의식 속에 넣고 살아 온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이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라는 독백이 진정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이 시속의 모딜리아니와 쟌느는 자크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속 타자(他者)의 환유(換喩)로 인식된다. 그것은 또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존재들이 바다에 떠있는 빙산처럼 잠재해 있다는 의미로 확대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커닝 페이퍼’의 의미도 순조롭게 풀린다. 인간의 생각이나 행위는 의식 속의 자기가 아닌 무의식 속의 타자에 의해서 조종된다는 것이다.   이 빠진 단어처럼/ 꽃잎이 톡, 떨어진다/ 나는 꽃잎을 집어들고/ 캔버스 속, 잃어버린 눈동자 속으로 잠입한다// 모딜리아니, 밥줄에 걸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 그녀의 긴 목, 초록색 짝 눈// 내가 매표소에 던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론/ 쟌느의 목을 똑바로 세울 수가 없다/ 그녀의 잃어버린 자유를 드로잉 할 수가 없다// 나는 쪽동백 하얀 꽃잎을 몇 번이고 씹는다/ 모딜리아니 광기어린 눈/ (면도칼, 임산부, 붉은 핏방울, )/ 콜록콜록, 내 입속에서 기침하는/ 꽃잎//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커닝 페이퍼,//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커닝 페이퍼」전문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도 1인 또는 2인의 공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델 쟌느 역할 여자 1.(시낭송자 1, 퍼포먼스 1로 시낭송과 퍼포먼스를 분리할 수도 있다)”그리고 ‘주의 집중’포퍼먼스를 펼친 후, 시낭송을 한다. 시낭송자는 낭송을 하며 동시에 시의 내용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연기를 한다. 시의 내용과 낭송자의 연기가 합치되는가. 그것이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반응이다.   16)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 17)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18)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19) 커닝 페이퍼,/ (16행 모션: 꽃잎, 꽃잎, - 관객을 한 명, 한 명 손을 옮기며 지적한다.)/ (17행 모션: A4 용지를 바닥에 흩뿌린다.)/ (18행 모션: 바닥에 눕는다. 태아가 웅크린 자세를 취한다.)/ 20)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20행 모션: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멀리 시선을 둔다)/  * 무대조명 천천히 꺼진다.//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끝부분   이 외에  일상으로부터 이탈된 예술가의 고뇌를 풍자한「고흐와 설사」,가족의 관계와 자신의 존재 원소(DNA)를 우주적 관점에서 조명하여 하이퍼적인 상상의 세계를 펼친「페르세우스 流星雨(유성우)」, 시인 자신의 현실적 모습을 냉장고 속의 식품으로 비유한 「이력서」,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열쇠를 잃어버렸어요」, 퍼포먼스 시로만 발표한 「버릇과 타성의 줄다리기」, 퍼포먼스 시로 각색한 이육사의 「광야」와 김소월의 「진달래 꽃」등의 퍼포먼스 시편들이 시적 긴장감과 일상에서 벗어난 신선한 사유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래서 그 시편들은 독자들을 유일하고 독특한, 육감적(肉感的)인, 진정으로 유니크(unique)한 시의 열정 속으로 끌어들여 용광로 속의 쇳물로 만들 것 같다.   나. 하이퍼시(hyper poetry)    하이퍼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다선구조), 동적 이미지를 기본으로, 독백적 서술과 주장과 설득의 거부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 형태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개혁적인 시운동이다.에서 발간한 20명의 시 선집(anthology)『하이퍼시hyper poetry』(2011년 11월 5일 시문학사)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벌여온 하이퍼시 운동의 결과물로 주변의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선 시인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발표하고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 )와 ( ) 사이에」는 에서 ‘새로운 감각과 발상, 실험의식이 있는 작품’을 선정하여 수상하는 제8회「푸른 시학상」을 수상한(2011년 11월 22일)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필자는 심사평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선 시인의 「( )와 ( ) 사이에」는 시어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 속에 ( )를 넣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숨은 의미를 찾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 )는 독자참여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공간은 수평적인 위치에서 독자와 시인이 소통하는 현대시의 탈구조적 형태를 구상하게 한다. 내용면에서도 “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에서는 괄호의 의미가 확대되면서 현대사회의 갈등의 요인이 무엇인가를 도상(圖像 icon)으로 암시하는 시적 깊이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기호시(記號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언어작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가 하이퍼적이라는 점은 (  )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 무한한 상상의 확대가 가능하고 시인은 객관적 위치에서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 사이로 / 빌딩이 자란다 / 가로수, 긴 괄호∥∥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 ) 화르르, 열린다 //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는다 //   ―「( )와 ( ) 사이에」전문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은 사과나무⟶사과⟶소녀의 꿈⟶말의 허공으로 이어지는 1, 2, 3, 4 부의 변화가 이미지의 집합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라는 초현실적인 상상의 감각과 현실의 결합이 하이퍼시의 언어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하이퍼시를 의식하고 쓴 시는 아니지만 발상과 상상과 감각에서 하이퍼시의 요소가 감지된다.      1./ 꽃사과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 놓았다./ 바람타고/ 줄기타고,/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 //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 // 2./ 사과나무, 제 살을 물어뜯다 지친/ 달빛 잘 익은 밤/ 비명소리, 사과 살만 골라 야금야금 먹는다 / 귀퉁이마다 하얗게 남아있는 이빨자국/ 하늘을 밀어내고/ 허공중/ 사과나무에 매달렸던 아담의 사과들/ 투두둑 떨어진다/ 달이 떨어진다 // 3./ 12시, 소녀가 꿈꾸던 신데렐라의 꿈도 달빛모양/ 땅에 떨어진다/ 펄럭이던 하늘빛 레이스자락/ 땅에 길게 눕는다/ 그 위에 빛이 흥건히 고인다// 4. / 휴식, 휴식이 필요해……/ 말은 말의 풀을 잘라먹고/ 잘라먹은 말의 허공, / 사과 나뭇가지에 끼어있던 햇살/ 휴식, 휴식이 필요해……/ 저것 좀 봐/ 저것 좀 봐/ 두 얼굴의 말이 나를 쫓아 안방으로 달겨든다/ 빨갛고 / 초록인, 어둠 //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전문   「숨은그림찾기」는 숨은 그림에서 연상되는 이야기가 다양하고 자유로운 이미지의 공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가오리, 8분음표, 성냥개비, 버섯, 화살표, 신발 등의 이미지는 숨은 그림 찾기라는 놀이 속 공간에 집합되어 있어서 이미지의 수평적 결합이라는 ‘하이퍼시’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숨은 그림 속에서 연상되는 이야기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미지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에는 여러 종류의 그림이 캡처되어 있습니다. / 숨은그림찾기는 늘 흥미롭지요? / 자,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해볼까요? (릴렉스 릴‥렉스)// * 온 가족이 환하게 웃는 그림이 인상적이군요./ 그럼, 먼저 가오리를 찾아볼까요? / ―(아, 술안주? 취해서 어머니에게 소주병을 던지던 아버지, 벌름거리는 콧구멍)//* 흠흠,������신발������도 찾아보시죠,/ ―(내 여자 친구에게 빨간구두를 사주고 영화관, 형, 거세해 버리고 싶었‥)// * ������성냥개비������도 어렵지 않게 찾았군요?/ ―(직장 상사가 그녀 엉덩이를 만지네. 나쁜자식! 고추를 확 불질러 버릴‥)/ * 숨은 그림에서 ������8분음표������가 자꾸만 튀어나온다고요? / ―(아이는 무릎을 꿇고 ������멍멍������ 개 짖는 소리를 내요, 친구들 책상 옆… 토끼뜀…어지러워요, 5학년, 담임)// ―「숨은그림찾기」부분    이 외에「귓속말 하기― 때, 시간, 장소, 그리고?」,「보들레르와 은행잎 편지」,「선문선답-모자이크 이미지 」,「잃어버린 동화 1」,「시인을 위하여 -감성스케치」,「빨강 스펙트럼-근친상간 , 성폭력, Red Card??」,「프리다 칼로 1-자화상〮 〮부서진 ․ 기둥」,「 프리다 칼로 2-자화상 ․ 다친 사슴 」,「프리다 칼로 3-자화상 ․ 꿈 」등의 시편에서 이선 시인이 추구하는 하이퍼시를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사유과 감정을 하이퍼시에 넣어서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쓰려고 한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유리판 같은 냉랭한 이미지만의 시에서 벗어나서 독자와 소통하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와 다른 시와의 차별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타인의 상처에 대한 치유와 하이퍼시의 특성을 결합하고 있는 이선의 시는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빈센트 반 고흐’나 ‘프리다 칼로’는 불행을 딛고 예술을 꽃 피운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그들을 시에 등장시켜서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한다. 그것이 치유의 한 방법이다. 연작시 「프리다칼로」의 주인공 프리다 칼로는 소녀시절, 전차 사고 후 척추장애로 평생 걷지 못한 불구의 화가다. 그는 평생 남편의 바람기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리다 칼로에 대한 연민은 같은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더 적극적인 거 같다.   고통스럽게 미간이 점점 밀려 맞붙는다// ―이 절박한 밤에도 / 선인장 꽃향기, 몸부림친다/ 희롱하듯 헐벗은 내 몸을 부드럽게 스쳐가는, 꽃바람// “여동생이, 남편 디에고와 잤어‥”// 내 자궁은, 알티플라노 중앙고원을 품고 홀로 잠든다/ 새벽안개가 첫눈을 치켜뜰, 때 /―초원이 용설란, 꽃잎 잉태하는 소리// ―「프리다 칼로-자화상 〮〮․ 부서진 기둥」부분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한 새 뿔을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 프리다 칼로2-자화상 〮․ 다친 사슴 」부분    3부 「가족」, 4부 「야생화」, 5부 「표절시비」 에 대한 해설은 줄인다. 그 시편들에도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현실의 문제를 포착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 자기 존재에 대한 추구가 들어 있어서 긴장감과 충격을 주고 있지만 새로운 시의 형태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3. 나가는 글    이선 시인은 자신의 시를 온 몸으로 공연(performance)하는‘행위의 시’를 통해서 현대시의 공간을 확대하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 첫 시집『빨간 손바닥 의자』는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 퍼포먼스 시의 모델을 제시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집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답답한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서 노래와 춤이 서로 어울렸던 ‘시의 원형’을 재현하려는 ‘현대시’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은 원시시대의 예술 정신과 표현 양식을 현대 예술에 접목하려는 원시주의(Primitivism)와 상통한다. 그는 또 하이퍼시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있다. 유리판 같이 냉랭한 이미지에 사유와 감정을 넣자는 것이 그의 하이퍼시 창작 정신이다. 필자는 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그의 종횡 무진한 상상을 접하고 내심 경이로움을 느꼈다. 앞으로 그의 시가 어떻게 변모하고 어떤 놀라움을 줄지 기대하면서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의 해설을 줄인다.    
60    하이퍼시 도무미 4 댓글:  조회:4481  추천:0  2015-02-18
      이석주는 70년대 극사실주의(하이퍼 리얼리즘)의 대표적 화가로서 주목받았다. 그의 회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너무나 드러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감춰진 듯한, 그리하여 그 동안 여러 분석에서 의외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채 다른 모티프들과 같은 수준에서 언급되거나 짐짓 무시되기도 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 이미지이다.    그는 왜 상투적인 느낌을 줄 정도로 시계의 이미지, 더 정확히 말해 둥근 시계판과 시간을 가르키는 숫자들, 그리고 시침을 반복적으로 재현시키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의문을 가져보아야 한다. 여기에 반복강박적인 집요한 사유의 흔적이 발견된다. 그의 이미지들은 시간과 그리고 공간에 대한 사유의 흔적이다. 그것은 또한 운동과 정지에 대한 상상력이며, 나아가서 현실과 가상에 대한 고뇌의 얼룩들이다.    클로즈업된 극사실의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매우 비사실적인 이미지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시지각은 사물의 대강의 이미지(윤곽과 특징)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연결시킨다. 따라서 세부적인 극사실의 이미지가 클로즈업 되는 순간은 사물이 시간의 수평적 흐름을 벗어나서 수직적으로 비약하는 특이한 순간이다. 그것은 선형적인 시간을 벗어나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극사실은 오히려 환상적 효과를 낳는다. 그 곳은 시간의 입자들이 증발해 버린 비현실적인 순수 공간 같은 곳이다. 이석주는 이러한 무시간적 극사실의 공간 속에 시간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그려 넣고 있다. 이것은 무척 이질적이고 당혹스러운 느낌을 준다.    시계판은 그 자체로 매우 모순적인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 즉 지속을 지시하지만 그 자신은 시간을 공간적 양으로 절단한다. 다시 말해서 시계판은 운동이면서 정지이다―이석주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원판이나 바퀴 역시 시계판의 변형 이미지이다. 또한 형태상으로도 시계판은 원이면서 직선(침)이다. 가끔 화살표로도 표현되는 직선의 침은 원을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지만 끊임없이 원으로 회귀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계판 앞에서 우리는 양가적 모순이 발생시키는 기이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시계판은 이석주가 탐색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사유를 가장 강렬하게 이미지화 한다.  이러한 느낌은 그의 기차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은 아름다움을 발작적인 것이 일으키는 경이로 보았는데 이러한 발작적 아름다움의 대표적인 경우가 ‘정지된 폭발’이다. 정지된 폭발은 움직이면서도 동시에 정지해 있는 것이다. 그 예로 브르통은 “폐허가 된 처녀림에 수년간 방치되어 있는 고속열차의 사진”과 “몸과 옷의 구분이 희미해질 정도로 빠르게 돌고 있는 탱고 댄서의 사진”을 들었다. 열차가 가진 전진 속도의 기억과 처녀림의 덩굴이 가진 움켜잡는 정지의 힘이라는 모순의 돌연한 만남, 그리고 빠른 움직임이면서 부동의 이미지로 고착된 사진이 야기하는 기묘한 느낌을 우리는 이석주의 기차에서도 익숙하게 만난다.    이석주의 기차는 긴 연기를 뿜으며 먼 곳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극사실 기법으로 클로즈업된 기차의 이미지에서는 움직임이 사라진다(물론 원경으로 처리된 기차에게서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이석주의 기차는 정지된 먼 여행이다. 시계의 시침처럼 직선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언제나 시계판의 원에 수렴된다(시계판의 원을 도는 기차 그림도 있다). 정지된 먼 여행은 회상이나 몽상의 동력학이다. 이것이 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석주의 비선형적이며 몽상적인 시공간이다.    그러나 그 몽상의 시공간은 순수하지 못하고 불온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도처에 얼룩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얼룩이 몽상의 재현 공간을 방해하고 있다. 이석주의 그림을 일별하다 보면 극사실로 재현된 환영(가상)의 공간 속에 당혹스럽게도 마구 칠해진 초록색의 얼룩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얼룩은 몽상의 시공간을 그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있으며, 얼룩을 통해 의 현실이, 현실의 시공간이 화면으로 끊임없이 개입한다. 마치 몽상을 가로막는 벽처럼. 그렇다. 그의 초기작인 은 이후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다. 그가 창조하는 환영의 시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벽은 그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환영의 공간들이 사실은 어떤 벽면이나 판자의 표면임을 얼룩의 흔적들은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얼룩은 또한 환영의 공간이 사실은 화보의 한 페이지임을 보여주는, 접히는 중간선의 흔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허공에 떠 있는 깃털이나 낙엽도 얼룩의 변형태이다. / 이성희 (철학박사, 시인)  
59    하이퍼모더니즘의 시대는 오는가 댓글:  조회:4652  추천:0  2015-02-18
하이퍼모더니즘의 시대는 오는가                                                            조명제 (시인, 문학평론가)       8월 8ㆍ9일에 있은 현대시인협회 세미나는 여러 모로 기억에 남을 행사였다. 우리 현대시 100주년 기념을 겸해 개최된 하계 세미나의 본 행사지는 안면도 자연 송림 속이었다. 100년은 좋이 묵었을 솔숲 아래에 모여 앉아 먼저 문덕수 선생님의 기조 강연 ?현대시 100년, 두 가지 제언?을 들었다. 선생님은 우리 시가 관념론적 역사주의와 관계론적 형식주의로 맞서 왔으나 지난 100여년 간 현실적으로는 관념적 실체론이 횡행하여 작품의 심미적 형식적 가치가 무시되어 온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 앞으로 관계론이나 형식론 쪽으로 눈을 돌려 집중 탐구할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두 번째로 나선 심상운 시인은 21세기 ‘하이퍼 텍스트 시’의 이해를 위한 주제 ?單線構造의 세계에서 多線構造의 세계로?를 발표하여 관심을 집중시켰다. 하이퍼미디어의 특성에 바탕을 둔 다선구조적 하이퍼시는 디지털 문명 시대의 새로운 소통법이라고 역설하였지만 일부 원로 시인들은 비논리적, 비순차적, 비선형적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 링크의 불연속적 상상의 가지치기가 어떻게 원활한 소통이 되겠느냐고 반박하는 등 잠시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 번째로 나선 필자는 ?한국 모더니즘 시의 정통 계보와 현실?을 주제로 발표하였다. 불행한 민족 문학의 사상 대립과 갈등을 허두에서 언급하고, 모더니즘 시운동의 정통 계보와 그 현주소를 짚었다. 특히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하이퍼모더니즘으로의 전개가 문덕수ㆍ김규화 주재의 을 중심으로 이뤄져 온 시사적(詩史的) 의의를 피력하여 공감을 얻었다.  세미나가 끝난 뒤 일행은 지역 시인들의 안내로 낯선 모감주나무 바닷가로 가서 휴식하고, 다시 샛별 해수욕장이라는 곳으로 이동하여 일몰을 감상한 뒤 팬션 식당 ‘신밧드의 모험’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담론하였다. 참석자들은 알선자의 호언장담과는 별개인 음식과 서비스, 숙박 환경 등 모든 면에서 ‘신밧드의 모험’에서의 모험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지난 8월 30ㆍ31일 양일 간에 걸쳐, 가평군 북면 제령리 소재 김용언 시인의 전원주택에서 열린 한국시문학문인회 제28회 ‘주제가 있는 시 낭송회’ 에서도 토론의 주된 화제는 단연 하이퍼시였다. 먼저 문덕수 선생님의 시론 ?사물과 기호?를 읽고 자유로이 질문하고 답변하는 형식이었는데, 하이퍼시의 시대적 배경이나 특성, 창작 방법 등에 대해서 주로 신규호, 심상운, 오남구, 조명제(필자) 등이 해명에 나섰다.   9월호는 비교적 전면에 ‘하이퍼텍스트 시’ 동인의 하이퍼 시집을 싣고 있다. 4월호에 하이퍼텍스트 시 동인지가 예고되고, 5월호에 기획 특집으로 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시인 등 동인들의 그 첫 번째 하이퍼시가 발표된 이후 두 번째의 기획 특집이다.                할머니 바지 길어요         짚뭉치가발 쓴 하송(下松) 마을 서낭당 돌머리 웃고 있다.         허리가 짧아졌으니까         면사무소 가는 길이 해발 오십미터 소나무고개로 휘는 시절         네 바지가 길다, 얘         상송(上松) 마을 동무와 하송 마을 고모의 수다         몸 살을 뺐거든(요)                       그만 Bar                       Diet Bar                       나의 슬림한 몸매가 부러워요?                       너도 Diet Bar해!         그러면서 그녀는 민다리를 꼰다         추수가 끝나자 찾아든 농악대들         동네 들머리에서부터 지신 밟는 그들의 숭얼숭얼한 웃음         그대의 바지가 길구나         제 높은 구두 뒤축을 부러뜨렸잖아요, 하느님         바람, 햇볕, 볏단 그리고 하늘         그동안 당신이 머리 위에서 누르고 또 눌렀어요         신의 땅 라싸 해발 오천 미터, 경전을 외는 한 무리들                                                     -김규화 ?과학적 이유 세 가지? 전문    우리 현대시가 여전히 ‘2천여 년 전 예수나 석가 시대의 비유, 상징의 기법으로 정서와 관념을 표현해’ 오고 있는 현실에 일침을 가하며 하이퍼텍스트 시운동에 과감히 뛰어든 김규화 시인은 디지털 시대의 하이퍼적 시쓰기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 가고 있어 주목된다.  이제는 적어도 출신 시인들이나 현대시협의 시인들은 그 동안 발표된 디지털리즘이나 하이퍼 시론과 작품들을 통해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는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 시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인간의 뇌 구조의 복잡한 그물망처럼 하이퍼시는 합리주의의 근본인 인과적 논리성이나 순차적 질서, 혹은 위계적 시스템을 벗어나 탈중심의 리좀(rhizome) 형태를 구축하며, 일방향적 단선구조에서 쌍방향적 혹은 다방향적 다선구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관계론적 체계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연상과 공상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가상공간을 가릴 것 없이 점핑해 가며 텍스트의 마디들을 연결짓거나 병치, 혹은 나열 등의 방법으로 공존시킴으로써 기계론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4차원적)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를 맛보게 한다.   5월호에 이어 이번에도 김규화 시인은 5편을 발표하면서 몇 가지의 하이퍼적 형식실험을 하고 있다. 인용시 ?과학적 이유 세 가지?는 세 가지 상황에서 바지가 긴 이유들을 중심으로 시 구문들의 모듈(module)화, 자유연상적 하이퍼 링크와 시상의 가지치기 등으로 관심을 집중시킨다.  우선 이 작품의 제1연은 조향의 ?아시체(雅屍體)놀이?처럼 외견상 행간의 연결이 무시된 이질적 이미지들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살펴보면 홀수행은 홀수행끼리, 짝수행은 짝수행끼리 의미 맥락이 연결되게 깍지끼듯 구성된 특성을 발결할 수 있다. 일종의 어긋매끼식 병치 구조 형식인 셈이다.  홀수행을 보면 선문답처럼 간결한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할머니와 화자가 서로 상대방의 바지가 길다라고 하면 그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답변하는 형식이다. 제1연의 화자는 아마 날씬한 몸매를 위하여 다이어트를 한 게 분명해 보인다. ‘다이어트로 몸 살을 뺀 슬림한 몸매’는 곧바로 지하철 구내에서 보아온 광고 문구로 링크되고, 그 광고 문구가 그대로 몽타주처럼 편집, 연결된다. 언어유희적이며 경쾌한 문구의 그 ‘슬림한 몸매’의 주인공은 다음 연의 첫 행을 이룬다.  ‘그러면서 그녀는 민다리를 꼰다’와 그 다음 행은 내적 맥락의 연속성을 볼 수 없는 단절적 구조로 되어 있다. 굳이 연결고리를 찾는다면 ‘민다리를 꼰다’의 ‘꼰다’이다. 다리를 꼰다에서 새끼를 꼰다로 불연속적 하이퍼 링크가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추수가 끝나고 새 지붕을 이거나 가마니를 짜기 위해 새끼꼬기에 들어가는 시절 농악대들이 지신을 밟으며 마을의 집집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하 땅신(지신)에서 높은 곳의 신 하느님으로, 하느님에서 하늘로, 높은 하늘에서 누르기로, 신기(神氣)를 가장 먼저 가장 강력하게 받게 되는 신의 땅 하면 해발 5천미터 티베트의 라싸, 가난한 그곳 사람들이 끊임없이 경건히 경전을 욀 때, 해발 5십미터 소나무 고갯길의 이 땅에서는 몸매 만들기(몸짱)에 목메고 있는 현실로 링크하여 시공과 의식, 무의식을 넘나들고 건너뛰며 집합적 결합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편의상 이렇게 해석해 보았지만, 작가의 자유분방한 하이퍼적 상상과 의식의 흐름을 어떤 틀에 가두어 해석할 수는 없다. 미국의 한 비평가는 “모든 글읽기는 오독이다.”라고 한 바 있지만, 특히 하이퍼시의 경우 글 읽기의 최종적 이해는 독자 각자의 즐거운 몫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다른 작품 ?달팽이와의 대화?는 교통신호를 기다리고 건너는 사이 달팽이를 기른다는 맹인 아이와 나눈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팽이 기르기의 특이함이나 신기함도 시읽기의 재미를 더해 주지만, 지극히 사실적인 대화에서 관념을 찾아 볼 수 없는 특성을 보인다. 마치 교통 신호처럼 하나의 기호가 되고 캐릭터(달팽이)가 되어 아이는 ‘달팽이 길로 사라진다.’ 나머지 세 편 ?빨강보다 더 빨강? ?떡갈나무 많아? ?쪽공원의 쪽공간?들도 시어의 어감이나 감각적 이미지의 분방한 연상으로 다채롭게 완성시켜 놓았다.    순식간에 내 눈의 자동 셔터가 찍은 한 컷의 동영상. 2008년 5월 25일 정오 일행들과 북한산 사모바위 틈에 뿌리 뻗어 만개한 라일락 꽃 짙푸른 향기에 취해 있을 때, 햇빛 환한 비봉碑峰쪽으로 휘익 날아가던 은백색 깃털들. 야아,  소리 지를 틈도 주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던지며 10분의 1초의 속도로 내 시야 를 벗어나는 은빛 부챗살. 그 반짝이는 부챗살은 화창한 초여름 날 산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쾌한 UFO? 그럼  지금 산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성하게 돋아난 녹색 이파리들이 노랑 하양 보라꽃들과  어우려져 한창 신명나는 판을 벌이고 있는 중! 12월 아침 아이들과 식탁에서 죽은 닭의 살점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사이프러스와  찬란한 별밤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점령해버린 은백색의 젊은 눈들. 질주하는 차바퀴에 깔린 눈들의 몸에서 나온 맑은 피는 도로에 줄줄 흐르고, 아이들은 포크를 던지고 와아, 환성을 지르며 공터로 뛰어나가고, 도시는 하루종일 은백 색의 축제. 너는 지금 사람들의 무의식無意識 속 공간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환한 불꽃들을 팡팡 터뜨리는 UFO의 고향을 찾아 네팔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고산지대白色高山地帶. 그곳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지점. UFO의 탄생지는 그곳 새파란 공기층 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심상운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전문    견고한 이미지의 모더니즘 시를 써 오던 심상운 시인은 오남구 시인의 디지털리즘 선언 무렵부터 동참, 디지털 시론과 최근 하이퍼 시의 이론을 함께 개척해 가면서 시적 경향을 그런 쪽으로 급선회하여 작품을 제작해 오고 있다.   인용한 시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는 순간 포착의 한 이미지를 좇아 의식, 무의식의 자유분방한 연상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신록의 5월 북한산 산행에서 바람에 물결처럼 뒤집히며 비봉(碑峰)쪽으로 몰리는 나뭇잎들의 풍경을 ‘은백색의 깃털’ 이미지로 순간 포착한다. 그 은백색 깃털은 ‘은빛 부챗살’로 전이되고,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경쾌한 UFO’로 건너뛴다. 이 은빛 이미지의 파노라마는 어느 12월의 식탁에서 닭고기를 먹으며 반 고흐의 그림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덮어 버린 강설(降雪), 곧 ‘은백색의 젊은 눈들’로 가지를 치며 링크된다.   그 ‘은백색의 축제’는 만년설의 나라 네팔의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 고산지대’로 뛴다. 시인은 숨 쉬기조차 어려운 고지의 ‘새파란 공기층’이야말로 끝없는 공상과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UFO의 탄생지가 아닐까라는 상상으로 텍스트를 마감한다. 별이 빛나는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바깥은 어느새 구름끼고 소리없이 눈이 내려 도시를 덮어 버린 대조적 풍경과 약간의 가지치기 외에는 주로 연상에서 연상의 확산으로 이어진 하이퍼 링크를 보여 준 작품이다.  시인의 다른 작품 ?사각 스크린?도 스크린 같은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의 역동성을 모티브로 무한 상상을 환상적으로 펼쳐 낸 작품이며, ?그림 또는 링크? ?파란색 기차? ?헤드라이트? 등도 스타일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배들녘은 풋벼의 바다, 아침 고요로운 지평선에 풍! 떠올랐다가 풍선처럼 서서히  내려오고 있는 붉은 사과, 동진강 하구에서 쌀을 실으러 거룻배가 들어왔었다는 ‘배들이’  들판! 손에 든 들판은 피켓! 손해난 ‘배 들이’어서 빚으로 들들 볶일 판 피켓 들고 전봉준이 들이칠 판, 숨을 멈추고 있는 풋벼의 바다 황혼에 내가 주먹 속에 받아 쥔 해 사과를 굴린다, 굴러가며 가르마 같은 선을 긋는다 선을 따라 불이 화~ 화~ 일어난다                                                                   -오남구 ?사과? 전문    번쩍이는 의식과 감각의 오남구 시인은 일찍이 시의 관념 파괴와 시작 과정의 심리적 현상을 수학적 논리로 증명해 왔으며, 디지털 시대의 문화 논리를 재빠르게 접수하여 디지털리즘을 선언하고 작품적 실천을 주도함으로써 시단의 주목을 받아 왔다. 그리고 비록 미국보다 20여년 뒤의 일이요, 우리에게 하이퍼 문학이 소개된 이후 5?6년 뒤의 일이긴 하나 그는 우리 문단에 하이퍼텍스트 시를 논의의 중심에 올려 놓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더러 즉흥적이고 산발적이거나, 때로 단편적인 이론을 가다듬고 체계를 잡을 수 있도록 코치하고 논리적 뒷받침을 해 준 이는 문덕수 시인이다. 특히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당연히 전자하이퍼 문학을 말하는 것인데, 그와 구별되는 종이하이퍼 문학을 문덕수 시인이 천명해 줌으로써 하이퍼시 논의의 획기적 진전을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남구 시인은 이번에 ?사과? ?관광버스? ?젓가락? ?신호등? ?약수터?의 5편을 선보이고 있다. 시상 전개의 재치와 언어에 대한 감각, 그리고 문장의 팽팽한 긴장미가 오남구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예시 ?사과?를 보면, 자유로운 언어놀이, 의미의 전이와 전복, 풍자적 반전 등 하이퍼 링크의 두드러진 개성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동진강 상류 ‘배들녘(조선 후기 조병갑이 물세를 받다가 농민들의 저항을 받아 동학란을 자초한 만석보가 있는 들녘이다)’, 그 배들녘은 지금 한창 자라는 풋벼로 바다 같은 풍경을 이룬다. 화자는 마치 역동적인 동해의 일출처럼 풋벼의 아침 지평선 위로 해가 ‘풍!’하고 솟아올랐다가 서서히 빛을 확산하는 모양이 거대한 붉은 사과 같다고 인식한다. ‘배들녘’은 원래 ‘동진강 하구에서 쌀을 실으러 거룻배가 들어왔었다’고 해서 ‘배들이’ 들판이라 이름지어진 곳이다.   시인은 그 ‘배들이 들판’이라는 말에서 ‘들판’의 동음 어의 뒤집기의 연상 링크로 의미의 맥락을 전복시켜 동학란의 역사적 상황으로 전환시켜 나간다. 그러니까 ‘들판(野外/平野)→들판(擧板)→피켓’으로 연상작용을 펼쳐 간다. 그 사이에 거룻배들이 드나들었다는 뜻의 ‘배들이’ 역시 의미 연상의 가지치기를 하여 ‘손해 난 배’ 들로 뒤집고, 그 적자를 본 배들은 빚 독촉에 ‘들들 볶일 판’의 ‘들판’으로, 다시 들판피켓을 들고 ‘전봉준이 들이칠 판’의 ‘들판’으로 분방하게 링크해 간 것이다.   이렇듯 숨가삐 언어유희로 전의(轉義)시켜온 다음 고요한 바다(수평선) 같은 풋벼의 들판으로 돌아가 황혼녘 지는 해를 사과처럼 주먹 속에 받아 쥐고 굴린다. ‘주먹 속에 받아쥔 해 사과를 굴린다’의 ‘굴린다’는 말은 지금까지 어의를 연상에 의해 이리저리 ‘굴려’ 온 것과 동일선상에 놓여 통합된다. 끝 부분의 가르마 같은 선을 따라 불이 화~ 화~ 일어난다라고 표현한 대목은 이 작품의 집합적 의의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간 동학란 이미지로 결집됨을 말해 준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약수터?는 마치 한 폭의 동영상의 상황화(狀況畵) 같기도 하고, 짤막한 상황극 같기도 한 재미를 던져 준다. 해돋이 무렵의 약수터 풍경은 그림 같다. 물을 받으며 (옆에 빈 자리가 있는) 장의자에 앉은 노인 셋이 기호화된 캐릭터로 등장한다. 캐릭터 ‘빨간 딸기코’가 침묵을 깬다. “왜 걔가 안 보여?”, 캐릭터 ‘낡은 골프모자’와 ‘굵은 테안경’이 지극히 간결하고 천역던스럽게 “그러게 말여” “갔나 벼”라고 주고 받고는 다시 말없이 앉아서 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던져 놓고 있다. 수다는커녕 이런저런 말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노년, 한두 마디로 수천 마디에 값하는 행간을 읽어내는 나이의 상황극을 완결짓는 것은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캐릭터 ‘반백의 꽁지머리’이다. 그는 ‘구릉에서 약수터로 내려와 페트병 하나를 놓고 몇 번 팔 굽혀 폈다가 빈 의자 끝에 앉는다.’ 사실적 상황의 절묘함은 더 이상 언급을 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자의 말에 의하면, 셋째행에 있는 ‘해가 반사경처럼 약수터를 환히 밝혀 놓는다.’는 진술은 떠오르는 해가 한 캐릭터의 대머리에 비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숙연함과 코믹함이 작가 특유의 절제미로 잘 버물러진 한 편의 시로 보인다.  지금까지 하이퍼시 텍스트를 접해 온 시인들 가운데는 이념과 용어, 이론과 작품, 자기 모방과 유행어, 감동 부재 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이런 문제는 하이퍼시를 쓰고 있는 당사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논의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난관을 차근차근 극복해 나갈 때 하이퍼 모더니즘의 시대는 보다 빨리 열릴 것이다.  원로 김광림 시인의 ?바위벽에 드러난 얼굴? ?八旬이란? ?외톨이? 등 지극히 절제된 세 편은 세상과 사물을 대하는 연륜의 깊이와 무심,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흔히 보게 되는 요설이나 겉멋, 군더더기, 손끝 기교를 전혀 볼 수 없는 담백함과, 거울 같은 시심을 직면케 한다. 그 중 ?외톨이?는 세상 잡사를 초월한 아득한 시적 경지를 보여 준다.     외가지/끝에/앉아 있는/새야/참 새야/이제 그만/조잘댈/대상도 없어/아득히/정처없이/ 바라보기만 하는/나 같은/것아                                                                 -김광림 ?외톨이? 전문    이것이야말로 정신의 하이퍼 링크이며 절제된 텃치의 자화상이요, 8순의 시인이 쓴 원숙한 자작시론이 아닌가 싶다. ‘이제 그만/조잘댈/대상도 없어/아득히/정처없이/바라보기만 하는/나 같은/것아.’ 같은 경지에 매료되다 보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의 관심사인 하이퍼시 특집에 집중하게 된 까닭에 심도 있게 논의하지는 못하지만, 김기성의 ?천직?, 신작시집 중 김윤희의 ?비의 포식?, 김순진의 ?복어 화석?, 이선의 ?누드크로키? 등을 재미있게, 혹은 인상 깊게 읽었다. 그리고 현대시협 세미나 때 거론된 신인 김용인(7월호 당선) 시인과 시문학문인회 시낭송회 때 참석하여 의외의 면모로 주목받은 이옥교(7월호 당선) 시인의 데뷰 작품을 정독하였다. 김용인의 심오한 개성과 이옥교의 예리하고 간결한 시정(詩情)에 박수를 보낸다.      
58    하이퍼시 도우미 3 댓글:  조회:4286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대 시 예술의 방향   한강아리랑을 통해서 살펴본다...---   정보, 네트워크, 인터렉티브, 융복합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활용하는 작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조형면에서는 돌덩이, 석고 덩어리로서의 조각에서 더 나아가 컴퓨터, 로봇, 스마트폰과 같은 형태의 정보 유기체로서의 작품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음악, 시각예술에 있어서도 감각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예술의 꽃으로서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사고를 이끌어내는 정신의 꽃으로서의 작품, 매체 활용 면에서도 단일 매체에서 더 나아가 융복합예술, 인터렉티브예술에 관심이 돌려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는 지능형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반영할 때, 우리의 삶과 정신을 이끌어가는 예술 본연의 역할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리라   혁명의 시대다.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첨단과학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뇌스캔을 예고하고 있다. 빅데이터에 의한 미래예측 시대를 열고 있다. 로봇, 사이보그는 우리의 현실이다. 달라졌다. 그에 비해서 우리 몸은 달라지지 못한다. 짐승과 인간의 몸, 생체구조는 다름이 없다. 영혼도 별도로 없다. 컴퓨터와 인간은 유난히 닮아가고 있다. 우주로 뻗어나가고 있다. 힉스등을 캐내고 있다.   그런데 비해서 우리의 몸은 달라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의 뇌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과학의 진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이미 지능형테크놀로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구조를 거의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우리는 이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클릭, 검색, 답글 하나까지 모두 데이터화되고 분석되고 처리된다.   정보화사회, 지능형 테크놀로지 시대, 네트워크 시대, 융복합시대, 첨단과학시대, 생명공학시대, 이러한 생활환경을 반영하고 이를 제대로 표현해내는 역할이 필요하다. 시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퍼 시예술 운동은 이러한 생활환경,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환경 속에서 태어난 시예술운동이다.   이러한 여건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활용하고 이를 시예술로 표현해냄으로서 정신의 꽃을 피워내는 일이리라   [출처] 하이퍼아트 시문학으로서의 멀티포엠아트'한강아리랑'|작성자 장경기 하이퍼시대 시 예술의 방향   한강아리랑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하이퍼시대 시 예술의 방향  정보, 네트워크, 인터렉티브, 융복합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활용하는 작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조형면에서는 돌덩이, 석고 덩어리로서의 조각에서 더 나아가 컴퓨터, 로봇, 스마트폰과 같은 형태의 정보 유기체로서의 작품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음악, 시각예술에 있어서도 감각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예술의 꽃으로서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사고를 이끌어내는 정신의 꽃으로서의 작품, 매체 활용 면에서도 단일 매체에서 더 나아가 융복합예술, 인터렉티브예술에 관심이 돌려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는 지능형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반영할 때, 우리의 삶과 정신을 이끌어가는 예술 본연의 역할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리라   혁명의 시대다.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첨단과학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뇌스캔을 예고하고 있다. 빅데이터에 의한 미래예측 시대를 열고 있다. 로봇, 사이보그는 우리의 현실이다. 달라졌다. 그에 비해서 우리 몸은 달라지지 못한다. 짐승과 인간의 몸, 생체구조는 다름이 없다. 영혼도 별도로 없다. 컴퓨터와 인간은 유난히 닮아가고 있다. 우주로 뻗어나가고 있다. 힉스등을 캐내고 있다.   그런데 비해서 우리의 몸은 달라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의 뇌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과학의 진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이미 지능형테크놀로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구조를 거의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우리는 이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클릭, 검색, 답글 하나까지 모두 데이터화되고 분석되고 처리된다.   정보화사회, 지능형 테크놀로지 시대, 네트워크 시대, 융복합시대, 첨단과학시대, 생명공학시대, 이러한 생활환경을 반영하고 이를 제대로 표현해내는 역할이 필요하다. 시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퍼 시예술 운동은 이러한 생활환경,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환경 속에서 태어난 시예술운동이다.   이러한 여건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활용하고 이를 시예술로 표현해냄으로서 정신의 꽃을 피워내는 일이리라   [출처] 하이퍼아트 시문학으로서의 멀티포엠아트'한강아리랑'|작성자 장경기    
57    하이퍼시의 도우미 2 댓글:  조회:4087  추천:0  2015-02-18
  시작 노트 김규화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의미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의미’라는  말은  ‘언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의미는  언어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  만물에는  모두  언어가  있다. 언어는  사물에  붙은  의미이고  그 의미는 관념으로 성장한다. 위의  말은  완전히  맞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언어  수의  한계가  모든  사물을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학· 과학 기호도  생겼으며, 언어 예술인  시에서는  비유가  발생하는  계기가  된다. 과거  유아시절의  꿈  같은  아름다운  기억과  철학자의  심오한  사유  등은  언어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을  언어가  연결시켜 주지  못할  적에는  기억하거나  사유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일 찍이  프로이트가  하였다. 언어는  언어  자체로는  홀로  설  수  없다. 어디까지나  사물에  꼭  붙어서야, 혹은  관계되어서야  비로소  선다. 세상 이  처음  열릴  때  사물이  있었고, 후에  언어가   있었다고  구약성서에서는  말한다. 하느님이  만물을  만들고  아담 이  언어로써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인간 세계에서  언어란  무엇일까. 20세기  전반의  초현실주의  시인  트리스탄 차라는  그의  시에서,  “만약 낱말(즉  언어)이라는  것이  마치  봉투나  포장지에  붙은  우표처럼  사물에  붙은  딱지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먼지 와  몸짓 뿐이며  이  세상에는  기쁨도  슬픔도  없을  것”이라고  읊었다. 사물에  붙은  ‘딱지’는  사물  자체도  아니고  사 물의  성질과도 일치할  수  없는  다분히  형식적이고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떼내버려도  되는  ‘먼지’나  ‘몸짓’  같은  하찮은(?) 것이겠다. 먼지나  몸짓은  시니피에(의미)와  시니피앙(소리)으로  이루어진  기호이고  그러한  기호는  언어라고  불린다. 우리는  그  언어로써  시를  쓴다. 언어가  없는  시를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언어의  두  요소  중의  하나인  시니피앙  즉  소리(청각 영상)를  너무  홀대했던  것  같다. 과거의  내  시는  무거운  의미로  뒤덮였었다. 가령  고독,  불안,  생명  같은  관념   말이다. 이  세상에는  무가치한  관념의  압력이  너무  많다. 그러한  의미를  시에서  가급적  빼고  싶다. 사물의  본래적이고   적나라한  이미지는  언어라는  형식을  벗어나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음악의  선율이  아니고  미술의   선과  색채가 아니며  오직  언어일진대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래서  나는  단지  그런  무의미의  상태를  동경하 는  것 만으로  나의  시작 태도는  성과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십여 년  전  대만의  한  시낭송회에서  중국어 시 낭송을  들을  때, 뜻은  전혀  알  수  없으나  소리의  사성인  평·상·거· 입성과  어조만으로도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  후로  나는  가끔씩  틀어 놓고  귀에  익숙한  우리 말의  의미를  빼 버리고  소리만  듣는  시도를  해보거나  혹은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외국어의  화면을  보면서  ‘소리’만  듣는  즐거움 도  맛본다. 나는  될  수만  있으면  모든  존재의  기표로  시를  쓰고  싶다.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하는  시니피앙, 즉  ‘소리  이미지’로  쓰고  싶다. 기표의  동일성 (예를 들어  ‘등’은  등불, 등꽃, 사람의  뒷등  등)의  연결은  하이퍼시의  이미지를  만드는  에너지가  된다. 이  이미지들은  서로  연관성  없이  현실 세계와  상상(혹은 가상) 세계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서  리좀을  만들고  구절과  구절, 행과  행, 연과  연의   단위로  다층적 구성을  이루는 (나의) 하이퍼시가 된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오늘날, 사람들은  아날로그적인  자연을  떠나  환상적인  가공세계의  마력에  빠져들어 버렸다. 인터넷이나  TV  등이  보여 주는  하이퍼적 세계에  모두  미혹되어  있다. 시도  하이퍼적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은  시대의  탓이라고  하겠지만…….  
56    탈관념의 꿈꾸기 댓글:  조회:4275  추천:0  2015-02-18
  [하이퍼텍스트 시론 1]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 ― 시집 「실험실의 미인」을 중심으로     吳南球 (시인, 평론가)     ❙ 들어가며 ❙현대시가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고 있다. 해체된 언어(조각, 유니트)가  다시 통합되는 원리는 무엇인가?,'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종의 초현실로서 저절로 통합되어 자동기술 되는 ‘탈-관념'의 시 쓰기이다.     1976년, '시인의집' 모임에서 현대시의 ‘수학적 존재 증명’을 얘기하곤 했다. 모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할 무렵 한성례씨가 찾아왔다. 분위기가 갑자기 환하게 느껴지는 용모였다. 가까운 문우들에게 필자가 이 모임을 탈관념의 ‘실험실’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시를 살펴보니 ① 탈관념의 선언에 영향을 받은 존재론적인 것과 ② 탈관념의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 과정에서 비롯된 것과 ③ 탈관념 그 습작과정에서 쓰여진 것과 ④ 수학여행이라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시고(詩稿)들을 읽어보니 모던이스트 중에서도 모던이스트로 그 문명비평적인 쎈스의 풍자와 기지들은 많이 지나칠 정도여서 내게 씨(氏)가 시골사람이라는 걸 아조 잊어버리게까지 하고 있다.”   미당(서정주)이 한성례씨의 시집에 붙인 서문의 글이다. 이 말이 아니라 해도 시를 읽어보면 독자는 깨뜨려진 어떤 낮선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표백제로 얼룩진 물감을 탈색해서 이제 막 내어놓는 옥양목 같다고나 할까, 고정관념이 깨뜨려지고 있는 시어들은 낯설고 싱싱하다.     한 가름, 탈관념 선언에 영향을 받은 시   당시 탈관념의 실험을 시작하면서 모임에 내세울 새로운 이슈를 선언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미당을 찾아가서 자문도 구하고 노장사상(老莊思想)도 읽었다. 동경대전(東經大全)도 다시 읽었다. 숙고한 끝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대로 한국적인 사상에 기초한 선언문을 작성한다. 그 해가 1980년 1월 무렵이었다. 후에 그 일부가 경구(警句)처럼 동인지 표지에 한동안 게재된다. 그 표지에 써 놓은 글은 이러하다.   “신은 시인 앞에 오면 한 낱의 낱말이다. 시인은 낱말을 죽이고 또 창조한다.”   이 같은 문구는 동인들 중 크리스천들에게는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시를 쓰는 ‘주체’에 대해서 ‘신이 아니라 사람, 즉 시인’이라는 등, 시의 본질이 되는 요인들을 하나하나 담론해 갔는데, 물론 그 선언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바로 다음 항에서 말하는 탈관념의 논리를 구축해 가는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인데, 지적이고 논리적이던 한성례씨는 이러한 시론을 좋아했다. 이 무렵 그는 갈등하며 시적인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관념적 허구’로서 절대자를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허무감’을 느꼈고, ‘막막한 신천지에 서듯’ 외로움을 타고, 불안・초조 등의 실존주의적 경향이 나타났다. 다음의 시를 보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그가 드디어 동양적인 사고로 ‘직립’하여 바로 서는 자존적인 자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서구화된 우리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절망과 고뇌를 반복한다.     1.「무풍대에서」에 나타난 자아, 그 직립   「무풍대에서」그가 자아의 눈을 뜨고 바라본 진실은 무엇인가? 시를 보자.   종소리 속에서 느릿느릿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관성만 남은 일상 더듬이가 필요한 날에는 볕이 드는 쪽과 음지를 혼동한다.   낯선 바람 원점 향해 위치 변동 꽉 채우고 있는 물먹은 공기 빠져나갈 출구가 없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첫째, 사고가 신의 세계에 갇혀 “종소리 속에서 / 느릿느릿 /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그런 관성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정작 옳고 그름의 이성적인 ‘더듬이’의 가치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그 관성으로 인하여 그 판단이 혼동된다. 둘째, ‘낯선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곳이라고 파악되는 ‘무풍대’이지만 ‘낯선 바람’이 태동한다. ‘낯선 바람’이란 시인이 의식한 ‘새로운 것’ 즉 서구적이 아닌 동양적인 의식의 ‘새 바람’이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실이란 서구 정신문화가 포화된 상태로서, “꽉 채우고 있는 / 물 먹은 공기”로서, ‘새바람’의 출구도 없는 무풍지대로 인식된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 그 언저리는 꼭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다.   직립한 바람은 직립한 바람끼리 손잡고 있는 무풍대에서    껌딱지로 도배된 기지촌의 포도처럼 사인 코사인의 귀를 맞추며 덕지덕지 하품으로 이어 놓는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셋째, 그는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절망을 느낀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을 본다. 또 죄지은 듯이 “꼭 /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고, ‘기죽은 초라한 자아’ 그 실존의 위기를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시인으로서 ‘직립’ 하여 ‘바로 서는’ 자의식의 입지(立志)를 한다. 물론 ‘기지촌’, ‘껌딱지’의 서구적 극한 상황에서도 의연한 의지로 견디어야 하는 숙명이다. 이제 그는 무풍대에서 직립한 바람의 존재로서 홀로 서 있다.     2. 「벼랑 끝에서」의 춤   신을 ‘관념적 허구’로 파악하고 ‘절대자’를 부정했으나, 그는 아직 확고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실로 한성례씨는 두려움 속에 있다. 신천지에 서듯 막막함과 불안・초조의 벼랑에 서게 된다. 이때 ‘춤’을 추게 되는데, 불안・초조로부터의 극복과 탈출을 위한 몸짓이다. 이 절대 고독상황에서 손잡아 주는 것은 새로운 의식의 ‘어설픈 바람’ 뿐이며, 그 절실한 모습에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낭떠러지에 서서 춤을 춘다. 동작보다 언제나 한 템포 느린 음악   아래로부터 걷어 올라온 바람이 어설프게 손잡아 준다.   언제부터였을까  엄청난 배반의 현실에도 때때로 풋풋한 여명을 맛보곤 한다.   내 가슴 속에 출렁이는 배 한 척 무거운 방황은 젊은 날의 피를 낭비하는 것이라 해도 음울한 예정론에 기대를 걸고 출항을 서둘렀다.   이제 나이 드는 것이 타락의 나이테라면 차라리 돌아가지 말아야지   벼랑 끝에서 느릿느릿 춤을 춘다. ─「벼랑 끝에서」전문     3.「불완전 명사의 저녁」에 나타난 존재   눈을 뜬 자아, 그래서 막 태어난 '불완전 명사'로 나타난 존재! 그 직립에 의한 행보는 방황과 갈등이다. 벼랑에서 새로운 출항을 하게 되지만 이는 불안한 항해로서 익숙지 못한 실존주의자의 삶이다. 좌절과 불안과 머뭇거림의 연속이다. 그의 사상은 불투명한 상태로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리는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갈등 한다.   터널로 빠져 드는 녹슨 연기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린다. 철분의 붉은색 앙금으로 가라앉히고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자맥질처럼 움직인다.   퇴색된 석양 언저리에서 태우며,  가늘게 남은 내 생의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   줄자로 잴 수 없는 문화의 어정거리는 습성  그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   터널로 빠져드는 녹슨 연기 아우성으로 떠는 흐느낌이다. ─「불완전 명사의 저녁」 중에서   그러면서, “가늘게 남은 내 생의 /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으로 그의 존재(存在)를 확인하며, “줄자로 잴 수 없는 / 문화의 어정거리는 / 습성”을 꼬집어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고 스스로 질타한다. 존재자의 갈등! 바로 진실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시인, 그 인간다움이다. 이러한 그는 「도편수의 노래」에서 스스로의 배-새로운 출항을 위한 도편수가 되기도 하고, 줄타기 하는 삶의 곡예사로서 ‘땅에 발 디디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두 가름,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에서 비롯된 시   이렇듯 그가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을 했는데, 그것은 ‘최면을 통한’ 자동기술(自動記述) 훈련이었다. 그 한 가지 내용을 보면,   “자,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감는다. 편안히 호흡을 고른다. 깊이 숨을 들이 마신 후에 아랫배에 지긋이 힘을 모은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쉰다. 1초, 2초, 3초……. 이제 감각여행을 떠난다. 태양! 태양을 마음에 그린다. 태양을 향해서 몸이 둥둥 떠간다. 경비행기 속도로 간다. 빛의 속도로 간다고 생각한다. 1초, 2초, 3초…. 태양! 태양이다! 느껴본다. …뜨겁다. …탄다!…… 눈을 뜬다.”   대강 이런 식으로 실험을 했는데 그 성취는 괄목할 만 했다. 눈을 떴을 때는 대체로 들뜬 상태가 아니면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공통점은 한결같이 마음이 가벼워졌고 바라보는 사물들이 움직인다고 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것은 느낌을 말한다. 몇 분 전만 해도 무심히 무감각하게 보아 넘겼던 커피잔, 스푼, 화분, 의자 등이 새로운 정서로서 움직인다. 그 성취 정도는 사람들마다 각기 달랐다. 불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비교적 강렬하고 빠른 반면에, 서구적인 종교와 철학, 지식의 깊이가 강한 사람은 그 성취가 느렸다. 그의 시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는 그 즈음 겪은 갈등과 실험을 꾸밈없이 쓰고 있는데, 드디어 관념이 깨어지는 그의 꿈꾸기(Image-Dream)는 ‘황홀한’ 첫 시적 경험을 한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    ─ 타버린다 ─ 는 감각은 없어지고 경비행기로 출발한 우주여행은 그저 행위로만 남았다   기착지는 태양 뜨거움보다는  황홀한 색채에 질식당했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전문   당시 그는 자동기술의 감성훈련에 적응이 늦었던 것 같다. 개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지적인 서구적인 합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의 곤혹스런 입장을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로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늘 도로(徒勞)의 작업이던 ‘꿈꾸기’가 첫 느낌을 얻게 된다. 자연스러운 “기착지는 태양”으로서, 첫 시적(詩的) 체험인 “황홀한 색채에 질식” 당하는 희열을 맛본다. 이후 그는 초현실적인 감각의 시 쓰기가 익숙해진다.「구의역에서」,「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등의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되고, 또한「방」,「장마」에서는 빗줄기의 기하학적인 선(線)이 꿈처럼 펼쳐지며 새로운 시세계를 열고 있다.     1.「구의역에서」의 우주적인 시점   이러한 ‘탈관념의 꿈꾸기’를 체험한 사람들은 우주적 감각인 둥둥 떠가는 ‘느낌’이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구의역에서」는 시점의 ‘일상성 벗기’라는 ‘감성훈련’으로 빚은 큰 성과다. 그가 바라보는 사물(역, 길, 사람 등)이 둥둥 떠다니며 지구의 자전에 따라 시각이 바뀐다. 낮에 바로 서 있던 물건이 밤이면 거꾸로 처박히는 모습이 된다. 이 시는 바로 우주적인 시각에서 본 움직임인데, 탈관념의 꿈 중 하나이다. 한성례씨에게는 그녀 인생의 무대, 그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바로 서기도 하고 거꾸로 서기도 한다.   둥둥 떠가는 구의역 내 앞에 누워 있는 길. 뱉어낸 사람들 물살로 흘러 흘러서 무시로 흩어져 간다.   질주하던 길이 문득 산 밑에 가서 머문다. 시선 끝으로 길 한 줄기 붙잡으면 녹음이 앞서 무질러 오고 밀려드는 차 물결   쏟아질 듯 곤두박힐 듯 가로수 함께 일렁이다가 몇 개로 틀어지고 조각난 풍경 판토마임의 내가 거꾸로 서서 자막 속을 걸어간다. ─「구의역에서」중에서    그는 우주적인 감각이 자유로워졌고, 그에 따라 무한하게 시의 세계가 확장된다. ‘가로수와 함께 일렁이기도’ 하는 판토마임 속의 자신을 확인하면서 눈을 뜬 현실로 되돌아 와서 다음과 같이 ‘구의역’을 직시한다.     잠시 눈 뜬 플랫폼, 흘러 흘러서     투사되듯 입력(入力)되는 곳 구의역.  ─「구의역에서」 중에서     2.「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의 전전반측   전전반측(輾轉反側)하는 시인의 정(情)은 무엇일가? 그는 밤을 지새우고 있다. 그러면서 갈증 같은 향수를 느끼고, 그때 “기지개 켜는” 의식이 꿈꾸기를 한다.     산과 들, 강물 걸어 넘는다.   그 끝은 평행선 한 가닥 분실된 몇 낱 낯선 어둠에 섞여 보이지 않고 ─「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중에서   몽롱한 의식 상태의 그의 ‘꿈꾸기’는 비몽사몽간 눈앞에 고향산천을 그려보지만 원근 속에 하나의 점이 되어 소멸돼가서 끝이 보이지 않고, 다만, “멍든 석양의 조각들이 / 도시 꼭대기에 차양처럼” 매달린 메커니즘의 현대문명 속의 삭막함만이 남는다. 현대인의 짙은 외로움이 드리워져 있다.      3.「장마」에서의 기하학적인 선   1980년대의 답답한 현실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현실을 탈출하려는 꿈꾸기가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기하학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빗줄기는 대단히 시원하고 자유분방하다.     빗줄기 속에서 뻗어 내린 흰 꼬리 화살 화살은 내게 일제히 달려든다.  몸짓으로 털고 몸짓으로 도망하고 또는 몸짓 거부로 넘어지는 행위   시대의 재채기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 ─「장마」중에서    그의 시는「장마」에서 안정(安定)되고 한 단계 더 세련되었다. 빗줄기로 시작한 ‘꿈꾸기’가 “시대의 재채기 /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로서, 현실과 이어져 있다.     세 가름, 탈관념의 자동기술된 시   1. 수학적 시론의 전개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데 있어 새로운 질서의 공감각과 방향이 있어야만 망상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그 질서는 ‘자연’에서, 그 방법은 ‘직관’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실험에 의한 체험적 소신이었다. 고정관념의 ‘깨뜨림’은 습작을 위한 중요한 과정으로서 상당기간 대화법으로 실험을 도왔다. 그때 집약된 내용이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이었다. ‘쓰레기통 문답’은 이러했다.   ‘꽃 한 송이를 들고 신인들에게 보인다. “이게 뭡니까?”라고 묻는다. “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때 필자는 쓰레기통에 꽃을 던진다. 그리고 “쓰레기입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그 얘기를 듣고 와서 “쓰레기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이게 왜 쓰레기통입니까? 꽃이죠!”라고 무안을 주었다.’   이 쓰레기통 문답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첫째,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려서 신선한 충격을 경험하게 하고 둘째, ‘꽃’이라는 이름이 쓰레기통(박스) 속에 들어가면 순간 ‘쓰레기’가 됨으로써 허무하게 관념(의미)이 바뀌는 것을 보여 준다. 셋째, 청각이나 시각 등 오감으로 느낀 사물에 대한 정서와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각기 다른 언어로 표출된다는 것을 쉽게 이해시킨다. 그럼으로써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가 각기 다른 ‘의식의 함수 f(x)다’ 라는 가설로 유도시킨다. 당시 한성례씨는 이러한 수학적 시론의 전개를 신선한 충격으로 공감하고 받아들였다. 필자는 보다 체계적으로 시론을 정립해 가며, 그 가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설명했다.   “시인의 삶이 f(x)면 시는 그 도함수(기울기)이다. x는 ‘만남(사물)’의 변수, y는 의식 공간이다.”             2. 의식의 단면   어느 날 좌표평면 상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순간변화(의식의 단면)를 발견했다. 수학적 시론의 가설을 구체화시켜 x축과 y축으로 하는 평면좌표를 그렸는데, x축은 시간의 만남(시간적인 흐름 속에서의 만남)이고, y축은 그때그때의 ‘의식 공간’으로 구성했다. 다음은 한 ‘시인(한성례씨)’과 남산’의 ‘만남을 함수관계’로서 그 의식(체험)을 나타내 보았다.   [예] 만남의 요소-남산   ① 20대의 한 시인이 1974년 1월 처음 남산을 보았다. 이후 계속 보게 된다. 그 높이를 300m쯤으로 직감한다. 이를 y축 3에 표시한다. ②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동진강변의 평야지대에 살았다. 그가 산을 보아온 일상적인 의식체험은 100m 쯤의 야산들이었다. 이를 y축 1에 표시한다.            위의 ‘가나다라’ 선은 시인이 사물을 만나서 느낀 의식의 그래프이다. 이것은 의식(체험)의 한 단면이고, 여기에서 수평을 이루고 있는 선분 ‘가나’와 ‘다라’는 늘 바라보았던 일상적인 것인데, ‘반복된 사건의 일상성’이다. 그런데 상경하여 남산을 접한 어느 순간, 그 일상성이 깨뜨려지는 수직의 선분 ‘나다’가 나타난다. 이 순간의 의식(느낌)은 긴장이나 시적 충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이를 ‘일상성의 깨뜨림’이라 했고, 수평의 선분 ‘가나’ ‘다라’를 반복된 사건의 고정관념을 나타내는 ‘일상성의 직선’ 이라고 했다. 이로써 좌표평면 상에 시의 존재(기울기)가 나타나는데, 바로 선분 ‘나다’로서 긴장의 정도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나다’의 선분은 앞의 가설인 함수 f(x)의 ‘시간 x축’과 ‘의식 공간 y축’으로 하는 좌표 상에 나타난 ‘순간변화’이다. 그래서 이것을 의식의 ‘순간변화’ 또는 ‘순간변화율’이라고 이름 붙였고, ‘느낌의 기울기’라고 했다.  이렇듯 '만남의 자극과 반응’으로 나타난 ‘순간변화율’로서 그 존재를 확인하고, ‘만남이라는 사건’에 착안하여 집합과 조합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시공에서 사물과의 만남은 무수히 진행되고 의식은 집합적으로 결합된다.’ 이처럼 시공의 개념에서 접근하여 수학적인 방법으로 좌표 위에 '나'의 존재(의식)를 나타내고, x축을 시간의 흐름, y축을 의식공간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x축과 y축 사이에 무수히 진행되는 ’만남의 사건‘을 변수 x로 가정하였다. 그래서 자동기술의 시는 무수히 사물과 만나면서 이뤄진 체험이 잠재했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은 초현실주의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초현실 시 쓰기인 탈관념의 ‘꿈꾸기’를 하면서 시의 ‘질서는 자연에서, 방법은 직관’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게도 되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자연스러움’은 곧 시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3. 그 습작과정에서 쓴 시,「서울의 큐비즘」   그는 그때까지 ‘매끈한 시’, ‘잘 다듬어진 시’가 좋은 시라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며 고교생 대상의 여러 시문학상도 수상하고 나름대로 시에 식견이 있다고 여겼던 그에게 탈관념은 커다란 충격과 혼란이었다. ‘깨뜨림’을 당한 멍한 상태라고 할까, 아무튼 이로 인하여 시적방황이 시작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처음으로 자동기술 되어 나온 작품이 ‘서울의 큐비즘’인 것으로 기억된다. 이어서 ‘지하도 풍경’도 발표했는데, 두 작품이 각각 문학지 ‘신인문학상’과 ‘대학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에게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핏빛 바람 갈대숲 안고 달아나는 소나무 하늘은 꽃씨 눕힌다. 누이의 속치마 능선을 타고 호랑나비 하늘을 앓는다. 소나무 허리 껴안은 거문고 울음과   한강변 세 살 난 잠실동 아이의 맏연습  아파트 아파트 우리 집은 아파트 충무로 1가에서 떠돌던 바람 소리 내어 돌아가고   호랑나비 푸득 푸드득 날개 짓 하는 하오는  종합전시장 앞 14차선 도로 악을 쓰며 누워 있다. 맨드라미 노을 넘실거리고   서울의 꿈은 유리알 맑은 모래처럼 내 온몸을 휘감는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걸치고 앉아 있다. ─「서울의 큐비즘」 전문   우선 시에 나타난 어휘들을 집합(集合)해 보면, "달아나는", "앓는다", "울음", "맏연습", "떠돌던", "악을 쓰며", "허리를 반쯤 걸치고" 등의 말들이 모이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 즈음의 그의 갈등에서 생성된 것으로서 인위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표출, 순열(順列)된 것이다. 시 자체는 좀 생경스러우나 일대 혁신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미화되거나 인위적으로 포장됨이 없이 시인의 솔직한 진실(감정)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이나 확신이 없다. 긍정 반 부정 반의 자세로서 엉거주춤한데,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 걸치고 앉아 있다”의 표출이 그것이다. 그의 신경세포가 ‘반쯤’의 어중간한 상태를 자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해의 한 시점인 반쯤 앉은 상태가 강한 이미지로 입력되었다가 자동기술(순열)된 것으로 이해된다.     네 가름, 삶 언어의 집합・조합・순열의 묘    1. 언어의 표현   시인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물과 만나며 느끼는 자극(느낌→의식)을 y 라고 하고, 사물과 만나는 시간 x를 변수로 하는 의식의 함수 y= f(x)를 가정할 때, 어느 시점의 자극(만남)과 반응(의식)을 나타내는 순간변화율(기울기)이 있다. 즉 사물과 만나는 '의식(느낌)의 변화율'이 있다. 이것을 필자는 '의식의 기울기'라 하고, '긴장' 또는 '흥분' 등의 파동을 나타내는 '시의 순간 변화율'이라고 했다. 곧 시를 어떤 순간 변화율인 '생명의 파동'으로 보았다. 그래서 언어로 표현 기술되었을 때, 이 기울기(시라는 순간변화율)는 생명적이므로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는 어떤 생명의 존재질서 위에 있으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집합, 조합, 순열된다. 그래서 벤다이어그램으로 이를 도표화해서 보면 ‘언어A, 언어B, 언어C’의 표현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그림]언어의 집합   도표를 살펴보면, 언어의 합집합인 최대공배수 ①A∪B∪C와 공통집합인 최대공약수 ②A∩B∩C 등의 모양이 나타난다. 합집합은 세 단어가 나타낼 수 있는 의미 내용의  최대로서 표현의 L.C.M이고, 세 단어가 의미 내용을 공통으로 가지는 빗금 친 부분의 공통집합은 표현의 G.C.M이다. 이 G.C.M으로써 보편적인 언어의 의미가 구성된다. 그러나 이 의미는 독자(평론가)에게 수용되고 물론 그의 체험에 의해 재구성된다.   2. 시 해설은 적분   이상의 수학적 시론의 전개는 동인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것을 바탕으로 실험습작을 했다. 그에 따른 시의 성취나 그 가치는 별도로 하고, 당시 탈관념의 ‘꿈꾸기’에 몰두했던 한성례씨의「지하도 풍경」의 한 예문을 분석해서 정리해보겠다.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 ─「지하도 풍경」 중에서   위의 예문에 “범람/ 성욕 / 용설란 / 남아프리카지도 / 피” 다섯 개의 단어가 있다. 이것은 시인이 사물과 만남(사건)으로써 생긴 단어들인데 긴장과 흥분 등 느낌의 기울기(미분)를 갖는다. 이것은 삶의 한 시점이 미분된 것이고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이다. 이 단어들이 독자(평가)에게 수용되고 해설될 때 시적체험이 되고 시인의 삶이 된다. 그러므로 해설은 곧 ‘적분’이다. 표현되는 내용은 집합, 조합, 순열된다. 여기서 표출되는 내용을 도표화해 보면,                       예문의 ‘집합①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집합②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를 보자. 그림 ①처럼, ‘범람∪성욕∪용설란’의 집합과 그림 ②처럼, ‘남아프리카 지도∪피’ 의 합집합은 단어들이 갖는 상징과 이미지 등 표현의 모든 범위를 갖는다. 그리고 단어들의 내용이 겹치는 부분인 공통집합(빗금)은 특별한 의미를 만들고 공감을 얻는다. 그런데 집합 ③에서 한 행 한 행의 내용 표현이 문장을 이루고, 다시 조합, 순열로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해 간다. 이와 같이 언어, 즉 의식 또는 체험으로 연결된 잠재의식 속의 단어(하이퍼텍스트)는 시인을 통해서 다시 집합, 조합, 순열해서 통합된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그림과 같이 ‘범람∩성욕∩용설란’으로 공통집합 되면 시인 개체 안에서 자동으로 이미지나 의미가 결합되어 생명의 질서(정서)를 갖고서 표출된다.    3. 언어의 징검다리 건너기   이렇듯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는 원리는 미래 시의 새로운 항해에서 나침판이 되어줄 수도 있다. 구문론을 과감하게 파괴(탈-관념)하는 시가 길을 잘못들 경우 난해한 미로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해체된 언어들은 어떤 질서로 통합되어야 한다. 그의 시 ‘옵니버스 율’은 시인(생명)의 어떤 질서를 내포한 무의식의 흐름이고, 그 흐름의 경로(항해 -‘탈-관념의 꿈꾸기’)가 나열됨으로써 정서(질서)가 표출되었다.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햇살은 나비의 눈물같이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들판」 전문   ‘산 빛 초록촉록 꽃밭동’ 에는 조사가 없다. 다른 행에서도 주어, 술어 등의 구문론이 다수 파괴되어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시에서 보이는 선형성(線形性)이 없다. 비선형적이다. 또한 앞뒤의 문장이 원인과 결과, 논리가 없고 순차적이지 않다. 이 텍스트는 전통적인 텍스트에서 벗어난 하이퍼텍스트 적이라 할 수 있다. 끊어져 있는 마디가 무작위로 배열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가 이 시를 읽을 때는 징검다리를 건너가듯 언어의 마디와 마디를 뛰어 읽어가야 한다. 이때 독자는 단절된 마디와 마디 사이의 틈을 뛰는 스릴을 맛볼 수 있고,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상상을 펼칠 수도 있다. 또한 시의 행갈이 순서도 자유로워서 역순 뿐 아니라 얼마든지 행을 뒤섞어 읽어도 이미지가 선명하다.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햇살은 나비의 눈물 같이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그는 이러한 시들의 묶음을 ‘옴니버스 율’이라고 했는데, 행이나 구문에 이미지나 표현이 묶이지 않고 한 행 한행 독립적으로 배열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옴니버스이므로 한 줄 한 줄 독립된 이미지의 마디를 다시 독자가 재배열해서 읽어도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이 역순으로 배열된 텍스트가 더욱 선명한 이미지를 보이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원본 텍스트보다 역순 텍스트인 메타텍스트가 더 하이퍼텍스트 적이고, 특히 선형성과 순차적인 배열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행한 이 실험은 모더니즘 시의 한 가닥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 나가며   탈-관념의 꿈꾸기는 우주적(하이퍼) 공간이다. 그의 시「구의역에서」에서 보이는 부유하고 있는 모습이 그러하고,「태양을 향해 날아갔다」에서도 현실감각이 사라진 공간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시적 꿈꾸기는 사이버세계의 ‘경로’로 이해할 수 있다. 별과별을 잇는 상상의 ‘링크’가 있고, 그 링크를 계속 따라가는 궤적과 같은 그런 경로다. 은하계의 ‘북두칠성’을 보자. 하나하나는 멀리 떨어진 별이다. 우리의 상상은 일곱 개의 별을 이어 놓고 이 별자리에 ‘북두칠성’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의 시를 이처럼 우주 공간의 ‘경로’로 이해해도 되고, 봄날에 꽃과 꽃을 옮겨다나며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나비의 ‘경로’에 비유해도 된다. 이러한 시 쓰기는 인간의 뇌 속에 잠재해 있는 기억의 소자(원소)들 사이를 흐르는 의식의 흐름과 흡사하다. 시를 ‘의식이 흐른 하나의 경로’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현대시가 ‘언어를 해체한다’고 해도, 해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시인의 의식을 표출하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경로를 통해 표출된 정서나 음률은 시의 바탕을 이룬다. 한성례씨의 탈-관념된 시가 정서와 음률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대를 뛰어 넘어 언제든 수준 높은 독자와 만나게 될 것이다.(完)    
55    현대시의 길 열기 댓글:  조회:4614  추천:0  2015-02-18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나, 문덕수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문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도 디지털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단서는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와 “열린 문으로는/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에서 발견된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 감염되지 않은 탈-관념의 영상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최소 단위들 “빨간 저녁 놀, 재떨이, 유리컵 세 개, 라이터 ,청자 담배. 육각형 성냥갑, 한 사나이 등”은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집합적 결합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모듈)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재떨이를 물주전자로, 라이터를 핸드폰으로, 유리컵을 사기 찻잔으로, 청자 담배를 신문지로 변경시키고, 사나이를 20대 젊은 아가씨로 바꾸어도 시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에는 어떤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가상현실은 순수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생동하는 사물성의 공간이 되고, 독자들의 상상과 의미 붙이기가 무한정 허용되는 세계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보다 독자의 상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다. 그 까닭은 이 시는 현실세계에서 직접적으로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의 자료들은 아날로그에서 샘플링 된 자료다. 샘플링의 방법은 1차적인 방법과 2차적인 방법으로 구분된다. 1차적인 방법은 직접 현실세계를 사진 찍듯이 하는 샘플링 방법이고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을 통해서 샘플링 하는 방법이다. 이 때 1차적 방법은 독자가 들어갈 시적공간은 제한되지만 현실과 현장이라는 생명의 감각에 더 접근되어 있어서 정서의 표현이 살아난다. 이에 비해서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펼치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놓아서 독자가 들어 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성의 세계는 현실적인 생명감각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조작성이 쉽게 드러난다. 따라서 시의 정서도 조작된 정서가 된다.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1차적 방법에 해당하는 시이고,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는 2차적 방법에 해당되는 시라고 판단된다.   4. 디지털 시의 성립과 조건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 디지털(digital)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을 디지털리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 본다.(2003년 「디지털리즘」1집에서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 선언을 함)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디지털적인 시각, 사유, 지각, 감성, 정서, 언어 등을 망라하여 그것을 현대시에 흡수하여 언어표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상상(시각)과 감각과 감성과 사유의 영역을 열어 보이는 시를 즉 디지털 시라고 개념정의를 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의 성립에서 짚고 넘어야 할 문제는 디지털의 특성과 시가 결합할 때, 디지털 시는 기성의 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날로그 시(디지털 시에 대응하는 시로 기성의 시를 의미함)나 디지털 시나 공통적인 것은 시의 현실은 현실자체가 아니고 샘프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원래, 현실 그 자체에서 벗어난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샘플링이나 가상현실은 디지털 시만의 특성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특성은 기성의 시와는 다른 표현방법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언어단위들(unit)에 근거(根據)를 두게 된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  이런 무의미의 탈-관념 언어들이 디지털 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디지털 시가������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가 되기도 하고, 시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한 편의 시가 하나 또는 몇 개의 언어단위로 표현되면서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의 원형은 1930년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와 1950년대 조향의「바다의 층계層階」에서 발견된다.   나, 디지털 시의 표현 방법   이런 원칙을 기본으로 할 경우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파악된다. 그 중 첫 번째의 방법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 1호)에서 구현된 독특한 추상화 기법이다. 탈-관념된 언어 단위들을 사용하여 시인이 상상한 현실의 추상화를 그려서 보여주고 작가의 개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 주는 시의 기법은 디지털적인 구조에 맞는 기법이다. 특히 시 속에 시인이 창조한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어떤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언어의 환상적인 면(언어유희)에서도 새로운 감각과 상상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두 번째 방법은 염사와 접사의 방법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염사와 접사는 현실이 반영(反映)된 마음속의 직관상을 사진 찍 듯이 찍는 것이기 때문에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적 샘플링 기법이 된다. 염사는 직관을 통해서 내면에 잠재된 대상을 드러내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면 세계에 대한 직관과 시각적인 접근을 통해서 원근법을 깨뜨려버리고 대상의 실상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염사와 접사는 병적인 망상(妄想)이나 터무니없는 환상(幻像)과는 구별된다. 염사와 접사는 선적(禪的)인 의식 즉 고도의 집중된 정신의 현상 속에서 발생한 투명한 의식의 그림이다.  세 번째의 표현 방법은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사물의 충돌, 사물과 사물의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런 사물성의 이미지 세계는 사물성의 감각을 포착하여 직관의 영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사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반영(反映)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시가 된다.  네 번째 표현방법은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포착된 영상자료들의 변형으로 상상의 세계를 확대시키는 이미지의 세계다. 이것은 디지털 시의 독특한 표현방법이 된다. 이 때 시인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 등을 융합하여 감각의 통합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통합은 디지털 언어의 감각이 된다.  이 네 가지의 표현방법의 중심에는 샘플링 된 현실이 들어 있다. 샘플링 된 자료(이미지)는 하나의 독립된 단위를 형성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단위들의 결합이나 연결 방법이다. 아날로그 시는 대부분 관념 또는 사유의 연속적인 연결(인과관계)방법을 선호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연결로 의미(관념)와 정서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보다는 감각이나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더 중점을 두는 디지털 시는 단위와 단위의 연결을 “집합적 결합”으로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탈-관념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것에서 디지털의 불연속 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자유롭게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언어 단위들 사이에는 간섭(干,interference) 과 잔상(殘像, afterimage) 현상이 발생하여 아날로그 시와 같은 효과를 구현한다. 이러한 결합은 단위의 조합을 바탕으로 운용되는 디지털의 성격과도 부합된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컴퓨터의 모듈과 같이 시의 언어단위를 독립적인 단위로 인정한다. 그것은 위에 제시한 시인의 추상적인 현실 이미지, 염사․접사, 사물성의 이미지, 영상자료의 변형으로 포착하는 감각 등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시(하나의 시스템)를 형성하기도 하고 집합적 결합을 이룬 종합적인 구조의 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합적 결합은 “대상의 결합이나 구성방법의 종류를 다양화할 수 있고, 구문과 비구문, 의식․무의식의 경계와는 관계없이 시의 구성 영역의 공간을 무한히 넓힐 수 있다.”(문덕수-「문덕수 시전집」“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음은 디지털 시의 정서다. 디지털은 정서나 감각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이기 때문에 아날로그적인 정서와 감각에서서 멀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아날로그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정서를 드러낼 수 있다. 샘플링 된 현실은 사실이 아니고 마음 속 화면에 반영(反映)이 되어서 나타난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 반영 속에는 시인 자신의 의식(관념)의 그림자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것을 순수한 탈-관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실과 밀착된 마음의 영상은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디지털의 생동하는 감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이 생동하는 감각은 추상적인(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아니라, 현실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시의 정서는 샘풀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 될 때 이미지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관념의 위로 솟아올라온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다. 따라서 시의 밑바닥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다. 그래야 인간적인 시가 탄생할 수 있고, 그 시에 담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진 맑은 정서가 될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했을 때 디지털 시는 관념이 가라앉은 후에 떠오르는 맑은 향기 즉 원래의 자연향기를 풍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화된 상태의 자연 본연의 향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굳이 정서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샘플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되는 탈-관념의 디지털 시의 정서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정화시키는 힘을 드러낸다. 그러나 추상적인 상상을 통한 간접적인 샘플링의 방법으로 구성된 디지털 시에는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생길 수도 있다.    다. 디지털 시의 조건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에 전제되는 조건은 디지털 시는 시 본래의 특성(아날로그의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아야 하며 보통의 시와 같이 읽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가 실험시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감각만이 아니라 시가 사유와 정서의 표현이라는 일반적인 시의 조건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가 일반적인 시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디지털 시의 근원(기본원칙)과 전제조건을 만족시키고 디지털 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은 무엇일까? 그것을 열 가지로 구분하여서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디지털 시는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한다. 언어 단위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그 언어 단위는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요소 즉 객체지향의 모듈(module)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예시작품: 문덕수의「꽃잎세기」,오남구의「푸른가시짐승-빈자리x.3」,심상운의「빈자리-낮12시25분」)  2)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 (심상운「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참조)  3) 디지털 시는 현실을 직접 샘플링(1차적 방법)한 자료로 생성된 시와 추상적(2차적인 방법) 샘플링을 통해서 구성된 시로 구분한다. 그러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 시에는 샘플링(sampling견본추출)된 현실세계가 극소화될 수도 있다.  4) 디지털 시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과 사물성의 순수 이미지를 중요한 요소로 한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순수 감각을 드러내고 사물의 충돌과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은 디지털 감각과 영상언어의 산실이 된다. 이러한 영상언어는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디지털 시는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하는 과정에서 탈-관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아날로그의 노이즈(noise 잡음) 제거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의 심리적 현상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 것은 허용한다. (예시 작품: 심상운의「검은 기차 또는 흰 비닐봉지」)  6) 직관을 통한 염사와 원근법을 깨뜨리고 실상에 접근하는 접사는 디지털 시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샘플링의 방법이다. 따라서 더 많은 방법들이 원용될 수 있다. (예시 작품 :오  남구의 「밤비」)  7) 디지털 시의 정서는 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와 현실(관념)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로 분류한다. 증류수 같은 정서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의 시는 송시월의 「입춘무렵」을 예시작품으로 들 수 있다.  8) 디지털 시는 단일한 시점과 감각과 정서만 고집하지 않고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  합된 감각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도 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다층구조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 「경운동 88번지로 간다-염사」를 들 수 있다.  9) 디지털 시는 작가(시인)가 만들어낸 완성품의 시에서 벗어나 독자가 참여하여  각자의  사고와 인식과 감정과 감각이 들어가서 만들어 내는 독자 참여의 열린 시를 지향한다. 그 바탕에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受容美學, Rezeptionsasthetik)이 들어있다. 이 때 시인은 시의 설계도를 제시하고 그것의 자유로운 변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참여를 유도하는 연출자가 된다.  10) 디지털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지향한다. 그래서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 그 가상현실은 환상도 되고 꿈도 되지만 현실의 절실한 감성과 정서를 전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이 열 가지의 조건은 한 작품 속에서 서로 조화로운 비중으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한두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작품을 형성할 수 있다.   라. 예시 작품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讀解) 다음은 와 에서 예시작품으로 거론된 시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다. 예시된 시들은 탈-관념의 세계를 보여주는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와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시의 방법론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열 가지의 조건(방법)에 대입하여 디지털 시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고 새로운 감상과 해석의 길을 열어보는 것은 실제의 창작을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전문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이 시는 시가 “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서 탈-관념의 순수한 영상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연속적인 각 연의 언어들은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의 각 연은 서로 독립적인 관계 즉 객체지향성(모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인이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입장에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5연 는 통사적 구문에서 벗어난 시의 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단위(단어, 구문)들의 충돌과 간섭을 통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적 면에서 구성이 산만하다. 그 원인은 이 시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의식(의도)이 시 전체를 통제(관통)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마을을 덮은 코스모스 덤불 아무거나 한 송이 골라 꽃잎을 열심히 세어 본들 나비처럼 머무를 수야. 대추나무 밑동을 감고 한창 뿌득뿌득 기어오르고 있는 나팔꽃 푸른 것은 깔때기 모양 흰 것은 나팔주둥이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여섯 세어보지만 실은 한 송이일 뿐이다. 돌담을 돌자 앞장선 나비는 오간 데 없고 순하고 야들야들한 연보라 무궁화꽃 그 한 송이의 여섯 개 꽃잎을 확인한들 내 어쩌랴 어쩌랴. 해바라기는 서른네 개의 황금 꽃잎을 둥글게 박고 들국화는 서른아홉 개로 쪼개진 보랏빛을 빽빽이 둘렀거늘 내 어찌 머무를 수야. -------문덕수「꽃잎세기」전문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 시의 탈-관념된 언어 단위(unit)들은 결합을 통해서 대상의 모습(현상)을 드러내지만 분리(해체)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꽃은 여섯 잎, 무궁화꽃 여섯 잎, 해바라기 서른 네 개의 꽃잎, 들국화 서른아홉”이라고 대상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들을 분리하고 숫자화 함으로써 색(色)과 공(空), 결합과 분리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구상적인 자연현상을 추상적 디지털 언어로 환원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덕수는 이러한 시적 형상의 방법론을 그의 시론 「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사물이나 대상 하나하나를 1,2,3,4,5.......와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적 특성을 추상화할 수 있고, 추상된 그 대상을 결합하여 한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을 나는 역시 인접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집합적 결합”이라고 명명해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디지털을 형성하는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의 의미 즉 디지털의 최소의 단위의 개념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 시는 디지털 시의 본질인 단위의 분리와 결합의 원리를 보여준 시라고 판단된다. 이 시에서 ”나팔꽃, 무궁화꽃, 해바라기, 들국화“는 디지털 시의 구조를 형성하는 부분 단위(module)가 된다.   간밤, 회색담장 ������회색������을 헐고 푸른울타리 ������푸른������을 세웠다. 반짝이는 인동의 사금파리������반짝������을 빼고 가시장미������가시������를 올 렸다. 갑자기 ������푸른가시������짐승이 나와서 달빛을 갈갈이 찢고 온 밤을 으르렁댔다. 다시 ������푸른������을 밀고 가시장미������가시������를 내리고 비워 둔 빈자리 x. 아침, 울타리에 구름 한 쪼각 앉아서 쫑긋 꼬 리를 들었다가 사라진다.  --------오남구「푸른가시 짐승 -빈 자리x.3 」전문    이 시의 중심점은 빈자리 x의 무한한 변신이다. 빈자리에 무엇이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감각과 상상의 세계가 바뀐다. 이렇게 바뀌는 것(분리와 결합)이 탈-관념된 디지털 단위들의 특성이다. 만약 어떤 고정된 의미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면 감각과 상상의 변신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탈-관념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꾸벅꾸벅 졸던 중년 여인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앉은 꽃무늬 스카프의 아가씨   두 꽃의 향기가 흥건하던 자리에 머리에 무스를 바른 청년이 앉는다 그의 핸드폰이 뿜어내는 경쾌한 소리   순간, 나는 조금씩 발을 들썩이고 파랗게 살아나는 오래된 바다 흰 목덜미의 그녀는 노란 유채꽃 밭을 뛰어가고 있다   그가 훌쩍 일어서서 나간 뒤 하나의 공간으로 돌아간 진홍빛 우단의 빈자리 그 위로 눈부신 햇빛과 신록新綠의 그림자가 번갈아 앉았다가고   낮 12시 25분 전동차 안은 계속 섭씨 20도의 환하고 푸른 공기 속에 있다        ------ 심상운 「빈자리 -낮 12시 25분」전문        이 시도 오남구의「푸른가시 짐승 -빈자리x.3 」같이 빈자리 즉 최소 단위(unit)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는 감각과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전동차 안의 풍경과 감각, 시인의 상상이 생동하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그것은 이 시 속에서 언어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인 감각의 흐름이 시의 저변을 흐르는 시인의 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이미지의 생명력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전문    이 시는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접사와 염사를 통해서 샘플링한 시다. 샘플링 하는 과정에서 사건은 단순화되었으며 탈-관념이 되었다. 그러나 “검은 색과 푸른 색, 하얀 색”의 색채가 의미하는 관념과 “눈물”이라는 관념의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아서 시의 정서가 되고 있다. 그 정서형성의 원리 속에는 디지털 시에서도 관념의 완전한 제거는 시를 성립시키는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과 인지단계의 관념은 오히려 디지털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이 시에서도 장면의 변화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과 디지털의 감각과 상상을 표현하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간섭(干涉, interference)과 잔상(殘像, afterimage)을 통해서 이미지 형성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남구 「밤비」전문    이 시의 중심은 직관을 통한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샘플링이다. 그 잠재의식 속에는 현실이 들어 있다. 그것을 염사와 접사로 나누면 잠재의식 쪽에 더 가까운 것을 염사라 하고 현실 의식 쪽에 가까운 것을 접사라고 한다. 염사와 접사는 대상을 사진 찍 듯이 순간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미지로 재생하는 샘플링의 방법이다. 이 기법은 디지털 시의 기본적인 표현 방법이다. 이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에도 비 오는 밤에 시인의 잠재의식 속에 떠오르는 영상들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의식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햇살에 찔린 잔설 한 토 막, 눈물을 흘린다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메시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 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송시월 「입춘 무렵」전문    이 시에는 디지털적인 감각과 정서가 선명하게 들어난다.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에 들어 있는 감각은 디지털적인 명료한 감각의 표현이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다. 이 데이터는 디지털 시에서 아날로그 시보다 현장의 감각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탈-관념된 언어단위가 된다. 이와 함께 휘파람새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장면 변화의 동영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투명한 의식과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기법이다.    461120-10675xx吳鎭賢  2002년 12월 29일 57세로 살아 있음.  빨간 싱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뇌세포의 신 경체계가 잘 유지된다.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고, 잠깐 내 모습의 환영, 팔순 노구가 앞을 멈칫멈칫 가다가 쉰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이 때 번쩍 뇌세포에 녹화된 화면 이 켜진다. 2002년 12월 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 목사가 하늘에서 돈뭉치를 뿌린 다. 파란 만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 한 노구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아우성친다.  띵-, 붉은 등이 켜진다. 다시 ������복제인간 아기 탄생!������화면이 겹 친다. 몸이 떨린다. 쾅!쾅!쾅! 맥박이 가슴친다 숨이 가빠지고 정 신이 없다 인내천 인내천 소리치고 숨을 고르면서 경운동 887번 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쏴아-.싸늘한 바람, 번쩍,5번 출구의 표시등이 켜졌다. 침략으로 점멸하기 시작 하는 신호,→⑤번 출구, 바뀐다.  시련의 점멸하는 이름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며 내 신호 체계가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오남구「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염사」 전문    이 시는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합된 감각의 세계를 디지털적인 순간순간의 변화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다층구조의 감각과 이미지는 팔순노구→ 목사가 하늘에서 뿌리는 파란 만원짜리 지페→미래의 내 모습의 환영인 노구들의 허우적거리는 아우성→복제아기의 탄생의 화면이 겹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시인은 시공을 이동하며 잠재의식과 현실의식 속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겹쳐져서 나타나는 화면을 생생하게 사진 찍 듯 찍어내고(염사) 있다. 그것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몇 분 사이의 사건이다. 이런 디지털 시의 감각은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섞어서 저장, 전달, 재생하는 디지털적 감성통합과 맥을 같이 한다.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디지털 시의 특징은 운동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 동적 이미지는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가상현실은 흥미로운 환상도 되고 꿈도 된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투명한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이 시의 언어들은 탈-관념의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디지털의 정수로 된 수리적 데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5. 나가는 글-디지털 시의 미래    이제까지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라는 주제의 중심에 “디지털 시”를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21세기의 의사소통 방식은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가 시대의 핵심동력(核心動力)이 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현대시의 방향을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에 맞추어 탐구하는 것은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는 디지털 시의 근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의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덕수의 탈-관념의 사물성의 시도 디지털 시의 존재성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그 시들의 감각과 시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현대 컴퓨터의 디지털 특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부분 , , 은 순수한 독창적 것이 아니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디지털 시와 연관된 재료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합하여 구성한 21세기 디지털 시의 설계도인 것이다.  과 은 미래지향의 시창작방법론이다. 예시 작품들은 디지털 시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실험적인 방법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예술에서 완성이란 신기루(蜃氣樓) 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환원하여 21세기적인 새로운 시의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시 운동이다. 현재 이 시운동은 출발선상(出發線上)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디지털 시 운동이 한국을 넘어서 세계화가 될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은 지나친 자만(自慢)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시론은 21세기적인 감각과 의식이 생동하는 젊은 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로   --- 디지털 시대의 시 쓰기                                                           심 상 운(시인) 1.  동양시의 경전이라고 일컫는 고대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보여주는 인간정서의 자연스런 분출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피어난 ‘감정의 자유로운 유로’(워즈워즈)는 이성보다 감성을 선호하는 한국현대시에서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근원은 ‘시는 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그러나 정서과잉, 상상력의 고갈 등 시적 긴장감이 풀어진 시들은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주었고 시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불러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 리듬, 이미지, 스타일 등에서 시대적 감각에 맞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의 모더니즘 시가 지적인 언어와 회화적인 이미지의 기법으로 정서과잉의 낭만주의에 식상한 지적 성향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영토로 환영을 받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고, 정서의 자연적 노출에서 벗어나 이를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줌으로써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했다. 이는 시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箱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距離의 노을을 벗기지 않는다면....   희망. 그것은 너의 寶石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는다면..... ------김현승 1〜3연    그러나 시에서 의미를 중시하는 지성의 과잉이 일으키는 병폐도 또한 새로운 시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지성의 과잉에 대응하는 반지성(反知性)의 시, 즉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초현실의 시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를 추구하고 언어표현의 과감한 혁신을 지향한다. 그리고 시적대상의 현실적인 공리성이나 합리적인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대상과 대상을 창조적인 새로운 관계로 맺어주는 시작방법(詩作方法)을 내세운다. 이때 시 속에서 현실적 실용성이나 합리성, 공리성을 다 없애버리고 순수한 시적대상으로 재탄생하는 대상을 오브제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시작방법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反動)이거나 모더니즘의 전위(轉位)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초현실주의 시는 난해성을 수반하지만 시의 존재성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부분    나의 영혼은 어느 무당집 촛불로 불타고 있다. 그해 겨울 동자상을 안고 오는 길은 뼈가 갈라지는 어둠이었다. 무당이 주는 병든 본능의 복숭아를 깨물며 내가 사랑했던 개들이 나를 자꾸 물어뜯어도 어디가 아픈지도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잠들 수 없는 어둠, 소리칠 수도 없는 어둠, 껴안을 수도 없는 어둠이 토끼의 눈물처럼 내 손바닥에 쌓이고 그런 날 무당집 뒤뜰의 구렁이는 밤마다 나를 껴안았다. 그 때마다 묻어났던 벌개진 어둠.                           ----------양준호「나의 영혼은」전문    모더니즘은 이런 도전 속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포용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것이 반지성을 용인하고 지성과 반지성이 서로 어울리게 하는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다. 이런 시작방법과 인식의 변화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시운동의 태동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 현대시에서 디지털 시대의 감각을 시에 도입하고자하는 ‘디지털 시’ 운동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시의 큰 테두리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의 모색과 분출이 가능한 것은 모더니즘의 근본정신 속에는 인습적인 것이나 상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변혁(變革)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21세기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디지털의 시대다. 컴퓨터의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사이버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을 열어 놓고 있다. 이 사이버공간은 개인 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영상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 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디지털의 특성이 만들어 내는 영상과 쉽게 합치될 수 있다. 이 영상(보여주기)은 근대 이성의 ‘문자권’, 을 넘어서는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 시대의 중심 매체다. 현대를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디지털의 특성+시= 디지털 시’는 현대시에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디지털의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언어의 예술인 시의 세계에서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옮겨 온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로 옮겨오는 디지털의 특성에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적인 언어와 상상력’이다.  ‘디지털 적인 언어’라는 것은 언어를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컴퓨터의 데이터(data)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언어를 기호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선과 색채’와 같이 의미나 실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언어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탈-관념(무의미)의 언어라고도 한다. 이 탈-관념의 언어는 디지털의 감각인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등을 구현하는 언어가 된다.  이런 디지털 시의 언어는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 (erdinand de Saussure 스위스 제네바 857. 11. 26 ~1913. 2. 22)의「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19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언어는 실제적인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스스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의 상상은 이런 언어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虛像)이지만 실재(실체)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순간의 시학」과「불의 시학」을 강의하는 김융희(서울예술대 교수)는 강의(2006,6,26)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강의 개요’에서 요약․정리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도「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 157호)에서,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라고 순수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수평으로 네 개의 막대기가 날아간다. 똑같은 속도로 나란히 열을 지어 때로는 장대처럼 일직一直으로 이어져, 그 중의 하나는 달을 두 쪽으로 쪼개고 그 중 하나는 지구를 툭툭 치고 그 중 하나는 꽃밭을 후려갈기고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쳐 죽인다. 흩어졌던 막대기들이 다시 날아와 수평으로 나란히 열을 짓다가 제각기 머리를 돌린다. 하나는 벽을 후비면서 돌고 하나는 유리창을 뚫고 드나들며 하나는 나비를 뒤좇아 내를 건너고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 뒤얽히던 세 개도 차례로 죽는다.                         -문덕수 「네 개의 막대기」전문    디지털 적인 상상력은 ‘가상세계(假想世界)’라는 무대를 설치하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 가상세계는 ‘허구적(虛構的)’이란 면에서는 예술적인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디지털적인 상상은 허구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데서 기존의 허구와 차이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을 제정하고 홍보하는 조선일보(2007,4,9)에 기고한 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의 글,「꿈을 현실로… 이것이 뉴 웨이브 문학!」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는 그 글에서 “정보화 혁명은 문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좌표 위에 위치시켰다.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을 하는, : 대화식의)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 라고 21세기 디지털의 세계가 펼치는 가상세계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라고 하면서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판타지문학도, SF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의 마법사’ ‘듄’ ‘유배행성’ ‘로캐넌의 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그리고 있는 현대문학일 뿐이다. 그 반대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현대문학’, 즉 1990년대 이전까지의 현실 개념에 따라 문학을 이해하는 근대문학이 있다.”라고 현대문학과 근대문학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검증을 철저히 거쳐야 하겠지만, 상상의 무한한 확대라는 면에서 21세기 문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Hypertext literature) 은 디지털 적인 순수한 상상력의 확산과 독자참여의 문학공간이라는 면에서 한계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 텍스트의 유동성(流動性)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닌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형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형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인터넷에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리좀은 원래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줄기 즉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용어인데,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J. 데리다, G.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되는 시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과리(문학평론가)는「컴퓨터와 문학- 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6년)에서 “문학의 ‘文’ 그리고 literature의 'letter'는 문학이 ‘언어’ (더 좁혀, 문자)를 중심매체(中心媒體)로 삼는다는 뜻을 포함하고도 있다. 하이퍼미디어에서는 그런 중심매질(中心媒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 또한 그 자체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의 장 속에 종속하여 있어서,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론은 문학에서 중심매질이 되는 언어(문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 예속된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미완성의 시-그림 감상하기」전문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 1834 영국의 서정시인·비평가·철학자.)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연상)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기울게 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추리(知的推理)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무목적성’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공상이 상상보다 현대적인 감각을 더 넓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시의 무목적성 외에 공상이 가지고 있는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낀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이나 유희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거나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이 하이퍼텍스트 시도 ‘디지털 시’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필자의 현대시론「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는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듈 이론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연결 관계보다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이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이다. 이 의식의 흐름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의 맥락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4.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탈-관념의 영상언어 즉 보여주기(Showing)의 세계를 제시한 ‘디지털 시 운동’은 모더니즘의 구조(frame)속에 들어있으며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의 새로운 언어 운동’이다. 이 디지털 시 운동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는 물론 상상의 확대, 자유연상(공상), 영상성과 공연성을 통해서 ‘공연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현대시의 공간 확장방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탈-관념’, ‘기호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 공간을 개척하는 강한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정서 위주의 시나 모든 시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시인들은 사이버 공간과 가상세계, 언어의 기호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들 중에는 ‘디지털 시’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기계의 시로 착각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다. 그런 시인들에게 디지털 시의 넓은 공간과 새로운 감각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쩌면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21세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호흡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의 세계는 현대인의 정신을 정주(定住)에서 이동(移動)으로, 삶의 공간을 지역공동체에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변화시키고 있다. 탈-중심은 다양한 가치의 세계 속에서 어떠한 대상과도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런 현상은 언어예술의 세계에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따라서 현대 시인들은 과거시제의 ‘관념의 집’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유목민처럼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시점에서 볼 때,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문학은 미지의 텍스트의 세계로 떠나가는 예술적 여정에서 다른 예술보다 뒤처져 있다. 언어의 의미성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문화의 집적(集積)인 언어의 의미성이 새로운 텍스트의 원천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에 게재한 시론(대담형식의 글)「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畵)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에는(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7년 12월 사단법인 한국 현대 시인협회 기관지 2호에 발표 (2007,12,24 수정)               사단법인 2008년 여름 세미나 주제발표 원고 (수정보완)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 21세기 ‘하이퍼 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 상 운 (시인)    1.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1908년 잡지 에 발표된 최남선의‘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시발점으로 출발한 한국의 현대시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경제건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면서 시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현대시는 시대적 이념의 시, 개인적 서정시에서 전통적 서정시, 사회계층에 대한 시, 모더니즘의 예술적 감각의 시, 주지적 관념의 시, 언어실험 시 등 시대적 사회적 예술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시의 공간을 대폭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민조시(신세훈),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공연시(신규호), 디카시(이상옥) 등 새로운 시의 형태를 정립하고 있다. 현대시의 이런 변화 속에는‘전통 언어의 계승과 변화’(민조시),‘언어와 실체의 관계’,‘시와 독자의 소통문제’(디지털 시, 공연시, 디카시) 등이 들어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와‘시의 구조(構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설정은 중요성을 더 한다.  20세기 한국 현대시들은 시의 구조에서 공통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단선구조의 시는 시의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 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말한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전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전문    이 두 편의 시 속에는 인물(눈먼 처녀, 내 누님)이 들어 있지만 그 인물들은 시의 시점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박목월의 속의 눈먼 처녀는 시적 화자(詩的 話者)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눈 먼 처녀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정서는 화자(시인)의 주관적 인식과 감성의 표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화자와 처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 된다면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가능해 질 것 같다. 서정주의 속의‘내 누님’은 비유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단일시점으로 고정된 화자의 사유와 감성에 더 밀접해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독립적인 면이 박목월의 의 눈 먼 처녀보다 약하다. 작품 예시는 안했지만“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시 속에‘그’라는 인물을 삽입하여 정서를 객관화시키고자 했던 유치환의 도 단일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런 단선구조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현대시의 고정된 틀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시의 정체(正體)도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 표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향의 나 문덕수의 와 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라는 단선구조의 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전문   남쪽 북쪽의 불벼락을 맞아 지붕 기왓장 문짝 모두 휴지처럼 날려가버린 유령이네 반세기를 앓는 벽은 3층 윤곽만 남았네 태극기 인공기 번갈아 내걸려 펄럭이었을 그날의 불먼지, 벽귀퉁에서 시나브로 날려 떨어지는 문틈에는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 꽃 피네   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 나비 앉네                   ----문덕수 < 철원군 노동당 당사> 전문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선비화禪扉花로 피었다는 설화가 있음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어 벽에 걸어 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 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새기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 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녹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 개 씩 들고 몰려온다           -----문덕수 전문     조향과 문덕수 시의 공통점은‘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들은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 즉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해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조향의 는 연결고리(링크)의 기능이 형성되지 않은 단순 이미지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와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문덕수의 는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사실적 이미지 + 난해한 이미지) 즉 의식의 중층구조를 통해서 다선구조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의식의 중층구조는 이 시의 끝부분 에서“꽃 피네”와 “선비화에 나비 앉네”의 링크(link)가 만들어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꽃 피네”에 링크하여 “선비화에 나비 앉네”로 건너뛰는 의식의 비약이 현실을 초월하는 하이퍼(hyper)인 것이다. 에서는 마릴린 몬로의 다양한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서 현대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욕망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의 환유(換喩)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논리적 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도 “마릴린 몬로”는 연결고리(링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 속에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단선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향과 문덕수가 시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의 탈출은 그들의 시에서 의미의 단절 또는 의미로부터 해방과 함께 시의 공간이동을 보여준다. 이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계에서 형이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 결합 방식은 김춘수의‘무의미 시’의 기법과는 다른‘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여야 하는 시의 정체(正體)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기법의 제시다. 따라서 언어의 링크 기능을 통한 하이퍼(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는 문덕수의 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여는‘디지털 시 또는 하이퍼 시’의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2.  21세기의 한국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운동‘디지털 시’또는‘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시의 정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어려웠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 공간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사이버(cyber)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이버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개인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공간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의미의 예술’에서‘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20세기의 단선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서 21세기적인 다선구조의 틀을 세우려는 ‘하이퍼 시 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하이퍼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를 거부하고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이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따라서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선후(先後)가 없으며,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리좀의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 시다. 그러나 전자 하이퍼 시가 아닌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문자 하이퍼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문자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문덕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에서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 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줍니다.”라고 이미지 세계(시)와 가상현실 세계(컴퓨터)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하이퍼 시)’ 이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 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李箱),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 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 화자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나’라면 제2 제 3의 화자는‘너‘와‘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층 시점에서 3인층 시점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   (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위에 예시한  와 는 하이브리드 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만이 아닌 ‘너’나 ‘그’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형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바뀌게 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나’와 일반 서정시의‘나’는 입장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에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  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 심상운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회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 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나’와‘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이다.               4.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3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 시는 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사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 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가상현실의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 시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 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와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확장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선택과 집중’‘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가상현실의 세계’라는 디지털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 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출처] 심 상운의 하이퍼시에 관한 시론|작성자 최진연  
54    하이퍼시의 도우미 댓글:  조회:4186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함(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즘)을 형성한다. 다시점의 이이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김규화.심상운-편집자 발간사 中 일부 발췌 page 5-6]     발간사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구현방법을 읽어보고서야 책에 수록된 시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이브리드. 링크. 네트워크. 敍事. 초월. 變換. 이중구조. 연출자’ 하이퍼시를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추려내 본 낱말들이다. 무척이나 초현대적인 단어라는 느낌이다. 문학적이기보다는 철학적인 뉘앙스가 더 많이 풍긴다고 해도 틀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 특히 敍事라는 낱말에 머릿속이 명징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그동안 왜 하이퍼시는 길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시의 운율보다는 자칫 산문적인 느낌으로 읽히는 시를 읽으면서 줄곧 풀지 못 했던 문제였다. 초월의 이미지도 따라가기엔 너무 보폭이 크고 넓어서 영 어렵기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9가지의 하이퍼시 구현방법을 읽고 나니 비로소 내 문제의 답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 같다. 아무튼, 나는 새로운 세상을 하나 더 알아보려는 착한 학생의 마음으로 하이퍼시의 문 앞에 서 보았다.   내가 하이퍼(hyper)시를 처음 만난 건 월간 시문학을 통해서이다. 매달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 시론을 읽으며 하이퍼 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배움이 부족해서일까 하이퍼시는 여전히 내겐 너무 어렵다. 한국하이퍼시클럽 동인들이 작품집 ‘하이퍼시’를 출간했다. 하이퍼시에 대해 궁금해 했던 참이라 반가운 시집이다. 물론, 이미 시문학에 게재되어 만나본 시도 있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시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시집을 읽는 재미 이외에도 새로운 시를 공부하기 위한 텍스트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고 나는 본다.     잘 익은 부사를 깍는다/ 둥글게 깎여나간 ‘잘’이란 꽃뱀 한 마리/ 쟁반에다 또아리를 튼다// 과도에, 내 손에 닿아 끈적끈적 달라붙는 군살// 우리집 통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다 보름달이 해체된다/ 초승달 하현달 반달 갈고리달 둥글게 머리 맞대고 모/니터 앞에 앉아/ ‘부사’란 단어를 검색 중이다/ ‘사과의 한 품종으로서 당도가 높고 색깔이 붉다. 품/사의 하나로서 한 문장의 특정한 성분을 꾸며주는 성분/ 부사(잘 매우 겨우) 등 그리고 문장 전체를 꾸며주는/ 문장부사(과연 설마 제발) 등’// 내가 갂아낸 부사,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 [송시월-사과를 깎으며 全文 page95]   눈을 뜨고 잠을 자다 소복한 여인처럼 시장골목 여기/저기 종종 걸음으로 넘쳐나 돌아치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숨죽이고 엎어져 있다 왜들 그러냐고 묻지 마라/ 입을 다물고 산자락에 꽃뱀처럼 똬리를 틀다 거리에 춤/추다 어디에서 숨바꼭질을 하는지 누구 가슴에 숨어 울/다 잠들다 작은 소리로 징징거리다 기우뚱거리며 실룩거리다 늪에 빠져 이내 조용하다 채송화 봉선화 벌겋게/피었다 흘러내리다 주막집 끝자락에 연분홍 바람 한줌/매달다. [정연덕-유월의 낮달 全文 page164]     시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든 시를 매개로 한 시인과 시를 읽는 독자와의 교감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쓴 시인의 생각이 시를 읽는 독자와 모두 일치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시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해독불가의 암호 문자가 되어서도 곤란하지 않을까. 물론, 시인이 독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일단 어떤 매체로든 독자와의 만남을 의도한다면 독자에 대한 배려 또한 시작과정에서 어느 만큼은 안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할 때 입에서 꽃이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네/ 그런 사람의 가슴에는 꽃밭이 있지/ 당신도 그런 하늘이었으면 좋겠네/ 저기 푸른 물고기가 뛰노네/ 만지면 붉은 잎맥이 전달되는 꽃이 있네/ 꽃의 눈에는 연못이 있지/ 그 연못이 해를 들어올리네/ 초인종 소리 느리게 떨어지는 저녁/ 가시연이 하늘을 떠다니네/ 바람에 턱을 괴고 있던 별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스멀스멀 일어나 꽃이 되네// [김은자-꽃과 물고기 정물 全文 page71]     시 공부를 위해서 시를 많이 읽는 편이지만 시는 텍스트만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공부를 위한 시 읽기로 시작해서 문학과 예술로서의 시 읽기로 끝이 나서 난감할 때가 더 많지만 그럼에도 시란 ‘정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독자로서의 나는 시를 복잡한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읽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퍼시는 얼핏 불친절한 시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하이퍼시가 가지는 특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보니 하이퍼시가 의외로 유쾌하고 재미있는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는 아래로 내리고 바람은 누워서 불어 비와 바람이 마주치는 비바람소리에//숲속의 새들은 날개를 접고 풀슾을 헤치며 놀던 아이들도 발걸음 줄이며 함께 내리는 소리가// 어울려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Z Z Z? // 손가락으로 밀며 보는 스마트폰 안에서는 킬힐 신고 춤추는 잡가에 판소리에// 건물 옥상에서 나오는 울음 타는 소리, 초가집 구들장 무너지는 소리// 없이 고양이가 쥐를 잡는다는 소식, 소리소문없이 나는 소리 [김규화-소리에 링크하기 全文 page32]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꽃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심상운-맨살에 링크하기 全文 page119]     사전을 찾아보아도 hyper라는 말의 의미는 참 어렵다. 나는 그동안 나름대로 하이퍼시를 컴퓨터 용어로서의 하이퍼텍스트라는 말의 의미에 더 비중을 두고 이해하려 했었다.(hyper-컴퓨터 용어. in nonsequential manner 비순차적으로 연결된// hypertext-정보란을 마음대로 만들거나 연결시키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비순차적으로 기억된, 데이터의 텍스트) ‘낯설게 하기’로 설명 하는 ‘은유’와 ‘하이퍼’의 차이점을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이즈음의 문학잡지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뭔가를 주장한다. 어떤 문학잡지는 ‘정신’으로의 회기를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잡지는 ‘탈관념’을 부르짖기도 하고 ‘순수’를 표방하지만 그렇다고 순수하지만도 않은 문학잡지들의 주장 속에서 ‘하이퍼시’는 근래의 문학잡지들이 표방한다고 하는 그 주장 또는 지향점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하이퍼시가 지닌 색체는 일단 범접하기 어렵고 부담스러운 면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시론을 요약해보면, 하이퍼시에 대한 개념 정리가 조금 더 명료해지고 텍스트로서의 하이퍼를 비로소 시의 하이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이퍼(hyper)라는 말은 과도(過渡)한, 과다(過多)한, 초월하여, 넘어서, 초(超)...3차원보다 더 높은 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 일종의 연결어입니다. 사전에 hyperpoetry라는 말은 보이지 않으나, hyperacid(위산과다증), hyperactivity(극단적으로 활동적인), hyperacute(아주 과민한, 초과민한) 등의 용어가 보입니다. hyperpoerty라는 말은 미국의 브라운대학 교수인 P.란도의 저서 [하이퍼텍스트 3.0]에서 보입니다. 처음엔 하이커텍스트를 발견하였으나 뒤에 하이퍼시(hyperpoetry)를 발견하여 이 말로 대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이퍼’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세계를 넘어선, 저쪽 너머의, 또는 초월의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틈이 있는 두 세계(일상적 의식에서는 결합될 수 없는 두 세계)가 연속 연결되는 형식을 일컫는 말로 볼 수 있고, 문학작품 특히 시의 경우엔 하이퍼적인 것이 도입되어 비로소 시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문덕수-하이퍼시 개관 中page193-page194)     지난 며칠. 갑자기 착한 학생이 되어선 나름대로 열심히 하이퍼시에 대한 공부를 했다. 과월호 시문학을 꺼내놓고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이 책 ‘하이퍼시’에 실린 작품들도 다시 읽어보았다. ‘디지털리즘’에 소개되었던 작품들도 다시 찾아 읽어보았다. ‘하이퍼시’가 대중들에게 다가서기엔 다소 시간이 걸릴는지도 모른다. 내 나름대로의 결론대로라면 하이퍼시는 매우 고급스러운 시의 한 표현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53    하이퍼시의 전환기법 관찰 댓글:  조회:4472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의 항등성 배제 및 전경과 배경의 전환기법 관찰       -김해빈 시 중심으로                          이오장(시인)     1.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하이퍼시가 무엇이냐는 의문은 많은 시인으로부터 듣게 되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만큼 하이퍼시가 시인들의 관심과 연구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이며 시문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으로 새로운 시 연구에 있어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에 비하여 요즘 일부 젊은 시인들 주축으로 언어의 형식적인 서술과 비틀린 이미지의 조합으로 독자들이 외면하게 하는 부류가 있는데 바로 난해시파라고 불리는 시인들이다. 하이퍼시는 그러한 난해시 와는 확실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에 비하여 난해시는 관념과 허구를 결합하여 이미지의 이탈을 은연중 유도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미지 이탈이 목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거기서 발생한 상상은 독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본질을 이탈해 언어의 폭력으로까지 번지기 때문이다.   하이퍼시를 처음 도입하고 하이퍼시의 새로운 연구에 적극적인 문덕수 시인은 하이퍼시를 한마디로 압축하여 설명한다.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다.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두 단위의 구조를 이룬다. 결국,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점으로 귀결되고 그 두 단위를 연결함으로써 완결된다." 즉 하이퍼시는 관념을 완전히 버리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을 묘사하여 시를 쓰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물만을 가지고 시를 쓴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사물에 대하여 새로운 상상으로 몰입되기에는 자신만이 가진 사물의 본질적 이해가 필요하다.   시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의 감정적 변화의 그림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시인의 눈에는 사물에서 얻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며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여 독자와 공유한다. 한마디로 사물에서 느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그릴 줄 아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같은 사물을 두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고 이미지의 연상을 다른 사물과 대비하여 자신만의 세계로 읽는 이의 감정을 끌어 모은다. 그것이 개개인의 능력이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빠트리기 쉬운 감동의 여부가 결정되어 새롭고 진정한 하이퍼시가 완성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껴야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이퍼시가 되는가, 시인과 독자가 같은 감동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시문학의 발전만큼 독자들도 발전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시를 써도 그 순간은 자신이 감동하게 되고 완성을 이뤘을 때는 독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론에 맞는 하이퍼시를 쓰려면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2. 하이퍼와 항등성에 대하여   어떠한 대상을 보든 인간의 두뇌는 기하학적 원리를 따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인간의 두뇌는 자신만이 가진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눈과 대상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대상의 크기는 당연히 반으로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100m 앞의 사물의 크기와100m 높이에서의 사물의 크기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 볼 때가 훨씬 작아 보인다. 수직으로는 기하학적 원리가 작동되지만, 수평으로 볼 때는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등성이라는 지각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항등성이란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사물을 일정한 방식으로 계속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둥근 접시를 옆에서 봐도 타원이 아니라 여전히 둥근 원으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상황과 관계없이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말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동일성의 심리학적 구성 원리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른다면 시의 구성이 되지 않고 사물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져 시의 목적을 잃게 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모양에서 얻은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소나무를 봤을 때 소나무의 생태와 자연과의 동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눈으로 본 그대로의 모습을 그때의 상황과 연계하여 거기서 파생된 상상을 이어가는 것이 하이퍼시다. 시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안 되는 줄 알았고 실제로 우리는 시를 그렇게 써왔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대상의 본질 보다는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멀리 떨어진 큰 고목이 작은 묘목으로 보일 수도 있는 허상도 그릴 수 있고, 위에서 보는 크기와 거리를 두고 보는 크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활은 대부분 수평 공간에서 이뤄진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은 대부분 항등성을 잊고 산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쓸 때 그러한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감동을 앞세워 본능적인 감각으로 씨를 쓰기 때문이다.이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 세계에 대한 강박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게 된 것은 원근법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은 양쪽으로 보이는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원근법은 눈이 하나일 때만 가능했다. 렌즈가 하나인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그것은 항등성과 같은 두뇌의 작용을 제거하고 눈을 두뇌로부터 단절시켜 기계적인 정보만을 얻겠다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시인들에서 먼저 나타났다.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파괴하기 전부터 시에서는 항등성 제로의 원근법 강박에서 벗어나 보이는 데로 느끼는 데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시의 주류는 본질적 세상의 이상을 그려나가 인류는 객관적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은 기계문명에 완전히 길들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마트폰.컴퓨터 등의 화면 세상에 빠져 두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카메라가 잡은 세상만을 믿고 산다. 본질의 통찰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르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하이퍼시는 시작됐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상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무시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그림 위에 새로운 상상을 결합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카메라가 잡은 객관적 정확성에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세 번째의 눈, 다시 말해 본능적인 감성이 있어야 이미지의 연속성으로 하이퍼시가 이어지는 것이다.   3.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의 전환   시를 쓴다는 것은 창조적 행위다. 시인은 창조자로서의 요건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된다. 창조적 사고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인 월리스는 창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문제로부터 몸과 마음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시의 대상인 사물을 대했을 때 확연한 이미지가 이어지지 않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잠시 떨어져 다른 것을 상상하게 되면 불현듯 어떠한 상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상상의 존재란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사물의 각 부분을 따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형태 즉 게슈탈트(독일어로써 심리현상은 어떠한 요소의 가산적 총화로는 설명할 수 없고 전체성을 갖는 동시에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성질)로 파악한다. 이때 중요한 부분은 전경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인물만 뚜렷하게 나오게 하는 아웃포커싱과 같은 원리다. 시에서 이와 같은 전경과 배경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물의 어떤 부분이 관심의 초점이 되어 전경이 되면 나머지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맥락이 바뀌면 전경이 배경이 되고 배경이 전경이 된다. 이렇게 게슈탈트의 끊임없는 형성과 해소, 이 과정이 사물의 서사 즉 이야기되는 것이고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묘미이며 진정한 하이퍼이다. 전경과 배경의 전환이 매끄럽지 못하여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전경을 바꾸지 못하고 고정된 존재만 바라본다면 하이퍼의 구성이 한정되게 되어 형성이 뒤엉켜버리는 데 있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잃게 되는 감동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을 전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 기존의 고정 관념을 확실하게 버리는 것이다. 같은 하이퍼시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중복될 수 있는데 이것이 또 다른 관념이 되는 것이므로 유행 같은 언어의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둘째. 사물의 움직임과 동화된 주위 환경을 봐야 한다. 즉 새로운 사물을 찾아내어 그 움직임을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움직여 사물의 움직임을 찾아야 한다. 셋째. 관심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까지 몰랐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경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게슈탈트 전환이 가능해야 창조적인 발상으로 하이퍼시를 쓸 수 있다.   4. 김해빈 시에서 나타난 하이퍼시의 관찰   하이퍼시가 새로운 시문학으로 자리 잡아 시단의 큰 방향을 일으킨 후로 많은 시인이 참여하여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그 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성향에 맞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하여 그동안에 익혀왔던 사물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인들을 보면 문덕수 시인을 중심으로 심상운. 김규화. 조명제. 송시월. 안광태. 이춘하. 정연덕. 고종목. 이솔. 위상진. 김기덕. 이선. 김예태. 허순행. 김해빈 등 문단의 활동이 활발한 시인들이다. 나열된 이름에서 빠진 시인들도 상당수가 있어 새로운 시론으로 나타난 하이퍼시 운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이중 김해빈 시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이퍼시의 이론과 실제의 작품이 하이퍼답게 이해되고 부합되는 것에 대하여 관찰해보기로 한다.   김해빈은 초기 작품부터 전통 서정을 크게 벗어난 상태로 나타났다. 처음 작품집 "새에 갇히다"를 살펴본다면 그 제목부터 하이퍼 유형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 이론을 접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자신의 안목과 상상을 은연중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새에 갇힐 수는 없다. 그러나 김해빈은 스스로 새에 가두어 날개를 빌리고 새를 통하여 본 새로운 세상을 그린 것이다. 그 후의 작품집에서도 하이퍼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 것이 곳곳에 보이는데 이는 원래의 시적 감성이 일반 서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감각을 타고난 듯하다.   시문학 5월호에 발표된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비 그친 자운서원 잔디마당 위로 눈알 굴리는 잠자리 떼 뇌관 푼 핵폭탄 물고 몰려간다   유럽을 평정한 히틀러 독일공군이 영국 본토를 향해 도버해협 상공을 날고 있다 우중충한 날씨에 내려다보는 도시는 무표정하고 괴링의 출격명령에 날개를 편 전투기 노선을 이탈해 런던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 *블리츠(Blitz)체험관 상공을 낮게 날고 있다   잠시 멈추었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전투기는 급하강한다   빗금으로 치닫는 빗줄기에 야금야금 저려오는 날개 나치는 영국 상륙을 포기하고 두 손을 들었다   아버지보다 위에 있는 율곡무덤도 오만원권 오천원권 지폐도 아닌, 기념관 빛바랜 초충도에 앉은 고추잠자리   헤드라인 ‘오늘이 우리의 승전일입니다(TODAY IS V.E. DAY!)’     *블리츠Blitz 체험관: 유대인 학살 기록관과 런던 대공습 당시 일반인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꾸며 놓은 곳                           이 작품은 하이퍼적인 이론에서 벗어나지 않은 전형적인 하이퍼를 보여주고 있다. 고추잠자리는 평화의 상징이며 한가롭고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자연의 개체이다. 누구나 비 그친 뒤에 잔디밭 상공을 바람 없이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를 대하면 내면에 감춰진 그 어떤 고민과 울화도 잊게 된다. 어린아이가 고추잠자리를 잡겠다고 뛰어다니는 모습에 함께 동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평화의 상징이라 아니할 수 없는 곤충이 고추잠자리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겉모양뿐이다. 잠자리의 생태를 보면 곤충 중에서도 상위급인 포식자이다. 잠자리 유충이 물속에서 자랄 때 장구벌레 등 작은 애벌레나 심지어 개구리의 올챙이까지 잡아먹으며 사는데 애벌레의 시기를 보내며 먹는 먹이의 수효가 몇 만 마리가 된다는 학계의 발표도 있다. 또한, 땅 위에서 유충으로 지내는 명주잠자리는 일명 개미귀신이라 불리며 함정을 파 수많은 개미를 잡아먹는 포식자이다. 이것이 잠자리의 생태이며 본질이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시를 구상하지 않고 사물의 현재 보습을 보고 시를 쓴 것이지만, 전투기와 히틀러를 잠자리에 대입시킨 것을 보면 김해빈은 사물의 본질까지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위패를 봉안한 사원이며 율곡의 가족묘를 조성한 곳이다. 알다시피 율곡 이이는 성리학자로 알려진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또한, 평화를 지키는 데는 힘이 있어야 한다며 10만 군병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힘을 앞세운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잠자리가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는 데는 힘을 기르는 포식자의 시기가 있다는 것을 자운서원과 잠자리를 대비하여 나타낸 것으로 사물의 실체를 연결 인식하는 항등성을 벗어버리고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대비시킨다.   히틀러는 근대의 몇 안 되는 독재자의 대명사이다. 힘을 내세워 유럽과 전 세계를 점령할 목적으로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웃 나라를 폭격한다. 김해빈 시인의 상상은 사물의 현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유럽까지 날아가 히틀러의 폭격기를 불러낸다. 도버해협을 날아가는 폭격기가 자운서원 앞마당을 날고 있는 잠자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사물에서 파생된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다. 고추잠자리는 전경으로, 자운서원은 배경으로 나타나다가 폭격기의 등장으로 자운서원이 전경이 되고 잠자리는 배경으로 물러나는 전환의 기교와 이율곡의 사당과 가족이 배경이 되어 그려지다가 다시 고추잠자리가 전경이 되는 하이퍼적인 기법은 게슈탈트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운서원의 유래와 형성. 잠자리의 생태와 실태, 히틀러의 폭격기와 폭탄의 파열음을 하나의 장면에 대비시켜 이미지의 연결을 이뤄낸 하이퍼의 퍼즐을 무리 없이 그려냈다. 사물의 과거가 현재의 평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현재 보이는 모습의 잠자리가 그대로의 움직임으로 평화를 만들어 모두가 승리한 승전 일을 만든 것으로 복합된 이미지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하이퍼에서 빠지기 쉬운 감동까지 만든 것이다.     웃음보에 헛바람 들었는지 멸치같이 깡마른 남자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시청 앞 건널목 횡간막 사이를 비집고 히죽히죽거리며 다가온다   가을걷이 끝날 무렵 볼썽사납게 조무라든 꽈리를 보았을까 소피 마려운 여자의 뒤태를 보았을까 2시간 전 언양불고기 먹고 ktx 타고 올라온 여자의 하프코트에 묻은 쇠똥 굴러가는 소리를 들은 게야   설익은 시에 짓눌려 내 흉강에 덧쌓인 말씨들이 폐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혹시 눈치챘는지 남자는 이내 뒤따라오던 스키니 차림에 킬힐 신은 여자의 꽁무니에 눈길 꽂힌다   거미줄 같은 거리를 기웃거리며 권력을 찾던 남자는 몇몇 조무래기들의 웃음과 교회 전도사로부터 받은 일회용 휴지를 주머니에 우겨넣고 도마뱀처럼 꼬리 자르고 건물 안 으로 들어 가버린다   성형외과에서 나온 얼굴 퉁퉁 부은 여자, 공터를 지나다 울타리 넘어온 축구공에 뒤 통수 맡고 미간을 찌푸리려 하자 완충지대 튤립나무에 앉았던 까치가 깔깔거리며 날아 간다   주유소 화장실에 뛰어든 여자의 스커트자락 놓지 못한 남자 여자의 핸드백 들고 휘파람 부는 듯 볼을 잔뜩 오므렸다 부풀리며 달착륙을 시도하고 있다   정지신호 무시한 채 응급처치하고 나오는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                                                                                앞의 작품이 사물의 모양을 그려 새로운 이미지를 엮어낸데 비하여 이 작품은 사람의 감정을 사물화하여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적절히 이뤄낸 데 있다. 남녀의 생태적인 일상을 여러 각도의 방향에서 바라보고 남자의 히히낙낙 거리는 실태와 여자의 팽팽해진 감정을 하나의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하여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여기에는 남자를 전경으로 하고 그 뒤의 배경에는 여자의 감정이 언제나 받혀주는 형태로 사물의 표현보다 사람의 감정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남자는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신의 소유라고 믿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후손 번식이라는 지대한 자연의 섭리가 남자들을 착각하게 하였을 것이다. 작품 속의 남자는 여자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이어폰을 꽂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키득거리는 모습을 여자는 뒤에서 살펴본다. 현시대의 새로운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으로 있는 여자의 감정 기복은 폭발 직전이다. 그런데도 남자의 눈길은 또 다른 여자의 모습에 현혹되어 뒤따라가는 실태를 보인다. 이때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자는 남자의 기본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권력과 금전을 얻기도 전에 섭리적 욕망만을 풀어내려는 남자는 여자의 표적이 된다. 대부분 여자는 표적의 남자를 향해 창을 던지는 게 아니라 다른 출구를 찾게 되고 그 출구로 성형외과를 들락거린다. 그것이 실패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남자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푸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해빈 시인의 고민은 시작이다. 남자와 여자의 생태적인 모습을 버리고 현실에 맞는 모습을 그려야 할지. 남자의 비뚤어진 욕망의 발산을 원칙적으로 그려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 결과로 달이라는 위성을 찾았다. 해결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을 찾아 원색적인 남자의 욕망을 잡은 것이다.   기흉은 결핵성 파괴 등의 원인으로 폐의 표면에 구멍이 생겨 흉막강 안에 공기 또는 가스가 찬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자꾸만 헛바람이 빠져나와 남들이 보기에는 실없이 웃는 모습으로 보이는 병이다. 김해빈의 기흉은 그러한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남녀관계에서 시적 모티뷰를 찾아낸 것이지만 사물의 모습이나 움직임에서 이미지를 찾지 않고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사물화하여 원리적인 항등성을 배제하고 전경과 배경을 적절하게 전환하여 한 편의 하이퍼시를 완성하였다. 이것은 사물에서 찾은 이미지보다 쉽게 그려질 것 같아도 사람의 변화가 짐작하지 못할 이변의 연속인 것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다.   마지막 연에서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는 남녀의 생리적인 차이는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남녀관계는 이율배반적으로 동등하다는 항변으로 보인다.     날카롭게 솟은 뿔 동그란 눈 지그시 감은 타르보사우루스 알을 낳는다 간척지 모래 위로 퍼져가는 억새를 스쳐온 바람이 알을 날름 삼켜버린다   화성, 개미섬 기슭 따라 풀잎까지 벌떡 일어서서 조이는 팽팽한 호흡 바위를 핥아대던 기다란 혀들이 용암에 젖은 이빨, 발톱, 눈빛들이 번뜩인다   알을 깨트리며 주먹을 휘두르던 주몽이 활을 만들고 당긴 시위를 놓는다 경주로를 이탈한 말의 울부짖음 벌판을 가르는 선이 무너져 뚜렷하게 찍히는 발자국 부러진 청동검 반쪽을 주몽이 알 속에 감춘다 뺏고 빼앗기는 칼 유리가 알 속에서 청동검을 찾는다 얼었던 송화강이 녹는다   철거덕 철컥 철거덕 철컥 고개 쳐들고 들판을 달리는 점박이 또다시 커다란 알을 쏟아낸다 논바닥에 뒹구는 알 사육장 소가 침 흘리며 되새김질한다   돌알을 품고 있던 메갈로사우루스 시화방조재를 바라보며 푸른 눈 껌벅거리고 삭아버린 티라노의 하얀 숨결 솟아오르는 공단 굴뚝 안킬로사우루스의 잿빛 눈물이 하수구를 따라 흘러내린다 고삐 묶인 폐선 허리께서 삐거덕삐거덕 막대뼈 조이는 소리 몸 사르며 찢어진 풍어 깃발마다 익룡 발가락 펄럭인다   산조, 칠면초, 갈대가 뒤덮인 갯벌 알을 낳은 타르보사우루스 위턱을 치켜들고 슬금슬금 바닷가 암벽 속으로 사라진다 억새의 손짓을 기억하는 코리아케라톱스 알이 입 쫙쫙 벌린다                               첫 번째 작품이 사물의 형태와 움직임을 그려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을 이뤄낸 것이라면 두 번째의 작품은 사람의 심리 상태를 사물화하여 사물과 똑같은 상태로 전경과 배경을 전환하여 하이퍼적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세 번째 작품인 코리아케라톱스는 과거와 현재를 합하여 미래로 이끌어나가는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김해빈 시인의 시각과 감각이 사물과 사람의 연결된 상상의 고리를 한 차원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코리아케라톱스는 5천만 년 전 이 땅을 지배했던 공룡의 이름이다. 시화간척지가 생긴 후에 드러난 갯벌 개발 중 우연히 발견된 공룡알 화석에서 그 이름을 얻은 우리의 토속 공룡으로 그 흔적을 다 찾지 못하여 아직도 발굴 중이다. 그곳에 가면 금방이라도 공룡들이 포효하며 뛰어나올 것 같은 환상에 쌓이고 알 화석을 마주한 순간은 누구나 과거의 자연 상태를 떠올리며 현실을 잊게 만드는 곳이다. 김해빈이 본 것은 누구나 똑같이 보는 사물이다. 각자의 상상과 현재 보이는 현실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상상으로 몰입되어 각종 공룡을 만난다. 그러나 김해빈이 본 것은 남과 확연히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알을 떠올리게 되면 그 크기를 재어보고 부화될 새끼의 크기와 성장한 크기를 상상한다. 김해빈은 초기 삼국시대의 전설인 주몽을 불렀다. 건국에 필요한 힘과 힘을 받쳐줄 각종 무기와 활, 불타는 듯한 눈빛을 공룡의 힘과 대비하여 나라를 세운 주몽의 활약을 그려냈다. 거기에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떠올리고 주몽과 유리와의 관계를 설정하여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이뤄낸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돌아와 농기구인 트랙터가 뱉어내는 하얀 덩이(소를 먹이려고 볏짚을 효소와 섞어 단단하게 굴리는 일종의 싸이로 방법)를 알과 전설에 혼합하여 인간이 자연과 싸워 만든 거대한 방조제를 향해 생태파괴의 폭력을 항의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산조. 칠면초. 갈대가 뒤엉켜 펄럭이는 갯벌의 평화에서 쫓겨 가는 공룡의 마지막 장면으로 한 편의 희극과 같은 연출기법을 보여줘 하이퍼적시에서 빠트릴 수 있는 서정의 감동을 이끌어내었다. 항등성을 배제하고 사물의 모양과 움직임만으로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그려낸 것이다.     눈 쌓이는 모스크 앞에서 기도하는 무슬림들, 눈밭에 앉아 있는 낙타, 피라미드 앞 스핑크스는 미소를 잃었다. 사람들 호기심이 파라오의 역사를 뒤집어놓고 말았다   대립이 가득한 지붕을 하얗게 덮은 눈은 주도권 싸움에 뜨겁고 치열했던 여의도 십자가를 잠재울 수 있을까                                       압축된 삶은 의미가 없다며 하루하루를 느슨하게 흘려보내던 여자는 접시에 채소셀러드와 과일을 듬뿍 담아 테 이블 아래 주름진 의자에 앉는다   1월을 지나 2월이 오면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은 쭉정이도 제 몸 부풀리며 이벤트의 계절을 또 기다리겠지   12월 어느 날 베고니아 뷔페 시인의 접시 위에 퉁퉁 불어 튼 강남콩 한 알 덩그러니 남았다                                           위에 부분적으로 나열한 두 편의 시에서도 김해빈의 시는 시종일관 하이퍼적인 기법을 유지하며 시의 방향을 잡아 나간다. 폭설에서 100년 만에 이집트를 덮은 눈에 사막의 피라미드는 하얗게 덥히고 스핑크스가 미소를 잃은 상황에서 군중은 자유를 외치며 혁명가를 부른다. 개인의 염원이 하나로 뭉쳐 짓눌린 자유를 찾는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되찾은 자유는 폭설에 갇혀 다른 고난을 불러내는 피의 역사, 한 송이의 눈이 뭉치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보여주지만 웃음을 잃어버린 승리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다시 일으킨다. 이에 대비하여 우리의 의사당인 여의도를 등장시켜 대립과 설전이 난무한 상황을 꼬집고 그 옆에 위치한 높다란 십자가의 건물에서 일어난 분쟁을 종교적인 문제 즉 폭설로 불러낸 전환의 기법이다.   배부른 콩에서는 자유분방하고 욕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리낌이 없는 행동을 보이는 남자와 여자를 대비시켜 인간의 추악함이 얼마나 높아야 무너질 수 있는지를 쭉정이 콩에 비유하였다. 완성된 인간은 없으나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려는 과욕에 대한 행동을 꼬집어 통통하게 영걸은 콩과 익지 않아 쭉정이가 된 콩으로 그려낸 기법은 김해빈의 특유한 하이퍼적 시의 기교다. 어느 작품에서든 사물과 사물의 연관을 찾아내고 사물의 움직임과 멈춰진 정서를 끄집어내는 김해빈의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몰두는 앞으로 한 발짝 더 나갈 것이 분명하다. 이는 시의 실제가 이론을 앞질러 가기 때문이다.     5. 하이퍼시의 방향   시 자체가 원래 하이퍼라고 주장하는 시인도 있다. 일상의 용어에서 벗어나 그 위의 가상 현실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시는 언제나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의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 더 나가 지금껏 사용한 관념과 묶인 상상을 벗어버리자는 하이퍼시 운동은 우리 시단에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하이퍼시는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물에서 나온 가닥의 실을 한곳에 모아 하나의 실타래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 결코,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사물을 볼 때 이미 머릿속에 박혀있는 고정된 환경과 형태를 벗어버리고 사물마다 가진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어 하나의 특출한 이미지를 만들자는 것은 난해한 시를 쓰자는 것이 아니다. 문명의 발달에 맞춰 자연적인 정서에 기계적인 정서를 도입하고 발달에 따라 변해가는 인간의 정서도 바뀌어 가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옳다. 하지만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의 연결을 위하여 여러 갈래의 사물이 등장하고 조합된 이미지가 매끄럽지 못하여 시적 감동이 적다는 지적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개개인이 극복하여 풀어내야 할 숙제다.    
52    하이퍼시의 리해와 창작 댓글:  조회:4359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의 이해와 창작                                 이 오장 시인                                                   1. 현대시의 원리   17세기 폴란드의 미학자 사르비에브스키(K.M.sarbiewski)는 “모든 예술의 창조개념은 자연이나 사물을 모방할 뿐이지만 시인의 예술 행위만은 새롭게 창조(de novocrat)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미술이나 조각 등 기타 예술 행위는 자연과 사물 등의 대상을 모방하지만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끝없이 펼쳐져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으로 시가 모든 예술의 정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시의 발생이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함께 존재했다는 학설은 시가 예술의 근원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경외심을 가졌다.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에 비해 너무나 나약함을 깨달은 인간이 구원의 행동으로 언어가 발생하기 전부터 자연에서 얻은 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었고 언어를 습득한 이후 리듬이 발생하여 이것이 시로 발전했다는 학설은 누구나 부정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시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다. 순간의 전시성에 그치는 미술이나 청각적 예술은 인간의 정서를 다듬어주는 데 그치지만, 정신적 감동을 전달하는 시는 인간이 만든 역사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단 몇 줄의 시가 수많은 전쟁사를 기록으로 남겨 인류 발전에 공헌한 사실도 있다. 인간 생활은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연속적으로 구성되었다가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안정이다. 그 안정은 변화 속에서 자리잡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물질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오직 영적인, 즉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하다. 시는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정신세계를 다듬어 왔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를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부터 선택적 지각으로 왜곡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자연에 한정된 시야를 가졌기 때문이다. 시가 자연 속에서 발생하였지만 꾸준히 자연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었고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원하는 시의 형태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현상이다. 일찍이 조지훈 시인은 시의 원리에서 "시인은 자연이 능히 나타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시에서 창조함으로서 한갓 자연의 모방에만 멈추지 않고 자연의 연장으로서 자연의 뜻을 현현하게 하는 대자연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인이 자연을 소재로 하여 다시 완미한 결정을 이룬 제2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에 더 많이 통할수록 우수한 시며 실제에서도 훌륭한 예술작품은 하나의 자연으로 남는 것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를 모두 수용한다는 것은 착오다. 인간이 발전하는 속도에 뒤처지는 시라면 가치가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화가 끝이 없다는 것을 가정할 때 과연 사실과  실재성 즉 현실성만 가지고 시를 쓴다면 꾸준하게 발전되어온 시가 정체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쫒으려는 새로운 형태의 모더니즘(modernism)이 발생하여 전통주의와 사상에 대립하여 문명적 주관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시파가 등장하였고 근대 시인들이 꾸준하게 이를 발전시켜 많은 유파를 남겼다.  인간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보게 된다. 실제로 세상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자극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필요한 자극만 받아 그것만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창조적인 존재로서 남들이 지나치는 자극을 잡아들이는 능력을 갖췄다. 이것이 낯설게하기다. 시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똑같은 방법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낯설게하기가 기본임을 감안할 때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시 창작의 원칙이다. 이 같은 낯설게 하기의 기본이 시의 방향을 새롭게 만든다. 시는 미학이 아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엇도 아니다. 미학에 빠져있는 창조는 막힌 길이다. 예술의 창조는 시만이 가진 것이라면 우리는 새로운 시학을 가져야 하고 새로운 시학을 발전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2.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한마디로 이미지의 탑 쌓기다. 여러 가지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각각의 이미지로 그린 후 하나의 탑으로 쌓는 것이 하이퍼시다. 기존의 시가 하나의 이미지로 시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하이퍼시는 다수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하여 더 확장된 시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어 시의 표현력을 끝이 없게 상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존의 시만을 고집한다면 모더니즘의 공간에서 더 이상의 확장을 멈춰야 한다. 시는 인류의 발전에 앞장서야지 발전을 따라가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대개 시인은 하나의 사물만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시의 모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즉 관념에 갇힌 시작법을 고수하는 것이다. 심리학계의 저명한 학자인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stopher chabris)와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는 인간의 맹시현상을 실험하여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결과는 인간의 시선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어떠한 연극이나 경기를 보게 한 뒤 극 중이나 경기와는 관계없는 움직이는 사물을 지나게 하면 대개의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연구결과이다. 자기가 보고 있는 사물의 움직임만 보게 되지 그 밖의 사물은 관심 없다는 맹시현상은 시인의 시 쓰기에도 동일하다. 어떠한 사물에서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오직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올리게 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른 이미지는 관심 밖에 두는 것이 일반적인 자세다. 하이퍼시는 맹시현상의 허점에서 출발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며 거기서 파생된 다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면 하이퍼시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파생된 이미지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편집이다. 사물은 끝없이 구성되고 해체되었다가 재구성되는 성질을 가졌다. 이미지는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유동성 상상이다. 하이퍼시는 변하는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변화하는 각각의 사물마다의 이미지를 편집하여 하나로 융합시키는 것이 하이퍼시의 완성이라 할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재능이 필요하지는 않다. 천재는 한없는 상상을 하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능력을 가졌다. 이에 반하여 둔재는 끝없이 상상하기만 한다. 시를 쓰는 시인은 누구나 천재라고 자평한다. 그렇다면 하이퍼시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가장 창의적일 때는 멍하니 있을 때다. 멍하니 있다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무엇인가 자신도 모르는 것을 생각하며 끝없이 상상력을 확장해 나간다. 이때의 상상은 생각의 흐름을 놓칠 때까지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에 멈추게 되는데 그 멈춤에서 흐름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이고 찾아내지 못하고 놓치는 게 보통 사람이다. 이러한 상상은 시인들에게는 일상이다. 이럴 때의 생각은 그림 곧 심상이 되고 시인은 이를 문장으로 옮겨 시를 쓰게 된다. 이때 그림을 설명하는 글이 관념적인 문장이고 객관적으로 묘사를 강조한다면 사물시가 되어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론을 보면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고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구조를 이룬다고 했다.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들어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함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한다.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상상으로 끌고 간 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하는 것으로 이는 하나의 그림을 최소 단위로 세분화하고 각 부분을 사물화하여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결국, 하이퍼시는 보고 느낀 것에 대한 관념의 그림을 세분화하여 사물에서 파생되는 연결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처음의 이미지와 융합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이퍼시의 단계   1) 1단계   안개는 피어서 강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박목월  전문   위의 시는 목월의 초창기 작품으로 한편의 그림을 추억 저편의 꿈으로 그려낸 시다. 강가에 핀 안개가 밑바탕을 이루고 잠들어야 할 밤에 울어대는 비둘기가 그리움을 재촉한다. 그런 밤엔 저절로 고향 이웃에 살던 처녀가 떠올라  잠을 못 이룬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고향이고 봄의 풍경이다. 단 한마디도 고향의 이야기는 없으나 유년시절의 향수가 읽는 이의 내면을 흔들어 놓는다. 환상적인 그림을 강가의 안개 밤에 우는 비둘기 갑사댕기를 맨 처녀 등, 사물로 대비한 목월의 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이퍼적인 기질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것이 하이퍼시의 1단계라고 볼 수 있다.  . 2) 2단계   봄은 차 한 잔의 향기가 난다 귀 가까이 은박지를 밟고 와 똑똑똑 여보세요 아침 하얀 풋잠을 깨운다 울타리의 장미가 새순을 뻗고 기어가 바람 일렁이는 꽃불을 켜고 있는 가슴 신록을 꼭 누르면 깜박 깜박 디지털 숫자가 찍히고 싱그러운 손전화 푸른 벨소리가 난다 감전되는 떨림으로 여보세요 신록의 첫 목소리가 울려온다 울타리에 멧새 한 마리가 날아 앉아 도록또록 눈망울을 굴린다                          오진현 ‘푸른 벨소리’ 전문   오진현 시인은 일찍부터 탈관념의 시론을 주창하며 관념을 모두 깨트리려 직관적인 수학적 존재증명이라는 시론을 발표하고 누구보다 앞서 하이퍼적인 시 쓰기를 주장하였다. 모든 시어를 사물로 대체하며 이미지의 연결과 확장을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새로운 시 쓰기를 실천하여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생을 일찍 마감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하이퍼시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 작품은 하이퍼시의 초기 단계로 당시에는 디지털시라고 명명했던 시로서 이미지의 단순함을 빼고 나면 하이퍼적인 요건을 갖췄다. 하이퍼시가 여러 개의 이미지를 펼쳐내고 다시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여 상상 속에서 캐낸 더욱 더 큰 이미지의 집합체라면 이 작품 속에 나타낸 이미지는 봄 그림 하나에 불과하다. 여기까지가 하이퍼시의 2단계라 할 수 있다.   3) 3단계   까만 머리통에 볼펜으로 두 눈동자를 찍은 손톱만한 몸뚱이. 반짝이는 갑옷 앞다리 갈퀴와 뒷다리 톱니로 쇠똥더미에 올라 곰상곰상 쇠똥을 굴려 금방 구워낸 똥경단 핑크 냄새나는 달덩이 빵 달은 없고 고공 철탑농성 2백일 비정규직 B씨의 눈에는 별없는 칠흑 밤하늘이 두 아이와 아내를 위한 더 큰 빵만 하였다   쇠똥구리 작은 눈을 화등잔만큼 키우고 말랑한 똥경단 밟고 오른 무대에서 팔을 비틀고 다리를 꼬아 깨끼춤을 춘다 하늘을 조아 은하수 등불을 찾는다 은하사다리가 감마선 광목을 펼쳐 미끄럼 타고 내려오면 똥경단을 탈없이 집으로 가져가기 달덩이 방을 빼앗기지 않기   하늘 공중에 떠서 굶고 사는 B씨가 은하 젖줄에 더 가까이 가려고 양 어깨를 들썩인다 똥 굴려 똥경단 먹고 똥경단 틈새에 새끼 낳고 똥 구워서 쇠똥찜 한다              김규화 ‘쇠똥구리의 춤’ 전문   하이퍼시가 이미지의 탑 쌓기라고 정의한다면 쇠똥구리의 춤은 하이퍼시가 분명하다. 생존한다는 것은 먹는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먹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한다. 더럽고 작고 뜨겁고 차갑고를 떠나서 각자의 현실에 맞게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똥을 먹는 쇠똥구리, 아이와 아내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철탑에 올라 농성하는 근로자. 작은 일당을 얻기 위하여 관객도 없는 무대에 오른 곡예사,모두가 먹기 위한 행동으로 움직인다. 그 방법이 모두 달라도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은 같다. 굴러가고 높이 오르고 춤을 추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움츠리다가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하나의 작품 속에 모두 배열하고 전체적으로 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 작품은 하이퍼시만이 가진 표현 방식이다. 김규화 시인의 시는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췄으면서도 읽기가 편하고 이해하기가 빠르다. 너무 난해하여 독자와의 소통이 어려운 하이퍼시 속에서 하이퍼시의 완성도를 갖췄다.        4. 하이퍼시의 배제요소   1) 주관의 배제      모든 시는 시인의 주관으로 시작되고 주관으로 끝나는 게 보편적이다. 화자의 감정 몰입으로 얻은 이미지가 끝날 때까지 일직선으로 움직여 주제를 벗어난다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독자의 감동을 유도하려는 경향이 많다. 이는 화자의 울타리에 독자의 감동을 강제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라기보다는 화자가 창작한 작품이 화자의 내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다. 하이퍼시는 여기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하이퍼시가 된다. 새로운 시운동은 실험이다. 그 결과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주관을 빼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둘째 반복하여 써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셋째 나타내고자 한 이미지가 뚜렷해야 한다. 넷째이미지의 결과가 표준화 및 일반화되어야 한다. 어느 것이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하이퍼시의 최대 쟁점은 주관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 속에서 화자인 ‘나’가 있고 없고는 시작법에 있어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보편적으로 볼 때 화자의 존재는 표시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배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오케스트라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지휘자밖에 없다. 연주자나 관객 모두가 지휘자의 몸짓에 따라 감정의 기복을 나타내고 감동의 결과는 연주가 끝나지 않아도 발출된다. 시에서 화자는 지휘자에 속한다. 그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보여주는 몸짓을 한다면 객관적이지 못하여 감동의 결과는 끝내 발출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발표되는 많은 하이퍼시가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화자인 ‘나는’을 나타내어 객관을 벗어나는 듯한 작품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국 하이퍼시클럽 2집을 보면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나는’의 주관적인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시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시론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시 속의 화자 즉 ‘나’와 ‘나는’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는 존재를 나타내고 ‘나는’은 존재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나는’은 은연중 움직이려는 의도성 즉 주관성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차이를 갖고 있어 ‘나’와 ‘나는’을 굳이 나타내고자 한다면 ‘나는’ 보다는 ‘나’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하이퍼시는 화자의 울타리 밖에서 인정받는다. 화자가 만든 울타리에 독자를 들여놓을 수 없으며 처음부터 울타리 없는 시를 창작하여 읽는 이에게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야 한다.   2) 직유법의 배제    직유는 본의와 유의의 관계가 지표에 의하여 분명히 나타나는 비유로서 ‘넓은 의미의 은유의 한 종류다’라고 문덕수 시인의 시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고 그동안 많은 평론에서 직유가 논의가 되었다. 시에서 직접적인 비유가 필요한가는 시작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인 개개인의 표현방법이라 할 수 있다. 미당 서정주시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도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직유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하이퍼시에서는 과연 직유가 필요한가는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다. 사물의 이미지를 찾고 객관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하이퍼시의 이론을 따른다면 직유는 옳지 않을 것이다. 예로 효도를 나타내는 시를 쓴다면 “나는 심청이처럼 아버지를 모셨다“ "나는 이순신 장군처럼 국가를 위해 싸웠다" "나는 빌게이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등 이렇게 직접적인 표현을 한다면 과연 그 밖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처럼’ ‘같이’ 등 직유를 쓰게 되면 단 한 구절로 시를 완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하이퍼 시에서는 직유는 피해야 한다고 본다. 하이퍼시클럽 2집에서 예시를 본다면 "물계자의 노래“ 1연 첫 행부터 "나는 어느덧 지렁이처럼 거미처럼 무엇보다 지네처럼” 등 무려3번의 직유가 있고 그 밖의 시에서도 많은 직유가 유행처럼 보인다. 하이퍼시를 쓴다면 직접적인 비유가 하이퍼시의 최고 지향점인 사물의 객관화를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가 된다.   3) 항등성의 배제   대부분 사람은 사물을 대할 때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그 사물의 본질을 이미 인식된 대로 바라보게 된다. 사물은 거리와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는데 인간의 두뇌는 이미 각인된 인식을 거의 바꾸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사물의 본질대로 생각하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현실에 맞게 그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객관적인 기술 방식이다. 커다란 소나무를 매일 본 사람이라면 멀리 있을 때도 소나무의 크기를 원래의 크기대로 인식하고 그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하이퍼시는 그것을 배제하고 현재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 하이퍼시가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로써 자기가 나타내고자 하는 이미지를 그려 내는 것이 분명하다면 사물의 크기나 모양을 주위의 환경과 움직임에 맞춰 이미지의 상상력을 확대해야 한다. 사물에 대한 본질보다는 허상과 허구의 상태를 그려 여러 각도의 방향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야 한다. 이것이 항등성 곧 관념의 배제이다   88올림픽자동차전용도로에 철가방이 갈지자로 흔들며 휙휙 달려간다 소나기 지나가고 63빌딩이 부르르 떤다 흩어진 물방울이 여의도병원 성모마리아상에 내려앉는다 임종실에 들어갔다는 예수의 소식이 가슴 적신 이탈리아 아드리아 연안의 보라(bora)가 2000cc의 배기량에 우아한 보디라인과 넓은 트랙, 차체 둘러싸고 있는 탄탄한 범퍼를 자랑하며 지중해 상쾌한 바람 몰고 한남대교 나들목을 빠져나간다 내 두 바퀴 무겁다   오후 2시 네팔 카투만두 시장을 지나 한차례 쏟아진 비에 발이 묶인 바이크족이 더위를 피해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다가 청평 75번국도를 물고 찰나에 달아난다 지름길이 훤하다   질척이던 길 지우고 집으로 들어선다 아들이 남겨둔 하루가 냄비 속에 바싹 말라 있다       김해빈 시인  전문   김해빈 시인은 사실적인 묘사로 하이퍼시를 전개한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불법으로 질주하는 배달 오토바이, 뒤따라 한바탕 내리는 소나기, 스콜이 지나간 것처럼 활짝 갠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의 죽음 등 도무지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상황이 보인 그대로 전개되고 불황 속에서도 사치한 모습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외국산 자동차, 네팔 카투만두는 스콜이 잦은 곳인데 그곳에 바이크족이 갑자기 청평 75번 국도를 달리는 오토바이 부대로 전환된다. 평소 흔히 마주하는 장면 중의 하나인 쏜살같이 달리는 오토바이 행렬을 끌어와 상습 정체구간임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다. 반복되는 혼란과 불안의 연속선상에서 겪게 되는 하루가 전개되다가 안주할 집에 도착하여 보게 된 어지러운 상황과 연계시켜 하루를 마무리하며 갈등과 사회적인 격차를 그려냈다. 기존에 굳어진 이미지 대신 항등성을 배제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끌어들여 하나의 이미지로 묶은 것이다   4) 제목의 사물화 및 관념 배제   하이퍼시의 최대 목표는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로써 객관적으로 이미지를 넓혀가는 데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제목 곧 주제부터 관념어가 쓰여 진다면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기존의 관념시가 되고 말 것이다. 하이퍼클럽 2집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해부학 교실. 환각제 복용. 생존 본능. 노란 불꽃. 인연론. 냉동된 자유. 삶과 죽음의 시편. 희고 붉은 시. 환상여행. 미궁. 원앙생가, 돋아나는 서녘. 사이에 대한 소고. 나의 고독은. 겨울 여행. 세한도. 등 제목만 보면 하이퍼시라 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 많다. 이는 사물이나 형상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이미지의 제목을 붙일 수가 있는데 이것을 잊고 하이퍼시를 쓴다. 또한 제목이나 내용에 알 수 없는 외래어가 많이 보이는데 이것 또한, 배제해야 할 요소들이다.  5. 하이퍼시의 구성 요소   1) 몽타주 기법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 소비에트의 쿨레쇼프(kuleshov)는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더하기 B가 아니라 C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같다. 시에서도 각각의 이미지가 합쳐지면 부분의 특성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물 이미지의 합과 합은 완결성의 법칙에 의해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로 전환된다는 뜻이고 서로 모순되거나 부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제시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적극적 해석을 유도하는 상호작용적 방법론이다. 하이퍼시는 여러 대의 카메라로 잡은 화면을 이어 붙여 하나의 연속적인 화면으로 편집하는 시작법이다. 희극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칼 든 사람을 보여주면 비겁한 내용이 되지만 우울한 사실이 먼저 나오고 칼 든 장면이 나온 뒤 웃는 사실을 묘사하면 전혀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문장 편집의 몽타주기법에서 완성여부를 결정짓는다. 서로 관계없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하나의 그림에 담아 새로운 정서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시작법이다.   비행기가 지나자 물보라가 일었다 반딧불과 어우러져 은어 떼처럼 별들이 유영하는 밤하늘 달의 목선을 타고 심해로 떠나는 항해를 꿈꿨다 턱시도를 입고 구름과 파도에 휩쓸리던 밤바다엔 용암이 흘러 넘쳤다 꽃밭의 별들이 숯불을 피워 이글이글 타올랐다 해저에 닻을 내리고 은사의 투망을 던지는 초신성의 바다 달의 나침판은 지상을 가리켰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남자의 등에서 말의 엉덩이에서 새의 날개에서 나뭇잎의 푸른 잎맥에서 신의 성경책에서 마주보던 거울 속에서 출렁이는 바다 달의 뒷편에서 어둠은 바다를 잊고 살았다 문득 발견한 빛, 둥실 허공에 뜬 몸에서 엔진소리가 들렸다 밀물로 차오른 보름달 망망대해엔 북극성의 부표가 떠올랐다 온 세상 밤의 물결로 차오른 중수감 손안에서 바다가 출렁이고 바람에 깃발처럼 달력이 찢어진다 시간의 속력에 찌그러진 유선형의 그믐달, 화살이 날아간다                                김기덕 시인 전문   김기덕 시인의 "달의 항해"는 직유와 관념이 부분적으로 보이는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하이퍼시가 갖춰야 할 몽타주기법이 살아 있다. 하늘과 바다가 넘실대고 아버지, 남자, 말과 새, 나뭇잎 등 온갖 이미지가 난무한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하나로 묶여 읽는 독자의 시선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빛과 엔진소리 화살로 빠르고 정확하다는 집합된 이미지를 전달한다. 위의 시처럼 이해하기 힘든 이미지의 집합을 낯설게 하기의 특징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이퍼시는 각기 다른 이미지를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시작연구의 결과물이다. 중간마다 떨어져 있는 불안전한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독자가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안전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연속 제시하여 혼란을 가증시켜서는 안 된다.   2) 서사성   모든 동물은 영역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하여 싸움하고 자기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자신만의 성을 쌓고 산다.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로 영역을 가진다. 특히 시인들의 영역은 확고하다. 자신이 주장하는 시창작 방법에 도전을 받게 되면 참지 못한다. 뚜렷한 학설을 제시하지도 않고 무조건 다른 이론은 배척하는 경향은 시인들이 가진 특권처럼 되어있다.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발상은 은연 중에 나타내야지 갑자기 돌발하면 폭력적이라고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하이퍼시는 어느 날 뚝 떨어진 이론이 아니다. 인간의 발달에 따라가기 위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시창작방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혁명적인 요소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하이퍼적인 기법을 동원하더라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독자의 이해를 돕고 하이퍼시의 발전을 위한 시를 쓸 수 있는 것인가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우선은 서사성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을 나는 제시한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드리리다   이것은 어떤 신라의 늙은이가 젊은 여인네한테 건네인 수작이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드리리다   햇빛이 포근한 날  그러니까 봄날 진달래꽃 고운 낭떨어지 아래서 그이 암소를 데리고 서 있던 머리 흰 늙은이가 문득 그의 앞을 지나는 어떤 남의 안사람보고 한바탕 건네인 수작이다 자기의 흰 수염도 나이도 다아 잊어버렸던 것일까   물론 다아 잊어버렸다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다아 잊어버렸었다   꽃이 꽃을 보고 웃듯이 하는 그런 마음씨밖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었다                           미당 서정주  일부   일찍이 미당 서정주 시인은 신라초에서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현실에 맞도록 풀어내어 주목을 받았다. 인연 설화조. 수로부인의 얼굴. 신부 등 많은 시를 설화조로 표현하여 하이퍼적인 요소가 깃든 시를 썼다. 오늘날의 하이퍼와는 이미지의 전개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찍부터 과거와 현실을 융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서사로 시작되는 시는 누구에게나 친숙하게 와 닿아 이미지의 전개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시선을 잡아두는 효과를 본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하이퍼에서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시창작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강영은 시인은 이러한 효과적인 방법을 미당의 시와 더불어 서사가 있는 하이퍼시로 발표하고 있다.   아부오름, 움푹 파인 굼부리가 아버지 무릎 같다 좌정한 무릎 아래 빙 둘러 심은 삼나무들, 연하장에서 막 빠져나온 푸른 미간이다   아부지, 여기가 정토인가요   뾰족한 잠이 돋아 있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마음은 죽어서도 번득이는 붉은 돔 눈깔, 가본 적 없는 시간의 미늘이어서   잔물결 이는 생각 속으로 핏빛 물기 스미는 지상의 한 시간은 먼 거리 한 시간 후에 닿아보지 않은 발자국이 벌써 촉촉하다   눈 아래 방목장에는 푸른 지붕을 가진 축사   달맞이꽃이 평생 걸어야 닿는 저 곳에도 무릎 구부린 아비소가 갓난 송아지의 등을 핥아주고 있을 거라고 그 무릎에 가만히 지상을 얹어보는데        강영은 시인 일부   제주도의 풍경이 둘러쳐지고 삼나무 울타리에 펼쳐진 아버지의 기억이 한 편의 영상으로 전개된다. 불교에서 원하는 서방정토에 아버지가 이미 갔으나 달맞이꽃 되어 바라보기만 하는 화자는 따라가지 못하여 한 마리 송아지가 되어 등을 핥아줄 아버지의 혀를 기다리며 지상에 전개된 목장에 촉촉한 발자국을 찍으며 배회한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듯 불가능한 일을 해내려는 시도는 돌아간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아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은 서녘에 목멘 목젖을 필사한다. "원왕생가"의 전설을 모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작품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 여러 가지의 사물로 적절한 비유를 하여 하이퍼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작품이다.    수학자 폴리아(G.polya)는 재미있는 실험을 하였는데. 곰 한 마리가 a지점에서 출발하여 1킬로미터를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 1킬로미터를 간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1킬로미터를 간다. 그러다보니 출발점인 a지점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곰의 색깔은 무슨 색일까 하는 실험이다. 답은 흰색의 북극곰이다. 문제는 곰의 색깔이 아니다. 남쪽으로 1키로 동쪽으로 1키로 북쪽으로 1킬로미터로 갔는데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지구가 둥근 입체가 아니라 평면이라고 생각하는 맹점을 말하는 문제다. 습관적으로 새로운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시는 무조건 어렵고 외우기가 불편하다는 선입감을 더 느끼고 시를 대한다. 더구나 하이퍼시라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선입감을 갖고 있으며 시인들조차 하이퍼시가 무슨 시인가 하고 의문을 갖는다. 문제는 이야기 즉 서사에 있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데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쉬운 이야기를 이미지에 맞춰 풀어간다면 하이퍼시의 성공은 분명하다고 본다. 폴리아의 문제처럼 시선을 끌어들여야 하이퍼의 공간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6. 하이퍼시의 방향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론 발표 이후 많은 시인이 참여하여 현재까지 발표된 하이퍼시는 시단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 하지만 하이퍼시의 이론과 맞게 발표된 작품이 과연 몇 편이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주관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사물의 이미지를 찾지 못하고 제목부터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과 국적 모를 외래어의 남발, 이어가지 못하는 이미지의 확장을 위한 과도한 직유, 상상 보다 허구의 조합이 많고, 과도한 낯설기작법 등, 독자들이 외면하기 좋은 충분한 요소를 가진 것이 사실이다. 평론가 이성혁은 "시문학" 8월호에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이란 시론에서 이상의 시 "광녀의 고백"을 들어 현란한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흐르면서 하이퍼하게 결합하고 벌거숭이인 채로 달리고 있는 푸른 불꽃 탄환은 모순적인 색채이미지가 결합하고 있어 진정한 하이퍼적 요소를 갖춘 시라고 극찬하며 현재의 하이퍼시를 일부 폄하하는 듯한 글을 발표하였는데 또한 하이퍼텍스트가 시에 내장된 어떤 특성을 활성화하여 개발된 것이라면 하이퍼텍스트는 테크롤리지에서 시를 예속시키려하는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시도는 진보적이라기보다 퇴보적이기에 실패하게 된다고 비평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일부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인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하이퍼시가 문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꾸준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이퍼 시이론에 맞게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며 자신의 시창작에 한계를 느껴 유행을 따르듯 하이퍼시에 동참하고 시의 낯설게 하기가 낱말의 낯설기가 아니라 이미지의 낯설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51    하이퍼시와 디카시 댓글:  조회:4226  추천:0  2015-02-18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문덕수     [1] ‘디카詩’의 창시자는 누구일까. 신(神)의 유무보다는 디카시의 창시자의 누구냐의 물음엔 한 가지 대답밖에 없으니 더 쉽습니다. 디카시의 창시자라는 말에 “창시자” 그 동격어 “이상옥”이라고 하면 대답하면 되겠습니다만 말하자면 디카시의 창업자는 이상옥입니다.   [2] 디카는 “디지털 카메라‘의 준말입니다. 우니라에도 생산되고 있고, 이제는 스마트폰에도 장착되어 있으므로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과학기기인 이 디카가 시쓰기의 주체인가, 아니며 단지 보조기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주체라고도 할 수 있고 보조기구(원고지나 펜같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TV나 컴퓨터가 안방에 들어와 있는 판에 과학기기가 시쓰기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버스, 지하철, 비행기, 승용차 등 인간은 과학기기의 사용이 없으면 생활이 안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디지털 카메라가 시와 결부될 수 있음도 불가피한 시대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에 등 돌려서 현대시를 쓸 수 있겠습니까?   [3] 가만히 들여다보면 디카시는 기호시임을 깨닫게 됩니다. 『디카시마니아 24인사화집』(2012, 도서출판 디카시)에는 이상옥의 디카시 「숙명」(The Fare)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시는 망가지고 있는 나무 뿌리 등의 사진 옆 페이지에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Breaking down mybody now I go to you)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내 몸 부수어” “너” 가 가장 요점이 되는 어구인 것 같습니다. “내 몸 부수어”는 많은 함축(含蓄)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랑의 주체인 “나”, 가장(家長)으로서의 나, 제자들의 스승으로서의 나, 역사(歷史) 속의 한 주체로서의 나, 주인이 아닌 봉사자로서의 나 등이 그러한 연상의 목록입니다. 이렇게 제시해 내놓고 보니 그 나열이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호화해 가는 목적적 존재를 “너”라고 했습니다. “너”는 분명히 남(他者)입니다만, 우리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수한 “남”으로 둘러싸여 공생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의지를 내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존적 삶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의 의지에 의해 사는 존재입니다. 어쨌든 이 “나”는 앞에서 “나”의 경우에 열거한 그러한 나와 대등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너”의 대응 관계로 수용할 때 이상옥의 디카시는 1차시입니다만, 그 함축과 내포는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카시가 언어로 기록되건 사진영상으로 촬영되건 그것의 1차적, 기본적으로 사물시와 동질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디카는 하이퍼 시와 첫걸음을 함께 내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이퍼와 디카는 같은 스타트라인에서 같은 신호로 함께 출발합니다. 여기서 사물시와 디카시는 일치합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제시된 ‘사진’도 기호(記號)이고, 언어로 표현된 디카시 문자도 “기호”라는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기호라고 하면 프랑스의 소쉬르(1857~1913)와 미국인 퍼스(1839~1914)의 두 사람을 듭니다만 기호의 세계를 더욱 폭넓게 본 사람은 퍼스인 것 같습니다. 퍼스는 언어 뿐만 아니라 “사진”을 포함한 영상이나 도상, 길바닥이나 눈 위의 발자국 같은 것을 모두 기호로 보았습니다. 퍼스는 이 세계는 기호로 충만한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이 다 기호이지요. 퍼스는 다만 “기호 처리의 프로세스로서 인간”을 이해했습니다. 아마 시인도 기호체계의 한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자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반사된 빛이 눈의 망막에 도달하는 순간, 일련의 감각이나 인지적(認知的) 기능이 마치 연못의 둑을 끊은 것처럼 흐르는 것— 이것이 경험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사진의 어떤 부분에 집중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어지럽게 이동하는 색이나 윤곽이나 형태를 즉시 감각신호로 변환시켜 후두부에 있는 시각야(視覺野)라고 불리는 뇌의 영역에 보내집니다. 거기서 특징들이 분석되어 그 결과가 대뇌피질(大腦皮質)의 많은 영역을 이동시킵니다. 그러한 활동분야의 하나가 피질의 중앙에 위치하고 근운동(筋運動)의 중추 역할을 맡은 운동야(運動野)입니다. 여기서 눈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근육을 움직이는 지령이 나와, 눈은 사진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눈이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향하게 하는 과정이 몇 백 번 되풀이됩니다. 한 번 얻은 상(像)은 피질의 뉴런 네트워크로 보여지며, 그때까지 저장되어 있는 정보와 연결되고, 사진에 대한 해석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뇌가 행하는 사진(그림 포함) 이해의 프로세스를 인지 과학자 R L. 소쉬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이라는 물리 현상에서 시작하는 ‘그것이 감각 신호로 바뀌는 그 처리를 거친 특징이 추출되어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전 지식도 참조하면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상옥의 디카시가 망가지고 있는 「숙명」이라는 디키시는 많은 내포가 다양하게 응축된 디카시의 전형인 것 같습니다. 사화집 『너머』(Beyond Over)는 대분분 이와 같은 보편적 레벨에 도달한 디카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5] 그런데 이상옥의 「숙명」을 잘 들여다보면, 그 해석은 단지 나무 밑둥이 부서지고 있는 붕괴현상만이 아니라 현상이 형이하(形而下)의 세계와 형이상의 세계(形而上世界)를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이해는 디카시의 형이하적 특징과 형이상적 특징을 연결하는 것으로 보여 무척 흥미롭습니다. 나무 밑둥의 붕괴는 풍화작용인지, 세균의 잠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시간의 먼 지평 속에서 변호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 인도인(특히 힌두교도)은 모든 만물은 시간상에서 변화하며 여러 가지 존재의 직접적, 간접적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서 변화한다라고 한, 그 위대한 사상체계의 “연기설”(緣起說, Pratitiya-samurāda)을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에서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한(漢)나라를 세운 유비도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상옥의 디카 사진을 잘 봅시다. 산에서나 길가에서, 나무 밑둥지가 부서져가는 현상을 흔히 발견할 수 있고, 이 현상에서 흙구덩이 속의 인체도 결국 이런 과정을 밟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체의 경유, 균이나 박테리아가 흙 속에서 겨드랑이나 허벅지 등을 먼저 먹게 되겠지요. 사물인식은 가정, 사회, 역사, 문화에 대한 지식과 결부되어 나무밑둥이라는 물체의 내면의식세계가 형성됩니다. 사물은 감각성, 시각성, 외부성 등의 욉줙 존재입니다만, 동시에 내면의 영혼적 무의식적 무한성을 가지고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있음 esse)는 있는 것(ens, 개별 사물 존재)의 시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물을 외면이나 내면의 한 측면에서만 보지 않고 외부적 존재로 보고 동시에 내면세계를 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지닌 α위상과 β위상의 이중을 본다는 뜻이 되고, 또 이렇게 보아야만 사물 전체를 본다는 것이 됩니다. 이상옥이 있는 것(ens), 즉 「숙명」을 통해서, 우리가 가정→역사의 영역에서 가지고 있는 정보와 연결시킨다는 것은, 사물의 내면성도 동시에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옥의 「숙명」의 밑둥은 흙 속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꽤 깊이 박힌 듯합니다. 지표에서의 윗부분이 갈라져 부서지고 있으나, 아마 그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서 꿈쩍 않고 대지(大地)를 물고 호흡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숙명」이 지닌 형이하적(形而下的) 특질인 것입니다만, 한편 부서짐의 과정을 통하여 껍질이 벗겨지고 나무의 육질이 파삭파삭해지면서 그 영혼이라고 할까 정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은 형이상적(形而上的) 세계로 차원이 다른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역사 너머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즉「숙명」이라는 디카 영상은 형이하와 형이상에서 초월을 동시에 공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디카시는 이러한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고, 여기서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짙은 공통 관련성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라는 일행시에서도 형이하와 더불어 여기서 초월하려고 하는 형이상의 몸짓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서진다”(망가지다, 붕괴핟, 변화한다)라는 말의 뉘앙스가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6] 마지막으로 두 장르의 통합단계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즉 디카 영상과 언어예술의 두 단계를 하나의 세계로 통합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디카시는 디카 영상과 언어시와의 두 존재를 포함하고 있고 두 단계가 통합해서 다르나 같은 의식적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합니다. 통합 단계는 두 장르가 “서로 관계”를 가지고 하나의 세계(시 세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두 장르의 관계는 접근, 영향, 융합 등의 상생(相生) 공발(共發)의 관계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정복하거나 먹어버리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어디까지 상생공존의 발전 관계를 맺고 더 높은 하나의 통합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형이하적 관계와 형이상적 관계가 엄존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먼저 형이하적 관계부터 보겠습니다. 형이하적 관계는 사물의 감각적, 가시적, 외부적 관계에서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러한 외부적 배치에 의하여 하나의 가시적 이미지(즉 사물존재로서의 이미지, 그러니까 β위상의 관계에서 형성된 이미지)를 이루게 되면, 그러한 가시적인 두 이미지가 융합되어서 서로 보완하여 하나의 더 높은, 더 완성된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형이하적 세계, 즉 물질세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높은 형이상적 단계로 상승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디카시라고 하는 통합적 장르가 비로소 “의의”(意義: 의미보다는 높은 의미의 세계로 연결된다는 뜻)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의의주제에 접근한 가장 높은 뜻으로 뭉치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형이상적 통합의 의의는 첫째 형이상적(신적) 뜻을 이루고, 둘째 그 뜻은 형이하적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하고, 어떤 미세하거나 광대한 움직임에 의해 영향력을 공급하는 에너지 역할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방향과 방법을 정립시켜 주기도 합니다. 흔히 ‘섭리’라고도 하고, ‘천명’(天命)이라고도 하는 그런 차원의 뜻입니다. 모든 디카시는 여상과 언어의 두 단계가 통합된 형이하적, 형이상적인 미학적 뜻으로 통합, 형성되어 완료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적 통합을 거쳐, 두 장르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이미지 세계를 이룩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하이퍼적이라고 하고, 이 점에서 디카시가 하이퍼시의 또 한번의 강력한 유대와 그 관련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7] 여기서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그칠까 합니다. 디카시가 가진 기호성, 디카시의 이중성(형이하와 형이상) 등을 토대로 디카시와 하이퍼시의 관련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밖에 디카시의 사진과 언어는 사진과 언어라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면서 디카시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하이퍼적 패러독스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퍼시에서는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가 비유의 본의(本義)와 유의(喩義)의 양 항에 관련되어 있고, 그 관련에서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를 역설적으로 사사해 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런 점에서 디카시나 하이퍼시는 파라독스의 언어로 된 역설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50    ...계속 6 댓글:  조회:3855  추천:0  2015-02-18
5. 나가는 글-디지털 시의 미래     이제까지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라는 주제의 중심에 “디지털 시”를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21세기의 의사소통 방식은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가 시대의 핵심동력(核心動力)이 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현대시의 방향을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에 맞추어 탐구하는 것은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는 디지털 시의 근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의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덕수의 탈-관념의 사물성의 시도 디지털 시의 존재성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그 시들의 감각과 시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현대 컴퓨터의 디지털 특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부분 , , 은 순수한 독창적 것이 아니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디지털 시와 연관된 재료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합하여 구성한 21세기 디지털 시의 설계도인 것이다. 과 은 미래지향의 시창작방법론이다. 예시 작품들은 디지털 시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실험적인 방법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예술에서 완성이란 신기루(蜃氣樓) 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환원하여 21세기적인 새로운 시의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시 운동이다. 현재 이 시운동은 출발선상(出發線上)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디지털 시 운동이 한국을 넘어서 세계화가 될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은 지나친 자만(自慢)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시론은 21세기적인 감각과 의식이 생동하는 젊은 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1, ... 2, ... 3. 『컴퓨터 및 정보통신 용어 사전』 4. 문덕수 저 『문덕수 시전집』시문학사(2006,3,20) 5. 『한국 전후 문제 시집』신구문화사(1961,10,5) 416쪽 「데뻬이즈망」의 미학」-조향(趙鄕) 6. 문덕수 저 『니힐리즘을 넘어서』시문학사(2003,5,30) 183쪽~195 쪽 7. 임종국 편 『이상전집』문성사 (1968,9,15)405쪽 8. 오남구 저『이상의 디지털리즘』범우사(2005,4,15) 9. 오남구 편『디지털리즘-1집』글나무(2003,3, 15)    
49    ...계속 5 댓글:  조회:4358  추천:0  2015-02-18
다. 디지털 시의 조건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에 전제되는 조건은 디지털 시는 시 본래의 특성(아날로그의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아야 하며 보통의 시와 같이 읽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가 실험시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감각만이 아니라 시가 사유와 정서의 표현이라는 일반적인 시의 조건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가 일반적인 시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디지털 시의 근원(기본원칙)과 전제조건을 만족시키고 디지털 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은 무엇일까? 그것을 열 가지로 구분하여서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디지털 시는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한다. 언어 단위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그 언어 단위는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요소 즉 객체지향의 모듈(module)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예시작품: 문덕수의「꽃잎세기」,오남구의「푸른가시짐승-빈자리x.3」,심상운의「빈자리-낮12시25분」)   2)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 (심상운「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참조)   3) 디지털 시는 현실을 직접 샘플링(1차적 방법)한 자료로 생성된 시와 추상적(2차적인 방법) 샘플링을 통해서 구성된 시로 구분한다. 그러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 시에는 샘플링(sampling견본추출)된 현실세계가 극소화될 수도 있다.   4) 디지털 시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과 사물성의 순수 이미지를 중요한 요소로 한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순수 감각을 드러내고 사물의 충돌과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은 디지털 감각과 영상언어의 산실이 된다. 이러한 영상언어는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디지털 시는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하는 과정에서 탈-관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아날로그의 노이즈(noise 잡음) 제거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의 심리적 현상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 것은 허용한다. (예시 작품: 심상운의「검은 기차 또는 흰 비닐봉지」)   6) 직관을 통한 염사와 원근법을 깨뜨리고 실상에 접근하는 접사는 디지털 시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샘플링의 방법이다. 따라서 더 많은 방법들이 원용될 수 있다. (예시 작품 :오 남구의 「밤비」)   7) 디지털 시의 정서는 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와 현실(관념)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로 분류한다. 증류수 같은 정서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의 시는 송시월의 「입춘무렵」을 예시작품으로 들 수 있다.   8) 디지털 시는 단일한 시점과 감각과 정서만 고집하지 않고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 합된 감각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도 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다층구조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 「경운동 88번지로 간다-염사」를 들 수 있다.   9) 디지털 시는 작가(시인)가 만들어낸 완성품의 시에서 벗어나 독자가 참여하여 각자의 사고와 인식과 감정과 감각이 들어가서 만들어 내는 독자 참여의 열린 시를 지향한다. 그 바탕에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受容美學, Rezeptionsasthetik)이 들어있다. 이 때 시인은 시의 설계도를 제시하고 그것의 자유로운 변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참여를 유도하는 연출자가 된다.   10) 디지털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지향한다. 그래서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 그 가상현실은 환상도 되고 꿈도 되지만 현실의 절실한 감성과 정서를 전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이 열 가지의 조건은 한 작품 속에서 서로 조화로운 비중으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한두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작품을 형성할 수 있다.    
48    ...계속 4 댓글:  조회:4244  추천:0  2015-02-18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디지털 시의 특징은 운동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 동적 이미지는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가상현실은 흥미로운 환상도 되고 꿈도 된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투명한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이 시의 언어들은 탈-관념의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디지털의 정수로 된 수리적 데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47    ...계속 3 댓글:  조회:4010  추천:0  2015-02-18
라. 예시 작품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讀解)   다음은 와 에서 예시작품으로 거론된 시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다. 예시된 시들은 탈-관념의 세계를 보여주는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와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시의 방법론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열 가지의 조건(방법)에 대입하여 디지털 시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고 새로운 감상과 해석의 길을 열어보는 것은 실제의 창작을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전문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이 시는 시가 “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서 탈-관념의 순수한 영상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연속적인 각 연의 언어들은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의 각 연은 서로 독립적인 관계 즉 객체지향성(모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인이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입장에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5연 는 통사적 구문에서 벗어난 시의 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단위(단어, 구문)들의 충돌과 간섭을 통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적 면에서 구성이 산만하다. 그 원인은 이 시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의식(의도)이 시 전체를 통제(관통)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마을을 덮은 코스모스 덤불 아무거나 한 송이 골라 꽃잎을 열심히 세어 본들 나비처럼 머무를 수야. 대추나무 밑동을 감고 한창 뿌득뿌득 기어오르고 있는 나팔꽃 푸른 것은 깔때기 모양 흰 것은 나팔주둥이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여섯 세어보지만 실은 한 송이일 뿐이다. 돌담을 돌자 앞장선 나비는 오간 데 없고 순하고 야들야들한 연보라 무궁화꽃 그 한 송이의 여섯 개 꽃잎을 확인한들 내 어쩌랴 어쩌랴. 해바라기는 서른네 개의 황금 꽃잎을 둥글게 박고 들국화는 서른아홉 개로 쪼개진 보랏빛을 빽빽이 둘렀거늘 내 어찌 머무를 수야. -------문덕수「꽃잎세기」전문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 시의 탈-관념된 언어 단위(unit)들은 결합을 통해서 대상의 모습(현상)을 드러내지만 분리(해체)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꽃은 여섯 잎, 무궁화꽃 여섯 잎, 해바라기 서른 네 개의 꽃잎, 들국화 서른아홉”이라고 대상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들을 분리하고 숫자화 함으로써 색(色)과 공(空), 결합과 분리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구상적인 자연현상을 추상적 디지털 언어로 환원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덕수는 이러한 시적 형상의 방법론을 그의 시론 「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사물이나 대상 하나하나를 1,2,3,4,5.......와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적 특성을 추상화할 수 있고, 추상된 그 대상을 결합하여 한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을 나는 역시 인접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집합적 결합”이라고 명명해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디지털을 형성하는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의 의미 즉 디지털의 최소의 단위의 개념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 시는 디지털 시의 본질인 단위의 분리와 결합의 원리를 보여준 시라고 판단된다. 이 시에서 ”나팔꽃, 무궁화꽃, 해바라기, 들국화“는 디지털 시의 구조를 형성하는 부분 단위(module)가 된다.      
46    ...계속 2 댓글:  조회:4107  추천:0  2015-02-18
나, 문덕수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문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도 디지털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단서는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와 “열린 문으로는/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에서 발견된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 감염되지 않은 탈-관념의 영상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최소 단위들 “빨간 저녁 놀, 재떨이, 유리컵 세 개, 라이터 ,청자 담배. 육각형 성냥갑, 한 사나이 등”은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집합적 결합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모듈)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재떨이를 물주전자로, 라이터를 핸드폰으로, 유리컵을 사기 찻잔으로, 청자 담배를 신문지로 변경시키고, 사나이를 20대 젊은 아가씨로 바꾸어도 시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에는 어떤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가상현실은 순수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생동하는 사물성의 공간이 되고, 독자들의 상상과 의미 붙이기가 무한정 허용되는 세계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보다 독자의 상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다. 그 까닭은 이 시는 현실세계에서 직접적으로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의 자료들은 아날로그에서 샘플링 된 자료다. 샘플링의 방법은 1차적인 방법과 2차적인 방법으로 구분된다. 1차적인 방법은 직접 현실세계를 사진 찍듯이 하는 샘플링 방법이고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을 통해서 샘플링 하는 방법이다. 이 때 1차적 방법은 독자가 들어갈 시적공간은 제한되지만 현실과 현장이라는 생명의 감각에 더 접근되어 있어서 정서의 표현이 살아난다. 이에 비해서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펼치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놓아서 독자가 들어 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성의 세계는 현실적인 생명감각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조작성이 쉽게 드러난다. 따라서 시의 정서도 조작된 정서가 된다.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1차적 방법에 해당하는 시이고,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는 2차적 방법에 해당되는 시라고 판단된다.   4. 디지털 시의 성립과 조건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   디지털(digital)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을 디지털리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 본다.(2003년 「디지털리즘」1집에서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 선언을 함)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디지털적인 시각, 사유, 지각, 감성, 정서, 언어 등을 망라하여 그것을 현대시에 흡수하여 언어표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상상(시각)과 감각과 감성과 사유의 영역을 열어 보이는 시를 즉 디지털 시라고 개념정의를 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의 성립에서 짚고 넘어야 할 문제는 디지털의 특성과 시가 결합할 때, 디지털 시는 기성의 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날로그 시(디지털 시에 대응하는 시로 기성의 시를 의미함)나 디지털 시나 공통적인 것은 시의 현실은 현실자체가 아니고 샘프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원래, 현실 그 자체에서 벗어난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샘플링이나 가상현실은 디지털 시만의 특성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특성은 기성의 시와는 다른 표현방법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언어단위들(unit)에 근거(根據)를 두게 된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 ...
45    李箱시의 디지털적 해석 댓글:  조회:4274  추천:0  2015-02-18
  * 이 글은 에서 발췌한 글로서, 이상의 시에 대한 새로운 디지털 적 접근을 시도한 글입니다.   디지털 적 관점과 특성으로 해석한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 와(詩第十一號)                                                                                                                                                  심 상 운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해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 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 "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산산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44    탈관념 시의 리해 댓글:  조회:4067  추천:0  2015-02-18
   이 글은 월간 2006년 8월호에 발표한  글로서, 탈-관념에 대한 논쟁을 잠재우고 탈-관념의 이론을 새로 정립한 글입니다. 이 글의 논리를 바탕으로 해야 아방가드르의 시론이 성립됩니다.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 상 운            1. 인지의 본질과 인지과정      관념의 개념을 정리하고 탈관념이라는 새로운 단어의 성립이 가능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인지認知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인지의 본질 및 인식하는 정신과 외부 현실의 관계에 대해 철저히 논의해왔다. 원시불교에서는 인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그것을 감각기관인 근根(6근), 대상세계인 경境(6경), 식별작용인 식識(6식)의 세 범주로 분류하고, 그것을 인간의 존재문제로까지 확대․심화하였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지認知를 인식 혹은 인식행위와 관련된 과정으로 본다. 인지는 인식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정신과정을 포함하는데, 인식은 감정이나 의지와는 구별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지는 감정과 의지를 제외한 지각·재인再認·상상·추론推論 등 지식을 구성하는 모든 의식적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인지의 본질은 지각과 판단이며 판단을 통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고 그 대상을 어떤 한 개념 또는 몇 가지 개념으로 특징짓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의미형성의 전단계가 된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몸에서 제일 먼저 발생하는 것은 감각기관 6근根(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을 통과(감지)하는 6식識(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작용이다. 이 감지작용은 지각知覺의 초기과정이다. 이 여섯 감각기관은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을 6경境이라고 한다. 그런데 6식識 중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은 다섯 감각기관을 총괄하고 모든 감각을 식별하는 식識이다. 이 의식意識에는 인식認識하는 것과 인식認識되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계기契機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의식意識 속에 주관과 객관이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다섯 가지의 식識이 모두 장애를 일으켜도 이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에 의해서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식識의 작용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한다는 데서 일반적인 인지와 구별된다. 그리고 이 여섯 번째의 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존재의 본질을 투시하는 내적 행위를 하는데, 그것을 직관이라고 한다. 이 6식과 함께 인지과정을 정리하면 ①감지(6식의 초기작용)→②인지(의식의 분별작용)→③의미형성(의미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과정을 거쳐서 그 주위에 있는 것들과의 연관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순수인지는 ②항까지를 말한다.), ①감지(의식작용)→②직관의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직관直觀(intuition)은 선禪의 핵심이 되는 불교의 독특한 사유방법이지만 서양 철학에서도 중요한 사유의 방법으로 인정한다. 칸트(Kant, Immanuel)는 관찰에 근거하지는 않는 모든 사실인식의 원천을 직관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직관은 다른 원천에 의해 얻지 못하는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원적이고 독자적인 인식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필연적 진리와 도덕원리들의 인식은 종종 직관의 방식으로 설명된다. 예컨대 논리학이나 수학의 진술은 다른 진리로부터 추론되거나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공리公理처럼 다른 명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진술들은 직관을 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리와 규칙은 명백한 직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직관은 과학이나 일상적 관찰에 의해 얻어진 단편적인 '추상적' 인식과 달리 상호 연관되어 있는 세계 전체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의미한다.  직관을 통해서 보는 상像을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 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관적인 시각현상의 하나다. 직관상을 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을 감고 있거나 상像의 배경 구실을 하는 표면만을 보면서도 마치 실제로 그 대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제거된 후 곧바로 선명하게 떠오를 수도 있고 몇 분, 몇 날 또는 몇 년이 지난 후에 떠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직관상과 그것이 나타내는 원래의 대상은 색깔, 모양, 외관상의 크기, 공간상의 위치, 세밀성 및 다른 많은 특징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고, 대상이 거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재생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직관상의 성격·원인·의미에 대해 거의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직관상은 현대시에서 관념을 뛰어넘는 방법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꿈의 현상과는 다른 생생한 생명의 감각을 담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관념과 탈관념의 개념 정리    국어사전에서 관념觀念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 되어 있다. 관념(觀念)[명사] 1.(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 2.《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에 잠김 3. 심리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내용의 총칭. 철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형상의 총칭. 선악의 관념, 죽음에 대한 관념 같은 것.  1번 항의‘ (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라는 풀이는 관념이 인식과 사유와 판단을 통해 “(어떤)의미”를 표시하는 인간의 의식내용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3번 항의 “대상을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 (선악의 관념, 죽음의 관념 따위)”에서도 관념은 “의미”를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이라는 것이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관념은 대상에 대한 감지와 인지의 과정이 끝난 뒤에 일어나는 사유와 지식에 의한 의식의 현상이라고 풀이 된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바닥이 차다.” “굶어서 배가 고프다” “그는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는 관념이 아닌 사실인식(감각)이다. 그리고 “꽃이 피었다”는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다. 현상에 대한 느낌, 현상에 대한 사실적인 인식은 그 속에 배경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념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사랑은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등은  관념이다. 그 말 속에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지식과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어 중에서 가장 관념적인 말들은 속담이나 잠언이나 명언들이다. 언어는 사물에 대한 인식기호다. 따라서 언어를 형성하는 기의와 기표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 조건만으로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의 내용을 모두 “관념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주의적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다음은 “탈관념脫觀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일이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3. 현대시에서의 관념과 탈관념의 문제    이상으로 인지의 본질과 과정, 관념과 탈관념에 대한 개념정리를 마치고,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가 성립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실제 작품의 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관념과 탈관념의 철학적 심리학적 탐구는 계속 천착되어야하지만 그것은 전문적인 분야의 연구 성과에 의뢰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시에서 관념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모더니즘의 시에서 관념은 시의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배경이 되어서 주제를 드러내고 독자들을 설득하고 시인이 의도한 형이상의 세계로 유인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모더니즘 시를 포함한 전통적 서정시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의 현대시에서 관념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관념이 없는 시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극소수의 시인들은 관념을 거부하는 시운동을 펼치고 있다. 새로운 시를 추구하는 그들에게 고정관념들이 안고 있는 인생론이나 과거 지향적 향수, 누적되어 있는 때 묻은 지식은 거부의 대상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언어와 의식 속에 고약같이 끈끈하게 붙어있는 관념들을 지우고 직관直觀을 통해서 대상과 직접적인 내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로 탐색의 눈을 돌리기도 하고, 사물성의 이미지를 시의 목표로 삼기도 하고, 언어의 허구에서 벗어나 실상의 모습을 보고자한다. 따라서 그들은 시의 출발점을 관념이 침범할 수 없는 의미의 제로 포인트 지점인 대상의 인지영역에 두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탈관념을 지향하는 시는 언어유희의 무의미 시, 초현실주의 시, 순수 이미지의 사물시를 비롯하여 21세기 아방가르드의 맨 앞에 서 있는 디지털리즘의 시 등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런 탈관념의 실험은 김춘수 시인이 시도한 무의미시의 원천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가 내세운 무의미시에서 언어의 의미를 배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긍정과 부정의 충돌을 통한 의미 없애기, 정서나 의미가 묻어나지 않는 언어의 사용, 순수한 단순 이미지의 창출 등 언어유희의 방법을 동원한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너를 위하여 피 흘린 그 사람은 가고 없다   가을 벽공에 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 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 흙으로 갔다   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 유리같이 차다   가버린 그를 위하여 돌의 볼에 볼을 대고 누가 울 것인가    -----김춘수 전문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 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김춘수 전문   두 편 모두 김춘수 시인의 시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시를 시의 의미면에서 비교할 때 전혀 영역을 달리하는 시로 분류된다. 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의미의 시인데 반해 는 김춘수 시인 한 사람 외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의 시다. 그 이유는 의 내용 “가을 벽공에/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흙으로 갔다//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유리같이 차다”는 이미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체험을 통하여 인식한 지식들이 굳어져서 만들어낸 “죽음의 의미”가 들어 있고 그것이 공감을 주고 있는데 반해 의 시의 내용,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개인 체험과 인식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관념)도 형성되지 않는다. 또 이 시의 자연현상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눈은/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사실) 외에 어떤 배경의미도 없다. 그래서 무의미의 시는 어떤 의미(관념의 틀)가 형성이 되기 이전의 인지단계의 시라고 판단된다. 이런 인지단계의 시는 관념의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 속에 들어있는 감각이나 사실에 대해 누구도 시비를 걸 수없는 자유로운 상상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유희라는 말이 타당성을 갖는다. 유희는 예술의 전단계로서 자기만족에 충실한 예술정신의 원천이다. 의미(관념)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김춘수 시인은 순수 언어를 도구로 하여 언어예술의 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이렇게 시의 예술성을 지향한 탈관념의 무의미시는 1950년대 조향 시인의 시가 더 적극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인정되는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 를 읽어보자.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             ------조향 일부   주어와 서술어가 없는 이 구절은 통사적인 면에서 문장구조가 불완전하다. 따라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의미가 모호하다. 그리고 시행의 독특한 나열은 형태면에서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이질적인 사물의 대립적 배치로 언어충돌을 일으킨다. 바닷가 모래밭과 수화기受話器는 자연과 물질문명이라는 대립적 구도를 연상하게 하고 수화기受話器는 여인의 허벅지와 이미지의 조화를 이룬다. 끝부분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는 또 어떤 상상력을 불러일으킬까. 어떤 성적性的인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 시는 그런 것들을 모두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그래서 관념(의미)의 틀로부터 해방된 언어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 그림으로 남는 시가 된 것이다. 다음은 문덕수 시인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을 읽어보자.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치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전문    이 시도 어떤 관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의 이미지는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그 언어는 사고(사유) 이전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의미를 철저히 배제한 이 시는 객관적인 눈으로 빨간 저녁노을이 반쯤 담긴 유리컵, 그 유리컵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표정과 위치, 한 사나이의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금방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긴장감 속으로 시의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그 하나의 풍경만으로도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충실한 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물들의 생동하는 모습에서 사물성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도시와 인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고 또 바람직한 행위다. 하지만 그 작업은 이 시가 시도하고 있는 탈관념의 언어 이미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서 있는 한 사나이,/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세 유리컵/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그 금 밖으로 밀려나/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는 시인의 지각작용이 포착한 생동하는 사물성과 한 순간에 집중된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탈관념과 디지털리즘 시를 주장하고 있는 오진현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 화 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 !“하고 바로 눈 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 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 서 내 앞에 선다.            ----------오진현 전문   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낳는다. 그것이 시의 생명력이다. 만약 하나의 시점으로만 해석되고 감상되는 시가 있다면 그 시는 가장 불행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도 보는 이의 지식과 취향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그가 왜 탈관념을 주장하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시 속에는 꽃은 꽃이고 나무는 나무라는 관념의 틀에 갇혀 살다가 그 관념의 틀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체험하고 감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직관의 장면을 견성見性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런 견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자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언어와 사물(대상)의 관계에 대한 실제적인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사물과 사고思考의 표현기호다. 그런데 그 기호가 역전현상을 일으켜 오히려 사물과 사고를 지배한다. 따라서 “국어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언어가 쌓아놓은 거대한 성벽 즉 고정관념의 성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화자는 “나무”와 “꽃”이라는 언어의 기호에서 해방된 기쁨을 감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언어와 그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고思考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깨달음은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시는 그런  배경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탈관념의 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언어(기표․기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그가 말하는 탈관념의 첫 걸음이 된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진현 전문    이 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섰다가 비가 그치자 빌딩 사이 조각난 허공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접사) 찍어 놓은 것이다. 비를 맞는 감각이 차다→단단하다→날카롭다로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비는 팔닥팔닥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방금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動映像의 한 장면을 보는 거 같다. 사실과 현장 체험의 생생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생각(지각)의 속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관념)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진현 전문    자신의 내면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의 지각작용은 직관이다. 그래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관념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의 주관적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이다. 그 직관상 속에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른다. 그 에너지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들어갈 틈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는 그 의식의 내면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내어(염사)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의 자동기술과도 구별된다. 다만 마음의 눈이 마음에 비친 의식의 영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리즘의 시인은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양준호 시인의 시에서도 탈관념의 한 장면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꽃잎을 짓밟고 간다. 문득 저승에서 뻐꾸기 세 번 울고 간다. 너는 뭐니 너는 뭐니. 노란 파도가 노란 파도를 따라간다. 비이슬에 젖은 철조망, 메뚜기의 눈이 등대처 럼 설레고 간다.                    ----------------양준호 전문   양준호 시인은 고정된 사고思考로부터의 탈출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조향시인의 초현실주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시에서는 꽃잎을 짓밟고 가는 어느 날 한 찰나의 의식이 담겨있다. 그 의식에는 “간다”라는 동사가 이끄는 네 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네 개의 문장은 논리적(객관적)인 의미의 연결이 안 된다. 따라서 어떤 의미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 네 개의 문장이 담고 있는 영상은 그의 무의식의 내면에서 포착한 영상 같기도 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만 그의 무의식의 속으로 들어가 보는 희귀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다음은 송시월 시인의 시 를 읽어보자.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간다                     --------송시월의 전문     이 시는 오진현의 같이 비 그친 날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낸 시다. “그려낸”이 아닌“찍어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눈에 들어 온 풍경이 언어의 구문 조직상 순차적 연결로 되어 있지만 “물웅덩이,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멧새 한 마리가”가 눈에 포착되는 순간은 동시적同時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각영상이 이렇게 질서화 된 것은 직관을 통한 의식의 작용이 선택하여 만들어 냈다는 것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인정한 것이다. 우리들의 눈은 물리적인 면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빛으로 들어오는 것은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단일시점單一視點이 아닌 다시점多視點의 시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의식(마음)은 외부의 것을 기억의 그릇에 선택적으로 담는다. 그것을 마음의 눈이라고 한다. 이 선택적인 시각視角 즉 마음의 눈에 관해서 영국의 수필가 가드너는 라는 수필을 통해서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깐 이 시는 송시월 시인의 마음의 눈이 카메라가 되어서, 비 그친 후 물웅덩이에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지나가는 동動․정靜의 한 순간을 찍어낸 사진 즉 인식의 그림이 된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리즘이 주장하는 탈관념이며 직관을 통한 염사 또는 접사의 기법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독자들은 관념의 작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사물과 직접 만남, 즉 인간과 사물(물에 비친 영상)과의 내통만이 있을 뿐이다. 다음은 이솔 시인의 을 읽어보자.   욕조 가득 비누거품이 부풀고 있다 거품 속에 색들이 팔딱거린다 거울 속에서 허물이 흘러내린다 구석구석 비누거품을 벗겨낸다 동그랗게 굴러가는 색깔들   텃밭에서 갓따온 가지빛깔 처음 우러나온 치자빛깔 옥수수 수염색깔 샘물바닥에서 솟아나는 모래빛깔 청심환을 싸고있는 금박지 씨가 환히 비치는 청포도빛깔   바구니 가득한 캔디 눈에 담기는 색깔부터 입 속에 넣는다 달콤하다가 시다가 씁쓰레 하기도 캔디맛인지, 색깔맛인지 욕조 가득 넘치는 맛과 색 맛으로 빛으로 춤춘다 ------이 솔 전문   이 시는 비누거품의 빛과 맛의 세계로 독자들의 감각을 끌어들인다. 그 빛과 맛은 시인이 감지하고 상상한 사물성의 세계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과 사물의 순수한 교감交感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시인과 사물의 직접적인 내통과 상상은 독자들에게 관념이전의 순수한 사물성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 세계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세계다. 그래서 이 시 속에 들어 있는 시인의 자기소멸의 빈 마음과 섬세한 감각, 그리고 날카로운 관찰과 상상은 신선하고 창조적인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한다.     이제까지 일반적인 관념(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무의미의 시(김춘수), 초현실주의의 시(조향, 양준호), 사물성의 감각과 이미지 중심의 사물시(문덕수, 이솔), 디지털리즘의 시(오진현, 송시월)의 시편들을 나름대로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시에서 창작된 탈관념 시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탈관념의 시는 대상에 대한 지각을 의미 형성의 이전, 감지와 인식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검증하였다. 어떤 의미도 형성되기 이전의 감지와 인식의 단계는 관념시와 탈관념 시의 경계가 된다. 따라서 관념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인간의 의식 활동 전체(생각)를 관념이라고 모호模糊하게 정의하지 않는다면(관념의 지나친 확대는 거대한 고정관념의 형성이다), 한국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는 가능하고 그런 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들은 언어의 관념에 시달려온 우리들의 정신을 맑은 물로 씻어주고 사물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감각과 정신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끝으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대상을 보는 눈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하는 가장 기본적 관점觀點의 자세를 산문체로 풀어쓴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글을 줄인다.   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지 못 하나, 우리의 눈. 풍경들은 시시각각時時刻刻 새롭게 변화하고 치장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스스로 환히 보여주고 있데, 이미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계곡의 숲길이나 꽃나무들, 묵은 생각이 그려내어 벌려놓는 화판 위의 그림.   이젠 그 관념觀念의 안경을 깨뜨려 버려라, 우리의 눈. 순간순간 펼쳐 보이는 풍경의 색깔이나 모양, 변화의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눈부신 육체와 혼魂을 찾아내어 아이들처럼 즐겁게 놀면서 교감交感하라, 순백과 눈 맞춰라, 우리의 눈. 뇌세포 속에 푸른 반점으로 남아 있는 몇 만 년 전의 원시기억原始記憶까지 모두 지울 수 없나, 우리의 눈. 먼지 묻고 얼룩이진 유리창을 계속 깨뜨려라, 들어오는 밝은 빛을 굴절시키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형상形象들을 계속 깨뜨리고 또 깨뜨려라, 우리의 눈.   오오, 아무 배경背景 없는 순수인식純粹認識, 그 한가운데서 투명하게 빛날 새 눈을 위해.                              --------심상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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