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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정―우리 문학의 비옥한 풍토
한원국
룡정이 중국조선족사회 근대문화의 발상지이며 해방전 재만조선인문학의 중심지였다는것은 세인이 공인하는 사실이다.
일찍 1930년대에 문학동인단체 《북향회》가 발족되였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문학지 《북향》이 둥지를 틀었던 보금자리다. 저명한 녀류작가 강경애를 위시하여 리주복, 김유훈, 천청송, 안수길 등 작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광범한 교사, 학생, 의사 등 문학도들이 망라된 《북향》은 소설, 시가, 희곡, 문학리론분야에서 큰 성과들을 취득함으로써 당시 간도문단에서 겨레문학의 홰불을 높이 추켜들어 국내외에 커다란 영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해방이 되자 더우기 연길시가 자치주의 수부로 됨에 따라 연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연길로 옮겨졌다.
룡정에서 문학활동을 벌리던 《북향》의 동인들도 대부분 조선으로 가고 김창걸, 채택룡, 서헌, 김유훈 등 문학가들도 연길로 전근되였다.
룡정은 사람들이 이사짐을 싣고 떠나가버린 빈집마냥 터만 남았었다. 하지만 룡정사람들은 빈 터전에서 다시 털고 일어났다. 말하자면 해방전부터 깊이 뿌리가 박혔던 재만조선인 문학근거지의 맥락을 이어 우리 문학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는것이다. 필자가 룡정에서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연길현문화관(지금의 룡정시문화관) 문학보도원으로 연길현문련 비서장으로 사업했던 시기만하더라도 룡정은 우리 문학의 비옥한 풍토였다.
그때 룡정시에는 벌써 작가군이 형성되여있었고 곳곳마다 동인회, 동인잡지가 있었으며 윤광주, 윤금철, 황상박, 윤태삼, 김병기, 한원국, 오흥진, 황장석, 정국초, 강호혁, 김재권 등 작가들이 문학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당시 연변작가협회 회원들은 주로 연길시에 있는 주 직속기관, 학교들에 밀집해있었고 다른 현, 시들에는 작가협회 회원이 거의 없었지만 룡정시에만은 연변작가협회 회원 총수의 7분의 1을 차지하는 회원들이 활동하고있었는바 이것은 괄목할만한 일이라겠다.
당시 룡정시에 속한 향, 진에는 거의 모두 동인회형식으로 된 문학창작조가 있었고 서글픈대로 인쇄물은 아니지만 부정기 문학간행물 프린트본도 갖고있었다.
룡정시에는 윤광주, 윤금철, 황장석, 박상철, 리영조, 한원국, 오흥진 등이 참가한 중심창작조가 있었고 현문련에서 꾸리는 부정기간행물 《해란강》이 있었는데 책임편집은 한원국이였다. 《해란강》은 비록 4기를 꾸리고 3년재해시기 일부 잡지 정간지시정신에 좇아 정간되였지만 광범한 과외작자들을 조직동원하여 문예창작을 번영시키는 면에서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 팔도에는 황상박, 최문섭, 김재권, 정창환, 리두송 등이 주축을 이룬 문학창작조가 있었고 황상박이 주필을 담당한 《구수하》가 있었다.
개산툰에는 정국초, 전복록, 심정호, 정광국, 송영준, 김복순이 주축을 이룬 창작조가 있었고 그들이 꾸린 잡지 《천평벌》이 있었다.
동성용에는 윤태삼, 석하연, 조룡진, 최경준, 신학산 등이 주축을 이룬 문학창작조가 있었고 월청에는 황병락, 서광억, 강호혁을 골간으로 한 문학창작조가 있었으며 그들이 꾸린 잡지 《일관산》이 있었다.
동불사에는 허흥식, 신영일, 리택수, 김중복, 심석종을 중심으로 한 문학창작조가 있었다.
조양천에는 농민작가 김병기와 함께 전광하, 김중섭 등이 참가한 창작조가 있었다.
이밖에도 세린하에는 리경필을 대표로 하는 창작조가, 로투구에는 리종복을 대표로 하는 창작조가, 태양에는 허영희를 대표로 하는 창작조가 있었으며 도문에는 리광순, 구영문, 남효현 등이 가담한 창작조가 있었다.
동서남북 방방곡곡에 널려있던 이런 문인들은 신문잡지와 예술무대에 많은 성과작들을 발표하였다.
시분야에서는 윤광주의 《아침합창단》, 황상박의 《꽃피는 공소부》, 윤태삼의 《요, 귀여운것들아!》를 대표작으로 들수 있고 소설분야에는 윤금철의 《숙질간》, 《해빙기》, 김병기의 《쇠돌골의 변천》을 들수 있고 희곡분야에서는 오흥진의 단막극 《경사》와 정창환의 단막극 《모범부부》를 들수 있다.
민간문예방면에서는 수백편의 주옥같은 민간이야기를 구술하면서 미수의 고령에 이른 민간이야기대왕 황구현선생이 솟아났고 판소리 《배뱅이굿》을 연창한 민간예인 조종주선생을 떠올릴수 있다.
이밖에 팔도로부터 태양에 이르는 구수하벌은 천년문화재 《농악무》를 보존한 고향이며 로투구로부터 조양천에 이르는 조양벌은 전통무용 《부채춤》과 《물동이춤》을 출산시킨 복지이다.
저 하늘의 별처럼 총총하게 모여있던 문인들속에서 윤씨 성을 가진 작가와 황씨 성을 가진 작가 다섯분을 별도로 소개한다.
윤광주시인은 1933년 4월 룡정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셋째아들 즉 우리 민족이 낳은 저명한 시인 윤동주의 동생으로 태여났다.
윤광주는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초반까지 연변시단에 발을 붙이고 중국조선족문학의 초창기에 벌써 20여수의 시를 발표하여 한몸에 인기를 모았던 청년시인이다.
1958년부터 필자는 그를 알게 되였는데 그때 필자는 윤동주도 모를 때였고 그 자신도 누구의 동생이라는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늘 색바랜 검정양복을 입고 다녔으며 얼굴은 병색에 젖어있었기에 남에게 추워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무서운 독서가였으며 뛰여난 시재를 품은 노력가였다.
1946년 봄 룡정인민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중 가정사유로 1948년 10월에 중퇴하고 연변의과전문학교의 실험원으로 취직, 얼마후 페결핵에 걸려 1950년 봄부터 휴양치료를 하였다.
1951년 여름 일터를 떠나 집에서 투병하면서 독서하고 문학의 조예를 닦았다. 병세가 호전되자 1953년부터 저명한 민간문학연구가인 정길운선생의 지도밑에서 민간문학과 접촉하였고 1954년부터는 룡정시 룡남가 청년회에서 청년들의 문학활동을 지도하였으며 1957년봄에는 공청단 연길현위에서 무은 평두산개간대의 대장직을 맡고 활약하다가 병이 도지는 바람에 이듬해 귀가하여 투병하면서 문학활동을 벌리였다.
그는 형님 윤동주의 영향밑에 문학에 대한 신념을 굳히고 시문학에 열심하였는바 《시를 쓰는것을 문중의 일로》 간주하였다.
1954년 6월 처녀작 《그때면 알겠지》를 《연변문예》에 발표하면서부터 시단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후 많은 시편들을 내놓았으나 산실되여 지금 찾을수 있는것으로는 겨우 20여수밖에 안된다.
재간있는 이 시인은 너무나 단명이여서 자기의 시재를 활짝 펼칠 새도 없이 1962년 가을 2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때 그는 룡남가에 거주하고있었는데 지금처럼 집집마다 전화도 없어 문학활동을 조직할 때면 인편으로 겨우 소식을 전하군 하였다. 그래도 그는 누구보다도 약속을 잘 지키고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1962년초, 우리는 《연변》잡지사와 손잡고 《연길현문학전란》을 꾸리게 되였다. 필자는 그때 급히 그에게 좋은 시 한수를 써달라고 약고하였는데 사흘도 안되는 사이에 주옥같은 시를 써가지고 왔었다.
그것이 바로 잡지 《연변》 1962년 6호에 나간 시 《아침합창단》이다.
이 시가 아마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 발표작이 아닌가싶다.
윤금철은 로동자출신의(후에는 공장장으로 발탁되였다고 한다.) 소설가로서 당시 연길현의 유일한 중국작가협회 길림분회 회원이였다.
소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그가 대중적 문학창작조류속에서 용솟음쳐나와 일약 인기를 모으는 소설가로 등단할수 있은 저력은 어디에 있었을가?
기성작가처럼 머리속에 형성된 어떤 틀이 없이 창작사상이 해방되고 퍼그나 활약적인데다 주로 그의 밑바닥인생생활에서 쌓여진 풍부한 생활체험이 문학의 디딤돌로 되지 않았는가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의 대표작 단편소설 《숙질간》 역시 친히 겪은 생활체험의 산물이며 《해빙기》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당시 유년기에 처해있던 우리 조선족소설문단에서 히트를 쳐 막강한 센세이숀을 불러일으켰으며 1962년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10주년 우수문학상을 수여받았다.
그런데 글씨필체가 오불꼬불 엉망이 돼서 편집원들이 알아보지 못하는것이 큰 두통거리였다. 《비서》가 있어야 했다.
그에게는 월급을 주지 않는 《비서》가 두사람 있었는데 한분은 시인 황장석이였고 다른 한분은 고중을 졸업하고 글씨를 똑똑히 쓰는 그의 부인이였다.
실제상 황장석은 작품구상으로부터 문장추고까지 도와주는 《편집비서》였고 부인은 원고를 깨끗이 베껴쓰고 마무리해주는 《서법비서》였다고 할수 있다.
그는 늘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을 담고 다녔으며 소탈하고 누구하고나 허심탄회하여 친구가 많았다.
그런데 몇해 지나자 차츰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어찌된 일인가? 퍼그나 궁금했지만 그때 필자는 연길에 와있었는지라 한동안 거래가 끊어졌다.
그러던 윤금철씨가 70년대 어느 봄날, 우리 집을 문득 찾아왔다. 《전례없던 혁명》후 첫상봉이였다.
반갑게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어찌된 일이오? 무슨 일로 연길에 왔소?》
《방송국에서 불러 왔습니다.》
그의 불깃한 얼굴은 여전히 싱글벙글하였다. 방송국의 부탁을 받고 소설을 쓰려고 연변건축공사초대소에다 자리를 잡았다고 하였다.
《거참, 잘되였구만. 이 좋은 기회에 한번 본때있게 써보시오!》
필자는 진심으로 축하하였다.
《뭐 되겠는지, 붓을 놓은지도 오랜데…》
《왜 안되겠소? 힘을 내야지.》
《나같은거야 워낙 가 돼서 인젠 틀렸다니까… 아마 내 동생이 나을게요.》
이렇게 그때 그를 두어번 만나보고는 다시 만나보지 못하였다. 기대를 갖고 기다리던 그 소설도 소식이 감감하였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아마도 류산된듯싶었다.
그때로부터 윤금철씨는 문단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말과 같이 동생 윤명철이 형님대신 소설을 들고 나왔다.
윤명철은 시작부터 창작준비를 단단히 갖춘 모양으로 문단에 데뷔하자마자 단편소설 《연기속에 누워있는 시체》와 같은 력작을 련속 써냄으로써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가석한것은 너무나 단명인것이였다. 자기의 재간을 한창 꽃피울 젊은 나이에 급병으로 요절하고만것이다.
윤태삼시인은 당시 연길현에 있던 문단 윤씨 삼형제중의 막내였다.
동성용 농기소에서 뜨락또르운전사로 있은 그는 한손으로 뜨락또르 핸들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새 생활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많은 좋은 시를 발표하였지만 청년시인으로 자리를 굳혀준 대표작은 아마 시 《요, 귀여운것들아!》일것이다.
이 단시는 대대로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씨뿌리던 시골마을에 처음으로 뜨락또르가 나타나자 너무도 희귀하고 좋아서 무한궤도 자리를 졸졸 따라가며 오구작작 쬐꼬만 발자국을 찍는 개구쟁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안겨오는 참으로 깔끔한 시다.
윤태삼은 무서운 자습가였고 노력가였다. 다산은 아니였지만 드문드문 좋은 시들을 내놓아 편집들을 깜짝깜짝 놀래웠다. 이런 성과로 하여 1965년 북경에서 열렸던 전국과외청년작가대회에 연변조선족대표로 참가하는 영광을 지닐수 있었다.
그는 시인이기 앞서 후더운 인간이였다. 그의 집은 동성용태평촌 철길옆에 있었는데 울안에 싱싱한 오얏나무들이 삥 들러있었다. 여름에는 서늘한 그늘을 주고 가을에는 탐스런 오얏을 선사하는 오얏나무, 필자는 동성용으로 출장다닐 때마다 이 오얏나무아래서 다리쉼하며 태삼이와 석하연을 만나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군 하였다.
1961년 초가을, 그때는 3년재해시기여서 돈이 있어도 사탕, 과일을 사먹기 힘든 때였다.
그런데 어느날 태삼이가 오얏을 불뚝 채운 자루를 둘러메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애들은 너무도 좋아 퐁퐁 뛰였다.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제일 맛이 있다. 그때 먹은 오얏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부인은 지금도 장마당에 가 오얏을 사올 때면 그때 태삼이가 가지고 왔던 오얏맛을 입에 담는다.
그는 지금 조양천농기소에서 퇴직하고 만년에 시조창작을 하고있다.
얼마전 조양천 출장길에 그에게 문안전화를 걸었다.
밤이 되여 필자가 자리에 누웠는데 윤태삼이 음식가방을 메고 찾아왔다.
《식당에 가도 그렇고 내 집에 가도 그저 그렇고 해서 마주앉아 술이나 한잔 나누고싶어 찾아왔습니다.》
그는 옛날 그 본새대로 조양주 한병을 가방에서 꺼냈다. 안주는 큼직큼직하게 썬 돼지고기비게에 감자국수오리를 섞어서 볶은 료리 한그릇이였다.
원체 말수가 적은 그였지만 그날 밤만은 권커니 작커니 밤새는줄 모르고 말끈을 풀어헤쳤다. 다만 룡정에 있을 때와는 달리 주선률은 어디까지나 창작담이 아니라 인생담이였다.
황상박은 팔도향우전국의 우편배달부로 일하면서 좋은 시를 많이 써낸 연길현의 중견시인이며 팔도창작조를 훌륭하게 이끈 코기러기이고 문학지 《구수하》의 주필이였다.
황상박은 당시 연길현에 있었던 시인들속에서 문학창작성과가 가장 뚜렷한 시인이였다.
그는 직장에서는 사람들의 존경받는 좋은 동료였고 창작에서는 훌륭한 다산시인이였다. 향우전국 국장의 말과 같이 그는 나갈 때는 우편물을 한짐 지고 나가고 들어올 때는 창작소재를 한짐 지고 돌아왔다.
필자는 1961년 11월 5일 《연변일보》에 《록색우전복과 서정시》라는 글 한편을 써서 그를 지지한 일이 있다.
1954년 초중을 졸업하고 고중을 중퇴한 그는 1958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60년대초반부터는 창작의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때 벌써 각종 간행물에 100여편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여 1962년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10주년때에는 우수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65년 11월 전국과외청년작가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대회발언까지 하였다.
대표작은 시 《꽃피는 공소부》, 《형제바위》를 들수 있다.
그의 시는 계곡에서 모래알을 굴리며 퐁퐁 솟아나는 옹달샘마냥 정갈하고 산뜻하며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온 집식구 둘러앉아 보글보글 곱돌장사귀에 청국장을 끓여먹듯이 구수한 시골향기가 풍긴다.
그는 평생 열심히 삶을 영위하느라 바삐 보내는 사람이다. 룡정시방송국에서 퇴직휴양을 한 그는 지금 혼자서 중국조선족문단의 유일한 가사신문인 《해란강여울소리》를 매달 편집, 발행하느라 팽이처럼 돌아치고있다.
그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팔도출신의 작가들로는 민간문학가 김재권씨와 시인 최문섭씨를 들수 있다. 특히 김재권과 황상박은 몇십년간 고락을 같이 한 문우로서 물과 고기사이였다. 황상박의 문학적재능이 김재권을 문학의 길로 자석마냥 흡인했다면 김재권은 그의 뛰여난 조직능력으로 황상박이 창작의 길을 끝까지 가도록 밀어주었다는것이다.
오늘도 《내 고향 오솔길》을 톺아오르며 문학의 외길인생을 살아가는 그한테 아름다운 래일이 웃어줄것이다.
황장석은 룡정문학동인회의 주요성원이였으며 황상박이와는 자치동갑이였다. 동인회기간에 그는 주로 두가지 준비사업을 하였다.
한가지는 현문화관도서실의 단골손님으로 되여 동서고금의 문학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장차 시인으로 두각을 내밀 준비를 단단히 하는 한편 처녀작 시 《로동자행진곡》을 썼다.
다른 한가지는 자각적으로 윤금철씨의 《편집비서》노릇을 하면서 장차 문학편집으로 출마할 준비를 은근히 하였다. 하여 그는 로동자로부터 민경, 민경으로부터 1970년대에는 일약 《연변문학》의 편집으로 발탁되였고 지금은 편심으로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는 굵직굵직하고 개성있는 정치서정시들을 많이 발표하는것으로 시단의 한자리를 굳히였다.
저서로는 시집 《그리운 그대여, 어디에 계시나요?》, 산문집 《하얀 봇나무》, 장편실화소설 《얼의 몸부림》(합작), 《삶의 선택》(합작) 등이 있다.
그는 언제나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하며 유머와 익살로 넘치는 사나이다. 해마다 년말이면 작가협회에서는 송구영신의 만회를 열고 작가들을 초대하였다.
그때면 그는 늘 먼저 들어가 식탁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오는 식객들을 향해 소리를 친다.
《고향이 룡정인 분들은 다 이 식탁으로 오십시오!》
그러면 친구들은 《오, 저기 장석이가…》, 《장석이, 오래간만이다!》 하며 달려가 손을 잡는다.
이때라고 여긴 그 자신은 입심좋게 익살을 부렸다.
《우에서 임명한것만 서기인줄 아오, 군중들이 선거한게 진짜 서기지. 나, 이 는 연길현공안국에 있을 때부터 로 불리웠는데 연길에 온 다음에도 군중들이 그냥 그렇게 불러주니 어찌겠수. 정말 노릇을 할수밖에 없지. 하하하!》
《응?! …허허허!》 듣고보니 그럴듯하여 우리도 한바탕 따라웃었다.
그는 지금 생활속으로 깊이 들어가 글을 쓰고싶어 안해와 같이 룡정시 지신록장에 내려가 시골집을 잡았다. 사람이 워낙 부지런하여 여름에 겨울날 땔나무를 다 장만해놓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60이 청춘이라고 이제 방금 시작한 새로운 인생길을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언젠가는 새 작품이 새 모습으로 출세하리라고 필자는 미리 축복을 보낸다.
이밖에도 써야 될 사람들이 많고많다. 김재권, 김병기, 강호혁, 석하연, 조룡진, 황병락, 서광억, 김중섭, 신학산, 정찬환, 정국초, 심정호, 전복록, 신영일, 리택수, 허흥식, 리광순, 구영문, 전광하… 저 하늘의 별나라처럼 총총하던 문우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며 한마음으로 똘똘 뭉쳤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어떤 문우들은 타계하여 저승에 가있으련만 이승에 있는 문우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있는지 만나보고싶다.
이분들을 찾아 연길현의 산천을 메주밟듯 밟으며 돌아다니던 그 나날들이 지금도 눈앞에 필림처럼 돌아간다.
그때는 한나이 젊었고 교통도구도 그렇게 발달되지 못했던 시절이여서 하향을 하여도 도보로 다니기가 일쑤였다.
1959년 공사문예프로검사를 다닐 때 용신에서 백금까지 걸어갔다. 산나리를 꺾어들고 문바위를 넘어 계곡에 지친 두다리를 담그기도 하며 도문에서 출장을 마치고 개산툰을 가야겠는데 룡정을 에돌아 다시 기차타고 갈 일이 아득하여 그냥 두만강 강뚝길을 따라 도보로 개산툰까지 갔던 일, 가다가 선구 정국초선생네 집에 들려 점심을 먹고 저녁에 광소 허만복선생네 집에 가 자던 일이 어제 같은데 어언간 40여년이 지나갔다…
아, 그립다, 그 시절, 그 풍경이… 오늘밤도 하늘을 쳐다보며 별 하나, 나 하나. 손가락 꼽아가며 하나, 둘, 셋… 그때 그 고향 문우들의 이름을 세며 외우고 외우다가 잠이 든다. 소르르 꿈나라로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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