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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을 낳은 땅 ― 남평진
김응룡
길림성 화룡시에서 동남으로 시원히 트인 포장도로를 따라 50키로메터쯤 달리면 두만강이 막아서고 그 기슭에 진소재지 남평이라는 전설도 많은 마을이 나타난다. 그 마을에서 두만강을 따라 다시 서남쪽으로 10키로메터 더 가면 호곡령이 나지고 그 령마루에 우리 조선민족의 저명한 시인 리욱선생의 시비가 우뚝 서있다.
두만강의 맑은 물은 그밑으로부터 깎아지른듯한 절벽들을 용케도 굽이굽이 감돌아 동으로 흐르는데 그 기슭에 남평진의 남평, 길지, 류신, 룡연 등 마을들이 잔별처럼 널려있다.
봄이면 연분홍 진달래, 하얀 살구꽃이 산벼랑이 무너질듯 피여나고 그 사이사이에 짙푸른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솟아있다. 그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는 그대로 맑은 두만강에 거꾸로 비껴들어 황홀한 선경을 이룬다. 또 겨울이면 련련 산발에 백설이 뒤덮여 마치도 줄달음치는 흰코끼리떼와 방불한데 그우로 찬바람을 헤가르며 독수리들이 오연히 나래친다.
그래서 1968년, 남평진 문학도들을 취재하러 왔던 연변일보 기자 리서량선생은 《산천경개가 이렇듯 아름다우니 어찌 시인들이 나타나지 않겠는가!》고 감개를 터뜨렸다.
길지촌 송전툰은 길지 본 마을에서 류신으로 넘어가는 고개밑에 있는 12호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이 바로 작가 허씨 삼형제인 허충남, 허봉남, 허두남과 필자 김응룡이 자라던 마을이다. 향소재지와 13리 떨어진 이 외진 마을에서 허충남형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소학교때부터 문학서적들을 손에 들어오는대로 탐독했다. 그의 영향을 받아 봉남군과 나, 두남군도 훈민정음을 익히자 그가 읽던 책들을 읽었다. 독서에 재미를 붙인 우리는 신발을 살 돈마저 없어 맨발로 학교를 오가면서도 콩이삭을 주어 팔고 물고기를 잡아 팔아 보고싶은 책들을 사서 읽었다. 어린 나이에 그처럼 닥치는대로 많은 책을 읽었으니 어찌 형상사유가 트지 않겠는가!
충남형은 초중시절에 소년보에 우화시를 발표했고 봉남군은 소학교 5학년때 소년보 1면에 《눈 오는 날 아침》이라는 작문을 발표했으며 필자는 초중 2학년때 연변방송국 소년아동프로에서 벌린 글짓기콩클에 《참외에 깃든 이야기》란 글을 투고했는데 입선되였다. 어린 시절에 덜 익은 글이나마 지면에 발표됨으로 해서 우리의 어린 가슴에는 작가로 될 꿈이 자리를 틀기 시작했다.
나와 봉남군은 소학교로부터 고중까지 줄곧 함께 자랐다. 우리는 고중시절에 집에서 달마다 겨우겨우 보내주는 식비를 절약하여 조선에서 체계적으로 출판하는 세계문학선집( 당시 이 책들은 상해 우구서점을 통해 샀음.)을 사서 통독하며 좀 성숙된 마음가짐으로 작가로 될 꿈을 무르익혔다. 그런데 1966년, 고중졸업을 앞두고 우리는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을 맞았다. 당시 《네가지 낡은것》을 짓부시는 가운데 마음이 약한 필자는 굶으며 돈을 절약해서 산 책들을 다 페지로 팔아 난생처음 구두 한컬레를 샀다. (룡관군, 봉남군이 장가를 들자 필자도 장가들고싶은 욕망으로 처녀들의 환심을 사려고.)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날, 친구의 잔치에 참가하여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집으로 가려고 구두를 찾으니 뉘집 개가 뒤간옆에 물어다놓고 물어뜯고있었다. 두마대나 되는 명작들이 페지로 팔리고 그 돈으로 산 구두가 개에게 뜯기고 나의 문학에 대한 꿈도 박산이 났다.
1968년이라고 생각된다. 《연변일보》 《해란강》부간이 복간된지 얼마 안되여 우리 친구 최룡관(허씨 삼형제와 내가 살던 마을에서 5리가량 떨어져 살았는데 같은 남평중학을 다녔다. 하여 늘 우리와 함께 우정을 키웠고 문학을 담론했음.)군의 서정시가 《연변일보》에 대문짝같이 실리였다. 고중시절에는 정치를 전공하겠노라고 하던 그가 서정시를 발표하자 우리는 놀람과 더불어 그 폭풍취우속에서도 문학은 죽지 않았다는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최룡관군의 시가 한달에도 둬번씩 발표되자 봉남군과 나도 시쓰기에 달라붙었다. 워낙 우리들가운데서 문학소양이 한차원 높았던 봉남군은 인차 예술성이 높은 시들을 륙속 발표하고 이어서 단편소설도 가담가담 발표했다. 정보에 눈이 어두웠던 필자는 1968년 12월에야 첫시를 발표했다. 한 향에서 갑자기 시를 쓰는 젊은이 셋이 나타나자 연변의 신문계, 예술계(당시는 아직 연변문예도 복간되지 않고 출판사도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음.) 등에서 우리 남평진에 자주 사람을 파견하여 작품들을 계약하군 했다.
1974년, 필자는 향문화소 소장으로 임명되자 우리 향에 문학도들이 많은 특점을 살려 담이 크게도 8절지 8면이나 되는 문학신문을 꾸려 한달에 한두번씩 발간하면서 주위에 문학도들을 묶어세웠다. 필자는 이 문학신문을 잘 꾸리기 위해 이미 성숙된 허씨 삼형제와 최룡관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심혈을 몰부었다. 얼마 안지나 남평의 신창수, 길지의 박상국, 김영철 등 젊은 신진들이 신문지상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대오도 그만큼 늘어났다. 남평진 시인들의 시가 연변일보 부간에 자주 나가자 우리 고장에 지식청년으로 내려온 젊은이들도 문학에 흥취를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룡연대대의 지식청년 최홍일(현재 우리 조선족문단의 중견소설가)도 이에 끼여들어 시를 썼다. 우리는 최룡관군의 집에서 물고기국을 끓여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을 담론했고 필자의 집에서 두부를 해놓고 땀을 벌벌 흘리며 먹어대면서 주에서 온 작가, 시인들이 들려주는 문학창작형세를 듣기도 했고 봉남군의 뒤고방에서 맥주병을 거꾸로 들고 마시며 시합평을 했다.
당시 《연변일보》 《해란강》부간의 김경석선생은 여러번 우리 향에 와서 특집을 꾸렸고 《연변문예》가 복간되자 리상각선생도 찾아와 우리 향의 특집을 꾸렸다. 또 주, 현급의 이런 저런 문학창작학습반이 자주 우리 향에서 개최되였는데 그 영향으로 현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 치벽한 시골향에 문학창작열기가 화끈하게 일어났다.
1975년 가을의 어느날,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 주임 허해룡선생과 시인 김성휘선생이 필자를 찾아와 공사(당시는 향을 공사라 했음.)의 시집을 꾸릴 타산인데 이 덕화공사(남평진의 본명)에 시인들이 모여있기에 찾아왔다고 했다. 그들은 필자를 보고 책임지고 원고를 모집해달라고 했다. 하여 필자는 중소학교 어문교원들을 비롯해서 약 35명가량의 문학애호가들을 동원하여 시를 쓰게 하고 골간 시인들을 모아 합평을 거듭하여 마침내 《공사의 아침》이라 표제를 단 시집을 출판사에 교부했는데 1976년 3월에 출판, 발행되였다.
필자의 기억에는 이 시집이 연변에서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기전에 출판된 유일한 한권의 시집이라고 생각된다.
1978년 5월, 필자가 연변인민방송국에 전근되여온후 필자의 친근한 시우들인 허충남, 최룡관, 허봉남은 남평중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고 문학창작을 계속하는 한편 어린 문학도들의 양성에 계속 심혈을 쏟아부었다. 그들의 제자들가운데서 조선족문단의 중견시인 김영건, 박장길이 혜성같이 나타나 남평진시단에 더욱 이채를 돋구었다. 뿐만아니라 허동혁, 김승종(시집, 시작노트 4권 출판) 등 청년문학도들도 시를 발표했다.
그후 재능 있는 남평진의 시인, 작가들은 륙속 연변의 각 신문, 출판, 방송, 문예계통에 전근되였는데 최룡관은 《연변일보》 문예부 주임, 작가협회 부주석으로 되였고 허봉남(중국작가협회 회원)은 《연변일보》 문예부 부주임을 걸쳐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 부주임을 지냈으며 허두남은 연길시문화국 창작원으로, 박장길은 연길시예술단 창작원으로 사업했다. 최홍일은 《천지》월간사,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문학편집을 하면서 소설창작에 정력을 쏟았는데 장편소설 《눈물 젖은 두만강》을 비롯해 많은 중,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우리 조선족문단 거물의 하나로 되였다. 이들은 이미 퇴직 혹은 2선에 물러났다. 시인 신창수는 외국으로 나가고 아직 젊은 김영건(중국청년작가대표대회 대표)은 우리 중국조선족시단의 중견으로 활약하는 한편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문예부 주임으로서 연변텔레비죤문화의 대들보를 떠메고 맹활약하고있다. 박장길은 현재 재직에서 그 정열과 재능을 뽐내고있다. 그 세월의 흐름속에 허충남은 동화, 우화집을, 최룡관은 몇권의 시집을, 허봉남은 여러 권의 아동문학작품집과 장편소설을, 허두남은 몇권의 우화집을, 김영건은 몇권의 시집을, 박장길은 시집과 가곡테프를, 필자는 시집과 두편의 장편실화소설 및 많은 산문작품을, 최홍일은 장편소설집, 중, 단편소설집 등을 펴냈다.
세월은 몇십년이 흘러갔다. 그 세월속에 한 고향땅에 태를 묻은 우리 남평진 출신 문인들은 각기 다른 사업터에서 사업하고 창작하면서 자기의 스찔을 발전시켰는데 사회환경과 탐구령역의 다름에 따라 작품개성이 서로 다르고 작품을 보는 시야도 많이 달랐다. 그러나 언제 한번 얼굴을 붉히며 다툰적이 없었다. 늘 자기 창작견해, 주장을 떠들어대면서 목에 피대를 세우기도 했으나 통일을 이룰수 없을 때면 허허 웃어버리고 다시 술잔을 기울이군 했다. 누구의 작품집이 출간되거나 누가 상을 받을 때면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자호감을 느꼈다.
필자와 룡관군, 봉남군이 차비가 없어 120리 길을 걸어 현소재지의 고중을 다니던 그 고개 높던 산길은 이미 포장도로로 되였다. 풍경이 그림 같아도 찾는 사람이라곤 없던 국가급 풍경구― 선경대에 지금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있으며 남평통상구를 통해 조선으로 오가는 객과 차량들이 실북나들듯하고있다. 헌데 지금 학교가 줄어들고 학생래원이 고갈된 시인들의 옛 고향―남평진에서는 더는 시인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산천경개가 그림 같다 한들 노래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빛날수 있으랴!
오로지 저명한 시인 리욱선생만이 홀로 고집스럽게 그 바람 세찬 호곡령에서 오늘도 《할아버지의 마음》을 읊고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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