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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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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시인 - 허옥진 댓글:  조회:5564  추천:0  2015-03-08
화룡시 허옥진시인 지용문학상 수상     2011년 09월 02일 08:58   연변작가협회, 한국옥천군청, 옥천문화원에서 공동으로 주최하고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가 주관하는 제15회 연변지용제가 8월 24일 연길시문화예술중심에서 펼쳐졌다. 화룡시의 허옥진시인이 시집 《나에게로 돌아온 너》로 제15회 지용문학상을 수상받았다. 시상식에 이어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의 민족풍정무극 “계절의 노래”와 정지용시랑송회가 펼쳐졌다(허국화 기자). 래원: 연변일보 진눈깨비 '복허수에 대하여'  제15회 연변지용제 수상 시인 허옥진   2011년           너에게로 날아든다 새나 나비처럼 근대성 가까이  어둡게 너한테 침몰되는 중 나는 나라고 말할수 없어 사라지기 위해 네가 나를 위한 생리대는  일년에 두번쯤은 족해   복식(複式)의 방안으로  복허수(複虚数)의 실수는 나의 이중성을 떠나는  첫번째 계절이 되였다   자기 카드에 인출된 수량만큼 형태소(形態谕)를 나타냈을 뿐 너의 유배지에서  채 해동되지 못한 표절된 허두가 나의 첫 음성으로  너에게로 반환되여 사라지는 중   설맹(雪盲)으로 지양되지 못한 여백에 공명으로 슴슴해진 언어의 혈액형들 더는 낭설로 너의 밑바닥까지 적시진 않아   잠언으로 환원되지 못한 계절의 쪼각들 환절의 어설픈 주성(走性)으로  너에 향한 회귀성은  겨울을 견딜수 있는  푸르른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될수 있었다   [출처] 진눈깨비 '복허수에 대하여' |작성자 혜철
162    시인 - 주향숙 댓글:  조회:4163  추천:0  2015-03-08
  (사진:  신인상 수상자들. 좌로부터 박룡길, 주향숙, 조룡기 )  9월 7일,   《연변문학》월간사의 제30회시상식에서 주향숙 시인이 수필   로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주향숙 시인은 일찍 시 으로 두만강여울소리 시인탐구상을 수상한바  있으며 현재 연북소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길림신문 뉴스-----   《연변문학》월간사가 주최하고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가 후원한     2009년 제30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이 9월 7일 오전, 연길 백산호텔에서 있었다.    연변이 낳은 민족저항시인 윤동주의 항일독립정신과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윤동주문학상》은    1999년부터 매년 《연변문학》에 실린 작가들의 작품을 뽑아    시상식을 거행하고 있다.     제30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수상작에는     소설부문에서 홍천룡의 《호박골의 떡호박》이 본상을,      조룡기의 《포장마차 달린다》가      신인상을, 시부문에서 김철의 《휴전선은 말이 없다》가 본상을,      박룡길의 《유리창》이 신인상을,      수필부문에서 리태근의 《깨여진 고향의 반쪽 얼굴》이 본상을,      주향숙의 《내가 내곁에 서서》가 신인상을,      평론부문에서는 우상렬교수의 평론 《현대적인 소설서정》이 본상을      수상했다.       소설부문 본상을 수상한 홍천룡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1981년 소설 《구촌조카》로 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이러저러한 생활탐구와 모대김때문에       소설창작과 멀어졌던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수상의 영예를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과        소설을 이쁘게 봐준 평심위원들과 독자들에게 돌렸다.        시상식에는 연변작가협회, 연변주문련, 연변인민출판사,       부분적 민간문화단체의 책임자들과 회원 그리고       언론매체의 기자 등 120여명이 자리를 같이 하였다.               (길림신문 기자 김태국, 안상근)
161    시인 - 김영춘 댓글:  조회:4218  추천:0  2015-03-08
     
160    시창작의 1, 2 , 3. ㅡ 석화 댓글:  조회:4089  추천:0  2015-03-08
시창작의 1, 2, 3.  석 화  1. 모든 말에 리듬을 실어라.  생명의 첫째가는 표현은 호흡이다. 생명은 호(呼)와 흡(吸) 즉 날숨과 들숨의 끝임 없는 반복으로 진행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무수한 호흡을 반복하며 반복되는 호흡은 리듬을 불러온다. 사람에게 있어 이 숨결은 성대를 울려 소리를 내게 하고 그 소리에 생각을 실어 말이 되게 한다. 말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글이며 말과 글이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을 문학이라 부르고 그 문학의 최초와 최후가 시이다. 시는 말 중의 말(詩=言+寺)로서 시와 비시(非詩)를 가늠하는 저울추를 운율(韻律)이라 하여 문학은 우선 리듬을 담은 운문(韻文)과 그렇지 않은 산문(散文)으로 나뉜다.  바벨탑의 상징은 세상이 수많은 무리들로 나뉘고 그 무리들은 각기 다른 말을 한다는 이야기로 민족과 민족언어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민족언어는 그 해당 민족의 제일 주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다. 하나의 민족은 역사, 지리, 문화의 사회학적 공통성과 함께 피부, 골격, 체질 등 생리학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데 민족언어는 이 모두를 함께 아우르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민족마다 발성법이 다르며 이 자기만의 발성법은 그 민족 나름의 호흡에 의한 성대의 울림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 민족의 언어에는 그 민족의 숨결과 함께 그 민족의 문화, 풍습, 역사와 전통 모든 것이 스며있어 이를 일러 그 민족혼의 가장 기본적인 염색체(DNA)라고 말한다. 따라서 민족언어를 잃은 민족은 모든 것을 잃은 민족이며 역사 속에 버림받고 현실속에 사라진 민족이라고 말하게 된다.  시는 리듬 속에 모든 것을 담아낸다. 모태의 시간을 넘어 아득한 태고로부터 한줄기 핏줄을 타고 흘러온 맥박과 숨결이 시인의 호흡에 이어져 민족어의 운율로 리듬을 타게 된다. 훌륭한 시인이란 이 리듬에 자기 숨결의 호흡을 맞추는 자이며 이 리듬에 자기 심장의 박자를 맞추는 자이다. 조상의 숨결에 핏줄을 대고 그 맥박에 박자를 같이 하여 가슴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리듬이 입에 올라 스스럼없는 경지에 이르는 자, 그 리듬으로 조화로운 운율을 엮어내는 자가 시인이다.  2.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어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김춘추)》라는 시구가 있다. 언어는 기표와 기의 즉 말을 이루는 소리 부분인 시니피앙(significant)과 개념을 나타내는 의미 부분인 시니피에(signifier)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름은 그 기표와 기의를 통하여 지칭하는 대상의 형태 및 속성을 지시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우선 불러주는 이름으로 하여 세상에 존재한다. 해, 달, 별과 꽃과 나비 모두는 그 불러주는 이름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인지된다. 물론 《이름값을 못하는 것》도 있고 《이름과 영 다른 것》들도 있지만 그것은 우선 그것 먼저 이름표를 가진 것들과 구별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뿐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은 사랑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 민들레, 채송화, 들장미, 함박꽃과 나비, 잠자리, 귀뚜라미, 금붕어와 다람쥐, 꾀꼬리, 종달새와 토끼, 거북이, 사슴…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아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눈앞에 금방 떠오를 것이다. 또 코끼리, 반달곰이나 호랑이, 사자를 불러보아라. 그에 걸맞은 모양이 눈앞에 우렷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누나와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불러보아라. 가슴 가득 따스한 감동이 물결을 칠 것이다.  머리와 가슴속에 식물과 조류, 곤충류, 어패류와 여러 동물들의 이름을 늘 넣어 다니라. 오늘을 같이 살고 있는 주변 사람이든 역사를 살고 간 옛사람이든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가상적 사람이든 아무튼 그대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항상 불러보라. 그리고 그 모두와 말을 걸어라. 사람이든 다람쥐든 민들레든 또는 나무든 돌이든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어라. 수많은 인연이 생겨나고 수많은 이야기가 엮어지고 수많은 감동이 물결 칠 것이다.  우리 겨레는 원래부터 동구 밖 성황당아래의 돌무더기에서부터 집안의 부엌과 뒤 뜰 장독대에 까지 각기 맡은 신들이 따로 있으며 그들을 불러와 말을 나눌 줄 알았다. 유일신적이 아닌 범신론적인 의식을 가지고 세상만물에 모두 신이 있으며 그들 모두와 친해 함께 살아가는 재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서로의 느낌과 경험을 공유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어라. 그것들이 마음속으로 다가 올 것이다.  3.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아라.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며 해가 있고 달이 있다. 낮이 있고 밤이 있으며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다. 오른 쪽이 있고 왼쪽이 있으며 바른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다. 세상은 원래부터 이렇게 자기의 짝을 하나씩 가지고 생겨났다. 세상만물은 모두 상대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한 쪽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사물의 뒤편, 반대편의 것은 보지 못하고 아니 보려고 하지 않고 살아왔다. 산이 있고 그림자가 있는데 산만 보고 그림자는 보지 못하거나 그림자만 보고 산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시작은 어느 것의 끝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그 끝은 또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다. 정지는 운동의 다른 한 형태이며 운동은 수많은 정지상태가 이어져 이루어 낸 것이다. 나무가 걸어 다니고 사람이 돌이 된다.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 새들이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 이렇게 발상의 전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한번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라.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또는 그 반대로 생각해 보라. 이것이 메타포(metaphor) 즉 은유와 암유이며 난센스와 아이러니(반어)이며 알레고리(풍유)의 미학이며 패러독스(역설)에 접근하는 길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떤 사물을 대할 때, 어떤 현상을 접할 때, 어떤 생각을 할 때 직선적이거나 평면적이 아닌 입체적인 3차원 또는 그 이상의 사유를 진행하며 문제대상의 정면뿐이 아닌 뒤면, 측면과 그보다 많은 면을 동시에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같은 한 그루의 나무를 보더라도 항상 바라보던 시각이 아니라 한번 물구나무서서 올려다보거나 그보다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보아라. 대뜸 풍경이 바뀌어 질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의 창문을 열어 일반인들 눈으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시인이 마땅히 해야 할 몫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시각을 찾아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라는 것이다.  4. 바람을 보는 눈을 가져라.  우리는 세상을 오관을 통하여 느끼고 받아들인다. 외부의 각가지 신호를 눈, 귀, 코, 입과 피부로 느끼고 그것을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감수하고 판단하고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밖으로부터 받아들인 신호들 가운데서 시각으로 받아들인 신호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옛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하였다. 객관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여러 가지 감각들 중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말일 것이다.  보라. 밖으로 세상을 보고 안으로 마음을 보라. 보이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 눈을 떠서 보이는 것만 보아서는 아직 시인이 아니다. 당신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엔 훤히 보이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 중 하나가 바람을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다. 바람은 꽃잎을 흔들어 존재를 나타내고 깃발을 펄럭이어 가는 길을 알려준다. 언덕이 파랗게 물들어지면 봄바람의 아랫도리가 보이고 들판이 누렇게 물들어 가면 가을바람의 뒤 잔등이 보인다. 바람은 이렇게 비유로 말하고 바람은 이렇게 상징으로 말한다. 바람은 A를 그냥 A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람은 A는 B이며 C이며 D이며 그 밖의 또 다른 무엇이라고 말한다. 바람은 제 곁의 다른 것을 흔들어 자기를 나타낸다. 이 모두를 바로 보려면 우선 바람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바람의 무게, 바람의 향방, 바람의 색깔, 바람의 모양을 바로 알아보는 눈을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다.  바람은 자기를 보여주지 않지만 늘 우리 곁에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의 곁에 있다. 사랑은 사랑이 만들어 낸 창조물로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눈빛에 비껴 사랑하는 이의 웃음에 담겨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람을 보는 눈을 가질 때 사랑의 눈이 떠지게 될 것이며 시적 안목도 비로소 열리게 될 것이다.    5. 언제나 나에서 비롯하라.  한편의 훌륭한 시가 한 시대의 정서를 기록하여 위대한 예술품으로 살아있게 되는 것은 시인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그 시대의 강렬한 빛줄기가 남겨놓은 흔적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민족의 참담했던 시기를 김소월과 박팔양,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등 개개인의 시인을 통하여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는 김소월의 서정을 이육사의 《절정》에서는 이육사의 격정을 각기 다르게 받아 안게 된다. 같은 시대를 살다간 시인들이지만 그들의 마음을 각기 통과한 시대적 아픔은 각기 부동한 시편을 남겨 놓았고 그것은 다시 다 같이 천고의 절창으로 되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여야 오늘의 시대적 정서가 화인처럼 찍힌 시편을 남겨 백년 뒤에 오는 세월을 감동시킬 것인가. 우리의 시는 현재를 위해 씌어지면서 또한 미래에 읽힌다고 한다. 시인의 창작작업은 모든 예술작품의 창작작업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창작물이 장구한 예술적 생명을 지니기를 갈망하게 된다. 두보, 리백과 같이 송강이나 황진이처럼 그리고 상기의 소월, 상화처럼 오래 읽히고 길이 남는 시를 쓰고자 한다.  여기에 정답이 있을까. 나는 그저 언제나 나에서 비롯하려 한다. 세상은 나로 하여 존재하며 모든 느낌은 나만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159    시인 - 송미자 댓글:  조회:4653  추천:0  2015-03-08
송미자시인의 첫시집 《당신의 이름으로》출간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0-05-23 10:29:54 ]  5월 22일 오전, 연변시인협회의 주최하에 강동회관에서 《송미자 시집 〈당신의 이름으로〉출간기념회》와 송시인의 제의로 이루어진 《제1회 푸른 오월 시랑송회》가 1, 2부로 나뉘여 진행되였다. 1998년에 《연변일보》에 《고드름》과 《작은  풀》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고 2007 계간대한문학세계 겨울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등단한 송미자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으로》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되였다. 출간기념회에서 송시인이 선배시인들과 가족에 감사를 드리고 있다. 다년간 한국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 시에 미쳐 시공부를 견지했다는 송미자는 생활을 바탕으로 인생에 접근하는 시들을 많이 창작하여온 시인이다. 《꽃이 피는 소리》, 《사랑쏘나타》, 《민들레고향》, 《서울의 겨울》, 《비누방울과 아기와 꿈과 인생》, 《당신의 이름으로》 등  6부로 된 시집에는 10여년간 송미자시인이 창작한 84수의 주옥같은 시와 연변대학 김관웅 교수의 평론 《인생을 위한 시》가 함께 수록되였다. 이번 행사에는 연변작가협회와 연변시인협회 회원, 녀성시인협회 회원 그리고 연변대학 종소리문학사 회원들 도합 50여명이 자리를 같이 하였다.
158    시인 - 김경희 댓글:  조회:4603  추천:0  2015-03-08
    해란강문학상 수상자 김경희(오른쪽 첫사람), 량영철 (가운데 사람), 리선애부친(왼쪽첫사람 대신수상자)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19일 오전 일변일보사에서는 13년째 한국 CJ그룹과 함께 펼치는 해란강문학상, CJ상 시상식을 가지고 수상자들에 대한 축하, 격려와 더불어 문학인들 함께 하는 문화축제의 뜻깊은 장을 마련하였다.  이번 시상식의 CJ상 본상에 안도현 량병진 신흥촌의 농민시인 김일량의 시 《여름산은 새소리 따라간다》 , 해란강문학상에 량영철의 단편소설 《비 오는 날의 그래픽》, 김경희의 수필 《계절은 소리없이 다가오나봅니다》, 리선애의 수필 《리별의 연길정거장》등 작품들이 당선되여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마음을 비우고 고향의 청산록수를 친구 삼아 써낸 김일량시인의 자연에 대한 깊은 관찰력과 탁월한 언어구사력, 도시화 산업화의 길목에서 리상과 현실의 처절한 갈등을 겪고있는 조선족사회의 허탈하고 무기력한 일면을 집어낸 량영철작가의 깊은 통찰력, 삶과 죽음사이의 철리를 음미하는 김경희의 철학적 고민, 아름다운 륜리도덕과 현실병페의 모순속에서 그 대안을 찾고있는 리선애의 작가적 정신 등이 각기 수상의 리유로 지목되였다.  《작가는 결국 작품으로 산다》는 중국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 회장의 축사, 문학의 힘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힘,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치렬한 삶을 살아가는 작가들에 대한 연변문련 전순자당조서기의 격려, 연변일보사와 함께 13년간 민족의 얼과 자주성을 이어가는 행사에 변함없이 동조해왔고 또 앞으로 10년, 대를 이어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CJ그룹 중국본사 홍성일씨의 다짐, 그런 민족그룹에 고마움을 전하는 연변일보사 리영사장의 감사패증정 등 행사는 민족문화사업에 몸담그고있는 참가자 모두에게 새로운 동력을 심어주었다.                                   (인터넷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157    시인 - 리순옥 댓글:  조회:5329  추천:0  2015-03-08
2009-09-16 13:51:00,      리순옥시집 출판 6월 8일 연변조선족녀류시회 리순옥회장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를 방문하여  문화교류와 더불어 자기의 첫 시집 를 조성일회장을 비롯한 추진회 임직원에게 기증하였다. , 한국 '시와산문사'에 의하여 출판된 리순옥의 시집 는 1.바다  2.사람  3.향기속의 이름  4.산에 서면  5.사랑, 그 먼 이름에 6.령혼의 그늘아래 등 6부로 나뉘여 엮어졌다. 리순옥은 1962년에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전업, 연변간호학원 졸업하고 지금은 '연변의학' 잡지사에서 편집으로 사업하면서 시창작에 정진하고있다. 그는 시문학탐구회 우수상, 우수상 등 여러가지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리순옥은 지금 연변작가협회 회원, 연변조선족녀류시회 회장으로 문단에서 활약하고 있다.  오는 6월 17일 오후 3시 연변개원호텔에서 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 주최로 를 개최하게 된다.                                                                                                    KCC   기자 문신                                                          (ㅡㅡㅡ좌측  리순옥 시인) ========================================== 옥천문화원과 중국 연변작가협회는 제19회 연변지용제 지용문학상에 리순옥(53·여·중국 지린성 화룡현)시인의 시집 '피빛두만강-나는 누구인가'를 선정했다. 이 작품에는 리 씨의 5년에 걸친 룽징시, 투먼시, 옌지시, 장백산 등 중국일대 자료수집과 답사를 통해 이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의 삶과 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져 있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민족의 어제와 오늘과 미래에 대한 끈질긴 탐구로 여성적 섬세함과 생활적 접근의 옷을 입고 전통시가의 맥을 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65편의 두만강을 주제로 해 자칫 고루하고 따분한 표현에 갇힐 수 있는 긴 시를 옛날의 풍경과 정서로 차분히 그렸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시로 개성있게 승화시켰다는 설명이다.  이번 문학상 심사는 연변작가협회의 회원들이 맡았다.  이 상은 옥천문화원이 연변 교포 문학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키 위해 발표된 시 중에 우수작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으며 시집 1000권 발행권을 부상으로 준다.  현재 연변작가협회 이사로 활동 중인 리씨는 시집 별빛 그먼 그리움에, 하늘 그리고 령혼빛찬가와 문집 바람처럼 물처럼을 출판했다. 한국재외동포문학상시우수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시본상, 길림신문 두만강문학상시본상,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 우수상 등 문학상을 여러차례 수상한 경력이 있다. 한편, 시상식은 다음달 (2015년) 9월 8일, 옌지시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홀에서 열리는 제19회 연변지용제 개막식장서 개최된다.  옥천=박병훈 기자  ====================== 19회 중국 연변지용제에서 김승룡(오른쪽) 옥천군문화원장이 지용문학상에 선정된 리순옥 시인에게 꽃다발을 수여하고 있다. [충북일보=옥천] 중국 연변에서 열린 '19회 연변지용제'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원장 김승룡), 중국연변작가협회(주석 최국철)가 공동으로 한 이번 연변지용제는 지린성(吉林省) 옌지(延吉) 일원에서 지난 (2015년) 9월 7일부터 12일까지 개최했다. 연변지용제는 정지용 시인을 기리기 위한 문학제로 정구건 옥천군기획감사실장, 김승룡 문화원장, 안효익 군의원, 최대철 농협옥천군지부, 한경환 옥천교육지원청 교육지원과장, 옥천군문인협회, 일반인 등 50여명의 방문단이 4회 연변지용백일장, 19회 연변지용제, 정지용 문학기행 등을 함께했다. 이 문학제는 옥천문화원과 중국연변작가협회가 옥천 출신인 '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유망한 동포 문학인 발굴과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매년 연길시 일원에서 열리는 민족문학축제다.  연변지용제 및 역사문화 탐방단은 7일 연변대학사범분원서 400여명이 참여한 연변지용백일장 개막식을 관람한 뒤 8일 연변대학예술학원 예술극장에서 열린 지용제를 차례로 참석했다. 정구건 기감실장은 인사말에서 "김영만 옥천군수를 대신해 참석하게 됐으며 연변지용제가 벌써 19회가 돼 뜻깊다며"며 "중국의 동포사회에 지용시인의 문학정신을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우리모두가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이어 최국철 주석은 "옥천군과 문화원 등의 지원으로 연변지용제가 벌써 19회째가 됐다"며 "내년엔 20회인 만큼 성공행사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1·2부 행사로 나누어 열린 이날 지용문학제는 '피빛 두만간-나는 누구인가'로 지용문학상에 선정된 리순옥(53·중국 지린성 화룡현) 시인에게 상장과 시집 1천여권 발행이 부상으로 수여됐고 앞서 열린 지용백일장 수상학생 50명에게도 상금과 상장이 주어졌다.  아쉬움을 남긴 이들 일행은 행사가 끝나고 윤동주 시인 생가와 9일 백두산 천지 답사, 10일 광개토왕비와 장군총을 11일에는 정지용 시인의기행문인 '화문행각' 작품을 썼던 단둥( 丹東)으로 문학기행도 했다.  마지막 날인 12일에는 안중근 의사가 수감됐던 ' 뤼순감옥', '안중근 박물관' 등을 관람하고 귀국했다. 김승룡 문화원장은 "이번 연변지용제는 연변작가협회, 탐방단 등의 협조로 성황리에 마무리 하게 됐다"며 "내년 20회 연변지용제는 지금까지 부족한점을보완해 더욱 알차고 내실있게 준비토록 하겠다"고 밝혔다.  옥천 / 손근방기자
156    시인 - 최기자 댓글:  조회:4229  추천:0  2015-03-08
최기자 시집 출간 2007-02-14 16:44:42     최기자 시집 출간의식이 2월 7일 연변시인협회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의 주최로 연길에서 있었습니다. 최기자시인은 이 될 꿈을 가졌다가 시기 농촌에 내려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는 두 아이 엄마로 된후에 학교를 다녔습니다.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30녀 년래 글농사에서 주렁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최기자시인은 선후로 중국조선어문 잡지사 부주필,연변조선족녀류시회 초대회장,사단 법인 연변조선족어머니수필회 초대회장 등 직무를 역임했으며 , 시탐구회 우수상을 획득했습니다. 이번 시집 는 거창한 소재를 다룬것이 아니라 시인자신의 주변의 사실 ,가족관계를 다루면서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와 인생살이를 묻혀내고있으며 자기의 인생철학과 지조의 미학을 치렬한 삶의 양태,사랑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최기자시집 《고독은 페경이 없다》 출간     2014년12월01일 09시21분       최기자시인의 두번째 시집 《고독은 페경이 없다》가 일전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여 독자들과 대면하였다. 지난 2007년에 《아침에 머리카락 줏는 녀자》를 펴낸데 이어 7년만이다.   시집에는 근작시 90수와 이미 발표된 가사 20수를 《세월이 치매를 앓다》, 《외짝장갑들은 어디로》, 제3부 《고독은 페경이 없다》, 《그 리유 알때에야》, 《어찌 가히 하늘 우러르지 않을가》, 《노래말 묶음》 등 6개부로 나누여 수록하였다. 연변대학 김관웅교수는 평론 《고독과 시쓰기》에서 《고래희를 지척에 앞두고 펴내는 초기자의 이 시집은 그으 이전의시집이나 수필보다 인생의 본질에 대한 사색이 훨씬 깊어졌고 문학적인 표현도 훨씬 세련되여 문학적품위가 월등하게 높아졌다》고 평가하였다.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를 졸업하고 《중국조선어문》잡지사 부주필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최기자시인은 연변조선족녀류시회 초대회장, 연변조선족어머니수필회 회장 등을 력임한바 있으며 연변일보《해란강문학상》,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 우수상, 《전국가요콩클상》 등 다수를 수상한 경력이 있다.        
155    시인 - 석화 댓글:  조회:5045  추천:0  2015-03-08
    석화 시인 프로필       석화(石華) 약력:   1958년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출생. 중국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졸업, 한국 배재대학교 인문대학원 석사졸업, 현재 동 대학원 박사과정 중 연변인민방송국 문학부 주임역임, 월간《연변문학》한국서울지사장 역임. 연변작가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회원. 연변작가협회부주석.     시집: 《나의 고백》, 《꽃의 의미》, 《세월의 귀》연작시 > 외.   수상: 《천지문학상》, 《지용시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외.   일본서 석화 시인의 시 연구를 중심으로 한 문학 석사학위 논문 제출이 화제가 되는 가운데,  그의 시가 지난 2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이 수록,   이어 두번째로 또 석화시인의 시 가요 《정다운 고향(작곡 김승철)》이 국정교과서인 소학교음악교과서 4학년 하권에 수록되었다.  2005년 12월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새로 편찬하여 출판한 이 교과서  는 전국조선문교재심사위원회에서 심사하여 발행하는 의무교육조선  족학교교과서이다. 중국 내 조선족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이 교과  서를 사용하게 되며 모든 학생들은 이 교과서의 내용에 따라 수업  을 받게 된다.  석화시인이 가사를 쓴 이 가요작품은 소학교음악교과서 4학년 하  권 제 2과(7페이지)에 수록되었다. 작곡자는 현재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음악프로듀서를 담당하고 있는 김승철PD, 김PD는2003년 50회분 대형음악시리즈 《우리 노래 50년》을 제작, 방송한 공로로 한국방송공사(KBS)의 해외방송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석화시인의 작품이 국정교과서에 수록되기는 2005년 2월에 발행된  중학교 어문교과서 7학년 하권에 편찬된 시 《연변》에 이어 두 번  째이다.  ================  정다운 고향  작사 /석화  작곡 /김승철  잠자리 나래 접는 울바자 아래서  병아리 나래 접는 정다운 고향  그리운 동년을 묻은 곳  언제나 언제나 잊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쌍제비 둥지 트는 처마아래서  고추다래 빨간 정다운 고향  어머니 사랑이 깃들은 곳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앞마을 논벌에 달빛이 흐르면  개구리 합창하는 정다운 고향  꿈마다 찾아가는 그리운 곳  그 어데 가 있어도 잊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맑은 물 굽이도는 시냇가에서  버들피리 꺾어불던 정다운 고향  못 잊을 추억이 샘솟는 곳  세월이 흘러도 있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조선족 시인 석화, 그와 잠시 걷다 ㅡ시집 를 가방에 넣고                                                                                    서석화         1. 같은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시인을 평가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한 권의 시집만으론 지극히 일차적인 형식비평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 작품에 다루어진 사회상, 혹은 그것이 미친 영향 등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역사주의 비평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일찍이 엘리어트는 "시란 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닌 시 자체"라고 하여 시를 그 무엇으로부터도 독립된 하나의 '자율적 구조체'로 보았던 형식주의자들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비평가가 작가를 버리고 작품만을 존중한다면 결국 문학 작품의 자리를 작가 쪽이 아니라 비평가 혹은 독자 쪽에 둔다는 위험을 떠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어떤 작품이고 그것의 잉태는 여러 정황들의 필연적인 교접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그 돌파구 가운데 하나는 작품을 보되 작품의 기저에 있는 여러 상황을 함께 볼 수 있는 관심일 것이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나 그것을 끌어들이는 감정의 이면에는 그 사람의 삶을 말해주는 역사적인 필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시인은 중국 조선족 3세 석화다. 1958년 중국 룡정 출신으로 다른 조선족들보다 비교적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1982년 연변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월간 편집을 맡았다.   등단과 함께 '천지문학상', '두만강여울소리시인상', '진달래문학상', '해란강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아리랑문학상', '압록강문학상', '도라지문학상' 등 연변 자치 주, 성, 국가 급의 문학상과 문예상을 50여 회나 수상함으로써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는 일찌감치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한 동포 시인이다. 1989년 시집 가 '지용문학상'에 당선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조선족 사회의 대들보 시인이 된 것이다.   시인 석화의 시를 읽기 위하여 필자는 우선 그들 사회에서 활동하는 다른 조선족 시인들의 시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치를 어렵게 구했고 참을성 있게 읽어나갔다. 같은 땅 같은 사회에서 이민족이라는 동질의 정서를 같이 노래하는 동료 시인들의 시들을 보지 않고선 시인 석화에 대한 본격 오독의 실수를 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의 시는 한국시 고유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정한에 뿌리 한 서정성에, 스토리 위주의 시가 일색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칫 깊이 있는 정신의 사유라든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수용의 긍정성을 떨어뜨리는 위험 인자로 작용하는 동시에, 혼자만 갖고 노는 자족의 놀이라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물론 그중엔 황춘옥의 이라든가, 리중의 같이 현대시가 지양해야 할 교과서적인 시 정신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더러는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일상, 그것도 과거에 대한 회상이 주조를 이루고, 자연 현상 하나에도 억지 의미를 돌출해내려는 무리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영탄조의 범주 안에 머물게 하는 그들의 시를 보며 필자는 귀하게 얻은 석화의 시집에 나름의 변별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마침내 필자는 동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동명의 이름을 가졌다는 남다른 친근함으로 그의 시의 눈과 마음과 심장을 열어보기로 했다. 같이 시를 쓰는 입장이라는 팔자론도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 태어나고 자란 곳 그리고 삶의 뿌리가 나와 다른 그가 살고 있는 연길이라는 지역을 탐험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시집 를 열어보자. 이로써 필자는 엘리어트의 말에 약간의 반기를 든 셈이다. "시는 시 그 자체"에다 "시인을 둘러싼 정황 엿보기"를 곁들인 또 한 번의 오독을 용서하시라.   2.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네   우선 그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언어의 평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길이라는 사회가 주는 낙후된 풍경이 그의 시에서는 거부감 없이 나타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필자가 십 년 전 초청으로 동료 시인들과 연길에 갔을 때 우선 느꼈던 점은 발달 이전의 소도시 모습이었다. 1970년대 국내 소도시 풍경을 영화 세트장에서 보고 있는 듯, 생경하면서도 많이 봐왔던 우리네의 옛날 풍경이 거기엔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베이징과는 도저히 같은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 서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세련되고 싱싱한 베이징의 풍경. 전설 속을 헤매다 갑자기 뚫고나온 사람처럼 당혹감과 슬픔이 동시에 몰려왔던 기억이 새롭다.   낮은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달린 간판들과 불균형의 글씨체, 그 속을 오가는 빨간 택시들과 택시 수보다 더 많은 자전거들. 그리고 40도를 넘는 폭염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상의를 벗어 던진 런닝 차림의 남자들이 나른한 표정으로 길가를 걸어 다니거나 아무데나 돗자리를 펴고 누워 잠든 모습들. 쉽게 '촌스럽다'고 말해버릴 수 없는 연길 풍경 속에서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나 우린 서로에게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언어는 시대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 석화가 가지는 언어의 평이성과 또 나름대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기법의 시도는 연길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제대로 읽을 수 없으며, 필자에게 주어진 한권의 시집만으론 도저히 납득 불가능한 그의 화려한 수상 경력 역시 연길과 조선족이라는 두 개의 화두를 풀고서야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각 나라마다 수많은 문학상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시인이 50여 회나 상을 수상했다는 것에서 필자는 일차적으로 모국을 떠나 있는 사람들의 지독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상이란 건 축제의 행사이고 축제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일시적이나마 하나로 묶는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시인 석화가 수상한 상의 이름이 모두 모국인 한국의 지명이나 산하를 딴 것이라는 것만 봐도 그들, 조선족 시인들이 가지는 향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여러 정황들을 이해하고 나서야 필자는 중국 조선족 시인 석화의 시를 형식주의가 아닌 미력하나마 역사 전기적인 입장에서 그의 시가 주는 울림을 동포의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시에 사용된 띄어쓰기나 철자법, 행갈이 등은 원문 그대로 옮겼다. (참고로 이 글은 수년 전 필자가 대학원 재학 중에 임헌영 교수님께 레포트로 제출한 것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3. 느리게 그러나 같이    그의 시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살고 있는 이방인의 향수가 주조를 이룬다. '도문을 가며 3'이라는 부제가 붙여진 이라는 시를 보면 그런 그의 심경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기실 모두가 저쪽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바라보고있을수밖에 없다   엷은 안개가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한줄기 강물, 먼 서쪽나라의 어느 하늘밑을 흘러가는 요단강처럼 우 리는 누구나가 다 한줄기 강물을 갖고 있다   피안 혹은 대안이라 부르는 저쪽켠의 강기슭 아슴푸 레 바라다보이는 저쪽 기슭으로 늘 건너가보고싶지 만 피와 살과 뼈가 너무 무겁다   기실 모두가 다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것이지만 지금 은 그냥 그저 건너가보고싶은 생각뿐이다   지금 저쪽 기슭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계실 어느 분도 이와 같은 시를 쓰고 있을까                    - 시 전문     피안이란 불교에서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 또는 그 경지를 말한다. 시인은 그곳에 고국을 두고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이민족이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의 정처 없음과 본질적 그리움이 이 시의 주조라고 말할 수 있다. 3연에서 "저쪽 기슭으로 늘 건너가보고싶지/ 만 피와 살과 뼈가 너무 무겁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것은 이미 타국에서 정착된 시인의 삶의 뿌리가 너무 깊어 고국이 그리워도 그곳으로 옮겨 심을 수 없다는 한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비단 그만의 한탄은 아닐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남의 나라에 뿌리내려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남의 나라라는 현재의 거주지 사이에서의 방황은 공통분모가 아니겠는가.   시인 자신을 형상화한 시로는 이라는 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센티멘탈한 서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이 시는 현대 연길 조선족 시인들의 공통적인 시풍이 그대로 배어 있다.     가는길 길손이라 갈길 바빠도   다시 돌아 눈길주며 외우는 이름   어느날 내 이허물 다 벗어놓고   너처럼 피어나랴 이 천지간에     - 시 중에서     그러나 시인 석화에게선 다른 조선족 시인들과 차별되는 점이 있으니, 그것은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형식과 소재의 참신성이다. 이라든가 연작시가 바로 그것인데 에 수록된 다른 시인들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그의 실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자본주의 세례를 받아 물질문명에 편승된 자아의 울림이 뿌리 깊은 향수와 정한을 채색하며 그의 앞으로의 시의 행보를 말해준다.     포도주 오렌지주스 혹은 랭커피 그 이름으로 그는 다시 명명된다       - 시 중에서     철근+시멘트+타일+...+땅= 벽체       - 시 중에서     1,2,3,4,5,6,7,8,9,10이 차례로 나와서 라고 했다 나는 라고 했다 라고 한다 라고 한다              - 시 중에서     자기가 나비인지 나비가 자기인지 누구는 모르겠다 고 했다지만 내가 지금 도대체 정말 무엇 인지 모르겠다 필경 전생에 걸상이나 전화기나 유리창이나 그러한 것들은 아니였겠는데 마주보이는것들은 모두가 딱 딱하고 빤질빤질하고 윤기도는것들뿐이다 개나 돼지나 그와 같은 것들은 하나도 없다             - 시 중에서   위에 인용한 시들은 필자에게 새롭게 도래한 세계를 향한 시인의 시상 확대가 얼마만큼의 표현의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엿보게 한다. 조선족 시인 석화의 특출성은 여기에 있다. 어쩔 수 없이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 미학 의식에 바탕을 뒀다고는 하나 새로운 문명 즉 모더니즘적인 요소를 실험하고 있는 그의 시야말로, 조선족의 시가 중국 본토의 시에 비해 형편없이 질이 떨어진다는 혹평을 거둬낼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필자는 그의 화려한 수상 경력에 박수와 함께 동의를 보낸다.   4. 외람된, 그러나 뜨거운   내밀한 정서의 공감만으론 폭넓은 독자와의 의사소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시가 일방적인 읊조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치열한 인식과 구체성,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항상성 유지, 이 모든 것이 결합된다면 조선족 시인 석화는 왕성한 시작 활동과 더불어 우리에게 더 많은 좋은 시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언젠가 모 문학잡지에서 어느 시인의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좋은 시는 좋고 나쁜 시는 나쁘다!" 필자는 선승의 화두와도 같던 그 짧은 문장에 지금까지도 혼란과 함께 주눅이 든다.   잘쓴 시와 못쓴 시에 대한 구별이나 판단은 어느 정도 보편적 수준에서 가능한 일이나, 어떤 시가 좋은 시고 또 어떤 시가 나쁜 시인지는 이십 년 가까이 시를 써오고 있는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것이 늘 숙제다.    “천지꽃”, 시인의 백년 묵향이 피어나다   글 / 김호림     특기할 일이었다. “천지꽃”이 남쪽 나라 한국에 피어났다. 천지꽃은 진달래를 이르는 조선 함경북도의 방언이다. 이 낱말은 현재로선 거의 연변 일대에서만 통한다. 그런데 “천지꽃”이라는 이름이 한국 교육과학기술부의 검정을 거친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버젓하게 나타났다. 시인 석화의 작품 “천지꽃과 백두산”이 교과서의 과목으로 수록된 것이다. 한국의 교과서에 이처럼 연변 조선족시인의 작품이 등장하는 것은 백년에 한번 피는 꽃처럼 전설로 불릴 정도. 기실 석화의 작품은 교과서에 실린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여러 편의 작품이 중국의 각종 문학선집과 중소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연변문학예술연구소, 연변대학 등 국내의 유수의 문학예술연구기구와 한국, 일본 등 국외 문학예술연구기구는 이미 석화의 문학창작현상과 작품세계를 연구하고 있다. 석화는 중학교 시절이던 1976년 처녀작을 발표해서부터 지금까지 3천여수의 시를 창작했으며 “나의 고백”을 비롯하여 4부의 시집을 출판, 해내외 각종 문학상과 문예상을 30여차 수상했다. 거기에는 “천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진달래문학상”, “지용시가문학상”, “전국대중가요작품상”, “해외동포문학상” 등이 망라된다. 석화는 조선족시단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일찍부터 해내외에 연변의 “천지꽃”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월계관을 쓴 애송이 1976년 5월 9일은 시인의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저의 첫 작품이 ‘연변일보’에 발표된 날이지요.” 석화는 그제 날의 감회에 잠긴 듯 잠깐 말을 멈춘다. 그날 담임교원 한병춘은 제자의 시가 실린 신문을 학교의 여러 교학연구실마다 들고 다니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다고 한다. 하긴 그럴 만 했다. 신문이나 잡지가 지금처럼 많지 못했던 그때 지면에 작품을 싣는다는 건 “하늘이 별 따기”와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연변일보”는 중국 조선족사회의 권위적인 일간지로 여간해서는 넘보기 힘든 간행물이었다. 또 문학도라는 이름 하나로도 선망의 대상이 되던 그 시절의 독특한 풍토였다. 그런데 아직 중학생인 열 일여덟 살의 애송이가 혜성처럼 홀연히 문단에 등극했던 것이다. 한병춘 선생은 바로 석화가 시인으로 성장하는 길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길라잡이였다. 석화는 1958년 대약진 운동 시기 룡정에서 태어났다. 정치운동은 그의 소년기에도 숙명처럼 계속 이어졌다. 훗날 화룡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지난 세기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은 동란의 “문화대혁명” 시기였다. 이때 물질적인 배고픔이 있었고 또 정신적인 배고픔이 있었다. “책이라곤 교과서 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중학교에 올라온 후 갑자기 책의 세계가 나타났다. 한병춘 선생의 저택에 서가가 있었던 것이다. 석화는 마치 꽃밭을 찾은 꿀벌처럼 금세 서가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조선의 시인 조기천, 김소월, 박팔양 그리고 러시아의 뿌쉬킨과 마야꼽스끼, 독일의 괴테와 하이네… 이름만 들어도 현혹할 시인들이 뭇별처럼 한꺼번에 등장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오로지 언어로도 감동을 주는 예술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석화가 시를 읽으면서 받은 감동은 실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아예 소설이나 극작품은 한쪽에 밀어놓고 시만 찾아서 읽었다.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 서정시 “흰 바위에 앉아서”, “수양버들”, “조선은 싸운다” 등은 아직도 구구절절 기억에 남아있단다. “백락은 천리마를 알아본다.” 한병춘 선생은 석화를 그의 대학친구인 유명한 시인 김문회에게 소개했다. 석화는 이로써 정식으로 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나중에 “연변일보”에 처녀작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던 것. 시 문학에 대한 사랑은 연변대학에 입학한 후 개인의 시 창작은 물론 문학동아리 “종소리문학사”의 창립 현장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석화는 “종소리문학사”의 초기 창설멤버의 일원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더불어 자주 시낭송모임을 가졌고 자작시를 강판글씨로 찍어냈다. 석화는 련인처럼 시우와 늘 함께 한다는 그 자체로만도 마냥 즐거웠다고 말한다. 대학의 글 마당에서 갈고 닦은 기예는 금방 나타났다. 대학을 졸업하기 바삐 석화는 시 “벗들아, 우리의 이름은 청춘” 등으로 원숙한 시인의 매력을 발산한다.     시인의 꽃의 “장례식” 대학을 졸업한 후 석화는 연변라디오방송국에 기자, 편집으로 배치된다. 이 기간 그는 짧은 몇달 사이에 6부의 녹음테이프(가사)를 출판하는 실적을 올린다. “유병걸노래집”, “구련옥노래집”, “김은희독창집”, “김상운독창집”, “한해연독창집” 등 유명한 조선족가수의 카세트노래특집의 가사는 모두 그가 창작한 것이다. 솔직히 석화는 음악부의 편집이었기 때문에 가사를 쓰는데 월등한 플랫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누구더라도 그 자리에 설 경우 가요창작의 “코기러기”로 될 수 있지 않을까. 일찍부터 시 작품으로 명성을 날린 석화에게는 가수와 작곡가들의 청탁이 한시도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실제 석화는 방송국 입사 전부터 가사창작에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세월과 더불어 오래오래 전해질 그런 노래를 써볼 욕심이 있었지요.” 흰 눈처럼 깨끗한 사랑과 풋풋한 인정세계를 펼치고 있는 가사들은 금세 작곡가의 마음을 사로잡아 오선보를 탔으며 뒤미처 가수의 감미로운 목청에 실렸다. 이때 석화는 그의 창작생애의 황금기를 맞으며 무려 수백 수의 가사를 창작한다. 가요 “동동타령”, “추억의 노래”, “어머님 생각”, “별과 꽃과 선생님”, “동그라미”, “노래를 부릅시다”, “돌다리” 등 가요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날이 가고 달이 갔다. 방송국에서 근무한지 거의 20년 세월이 흘렀다. 애석한 그 무엇이 노래처럼 늘 가슴 한구석에 맴돌았고 그것이 풀지 못할 응어리로 되어 점점 커졌다. “작품이 그냥 소리로만 만들어지고 책으로 남지 않는 게 늘 아쉬웠습니다.” 마침 연변작가협회 기관지인 “연변문학”에서 편집으로 초청하는 러브콜이 날아왔다. 석화는 그에게 한때 꿈의 향연을 펼쳤던 방송국을 미련 없이 떠난다. 자칫 “가요의 산원”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치는 파격적인 전근이었다. 이 무렵 시인의 “자아”에 대한 고민은 하나의 정상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가 창작한 시들은 행마다 뼈를 깎는듯한 시인의 고뇌를 담고 있었다. 시 “우리는 개인가”, “나는 나입니다” 등등으로 그는 스스로 물음을 연방 제기하고 또 나름대로 그에 따른 대답을 찾고자 방황한다. 그의 말을 빈다면 시와 만나는 과정은 자아를 찾아가고 확인하며 구원하는 과정이었다. 드디어 석화는 시단에서 “나의 장례식”을 치르기에 이른다. 필묵을 던지고 문학석사 학위에 도전장을 냈던 것이다. 어제 날의 “시인”을 묻어버리고 새로운 “시인”으로 도약하기 위한 파격적인 행보였다. 2001년 그는 한국 대전의 배재대학교 인문대학원에 들어갔다.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수강했지만 그 시간이 그토록 즐거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모든 학과목에서 A학점을 취득, 드디어 2003년 학위론문 “김조규시문학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 기간 석화는 연변대학의 지인과 함께 서울과 지방의 대학, 문인협회에서 중국조선족문학알리기 세미나를 수십회 조직했으며 한국의 여러 간행물과 신문에 중국조선족문학과 관련한 론문을 십여편 발표했다. 2006년 그는 한국학술정보사에 문학평론집 “시와 삶의 대화”를 출간한데 이어 또 연변인민출판사에 “윤동주대표시 해설과 감상”을 펴냈다. 석화는 어느덧 학자풍의 시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시인의 백년의 묵향(墨香) 운명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귀국한 후 석화가 창작한 첫 시는 또 “연변일보”에 발표된다. 련작시 “사모곡”이다. 그가 한국에서 공부를 하던 기간 연변에 계시던 양친은 모두 세상을 떴다. 부모에 대한 애절한 사랑은 나중에 시라는 이름으로 맺혀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석화의 시는 민족의식과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삼고 있으며 예전보다 한결 차원이 다른 사고와 경지를 열어 보인다. 시단에는 석화의 또 하나의 “처녀작”이 샛별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뒤미처 발표된 련작시 “연변”도 “사모곡”과 맥을 같이한다. 련작시 “연변”은 연변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과 연변의 풍경, 풍습을 점점의 풍속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한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시 “천지꽃과 백두산”은 22편으로 된 이 련작시의 첫 시이다. 석화는 련작시 “연변”의 창작동기에 대해 “류학시절에 한국에서 그리운 북쪽하늘을 넋 없이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리운 산천과 그리운 얼굴들이 흰 구름처럼 비껴있을 것만 같은 하늘이기 때문이었다.     “이른 봄이면 진달래가 천지꽃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어나는 곳이다…”     진짜 머나먼 북쪽의 하늘아래에는 “천지꽃”의 고향이 있었고 또 연분홍의 “천지꽃”이 피어나 있었다. 석화는 충주(忠州) 석씨의 32대손으로 입북 14대이다. 그의 조부는 8세 때인 1911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연변의 룡정 장재촌에 이주했다고 한다. 부친은 장재촌에서 태어나 화룡에서 생활했고 모친은 해주 최씨로 도문 출생이었다. “저의 딸은 또 연길 태생이지요.” 석화는 인터뷰 도중에 외동딸의 자랑을 잊지 않았다. 딸 석현은 아빠보다 훨씬 더 이른 소학교 5학년 때 벌써 작품을 발표, 장편소설 “개구장이친구들”을 선후로 중국과 한국에서 출판했다. 석현은 현재 일본 도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단다. 이처럼 조부가 이삿짐을 풀고 양친과 나, 자식을 양육한 연변에 시인은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마을 뒤산에 낮은 언덕으로 누워 계시고 해살이 유리창에 반짝이는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가 한창이다”     시는 또 연변에서 이주민들이 모여 살면서 집단촌이 이뤄지던 정경을 등장시키며 옛 우물인 “룡두레우물”을 시행으로 끌어들여 연변 조선족의 유구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천지꽃과 백두산”은 석화의 가족뿐만 아닌 연변에 이주한 겨레의 백년의 삶과 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겨레의 연변의 백년 이주사가 “천지꽃”에 묵향으로 소담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중국조선족 시인 석화의 작품세계  서석화  1  한 사람의 시인을 평가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한 권의 시집만으로는 지극히 도식적인 형식비평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 작품에 다루어진 사회상 혹은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 등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역사주의 비평과는 달리 작품 자체의 형식적인 요건들, 작품 각 부분들의 배열관계 및 전체와의 관계 등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일찍이 엘리어트는 "시란 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닌 시 자체"라고 하여 시를 그 무엇으로부터도 독립된 하나의 자율적 구조체로 보았던 형식주의자들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비평가가 작가를 버리고 작품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결국 문학작품의 자리를 작가 쪽이 아니라 비평가, 혹은 독자 쪽에 둔다는 것으로 이 경우 비평에서 예상되는 결과는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주관주의, 가치의 아나키즘 등에 오히려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돌파구 가운데 하나는 작품 밖에서 유용한 자료를 찾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상의 시정이 될 것이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나 그것을 끌어들이는 감정의 이면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삶을 말해주는 필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조선족 3세인 시인 는 1958년 중국 룡정 출신으로 다른 조선족들보다 비교적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1982년 연변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월간 연변문학 편집을 맡게된다. 등단과 함께 , , , , , , , 등 연변자치 주, 성, 국가 급의 문학상과 문예상을 50여 회 수상함으로써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는 일찌감치 자리 매김을 확실히 했다고 할 수 있다. 1989년 시집 , 1993년 시집 등을 간행했으며 본 시집 가 에 당선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조선족 사회의 대들보 시인이 된 시인 의 시를 동시대를 살고 있으며, 같이 시를 쓰는 입장이라고는 하나 태어나고 자란 곳, 그리고 삶의 뿌리가 다른 그가 살고 있는 연변이라는 지역 속에서 이해의 첫 문을 열며 읽어보기로 한다.  2  우선 그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언어의 평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이라는 사회가 주는 낙후된 풍경이 그의 시에서는 거부감 없이 나타난다. 발표자가 2년 전 연변에 갔을 때 우선 느낀 점은 시각적으로 20여 년 전의 도시 풍경을 영화 세트 장에서 보는 듯한 발달이전의 소도시 모습이었다. 낮은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달린 간판과 불균형의 글씨체, 그 속을 오가는 빨간 택시들, 택시 수보다 더 많은 자전거들, 그리고 40도에 가까운 폭염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상의를 벗어 던진 러닝 차림의 남자들이 나른한 표정으로 길가를 걸어다니던 모습.......  쉽게 촌스럽다고 말해버릴 수만은 없는 개화 이전의 풍경 속에서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나 우린 서로에게 이방인이었다. 언어는 시대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 의 시가 가지는 언어의 평이성과 또 나름대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기법의 시도는 연변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선 제대로 읽을 수 없으며, 한 권의 시집만으로는 긍정이 불가능한 그의 화려한 문학이력 역시 연변과 조선족이라는 두 개의 화두를 풀고서야 동조할 수 있다.  문학상이 많다는 건 각 나라마다의 특수한 사정이랄 수 있겠으나 아직 사십 중반도 되지 않은 시인이 50여 회나 상을 수상했다는 자체에서 나는 교포들의 지독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상이라는 것은 축제의 행사이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일시적이나마 하나로 묶는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시인 가 수상한 상의 이름이 모두 고국인 한국의 지명이나 산하를 딴 것이라는 것에서도 그들, 조선족 시인들이 가지는 향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 시집 를 읽어가며 나는 정지용이란 대 시인의 이름을 건 상을 수상한 작품으로서 솔직히 미흡한 부분이 너무 많아 이런 나의 생각의 오류를 잡기 위해서라도 다른 연변 조선족 시인들의 시를 같이 읽어보기로 했다. 월간에서 발행되고 있는 연변문학 99년 1년 분량이 연변으로부터 공수되어 왔고, 그것을 읽어나가며 - 절대로 그들 연변 조선족 시인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 시인 석화의 시가 그들 사회에서 가지는 가치와 위상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 긍정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시는 한국 시 고유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정한에 뿌리한 서정성에 스토리 위주의 시가 일색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깊이 있는 정신의 사유라든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수용의 태세보다는 일상, 그것도 과거에 대한 회상이 주조를 이루고 자연현상 하나에도 억지의미를 돌출해 내려는 무리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영탄조의 시가 일색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엔 연변 문학 99년 7월호에 발표된 황춘옥의 이라든가 같은 해 1월호에 발표된 의 같이 현대시가 지향해야할 모범적인 시정신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었다. 이런 여러 정황들을 이해하고 나서야 나는 시인 의 시를 형식주의가 아닌 미력하나마 역사 전기적인 입장에서 그의 수상경력과 함께 그의 시가 주는 울림을 동포의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3  그의 시는 전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포 3세라고는 하나 고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살고 있는 이방인의 향수가 시의 주조를 이룬다. 이라는 부제가 붙여진 이라는 시를 보면 그런 그의 향수의식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기실 모두가 저쪽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엷은 안개가 가물가물 피여오르는 한 줄기 강물, 먼  서쪽나라의 어느 하늘밑을 흘러가는 요단강처럼 우  리는 누구나가 다 한줄기 강물을 갖고 있다  피안 혹은 대안이라 부르는 저쪽켠의 강기슭 아슴푸  레 바라다 보이는 저쪽 기슭으로 늘 건너가 보고 싶지  만 피와 살과 뼈가 너무 무겁다  기실 모두가 다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 것이지만 지금  은 그냥 그저 건너가 보고싶은 생각 뿐이다  지금 저쪽 기슭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계실 어느  분도 이와 같은 시를 쓰고 있을가  -피안-  피안이란 불교에서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 또는 그 경지를 말한다. 시인은 그곳에 고국을 두고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이민족이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의 정처 없음이 이 시에서는 열반의 세계를 꿈꾸듯 고국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3연에서 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것은 이미 타국에서 정착된 시인의 삶의 뿌리가 깊어 고국이 그리워도 그곳으로 옮겨 심을 수 없다는 한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비단 시인만의 한탄은 아닐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남의 나라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교포들이라면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무대가 되고 있는 현재의 거주지 사이에서의 이방인적인 방황은 공통분모가 아니겠는가? 시인 자신을 형상화한 시로는 이라는 시가 눈에 띈다. 센티멘탈한 서정을 가감없이 드러낸 이 시는 연변 조선족 시인들의 공통적인 시풍이 그대로 배어있다.  가는 길 길손이라  갈길 바빠도  다시 돌아 눈길주며  외우는 이름  어느날 내 이허물  다 벗어놓고  너처럼 피어나랴  이 천지간에  -천지꽃 중에서-  그러나 시인 석화는 다른 연변 조선족 시인들에 비해 다채로운 시작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라든가 연작시가 그것인데, 연변문학에 수록된 다른시인들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참신성과 기발한 소재채택에서 자본주의로 가고 있는 연변의 문화를 체함없이 소화해내고 있다. 바로 여기에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 그의 시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예술이란 그 분야를 막논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도전정신과 그것을 내것으로 하려는 의지를 필요로 한다. 쉽게 서정이라 불리워지는 자칫 무력한 시풍에서 벗어나 사물을 기호화하고 끊임없이 뻗어 가는 정신세계를 시로 끌어들이려는 그의 노력은 그래서 귀한 것이다.  포도주  오렌지주스  혹은 랭커피  내안의 너  그 이름으로  그는 다시 명명된다.  -유리컵과 사랑학개론- 중에서  철근 + 세멘트 + 타일 + ...... + 땅 = 벽체  벽체 * 유리 * 페인트 * ...... * 하늘 = 빌딩  -작품36(가감승제와 방정식)- 중에서  1,2,3,4,5,6,7,8,9,10이 차례로 나와서  라고 한다  나는 라고 했다  라고 한다  라고 한다  -작품39(협박)- 중에서  자기가 나비인지 나비가 자기인지 누구는 모르겠다  고 했다지만 나야말로 내가 지금 도대체 정말 무엇  인지 모르겠다  필경 전생에 걸상이나 전화기나 유리창이나 그러한  것들은 아니였겠는데 마주보이는것들은 모두가 딱  딱하고 빤질빤질하고 윤기도는것들뿐이다  개나 돼지나 그와 같은 것들은 하나도 없다.  -작품91(탈출)- 중에서  위의 시들에서는 시인의 언어적 탐구가 외적 세계에 대한 응전의 방식과 연관지어보려는 노력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에 사는 우리가 읽어도 전혀 이질감이나 시적 성취도 면에서 떨어지지 않음을 위의 시에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적인 시적 세련됨은 물론이요, 시인의 사물을 바라보는 엄정한 내부의 시선이 항상적으로 유지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집 전편을 논한다면 인식의 치열함이랄까 아직 완전히 자  기 것이 되지 못한 신문물에 대한 낯설음 또한 배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중국조선족 시인 의 시를 살펴보았다. 시를 쓰는 것도 어렵지만 남의 시를 바르게 읽어내는 일이야말로 책임이 부과된 만큼의 어려움을 동반하는 힘든 작업이었음을 글을 끝내며 밝힌다. 오독이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끝-                     [출처] "천지 꽃 "시인의 백년 묵향이 피여나다 |작성자 엘리자리
154    시인 - 김응룡 댓글:  조회:4810  추천:0  2015-03-08
김응룡시집 《붉은 잠자리》 출간 편집/기자: [ 김태국 ][ 길림신문 ] 발표시간:2014-06-06  연변시인협회 부회장 겸 비서장인 김응룡시인의 시집 《붉은 잠자리》가 최근에 연변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화룡시 남평진 버들골에서 출생한 시인은 선후로 교원, 덕화향문화소 소장, 연변인민방송국 청소년부 주임, 《연변문학》월간사 시평론실 주임 등을 력임하면서 장편실화소설 《얼의 몸부림》, 《삶의 선택》, 《물속의 불》, 《잔디풀의 작은 사랑》, 번역소설집 《숲속에서 맺은 사랑》 등 다수를 출간하고 한국세계계관시인상, 한국《문예시대》해외동포문학상, 전국동요콩쿠르 1등상 등 다수를 수상한바 있다. 서예박사 서영근씨가 김응룡(가운데)시인의 시로 창작한 작품을 시인에게 증정했다.  석화시인은 《고향, 말없이 바라보는 눈물 젖은 시선-김응룡시인의 시세계》라는 평론에서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면서도 표현력이 풍부한 시적언어로 작품의 소재와 제재 및 주제를 다뤄내는 능력이 우수한 김응룡시인의 《붉은 잠자리》는 《고향》이라는 시어가 담아내는 공간적이미지와 《인생》이라는 시어가 실어오는 시간적이미지가 서로 어울리면서 엮어진 아름다운 시집이라고 평가하였다. 174쪽 분량의 시집에는 109수의 시가 7부에 나뉘여 수록되였다.     
153    시인 - 김학송 댓글:  조회:4076  추천:0  2015-03-08
  시인의 노래        1 취재대상에 대한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문화부에 배당된 시골현장에만 내려가다가 이번에는 대상을 바꾸어 문학계로 눈길을 돌렸다. 연변문학 30년의 성과보고에서도 언급하다싶이 문학계는 개혁개방 30년 동안 그야말로 풍성한 성과를 안아왔고 그만치  성과를 따낸 문학인을 찾기도  쉬운 일이였다. 김학송시인을 찾은 계기는 금번 전국 제9회 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평의에서 시집《사람속에서 사람 그리워》로《준마상(상금 만원)》을 수상했다기보다 타의추종을 불허할 다산시인이라는 점이 더 작용한것이다. 2   김학송(56세)시인은 문학창작에 전전한 30여년 동안 26권의 시집, 에세이집을 펴낸 다산작가이다. 조선족시인중에서도 최다의 시집을 펴낸 김학송시인을 만난건 그가 근무하는 《연변문학》편집부에서다. 다음 취재의 편리를 위해서 그의 주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해가 석사연구생으로 공부하는  아들의 뒤바라지 하러 한국으로 갔는지라 요즈음은 홀아비생활이라고 서글픈 모습을 보였지만 두 벽면을 메운 서재에서 시인의 서글픔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향기가 은은히 묻어나는 노래하는 시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1952년, 도문시 월청진 화평촌(곡수촌)에서 6남매 대가정에서 남자항렬 맏이로 태여나고 소학, 중학을 마치고 시골에 하향하던 시기는 10대 후반이였다. 하방한 아버지로 하여 하향지식청년으로 되고 시골에서 논물관리원, 과학시험소조 조장으로 7년을 두루 시골을 배우다가 행운스레 장춘야금학교에가서 지질탐사를 전공으로 배운것은 그의 인생의 새로운 첫번째 전환점이였다. 하지만 배운 전업이 싫어서 도문에 와서 술담배공사, 석유공사,  보위간사, 공청단서기 등 다채로운 직업에서 헤염치다가 그후 연변대학(작가반)에 입학한것이 관건적인 전환점이 된다. 여기에서 김학송시인은 문학이라는 평생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고 지금까지 줄기차게 달려온다. 도문시가무단, 연변가무단 창작조를 거쳐 현재는 월간《연변문 학》지에서 시편집으로 사업하고있다. 3 흔히《문화대혁명》의 동란속에서 소년기와 청춘기를 잃어버린 홍위병 세대들을 일컬어서 우롱당한 세대라 한다. 말 그대로 저마다 혼돈씨가 되여 《볼품없이 망가진 얼룩 세월을》칠하면서 우매로 세례당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다. 김학송시인 역시 례외가 아니다. 아버지의 하방, 차도 통하지 않던 오지, 가난, 인간가치의 상실은 그의 젊은 시절의 초라한 초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세월은 후날 시인에게 김학송시인만의 시적언어 확립과 창작경지를 톱는 밑천이 되기도 한다. 인간적으로 약간은 엉뚱한데가 있고 개성이 강한것만치 시창작에서도 전위에 나섰다. 시인의 말을 빈다면 자신의 경력과 천성에 맞는 언어적인 스타일을 빨리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독보적인것으로 만드는것을 소명으로 알던 시인의 시어는 쉬운 말로 말하면 벽계수가 흐르듯 경쾌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김학송의 아름다운 시어는 그의 투박한 성격과는 다르다고도 말한다. 영혼의 마찰과 울림이 담긴 소박한, 구체적 형상화의 시를 창작하고 순수하게 마음을 울리는 시. 독자와 호흡을 할수 있는 맑은시, 그러면서도 은은한 무게와 간절한 혼이 침투되여 고도의 진정성을 바탕으로 날개가 있는 시를 창작하여 《중국조선족시단에서 현대시창작의 첨단을 달리는 시인중의 한 사람으로 현대문명에 찌든 이웃도 모르는 도시 , 각박한 인심, 영악한 인간관계에 대한 항변이 여울치고… 오염되지 않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룬 인류의 요람시대를 창조하려는 갈망 숨쉬고있다.》(조성일)《김학송시인의 절대적가치에의 탐구는 기대와 고통의 련속으로서 그 서정이 아로새겨지고 … 현실적고통을 감내하는 구도적자세가 보이며 전통에의 진진한 승화와 계승의식이 투철하다.》라는 평이 쏟아진다. 한 시인의 시창작과 그의 세계는 시인의 사고의 넓이와 이 세상을 포섭하는 시각의 깊이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특히 1990년대 초기 한국체류는 시인의 문학사고폭을 넓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인은 빈번한 한국문인들과의 교류, 독서에서 의식의 변화를 추진시켰고 현대시창작실험에 대담하게 달라붙었다. 2년도 안되는 사이에 그는 한국에서 10여권에 달하는 창작시집을 출판하였고 귀국후에도 15권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펴내 최다 시집출판기록과 해외 출판에서의 최다기록을 보유했다. 그의 시는 자연의 섭리와 질서속에서 인간의 내면공간의 실존적인 양태를 치렬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표출시킨것으로 특징지어진다. 하기에 시단에 대한 기여도가 있는 시인으로 통하기도 한다. 4   김학송시인에 대해 자상한 소개를 차지하고 굵직한 소개를 하자 해도 편폭이 모자란다. 지금까지 200수에 달하는 가사를 썼는데 그중에는 조선족들이 즐겨부르는《아버지에게 드리는 노래》,《세월은 흘러도》,《고향은 청춘》 등 노래가 있는가 하면 조선족중학교의무교과서에 《태산에 오르며》란 수필이 등재되고 소학교 6학년 의무교과서(상권) 에는 《첫눈》, 하권에는《완두밥》,《박넝쿨》이 등재되였고 1984년-19 97년 동시 《봄비》가 등재되기도 했다. 열독교과서에 실린것까지 합치면 근 20여수(편)의 시와 수필이 등재되는 호황기를 맞기도 했다. 그외에도 연변에서 제일 처음으로 등산팀을 발족시킨 장본인, 수석 (기의한 돌 수집)에 특별한 애정을 쏟고 돌에도 력사와 년륜이 있고 시가 있다고 주장하는 시인이다. 수석관련전문저서도 출판했다. 개혁개방은 문화계에서 가장 빠르게 접수했고 작가들에게는 창작의 호황기를 마련해주었다. 사상의 해방과 작가들의 창작대상에 대한 자유는 문화에서의 개혁개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학송시인도  문뜩문뜩 아버지의 하방년대와 그후 개혁개방이 가정에 가져다준 문학적인 실리를 비유하면서 감개무량한 표정을 보였다. 연변일보     시인의 가치와 효용성   김학송   감동이 증발하고 인정이 추방된 세상에 대체 시인은 필요한 존재인가?   물질만능의 세월에 시는 웬 뚱딴지같은 시란 말인가?   혹자는 이런 의혹을 제기해올수도 있다. 그렇다. 세상은 갈수록 삭막해가고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쪽으로 급속히 기울어져간다. 정신적인 카오스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있는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겉에 드러난 현상일뿐 삶의 전부의 본질은 아니다. 사람이 살자면 우선 먹을 밥이 있어야 하고 입을 옷이 있어야 하고 잠잘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 이것은 삶의 기본조건들이다.   그밖에 공기처럼 해살처럼 만질수는 없지만 지극히 소중한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문학이요 음악이요 시이다. 시는 정신의 밥, 정신의 옷, 정신의 집이라고 할수 있다. 여느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문화적인 동물이기때문이다.   단순 의식주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높은 지표을 향한 몸부림이 인간을 시와 문학을 옹호하게 하는것이다.   시는 생활의 품위와 품격을 높여주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다. 그래서 유사이래 호연지기가 있는 영웅남아들은 거의 모두가 시를 써서 자신의 드넓은 흉금과 드높은 의기를 표현하였다.   허다한 사람들은 시를 가까이 하려다 다가설수 없으니 야릇한 분노와 시기심에서 타매할뿐이지 본심은 그게 아니다. 시가 중요하고 또 대단히 매력적이라는것쯤은 알고있다.   나의 작은 체험으로 보면 시는 시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마음이 보이잖는 곳에 꿈의 집을 짓는 까닭이다. 그 집에는 해와 달이 찾아오고 신선이 춤을 추고 바람이 놀다 간다. 시는 지상과 천상을 련결하는 신비로운 통로이다. 시인의 집은 가난해도 풍요롭다. 시인은 마음의 귀로 듣고 마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하기에 그들에겐 꽃이 웃는 소리, 돌이 말하?소리가 들리고 새와 나무가 흘리는 눈물도 보인다. 모든 사물과 령혼의 대화가 가능하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듣기때문이다.   그들은 찰나속의 영원을 보아내며 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사귄다. 무한히 작은것에서 무한히 크고 위대한것을 보아내며 작은 행복에서 큰 감사와 큰 의미를 깨닫는다. 하기에 속인들이 느낄수 없는 신성한 령역에서 마음은 독립하고 정신은 자유롭다. 하나의 완정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갖고 사는게 시인이다. 그들의 삶의 질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보이잖는 거대한 재부를 가진 사람들이다. 하기에 시인은 가난해도 행복하다.    2008년 4월호
152    시인 - 김영건 댓글:  조회:4400  추천:0  2015-03-08
  김영건의 세번째 시집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출간 모임이 지난 7월 17일 오후 연변인민출판사 민족문정기간행물센터와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의 주최, 화룡시 서성진정부와 화룡시문화관의 후원으로 화룡시 서성진 왕룡촌에서 있었다. 김영건시인의 문우들과 동료, 친구, 일가친척 등 50여명의 하객이 자리를 같이 하였다. 시집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는 “심지절창”, ‘아오모니 기억”, “바람을 가르는 팡세”, “파페포토 투게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 4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시인이 최근년간에 창작한 112수의 주옥같은 시로 묶어졌다. 한춘평론가는 시집 머리말에서 “김시인은 존재와 부재사이를 왕래하는 인간실존의 량면성을 정직하게 시인하고 인간의 존재를 우주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인간의 부끄러운 실상과 민족의 아픔실상을 묘파하는데 중시를 돌리고있다.”고 설파하고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하객들은 김영건시인은 역설, 변형과 굴절,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통해 참신한 시적형상을 창조하고있다면서 계속하여 유수한 시작으로 우리 시단을 한결 빛내주기를 바랐다. 김영건시인은 일찍 연변텔레비죤 프로듀서, 감독으로 활약하면서 많은 인기프로들을 창출하였으며 중국 100대방송인, 성 10대 방송인으로 선정되였다. 그리고 전국소수민족 준마상, 중국소수민족최우수방송프로 최우수감독상 등 큰 상들을 수십차나 안아왔다. 현재 김영건시인은 연변인민출판사《문화시대》주필,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주임, 연변시가학회 회장, 심련수문학상운영위원회 회장 등으로 활약하고있다.                                     도옥 김영건 4번째 시집 펴내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6-06 ]               도옥 김영건시인의 4번째 시집《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가 일전에 연       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발행되였다.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연세대학, 중앙대영상대학원을 수료한 김영건시인       은 연변TV드라마부 편집, 문예부프로듀서, 감독, 주임, “주말극장”, 연변TV음력설       야회 등 각종 문예야회 총연출을 맡은바 있으며 중국 100대 방송인, 길림성 10대       방송인, 전국소수민족준마상, 중국조선족출판문화대상, 길림성두루미상, 연변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유스트문화상, 윤동주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해란강       문학상, 단군문학상 등 상을 수상하였다. 국가1급 감독이기도 한 김영건시인은 현       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가창작위원회 주임, 연변시가학회 회장, 연변인민출판       사 《문화시대》 주필 등 직을 맡고있다.           115수의 근작시들을 수록한 시집은 제1부 “구색아리랑”, 제2부 “나무와 물의       대화”, 제3부 “몽접의 호수”, 제4부 “바다와 륙지의 잠언”, 제5부 “세상은 안개숲이       다”로 되였으며 시집 《사랑은 전개가 없다》, 《빈자리로 남은 리유》, 《아침산       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에 이어 시인이 4번째로 펴낸 시집이다.           연변대학 우상렬교수는 책머리에 쓴 “충돌의 미학ㅡ아름다운 시세계”라는 글       에서 “그의 시는 이미지로 말한다.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하다.”고 평가하였고 시       인, 평론가 한영남은 “우주를 향한 민족서정의 하모니”라는 평론에서 “김영건시인       의 시는 높은 산정에 올라 인간세태를 굽어보며 우주애적인 세계관으로 민족정서       를 녹여내고있다”고 평가하였다.    
151    동시인 - 림금산 댓글:  조회:4458  추천:0  2015-03-08
림금산 시인의 詩와 함께       시집: “불새”,  “살구꽃 복사꽃” 등 수권 정지용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백두아동문학상, 해외동포문학 안민상 등 수차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이사,  중국조선족소년보사 기자부 부장.     살아간다는 것은   눈물을 버리지 말아라 놋대야에 잘 담아뒀다 화분에 주어라 그러면 눈물을 먹고 꽃은 피여난다 그 꽃에서 풍기는  향기는 눈물냄새가 나리라   아픔을 버리지 말고 하얀 손수건에 잘 싸두어라 그랬다가 가슴에 번열이 날때 꺼내보면 가슴에 봄이 내려앉는다 그 봄이파리에는 고름이  탐스럽게 열릴것이다…   장모님   당뇨병으로 앓던 장모님 어느 날부턴가 한쪽 눈이 멀었다 한쪽 눈이 먼 장모님  다른 한쪽 눈은 더욱 커보인다 근심이 묻혔는지 울음이 숨었는지  한쪽 눈이여서 잘 알리지 않는다 그저 이왕보다 더욱 깊어지고 우묵한 눈이다 한쪽 눈으로만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애절한 바램은 무엇일가? 말한마디 못 번지며 운명하던 그 시각 이미 멀어진 다른 한쪽눈으로  당분이 피처럼 진하게 흘러내린다.   다향(茶香)앞에   가벼운 차잔을 들고 나는 무거운 생을 음미한다 잠간이나마 뜨는 기분을 눅잦히고  한걸음 가까운 사색을 보듬을때 성숙은 내곁에 꽃으로 입을 열고 피보다 붉은 진실은  나의 이마에 화려한 꽃나비를 불러온다   친구야, 다향(茶香)의 말씀앞에   거짓을 눈짓하는건  조금은 부끄러운 소행이거늘 찻닢이 물우에 조용히 펴지듯 진실앞에 우리는 언제나 반듯한 마음안고  차분한 기도(祷告)로 숙연해 지자.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24호 2014년 10월 14일 발행   나와 문학                                                 림금산     꿈으로 아롱진 대학시절     나는 대학입시준비를 할때부터 문학전업을 가려고 윽 별렀다. 일찍 고중시절부터 문학에 심취한 나는도문시 장안진(위자구)에서 룡정고중사회반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룡정북신소학교 교정에서대학입시를 치렀다. 룡정의 공부를 마치고 숙소의 짐들을 꾸려가지고 장안진으로 올때 나는 아직 대학입학통지서도 내려오겠는지 미결인데도 연길에 들려 내가 제1지망으로 써넣은 연변대학조문학부가생각나 특별히 연변대학 언덕에 올라보았다. 나는 그날 연대언덕에 걸터앉아 가고 오는 대학생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조문전업에서 대학시절을 보낼 황홀한 꿈을 꾸어봤다.   과연 얼마 안지나 룡정으로 부터 대학입학통지서가 날아왔다. 나는 꿈에도 그리던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대학시절 나는 공부보다는 문학창작의 꿈을 붙안고 계속 독서와 창작을 주업으로삼았다. 그때는 또 주위의 문학창작풍토와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말그대로 최고의 창작분위기였다.조문전업만 보아도 우리 우학급으로 김호웅, 석화, 류연산, 김성우, 김관웅(한어전업),김장혁, 박문봉,김경훈, 조일남, 한창선… 리혜선(한어전업)조성희 등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이 있었고 우리 반급에는소설가 한정화, 수필가 최순희, , 남춘애, 시인 남상수, 윤영애, 김춘산이 있었는가 하면 우리 아래 학급으로는 수필가 리영애, 리춘희,남복실, 김창석,김옥희, 시인 주성화(수학학부), 김춘희, 윤경찬(수학학부) 평론가 우상렬, 리광일 등 분들이 많이도 포진해 있었다.   또 이 때 마침 김철시인을 주도로 한 연변작가협회에서 연변대학과 합의하여 본과학력의 문학반도 개설하였는데 거기에는 이미 창작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고있던 김학천,전태균,김학송, 김철호, 우광훈,리선희, 윤림호, 권중철, 류흥식 등 많은 시인, 작가들이 포진하여 있었다. 이런 문학의 대호황기에 나는 그들속에서 진한 문학의 자양분을 맘껏 만끽할수가 있었다.   또 이것뿐만이 아니였다. 우리한테 문학지식과 창작열정을 한껏 불어넣어주었던 연변대학의 쟁쟁한문학교수분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로는 정판룡교수를 비롯하여 최윤갑, 현룡순, 림휘, 허호일, 허룡구, 김해룡, 리해산, 박상봉, 현동언, 최건, 김기종, 김만석 등분들이였는데 한쪽으로 문학리론저술과 문학창작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교학을 하였었다. 이런 하좋은 분위기는 나한테도 매일같이 시쪼각을 긁적이게 만들었고 베끼고 암기하고 랑송하도록 하였다. 나는 그때 연변대학도서관의거의 전부의 우리말 시집을 수차 뒤졌으며 문학신문, 만선일보 등 많은 우리 민족문학에 관계되는 자료들을 섭렵하였다.   그때는 문학의 풍토가 하도 농후하여 쩍하면 조문학부를 중심으로 문학동아리 활동을 거세차게 진행하였는데 해마다 몇차례씩 소설창작특강이나 시창작 특강, 시랑송모임을 조직하였다. 그때 자주 연변대학조문학부에 초청받아 오신 분들로는 김학철,김철, 김성휘, 림원춘…등 분들이였다. 우리는 연변대학 본교 4층청사에서 행사를 많이 가졌는데 지어 리욱시인까지 남의 부축임을 받아가면서 시낭송에참가하여 백두산과 사랑에 대하여 읊어 크나큰 감동을 주군 했다.   우리는 또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이면 교실에 모여 자체로 프린트지 “종소리”잡지를 자주 꾸려냈으며우리의 동아리들 잡지에 김철, 김성휘, 리상각 등분들의 시들을 학생작품과 함게 발표하기도 했다. 나는 졸업할때까지 벌써 공개간행물에 시 20여수를 발표하여 대학생으로서는 최고의 발표률을 올렸고연변작가협회에서 아직 학생이기에 회원으로 받지 못하는걸 퍽 아쉬워하기도 했었다. 또 이 무렵 “아리랑”문학지 책임자였던 김성휘시인은 “아리랑”잡지에 머리말까지 달아서 자주 연변대학 학생특집을꾸려주어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른다.   눈부신 청년시회활동   사회에 나온 후에도 문학그루빠활동은 계속되였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안도현에 배치받아 교편을잡았지만 문학창작은 끊지않고 줄기차게 진행하였다. 계속 각지의 잡지들에 시작품을 투고하고 원고비가 오면 교원들과 함께 술판을 벌리고 작품발표의 기쁨을 한껏 맛보군하였다. 내가 배치받은 학교는안도현 제2고중이였는데 나는 학교에 문학써클조를 꾸려놓고 매일이다 싶이 습작지도를 하는 한편 계속 자신의 글도 써나갔다. 연변인민출판사의 조룡남선생님과 료녕의 “새마을”잡지 박화선생님도 편지로 나의 창작을 많이 고무해주었다. 조룡남시인은 지어 나의 시작품을 “아리랑”잡지에다 한꺼번에7수를 발표해주기도 하면서 시가 잘 익었다고 고무해주었고 연변일보 문예부의 최룡관시인은 여러차나의 시묶음을 발표해주었다. 하여 나는 문인들이 극히 적은 명월진에서도 별로 고독한줄 몰랐었다.   한번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원고비가 왔는데 45원이였다. 옆자리교원들은 나더러 한턱 내라고 해서내가 전교의 남성청년교원들을 거의 불러모았는데 모두들 이상해 하였다. “원고비가 어떻게 45원이나되는가? 4원 50전이겠지…” 그들은 진짜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때 나의 한달 로임이 70여원이였으니 45원이면 반달 로임보다도 더 많으니깐 말이다. 나는 그 돈으로 청년교원들을 다 접대하고도 남았다.   그러던 1년후의 어느날 안도현의 소설가 김희철선생께서 나한테 전화가 왔다. 내가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비준되였다는것이였다. 당시 안도현에는 작가협회 회원이 조선족으로는 나까지 3명이였다. 즉김희철, 리룡득과 나였다. 김희철선생은 그때 당시에 “연변문예”지에 중편소설도 자주 련재하던 아주유망한 소설가였는데 나의 가담으로 안도현문인들의 력량이 가강되였다면서 학교교원숙소에서 홀로지내는 나를 자기집에 초대하여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때 리룡득선생댁에도 자주 가서 음식이랑 얻어먹었고 리룡득선생님은 또 전 현 문학창작경색같은것이 있을때면 나를 심사위원으로 내세워 주기도 하였다. 이젠 작가협회 회원으로 발탁되였고 또 그무렵 내가 연길처녀와 결혼하였으므로 나는 연길에 자주 와서 문인들 회의에도 자주 참가하게 되였고 당시 연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던 청년시회활동에서도 주력으로 활약하게 되였다. 석화를 회장으로 하는 우리 연길시청년시회에는 리임원, 김인선, 주성화, 리성비, 차영화 그리고 나까지였는데 후에 주룡이 가첨되였다. 우리는 한주일에 한번꼴로 계속 시토론,시작품합평회같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때까지만도 경제여건이 안되여 집집을 순회하면서 맥주놀이를하였다. 지금은 집보다도 음식점이 더 편했지만 그때는 집이 더 편했다. 오늘은 석화네 집, 래일은 임원이네 집, 그 다음은 우리집 이렇게 집집의 술상이 문학교류의 제일 좋은 장소였다. 우리는 또 연길시청년시회를 대표하여 화룡시청년시회(당시 회장은 박장길시인)를 방문하고 도문시청년시회와 함께 들놀이도 가고 하면서 타현의 시인들과도 빈번한 교류를 진행하였다. 우리가 타현에가면 거기의 청년시회에서 우리들을 접대하느라 정성을 보였고 그들이 또 연길에 오면 우리가 그들을접대하느라 돌아쳤다… 세월이 살같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연길시청년시회에서 활동하던 주요 맨버들은 그때 자식들을 업고안고 들놀이랑 다녔는데 지금은 자식들 모두가 대학까지 다 졸업하고 사회활동에 참가하였으니 말이다. 디지텔시대에 직면한 우리의 후세들은 지금쯤 시같은걸 어떻게 생각할지? 그들한테도 시가 우리때만큼은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을테고…                                옹달샘 동시회   안도현 제2고중에서 연길에 있는 소년신문사에 전근되여 온후 나는 하는수없이 성인시창작을 위주로하면서도 동시창작도 곁들어 하게 되였다. 나는 동시가 한창 새롭게 번지고 있던 시점에 동시를 시작하였으므로 친구들과 함께 “옹달샘”동시회를 무었다. 내가 회장을 맡고 김학송, 김철호가 부회장을,김현순이 비서장을, 한석윤이 고문을 맡은 “옹달샘”동시회는 몇년간 우리의 동시단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우리는 거의 매주마다 한차례씩 새동시 합평회를 가졌으며 중국조선족소년보, 별나라, 중학생신문, 등에 동시특집을 냈으며 또 이런 신문, 잡지사들에서는 우리의 동시회를 지지해주는 각도에서원고비도 톡톡히 주어 우리의 활동경비에 보태도록 하여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른다. 후에 우리 옹달샘동시회의 회원들은 많은 우수한 동시들을 창작해 냈고 많은 훌륭한 동시집들을 출판했으며 많은 동시문학상을 섭렵하였다.   두만강여울소리   나는 “두만강여울소리 시가탐구회”에 제6기부터 참가하였는데 처음엔 일반시인으로 참가하였고 후에는 한 10년정도 조직자의 한사람으로 참가하게 되였다.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는 모임의 원래 명칭이고 몇년 지나니 “두만강여울소리”로 통하였으며 지금은 그냥 “여울소리”로 통한다. 모임의 명칭만 보아도 세월의 흔적이 력력히 묻어난다. 한번은 룡정시 삼합진에서 1박 2일간 진행하였는데 나는 그때의 감수를 “비내리는 두만강”이란 수필로 써서 연변일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두만강여울소리는 이젠 장장 29년간 28차까지 진행되였다. 해마다 한차씩 진행되는 우리 시단의 대성회이고 대교류의 장이고 시인들의 대만남의 장이다. 내가 참가했던 “두만강여울소리”활동은 정몽호,림연, 최룡관, 석화, 리성비 등이 제일 많이 책임자로 치렀었다. 세월은 많이도 흘러 우리도 이젠 50대에 올라섰고 시단의 중임을 맡았으며 여러가지 이번트를 조직할때가 되였다. 5년전 연변작가협회에서는 나를 시분과 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미 20여년이나 이끌어온 시단의 성회-“두만강여울소리”도 이젠 우리들이 조직해야 하였다.   하지만 해마다 한번씩 진행되는 “두만강여울소리”를 어떻게 하면 더 다채롭고 내용이 더 풍부하게 조직할것인가가 고민이였다.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두만강여울소리”라 하면 이젠 해외에서도 소문이 짱한 명브랜드활동인데 말이다. 더우기 동북3성을 포함한 전국의 우리 민족시인들이 대거 참가하는 그런 모임이였고 또 제24차부터는 우리가  처음으로 시가창작위원회의 중임을 맡은후의 첫 행사였으니 신경이 안쓰일수가 없었다.   마침 박장길씨가 화룡시민족식당으로부터 일정한 자금을 후원해 왔다. 우리는 기뻤다. 인맥이 넓은 김영건주임은 화룡시정부에 직접 련계를 달아 “제24차두만강여울소리”를 화룡시정부 회의실에서 거행하기로 협의를 보았으며 연변의 인기배우들과 가수들을 동원하여 회의에 멋진 공연을 선물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처음으로 조직하는 일이 잘되게 하늘이 도와주었는지 김철시인부부도 마침 연길에 와 있을때라 우리의 초청에 의해 직접 화룡에까지 오셨으며 주당위선전부, 화룡시정부 등 정부차원에서 열정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회의 첫날 저녁에는 민족식당에서 개를 앉히고 연회를 베풀었으며 소박하고 멋들어진 공연도 선보여 회의 분위기를 확 잡아왔다. 이튿날 오전에는 탐구시를 심사하는 날이였는데 우리는 김철시인한테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감독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회의군들은 이튿날 연변의 금강산으로 불리우는 선경대를 유람하였고 또 선경대아래동네에 있는 유동림장에 가서 사슴까지 잡아 잔디밭우에다 사슴고기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김철시인은 당장에서 유동림장책임자한테 일필휘지하여 족자까지 써주셨다. 대회는 진짜 성공적으로 잘 되였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늘 뿌듯한 마음이다. 제25차는 안도현만보진 국가급 생태골에 가서 치렀는데 안도현정부에서 최고급호텔을 배치하고 양을 잡아 접대하였는데 량성복부현장이 직접 회의장에 와서 친절한 관심을 보여주어 시인들은 감동을 받았다. 제26차 “여울소리”는 회의 참가자 전원이 먼저 도문시 두만강 강뚝공원에서 정몽호시비 제막식을 마치고 량수진에 가서 1박2일로 치렀다. 끊어진 온성다리밑으로 두만강은 소리없이 흐르며 력사를 써내려갔고 우리들은 다리우에서 시상을 더듬었다. 그번 여울소리가 끝난후 나는 20여차의 “여울소리”정황을 개괄하여 수필을 써서 “여울소리인상기”란 제목으로 북경에 있는 “중국민족”잡지에 발표하여 영원한 력사자료로 남기였다. 제27차 “여울소리”는 화룡시서성진 와룡향에서 치러졌는데 역시 특색을 살려 시인들이 모두 농민들집에 끼리끼리 숙박하도록 했다. 촌장이 시인들을 데리고 이집 저집 안배할때는 마치도 우리가 어렸을적에 해방군대오가 지나다 마을에 들러 하숙할때를 방불히 하였다. 역시 서성진의 진장이 회의에 직접 참석하였고 돼지와 소와 이튿날엔 양까지 잡아서 문인들을 대접하였다. 그번 여울소리는 또 김영건의 시집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의 출간기념식까지 곁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제28차 “여울소리”는 연길시한성호텔에서 진행되였는데 할빈에서 온 리홍규시인의 심련수문학상수상식까지 곁들어 보기에 너무나 좋았다. 그날 술자리에서는 또 박송천의 소품과 송미자의 시랑송도 있어 분위기가 화끈하였다.     문학살롱 케스트     2009년 가을부터 연변인터넷방송 문학살롱프로에서는 나더러 시에 대한 생방송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이런건 해본일 별로 없어서 망설이였는데 그럼 몇번만 해달라고 하였다. 나는 한국현대시부터 시작하였는데 좋이 한국명시 200여수에 대한 분석과 명시인 40여명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러구러 1년이 지났다. 방송국에서는 계속 더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하는수없이 로씨야, 영국,독일, 인도의 일부 시인들에 대해서 소개했으며 중국의 “몽롱시”와 현대시인들에 대해서도 10여명을 소개하였다. 또 한해가 지나갔으나 방송국에서는 계속 하는데까지 해달라고 청들었다. 그래서 나는 중국조선족시인 50여명을 소개하였는데 이번에는 또 시창작론에 대해서 강의해 달란다. 또 한해가 지났다. 그래서 이미 만3년째 나는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좋은 효과를 거둔 방송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방송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방송을 듣고 흑룡강성 녕안의 최화길, 할빈의 한영남, 리홍규, 산동성 청도의 김기덕,김혁일,심양의 리문호,북경의 전춘매, 연길의 리상각, 리순옥, 김철호, 김영춘, 김창희, 최기자, 리임원, 리성비, 화룡의 리근영,허옥진,김승종, 미국의 홍군식…등등 많은 시인들이 전화나 메일을 보내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역시 우리 시단의 홍보이고 시와 독자들과의 거리를 더욱 가까이 하는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생각되여 오늘까지도 나는 계속 이 노릇을 해오고 있는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곤난도 많았다. 한쪽으로 단위에 출근해야 하고 또 기자이니깐 타성으로 외출도 해야하고 나의 글도 써야하고 …방송자료는 대부분 퇴근후나 휴식일에 하다보니 나는 련휴일을 기본상 쉬여보지 못하였고 저녁에는 11시-12시전에 자본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문학과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미치는 나였으니 그런대로 매주 목요일마다 만사를 제쳐놓고 방송국에 달려가군 했다.   한번은 단위에서 도문시 월청쪽으로 들놀이를 갔는데 주임인 내가 안가면 우리 보도부의 성원들이 섭섭해 한다고 가긴 갔는데 그날따라 생방송이 있는 날이였다. 나는 술한방울도 못마이고 점심식사가 끝나자 곧추 택시를 잡아타고 연길로 질주하였다. 그날 생방송은 의외로 잘 되였지만 방송국분들은 내가 도문 월청으로부터 달려온건 누구도 모르고 있다…   또 한해가 다 지나 음력설이 코앞이다. 나는 설날휴식때문에 이번 목요일에는 두번치를 한꺼번에 준비하여 하나는 직접 생방송하고 하나는 록음해야 하기에 또 바빠야 한다. 하지만 문학을 위해서는 붉은 코피가 흘러도 이만한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매번 방송할때마다 방송재료 평균 8천자가량씩 쓰는데 이 3년간 이미 근 150여만자를 썼다…   오늘까지 장장 30년이란 창작생활에 별로 이렇다할 명작은 못써냈지만 그래도 시집 네권과 수필 50여편, 가사 30여수,실화 20여편에 정지용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한얼패수필상, 백두아동문학상, 윤정석아동문학상, 전국청년월간지수필상 등10여차의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지니게 되였다. 나는 내가 문학에 빠진걸 종래로 후회한적은 없다. 만약 문학이 없었다면 나의 지금까지의 삶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슴슴하였을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만약 내가 문학을 떠났더라면 나의 생활은 부로 일정한 윤택은 가미했을지라도 령적으론 사막의 마른 바람같은 그런 생활을 해왔을건 뻔한 일이다. 문학은 나의 령적 삶에 차분한 오아시스를 펼쳐주었고 농익은 와인속에 피빛 장미꽃을 얹어주는 그런 짙은 멋을 주었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또 래일도 문학에 감사를 드릴뿐이다.                                       2013년 2월   \\\\\\\\\\\\\\\\\\\\\\\\\\\\\\\\ 깊은 동시는 깊은척 하지 않는다                       김정도   근간에 나온 림금산의 동시집 “사랑의 동그라미”를 읽으면서 참 좋은 시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걷는 걸음마다 산꽃은 따라오며 핀다   내가 숲속에 숨어 들자 꽃도 숲속에 숨어서 핀다          -(“산길”전문)   이 얼마나 탐스러운 동시인가. 온통으로 동심의 덩어리이다. 기술로 만든 동시가 아니여서 좋다. 농도짙은체험의 소산이여서 가상하기 그지없는것이다. 동심의 눈으로 본 대자연의 경이가 이 시를 낳게 한 체험적바탕일것이다. 계절처럼 산에는 꽃이 핀다. 어디가나 꽃이다. 그처럼 이쁠수가 없다. 그러한 경이로움이 시인의 몸에 천연스레 옮아 꽃의 순수가 한수의 동시로 태여났을것이니 이 어찌 소담하지 않으랴. 유심한 독자라면 누구나 언어의 배면에서 강하게 풍겨나오는 미적인 호소에 압도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동시 “분계선”도 찾아보기 힘든 수작이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진달래 무궁화   그 부드러운 꽃가지에 언제부터인가 파아란 뱀 한마리가 칭칭 감겼다.          -(“분계선”전문)   분단의 비극을 읊은 시치고는 참 야무진 절창이다. 깊은 동시는 깊은척 하지 않는다.오히려 얕은척 한다.이것이 순수이며 경지이다. 림금산의 일부 동시는 이런 경지에 도달해 있다. 동시 “향기로운 강”을 보면서 림금산의 솜씨에 다시 한번 무릎을 쳤다.   젖빛 다리가 불궈져서   물은 온통 젖내난다.   달랑 고추가 풀어져서 강은 더욱 향기롭다.   매일같이 강을 세탁하는 너희들이 진짜 강의 주인이구나.           -(“향기로운 강” 전문)   이 시집의 최고의 백미로 꼽을수 있는 “향기로운 강”은 중국조선족동시단이 이룩한 새로운 성취로 알고 싶다. 아이들의 달랑 고추, 그것이 풀어져서 향기를 풍기는 강, 참 빼여난 표현이다. 강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눈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동시는 강에 대한 상상적 표현에서 가볍게 벗어나 높은 미적인 각성에 접근한다. 강에 대한 기묘한 형상화작업을 바탕으로 마지막련에 이르러서는 시의 의미적 령역을 보다 높고 깊은 경지에로 확장시킨다. 읽는 이의 마음마저 세탁되게 한다. 오래만에 맑은 동시의 강에서 목욕을 하고난후련한 기분이다. 현대시의 지나친 기술주의가 병페라고 한다면 림금산의 동시는 체험을 바탕으로 생리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런 자세를 높이 사고싶다.                     (연변일보 1998년 12월)   ////////////////////////////////////////////////////////////////////////////////////////// 보이는 시, 움직이는 시, 향기 풍기는 시                        -림금산 동시를 조명해본다                                          림  철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성인문학을 큰것의 아름다움 즉 숭고미나 비장미에 대한 추구와 례찬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아동문학은 어쩌면 작은것이 지니고 있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발견과 례찬이라고 해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중국어 성구에는 인간의 가장 순결한 마음을 갓난아기의 마음─‘적자지심(赤子之心)’이라고 했고 영국의 랑만파시인 워즈워스는 ‘무지개’라는 서정단시에서 ‘아이는 어른들의 아버지여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기였다.”     림금산시인은1980년대 초 대학시절부터 성인시를 주로 창작하여 지금까지 서정시500여수를 발표하였고 제9회 지용문학상을 수상하고 성인시집 《불새》를 펴냈으며198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조선족소년보사에서 기자, 문예편집을 맡아하면서 금쪽같은 많은 동시들을 창작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집 《사랑의 동그라미》와 《옹달샘》을 선보이기도 했다.     림금산시인은 바로“작은것이 지니고 있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발견과 례찬”을 통하여 자라나는 우리 후대들에게 좋은 심성을 심어주고 미적향수를 안겨주고 있다. 이것 이 바로 아동문학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그의 동시들은 동시마다 동심이 퐁퐁 솟치고 있으며 그림처럼, 영화처럼 독자들의 시야에 펼쳐지며 매 동시마다에 서정이 굽이쳐 흐르고 있어 미적향수를 다분히 느낄수 있다.     그럼 아래에 필자는 몇개 방면으로 나누어 림금산시인의 동시를 조명해보련다.                   보이는 시, 움직이는 시       림금산시인의 동시를 읊조리느라면 동시의 화폭이 눈앞에 생생히 안겨온다. 그의 동시들을 보면 대부분이 시적대상물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없거나 적다. 시적대상물에 대한 직관적인 묘사가 없지만 우리들의 시야에 와닿을수 있는것은 그 시적대상물을 통하여 련상,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 련상과 상상의 예술적승화를 위하여 비유, 의인, 과장과 환상, 상징, 이률배반의 표현기법을 잘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동시 “새무리”를 보기로 하자. 파아란/하늘 호수/숱한/재재거림이/물결쳐간다// 가다가//가다가/나무아지에/잎으로 열리고// 날다가/날다가/반공중에/파문을 그린다.     하늘을 “파란 호수”로, 날아예는 새무리들을 “재재거림이 물결쳐간다”고 비유하고 있으며 나무아지에 앉아 쉼을 쉬는 새들의 모습을 “나무아지에 잎”으로 열렸다고 묘사하고있으며 새무리들의 날아예는 모습을 “반공중에 파문을 그린다”고 읊조리고 있다. 새무리들의 모습이 하나하나의 아름다운 화폭으로 우리의 시야에 다가오고 있으며 시적대상물이 정적으로가 아니라 살아움직이고 있다.     동시 “해바라기”를 보기로 하자. 노오랗게/목을 비탈더니/까아맣게 염글어/기름을 떨군다// 알알이 불에 탔다/향기마다 가마에 굽혔다/구수한 냄새/코끝을훓는다 감각적이고 동적인 언어로 해바라기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노오랗게 목을 비탈더니” 이 표현은 생활의 론리에는 맞지 않는다. 어떻게 해바라기가 노오랗게 목을 비탈수 있는가? 하지만 시인은 이률배반의 수법으로 해바라기가 “노오랗게 목을 비탈더니 까아맣게 염글어 기름을 떨군다”고 묘사하고 있다. 까아맣게 염근 해바라기종자의 모습을 “기름을 떨군다”고 동적인묘사를 하고있다. “알알이 불에 타 굽혀서 구수한 냄새 코구멍을 훓는다”는 표현은 독자들로 하여금 해바라기가 익어 풍기는 구수한 냄새를 직접 맡아보는 느낌을 준다. 실로 보이면서도 움직이기도 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직접 체험하는 느낌을 주는 동시다. 동시 “가을풍경” 역시 보이는 시, 움직이는 시의 좋은 례로 들수 있다. 노오란 애들이/나무에 바라올라/불장난해요// 빠알간 애들이/비탈에 노오란/편지를 가득 뿌려요// 기슭에선 아직도/파아란 애들이/ 물장난을 그치지 않고// 해님은 따가운/볕을 쏟아/개구쟁이들 엉뎅일 챡챡-   이 동시에서 시인은 단풍든 나무잎을 노오란 애들이 나무에 바라올라 불장난한다고 형상화하고 있다. 단풍든 비탈을 빠알간 애들이 비탈에 노오란 편지를 가득 뿌린다고 형상화하고 있으며 단풍이 채 들지 않은 기슭에선 파아란 애들이 물장난을 하는데 해님이 볕을 쏟아 개둑쟁이들의 엉덩일 챡챡 때련준다고 형상화하고 있다. 비유, 과장, 의인의 수법을 리용하여 가을풍경을 보는듯이 그려주고 있으며 또 가을풍경을 빨갛고 노랗고 파란 애들이 뛰노는 모습으로 동적인 묘사를 하면서 미적향수를 안겨주고 있다. 림금산시인의 동시들의 움직임은 또한 동적인 시어, 터지는 파렬음 사용, 의성의태어활용을 통하여 더욱 생동하게 표현된다. 하아얗다, 찰랑인다, 또오옥-, 화아악-(동적인 언어, 형상화된 시어), 통통 살이 오르다, 태질하다, 토옥토옥, 푹신푹신, 담상담상, 몽-몽-, 한들한들, 우쭐우쭐, (파렬음, 터지는 소리, 의성의태어). 동시 “가을국화”에서도 시인은 노오랗고 하아얀 국화의 모습을 “실눈인 애들이/ 해시시 노오란 웃음을/ 흘리고있다// 곱슬머리 이웃집/곰순이가/ 하얗게 춤추고 섰어요/.마을어구 돌담아래/가을 그득 쏟아붓는/오- 염근 향기 한마당”이라고 묘사하고있다. “노오란 웃음을 흘린다”, “하얗게 춤추고 섰어요”는 이률배반의 수법이다. 과히 그림처럼 펼쳐지고 살아움직이는 동시, 향기 풍기는 동시라고 할수 있다.   동심이 퐁퐁 솟치는 시   림금산시인의 동시들은 그 어떤 시적대상을 단순하게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시적대상물을 통하여 서정적주인공의 감수를 미적으로 전하고 있는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보아진다. 시인은 동시에서 서정적주인공으로서뿐아니라 자기가 직접 동시의 주인공으로 되며 동시속 개구쟁이가 된다. 동시 “파아란 고무신”과 “과수원”은 동년을 묘사한 동심이 퐁퐁 솟는 시라고 할수 있다. 동년에 신고 다니던 고무신에는 낮이면 해빛이 모여들고, 밤이면 별빛이 내려앉고 봄이면 “파란 뻐스”, 여름이면 새끼고기 헤엄치는 “어항”으로, 가을이면 머루다래 담은 “파란 바구니”, 겨울이면 하얀 서리 뽀햫게 서리내리는 고무신, “고향이 들어있고/동년이 숨어있는 신// 언제나 내 맘에/작은 배처럼 떠있는/파아란 고무신”,  참으로 동년의 그림움, 추억으로 다가오는 동시다.     고무신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없어도 시적대상물에 대한 감수를 통하여 동년의 개구쟁이 모습을 보는듯이 그려낸 동시라고 할수 있다.     동시 “과수원”도 과수원에 열린 과일을 기특한 애들이 가지마다 한가득 매여달려 웃고 떠들며 재롱피운다고 읊조리고있다. 그래서 “어느애부터/안아볼가 포동동 살찐/이쁜 애들//너도 나도/ /달려와 안기는/배밭엔 온통/애들천지…”라고 시적대상물 배를 개구쟁이 어린이로 등장시키고 있으며 작자의 감수를 통해 동심을 잘 구현해주고 있다.                         하얀 얼이 살아 숨쉬는 시     림금산시인의 동시들에는 “하얀 이미지”가 숨쉬고 있다. 그의 많은 동시들에는 민족의 하얀 얼이 내비치고 있으며 백의민족의 정서가 슴배여 있다.     동시 “성에꽃”을 보기로 하자. 지난밤 꿈결에/우리 할매/찾아오셨습니다// 하얀머리/길게 풀고/하늘가신 우리 할매// 지난밤 나의/창가에 찾아오시여/숱한 꽃을 피우셨습니다// 간밤에 피여난/할매의 숨결/아침 창문에 가득 웃어줍니다   이 동시에서 시인은 창문에 핀 성에꽃을 “하얀머리/길게 풀고/하늘가신 우리 할매”가 찾아와 피워주었다고 쓰고 있으며 그것을 “간밤에 피여난/할매의 숨결”이라고 읊조리고 있다. 동시 “고향집”에서 시인은 고향집을 “햇 벼짚으로 살짝 새이영 얹은 초가 샛노랗게 구워진 햇 감자”라고 묘사하고 있다. 시골의 고향집에 대한 절절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이 동시에서도 우리는 하얀 이미지를 찾아볼수 있다. 물론 동시에서 고향집을 “샛노랏게 구워진 햇 감자”로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 숨은 벼의 하얀 의미지, 노랗게 구워진 감자속의 하얀 이미지를 엿볼수 있다. 동시 “옛말”을 더 례로 들어보자. “머리/ 하아얀/할아버지 한분이/옛말 하신다//파아란 고무신/하아얀 고무신//두만강/바다섬//철쪼망…//할아버지 한분이/ 옛말하시다가//그대로/북변에/하아얀 산이 되셨다.” 이 동시는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쓰고 있다. 백설을 떠인 백두산의 모습을 “머리 하아얀 할아버지”로, 할아버지가 하시는 “하야얀 고무신”옛말, “북변의 하아얀 산”이 된 할아버지, 이 동시는 “하야얀 이미지”로 가득차있다. 동시 “할머니(1)”에서도 우리 민족 “하얀 정서, 하얀 이미지”를 잘 창출해내고 있다. 내가 씻은 빨래는/왜서 희지 않을가/할머니 씻으면/하도나 희여서/눈이 부신다//할머닌 흰머리 많아/빨래도 하얗게 하얗게/눈부실걸가 이 동시에서 보다시피 “희다, 희여서, 눈이 부시다, 흰머리, 하얗게, 눈부실걸가” 등 시어들에는 모두 “하얀 이미지”가 내포되여 있다. 이처럼 림금산시인의 동시에는 우리 민족의 하얀 숨결, 하얀 정서, 하얀 모습, 하얀 이미지가 서려있어 읊조리노라면 저도몰래, 고향애와 조상들에 대한 존경, 숭배의 감정이 흘러나온다.   미적향기 물씬 풍기는 시       림금산시인의 동시는 향기 풍기는 시, 아름다운 시로 이름찍을수 있다.    그의 동시들을 읽느라면 미적향수를 다분히 느낄수 있다. 보는듯이, 살아움직이는 시, 동심이 다분한 시로 될수 있고 미적향기 물씬 풍기는 동시들이다. 아래는 “엄마의 손”전문이다.   사랑이/ 찰랑이는/손끝이다// 더움이/떨어지는/손가락이다// 불 지피면/봄날이 된다// 감자알 구우면/함박꽃처럼/터진다// 옥수수 삶으면/밥이 나와/흐드러진다// 밥 지으면/윤나고/국 끓이면/파도친다.       이 동시에서 시인은 “찰랑이는”, “떨어지는”, “지피면”, “구우면”, “삶으면”, “지으면” 등 동적인 시어로 엄마의 모성애가 “터진다”, “흐드러진다”, “파도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시를 읊노라면 실로 엄마의 모성애를 절감할수 있고 피부로 느낄수 있으며 가슴이 막 활랑인다. 동시 “불구경 가자”에서도 시인은 익은 가을, 활활 타는 가을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가을이 오면/온 마을에/불이 붙는다// 처마밑 고추타래서/일어난 불길은/마당앞 능금알을/빠알갛게 태우고/다락우에 옥수수도/노오랗게 굽는다// 마을을 지나/앞산더기 단풍나무에도/불길은 알차게/매달렸다. 가을이 온 마을의 모습을 “온 마을에 불이 붙는다”고 묘사하면서 “처마밑 고추타래서 일어난 불길은 마당앞 능금알을빠알갛게 태우고 다락우에 옥수수도 노오랗게 굽는다. 마을을 지나 앞산더기 단풍나무에도 불길은 알차게 매달렸다.”는 묘사는 실로 시야에, 가슴속에, 불타는 정서로 피여오르는 시구라고 할수 있다. “고추타래”, “불길”, “능금알”, “빠알갛게 태우고”, “노오랗게 굽는다”, “단풍나무”, “알차게 매달리다” 등 시어들에는 가을의 정열, 시인의 벅찬 정서가 흠뻑 젖어있다. 림금산시인은 이처럼 동시에 시적대상물에 대한 절절한 감수를 시인의 불타오르는 정서로 터지는, 피여오르는, 활활타는 시어로 예술적이미지를 승화시키고 있다. 총적으로 림금산시인은“작은것이 지니고 있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발견과 례찬”을 통하여 자라나는 우리 후대들에게 좋은 심성을 심어주고 미적향수를 안겨주고 있다. 그의 동시는 독자들의 시야에 보이는 시로, 살아움직이는 시로, 동심이 퐁퐁 솟치는 시, 터치는 시, 활활 타오르는 시, 미적향기 물씬 풍기는 시로 안겨오고 있다.                            2010년1월25일     
150    시인 - 리임원 댓글:  조회:4387  추천:0  2015-03-08
    백두산 리임원 전설은가고 전설의 언어 껍데기만 남았는데 이제 그 청청한 빛의 소리 언어는 안개처럼 사라질 것인가. 긴 긴 세월 수 많은 전설들을 봉우리마다 뿌리내리면 하나의 민족 하나의 역사 하나의 꿈을 길러오시던 어머니 그러나 이제 아름다웁던 전설은 가고 당신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수모의 날들을 참고 견디며 애처로운 어머님의 젖은 눈동자  
149    시인 - 윤청남 댓글:  조회:4406  추천:0  2015-03-08
  시집 “갈밭에 바람자면 갈대는 일어서서” 출간       윤청남 제2 시집 “갈밭에 바람자면 갈대는 일어서서”가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윤청남 제2 시집 “갈밭에 바람자면 갈대는 일어서서”는 윤청남 시인의 제2시집으로서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 강릉심련수선양사업위원회 주관한 제1회 심련수문학상 공모 당선작으로 출간되였다.   시집은 “홍시”등 시인의 100여수의 근작시들을 수록, 심사위원들은 “수상작품집은 언어의 순수성과 우리 글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냈고 현대사회 지인들의 내적갈등과 민족적인 삶의 정서와 애환을 잘 표현하였다.”고 정평했다.   윤청남시인은 시가창작에 정진하여 괄목할만한 성취를 이룩, 선후로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연변제7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있다.   그는 시집의 뒤머리에 적은 수상소감에서 “시는 내 삶의 종교다. 시를 사랑했기에 인정이 가난한 이 세월에도 삶은 다소 풍요롭지않은가. 나는 청빈한 시인이 되지못한것을 후회하지 못한다.”고 자신의 창작관을 밝히면서 시가창작에서 계속 정진할 의지를 표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 8월  23일      
148    시인 - 김파 댓글:  조회:4210  추천:0  2015-03-08
돌에 새겨진 《돌의 음악》 문화향기 물씬       2014년 4월 2일              김파시인의 시비제막식 두만강변서 4월 1일 오전, 김파시인의 《돌의 음악》시비 제막식이 두만강변에서 있었다. 아름다운 문화관광도시인 도문시에 2009년에 설립된 정몽호시비에 이어 또 하나의 시비가 세워졌다. 화강암기초돌에 받쳐진 높이 2.6메터, 너비 1.2메터에 두께가 0.5메터인 유백색 대리석시비에는 김파시인의 《돌의 음악》이 조한문으로 정히 새겨졌다. 《돌을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돌은 부서진 소리가/ 뭉쳐진 덩어리다//바이올린 선률도/ 피아노의 절주도/돌의 부서진 소리를 체로 쳐/ 빚어서 발효시킨 술/ 마시면/ 취한다.》 시비 정면에 새겨진 《돌의 음악》의 전문이다. 일찍 《흰돛》, 《대륙에 묻혀있는 섬》, 《겨울나비》, 《태양의 종소리》등 7권의 서정시집과 《사랑의 별》(서정서사시집), 《천추의 충혼 안중근》(서사시), 《천년고국 고구려》(력사대하시), 《립체시론》(시론집) 등 25부의 작품집을 펴낸 김파시인의 《돌의 음악》시비제막식이 4월 1일 오전 도문시 두만강광장의 두만강가에서 있었다. 1942년 흑룡강성 해림현에서 출생한 김파시인은 도문시 2중과 4중에서 교원으로 있다가 도문시문화국창평실성원으로 근무, 퇴직후 대련에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고있다.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와 연변작가협회 회원인 김파시인은 시창작외에도 장편소설, 장막가극 등 기타 쟝르의 작품도 많이 창작하였으며 작고한 김성휘시인과 정몽호시인 등과 함께 조선족시단의 시인들의 모임인 《두만강여울소리》를 발기하기도 하였다. 제막식에서 평론가 최삼룡의 《김파의 시비를 세워야 하는 리유》가 대독되였고 최룡관시인, 김룡운평론가, 윤청남시인 등이 축사를 했다. 최룡관시인은 축사에서 지난 2009년에 세워진 정몽호시비와 더불어 두만강가에서 짙은 문화향기를 풍기게 될 김파시인의 《돌의 노래》시비설립에 대폭적인 지지를 준 도문시당위와 정부에 거듭 감사를 드리고 수십년간의 창작생애에서 거둔 김파시인의 성과를 높이 긍정하였다. 답사를 하고있는 김파시인. 김파시인은 답사에서 시비를 세워준 동북아문화연구원과 도문시당위와 정부에 감사를 드리고 《인류는 삶과 사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물질재부창조와 정신재부창조 두가지를 병견하는데 정신재부의 한개 장르인 문학, 그 가운데서도 시는 생명력이 강한 우월한 정신재부에 속하며 시비는 한 시인의 령혼의 상징으로 빛뿌리게 될것》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민족과 나라, 나아가서는 인류를 위해, 보다 좋은 령혼의 보석을 남기기 위해 여생의 마지막 날숨까지 연소할것을 다졌다.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원장 최룡관)의 주최로 개최된 이날 제막식에는 도문시당위선전부의 해당 책임자와 연변시인협회 김응준회장, 연변시조사 김철학회장 등과 동북아문화연구원의 부분적인 회원들 그리고 도문시문련, 도문시문화관, 도문시작가협회 회원 등 20여명이 참가하였다. 길림신문 김태국기자    
147    시인 - 강효삼 댓글:  조회:3987  추천:0  2015-03-08
  시인 강효삼-문학은 인간학이다 “우리 민족 밑바닥의 삶의 현장을 절대 떠나지 않을것이다”             시골 농군의 후줄근한 옷차림에 작달막하고 여윈 체구, 학교때 별명이 ‘오태(误胎)’였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로인이 있다. 그가 가는 곳이면 그만의 특유한 해학으로 웃음소리가 넘치게 하고 걸쭉한 육담이 오간다. 그에 또 술 한잔까지 곁들이게 되면 곁에 모인 사람들 모두를 똑 같은 촌로로 만드는 신기한 ‘마술’이 있는 사람. 인기는 어찌나 좋은지 이름만 대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런 사람이 시인이라고 한다. 짜장 별 볼멋 없는 촌로인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아니한 신기한 매력이 있는 사람, 그것도 북방 문단의 사실주의 시의 코치인 사람이있다. 그가 바로 강효삼시인다. 1943년 출생, 1963년 2월 15일 흑룡강신문 ‘진달래문학세계’에 ‘봄이 나간 날’이라는 시로 등단. 동시, 시, 노래말가사. 수필, 등 쟝르의 작품 500여편 발표. 7인 시집 ‘칠색무지개’, 시집 ‘먼 후날. 저 하늘 너머’와 아동시집 ‘봄비’가 있음. 윤동주문학상, 한국 문예시대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연변작가협회회원, 흑룡강작가협회회원, 현 흑룡강성 상지시 자유기고인. “내가 걸어온 문학의 길은 절망과 희망, 불행과 행운이 겹쳐진것이였습니다. 지금도 로임은 적고 사회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지만 역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올해까지 문학인으로서의 50년의 길을 걸어왔다고 하는 강효삼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문학인생을설명하는 말이다.   “문학은 내 인생의 강심제였다” 강효삼시인이 문학의 푸른 꿈을 꾸게 된것은 소학교 4학년때를 들어야 할것 같다. 당시 상지시신화서점에서 ‘조기천시집’ 등을 학교에 가지고 와 팔았는데 어린 그는 ‘시집이란 시집가는 책인가’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후의 학교 랑송대회에서 강효삼은 조기천의 ‘조선은 싸운다’를 랑송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당시는 조선전쟁이 진행될 때여서 그때의 분위기와도 알맞았던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여 그는 문학의 푸른 꿈을 꾸게 되였다. 소학교 5학년때 ‘봄바람’이라는 제목의 동시를 써서 교원의 칭찬을 받았고 교과서에 있는 ‘어린 시인’이라는 글을 배우면서 문학을지향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중학교에 입학해보니, 당시의 상지조중은 문학 분위기가 농후하여 문학 지망생이 많았다. 하지만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린 그는 그들속에 끼이기조차 어려웠다. 그래도 당시 조선어문을 가르친 선생님이 많이 고무하여줘 큰 힘이 되였다. 당시 그는 선생님을 따라다니며민간이야기도 정리하면서 점차 문학의 길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후 대약진운동에 회의를 가지고 불만을 표시했던 그는 학교에서 처분을 받고 중퇴하여 생산대에 내려가 일해야 했다. 그러다가 1961년 5월 당시 연수현 평안 성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다시 문학을 꿈이 살아나 습작을 시작했다. 그때 학교때부터 함께문학을 꿈꾸던 김상봉씨(상지시 월성향 사람, 향토시인)를 만났다. 문학을 사랑하나 발표원지를 찾을수 없었던 그들은 문학동아리를만들기로 하고 ‘송화강 문학청년 애호자 단체’를 만들었다. 강효삼이 부회장이 되여 문학 애호자들끼리 만남을 가졌다. 그런데 당시는 나라적으로 계급투쟁을 할 때여서 공안국의 비밀감시까지 받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래도 동아리의 규약 첫 머리에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붉은기를 내걸고’라고 써넣었기에 반혁명조직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으나 그후 이 동아리는 절로 해산되고 말았다. 바로 그때 흑룡강신문에 강효삼의 첫 작품이 발표되여 액막이로 되였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였으며 그후 련거퍼 발표한 ‘공사의 처녀’라는 시는 당시 흑룡강신문사 문학편집이 한어로 번역하여 ‘흑룡강일보’에 발표하면서 의심이 해소되고 공청단 가입까지 비준받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전까지 강효삼은 꽤나 많은 글들을 발표하면서 문학에 재미를 붙히게 되였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반당문예로선의 검은선’이라는 대자보가 나붙어 어렵게 고비를 넘겼고 그후 또 “문화대혁명은 문화에 대한 파괴”라고 불만을 토로한것으로 하여 하루 아침에 현행 반혁명으로 몰리게 되였다. 격리당해 투쟁을 받았고 교사대오에서 쫓겨났으며 리혼까지 당했다. 그는 문학을 했기에 세상을 보는 눈이 있게 되였고 그때문에 교원대오에서 쫓겨 났지만, 또 문학을 했기에 다시 교원대오에 설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으며 후에는 상지시 하동향문화소에 전근하게 되였다고 말한다. 즉 좋아도 문학이요, 나빠도 문학인것이였다.오르막과 내리막의 가파로운 경사를 거듭하는 인생 그라프를 그려오던 나날, 그는 문학을 한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것이강심제로 되여 어려운 나날을 버틸수 있게 했고 끝내는 볕을 볼수 있게 했다. 그 사이에 그는 1978년에 연변작가협회에, 1980년에 흑룡강작가협회에 가입했고 흑룡강신문의 국경15주년 맞이 응모에서 3등상을탔으며 또 그 작품이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3등상을 타게 되였으다. 그리고 그가 쓴 가사 ‘톱질타령’은 흑룡강성의 우수가곡 평선에서 2등상을 타기도 했다. 하동향문화소에서 13년간 근무하던 시절 그는 인생의 황금시기를 맞이해 많은 글들을 썼으며 작가들을 양성하느라 문학살롱을 만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강효삼이 끝내는 성공했다고 말하는데, 만약 성과로 성공을 론하는게 아니고 하고싶은 일을 했다는 점으로 성공을론할 때 나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문학을 할수 있어 자신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강효삼시인이다.   “문학은 인간학이다” 강효삼시인은 몇십년동안 문학을 하면서 문학이 바로 인간학이라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한다. “한때는 정치의 구미에 맞추느라 애썼고 마음에 없는 소리도 했지만, 문학이란 인간의 진실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강효삼시인은 문학이란 고통받는 사람들,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야 한다고 말한다. 꼭 사회의 암흑면을 꼬집어야 한다는건 아니지만 문학은 성실해야 하고, 문학은 참되여 하며, 문학인이라면 글에서만 인간이 되여야하는게 아니라, 인간이 되여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인생의 추구이자 문학적 추구라고 하는 그는 글을 쓸수 있는 날까지 우리 민족의 밑바닥 삶의 현장을 절대 떠나지 않을것이라고 한다. 그의 시들을 보면 그의 문학적 추구와 인생적 추구가 들여다 보인다. 강효삼의 시적 추구는 민족 공동체와 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이 날로 상실되는 현실에서 회복의지와 발전 전망을 리얼하게 표현하는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예술성 추구를 홀시하는것은 아니다. 그는 진정한 작품은 역시 예술적으로 진미가 나타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현재 고래희의 언덕에 올라선 로인이지만 아직도 배움을 추구한다. “금년 들어서는 동서 고금의 책들중 내가 찾아볼수 있는 책은 다 찾아봅니다. 어떻게 하나 좀 더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배우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즐거움입니다.” 이제 와서 문학이 무엇인가 고쳐 생각해봤다는 그는 문학은 일시적인 취미나 애호가 아니라 심각한 정신적 사업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바른 사랑, 명지한 철학, 깨끗한 량심, 허식 없는 열정, 끝없는 열정, 그리고 욕망과 진취심이 수요된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쉽게 세상을 허무하게 볼수도 있겠지만 욕망은 필요한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이다. 그래야 끝까지 문학의 줄을 놓지 않을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적 탐구와 인간적 탐구를 동시에 진행하며 사는 날까지 열정과 욕망을 가지고 문학을 분신으로, 세상을 뻗치는 받침대로, 죽는날까지 문학은 버릴수 없다고 말하는 강효삼, 그야말로 진정 ‘시인’이라는 두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채복숙 기자    
146    명시인 - 괴테 댓글:  조회:4677  추천:0  2015-03-07
시목록 신비의 합창  첫사랑  그대 곁에서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동경(憧憬)  이별  슬픔의 환희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느껴요  사랑의 독본  들 장 미  나그네의 밤노래  5월의 노래  거룩한 갈망  미뇽(Mignon)  가뉘메트  마왕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  툴레의 임금님  프로메테우스  ~~~~~~~~~~~~~~~~~~~~  신비의 합창  지나간 모든 것은  한갓 비유일 뿐,  이루기 어려운 것 여기 이루어졌으니.  글로 쓰기 어려운 것이  여기 이루어졌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라가게 한다.  Chorus Mystics  - Johann Wolfgang von Goethe  Each thing of mortal birth  Is but a type  What was of feeble worth  Here becomes ripe.  What was a mystery  Here meets the eye;  The ever-womanly  Draws us on high.  ~~~~~~~~~~~~~~~~~~~~  첫 사 랑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 줄 것이냐,  저 첫사랑의 날을.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때를 돌려 줄 것이냐,  저 사랑스러운 때를.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기르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한탄과 더불어  잃어 버린 행복을 슬퍼한다.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 줄 것이냐!  그 즐거운 때를.  Verlust  - Johann Wolfgang von Goethe  Ach wer bringt die schonen Tage,  Jene Tage der ersten Liebe,  Ach wer bringt nur eine Stunde  Jener holden Zeit zuruck:  Einsam nahr ich meine Wunde,  Und mit stets erneuter Klage  Traur ich ums verlorne Gluck.  Ach wer bringt die schonen Tage,  Jene holde Zeit zuruck!  ~~~~~~~~~~~~~~~~~~~~  그대 곁에서  나 그대가 생각납니다.  태양의 미미한 빛살이  바다 위에서 일렁거리면  나 그대가 생각납니다.  달의 어렴풋한 빛이  우물 속 그림자로 출렁거리면  나 그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먼 길에 먼지에 일게 되면  나 그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슥해진 좁은 길 위에서  나그네가 떨고 있으면  나 그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요란한 소리로 높은 파도가 밀려 올때면  나 그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모든 것이 숨죽인 공원을 거닐 때면  나 그대 곁에 있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대는 늘 내 곁에 있습니다.  태양이 가라앉고  잠시 후 별이 빛날 것입니다.  아아, 그대가 저 하늘의 별일 수만 있다면.  ~~~~~~~~~~~~~~~~~~~~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희미한 햇빛 바다에서 비쳐올 때  나 그대 생각 하노라.  달빛 휘영청 샘물에 번질 때  나 그대 생각 하노라.  저 멀리 길에서 뽀얀 먼지 일 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어두운 밤 오솔길에 나그네 몸 떨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물결 높아 파도 소리 아득할 때  나 그대 소리 듣노라.  고요한 숲 속 침묵의 경계를 거닐며  나 귀를 기울이노라.  나 그대 곁에 있노라, 멀리 떨어졌어도  그대 내 가까이 있으니  해 저물면 별아, 나를 위해 곧 반짝여라  오오 그대 여기 있다면.  ~~~~~~~~~~~~~~~~~~~~  동경(憧憬)  내 마음을 이렇게도 끄는 것은 무엇인가  내 마음을 밖으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방에서, 집에서  나를 마구 끌어 내는 것은 무엇인가.  저기 바위를 감돌며  구름이 흐르고 있다!  그곳으로 올라갔으면,  그곳으로 갔으면!  까마귀가 떼를 지어  하늘하늘 날아간다.  나도 그 속에 섞여  무리를 따라간다.  그리고 산과 성벽을 돌며  날개를 펄럭인다.  저 아래 그 사람이 있다.  나는 그쪽을 살펴본다.  저기 그 사람이 거닐어 온다.  나는 노래하는 새.  무성한 숲으로  급히 날아간다.  그 사람은 멈춰 서서 귀를 기울여  혼자 미소 지으며 생각한다.  저렇게 귀엽게 노래하고 있다.  나를 향해서 노래하고 있다고,  지는 해가 산봉우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건만,  아름다운 그 사람은 생각에 잠겨서  저녁놀을 보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목장을 따라  개울 가를 거닐어 간다.  길은 꼬불꼬불하고  점점 어두어진다.  갑자기 나는  반짝이는 별이 되어 나타난다.  저렇게 가깝고도 멀리  반짝이는 것은 무엇일까.」  네가 놀라서  그 빛을 바라보면,  나는 너의 발 아래 엎드린다.  그 때의 나의 행복이여!  ~~~~~~~~~~~~~~~~~~~~  이 별  입으로는 차마 말 할 수 없는 이별을  내 눈으로 말하게 하여 주십시오  견딜 수 없는 쓰라림이 넘치오  그래도 여느 때는 사나이였던 나였건만  상냥스러운 사랑의 표적조차  이제는 슬픔의 씨앗이 되었고  차갑기만 한 그대의 입술이여  쥐여 주는 그대의 힘 없는 손이여  여느 때라면 살며시 훔친 입맞춤에조차  나는 그 얼마나 황홀해질 수 있었던가  이른 봄 들판에서 꺾어 가지고 온  그 사랑스런 제비꽃을 닮았었으나  이제부터는 그대 위해 꽃다발을 엮거나  장미꽃을 셀 수조차 없이 되었으니  아아 지금은 정녕 봄이라는데 프란치스카여  내게만은 쓸쓸하기 그지없는 가을이라오  ~~~~~~~~~~~~~~~~~~~~  슬픔의 환희  마르지 말아라, 마르지 말아라  영원한 사랑의 눈물이여!  아아, 눈물 마른 눈에 비치는 이 세상이란  얼마나 황량하며, 그 얼마나 죽은 것으로 보이랴!  마르지 말아라, 마르지 말아라  불행한 사랑의 눈물이여!  ~~~~~~~~~~~~~~~~~~~~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나는 모른다.  단 한번 그대 얼굴 보기만 해도,  단 한번 그대 눈동자 보기만 해도,  내 마음은 온갖 괴로움 벗어날 뿐,  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하느님이 알 뿐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나는 모른다.  OB ICH DICH LIEBE  Ob ich dich liebe, weiss ich nicht.  Seh" ich nur einmal dein Gesicht,  Seh" dir ins Auge nur einmal,  Frei wird mein Herz von aller Qual.  Gott weiss, wie mir so wohl geschicht!  Ob ich dich liebe, weiss ich nicht.  ~~~~~~~~~~~~~~~~~~~~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내 가슴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홀로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등지고  머언  하늘을 바라봅니다.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알아 주던 사람은  지금 먼 곳에 있습니다.  눈은 어지럽고  가슴은 찢어집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내 가슴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느껴요  산과 강, 도시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까요?  그러나 우리가 비록 헤어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느끼며  영혼이 가까이 있는 그 누군가가 있음을 알고 있다면  이 세상은 사람이 살고 있는 정원이 될 것입니다.  ~~~~~~~~~~~~~~~~~~~~  사랑의 독본  책 중에  가장 오묘한 책,  사랑의 책을  나는 차분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기쁨을 말하는 페이지는 적었고  한권을 읽는 동안  괴로움만 계속되었습니다.  이별은 특별히  한 장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재회에 대해서는  아주 짧은 단문으로 말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고뇌는  전편에 걸쳐 매우 긴 설명이 붙어 있었고  끊임없이 이어져 갔습니다.  오오 시인이여,  마침내 그대는 정답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풀 수 없었던  그 문제는 결국  다시 만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  들 장 미  한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  그리도 싱그럽고 아름다워서  가까이 보려고 재빨리 달려 가,  기쁨에 취하여 바라보았네.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소년은 말했네. '너를 꺾을 테야  들장미야!'  장미는 말했네. '너를 찌를테야  끝내 잊지 못하도록.  꺾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짖궂은 아이는 꺾고 말았네  들에 핀 장미  장미는 힘을 다해 찔렀지만  비명도 장미를 돕지 못하니,  장미는 그저 꺾일 수 밖에.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  나그네의 밤노래  모든 산봉우리위에  안식이 있고  나뭇가지에도  바람소리 하나 없으니  새들도 숲속에 잠잔다.  잠시만 기다려라  그대 또한 쉬리니.  The Wanderer"s Night-Song  - Johann Wolfgang von Goethe  THOU who comest from on high,  Who all woes and sorrows stillest,  Who, for twofold misery,  Hearts with twofold balsam fillest,  Would this constant strife would cease!  What are pain and rapture now?  Blissful Peace,  To my bosom hasten thou!  ~~~~~~~~~~~~~~~~~~~~  5월의 노래  밀밭과 옥수수밭 사이로,  가시나무 울타리 사이로,  수풀 사이로,  나의 사랑은 어딜 가시나요?  말해줘요!  사랑하는 소녀  집에서 찾지 못해  그러면 밖에 나간 게 틀림없네  아름답고 사랑스런  꽃이 피는 오월에  사랑하는 소녀 마음 들 떠 있네  자유와 기쁨으로.  시냇가 바위 옆에서  그 소녀는 첫 키스를 하였네  풀밭 위에서 내게,  뭔가 보인다!  그 소녀일까?  May Song  - Johann Wolfgang von Goethe  BETWEEN wheatfield and corn,  Between hedgerow and thorn,  Between pasture and tree,  Where"s my sweetheart  Tell it me!  Sweetheart caught I  Not at home;  She"s then, thought I.  Gone to roam.  Fair and loving  Blooms sweet May;  Sweetheart"s roving,  Free and gay.  By the rock near the wave,  Where her first kiss she gave,  On the greensward, to me,--  Something I see!  Is it she?  ~~~~~~~~~~~~~~~~~~~~  거룩한 갈망  현자에게가 아니면 말하지 마라  세속 사람은 당장 조롱하고 말리니  나는 진정 사는가 싶이 살아 있는 것을  불꽃 속에 죽기를 갈망하는 것을 찬미한다  그대를 낳고 그대가 낳았던  사랑을 나눈 밤들의 서늘한 물결 속에서  그대 말없이 타는 촛불을 보노라면  신비한 느낌 그대를 덮쳐 오리  그대 더 이상 어둠의 강박에 매이지 않고  더 높은 사랑의 욕망이 그대를 끌어올린다  먼길이 그대에겐 힘들지 않다  그대 마술처럼 날개 달고 와서  마침내 미친 듯 빛에 홀리어  나비처럼 불꽃 속에 사라진다  죽어서 성장함을 알지 못하는 한  그대 어두운 지상의 고달픈 길손에 지나지 않으리  The Holy Longing  Tell a wise person, or else keep silent,  because the mass man will mock it right away.  I praise what is truly alive,  what longs to be burned to death.  In the calm water of the love-nights,  where you were begotten, where you have begotten,  a strange feeling comes over you,  when you see the silent candle burning.  Now you are no longer caught in the obsession with darkness,  and a desire for higher love-making sweeps you upward.  Distance does not make you falter.  Now, arriving in magic, flying,  and finally, insane for the light,  you are the butterfly and you are gone.  And so long as you haven't experienced this: to die and so to grow,  you are only a troubled guest on the dark earth.  (Johann Wolfgang von Goethe)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Robert Bly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로버트 블라이 번역  ~~~~~~~~~~~~~~~~~~~~  미뇽(Mignon)  당신은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  그늘진 잎 속에선 금빛 오렌지 빛나고  푸른 하늘에선 부드러운 바람 불어 오고  감람나무는 고요히, 월계수는 드높이 서 있는  그 나라를 아시나요?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사랑이여 !  당신은 아시나요. 그 집을? 둥근 기둥들이  지붕 떠받치고 있고, 홀은 휘황 찬란, 방은 빛나고,  대리석 입상(立像)들이 날 바라보면서,  "가엾은 아이야, 무슨 몹쓸 일을 당했느냐?"고 물어 주는 곳,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보호자여 !  당신은 아시나요, 그 산, 그 구름다리를?  노새가 안개 속에서 제 갈 길을 찾고 있고  동굴 속에는 해묵은 용들 살고 있으며  무너져 내리는 바위 위로는 다시  폭포수 내려 쏟아지는 곳,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우리의 갈 길 뻗쳐 있어요. 오 아버지, 우리 그리로 가요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  가뉘메트  아침놀 가운데인 양  나를 에워싸 작열한다.  그대, 봄이여, 사랑하는 것이여!  수천의 사랑의 기쁨 더불어  그대의 영원한 열기  거룩한 마음  내 가슴으로 밀쳐든다.  끝없이 아름다운 것이여!  하야 내 그대를 끌어 안고자,  이 품안으로!  아, 애태우며  그대 가슴에 내 누우면,  그대의 꽃, 그대의 풀포기  내 가슴에 밀려든다.  사랑스런 아침 바람  내 가슴 속 불타는  갈증을 식혀주면,  바람결에 나이팅게일 사랑스럽게  안개낀 골짜기에서 나를 향해 우짖는다.  곧 가리라! 가리라!  그러나 어디로? 아, 어디로?  위를 향해, 위를 향해서이다.  구름은 아래로 떠오며, 구름은  그리운 사랑으로 내려 온다.  나에게로, 나에게로 오라!  너희들의 품에 안겨  위를 향해서  에워 싸고 에워 싸이어!  위를 향해  그대의 가슴에 안겨  자비로운 아버지여!  GANYMED  Wie im Morgenrot  Du rings mich angluehst,  Frueling, Geliebter!  Mit tausendfacher Liebeswonne  Sich an mein Herz draegt  Deiner ewigen Waerme  Helig Gefuehl,  Unendliche Schoene!  Dass ich dich fassen moecht'  In diesen Arm!  Ach, an deinem Busen  Lieg' ich, schmachte,  Und deine Blumen, dein Gras  Draegen sich an mein Herz.  Du kuehlst den brenneden  Durst meines Busens,  Lieblicher Morgenwind,  Ruft drein die Nachtigall  Liebend nach mir aus dem Nebeltal.  Ich komme! Ich komme!  Wohin? Ach, wohin?  Hinauf, hiauf strebt's,  Es schweden die Wolken  Abwaerts, die Wolken  Neigen sich der sehnenden Liebe,  Mir, mir!  In eurem Schosse  Aufwaerts,  Umfangend umfangen!  Aufwaerts  An deinem Busen,  Alliebender Vater!  * 가뉘메트 ; 아폴로의 독수리를 따라 하늘로 올라간 미소년  ~~~~~~~~~~~~~~~~~~~~  마왕  이 늦은 밤 어둠 속, 바람 속에 말타고 가는 이 누군가?  그건 사랑하는 아이를 데리고 가는 아버지다.  아들을 팔로 꼭 껴안고,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다.  "뭣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무서워 하느냐?"  "보세요, 아버지, 바로 옆에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왕관을 쓰고 옷자락을 끄는 마왕이 안 보이세요?"  "아이야, 그건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란다."  "오, 귀여운 아이야, 너는 나와 함께 가자!  거기서 아주 예쁜 장남감을 많이 갖고 나와 함께 놀자.  거기에는 예쁜 꽃이 많이 피어있고  우리 엄마한테는 황금 옷이 많단다."  "아버지, 아버지, 들리지 않으세요?  마왕이 지금 제 귀에 말하고 있어요."  "조용히 해라 내 아가야, 너의 상상이란다.  그건 슬픈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란다."  "귀여운 아이야, 자, 나와 함께 가자꾸나.  나의 딸들이 널 예쁘게 돌봐주게 하겠다.  나의 달들은 밤마다 즐거운 잔치를 열고  춤추고 노래하고 너를 얼러서 잠들게 해줄거다."  "아버지, 아버지, 저기에 보이지 않으세요?  마왕의 딸들이 내 곁에 와 있어요."  "보이지, 아주 잘 보인단다.  오래된 회색 빛 버드나무가 그렇게 보이는 거다."  "귀여운 아이야 나는 네가 좋단다. 네 귀여운 모습이 좋단다.  네가 싫다고 한다면 억지로 끌고 가겠다."  "아버지, 아버지, 마왕이 나를 꼭꼭 묶어요!  마왕이 나를 잡아가요!"  이제 아버지는 무서움에 질려 황급하게 말을 몬다.  신음하고 있는 불쌍한 아이를 안고서.  가까스로 집마당에 도착했으나  팔 안의 아이는 움직이지 않고 죽어 있다.  The Erl-King  - Johann Wolfgang von Goethe  WHO rides there so late through the night dark and drear?  The father it is, with his infant so dear;  He holdeth the boy tightly clasp"d in his arm,  He holdeth him safely, he keepeth him warm.  "My son, wherefore seek"st thou thy face thus to hide?"  "Look, father, the Erl-King is close by our side!  Dost see not the Erl-King, with crown and with train?"  "My son, "tis the mist rising over the plain."  "Oh, come, thou dear infant! oh come thou with me!  Full many a game I will play there with thee;  On my strand, lovely flowers their blossoms unfold,  My mother shall grace thee with garments of gold."  "My father, my father, and dost thou not hear  The words that the Erl-King now breathes in mine ear?"  "Be calm, dearest child, "tis thy fancy deceives;  "Tis the sad wind that sighs through the withering leaves."  "Wilt go, then, dear infant, wilt go with me there?  My daughters shall tend thee with sisterly care  My daughters by night their glad festival keep,  They"ll dance thee, and rock thee, and sing thee to sleep."  "My father, my father, and dost thou not see,  How the Erl-King his daughters has brought here for me?"  "My darling, my darling, I see it aright,  "Tis the aged grey willows deceiving thy sight."  "I love thee, I"m charm"d by thy beauty, dear boy!  And if thou"rt unwilling, then force I"ll employ."  "My father, my father, he seizes me fast,  Full sorely the Erl-King has hurt me at last."  The father now gallops, with terror half wild,  He grasps in his arms the poor shuddering child;  He reaches his courtyard with toil and with dread,--  The child in his arms finds he motionless, dead.  ~~~~~~~~~~~~~~~~~~~~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  슬픈 밤을 한 번이라도  침상에서 울며 지새운 적이 없는 자,  그는 당신을 알지 못하오니,  하늘의 권능이시여.  당신을 통하여 삶의 길을 우리는 얻었고  불쌍한 죽을 자들 타락케 하시어  고통 속에 버리셨으되,  그럼에도 저희는 죄값을 치르게 됩니다.  WHO Never Ate With Tears His Bread  - Johann Wolfgang von Goethe  WHO never ate with tears his bread,  Who never through night"s heavy hours  Sat weeping on his lonely bed,--  He knows you not, ye heavenly powers!  Through you the paths of life we gain,  Ye let poor mortals go astray,  And then abandon them to pain,--  E"en here the penalty we pay,  ~~~~~~~~~~~~~~~~~~~~  툴레의 임금님  옛날 예적 툴레에 한 임금님이 사셨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정성을 바쳐  사랑하던 왕비가 세상을 떠나며  황금 술잔 하나를 남기고 가셨지.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서  잔치 때마다 그 잔을 쓰시고  그걸로 술을 드실 때마다  계속 눈물을 흘렸지.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 지자  다스리던 고을들과 온갖 것들을  세자에게 물려주셨지만  금 잔만은 그러지 않았지.  임금님은 왕궁 잔치를 열었는데  바닷가 높은 성 안에  선조들 대물려 온 넓은 연회장에  기사와 귀족들 모두 불렀지.  늙으신 임금님은 거기에 서신 다음  그 잔으로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드시더니  그 성스러운 잔을 들어  바닷물로 힘껏 던지셨지.  임금님은 잔이 떨어지는 것과, 물이 들어가고  바다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신 다음  눈을 영원히 감으시고  다시는 마시지 않으셨네.  The King Of Thule  This ballad is also introduced in Faust  - Johann Wolfgang von Goethe  IN Thule lived a monarch,  Still faithful to the grave,  To whom his dying mistress  A golden goblet gave.  Beyond all price he deem'd it,  He quaff'd it at each feast;  And, when he drain'd that goblet,  His tears to flow ne'er ceas'd.  And when he felt death near him,  His cities o'er he told,  And to his heir left all things,  But not that cup of gold.  A regal banquet held he  In his ancestral ball,  In yonder sea-wash'd castle,  'Mongst his great nobles all.  There stood the aged reveller,  And drank his last life's-glow,--  Then hurl'd the holy goblet  Into the flood below.  He saw it falling, filling,  And sinking 'neath the main,  His eyes then closed for ever,  He never drank again.  We wouldn"t enjoy the sunshine  If we never had the rain.  We wouldn"t appreciate good health  If we never experienced pain.  ~~~~~~~~~~~~~~~~~~~~  프로메테우스  제우스여, 그대의 하늘을  구름의 연기로 덮어라!  그리고 엉겅퀴의 목을 치는  어린이처럼  참나무나 산정들과 힘을 겨뤄라!  그러나 나의 대지는  손대지 말고 내버려둬야 한다  그대가 짓지 않은, 나의 작은 집과,  불길 때문에 그대가  나를 질투하는  나의 화덕도  나는 태양 아래에서  신들인 그대들보다 가엾은 자들을 알지 못한다.  그대들은 제물과  기도의 숨결로  간신히 먹고산다.  대단한 분들이여  그리고 만일 어린이들과 걸인들이  희망에 부푼 바보들이 아니었던들  그대들은 굶주렸을 것을.  나 역시 어린애여서,  들고 날 곳을 몰랐을 때,  나는 당황한 시선을  태양을 향해 돌렸다. 마치 저 하늘에,  나의 탄식을 들어 줄 귀가 있고,  압박받는 자를 불쌍히 여겨 줄  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있는 듯이.  그러나 누가 거인족의 오만에 대해서  나를 도왔으며,  누가 죽음과  노예상태에서 나를 구했던가?  거룩하게 불타는 나의 마음이  이 모든 것을 성취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젊고 선량한 마음은,  기만당하여, 구원에 감사하며  천상에서 잠든 자를 열애하지 않았던가?  그대를 존경하라고? 왜?  그대가 이전에 한 번이라도  짐을 진 자들의 고통을 덜어 준 적이 있는가?  그대는 이전에 한 번이라도  겁먹은 자들의 눈물을 달래 준 적이 있는가?  전능의 시간과  나의 주이며, 그대의 주인인  영원한 운명이  나를 사나이로 단련하지 않았던가?  꽃봉오리의 꿈이 모두  성숙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삶을 증오하고,  황야로 도주할 것이라고  그대는 착각하는가?  나는 여기에 앉아, 나의 모습에 따라,  인간들을 형성한다.  괴로워하고, 울며,  즐기고, 기뻐하는,  나와 같이  그대를 존경하지 않는  나를 닮은 족속을.  Prometheus  - Johann Wolfgang von Goethe  Bedecke deinen Himmel, Zeus,  Mit Wolkendunst  Und ube, dem Knaben gleich,  Der Disteln kopft,  An Eichen dich und Bergeshohn;  Mußt mir meine Erde  Doch lassen stehn  Und meine Hutte, die du nicht gebaut,  Und meinen Herd,  Um dessen Glut  Du mich beneidest.  Ich kenne nichts Armeres  Unter der Sonn als euch, Gotter!  Ihr nahret kummerlich  Von Opfersteuern  Und Gebetshauch  Eure Majestat  Und darbtet, waren  Nicht Kinder und Bettler  Hoffnungsvolle Toren.  Da ich ein Kind war,  Nicht wußte, wo aus noch ein,  Kehrt ich mein verirrtes Auge  Zur Sonne, als wenn druber war  Ein Ohr, zu horen meine Klage,  Ein Herz wie meins,  Sich des Bedrangten zu erbarmen.  Wer half mir  Wider der Titanen Ubermut?  Wer rettete vom Tode mich,  Von Sklaverei?  Hast du nicht alles selbst vollendet,  Heilig gluhend Herz?  Und gluhtest jung und gut,  Betrogen, Rettungsdank  Dem Schlafenden da droben?  Ich dich ehren? Wofur?  Hast du die Schmerzen gelindert  Je des Beladenen?  Hast du die Tranen gestillet  Je des Geangsteten?  Hat nicht mich zum Manne geschmiedet  Die allmachtige Zeit  Und das ewige Schicksal,  Meine Herrn und deine?  Wahntest du etwa,  Ich sollte das Leben hassen,  In Wusten fliehen,  Weil nicht alle  Blutentraume reiften?  Hier sitz ich, forme Menschen  Nach meinem Bilde,  Ein Geschlecht, das mir gleich sei,  Zu leiden, zu weinen,  Zu genießen und zu freuen sich,  Und dein nich zu achten,  Wie ich!  ~~~~~~~~~~~~~~~~~~~~  - 괴테 (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  독일의 시인·작가. 고전파의 대표자이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출생. 부친에게서 엄한 기풍을,  모친에게서 명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적 성격을 이어 받았고,  부유한 상류가정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 뒷날의 천재적 대성(大成)을  이룰 바탕을 마련하였다.  괴테는 독일의 시인,비평가,언론인,화가,  무대연출가,정치가,교육가,과학자.  세계문학사의 거인중 한사람으로 널리 인정되는 독일 문호이며,  유럽인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르네상스 거장다운 다재다능함과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가 쓴 방대한 저술과 다양성은 놀랄 만한 것으로,  과학에 관한 저서만도 14권에 이른다.  서정적인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문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허구문학에서는 정신분석학자들의 기초자료로 사용된 동화로부터  시적으로 정제된 단편 및 중편소설(novella)들.  의 "개방된" 상징형식에 이르기까지  폭넓음을 보여준다.  희곡에서도 산문체의 역사극.정치극.심리극으로부터  무운시(blank verse) 형식을 취한 근대문학의 걸작 중 하나인  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82년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인 경지의 예지를 터득하기도 했으나,  사랑이나 슬픔에 기꺼이 그의 모든 존재를 내어 맡기곤 했다.  내적 혼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할 규율을 엄수하면서도  삶, 사랑, 사색의 신비가 투명할 정도로 정제되어 있는  마술적 서정시들을 창조하는 힘을 잃지 않았다.  .......  마침내 그에게는 원하는 대로 창조력을 샘솟게 하는  자신조차도 신비스럽게 여긴 재능이 생겨나 60년 가까이 노력해온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죽기 불과 몇 달전에 완성한 전편은  괴테의 반어적인 체념이 덧붙여져 후세 비평가들에게 전해졌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2행연구(couplet)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우리를 끌어 올린다"는  인간존재의 양극성에 대한 괴테 자신의 감성을 요약한 말이다.  여성은 그에게 있어 남성의 영원한 인도자요 창조적 삶의 원천인 동시에  정신과 영혼의 가장 숭고한 노력의 구심점이었다.  괴테에게는 상호 배타적인 삶의 양극을 오가는  자연스러운 능력과 변화 및 생성에 대한 천부적 자질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상반된 경향들을 자연스럽게 조화시미는 가운데  타고난 재능을 실현해가는 성숙의 과정이었다.    
145    보들레르 시 표절작? 댓글:  조회:4634  추천:1  2015-03-07
말라르메와 보들레르 시가 표절작이라고? 툴바메뉴 스크랩 오류신고 프린트 기사공유하기 facebook twitte     겨울 여행/어제 여행 조르주 페렉·자크 루보 지음,      피에르 바야르의 은 시기적으로 앞선 작가가 나중 작가의 작품을 ‘표절’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엉뚱하면서도 흥미로운 주장을 담은 책이다.   이 책 앞부분에서 바야르는 “예상 표절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낸 건 울리포(잠재문학작업실)다”라고 밝힌다. 울리포는 프랑스의 실험적 문학 집단으로 조르주 페렉, 레몽 크노, 이탈로 칼비노, 마르셀 뒤샹 등이 속해 있었다.   조르주 페렉이 1979년에 처음 발표한 짧은 소설 은 바야르에게 예상 표절 개념에 관한 영감을 준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소설 주인공인 문학 선생 뱅상 드그라엘은 1939년 8월 어느날 동료 드니 보라드의 집 서재에서 이라는 소책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일인칭 시점으로 쓰인 이 소설을 읽자 “마치 눈앞에 있던 문장들이 갑자기 그에게 친숙한 듯했고,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듯했으며, 문장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거의 같은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어디선가 읽은 것 같기도 한, 어떤 문장에 대한 또렷하면서도 흐릿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는 겹쳐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컨대 이 소설 속 문장들은 랭보와 말라르메, 로트레아몽, 귀스타브 칸, 베를렌 같은 유명 시인들의 시 구절을 베끼거나 살짝 변형시킨 것들로 보였는데, 문제는 이 책이 이 시인들의 활동 시기보다 앞선 1864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 드그라엘은 “로트레아몽, 제르맹 누보, 랭보, 코르비에르 그리고 다른 많은 시인들이, 단 한 편의 작품 안에 이후 서너 세대의 작가들이 양분으로 삼을 열매들을 모아놓을 수 있었던 천재적이고 불우한 한 시인의 표절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신하지만, 의 지은이 위고 베르니에와 그의 작품에 관한 30년 가까운 추적과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역시 울리포 멤버인 자크 루보가 1992년에 처음 발표한 은 페렉 소설 을 계승·발전시킨 작품으로 문학적 대화와 유희의 흥미로운 사례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드니 보라드의 아들로 존스홉킨스대학 프랑스 문학 전공 교수인 데니스 보라드는 페렉의 을 읽고 위고 베르니에의 삶과 문학에 관한 탐구에 나선다. 고모의 도움으로 그는 위고 베르니에의 또 다른 책 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는데, 추가 자료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또 다른 충격을 준다. “보들레르의 이 베르니에의 의 완벽한 표절작”이었던 것. 루보는 속 여러 작품의 구절들을 헤쳐 모아 놓은 듯한 베르니에의 시들을 열거한 다음, “1857년 6월25일, 출간이 예정되었던 최초의 날짜에서 이틀이 지난 후, 파리에서 샤를 보들레르의 초판이 판매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보들레르가 베르니에의 시들을 베꼈다고 주장한다. 베르니에를 베낀 것이 보들레르만은 아니어서 루보는 “모두가 그 책을 읽었다. 모두 그 책을 베낀 다음, 틀림없이 모두 없애버렸을 것이다”라는 과감한 결론으로 나아간다.   페렉의 과 루보의 은 프랑스에서 1997년에 한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는데, 지난해에는 역시 이 이야기를 이어 쓴 울리포 구성원 열다섯명의 ‘공동창작소설’이 이라는 제목으로 나오기도 했다.
144    명시인 - 랭보 댓글:  조회:5225  추천:1  2015-03-07
1871.5.15 시인 드메니에게 '견자의 편지'를 써서 보내다       천재란 단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각고의 노력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는 단순히 ‘성실한’ 정도를 넘어서서 ‘미칠 정도’로 노력한다. 아르튀르 랭보가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랭보는 마치 글자를 먹는 염소와 같았다. 그는 라틴어 고전과 프랑스 현대문학 작품을 읽고 또 읽고, 그 뼛속까지 외우기를 거듭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시인이 되었다.       1871년 5월 랭보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세계관을 밝히는 중요한 편지 두 통을 쓴다. 13일에는 담임선생이자 학창시절의 최고 멘토였던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편지를 써보냈으며, 15일에는 스승의 친구이자 시인인 폴 드메니에게 또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두 통의 편지에 모두 자신이 쓴 시를 동봉했다. 랭보의 ‘견자의 편지’는 바로 이 두 통의 편지를 말한다. 두 통의 편지에 랭보는 독특한 시론(詩論)을 피력하면서 자신이 ‘견자’(見者, voyant)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견자’는 랭보의 시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어가 되었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예고한 편지 - “시인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견자로 만듭니다.”       이장바르는 랭보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스승이었고, 드메니는 랭보의 습작 시절에 힘이 되어준 시인이었다. 이장바르에게 보낸 ‘견자의 편지’는 간결하고 함축적인 데 비해, 드메니에게 보낸 편지는 시와 시인에 대한 랭보의 생각이 상세하게 담겨 있는 체계적인 시론이었다. 랭보는 드메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감히 견자이어야 하며, 의식적으로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랭보의 시 의 육필 원고 일부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시인은 그 자신을 추구합니다. 자신 속에 모든 독소를 걸러내어 오직 그 정수만을 간직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신앙과 초인적인 모든 그의 힘이 필요한 말할 수 없는 고역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죄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의 박식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미지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왜냐하면 그는 그의 영혼을 단련해서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누구보다도 풍요해진 영혼을!       그는 미지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미쳐 날뛰며 자기 환각들에 관한 지식을 상실하고 말 때에 그는 반드시 그 환각들을 볼 것입니다. 그는 지극히 엄청나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사물들에 의한 약동 속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그때에는 가공할 만한 다른 작업자들이 올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쓰러진 바로 그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이준오 역)       이 편지들은 랭보가 앞으로 ‘견자’로서 세계를 자유롭게 항해하겠다는 출사표였다. 아버지와 같은 자신의 스승들에게 성장한 자신을 보여주면서, 사랑받고 싶다고 외친 외로운 소년의 애정 표현이기도 했다. 시의 길을 가는 랭보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온 이장바르와 드메니였지만, 랭보의 갑작스런 비약은 적지 않게 당황스런 것이었다. 그들은 랭보를 이해하지 못했고, 랭보에게 현실을 고려하여 인내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미 랭보는 돌아올 수 없는 세계를 향해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을 건너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이었다. 그 세계를 향한 힘찬 고동소리가 바로 ‘견자의 편지’였다.         지적 욕구와 탐구정신, 엄청난 욕망 아래 감춰진 나약함과 억제된 에너지                                                                            첫 영성체를 받던 날 12살의 랭보(1866)       아르튀르 랭보의 처녀작은 (1869년 작, 1870년 1월 발표)이다. 이전에 라틴어로 쓴 시가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문학작품으로 쓴 것이라기보다는 학습의 일환으로 쓴 것이었다. 첫 작품이 보통 시인의 내면을 비치는 거울이 되듯이 이 작품 또한 랭보의 내면에 숨어 있는 고아의식을 발현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드센 아내가 싫어 집을 떠나버렸고, 아버지 없는 자식들을 키우느라 어머니는 과도하게 엄격하였다. 아르튀르의 형제로는 형 프레데리크, 여동생 비탈리와 이자벨이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교육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한 아르튀르 랭보는 채워질 수 없는 결핍감으로 시달려야 했다.       학창시절의 랭보는 항상 우수한 학생이었다. 특히 라틴어를 배우고 암송하는 그의 솜씨는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는 놀랄 만한 기억력으로 라틴어로 된 글 여러 쪽을 어렵지 않게 암송했다. 그는 라틴어 시의 구성을 유심히 분석해보고, 그 속에서 단어의 유희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으며, 라틴어 시의 창작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남들은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을 랭보는 오히려 즐겼다.       특히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의 만남은 특별했다. 중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이 랭보를 학술경연대회에 내보내기 위해 담임인 아리스티드 레리티에로 하여금 그를 특별 지도하게 했다. 랭보는 자연스럽게 담임이 좋아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세계에 푹 빠지게 된다. 베르길리우스를 읽으며 랭보는 시의 창작 기법을 음미하고, 원문과 프랑스어 번역문을 비교하면서 그 차이를 하나하나 맛보았다.       베르길리우스의 와 의 차이를 간파해내는 랭보의 예지는 이미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농경시도 전원시와 배경도 다르지 않고 작자의 자연에 대한 사랑도 여전하지만, 농경시에 오면 ‘일’이 ‘시’를 밀어내고 있음을 예리한 소년은 날카롭게 간파해냈던 것이다. 그는 베르길리우스 외에도 수많은 대가들의 작품을 탐독했고, 그들의 저서 속에서 들끓는 이미지들을 발견해나갔다. 그것은 세계 창조의 이미지였고, 묵시록과 대홍수의 이미지였으며, 태초와 종말의 이미지였으며,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였다.       1870년 수사학 반의 담임 교사로 온 조르주 이장바르는 학창시절의 랭보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이었다. 이장바르는 랭보의 지적 욕구와 탐구정신, 엄청난 욕망 아래 감춰진 나약함과 억제된 에너지를 꿰뚫어보았다. 랭보 또한 진보적인 스승의 세련된 정신세계와 열린 사고방식을 존경했다. 이장바르를 통해 엘베시우스와 장 자크 루소를 알게 된 랭보는 내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팡탱 라투르의 그림 의 일부로 폴 베를렌(왼쪽)과 랭보(가운데)가 나란히 앉아 있다.       무엇보다 이장바르가 구독한 에서 발견한 프랑스의 많은 시인들의 시세계는 랭보에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한껏 키워주었다. 특히 샤를 보들레르는 랭보에게 신이 되었다. 보들레르를 통해 랭보는 시인이란 평온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며, 시란 세계에 대한 반항이자 금지된 세상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꿰뚫어보는 강렬하고도 예민한 투시력을 갖춘 시인의 출현이 임박했던 것이다.         폴 베를렌과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파국 맞은 '시인의 사랑'                                                                                폴 베를렌이 스케치한 랭보의 모습(1872)       1871년 5월 ‘견자의 편지’에 대한 드메니의 답장이 늦어지자, 아르튀르 랭보는 자신이 견자의 편지에서 실제 ‘견자’로 지목했던 몇 명의 시인 중에서 테오도르 드 방빌을 대화 상대로 선정했다. 방빌에게 편지를 써놓고 기다리는 동안,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친구 샤를 브르타뉴의 입에서 시인 폴 베를렌에 관한 얘기가 튀어나왔다. 베를렌은 랭보가 ‘견자의 편지’ 말미에서 고답파시인 중에서 진짜 시인으로 꼽은 견자였다. 브르타뉴는 뜻밖에도 베를렌과 친분이 있는 친구였다.       브르타뉴에게서 베를렌의 연락처를 안 랭보는 곧 베를렌에게 편지를 썼다. 아울러 시 을 필체가 좋은 친구 들라에에게 베껴 적도록 하여 동봉했다. 편지를 보낸 지 나흘째가 되자 초조해진 랭보는 또 를 동봉하여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9월 초, 드디어 베를렌의 답장이 브르타뉴의 집 주소를 통해 랭보에게 날아들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영혼이여, 어서 오시오. 우리는 당신을 원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는 파리에 도착한 랭보가 기차에서 내리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베를렌과 랭보의 운명적인 만남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랭보는 파리의 시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로 쓴 대작 를 들고 베를렌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그것이 그들에게 커다란 축복이었으나 엄청난 저주였음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을까? 그들은 문학적으로 서로에게 깊이 매료되었고 더불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정도 느껴보지 못한 랭보가 더 적극적이었다.       베를렌은 랭보와 아내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2년이 채 되지 않아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1873년 7월 10일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격분한 베를렌이 랭보를 향해 총을 쏘았던 것이다. 두 발의 총알 중에서 한 발이 랭보의 왼손에 상처를 입혔다. 베를렌은 기소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랭보는 로슈로 돌아와 나중에 그의 대표작이 되는 연작 을 쓴다. 10월에 이 출간되었으나, 그 책은 프랑스 문단과 독자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1874년에는 전에 썼던 을 정리하면서 새로 쓰게 된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랭보는 시작활동을 중단하였다.       랭보의 시는 대상에 대한 상투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모든 감각이 뒤틀렸을 때 보이는 새롭고 놀라운 사물의 현현을 시적 이상으로 삼았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랭보의 시가 프랑스 문학사 속에서 두 가지 점에서 새롭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세련된 과장법을 음절 단위의 리듬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전통이었던 프랑스 시에 대한 대담한 반항이었으며, 또 하나는 기독교 정신에 기반을 둔 유럽 문명 자체에 대한 문학적인 회의였다. 랭보는 예리한 송곳 같은 시선으로 사물의 핵심 속으로 파고들어갔으며, 그 이면에 숨은 본성을 꿰뚫어봄으로써 예언자적인 시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랭보의 출현은 이처럼 프랑스 문학사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었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그에게 조명을 비출 여유가 없었다.         "나는 미지에 도달합니다" - 세계를 떠도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베를렌은 랭보에게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자신의 별명답게 랭보는 안주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감옥에서 나온 베를렌이 랭보에게 신앙을 권했을 때도 랭보는 거절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랭보는 안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1875년에는 걸어서 이탈리아에 가서 밀라노에서 머물기도 했다. 1876년에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용병으로 자원해 하르데르베이크에서 머물다 자바로 떠났다가, 8월 15일 탈영하여 희망봉과 아일랜드를 거쳐 12월 중순 샤를빌에 도착했다. 1878년에는 키프로스 섬의 채석장에서 일자리를 얻지만, 이듬해 5월 장티푸스에 걸려 로슈로 돌아온다. 9월이 되자 다시 떠나지만 마르세유에서 병이 재발해 돌아왔다. 1881년부터는 에티오피아의 여러 지역을 돌면서 상인이자 탐험가의 삶을 산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방랑벽이 랭보의 피 속에서 뜨겁게 돌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하라의 랭보(1883)     에티오피아에서 커피와 무기를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난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짤막한 외투는 관념적이게 되었지,   나는 하늘 아래 나아갔고, 시의 여신이여! 그대의 충복이었네,   오, 랄라! 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꿈꾸었는가!     내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었지.   ㅡ꿈꾸는 엄지동자인지라, 운행중에 각운들을   하나씩 떨어뜨렸지. 내 주막은 큰곰자리에 있었고.   ㅡ하늘에선 내 별들이 부드럽게 살랑거렸지.     하여 나는 길가에 앉아 별들의 살랑거림에 귀기울였지,   그 멋진 구월 저녁나절에, 이슬 방울을   원기 돋구는 술처럼 이마에 느끼면서,     환상적인 그림자들 사이에서 운을 맞추고,   한 발을 가슴 가까이 올린 채,   터진 구두의 끈을 리라 타듯 잡아당기면서!     -아르튀르 랭보, 「나의 방랑생활」 전문 (김현 역)       랭보의 방랑벽은 진정한 견자가 되기 위한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견자의 편지’를 들추어보자.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선 자기 자신을 완전히 깨닫는 일입니다. 그는 그의 영혼을 추구하며, 그것을 검토하며, 시련을 가하고 가르쳐갑니다. 자신의 영혼을 알고 나서는 그것을 가꾸어가야만 합니다. (……) 소중한 일은 영혼을 기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곰프라치코스(스페인의 전설에 나오는 괴물로 얼굴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험상궂으며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를 본따서 말이죠.”       랭보는 자신의 영혼을 검토하고 시련을 가하기 위해 끊임없이 방랑을 일삼았다. 그렇게 하면 영혼을 기괴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방랑이 “지극히 엄청나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사물들에 의한 약동”을 제공하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방랑은 곧 반항이었다. 그것은 정착의 꿈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나약한 정신에 대한 거부였다. 미국 듀크 대학교 불문학 교수였던 월리스 파울리는 이렇게 말했다. “랭보는 일상에 반항했다. 철이 들면서 그는 가족(정확히는 가족 중의 한 사람)에게 반항했고, 샤를빌 중학교의 교사들에게 반항했고, 노트르담 교구 소속 성당의 사제들에게 반항했고, 샤를빌이라는 지역 사회에 반항했고,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급기야 19세기 프랑스 시단에 반기를 들었다.”         한쪽 다리를 절단했지만 전신으로 퍼진 암세포를 막을 수 없었다                                                          시집 과 이 실린 프랑스 폴리오 문고       너무도 뜨겁게 살았던 나머지 랭보의 생애는 일찍 저물게 된다. 1891년 연초에 랭보는 오른쪽 무릎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다리가 심하게 부어오르자 랭보는 들것에 실려 중간 거점으로 삼곤 했던 아라비아 반도의 아덴으로 간다. 그곳에서도 병을 고칠 수는 없었다. 고국에 돌아와 마르세유의 콩셉시옹 병원에 입원한 랭보는 한쪽 다리를 절단한 후 로슈로 갔지만, 다시 악화되어 병원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제 전신으로 퍼진 암세포를 막을 길은 없었다. 1891년 11월 10일 젊은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지옥의 계절’을 굵고 짧게 보낸 후 ‘천국의 계절’을 향해 갔다.       아르튀르 랭보가 ‘견자의 편지’에서 샤를 보들레르를 ‘최초의 견자이자 시인의 왕이며 진짜 신’이라고 했듯이, 랭보는 보들레르의 가장 창조적인 계승자였다. 보들레르로부터 시작한 프랑스 상징주의는 베를렌을 거쳐 랭보에게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며, 스테판 말라르메 와 폴 발레리를 통해 현대시의 또 하나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특히 랭보의 파격적인 시는 현대시의 혁명이었다.       보들레르를 현대시의 기원이라고 하지만 그의 다양한 실험이 랭보에게서 더욱 분명하게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들레르의 시집 은 내용은 자유롭되 형식은 전통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랭보의 연작에 이르면 내용과 형식이 모두 어떤 격도 따르지 않는다. 보들레르가 혁명의 시작이라면 랭보는 혁명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그가 일생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를 창작한 기간은 15~20세의 약 5~6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단 5년 동안에, 그것도 10대의 소년으로서 전 세계 시문학의 중심에 우뚝 선 그는 진정으로 천재였다. 천재는 자신이 5년 동안에 이룩한 업적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평생 걸리는 일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 또한 랭보가 절필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면 20세 이후에도 랭보는 시를 썼다. 20세 이전에 펜으로 시를 썼다면, 그 이후에는 몸으로 시를 썼던 것이다. 펜으로 쓴 시는 깊이 있게 연구되어왔지만, 몸으로 쓴 시는 아직도 세심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몸으로 쓴 시가 더 난해한 것일까?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랭보』, 클로드 장콜라 저, 정남모 역, 책세상, 2007.                                                                 랭보의 시를 이해하기 힘든 독자에게 클로드 장콜라의 『랭보—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랭보의 삶은 그의 시와 비슷하다. 이 책은 랭보의 모든 것을 놀라우리만치 꼼꼼하고 흥미롭게 정리한 평전이다. 어린 시절의 랭보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그의 문학사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시절의 삶에 대해 이 책은 매우 친절하고도 섬세하게 전해준다. 이 평전을 읽고 랭보의 시를 읽으면, 그의 작품이 더 이상 어렵지 않을 것이다.         『랭보 지옥으로부터의 자유』, 삐에르 쁘띠피스 저, 장정애 역, 홍익출판사, 2001.         삐에르 쁘띠피스의 『랭보—지옥으로부터의 자유』는 상상력을 풍부하게 가미하여 극적으로 구성한 평전이다. 이 책을 통해 좀 더 편안하게 랭보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에 따르면, 랭보가 죽은 후에야 여동생 이자벨은 비로소 오빠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주 잠깐씩만 집에 들르곤 했던 오빠가 밖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오빠의 사후에야 랭보를 알았듯이 세계 또한 그러했다. 랭보는 사후에야 진정으로 이해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롤랑 드 르네빌르의 『견자 랭보』(이준오 옮김, 문학세계사, 초판-1983/중판-1992)는 저자의 소르본 대학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하여 펴낸 책이다. 이 책은 랭보의 시 속에 담긴 사상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동양적인 신비 사상과 시인의 예언자적인 면모를 깊이 있게 분석하였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랭보가 1871년 5월 15일에 드메니에게 쓴 견자의 편지 전문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 월리스 파울리 저, 이양준 역, 사람들, 2011.         그 밖에도 랭보와 베를렌의 삶을 함께 조명한 『저주받은 시인들』(앙리 뻬이르 지음, 최수철・김종호 옮김, 동문선, 1985)과 『랭보와 베를렌느 비교론』(이준오 편역, 예림기획, 1999), 랭보를 존경했던 가수 짐 모리슨과 랭보의 정신세계를 비교한 『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도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랭보의 거의 모든 작품이 번역되어 다양한 판본으로 출간되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번역시를 읽다보면 번역에 불만을 갖게 되기 쉽다. 그러나 완벽한 번역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그들에게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차창룡 | 시인, 문학평론가.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143    서구 현대시 시조 - 보들레르 댓글:  조회:4393  추천:0  2015-03-07
  서구 현대시의 시조 보들레르, 그리고『악의 꽃』     낭만주이 정신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낭만주의의 결점을 뛰어넘었던,   이후 오게 될 상징중의, 초현실주의, 현대시에 길을 터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보들레르 유일의 시집     보들레르는 많은 시집을 남긴 시인이 아니다. 소산문 시집 『파리의 우울』을 제외하고는 단 한 권의 시집,『악의 꽃』을 남겼을 뿐이다. 그는 단 한 권의 시집 속에 그의 삶의 경험의 정수를 쏟아놓았고, 이 시집으로 후에 '현대시의 시조'로 불리게 된다.『악의 꽃』은 삶의 어느 특정한 시기에 씌어진 것도, 짧은 시간의 산물도 아니다.『악의 꽃』의 역사는 보들레르의 삶의 역사를 동반했다는 점에서도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진다. 문학 활동이 지속되었던 근 이십오 년 내내 그는 이 한 권의 시집에 집착하며, 그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857년 보들레르가『악의 꽃』을 발표했을 때 그 시대의 누구도 이 시집의 놀라운 독창성을 주목하지 못했다. 이 책에 담긴 기이하고 대담한 주제들, 빅토르 위고가 말한 '새로운 떨림'과도 같은 신선하고 파격적인 감수성,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영혼의 전율, 그리고 매혹적인 음악성……    그 시대는 이 모든 감동을 같이할 감각을 갖추지 못했다. 시대적 감수성이라는 점에서『악의 꽃』의 시인은 한 세계를 앞질러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보들레르는 실로 오랜 세월 '저주받은 시인'으로서의 불행을 벗어나지 못했고,『악의 꽃』은'소수의 행복한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은 채 독자층을 한껏 넓혀갔고, 후세는 이 책을 '현대시의 복음서'  부르기를 서슴치 않는다.  『악의 꽃』은 연금술사가 용광로에 집어 넣은 수 많은 재료로부터 귀중한 금속을 추출해낸 것처럼, 그가 문학과 예술의 세계로부터 얻은 풍부한 체험으로부터 정수만을 뽑아낸 것이다.                                                                                                     -『악의 꽃』표제에서   *******************************************************************************************       시체   LNE CHAROGNE         기억해보라, 님이여, 우리가 보았던 것을,             그토록 화창하고 아름답던 여름 아침;   오솔길 모퉁이 조약돌 깔린 자리 위에               드러누워 있던 끔찍한 시체,     음탕한 계집처럼 두 다리를 쳐들고,               독기를 뿜어내며 불타오르고,   태평하고 파렴치하게, 썩은               냄새 가득 피우는 배때기를 벌리고 있었다.     태양은 이 썩은 시체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알맞게 굽기라도 하려는 듯,   위대한「자연」이 한데 합쳐놓은 것을                백 갑절로 모두 되돌려주려는 듯;     하늘은 이 눈부신 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어나는 꽃이라도 바라보듯.   고약한 냄새 어찌나 지독하던지 당신은                풀 위에서 기잘할 뻔했었지.     그 썩은 배때기 위로 파리떼는 윙윙거리고,                 거기서 검은 구더기떼 기어나와,   걸쭉한 액체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살아 있는 누더기를 타고.     그 모든 것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밀려나갔다 하고,                그 모든 것이 반짝반짝 솟아나오고 있었다.   시체는 희미한 바람에 부풀어올라,                아직도 살아서 불어나는 듯했다.     그리고 세상은 기이한 음악 소리를 내고 있었다,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또는 장단 맞춰 까불리는 키 속에서                 흔들리고 나뒹구는 곡식알처럼.     형상은 지워지고, 이제 한갓 사라진 꿈,              잊혀진 화포 위에   화가가 기억을 더듬어 완성하는               서서히 그려지는 하나의 소묘.     바위 뒤에서 초조한 암캐 한 마리                성난 눈으로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놓쳐버린 살점을 해골로부터               다시 뜯어낼 순간을 노리며,     -허나 언제인가는 당신도 닮게 되겠지,               이 오물, 이 지독한 부패물을,   내 눈의 별이여, 내 마음의 태양이여,                내 천사, 내 정열인 당신도!     그렇다! 당신도 그렇게 되겠지, 오 매력의 여왕이여,               종부성사 끝나고   당신도 만발한 꽃들과 풀 아래               해골 사이에서 곰팡이 슬 즈음이면.     그때엔, 오 나의 미녀여, 말하오,                 당신을 핥으며 파먹을 구더기에게,   썩어문드러져도 내 사랑의 형태와 거룩한 본질을                 내가 간직하고 있었다고!             살인자의 술   LE VIN DE LASSASSIN       아내가 죽어 나는 자유다!   그러니 나는 실컷 마실 수 있다.   돈 한 푼 없이 집에 돌아오면   그녀의 고함 소리 내 가슴을 찢었지.     왕 못지않게 행복하구나;   공기는  맑고 하늘은 기막히다……    내가 아내에 반했을 때도   이런 여름이었지!     나를 쥐어뜬는 이 끔찍한 갈증을   풀어주자면 필요할 거다,   아내의 무덤을 채울 만큼의 술이,   - 아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아내를 우물 깊은 곳에 던져버리고   그녀 위에 샘 가의 돌멩이들을   모조리 집어넣기까지 했지.   - 이런 일은 할 수만 있다면 잊고 싶다!   아무것도 우리 사이에 떼어놓을 수 없다고   맹세한 사랑의 이름을 내세워,   우리 사랑의 절정의 행복한 시절처럼   서로 화해하자고,     어느 날 저녁 아내에게 애원하여,   으슥한 거리로 불러냈었지.   아내는 나타났지 뭐야!- 정신 나간 계집 같으니라고!   하긴 우리 모두 좀 정신이 나갔지만!     비록 몹시 지치기는 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어여뻤다!   나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지! 그래서   삶을 끝내! 하고 난 말했다.     아무도 이런 내 마음 모르리.   어리석은 주정뱅이들 중   누구인들 그 병적인 밤   술로 수의를 만들 생각을 했으랴?     쇠로 만든 기계처럼   끄떡없는 주정뱅이 따위는   여르밍고 겨울이고 한번도   진정한 사랑 해보지 못했지.     검은 마력과 그 지옥 같은   공포의 행렬, 독약병과 눈물,   그리고 쇠사슬과 뼈다귀   소리가 따르는 진정한 사랑을!     - 나는 이제 자유로운 홀아비다!   이 밤 죽도록 마시고 취해;   두려움도 후회도 모르는 채,   땅바닥에 아무렇게 드러누워,     개처럼 잠들라   돌이며 진흙 가득 실은   수레바퀴 무거운 화물차가     죄 많은 내 머리 박살을 내건,   내 몸뚱이를 두 동강이 내건, 「신」이고「악마」고「영성체대」고   아무것도 겁날 것 없다!  
142    노별상 수상 거부자들과 그 리유 댓글:  조회:4371  추천:0  2015-03-05
노벨상 수상 거부자와 이유   2002년까지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수상자는 아래의 총 6명입니다. 1. 리하르트 쿤: 화학상, 1938년, 독일, 카로티노이드 및 비타민 연구 2. 아돌프 부테난트: 화학상, 1939년, 독일, 성 호르몬 연구 3. 게르하르트 도마크: 생리의학상, 1939년, 독일, 프론토질의 항균 효과 4.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문학상, 1958년, 소련, 소설가/시인 5. 장 폴 사르트르: 문학상, 1964년, 프랑스, 철학자/극작가 6. 르 둑 토(黎德壽): 평화상, 1973년, 북베트남, 베트남 분쟁 해결 이들의 수상 거부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1, 2, 3(리하르트 쿤, 아돌프 부테난트, 게르하르트 도마크 ): 외부 압력 때문 1937년 아돌프 히틀러는 1935년 당시 독일의 정치범이었던 반나치 저술가 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데 격분해 향후 독일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바 있다.  * 4(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정치적인 이유 장편소설 〈의사 지바고 Doctor Zhivago〉로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소련 내에서 커다란 반대가 야기되어 수상을 거부했다. 러시아 혁명의 잔혹함과 그 여파 속에서 펼쳐지는 방황, 정신적 고독, 사랑을 서사적으로 기술한 이 소설은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소련에서는 비밀리에 번역본으로만 유포되었다. 1956년 파스테르나크는 큰 기대에 부풀어 모스크바의 유력한 월간지에 소설 〈의사 지바고〉를 기고했으나 "10월혁명과 혁명의 주역인 인민, 소련의 사회건설을 중상했다"는 비방과 함께 거부당했다. 1957년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출판사를 통해 서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저작권을 사들인 그 출판사는 '수정을 위해' 원고를 되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영역본이 출간된 1958년에는 이미 18개 국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소련에서는 파스테르나크 탄핵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었으며 생계유지의 수단마저 빼앗겼다. 공공 모임에서는 그를 국외로 추방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는 제1서기장 흐루시초프에게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내게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써보냈다. 그는 페레델키노의 집에서 암과 심장병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냈다.  * 5(장 폴 사르트르 ): 본인 의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르트르는 프랑스 정치운동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고 공공연하게 좌익으로 기울었다. 또 비록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소련에 대한 열렬한 찬양자가 되었다. 1954년에는 소련·스칸디나비아·아프리카·미국·쿠바 등을 방문했다. 그러나 1956년 부다페스트에 소련 탱크가 진입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그는〈현대〉에〈스탈린의 환상 Le Fantome de Staline〉이란 긴 글을 써서 소련의 침공과 모스크바의 독재에 굴복한 프랑스 공산당을 모두 비난했다. 몇 년이 지나 이러한 비판적 태도 때문에 '사르트르적 사회주의'란 형식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새로운 주요저서〈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에서 표현되었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착수했고 소련식 변증법은 살아날 수 없음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당대의 유일한 철학이라고 믿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화석처럼 굳어졌으며 특정 상황에 적응하는 대신 그 특정 상황을 미리 정해진 보편성에 따라 억지로 짜맞춘다고 인정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그 근본적·일반적 원칙이 무엇이든 다른 구체적 실존상황을 인정하는 법과 인간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변증법적 이성비판〉은 빈약한 구성이 문제이지만 지금보다 좀더 관심을 끌 만한 인상적이고 유려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의 제2권을 기획했다가 포기했다. 대신〈말〉을 출판할 준비를 했는데, 이 책이 1964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을 알고는 수상을 거부했다.  * 6(르 둑 토(黎德壽) ): 본인 의사 1973년 헨리 키신저와 함께 노벨 평화상 공동수상자로 지명되었으나 거절했다.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창당 일원이었으며 정치적 활동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1940년 중국으로 탈출했다. 1945년 하노이로 돌아와 공산당인 베트남 노동당 재건과 공산반란 단체인 베트민을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1955년부터 베트남 노동당의 정치국에서 일했고 1976년부터는 노동당에서 공산당으로 명칭이 바뀐 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의 일원이 되었다. 1968~73년 파리 평화회담에 월맹측 대표단 특별 고문으로 파견되어 1973년 베트남 종전을 위해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중에는 대표단의 수석 대변인이 되었다.  참고로, 지정된 날짜 전에 수상을 사양하거나 거부할 경우에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됩니다. 수상을 거부했던 사람이 나중에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금메달과 상장을 찾아간 사례도 있었지만 상금은 이미 기금에 환수된 뒤였기 때문에 돌려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편, 각 부문별 상금은 1,000만 스웨덴 크로나(약 94만 3,000달러, 2001년 현재)라고 합니다. 이상, 도움이 되셨기를...    
141    력대 노벨문학상 수상작 목록 댓글:  조회:4933  추천:0  2015-03-05
        ▲ 2007년 도리스 레싱(영국.소설가) - '마사 퀘스트' '다섯' ▲ 2006년 오르한 파묵(터키.소설가) - '내 이름은 빨강' '하얀성' ▲ 2005년 해럴드 핀터(영국.극작가) - `축하' `과거 일들의 회상' ▲ 2004년 엘프레데 옐리네크(오스트리아.소설가)- '피아노 치는 여자' '욕망' ▲ 2003년 J M 쿳시(남아공.소설가)- '불명예' ▲ 2002년 임레 케르테스(헝가리.소설가)- '운명' ▲ 2001년 V. S. 네이폴(영국.소설가)- '도착의 수수께끼' ▲ 2000년 가오싱젠(중국.극작가)- '영산(靈山)' ▲ 1999년 귄터 그라스(독일.소설가)- '양철북' ▲ 1989년 카밀로 호세 세라(스페인.소설가) - '파스쿠알 두아르테 일가' ▲ 1988년 나집 마흐프즈(이집트.소설가) - '우리 동네 아이들'  ▲ 1987년 요세프 브로드스키(러시아계 美.시인) - '소리 없는 동네'  ▲ 1986년 월레 소잉카(나이지리아.소설가) - '늪 지대 사람들'  ▲ 1985년 클로드 시몽(佛.소설가) - '사기꾼'  ▲ 1984년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체코슬로바키아.시인) - '프라하의 봄'  ▲ 1983년 윌리엄 골딩(英.소설가) - '파리 대왕'  ▲ 1982년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소설가) - '백년 동안의 고독'  ▲ 1981년 엘리아스 카네티(英.소설가) - '眩暈'  ▲ 1980년 체스와프 밀로즈(폴란드.시인) - '한낮의 밝음'  ▲ 1979년 오디세우스 엘리티스(그리스.시인) - '방향'  ▲ 1978년 아이작 싱어(美.소설가) - '고레이의 사탄'  ▲ 1977년 비센테 알레이산드레(스페인.시인) - '마음의 역사'  ▲ 1976년 솔 벨로(美.소설가) - '희생자'  ▲ 1975년 에우제니오 몬탈레(伊.시인) - '기회'  ▲ 1974년 H.마르틴손(스웨덴.시인) - '아니 아라 ' E.욘손(스웨덴.소설가) - '해변의 파도'  ▲ 1973년 패트릭 화이트(濠洲.소설가) - '아주머니 이야기'  ▲ 1972년 하인리히 뵐(獨.소설가) - '기차는 늦지 않았다'  ▲ 1971년 파블로 네루다(칠레.시인) - '황혼의 세계'  ▲ 1970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舊소련.소설가) - '수용소 군도'  ▲ 1969년 새뮤얼 베케트(아일랜드.소설/극작가) - '고도를 기다리며'  ▲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日.소설가) - '雪國'  ▲ 1967년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과테말라.소설가) - '과테말라 전설집'  ▲ 1966년 S.요세프 아그논(이스라엘.소설가) - '출가' 렐리 사크스(스웨덴.시인) - '엘리'  ▲ 1965년 미하일 솔로호프(舊소련.소설가) - '고요한 돈강'  ▲ 1964년 장 폴 사르트르(佛.철학가.작가) - '구토'  ▲ 1963년 게오르게 세페리스(그리스.시인) - '연습장'  ▲ 1962년 존 스타인벡(美.소설가) - '에덴의 동쪽'  ▲ 1961년 이보 안드리치(유고슬라비아.시인) - '드리나강의 다리'  ▲ 1960년 생존 페로스(佛.시인) - '찬가'  ▲ 1959년 살바토레 콰지모도(伊.시인) - '시인과 정치'  ▲ 19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舊소련.소설가) - '닥터 지바고'  ▲ 1957년 알베르 카뮈(佛.소설가) - '이방인'  ▲ 1956년 J.R.히메네스(스페인.시인) - '프라테로와 나'  ▲ 1955년 H.락스네스(아이슬란드.소설가) -'독립된 백성'  ▲ 1954년 어니스트 헤밍웨이(美.소설가) -'무기여 잘 있거라"  ▲ 1953년 윈스턴 처칠(英.정치가) - '제2차대전 회고록'  ▲ 1952년 프랑수아 모리악(佛.소설가) -'테레즈 데케르'  ▲ 1951년 P.라케르크 비스트(스웨덴.소설가/시인) - '바라바'  ▲ 1950년 버트런드 러셀(英.철학자) - '권위와 개인'  ▲ 1949년 윌리엄 포크너(美.소설가) - '음향과 분노'  ▲ 1948년 T.S.엘리엇(英.시인) - '황무지'  ▲ 1947년 앙드레 지드(佛.소설가) - '좁은 문'  ▲ 1946년 헤르만 헤세(스위스.소설가/시인) - '데미안'  ▲ 1945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칠레.시인) - '비수'  ▲ 1944년 J.V.옌센(덴마크.소설가/시인) - '긴 여행' ▲ 1927년 앙리 베르그송(프랑스.철학자) - '물질과 기억' ▲ 1923년 윌리엄 예이츠(아일랜드.시인) - '환상' ▲ 1915년 로맹롤랑(프랑스.소설가) - '장 크리스토프' ▲ 1913년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인도.시인.철학자) - '기탄잘리' ▲ 1907년 러디어드 키플링(영국.시인.소설가) - '정글북' ▲ 1901년 쉴리 프뤼돔(프랑스.시인) - '스탕스와 시'   
140    러시아 시인 - 조지프 브로드스키 댓글:  조회:4461  추천:0  2015-03-05
조지프 브로드스키(Joseph Brodsky)  본명은 Iosip Aleksandrovich Brodsky.  1940∼1996. 러시아 태생의 시인.  1987년 중요한 서정적 비가(悲歌)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문단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독립적 성향과 꾸준하지 못한 작품활동으로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사회주의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1964년 5년간의 중노동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비중 있는 작가들이 이 판결에 이의를 제기한 덕택에 1965년 사면받았다. 1972년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후 계속 그곳에서 살았고 1977년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1972∼80년에는 중간중간 미시간대학교와 앤아버대학교의 거주시인으로 있었고 그밖의 다른 학교에서도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시는 개인적 주제들을 담고 있으며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 같은 보편적 관심사를 강렬하고 사색적인 필치로 다루고 있다. 러시아어로 쓰인 초기작품 가운데는 〈운문과 시 Stikhotvoreniya i poemy〉(1965)·〈황야의 정거장 Ostanovka v pustyne〉(1970)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이 조지 L. 클라인에 의해 영역되어 〈시선집 Selected Poems〉(1973)으로 나왔는데, 특히 유명한 〈존 던을 위한 비가 Elegy for John Donne〉도 실려 있다. 러시아어와 영어로 쓰인 중요한 작품으로 시선집 〈연설의 일부 A Part of Speech〉(1980)·〈20세기의 역사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1986)·〈우라니아에게 To Urania〉(1988)와 산문모음집인 〈1보다도 작은 Less than One〉(1986)·〈슬픔과 이성에 대해 On Grief and Reason〉(1995)를 꼽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 베네치아와 자신의 인연을 조용하면서도 치밀한 문체로 다룬 산문인 〈Fondamenta degli Incurabili〉(1991)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수작 가운데 하나이다.  
139    민족시인 7위 분향단 댓글:  조회:4621  추천:0  2015-03-05
  윤동주 옥사65주기 맞아 기념비 잇달아 조성     한국에 또하나의 윤동주 기념 조형물이 경립 될 예정이다. 전남 광양시 진월면 선소리 마을은  윤동주시인을 기리는 시비를 세우기로 준비 중이다. 광양은 지금의 연변에서 태여난 윤동주 시인의 고향도 아니고 스친적도 없는곳이지만 이곳에 윤동주시비를 세우게 된 사연이 있다.       연희전문시절의 윤동주와 그의 절친한 후배 정병욱     윤동주시인은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다 우리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그 꿈을 접고 일본으로 류학가기전 당시 하숙집 후배로 광양시 진월면이 고향인 정병욱(1922-1982)에게 친필원고를 맡겼다. 정병욱의 어머니가 보물로 고이 간직해온 이 친필원고는 윤동주시인이 일본 경찰에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뒤인 1948년 정병욱의 노력에 힘입어 시집으로 간행돼 드디여 빛을 보게됐다. 다음달 경립되게 될 시비에는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의 하나인 “별헤는 밤”이 새겨지게 된다.       충청남도 보령시에 설치된 윤동주를 비롯한 민족시인 7위 분향단.   한편 한국 충청남도 보령시에서는 “항일 민족시인 7위 분향단” 설치 공사가 완료, 그 기념물에는 또한번 윤동주 시인이 새겨져있다. 기념물은 계간《시인과 육필시》,《문예춘추》등의 발행인이자 한국육필문예공원 대표인 리양우 시인이 기획하고 그의 사재를 털어 조성한것이다. 분향단에는 윤동주시인외에도 또 하분의 연변이 낳은  민족시인 심련수도 모셔져 있고 그외   리륙사, 한룡운,리상화, 김영랑, 오일도 등  7인이 모셔져 있다. 리양하시인은 “항일문인”의 훌륭한 표상을 기리는 매개체로 만들고자” 기념물을 만들었다고 그 계기를 밝혔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 1- 25     
138    아동문학가 - 고 윤정석 댓글:  조회:4871  추천:0  2015-03-05
윤정석 동시비 연길공원에 우뚝 - 제4회 “윤정석아동문학상” 시상식도 더불어       저명한 아동문학가이며 청소년언론인인 윤정석(1927-1993) 동시비 제막식이 고인의 탄신 83주기를 맞아 8월 5일 오전 연길공원 동시동네에서 펼쳐졌다.   시비제막식은 연변작가협회에서 주최하고 동시비건립위원회가 추진, 윤정석소년아동문화재단, 장백산발전연구회(회장 신봉철),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에서 후원하였다.     제막식에는 연변작가협회,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등 단체와 윤정석소년아동문화재단 리사장 윤진을 비롯한 고윤정석선생의 가족들과 연변지역의 작가와 시인 100여명이 참석했다. 고 윤정석(1927년-1993년)은 중국조선족청소년사업에 일생을 바쳐오면서 어린이잡지, 어린이신문, 어린이방송 등 매체와 아동문학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 저명한 청소년언론인이며 아동문학가이다. 타오르는 홰불모양으로 주조된 시비 정면에는 고인의 명동요 “앵코타기”가사 전문이 각인되였다. 시비는 채택룡, 김례삼, 윤동주시비에 이어 연길 인민공원의 동시동네에 “입주”, 또 하나의 문화경관으로 자리매김할것이다.   한편 이날 녀류작가 리혜선의 “김학철 이야기: 자유 찾아 만리 길”(한국웅진주니어 출판)가 제4회 윤정석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식은 동시비제막식에 이어 연변국제호텔 4층 회의실에서 있었다. 이번 문학상은 김경훈 교수, 최문섭 시인, 김혁 소설가로 평심단을 뭇고  2009년 6월부터 2010년 6월 1일까지의 작품으로 공모된 아동문학단행본 6부와 21편(수)의 작품을 공모, 심사했다. 김경훈 연변대 교수는 심사평에서  수상작은 “인물의 정신적 성장과 변화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성장소설을 기본 축으로 문학가이자 투사였던 주인공의 면면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고 수상리유를 밝혔다.     좌로부터 한석윤, 허룡석, 리혜선, 윤진   윤정석 동시비의 건립과 문학상을 주도해온 한석윤 사장은 “2007년에 설립된 ‘윤정석아동문학상’은 오늘날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권위적 문학상으로 발돋음  하고 있다.”고 하면서 “산업화의 물결속에서 우리의 아동문학이 역경을 겪고있지만 선배들의 불후의 문학정신이 우리를 이끌어주고 용기를 주고있는한 우리들은 아동문학의 필을 놓지 않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윤정석아동문학상’은 우리 아동문학창작자들에게 내려는 단비이며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이 새로운 도약을 할수있는 주추돌이다.”라고 감개를 표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 8월 9일     아동문학가 윤정석 동시비 선다       조선족청소년언론인이며 아동문학가인 윤정석 동시비가 연길시 인민공원에 건립된다. 연길시 인민공원에 조성된 “동시동네”에 채택룡, 김례삼, 윤동주에 이어 건립되는 동시비는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와 윤정석소년아동재단, 장백산발전연구회에서 기획, 작가의 생신인 8월 5일을 맞아 연길시 인민공원 “동시동네”에서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동시비에는 작가의 대표작인 “앵콩타기” 전문을 각인하게 된다.   윤정석(尹精錫)은1927년 8월5일 연길현 장재촌에서 출생, 룡정 은진중학교를 졸업한후 명동소학교, 룡정소학교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 한편, 문학창작에 심취하여 50년대 동요창작황금기의 대표작의 하나로 불리고있는 동요”앵콩타기”등 작품들을 창작발표하였다. 1953년 연변교육출판사에 전근, “소년아동”잡지의 책임편집을 맡고 주도했다.   문화대혁명시기 절필하다가 1972년 연변인민방송국으로 소환, ”문화대혁명”중 취소되였던 소년아동방송프로를 회복하며 소년아동조 부조장으로 활약했다.    1982년 몇년동안의 노력을 거쳐”연변소년보”를 복간, 1985년에 는 전국의 조선족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중국조선족소년보”로 급상시켰다. 1988년5월에 정년퇴직, 1993년8월23일에 병환으로 타계했다.   윤정석의 아동문학창작은 동요, 동시, 동극, 동화, 소설 등 쟝르를 폭넓게 포괄하고있는데 그중 “앵콩타기”는 조선족명동요로 평가받고있다.   윤정석선생의 이름으로 명명한 “윤정석아동문학상”은 올해로 4회째에 이르고있는데 이미 조선족아동문학을 더욱 높은 차원에로 끌어 올리는데 취지를 둔 중후한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고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 7월 19일    
137    시인 - 박장길 댓글:  조회:4179  추천:0  2015-03-05
박장길 시인 “지용문학상” 수상           박장길 시인의 “얼음 꽃”이14회 지용문학상으로 선정되였다. 수상작품집은 “대상물에 대한 광범성과 시상의 다양화를 지향했고 자기중복적인 틀에서 벗어나 보다 다각적인 방법으로 삶을 성찰하려는 시인의 노력이 엿보였다”고 심사평을 받았다.   박장길시인은1960년 화룡시 남평촌 출생. 1980년 군제대후 교원. 향문화소 소장을 력임했다. 시작활동에 몸을 담그고 가사창작도 병행, 선후로 “매돌”,”찰떡” “소녀의 봄” 등 5부의 시집과 가사집, 수필집등을 출간했다. “아리랑”문학상, “두만강 여울소리” 시탐구회 우수상 등 상을 수상했다. 현재 연길시 조선족예술단 창작실 주임으로 활동중이다.   박장길 시인은 “큰 영예의 무게로 내 마음을 눌러 용수철처럼 폭발력을 다져넣고 가끔 가다 꿈틀거릴것이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여 세워진 지용문학상은 연변지용제운영위원회 주관, 연변작가협회, 한국옥천군청, 옥천문화원의 공동주최로 14회째 펼쳐지고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 8월 30일  
136    윤동주 미발표 시 더 있다... 댓글:  조회:9659  추천:0  2015-03-05
“윤동주 미발표 시 더 있다” - 윤동주 추모 66주기서 증언 나와     지난2월20일 도꾜 이케부쿠로(池袋)의 립교(立敎)대에서 시인 윤동주의 66주기를 기리기 위한 추모 행사가 거행, 윤시인이 1942년 류학했던 이 학교의 총장 등 한국. 일본인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동주시인의 조카인 윤인석(한국 성균관대 건축공학과)교수가 윤동주에게 미발표시가 있다는  증언을 했다.   릿교대 시절의 윤동주, 전시 단발령에 의해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윤동주는 “서시” 등 시 76편, “오줌싸개 지도”등 동시 35편, “달을 쏘다”등 수필 5편 등 도합116편의 작품을 남겼다.       윤동주의 명시 “서시” 육필고   1947년 12월,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은 남편 오형범과 함께 고향 룡정을 떠났다. 그때 윤혜원의 행리속에 오빠 윤동주의 시 편들이 들어있었다. 룡정에서 소학교 교사를 지냈던 윤혜원씨는 당시 방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윤동주의 대학노트 3권을 가지고 떠났다. 그 노트에는 윤동주 시인의 초기와 중기의 작품 대부분 포함되여 있었다. 그 대학노트에 담긴 윤동주의 걸작들은1948년 서울에서 처음 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들어있지 않은 시편들이 대부분이였다. 유고시집에 실린 31편은 윤동주의 연희전문시절의 친구 강처중과 가장 아꼈던 후배 정병욱에 의해 보관되였다. 동생과 친구들에 의해 보관된 현재 116편으로 알려져있는 윤동주의 시들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후배 정병욱 (위)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과 그의 남편 오형범(아래). 이들은 윤동주의 시편들을 보존해 세상에 알린 공신들이다.   많은 이들은 시인이 일본 립교대에 다니던 시절인 1942년 6월 이 학교 용지에 적어 연희대의 친구였던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속에 담긴 시 “봄”이 최후의 작품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몇 편의 시를 더 남겼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그중 한 가지는 1943년 교또(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중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교또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체포된 직후에도 시를 지었다는것이다. 1995년 윤동주의 삶과 죽음을 다룬 프로그램을 만든 전 NHK 프로듀서 다고 기치로(多胡吉郞)씨는 "당시 가족들이 경찰서로 면회하러 갔을때 시인이 자작시를 일본어로 바꿔 보여줬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윤동주의 시가 조선등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증언도 있다.   윤인석 교수는 시인의 매제이자 자신의 고모부인 오형범(오스트랄리아 시드니 거주)씨로부터 전해들은 증언을 전했다.   윤동주시인의 조카 윤인석 교수     윤혜원과 오형범은 고향을 뜨던 당시1년간 조선의 청진과 원산에서 머물렀었다. 그때 청진에서 만난 김윤립이라는 고등학교 교사가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있을때 엽서에 사연과 시를 적어 보내왔다”고 했다고한다.   김윤립은 그 당시 립교대학을 다닌것윽로 추정되며 윤동주가 1944년부터1945년에 지었을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가 적힌 엽서는 그후 행방을 알수없는 김윤립에게 있다는것이다.   우리 민족이 가장 애대하는 시인 윤동주, 그의 소량이지만 편편마다 주옥같은 시편들을 아쉬움속에 읽어왔고,더 읽고싶은 독자들에 의해 미발표시에 대한 증언은 다시 한번 학계와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김혁 기자   한국,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문화재로 등록하려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의 육필원고     한국 문화재청이 시인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문화재로 등록할 계획이다. 한국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에서 료해한데 의하면 한국문화재청은 근대문학유물 160건을 선정, 이 가운데 문학사•자료적 가치가 큰 유물을 래년에 문화재로 등록할 계획, 그중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수록되였다. 윤동주는 경희대 시절인 1941년에 자필원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 하려했으나 일제의 검문에 통과되지 못할것을 념려하여 꿈을 접었다. 윤동주가 사상범의 혐의로 후코오카감옥에 투옥돼 1945년에 옥사한 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경희대의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1948년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됐다. 외에도 김소월, 한룡운, 서정주 등의 시집 59부, 신채호, 라도향, 김동인등의 소설집 58부,” 소년”(1908) 창간호 등 문예지 17 부, 희곡집 4부 리어령의 평론집 등 11부, 수필집 1부, 윤석중 등의 아동문학 3부 가 근대문학유물 목록에 들었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9- 12- 7   [출처] 한국,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문화재로 등록하려|작성자 김 혁  
135    시인 - 김동진 댓글:  조회:4514  추천:0  2015-03-05
제1회 “시향만리” 문학상 시상식 열려       연변시인협회가 주최로 제1회 “시향만리”문학상 시상식이 8월 28일 오후 연길시 라경호텔에서 있었다.   2006년에 발족한 연변시인협회는 2007년 시총서 “시향만리” 창간호를 출간, 그로부터 현재까지 총 7기를 펴냈다.   올해 연변시인협회에서는 시인들의 시창작을 고무하고 적극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시문학상을 설치하기로 결정, 제1회 문학상은 지난 5년간 “시향만리”에 발표된 시작품들중에서 우수한 작품을 골라 시상하였다. 결과 중국조선족문단의 중견시인 김동진이 시 “오월이네는 아니 오고”로 제1회 “시향만리”문학상 본상을, 연변대학 전은주학생이 시 “밤비”로 신인상을 수상했다.   김동진시인은 수상소감에서 “8월에 주어진 이 무거운 상을 조밭의 가라지가 되지 말고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고무와 편달로 받아들이련다”고 하면서 상금(7,000원) 전액을 다음해 “시향만리”총서 출간경비로 지원하였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1년 9월 5일    
134    스웨덴 시인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댓글:  조회:4335  추천:0  2015-03-05
201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올해 노벨 수상자로 스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가 영예의 계관을 썼다. 스웨덴 한림원은 "작품이 간결하면서도 투명한 이미지를 통해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다"고 수상리유를 밝혔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80)는 스웨덴에서 “국민시인”으로 꼽힌다. 독일의 페트라르카 문학상,보니어 시상,노이슈타트 국제문학상 등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하며 그는 최근 몇년동안 내내 강력한 노벨상 수상 후보로 거론됐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스톡홀름에서 기자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여났다. 음악과 그림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고고학과 자연과학에도 매료돼 탐험가를 꿈꾸기도 했다. 트란스트뢰메르는 스톡홀름 대학을 졸업, 한동안 심리상담사로 사회 활동을 했다. 13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1954년 “17편의 시”라는 시집으로 데뷔했고1987년 시선집이 영국에서 출간되면서 유럽 문단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트란스트뢰메르는 “스웨덴 자연시”라는 토착적인 전통우에 모더니즘의 세계를 펼쳤다. “꼼꼼한 거시주의” 혹은“거시적 미시주의”가 그의 특징이다. 10권이 넘는 시집을 냈지만 시의 총 수는 200편이 안 될 정도로 적은 량이다. 초기에 불, 물의 이미지를 탐구한 그는 중기에 접어들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런 자유분방함은 기독교 신비주의와도 밀접하게 련관된다. 이런 시 세계를 펼친 그는 평론가들로부터 “말똥가리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말똥가리처럼 높은 곳에서 신비주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지상의 세세한 일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시각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는 1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묵한” 시인이였다. 이러한 시작(诗作) 과정을 통해 차분하고 조용하게서두르지 않고 시류에 흔들림 없이 “침묵과 심연의 시”를 생산했다. 적은량의 작품을 내였지만 그는 상복도 많은 편이였다. 독일의 페트라르카 문학상, 보니어상, 노이슈타트 국제 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받았다. 또 그의 작품은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서구 문학계에서는 크게 인정받았지만 그의 시 세계는 자못 난해하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가 난해하게 여겨지는 리유는 "이미지가 촘촘하게 엮여 있는 탓에 배경의 의미를 찾기가 무척 어렵다"고 평론가들은 분석한다. "하지만 워낙 시 세계가 깊이가 있기때문에 영미 등 서구권에서 높이 평가받아왔다"고 평했다.   고령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펼치던 그는 1990년대 초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상태이지만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평단은 "정치적 다툼의 지역보다는 북극의 얼음이 해빙하는 곳,또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화해와 포용의 지역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며 "북구의 투명한 얼음과 끝없는 심연과 영원한 침묵 속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우주를 창조해낸다"고 그의 시에 대해 높이 격찬했다.   김혁 정리       未完의 천국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절망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고통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독수리가 제 비행을 멈춘다. 열망의 빛이 흘러나오고, 유령들까지 한 잔 들이켠다. 빙하시대 스튜디오의 붉은 짐승들, 우리 그림들이 대낮의 빛을 바라본다. 만물이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수백씩 무리지어 햇빛 속으로 나간다. 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 발밑엔 무한의 벌판. 나무들 사이로 물이 번쩍인다. 호수는 땅 속으로 통하는 창(窓).   / 이경수 번역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새 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서곡(序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깨어남은 꿈으로부터의 낙하산 강하. 숨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 지도 쪽으로 하강한다. 사물이 확 불붙는다. 퍼덕이는 종달새의 시점에서 여행자는 나무들의 거대한 뿌리 체계를, 지하의 샹들리에 가지들을 본다. 그러나 땅 위엔 녹음, 열대성 홍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에 귀 기울인다. 여행자는 여름 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 속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빈 아래 떨고 있는 습기 찬 녹색 시대들의 수갱(竪坑) 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수직 낙하 여행이 이제 멈추고,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기시대 트럼펫의 무법의 선율이 바닥없는 심연 위에 부동(不動)으로 걸려 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여행자가 나무 아래 서 있다. 죽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 후,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의 머리 위로 펼쳐질 것인가?           정오의 해빙/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아침 공기가 타오르는 우표를 붙인 자기 편지를 배달했다. 눈(雪)이 빛났고, 모든 집들이 가벼웠졌다. 일 킬로그램은 칠백그램 밖에 나가지 않았다.   태양이 빙판 위로 높이 솟아, 따뜻하면서도 추운 지점을 배회했다. 마치 유모차를 밀듯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나왔다.   가족들이 밖으로 나왔고, 수세기 만에 처음인 듯 탁 트인 하늘을 보았다. 우리는 마음을 아주 사로잡는 이야기의 첫 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꿀벌 위의 꽃가루처럼 모피모자마다 햇살이 달라붙었고, 햇살은 겨울이라는 이름에 달라붙어, 겨울이 떠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눈 위의 통나무 정물화가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물었다. '내 유년시절까지 따라올래?' 통나무들이 대답했다. '응'   잡목 덤불 속에는 새로운 언어로 중얼거리는 말들이 있었다. 모음은 푸른 하늘, 자음은 검은 잔가지들, 그리고 건네는 말들은 눈 위에 부드러웠다.   하지만 소음의 스커트 자락으로 예(禮)를 갖춰 인사하는 제트기가 땅 위의 정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133    윤동주 생가 댓글:  조회:4825  추천:0  2015-03-05
연변, 윤동주 기념사업 탄력 받는다 생가 확장공사 시작 중문판 유작시집 출간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 탄생 95주기를 맞아 연변에서 그 기념사업이 탄력을 받고 있다. 생가 확장공사, 전시관 개관, 시림(诗林) 조성, 석상 건립, 중문판 유작시집 발간등 다양한 추모사업들이 발을 잇고있다.   28일, 윤동주의 생가가 위치한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며통전부 부부장인 리덕수, 룡정시 윤성룡 당서기를 비롯해 마을주민 3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윤동주 생가 확장공사 준공식이 있었다. 준공식은 예술 공연에 이어 안명식 시장의 행사 개회를 시작으로 윤성룡 서기의 기념사, 윤동주 생가 표지석 제막, 준공식 선포, 생가 참관등 순으로 진행됐다. 준공식에서 윤서기는 “윤동주는 중국조선족의 자랑이며 애국, 애민, 애향등 정신은 우리가 길이 전해가야 할 귀중한 정신적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또 안시장은 “중국조선족 민속문화를 널리 알리고 룡정시 관광산업과 문화산업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시정부가 나서 윤동주 생가 복원사업에 참가하게 됐다”고 말했다.     새롭게 거듭난 윤동주 생가터   총 투자 450만원, 부지면적이 근 1만평방메터에 달하는 윤동주생가 확장공사는 금년 4월부터 시작, 담장, 대문 등을 새롭게 세우고 정자와 정자길을 조성했다.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윤동주시비, 고풍스럽게 지은 168평방메터 되는 윤동주 전람관등을 주축으로 인행도 량켠에는 자연석과 경관 등에 조, 한 두가지 문자로 윤동주 시 119수를 새겨넣었다. 또 윤동주의 일생을 6개 부분으로 나눠 화폭에 담은 그림을 돌에 새긴 석판화, 대표작 서시와 함께 학사모를 쓴 모습을 새긴 석상등도 세웠다.  이에 앞서 27일에는 윤동주의 중문판 시집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仰望天空毫無愧恨)” (역자 리영)이  북경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의 공동출판으로 출간되엿다. 시집은 “지향편”, “사회편”, “생활편”, “자연편”, “정감편”, “동심편” 등 여섯개 부분으로 나뉘였고 매 수의 시마다 좌측 조선문, 우측 한문을 실어 독자들의 리해에 도움을 주었다. 또 원 시문에 있는 한자단어를 그대로 수록하여 시의 원맛을 그대로 보존하기에 노력했다. 한민족이 애대하는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중화민국동북부 만주 간도성 화룡현 지신사 명동촌(오늘의 중국길림성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출생,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한 근대적 민족교육기관인 명동학교를 나왔고 서울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1942년 일본으로 류학했다. 1943년 독립운동의 혐의로 체포돼 일본 후쿠오카(福岡)교도소에서 복역하다1945년 2월 29세를 일기로 옥사했다. 윤동주는 짧은 29세의 생애동안119수의 시와 4편의 산문을 남겼다. 그의 시는 선후로  일어, 프랑스어, 체코어, 세계어 등 여러가지 언어로 번역되였다.  연변의 문인들은 시인을 기리여 룡정 중학교와 연길시민공원에 윤동주의 시를 새긴 시비를 건립하고 윤동주문학상을 세우고 윤동주연구회를 설립하는등 등 추모사업을 활발하게 벌려오고 있다.     중문판시집 출간기념회에 참석한 윤동주의 매제 오형범 (왼쪽)과 윤동주 조카 오인경 (오른쪽)   룡정시정부의 초청을 받은 윤동주의 매제 오형범씨와 윤동주의 조카 오인경씨 등 유족들도 뜻있는 자리에 함께했다.  유족은 “이번 추모사업 마무리는 우리글로 쓴 시를 세상에 내놓으려던 념원을 이루지 못한채 일본 감옥에서 외로이 세상을 떠난 윤동주 시인에게 더없이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라며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민족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감개를 표했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2년 9월 3일    
132    시인 - 김철호 댓글:  조회:4396  추천:0  2015-03-05
제16회 정지용문학상 시상식 연길서       연변작가협회,한국옥천군청,옥천문화원 주최, 연변작가협회시가창작위원회에서 주관한 “제16회 중국연변지용문학제 및 지용백일장 시상식”이 한국과 연변의 작가,시인,학생 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5일,연변대학예술학원 예술홀에서 있었다.   도합 7권의 공모시집중에서 김철호의 시집 ”우리는 다 한올 바람일지도 모른다”가 제16회 연변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평심단은 “수상작은  개성있는 목소리와 제재의 다양함과 현대와 전통수법을 교묘하게 결부했다”고 선정리유를 밝혔다.   한편 오전에는 중국 연변지용문학세미나이 개최되였고 올해 처음으로 지용문학제의 일환으로 지용백일장도 펼쳐졌다. 시상식에 앞서 120여명의 학샏들이 경합을 벌린 가운데 소학조 우수상에는 도문시 제2소학교 김성우 학생 등 12명,중학조 우수상에는 연길시 제3중학교 유동훈 학생 등 12명,대학조 우수상에는 연변대학 사범분원 유흥학생 등 18명,동상 수상에는 연길시 실험중학교 김소연 학생 등 9명,은상 수상에는 룡정시 북안소학교 리해은 학생 등 6명,금상 수상에는 연길시 13중학교 최봉서 학생 등 3명이 수상의 영예를 지녔다.백일장 최고상인 대상은 연변대학사범분원 10학년 김혜경 학생이 차지, 이 학생에게는 한국옥천군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다.   김혁 기자  
131    동시인 - 한석윤 댓글:  조회:4491  추천:0  2015-03-05
      동심어린 한석윤시인의 고향을 찾아서   글/ 한태익 사진/ 성광호          한석윤 동시인을 모시고 한석윤 동시인의 고향을 찾아가는 우리 탐방 팀 일행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한석윤 동시인의 고향마을에서도 한석윤 동시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양으로 여러 번 한석윤 동시인께 전화를 걸어왔다. 벌써부터 고향을 찾는 이와 고향에서 기다리는 이들의 상봉이 기대되었다.   드디어 우리 탐방 팀 일행은  한석윤 동시인의 고향인 중국 길림성 훈춘시 밀강향 중강자 마을에 도착했다. 한석윤 시인의 고향 중강자 마을은 한 폭의 산수화 속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그런 아담한 동네였는데 촌장이 마을 노인들을 친히 모시고 나서서 반겨 맞는다.   한석윤 동시인을 반겨 맞는 이들이 바로 한석윤 동시인과 공부했던 동창들이라 한다. 한석윤 동시인이 어렸을 적에 업어주기까지 했다는 이웃집 누이도 이제는 칠순을 넘긴 고희의 늙은이건만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한석윤 동시인의 두 손을 붙잡고 어쩔 바를 모른다.   “석윤이, 어머님 건강히 잘 있소?>   여러해 전에 고향을 찾은 어머님을 보았다는 안노인들의 물음이다.   “잘 있소. 모시고 함께 오고 싶었는데 다리가 불편하여 그러지 못했소.”   “청상과부로 홀로 살며 자식을 잘 키워 늘그막에 복 받는구먼. 옛날에 석윤일 공부시키겠다고 무작정 연길로 이사 간 엄마가 대단한 분이지. 우리들도 그때 석윤이가 도회지로 이사 가니 얼마나 부러워했다고. 하지만 어머니가 홀로 생판부지인 시내에 가서 얼마나 고생했겠소. 엄마가 그랬기에 석윤이도 농촌을 벗어나 대학공부도 하고 이렇게 큰사람이 되었지.”   고향사람들은 도회지에 가서 출세한 한석윤 동시인의 지난 일을 추억하며 감회에 젖는다.   한석윤 동시인은 고향 증강자 마을의 박경석 촌장이 고향의 특산물로 마련한 음식이 식는다고 식사부터 하시라는 권고도 마다하고 자신이 살던 생가부터 찾았다. 생가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한석윤 동시인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생가 앞에서 한석윤 동시인은 지난날을 회상한다.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전임사장이며 현 연변청소년진흥회 회장이신 한석윤 동시인은 중강자 마을에서 자라고 소학교에 입학하여 열두 살까지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곳 중강자에서 세살에 한석윤 동시인 아버지를 여의였는데 시인의 부친께서 한석윤 동시인이 공부로 출세 할 것을 바라 자신을 문필봉아래에 묻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도 한석윤 동시인은 문필봉으로 부친의 성묘를 다닌다고 한다.   한석윤 동시인은 남편의 뜻을 헤아린 어머니를 따라 연길에 와서 학업을 이었고 1967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3309병퇀을 따라 북대황에 가서 노동단련을 받았고 후에는 주인민정부 번역과를 거쳐 중국조선족소년보사 당조서기 겸 사장 사업을 장장 21년간 하시다가 지금 정년퇴임 하시고 지금은 연변청소년진흥회 회장으로 여생을 청소년사업에 바치고 동시창작에 태워가고 있다.   한석윤 동시인은 동년의 소꿉친구들과 함께 중강자 마을 뒤편에 터를 잡고 있었던 옛날 학교자리를 둘러보며 흘러간 개구쟁이시절을 추억하다가 후에 마을 뒷산 밑에 다시 세웠던 학교가 폐교된 현실을 쓸쓸하게 바라보며 어린이들이 없는 농촌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반면에 정다운 고향이 해체의 위기를 맞지 않고 새롭게 변모해 가는 모습을 보고 한석윤 동시인은 기쁨을 금치 못했고 앞으로도 고향을 자주 방문하고 고향에 도움이 되는 일을 얼마간이라도 할 생각이라 했다.   한석윤 동시인을 기억하고 반갑게 반기는 이들도 많았지만 한석윤 동시인을 알지 못하는 고향사람들도 많았다. 그래도 부모들의 이름을 대면 누구누구네 자식임을 한석윤 동시인은 헤아려보고 반가워했다.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여러분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자주 방문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오래 동안 고향을 잊고 살았던 저를 이렇게 고향의 진수성찬으로 대접해주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의 고향 탐방을 마련해주신「송화강」잡지사에 고마움을 표하고 함께 해준 한태익 방송인과 성광호 사진작가에게도 고마움을 드립니다.”   고향 사람들이 마련한 오찬을 마주하고 한석윤 동시인의 마음은 감격에 떨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한석윤 동시인은 고향사람들하고 나누는 오찬일진 대 이 한잔 술도 꿀보다 더 달 것이 아닌가?   “여러분 잘 계십시오. 가을에 어머님을 모시고 꼭 다시 오겠습니다. 부디 그동안이라도 모두들 옥체건강하십시오.”   탐방 팀 일행과 함께 한 몸이라 한석윤 동시인은 고향에 더 오래 체류할 수 없었다. 귀로에 오를 때 한석윤 동시인은 다음을 약속하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이번 고향 행을 통해 한석윤 동시인은 다시 동심을 찾은 듯 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동년을 같이 보내던 고향 사람들을 만나 동년의 회포를 풀었으니… 이번 고향 행을 통해 한석윤 동시인은 만년에 어린이 동심을 간직하고 동시창작에서 더 큰 성과를 이루기를 미리 빌어마지 않는다.     동시인 한석윤 한국에서 시화전 펼쳐   저명한 동시작가 한석윤(70세)시인의 동시화전이 7월 4일 한국 서울 서초동의 한국청소년운동련합에서 개최,시화전에서는 많은 독자들이 평생을 어린이들과 살아온 한석윤 시인의 동시에 세계적인 조선족 화가들이 그림을 덧입힌 시화들을 만났다.   한국청소년운동련합의 초청으로 열린 이번 동시화전에는 한석윤시인의 동시작품 60여편이 전시, 한시인의 동시와 중국 조선족화가인 신순칠과 고 장홍을 화백의 그림이 만나 재미있게 형상화됐다. 장홍을화백은 타계하기전 도합 30여폭의 동시화를 남겨놓았고 그후 중국조선족소년보사의 미술편집인 신순칠화가가 또 한석윤선생의 동시화 50여폭을 창작했다. 이번에 선보인 동시화전은 한석윤시인이 두 화가와의 합작으로 만든 80여점의 창작품중에서 60여편을 추려서 전시한것이다. 이에 앞서 한시인은 1996년 한국 인사동 갤러리에서 20여명의 조선족화가들과의 합작으로 만든”중국조선족동시인 한석윤초청시화전”을, 2006년 8월에 또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과 대전시, 제천시에서 각각 일주일간의 동시화전을 펼친바 있다. 조선족 작가들중 개인시화전을 펼친것은 그가 처음이다.   한석윤시인은 언론인, 동시인, 사회활동가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연변기자협회 부주석,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부회장,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등을 력임했다. 현재 사단법인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회장을 맡고 있다. “별과 꽃과 아이와”, “웃음을 쏘는 대포”등 9권의 동시집을 펴냈고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진달래문학상, 한국방정환문학상 등 여러차례 문학상을 수상했다.   명년에 열번째 신작 동시집 출간을 앞두고있는 한석윤시인은 “앞으로도 아이들을 위해 우리 민족의 얼을 우리 글과 말로 노래할수 있는 작품을 그냥 써갈것”이라고 밝혔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7월 15일    한석윤 동시인, 시조창 발전 공로상 수상       저명한 동시인 한석윤이 대한시조협회 함안지회(지회장 김재순)에서 실시하는 제5회 시조창 발전 공로상에 선정되였다. “중국조선족소년보사”에서 정년 퇴직한후 연변 청소년문화진흥회를 출범하고 아이들을 위한 일에 “평생무휴”로 로고를 바치고있는 한석윤 동시인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시조창이라는 이 고유의 쟝르가 조선족사회에서 잊혀지고있는 실정을 감안해 한국의 시조창 기능자들에게 전수해 줄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결과 한국 함안지회장인 김재순 명창의 “중국동포를 위한 시조창 봉사활동” 이 개시되였고 연길시, 도문시 등에 시조창의 씨앗을 뿌리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2007년에 처음으로 “시조창 사랑회”가 발족되여 지금은 소학교와 중학교는 물론 과학기술대학, 연변대학 등 대학생들까지도 시조창을 배우게 되였고 올해는 “연길시 중국 조선족 시조협회” (사단법인)를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사단법인 대한시조협회 함안지회에서는 2006년부터 시조창 발전에 기여한 분을 선정,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감사패와 함께 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1년 1월 10일  =============================   내가 아는 한석윤 림금산 내가 동시인 한석윤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86년 연말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때 나는 안도현 제2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하루는 나더러 연길에 있는 소년보사에서 왔다가라는 통지가 날아들었다. 부랴부랴 말미를 맡고 연길에 달려가 하남 3백화점 바로 위쪽에 있는 단층집(간판은 천지월간사라고 쓰여 있었음.) 한쪽 칸에 찾아들어가니 사장이신 한석윤 선생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것이 나와  동시인 한석윤 선생사이의 첫 대면이었다. 그때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몸이 퍽 갱핏 했고 키가 좀 큰 편이었는데 머리는 짧고 도수 높은 안경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에도 역시 지금처럼 웃는 눈길이었다. 첫인상에 전형적인 지성인 타입이었다. 그리고 한손에 빗자루를 쥐고 한손엔 쓰레바끼를 들고 있었다. 마침 실내청소를 하다가 나를 만난 것이었다. 너무나 소탈하고 너무나 친근하고 너무나 열정적이고 너무나 순수한 사람이란 인상이 강하게 안겨왔다. 우린 만나자부터 마치 오래 익숙히 아는 사이처럼 마음이 통하였고 나는 그와 한집안 식구 같은 분위기에 잠겼다. 그이는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이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많은 말씀을 해주었고 소년보사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린 지 오래 되는데 수속이 되는대로 1987년 1월부터 정식 출근해도 별문제 없다고 찍어 말해주었다.  그때 그 옆에 소년보사에서 인사를 책임진 최숙녀 선생이“한 사장은 성 노력모범이 되었는데 동무도 그를 따라 배워 잘해보라.”고 귀띔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동시인 한석윤 선생의 그 갱핏한 몸매를 눈주어 보았다. 이렇게 나는 소년보사란 이 가정에서 동시인 한석윤 선생의『부하』로 오늘까지 18년간 아이들 신문을 꾸리는 일을 맡아보게 되였다.  또 이러는 가운데서 동시인 한석윤 선생의 많은 일들을 알게 되였고 그의 웅성 깊은 이상과 이글거리는 열정, 쉼 모르는 사업 심, 부드러운 인간애를 몸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 개괄해 말한다면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그때 우리 중국조선족어린이들이 꿈 하늘에 오르는데 없어서는 안 될 칠색의 무지개발 작용을 하였으며 현란한 동시, 동요, 창작을 펼친 유능한 아동문학작가였으며 중국조선족 아동문화사업의 조직자와 실천자의 한 사람이었다.  북경에서 있었던 일 언젠가 나는 동시인 한석윤 선생과 함께 소년보사의 경비문제로 당시 중공중앙 총서기인 호요방 동지를 만나러 북경에 다녀온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80년대에 이런 일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린 연변의 특산인 능금을 한 가방 메고 북경까지 갔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우리는 북경까지 줄곧 침대차 없이 자리표만 떼고 그냥 눌러앉아 긴 여행을 했었다. 북경에서는 더구나 간고하였다. 돈을 절약하느라 단 한번 택시를 타지 않아 발이 다 부르텄고 식사는 기본상 도시락으로 에웠다.  하지만 시간상오차로 호요방 총서기를 만나진 못했고 당시 중공중앙 통전부에서 사업하는 호요방 동지의 아드님과 전국소선대 사업위원회 주임 진해연 동지를 만나 우리 신문의 실제 곤란을 반영하였으며 우리사의 정황 회보서를 호요방 동지한테 전하도록 하였고 우리가『예물』로 가져간 연변의 능금을 한가방중 반은 통전부에, 반은 호요방 동지께서 맛보시라고 올려 보냈다.  얼마 후, 호요방동지는 친필비준서를 쓰시여 통전부에 내려 보냈다. 그 내용은 대개 연변의 소년보사 동지들의 일을 통전부에서 알아서 잘 해결해주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통전부에서는 인차 문건을 내고 공청단 동북3성위원회에서 물심양면으로 우리 신문을 뒷받침해주도록 지시하였다. 그때의 그 문건은 지금도 우리가 우리민족 소년신문을 꾸리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또 한 번은『전국근로소대, 지혜소대 여름철야영』참가차로 용정시 용정실험소학교의 홍매 어린이와 요녕성 본계시 왜두산조선족소학교의 조경애 어린이를 데리고  동시인 한석윤 선생과 내가 북경으로 간적이 있다.  머릿속에 항상 소년보와 아이들을 담고 있는 그였기에 이번기회가 우리 조선족 애들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민족 신문의 위신도 수립하는 좋은 기회라는 걸 그는 잊지 않았다.  이는 매우 중요한 전략과 전술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이번에 등영초동지가 전국에서 모여온 56개 민족 어린이들을 만나줄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알아내고 연변박물관에 달려갔다. 당년 주은래 총리와 등영초 동지께서 연변에 왔을 때 연변가무단배우들과 함께 찍은 흑백사진이 있는 걸 발견하고 그걸 크게 확대하여 멋진 액틀에 넣었다. 그리고 당시 중국조선족어린이 23만 명(초중생까지 포함)이 등영초 동지한테 올리는 문안편지를 써가지고 떠났다. 중남해에 있는 등영초 동지의 저택―서화청에서 이 기념사진을 드리고 공청단 중앙 동지들의 비준을 거쳐 홍매 어린이가 당장에서 이 편지를 읽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전국각지에서 대표로 뽑혀온 어린이들은 모두 150명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누구하나 마음대로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는 등영초동지가 몸이 안 좋았고 다른 하나는 국무원에서 접견시간을 20분밖에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짧고도 짧은 시간에 전국의 소수민족어린이를 대표하여 꽤긴 문안편지를 읽은 애는 유독 우리 민족 어린이 홍매 하나밖에 없었다. 하기에 이는 단지 홍매 어린이 단 한사람의 영광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 전반 조선민족의 영광이었다. 그때 희색이 만면하여 우리가 가져간 흑백사진을 보던 등영초동지가 처음엔 연변에서 왔다고 하니 연안변경에서 왔느냐고 반신반의 하시다가 조선족이라고 반복해 설명하자“아, 조선족! 조선족!”하고 불렀다. 마침 사진에서 등영초 동지는 우리 민족 한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인 한석윤 선생도 이때만은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인자하신 아빠 한번은『사랑의 일기』큰 잔치에 참가차로 한국 전남에 가게 되었는데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전남대학에서 문학박사과정을 전공하고 있는 자기 따님 한연이도 만나보지 않고 대회가 끝나는 길로 전화만 댕그랗게 남겨놓고 중경으로 날았다. 한연이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언짢아한단다. 박사과정공부에 드바삐 보내다가 고향에서 아빠가 오셨다니 얼마나 만나보고 싶었을까? 하지만 매정한 아빠는?  한석윤 선생도 얼마나 막내딸을 찾아보고 싶었을까만 그럴 겨를이 없는 걸 무슨 방도가 있담. 중국소년아동간행물협회 부주석 직을 맡고 있는 그가 1년에 한번밖에 없는 년차 회에 안 참가해서야 되겠는가?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이렇게 드바쁜 사람이었다. 또 그 때문에 때론 인자한 아빠가 못 될 때도 많았다. 80년대 말까지 나는  동시인 한석윤 선생과 연길시 남산기슭에서 이웃으로 살았다. 나는 퇴근시간이 되면 집에 와 불도 때고 석탄도 퍼들이고 했지만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그렇지가 못하였다. 퇴근 후에도 여러 가지 사회활동에 참가해야 했고 상급지도자들을 만나야 했고 또 장춘으로, 북경으로, 한국으로 자주 출장을 가야 했다. 하다보니 집안일 대부분은 사모님의 몫이었다. 그때까지 자식들은 다 초, 고중 공부에 바쁘다보니 집일을 도울 계제가 못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시선엔 심심찮게 사모님께서 마당에서 일하는 모습이 날아들곤 했었다. 마당모서리에 있는 큰 웅덩이에 밀차로 흙을 퍼 담아다 메우느라 땀 흘리는 모습이랑 또 봄이면 오이 밭에 장대기를 세우는 모습이랑… 아마 그때 일이 늘 마음속에 죄스럽게 생각되었던지 몇 년 후부턴 자식들을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자기서재는 다 아들딸들에게 할애하고 자신은 부엌 칸에서 밥상에 마주 앉아 전등을 낫게 드리워놓고 그의 명동시집『별과 꽃과 아이와』를 탈고했다. 그의 자식들에 대한 인내력 있는 사랑과 교양 하에 자식들은 크나큰 의지력으로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미국솔로몬대학 명예문학박사로 되다보니 그들의 메일이나 전화내용은 퍽 남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군 한다. 서로서로“한 박사님, 한 박사님”하니 말이다. 너무나 드바쁘던 세월에 자식 셋을 끌끌한 인재로 키워낸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지금은 또 외손녀 혜경이를 알뜰살뜰 키우느라 바쁘시다.  은행나무와 겸손  동시인 한석윤 선생은 언제나 은행나무처럼 깨끗한 분이었고 인자한 분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소년보사에 수백만 원의 자금을 협찬 해다가 아이들의 활동경비로 쓰고 여러 가지 장학상을 설치하여 빈곤학생들에게 쓰지만 자신은 항상 소박한 생활에 젖어있다. 나는 지금도 눈보라 치는 겨울날 과학기술대학에서 여러 학교들에서 온 자동차에 책을 실어 보내던 우리 신문사 일군들의 모습을 생각하군 한다. 몇십개의 큰 학교들에 아이들의 고급독물을 그렇게도 많이 해결해온 분이 바로  동시인 한석윤 선생이다. 그는 작가협회 자료실에도 많은 책들을 한국에서 가져다주었고 조선 평양에 있는 소년신문사에도 5천여 근의 입쌀을 보내주었다.  그는 술 한 모금도 마실 줄 모르지만 친구나 관계호가 그렇게 많고 문단과 정계, 교육계, 신문출판계에 위망이 높은 분이시다.  그는 우리한테 늘 이런 말씀을 하군 한다.  “남들이 좋은 일로 청할 때는 시간상 허락이 안 된다면 혹시 못 가볼 수도 있지만 남들한테 나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꼭 가보아라.”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에 옮겼다. 그는 동시창작을 누구보다 늦게 시작한 편이지만 누구보다 창작성과가 뚜렷하다. 새시기 동시창작에서 그는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누구보다도 동시나 동요에 대하여 조예가 깊지만 언제나 남들한테 물어보길 즐기고 남들한테 초고를 가져다 토론하길 즐긴다. 그리고 자기와 견해가 반대되는 사람과도 계속 곁을 주면서 종래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로 만든다. 그의 너른 마음 폭과 겸손한 천직, 그의 인격과 쉼 모르는 일 욕심은 지금뿐 만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나와 나의 친구들의 귀감으로 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마지 않는다. 제공:하얀 꿈나라   [출처] 한석윤 동시인, 시조창 발전 공로상 수상 |작성자 김 혁      
130    시인 - 고 한춘 댓글:  조회:4734  추천:0  2015-03-05
    한춘: 시는 객관세계가 작가의 심령에 불러일으킨 촉동을 표현해야 한다       현대인의 시간은 과거와 속도가 다른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일부 사람에게만 다른 속도를 적용하고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일흔고개에 올라선 한춘선생만 봐도 그렇다. 아직도 배갈을 쭉쭉 내는 모습,청년들처럼 열변을 토로하는 모습, 뜨거운 일욕심, 그리고 미인을 사랑하는 마음… 시인이고, 평론가이고 하는 인간 삶의 규정어들을 론하기에 앞서 그는 열린 사유와 미리지향적인 자세를 지닌, 삶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또한 이러한 삶의 자세가 그의 문학인생에 녹아내려 화려한 악장을 연출하는것 같다. 문학인으로서의 한춘(본명 림국웅, 70세)은 문화대혁명전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1979년부터 흑룡강신문사 문예편집으로 활약, 현재는 퇴직하고 흑룡강동방학원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는 초빙교수로 일하고있다. 조선족 북방문단의 형성과 현대파 시인 군체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한 뿌리 깊은 나무이며 중국조선족문단의 대표적인 현대파시인이다. 또한, 최근에는 왕성한 평론활동을 펼치고있다.   북방문단과 현대파 시인 군체의 형성을 위해 노력하다 문화대혁명전 전반 흑룡강성 조선족문단은 창작대오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리삼월, 허도남 등 10여명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뿐이었다. 당시 ‘흑룡강신문’의 진달래부간도 페간되였었다. 문화대혁명후기, 1975년을 전후하여 ‘흑룡강신문’에 ‘아침노을’이라는 부간이 생기였고 차츰 문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후, 4인방이 타도되면서 문학열조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문화대혁명기간에 중단됐던 흑룡강신문의 ‘진달래문학부간’도 회복되였다. 당시 한춘선생은 동북농업학원 토지규획전업 졸업으로, 해림에서 문학과 관련 없는 직업을 갖고있었으나 송화강잡지와 흑룡강신문 ‘아침노을’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리게 되였으며 1979년부터는 흑룡강신문사 문예편집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후기부터 1979년까지 흑룡강성조선족문단에는 소설에 윤일산, 김송죽 등이 신문을 통해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4인방이 타도된 후에는 윤림호, 장금선이 나타났다. 1982년에는 리삼월, 리명재, 박철준, 한춘, 강효삼, 김동진, 한병국 등 7명의 시인들의 작품을 묶은 ‘칠색무지개’라는 시집이출판되였다. 이러한 계기로 흑룡강성에 문학인군체가 형성되였으며 북방문단이라고 불리웠다. 이 시기 한춘선생은 흑룡강성의 조선족 문학인들에게도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여 연변작가협회와 적극 련락, 제1회로 8명의 북방문단의 작가들이 연변작가협회에 입회하여 흑룡강성창작소조를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1984년 한춘선생은 흑룡강신문사 문예부 주임직을 맡게 되였으며 흑룡강성 창작소조 8명 회원이 흑룡강성작가협회에 가입하는 일을 추진, 흑룡강성 문화청과 선전부, 작가협회, 민정청 등 부문을 뛰여다니며 노력한 결과 흑룡강성작가협회 산하의 조선족작가창작위원회를 설립할수 있었다. 초대회장에홍만호선생이 당선되고 민족호텔에서 성대한 설립대회를 열었다. 당시 연변작가협회 주석, 조선작가동맹위원회의 부위원장이 설립대회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흑룡강성은 독립적인 창작군체를 형성하였으며 박옥남, 조광명, 홍군식, 최화길, 리홍규 등 중견문인을 배출하였다. 흑룡강신문사는 한춘선생의 주도로 해마다 문학행사를 마련하여 수필문학상,시조문학상 등을 단일쟝르 문학상을 설치하였다. 1985년에 시작된 수필문학상은 7회를 유지하여 왔다. 역시 1985년에 시작된 신춘문예 장편소설 련재는 11회까지 유지되였다. 당시에 련재된 허련순의‘바람꽃’, 리혜선의 ‘빨간 그림자’ 등은 모두 중국 소수민족 ‘준마상’을 탄 작품들이다. 1980년대는 중국에서 사상 해방 시기였으며 문학관념에 대한 전변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한춘선생은 당시 중국문단의 한 류파로 자리잡고있던 몽롱시의 영향하에 전통적이고 사회 직접 반응이며 송가적인 시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1984년에 ‘시가 관념을 갱신할 때가 되였다’란 단상을 발표, ‘연변문학’잡지에 많은 반박 문장들이 나가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한춘선생은 전반 시대적 흐름을 읽으면서 문학 전환의 흐름이 형식위주로 나간다고 보았다. 즉 예술성이라고 보았다. 그는 시는 감정 정서를 표달하는게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객관세계가 작가의 심령에 불러일으킨 촉동을 표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편집으로써, 흑룡강신문에 현실주의 시와는 색갈이 틀린 시들을 발표하고 그 작품 해석을 쓰면서그 과정에 젊은 시인 군체들을 이끌어주었다. 근 10년에 가까운 노력을 거쳐 현대파 시인 군체가 형성되였으며 현재는 현대파시가 조선족문단에서이미 충분한 위치를 가지게 되였다. 2011년에는 ‘두 동네 은회색 카니발’이란 모던시집을 묶어 현대시의 결과물을 보기도 했다.   평론가로서의 한춘이 보는 시와 수필 “내가 편집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니 편집으로서 전반 문단의 흐름을 생각하게 되였다. 그래서 평론을하게 되였다. 시대적 흐름을 볼 때 문학은 내용 위주에서 형식 위주로 나간다고 생각했다. 또한, 모던은 언제나 새로운 시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고 보는것을 말한다. 현재 진행형이라고 해서 다모던인 것이 아니다.” 한춘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한춘선생의 ‘난해시의 변호’, ‘현대시의 진단’ 등 평론은 조선족시단의 변화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문체의 변화에서 나타났다. 이런 와중에 작품을 평론하면서 현대시를 전통적인 사실주의 방식으로 평론하기 어려우나 구조주의로는 가능하다는것을 발견, 즉 능기(能指)- 시밖에무엇이 있느냐로 평론을 했으며 시행의 이미지 사이의 내재적 련계를 추적해내면서 1+1>2이라는 시평을 할수 있었다. 한춘시인이 수필 평론쪽으로 눈길을 돌린것은 1986년 ‘도라지’잡지에 ‘옆쪽 쪽걸상에 앉은 수필문학’이라는 문학단상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때로부터 중국조선족 수필 현장비판을 시작하여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에 수필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수필은 격이 없으므로 평론이 가장 어려운 쟝르이다. 역시 형식 평론을 한다,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어떻게 썼느냐를 평론한다. 즉 이야기가 작품이 아니고 그 이야기가 작가에게 가져다준 정서적인것이수필이다, 수필을 쓰는 사람들이 나무 하나 전지하면서도 거기에 도리를 담으려 하는데 나는 그것보다거기에 감정을 담는게 좋다고 본다” 한춘시인은 우리 수필이 가장 부족한것이 문화의식과 력사의식이 미약한것이라고 봤다. 즉 민족심리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적 심리를 써야 하는데 깊이 파고드는 멋이 부족하다는것이다. 그리고 력사의식이 미약하다는것은 우리 수필이 너무나 좁은 민족세계에 국한되여 있다는 점, 전중국적, 혹은 인류의시점에서 력사의 본질을 추구해내는것이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70고령임에도 대학에서 문학강의를 하고있는 한춘선생은 교수과정에서 한국문학사 교과서가 마땅한것이 없음을 느끼고 30만자에 달하는 ‘한국문학략사’를 편찬해 올해 8월에 출판될 예정이다. 이외에도 ‘당시 150수’, ‘송사 150수’의 우리글 번역서도 8, 9월에 출판될 예정이다.   /연변일보           한춘 프로필: 1966년 동북농업학원 졸업, 1968년 해림시 수리국 취직. 1979년 12월 흑룡강신문사 입사. 2003년 3월 정년, 고급편집. 전 흑룡강동방학원 초빙교수.한국문학 강의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리사 력임, 흑룡강작가협회 리사 력임,  명예리사. 흑룡강조선족창작위원회 회장 력임,  고문 수상경력: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3차, 흑룡강성문예상 2등상, 흑룡강소수민족문학상 1등상, 중국조선족문학비평상, 장락주문학상 등 다수. 작품집:   시집 등 5부, 평론집 .  등. 금년 시집 한권과 수필집 두권 출판계약 맺음. 번역:  ‘당시 정선 150수’, ‘송사 정선 150수’   “왕몽 자서전 '나는 학생이다'” , 홍매 ‘수필집’ ( 번역제목 ) 등 다수.     북방문단의 시인 한춘(본명 림국웅)이 7월 17일 별세했다. 한춘은 1943년 흑룡강성 연수현 출생으로서 문예편집, 시인 평론가로 활약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왔다.그는 조선족 북방문단의 형성과 현대파 시인 군체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한 중국조선족문단의 대표적인 현대파시인이다.   문화대혁명전 전반 흑룡강성 조선족문단은 창작대오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리삼월, 허도남 등 10여명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뿐이었다. 당시 “흑룡강신문”의 진달래부간도 페간되였었다. 문화대혁명후기, 1975년을 전후하여 “흑룡강신문”에 “아침노을”이라는 부간이 생기였고 차츰 문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후, “4인방”이 거꾸러지면서 문학열조가 다시 부흥되였고 그 동안 중단되였던 흑룡강신문 “진달래문학부간”도 복간되였다. 당시 동북농업학원 토지규획전업을 졸업한 한춘은 문학과 관련없는 직업을 갖고있었으나 “송화강”잡지와 흑룡강신문에 서정시 “건축공의 기쁨”과“그때 우리는 어찌하여”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79년부터는 흑룡강신문사 문예편집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후기부터 1979년까지 흑룡강성조선족문단에는 소설에 윤일산, 김송죽 등이 “4인방”이 거꾸러진후에는 윤림호, 장금선등이 나타났다. 1982년에는 리삼월, 리명재, 박철준, 한춘, 강효삼, 김동진, 한병국 등 7명의 시인들의 작품을 묶은 “칠색무지개”라는 시집이 출판하였다. 이러한 계기로 흑룡강성에 문학인군체가 형성되였으며 북방문단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춘은 흑룡강성의 조선족 문학인들에게도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여 연변작가협회와 적극 련락,제1회로 8명의 북방문단의 작가들이 연변작가협회에 입회하여 흑룡강성창작소조를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1984년 흑룡강신문사 문예부 주임직을 맡게 된 한춘은 흑룡강성 문화청과 선전부, 작가협회등 부문을 뛰여다니며 노력한 결과 흑룡강성작가협회 산하의 조선족작가창작위원회를 설립할수 있었다. 이로써 흑룡강성은 독립적인 창작군체를 형성하였으며 리홍규, 조광명, 박옥남등 중견문인들을 배출하였다. 흑룡강신문사는 한춘의 주도로 해마다 문학행사를 마련하여 수필문학상, 시조문학상 등을 단일쟝르 문학상을 설치, 1985년에 시작된 수필문학상은 7회까지, 역시 1985년에 시작된 신춘문예 장편소설 련재는 11회까지 이어졌다. 1980년대는 중국에서 사상 해방 시기였으며 문학관념에 대한 전변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한춘은 당시 중국문단의 한 류파로 자리잡고있던 몽롱시의 영향하에 전통적이고 고루한 시의 작태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1984년에 “시가 관념을 갱신할 때가 되였다”란 단상을 발표, 시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그와 문인들의 근10년에 가까운 노력을 거쳐 현대파 시인 군체가 형성되였다.   작품집으로는 시집 ”무지개”, “주소 없는 편지”, “서러운 별”, “파랑새는 운다”, 평론집 “현대시의 선택과 곤혹”.번역으로는 “한국문학략사”, “당시 150수”, “송사 150수”등이 있으며  연변작가협회문학상, 흑룡강성 정부 문예상, 흑룡강소수민족문학상, 도라지 수필문학대상, 장백산 조선족문학비평상등 상을 수상했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7월 22일   한춘 추모글. 7월의 슬픔, 7월의 그리움 2013년 07월 23일 작성자: 리홍규(李洪奎)        7월은 태양이 가장 뜨겁게 작렬하는 계절이요 수풀이 가장 왕성하게  절정으로 치닫는 계절이다. 7월이란 그래서 쇠락의 래일이 바라보이는 계절이기도 하다. 절정의 순간순간에 쇠락의 그림자가 어딘가에서 한뼘한뼘 따라나서는 계절, 7월은그래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처절한 그래서 가장 슬픈 계절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계절에 우리는 한춘선생을 떠나보냈다. 아니 선생께서 이런 계절을 선택해서 우리를 떠나셨는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 병마와 조우하신후 50성상 시인의 삶을 살아오신 선생답게 생명의 마감을 이렇듯 아름답고처절한 계절로 선택해 장식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이 슬픈것은 그것이 다시 살아돌아올 수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슬픈 죽음의 다른 한 의미를 망각할 때가 많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란 곧 생명 창조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그 점이다. 무릇 생명이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울수 있고 의미가 있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생명의 연장만이 아닌 생명의 창조에서 우리는 삶의 보람과 의미를 한결 더 절실하게 느낄수 있지 않은가. 선생의 떠남이 우리의 가슴을 더더욱 저리게 하는것은 바로 선생의 시창작,선생의 문학비평, 선생의 후학에 대한 사랑과 가르침...... 이  모든것이 바로  7월의 수풀처럼 절정으로 치닫으며 생명 창조의 찬가를 부르는 가운데 문득 단절되였기때문이다.   그러한 생명 창조는 칠순이라는 선생의 년세와 무관한것이였다. 그만큼 선생은 시인으로서 치열한 인생을 살아오셨고 그 치열함속에서 완성돼온 선생의 문학세계와 문학사상은 곧 그이를 우리 문단의 거목으로 우뚝 서도록 만든것이였다. 그처럼 즐겼던 소주와 줄담배만큼이나 문학에 심취하며 살아오신 선생은 온 생명을 문학과 문학을 위한 일과 사람에게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방문단의 거의 모든 시인, 작가들이 선생의 관심과 가르침을 받았고 그들의 성장과정에 알게  모르게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또한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만큼 선생은 지난세기 80년대부터 북방문단의 기수와 도사로서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문학인생을 살아오셨던 것이다.   그러한 문학인생은 또한 선생을 북방문단뿐이 아닌 전반 중국 조선족문단에서도 그이만이 이룩할 수 있는 업적을 쌓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선생은 우리 문단에서 가장 먼저 을 주장하며 시가 리론과 창작을 적극 실천해오셨다. 그것은 단지 현대시창작방식을 주장해온 것만이 아니였다. 그것은 건국이후부터 이른바 을 경과하면서 굳어지고 경직된 우리의  문학환경에 대한 도전이였고 정치와 전통관념의 예속에서 리탈하려는 과감한 시도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우리문단의 관념전변과 사상해방이 그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은 이미 20여년 흘러 지금  우리문단은 창작관념이나 방식에서 전례없는 다원화 국면이 조성되고있는데 여기에는 선생의 당초 관념갱신 주장과 실천에서 그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것이다.   우리문단에서 애주와 달변 그리고 소탈함과 박식으로 유명하셨던 선생은 어딜 가나 주변에 문우들이 모여들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과 인생을 담론하곤 하셨다.   그러나 그이의 시를 진정 리해하는 이 몇이였고 그이의 작품세계에 깊숙이 들어간 이 몇이였던가. 우리의 보잘것 없는 시와 수필 그리고 소설에 대해 선생은 하나에서 열까지 그토록 자세하고도 심각하게 그 우렬과 높고 낮음을 가려주셨지만 그이의 문학세계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습득하고 있었던가. 그래서 선생은 어쩌면 고독하셨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독보적인 문학인생을  살으시며 그토록 높은 금자탑을 쌓으셨기에 그만큼  그이는 정신의 고독함을 감내하시다가 가셨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늦게나마 알게 된 우리의 가슴은 그래서 더더욱 슬퍼지는것만 같다. 이제 우리는 빈말이 아닌 실제행동으로 그의 문학사상을 리해하고 거기서 창작과 사상의 양분을 길이길이 섭취해야 할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를 사랑하고 가르치셨던 선생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인지도 모른다.   7월 19일 오전, 선생은 몇줌의 하얀 뼈를 남기시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골회함을 받쳐든 선생의 아들 대용이와 딸 미금이를 따라 납골당까지 갔다. 하늘나라에도 주소가 있다면 납골당 번호가 바로 그 문패일것 같아 그걸 알아두기 위해서였다. 혹시 선생이 그리우면 가끔 찾아가뵐수도 있으니까.   할빈 하평로(哈平路) 납골당 3층 천지(天池)실  997번.  를  한권의 시집으로 묶어내셨던 선생이 남기신 마지막 주소인셈이다. 주소는 있으되 편지를 보낼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그리움만은 항상 보낼수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129    시인 - 심련수 댓글:  조회:4219  추천:0  2015-03-05
  일제 강점기 문학활동을 펼쳤던 민족시인 심련수 시인의 삶과 문학정신을 기리는 “심련수 문학제”가 10월1일 개막해 5일까지 강원 강릉시에서 다채롭게 펼쳐졌다. 문학제에서는 제13차 심련수 한중학술세미나, 심련수 대표 시 랑송회, 열린 음악회 등으로 다채롭게 조직되였다. 또 제4회 연변 심련수문학상 시상식을 거행, 연변에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있는 김룡운선생에게 공로상이 전달되였다.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한국 강릉에서 출생, 1930년 중국 흑룡강성 밀산을 거쳐 1936년 룡정으로 이주하였다. 1940년경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려창의 밤” 등 시편들을 발표하였다. 1943년 7월 일본류학을 마치고 일제의 학병 강제징집을 피하여 룡정으로 귀환하였다. 영안현 신안진 등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945년 8월 8일 귀향 도중 왕청현 춘양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2000년 7월 룡정시 길흥촌에 거주하는 동생 심호수에 의해 55년간 항아리에 담겨 비밀리에 보관되어 오던 육필 유고가 공개되면서 마침내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였다. 현재 심련수의 문학과 삶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있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2013년 10월 14일     한국학계 “심련수  문학촌” 조성 필요성 제기               룡정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심련수(1918∼1945) 시인의 문학, 력사적 위상이 연변과 한국등지에서 날로 부각되면서 그의 문학을 새롭게 조명하고 문학사적 의미가 정당하게 확보될수 있도록 학계와 일반의 노력에 대한 주문이 높아지는 가운데 “심련수  문학촌”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개발돼야 한다는 주장이 한국학계에서 제기됐다.   지난 6일 한국 호텔현대 경포대에서 “민족시인 심련수 의 현대적 전승방안 및 콘텐츠화”를 주제로 한 제10차 심련수  학술세미나가 개최, 세미나에서 숭실대 강명혜 문학박사는 “심련수시인은 일제 암흑기 문학으로 민족정신을 일깨운 걸출한 민족시인으로서 윤동주, 리륙사와 더불어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추앙되는데 이견은 없다”며 “앞으로 남은 과제는 심련수의 문학정신을 우리 문학사에 정확히 정립하고 널리 알리는데 주력하는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심련수  문학촌’을 조성해 그의 삶의 행적을 추적, 복원한 강릉관 로씨야관(울라지보스토크), 중국관등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뿐만아니라 심련수  시, 조각 공원 및 심련수  상징물 캐릭터화, 심련수  축제 개최등의 프로그램 개발에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심련수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2010 심련수  문학제”가 한국과 중국 연변의 일원(一圓)에서 이채로운 장을 펼쳐졌다. 우선 한국 강릉시가 주최하고 심련수선양사업위원회, 강원도민일보, 강릉MBC가 공동 주관하는 심련수  문학제가 강릉지역에서 학술세미나와 문학상 시상식, 시랑송대회, 시화전시, 출판기념회 등 다채로운 학술, 문화,기념행사로 이어졌다.   심시인의 문학활동의 주무대였던 중국에서는 지난 10일,  “제1회 심련수문학상”이 개최, 연변시가학회와 연변작가협회시가창작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강릉심련수선양사업위원회에서 주관한  시상식에서는 윤청남시인의“갈밭에 바람자면 갈대는 일어서서”가 제1회 심련수문학상을 수상했다 .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 8- 15    
128    음악가 - 정률성 댓글:  조회:4583  추천:1  2015-03-05
  음악가 정률성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휘황한 음악생애를 기리는 뮤지컬이 나온다.   한국 광주 사회적기업협회와 아시아도시재생연구소등 단체를 중심으로 무대에 올리는 뮤지컬은 “연안송”과 “팔로군 행진곡” 등 정률성의 대표곡을 주요 콘텐츠로 삼아 음악가의 일대기를 다룬다. 중국 관광객을 주요 대상으로 공연될 뮤지컬에는 출연배우부터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 연주자, 성악가 모두 정률성의 고향인 광주출신의 젊은 예술인들이 재능기부를 통해 참여한다. 이를 통해 광주의 대표 관광상품을 만들고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 역량도 키운다는게 사회적기업협회와 아시아도시재생연구소의 취지다. 정률성은1914년 한국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 1933년 중국에 와 남경“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 졸업후 남경, 상해 등지에서 항일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부터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 음악지도, 로신예술학원 성악교원,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교육장등직을 맡았다. 1938년 4월에 창작한”연안송”은 1993년 20세기 혁명음악의 경전으로 평의되여 중국음악사서에 영원히 기록되였다. 1950년 중국국적에 가입, 선후로 북경인민예술극장과 중앙가무단에서 음악사업에 종사했다. 정률성은 도합 360여부의 음악작품을 창작, 그중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은 1988년 7월 25일에 중국 중앙군위에 의해 정식으로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지정되였다. 1976년 12월 7일 북경에서 서거했다. 정률성은 몇해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60주년을 맞아 “신중국 창건 영웅 100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매년 중국관광객 2만명 이상이 생가 터 등 그의 흔적을 찾아 광주를 방문하고 있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11월4일    
127    시인 - 고 리삼월 댓글:  조회:4123  추천:0  2015-03-05
  북방문단의 큰 “별”이 지다 - 원로시인 리삼월 타계     북방문단의 대표작가인 리삼월시인이12월 2일 심장병으로 타계했다.   리삼월시인은 본명이 리경희, 1933년 길림성 장춘시에서 출생했다. 1951년 흑룡강오상중학 재학중 조선전쟁에 참전했다. 1956년부터 소학교 교사, 농업기술간부, 문화관 관원 등 직무를 담당했다. 1954년에 《연변문예》에 처녀시작을 발표하면서 시창작에 혼신을 쏟아 천여수의 시를 발표했으며 '황금가을', '두사람의 풍경', '봄날의 증명', '야생화의 향기' 등 시집을 출간했다.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한국문인협회 해외문학상, 흑룡강성정부 문학상 등 상을 수상했으며 시 '접목'이 조선어문 교재에 수록되기도 했다. 또 한연변작가협회 리사,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상무리사 등 사회직무를 력임하기도 했다.   1959년부터 1993년까지 할빈에서 《송화강》문학지 편집원, 주필로 사업. 잡지가 나오면 등짐으로 지고 흑룡강성의 마을마다 다니면서 배포를 했고 초학자들의 작품을 단 한편이라도 빛을 보이기 위해 산간오지에까지 찾아다니는 등 “송화강지”와 북방문단의 작가대오의 정착과 발전을 위해 필생의 기여를 했다.    “문학의 사회적인 위치가 많이 떨어졌고 돈에 밀려 뒤전으로 도외시되고 있지만 나는 초지일관 조선족문학을 평생의 과업으로 선택한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어느 회억록에서 토파했던 시인은 작고하기 5일전까지 육필로 시를 남겼다고한다.   한편 12월 4일 전국각지에서 비보를 듣고 달려온 200여명의 문우들이 할빈에서 리삼월시인의 영결식을 치렀다.할빈시의 조선문 매체들과 연변작가협회와 연변문학잡지, 도라지잡지사, 장백산잡지사에서 영결식에 참가했다.   김혁 기자  
126    룡정 윤동주연구회 "룡두레" 문화총서 출간 댓글:  조회:4633  추천:1  2015-03-04
룡정·윤동주연구회, 문화총서 “룡두레” 출간     조선족 문화총서 “룡두레”가 일전 상해 원동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윤동주 옥사 70주기를 맞으며 사단법인 “용정.윤동주연구회”가 편찬, 출간한 “룡두레" 제1호는 윤동주 추모특집으로 꾸며졌다. 총서는 우선 앞자리에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큰 편폭으로 도편과 더불어 정리, 소개했다. 총서는 논문, 추모시, 추모수필, 르포 등 코너로 조선족 학자, 작가, 시인과 교직원들의 작품으로 꾸며졌다. “윤동주, 순진무구한 동심에서 저항의 세계로”, 윤동주시에 반영된 의식차원에 대하여”, “윤동주 향토애의 심성과 그의 시 세계“ 등 논문에서는 윤동주의 작품세계를 심도있게 조명했고 “동주의 넋”, “별이 된 시인을 그리며”등 추모시와 “별에 입맞추다”, “동주 별, 동주 숲, 동주 길”, “별을 품은 교정”, “추억속 뜻깊은 나날들”등 추모수필들은 윤동주에 대한 절절한 애대의 심정을 정감어린 시와 수필에 담아냈다. “영원우표로 만나는 윤동주”, “별이 빛나는 마을, 명동”, “더기 위의 시인의 집”등 르포들은 기행, 칼럼등을 통해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정신을 다각적으로 풀이 해 보여 주었다. ​ 총서의 주필인 용정.윤동주 연구회 김혁 회장은 권두언 “정수(淨水)를 길어올리다”에서 “총서는 겨레가 앙모하는 윤동주를 연구하고 그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잇는 문헌과 회원들의 이채로운창작품들들을 정기적으로 게재할뿐더러 무엇보다 용정의 역사, 용정이 배출한 인걸들에 대해 조명하고,진통을 앓고있는 우리 공동체의 이슈와 현안에 대해 진맥하며 나아가 우리 민족의 비전에 대한 제안등의알쭌한 내용들을 여러 코너를 개설해 다양한 문체로 꾸며 나감으로써 명실공히 읽을 만한 총서, 소장할만한 총서, 후일 다시 찾게 되는 총서로 꾸며나가고자 한다.”고 표했다. 본호 총서는 또한 중국조선족의 첫 윤동주 추모문집이다. ​ 한편 사단법인 "용정.윤동주 연구회"는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을 승계하기 위한 취지로 작가,학자, 교직원들로 무어져 지난해 9월에 윤동주의 고향에서 발족되였다. 초대회장으로는 장편소설 “시인윤동주”, 인물연구 “윤동주를 위한 29개의 키워드”의 저자인 재중동포 김혁소설가가 당선되였다. 김혁소설가는 또한 조선족문단 최초로 윤동주 평전을 집필, 올해부터 조선족 대형문학지 “장백산”에 3년간 연재하게 된다.   [출처] 룡정·윤동주연구회, 
125    고독과 시인과 시 댓글:  조회:4785  추천:0  2015-03-04
  고독의 시인 에밀리 디킨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문학에 정열을 바친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Elizabeth Dickinson,1830~1886년).30세 이후엔 은둔생활을 하며 흰옷만을 즐겨 입어 `뉴잉글랜드의 수녀'란 별명을 얻기도 한 디킨슨의 생애는 마치 슬픔이 서려있는 청솔가지 같다. 그녀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에머스트에서 변호사인 에드워드 디킨슨과 에밀리 노크로스의 두번째 자녀로 태어나 불과 몇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독실한 기독교가정에서 성장한 그녀는 마운트 홀리요크 여자신학교에서 신앙을 키웠지만 가문의 보수적인 청교도신앙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특히 영적대각성운동(청교도 정신부활의 물결)이 그녀의 집안과 마운트 홀리요크 여자신학교를 비롯해 에머스트 전체를 뒤흔들어도 그녀는 `구원의 희망이 없는 반항아'로 외로이 살면서 청교도신앙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건강상의 문제로 신학교를 1년만에 중퇴한 그녀는 시작(詩作)에 전념하다 1855년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그녀의 아버지가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일가는 1854년부터 이듬해까지 워싱턴에서 지냈는데 이때 필라델피아의 한 장로교회에서 찰스 워즈워스 목사를 만난다. 그의 문학적인 설교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찰스 워즈워스 목사는 낭만적인 인물로 큰 슬픔을 겪었다고 전해지는데 강단에서의 웅변은 그의 외로움과는 대조적으로 힘이 있었다고 한다.그의 칼뱅주의적 전통주의는 그녀의 사색에 밑거름이 됐고 시작에도 영향을 미쳤다. 에밀리 디킨슨은 그와 영혼에 관한 편지를 주고 받았고 1860년에는 찰스 워즈워스 목사가 에머스트로 그녀를 찾아오기도 했다.그녀는 여러 글에서 그를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지적 도전과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가져다 준 힘차고 매력적인 찰스 워즈워스 목사는 기혼자였고 그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그녀의 말대로 우리가 알고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일까.그녀는 고통을 초월하려고 했다.  1861년 찰스 워즈워스 목사는 샌프란시스코의 교회로 전임했고 그후 연락이 두절된다.이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한 이별을 의미했다.자신의 비련을 친구부부와 여동생에게만 밝혔던 그녀는 실연의 아픔을 시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시적 재능은 봇물처럼 흘러 넘쳤고 사랑의 좌절은 차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돼 그녀의 작품들과 영적인 결합을 이루었다.이 때부터 그녀는 흰옷만을 입고 운둔적 생활을 해 뉴잉글랜드의 수녀란 별명을 얻었다. 1862년 4편의 시를 동봉한 편지를 문학가 토마스 웬트워스 하긴스에게 보내 평을 부탁했다.그는 출판에 반대했으나 시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계속 조언자의 역할을 해주었다.친구들의 출판 권유를 계속 거절한 결과로 그녀는 생전에 불과 7편의 시만 발표했다.  그녀가 평생동안 쓴 시는 1천7백75편.그러나 7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후에 발표됐는데 1890~1945년 8권의 시집으로 묶여 출판되었다.그녀는 고독 속에서 자신의 시대보다 반세기 앞선 시를 썼고 20세기에 와서 제대로 평가 받았다. 말년에 그녀는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으로 비애 속에 살았다.1882년 어머니를 잃었고,2년 후엔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던 로드 판사와 이별한 뒤 그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위기를 맞는다.그녀는 아내를 잃고 홀로된 로드 판사와 사랑에 빠졌으나 독신생활을 버리기 어려워 청혼을 거절했다.로드에게 보낸 여러 편지 속엔 성숙한 사랑이 담겨있어 서로가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녀는 로드 판사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졌고 이로 인한 건강 악화로 1886년,56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시는 `자연과 사랑' 외에도 청교도정신에 바탕을 둔 `죽음과 영원'을 많이 다루고 있다.그의 시는 친밀하고 익숙한 언어로 사랑 죽음 자연 등에 관해 노래했다.1천7백75편의 시와,그와 비슷한 분량의 편지들을 통해 본 에밀리는 열정적이고 재치있는 여성으로 시 뿐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술로 승화시킨 철저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영혼이란 제 있을 곳을 선택하는 법/문을 닫아버린다/영혼의 그 거룩한 많은 수에게/더 이상 선물 따위는 하지 말라/냉정히 나지막한 제 문 앞에서 멈추는…난 영혼을 알고 있지 그 광대한 나라로부터/선택하라,하나를/그리고 눈치채지 못하게 하라/돌과 같이' _`영혼이란 제 있을 곳을' 중에서      디킨슨의 시는 자연·사랑·죽음·신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시풍은 노래하거나 이야기하는 휘트먼과 대조적으로 지적·즉물적·경질적(硬質的)이며 이미지가 간결하게 응축되어 있다. 현대시와 비슷한 경향인 디킨슨의 시는 20세기 이미지즘의 전파와 형이상파 시인에 대한 재평가에 따라 높이 평가되고 있다.     [동서문화사]        
124    묘비명 - 자유 댓글:  조회:4586  추천:0  2015-03-04
    나의 내면에는 인간 존재 이전의 ‘악한 자’가 지닌 어두운 태곳적 힘이 존재했고 또한 인간 존재 이전의 신이 지닌 밝은 힘도 존재했는데 내 영혼은 이 두 군대가 만나 싸우는 격전장이었다.   고뇌는 격렬했다. 나는 내 육체를 사랑해서 그것이 사멸하지 않기를 바랐고 영혼을 사랑해서 그것이 썩지 않기를 바랐다. 그 힘겨운 싸움이 삶을, 문학을 살찌웠을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강할수록 투쟁은 그만큼 수확이 많고, 최후의 조화는 더욱 풍요롭다. 신은 나약한 영혼이나 흐물흐물한 육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정신은 힘차고 저항력이 넘치는 육체와 씨름하기를 바란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 . . . . .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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