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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
요즘은 아침마다 시를 읽는다.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좋은 시는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이다. 시를 읽으면서 물렁했던 하루가 단단해짐을 느끼고, 내가 시를 쓰는 것에 대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간혹 좋은 시가 어떤 시인지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그 질문에 선뜻 답을 하기가 쉽지 않다. 좋은 시란 개인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시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주위 사람들에게 몇몇 시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좋아요’라고 말하기보다 ‘너무 어려운데’라는 반응이 주를 이루기도 한다. 사람들에게는 시가 어렵게 보이는 모양이다.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교육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를 감성으로 배우지 않고 교과서로 배웠다. 처음 접한 시가 교과서에 있었고, 교과서에 실린 시가 가장 좋은 시라 생각했다. 알다시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시를 읽는 방법은 일방통행이었다. 은유와 직유, 환유 제유와 같은 비유법과 단어가 가지는 속뜻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예를 들어 ‘님의 침묵’에서 ‘님’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방식은 시를 읽기보다 점수를 먼저 생각하게 했다. 이러한 방식이 시를 왜곡된 방식으로 읽게 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교과서에 실린 시도 오늘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어떤 시를 좋아합니까 라고 물으면, 대다수 사람은 20세기 초의 시인과 시를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의 시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민족 문인들이 일제 치하의 상황을 탈피하기 위하여 시를 썼고, 윤동주 시인은 생체실험의 도구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 그들이 있어, 오늘 우리의 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시 읽기는 너무 편향적이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윤동주, 한용운, 정지용 시인의 시도 좋지만, 연대기적으로 백석, 기형도, 안도현, 도종환과 같은 좋은 시인이 출현했고,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시를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지금 수많은 젊은 시인들이 나타나 우리의 시단을 밝히고 있다.
요즘 시는 다양하다. 시는 ‘오로지 서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이는 젊은 시인들의 노력이 크다. 그들의 노력이 대단한 결과물을 만든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출현이 너무 갑작스럽게 보여,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홍어를 좋아한다(생선을 싫어하는 충청도 촌놈이 홍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삭힌 맛의 홍어를 선호하는데, 많은 사람이 견디지 못하는 맛이다. 시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극 서정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리얼리즘의 시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미래파라고 불리는 시인의 시를 좋아할 것이다. 이중 어느 시가 좋은가 묻는다면 나는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맛의 취향 같은 것이어서, 자기에게 맞는 시가 좋을 뿐,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는 서정에 가깝다. 리얼리즘의 시편도 좋고, 과하지 않은 미래파의 시도 좋아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시의 경향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시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라면, 다양한 시들을 접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시의 다양한 맛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가장 올바른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시 속에서,사막화되어버린 감성을 되찾게 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 시대 시인의 역할일 것이다.
[출처]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작성자 yhjo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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