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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몽사몽 글쓰기’와 하이퍼텍스트시
손해일 (시인, 문학박사 )
지난호 시문학에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라는 아주 인상적인 토픽이 실렸다.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를 문학의 에콜로 활성화하자는 취지를 밝힌 심상운, 김규화씨의 대담이 그것인데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감한다.
전자 다중 매체의 발달에 따라 현대는 이미 디지털적 사고와 컴퓨터, 인터넷을 통한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가 주류를 이루는 추세여서 수천년간 금과옥조가 되다시피한 아날로그적 전통 글쓰기 방식도 변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오남구, 심상운, 이상옥씨 등 시문학 출신들을 중심으로 ‘탈관념시’ ‘사물시’ 디카시 등의 논의가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데 새시대문학의 지평넓히기라는 측면에서 고무적인 현상이다.
1965년 컴퓨터 선구자 넬슨이 사용해 보편화된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는 인터넷 웹문서형식으로 사용자가 임의대로 선택, 첨삭, 패러디 등을 다양하게 네트워크로 링크시키는 비선형적, 비선조적, 비문자적 특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문학비펑적으로 보면 그리 간단히 넘길 개념이 아니다.
수용미학이나 구조주의 기호론적 관점에서 본 전자적 글쓰기나 읽기는 작자 일방이 아니라 독자가 함께 상호 교환 반전해 텍스트와 텍스트가 끝없는 링크로 연결되는 복합구조이다. 실생활에서 수퍼마켓보다는 하이퍼마켓이 보다 크고 발전된 첨단유통점이듯이 ’초월하여, 과도한‘이라는 의미의 ‘하이퍼(hyper)라는 접두사 자체가 새로운 개념을 암시하고 있다. 라틴어 textus( 실로 짜여진 직물)가 어원으로 단순히 작품(work)이라는 말을 대체한 텍스트(text)라는 개념도 1960년대부터 자주 쓰이기 시작해 한스 야우스 로베르트가 주창하는 수용미학의 핵심개념이 되었다.
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지면은 없지만 롤랑바르트는 텍스트와 작품을 몇가지 관점에서 확연히 구별하고, 문학적 텍스트와 비문학적 텍스트도 구별하고 있다. 따라서 텍스트가 문학작품과 단순동의어 개념이 아니라면 이를 원용한 시쓰기도 혼란을 줄이기 위해 ’하이퍼시‘ 라는 약칭보다는 '하이퍼텍스트시’로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이러한 시대배경과 개념이론이 맞물려 첨단적 글쓰기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시’는 관심의 초점이며, 디지털강국으로 등장한 한국의 현실에서 이론이든 작품이든 선도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덧붙여 고려할 것은 인터텟용어에서 파생된 하이퍼텍스트 개념이 재래적 글쓰기에도 심상이나 이미지 창출과정에서 배태되어 있다는 점, 종이문자의 하이퍼텍스트와 전자적 하이텍스트의 차이와 유사점, 프로이트의 꿈이론이나 정신분석학과도 연관이 크다는 점이다.
문자와 동영상, 소리, 그림 등 복합적 기능을 망라한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는 사이버 공간을 통해 현실과 가상현실을 넘나들며 첨삭, 교환분합, 집합해체가 자유롭고 온전히 비논리적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꿈꾸기’와 닮아 있다. 예술창작행위 자체가 일종의 꿈꾸기이지만 특히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는 첨단 디지털적 특성뿐 아니라 상상보다는 공상을 위주로 하여 현실과 가상현실(꿈)을 넘나들며 비논리적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비몽사몽 글쓰기’라고 명명해 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 시문학 4월호에는 하이퍼텍스트적 시작품 보다는 시인의 일상과 서정을 위주로 한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하이퍼 텍스트적 글쓰기의 당위성과 시대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생소하기도 하고 보편화 되지 않은 탓으로 본다.
4월의 시 26편과 최연홍,정대구, 조운주, 김철교시인의 신작시집 중에서 몇편을 언급해본다.
지금은 기억 조차도 마구 희미하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통성명을 하고
체온이 전해지도록 악수도 했을 것이다.
두서없이 바쁘기만 하던 날
얼키고 설킨 거미줄 이젠 실밥이 터진 채
먼 나라 동전으로 서랍 한구석에 누워 녹슬어 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얼굴
이제 와 더듬어서 찾으려 해도
벌써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거나
전화번호는 이미 결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스치는 옷깃 하나로도 환하게 눈부시던 날의
소중히 간직해온 젖은 인연이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세월의 뒤안길에서
지금은 기억마저도 한참 동안 희미하다.
--김석규 < 명함> 전문
언제 받아 넣었는지/ 작년에 입던 윗호주머니 속에 /낡은 명함 두 장/
민등기, 주근우 별난이름이다 /어디서 만났을까 직함과 관련 시켜봐도 /
이름이 별난 만치 그 얼굴 별나지 않았는지 /기억을 일일이 들쳐봐도 미등기상태/
처음부터 내 기억 속에서 죽은 친구/생각을 꼬집고 뒤집어봐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 //...... 중략.....// 얼굴 사진까지 새겨 넣은/ 차마 찢어버릴 수 없는 /내 서랍속에 차곡차곡 눌려 있는 명함들/ 또 어떻게 처리할까/ 이번 기회에 화장해 버릴까//
아니지 천지사방에 뿌려놓은 내 얼굴은 어찌하라고//
-- 정대구 < 명함 > 일부
우연이지만 위의 예문은 김석규와 정대구시인의 <명함>이라는 같은 제목의 단상이다. 태초에 아담이 사물의 이름을 짓듯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때문일까. 이름처럼 귀한 게 있을까. 세계적으로도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전에 부모가 지어주신 징표를 영광스럽게 남기고 더럽히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집착 또한 대단하다. 특히 현대인의 실생활에서 필수품이 된 명함이 한국에서는 연락처와 이름을 적은 일상적 네임카드나 비즈니스 카드를 넘어 심한 경우엔 자신의 사진과 이력을 촘촘히 박아 넣은 준 이력서 수준이 되기도 한다. 통성명을 넘어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알리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산물인데도 세월이 지나면 수북한 명함꽂이의 그 많은 명함중에서 몇 장이나 기억에 남을 지 생각해 볼 일이다.
김석규와 정대구의 시에서처럼 엁키고 설켜 옷깃을 스친 소중한 인연을 간직하기 위해 정중히 인사하고, 악수도 한뒤 곱게 받아 넣은 명함이 녹슨 동전처럼 서랍에서 잠자고 세월이 지난 뒤 명함을 꺼내보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명함건넨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서 후일 ‘누구였더라?’ ‘어디서 만났더라?’ 아무리 기억을 뗘올려도 생각나지 않는 안타까움은 특히 나이든 사람이면 익히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버릴수도 태울수도 없는 애물단지, 자신이 뿌린 명함도 상대에겐 같은 처지일 것이므로...
오늘은 온통 벗은 웃음으로 건배를 한다. /가장 취약한 약점을 일부러 드러내기 위해/ 며칠 전부터 리모델링하는 하얀 페인트븟을 몰래 / 휴지통에 던지고 간 벽 쪽 무당거미 줄을 친 가리개/ 그 옆에 그것만 가린 억센 니그로의 가시내/ 카페의 벌거숭이들 앞에서 웃는 하얀 이빨/ 야릇하게 휘감는 엉덩이로 따내고 있는 옥수수 // 모두 시원한 옥수수 밭으로 달려간다 간다 ... 구멍마다 튀어나온 말벌들이 몰려온다/ 맥주컵으로 후려 칠수 록 흘러 넘치는 밴드연주/ 흰 발톱에 부서지는 얼음 파편을 일부러 밟는 탱고 춤/ 눈구 멍을 막을수록다가오는 하얀 콧구멍은 벌름벌름.....
---차영한 < 몸과 옷의 오후 >일부
어느 이국적 카페에서 벌어진 질펀한 술판과 흑인 여자의 모습과 무대와 밴드연주. 탱고 등이 배경으로 나오고 그속에서 화자가 느끼는 감상이 순차로 암시된다. 가리개, 니그로의 가시내, 하얀 이빨, 옥수수, 하모니카, 말벌, 밴드연주, 탱고춤, 눈구멍 , 하얀 코구멍 등 이다. 제목이 ‘몸과 옷의 오후’ 라 암시적이지만 화자의 주장이나 구체적인 설명대신에 특징적으로 제시한 장면과 사물만으로도 몽환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일종의 보여주기 수법으로 시로서 앞서 얘기한 하이퍼텍스적적 성격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세링게티 초원에 건기가 시작되면 200여만 마리의 누 떼들이 신선한 초원 찾아 목슴 건 여행을 시작합니다. / 그들은 무리지어 서로 도와가며 움직이면 악어도 사자도 쉽 게 덤비지 못한다는 것 잘 압니다. // ---< 중략 >--- // 언덕을 먼저 넘으려고 서로 다투다 깔려 다리가 꺾이는 누가 생깁니다...... //악어는 경쟁에서 밀린 누를 먹잇감 으로 손쉽게 취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내눈에는 어려움에 처 한 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발에 밟혀 쓰려저 위험에 처해 있는 이들이 있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의 평안함이 계속되기만을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
---장원상 < 세상건너기 > 일부
아프리카 세링게티 초원의 봄철 누떼는 스프링고우트(Spring Goat) 라는 예화로 우리 인생살이의 교훈으로 자주 인용된다. 산문형태로 다소 늘어진 게 흠이지만 장원상시인 역시 누떼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있다. 성인군자나 이타적 삶을 추구하는 가 대단한 인격자가 아니라면 우리들도 자기중심적인 평범한 삶이 대부분이다.
특히 봄철 건기에 새풀을 찾아 다투며 선두 양이 질주하는 꽁무니를 무작정 따라 달리다 보니 계곡 낭떠러지에 집단 추락하는 양떼도 있다. 양떼들도 봄을 타서 비관자살하는 것일까? 실은 눈앞의 새풀을 서로 먼저 먹으려고 다투며 맹목적으로 질주하보니 관성으로 멈추지 못해 생기는 참상이다. 우리도 누떼처럼 앞만 보고 달릴 게 아니라 추구하는 행복과 삶의 목적, 방향은 옳은 지, 이웃들의 삶은 어떤지 가끔 살피며 세상을 건널 일이다. 마침 우리도 4월 9일 국회의원 선거를 마쳤기에 양떼처럼 죽음의 절벽으로 몰지 않는 현명한 리더들이 많아 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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