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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시의 이해와 창작 이 오장 시인
1. 현대시의 원리
17세기 폴란드의 미학자 사르비에브스키(K.M.sarbiewski)는 “모든 예술의 창조개념은 자연이나 사물을 모방할 뿐이지만 시인의 예술 행위만은 새롭게 창조(de novocrat)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미술이나 조각 등 기타 예술 행위는 자연과 사물 등의 대상을 모방하지만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끝없이 펼쳐져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으로 시가 모든 예술의 정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시의 발생이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함께 존재했다는 학설은 시가 예술의 근원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경외심을 가졌다.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에 비해 너무나 나약함을 깨달은 인간이 구원의 행동으로 언어가 발생하기 전부터 자연에서 얻은 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었고 언어를 습득한 이후 리듬이 발생하여 이것이 시로 발전했다는 학설은 누구나 부정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시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다. 순간의 전시성에 그치는 미술이나 청각적 예술은 인간의 정서를 다듬어주는 데 그치지만, 정신적 감동을 전달하는 시는 인간이 만든 역사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단 몇 줄의 시가 수많은 전쟁사를 기록으로 남겨 인류 발전에 공헌한 사실도 있다. 인간 생활은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연속적으로 구성되었다가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안정이다. 그 안정은 변화 속에서 자리잡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물질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오직 영적인, 즉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하다. 시는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정신세계를 다듬어 왔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를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부터 선택적 지각으로 왜곡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자연에 한정된 시야를 가졌기 때문이다. 시가 자연 속에서 발생하였지만 꾸준히 자연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었고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원하는 시의 형태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현상이다. 일찍이 조지훈 시인은 시의 원리에서 "시인은 자연이 능히 나타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시에서 창조함으로서 한갓 자연의 모방에만 멈추지 않고 자연의 연장으로서 자연의 뜻을 현현하게 하는 대자연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인이 자연을 소재로 하여 다시 완미한 결정을 이룬 제2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에 더 많이 통할수록 우수한 시며 실제에서도 훌륭한 예술작품은 하나의 자연으로 남는 것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를 모두 수용한다는 것은 착오다. 인간이 발전하는 속도에 뒤처지는 시라면 가치가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화가 끝이 없다는 것을 가정할 때 과연 사실과 실재성 즉 현실성만 가지고 시를 쓴다면 꾸준하게 발전되어온 시가 정체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쫒으려는 새로운 형태의 모더니즘(modernism)이 발생하여 전통주의와 사상에 대립하여 문명적 주관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시파가 등장하였고 근대 시인들이 꾸준하게 이를 발전시켜 많은 유파를 남겼다. 인간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보게 된다. 실제로 세상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자극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필요한 자극만 받아 그것만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창조적인 존재로서 남들이 지나치는 자극을 잡아들이는 능력을 갖췄다. 이것이 낯설게하기다. 시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똑같은 방법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낯설게하기가 기본임을 감안할 때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시 창작의 원칙이다. 이 같은 낯설게 하기의 기본이 시의 방향을 새롭게 만든다. 시는 미학이 아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엇도 아니다. 미학에 빠져있는 창조는 막힌 길이다. 예술의 창조는 시만이 가진 것이라면 우리는 새로운 시학을 가져야 하고 새로운 시학을 발전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2.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한마디로 이미지의 탑 쌓기다. 여러 가지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각각의 이미지로 그린 후 하나의 탑으로 쌓는 것이 하이퍼시다. 기존의 시가 하나의 이미지로 시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하이퍼시는 다수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하여 더 확장된 시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어 시의 표현력을 끝이 없게 상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존의 시만을 고집한다면 모더니즘의 공간에서 더 이상의 확장을 멈춰야 한다. 시는 인류의 발전에 앞장서야지 발전을 따라가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대개 시인은 하나의 사물만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시의 모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즉 관념에 갇힌 시작법을 고수하는 것이다. 심리학계의 저명한 학자인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stopher chabris)와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는 인간의 맹시현상을 실험하여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결과는 인간의 시선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어떠한 연극이나 경기를 보게 한 뒤 극 중이나 경기와는 관계없는 움직이는 사물을 지나게 하면 대개의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연구결과이다. 자기가 보고 있는 사물의 움직임만 보게 되지 그 밖의 사물은 관심 없다는 맹시현상은 시인의 시 쓰기에도 동일하다. 어떠한 사물에서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오직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올리게 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른 이미지는 관심 밖에 두는 것이 일반적인 자세다. 하이퍼시는 맹시현상의 허점에서 출발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며 거기서 파생된 다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면 하이퍼시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파생된 이미지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편집이다. 사물은 끝없이 구성되고 해체되었다가 재구성되는 성질을 가졌다. 이미지는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유동성 상상이다. 하이퍼시는 변하는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변화하는 각각의 사물마다의 이미지를 편집하여 하나로 융합시키는 것이 하이퍼시의 완성이라 할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재능이 필요하지는 않다. 천재는 한없는 상상을 하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능력을 가졌다. 이에 반하여 둔재는 끝없이 상상하기만 한다. 시를 쓰는 시인은 누구나 천재라고 자평한다. 그렇다면 하이퍼시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가장 창의적일 때는 멍하니 있을 때다. 멍하니 있다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무엇인가 자신도 모르는 것을 생각하며 끝없이 상상력을 확장해 나간다. 이때의 상상은 생각의 흐름을 놓칠 때까지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에 멈추게 되는데 그 멈춤에서 흐름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이고 찾아내지 못하고 놓치는 게 보통 사람이다. 이러한 상상은 시인들에게는 일상이다. 이럴 때의 생각은 그림 곧 심상이 되고 시인은 이를 문장으로 옮겨 시를 쓰게 된다. 이때 그림을 설명하는 글이 관념적인 문장이고 객관적으로 묘사를 강조한다면 사물시가 되어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론을 보면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고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구조를 이룬다고 했다.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들어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함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한다.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상상으로 끌고 간 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하는 것으로 이는 하나의 그림을 최소 단위로 세분화하고 각 부분을 사물화하여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결국, 하이퍼시는 보고 느낀 것에 대한 관념의 그림을 세분화하여 사물에서 파생되는 연결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처음의 이미지와 융합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이퍼시의 단계
1) 1단계
안개는 피어서 강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박목월 <갑사댕기> 전문
위의 시는 목월의 초창기 작품으로 한편의 그림을 추억 저편의 꿈으로 그려낸 시다. 강가에 핀 안개가 밑바탕을 이루고 잠들어야 할 밤에 울어대는 비둘기가 그리움을 재촉한다. 그런 밤엔 저절로 고향 이웃에 살던 처녀가 떠올라 잠을 못 이룬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고향이고 봄의 풍경이다. 단 한마디도 고향의 이야기는 없으나 유년시절의 향수가 읽는 이의 내면을 흔들어 놓는다. 환상적인 그림을 강가의 안개 밤에 우는 비둘기 갑사댕기를 맨 처녀 등, 사물로 대비한 목월의 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이퍼적인 기질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것이 하이퍼시의 1단계라고 볼 수 있다. . 2) 2단계
봄은
오진현 ‘푸른 벨소리’ 전문
오진현 시인은 일찍부터 탈관념의 시론을 주창하며 관념을 모두 깨트리려 직관적인 수학적 존재증명이라는 시론을 발표하고 누구보다 앞서 하이퍼적인 시 쓰기를 주장하였다. 모든 시어를 사물로 대체하며 이미지의 연결과 확장을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새로운 시 쓰기를 실천하여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생을 일찍 마감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하이퍼시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 작품은 하이퍼시의 초기 단계로 당시에는 디지털시라고 명명했던 시로서 이미지의 단순함을 빼고 나면 하이퍼적인 요건을 갖췄다. 하이퍼시가 여러 개의 이미지를 펼쳐내고 다시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여 상상 속에서 캐낸 더욱 더 큰 이미지의 집합체라면 이 작품 속에 나타낸 이미지는 봄 그림 하나에 불과하다. 여기까지가 하이퍼시의 2단계라 할 수 있다.
3) 3단계
까만 머리통에 볼펜으로 두 눈동자를 찍은
쇠똥구리 작은 눈을 화등잔만큼 키우고
하늘 공중에 떠서 굶고 사는 B씨가
김규화 ‘쇠똥구리의 춤’ 전문
하이퍼시가 이미지의 탑 쌓기라고 정의한다면 쇠똥구리의 춤은 하이퍼시가 분명하다. 생존한다는 것은 먹는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먹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한다. 더럽고 작고 뜨겁고 차갑고를 떠나서 각자의 현실에 맞게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똥을 먹는 쇠똥구리, 아이와 아내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철탑에 올라 농성하는 근로자. 작은 일당을 얻기 위하여 관객도 없는 무대에 오른 곡예사,모두가 먹기 위한 행동으로 움직인다. 그 방법이 모두 달라도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은 같다. 굴러가고 높이 오르고 춤을 추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움츠리다가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하나의 작품 속에 모두 배열하고 전체적으로 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 작품은 하이퍼시만이 가진 표현 방식이다. 김규화 시인의 시는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췄으면서도 읽기가 편하고 이해하기가 빠르다. 너무 난해하여 독자와의 소통이 어려운 하이퍼시 속에서 하이퍼시의 완성도를 갖췄다.
4. 하이퍼시의 배제요소
1) 주관의 배제
모든 시는 시인의 주관으로 시작되고 주관으로 끝나는 게 보편적이다. 화자의 감정 몰입으로 얻은 이미지가 끝날 때까지 일직선으로 움직여 주제를 벗어난다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독자의 감동을 유도하려는 경향이 많다. 이는 화자의 울타리에 독자의 감동을 강제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라기보다는 화자가 창작한 작품이 화자의 내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다. 하이퍼시는 여기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하이퍼시가 된다. 새로운 시운동은 실험이다. 그 결과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주관을 빼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둘째 반복하여 써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셋째 나타내고자 한 이미지가 뚜렷해야 한다. 넷째이미지의 결과가 표준화 및 일반화되어야 한다. 어느 것이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하이퍼시의 최대 쟁점은 주관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 속에서 화자인 ‘나’가 있고 없고는 시작법에 있어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보편적으로 볼 때 화자의 존재는 표시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배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오케스트라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지휘자밖에 없다. 연주자나 관객 모두가 지휘자의 몸짓에 따라 감정의 기복을 나타내고 감동의 결과는 연주가 끝나지 않아도 발출된다. 시에서 화자는 지휘자에 속한다. 그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보여주는 몸짓을 한다면 객관적이지 못하여 감동의 결과는 끝내 발출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발표되는 많은 하이퍼시가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화자인 ‘나는’을 나타내어 객관을 벗어나는 듯한 작품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국 하이퍼시클럽 2집을 보면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나는’의 주관적인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시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시론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시 속의 화자 즉 ‘나’와 ‘나는’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는 존재를 나타내고 ‘나는’은 존재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나는’은 은연중 움직이려는 의도성 즉 주관성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차이를 갖고 있어 ‘나’와 ‘나는’을 굳이 나타내고자 한다면 ‘나는’ 보다는 ‘나’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하이퍼시는 화자의 울타리 밖에서 인정받는다. 화자가 만든 울타리에 독자를 들여놓을 수 없으며 처음부터 울타리 없는 시를 창작하여 읽는 이에게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야 한다.
2) 직유법의 배제
직유는 본의와 유의의 관계가 지표에 의하여 분명히 나타나는 비유로서 ‘넓은 의미의 은유의 한 종류다’라고 문덕수 시인의 시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고 그동안 많은 평론에서 직유가 논의가 되었다. 시에서 직접적인 비유가 필요한가는 시작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인 개개인의 표현방법이라 할 수 있다. 미당 서정주시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도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직유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하이퍼시에서는 과연 직유가 필요한가는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다.
사물의 이미지를 찾고 객관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하이퍼시의 이론을 따른다면 직유는 옳지 않을 것이다. 예로 효도를 나타내는 시를 쓴다면 “나는 심청이처럼 아버지를 모셨다“ "나는 이순신 장군처럼 국가를 위해 싸웠다" "나는 빌게이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등 이렇게 직접적인 표현을 한다면 과연 그 밖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처럼’ ‘같이’ 등 직유를 쓰게 되면 단 한 구절로 시를 완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하이퍼 시에서는 직유는 피해야 한다고 본다.
3) 항등성의 배제
대부분 사람은 사물을 대할 때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그 사물의 본질을 이미 인식된 대로 바라보게 된다. 사물은 거리와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는데 인간의 두뇌는 이미 각인된 인식을 거의 바꾸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사물의 본질대로 생각하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현실에 맞게 그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객관적인 기술 방식이다.
88올림픽자동차전용도로에 철가방이 갈지자로 흔들며 휙휙 달려간다 소나기 지나가고 63빌딩이 부르르 떤다 흩어진 물방울이 여의도병원 성모마리아상에 내려앉는다 임종실에 들어갔다는 예수의 소식이 가슴 적신 이탈리아 아드리아 연안의 보라(bora)가 2000cc의 배기량에 우아한 보디라인과 넓은 트랙, 차체 둘러싸고 있는 탄탄한 범퍼를 자랑하며 지중해 상쾌한 바람 몰고 한남대교 나들목을 빠져나간다 내 두 바퀴 무겁다
오후 2시 네팔 카투만두 시장을 지나 한차례 쏟아진 비에 발이 묶인 바이크족이 더위를 피해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다가 청평 75번국도를 물고 찰나에 달아난다 지름길이 훤하다
질척이던 길 지우고 집으로 들어선다 아들이 남겨둔 하루가 냄비 속에 바싹 말라 있다
김해빈 시인 <스콜> 전문
김해빈 시인은 사실적인 묘사로 하이퍼시를 전개한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불법으로 질주하는 배달 오토바이, 뒤따라 한바탕 내리는 소나기, 스콜이 지나간 것처럼 활짝 갠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의 죽음 등 도무지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상황이 보인 그대로 전개되고 불황 속에서도 사치한 모습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외국산 자동차, 네팔 카투만두는 스콜이 잦은 곳인데 그곳에 바이크족이 갑자기 청평 75번 국도를 달리는 오토바이 부대로 전환된다. 평소 흔히 마주하는 장면 중의 하나인 쏜살같이 달리는 오토바이 행렬을 끌어와 상습 정체구간임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다. 반복되는 혼란과 불안의 연속선상에서 겪게 되는 하루가 전개되다가 안주할 집에 도착하여 보게 된 어지러운 상황과 연계시켜 하루를 마무리하며 갈등과 사회적인 격차를 그려냈다. 기존에 굳어진 이미지 대신 항등성을 배제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끌어들여 하나의 이미지로 묶은 것이다
4) 제목의 사물화 및 관념 배제
하이퍼시의 최대 목표는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로써 객관적으로 이미지를 넓혀가는 데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제목 곧 주제부터 관념어가 쓰여 진다면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기존의 관념시가 되고 말 것이다. 하이퍼클럽 2집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몽타주 기법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 소비에트의 쿨레쇼프(kuleshov)는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더하기 B가 아니라 C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같다. 시에서도 각각의 이미지가 합쳐지면 부분의 특성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물 이미지의 합과 합은 완결성의 법칙에 의해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로 전환된다는 뜻이고 서로 모순되거나 부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제시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적극적 해석을 유도하는 상호작용적 방법론이다. 하이퍼시는 여러 대의 카메라로 잡은 화면을 이어 붙여 하나의 연속적인 화면으로 편집하는 시작법이다. 희극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칼 든 사람을 보여주면 비겁한 내용이 되지만 우울한 사실이 먼저 나오고 칼 든 장면이 나온 뒤 웃는 사실을 묘사하면 전혀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문장 편집의 몽타주기법에서 완성여부를 결정짓는다. 서로 관계없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하나의 그림에 담아 새로운 정서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시작법이다.
비행기가 지나자 물보라가 일었다
턱시도를 입고 구름과 파도에 휩쓸리던 밤바다엔
아버지의 이마에서
달의 뒷편에서 어둠은 바다를 잊고 살았다
온 세상 밤의 물결로 차오른 중수감
김기덕 시인 <달의 항해>전문
김기덕 시인의 "달의 항해"는 직유와 관념이 부분적으로 보이는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하이퍼시가 갖춰야 할 몽타주기법이 살아 있다. 하늘과 바다가 넘실대고 아버지, 남자, 말과 새, 나뭇잎 등 온갖 이미지가 난무한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하나로 묶여 읽는 독자의 시선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빛과 엔진소리 화살로 빠르고 정확하다는 집합된 이미지를 전달한다. 위의 시처럼 이해하기 힘든 이미지의 집합을 낯설게 하기의 특징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이퍼시는 각기 다른 이미지를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시작연구의 결과물이다. 중간마다 떨어져 있는 불안전한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독자가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안전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연속 제시하여 혼란을 가증시켜서는 안 된다.
2) 서사성
모든 동물은 영역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하여 싸움하고 자기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자신만의 성을 쌓고 산다.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로 영역을 가진다. 특히 시인들의 영역은 확고하다. 자신이 주장하는 시창작 방법에 도전을 받게 되면 참지 못한다. 뚜렷한 학설을 제시하지도 않고 무조건 다른 이론은 배척하는 경향은 시인들이 가진 특권처럼 되어있다.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발상은 은연 중에 나타내야지 갑자기 돌발하면 폭력적이라고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드리리다
이것은 어떤 신라의 늙은이가 젊은 여인네한테 건네인 수작이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드리리다
햇빛이 포근한 날 그러니까 봄날 진달래꽃 고운 낭떨어지 아래서 그이 암소를 데리고 서 있던 머리 흰 늙은이가 문득 그의 앞을 지나는 어떤 남의 안사람보고 한바탕 건네인 수작이다 자기의 흰 수염도 나이도 다아 잊어버렸던 것일까
물론 다아 잊어버렸다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다아 잊어버렸었다
꽃이 꽃을 보고 웃듯이 하는 그런 마음씨밖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었다
미당 서정주 <노인 헌화가> 일부
일찍이 미당 서정주 시인은 신라초에서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현실에 맞도록 풀어내어 주목을 받았다. 인연 설화조. 수로부인의 얼굴. 신부 등 많은 시를 설화조로 표현하여 하이퍼적인 요소가 깃든 시를 썼다. 오늘날의 하이퍼와는 이미지의 전개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찍부터 과거와 현실을 융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서사로 시작되는 시는 누구에게나 친숙하게 와 닿아 이미지의 전개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시선을 잡아두는 효과를 본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하이퍼에서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시창작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강영은 시인은 이러한 효과적인 방법을 미당의 시와 더불어 서사가 있는 하이퍼시로 발표하고 있다.
아부오름, 움푹 파인 굼부리가 아버지 무릎 같다 좌정한 무릎 아래 빙 둘러 심은 삼나무들, 연하장에서 막 빠져나온 푸른 미간이다
아부지, 여기가 정토인가요
뾰족한 잠이 돋아 있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마음은 죽어서도 번득이는 붉은 돔 눈깔, 가본 적 없는 시간의 미늘이어서
잔물결 이는 생각 속으로 핏빛 물기 스미는 지상의 한 시간은 먼 거리 한 시간 후에 닿아보지 않은 발자국이 벌써 촉촉하다
눈 아래 방목장에는 푸른 지붕을 가진 축사
달맞이꽃이 평생 걸어야 닿는 저 곳에도 무릎 구부린 아비소가 갓난 송아지의 등을 핥아주고 있을 거라고 그 무릎에 가만히 지상을 얹어보는데
강영은 시인<원왕생가, 돋아나는 서녘> 일부
제주도의 풍경이 둘러쳐지고 삼나무 울타리에 펼쳐진 아버지의 기억이 한 편의 영상으로 전개된다. 불교에서 원하는 서방정토에 아버지가 이미 갔으나 달맞이꽃 되어 바라보기만 하는 화자는 따라가지 못하여 한 마리 송아지가 되어 등을 핥아줄 아버지의 혀를 기다리며 지상에 전개된 목장에 촉촉한 발자국을 찍으며 배회한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듯 불가능한 일을 해내려는 시도는 돌아간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아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은 서녘에 목멘 목젖을 필사한다. "원왕생가"의 전설을 모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작품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 여러 가지의 사물로 적절한 비유를 하여 하이퍼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작품이다.
6. 하이퍼시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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