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文人 지구촌

전체 [ 2283 ]

123    사르트르 댓글:  조회:4143  추천:0  2015-03-04
  사르트르            20세기  세계적 문제아   노벨상을 거부할 정도로 엉뚱하고 배짱 두둑한 놈   자유에 미쳐 머리가 돈 놈   세계 문제를  마치 자기 문제인 양 온통 뒤집어쓰고 고민한 사나이   문학은 오직  실천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행동파   자유가 주는 고뇌와 괴롬 온몸으로 밀어내며 프로메테우스처럼 살았던 철학가   지독하게 못나고 사팔뜨기에다 꼴 사나운 안경잡이   갖은 정치 참여로 좌충우돌  시행착오가 많았던 놈   그래도 늘 최선의 선택 속에 우주를 보며 인류와 대화했던 삶의 열애자   지식인 허위 깨고 늘 약자 위한  외길 지킨 민중의 지지자   살아 있음의 기쁨 글쓰는 일로 확인하며 자기의 반역 사상 끊임없이 떠벌린 수다쟁이    
122    도데와 <마지막 수업> 댓글:  조회:4666  추천:0  2015-03-04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인식 "황당"     알퐁스 도데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것이 있지요? 여기(한국) 교과서에도 나오지요? 어떻게 가르쳐요? 어떤 교훈입니까? 그거 배우면서 동시에 같이 연상되는 게 일제시대에 우리 말을 빼앗겼던 일과 우리 말에 대한 소중함이죠.   일본에서도 똑같이 '마지막 수업'을 가르쳐요. 그런데 '마지막 수업'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잘 아시겠지만 보불전쟁, 즉 프로이센하고 프랑스가 벌인 전쟁 때문에 알자스 지방, 스트라스부르 지방이 독일 땅이 되어서 그 때까지 가르치던 프랑스 말을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되자 마지막 수업을 한다는 것이죠.   그 전에는 그 지방이 어땠지요? 그 전에는 프랑스 말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의 모어인 알자스 말을 가르쳤습니다. 원래는 독일 말의 사투리라고 할 수 있는 알자스 말을 썼던 것입니다. 알자스 말을 쓰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프랑스 말을 국어로 강요했는데 더 이상 강요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마지막 수업'의 진실입니다.   일제 때에 일본 말을 가르치는 마지막 일본어 교사의 이야기로 읽으면 더 정확합니다.  '이 때까지는 조선을 점령하고 조선 사람에게 일본 말을 가르쳐 왔는데 패전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일본 말을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일본 말도 이제 마지막이다.' 하는 그런 모습을 대입하면 더 정확한 겁니다. '마지막 수업'이라는 것이 말이죠. 그 전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프랑스 말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니까 역사를 왜곡합니다.   - <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국민, 국가, 고향, 죽음, 희망, 예술에 대한 서경식의 이야기) > (철수와영희. 2009) 중에서       그림책으로 된 중국판 "마지막 수업"     이 책은 재일 조선인 2세 서경식 교수가 2006년 4월부터 2008년 3월까지 2년 동안 국민, 국가, 고향, 죽음, 희망, 예술을 주제로 한국의 시민운동가와 학생,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속 강연과 세미나 내용을 엮은 것이다.   서 교수는 진보적인 한국 사람들마저 특정 이슈와 개념에 대해 기존의 사회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한 모습을 보며 의외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마지막 수업'은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북데일리]        
121    이율곡과 시 댓글:  조회:4486  추천:0  2015-03-04
  “이율곡이 생각하는 시는 개인 심성 수양의 방편”   시선집 ‘정언묘선’ 에 시 문학관 드러나 전통적 시관 탈피 표현의 개연성 선호         ▲ 율곡 이이   “이것은 무엇과 같으냐.” “석류 껍질이 부서진 붉은 구슬을 싸고 있습니다.” 외할머니가 석류를 가리키며 한 질문에 세살 된 율곡이 한시를 인용하며 대답했던 이 대화는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유명한 일화다.   어릴 적부터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였던 대사상가 이이는 시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었을까. 한문학자인 조기영 박사는 ‘율곡사상연구’ 제 17집에 내놓은 논문에서 ‘율곡의 시문학관’을 제목으로 이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간다. 이이가 38세인 1573년에 펴낸 시선집 ‘정언묘선’(精言妙選)을 통해 시에 대한 그의 안목을 살펴본다.   필자는 본격적으로 율곡의 시문학관을 소개하기에 앞서 그의 문장관, 즉 ‘글’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율곡이 남긴 글을 통해 설명한다. 시에 대한 철학 또한 문장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도(道)가 구현된 것을 글이라고 이르니, 글이란 도를 꿰뚫는 그릇입니다. 어찌 이것으로써 아로새기고 꾸며 다듬는 기교로 삼고자 마음먹겠습니까? 출세에 눈 먼 분별없는 유생들은 문장과 구절 사이에서 찾고 들추지만 깊이 담겨있는 의미를 아는 실질이 없으며, 잔재주 부리는 하찮은 사람들은 기괴함을 다투고 수놓고 색칠하는 사이에 속에 쌓인 아름다운 색채가 겉으로 드러나는 실상이 없으니, 이미 국가가 글을 숭상하는 본래의 뜻을 잃고 말았습니다.’(율곡)   필자는 “율곡은 도가 구현된 것이 글이니 도가 글의 근본이고, 글이 도의 말단이라고 하였다. 곧 주자가 말한 ‘도본문말’의 입장에서 글을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도라는 근본을 추구하면 성현의 글이 되고, 말단을 추구하면 세상의 비속한 선비의 글이 된다고 하였다”고 설명한다. 현대적으로 풀이한다면 “문장의 스킬이나 글재주보다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과 뜻이 작문의 본질이 돼야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율곡이 완성한 ‘정언묘선’은 율곡 자신의 시적 취향과 안목을 드러낸다. ‘정언묘선’은 정묘(精妙)한 언사(言辭)를 정선(精選)하였다는 뜻으로 상고시대의 고시로부터 송대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문사의 정수인 시작품 가운데서 정묘한 것을 가려 뽑았다는 것이다. 정언묘선은 ‘원형이정인의예지(元亨利貞仁義禮智)’ 8편으로 구성됐으며 충담(沖澹)한 것에서부터 이아(爾雅)한 것에까지 가려 뽑았다고 한다.   필자는 율곡이 ‘원형이정인의예지(元亨利貞仁義禮智)’를 정언묘언 시선집의 기본 틀로 한 것에서 그의 시문학관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정언묘선의 편명을 원형이정과 인의예지로 한 것은 아마도 도본문말 및 관도지기(貫道之器)와 문이형도(文以形道)라는 시문학관을 지니고 있는 율곡이 천도(天道)와 인도(人道), 도심과 인심을 염두에 두고 붙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바로 시가 개인의 심성 수양 및 명도(明道)의 방편이 되어야 한다는 시적 관점을 분명히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도를 깨우치기가 쉽지 않듯이 시를 배우는 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필자는 “율곡은 문장이 도를 꿰뚫고 도를 나타내는 그릇이라고 인식했듯이 도를 깨우치듯 시를 배워야만 수양과 명도에 보탬이 있을 거라고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 시에 대한 율곡의 생각을 대변한다. 이같은 율곡의 생각이 시를 가려 뽑는 기준이 되었다는 것. 율곡은 ‘정언묘선’ 8편인 ‘원형이정인의예지(元亨利貞仁義禮智)’ 편에 대한 서문을 스스로 붙였는데, 서문마다 시편의 특징을 쉽고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8편 중 형(亨)을 주제로 한 ‘형자집’에 대한 율곡의 서문이다. ‘이 시집에 뽑아놓은 시는 한미(閒美)하고 청적(淸適)한 것을 위주로 하였다. 조용하고 침착하며 스스로 흡족하게 여기는 삶 속에서 흥에 겨워 표출되었으며, 생각만 한다고 해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시집을 읽는다면 마음이 평정(平靜)하고 기운이 온화해져서 마치 작은 수레를 타고 내 뜻대로 화초가 있는 오솔길을 다니는 것과 같으리니, 세상의 권세와 재리(財利)와 명성과 영화가 시야에서 멀어질 것이다.’(율곡) 그러나 율곡은 시를 고르는데 있어 시에 대한 당대 선비들의 평가와 고정관념에 따르지 않았다.   필자는 “정언묘선에서 율곡자신의 안목과 취향을 가지고 그 풍격에 해당하는 시작품을 정선하였다. 그 결과 이백과 두보, 주자와 염락의 시작품이 가장 많으리라는 상식에서 벗어나 같은 성당(盛唐) 시인인 위응물(韋應物)의 시작품을 가장 많이 실었다. 그 다음으로 이백과 두보의 순으로 많으며, 맹호연 유종원 황유 등을 비롯하여 도연명, 사영운, 유장경, 유우석, 상건, 가도, 주자, 구양수, 왕안석, 소동파 등의 시작품을 골라 실었다. 그리고 무명시인의 작품과 작자 미상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율곡 자신이 선호하는 시의 풍격과 그런 시도에 적합한 작품이면 가리거나 따지지 않고 실었다”며 시선의 특징을 설명한다.   필자는 이에 대해 “"이로 볼 때 시를 선별하는 관점에 있어서 유가의 전통적인 시관이나 주자를 비롯한 도학적인 시관을 중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에 있어서 시인 개인의 성정, 문사의 영탄과 아울러 음일을 말하여 문학의 순수표현성을 인정했던 것처럼, 성정지정을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라면 시인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나 시대적 입장 등에 연연하지 않고 시작품이 함유하고 있는 표현의 개연성을 용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시 작품을 대하는 율곡의 태도를 이야기했다.    강원도민일보/ 2009년 02월 02일      
120    시인 - 조룡남 댓글:  조회:7055  추천:0  2015-03-04
  원로시인 조룡남 달력에 올라     “반디불”의 시인 조룡남이 달력에 올랐다. 중국문화예술협회와 세계다원화연구회에서 주최한 2013년력인물(年历人物) 중국저명문예가에 조선족 원로시인 조룡남이 선정되여 달력에 올랐다.   조룡남시인은 6월달 페지에 실렸다. 달력에는 시인의 간력과 함께2002년 조룡남시인의 모교인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세운 “반디불”시비와 2004년 룡정시 비암산 일송정풍경구에 세운 시인의 “비암산진달래”시비도 도편과 더불어 실렸다.         조룡남시인은 1935년 11월 27일, 길림성 훈춘시에서 태여나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나왔다. 1951년 중학교 학생시절 “연변문예”지(“연변문학”전신)에 처녀작을 발표했고 1956년 연변작가협회 성립시의 제1기 회원으로 입회했다.  중국작가협회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리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분과위원회 주임, 연변시조시회 회장 등 직을 력임했으며 연변자치주 정치협상회의 제7기, 제8기 상무위원, 문사전문위원회 부주임등 다양한 직무를 겸직했다. 시집으로는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그리며 사는 마음”, “고향마을 동구앞에서”, 동요동시집 “반짝반짝 반디불”등이 있고 그외 “문학묘사사전”, “세계문학명작소개” 등이 있다. “홍범도장군”, “길림조선족”, “해방전연변경제”, “남조선문학개관”, “고려문학미의식연구”,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등 수십종의 우수도서를 편집 출판했고 성급, 국가급의 창작상, 편집상을 수차 수상했다.     조룡남시인의 10여수의 시작품들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한 중소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번 년력인물에는 중국의 첫 노벨문학상수상자인 막언이 1월달에 올라 이 선정의 막중함을 과시했다. 중국문화예술협회에서는 해마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문화예술분야의 성과가 있는 문학, 서예, 화가 등 문화예술인들을 선정하여 년도최고영예인 중국저명문예가로 명명하고 달력으로 만들어 그 당선자와 작품들을 소개하고있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2년 1월 21일         원로시백 조룡남선생을 만나     조룡남선생의 저택에 들어서자 가장 눈에 띄는것이 도서였다. 서재, 작업실, 침실 할것없이 발을 디뎌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도서가 꽉 차 있었다. 선생의 컴퓨터에도 컴퓨터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지나 않을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많은 서류가 빽빽하게 자리하고있었다. 이렇게 많은 책과 서류 가운데서 어떻게 필요한것들을 찾을지 왼심이 쓰였다. 하지만 그런 근심은 한낱 기우였다. 선생은 컴퓨터에 마주앉자마자 능수능란하게 필요한 자료들을 족집게처럼 대번에 집어냈다. 취미가 다양한 선생은 천여장에 달하는 영화CD와 음악CD를 소장하고있었다. 취미생활은 중병으로 투병중인 선생에게 잠시 아픔을 잊게 하고 치료에 도움을 주는 활력소가 된다고했다.    초년에 두각을 내민 나젊은 시인   “반짝반짝 반디불/ 손벽치면 온다야/ 파란 전등 켜고서/ 한들한들 온다야”(조룡남 작사, 김덕균 작곡, 동요 “반디불”) 동요 “반디불”은 조룡남선생이 사범학교 학생시절, 약관의 나이에 쓴 작품이다. “반디불”은 선생의 동년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미래에 대한 동경과 우리 민족의 민족적정서가 잘 녹아든 명동요이다. 2002년, 선생의 모교 연변대학 사범분원 캠퍼스에 건립된 반디불비 비기(碑記)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있다.  “‘반디불’은 지난 반세기 동안… 여러 세대 어린이들 동심세계에 밝고 따뜻한 꿈이 되여주었다.” 당시 “문학신동”이라 불린 선생은 동시와 성인시를 동시에 잡지에 발표한다. 처녀작 성인시 “불꽃”은 1951년에 《연변문예》에 발표하고 처녀작 동요 “공장”은 1951년 《소년아동》잡지에 발표하였는데 그때 선생의 나이는 15세였다. 우리 시단에 “반디불” 신드롬을 몰고오면서 두각을 내밀기 시작한 조룡남선생은 희망이란 반디불처럼 묘연한것이긴 하나 열심히 사느라면 능히 손에 거머쥘수 있는것이라고 굳게 믿고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인생의 전반기에 “반디불”처럼 위태위태한 삶을 살게 된다. 1955년 선생은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있다가 “우파”모자(22살, 연변에서 가장 나이 어린 우파분자)를 쓰고 추방되여 “로동개조”를 강요당하고 모진 수난을 겪는다. 이어 “10년 동란”이 터지면서 또 한번 막심한 재난을 겪는다. 그렇게 선생은 장장 23년을 고생하다가 1979년에 “우파”모자를 벗고 모교인 훈춘2중에 복귀하여 다시 교편을 잡았다가 연변인민출판사에 전근하여 문예편집으로 근무하게 된다. 가장 혈기왕성했던 23년간의 청춘시절은 아쉽게도 선생에게는 인생의 공백기요, 창작의 공백기로 남아있다. 그때 선생을 투쟁하는 대회에서 현의 한 지도자는 “작가로서의 조룡남의 생명은 끝났다”고 선포하였다. 하지만 그는 험악한 세월에도 몇궤짝씩 되는 책을 끌고 다니면서 계속 독서하였고 일기형식의 작은 글들을 남기기도 했다.    “해빙기의 강변에서” 정감의 보물을 터치우다   조룡남선생이 본격적으로 다시 창작을 시작한것은 1980년대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을 맡았던 때부터였다. 시인의 구세주는 고통이라 했던가. 길고 어두웠던 그의 인생에서 불우한 운명은 청춘과 사랑과 미래에 대한 장미꿈을 여지없이 짓밟아놓았지만 유독 선생에게서 빼앗아갈수 없었던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정감과 감성, 시적재능이였다. 선생은 “인생 고래희”를 훌쩍 넘기고서도 정감과 감성의 바다에서 주옥같은 시편들을 끊임없이 건져냈다. 1989년에 조룡남선생은 첫 시집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을 출간했다. 상기 시집에는 “옥을 파간 자리”, “해빙기강변에서”,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등 선생의 수작이 다수 수록되였다. 수록된 시들은 다양한 주제를 포섭하고있지만 주류는 상처입은 기억에 대한 시적재현으로 인간과 인생에 대한 절대적정감을 기조로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진실을 진지한 자세로 탐구하고 상실의 아픔속에서 승화의 미를 단조한것들이다. 선생은 지금까지 서정시 700여수, 동시 300여수, 장시 20여편, 논픽션 100여편을 창작하고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에 이어 《그리며 사는 마음》, 《고향마을동구밖에서》, 《반짝반짝 반디불》, 《사람아 사람아》 등 5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중 “어머니”, “옥을 파간 자리”, “고향생각”, “반디불” 등 10여수의 작품이 중소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였다. 조룡남선생은 중국작가협회 회원이고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주정협 상무위원 등 직을 력임하였다. 선생은 주인민정부의 “진달래문예상”과 “공훈상”, 길림성인민정부의 “장백산문예상”(3차), “전국소수민족문학상”(2차) 등 큼직한 상들을 수십차 수상하였으며 그의 략력과 업적은 《중국작가대사전》(중국사회과학출판사, 1993년) 을 비롯한 다수의 사전과 명인록에 수록되였다.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선생의 “반디불비”가 세워지고 룡정 비암산 일송정에 선생의 “비암산 질달래” 시비가 세워졌다. 아름다운것은 언제나 진실에서 싹이 트고 그 향기를 풍기듯이 가식이 없는 진실한 시는 독자들에게 령혼의 울림을 준다. 조룡남선생의 시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뿐만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계시가 크다. 그것은 시인이 아픔의 현장을 뛰여넘은 완성도가 높은 시적미감을 창출했기때문이다.           연변일보 김인덕기자 시인 조룡남의 콤플렉스와  그의 시의 상징이미지                                    /림철   시인 조룡남선생은1935년, 길림성 훈춘현 춘화향 동흥진에서 태여났다. 1955년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한 조룡남선생은 모교인 훈춘2중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다. 그러다1957년 정치풍파속에서 그는 억울하게 우파모자를 쓰고 수업의 권리,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머나먼 심산골로 추방되였다. 그리하여 재능있는 시인의 이름은 너무나 일찍 우리 문단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때로부터 그는 장장23년이나 온갖 고역과 치욕을 겪으면서 《죄수》로 되어 인간 최하층의 생활을 경험하게 되였다. 1979년에야 조룡남선생은 비로소 시정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때 그는 벌써45세인 중년에 들어섰다. 그때로부터 조룡남선생은 다시 붓을 들고 새로운 문학인생을 시작하게 되였다. 1984년부터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편집부에 몸을 담그고 많은 책들을 편찬하고 편집, 출판하는 한편 왕성한 정력으로 창작에 정진하였다. 그는 선후로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그리며 사는 마음》,《고향마을 동구앞에서》,《민들레씨 동동》 등 서정시집들을 련속 출판하였고 그밖에도 기타 문학쟝르의 창작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다. 조룡남선생은 또 우리 문단에서 문학상을 가장 많이 탄 작가중의 한 분이시다. 굵직굵직한 상들만 하여도 연변작가협회문학상2차(1985년,1990년), 연변의 최고상인 자치주인민정부 우수작가상(1992년)과 진달래문예상(1997년), 길림성 최고상인 길림성인민정부 장백산문예상2차(1990년, 1997년), 전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1998년) 등 다양한 수상경력을 기록하고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이 해소되지 못하면 심리 심층에 깔리고 쌓이여 매몰된다. 이렇게 장기간 억눌렸던 심리고통과 갈등, 고달픈 감정체험이 의식속에 잠재된다. 이것이 바로 콤플렉스이다. 16살 초중시절부터 신문, 잡지들에 문학작품을 련속 발표하고 수차 수상경력까지 지닌 문학신동으로 불리우던 조룡남선생이였다. 1952년 연변사범학교에 진학하면서 그의 문학은 큰 발전과 성장을 가져오게 되였다. 이 시기 그는 벌써 장시 《눈내리는 밤》, 서정시 《평화시초》, 수필 《왜 사범학교에 갔는가고 묻는 사람들에게》 등 비교적 성숙된 작품들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의를 끌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가1957년 풍파후 장기간 농촌에 내려가 《죄있는 령혼》을 씻어야 하였다. 20여세 한창 젊은 나이에 청춘을 버려야 했으니 쌓이고 쌓인 심리고통 그 콤플렉스는 또한 얼마였으랴! 23년이란 기나긴 시간을 붓대를 꺾고 지내야 했고45세 중년이 되어서야 다시 붓을 잡게 된 조룡남선생, 바로 그의 그 콤플렉스가 그의 시를 낳은 것이다. 이렇듯 장장23년간 붓을 꺾었던 조룡남선생이45세 때부터 다시 붓을 잡고 일어나서 문학도인생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23년간에 쌓이고 쌓인 콤플렉스가 그의 시집들에 력연히 나타나고 있으며 시행마다에 부착되여 있다. 그럼 아래에 조룡남시집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에서 《두견새》,《옥을 파간 자리》,《홍장미》 등 몇수의 시를 살펴보면서 그의 파란많은 인생의 콤플렉스와 작품에서 표현된 그 상징, 은유적인 이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래는 시 《두견새》의 전문이다.   두견새   마디마디 울음이 목이 터져서 떨기떨기 꽃잎우에 피물이 드는 두견새의 울음아, 구슬픈 울음 적막강산 외로운 나그네 혼아 천년을 울었건만 못다 울어서 마디도 못 꺾는 저 울음소리 이 몸도 울며 사는 작은 두견새 너와 함께 울며 살다 울며 가리라   문학창작은 욕망의 표현이다. 작가들은 예술창작의 형식을 통하여 그러한 욕망을 위장함으로써 만족과 승화를 가져온다. 서정시 《두견새》에서 《두견새》는 작자 본인일수 있다. 조룡남선생은 《두견새》라는 상징이미지를 설정하고 《적막강산 외로운 나그네》의 심리체험을 토로하였다. 《마디마디 울음에 목이 터져서/ 떨기떨기 꽃잎우에 피물이 드는》 실로 작자의 《구슬픈 울음》이 아닐수 없다. 청춘의 권리, 창작의 권리를 빼앗기고 《죄있는 령혼》을 씻어야 했던 조룡남선생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마디도 못꺾는》 울음소리였을가? 그의 시 《옥을 파간 자리》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이 시에서 《옥》과 《구뎅이》는 그 어떤 상징, 은유물이다. 《옥》은 《청춘》,《명예》일수도 있고 또 《사랑》일수도 있다. 그러나 조룡남선생의 경력을 놓고 볼 때 이 시에서 《옥》은 《잃어버린 청춘, 빼앗긴 청춘》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 같다. 바로 그런 《청춘》을 잃고 빼앗겼기에 가슴에 《웅뎅이》 하나가 생겨 《허연 소금》이 돋쳐 《마를줄 모르는 빗물이, 눈물이 고이여》 있는 것이다. 억눌렸던 《한(恨)》의 응어리, 그 콤플렉스가 《옥》과 《웅뎅이》란 상징으로 작품속에 토로되고 있다. 작가의 가슴속깊이에 묻혀있던 갈등과 고통, 그 억눌림이 바로 《웅뎅이》였고 잃고 빼앗긴 청춘이 곧바로 《옥》이였다. 조룡남시인의 또 다른 하나의 시 《홍장미》를 보자. 이 시는 피뜩 보건대는 애정시로 리해되지만 작자의 경력과 련결시키고 그 시행을 분석해보면 역시 《령혼》을 씻던 시기 마음속 심처에 입은 《상처》를 반영했다고 볼수 있다. 혹은 청춘도 사랑도 다 잃은 작자의 처지를 나타냈다고도 볼수 있다. 그리고 그 시기의 그 어떤 욕망, 념원의 실패, 좌절을 나타냈을수도 있는 것이다. 3련에서 《피흐르는 손이야/ 아무오리만/ 마음에 든 가시야/ 어찌 뽑으랴/ 언제 뽑으랴》에서만 보아도 이것을 단순히 사랑, 애정좌절을 나타냈다기보다도 청춘과 명예나 그리고 그 어떤 욕망, 념원의 좌절이라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 같다. 조룡남선생이20세기80년대에 쓴 기타 시작품 례하면 《해빙기의 강변에서》,《나를 리해해다오》,《나의》등 시들에서도 그가 경험했던 콤플렉스들이 력연히 안겨온다. 아래는 그의 시 《나의》의3, 4, 5련이다. …… 나도 묵묵히 생각해본다 정말 젊었을 때가 없었던가? 나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마치도 어린애에서 갑자기 늙은이로 변해버린 듯 없기야 왜 없었으랴만 그것은 꽃이 없는 봄 의혹, 오뇌, 방황, 우롱 속죄, 추방, 고역, 절망… 이렇게 나는 비싼 값으로 청춘20년을 력사에 지불하고 만년으로 가는 인생의 부두에서 3등석 배표 한 장 끊지 않았던가   시인 조룡남선생이 겪었던 콤플렉스는 그 외에도 고향을 노래한 기타 서정시집들에서도 우련히 안겨오고 있지만 여기서는 이만 줄인다. 총적으로 조룡남시인은 《잃어버리고 빼앗긴20년 청춘》에 쌓이고 쌓인 콤플렉스를 시라는 문학형식을 통하여 또 거기에 그 어떤 상징, 은유적이미지를 부여하여 작자가 겪은 고통, 갈등, 억눌렸던 감정을 토로하였고 력사의 비극을 개탄하면서 《잃었던 청춘》을 다시 찾고 있다. 서정시 《두견새》나 《옥을 파간 자리》나 《홍장미》는 바로20여년간 강간당했던 청춘에 대한 절규이며 깔리고 억눌리웠던 콤플렉스의 해소라고 볼수 있다.    =============================================== 저 명멸하는 반디불의 빛처럼 - 원로시인 조룡남의 문학인생 “… 반짝반짝 반디불/ 손벽치면 온다야/ 파란 전등 켜고서/ 한들한들 온다야” 여러 세대 불려지면서 조선족 어린이들의 애창가요중에서 굴지로 꼽혀온 명동요 “반디불”의 저자 조룡남(75세)시인이 일전 “민초 해외문학상”을 수상했다. “민초 해외문학상”은 카나다 한인동포들이 운영하면서 세계 한민족문학인들중에 서 선정하여 높은 문학공적과 성과를 치하하여 내리는 상으로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을  임헌영 등으로 무어진 평심단은 "시인 조룡남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로운 시세계를 펼쳐 우리 문학을 빛나게 해주었다"고 시인의 문학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연길시 하남가두에 위치한 그의 조촐한 가택에서 시인을 마주했다.  서재를 가득 메우고 응접실까지 밀려나오며 빼곡이 포진해있고 책더미속에서 맛있는  원두커피를 타주며 담담한 어조로 시인은 후학들에게 말머리를 풀었다. 항용 그러하듯이 단연 문학이 단골화제였다. “시는 한 민족의 문명정도와 기질과 정감과 심미수준을 반영합니다. 시를 사랑하는 민족은 우수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난 시인이라는 칭호를 지금도 벅차게 생각하고있습니다.” 시인은 1935년 11월 27일 중국 로씨야 국경지대인 길림성 훈춘시 춘화향 동흥진촌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문은 한일합방후 로씨야 연해주로 이주하여 울라지보스토크에 정착해 살다가1930년대 연해주 고려인들의 중앙아세아로의 강제이주를 피해서 고향으로 가던중 중국에 눌러 앉게 되였다. 구전동요 몇백수를 읊조릴수 있었던 어머니를 모신 집안에서 자란 시인은 은연중 문학소년으로 성장해갔다. 어머니는 그에게 일본어로 된 “좋은 어린이의 벗(良い子の 友)”잡지와 “주간소국민(週刊小国民)”신문을 주문해 주었다. 시인은 이런 간행물에 실린 문학작품들에 푹 빠져들었다. 또 집에는 력사시조를 적은 “가르다”퍼즐이 어러 몫 있었는데 이 가르다놀이를 하면서 시인은 소학교 저급학년 시절에 벌써 수십수의 시조를 외울수있었다. 이러한 가족분위기는 시인의 작가적 기질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51년 중학시절 시인은 학교 대표로 연길에서 열리는 연변제1차 하령영에 참가했다. 그때 지도교사가 바로 연변대학 재학중이였던 권철선생이였다. 하령영에서 시랑송, 영화감상, 공장참관 등 활동에 이어 석현제지공장을 참관하고 애국증산을 주제로 한 작품쓰기를 했다. 그때 시인이 써바친 작품이 권철선생의 추천으로 당시 6기까지 출간되였던”연변문예”에 실렸는데 바로 처녁작”불꽃”이였다. 시인의 함자와 함께 선참 떠오르는 작품”반디불”은 시인이 1953년 연변사범하교 2학년때 펴낸 작품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님이 부르시는”둥근 달님 따다가”, “하늘에는 별이 총총”등등 동요들에 심취되였던 시인은 초중시절에 이미 동요들을 잡지에 발표했고 그중1952년에 창작한 “매”는 소년아동 당선작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연변사범학교에 진학한뒤 저명한 동시인인 김례삼은사의 지도밑에서 시인은 대표동요로 인정받는 “제비제 학교”, “딸랑강아지”, “호박꽃초롱” 등 많은 동요들을 써냈다. 1953년 겨울방학 시인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도서관의 많은 책들을 탐독했다. 그 겨울 동창생이였던 김덕균과 배가 고파 기숙사 김치움에서 김치를 훔쳐다가 찢어먹으면서 만든것이 바로 “반디불”이였다. 조선족 어린이들의 너나의 동심에 오롯이 각인된 이 동시는2002년 8월에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시비로 세워졌다. “반디불”창작 50년을 기리여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분과, 연변음악가협회 아동음악분과,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연변대학 사범분원 등 단위가 시인의 모교에 세운것이다.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세워진 “반디불” 동요비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한뒤 시인은 고향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1957년 불어친 반우파투쟁은 연변작가협회 성립시의 제1기 회원이였고 당시 꽤 문명(文名)을 날리던 젊은 시인을 천길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시인은 22세의 나이에 “연변에서 가장 나이 어린” 우파분자의 한사람으로 락인되여 고향의 치벽지로 추방되여 굴욕적인 로동개조에 신심을 혹사 해야했다. 직장도, 로임혜택도 박탈당한채 국영농장에서, 대약진 땜 건설현장에서 토역에 내몰렸고 지어 똥수레를 몰고 인분을 퍼나르는 일 까지 강요당했다. 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마저 얼굴에 가래침을 뱉고 구석에 세우고 공으로 얼굴을 가격하고 함께 우파분자로 현장에 몰렸던 초중시절의 교장은 미쳐나고 생일이 맞띄워도 신분증을 보이며 겨우 죽 한그릇을 얻어먹을수있고 그 죽마저 범인들의 탐욕어린 손아귀에서 사수해야하는 혹독한 시련은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의 동란시절에도 계속되였고 장장 23년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룡정 비암산에 세워진 시인의 "진달래"시비 앞에서 부인과   1979년 불혹의 나이가 되여서야 시인은 신심을 짓누르던 무거운 우파모자를 벗을수있었다.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으로 취직했고”아리랑”문학총간 편집을 맡게되였다.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했던 시인은 다시 붓을 들었고 벌창해진 봇물처럼 작품들을 량산해 냈다.  “해빙기의 강변에서”, “영원한 미소” 등 서정시 500여수, “반디불”, “제비네 학교” “딸랑강아지” 등 동요 동시 300여수와 “아, 청산골”, “꿀벌의 죽음” 등 장시 20여편, “꾀꼬리가 울기까지”, “돌아온 백조” 등 실화 수필이 80여편을 펴냈고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그리며 사는 마음”, “고향마을 동구앞에서”, 동요 동시집 “반짝반짝 반디불”, “문학묘사사전”, “세계문학명작소개”, 등 저서들을 펴냈다.  그외 편집원으로서 “백야” 등 번역작품을 내놓았고”홍범도장군”,”해방전연변경제”, “남조선문학개관”, “고려문학미의식연구”,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등 수십종의 우수도서를 편집 출판하여 여러 차례 성급, 국가급 우수도서편집상 수상 하기도 했다.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리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분과위원회 주임, 연변시조시회 회장 등 직을 력임도 했고 연변자치주 정치협상회의 제7기, 제8기 상무위원과 문사전문위원회 부주임직도 지냈다. 선후로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연변자치주인민정부 우수작가상, 진달래문예상․공훈상, 길림성인민정부 장백산문예상, 전국소수민족문학상-준마상, 전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원예사상, 21세기한국문학상, 한국 미래문학해외동포문학상, 세계화인교류협회 “국제우작품상”, 중국과학원 화하문화연구원 “중국신사상신학술성과․1등상” 등 굵직한 상들을 수상했다. 시인이 올해 수상한 상만해도 17개나 된다고 한다. 1995년에 정년퇴직한후에도 민족의 문화사업을 위한 시인의 행보는 멈출줄 모른다. 연변인민출판사와 “김학철문학연구회”가 펴내는 연구저서들의 책임편집업무를 맡고 시인이 우상으로, 사표(师表)로 모시고있는 김학철 선생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해마다 한집씩 “김학철문학연구”총서를 정성들여 편집하고있다.    시인의 정신적 사표- 김학철 선생의 문학기념비 앞에서 이순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시인은 정보의 홍수로 넘쳐나는 글로벌 시대에 뒤지지않게 그 나이에는 드물게 인터넷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문서작성, 메일전송은 물론 풍경사진, 인물사진, 회의사진 등 내용으로 수백페지에 달하는 전자사진첩을 만들었으며 음악앨범까지도 만들어”세계명화”, “세계명시”, “명작영화모음”, “즐기는 음악” 등도 편집해두고 수시로 감상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정서적공간을 확보해가고있다.  출국해 있는 자식들과 화상채팅을 하는것이 즐거움의 하나라고 시인은 밝게 웃는다.  이순의 나이에도 컴퓨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있는 시인은 스스로 "컴광"이라 자칭하며 인터넷 세계에 심취되여있다.    모교에 동요비가 세워지고 룡정에 “비암산 진달래”시비가 세워지고 시”고향생각”이 조선어문교과서에 실리고 해내외로 부터 저명한 시인으로 칭송되고있지만 시인은 자신을 원로가 아닌 문학소년으로 간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명작들을 다시 탐독하면서 문학거장들의 넓은 작가적시각과 깊은 문화적소양에 다시한번 매료되고 감복하고있다. 하루라도 독서를 게을리한다면 시대의 락오자로 전락되기 쉽다며 체질화된 독서습관을 이어오며 매달 상당한 량의 작품을 독파하고있다. 시인은 요즘 한국작가 최인호 대하 장편소설 『유림』을 정독한다고 한다. “자신의 삶과 문학을 정리해야하는 시점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것은 자신의 지식과 철학의 빈곤이라며” 엄격한 자아완성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있는 시인은 동양의 대 거유(巨儒)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진정 바른 선비의길에 대한 화두를 새김질하고있다고 한다. 앞으로 시집과 동요동시집도 몇권 내고싶고 더우기는 암울했던 동란시절의 희생양으로 20여년간 살아온 인고의 시간들을 형상화한 수필집을 펴내고싶다는 시인이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력정을 작품화하는 시인의 괴로움은 크다. 쓰다가는 필을 멈추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고 한다. 혹여 집사람에게 맞띄면 함께 부둥켜안고 통곡하기 일쑤라고한다. 하지만 피가 철철 흐르던 력사의 상처의 딱지를 굳이 들추면서라도 후세들에게 알리는것이 자신의 숙명인줄을 시인은 안다. “문학이란 그리고 인생이란 고달픈 작업의 련속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작가마다 상황이 좀씩 다를수는 있겠지만 진정 우수한 작가로 거듭나려면 뼈를 깎는 령혼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최고의 인생은 시화된 인생입니다. 시인의 파란많은 인생려정을 경청하며 필자는 저도모르게 인도 철학가 스와미 웨다 바라띠의 잠언시 한구절을 떠올렸다. “초불은 부드러운 미풍에도 꺼진다. 그것은 바깥에 있는것에 의해 점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디불은 거센 폭풍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빛이 자기안에 있기 때문이다.” 반디불은 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어둠을 사르며 난다. 사랑과 생명의 광휘로 가득한 삶도 그렇다. 밝은 자기 내부의 빛으로 당대의 어둠과 고통의 질곡을 깨뜨리며 문학이라는 이름의 광휘로 세상에 밝은 빛을 더하고자하는 문학대선배와의 대담을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하노라니 다시한번 명동요의 한구절이 귀전에 쟁쟁히 남아 감돈다.  “반짝반짝 반디불/ 손벽치며 온다야/ 파란 전등 켜고서…   김혁 기자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9- 11- 14     ================================= 사람에 대한 오롯한 명상 - 원로시인 조룡남 시집 “사람아, 사람아” 출간       원로시인 조룡남의 시집”사람아, 사람아”가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시집은 “내 가슴에 묵어간 녀인”, “꽃이여”, 사람아, 사람아”, “내 이름은 개똥”, “불멸의 삼족오”, “주막 그리고 길손” 등 총 6부로 나뉘여 시인이 일껏 선정해낸 시 200여수를 묶었다.   시집 제목이 명시하다싶이 시집에는 영원한 화두인 사람에 대한 탐색과 인간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한 시편들이 작가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로 오롯하게 실려있다。”작은 책을 어머님의 령전에 바치옵니다”라는 애틋한 제사(题词)로부터 시작된 시집의 행간에서는 “무가(无价)의 보화(宝货)” 어머니가 보이고 “곁을 지켜준”살가운 자식이 보이고 “왕국을 버리기에도 아까와 하지 않을” 녀인이 보이고 “경건한 신앙이자 종교”같은 김학철옹이 보이고 “북방의 량심” 리삼월시인이 보이고 “작은 등불을 켜든” 저자 자신도 보인다.  조룡남시인은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끊임없는 련민과 그리움을 되뇌이며 사랑의 여러가지 무늬를 새기고 있다.    만추에도 지칠줄 모르는 정열로 글밭을 경작하고있는 조룡남시인은 1935년 11월 27일, 길림성 훈춘시에서 태여나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나왔다. 1951년 중학교 학생시절 “연변문예”지(“연변문학”전신)에 처녀작을 발표했고1956년 연변작가협회 성립시의 제1기 회원으로 입회했다.    중국작가협회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리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분과위원회 주임, 연변시조시회 회장 등 직을 력임했으며 연변자치주 정치협상회의 제7기, 제8기 상무위원, 문사전문위원회 부주임등 다양한 직무를 겸직했다. 시집으로는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그리며 사는 마음”, “고향마을 동구앞에서”, 동요동   시집 “반짝반짝 반디불”등이 있고 그외 “문학묘사사전”, “세계문학명작소개” 등이 있다. “홍범도장군”, “길림조선족”, “해방전연변경제”, “남조선문학개관”, “고려문학미의식연구”,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등 수십종의 우수도서를 편집 출판했고 성급, 국가급의 창작상, 편집상을 수차 수상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 9월 27일  =========================   수필    시인 조룡남   김학철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의사무사한반 아마 1955년 가을께가 아니였던가 싶다. 훈춘중학교에 가 강연을 할 때 처음 만났던 스무살안팎의 총각선생, 그가 대개 이 인거 같다.    내가 조룡남을 다시 만난것은 이 끝이 나가지고 우리의 많은 작가들이 22년동안의 피눈물나는 고역살이에서 풀려나 륙속 문단으로 복귀를 할즈음이였다. 그러니까 1982년초겨울께쯤이 됨직하다.    근 30년이란 세월을 제각각 살면서도 우리가 겪은 고초는 다 어슷비슷해 그야말로 의 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지금도 갈구하는 리상의 실현을 위해 꾸준히 필경에 정진을 하고 있다. 그는 60세 나는 80세 .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에 끌려나왔다가 죽은 남편을 찾아나섰다는 전설의 녀인 맹강녀, 그 맹강녀를 통해서도 조룡남의 시상은 발로가 되고있다.   장성보다 긴 왕조를 넘어오면서 장성보다 긴 세대를 살아오면서 그녀는 만천하에 폭군을 공소한다 폭퐁같이 준절히 폭정을 통책한다      제철 만난 잉어모양 싱싱하던, 물정 모르는 애숭이총각선생이, 날벼락같은 의 철퇴
119    不狂不及 댓글:  조회:4269  추천:0  2015-03-04
《불광불급》, 미치지 않고는 미칠수 없다 |   조선족문단 《독서광》이라 불리는 소설가, 김혁선생의 독서지론 --독서열이 저조되고 독서인구가 급락하는 중국조선족사회, 《축구의 고향》, 《가무의 고향》으로 자부를 머금었던 우리 민족에게 독서와 관련한 명분은 아무것도 없다는 슬픈 현실 --책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고 세월의 험난한 강을 지혜롭게 건너는 징검다리를 발견할수 있다고 할 때, 어쩌면 온 민족을 통한 책읽기는 목전의 진통을 이겨내고 비전을 가질수 있는 또 하나의 지름길이 아닐가       서재에서 김혁소설가     유명한 《독서광》   김혁소설가가 유명한 독서광이라는것은 조선족문단이 다 아는 사실이다. 동년시절, 어문교원이였던 양어머니의 가르침하에 5세에 글을 깨쳤고 그즈음부터 독서에 빠져들기 시작하여 소학시절에는 천권에 달하는 련환화를 모아 당시 《룡정에서 책이 가장 많은 어린이》로 되였다. 젊은 시절 엷은 로임마저 헐어서 수십년간 사들인 책이 저그만치 만여권, 생활고에 시달리며 열여섯번이나 이사를 하면서도 다른 기물은 내칠지언정 책만은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집착》, 십여명의 짐군들이 수백포대의 책짐을 져나르다가 포대에 든 네모난것이 타일인줄로 알고 《타일장사로 돈 많이 버나봐유》 하고 부러워했다고. 서재에 책이 넘쳐 응접실까지 차지하여 두마리의 애견도 책더미사이로 빠져다녔다는 재미난 일화… 그의 일상은 어쩌면 미친듯이 사들이고, 미친듯이 읽고, 미친듯이 쓰는것이 전부인지도 모른다. 남보다 여의치 못한 잔혹한 운명에 시달리면서도 그 독서에 대한 사랑과 신앙에 가까운 독서행위는 실로 사람을 감동케 한다. 원고료를 후무려서, 로임봉투를 잘라서 책을 산다. 로임의 절반, 때로는 거의 전부가 책구입에 들어간다. 혹 길거리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의 손에는 언제나 신간서적이 들려있다. 허기진 사람처럼 책을 사들이고 읽는다. 어려서부터 길러온 미친듯한 독서습관은 체질화로 골수깊다. 부지런히 읽고는 또 작품을 쓴다. 원고료가 나오면 문학친구들이나 후배들과 술 한잔 나누며 문학과 독서를 화제로 열기가 도도하다. 옛날문인들에게는 《4대 애장품》이나 《4대 취미》가 있다고 했다. 김혁소설가는 《책 읽기, 영화 보기, 맥주 마시기, 애완견 기르기》가 애장품이요 취미요 일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토록 행복하다고 한다. 그는 이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에 함몰된 독서광이다. 문학뿐만아니라 예술, 철학, 력사, 종교, 천문학, 회화, 동식물학, 민속 등등 넓은 분야의 책들을 대량적으로 구매하여 읽는다. 신간 베스트셀러는 물론 그외 주문하거나 사서 읽는 잡지만 해도 10여종류나 된다. 김혁소설가의 서재에는 책뿐만아니라 영상자료도 어마어마하다. 수십년간 사들인 영화테프, CD가 5000여장이나 별도로 꽂혀있다. 신작영화, 경전영화를 비롯해 신예감독들의 끼 넘치는 실험영화, 지어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까지 모조리 사보면서 다양한 참조물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가꾸어간다. 김혁소설가는 자신의 문학블로그에 신간서적을 주기적으로 소개하고 또 위챗(微信)에까지 매일 읽는 책을 핸드폰으로 업데이트한다. 그가 올리는 글에서는 방대한 책 정보량이 읽혀진다. 그러한 노력으로 그는 문단에 데뷔한 이래 장편소설 4부, 인물전기 3부, 중단편소설 80여편을 비롯하여 시 300여수와 명상시리즈 500여편, 수필, 칼럼, 잡문 200여편을 발표했다. 게다가 그가 발표한 신문기사는 수천편에 달한다. 픽션과 논픽션 거의 모든 쟝르를 섭렵하면서 십여권의 저서를 펴냈고 국내외의 크고작은 상을 30여차 수상하였다.   책에서 징검다리 발견한다   《독서와 민족》에 대한 그의 관심 역시 뜨겁다. 조선족 인구 대이동, 인구 마이나스 성장, 조선족학교 학생원 감소, 시장경제법칙에 걸맞지 않는 출판부문의 일부 페단, 각종 미디어물의 빠른 보급과 충격, 하루살이와도 같은 향락적인 생활신조의 만연… 등등으로 책과 담을 쌓는 사람들이 늘어나고있음을 피력하면서 중국조선족사회의 독서열이 저조되고 독서인구가 급락하는 원인을 진단한다. 그러면서 《축구의 고향》, 《가무의 고향》으로 자부를 머금었던 우리 민족에게 독서와 관련한 아무런 명분도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고 지적한다. 그는 독서는 삶에 많은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한다. 우선 좋은 책을 찾았을 때의 그 즐거움, 몰입해서 책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그 쾌감, 책으로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고 배운 지식을 주변과 나누면서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순환고리라고 한다. 《자신을 주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할수 있느냐》가 지식사회의 새로운 화두라고, 지식정보화사회, 지식기반사회로 변해가는 시점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더구나 책을 들어야 한다고 그는 억양을 살렸다. 책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고, 세월의 험난한 강을 지혜롭게 건너는 징검다리를 발견할수 있다고 할 때, 어쩌면 온 민족을 통한 책읽기는 우리 민족이 목전의 진통을 이겨내고 비전을 가질수 있는 또 하나의 완연한 지름길이 아닐가며 눈빛을 빛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수 없다고 했다. 《독서광》, 《문학광》, 《영화광》으로 불려지는 김혁소설가의 독서지론과 같이 민족 전체가 독서의 풍조를 일으키며 우리의 문화풍토, 사회풍토를 가꾸어갈 때 우리 사는 세상은 더 아름답고 더 정갈하고 더 참되지 않을가.   편집/기자 김청수 [ 길림신문 ] 2014-01-30  
118    <<마지막 분대장>> - 김학철 댓글:  조회:4393  추천:0  2015-03-02
'중국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선생 타계 탄생90주기를 맞아 선생님의 비장한 최후를 적은 '동아일보' 기자의 기사를 다시 실어 고인을 기리고저 한다.     ‘마지막 분대장’의 아름다운 세상 이별 조선의용군 출신 옌볜 작가 김학철옹 임종 발자취 … 단식으로 죽음 예비 “내 유골은 두만강에” 조선의용군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옹(85). 일제의 식민통치와 뒤이은 분단과 독재, 좌우대립 등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 현대사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그 자신이 하나의 현대사가 되어버린 김옹이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한 것은 지난 9월25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망 소식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사흘장을 모두 마치고 난 뒤인 9월28일경. 김옹이 자신의 죽음을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고 유언한 데 따라 유족들조차도 측근 몇 명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김옹의 사망 소식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추석 연휴가 시작될 무렵,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김옹의 죽음은 그렇게 잊혀졌다. 그래서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등 국내에도 수많은 독자를 가진 소설가이자 옌볜 조선족 사회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김옹을 기억할 만한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주간동아’가 입수한 김옹의 사망 직전 마지막 생애와 장례 현장을 담은 사진은 평생을 항일투쟁과 김일성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에 바친 혁명가의 마지막 삶이 얼마나 고결하게 마감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옹은 눈감기 20여일 전부터 곡기를 일절 끊고 자신의 죽음을 하나하나 준비해 왔다. 그의 마지막 생애를 김옹의 유족과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했다. 김옹의 아들 해양씨(52)의 증언과 옌볜작가협회 김학천 주석의 ‘연변일보’ 기고문, 조선족 작가 류연산씨의 수필 ‘김학철 선생님의 쌍지팡이’, 그리고 비디오 저널리스트 조천현씨의 김학철옹 인터뷰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마지막 서울 방문 김옹은 그동안 8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6월 석 달간 한국에 머무른 것이 그의 마지막 한국 방문이었다. 그러나 김옹 스스로 장기간 체류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김옹은 지난 6월 자신과 함께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한 윤세주 선생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윤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치른 기념학술행사에 초청 형식으로 참석했다. 윤세주 선생은 김옹이 중국 허베이(河北) 지방에서 항일투쟁을 벌일 당시 같은 분대의 상관이었다. 김옹은 윤선생의 부인을 ‘형수님’이라 부를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고.  김옹은 일정 도중 겨드랑이에 통증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종양 발병 진단을 받았다. 곧 서울적십자병원에서 겨드랑이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으나 내시경 검사 과정에서 식도가 파열되는 사고로 병상 신세를 져야 했다. 병상에 누운 85세의 노혁명가는 건강 걱정은커녕 “독립운동가 중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는 심경을 내비쳤다고 한다.  석 달간의 입원치료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고 식사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자 김옹은 퇴원을 고집했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옌볜으로 돌아간 것은 8월31일. 이미 기력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고 주변 사람들은 김옹의 얼굴에서 모종의 결심이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털어놓은 사실이지만, 한시라도 일을 안 하면 견디지 못하는 김옹의 성격에 비춰 석 달간의 입원은 지옥 그 자체였다고 한다.  죽음의 그림자 옌볜으로 돌아온 지 1주일도 안 되어 그는 미음조차 받아넘기지 못하는 중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쇠약한 몸과 희미해지는 정신을 채찍질하며 유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 그가 남긴 짤막한 유서의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이와 함께 김옹은 자신의 장례식에 대비한 ‘실무 지침’까지 내렸다.  ‘부고를 내지 말라. 유체 고별식과 추도회를 일절 하지 말라. 일절 부조금을 받지 말라. 골회(유골)는 두만강 하류에 뿌리고 남은 것은 우체국에서 우편용 종이 박스를 구해 여기에 담아 두만강물에 띄워 고향 원산으로 가게 하라.’ 뿐만 아니라 김옹은 자신의 유골함에 써넣을 문구까지 정해주었다. ‘元山 앞바다行,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85년을 사는 동안 김옹과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굴곡진 역사와 함께하지 않은 것이 없었건만, 그는 마지막 떠나는 길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한마디로 일축했다. ‘홍성걸’은 김학철옹의 본명. 김옹은 상하이로 건너가 조선민족혁명당원이 되는 순간부터 가족이나 지인에게 피해가 갈 것을 걱정해 이름을 바꾸어 사용했다. 이러한 사실이 그의 유언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다. 고향을 찾아가는 마지막 길에서 고향 사람들이 자신의 유골함을 알아보지 못할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에서였을까. 그는 평생을 잊고 산 자신의 본명을 이제야 꺼낸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에 조선의용대 추도가와 황푸군관학교 교가를 틀어달라고. 조선의용군 추도가는 그 자신이 가사를 쓰고 조선의용대 동료였던 류신이 작곡한 노래로 김옹의 대표적 애창곡이었다.  세상과의 마지막 만남 곡기를 끊은 지 열흘째. 외부와 접촉을 꺼린 김학철옹이 무엇인지 결심한 듯 카메라 앞에 앉았다. 조선의용군의 살아 있는 역사요, 옌볜 조선족의 표상인 김옹을 찾아 한마디라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언론인과 학자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집까지 찾아온 기자들마저 며칠씩 기다리다 지쳐 그냥 돌아가게 하던 김옹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서 있는 상황에서, 서울에서부터 그를 따라다닌 비디오 저널리스트 조천현씨의 카메라 앞에서 마침내 무장 해제했다.  85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는 그의 마지막 인터뷰는 인터뷰라기보다 유언처럼 들렸다. 게다가 그는 이미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극심한 호흡 곤란 증세를 겪고 있었다. 한마디 던지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어렵게 또 한마디를 남기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조 : 오늘로 단식 열흘째시라면서요? 김 : 병원이니 주사니 하는 것 다 시시해. (휴-) 자기 한명(限命)을 아는 게 영웅이야, 영웅이라고. 깨끗이 죽는 게 낫지, 지저분하게 사는 것보다야. 자기 한명을 알아야지, 이걸 모르고 얼마나 더 살겠다고…, 난 그런 것 싫어. 노인네가 병들어 누워 텔레비전 보면서 ‘이 약 사와라, 저 약 사와라’ 하는 것, 그게 뭐 철없는 짓이야.  조 :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데요. 김 : 그거 다 속인들이야. 자기 한명을 알면 그대로 깨끗하게 승복하고 가는 거야. (휴-). 게다가 나는 85세야. 부족한 게 뭐가 있어. 우리 집사람하고 55년을 살았어. 조 : 선생님의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김 : 내 생활신조에서 나오는 거지. 병원에 가 7∼8년 인공적으로 생명을 연장해 봤자 결국 죽는 거야. 난 내 장례식에 나랑 가장 친한 사람들로 딱 12명만 모았어. 며느리도 그날 학교 가는 날이면 출근하라고 했어, 학교가!(그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며느리 염리나씨는 옌지 하남소학교 음악교사임).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사필귀정이야. 자기 가족만 생각하지 말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지. 나라가 망했는데 가만있을 수 있나. 싸워야지. 힘이 약하면 힘 닿는 데까지 싸우는 거야. 그러다가 난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지(휴-). 그랬다가 남조선에서 진보 인사들을 탄압하니까 평양으로 쫓겨왔지. 거기서 4년 있으면서 김일성이의 온갖 더러운 독재 행태를 보았지. 나는 그동안 김일성을 존중해 왔는데…. 그래서 내가 ‘금슬을 누가 파괴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노동신문에 썼지. 결국 신문사에서 쫓겨났고 그때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한 거야. 중국으로 망명했어…. 그런데 모택동이의 대약진 때 3000명이 굶어 죽었어. 아무리 ‘모택동 만세’를 외쳐도 이건 말이 안 돼. 그러고서 또 10년을 (감옥에서) 살고 나왔지. 그 뒤로 계속 나는 반독재 투쟁을 해온 거야. 내 일생은 반독재로 끝나는 거야. 난 죽을 때까지 싸웠어. 죽을 때까지 싸운 거야. 서울 가서 석 달 입원하고…, 이제 죽는 거야.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웠어. 외로운 싸움을 했다고. 나는 굶으면 열이틀이면 죽을 줄 알았어. 그런데 며칠 더 가는 모양이야. 할 수 없지. 조용히 있다 죽는 거야. 원산 앞바다 고향 앞바다로 돌아갈 거야. …그런데 힘이 없어.  조 : 지인과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말씀만 해주시죠. 김 : 하려면 이야기가 긴데, 숨이 차 못하겠어. 어서 끝내줘. 조 : 건강하십시오. 김 : 고마워, 다시 만나자.  이것이 김옹과 세상의 마지막 접촉이었다. 다시 만나자던 김학철옹의 말이 이승의 것인지 저승의 것인지는 살아 있는 자들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짤막한 인터뷰가 끝난 뒤 정확히 열하루 만에 김옹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마직막 순간까지 내 할일을 … 집필이나 연구 등 한시라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던 김옹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커녕 못다한 일을 마무리하겠다는 심정으로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국에서 역사학자 염인호 교수(서울시립대)가 보내온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을 보고 전우의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을 마친 것은 숨을 거두기 보름 전의 일이었다(아래 사진 참조).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작업은 그중 가장 중요한 것에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몸을 번쩍 들어 아들 해양씨가 책상에 옮겨놓자 말라 비틀어진 팔목을 들어 확대경을 들고는 빛바랜 한 장의 사진에서 옛 전우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훑어가기 시작했다. 무려 63년이나 지난 사진이다. 그러나 육신이 촛불처럼 스러져가는 상황에서도 김옹의 기억력은 초인적인 것이었다. 90여 명의 조선의용대원 중 얼굴이 가려진 단 2명만 제외하고는 전 대원의 이름은 물론 별명까지 확인해냈던 것이다. 한쪽 다리가 없는 데다 기력이 소진되어 몸이 자꾸 한쪽으로 쏠리면서 중심을 잡기 힘들었지만 그는 아픈 눈을 비비면서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일을 내가 안 하면 영원히 력사의 퀴즈(수수께끼)가 될 것이야.”  가까스로 작업을 끝낸 뒤 침대로 옮겨지면서 그가 가느다랗게 내뱉은 말이었다.  다시 조선의용군으로 정신적으로 죽음을 준비해 온 김학철옹은 이제 육신마저 죽음과 친구가 되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이발사를 불러 머리를 빡빡 깎아달라고 했다. “나는 이제 전우들이 모두 가 있는 조선의용대로 복귀한다”는 말과 함께. 지금부터 63년 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던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삭발했다. 면도까지 마치자 파랗게 깎인 그의 머리 위에 이제까지 자식들은 물론 아무도 보지 못했던 깊숙한 칼자국이 드러났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휘두른 쇠몽둥이에 맞아 찢어진 자국이었다. 김옹의 머리에 깊이 난 상처는 그 후 성성한 머리카락에 묻혀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훈장이 되었다. 그러나 비로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청년 김학철은 그날의 요동치던 역사로 돌아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간호사를 불러 관장을 해달라고 했다. 곡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니 관장을 한들 나올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들 해양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심정으로 김옹의 육신을 정갈하게 비워냈다. 그러고 나서 아들 해양씨는 아버지를 깨끗이 목욕시키기 시작했다. 김옹은 한쪽 다리가 없다. 1941년 일본군과 싸우던 중 부상을 입고 나가사키 감옥에서 다리를 절단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 감옥에서는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상당한 다리를 일절 치료해 주지 않았다. 결국 상처난 다리를 3년6개월간 그대로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3년 반 내내 다리에서 피고름이 흐르고 상처에서는 구더기가 수도 없이 생겨났다. 김옹은 구더기를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집어내던 역사의 한모퉁이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증언했다.  “잘린 다리는 일본 감옥에 묻혀 있어. 그러니 나는 이번에 죽으면 무덤이 두 개나 되는 셈이야, 허허.” 역사속으로 잠들다 이 웃음이 세상을 향한 그의 마지막 낙관이었을까. 이때부터 아들 해양씨의 눈물을 사이에 두고 아들과 눈빛이 마주칠 때면 김옹은 눈을 감아버렸다.  단식 21일째.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것만 벌써 9일째이다. 김옹은 이미 말을 잊었다. 언어를 구성할 최소한의 기력마저 잃은 것이다. 오직 손으로만 의사를 표시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부인 김혜원씨와 아들 해양씨에게는 침대맡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9월25일 새벽 2시. 김옹은 침대맡의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30년을 입어 구멍이 숭숭 뚫린 푸른색 중산복을 입혀 달라고 했다. 평생 목발을 짚고 다닌 덕에 윗옷 겨드랑이는 아예 해지고 없는 낡은 옷이었다. 평생을 입어온 이 푸른 옷은 이제 그의 수의가 될 모양이었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옌볜병원 간부병동 103호실. 이곳이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과 이별을 고한 곳이었다.  김옹은 고통을 참기 힘들었는지 명치 끝에 침 한 대만 놓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병원의 어느 누구도 김옹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역사의 품에 안기기 위해 하루하루를 준비해 온 김옹이었지만 마지막 죽음의 문턱을 넘는 고갯길만큼은 아무래도 힘에 부친 탓일까.  오후 3시39분. 머리를 박박 깎은 항일청년 김학철이 63년 전 조선의용대 입대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거기 누워 있었다. 김학철의 항일정신은 역사를 뛰어넘어 푸르게 빛나고 있었고 독재와 맞선 김학철의 의기는 세월과 함께 더욱 끓어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만큼은 이미 거기에서 박동을 멈추고 있었다.  고향으로 고향으로 김학철의 장례식은 그의 유언에 따라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장례식에 초대받은 지인은 모두 12명. 그가 숨을 거둔 날 아침 김옹의 집에서는 아들 해양씨가 그의 죽음을 접한 지인들의 문상 요청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옌볜작가협회 김학천 주석이 우체국에서 종이상자를 사왔고 분골 과정을 거친 김옹의 유해는 이 상자에 담겼다. 변변한 영구차도 없이 승합차에 문상객을 싣고 옌지에서 투먼까지 26km, 다시 투먼에서 훈춘까지 50km를 2시간 만에 달려 훈춘시 영안진 앞 두만강가에 이르렀다.  ‘원산 앞바다행’이라고 쓰인 유골함을 아들 해양씨가 두만강에 띄웠다. 민족의 성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물은 85년을 항일과 반독재로 일관해 온 노혁명가의 유골을 비로소 고향으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그가 가사를 지은 ‘조선의용군 추도가’가 울려퍼졌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 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주간동아' 2001년 11월 1일    
117    남평 ㅡ 시인들을 낳은 땅 댓글:  조회:4536  추천:0  2015-03-02
시인들을 낳은 땅 ― 남평진 김응룡    길림성 화룡시에서 동남으로 시원히 트인 포장도로를 따라 50키로메터쯤 달리면 두만강이 막아서고 그 기슭에 진소재지 남평이라는 전설도 많은 마을이 나타난다. 그 마을에서 두만강을 따라 다시 서남쪽으로 10키로메터 더 가면 호곡령이 나지고 그 령마루에 우리 조선민족의 저명한 시인 리욱선생의 시비가 우뚝 서있다.  두만강의 맑은 물은 그밑으로부터 깎아지른듯한 절벽들을 용케도 굽이굽이 감돌아 동으로 흐르는데 그 기슭에 남평진의 남평, 길지, 류신, 룡연 등 마을들이 잔별처럼 널려있다.  봄이면 연분홍 진달래, 하얀 살구꽃이 산벼랑이 무너질듯 피여나고 그 사이사이에 짙푸른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솟아있다. 그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는 그대로 맑은 두만강에 거꾸로 비껴들어 황홀한 선경을 이룬다. 또 겨울이면 련련 산발에 백설이 뒤덮여 마치도 줄달음치는 흰코끼리떼와 방불한데 그우로 찬바람을 헤가르며 독수리들이 오연히 나래친다.  그래서 1968년, 남평진 문학도들을 취재하러 왔던 연변일보 기자 리서량선생은 《산천경개가 이렇듯 아름다우니 어찌 시인들이 나타나지 않겠는가!》고 감개를 터뜨렸다.  길지촌 송전툰은 길지 본 마을에서 류신으로 넘어가는 고개밑에 있는 12호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이 바로 작가 허씨 삼형제인 허충남, 허봉남, 허두남과 필자 김응룡이 자라던 마을이다. 향소재지와 13리 떨어진 이 외진 마을에서 허충남형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소학교때부터 문학서적들을 손에 들어오는대로 탐독했다. 그의 영향을 받아 봉남군과 나, 두남군도 훈민정음을 익히자 그가 읽던 책들을 읽었다. 독서에 재미를 붙인 우리는 신발을 살 돈마저 없어 맨발로 학교를 오가면서도 콩이삭을 주어 팔고 물고기를 잡아 팔아 보고싶은 책들을 사서 읽었다. 어린 나이에 그처럼 닥치는대로 많은 책을 읽었으니 어찌 형상사유가 트지 않겠는가!  충남형은 초중시절에 소년보에 우화시를 발표했고 봉남군은 소학교 5학년때 소년보 1면에 《눈 오는 날 아침》이라는 작문을 발표했으며 필자는 초중 2학년때 연변방송국 소년아동프로에서 벌린 글짓기콩클에 《참외에 깃든 이야기》란 글을 투고했는데 입선되였다. 어린 시절에 덜 익은 글이나마 지면에 발표됨으로 해서 우리의 어린 가슴에는 작가로 될 꿈이 자리를 틀기 시작했다.  나와 봉남군은 소학교로부터 고중까지 줄곧 함께 자랐다. 우리는 고중시절에 집에서 달마다 겨우겨우 보내주는 식비를 절약하여 조선에서 체계적으로 출판하는 세계문학선집( 당시 이 책들은 상해 우구서점을 통해 샀음.)을 사서 통독하며 좀 성숙된 마음가짐으로 작가로 될 꿈을 무르익혔다. 그런데 1966년, 고중졸업을 앞두고 우리는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을 맞았다. 당시 《네가지 낡은것》을 짓부시는 가운데 마음이 약한 필자는 굶으며 돈을 절약해서 산 책들을 다 페지로 팔아 난생처음 구두 한컬레를 샀다. (룡관군, 봉남군이 장가를 들자 필자도 장가들고싶은 욕망으로 처녀들의 환심을 사려고.)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날, 친구의 잔치에 참가하여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집으로 가려고 구두를 찾으니 뉘집 개가 뒤간옆에 물어다놓고 물어뜯고있었다. 두마대나 되는 명작들이 페지로 팔리고 그 돈으로 산 구두가 개에게 뜯기고 나의 문학에 대한 꿈도 박산이 났다.  1968년이라고 생각된다. 《연변일보》 《해란강》부간이 복간된지 얼마 안되여 우리 친구 최룡관(허씨 삼형제와 내가 살던 마을에서 5리가량 떨어져 살았는데 같은 남평중학을 다녔다. 하여 늘 우리와 함께 우정을 키웠고 문학을 담론했음.)군의 서정시가 《연변일보》에 대문짝같이 실리였다. 고중시절에는 정치를 전공하겠노라고 하던 그가 서정시를 발표하자 우리는 놀람과 더불어 그 폭풍취우속에서도 문학은 죽지 않았다는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최룡관군의 시가 한달에도 둬번씩 발표되자 봉남군과 나도 시쓰기에 달라붙었다. 워낙 우리들가운데서 문학소양이 한차원 높았던 봉남군은 인차 예술성이 높은 시들을 륙속 발표하고 이어서 단편소설도 가담가담 발표했다. 정보에 눈이 어두웠던 필자는 1968년 12월에야 첫시를 발표했다. 한 향에서 갑자기 시를 쓰는 젊은이 셋이 나타나자 연변의 신문계, 예술계(당시는 아직 연변문예도 복간되지 않고 출판사도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음.) 등에서 우리 남평진에 자주 사람을 파견하여 작품들을 계약하군 했다.  1974년, 필자는 향문화소 소장으로 임명되자 우리 향에 문학도들이 많은 특점을 살려 담이 크게도 8절지 8면이나 되는 문학신문을 꾸려 한달에 한두번씩 발간하면서 주위에 문학도들을 묶어세웠다. 필자는 이 문학신문을 잘 꾸리기 위해 이미 성숙된 허씨 삼형제와 최룡관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심혈을 몰부었다. 얼마 안지나 남평의 신창수, 길지의 박상국, 김영철 등 젊은 신진들이 신문지상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대오도 그만큼 늘어났다. 남평진 시인들의 시가 연변일보 부간에 자주 나가자 우리 고장에 지식청년으로 내려온 젊은이들도 문학에 흥취를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룡연대대의 지식청년 최홍일(현재 우리 조선족문단의 중견소설가)도 이에 끼여들어 시를 썼다. 우리는 최룡관군의 집에서 물고기국을 끓여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을 담론했고 필자의 집에서 두부를 해놓고 땀을 벌벌 흘리며 먹어대면서 주에서 온 작가, 시인들이 들려주는 문학창작형세를 듣기도 했고 봉남군의 뒤고방에서 맥주병을 거꾸로 들고 마시며 시합평을 했다.  당시 《연변일보》 《해란강》부간의 김경석선생은 여러번 우리 향에 와서 특집을 꾸렸고 《연변문예》가 복간되자 리상각선생도 찾아와 우리 향의 특집을 꾸렸다. 또 주, 현급의 이런 저런 문학창작학습반이 자주 우리 향에서 개최되였는데 그 영향으로 현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 치벽한 시골향에 문학창작열기가 화끈하게 일어났다.  1975년 가을의 어느날,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 주임 허해룡선생과 시인 김성휘선생이 필자를 찾아와 공사(당시는 향을 공사라 했음.)의 시집을 꾸릴 타산인데 이 덕화공사(남평진의 본명)에 시인들이 모여있기에 찾아왔다고 했다. 그들은 필자를 보고 책임지고 원고를 모집해달라고 했다. 하여 필자는 중소학교 어문교원들을 비롯해서 약 35명가량의 문학애호가들을 동원하여 시를 쓰게 하고 골간 시인들을 모아 합평을 거듭하여 마침내 《공사의 아침》이라 표제를 단 시집을 출판사에 교부했는데 1976년 3월에 출판, 발행되였다.  필자의 기억에는 이 시집이 연변에서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기전에 출판된 유일한 한권의 시집이라고 생각된다.  1978년 5월, 필자가 연변인민방송국에 전근되여온후 필자의 친근한 시우들인 허충남, 최룡관, 허봉남은 남평중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고 문학창작을 계속하는 한편 어린 문학도들의 양성에 계속 심혈을 쏟아부었다. 그들의 제자들가운데서 조선족문단의 중견시인 김영건, 박장길이 혜성같이 나타나 남평진시단에 더욱 이채를 돋구었다. 뿐만아니라 허동혁, 김승종(시집, 시작노트 4권 출판) 등 청년문학도들도 시를 발표했다.  그후 재능 있는 남평진의 시인, 작가들은 륙속 연변의 각 신문, 출판, 방송, 문예계통에 전근되였는데 최룡관은 《연변일보》 문예부 주임, 작가협회 부주석으로 되였고 허봉남(중국작가협회 회원)은 《연변일보》 문예부 부주임을 걸쳐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 부주임을 지냈으며 허두남은 연길시문화국 창작원으로, 박장길은 연길시예술단 창작원으로 사업했다. 최홍일은 《천지》월간사,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문학편집을 하면서 소설창작에 정력을 쏟았는데 장편소설 《눈물 젖은 두만강》을 비롯해 많은 중,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우리 조선족문단 거물의 하나로 되였다. 이들은 이미 퇴직 혹은 2선에 물러났다. 시인 신창수는 외국으로 나가고 아직 젊은 김영건(중국청년작가대표대회 대표)은 우리 중국조선족시단의 중견으로 활약하는 한편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문예부 주임으로서 연변텔레비죤문화의 대들보를 떠메고 맹활약하고있다. 박장길은 현재 재직에서 그 정열과 재능을 뽐내고있다. 그 세월의 흐름속에 허충남은 동화, 우화집을, 최룡관은 몇권의 시집을, 허봉남은 여러 권의 아동문학작품집과 장편소설을, 허두남은 몇권의 우화집을, 김영건은 몇권의 시집을, 박장길은 시집과 가곡테프를, 필자는 시집과 두편의 장편실화소설 및 많은 산문작품을, 최홍일은 장편소설집, 중, 단편소설집 등을 펴냈다.  세월은 몇십년이 흘러갔다. 그 세월속에 한 고향땅에 태를 묻은 우리 남평진 출신 문인들은 각기 다른 사업터에서 사업하고 창작하면서 자기의 스찔을 발전시켰는데 사회환경과 탐구령역의 다름에 따라 작품개성이 서로 다르고 작품을 보는 시야도 많이 달랐다. 그러나 언제 한번 얼굴을 붉히며 다툰적이 없었다. 늘 자기 창작견해, 주장을 떠들어대면서 목에 피대를 세우기도 했으나 통일을 이룰수 없을 때면 허허 웃어버리고 다시 술잔을 기울이군 했다. 누구의 작품집이 출간되거나 누가 상을 받을 때면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자호감을 느꼈다.  필자와 룡관군, 봉남군이 차비가 없어 120리 길을 걸어 현소재지의 고중을 다니던 그 고개 높던 산길은 이미 포장도로로 되였다. 풍경이 그림 같아도 찾는 사람이라곤 없던 국가급 풍경구― 선경대에 지금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있으며 남평통상구를 통해 조선으로 오가는 객과 차량들이 실북나들듯하고있다. 헌데 지금 학교가 줄어들고 학생래원이 고갈된 시인들의 옛 고향―남평진에서는 더는 시인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산천경개가 그림 같다 한들 노래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빛날수 있으랴!  오로지 저명한 시인 리욱선생만이 홀로 고집스럽게 그 바람 세찬 호곡령에서 오늘도 《할아버지의 마음》을 읊고계신다.   
116    시인 - 고 리욱 댓글:  조회:4974  추천:0  2015-03-02
  해방전 최초의 조선족 시인- 리욱   호곡령에 우뚝 선 리욱시비 시인 리욱(1907-1984)은 중국조선족문단과 한국문단에 널리 알려진 저명한 시인이다. 그는 간도문학의 개척자이며 대표자로서 널리 추앙 받고있는 민족시인이다. 그는 간도문학을 한국문학이 아닌 중국내 조선인문학으로서 자리를 잡게 한 최초의 문학인으로서 일생동안 그 터전을 갈고 닦아왔다. 리욱시인은 중국조선인문학의 몇개의 《최초》를 독점함으로서 그  가치를 빛내고 있다. 리욱은 중국조선족문학의 터닦기를 시작한 최초의 문학인으로서 1924년에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하였으며 1947년 광복직후 최초로 개인시집 《북두성》을 출판하였으며 1956년 북경에서 최초로 중국작가협회 정식 회원으로 됐으며 1957년 최초로 북경 작가출판사에서 중문시집 《장백산하》를 출판하였으며 최초로 《중국현대문학사》의 한페지를 장식하였다. 리욱은 1907년 7월 25일 로씨야 부라디보스톡 신안촌(고려촌)에서 출생, 소학교를 졸업하고 사숙공부를 하며 소시적부터 조부의 슬항서 사서오경과 절구를 배웠다. 1923년 4월 룡정 동흥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했으며 1924년 훈춘 창동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한편 계몽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24년 처녀작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한 뒤를 이어 20년대에 성정시 《눈》, 《봄비》등을 쓰고 30년대를 잡아들어 《님 찾는 마음》(1930),《송년사》(1935), 《금붕어》(1938) 등을 《조선문학》, 《만가일보》, 《만선일보》,  《조광》잡지들에 발표했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일보》의 만주특파기자로 있었기에 일제 간도헌병대의 검은 당안에는 리성학을 위험인물로 지목했다.  이 시기 리욱은 월촌, 월파, 월초, 월추, 단립, 백파, 춘파 등 십여가지 필명을 사용하였다.  1940년 8월 일제에 의해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와 함께 강제로 페간되자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조양천, 화룡 일대에서 광석탐사를 했다. 이 시기 리욱의 시를 당시  평론가  김우철은 1940년 5월 15일자 《만선일보》에 이렇게 적었다.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그 지향! 그것만으로 신전시인의 명예를 차줄수있지 않을까.ㅁㅁ과 케케묵은 감각의 울타리안에서 시를 창조하는 대신 시를 복제(모방)하는  이미 퇴색한 청년시인들에 비해 볼 때 아직 체내에 미숙한 오관을 가지고 떠리는 두손과 두팔을 한껏 벌리어 새로운 의 세계로! 항시 비상을 익망하는 젊은 시인—신세대, 시인들의 활기를 나는 놉히  사고 싶다. 그러나 지나친 바상은 오히려 허망과 를 동반하는수가 있자 않을까? 무의미의 탐미성을 강조하는 슐레알리스트들의 시로에는 경복할수 없으므로 의미의 혼란으로 충만되여 그것이 반대로 무의미한 시작품으로 화해버리는 이런 류의 시를 쓰는 무의미를 월촌씨에게 삼가 경고하고 싶다. 의미의 람용으로 시인자신이 나중엔 판타지병에 걸려 자기도 리해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푸념과 넉두리와 언어의 유희로 충만된 시를 쓰는 수가 많고 이런 시를 우리를 재ㅗ있는 신인들에게서 간혹 볼수 있다. 그러나 월촌씨는 아직 그런 환상병에 걸림지 안흘만한 자성과 건강을 가지고 있다.》 리욱의 해방전 서정시는 한시 12수를 포괄하여 민족적 특성이 짙고 랑만주의색채가 농후한것이 특징적이다.《그리고 그의 시에서는 상징주의적이며 은유적인 기법들을 재치있게 운용함으로써 자기나름의 시풍을 보여주고 있다》 광복후 리욱은 리학성이란 이름 대신 리욱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그의 창작은 사회주의, 사실주의 경향으로 발돋음하게 되였으며 시집《고향사람들》(민족출판사, 1957), 《연변의 노래》(작가출판사, 1957),《장백산하》(작가출판사, 1959) 등 시집들을 조, 한 두가지 문자로 북경에서 출판하였다. 서사시《고향사람들》은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최초로 창작된 서사시이다.  이는 리욱의 시창작의 고봉을 이루는 성과작이며 건국후 조선족시문학에 있어서는 하나의 리정표로 되고있다. 리욱의 한시를 보면 해방전에는 주로 절구를 쓰고 간혹 률시도 썼다. 해방후에는 대체로 사를 위주로 썼다. 그의 해방전 한시에는 애환과 향유가 섞여 있다.유고로 남긴 한시집 《협중시사》는 108수가 수록되여 있다. 김동훈은 《리욱선생은 우리 민족 한시문학의 마지막장을 휘황하게 장식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고 말했고 조규익은 《그의 한시문학은 결코 중국문학의 아류거나 단순한 습작품이 아니라 중국현대상류문학에 속하는, 선명한 독자적개성을 띤 하나의 정신적재부이다》고 주장하고있다. 시인 리욱은 1984년 2월 26일 별세, 연변대학 학부4층 강당에서 전례없이 룽성히 추도식을 거행했다. 그의 시비는 화룡현 로과향 호곡령정상에 세워졌다. 맞은 켠은 조선 무산, 시《할아버지 마음》(1957)이 시비에 새겨져 특수한 의의를 갖게 되였다.   리욱 시 연구세미나 연변도서관에서 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2-07 15:25:24 ]     2월 6일 오전, 해란강닷컴에서 주최하고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에서 협조한 《다시 읽는 우리 문학》 제1부 리욱 시 연구세미나가 고려원의 협찬으로 연변도서관회의실에서 개최되였다.   《시인 리욱을 다시 읽다》란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연변대학 우상렬교수가 《리욱시의 민족성연구》를, 석화시인이 《중국조선족시문학 정초자 리욱》을, 장춘리공대 한국어학과 김인향교수가 《해방전 리욱시세계 고찰》을 발표하였다.   좌로부터 발표자들인 우상렬교수, 석화시인, 김인향교수.   세미나에서는 또 연영미, 림혜경, 윤걸 등 랑송인들이 리욱시인의 《북두성》, 《금붕어》 등 시들을 랑송하였으며 리욱시인의 아들인 리선호시인이 31년전에 타계한 리욱시인의 일화를 이야기하였다.   중국조선족시문학의 정초자로 불리우는 리욱시인(1907.7.15-1984.2.6) 1924년 처녀작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창작활동을 시작하여 1930년대에 이미 《북두성》, 《모아산》, 《님 찾는 마음》 등 대표적인 시들을 창작하였다. 1945년부터 필명을 리욱으로 고치고 새롭게 문단에 등장한다. 이 시기 그는 《간도예문협회》, 《동라문인동맹》, 《연길중소한문회협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활약하였다. 1947년 동북군정대학을 다니면서 첫 서정시집 《북두성》을 출간하고 군정대학을 졸업한후 《대중》잡지 주필 겸 연변도서관 관장을 맡았으며 1949년 두번째 서정시집 《북륜의 서정》을 출간하였다.   1951년부터 리욱은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시인과 교육자의 길을 걸으면서 중국조선족문학의 후대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문화대혁명시기 시인은 《반동문인》, 《반동학술권위》 등으로 몰려 박해를 받았다.   시인은 건국후 《고향사람들》(1957), 《연변의 노래》(한문 1959), 《장백산하》(1959) , 《리욱시선집》(1980) 등을 출간하였으며 장편서사시 《풍운기(1부)》(1982)를 펴내고 제2부를 집필하다가 뇌익혈로 타계하였다.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최국철, 연변대학 교수 김호웅, 연변주문화예술연구쎈터 주임 리임원, 연변주당위 선전부 전임 부부장 채영춘 등이 세미나에 참석하여 발언하였다.   해란강닷컴의 주성화총편은 《중국조선족문학은 조선반도의 문학에 뿌리를 두면서도 중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꽃피우면서 수많은 시인, 작가들에 의하여 훌륭한 작품들이 생산되였다》 고 하면서 오늘날 이러한 작품들을 다시 읽고 그 창작자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것은 조선족문학의 번영과 발전에 매우 필요한 사업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해란강닷컴은 2015년도에 연변작가협회, 연변대학, 연변도서관 등 단위들과 손잡고 김창걸, 채택룡, 김조규, 김례삼, 박은, 주선우 등 조선족문학에 큰 의미와 족적을 남겼으나 아직까지 연구가 미흡한 작가와 작품들에 대하여 재조명하게 된다고 밝혔다.  
115    룡정 ㅡ 우리 문학의 비옥한 풍토 댓글:  조회:5339  추천:0  2015-03-02
  룡정―우리 문학의 비옥한 풍토 한원국     룡정이 중국조선족사회 근대문화의 발상지이며 해방전 재만조선인문학의 중심지였다는것은 세인이 공인하는 사실이다.  일찍 1930년대에 문학동인단체 《북향회》가 발족되였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문학지 《북향》이 둥지를 틀었던 보금자리다. 저명한 녀류작가 강경애를 위시하여 리주복, 김유훈, 천청송, 안수길 등 작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광범한 교사, 학생, 의사 등 문학도들이 망라된 《북향》은 소설, 시가, 희곡, 문학리론분야에서 큰 성과들을 취득함으로써 당시 간도문단에서 겨레문학의 홰불을 높이 추켜들어 국내외에 커다란 영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해방이 되자 더우기 연길시가 자치주의 수부로 됨에 따라 연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연길로 옮겨졌다.  룡정에서 문학활동을 벌리던 《북향》의 동인들도 대부분 조선으로 가고 김창걸, 채택룡, 서헌, 김유훈 등 문학가들도 연길로 전근되였다.  룡정은 사람들이 이사짐을 싣고 떠나가버린 빈집마냥 터만 남았었다. 하지만 룡정사람들은 빈 터전에서 다시 털고 일어났다. 말하자면 해방전부터 깊이 뿌리가 박혔던 재만조선인 문학근거지의 맥락을 이어 우리 문학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는것이다. 필자가 룡정에서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연길현문화관(지금의 룡정시문화관) 문학보도원으로 연길현문련 비서장으로 사업했던 시기만하더라도 룡정은 우리 문학의 비옥한 풍토였다.  그때 룡정시에는 벌써 작가군이 형성되여있었고 곳곳마다 동인회, 동인잡지가 있었으며 윤광주, 윤금철, 황상박, 윤태삼, 김병기, 한원국, 오흥진, 황장석, 정국초, 강호혁, 김재권 등 작가들이 문학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당시 연변작가협회 회원들은 주로 연길시에 있는 주 직속기관, 학교들에 밀집해있었고 다른 현, 시들에는 작가협회 회원이 거의 없었지만 룡정시에만은 연변작가협회 회원 총수의 7분의 1을 차지하는 회원들이 활동하고있었는바 이것은 괄목할만한 일이라겠다.  당시 룡정시에 속한 향, 진에는 거의 모두 동인회형식으로 된 문학창작조가 있었고 서글픈대로 인쇄물은 아니지만 부정기 문학간행물 프린트본도 갖고있었다.  룡정시에는 윤광주, 윤금철, 황장석, 박상철, 리영조, 한원국, 오흥진 등이 참가한 중심창작조가 있었고 현문련에서 꾸리는 부정기간행물 《해란강》이 있었는데 책임편집은 한원국이였다. 《해란강》은 비록 4기를 꾸리고 3년재해시기 일부 잡지 정간지시정신에 좇아 정간되였지만 광범한 과외작자들을 조직동원하여 문예창작을 번영시키는 면에서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 팔도에는 황상박, 최문섭, 김재권, 정창환, 리두송 등이 주축을 이룬 문학창작조가 있었고 황상박이 주필을 담당한 《구수하》가 있었다.  개산툰에는 정국초, 전복록, 심정호, 정광국, 송영준, 김복순이 주축을 이룬 창작조가 있었고 그들이 꾸린 잡지 《천평벌》이 있었다.  동성용에는 윤태삼, 석하연, 조룡진, 최경준, 신학산 등이 주축을 이룬 문학창작조가 있었고 월청에는 황병락, 서광억, 강호혁을 골간으로 한 문학창작조가 있었으며 그들이 꾸린 잡지 《일관산》이 있었다.  동불사에는 허흥식, 신영일, 리택수, 김중복, 심석종을 중심으로 한 문학창작조가 있었다.  조양천에는 농민작가 김병기와 함께 전광하, 김중섭 등이 참가한 창작조가 있었다.  이밖에도 세린하에는 리경필을 대표로 하는 창작조가, 로투구에는 리종복을 대표로 하는 창작조가, 태양에는 허영희를 대표로 하는 창작조가 있었으며 도문에는 리광순, 구영문, 남효현 등이 가담한 창작조가 있었다.  동서남북 방방곡곡에 널려있던 이런 문인들은 신문잡지와 예술무대에 많은 성과작들을 발표하였다.  시분야에서는 윤광주의 《아침합창단》, 황상박의 《꽃피는 공소부》, 윤태삼의 《요, 귀여운것들아!》를 대표작으로 들수 있고 소설분야에는 윤금철의 《숙질간》, 《해빙기》, 김병기의 《쇠돌골의 변천》을 들수 있고 희곡분야에서는 오흥진의 단막극 《경사》와 정창환의 단막극 《모범부부》를 들수 있다.  민간문예방면에서는 수백편의 주옥같은 민간이야기를 구술하면서 미수의 고령에 이른 민간이야기대왕 황구현선생이 솟아났고 판소리 《배뱅이굿》을 연창한 민간예인 조종주선생을 떠올릴수 있다.  이밖에 팔도로부터 태양에 이르는 구수하벌은 천년문화재 《농악무》를 보존한 고향이며 로투구로부터 조양천에 이르는 조양벌은 전통무용 《부채춤》과 《물동이춤》을 출산시킨 복지이다.  저 하늘의 별처럼 총총하게 모여있던 문인들속에서 윤씨 성을 가진 작가와 황씨 성을 가진 작가 다섯분을 별도로 소개한다.  윤광주시인은 1933년 4월 룡정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셋째아들 즉 우리 민족이 낳은 저명한 시인 윤동주의 동생으로 태여났다.  윤광주는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초반까지 연변시단에 발을 붙이고 중국조선족문학의 초창기에 벌써 20여수의 시를 발표하여 한몸에 인기를 모았던 청년시인이다.  1958년부터 필자는 그를 알게 되였는데 그때 필자는 윤동주도 모를 때였고 그 자신도 누구의 동생이라는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늘 색바랜 검정양복을 입고 다녔으며 얼굴은 병색에 젖어있었기에 남에게 추워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무서운 독서가였으며 뛰여난 시재를 품은 노력가였다.  1946년 봄 룡정인민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중 가정사유로 1948년 10월에 중퇴하고 연변의과전문학교의 실험원으로 취직, 얼마후 페결핵에 걸려 1950년 봄부터 휴양치료를 하였다.  1951년 여름 일터를 떠나 집에서 투병하면서 독서하고 문학의 조예를 닦았다. 병세가 호전되자 1953년부터 저명한 민간문학연구가인 정길운선생의 지도밑에서 민간문학과 접촉하였고 1954년부터는 룡정시 룡남가 청년회에서 청년들의 문학활동을 지도하였으며 1957년봄에는 공청단 연길현위에서 무은 평두산개간대의 대장직을 맡고 활약하다가 병이 도지는 바람에 이듬해 귀가하여 투병하면서 문학활동을 벌리였다.  그는 형님 윤동주의 영향밑에 문학에 대한 신념을 굳히고 시문학에 열심하였는바 《시를 쓰는것을 문중의 일로》 간주하였다.  1954년 6월 처녀작 《그때면 알겠지》를 《연변문예》에 발표하면서부터 시단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후 많은 시편들을 내놓았으나 산실되여 지금 찾을수 있는것으로는 겨우 20여수밖에 안된다.  재간있는 이 시인은 너무나 단명이여서 자기의 시재를 활짝 펼칠 새도 없이 1962년 가을 2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때 그는 룡남가에 거주하고있었는데 지금처럼 집집마다 전화도 없어 문학활동을 조직할 때면 인편으로 겨우 소식을 전하군 하였다. 그래도 그는 누구보다도 약속을 잘 지키고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1962년초, 우리는 《연변》잡지사와 손잡고 《연길현문학전란》을 꾸리게 되였다. 필자는 그때 급히 그에게 좋은 시 한수를 써달라고 약고하였는데 사흘도 안되는 사이에 주옥같은 시를 써가지고 왔었다.  그것이 바로 잡지 《연변》 1962년 6호에 나간 시 《아침합창단》이다.  이 시가 아마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 발표작이 아닌가싶다.  윤금철은 로동자출신의(후에는 공장장으로 발탁되였다고 한다.) 소설가로서 당시 연길현의 유일한 중국작가협회 길림분회 회원이였다.  소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그가 대중적 문학창작조류속에서 용솟음쳐나와 일약 인기를 모으는 소설가로 등단할수 있은 저력은 어디에 있었을가?  기성작가처럼 머리속에 형성된 어떤 틀이 없이 창작사상이 해방되고 퍼그나 활약적인데다 주로 그의 밑바닥인생생활에서 쌓여진 풍부한 생활체험이 문학의 디딤돌로 되지 않았는가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의 대표작 단편소설 《숙질간》 역시 친히 겪은 생활체험의 산물이며 《해빙기》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당시 유년기에 처해있던 우리 조선족소설문단에서 히트를 쳐 막강한 센세이숀을 불러일으켰으며 1962년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10주년 우수문학상을 수여받았다.  그런데 글씨필체가 오불꼬불 엉망이 돼서 편집원들이 알아보지 못하는것이 큰 두통거리였다. 《비서》가 있어야 했다.  그에게는 월급을 주지 않는 《비서》가 두사람 있었는데 한분은 시인 황장석이였고 다른 한분은 고중을 졸업하고 글씨를 똑똑히 쓰는 그의 부인이였다.  실제상 황장석은 작품구상으로부터 문장추고까지 도와주는 《편집비서》였고 부인은 원고를 깨끗이 베껴쓰고 마무리해주는 《서법비서》였다고 할수 있다.  그는 늘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을 담고 다녔으며 소탈하고 누구하고나 허심탄회하여 친구가 많았다.  그런데 몇해 지나자 차츰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어찌된 일인가? 퍼그나 궁금했지만 그때 필자는 연길에 와있었는지라 한동안 거래가 끊어졌다.  그러던 윤금철씨가 70년대 어느 봄날, 우리 집을 문득 찾아왔다. 《전례없던 혁명》후 첫상봉이였다.  반갑게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어찌된 일이오? 무슨 일로 연길에 왔소?》  《방송국에서 불러 왔습니다.》  그의 불깃한 얼굴은 여전히 싱글벙글하였다. 방송국의 부탁을 받고 소설을 쓰려고 연변건축공사초대소에다 자리를 잡았다고 하였다.  《거참, 잘되였구만. 이 좋은 기회에 한번 본때있게 써보시오!》  필자는 진심으로 축하하였다.  《뭐 되겠는지, 붓을 놓은지도 오랜데…》  《왜 안되겠소? 힘을 내야지.》  《나같은거야 워낙 가 돼서 인젠 틀렸다니까… 아마 내 동생이 나을게요.》  이렇게 그때 그를 두어번 만나보고는 다시 만나보지 못하였다. 기대를 갖고 기다리던 그 소설도 소식이 감감하였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아마도 류산된듯싶었다.  그때로부터 윤금철씨는 문단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말과 같이 동생 윤명철이 형님대신 소설을 들고 나왔다.  윤명철은 시작부터 창작준비를 단단히 갖춘 모양으로 문단에 데뷔하자마자 단편소설 《연기속에 누워있는 시체》와 같은 력작을 련속 써냄으로써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가석한것은 너무나 단명인것이였다. 자기의 재간을 한창 꽃피울 젊은 나이에 급병으로 요절하고만것이다.  윤태삼시인은 당시 연길현에 있던 문단 윤씨 삼형제중의 막내였다.  동성용 농기소에서 뜨락또르운전사로 있은 그는 한손으로 뜨락또르 핸들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새 생활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많은 좋은 시를 발표하였지만 청년시인으로 자리를 굳혀준 대표작은 아마 시 《요, 귀여운것들아!》일것이다.  이 단시는 대대로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씨뿌리던 시골마을에 처음으로 뜨락또르가 나타나자 너무도 희귀하고 좋아서 무한궤도 자리를 졸졸 따라가며 오구작작 쬐꼬만 발자국을 찍는 개구쟁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안겨오는 참으로 깔끔한 시다.  윤태삼은 무서운 자습가였고 노력가였다. 다산은 아니였지만 드문드문 좋은 시들을 내놓아 편집들을 깜짝깜짝 놀래웠다. 이런 성과로 하여 1965년 북경에서 열렸던 전국과외청년작가대회에 연변조선족대표로 참가하는 영광을 지닐수 있었다.  그는 시인이기 앞서 후더운 인간이였다. 그의 집은 동성용태평촌 철길옆에 있었는데 울안에 싱싱한 오얏나무들이 삥 들러있었다. 여름에는 서늘한 그늘을 주고 가을에는 탐스런 오얏을 선사하는 오얏나무, 필자는 동성용으로 출장다닐 때마다 이 오얏나무아래서 다리쉼하며 태삼이와 석하연을 만나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군 하였다.  1961년 초가을, 그때는 3년재해시기여서 돈이 있어도 사탕, 과일을 사먹기 힘든 때였다.  그런데 어느날 태삼이가 오얏을 불뚝 채운 자루를 둘러메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애들은 너무도 좋아 퐁퐁 뛰였다.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제일 맛이 있다. 그때 먹은 오얏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부인은 지금도 장마당에 가 오얏을 사올 때면 그때 태삼이가 가지고 왔던 오얏맛을 입에 담는다.  그는 지금 조양천농기소에서 퇴직하고 만년에 시조창작을 하고있다.  얼마전 조양천 출장길에 그에게 문안전화를 걸었다.  밤이 되여 필자가 자리에 누웠는데 윤태삼이 음식가방을 메고 찾아왔다.  《식당에 가도 그렇고 내 집에 가도 그저 그렇고 해서 마주앉아 술이나 한잔 나누고싶어 찾아왔습니다.》  그는 옛날 그 본새대로 조양주 한병을 가방에서 꺼냈다. 안주는 큼직큼직하게 썬 돼지고기비게에 감자국수오리를 섞어서 볶은 료리 한그릇이였다.  원체 말수가 적은 그였지만 그날 밤만은 권커니 작커니 밤새는줄 모르고 말끈을 풀어헤쳤다. 다만 룡정에 있을 때와는 달리 주선률은 어디까지나 창작담이 아니라 인생담이였다.  황상박은 팔도향우전국의 우편배달부로 일하면서 좋은 시를 많이 써낸 연길현의 중견시인이며 팔도창작조를 훌륭하게 이끈 코기러기이고 문학지 《구수하》의 주필이였다.  황상박은 당시 연길현에 있었던 시인들속에서 문학창작성과가 가장 뚜렷한 시인이였다.  그는 직장에서는 사람들의 존경받는 좋은 동료였고 창작에서는 훌륭한 다산시인이였다. 향우전국 국장의 말과 같이 그는 나갈 때는 우편물을 한짐 지고 나가고 들어올 때는 창작소재를 한짐 지고 돌아왔다.  필자는 1961년 11월 5일 《연변일보》에 《록색우전복과 서정시》라는 글 한편을 써서 그를 지지한 일이 있다.  1954년 초중을 졸업하고 고중을 중퇴한 그는 1958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60년대초반부터는 창작의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때 벌써 각종 간행물에 100여편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여 1962년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10주년때에는 우수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65년 11월 전국과외청년작가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대회발언까지 하였다.  대표작은 시 《꽃피는 공소부》, 《형제바위》를 들수 있다.  그의 시는 계곡에서 모래알을 굴리며 퐁퐁 솟아나는 옹달샘마냥 정갈하고 산뜻하며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온 집식구 둘러앉아 보글보글 곱돌장사귀에 청국장을 끓여먹듯이 구수한 시골향기가 풍긴다.  그는 평생 열심히 삶을 영위하느라 바삐 보내는 사람이다. 룡정시방송국에서 퇴직휴양을 한 그는 지금 혼자서 중국조선족문단의 유일한 가사신문인 《해란강여울소리》를 매달 편집, 발행하느라 팽이처럼 돌아치고있다.  그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팔도출신의 작가들로는 민간문학가 김재권씨와 시인 최문섭씨를 들수 있다. 특히 김재권과 황상박은 몇십년간 고락을 같이 한 문우로서 물과 고기사이였다. 황상박의 문학적재능이 김재권을 문학의 길로 자석마냥 흡인했다면 김재권은 그의 뛰여난 조직능력으로 황상박이 창작의 길을 끝까지 가도록 밀어주었다는것이다.  오늘도 《내 고향 오솔길》을 톺아오르며 문학의 외길인생을 살아가는 그한테 아름다운 래일이 웃어줄것이다.  황장석은 룡정문학동인회의 주요성원이였으며 황상박이와는 자치동갑이였다. 동인회기간에 그는 주로 두가지 준비사업을 하였다.  한가지는 현문화관도서실의 단골손님으로 되여 동서고금의 문학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장차 시인으로 두각을 내밀 준비를 단단히 하는 한편 처녀작 시 《로동자행진곡》을 썼다.  다른 한가지는 자각적으로 윤금철씨의 《편집비서》노릇을 하면서 장차 문학편집으로 출마할 준비를 은근히 하였다. 하여 그는 로동자로부터 민경, 민경으로부터 1970년대에는 일약 《연변문학》의 편집으로 발탁되였고 지금은 편심으로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는 굵직굵직하고 개성있는 정치서정시들을 많이 발표하는것으로 시단의 한자리를 굳히였다.  저서로는 시집 《그리운 그대여, 어디에 계시나요?》, 산문집 《하얀 봇나무》, 장편실화소설 《얼의 몸부림》(합작), 《삶의 선택》(합작) 등이 있다.  그는 언제나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하며 유머와 익살로 넘치는 사나이다. 해마다 년말이면 작가협회에서는 송구영신의 만회를 열고 작가들을 초대하였다.  그때면 그는 늘 먼저 들어가 식탁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오는 식객들을 향해 소리를 친다.  《고향이 룡정인 분들은 다 이 식탁으로 오십시오!》  그러면 친구들은 《오, 저기 장석이가…》, 《장석이, 오래간만이다!》 하며 달려가 손을 잡는다.  이때라고 여긴 그 자신은 입심좋게 익살을 부렸다.  《우에서 임명한것만 서기인줄 아오, 군중들이 선거한게 진짜 서기지. 나, 이 는 연길현공안국에 있을 때부터 로 불리웠는데 연길에 온 다음에도 군중들이 그냥 그렇게 불러주니 어찌겠수. 정말 노릇을 할수밖에 없지. 하하하!》  《응?! …허허허!》 듣고보니 그럴듯하여 우리도 한바탕 따라웃었다.  그는 지금 생활속으로 깊이 들어가 글을 쓰고싶어 안해와 같이 룡정시 지신록장에 내려가 시골집을 잡았다. 사람이 워낙 부지런하여 여름에 겨울날 땔나무를 다 장만해놓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60이 청춘이라고 이제 방금 시작한 새로운 인생길을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언젠가는 새 작품이 새 모습으로 출세하리라고 필자는 미리 축복을 보낸다.  이밖에도 써야 될 사람들이 많고많다. 김재권, 김병기, 강호혁, 석하연, 조룡진, 황병락, 서광억, 김중섭, 신학산, 정찬환, 정국초, 심정호, 전복록, 신영일, 리택수, 허흥식, 리광순, 구영문, 전광하… 저 하늘의 별나라처럼 총총하던 문우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며 한마음으로 똘똘 뭉쳤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어떤 문우들은 타계하여 저승에 가있으련만 이승에 있는 문우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있는지 만나보고싶다.  이분들을 찾아 연길현의 산천을 메주밟듯 밟으며 돌아다니던 그 나날들이 지금도 눈앞에 필림처럼 돌아간다.  그때는 한나이 젊었고 교통도구도 그렇게 발달되지 못했던 시절이여서 하향을 하여도 도보로 다니기가 일쑤였다.  1959년 공사문예프로검사를 다닐 때 용신에서 백금까지 걸어갔다. 산나리를 꺾어들고 문바위를 넘어 계곡에 지친 두다리를 담그기도 하며 도문에서 출장을 마치고 개산툰을 가야겠는데 룡정을 에돌아 다시 기차타고 갈 일이 아득하여 그냥 두만강 강뚝길을 따라 도보로 개산툰까지 갔던 일, 가다가 선구 정국초선생네 집에 들려 점심을 먹고 저녁에 광소 허만복선생네 집에 가 자던 일이 어제 같은데 어언간 40여년이 지나갔다…  아, 그립다, 그 시절, 그 풍경이… 오늘밤도 하늘을 쳐다보며 별 하나, 나 하나. 손가락 꼽아가며 하나, 둘, 셋… 그때 그 고향 문우들의 이름을 세며 외우고 외우다가 잠이 든다. 소르르 꿈나라로 찾아간다.   
114    소설가 - 고 김학철 댓글:  조회:4467  추천:0  2015-03-02
  김학철선생님과의 문학대화 김학철선생의 생애와 문학연구에 도움을 주고싶어 1990년 3호에 발표되였던 이 글을 사이트에 올린다.    △사회: 조성일 ㅡ질문: 조성일, 최삼룡, 전성호, 김성호, 조일남, 리상범, 리광일, 김순금. □대답: 김학철 시  간: 1990년 2월 13일. 지  점: 연변로동강습교육중심 2층 회의실. △오늘 우리 문학예술연구소에서는 김학철선생님을 모시고 문학대화를 하려 합니다. 이에 앞서 이번 문학대화를 마련하게 된 동기를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문학예술연구소에서는 금년에 연구총서를 한책 펴내려고 합니다. 작년에 《조선족문학예술연구》라는 제목으로 제1집을 내고 금년에 제2집으로 우리 연구소의 연구성과와 사회상에서 연구한 성과를 집성하여 《김학철론》을 출판하려고 합니다. 작년 말에 계획을 작성한 후 연구소분들은 집필에 달라붙었습니다. 이런 단계에 연구소분들은 일부 문제에서 난제에 부딪쳐 작가선생님의 해석을 바라는 것이 있고 하여 직접 김선생님을 모시고 문학대화를 진행하게 되면 우리의 연구작업을 진척시키는데 효과적이겠다고 생각되여 이 모임을 마련하였습니다. 김선생님께서는 여생에 더욱 많은 일들을 하시려고 분초를 쪼아가면서 창작에 몰두하시기에 시간이 금싸락같이 귀중하지만 우리 연구소를 위해 오늘 오후를 희생시키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김선생님께서 우리 연구소에 돌려주시는 따뜻한 배려에 뜨거운 사의를 표합니다.  김선생님께서는 40여년간 문학창작에 전력해왔습니다. 하여 조선족인민이 낳은 우수한 작가로 세인들의공인을 받고있으며 또한 3~40년대의 반일무장투쟁에 뛰여나신 항일투사로 많은 사람들의 지목을 받고있습니다. 김선생님은 40년간의 문학창작에서 단편소설창작과 더불어 장편소설창작에서 큰 성과를 따냈습니다. 특히 반일무장투쟁을 서사적인 화폭속에 담은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등을 창작하므로써 큰 성과를 따냈습니다. 특히 반일무장투쟁을 서사적인 화폭속에 담은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 등을 창작함으로써 국내는 물론 세계에까지 큰 공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런가 하면 산문창작 특히 잡문창작에서 우리 문단의 공백을 메웠고 이방면에서 개척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외에 번역, 평론활동 등에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작년 가을에 김선생님께서는 친척방문차로 남조선에 가셔서 남조선 문단과 력사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김선생님의 작품을 에워싸고 연구가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도 이것을 계기로 중국 조선족문학을 다시 조명하고 여기에 대해 관심을 모으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이로하여 중국조선족문학과 조선반도의 문학교류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면에서 김학철선생님의 역할이 매우 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김선생님의 모시고 여러분들이 자기 연구작업에서 부딪친 문제, 알고 싶은 문제를 서슴없이 질문함으로써 우리의 연구작업을 더욱 추진시켜야겠습니다. 그럼 김선생님께서 질문에 앞서 하실 말씀은 없으신지요? □여러분께서 우리 민족의 문학을 계통적으로 연구한다니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왔지만 밑천이 없어서 뒤가 켕깁니다. 이번에 서울에 가서도 문학을 제기하면 참으로 부끄럽더라구요.  서울에서는 남북조선, 일본, 미국, 카나다, 중국 등의 조선족문학을 모두 합쳐 우리 민족문학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우리 말로 쓴 것이여야지 일본에서 일어로 쓴 것이라던가 미국에서 영어로 쓴 것은 승인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일본에 가서 김달수씨를 만났는데 어릴 때 일본에 건너가서 조선글을 배우지 못했기에 말은 다하고 듣기도 다 알아듣는데 쓰지를 못한다고 하면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더군요. 김달수씨도 자기 작품에서 일본에 있는 우리 조선민족의 생활을 많이 그려냈습니다. 그래도 이런 사람들이 문학이 우리 민족문학이 아닌가? 저는 혼자 잘 모르겠습니다. 문학예술 연구소에서 어떻게 잘 연구하여보십시오. 그래 이번에 서울에 가니깐 솔직한 말이지 우리 중국동포들의 문학을 매우 관심하는데 아주 어리게 보더라구요. 우리 문학이 예술적기교면에서는 확실이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건전하지요. 그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 우리의 문학을 《20년대 수준밖에 안된다.》고하니 제가 있다가 《당신들의 정치가 우리의 20년대 수준밖에 안됩니다.》고 하였지요.  아래에 동무들의 질문에 대해 아는데까지 대답하면서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순서없이 구애를 받지 말고 자유롭게 질문들을 하여봅시다.  ㅡ우선 선생님의 생평에서 재기되는 문제부터 알고 싶은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되여 남조선에서 북조선으로 넘어오고 북조선에서 중국으로 건너 오게 되였는지요? □제가 이번에 서울에 가서 이와 똑 같은 질문을 받아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서울에서 평양으로 간 것은 중편소설 하나 엮을만한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였습니다. 북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장편소설 하나 엮을만한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였습니다.》고 대답하였지요. 기실 저는 1945년 10월 9일 일본에서 전국의 정치범이 동시에 몽땅 석방될 때 나가사끼감옥에서 놓여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시모노세끼에서 나무배로 부산에 왔습니다. 11월 1일에 서울에 도착하였지요. 이틀후에 조선독립동맹과 련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군인으로 있기가 곤난 하였지요. (김학철선생님은 1941년 태항산의 호가장전투에서 일본놈의 총탄에 왼쪽다리에 부상을 입고 일본형무소에서 다리를 잘랐던 것이다.) 저는 일본감옥에 있을 때부터 문학예술을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딴 길은 없으니깐요. 이것이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겠지만… 저는 서울에 오는 길로 당조직에 들어가 있으면서 문학활동을 했어요. 그러나 쉽지 않더라구요. 소질이 없는게 막다른 골목에서 할 수 없이 억지로 선택한 것이니깐 잘 안되지요. 쓰기는 소설을 썼지만 소설이라고 하기가 곤난하였습니다. 그저 르포르타즈라고 하는 편이 나았지요. 선생님들도 남조선이 평론을 보셨겠지요. 《이것이 얘기지 소설이 아니다》옳은 평가지요. 하여튼 이러한 글들을 부지런히 썼습니다. 1년 동안에 꼭 10편을 발표하였지요. (앞표지안의 웃사진을 보이면서) 이것이 내가 새로 왔다고 환영하면서 찍은 거지요. 그런데 1년이 지나니 탄압이 시작되였습니다. 저는 목표가 드러났습니다. 도처에 다니면서 열변을 많이 토했거던요. 그러니 어디에 숨을 데오 없고 하여 조직에서 북으로 넘겼습니다. 1946년 12월 저는 마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림진강까지 내려와서 옹진반도를 거쳐 거기서 해주로 해서 북으로 왔습니다. 정치적국세가 긴박하여 좌익을 탄압하니깐 조직적으로 철퇴한 것이지요. 북조선에 와서는 《로동신문》사에서도 있고 하였는데 글은 별로 쓰지 못하였습니다. 4년후인 1950년 10월 정치적 리유로 중국에 들어 왔지요. 들어와서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 연구원으로 2년간 있으면서 좀 배우다가 연변으로 나왔습니다. 북경에서 콩나물처럼 뿌리가 땅에 대이지 못하겠으니… 나와서 좀 활동을 하다가 투쟁을 맞았습니다.  △일생동안 정치풍파를 많이 겪었지요.  ㅡ선생님의 고향은 어디십니까? 소학교는 어디에서 다니시고요?  □저의 고향은 원산입니다. 저는 1916년 조선 원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소학교는 원산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는 서울보성고등학교를 다니였습니다. 서울에 외갓집이 있었지요.  ㅡ 형제분은 몇분이십니까?  □우리는 삼남매간입니다. 누이동생 둘이 있었지요. 큰누이동생은 42살좌우에 죽고 작은누이동생은 지금 행방불명이 되였습니다. 작은누이동생은 제가 일본감옥에 있을 때 편지도 여러 번 오갔고 또 나가사끼 감옥에서 나올 때 어머님과 함께 저를 맞아주었지요.  ㅡ선생님께서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결혼은 1947년도에 했습니다.  ㅡ저는 각도를 좀 바꾸어 선생님의 《격정시대》를 보면서 의문 되던 점을 간단히 물으려 합니다. 선생님께서 《격정시대》에 반영한 선장이란 인물은 1932년에 중국에 건너와 상해에서 테로활동을 하고 선생님의 간력은 1936년도에 들어오신 걸로 되는데 여기에 4년이란 시간차이가 있습니다. 《격정시대》가 소설이기에 별문제는 없습니다만 선생님께서도 후기에 쓰셨지만 전기문학이란 각도에서는 이 4년을 어떻게 정리하셨는지요?  □《격정시대》는 소설입니다. 제가 이번에 서울에 가니깐 모두 《서선장이 선생님이시지요?》하고 묻더군요. 저는 《아닙니다. 저는 김학철입니다.》고 대답하였지요. 모두 꼭 저의 력사 같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서선장의 몸에 작자가 많이 체현된것만은 사실입니다. 서선장이 소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라든가는 모두 저의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중국에 들어와서부터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데 무어 쓴 것입니다. 작자의 범위를 벗어난 전체의 이야기를 썼지요. 당시 우리 사람들이 생활과 경력이 대동소이하였지요. 좀 먼저 온 사람도 있고 좀 나중에 온 사람도 있었지요. 제가 후기에도 썼지만 사실은 다 있는 것으로 적당히 조직했을 뿐입니다. 《격정시대》는 기실 우리들의 력사입니다. 력사로 쓰면 매개 사람들을 모두 적겠는데 그럴 수 없어서 소설로 쓴것입니다.  ㅡ네, 잘 알았습니다. 한가지 더 묻고싶은데요. 선생님의 《격정시대》에서도 그렇고 《작가수업》이란 글에서도 또 《천지》30돌 기념활동에서 하신 말씀에서도 저는 선생님께서는 무단적이거나 허무한 랑만주의를 반대하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고있습니다. 이래서 《격정시대》도 끝이 아닌 끝을 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무단적이거나 허무한 랑만주의를 반대하는 문학주장이 《격정시대》에서는 어떻게 체현되였는지요?  □제가 10년감옥살이에서 나와 해방을 받고보니 예순다섯이 였습니다. 1978년 1월에 만기석방 되고 1980년 12월에 무죄로 해명받았지요. 저는 진시황처럼 어리석지 않아요. 천년을 살고 억년을 산다고 생각지 않아요. 하여 하루빨리 인멸 되여가는 우리의 력사를 구해야 겠다고 생각하였지요. 고무풍선 같은 력사를 후대들에게 남겨서는 안되는거지요. 이번에 서울에 가서도 이 문제를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임무는 바른 력사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전별곡》을 쓰지 않았습니까? 그걸 전기문학으로 썼지요.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걸리여 여기 출판사에 들어갔다 쫓겨나오지 않았습니까? 저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의 력사를 남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로 하는 형식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격정시대》를 쓴것입니다. 목적이 명확해요. 과거 산해관 이남에서 항일 전쟁을 한 사람가운데서의 죄익들이 력사를 남기라는 것입니다. 실패는 실패 성공은 성공이라고. 물론 제가 나이가 젊다면 좀 천천히 하겠습니다. 그러나 올해 벌써 일흔다서입니다. 소설이 되고 안되고 관계없습니다. 그 내용이 전달되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ㅡ선생님의 그 력사에 대한 신성한 사명감에 감복됩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작품들이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한페지를 차지한다는 것도 홀시할수 없지요. 지금 사회상에서 선생님의 조선족문학에 대한 기여를 주요하게 세가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로는 선생님께서도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력사사실을 문자화 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사실주의기치를 고수했다는 것이며 셋째로는 중국조선족문학에서 독특한 풍격 즉 생활의 변증법에 기초한 유모아 적이고 해학적인 필치, 독특한 언어구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세가지 가운데서 선생님 자신으로는 어느 방면의기여가 제일 크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이구, 그건 저로서는 말하기 곤난 합니다. 여러 분들이 좋을 대로 생각해주세요.(웃음) 그러나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개척자는 리욱과 김창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시에서는 리욱이고 서설에서는 김창걸입니다. 이 두 분을 내놓고 그 누구도 개척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창작방법에 있어서 저는 사회주의 사실주의외에는 다른 것은 승인이 안됩니다. 그렇게 실천이 잘되는지는 모르지만 시종일관 그렇습니다. 또 글 쓰는데 유모아가 많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영국의 디켄즈와 미국의 마크 트웬입니다. 그들의 풍자를 저는 매우 즐겨요. 그리고 홍명희의 《림꺽정》, 조설근의 《홍루몽》, 로신의 《아Q정정》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에도 해학이 많이 들어있지요. 읽으면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말이여요. 저는 중국에 와있으면서 《홍루몽》과 《호신전집》들을 원문으로 볼수 있다는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해요. 저는 파금의 작품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격정이나 사회적인 영향은 모두 승인하지요. 그러나 파금의 문학은 진실만 많지 해학이 적습니다. 너무 엄숙하면 피곤해서 못견디지요. 작품에서 해학, 유모아는 불가결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생을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많이 살아왔습니다. 전투환경과 이른바 투쟁을 받은 생활이 있었는데 그런 간고하기 짝이 없는데서 롱담이 오고갔습니다. 이래서 자기로 자기를 완화해야지요. 저는 일관적으로 사회주의 사실주의와 더불어 유모아와 해학을 즐깁니다.  ㅡ선생님의 50년대작품과 80년대작품들을 읽어보면서 선생님께서는 문학창작에 있어서 엄숙한 진실성을 추구한다고 생각되는데요. 문학에서의 진실성에 대하여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우리 문학이 어느 기생계급의 오락물이 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문학은 방법을 통해서도 우리 민족의 소질을 제고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엄숙하게 맑스주의만 웨치고 전통만 찾으면서 오락을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오락이 없으면 누가 봅니까? 제가 이 에피소드를 여러 번 이야기 하였는데 어느 전투에서 적의 거점을 소탕내고 그 전리품을 거둘 때의 일입니다. 한놈의 자루속에 책이 하나 있더라구요. 전장에서는 책이 매우 귀했어요. 제가  제꺽 그것을 넣어가지고 와서 이튿날 아침에 펼쳐보니 앞뒤 뚜껑이 다 떨어져나간 우리 글로 된 단편소설집이였어요. 그가운데 《발가락이 닮았다》는 글이 있더라구요. 우리는 돌려보고 나서 《이런 망할놈의 자식이 어디 있나, 남은 전쟁마당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이따위 것을 써가지구 민족의 투쟁의지를 마비시키다니…》하고 욕을 퍼부었지요. 그 후 일본감옥에 있다가 해방 후 서울에 와서 문학가동맹의리태준, 김남천, 리원조, 안희남 등 사람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전리품을 주은 얘기도 자연히 나왔지요. 《 를 대체 누가 쓴 것입니까?》고 물어보았더니 모두들 박장대소하면서 《그게 김동인이 쓴것입니다.》고 하더군요. 저는 우리 문학은 확실히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엄숙하게 해야지 그게 뭡니까? 그래서 저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저의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일관하게 주장하는 것이 우리 문학을 재미있게 잘 써라, 누구나 읽기 좋아하는 것을 쓰면서 궁극의 목적에 가서는 민족의 소질을 제고하는데 이바지하자는 것입니다.  ㅡ선생님께서 구라파의 현대파사조에 대해 흥취를 느끼지 않지만 사회주의 사실주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신적 없으신지요?  □흥취가 없으니 생각은 더욱 하지 않지요. 그것이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고…지금도 흥취는 없습니다.  ㅡ선생님께서는 사회주의사실주의 창작방법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류력사나 사회현실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정확한 것이 맑스주의입니다. 맑스주의 사상을 파악한 사람은 력사를 분석하거나 사회현상을 분석하거나 틀림없어요. 맑스주의 대가 지났다는 것은 오유적인 관점입니다. 맑스주의는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그것은 교조가 아니라 원칙입니다. 사회주의 사실주의는 이런 력사관에 근거한 문학형식입니다. 때문에 맑스주의가 없이 사회주의 사실주의를 운운하는 것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짜 맑스주의와 가짜 맑스주의를 똑똑히 식별하여야 합니다.  ㅡ선생님의 그런 확고한 신념이 지금 사회의 많은 청년들, 문학도들이 가장 깊이 인상받고 교육받는것이지요. 일본놈의 감옥에서 생명의 한 부분인 다리를 하나 잃고도, 반우파투쟁으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문화혁명의 《세례》로 10년의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선생님께서는 신념을 잃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런 역경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 청년들에게는 신비하게 전설처럼 들리지요. 특히 30살 이하의 청년들은 믿어지지 않아 하지요. 선생님께서 신념을 잃지 않는데 무슨 비밀이 잇는지 알고 싶습니다.  □비밀은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저도 원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였습니다. 제가 혁명에 참가한 것은 일본놈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에서 였지요. 하여 일본놈과 맞서 싸워보겠다고 1936년 3월 상해에 갔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상해에 가서 민주혁명당에 들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몇사람이 모여 앉더니 《미스터 김 만약 우리 나라가 독립한다면 리시왕(그때리감봉, 리검봉이 살아있을 때입니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하고 저를 떠보며 묻더군요. 《그가 우리 임금님이니 갖다 모셔야지요.》저는 인차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아주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웃더군요. 저는 속으로 《이제보니 이것들은 모두 역적이구나.》고 생각하였지요. 이것은 진짜 있은 이야기 입니다. 19, 20살때의 제가 이 정도였지요. 그런데 그때로부터 4년후에 입당하였습니다. 제가 4년 동안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저의 세계관이 수립되지 않았으면 공산당에 가입할 수 없었지요. 저는 4년간의 정치투쟁을 통해 사회주의만이 우리 민족을 구할 수 잇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번에 서울에 가서도 글을 썼지만 《서울은 천당과 지옥이 동거하는 곳》이지요. 한쪽은 천당이고 한쪽은 지옥이지요. 거기에서 저는 오직 사회주의만이 우리 민족의 진정한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을 더욱 느꼈습니다.  저는 그때 한번 세계관이 수립된 후 동요가 없었습니다. 또 많은 투쟁가운데서 시련을 겪으면서 신심이 더욱 생겼습니다. 하여 일본이 독방감옥에서도 고독을 느끼지 않았지요. 반우파투쟁때로부터 24년간의 간거한 생활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구요. 제가 감옥 10년에서도 신념이 죽지 않았기에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 이 정치적신념이 견정하였습니다. 저는 공판을 받을 때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머리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자는 어떤 환경,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인민대중을 교육할 의무가 있다. 좀 본때를 봐라.》는데서 더 꿋꿋이 서있었습니다. 신념이 없으면 거꾸러진지 오라지요. 저는 인젠 일흔다섯이니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아직도 기나긴 인생길에서 꼭 순탄하리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념만 잃지 않는다면 견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ㅡ선생님께서 10년의 감옥살이를 하시면서 감방안에 앉아서도 그런 신념이 북받칩디까?  □그럼 뭐, 드놀지 않지요. (일동 웃음) ㅡ선생님게서 어느해에 공산당에 가입하셨다지요?  □1940년 8월 29일입니다. 그전에 회외에 있는 망명단체, 혁명단체에서는 8월 29일을 국치일이라 하여 점심을 굶었습니다. 조선이 망한 날이지요. 하여 굶주린 창자에 망국의 설음을 아로새기자는데서 그날에 입당을 하였습니다.  ㅡ중국에 오셔서 당에서 정식으로 제명당한 것은 어느 때입니까?  □당에 제명당한다는 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1953년에 평양 로동당조직부에 가서 조직관계를 가져와 직접 북경 중앙조직부에 올라가서 복당수숙을 하고 얼마 안되여 반우파투쟁이 터졌습니다. 그러니 여지가 없지요.  ㅡ후에 와서 언제 회복되였습니까?  □1989년 1월 29일입니다. 복당이지요.  ㅡ《해란강아 말하라》는 실제 사실을 갖고 쓴것입니까?  □녜, 많은 사람을 만나 자료를 수집한데 근거하여 쓴 것입니다. 소영향의 김신숙한테 가서도 몇 달 있으면서 썼지요. 기교가 없으니 그렇게 되였지요. 그리고 《해란강아 말하라》는 선전부에서 임무를 맡겨서 쓴 것입니다. 정치의무감에서 쓴 것이지요.  ㅡ그런데 어떻게 되여 《해란강아 말하라》가 비판을 받게 되였습니까?  □그때 어느것이 반동이 아닌 것이 있었습니까? 선전부에서 모두 검열했지만 시기가 그러니 반동으로되였지요.  △《아리랑》잡지 1957년도에 비판문장들이 실렸습니다.  ㅡ최근에 선생님께서는 잡문을 많이 쓰셔서 광범한 독자층에 커다란 반향과 중시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럼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되여 소설창작으로부터 본격적인 잡문창작에로 들어가셨는지요?  □제가 요새 잡문을 쓰는 것은 어떤 현상을 보면 속에서 불이 올라와 참을 수 없어서지요. 그래서 잡문이 제일 빠르니깐 잡문으로 불질하지요. 어떤 때는 잡문을 한 주일에 3편씩 쓴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소설을 쓰려고 해도 겨를이 없지요. 24년 동안 묵었던 것이 몽땅 쏟아져 나오는 모양입니다. (일동 웃음) ㅡ그리고 선생님의 잡문은 사상면과 예술가치에서 로신의 잡문과 공통점이 있으면서 또 선생님식의 독특한 새성, 다분한 민족풍격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럼 선생님의 잡문과 로신잡문의 관계, 선생님의 잡문과 우리 민족문화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보셨는지요?  □저는 로신을 굉장히 숭배합니다. 로신의 잡문에 대해 많이 학습하였습니다. 로신의 작품들을 거의 외우다 싶이 하였거든요. 로신을 따라 배우려고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우리 민족문학에 있어서는 홍명희의 글을 많이 읽었구요. 저는 로신의 정신에다 홍명희의 표현수단을 배우면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ㅡ앞에서 선생님의 《신념》에 대해 들어보아도 그렇고 또 선생님의 겪으신 허다한 경력을 보아도 선생님께서는 종교를 신앙하는 분이 아니라고 긍정은 하면서도 선생님의 잡문이랑 읽어 보면 어쩐지 선생님이 도교에서나 특히 장자, 로자에서 어떤 영향을 받은감이 나는데요?  □로자의 변증법은 가치가 있습니다. 로자의 변증법에 중국의 묵은 변증법이 들어있지요. 모택동이 로자를 존중했습니다. 저도 중국의공자, 맹자의철리를 많이 학습합니다. 또 로자의 영향도 받았지요.  □죄장이 너무 많아 어느것이라 말하기 곤난합니다. 그때 대자보가 많이 나붙었지요.  ㅡ제가 대학 1학년때의 신문부간과 잡지들에서 보니 《괴상한 휴가》를 가지고 많이는 누구를 친것이라고 하고 《해란강아 말하라》는 공산당의 통일전선을 공격하고 혁명투쟁을 실패로 만들고 하여 독초라고 하였지요.  ㅡ선생님께서 《20세기의 신화》는 어느 때부터 쓰기 시작하셨습니까?  □《20세기의 신화》는 속에 많이 넣어두었다가 1964년초부터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전에 원래 쓰려고 하였는데 출판사에서 《유림외사》 번역이 와서 97만자를 1년이 걸려 완수하다나니 《20세기의신화》 전반부는 1964년 9월에 탈고되였지요. 1965년 3월에 몽땅 탈고한 뒤 다시 일어로 전반부를 번역하였습니다. 후반부를 번역하려고 할 때 감옥에 들어가게 되였지요.  ㅡ선생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논 정치서적은 어떤 것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국가와 혁명》에서 큰 감복을 받았지요. 그전에 저는 국가라는 것은 아주 큰 콩크리트로 만든 빌딩 같은 것으로 알았는데 《국가와 혁명》을 읽으면서 그 콩크리트 벽이 막 무너져나갔습니다. 다음 맑스의 《프랑스내전》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습니다. 빠리꼼뮨의 사적에 너무도 감동되였지요.  ㅡ1957년 하반년부터 반우파투쟁이 시작되였는데 그때 조직에서 창작을 못한다는 말은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형편이 그렇게 되였으니깐. 그저 《너는 이달부터 로임이 50원이다. 나와서 개조하라.》고  하니 나가 로동개조를 시작하였지요. 돌까기도 하고 도서실도 정돈하고 감옥에 가서는 돼지도 먹이면서… ㅡ우파모자를 벗긴다는 것도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씌울 때 씌운다는 것이 없었으니깐…내부로 하였지요.  ㅡ선생님께서는 오랜 창작생애에 많은 작품들을 쓰셨지요. 그 가운데서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어느것이고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어느것입니까?  □제일 실패작은 《해란강아 말하라》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건 선생님의 생각이지요. 그래도 력사적으로 보아야지요. 장편소설로는 처음이였다고 생각되는데요.  □제일 사랑하는 작품은 《격정시대》라고 해야 겠지요. 제가 1947년도에 평양 《로동신문》사에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한 50푼히 되여보이는점잖은 부인이 저를 찾아와서 《당신이 김학철이요?》하고 묻지를 않겠습니까. 제가 《녜, 그렇습니다.》고 대답을 올리니 그 부인은 저의 손목을 잡으면서 《내가 김정희에미요.》라고 하더라구요. 김정희는 광동 중산대학에서 호북 강릉중앙륙군군관학교에 전학해온 저의 동기동창이였지요. 그런데 그 친구가 태항산에서 전사하였지요. 전사한 전우의 어머니가 저의 손목을 쥐는 순간 저는 가슴이 섬뜻하였습니다. 마치 김정희가 저 때문에 죽은 것처럼…그는 죽고 저는 살아왔으니깐요. 그때 그 어머니가 《내자식도 당신처럼 그렇게 되서라도 (김선생님께서는 그때 왼쪽다리를 잃었었다.) 돌아와주었더라면 얼마나 영광수러웠겠소.》 그런데 그들이 죽은지 40년이 지낫는데도 그들의 력사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지요. 하여 저는 해방되면서 인차 《항전별곡》을 썼지요. 그것이 발표되자 또 다시 《격정시대》를 썼던것입니다. 저는 전사한 옛 전우들에 대한 뜨거운 동지애로 만강의열정을 다하여 썼습니다. 이 책이 나옴으로 하여 저는 《병신자식 효도》를 한셈이 되였습니다.  서울에 가서도 《에피소드의 련성》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어쨌든 있는 사실을 력사적으로 내놓자는 것이 목적이 였지요. 저도 《문학적가치보다 력사적가치가 더 높다.》고 똑똑히 밝혔습니다.  ㅡ선생님께서는 중편소설 《번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형편없지요. 임무를 맡고 춘(태양향)에 내려가 쓴 것입니다. 그때는 《문예는 정치를 위해 복무한다.》고 하니 꼭 그래야 되는줄로 알고 썼습니다.  ㅡ선생님의 처녀작은 어느것입니까?  □저의 처녀작은 《지네》입니다. 1945년 12월에 《건설》잡지에 발표되였지요.  ㅡ선생님이 지금 구상중에 있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웃음) 저에게 지금 미발표작 《미이라》가 있습니다. 작년 가을 서울을 떠나기 전에 《연변일보》에 가져갔는데 종시 발표되지 못하였지요.  △오늘 우리의 문학대화는 이 단계로 마칩시다. 김선생님께서 고령에 몇 시간동안 앉아계셔서 대단히 피로 하실줄로 압니다.  오늘의 이 문학대화는 아주 의의깊은 대화라고 생각 됩니다. 김선생님께서 장시간 귀중한 말씀을 많이 나눠주셔서 우리 연구소의 금후의 연구활동과 이번 작가론을 쓰는데 큰 계발과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앞으로 김선생님께서 우리의 연구작업에 더욱 많은 협조를 주실 것을 부탁 드리면서 이로써 오늘의 문학 대화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ㅡ 《문학과 예술》1990년 제3호에서  
113    시인 - 고 정몽호 댓글:  조회:5509  추천:0  2015-03-02
고 정몽호 문학인 그는 누구인가 연변작가협회시가창작위원회, 연변작가협회평론위원회, 연변작가협회아동문학창작위원회에서 공동 주최한 '정몽호 문학세미나'가 지난 6월 21일에 연길시에서 열렸다. 이번 세미나는 중국조선족문단에서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세운 정몽호선생의 평생을 기리는 장으로 자리매김을 하기에 충분했다.  이번 세미나 사회를 맡은 연변작가협회시가창작위원회 김영건 주임은 "고 정몽호선생은 한마디로 우리중국조선족 문단의 한 버팀목으로, 창작에 모범으로, 후대양성에 아버지로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한 사람"이라 일축하면서 이번 세미나의 의미를 밝혔다.    1961년에 동북사범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한 정몽호씨는 선후로 연변한어사범학교 중문교원, 도문시당교 철학교원, 도문시 문련주석 등 사업을 력임하면서 수십년 동안 시를 포함한 문학창작에 혼신을 불태웠다.    '두만강 여울소리'시가탐구회는 중국조선족 문단 특히는 시가창작에 전념하고 있는 문인들로 볼 때 '시 탐구에는 만남의 장'으로 자리매김을 하기에 손색이 없었는데 이 시가탐구회가 바로 정몽호씨의 발기로 시작되였으며 올해까지 23년간 진행 되여오는데는 그의 노력을 갈라놓고 생각할수 없었다.  이 탐구회를 통해 많은 중견시인들은 자기의 창작을 보다 깊이하게 되었고 도문시 청년시인들을 중심으로 많은 시인들이 본격적인 시창작의 길에 올라섰다.     정시인이 후대양성에 심혈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도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 도문시작가협회 중임을 메고 있는 윤청남시인을 비롯하여 남철심, 박성훈, 김경희, 김영춘 등등 십여명의 시인들은 이미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시창작에서도 많은 성과를 냈는바 그들은 정지용문학상, 연변문학상, 아리랑 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등 많은 성과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이번 문학세미나에서는 문학평론가 최삼룡 씨의 '정몽호 시에서 꿈의 이미지' 전국권 씨의 론평 '정몽호선생의 리론계공헌', '최문섭 씨의 아동문학평', '남다른 애착 독특한 발견 끈질긴 추구'가 발표되였고 리상각, 조성일, 김득만, 김응준, 림원춘 등 원로시인작가들은 고 정몽호 씨를 기리며 생전에 그의 인품과 열정 문단에 공헌을 높이 평하였다.      훌륭한 독서가, 투혼을 불사른 문학인 림원춘 소설가는 "독서를 하지않는 오늘의 현실에서 정몽호 씨를 반드시 현시대의 우상이돼야 할 독서가", 조성일 평론가, 리상각 시인은 "정몽호 씨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이고 또 시탐구에서 혼신을 다 바친 문학인이며 후대양성에서 투혼을 불사른  문학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정 시인은 생전에 책 읽기를 즐겨하는 독서가였다. 고금동서의 도서들을 탐독하는 것은 그의 일상생활로 되였다고 미망인 엄금단 씨가 설명했다.그에 따르면 모든 원고료는 모두 책을 사는데 지불했고 한달에 적어도 몇백원어치의 책을 사서 탐독했는데 연변에서 구하지 못한 책들은 북경 등지 서점에서 사다가 보았다.     정몽호 씨는 중문과를 졸업했기에 중문에 조예가 깊어 중문으로 된 철학서적들도 많이 탐독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헤겔, 맑스,엥겔스 등 철학서적들을 많이 탐독했기에 자기의 독특한 철학 체계가 구축되여 있어 문단에서 유일한 철학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산지식을 보유한 문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유지인들은 설명하고 있다.    이런 연박한 지식이 있기에 정몽호 시인은 일찍 1983년도에 도문시에서 ‘두만강여울소리 시가탐구회’를 발기하고 문우들과 나란히 중국조선족시탐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탐구회의 발족으로 연변은 물론 제반 동북3성 더 나아가서는 멀리 북경 등지까지 이 탐구회를 만남의 장, 탐구의 장이라는 점에서 문우들이 몰려오군 했다.     일년에 한번씩 열리는 탐구회는 시인들의 대잔치여서 시인마다 탐구한 글들을 발표하는 장으로 자리매김을 했고  또 이 기회에 우수작품평의 시랑송,평론,등 다양한 행사를 벌였다.  자고로 문인들은 가난하다. 어떤 행사를 치르자해도 자금마련은 여전히 골치아픈 일로 대두되고 있다. 도문시라 하게 되면 실지 시골도시임이 분명하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그리 부유하지 못한 변경 도시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이런 지역에서 ‘두만강여울소리 시가탐구회’를 정규적으로 연다는 것은 사실 힘에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당시 정몽호 시인은 비록 도문시문련주석을 담임하고 있지만 이런 시간탐구회에 지불할 자금은 없는 것이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집에 온 손님들은 주숙케하고 각 기업 혹은 민족사무위원회 등 단위들을 찾아다니면서 자금을 마련해 행사를 치렀다. 참으로 선비의 옷을 벗고 체면을 불구하고 도처로 다니면서 구걸했던 것이다.    흑룡강조선족출판사 김두필 씨는 "정몽호 씨와 이 출판사와의 인연은 '은하수','꽃동산'잡지부터 시작되였다"고 한다.1983년도에 정몽호 씨가 도문시문화관의 관장으로 있을 때 도문시의 문학을 한단계 추진시키려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여 먼저 합작의 손을 내밀었고 도문에서 문학창작강습반을 조직하고 은하수와 꽃동산 편집들을 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은하수'가 연변진출을 대담하게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뒤로 정몽호 씨의 댁을 우리의 련락사무소로.   만남의 장소로 삼아 연변의 많은 작가들과 손을 잡았고 적지않은 원고들이 이 도경으로 흑룡강조선족출판사에 흘러왔단다. 흑룡강조선족창작위원회 한춘 회장은 "시가탐구의 홰불을 추켜든 정몽호선생의 시정신은 언제까지나 칭송받아 마땅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이렇듯 훌륭한 인품을 가진 문학인이 있음으로 해서 수많은 문우들은 그와 대화하기를 즐겨했단다    훌륭한 문인, 아름다운 미망인    정몽호 시인의 이런 문학탐구에서의 열정은 훌륭한 동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미망인 엄금단 씨이다. 흑룡강조선민조출판사 김두필 씨는 "정몽호 선생의 5권의 작품집이 한국에서 무난히 출판될 수 있은 것도 사모님의 뜨거운 마음과 노력의 결실이라고 심심히 느낀다"며 "우리 출판사에서 정선생의 댁을 모르면 ‘왕따’를 당한다"고 했다."그렇게 많은 문우들이 집을 찾아왔고 또 잠자리도 마련하고 술상까지 푸짐이 마련했다는데 싫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미망인 엄금단 씨는 "종래로 싫은 적이 없었거니와 반갑기만 했다"고 답복했다.    정몽호 시인이 대학교시절 약혼녀인 엄금단 씨는 화룡의 한 시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여느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에도 늘 편지로 애정을 토로를 했지만 대부분 편지의 내용은 정시인에게 시상이 떠 오르겠끔 당지의 상황을 소개했단다.     그러던 중 엄금단 씨가 '병아리가 부러워'라는 동시를 약혼시절 즉 50년대에 발표하게 되였는데 이로해서 그들의 애정은 더욱 깊어만 갔고 안해의 창작을 크게 도와 주었단다. 이렇게 두 남녀사이에 문학이라는 무지개가 징검다리로 이어졌기에 엄금단 씨는 후세에 남편을 찾아오는 문우들을 자기 집사람처럼 후하게 환대하게 되였단다.    하여 결혼해서 째지게 가난해 귀동냥을 하면서라도 남편의 창작활동을 사심없이 도와주었던 것이다. 참으로 "정으로 가는 길엔 강물이 푸르고 실력으로 가는 길에 청산이 높다"는 정몽호 씨의 생전의 유언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몽호 씨는 생전에 자식에 대한 교양에서 책을 읽지않으면 소경이 될 수 밖에 없으므로 항상 책을 보라고 자식(아들 하나, 딸 두명)들을 타일렀고 언제 어디서나 덕을 쌓으라고 자식들을 교양했다고 엄금단 씨는 설명했다.    문우들과의 만남은 말그대로 시가탐구인 것만큼 어떤 경우에는 치열한 쟁론이 불가피하다. 그때마다 정몽호 시인은 자기의 관점으로 극구 다른 문우들의 관점을 반박하지 않았단다."각자가 자기의 관점이 있는데 누구나 관점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니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자기의 관점의 정확성과 비정확성을 판단할 수 있다"고 정시인은 늘 생전에 안해하고 얘기했단다.    정몽호 시인은 어느 한 글에서 이렇게 적어내려 갔다."동북3성조선족 시가탐구회-두만강여울소리가 도문에서 열리게 된 것은 어찌보면 우연한 것 같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중국조선족 시 발전의 필연성의 결과로서 력사적인 해탈과 지역성적인 각성이 새로운  시 형식의 탄생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권위자의 리론에 대한 간단화와 절대화에서 해방되는 것은 문예관 해방을 예고하는 새벽종소리였다…”  정몽호 씨는 생전에 여러편의 시집과 '정몽호 문집', '재미나는 동시 창작방법', '실용수필 창작기교' 등 수편의 저서들을 출간했고 또 많은 작품들이 '아리랑문학상','해란강문학상'등을 수십번 수상했고 많은 평론도 펴냈다. 시인은 갔지만 그의  숨결만은 남아있다. 정으로 살아온 그의 숨결로 강물은 푸르고 탐구로 불타던 그의 메아리는 청산이 읽어주리라. 고 정몽호시인님 고이 잠드시라.  [흑룡강신문 2007년 06월 28일]     두만강 여울목에 새겨진 시혼 - 정몽호시인 타계 5주기, 시비제막식 가져     도수안경에 강마른 몸매, 소탈한 웃음, 입을 열면 쏟아지는 달변… 항용 지성과 열정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했던 정몽호 시인이 타계한지도 어언 5주년이 지났다. 가을바람 소슬한 10월 12일, 정몽호시비제막식이 두만강변에서 있었다. 정몽호시비는 조선족시단의 최대 시탐구회로 자리매김한 《두만강여울소리시가탐구회》의 발기인의 한분이며 후배양성과  조선족시단의 의식갱신과 시발전을 위해 헌신해왔던 고 정몽호시인을 기리기 위해 도문시 문련과 작가협회의 협력으로 건립됐다. 시인의 5주기를 맞아 시비 제막식등 기념활동을 가지며 문단은 다시한번 학자형 시인으로서 문단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정몽호시인의 문학과 생애를 반추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시인 정몽호는 1935년 룡정시 동불향 요구촌에서 태여났다.  1961년 동북사범대학 철학계를 졸업, 도문시 당교에서 철학과를 가르치기도 했다. 1983년 도문시문련에 전근하여 정년퇴직하기까지 붙박이로 두만강변의 작은 도시에서 문련비서장, 도문시문련주석등직을 지냈다. 1950년대 국가청년축구팀의 선수로 까지 활약했던 정시인은 1958년 대학시절에 처녀작 동시 “대롱다롱 보배봉지”을 발표하면서 문학창작의 일로에 발길을 돌렸다.  “아버지”, “어머니와 나”등 굵한 장시들을 비롯하여500여수의 시, 동시, “양가령 언덕길”, “주총리 우리마을에 오셨네” 등 가사를 발표했고 시집, “두만강의 아들”, 합저 “문학학습사전”, 번역서 “외국 아동명곡집” 리론저서 “실용수필의 장작기교”, “백일장의 길동무- 시와 수필의 창작기교”등 저서들을 펴내였다. 오래동안 문화관사업을 해오면서 시인은 문학신인 양성에 로고를 아끼지 않았다. 10여명으로 무어진 도문시청년과외작자들을 이끌어 시협회를 뭇고 글짓기지도를 해주고 철학사조, 문학사조에 대해 때때로 주입해주었다. 그중 정시인이 보듬었던 후배 윤청남, 김영춘, 김경희 등 수명이 현재 조선족 문단의 중견시인으로 성장했다.   조강지처 엄금단 녀사와 엄금단 녀사는 남편의 숙원을 받들고 사재를 털어 "정몽호신인상"을 설립했다.   80년대초, 극좌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윤활해진 문예정책에 동조해 작가들의 작품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오고 박래품에 대한 수용, 그리고 향후의 창작방향에 대한 제시가 박절히 수요되는 시점에서 당시 도문시 문련비서장으로 있던 정몽호 시인은 그러한 사조에 편승하여 시효성있는 문학탐구회를 조직할 의향을 뼈무르게 되였다. 마침 도문행차를 했던 김성휘 시인이 그들의 의취를 받아들이고 좋은 아이디라고 의기투합을 보였다. 이 발기는 “문학과 예술”, “아리랑”, “은하수” 등 문학지와 종합지들의 동조의 박수를 받았다. 드디여   1984년 5월 3일 제1회 “두만갇 여울소리 시탐구회”가 도문시에서 열렸다. 김성휘, 임효원, “, 리행복, 정몽호, 김문회, 최문섭, 김동호, 림창연 등 시인들이 정몽회 시인의 집에 모여앉아 시작품을 읊고 합평회를 가지고 문학도들을 불러 시랑송 모임도 가졌다. 이렇게 맨처음 온돌방에서 무릎을 마주하고 앉은 시우들의 작은 모임으로부터 시작되였던 두만강 여울소리는 그후 연변뿐아니라 동북삼성 나아가 전국조선조시인들을 상대로 한해에 한번씩 열리는 정규적인 세미나로 발돋움하였다.  시 탐구회 10돐을 맞던해,  탐구회의 장구적인 발전, 장대를 기원하는 뜻에서 지인들은 “두만강 여울소리 시비”를 세우기로 결정, 정몽호 시인은 다시한번 시비의 자금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정몽호 시인은 새로 산 구두창이 끊어지는 등 신고끝에 도문, 훈춘등지의 석장을 헤집고 다니면서 드디여 시비의 원석을 골라냈다. 경비가 적어 쪼개써야 했기에 토목에 대해 좀 알고있다는 이웃이며 지어 사돈까지 동원했고 도문시 청년시회의 애송이 문학도들과 함께 바줄로 비끄러매고 당기고 하여 마침내 두만강반에 시비를 일떠 세웠다.   1993년 6월 25일 전국각지에서 모여온 시인, 평론가들이 두만강변에서 시비 제막식을 가졌고 《두만강여울소리시가탐구회》의 발기인의 한분으로서의 정몽호시인의 로고에 대해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 이 시비는 중외 유람객들이 운집해 드는 두만강변에서 하나의 문화경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두만강여울소리 시비" 제막식에서 (왼쪽 첫번째가 정몽호 시인)   만년에 젊은 시인들에 대한 양성과 문학리론서 집필에 주력하던 정몽호 시인은 불행하게도 간암진단을 받았다. 병상에서도 “병원 시초”를 창작하고 리론서 “동시창작기교”를 다그치며 문학에 대한 의욕의 끈을 놓지못하던 시인은 2005년 3월 23일 병이 깊어져 끝내 문단과 영결하고말았다.     두만강변에 세워진 정몽호 시비 "두만강 여울소리" 시비와 더불어 도문시의 일대 문화경관으로 자리잡았다.   정몽호시비제막식과 더불어 정몽호시인의 미망인 엄금단 녀사를 비롯한 유가족은 사재를 털어 《정몽호신인문학상》을 세웠고 지난 12일 제26차 두만강여울소리시가탐구회의 일환으로 제1차 수상식을 가졌다. 시인의 높은 작가정신을 기리고 시인의 생전 숙원대로 문학신진들을 위한 디딤돌을 마련하고자 설치된 문학상이다. 정몽호시인의 시비는 신축중인 도문광장옆, 두만강강변공원에 경립돼 있다. 정면에는 고 정몽호시인의 시 《접어둔 날》이 뒤면에는 시인의 략력과 대표작 목차가 새겨져있다.  시인의 불같은 시혼이 오롯이 음각되여있는 시비는 오늘도 두만강여울의 작은듯 큰 흐름을 면면히 지켜보고있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9- 10-12    
112    강경애 - 두만강 례찬 댓글:  조회:5139  추천:0  2015-03-02
두만강 예찬                                                                              강경애     두만강이라면 조선 · 만주 · 러시아의 국경이니 만큼 거기에 대한 역사나 재미있는 전설 같은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소양이 없는 나로서는 극히 난처한 일이다. 더욱 두만강이라면 우리로서는 예찬보다는 원한이 많을 것이다. 좌우간 예찬이 될지 원한이 될지 생각나는 대로 붓을 옮겨보자.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흐르는 일천오백여 리나 되는 장강이다. 두만강수의 분량은 조선에서 흐르는 물의 분량보다도 만주에서 흐르는 분량이 더 많다. 간도 용정촌으로 흐르는 해란강이며 국자가의 연길강, 백초구의 백초구강, 훈춘의 훈춘강 등이 고려령(高麗嶺)을 넘어 두만강에서 합류된다. 그리고 두만강이란 이름도 만주어에서 나온 이름이니 즉 도문색금(圖門索禽)이란 만주어에서 색금을 떼고 도문만을 붙여 두만이라 하였다. 도문색금이란 뜻은 새가 많이 사는 골짜기로 해석이 된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아 두만강 일대에는 새가 많이 깃을 들이고 있던 모양이다. 역사적으로는 분명하지 않으나 금국(金國) 당시에 천조제(天祚帝)가 신하를 많이 데리고 꿩사냥을 하곤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사천여 년 전에 만주는 부여족이 개척하였다. 부여족에서 갈라진 읍루족이 이 근방에서 살았고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일어나자 여기에는 발해 동경인 솔빈부(率賓府)가 되었으며 요나라가 흥하면서 이곳을 동변성(東邊城)이라 하였다. 다음에 요나라를 치고 금나라가 들어서면서 여기를 동변도라 하여 전자에 말한 바와 같이 여기에는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고 꿩사냥을 하는 놀이터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 몽고족이 원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중원에 호령하자 여기다 동변도 총독부를 두게 되었고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되면서 회령(會寧)이라 하였다. 지금의 회령이란 이름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회령에는 모린위(毛嶙衛)라는 군대주둔소를 두게 되었으며 여전히 이 지방에는 부여족에서 내려온 여진족이 살고 있었다. 명국이 망하고 청국이 성하자 그때 조선에는 이조 세종 3년이었다. 세종왕은 신하인 김종서를 이 지방에 보내어 여진족을 토벌한 후에 두만강을 국경으로 정하였다. 그 전에는 회령에서 청진까지 일직선을 그어 이남이 조선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두만강이 국경이 되었다. 당시에 여진족은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할 압박을 받으며 죽지 못하여 살았다.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권력자 앞에 그들의 생명은 풍전등화였다. 불교를 강제로 믿게 하는데 너희들은 가족을 데리고 집에서 믿어라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산에서 믿는 불교를 집에서 믿게 되었다. 이른바 재가승(在家僧)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들의 항복의 기념으로 지은 종성(鍾城)에 있는 수항루(受降樓)를 그들은 얼마나 원망하였을까. 그리고 수항루를 끼고 굽비굽비 감돌아 내리는 두만강을 얼마나 넘고 싶었을까. 그러나 국경의 수비가 엄하니 어찌 감히 넘으랴. 달 밝은 밤 그들은 고달픔에 못 이겨 아마도 두만강에 몸을 맡겼을 것이다.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필경 이때로부터 두만강을 넘는 페이지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당시에 조선은 청국과의 국제문제를 두려워하여 국경을 넘는 자에게는 용서 없이 처치하였다. 그리고 양국은 통상조약이 성립되어 회령에 개시장(開市場)을 열게 되었으며, 두만강 이북으로부터 간도 국자가 근방까지는 완충지대라 하여 통상(通商)시에만 인마가 빈번할 뿐이요, 그 시기가 지나면 완충지대는 공지이었다. 그러므로 두만강 일대에 있는 여진족이야말로 이 자유천지를 날마다 밤마다 넘겨다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내려오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66년 전 기사(己巳) 경오(庚午)년에 무서운 흉년을 만난 백성들은 이제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달했으니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두만강을 넘기 시작하였다. 죽이기로 당치 못할 것을 안 정부에서는 나중에는 방임하여 버렸다. 그러니 백성들이 막 쓸어 간도로 나오게 되었다.    지금의 간도라면 왕청, 연길, 화룡, 훈춘 이 4현을 말함이니 이 넓은 지광(地廣)에 조선인이 사십만이다. 이 사십만은 누구나 두만강과 인연이 깊을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두만강에 있다. 종성 대안(對岸)인 두만강 가운데는 간도라는 조그만 섬이 있었다. 그 섬은 아주 옥토이어서 곡식을 심으면 조선땅에서 나는 곡식보다 배나 더 나곤 하였다. 그러니 백성들은 몰래 건너가서 농사를 짓곤 하였다. 그러나 강국인 청국이 무섭고 국경의 수비가 엄하여서 그들은 마음을 놓고 농사를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밤중에 백성들이 모여서 간도를 조선으로 옮겨오자고 의논이 되었다. 그들은 즉시 두만강으로 나가서 조선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만주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로 옮기기 위하여 흙으로 메워서 종내는 간도를 조선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종성에 가보면 그 자취가 남아 있다.    이렇게 간도를 조선땅으로 만들기 전에 몰래 이 섬에 와서 농사 짓는 것을 간도농사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간도가 아니라도 두만강을 건너 농사 짓는 것을 모두 간도농사라고 하였다. 지금의 간도란 두만강에서 나온 말이다. 이 전설을 미루어 간도는 두만강이 낳아 놓은 듯싶다. 간도의 어머니인 두만강.    누구든지 간도를 알아보려면 이 두만강부터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이었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신록이 무르익은 버들숲을 끼고 흐르고 흐르는 저 강수(江水)!    나는 문득 이런 노래를 생각하였다.   여인은 애기 업고   사내는 쪽박 차고   지친 다리 끌면서   강가에 섰소.   강물에 발 담그며   돌아다 보니   강변엔 봄이오.   버들가지 푸르렀소.   강물은 무심히도   흐르고 흐르는데   애기는 울고 울고   석양은 기오.   아직까지도 이 노래가 내 머리에서 감돌다가 펜을 드니 술술 달려 나온다. (1934년 작)  
111    동시인 - 고 김례삼 댓글:  조회:4590  추천:0  2015-03-02
  김례삼 시비 연길공원에 경립     고개고개 고개길 학교 가는 길 공부하고 휘호호 휘파람 불며 붉은 댕기 팔라라 오빠 오는 길… 몇세대를 거쳐 우리의 동심을 두다렸던 “고개길”. 그 작자이신 고 김례삼선생의 시비가 연길공원내의 동시동네에 경립되였다. 연변작가협회 주최, 동시비건립위원회 주관, 장백산발전연구회, 연변군중예술관,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의 후원으로 된 "김례삼 시비 제막식"이 11월 1일 연길시 인민공원에서 있었다.   김례삼선생은 중국조선족 제1대 작가로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선구자이며 정초자의 한분이시다. 1913년1월 1일 조선 함경남도 북청읍에서 탄생, 1933년부터 아동문학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선후로 동시, 동요, 서정시, 민간문학, 평론, 회억록 등 600여(수)편을 발표했다. 그중 《고개길》, 《기차놀이》, 《똑또르르》등 동요는 몇새대를 거쳐 널리 애창되는 명동요로 자리매김하였다. 시비는 김례삼선생의 명동요 “고개길”의 이미지를 조각예술품으로 재현, 주체석에는 “고개길”의 전문이 새겨져있고 그아래에는 만발한 진달래꽃이 새겨져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의 향기가 만방에 전해짐을 상징적으로 주물해냈다.  김례삼선생의 유가족과 주인대상무위원회 오장숙전임주임, 길림성로동사회보장청 신봉철부청장, 연변주당위 선전부 채영춘 부부장,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 청소년문화진흥회 한석윤 회장을 비롯한 관계자, 문인 100여명이 이날 자리를 함께 했다.   김혁  “종합신문” 11월 9일       한 동시인이 넘어온 “고개길” - 중국조선족 제1대 아동문학가 김례삼   김 혁         지난 11월 1일, 연변작가협회 주최, 동시비건립위원회 주관, 장백산발전연구회, 연변군중예술관,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의 후원으로 된 "김례삼 시비 제막식"이 펼쳐져 고인의 시비가 연길시 인민공원내의 동시동네에 경립되였다.   길림성로동사회보장청 신봉철부청장, 연변주당위 선전부 채영춘 부부장,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 청소년문화진흥회 한석윤 회장을 비롯한 관계부문 지도자, 문인 100여명이 김례삼선생의 유가족을 모시고 중국조선족 제1대 작가로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선구자이며 정초자의 한분인 김례삼 선생의 생평을 반추해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김례삼은 1913년 1월1일 조선 함경남도 북청읍에서 목수 김익수의 아들로 출생, 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슬하에서 유년을 보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했고 김례삼은 소학교를 다닐때부터 신문배달을 하여 월사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가난도 타고난 총기를 막지는 못했다. 6살에 “천자문”을 떼고 “백구(百句)시”를 외웠으며 글짓기에서 남다른 기량을 보였다.  보통학교를 겨우 졸업한뒤에도 빈고를 이기지못해 그냥 점원, 떠돌이 막로동자, 간판업 운영등 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와중에1932년 동요 “나는 빌어먹는 거지”, 서정시 “지는 가을”등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1935년 중국으로 이주, 흑룡강성 목릉현에서 조선인학교 교원으로 교편을 잡았다. 1945년 목단강에서 광복을 맞이한 그는 혁명의 길에 나서서 목단강시 가두의 가장, 청년부장으로 활약했고 목단강시 민주대동맹문공단 단장, 할빈로신문예공작단 조선대 대장으로 활약상을 보였다.  해방후 보다 원활해진 창작풍토에서 그의 창작열정은 더욱 높아져 창작의 왕성기를 맞이했다. 동요 “고개길”, “기차놀이”, “새나라 어린이”, “딱친구”, “똑또르르”, 동시 “꿀벌과 꽃송이” 등 동심에 걸맞는 작품들을 륙속 발표했다. 동요동시뿐 아니라 동화창작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다년간 민간동화를 수집하여 민간이야기집 “천도복숭아”, “꾀당나귀의 꿈”등을 펴내였다. 고개고개 고개길 학교 가는 길 공부하고 휘호호 휘파람 불며 붉은 댕기 팔라라 오빠 오는 길… 이는 작가가 1950년에 창작한 동시 “고개길”이다. 동시는 새 중국의 설립과 함께 새로운 삶의 희망으로 부풀어오르는 심경을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면서 명랑한 분위기에서 랑만적인 미래를 예시하고있다. 이외에도 변강의 오지에서 멀리 넓은 세상으로 나래치고 싶어하는 향상심을 보여준 “기차놀이”, 우량종자를 선종하는 농군들의 모습을 생동하게 보여준 “똑또르르” 등 형상성 짙은 동요들을 창작해 냈다. 작품들은 재래식 7.5조의 전통식운률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담하게 새로운 운률의 조합을 창조함으로써 동요동시창작기법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했다. 이 동요들은 또 우수한 작곡가들과의 완벽한 호흡으로 맞추어져 노래로도 창작, 어린이들의 애창곡으로 널리 불려졌으며 몇새대를 거쳐 명동요로 자리매김하고있다. 60년대 연변으로 나와 연변문공단 부단장, 연변문련주비위원회 비서장, 연변사범학교 교원,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실 주임 등 사업에 투신했다. 동란시기 “잡귀신”으로 몰리워 농촌에 추방되기도 했다. 정책락실을 받은후 연변군중예술관에 전근되여 사업하다가 정년퇴직, 70고령이 넘은 1988년에 동요동시집 “고개길”을 펴내였고 1994년에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 종합시집 “인생의 고행길”을 펴냈다. 600여편의 작품을 발표, 동요동시,서정시, 민담, 평론, 회상기, 등 여러 쟝르를 아우러왔지만 아동문학에서 거둔 뛰여난 성과로 김례상선생은 아동문학가라는 정다운 지칭으로 정평이 나있다. 2005년 5월 31일 향용 즐겨 맞던 아동절을 하루 앞두고 향년 93세로 타계했다. 오늘 몇세대를 거쳐 우리의 동심을 두다렸던 동시인의 시비가 지성인들의 경모에 받들려 경립되였다.  우리가 무심코 거닐고있는 공원의 한 자락에 조용히 솟은 시비는 스모그(烟雾)에 찌들고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맑고 순수한 동심으로 순화시켜주고있다.     "종합신문" 2008/11/24  
110    시인 - 고 김성휘 댓글:  조회:4724  추천:0  2015-03-02
  김성휘 시비 모교에 재건     저명한 시인 김성휘시비재건제막식이 11월 22일, 시인의 모교 룡정고중에서 있었다. 사실주의 시문학의 한봉우리를 이루고 간 조선족문학의 대표적인 시인 김성휘를 기리기 위해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는 동인들의 모금으로  1994년 7월 22일, 시인의 모교인 룡정고중 정원에 김성휘시비를 세웠었다. 2003년, 룡정고중은 교내확장공사때문에 시비를 잠시 철거, 이번에  재건에 나섰다. 재건된 시비는 대리석으로 된 받침돌을 새로 축조하고 그우에   김성휘시인의 시 “시내물”을 음각한 전 시비를  복원했으며 시비 주위에  계단식란간을  둘렀다.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와 룡정고급중학교 주최로  된 시비재건제막식에는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 원로시인 설인을 비롯한 문인들과 시인의 유가족, 룡정고중 사생대표 100여명이 참가했다. 제막식에서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은 “김성휘시인은 중국조선족문단의 대표시인의 한사람으로 중국조선족문단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다”고 그의 공적을 치하했고 룡정고중 방송산부교장은 “김성휘시비 재건은 연변문단은 물론 유서깊은 룡정의 문화재 건설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시비재건의 의취를 밝혔다.  김성휘시인은 1933년 룡정시 백금향 동명촌에서 출생,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등 력임했으며 중국작가협회 회원, 1급작가로 활약했다. “나리꽃 피였네”, “들국화”, “금잔디”,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고향생각”, “흰옷 입은 사람아” 등 시집과 장편서사시 “사랑이여 너는 무엇이길래”,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등을 펴냈다. 제1, 2, 3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상을 수상, 20세기 중국소수민족100명작가평전에 그 이름이 수록되였다. 조선족의 서정시, 서정서사시, 장편서사시 창작과 젊은 시인 양성에서 큰 기여를 한 시인은 1990년 3월 25일 병으로 타계했다.   "종합신문" 08/11/30   김혁   제공:길림신문 |  고 조선족 저명한 시인 김성휘시비재건제막식이 11월 22일,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와 룡정고급중학교 주최로  설인 원로시인을 비롯한 30여명 문인과 김성휘시인 유가족, 룡정고중 사생대표 등 6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룡정고중에서 있었다. 룡정고중은 2003년, 운동장확장공사때문에 김성휘시비를 잠시 철거했다가 이번에  재건하면서 대리석으로 된 받침돌을 새로 축조하고 그우에   김성휘시인의 시 《시내물》을 음각한 전 시비를  복원,그리고 주위에  계단식란간을  만들어놓았다.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은 중국조선족문단의 대표시인의 한사람인 김성휘시인은 중국조선족문단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다면서 부단히 정품창작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 한 김성휘시인의 정신을 배워 우리 문단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룡정고중 방송산부교장은《김성휘시비재건제막식은 연변문단은 물론 유서깊은 룡정고중의 문화재를 건설하는데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제2기 졸업생인 김성휘시인은 생전에 모교의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돌렸다. 또한  룡정고중선배장학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는바 그것이 밑거름이 되여 장학회는 이미 620여명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발급하였고 교원들에게도 공로금을 발급하고있다. 룡정고중은 김성휘시인을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라고 했다.   조선족문학을 위해 혼신을 바친 김성휘시인을 기리기 위해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는 소속 위원들을 중심으로 시비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족문학계 100여명 동인들이 모금하는 형식으로  1994년 7월 22일, 시인의 모교인 룡정고중 정원에 김성휘시비를 세웠다. 김성휘시인은 1933년 룡정시 백금향 동명촌에서 출생,  1956년부터 1984년까지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1985년부터 1990년 3월까지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등 력임했으며 중국작가협회 회원, 1급작가로 활약했다.   《나리꽃 피였네》, 《들국화》, 《금잔디》,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고향생각》, 《흰옷 입은 사람아》, 《사랑이여 너는 무엇이길래》, 《결백한 사랑》(한어문), 《장백산아 이야기하라》(한어문) 등 시집을 출판했고 제1, 2, 3회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상을 수상했다. 1990년 3월 25일 김성휘시인은 병으로 타계했다.  김창희 기자                                             료녕의 첫 종합시집 과 력사적의의                                                                                                                                    리문호      료녕 민족출판사가 성립된지 이듬해 1978년 초봄이다. 심양의  먼지 바람은 초가집 곱새를 벗겨낼 정도로 세차게 불었다. 들에는 아직 파아란 풀 한포기도 보이지 않게 황량하고 삭막했다. 그러나 심양역 앞 화교려사에는  봄빛이 화창하였다. 유사 이래 료녕문인들의 첫시집 (이하 략칭 새봄)을 출판하려고 료녕민족출판사의 허경룡사장, 김창대. 김재현, 홍순갑 등의  주최하에 작품 토론회가 6일간 진행되였다. 때 마침 연변에 계시는 김성휘 시인님의 시집 가 출판되는지라 김성휘시인 님의 작품도 함게 토론되였다.          김성휘 시인님의 참석은 시 편집 경험이 부족한 료녕문인들에게는 커다란 고무가 아닐수 없었다.  은 137페이지 50수의 시로 구성되였으며 료녕 15명 문인의  시작품 23수가 수록되여있다. 료녕의 문인으로는 정철, 김재현, 김무길, 장동운, 림원휘,신현옥, 김명욱, 박병대, 등의 작품이며 연변의 시인들로는 김철, 김성휘, 리상각, 최문섭,김태갑 등 시인들이다    이 은 문화대혁명후 동북 3성의 첫 조선족 종합 시집임에 의미가 깊다 . 연변인민풀판사에서 김성휘 시인님이 편집한 는 79년에 출판되였으니까 말이다. 에도 우리 료녕의 문인 10명의 시가 수록되여 있다. 연변의 한 시인은 를 획기적인 시집이라 평가 하는데 비춰 불모의 땅 료녕에 의 출판은 더욱 큰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은 비록 정론시,숭배시, 송가가 주선을 이루고 있지만 료녕의 첫 종합시집이라는 점에서 깊은 발자국을 찍었으며 또한 선구자의 발자국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몇 십년후 혹은 백년후에도 문혁을 연구하는데 학술적 가치가 있는 시대의 숨결이 담긴 살아 있는 시라 말할수있다. 내가 이 을 이사를 몇번 하면서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다니는 원인은 내시가 수록된 원인도 있겠지만 기념적 가치가 더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지금 이 시집 천 팔백권 부수에서 많이는 변소간 수지 신세를 모면하지 못했을 것이며 아이들 딱지가 되여 땅 바닥을 치며 비명을 질럿을것이다. 지금은 몇권 남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   이 토론회의에서 김성휘 선생님에 대한 일화는 더욱 깊은 기억으로 남게된다.   김성휘 선생님은 술을 매우 좋아하셨다. 출판사 미술편집 홍순갑 선생님이 생활을 맏고 있으면서 회의 참석자들에게 구하기 힘든 인삼술 두병식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식당에서는 외빈들이 있기 때문에 금주로 규정되여 있는지라 안주도 없이 먼저 깡술을 마시고 내려가 식사를 하였다 . 후에 김명욱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20리길이나 되는 금가만 집에가서 된장을 끓여 한 간지미통 담아 왔었다. 그때는 되지고기라던가 계란은 구경도 못하는 시절이라 고작해야 파를 썰어두고 콩기름이나 몇방울 떨어 뜨리면 고소한 맛이 났다. 김성휘 선생님은 간지미통을 받아 높이 추겨 들고 환성을 올리며 방안을 빙빙돌며 하며 즉흥시를 읊었는데 정말 환성이 터져나올만큼 극적이였다. 그후부터 술안주가 생겨 김성휘 시인님은 흥미진진하게 술을 드셨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나의 몫을 그에게 드렸다. 식사하러 내려 가기전이면 김성휘 시인님은 꼭 내방에 찾어와 하고 부른다.  글쎄 수저도 없이 어떻게 된장으로 술마시는지 세상에서 가장 큰 우화가 아닐수없다. 세면실에 가서 손을 씻고 간지미통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술한잔 마시고는 쭉 빨고, 마시고는 또 쭉 빨고 , 김재현 선생님, 김창대 선생님, 홍순갑 선생님 등도 동참해서 술을 마시며 손가락을 간지통에 넣었다가 꺼내 쭉 빨군하였다. 좋다고, 재미있다고, 웃고 야단하는 장면은 아직 생생하다. 또한 시인들의 생활 모습이 담긴 한폭의 기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내가 이 일화를 쓰지 않으면 영원히 망각속에 잊어졌을지 모른다.    이 출판된지 이미 30년이 되였다. 이 책에 시를 실은 많은 분들은 문단을 떠났거나 세상을 하직하고 딴 나라로 갔다. 에 시를 발표한 료녕의 문인들은 시인이라 말할수 없는 근근히 문학 애호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은 시인 칭호를 받을수 있는 새세대의 유망한 시인들로 료녕의 시단을 장식하고 있으며 또한 질적 제고는 그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성숙의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점에 근거해 순수 료녕 시인의 종합시집 을 내올 때도 되지않았는가 생각된다 . 이 또하나의 시집을 내는데 뜻을 둔 기업가와 유지인들을 찾아야하며 시인들의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료녕의 시인들이여, 우리의 집념과 심혈과 고군분투로 을 이어 또 하나 획기적인 리정비를 세우자!                     
109    시인 - 리상각 댓글:  조회:4674  추천:0  2015-03-02
  리상각 시집 "아리랑 고개는 별고개" 출간     “아버지의 괴나리봇짐에 숨어/령넘어 왔네/어머니의 허리춤 쪽박에 매달려/물건너 왔네/수륙수천리 떠나온 노래/…/그 노래 들으며 벼알이 영글고/그 노래 들으며/나도 한뼘 두 뼘 자랐네” 원로시인 리상각(73)선생이 시집 “아리랑 고개는 별고개”를 펴냈다.   한국 정선아리랑학교를 통해 출간된 시집에는 “아리랑 노래” “백두 아리랑” “새 아리랑” “어머님 가르치신 정선아리랑” 등 민족 고유의 아리랑을 주제로 한 33편의 시가 시인의 필적과 함께 감동으로 다가온다.   시인 리상각   1936년 한국 강원도에서 태난 리시인은 1961년 연변대학 조문학과를 졸업, “샘물이 흐른다”, “두루미”, “별 많은 하늘아래” 등 30여권의 시집과 문집을 펴냈으며 월간지 “천지(현 “연변문학”)”주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직을 력임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09/1/19 대중문화의 새 장을 연 시인  기자: [김창희] [길림신문] 발표: [2008-03-15 오후 1:01:08]         리상각시인의 처음으로 되는  작품세미나 연길서 2008년 3월 14일, 조선족문단의 원로시인 리상각시인의 처음으로 되는  작품세미나 《리상각시인 근작문학작품좌담회》가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연변시인협회, 연변시조사의 공동주최로 연길호텔에서 열렸다. 세미나에는 연변지역 문인 70여명이 참석하고  리상각시인의 부인 김세영녀사와 차남 리동혁씨가 동석했다. 시가창작위원회 김영건위원장은 기조발언에서 《리상각시인은 우리 문학을 위해 일생을 살아온 문인의 한분이며 수십년간 〈연변문학〉주필을 력임하면서 후대양성에 막대한 기여를 한 공훈자의 한분이며 우리 시단의 대표적시인의 한분이다. 리시인은 자연과 생활을 소재로 항시 빛과 아름다움을 노래한  빛의 시인이며 전통시가의 민요풍과 음악성으로 시가예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면서 대중문화의 새로운 장을 연 시인이다. 》며 리상각시인의 문학행적을 개괄했다. 좌담회는 역설과 반어, 야유로 씌여진 리상각시인의 근작시집 《뼈다귀》, 부인과의 순애보적 사랑 등  내용을 다룬 에세이집 《그대는 달》, 시조시집 《유혹》 등 세부의 작품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연변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은 《리상각의 시를 론함》이란 평론에서 《리상각시문학의 주제풍향에서 또 하나의 이채를 보여주고있는것은 풍자와 해학을 통한 인륜도덕과 사회의 그릇된 풍조에 대한 비판이다. 리상각 시백은 옛 지성인들의 올곧은 뜻을 귀감으로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은 어지롭고 복잡한 세상, 어디서나 볼수 있는 추하고 고약한 현상에 비분강개를 참지 못해 비판적지성으로 나타나 풍자적 메타포를 동원한 저항시인 풍자시 창출의 급물살을 일궈냈다》며 리시인의 근작시작품의 성향을 밝혔다. 연변대학 김관웅교수는 《리상각 시백의 창작경향의 변화양상을 론함》이란 평론에서 리상각시인의 근작시작품들을 보면 《1990년대의 정감을 려과없이 직설적으로 드러내던 랑만주의적 정서표현에서 탈피하여 상징적수법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시의 이미지화작업에 의식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면서 단순한 이미지화가 아닌 사상과 정감의 표현을 동시에 지극히 중시하고있다.》고 했다. 좌담회는 연변대학 김경훈교수의 《리상각 시조작품에 대해》, 등 평론과 김응준, 최룡관 등 시인들의 덕담적인 자유발언으로 이어졌다.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은 총화연설에서 리상각시인은 우리 조선족의 저명한 대표적 시인이며 50여년간 줄곧 시창작을 견지하면서 독자들에게 많은 수작들을 선사했으며 정직한 인품과 함께 만년에도 왕성한 창작력을 시사해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있다며 이번 좌담회가 우리 문단이 보다 조화로와지고 새로운 문학발전의 지평을 열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리상각시인은 현재까지 시전집 5권을 포함하여 30여권의 저서를 펴냈다.   출처(연변모이자 )    
108    시인 - 남영전 댓글:  조회:4511  추천:0  2015-03-02
  남영전 토템시창작과 연구 학계서 인기     남영전시인의 토템문화연구와 토템시가작품창작이 국내외 문학계에서 큰 관심을 보이며 주목 받고 있다.  “길림조선문”신문사, “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총편집도 맡고있는 남영전의 론문 "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게 주는 중요계시"는 지난해 10월, 중국관리과학원 "개혁개방30년 중국관리과학 우수학술성과 1등상"을 수상, 론문 전문이 “개혁개방30년 중국관리과학문헌”에 수록되였다.     남영전 시인     남영전시인은 “토템문화를 통해 민족의 문화심리의 심층구조가 형성되고 이 구조는 의식속에 잠재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며 자아와 본성을 상실해 가는 현대인들에게 토템 문화는 현대병을 치유할 수있는 샘물과도 같은것”이라고 주장한다. 남영전시인은 1986년부터 토템문화를 연구함과 아울러 토템시를 창작하기 시작, 20여년래 토템문화연구론문과 토템시작품들을 꾸준히 창작하여 “원융”, “신단나무”, “천지인” 등 토템시집 6권을 출판했다. 그의 토템시작품과 론문은 국내외에서 여러번 대상을 수상, 국내외 문학계, 학술계에는 그의 토템시와 토템문화론에 대한 연구활동이 활발하게 일고 있다.     남영전 토템 시집 "원융"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이미 130여편의 토템시연구에 관한 론문이 발표되였으며 중남민족대학, 수도사범대학, 장춘사범대학, 한국한림대학 등 유명대학과 학술단체들에서 "남영전토템시세미나"를 도합 5차 개최, “남영전토템시 감상과 분석”, “남영전토템시학”등 감상해제집, 론문집, 전문저서, 시가서예집, 전각집 등 11권이 출판되였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09/1/19 내가 보는 21세기 중국조선족문학의 흐름 남영전                 ▲ 중국조선족 저명한 시인, 전장백산문학지 남영전 사장 [서울=동북아신문] 들어가는 말    필자는 문학비평가가 아닌 시인의 신분으로 ‘21세기 중국조선족문학의 흐름’을 담론한다는 것은 분에 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다만 중국 개혁개방의 덕을 입어 1980년부터 문학동인들과 손잡고 조선족의 산재지구에서 대형 문학지《장백산》을 창간하여 30년을 경영해왔고 2005년부터 5년 동안《길림신문》의 직무를 겸했으며 2012년부터는 중국작가협회의 기관지 《민족문학》(조선문판)의 심독평을 하게 되다보니 조선족문단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일가견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번 세미나 주최측의 부탁으로 자신의 견해를 지면에 옮겨본다. 얼마간의 참고가치가 있다면 필자로서는 더없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작가의 사망이 가져다주는 충격   새천년에 들어서서 어찌된 일인지 중국조선족문단은 불행하게도 적지 않은 중요한 작가들을 잃는다. 2001년에 항일투사이고 노작가인 김학철선생(1916-2001)은 9월, 대학교수이고 문학이론과 비평가인 정판룡선생(1932-2001)은 10월, 시인이고 시비평가인 박화선생(1938-2001)은 12월, 세분이 선후로 인생을 마감하였다. 2003년부터 농촌제재로 소설창작에 활약했던 윤림호(1954-2003), 원로시인 임효원(1926-2006), 소설가 고신일(1942-2006), 소설가와 서예가인 김호근(1948-2007), 원로작가 유원무(1934-2008), 원로시인 이삼월(1933-2009), 민족의 발자취에 대한 작품을 많이 펴낸 작가 유연산(1956-2011), 노작가 이홍규(1927-2011), 아동문학가 최문섭(1942-2012), 소설가이고 문학활동가인 박성군(1945-2013), 시인이고 시비평가인 한춘(1943-2013), 노시인 설인(리성휘, 1921-2014) 등 10여명의 중요한 시인, 소설가들이 타계를 하였다. 이상 10여명의 시인, 소설가들은 조선족문단에서 영향이 비교적 큰 문인들이다. 특히 문단의 정신적 기둥이였고 작가들의 뒷심이 되었던 김학철 선생과 정판룡 교수의 타계는 조선족문학발전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그리고 시인으로서 또 시 비평을 하는 2중 신분을 지니셨던 조선족시단의 보귀한 존재이며 지난세기 90년대부터 주지시(主知詩)창작을 탐구하였고 시평에도 조예가 깊은 박화선생, 80년대 후반부터 현대시창작을 견지해왔고 시평에 활약했던 한춘선생의 타계는 조선족시단에 미봉할 수 없는 큰 충격이다. 민족의 발자취에 대한 작품을 많이 펴낸 유연산은 이미 완성한 작품보다 더 많은 양의 미완성고를 남기고 55세의 한창 나이에 타계를 했으니 조선족문단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   활기 띤 전기문학창작   21세기의 조선족문단은 전례 없는 전기문학 창작 붐이 일어난 것이 돋보인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지난세기 80-90년대에 조선족문단의 거두인 김학철선생의 전기문학 『‘항전별곡』(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3년),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문학과 지성사, 1995년), 정판룡 선생의 회고록 『고향 떠나 50년』(1990년부터 《장백산》과 《금호문화》에 2년좌우 연재, 1997년 민족출판사 제1판, 2000년 제2차 인쇄, 1996년 연변대학출판사에서 중문판 출판.), ‘나의 아내’(2000년《연변여성》 연재)가 조선족문단에 주는 감동과 계시가 컸었다. 그리고 젊은 작가 유연산이 21세기에 들어서서 민족의 발자취를 더듬고 역사인물을 찾는 인물전기『불멸의 지사 유자명 평전』, 『불멸의 지사 심여추 평전』. 『불멸의 영령 최채』, 『삼인삼색의 운명』,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등의 작품창작이 선두작용을 하였다. 문단의 중요한 작가들의 전기문학을 읽으면서 민족역사에 공헌이 있는 인물들의 정신에 감동을 받아 작가들은 인물전기창작에 관심을 가졌다. 사회와 문단에서 영향이 상대적으로 큰 작품들은 김호웅, 김해양의 『김학철 평전』(실천문학사, 2007.11), 이해영의 『청년 김학철과 그의 시대』(도서출판 역락, 2006. 10), 한족작가 우레(于雷)가 쓴 김학철 전기 『쇠지팽이 밑의 발자취(鐵拐下的足痕) 』(상,하. 작가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2013.8), 최국철의 『주덕해 평전』(민족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2012.8), 이혜선의 『정률성 평전』(민족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2013. 10), 한족작가 곡애국(曲愛國), 증범상(曾凡祥)의 『조남기전』(인민출판사, 2003년. 2004년 김성의 조선문으로 번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 김호웅의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조선족교육가 임민호』(재외동포재단, 2007년. 민족출판사 2008년), 허련순의 김진경 평전 『사랑주의』(홍성사, 2012.9), 김수영의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7.7) 등이 있다. 《장백산》잡지는 2012년 3호부터 2014년 4호까지 이혜선의 『정률성 평전』을 연재하였고 2014년 1호부터 허련순의 김진경 평전 『사랑주의』를 연재하고 있다. 《길림신문》은 2007년부터 전기인물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김수영), 『조남기전』(김성의 번역), 『주덕해 평전』(최국철)을 연재하였고 지금은 『정률성 평전』(이혜선)연재중이다. 《길림신문》은 2013년부터 ‘중국조선족 백년 백인’ 대형계열보도를 시작하여 2014년 10월 1일까지85인의 사적이 실렸다. 일인 일면 분양의 사적은 실상 간략한 인물전기다. 길림성 조선족 경제 과학기술 진흥총회는 2013년 7월부터 《흑룡강신문》, 《요령조선문보》, 《길림신문》, 연변TV방송국 등 국내 각 언론매체, 사회단체와 손잡고 ‘감동중국조선족걸출인물’ 평선 활동, 개혁개방 30년의 조선족사회를 점검하는 의의 있는 큰 행사를 가졌다. 그해 12월 20일, 연변TV방송국에서 선출된 20명 걸출인물시상식을 가졌고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요령조선문보’ 세 언론지는 동시에 걸출인물들의 사적을 실었는데 이 사적 역시 인물전기에 속한다. 이 두 활동의 인물사적은 모두 책자로 출판하게 된다. 전기문학창작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둔 한 젊은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1965년생인 김혁이다. 김혁은《장백산》에 연재하는 장편역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에 작가 강경애, 최서해, 김창걸,화가 한락연, 아동음악가 윤극영, 민간예술인 황구연의 인물전기가 발표되었고 금년부터 ‘중국민족’에 인물시리즈 ‘소설가 김혁의 조선족 인물사’가 연재되고 있다. 60만자 분양인 ‘윤동주 평전’은 《장백산》에서 2015년 1호부터 2017년 6호까지 3년 동안 연재를 한다. 김혁은 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중국조선족인물전 작업에 착수하여 이미 『주덕해의 이야기』(2011), 『한락연의 이야기』(2013)를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였고 『김학철 청소년전기』는 명년 연초에 출판하게 된다. 그리고 윤동주,정률성, 이화림, 이홍광, 양림, 이추악, 김염, 정판룡, 김약연, 강경애, 이상설, 홍범도 등 12명의 인물 전기를 펴내려 기획, 집필중이다. 북경의 민족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는 연합으로 방대한 ‘중국조선족명인평전시리즈’출판을 진행하고 있다. 유자명, 김염, 주덕해, 최채, 정률성, 석희만, 조득현 등의 평전은 이미 출판되었거나 혹은 육속 출판될 것이다. 조선족문단 전기문학창작의 뚜렷한 성과로 제10회(2008-2011)중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 평선에서 김호웅은 인물전기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조선족 교육가 임민호』작품으로, 심승철은 인물평전 『불멸의 영령 최채』등 번역 작품으로 국가급상의 수상의 영예를 받았다.   성숙한 소설 창작   21세기에 들어서서 소설창작은 지난세기 80-90년대에 활약했던 중견작가들에 의해 지속된다. 다만 그 시기 이름을 날렸던 몇몇 소설가들의 새로운 소설작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움을 남긴다. 이와 반면에 신인들이 많이 나타나 활약하고 있는 것이 또한 특점이기도 하다. 노작가중 임원춘(1937년-), 강효근(1935-) 두 분의 소설 창작이 돋보인다. 단편소설 ‘몽당치마’로 전국 우수단편소설 상을 받은 임원춘선생은 ‘골회’ 등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간행물에 발표하였고 2012년 1호부터 《장백산》에 장편소설 ‘그날의 25시’를 연재했으며 2011년 6월에『임원춘 소설선집』 전 5권(1, 2권 단편집, 3권 중편집, 4권 장편소설 『오랑캐령』, 5권 장편소설『족보』)를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지난날 이미 중단편소설집 『정신 있소』, 『꽃피는 시절』, 『둥지를 떠난 새』, 『살아 숨 쉬는 상흔』, 『객귀』, 『혼자 사는 여의사』를 펴낸 강효근선생은 새시기에 장편소설 창작에 몰두한다. 그는 토지개혁시기의 현실을 반영한 장편소설 ‘산 넘어 강’을 《장백산》에 연재를 하였고 이 작품이 《장백산》의 상을 받아 2011년 4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또 자신이 장기간 은행에서 사업한 경력으로 금융제재를 다룬 장편소설 ‘욕망의 한계’를 완성하여 《연변문학》에 연재하였고 2014년 3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을 하였다. 하련순(1955-), 이혜선(1956-)은 소설 창작에 활약한 여류작가다. 허련순은 소설창작과 극본창작을 병행하는 작가로서 21세기 첫해인 2000년 10월, 《장백산》에 연재한 장편소설 『뻐꾸기는 울어도』가 《장백산》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어 이 작품이 요령민족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그 후 그는 또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를 펴냈고 장편소설 『중국색시』는 《연변문학》에 연재를 하였다. 그의 단편 ‘거미를 살려줘’, ‘사슬은 끊을 수 있는가’(중문번역)는 각기 2012, 2013년 ‘민족문학’ 소설 상을 수상하였다. 이혜선은 새천년에 들어서서 중문으로 번역된 장편소설 『빨간 그림자(紅胡蝶) 』로 제7회(1999-2001)중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을 받았고 장편소설 『생명』, 소설집 『푸른 잎은 떨어졌다』, 『야경으로 가는 여자』를 출판하였다. 한국에서 아동소설 『폭죽소리』, 『사과배 아이들』, 『자유 찾아 만 리길―김학철 이야기』, 장편르포 『코리안 드림』, 『코리안 드림, 그 희망과 방황의 보고서』,『두만강의 충청도 아리랑』 등을 출간하였다. 조선족의 이민역사를 반영한 장편소설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던 최홍일(1954-)은 다년간의 고심 끝에 2013년 9월, 『눈물 젖은 두만강』 속편, 대하소설 『용정별곡』(1, 2부 연변인민출판)을 세상에 내놓았다. 세천년에 들어서서 소설가 리동렬(1957-)은 왕성한 창작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장편소설 《고요한 도시》(2000), 《낙화유수》(2006)를 펴낸다음 중단편소설집 《눈꽃서정》, 《토양대》 등을 출간하였다. 그는 현재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장, 《동북아신문》사장, 《동포문학》발행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1999년에 장편소설 『간도전설』과 소설집 『여름은 추운 계절』을 출판한 최국철(1962-)은 2010년에 장편소설 『광복의 후예들』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2013년 3호 《민족문학》(조선문판)에 실린 단편소설 ‘왕씨’로 2013년 ‘민족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문단에서 농민작가로 불리우는 박선석(1945-)의 소설은 백성들이 즐겨 읽는 작품이다. 그는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자랐고 농사를 지으면서 지금까지 왕성한 소설 창작을 하는 작가다. 농촌의 문화대혁명을 반영한 그의 장편소설 『쓴웃음』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문단에서도 높이 평가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장백산》에 6 년 반 연재되었고 상, 중, 하3권으로 출판된 다음 제8회(2002-2004)중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그는 또 농업합작화로부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농촌사를 다룬 『재해』를 《장백산》에 연재하였고 지금은 토지개혁 때의 농촌사를 다룬 『압록강』을 《장백산》에 연재중이다. 새천년에 들어서서 조선족문단에는 소설을 들고 나오는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60후’의 박옥남(1963-), ‘70후’의 구호준(1972-), 조용기(1972-), 김춘택(1972-), 김금희(1979-), 박은희(1978-),주향숙(1975-), 김영해(1975-), ‘80후’의 김서연(1983-), ‘90후’의 한영남(1997-), 박초란(1996-) 등 신인들이 점점 활약해지는 것이 기꺼운 일이다. 박옥남(1963-)의 소설창작을 두고 천상규(한영남)는 이런 비평 글을 썼다. “요즘의 몇 안 되는 조선족문학잡지와 신문들에서 박옥남은 단연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만큼 박옥남은 우리의 팔도사투리들을 능란하게 구사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조선족작가이기 때문이다.”(‘팔도사투리로 엮어가는 중국 조선족 삶의 현주소―박옥남의 팔도사투리를 따라 그녀의 고향을 가다’ 《‘도라지》, 2012년 3호) 박은희(1978-)의 단편소설 ‘바람의 뜰’, ‘네 번째 맞선’, 수필 ‘어느 지루한 날의 지루한 이야기’를 두고 비평가 최삼룡 선생은 “소설을 시처럼 쓰고 수필을 소설처럼 쓰는 수준의 제고는 우리 작가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과시한다는 것이 박은희의 근작을 읽는 필자의 생각이다”고 하였다(‘사랑의 원근법, 상식과 인습에 대한 역설―박은희의 근작을 놓고’, 《도라지》, 2013년 6호). 김금희(1979-)의 소설 창작에 대하여 박사연구생 노신주는 이런 평가를 한다. 김금희는 “신진작가답게 당대사회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근대성을 중심으로 사회를 파악하고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여기서 근대성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성찰적 태도와 작가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이는 격변기를 겪는 우리 사회에 던진 일종의 각성의 메시지가 된다 하겠다.”(‘김금희 소설의 근대성 성찰’, 《장백산》, 2014년 4호) 김춘택(1972-)의 단편소설 ‘뱀과 남자(蛇郞)’를 놓고 비평가 최삼룡 선생은 “김춘택의 치열한 문학정신과 독특한 창작발상에 대하여 크게 치하하고 싶은 마음”이며 “김춘택의 끈질긴 자아성찰의 의지와 치열한 문학정신에 감동된다”하였다(‘치열한 문학정신과 독창적인 창작발상’, 《도라지》, 2013년 3호). 박초란(1996-)의 단편소설 ‘수박사냥꾼’, ‘빨간 벽돌’ 등 근작 4편을 두고 비평가 최삼룡 선생은 이런 말을 하였다. “근년래 북경에서 야심찬 작품 활동을 벌리고 있는 박초란의 소설은 그 인성탐구의 깊이와 그 방법과 수법의 독창성으로 하여 필자의 주의를 끌고 있다.” “우리의 민족문화의 여건에서 사람들이 박초란씨의 작품을 어떻게 대하는가도 문제지만 창조주체가 이 처절한 실험을 어디까지 끌고 나가는가는 더 큰 문제일 것이다”(‘한 개체의 파편화된 실존과 상실된 자아―박초란의 근작 4편에 붙여’,《도라지》, 2013년 4호). 구호준(1972-)은 특이하게 소설을 수개하는 젊은 작가다. 그는 소설을 수개할 때면 언제나 컴퓨터에 저장된 처음의 원고를 지워버리고 다시 사작하여 새롭게 쓴다. 이렇게 새로 쓰기를 거듭하여 마음에 드는 최종 완성고를 내놓는다. 그의 중편소설집 《사랑의 류통기간》에 수록된 작품은 모두 이렇게 완성된 작품이다. 우리 문단에 특이한 형상이라 해야 할것이다. 젊은 소설가중에서 현재 연변작가협회 소설 창작위원회 주임으로 있는 김혁(1965-)의 소설 창작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지난세기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연변인민출판사, 1999),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연변인민출판사, 1998)를 펴냈고 새천년에 들어서서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연변문학》, 2010년 연재), 『마마꽃 응달에 피다』(상해원동출판사, 2014),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연변문학》, 2003년 연재), 『완용황후』(《도라지》, 2013년 연재)를 펴냈고 명년 (2015)부터 《연변문학》에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을 연재한다. 그는 현재 장편소설 『무성시대(火焰) 』가 2013년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 중점지지 작품에 당선되어 집필중이다. 장편창작 외 그는 또 수십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그의 작품은 윤동주 문학상, 김학철 문학상, 《연변문학》상(2차), 《장백산》문학상(2차), 《도라지》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2차), 《길림신문》‘두만강’문학상, 《흑룡강신문》 ‘한얼’문학상 대상,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문학상, 주정부 ‘진달래’문학상(2차), 한국재외동포재단 한민족 청년상, 한국계몽사 해외문학상 등 30여차 수상을 하였다. 비평가 조성일 선생은 김혁의 창작을 두고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장백산》, 2014년 2호) 하였다. 형상적인 적절한 비유다. 2014년 10월 19일,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의 지지와 후원으로 연변작가협회, 중앙민족대학, 연변대학은 공동으로 “50후”소설가작품연구세미나를 연길에서 가졌다. 허련순(1955-)의 소설작품에 대하여 연변대학교수 김관웅은 《중국조선족 페미니즘, 디아스포라문학의 선두주자 허련순의 소설세계》, 연변대학박사생 김미란은 《디아스포라의 치유와 소통의 꿈을 담은》 론문을 발표하였다. 리혜선(1956-)의 소설작품에 대하여 연변대학교수 김경훈은 《리혜선의 작품세계를 말하다- 녀성 인물형상을 중심으로》, 평론가 조일남은 《가족과 운명, 그리고-리혜선의  관견》론문을 발표하였다. 최홍일(1954-)의 소설작품에 대하여 영변대학교수 김호웅은 《치열한 작가의식과 철학적 안목- 최홍일의 중,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연변교육출판사 김호선생은 《최홍일의  소고》론문을 발표하였다. 리여천(1955-)의 소설작품에 대하여 연변대학교수 우상렬은 《리여천의 작품세계》, 북경제2외국어대학교수 김영옥은 《한 가족과 민족의 수난의 기록- 리여천의 소설세계》론문을 발표하였다. 우광훈(1955-)의 소설작품에 대하여 연변대학교수 리광일은 《인간과 자연의 관련속에서의 우광훈의 소설- 중,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흑룡강대학교수 리태복은 《실존의 본연을 찾기 위한 ‘흔적’ 만들기와 지우기- 우광훈의 장편소설 을 앞에 두고》론문을 발표하였다. 이번 세미나에서 “50후” 5명 소설가들의 소설작품세계를 집중조명하였고 기타 참석자들도 열렬한 발언을 하였다.   부단히 탐구하는 시문학   조선족시단은 시인들이 부단히 탐구를 하고 자주 쟁론이 벌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1987년 김정호가 쓴 모더니즘 시 ‘추억’을 두고 시단에는 쟁론이 있었다. 이 쟁론을 통해 많은 시인들은 사상을 해방했고 문학의 본연을 추구하며 창작기법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그때부터 많은 시인들이 나름대로 탐구의 길에 들어선다. 시인 박화는 주지시를 주장하면서 탐구에 열중하였고 시인 한춘은 현대식창작을 고수하면서 흑룡강의 젊은 시인들을 이끌었다. 그중의 조광명은 선시(禪詩 )창작을 탐구하여 적지 않은 시편들을 내놓았다. 새천년에 들어서서 조선족시단은 탐구를 계속하는 것이 돋보이고 쟁론도 활발히 진행되는 것이 기꺼운 일이다. 김파는 1986년부터 지(知), 정(情), 의(意) 3자를 융합한다는 입체시(立體詩)를 들고 나온 시인이다.그때 비록 문단에서는 약간의 부정적인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는 탐구를 게을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하여 탐구작 시집을 내놓았다. 『대륙에 묻혀있는 섬』(동아출판, 1988.12), 『겨울나비』(명문당, 1992.12), 『하얀 메아리 새』(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년 2월), 『보랏빛 이유』(요령민족출판사, 2004년 8월), 『태양의 종소리』(연변인민출판사, 2005년 10월), 『프리즘 속에 비낀 풍경』(연변인민출판사, 2008년 1월) 등 탐구작 시집을 펴냈고 2005년 4월 에는 『입체시론』(요령민족출판사)을 출판하였다. 그의 시 탐구는 한국의 비평가 임헌영선생과 노시인 고은선생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고은선생은 김파의 시집 『대륙에 묻혀있는 섬』의 발문에서 “시 ‘소라의 슬픔’은 퍽이나 소녀 적이다.소녀 적인 정서 안에 담겨진 우주관은 달관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는 순전히 언어에 부딪치는 주지적 감각시로서 이것이 곧 김파 시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고은선생이 긍정하는 ‘소라의 슬픔’을 옮겨본다.   썰물이 너를 버리고 갔구나 작은 발자국에 고였던 물 해가 홀짝 마셔버렸으니 울어도 소리 없는 생명이여 애들의 여린 웃음소리에 미물의 영혼 하늘에 오르고 이승에 남아 휘파람 부는 껍질 소꿉놀이 파란 꿈만 담겼구나 ―시 ‘소라의 슬픔’ 전문   문학평론가 최삼룡 선생은 장기간 김파의 시 창작을 지켜보고 그와의 대화를 여러 번 가진 다음 시인과 시작품을 연구한 ‘『김파론』(도서출판 백암, 2010년 10월)을 펴냈다. 최룡관 시인은 지난세기 90년대 후반기부터 시의 이미지에 모를 박고 시를 쓰고 연구를 하면서 21세기에 들어서서 ‘이미지시 창작론’을 《장백산》에 4개 부문을, 《도라지》에 2개 부문을 발표하였다. 2003년에 이 창작론을 둘러싸고 문단에서는 쟁론이 있었지만 시인은 연변작가협회 민족문학원 제5기 문학강습반에서 ‘이미지시 창작론’을 강의하면서 청년시인들의 시창작을 지도하여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시의 문외한이었던 심명주가 시의 이미지를 파고들면서 반년 만에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을 따내었고 심예란이 ‘제22차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우수상을 획득하였고 그 뒤에 또 박춘월이 《연변일보》 ‘해란강’ 부간을 통하여 ‘CJ’문학상을 획득하였으며 심명주와 심예란이 ‘정지용 문학상’을 따내어 각기 시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최룡관 시인이 제창하는 이미지시란 미국의 루이스가 말하는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묘사된 언어의 그림”, 영국의 시드니가 말하는 “시는 말하는 그림”, 한국의 문덕수가 말하는 “글로 그린 그림” 또는 “언어의 회화”이다. 최룡관 시인은 이미지시를 제창하면서 자신도 이미지시를 많이 썼었다. 그의 시 ‘바다의 아침’을 지면에 옮긴다.   하얀 백마떼들 질주하는 파란 잔디밭에 갈매기들 오선보 그으며 음표를 늘인다 백사장으로 달려왔던 백마들은 갈매기들 지은 노래 배우려고 다시 하늘가로 달려간다 머나먼 잔디밭에 샛노란 태양이 떨어지면 백마들 부르는 찬송가소리가 건뜻 하늘을 들어올린다 ―시 ‘바다의 아침’ 전문   최룡관 시인은 2007년 4월에 『이미지시 창작론』(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을 출판하였고 2009년 10월에 『최룡관 문집』(전 4권,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시집 『사랑링크』, 『이미지시 창작론』, 동화시집 『다리 하나 놓자야』, 기행문집 『연길-카스 2만리 기행』)을 펴냈으며 2012년에는 『최룡관 시선집』(연변인민출판사)을 출간하였다. 이 몇 년간 최룡관 시인은 또 하이퍼시를 창도하고 있다. “하이퍼시는 우리와 해외의 시풍을 접목시키는 일이며, 21세기 세계시의 새로운 흐름과 발걸음을 함께 하는 작업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이퍼시란 다선시라고 하고 디지털시라고도 한다. 하이퍼텍스트문학은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개척자 테드넬슨이 만든 말이다. 하이퍼시는 조지•P란도의 ‘하이퍼텍스트’(1992)라는 책에서 란도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이 말을 한국시단에 처음 도입해서 쓴 사람은 문덕수시인과 하이퍼시 동인들(심상운, 김규화, 오남구)이라고 한다. 최룡관 시인은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소개하면서 자신도 이런 시를 내놓았고 시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을 이끌었다. 2013년 10월에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문고의 명의로 시집 ‘비비(飛飛)’를 펴냈다. 이 시집에는 ‘연변 하이퍼시편’란에 강동한, 김견, 김승종, 김철호, 여순희, 박장길, 방산옥, 방순애, 신금화, 심예란, 정두민, 최려나, 최룡관, 허옥진, 황희숙 등 15명, 매인 5수, 도합 75수의 하이퍼시가 실렸고 ‘한국 하이퍼시’란에 강영은 고종목, 김규화, 김금아, 김기덕, 김은자, 문덕수, 박이정, 손해일, 송시월, 신규호, 심상운 등 12명 시인의 12수의 시를 선보였다. 그리고 ‘하이퍼시즌’란에 최룡관의 ‘하이퍼시에 대한 탐색’, 조지•P란도의 ‘하이퍼시 텍스트3.0’, 이선의 ‘하이퍼시 창작기법연구’를 실었다. 여기서 최룡관의 하이퍼시 ‘비’를 옮긴다.   하늘의 이발이 와르르 내려와 보송보송한 땅을 뭉텅뭉텅 씹어 삼킨다 만리장성위에 여러 색 꽃물결이 사품치고 태양은 무수한 빨대로 땅이며 풀이며 나무의 물을 빨아 목을 추기다 시인은 사물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징검다리를 놓아주고 있다 땀방울이 뚝뚝 이마에서 떨어진다 ― ‘비’ 전문   줄곧 입체시를 탐구하던 김파시인은 이 몇 년간 또 하이퍼시를 탐구하여 200여수의 시로 작품집을 묶는다고 한다. 하이퍼시의 탄생은 조선족시단의 하나의 화제가 되고 있다. 조선족시단에서 쟁론이 제일 활발했고 또 쟁론시간이 긴 것은 필자의 토템시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2006년 8월부터 시작되어 근 4년 지속되었다. 쟁론의 핵심은 2003년에 출판된 42수의 토템시집 『원융』을 놓고 우리 민족 속에 무슨 토템물이 그리도 많은가 하는 문제였다. 실상 이것은 토템이란 무엇인가, 우리 민족 속에서 토템을 어떻게 찾는가, 성씨와 토템은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 민족학, 인류학적인 문제이다. 한 개 민족의 토템물 수량의 여하는 그 민족 성원들 성씨의 많고 적음, 역사의 길고 짧음, 민속신앙의 풍부와 빈약을 말해주는 것이다.때문에 역사가 유구할수록, 민족성원의 성씨가 많을수록, 토템물이 많고, 민속신앙이 다채롭고 풍부하기에 그 민족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자랑스러운 민족이 되는 것이다. 토템시에 대한 쟁론은 우리 민족을 이해하는 좋은 장을 열어놓은 셈이다. 쟁론에서 승자나 패자는 없는 것이다. 부동한 견해 모두 하나의 등불을 밝히는 원동력이다. 필자는 특히 반론에 감사한 마음이다. 반론이 있기에 독자들의 흥취를 자아냈고 반론이 있기에 쟁론은 심도가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반론자,찬론자 모두 공로자이다. 어차피 토템시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지간의 조화, 인류의 평화를 호소하는 것으로 세미나나, 쟁론은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족문단에서는 4차례의 세미나가 있었고, 한국 한림대, 부경대의 주선으로 4차례의 한중세미나를 가졌으며 중국주류문단은 나름대로의 흥취로 4차례의 세미나가 있었다. 하나의 시작품을 두고 12차례의 세미나가 있었다는 것은 작자로서는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기꺼운 일이 있다. 현하 한국학계는 성씨문화연구에 관심을 돌려 적지 않은 연구서적들이 나왔다. 그중 일부를 나열하면 조상신 연구가 김문순의 『조상성씨의 세계』(도서출판 답게, 2009년 3월), 서해숙의 『한국성씨의 기원과 신화』(민속원, 2005년 12월), 김정호의 『한국의 귀화성씨―성씨로 본 우리 민족의 구성』(지식산업사, 2003년 12월), 박기현의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성씨』(역사의 아침, 2007년 3월), 김정현의 《김씨姓 이야기》(보고사, 2013년 9월) 등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우리 민족의 구성을 이해하고 민족의 토템물을 이해하는데 좋은 계시를 주고 있다. 자신이 자신을 알고 자기의 민족을 진정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넓지 않은 조선족시단, 시인들의 탐구와 학계의 쟁론은 시문학 발전에 특수한 의의를 가지는 좋은 현상이다. 조선족시단은 이러한 풍경 속에서 점차 성숙의 길로 나갈 것이다. 요즈음, 조선족시단에는 또 좋은 일 하나가 있다. 최룡관(1944-)시인의 주선으로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은 길림성 조선족 경제 과학기술 진흥총회의 경제지원으로 조선족시단의 원로시인 김철(1932-), 김응준(1934-), 조룡남(1935-), 이상각(1936-) 네 분의 공적을 기리는 ‘시스승님상’ 시상식을 10월 18일 연변에서 가졌다.   인기 있는 수필문학   수필창작은 지난세기 90년대부터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새천년에 들어서서는 작가들이 즐겨 쓰는 장르로 되었다. 조선족문단에서 최초에 수필의 매력을 보여준 작가는 양은희와 남영도(남복실)이다. 신문사에 직업을 둔 양은희는 드넓은 시야, 다양한 생활내용, 독특한 구상, 재치 있는 글 솜씨로 수필의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선사하였다.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남복실은 진지한 감정과 참신한 글 솜씨로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들의 영향으로 많은 작가, 특히 여성작가들이 수필을 쓰는 붐이 일어났다. 제8회(2002-2004)중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 평선에서 이선희의 수필집 『어머니의 사랑』이 선참으로 수상의 영예를 지녔다. 제10회(2008-2011)중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 평선에서 장정일의 수필집 『세모의 설레임』(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0월)은 명액의 제한으로 아쉽게도 수상작으로 선정되지는 못하였지만 조선족문단의 수필의 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현하, 조선족의 어느 잡지나 신문을 물론하고 수필작품이 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인이든, 소설가든, 비평가든 느낌과 감촉이 있을 때 흔히 수필로 표현한다. 독자들도 짧은 수필을 즐겨 읽는다. 적지 않은 작자들은 수필창작을 고수하고 또 수필창작의 성과로 작가의 신분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수필장르는 조선족문단에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지속적인 창작풍기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간행물에서는 작가들의 수필작품을 집중조명하는 붐도 일어나고 있다. 《장백산》은 다년간 매호마다 ‘계열수필’란을 설치하여 한 작가의 수필작품을 집중조명한다. 금년(2014)의 경우를 보면 이러하다. 《장백산》 1호에 서정순의 계열수필 ‘열사흘, 딸과 함께 했던 나날들’을 싣고, 이진윤의 수필평 ‘정에 얽혀 정으로 엮는 사랑노래’를 발표하였다. 《장백산》 2호에 채복숙의 수필 ‘가을바람 소슬하니 술 데우고 친구 부르자’(외 3편)에 최학송의 수필평 ‘불혹의 사색과 포용’이 실렸다. 《장백산》 3호에 금이(김금희)의 수필 ‘나의 땅강아지’(외 2편)에 노신주의 수필평 ‘인간성에 대한 사색과 관조’가 실렸다. 《장백산》 4호에 김영옥의 수필 ‘푸른 하늘을 꿈꾸며’(외 3편)에 우상렬의 수필평 ‘김영옥의 수필 삼매경’이 실렸다. 《장백산》 5호에 구호준의 수필 ‘밤의 여행자’(외 2편)에 유려의 수필평 ‘답을 찾고 있는 즐거운 여행자’를 실었다. 이번호에 조선족고급간부로서 조선족사회의 인기를 모은 신봉철의 수필 ‘어머니를 그리며’(외 4편), 그리고 신봉철인상기인 남영전의 ‘신봉철현상의 계시’, 남명옥의 ‘현명한 지도간부―신봉철 서기’를 ‘기획조명―작자와 작품’란에 실어 조선족사회에 좋은 반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도라지》는 해마다 한해 본 지면에 발표된 수필작품을 한번 돌이켜보는 총화의 평을 싣는다. 조선족문단에서 짧게 쓰는 수필이 그 편폭이 늘어남에 따라 ‘중편수필’이란 호칭이 달리기도 한다.《도라지》(2012년 1호)에 발표된 조광명의 중편수필 ‘기록: 2012년 2월 20일 전화사연’, 동년 6호에 발표된 이홍규의 중편수필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가 그 사례로 된다. 조선족문단에서는 모든 작가가 다 수필을 즐겨 쓰고 해외에 있는 조선족작가들의 수필도 종종 여러 간행물에 얼굴을 보인다. 1997년부터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엄정자는 2011년 8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를 펴내기도 하였다.   민족작가 수작의 교류의 장 《민족문학》(조선문판)   《민족문학》(조선문판)은 중국작가협회의 기관지인 《민족문학》잡지사가 소수민족모어창작을 격려하고 모어독자들을 위해 중앙관계부문의 비준과 경제지원을 받아 2009년에 몽골어, 장어, 위글어, 세 개 문판의 잡지를 펴낸 다음 2012년에 까자흐어판 잡지와 함께 창간된 중국 5개 소수민족어판 잡지중의 하나로서 국가급 잡지에 속한다. 《민족문학》(조문판)은 격월간으로 매호에 ‘명작감상’, ‘특별추천’, ‘모어창작 작품’, ‘우수민족작품’, ‘평론’ 등 다양한 종목내용을 설치하여 한족을 포함한 여러 민족의 수작을 발표하고 ‘세계문학’난에 1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과 그의 창작세계를 소개한다. ‘모어창작 작품’에 게재되는 조선족의 작품은 조선문 잡지와 신문에 발표된 작품 중에서 선정된다. 금년 10월까지 《민족문학》(조선문판)은 도합 13권이 출판되었다. 2012년 《민족문학》(조선문판) 창간호(9월-10월)의 ‘특집’난에 《민족문학》의 전임주필, 노시인 김철선생의 시 ‘명상’(외 3수), 그의 창작담 ‘갈피 없는 나의 생각’, 그리고 김형직의 평론 ‘시인 김철의 생애와 창작의 길’을 실었다. ‘소설’난에 허련순의 ‘거미를 살려줘’, 채운산의 ‘땅의 자식들’이 발표되었고‘시’란에 《인민일보》의 수상작 남영전의 시 ‘인간의 정’이 실렸다. 2012년 제2호(11월-12월) 《민족문학》(조선문판)에는 “제10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특집”난에 김호웅의 수상작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조선족교육가 임민호』(발취), ‘소설’난에《민족문학》의 수상작 김인순의 ‘오동’이 실렸다. 《민족문학》(조선문판)은 2013년 제1호부터 ‘모어창작’난을 설치하여 당해에 매호 2편의 모어작품을 채용했고 2014년부터는 3편으로 늘어났고 많을 때는 5편까지 실었다. 모어란에 발표된 작품이 많지 않기에 장르별로 2013년 1호부터 금년 5호까지의 모어작품을 한번 나열해본다. 단편소설, 2013년: ‘유목민들’(김서연, 2호), ‘왕씨’(최국철, 3호), ‘참새’(소리, 5호), ‘소리가 보이니?’(김영해, 6호). 2014년: ‘아B정전’(허련순, 1호), ‘바위벌레’(박옥남, 2호), ‘추(醜)의 이중협주곡’(박은희, 3호), ‘판도라의 상자’(박초란, 4호), ‘반편들의 잔치’(강재희 5호). 수필, 2013년: ‘진달래’(이태근, 1호), ‘나는 60억을 왕따시켰다’(한영남, 2호), ‘어머니의 사월 초파일’(강용운, 3호), ‘시인보다 가난한 라면은 없다’(조광명, 5호), ‘목동의 눈 속에도 소가 있네’(양영철). 214년 ‘망월송’(임선자, 1호), ‘사랑은 뭘 먹고 사나?’(이홍규, 2호), ‘400년과 만나다’(김홍란, 2호), ‘겨울 수채화에는 그리움이 물들고’(이화, 3호), ‘막걸리 한잔 하실래요’(전연, 4호). ‘풋강냉이’(이춘열, 5호). 시작품, 2013년: ‘지는 장미 앞에서’(박경상, 1호), ‘위태로운 마침표’(조광명, 6호). 2014년: ‘깨어난 빛은(외 1후)’(석화, 1호), ‘시간(외 6수)’(이임원, 1호), ‘춘삼월(외 1수)’(김혁일, 2호), ‘서탑’(김창영, 2호), ‘중국의 꿈’ 공모 작품 수상작 시 ‘희망과 꿈’(남영전, 2호), ‘시계(외 3수)’(최화길, 3호), ‘섬의 여인’(김옥결, 4호), ‘민들레(외 1수)’(강효삼, 5호), ‘못박힌 긴 영원(외 1수)’(김파, 5호). 《민족문학》(조선문판)은 매년 모어우수작과 우수역작(한어 조선어 번역)을 평선하고 시상식을 가진다. 2012년의 수상작은 허련순의 소설 ‘거미를 살려줘’(창간호), 남복실의 수필역작 ‘장마철’(2호), 이범수의 시역작 ‘나의 전서’(2호). 2013년의 수상작은 최국철의 소설 ‘왕씨’(3호), 장춘식의 소설역작 ‘장미장원에서의 일곱밤’(2호), 김성우의 소설역작 ‘이제 가면 언제 오나’(3호). 《민족문학》(조선문판)은 또 중한문학교류의 장이다. 2012년 11월, 한국 언어문화교육진흥원 원장 소설가 신상성 교수(용인대)가 북경에서 《민족문학》잡지사를 방문하고 교류의사를 밝혀 창간호에 실린 철응(鐵凝, 한족)의 ‘기침 깇는 고니(咳嗽天鵝)’, 이시단쩡(益希丹增, 장족)의 ‘갈림길(向南還是向東)’, 2013년 2호 예메이(葉梅,투쟈족)의 ‘장미정원의 일곱밤(玫瑰莊園的七個夜晩)’ 세편의 단편소설을 아시아문학 콩쿠르상 수상작으로 선정하고 2013년 4월에 ‘2013년 아시아대표문제소설’(창조문학사)를 펴냈다. 2013년 4호 ‘민족문학’(조선문판)은 ‘한국문학작품특집’을 꾸려 김경희의 소설 ‘꽃배’, 신상성의 수필 ‘중국소수민족정서와 조화의 큰 마당’, 신수연의 평론 “한국에서의 ‘블랙스완’의 광폭성”, 그리고 6명 시인의 시작품, 장자통의 ‘나비가 된 대왕고래(외 1수)’, 임승민의 ‘언두부(외 1수)’, 이철현의‘철 잃은 넝쿨장미’, 정시언의 ‘나비효과(외 1수)’, 조성순의 ‘고등어(외 1수)’, 김금용의 ‘완전범죄’ 등이 실렸다. 2013년 7월 27일, 《민족문학》잡지사는 할빈에서 중한작가좌담회를 가졌다. 중국측에서는 작가, 번역 50여명, 한국측에서는 신상성 교수 일행 13명의 작가, 시인들이 참석하여 진지하고 열렬한 토론을 가졌다. 필자도 이 좌담회에서 ‘민족문학’(조선문판)에 대한 일가견을 이야기하였었다.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수상작   중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은 중국작가협회가 소수민족작가들의 수작을 표창하기 위하여 1982년에 설립한 국가급상이다. 이 상은 중국작가협회의 4대 문학상 중의 하나로서 모순문학상(장편소설), 노신문학상(중단편소설, 시, 산문, 실화, 평론, 번역), 아동문학상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는 상이다. 소수민족신분의 작자가 중국내의 정식간행물과 출판사에서 발표되거나 출판된 작품(모어, 중문창작)은 모두 평선에 참석할 자격을 가지고 한족작자의 소수민족어 중문번역 작품도 평심자격을 가진다. 이 상은 지난 제9회(2005-2007)까지 매 3년에 한번 진행되다가 제10회(2008-2011)부터는 4년에 한차례로 바뀌었다. 상금도 제9회까지 조금 낮았지만 제10회부터는 노신문학상, 아동문학상과 똑같이 인민폐 10만원으로 올렸다(장편소설 모순문학상은 상금 인민폐 50만원).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은 장편소설, 중단편소설, 시집, 산문집, 실화문학, 번역 등 장르를 망라한 상으로 제7회(1999-2001)까지 수상작의 수량이 많았지만 제8회(2002-2004)부터는 엄격히 매 장르에 5편(부)로 제한되었다. 새천년에 들어서서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조선족작자들의 수상작을 아래에 옮긴다. 제7회 소수민족문학 ‘준마상’(1999-2001) 이혜선의 장편소설 『빨간 나비』(중문) 고신일의 중단편소설집 『9월의 눈물』(조선문) 김학천의 시집 『세기지교의 고행』(중문) 이옥화의 조선문의 중문번역 제8회 소수민족문학 ‘준마상’(2002-2004) 박선석의 장편소설 『쓴웃음』(조선문) 남영전의 토템시집 『원융』(중문) 이선희의 산문집 『어머니의 사랑』(조선문) 제9회 소수민족문학 ‘준마상’(2005-2007) 김학송의 시집 『사람들 속에서 인정을 갈망하다』(조선문) 장춘식의 평론집 『일제점령시기 조선족이민문학』(조선문) 제10회 소수민족문학 ‘준마상’(2008-2011) 김인순의 장편소설 『춘향』(중문) 김호웅의 인물전기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조선족교육가 임민호』(조선문) 심승철의 조선문의 중문번역 필자는 제9, 10회 소수민족문학 ‘준마상’의 평심위원으로 평심과정을 통해 받은 감촉이 크다. 조선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중 인구수자로 12위에 있지만 인구비례로 따지면 타민족보다 작가들이 많은 편이고 작품의 질도 높다. 때문에 매번 모어수상작 2편(부)가 보장이 되고 중문작품은 전체평심위원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된다. 7회에서 10회까지 4회의 평심활동 중 중문으로 된 2부의 장편소설과 2부의 시집이 수상을 하였다. 제10회 ‘준마상’ 경우, 조선족의 수상작은 3편, 이 숫자는 소수민족 중 많은 인구를 가진 장족(5편), 몽골족(4편)보다 좀 적지만, 위글족의 3편과 맞먹는 숫자이다. 역시 많은 인구를 가진 만족과 회족은 각기 2편이고 까자흐족, 이족은 1편밖에 안 된다. 조선족의 문학창작은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활동에서 언제나 선두에 서있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맺는 말   이상으로 필자는 윤곽적으로 21세기 중국조선족문학의 흐름을 장르별로 살펴보았다. 보다시피 조선족문단은 점차 활발과 성숙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시인, 작가들 지간의 관계도 이해, 관용, 포옹의 길로 나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금후 조선족문학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어쩌다 보니 말이 빨랫줄처럼 길어졌다. 이쯤에서 끊는다.   2014년 10월 20일 장춘에서 (본고는 2014년 10월 31일~ 11월 1일, 한국공주대학 “중국조선족작가 초청포럼”에서의 발표문임)    남영전 약력   남영전, 1948년 길림성 휘남현 출생. 길림성작가연수학원 졸업. 미국세계문화예술원 영예문학박사, 대형문학 간행물 《장백산》잡지사, 《길림신문》사 사장 겸 총편집 역임. 현재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위원회 위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부회장,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회 부회장, 미국세계시인대회, 영국국제전기협회 종신회원,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연구원, 길림대학 문학원, 동북사범대학 상학원, 연변대학 사범학원 겸직교수, 제9, 10기 중국소수민족 문학 ‘준마상’ 평심위원. 1971년 중문시작품으로 중국문단 데뷔. 『상사집(相思集) 』, 『원융(圓融) 』, 『남영전 토템시집(南永前圖騰詩集) 』 등 시집 16권,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등 수필집 3권, 중국고전문학번역 『당송전기선집』, 『봉신당』 등 3부 출판. 3차례 국가급상인 전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 6차례 전국 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 4차례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상’ 등 50여차례 각종문학상 수상. 한국에서 《문예시대》‘제1회 해외동포문학상’, 호미예술제 ‘제1회 중국조선족문학상 본상’ 등 4차례 문학상 수상. 1986년이후 창작한 토템시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지간의 조화와 인류의 평화를 호소하는 새로운 시 장르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 지금까지 300여편의 논문이 국내외 간행물에 발표되었고 학자, 전문가들의 『남영전 토템시학』, 『남영전 토템시의 인류학경지』, 『남영전 토템시연구』 등 학술저서,논문집, 감상집, 서예시화집, 정각집 13권이 출판. 1995년 이래 국내외 10개 대학과 학술단체에서 12차례 ‘남영전 토템시 연구세미나’를 진행. 2009년 절강 호주사범학원에서 ‘남영전 토템시 연구’를 공공학과로 설치해 교수했고, 남영전 토템시 연구는 국내 일부 대학 석사, 박사 연구생의 졸업논문제목이 되었음. 2011년에는 남영전 토템시내용이 대학입시 작문모의시업제목으로도 선정되었음. 2014년 4월23일 ‘세계 독서날’을 맞아 길림성열독협회와 길림성작가협회는 남영전 토템시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我們從哪里來)’를 전민열독작품으로 선정하고 독서회를 진행, 5월9일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서 “남영전토템시문화축제”가 있었음. 1993년, 2003년 미국세계문화예술원에서 두 차례 문학영예박사 학위 수여, 영국, 미국세계명인전기센터에서 ‘20세기 성과상 메달’, ‘세계걸출인물메달’ 등 4개 메달 수여. 1995년부터 중국 국무원 특수수당금 획득, 2008년 길림성고급전문가로 평선, 2010년 중국당대 10대 걸출민족시인으로 당선, 2013년‘중국조선족 백년 백인’, 개혁개방 30년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로 평선.  
107    시인 - 김철 댓글:  조회:5141  추천:0  2015-03-02
  김철시인  전국소수민족작가특수공헌상 수상       김철시인이 문학신인 육성에 바친 로고로 전국소수민족작가특수공헌상을 수상했다. 시인 김철은 1932년 일본 시모노세끼 출생으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주석, 연변문련 주석 등 직을 맡아하다가1982년 중국작가협회로 전근,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월간지 주필을 력임했다.   세계예술축전 대상(1956년 모스크바), 세계문화명인성취상, 한국해외문학상, 국무원특수공헌상 등 상을 수상, 시집 30권을 출간했다.               김철 시인은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주필과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상무부회장을 지내던 기간 소수민족의 문학창작과 작가양성을 위하여 신강, 내몽골, 운남, 산동, 연변, 통화 등지에서 여러차례 창작문필회를 조직하였고 북경에서 전국소수민족작가회의를 성공적으로 소집하였다. 연변에서 북경에 전근되여간 초기에도 전국소수민족문학학원을 꾸려 여러 민족 문학신인들을 많이 육성해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09년 2월 23일   ♧ 추모수필 ♧  와 같은 그의 생애  김철 임효원하면 《길짱구》가 생각난다. 그이는 좋은 시들을 남겨놓고서 저세상으로 갔다. 생각하면 《길짱구》와 꼭같은 그의 생애, 어찌 보면 《길짱구》는 시인의 자화상일런지도 모른다. 광복후 송강성(지금의 흑룡강성)에서부터 정열에 넘치는 필을 든 청년시인― 임효원선생, 파란만장 그의 한생은 《길짱구》와 같이 밟히며 살아온, 문단의 불행한 축도라고도 말할수 있지 않을가. 반우파투쟁, 민족정풍, 《흰기》 뽑기, 영화 《무훈전비판》, 문화대혁명… 어느 하나도 그를 빼놓지 않았다. 무시무시했던 문예계의 비판운동가운데서 그는 번마다 된서리를 맞았고 번마다 또한 위험한 신세가 될번했으나 다행히도 그는 변두리를 스치며 겨우 살아남은 불행중 다행스런 인물이였다.  밟히면서도 머리 들고 살아온 인간, 그의 삶은 《길짱구》처럼 끈질긴 삶이였다. 그의 《길짱구》는 유린 당한 인간의 항변이기도 했다. 《길짱구》와 같이 짓밟히며 울부짖으며 살아온 우리 또래들의 한세대, 우리는 모두 《길짱구》의 친구들이 아닌가!  나와 임효원시인사이에는 지울수 없는 한토막의 추억이 있다. 1953년 초여름, 내가 지원군전사복을 입고 일자리를 찾아 연변으로 처음 왔을 때였다. 그때 임효원시인은 문단의 몇몇 동료들과 함께 연변문련을 창립하려고 준비사업에 분망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내가 그들을 찾아갔을 때 준비위원회 성원들은 최죽송사(후에 신풍대대) 어느 농민집 뒤골방에서 회의를 하고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배낭에 넣어 지고온 《전선시초》라는 자작시집 두권을 건네주면서 좀 보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튿날 나는 성부지명부지 아무런 련락도 없었던 신문사 사장(당시의 이름은 동북조선인민보였는데 후에 연변일보로 개칭)을 찾아갔다. 사장실에 들어서니 대머리가 훌렁 벗어진 50대 어른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왜 왔소?》  《나를 신문사에서 쓰지 않겠습니까?》  전사답게 거수경례를 하고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물론 지금처럼 누구를 통해 장황한 자기소개도 없었고 손에 든 술병 같은건 더더구나 없었다. 그런데 대방의 대답은 뜻밖이였다.  《쓰겠소!》  《예?》  도리여 내쪽에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분이 나를 어떻게 알고 쓰겠다 하실가?)  《정말입니까?》  《정말이요.》  《그럼 여기다 쓰겠다는 글쪽지 하나 써주십시오. 동북군구에 가서 정식수속을 해야 하니깐요.》  그 사장님은 또 두말없이 나를 받겠다는 글쪽지를 써주었다. 우리의 취직담판은 이렇게 끝났다. 이 당돌한 취직담판에 대한 의혹은 후에야 풀렸다. 바로 나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 임효원시인이였다.  그처럼 다망한 사업가운데서도 언젠가 내가 건네준 시집 《전선시초》를 읽고 임효원시인은 매우 높은 평가를 하였다 한다.  《참말 대단한 젊은이야. 앞으로 꼭 훌륭한 시인이 될수 있을거야!》  그리고는 이 소문을 문예계에 파다하게 퍼뜨렸는데 하루전에 리희일사장이 들었다는것이였다. 하여 리사장은 아무런 고려 없이 나를 신문기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임효원시인은 나의 문단생애가 시작되는 기자생활의 다리를 놓아준 고마운 분이였다.  그후 우리는 줄곧 한전선에서 일해온 한전호속의 전우였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눈 시우, 먼저 가신 그 길이 편하시기를 두손 모아 비는 간절한 마음이다.   2007년 1월호 ====================== 문학의 지평선 김철 사회주의새농촌을 건설하는 문제는 열기띤 화제이다. 이는 우리 당, 전국 인민, 그리고 우리 작가들앞에 나선 력사적과제이며 전당 전민이 실현해야 할 위대한 력사적사명이다.  그런데 현황은 어떠한가?  그동안 농촌이 우리 창작에서 소외되고있었다. 농민들이 우리곁을 떠나가고있다. 한동안 우리 작품의 주제가 많이는 도시로 옮겨졌고 농촌보다는 도시생활에 그 주의력이 쏠렸고 시에서는 큰 《나》요 작은 《나》요 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다. 우리 작가, 시인들에게는 차츰 농촌생활이 생소해지고 흥취도 적어졌다. 그러니 농민들이 우리곁을 떠날수밖에.  사회주의새농촌건설에서 새문화건설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처해있다. 그들의 관념도 변하고있다. 생활환경, 생활양식, 관념과 의식, 풍속과 세태, 전통과 혁신 모두가 탈바꿈을 하고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천지개벽》이라는 명사를 쓰고있다. 특히 조선족사회는 변화가 매우 크다. 백여년의 농경이민사에 종지부를 찍고 지금은 산업대진군을 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나고있으며 외국 로무수출과 농촌인구류동으로 하여 조선족농촌에는 심각한 사회문제들이 야기되고있다. 이 와중에서 우리 민족 농민들의 사상과 생활도 매우 복잡해졌고 현실과 미래, 그리고 삶을 두고 외면 못할 충돌과 변화가 일어나고있다. 희와 비, 희망과 우려가 한데 엉켜 생활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있다는 말이 되겠다. 이 모든것은 우리 작가들이 정시하고 주시해야 할 문제들이다. 지난날 력사의 위대한 전환기마다 우리 작가들은 필을 날려 불후의 명작이나 거창한 문장들을 썼다. 참혹했던 항일전쟁이나 들끓던 합작화시기 같은것이 그러했다. 이 시기 우리 작품의 주인공은 대부분 농민들이였다. 어찌보면 지난날 농민의 희로애락은 우리 민족정서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 시기 우리 작가와 농민들은 매우 친근했고 물과 고기의 사이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를 않다. 우리 문학작품에서 농민들의 형상이 차츰 희미해지고 소외되여가고있다. 이는 우리가 깊이 사고하고 반성해보아야 할 문제인것 같다.  지금 농촌에는 일부 어설픈 그림자가 드리워있기도 하지만 밝은 빛과 서광이 비쳐들기도 하고있다. 사회주의새농촌, 성향의 차별이 축소되여가고있는 향진기업의 성장, 이런 농촌의 모델이 동북 각지에 적지 않게 나타나고있다. 이런 향진의 농민들은 도시시민들 못지 않는, 완전히 신형의 농민모습과 생활양상이 펼쳐지고있다. 그들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도 변화되고있다. 신형의 륜리, 새로운 감정, 새로운 형태의 농민, 이런 신형의 인간들이 우리 작품에 대거 등장되여야 할것이다.  이렇게 하자면 우리 작가들이 새로운 자태로, 새로운 안광으로, 새로운 감정으로 변화되는 새농촌 현실속에 들어가야 할것이다. 결코 낡은 관점이나 낡은 의식형태에 사로잡혀 그들의 부정면이나 락후한 면에만 낯을 돌리고 현실을 어둡게만 보지 말고 새로운 각도와 새로운 형태의 농민을 발견하고 묘사하기에 력점을 두어야 할것이다.   우리 문학의 복무대상의 대부분은 여전히 농민이다. 우리 작품의 독자도 대부분이 역시 농민이다. 우리가 그들을 도외시하거나 지어는 그들을 잃는다면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문학의 대상과 의미도 기로에 빠지게 될것이다. 우리의 문학이 광활한 농촌에 뿌리박고 예전과 마찬기지로 그들 대다수를 위해 진심으로 복무한다면 우리 문학의 수평선도 날로 넓어질것이 아닌가!  광활한 농촌에 낯을 돌리자, 농민들을 작품에 주인공으로 모시자. 시에서도 순수한 《나》를 좀 적게 쓰고 농민들의 세계에로 붓끝을 돌리자. 우리 문학이 농민을 잃는다면 그 주체를 잃는것과 다름없는것이다.  당중앙의 호소가 바로 사회주의새농촌을 건설하는데 그 력점을 두었다. 우리 문학도 이에 적극 호응해야 할것이 아닌가.  문학의 광활한 천지, 문학의 지평선이 열리고있다. 우리 모두 필봉을 농촌에로 돌리자. 그리고 광활한 천지에서 대작을, 걸작을 많이 쓰자. 시대가 이를 요구하고있지 않는가!  (문화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수 있습니다.)  2007년 6월호 작가의 령감 2013년 03월 31일 작성자: 훈이  십년 전 대학에서 대학생들과 대화를 가진적 있다. 당시 대화의 주제가 “작가의 령감”이었다. 필자가 창작경력에 대한 소개를 마친뒤 바로 질문 답변 절차에 들어갔는데 한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   “누구나 글은 쓸 수 있지만 작가다운 글은 못 쓰는데 대체 작가란 어떤 사람인지 작가님의 소견을 듣고 싶습니다.”   17살부터 시, 소설, 연극, 시나리오, 칼럼, 기행문을 써오면서도 필자는 작가가 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또한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도 못했던차라 인차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잠깐 뜸을 들이고나서 필자는 생각나는대로 답했다.   “솔직히 말해 필자는 작가에 대한 정의를 생각조차 못해본 사람입니다. 정의를 내릴 수도 없고.”  이렇게 허두를 뗀 필자는 대충 작가에 대한 소견을 피력했다. 작가는 모든 것과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다. 인간과의 대화는 물론 삼라만상과 대화가 가능하다. 하늘의 태양, 지어 꽃잎에 맺힌 이슬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영혼과도 또한 하나님과도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가 가능한 것은 작가가 대화를 통해 계시를 받고 창작 충동을 받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아버님(김철)은 당대 원로 시인이다. 아버님은 어떻게 해야 시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학도들의 질문에 “시인이 되려면 남다른 시각과 느낌을 가져야 한다.”고 답한적이 있다. 남다른 시각이라면 시인다운 시각이란 말인데 그런 시각을 갖추어야만 시인다운 령감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시인과 령감을 언급하면서 아버님은 자작시 를 예들었다.    대장간 모루우에서  나는 늘  매를 맞아 사람이 된다  벌겋게 달아오른 나의 정열  뜨거울 때 나는 매를 청한다  맞을 때는 미처 몰라도  맞고 나면 그 매값을 안다  그래서 나는 내 몸이 식을 때  노상 주르르 눈물을 흘린다.    시인의 눈에는 대장간 모루위에 놓인 쇠붙이가 그냥 쇠붙이로 보이지 않고 고된 인생살이에서 삶의 이치를 터득해 가는 자신을 찾아본 것이다. 이런 시각적인 차이, 그 차이가 바로 시인과 일반인과의 차이다. 시각적인 차이로 느낌도 다를 건 당연한 일이다.     시인다운 시각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해 필자의 아버님은 직답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난한 시인이다. 돈보다도 사색의 빈곤, 그 고통이 심하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싶다. 추억에는 백만장자지만 사색에는 참말 거지다. 그래서 애써 사색의 부자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시인다운 시각은 깊은 사색에서 온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 사색이 동반되어야 시적인 령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도 통한다.   아버님은 문화혁명시절 4년 옥살이를 하면서도 감방에서 사색을 멈추지 않았고 시를 구상하는 비범한 창작열정을 보였다. 아버님은 “내가 자살을 하거나 정신이 붕괴되지 않은 것은 가족의 드팀없는 믿음외에도 내 맘속에 항상 시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가 플라톤은 시인을 “신들린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님은 진짜 시에 “신들린” 분이셨다.    “부전자전”으로 필자가 아버님 뒤를 이어 작가가 된데는 유전자보다도 아버님이 항상 쫓는 집요한 사색, 그 사색이 동반한 창작열정이 필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사전에 올림말을 보면 령감이란 사유의 일종인데 일명 영감사유라고 한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창조적인 사유로서 간단하게 말하면 창의적인 기발한 생각이다. 작가의 생활체험, 소유한 지식, 끈질긴 추구, 깊은 사색의 복합체가 승화를 이룬 것이 바로 작가가 얻는 령감이다.  기독교 신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의 계시”다. “신의 계시”를 “영적인 계시”라고도 하는데 작가가 생활실천과 사색을 통해 받는 계시, 느낌, 또는 창작 충동도 역시 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인 계시”가 아닐가.  작가가 령감을 얻는 방식 또한 각양각색이다. 어떤 작가는 미술, 음악, 영화 등 다른 쟝르의 작품에서 령감을 얻는다고도 하고 또 어떤 작가는 꿈을 통해 령감을 얻는다고도 한다. 그 중 많은 작가들은 산책하면서 또는 명상에 잠겨 령감을 얻는다고 한다. 여기서 필자는 한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작가의 체험이다. 필자의 경우를 보면 창작의 령감을 얻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이 바로 생활체험과 사색이다.  필자의 작품 중 중편소설 “아 동년”은 필자의 동년의 추억을 바탕으로 씌어진 자서전체 소설이고 중편소설 “청춘약전”은 필자가 지식청년시절 의 생활체험과 주변 친구들의 운명을 다룬 글이며 3대 여성의 운명을 다룬 시나리오 “민들레꽃”은 역사공부에서 얻은 사색과 품을 들인 인물취재에서 얻어진 작품이다. 10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계열소설 “수도권의 촌놈들”은 필자가 중국국제방송국으로 전근된 후 쓴 소설이다. 소설은 개혁개방후 수도에 진출한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을 그렸는데 이 소설 역시 사색을 동반한 작가적인 체험에 근거해 씌어진 것이다. 아래에 중편소설 “정신병리학 연구”를 례들가 한다.  이 소설은 정신병원이라는 특이한 환경을 배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정상인이지만 정신질환을 가진 일반인들의 운명과 흘러온 세월이 인간에게 강요한 정신질환, 아울러 정신질환이 정상인, 사회에 조성한 위해를 각광시키면서 물질의 풍요만 추구하지 말고 심령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것을 독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이 소설을 쓸 충동은 정신병원 원장으로 있는 친구를 찾아 정신병원에 갔다가 목격한 장면에서 받았다. 정신병원에 가 보니 한번 특이한 환경인 정신병원을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환자들인 입원한 병동에 들어서기 바쁘게 한 늙은 환자가 군례를 붙혔다. 그 환자는 전쟁시기 포소리에 놀라 정신이 돌아버린 분이었다. 여자 병동에 가니 한 여인이 연지곤지 바른 얼굴로 열심히 문화혁명시기 추던 “충성무”를 추고 있었다. 돈에 환장해 정신이 돌아버린 한 환자는 쉴새없이 무언가 중얼거리며 동전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이런 환자들을 보는 순간 필자는 정신병 환자의 사유는 그가 미쳐버린 그 시대에 머물러 있고 정신병원은 그냥 병원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박물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정상인들은?   원장인 내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정상인도 여러가지 정신질환을 안고 있다. 단 그가 정상인인 것은 그가 정신 통제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통제력을 잃으면 정신병환자다.” 정신병원에서 받은 계시, 느낌, 충동으로 필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상들을 새삼스럽게 눈여겨 보게되었고 물질의 풍요속에 병들어가는 심령의 상처를 짚어내게 되어 나중에 그것이 소설화 되었다. 소설이 발표된 후 필자는 소설을 장막연극으로 각색했다. “망각된 인간들”이란 제목으로 된 연극은 3회 공연밖에 못하고 금연당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 11년이 지난 1987년이었지만 “좌경” 사조는 남아있었다. 당시 이 연극에 “사회 전체를 정신병원으로 모독하고 현대인을 죄다 정신병환자로 치부했다”는 루명을 뒤집어 씌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극은 그 이듬해  “중국소수민족제재연극창작” 은상을 수상했다.  필자는 작가의 령감을 유발하는 작가의 생활실천과 사색은 작가의 사명감에서 온다고 본다. 작가의 사명감에 대해 작가들마다 다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지만 필자 생각에는 작가의 사명감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안고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그리는 것이라고 본다.  20년전 필자는 한국과 중국 연변에서 한국의 조정래 소설가를 두 번 만났다. 편한 자리에서 나누던 대화 중 조정래 소설가는 이런 말을 했다.   “소설가는 그냥 고개 숙이고 묵묵히 밭길을 걷는 농부와 같다.”고 했다.   농부는 묵묵히 밭길을 걷지만 가을을 꿈꾼다. 작가 역시 농부마냥 창작에서 수확의 계절을 꿈군다. 천재적인 발명가 애디슨의 명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천재는 99%의 땀과 1%의 령감으로 이루어진다.”                                                                                  (두만강 사이섬에서)   ========================= 전선에서 틔운 문학꿈 시와 노래로 꽃피다 (ZOGLO) 2018년5월18일   평생영예칭호 수상자 김철 20세기 70년대 말에 창작된 (동희철 작곡)는 3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리고 있다. 이 노래의 작사자가 바로 김철 시인이다. 이 노래는 당시 중국의 으로 지위가 일락천장이 됐던 교육자들의 위상을 높여주고 옳바른 교육기풍을 선양한데서 연변을 비롯해 전국의 조선족학교들에서 많이 불려졌고 그뒤 한어로 번역돼 전국 각지 학교들에 널리 전파됐다.   김철 시인(87세)의 본명은 김룡섭, 1932년 8월 6일에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태여났다. 일본, 중국 대만을 거쳐 부모의 고향인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녔으며 1942년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했다.   1949년 마라손선수로 연변과 흑룡강성에서 1등을 따내기도 했던 그는 전국대회 선수권자격을 얻었지만 조선전쟁의 발발로 무산됐다.   1950년 그는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군, 군예술단에서 무용배우와 안무가로 활약했다. 장진호전역 당시 우연히 페허더미속에서 조기천의 시집 《백두산》을 찾아낸 것을 계기로 그의 시인꿈이 싹트기 시작했다.   미구에 부대를 따라 이동하던 김철은 우연히 조기천과 한 집에서 묵게 되였으며 그와 밤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얻을 수 있는 시집은 모조리 보았고 짬만 나면 시를 쓰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창작을 시작했다.   한편 1952년 그가 창작한 무용 은 중국인민해방군, 중국인민지원군 제1차 예술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했으며 전국순회공연에 참가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당시 모택동주석, 주은래총리 등 당과 정부 지도자들은 중남해 회인당에서 그가 창작하고 출연한 을 관람하기도 했다.   1953년 제대할 때는 연길에 있는 《동북조선인민보》(연변일보의 전신)에 무작정 찾아가서 받아달라고 지청구를 들이댔는데 당시 문화분야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던 터라 순조롭게 입사했다. 이 가운데는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일찍 이 전국문예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고 중앙 문화부에서 회보공연을 할 때 김학철 선생이 주석단에 앉아 관람했고 그 뒤 김철 시인은 연길행에서 문학도의 신분으로 김학철 선생을 찾았다. 김철 시인이 전쟁의 나날에 쓴 수백수의 시들을 묶은 2권의 자작시집 보고나서 김학철 선생은 크게 고무격려해주었고 그 소문이 당시 신문사 사장이던 리희일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김철 시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문기사와 문학창작에 정진했다. 신문사에 문예부가 선지 얼마 안돼 일손이 딸리는 상황에서 김철 시인 혼자서 1주일에 문예면을 한기씩 꾸려야만 했다. 이외에도 중요행사에는 통신문을 써서 주요 지면에 공급해야 했고 따로 론설도 써야 했다.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그때가 가장 바빴지만 일할 멋이 났다고 적고 있다.   1956년에 김철 시인이 정진옥 작곡가와 손잡고 창작한 대합창 는 모스크바에서 펼쳐진 제6차 세계청년예술축전에서 은상을 수상, 그때 그의 나이 24살이였다. 당시 주덕해 서기가 김철 시인과 정진옥 작곡가에게 “로항일근거지이며 수많은 항일렬사들이 나온 연변에서 그들을 노래하는 큰 작품을 써달라”고 부탁을 했고 이들은 장백현 북쪽의 밀영지에서 혹한을 체험해가며 작품을 써냈다.   이 작품은 북경 ‘천교극장’에서 공연했는데 적은 합창대 인원으로 큰 무대를 꽉 채우는 성량을 보여주며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평의결과 모든 평심들이 를 1등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김철 시인의 처녀작은 시가 아닌 란 제목의 단편소설이다. 의 원고료는 60원이였는데 당시 월급이 40원 50전이였다고 하니 거금이 아닐수 없다. 이어서 1953년 서정시 이 《동북조선인민보》 신춘문예에 입선되며 문단에 데뷔한 그는 지금까지 38권의 저작을 내놓기에 이른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장편서사시 《동틀무렵》을 구상했고 출옥해서는 《연변문예( 전신)》잡지사에 출근하면서 창작에 몰두, 련속 장편서사시와 서정시집들을 쏟아냈다. 이후 그는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겸 비서장, 연변작가협회 주석과 연변문련 주석을 력임했다.   1983년에 중국작가협회로 전근했고 중국 4대 문학간행물의 하나인 《민족문학》의 주필을 맡았다. 이 기간 또 중국민족작가협회 상임부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전국 소수민족 문과대학을 꾸리는 등 문학인재 양성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김철의 첫 시집 《변강의 마음》은 1957년에 출간됐다. 그밖에 1958년에 출간된 시집 《동풍만리》, 장편서사시 《동틀무렵》과 《새별전》, 서사시집 《내 고향의 금물결》, 서정시집 《가야금집》, 《태양에로 가는 길》과 《산향길》 그리고 《인간세상》 등이 있다. 그중 《새별전》은 봉건시대 농민봉기의 장엄하고 웅장한 투쟁을 배경으로 했고 주인공 새별과 장수의 굴곡적인 사랑이야기를 통해 조선족 인민의 아름다운 정신면모와 투쟁정신을 보여줬다. 김철 시인의 《새별전》, 《김철시선집》 등 작품은 전국 제2회, 제4회 소수민족문학 창작상을 수여 받았다. 그의 시작품은 향토분위기가 농후하고 민족특색이 선명하며 감정이 풍부하다는 평가이다.   (본 기사는 자료에 근거해 작성됐음을 알린다.)   ///연변일보 리련화 기자
106    조기천과 <<백두산>> 댓글:  조회:4259  추천:0  2015-02-24
조기천의 서사시   1. 조기천의 생애  분단이후 북한 문학사가 "평화적 건설시기"(1945. 8-1950. 6)의 걸작으로 꼽고있는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은 제주 4·3사건을 다룬 강승한의 서사시 『한라산』과 함께 가장 알려진 작품이다. 이 서사시는 비단 이 시기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분단시대의 북한문학 전시기를 통틀어서도 이념적 경직성이 지나치지 않는 8·15직후의 빈약했던 우리 문학가에서 드물게 보는 성과로 평가받을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른바 1970년대를 전후해서 본격화된 주체이념의 유일사상화 시기를 북한문학의 이해와 평가의 시대적 분수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방법론인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도 『백두산』은 오히려 주체사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예술작품이 지닌 그 부정적 측면을 잘 극복한 뛰어난 형상성을 지니고 있다.  시인 조기천은 1913년 11월 6일 함경북도 회령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이내 시베리아로 이주해 갔다. 소련에서 그는 소년시절부터 지방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짤막한 시들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옴스끄의 고리끼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중앙 아시아 끄실 오르따 조선사범대학에서 약2년간 교직에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전개했다. 8·15때 조기천은 중국 동북지방에 들어왔던 소련군에 참여했다가 이내 북한으로 오게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북한 문단의 구성요인이었던 재북·월북파,연안파,소련파 등의 구분에 따르면 소련파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조기천은『조선신무넬에서 일하면서 1946년 3월 서정시「두만강」을 발표하여 처음 시인으로서의 얼굴을 나타낸다. 이 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수난받는 민중상과 항일투사들의 투지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8·15의 감격을 노래한「울밑대에서 부른 노래」,토지개혁을 읊은「땅의 노래」등을 거쳐 1947년 『백두산』을 쓰게된다.  소련파였던 조기천이 이 시기에 가장 먼저 항일유격전을 소재로 하여 김일성을 부각시키는 작품에 손을 댄 사실은 여러 가지를 상정할 수 있으나 어쨌건 이 시로써 그는 일약 북한문단의 일급으로 부상한다. 1948년 여순사건을 소재로 한「항쟁의 려수」를 발표하여 그는 북한당국으로부터 공로메달을 받았는가 하면 8·15기념예술축전에서 연 세 번이나 수석 표창을 받았다고 전한다.  1949년 여름에는 휴가를 이용하여 흥남인민공장을 방문하여 약20일간 노동자들과 함께 한 체험을 바탕삼아 1950년6월에 장편 서사시『생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2개년 경제계획에 나서도록 노동자들을 독려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6·25가 일어나자 조기천은 9월에 종군작가로 나서서 낙동강까지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중에 저 유명한「조선은 싸운다」를 비롯하여「불타는 거리에서」「죽음을 우너수에게」「나의 고지」등 시작품을 썼다. 특히 "세계의 정직한 사람들이여!/ 지도를 펼치라/ 싸우는 조선을 찾으라"로 시작되는「조선은 싸운다」는 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지도에서 도시와 마을은 폭격으로 불타고 없으니 찾지 말아라는 이 시는 선전과 서정이 조화된 반전시로 세계문학사에 알려져 있다.  1951년 3월 조기천은 조선문학예술 총동맹 부위원장으로 피선된다. 그 해 5월 그에게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국기훈장 2급이 수여되기도 한다. 그 두 달 뒤인 7월 31일 조기천은 39세로 평양에서 폭격으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품 속에서는 유고『비행기 사냥군』이란 서정서사시가 있어 사후에 발표되었다고 전한다.  조기천의 생애는 짧았기에 북한의 어떤 정치적 격변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애국적 시인"으로 남았고, 또한 그의 작품활동 기간은 "평화적 건설시기"와 "위대한 조국 해방전쟁시기"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 뒤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기천은『생의 노래』에서 투철한 자신의 문학관을 토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소련 시절부터 익혔던 사회주의 미학관의 한 표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옛날엔/ 시가를 풍월이라 불렀다/ 그래서 시인이라 자처한 무리들은/ 화조월석을 찾았고/ 초로인생을 설어했는가?/ 그래서 그들에겐/ 외적의 나팔소리보다/ 꾀꼬리소리 더 높이 들리었고/ 달이 둥그는 걸 잘 알았는가?/ 시인이라 자처한 무리들은/ 병든 마음을 파고들며/ 인생의 비애를 찬미하며--/ 무엇 때문이었느냐?/ 지는 곷이 서러웠드냐?/ 조선의 가슴에/ 일제의 칼이 박혔는데--  『생의 노래』에서  8·15뒤 북한문학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창조를 그 바탕으로 삼으면서 민족형식을 강조하는 경향이었는데 비록 소련에서 소년기를 보낸 조기천 일지언정 이런 원칙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던성 싶다.  2.『백두산』의 주제로서의 보천보 전투  8·15직후 남북한은 문학적으로 다 일제잔재 청산과 새 사회 건설을 위한 완전독립을 이루려는 반외세운동 등이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친일파에 대한 처벌문제와 반제·반봉건 의식의 문학이 가장 긴박한 과제로 등장했으며 이를 다룬 작품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 남북한에서 다 토지문제를 다룬 작품이 상당량에 이르며 그 뒤로 오면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인간의 내면적 탐구를 주로 다루는 한국문학과 사회주의 개혁의지를 다룬 북한 문학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조기천의 『백두산』은 바로 그 갈림길에 이르는 길목에 있으면서 그 당시로서는 직접적으로 당면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항일빨치산을 소재로 했다는데서 이 시인의 특이한 역사적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이 서사시의 소재인 보천보 전투에 대해서는 항일투쟁사에서 여러 각도에 걸쳐 고찰된 것이 많은데 최근 소개된 와다 하루키(和母春樹)의「김일성과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사회와 사상』1988.11-12 연재)에 따르면 조국광복회 조직이 시작되면서 국내로까지 손을 뻗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그 지휘자는 김일성이었다고 한다. 커민테른 제7차대회의 새방침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의 힘으로 조선독립투쟁을 수행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져 3개사가 공동으로 국내 진입작전을 입안하게 된 것이라고 와다 교수는 보고 있다.  즉 제6사는 장백에서 보천보를 공격하고, 제4사는 무송-안도-화룡으로 돌아서서 조선의 무산을 치며, 제2사는 임진강 일대에서 장백으로 향하도록 계획을 세웠는데 이런 제안은 김일성이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적으로 간삼봉(間三峯)에서 만나기로 한 이 3개사 합동작전은 제4사의 최현의 이름을 유명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의 제6사는 근대 민족해방 투쟁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북한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이하 와다 교수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김일성의 제6사는 무산에서의 행동을 통보받고 6월 4일밤, 100여명이 강을 건너고, 대안에서 조국광복회 청년 80여 명과 합류하여 보천면 보전(保田)을 공격했다. 보건은 일본인 26호, 조선인 280호, 중국인 2호, 합계 308호인 소읍으로서 조재소에는 5명의 경관이 있었다. 이 주재소를 비롯하여 면사무소·삼림구(森林區)·우체국·관공서 건물들이 불타버렸다. 부대는 〈10강령〉의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철수할 때 혜산서(署)의 오가와(大川)의 경부가 이끄는 병력의 추격을 받자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물러갔다.  보천보 작전을 성공리에 끝마친 제6사는 장백의 밀영으로 일단 철수했다가 제4사·제2사의 도착을 기다려 간삼봉으로 이동했다. 총인원 400이라고도 하고 600이라고도 한다. 그 사이 조선 침입사건으로 초조해진 일본군은 함흥의 제74연대를 김석원 소좌의 지휘하에 출동시켜 국경 일대의 토벌전을 시도했다. 이 군대에 6월 30일, 간삼봉에서 기다리고 있던 3사 연합군의 타격을 가했다.  『사회와 사상』1988. 11. 187쪽  이어 와다 교수는 이 사건으로 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원이 일제 기관에 의하여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고 쓴다(보다 자세한 자료는 남현우 엮음『항일무장 투쟁사』대동, 253-266쪽 참고)  이 1937년 6월4일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 조기천의 『백두산』으로 이는 북한에서 항일 빨치산 투쟁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많은 예술작품이 다뤄온 역사적인 한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조기천의 『백두산』은 이 보천보 사건을 다루면서도 결코 이 사건 하나만에 국한시키지 않는 항일빨치산 투쟁의 보편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서가고 있다. 즉 이 시에서는 김을 비롯한 몇몇 고유명사만 빼면 어떤 특수한 사건이 아닌 항일 투쟁의 민족적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창작했다고 풀이한다. 예술적인 일반화를 시도하려는 동기에서 이 시는 사건발생의 명확한 연도와 지명을 밝히지 않았는데 예컨데 H시로 표기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영웅주의를 벗어난 영웅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특정 사건의 특정 인물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민족적으로 일반화된 민중주체의 항일투쟁을 전형화 시킨다는 의도로 평범한 농민투사들을 내세우고 있다. 다만 김만은 예외적 구상으로 이뤄져 있다.  3. 『백두산』의 구성과 특질  머리시와 1-7장에다 맺음시로 이루어져 있는『백두산』은 조기천 자신의 서정시「두만강」을 그 원형으로 삼고 있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즉「두만강」에 나오는 국토와 민족애가 『백두산』에 그대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째진 가난 속에 부대껴도/ 말 한마디 틀리랴 겁내며/ 눈물에 치마고름 썩어도/ 앞날을 바라고 한숨을 주이는/ 두만강이여. 이것이/ 그대 그려둔 조선의 여인이 아닌가?"(「두만강」)에 나타난 여인상이 그대로『백두산』의 꽃분이로 승화한다는 해석이 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우리의 민족문학에 나타난 여인상은 모두가 꽃분이일 수밖에 없다는 민족적 보편성이 성립할 소지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보편성을 먼저 내세우느냐 하면 분단 44년이 지나서 남북한의 이질화 현상을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지만 민족문학사의 긴 뿌리에서 본다면 결국은 동질성으로 볼 수 밖에 없음을 대전제로 삼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백두산』의 모든 인물들은 근대 이후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반성을 지닌 인간상이 아닐까? 예컨데 꽃분이는 가난 속에서 민족의식을 지닌 채 자라나 빨치산 활동에 투신하여 박철호와 위험을 무릎 쓰고 항일선전 및 무장투쟁에 까지 가담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 박철호가 죽어간 뒤에도 미래의 조국 건설을 위한 후비대로 눈물을 삼키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런 한 여인상의 고난은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너무나 많은 변형으로 나타난다. 신동엽의 시에서는 아사녀로 상징되며, 소월의 시에서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며 님을 보내드리는 그 여인상 모두가 우리의 꽃분이가 아닐까.  『백두산』은 그 앞머리부터 역사적인 현실성으로서의 평범성(곧 민중성)과 초자연적인 영웅성이 조화를 이룬 채 장엄하게 묘사된다. 이 조화로운 자연묘사는 영웅주의와 민중성을 하나의 역사적 진보의 작용으로 보려는 시인의 의도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에 나타난 영웅상은 한 개인적인 위대성의 표현이 아니라 집단적 영웅상으로 그려진다. 물론 시에는 김을 그 정점으로 삼아 짤막하나마 초인화시키고 있으나, 그것은 다른 빨치산 개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홀로인 영웅주의로 우뚝 솟은 인물로 부각된 것은 아니다.  민중적 영웅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적 구도로 『백두산』은 가장 민중적 형식인 구비문학의 각종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이는 철저한 전통적 민중성을 혁명의 기초로 삼으려는 의도된 문학적 형식이기도 한데 민요조로 이루어진 가락은 독자들에게 한결 친근감을 준다.  시적 사건 전개방법은 오히려 극히 단조롭다. 아내를 일본인에게 잃은 김운칠은 혜산에서 솔개 마을로 옮겨와 화전농으로 어렵게 살아간다. 딸 꽃분이는 조선광복회 회원일시 분명한 박철호가 정치공작원으로 국내에 잠입해 왔을 때 그에게서 1년동안 지도를 받는다. (2장) 꽃분이와 철호는 유인물을 만들다 일본경찰에게 들킬뻔 했으나 꽃분의 기지로 위기를 넘긴다. (3장) 임무를 끝낸 철호는 16세 소년 영남이와 떠났으나 압록강을 건너다 영남은 사살되고 만다. (5장) 이미 국내에 조직되어 있는 과옥회 회원들과 연계하여 잠입한 빨치산은 쉽게 폭동에 성공한 후 각종 정치사업을 끝내고는 물러간다. 폭동 성공은 물론 꽃분이와 철호가 그 앞장을 선다. (6장) 그러나 압록강 뗏목을 타고 국경을 넘어가던 중 철호와 청년빨치산 중 가장 용감했던 석준이 총에 맞아 전사한다. (7장)  이미 밝힌 것처럼 보천보 전투를 그대로 묘사하면서도 특정 지명을 쓰지 않은 것은 항일투쟁의 보편성을 전형화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러나 투쟁의 전형성은 먼저 투철한 조직의 부각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H시에 들어온 빨치산들은 이미 만들어진 조직을 통하여 힘들이지 않고 잠입하여 쉽게 폭동을 일으킨 후 여유있게 물러간다. 그리고 이런 힘이 원천을 이 시에서는 민중의 편에 선 민중을 위한 조직으로 풀이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하나인 제4장은 나흘째 굶은 빨치산 대원들이 소 두 마리를 끌고 오자 그 소가 일본의 것이 아닌 조선과 중국 농민의 것임을 알고는 되돌려 주려다 실패하곤 그 대가라도 치뤄야 한다는 철의 규율이 나오는 대목이다. 제4장의 5절에 나오는 민중성의 강조는 근대이래 우리 민족문학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구절이다.  항일빨치산이 지닌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하여 『백두산』의 맺음시는 "그러면 백두야/ 조선의 산아 말하라!/ 오늘은 무엇을 보느냐?/ 오늘은 누구를 보느냐?"고 묻도록 만든다. 바로 8·15직후의 한반도로 항일의 의지를 끌어들여 역사적 진로를 모색코자 하면서 이시는 끝난다. 물론 문학의 당시 입장이 선명하게 스며있다, 그러나 8·15직후의 북한 입장이란 오늘의 분단고직화 시대의 그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자유의 나라!/ 독립의 나라!/ 인민의 나라!/ 백두산은 이렇게 외친다!/ 백성은 이렇게 외친다!"는 마지막 구절은 당시 남북한 어디에도 들어맞는 말이었기도 하다.  이래서『백두산』은 분단시대 초기의 남북한 이질화가 옹고되기 이전의 동질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작품의 하나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서사시로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물론 오늘의 우리 입장에서 말한다면 일제 식민지 아래서의 구체적인 민중적 삶의 실체가 좀 약하다든가 하는 나대로의 비판이 따를 수도 있지만 8·15직후의 작품수준을 감안할 때 우리 문학의 수확인 점은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105    하이퍼시 일가견 댓글:  조회:4267  추천:0  2015-02-24
  하이퍼텍스트 詩 쓰기에 관한 견해                                                                              이선       하이퍼텍스트 시론은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문덕수는 하이퍼텍스트 소설론을 시론에 도입하여 한국 최초로 하이퍼텍스트 시론이라는 새로운 詩 창작 방법론을 개척하였다. 심상운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구체적인 정의를 규명하고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심상운과 오남구, 김규화, 시문학 시인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던 하이퍼텍스트 詩 쓰기는 이제 다른 문학지 시인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에 참여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 하이퍼텍스트 시는 칭찬과 비평, 공격을 동시에 받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제점과 해결 방법을 필자의 詩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어떤 문예사조도 처음에는 칭찬과 비난을 받는다. 원래 작품이 먼저 활발하게 생산되고 평론가의 집중조명을 받으면서 새로운 문예사조가 탄생하며 인정받는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 시는 작품이 먼저 탄생하여 인정받고 문예사조로 등록된 것이 아니다. 컴퓨터의 디지털 전자개념을 시에 도입하여 새로운 시 쓰기 방법론을 모색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시론으로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시 창작론을 만들어가고 연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끈임 없이 새로운 시 쓰기 방법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 창작품이 탄생되고 있다. ‘새로움’은 시의 목표며 예술의 영원한 과제다. 하이퍼텍스트 시인들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지 많은 눈들이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더 긴장한다. 또한 비평의 칼날을 받을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다. 관심은 결과로 가는 필수과정이다. 필자는 먼저 매를 맞는 기분으로 필자의 시에 자성의 칼날을 들이대기로 한다.   필자는 하이퍼텍스트 시파에 가담하여 새로운 시 쓰기를 모색하면서 기쁨의 탄성도 질렀고 회한에 빠지기도 하였다. 하이퍼텍스트 시가 내용보다는 표현에 치중하다보니 진정성의 결여와 내용의 가벼움이 문제점으로 지적받았다. 또한 무의미 단어와 이미지의 나열과 결합이 이름만 가리면 누구 작품인지 알 수 없다는 작가의 개성이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새로운 시도가 무엇이냐? 는 지적도 받았다. 필자는 「잃어버린 동화 1」에서 각각의 단절된 이미지를 각각의 연에 배치하여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엘리엇이「황무지」에서 보인 방법론을 이름만 하이퍼텍스트라고 붙인다고 하여 새로운 시 쓰기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회의에 빠졌다. 엘리엇은 필자보다 먼저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 사물시를 쓰며 하이퍼텍스트 시가 주장하는 객관화를 실현한 것이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 시가 당위성을 갖는 것은 엘리엇보다 상상력에서 한 수 위라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하며 상상력의 무한대를 자랑한다. 독자에게 감각의 새로움과 새로운 미의식, 무한대의 상상과 자유를 제공한다. 모듈이론에 입각한 무의미 단어와 단어의 조합, 리좀 이론에 입각한 단절된 이미지의 병렬배치가 독자의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새로운 해석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대로 지정하여 주제로 독자를 이끌어 오지 않고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한다. 그 다음은 독자의 자유 상상에 맡긴다.   그런데 이 무한대의 상상력과 자유, 무의미 단어들의 조합이 닮은꼴 시를 양산하는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가 주장하는 최첨단 디지털 시론이 똑같은 물건을 찍어내는 전자시계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무의미 시는 내용의 빈곤과 진정성의 결여라는 문제를 지적받았다. 이 문제는 문덕수가 장시「우체부」에서 ‘사랑과 전쟁’이라는 주제로 신화와 한국전쟁까지 거시적 소재를 다루면서 내용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문덕수는 장시「우체부」에서 모든 연약한 인간을 향한 인애하는 마음과 연민을 드러내며 시인이 지양해야 할 시적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문덕수는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물결을 동서양을 오가며 쪽배를 타고 길을 터 낸다. 어느 집에나 편지는 배달되고 시인은 우체부처럼 사랑을 퍼 나른다. 문덕수는 시인의 역량에 따라 하이퍼텍스트 시가 거시적 주제와 소재를 다룰 수 있음을 장시「우체부」에서 증명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이론인 연과 연의 링크를 통하여 무한대의 새로운 이야기를 삽입하여 짜깁기, 모자이크 할 수 있음도 증명했다. 심상운도「검붉은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에서 1연 ‘병원 응급실’, 2연 ‘밥’, 3연 ‘이집트 미라 그림’ 각각의 이미지를 병렬배치하여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며 시적 긴장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사실과 사물을 통한 객관화를 실현하며 하이퍼텍스트 시가 현재성과 실제성을 떠난 비실제적이고 가벼운 언어놀음을 한다는 비난을 극복하고 있다. 심상운의「검붉은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은 인간에게 필연적인 병과 죽음, 삶의 문제를 다루며 진정성의 부재라는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과 오명을 극복하고 시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 또한 그림에서 모티브를 받아 고대와 현재를 오가며 상상적 공간을 확대하여 시의 스케일을 넓히고 실제적이며 직접적인 실감을 주고 있다. 각각 다른 이미지의 연들을 링크하며 주제폭을 넓혔다.   필자도 하이퍼텍스트 시「詩人을 위하여」와 「잃어버린 동화 1」에서 아동 성폭력 문제를 다루었다. 「詩人을 위하여」에서는 동네 할아버지와 운전기사, 청소년들에게 성폭력을 당한 12세 소녀 ‘은지’ 를 1연의 중심소재로 하여 사회문제로 부각시켰다.「잃어버린 동화 1」에서는 친아버지에게 강간당한 딸이 아버지를 고소하며 중벌을 내려줄 것을 판사에게 건의한 기사를 토대로 근친상간을 사회적 이슈로 문제제기하였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에서는 주제는 ‘드러나지 않게’, 시적 표현은 ‘강’하게 써야 한다. 미의식과 상상력을 증폭시킬 것, 주제보다는 표현에 중점을 둔다. 필자의 졸작 「잃어버린 동화」일부를 소개한다.       로켓을 타고 잃어버린 시간의 간이역에 내리면   30년 전, 울고 있는 계집아이   원초적 본능, 하이에나의 이빨에 머리카락이 잡혀   놀이공원의 회전목마를 타고 절뚝거리며 빙글빙글 돌다   하늘과 땅이 홑이불처럼 거꾸로 뒤집혀,   그녀 몸을 덮치던 날     빨갛고 초록인 어둠     그 뒤, 아이의 습한 동굴 속에선   아빠의 구불거리는 갈색 음모들이 뒤엉켜 거꾸로 줄기가 치솟는 거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아~악,   입, 귀, 콧구멍, 구멍이란 구멍에서 초록 줄기가 뻗어 나와                                      - 이선, 「잃어버린 동화」부분     근친상간과 아동성폭력은 큰 사회문제지만 집중조면을 받지 못하고 음성적으로 확대되어가고 있다. 아동성폭력을 다루면서 칙칙하지 않게 어떻게 미의식적 표현을 하면서도 진정성과 주제를 어떻게 부각시킬 수 있을까 고심하였다. 아이의 마음에 ‘빨갛고 초록인 어둠’으로 상상적 색채감을 주었다. 또한 ‘아~악, / 입, 귀, 콧구멍, 구멍이란 구멍에서 초록 줄기가 뻗어 나와’ 부분에서 아빠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상처받은 아이를 필자는 식물로 바라보았다. 식물은 누가 물을 주거나 옮기지 않으면 붙박이로 자기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의 연약하고 수동적인 상황은 식물처럼 슬픔을 안고 자란다. 아이의 몸과 마음, 뿌리가 모두 아빠의 음모로 온통 생각이 집중되어 갖혀 버린 아이를 상상해 보라. ‘입, 귀, 콧구멍, 구멍이란 구멍에서 초록줄기가 뻗어 나와’ 아이의 일생을 지배할 것이다. 온 몸이 아프다고 절규도 목하는 아이. 필자는 온 몸에서 아픔의 줄기가 자라는 식물성 아이를 통하여 아이의 절박함, 절대극한 상황, 사회적 단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세상의 음모에 맞서는 연약한 소녀를 고발함으로써 역으로 세상을 고발한 것이다. 진정성의 결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한 아날로그 시와 똑같은 주제를 어떻게 표현과 상상력을 가미하여 하이퍼텍스트 시를 완성할 것인지가 고민사항이었는데, ‘음모’와 ‘구멍’, ‘초록 줄기’를 링크하며 답을 찾았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앞으로도 많은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공격을 환영한다. 정반합의 원리에 따라 많은 공격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하이퍼텍스트 문예사조가 탄생하려 하고 있다. 싹을 자르려고 노력하지 말고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 지켜보는 믿음도 작가의식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와 하이퍼텍스트 시를 쓰려고 고민하는 시인들도 천편일률적인 언어조합에 머물지 않고 시적 진정성과 표현의 새로움을 찾기 위해 더 고민하여야 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를 쓰는 동료들에게 어딘가 비슷한 닮은꼴 시들이 양산되지 않길 바란다. 앞으로 하이퍼텍스트 시는 예술의 필요조건인, 유일성과 창조성, 철학성을 획득한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한 완성된 하이퍼텍스트 시 작품을 쓰는 것이 하이퍼텍스트 시를 쓰는 필자와 모두의 과제다.  
104    현대시 원리와 하이퍼시 댓글:  조회:4292  추천:0  2015-02-24
하이퍼시의 이해와 창작                                 이 오장 시인                                                   1. 현대시의 원리   17세기 폴란드의 미학자 사르비에브스키(K.M.sarbiewski)는 “모든 예술의 창조개념은 자연이나 사물을 모방할 뿐이지만 시인의 예술 행위만은 새롭게 창조(de novocrat)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미술이나 조각 등 기타 예술 행위는 자연과 사물 등의 대상을 모방하지만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끝없이 펼쳐져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으로 시가 모든 예술의 정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시의 발생이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함께 존재했다는 학설은 시가 예술의 근원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경외심을 가졌다.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에 비해 너무나 나약함을 깨달은 인간이 구원의 행동으로 언어가 발생하기 전부터 자연에서 얻은 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었고 언어를 습득한 이후 리듬이 발생하여 이것이 시로 발전했다는 학설은 누구나 부정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시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다. 순간의 전시성에 그치는 미술이나 청각적 예술은 인간의 정서를 다듬어주는 데 그치지만, 정신적 감동을 전달하는 시는 인간이 만든 역사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단 몇 줄의 시가 수많은 전쟁사를 기록으로 남겨 인류 발전에 공헌한 사실도 있다. 인간 생활은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연속적으로 구성되었다가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안정이다. 그 안정은 변화 속에서 자리잡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물질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오직 영적인, 즉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하다. 시는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정신세계를 다듬어 왔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를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부터 선택적 지각으로 왜곡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자연에 한정된 시야를 가졌기 때문이다. 시가 자연 속에서 발생하였지만 꾸준히 자연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었고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원하는 시의 형태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현상이다. 일찍이 조지훈 시인은 시의 원리에서 "시인은 자연이 능히 나타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시에서 창조함으로서 한갓 자연의 모방에만 멈추지 않고 자연의 연장으로서 자연의 뜻을 현현하게 하는 대자연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인이 자연을 소재로 하여 다시 완미한 결정을 이룬 제2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에 더 많이 통할수록 우수한 시며 실제에서도 훌륭한 예술작품은 하나의 자연으로 남는 것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를 모두 수용한다는 것은 착오다. 인간이 발전하는 속도에 뒤처지는 시라면 가치가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화가 끝이 없다는 것을 가정할 때 과연 사실과  실재성 즉 현실성만 가지고 시를 쓴다면 꾸준하게 발전되어온 시가 정체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쫒으려는 새로운 형태의 모더니즘(modernism)이 발생하여 전통주의와 사상에 대립하여 문명적 주관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시파가 등장하였고 근대 시인들이 꾸준하게 이를 발전시켜 많은 유파를 남겼다.  인간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보게 된다. 실제로 세상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자극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필요한 자극만 받아 그것만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창조적인 존재로서 남들이 지나치는 자극을 잡아들이는 능력을 갖췄다. 이것이 낯설게하기다. 시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똑같은 방법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낯설게하기가 기본임을 감안할 때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시 창작의 원칙이다. 이 같은 낯설게 하기의 기본이 시의 방향을 새롭게 만든다. 시는 미학이 아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엇도 아니다. 미학에 빠져있는 창조는 막힌 길이다. 예술의 창조는 시만이 가진 것이라면 우리는 새로운 시학을 가져야 하고 새로운 시학을 발전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2.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한마디로 이미지의 탑 쌓기다. 여러 가지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각각의 이미지로 그린 후 하나의 탑으로 쌓는 것이 하이퍼시다. 기존의 시가 하나의 이미지로 시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하이퍼시는 다수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하여 더 확장된 시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어 시의 표현력을 끝이 없게 상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존의 시만을 고집한다면 모더니즘의 공간에서 더 이상의 확장을 멈춰야 한다. 시는 인류의 발전에 앞장서야지 발전을 따라가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대개 시인은 하나의 사물만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시의 모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즉 관념에 갇힌 시작법을 고수하는 것이다. 심리학계의 저명한 학자인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stopher chabris)와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는 인간의 맹시현상을 실험하여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결과는 인간의 시선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어떠한 연극이나 경기를 보게 한 뒤 극 중이나 경기와는 관계없는 움직이는 사물을 지나게 하면 대개의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연구결과이다. 자기가 보고 있는 사물의 움직임만 보게 되지 그 밖의 사물은 관심 없다는 맹시현상은 시인의 시 쓰기에도 동일하다. 어떠한 사물에서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오직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올리게 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른 이미지는 관심 밖에 두는 것이 일반적인 자세다. 하이퍼시는 맹시현상의 허점에서 출발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며 거기서 파생된 다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면 하이퍼시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파생된 이미지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편집이다. 사물은 끝없이 구성되고 해체되었다가 재구성되는 성질을 가졌다. 이미지는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유동성 상상이다. 하이퍼시는 변하는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변화하는 각각의 사물마다의 이미지를 편집하여 하나로 융합시키는 것이 하이퍼시의 완성이라 할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재능이 필요하지는 않다. 천재는 한없는 상상을 하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능력을 가졌다. 이에 반하여 둔재는 끝없이 상상하기만 한다. 시를 쓰는 시인은 누구나 천재라고 자평한다. 그렇다면 하이퍼시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가장 창의적일 때는 멍하니 있을 때다. 멍하니 있다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무엇인가 자신도 모르는 것을 생각하며 끝없이 상상력을 확장해 나간다. 이때의 상상은 생각의 흐름을 놓칠 때까지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에 멈추게 되는데 그 멈춤에서 흐름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이고 찾아내지 못하고 놓치는 게 보통 사람이다. 이러한 상상은 시인들에게는 일상이다. 이럴 때의 생각은 그림 곧 심상이 되고 시인은 이를 문장으로 옮겨 시를 쓰게 된다. 이때 그림을 설명하는 글이 관념적인 문장이고 객관적으로 묘사를 강조한다면 사물시가 되어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론을 보면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고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구조를 이룬다고 했다.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들어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함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한다.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상상으로 끌고 간 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하는 것으로 이는 하나의 그림을 최소 단위로 세분화하고 각 부분을 사물화하여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결국, 하이퍼시는 보고 느낀 것에 대한 관념의 그림을 세분화하여 사물에서 파생되는 연결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처음의 이미지와 융합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이퍼시의 단계   1) 1단계   안개는 피어서 강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박목월  전문   위의 시는 목월의 초창기 작품으로 한편의 그림을 추억 저편의 꿈으로 그려낸 시다. 강가에 핀 안개가 밑바탕을 이루고 잠들어야 할 밤에 울어대는 비둘기가 그리움을 재촉한다. 그런 밤엔 저절로 고향 이웃에 살던 처녀가 떠올라  잠을 못 이룬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고향이고 봄의 풍경이다. 단 한마디도 고향의 이야기는 없으나 유년시절의 향수가 읽는 이의 내면을 흔들어 놓는다. 환상적인 그림을 강가의 안개 밤에 우는 비둘기 갑사댕기를 맨 처녀 등, 사물로 대비한 목월의 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이퍼적인 기질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것이 하이퍼시의 1단계라고 볼 수 있다.  . 2) 2단계   봄은 차 한 잔의 향기가 난다 귀 가까이 은박지를 밟고 와 똑똑똑 여보세요 아침 하얀 풋잠을 깨운다 울타리의 장미가 새순을 뻗고 기어가 바람 일렁이는 꽃불을 켜고 있는 가슴 신록을 꼭 누르면 깜박 깜박 디지털 숫자가 찍히고 싱그러운 손전화 푸른 벨소리가 난다 감전되는 떨림으로 여보세요 신록의 첫 목소리가 울려온다 울타리에 멧새 한 마리가 날아 앉아 도록또록 눈망울을 굴린다                          오진현 ‘푸른 벨소리’ 전문   오진현 시인은 일찍부터 탈관념의 시론을 주창하며 관념을 모두 깨트리려 직관적인 수학적 존재증명이라는 시론을 발표하고 누구보다 앞서 하이퍼적인 시 쓰기를 주장하였다. 모든 시어를 사물로 대체하며 이미지의 연결과 확장을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새로운 시 쓰기를 실천하여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생을 일찍 마감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하이퍼시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 작품은 하이퍼시의 초기 단계로 당시에는 디지털시라고 명명했던 시로서 이미지의 단순함을 빼고 나면 하이퍼적인 요건을 갖췄다. 하이퍼시가 여러 개의 이미지를 펼쳐내고 다시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여 상상 속에서 캐낸 더욱 더 큰 이미지의 집합체라면 이 작품 속에 나타낸 이미지는 봄 그림 하나에 불과하다. 여기까지가 하이퍼시의 2단계라 할 수 있다.   3) 3단계   까만 머리통에 볼펜으로 두 눈동자를 찍은 손톱만한 몸뚱이. 반짝이는 갑옷 앞다리 갈퀴와 뒷다리 톱니로 쇠똥더미에 올라 곰상곰상 쇠똥을 굴려 금방 구워낸 똥경단 핑크 냄새나는 달덩이 빵 달은 없고 고공 철탑농성 2백일 비정규직 B씨의 눈에는 별없는 칠흑 밤하늘이 두 아이와 아내를 위한 더 큰 빵만 하였다   쇠똥구리 작은 눈을 화등잔만큼 키우고 말랑한 똥경단 밟고 오른 무대에서 팔을 비틀고 다리를 꼬아 깨끼춤을 춘다 하늘을 조아 은하수 등불을 찾는다 은하사다리가 감마선 광목을 펼쳐 미끄럼 타고 내려오면 똥경단을 탈없이 집으로 가져가기 달덩이 방을 빼앗기지 않기   하늘 공중에 떠서 굶고 사는 B씨가 은하 젖줄에 더 가까이 가려고 양 어깨를 들썩인다 똥 굴려 똥경단 먹고 똥경단 틈새에 새끼 낳고 똥 구워서 쇠똥찜 한다              김규화 ‘쇠똥구리의 춤’ 전문   하이퍼시가 이미지의 탑 쌓기라고 정의한다면 쇠똥구리의 춤은 하이퍼시가 분명하다. 생존한다는 것은 먹는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먹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한다. 더럽고 작고 뜨겁고 차갑고를 떠나서 각자의 현실에 맞게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똥을 먹는 쇠똥구리, 아이와 아내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철탑에 올라 농성하는 근로자. 작은 일당을 얻기 위하여 관객도 없는 무대에 오른 곡예사,모두가 먹기 위한 행동으로 움직인다. 그 방법이 모두 달라도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은 같다. 굴러가고 높이 오르고 춤을 추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움츠리다가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하나의 작품 속에 모두 배열하고 전체적으로 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 작품은 하이퍼시만이 가진 표현 방식이다. 김규화 시인의 시는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췄으면서도 읽기가 편하고 이해하기가 빠르다. 너무 난해하여 독자와의 소통이 어려운 하이퍼시 속에서 하이퍼시의 완성도를 갖췄다.        4. 하이퍼시의 배제요소   1) 주관의 배제      모든 시는 시인의 주관으로 시작되고 주관으로 끝나는 게 보편적이다. 화자의 감정 몰입으로 얻은 이미지가 끝날 때까지 일직선으로 움직여 주제를 벗어난다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독자의 감동을 유도하려는 경향이 많다. 이는 화자의 울타리에 독자의 감동을 강제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라기보다는 화자가 창작한 작품이 화자의 내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다. 하이퍼시는 여기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하이퍼시가 된다. 새로운 시운동은 실험이다. 그 결과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주관을 빼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둘째 반복하여 써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셋째 나타내고자 한 이미지가 뚜렷해야 한다. 넷째이미지의 결과가 표준화 및 일반화되어야 한다. 어느 것이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하이퍼시의 최대 쟁점은 주관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 속에서 화자인 ‘나’가 있고 없고는 시작법에 있어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보편적으로 볼 때 화자의 존재는 표시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배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오케스트라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지휘자밖에 없다. 연주자나 관객 모두가 지휘자의 몸짓에 따라 감정의 기복을 나타내고 감동의 결과는 연주가 끝나지 않아도 발출된다. 시에서 화자는 지휘자에 속한다. 그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보여주는 몸짓을 한다면 객관적이지 못하여 감동의 결과는 끝내 발출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발표되는 많은 하이퍼시가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화자인 ‘나는’을 나타내어 객관을 벗어나는 듯한 작품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국 하이퍼시클럽 2집을 보면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나는’의 주관적인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시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시론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시 속의 화자 즉 ‘나’와 ‘나는’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는 존재를 나타내고 ‘나는’은 존재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나는’은 은연중 움직이려는 의도성 즉 주관성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차이를 갖고 있어 ‘나’와 ‘나는’을 굳이 나타내고자 한다면 ‘나는’ 보다는 ‘나’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하이퍼시는 화자의 울타리 밖에서 인정받는다. 화자가 만든 울타리에 독자를 들여놓을 수 없으며 처음부터 울타리 없는 시를 창작하여 읽는 이에게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야 한다.   2) 직유법의 배제    직유는 본의와 유의의 관계가 지표에 의하여 분명히 나타나는 비유로서 ‘넓은 의미의 은유의 한 종류다’라고 문덕수 시인의 시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고 그동안 많은 평론에서 직유가 논의가 되었다. 시에서 직접적인 비유가 필요한가는 시작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인 개개인의 표현방법이라 할 수 있다. 미당 서정주시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도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직유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하이퍼시에서는 과연 직유가 필요한가는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다. 사물의 이미지를 찾고 객관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하이퍼시의 이론을 따른다면 직유는 옳지 않을 것이다. 예로 효도를 나타내는 시를 쓴다면 “나는 심청이처럼 아버지를 모셨다“ "나는 이순신 장군처럼 국가를 위해 싸웠다" "나는 빌게이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등 이렇게 직접적인 표현을 한다면 과연 그 밖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처럼’ ‘같이’ 등 직유를 쓰게 되면 단 한 구절로 시를 완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하이퍼 시에서는 직유는 피해야 한다고 본다. 하이퍼시클럽 2집에서 예시를 본다면 "물계자의 노래“ 1연 첫 행부터 "나는 어느덧 지렁이처럼 거미처럼 무엇보다 지네처럼” 등 무려3번의 직유가 있고 그 밖의 시에서도 많은 직유가 유행처럼 보인다. 하이퍼시를 쓴다면 직접적인 비유가 하이퍼시의 최고 지향점인 사물의 객관화를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가 된다.   3) 항등성의 배제   대부분 사람은 사물을 대할 때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그 사물의 본질을 이미 인식된 대로 바라보게 된다. 사물은 거리와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는데 인간의 두뇌는 이미 각인된 인식을 거의 바꾸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사물의 본질대로 생각하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현실에 맞게 그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객관적인 기술 방식이다. 커다란 소나무를 매일 본 사람이라면 멀리 있을 때도 소나무의 크기를 원래의 크기대로 인식하고 그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하이퍼시는 그것을 배제하고 현재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 하이퍼시가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로써 자기가 나타내고자 하는 이미지를 그려 내는 것이 분명하다면 사물의 크기나 모양을 주위의 환경과 움직임에 맞춰 이미지의 상상력을 확대해야 한다. 사물에 대한 본질보다는 허상과 허구의 상태를 그려 여러 각도의 방향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야 한다. 이것이 항등성 곧 관념의 배제이다   88올림픽자동차전용도로에 철가방이 갈지자로 흔들며 휙휙 달려간다 소나기 지나가고 63빌딩이 부르르 떤다 흩어진 물방울이 여의도병원 성모마리아상에 내려앉는다 임종실에 들어갔다는 예수의 소식이 가슴 적신 이탈리아 아드리아 연안의 보라(bora)가 2000cc의 배기량에 우아한 보디라인과 넓은 트랙, 차체 둘러싸고 있는 탄탄한 범퍼를 자랑하며 지중해 상쾌한 바람 몰고 한남대교 나들목을 빠져나간다 내 두 바퀴 무겁다   오후 2시 네팔 카투만두 시장을 지나 한차례 쏟아진 비에 발이 묶인 바이크족이 더위를 피해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다가 청평 75번국도를 물고 찰나에 달아난다 지름길이 훤하다   질척이던 길 지우고 집으로 들어선다 아들이 남겨둔 하루가 냄비 속에 바싹 말라 있다       김해빈 시인  전문   김해빈 시인은 사실적인 묘사로 하이퍼시를 전개한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불법으로 질주하는 배달 오토바이, 뒤따라 한바탕 내리는 소나기, 스콜이 지나간 것처럼 활짝 갠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의 죽음 등 도무지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상황이 보인 그대로 전개되고 불황 속에서도 사치한 모습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외국산 자동차, 네팔 카투만두는 스콜이 잦은 곳인데 그곳에 바이크족이 갑자기 청평 75번 국도를 달리는 오토바이 부대로 전환된다. 평소 흔히 마주하는 장면 중의 하나인 쏜살같이 달리는 오토바이 행렬을 끌어와 상습 정체구간임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다. 반복되는 혼란과 불안의 연속선상에서 겪게 되는 하루가 전개되다가 안주할 집에 도착하여 보게 된 어지러운 상황과 연계시켜 하루를 마무리하며 갈등과 사회적인 격차를 그려냈다. 기존에 굳어진 이미지 대신 항등성을 배제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끌어들여 하나의 이미지로 묶은 것이다   4) 제목의 사물화 및 관념 배제   하이퍼시의 최대 목표는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로써 객관적으로 이미지를 넓혀가는 데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제목 곧 주제부터 관념어가 쓰여 진다면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기존의 관념시가 되고 말 것이다. 하이퍼클럽 2집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해부학 교실. 환각제 복용. 생존 본능. 노란 불꽃. 인연론. 냉동된 자유. 삶과 죽음의 시편. 희고 붉은 시. 환상여행. 미궁. 원앙생가, 돋아나는 서녘. 사이에 대한 소고. 나의 고독은. 겨울 여행. 세한도. 등 제목만 보면 하이퍼시라 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 많다. 이는 사물이나 형상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이미지의 제목을 붙일 수가 있는데 이것을 잊고 하이퍼시를 쓴다. 또한 제목이나 내용에 알 수 없는 외래어가 많이 보이는데 이것 또한, 배제해야 할 요소들이다.  5. 하이퍼시의 구성 요소   1) 몽타주 기법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 소비에트의 쿨레쇼프(kuleshov)는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더하기 B가 아니라 C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같다. 시에서도 각각의 이미지가 합쳐지면 부분의 특성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물 이미지의 합과 합은 완결성의 법칙에 의해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로 전환된다는 뜻이고 서로 모순되거나 부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제시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적극적 해석을 유도하는 상호작용적 방법론이다. 하이퍼시는 여러 대의 카메라로 잡은 화면을 이어 붙여 하나의 연속적인 화면으로 편집하는 시작법이다. 희극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칼 든 사람을 보여주면 비겁한 내용이 되지만 우울한 사실이 먼저 나오고 칼 든 장면이 나온 뒤 웃는 사실을 묘사하면 전혀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문장 편집의 몽타주기법에서 완성여부를 결정짓는다. 서로 관계없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하나의 그림에 담아 새로운 정서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시작법이다.   비행기가 지나자 물보라가 일었다 반딧불과 어우러져 은어 떼처럼 별들이 유영하는 밤하늘 달의 목선을 타고 심해로 떠나는 항해를 꿈꿨다 턱시도를 입고 구름과 파도에 휩쓸리던 밤바다엔 용암이 흘러 넘쳤다 꽃밭의 별들이 숯불을 피워 이글이글 타올랐다 해저에 닻을 내리고 은사의 투망을 던지는 초신성의 바다 달의 나침판은 지상을 가리켰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남자의 등에서 말의 엉덩이에서 새의 날개에서 나뭇잎의 푸른 잎맥에서 신의 성경책에서 마주보던 거울 속에서 출렁이는 바다 달의 뒷편에서 어둠은 바다를 잊고 살았다 문득 발견한 빛, 둥실 허공에 뜬 몸에서 엔진소리가 들렸다 밀물로 차오른 보름달 망망대해엔 북극성의 부표가 떠올랐다 온 세상 밤의 물결로 차오른 중수감 손안에서 바다가 출렁이고 바람에 깃발처럼 달력이 찢어진다 시간의 속력에 찌그러진 유선형의 그믐달, 화살이 날아간다                                김기덕 시인 전문   김기덕 시인의 "달의 항해"는 직유와 관념이 부분적으로 보이는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하이퍼시가 갖춰야 할 몽타주기법이 살아 있다. 하늘과 바다가 넘실대고 아버지, 남자, 말과 새, 나뭇잎 등 온갖 이미지가 난무한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하나로 묶여 읽는 독자의 시선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빛과 엔진소리 화살로 빠르고 정확하다는 집합된 이미지를 전달한다. 위의 시처럼 이해하기 힘든 이미지의 집합을 낯설게 하기의 특징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이퍼시는 각기 다른 이미지를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시작연구의 결과물이다. 중간마다 떨어져 있는 불안전한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독자가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안전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연속 제시하여 혼란을 가증시켜서는 안 된다.   2) 서사성   모든 동물은 영역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하여 싸움하고 자기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자신만의 성을 쌓고 산다.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로 영역을 가진다. 특히 시인들의 영역은 확고하다. 자신이 주장하는 시창작 방법에 도전을 받게 되면 참지 못한다. 뚜렷한 학설을 제시하지도 않고 무조건 다른 이론은 배척하는 경향은 시인들이 가진 특권처럼 되어있다.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발상은 은연 중에 나타내야지 갑자기 돌발하면 폭력적이라고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하이퍼시는 어느 날 뚝 떨어진 이론이 아니다. 인간의 발달에 따라가기 위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시창작방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혁명적인 요소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하이퍼적인 기법을 동원하더라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독자의 이해를 돕고 하이퍼시의 발전을 위한 시를 쓸 수 있는 것인가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우선은 서사성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을 나는 제시한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드리리다   이것은 어떤 신라의 늙은이가 젊은 여인네한테 건네인 수작이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드리리다   햇빛이 포근한 날  그러니까 봄날 진달래꽃 고운 낭떨어지 아래서 그이 암소를 데리고 서 있던 머리 흰 늙은이가 문득 그의 앞을 지나는 어떤 남의 안사람보고 한바탕 건네인 수작이다 자기의 흰 수염도 나이도 다아 잊어버렸던 것일까   물론 다아 잊어버렸다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다아 잊어버렸었다   꽃이 꽃을 보고 웃듯이 하는 그런 마음씨밖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었다                           미당 서정주  일부   일찍이 미당 서정주 시인은 신라초에서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현실에 맞도록 풀어내어 주목을 받았다. 인연 설화조. 수로부인의 얼굴. 신부 등 많은 시를 설화조로 표현하여 하이퍼적인 요소가 깃든 시를 썼다. 오늘날의 하이퍼와는 이미지의 전개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찍부터 과거와 현실을 융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서사로 시작되는 시는 누구에게나 친숙하게 와 닿아 이미지의 전개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시선을 잡아두는 효과를 본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하이퍼에서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시창작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강영은 시인은 이러한 효과적인 방법을 미당의 시와 더불어 서사가 있는 하이퍼시로 발표하고 있다.   아부오름, 움푹 파인 굼부리가 아버지 무릎 같다 좌정한 무릎 아래 빙 둘러 심은 삼나무들, 연하장에서 막 빠져나온 푸른 미간이다   아부지, 여기가 정토인가요   뾰족한 잠이 돋아 있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마음은 죽어서도 번득이는 붉은 돔 눈깔, 가본 적 없는 시간의 미늘이어서   잔물결 이는 생각 속으로 핏빛 물기 스미는 지상의 한 시간은 먼 거리 한 시간 후에 닿아보지 않은 발자국이 벌써 촉촉하다   눈 아래 방목장에는 푸른 지붕을 가진 축사   달맞이꽃이 평생 걸어야 닿는 저 곳에도 무릎 구부린 아비소가 갓난 송아지의 등을 핥아주고 있을 거라고 그 무릎에 가만히 지상을 얹어보는데        강영은 시인 일부   제주도의 풍경이 둘러쳐지고 삼나무 울타리에 펼쳐진 아버지의 기억이 한 편의 영상으로 전개된다. 불교에서 원하는 서방정토에 아버지가 이미 갔으나 달맞이꽃 되어 바라보기만 하는 화자는 따라가지 못하여 한 마리 송아지가 되어 등을 핥아줄 아버지의 혀를 기다리며 지상에 전개된 목장에 촉촉한 발자국을 찍으며 배회한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듯 불가능한 일을 해내려는 시도는 돌아간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아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은 서녘에 목멘 목젖을 필사한다. "원왕생가"의 전설을 모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작품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 여러 가지의 사물로 적절한 비유를 하여 하이퍼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작품이다.    수학자 폴리아(G.polya)는 재미있는 실험을 하였는데. 곰 한 마리가 a지점에서 출발하여 1킬로미터를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 1킬로미터를 간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1킬로미터를 간다. 그러다보니 출발점인 a지점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곰의 색깔은 무슨 색일까 하는 실험이다. 답은 흰색의 북극곰이다. 문제는 곰의 색깔이 아니다. 남쪽으로 1키로 동쪽으로 1키로 북쪽으로 1킬로미터로 갔는데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지구가 둥근 입체가 아니라 평면이라고 생각하는 맹점을 말하는 문제다. 습관적으로 새로운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시는 무조건 어렵고 외우기가 불편하다는 선입감을 더 느끼고 시를 대한다. 더구나 하이퍼시라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선입감을 갖고 있으며 시인들조차 하이퍼시가 무슨 시인가 하고 의문을 갖는다. 문제는 이야기 즉 서사에 있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데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쉬운 이야기를 이미지에 맞춰 풀어간다면 하이퍼시의 성공은 분명하다고 본다. 폴리아의 문제처럼 시선을 끌어들여야 하이퍼의 공간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6. 하이퍼시의 방향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론 발표 이후 많은 시인이 참여하여 현재까지 발표된 하이퍼시는 시단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 하지만 하이퍼시의 이론과 맞게 발표된 작품이 과연 몇 편이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주관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사물의 이미지를 찾지 못하고 제목부터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과 국적 모를 외래어의 남발, 이어가지 못하는 이미지의 확장을 위한 과도한 직유, 상상 보다 허구의 조합이 많고, 과도한 낯설기작법 등, 독자들이 외면하기 좋은 충분한 요소를 가진 것이 사실이다. 평론가 이성혁은 "시문학" 8월호에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이란 시론에서 이상의 시 "광녀의 고백"을 들어 현란한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흐르면서 하이퍼하게 결합하고 벌거숭이인 채로 달리고 있는 푸른 불꽃 탄환은 모순적인 색채이미지가 결합하고 있어 진정한 하이퍼적 요소를 갖춘 시라고 극찬하며 현재의 하이퍼시를 일부 폄하하는 듯한 글을 발표하였는데 또한 하이퍼텍스트가 시에 내장된 어떤 특성을 활성화하여 개발된 것이라면 하이퍼텍스트는 테크롤리지에서 시를 예속시키려하는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시도는 진보적이라기보다 퇴보적이기에 실패하게 된다고 비평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일부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인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하이퍼시가 문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꾸준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이퍼 시이론에 맞게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며 자신의 시창작에 한계를 느껴 유행을 따르듯 하이퍼시에 동참하고 시의 낯설게 하기가 낱말의 낯설기가 아니라 이미지의 낯설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103    hyper poetry 리해 댓글:  조회:4084  추천:0  2015-02-24
      하이퍼시(hyper poetry) 이해 崔進淵             1. 하이퍼시란 용어와 개념       지는 몇 년 전부터 하이퍼시라는 새로운 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시인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하이퍼라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심 상운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시론집을 낸 바 있고, 필자는 그에 대한 서평을 주로 그의 하이퍼시론을 중심으로 써서 (2009.9)에 발표한 일이 있다. 하이퍼시(Hyper poetry)란 ‘하이퍼+시’를 뜻하는 조어(造語)이다. 인터넷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문학(Hypertext Literature)에서 ‘Hyper’를 차용해서 만든 말이다. Hyper는 ‘과도, 초과, 초월, 건너뜀, 최고도’를 의미하는 접두사로서 Hyper-bole(과장법),Hyper-optic(원시), Hyper-content(대만족), Hyper-sensitivity(과민증) Hyper-bo-rean(북극의, 북극인),등 그 용례는 볼 수 있다. 하이퍼시가 어떤 점에서 Hyper한 시인가? 그 대답을 단순하게 하자면, 표현형식에서 Hyper하다고 할 것이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탈 관념적인 사물시와 같은 입장에서 시를 쓰되, 그 구성 양식에 있어서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쓴다.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Hyper하다고 하겠다. 하이퍼시 상론은 뒤로 미루고, 우선 하이퍼시가 출현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2. 관념시와 사물시     하이퍼시(hyper poetry)를 말하려면 먼저 관념시(觀念詩)와 사물시(事物詩)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사물시를 쓰는 시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시단에서 의식적 집단적인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서 시 쓰기는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근래에 와서 시작되었고, 하이퍼시는, 라는 진화과정을 거쳐 출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랜섬(J. C. Ransom)은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 사물시(Physical poetry),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로 구분하였다. 관념(Idea)은 사물(Thing)의 대칭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떠나 시론상의 개념을 범박하게 말하면, 시에 담긴 감정이나 의미(사상, 주장, 의도 등)를 뜻한다. 관념시는 이런 관념들을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워즈워드(W. Wordsworth)가, “모든 좋은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다.”라고 한 말이나, 아널드(M. Arnold, 1822.12.24~1888.4.15)가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라는 의 말은 시의 관념성을 강조하고 있다. 동양시론의 근원인 상서(尙書)의 순전(舜典)에 나오는 ‘詩言志’란 말은, ‘마음(心)이 가는(之) 대로(志) 표현(言)하는 것이 시(詩)라는 말인데, 이는, 시가 마음-사상 감정을 표현한다는 관념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 시론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思無邪’란 말도 그렇다. 공자가 자신이 편집한『詩經』의 시편들을『論語』「爲政篇」에서 총평한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에서 따온 이 말도 시가 ‘사특한 마음이 아닌 바른 마음이 담겨 있다.’는 뜻이니, 시의 관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런 전통적 인식이, 관념시가 전통적으로 우리 시의 주류를 이루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문학은 시대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한국시의 연원인 唱歌와 그에 이어진 新體詩가 발생 ․ 전개된 시기가 국권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10 전후의 개화기여서, 우국충정의 감정과 의지 곧 관념이 그 詩歌 속에 강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시의 효시인 주 요한의「불놀이」도 민족 수난기를 맞은 비애의 감정이 충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이후의 작품들 역시 국권을 침탈당한 시대의 고통과 분노, 인고의 감정, 투지와 희망의 의지 등의 관념이 그대로 또는 굴절되어 반영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식민지 한국의 작가 ‧ 시인으로서 그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시는 그 관념시의 전통을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시에서 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관념을 떠난 이 장희, 정 지용 등 순수시, 이 상의 기호시나 조 향 등의 초현실주의 시, 김 춘수의 무의미 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속할 시도 없지 않았으나, 이 육사, 한 용운, 윤 동주 등의 경우처럼 정신과 의지가 강하거나 아니면, 이 상화, 김 소월 등과 같이 감정 노출이 심한 관념시들을 지금까지도 이어받아 쓰고 있다. “관념시는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주류로 군림해왔다.” 이런 한국시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의 모색은 문 덕수에 의해 주창되어왔다. 주지하는 대로 문 덕수는 모더니스트로서 처음부터 주지성이 강한 사물시 내지 형이상시로 간주될 수 있는 시를 주로 써왔는데, 그는 2천 년대 들어와서 탈 관념의 사물시를 비롯한 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그 뜻을 확산하기 위해 그의 주도로 2004년에《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개설, 배재학당 건물에서 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그 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은 시론집『새로운 시론 탐구』의 제목부터가 관념을 떠난 새로운 시 쓰기를 모색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사물시란 사물을 다시점(多視點)에서 현상학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을 기초로 쓴 시이다. 다시점이란 동일한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위치, 때, 광선의 밝기, 조명의 색깔, 양의 다소, 다른 사물과의 매치, 원근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므로 그런 다양한 모습을 객관적이나 개성 있는 눈으로 포착해서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시란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시는 ‘탈 관념(무의미)’의 시이다. 문 덕수는 사물시를 설명하면서 “시에서 관념이나 어떤 사상보다 물리적 이미지를 중요시한다는 뜻이다.…관념도 반드시 물리적 이미지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관념을 형상화해서 사물시로 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추상적 관념 예컨대 애국, 사랑, 증오, 분노 등을 대상으로 쓸 경우도 五感에 의해 감각되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것을 T.S. 엘리엇은 “사상의 감각화”라고, E. 파운드는 "관념의 형상화“라고 말했다. 심 상운은, 관념덩어리인 언어로 표현하는 시에서 사전적 의미의 관념을 벗어날 수는 없으나, “시인(화자)의 주관적 생각(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 제시에 그치면 ‘탈 관념”이라는 말로 관념과 탈 관념의 기준을 세웠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관찰에 의한 현상의 인지적 묘사에 그친 시가 사물시라는 것이다. 이 시운동에 적극 나선 시인은 오 진현이다. 그는 탈 관념을 강조한 시론집『꽃의 문답법』을 내면서 직관에 의한 사물시를 써왔다. 그는 『이 상의 디지털리즘』출간 전후로 사물시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작품을 ‘디지털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직관적인 사물시 쓰기에 뛰어났으나, 시론은 정리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의 시론을 정리, 발전시킨 심 상운은 디지털시론에서 나아가 하이퍼텍스트문학의 요소를 살린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 ‘하이퍼시’에 관한 일연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시론에 따른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3. 하이퍼시 출현의 필연성       우리는 앞에서 하이퍼시가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사물시와 디지털시를 거쳐 출현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하이퍼시의 출현은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 본다. 하이퍼시 출현의 더욱 두드러진 필연성은, 현대의 철학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는 탈구조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다. 절대자, 절대자아, 절대가치, 권위주의, 중심주의 등이 부정되고 복잡다단한 현대에 맞는 다양한 개성과 상대성이 지배하고 존중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예술 표현에 있어서도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절대유일의 재현(Representation)이나 동일성(Sameness)을 거부하며, 어느 것만을 절대시하지 않고, 현대사회를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지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시에서도 작자의 일방적인 정서나 사상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전통적 관념시에서 떠나 다원화되고 전문화된 이 시대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시를 써보자는 것이다. 또 전자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시대가 우리 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하이퍼시 출현의 세 번째 필연성이라 하겠다. 현대는 IT를 비롯한 새로운 전자기술의 발달로 A. 토플러가 예언한 ‘제3의 물결’이 산업 및 생활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황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도체 기술의 진화가 야기하는 IT 등의 신기술은 혁신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질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데, 이 변화는 한마디로 말해서 종래의 아날로그문화에서 디지털문화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는 유‧무선인터넷과 PC, 스마트 폰 등으로 어느 곳에서나 거의 동시에 접속, 통신 또는 샘플링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 지식 정보(데이터)는 주지하다시피 0과 1의 2진법 형태의 비연속적 단속적 신호체계 즉 디지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이 두 가지 시대적 특성은 예술 분야에도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변화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한국인 백 남준이 열어놓은 비디오아트는 미적 상상력에 의해 디지털 기기와 기술을 채용 구성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디지털아트로 발전하고 있음을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시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작가들도 이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 이 시작된 지 오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줄 안다. 디지털시에 이어 거의 동시에 하이퍼시가 출현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과 필연성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라 본다.       4. 하이퍼시의 특성   필자는, 오 진현이 탈 관념만을 강조하면서 언어의 본질적 가치인 관념을 도외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에 한 마디 하는 것이 언어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는 데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탈 관념은 가능한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시문학,2006.7). 심 상운은 사물시를 쓰는 입장에서 오 진현의 생각을 옹호하는 ‘탈 관념시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시문학,2006.8). 그 이후 사물시 내지 디지털시론을 다수 발표하다가 하이퍼시에 관한 본격적인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이퍼시의 특성은, 무엇보다 그 구성에 있어서, 문 덕수 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창하고 그의 시에서 적용해온 시적 방법으로서 “집합적 결합”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컴퓨터, 책, 확대경, 볼펜, 찻잔, Secret Card, … 이런 물품들은 서로 필연적 인과 관계가 없으나 지금 필자의 책상 위에 놓인 물품이란 점에서 하나의 집합으로서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시에서 행과 행, 연과 연 상호간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건너 뜀 초월’이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을 미술에서 말하는 구성(Composition)이라 생각한다. 가령 클레의 나 큐비즘을 연 피카소의 등 서양 그림 가운데 구성적인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사실 이 기법을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용해왔다. 심 상운이 말하는 하이퍼시와 전혀 다를 것이 없음을 하이퍼시인들의 모임에서도 확인되었다.⒟ 아무튼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심 상운은 이를 종래의 관념시처럼 단선구조가 아닌 다선 구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종래와 같은 단선(單線)구조도, 다선(多線)구조도 아닌 뚜렷한 여러 가닥의 선을 찾을 수 없으므로 비선(非線) 또는 무선(無線)구조라고 함이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하이퍼텍스트문학의 특징을 인쇄텍스트인 하이퍼시에 살린 점에서도 그렇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은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다. 이미지 단위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디지털의 모듈(Module)이론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Rhizome)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미론적 혹은 정서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게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그러나 화자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링크 역할을 하는 유사한 소리나 단어, 구문의 반복 등과 함께 연상에 의해 시의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세 번째 특성은 상상력에 의한 시적 공간 확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컴퓨터에 의한 사이버공간에서 3차원의 입체적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또 다른 현실이 현실세계와 조금도 다름없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이퍼시는 클릭에 의해 즉시 열리는 ‘준비된 현실’이라는 이 가상현실의 세계로 문학적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하자는 것이다. 과거 시적 이미지는 현실세계를 따오는(Sampling) 데 그쳤으나, 하이퍼시에서는 그 이미지들이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술라르가 그의 공간시학에서 말하는 이미지의 보편성이란 질서를 잃지 않는다. 독자 누구나가, 시인이 이 두 현실의 구별이 없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을 상상에 의해 교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이퍼시의 또 다른 특징은 그 표현에 디지털 감각의 영상성과 동시성, 정밀성을 강조하는 점이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이 동영상과 유사한 동적 입체적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단위(Unit, 연과 행)의 이미지들은, 앞에서 말한 상상과 공상에 의한 이미지 창출과도 관계가 깊은 말이거니와, 마치 TV장면이 순간적으로 제한 없이 바뀌거나 또 채널을 돌릴 때 순간적으로 전혀 다른 화면이 나타나는 것과 흡사한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에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직관이나 관찰의 경험이 의식 무의식을 통한 사유에 의해 표현의 정확한 정밀성을 가지되 디지털의 이 순간적 단속적 사실(寫實)적 특성을 시에 원용하고 있다. 종래의 단선적인 시는 지속적 사유의 산물로 디지털의 순간적 단속의 직관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하이퍼시에는 이런 생동하는 이미지의 현장성이란 리얼리티가 강하다. 아날로그적 종래의 시에도 없지 않으나, 하이퍼시는 서사(敍事)구조라는 특성도 가진다. 물론 시의 얼굴은 각 편마다 다르게 되기 때문에 천편일률로 서사적인 짜임으로 되지 않을 수 있으나 대체로 서사구조를 갖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여러 특성을 살려서 관념성을 탈피하고, 디지털문화가 보편화됨과 동시에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현대문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시의 패러다임이 하이퍼시라 하겠다. 이제 이쯤에서 하이퍼시와 그 시 형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있어온 여러 가지 양상의 시들을 괄호문자로 표시한 대로 살펴봄으로써 하이허시와 종래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를 작품을 통해 직접 이해하기를 바란다.       ⒜ 관념시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 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김 현승, 「가로수」6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가로수인 플라타너스가 푸른 잎으로 행인의 반려자가 되어준다는 일관된 관념을 볼 수 있다. 이 시에 상상력에 의한 창조적 이미지는 첫 연의 제3행에서 볼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념시는 관념의 평면적 설명의 서술에 그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 순수사물시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船窓으로/ 눈썹까지 차오른 水平이 엿보고,// 하늘이 한 폭 나려앉어/ 큰악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透明한 魚族이 行列하는 位置에/ 홋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정 지용, 「海峽」7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감각적 즉물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순수 사물시이다. 화자의 어떤 의견이나 주장의 관념이 전혀 없다. 이런 이미지 창조는 곧 언어창조로 고정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생명력을 언어에 불어넣는다. 자기만의 이런 언어창조가 없는 시는, 엄격하게 말해서, 창작물로서 시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관념이 깔려 있는 사물시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 화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하고 바로 눈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서 내 앞에 선다. -오 진현,「꽃!」전문   이 시는 사물시이지만 화자의 의도가 들어 있다고 본다. 사물을 물리적 언어로 쓴 작품이므로 사물시에 속하나, 이 시는 화자(시인)가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볼 때 국어사전적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감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그 감격을 시화하겠다는 의도가 녹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시는 순수한 의미에서 사물시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 ⒟ 하이퍼시와 다름없는 종래의 시 보기   빛의 그물에 걸려 대롱거리는 녹색 공/ 오늘 아침 내 귀는/ 컴퓨터의 그래픽 속에/ 남쪽 하늘 반달처럼 떠 있더라.// 스치로폼 눈이 내리는 겨울 밤/ 비닐 순대를 먹은 창자가/ 밤새 꿈틀꿈틀/ 페르시아 만(灣) 쪽으로 기어간 자국.// 연필을 깎아 향나무 냄새가 나는 시를 쓰는/ 수녀님의 시간은/ 그녀 생가의 마루 밑에 잠든/ 청동(靑銅)화로//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찍어내는/ L. 다빈치의 키 펀칭/ 고난 주간 마지막 밤에 흘리던 피땀/ 우리 구주 로봇 씨의 이마에도/ 수은빛 진짬이 베어 나더라.// -최 진연, 「그래픽 ‧ 1」전부   이 시는 80년대에 쓴「그래픽」이란 제목의 연작 중 첫 작품이다. 이 시의 이미지들은 낡은 지폐처럼 때 묻은 이미지들이 아닌 독창성을 보여주며, 각 연의 그림언어들이 상관성이 거의 없이 구성되어 있다. 맨 끝 연에 관념성을 약간 노출하고 있으나 종래의 관념시와는 다른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 시 전체가 앞서 설명한 요즘의 하이퍼시와 다를 게 없다는 평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라고 종래의 시와 전혀 관계없는 게 아니다. 시인들에 따라서는 이미 하이퍼시적 특성들을 시작에 사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이제 하이퍼시를 써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 하이퍼시 보기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무장한 미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업은 40대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거품을 토하여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드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 상운. 『빨간 방울토마토 또는 여름 바다 사진』   이 시는 화자가 식탁에 앉아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 여름 바다 사진을 보고 느낀 것을 서술형식으로 쓴 하이퍼시이다. TV에서 본 것으로 되어 있는 이라크 아이나 미군, 겨울풍경은 화자가 상상으로 만들어내었거나 샘플링 한 가상현실이다. 이 시가 위에 설명한 하이퍼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 공상에 의한 이미지 보기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후략) -심 상운,「파란 의자」부분   이 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나, 《윤리학》의 쾌락을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칸트의 ‘무목적의 목적’라는 말로 일컬어져온 문학의 유희성을 생각하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詩史에서 심 상운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하이퍼시 몇 편을 감상 자료로 더 제시하겠다.   시인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황제*를 읽어서인지 내 심장이 핑크빛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여름 태양보다 뜨겁게 운동장을 달구는 관중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는 나라에서 지하철 칸칸마다 하얗게 죽어서 밟히는 시간의 시체들을 보고 피라미 같은 낱말들의 떼죽음을 보자니, 눈사람 같은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를 위한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하나님과 불타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서 돌아올 때 푸줏간의 고깃덩이들 틈에 어느 시인의 심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났다. 아침에 죽은 팝송 황제 마이클 잭슨의 새까만 안경과 하얀 페인트 얼굴의 입술에 칠한 빨강, 아이스크림 황제를 모르는 그 황제는 죽어서 더 날뛰면서 그 입술 색깔로 노래하고 있었다.// 새싹 밥이 소화되는 그날 밤, 낮에 본 지하철 공사장에 쌓인 철 빔들이 모두 일어서서 천년을 꿈꾸는 숲을 이루고, 팝송 황제를 위해 노래하는 숲의 나뭇잎들. 꽃다발을 바치는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나는 더위를 식히라고 아내가 주는 아이스크림을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가 생각나서 먹을 수 없었다.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Wallace Stevens)의 시 제목 - 최 진연,「아이스크림」전문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불룩한 가슴선에선 노란 분꽃냄새가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 있던 붉은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잔뜩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 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 심 상운,「환각제 복용」전문   청계천 늪지대, 하늘 장대에/ 양 팔을 끼운 꽃무늬 바지저고리/ 바람이 십육 배 속으로 끌어올렸다내렸다 한다.// 살수차가 엎어진 도로 위,/ 버스는 오후의 해를 끄려고 허공으로 올라가고/ 소풍 나온 아이들의 구름 모자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시간을 ‘뒤로뒤로’ 클릭 해보세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음”/ 담임선생의 긴 손가락이 남아 있는 생활통지표./ 전학 간 친구가 건네준 올챙이 편지,/ 살구색 치맛자락을 치켜든 어머니/ 오월의 꽃그늘로 걸어가신다./ 나는 은하철도를 타고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디지털이 무엇입니까?”/ “자연이 진화한 것이다.// 디지털 이후는 무엇이 올까?/ 잭슨 폴록은 아직도 바람의 염료를 뿌리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물결은/ 세이랜의 노래를 내 방으로 쏟아놓는다.// - 위 상진,「설치미술」전문     5.맺는 말       우리는 앞에서 사물시에서 관념을 함유하고 있는 경우를 보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퍼시에서도 사물에 대한 인지적 단계를 넘어 무엇을 지향하는 의미를 외표하지 않는다면 형상화 된 관념은 허용해도 상관이 없으리라 보고 그런 작품을 쓰고 있다. 위의「아이스크림」이 그 한 예이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문학의 양대 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심 상운의 표현을 빌자면 ‘지장수 같은 관념’을 살려 쓰고 있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해서이다. 또 초현실주의 시 등에서 볼 수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시는 문제가 되므로 하이퍼시에서도 정서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래의 시와 다를 게 없다는 점도 부기해둔다. 관념의 과잉은 한국시가 벗어나야 할 당면 과제로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시는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표현 방법 공 형식이 더 중시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무엇인가를 써내려고, 시 속에 감정이나 생각들을 많이 담으려고 해서 시가 무겁고 재미가 없게 된다. 시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시’입네 하고 시 이전의 자기감정과 주장을 늘어놓은 잡초 같은 글을 발표하고 있어서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102    하이퍼시와 비몽사몽 글쓰기 댓글:  조회:4509  추천:0  2015-02-24
  ‘비몽사몽 글쓰기’와 하이퍼텍스트시                   손해일 (시인, 문학박사 )     지난호 시문학에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라는 아주 인상적인 토픽이 실렸다.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를 문학의 에콜로 활성화하자는 취지를 밝힌 심상운, 김규화씨의 대담이 그것인데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감한다.        전자 다중 매체의 발달에 따라 현대는 이미 디지털적 사고와 컴퓨터, 인터넷을 통한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가 주류를 이루는 추세여서 수천년간 금과옥조가 되다시피한 아날로그적 전통 글쓰기 방식도 변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오남구, 심상운, 이상옥씨 등 시문학 출신들을 중심으로 ‘탈관념시’ ‘사물시’  디카시 등의 논의가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데 새시대문학의 지평넓히기라는 측면에서 고무적인 현상이다.    1965년 컴퓨터 선구자 넬슨이 사용해 보편화된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는 인터넷 웹문서형식으로 사용자가 임의대로 선택, 첨삭, 패러디 등을 다양하게 네트워크로 링크시키는 비선형적, 비선조적, 비문자적 특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문학비펑적으로 보면 그리 간단히 넘길 개념이 아니다.   수용미학이나 구조주의 기호론적 관점에서 본 전자적 글쓰기나 읽기는 작자 일방이 아니라 독자가 함께 상호 교환 반전해 텍스트와 텍스트가 끝없는 링크로 연결되는 복합구조이다. 실생활에서 수퍼마켓보다는 하이퍼마켓이 보다 크고 발전된 첨단유통점이듯이  ’초월하여, 과도한‘이라는 의미의 ‘하이퍼(hyper)라는 접두사 자체가 새로운 개념을 암시하고 있다.  라틴어 textus( 실로 짜여진 직물)가 어원으로 단순히 작품(work)이라는 말을 대체한  텍스트(text)라는 개념도 1960년대부터 자주 쓰이기 시작해 한스 야우스 로베르트가 주창하는 수용미학의 핵심개념이 되었다.    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지면은 없지만 롤랑바르트는 텍스트와 작품을 몇가지 관점에서 확연히 구별하고,  문학적 텍스트와 비문학적 텍스트도 구별하고 있다. 따라서 텍스트가 문학작품과 단순동의어 개념이 아니라면  이를 원용한 시쓰기도 혼란을 줄이기 위해 ’하이퍼시‘ 라는 약칭보다는 '하이퍼텍스트시’로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이러한 시대배경과 개념이론이 맞물려 첨단적 글쓰기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시’는 관심의 초점이며, 디지털강국으로 등장한 한국의 현실에서 이론이든 작품이든 선도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덧붙여 고려할 것은 인터텟용어에서 파생된 하이퍼텍스트 개념이 재래적 글쓰기에도 심상이나 이미지 창출과정에서 배태되어 있다는 점, 종이문자의 하이퍼텍스트와  전자적 하이텍스트의 차이와 유사점,  프로이트의 꿈이론이나 정신분석학과도 연관이 크다는 점이다.     문자와 동영상, 소리, 그림 등 복합적 기능을 망라한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는 사이버 공간을 통해 현실과 가상현실을 넘나들며 첨삭, 교환분합, 집합해체가 자유롭고 온전히 비논리적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꿈꾸기’와 닮아 있다. 예술창작행위 자체가 일종의 꿈꾸기이지만 특히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는 첨단 디지털적 특성뿐 아니라 상상보다는 공상을 위주로 하여 현실과 가상현실(꿈)을 넘나들며 비논리적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비몽사몽 글쓰기’라고 명명해 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 시문학 4월호에는 하이퍼텍스트적 시작품 보다는 시인의 일상과 서정을 위주로 한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하이퍼 텍스트적 글쓰기의 당위성과 시대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생소하기도 하고 보편화 되지 않은 탓으로 본다.  4월의 시 26편과 최연홍,정대구, 조운주, 김철교시인의 신작시집 중에서 몇편을 언급해본다.       지금은 기억 조차도 마구 희미하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통성명을 하고    체온이 전해지도록 악수도 했을 것이다.    두서없이 바쁘기만 하던 날    얼키고 설킨 거미줄 이젠 실밥이 터진 채    먼 나라 동전으로 서랍 한구석에 누워 녹슬어 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얼굴    이제 와 더듬어서 찾으려 해도    벌써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거나    전화번호는 이미 결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스치는 옷깃 하나로도 환하게 눈부시던 날의    소중히 간직해온  젖은 인연이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세월의 뒤안길에서    지금은 기억마저도 한참 동안 희미하다.                   --김석규 < 명함> 전문         언제 받아 넣었는지/ 작년에 입던 윗호주머니 속에 /낡은 명함  두 장/    민등기, 주근우 별난이름이다 /어디서 만났을까 직함과 관련 시켜봐도 /    이름이 별난 만치 그 얼굴 별나지 않았는지 /기억을 일일이 들쳐봐도 미등기상태/   처음부터 내 기억 속에서 죽은 친구/생각을 꼬집고 뒤집어봐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       //......    중략.....// 얼굴 사진까지 새겨 넣은/ 차마 찢어버릴 수 없는 /내 서랍속에 차곡차곡   눌려 있는 명함들/ 또 어떻게 처리할까/ 이번 기회에 화장해 버릴까//    아니지 천지사방에 뿌려놓은 내 얼굴은 어찌하라고//                     -- 정대구 < 명함 > 일부     우연이지만 위의 예문은 김석규와 정대구시인의 이라는 같은 제목의 단상이다.  태초에 아담이 사물의 이름을 짓듯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때문일까. 이름처럼 귀한 게 있을까. 세계적으로도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전에 부모가 지어주신 징표를 영광스럽게 남기고 더럽히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집착 또한 대단하다.  특히 현대인의 실생활에서 필수품이 된 명함이 한국에서는 연락처와 이름을 적은 일상적 네임카드나 비즈니스 카드를 넘어 심한 경우엔 자신의 사진과 이력을 촘촘히 박아 넣은 준 이력서 수준이 되기도 한다. 통성명을 넘어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알리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산물인데도 세월이 지나면 수북한 명함꽂이의 그 많은 명함중에서 몇 장이나 기억에 남을 지 생각해 볼 일이다.    김석규와 정대구의 시에서처럼 엁키고 설켜 옷깃을 스친 소중한 인연을 간직하기 위해 정중히 인사하고, 악수도 한뒤 곱게 받아 넣은 명함이 녹슨 동전처럼 서랍에서 잠자고 세월이 지난  뒤 명함을 꺼내보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명함건넨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서 후일  ‘누구였더라?’ ‘어디서 만났더라?’  아무리 기억을 뗘올려도 생각나지 않는 안타까움은 특히 나이든 사람이면 익히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버릴수도 태울수도 없는 애물단지, 자신이 뿌린 명함도 상대에겐 같은 처지일 것이므로...      오늘은 온통 벗은 웃음으로 건배를 한다. /가장 취약한 약점을 일부러 드러내기 위해/      며칠 전부터 리모델링하는 하얀 페인트븟을 몰래 / 휴지통에 던지고 간 벽 쪽 무당거미     줄을 친 가리개/ 그 옆에 그것만 가린 억센 니그로의 가시내/ 카페의 벌거숭이들 앞에서     웃는 하얀 이빨/ 야릇하게 휘감는 엉덩이로 따내고 있는 옥수수 //  모두 시원한 옥수수     밭으로 달려간다 간다 ... 구멍마다 튀어나온 말벌들이 몰려온다/ 맥주컵으로 후려 칠수     록 흘러 넘치는 밴드연주/ 흰 발톱에 부서지는 얼음 파편을 일부러 밟는 탱고 춤/ 눈구     멍을 막을수록다가오는 하얀 콧구멍은 벌름벌름.....                                   ---차영한 < 몸과 옷의 오후 >일부      어느 이국적 카페에서 벌어진 질펀한 술판과 흑인 여자의 모습과 무대와 밴드연주. 탱고  등이 배경으로 나오고 그속에서 화자가 느끼는 감상이 순차로 암시된다. 가리개, 니그로의 가시내, 하얀 이빨, 옥수수, 하모니카, 말벌, 밴드연주, 탱고춤, 눈구멍 , 하얀 코구멍 등 이다. 제목이 ‘몸과 옷의 오후’ 라 암시적이지만 화자의 주장이나 구체적인 설명대신에 특징적으로 제시한 장면과 사물만으로도 몽환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일종의 보여주기 수법으로 시로서 앞서 얘기한 하이퍼텍스적적 성격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세링게티 초원에 건기가 시작되면 200여만 마리의 누 떼들이 신선한 초원 찾아 목슴       건 여행을 시작합니다. / 그들은 무리지어 서로 도와가며 움직이면 악어도 사자도 쉽       게 덤비지 못한다는 것 잘 압니다. // ---< 중략 >--- // 언덕을 먼저 넘으려고 서로       다투다 깔려  다리가 꺾이는 누가 생깁니다...... //악어는 경쟁에서 밀린 누를 먹잇감      으로 손쉽게 취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내눈에는 어려움에 처     한 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발에 밟혀 쓰려저 위험에 처해 있는 이들이 있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의 평안함이 계속되기만을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                                            ---장원상 < 세상건너기 > 일부      아프리카 세링게티 초원의 봄철 누떼는 스프링고우트(Spring Goat) 라는 예화로 우리 인생살이의 교훈으로 자주 인용된다. 산문형태로 다소 늘어진 게 흠이지만 장원상시인 역시 누떼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있다. 성인군자나 이타적 삶을 추구하는 가 대단한 인격자가 아니라면 우리들도 자기중심적인 평범한 삶이 대부분이다.  특히 봄철 건기에 새풀을 찾아 다투며 선두 양이 질주하는 꽁무니를 무작정 따라 달리다 보니 계곡 낭떠러지에 집단 추락하는 양떼도 있다. 양떼들도 봄을 타서 비관자살하는 것일까? 실은 눈앞의 새풀을 서로 먼저 먹으려고 다투며 맹목적으로 질주하보니  관성으로 멈추지 못해 생기는 참상이다.  우리도 누떼처럼 앞만 보고 달릴 게 아니라 추구하는 행복과 삶의 목적, 방향은 옳은 지, 이웃들의 삶은 어떤지  가끔 살피며 세상을 건널 일이다. 마침 우리도 4월 9일 국회의원 선거를 마쳤기에 양떼처럼 죽음의 절벽으로 몰지 않는 현명한 리더들이 많아 지기를 바란다 [출처]  비몽사몽 글쓰기와 하이퍼 텍스트시 |작성자 손박사
101    <산해경>은 난해시의 원조 댓글:  조회:4568  추천:0  2015-02-19
  을 제대로 알아보기 쉽게 번역하는 방법은 없는가? 한문을 안다고 해서 번역이 되는가? 현재까지는 그렇게 해 왔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하여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 비밀 한 조각이라도 파악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이제 새로운 번역의 방법을 찾아 풀어보았다. 아마도 이 방법 이외에 또 일을지는 알 수 없다.   『산해경』은 난해시의 원조   이 『산해경』에는 동물과 식물이 얽히고설킨 형태는 신화神話로만 취급할 것이 아니며, 그 지역의 특징적인 본질을 숨겨서 비유한 은유법‧암유법이 가장 많이 쓰였으며, 가장 축약되고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고,온갖 상상력으로 꾸며져 있어 특별한 언어로 창조하면서까지 서정과 창의를 함께 끌어오는 예술로서 문학의 진수인 시詩/Poetry의 특성을 가장 많이 담고 있기도 하다. 더구나 압축과 비약이나 이항대립적 세계의 인식 속에서 불가해스러운 현대시학의 특성으로 들고 나온 “이종교배적 상상력의 서정”이라든지, 전혀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새로운 창의적인 것으로 재탄생되는 것으로서 프로 시인과 아마추어 시인으로 구분하는 중요 기준의 절묘한 기법이라 평가되는, “사물의 존재의 현실적인, 합리적인 관계를 박탈해 버리고, 새로운 창조적인 관계를 맺어주는 것을 데뻬이즈망Dépaysement이라고 한다.”는 초현실주의Surréalism 시의 미학이라는 기법도 이미 『산해경』 자체에 녹아 있다는 사실이다. 즉 『산해경』은 현실적 사물들을 전혀 낮선 사물이나 장소에 조합시킴으로써 그 용도‧기능‧의미를 통하여 초현실적인 환상을 창조하여 세상을 낯설게 새롭게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을 세계적 사조思潮에서 보면, 1917년 이후에나 등장하는 쉬르레알리스트Surréalist들의, 마치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의 그림처럼, 어쩜 진정한 난해시難解詩를 바로 이 『산해경』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문의 해독 능력을 뛰어넘어 역사와 지리와 민속적 개념은 물론 상상력이 풍부한 시적 감각이 없으면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 바로 『산해경』이다. 그래서 나는 『산해경』을 가장 오래된 한편의 ‘난해시Difficult Poem’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문학의 어떤 장르를 다루는 사람일지라도 『산해경』을 제대로 읽거나, 개념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문인文人, 특히 진정 시인Poet의 품격을 지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본질을 말하건대, “시는 교묘한 말로 언어를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신명이 하늘 문자로 이미 사물의 만상을 시를 써 놓았으니, 시인은 그 천문을 인간 문자로 해독해 내는 시작 행위를 해야 한다.”고 최근 ‘미학의 시’가 주장됨에 앞서 이미 『산해경』의 이름에서부터 자연 속의 많은 사물의 특성에 관해 유기적으로 문학적 형상화를 잘 소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더구나 신화와 시가 본질적으로 그 고유한 특성 ― 상징·은유 및 인간과 사물 내지 자연과의 공감적 태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산해경』의 저자는 시인의 소양을 갖추었으며, 문장은 특히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언어의 특징 요소로서 운률의 구조는 4자·6자를 기본으로 한 시적 변용變容/Transfiguration이 모색된 기법에 더하여 거의 동일한 문형文型/패턴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는 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해경』은 신화로 빙자되는 난해시인 것이다. 더구나 언어기호의 의미는 무엇보다 하나의 시니피앙[signifiant/name/言表]에 그 하나의 시니피에[signifié/sense/言志]를 넘어, 또 다른 시니피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다양성은 특히 고사故事의 비유에서 많으며, 시의 특성의 하나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시어에도 같은 듯하지만, 다른 차별성의 특성,즉 헥시어티haecceity가 분명 존재하고 있으므로, 조어성造語性/새로 말을 만들어내는 성질이 매우 강하며,시적 언어에는 언제나 2개 이상의 의미言志로 읽힌다. 즉 『산해경』은 창조된 수많은 시어로써 나타낸 휫손리더십의 중요한 소재이다. 이 『산해경』을 읽어보면 분명 그러한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웬만한 사람들은 알아보기 어렵게 『산해경』을 썼을까. 그것은 그 지방과 그 제후들의 특성 습성 관습 개성과 핵심 활동 내용을 파악하여 정치 리더십으로 발휘하기 위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밀을 명확하게 제대로 알아내면 정치는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백성을 마구 부려먹기도 하지만, 정치의 책임에는 어떤 경우에도 임금, 즉 국가지도자에게 있기 때문에, 물 흐르듯이 그 백성의 고민을 풀어주고, 행복하게 해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산해경』을 조선의 뿌리와 역사관에 얼룩진 자신감과 자존감을 말끔히 치료하는 시치료Poetherapy의 도구로서 가장 원척적인 텍스트교과서가 될 것으로 믿는다. 전한前漢/西漢의 시중 벼슬이었던 류수劉秀/劉歆가 『산해경』을 통달하고 나서는 이내 민심을 얻어 후한後漢/東漢의 건국자로서 혁명을 일으켜 광무제光武帝/25~57가 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산과 강과 바다에 사는 존재의 특성을 진단하는 능력을! 이제 신선하고 신바람 나는 정치를 하고, 미래의 큰 꿈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산해경』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로마 신화』가 줄거리를 만든 가십Gossip이라면, 『산해경』은 시놉시스Synopsis가 없는 신화가 될지라도 그 내면에는 고급의 역사적 사건과 정치 리더십 문화가 은밀하게 녹아 있으므로, 5000년의 비밀이 숨어있는 이 『산해경』의 숨겨진 속뜻을 새롭게 조명하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이 『산해경』의 지리적 중심에 조선이 있고, 그 문화적 다양성을 공유하기 위하여 접근한 최초의 언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요즘 유명한 배우 최민식이 열연한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2014.7.30. 개봉)이 흥행기록을 깨며 최고 인기를 얻는 것도 충무공 리순신의 리더십의 뿌리 『난중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의 리더십 부재를 질타하는 성격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전쟁을 이겨낸 지휘관의 솔직한 고민이 담겨있는 한문 일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그 진실의 내막을 알 수 있었기에 크게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산해경』의 번역과 해석도 역사 창조를 위한 휫손리더십으로 다시 태어날 때에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역사 창조라는 말은 역사를 통하여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고, 이를 교훈삼아 미래 발전적 도전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산해경』 속에는 수수께끼 같은 숱한 비밀이 담겨져 있다. 그 비밀이 벗겨지는 순간이며, 이 비밀을 알면, 그제야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제3조는 도리어 광활한 고대 조선의 강역을 제외시키고, 웅대한 역사관을 왜곡‧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삭제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미국에도 영국에도 일본에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산해경』이 조선 뿌리와 문화의 터전이고, 유럽과 아프리카까지도 조선의 강역에 넣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여기에 등장하는 토산물이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 동국여지승람』과 함께 열대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며, 『환단고기』와 『조선왕조실록』 등의 여러 문헌에 실린 일식 현상에서 아프리카를 통과하는 일식대를 조선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이며, 천체관측에서는 극지방에서나 일어나는 오로라Aurora/극광와 백야 및 흑야 현상이 조선 강역에서 숱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료들을 어떤 논문의 논리성을 높이기 위하여 관련 사료의 취사선택 과정에서 스스로 의도적으로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진심으로 반성할 일이다.    
100    시작 도우미 ㅅ 댓글:  조회:5240  추천:0  2015-02-19
  난해시에 대해     난해시가 가진 장점이 있다면 그건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의미 때문에 평론가는 주로 난해시를 해석하곤 한다 뭘 어떻게 다루든 그건 시보다는 평론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해시는 그 이름처럼 난해하다 난해한 사람이 쓰는 시가 난해 시일까? 하여튼 명료함보다는 그는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은 길을 끌고 간다   처음엔 독자의 손을 잡고 가는 듯 하나 어느 순간 그는 사라져 버리고, 나(독자)는 덜렁 혼자 이상한 나라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찾지 못할 길은 아니어서, 그는 한 동안 이상한 세계에서 이상한 감정에 빠져 있다가, 겨우 詩의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힘들다. 복잡한 감정에 나는 도대체 뭘 보았단 말인가. 보긴 보았으나 나는 말 더듬으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한 토막을 끌어내어 설명한들, 그것은 토막에 대한 장황한 설명일 뿐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詩의 전제성에서 멀어져버린다.       [출처] 난해시에 대해|작성자 시용  
99    신경림 시평; 시 읽는 재미 댓글:  조회:4668  추천:0  2015-02-19
 읽는 재미/신경림  오늘 강연 제목을 '시를 읽는 재미'라고 붙였지만 사실 요즘 사람들이 시를 읽는 것이 너무 재미없다고 해서 역설적으로 붙인 제목입니다. 오늘 아침 경향신문 책 소개란을 봤더니 한 기자가 걱정을 했어요.  '요즘 시집 얘기를 하는 사람도 없고 시를 읽었다는 사람도 없다. 시집이라는 게 한권에 5천원밖에 안하는 커피 한잔 값인데 왜 이리 인색한가. 시를 읽고 시집을 좀 사주자.'  이런 글을 보고나서 '시를 읽는 재미'라는 강연을 한다는 게 참 비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시를 읽는 게 재미 없죠? 심지어 시를 읽는 것이 재미없고 신경질나게 한다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가 옛날보다 영향력을 잃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시가 30년전, 50년전보다 사람들에게 덜 읽히고 그만큼 영향력을 미치지도 않습니다. 무슨 사이버 시대가 되고 매체가 다양화되다 보니 사람들이 영상매체에 이끌리지, 활자매체에는 이끌리지 않는 복잡한 환경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1930년대 제 1차대전이 끝나고 세계적으로 제일 앞서나간다는 영국, 프랑스 시단에서도 시가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오든이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이죠. 노벨상 탄 유명한 T.S 엘리엇보다 조금 뒷 사람인데요, 엘리엇이 어렵고 고전적이고 산업적이고 관념적인 시를 쓸 때, 오든이란 사람은 '시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사는 사람속에 여러 사람의 정서와 사상을 그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했던 진보적인 시인이었죠.  그 시인이 그때도 시를 사람들이 안 읽으니까 재미있게 읽힐 만한 시만을 골라서 책을 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냐면 '옥스퍼드 북 오브 라이트 버스', 그러니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시 모음입니다. 오든이 그 책 한권을 내면서 한 얘기가 '사람들이 시를 안 읽는데 사회적인, 환경의 변화도 있지만 시인들 자신에게는 죄가 없는가 따져볼 때다. 사람들이 항상 긴장해서 사는 것은 아니니까 어렵게 접근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볍게 읽힐 수 있는 시를 가지고 접근해보자'라고 했습니다.  강연 후 청중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신경림 시인.  ⓒ프레시안  시인들의 '자폐성', '소양 부족'이 시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  저도 문득 오늘날 라이트 버스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발상도 해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얘기는 무엇이냐 하면 오늘 우리가 시를 안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사이버 영상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매체의 다양화 등 사회환경의 변화도 있겠지만 그러나 다른쪽에서 보면 근본적으로 시인 자신에게도 상당부분의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50년쯤 시를 써왔지만 제가 읽어도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시들이 너무 많아요. 어떤 시를 읽고 나면 처음에 한번 읽어보면 참 어렵다, 한번 더 읽으면 정신이 몽롱해집니다. 너무 어려워서요. 한번 더 읽으면 안동소주 한잔 먹고서 뺑뺑이 친 것 같아요. 더 모르겠어요. 그래서 해설을 읽어보죠. 해설은 좀 이해할 수 있게 썼겠지. 그러나 해설을 읽어보면 안동소주 먹고서 뺑뺑이 친 것을 뒷다리 걸어서 넘어뜨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읽기가 더 어려워져요.  결국 시를 너무 어렵게 쓴다는 것인데, 저는 시를 어렵게 쓰는데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난해시라는 것도 있으니까 우리가 무조건 난해시를 쓰면 안된다고 타박해서는 안되죠. 시인이 복잡한 심리과정이 있어서 도저히 어렵게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형편도 있겠죠. 예컨대 저는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만 이상 같은 시인이 그렇습니다.  이상 시인은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데 사실 거기에는 다 먹고사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 같은 어려운 시들이 없으면 대학교수들이 학교에서 강의할 것이 없어져요. 이상 같은 사람이 자꾸 있어야죠.  잡담을 좀 하자면 이상은 시인이나 소설가라기 보다는 에세이스트입니다. 산문을 참 잘써요. 그 사람 산문은 우리나라 산문사상 가장 뛰어난 산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김수영 산문이 누구에게 뿌리가 있습니까. 김수영 산문은 본질적으로 뿌리를 이상에게 두고 있는 것이죠. 여하간 뛰어난 산문가이지만 시는 좀 아리까리하고 너무 어렵게 써서 무책임한 면이 있죠. 그래도 우리는 이상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상은 그러한 복잡한 표현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심리상태에 있었죠.  그러나 최근의 난해시라는 것은 그렇게 부득이하고 불가피한 성격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자폐성이 있다는 것이예요. 자기 마음을 남들에게 열지 않는다는 거죠. 마음을 꽉 닫아놓고 '좋다,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나대로 혼자 나갈꺼야' 하는 자폐성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시를 정확하게 쓰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법 상에서, 재능 부족, 솜씨 부족이라는 거죠.  18세기에 워즈워스란 시인이 있습니다. 워즈워스라는 시인이 서정시집이라는 시집을 냈어요. 공동 시집에서 실명이 아니라 필명으로 낸 시집인데, 냈다가 반응이 좋으니까 30년 뒤에 재판을 했어요. 그 30년 동안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시인이란 무엇인가' 하는 자기 고민을 털어놨어요. 시인이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이것저것 하다가 결론으로는 결국 '시인이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남과 똑같은 사람이다. 다만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남들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자기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는 능력, 정확하고 분명할 뿐 아니라 힘있고 단순화시켜 얘기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우리 시하고 비교해서 얘기하자면 자기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시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되겠죠. 아마도 워즈워스의 이 결론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론이 없는 것 같아요. 일단 그것을 획득해야 하는데 요즘 시인들이 그것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죠.  엉뚱한 말을 좀 하겠습니다. 워즈워스 이전까지는 구어,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고살면서 쓰는 말, 장터에서 쓰는 말을 가지고 시를 쓰지 않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시는 문어로 이루어졌어요. 처음으로 그것을 깨고 민중어라고 할까, 생활어로 시를 쓰기 시작한 최초의 시인이 워즈워스입니다.  생각도 처음에는 진보적이었죠. 프랑스혁명 당시 그 사람 나이가 스물 셋인가 넷이었을 겁니다. 이 사람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 파리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니까 파리로 쫓아갑니다.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파리 시민들이 어떻게 혁명을 성취해가는가를 감격스런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영국도 프랑스 같은 혁명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느날 문득 친척이 죽어서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됐습니다. 부자가 되니까 우물우물 시를 게을리 했습니다. 온갖 힘을 다해서 시를 쓴다는 게 재미가 없으니까 공주가 시를 써달라 하면 써주고, 왕이 축시를 해달라고 하면 해주면서 보수화됩니다. 그러면서 영국에서 화두가 됐던 모든 국민은 똑같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의무교육, 모든 여성도 똑같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여성교육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를 합니다.  반면 로버트 브라운이라는 영국시인이 있습니다. 워즈워스와는 40년 정도 차이가 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워즈워스를 비판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평생을 워즈워스 비판하는 데 바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냐 하면, '시인은 나이 들어서 시를 쓰면 안된다, 젊어서 쓰고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대상은 워즈워스였죠. 워즈워스는 젊을 때 쓴 시는 괜찮고, 39살까지 쓴 시는 그래도 읽어줄만한데 마흔 넘어서 쓴 시는 화장실에서 찢어버려야 한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늙어서까지 시를 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여튼 시인이란 무엇인가를 얘기하다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요즘 우리 시가 어려운 까닭중에 하나는 바로 워즈워스가 정의하고 있는 시인의 능력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시인 중에 너무 많아서 그렇다는 얘기가 되는거죠. 그러니까 정말 자기가 쓰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시를 어렵게 쓰는 경향이 생기는 겁니다.  결국 시인이 자폐증에 걸려서 시의 소통의 통로를 어렵게 만드는 것 하나와 시인 자신이 능력이 모자라서 자기의 말을 정확히 시로 형상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어려운 시 중에는 복잡한 세상을 살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어려운 시를 쓰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지금 얘기한 경향이 더 많다는 말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시 읽는 재미 하나, "시는 단 몇 마디로 힘있고 분명하게 하는 대화"  반대로 시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어려운 시를 한번 더 읽어줄 수 있는 아량이 있는게 좋겠죠. 또 읽어서 모르겠으면 안 읽어도 좋습니다. 그 시집 그래도 5천원 들여서 산 책을 내버리기는 아까우니까 어디 한구석에 뒀다가 1년, 2년쯤 후에 읽어보는 것도 좋겠죠. 그래도 모르겠으면 재활용 하는 곳에 버리면 다른 종이로 탄생할 테니까 버려도 아까운게 없죠.  시가 무슨 일을 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자폐증으로 인한 독자와의 소통을 얘기했는데, 거꾸로 얘기하면 시도 다른 말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대화입니다. 단 몇마디로 힘있고 분명하게 하는 대화죠. 어떻게 보면 짧은 말을 가지고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대화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짧은 말을 가지고 어떠한 웅변가가 얘기할 수 있는 것보다 힘있고 감동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대화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를 쓰고 읽으면 자폐증은 어느 정도 풀어지겠죠.  예를 들어볼까요. 김종삼 시인의 시가 얼핏 생각납니다. 묵화라는 시가 있습니다. 짧으니까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물먹는 소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오늘 하루도 함께 지냈다고  서로 발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이 시 어떻습니까. 저는 이 시를 읽을 적마다 살기 어려운 것, 노동의 힘든 것, 인간의 고독이 얼마나 사람을 못견디게 만드는가 하는 여러 가지를 몇십 매 몇백 매의 에세이나 웅변보다도 이 시 몇줄이 강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루종일 할머니와 소가 함께 일한거죠.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게 일했으면 소도 발등이 붓고 할머니도 발등이 부었겠습니까. 또 이것을 쓴 때가 1950년대로 알고 있는데 전쟁통에 가족을 다 잃고 혼자 외롭게 살고있는 할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시에서 떠오르죠.  이 시는 몇마디 가지고 많은 웅변이나 몇백장이 되는 산문이 가지는 대화보다도 강력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결국 시라는 것도 대화라는 생각을 하면서 시를 읽으면 좀 더 시를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어려운 시보다는 서로 대화가 될 수 있는 시를 먼저 읽는게 시를 읽는 재미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제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추측컨대 이중섭이라는 화가의 '소'라는 그림을 보고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종삼 시인과 이중섭 화가는 친하지는 않았지만 김종삼 시인의 형과 이중섭 화가가 친했고 또 이중섭 화가가 그 무렵 시인들과 어울려 놀았다고 해요. 그래서 그 그림을 보고 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 시가 이중섭 화가의 그림보다 값어치가 나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시에는 이중섭 화가의 소 그림에는 없는 그림이 이 속에는 많이 있죠. 아무리 그림 잘 그린다 하더라도 발등이 부은 것을 그릴 수 있는 화가가 있습니까. 또 하루종일 일을 한 모습을 그대로 그려넣을 수 있는 화가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한 개의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도 시를 읽는 재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시를 읽는 것은 시인과 서로 대화가 돼서 알아들을 때 재미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머릿속에 선명한 그림 하나를 그려넣을 수 있을 때 시를 읽는 재미가 있다는 얘기죠.  시 읽는 재미 둘, "머릿속에 그림 한 폭 그려넣을 수 있는 시"  재미난 시라는 것은 어떠한 시라도 머릿속에 뚜렷한 그림 하나를 그리게 만들어 주는 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시를 한편 외운다면 그림을 한 폭 머릿속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효과가 있겠죠.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박목월 시인의 '윤사월'이라는 시 하나 읽어봅시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윤사월 연초록으로 덮인 산이 떠오르고, 노란 송화가루가 날리는 모습, 비록 눈이 멀었지만 아주 아리따운 처녀가 초가집에 앉아있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하나의 그림이 떠오르는 것이죠. 이렇게 시를 읽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넣을 수 있을 때, 시를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때가 이때라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선배 시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조지훈 시인입니다. 지조론이라는 시를 썼을 만큼 지조도 있고 한학에도 조예가 깊고 학자로서도 훌륭한 분입니다. 시인으로서도 대단하죠. 조지훈 시인과 박목월 시인을 시 하나로 단순 비교하면 시가 무엇인지 잘 나타나니까 얘기를 해 봅니다.  여러분들 잘 아시는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란 시가 있습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원래 이 시의 주제는 조지훈 시인이 쓴 '완화삼'이라는 시와 같습니다. 조지훈 시인이 완화삼이라는 시를 써서 친구인 박목월 시인에게 줬는데, '술익는 강마을에 저녁노을이여'이라는 구절을 박목월 시인이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로 바꿔서 나그네를 썼습니다. 그런데 '완화삼'은 유명해지지 않고 '나그네'는 유명해졌습니다.  왜그러냐 하면 완화삼은 뭔가 멋지고 근사한 말로 가득 차 있지만 머릿속에 그림 하나가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반면 '나그네'에는 분명한 그림이 떠오르죠.  '완화삼'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여기서 목월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를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로 살짝 바꿔서 '나그네'라는 시를 썼는데, '완화삼'을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목월의 '나그네'라는 시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민적인 시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두 시를 비교하면 나그네를 읽으면 머릿속에 뚜렷한 그림 하나가 떠오르지만, 완화삼을 읽으면 분명한 그림이 떠오르지 않고 어딘지 어슴푸레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뚜렷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때 시에 가까워질 수 있는 이유가 되겠죠. 여러분들도 시를 읽을 때, 일단 그 시를 읽고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는 습관을 붙인다면 시를 읽는 재미가 한결 더해질 것입니다.  시 읽는 재미 셋, "시가 던지는 암시와 비유의 메시지를 읽을 때"  그러나 시가 그런 것만 가지고 있다고 되겠습니까. 워즈워스로 다시 돌아가서 얘기하자면, 워즈워스는 시인이 보통사람과 다른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하고 힘있고 단순화시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을 했지만 덧붙여서 시를 읽는 사람들도 조금씩은 보통사람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감수성, 직관력이 일반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직관력 감수성 이런 것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이미 다 가지고 있다는 얘기지요.  여기에 제 생각을 덧붙이자면 시를 쓰는 사람들은 그 바탕위에서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직관력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일반인들에게 일정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일반인들이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 즉 어떤 위험을 일반인들이 깨닫지 못할 때 그것을 알려주는 책임이나 의무를 시인이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인이 알려주는 경고나 예감을 읽는 재미가 또한 시를 읽는 재미로 빠뜨릴 수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를 읽으면 도저히 자기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일깨워주는 경보나 예방을 시에서 발견하는 것도 시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입니다.  이병철이라는 시인이 쓴 시가 있어요. 88년부터 해금되기는 했지만 6.25 전에 월북을 했던 시인입니다. 옛날에 이 시인의 시를 읽으면 반공법으로 잡혀갔었어요. 이병철 시인이 시를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북쪽에서는 조금 발표한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쪽에서 발표한 시를 제가 보니까 도저히 읽어주지 못할만한 시가 많아요. 거기서는 수령에 대한 충성이 없으면 시를 발표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여기서 발표한 시 중에는 뛰어난 시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나막신'이라는 시입니다.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딸그락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  1944년, 1943년 쯤에 썼던 시라고 합니다. 그 무렵이 얼마나 어려운 시절이었습니까. 이 시를 썼을 때 사람들은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한가한 소리를 하느냐는 얘기를 하고 핀잔을 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 속에는 일제의 박해 속에서도 여유를 갖고 우리의 몸과 정신을 온전하게 보전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우리가 살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온전한 것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이 시는 던지고 있는 거예요.  이 시를 제가 처음 읽은 것은 6.25 얼마 뒤에요. 미군부대 따라다니는 하우스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 포성이 들리는 상황에서 먹고사는 가장 속편한 자리는 미군부대를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있으면 굶지만 미군부대 들어가면 배불리 먹고 동생들도 먹고 그랬으니까 모든 중학생들의 꿈이 미군부대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제가 6.25때 미군부대를 처음 들어간 것은 충청북도 영동이란 곳이었는데 그 부대가 원주에서 홍천으로 이동했어요. 그 부대가 중공군하고 싸움이 붙었을때 저를 관장하고 있는 미군 대위가 나한테 '너 미군하고 함께 다니는 것을 보면 너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도망가라'며 원주까지 차를 태우고 와서 원주서 나를 놔줘서 충주까지 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를 원주에서 미군부대 근처 헌 서점에서 사가지고 부대에서 읽었어요. 제가 이 시를 읽고 너무 감개가 무량해 하니까 대위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만 제가 영어가 안돼서 대위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리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를 읽으면서 저는 굉장히 위안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나쁜 환경 아래에서도 조금도 주눅들지 말자는 뜻이 아니냐, 아무리 바빠도 천천히 돌아가고 여유를 갖고, 낭만도 가지고 살자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아마 제가 전쟁통에 시를 읽는 여유가 있었던 것은 그 시를 읽은 감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여하간 시를 읽는 재미중의 또 하나는 지금 우리가 어떠한 곤경에 처해있는가, 또한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직접적인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어떤 암시나 비유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시를 읽는 재미중의 하나입니다.  역시 월북한 시인의 시를 하나만 더 읽겠습니다. 이용악이라는 시인의 '북쪽'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  이 시를 발표한 것은 1930년대입니다. 감회가 지금하고는 달랐겠죠. 그러나 상상하건대 그때 이 시를 읽는 독자들, 특히 북쪽에 고향을 둔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아마도 가슴이 뭉클했을 것입니다. '아 정말 우리가 너무 가난하게 사는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더 북쪽의 나라 중국이나 러시아에 우리의 귀여운 딸을 팔아먹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도록 하는 시죠. 지금같은 환경하에서는 우리가 살 수 없으니까 개선해야 한다는 암시가 담겨있습니다.  물론 이 시속에 우리의 역사는 어떻고 오랑캐는 어떻고 하는 직접적인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사는 환경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가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일깨움을 읽는다면 그것도 시를 읽는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 읽는 재미 넷, "치열하고 처절한 '사랑의 시'"  처음에 제가 시에 접근하던 때에는 나하고 가장 감정이 처음에 제가 시에 접근하던 때에는 나하고 가장 감정이 통하는 시를 좋아했습니다. 그러한 시는 사춘기 때니까 '막연한 그리움', '이성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었죠. 저는 지금도 가장 아름다운 시는 연애시라고 생각합니다. 연애시를 읽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어떤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시를 보니까 거지 얘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질적 거지가 아니라 정신적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시는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진짜로 '정신과 정신의 작용' 같은 정서를 가진 연애시를 읽는 것도 시를 읽는 재미 중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중의 하나겠죠.  저는 연애시를 가장 잘 쓰는 시인이 유치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양반은 살아서 연애깨나 한 모양이에요. 연애시가 참 많고 절실합니다. 재밌게 읽힐 수 있어요. 연애시를 읽는 재미는 제가 어떠한 말을 해도 시를 읽는 재미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의 '그리움'이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아주 쉬운 것 같으면서도 그리 쉽지 않은, 그래도 쓰기는 굉장히 쉬운 것 같죠. 시를 읽는 사람들이 이건 나도 쓸 수 있는데 빼앗겼구나 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시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읽는 사람들이 읽고 났을 때 '야 이건 내가 써야 하는데 이 사람이 먼저 썼네' 하는 생각이 있을 때 그 시가 정말 좋은 시죠.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도 못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면 재미난 시가 못되죠. 유치환씨는 바로 그렇죠. 파도가 치는 것을 보면서 짝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보고 파도에 까딱않는 육지를 보면서 마치 내마음 같아서 그런 간단한 시를 쓴 건데, 누구나 쓸 수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시 중에서 '그리움'이라는 시가 다른 한편 있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요즘 이런 연애하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만, 이런 시를 보면 치열하고 처절한 사랑의 시를 읽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계할 것은 가짜 사랑의 시입니다. 잘 뜯어 읽어보면 사랑을 억지로 만들어서 관념적이고 툭하면 '님이여' 하고 그럽니다. 유행가하고 시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유행가는 남들이 하는 소리를 똑같이 하는 것이고 시는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이죠. 또 한가지는 유행가는 이미지가 식상하고 독창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에서는 이미지가 독창적입니다.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얘기라서 다른 것입니다.  가짜 사랑의 시라는 것은 이미지가 독창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하고 대중가요의 중간쯤 속하는 사랑의 시는 읽어서 그다지 도움이 안되고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에 재미를 들이기 시작하면 진짜 연애시를 읽는 재미를 못붙일 겁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때 쯤 읽고 감동을 받은 연애시가 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요, 김영랑의 '언덕에 바로누워'라는 시입니다.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그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미리사 알았거니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네 감기었네  이런 시는 대중가요가 못가진, 김영랑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이미지 같은 것이 있죠. 그런 것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시를 읽는 재미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시도 대중가요 같은 것이 아니냐.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이게 시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시와 대중가요를 구별을 못한다면 진짜 연애시를 읽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독특한 재미가 있는 거죠. 다른 사람이 못해본 사랑을 표현한 시를 읽는 재미도 있죠.  서정주의 '동천'이라는 시도 사실은 연애시입니다. 
98    시작 도우미 ㅂ 댓글:  조회:4197  추천:0  2015-02-19
    당신은 오래 간직하고 싶은 시집이 있습니까?   이승하         지난해 국내 시집 판매를 주도한 시집은 하상욱의 『서울 시』 1, 2권이었다. 몇 권이 팔렸는지 알 수 없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1월 25일 현재 인터넷서점 YES24의 판매지수는 1, 2권을 합쳐 14만2,677이다. 일본인 시바타 도요(1911〜2013)의 『약해지지 마』는 4만5,333이다. 이에 비해 이 시대 최고의 스타 시인이라고 해야 될 황병승의 신간 시집 『육체쇼와 전집』은 4,794이다. 기준을 알고 싶다면? 정호승 시인이 작년 6월에 발간한 시집 『여행』이 1만377이고 도종환 시인이 재작년 8월에 발간한 시집 『흔들리며 피는 꽃』이 1만20이다. 김은주라는 카피라이터의 단상 모음 『1cm+』라는 책이 48만9,468이니 대다수 시인의 시집은 서점에서건 인터넷서점에서건 거의 안 나간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 오늘날 ‘시집 독자’가 과연 있는가?     인터넷상의 시 동호인 모임이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보아 시를 읽고 있는 독자는 분명히 있다. 작년에 시 전문 계간지 『시안』『시인세계』『시평』이 간행 중단 선언을 했지만 문예지의 수를 생각하면 사실 빙산의 일각이다. 문예지를 낸다는 것은 곧 적자를 본다는 것인데 매 계절 수백 종의 문예지가 나오고 있다. 매달, 매 계절 발표되는 시의 편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해마다 문예지 신인상 당선자는 수백 명에 달하고 지방지까지 합치면 신춘문예 당선 시인도 30명이 넘는다. 시인 공화국임에 틀림없는데 출판사 편집자를 만나보면 시집이 안 팔린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시인도 많고 문예지도 많이 나오는데 시집은 안 팔린다? 기이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고 당연한 현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단 요즈음 시집의 두께를 생각해보자. 2011년도에 나온 박형준의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가 205쪽이고, 2012년에 나온 박성준의 시집 『몰아 쓴 일기』가 240쪽이다. 170쪽이 넘는 개인시집이 정말 많이 나온다. 조연호의 『농경시』(2010)는 시 1편이 시집 1권인 극단적인 경우지만 김경주의 『기담』(2008)에는 10쪽, 15쪽, 22쪽에 달하는 시가 나온다. 장석원의 시집 『아나키스트』(2005)에는 4쪽 이상의 시가 11편이 나오고 14쪽이나 되는 시가 있다. 같은 시인의 『태양의 연대기』(2008)에는 40쪽에 달하는 시가 나온다.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2005)에는 4쪽이 넘는 시가 12편에 달하고 9쪽짜리 시, 10쪽짜리 시가 나온다. 박성준의 『몰아 쓴 일기』(2012)에도 10쪽, 12쪽에 이르는 시가 나온다.     시의 길이도 문제지만 요즈음 시는 운율을 잃고서 산문이 돼버렸다. 정진규 시인처럼 빼어난 산문시를 쓰는 경우는 예외가 되겠지만 많은 후배 시인들이 정진규의 산문시를 잘못 흉내 내고 있다. 소설의 일부 같은 시, 6~7행이 한 문장인 시, 여러 쪽이 연 구분 없는 산문으로 된 시를 시집이나 문예지상에서 발견하기란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운문 형태의 시를 쓰던 시인들조차 산문시를 함께 쓰는 것이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운율 파괴와 문법 파괴, 이국취미(전통 파괴)가 오히려 모던한 시풍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를 개성으로 여기고 있는 황병승ㆍ김경주ㆍ박성준ㆍ김승일 같은 시인이 스타 출현인 양 각광받고 있다. 이들 시인에 대한 칭송의 글은 차고 넘치지만 이러이러한 점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지적한 글은 거의 보지 못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읽어보아야 할 한 권의 책이 있다. 민족과문학사에서 1990년에 나온 『시를 묻는 젊은이에게』라는 책이다. 이근배 시인이 엮은 것으로, ‘오늘의 대표시인 25인의 체험적 시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을 낼 시점에 청탁을 받고 쓴 글도 있지만 대개는 25명 시인이 예전에 지상에 발표했던 대표적인 시론을 집대성한 한 권의 시론집인 것이다. 제일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글이 서정주의 「머리로 하는 시와 가슴으로 하는 시」이다.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다.       19세기의 낭만주의자가 감정과 욕망을 잘 절제하지 못한 나머지, 얼마나 많은 무미한 정서의 통속을 빚어내 놓았는가를 우리는 잘 보아서 알고 있다.   고도한 정서의 형성은 언제나 감정과 욕망에 대한 지성의 좋은 절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시인이 감정을 절제할 줄 모르면 안 된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지성의 통제를 통해 균형 감각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아마도 1920년대에 동인지를 중심으로 우리 시가 태동하는 과정에서 감정 과잉의 시가 많았는데 지금도 그런 현상이 있으니, 시인들은 머리로만 시를 써도 안 되고 가슴으로만 시를 써도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신경림은 남한강에 얽힌 이야기와 노래(민요)가 자기 시의 모체가 되었다는 시론을 편다.       강마을 사람들은 이 강이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로 이 강을 끼고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와 관계되는 얘기도 많이 남아 있었다. 노래도 많아 내 귀를 뜨이게 했다. 이때 나는 남한강에 얽힌 얘기와 노래를 언제고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 생각은 훗날 장시 『남한강』으로 결실을 맺는다. 신경림 시인의 시에 잘 나타나 있는 이야기성과 가락은 시를 쓰기 이전, 성장기 때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신경림 시인은 대담 자리에서 현대시의 난해성에 대해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현대시의 난해성에는 일정 부분 부득이한 면이 있습니다. 문제는 전혀 필연성이 없는 엉터리 난해시입니다. 이런 엉터리 난해시가 되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시인이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정확하게 말할 능력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 경우입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니까 자연 시가 어려워집니다. 두 번째는 말장난에 치우친 경우입니다. 말을 돌리고 비틀고 하다 보니까 시가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시를 억지로 만드는 경우입니다. 내용이 없으니까 시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난해시, 이런 시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애정을 가져야겠지요. 하지만 엉터리 난해시는 독자로 하여금 시를 외면하게 만드는 내적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자의 시집 외면은 사실상 지나친, 혹은 불필요한 난해성 때문이다. 원래 시라는 것 자체가 애매성과 다의성을 지니고 있으며 비논리와 비상식을 지향하는 속성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1984년에 등단한 이후 30년 넘게 시를 써 오고 연구하고 시 쓰기 지도를 하고 있는 나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가 차고 넘친다. 대학에 있다 보니 학생들과 함께 이런 시를 놓고 텍스트삼아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20대 초반의 대학생들과 평균연령 30대인 일반대학원 학생, 40대인 예술대학원(특수대학원) 학생, 50대인 사회교육원(문예창작전문가과정) 학생들과도 이런 시를 놓고 토론을 한다. 고교 시절에 배운 소월과 영랑의 시를, 윤동주와 이육사의 시를 계속 공부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나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섯 번을 읽었는데도 감을 못 잡겠습니다. 현대시의 난해성은 화자의 우월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한 이가 정진규 시인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 때의 요절 시인 이하(李賀, 790~816)의 시를 예로 든다.     오동잎에 바람 이니 서글퍼져 장사壯士의 마음 괴로운데, 희미한 등불에 풀벌레 소리 차가워라. 그 뉘일까? 나의 한 편 시고를 읽으며, 화충花蟲이 좀먹지 않게 할 사람은. 서글픈 생각에 이 밤 가슴 메이고, 차가운 빗속을 향혼香魂이 내게 조상 오네. 가을 무덤 속에 귀신 되어 포조鮑照의 시詩를 노래하리니, 한스러운 피는 천년을 두고 땅속에서 푸르리라.       화충은 나무좀과에 속한 좀벌레이다. 포조(421?~465)는 중국 육조 송나라 때의 시인으로 악부에 능했다. 여기서 ‘포조의 시’란 죽은 자의 감개를 나타낸 시를 가리킨다. 김달진 선생이 번역한 『唐詩全書』에는 이하의 생애와 시세계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7세 때 문장을 지어 한유(韓愈)를 경탄케 하였으며 27세로 요절하였다. 24세에 백발이 되었고, 몸이 여위었으며, 눈썹이 짙은 결핵 체질이었던 그의 시는 초현실성, 환상성으로 인하여 중국 시단의 이단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요절한 천재 시인 하면 이상(李箱)을 꼽지만 중국에서는 단연 이하를 꼽는다. (두 사람 이름이 묘하게도 以上과 以下를 생각게 한다.)     이동향이 번역한 민음사 세계시선의 『李賀詩選』을 보면 “후세 사람들은 이백을 선재(仙才), 이하를 귀재(鬼才)라고 평한다. (…) 이하는 유령이나 요괴, 귀신 등 초자연적인 사물들을 많이 노래하여 귀기가 서린 듯 기괴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하 시의 특색이며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귀(鬼)를 중심으로 한 환상적인 시들이며, 그의 어둡고 우울한 감정 표현은 환상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되어 있다. 정진규 시인은 이하의 「秋來」를 인용하고 나서,       ‘화자우월주의’ 상위 시각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자신만의 말을 하고 태어나는 대상의 말을 듣지 않는 일방적인 화법을 뜻한다. 이러한 화법은 해마다 신인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직접 보고 느껴온 것이기도 하고, 우리 기성 시들에도 미만해 있는 한 고질일 수도 있다. (중략) 이렇게 되면 시가 설명적인 해석이 될 수밖에 없고, 유형화가 될 수밖에 없다. 시의 작동이란 그 순간부터가 대상과의 합일을 뜻한다. 상호 교감의 구체적 활동을 뜻한다. 대상들이 하는 말을 듣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을 듣는 귀가 열렸을 때 시를 쓰는 몸에는 율律의 무늬가 일기 시작한다. 그 율의 무늬가 바로 시가 아니겠는가. 예를 들자면 앞서 인용한 이하의 시 두 번째 구절 “희미한 등불에 풀벌레 소리 차가워라”도 그렇다. 번역의 문제이기도 하겠으나, 원문은 이렇다. “쇠등낙위 제한소衰燈絡緯 啼寒素”, ‘쇠등衰燈’은 희미한 등불, ‘낙위絡緯’는 가을 풀벌레, ‘제한소啼寒素’가 문제다. ‘제啼’는 운다. ‘한소寒素’는 차가운 흰 깁. ‘한소로 운다’라고 직핍해야, 아니면 ‘차가운 흰 깁으로 운다’라고 해야 그 울음의 이미지, 촉감이 살아나고 색채감각이 살아난다. 그게 설명이 아닌 ‘율의 무늬’이며 대상의 ‘무자서無字書’, 그 화답이다. ‘무현금無絃琴’의 소리이다. 이것을 보고 듣는 체감이 새로운 시를 태어나게 한다. 화자우월주의 상위시각은 나아가 시를 평면화하고 왜소화시킨다.     고 하면서 독자를 깔보는 시인의 화자우월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이 높은 정신세계에서 독자를 내려다보며 쓴다는 화자우월주의는 결국 독자와의 소통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유아독존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그래서 독자의 이해를 구하지 않고 시인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쓴다. 수필 쓰듯이 쓰는 것이 아니라 내키는 대로 쓰는 것이다. 전통에 대한 완전한 부정은 곧 아방가르드요 포스터모더니즘이요 해체주의인데 서구에서는 이미 예전에 종식된 이 사조가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우니까’라는 면죄부를 받고 득의양양 위세를 떨치고 있다.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 혹은 현실참여의식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인가. 세상이 이렇게 어두운데 왜 우리는 시인의 횡설수설과 투덜거림에 계속 귀를 열어두어야 하는가. 문학평론가들과 소수의 독자에게 동의를 얻는 이런 시를 다수의 독자는 결국 난감해하면서 포기한다. 포기하고 시라고 할 수 없는 『서울 시』와 시라고 할 수는 있는 『약해지지 마』를 읽는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일본 하이쿠 시집 『한 줄도 너무 길다』를 YES24에서 찾아보니 독자 리뷰가 44개나 붙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시인이 독자를 뿌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경림 시인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자.       한때 시가 산문이 할 수 없는 것을 찾았듯이, 사이버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 시만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들이 마음을 닫고 속으로 움츠릴 것이 아니라 활짝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시가 너무 닫혀 있어 독자와의 대화 또는 교섭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지금 시의 몰락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우선 남들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시를 좀 써달라는 것입니다. 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시가 너무 많아요. 다음으로는 시를 억지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지요. 나도 시는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란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시를 만드는 경향이 너무 심해요. 시가 작위적이라는 뜻이지요. 리듬이란 게 뭡니까? 자연스러움, 바로 그것이 리듬이 아니겠어요? 요즈음의 시에 리듬이 없다는 말은 시가 너무 작위적이어서 나오는 말이지요. 또 시를 너무 마구들 써대요. 많이 쓰는 것이야 누가 뭐라겠습니까! 하지만 한 편으로 쓸 수 있는 시를 다섯 편, 열 편으로 쓰는 경향들이 있어요. 이래서 시의 인플레가 생기고 시는 더욱 독자로부터 외면당하지요.       노인네가 하는 말이니까, 하고 무시할 일이 아니다. 10대 때부터 시를 써 20대 초반에 등단한 신경림 시인은 이제 여든을 바라보고 있다. 이 시인이 간곡히 하는 말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짧은 산문을 시라고 하고 소설의 일부를 시라고 하고 에세이를 시라고 하니, 이런 것이야말로 지록위마(指鹿爲馬)가 아닌가. 이 책의 편자 이근배 시인은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시는 물구나무서기이다. 세상을 똑바로 보는 일은 산문에서나 할 일이다. 말짱한 정신으로는 시를 볼 수가 없다. 도깨비에 홀린 것같이 천방지축으로 떠돌아다녀야 한다. 머리와 꼬리를 뒤집어보아야 한다. 세상을 거꾸로 보아야 한다.       시인은 부단히 전통의 자장을 뿌리치려 하면서도 반역자요 혁명가여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 자체를 부정하는 언어파괴공작에 나서려 해서는 안 된다. 80년대 초반에 우리 시의 외연을 넓힌 이성복과 박남철과 황지우를 보라. 이들이 90년대에도 계속 그런 시를 썼던가? 아니다. 1990년대에 들어 그들은 『그 여름의 끝』(1990)과 『생명의 노래』(1992)와 『게 눈 속의 연꽃』(1990)을 일제히 펴낸다. 시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반영된 시집을 90년대에 세 시인 모두 냈음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시란 형식도 중요하기에 시인들이 별난 장난도 다 해보지만 결국 주제의 무게가 있어야 한다. 이하의 절창을 보라. 이상의 시는 연구는 되지만 결코 애송되지 않는다. 이하의 시는? 김원중은 “그의 시는 과장된 수사법과 환상적인 수사 기교 및 날카로운 현실풍자와 규중 여인의 애정 문제에 대한 섬세한 묘사로 유명하며, 색채어(홍, 청, 황, 백)의 과도한 활용과 괴상한 언어 사용으로 감상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염세적 분위기를 띤다. 그의 조어 방식은 품사나 어법, 구법에 관계없이 이미지만을 결합하는 수법을 즐겨 썼다.”고 평가하여 얼핏 보면 지금 이 시대에도 통용 가능한 모던한 시를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가 그 무엇보다 좋다. 시가 정말 좋기에 지금 이 시대에 읽어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우리는 충격을 주는 데만 급급하여 감동을 주는 시를 못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부터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볼 일이다.     술을 권하다將進酒     옥 술잔에 호박빛 진한 술 작은 술동이에 진주같이 붉은빛 방울져 내리고 용을 삶고 봉황을 구우니 옥 같은 기름이 울고 비단 병풍과 수놓은 장막에는 향긋한 바람이 감돈다     용피리 불고 악어가죽 북을 치니 하얀 이의 미녀는 노래하고 가는 허리의 미녀는 춤을 춘다     하물며 봄날도 어느덧 저물어가고 복사꽃이 붉은 비처럼 어지러이 떨어짐에랴 그대여 종일토록 마시고 한껏 취할지니 유영(劉伶)*도 무덤까지는 술을 가져가지 못하였으니     ㅡ김원중 역, 『唐詩』(을유문화사)에서     *유영: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으로서 항상 수레에 술을 싣고 다니면서 자기가 죽으면 함께 묻어달라고 말할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으며, 술을 찬미하는 「주덕송酒德頌」을 지음.    
97    쉬운 시쓰기 어려움 댓글:  조회:4081  추천:0  2015-02-19
쉬운 시의 어려움 시인들은 쉬운 시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독자들 또한 어려운 시를 선호하지 않는 것 은 분명합니다. 名詩라 일컬어지는 많은 시들, 베스트 셀러가 되는 시집들의 대부분은 낭송하기에 알맞은 가락과 누구나 쉽게 해독할 수 있는 언어로 짜여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시인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쉬운 시'의 매력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 ' 쉬운 시'의 명제는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생각거리를 파생시키고 있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소월의 '진달래 꽃'이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천상병의 '귀천'이 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우선 독자들의 일차적인 정서를 충족시켜 줍니다. 일차적인 정서라고 함은 우선 시에 나타난 의미가 독자들의 감성 내용과 일치된다는 점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恨'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단순한 관념이 시에 표상되므로서  문학 예술의 두 기능인 '배설'과 '정화' 또는 '교훈의 전달'이라는 목표에 부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위에 열거된 시들은 결코 그러한 일차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의미 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는 중층 구조를 내포하고 있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말은 발화자인 시인의 의도와 독자가 체험한 내용이 일치되거나 독자가 직접 체험하 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추체험의 형식으로 전이되는 것 이상의 영역이 분명 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님의 침묵'에서의 '님'이 한 개인의 사랑의 대상이면서 그 이상의 존재 의미 로 확대할 수 있으며 확대된 상태에서의 시의 구조 또한 그 논리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시는 분명히 로고스의 세계가 아닌 파토스의 세계에서 진행되 므로 시인의 상상력은 비논리적인 직관에 연유함은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언 술과 달리 시라는 틀에 얹힌 언술은 질서정연한 상상력의 통로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내용과 형식의 조화라는 큰 틀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 님의 침묵'은 하나의 연 시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으며 불교적 세계관의 인식 배경을 놓고 읽어도 그 다양한 의 미는 결코 훼손되지 않습니다. 시는 일반적인 진술과는 달리 언어에 옷을 입히는 행위입니다. 시인이 겪어낸 삶에서 우러나는 시의 향기는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쉬운 시'는 그러므로 삶을 벼려내는 시인의 정신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섬 광과도 같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 편의 시에는 고스란히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가 담겨져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외면상으로 평이한 구조와 평 범한 진술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시가 함의하는 의미의 내포가 큰 시야말로 진정한 '쉬운 시'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시 한 편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꿈꾸듯 편지를 쓴다① 이민 간 친구에게 짝사랑했던 그에게 가슴 저리도록 그리운 어머니에게② 요란한 자명종 소리에 아침은 깨고③ 남편의 성으로 바뀌어버린 그녀에게 가을의 전설이 되어버린 브래드 피트에게 인명구조견이 되어서라도 찾아낼 것만 같았던 어머니에게④ 세 통의 편지를  한 통만 부친 채⑤ 이 시는 습작기에 있는 분의 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매우 잘 짜여진 구조와 명료한 메시지가 도드라지면서 쉽게 읽혀지는 시입니다. ①과③, ②와④처럼  대구법을 사용하여 그리움의 대상을 점층적으로 묘사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기 법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하루 중에 밤은 안식 뿐만 아니라 꿈 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며, 시간인 셈이지요, 그러나 그리움의 대상에게로 향하 는 날갯짓은 인위적인 자명종 소리에 깨이는 아침과도 같이 무엇엔가 끌려가는 현대인 의 고독한 심상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⑤에서와 같이 마음 속에 써 내 려간 편지는 부치지 못하는 무위의 행위로 그쳐버리고만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 다. 조금 더 꼼꼼하게 살펴 보기로 합시다. ②에서의 친구, 그. 어머니는 현실적으로 나에 게서 떠나버린 존재들입니다. ②는 내게 인식된 대상들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데 ④에 서는 부재의 상태를 명료하게 하는 구체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민 간  친구'는 이민을 감으로 해서 '남편의 성으로 이름이 바뀐' 상태이며, 짝사랑의 대상인 그는 영화 '가을의 전설' 에 나오는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처럼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존재이며 '그리운 어머니'는 내가 인명구조견이 되어서라도 찾아야할 대상으로 변화된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②의 진술에서 ④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서 본다면 ②에서 ④로진행되는 필연적 구조가 생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②와④는 'A는 B이다'로 지칭되는 은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A와 B의 의미망이 유사한 관념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을의 전설' 같은  막연한, 즉 가을이라는 심상과 전설, 이라는 심상의 결합에 있어서의 적합하지 않은 유 추가 시의 멋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 드러난 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시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맹점은,- 이 점은 많은 시인 지망생 여러분이 시 적 진실과 사실의 관계를 혼돈하는데서 발생하는 문제인데- 시에 있어서의 순수성을 시 의 내용과 사실과의 일치에서 찾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시의 작자는 실제로 세 통의 편지를 쓰고 그 중 한 통의 편지를 실제로 부쳤는지 모릅니다. 부쳐진 한 통의 편지는 누구에게 보낸 것일까 하고 글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하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시의 트릭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 통의 편지를 부쳤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고립감이나 허무감은 반감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결국 한 통의편지도 부치지 못했다든가, 부치긴 했는데 그 편지들이 수신인 불명으로  되돌아 왔다든가 하는 결말을 보여주었다면 더욱 큰 감동을 전달 할 수 있었던 것은 아 닌지요. 이 시는 한 편의 시가 결코 많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 서는 좋은 작품일 수 있으나 누구나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모색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인의 현실인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같이 아무 생각없이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만 같이 사랑은 꼭 그만큼에서 그 빛깔만 같이 - 장석남의 이 시는 아주 평이한 어휘와 단순한 어조로 아주 쉽게 읽혀질 것 같이 보이는 시이지 만 이 시의 올바른 감상을 위해서는 몇 단계의 유추의 단계를 지나가야 하는 시입니다 . 현대시의 조류에 있어서 시에서의 주제와 소재의 분류 같은 의도적인 시 해석의 도구 를 배제하는 경향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제와 소재를  찾아보기로 합시다. 이 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소재는 무엇일까요? 복숭아 꽃? 뻐꾸기 소리? 그렇습니다. 이 시의 모티브는 뻐꾸기 소리입니다. 시인은 뻐꾸기 소 리를 듣습니다. 어느 산에서 우는 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뻐꾸기 소리는 사랑의 실체 이기도 하면서 사라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뻐꾸기 소리는 어느덧 창호지에 복숭아 꽃 빛으로 물듭니다. 시인은 창호지 문 안쪽에서 차단된 저 쪽 세계의 메시지를 분홍 복숭 아 꽃빛으로, 그림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뻐꾸기 소리 - 창호지 안에서 듣는 나 - 나에게서 발화되는 뻐꾸기 소리의 관념 - 복 숭아 꽃빛 - 그림자로 어리는 창호지를 바라보는 나와 같은 의식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 을 보여주면서 사랑을 뻐구기 소리로 뻐구기 소리는 복숭아 꽃빛으로 변화시키는 상상 의 질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사랑'이라는 관념을 소리로 빛깔로 치환시키면 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관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식으로부터 빗겨 서 있는 시인의 태도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으 면서 사유의 깊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감상 방식은 이 시를 읽어내는 많은 통로 중에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 다. 만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다른 방식의 시 읽기를 주장하신다면 바로 그 순간에 이 시는 좋은 시로 평가될 수 있는 덕목 하나를 갖추고 있는 셈이 될 것입니다. 茶道는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즐기기에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합니다. 한 잔 의 녹차를 마시는 방법 중에 하나는 인스턴트 녹차를 마시면 될 것입니다. 끓는 물에  봉지 하나만 넣으면 쉽게 우리는 차를 즐길 수 있습니다. 차를 마신다는 행위에 있어서 는 다도를 배우고 절차를 따르고, 다기를 준비하는 등의 번거로움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 그러나 다기를 씻고 배열하고, 물을 적당한 온도로 끓이고 우려내는 행위를 거듭하면 서 마시는 차에는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베어있게 마련입니다. '쉬운 시' 는 눈으로 쉽게 읽히고 가슴에 금방 와 닿는 시가 아닙니다. 시의 내용이 독자에게 쉽게 동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려낼수록 깊은 향을 풍기는 차 처럼 오래 가슴에 담아두고 되내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재생산시키는  시를 많은 시인들은쓰고 싶어합니다      
96    시작 도우미 ㅁ 댓글:  조회:4267  추천:0  2015-02-19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 로렌스 페린     시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이것은 시 쓰는 이들 모두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로렌스 페린의 저서『소리와 의미』(Laurence Perrine “Sound and Sense", 조재훈 역, 형설출판사, 1998)를 통해서 그 해답의 일단을 들어본다. 저자는 는 첫째, 그 의도를 충실하게 달성한, 곧 예술적 완성도를 갖춘 것이어야 하고, 둘째, 그 의도가 중요(훌륭)한 것이어야 한다고 전제한 뒤, 오행속요 'There was a young lady of Niger', 에밀리 디킨슨의 시 'It sifts from leaden sieves',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That time ofyear'를 예로 들어 와 , 에 대해 설명한다.  01. 먼저 에 대해 말한다.  니제르의 아가씨가 있었네  호랑이를 타고 미소지었네;  그녀를 품에 안고  그들은 돌아왔네  호랑이 얼굴에 미소지으며  ―작자 미상의 오행 속요 ‘니제르의 아가씨’  "이들 각각의 시는 아마도 유능한 비평가에 의해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려 했는가'하는 평가의 측면에서 아주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이 되었을 것이다. 오행속요는 불필요한 단어나 잘못된 단어의 수반 없이, 율격과 압운에 의해 규정된 문장의 어순에 따라 그것의 작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오행속요 형식은 작가의 유머러스한 의도에 이상적으로 부합된다. 과소, 과장을 수반한 이야기의 전개방식, 숙녀의 미소와 자세의 산뜻한 변화는 경제적이고 유쾌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오행속요를 모든 면에서 엄격히 고찰해야 한다 ; 왜냐 하면 우리는 그것을 거의 시(poetry)라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재의 경험을 전달하지 않으며, 그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간단한 일화를 유머러스하고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려 시도할 뿐이다."  02. 이번에는 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납으로 만든 체로 체질하고,  모든 나무를 가루낸다.  희고 매끄러운 양털로  길의 주름살을 가득 채운다.  그건 산과 평지의  평평한 얼굴을 조각한다.-  동에서 또 다시 동으로까지  상처입지 않은 이마를 지닌 채.  그것은 담벼락까지 닿아 있고  울타리와 울타리로 감싼다.  그것이 양털 속에 잠길 때까지;  그것은 천국의 면사포를 나누어준다.  그루터기와 볏가리 줄기에-  여름의 텅 빈 방에-  그러나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수확이 기록되지 않은 채,  이어진 수 에이커의 땅에.  그것은 파발꾼의 손목을 어지럽힌다.  마치 왕비의 발목처럼,  그리고 유령처럼 예술가들을 고요케 한다.  예전에 그들이 예술가였음을 부인하면서.  ―에밀리 디킨슨의 ‘납으로 만든 체로 체질하고’  "반면에 에밀리 디킨슨의 시(poem)는 시(poetry)이며, 아주 좋은 시이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과 상상력에 강렬히 호소하고, 시의 의도면에서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곧 자연의 매력과 신비에 대한 감각뿐만 아니라 외적인 자연의 모습과 적설량, 새롭게 떨어지는 눈의 정경을 전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우수한 시를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비교할 때, 우리는 다시 중요한 차이점을 인식하게 된다.비록 디킨슨의 시가 느낌과 상상을 불러일으켜 우리를 경이감에 젖어들게 하고, 자연에 대한 묵상으로 우리를 인도할지라도 정서와 지성에는 깊게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처럼 인간 삶의 중심과 고통의 핵심부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 사실상 그것은 일차적으로 작은 이야기의 주제인 기후에 관련되어 있다."  03. 마지막으로 에 대해 말한다.  그대 내게서 이런 때를 보리라.  한 때는 달콤한 새들이 노래했지만,  지금은 앙상한 저 합창단, 나뭇가지에  누렁잎 몇 개 매달려 있는 그런 때를.  그대 내게서 이런 노을을 보리라.  일몰의 저녁 하늘에 물든 노을을,  죽음 속에 모든 걸 감출 죽음의 검은 밤이  언젠가는 빼앗아 갈 그런 노을을.  그대 내게서 이런 꺼지다 만 불씨를 보리라.  태워버린 젊음을 주검삼아 누워있는 그런 불씨를,  생명의 젖줄기 다하는 날 임종의 자리에서 꺼져갈 그런 불씨를.  그대 이런 걸 깨달을 때, 사랑 더 강해져  버리고 떠날 모든 것을 힘껏 사랑하리라.  ―세익스피어의 ‘일년 중 그때’  "한편 세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사랑과 죽음에 접근하며 늙어가는 보편적인 인간의 비극에 관련되어 있다. 이들 세 작품 중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가장 위대하다. 그것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나 오행속요의 말, 그 이상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보다 풍부한 경험을 전달하면서 보다 중요한 의도를 성공적으로 성취한다. 분별력 있는 독자라면 그것으로부터 보다 심오한 기쁨을 얻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즐거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풍부한 자양분을 섭취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시는 감각, 상상, 정서, 지성 등 인간의 전체적인 반응에 관여한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제한적인 측면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시는 단지 독자의 기쁨만을 추구하지 않고, 그에게 순수한 기쁨과 함께 신선한 통찰력, 다시 새롭게 탄생한 통찰력, 중요한 통찰력을 지니게 하면서 인간 경험의 본질로 이끌어간다. 위대한 시는 독자로 하여금 삶과 이웃에 대해서,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해서 보다 폭넓고 심오한 이해를 하게 만든다. 물론 그러한 통찰의 문학적 성격이 항상 단순히 '교훈'이나 '도덕'으로 요약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앎이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비극의, 고통의 복잡성을 통렬히 느끼는 앎(felt knowledge)이고, 인간 경험을 특징짓는 흥분과 기쁨에 대한 새로운 앎(new knowledge)이다."  04.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세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위대한 시인가? 그것은 적어도 위대한 소네트이다. 좋음처럼 위대함도 상대적이다. 만약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어떤 소네트와 그의 가장 훌륭한 극작품들―'맥베드', '오델로', '햄릿'―을 비교해 본다면, 커다란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비극들에서 착수되고 성취된 바는 하나의 소네트에서 착수되고 성취될 수 있는 것보다 엄청나게 크고, 더 어렵고 보다 복잡하다. 사실, 문학의 위대성을 전적으로 규모와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농구나 축구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에 있어서도, 우수하면서 큰 사람이 우수하고 작은 사람보다 낫다. 시의 위대성은 우리에게 전달하는 경험의 범위와 깊이, 그 경험의 강렬성과 비례한다. 곧 그것은 삶의 총체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14행의 소네트로서 결코 압축될 수 없는 인생의 다양성과 삶의 깊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 희곡들은 생의 거대한 복잡성을 체계화시키고 경험을 통합으로 이끈다.  결국 우리는 문학적 판단을 위한 손쉬운 비교의 척도나 눈대중의 척도를 제공할 수 없다. 기계적인 테스트도 없다. 최종적인 척도의 막대는 단지 교양 있는 독자의 반응, 성숙도, 감식력과 분별력일 뿐이다. 그러한 감식력과 통찰력은 부분적으론 선천적인 재능이고, 일부는 성숙과 경험의 소산이며, 또 일부는 의식적인 연구나 훈련 혹은 지적인 노력의 대가로 얻은 성취이다. 그것들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성취될 수는 없다. 또한 결코 완벽하게 성취될 수도 없다. 노력은 길고 고된 하나의 요건이다. 그러나 성공은 비록 상대적 성공이라 할지라도 삶의 풍요와 삶의 조망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다."  그리고 이 책을 펼치면 다음 글을 맨 처음 만나게 된다.  글쓰는 일이 진정 쉽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기술, 마치 춤을 배운 사람이 아주 쉽게 몸을 움직이듯이.  거친 음이 거슬리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소리는 의미에 대한 반향으로 울려야 하느니.      ―포프의 '소리와 의미'(439쪽) 중       
95    시작 도우미 ㄹ 댓글:  조회:4086  추천:0  2015-02-19
사랑하는 친구야, 우리는 가끔 가을 언덕에 앉아서 뭣인가를 동경하는 세계를 그려보며 이야기를 했었지 않았는가. 그 때 시의 유형에 대해서 의견을 나눈 일이 있었지. 여러 유형이 있지만 크게 몇 가지로 나누어 말을 하지 않았는가. 첫째, 읽어서 마음속에 부담을 주는 시가 있고 둘째, 읽고나서 머리를 산만하게 해 주는 시가 있고 셋째, 읽은 후 마음이 깨끗하게 느껴지는 시가 있고 넷째, 읽은 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미소를 자아내게 해 주고 가슴 한 구석에 행복감이 가득 차있는 듯한 느낌의 시가 있다고 말했었지. 첫째의 유형에 속하는 시들은 대개가 인생의 단면을 나타내 주는 시들이지만 삶이나 인생의 무게를 양껏 싫어놓은 시들일 것이야. 말하자면 밝은 면을 보여 주려는 시가 아니라 어두운 면을 이야기해서 독자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시라는 말이지. 둘째는 시인이 작가에게 무엇을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불분명해서 독자를 혼란 속에 빠뜨리는 경우의 작품이지 않을까. 셋째는 독자에게 강렬하게 전달 해 주는 메시지는 없지만 왠지 후련함을 느끼는 하는 시들이 있어 넷째는 독자들에게 저음의 소리처럼 은은하게 잔물결로 전달해지는 이미지가 있는 시일 것이고, 그것은 위안과 평온의 마음을 가져다주는 시라는 말이지. 사랑하는 친구야, 첫 번째의 시인의 작품과 두 번째의 시인의 작품은 아직 미숙한 시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 80 년대까지 유행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어. 이 때 쓰여 진 몇몇의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을 거야. 글을 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알 수 있지만 독자와는 거리가 멀어 시인가 글인가 모를 정도의 새로운 모더니즘이었거든. 작품은 독자와의 괴리감이 있어서는 안돼.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만을 위한 시를 쓰고 ‘이것이 시다.’라고 했었어. 쉽게 이야기 하자면 이 시에서 한 줄 저 시에서 한 줄 또는 한 단어씩 떼어다가 붙여서 만든 듯한 시였어. 짜깁기식의 글이었으니 작가와 독자들은 제 각각 분리 되고 독자들이 아무리 이해 해 주고 싶어도 이해를 할 수 없으니 고립된 것이야. 시의 창작품은 독자의 가슴 속에 깊어 들어가야 하고, 독자는 작가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고 했을 때 좋은 공감대가 형성 되고 좋은 작품으로 남는 거야. 그렇다면 세 번째의 작가와 네 번째의 작가가 돼야겠지. 물론 더 좋은 작가는 마지막일거야. 나는 가끔 화가의 집에 놀러 가서 그림 그리는 것을 많이 보고 있어. 그 친구는 의제 허백련선생님의 수제자야.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가 들어봐 7.80년대에 깡패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당장 그림을 한 점 그려 주지 않으면 병신을 만들어 버린다. 집에다 불을 질러버린다 하면 겁이 나서 그려준데. 그러면 그 놈들은 꾸벅 절하고 간데. 물론 가지고 가서는 누구의 작품이니 얼마 달라고 해서 치부를 한데. 더 순수한 이야기 하나 해볼게. 누구든 찾아와서 이야기 하면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이야. 한번은 아는 친구가 찾아와서 어느 땅을 사려는데 자기가 돈이 부족하니 같이 나누어서 사자고 하더래. 그래서 절반을 나누어서 샀는데, 몇 년간 묵혀 두었다가 곱빼기로 팔았을 것인데 본전도 주지를 않고 안 팔려서 싸게 팔았다고 하더래. 그것도 병풍 한 벌 그려주고 받았다니 얼마나 순수한 사람이야. 마음을 비우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예로 말 하는 거야. 그러기에 그 친구는 언제든 좋은 그림을 그릴 수가 있어. 시인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무욕. 무심에서 쓰여 지는 시는 독자들이 읽고나서 가슴에 쉽게 다가오기 때문에 좋은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래서 작품을 읽으면 생활을 위하거나 가식의 탈을 쓰고 있는 시인의 작품인가를 알 수 있고, 또 시만을 위한(예술작품) 시인인가를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어. 돈을 생각하거나 어떤 지위를 바라는 사람은 가면이 앞에 있기 때문에 진실한 작가가 될 수 없어. 오히려 반대로 작가는 배가 고파야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 더 많이 나올 수도 있어. 인생의 밑바닥을 모르는 사람은 항상 허세로 사는 사람이기에 작가와는 동떨어진 생각들을 가지고 있어.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사는 사람들은 사랑의 깊이를 진정 알 수가 없고, 사랑으로 인해서 헤어지는 경우는 얼마나 깊게 사랑 했었는가 알 수 있어. 말하자면 사랑의 반대편에 서 보았을 때 그 진실과 애정의 깊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야. 사랑하는 친구야, 우리는 화가 같은 마음으로 시를 써야 생명력이 있고 역사에 남을 거야. 내 말에 조금은 수긍이 가겠지. 당신도 그런 작가 정신으로 작품을 써 주기를...... 사랑하는 친구에게   편지로 쓰는 시 창작론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 정산 김 용 관
94    시작 도우미 ㄷ 댓글:  조회:4025  추천:0  2015-02-19
어떤 시가 좋을가   좋은 시를 보아낼줄 아는 시인이 좋은 시를 쓰게 마련이다. 시는 자기가 아는것만큼쓰게 되는것이 일상도리이다. 우리들은 시인이면서 시평에 참가하는 사람들이므로 시를 보는 눈길이 중요하다. 어떻게 볼것인가? 아래와 같은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시는 무엇을 썼는가를 보지 말고 어떻게 썼는가를 보아야 한다. 시에 태여난 이미지가 새로운가 아닌가 나의 생각과 다른가 다르지 않는가. 이것을 판단함에 있어서 돌발적이고 기습적인 이미지인가 아닌가를 판정하여야 한다. 나를 놀라게 하는 이미지, 나를 악연하게 하는 이미지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피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는 이미지말이다. 두번째는 뛰기가 잘 되였는가를 보아야 한다. 앞의 이미지와 비슷하거나 어디서 본것같거나 하는것은 뛰기가 잘못된것이다. 우의 이미지와 아래의 이미지는 왕청같이 다른것일수록 좋다. 서로 아무런 련계도 보이지 않고 생소할수록 좋은것이다. 세번째는 현실적인가 아닌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시가 현실에 얽매워있으면 안된다.시는 시인의 꿈을 쓰는것이므로 환상성이 있어야 한다. 환상성이란것은 매우 복합적인 문제인데 현실사 물에 대한 변형인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사물에 대한 변형인 것이다.  현실로부터 상상으로 가기도 하는데 상상으로 간후에는 절대 현실로 복귀해서는 안된다. 좋은 시를 투표할 때는 한번 봐서 알리는 시를 투표하는것보다 자기가 잘 리해할수 없는 시를 투표하는것이 더 좋다. 시는 리해되지 않아도 통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것이리라. 시간과 공간의 확장이 크면 클수록 점수를 더 주어야 할것이다. 언어란 그사물인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영상을 떠올리는것는 매체이다. 즉 중개물이다. 사물은 파괴되고 바뀔수 있지만 언어는 절대 파괴되지 않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의 기능을 잃지 않는다. 물은 불이라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례를 보면 언어의기능이 무엇인가를 알수 있다. 언어의 기능은 자유로이 한 사물의 영상에서 반대되는다른 사물의 영상으로 갈수 있다는것이다. 감에는 아무런 걸림돌이 없는것이다. 자유로운 언어의 결합들이 새로운 이미지를 이룩하고 새로운 시를 산생시킨다. 시의 언어는 세분될수록 좋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미지의 힘은 세부에 있기에.  우린 해마다 응모작을 놓고 좋은시 투표를 하는데 시를 놓고 투표해야지 사람을 놓고투표해서는 절대 안된다. 시인의 마음은 티없는 샘물처럼 맑고 순수해야 한다. 친분여하를 보며 눈치보기나 싸주기를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93    시쓰기 비법 댓글:  조회:4271  추천:0  2015-02-19
  50여 년을 시인이자 소설가로 활발하게 활동을 해온 작가 한승원이 직접 터득하여 전수하는 『나 혼자만의 시 쓰기 비법』이 도서출판 푸르메에서 출간되었다. 혼이 담긴 살아 있는 글을 쓰기 위해 평생을 몰두해온 작가 한승원의 이번 시 쓰기 비법 책은 시 쓰기에 뜻을 세운 독자들에게, 또 이미 시작詩作을 하고 있는 후배 시인들에게도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 먼저 시인의 마음을 만들어라         저자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첫 번째 비법으로 시인으로서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스님들이 도를 닦듯이 마음을 비우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어린아이들이 우주의 여러 현상과 그 내면의 뜻을 발견하고 놀라워하듯 순수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인의 마음이 갖추어진다면 이미 반 이상은 시인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양새를 읊으면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도 당신 혼자만의 하늘을 잡고 뙈기를 치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그러한 시가 이미 당신 속에 들어있는데 그것을 당신이 지금 모르고 있을 뿐이다.” -p.5 “어떤 형상을 보고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내면세계 속에 들어 있는 그 형상을 형상화시키는 것이다. 별을 보고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영혼 속에 들어 있는 별을 형상화시킨다는 것이고, 바다를 앞에 두고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내부에 들어 있는 바다를 발견하고 형상화시킨다는 것이다.” -p.259         두 번째 비법은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를 판별하여 읽고 그것을 암송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되려는 사람이 일차적으로 가져야 할 필수적인 덕목으로, 시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수사법을 공부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은 그들만의 시 쓰기 비법이 있으므로 그들의 비법을 터득한 후 자신만의 시 쓰기 비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를 읽고 외운 후 그들을 모방해서 시를 쓰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자기 혼자만의 비법을 터득하여 나만의 독특한 시를 써야 한다. 저자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가 나아갈 방향을 선시禪詩에서 찾는다.         “선은 구구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단박 깨달음의 경계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다. 손가락 저 너머의 달을 보는 방법이다.” -p.225 “요즘의 오탁악세五濁惡世 속에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탐욕으로 찌들어 있다. 이 더러운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 앞에 ‘선시’가 놓여 있다.” -p.228         ▪ 좋은 시는 올곧고 바르게 사는 삶에서 비롯된다         이 책 『나 혼자만의 시 쓰기 비법』은 단순히 시를 쓰기 위한 기술을 전하는 개론서가 아니다. 좋은 시란 올곧고 바른 마음자세와 삶의 철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믿는 저자의 삶이 그대로 투영된 만큼 저자의 정신수양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시인의 마음 만들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또한 그 자신 평생을 통해서 문학과 철학은 물론 한시, 인도 신화, 불교 설화, 민담 등을 공부해왔고 그런 모든 것들이 시 쓰기의 바탕이 되어 자연스레 시로 표출된 만큼 책 속의 풍부한 예문과 이야기는 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저자 자신이 시를 쓰면서 오리무중 속에서 겪었던 경험과 고통을 극복한 본인만의 비법을 여과없이 담았기에 이 책이 독자들에게 삶의 지혜로운 길라잡이가 되고, 나아가 시원시원하고 고결한 한국의 시를 책임질 모범답안이 될 것이다.         ▪ 나 혼자만의 시 쓰기 비법 엿보기          에서는 시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소개한다. 저자는 시를 잘 쓰기 위한 첫 걸음은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진실된 자세라고 말한다. 거짓이나 의심, 탐욕에서 벗어나 투명하고 깨끗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시인의 마음 만들기 준비가 된 것이다. 자신만의 거울로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흥미로운 시선과 그를 통해 만들어진 시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에서는 선의 전통이 서려있는 흥미로운 시와 이야기가 가득하다. 2부를 읽고 나면 선시가 선사하는 아름다움은 물론, 삶에 대한 지혜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에서는 어떻게 시에 접근하고 쓰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1부에서는 다소 포괄적인 의미에서 시인의 마음을 이야기했다면 3부에서는 어떤 마음으로 시를 대하고 써야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방법을 말해준다.  에서는 시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수사법의 종류에 대해 알려준다. 각 수사법의 사용 방법과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저자가 예로 든 시에서 어떤 수사법이 쓰였는지 찾아본다면 그 어떤 정확한 정의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본문내 주요 문안         좋은 시를 쓰려면 시인으로서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스님들이 도를 닦듯이 수양을 해야 한다. 그것은 시인답게 마음을 비우고 살기이고, 어린 아이처럼 우주의 제 현상과 그 내면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놀라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p.8         평생 소설을 써오지만 나는 시를 여기餘技로 여기지 않는다. 걸쭉한 단물을 고고 또 고아서 차돌 같은 엿으로 만들듯이 풀어진 말과 삶을 그렇게 곤다. 비수를 깎듯이 벼리고 다듬는다. 싸움터에 나가서 쓸 그 촌철살인의 독 묻힌 칼, 내 가슴 속에 상처 내어 그 진주의 씨를 배양하고 가꾼다. -p.28         사랑은 영원한 화두이다. 사랑을 표현한 시 속에서, 그 사랑의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의 도달점이기도 하다. 확언하건대, 모든 사랑의 시는 진실로 사랑하는 대상이 없으면 써지지 않는다. 사랑이 없으면 시도 없는 것이다. -p.28         추워짐과 슬퍼짐이란 것은 온실 속 같은 다사로움과 달뜸으로 인해 물러져 있는 의식을 냉철하게 하는 오싹함이다. 그 냉철로 인한 슬픔과 오싹함은 나의 흐물흐물해져 있는 삶을 성난 얼굴로 살펴보게 한다. -p.64         나는 소설 쓰기, 시 쓰기에 미친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나, 울화가 치밀면 나는 밖으로 나와서 바람을 쏘이면서 심호흡을 한다. 마음에 번뇌가 일어날 때 바다 바람을 쏘이면서 속으로 소리친다. 파도가 철썩거린다, 아귀차게 살려고 애써야 한다. -p.86         연근해일지라도 고향의 바다는 단순한 서정적인 모습이 아니고 거친 서사적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 바다는 어촌 사람들의 아픈 삶의 현장이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마녀적인 위엄과 거친 폭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연근해의 생활을 통해 나는, 인간이 바다 앞에서 연약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 바다에 저항을 하며 비나리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의 이념 다툼과 한국전쟁을 거쳐온 고향 바다와 어촌 사람들의 슬픈 음화 같은 삶을 소설로 형상화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p.89         나는 주름살과 흰 수염과 흰머리를 두려워하거나 창피해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제5기의 인생수업, 작품 수업을 하고 있다. -p.145         자기를 서책 속에 가두고 사는 사람에게서는 그윽한 향기가 나고 탐욕 속에 자기를 가두고 사는 사람에게서는 흉칙한 냄새가 난다. 나를 잘 가두는 법을 배우기 위해 나는 늘 달려가서 그 오솔길을 걷곤 한다. 내가 오래 전에 서울을 버리고 장흥 바닷가에 토굴을 짓고 그 안에 나를 가두고 사는 것 역시 다산에게서 배운 것이다. -P.154     나는 내 문장이 늙음으로 인해 건조해지지 않았는지, 감각이 낡지 않았는지, 내가 새 정보에 어두운 건 아닌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이 시대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발언인지, 글 속에 내 철학적인 사유가 녹아들어 있는지를 성난 얼굴로 천천히 깊이 살피곤 한다. -p.146         늙은 예술가는 지금의 늙음으로 말미암아 높아진 안목과 보석 같은 지혜와 그윽함과 경륜으로써 해오던 예술 활동을 끊임없이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나는 늙었을 뿐, 낡아가지 않는다”고, 꿋꿋이,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작품 활동을 해나가는 그런 사람과 영혼의 사귐을 나누는 것, 그것이 노인들의 소임이 아닐까. -p.147         시를 쓰고 차를 마시면서, 거울처럼 맑게 가라앉힌 마음에 비친 향기로운 생각, 푸나무와 꽃과 내 마음에 쏟아지는 하늘의 공평한 마음, 산소 같은 생각만 남기고 다른 것들을 잘라 없앤다. -p.203         나에게는 천강에 비치는 달빛이 시이다. 소설은 시를 향해 날아가고, 시는 음악을 향해 날아가고, 음악은 무용을 향해 날아가고, 무용은 우주의 율동을 따라 날아간다. 그 율동의 한가운데에 시인인 내가 서있다. -p.221         시인은 고독을 슬퍼하면서 즐기는 견고한 바위 같고 바다 같고 별 같고 달 같고 호수 같은 존재이다. 시인은 그 고독을 어떻게 이겨내는가를 스스로 관찰한다. 이때 시는 자신과의 대화이다. 사랑을 떠나보낸 다음의 아픈 견딤일 수도 있고, 참을성 있는 기다림일 수도 있다. -p283         시인이 문답할 상대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산이나 바다일 수도 있고, 신일 수도 있고 도깨비일 수도 있고, 들풀이나 산이나 바다일 수도 있다. 그들과 문답한다는 것은 영혼으로 소통한다는 것이다. 달과 별과 들풀과 구름과 안개와 무지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삶인가. p.308         ▶ 저자소개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50여 년 동안 글을 써 온 작가 한승원은 독자들에게 시인보다는 소설가로 친숙하지만, 『열애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있게 하고』 『노을 아래 파도를 줍다』 『달 긷는 집』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등 다섯 권의 시집을 내며 시인으로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고향 장흥에 위치한 작업실 해산토굴에서 글을 쓰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대접하는 그는 자신을 “늙어갈 뿐 낡아가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책읽기를 탐하고 하루에 일정 양의 글은 반드시 쓰며, 잘 보이지 않아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활자를 15포인트로 키워 글을 쓴다는 그는 늘 자신의 문장이 늙음으로 인해 건조해지지 않았는지, 글 속에 철학적인 사유가 녹아들어 있는지를 살피고 반성한다. 늙어가지만 절대로 낡아가지는 않는 이 시대의 진정한 원로 작가 한승원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92    시작 도우미 ㄴ 댓글:  조회:4613  추천:1  2015-02-19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             요즘은 아침마다 시를 읽는다.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좋은 시는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이다. 시를 읽으면서 물렁했던 하루가 단단해짐을 느끼고, 내가 시를 쓰는 것에 대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간혹 좋은 시가 어떤 시인지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그 질문에 선뜻 답을 하기가 쉽지 않다. 좋은 시란 개인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시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주위 사람들에게 몇몇 시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좋아요’라고 말하기보다 ‘너무 어려운데’라는 반응이 주를 이루기도 한다. 사람들에게는 시가 어렵게 보이는 모양이다.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교육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를 감성으로 배우지 않고 교과서로 배웠다. 처음 접한 시가 교과서에 있었고, 교과서에 실린 시가 가장 좋은 시라 생각했다. 알다시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시를 읽는 방법은 일방통행이었다. 은유와 직유, 환유 제유와 같은 비유법과 단어가 가지는 속뜻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예를 들어 ‘님의 침묵’에서 ‘님’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방식은 시를 읽기보다 점수를 먼저 생각하게 했다. 이러한 방식이 시를 왜곡된 방식으로 읽게 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교과서에 실린 시도 오늘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어떤 시를 좋아합니까 라고 물으면, 대다수 사람은 20세기 초의 시인과 시를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의 시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민족 문인들이 일제 치하의 상황을 탈피하기 위하여 시를 썼고, 윤동주 시인은 생체실험의 도구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 그들이 있어, 오늘 우리의 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시 읽기는 너무 편향적이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윤동주, 한용운, 정지용 시인의 시도 좋지만, 연대기적으로 백석, 기형도, 안도현, 도종환과 같은 좋은 시인이 출현했고,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시를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지금 수많은 젊은 시인들이 나타나 우리의 시단을 밝히고 있다.     요즘 시는 다양하다. 시는 ‘오로지 서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이는 젊은 시인들의 노력이 크다. 그들의 노력이 대단한 결과물을 만든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출현이 너무 갑작스럽게 보여,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홍어를 좋아한다(생선을 싫어하는 충청도 촌놈이 홍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삭힌 맛의 홍어를 선호하는데, 많은 사람이 견디지 못하는 맛이다. 시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극 서정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리얼리즘의 시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미래파라고 불리는 시인의 시를 좋아할 것이다. 이중 어느 시가 좋은가 묻는다면 나는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맛의 취향 같은 것이어서, 자기에게 맞는 시가 좋을 뿐,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는 서정에 가깝다. 리얼리즘의 시편도 좋고, 과하지 않은 미래파의 시도 좋아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시의 경향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시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라면, 다양한 시들을 접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시의 다양한 맛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가장 올바른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시 속에서,사막화되어버린 감성을 되찾게 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 시대 시인의 역할일 것이다.       [출처]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작성자 yhjoo1  
91    시작 도우미... 댓글:  조회:3916  추천:0  2015-02-19
사람이 나이가 들면 깊어지는가 보다  나만 철이 없어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아 자꾸 속 쓱쓱하다  난 언젠가 읽은 구절 중에 "충격을 주는 시가 좋은 시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일반인들이 대개 좋아하는 시는 편안한, 편안함을 주는 시인것 같애. 근데 시는 어떤 대상이나 정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표현 이기에 그건 충격을 줄 수 밖에 없다. 새로움을 주는 시라고 해도 좋겠지. 어디선가 본 것 같고, 한 번 쯤 들어본 것 같은 시는 많지만 그런만큼 참신함은 떨어지고 그만큼 감동은 줄어드는 것일거라는 생각 해  어려운 시에 대한 반발은 그 시를 쓰는 사람들의 세계관과 역사관, 혹은 반동적 행동에 기인하는 것이 더 큰 것 같애. 동시에 어렵다는 건 그만큼 대상에 대한 이해와 관조가 덜되었거나 표현미숙일 경우가 더 많은 것 같고. 물론 전혀 새로움을 전혀 새롭게 표현하는 경우, 어려운 시가 나올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미숙에 기인한 경우가 더 많다는데 관해 고개가 끄덕여진다...  --------------------- [원본 메세지] ---------------------  예전에 나는 쉬운 시가 좋았습니다.  한번 읽어 시란, 눈에 썩 들어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게 무슨 시란 말인가?  그래서 쉬운 시, 상징이 적은 시, 내면보다는 외적인 형상이 묘사된 시,언어의 술수를 부리지 않은 직설적인 시, 반드시 민중의 아픔과 분노가 섞인 시, 그런데 한정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 기준을 두고서 나는 시를 대체로 네 가지로 분류하여 보았습니다.  첫째, 한 번 읽으면 이해는 되나 다시는 펼치지 않는시,  둘째, 금방 이해는 되나 다시 펼쳐지는 시(이런 시는 거의 음악같은 시일 것이다),  셋째, 여러번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시,  넷째, 처음에는 어려운데 여러번 읽을 수록 그 의미가 새록새록 돋아나는 시  요새 내가 재미있게 읽는 시는 두번째와 네 번째에 해당하는 시들입니다.(*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제 취향일 뿐입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시들과 창비의 몇 몇 시들이지요. 창비의 장석남의 시들은 두번째와 네번째를 걸쳐서 존재하는 것 같고, 고형렬의 시는 네 번째, 그리고 최근에 읽은 박용하의 시들은 네번째의 시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땅끝문학회 회원들이 읽고 쓴 시들은, 첫번째 아니면 두번째에 해당하였지 않나 생각됩니다. 물론 이 말은 '대체로'입니다. 저도 거기에 속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10년 전의 제 시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 절실하게 듭니다. 세상에, 겨우 10년 전에 쓴 시들이, 몇 편을 제외하고는 어설픈 감정이 느껴진다니.  깊은 사유와 세상의 모습이 담겨있는 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어제 글을 쓰다가 오류가 있어 수정합니다. 장석남의 시는 두번째와 세번째가 아니라 '두번째와 네번째'로 수정합니다.  그럼 지난번엔 고형렬의 시를 보았으니, 이번엔 장석남의 시를 보지요.  오동꽃(장석남)  다른 때는 아니고,  참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하고 한참만에 고개를 들면 거기에 오동꽃이 피었다  살아온 날들이 아무런 기억에도 없다고, 어떡하면 좋은가... 그런 평화로움으로 고개를 들면 보라 보라 보라  오동꽃이 피었다 오오  무엇을 펼쳐서 이 꽃들을 받을 것인가  위의 시는 정말 쉬운 시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어의 행간에서 주는 상징은 끝이 없습니다. 저는 이 시를 수십번은 읽은 것 같은데 아직도 여운이 그득하게 느껴집니다.  한 사람이 사랑에 실패하고, 그 사랑을 잊으려 애쓰던 중, 어느날은 바람부는 언덕에 오래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아, 이제는 잊었구나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자신이 앉았던 자리의 위로 보라색 오동꽃이 피어 있습니다. 아직 그는 그 사랑을 못잊은 것 같습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면 거기 오동꽃이 피었다'니!  '보라 보라 보라'는 시각적 심상도 느껴지지만 오동꽃의 색깔이 '보라'색임을 심상으로 더불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장석남)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 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 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 가운데다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모두들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을 아시죠?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아버지의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물던 못물들의 조용함, 자연스러움, 그 앞에 곁에 잠 덜 깬 눈비비며 날아와 앉던 잠자리의 가벼움! 그 잠자리의 가벼움과 못물의 조용함을 시인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라고 표현했습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자연스러움을 한껏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90    글에서의 기호학 댓글:  조회:3952  추천:0  2015-02-19
구조주의와 기호학                                         테렌스 호옥스      비꼬(vico)는 이탈리아의 법률가인데 (1725년) 그 당시에는 관심을끌지 못했던 기념비적작품. 비꼬의 연구는 … 영원히 계속되는 구조화의 과정이 인간정신에 대해서 지니는 마취적인 속박을 풀어버리는 최초의 근대적 시도의 하나로 손꼽힌다.17   진정 변별적이고 영원한 인간특성은, 라는 능력안에서 식별해 볼수 있는데 , 그것은 신화를 창조하며 또 언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능력과필요성인것으로 나타난다… 시적예지라는 재능은 그러니까 구조주의 재능이라고 할수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생활방식에 성격을 부여하는 원리이기에, 인간이다 라는것은구조주의자이다 라는것과 같다는 주장이다.17   삐아제(piaget) 삐아재는 구조를 전체성의 개념, 변환의 개념, 자기조적의 개념 등 세가지 개념으로생각했다. 전체적이라는것은 내적인 결합체를 의미한다. 변환적이라는것은 정적이 아니다. … 구조는 변환의 절차를 행할수 있어야 한다. …언어는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구조로서, 갖가지의 기본문장을 광범위하게 다양한새로운 발화로  변환시킬수 있는터이나, 한편으로는 그 변환을 언어자신의 고유한 구조안에 머물러있게 한다. 자기조절적이란 변환수단을 유효한것이 되게 하기위하여 제자신을 넘어서는것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변환은 그 변환을 수행하는 고유의 법칙을유지하고 보장하도록 작용하며 다른 체계가 련관되지 않게 그 체계를 봉인하도록 작용한다. 개라는 낱말은 언어구조안에 존재하여 기능하고 있으며, 네개의 발을 가진 짖는 피조물이 실재한다는것과는 관계가 없다.19   구조주의-세계에 대한 하나의 사고방식   사물의 참된 본성은 사물 그 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하고 그리고 지각하는 사물들 간에서의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것이다. 20   구조주의자의 생각의 궁극적인 원천은, 항구적인 구조, 즉 개개인의 행위, 지각, 자세가 그 안에서 조화되고 그것들의 최종적인 성질이 그로부터 이끌어내지는 구조라고할수 있겠다… 인간본성의 그 측면에 , 즉 언어에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여 있다.21   언어학과 인류학 – 소쉬르( Saussure) 스위스.   소쉬르가 언어연구에서의 혁명적인 공헌은 언어를 실질로 보는 견해를 배척하고 관계적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된 일이다.22   두개의 기본적차원에서… 즉 랑그라는 측면과 빠롤이라는 측면에 대해서이다.24   빠롤은 물우에 나타나 있는 빙산의 일각이다. 랑그는 그것을 받쳐주는 그리고 말하는사람과 듣는 사람에 다 같이 느껴지면서도 결코 그자체는 모순을 나타내지 아니하는더 큰 빙산덩어리인것이다.25   나무라는 청각이미지 즉 능기와 그것에 수반되는 개념 즉 소기, 그리고 지상에 실제로자라고있는 물리적인 나무사이의 연결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적합성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나무라는 낱말에는 요컨대 자연 그대로인 혹은 나무다운 성질이 없다. 그러니언어의 구조를 떠나서 현실에의 보증할만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 나무라는 낱말이땅우에서 자라고있는 잎이 있는 물리적물체를 의미하는것은, 그 언어의 구조가 그 낱말에 그 물체를 이미지시키고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때, 비로소 그 낱말은그 효력을 인정받게 된다.31   레비스트로스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것은 언어에 대하여 말하는것이며, 언어에 대해서 말하는것은사회에 대하여 말하는것이다.42   어떠한 경우에서든 , 어떤 현상을 결정하는것은 그 현상자체의 어떠한 본래적인 양상도 아니고, 현상들간에서의 관계이다 라는것이 , 구조주의 (그리고 음운론)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44   문학에 관해서 말하면, 이것은 먼저 단순한 내용을 넘어서서, 우리가 막연한 형식의영역이라고 말하는 그곳으로 밀고 들어가는것을 의미한다.79   러시아 포르마리즘.(formalism)1920- 1930.Boris  Eichenbum, Vtor Shklobisky, Roman Yakobson,  Bris Tomasjevsky, Juri Tynyanov언어학자나 문학사가들. 모스크바언어학회와 뻬드로그라드 시적언어연구회.   초기의 포르마리즘(1920-30년대 쏘련형식주의)은 상징주의 및 실용될수 있는 코무니 케이션의 도구로서의 형식에 대한 상징주의자적 관심을 기본원리로 해서 구축되였었다. 즉 자립적이고 자기표현적이며, 언어외적 리듬, 연상, 암시를 리용해서 언어를보통의 일상적인 의미 영력을 넘어서까지, 늘려나갈수 있는것으로 생각해서이다. 이러한 관심에서, 비평의 경우에도 문학적인 언어를 작동시키는 기술에 열심히 주목하게 되고, 또 이 기술들을 일상적인 언어의 양식mode과 구별해서, 그 특성을 규정하려는 관심이 생겨났었다.81   Shkrovsky는 ‘예술은 언재나 인생으로부터는 자유이고, 그것의 색갈은 도시의 성책위에 펄럭이는 깃발의 색갈을 결코 반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일 예술이, 특히 문학이,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있다면, 문학의 학술적연구나 비평은 마땅히 애매함이 없이분명하게 확정된 고유의 자동영력을 가지고 있는 통일된 지적활동이라야 할것이다. ‘예술형식은 , 예술 고유의 법칙에 의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라고 주장한 skrovsky의분명히 구조주의적인 일반원칙에 따른다면, 위에 말한 그 령역은,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문학인가라는것에, 즉 언어예술전반에서의 특유한 성질에 밀접하게 연관되여 있다. 스크로브스키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이란, 작품을 될수있는대로 예술적인것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 따라 특수한 기법으로 창작되여진 작품을 말한다.를 용인하는것은 야콥슨의 결론인’문학연구의 대상은 , 문학의 총체가 아니고, 문학성, 즉 작품을  문학자품이 되게 하는 그것이다’를 역시 용인하는것이 된다…. 작가의 내부에서가 아니고 작품자체의 내부에서, 즉 시인에서가 아니고  시의 내부에서 발견될수 있다는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거기에 사용된 언어의 독특한 용법에 깃들어있어야 한다83….   포르마리스트들은 전의적, 언어, 은유, 상징. 시각의영상 등은 시의 필요조건인것이아니라 일상언어의 특징일뿐이라고 주장한다…. 문학분석에서의 그들의 흥미는 이미지의 존재에 있는것이 아니고 이미지가 적용되는 용법에 있는것이리라.84   일탈은 포르마리즘의 중심적관심사…일상의 언어와 비교해 볼때, 문학언어는 일탈을발생시킬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탈이기 때문이다… 장치, 기법은 문학예술의 근간이 되며, 문학의 모든 요소가 그곳으로 향해서 조직되고있는 기본적요소가 된다. 그리고 그 요소들을 심판하는 기준이기도 하다.85 시적술화는 … 단순한 실용성이나 지식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정보의 전달이나 언어를 넘어서 저쪽에 있는 지식의 체계화에도 관여하지 아니 한다. 시적언어는 용이주도하리만큼 자기의식 적이며 자기각성적이다. 그것은 자체내에 포함되여 있는 메시지이기를 떠나서, 두드러지게 매체가 되려고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는 특색을지니고있으며, 또 제자신의 언어적특질을 체계적으로  강화시키고있다. 그 결과 시에사용 되는 낱말들은 , 단순히 사상전달의 신분을 지니고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목적이 되는 자율적인 구체적 실체 인것이다.86   시는 낱말과 의미를 분리시키기보다는 , 오히러 –놀라운 일이 겠으나- 낱말이 취하게되는 의미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이런 점에서 시는 또 다시 보통의 언어활동의 정도를한층 더 높인다… 낱말의 시적용법에 의하여 애매성은 낱말의 운용에 있어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이렇게 됨으로서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로 옮겨가는 낱말이 낱말의구조사의 역활이 전환되 여진다.87   에술작품은 모방(내용을 지니고있는것)이라고 생각하는 상식적 견해를 제쳐놓고, 그자리에 형식의 완전한 우월이라는 관념을 대치시키는 일이기때문이다. 이렇게 생각되여지는 문학이야말로 본질적으로 문학다운 것이다. 즉 다른 실체를 지각해볼수 있는창문이 아니라, 자기 충족적인 실체인것이다. 내용이란 문학형식의 한 기능에 불과하며, 형식을 넘어서서 혹은 형식을 통해서 감지될수 있거나 , 형식과 분리될수 있는 그무엇은 아니다. 실은 작품이 내용을 포함하고있는것처럼 보일뿐인 것이다. 사실인즉작품은 스스로의 발생, 스스로의 구성에 대해서  말하고있을 따름이다.91   예술이라는 과정의 생명력은 , 행동안에서 볼수있는 그것의 수법에 의존한다는것이포르마리즘의 중심명제이다. 그리고 장치를 노풀시킴으로써, 자신이 집필할 때 의지하고있는 비친숙화의 기법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문학예술가는 모든 장치들중에서더할나위없이 중요한 장치에 접근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예술을 작동케 하는 과정에 은밀히 통해있는 일탈감각인것이다.95   변혁은 사회변화에 대한 반응이기거나 혹은 그 부산물로서가 아니고, 내적요구에 의하여 재촉되고 추진되여서, 자기개성 적이고 자기 페쇄적인 문체나 장르의 연속을 펼치는 일이라고 볼수있는것이다. … 참신한 형식이나 문체는 낡은것에 반역하 는데서출현하는것이기는 하나 그것들의 반대명제로가 아니고, 영속성이 있는 요소들을 재조직하고 재편성하는 한에서이다. 이것 역시 일탈과정의 일부분이다. 기의한것이 일상적인것이 되면 다른것으로 바뀌여질 필요가 생긴다.98   패로디는 중요한 역활을 한다. 왜냐하면 패로디는 언제나 다른 문학작품을 배경으로삼고, 그것의 수법을 폭로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떠나기때문이다….페물이 되여버린수법은, 내버려지는것이 아니라, 어울리지 아니 하는 새로운 문맥에서 반복되여… 재차지각이 가능해진다.98   문학은 자신을 개신시키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자기의 경계선을 다시 긋곤한다…. 모든 에술은 연속성안에 있다는것, 고등예술은 자신을 갱신키 위하여 그 연속성의 범위내에서 경계선을 정기 적으로 옮기고 있다는것,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유일하게 불변인것은 문학 항시 나타내어야 하는 문학다움의 감각이라는것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든 문학을 규정하고있는것은 그것의 구조적역활 즉 그 시대의 비문학과의 대립인것이다. 99   유럽의 구조언어학   언어가 정보전달에 사용될 경우에는 인식적 혹은 지시적 기능에서 작동하고, 말하는자나 글쓴 자의 기분이나 태도를 나타내기에 사용될 때는 표현적 혹은 정감적 기능을볼수있고… 언어가 …  보통의 사용법에서 최대로 일탈될 때, 그 언어는 시적으로 혹은 미적으로사용되여진다   …체코의 언어학자 얀 무카로브스끼가 말하는것처럼, 이러한 전경화현실화라는 행위는 중요하다. 시적언어는 코뮤니게이션을 위해서 사용하는것이 아니고, 표현행위 즉 언어행위 그자체를 전면에 내놓기위해서 사용 되고있다.103   야콥슨jakobson   은유—어떤유사점, 상합적, 공시적, 수직적, 직유. 초현실주의 , 능기생성, 시전경화,  해석불가 환유—인접성, 련합적, 통시적, 수평적, 제유, 입체파. 능기결합, 산문전경화,  해석거부   은유와 환유는 의 비유인것이다. ‘그차는 딱정벌레처럼 전진해 갔다’와 같은은유에서는 , 딱정벌레의 움직임이 자동차의 그것에 등가인것으로서 제시되여있고, ‘백악관이 새로운 정책을 검토한다’ 라는 환유에서는 , 어떤 특정의 건물이 합중국의대통령에게 등가인것으로 제시되여있다.105   소쉬르의 개념을 적용하면 은유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질상 상합적이여서 언어의 수직관계가 리용되는데 , 환유에서는 일반적으로 그 성질상 연합적이여서 언어의 수평의관계가 리용된다. 106   인접성위에 유사성이 들게 놓이므로서, 시는 완전히 상징적이고 다양하고 다의적인본질을 부여받게 된다. 108   시는 보통언어를 그냥 장식하는것이 아니고 , 별개종류의 언어를 구축하는것임을 의미한다. 시적이라는것은 수사상의 장식으로 술화를 보완하는것이 아니고 , 술화와 그구성요소 모두를 전면적으로 재평가하는 일이다…. 시적이라는것이 경합해서 존재하는 다른 어떠한 기능들보다도 더 높은 차원으로 높아졌을 때, 시가 생기게 되는것뿐이다… 그래서 시적기능은 언어예술의 유일한 기능은 아니고 다만 그중에서 지배적이고결정적인 기능인것뿐이다. 112   사실주의시는 해석되기를 거부하고 현대시는 해석을 요구하면서 해석불가능에 있다고 하겠다. (나의 말)   의미는 그 특징상 전의할뿐만 아니라 , 전의될수가 있고 또 전의되여야 한다.116   만일 코뮤니케이션이 메시지 그자체에게로 지향하고 있다면, 이 때는 시적 혹은 미적기능이 우세해진다고 말할수 있다… 언어의 시적기능은 … 기호를 명확히 인식하도록촉진시킨다. 그 결과 능기와 소기, 기호와 대상간에서의 어떠한 관계라도 자연스럽다거나 분명하다고보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부숴뜨리리게 된다.118   양식은 자기 지지적이며, 그 양식이 바로 주제인것이다. … 문학예술에 대한 이러한견해는 형식과 내용을 재통합하는데 소용되며, 또 본성을 유효토록 하기위해서 작품을 메시지의 용기가 아니라, 그 본성을 유효하도록 하기위해서 자신의 령역을 넘어서는 지시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생성적이고, 자기조절적이고, 결국에는 자기존중적인  본질적통일체로 제시 하는데 소용되는것이다. 결국 작품은 Piaget의  말을 빌면, 하나의 구조인것이다.119   구조주의는 그자체가 언어학적 모델에서 발전했었는데 언어로 이루어진 작품인 문학에서 그 모델과의 유사성 이상의것을 가진 대상을 발견하고 있다. 양자는 동질이다라는것이다.120   그레마스 A.J.Greimas   우리는 차이를 지각하고 , 그지각의 덕택으로 , 세상은 우리앞에 서 우리의 목적에 맞도록 형상을 취하게 된다121   행위의 내용은 노상 변하고 , 행위자도 바뀐다. 그러나 언술광경은 항상 동일하다. 121   또도로프TzvetanT0d0rop   문법이 어째서 보편적이냐 하면, 그것이 우주에 관한 정보를 모든 언어들에게 알려주고 있기때문이기도 하지마는, 그것이 우주자체의 구조와 일치하기때문이기도 하다.132   대담한 개인적창의력이라는 이름에서 낡은 체계를 파괴한다는 의미일것이다. 136   구조주의의 최대의 특색은, 바로 형식을 내용이 되게 하는 일종의 변환작업에 있는것같다… 즉 문학작품은 언어에 관한것이며 , 언어사용 그자체의 과정을 가장 본질적인주제로 삼고 있는것이다.137   형식이 곧 내용이다라는것을 자명한것으로 보고 있기때문에, 형식과 내용을 같다고보는 낭만파후기의 생각을 시인하 는것이다. 141   문학은 언어의 내부에서 모든 언어에 생래적으로 깃들여있는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그것이다. 문학의 술화의 본질은 언어를 넘어서가는 일이다. (만일 그렇지가 않다면 문학의 존재이유는 없을것이다.) 문학이란, 언어가 자살을 기도할 때 사용하는 흉기와같은것이다.147   바르트   인간은 자신이 살고있는 세계를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우리는 주어져있는것을 변경하고 재구축하는것이다. 148   글쓰기는 결코 코뮤니케이션의 도구도 아니고 , 말할 의도만이 통해가는 열려있는 통로도 아니다. 정밀이니 명료니 하는것과 같은 초역사적인 보편적문체의 양식이나 조건도, 이데올로 기적으로 무구명료함이이란 순수하게 수사학상의 속성이지, 일반적으로 어떠한 시대 어떠한 장소에서도 가능한 언어특성은 아니다. … 부르조아지는 자신이 분류해내지 못하는것은 인정하지 아니하려고 하며, 일체의 인간경험을 자신의 고유한 세계관과 합치되도록 고쳐서 그것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것으로 승격시켜 나간다.151   이들 꼬드는 --우리가 인정하든말든—의미를 변경시키기도 하며, 더욱 중요하게는생성하는 작용을 하는데 , 그 방법은 무구하다 거나 자유롭다고 하는것과는 거리가 멀고, 바깥 어디엔가에 있는 객관적인것으로 우리가 생각하기 좋아하는 그것에, 언어자체가 제자신의 중개적이며 형성적인 패턴을 부과할 때의 복잡한 방법에 많이 닮아있다. 그 결과, 적절히 분석되였을 경우의 텍스트가 드러내게 되는것은 현실의 단순한반영이 아니라 토도로브가 말하는 뚜렷한 일종의 다양성이다.153   다수성과 애매성은 문학의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라고 보는 생각이라든가, 의미들 상호간에서 신중히 유발되여진 긴장에서 언어의 본성에 관한 많은것이 밝혀질수 있다.155   문학은 우리가 세계를 가공하고 창조하기위해서 고안해낸 여러꼬드들에 의존하고 있다. 문학이란 , 어느 의미에서는, 꼬드를 창출하는 중요한 동인이 되는 꼬드의 중류장치일런지도 모든다. 문학은 독자에게 꼬드를 상기시키고, 그 꼬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그에게 보여준다. 문학의 언어비평성은 이러한 점에 있다…. 우리는 글쓰기를 무슨 도구인양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도를 전달해주는 차량, 행동의 수단, 언어의 의복인양으로 그릇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156   저작자의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능기에 주목해야 한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능기를 넘어서서 능기가 암시하는 소기에게로 옮겨가려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굴복해서는 안될것이다.158   작가스러운 텍스트는 우리로 하여금 텍스트를 통해서 예정된 현실세계를 바라보게 하는것이 아니라 , 언어자체의 본성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이 작가스러운 텍스트는,독자가 읽어나가면서 저작자와 더불어 자신의 현재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위험은있으나 상쾌한 작업에 독자를 끌어 넣는가… 독자스러운 텍스트에서는 능기가 행진하는데 작가스러운 텍스트에서는 능기가 춤을 춘다.160   쾌락의 텍스트란것은… 향락의 텍스트는 결락감(缺落感) 을 안겨주는것인데, 독자의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심리적가정과 그의 취미, 가치관, 기억 등의 일관성을 (어쩌면따분하리만큼) 불쾌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여, 독자와 언어와의 곤계에 위기를 가져온다.162   능기를 분석하는 꼬드   1.     해석학적꼬드; 설화적인 꼬드, 수수께끼를 구성해 풀어가는 꼬드. 2.     의미소 또는 능기의 꼬드; 의미의 깜박임 반시적꼬드-伴示 3.     상징적꼬드; 群化나 윤곽구축, 대조(2,3은 분별이 불투명) 4.     행동꼬드(프로아이젝트); 연속적사실. 5.     문화적꼬드(대상지시적꼬드); 격언적, 집합적.   예술은 다같이 주어진 자료, 주어진 능기 (즉 텍스트, 화음의 연계)에서 파생된다고는해도, 그것들에서 주어져있지 않는 새로운 현실, 새로운 능기를 창조하고, 또 창의와미라는 량면에서 본래의것을 능가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러한 예술은, 소기의 예술이 아니고 능기의 예술이겠는데 진실로 현대적 이라고 말할수 있다. 170   관계 그자체가 의미를 생성하는것이지, 관계를 넘어서서 지향되고 있는 어떠한 현실의 세계도 있을수 없다. 그러기에 의미의 작용은 언어의 어떤 레벨에서 딴 레벨로의 ,한 언어에서 딴 언어로의 이동에 불과하며, 또 의미란것도 그러한 꼬드전환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171   장미다발은 능기이고 정열은 소기이다. 183   대시작용이라는것은 보통으로는 언어사용에 있어서 말해지고 있는것을 의미하는 일이고, 반시(伴示)작용은 말해지고 있는 것이외의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일이다. 선행되고있는 능기— 소기의 관계에서 생기는 기호가 , 더높은 단계의 기호의 능기로 되는경우에, 반시작용이 생겨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첫째 세계는 대시작용의 차원이고둘째는 … 반시작용의 차원이 되는것이다. 187-188   청각적기호는… 시간을 리용하고 …공간적기호는 공간을 점하고... 청각적이고 시간적인 기호는 그 성격상 상징적인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는데 … 시각적이고 공간적인기호는 그 성격에 있어서 도상(图象)적인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능기는 고도의 다양성을, 말하자면 애매성을 나타내고있다. … 기호론적으로 말하면애매성은 꼬드의 규칙을 어기는 양식이 라고 규정되여야 한다… 시는 일상적인 말씨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다 라는 야콤슨말에…200   파괴성은 –Umberto Eco (a) 상이한 레벨의 많은 메시들은 애매성을 지니고 조직화 된다  (b) 애매성은 정확한 설계에 따른다  (c) 어떠한 메시지에 있어서도 , 거기에 들어있는 정상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은 다같이, 다른 모든 메시지에서의 정상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에 대하여 맥락상의 압력을 느낀다 (d) 한체계의 규칙이 한 메시지에 의해서 깨뜨려지고 있는 방식은 다른 체계의 규칙이자신의 메시지에 의하여 깨뜨려지는 방식과 동일하다 그 결과로 생겨나온것은 미적개인어 예술작품에 독특한 특수 언어인데, 이것은 독자들에게 그 대시를 새로운 반시로 부단히 전화시키고 있는 우주적 질서—즉 확립되는순간에 자기 확립된 의미의 레벨을 넘어서 끝없이 움직인다—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미적메시지가 의미작용을 부단히 행하는 다차원의 체계이기에 , 의미작용이 한레벨에서 다른 레벨로 이행하고 있어서 그것의 대시가 일종의 무한 급수적인 양상에서 반시로 된다는것인 듯하다. 그 결과로서, 미적메시지에 대한 최종적인 꼬드풀이나 글읽기에는 켤코 도달하지 못하는 터이다. 왜냐하면 애매성의 하나하나가, 다른 레벨들에서  더욱 많은 같은 계통의 규칙위 반을 생성시키고 , 또 예술작품이 어떤 점에서든말하고있다고 생각되는것을 벗겨버리거나 다시 조립하거나 하도록 노상 우리를 재촉하기 때문이다.200-201   다양성- 애매성-규칙위반-장식바꾸기-다차원-다의미   독자는 자신이 새로 발견한 글쓰기나 사람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다르게 세계를 보게 되고 또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예술도현실의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 그것을 알고 그것에 대처하며 그것을 바꾸어나가는 방법인것이다.202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술작품이란 세계를 내다보는 창문이란 견해다. 이러한 예술가는 , 말과 이미지를 통해서 말과 이미지의 건너편에 있는것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런 류형의 예술가는 번역가라고 불리워질만 하다. 또 하나의 태도는, 예술이란 독립해서 존재하고있는것들로 성립되는 세계이다하는 견해다. 말, 그리고 말들과의 관계, 사고, 그리고  사고들의 비꼬임, 그것 들의 분산, 이러한것들이 예술의 내용인것이다. 예술이란것은 , 창문에 비해질수 있다손치더라도 .대강 그려진 창문에 불과 하다.204   책이라는것이 궁극적으로 묘사하고 반영하는것으로 보이는것은 , 현실의 물리적세계가 아니고 , 다른 차원으로 환원된 세계이다. 205   글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은 글이 만든다.  
89    글쓰기 0도 댓글:  조회:4264  추천:0  2015-02-19
글쓰기의 0도 롤랑 바르트   영어단어해석   도그마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 데크닉;데크니크, 수법, 기술 아우라;예술작품에서 흉내낼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 다른것과 구별되는 개성적분위기. 파롤(빠롤); 소쉬르의 언어, 말, 가변적개인적 랑그;체계속 언어, 구조적 사회적 메커니즘;어떤 대상의 작동원리나 구조 그래픽;그림이나 사진을 위주로 편집한 지면이나 인쇄 물 시퀀즈; 시간,장소, 사건으로 한개의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단위   사유는 어떤 무속에서 말을 배경으로 행복하게 솟아오르는것 같았는데, 이런 무로부터 출발한 글쓰기는 점진적인 응결의 모든 상태들을 통과했다. 그 다음으로 그 만듬의 대상, 끝으로 파괴의 대상이였던 글쓰기는 오늘날 마지막 변신인 부재에 도달하고 있는것이다. 10   언어체는 한시대의 모든 작가들에게 공통적인 규정들 및 습관들의 조직체이다. .. 언어체가 작가의 파롤에 어떤 형태를 주는것은 결코 아니며 자양을 주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실들의 추상적인 원과 같은것이며, 이원을 벗어날 때 비로소 밀도 있는 고독한 언어가 쌓여지기 때문이다. 15   글쓰기는 언어를 넘어선 지점에서 언제나 뿌리내리고 있으며, 하나의 선이 아니라 싹처럼 전개되고 , 어떤 본질을 나타낸다. 어떤 비밀의 위협인 그것은 반소통이며 위압갑을 준다 23   지식인의 이런 글쓰기들은 불안정하며 여전히 문학적이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무력하게 참여에 대한 강박에 의해서만 정치적이 기때문이다. 요컨대 그것들은 여전히 윤리적 글쓰기들이며, 그속 에서 필자(우리는 더이상 감히 작가라고 말할수 없다)의 의식은 집단적구원의 안심시키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30   중국전통을 보면 예술은 현실의 모방에 있는 완벽에 다름 아니다… 례컨대 나무로 만든 이 호두는 그것을 탄생시킨 예술을 나에게 환기시키겠다는 의도를 어떤 호두의 이미지와 함께 전달해서는 안된다. 소설적글쓰기가 수행하는것은 그 반대이다. 35   언어는 당연히 그자체의 파괴를 향하고있기 때문이다. 38   모든 시는 자신을 표현하는 그 방식이 어떠하든지 본질의 상태로 , 힘의 상태로 존재하고있는 잠재적산문의 장식적 암시적 혹은 과장된 방정식에 불과하다… 시적언어와 산문적 언어는 그것들의 타자성을 나타내는 기호들자체가 필요없을만큼 충분히 분리되여있다… 고전주의사유는 지속이 없으며 고전주의적시는 자신의 기교적배치에 필요한 사유만을 지닌다. 그 반대로 근대적시학에서 낱말들은 일종의 형식적연속체를 생산하며 이 연속체로부터 낱말들 없이는 불가능한 지적 혹은 감정적밀도가 조금씩 비롯된다. 따라서 말은 보다 정신적인 배태의 빽빽한 시간이며, 이 배태속에서 ‘사유’가 준비되고 낱말 들의 우연을 통해서 조금씩 자리잡힌다.따라서 의미작용의 무르익은 열매를 떨어뜨리게 되는 이와같은 언어적기회는 시적시간을 상정하는데,이 시간은 더 이상 제작의 시간이 아니라 어떤 기호와 어떤 의도의 만남이라는 가능한 모험의 시간이다. 근대적시는 언어의 모든 구조를 포착하는 차이를 통해서 고전주의적예술과 대립되며, 이 두시사이에는 동일한 사회학적의도이외에는 다른 공통점을 남기지 않는다.43   고전주의적연속체는 밀도가 동등한 요소들의 연속인데, 이 요소 들은 차안된것같은 개인적의미작용에 대한 모든 성향을 제거하고 동일한 감각적압력을 받지 않을수가 없다. 시적어휘 자체는 창안이 아니라 관례의 어휘이다. 그속에서 이미지들은 창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습을 통해 고립되지 않고 함께 있음으로써 특수하다. … 고전주의적인 기교적수식은 낱말들이 아니라 관계들의 기교적수식이다.그것은 창작의 기교가 아니라 표현의 기교이다. 44   낱말은 무한한 자유로 빛을 발하며 불확실하고 가능한 수많은 관계를 향하여 빛날준비를 하고있다. 고정된 관게가 무너짐 으로써 낱말은 어떤 수직적인 기회만을 지닌다.그것은 의미들, 반사들, 잔상들로 이루어진 어떤 총체속에 잠기는 덩어리이고 기둥이다. 요컨대 그것은 서있는 기로이다. 여기서 시적인 낱말은 직접적인 과거가 없는 행위이고, 그것에 결부된 모든 기원들의 반사들이 드리우는 두터운 그림자만을 제안하는 주변없는 해위이다… 각각의 시적인 낱말들은 예기치 않은 대상이고 , 언어의 모든 잠재적가능성들이  날아오르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특별한 호기심, 일종의 신성한 식도락을 가지고 생산되고 소비된다. 대문자 낱말의 이와같은 절대적갈망은 모든 근대적시에 공통적인데, 시적인 말을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말로 만든다. 그것은 구멍들과 빛들이 가득하고 , 지나치게 풍부함을 주는 기호들과 부재들로 가득한 담화를 확립하지만. 이 담화는 의도의 예상도 연속성도 없으며 따라서 언어의 사회적기능에 매우 대립되기때문에 어떤 불연속적인 말에 단순히 의존하기만 해도 모든 고유한 초자연들의 길이 열리게 된다. 46-47   근대적시는 언어의 관게를 파괴했고, 담화를 낱말들의 정거장으 로 규결시켰다. 이런 현상은 대자연에 대한 인식에서 전복을 함축한다. 새로운 시적언어의 불연속체는 덩어리들로서만 드러나는 어떤 불연속적 대자연을 확립한다. 기능들의 후퇴가 세계의 관계들에 대해 어둠을 드리우는 바로 그 시점에서 대상은 담화에서 높아진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근대적시는 객관적시가 된다. 그속에서 대자연은 고독하고 끔직한 대상들의 불연속체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잠재적관게들만 있기때 문이다. 아무도 그것들을 위해 어떤 특권적의미나 사용 혹은 서비스를 선택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것들에 어떤 계층체계를 감지하지 않고 아무도 그것들을 정신적행동이나 의도의 의미,작용, 다시말해 요컨대 어떤 애정의 의미작용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언어의 파렬은 절대적대상을 성립시킨다. 대자연은 수직들의 련속이 되고 대상은 그것의 모든 가능성들로 채워진채 갑자기 일어선다. 그것은 메워지지 않는 따라서 끔직한 하나의 세계를 구획할뿐이다. 낱말들 대상들은 관계가 없으며 그것들이 파렬하는 모든 폭력으로 치장되고 이 폭력의 순전히 기계적인 떨림은 다음 낱말에 기이하게 충격을 주지만 곧바로 소멸한다. 이런 시적낱말들은 인간들을 배제시킨다. 결국 근대성의 시적인본주의는 없다. 이처럼 수직적으로 서있는 담화는 공포로 가득한 담화이다. 다시말해 그것은 인간을 다른 인간들과 연관시키는게 아니라 하늘 지옥 불가침한것, 어린시절, 순수한 질료 등 대자연의 더없이 비 인간적인 이미지들과 련관시킨다. 이 시점에서 시적인 글쓰기에 대해 나갈수 있다는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윤리적중요성을 파괴해버리는 자률의 폭력을 지닌 언어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어적몸짓은 대자연을 수정하는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하나의 조물주와 같다. 그것은 의식의 태도가 아니라 관계의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최소한 근대적시인들, 자신들의 의도를 끝까지 밀고 가는 그 시인들의 언어이다. 그들은 시를 정신적인 실천, 령혼의 상태 혹은 립장의 계시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꿈꾸어진 언어의 찬란함과 신선함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시인들에게는 시적감 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것 역시 쓸데 없다. 48-49   고전주의 작가들 역시 형태의 문제를 알고있었겠지만, 론쟁은 글쓰기들의 다양성 및 의미와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언어의 구조와는 더욱 관련이 없었다. 다시 말해 어떤 설득목적에 따라 생각된 담화의 질서만이 문제가 되였다. 따라서 부르죠아적 글쓰기의 특이성이 대응하는것은 수사학의 다양성이였다. 54   모파상, 졸라, 도데의 그 글쓰기는 문학의 형식적기호들 (단순 과거 , 간접화법, 씌여지는 리듬)과 사실주의의   역시 형식적인 기호들(민중언어의 덧붙혀진 조각들, 거친 말, 방언 등)의 결합체이다. 62   공산주의작가들은 부르주아작가들이 오래전부터 단죄했던 부르 주아적글쓰기를 요지부동으로 지지하는 유일한자들이 된다.67   언어의 어떤 질서에의 모든 예속에서 해방된 백색의 글쓰기를 창도하는것이다. 70   의식적인 작가는 이제 조상 전래의 전능한 기호들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78   근대적예술전체가 그렇듯이, 문학적글쓰기는 역사의 소외와 역사의 꿈을 동시에 지니고있다. 필연성으로서 그것은 언어들의 찢김, 계급들의 찢김과 분리할수 없는 찢김을 증언한다, 자유로서 그것은 이런 찢김의 의식이고 그것을 뛰여넘고자 하는 노력자체이다. 그것은 그것자체의 고독에 대해 끊임없이 죄의식을 느끼고 있음에도, 여전히 낱말들의 행복에 탐식하는 상상력이며, 어떤 꿈꾸어진 언어를 향해 달려간다. 언어가 더이상 소외되지 않는 새로운 아담적인 세계의 완벽함을 일종의 리상적인 예견을 통해서 나타내는 신선함을 지닌 그런 언어를 향해. 글쓰기들의 다양화는 새로운 문학을 확립한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문학은 오로지 하나의 기획이 되기 위해서만 자신의 언어를 창안한다는 점때문이다. 이 기획은 문학이 언어의 유토피아가 되는것이다.79   작품의 불연속성과 무질서가 낳는 열매자체는 각각의 잠언이 이를테면 모든 잠언들의 원형이라는것이다. 유일하면서도 변주되는 하나의 구조가 있다… 성찰들은 담론의 단상들이고 , 구조와 광경이 없는 텍스트들이다. 84   잠언은 개별적인 덩어리들로 구성된 전체적인 불덩어리이다. 뼈대는 뚜렷한 모습이상으로 광경적이며- 그리고 뼈들은 단단한것들이다. 잠언의 모든 구조는 그것이 고정되여 있지 않다는 바로 그점에서 가시적이다. 85   수직성을 통해서만 질서가 잡히는 하나의 세계가 드러난 셈이다. 미덕들, 다시말해 외관들의 유일한 수준에서는 그 어떠한 구조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구조는 바로 명백한것과 감추어진것 사이의 진실관계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97   무질서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98   지극히 뛰여난 명철성에 지극히 대단한 비현실성이 흔히 대응한다.100   이미지들은 텍스트와 분리시킴으로써 는 대상의 하나의 자율적인 도상학에 진입하고 있었다. … 의 도판들은 대상을 제시하고 이 제시는 예시의 교육적목표에 보다 무상한 미학적 혹은 모상적 정당화를 덧붙이고 있다.105   일반적으로 대상의 생산은 이미지를 거의 신성하다할 단순성으로 이끈다… 창조의 간결한 엄겨겅, 거래의 화려함, 이것이 백과전서적 대상의 이중적체제이다. 109   기계의 도판, 곧 이미지는 … 우선 대상 혹은 작업의 분산된 요소들을 분석하고 열거하며, 그것들을 독자의 눈앞에 테이블위에 던지듯 던지고, 이어서 마무리하기 위해 생활장면, 다시 말해 삶의 두께를 덧붙이면서 그것들을 재구성한다. 116   당신이 재현하는것은 분석적정신의 여정이다. 세계는  당신에게 통상적인것, 분명한것(이것은 생활의 장면이다)을 제시한다. 백과전서파와 함께 당신은 점진적으로 원인들, 물질들, 원요소들로 내려가며 , 체험적인것으로부터 인과적인것으로 가고 , 대상을 지적으로만든다. 일직선적인 글쓰기와 이 점에서 반대되는 이미지의 특권은 그 어떠한 독서의 미로도 강제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론리적인 백커가 언제나 결핍되여 있기 때문이다.117   특이한 떨림은 무엇보다도 놀라움이다.118   백과전서적인 시적세게는 언제나 어떤 비현실주의로 규정된다. 따라서 객관성(‘현실’)의 엄격한 요구에 토대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 다른 무엇(타자는 모든 신비의 기호이다)이 끊임없이 현실을 넘어서는 시적작품이 되는것이 의 계획 이다. 121   객관적으로 이야기된 단순한 대상의 은유자체는 무한히 떨리는 대상이 된다. 122   이미지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으로 하여금 본질적으로 터무니없는 대상을 재구성하지 않을수 없게 만든다. 첫번째 자연이 일단 분해되고 나면 첫번째것처럼 형성된 또 다른 자연이 출현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계를 부순다는것은 불가능하다. 세계가 영원히 차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시선- 우리 시선- 이면 족하다  123   자신(을 쓴 샤토브리앙)의 마지막 그림속에 그 최상의 신비한 불완전성을 담아놓은 푸생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 불완전성은 완성된 예술보다 더 아름다운데, 시간의 떨림 이다. 추억은 글쓰기의 시작이고 차례로 글쓰기는 죽음의 시작 인것이다.(그것이 아무리 젊은때 시작된다 하더라도 말이다)128   은유      사실 파격구문은 거리의 시학으로 이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학적노력이 친화성들, 상응들, 유사성들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작가의 기능이 자연과 인간을 단 하나의 세게로 통합하는것이라 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공감각적인 기능이라고 부를 수있는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근본적인 문채인 은유 역시 분리의 강력한 도구로서 리해될수 있다. 특히 은유는 샤토브리앙의 경우 풍부한데 , 두성분뿐 아니라 비소통을 우리에게 표상한다. 마치 하나는 다른 하나에 대한 향수에 불과한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문자적요소들, 다시 말해 은유적인 방법을 통해 갑자기 덥석 물리고 , 쳐들려지며,떼어내지고, 분리된 뒤후 일화의 자연스러움에 내맡겨지는 문자적요소들을 제공한다. (그것은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준비도 없이 폭력적인 파격구문에 따라 억지로 도입된 새로운 말은 환원불가능한 어떤 다른 곳과 갑작스럽게  이 요소들을 대면시킨다. 샤토부리앙은 죽어가는 어떤 젊은 수도사의 미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캐시미르계곡에서 여행자를 위로하는 그 이름모를 새소리를 듣고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대목도 있다.“이곳에서 누가 태여났고, 누가 죽었으며, 누가 울었는가? 저 하늘 높이 있는 새들은 다른 고장들을 향해서 날아간다” 샤토브리앙의 작품에서 은유는 사물들을 접근시키는게 전혀 아니다. 그것은 세계들을 분리시킨다. 기교적으로 말하며 (왜냐하면 기교나 형의상학을 말하는것은 같은것이기때문이다), 오늘날 은유는 (시적자유에서와는 달리) 단 하나의 기표에만 관련되는게 아니라, 담화의 커다란 단위들에 확장되여 연사莲词 생명력자체에 참여하는것 같다. 언어학자들은 연사가 언제나 말과 가깝다고 말한다. 샤토브리앙의 커다란 은유는 사물들을 분활하는 여신인데, 언제나 향수적이다. 그것은 반향을 증식시키 는것처럼 나타나면서도 인간을 자연속에 불투명한것처럼 남겨두고있고 그에게 결국 직접적인 진정성의 기만을 면제해 준다. 문학은 분리시키고 일탈시킨다. 133-134   대립들이 엄격하도록하기 위해 그것들을 두개이상의 상이한 풍경이 아래로 쫙 펼쳐지는 산정상의 능선처럼 얇고 날카로우며 결정적인 일회식사건을 통해 분리시켜야 한다.   문학은 우연적인 진실을 영원한 개연성(필연성)으로 대체 한다135   근대의 작가는 아브라함이면서 아브라함이 아니다. 그는 도덕을 벗어나 있으면서 동시에 언어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환원불가능한것을 가지고 일반적인것을 만들어야 하고 , 언어의 도덕적인 일반성을 통해서 자기존재의 부도덕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문학이라는것은 이와같은 위험을 감수한 통과이다. 138   고유명사는… 보통명사의 모든 특징들을 부여받고 있지만 모든 투사적법칙을 넘어서 존재하고 기능할수 있기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유명사를 근거지로 하는 하이퍼의미성현상의 대가 –혹은 날쁜점-이다. 이 현상이 고유명사를 시적인 낱말과 매우 유사하게 만들고 있음은 물론이다.146   사실 고유명사는 촉매작용을 할수있다. 우리는 그것을 채울수 있고, 확장할수 있으며, 그것의 의소적골격이 지닌 사이들을 무한한 추가물들로 메울수 있다. 고유명사의 이와같은 의소적 확장은 다음과 같이 다른 방식으로 규정될수 있다. 각각의 이름은 우선 불연속적이고 고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출현하는 여러장면들을 포함하지만, 이것들은 련합하여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되기만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야기하는것은 일정수의 충만한 단위들을 환유적방식을 통해 련결시키는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48   고유명사는 흉내이고, 아니면 플라톤이 말했듯이 환영이다. (이것은 의구심이 들지만 맞다)150                         프로베르보다 훨씬 전에 작가는 문체의 혹독한 작업, 끊임없는 수정의 피곤함, 미미한 수확을 얻기위한 과도한 시간의 슬픈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표현했다… 플로베르에게는 문체는 절대적인 아픔이고, 무한한 아픔이며, 불필요한 아픔이다. 집필은 터무니없게 완만하다(‘일주일에 네페지’ ’한페지를 쓰는데 닷새’ ’두줄을 쓰는데 이틀’) 그것은 “삶과의 돌이킬수 없는 고별” 무자비한 자기 감금을 요구 한다.157   수직적축에는 대체 낱말들이(이것들은 정정들이나 낱말들이다) 기입된다. 수평적축에는 통합체들의 삭제들이나 첨가들 (이것 들은 개정들)이 기입된다.  
88    하이퍼시 도우미 4 댓글:  조회:4307  추천:0  2015-02-19
 결론   초현실주의가 시에 내장된 포에지의 강렬성을 최대한 증폭시키려는 조류라고 할 때, 꼭 초현실주의 시에서만 하이퍼텍스트적인 특성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 연구에서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문제설정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시가 하이퍼텍스트 환경에 대한 비판-이원의 시가 보여주었던-을 넘어 하이퍼텍스트와의 긍정적인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탐구는 시가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방안을 찾는 것보다는 시에 내장되어 있는 하이퍼한 특성을 찾아내고 이것이 하이퍼텍스트의 특성과 연결될 수 있는가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생각된다. 하이퍼텍스트가 시에 내장되어 있는 어떤 한 특성을 활성화하여 개발된 것이라고 한다면, 하이퍼텍스트라는 테크놀로지에 시를 예속시키려고 하는 하이퍼텍스트 시의 시도는 진보적이라기보다는 퇴보적이기에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는 시의 ‘하이퍼’적인 연상적 특성을 활성화시키지만, 한편으로 시의 다른 특성을 제거해버려 문학에 일종의 후퇴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에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적용하여 시작(詩作)하고 하는 ‘하이퍼시’의 시도도 역시 시에 내재해 있는 잠재성을 북돋는 것보다는 협소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하이퍼텍스트의 발상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연상 과정에 맞추고자 하는 정보 시스템을 창출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볼 때, 역시 인간의 정신을 여러 가지 억압과 속박에서 해방하고자 하는 시의 노력은 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렇다면 시와 하이퍼텍스트라는 테크놀로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학적 물음을 그 공통분모로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시와 하이퍼텍스트는 인간학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을 통해 그 관계가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문학과 하이퍼텍스트의 관계 문제는, 더욱 심도 깊은 연구를 과제로서 요청하고 있다고 하겠다.  
87    심상운 시평 <우체부> 댓글:  조회:4432  추천:0  2015-02-19
이 글은 월간 2008년 11월,12월 호에 발표된 문덕수 시인의 470행 장시 를 시의 표현형식면에서 고찰한 작품론입니다. 장시는 한국 현대시의 핵심을 관통하는 그의 시론과 함께 한국 현대시사에 남을 중요 작품이라고 평가됩니다.                    하이퍼텍스트의 기법과 무한 상상의 세계                     ------문덕수의 장시 『우체부』                                                  심 상 운       1. 독법讀法의 문제      21세기 대부분의 한국 현대시는 시의 언어구조가 어떤 주제(의미)를 향해 집중되어야 한다는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평론가들이나 전문적인 시연구가들도 시를 읽을 때 먼저 그 시가‘무엇’(내용 또는 주제)을 말하고 있는가에 80% 이상의 주의를 집중하고, 나머지 20%는 어떻게(형식)와 왜(창작의도)에 배분하는 것이 상례常例다. 이런 경향에서 볼 때, 장시「우체부」는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시難解詩에 속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시에는 통일되고 집중된 서사구조敍事構造에서 벗어난 시인의 의식意識 속 또는 무의식無意識 속의 사건들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단편적인 이미지나 불연속적不連續的인 스토리의 표출이 시 전체를 뒤덮고 있어서, 그곳에서 어떤 고정된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문덕수는 이 장시에서 논리적인 인과관계因果關係의 재래적 구성을 거부하고 텍스트와 텍스트의 불연속적인 연결과 단절斷絶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언어의 기능을 의미에 한정 시키지 않고 기표(시니피앙)의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 들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기법의 다양성은 새로운 독법을 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장시「우체부」를 이해할 수 있는 독법을 '하이퍼텍스트(Hypertext)적인 독법’이라고 나름대로 명명命名 해보았다.  하이퍼텍스트는 1965년 테드 넬슨(Ted Nelson)이 고안해 낸‘문서 연결의 방법’이다. “하이퍼텍스트는 문서 중간에 특정 키워드를 두고 문자나 그래픽 파일 등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만든 문서를 말한다. 즉, 일반 문서에 정지된 그림이나 움직이는 그림과 소리 그리고 음악 등을 삽입하고, 하나의 문서 내에 관련되는 여러 문서를 연결시켜서 읽는 사람이 쉽게 원하는 문서를 참조할 수 있게 만든 문서이다.”(엠파스 용어사전)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이퍼텍스트는 문서(텍스트)와 문서(텍스트)를 연결(link)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연결기능을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에서 문학에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문학(Hypertext literature)이다.  문덕수는 이런 텍스트의 연결기능을 현대시에 응용하여 상상과 상상, 현실과 비현실을 교직交織하는 방법으로 시를 제작해내려고 한다. 그것이 470행의 장시『우체부』에 들어있는 시의 기법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이 어떤 의미의 틀(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시인의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서 텍스트의 연결과 연결의 맥락을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 주제 찾기에 골몰하는 것보다 올바른 읽기가 된다. 이 시의 앞부분 을 읽어보자.     고향 뒷산 기슭에 옥으로 박힌 호수 그 /어머니의 양수(羊水)에서 너는 물장구쳤네/잉어 가물치와 놀고 물밤 먹고 자랐네/어느날 서낭당 나무에 몸 칭칭 묶어놓을 듯이/노끈 한 줄 날아와 네 어깨에 걸리고/고무줄처럼 늘어져도 나긋나긋 끊이지 않는/우체부 ‘가방’ 하나 달랑 달렸네/지구의 궤도 같은 빈 동그라미/달마상처럼 눈에 잘 띄게 또렷하네/물결 서로 부르며 몸 섞고 짙푸른/우발수(優渤水) 가에서 금와를 만난 유화/미쓰 고구려 유화(柳花)의 침실에 햇빛이 들어와 좇으니 태기 있어/닷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으니/네 가방 그 알만 하네/네 가방 그 알만큼 불룩거리네/나라를 밴 첫 어머니의 배만큼 둥글해지네/사문(沙門)의 ‘바랑’ 이네 ----에서        이 시에서 ‘너‘로 불리는 우체부 조셉룰랭의 탄생을 고향의 뒷동산 호수→어머니 양수→잉어가물치→서낭당 나무→노끈→우체부가방→빈 동그라미→달마상→우발수→유화→닷되들이만한 큰 알→사문의  바랑으로 연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시인의 의식의 흐름이나 자유연상 이외에 어떤 인과나 논리도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연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현실과 비현실을 초월한다. 여기서 ’초월한다(Hyper-)‘ 는 것은 이질적인 것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결합하고 자유롭게 새로운 세계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관념이 탄생되기 이전의 무의미의 공간이며 현대시에서 말하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세계다.  초현실주超現實主義의 시에서는 일상의 가치나 용도에서 해방된 오브제의 전위轉位를 말하고 있는데, 이 시의 소재들- 빈 동그라미, 달마상, 우발수, 유화, 닷되들이만한 큰 알, 사문의 바랑 등도 시인이 연상해낸 일종의 초현실적 오브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오브제들에 의해 독자들은 나름대로 자유로운 생각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어떤 독자가 우체부의 가방을 빈 동그라미에 연결한 것을 두고 그것을 불교의 공空과 연관시켜 관념을 추출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독자의 자유에 속하는 일로 허용된다. 그러나 우체부의 가방이 빈 동그라미에 연결되었다고 해서 불교의 공空에 고정시켜 버린다면 시인의 상상력은 거기에서 정지되고 이 시의 언어들은 굳어버린 화석 같은 관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열림과 닫힘의 이치를 이해하고 접근함으로써 이 시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 따라서 이 시를 읽는 기본적인 태도는 고정된 시각이나 굳어버린 관념의 틀에서 해방되어서 어린아이처럼 자유롭게 시인의 상상 속을 날아다니는 것이다.     2. 기법技法 들여다보기     가.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과 총체적인 현실 인식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은 단절과 단절의 결합이라고도 한다. T.S.엘리엇의「황무지」의 앞부분 에는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의 기법이 단절된 시의 공간을 형성한다. 잔인한 4월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스타른벨거제호의 여름소나기 이야기가 나오고 또 이어서 호프갈텐에서 커피 마신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아무 예고 없이 대공의 사촌 누이동생인성 싶은 어떤 소녀의 쫑알거림이 들리는 것이 그것이다. 한 연에 4개의 사건이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불연속적으로 집합되어 있다. 이런 기법을 조향趙鄕은 에서 외부와 내부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현실은 외부현실과 내부 현실이 한꺼번에 표현되었을 때, 비로소 ‘토텔리티totality’로서 진짜 현실이 파악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총체적 현실인식의 논리는 현대시에서 중요한 기법으로 진화된다. 「우체부」에는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을 통한 총체적 현실인식이 작품전체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에서는 신화와 역사 속의 인물들을 불연속적으로 연결하면서 권력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총체적인 시각에서 보여준다. 인간의 욕망을 투시하는 눈은 붓다의 눈이다. 그 부분을 정리하면, ㉠네 보석 눈에서 타오르는 불기둥㉡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쳐죽인 오이디푸스㉢어린 조카의 눈에서 수양(首陽)이 본 불의 칼㉣어린 아들 사도의 눈에서 영조가 본 불의 왕관㉤ 6,25전쟁을 일으킨 욕망의 불꽃㉥불의 막대기 불의 칼 불의 포탄 불의 핵....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런 이미지의 연결방법은 에서는 전쟁터의 현장을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지워버리고 하나의 현실로 통합한다.     쇠나팔이 울돌목을 휘감아 길게 세 번 울고 그 꼬리 허공으로/풀리니 발진 명령이 복창으로 전군에 하달되네/배의 노가 일제히 물위로 치솟다가 내려가고/이물에 덤비는 물결은 길길이 뛰며 달라들고/부딪친 물결이 깨어져 갈리며 소용돌이치네/노 한 자루에 네 사람이 붙어/서로 마주보며 몸을 숙이고 젖히네/온 몸이 북소리 한 번에 앞으로 밀고/또 한 번에 뒤로 당기네/노를 질타하는 북소리 다급해지니/빠른 뇌고(雷鼓)로 바뀌고/역류로 달라드는 물결과 북소리 틈새에서/격군들 몸은 으스러지네*//펜대를 쥐었던 연약한 손이/MI을 받들어총의 자세로 잡고/하낫 둘 하낫 둘 역사의 구령에 길들여지네/구슬땀이 염주알로 익어 한 겹 두 겹 모가지를 두르네/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한 시대가 그대로 시뻘건 용광로로 달구어지네 ------에서      임진왜란 당시 울돌목에서 조선수군과 왜군이 전투하는 장면에 이어 국군 신병훈련소에서 훈련하는 훈련병들의 모습이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이어진다. 이 연결로 인해 두 개의 장면이 하나가 되고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된다. 이것은 시인의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시간과 공간의 ‘토텔리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연결을 통한 총체적 현실인식은 에서 지구전체의 공간으로 확대되고 과거 현재 미래를 망라網羅한다.     룩소르의 오벨리스크 꼭대기에서 나일강을 굽어보다 내려온 망령/9.11테러로 죽은 해골들과 얼싸절싸 어울리네/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해골들이 날아오네/파르테논 신전 주춧돌에 눌리다가 빠져나온 야윈 혼령들이/돌계단을 내려와선 올리브 숲으로 얼른 숨거나/북쪽의 에렉트리온 신전 담을 뛰어넘어 사라지네/로봇들이 924고지의 어둔 계곡을 다 덮네/토끼처럼 재빠르게 개울을 뛰고/지렁이로 몸을 비틀며 꾸물꾸물 산비탈을 기어오르고/원숭이로 변해 날쌔게 떡갈나뭇가지로 뛰어 올라가 숨네/탱크를 장난감처럼 뒤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들 가을의 붉은 속치마를 두른 680고지 673고지 749고지/펀치볼을 두른 칼날의 능선바위도 오르내리네/지금 네 빈 가방에는 무엇이 울고 있느냐/파편이냐 보석이냐 두개골이냐 더그럭 덜그럭                                                                          ------에서      파르테논 신전과 9,11테러, 탱크를 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한 이미지들이다. ‘탱크를 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은 미래의 전쟁 상황을 상상한 동영상이다. 이 부분은 시공時空을 집합하고 하나로 통합한 것을 보여준다. 이 통합은 시인의 의식 속에서 해체의 과정을 거친(관념을 다 벗어버린) 통합이라는 데서 시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다음의 예시는 사상과 종교를 통합한 이미지다. 의 붓다와 예수의 등장이 그것을 선명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공(空)이 한 시대의 밑바닥을 다 읽은 듯/탕 치고 튕기네/풍선처럼 점점 부풀다간 탁구공만해지면서 저쪽으로 굴러가네/축구 선수들 발 끝에 붙어 맨체스터 밀라노까지 갔다 오네/ 핵버섯구름도/안으로 짓이겨 빻아서 가루로 다져 굴러가네(생략)/호주의 모랫바람에 숨구멍이 막히고/2004년던가 지중해 신화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바람둥이 파리스가 아프로디테 누나에게 준/탐스러운 사과도 맛보았지/(생략)수마트라 이체에서도 쓰촨에서도/그래도 공은 바닥을 치고 솟네/네 키를 넘고 북한산을 넘네/2천 7백미터 백두산 맑은 물을 한 번 돌고/예수께서 맨발로 걸어오신 갈릴리 호수 위를 굴러/8천 848 미터 에베레스트 정상/룸비니에서 본 싯다르타의 시선이 상기 머무는 저 바위에도                                                                                       --------- 에서      이 부분에서는 공空을 공으로 환원하여 기표연상記標聯想의 상상력이 펼치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파노라마가 지구전체를 휘감으며 웅장하게 전개된다. 공(空)→공→멘체스터→밀라노→호주의 모랫바람→지중해 신화의 숲→파리스가 이프로디테 누나에게 준 탐스런 사과→수마트라 이체→쓰쏸→북한산→백두산→예수께서 맨발로 걸어 온 갈리리 호수→에베레스트 정상→룸비니 싯다르타의 시선이 머문 바위.   이런 웅장한 상상의 공간은 우체부(시인)가 80년 동안 쌓아온 인식과 사유가 총체적인 이미지로 분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시의 캐릭터 우체부는 현실(현상)의 실상을 ‘불연속적인 공空의 변화’라는 렌즈를 통해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 텍스트와 텍스트의 불연속적인 결합 또는 병치倂置는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 총체적 현실인식의 세계는 20세기의 시와 21세기의 시를 가르는 경계가 된다.     나. 단선구조에서 해방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과 결합은 시의 구조를 다선구조多線構造로 만든다. 필자는 시론「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시문학」 2008년 10월호)에서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21세기한국의 시인들은 대부분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쓰고 있다. 시 속에 사건과 인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건과 인물들은 시 속에서 시인(시적화자)에게 종속되어서 독립된 시점을 나타내지 못하고 시의 대상(소재)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런 단일한 시점의 단선구조는 그림의 ‘원근법遠近法’과 같이 어떤 한 곳에 중심을 두고 하나의 시점에 대상을 집중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작가가 의도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그런 기법은 미술의 역사에서는 19세기적인 기법이다. 이 단일시점의 ‘원근법遠近法’을 깨뜨린 것이 20세기 초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가 일으킨 큐비즘Cubism 운동이다. 이 큐비즘Cubism이 현대미술 기법에서 상식이 된지는 이미 오래다.  그들은 “자연을 예술의 근거로 삼았지만 그 형태와 질감 및 색채와 공간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상을 철저히 분해하여 여러 측면을 동시에 묘사함으로써 사실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엠파스 백과사전) 피카소의 그림 은 큐비즘의 기법으로 비동시적인 것을 동시화 함으로써 2차원의 평면에 입체적立體的인 시각視角을 제시하고 있다.  이 큐비즘과 같은 기법의 시가 다시점多視點의 시다. 앞에서 말한 16세기 임진왜란 해전의 장면과 20세기 한국전쟁(6,25) 장면의 동시적 보여주기,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한 이미지들은-파르테논 신전과 9,11테러, 탱크를 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 등의 장면- 모두 미술의 원근법 같은 인과적 관계로 형성된 일반적인 서사구조를 깨뜨린 다시점의 시각이 펼치는 비동시적인 사건의 동시화 기법이다. 이와 함께「우체부」에서 보여주는 다시점의 구조는 다양한 화자話者의 목소리를 통해서 흥미로운 보여주기showing로 표현된다. 이것이「우체부」에 들어있는 다시점의 다선구조다.   이 시에는 제1의 화자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와 행동을 전하는 우체부, 주인공 우체부를 소개하고 그의 행동을 응시하는 제2의 화자, 그리고 세상을 전지적 시점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제3의 화자, 전쟁터나 야전병원 등 현장의 인물들(제4의 화자), 펀pun의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제5의 화자) 등 다양한 화자들이 등장하고 각자 독자적인 모습으로 다른 환경과 시점에서 존재하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는 독자들을 하나의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상의 무한한 변화變化와 조화調和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래서 이 시를 공연公演하기 위해 오페라의 대본으로 각색脚色할 경우, 무대舞臺에는 불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전쟁의 사실적인 장면들과 함께 중심 캐릭터 우체부와 그 우체부를 응시하고 있는 인물, 신적인 존재, 신화속의 인물, 역사 속의 인물, 현장의 인물, 펀 속의 인물들이 무대 위에서 질퍽하게 빚어내는 형이상학形而上學과 형이하학形而下學의 파노라마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리라고 생각된다. 이 시속에서는 그런 다양한 화자들의 목소리(이야기)가 시행詩行의 변형變形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면,     우체부 가방은 다시 ‘개(犬)고개’를 넘었지 가전리(加田里)로 가는 구불구불한 산길에 솟은 ‘개고개’ 왼편에는 저 멀리 흰 거품을 뿜으며 산골을 굽이굽이 적시는 소양강 상류가 보이고 그 앞의 나즈막한 구릉 기슭에 제1소대 제2소대 제3소대 순으로 진을 쳤네 박격포 12문을 방렬(放列)했네 호를 깊이 파, 더 깊이 머리를 내어 멀리 지평선까지 투시할 수 있도록 호를 2층으로 파라구 포탄이 날아들면 자라처럼 머리를 옴츠려넣고 몸을 옹크려야 탄약도 충분히 준비해 중대장의 이런 다급한 소리 들었지                                    --------에서    이 장면에는 우체부(제1화자)의 이야기와 “호를 깊이 파, 더 깊이” 파라는 중대장(제4의 화자)의 목소리가 시행의 변형으로 표현됨으로써 시점이 두 개로 구분된다. 그리고 화자도 우체부와 중대장으로 나누어진다. 시점과 화자의 구분은 사실의 표현을 정확하게 해 줄뿐 아니라, 우체부의 행동과 사고思考와 관찰觀察의 눈을 더 자유롭게 해주는 효과를 드러낸다.     병사들은 뭣인가를 중얼거리며 죽어갔네 으으이 윽, 말하기 전의 시니피앙 말이 끝난 뒤의 소리를 내지르며 죽어갔네 한숨 중얼거림 신음 절규 호곡 어머니 불효자 용서하세요 어머니 만수무강하세요 어머니 ‘빽’하고 죽습니다 불룩거리는 네 가방 속은 무슨 소리지 더그럭 덜그럭 쟁그랑 딱 딱 왁자그르 와글북적 미미발휼(浘浘浡潏) 우체부 조셉 룰랭의 금단추 벗는 소리 --------에서      이 장면에는 제1화자인 우체부와 죽어가는 병사(제4의 화자)와 우체부를 응시하는 제2의 화자가 등장한다. 우체부와 병사들은 전쟁터라는 현장에 있는데, “불룩거리는 네 가방 속은 무슨 소리지”라고 묻는 제2의 화자는 그들과는 먼 거리에서 엉뚱한 질문과 상상을 한다. 이 제2화자의 존재는 우체부를 시의 캐릭터로 내세운 시인의 무의식無意識 속에 존재하는 타자他者 즉 제3의 무형無形의 인물 같기도 하다.     룩소르의 오벨리스크 꼭대기에서 나일강을 굽어보다 내려온 망령 9.11테러로 죽은 해골들과 얼싸절싸 어울리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해골들이 날아오네 파르테논 신전 주춧돌에 눌리다가 빠져나온 야윈 혼령들이 돌계단을 내려와선 올리브 숲으로 얼른 숨거나 북쪽의 에렉트리온 신전 담을 뛰어넘어 사라지네 로봇들이 924고지의 어둔 계곡을 다 덮네 토끼처럼 재빠르게 개울을 뛰고 -------- 에서      이 장면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전지적이고 거시적인 제3의 시점 즉 신적神的인 존재의 시점이 들어 있다. 화자가 바뀌는데 따라 시점이 거시화巨視化(확대) 또는 미시화微視化(축소)되면서 다이내믹한 극적효과劇的效果를 만들어 낸다. 이런 다양한 시점의 포용과 표출이 이 시를 형성하는 다선구조의 특성이다.     다. 사건을 생생하게 감지하게 하는 사실적인 표현기법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시적 상상의 밑바탕이 된다. 이 시에서는 상상의 비탕이 되는 사실의 생생한 인식과 표현이 생동감과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 주는 힘이 발산하는 현장감의 효과다. 형이상학을 앞세운 시에서는 담을 수 없는 살아 움직이는 정서이기도 하다. 에서 보여주는 6,25 전투장면의 현장은 독자들을 목격자目擊者처럼 만든다. 그리고 정밀한 수학적 언어들은 냉정하고 치밀한 관찰이라는 사물시事物詩physical poetry의 기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사실성은 독자들에게 사실의 생생한 감각을 감지하게 하고 체험하게 할뿐 아니라 시의 기반을 튼튼하게 한다. 의 대구大邱 제1육군병원의 현장묘사는「우체부」가 관념의 시가 아닌 실제 체험의 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발사준비 편각(偏角) 1635 고각(高角) 777 장약 20호!/1번 포수가 편각과 고각을 맞추고/2번 포수가 각도를 올렸다 내렸다 조정하고/3번 포수가 장약을 맡고/4번 포수가 포탄을 들어 포구(砲口)에 집어넣으니/포강(砲腔)에 떨어져 바닥의 격침에 닿는 순간 쾅! 발사되네                                                                              ------에서     포성을 맞으며 새벽을 떠난 후송 열차는 느릿느릿/한밤의 대구(大邱) 제1육군병원이네, 들것은 다시 트럭으로 옮겨지고/닭도 울지 않는 달구벌에 내려졌네/전선에서 몰려든 부상병들이 누더기처럼 광장을 다 덮었네/하늘의 은하수처럼 빽빽하게 쏟아부었네/만발한 한겨울의 꽃밭이네/그때 네 인장은 저 별이 간직하고 있었을까/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추위가 추위에 눌려 지층(地層)으로 켜켜이 쌓인 달구벌의 겨울밤은 차라리 원시적 아픔이었네 눈물과 신음이 얼어붙는 북극 도시였네/끊어지는 숨소리 헐떡거림 끙끙거림 울부짖음/아아 아야야 윽윽 음음 응응 비명의 격류/다리 잘린이 눈 잃은이 부러진 척추/잘린 발목 부여잡은이 팔 없는 어깨죽지/노호 탄식 통곡 읍소 절규……                                                                           ---------에서      1930년대의 시인 김기림金起林은 그의 『시론詩論』32쪽 에서 “主張을 품은 모든 命題는 事實의 檢證에 비추어서 그 眞假를 결정하는 것을 眼目으로 한다. 論理 自體는 權利가 없다. 그것이 事實-실로 事實과 相應하지 않을 때는 거짓이라는 烙印을 얻어맞는다. 科學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理論物理學이다. 形而上學이 科學 앞에서 드디어 그 地位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면서 현대시인의 과학적 태도를 요망하고 있다.     라. 펀(pun)   「우체부」에서 느닷없이 튀어 나오는 펀(pun)은 의미를 따지기 전에 흥미를 돋워준다. 이 펀(pun)을 시의 맥락과 연결시키는 독자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 시에서 그 자체의 독립적인존재성을 갖는다. 펀(pun)은 시의 내용을 풍성하게 하고 활력을 불어 넣는다. 1950년대 악극단공연樂劇團 公演에서 막과 막 사이의 시간에 재담꾼들이 나와서 관객을 웃기곤 했는데, 시에서의 펀(pun)은 그 방법의 전위轉位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펀(pun)의 기법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 하이브리드의 기능을 한다. 하이브리드는 이질적인 것의 결합을 통한 시의 영역확대의 기법이다. 이 시에서도 펀(pun)은 강파르고 심각한 전쟁 상황 속에서 인간적인 훈훈한 마음의 꽃을 피우는 역할을 하고 웃음을 공급한다.     기사 양반 저짝으로 쪼깐 돌아서 갑시다/어찮게 그런다요 버스가 머 택신지 아요/아따 늙은이 물팍이 어링께 그라재/쓰잘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저번 착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그 기사 미쳤는갑소// 이러히 그들은 연애하네/가끔씩 닭이 보이지 않으면/소가 목 빼고 두리번거리고요/소가 한 구석에 엎디어 있으면 닭은 소막까지/가서 갸우뚱갸우뚱하다가 뒤뚱뒤뚱 돌아나오지요/이러히 소와 닭은 연애하네//저녁 바람이 이렇게 드세니 동백꽃도 뺨따구 맞듯 다 저버리겠어 진 꽃잎은 땅에서도 서성거리지 못해 바다로 쓸려 가버리겠고 동백꽃은 왜 선혈처럼 그렇게 붉고 붉은지…/그러면 보자 그 여자분 열 아홉 살 영감님 나이 수물 한 살에 만나가꼬 용초도에 동백꽃 필 때 동백나무 숲에서 오 년마다 미아이하기로 하고 마 헤어졌다는 그런 말씀 같으신데… 참말로 세상에 그런 기구한 곡절도 있다니 소매자락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라 말도 있드키 시상 오래 살고 볼 일임더/이러히 그들의 연애 동백꽃도 붉네                                                                                   -------- 에서     굴뚝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 트나 가지 한 개요/두더지는 황하(黃河)를 탐하나 쬐그마한 제 배 채울 뿐이네/누가 투덜거렸나 쯧쯧                                                                                      ----------에서     마. 언어유희   언어를 구성하는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를 분리하여 기표만 이용하는 언어유희는 경박한 말장난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이 시에서 언어유희는 펀(pun)과 같이 시의 윤활유 역할을 하고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 기여한다.     불룩거리는 네 가방 속은 무슨 소리지/더그럭 덜그럭 쟁그랑 딱 딱/왁자그르 와글북적 미미발휼(浘浘浡潏)/우체부 조셉 룰랭의 금단추 벗는 소리/겉보리 찐쌀 된장 미역이 한데 섞이는 소리/논두렁에서 참 함지를 이고 가는 처녀의 속치마 소리/요강에 조용히 앉아 잠이 든 여인 요조숙녀/죽치고 마주 앉아 고스톱하는 친구 죽마고우/施發勞馬 始發奴無色旗/캥캥 캥 대굴대굴 팽이처럼 돌면서/찍 찍 찍 찌르르 윙윙윙 울면서 몰려오는 두개골들/발끝에서 어깨까지 차도르(chādor)를 들러쓴 주검들/피에타의 숨소리 피에타의 맥박 소리/깨어지는 사금파리가 아니라/불발탄과 파편들이 뼈다귀를 녹이는 소리네/편지와 엽서는 모두 불탔네                                                --------에서     전사한 할아버지 애비 손자의 두개골들이/고지(高地)를 왕릉처럼 덮네 공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네/어깨에 멘 황갈색 가방에 부딪쳐 튀어나가/저쪽 불탄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서 멎네/솔제니친이 삽 들고 헐떡이다 남겨놓은 굴라그(Gulag)/으슥한 흥안령 기슭을 돌아 밤의 두만강을 건넌/굴라그 구라게 굴라그 구라게/갓 속에서 촉수의 쇠그물 늘여친 クラゲ 굴라그                                                                            -------- 에서     에서 ‘施發勞馬 始發奴無色旗 ’는 한자의 뜻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소리(시니피앙)이다. 욕설을 한자로 음사하여 표현함으로써 한자의 뜻과 욕의 뜻이 겹치는 이 중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에서는 전쟁이 휩쓸고 간 고지에서 해골들이 굴러다니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굴러다니네→굴라그(Gulag)→구라게 굴라그 구라게→クラゲ 굴라그,  라는 소리의 유사성이 만들어내는 연상의 음성언어로 시상을 전개하는 재미난 시니피앙의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솔제니친이 삽 들고 헐떡이다 남겨놓은 굴라그(Gulag)”에서는 소련의 강제수용소 굴라그에서 노역을 하던 솔제니친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전쟁과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게도 한다. 이런 엉뚱하고 파생적派生的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시니피앙의 연상 방법은 하이퍼텍스트의 기표 건너뛰기 기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3. 나가는 글      문덕수는 『문덕수 시 99선』(오늘의 시인총서 2004, 7,5 선)의 후기 시론 에서 “시의 방법이란 무엇일까? 기술技術이나 기교만이 아닐 것이다. 언어를 매만지고 다루는 솜씨도 방법이지만, 시의 방법은 그러한 범주를 뛰어넘는 넓이와 깊이를 갖는다. 말하자면 의도한 시를 완성하기 위한 모든 의식적 절차나 수단의 총칭이다. 시의 개념이나 대상에 대한 반성은 물론이요, 재료의 선택․배열․결합, 정서와 이미지와 언어 등의 모든 문제를 포함한다.”고 했다. 이 말은 그의 장시「우체부」에 그대로 적용된다.  필자는「우체부」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감상하고 비평하면서 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 앞에 선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어가야 할지 난감하였고, 능력의 부족을 절감했다. 그래서 ‘재료의 선택․배열․결합, 정서와 이미지와 언어 등의 모든 문제’ 중 다른 많은 미확인지대未確認地帶는 남겨두고 말할 수 있는 부분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이 하이퍼텍스트 시의 ‘독법문제’와 ‘기법 들여다보기’에서 확인한 것을 소제목으로 붙인 ‘가.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과 총체적인 현실 인식’, ‘나. 단선구조에서 해방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 ‘다. 사건을 생생하게 감지하게 하는 사실적인 표현기법’, ‘ 라. 펀Pun’. ‘마. 언어유희’ 등이다. 따라서 이 시의 주제파악 등 세세한 내용문제와 T.S.엘리엇의「황무지」와의 비교는 차후로 미루어졌다.  시를 창작하는 동기는 시인마다 다르고 그것이 시의 기법이나 내용에 미치는 영향도 시인마다 같지 않다. 이 시는 시인의 전쟁체험이 창작동기와 결부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체험이 장시「우체부」에 끼친 영향은 20% 미만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시를 시인 문덕수의 사적연보私的年譜에 결부하여 해부하고 의미를 추출하고 비평하는 것은 이 시가 안고 있는 현대적 기법의 자유롭고 광활한 이미지의 세계에 전혀 이가 맞지 않는 언어행위라고 생각된다.  470행의 이 장시에는 붓다, 예수, 공자 등 인류의 성인이 등장하고 그리스 신화를 비롯하여 창세이래創世以來 지구상에서 일어난 숱한 사건들이 망라되고, 현대인의 인권과 관련된 중요한 인물이 바다 속의 물고기처럼 편린片鱗을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용솟음치는 전쟁의 광기狂氣와 그 광기의 와중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선량한 민초民草들이 살아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로봇이 만들어 낼 미래의 세계도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어떤 관념에도 기울지 않고 그런 것들이 생동하는 현장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가상현실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시속의 화자(시인)가 이 시에서 아무런 메시지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 시의 중심 캐릭터 우체부는 둥근 가방을 메고 지금도 한반도를 벗어나서 지구 또는 지구 밖의 어느 곳을 떠돌고 있을 것 같다. 이 시속에는 20세기 한반도의 시공에 중심을 두고 지구전체의 시공 속을 여행하다가, 제3의 공간- 4차원의 미래로 떠나는 우체부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공空의 가방이 있다. 그 둥근 알 같은 가방 속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새로운 정보와 이야기들이 들어있을 것 같다.  따라서 인간의 실체적인 존재의 모습과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와 역사, 인류의 사상이 시인의 언어(기법) 속에 ‘토텔리티totality’의 형태로 담겨있는 현대적 기법(하이퍼텍스트)의 장시「우체부」는 1930년대 김기림金起林의「기상도氣象圖」와 함께 우리 현대시사現代詩史에 문제작으로 남으리라고 생각된다.      
86    멍텅구리의 시학 댓글:  조회:4436  추천:0  2015-02-19
21세기 현대시를 주역의 원리로 풀어서 현대시의 시론을 구축한 안수환의 시론은 동양철학을 현대화 한다는 면에서 매우 주목되는 시론이다. 독자들이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기 바라면서 블로그에 올린다.    생각 안에서, 생각을 넘어 ---‘멍텅구리의’ 시학       안 수 환(시인 문학평론가)     1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면, 그는 멍텅구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멍텅구리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시를 쓰되 그는 멍텅구리의 생각을 가지고 시를 쓰기 때문이다. 생각은 말을 낳고, 말은 뜻을 품는다. 움직이는 방향으로 이것들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생각 (즉, 의意) → 말 (즉, 사辭) → 뜻 (즉, 지志)’으로 흔들리는 것들이다. 생각은 모습 (즉, 상象)에 붙어 있는 것. 모습은 실유實有로서의 근본과 여줄가리 root and branch (즉, 본말)를 가리키는 것. 모습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생각 또한 이리저리 흔들린다. 시인은 모습을 바라볼 뿐, 말과 혹은 뜻 따위에는 무심한 반응을 내보인다. 먼 옛날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 “시를 말하는 자는 글 (즉, 문文) 때문에 말을 해치지 않고, 말 (즉, 사辭) 때문에 뜻 (즉, 지志)을 해치지 않는다. 생각 (즉, 의意)을 가지고 뜻 (즉, 지志)을 맞이한다. 이것이 뜻을 얻게 되는 것” (설시자 불이문해사, 불이사해지 이의역지. 시위득지 說詩者 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 以意逆志. 是爲得志..『맹자孟子』「만장장구⦁상 萬章章句⦁上」제4장). 맹자의 주장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는 생각보다는 말 (즉, 사辭)을 귀히 여기고 말보다는 뜻 (즉, 지志)을 귀히 여겨가며 글 (즉, 문文) 혹은 시를 바라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말을 거꾸로 들어보면, 시는 ‘뜻 (즉, 지志) → 말 (즉, 사辭) → 생각 (즉, 의意)’의 방향으로 흘러넘치는 문맥이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생각이 불붙고, 생각이 꺼지는 모습을 바라보자. 어떤 생각은 하늘의 모습 (즉, 천위天爲)에 닿아 있고, 어떤 생각은 지푸라기 (즉, 초개草芥)에 닿아 있다. 맹자의 어투로 말해보자면, 대인의 눈빛은 천위를 꿈꾸고, 필부의 눈매는 부귀를 꿈꾼다. 작은 것이 물러가고 큰 것이 돌아오면, 그것을 『주역周易』에서는 지천태地天泰 라고 불렀다. 혹은 큰 것이 물러가고 작은 것이 돌아오면, 그것을 『주역周易』에서는 천지비天地否 라고 불렀다. 태泰와 비否의 차이. 대인과 소인의 차이.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 생각은 멀고, 뜻은 가깝다. 비유해서 말한다면, 촛불이 타오를 때는 심지가 불붙고 촉농燭膿이 흘러내리는 것. 심지는 남고 촉농은 소멸한다. 뜻 (즉, 심지 혹은 등심燈心)은 남고, 생각은 소멸한다. 심지와 촉농의 불가분의 관계. 촉농의 소멸을 통해 촛불은 빛나는 것. 빛이 본질인 것. 생각의 소멸을 통해 뜻은 빛나는 것. 빛으로 말미암은 뜻. 뜻은 분명할수록 좋지만, 생각은 아득할수록 좋다. 뜻은 하나이지만, 생각은 일만이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인 것.   2 그런데 먼 옛날 공자는 맹자와는 다르게 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 “글 (즉, 서書)은 말 (즉, 언言)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생각(즉, 의意)을 다하지 못한다” (자왈, 서부진언, 언부진의, 子曰, 書不盡言, 言不盡意.『주역周易』「계사상전繫辭上傳」제12장). 글과 말의 모양은 생각의 깊이에 닿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이는 생각의 모습 (즉, 상象)이 크고도 큰 것이어서 혹은 중하고도 중한것이어서 말과 뜻으로는 그 생각을 다 퍼담을 수 없다는 뜻이리라. 쉽게 말하자면, 생각이란 최우선적으로 모습을 세우며 가벼운 듯 흘러가는 물결이라는 뜻이리라. 나는 방금 ‘생각은 모습이다’는 말을 했다. 이를 거꾸로 표현하자면, 모습이 사라지게 될 때 그때는 즉시 생각이 소멸된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모습의 소멸은 생각의 소멸. 생각의 소멸은 시의 소멸. 아니다. 생각의 소멸은 시의 탄생인 것. 시는 생각으로 씌어지는 동시에 그 생각을 지워버리는 행위인 것. 나는 이 물결을 바라보면서, 그 움직임의 모습을 생각의 생각 [즉, (생각)2 ]이라고 달리 명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생각이 생각을 지우는 힘. 큰 생각인 것. 이를 이해하고나면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더욱 쉽게 귀에 들어온다 ; “성인은 모습을 세움으로써 생각을 다 보여주고, 괘卦를 지어줌으로써 실질과 거짓을 다 보여주며, 말을 걸어둠으로써 그 말을 다하고, 변하고 통하는 것을 가지고 이로움을 다 보여주며,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춤으로써 신명을 다하느니라’ (성인입상이진의, 설괘 이진정위, 계사언이진기언, 변이통지이진리, 고지무지이진신 聖人立象以盡意, 設卦 以盡情僞, 繫辭焉以盡其言 變而通之以盡利 鼓之舞之以盡神.『주역周易』「계사상전繫辭上傳」제12장). ‘모습을 세움으로써 생각을 다 보여준다 (입상이진의 立象以盡意)’는 이 말씀을 나는 주목한다. 이것이 곧 생각의 생각 [즉, (생각)2 ]인 것. 생각이 열리게 되면, 뜻은 저절로 그 생각을 좇아 달려가는 것. 생각의 생각 [즉, (생각)2 ]. 그것은 생각 안에서, 생각을 넘는 멍텅구리의 생각인 것. 시인 심상운은 다음과 같은 시「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기억」을 쓴다 ;   폭염 한낮 산간도로 위에 말라붙어 있는 그 끈 같은 것은   숲에서 나와 끈적이는 아스팔트 도로를 횡단하기 위해 스르르 미끄러지던 뱀 한 마리가 한 순간 화물차 바퀴에 깔려 남겨 놓은 생의 흔적일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도로 한가운데 한 오리 길게 늘어져 있던 그 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기억을 쉽게 지울 수 없다   그 푸르스름한 끈이 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내다보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여도 !   시인은 끝내 ‘그 푸르스름한 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해석을 극도로 자제하려고 한다. 다만, “한 오리 길게 늘어져 있던 그 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기억을 / 쉽게 지울 수 없다” 라고만 고백할 따름이다. ‘한 오리 길게’의 그 ‘오리’마저도 길고 가늘게 오린 조각 strip이라는 실질로서의 수치가 아닌 아무런 뜻도 없는 발어사發語辭로 읽히고 있을 정도다. 발화의 양화量化 quantification를 벗어던진 이 시의 화법으로 볼 때 낱말 (즉, 명사)의 단계화 differentiation of types가 지워지는 순간이다. 생각의 지움이 진행되는 순간이다. 시인은 말한다 ; “그 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기억을 / 쉽게 지울 수 없다” “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내다보는 나와는 /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여도 !” 이 발화의 의미 내용에 대한 사족 한 마디. ‘푸르스름한 끈’의 소재는 ‘산간도로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의 기억 속’이라는 것. 생명에 대한 경외감의 활로는 비로소 그렇게 열리게 되었던 것. 좋은 시는 주장하지 않는다.   3 나는 앞에서 잠깐 낱말 (즉, 명사)의 단계화라는 말을 썼다. 생각의 지움을 나타낼 때는 꼭 낱말의 단계화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와 같은 표현을 썼던 것. 명사와 동사의 관계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자. 명사는 정신이든 사물이든 그것들의 표상表象을 두고 하는 말. 동사는 그 표상들의 움직임을 두고 하는 말. 명사는 명사의 명사인 것 [즉, (명사)2 ]. 표상의 이름인 것. 동사는 동사의 동사인 것 [즉, (동사)2 ]. 표상의 움직임인 것. 명사가 이름인 반면, 동사는 관련인 것. 명사는 ‘지칭되는’ 몸이며, 동사는 ‘주장 assertion 하는’ 힘이다. 시인과 사물 (즉, 대상) 사이에 있는 주장이 소거消去된 다음에는 바로 이 순간 멍텅구리 생각이 드러난다. 낱말 (즉, 명사)의 질화質化 qualification가 나타날 때는 그 명사가 동사와 제휴할 때다. 말문이 열리고 말문이 닫힐 때 낱말의 질화는 출렁거린다. 시인의 생각은 이 낱말의 질화를 따라 출렁거린다. 그의 생각은 너무나도 깊은 것이어서 어떤 의중 (즉, 지志)으로도 그의 말을 규정할 수 없다. 멍텅구리 생각이 그의 의중을 대신하는 것.『주역周易』에서 말하는 태극太極 (즉, 20=1), 양의兩儀 (즉, 21=2), 사상四象 (즉, 22=4), 팔괘八卦 (즉, 23=8), 육십사괘六十四卦 (즉, 23×2=26=64) 등의 진행은 바로 이 생각의 진전도進展圖인 것. 1, 2, 4, 8은 1의 태극太極과 2의 음陰과 양陽, 4의 태양太陽 소음小陰 소양小陽 태음太陰, 그리고 8의 건乾,⋅태兌⋅리离⋅진辰⋅손巽⋅감坎⋅간艮⋅곤坤의 문자文字로 드러난다.  ‘ - 과 
85    현대시의 낯설게 하기 댓글:  조회:4675  추천:1  2015-02-19
선(禪)과 현대시(現代詩)의 낯설게 하기                                                                                            심 상 운     현대시에서 ‘낯설게 하기’는 일상적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인식에 충격을 가하고 시의 표현을 새롭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1916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의 시어 연구회와 모스크바 언어학회에서 평범한 언어를 예술적 언어로 변모시키기 위한 기법으로 제시한 형식주의(Formalism)에서 출발하였지만, 표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인식능력을 신장하여 철학적 형이상학적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선승(禪僧) 같은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고 새로운 관점과 감성의 언어로 생명의 세계를 보여주게 된다.   잠시 그는 땅에서 솟구쳐 오른 암흑의 빈 탑이었다. 날개를 잃은 학이었다. 어느 날 그는 발 밑을 들석들석하더니 죽죽 몸을 펴 뻗었다.   불룩하다간 꺼지고 또 불룩하는 잉태와 유산流産의 흥분에서 조용히 육신肉身의 붕괴를 다스렸다   앓이하는 무수한 핏줄처럼 마구 금 긋고 가는 전쟁이 있었다. 그물처럼 에워싸는 고뇌의 균열이 있었다.   그의 허리에 푸른 지문指紋을 찍는 계절 세월의 회색 주름살 그는 무엇일까? 조용한 탄생을 위하여 스스로의 열도熱度를 싸느랗게 지우고만 있는 그는 무엇일까?   -----------문덕수 전문     말 오양간 냄새가 나는 이에스 크리스도의 머리에서 빛난 기적처럼 너는 전쟁의 계단을 포복하는 군단의 불면이 겹싸여 탄피와 같이 굳어진 나의 눈시울 속에 살았다.   어느 날 아침 장미와 인간을 위한 하늘처럼 별처럼 노오랗게 새파랗고 또 무슨 여러 가지 샛말간 색깔의 과실들과,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들과 바다처럼 부드러운 나래처럼 음악이여 ------------------전봉건 1,2연   두 편의 인용시는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50년대 전후의식(戰後意識)의 시다. 문덕수(文德守)의「항아리 1」은 항아리를 ‘암흑의 빈 탑’ ‘날개를 잃은 학’으로 비유하여 일상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이미지는 전후(戰後)의 폐허 속에서 생존하며 희망을 열어가는 시인자신의 존재성과 연결되면서 ‘잉태와 유산’, ‘고뇌의 균열’을 거친 “조용한 탄생”의 원형으로 항아리의 이미지를 승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잉태와 탄생이라는 항아리가 안고 있는 원형적인 의미와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갈망의 그림자가 내면적으로 결합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전봉건(全鳳建)의「음악」은 전쟁 속에서도 잃지 않은 시인의 내면의식의 세계를 이질감을 주는 언어로 표현하면서 ‘전쟁과 평화’라는 대립적 상황을 통하여 인간이 지향하여야 할 것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두 시의 공통점은 시인의 시선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적 효과는 일상성과 타성에 젖은 인식에 충격을 가한다.   선(禪)의 첫걸음도 일상성과 타성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선에서는 본질적으로 진리를 표현하는 도구로서 언어를 인정하지 않는다. 선승들은 입을 여는 순간에 진리는 사라져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불입문자(不立文字)라고 했으며, 진리를 전하는 방법으로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을 때,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그 뜻을 깨달아 미소를 지었다는 데서 유래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라는 말을 통해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진리를 전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묵언(黙言)을 수행의 한 과정으로 실천한다. 그러나 선에서도 깨우침을 전하는 방법으로 언어를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언어를 떠난 방법이 너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선승들이 전하는 오도송(悟道頌)은 고도의 언어로 표현된 선시(禪詩)가 된다.   孤輪彼照江山靜 自笑一聲天地驚   달빛 비친 강산 고요한데 내 스스로 웃으며 터뜨리는 한 소리에 하늘과 땅이 놀란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에서   이 시에서 달을 고륜(孤輪)이라고 ‘무한 허공에 떠 있는 외로운 바퀴’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시의 낯설게 하기와 상통하는 면이 보인다. 선문답(禪問答)도 ‘일상적인 타성의 인식을 깨뜨리는 언어’를 도구로 삼고 있다.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라는 말로 유명한 운문(雲門) 스님에게 하루는 제자가 물었다. “무엇이 ‘참나’입니까?” 운문이 대답했다.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는 자이지”   어느 날 동산(洞山) 스님에게 제자가 질문을 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동산스님이 대답했다.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이 선문답에는 제자에게 깨우침을 주려는 스승의 마음이 들어있다. 그러나 선은 지식의 전수 같은 가르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정신의 경지이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고 가리키는 것’으로 방법을 삼는다. 그래서 제자가 스스로 체험을 통해서 마음 속 자명종의 울림을 듣게 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선문답에는 설명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설명의 생략’은 선문답의 답을 화두(話頭)로 만든다. 제자들은 선정(禪定)을 통해서 그 화두의 의미를 탐구하고 해결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설명의 생략’은 시의 구조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설명이 들어가는 순간에 시는 사라지고 산문(散文)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문답이 퍼포먼스(performance) 같은 행위와 결합될 때 그 구조가 다양해지고 상상력의 폭이 확장된다.     조주(趙州) 스님은 어느 날 스승 남전(南泉)에게서 제자들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끊어버리기 위해 고양이를 칼로 두 동강이 낸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다 들은 뒤 아무 대꾸도 않고 신발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남전이 말했다. “그때 만일 자네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려주었을 텐데”. -오경웅(吳經熊) 지음 유시화 옮김 『禪의 황금시대』에서 발췌정리     신발을 머리에 이고 가는 조주의 행동은 몇 가지의 의미를 유추하게 한다. 구도자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뒤바뀐 가치관과 인식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신발을 머리 위에 이고 걸어가는 것은 그들의 시시비비는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행위라는 것. 진리에는 머리와 발의 경계가 없다는 것.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첨부하면 우스꽝스런 행동으로 스승의 마음을 풀어드리려고 했다는 것 등이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일상에서의 일탈(逸脫)이라는 유희성(遊戱性)과도 연결된다.   다음 글은 김석 시인의「조향의 초현실주 문학의 이론과 기법」에서 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글이다. 이 글은 선의 언어와 초현실주의 시(언어유희)의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선의 언어 속에는 ‘깨달음의 자명종’이 숨겨있는 데 반해서 언어유희에는 ‘논리적 사고로부터의 해방’이 들어있다. 둘의 공통점은 상투적인 언어로부터의 도피(逃避)이다.     마치 눈가림한 사람이 숲 속에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에 부딪히는 것처럼, 指導도 방향도 없이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에로, 의식이 흐르는 대로 생각을 맡겨두고 쓰는 일이다. 동양식으로는 東問西答式 시의 놀이이다. 이런 면에서 선시나 偈頌과 맥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는 억눌림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위한 ‘정신적 사냥’으로 동문서답식 시의 기교인데 반하여 동양은 법통을 잇기 위한 ‘진리파지’의 큰 주제 아래 그 한 방법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래 보기의 시는 조향 선생님이 서울의 某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실험했던 단어와 단어 사이, 시행과 시행 사이에 의식의 단층을 만들었던 합작 시로 『아시체』의 한 시 놀이다.   B__태양을 향한 한 마리 山羊의 J__프로이드가 씹어 먹는 날개란 말야,   K__그 사람은 언제 떠났지?   S__철도 연변의 들국화야,   J__여름 얼굴 위에 흐르는 지렁이는?   K__고양이 생일이었어,   B__연못 옆에 있는 것은 뭐지?   J__전등 속에 든 베레모 같은데,(이하 생략)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시적 순간과 형이상학적 순간』에서 그가 인식한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詩)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하나의 짤막한 시편(詩篇) 속에서 시는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과 존재와 사물을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시가 단순히 삶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시는 삶만 못한 것이다. 시는 오로지 삶을 정지시키고 기쁨과 아픔의 변증법을 즉석에서 삶으로써만 삶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그 때서야 시는 가장 산만하고 가장 이완된 존재가 그의 통일을 획득하는 근원적 동시성(同時性)의 원칙이 된다. 다른 모든 형이상학적 경험들은 끝없는 서론(緖論)으로 준비되는 것인 데 비하여 시는 소개말과 원칙과 방법론과 증거 따위를 거부한다. 시는 의혹을 거부한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침묵의 서두(序頭) 정도이다. 우선 시는 속이 텅 빈 말을 두드리면서, 독자의 영혼 속에 사고(思考)나 중얼거림의 어떤 계속성을 남기게 될지도 모르는 산문(散文)과 서투른 멜로디를 침묵시킨다. 그러고 나서 진공(眞空)의 울림을 거쳐서 시는 자기의 순간을 만들어 낸다.”   선도 순간의 언어로 표현된다. 대상에 대한 직관적인 총체적 인식이 한 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 선의 언어다. 직관적이고 총체적 인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시와 선은 같다. 그리고 일상에 대한 전도(顚倒)와 비약(飛躍)이라는 점에서도 상통한다. 따라서 시가 ‘대상에 대한 해방(解放)’을 추구한다면 선은 구도자 자신의 ‘해탈(解脫)’을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이라는 말이 기존의 관념이나 인식방법에서 풀려나는 것을 의미하는 데 비해 해탈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유무(有無)를 초월하는 제 3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에서 “진공(眞空)의 울림”은 미당(未堂) 서정주(徐定柱)의 시「동천冬天」같이 일상이나 기존관념으로부터의 해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을 초월하는 시의 궁극을 표현한 말로 인식된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의「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는 실체와 실질적 관계가 없는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가 만들어 낸 ‘이미지의 언어’다. 이런 언어를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erdinand de Saussure 스위스 제네바 1857-1913)의『일반 언어학 강의』를 근거로 ‘기호’라고도 한다. 이 시속에는 미당이 일생동안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한 ‘사랑의 진실’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면 그 진실은 선의 진리와 상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시는 조주 스님이 신발을 머리에 이고 걸어 간 행위에 대입할 수 있을까? 현대시의 낯설게 하기와 선의 관계를 통해서 그 해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84    시와 생명 댓글:  조회:4329  추천:0  2015-02-19
시와 생명                                                                                     심 상 운       그리움, 사랑, 이별, 고향, 어머니, 아버지, 당신(임), 만남, 세월 등의 단어를 벌려놓고 보면 한국현대시에서 서정시가 위치하고 있는 영역을 조감(鳥瞰)해 볼 수 있을 거 같다. 이 단어들은 이성(理性)보다는 감성(感性) 쪽에 더 가까운 단어들로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추출한 단어들과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의 서정시에는 이성이 자리 잡기 힘들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사유(思惟)의 시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시가 주관적 정서의 배출구가 되고 대부분의 시인은 새로운 세계를 기피하는 안일(安逸)에 젖게 된다. 그러나 그런 소재(素材)의 시들도 사물(事物)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실제경험이 시어와 정밀하게 교직(交織)될 때, 시의 차원(次元)이 상승되고 독자들에게 신선한 감각과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시가 되기도 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향수」1,2연   이 시에서는 “지즐대는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등의 세밀하고 감각적 표현이 신선한 생동감(生動感)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반복적인 구절이 만들어내는 음악적 리듬을 음미하게 한다. 정지용 시인은 1930년대의 시단에서 주관적 관념, 영탄적인 서정의 언어와 대립되는 객관적이고 사실(사물)적인 이미지의 시를 보여줌으로써 ‘서정시의 혁신(革新)’을 몰고 온 모더니즘의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에는 사물과 정서와 언어를 냉정하게 이어주는 이성이 숨어있다.   이성보다 감성과 정서를 중시하는 경향의 시풍은 18세기~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浪漫主義)와 같은 계열로 인식된다. 대표시인 W.워즈워스는『서정민요시집(抒情民謠集)』에서 “시란 힘찬 감정의 발로이며, 고요함속에서 회상되는 정서에 그 기원을 둔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엄격한 규율이나 규칙, 정형화되고 교훈적인 고전주의(古典主義)의 틀을 깨고 인간의 상상력(想像力)과 감정을 최고조로 높이는데 시의 중심을 두었으며, 무의식적(無意識的) 정신작용, 꿈과 환상(幻想), 초자연적 세계, 순수하고 원시적인 세계관을 크게 강조했다. 그리고 자연발생적이고 진지하고 강렬한 시는 기본적으로 창조적 상상력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서 발췌정리)   지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어디 있으랴: 그냥 지나쳐가는 자의 영혼은 무디어라 이처럼 감동적인 장관을 두고: 이 도시는 지금 옷을 입고 있구나 아침의 아름다움을; 말없이, 드러내놓고, 선박, 탑, 원형지붕, 극장, 교회들이 누워 있다 들판과 하늘을 향해, 모두들 매연 없는 대기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태양은 일찍이 이보다 더 아름답게 첫 햇살로, 골짜기, 바위 혹은 언덕을 비춘 적 없고; 나는 이같이 깊은 정적을 보지도 느낀 적도 없나니! 강물은 제멋에 유유히 흘러간다; 오 하나님! 집들마저 잠든 듯 하네요; 그리고 저 힘찬 심장은 고요히 누워 있고! ----- 워즈워드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김철교 번역   이 시는 시인의 객관적인 관찰(觀察)이 보이지만 감각적인 언어의 이미지보다는 낭만적이고 개인적인 감성과 영탄이 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문명과 대립되는 원시적 자연을 찬양하는 시인의 정신이 빛을 내고 있는 점은 한국의 서정시와는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그것은 낭만적인 시에도 깊은 사유가 들어 있으며 그 사유는 개인적인 범주를 벗어나서 인간의 본성과 일치되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 현대시에서 1937년 동인지『생리(生理)』를 중심으로 서정주, 오장환, 정지용, 김영랑 유치환 등이 ‘생명파(生命派)“란 시의 한 그룹을 형성한 것은 높은 가치를 갖는다. 그들은 일상적인 서정에서 탈피하여 가장 근원적이고 원시적인 인간 생명의 탐구라는 새로운 시세계를 열고 시적가치를 삶 자체의 여러 현상에 두고 있다. 그 중에도 서정주의 시 「문둥이」,「화사花蛇」가 대표작으로 꼽히는데,「문둥이」에는 문둥이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강한 욕망을,「화사」에서는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성적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들은 생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탈색되지 않고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아래에 인용한 김규복의 시「설거지」,「청소부」도 개인적 서정에서 벗어나서 생명의식을 시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시라는 점에서 새롭게 조명된다.   잘 가거라, 너희들 꽁치뼈 명태살 젖은 상추도 갈 때는 탁 트인 큰길로 함께 가거라   살 주고 피 주고 머리 잘리고 마지막 남은 뼈로 어깨동무해   잘 가거라, 너희들 주인집 등불 꺼진 다 저녁에 밑둥 잘려 바스라져 흐느적해도   뜯겨진 옆구리를 서로 껴안고 마지막 남겨진 붉은 눈으로 엉키고 안겨서 함께 흘러라   손 없고 입 없는 그 몸으로 지하에서 지하로 끝없이 가서   인도지나 반도 그 어느 해안가 같이 살 따순 마을 이룰 때까지 서로 부벼 다정히, 부디 너희들. --------김규복 「설거지」전문   나는 바퀴벌레의 아버지   기인 아파트 맨 밑구멍 쓰레기 하치장 문을 열고 자루마다에 폐기더미를 담을 때   다정한 그 놈들 내 어깨와 등을 타고 올라와 입 맞출 때   수백 마리 바퀴벌레로 옷 입은 나는 흡사 갑옷과 투구를 쓴 위대한 병사   가득가득 자루에 담아놓고 잠시 도시락을 풀으면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 흰밥을 까맣게 덮으며 달려드는 그 놈들   묵중한 기중기를 앞세워 내가 쓰레기 정글 속을 빠져나갈 때에도   끈질긴 한 놈 장화 속을 파고드네   그래, 같이 가자   이다음 이다음에 땅속에 함께 들어박힐 때까지   우리 껴안고 썩는다면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리 ------김규복 「청소부」전문   나는 1991년 이 시편들이 들어있는 김규복 시인의 시집 『줄 타는 사내』의 을 쓰면서 이 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설거지」는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으며 삶의 본질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독자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사실적인 서술이 갖는 객관성과 냉혹성이 시인의 뜨거운 모성애에 의해 용광로의 쇳물처럼 녹아 감동적인 울림을 전해 주고 있다. 흡사 지장보살의 말씀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다. 끝 연에 들어 있는 이 시인의 모성적인 마음이 이 시를 얼마나 따뜻한 생명의 시로 만들어 주고 있는지 거듭거듭 음미하게 한다.「청소부」에서도 이러한 시인의 마음이 짜릿하게 감전되어 온다. 미물 중에서도 사람의 미움을 받는 바퀴벌레를 노래하는 이 시인은 첫 연에서 “나는/ 바퀴벌레의 아버지”라고 선언하고 “그래, 같이 가자// 이다음에/ 땅속에 함께 들어가 박힐 때까지// 우리 껴안고 썩는다면/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리”라고 끝 연을 맺고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중생이요, 중생의 마음은 모두 같으며 그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생명의 보편성과 평등성을 바탕으로 한 생명존중의 근본 마음으로 대상을 관조하고 그것을 절절한 감동의 언어로 승화시킬 줄 아는 이 시인의 건강한 정신세계의 깊이를 독자들은 이 시를 통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마음으로 가늠하리라고 생각한다.   라고 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그때 나의 해설이 빗나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생각, 저 새와 나무와 짐승들과 사람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생각, 이러한 생각을 넓히고 깊게 하면 생각의 폭이 무한해지고 세상이 새로 보이게 된다.   십여 년 전 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인터뷰기사를 보고 스크랩을 하였다. SBS 자연다큐 전문 PD 윤동혁씨가 한 말이다. 그는 생명의 소중함을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저절로 나온다면서, “결국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로 모아져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가 핵심이죠. 관심을 기울이고 집요하게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나오게 됩니다.” 이 말은 시에도 해당됨은 물론이다.   다음 시는 『세계명작 동요동시집』(계몽사 1977년 4월 9일)에 실려 있는 영국 시인 월터 드라 메어의「살려주」라는 시다. 일상생활 속에서 특히 주부들이 늘 경험하는 주방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충격적인 울림을 준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얼마나 뜨거운 가슴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잘 전달해 주고 있는가를 거듭 생각해보았다.   에그 에그 어서 빨리 와 봐요 기름에 튀기는 빵 속에서 생선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애 유리처럼 들여다보이는 기름 속에서 주둥이를 불쑥 내밀고 “살려주” 그랬어 울상이 되어서 나좀 살려 달랬어   그러면서 보글보글보글 기름 속으로 갈아 앉았어 ----월터 드라 메어「살려주」전문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에게 묻더라도 생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생명은 사람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다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의 우월성을 내세워서 인간의 생명만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인간중심주의(humanism)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현대철학자들 사이에서 현명한 인간이란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자연과 문명을 공존시키는데 실패한 인간이라는 의미로 추락하고, 공생인간(共生人間)이라는 호머심비우스(Homo symbious)가 거론되고 있는 것도 인류의 생존을 위한 사고(思考)의 전환을 의미한다.   끝으로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본다. 좋은 시는 우리들의 생각을 열어주는 시, 고정관념을 허물게 해주는 신선한 상상과 감각이 들어 있는 시, 깊은 사유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시. 그리고 독자들의 마음속에 생명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을 심어주는 시라고 결론을 지어본다. 이런 시들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영속적인 힘을 스스로 안고 있으며, 그 자체가 약동하는 정신의 에너지가 되어 있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