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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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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네오아방가르드>>--~(아이고나 머리가 뗑...) 댓글:  조회:4381  추천:0  2015-02-18
『Return of the Real』 Hal Foster  누가 네오-아방가르드를 두려워하는가?  *네오-아방가르드: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적 고안들, 즉 콜라쥬와 앗상블라쥬, 레디메이드와 그리드, 모노크롬 회화와 구성조각 같은 것들을 재활용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북미와 서유럽 미술가들을 느슨하게 묶어서 지칭하는 말.  할 포스터는 전후부터 지금까지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던 수많은 '네오'와 '포스트'들 중에서, 예술적 관례들과 역사적 조건들 둘 다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려 열망했던 복귀들에 주목한다.  그는 '근본적인 독해'의 예로, 알튀세의 마르크스 독해와 라캉의 프로이트 독해를 들고 있다. 이 두 복귀의 핵심은 담론의 구조,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나 정신분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의미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변형시켰는가 하는 데에 있었다. 알튀세는 마르크스 내에서 잊혀진 단절을 분명히 밝혀내는 데에, 라캉은 프로이트와 소쉬르 사이의 잠재된 연계를 명료화시키는 데에 집중하여 각기 다른 내부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지만, 독해의 방법과 모티브는 유사하다. 즉, 억압적으로 느껴지는 현재의 작업방식으로부터 그 담론을 떼어내기(disconnect)위해서, 그것을 어떤 상실된 실천과 다시 연결시키려는(reconnect) 전략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후자의 움직임(다시)은 시간적인 것으로, 전자의 공간적인 움직임(떼어내기)속에서 새로운 작업장소를 열어놓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술에서는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의 뒤샹적인 다다의 레디메이드들과 러시아 구축주의의 불확정적 구조들의 복귀가 앞서 말한 근본적인 복귀에 해당할 수 있다. 이 두 움직임은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모두 자율적 미술 및 표현주의적 미술가의 부르주아적 원리들에 대해 투쟁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방법-전자는 미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의 포즈와 일상 사물들을 포용함으로써, 후자는 산업 재료들을 사용하거나 미술가의 기능전환을 시도함으로써. 목적-미적 범주들에 대한 인식론적 탐구를 통해서 예술 제도를 규정하고/하거나 그것의 형식적 관례들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공격을 통해 그 같은 예술제도를 파괴하려고. 그러한 제도를 혁명적 사회의 유물론적인 실천들에 따라 변형시키려고.) 두 경우 모두 미술을 세속적인 시·공간과의 관계 속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적 실천과의 관계 속에서 재위치지우기위한 것이다. 50년대의 미술가들이 대체로 아방가르드적 고안들을 재활용했다면, 60년대의 미술가들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탐구했다.  두 가지 전제: 아방가르드를 구축하는 일의 가치에 대한 것, 아방가르드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서사들의 필요에 대한 것.  아직까지도 아방가르드에 대해서 논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적 형태와 정치적 형태사이의 상호접합(articulation)이라는 문제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예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상호접합이야말로, 포스트모던이라는 절충적 개념 뿐 아니라 네오-아방가르드에 대한 탈역사적(posthistorical)설명이 말소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온 과거를 복합적으로 만들고 나아갈 미래를 지원하는,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계보가 필요하다.    *페터 뷔르거의 의 핵심과 할 포스터의 관점.  뷔르거의 전제, 그러니까 아방가르드의 모든 활동들이 부르주아 예술의 허구적 자율성을 파괴하려는 기획 아래 포섭될 수 있다는 것에 문제가 많다. 그보다 더한 문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절대적 기원으로, 즉 그 미적 변형이 첫 번째 단계에서 완전히 그 의미를 드러내고 또 역사적으로 그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그려낸 것. 이는 지금 현재 역사적 아방가르드라는 의미를 얻을 수 있는 작업(작가)들이 아방가르드적 실천과 제도적 수용 사이의 대화의 시공간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상황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뷔르거의 전제: 어떤 한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오로지 그 예술이 진전하는 정도에 따라서만 진전할 수가 있다. 뷔르거의 주장에 따르면, 부르주아 예술에 대한 아방가르드의 비판은 이 부르주아 예술의 전개, 특히 그 역사 안에서의 세 단계들에 의존한다. 첫단계는 18세기 말경 예술의 자율성이 계몽주의 미학에서 하나의 이상으로서 선언되었을 때 생겨났고, 두 번째 단계는 19세기 말경 이러한 자율성이 바로 예술의 주제자체로 바뀌었을 때, 그리하여 추상적 형식뿐 아니라 또한 세상으로부터의 유미주의적 퇴각 역시 추구했던 예술 속에서 생겨났다. 세 번째 단계는 20세기 초엽 이 유미주의적 퇴각이 역사적 아방가르드에 의해, 예를 들면 미술은 사용가치를 회복해야한다는 생산주의자들의 명백히 드러난 요구나, 혹은 미술은 자신의 무용성을 인정해야한다는-문화질서로부터의 예술의 퇴각은 또한 이 질서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다다이스트들의 함축적인 요구의 형식으로 공격받았을 때 생겨났다. 그의 이론이 신봉하는 진화의 개념은 이전과 이후를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전혀 별개의 것과 합성시키는 단순한 것이며, 역사를 순간적이면서 또한 종국적인 것으로 제시하게끔 그를 이끌어 갔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네오-아방가르드에 의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반복은 오로지 반-미학을 예술적인 것으로, 위반적인 것을 제도적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뿐이다.(물론 그것이 다 거짓은 아니지만) 따라서 역사적 아방가르드=영웅적(성공한) 과거, 네오-아방가르드=실패한 현재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하지만 두 아방가르드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뷔르거는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예술양식들이 역사적 관례들임을 드러냈으며, 그것들을 실천적인 수단들로 다루었다고 주장하며, 이것들이 예술-역사를 넘어서고 목적을 결여한 것으로 간주되는 -에 대한 아방가르드의 비판에 근본적인 이중의 수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이런 자의성은 네오-아방가르드의 "어떤 의미설정도 가능케 하는 공허한 의미의 선언"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질적 차이는 아니다. 여기서 두 아방가르드 사이의 연속성을 찾을 수 있다.  할 포스터가 뷔르거를 걸고넘어지는 목적은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 사이의 시간적 교류, 말하자면 예상과 재구성의 복합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패를 시뮬레이트하는 네오-아방가르드라는 뷔르거의 논리는 더 이상 충분치 않으며, 그가 주장해마지않는 역사적 진화라는 개념과도 모순된 것이다. 그의 결론은 1. 아방가르드의 다음과 같은 교훈, 즉 동시대 예술의 역사성이라고 하는 교훈을 무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교훈을 뷔르거는 다른 곳에서는 우리에게 설파하고 있다. 그것은 또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이러한 역사성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로 인해 예술이 오늘날 예술로서 진전되었음을 주장할 수 있는, 하나의 평가기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2. 그것은 네오-아방가르드가 예술제도에 대한 전전의 비판을 전복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애썼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네오-아방가르드가 그렇게 하는 가운데 새로운 미적 경험들과 인식상의 연관들, 그리고 정치적 개입들을 생산해냈다는 사실을 무시하며, 또 이러한 새로운 개방들이 바로 그로 인해 예술이 오늘날 진전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평가기준을 구성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할 포스터는 '네오-아방가르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기획을 무효화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은 아닌가?'라는 가설에서부터 새로운 개방의 가능성을 탐구해나가려 한다.    뷔르거에게 또 한 번 딴지를 걸자면, 그는 아방가르드가 예술과 삶을 다시 연결시키기 위해 자율적인 예술제도를 파괴한다고 했는데, 이런 관점은 문제가 되는 자율성을 예술에게 할당하고 삶은 그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위치시켜서 필연적으로 아방가르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아방가르드의 실천들이 지닌 결정적 차원을 놓치게 된다.(예: 아방가르드가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타락한 세계를 조롱하기 위해서 흉내낸 모방적 차원, 아방가르드가 무엇이 존재할 수 있는가보다는 무엇이 존재할 수 없는가를 제안하려고 했던 유토피아적 차원) 하버마스는 뷔르거에 한 술 더 떠서 아방가르드는 단순히 실패했을 뿐 아니라, 항상 이미 잘못된 것, 즉 "넌센스한 실험"이라고 말한다. 그의 관점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은 아방가르드는 예술-그-자체라는 범주를 그대로 유지하며 그저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의 역전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방가르드들의 목표는 예술의 추상적 부정이나 삶과의 낭만적 화해가 아닌, 삶과 예술이라는 이 양자의 관례들을 지속적으로 시험하는 것이며, 그 실천은 모순적·유동적, 악마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것은 예술과 삶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예술의 관례와 제도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예술제도는 미적 관례들을 총체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또 이러한 관례들은 예술제도를 총체적으로 구성하지는 않는다. 이런 차이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의 역점들을 구분하게 해주는데, 전자가 관례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후자는 제도적인 것에 집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네오-아방가르드들은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이 수행한 전통적 매체들의 관례들에 관한 비판을 미술제도에 대한 탐구, 즉 그 제도의 지각적이며 인식적인, 또 구조적이며 담론적인 매개변수들에 대한 탐구로까지 발전시켰다. 따라서 할 포스터의 세 가지 주장은 1) 예술제도가 그 자체로 포착되는 것은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더불어서가 아니라 네오-아방가르드와 더불어서이다. 2) 네오-아방가르드는, 최상의 상태에서는, 이 제도에 대해서 특정하면서도 해체적이기도 한 창조적인 분석(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 자주 그랬듯이, 추상적이면서 무정부적인 성격을 띠는 허무주의적 공격이 아니라)을 수행한다. 3)네오-아방가르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무효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기획을 처음으로-이 처음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재차 끝이 없는 것이다-실행한 것이다.    네오-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더 세분화해보면, 초기 네오-아방가르드에 있어서 두 계기를 구분할 수가 있다. 첫 번째 네오-아방가르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기본적인 고안들을 반복함으로써 미술제도를 변형시킨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방가르드를 제도로 변형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억압과 반복에 대한 프로이트적인 모델과의 유비에 따르면 이는 억압된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그 모순들이 충분히 다뤄지기 전, 그러니까 회고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반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평가와 판단, 분류가 있기 전, 무의식적인 저항으로서 수용되는 단계로 볼 수 있다. 이런 아방가르드의 제도화는 두 번째 네오-아방가르드에 있어서,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첫 번째 네오-아방가르드 양자의 한계들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촉구한다. 다시 말하자면,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첫 번째 네오-아방가르드의 소위 말하는 실패, 즉 미술제도를 파괴하는 데에 있어서의 그것들의 실패는 두 번째 네오-아방가르드에 의한 이 제도의 해제 실험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네오-아방가르드를 종착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럴려면 그것의 비판이 그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여러 상황은 두 번째 네오-아방가르드에게 또 다시 성찰을 요구하는데, 그 제도적 분석을 발전시키려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동시대 미술가들은 거대한 대립들(oppositions)로부터 미묘한 전치들(displacements)에로, 그리고/혹은 다른 집단들과의 전략적인 협업들(collaborations)에로 옮겨갔다. 이런 과정이 아방가르드의 비판이 지속되는 한 방식이며, 아방가르드가 지속되는 한 방식이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 사이의 이러한 개정된 관계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로 다시 되돌아가자. 할 포스터의 텍스트를 관통하는 한 가정을 전면으로 드러내면, '역사는, 특히 모더니즘의 역사는 자주, 암암리에건 혹은 그 반대이건 간에, 개인 주체라는 모델에 입각해 실로 하나의 주체로서 포착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가정에서 자유로워지거나 포기하는 대신, 그것을 하나의 덕목으로 만드는데, 개인 주체에 대한 이러한 유추가 역사 연구에 있어 거의 구조적인 것이라면, 차라리 주체에 관한 가장 정교한 모델인 정신분석학 모델을 적용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공공연히 제안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심리적 시간성을 포착한 것을 라캉의 프로이트 독해로 풀어보면, 하나의 사건은 오로지 그것을 기록하는 또 다른 사건을 통해서만 등재되며, 또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오로지 지연된 작용 속에서만 알게 된다는 내용인데, 포스터는 모더니즘 연구 목록들 속에 이런 유추를 집어넣는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는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즉 미리-당김(protention)과 다시-당김(retention)의 지속적인 과정, 예상된 미래들과 재구성된 과거들 간의 복잡한 이어달리기로서-간단히 말해, 이전과 이후, 원인과 결과, 기원과 반복이라는 그 어떤 단순 도식도 헛되게 되고 마는 지연된 작용 속에서-구성된다는 것이다. 뷔르거의 '최초의'시작과 끝이라는 결론과 달리, 이런 유추에 의거한다면 아방가르드 작업은 그 시초의 계기에 있어 결코 역사적으로 효과적이지도, 또 충분히 의미있지도 않다.(그저 그 시대의 상징질서에 뚫려 있던 하나의 외상(구멍)일 뿐.) 이 외상은 레디메이드와 모노크롬 같은 아방가르드적 사건들의 반복이 지닌 또 다른 기능, 즉 그러한 구멍들을 깊게 할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덮기도 하는 기능을 지시해 준다. 그리고 이런 기능은 처음에는 분열적이고 두 번째에는 회복적인 두 작동방식을 구별할 것인가, 과연 그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지시해 준다. 네오-아방가르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에 의해서 그것이 작용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역사적 아방가르드에 작용하기도 한다. 억압되었던 아방가르드는 복귀를 거듭한다. 미래로부터.    
42    <<최첨단 현대시론(?)>>과 <<아방가르드 시론>> 댓글:  조회:3967  추천:0  2015-02-18
  * 이 글은 월간 2006년 12월호에 발표하여 21세기 한국시단에 파문을 일으킨 심상운의 최첨단 현대시론이다.  디지털의 원리를 현대시에 도입하여 라는 새로운 시론을 전개하고 개념을  정립하였다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 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41    열린 시 운동과 公演詩 댓글:  조회:3639  추천:0  2015-02-18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                                                  심 상 운   1.   현대는 사회의 곳곳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이 활화산처럼 분출되는 시대다. 이 상상력은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서로의 존재성을 높이면서 다양한 가치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 대표적인 예(例)가 현대예술의 첨단에 위치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다. 그는 이전의 예술가들에게는 전혀 예술의 재료가 되지 못했던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 최초의 ‘테크놀로지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현대시의 실험적인 시인들은 언어문자의 틀을 넘어서, 시가 음악과 영상, 시인의 연기를 포함하고, 연극의 무대로 진출하여 독특한 시의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시에서 시가 언어의 의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무의미시, 탈관념시). 시가 사물화 되려는 것(사물시). 시가 순수 이미지의 집합만으로 만족하려는 것(디지털 시, 기호시)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현대시의 창조적인 변화의 모습이다. 이런 변화는 언어(문자)를 유일한 표현매체로 삼는 전통적 시의 기능에서 벗어나는 창조적인 변화의 양상으로서 그 속에는 현대의 특성인 ‘경계 허물기’ 와 ‘통합하기(퓨전)’가 들어있다. 그들은 시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시인의 사상, 감성, 상상, 영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시의 공연화(公演化)는 시와 연극, 시와 무용, 시와 회화, 시와 음악 등이 융합하는 현대시의 혁신적 변화로써 독창적인 표현영역을 확립해야 하는 미래지향적 과제를 안고 있지만, 영상매체에 위축된 현대시의 독자(관객)를 향해 새로운 소통의 문을 여는 ‘열린 시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존재의미가 평가된다.     2. 공연시(公演詩)는 이미 존재하는 극시나 시극과는 성격이 다르다. 극시나 시극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1시간 이상 공연되는 연극의 대본(희곡)이지만, 공연시는 보통의 짧은 서정시의 낭송언어를 공감각적 이미지에 조화시켜 5~7분 동안 무대에서 연출하여 보여주는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시(perfomance poetry)는 글자 그대로 ‘공연+시’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시와 다른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공연시를 창작할 때에는 첫째로 ‘공연을 위한 시’의 요소(극적 요소)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둘째로 무대에서 연출되기 위해 시인, 연출자, 배우 등의 역할분담(분업화)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공연시의 독자성을 살리기 위해서 연극, 음악, 무용 등 기존의 예술들과 융합되면서 ‘시의 언어감각과 이미지와 상징성’을 살려나가는 독창적인 표현양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연을 위한 시의 목적에 부합되는 새로운 장르로서의 공연시가 정착되고 창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창작된 기존의 작품들은 ‘각색(脚色)’의 과정을 거치거나 창조적 연출의 기능에 의해서 공연시(각색시)로 재탄생할 수 있다.     현재 무대에서 공연되는 공연시는 ‘1인 낭송시’, ‘합송시’, ‘무용시’, ‘퍼포먼스’, ‘영상시’ 등으로 분류된다. 1인 낭송시의 경우에는 도우미가 캐릭터의 역할을 하고, 배경음악, 효과음, 소품사용 등을 통한 시인의 낭송연기로 문자시의 한계를 벗어나는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일반적인 시낭송(詩朗誦)과 차별성을 갖는다. 그리고 녹음된 시의 낭송을 곁들이는 무용시(舞踊詩)는 언어의 시를 몸의 시로, 퍼포먼스는 간단한 무대 장치를 갖춤으로써 언어의 시를 극적인 연출의 시로, 영상시(映像詩)는 노래나 해설과 함께 사이버 공간에서의 영상과 시의 결합이라는 방법으로 시의 이미지를 표현하여, 문자를 유일한 매개로 하는 ‘종이 속에 갇힌 시’와는 차원이 다른 전달성을 드러낸다. 이런 공연시의 표현 효과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평면성을 입체성으로, 청각이나 시각을 공감각으로 바꾸는 이미지의 다양한 변화다. 그리고 이와 함께 영상시를 제외한 공연시에서 이루어지는 시공연자(시인)와 관객(독자)의 직접적인 만남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관객(독자)들에게 문자시에서 맛보지 못하는 즐거움을 주고 독자와 함께 시의 호흡을 나누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객(대중)들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공통적 특징인 비유적, 상징적 표현이나 문맥 파괴적인 현대시의 공연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3. 공연시는 시의 커뮤니케이션에서만 아니라 시의 창조적인 이미지 면에서 현대시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 예상된다. 공연시는 언어와 문자를 기본으로 하지만 무대의 공연을 통해서 시인(배우)의 연기와 무대장치, 조명, 소리 등의 효과로 전달되는 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로,그 변화의 양상에 일반적인 현대시를 대입해보면  영상시를 지향하는 시에서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통한 복합적인 이미지의 세계(하이퍼택스트)를 구현하는 시가 더 확산 될 것 같고, 짧은 서정시에도 극적인 요소를 넣어서 입체적인 표현을 하는 시가 일반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전망이 가능한 것은 공연시가 확산되면 그것이 전통(일반) 서정시의 표현 방법에 도미노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의 주체는 시인(창작자)이라는 고정관념의 변화다. 시를 무대에서 행위예술로 표현하는 배우나, 시를 각색하고 연출하는 연출자도 시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독창적 해석에 의해 시의 의미와 감각이 여러 방향으로 달라질 수 있다. 셋째로는 시의 표현에 사용되는 음향과 영상기기와 시의 만남이다. 악기와 전자기기들이 시의 표현양식 속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언어를 대신하는 매체로 자리를 잡게 된다. 따라서 물리적인 기기(機器)와 시의 합성은 새로운 감각의 시를 탄생하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이외에도 시가 한정된 종이의 공간에서 무한정한 사이버의 공간으로 확산되어서 시의 대중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예상이다.     공연시의 이론을 세우고 실제적 공연에 앞장서서 새로운 시의 영역을 개척해온 신규호 시인(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은 이제까지 벌여온 공연시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현대사회에서 구현가능한 공연시의 전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2007, 4,27) “실제로,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무대 위에서 직접 창작시를 합송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낭송하거나,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거나(노래시), 또는 시극이나 무용시, 퍼포먼스 등을 시청각 매체를 이용해서 무대 위에 올림으로써, 청중들에게 몸으로 다가가고자 시도하는 ‘공연시’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2000년 1월부터 현재까지 ‘좋은시 문학회’가 총 88회에 걸쳐 실험하고 있음.) 무대 위에서 ‘공연’되는 시는 캠코더나 디지털 카메라나 카메라 폰 등으로 녹화하여 다시 사이버 공간이나 DMB, TV 등에 재생하여 감상하게 함으로써 ‘공연시’의 재생산, 재활용도 가능하다고 본다. 더구나, 최근에 새로 등장한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나 'SECOND LIFE'와 같은 콘텐츠 제작 방법을 ‘공연시’가 앞으로 잘 활용하면 무궁무진한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전망은 현대 영상매체의 기기와 공연시를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다. 이는 백남준이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든 것과 유사한 독창적인 비전이다.     4 공연시를 창작하고 발표하는 시인은 ‘시인, 연출가, 배우’의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종합예술인의 의식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시를 언어(문자)에서 해방시켜서 온 몸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전문가적인 정신과 열정이 있다. 그래서 “ ‘공연시’는 보다 ‘인간적’이다. 시인과 청중이 시를 가지고 직접 서로 만나서, 면대 면으로 호흡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을 이용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발표해 보여줌으로써, 창조적인 시적 상상력을 통한 감동을 서로 공유한다는 데에 참뜻이 있다. 비인간화 시대에 시적 정서를 직접 교환함으로써 인간적 유대감을 증진함은 실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신규호 시인의 글(「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은 더욱 공감을 준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문화 현상들에서 형식이 내용의 대부분을 만들어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근거가 되는 예(例)는 집의 형태에 따라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달라지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고, 환경이나 제도가 사람의 생활 형태와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형식은 내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용기(容器)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공연시의 앞날을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오늘 열리는 ‘한국 현대 시인협회 주최 제1회 ’는 이제까지 검토한 여러 가지 사실에 비추어볼 때 매우 의미 있는 행사라고 생각된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시인과 도우미(조연)는 전문적인 연기자가 아닌 순수한 아마추어들이지만 그들은 자기가 창작하는 시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 있으며 열정이 넘친다. 따라서 어설픈 장면도 많겠지만 전문가를 넘어서는 재치와 상상력의 싱싱함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그들이 보여주는 몸의 시, 행위의 시를 받아들이고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말자.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한 몸이 되어 보자. 그러면 ‘종이’에서 해방된, 뜨겁고 빛나는 새로운 시의 혼(魂)과 만나게 될 것이다.      
40    하이퍼텍스트 시의 지향 댓글:  조회:4273  추천:1  2015-02-18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대담   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 김규화 / 심상운    아무리 아니라고 머리를 저어도, 우리는 인터넷, TV, 핸드폰 등의 IT기기들로 둘러싸인 환경, 즉 하이퍼텍스트의 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위아래(상하), 앞뒤(전후), 좌우라는 3차원의 공간에서만 살고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현실을 초월한(hyper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오늘의 삶과 시가 변화된 리얼리티를 추구하며 하이퍼텍스트로 가고자 하는 노력은 시대의 불가피한 한 흐름으로 생각됩니다. 시대에의 맹목적 예속보다는 시읽기와 시쓰기의 새로운 리터라시(literacy)를 정립해 보고, 소외된 삶의 모습을 조명하는 비판적 시각도 시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이 시대의 한 자원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오남구(吳南球) 시인의 제의로 심상운(沈相運), 김규화(金圭和), 오남구 세 시인이 『하이퍼텍스트 시』 동인지를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IT시대를 선도할, 에콜 있는 동인지가 출현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심상운 시인은 오남구와 더불어 디지털 시와 그 이론을 양역(兩役)해 왔고, 김규화는 이번 동인 운동의 동참으로 변신과 더불어 새로운 하이퍼텍스트를 지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새 동인의 영입도 있겠지만, 우선 심상운, 김규화 두 분께서 다음 토픽으로 새 동인운동의 계획과 포부에 대한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해 주기 바랍니다. ― 편집자   1. 동인지 운동에 앞선 소감은?   심상운:문학에서 에콜 활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학적 특성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나는 오남구와 몇 년 동안 동인 아닌 동인활동을 해왔습니다. 「2004년의 한국시단의 동향」(한국현대시인협회의 연간 사화집, 2005)의 평문을 쓸 때, 오남구가 제창한 「디지털리즘」에 대해 퍽 흥미를 느끼고, 그 방법론에서 시대적인 당위성과 새로운 감각의 언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남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고민하였습니다. '탈관념 시'와 '디지털 시'를 주창하는 오남구를 동인이라고 서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김규화 시인의 시에서 디지털의 기법이 보이고, 그것이 신선한 감각으로 느껴졌습니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있는 관념에서 해방되어 관념이 아닌 언어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김규화 시인이 시에서 디지털 시의 언어기법이 생동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움과 기쁨을 느끼고 동인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의 사고방식과 문화감각은 21세기에 와 있는데, 많은 시인들의 의식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동인운동은 시대적 중요성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시 창작의 기본이 되는 언어, 정서, 사물, 관념, 상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한 표현방법에 대한 모색과 실험은 현대시의 길을 여는 작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김규화:우리 시(한국현대시)는 계속하여 2천여년 전의 예수나 석가 시대의 비유, 상징의 기법으로 정서와 관념을 표현해 왔습니다. 이제 형식과 내용면에서 조금은 반성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미 늦은 감이 있습니다. 21세기는 전자 테크놀로지 시대입니다. 이러한 변화한 시대에 맞는 변화한 시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인터넷 인구가 날로 증가해 가고 있습니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구분할 정도로 종이책(시)이 안 읽히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대신 인터넷 속의 하이퍼텍스트를 대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쓰는 사람들의 인성을 즉흥적.도발적.비선형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비판적 시각에서 여기에 상응하는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연유로 오남구와 심상운 제가 하이퍼텍스트시를 쓰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앞으로의 시문학은 동인지 운동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문학은 한 지역 안에서 10명 내외의 그룹이 모여앉아 읽고 감상하는 정도로 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수없이 쏟아지고 있는 경향 각지의 문학지들도 동인지적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남구 시인은 처음부터 실험시의 깃발을 들고 써왔고, 심상운 시인은 근년에 와서 디지털 시에 대한 이론과 시작품을 쓴 사람입니다. 여기에 신입생인 내가 합류한 셈입니다.   2. 동인지는 '하이퍼텍스트 시'(또는 '하이퍼 시')로 할 예정인 것 같은데, 동인지의 방법이나 에콜로서 '하이퍼텍스트'라는 방법적 지표를 세운 이유나 동기를 말씀해 주세요.   심상운:동인지의 명칭은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이 생각되지만 '텍스트'와 '시작품'은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하이퍼 시'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쉽게 이해하기 좋게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디지털 시'의 가장 발전된 상태를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말한 것과 같이,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의 에콜로서의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하이퍼텍스트에는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3차원 세계를 뛰어넘은 자유연상의 이미지 등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흔히 버추얼 세계라고도 일컫는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세태를 가진 현실입니다. 이것은 21세기적인 상상의 공간형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를 동인지의 지표로 세운 이유가 되겠습니다. 김규화:앞서도 말했지만, '혁명'이라 할 만큼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 속에 사는 우리는, 문학 작품도 변화를 하지 않고는 살아 남지 못할 시대에 와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의 선형적∙순차적 질서, 구문론적 선조성, 서론∙본론∙결론 식의 글쓰기의 틀을 지켜야 한다는 시대를 지나, 지금은 디지털 시대의 텍스트인 하이퍼텍스트를 외면하는 시(글)쓰기는, 현재에 살면서도 현재에 살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직선적인, 즉 리니어(linear)시대가 아니라 '넌 리니어,(non-linear)' 시대라는 인식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3. 하이퍼텍스트란 무엇인가요? 하이퍼텍스트의 개념 또는 定義를 말씀해 주세요.   심상운:『IT용어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자, 그래픽, 음성 및 영상을 하나의 복잡한 비연속적인 연상의 거미집(web of associations)과 같이 서로 연결시켜, 제목의 제시 순서에 관계없이 이용자가 어떤 제목과 관련된 정보를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정보 제공 방법. 이와 같이 연상을 연결하는 링크는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의도(목적)에 따라 종종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작성자와 이용자 둘 다에 의해 생성된다. 예를 들면, 어떤 화제 또는 제목에 들어 있는 '쇠(iron)'라는 단어와 연관된 링크들을 조사하여, 이용자는 철기시대의 연대표를 찾거나 철기시대 유럽에서의 야금술의 발달∙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를 찾을 수도 있다.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는 1965년 넬슨(Nelson)이 책, 필름, 연설 등의 선형 구성(linear format)과는 대조적으로 비선형 구조(non-linear structure)로 컴퓨터를 통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었다. 최근에 도입된 하이퍼미디어라는 용어는 하이퍼텍스트와 거의 같은 의미이지만, 하이퍼텍스트의 비문자적 구성 요소 즉 애니메이션, 녹음된 음성 및 영상 등을 강조하는 용어다. "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넬슨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됩니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집니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를 만드는 원천이 됩니다. 텍스트의 유동성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닙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세계로서,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流動性)의 문학형태가 됩니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입니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합니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 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적인 시입니다.   김규화: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넬슨(Nelson)이 처음 쓴 용어입니다.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텍스트에서 그림이나 밑줄 친 부분을 마우스로 누르면 다른 텍스트가 연결되어 떠오르는데, 이렇게 다른 텍스트로 연결해 주는 것을 하이퍼링크라 하고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복수의 텍스트 전체가 하이퍼텍스트입니다. 기존의 모든 정보(텍스트)가 평면 형태, 즉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이었지만 하이퍼텍스트 구조는 이러한 선조성, 고정성, 유한성을 파괴한 한편, 하이퍼텍스트는 매체를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하이퍼미디어라고도 합니다.   4. 시에서 말하는 하이퍼텍스트는 종이에 손으로 기록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컴퓨터나 TV에서의 '전자 하이퍼텍스트'와 전자장치가 없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시 하이퍼텍스트, 또는 하이퍼텍스트 시)와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심상운: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된 시입니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 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를 기록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기록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숨어 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됩니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됩니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립니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됩니다.   김규화:하이퍼텍스트 문학이라고 하면 하이퍼링크가 적용된 문학으로서, 링크에 의해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존의 문자 텍스트는 텍스트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작가(또는 시인)가 정해놓은 한 가지 주제나 한 가지 이미지가 형성하는 문맥의 시간적 순서로(순차적으로) 이어나가는 데 반해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독자가 마우스로 선택적 링크를 하여 갈라져나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건이나 이미지를 만들고, 한 문장 중의 단어나 어구에서 문맥의 가지가 파생하여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장들이 종합된 하나의 복합 네트워크로 구성된 것입니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발달된 컴퓨터 기술의 특성을 종이 위의 문자면에서 최대한 활용하여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형태입니다.   5.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을 말씀해 주세요.(시 인용도 무방함)   심상운: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됩니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합니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합니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입니다.   김규화:종이 위의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 화면이 아니면 입력할 수 없는 그림, 소리, 동영상, 그래픽, 음악 만을 제외한 모든 특성을 종이 시에 이용한 것을 말합니다. 하이퍼텍스트에서 보이는, 순차적 질서나 위계적 시스템 구조를 안 지킨, 혼란스럽기까지 한 비선형성, ―어쩌면 인간의 사고과정이나 뇌세포의 덩어리(의식의 흐름)를 닮은―, 어떤 논리적 체계가 있는 수목(樹木)과 같은 시스템이 아니라, 감자의 알뿌리 같은 근경(根莖)처럼 사방으로 마구 이동하여 중심이 없이 그물 상태를 만들어내는 리좀(rhizome)성, 그로 인한 일방향적이 아니라 다방향적, 혹은 쌍방향적인 네트워크를 하이퍼텍스트시에 이용하여야 합니다. 하이퍼텍스트(시)를 이루는 마디(node:단어, 행, 연)들은 동시적으로 공존하거나 나열하여 존재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무화시키거나 초월하거나 평준화시켜 닫힌 코드가 아닌 열린 코드로 무한한 상상력(공상∙환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게 합니다.   6. 구체적인 작품을 들어 설명해 주세요.   심상운:다음은 내 시에 대한 자작시 해설입니다. 나는 나름대로 하이퍼텍스트 적인 시를 구현해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전문(『시문학』 2007년 6월호)   이 시의 기법은 첫째, 사물어의 사용(탈-관념), 둘째, 가상현실, 셋째, 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넷째, 영화의 몽타주 기법(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등입니다. 그래서 자연풍경+사회 및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 등의 결합은 하이퍼텍스트적인 공간이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 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먹는다'라는 욕망 행위와 '아우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회를 먹습니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습니다. 생명현상을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기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하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입니다. 그래서 연극적인 기법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시에 나오는 '나'와 '그'는 시 속의 캐릭터입니다. 끝부분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입니다. 나는 현대시론, 「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모듈 이론도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점이 많습니다. 기존의 문장에서 낱말, 문장, 문단과 같은 구성단위의 전후 관계를 바꾸게도 하고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틀을 깸으로써 독자에게 재구성의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연결 관계의 논리성이 아니라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입니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입니다. 그것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을 아무리 치밀하게 전개하여도, 다양한 상상의 집합, 그 집합의 내면으로 흐르는 시인의 의식, 동적인 이미지, 해방감 등을 독자와 함께 나누는 시를 어떻게 종이 위에 '문자시'로 구현하느냐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숙제로 남습니다.   김규화:설명하기 쉬운 졸시 「한강을 읽다」를 들겠습니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우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리다가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지른다   이 시는 사이버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강과 한강가에 늘어선 고층 아파트들의 '현실'과, 한강 물속에 비치는 아파트와 그 속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환상)'을 병치시켜 놓고,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이 모든 것(현실과 환상)을 지워버리는 가상현실(?)을 표현해 본 것입니다.   7. 앞으로의 계획은?   심상운:디지털 시의 이론을 더 충실하게 연구하여 가다듬고 그 이론에 부합되는 시를 모아서 '하이퍼텍스트 시집'을 상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동인활동을 통해서 한국 시문학사에 남을 유파를 형성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서 벗어나서 길 없는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은 어쩌면 현실에서 벗어난 공상(空想) 또는 몽상(夢想)으로 번역되는 환상(Fancy)의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성적 사고를 넘어서는 해방된 공간을 나름대로 시로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 공간 속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창의적 생각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상상과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주고 즐거움을 줍니다. 언어는 언제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놓고 있습니다. 김규화:이 시에 공감하는 시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 시는 더욱 다듬어서 좋은 동인지를 만들 계획입니다. 특히 덧붙이고 싶은 점은, 부분이나 작은 단위를 자유연상에 의해 연결하는 '링크'는 어떤 정해진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연상에 의한 '무한 링크'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링크 작업이 어느 지점에서 스톱하여 한 작품의 전체로서의 네트워크의 형태나 스타일을 형성하는가도 큰 문제입니다. 앞으로의 모색 과제입니다.    
39    詩作과 자작시 해설 댓글:  조회:4524  추천:0  2015-02-18
                -자작시 해설                                                           심상운     시의 언어는 고정관념과의 싸움에서 획득한 뜨겁고도 선연鮮姸한 빛깔의 언어이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감각과 생명을 얻은 시가 탄생한다.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기억되는 좋은 시들은 모두 이러한 언어로 표현된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황진이의 시조 이나 1930년대 미당 서정주의  등을 읽어보면 그 언어의 싱싱한 기운이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다. 그것은 바로 그 시에 담긴 시어가 뿜어내는 힘이 시대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쓸 때 내가 제일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신선한 감각의 시어다.      “시의 표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소박한 생각도 시어의 신선한 감각과 생명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시인이면 누구나 하게 되는 정통적인 시의 일반론一般論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반론이 안고 있는 방법론은 조금만 깊이 들어가서 방향을 바꾸면 “비대상非對象, 무의미無意味, 탈관념脫觀念, 초현실超現實” 등 여러 가지 현대적 기법들과 만나게 되는데, 이 기법들은 일상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시적 피안彼岸을 보여준다. 시작과정에서 그것들의 깊이를 헤아리고 응용하는 것은 시인의 정신과 시를 젊게 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어떤 방법에 들어가든 그 중심中心에 자리잡고 있는 샤먼의 우주목宇宙木같은 시인의 개성적인 시어가 좋은 시를 탄생시키는 근본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많은 시인들이 그러했듯이 언어와 관념을 안고 뒹굴며 밤잠을 설치는 운명을 감수甘受하는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하는 것으로 만들어서 독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시작과정에서 시의 이미지image를 중시하였다.  이미지는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시의 의미를 싱싱하게 지속시켜주는 힘을 발휘하고, 이미지는 그 자체가 언어의 투명한 보석이 되어 자율적自律的인 독립된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스스로 돌파하고 무한히 넓혀준다. 그런데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나에게 고민이 되는 것은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적인 정서의 적절한 조화調和와 현실의 문제였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혼, 생명, 그리움, 신적神的인 존재 등 ―을 중시하여도 현실의 문제들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는 안 되는, 시인의 존재 이유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현실의 문제들도 문제의 원형原形속으로 들어가서 이미지화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현실문제에 대한 시들은 첫 시집 「고향산천故鄕山川」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나는 또 시각적視覺的인 이미지와 함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시속에 담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이 소리는 시속에서 의미를 감각화感覺化 하는데 도움을 주면서 시의 리듬을 돋구어주고 신명을 불러들이는 구실을 한다. 다음에 소개하는 세 편의 시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두 번째 시집「당신 또는 파란 풀잎」에서 골라 본 것이다.    아직 개발開發되지 않은 컴컴하고 습한 지역을 아시나요   눈 내리는 날 우리 그곳으로 가요 그곳에는 아직도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 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 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인가人家와는 멀리 떨어져 마을의 길은 이미 끊어지고 컴컴하고 습한 진흙 벌만 계속되는 미개발의 그 곳은 하얗게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이면 자연의 거대한 사원寺院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 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 젊은 신神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         -------- 전문    이 시의 제목을 처음에는 “신神들의 마을”이라고 했는데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서 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시 전체의 이미지는 흰 색과 검은 색을 대조시켜 시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하였다.    나는 이 시에서 생명의 고향이 어디에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면서 개발開發이라는 인위人爲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컴컴한 잡목림雜木林속에서 벌어지는 생명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환희를 동적動的인 이미지로 그려보려고 하였다. , 라고 시의 앞뒤에 시청각視聽覺이 서로 한 데 어울린 동적인 이미지를 넣은 것은 생명의 움직임과 환희의 감정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그려보려는 의도였다.    이 시는 단순한 환경문제에 관한 시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생명이 지향하는 근원적인 삶의 모양을 환상적幻想的인 언어의 그림으로 그려보려고 하였다. 윤강원尹江遠시인은 이 시에 대해 월평月評에서 고 하였다. 그는 이 시를 깊이 이해하고 시에 담긴 의미를 높은 정신세계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적 생명의 기운을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신神을 등장 시켰다. 이 신은 생명의 원형을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독자들은 원시적인 에니미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시류성時流性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의미와 미감美感을 가진 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시각적인 이미지에 중점을 둔 시로 또 과 을 들 수 있다.   나는 언제나 검은 꿈의 바다를 떠도는 수부水夫 한밤중 달의 은사시빛 밧줄이 부서진 내 배의 동체를 끌고 간다. 나는 저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곁으로 가고 싶다. 그것이 항해의 끝이 되어도 설령 내가 영혼만으로 떠돈다 할지라도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나는 얼마나 황홀한 빛의 침대 위에 누워 있을 것인가. 그 곳에는 악惡도 선善도, 오직 순수한 신神들의 소리만 살아 고생대古生代의 바다가 아직도 파도 친다. 아아, 나의 첫 항해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차디찬 꿈의 빙산氷山을 지나 더 멀고 먼 푸른 바다로 떠나가야 한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그 모래밭까지 --전문    앞의 시 이 외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데 반해 은 시인의 내면의식을 시각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시다. 두 편의 시에 공통점이 있다면 생명의 원적지原籍地를 찾는 의식의 흐름이다. 나는 이 시에서 내 존재의 고향을 찾아 항해하는 수부水夫가 되었다.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황홀한 빛의 침대, 고생대古生代의 바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등은 내 의식을 객관화하여 드러내기 위한 은유의 언어이고 상상想像 속의 그림이다. 나는 불교의 선禪이 지향하는 세계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지만 그 세계는 선善과 악惡, 죽음과 무無의 세계를 넘어선 푸른 바다와 같은 생명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최진연崔進淵 시인은 이 시의 앞부분 를 인용하여 "검은 꿈의 바다"를 불교에서 말하는 고해苦海로 해석하고, “은 불자로서 그가 도달하기를 꿈꾸는 정토淨土라는 관념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라고 이 시의 내용을 불교의 구도 행위로 풀이하고 있다. 나는 그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어떤 고정된 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에서 의 의미를 절망적인 상황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꿈이든 꿈속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관념적觀念的이고 사색적思索的인 내용이 중심이 되는 시다. 나는 벽돌같이 딱딱한 관념을 부드럽고 신선한 상상의 언어로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어는 관념어를 배제하고 구상어具象語를 사용했으며, 객관적인 이미지와 주관적인 정서를 조화시켜 독자들에게 친근감과 시적인 감흥感興을 주기 위해서 "나"를 시의 화자로 삼아 독백조獨白調의 어조로 시를 구성하였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들을 아시는가   우리들이 산을 오르다 잠시 바위 위에 앉아 땀을 들일 때 그 꽃들 만나고 가는 바람이 우리들 머리나 가슴을 향기롭게 스치고 지나가고 그 때마다 하늘은 유난히 파란 가슴을 드러내곤 하였지   높은 산 까마득한 벼랑 위 바위틈에 뿌릴 박고 피어 있는 꽃   햇볕 따뜻한 날이면 누군가 그 꽃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을 거 같다 이 세상과는 영영 이별을 해버린 모습으로 한평생 찾아 헤매던 사랑을 찾은 듯한 모습으로 속살까지도 빨간 꽃 옆에서 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그 곳이 먼 옛날 떠나온 제집인 양 누워 있을 거 같다 ---- 전문     이 시는 어느 봄날 산행 중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갈무리한 시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은 실제의 꽃도 될 수 있지만 상상 속의 꽃으로도 확대된다. 저 신라시대 수로부인水路夫人을 유혹했던 절벽 위의 철쭉꽃으로, 아니면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에서 피어있는 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산행山行을 할 때 우리들의 가슴을 더 향기롭게 해주는 것은 그 상상 속의 꽃들을 만나고 가는 바람의 향기라고 차원을 높여보았다. 그리고 햇볕 따스한 봄날 그 꽃 옆에 누군가 잠을 자고 있으리라고 상상의 세계를 넓혀 보았다. 여기서 "누군가"는 영원한 생명 속에 잠들고 싶어 하는 내 존재의 본래적本來的인 모습일 수도 있고, 떠나온 낙원을 그리워하는 인간존재의 한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속의 은 영원한 생명의 고향을 상징象徵하는 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시의 기능 중에서 이 세상의 허무虛無를 극복할 수 있는 기능을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은 그런 면에서 내가 아끼는 시가 되었다. 나는 이 시에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시속의 빨간, 파란 등 색채언어色彩言語는 회화적인 효과를 높이고 또 의미를 상승시키는 구실을 하면서 미적 감각과 서정성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시의 표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의 속뜻을 짚어보면 시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존재로 만드는 존재의 암시와 발견, 존재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발견자요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다.
38    디지털시의 현장성 댓글:  조회:4563  추천:0  2015-02-18
                     현장과 시                                 --- 디지털 시의 현장성                                                                                                              심 상 운(시인)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은 시의 예술적인 면에서 풍성한 암시와 반짝이는 상상의 언어세계를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잃어버렸던 신화를 되돌려주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중세의 허풍장이기사騎士에 머물지 않고 현재까지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상상 속에 살아 있는 것은 그의 비현실적인 꿈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 때문이다. 모더니즘도 우리들의 시에 언어의 꿈을 담아주었기 때문에 현실주의자들의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만약 시인들이 현실과 역사의 진보에만 매달려서 싸웠다면 시인들은 전사戰史에 기록될 수 있는 영웅은 되었을지 몰라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상상력이 고갈된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라의 주권을 일제日帝에 침탈당한 국권상실시대에 일제에 직접 저항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1930년대 이육사李陸史의 시편들 속에서 발견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아름다운 만남이 명징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絶頂」전문     이 시의 끝 구절 에서 강철+무지개가 던져주는 죽음을 초월하는 희망의 경이로운 상상과 암시는 지금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더니즘의 이미지, 즉물적卽物的 감각이 우리의 현대시에 수놓은 금싸라기 같은 수사의 미학을 귀중한 재산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이 시인과 독자들을 자연발생적인 시들의 고식적인 감상感傷과 영탄성詠嘆性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딱딱한 관념어의 굴레에서 시를 해방시켰다는 공적만이 아니라,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더니즘의 긍정적인 생명력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사회적 현실과의 관계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꽃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한 개 벽돌이나 되겠다. 이 살덩이를 흙가루로 빻고 썩기 전에 이 피로 곱게 물들여 1천도의 시뻘건 불 속에서 다시 벽돌로 태어나고 싶다. 그리하여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여 백 층이나 삼백 층의 빌딩이 되거나 반월형半月形 의 만리장성이 되거나 원수의 포탄이 우박처럼 박혀도 끄덕도 않는........ 구름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단단한 벽돌이나 되겠다. ----------문덕수의 「벽돌」전문     이 시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쓰인 과 , 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또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강한 의지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또 사물어事物語의 쓰임이 이 시에서 어떤 시적 효과를 나타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어디까지 자극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 시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980년대의 사나운 현실 속에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모더니즘 언어의 바른 자세와 당당함이다. 이 시의 앞부분 는 사회적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정신과 함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시 속에서 결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예술)과 리얼리즘(현실)의 이런 아름다운 만남은 더 이상 넓게 확산되지 못 했다. 대부분의 모더니즘 시들이 삶의 현장의 뒤쪽으로 물러서서 스스로 존재영역의 범위를 축소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몇 가지 면에서 더 검토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한국의 모더니즘 시가 안고 있는 현실회피와 현장성(사물)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일부 모더니즘의 시인들이 현실과 예술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언어의 건강한 긴장감과 조화를 외면하고, 현장에서 발생하는 생동하는 이미지나 환상과 상징을 잃어버린 편협偏狹한 언어 관념의 시로 변질되면서 모더니즘 시의 한계가 노정露呈된 것이다. 그것을 간단히 압축하면 모더니즘 시의 언어 관념주의는 모더니즘 시의 함정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21세기의 새로운 감수성과 꿈을 담은 시의 탄생을 기다리게 하는 원인이 되고, 병든 모더니즘(포스트 모더니즘)을 치유하고 개혁해야하는 당위성의 원천이 되었다.       주지적 모더니즘의 시를 ‘언어 관념의 시’라고 하는 것은 시인의 정서, 직관, 관찰, 순수한 상상력에 의해서 시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표출하기 위한 시인의 수사적인 언어작업에 의해서 시가 제작되기 때문이다. 이 수사적인 언어작업은 어떤 관념을 중심에 세우고 그것을 비유, 상징, 우유(allegory)로 포장하여 시인의 감정까지 관념이 만들어내는 의도성과 논리성으로 휘감아버린다. 이런 기법을 선관념 후사물(先觀念 後事物)의 기법이라고 한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한국 현대 시인들은 이러한 시의 기법에 익숙하고 그것을 정통적인 시의 기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어떤 시인은 아주 엄밀하고 냉랭하게 계산된 논리적인 비유, 상징의 언어를 시의 중심에 넣고 감정까지도 객관화하여 독자들의 반응을 계산하면서 시를 제작한다.     난 해질 무렵 몽상가 소부르주아 시인 세상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 의자, 작은 방, 개미 , 염소   피와 이슬로 된 술 난 현실 따윈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난 현실을 모르는 국문과 교수 허리띠를 헐렁하게 매고 거울을 연구하는 교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감기엔 맥을 못 춥니다 30년 전부터 어디론지 떠나고 싶었지만 --------------이승훈 「오토바이」 전문      이승훈의 시는 비록 시인의 관념이 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지만 시인은 현장(현실)에서 벗어나서 시라는 무대에 올라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인과 독자들이 갈구하는 낯 설음, 새로운 기법의 언어, 경쾌한 감각의 현대성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 등의 언어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존재의 탐구에만 전념하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서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현실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과 환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강한 집착이 모더니즘 시의 원형인 것처럼 독자들을 유인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삶의 현장감이 생동하는 시의 실체는 사라지고 관념의 감옥 속에 갇혀버린 시인의 의식만 드러내게 된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김춘수 「처용단장 제1부의 1의 4」전문       김춘수의 시는 이승훈의 시와는 달리 실제의 현장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현장의 사실성을 무화無化 또는 추상화抽象化시키는 것으로 시적 효과를 달성하려고 한다. 그 근거는 이 시에서 의 구절에서 찾아진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실제의 바다 풍경을 비현실의 바다 풍경으로 전환시키고 있음을 알게 한다. (서해 갯벌에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대상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을 무화 또는 추상화하는 기법이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에서도 ‘죽은 물새’가 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 물새는 문맥상으로 보아 여름에 본 물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실제를 비실제로 변환시키는 실체적 대상의 무화 또는 추상화의 근거가 된다. 이 추상화의 그림은 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상식적인 의미의 세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인의 몸부림이 개척한 세계로 이해된다. “바다는 가라앉고”나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는 현실적 논리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시적인 상상의 세계에서는 전혀 모순성이 없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김춘수는 논리의 단절이라는 기법으로 일상의 의미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는 김춘수의 이런 기법을 그의 「시론」에서 ‘무의미의 심상’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시도한 ‘무의미’는 사실적인 현상現象을 추상적인 현상으로 상태를 전환시켜 ‘또 다른 세계의 의미’를 창조하려는 언어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대상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을 무화 또는 추상화하는 기법의 남상은 한국의 고전시古典詩에서 발견된다. 이규호(李圭虎 대구대학 인문교수)는「한국고전시학론」에서 그런 표현방법을 ‘정석가식鄭石歌式 표현’이라고 한다.의 작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을 제시하여 현실적 시간을 무화無化시키고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므쇠로한쇼를디여다가 므쇠로한쇼를디여다가 철수산鐵樹山에노호이다 그쇠철초鐵草를머거야 그쇠철초鐵草를머거야 유덕하신님여아와지이다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논리적인 조작으로 무의미를 추구하던 김춘수는 논리 단절의 세계에 염증을 느끼고 절망하여 관념(의미)의 세계로 회귀하게 된 것 같다. 논리적인 ‘모순어법’만으로는 의미(대상)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기호성과 가상현실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의 세계는 더 다양하고 자유로워졌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무의미의 언어실험’은 삶의 현장에 대한 이탈, 단순 이미지의 나열에 그치고 있어서 그가 목적으로 한 "관념이 장차 거기서 태어날, 관념의 제로 지대地帶"(事物詩와 觀念詩의 問題- 1981년 12월호 「시문학」)에 도달하지 못하고, 현대시의 현장에 난해성만 남겨놓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그의 무의미시는 한국 모더니즘 시에 대한 성찰의 근거가 되고 시에 대한 정의를 다시 찾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극단적인 언어논리주의 시에 대한 성찰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시는 현장 속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향기 나는 생명체를 모셔놓은 언어의 집이라는 시의 정체성을 다시 찾게 한다. 그래서 오히려 모더니즘의 언어예술로서의 시보다 자연발생적인 서정시가 더 본래적인 시에 가깝게 인식되기도 한다.   비오는 날 묵밭에 소를 먹이고 있으면 어디서 깊은 소리가 들리네.   온 天地가 共同墓地같은데 오동나무만 저승의 길잡이처럼 서 있네.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도 푹 빠졌을까. 안개사이로 인업이 꼭 걸어올 것만 같네.   喪輿를 놓고 그렇게 울던 곳. 그 곳엔 이상한 불빛이 서려 있었네. -------이성교「비오는 날(1)」 전문     자연발생적인 서정은 시인의 언어조직만으로는 만들어내기가 매우 어렵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자연스럽고 순수한 서정의 시에는 이성(지성)보다 감성이 주류를 이루어서 때로는 원시적인 야성의 감성이 시의 생명력을 키워내는 원천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에서 관념과 비유, 상징을 떨쳐버리고 직관의 눈으로 직접 대상과 만나자는(의식→대상→이미지) 디지털 시 운동은 시의 현장성과 내재적인 생명성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인 서정시와 연결된다. 그것은 내면의식의 흐름 위에 자리한 디지털 시가 논리적인 관념의 시나 언어조작의 시보다 시의 원래 모습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지털 시는 현장과 상상의 예술적 언어융합을 시의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북한산 비가 오락가락, 찜통 더위 속 , 땀을 흘리고 확 터진 능 선에 올랐다. 앞에 서 있는 봉우리들 얇은 구름이 그림이다. 주저 앉아 상상하며 가슴쯤 산의 옷을 벗기면서, 이렇게 시에 빠져들고 있는데, 한 시인이한다. 나는 내색을 못하고 하고 이성理性을 말 했다. 그 때 지나가는 등산객이 했다. 멍! 모두 몽둥이로 한 대씩 맞은 기분이었다.   이 날 산행은 흰수염을 휘날리고 아슬히 바윗서리에 걸터앉은 내가 희죽이 웃으며, 리모콘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비밀한 얇은 비단을 밀어 올리고,                ---------오진현 「산행」 전문      오진현 「산행」은 때 묻은 감각과 지식을 뛰어 넘는 디지털 시대의 감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면서 그것을 수용하는 맑은 현장언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어떤 관념도 미리 들어가 있지 않은 탈-관념의 빈 마음은 새로운 감각이 모여드는 맑은 못이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새로운 감각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열린 마음이 디지털 시대의 시인의 마음이다. 그 마음에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숨을 쉬고 지느러미를 펄떡이면서 움직이는 자신의 심리적 현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직관(초논리超論理, 비논리非論理)의 눈이 살아 있다. 따라서 그 현상을 언어 카메라로 찍어내는 디지털 감각(염사念寫, 접사接寫)의 이미지 시와 어떤 관념을 솟대같이 중심에 세워놓고 언어의 수사에 의해서 만들어 내는 모더니즘의 이미지 시와는 선명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한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진현 「밤비」전문     직관적인 염사의 시에서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른다, 그런 에너지가 흐르는「밤비」는 시인 자신의 내면이 시의 현장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적 의식의 흐름 속에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보이지 않는다. 직관의 눈이 의식의 현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할 뿐이다. 의식의 집중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자동기술과 구별된다. 그리고 디지털 감각은 시인이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 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 무장한 미 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엎은 40대의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 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흰 거품을 토하며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들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상운 전문     이 시에는 현실과 가상현실이 결합된 디지털시의 현장성(하이퍼 세계)이 들어 있다. 이 디지털 시의 현장은 시의 구조에서 다선구조를 형성한다. 다선구조는 ‘선택과 집중’ ‘설득’을 중시하는 단선구조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상상의 결합과 연결’, ‘현실과 가상현실의 세계’를 시 속에 구축한다. 이 시에서는 눈 덮인 12월의 숲 속에 들어가서 북소리를 듣고 있는 그와 벽에 붙은 여름바다 사진, 식탁에서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TV를 켜는 나, TV화면 속의 이라크 아이들과 달래강의 풍경 등의 이미지 결합이 그 원천이 되고 있다. 따라서 시의 시점도 평면적인 단일시점에서 입체적인 다시점으로 변화된다. 그것은 다선구조의 이미지는 시를 어떤 목적의식과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시에 입체성과 현장성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이 다선구조는 우리들의 일상이 단일시점이 아니고 다시점(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이라는 점에서 더 자연스럽게 총체적인 실존의 모습을 형성한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우리들의 삶이 논리성보다는 심리적인 이미지의 세계에 더 가깝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 속에 흐르는 내적 의식의 흐름이 불연속적인 이미지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이러한 이미지 결합의 디지털 시는 또 문명적 사고(객관적이며 추상적인 과학적 사고)와 대립되는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구체적 사고)에 맥이 닿는다.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는 구체적이고 주술적이고 감각적이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신화적 사고라고 한다. “신화적 사고는 표상(image)에 묶인 채 지각(percept)과 개념(concept)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우리에게는 표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일반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나름으로는 과학적일 수 있다고 레비-스트로스는 주장한다.” 이런 면을 중심에 두고 생각할 때, 디지털 시는 비인간적인 기계의 시가 아니라 언어적인 면에서 모더니즘의 이미지를 확장하고 현장의 긴장감을 내포한 매우 인간적인 직관과 감성에 의해서 탄생하는 탈관념의 새로운 감각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사실, 생명, 현장을 바탕으로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중시하는 21세기적인 감수성(디지털 감각)과 인간의 내면에 잠겨 있는 야성적 감각이 만나서 순수 직관의 이미지(탈관념, 시공간 초월), 즉 신화적인 언어 표상(image)으로 탄생되는 시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것은 문명적인 면에서 볼 때, 과학적 사고(문명)와 야생의 사고(문명이전)의 융합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시인의 사유와 감각과 언어의 수사修辭에 의해서 제작되는 정통적 모더니즘의 시에 비해서 시의 일반화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의식이 전제가 되고 이제까지 사용된 익숙해진 언어(비유, 상징)로부터 벗어나서 때 묻지 않은 원초적 현장언어와 디지털 감각(염사, 접사,가상현실)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모더니즘 시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신화 만들기”는 매우 어려운 도정이 예상된다. 그러나 21세기는 도처에서 새로운 변화(IT, DNA 등)의 구름을 계속 몰아오고 있어서 시인들도 그것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37    문제 시집, 시와 현대시 동향 및 그 新모색 댓글:  조회:4125  추천:0  2015-02-18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과 새로움의 모색                    -------문제 시집과 시와 시론을 중심으로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    현대시의 도전 양상은 무엇보다도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시인들의 자세와 젊은 의식에서 발견된다. 시의 숙명은 언어의 한계와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갖기 때문에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고뇌하고 도전하고 변화를 꿈꾸는 시인들의 의식은 그 자체가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면서 새로운 현대시를 낳는 모태가 되어왔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현대시의 역사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1930년대의 박용철・ 김영랑 등의 순수시 운동이나, 이상李箱의 심층심리와 초현실주의, 김기림 ・정지용의 모더니즘 시운동 등은 외국의 문예사조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과 당대의 현실을 외면한 것을 지적하여 비판할 수 있지만, 한국 현대시의 준거를 마련하고 시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공적을 남긴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시에 대한 개념을 확대시켜 현재까지 한국 현대시의 다양한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이때부터 시작된 한국 현대시의 회화성과 내면의식의 표현, 사상의 감각화 등은 전통적인 서정시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서 서정시의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IT, DIGTAL, DNA 등이 주도하는 빠른 변화의 21세기에도 20세기의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의 방법으로 인간과 자연과 생명의 문제에 대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지각知覺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사물인식事物認識과 표현기법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될 수 있는 시론과 시집과 시편들을 중심으로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을 예시하고 새로운 시의 모습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밖에도 한국 전통적 서정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샤머니즘 계열의 시인들과 시는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서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서정시인들의 시편들. 언어의 감각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 풍자나 역설, 사상의 감각화를 중시한 주지시. 사상이나 메시지 전달을 강조하는 관념시. 언어의 유희적 기능을 내세우는 초현실적인 시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국 현대시의 시편들의 모습을 나름대로 살피면서 변화의 징후를 발견해보려고 한다.  먼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21세기 시에 대한 대안으로 문덕수가 제시하는 사물시事物詩에 관한 시론이다. 문덕수는 「오늘의 시인 총서- 문덕수시 99선」의 후기 시론에서 “21세기에는 언어 예술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어야한다”고 전제하면서, 라는 새로운 아이템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국 모더니즘 시를 대표하는 원로시인이 젊은 시인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끊임없는 탐색의 정신에서 솟아나는 사고思考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진다.  두 번째는, 현대의 언어는 인간의 존재 상황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인간의 사유思惟를 담고 있는 언어는 지식知識의 틀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그것은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가 갖고 태어난 것을 얼마나 잘 담고 있는가, 하는 언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바탕으로 하면서, 오진현(필명 오남구) 시인을 중심으로 IT 시대에 고뇌하고 도전하는 일군一群의 젊은 시인들이 벌이고 있는 탈관념과 디지털리즘의 시운동이다. 오진현은 90년대 중반에 탈관념의 시적 방법론을 제시한 이후 2002년에 과감하게 디지털리즘을 선언하고, 2년 만에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시를 시발점으로 하는 「디지털리즘 선언」 3집(2004, 9, 11)을 내놓고 있어서 그 열정과 힘이 더욱 강하게 감지된다.   세 번째는 산업사회의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의 존재를 위기상황으로 몰고 가는 환경문제에 대응하여 생태시(녹색시, 환경시)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일군一群의 시인들도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보여주고 있는 건강한 시인들로 분류된다. 신진, 송용구 등 이 분야의 시인들은 시작詩作에서 방법보다 내용을 중시하고 있어서 현실 참여시의 폭을 넓히고 그 분야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시운동은 모두 2004년 한국 현대시에 젊고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있어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변화의 시대에 과거의 틀에 안주하는 시인과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며 새로운 시를 꿈꾸는 시인들을 구분하고 그들의 시사적 위치를 가늠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2. 21세기 새로운 시의 모색     가. 사실과 생명과 현장 체험을 중시하는 사물시事物詩    문덕수는 「오늘의 시인 총서- 문덕수시 99선」( 2004,7,5)의 후기 시론 에서 21세기 시의 키워드로 “사실, 생명, 현장”이라는 세 가지 전제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DIGITAL, DNA, DMZ”의 공통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언어가 아닌 사물事物이야 말로 21세기 시의 모든 문제를 내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중적 리얼리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시학'으로 심화된 김지하의 시론, 이상李箱의 심층심리를 기점으로 출발한 탈관념의 실험, 에콜로지즘에 의한 녹색시학의 시도, 그리고 분단현장의 새로운 관찰과 전망 등은 모두 적나라한 사물의 실제에 대한 직접적 체험에서의 출발로 볼 수 있다.'사실''생명''현장'이라는 전제를 일관하는 밑바닥에는 '사물事物'이 공통분모로 자리 잡는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찾고자 하는 시인들의 오랜 방황의 길목에서의 불가피한 만남이다. 21세기 시는 언어 이전 또는 모든 사유를 벗어난 사물 그 자체의 날것에서 출발한다. 21세기의 시는 모더니즘의 모든 언어주의(특히 언어유희)를 초극하고 내면세계와 외면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그대로의 적나라한 '사물'에서 새로운 시의 원점(제로지점)을 찾으며, 시의 내재적 특징과 지향적 특징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 속에는 모더니즘의 언어주의(언어유희, 언어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허구성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라는 언어의 숙명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해보고자 하는 시인의 치열한 도전의식이 들어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시인의 주관적인 감성이나 사상,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존재의 본질과 만나는 방법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또 시속에서 대상에 대한 시인의 인내심과 내공內空의 힘을 드러내게 하여 시를 도道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려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는 사물시의 특성을 안고 있는 시다. 두 편의 시를 살펴보자. 이솔의 시집 「수자직繻子織으로 짜기」(2003, 10, 30)에서 사물시의 구체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큰집 마루에 앉아서 꽈리를 분다/아랫입술에 구멍을 대고 부풀린 다음 윗니로 살짝 누른다/뽀르륵 꽈리소리에 빠져서 자꾸 불어댄다//햇빛이 가득한 큰집 마루에 혼자 앉아 꽈리를 분다/원추형의 치마를 들치면 동그란 꽈리가 매달려 있다/아주 조심스럽게 만져가며 말랑말랑하게 만든다/심지가 만져지고 씨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꼭지를 살살돌리면서 천천히 심지를 뺀다/바람을 불어 넣고 햇빛을 담으니 동동 뜰 것 같다//꽈리 속에는 소리가 많다/입을 오므리고 불면 개울물이 굴러 흐른다/돌틈으로 비비대며 흐르는 개울물소리/바람을 잔뜩 부풀리고 서서히 불면 굴렁쇠소리가 난다/맨발로 마당을 빙빙 돌며 굴리던 둥근소리/입을 옆으로 하고 누르듯이 불면/칭얼대는 아기소리가 난다/돌사진 한번 찍어보지 못한 아기/입안 가득히 흐르고 구르는 소리//큰집 마루기둥에 기대앉아/꽈리를 부는 일은 지치지도 않는다// -----------이솔 전문   이솔의 시에는 사물을 직접 보고 만지고 체험하는 시인의 독특한 사물인식의 양식이 보인다. 이러한 사물인식의 방법은 사실성과 현장성을 바탕으로 하여 시를 언어 이전의 사물세계에 접근시키고 있다. 그래서 시를 모더니즘의 언어주의(특히 언어유희)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시는 또 사물시에서 지향하는 순수직관의 방법도 보여주고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언어감각을 감지하게 한다. 최진연의 「여름시편․4-소나기」에서도 사물시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해열제를 먹고 누워서 듣는 이웃집의 피아노소리/갈매기한두 마리 끼룩거리며 날고 있을뿐/아직도 비어 있는 바다가 보임./시골에도 비가 온다는 조카의 고추밭 고추들처럼/얼굴이 환해지는 아내/방안에서도 비를 맞는 행운 목 잎들이 길게 늘어져 있음./비를 받아 먹느라 쳐들었던 그간에 마른 얼굴의 꽃들/보나마나 이젠 고개 숙이고 있을 것임./해열제를 먹은 내 몸에서도 소낙비는 쏟아지고/자면서도 나무들 지절거리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음.// ---최진연 「여름시편․4-소나기」 전문   이 시에서는 시인과 사물과의 관계가 '사물시'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솔 시인의 시편들은 시인의 위치가 중립적인데 비해 이 시는 시인이 사물 쪽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내면(혼)까지 드러내려고 한다. 사물이 시의 원점(제로지점)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시인이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사물과 만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솔, 최진연의 시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물시의 모습은 문덕수가 제시하고 추구하는 사물시의 한 부분이다. 언어 이전의 사물인식은 “DIGITAL, DNA, DMZ”의 시편에 내재된 공통개념이다. 모더니즘의 언어주의(언어유희, 언어 이미지)와 관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사실과 생명과 현장 체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시운동으로서의 '사물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나, 디지털리즘의 선언과 디지털리즘의 시   오진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디지털리즘 시운동은 사물시의 연장선상에서 더 구체화되고 세밀화 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사실, 생명, 현장”이라는 사물시가 지향하는 전제前提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모더니즘의 언어유희, 언어 이미지를 포함하는 다른 측면을 실험시의 형태로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리즘」 1집(2003,3, 15)에서 선언한 디지털리즘의 핵심 내용을 인용해보면, “지금까지 아날로그 시대의 시가 '기술記述' 또는 '자동기술自動記述 '하는 것이라면, 미래의 디지털 시대의 시는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사 念寫'또는 '찍는다'는 행위로 구분 짓기도 한다. 그래서 ”인체人體의 신비전神秘展“에서 보듯 '진열된 세계'의 시신屍身을 종으로 갈라놓거나 횡으로 갈라놓아 진실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그런 현란한 색깔의 무늬를 보고 황홀해 하는 '디지털리즘'을 실험하였다. 마치 이것은 현미경으로 보는 '생명의 절편切片'으로서 일찍이 초현실주의 작가 부르통이 몸에 유리관을 끼워서 내장을 들여다보았던 '상상의 세계'가 실제 시신의 절편을 통해서 충격적으로 직접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선언문의 내용을 찬찬히 짚어보면 디지털리즘의 표현방식은 염사念寫'또는 '찍는다'는 행위이고, 충격적인 사실을 직접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여주는 것은'생명의 절편切片'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시의 전제 조건 “사실, 생명, 현장”을 구체화한 것으로 사물시의 공통 개념에 부합된다. 그런데 “현란한 색깔의 무늬를 보고 황홀해 하는'디지털리즘'”이라는 말에서는 언어 이미지나 언어유희의의 세계가 발견된다. 이것은 사물시가 벗어나고자 하는 모더니즘의 언어주의 세계와는 다르지만 디지털리즘의 언어유희와 언어감각의 모양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언어 이미지, 언어유희, 찍어서 보여주기의 방법에서 디지털리즘은 사물시와 별개의 시로 나누어 진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단순히 읽히는 시가 아닌 사실 또는 현상을 보여주는 시, 언어 그림의 시이면서 시인의 내면적 의식을 떠올리는 시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아침바다, 나의 첫 말言들이 꽃과 섹스를 시작한다./ 오늘/ 「미역국」 「미끄러졌다」는 탈脫의 이미지 미끄러지기/ 탈관념脫觀念이, 해日에서 「꽃」 꽃에서 「춤」으로 미끄러지기, 유쾌히 말이 미끄러진다./--수평선에 이쁜 눈썹 같은 민족이란 언어가 기우뚱하다. (단, 민모 또는 민족시인*이 내말을 못 알아/ 들어도 어쩔 수 없다.)/창가에서 언어와 꽃의 고독한 섹스,이미지 미끄러지기. 힘차게 꽃대 뽑아올리고 있는 제주 한란寒蘭, 뚝 뚝 피멍울이 져버리는 한란寒蘭, 순백이 일순간 흔들리면서, 오르르르...... . 전 신경이 떤다./ 꽃아,/ 달 하나 반짝이며 떨어진다/천 개 만 개 별들이 쏟아진다/간밤에 맺힌/ 이슬 한 방울 선한 자식듣,/모어母語의 첫 언어 아-.아-.                             ---오남구 < 해맞이 첫 언어- 디지털리즘 ①> 전문  * 민족시인:큰 고정관념을 상징. 참고로 나는 신(神)을 고정관념의 대표선수로 노래한 적이 있음    이 시는 「디지털리즘」 1집에 수록된 첫 실험시다. 이 시에서 먼저 발견되는 것은 “-시작한다, -미끄러지기, -미끄러진다 , -신경이 떤다, -쏟아진다” 등의 현재형 종결어미가 보여주고 있는 어떤 사실(현상)의 순간적 변화다. 의식의 흐름이 아닌 의식의 깜박임(단절과 이어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 시계의 깜박이는 영상과 흡사하다. 여기엔 지나간 사실은 순간순간 지워지고 현재의 사실만 보인다. 모더니즘의 언어유희, 언어 이미지와는 다른 디지털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언어유희, 언어감각이다. “연속적 흐름”이라는 아날로그 세계의 개념을 넘어서 시간時間이 아닌 시각時刻이 지배하는 디지털 세계의 현상이 담겨있다. 첫 행, 에서는 “해맞이 첫 언어”의 신선한 감각적 이미지가, < 「미역국」 「미끄러졌다」는 탈脫의 이미지>에서는 탈관념 언어유희의 한 부분이 보인다. 한 언어로부터 연상되는 이미지가 해→꽃→춤으로 이어지고, 이'이미지 미끄러지기'는 제주 한란寒蘭→꽃→달→별→이슬방울→모어母語의 첫 언어 아- 아-로 맺어지는데, 어떤 의미나 관념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독자는 관념에서 해방되어 시의 언어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시의 전개는 순수하게 시인의 내면적인 염사念寫의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디지털리즘 선언」 2집(2003,12,15)에서 시 한 편을 또 읽어보자.     비,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 수편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닥팔닥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남구 「부드러움의 단상」 전문    이 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섰다가 비가 그치자 빌딩 사이 조각난 허공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 찍어 놓은 것이다. 비를 맞는 감각이 차다→단단하다→날카롭다로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비는 팔닥팔닥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방금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動映像의 한 장면을 보는 거 같다. 사실과 현장 체험의 생생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생각의 속도가 들어 있다.  디지털리즘의 핵심은 대상(사물)을 접촉할 때 관념을 배제하고 대상(사물) 그 자체에 의식의 촉수를 넣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은 의식의 집중에 전념해야하고 의식의 힘으로 건저올린 사물(대상)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순수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이 때 대상에 대한 표현 방법을 염사念寫와 접사接寫로 나누고 있는데, 염사는 내적인 의식의 흐름을 포착하여 순간적으로 사진을 찍듯이 표현하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적인 대상을 순간적 감각으로 포착하여 찍어내는 방법이다. 그래서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사진을 찍는 듯한 언어표현의 방법을 현대과학의 용어인 디지털의 개념에 융합시켜 만들어 낸 “디지털리즘 시”라는 용어가 새로운 문학 언어로 성립된 것이다. 이 디지털리즘의 시론은 탈관념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론과는 다르다. 무의미시는 대상이 없이 언어를 유희적으로 사용하여 만들어낸 단순한 언어 이미지인데 반해 디지털리즘 시는 눈에 보이는 대상(또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상)을 어떻게 포착하여 표현하느냐 하는, 대상의 표현 방법에 관한 시론이다. 따라서 이 시론은 어떤 관념의 표현을 위해 사용되는 비유적인 이미지의 기법과도 다르다. 보통의 시들이 의식→대상→관념→ 비유적인 언어(이미지)→의미의 표현이라는 방식인데 반해 디지털리즘의 방법론은 의식→대상→이미지다. 이것을 순수 직관적 표현이라고 한다. 이 직관적 표현은 불교의 선시禪詩와도 차이가 있다. 선시는 하나의 분명한 관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리즘의 시에는 어떤 뚜렷한 의미(관념, 주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의식→대상→이미지로서 최종적인 것은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독자의 판단과 해석에 의해 재창조되는 소재로 탄생한다. 그래서 디지털리즘 시는 독자에게 일정한 역할을 맡기는 시, 즉 독자참여의 시로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리즘의 시는 독자들에게 기존의 시와는 전혀 다른 경험과 맛을 느끼게 해준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또 '사진 찍기의 기법'이라는 측면에서 시인에게 종합적인 사고와 예술적인 다양한 기법을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디지털리즘의 시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처럼 TV화면에 영상화 될 수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디지털리즘은 현대적인 감각과 시대의 조류에 잘 어울리는 시론이다. 그러나 단순한 ‘사진 찍기’의 기법이 안고 있는 가벼움과 차가움(비인간적인 면)은 문제로 남는다. 디지털리즘 시의 종결어미가 대부분 현재형 이라는 점이 그런 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현대의 복잡다기한 의식과 관념, 인간정서의 은은한 맛, 강렬한 감정 등을 표현하는 데에는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이 오히려 특징으로 남는다. 남과 다른 면이 있을 때 이것이 장점이 된다. 디지털리즘의 시운동은 현대와 미래사회에서 요구하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을 내포하고 있어서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리즘선언」3집(2004,9,11)에 실려 있는 박유라, 송시월, 이낙봉, 심언주, 김서은, 이인선, 류기봉, 김병휘, 박햇살, 고종목 등 동인들의 시편들이 풍기는 디지털리즘의 참신한 감각과 독특한 표현양식은 실험시의 범위를 넘어서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한 유파流派를 형성할 수있음을 보여준다. 그 중 한 편의 작품을 읽어보자.   아침, 나무사이/은색 자전거가 싱싱하게 지나간다/파란 산소 초록을 흘리며 간다/바짝, 4차선 쪽으로 촘촘히 걸어나오는 햇빛/물오른 캔버스를 한획 한획 푸르게 덪칠하며 걸어온다/초고층 아파트에서 졸고 있던 낮달이/슬며시 횡단 보도를 건너/하늘 파란 울음 한 조각 옆구리에 끼고서/빠르게 차창 안으로 날아든다./-누군가 내 핸드폰에 보내온/초록 문자 멧세지/전철안이 푸릇푸릇하다./누-구-세-요-?//---김서은 전문    김서은의 은 어느 여름날 전철 안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한 풍경(사물)이다. 이 영상은 한 순간에 마음(염사)과 눈(접사)을 통과하면서 어떤 관념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하고 선명한 형태의 감각(디지털 감각)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싱그러운 향기까지 풍기면서.   다. 현실 참여와  생명 사랑의 생태시    생태시의 바탕에는 생명의 근본 사상이 깊이 간직되어 있다. 그래서 환경시, 녹색시 등 인간의 환경파괴를 고발하고 무분별한 인공人工과 비자연성非自然性, 공해에 저항하는 사회참여의 시에서 출발한 생태시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중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생명의 근본 세계를 포함하는 보다 상승된 세계를 지향한다. 여기에는 인간을 위한 환경보존만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생태계의 문제가 들어있다. 그래서 생태주의 시는 환경시보다 더 적극적으로 생명세계를 지향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생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시로 변화하고 있다. 이것이 환경시, 녹색시와 생태시의 차이점이다.  생태시라는 용어는 생태학生態學과 시의 합성어로 환경에 대한 생태학적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래서 송용구는 “자연환경과 생명체의 질적 변화를 생태학적, 사회적, 정치적 인식 및 생명의식에 근거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고발하는 현대시의 한 장르”라고 생태시를 정의하고 있다. 그가 소개한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송용구 번역)는 파괴된 생태계의 문제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인간의 운명을 저항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 사화집에 들어 있는 시편들은 주제, 내용, 관심에서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21세기 한국의 생태시에 많은 영향과 자극을 주고 있다. 신진의 시집 「녹색엽서」(2002)도 산업화이후 파괴되고 훼손된 한국의 환경문제에 정면 대응하는 생태시로 평가 받고 있다.  2000년을 전후한 「시문학」의 생태주의・생명주의 시운동, 「문학사상」,「현대시학」,「녹색평론」 등의 생태시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생태시의 위치를 확고하게 정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시정신 운동으로 한 단계 높이고 있다. 2000년 10월 호 「시문학」에 발표된 의 「환경선언문」은 인간과 예술과 환경의 인과관계를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고 황폐화 되는 환경과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정신의 황폐화와 정서의 궁핍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 인간과 자연을 똑같이 존중하는 생명사랑의 시정신을 천명闡明하고 있는데, 이 생명사랑의 시정신은 21세기 한국 생태시의 핵심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생태시의 언어에도 문덕수의 사물시가 전제로 내세운 “사실, 생명, 현장”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초여름 아침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져 초록숲을 뒤흔든다// (황금꼬리를 낚아야겠다)//산수유 골진 잎사귀와 산벚꽃나무 팔랑팔랑 까불어대는 숨구멍 사이에다 초록그물을 친다 그물코에, 하루살이 작은 몸뚱이가 걸렸다//_ 작다고 얕보지마!// 이래뵈두 천일동안 물속에 잠겼다가 스물다섯번이나 허물을 벗은 후에 태어난 생이야/ 어디, 하찮고 떫은 생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그 누가/여름날 하루해가 너무 길다고 했던가?          -------- 이춘하 전문 (시문학, 2004, 8)    이춘하 시인의 는 파괴된 생태계의 문제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신음하며 죽어가는 인간의 운명을 저항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기존의 환경시, 생태시와는 전혀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는 언어 이미지나, 주장, 고발, 당위적인 관념 등에서 벗어나 생태계의 모습을 세밀히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독자들에게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잘 것 없는 미물이지만 천일동안 물속에 잠겼다가 스물다섯번이나 허물을 벗은 후에 태어난 하루살이의 생. 그 하루살이를 포획하는 초록그물. 이런 생태계의 사슬 관계를 시인의 미시적인 눈이 자연스럽게 포착한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생명존중, 생명평등의 열린 마음이 포옹抱擁한 생명세계의 현장이다. 이 말은 하루살이의 항변만이 아닌 시인의 항변이다. 이 세상에는 가치 없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명존중 의식. 여기서 새로운 생태시 모습이 발견된다. 이것이 21세기 한국 생태시의 미래를 예시해 주는 단서라고 한다면 지나친 예단일지도 모르지만.   라. 변화의 징후徵候를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   진헌성의 연작시(시문학, 2004,9)은 물성物性이 본래 가지고 있는 비의를 우주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시화詩化하고 있다. 신神보다 앞선 물질계의 본성을 직관적인 감성과 과학적인 추리로 통찰하고 있다. 관념적인 면이 강하지만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우주적 신비세계를 추적하는 시인의 의지와 상상력이 뜨겁게 감지된다.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물성의 본질을 이만큼 추적하고 드러낸 시는 아직까지 없었다고 생각된다. 문덕수의 '사물시'시론과 원초적인 면에서 조화調和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샤머니즘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 박재릉은 시집「삭발하고 분바르고」(2002) 이후에도 신작시 특집 등을 통해 활발하게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 (시문학, 2004,9)에서, 아직도 시속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에너지는 여전하지만, 무속巫俗 세계의 뜨거운 인간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탈속脫俗과 관조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을 넘어선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바다같이 출렁이는 생명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또 풍자와 역설로 관념의 속살을 드러내며 흥겨운 시의 판을 벌이고 있는 안수환의 시집 「하강시편」(2004,2)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감성과 관념 너머의 세계. 그리고 언어 놀이도 새로운 변화의 징후를 감지하게 한다.  이 밖에도 내적(정신적) 시선의 이동으로 시의 의미(상징)를 확장하고 놀라움을 주는 박찬일의「모자나무」, 독자들을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시의 언어를 즐기게 하는 양준호의 「포크」, 디지털리즘의 언어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내면찍기를 보여주고 있는 박유라의 「겨울 X-Ray」, 봄에 산에서 꽃이 피는 평범한 사실을 감각적이고 우주적인 발상의 이미지로 순간적인 언어자극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는 이종현의 「우주가 하혈하는 희한한 풍경」, 사물과 사물의 연결을 통한 비유 속에(허물어진 �달의 그림자, 쭈그러져 누운 단화 등) 자신의 꿈과 현실을 함축하고 이를 “다시 피는 들꽃”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송문헌의 「소리의 넋-자화상」, 대상(나무)과 시인의 관계가 일체가 되어서 시인의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인식만이 감지되는 정유준의 시집「나무의 명상」(2004,6,30) 속에 들어 있는 시편들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개성적인 언어기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로 평가된다.       3. 맺는 글    이 글에서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융합하는 문덕수의 '사물시', 탈관념을 바탕으로 사실과 현상을 순간적인 생각의 속도에 실어 사진 찍듯 찍어서 보여주는 오진현의 '디지털리즘의 시론과 실험시,'사회참여의 저항성에서 출발하여'생명사랑으로 변화하는 생태시', 그 밖에 개성적인 언어 기법과 변화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시들을 대상으로 하여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변모를 모색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이유는 1년간 상재된 시집을 열거하고 사족蛇足을 붙이는 일보다는 젊고 발랄한 정신을 뿜어내는 시인들의 참신한 의식과 언어를 추적하면서 새로움을 모색해보는 것이 더 즐겁고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법의 변화에는 생각의 변화가 수반隨伴되고 생각의 변화는 새로운 기법을 탄생시킨다. 이 둘의 관계는 인과因果를 만들면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사실・생명・ 현장을 전제로 하는 사물시, 디지털리즘 시, 생태시 등의 시들은 현대인들의 변화하는 생활과 사고思考와 환경과 행동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함으로써 당위성當爲性과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사실(사물)의 본질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감각과 순간적인 변화를 즐기는 현대인들의 생활과 사고와 감성과 행동양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사물시와 디지털리즘의 시는 20세기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통합하는 21세기 새로운 현대시의 모델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시는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서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내면의식의 서정시나 풍자나 역설, 사상의 감각화를 중시하는 주지시나 사상이나 메시지 전달을 강조하는 관념시 등 다양한 모습의 현대시들도 그 존재가치를 지속시키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21세기의 시대적 흐름을 수용受容하는 새로운 시로 변모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4년의 한국 현대시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6    디지털시대와 글쓰기 방법론 댓글:  조회:4599  추천:0  2015-02-18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환경과 글쓰기의 방법론 -최동호 시인의 에 대한 반론                                                                                     심 상 운   1. 최동호 시인은 에서 주관한 학술세미나[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환경과 글쓰기의 방법론](2003.8.13)의 기조발표문 에서 “디지털 시대를 대변하는 음유시인(吟遊詩人)이 출현한다면 대중적 관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폭발적인 것이 될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우고 21세기 영상성의 시대에 오히려 서양의 고대나 중세에 활동하던 음유시인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음유시인의 출현을 기다리는 이유는 일부시인의 대중적인 인기를 빌어서 현대시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시의 내적 방법론보다는 대중에 영합하는 포퓰리즘(populism)을 선택한 그가 현대시의 미래에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끊임없이 현대시의 시론을 탐색해야 할 입장의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내세우는 가설에는 그의 실증적 체험이 들어있지 않고 막연한 예언 같은 추상성만 들어 있어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는 그 가설의 근거를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김소월이 민요 시인으로 불리면서(본인은 그 명칭을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의 20세기적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김소월과 대극점에 이상의 시가 있고, 김수영이나 김춘수 같은 시인은 관념의 세계를 파고들어 그 나름의 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앞으로 노래와 결합되지 않는 시는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 예견된다.” 라고 한국현대 시사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어디에도 오늘의 현실에 입각한 실증적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시대의 변화와 다양한 취향의 독자들을 외면하고 21세기에도 김소월과 같은 민요조의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백남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한국 현대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1980년대 한국시단을 휩쓸고 간 베스트셀러의 열풍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베스트셀러의 시집들이 지금도 인기가 있고 문학적 가치가 있는 시집으로 존재하는가를 한번이라도 냉정하게 검토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 하는 방법을 디지털 시대의 매체의 기능에서 찾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여러 매체들을 종합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이 시의 쟝르적 특징이고, 이를 살려 시와 음악, 시와 무용 등이 결합하는 방식”이라고 시와 음악, 시와 무용의 결합을 현대시의 한 방법“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의 연구”라는 말을 통해서 음악과 무용과 결합할 수 있는 시의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의 결합방식에는 현대시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현대시의 언어를 종합예술의 형태 속에 넣어서 음악이나 무용의 힘을 이용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다. 이때 시가 음악이나 무용에 붙어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가를 숙고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 그러면 먼저 그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돌파구로 내세우고 있는 그의 ‘음유시인(吟遊詩人)’이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 대안인지 검토해보자. 그가 거론한 음유시인은 중세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각지에서 봉건 제후의 궁정을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지은 시를 낭송하던 시인이나 고대 그리스에서 광장이나 길거리에서 오랜 동안 전승되어 오는 서사시를 간단한 악기의 운율에 실어서 대중들에게 들려주던 형태와 같은 시인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본뜬 현대의 음유시인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의 도시에서는 공원이나, 카페나, 다방에서 자기가 지은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거나 낭송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시인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구조 속에서 음유시인의 일반적인 형태는 시인이 쓴 시를 작곡가의 곡에 붙여서 가수가 노래하는 형태가 될 것 같다. 정지용 시인의 시 에 곡을 붙여서 대중들에게 가수가 들려주는 것처럼. 그럼 그때 '음유시인'은 누가되는 것일까. 시인일까? 작곡가일까? 가수일까? 이런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세밀하게 구상되어 있지 않은 채, 단순히 대중에 영합하는 시를 말하기 위해서 ‘음유시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그의 은 매우 즉흥적이고 아마추어적 발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현대는 그가 말한 대로 디지털의 여러 매체를 종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시인이 대중들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활자매체’ 한 가지 만은 아니다. 활자매체에 영상 이미지를 넣고 음악과 시인의 음성을 담아서 컴퓨터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서 독자들과 만날 수 있다. 만약 그가 인터넷 가상공간의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음유시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라면 그의 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하지만 현대성을 획득하는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다음은 두 번째로 음유시를 위한 시의 연구가 현대시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는 시론으로 성립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검토해보자. 음유시가 되기 위해서는 현대시가 대중가사의 노랫말같이 읽고 노래하기에 적합한 운율적인 언어로 조직되어야 하고 시인의 정서를 대중들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영탄형의 구문이 되어야 한다. 고려시대의 속요에도 음악성을 나타내는 후렴구가 들어 있고, 시조에도 4음보와 3,4 4,4 조의 운율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가사에도 3,4, 4,4 조의 가락이 있다. 정지용 시인의 에도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이런 비슷한 운율을 현대시에 넣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런 시가 진정으로 대중과 가까워지는 현대시의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이때 현대시와 대중가사와의 거리는 또 어떤 기준으로 설정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제까지 쌓아온 한국 현대시의 언어적 성과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그의 인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만 든다.   그러나 시와 음악과의 결합은 근래에 산문화 되고 있는 현대시의 ‘음악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는 연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런 생각과 함께 현대시의 새로운 운동으로, 일부의 시인들이 독자(관객)와 호흡을 함께하는 나 의 시가 매스컴의 외면으로 대중화에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라는 주제를 논하고, 음유시인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그냥 지나쳐버린 것은 편향된 시각이나 좁은 안목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게 한다.     2. 이상으로 디지털 시대의 시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 최동호 시인의 음유시인의 등장에 대한 검토를 나름대로 해보았다. 다음은 왜 최 시인이 디지털의 시대에 사는 세대들이 선호하는 영상 이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가상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짚어보자. 그는 의 도입부에서 갑작스런 사이버 시대의 도래를 이야기하면서 사이버 세계에 의한 독서 인구의 감소를 지적하고 있다. 이 독서 인구의 감소 문제가 가상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온 원인이 된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에서 ‘문학의 이해’ 수업시간에 경험한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박목월의 시 ‘청(靑)노루’를 다루면서 우선 전혀 다른 이질적인 반응에 놀라게 되었다. 리얼리즘 문학론이 붕괴되고 해체시와 정신주의가 충돌하던 90년대 초반에 이 시에 대해 학생들은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세계가 이미 자신들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이 시에 그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 ‘청노루’ 전문     60년대 이후 회화적인 구도를 가진 자연시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거론되어온 박목월의 ‘청노루’가 젊은 세대들에게 이처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필자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 유행하던 시들은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이거나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작품들이었다. 물론 많은 시인들에 의해 전통적인 서정시가 쓰여지고 있었지만 그런 류의 시들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작품으로 치부되는 듯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학생들에게 박목월의 ‘청노루’를 다시 읽혀보고, 종전과 유사한 반응을 기대했었는데, 의외로 2000년대 초의 학생들은 이 시에서 그들 나름의 시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크게 부정될 줄 알았던 것과 정반대의 반응에서 필자는 일단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최근의 학생들이 이 작품에 공감을 보인 것은 이미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에서 흥미를 느끼는 그들이 ‘청노루’ 정도의 표현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그만큼 인터넷의 가상현실 속에서 그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   최동호 시인의 현실진단은 정확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진단에 대한 그의 해석은 한마디로 부정확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인터넷의 가상세계를 부정적으로만 보고 거기에 대응하는 시적 방법론을 새롭게 찾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해답이 되는 시적 방법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 대한 그의 진단 속에 들어있었다. 1990년대 초에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던, ‘청노루’가 2000년대 이후의 독자들에게 읽히는 이유가 그 해답의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는 학생들의 반응 속에 정답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 까닭은 세대 차이에서 찾아볼 수도 있지만 그의 마음이 활짝 열려 있지 않았다는데, 근본이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시들은 현실에 대응하는 참여시로서의 가치는 있었지만, 시의 상상력을 추구하는 예술적인 본령에서는 멀리 떨어진 시의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2000년대의 학생들은 직감한 것이다. 컴퓨터 인터넷을 생활의 일부로 삼는 그들은 시에서 의미보다 영상성(이미지)에 더 친밀감을 느끼고, 가스통 바스라르와 같이 철학적 명상에는 잠겨보지 않았겠지만 ‘가상현실을 이미지의 세계’로서 현실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대시에 대한 이런 감각은 시의 예술적인 면에서 얼마나 건전하고 바른 접근인가 거듭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이 단지 사이버의 가상세계에 빠져서 독서를 등한시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감성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부정적으로만 몰아간 것이 과연 현대시의 강의 현장에서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원하는 방향이든 원하지 않는 방향이든 필연적인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 시대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의 표현대로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인 그들에게 그들이 선호할 수 없는 시만 보여주고 “왜 시를 읽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고집일 뿐”이라는 말을 그에게 되돌릴 수밖에 없다.     3.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영상 언어의 세계를 제시한 운동은 아날로그와 대칭되는 디지털이라는 관점에서 ‘기계의 시’ ‘반인간적인 시’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외면하는 시인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그들의 그런 자세는 현대의 물질주의적 상황에서 인간의 정서를 옹호하고 시의 생명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태도라는 점에서 공감이 가는 행위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이 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어처구니없는 태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도 이제까지 현대시를 이끌어온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와 같이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 가상세계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의 존재 이유가 첫째,‘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시의 서정성을 근본적인 바탕으로 한다는 것. 둘째, ‘모더니즘의 절제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 슈르의 반지성적인 ‘상상의 확대’,‘자유연상’, ‘창조적인 이미지에의 유혹’은 물론 리얼리즘의 ‘현장성’ 까지 모두 포함하는 시의 큰 그릇이라는 것. 셋째,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직관을 통한 염사와 접사’,‘무의미(탈관념)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의 공간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 선결과제가 된다. 그것은 현대시의 문제의 해결 방법을 외부가 아닌 현대시의 언어내부에서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적 지향점을 안고 있는 는 과학적인 사실주의(실증주의)도 중시하지만 인간 내면의 심리적 현상에도 깊이 있는 시선을 던진다. 그것은 가 ‘언어의 의미’에서 탈출하여 ‘이미지의 세계’를 시의 근원으로 삼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슬라르는 과 에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가스통 바슬라르의 과 을 강의 하는 김용희는 그의 강의 노트에서 가스통 바슬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요약․정리하고 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가스통 바슬라르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은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고 하는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인 학생들의 시적 인식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러나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실제로 행하여졌던 이미지의 실재성을 인정한 것일 뿐, 그가 새로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실증적 관찰을 통한 이미지의 실재성은 현대시에서 ‘상상의 가치’를 높이는 데 힘이 되고 있으며, 미래지향의 가치를 창조하는 동력을 공급고 있다고 생각된다. 는 상상력의 확대와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라는 면에서 가스통 바슬라르의 상상의 시학과 맥을 같이 한다.     4. 그가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 들은 어떤 상상력을 가진 세대이어야 하는가? 그들에게 기성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중심이 되는 이슈가 ‘창조적 상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2007년 2월 16일자 기사에는 2007년 주요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 주제가 ‘창조교육’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한 신제품 만들기다. 그 제품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지 못한 것이어야 한다. 제품은 실제 물건일 수도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제도나 시장ㆍ금융상품ㆍ마케팅 아이디어도 포함된다고 한다. 이런 미래지향적 연수의 결과물 중에서 '아이-라이크(Eye-Like)‘라는 제품이 있다. 콘택트렌즈처럼 이 제품을 눈에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하도록 한다. 집에 들어와 아이라이크를 빼내 별도 플레이어(재생기)에 장착하면, 그날 일상에서 본 모든 영상이 아이라이크에 담겨 있다. 플레이어를 통하면 그날 하루 일과가 그대로 재생된다. 눈에 끼는 캠코더를 연상케 하는 제품이다.'루미트리(Lumi-Tree)'란 제품도 이와 같다. 반딧불이의 발광 DNA를 식물의 DNA와 합성해 나무나 꽃의 잎(또는 줄기)에서 발광물질을 발산하게 한다. 식물 자체에서 나오는 빛으로 가로등을 대체할 수 있다. 이런 상상의 제품은 미래 시장을 향한 제품이다. 과거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가상세계의 현실화에 도전하는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꾸는 꿈은 현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 세계 속에서도 존재하는 꿈이라는 점에서 의 꿈과 같다. 따라서 현대시의 전위적인 실험시도 그들의 신제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감성과 상상력의 조화와 확대로 새로운 시의 원천이 되는 아이템을 찾아내는 일이다. 상상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모태가 된다. 그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이지만 실재(실상)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은 실제적인 이해타산과 인과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이미지’에 의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심리적 이미지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적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현대시에서 이미지를 ‘심상(心象)’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미지의 범위를 좁힌 점은 있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단어로 존재성을 갖는다. 그 심리적 이미지는 오랜 옛날부터 예술의 동력이 되어서 사람들을 움직여왔지만 실상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이미지의 비중이 커지고 비약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현대시에서 상상력의 확대를 추구하는 는 가상세계를 포함한 인간의 심리적 이미지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한다. 그 변화 속에 디지털 시대에 시가 존재하는 방식이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35    하이퍼시와 디지털시대 댓글:  조회:3863  추천:0  2015-02-18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 디지털 시대의 시 쓰기                                                                       심 상 운(시인)     1.  동양시의 경전이라고 일컫는 고대 중국의 에서 보여주는 인간정서의 자연스런 분출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피어난 ‘감정의 자유로운 유로’(워즈워즈)는 이성보다 감성을 선호하는 한국현대시에서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근원은 ‘시는 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그러나 정서과잉, 상상력의 고갈 등 시적 긴장감이 풀어진 시들은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주었고 시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불러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 리듬, 이미지, 스타일 등에서 시대적 감각에 맞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의 모더니즘 시가 지적인 언어와 회화적인 이미지의 기법으로 정서과잉의 낭만주의에 식상한 지적 성향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영토로 환영을 받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고, 정서의 자연적 노출에서 벗어나 이를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줌으로써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했다. 이는 시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箱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距離의 노을을 벗기지 않는다면....   희망. 그것은 너의 寶石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는다면..... ------김현승 1〜3연      그러나 시에서 의미를 중시하는 지성의 과잉이 일으키는 병폐도 또한 새로운 시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지성의 과잉에 대응하는 반지성(反知性)의 시, 즉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초현실의 시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를 추구하고 언어표현의 과감한 혁신을 지향한다. 그리고 시적대상의 현실적인 공리성이나 합리적인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대상과 대상을 창조적인 새로운 관계로 맺어주는 시작 방법을 내세운다. 이때 시 속에서 현실적 실용성이나 합리성, 공리성을 다 없애버리고 순수한 시적대상으로 재탄생하는 대상을 오브제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시작 방법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反動)이거나 모더니즘의 전위(轉位)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초현실주의 시는 난해성을 수반하지만 시의 존재성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부분     나의 영혼은 어느 무당집 촛불로 불타고 있다. 그해 겨울 동자상을 안고 오는 길은 뼈가 갈라지는 어둠이었다. 무당이 주는 병든 본능의 복숭아를 깨물며 내가 사랑했던 개들이 나를 자꾸 물어뜯어도 어디가 아픈지도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잠들 수 없는 어둠, 소리칠 수도 없는 어둠, 껴안을 수도 없는 어둠이 토끼의 눈물처럼 내 손바닥에 쌓이고 그런 날 무당집 뒤뜰의 구렁이는 밤마다 나를 껴안았다. 그 때마다 묻어났던 벌개진 어둠. ----------양준호「나의 영혼은」전문      모더니즘은 이런 도전 속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포용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것이 반지성을 용인하고 지성과 반지성이 서로 어울리게 하는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다. 이런 시작방법과 인식의 변화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시운동의 태동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 현대시에서 디지털 시대의 감각을 시에 도입하고자하는 ‘디지털 시’ 운동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시의 큰 테두리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의 모색과 분출이 가능한 것은 모더니즘의 근본정신 속에는 인습적인 것이나 상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변혁(變革)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21세기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디지털의 시대다.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사이버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을 열어 놓고 있다. 이 사이버공간은 개인 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컴퓨터의 영상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 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디지털의 특성이 만들어 내는 영상과 쉽게 합치될 수 있다. 이 영상(보여주기)은 근대 이성의 ‘문자권’, 을 넘어서는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 시대의 중심 매체다. 현대를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디지털의 특성+시= ‘디지털 시’는 현대시에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디지털의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언어의 예술인 시의 세계에서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옮겨 온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로 옮겨오는 디지털의 특성에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적인 언어와 상상력’이다.  디지털 적인 언어라는 것은 언어를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컴퓨터의 데이터(data)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언어를 기호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선과 색채’와 같이 의미나 실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언어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탈-관념(무의미)의 언어라고도 한다. 이  탈-관념의 언어는 디지털의 감각인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등을 구현하는 언어가 된다.  이런 디지털 시의 언어는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 (erdinand de Saussure 스위스 제네바 857. 11. 26 ~1913. 2. 22)의「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19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언어는 실제적인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스스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의 상상은 이런 언어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虛像)이지만 실재(실체)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순간의 시학」과「불의 시학」을 강의하는 김융희(서울예술대 교수)는 강의(2006,6,26)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강의 개요’에서 요약․정리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도「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 157호)에서,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라고 순수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수평으로 네 개의 막대기가 날아간다. 똑같은 속도로 나란히 열을 지어 때로는 장대처럼 일직一直으로 이어져, 그 중의 하나는 달을 두 쪽으로 쪼개고 그 중 하나는 지구를 툭툭 치고 그 중 하나는 꽃밭을 후려갈기고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쳐 죽인다. 흩어졌던 막대기들이 다시 날아와 수평으로 나란히 열을 짓다가 제각기 머리를 돌린다. 하나는 벽을 후비면서 돌고 하나는 유리창을 뚫고 드나들며 하나는 나비를 뒤좇아 내를 건너고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 뒤얽히던 세 개도 차례로 죽는다. -문덕수 「네 개의 막대기」전문      디지털 적인 상상력은 ‘가상세계(假想世界)’라는 무대를 설치하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 가상세계는 ‘허구적(虛構的)’이란 면에서는 예술적인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디지털적인 상상은 허구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데서 기존의 허구와 차이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을 제정하고 홍보하는 조선일보(2007,4,9)에 기고한 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의 글,「꿈을 현실로… 이것이 뉴 웨이브 문학!」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는 그 글에서 “정보화 혁명은 문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좌표 위에 위치시켰다.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을 하는, : 대화식의)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 라고 21세기 디지털의 세계가 펼치는 가상세계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라고 하면서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판타지문학도, SF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의 마법사’ ‘듄’ ‘유배행성’ ‘로캐넌의 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그리고 있는 현대문학일 뿐이다. 그 반대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현대문학’, 즉 1990년대 이전까지의 현실 개념에 따라 문학을 이해하는 근대문학이 있다.”라고 현대문학과 근대문학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검증을 철저히 거쳐야 하겠지만, 상상의 무한한 확대라는 면에서 21세기 문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Hypertext literature) 은 디지털 적인 순수한 상상력의 확산과 독자참여의 문학공간이라는 면에서 한계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 텍스트의 유동성(流動性)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닌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형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형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인터넷에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리좀은 원래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줄기 즉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용어인데,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J. 데리다, G.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되는 시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과리(문학평론가)는「컴퓨터와 문학- 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6년)에서 “문학의 ‘文’ 그리고 literature의 'letter'는 문학이 ‘언어’ (더 좁혀, 문자)를 중심매체(中心媒體)로 삼는다는 뜻을 포함하고도 있다. 하이퍼미디어에서는 그런 중심매질(中心媒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 또한 그 자체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의 장 속에 종속하여 있어서,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론은 문학에서 중심매질이 되는 언어(문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 예속된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미완성의 시-그림 감상하기」전문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 1834 영국의 서정시인·비평가·철학자.)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연상)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기울게 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 추리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무목적성’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공상이 상상보다 현대적인 감각을 더 넓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시의 무목적성 외에 공상이 가지고 있는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낀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이나 유희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거나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의 바탕에는  언어의 기호성과 영상성, 가상현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등 ‘디지털 시'의 원리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필자의 현대시론「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는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듈 이론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리좀 이론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연결 관계보다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이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이다. 이 의식의 흐름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의 맥락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4.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탈-관념의 영상언어 즉 보여주기(Showing)의 세계를 제시한 ‘디지털 시 운동’은 모더니즘의 구조(frame)속에 들어있으며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의 새로운 언어 운동’이다. 이 디지털 시 운동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는 물론 상상의 확대, 자유연상(공상), 영상성과 공연성을 통해서 ‘공연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현대시의 공간 확장방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탈-관념’, ‘기호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 공간을 개척하는 강한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정서 위주의 시나 모든 시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시인들은 사이버 공간과 가상세계, 언어의 기호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들 중에는 ‘디지털 시’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기계의 시로 착각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다. 그런 시인들에게 디지털 시와 하이퍼텍스트 시의 넓은 공간과 새로운 감각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쩌면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21세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호흡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의 세계는 현대인의 정신을 정주(定住)에서 이동(移動)으로, 삶의 공간을 지역공동체에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변화시키고 있다. 탈-중심은 다양한 가치의 세계 속에서 어떠한 대상과도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런 현상은 언어예술의 세계에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따라서 현대 시인들은 과거시제의 ‘관념의 집’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디지털 시와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을 향해 유목민처럼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시점에서 볼 때,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문학은 미지의 텍스트의 세계로 떠나가는 예술적 여정에서 다른 예술보다 뒤처져 있다. 언어의 의미성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문화의 집적(集積)인 언어의 의미성이 새로운 텍스트의 원천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34    詩와 기호(記號) 댓글:  조회:4285  추천:1  2015-02-18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발음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2007,7,30, '시문학사')에 게재한  대담형식의 시론「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化)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에는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생략)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비슷하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오늘의 시작법』2004, 개정판 )-   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33    하이퍼시와 젊은 시 운동 댓글:  조회:4232  추천:0  2015-02-18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젊은 시 운동-‘하이퍼시’ -기존관념에서 해방,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현, 우주적 개안開眼                                                                                    심 상 운   「시문학」에서 2008년 5월부터 2009년 7월까지 4회에 걸쳐 특집으로 엮은 김규화, 오남구, 심상운의 60편, 2009년 11월부터 2010년 2월까지 3회에 걸쳐 기획특집으로 발표한 57편(참여시인 19명)을 비롯하여 하이퍼시 운동의 추진력으로 작용한 이슈의 숲길 과 , , 등은 21세기의 감각과 문화현상에 대응하여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젊은 시 운동의 치열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하이퍼시는 한국현대시를 오래 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다선구조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정적 이미지를 동적 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현대시의 개혁운동이다.   이런 개혁성으로 인해서 하이퍼시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일부 시인이나 독자들에게 당혹감과 거부감을 안겨주고 ‘소통疏通의 단절, 자기들만의 만족’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이퍼시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인들과 독자들의 호응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이 추세趨勢다. 이 호응에는 젊은 감각을 선호하는 독자들과 시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 밀착된 사실적인 이미지와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미지의 뒤섞임을 즐기고자 한다. 이 뒤섞임은 그들에게 관념이나 의미를 넘어선 비약飛躍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경향傾向은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환상적인 디지털의 감각을 선호하는 현대시의 변화로 파악된다.   변화는 하이퍼시의 생명이다. 이제까지 하이퍼시는 영화의 몽타주 기법과 같은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시구조의 바탕으로 하였다. 그래서 장면을 연결하는 링크를 당연한 기법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하이퍼시의 특징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링크를 답답하게 여기고 링크를 클릭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과격한 성향의 텍스트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 하이퍼 시의 현장이다. 나는 ’상상의 클릭‘이라는 개념을 하이퍼시에 넣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하이퍼시의 기법은 컴퓨터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현대시의 기법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텍스트를 빼고 하이퍼시로 명칭을 정한 이유의 일부도 거기에 있다.    2006년 나는 라는 시론에서 ‘디지털 감각’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모듈(module)’, ‘샘플링(sampling)’ 등의 용어를 검증절차 없이 과감하게 디지털 시의 이론에 도입하여 시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보여주기(showing)의 ‘디지털 감각’이나 ‘가상현실’은 개념의 일반화 과정에 들어간 것 같으며, 모듈 이론은 하이퍼시에서 리좀 이론으로 언어만 바뀌었을 뿐, 그 중심개념은 그대로 살아있다고 생각된다. 샘플링 즉 견본추출이라는 개념도 ‘시와 현실의 관계’를 논의할 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탈관념, 링크, 클릭 등의 용어도 현대시의 이론 속에 흡수되어서 새로운 기법의 용어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탈관념은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지자는 것이지, 시에서 관념을 아주 없애자는 무관념이 아니다. 기존관념에 집착하지 않을 때 더 큰 세계가 열리게 된다.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탈관념의 세계이며, 현실과 상상이 결합된 새로움으로 가득한 하이퍼(hyper)의 세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서 중요한 것은 기존관념으로부터 과감한 탈출과 창의적인 상상력의 발현이다. 거기에는 우주적인 개안開眼이 들어있다.    
32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댓글:  조회:3979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심 상 운     1,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이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를 말하면서‘저자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것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 또‘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記意)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記意)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記票)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마디들 속에 산발적으로 퍼져있는‘이음(link)’에 의해 연결되는‘마디(node)들의 집합(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 마디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마디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이 흐름은 리좀의 선(line)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자유가 훨씬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이퍼시의 구조는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무경계(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선(단선)의 횡포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선으로부터의 해방은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인간의 사고과정(思考過程)을 닮았다는 점에서는 기승전결의 논리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게 인식된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전통적인 시에서와 같이 메시지(주제, 관념)를 중시하지 않는다.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를 말할 수 없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리좀 이론과 관련된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하이퍼텍스트의 수평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rhizome)이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런 리좀 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들뤄즈와 가타리는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에는 이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리좀의 제시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통해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erogenity)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ania)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 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마디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하나의 마디를 관통하는 다양한 선들(이미지)과 그 선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원리 5,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마디(node)를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환유(기표, 이미지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하이퍼시에서 링크는 환유의 수평이동이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철학에서는 그에 대한 이해는 현대철학의 관문통과 의례라고도 한다.)   20세기 중엽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후기구조주의 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이가 이성에 환상을 개입시키는 작용을 함으로써 인간은 현실적인 면과 비현실적인 면을 공유하게 된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의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衆)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31    하이퍼시와 형이상시 댓글:  조회:4224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와 형이상시의 결합을 위한 시론試論                                                                                    심 상 운   1. 현대시에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요소는 예술적 감흥을 고양시키는 효과를 드러낸다. T. S.엘리엇은 문학평론
30    하이퍼시와 무의미시 댓글:  조회:4398  추천:0  2015-02-18
  하이퍼텍스트 시 들여다보기 - 심상운의                                                                      이 선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심상운,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전문     심상운의 시 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시 쓰기 방법을 모색한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새롭게 하였다. 아직 하이퍼텍스트 시론은 학계의 학문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고 더 연구하고 발전할 과제가 많지만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증명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하여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도 그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심상운의 시 에 나타난 하이퍼텍스트적 요소를 살펴보고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역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건너뛰기, 포기하기, 다른 텍스로의 이동’ 등 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텍스트를 검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한 편의 시 안에서 단어, 행, 연을 동시적으로 나열하여 한 공간에서 공존하게 한다.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맞게 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은 몽타쥬 기법을 쓰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였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작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으로 사건과 사실을 펼쳐 ‘보여주기’ 하고 있다. 그 그림에 색칠을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보다 자유로운 상상적 공간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독자는 가상현실의 플롯을 각각 다르게 상상하여 해석하고 감상한다.   ‘병원 응급실’, ‘냉동고의 찬밥’, ‘이집트 미라’는 평범한 듯 보이는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다. 세 개의 그림은 하이퍼텍스트의 리좀 이론에 따라 다양한 얼개를 가지고 그물망을 짠다. 1연, 2연, 3연 모두 각각의 객체이지만 또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1연의 ‘재희 아빠’는 2연의 중심 주제인 ‘밥’을 구하려고 피곤한 몸으로 일에 몰입하다 큰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또한 응급실의 ‘재희 아빠’는 통상적으로 병원 응급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장례식장,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3연의 ‘이집트 미라’인 고대 인간의 주검은 1, 2연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1, 2, 3연이 본질적 인간 생활과 일맥상통하며 연계된다. 동서양을 떠나서 남자는 기본적으로 가족부양이라는 가장의 책임을 떠맡고 있다. 이렇게 한 공간 안에서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링크되어 공존하면서 연상작용을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1연,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40대 사내’라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시는 출발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화하여 ‘보여주기’ 한다. 극한상황을 제시하여 사건을 구성한다. 그런데 2연에서 생뚱맞게 사물인 ‘밥’이 등장한다. 전혀 다른 이물질들의 결합이다. 병렬적 구조인 ‘사내’와 ‘밥’은 서로 내포적이거나 종속적이지 않으며 등가적이다. 그런데 그 밥은 정상적인 밥이 아니다.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이다. 마치 냉동고에 안치된 시체처럼 서늘한 기운이 나는 ‘찬밥’이다. 1연의 ‘사내’는 세상에서 ‘찬밥신세’로 살다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사내가 세상의 밥이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사내의 '밥‘이었을 수도 있다. 사내는 ‘재희 엄마’와 ‘재희’에겐 그들을 먹이는 밥일 수도 있다. 가족을 먹이려고 밥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다 응급실에 실려온 것이다.. ‘밥’은 냉동고에서 찜통으로 들어가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녹는다. 차갑고 어두운 기억이 응고된 밥.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는 밥의 가슴. 2연의 ‘밥’은 1연의 ‘사내’와 치환되어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 또한 고정적이지 않다. 자유롭게 독자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것이 사물시의 장점이다.   심상운 시에서의 ‘밥’은 무생물이 아닌, 생각과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얼어붙은 활유화된 밥이다. ‘밥’과 ‘사내’의 아픔을 병치시켜 사내의 극단적으로 어려웠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단순한 밥이 아니다. 이 ‘밥’은 먹을 수 있도록 녹기까지 상당히 복잡한 사연을 가진 밥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연은 ‘그’라는 3인칭을 써서 1연의 ‘사내’와 ‘그’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여지를 준다.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는 ‘그’는 전혀 1연과 다른 사내일 것이다. 2연의 ‘그’는 1연의 ‘사내’를 진찰하는 의사일 수도 있다. 의사는 사내를 찔러보며 관찰하고, 진찰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검진한다. 또 어쩌면 2연의 ‘그’는 관을 꺼내서 염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게 1연과 2연은 다초점, 다원화된 구조의 그물망을 짜서 독자에게 복잡한 리좀을 만들고 있다. ‘그’는 여러 정황적 상황과 상징성을 가지며 독자에게 상상력을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의미시보다 해석의 폭이 넓다. 이렇게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의 단선구조를 다선구조로 바꾸었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링크하여 관념에 묶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또한 그 상상력은 사실에서부터 출발한 객관화된 상상력이다.   그런데 3연은 1, 2연과 또 동떨어진 소재 ‘이집트 미라’가 등장한다. 1연과 2연과 3연은 각각 다른 이야기로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지금까지 연과 연이 결합하여 의미를 생산하던 시 쓰기 방법을 버리고 연과 연의 연결을 일부러 끊어버린다. 시적 거리가 먼 사물을 등장시켜 시적 논리와 질서를 파괴한다. 인간인 ‘사내’와 무생물인 ‘밥’, ‘사진’을 한 공간에 병렬 배치하여 같은 값을 준다. 지금까지 시의 연에서 이뤄지던 내포와 종속의 관계를 부정한다. 3연의 미라는 실제의 미라가 아니라 사진에서 본 ‘목관’ 속의 ‘미라’다. 고대의 숲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5월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닌다. ‘오전 11시’라는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현재성을 제공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다.   1연- 객관적 사실. 2연- 객관적 사물과 상상력. 독자를 연상작용으로 유도한다. 3연- 객관적 사물인 사진. 다시 사진에서 상상력을 더하여 현재로 이동. 심상운 시인은 거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보고 위의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시인은 벽에 걸린 이집트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면서 주검을 생각하고, 죽음은 병원응급실에 대한 심상운 시인의 사전지식인 기억과 만난다. 죽음은 다시 직업과 연결되고 직업은 밥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다. 단순한 이집트 미라 목관 사진 한 장이 병원, 밥을 연상작용으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또한 현재의 ‘새소리’를 등장시켜 화자인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온다. 흡사 영화의 회상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사진을 ‘본다’는 작은 사실에서 출발하여 ‘바라본다 - 관찰한다 - 상상한다 - 이야기를 조립한다 - 뼈대를 세운다 - 꾸민다’는 시적 발상과 완성까지, 시 쓰기의 전 과정을 심상운 시인은 여과 없이 시로써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눈을 감고 상상력의 가지를 뻗어 ‘무화과나무 목관- 무화과나무 숲- 숲에 사는 고대의 새-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새소리- 현대 청계산- 오전 11시의 화자인 나’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상을 한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사물에 같은 값을 주고 병렬 배치한다. 사진에서 생물과 사건이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상력의 줄기를 잡고 우주 끝까지 연상작용을 하는 상상력을 중시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논리성을 파괴하며 무의미를 추구한다. 논리를 버리고 의미찾기를 버린다. 연과 연의 연결고리를 일부러 끊어버린다. 연과 연의 지시, 명령을 받지 않은 언어는 상상력의 폭이 넓어져 독자는 감각적이며 청량한 정서적 미의식을 경험한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사물시의 본질, 사물에서 파생된 상징과 본질적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2연의 ‘밥’처럼, 밥이라는 사물은 일과 직업이라는 묵계된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찬밥’을 녹이는 과정은 ‘찬밥’이 아웃사이더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이된 것처럼 굳어버린 변형된 의미체계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또한 ‘병원 응급실’과 ‘미라’도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학습된 섬뜩한 무서운 이미지가 독자에게 연상작용을 하여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독자는 상상력의 범주를 넓혀 1, 2, 3연을 조합하여 극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민다. 스스로 사건을 구성하는 토대는 경험과 지식, 극적구조물을 짜는 능력에 따라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 시가 추구하는 텍스트의 명령과 지시, 패턴에 얽매이지 않는 시 감상의 매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무의미한 단어와 무의미한 사실들을 혼합시켜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보는 것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독립된 연과 단어를 나열하여 독자가 각기 다른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널브러져 있지만 서로 말을 하고 연관을 갖는다.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또한 시는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시를 새롭고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연과 연은 병렬배치 되어 있지만 각 연들은 서로 링크된다. 블록과 블록은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검색된다. 또한 각 연의 단어와 단어, 이미지와 이미지들도 병렬 배치되어 있지만 서로 링크된다. 모듈처럼 단어와 이미지, 사건들이 한 연 안에서 모자이크처럼 내밀한 구조로 연합되어 있다. 단어와 단어, 연과 연, 이미지와 이미지는 동시다발적 구도를 가지고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존적이며 주장적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 용어로서 한 개의 모티브를 검색하기 위해서 여러 번 클릭한다. 이 시의 화자는 ‘검붉은 색의 그림’을 클릭한다. 또한 디지털의 모자이크 기능처럼 ‘을지병원 응급실’이라는 절박한 상황과 ‘밤 12시 05분’이라는 시간을 클릭하고, ‘재희 아빠, 울고 있는 중년 여자,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를 클릭하여 모자이크 하여 빠르게 빤짝빤짝 보여주고 있다.   2연에서도 ‘허연 비닐봉지, 냉동고, 딱딱, 후끈후끈, 찜통, 얼굴, 가슴, 밥덩이, 수증기, 끈적끈적, 입김, 차갑고, 어둡고, 기억, 응고, 뼈, 가슴, 축축, 푸른, 옷, 가스레인지, 나무젓가락 등, 밥의 살, 찔러본다, 웃다’ 등 많은 명사와 형용사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3연에서는 ‘이집트, 미이라, 햇빛, 찬란, 꿈, 무화과나무, 목관, 사진, 고대 숲, 날다, 새,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 청계산, 숲, 오전 11시’ 등 시간, 사물, 공간, 시대를 짜깁기 하여 종적, 횡적으로 모자이크하였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추상화와 같다. 연과 연은 흩어져 있지만 전체로 집합된다. 단어와 단어는 모듈과 리좀으로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색깔이 섞인 구성과 같다. 그 구성의 덩어리들이 떠다니는 것이 연이다. 여러 개의 연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의 인상을 결정한다. 독자는 추상화를 일일이 색깔을 분석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전체적인 인상으로 감상한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황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유기체의 결합은 모자이크처럼 여러 색깔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의 그림 속에는 여러 개의 구성물과 색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일일이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 전체적인 상황으로 그림을 받아들인다. 즉 추상화는 감상자의 직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의성어와 의태어, 무의미한 단어 나열로 가볍다는 지적을 받았다. 의미를 추구하던 아날로그 시를 버리고 하이퍼텍스트 시가 무의미를 추구하면서 경박하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계속 받아왔다. 상황제시만 있지 인간 삶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없는 철학의 부재가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똑같은 형태의 시가 난립하여 개성적인 작품생산이 어렵고 자기 상표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름만 가리면 누구 작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단어 던지기는 어떤 단어로 대체하여도 되기 때문에 절실함과 진정성이 없다고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 반하여 심상운의 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실현하기 어려웠던 사유와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죽음’과 ‘병’, ‘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사유의 부재와 무작위 단어들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무의미한 이미지 나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진정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밥’이다. 또한 ‘밥’을 얻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다가 병과 죽음을 얻는다. 인간생활에서 죽음과 밥, 병이라는 테마는 ‘전쟁과 사랑’만큼 절실한 문제다. 인간이 영원히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예술의 테마다.   심상운은 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가 단어 던지기와 무의미 단어 나열로 가볍고 정신없다는 비난을 무력화시켰다. 위의 시는 여러 상황을 모자이크하여 보여주면서도 산만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질서정연한 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퍼 시의 문제점은 바로 그 파괴된 형태를 보여주는 시 쓰기를 실현하면서 보여주는 단어던지기와 무분별한 단어의 조합과 나열, 각각 다른 연의 ‘낯설게하기’ 기법이 무작위적으로 여러 편의 시를 생산했을 때 그 새로운 방법론이 시인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양산된 시가 과연 새로움을 가질 수 있는지, 창조성과 유일성, 철학을 가진 예술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이 새로운 문예사조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쓰여진 하이퍼텍스트 시로써 시론을 증명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필자를 포함하여 하이퍼텍스트 시를 쓴다고 주장하는 시인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29    문덕수와 심상운 댓글:  조회:4418  추천:0  2015-02-18
  심상운론 1 -‘하이퍼 시 14인집’(시문학 2010.11)을 중심으로   문덕수 (시인, 예술원 회원)   1. 심상운(沈相運)은 학업(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을 마친 후 을 통해 등단했다(1974). 대학 시절의 친구들인 신세훈, 배정웅과의 3인 시집인 (한겨레, 1978),(시문학사, 1981), (시문학사, 2002)을 상재했는데, 초기 작품에는 역사의식이 담긴 관념이 짙은 편이었지만, 모더니즘의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새로운 전위시 운동에 눈 뜬 때는 2006년 무렵인 것 같다. 사실상 하이퍼 시 운동의 우리시단의 최초의 시론집으로 볼 수 있는 (푸른사상, 2010)의 서문에 의하면, 오남구 주도의 의 동인지의 글 「디지털리즘」과 문덕수의 「사실, 생명, 현장」 등의 글에서 조금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 심상운은 하이퍼시 운동의 자리를 잡았다. 심상운(沈相運)의 초기시에는 “백두산이 보고 싶은 날은 술을 마신다⁄아무도 모르게 사발 가득⁄천지 맑은 물 떠올리며 혼자 마신다”(「고향산천 Ⅰ」)는 대목이 보인다. 또, ‘풀’을 보고 “낫질과 삽질⁄대학살이 지나간 뒤에도⁄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풀」)는 대목도 있다. 백두산 천지의 물을 술처럼(그는 술을 좋아하지만 폭주는 하지 않는다) 떠마시고 싶은 때가 있고, 지금까지 자신이 겪고 살아남은, 끔찍한 대학살의 지난 역사를 회상할 때도 있다. 이것은 모두 관념이다. 탈관념(脫觀念)을 가장 주창하는 그의 시에도 초기에는 이와 같이 벗어나야 할 관념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다른 시인의 경우도 대부분 그렇다) 이런 시에도 천지의 물을 “떠올리며 혼자 마신다”는 대목이 있고, 대학살의 역사를 회상하는 지난 현실과의 떨어진 “회상의 공간(거리)”이 있다. “천지의 물”이나 “학살의 역사공간”은 현재 실재하지 않는 시점에서 현실화 할 수 없고, 따라서 하이퍼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여기서 최근의 심상운의 하이퍼의 실험의 씨가 이미 그의 초기시에 배태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인기척 없는 빈 집 금간 흙벽엔 금실같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잡풀 돋아난 마당 그늘진 습지에선 지렁이가 배를 깔고 누워서 꿈틀거리고   배 터진 베개, 부서진 거울조각 누렇게 빛바랜 신문지와 달력 종이들이 제멋대로 널려 있는 마루 아래 양지바른 구석엔 짹 짹 짹 짹 귀를 맑게 씻어주는 새들의 소리   헌 군화(軍靴) 한짝 속에 둥지를 튼 산새 가족 어미를 기다리고 있는지 벌건 몸털 보송보송한 새끼들이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 거린다 -「햇빛 속의 빈집」(제4호, 2008. 11)   2. 위의 시는 심상운이 하이퍼 시 운동을 시작할 무렵 전후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작품과 함께 발표한 「길」(4호, 2008. 11)에는 “길이 1cm쯤 될까 말까한⁄배추벌레 한 마리가 ”(4연)와, “마추피추의 무너진 벽돌 계단 위에⁄노란 나비가 하늘하늘 날고 있다”(5연)가 한 작품 속에서 연 단위로 대응하여 구성되어 있다. 이 시는 이 무렵 바로 하이퍼의 세계로 진입했음을 말해준다. 참고로, 하이퍼 이외의 그의 시 몇 가지 특징을 요약해 보자.   첫째, 대상의 실재성이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그는 사물의 정확한 이미지 조형을 중시했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라는 주소는 이 시의 대상의 지리적 위치가 실재임을 증거한다. 둘째, 시의 대상이 상상세계가 아니라 현실적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햇빛 속의 빈 집”은 비현실적 가공(假空)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제시한다. 셋째, 이 시에는 빈 집이 겪은 어떤 역사성도 보인다. 베개, 거울조각, 신문지, 달력종이, 마루 아래의 사물들 등은 이 집의 생활역사의 관념들 자취다. 최근에는 페가가 늘고 있다. 따라서 하이퍼시가 역사주의를 배제하지 않음도, 이 시는 암시하고 있다. 넷째, 이 시의 각 연 단위로 배열된 대상은 이 시인이 추구하는 하이퍼성의 특징을 암시한다. 햇빛 속의 빈 집이라고 제목을 확정한 윤곽 속에 편입될 수 있는 각 연의 이미지들은, 그렇게 하여 한 작품으로서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으나, 또 한편 코드가 같은 모듈(module)처럼 독립한 이미지의 구조임도 암시한다.   3. 시 「햇빛 속의 빈 집」이 지닌, 앞서 열거한 둘째 특질을 좀 더 설명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 특질이란 ‘현실적 가능성’이다. 하이퍼 성의 중심 특질로서 ‘상상적 가능’과 대응되는 개념은 바로 ‘현실적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하이퍼의 논의에서 특히 중요시 되는 키워드다. 상상과 현실은 하이퍼와 하이퍼 아닌 세계와의 경계선이 된다.   길이 1cm쯤 될까 말까한 배추 벌레 한 마리가   퍼런 배추 잎 위로 배멀이하며 올라가고 있다……(1, 2연) > 마추피추의 무너진 벽돌 계단 위에 노란 나비가 하늘하늘 날고 있다(6연, 종연) —「길」에서   1연, 2연이 갖는 ‘현실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종연(6연)에 있다. 6연은 스페인이 침공하기 이전의, 마추피추(Machu Picchu) 성새(城塞)의 역사를 담고 있다. 배추벌레에 대한 체험도 한 시간 전인지, 하루 전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어쨌든 과거의 경험이고, 마추피추 성새의 역사는 직접 관광한 것인지 책에서 읽은 것인지, 어쨌든 배추벌레의 체험보다 훨씬 이전의 일인 듯하다. 여기서 시의 ‘이미지’란 “현전(現前)하는 실재성(實在性)이 아니라 지나간 과거의 심적(心的)인 이미지, 즉 부재(不在)의 대상에 대한 언어적 상상적 대리물”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르트르(1905~1980)의 견해다. 사르트르는 지각(知覺)과 상상(想像)을 구별해서 본다. 일반적으로, 지각은 감각기관에의 자극을 통하여 얻게 된 정보를 토대로 외계의 대상의 성질․형태․관계 및 신체 내부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작용이라고 하고, 상상은 현전의 지각에 나타나지 않는 부재의 사물을 마음에 떠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눈앞에 있는 장미를 육안(肉眼)으로 볼 때 그 장미를 지각한다고 할 수 있지만, 하루 쯤(또는 몇 시간 쯤) 지나거나 눈을 감고 그 장미를 마음속에 떠올려 지각할 때 ‘상상’이라고 한다. 도대체 현전(現前)의 지각이나 현전의 실재라고 할 때, 그 현전은 육안으로 관찰이 끝난 때부터 몇 분 몇 초 동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물을 눈으로 직접 보고, 직접 보려고 눈을 뜨나 그 사물이 부재일 때의 사이의 시간은 얼마인가 하는 문제는 물리학만의 영역일까. 그런데 앞에 든 시에서 우리가 ‘상상’으로 간주한 “퍼런 배추 잎 위로⁄배밀이하여 올라가고 있다”의 대목을 보면 감각기관과는 관계없는 상상인 이 대목도 감각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상상 속에는 감각적 부분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퍼런 배추 잎”을 시각으로 보고 “배밀이하여 올라가고 있다”는 촉각 또는 운동감각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언급은 상상에도 감각 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image와 imagination이 같은 어원이라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4. 심상운 시에서 사물의 객관적 묘사 즉 사생(寫生)을 볼 수 있다. 사물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실재하는 것 같은 생동감을 준다면, 이는 실재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하이퍼시와는 거리가 멀다. “말(馬)이 하늘을 날아간다”든지, “삼각형(三角形)이 분노의 불을 뿜고 있다”와 같은 하이퍼적 시행에는 현실성이 없고, 현실과 비교해서 보면 오히려 허위성(虛僞性)이 두드러진다. 하이퍼적 기호시에는 이러한 허구나 허상(虛像)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이런 점에서 하이퍼성은 진리나 진실 탐구의 역효(逆効)를 강조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우리가 하이퍼 시를 긍정하고 현대시의 전위적 실험을 긍정하는 이유는, 하이퍼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떠받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이퍼와 실재(實在)를 대비하고, 그 역설을 강조하며, 그러한 파라독스를 통해서 진실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기호는 거짓말하는 능력 외에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있다. 기호는 진실과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이중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호는 저주이자 축복이다. 기호가 갖는 이 역설(paradox)은 중요한 이원론적 진리(binarism)를 내포하고 있다.”(김경용 2007, 37쪽) 이런 점을 이해한다면, 심상운이 사물의 사생의 정확성을 중시하는 그 이유도 진실 인식의 한 방법임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사생이 느슨해져 구조의 견고성을 도리어 조금 연약하게 만드는 불가피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이 점은 심상운시의 약점이다) 사생 부분을 늘어뜨려 편입하는 것은 하이퍼시가 갖는 ‘역설’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런데, 배추벌레의 배밀이와 마추피추 성새는 연(聯)을 달리하여 대응하고 있으나,(이것을 모듈이니 리좀이니 말하나 이러한 단위는 센텐스와 센텐스 사이에도 대응할 수 있고, 한 센텐스 안에서 주부와 술부로서도 대응하여, 구성될 수 있다. ) 이와 같이 시의 하이퍼 성은 작품의 요소요소에서 잠복하여 ‘현실과 비현실’, ‘현실과 상상’의 두 다른 세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면서 공존한다.   파란 옷을 입은 아이가 꿈 속에서 가지고 나온 듯한 빨간 공을 길바닥에 굴리며 놀고 있다. 공은 반짝이며 굴러가고 아이는 공을 쫓아 소리지르며 뛰어간다. ……………………   긴 사다리를 허공에 설치하고 구름 위로 올라가는 TV 속 사내가 당신을 유혹한다고요? 그래서 당신도 파란 옷의 아이처럼 빌딩과 빌딩을 휙휙 건너뛰고 싶을 때가 있다고요? 오늘도 꿈 속에서 본 “빨간 공을 찾아서 뛰어다니다가 빌딩 옥상 구석에 누워서 10월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고요?……… -「공과 아이」( 2010. 11)에서   이 작품과 함께 발표한 「구멍 탐색」( 2010. 11)도 비슷한 구조의 하이퍼시다. “꿈 속에서 가지고 나온 듯한 빨간 공”이나 “꿈 속에서 본 빨간 공” 등, ‘공’이라는 이미지가 1연과 2연에 배치되어 연결하고 있으나, 1연은 천진난만한 공놀이 장면이고, 2연은 순수한 인간의 정서들이 점철(點綴)되어 있어서, 두 연 사이엔 그다지 먼 거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이퍼시로서는 좀 어떨까 하는 기우도 없지 않다. 배추벌레의 배밀이와 마추피추 사이의 거리가 훨씬 하이퍼성을 더 강화하지 않는가 생각된다.(이 거리는 하이퍼 시의 결정적 열쇠가 된다.) 이 작품과 함께 발표한 「구멍 탐색」은 4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쓰러진 나무의 구멍 속에서 떠오른 물방울(1연), 맥주 마시기의 황홀한 탐색과 존재의 근원인 구멍(2연), 산의 토굴인 구멍 속의 탐험(3연), 연통청소와 아내에의 메시지(4연)로 구성된 이 시의 각 연은, ‘구멍’이라는 상징 이미지가 연결과 통일감을 주는 열쇠 역할을 하고 있다.(물론 이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든다.) 각 연의 단위끼리가 멀고 그 사이에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사이의 연결을 암시하는 어떤 이미지 같은 것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런 필요성에 몰려 어떤 사물 이미지를 내세우면 도리어 연 단위와 연 단위 사이의 긴장이나 이질적 적대적 갈등이나 통합감을 줄이는 역할도 하게 된다. 이러한 고리 역할을 하는 이미지가 강화되면 하이퍼시의 실험은 효과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어쨌든, 이러한 단위를 module이라고도 하고 rhizome이라고도 하는 이가 있으나 모두 이러한 단위(unite)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단위는 연, 센텐스 등에 두루 보인다.) 그런데 배추벌레의 배밀이와 마추피추의 병치에서 보는 이 하이퍼성의 극대화 조치는 다른 하이퍼성을 지향하는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8    하이퍼시는 單線에서 多線에로... 댓글:  조회:4672  추천:0  2015-02-18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 21세기 ‘하이퍼 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 상 운 (시인)     1.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1908년 잡지 에 발표된 최남선의‘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시발점으로 출발한 한국의 현대시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경제건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면서 시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현대시는 시대적 이념의 시, 개인적 서정시에서 전통적 서정시, 사회계층에 대한 시, 모더니즘의 예술적 감각의 시, 주지적 관념의 시, 언어실험 시 등 시대적 사회적 예술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시의 공간을 대폭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민조시(신세훈),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공연시(신규호), 디카시(이상옥) 등 새로운 시의 형태를 정립하고 있다. 현대시의 이런 변화 속에는‘전통 언어의 계승과 변화’(민조시),‘언어와 실체의 관계’,‘시와 독자의 소통문제’(디지털 시, 공연시, 디카시) 등이 들어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와‘시의 구조(構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설정은 중요성을 더 한다. 20세기 한국 현대시들은 시의 구조에서 공통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단선구조의 시는 시의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 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말한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전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전문   이 두 편의 시 속에는 인물(눈먼 처녀, 내 누님)이 들어 있지만 그 인물들은 시의 시점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박목월의 속의 눈먼 처녀는 시적 화자(詩的 話者)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눈 먼 처녀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정서는 화자(시인)의 주관적 인식과 감성의 표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화자와 처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 된다면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가능해 질 것 같다. 서정주의 속의‘내 누님’은 비유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단일시점으로 고정된 화자의 사유와 감성에 더 밀접해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독립적인 면이 박목월의 의 눈 먼 처녀보다 약하다. 작품 예시는 안했지만“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시 속에‘그’라는 인물을 삽입하여 정서를 객관화시키고자 했던 유치환의 도 단일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런 단선구조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현대시의 고정된 틀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시의 정체(正體)도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 표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향의 나 문덕수의 와 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라는 단선구조의 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전문     남쪽 북쪽의 불벼락을 맞아 지붕 기왓장 문짝 모두 휴지처럼 날려가버린 유령이네 반세기를 앓는 벽은 3층 윤곽만 남았네 태극기 인공기 번갈아 내걸려 펄럭이었을 그날의 불먼지, 벽귀퉁에서 시나브로 날려 떨어지는 문틈에는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 꽃 피네   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 나비 앉네 ----문덕수 < 철원군 노동당 당사> 전문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선비화禪扉花로 피었다는 설화가 있음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어 벽에 걸어 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 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새기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 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녹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 개 씩 들고 몰려온다 -----문덕수 전문     조향과 문덕수 시의 공통점은‘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들은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 즉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해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조향의 는 연결고리(링크)의 기능이 형성되지 않은 단순 이미지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와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문덕수의 는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사실적 이미지 + 난해한 이미지) 즉 의식의 중층구조를 통해서 다선구조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의식의 중층구조는 이 시의 끝부분 에서“꽃 피네”와 “선비화에 나비 앉네”의 링크(link)가 만들어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꽃 피네”에 링크하여 “선비화에 나비 앉네”로 건너뛰는 의식의 비약이 현실을 초월하는 하이퍼(hyper)인 것이다. 에서는 마릴린 몬로의 다양한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서 현대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욕망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의 환유(換喩)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논리적 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도 “마릴린 몬로”는 연결고리(링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 속에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단선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향과 문덕수가 시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의 탈출은 그들의 시에서 의미의 단절 또는 의미로부터 해방과 함께 시의 공간이동을 보여준다. 이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계에서 형이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 결합 방식은 김춘수의‘무의미 시’의 기법과는 다른‘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여야 하는 시의 정체(正體)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기법의 제시다. 따라서 언어의 링크 기능을 통한 하이퍼(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는 문덕수의 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여는‘디지털 시 또는 하이퍼 시’의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2. 21세기의 한국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운동‘디지털 시’또는‘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시의 정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어려웠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 공간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사이버(cyber)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이버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개인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공간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의미의 예술’에서‘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20세기의 단선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서 21세기적인 다선구조의 틀을 세우려는 ‘하이퍼 시 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하이퍼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를 거부하고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이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따라서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선후(先後)가 없으며,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리좀의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 시다. 그러나 전자 하이퍼 시가 아닌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문자 하이퍼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문자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문덕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에서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줍니다.” 라고  이미지 세계(시)와 가상현실 세계(컴퓨터)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종이 하이퍼텍스트 시(하이퍼시) 이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 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李箱),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 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 화자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나’라면 제2 제 3의 화자는‘너‘와‘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층 시점에서 3인층 시점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 (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위에 예시한 와 는 하이브리드 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만이 아닌 ‘너’나 ‘그’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형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바뀌게 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나’와 일반 서정시의‘나’는 입장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에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 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 심상운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  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              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             락을 추적해 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회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             으로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 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나’와‘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                     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                    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                    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이다.                       4.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3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 시는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사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reterritorialization)를 만들어 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 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가상현실의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 시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 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와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확장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선택과 집중’‘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가상현실의 세계’라는 디지털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 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27    하이퍼시에서 상상, 공상 댓글:  조회:4116  추천:0  2015-02-18
하이퍼 시에서 상상과 공상 그리고 정서의 문제                                                                                                             심 상 운             1. 상상과 공상     공상(空想) 또는 몽상(夢想)으로 번역되는 Fancy는 상상(imagination)에 비해 문학 창작의 능력으로서 낮은 평가를 받아 왔다. 19세기 영국의 문예비평가 콜리지(Coleridge)는 그 이유를 “Fancy는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된 기억의 한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바탕에는 문학작품이 갖추어야 할 의도적 질서(목적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들어 있다.     상상력은 이성적인 사고능력의 한 부분에 속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의적 생각을 발생시키는 능력을 보유한다. 따라서 상상은 기억의 재생,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감각적 생기, 연상 작용, 등으로 시의 영역을 확대하고 시를 습관적인 관성에서 이탈하게 하지만 실재성에 기초를 둔 엄숙한 사상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공상은 이성적 사고능력의 밖에서 해방된 공간을 형성한다. 그래서 공상은 자의적이고 비현실적이고 허황하지만 상상이 안고 있는 엄숙한 사상성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어서 유희성, 변화성, 경쾌성이라는 매력을 시에 부여하고 새로운 감각을 독자들이 즐기게 한다. 이것이 상상과 공상의 차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공상을 근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를 발명하게 한 상상의 시초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자유로운 공상을 펼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베른 (Jules Verne 1828. 2. 8 프랑스 낭트~1905. 3. 24)이 고안해낸 잠수함 노티러스 호는 당시에는 공상과학(空想科學) 소설 의 소재였지만 20세기에는 원자력에 의해서 현실화된 잠수함이라는 것도 공상과 상상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공상이 상상의 원천이 되는 이유는 공상이 상상보다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나 관념의 굴레에서 훨씬 자유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위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고(思考) 작용으로서의 상상력과 아무런 의도성이 없이 아무 것이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의 가지나 줄기가 자유롭게 이어지고 벋어나게 내버려두는 공상이 현대시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활용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적인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Coleridge)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假想空間)을 제공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 추리 작용(推理作用)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자율적 공간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함으로써 시 속에 새로운 자유의 공간을 형성한다.     인조수지나무에 종이컵이 난쟁이 고깔처럼 조랑조랑 과일들 맺어 풍성이 영글면 다 따서 담아 주스라도 빚을 듯이 종이컵 하나 따서 길바닥에 던져 구둣발로 꾹 밟고 눌러 본다 빈 알루미늄 깡통처럼 쭈그러지면서 한마디 꽥소리 없다 이리저리 굴리고 뭉쳐 손아귀로 꼭 쥐어 본다 오렌지 커피 녹차 혹은 그런 갈증과는 아예 관련이 없다 이 빈 기도 속에 지구地球 만한 풍선꿈이 들어앉는다. -문덕수 「종이컵」전문     문덕수의「종이컵」은 시인의 창조적인 상상의 밑바탕에 자유분방한 공상의 영역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조수지나무의 종이컵에서 “이 빈 기도 속에/ 지구地球 만한 풍선꿈이 들어앉는다”에 이르기까지의 자유롭고 유희적인 시인의 행위에는 현실적인 어떤 목적의식이나 논리적 인과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변화 속에서 미적 쾌감과 충격적인 의미가 살아나고 있다.   하이퍼시는 한국현대시를 오래 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單線構造)의 틀을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정적(靜的) 이미지를 동적(動的) 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編輯者)로, 고정된 관념(觀念)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想像)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感覺)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21세기 한국현대시의 개혁운동이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중심은 연상을 매개로한 창조적 상상일 수밖에 없다. 이 창조적 상상의 밑바탕에는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공상이 들어있다.     높은 빌딩 위 전광판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가 운반되고 있다. 경례하는 미국 대통령의 확대된 모습     사이에서 나는 짙푸른 오이를 꺾어 한 입 힘차게 베어 문다. 입안에 푸른 피가 철철 흐른다. -신규호 「풍경․1」2 전문     신규호의 하이퍼시「풍경․1」2에는 두 개의 풍경이 병치되어 결합돼 있다. 이 두 풍경에는 어떤 유사함도 없다. 오히려 대조적이다. 따라서 두 이미지의 충돌 감각이 미적 쾌감을 일으킨다. 그것은 죽음을 대하는 시 속의 캐릭터의 행위에서 찾아진다. 엄숙한 의식(儀式)의 공간을 보는 장면에서 입안에 철철 흐르는 오이의 푸른 피를 보여주는 행위는 공상에서 솟아나는 퍼포먼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유희성의 표출이다. 그것은 하이퍼 시가 감각적 순수 이미지로 보여주려는 정서와 암시적인 사유공간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재서는「문학원론」에서 상상을 문학 작품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공상을 배척하지 않고 옹호하고 있다.     상상은 어디까지나 실재성에 기초를 두니까 엄숙하지만, 공상은 자의적이나까 비현실적이다. 문학에서 상상이 존중되고 공상이 매양 배척을 받는 것은 그럴 법도 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이 상상적이고 무엇이 공상적이냐 하는 문제는 무엇이 실제적이고 무엇이 비현실적이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 비평의 가장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여기서는 그런 논쟁적인 문제를 불문에 부치고, 다만 공상이 문학에서 차지할 수 있는 정당한 지위를 지적해 두려한다. 첫째로 공상은 그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으로 말미암아 문체의 장식적 요소가 된다. 인생은 엄숙한 것이지만, 이런 것까지도 버린다는 것은 퓨리턴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로 극이다. 희극에서처럼 공상의 매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일이 없다. 우리는 과 같은 상상의 문학을 존중하는 반면에 같은 공상의 문학도 즐겨할 줄 안다. 심지어 이나 에서처럼 상상과 공상이 교착하는 문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매력을 느낀다. 이들 작품은 현실과 이상을 대조하고 상상과 현실과 이상을 교체함으로써 실재감을 더욱 감명 깊게 하기 때문이다. -최재서「문학원론」14장 상상(2) 3. Fancy와 Wit에서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상상과 공상이 뒤섞여서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을 즐기고 거기서 다른 갈래의 실재성의 근원을 발견한다. 여기에 하이퍼시의 공상이형성하는 다양한 이미지 세계의 당위성이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에 더 기울게 된다.         2. 정서의 문제     공상을 하이퍼 시의 바탕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관념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공상이 시인의 정서와 어떻게 결합되느냐 하는 것이다. 정서는 시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공상과 정서의 결합여부는 시의 생명을 좌우하게 된다. 그 예는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서의 결핍이다. 초현실주의 시들은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새로움을 주지만, 시인의 내적의식의 흐름이 시 전체에 혈관조직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동일성이 결여되고, 한 편의 시가 파편화된 이미지의 나열 또는 집합형식에 머물고 말기 때문에 시적 감동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비합리적이고 무목적의 순수공상(탈-관념)으로 형성되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속에 시인의 정서를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시인의 무한한 공상 속에 축축한 수분의 정서를 넣어서 시의 이미지를 수목처럼 싱싱한 생명체로 만들어 내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은 정서의 실체를 밝히는 일이다. 독일의 미학자인 게르노트 뵈메(Gernot Bohme)는 “정서를 대상과 주체 사이에 발생하는 분위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전의 해석을 빌리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이) “사물에 부딪쳐 일어나는 온갖 감정”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비교적 약하고 장시간 계속되는 정취(情趣)와 구분한다. 정서는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된다는 점에서 정동(情動)이라고도 한다. 희노애락(喜怒哀樂)·애증(愛憎)·공포·쾌고(快苦) 등이 정서이며, 의식적으로는 강한 감정이 중심이 되며, 신체적으로는 내장적(內臟的)인 생활기능의 변화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를 요약하면, 정서는 인간이 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인간의 내적감정이 일으키는 심리적인 에너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게르노트 뵈메의 분위기(atmosphere)라는 정의는 정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는 정서에는 분위기만 아니라 행동의 직접적 계기가 되는 심리적 에너지가 들어 있는 것을 간과한 것 같다.     정서의 심리적 현상은 강한 폭발력을 내재하고 있으며, 그 내재된 폭발력은 서정시에서 감동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정서가 제거된 이성적인 주지시보다 이성이 약화된 정서 위주의 서정시가 독자들을 더 유인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지성을 중시하는 현대시에서도 정서가 사물이나 지적 사유보다 강하게 인식되는 이유다. 그것은 대중가요의 흡인력과 같다. 특히 이성적인 논리성보다 인정과 눈물에 더 치우치는 감성적인 한국인들에게는 시에서 이성적인 것보다 정서적인 것이 더 평가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서의 발생은 주체의 내적감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집단적 감정도 정서 발생의 원인이 되지만 정서의 대부분은 대상과 주체의 심리적인 상태의 관계에 의해서 발생한다. 따라서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감정이 표현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서정시의 시점이 1인칭시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주체인 ‘나’ 또는 ‘우리’의 감정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의 특성을 하이퍼 시에서 어떻게 담아내어야 하는가? 하이퍼 시는 주체(화자)의 일방적인 정서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서정시가 아니기 때문에 새롭고 독특한 방법이 요구된다.     다음 글은 월간 「시문학」2009년 3월호 신진과 조명제 시인의 대담 ‘하이퍼 시의 가능성’에서 발췌한 것이다.     신진: 하이퍼 시는 원칙적으로 허구를 제시하되 그 세계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독자로 하여금 나름의 현실을 재구성하게 하는 시뮬라시옹의 시라 할 것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전제와 확신에도 갇히지 않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양식이며 이 논리의 골격은 리좀(rhizome)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쉬임없이 변화하는 모든 사물의 상호연관성이란 뜻으로 쓴 리좀은 원래 식물학적인 용어로 줄기와 뿌리가 같이 이어져 땅속으로 뻗어나는 줄기를 뜻하며, 스스로 뿌리이기도 한 식물을 가리킵니다. 시작도 끝도 아니고, 언제나 중간에 있으면서 접속 가능한 모든 차원과 접속될 수 있는, 복잡한 상호연관성의 지도를 만들어가는, 깨어지고 부수어지며 재생하는 반계보학적 네트워크입니다.     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시학을 포용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2차원의 종이텍스트를 언제나 유동적인 4차원의 사이버 공간까지 확대한다는 하이퍼 시 동인의 논리에 부합합니다. 심상운 시인의 시를 한 편 들겠습니다.     7월 아침나절 갑자기 쏟아지는 비   한낮의 아프리카 대평원엔 피범벅이 된 사자의 입과 사슴의 붉은 살덩이가 내뿜는 싱싱한 비린내   6월의 태양 아래 이글이글 벌어지는 초원의 잔치!     나는 TV에서 가슴 떨리는 아프리카 생태계를 보다가 식탁의자에 앉아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우쩍우쩍 씹는다.     그때 휴대폰을 울리는 그녀의 가쁜 목소리   그녀는 여름비의 유혹이 참을 수 없어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굵고 기운찬 빗줄기에 온몸 부르르 떠는 녹색 가로수들이 제각기 잎사귈 퍼덕이며 소리치는 도로를 지나 녹색의 광기를 한껏 즐기고 있는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 ―심상운 「녹색전율」     인과(因果)의 틀을 벗어나 나열되는 이미지들이 상호 연계되면서 리좀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7월 아침의 비와 6월의 초원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사투, 식탁에 앉아 우적우적 씹는 방울토마토, 휴대폰을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는 역동적인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하이퍼 실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오남구 시인의 시도 한 편 들어봅시다.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 불그스레 실눈을 뜬 쪽달이 베갯잇 속으로 미끄러진다. 베갯잇의 조각보에 꿈오라기 오락가락 청-백-적-흑-황 지금 신행 온 딸아이가 베고 있다. 꾸륵 꾸륵 흑두루미가 철원하늘을 날아간다. 오르르∼ 신부가 떠는 입춘에 나뭇가지에서 오락가락 햇살 따뜻한 에너지가 스민다. 꿈틀 꿈틀 망울이 가렵고 겨드랑이가 가렵다. 거울 속에 팝콘 같이 흰 철쭉 꽃망울이 터진다. ―오남구 「입춘詩」전문     서두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에서부터 표준 어법을 이탈하고 있고, 한 마디의 서술 없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 있던 이미지들을 나열하여 연결함으로써 입춘의 추상을 구체화 하고 있습니다. 시의 길이에 비해 움직임이 큰 동사와 형용사,‘오락가락, 꾸륵 꾸륵, 오르르∼, 꿈틀 꿈틀’ 등과 같은 의성어, 의태어를 빈번하게 사용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은 특히 오남구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명제: 김규화의「매미소리」의 방법적 특질은 화자가 강의를 듣고 나오면서 ‘미륵론’의 환청처럼 들리는 매미소리와 그 울음의 유사성으로 하여 연상되는 염소 울음소리, 심지어 기차를 놓친 과거 어느 날 떠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마저 맹랑한 매미소리로 환치 혼융된 감각적 변용에 있어 보입니다.‘미륵’과 ‘매미’는 ‘미’라는 기표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기의에는 유사성이 전연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강의의 잔상효과와 ‘미륵’/‘매미’ 두 말이 지닌 기표의 유사성만으로 그 관련성을 맺어 줍니다.   역사박물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 마당 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미륵 미륵 미륵,미르 미르 미르 르르르 사정한다   염소에게서 배웠나,매해해 얌얌 염소 입술을 뾰죽이 내밀어 매매매 하는 그그그 미 매 하는 미,매미이이이를   플랫폼에 혼자 두고 가는 기차가 소리 한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     맴맴맴 매애애 매앵매앵 앵앵앵 미잉미잉 잉잉잉 ―김규화의 「매미소리」 전문     매미소리는 매미의 언어로서 어떤 의미신호가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의 귀에는 그저 카랑한 울음소리의 기표만 들릴 뿐이지요. 우리가 노승의 독경소리를 들을 때 그 의미는 전연 알지 못하면서도 그 유려한 독경소리 자체에 매료되어 열복(悅福)을 느끼는 절대 순수의 순간처럼 매미소리의 시니피앙 속으로 빠져들어 추억과 환상의 절대적 세계를 맛보게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퍼 시는 일반적 서정시들의 대상과 주체의 밀착에서 벗어나 대상과 주체와의 간격을 중요시 한다. 그 간격은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것이 링크(연결고리)다. 링크로 연결된 이미지의 내면에는 어떤 의도성이나 목적성이 가미되지 않은 시인의 ‘순수한 의식의 흐름’이 들어 있으며, 그 의식의 흐름 속에는 주체의 정서가 들어 있다. 이 정서는 기계 속의 윤활유와 같이 시간과 공간, 사물과 사물을 서로 부드럽게 연결하여 이미지의 세계에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 흐름의 정서 속에서는 신선한 감각의 공간이 열린다. 그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캐릭터의 퍼포먼스 같은 행위는 주체의 정서를 드러내는 감각적 행위가 된다. 앞에서 예시한 신규호의 풍경․1」2에서 보여주는 캐릭터의 입 안에 철철 흐르는 오이의 푸른 피, 심상운의「녹색 전율」에서 빨간 방울토마토를 우쩍우쩍 씹는 행위,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가 환기시키는 감각적인 이고 원시적 본능의 정서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오남구의「입춘詩」에서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던 이미지의 돌출, 의태어와 의성어가 빚어내는 동적인 감각, 김규화의「매미소리」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순수한 청각 시니피앙은 대상과 주체(시인) 사이의 공간과 시인의 내면 의식의 흐름이 어우러져서 형성된 감각적인 정서의 표출로 인식된다.   정서는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감성의 현상이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시인의 주관을 제로상태로 줄일 때 객관화 되어서 드러난다. 따라서 하이퍼 시의 정서는 일반적 서정시의 정서와 같이 어느 한 쪽으로 경도된 주체의 정서가 아니라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는 탈-관념된 정서가 된다. 그 정서는 노출된 정서가 아니라 이미지 속에 내장된 정서라는 데 특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하이퍼 시에서 주체의 정서를 담아내는 방법은 이미지의 병치와 대립, 연상적 이미지의 전개, 무의식 속의 환상, 자유분방한 유희적 퍼포먼스, 불연속적인 시간과 공간의 결합, 펀(pun)의 삽입을 통한 변화 등 엄숙한 사상성에서 벗어난 정서의 다양한 감각화와 순수한 의식의 흐름을 경쾌하고 자연스럽게 시 전체에 흐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6    하이퍼시와 탈관념과 상상 이미지 댓글:  조회:3959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의 구조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무엇이냐?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 두 단위의 초월 관계를 연결하여 완성한 시다                                                                                      문 덕 수     [1] 가끔 하이퍼시란 무엇이냐고 묻는 시인들이 의외에도 많습니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 중에도 그렇게 묻는 이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우나,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두 단위의 구조를 이룹니다. 결국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점으로 귀결되고, 그 두 단위를 연결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말에 ‘비근’(卑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상하거나 웅승깊지 아니하고 주변에 가깝게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하이퍼시는 비근한 사물을 묘사하여 A단위를 먼저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즉 ‘이성’(理性)이나 ‘정의’나 ‘선(善)’이나 하는 말이 아니라, 즉 관념이 아닌, 우리 주변에 가깝고 낮은 모든 사물들(집, 부엌, 그릇, 호미, 쟁기, 나무, 펜, 그릇, 종이 등)을 가지고 묘사하여 시를 쓰라는 것입니다. 영어에 ‘아우트리치’(outreach)라는 말이 있습니다. “팔을 뻗는다”는 뜻입니다만 동시에 팔을 뻗은 범위 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곧 비근한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 팔을 뻗어 그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이 비근한 사물입니다. 즉 하이퍼시란 ‘아우트리치의 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탈관념 사물과 상상 이미지가 연결된 구조의 시라는 것이 제일 정확한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이퍼시를 쓰기 위해 칸트나 사르트르 같은 위대한 철학적 저서를 읽기 위해 인공위성을 탈 필요가 없습니다. 장자나 맹자나 불교학자인 용수(龍樹, Nagrhuna, 150~250)의 저서인 「중론」(中論)을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물론 읽으면 더 좋지요) 지금은 아득히 높고 먼 시대가 아니라 아주 낮고 가까운 시대입니다. 즉 아우트리치의 시대입니다. 아우트리치의 시대에는 아우트리치의 시를 써야 하겠습니다. 아우트리치의 사물로 하이퍼의 A단위를 만들고, 그 다음에 상상세계의 이미지로 B단위를 만들어 연결함으로써 완성해야 합니다. A단위와 B단위의 연결을 ‘초월’(超越)이라고 합니다. A와 B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나 그 사이에 함부로 뛰어 오르거나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닌 ‘갭’(gap)이 있으므로 ‘초월’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2] 하이퍼 시는 표현에 있어서 설명보다(특히 관념적 설명보다) 묘사(描寫)를 더 강조합니다. 묘사에는 암시적 묘사(suggestive description)를 중시하고, 설명적․기술적 묘사(technical or expository description)도 섞어 쓰기도 합니다만(문덕수 지음, 『문장강의』, 시문학사, 1994) 암시적 묘사를 더 중시합니다. 또 객관적 묘사보다 주관적 묘사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먼저 객관적 묘사의 실례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사십이 가까운 처녀인 그는 죽은깨 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시들고 꺼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공팍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 겹 주름이 잡힌 벗겨진 이마라든지, 숱이 적어서 맘대로 쪽지거나 틀어올리지 못하고 엉성하게 그냥 벗겨 넘긴 머리꼬리나 뒤통수의 틈에 염소 똥만 하게 붙은 것이라든지... -현진건 「B사감과 러브레터」에서     전체적으로 또는 당시의 시조적 입장에서는 객관적 묘사입니다만, 그러나 관찰자의 심리적 반영이 도처에 나타나 있어서 객관 묘사와 주관적 묘사가 섞여 있다고 하겠습니다.     [A] 매력적인 케이프 코드(Cape Cod)의 별장, 큰 거실(13×25), 매듭무늬 소나무 모양이며 돌로 된 벽난로, 햇볕이 잘 들어오는 식당(12×14), 작은 서재, 현대식 전기 스토브, 개스 냉장고, 접시 닦는 기계가 있는 부엌(모두 실제로 새것임)...     [B] 만추는 햇살이 만든다. 햇볕이 나면 풀과 나무가 활짝 꽃피며 웃다가 해만 구름에 가리면 금방 시무룩하니 몸을 움츠린다. 코를 찌르던 여름의 풀냄새는 없고 산에는 마른 풀 향기가 희미하게 떠돈다 -진웅기의 「가을풀」에서     [A]는 설명적·기술적 묘사문이고, [B]는 암시적 묘사문입니다. 한 가지 더 들겠습니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피 떨어지는 누우 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심상운, 「파란의자」에서)는 객관묘사이면서 주관적 인상(印象)을 강조한 글입니다. 설명적 묘사와 암시적 묘사를 구별하는 것은 인상을 얼마만큼 강조했느냐 하는 점에 있습니다. 심상운의 대부분은 암시적 묘사입니다.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선생의 두 권 시집(『정지용시집』과 『백록담』)의 시는 대부분 암시적 묘사로 되어 있습니다.     [3] 하이퍼시는 단위(unit)를 모아 구성됩니다. 연(聯)이나 절(節), 리좀 덩어리 등과 구별하여 ‘단위’라고 부르는 것이 편리하고 좋겠습니다.     들판에서 순산한 어머니는 탯줄을 짚으로 묶고 이빨로 끊었단다. -김기덕, 「끈 자르기」에서     김기덕의 「끈자르기」라는 하이퍼 시의 제1 단위입니다. 센텐스 하나로서 한 단위를 이루고 있습니다. 굉장히 짧습니다. 이 첫 단위 다음에 다섯 개의 단위가 연속되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하수 흐르는 밤의 자궁 속에서 별들이 태어나는 밤, 또 유성 하나 푸른 목숨 줄을 끊는다”라는 마지막 단위가 끝맺음으로 접속됩니다. 이 단위도 한 센텐스로 이루어져 짧습니다. 들에서 일하다가 순산한 어머니와, 은하수의 자궁 속에서의 별(천체) 탄생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탄생과 별(천체)의 탄생이 우주적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A] 길이 1cm 쯤 될까 말까 한 배추벌레 한 마리가     [A-1] 파란 배추 잎 위로 배밀이하며 올라가고 있다(....)     [B] 마추픽추의 무너진 돌계단 위에 노랑나비가 하늘하늘 날고 있다 -심상운, 「길」(『시현장』4호, 2008.11)     [A] 단위에 [A-1]의 단위가 갈라져 있으나 이것은 하이퍼시의 구조상으로 볼 때 한 단위로 묶을 수 있습니다. [A]와 [A-1]의 연결은 단위를 달리 해야 할 이유보다 한 단위로 묶어야 할 이유(이렇게 연처럼 갈라서 표현해도 괜찮습니다만)가 더 큰 것 같습니다. 굳이 따진다면 [A-1]은 [A]를 전제로 해서 성립되며 따라서 인과관계로 연결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손해일의 「떴다방 까지집」(『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도 두 단위가 한 단위로 합쳐진 것 같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김규화의 「매미소리」는 한 단위에 두 개의 단위가 합쳐서 구성되고 있는 듯 합니다.     역사박물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 마당 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미륵 미륵 미륵, 미르 미르 미르 르르르 흘린다 -김규화 「매미소리」에서     그리고 김금아의 「오후의 스케치」(『하이퍼시』, 시문학사, 211), 「내시경」, 김은자의 「꽃과 물고기 정물」(동상), 고종목의 「소리」, 신진의 「작은 눈사람」 등은 모두 한편 전체가 한 단위로 구성된 것들입니다. 따라서 단위 구성의 길고 짧음, 연(聯)과 구별된 단위의 분석 등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4] 심상운 「길」제 1, 2단위입니다. 이 시에서 배추벌레/노랑나비는 자연/역사, 생명체/비의식의 존재, 현재/과거, 흔적(자취)/소멸 등의 대립이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각각의 대립 사이에는 그냥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어떤 논리로도 메울 수 없는 심연(深淵)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김기덕의 「끈 자르기」에서 인간의 탄생과 천체(千体:별)의 탄생이라는 두 현상 사이의 심연의, 운명적 연결을 본 바 있습니다만, 바로 그러한 분열, 틈, 단절 등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두 존재의 관계 사이에 있는 심연, 단절, 틈을 ‘갭’(gap)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포괄적으로 ‘초월’(超越, transcendence)이라고 하면 괜찮을 듯도 합니다. 모든 하이퍼시 속에는 초월의 공간이 두 세계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초월의 이쪽과 저쪽의 세계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고종목의 「퍼즈놀이」에는 “바늘 외다리 축지법을 읽는다/서울 잠실에서 만리장성으로 건너 뛴다”의 바늘 외다리가 있는 곳(만리장성)과 잠실 사이엔 지리적으로 서해(西海)라는 심연이 있습니다. 중국에는 고대에 ‘기’(夔)라는 외다리 짐승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믿을 수 없습니다.   미륵과 매미 우는 소리의 사이에도 초월이 있습니다.(김규화 「매미소리」에서), 백암학교 이 선생이 거주하는 한국과, 도롱뇽알 같은 눈을 가진 인도인이 사는 지역의 사이에도 초월이 있습니다.(이솔 「도룡뇽알 까만 눈이 나를 보고 있다」에서), “까순이 까돌이가 돌아온 주상복합 아파트와 난 거지 뜬 부자 윤봉길의 민족정기”(손해일 「다시 떴다방 까치집」에서) 사이에도 초월이 있습니다. 막장과 기미독립선언문 사이에(송시월 「막장」에서)도 초월이 있습니다.   초월(超越)의 어원은 “올라가 넘다”라는 뜻입니다. 접두사 trans는 ‘넘어서’의 뜻입니다. 즉 ‘넘는다’라는 뜻입니다. ‘넘어서’라는 접두사 trans가, ‘오르다’라는 동사 scandere와 조합되어서 transcendere가 되고, 이것의 분사형인 ‘초월’(transcendence)이 됩니다. 사전에는 표준을 훨씬 넘어버리는 것, 속사(俗事)로부터 빠져나가버리는 것,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양, 성질, 장소, 관계 등 열 가지의 카테고리를 들고 있으며, 중세에는 이 카테고리를 넘어서는 것을 ‘초월’이라고 했으나 현재의 의미와는 관계가 희박한 것 같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인간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초월론적’이라고 하여, ‘초월’과 ‘초월론적’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문제를 여기서 굳이 다룰 필요가 없습니다.   앞에서 초월(超越)의 어원을 설명할 때 ‘올라서 넘는다’라는 뜻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춘하의 「종이로 만든 집」(『시현장 6집』)에는 “언덕에 오르면 아직도 무지개 마을이 있을까요”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목은 초월의 행동을 보여줍니다. ‘무지개 마을’은 상상 세계 속의 마을입니다. 하이퍼시에 초월이라는 특징이 없으면 하이퍼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하이퍼시에는 초월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이 초월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만드느냐)에 하이퍼시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할 핵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올라서 넘는다’라고 할 때, 두 세계가 평탄하게 이어지지 않고 반드시 그 사이가 갈라져서 틈이나 균열이 있다는 뜻이고, 지옥과 천국의 사이나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의 사이처럼 그 틈이나 균열을 쉽게 넘거나 건널 수 없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이퍼시의 생명은 이 초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월의 이쪽과 저쪽은 마치 절벽 밑의 심연(深淵)과 같습니다. 그 사이에는 함부로 뛰어 넘거나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월의 이쪽과 저쪽은 하나의 세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완전히 분리시키지 않고 이어져 있으면서 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이접(離接)과 연접(連接)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초월을 어떠한 관계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 하이퍼시의 비밀입니다. 틈이나 단절을 역사와 관련되는 것으로 연속시키면 유심적(唯心的)과 유물론적(唯物論的), 권력과 소외 등이 될 것입니다. 종교와 관련시켜 말한다면 신(神)/신자 또는 천국/지옥의 연속이 되겠지요. 사물의 연접과 이접은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가령 전쟁과 관련되면 승리/패배 또는 정복/피정복으로, 단순히 반대나 대립으로 본다면 밤/낮, 빛/어둠, 먼 것/가까운 것, 존재/부재(不在), 유(有)/무(無), 이 밖에도 긴 것/ 짧은 것, 안/밖, 기쁨/슬픔, 남성/여성, 땅/하늘, 아름다움/추악한 것, 강함/약함, 비쌈/헐함, 선(善)/불선(不善), 정의/불의, 완전/불완전, 적음/많음, 높음/낮음, 사람/짐승 등 초월을 이루는 계기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하이퍼시는 이러한 계기를 발견하여 시로서 잘 살려야 합니다.   중요한 부분이므로 예를 조금 들겠습니다. 심상운의 「길」(『시현장』 4집)에서는 배추벌레와 마추픽추의 돌계단 사이, 김규화의 「매미소리」(『하이퍼시』, 2011)에는 미륵보살과 매미울음 사이, 송시월의 「막장」(『하이퍼시』, 2011)에서는 막장과 기미독립선언문, 신진의 「행락」(『하이퍼시』, 2011)에서는 일상의 현실(잠재되어 있음)과 행락(行樂)지의 풍경, 박이정의 「북두칠성 돌리는 여자」(『하이퍼시』, 2011)에서는 성산동 진관동 등 현실과 북두칠성을 돌린 뒤의 상황, 이솔의 「도룡뇽알 까만 눈이 나를 보고 있다」(『하이퍼시』, 2011)에서는 도룡뇽 알의 눈과 인도의 짐꾼 사이엔 각각 초월이 있습니다. A와 B의 두 단위로 이루어진 시라면 A단위와 B단위의 초월이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어져 있을 것입니다. 단위가 많을 때에는 적절하게 A와 B로 나누어 보면 될 것입니다.     [5] 하이퍼시의 한 단위와 단위 각각의 관계를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한다면 ‘초월’이라고 할 수 있고, 유무(有無)의 대립적 관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有니 無니 하는 개념은 철학적 어휘여서 어렵게 생각됩니다만,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시를 껴안고 자다가 깨어난 아침 문득 떠오르는 시상(詩想)이 있어 -조명제, 「물끄러미」(시현장 2010)에서     이 시의 “시를 껴안고 잔” 간밤은 無이고, 깨어난 아침은 有입니다. “문득 떠오른 시상(詩想)은 무입니다만 이것은 시의 한 단위에 부분적으로 들어 있는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66회 광복절 경축식이 진행되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식장을 가득 채운 애국가 합창이 바람을 타고 훠이훠이 날아간다     쿰부 히말라야 높고 험한 고갯마루에 찢길 듯 바람에 휘날리는 오색 타르초 절절한 바람의 끈을 움켜쥐고 파르르 파르르 말 울음소리를 낸다 -안광태, 「바람 바람 바람」에서     안광태의 시에 보이는 광복절 경축식의 바람인 통일의 열망은 有이고, 그 다음 단위의 그곳 선주민(先住民)의 “오색 타르초”는 無입니다. 옛날의 경험인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無입니다. 앞 단위의 有는 시간적으로 현재의 경험이며, 그 다음 월남전에 참전한 친구 이야기인 단위는 공간적으로 볼 때 멀고 먼 有이긴 하나 현재 경험할 수 없으므로 無입니다.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은 민족적․역사적으로 전혀 다르므로 無로 간주됩니다.     통곡의 벽 앞에 검은 복장을 한 유태인들이 기도하고 있다 -신규호, 「인터넷망을 타고·2」에서   전행(前行)은 검은 복장을 입은 유태교 신자인 유대인들로서 사물 묘사의 단위이고, 후행(後行)의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있는 이미지 자체는 사물묘사이나 ‘기도하는 마음의 내용’은 다 다른 것으로서 독자가 경험할 수 없는 무(無)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시에서 무의 세계 묘사가 좀 모자라기는 하나 역시 유와 무의 대립에 있습니다. 신규호의 최근의 시집 『허무의 물레』는 무의 세계를 추구한 희귀한 시집입니다. 대부분의 하이퍼시는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무의 세계를 현실에서는 경험이 불가능한 ‘상상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A] 망치를 들고 깨진 유리창 조각들을 더 잘게 부수고 있는 인부들의 얼굴이 점점 환해지고 있어요. 그들은 망치질에 신명을 풀어내는 듯 리듬을 타고 있어요. 작은 알갱이로 돌아간 유리들도 햇빛에 반짝이고 있어요.   [B] 아아, 여보세요. 조주 선사가 신발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한강대교를 걸어가고 있다구요? -심상운, 「통화」에서     심상운의 다른 작품인 「길」에 보이는 마추픽추의 무너진 돌계단은 역사적인 실재(實在)이나 현재 경험이 안 되는 無입니다. 앞의 심상운의 [A] [B]도 有無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독자의 해석을 장황하게 하는 이 하이퍼시는 有의 특질과 無에 특질이 잘 병존하고 있습니다. 하이퍼시는 有와 無의 초월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종전처럼 한 테마에 하나의 이미지를 펼쳐보이는 시여서는 안 됩니다. A. B 두 단위가 있을 때, A의 유와 B의 무가 초월적으로 관계를 맺고 결합되면서 하이퍼시가 성립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구조적 특징입니다.     저녁은 고해신부의 귀처럼 비밀을 향해 자라기 시작했다 -위상진, 「가방 속의 탁상시계」에서     이 시의 전행(前行)은 유(有)이며, 후행(後行)은 무(無)인 것 같습니다. “고해신부의 귀처럼 자라기 시작했다”라는 대목은 놀랍고 매우 인상적인 비유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줄시계처럼 늘어졌다”(「여름감기」)에서처럼 일상적인 나와,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시계줄처럼 늘어진 나를 각각 한 단위로 그 속에 ‘초월’이 끼어든다면 굉장한 하이퍼시가 될 것입니다.” “얼음조각 같은 연인들”(「여름감기」), “죽은 사람의 전화번호”(「여름감기」) 등은 이 자체로서도 뛰어나고 놀라운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저녁”과 고해신부 사이에 초월의 세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스크린도어 앞에서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줄시계의 사이에도 유무(有無)의 대립에 의한 심연이 있고, 그 초월이 하이퍼시를 탄생시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6]   꾸역꾸역 도시인을 삼키며 검은 입 벌리고 있는 4번 입구   전파상에서 밀려오는 쓰나미 검은 화면을 계속 뱉어내고 있다 -신규호, 「전철역, 입 벌리다」에서     신규호의 이 시 속에 비유가 들어 있습니다. “도시인을 삼키며”나 “입 벌리고” 등은 모두 은유입니다. 이 은유의 본의와 유의가 각각 하나의 단위로 나뉘어져 구성된다면 굉장한 하이퍼적 특질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심상운의 「아우슈비츠」에서도 진술의 부분적 비유(예를 들면 “하늘 한 자락을 꺼내들고”)를 발견하게 됩니다. “야크가 만들어 놓은 히말라야 설산고봉을/철새들이 넘는다”(최진연, 「목화꽃」)에서도 “야크가 만들어 놓은 히말라야”는 진술 속의 비유입니다. “정신의 히말라야”도 그렇습니다. 최진연의 「목화꽃」에선 “히말라야 설산고봉”과 “설악의 울산바위” 그리고 “청량산(淸凉山)” 등의 지리적 원거리의 대조관계가 있습니다만 그 사이에는 초월을 만들어 하이퍼시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에서는 이미지들이 평면화(平面化) 되어 비유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손해일의 「떴다방 까치집」에도 있습니다. ‘초월’은 모두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A] 막장을 먹는다 강원도 태백 지인이 부쳐온…     [B]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을 선언하노라” 이명처럼 들려오는 33인의 목소리 대한독립만세소리…… -송시월, 「막장」에서     송시월의 [A][B]의 관계는 부분이 전체 구조로서의 비유구실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입니다. [A]와 [B]의 연결에서 “같이, 처럼, 듯이, 듯”의 직유의 특징인 연결사가 없고, “사람은 갈대다”, “그는 온순해서 양(羊)이다”와 같은 은유 등과 구별해 보아도 본의(本義)와 유의(喩義)가 분명하지도 않고, 두 사항의 유사성이 드러남이 없어 즉, 보통의 은유와 같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비유일까요. [A]와 [B]의 연결과 같은 하이퍼시의 단위간의 연결을 나는 ‘교유’(交喩, diaphor)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교유’는 휠라이트(Philip Ellis Wheelwright)라는 사람의 처음 한 말입니다. 서강대의 김태옥(金泰玉) 교수의 『은유와 실재』(문학과 지성사, 1982)는 휠라이트의 책의 역서입니다.     [7] 앞에서 예를 든 바와 같이, 하이퍼시의 구조는 거의 교유(交喩)로 되어 있습니다. 교유이니까 비유의 일종이며, 따라서 비유의 일반적 구조의 특성인 본의(本義)와 유의(喩義)의 간의 유사성에 의해서 결합되어야 합니다만 그것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비유는 (1)본의(本義, tenor)나 유의(喩義, vehicle)가 있고, 그 본의와 유의는 (2)유사성(類似性, similarity)과 근접성(contiguity)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가 모두 비유를 성립시키는 구조의 기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의’란 본디 표현하고자 한 고유의 관념이며, 실제로 말하거나 생각된 사물입니다. 유의란 이와 비교된 사물로서 상상에 의해 도입된 사물이며, ‘차용관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의와 유의라는 말이 도입되기 전에는 ‘고유관념’과 ‘차용관념’이라고 말해졌습니다. 이 밖에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먼저 앞에 든 송시월의 「막장」은 [A]와 [B]의 두 단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만, 이 경우 어느 단위가 본의이며 어느 단위가 유의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강원도 태백의 지인이 보내온 막장을 먹는 장면([A])이 본의인지,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인의 독립국임과...”의 독립선언문이 본의인지 구별이 잘 안됩니다. 본의와 유의 구별이 잘 안된다고 해서 하이퍼시를 비유구조와 같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본의/유의의 위치변경이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해도 하이퍼시라고 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바로 그 점이 하이퍼의 특징 중의 또 다른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심상운의 「길」이라는 하이퍼시도 ‘교유’(交喩)로 되어 있습니다. “배추벌레/노랑나비, 배추잎/마추픽추의 벽돌계단”의 대립(차이성) 등이 현재/과거, 생명/역사(문명), 현실/상상 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배추벌레는 현실의 생명체이고, 노랑나비는 북미 마야문명 유적지인 마추픽추의 벽돌이며 이는 역사입니다. 따라서 배추벌레와 노랑나비의 관계를 유추하기는 거의 어렵지만, 도리어 유사성(類似性, similarity)과 차이성(差異性, differenc)은 근접성에 의하여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유사성이란 무엇일까요. 배추벌레가 배밀이로 기어가고 있는 ‘자연’(배추)과 마야문명 유적지인 ‘역사의 벽돌’이 생명의 시간적 경과에서의 공통성이 드러나는 어떤 시간성이라고 할까, 소실성(消失性)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시에서 은유 구조의 일반적 특성인 본의와 유의의 구별이 아주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교유’(交喩)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설령 이러한 암시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교유에 의한 하이퍼시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휠라이트라는 사람은 은유가 되느냐의 여부는 문법적 형태의 법칙 문제가 아니라 “의미 변환(semantic transformation)의 질”이라고 말합니다. 의미 변환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송시월의 「막장」의 [A][B]나, 심상운의 배추벌레와 노랑나비는 서로의 영향 하에 어떤 의미로 변한 것은 분명하며 모두 교유임이 확실합니다.     [8]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연(聯)을 ‘리좀’이나 ‘모듈’ 같은 이름을 말하지 말고 그냥 단위(單位, unit)로 통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앞에 예를 든 심상운의 [A][B]나, 송시월의 [A][B]는 연으로서 단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때의 [A]와 [B]를 하이퍼시의 단위로 보고 해설했습니다. 그런데, 이솔의 「저는 지금 세느강가에 있어요」(『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 최진연의 「재채기」(『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 조명제의 「풀밭에서의 저녁식사」(『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 김규화의 「한강을 읽다」 등은 단위 구별이 없고, 한 단위로 한 편의 하이퍼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손해일의 「동편제」(『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 김규화의 「매미소리」(『하이퍼시』, 시문학사, 2011)는 한 단위(한 연)에 하이퍼적 특성이 둘 이상 있습니다. 이 단위는 A B C D의 네 단위로 된 하이퍼시의 첫째 단위입니다. 그런데 이 시의 제1 단위 속에는 하이퍼인 두 개의 단위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역사박물관에서 청강한 은 불교의 미륵보살(彌勒菩薩)의 ‘미륵’과 같은 시니피앙인데, 미루나무 숲의 미륵은 실제 매미의 울음소리입니다. 이 단위에는 이질적인 두 개의 시니피앙이 그 사물인 시니피에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단위 속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위를 하이퍼시의 구조의 뼈대라고, 반드시 그렇게 우기면서 볼 수는 없습니다.     말죽거리 지나 양재천 다리 마악 건너면 분당 가는 1005-1번 좌석 서는 들머리 ‘시민의 숲’ 키 껑충한 미루나무 꼭대기마다 둥게둥게 까치집 아슬하다. 여름내 은폐엄폐 짙푸르던 잎새 죄 떨구자 줄줄이 들통난 로빈후드 숲속 아지트들 얼짱 몸짱 까순이 까돌이 철떡궁합 눈맞아 몇 배 새끼깐 뒤 늦동이 막내 보기까지, ‘맹부 삼천지교’라 이왕이면 매헌 윤봉길 의사 민족정기부터 내려받고, 양재천 물길따라 강남 8학군의 배꼽 대치동 아랫녘까지 나와바리 넓혔더라 -손해일, 「떴다방 까치집」에서     손해일의 「떴다방 까치집」 6연 중의 제2연이다. 이 시는 하이퍼시인지 현실에 대한 풍자시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그러나 하이퍼적 특색이 없지는 않습니다. 넓은 의미의 하이퍼시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제1연 [A]에 “발리에서 생긴 일”이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지리적으로 인도네시아의 관광지 ‘발리’라는 지명이라면 그 발리와 서울의 ‘강남’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로빈후드’라는 말까지 있으니까 영국의 전설상의 의적(義賊)인 로빈후드가 그 거점인 영국의 숲속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 ‘얼짱 몸짱 까순이 까돌이’ 등의 말은 이 시가 부분적으로 해학적인 풍자시임을 보여줍니다. ‘까순이 까돌이’는 까치집의 ‘까치’와 연결되는 말이어서, 시니피앙을 연상케 하는 조어로서는 매우 재미 있는 말입니다. 다시 「떴다방 까치집」에는 “한동안 안 보이던 까순이, 까돌이가 돌아왔다”라는 대목이 돋보입니다.     [9] 신진(辛進) 시인이 “차유”(差喩, transphor)라는 말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은유나 환유 등의 비유는 비유구조의 요소인 본의(本意, tenor)와 유의(喩義, vehicle)가 유사성(類似性)이나 차이성(差異性)에 의해서 형성됩니다. 이 주장은 굉장히 중요하고 흥미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든 비유는 1)본의(本義, tenor, 본관념, 고유관념, 실재로 말해지거나 생각된 사물), 2)유의(喩義, vehicle, 비교된 사물, 상상된 사물, 차용관념), 3)유사성(類似性, similarity), 4)상이성(相異性, 差異性, difference) 등의 네 가지가 어울려 성립됩니다. 그런데 모든 비유는 본의, 유의, 유사성으로 성립한다고 하면서 ‘차이성’만 쏙 제외합니다. “사람은 갈대다”라는 은유에서 본의는 ‘사람’이며 유의는 ‘갈대’이며, 유사성은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비유구조를 설명할 때 본의, 유의, 유사성은 다 들면서 차이성만은 배제하는가, 라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은 인체(인격체)이고 갈대는 식물(식물성)이므로 사람은 갈대같이 연약한 존재다라고 말할 때 그 차이성도 드러난다고 본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왜 제외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심상운의 「길」에서 보이는 배추잎과 마추픽추의 돌계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또 송시월의 막장과 기미독립선언문과의 차이성은 무엇일까요? 얼른 답이 안 나옵니다. 그만한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본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차이성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요. 이런 점에서 ‘차유’(差喩)라는 비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면 신진은 차유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차유는 은유와 환유에 대비되어 문자 그대로 차이성의 비유라는 의미다. 은유가 유사성에 의한 대치(substitution)를, 환유가 인접성에 의한 연결(contexture)을 지향한다면 차유는 차이성에 의한 긴장(tension)을 지향한다. 꿈의 작용과 관련하여 추론하자면 응축과 치환이 환유의 원리이고 상징이 은유의 원리이며 모순은 차유의 원리가 된다. 차유에는 언어의 표현과 실제의 의미 사이에 간극(대조를 포함)이 있는 경우가 있고, 언어 표현 전체가 모순되거나 불합리가 있는가 하면 상식파괴나 언어의 우연적 만남 같은 차이 자체가 목표인 경우가 있습니다.”(신진 저 『한국시의 이론』 산지니, 2012, 75쪽)   신진의 차유의 예로서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을 들고 있다. 이 시에서 그는 “언어적 불합리와 모순에 내재하는 맥락”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텍스트 전반에 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신진은 윤동주 외에 이상(李箱)의 「절벽」(絶壁)도 들고 있습니다. 신진은 특히 상황적 맥락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휠라이트(Pulilp Ellis Wheelwright, 1901~1970)가 말한 디아포르(diaphor)는 우리 나라에서 ‘교유’(交喩)라는 역어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서강대학의 김태옥(金泰玉) 교수가 휠라이트의 저서, 『은유와 실재』(Metaphor and Reality, 문학과 지성사, 1982)를 번역했는데, 이 책에서도 교유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진 교수가 제기한 ‘차유’도 이 교유와의 넓은 접점이 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휠라이트는 미국의 이미지즘 시인이나 주지주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의 「지하철 정류장에서」를 그 실례로 들고 있습니다.     군중 속에 낀 이 얼굴들의 환영(幻影) 비에 젖은 검은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 -파운드, 「지하철 정류장에서」의 전문   첫 행과 둘째 행의 관계를 휠라이트는 ‘교유’라고 봅니다. 휠라이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전의(轉義, transterence)라는 말 대신에 “의미의 변화(semantic transformation)의 질”이라고 말합니다. ‘같이, 처럼, 듯이’ 등의 연결어가 없으므로 직유(直喩)가 아닌 것은 확실하고, 또 위의 제1행을 본의(本義)라고 하고, 제2행을 유의(喩義)라고 하고, 거기서 두 사항 사이의 유사성(類似性)을 발견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람은 갈대다”라는 은유에서는 ‘연약함’이라고 하고, 그 유사성은 사람과 갈대의 두 사물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즉 유사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만, 앞에서 예를 든 파운드의 「지하철 정류장에서」의 제1행(본의)과 제2행에서는 그 유사성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휠라이트는 은유에 대하여 문법적 형태의 변화가 아니고 의미의 변환(semantic transformation)이라고 하고, 의미 변환의 은유에는 의미의 탐색과 의미의 결합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유는 ‘의미의 결합’에 의하여 성립하는 비유라는 것입니다. 일반적 은유는 의미탐색입니다. 예를 들면 “그녀는 꽃이다”, “그녀는 양이다”와 같이 앞에 예를 든 파운드의 시의 제1행과 제2행은 의미의 결합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송시월의 「막장」에 보이는 [A][B]도 의미의 결합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심상운의 「길」에서 의미의 결합에 의한 교유가 드러납니다. 교유가 의미의 탐색에 의하여 성립하는 은유가 아니라, 의미의 결합에 의해서 성립하는 교유라는 점은 하이퍼시의 구조 이해에 큰 도움을 줍니다.     [10] 하이퍼시를 성립시키는 요소는 단위(單位, unit)이며 ‘연’과는 다릅니다. 그 단위와 단위의 관련은 교유(交喩, diaphor)에 의하여 관계를 맺어 구성된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이 교유는 결합에 의해서 발생하는 은유의 일종입니다. 종래에 우리는 병치(竝置, 竝存)나 대구(對句)라고도 막연히 일컬어왔습니다만 이제부터는 ‘교유’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직유나 은유 같은 비유는 본의(本義, 본관념)와 유의(喩義, 보조관념) 등이 있고, 이 두 사항은 어떤 유사성에 의해 연결됩니다. “그녀는 꽃이다”, “그녀는 양(羊)이다”와 같은 경우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꽃에서 느끼게 되는 아름다움과 같다는 유사성이 결합되어 “그녀는 꽃이다”라는 비유가 성립됩니다. 그러나 교유는 은유의 일종이기는 하나 의미의 탐색에서 그 유사성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결합’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의미의 탐색에서 본의와 유의 같은 두 요소에서 어떤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 외에도 다양한 관계의 결합이 있고, 그 결합의 범위가 깊고 넓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모두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단위간의 결합은 원칙적으로 교유이지만, 예외를 인정한다면 그 범위는 더욱 광대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이퍼 단위간에도 의미 탐색에 의한 은유(교유를 제외한 일반적 은유)도 있고, 심지어 직유적 비유의 하이퍼시의 가능성도 말할 수 있습니다.     칠레 샌디아고 지하 700m 막장에 69일 동안 갇힌 광부 33명 나는 숟가락 슈퍼캡술을 막장에다 집어넣어 360도로 회전시키며 한 사람 한 사람 끄집어 올린다. -송시월, 「막장」에서     송시월의 「막장」의 제5 단위입니다. 이 단위는 앞의 제1 단위로서 음식물인 막장과 연결됩니다. 이 때 연결된 고리는 이질적인 사물인 막장과 칠레 광산의 갱도의 막장이 갖고 있는 청각적인 소리(즉 ‘시니피앙’입니다)의 유사성 자체입니다. 물론 교유라고 볼 수 있으나, 교유로 본다면 교유에도 이러한 연결고리(또는 유사성)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플랫폼에 혼자 두고 기차가 소리 한 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   맴맴맴 매애애 매앵매앵 앵앵앵 미잉미잉 잉잉잉 -김규화, 「매미소리」에서     위의 예는 「매미소리」의 제4 단위입니다. 여기서는 기차가 “매앵!” 소리를 지르고 바퀴를 굴리며 떠나버립니다. 기차 소리와 매미소리 사이는 소리의 유사성을 실제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매앵”이라는 유사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의미의 변환’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변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기차의 출발이라는 기계 소리는 생명체인 매미소리와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이 시에서는 “매앵”이라는 유사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차 소리도 듣는 주체에 내재화(內在化)하면 주체의 안에 존재하는 것과 동화(同化)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표현에서는 “매앵”이라는 유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실재의 소리는 다른 것이니까. 매미/기차의 대립과 마찬가지로 매미울음(매앵)/기차소리의 대립이 있다고 볼 수 있고, 여기서 실재로는 단위간의 교유(交喩)가 존재한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논리가 조금 이상 방향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풀벌레 한 마리 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가 밑둥으로 내려온다 종일 사삭사삭 발효향 그윽한 노자를 끄적거리고 있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지껄이는 자는 알지 못한다 변솟간 벽에다 낙서 한 줄 누고 나온다   어이! 시원하다 -박이정, 「노자의 벌레」에서     「노자의 벌레」의 제2 단위, 제3 단위, 제4 단위입니다. 3단위와 4단위가 있어서 하이퍼 시의 특색을 갖추고 있습니다. 가지 끝에 매달린 풀벌레가 밑둥으로 내려온 제2 단위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기술한 제1 단위와 문맥적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3 단위는 노자(老子)가 말한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를 옮긴 말이기에 인용부를 썼습니다. 선자불변 변자불선(善者不辯 辯者不善)과도 연결됩니다. 고전(古典)은 풍부한 시의 귀중한 원천적 소재원입니다. 제3 단위와 제5 단위의 연결은 교유(交喩)라고 할 수 있고, 의미 변화의 연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단위와 마지막인 4단위 사이엔 어떤 맥락을 찾기 어렵습니다.  
25    모더니즘시 고찰 댓글:  조회:4320  추천:0  2015-02-18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 - 시적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중심으로                                                          김석환 (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     1.머리말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문화 운동을 전체를 아우르는 용어이다. 문화의 한 부분이자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에서 역시 모더니즘 사조는 크게 일어났는데 영미주지주의와 대륙의 아방가르드 운동, 즉 미래파 다다이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을 종합적으로 일컫는다. 그런데 한국 현대시에 그러한 사조가 유입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부터이며 영미주지주의 계열에 정지용, 초현실주의 계열의 이상 등을 당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후 전후 후반기 동인을 필두로 해서 다시 일기 시작했으며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으로 변화되면서 더욱 다양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물론 한국 현대시의 현주소를 논하는 자리에서 모더니즘만으로 그 다양한 양상을 모두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한국 현대 시단엔 이전에 풍미하던 리얼리즘적 경향이 쇠퇴하고 모더니즘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그 이전까지 민주화 및 노동자 또는 소외계층들의 권익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일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사회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만은 아니지만 1990년대 이후 컴퓨터를 추동력으로 하는 정보화 시대의 물결이 밀려 온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러한 사회적 변화는 현실의 반영 또는 재현에 유용한 리얼리즘 시의 흐름을 약화시키고 모더니즘의 강세를 가져왔다. 따라서 한국 시단에 강하게 일어난 모더니즘의 조류를 살펴보는 것은 요즈음 시문학의 전체 흐름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본고는 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을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구조의 구축(constru ction)과 탈구축(deconstruction)의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시는 언어를 소재로 하는 예술로서 하나의 구조체인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된 구조체, 즉 2차적 구조체이기 때문에 그 구조의 특성을 살피는 것은 곧 시적 특성을 살피는 일이다. 따라서 시의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에 사용된 언어가 어떻게 시적 구조를 구축하는가 또는 탈구축을 하며 의미를 생산하는가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특히 모더니즘은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그러한 고찰의 타당성 또는 필요성을 더욱 뒷받침 해 준다. 구체적으로 '구축'이란 시에 참여한 요소들이 대립과 유사성에 의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갖고 시적 구조를 이루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와 대립적인 '탈구축'은 그 요소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이 희미해짐으로써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전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 자체가 불확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언어의 특징을 활용하여 새롭게 구축한 시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며 암시적이요 다의적이다. 따라서 실제로 시에서 각 요소들, 즉 시어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임의성이 있으므로 구축과 탈구축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그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살피는 것이 곧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피는 일로서 의미가 있으며 그것 역시 각각의 시들이 갖는 특징을 고찰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2. 구조의 탈구축과 의미의 확장   시인 이상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으로서 연작시 를 연재하여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 '초현실주의'는 유럽에서 일어난 아방가르드 운동을 종합하여 최종 매듭을 지은 사조로서 무의식의 세계가 진정한 현실이라 여기며 이에 대한 탐색을 주요한 시적 과제로 삼았다. 다음의 시 역시 연작시의 한 편으로서 이른바 자동기술법으로 인간의 정신 심층에 내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1 나는거울없는室內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謀를하려는中일까.   2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잤다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있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 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굴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전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 때문에囹圄되어떨고있다. -이상 일부   화자인 '나'는 거울이 없는 실내에서 거울 속에 있을 또 다른 '나'를 생각하고 있다. 거울은 이상적 자아가 존재하는 무의식적 공간을, 그리고 실내는 의식적 공간인 현실을 상징한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나'는 이미 실내에 나와 있기 때문에 ‘外出中’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기 이전에 거울 속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다른 '나'가 있으며,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왜냐 하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거울 속의 욕망하는 '나'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 陰謀’를 하는 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室內에 있을 뿐만 아니라 거울 속에도 존재하는데 그 두 명의 '나'는 화합이 되지 않고 균열을 보이고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내가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는 라캉의 말을 빌자면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무의식에서 생각하는 '나'는 일치하지 않고 분열된 상태이다.   거울 속의 '나'와 일치하지 않은 '나'는 ‘罪를 품고’ 침상에서 잠을 자며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나'는 ‘缺席’하여 부재중이고 '義足을 담은 軍用長靴'가 '내 꿈의 白紙를 더럽혀 놓'은 것만을 확인한다. '軍用長靴'는 곧 거울 밖에 있다가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의 공간인 '꿈의 白紙'로 들어간 '나'를 대신하는데, 욕망하는 '나'는 그곳에 없어 만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解放하려고’ 한다. 즉 분열된 채 존재하는 두 얼굴의 '나'가 부조화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와 미안한 뜻을 전하는데 서로 분열된 채 거울 속과 실내에 ‘囹圄’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얼굴의 '나'는 서로 만나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된 채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거울'과 등가치인 '꿈'의 공간은 생각하는 '나'만 있을 뿐 현실 속의 나, 즉 '내 위조'는 결석하여 늘 부재중이다.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나, 즉 '자아의 이상'은 현실 속으로 진입하면서 현실을 규제하는 법과 권력의 상징인 '아버지'의 개입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서로 일치 할 수 없다. 그래서 화자는 아예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자살할 수 있는 통로인 '들창'을 가리키는데 그 들창을 통과한다는 것은 곧 자살이다. 들창 밖으로 나와 현실에 진입하는 순간 '나'는 다른 모습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현실에 '나'가 존재하는 한 살아 있으니 '불사조'에 가깝다. 이 역시 '생각하는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언제나 분열된 채 무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일상적 층위에서 보면 비논리적이고 모순된 상황을 형상화하는 역설적 어법이 독자들에게 낯설음을 주지만 내적 논리로서 시적 구조를 구축하여 무의식의 세계와 그 흐름을 보여 준다.   한편 정지용 시인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영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일본 시인들의 시들을 한국에 번역하여 소개하였으며, 동지사대학 졸업 논문에서 영국의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의 한 사람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연구하였다. 그렇게 일찍 영미모더니즘 시를 접한 그는 감정을 억제하고 이를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보여 줌으로써 회화성이 강한 시를 발표하며 한국 현대시단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영미 모더니즘은 아폴론적 경향이 강하여 디오니소스적인 유럽의 아방가르드 계열의 시에 비하여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적으며 다양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의미에 통합함으로써 구조의 견고성을 보인다. 그런데 다음 시는 그가 후기에 쓴 것으로서 한밤중의 산골 풍경을 회화적으로 그리면서 내면 깊이 잠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대 함끠 한나잘 벗어나온 그머흔 골작이 이제 바람이 차지하는다 앞남ㄱ의 곱은 가지에 걸리어 파람부는가 하니 창을 바로 치놋다 밤 이윽고 화로ㅅ불 아쉽어 지고 촉불도 치위타는양 눈썹 아사리느니 나의 눈동자 한밤에 푸르러 누은 나를 지키는다 푼푼한 그대 말씨 나를 이내 잠들이고 옮기셨는다 조찰한 벼개로 그대 예시니 내사 나의 슬기와 외롬을 새로 고를 밖에!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고 성긴 눈이 별도 없는 것이에 날리어라 -정지용 전문     화자인 나는 그대와 함께 한나절 동안 걸어 먼 골짜기를 벗어나 산방에 도착한다. 가지를 스치며 창을 치는 바람은 그곳에 도착한 화자의 심리적 변화를 암시한다. 밤이 이슥하여 화롯불이 아쉽게 식어 가고 촛불도 점점 희미해지며 어둠이 더욱 깊어지자 화자의 시선은 '누은 나'에게로 향한다. 그대도 ‘나’를 잠들이고 잠자리로 돌아가 홀로 남게 되자 '나의 슬기와 외롬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은 그곳이 삶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요 사방이 어둠에 가려진 한 밤인데 그대마저 곁에서 떠나 홀로 있기 때문이다. 즉 타자들의 욕망을 좇아 살던 현실이 차단되자 시인은 그 동안 소외된 채 '외롬'에 처해 있던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찾는다.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은 소외되었다가 솟아오르는 그 욕망의 상징이다.   그렇게 화자는 비로소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는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확인하는데 이는 곧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라깡에 의하면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환상을 통해 형성되는데 소외된 욕망의 주체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환상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타자의 욕망을 마치 나의 욕망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빼앗긴 나의 고유한 욕망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한다. 위의 시에서 하자는 타자의 욕망이 얽힌 현실로부터 차단된 산골의 밤에 자신을 성찰하며 고유한 욕망을 찾아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사, 2008. pp.79-80 참조) 한편 별도 없는 어둠 속에서 '성긴 눈발'이 내리는 것은 그러한 자유를 얻은 시인의 내면을 암시한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3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나의 하나님> 전문   '하나님'은 '늙은 비애', '살점', '놋쇠 항아리', '어리디어린 순결', '연둣빛 바람' 등의 다양한 이미지에 비유되면서 시적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구체화 또는 확장된다. 특히 비유적 이미지들이 ‘늙은/어리디어린, 생물/무생물, 밝음/어두움, 구체/추상’ 등으로 대립되면서 일상적 논리를 벗어나 낯설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미를 지연시키고 그 폭을 확장시킴으로써 모호성이 극대화되어 그 통일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시적 전체성을 유추하기가 불가능한 탈구축 양상은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체험으로써 그 실재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오히려 효율적이다.   사과나무의 천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고 뚝 뚝 뚝 떨어지고 있고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움직이게 하는 어항에는 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비에 젖는 섣달의 산다화가 있고 부러진 못이 되어 길바닥을 뒹구는 사랑도 있다. -김춘수 전문   사과나무의 사과알이 땅이 아니라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어항에 크나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 등은 일상적 논리를 벗어난다. 그리고 ‘사과알, 금붕어, 산다화, 부러진 못, 사랑’ 등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이어지면서 낯설음과 시적 긴장감을 더해 준다. 그런 이미지에 의해 형성되는 시적 상황은 제목인 '시'와 비유적 관계를 맺으면서 '시'의 의미를 지연시키며 확장한다. 이처럼 이질적인 이미지의 전개와 그들 사이의 충돌과 논리를 벗어난 묘사와 진술로 탈구축의 양상을 보이며 '시'의 의미는 일상어로 규명하기 어려울 만큼 모호한 것임을 암시할 뿐이다. 즉 시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다만 존재하면서 독자들과 대화를 요구하며 무한한 상상과 다의적인 해석을 유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김종삼 전문   ‘나의 본적’을 비유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것들의 유사성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즉 나의 본적은 ‘마른 잎, 거대한 계곡, 나무 잎새, 맑은 거울, 독수리, 고장, 교회당 모퉁이, 인류의 짚신, 맨발’ 등과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는 계속 지연되고 수정된다. 그러는 중에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나의 본적'의 의미를 확장하며 그 모호성을 증대시킨다. 그리하여 나의 본적이 상징하는 인간 존재의 기원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암시한다.   曲馬團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地域   코스모스 먼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緯度   참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一生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少女의 指紋 -박용래 전문   한편 시 에서 1연은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공간인 ‘곡마단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긴 꽃대 위에 핀 ‘코스모스’와 아슬아슬 곡예를 하고 마술을 부리는 ‘곡마단’이 비유적 관계를 맺게 한다. 이어서 코스모스 꽃은 하얀 눈이 덮인 ‘아라스카의 햇빛’과 그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위도’와 다시 비유적 관계를 맺고 다시 ‘사랑했던 사람의/ 일생’과 그 ‘소녀의/ 지문’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지구의 북극에 가까운 '아라스카의 햇살', '위도', '지역', '소녀', '지문' 등으로 점점 축소 또는 확대되며 이어지는 공간적 이미지의 비약적인 변화와 서술어의 생략에 의한 여백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질적인 이미지의 충돌과 생략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면서 코스모스의 시적 의미를 무한히 확장할 뿐 어느 의미로 한정하기에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시는 어느 대상에 대한 욕망이나 그것으로부터 경험된 의미를 독자적인 언어적 상징체계를 구축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적 자아는 그것을 현실을 판단하는 의식이나 초자아에 의해 인정되지 아니한 욕망을 교묘한 수단으로 엄폐하면서 나타낸다.(김형효,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 인간사랑, 2008. p.327 참조) 따라서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며 상징계로 진입할 때 타자들의 욕망이나 상징계를 지배하는 법에 의해 억압을 받아 왜곡된다. 그것은 언어의 양면인 기의와 기표가 일치하지 않고 떠도는 원인이 되는데 어떤 기표로 의미나 욕망이 드러나지만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욕망이 남아 있어 또 다른 기표가 요구된다. 그래서 시에서 하나의 기의에 다양한 기표, 그 역으로 하나의 기표에 다양한 기의가 나타난다. 따라서 독자들은 다양한 기표의 연쇄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동시적으로 고찰하여 그 기의, 즉 시인의 욕망 또는 시적 의미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의 실재(reality)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시를 구축하는 기표, 즉 다양한 이미지들은 다만 그 실재의 흐릿한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재’란 없으면서도 있는 것으로서 그 일부가 기표로 상징계에 나타나는 순간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3. 구조의 구축과 시적 의미의 집중   영미모더니즘의 시의 구조는 산업혁명의 근원지인 당대 영국의 사회적 구조와 상동성을 갖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신흥 자본가들이 부상하고 물신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혼탁해지던 유럽에서 선구적으로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은 대륙의 여러 나라에 비하여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영국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되 전통을 존중하며 질서를 세우고 사회적 통합을 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부응하여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더니즘 시는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선택하여 배열하면서 하나의 의미를 향해 집중시키고 구조의 전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이론가이자 시인인 엘리옷(T.S. Eliot)의 는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그 시에는 성서, 신화, 오페라의 대사, 일상적인 군중들의 말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배열되어 텍스트를 구축하면서 산업혁명으로 혼란해지는 시대상을 비판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집중되고 있다. 그 '이질적인 요소들의 통합'은 영미모더니즘 시의 구조적 특징의 핵심이며 한국 현대시단에서도 영미모더니즘 시의 영향을 받은 시들은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꽃이 열매의 上部에서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   나는 發散한 形象을 求하였으나 그것은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伊太利語로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叛亂性일까 동무여 이네 나는 바로 보마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 事物의 數量과 限度와 事物의 愚昧와 明晣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전문   꽃이 지고 열매가 맺는 게 자연의 순리이지만 그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다는 것은 결과와 원인이 전도된 모순이다. 그런 현실을 두고 '너'는 제 자리에서 상승과 하강 운동을 반복하며 줄을 돌리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는 것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표인 '發散한 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모순된 현실과 싸워야 하는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렵다'. 같은 대상을 두고 한국에서는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 하는 것처럼 그 지시체 또는 기의와 기표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표를 통하여 정확한 기의를 알 수 없듯이 사물의 가시적인 형상으로 그들의 관계와 진정한 의미의 실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사물과 사물의 생리적 관계, 그 수량과 한도를 바로 보겠다고 한다. 알고 보면 사물은 우매하여 형상 뒤에 숨은 본질, 그 명절성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것을 보는 인간이 우매하여 형상을 보며 그 뒤에 숨은 실재를 명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위의 시에는 서로 이질적인 상황 또는 이미지들이 병치적으로 나열되면서 긴장감을 주고 시적 의미를 확장시키며 그 해석을 어렵게 하는데 그것은 이 시가 갖는 독특한 미학이다. 이 시는 언어의 불확실성과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겪어야 하는 소외를 암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경향은 모더니즘 시의 한 경향이다.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下棺 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박용래 전문   이 시는 미메시스(mimesis)적 차원에서 보면 이미지들이 환유적으로 배열되면서 추수가 끝나고 살얼음이 어는 초겨울의 들판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시는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한 구조물로서 그 풍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이 내포한 이차적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이미지들이 다른 것 또는 전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시 전체를 구축하는가를 파악하여야 한다. '볏가리가 걷힌 논두렁'은 벼들의 한 해 살이가 끝난 죽음의 현장이요 '남은 발자국'은 죽은 이가 남긴 흔적이다. 그리고 '수레바퀴에 끼인 살얼음'은 유동성이 있는 물이 고체화 된 부동의 물이며 우렁 껍질도 죽은 우렁이가 남긴 것이다. '바닥에 지는 햇무리'는 하루가 저물어 가는 저녁 무렵의 햇살로서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기 위해 지평선 위를 날아가는 철새인 기러기떼 역시 지상의 삶을 마감하고 이승의 세계로 떠나가는 죽음을 암시한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 계열체들로서 주검을 매장하는 절차인 '하관'과 은유적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죽음의 의미에 집중되며 시 전체를 구축한다.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한 귀퉁이   나도향 한하운 씨가 꿈속의 나라에서   뜬구름 위에선 꽃들이 만발한 한 귀퉁이에선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구스타프 말러가 말을 주고받다가 부서지다가 영롱한 날빛으로 바꾸어지다가 -김종삼 전문   '꿈 속의 나라'에서 공간을 지시하는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꿈 속의 나라, 뜬 구름 위' 등이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는데 모두 지상과 다른 비현실적 공간이다. 그곳들에 등장하는 이들은 '나도향, 한하운, 지그문트 프로이드, 구스타프 말러' 등 국내외의 소설가, 시인, 심리학자, 작가 등이다. 작가와 시인은 상상력을 중시하며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쓴 이들이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주장한 정신분석학자인데 무의식은 꿈을 꾸는 정신적 영역이며 초현실의 세계이다. 따라서 인물들과 그들이 머물러 있는 공간들은 모두 비현실성을 내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곳은 또한 말을 주고받는 세계, 즉 현실이 아니라 '영롱한 날빛'이 존재하는 비현실적 또는 상상의 세계로서 무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음 시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를 선구적으로 발표하며 한국 시단에 새로운 충격을 주던 황지우 시인의 실험적인 의도를 강하게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와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황지우 전문   이 시는 화자인 '나'가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면서 신문의 광고난에 실린 '심인' 광고문을 보고 있는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그 광고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서로 다른 이들이 가출한 이들을 찾고 있다. 가족들이 애타게 가출한 가족을 찾고 있는 광고문의 내용과 그것을 읽으며 똥을 눟는 상황이 대조를 이루며 시대의 부정적인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서로 우연히 인접하여 실려 있을 뿐 각각 다른 사정을 갖고 있는 광고문이 그대로 시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패로디의 일종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크게 부상한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최근에 이런 광고문뿐이 아니라 만화, 영화, 유행가, 음악 등 문학의 주변 예술 또는 대중예술이 시와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 현상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한 상호텍스트성이 주요한 미학으로 부상한 것은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텍스트는 이전의 텍스트에 나온 것들을 직조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모든 텍스트는 이전 또는 동시대의 다른 텍스트들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전문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원텍스트인 샤갈의 그림을 패러디 하고 있다. 그림의 분위기를 차용하고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을 새롭게 변용하여 눈이 내리는 샤갈의 마을 사람들이 꾸는 부활의 꿈과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3월에 눈이 오는데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욕망의 피가 활발하게 돌아 정맥이 돋는다. 하늘에서 내려 온 축복의 메시지인 눈은 겨울이 가고 봄이 곧 시작됨을 알리며 사나이의 가슴에 겨우내 억압되어 있던 욕망의 피를 새로 활발하게 돌게 한다. 그리고 지붕과 굴뚝을 덮으며 사나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새 봄을 맞으려는 욕망을 더욱 익히고 다듬을 것을 권한다.   샤갈 마을 사람들의 욕망의 실체인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아낙들도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피며 생명이 새롭게 부활하는 봄을 기다리게 한다. 이처럼 샤갈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인물들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변용되며 집중적으로 겨우내 억압된 욕망의 실현을 암시한다. 샤갈의 그림을 패러디 한 이시는 그림과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데 김춘수 시인은 이 외에도 화가 이중섭의 생애나 그림 또는 토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등 다양한 원텍스트를 패러디 한 시들이 많다.   한편 하이퍼(hyper)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심상운 시인의 다음 시에 서로 이질적인 네 가지 국면이 제시되고 있다. 이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새로운 화면으로 전환하기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와 구조적 유사성을 엿보게 한다.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 포실한 흙 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촉촉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 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 속에 숨어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득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하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심상운 전문   위의 시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국면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어둠/빛’의 대립쌍이 내재된 계열체들이다. 첫째로 화자인 나는 감자밭 이랑에서 감자의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리고 그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고?’ 질문을 하며 그 ‘붉은 피’는 ‘우주의 꽃빛 파일’이라고 한다. 다음 국면은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화자는 그녀가 자신이 헌혈한 피가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검정고양이가 '헛간을 빠져 나와 번개 속을 뛰어 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를 궁금해 한다. 그녀가 헌혈한 피와 '헛간'에서 나온 검정고양이는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무의식 속에 내재된 욕망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국면에서 화자는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리는데 이 역시 위의 두 가지 국면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이상의 국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주체들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으며 사건 또는 상황이 이질적이다. 이는 화면의 전환이 자유롭고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과 상통하는데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비약적인 상상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이질적인 세 국면 속에는 모두 닫힌 공간에 내재되어 있던 '어둠'의 계열체들이 빛의 계열체가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감자가 묻힌 흙속, 그녀의 혈관, 고양이가 머물러 있는 헛간, 화자가 머물러 있는 승용차는 모두 그 무의식적 공간을 상징한다. 이처럼 세 국면은 표층적으로 보면 이질적이지만 구조적 상동성(homology)을 갖고 모두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욕망들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시인의 비약적인 상상은 그렇게 새로운 국면으로 이동하면서 그 속에 내재된 것들이 빛이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통하여 욕망이 현실,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는', '부르르 떠는', 깜짝 놀라면' 등은 욕망이 질서와 규칙으로 얽힌 현실로 진입하는 순간 받아야 하는 억압의 무게와 그로 인한 고통을 보여 주는 징후들이다. 또는 그것을 이기고 현실로 진입한 주체가 느끼는 경이감과 환희를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시인은 그녀의 '붉은 피'를 '우주의 꽃빛 파일'에 비유한 것에서 보듯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어둠이 암시하는 욕망이 오히려 빛의 세계인 현실을 움직이고 조정하는 힘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이선 시인의 다음 시는 디카시이자 하이퍼시의 일종으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차용하여 시의 일부로 배열하고 그 원텍스트를 패러디 하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그림: 프리다 칼로의   보름달을 삼킨, 앞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별들의 왕녀인 안드로메다가 가장 사랑한, 라임나무 열매를 훔쳐 먹은 죄로, 나는 노새사슴이 되었다 목자자리, 아르크투르스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디에고 리베라” 휘핑크림 바른 라임 파이(Lime pie), 혀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한 조각 이름   노새사슴 몸통은, 사냥꾼들의 표적 목에 꽂힌 화살 허리에 박힌 화살 나는 신음소리를 뱉지 않고, 꿀꺽 삼킨다   달빛 커텐, 내 꿈을 가리는 밤 내 뿔은 1cm씩, 나의 별을 향해 그리움을 키운다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 새 뿔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이선 전문   보름달을 삼켜 앞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라임나무를 훔쳐 먹은 죄로 ‘노새사슴’이 된 나는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그 별은 '디에고 리베라'와 동일시되며, 그 이름은 '라임 파이'에 비유된다. 따라서 ‘보름달, 라임나무, 별, 디에고 리베라, 라임 파이’ 등은 모두 노새사슴의 몸통 안에 저장된 욕망의 대상을 대신하는 계열체적 기표들이다. 욕망의 기의는 다양한 기표들에 의해 드러나면서 그것을 더욱 구체화하고 확장한다. 그런데 노새사슴의 몸통은 타자들의 상징인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어 목과 허리에 화살이 박힌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으며 별을 향해 1cm씩 그리움의 뿔을 키우고 오히려 상처와 고통을 화구로 삼아 이상세계인 푸른 바다와 클리토리아 해변을 그린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을 내던지고 새 뿔 왕관을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려 그 욕망의 대상에 이르고자 한다. 화자인 노새사슴이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그리며, 다시 뿔을 키우고 낡은 뿔을 가는 것은 욕망의 끝없는 분출을 암시한다. 시인은 이처럼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제시하고 이를 패러디 하며 자신의 '자화상'이라 밝힌 노새사슴을 통하여 타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고 이상세계를 향하려는 강한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산물인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하여 찍은 사진에 시를 덧붙이는 디카시가 새로운 장르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시는 그의 일종이다. 또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원용하여 쓴 '하이퍼시'라고 볼 수 있는데 화가의 그림 사진이 시텍스트의 일부가 됨으로써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만 디카시들이 흔히 자연풍경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는 데 비하여 화가의 그림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고 있다. 아무튼 이 시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시의 소재와 기법이 더욱 확대되고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유카 초목의 꽃들은 단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 유카 나방이는 그런 꽃들 중의 하나에서 그 꽃가루를 꺼내 반죽해 조그만 덩어리로 만든다. 그런 다음 나방이는 다시 또 한 유카 꽃을 찾아가, 그 암술을 찢어 열고 배추들 사이에 제 알들을 낳고서, 고깔 모양으로 생긴 암술의 터진 틈을 그 꽃가루 반죽덩어리를 메워넣어 막는다. 제 일생 중 단 한 번 유카 나방이는 이 복잡한 일을 행한다.”(칼 구스타프 융,『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서 인용)   1. 현대 문명적으로 해석하자면, 이것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유카 나방이의 필요가 유카 꽃을 발명한다.   2. 이것은 저 유구한 문제의 또 한 변형판이다. 심(心)이 먼저인가 물(物)이 먼저인가, 심(心)이 있으매 물(物)이 있나 물(物)이 있으며 심(心)이 있나. 사실은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이다. 유카 나방이/유카 꽃의 관계는 빛/그림자, 양/음, 생명-력(力)/생명-형태, 영 (靈)/혼(魂), 마음/육체, 이성/정서, 의미/이미지 등등의 관계와 같다.   3. 내가 왜 이런 것을 시(詩)라고 쓰냐 하면, 내가 한 마리의 유카 나방이-융을 받아들이는,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는, 한 송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저 물(物)만이 아닌 심(心)이 보태진 유카 꽃,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 된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의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최승자 「유카 나방이」   1연에서는 ‘유카 꽃’과 ‘유카 나방이’와의 미묘한 상생 관계를 밝힌 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 있는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2연에서는 그러한 생태를 현대문명적으로 해석하고 3연에서는 ‘유카 나방이/유카 꽃’의 관계를 ‘심(心)과 물(物)의 관계’에 비교하며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러 이항 대립쌍에 비교하며 그 자연 속의 상생 원리가 철학, 사상, 예술에까지 잠재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4연에서는 그것을 자신의 시 쓰기와 관련시키고 있는데 자신은 '유카 나방이 -융을 받아들이는,/ 유카 꽃'이요,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화자는 '물(物)에 심(心)이 보태진'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의식시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생태를 밝힌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이를 해석하고, 심(心)과 물(物)과의 관계에 비교해 보고, 다시 시 쓰기와 관련시키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사실을 밝히는 학문적인 문장에 시인의 해석과 비유적 상상력이 더함으로써 시가 되는 것이다. 즉 유카나방과 유카꽃이 서로 ‘자웅동체의 유카꽃’을 이루는 상생 원리로써 시쓰기의 과정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주와 삶의 원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학술적 문장을 도입하여 패러디 하고 연에 번호까지 부여하면서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관계에 다양한 논리적 관계를 병치하여 비유적 관계를 맺어 시를 완성한 이 메타시는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그러한 시의 구조 안에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이질적인 요소들이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전체성을 갖는다.   4.결론   이상에서 한국 모더니즘 시에 나타난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상 시인의 와 김춘수 시인의< 나의 하나님> 등의 경우에 다양한 이미지들이 하나의 의미에 집중되지 않은 채 구조의 탈구축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들은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일어난 아방가르드 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한 시들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유도하고 대상이 내포한 의미를 확장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반면에 김수영 시인의 이나 박용래 시인의 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텍스트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유지하며 견고하게 구조가 구축된 시들이 있다. 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보여 주는 영미모더니즘 시와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박용래, 김춘수, 김종삼 등의 시인의 경우를 보면 위의 두 가지 경향을 갖고 있는 시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패러디를 한 시 또는 하이퍼시 등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에서도 그 구조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시들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구축 또는 탈구축,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추상적인 기준으로 시의 특성을 구분한다는 것은 자칫 그 구체적 특성과 시적 효과를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된 나라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모더니즘과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구조적 특성이나 문예사조 또는 소재나 기법의 특성으로 시의 예술성과 가치를 논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다. 시란 굳어버린 일상어의 어법으로 다 보여주지 못하는, 오히려 그 아래 가려져 억압받는 인간의 진정한 욕망이나 대상이 갖고 있는 의미의 실재를 보여 주기 위해 언어로 구축한 2차적 상징체계요 예술이다. 시인은 죽어서나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다는 그 실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새로운 어법을 창조하여 언어의 그물을 엮는다. 시는 예술이기 때문에 창의성과 개성이 필수적 요소이지만 궁극적으로 미적 감동을 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적 요소들은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소재나 기법이 새롭다 하더라도 독자들의 상상력을 실재에 가까이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자들의 눈길을 일시적으로 끌기 위한 화려한 포장지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시의 죽음을 논하기에 앞서 고급스런 시를 쓰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독자들의 얇은 감성을 자극하고, 요설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낭비시키는 시들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깊이 가려져 있는 그 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시, 그곳으로 가는 데 꼭 필요한 이미지 또는 문장으로 쓴 고급스런 시만이 문화 창달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며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것이다.  
24    시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 댓글:  조회:4294  추천:0  2015-02-18
  의식의 흐름이 들어있는 옴니버스(omnibus) 기법                                                                                     심 상 운       21세기 현대시의 이미지는 의미意味나 심상心象의 단계를 넘어서서 기호記號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상상은 유추類推의 끈을 매달고 있지만 공상은 유추의 끈을 끊어버리고 무한한 미지의 영역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런 현상을 문덕수의 시론 「내면세계의 미학」에서는 ‘대상에서의 해방’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세계의 공간과 시간의 질서가 혼란해진(anarchy) 내면세계의 무의식無意識의 표출이라고 한다. 월간『시문학』을 중심으로 한 의 ‘하이퍼시 운동’도 이런 이미지의 세계를 원천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하이퍼시는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의 질서를 뛰어 넘는 해방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시에 담아보려는 언어작업의 산물産物이 된다.  그 작업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관념의 제로(zero) 지대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현실이 배제된 순수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기호의 세계’가 초현실의 새로운 예술적 공간으로 탄생한다. 그 공간은 현실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율적自律的인 순수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존재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서 객관적 공감을 얻지 못할 때, 언어의 박제剝製가 되어 허무虛無 속으로 빠져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노출한다.  현대시가 언어유희를 ‘무목적의 목적’, ‘쾌락적 공간’으로 허용하고 가치를 부여하지만 독자들은 의미의 소통이 단절되는 공간에서 오래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의미의 단절은 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시적영감의 원천이 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하여도 하이퍼시가 극복해야할 과제로 부상浮上한다.  나는 그런 점을 해결하고 허무를 생명生命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하이퍼시에 ‘현실적 이미지와 비현실적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결합’하는 기법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이런 기법을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으로 형성되는 다선구조多線構造 속에 넣었다. 그 구조의 내면에는 시인의 의식의 흐름이 들어있어서 그 흐름이 영화의 옴니버스(omnib us) 기법으로 표출될 때, 서사적敍事的 동영상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자연스런 교접공간交接空間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움직이는 이미지의 공간은 기존의 시형식과 차별화差別化를 이루는 바탕이 되고, 독자들에게 의미유추意味類推의 즐거움도 안겨주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3    하이퍼로 가는 문 댓글:  조회:4160  추천:0  2015-02-18
                  하이브리드                                                                         오남구   1. 잡종강세    하이퍼텍스트는 구조적으로  여러 기능을 갖는  하이브리드이다. 세간에서 “너나 잘하세요.” 이렇게 기존의 화법을 깨뜨리고 ‘하대하는 말과 높임말’을 뒤섞어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한 사회현상으로 기존의 순수한 언어가 뒤섞인 일종의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다.    하이브리드는 생물학적인 용어로서, 식물이나 동물을 육종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특정의 형질들을 가진 순종(純種) 2종류를 교잡하여 잡종강세를 개발한다. 이때에 부모에 비해 자손의 크기나 성장속도 등이 강하게 되는데 잡종 생장력(hybrid vigour)이라고도 한다. ‘너나 잘 하세요’는 이런 ‘잡종 생장력’의 현상이 일어나듯이 원래의 말보다 메시지의 기능이 크게 증폭되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무안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기존의 텍스트와는 다른 새로운 언어의 기능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 문장 구조를 살펴보면 하이퍼텍스트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①과 ②의 2종류의 언어가 있다. ①은 하대하는 말이고 ②는 높임말이다.   ① 너나(A) 잘 해(B) ② 당신이나(C)  잘 하세요(D)    말들을 구성하고 있는 마디를 ① A, B  ② C. D로 나누어 마디를 서로 뒤섞어 놓는다. 그러면 A, B와 C, D의 마디가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③ 너나(A) 잘 하세요(D) ④ 당신이나(C) 잘 해(B)    여기서 ①과 ②의 문장을 순수한 것이라 할 수 있고, ③과 ④의 문장을 순수함이 깨뜨려져 있는, ‘높임말’과 ‘하대하는 말’이 뒤섞여 있어 잡종 즉 하이브리드의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은 말의 마디가 서로 비꼬여서 ‘비틀기’가 되어 있고 파편화된 말의 마디가 (A)에서 (D)로 뛰어(hyper) 하이퍼텍스트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을 달리 보면 ‘해체된 말마디가 다시 통합된 문장’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교잡에 의한 통합으로서 새로운 텍스트이다.       2. 하이퍼시의 하이브리드     새로운 텍스트는 현실이다. 문덕수시인의 ‘종이하이퍼텍스트와 전자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4월호, 2008년)’는 하이퍼시('하이퍼텍스트+시'-하이퍼시로 명명-시향29호)의 논리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요즘 담론이 되고 있는 이상옥 시인의 ‘디카시’ 는 디카로 순간 포착한 사진과 기호(언어)가 섞인 시를 발표한다. 디카시는 하이브리드적인 종이하이퍼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텍스트와 사진이 하이퍼성(하이퍼텍스트의 특성-탈 중심, 탈 경계, 탈 관념 등)을 갖지 못하고 기존의 텍스트와 같다면 결과적으로 기존의 포토포엠과 구별되지 않는다. 하이브리드는 이미 기존의 시속에 들어와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컴퓨터의 발달로 하이퍼미디어 시대가 열리고 소리, 영상, 기호의 소통이 가능하게 되면서 이러한 인터넷의 텍스트를 철학자 넬슨이 ‘하이퍼텍스트’라고 명명하였다. 그래서 하이퍼텍스트라고 하게 되면 통상적으로 인터넷 상의 텍스트를 말하게 되는데, 문덕수 시인은 이것을 전자하이퍼텍스트라고 말하고 제2의 하이퍼텍스트라 한다. 제1의 하이퍼텍스트는 종이하이퍼텍스트라고 하는데 종이책을 매체로 하는 기호(언어)는 실재와는 관계가 없는 가상현실(버추얼)로서 하이퍼텍스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이퍼시론의 논리적 기반이 되고 있다. 여기서 기호만의 텍스트를 순수로 보면 영상(사진, 그림이미지) 등이 섞인 텍스트는 하이브리드(잡종) 적이다. 미래의 신개념의 종이(필름)에 소리가 함께 섞어 나오는 텍스트나, 제2의 하이퍼텍스트는 당연히 하이브리드로 분류될 것이다. 그런데  앞의 잠종강세의 예문에서 보듯이  기호만의 텍스트에서도  ‘높임말’과 ‘하대하는 말’이 뒤섞여서 하이브리드 적인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하이브리드 현상은 원래 생명의 존재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산이나 들에 집합되어 있는 나무와 풀이 한군데 뒤섞이어 존재한다. 여러 기능의 중심이 없는 탈 중심 그리고 탈 경계가 자연스럽다. 일찍이 자크 데리다가 자연의 사물을 텍스트로 보았는데 나에게는 자연의 이미지가 하이퍼텍스트로 다가온다.      (1) 탈 경계, 탈 중심의 이미지/ 신발   다음의 「신발」은 삶의 현장에서 찾은 하이브리드의 탈 경계, 탈 중심의 이미지가 있다.     1    시장 정육점 갈고리에 생고기와 나란히 걸린 가죽, 가족?   *         2    냉장고 쇼 케이스 안의 내 신발은 260미리입니다 아내의 신발은 235미리입니다 아들은 나와 똑같은 260미리입니다       *sbs 동영상 갭쳐  — 「신발」 전문    위의 그림이미지는 실재 TV에서 방영한 동영상에서 캡쳐한 것이다. 정육점에 신발과 생고기가 갈고리에 걸려 있다. 정육점도 아니고 신발가게도 아닌 하이브리드의 ‘신발정육점’이다. 이처럼 생활공간에서 경계가 무너지는 하이브리드의 현상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컴퓨터, 전자제품, 자동차 등은 말할 것도 없으며 생활 언어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 인용한 「신발」의 그림은 설명이 필요 없이 독자가 바로 알 수 있는 하이브리드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기호(언어)와 섞여 있다. '하이브리드의 하이퍼시' 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생고기와 신발을 본 작가의 직관이 ‘가죽’이라는 본질의 링크를 발견하게 되고,  ‘가죽’이 ‘가족’으로 기표가 흘러가고, 정서가 경로를 따라 흘러가 시의 맥락을 이룬다. 쇼 케이스 안에 든 신발 가족은 곧 시인의 가족이 되며 알 수없는 아련한 삶의 모습이 배어난다.    (2)마당놀이의 해학과 조소 / 피켓   문화의 공간으로서 마당은 무대의 원형일 것이다. 판소리의 마당은 광대와 청중이 창을 하고 추임을 하면서 한자리에 어울려 공연이 완성된다. 이렇게 관객이 공연에 동참함으로써 ‘관객과 연기자’라는 경계가 없다. 이러한 소리 ‘판’은 남녀노소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원시 ‘하이브리드 판’이라고 보아진다. 판을 만들어 가는 것은 ‘놀이’다. 놀이의 바탕에는 유희와 해학과 조소 등이 있고, 유희성이 없는 놀이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근래는 시위도 하이브리드 한 놀이 문화로 바뀌어 축제를 벌이고 있다. 촛불 문화축제는 그 예로서 손자와 아들과 며느리와 할머니가 한자리에 모여 촛불로 하트 모양을 만들거나, 광장에 수십 킬로나 되는 불길을 만들어 놓고 즐긴다. 이때 피켓은 소통의 도구로서 공간에 있는 하나의 미디어이다. 다음의 텍스트는 이런 피켓을 들고 있는 광장의 이미지(사진)와 기호가 나열된다. 순수 기호의 시에  대한 상대적인 것으로서 하이브리드이다.         2MB = 2 Mega Byte (약 3.5원) 2MB = 2 Micro Byte (가격산출 불가능) 2MB = 2 Mad Bull(미친 소) MB = My Bush(나의 부시) 2MB = 2 M(멍청하고) B(부지런한) 놈 2MB = 2(이) M(뭐) B(병) -> 이거 뭐 병신도 아니고... MB = Moues Baby  — 「피켓」 전문      놀이마당에 들고 나온 피켓. 이니셜 2mb를 하이퍼텍스트로 읽어본다.  2와 M과 B는 각기 마디가 되고, 마디와 마디 사이 숨겨진 링크을 걸면 많은 언어를 상상하여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위에 나타난 7가지 외에도  무수히 많은 의미의 경로가 나타나게 되는데, 독자는 읽고 싶은 대로 여러 방법으로 읽어가면서 유희하고 카타르시스 한다.      3,순수와 하이브리드     유전공학으로 만들어낸 하이브리드의 철쭉이 종로의 거리에 나와 있다. 명품이라고 내놓는 것을 보니 가지에 티 없이 깨끗한 바탕의 흰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고 같은 가지 속에서 진분홍의 꽃 몇 개가 피어 있다. 그런데 진분홍 또한 티 없이 맑은 바탕을 하고 있어서 순수/(순종,true)하기 이를 데 없다. 언뜻 보기에 한그루 철쭉 조화 같다. 여기에 다른 화려한 작품들을 비교하니 호화로우나 곧 싫증이 나고 산만하다. 결국 티 없이 순수한 격조 높은 두 가지의 특성이 명품의 하이브리드로서 탄생하고 있었고 절제된 심플한 구성이 예술성을 높이고 있다. ‘하이퍼시’에서 절제된 심플한 하이브리드의 구성이 요구되는 것이 이렇듯 자연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순수/(순종,true)는 하이브리드의 바탕이 된다. 격조가 높고 개성이 뚜렷해야 한다. 하이퍼텍스트가 여러 가지 특성을 싣는 수레라고 볼 때에 열린 개념의 또는 탈 관념의 대승적 기능을 하고 있다. 곧 하이브리드의 프레임은 하이퍼텍스트이다. 그래서 종이하이퍼텍스트의 언어(기호) 예술은 격조 높은 하이퍼시를 만드는 바탕이다. 다음의 「사과」는 언어의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이다.   배들녘은 풋벼의 바다, 아침 고요로운 지평선에 풍! 떠올랐다가 풍선처럼 서서히 내려오고 있는 붉은 사과, 동진강 하구에서 쌀을 실으러 거룻배가 들어왔었다는 ‘배들이’ 들판! 손에 든 들판은 피켓! 손해난 '배 들이'어서 빚으로 들들 볶일 판 피켓 들고 전봉준이 들이칠 판, 숨을 멈추고 있는 풋벼의 바다 황혼에 내가 주먹 속에 받아 쥔 해 사과를 굴린다, 굴러가며 가르마 같은 선을 긋는다 선을 따라 불이 화~ 화~ 일어난다    —「사과」전문   배들녘은 동진강 상류가 흐르는 들녘. 여기에 만석보가 있다. 조병갑이 보를 쌓고 물세를 받다가 농민들이 저항하여 동학란이 일어났다. 손에 든 들판, ‘피켓’은 시위 현장의 미디어이다. 이 하이퍼텍스트는 ‘시위 현장’과 ‘동학란’이란 배경의미가 시인의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언어와 언어의 마디를 링크시킨다. 그래서 기표가 자유자재로 ‘판’이 들의 ‘들판’으로, 손에 들고 있는 ‘들판’이 ‘피켓’으로, 그리고 붉은 사과(과일) → 해(日) → 사과(謝過)로 흘러가면서 상상의 무한한 이미지 공간이 확보된다. 그래서 붉은 사과가 굴러가면 선을 만들고 선에서 붉은 불이 일어난다. 감각적인 이미지 드림(imige-dream)이다.   하이브리드의 잡종강세 같은 새로운 기능을 확인한다. 순수는 바탕이 되고 격조가 높고 개성이 뚜렷했을 때에 명품의 하이브리드가 탄생한다. 절제된 심플한 구성이 예술성을 높일 것 같다.  
22    변화하는 詩 댓글:  조회:4476  추천:0  2015-02-18
변화하는 시의 현실과 하이퍼시                                                                                       심  상  운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젊은 시들의 변화는 필연적인 현상으로 인식된다. 기성세대가 관념시, 낭만적이고 독백적인 서정시, 사회적 이념의 시를 고수하려고 해도 젊은 시인들은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와 함께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남조 시인이 지적한 “실험적인 젊은 시인들이 해부칼로 인체를 갈라 보여주는 것 같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것”(2010,1, 18)과도 연관된다. 이 ‘보여주기(showing)’는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에 접근하여 시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다.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혁신적 표현의 중심에는 대상을 실제의 상태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물시의 객관적 시각과 디지털적 감성(영상성, 현재성, 정밀성)이 들어 있다. 디지털적인 감성(感性)은 가상현실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가상현실은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같이 현실과 비현실을 통합하는 제 2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 공간은 이미지들이 관계를 맺는 순간의 상황에 따라 의미가 바꾸어지는 공간이 된다. 그 이미지들이 지향하는 사고의 공간은 20세기 프랑스의 사회 인류학자이며 구조주의 철학자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가 말한 ‘야생적 사고의 세계’와도 연결된다. 그 연결의 접점은 야생의 사고가 경험을 중심으로 한 감성적 표현으로 세계를 조직화하는 ‘구체성의 논리적 사고’이면서도 미리 정해진 목표가 없는 미지(未知)를 지향하는 기호적(記號的) 사고라는 것에 있다. 따라서 문명적이고 과학적 사고가 추상적(抽象的)인 논리적 틀 속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길들여진’ 사고라고 한다면, 야생적이고 신화적인 사고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길들여지지 않은’ 사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시인들의 이미 길들여지고 정해진 관념에 기대지 않고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길들여지지 않은 고도의 암시성(暗示性)의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시적 경향은 하이퍼시가 지향하는 이미지의 세계와 동반적(同伴的) 관계(關係)가 된다.   이런 변화의 양상은 2015년 신춘문예 당선시의 심사평에서 드러난 현대시의 난해성(難解性)에 대한 이해에서 발견된다. 일부 심사위원들은 시의 완성도(完成度)를 중요시하면서도 신인들의 시가 개척하고자하는 새로운 시의 공간과 미개지(未開地)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암시(暗示)의 매력에 대한 평가도 인색하지 않게 하고 있다. 그들은 시의 서정성과 대등한 위치에서 난해성을 인정하고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것은 어두운 사회현상에서 받은 정신적 상처를 상상의 언어로 암시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의미보다는 자유로운 상상 쪽으로 시를 유인(誘引)하는 언어감각의 시편들에 대한 인정이다. 이런 경향의 시편들은 언어의 유희성(遊戱性)을 발판으로 언어의 연상(聯想)이 펼쳐내는 신선하고 새로운 감각과 의미를 담은 이미지의 창출(創出)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시에서 발견과 발명은 구분된다. 발견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라면, 발명은 대상과 무관하게 낯선 의미를 빚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발견은 소통 가능성(서정시), 발명은 소통 불가능성(비서정시)과 직결되고, 다시 발견은 언어의 투명성(우리), 발명은 언어의 불투명성(나)과 연관된다. 우리 현대시는 발견과 발명 사이에 서식한다.”는 황지우, 이문재, 남진우의 심사평과 “시라는 이름의 관행적 작문방식에 갇혀 오히려 생과 세계의 피 흐르는 실상으로부터 시 자체가 유리되는 자가당착을 돌파하는 패기의 글쓰기, 한국어의 갱신과 재구성이 그로부터 시발될 글쓰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것은 무조건 정당한가. 바로 이 오래된 물음을 또한 고통스럽게 치르는 가운데 일종의 시적 윤리성을 확보한 글쓰기이기를 바란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희망의 새로움이지 ‘새것 흉내’가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문정희, 김사인의 심사평은 한국현대시의 방향을 제시하는 시대의 흐름에 어울리는 평문(評文)으로 주목되었다.   나는 쌈을 즐깁니다 재료에 대한 나만의 식견도 있죠 동굴 속의 어둠은 눅눅한 김 같아서 등불에 살짝 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장으로 싸먹는 것들은 싱겁죠 강된장, 과카몰리* 등 다양한   봄철, 입맛이 풀릴 때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배춧잎을 새로운 쌈장에 찍어먹습니다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 어떤 배설물은 때로 훌륭한 식재료가 되죠   두꺼운 것들은 싸먹기 곤란합니다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에도 누명과 모함은 숨겨 있죠 적에게 붙잡히면 품속의 기밀을 구겨 한입에 삼켜요 무덤까지 싸들고 가는 비밀도 있습니다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은 경계가 소홀합니다 누군가 달의 뒷장에 몰래 싸놓은 알들 나는 긴 혀로 나방을 돌돌 말아먹는 두꺼비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각사각, 저 달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수줍은 달을 보쌈해간 개기월식 삼킬 수 없는 과욕은 역류되기도 하죠 보름달을 훔쳤다는 나의 누명이 시간의 부분식으로 벗겨지고 있습니다   *아보카도를 으깬 것에 양파, 토마토, 고추 등을 섞어 만든 멕시코 식 쌈장 --- 조창규「쌈」전문   의 당선작 조창규의「쌈」에는 ‘쌈’ ⟶ ‘동굴 속의 어둠’⟶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구멍난 방충망’⟶‘달의 뒷장’,⟶‘긴 혀’⟶‘보쌈’으로 이어지면서 쌈장 속에 사물과 자연 현상을 포괄하는 다양한 상상의 다선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도 구속되지 않는 시적 화자의 유머가 일상적인 관념을 깨뜨리고 있다.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 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두레박으로 소문을 나눠마신 자들이 전염병에 걸린 거목의 마을 레드우드 꼭대기로 안개가 핀다, 안개는 흰개미가 밤새 그린 지하의 지도 아이를 안은 채 굳은 여자의 왼발이 길의 끝이었다 끊긴 길마다 우물이 피어났다, 여자의 눈물을 성수라 믿는 사람들이 물통을 든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잎 떨어진 계절마다 배설을 끝낸 평면들이 지하를 채워 나갔다 부풀지 못한 뼈들을 눕혀 물길을 만들면 사람들의 발목에도 실뿌리가 자랄까 안개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우물 입구를 닫을 시간이다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다                                                         ---- 최은묵 「키워드」전문   의 당선작 최은묵의 「키워드」는 우물을 상상의 키워드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는 1,2연만 읽어보아도 이 시의 우물은 실제의 우물과는 전혀 다른 감성과 상상의 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단순한 비유譬喩라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재료를 사용해 매번 새로운 의미나 관계를 만들며 어떤 질서를 창조해내는 브리콜라주(Bricolage)의 예술적인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 ‘죽은 우물’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를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가 지나치게 모호해서 소통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고도의 암시성은 시에 있어서 결함보다는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나희덕, 정호승의 심사평이 신선하게 감지된다.   연속사방무늬 물이 부서져 날리고 구름은 재난을 다시 배운다 가스검침원이 밸브에 비누거품을 묻힌다 바닥을 밟는 게 너무 싫습니다 구름이 토한 것 같습니다 낮이 맨발로 흰색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고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 구름은 발가락을 다 잘라냈을 겁니다 전쟁은 전쟁인거죠 그는 무너진 방설림 근처에 하숙하고 우리 집의 겨울을 측량하고 다른 집으로 간다 우리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나누었던가 폭발음이 들렸던가 팔꿈치로 배로 기어가 빙하를 밀고 가는 정수리 허물이 차갑게 빛난다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이 문을 찧는다 인질들이 일어선다 -------김복희「백지의 척후병」전문   당선작 김복희의「백지의 척후병」도 소통불가능의 언어가 시적 상상의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연속사방무늬 물이 부서져 날리고/구름은 재난을 다시 배운다/가스검침원이 밸브에 비누거품을 묻힌다/바닥을 밟는 게 너무 싫습니다/구름이 토한 것 같습니다”라는 이 시의 첫 연에서 ‘가스검침원이 밸브에 비누거품을 묻힌다’는 구체적 행위가 시의 키워드가 되어 ‘구름’⟶‘흰색 슬리퍼’⟶‘뱀’⟶‘전쟁’⟶‘방설림’⟶‘겨울을 측량’⟶‘폭발음’⟶‘인질’ 등의 언어로 연결되는 데, 이 시에도 의미의 생산보다 상상의 확대에 따른 새로운 시적 공간의 형성이 인지된다.   전성기를 지난 저녁이 엘피판처럼 튄다 도착해보면 인저리타임 목공소를 지나 동사무소, 골목은 늘 복사된다 어둑해지는 판화 속에서 옆집이라는 이름을 골라낸다 옆집 하고 발음하면 창문을 연기하는 배우 같다 보험 하는 옛애인이 전화한 날의 저녁은 폭설과 허공 사이에서 방황하고 과외 하는 친구의 문자를 받은 날 아침은 접시 위의 두부처럼 무심해진다 만약이라는 말에 집중한다 만약은 수비수 두세 명은 쉽게 제쳤으며 늘 성적증명서보다 힘이 셌다 얇은 사전을 골라 가장 극적인 단어를 찾는다 아름다운 지진이란 지구의 맨 끝으로 달려가 구두를 잃어버리는 것 멀리 있는 산이 침을 삼킨다 하늘에선 땅을 잃은 문장들이 장작 대신 타고 원을 그리며 날던 새들의 깃털이 영하로 떨어진다 원점은 어딘가 빙점과 닮았다 양철 테두리를 한 깡통처럼 전력을 다해 서 있는 트랙처럼 잠시라도 폼을 잃어선 안 된다 전광판이 꺼지더라도 경기가 끝나면 유니폼을 바꿔 입어야 한다 ----김관용 「선수들」전문   당선작 김관용의「선수들」도 언어의 연상으로 펼쳐내는 이미지의 전개가 의미의 구속에 갇혀 있는 시와 구별된다. ‘전성기’⟶‘인저리타임’⟶‘옆집’⟶‘옛 애인’⟶‘폭설’⟶‘만약이라는 말’⟶‘수비수 두 명’⟶‘성적증명서’⟶‘아름다운 지진’⟶‘지구의 맨 끝’ ⟶‘땅을 잃은 문장들’⟶‘원을 그리며 날던 새들’⟶‘원점⟶전광판⟶유니폼 등 부분 부분 단절된 서사敍事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상상의 다양성이 한 편의 시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선수들」은 언어와 언어가 충돌하며 파열하는 섬광 같은 것을 뿜어내면서 자기 시를 ’전력을 다해 서 있는‘ 삶의 트랙으로 밀어붙인다. 그리하여 이 시는 시적인 것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다른 시’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지 않는 이 주밀한 자본의 세계에서 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균열과 의외성이다. 트랙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결말을 짐작할 수 없는 것으로의 이 과감한 투신의 성과를 당선작으로 미는 데 우리는 주저하지 않았다.“는 이시영 황인숙의 심사평에 공감하게 된다. 이는 현대시가  의미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독자들에게 초현실적인 상상의 즐거움도 제공하는 언어의 유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21    김파와 김몽 댓글:  조회:4175  추천:0  2015-02-17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 ㅡ감각하고 사유하는 시 ㅡ김파의 디지털하이퍼시 경우     김몽     중국조선족시단에서 줄곧 시 혁신과 시 갱신에 몰두하여온 시인이 그리 많지 않은데 그중에 김파시인도 있다. 80년대 중기부터 김파시인은 새로운 시 탐구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물로 입체시론을 내놓기도 했다. 70이 넘은 오늘도 김파시인은 혈기왕성한 심신으로 새로운 시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줄기차게 달리고 있으며 그 와중에 디지털하이퍼시를 만나 사귀게 된다. 요지음 한국에서 이백 여수의 시로 묶은 디지털하이퍼시집을 펴낸다고 하니 그 왕성한 창작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호 에 선보이는 10수의 시도 모두 디지털하이퍼시이다. 사실 김파시인은 이전에도 알게 모르게 사물시나 디지털시, 하이퍼시와 유사한 시들을 써왔다. 다만 이론적으로 정립이 되지 않았고 명확하게 지칭을 하지 않았을뿐이다. 이전에 비자각적으로 하이퍼시를 썼다면 얼마 전부터는 하이퍼시의 이론을 접수하고 자각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했다.   21세기에 들어와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국가들에서 하이퍼텍스트문학이 발걸음을 뗐고 그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도 10여년전부터 심상운, 문덕수, 최진연, 오진연 등에 의해 하이퍼 문학 열기가 일기 시작했으며 중국조선족시단에서도 한국의 영향을 받아 금방 하이퍼시 운동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 운동의 앞장에 김파, 최룡관 등이 서있으며 김파는 창작에서 성과가 돌출한 시인중의 한 사람에 속한다.   김파의 시세계를 들여다보자면 우선 얼마간이라도 하이퍼시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야 할 것 같다. 하이퍼의 영어 원뜻은 암소, 계집애, 젊은 여자를 지칭하는데 거기에 시라는 말이 가첨되여 하이퍼시라는 신조어로 되면서 과도, 초월, 건너뜀, 최고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두사로 둔갑하였다. 하이퍼시에서는 탈관념(무의미)을 선언하며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제창한다. 연과 연,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인과적관계가 없으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다. 한국에서 하이퍼시의 선두주자인 심상운은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나아가는 것이 하이퍼시라고 했고 문덕수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 두 단위의 초월관계를 결합하여 완성하는 것이 하이퍼시라고 말하였다.     하이퍼시의 고창자들은 하이퍼시의 배경이 첫째로는 탈구조주의와 포스터구조주의라고 보고있으며 둘째로는 21세기의 디지털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디지털은 0과 1로 이루어지는 이진법 논리를 사용해 0과 1의 각종 조합을 만든 후 그것의 조작과 처리를 통해 여러 기지 정보를 생산, 유통,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데 아날로그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물리량을 나타내는 반면에 디지털은 비연속적이고 단속적이다.   하이퍼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첫째는 이다. 이 이론은 문덕수가 내놓은 것으로 풀이하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 수의 시를 구성한다. 한마디로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 특성이다.   다음으로 심상운에 의하면 하이퍼시는 종래의 관념시처럼 단선구조인것이 아니라 다선구조라고 말한다. 최진연은 또 아예 뚜렷한 선이 없으므로 비선(非线)、무선(无线)구조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연과 연, 행과 행을 바꿔놓아도 상관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의미론적, 정신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것도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세 번째 특징은 상상력에 의한 시적공간의 확장이다. 하이퍼시에서는 이미지들이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극대의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된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 창출을 보여준다.   하이퍼시의 또 다른 특징은 디지털감각의 영상성과 동시성, 정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이 동영상과 유사한 동적, 입체성특징을 갖는다. 종래의 단선적인 시는 지속적사유의 사물이지만 다지털은 순간적 단속의 직관적인 사유이다.   하이퍼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탈관념이다. 이것은 무의미하고도 통한다. 추상적관념이란 바로 사랑, 증오, 분노, 폭로, 비판, 찬양 등등인데 하이퍼시에서는 이런 관념을 배제하고 추방한다. 심상운은 “시인의 주관적 생각(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 자체에 그치면 탈관념”이라고 말하였다. «최진연, »   심상운의 하이퍼시 한수를 보자. “앉아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빨간 뻐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뻐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후략)”   이 시를 보고 최진연은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시사(诗史)에서 처음”이라고 말하였다.   하이퍼시에 대한 이와 같은 소개를 전제로 김파 시를 살펴볼 수 있다. 10수의 시는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을 종횡무진하면서 다감각, 다정서, 의미지 다층차구조로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으며 독자들에게 무변의 다공간속에서 다감각세계를 맛보게 해주려 하고 있다.   «발자국» 은 각 시구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한 시스템속에서 상호보완적 생산기능을 한다. ,
20    하이퍼시와 심상운 댓글:  조회:4730  추천:2  2015-02-17
심상운론 ⦁ 2       문 덕 수 (시인⦁ 예술원회원)       1. 심상운(沈相運) 시인은 독실한 불교신자이므로 불교관계자를 끌어들여 얘기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필자의 편의상 장자(莊子)를 끌어들여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심상운은 허순행의 『꽃잎만 붉다』의 해설에서 노장철학(老莊哲學)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공자는 기원전 4세기 전 활약한 중국 고대의 대사상가이나 공맹의 가르침이 오상오륜(五常五倫)을 중심해 질서와 신분을 고정화시켰지만, 장자는 자유, 무차별, 무위자연을 기본으로 했습니다. 장자에겐 혜시(惠施)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호수(濠水)의 다리 위에서 그 아래의 강물을 바라보면서 “강물 속에서 물고기들이 즐겁게 놀고 있다.”고 장자가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혜자는 “너는 고기가 아니다. 고기가 즐거운지 어떤지 어떻게 아는가. 그렇지만 고기들은 번민하고 있는지도 몰라.” 장자는 반박하여 “나는 고기가 아니다. 그러나 너는 내가 아니므로 내가 고기 마음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네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어서 장자는 “청컨대 근본으로 돌아가라” 하고는 문답을 끝맺습니다. 네가 나에 대하여 “고기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는 순간, 너는 내가 고기 마음을 알 수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莊子與惠子游於濠梁之上. 莊子曰; 儵魚出遊從容, 是魚樂也. 惠子曰: 子非魚, 安知魚之樂? 莊子曰; 子非我, 安知我不知魚之樂? 惠子曰; 我非子, 固不知子矣. 子固非魚也, 子之不知魚之樂全矣. 莊子曰; 請循基本. 子曰; 女安知魚樂云者, 旣已知吾知之. 而問我, 我知之濠之上也―『莊子』 「秋水」)   여기서 다시 공맹과 노장의 출생지를 따질 자리는 아니지만 조금 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공맹의 고향은 산동성 곤주부(袞州府)이고, 노장의 향리는 하남성 귀덕부라고 합니다. 이 두 곳은 직선으로 연결하면 한국의 이수로서 2백리. 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거리로서 남북사상의 대립을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광막한 중국에서 말입니다. 공맹은 북방 사람입니다. 중국의 북방인은 특히 현실적입니다. 남방은 허무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심상운은 공맹보다 남방의 노장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허유(許由)라는 사람이 요(堯) 임금을 찾아왔습니다. 허유는 당시 유명한 은자(隱者)입니다. 요임금에게 방문의 뜻을 말합니다. 요임금은 허유에게 “지금까지 천하를 다스릴 자를 찾아 왔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나서 이 직위를 당신에게 양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일광(日光) 밑의 거화(炬火) 한 개비의 빛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시우(時雨)가 내린 후에 우물물을 관개(灌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엔 꼭 당신에게 양위할 생각입니다.” 허유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천하를 다스린다면 내가 맡을 것은 무엇입니까? 천자의 이름만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실없는 짓입니다. 실(實)의 빈(貧), 실이 있어야 그 이름이 있어요. 당신은 나를 보고 안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만 내게는 내 만족이 있습니다. 메추리(?)는 숲속에 둥지를 틉니다. 아무리 광대한 숲속의 둥지라 할지라도 결국 하나의 소지(小枝)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두더지(?)를 보십시오. 끝없는 강물의 흐름에서 물을 마십니다. 아무리 황하가 크다고 할지라도 그 두더지의 마시는 물은 조그마한 배를 채우는 몇 방울의 물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내게는 내 만족이 있습니다. 다시는 양위 문제를 내놓지 마십시오”   (堯讓天下於許由, 曰; 日月出矣, 而 爝 火不息, 其於光也, 不逆難乎? 時雨降矣, 而猶浸灌, 其於澤也, 不亦勞乎? 夫子立而天下治, 而我猶尸之. 吾自視缺然, 請致天下! 許由曰; 子治天下, 天下旣巳治也, 而我猶代子, 吾將爲名乎? 名者, 實之賓也, 吾將爲賓乎? 鷦 鷯 巢於深林 不過一枝, 偃鼠飮河, 不過滿腹, 歸休乎君, 予無所用天下爲. ―『莊子』 「逍遙遊」)   나는 심상운과 비견할 만한 인물을 찾다가 우연히 허유(許由)라는 한 인물을 찾았습니다. 심상운을 허유의 곁에 갖다 놓은 것은 무리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허유는 너무도 크고 너무나 굉장한 전설을 소유하고 있어서 좀 어떨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명성적, 역사적 전설과는 관계가 멉니다만 심상운의 근본 성격과 관련되는 듯싶습니다. 심상운의 과거 경력의 여러 가지 면이 천하를 주어도 싫다고 하는 허유와 일맥상통합니다. 나는 심상운의 그러한 면이 자랑스럽게 생각되고, 또 그러한 면에서 새로운 시론의 가능성도 믿습니다. 심상운은 공맹(孔孟)에는 모자라는 점도 있으나 노장(老莊) 쪽에 더 가깝게 생각됩니다.   2. 나는 몇 번 하이퍼의 내부(단위와 단위) 연결의 양상을 말한 바 있습니다. 심상운의 최근 시에서 하이퍼시의 여러 가지 연결의 양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례를 좀 들겠습니다.   [A] 꽃이 1cm 될까말까 한 배추벌레 한 마리가   파란 배추 잎 위로 배밀이하며 올라가고 있다 -「길」 부분   [B]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의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맨살에 링크하기」 부분   먼저 [A]의 고리 연결 방식부터 봅시다. [A]에서는 단위가 분류되어 있습니다. 배추벌레가 배추잎사귀에서 배밀이하면서 기어 올라가고 있음을 묘사한 단위입니다. 그런데 마추픽추의 돌벽을 기어 올라가는 벌레의 모습은 단위를 별도로 만들어 즉 별개의 단위로 만들어 연결합니다. 지금 마추픽추의 돌벽을 기어올라가는 광경은 예문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만 나타내어도 배추잎사귀 위를 기어 올라가는 광경과는 별도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순간의 시간 경과를 나타내는 벌레의 이동 광경을 표시한다고 하더라도 [A]단위에의 두 시간 경과 사이에 패여 있는 갭은 내가 이 논문에서 말하는 초월의 한 양상입니다. 하나는 자연에의 시간 이동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에서의 시간 이동입니다. 이러한 시간 이동 경과에 따라 생명 현상이 이어지거나 망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문제는 이러한 고리 이미지가 단위를 구별해서 연결되고 있음을 작자는 보여주고 있고, 이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 다음의 [B]에서는 어항속의 열대어 두 마리와 어항 대신에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남녀가 어깨를 감싸고 있는 모양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항 속의 열대어 두 마리와 산호초의 바다 속을 바라보면서 어깨를 감싸고 있는 남녀 한 쌍의 광경이 한 편의 한 센텐스 속에 비교되고 있습니다. 가령,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파란 의자」 부분   와 같이 연(단위)을 달리하여 연결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어쨌든 이러한 연결방법도 있는 듯합니다. 한 단위 안에서의 연결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심상운은 앞의 「길」에서 보여준 배추벌레의 이미지에 의한 연결 방식과 여기의 [B]에서 보여준 연결 방식(어항의 열대어 두 마리나 어깨를 감싸고 있는 한쌍 남녀, 「파란의자」에서 보여주는 파란 의자에 앉는 여자의 이미지)은 분명히 다릅니다. 앞의 「길」에서 보여주는 단위 속의 두 이미지 사이에는 큰 균열이 있고, 그 균열은 단순한 어휘의 연결이 아니라 그 속에는 굉장한 깊은 초월의 갭이 있습니다. 그것이 단위 간의 갭입니다. 심상운의 시에서는 여러 가지 연결의 방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자에게는 종전의 시처럼 감정이나 관념이 곧 전달되지 않습니다. 조금 참고 견디며 고리 이미지를 찾아보는 그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도 하이퍼시를 읽는 즐거움의 한 가지입니다. 앞의 시「파란 의자」(하이퍼시클럽의 동인 모임의 『하이퍼시』라는 앤솔로지가 있습니다. 이 동인지에 실려 있는 시입니다)는 매우 재미있고, 또 하이퍼시를 읽는 독자의 즐거움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다시 전문을 싣습니다.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뻘건 피 떨어지는 누우 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다)   그녀는 파란 의자 위에서 구름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넣어 물고 무거운 가방을 든 검은 외투의 사내에게 손을 흔든다 사내도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짓한다   버스 안은 침묵들이 움직이고 있는 빈 악보 속 같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이 투명한 물방울로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그 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터뜨린다 그럴 때마다 방울 속에서 나온 노란 알몸의 소리들이 쪼로롱거리며 버스 안에서 뛰어놀다가 바람에 실려서 도시의 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녀를 덮친다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뛰쳐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은빛 지느러미를 퍼들거리며 튀어오른다   순간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센터 쌍둥이빌딩 눈부신 유리창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은빛 비행기   (그 은빛 비행기에는 검은 외투를 벗어버린 알몸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고?)   아침 11시, 빨간 버스는 아마존 숲 위를 날아가고 그녀의 파란 의자는 더 반짝이기 시작한다 -「파란 의자」 전문   좀 긴 작품입니다. 좀 긴 작품을 가지고 감상해 봅시다. 제1연에 “아침 10시”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연월과 시간이나 날짜는 사물 묘사에 있어서 현장의 시간을 잘 나타내는 요소입니다. 심상운의 시에서는 날짜와 시간이 잘 제시됩니다. 묘사의 사주(四柱)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고, 앉은 그녀를 구름이 휩싸고 공중으로 날아가고 지상에서는 빨간 버스가 그녀의 구름을 싣고 달립니다. 완전히 상상 속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이상적 세계 속의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름이 만드는 아이스크림’은 비유인 동시에 상상 세계 속의 이미지입니다. ‘실제의 아이스크림’과 역설적 대조를 이루는 이미지입니다. 독자는 여기서 파란 의자에 앉은 그녀와 빨간 버스에 탄 구름과 그녀의 두 이미지를 비교해 보는, 그래서 사물과 허구의 두 이미지의 ‘역설’을 보는 시적 감수력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괄호 속의 이미지도 실은 사실과 상상세계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파란 의자와 하이에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있는 두 이미지의 비교 관찰에서 실제(현실)와 상상의 역설적 비교와, 그리고 현실적 초월성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의 이미지의 광경은 변화를 거듭하여 무거운 검은 외투의 사내와 파란 의자에 앉은 여성과의 만남이 등장합니다. 마치 연애장면을 연출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장면은 다시 변화하여 버스 안의 침묵의 빈 악보의 광경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의 물방울이 파란 의자에 앉은 그녀에게 닿은 그 침묵의 음표들을 톡톡 터뜨립니다. ‘노란 알몸의 소리’라고 하며 색채감각으로 그 음표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연은 또 한 번 대전환을 합니다. 즉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리는 상상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굉장한 세계에의 전환입니다. 다음의 현장은 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의 폭파현장입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정치 현실의 도입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검은 외투를 입은 청년은 뜻밖에도 무슬림 폭파범의 일인으로서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던 범인의 한 사람인 듯합니다. 파란 의자에 앉았던 사람은 손을 흔들면서 교신했던 것으로 보아 그 남자와 여자는 다 같은 쌍둥이빌딩의 폭파범으로 보입니다. 폭파범은 체포되었는지 그 다음엔 보이지 않고, 그 파란 의자만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이 시는 결국 이 속에 폭파범들이 잠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허구입니다. 이렇게 이 시 전체의 구조를 알고 다시 읽어보면 무척 재미있는 시로 느껴집니다. 모든 하이퍼시가 다 이러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구조도 있다는 것은 알고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심상운의 하이퍼시는 하이퍼의 여러 가지 단위간의 연관관계를 연구해 볼 수 있는 실례의 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연결도 두 단위의 연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3. 심상운 시의 저서 중에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라는 저서가 있습니다. 21세기 한국에서 전개된 디지털과 하이퍼시의 세계를 개략한 저서(푸른사상사, 2010)이며, 이 저서는 김기림의 『시론』(詩論, 白楊堂, 1947)에 버금갈 시대적 의미가 있는 저서입니다. 김기림의 저서는 모더니즘을 중심으로 한 시론이지만 심상운의 저서는 디지털과 하이퍼시를 조명한 시론입니다. 내용의 차이가 있으나 모두 한 시단의 동인지운동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저서입니다. 심상운이 진술한 한 가지 특징은, 그 진술은 근거의 추구를 통해서 전개해 나가는 것입니다. 심상운은 앞의 저서에서 디지털시와 하이퍼시를 비교하고 있거니와 그런 경우에도 디지털시의 경우, 그 데이터의 본질에 육박해서 디지털의 논리를 전개해 간다는 점에서, 애매하고 모호한 관념에서 진술하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나 본질을 확실히 파악해서 논리를 전개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시하고 있는 점은 디지털시의 근원입니다. 예를 들면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시의 탈관념된 언어단위(unit)들은 결합을 통해서 대상의 모습(현상)을 드러내지만 분리(해체)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질이나 근거를 애매하게 두고 그냥 넘어가지 않은 그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볼 때, 그의 진술 태도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또 심상운은 오남구의 「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인용하고 특히 퐁퐁퐁퐁 가로를 딛고 간다와 같은 표현을 언어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컴퓨터가 열어놓은 사이버세계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세계, 현실과 경계선의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에서, 컴퓨터 같은 IT정보시대의 중요한 현실의 도입이 확실시 되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그가 말하는 기호와 현대 프랑스의 기호론자인 보드리야르의 이론과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다음엔 이미지에 관한 논의입니다. 이미지(image)라는 언어는 허구를 주장하는 어원으로, 상상(imagination)과 같습니다. 심상운은 상상과 공상에 관한 이미지에 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요즘 문학의 장르론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문학에서 장르론은 중요한 영역입니다만, 그러나 그 장르를 마치 도구처럼 사냥하는 주체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의 장르는 시인이며, 시조의 장르는 시조시인이며, 평론 장르의 주체는 평론가입니다. 장르의 중요성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주체와 장르와의 관계입니다. 즉 그 장르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점은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이퍼시에서 장르의 붕괴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하이퍼가 현실에 무게를 두면서 상상을 초월하려고 하고 나아가 ‘공상 지향’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시의 이미지가 상상보다 공상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듯합니다. 왜 상상 쪽보다 공상 쪽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일까요? 이는 이미지가 실제의 사물의 존재에 무게를 두는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지 않은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이퍼시도 사물의 이미지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이미지의 존재에 관한 관심도 이미지의 실체(實体)로 오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상운은 이미지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이는 프랑스의 금세기의 철학자인 보드리야르의 사상과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즉 이미지는 실체가 없는, 즉 공상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미지는 사물의 실체를 가지느냐 안 가지느냐 하는 이미지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 같습니다. 결국 이미지의 표현은 ‘식’(識)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유식론인 듯합니다. 어쨌든 이와 같이 이미지는 공상이든 상상이든 이 모든 문제를 본질로 보고 있음이 심상운의 근본 자세인 듯합니다. 사물은 진실에 있어서 자성이공(自性而空)이라는 사상과도 직통합니다.   4. 하이퍼시로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심상운의 저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입니다.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이미지는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 상상(imagination)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됩니다. 공상은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합니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합니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와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입니다.(『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171~172쪽). 여기에 하이퍼시의 본질에 육박함으로써 직면하는 공상과 접촉에서 오는 또는 직면하는 양면을 논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점에 대하여 염려가 되므로 하이퍼시가 가지는 파라독스의 측면에서 논한 바 있습니다만... 심상운은 하이퍼시도 오남구의 디지털시에서 발전한 것인 듯 말하고 있습니다. 오남구가 내세운 ‘탈관념’, ‘빈자리X’, ‘껍데기론’은 디지털시의 바탕이 되는 존재성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오남구는 그의 선언에서, “아날로그시대의 시가 기술(記述) 또는 자동기술하는 것이라면, 미래의 디지털시대의 시는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사’(念寫) 또는 ‘찍는다’는 행위라고 하였다. 찍는다는 행위는 관념의 세계를 사물성의 보여주기의 세계로 전환하는 것으로 시의 현장성과 연관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213쪽) 심상운은 하이퍼시의 배경 이론인 리좀(rhizome)의 개념을,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의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다양화 또는 탈-중심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사회(rhizome society )’라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無限想像)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적인 시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가장 발전된 상태의 디지털시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들뢰즈는 수목상(樹木狀)의 조직형태의 전형으로서 드러나는 일자중심(一者中心), 이항대립(二項對立) 진행에서의 해방은 리좀의 불균형성, 무법칙성(無法則性) 등을 말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慾望)을 미세한 입자(粒子)의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흐름이 상호 결합하고 분리하면서 방향을 바꾸고 증식(增殖)하는 과정을 욕망이라고 하는데 그 욕망과 관련됩니다. 이것은 장소로서의 운동으로써 획득되는 탈속령화(脫屬領化) 쪽이 본래적인 것으로 보는 사상과 일치합니다. 여기서 컴퓨터 상의 공간이 아닌, 즉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 하이퍼시에서 링크의 역할을 보고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사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를 구현한 것이 오남구의 시가 주장하는 이미지의 미끄러지기, 말의 덩어리, 또는 마디 점핑하기 등으로, 이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서 이미 이루어진 정신현상이 시의 언어로 표출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한 예를 보인 것이 오남구의 「봄이 차 한잔을 놓는다」와 같은 시라는 것입니다.   봄이 부~드~럽~다 눈을 쏟아내리고 골목이 투명하다 살얼음이 진 공기 팽팽한 막을 만들어 울타리의 장미덩굴이 꼼짝 않는다. 새벽녘의 고양이가 스릉~ 팽팽한 막을 건드리고 간다 부~드~럽~다 내가 만진다 스릉~ 한꺼번에 사물들이 깨어 일어난다 길이 열리고 골목으로 어둠이 콸콸 흘러내리고 숨소리가 흘러내린다 그 때 삭풍에 장미덩굴이 뒤척이는 듯싶다 꿈틀꿈틀 움직이며 내 귀에 가까이 대고 “배아줄기세포이야긴데……” 속말을 하여 내가 장미덩굴을 들추어 본다 -「봄이 차 한 잔을 놓는다」에서   여기서 링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부~드~럽~다”, “스릉~”과 장미덩굴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배아줄기세포의 상상, 고양이의 이미지 등입니다. 심상운은 여기서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의식의 불연속적인 흐름은 시의 흐름을 시적 형상화를 통해서 순간적 직관에 의한 보여주기(showing) 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5. 심상운은 또 문덕수의 문제의 장시 「우체부」의 기법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작품 비평에 있어서 그 작품의 내적인 어떤 특색을 그 작품의 밖에 있는 역사나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특성과 관련시켜 보는데 비하여(나는 이러한 방법을 역사주의라 봅니다), 심상운은 작품 자체를 그 형식적 방법으로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평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일종의 혁명적·혁신적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역사주의 비평에서 벗어나서 작품 자체의 시적 예술적 방법론에 입각한 시대로 바뀐 것입니다. 언어(기호)가 역사를 가리키던 시대는 가고 역사 자체가 알맹이로 남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심상운은 「조셉룰랭」의 부분을 인용하고 고향의 뒷동산 호수 → 어머니의 양수 → 잉어가물치 → 서낭당, 나무 → 우체부, 가방 → 빈, 동그라미 → 달망산 → 우발수 → 유화 → 닷되들이만한 큰 알→사문의 바랑 등으로 이미지가 의식의 흐름이나 자유 연상, 이외에 어떤 인과나 논리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연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현실과 비현실을 초월합니다. 여기서 초월한다(hyper)라는 것은 이론적인 것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결합하고 자유롭게 새로운 세계를 형성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관념이 탄생되기 이전의 무의미의 공간이며 현대시에서 말하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하이퍼시의 기법을 열거하고 있는데, 1)불연속적인 연결과 총체적인 현실 인식, 2)단선구조의 시에서 해방된 다선구조의 세계, 3)사건을 생생하게 감지하게 하는 사실적인 표현기법, 4)펀(pun), 5)언어 유희 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단선구조의 시에서 해방된 다선구조의 세계는 가장 자극적이고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227쪽) 이것은 그의 다른 논문에서 지적하는 1)이미지의 독자성, 2)풍부한 상상의 세계, 3)미래 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다시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선 구조에 대한 해설은 동시에 하단에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21세기 한국의 시인들은 대부분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시점)만 존재케 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쓰고 있다. 시 속의 사건과 인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건과 인물들은 시 속에서 시인(시적 화자)에게 종속되어서 독립된 시점을 나타내지 못하고 시의 대상(소재)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런 단일한 시점의 단선구조는 그림의 원근법(遠近法)과 같이 한 곳에 중심을 두고 하나의 시점에 대상을 집중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작자가 의도하는 세계로 들어가려 한다. 그런 기법은 미술의 역사에서는 19세기적인 기법이다. 이 단일 시점의 원근법을 깨뜨린 것이 20세기초 파블로 피카소나 조르주 브라크가 일으킨 큐비즘(Cubism) 운동이다.”(동 상서 227쪽~228쪽) 이것은 다선구조의 의미를 해설한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하이퍼시의 중요한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6. 『장자』(莊子) 중에 다음과 같은 인물 묘사가 있습니다. 장자는 구루병(佝僂病, 곱사등이)으로 근대의 잔병을 면하게 된 지리소(支離疏)라는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찬양하면서 심한 곱사등이를 묘사한 것이 있습니다.   지리소라는 곱사등이는 그 병 때문에 징병(徵兵)에 면제되어 자유와 행복을 누리면서 장자의 ‘무용(無用)의 철학’을 논합니다. 지리소는 그의 턱이 배꼽 밑에 달렸고, 두 어깨는 머리보다 높고, 상투는 하늘로 치솟아 있고, 오장(五臟)은 머리 위쪽에 붙어 있고, 두 다리가 몸 옆구리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키질을 해서 쌀을 고르면 열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고, 나라에서 징집하더라도 나가지 않아도 되는 지리소는 팔을 휘저으며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다니지만, 그는 언제나 병신이라는 이유로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나라에서 신체 부자유자에겐 곡식을 내릴 때에는 3종(지금의 50리터에 해당함 6斛 4斗 정도라고 함)의 곡식과 열 다발의 땔나무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육체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그 목숨을 충분히 마칠 수 있었으니 하물며 그 덕이 온전하지 못한 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支離疏者, 頣隱於齊, 肩高於頂, 會撮指天, 五管在上, 兩髀爲脅, 挫鍼治繲 , 足以餬 口, 鼓筴 播精, 足以食十人, 上徵武士, 則支離攘臂而 遊於其間, 上有大役, 則支離以有常疾, 不受功. 上與病者粟, 則受三鍾, 與十束薪 夫支離其形者, 猶足以養其身, 終其天年, 又況支離其德者乎? -『莊子』 )   곱사등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묘사 같지만 장자의 주제인 “무용(無用)之 용(用)”을 드러내는 데는 충분한 듯합니다. 그런데 정상인과 곱사등이와의 대조는 큰 역설(paradox)입니다만, 이런 역설의 효과를 심상운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굉장한 패러독스입니다. 하이퍼시는 이런 특징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7. 잡담 한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어느 날 대공원숲 둘레길을 한바퀴 돌고 점심식사를 하다가 끝나갈 무렵에 심상운이 문득 “오늘은 안광태가 없어서 좋네”라고 한마디 무심코 했습니다. 모두들(문덕수, 김규화, 강정화, 김예태, 허순행, 정연덕 등)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정말 의외의 폭소였습니다. 병(대상포진?) 때문에 오랫동안 참석하지 못한 안광태를, 대장(심상운)이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나서 웃었지만, 점심이 끝나자마자 나누어주는 작품이 배부름에 상당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그런 부담감에 불을 질러 짓눌려 있었던 참가자들에게 불을 지펴 뜻하지 않는 패러독스의 웃음을 터뜨리게 된 듯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안광태의 시 연구는 결국 하이퍼시 연구로 연결되어, 그만큼 이 시의 중요성은 참가자들이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고 이와 같이 연구모임에서 토론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하이퍼시의 난해성은 하이퍼시의 패러독스입니다.
19    하이퍼시의 해명 댓글:  조회:4640  추천:0  2015-02-17
  하이퍼시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해명                                                                          심 상 운     1. 독자와의 소통문제에 대한 해명   하이퍼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독자와의 소통이다. 독자들은 논리와 감성을 통한 직접적인 소통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비순차적이고 비논리적인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골간으로 하는 하이퍼 시의 ‘의미의 불확정성(不確定性)’에 당황하게 된다. 그 근본원인은 현대시의 대부분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의미의 발굴’을 시의 중심개념으로 삼고 있는데 반해 하이퍼 시는 기존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난 전혀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을 중심개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불확정성은 하이퍼시에서 이미지 사이에 인과관계가 직선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서로 굴절되고 단절됨으로써 독자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만 떠다니고 의미의 형성이 분명해지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과 초월, 무한한 상상을 통한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결합과 확장은 기존의 시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시의 미개지(未開地)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언어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의식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보다 더 깊고 넓고 모호(模糊)한 무의식(無意識) 속에서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융합된 제3의 세계를 시를 통해 경험하는 것은 독자들의 입장에서 매우 신선하고 새로운 시적 개안(開眼)의 경험이 될 것이다.   다음의 글은 2015년 2월호 월평에서 발췌한 양병호(시인, 전북대 국문과 교수)의 평문(評文)이다. 이 평문을 인용하여 김석규의「저녁 귀가」와 심상운의 시「빛 또는」의 시적구조의 차이와 두 편의 시가 지향하는 방향성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줄곧 젖어 있는 일에 이력난 가난은 죄가 아니다 꾸부정한 비애의 어깨 너머로 물드는 잿빛 도시 건너 동네에 어둠이 오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간다 솔기 터진 일상의 피댓줄에 꼬여 사정없이 돌아가버린 허리 아픈 하루도 이렇게 속절없이 저물고 마는 것을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꾸려들고 돌아가는 저녁 변두리 백일장 나가서 장원하고 온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석규, 「저녁 귀가」 전문   이 작품은 일상의 시간 특히 저녁 무렵의 시간을 섬세한 묘사를 통해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일상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시상이 질서 있게 전개되고 있다. 서정시의 특징인 단일한 정서 혹은 순간적 서정을 압축하여 제시하는 전범을 보인다. 여기서 시간은 시인의 전경화 된 인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배경화 되어 있다. 예컨대 시간은 이 작품의 정서를 얼비쳐주는 배경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화자의 생은 가난하고 피곤하다. 그러나 가난은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 ‘죄’가 아님을 확인한다. 이는 가난한 삶에 대한 보호적이며 위안하는 심리이다. 화자가 생활하는 공간 역시 ‘잿빛 도시’로서 우울하고 권태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화자는 이러한 도시 공간에서 우울과 비애에 젖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리하여 생활은 “어둠이 오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가”는 상황으로 표상된다. 말하자면 ‘어둠’이 앞장서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가는 암울한 삶의 과정이 은유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후반 생략)   검은 옷을 입은 빛이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서 부르르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시간   성난 개들이 어둠 속 4차선 도로를 횡단하며 번쩍이는 빛을 향해 컹컹 짖어대고   한여름 바닷가 뜨거운 모래밭에선 배구를 하고 있는 맨발의 30대 비키니 여자들의 번들거리는 붉은 살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가 푸른빛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심상운, 「빛 또는」 전문   이 작품은 시상 전개 혹은 이미지 결합 층위에서 의도적으로 완결성을 방해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 대상은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설정 역시 인과성이 나 논리성을 자의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예컨대 임의적이고 의도적으로 의미의 불확정성을 강화하고 있으며, 시상 전개 과정에서도 의도적인 절연을 통해 공소를 배치하고 있다. 우선 시제에서부터 “빛 또는”이라는 불완전한 어구 제시를 통해 미완의 의도성, 여백의 판단정지를 강조하고 있다. 1연은 이 작품의 시간 배경에 대해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인 시간 표상을 목표하고 있지는 않다. 우선 1행의 ‘검은 옷을 입은 빛’이라는 역설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해석의 가능성을 확장하여준다. ‘빛’과 ‘검은’은 서로 친밀성이 희박한, 아니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러나 ‘옷’이라는 매개물과 ‘입은’이라는 매개 속성의 개입으로 의미성을 획득한다. 예컨대 ‘빛’은 ‘검은 옷’을 ‘입어서’ 발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빛’이 ‘검은 옷’에 차단 유폐되어 자신의 진실 혹은 본질을 발현하지 못하는 왜곡된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그 ‘빛’은 현재 시간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 있다. 이 구절에서 부각되는 의미소는 ‘무표정한’이라는 감정의 노출 억제 상황이다. 또한 ‘매미’라는 사물의 속성이 환기하는 짧은 생애라는 시간성이다. ‘붙어’있는 상황 역시 고정된 상태가 아니어서 위약한 접합성을 드러낸다. 결국 ‘빛’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떨기’시작한다. 따라서 시간 배경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1연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암시적으로 재현한다. 2연은 ‘개들’의 행위가 집중적으로 중첩되어 표상되고 있다. 개들은 우선 원인을 알 수 없는 ‘성’이 난 상태이다. 하여튼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상태인 것이다. 여전히 개들은 ‘어둠’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그 개들의 지향은 길을 따라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4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나아가고 있다. 동시에 개들은 ‘번쩍이는 빛’을 향해 짖어대고 있다. 이는 어둠 속에서 빛을 거부하는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즉 이 시의 1, 2연은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시간 공간 상황을 부각하고 있다. 그런데 3연에서는 장면이 급격하여 전환되어 환한 여름의 바닷가로 장소 이동을 한다. 시간은 ‘빛’의 절정기인 여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공간은 해변으로서 완전하게 개방되어 자유로운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시공 속에서 배구를 하고 있는 인지 대상인 ‘여자들’역시 ‘맨발’과 ‘비키니’차림으로 육체를 완전하게 노출하고 있다. 말하자면 폐쇄되고 차단된 시공 때문에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1,2연과 달리, 3연은 개방되고 자유로운 시공의 특성으로 인하여 밝고 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4연은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의 모습과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화자가 주목하고 있는 인물 ‘남자’를 묘사하고 있는 이 구절에서, ‘흰옷’은 ‘검은 옷’과 ‘장발’은 ‘맨발’과, ‘50대 남자’는 ‘30대 비키니’와 각각 대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실내 즉 임시로 가설된 ‘무대’에서 외부의 ‘하늘’을 향하여 팔을 벌리고 있다. 예컨대 이 남자는 폐쇄 차단된 어둠의 공간에서 무한한 빛의 공간인 ‘하늘’을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주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이 작품의 시상 전개를 의미 부여를 통해 재구축하여 보았다. 이 시는 서로 대립되거나 이질적인 요소 혹은 사물 특성을 자유연상으로 처리함으로써 빛과 어둠의 혼성이 주는 추상적인 감각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은 현실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 혹은 심리에 내재한 관념적인 것이다. 이 작품은 독자가 시인 혹은 화자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 시적 정조에 동화되기를 요구한다.   --- 「시간, 관념과 실재 속에 유랑하는」(양병호) 『시문학』 2015년 2월호 에서 발췌 인용   김석규의 「저녁 귀가」에 대해 “일상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시상이 질서 있게 전개되고 있다. 서정시의 특징인 단일한 정서 혹은 순간적 서정을 압축하여 제시하는 전범을 보인다.”는 평문과 심상운의 「빛 또는」에 대해 ‘의도적으로 완결성의 방해’ ‘의미의 불확정성’ ‘의도적인 절연을 통해 공소의 배치’ ‘몽타주 기법’, ‘시인의 내면심리’, “이 작품은 독자가 시인 혹은 화자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 시적 정조에 동화되기를 요구한다.“ 등의 비평언어는 일반적 서정시와 하이퍼시의 특성을 집어낸 것으로 인식된다.   김석환 (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은 이런 한국 모더니즘 시의 현상을「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에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구조의 구축(construction)과 탈구축(deconstruction)이라는 양립관계의 개념으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다. 위에 예시한 시를 김석환의 이론에 대입하면 김석규의「저녁 귀가」는 구축적 구조의 시이고, 심상운의 「빛 또는」은 탈구축적인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구축'이란 시에 참여한 요소들이 대립과 유사성에 의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갖고 시적 구조를 이루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와 대립적인 '탈구축'은 그 요소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이 희미해짐으로써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전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 자체가 불확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언어의 특징을 활용하여 새롭게 구축한 시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며 암시적이요 다의적이다.   구축의 시는 유기적 관계로 전체성을 형성 하는 시적 구조를 형성하고, 탈구축 시는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모호한 의미, 암시적이며 다의적이라는 그의 해석은 하이퍼시의 탈구축적 특성의 한 부분을 적시(摘示) 것으로 이해된다.   현대철학에서도 구성(구축)과 해체(탈구축)라는 개념으로 동서양의 철학을 분류하고 있다. 철학자 김형효(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조성택(고려대 교수), 한형조(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 이도흠(한양대 교수)과의 에서 동서양의 철학사를 관통하는 관점에서 철학을 구성주의 철학과 해체철학으로 양립시키고 있다. 구성주의 철학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기반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지배하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는 철학이고 해체철학은 진리를 구성하는 인간주의(人間主義)의 이성을 부정하고 자연 본래의 면목을 드러내고자 하는 철학으로 이해된다. 이런 철학적인 관점은 시의 내용과 주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다음 글은 인터뷰의 일부다.   “철학이란 동서고금에 너무 많고 철학사를 보면 너무 복잡해서 진리가 무엇인지 회의가 들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철학은 대단히 간단해서 동서고금을 통해서 보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구성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해체철학입니다. 구성주의는 자연의 인간동형론(人間同形論)이죠. 다시 말해, 인간을 설명할 때 자연과 비교하여, 즉 인간만 얘기하면 동어반복에 그치니까 변증법적으로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여서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모든 이성주의(理性主義) 철학과 동양의 주자학(朱子學)을 들 수 있습니다. 구성주의 철학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형이하학적인 구성주의로 세상을 어떻게 편리하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그런 의미의 형이하적인 구성주의가 있고, 형이상적인 이성주의가 있는데 도덕형이상학적(道德形而上學的)으로 정의의 입장에서 세상을 재편하겠다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명사에서 보면, 편리의 진리는 자본주의와 직결되고 정의의 진리는 사회주의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대립하고 있지만 철학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둘 다 이성(理性)에 의해서 세상을 구성하고 지배하겠다는 의도에 있어서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해체주의는 바로 이러한 구성주의의 철학적 한계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물론 해체주의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해체주의적 전통이 있었는데 에크하르트, 스피노자, 과거 독일의 심미주의 시인들, 예를 들어 하이데거가 대표적이고, 동양은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교(佛敎)가 해체주의를 대변해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해체주의는 인간이 진리를 구성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보편적인 자아(自我)든 이기적인 자아든 간에 인간의 자아에 의해 생각된 진리로 세상을 구성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세상은 이미 여여(如如)하게 있는데 인간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무명(無明)에 의해서 자기의 생각을 덮어씌우려고 하니까 괴롭습니다. 세상엔 여여한 법이 있는데 그 법을 무시하고 인간들이 자기중심으로 세상에 자기의 생각을 덮어씌우려고 하니까 더 괴로운 것입니다.”   김형효 교수가 분류한 구성철학과 해체철학에서 구성주의 철학의 유위(有爲)는 현대시의 관념(觀念)에, 해체철학의 무위(無爲)는 현대시의 탈관념(脫觀念)에 이어진다.  철학은 시인들에게 사유(思惟)의 나침반역할을 하고 시의 내용과 언어형식에도 관여한다. 독자들도 자기가 읽는 시가 어떤 철학과 연결되느냐 하는 것을 인식할 때 더 흥미롭고 깊은 읽기가 될 것이다. 그래야 구성주의의 상투적인 대중적 서정시, 사상의 권력화를 형성하는 ‘사회적 의식의 시’ 형이하학적 사유의 ‘교훈적인 시’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옹호하는 ‘관념시“의 틀에서 해방될 수 있고, 하이퍼시의 난해성(難解性)이 또 다른 시의 영역을 여는 문(門)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성주의와는 다른  사물성(事物性)의 탈관념의 세계, 모호한 의미와 암시성의 이미지가 떠도는 가상의 공간, 다의적 감각의 이미지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현대시의 심층을 탐색하는 언어 탐험가가 되어 현대시가 제공하는 독특한 정신적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현대음악, 현대회화를 감상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그 분야를 집중공부해서 얻는 즐거움과도 같다.       2. 하이퍼시의 탈관념에 대한 해명   관념이 지배하는 시는 시인의 사상, 주장, 감상 등이 노출되는 시다. 이런 시는 시어 사이의 유사성과 논리적 관계로 인해 구축적(構築的)인 기존 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하이퍼시의 가상공간이 만들어 내는 시적 현실과 다의적이고 암시적인 이미지가 떠도는 상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 탈관념의 완강한 고수(固守)는 하이퍼시를 현실과 유리된 언어유희의 시로 몰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필자는 이런 점을 예측하여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시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53쪽 ②에서 “디지털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관념에 대한 지나친 배척은 자칫하면 황당성과 미로, 미궁 그 자체에 머무르고 말 확률이 사뭇 크다. 따라서 독자들에게서 외면당할 수 있는 확률도 그만큼 크다.”는 김몽의 견해와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 ㅡ감각하고 사유하는 시」연변 조간신문 2014,6,26) 최진연이「하이퍼시의 이해」에서 제시한 “일체의 관념을 배제한다면 유희성만 남을 수 있으므로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살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가치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모두 수용할 여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은 관념어의 노출과 설명적, 개념정의적(槪念定義的) 언어는 하이퍼시가 중심요소로 삼는 이미지의 형성을 방해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배제되지 않을 수 없다. 하이퍼시는 이미지의 결합과 확장을 통해서 시적 정서와 감성과 의미를 암시하는 이미지의 덩어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퍼시의 탈관념은 무관념이 아니라 기존 관념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개념정리도 매우 조심스럽게 수용하게 된다.       3. 하이퍼시의 비판에 대한 해명   새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문화관광부의 ‘2000 새로운 예술의 해’ 기획 프로그램으로 정과리가 주도한 「언어의 새벽」, 2004년 11월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최동호‧이성우 등이 구현한 「팬포엠 Fan Poem」 프로그램 제작 프로젝트 등은 하이퍼텍스트의 기법을 시의 창작에 응용(應用)함으로써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한국현대시의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정부와 민간의 자금으로 시도한 이 작업은 그 기획의도가 시대성에는 부합되었지만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여 시장성에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였으며 작품의 완성도도 미흡해서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사이버 공간 속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는 실험이었다는 데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실패의 원인은 여러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텍스트(작품)가 종이에 인쇄된 텍스트보다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텍스트에 독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여 기존의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허물어버리고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는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의 ‘이상적 텍스트’의 개념도 독자들에게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함으로써 독자들의 입장에서 흥미 없는 작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좌절의 환경 속에서 하이퍼텍스트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종이에 인쇄된 시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시적 공간을 구현해 보자는 시적 방법론을 제창한 것이 하이퍼시 탄생의 모태가 된 심상운(필자)의 시론 「디지털시의 이해」(2006년 12월『시문학』에 발표)이다. 이 시론에서는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탈관념  (사물성의 언어)의 언어들이 디지털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디지털시가 '의미의 예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시의 공간 확장이다. 그것은 한 편의 시 속에 하나만이 아닌 몇 개의 언어단위(이미지)가 결합될 수 있으며, 그 언어단위(단어, 문장)들은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디지털시의 기법을 기반으로 해서 형성된 하이퍼시에는 탈관념, 언어의 기호성과 영상성, 가상현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다선구조) 등 디지털시의 원리가 깔려 있다. 디지털시의 모듈은 하이퍼시의 리좀과 같은 개념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혁(문학평론가)은「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에서 “문제는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의 ‘통치기계’로서의 일면을 억제하고 그 시스템이 지닌 긍정적인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데에 있으며, 그래서 하이퍼텍스트 환경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그 환경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시를 통해 드러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라고 하면서 심상운( 필자)의 시론집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에서 내세우는 하이퍼시의 시론을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한국 현대시의 대응 태도’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시’의 한 예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라는 자신의 시를 들고 있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가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로 되어 있지만 ‘하이퍼시’는 다선구조로 이루어진다면서, 위의 시를 그 예로 들고 있다. 그는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①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② 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③ 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④ 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되었고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의 공간의 시”며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와 관련된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고 한다.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는 나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대, 시적 화자가 “푸른 야채를 먹는” 방에서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가구들, 회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모두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이 시는 본능적인 움직임을 드러내는 이미지들이 자연풍경, 사회, 실내의 식탁, TV 화면에서 포착되어 ‘다선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각 연은 ‘본능적인 갈구’를 따라 링크되어 ‘하이퍼’하게 연결된다. " ----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이성혁)에서 발췌인용   그는 이렇게 심상운(필자)의 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를 하이퍼텍스트적인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1930년대 김기림의 장시「기상도」와 비교하면서 “모더니즘이 보여주는 허를 찌르는 풍자나 위트, 전복적인 표현이 거의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위의 시는 그 주제에 속할 수 있는 장면을 누구라도 계속 이어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시가 하이퍼텍스트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시는 특이성을 성취하지 못한 범용성만을 보여주고 있어서 독자의 의식에 충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질적인 이미지들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하이퍼시의 특성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이해와 인식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하이퍼시가 풍자나 위트 전복적인 표현이 가지고 있는 현실참여적인 비판과 이념(理念)의 구축적 시와는 대립되는 탈관념의 언어, 의미의 불확정성, 다의적이고 암시적인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탈구축적 시라는 점에서 비교의 잣대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가 비판한 ’특이성을 성취하지 못한 범용성‘은 하이퍼시와 독자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현대시의 하이퍼성은 이미 초현실주(超現實主義) 시에서  시도하고 구현하였으며 하이퍼시라고 이름 붙여지지 않은 현대시에서도 구현되고 있다는 그의 지적에 동의한다. 따라서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자생(自生)한 하이퍼시는 이미 잠재되어 있는 현대시의 하이퍼성에 의해 이해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일반화되어 한국현대시 담론의 중심에 오를 것을 기대하게 된다.    
18    중국 시인 시선 댓글:  조회:4334  추천:1  2015-02-16
  중국 현대시인 10인의 작품     역자 림금산           [소개되는 작품과 시인명]   黑磨窑/高凯  母亲攒了一些绳子/ 高健刚  我和,你/谷禾  贺兰岩画/古马  身世-嘎代才让 /韩作荣  草木之心/韩玉光   云雀/韩文戈   草可以走失,亦可以回来/猴头L   比石头更坚硬的……/何若渔     석마간 고개   어느 집에 아직도 한 오리의 열기가 남았다면 콧구멍만한 석마간의 구멍으로 오리오리의 혼 같은 연기라도 뿜어내련만 보릿고개엔 어쩔 수가 없다 세월이 갈수록 석마마다 이를 옥물 수밖에 없다 일단 땅에서 한줌의 낟알만 나온다면 굶주린 나귀는 천쪼박으로 입을 막고 두 눈도 막으리라 그렇게 사람과 나귀는 늙을 때까지 하나의 석마틀에 매인 짐승 시종 한 갈래의 검은 길에서 본의 아니게 돌고 돌아야 한다 또한 서로서로 상대방이 전생에는 굶어죽은 귀신같아 보인다 오직 하나의 입과 한 가정 식솔들을 위해 그들은 또 불시에 얼굴을 찢으며 어느 날인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죽어갈 것이오니 사람은 나귀한테 한입의 겨만 빚지고 나귀는 사람한테 채찍 하나 빚질 뿐       黑磨窑 高凯        如果哪一家人还有一口热气 窑洞的鼻孔就会挣扎冒出一丝丝 魂一样的炊烟 青黄不接了 每一个石头磨子年头岁尾 都必须咬紧牙关 一旦从土里抠出来一把粮食 饥肠辘辘的驴不但会被捂住嘴巴 还会被蒙住双眼 在一起磨合 人和驴 到老都是绑在一根磨棍上的牲口 始终在一条黑道上不由自主地打转转 而且谁瞅谁前世都像个饿死鬼 为了一张嘴一家子人 经常会突然撕破一张脸 不论谁个哪天一命呜呼 人欠驴的一口麸皮 驴欠人的一根鞭杆   --------------------- 고개 (필명:량자) 남, 1963년에 중국 감숙성에서 출생. 199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 국가1급작가, 현재 중국 감숙성 문학원 원장, 감숙성당대문학연구회 부회장, 중국시가학회 이사, 시집: , , 산문집: 등 8권, 편집하여 만든 책 18권, 1983년 문학상, 감숙성 제3기 문학상, 제4기 문학상 등. 감숙성 정부의 문학특수공헌상, 중국 국무원 특수수상금 획득자.         어머님이 모은 실 고건강     어머님은 늙으셨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집안에서 책걸상은 이젠 모두 그이의 지팡이가 되었다 어머님은 자주 개탄한다, 이젠 얼마 살지 못한다고. 어머님은 나한테 집조를 보이고 저금통장을 보이고 돈가방을 열어 보이고 농짝 열쇠 둔 곳을 알려 준다 또 보자기에 싸놓은 홍십자를 새긴 수의도 보여주면서 자식들더러 새 옷을 이젠 사지 말라고 부탁한다 이젠 더 입을 날이 없을 거라고 버리게 될 거라고 그이는 묘지도 만들지 말란다 골회도 싫단다 모두 다 바다에 뿌리란다 그이는 서랍에서 빨갛고 노랗고 연록색인 실토리를 꺼낸다 그건 우리가 어렸을 때 쓰던 장갑이나 양말에서 풀어낸 색실이란다 어머님은 그걸 나더러 가져가란다 당신은 이젠 쓸모가 없단다 집에는 실오리가 없으면 안 된단다   만약 어머님이 없다면 실오리가 있어도 우리한텐 필요없다 그건 그저 상상중의 일일뿐 실오리에는 우리들 동년의 적삼이 비껴있다 나는 알았다, 죽음이 곧 집에 가는 것임을.       母亲攒了一些绳子  高健刚   母亲老了 做不了事情 桌椅成了她安排好的夫手 经常感叹活不久了 给我看房产证,存折,钱包,厨柜钥匙 存放的位置 还有包袱里秀着红十字的寿衣 不让儿女买新衣裳 怕来不及穿 被冷掉 他说,不要墓地 骨灰 撒海里就行 她从抽泄里 拿出几个红黄的线球---- 那是我门儿时的手套,袜子,线衣折的线绳 她说,她用不着了 让我带回家 家里不能没有绳   如果没有了母亲 绳还有什么用呢 它将横在冥冥之中 绳上景晒着我们儿时的衣衫 让我懂得,死亡即是回家   -------------------- 고건강  남, 시인, 1960년대에 중국산동성 청도에서 출생. 현임 청도시문련창작련락실에서 전직작가 겸 청도문학잡지사 편집. 80년대로부터 문학창작을 시작하여 주로 시, 소설, 극본을 창작. 사의 우수작품상, , 조우희극문학상 등 수상. 시집: 등         나와 너 곡화     우리는 살아 있을 때를 말하자 사랑에 대해선 아직 논하지 말자 살자, 도시와 요원한 산속에 세상은 거리 때문에 그렇게 구불어든 호선을 긋는 게 아닐 것이다 영화관에는 이젠 사람들이 아주 희소하다만 그래도 우리는 목소리를 죽이고 귓속말로 속삭여야 한다 저들 살아있는 사람들은 이젠 얼마나 낯설은가 그들은 연이어 한명씩 죽어간다 절망으로 또는 평탄하게 또는 그런대로 죽어간다 더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죽어가는가 그들은 홀연 마음속의 초불을 꺼버렸다 목숨은 결국 초개같다 그들은 육체를 그곳으로 돌려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살아있다 어데다 둘 곳 없는 고독은 온 몸에 넘쳐 흐른다 나와 너 우리는 암흑 속을 걸어나온 애들 같다 우리는 그저 자아의 빛발 속에, 그리고 잘라내고 이어놓은 편집된 필름 속에서 벌거벗은 진실을 읽을 뿐이다 --네가 커서 성인이 될 때면 나는 늙을 것을 거리로 뛰쳐나갈 순간 우리는 더는 털끝하나 휘뿌리지 않을 것이다 바람은 너의 치맛자락을 날릴 것이고 그러면 날린 치마폭은 풀밭에 내려앉은 구름 같을 것이다 우리는 야색 속에 뜰 것이고 우리는 계속하여 살아있음을 논할 것이다 절대로 사랑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사랑에 대해서는 더구나 논하지 않을 것이다—       我和,你 谷禾   我们谈谈活着吧,而不谈论爱 活着,在都市 或遥远的山里,世界并不因为距离 而弯出漫长的圆弧 放映厅里观众稀少,我们仍把声音压到了私语 那些活着的人,多么陌生 继而一个个死去。死于绝望,平淡,或木然 死于不能再活下去 突然熄灭了心中的微暗之火 命如草芥,他们把肉体归还了 而我们活着——无处安放的孤单 充溢而满盈 我和你,仿佛黑暗的孩子,沉在自我的光芒里 剪接的胶片,让我们看清了赤裸的真 却不能解散羁绊的心 ——你长大了,也许我就老了 走上街头的瞬间,我们没有挥洒羽毛 风把你的裙子吹了起来,仿佛落草的云 我们浮在夜色里 继续谈论活着,而不谈论爱 也不谈论最爱——   ----------------------- 곡화 (본명:주련국),남, 1967년 단오절에 중국 하남성 농촌에서 출생. 시집: “눈날리는 빛”, “기사시”, “바다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집: “끝까지 사랑할테야” 등 여러 권 있음. 기획출판물: “중국시사전”, “새세기중국시사전”  등 “인민문학상”. “2011년 화문(华文)청년시인상”, “ 2011년도 최우수시인상”, “제3기 전국신문간행물최우수시편집상” 현재 베이징출판집단 잡지사 편집. 중국작가협회 회원.       ‘하란’암각화 고마     5필의 말과 둥근 태양이 손뿌리 주위에서 맴돈다   사람의 손이 어찌 태양만 못하랴 아침부터 저녁까지 따스하기만 하다   5필의 말도 자기가 뛰고 싶은 곳으로 맘껏 뛰는 사람의 손을 당할까   추풍보다도 더 큰 돌덩이 태양보다도 더 뜨거운 젖가슴 사람의 손은 만지고 싶은 만큼 맘껏 만진다 얼마나 희소하고 얼마나 진귀한가       贺兰岩画 古马   五匹马 和一轮太阳 在一只手周   人的手 何如太阳 从早到晚暖和   何如五匹马 去任何想去的地方 就快去了   比秋风硕大的石头 比太阳烫手的乳房 人的手   想摸再摸的东西 多么稀少多么珍贵   ------------------- 고마 원명은 채강, 1966년 5월 중국 감숙성 무위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탠진시에 있는 남개대학 경제관리전업을 졸업. 지금은 정부부문에서 공무원으로 사업. 1986년부터 작품활동 시작. 선후로 《시간》、《인민문학》、《별시간》등 간행물에 대량의 시를 발표。1996년에 시간사의 제14회 청춘시회에 참가, 그의 작품은 《중국20세기 90년대시선집》、《중국별시간40년시선》、《99중국최우수시가> 등에 수록. 시집:《소뿔연지》、《서풍고마》,《락일요》등이 있고 기획하고 만든 책으로는 시집:《세기말의 명단》、《10년 등불》등이 있다.       신세 가대채랑     “자정의 망령이 한 주머니의 저주를 가루내면 달빛이 꺼질 무렵 누구의 생에 한 방울 눈물이 사라질까?”   요원함은 사람들을 비애롭게 만든다— 사랑의 젖으로 말미암아 신사들은 밤중에 도취되나니 저 무한한 강역, 피 묻은 경전이여. 옳거니, 손톱이 닳아 문드러지매 바람의 빛을 드러내누나.   고독한 역사는 하늘에 식입한다. 사랑과 한의 거리를 보존할 수 있을까?   매의 게으름은 함묵의 품성을 만든다. 하늘엔 냉정함이 많아지는데   한 송이 구름의 상처를 타끓는 태양한테 돌려주라. 높은 언덕의 드넓음에 돌려주라. 마치도 내가 염주 외우듯 “절을 날아넘어 신령더러 살아 움직이게 하라……” 한생의 영욕을 저 무수한 무릎꿇음 앞에 위탁한다.   초췌한 화염은 얼굴에 피어나고 황색의 전경통은 마치도 한 송이의 들꽃 같나니 검은 구름에 가리운지 오래다. 여명의 시각 얼굴이 남루한 노인은 말한다.   인류의 비애는 여기서 탄생하나니 보라—     “서장대지에 전 세계의 색채들이 가득 넘치누나……”       身世 嘎代才让     午夜的亡灵打磨一截咒语,当月光熄灭的一刻,   将谁的生平中修出一滴难以遏制的泪?”   遥远使人悲伤——   由于爱情的哺乳,信使在深夜致醉,无限的疆域   自坠于一册带血的经卷。   是的,盔甲毁于锈迹,露出了风的光泽。   寂寞的历史植入天庭,   保持爱与恨的距离吗?   鹰的倦怠,成就了缄默的品性。天空多些镇静   让一朵云的伤痕还给烈日   还给高地的辽阔。犹如我的念唱:   “驰越了寺院,显身了神灵……”,一生的荣辱   就托付于无数的跪拜。   憔悴的火焰,点燃脸庞。黄色的转经筒,   像一朵含泪的野花,被乌云遮掩很久。黎明时刻,   面目腐朽的老人说:   人类的悲伤由此诞生,你看——   “西藏大地,沾满了全世界的颜料……”      ------------------------ 가대재랑 남자, 티베트족. 20세기 80년대 출생. 티베트어와 한어로 창작. , , , , 등에 많은 시를 발표. 그의 시는 선후로 , , , , , ,등에 수록됨. 으로 당선, “2005년도 중국년도선봉시가상”, “제4기화문(华文)청년시인상” 등 수상.         온정 -아내에게   한작영     생활은, 바로 매일아침 당신이 나한테 가져다주는 이 한 컵의 끓인 물과도 같다 마춤한 온도의 물   당신이 매양 주방에서 머리를 내밀고 나더러 밥을 들라고 부를 때에야 나는 나의 몸에 붙은 위를 생각한다 그 완고한 내 집의 요리는 모든 산해진미의 맛을 다 쓰러버린다   우리는 저마다 바쁘다 아들애는 인터넷에만 매달려 있고 나는 서재에서 책을 보고 글을 짓고 당신만이 TV에서 새“요리만들기”를 시청하면서 한 가지씩 새로운 요리만들기 비결을 베껴낸다 그리고 병 요양의 상식을 익히고 양생의 경혈위치를 배워낸다 그러다 때론 깊은 사색에 잠긴 나를 불러내서는 형광막 앞으로 끌고가 아픈 몸에 금해야 할 것과 치료법을 보여준다   한쪽다리가 때때로 아프면서도 당신은 계속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끝없는 가사에 다망하다 나를 동무하여 연 띄우는 걸 구경시키고 산보하고 공간이 있으면 제기도 차고   길에서 당신은 또 때론 조금씩 감개하기도 한다 날마다 한판씩 탁구치기도 배우잔다 그러면 나는 가끔씩 따르기도 한다 나는 배우는 척하면서 당신 비위를 맞춰준다 건장한 고동색 어깨들의 수림 속에서 당신은 나더러 많이 서툴다 하지만 나는 이미 기진맥진이다   그래, 우린 이제 모두 늙었다 자주 피로를 느낀다 당신의 물감들인 머리에서 흰빛이 번떡이면 나는 서리 내린 인생의 추위를 개탄한다 젊은 한때 지펴놓은 불길은 밝게 타오르다 점차 사그라져가 하얀 재로 된다   인젠 아껴 입고 아껴 먹을 때가 아니다 그래 이제 우리 멋진 옷이랑 어데 가서 입을까 시체옷을 입고 빨래를 하거나 밥 지을 수는 없는 것 치아가 좋을 때 우리에겐 먹을 것이 모자랐다 이제 뭐나 다 있을 때 우리에겐 치아가 없다   이렇게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서 격정도 잃었다 지어 서로에게 향한 열정마저 식었다 하지만 우린 이젠 더는 서로를 떠날 수가 없다 건늠길만 있으면 우리는 무조건반사로 곁의 손을 더듬어 잡고는 서로 의지하여 도심 속에서 안전한 틈서리만 찾는다   구들위에 누우면 우리는 때론 한담도 한다 네 한마디 내 한마디 끝도 없다 하지만 밤중까지 말했어도 뭘 말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많은 경우 내가 먼저 잠든다 하지만 그것도 옅은 잠이 조금 들 뿐 당신이야말로 잠의 주인이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당신이 자리에 들었음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시름 놓고 코를 곤다….         身世 -嘎代才让  韩作荣     生活,如同每天早晨你端来的这杯水 灼热子后沉静的水 有着恰到好处的温度   当你从厨房探出头来 喊我吃饭 我才想起自己的东北胃 顽固的家常菜嗜好 让一切山珍海味都失去了兹味   我们各自忙着 儿子盯着电脑 我在书房里翻书,写作 你则守着电脑机里的“食全食美” 记下一道新菜的秘诀 辨识疗病养生的穴位 偶尔把我从沉思中揪出来 去看荧光屏里病疼的禁忌和医治 一条腿不时疼痛,你仍在奔走 忙碌着,做没完没了的家务 陪着我看风筝,散步 在空地踢一会毽子   在路上发一点儿感慨 学着没天打一场乒乓球 偶尔遵嘱 我试学着为你刮痧 面对一片黑紫的脊背 你嫌我笨拙,可我已筋疲力尽   是啊,我们都老啦,常感老累 看到你染过的头发生出白茬 概叹人生落雪的寒凉 年轻时点燃的火 是明亮的燃烧 也是渐渐熄灭的灰烬   已经不必节衣缩食了 你説:好衣服到哪儿去穿呀 总不能穿着时装洗衣做饭 有牙齿的时候我们缺少食物 什么都有的时候我们却没了牙齿   就这样过着平平淡淡的日子 没有激情,甚至忘记了亲热 可两个人已难分披此 只有过马路的时候 总下意识地牵住身旁的手 拉扯着,在都市里寻找安全的缝隙   躺在床上,偶尔也有闲聊的时候 东一句,西一句 没完没了,可说了半夜 却记不住都说了些什么 更多的时候,是我先睡 可那只是半个人浅浅的睡眠 你是个压床的人,迷蒙中 你刚躺下 我立刻会打起放心的鼾声…      ------------------- 한작영  시인, 선후로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사업, 그 후 참군하여 전사, 패장으로 발탁되다가 모부대 정치간사, 편집부 편집,“인민문학”편집, 주임, 현임 “인민문학”주필, 시집: “만산에 나팔소리 울리네”, “북방서정시”, “고요한 봇나무숲”, “사랑의 꽃다발”, “눈꽃계절의 사랑노래”, “라체”, “유리꽃병”, “순간의 들국화”, “한작영자선시”, “6각형의 눈꽃” 수필집: “원의 유혹” 시론집: “감각. 지혜와 시”등. 첫기의 로신문학상(시가상) 획득.         초목지심 한옥광     가을이 깊었다 나는 홀로 초목 속에 앉는다 멀리로는 자색의 천아산이 보이고 가까이로는 날따라 여위여가는 후타하가 흐른다, 하늘에는   희미하게 둥근 저녁해가 걸리고, 한 마리의 백조가 멀리서부터 날아왔다 날아간다 이젠 여러 해가 흘렀지만 나는 시종 믿는다 이런 산수초목은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지고 있고 지금 내 주위에 둘러앉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골격과 혈육 사이에 나는 늘 혼자 앉아있다 황혼으로부터 저물녘까지, 또 별들이 솟아오를 때까지 그때면 만가의 등불이 반짝이고 가을벌레들의 합창소리 들판에 쏟아진다 이럴 때면 나는 더욱 믿는다 내가 진짜로 이 산수의 아이임을   초목의 아이인 나는 진심으로 원한다 이 초목과 마음을 함께하여 암흑 속에서 갈망하리라 어떤 손이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을 그것은 바람이 비를 이끌어오고 길이 발걸음을 이끌어내듯 할 것이오니 나는 그를 아버지라 부를 것이요 어머니라 부를 것이다 또한 그를 대지라 부를 것이요 하늘이라 부를 것이다.     草木之心 韩玉光     秋深了, 一个人 坐在草木之中 远处是紫色的天涯山, 近处 流动着日渐消瘦的滹沱河, 天上   挂着浑圆的落日,一只白天鹅 从远方来, 又往远方去 很多年了, 我始终相信 这些山水草木 有着与我相似的灵魂, 它们 环坐在我的周围 仿佛一颗心   在骨骼和血肉的中间,我常常 一个人 从黄昏坐到暮晚, 直到 月亮独自升起来 那时候, 万家灯火忽隐忽现 秋虫的唱和之声 星散于野, 这 更加让我相信, 我 真的是这些山水的孩子   草木的孩子, 我真的愿意 与它们共用着一颗心 在黑暗中, 渴望 有一只手牵着我们 仿佛风牵着雨, 路牵着脚 我可以叫他父亲, 或母亲 也可以叫她大地, 或天空     ------------------------ 한옥광 남, 1970년도에 중국 산서성 원평시에서 출생, 80년대후기부터 시창작시작, 필명은 한광, 중국 유명잡지들인 , , , , 등 잡지와 신문들에 300여수의 시를 발표. 시간사에서 꾸리는 제24기 에 참가. 2008년중국년도10대시인으로 선정되였었음. 시집: 등       종다리 한문고     종다리는 울면서 창공을 파고든다 마치도 노래할 줄 아는 쇠못을 구름송이가 빨아들이는 듯싶다. 바람은 종다리를 높여주어 구름 속에 걸어준다. 종다리는 높이 걸려 움직이지 않지만 구성진 노래는 즐거이 쏟아낸다. 그 빙설이 반짝이는 겨울 속에. 나도 종다리가 방금 날아오른 풀밭 황야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의혹스런 눈길로 종다리를 바라볼 제 나만은 그것이 한 마리의 새가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종다리 우로 천당이 없음을 나만은 알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발밑에도 지옥은 없다는 것을 나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자기의 밀어가 있다. 서로 얘기하고 울고 몸부림 치고 꽉 닫쳐진 문을 자꾸 두드리고.       云雀 韩文戈   云雀一边叫着,一边飞向苍空,仿佛一枚会唱歌的钉子 被云朵吸去。 然后风托举它,悬在云中,一动不动。 但它唱着嘹亮的歌 在冰雪闪烁的冬天。 我在它刚刚离去的短草荒原上,也一动不动 很多人疑惑着仰望它时,只有我知道那是一只鸟在歌唱 只有我知道,云雀的上边没有天堂,众人的脚下也不会有地狱 我们却有自己的密语:交谈,嚎哭,挣脱 敲着锁闭的门。     ---------------------- 한문고  남자, 1964년 11월생, 중국 하북성 봉윤 사람. 지금 하남성 석가장에 거주. 1982년부터 시 창작을 시작하여 선후로 신문간행물편집, 기자, 국가공무원 등 사업에 종사. 시집: “복된 마을”, 시문집: “옛날로 가는 길”,  시선집: “맑은 하늘아래” 등       풀은 잃어질 수 있지만 또한 돌아오리라 호두L     풀이 지하에 있을 땐 돌과 흙과 이웃하여 어둠을 헤치며 걸었다. 많은 풀들은 너무 작아 마치도 없는 듯했다 풀과 풀은 맞띠우면 산마루에 기댄다 그 한 마리 영양 --영양은 풀을 먹으려 한다 영양들은 하늘공중에서 무리로 줄을 쳐 물결쳐온다 그들은 대지로 덮친다 대지에선 일시에 파도가 인다 바다가 한 아기의 울음소리를 삼킨 후 풀들은 서로서로 이끌면서 영양의 입속으로 서서히 들어간다   이때에 내가 나선다 나는 한 개의 아주 주관적인 현상이다 --나는 풀 옆의 흙이다. 하지만 나는 풀의 내심에 들어갈 수 있다 나는 풀이 언제 잃어질지를 이해할 수 있고 또 언제 돌아올지도 알고 있다 영양이 풀을 먹어치울 때 나는 영양의 이빨을 부러뜨리는 돌멩이다 나는 풀의 믿음직한 이웃이다. 나의 의미는 바로 내가 있길래 풀이 있다는 그것이다   참, 내가 왜서 이렇게 수다떨지! 너무 많이 말한 것 같다 일망무제한 초원답지 않은가? 누가 감히 그 속에서 한 오리의 풀을 알아낼 수 있담 그것이 잃어졌던 풀이고 행복했던 풀이고 큰물에 밀려간 풀인 것을 또 그것이 하나의 아픔이었고 한 번의 큰 가려움이었던 것을 이때에 풀은 이미 내마음속에서 부풀린다 내가 흙이든 돌멩이든 영양이든 나는 앉으나 누우나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자기의 몸체에서 뛰쳐나오려 한다       草可以走失,亦可以回来 猴头L     草在地下的时候,与石头、泥土为邻 草摸黑走路。很多草小得像没有草一样 草与草碰面仰仗于山头,那只羚羊 ——羚羊要吃草 羚羊在天空成群结队地奔涌着,扑向大地 大地上平地起海。海高过一个婴儿 的哭泣后 草便挽着手,走进羚羊的口中   这个时候,我会出现 我是一个很主观的现象 ——我是草嘴边的泥土。我可以进入草的内心 理解草为什么走失,知道草什么时候回来 羚羊吃草的时候 我是硌掉羚羊牙齿的石头 我是草的高邻。我的意义在于:因为有我 草才是草   看,我多么饶舌!说这么多话 像不像一望无际的草原?——谁能从中拔出一根 认出,那是走失的草,是曾经的幸福 是随大水退去的,一阵痛,或者一生的痒 草此刻在我心中疯长 不管我是泥土、石头,还是羚羊,我都坐卧不安 想从自己的体内跑出来 跑到地下,抱着细小的草。——没有人能看见 亦无人知我   --------------------- 호두L(원명:리충건)  남, 작가, 시인, 극작가. 중국 하남성 신양 사람. 1968년 6월 출생. 지금 중국 하남성 정주시 거주. 16세에 해방군에 입대하여 부대의 신문간행물편집, 당대중국걸출한 청년시인, 중국문련음향출판사 주 하남성 판사처 주임. 영화 극본작가의 한 사람, 극조의 대외연락부 주임.       돌보다 더 강한 것 하약어     꼭 뭔가가 있다 돌덩이를 부셔 부드러운 가루로 만들고 압출하고 충격하는 것 그래서 마침내는 조용히 소리를 내는 것 꼭 뭔가가 더 있다 비할 바 없이 강한 금강석 송곳 같은 것 곧추 들어가 그 인적 없고 고독한 막끝의 수원을 찾아 깊이깊이 더 깊이 탐험하는 것 그래서 그 유곡이 불같이 샘물을 터쳐내는 것 그래서 파도로 맹수를 피곤케 하는 것 종내는 엎어진 선박들과 펼쳐진 모래밭 이는 절대로 세월속의 한차례 가설이 아니다 그들은 조용히 고요히 태초의 아름다운 곡선을 지켜가고 있다       比石头更坚硬的…… 何若渔   一定有些什么 将石头蹍成柔软的粉,挤压,撞击 并轻轻叫出声来 一定还有些什么 如无坚不摧的金刚钻,一路挺进 深深,深深地勘探着 幽僻孤寂的源头 当空谷暴烈泉涌,当波浪疲惫猛兽 倒扣的船舶,与沙滩 这绝非时光中的一场虚拟 他们静静,静静地保留了 最初优没曲线   ---------------------- 하약어  여, 시인, 70년대 출생, 현재 중국 복건성 복주에 거주. 필명은 . 그의 시작품은 , , , , , 등 각종 신문간행물에 수록되었음.     [출처] [특집 : 중국 현대시인 10인의 작품 국역] -동방문학 통권 제71호|작성자 사막의 수도사
17    "시인이란 명칭은 줄곧 있었다... " --- 시인 牛漢 댓글:  조회:4710  추천:0  2015-02-16
                  중국현대시론           척추가 아주 곧은 시인, 뉴한牛漢                                        김금용                              시를 배반한 적이 없다       “ 시인이라 불리는 게 제일 좋다. 중국은 옛적부터 소설가라거나 극작가라든가 하는 명칭은 없었어도 시인이란 명칭은 줄곧 있었다. 즉 시를 쓴다고 해서만 시인이라 불리지는 않았다. 모든 개체의 생명을 떠나서는 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면, 시와 사람은 나눠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과 시를 분리해서 쓰다가 추락하고 시 역시 그를 떠난다. 시를 쓰는 건 쉽지 않다. 시를 써서는 부귀를 이룰 수 없다. 심지어 더 곤란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생명은 그로 인해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한번도 시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젊음 가운데 있음을 느낀다. 차이치자오蔡其矫는 80 여 세에도 아이들 기운이 넘치고 리잉李瑛 시인도 80 세에 여전히 신체가 청년 같다. 그들 모두 노년에도 시를 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이렇게 청춘의 빛을 발하게 한다. “      2007년 10월 17일, 중국작가협회 주관으로 이뤄진 사 제 23회 ‘젊은 시 회의’에서 젊은 시인들이 존경과 갈망의 눈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머리가 희끗한 팔순의 노시인은 큰 체격과 형형한 눈빛으로 둘러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발걸음도 확실하게 무대에 섰다.  평생 시에만 몰두해 온 노시인의 이런 시에 대한 인식과 그 깨달음은 무대 아래의 청년 시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모진 비바람과 역사의 대재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시인 본색의 정신을 이 노시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허리가 곧다. 아니, 나의 척추는 아주 곧다. ” 뉴한의 유머러스한 말에는 시의 맛이 있다. 그의 건강한 신체를 부러워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는 말한다. 20 여 년간의 노동으로 오히려 이득을 보았다고,..불행했던 과거를 한 마디 가벼운 유머로 넘겨버리는 그에게서 무수한 담금질로 마침내 찬란하게 빛나는 삶의 값진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뉴한牛漢은 1955년부터 1980년 가을 핑반平反(* 문혁이 끝나면서 노동개조소로 끌려갔던 지식층들의 신분을 다시 회복시킨 일련의 제도)이 될 때까지 20여 년간 절필을 당했었다. 이 때 그는 굶주림, 박해, 구속 감금, 심판, 유랑, 노동개조소에서의 중노동, 중형,..등등,  “고난으로 풍부해진 삶” 그 자체였었다. “나로 하여금 고난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하나도 어렵지 않다. 나의 시에는 모두 있기 때문이다. 피눈물, 분노, 고소,..등등, 그러나 나는 고난에 고개 숙인 적이 없고, 후퇴도 없었고, 추락도, 투항도, 내 스스로 양심에 대한 배반도 없었으며 인문정신을 배반한 적도 시를 배반한 적도 없었다. 왜냐면 나는 더 높은 곳을 지향하며 현실규범 일체를 초탈, 인문의 경지를 넘어 어떤 것과도 비교하지 않고 오직 그 가치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시를 위해, 문학을 위해, 나는 일체를 내놓을 수 있다. 어떤 상황 아래서도 나는 시를 포기하지 않으며 문학창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시와 나의 인생의 경력은 나눌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쓴다는 것은 내심의 활동을 자서한다는 것이며 내 생명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중국 현대 대표시인인 아이칭艾青(1910──1996)이  “ 고난은 행복보다 더 아름답다. ” 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뉴한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뉴한은 항일운동과 시를 쓰면서도 늘 옷섶에 독창적이고도 허다한 민족고난의 정경이 응집된 아이칭의 《북방北方》시집을 갖고 다녔다고 한다. 그만큼 아이칭의 영향은 컸다. 그는 문화혁명이 끝난 뒤 비판을 받던 아이칭艾青을 위시한 일련의 시인들이 다시 복귀하자 그들의 새 흐름이 된 "귀래(归来)"파에 들어가 80년대부터 시작된 의 주류가 되었으며 의 한 사람으로도 활동하였다.   시는 생명 통곡의 진실된 기록이다     “1955년 구금되어 반혁명모자를 25년간이나 썼던 동안 나는 공민권이 없었다. 작품을 발표할 권리도 없었다. 노동개조소나 단위(기관, 혹은 공장 등 단체기관을 가리킴)에서 시키는 대로 초대장이며 편집이나 하다가 농촌에서 노동을 하며 지냈다. 2 년 3 년 또 그렇게 해를 보냈고,  팔달령 만리장성으로 다시 옮겨갔을 때, 그 시절은 정말 어이없도록 황막해서 행복이란 단어는 다시는 없을 줄 알았다.”  “대체로 비통한 사람이란 많은 오해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박해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대재난을 겪은 사람만이 행복을 이해할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공허한 게 아니다. 현실을 즐기는 게 아니다. 행복은 자발적인 내면의 추구에서 얻어지는 일종의 이상의 경지이다. ” 이런 뉴한의 주장대로 행복은 바로 이런 끊이지 않는 추구, 발현, 돌파, 재추구의 과정 중에 있지 않을까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뉴한은 많고도 많은 고난을 이겨낸 사람이다. 유랑, 기아 핍박, 구속, 수감생활, 노동개조소 생활, 살기 위한 숱한 노동과 수모,..그의 시는 이런 “풍부한 생명 통곡의 진실된 기록”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곳곳에서 피눈물, 분노, 항의,.등이 보인다. 그는 말한다. “나는 일종의 더 높고도 숭고한 정신력을 믿기 때문에 현실규범을 초월한 일체의 인문정신과 경지에 가치를 두고 추구해 왔다. 그럴 때 비로소 행복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 뉴한이 보는 관점에서 행복은 이렇게 부단히 추구하고 발견해내고 부딪치는 과정이며 “시를 위해 문학을 위해 난 일체를 걸 수 있다. 나는 어떤 상황 아래서도 절대 시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문학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나의 시와 나의 지나온 일생은 떨어질 수 없다. 쓴다는 것은 그러므로 내 자전적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시는 내 생명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도 모르게 미처 인식하지 못한 내 자신을 곧잘 드러내기도 하지만, 한편 경건한 고행자임을 자처할 수 있다.“       내 시는 개인의 자서가 아니다       5.7 간부학교 *¹ 시절에 뉴한은 한편으론 고달픈 노동에 착취당하면서도 틈만 나면 시를 구상하는데 보냈다. 당시 허다한 평범한 작은 일속에서도 돌연 내심의 정서를 불붙일 수 있는 충격을 받곤 했다. 혹독한 환경 아래서도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은 언제나 시였으며 시는 능히 영혼을 자유롭게 숨쉬게 한다고 믿었다. 이 기간 동안 쓴 시들이 시집 ≪온천溫泉≫에 들어있는데 이 긴 생명력을 갖은 시 한 수 한 수는 혼돈의 시대를 기록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자긍심 높은 그의 시혼을 보여주고 있다.       뉴한은 원래 몽고족으로서 북방농민의 순박하고도 굴복하지 않는 강렬한 성격의 전승이 보인다. 북방농민으로서의 그의 생활력과 열정은 그의 시 창작의 원천으로 그의 시에 흥미를 시종 보여준다. 한편 뉴한의 사상은 기실 전통적이다. 부친의 의지를 많이 따르고 있다. 젊은 시절, 그는 원래 목각과 회화를 배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문학을 택한 것은 부친의 희망이었다. 그를 가르친 것은 그의 부친이었고 아버지와 형은 모두 문학에 빠졌었다. 그런 연유로 그는 서북대학 러시아과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으나 시 쓰는 데에 재미를 더 붙였다. 이런 특수한 정서적 결과는 자연 그의 시에서 명확한 특색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보여준 시 를 보면 그림을 그리듯 자세히 묘사하고 있음을 곧 알아차릴 수 있다. 평론가가 말하듯  “ 그림으로 시를 끌어당기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시는 뉴한의 생명의 동력이었다. 시가 없다면 그 역시 없다고 말한다.  “내 시는 개인의 자서가 아니다. 내 시는 역사 대서사의 한 작고 보잘것없는 것일지 모르지만, 역사가 산출해 놓은 한 열매는 될 것이다. 내가 지닌 작품들은 산문을 포함해서 살아있는 한 역사이며 신선한 단층이며 일종의 서사시로서의 업적을 지니고 있다. 나와 나의 시가 소유한 이 완강한 활력은 고통스런 저주이거나 역사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역사로 하여금 재난으로부터 깨어나 밖으로 나오라는 주문인 것이다. ”   그는 “ 특정한 민족 고난의 시기를 견뎌온 한 증인으로서 특정한 시대(문화혁명을 가리킴)의 민족고난이 다시는 중화민족에게 영원히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기에 이 역사의 대재난을 시로 표현했을 뿐이다 ” 라고 밝히고 있다.      1998년 출판된 《뉴한시선牛汉诗选》을 보면 뉴한의 시가 대부분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통서정시는 절대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면 그의 시의 소재가 우선 일상적인 아름답고도 고운 정상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면에서 소개한 그의 대표시이기도 한 나 , 들은 하나같이 최악의 분위기 속에 펼쳐져 있음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벌목된 단풍나무나 반쪽으로 부서진 나무를 통해 끔찍한 생존환경 속에서도 위풍당당한 기세를 죽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로써 문화혁명의 대재난을 극복해낸 작가나 중국 인민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잘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에서는 우연히 들린 계림의 한 동물원 철창 안에서 발톱이 잘린 채 잔인하게 유린당한 호랑이의 삶을, 에선 땀이 피가 되어 온 몸의 수분이 마를 때까지 달려서 마침내 뼈만 앙상하게 남을 때서야 편안한 죽음을 통해 자유로울 수 있다는 한혈마의 운명을 그림으로써,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막바지 환경 아래 변형되고 왜곡된 삶이지만, 그럼에도 굽히지 않는, 완강하게 견뎌내는 인고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최악의 환경으로부터 항쟁하는 모습은 바로 시인 자신의 지나온 삶의 모습이기도 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진한 감동을 준다. 굽히지 않고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우연히 마주치는 주변의 동식물을 앞세워 그의 이런 열악한 환경으로부터의 저항정신을 보여주며 나아가 심오한 생명의 힘을 느끼게 한다. 절망의 모습이 아닌, 비장하고도 숭고한 아름다움을 그들을 통해 역설하고 있음을, 내달리는 삶의 완강함과 그 분투하는 정신력을 찬송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시는 바로 이런 통한의 생생한 삶의 기록이다.  그의 초기시가 이런 통한의 격렬한 감정이나 정서를 외부로 전달, 표출한 것이라면 최근의 시풍은 단련되고 연마된 뒤에 얻어지는 무겁고도 신중한 심오한 세계를 보여준다 하겠다.  그의 시에 대한 이런 열정과 정의에 대한 발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는 미학의 어떤 주의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범주에도 들어있지 않다. 내가 읽은 책은 다양하고 복잡해서 인류의 아름다운 시편을 다 씹어먹었다 할 정도이다. 그러나 나는 영원히 문학적 지식이나 이론적 방법에 의존하여 시를 쓰지 않는다. 나는 생명의 체험을 가지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에 대하여 시를 구상한다. 나라는 위인과 나의 시는 시종 거칠고 불안하고 미숙하며 우아하지 않다. 나의 시는 몽롱한 상상력, 혹은 꿈 속에 보이는 하나하나 머나먼 경치이며 나의 시는 그것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린다. 배회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고 피땀 흘리는 처럼 체력이 고갈될 때까지 달리고서야 죽을 것을 안다. 죽은 후에는 하늘로 올라갈지 땅 속으로 들어갈 지, 신이 될 지 귀신이 될 지 생각조차 안한다. 이것도 바로 나라는 사람, 그리고 내 시의 성격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가 여전히 신세대들에게 읽혀지고 젊은 시인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런 투지력, 이런 생명력에 있다 하겠다. 근육이 장대한 20대 젊은이로 느껴질 정도로 여전히 열정적인 삶, 정직하고 의기투합된 자유정신을 소유한 시인으로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까닭에 25년간이나 절필을 했음에도 신분이 회복된 이듬해인 1981년, 그는 여기에 소개한 시 으로 문학창작상을 받았으며 시집《온천温泉》으로 전국우수시집상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2003년 5월, 마케도니아 작가협회 주석 레이부스키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중국작가협회를 통해 뉴한에게 “문학제상‘을 주었는데, 이 상은 마케도니아 작가협회가 설립한 일련의 국제적인 문학상이다. 또한 2008년엔 녹색중국 초점인물평가위원회에서 주는  “녹색중국초점인물”로도 선정되었다.     몽고족시인 뉴한의 약력      원명은 스청한史承汉이며  1923년 10월 산시성山西省 딩양시엔定襄县의 한 궁핍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이 뉴한牛汉으로 바뀐 것은 초교 2학년 시험을 볼 때 ‘承’을 작게 써냈다가 일등을 못하자 같은 소리음인 ‘成’ 으로 개명했던 것을 시를 쓰면서부터 다시 우직하게 노동만 하는 ‘소 牛’로 바꿨다고 한다.(그의 작품 에서 인용) 필명은 꾸펑谷风 이다. 그는 14세까지는 고향에서 소를 방목하거나 장작을 패고 벼를 심고 때론 권법이나 씨름도 익히면서 진흙장난도 하면서 개구쟁이로 자랐다. 아버지는 예술적 기질이 많고 민주자유사상을 갖고 있던 중학(중고등학교를 말함)교사여서 그는 10살 때부터 아버지가 소장한 많은 책들을 이해가 되든 안 되든 두루 읽었으며 엄마로부터는 당시唐诗를 배웠다고 한다. 엄마는 아주 강직한 성격이었는데, 그는 엄마의 그런 감성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항일전쟁이 터지자 그는 아버지를 따라 산시성陕西省 시안西安으로 피난을 갔고 거기 머무는 동안 그림을 배웠다. 이때부터 그림과 시에 빠져들어 1940년부터는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41년 청두成都에서 발표한 시극《지혜의 비애智慧的悲哀》,1942年 꾸에린桂林《시창작诗创作》에 발표한《어얼뚜어스초원鄂尔多斯草原》으로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43년 산시성의 시빼이西北대학 러시아과에 입학했다. 1945년 초엔 시안의 문예지《류훠流火》의 주필이 되었으며 1948년 여름엔 시집《채색있는 생활 彩色的生活》을 출판했다. 그러나 1955년 5월 후펑안胡风案*²으로 해서 심문을 받고 검거, 그 때로부터 1980년 가을에 신분이 회복되는 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난과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70년대 후빼이湖北 시엔닝咸宁간부학교의 노동기간 중 분연히 일어나는 비분의 심정을 숨어서 시로 쓰기 시작, 1979년 까지 미발표작이 약 2,3백수였으며 등소평의 경제개방에 힘입어 文革에 대한 자유비판이 가능해지던 80년 이후에야 시집《후퉈허와 나滹沱河和我》로 묶어냈다. 현재 그는 중국시가협회 부회장이며 중국작가전국명예회원이다. 시집으로《채색생활彩色生活》、《조국祖国》、《온천温泉》、《지렁이와깃털蚯蚓和羽毛》、《뉴한서정시선牛汉抒情诗选》등 십여 권과 산문집으로 《뉴한산문牛汉散文》,《반딧불집萤火集》,《어린시절의 목가童年牧歌》등 7 권이 있다. 또한 시화집으로 《시학수기学诗手记》、《몽롱시인이 말하는 시 梦游人说诗》2 권이 있다.                                                                 참조 주 : * 주 1) 五七干校는 중국문화혁명 중 모택동의《5월7일 지시五七指示》를 관철하기 위해 공산당 간부들로 하여금 이를 접수,노동을 통해 재교육을 실시하게 하던 학교를 가리킨다. 즉, 당정치기관간부와 과학기술 간부들과 대학 등의 고등교육기관 교사 등을 농촌으로 내려 보내 노동을 시켰던 곳으로 1966년 5월 7일 모택동이 임표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본계급을 비판한데서 비롯된다. 이후 1968년 5월 7일, 흑룡강성에서 가진 모택동의 2주년 기념식에서 간부들의 대비판이 일면서 경안현 유하庆安县柳河의 한 농장에서 노동개조를 본격적으로 시작, 그곳을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주 2) 胡风 ; 1950년대 호풍반혁명집단안으로 문예논쟁이 정치심판으로 발전한 비극적인 사건. 이 일로 2100명이 연루되어 비판받았다. 그 중 92인은 압송, 62인은 격리, 73인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 후 1952년 6월8일,《인민일보人民日报》는 〈연안에서 가진 문예좌담에서의 강좌在延安文艺座谈会上的讲话〉》를 싣고 더불어 호풍의 문예사상은 일종의 자본계급의 개인주의적 문예사상이라고 발표,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참고문헌 1. 《뉴한시인诗人牛汉》,《전기문학传记文学》2005년 제 7 기에 수록  2. ≪“피눈물汗血”시인——뉴한 ≫ 평론 :장지엔 张健 3. 뉴한의 삶과 시 개략 소개 : 청용린程泳淋 4. 뉴한의 시 해설 : 위웨이余 玮 5. 《몽롱시인이 말하는 시梦游人说诗》: 뉴한 (화문출판사 華文出版社 2001 년판)  
16    중국 현대시 류파 댓글:  조회:4796  추천:0  2015-02-16
  격동의 20세기를 이겨낸 중국 현대시         _ 문화혁명 이전의 여러 유파를 중심으로 -                 김 금용    중국은 청나라 말기부터 외세침입에 의한 봉건주의 붕괴와 함께 서구 세계의 문예사조가 일시에 들이닥쳤기 때문에 신시와 근대시, 그리고 현대시의 시대 구분이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중국문단에서는 1917년에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탈바꿈한 白話운동을 포함한 신 문학운동을 기점으로 반제국,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를 현대시의 발생기로 본다. 즉, 백화운동으로 중국문자혁명이 일어난 1910년대부터 개인과 문학이 말살된 문화혁명이 끝난 1976년까지를 통틀어 현대시라고 부르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필자는 중국문단의 통설에 따라 1907년 루쉰魯迅이 서구의 셀리, 바이런, 키이츠, 푸슈킨 등의 시들을 白話로 소개함으로써 시작된 중국의 신시와 문화혁명 이전까지를 ‘현대시’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7,80년대 이후의 시를 중국문단에서는 ‘당대시當代詩’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필자는 중국 당대시를 크게는 현대시의 범주에 넣어서, 각 시대별 유파들의 특성과 그 시정신을 짚어보려 한다   “白話”를 매개로 한 신문학운동   본격적인 신시운동은후스胡適(1891~1962)가 1917년《신청년》 2월호에서 “한정된 형식에는 무한한 내용을 담을 수 없다”며, 시의 형식 타파를 주창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히 전통적 정형시 형식으로부터 이론적 탈바꿈만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현대시의 특징이 되는 낭만성, 상징성, 산문성 및 사회성을 도입함으로써 일약 시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후스胡適가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할 때 접하게 된 서구 문예사조는 후스 뿐만 아니라 중국 신지식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으며 그들은 앞다퉈 전문 시지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시의 유파를 형성하면서 활발한 시 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국,공 내란의 정치적 압박과 항일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1920,30년대는 중국 시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자유롭고도 치열한 심도의 시 전성기를 이뤘다고 할 것이다.   까마귀                후스*   나는새벽같이 일찍 일어나 사람들 지붕 모서리에 서서 시끄럽게 소리지르네 사람들은 내가 불길하다고 미워하네 나는 그네들 사랑 받자고 재잘거릴 줄 모르네 몹시 춥고 바람센 날에도 돌아가 쉴 곳이 없네 …후략… 『상시집嘗試集』에 수록   老鴉                                  胡適 我大清站在人家屋角上啞啞的啼/人家討嫌我,說我不吉利;--/我不能呢呢喃喃 寒風緊,無枝可棲。/我整日裏飛去飛回,整日裏又寒又飢。---/                                                              윗 시는 후스가 1924년(32세)에 발표한 시이다. 까마귀는 시인 자신을 비유하는 한편, 당시 중국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봉건왕조가 붕괴된 새 체제의 불안 속에서 자신이 품고있는 이상과 현실의 갭을 잘 투사하고 있다. 시인은 항상 군중 " 群" 과 나 자신 "己" 속에서 갈등하면서 자신만의 자유를 추구하려 한다. 첫 행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홀로 고립된 자신의 모습이며, 또한 깨어나 먼저 나라의 앞날을 짊어진 젊은이의 고뇌의 모습이기도 하다. 4.5행의 "無枝可棲""又寒又飢" 역시 춥고 배고파도 돌아가 쉴, 혹은 머물 나뭇가지 하나 없는 자신의 선구자적 존재의 고뇌와 고독을 표현하고 있다. 완전한 백화문으로 쓰여지고, 격률시의 정형성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20년대 초기 작품이지만, 상징과 은유, 역설적 표현이 잘 드러난 최근 현대시로도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쉬즈뭐徐志摩, 리진파李金髮 등과 함께 의 대표적인 시인인 원이둬聞一多는 시“여신의 地方色彩”에서 음악미와 건축미를 내세우며 현대시 리듬을 주창했으며, 리진파李金髮 는 프랑스의 상징시에 영향을 받아 를 이끌었다. 중국인들이 오늘날도 애송하는 국민시인 궈뭐루어郭沫若 역시 이 시인으로 를 통해 유미서정 경향의 시를 다수 발표했다. 또한 , 가 루쉰魯迅과 빙신氷心, 주즈칭朱自淸, 조우줘런周作人 등을 중심으로 모더니즘을 수용, 비약을 시작했다.   상징파 시의 출현   상징은 현대시의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이다. 중국 고대 시에서도 종종 눈에 띄는 창작법이나, 5.4운동 당시 『소년중국』『소년월보』『신청년』『창조주보創造週報』『어사語絲』등을 통해 소개된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상징시가 소개된 이후 본격적으로 창작되었다. 리진파李金髮 시인은 『어사語絲』에 상징주의 수법의 시를 처음 소개, 가장 왕성한 상징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25년부터 27년까지 3년간 《이슬비微雨》,《행복을 위한 노래爲幸福而歌》, 《식객과 흉년食客與凶年》등 세 권의 시집에 총 450 여편을 발표했다.      버림받은 여인                            李金髮리진파   긴 머리칼이 내 눈앞을 가리자 일체의 부끄러운 질시와 붉은 피의 급류, 앙상한 뼈다귀의 깊은 잠과 단절되었다. 칠흑의 밤이 모기떼를 몰고 천천히 다가와 낮은 담 모서리를 넘어와 결백한 내 귀에 대고 울부짖는다 황야를 휘돌며 노호하는 광풍이 무수한 목자들을 전율케 하듯   棄婦 長髮披遍我眼之前/ 遂隔斷了一切羞惡之疾視/ 與鮮血之急流, 枯骨之沉/黑夜與蚊蟲聯步徐來 /越此短墻之角/ 狂呼在我淸白之耳後,/如荒野狂風怒號./戰慓了無數遊牧   윗 시는 《이슬비微雨》에 수록된 대표시 중 하나로서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 거주한 스무 살의 리진파의 문화적 충격과 이방인으로서의 방황을 그리고 있다. ‘棄婦’는 삶의 고달픈 숙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기실 리진파 자신이 유학 중에 겪지 않을 수 없었던 외로움, 조국에 대한 고뇌, 방황, 절망에 이르는 비극성을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당시 프랑스에서 팽배하던 보들레르의 상징주의와 퇴폐성의 영향을 받아 그의 시 전반에는 현실에 대한 허무, 비애, 무능, 권태 등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모기떼를 몰고 오는 칠흑 같은 밤은 무고한 그의 귀에 와서 울부짖으며 그를 괴롭힌다. 외우내환으로 들끓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미약하기 그지없는 시인의 자화상을 호소력 있게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를 ‘詩怪’라고도 부르는데, 아마도 그가 외교관 등의 직업을 갖고 부유한 생활을 했음에도 시에선 상당한 퇴폐성과 삶의 절망 등을 보여줬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新詩운동을 전개시키며 서구의 문예사조를 재빨리 흡수, 바로 현대시로 발전시킨 당대 시인들에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대부분이 구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라는 점이다. 상징파 대표시인인 리진파는 홍콩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고 프랑스,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후에 외교관이 되어 미국에도 건너갔다가 뉴욕에서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삼대 상징파시인의 하나라고 불리던 왕두칭王獨淸 일본과 프랑스에서, 무무티엔穆木天은 일본 동경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펑나이차오馮乃超 역시 동경대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며 자연스레 외국문물을 접했던 시인들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순수시를 표방하고 신비주의, 유미주의 경향을 나타냈는데, 리진파는 베를렌을, 무무티엔穆木天은 라파르그(Lafargue)를, 다이왕수戴望舒는 야메스(Jammes)를, 스민石民은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음을 모두 인정하였다. 이들의 시에선 공통적으로 상징수법의 하나인 강렬한 암시와 음감과 색감을 동시에 결합시킨 기법을 활용하였는데, 특히 왕두칭王獨淸(정+힘) + (음 + 색)=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즉, 라마틴(Lamartin)으로부터 情을, 베를렌에게선 音을, 랭보(Arthur Rlmbaud)에게선 色을, 라파르그(Lafargue)에게선 ‘힘’을 전승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의 대두   중국인민들이 지금까지 애송하는 국민시인, 원이둬聞一多와 쉬즈뭐徐志摩, 리진파李金髮 시인은 모두 신월파 동인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색은 대체적으로 마르크스시즘에 대항하며 우파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국민당의 독재와 부정부패에는 저항하였다. 때문에 한때 국민당의 사찰을 받기도 했지만, 중국전국이 공산주의 국가체제로 바뀌자 5,60년대 중국학자들로부터는 ‘매판자본주의 문학단체’ 혹은‘반동적집단’이라고 비판을 받다가, 80년대 이후에서야 비로소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는 사실 인도의 타고르의 시집『초승달』(중국어로 新月)이란 이름에 매료되어 滿月이 되자고 1923년 북경에서 쉬즈뭐徐志摩가 발기한 사교 모임이었다. 원이둬聞一多와 쉬즈뭐徐志摩는 해외유학파였으므로 여러 계층의 신사들을 모아 자유롭게 연극을 감상하고 문학을 품평하다가 사회개혁을 시도하자는 뜻으로 동인들의 자본을 모아 1924년 12월에 『현대평론』을 창간하였다. 1927년, 북벌군에 쫓겨 상해로 온 시인들과 남경이나 해외에서 들어온 전국시인들이 모여    후스胡適를 세워 도 열고 19세기 말 영국의 문예지 『Yellow Book』을 닮은 정사각형 종합지도 발간했다. 의 공동신념은 자유주의, 인도주의, 개성해방이었으며 격율시를 제창했다. ‘격율시’란 시행의 장단이나 시의 韻의 위치를 조절함으로써 시의 균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전통시가 무너지면서 실험시가 넘쳐 만 여 편 이상이 발표되었으며, 방만한 낭만주의나 산문시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혼란상을 극복하고 전통시의 절구시나 율시의 형식을 일부 이식, 조화롭게 정리, 발전시킨다는 목적이 있었다. 또한 시어의 음악화, 방언의 시어화를 시도했다. 원이둬聞一多는 특히 음악미, 회화미, 형식상 균형을 지키자는 건축미를 주창했다. 일부는 를 ‘말린두부시(豆腐乾詩)’‘모꼴시(方塊詩)’ 라고 비아냥을 하기도 하였으나, 인권, 자유, 민주, 법치 등을 강조하는 서구 영향 아래 ‘中體西用’을 실험적으로 응용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혁명문학의 팽배와 항일운동의 봉기, 후에 좌익작가연맹으로 조직화된 사회주의 문학의 등장으로 이들이 이끌던 『현대평론』은 1928년 정간이 되었다. 다시 쉬즈뭐徐志摩가 『詩刊』을 매주 한 번씩 발간하기도 하였으나, 그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요절함으로써, 동년 6월, 11호로 정간되고 말아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고요한 밤                             원이둬    이 등불, 등불은 사방의 벽을 하얗게 씻어내고 점잖게 놓인 탁자와 의자는 친구처럼 친밀하다 고서의 종이 향내가 간간이 밀려오는데 소중한 찻잔들은 정숙한 여인처럼 청결하다 젖먹이는 엄마 품에서 홀짝홀짝 젖을 빨고 큰아이는 건강하다고 알리는 듯 코를 곤다   這燈光, 這燈光漂白了的四壁 / 這賢良的卓椅, 朋友似的親密, / 這古書的紙香, 一陣陣的襲來/   要好的茶杯, 貞女一般的潔白,/ 受哺的小兒, 接呷在母親懷裏/鼾聲報導我大兒健康的消息...//                                             聞一多 中 一部   윗 시에선 그의 주장대로 각 행 머리를 ‘這’로 시작하였으며 행의 중간마다 ‘的’을 넣어줌으로써 ‘節의 균형’과 ‘句의 규제’가 반복적으로 쓰여 리듬과 일정한 건축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격율’이란 단순한 음률상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적, 회화적, 건축적인 복합 차원의 형식의 규제이다. 따라서 자연대로의 수용이 아닌, 예술의 구성을 통한 唯美性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와 를 수용한   1930년대 대표적인 유파는 현대파이다. 는 본질적으로 를 계승, 발전했다. 두 파간의 상호 인적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시의 생명을 표현에 두고 시의 궁극목표를 순수시에 두었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이 있다. 는 1932년 5월, 의 출자와 시저춘施蟄存. 두헝杜衡의 편집으로 간행된 종합문예지 《현대》에서 시작되어 다이왕수戴望舒가 본격적으로 현대주의의 기치를 들고 『新詩』를 창간하면서부터 전 중국시단을 휩쓸게 된다. 와 의 쇠퇴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종전의 인물이었던 다이왕수戴望舒가 를 접수하고 여기저기에서 현대파 경향의 신 잡지들이 탄생하게 된다. 36년부터 37년까지 중일전쟁으로 말미암아 전 시단이 항전체제로 전환되기까지 는 최고의 성숙기를 맞아 다이왕수戴望舒는 비엔즈린卞之琳, 펑즈馮至, 쑨다이위孫大雨, 등과 공동편집으로 현대시의 조류를 강렬하게 펼침으로써 5.4운동 이래 중국 시 최고의 황금시기를 맞았다. 가 궁극에 둔 것은 순수시였다.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중국전역이 의 낭만과 신비로움, 난해한 시가 넘쳐 난데 대한 반발로 ‘자각적인 상징파’*3로 불리던 다이왕수戴望舒에 의해  中.西의 조화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즉, 밖으로는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의 암시법과 상징법, 의 낭만성과 격율시 등을 조화시켜 몽롱미와 복합적 이미지의 조합을 이뤘다. 또한 순수시정, 시의 산문미의 특성을 갖춤으로써 를 수정, 계승하고 있다. 이로써 현대파는 상징파보다 훨씬 화해적이고 통일적이며 주지적이고 의 지나친 암시와 상징으로 인한 난해함을 벗어나 좀더 직관적이고도 단순적 이미지로 시의 영역을 훨씬 명랑하고 격율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느끼게 했다. 다만, 당시 정치적 상황 등으로 인해 비관적 서정풍과 이미지 조합에 실험성을 가미한 심상풍, 직설이나 격정을 유보하면서도 현실비판에 맘을 둔 사실풍, 초현실적인 수법으로 첨예화된 현대의식을 표현하려던 회화풍 등 여러 가지 경향들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현대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서정적 낭만과 격율적 형식을 배제하지 못했으며 고전적 이성으로 현대적 상징과 심상의 융합을 꾀하는 시인들도 많았다.  이런 의미에선 는 지성과 이성을 강조하는 영미계 현대주의와는 그 특징을 조금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비 내리는 골목                                 다이왕수戴望舒   종이우산을 받들고, 혼자 길고 긴, 텅 빈 비 내리는 골목을 방황하면서 나는 희망한다 라일락처럼 근심과 원한을 맺은 소녀와 만나게 되기를   撑着油紙傘, 獨自 / 彷徨在悠長, 悠長 / 叉寂寥的雨巷,我喜望逢着 / 一個丁香一樣地 / 結着愁怨的姑娘//                                               中 一章   윗 시는 다이왕수가1927년 4.12사태에 연루되어 스저춘施蟄存 시인의 집에 숨어 지낼 때, 프랑스 시인 베를렌에 도취되어 쓴 시로 이 시는 1928년 《소설월보》에 발표되면서 일약 유명해진 작품이다. 베르렌의 와 견주어지곤 하는데, 슬픈 리듬이 노래처럼 강물처럼 흐느끼는 걸 느끼게 한다. 종이우산이나 긴 방황이 끝나지 않는 골목, 빗속에 남보라 빛 그늘을 드리우는 라일락, 그 라일락처럼 향과 슬픔을 함께 지닌 소녀와의 마주침 등이 ‘이슬비’ 속에 연결되어 창으로 번지는 빗물같이 물안개같이 읽는 독자들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인식이나 설명이 없이도 응축된 서정이 흐르며 시어가 절제되어 해이하지 않고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현대파의 특성 중, 애원적 정서를 바탕으로 고독과 우울을 서정풍이면서 삽화풍으로 그려낸 초창기 다이왕수의 대표시이다.     단장                                   비엔즈린   그대는 다리에 서서 풍경을 바라본다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각에서 그대를 바라본다 밝은 달은 그대의 창을 장식하고 그대는 다른 사람의 꿈을 장식한다   断章                              卞之琳 你在桥上看风景/看风景的人在樓上看你/ 明月装饰了你的窗子/ 你装饰了别人的梦.   1935년 10월에 발표된 이 시는 장시의 한 부분으로 후에 독립시켜 《断章》 제목을 달았는데, 중국 현대문학사상  짧으면서도 내포한 함의가 풍부한 명시라 할 수 있다. 이 시가 품고 있는 철학은, 사람들은 사물에 대해 자기 입장에서 각기 다른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시인 스스로도 "나의 의도는 ‘상대적’이라는 개념을 중시하자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시는 응축과 절제가 잘 이뤄진 현대파의 대표적인 시이다.    의 출현   시의 열풍이 강해질수록 독자들과는 소원해지는 당시 중국 상황은 일부 시인들이 복잡다단한 외세와 내부의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고 개인의 감성과 우울한 정서에만 치중한 데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괴리가 한창 심각해질 때, 마침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체가 항일전쟁 수행이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그 바람에 상징파, 신월파, 현대파 시인들도 모두 밖으로 나왔다. 유파와 관계없이 항일을 위한 민족적 위기감으로 그들은 뭉쳐서 시 낭송회와 좌담으로 민심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당시 국민당정권의 "외세를 축출하기 전에 먼저 국내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반공 주장 때문에, 그들은 반공 열기 속에서 항일전쟁보다는 국.공 대립에 밀려 좌.우익으로 갈리고, 갈등과 분쟁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문예를 위한 문예가 아니라’ ‘붓을 무기로 삼아’ ‘거리로, 시골로 뻗치는’ 가두시나 선동적 낭송시를 쓰게 되었다. 따라서 8년간(1937, 7월- 1945.8월)이나 계속된 항전은 급기야 시의 변화를 가져왔다. 낭송시의 단소화, 민족형식의 장편서사화, 정치시의 대중화의 색채가 두드러졌다. 이 때부터 낭송시, 가두시, 전단시라는 단어가 생겼으며 1938년엔 ‘가두시가운동선언’까지 나왔다. 이렇게 왜곡되기 시작한 항전문학도 1942년 공산화가 자리 잡히고, 모택동이 ‘연안 문예좌담회에서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문예정책’은 모든 인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시여야 하고 정치노선을 찬양하며 정치보다 더 우위에 설 수는 없다’고 연설하면서는 사실상 모든 예술은 파괴되었다.   시인들은 외국의 침략과 좌파와의 충돌이란 두 가지 짐을 져야 했다. 한창 누렸던 민주화 물결 속의 개인의 사상이나 사고, 자유의지 등은 국민당의 부패로 인해 상대적으로 호응을 받기 시작한 공산주의 운동으로 정치색을 드러내며 대중화되고 통속적, 산문적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항전시기의 시는 20여 년의 신문학을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좌익 정치노선의 구호에 내밀리며 대중화 시가 되었으며 민족화의 요구로 인한 개념화, 공식화의 현상을 가져와 예술성의 조잡함과 과도한 사상의 노출 등 결함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항전초기엔 애국애족의 민족사상과 함께 불붙어 모든 시들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즉,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국민과 위기의 조국을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단합하여 ‘내전을 중단하고 모두 대외투쟁에 나서자’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된 뒤, 시인들 중에는 항일정신으로 민족정기를 일으키는 시를 쓴 아이칭艾靑 같은, 후세까지 존경받는 시인이 있었으며, 다이왕수戴望舒와 비엔즈린卞之琳, 허치방何其芳, 무무티엔,穆木天, 좡커자臧克家, 루이스路易士, 루위엔綠原, 무단穆旦, 신디辛笛, 자오링이趙令儀 시인들도 시의 형상화, 심오한 경지화, 내성적인 시를 씀으로써 끝까지 순수시를 지켜내려 노력했다. 국가의 위기는 시인들을 더 많이 고무시키고 단합하게 만들어 한편에선 항전과 무관한 순수예술이 계속 발표되었다.   나는 이 대지를 사랑한다  아이 칭 내가 만일 한 마리 새라면 나는 응당 목이 쉬도록 노래할 것이다 저 거센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대지, 저 우리들의 비분이 영원히 용솟음치는 강줄기, 저 멈추지 않고 불어대는 격노한 바람, 그리고 숲 사이로 다가오는 더할나위 없이 부드러운 여명,..... _____ 그 후에야 난 죽을 것이다 깃털조차 토지 속으로 썩어 들 것이다   왜 나의 눈엔 항상 눈물이 고이는 걸까 내가 이 대지를 그토록 깊이 사랑하기 때문일까,......   我爱这土地                               艾 青 仮如我是一只鸟, / 我也应该用嘶哑的喉咙歌唱:/ 这被暴风雨所打击着的土地 / 这永远汹涌着我们的悲愤的河流 / 这无止息地吹刮着的激怒的风, /和那来自林间的无比温柔的黎明..... /___然後我死了,/ 连羽毛也腐烂在土地里面 // 为什麽我的眼里常含泪水? /因为我对这土地爱得深沈........   아이칭의 이 시는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고, 전국이 항일전쟁의 기치 하에 뭉쳤던 1938년 작으로서 절절히 표현된 조국애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중국인민들이 사랑하는 애송시이기도 하다. 이 시 외에 라는 시에서도 절절하게 애국애민의 순애보를 느낄 수 있다. 아이칭은 원래는 프랑스 미술유학생이었으나 중국좌익미술가연맹에 연루, 좌익으로 몰려 투옥되면서, 이 때부터 시를 전념했다. 그런 만큼 정치적 갈등과 그 사이에서 고통을 받는 중국인민들을 위한 열렬한 시를 발표했다. 아이칭은 국민당이 몰려난 즉 후에 다시 우익으로 몰려 노동개조소로 끌려가면서 절필선언을 했다. 장장 10여 년의 문혁이 끝난 뒤에야 신분회복이 이뤄져 북경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생활을 한 민족시인이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정치 대립 사이에서 고통 받으면서도 민족을 위해 한 줄의 시로 목쉬도록 아침을 깨우는 새 한 마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음을 이 시는 절규하고 있다.    시의 암흑기: " 정치는 모든 예술에 앞선다"   일찍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부정부패의 토양 위에서 자라난 중국 공산주의는 한창 서구 문예사조를 일시에 섭렵한 시인들의 자유분방함에 대해 일갈을 가했다. 즉, 시인들에게 정치 노선에 봉사하는 찬양 선동적 역할을 강요한 것이다. 즉, 모택동의 “연안문예강화”(1942년 5월) 발표와 함께 시는 “정치적 표준이 예술적 표준에 앞선다”는 강령 아래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나 의지, 남.녀간의 사랑표현 등, 시인의 개성과 인성을 중시하는 표현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시 정신이나 시인의 지위는 왜곡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1949년 공산주의 신중국이 성립되고 곧 이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정치와 군사가 압도하면서 중국 시단은 함께 선동의 깃발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야 했다. 특히 이상적 공산주의의 실현을 내걸고 정권 탈취와 연장을 위해 1966년부터 10여 년간 실시된 문화혁명은 인간성 말살의 극치를 보여줬으며 모든 예술의 암흑시대를 초래하였다.정치선전을 위한 목적시가 우선되면서 진정한 시 정신을 퇴보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현대시의 경계를 다시 문혁 그 이후로 잡아야 하느냐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화남호랑이(华南虎)                           뉴 한牛 汉*⁴ 너의 건장한 다리는 꼿꼿이 서서 사방으로 뻗쳐나가네 내가 보는 너의 발가락은 하나하나가 모두 깨지고 망가져 짙고 짙은 선혈이 응고되어 있네 너의 발가락은 사람들에게 묶여서생으로 잘려나갔는가 아니면 비통한 분노 때문에 그 부숴진 이빨로 뜨거운 피가 나도록 물어뜯은 것인가   나는 철창우리를 바라보네 회색 시멘트 담장 위 한 길 한 길 피 묻힌 도랑이 있어 섬광처럼 현란하게 눈 찌르는 것을   마침내 알았네,..... 부끄러운 마음으로 동물원을 떠날 때 갑자기 외치는 한 소리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외침, 속박할 수 없는 영혼이 내 정수리를 내리치고 허공으로 사라지네 나는 보았네, 불타오를 듯한 무늬와 불 타오르는 눈동자를 1976년 6월, 1982년2월호에 실림    你的健壮的腿/ 直挺挺地向四方伸开 / 我看见 的每 趾瓜 / 全都是破碎的,/ 凝结着浓浓的鲜血! / 你的趾瓜 / 是被人綑綁着 / 活活地鉸掉的 ? /还是由于悲愤/ 用同样破碎的牙齿/ 把他们和着热血咬碎的.....//     我看见铁籠里 / 灰灰的水泥墙壁上/ 有一道一道的血淋淋的溝壑 / 像闪电电那般耀眼刺目! //       我终于明白....../ 我羞愧地離开了动物园, / 恍惚之中听见一声 / 石破天驚的咆哮 /有一不羁的灵魂//      掠过我的斗顶/ 腾空而去, / 我看见了火焰似的斑纹 / 火焰似的眼睛!//               윗 시를 쓴 뉴한牛汉이 를 통해서 밝힌 시정신은 아래와 같다. " 나는 신장이 190센티로 우리 고향의 고량 나무 만큼이나 키가 크다. 그만큼 나의 뼈가 나를 가련히 여기고, 나를 보호해 주고 있다..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동안 수 천 개의 크고 작은 뼈마디들이 이를 악 물고 나를 액운으로부터 지켜주는 소리를 들었다.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나의 뼈에 감사하고, 나의 시에 감사할 일이다. 노동을 많이 해서 손바닥에는 딱딱한 못이 적지 않게 박혀 있고, 깊고 가벼운 상처들도 많다. 수십 년 동안 나는 아픈 손으로  시를 써 왔고, 시 한 줄, 글자 하나 쓰는 것이 모두 아픔이었다....나는 다른 사람보다 감각기관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뼈마디, 그리고 외관과 영혼 속의 상흔이다." 윗 시는 물론 汗血马(피땀 흘리는 말), 悼念一棵樹(한 그루 단풍나무를 애도함),半棵树(반쪽나무) 같은 시들은 오랜 전쟁과 공산주의 혁명, 그리고 문화혁명까지 닥치면서 휘돌아 치는 격랑에 지치고 다친 중국인민들의 상흔을 그리고 있다. 이 시도 뉴한이 감옥에서 나와 노동개조소에 오래 노동을 하다가1976년, 문혁이 끝나는 시점에서야 쓰여진 것으로 6년 뒤에야 발표를 했다는 데서도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가 빠지고 발톱이 생으로 빠져나가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구경꾼들의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외마디 포효를 함으로써 불 타오르는 그의 눈빛과 분노를 통한 그 절절한 삶에의 의지와 지켜내고자 하는 마지막 자존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인성의 말살을 실험하였던 문혁기간 중에도 견뎌낸 그의 시정신도 바로 이 화남호랑이 같았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6,70년대 文革 기간 중 감옥이나 노동개조소로 끌려가면서도 문학은 지하에서도 지속되어, 중국 현대시사는 결코 정치로 인해 중단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냐면, 70년대까지 이어진 정치서정시는 가송시, 생산시를 낳았지만, 예술성의 실험은 버리지 않고 지켜내어 80년 이후 다양한 새 영역으로 중국 현대시의 명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고난과 핍박 속에서 시인의 정신은 더욱 단단히 단련되는 것일까, 노동개조소나 감옥에 수감되었던 시인들에 의해, 문혁 이후에는 새로 탄생된 젊은 시인들에 의해, 고매한 시 정신과 시의 예술성, 순수성이 지켜져 오다가, 개혁개방이 시작된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정치 홍보용 꼭두각시가 아닌 ‘현대시’가 새로운 시각으로 발표되었다. 거기에 실험성도 가미되면서 현재 중국시는 보다 자유로운 풍토에서 2,30년대를 방불케하는 시적 열기가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존엄한 인성을 찾는 발걸음도 늦추지 않고 분투하고 있다.                                                     ** 참조, 1) : 후스: 1891년 상해 따칭大清태어나 시인으로 학자로 철학가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5.4 운동의 중심인물로서 제일 먼저 백화문으로 신시를 썼으며 모택동에게 제안하여 湖南自修대학을 설립하게 했다. 후엔 《자유중국》잡지의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민주사상을 흠모, 언론의 자유가 있는 대만에서 살다가 1962년 70세 때 세상을 떠났다. 2) 李金髮(1900年11月21日-1976年12月25日) 현대상징주의 시인으로 조각가이며 교수, 외교관 등을 역임했다. 그 역시 1919년에 프랑스에서  조각과 유화를 배웠다. 1920년 프랑스의 상징주의를 받아들여 시를 쓰기 시작, 중국상징주의 대표시인이 되었다. 1925년 귀국, 항주국립미술원, 중산대학미대교수로 있다가 1932년《현대》잡지를 통해 현대파 시인이 되었다. 1941년 항일문예운동에 뛰어들어 《문단文坛》창간을 도왔으나 그 해 이란, 이라크 등의 외교관으로 나가면서 후엔 아예 미국으로 이민, 뉴욕에서 76세에 생을 마감했다. 3) 盧斯飛, 劉會文 《馮至戴望舒的詩歌創作》 廣西敎育出版, 南寧,1989, 6月   이 책에서 인용함. 서구문화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중국 전통에서부터 이어져 온 상징수법을 다이왕수戴望舒에 의해 中.西의 조화를 창안했다는 뜻. 4) 뉴 한 (1923- ) : 원명은 史 成汉 山西省 定襄에서 태어남. 몽고족으로 1980년대 "칠월"파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문화혁명이 끝난 뒤 아이 칭(艾 青을 위시한 일련의 시인들이 복귀하자 "귀래(归来"파에 흡수되어 80년대부터 시작된 현대시의 주류가 되었다. 그도 우파로 몰려 1955년에서 57년까지 감옥생활을 했으므로 발표나 시집 출판이 한동안 금지되었다.   [출처] 격동의 20세기를 이겨낸 중국 현대시 / 김금용|작성자 푸른섬  
15    시작법 1 댓글:  조회:4550  추천:0  2015-02-16
오픈지식 시를 잘 쓰기 위한 10가지 방법 시를 잘 쓰기 위한 10가지 방법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문학을 좋아하는 많은 애독자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의 모국 대한민국의 많은 시인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시인입니다. 이 자리에는 저처럼 시를 쓰면서 이 이승에서의 삶을 꾸려가는 분들이 많이 와 계신 것으로 압니다. 지금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저의 가장 큰 소망은 지금까지 썼던 그 어떤 시보다 더 좋은 시를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단 한 편이라도 길이 남을 명시를 쓰고 싶은 소망 때문에 낮에는 전전긍긍하고 밤에는 전전반측하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와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드리는 것이 시를 쓰고 계신 여러분께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여러 날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법 10가지 전수입니다. 제가 1984년에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7권의 시집을 내면서, 또 1992년부터 대학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시작법을 가르치면서 익힌 노하우를 전해 드리는 것으로 강연을 대신할까 합니다. 거창한 강연이 아니라 아주 소박한 내용이어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과 함께 시를 감상하면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제가 인용하는 시는 졸저 {백 년 후에 읽고 싶은 백 편의 시}(시와시학사)에서 다루었던 것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즉, 그 책을 통해 했던 말을 중심으로 강연을 해볼까 합니다.    1. 시는 우리말의 보물창고이다    여러분과 함께 감상해볼 첫 번째의 시는 김진완이란 젊은 시인의 등단작인 [기찬 딸]입니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증기기관차가 달리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꽤나 옛날 일이겠지요. 시적 화자의 외할머니가 딸을, 즉 자신의 어머니를 분만하는데, 바로 그 장소가 달리는 기차 속이었습니다.    다혜자는 엄마 이름. 귀가 얼어 톡 건들면 쨍그랑 깨져버릴 듯 그 추운 겨울 어데로 왜 갔던고는 담 기회에 하고, 엄마를 가져 싸아한 진통이 시작된 엄마의 엄마가 꼬옥 배를 감싸쥔 곳은 기차 안. 놀란 외할아버지 뚤레뚤레 돌아보니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들뿐이었는데 글쎄 그게, 엄마 뱃속에서 물구나무를 한번 서자,    으왁!    눈 휘둥그런 아낙들이 서둘러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자 남정네들 기차 배창시 안에서 기차보다도 빨리 '뜨신 물 뜨신 물' 달리기 시작하고 기적소린지 엄마의 엄마 힘쓰는 소린지 딱 기가 막힌 외할아버지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인데요, 아낙들 생침을 연신 바르는 입술로 '조금만, 조금만 더어' 애가 말라 쥐어트는 목소리의 막간으로 남정네들도 끙차, 생똥을 싸는데 남사시럽고 아프고 춥고 떨리는 거기서 엄마 에라 나도 몰라 으왕! 터지는 울음일 수밖에요.      박수 박수 "욕 봤데이." 외할아버지가 태우신 담배꽁초 수북한 통로에 벙거지가 천정을 향해 입 딱 벌리고 다믄 얼마라도 보태 미역 한 줄거리 해 먹이자, 엄마를 받은 두꺼비상 예편네가 피도 덜 닦은 손으로 치마를 걷자 너도나도 산모보다 더 경황없고 어찌할 바 모르고 고개만 연신 주억였던 건 객지라고 주눅든 외할아버지 짠한 마음이었음에랴 두말하면 숨가쁘겠구요. 암튼 그리하야 엄마의 이름 석 자는 여러 사람들의 은혜를 입어 태어났다고 즉석에서 지어진 것이라.    多惠子.    성원에 보답코자    하는 마음은 맘에만 가득할 뿐        빌린 돈 이자에 치여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나의 엄마 다혜자씨는요,    칙칙폭폭 칙칙폭폭 끓어오르는 부아를 소주 한잔으로 다스릴 줄도 알아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    여장부지요    기찬,    기―차― 안 딸이거든요.                             ―김진완, [기찬 딸] 전문    승객이라고는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을 가진 농투성이들뿐이지만 이들은 낯선 아주머니의 차내 분만에 한마음으로 동참합니다. 아낙들은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고, 남정네들은 뜨신 물을 구해오고, "벙거지"는 미역 살 돈을 내놓고, 두꺼비상 여편네는 산파 노릇을 해 무사히 한 생명은 "으왕!" 울음을 터뜨리며 탄생합니다. 이런 여러 사람의 은혜로 태어났다 하여 엄마 이름이 다혜자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3연이 보여주는 여성적, 혹은 모성적인 건강함은 가슴 훈훈한 감동을 전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또한 꽤 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1연과 3연 사이에 위치한 "으왁!"이란 의성어가 환기하는 생명 탄생의 고통과 경이로움, "기찬"과 "기―차― 안"이라는 비슷한 음을 이용한 유머 센스 등은 이 시를 명작의 반열에 올리는 데 합심하여 공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오신 어머니가 소주 한잔 마시고 내뱉는 말,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에 있습니다. 참 한국적인 말이라고 할까요, 서민적인 말이라고 할까요. 어머니의 힘, 아니 한국 아줌마의 힘을 나타내는 그 말이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말도 되어 있다면 이 시의 맛은 반 이상 줄어들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 시야말로 사투리와 순우리말의 보물창고라는 생각을 합니다. 소월과 영랑이, 백석과 정지용이 왜 위대한 시인인가 하면 한국적인 정서를 한국적인 어투와 어조, 사투리와 순우리말로 표현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질료인 언어를 구사할 때, 사투리와 순우리말이 지금은 쓰지도 않는 낡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잘 찾아내어 시에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역만리에서 모국어를 구사하는 문화의 파수꾼이며 창고지기입니다. 언어 학대가 시인의 특권인 양 언어를 못살게 구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미국에서 살면서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습니까? 몸은 비록 미국에 있지만 시인인 이상 모국어를 잘 갈고 닦는 언어의 세공사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2. 시는 특이한 체험의 산물이다    김광림이란 시인이 있지요. 1929년생이시니 올해 연세가 일흔여섯입니다. 함경남도 원상 출생이신 시인은 이른바 이산가족의 일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 남북분단의 아픔을 남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계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시가 전개되는데, 시인이 겪었던 일이 어떤 영감이나 상상력, 혹은 비유와 상징의 도움 없이 그야말로 곧이곧대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중학 동창은    마지막 대작을 위해 일부러 나를 찾았단다    반세기가 넘어도 상기 '야' '자'로 통하는 사이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한때는 혀가 굳어져 제대로 말도 못했다며    다시 굳어지기 전에 꼭 해야겠다고    느닷없이 들고 나온 한마디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    간신히 기어드는 목소리로    ----아니    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금방 가슴속의 응어리가 터질 것만 같다.    ----이 자슥아! 너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앞세워 우리 집에 찾아오셨단 말야    너 어디 갔느냐고 물으시길래 나도 놀랐지 무슨 말씀이냐고 되물었지만……    ……'제 에미도 동생들도 다 모른다니 이놈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야'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하긴 그래    어머니는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인들 말렸을까    남행열차를 탄 내게 마냥 손을 흔들어쌌던    누이의 모습이 지금도 삼삼한데    아버지의 노여움에    모두가 모른다고 잡아뗀 모양이다.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    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    기세가 등등해진 녀석은    취기까지 가세하여 사뭇 심문조다.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    그만 울먹이는 소리가 돼버렸는지    '야' '자' 하던 친구가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아냐 잘했어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    이승에선 다시 못 뵈올 부모님 생각에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리고 싶어    상기된 얼굴을 들이대자    이번엔 '야' '자'가    잘못 눈물단지 건드렸나 싶었던지    시무룩한 목소리로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어쩌랴.                             ―김광림, [괜한 소리] 전문    제목 '괜한 소리'는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마지막 대작을 위해 찾아온 중학 동창의 입에서 나온 두 가지 질문인 동시에, 시인 스스로 자신의 대답을 '괜한 소리'로 규정한 자탄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동창생 노인은 마지막 대작이겠다, 술을 마신 김에 평소에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어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늙은 시인 친구는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하고, 급기야 울음보를 터뜨릴 듯 상기된 얼굴이 됩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라고 시무룩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시의 제목이 '괜한 소리'가 된 것이겠지요.    두 가지 질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을 치고, 쓰리게 하고, 결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해 눈시울까지 뜨거워집니다. 수백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물음은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입니다. 청년 김광림은 아버지한테 탈향(脫鄕)의 이유를, 이향(離鄕)의 전말을 말씀드리지 않고서 남행 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종적을 감춘 아들의 소식을 알아보고자 딸을 앞세워 아들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시인인들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귀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말씀드리지 않았지, 그것이 영원한 생이별의 순간임을 알았더라면 작별의 인사도 고하지 않고 떠나왔겠습니까.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이 한 행 속에는 아버지의 정이 소복이 담겨 있는 정도가 아니라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흘러 넘치는 그 부정(父情)이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입니다. 마지막 대작을 위해 찾아온 친구는 일신의 안전을 위해, 혹은 시를 쓰겠다고 아버지한테 말씀도 안 드리고 고향을 떠난 시인 친구를 공박하며, 살아 계시면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 묻습니다. 시인은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 속에는 살아 계실 확률보다는 돌아가셨을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쪽에서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라고 자탄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뒤에 가서는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라고 자학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는 별다른 시적 기교를 동원하지 않고서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것을 솔직히 털어놓아 깊은 감동을 준 경우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 가운데 가슴아픈 경험이 있으면 솔직하게 고백해보십시오. 수치심을 동반한 기억도 좋습니다. 그 체험이 소소한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체험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학적 자산입니다.    3. 시는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산가족으로서의 뼈아픈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지만 늙어가면서 느낀 쑥스러운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김광림의 시에는 민족사가 담겨 있지만 박남수의 시에는 일상사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 박남수는 미국에 이민을 와 작품활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이라 여러분 중에 교분을 나눈 분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보고    국도 끓여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박남수, [훈련] 전문    시인의 아내는 자신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뜰 것을 예감하고서 홀아비가 될 남편을 위해 혼자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던가 봅니다. 그런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도 전에 아내를 눈을 감았습니다. 이 작품은 흡사 일기를 시행으로 나눈 듯 시적 기교는 없지만 읽는 이의 가슴을 치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박남수 시인의 젊은 날의 시 가운데 [아침 이미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같은 눈부신 감각을 보여준 시를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는 노년에 들어서서 아주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지사는 어떻게든 숨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함으로써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를 쓸 수 있습니다.    4. 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담아야 한다    저는 성선설이나 성악설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만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순수한 본성은 나한테 잘못을 한 타인을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 타인의 불행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넓게 말해 사랑이지요. 여러분은 신문을 읽으면서 혀를 차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혀를 차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되고 그 마음이 시를 쓰는 마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타인의 불행에 오불관언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 아닙니다. 다음에 감상해볼 시는 '95년 1월, 빚 때문에 영랑호에 와 자살한 한 가족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곳 미국에서도 일가족 동반 자살의 뉴스가 전해지는 때가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해마다 정말 자주 듣는 뉴스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가족이 자살을 시도한 결과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났지만 살아난 사람도 중태란 소식, 부도를 막지 못한 중소기업의 사장이 가족을 먼저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식, 또 어른은 살아나고 아이들이 죽었으니 이건 동반자살을 아니라 비속살해라는 등등. 자, 시를 읽어봅시다.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울산바위가 물 속의 집 뜨락에    오래 가는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거나    산 그림자 속 화암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가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물 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 모래기는 영랑호 주변에 있는 마을 이름.                             ―이상국, [물 속의 집] 전문    어린아이들이야 자살에 자발적으로 동참했을 리 없고, 부모가(흔히 아버지가) 자식을 일단 살해한 뒤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인은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밝혀놓지 않았는데, 1995년 1월에 서른세 살의 남자가 빚 때문에 고민하다 그의 아내와 두 자식의 손을 잡고 영랑호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뛰어들었으니 그야말로 '동반' 자살입니다. 타인의 죽음이므로 시인은 1연에서 이 사실을 담담히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담담히?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제4행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에 이르면 시인의 안타까워하는 얼굴이 확, 다가옵니다. 그 겨울의 눈보라는 영랑호를 눈앞에 둔 한 가족을 얼마나 떨게 했을까요. 이 비정한 세상에 남편 없이 팽개쳐질 두 새끼의 목숨까지 거둘 결심을 한 젊은 가장의 굳어 있는 얼굴까지 확, 다가옵니다. 인간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의 정은 시인으로 하여금 제2연을 쓰게 합니다. 시인은 자살의 현장인, 네 사람의 목숨을 삼키고도 여전히 고요한 영랑호에 고리와 청둥오리들을 보내 조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상합니다.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즉, 이제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가족을 시를 통해서나마 한 번 부활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 속에다 집을 만들어서 말입니다. 한때는 단란했을 그들,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빚이 없었던 그 가족의 지난날을 생각하니 하느님이 다 무심하다고 생각되고, 그래서 시인은 하느님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상국은 시를 구상하는 동안, 초고를 쓰는 동안, 퇴고하는 동안, 신이 되었습니다. 시밖에 쓸 수 없는, 언어의 창조주가 말입니다.    미국에서도 폭탄 테러로 어린아이를 포함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적이 몇 번 있었지요. 이런 소식을 접하고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어쩌지 못해 시 한 편을 써보는 것입니다. 이상국 시인은 자신의 무력감이 서글퍼 제3연을 썼을 것입니다. 제3연의 마지막 행에서는 시인 자신이 느닷없이 등장해 울고 있습니다. 죽은 가족이 시인이 아는 사람들이라 비보를 접하고서 울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는지, 혹은 신문 기사를 보고서 울고 싶었는지, 뭐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자가 이 시를 평하면서 센티멘털리즘이니 감상 과잉이니 하며 비판하는 것도 시인은 개의치 않기로 한 듯합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그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인 시작 행위를 하되,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이렇게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일가족 동반 자살 소식을 접하면 아이들을 살해한 부모의 비정함에 분노하게 됩니다. 정 죽고 싶으면 자기네들이나 죽지 왜 애들을 죽여,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있을까 하고 개탄한 뒤, 욕을 몇 마디 덧붙이고는 남의 일이기에 곧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상국 시인은 젊은 부부가, 혹은 젊은 가장이 오죽했으면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했으랴 하는 생각에 이어진 연민의 정을 억누를 수 없어 물 속에다 집을 지어주고, 물 속의 집 뜨락에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게끔 하고, 화암사 중들에게까지 부탁하여 목탁을 치게 합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이 우리가 어찌 문학을 한다고 운위할 수 있겠습니까.    5. 시는 유머 감각의 산물이다    이상국의 시가 너무 비감하여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합니다. 이번에는 유쾌한 시를 한 편 감상해봅시다. 미학에서는 아름다움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비장미, 숭고미, 순정미, 우아미 외에 골계미가 있고, 또 하나 미와 반대개념이면서 미의 일종인 추(the ugly)가 있습니다. 우리 시는 너무 점잖고 엄숙한 경향이 있습니다. 언중유골이라고,  엄숙한 가운데서도 농담을 할 줄 알고, 농담을 하는 중에도 뜻을 새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도 시를 읽다가 미소를 짓거나 씩 웃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팔순을 넘기신 우리 할머니 경주이씨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는 의좋은 오누이 모습으로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 나누시네. 때는 봄날,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환하게 퍼져나가고 백발 장모가 권하는 일배 일배에 취한 눈멀고 귀먹어  가는 사위는 아주 오랜 옛날도 어제처럼 가까워 흥이 나네. 기억하시는교 빙모님요 막내 처제 낳고 제가 가물치 한 마리 사 가지고 찾아갔지요. 하모 김서방 그 달이 윤삼월 참으로 큰 가물치였제.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 가물치 한 마리 짚으로 꿰어들고 경남 양산군 하북면 삼감리로 걸어가는 키 큰 고모부 모습 나도 보이네. 산후조리하고 있던 할머니의 민망한 마음 보이네. 갓난애기 처제를 본 우리 큰고모부 선한 눈가 웃음도 보이네. 金粉으로 부서지는 두 분의 옛날 이야기 곁에 버릇없이 누운 나는 살아보지도 못한 저 먼 세월 어슬렁어슬렁 거슬러 올라가는 귀 큰 당나귀, 금줄 친 사립문 밖에서 百年 손님 맏사위 멋쩍게 맞으며 新羅瓦當의 웃는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듣네. 아직도 살아 푸드득거리는 가물치 소리 생생히 들려오네.                             정일근, [흑백사진―가물치] 전문                                  이 시는 상황 설정부터 웃음이 나옵니다.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의 이야기이니까요. 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촉매제가 바로 가물치입니다. 장모가 마흔이 넘어 처제를 낳았으니 본인은 백년 손님인 맏사위 보기가 민망하고, 장인은 사위 맞기가 멋쩍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위는 그래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엄청나게 큰 가물치 한 마리를 사 들고 처갓집에 갑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상황입니까. 그런데 시인의 재능은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등장인물을 아름다운 금빛으로 도금하는 언어의 연금술에 있습니다.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퍼져나가고", "新羅瓦當의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같은 표현도 그렇거니와, 화자의 팔순을 넘기신 할머니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에게 술을 계속 권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더없이 정겨워 독자는 감동하게 됩니다. 시 한 편에 사람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따듯한 정감을 이렇게 듬뿍 담을 수 있다니, 아니 흘러 넘치게 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6. 시는 새로운 요소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소재와 주제일지라도 표현 방법이 너무 진부하면 시의 맛이 사라져버립니다. 시를 쓸 때는 어느 정도의 실험정신이 시를 맛깔스럽게 하는 양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 편의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난 그날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 시도로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기로 한다.    그―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    날―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    통합적으로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나의 알 수 없는 우울증은 조금 더 강도를 높인다. 다음 단계로 그날의 사건과 정황을 그려보기로 한다. 이 단계에서 경계해야 할 점은 육신이 제거된 영혼의 교만함이 고개를 쳐든다는 점이다. 냉정함을 잃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두 번째 시도로 들어간다.        정말이지,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가 떠오른다. 정말 어찌 하라는 건지, 나 부끄러움 넘어선 견디기 힘든 굴욕감에 별들도 차가운 눈빛으로 가슴 깊이 얼음 송곳  밀어 넣는다. 바람에 상처받기 쉬운 겨울나무는 땅의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단단한 겨울에 완강히 저항한다. 그런 잠 못 들기 몇 날인가, 핏발 서린 눈에선 자꾸 마른 눈물 흘러, 말라비틀어진 흔적이 영혼 깊숙이 각인된다.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영혼의 기막힌 알리바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 더 나아가 내 몸 구석구석 굴욕의 상처들이 바람에 제 존재를 알리는 풀잎처럼 우우, 일시에 일어나 실개울로 흘러 비굴한 시 쓰기를 관통하여 뜨거운 태양이 그대의 오만함을 녹여줄 회복기의 봄을 고대하도록 한다. 이쯤 되면 영혼의 교만함이 육체의 단순성을 비웃듯 또다시 고개를 쳐들고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강성철, [그날] 전문    시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지요? [그날]이란 제목을 보고 '그 어느 날'이라고 생각한 저의 기대지평은 초장에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시인은 '그날'을 달리 생각해보고자 '그'를 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로, '날'을 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으로 해석해본 뒤, 통합하여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봅니다. '그'는 ①번을 선택했으나 '날'은 세 개 중 마땅한 것이 없어 면도날을 연상한 것입니다. ①번 '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에서 날카롭기 짝이 없는 면도날을 연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윽한 면도날이라니요. 여기서 독자는 시인의 장난에 우롱 당했다는 당혹스런 느낌과 시인의 계산을 못 따라잡았다는 허탈한 감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장난이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요.    제2연에 접어들어서도 강성철은 계속 독자에게 미지의 덫을 놓습니다.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는 면도날을 휘둘러대는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불시에 가한 자네의 행동에 나는 괴롭고 서러워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겨울에 저항하는 겨울나무처럼 잠 못 드는 나날을 보냅니다. 고통과 설움은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는 2연 중반 끝 부분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뒤엉킴의 실마리는 아마도 이 구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시인이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인이라면 영혼의 불멸 또한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육신'과 '영혼'의 관계는 평생 동안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화두와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설사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은 이 현실사회에서도 얼마나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까.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온 사람이 죽어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제 대충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육신을 계속 괴롭히는 영혼의 병이 나의 큰 문제인 것입니다. 타인에 의해 늘 상처받는 내 영혼의 병인 우울증이 문제인 것입니다.    시인은 "굴욕의 상처들"과 "비굴한 시 쓰기", "그대의 오만함"과 "영혼의 교만함" 등 온갖 자극적인 언어를 동원하면서 굴욕과 비굴, 영혼의 교만함에서 벗어나기를, 고통과 설움이 끝나기를, 그 무엇보다 우울증이 완치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제2연 끝 부분에 이르러 '그날'이란 글자의 분석에 몰입했던 이유가 밝혀집니다.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불면증 환자가 잠을 청하기 위해 숫자를 백, 아흔아홉, 아흔여덟, 아흔일곱…… 하면서 밤이 깊도록 세고 있듯이 강성철은, 아니 [그날]의 시적 화자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그날'이라는 글자를 분석하는 데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글자 분석의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애를 썼건만 화자의 우울증이 회복되기는커녕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니까요. 이 거대한 정신병동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이 괄호 속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너와 나의 관계는 늘 어긋나기만 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숨은 세계에서 승냥이처럼 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나와 타인은 다들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고, 나의 우울증은 심화되기만 합니다. 읽고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시, 여러 번 되풀이해 읽는 동안 뜻이 풀리는 이런 시가 오히려 매력적인 시일 수 있습니다. 1980년대에 한국 시단을 풍미했던 이른바 해체시라는 것에 대해서도 따뜻한 애정의 시선을 갖고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호 풀기나 미로 찾기 같은 시 읽기이지만 그 속에 오묘한 진리가 들어 있거든요.    7. 시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노래한다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체의 동일한 운명은 태어난 이상 마땅히 죽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에 나타난 가장 보편적인 소재요 주제입니다. 제게 소설작법을 가르쳐주신 김동리 선생님은 "소설로 쓸 만한 소재가 없어 고민하는 학생은 '죽음'을 갖고 써보게. 우리에게 죽음만큼 친숙한 것은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텔레비전 뉴스나 조간신문에 누군가의 '죽음'이 보도하지 않는 날이 있던가요?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루를 살면서 하루를 죽이는, 즉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작품을 쓰다가 소재나 주제가 고갈되었다고 여겨지면 누군가의 죽음을 갖고 시를 써보십시오. 죽음이 아니면 탄생과 늙음과 질병 가운데 하나를 택해 써보셔도 좋겠습니다.    묘비들 사이로    아이가 달려온다    기억의 저편으로 아득히 건너간 생애들이    몇 줄 글자로 남아    무릎 키 세우고 있는 사이        네 살배기 아이가 무어라 소리치며    저쪽에서 뛰어 온다    Beloved Wife and Mother 1939-1980    이국 땅에서의 크고 작은 기쁨    설레임과 회한의 날들    꿈결같이 아득히 사라지고    조국 하늘 아래 한 여인의 평생은    한 줄 이국 글자 묘비명으로 남았는데    한 명의 딸과 의학박사란 칭호만이    한 남자의 사십 년 생애가 남긴 모든 것이어서    의·학·박·사    이름 위에 새겨놓은 네 글자    살아남은 자의 애달픈 마음    그 옆의 묘비는 전하는데    내가 지상에 남기고 싶은    단 하나의 풍경처럼    줄지어 선 비석들 넘어    딸아이가 온다    팔랑팔랑    꿈속 나비 같다                             ―김기중, [공원 묘지에서] 전문    김기중은 외국의 한 공원 묘지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발견하고서 사뭇 처연한 심사에 사로잡혀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시에 나타난 가족사는 이렇습니다. 한 남자가 40년을 살아 지상에 남겨놓은 것은 한 명의 딸과 의학박사란 호칭이 전부였습니다. 즉, 의학박사의 신분으로 외국의 묘지에 묻혔으니 한 남자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에 공부가 차지한 세월이 거의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조국의 하늘 아래 남아 있던 아내의 '평생'이 남편의 묘비에 한 줄 이름으로 남게 되었을 뿐이니 그 감회가 착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착잡한 감회가 마지막 연에 담겨 있습니다.    딸아이는 아마도 성묘하러 온, 죽은 이의 자식이겠지요. 줄지어 선 비석들, 즉 수많은 주검을 뛰어넘으며 가장 최근에 죽은 이의 한 점 혈육이 꿈속 나비같이 팔랑팔랑 옵니다. 사서 중 하나인 {장자}에는 장주가 꿈속에서 본 나비의 고사가 나옵니다. 장주가 꿈에서 호랑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호랑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는, '물화(物化)'를 설명하는 고사가 생각납니다. 사람의 생이란 일장춘몽이며 남가일몽이란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생에 아무리 집착한들 저승사자의 방문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이며,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일 뿐일까요? 예술은, 시는 우리 목숨을 부활할 수 있게 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사후에 우리가 써놓은 시를 읽고 누군가 감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 독자의 마음속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영원 회귀를 꿈꾸는 것입니다.    8. 시는 문명비판을 지향한다    20세기를 풍미했던 가장 강력한 시적 사조는 모더니즘이었습니다. 모더니즘이 표방하고 있는 정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문명비판입니다. 영화는 기술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문명과 친화가 잘 이뤄지는데 문학은 이상하게도 문명하고는 좀처럼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정보를 제공하고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며 오락의 기능을 다하는 컴퓨터를 갖고 쓴 시가 있습니다. 어언 10년 전 일이 되었는데, 러시아의 한 해커가 인터넷을 통해 시티뱅크에 침투해 1천만 달러를 훔쳐간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컴퓨터를 잘 다루면 복면을 하고 은행털이 강도로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미국의 10대 해커들이 뉴저지 공군기지의 한 연구소에 침투한 일이 발생, 미국 사회를 경악케 하기도 했고, 1997년 초에는 호주와 에스토니아의 해커들이 3만 통이 넘는 전자 메일을 쏟아 부어 버지니아 랭글리 공군기지의 컴퓨터 네트워크가 마비된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정보 전달이라는 약과 함께 시스템 파괴라는 병을 주는 것이 컴퓨터입니다. 컴퓨터가 사람의 머리와 손발을 대신하여 정보사회의 중요한 전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학계에서는 '테크노 의존증' 혹은 '컴퓨터 중독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문명병이 등장하여 급속히 확산되는 중이라고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기기 자체에서 나오는 전자파도 문제이지만 컴퓨터를 너무 오래 사용하는 바람에 시력장애·경근완 질환(목·어깨·팔에 통증이 오는 병)·두통·소화불량 등의 신체장애는 물론 대인기피증·광장공포증·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이 컴퓨터를 많이 다루는 현대인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컴퓨터를 소재로 한 시를 젊은 시인들이 쓰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 대다수는 사실 눈만 뜨면 컴퓨터를 켜고, 컴퓨터를 꺼야 잠자리에 들지 않습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이 기억력 나쁜    고물 PC를 새 걸로 바꾸기로 결심.    언젠가 PC 카탈로그에서 보았던    삼성 알라딘을 사리라 마음먹는다    내 글이 안 되는 건 순전히    도구가 용산 조립품 286AT이기 때문이라    밤마다 기도하며 써 보았지만    고매해야 할 내 시들은 언제나 날림 조립식인 걸    알라딘을 사야지!    그의 자판을 요술 램프처럼 살살 만져 주면    나만의 유능한 종이 나타나    내 명령어들을 충실히 실행할 것이다    넘치는 하드 용량,    풍만한 그의 언어는    이 미궁에서 나의 탈출을 도우리라    사실 이 느림보 286AT에도 요정이 있다    언젠가 치약으로 열심히 PC 본체를 닦다가    난 보고 말았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하품을 켜며 기어 나오는    발이 안 보일 만큼 작은 바퀴벌레 새끼를,    나를 비웃으며 다시 제 집인 양 기어 들어가는    그 자식을 향해 재빨리 플로피 디스크를    몇 번이나 쑤셔 넣었다 뺐다 하며    압살을 노렸지만 디스크만 에러났던 기억.    가끔 모니터 속의 내 글 위로    그 바퀴들이 지나가지는 않을까,    그는 너무 두렵다    내가 잠든 사이 테트리스를 즐기고    어쩌면 이전에 헥사를 지우고,    가끔씩 바이러스를 먹이는 것도    그 요괴임에 난 짙은 혐의를 두었다    베네치아 워드게임에서    '바퀴벌레'란 단어가 내려와 나를 덮칠 때,    난 확신하였다    나의 체제는 이미 위협받고 있었다    놈은 밤마다 용량 작은 하드를 기웃거리며    내 글을 비웃을 거 아닌가?    무슨 시가 이래, 하면서도    내가 방심한 사이 내 연애시를 도용해    행여 또래 암컷들을 사귀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나의 신성한 작업실에서……    온갖 상스런 상상들이 아!    또 잡종의 새끼를 쳐서 손잡고 다니겠지    아, 나의 약한 정신은 이미 도굴되었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김창진, [알라딘을 사야 한다] 전문    컴퓨터는 우리의 친구이자 원수이고 상관이자 부하입니다. 컴퓨터를 소재로 한 이 시를 유심히 읽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술 램프를 문지르면 '유능한 종'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천일야화} 속 유명한 이야기의 그 유능한 종이 알라딘이죠. 이 시에서는 삼성전자에서 만든 신형 컴퓨터의 제품명이 알라딘이므로 알라딘은 중의법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형과 구형의 차이가 아닙니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하품을 켜며 기어 나오는/발이 안 보일 만큼 작은 바퀴벌레 새끼들"에 대한 이해가 이 시를 이해하는 요체가 됩니다. 요정·바퀴벌레·요괴는 같은 존재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놈들은 시인이 잠든 사이 테트리스를 즐기고, 가끔씩 바이러스를 먹이고, 내 연애시를 도용해 암컷들을 사귀고, 나의 약한 정신을 도굴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서의 바퀴벌레는 인간에게 해악을 준다고 알려져 있는 발 빠른 곤충인 그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 들어 있는 정보를 파괴하고, 제 마음대로 침입해 남의 정보를 빼 가는 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존재입니다. "또 잡종의 새끼를 쳐서 손잡고 다니겠지"라는 구절로 보아 그들은 증식까지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 연후에 시인의 약한 정신은 이미 도굴되었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힘주어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타인을 향해서는 경고를 주고, 스스로는 각성하자고 다짐해본 것입니다.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등장해 암약하는 해커와 바이러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저는 이 시를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 시는 문명비판시이며 일종의 현실풍자시입니다.    9. 시는 독자 감동을 지향한다    근년에 들어 저는 광고 문구 속에 '고객 감동'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보고 들었습니다. 광고인들도 이제는 광고주가 만든 제품에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어 있으니 쓰던 것을 버리고 우리 제품으로 바꿔 쓰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지요. 향상된 기능으로 당신들을 감동시킬 만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시가 지향하는 최고의 미덕이야말로 감동이 아니겠습니까. 격렬한 감동이든 잔잔한 감동이든 시를 읽으며 느낀 감동은 우리의 뇌리를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아버지 따라가 묵정밭을 맨 적 있습니다. 쇠비름풀 여뀌 바랭이서껀 이런 저런 잡초들 수없이 뽑아 던졌습니다. 검붉은 맨살의 흙이 드러나면서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나는 것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일평생 마침내 논 서른 마지기 이루고,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 그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어 버리고 빈 들 노을 아래 서 있던……    아버지, 일흔 중반 넘어서면서 망령드셨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사 관심거리가 하나 둘 줄어들더니, 마을이나 집안 대소사는 물론 식솔들의 잦은 불상사에 대해서도 영 남의 일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의 자식들, 심지어는 늘 곁에서 수발 드는 어머니 보고도 당신 누구요, 우리 집사람 못 봤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아버지,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 그 논에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섰습니다.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렸습니다. 품안의 새끼들을 어르고 입안의 혀 같은 당신의 아내와 자주 두런거렸습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어느 날 아버지,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까지도 뽑아 던졌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문인수, [풀뽑기] 전문    아버지를 따라가 묵정밭을 맸던 어린 날의 추억에서부터 시는 전개됩니다. 쇠비름풀·여뀌·바랭이 같은 잡초들을 수없이 뽑아 던져야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태어나는데, 아버지는 평생을 바쳐 논 서른 마지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이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고 기진맥진한 아버지는 노을녘에 서서 빈 들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슬픈 초상은 빈 들, 즉 당신의 피땀으로 일구었건만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가 된 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삶의 비애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아버지는 일흔도 중반이 넘어 노인성 치매를 앓는 환자가 되셨는데, 증세가 나날이 심해져 자기 아내도 못 알아볼 지경에 이릅니다. 망령은 들었어도 아버지는 소몰이며 땅을 일구는 일에 인이 박인 농투성이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논도 없는데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서고,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리는 망령을 보입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그간 가족의 녹아 내린 애간장이 어떤 색깔을 띠고 있는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윤회를 믿는 불가에서는 전생의 원수들이 모여 가족을 이룬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가 나를 아들로 보아주지 않는 슬픔, 죽음을 목전에 두고 헛소리를 하는 아버지를 마냥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슬픔이 목젖을 차고 오릅니다. 이 슬픔은 은유나 상징 같은 시적 기교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문인수는 그저 뭉툭한 필묵으로(평이한 필체로) 아버지의 초상화를 스케치하고 있을 뿐입니다. 잡초를 수없이 뽑아 던졌던 아버지는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을 끝내는 뽑아서 땅에 던집니다.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눈물을 감추고 있어 오히려 눈물겨운 마지막 연입니다. 한평생 풀 뽑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마지막으로 땅에서 뽑아 반듯하게 관에 드러누움으로써 생애가 완성되었습니다. 뽑혀진 풀이 흙의 일부가 되듯이 인간의 육신도 흙의 일부가 됩니다. 문인수는 아버지의 초상을 이 시에 그려놓은 것일 테지만, 저는 땅을 파며 한 생을 살다 땅으로 들어가 마감하는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의 모습을 [풀 뽑기]라는 한 편의 시를 통해서 봅니다. 아버지의 풀 뽑기도 개간을 위한 창조 행위였고, 아들의 [풀 뽑기]도 '시'를 이룬 창조 행위였으니 그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시인은 이 시에서 눈물을 애써 감추고 있지만, 뭇 독자의 심금은 그것 때문에 울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장미를 미의 하나로 취급해온 것일 테지요.    영화며 컴퓨터 게임 등 재미있는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아진 오늘날 시의 기능, 시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기상천외한 실험과 발명 및 파괴로 과학적 언어로밖에 대화할 줄 모르는 우리의 인식지평을 넓혀주는 것이 첫째 역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대끼느라 무뎌진 우리의 가슴에 서정의 물살을 와 닿게 해 잠시나마 감동하게 하는 것, 그 기능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서정의 물살이 워낙 약해 비록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더라도, 이 세상에는 감동하거나 감격할 일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감동적인 시는 이렇듯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슬픔의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0. 시는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거짓말이다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의 제목은 '정동진역'입니다. 가운뎃부분에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보이는 시입니다.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김영남, [정동진역] 전문    김영남은 등단작의 제목을 그대로 첫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그 첫 시집의 해설을 제가 썼기에 이 시의 생산 과정을 본인한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래시계'이던가요, 텔레비전 드라마의 촬영 장소가 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정동진역은, 1996년까지만 해도 해돋이 관광 명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 경치가 제법 괜찮다는 것 정도가 몇몇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지요. 어느 신문기자가 누군가로부터 정동진역 풍광이 좋다는 말을 듣고 직접 갔다와서는 '알려지지 않은 곳, 그러나 가볼 만한 곳'이라며 그곳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김영남은 그 기사를 읽고 일필휘지하여 이 시를 썼습니다. 물론 가본 적이 없었지요. 신문기사 한 쪼가리도 유심히 읽는 관찰력이 그에게 시인이란 타이틀을 붙여주었습니다. {죄와 벌} {테스} {여자의 일생} 등 세계명작 가운데 짧은 신문기사를 읽고, 그것을 갖고 쓴 것이 아주 많습니다. 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관찰하고 기록하기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든 영화든 관찰의 안테나를 세우고 유심히 보면 거기서 시의 제재가 나옵니다. 친구의 이야기든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든 유심히 들으면 거기서 시의 제재가 나옵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생명체가 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시는 열려 있는 총체입니다. 시는 그 어떤 인접예술과도 교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되 시적 진실을 표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정동진역에 전혀 가본 적이 없으면서 이런 시를 썼다고 하여 우리는 시인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는 저는 시가 시인 자신의 체험의 산물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신문기사를 읽은 간접체험에다가 상상력을 보태어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혹은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안 보고도 본 척, 안 겪고도 겪은 척, 모르고도 아는 척하는 사람이 또한 시인입니다. 시인은 신문기사를 보고도, 책을 읽고도, 영화를 보고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을 직접 체험한 양 둘러칠 수 있는 능력이 시인됨의 기본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시인의 자격으로 왔으니까 마지막으로 제 시를 한 편 낭송해 드릴까 합니다.    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버린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졸시,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전문    솔직히 말씀드려 이 시는 완벽한 거짓말입니다. 제 아버님은 이날 이때껏 입원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허리가 많이 안 좋으십니다만 올해도 고향에서 밭농사를 짓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은 많은 독자가 대부분 실제상황인 줄 알고 제게 물어왔습니다. 부친을 간병하느라 고생이 많았겠다는 위로의 말을 들을 때마다 곤혹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는 재미교포 2세인 루이스 최가 쓴 {생명일기}(김유진 옮김, 김영사 간행)라는 간병기를 보고 제 체험인 양 가져와서 쓴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성기 운운하는 대목은 그 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식물인간의 상태가 된 어른을 간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실히 기록되어 있는 그 책을 보고 만약 제 아버지가 저런 상태가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상상해보면서 한 편의 시를 썼던 것입니다. 이 시가 시적 진실을 추구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책을 통한 간접체험을 직접체험으로 슬쩍 바꿈으로써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한 인간의 체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간접체험과 상상력은 그 한계를 무한정 확장해 줍니다.    자, 그럼 이것으로써 제 강연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얘기를 경청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열 가지 방법론에 입각하여 전개한 제 얘기가 여러분의 시작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좋은 작품 쓰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14    현대시 흐름과 대표시 감상 댓글:  조회:4971  추천:0  2015-02-14
    한국 현대시의 흐름과 대표시 감상  ------[중국시의 서정과 풍류]                                           오태석  1.  1부스페셜 방영분중에서,  (입궐녀)"시를 지을줄 아시는 분이 그리움이 무엇인지도 모르십니까? 그리움이 지나치면 병이되시옵니다."  2.  13세 소녀가 세자에게 보낸 이규보(李奎報)의 시    山 僧 貪 月 色,  幷 汲 一 甁 中.   산 승 탐 월 색 병 급 일 병 중  到 寺 方 應 覺,  甁 傾 月 亦 空.   도 사 방 응 각 병 경 월 역 공  < 우물 속의 달을 노래함 >  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어  병 속에 물과 함께 달을 길었네  절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으리  병 기울이니 달도 비게 됨을!  (이 시는 불교의 진리인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달을 통해 묘사해 내고 있다. 스님이 우물에 물을 길러 갔다가 우물 속에 비친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 병 속에 함께 길었다. 그러나 절에 도착하여 병의 물을 기울이자 달도 함께 없어졌다. 손에 넣은 듯하면 빠져 달아나는 인간 탐욕의 무모함을 깨닫는 순간이다.)  3.  Eres Tu / Mocedades    Como una promesa, eres tu', eres tu'.Como una man~ana de verano.Como una sonrisa, eres tu', eres tu'. Asi', asi', eres tu'.당신은 나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어느 여름날 아침처럼당신은 나에게 미소를 주는 사람바로 그런 그런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Toda mi esperanza, eres tu', eres tu'.Como lluvia fresca en mis manoscomo fuerte brisa, eres tu', eres tu'.Asi', asi', eres tu'.당신은 나의 모든 희망내 두손에 고인 신선한 빗물 같은 사람당신은 강한 미풍과도 같은 사람.그것이, 그런 것이 바로 당신이랍니다Eres tu' como el agua de mi fuente (algo asi' eres tu')Eres tu' el fuego de mi hogarEres tu' como el fuego de mi hoguera Eres tu' el trigo de mi pan.Como mi poema, eres tu', eres tu'.Como una guitarra en la noche,todo mi horizonte eres tu', eres tu'.Asi', asi', eres tu'.당신은 내 마음의 샘에서 솟아나는샘물과도 같은 사람바로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당신은 내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당신은 내 빵에 쓰인 밀가루와 같은 사람Eres tu' como el agua de mi fuente (algo asi' eres tu')Eres tu' el fuego de mi hogarEres tu' como el fuego de mi hogueraEres tu' el trigo de mi pan.Eres tu'...당신은 한 편의 시와 같은 사람밤하늘에 들리는 기타소리와 같은 사람당신은 내 맘의 지평선과 같은 사람그것이, 그런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당신은...   영원히 사랑한다던 그 맹세잠깨어 보니 사라졌네지난밤 나를 부르던 그대 목소리아 모두 꿈이었나봐그대가 멀리 떠나버린 후이마음 슬픔에 젖었네언제나 다시 만날수 있을까바람아 너는 알겠지  바람아 이 마음을 전해다오불어나 내 님이 계시는 곳까지바람아 이 마음을 전해다오바람아 불어라그대를 잊지 못하는 이 마음 전해다오불어라 바람아 불어라 오내 님이 계시는 곳까지  이밤도 홀로 창가에 기대어밤하늘 별들 바라보네기약도 없는 그림을 기다리며이 밤을 지새우네  바람아 이 마음을 전해다오불어라 내 님이 계시는 곳까지바람아 이 마음을 전해다오바람아 불어라그대를 잊지 못하는 이 마음 전해다오불어라 바람아 불어라 오내 님이 계시는 곳까지        우리나라에 Eres Tu를 '그대 곳까지'로 1978년 처음 소개한 그룹 쌍투스가 28년 뒤,  2006년에 다시 모여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 한용운: “너의 가려는 길은 너의 님이 오려는 길이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1926)  →님과의 ‘분리→통합’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으로 오셔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사람이 가는 길은 사라짐을 향한 길이고 절대궁극의 길은 새로운 나타남의 길이다. 가는 길은 현재 시제의 길이며, 오는 길은 미래 시제의 길이다. 그러므로 너의 길은 있는 길이며, 님의 길은 있어야 할, 그러나 아직은 부재의 길이다. 존재의 있음은 있어야 함에 겹쳐질 때 비로소 그 허구의 결핍을 당위에 의해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다.  시는 있음에서 나오지만 있음 자체는 아니며 그것을 상처와 결핍의 구조로써 드러낸다. 즉 있음의 질서를 벗어나 그것을 해체하고, 다른 형태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 시는 현재적 결핍과 지양하고 → 미래적 모색과 당위의 새로운 세계를 향한 비상이다.  ※율격: 3,4 음보의 한국시의 전통 율격.  청산리/ 碧溪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一到/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오니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여간들 어떠리 (黃眞伊)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네  나를 버리고 가시는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네   산에는 꽃피네 꽃이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피네...(김소월 )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조지훈  1. 詩란 무엇인가?  ⑴ 散文: Lt. 프로수스(앞으로 나아간다) →Prose 전진  韻文: Lt. 베르수스(되돌아온다) →verse 반복  * 六朝: “有韻之曰文, 無韻之曰筆.”  ⑵시의 특성:  함축: 曖昧성(Ambiguity) 模糊성(vagueness), 多義성 / 정감성,  격률: 韻律, 반복, pose, 청각미  시란 情感어린 상상력을 시어의 음률적 운용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시는 일상 언어에 비해 電壓과 긴장감이 높다. 문학 언어의 특성을 극단으로 밀고나간다. 응축, 함축적이다. 시가 소설 희곡과 다른 것은 그 음악성이다. 자/구/행의 리듬, 반복과 변이, 운과 율, 한국어는 낱말의 첫글자를 세게 발음한다. 이러한 운율적 제약으로 정형시인은 산문가에 비해 75%만 말하고 있다.  워즈워드: 시란 강력한 감정의 자연스런 분출이다.  서정시(lyric)와 서사시(epic)  ⑶비유  *언어의 본질 파악→후기구조주의자는 언어의 수사성에 주목→ 譬喩: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지닌다. (《시론》최승호등, 황금알, 2008)  (직유: 직접적 비유 ex)수정 같은 눈)  ①은유(Metaphor): 등가적 유사성에 기초, 유사성과 차이성의 문제에서 발원. ex)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내 마음은 나그네요...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오, 그대 저 문을 닫어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귀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金東鳴)  →관점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말하는 방법.  http://www.youtube.com/watch?v=WXcCJcirjq0  ②환유: 연속하는 시공간적 인접성에 기초, 한 사물을 그 ‘속성’과 밀접하게 관련있는 대상과 비교함. 부분과 전체의 관계. →환원. ex)칼과 황금: 무력과 재력, 원숭이→사과→바나나→기차→비행기→백두산.  [예시] 김수영의   은유는 ‘類推’의 계열체의 축을 따라 ‘類似性’을 바탕으로 ‘轉移transfer’된다.(치환은유와 병치은유)  환유는 이와 달리 통합체의 축을 따라 형성되며, 인접성의 원리에 따른다.  * 장관이 옷을 벗었다 → 은유인가, 환유인가? 총체적으로는 은유이면서 옷은 관직의 환유일 것.  장관이 목이 잘렸다, 임꺽정은 호랑이였다.  ③제유: ‘부분’으로써 한 사물의 전체를 지칭. 환유와 제유는 구별이 쉽지 않다. (환유: 대→소 / 제유:소→대)의 설이 있는가 하면, 환유는 실체관계의 轉移(transfer)로, 제유는 범주관계의 전이로 보기도 한다.  →재현 ex)역사의 첫페이지에 먹칠을 하다: p137 이성선 나뭇잎→우주 어깨→몸  ④逆說(paradox): 표현상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것 같으나, 내면적으로 어떤 진실과 타당성을 드러내는 방법. 그리스어 paradoxa는 저너머 초월이란 para와 의견이란 doxa의 결합어. p191  아이러니 아이러니(irony): 표면의 의미와 상반된 속뜻을 드러내는 표현 방식이나 서술. 《시론》p177, 181  는 표면과 이면의 대조를 통해 비판의 의미를 지니지만, 역설은 비판의 뜻을 갖지는 않는다. C. 브룩스는 시가 역설의 언어라고 함. 과학자의 언어는 역설의 흔적이 제거된 언어를 요구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진리는 분명히 역설을 통해서만 접근된다.  →변증법적  ⑤패러디(parody): 의식적인 모방의 한 형식으로서, 과거의 특정 작품의 각색을 현재적 문맥에 삽입시키는 문학적 전략이다. 여기에는 메타언어적 상호텍스트성이 존재한다.  모순은 두개의 말이 서로 안맞는다는 뜻. (저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역설은 한 문장에 모순인 점이 들어감.('소리없는 아우성', '당신은 떠났지만 나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찬란한 슬픔의 봄..) 일견 모순되고 말이 안되는 듯하나, 진실이 들어있음.  [web 작품보기]  ❶김소월 (1925) 향토적인 소재를 제재로 수용하면서 민중적 정감과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와 민요적 율조로서 표출했다. 이시는 3음보를 주조로 한 한국적 율조를 잘 구현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눈물 흘리오리다.  떠나는 님에 대한 원망과 집념의 이중변주[irony]의 恨을 민속적 율조로 노래.  ‘고이’는 원망속에 전전긍긍하는, 아쉬움과 미련의 이중심태의 발현.  ⁋ 가정법으로 시작되는 ‘진달래꽃’은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오히려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이다. 임에 대한 크고 깊은 사랑, 내밀한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결한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승리.  ❷이상 (실험시) 제2,1편  http://blog.naver.com/arcadium?Redirect=Log&logNo=80124538859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13도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그중의 1인..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중의 2인..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d해라도 좋소.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 아니하여도좋소.  현대 도시인의 삶에서 오는 불안 심리를 말하였다. 서로 단절된 그래서 서로 모르는 그들은 서로 무섭운 대상이자, 무서워하는 주체이다. 여기서 수는 숫자화한 현대 물질문명을 상징.  ❸ 이장희(李章熙)1900-1929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❹-1 서정주(1915-2000) 1938, 젊은 시절의 열정을 묶어 《화사집》출간. 《소설문학 》(1982.01)술회: “나는 약 반세기의 내 과거의 시인 생활에서 겨우 7, 8권의 시집을 가졌을 뿐이지만, 내가 새로 내는 시집마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의 새 경지에의 시도를 늘 가지고 새 매력을 추가하려 애써 오게 한 내 정신의 뿌리에는 이 전통의 교사(敎唆)의 힘이 '햄릿'에게의 부왕의 혼의 교사(敎唆)처럼 끈질기게 항상 계속되어 있는 때문이었습니다. 시인이 시인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모국어를 통한 시적 언어 매력체를 어떻게 잘 구성해 내느냐는 데 달렸지만, 여기에서도 언어 전통은 또 어린애 입에 젖줄처럼 또 늘 이어서 작용하는 것이었다고 나는 회고합니다. 특히 내 시들에서 많이 보여 온 ―말한 것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암시하는 언외(言外)의 함축력, 그것에 더 많이 의존해 온 짐 같은 것도 말하자면 역시 우리 국어를 비롯한 중국어 등의 동양어들의 전통적 장점을 따른 겁니다. 서양의 현대시들은 늘 더 많이 노출에만 힘써왔지만, 이게 질리는 때가 오면 우리 동양의 우아한 암시적 표현 쪽에 기울어져 올 날이 기필코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지요. 시의 언어 발견자로서의 자기라는 것은 그 모국어를 자료로 스스로 자기 옷을 지어 입는 재단사와 같을 따름인 것이니까요.”  사향(麝香)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꽃대님 같다. /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ㅅ 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 석유 먹은 듯 .....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 스며라 !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 스며라 ! 배암 /  화사[꽃뱀]은 화자의 뱀에 대한 분열된 이중적 지향을 보여준다. 하나는 생명 본원인 리비도에 대한 억압과 止揚을, 다른 하나는 그 원천적 리비도로서의 에로티시즘이다. 프로이드는 성격의 구조를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나누었다. 이때 원초아는 인간의 본능에 해당하는 것으로 자아와 초자아의 에너지 근원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리비도는 '성욕구'로서 대상과 상황에 따라서 억눌리게 되며, 공격욕구와 함께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앞에서 말한것처럼 본능적인 에너지인 원초아가 이성과 도덕에 해당하는 자아와 초자아의 에너지원이 됩니다. 다만 사람들마다 그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양이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①원초아 ―무의식의 본능, ②자아 ―원초아를 통제하기 위한 것, ③초자아 ―외부의 사회적 규범을 통해 통제하는 것, ④리비도 ―성적 욕구.  입술에 스며드는 뱀은 남녀의 성적 결합을, 뱀은 남근을, 고흔 입설은 여근을 상징한다. 詩중의 뱀, 여자, 사향박하, 방초, 입술, 피, 고양이 등은 탐미적[퇴폐적] 상징주의 시인인 성적 본능을 드러내는 보들레르의 리비도적 이미지들과 합치된다. 뱀→[사향, 방초]; 여성→[입술, 피, 고양이]의 관능성으로 나타남.(보들레르 시와 동일)  ❹-2 서정주 p345. 시공간의 지평 확장 '초록 재와 다홍재'는 신부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적 존재로 아름답게 미화하여 표상하고 있다. 한편 '내려앉아 버렸습니다'의 반복을 통해서 운율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와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 우로보로스[Ouroboros]: (오)우로보로스[Ouroboros]: 뱀으로서, 문장(紋章)에 새겨진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의 뱀. 꼬리를 계속 먹어들어가다가 결국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영지주의와 연금술의 상징으로서, 멸망과 재창조를 영원히 순환하면서 사라지는 법이 없이 끊임없이 그 형태를 바꾸는, 물질과 영혼을 포함한 만물의 통일성을 나타낸다. 이 뱀은 끝도 시작도 없다.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내고, 자신과 결혼하고, 혼자 임신하고, 스스로를 죽인다, 따라서 원초적 통일, 자기 충족, 재통합의 순환 또는 남녀추니를 나타낸다 또한 우로보로스는 불사, 영원, 지혜를 상징한다. 지혜의 자기 순환적 완결을 상징하므로 신성에 대하여 '절대악'을 상징하기도 한다. 자기 꼬리를 입에 문 뱀은 불교에서는 윤회의 바퀴이며, 이집트에서는 우주의 원이자 태양신이 통과하는 길이며, 힌두교에서는 윤회의 바퀴이자 잠재 에너지라는 의미로서 '쿤달리니'(척추 밑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생명의 힘)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뱀의 허물벗기는 생의 재생 영원성, 즉 강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❹-3 서정주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❺ 김춘수 (1953)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장정일 :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라디오가 되고 싶다.  모더니즘계열의 시로서, 여기서 꽃은 존재의 참다운 본질, 또는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로부터 상호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이루어진 '존재의 본질과의 만남'의 순간을 상징하고 있다. 나무가 '나무'라는 언어에 의해 비로서 나무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춘수의 역시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 곧 언어에 의해 비로소'하나의 몸짓'이 아닌 '꽃'이라는 분명한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사물이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존재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집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모든 사물도 언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김춘수의 「꽃」은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인식의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철학적 성찰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전집에서는 ‘의미→눈짓’으로 바꾸었음. 세계는 언어화[이성화]함으로써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창조된다.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분절, 하늘과 땅의 분절로 천지 창조가 이루어져감.  ❻ 김수영 (1968)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❼ 박재삼(1933-1997)  (1959)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빛으로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봐 저것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감나무쯤 되라,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  이것이 제대로 뻗을 때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뒤로 뻗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ㅣ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설움이요 전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❽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주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❾ 정현종(1039-) 전문: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사람을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사람으로 살아보니 그랬다” 시를 모르는 사람이 써 놓은 낙서와 별다를 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왜 간단한 한줄의 산문과도 같은 이 시에 열광하는가? 이유가 있다. 섬이 주는 감동은 사람의 고독과 맞닿아 있다. 사람은 저마다가 섬이기 때문에 섬이란 말에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한꺼번에 공감의 확장을 불러온 것이다. 그외.. (정현종작):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➓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도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톡톡 튓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해탈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현재의 시간은 지 못한채로 이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너무 정신이 마비되어 있기도 한 시간이다. 그래서 도시의 삶은 날마다 게 하고 있으며, 가 도 아프다는 비명을 지르지 못할 만큼 압박의 시간이 지속되고 있는 그런 삶이다. 그런 구속적 시간 속에서 는 도시의 삶은, 그래서 을 생각할 찰나의 시간도 허락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도 지 못하게 도시의 삶은 흘러가고 있다. 1-70 연작시는 1982년부터 1995년까지 연작으로 발표. 풍장은 호남지방의 한 장례풍속.  ∙생활속의 시  *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사지 않으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  (교보문고건물 시구, 2011/3월)  * 참새 한 마리가  햇살 부스러기 콕콕 쪼아대는  하, 눈부신 날!  (우리은행본점 시구 2011년3월)  ⑪ 도종환 (1986)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을 줄 모르고/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남은 하루하루 하늘은/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뿌듯이 주고 갑시다/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출처] 《접시꽃 당신》도종환  도종환(2004)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욱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출처] 《가구》 도종환  김달진 고요한 이웃집의 하얗게 빛나는 빈 뜰 우에 작은 벚나무 그늘 아래 외론 암탉 한 마리 백화(白 )와 함께 조을고 있는 것 판자 너머로 가만히 엿보인다. 빨간 촉규화(蜀葵花) 한낮에 지친 울타리에 빨래 두세 조각 시름없이 널어두고 시름없이 서 있다가 그저 호젓이 도로 들어가는 젊은 시악시 있다. 깊은 숲 속에서 나오니 유월(六月) 햇빛이 밝다 열무우 꽃밭 한 귀에 눈부시며 섰다가 열무우 꽃과 함께 흔들리우다.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新綠)철 놀이 간다 야든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 보았다. 이 우주(宇宙)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이 피고 나비 날은다.  노장적(老莊的)인 세계관이랄까, 동양적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 또는 허정(虛靜)의 그윽함이 짙게 깔려 있다다. 「씬냉이꽃」은 이러한 무위자연의 세계인식이 우주적 관점으로 확대되어 관심을 끈다. 라는 내용은 이러한 우주적 관점의 획득이다.  *김달진: 1907년 경남창원 출생, 불교전문졸업, 1934년「시원」으로 데뷔, 승려생활후 환속, 1989년 작고.  박인환 (낭만적 모더니즘)  한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부서진다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세월은 가고 오는 것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등대에....불이 보이지 않아도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거져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목마는 하늘에  있고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김수영 고등학교교과서 수록 현대시 작품들. [국어]상,하: 김소월/진달래꽃, 정지용/유리창, 이육사/광야, 백석/여승, 박재삼/추억에서, 김남조/설일. [문학]18종 수록: 김억/봄은 간다, 주요한/불놀이, 우리 집, 한용운/님의 침묵, 나룻배와 행인, 알 수 없어요, 당신을 보았습니다, 정지용/향수, 유리창1, 장수산1, 고향, 김동환/국경의 밤, 김소월/산유화, 삼수갑산, 접동새, 가는 길, 초혼, 접동새, 진달래꽃, 먼 후일,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옷과 밥과 자유, 이상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임화/우리 오빠와 화로, 변영로/논개, 홍사용/나는 왕이로소이다, 이장희/봄은 고양이로다, 박용철/떠나가는 배,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을 아실 이, 독을 차고, 김상용/남으로 창을 내겠소, 심훈/그 날이 오면, 이상/거울, 오감도, 가정, 운동, 백석/여승,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여우난곬족, 고향, 이용악 / 낡은 집,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오랑캐꽃, 전라도 가시내, 그리움, 함형수/해바라기의 비명, 신석정/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들길에 서서, 임께서 부르시면, 김광균/추일서정, 설야, 성호부근, 외인촌, 은수저, 김기림/바다와 나비, 유치환/바위, 생명의 서, 일월, 이육사/절정, 교목, 광야, 꽃, 청포도, 윤동주/서시, 쉽게 씌여진 시, 십자가, 참회록, 별 헤는 밤, 간, 자화상, 길, 조지훈/승무, 봉황수, 고풍의상, 풀잎단장, 민들레꽃, 낙화, 다부원에서, 박목월/나그네, 청노루, 윤사월, 산도화, 하관, 이별가, 박용철/떠나가는 배, 노천명/자화상, 김동환/산 너머 남촌에는, 신석정/꽃덤불, 박두진 /해, 어서 너는 오너라, 청산도, 서정주/춘향유문, 추천사, 무등을 보며, 견우의 노래, 국화옆에서, 꽃밭의독백, 신부, 동천, 김춘수/꽃, 꽃을 위한 서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처용단장, 구상/초토의 시8, 박봉우/휴전선, 나비와 철조망, 김현승/눈물, 가을의 기도, 김수영/눈, 폭포, 풀, 푸른 하늘을,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박재삼/울음이 타는 가을 강, 추억에서, 흥부 부부상, 박인환/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목마와 숙녀, 정한모 / 가을에, 김규동/나비와 광장, 두만강, 김광섭/성북동 비둘기, 산, 저녁에, 장한모/나비의 여행, 새벽1, 박남수 / 아침 이미지1, 신동엽 / 껍데기는 가라, 금강, 산에 언덕에,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너에게, 황동규/즐거운 편지, 조그만 사랑 노래, 전봉건/피아노, 신경림/농무, 목계 장터, 가난한 사랑 노래, 강은교/우리가 물이 되어, 천상병/귀천, 정희성/저문 강에 삽을 씻고, 김지하/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이성부/벼, 김남조/설일, 겨울 바다, 정념의 기, 박용래/저녁 눈, 허영자/자수, 황지우/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너를 기다리는 동안, 고은/머슴 대길이, 성묘, 김종길 /성탄제, 김영태 / 멀리 있는 무덤, 송수권/산문에 기대어, 김광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상행, 이해인/살아있는 날은, 긴 두레박을 하늘에 대며, 곽재구/사평역에서, 정호승/또 기다리는 편지, 김용택/섬진강1, 오세영/겨울 노래, 그릇, 도종환/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신동집/오렌지, 기형도/식목제, 엄마 걱정, 최두석/성에꽃, 송찬호/구두, 장정일/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하숙, 오규원/프란츠 카프카, 김종삼/어부, 김기택/바퀴벌레는 진화중, 안도현/우리가 눈발이라면, 천양희/한계, 길상호/그 노인이 지은 집, 유하/생.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팔이오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천팔백구십삼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기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 뿐이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곳에서도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換)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로부터는 썩아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현대시 작품.  [국어]상,하: 김소월/진달래꽃, 정지용/유리창, 이육사/광야, 백석/여승, 박재삼/추억에서, 김남조/설일. [문학]18종 수록: 김억/봄은 간다, 주요한/불놀이, 우리 집, 한용운/님의 침묵, 나룻배와 행인, 알 수 없어요, 당신을 보았습니다, 정지용/향수, 유리창1, 장수산1, 고향, 김동환/국경의 밤, 김소월/산유화, 삼수갑산, 접동새, 가는 길, 초혼, 접동새, 진달래꽃, 먼 후일,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옷과 밥과 자유, 이상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임화/우리 오빠와 화로, 변영로/논개, 홍사용/나는 왕이로소이다, 이장희/봄은 고양이로다, 박용철/떠나가는 배,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을 아실 이, 독을 차고, 김상용/남으로 창을 내겠소, 심훈/그 날이 오면, 이상/거울, 오감도, 가정, 운동, 백석/여승,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여우난곬족, 고향, 이용악 / 낡은 집,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오랑캐꽃, 전라도 가시내, 그리움, 함형수/해바라기의 비명, 신석정/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들길에 서서, 임께서 부르시면, 김광균/추일서정, 설야, 성호부근, 외인촌, 은수저, 김기림/바다와 나비, 유치환/바위, 생명의 서, 일월, 이육사/절정, 교목, 광야, 꽃, 청포도, 윤동주/서시, 쉽게 씌여진 시, 십자가, 참회록, 별 헤는 밤, 간, 자화상, 길, 조지훈/승무, 봉황수, 고풍의상, 풀잎단장, 민들레꽃, 낙화, 다부원에서, 박목월/나그네, 청노루, 윤사월, 산도화, 하관, 이별가, 박용철/떠나가는 배, 노천명/자화상, 김동환/산 너머 남촌에는, 신석정/꽃덤불, 박두진 /해, 어서 너는 오너라, 청산도, 서정주/춘향유문, 추천사, 무등을 보며, 견우의 노래, 국화옆에서, 꽃밭의 독백, 신부, 동천, 김춘수/꽃, 꽃을 위한 서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처용단장, 구상/초토의 시8, 박봉우/휴전선, 나비와 철조망, 김현승/눈물, 가을의 기도, 김수영/눈, 폭포, 풀, 푸른 하늘을,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박재삼/울음이 타는 가을 강, 추억에서, 흥부 부부상, 박인환/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목마와 숙녀, 정한모/가을에, 김규동/나비와 광장, 두만강, 김광섭/성북동 비둘기, 산, 저녁에, 장한모/나비의 여행, 새벽1, 박남수/아침 이미지1, 신동엽 / 껍데기는 가라, 금강, 산에 언덕에,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너에게, 황동규/즐거운 편지, 조그만 사랑 노래, 전봉건/피아노, 신경림/농무, 목계 장터, 가난한 사랑 노래, 강은교/우리가 물이 되어, 천상병/귀천, 정희성/저문 강에 삽을 씻고, 김지하/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이성부/벼, 김남조/설일, 겨울 바다, 정념의 기, 박용래/저녁 눈, 허영자/자수, 황지우/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너를 기다리는 동안, 고은/머슴 대길이, 성묘, 김종길/성탄제, 김영태/멀리 있는 무덤, 송수권/산문에 기대어, 김광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상행, 이해인/살아있는 날은, 긴 두레박을 하늘에 대며, 곽재구/사평역에서, 정호승/또 기다리는 편지, 김용택/섬진강1, 오세영/겨울 노래, 그릇, 도종환/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신동집/오렌지, 기형도/식목제, 엄마 걱정, 최두석/성에꽃, 송찬호/구두, 장정일/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하숙, 오규원/프란츠 카프카, 김종삼/어부, 김기택/바퀴벌레는 진화중, 안도현/우리가 눈발이라면, 천양희/한계, 길상호/그 노인이 지은 집, 유하/생.
13    1960년대 녀성시 고찰 댓글:  조회:4771  추천:0  2015-02-13
/현대시론/ 한국현대여성시의 사적 고찰 - 1960년대 여성시| 평론마당     1960년대 한국현대여성시의 전개       한국 현대시사에서 60년대는 중대한 하나의 의미단락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60년대의 첫인상으로 치열했던 참여문학논쟁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4.19혁명과 5.16군사혁명으로 시작되는 60년대에 참여시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과의 관계에서 문학의 본질과 기능을 재검토해보려는 문학관의 정립이 문제가 된 게 이 논쟁의 정체였다. 이것은 물론 비평사적 문맥에서 보다 커다란 의의를 띠지만 한국 현대시를 순수. 참여시의 2분법으로 하는 경직된 사고를 낳게 했다. 둘째로, 60년대 시의 또 하나 주된 초상으로 난해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현대시의 난해성이 비로소, 그리고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이 60년대였다. 모더니즘의 시로 흔히 명명되는 600년대 일부 순수시는 현대시가 필연적이면서 본질적으로 난해시라는 명제를 뚜렷이 표방하고 나섰다. 동인들에 의해 주도된 난해성은『문학사상』지 73년 2월호의 앙케이트 특집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70년대 시가 극복해야 할 큰 과제가 되었다. 난해성이 현대시를 특정짓는 미학임에도 불구하고 60년대 난해시는 서구의 현대시를 특정짓는 미학임에도 불구하고 60년대 난해시는 서구의 현대시를 흉내낸 의 애매모호함, 또는 시인의 부정직성으로까지 매도되기도 했다. 이런 난해성과 연관되어 셋째로, 60년대 시가 갖가지 실험을 시도한 사실을 시사적 의의로 지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언어실험 또는 형식실험을 가리키지만 한 평자가 서정주의 예를 들어 이라고 적절히 지적했듯이 시의 소재가 되는 새로운 경험의 추구도 함축한다. 이 실험은 70년대에 나타난 전통 서정양식의 해체 징후만큼 두드러진 것도 급진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온건한 실험은 50년대 시와 확연히 구별짓게 하면서 70년대 시에 심화. 확대되는 씨앗이 되는 60년대 시의 변화의 몫이었다. 넷째로, 600년대는 시조문학의 전성기를 맞이한 점에서도 시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다 잘 알고 있다시피 시조는 조선조 주류적 시가장르이고 현대시는 자유시형태가 그 대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조는 신문학 초창기 최남선. 이병기. 정인보 등에 의해 부활되어 끈질긴 생명을 보이면서 60년대에는 자유시와 더불어 서정양식의 한 독립된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시조의 이런 격상은 여러 가지 형식실험에 의한 자유시의 지나친 자기 방종과 산문화경향에 대한 반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60년대 시에서 주목해야 할 유의사항은 이제 더 이상 한국 현대시사가 몇몇의 예외적인 시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지도 않고 따라서 우리가 쉽게 분류해서 자리매김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가 다양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점이다. 이것은 좌. 우 이데올로기의 격심한 대립으로 극도의 혼란을 빚었던 해방 공간과 6.25의 비극적 체험을 겪고난 뒤, 사회역사적 현실을 정신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심도 있게 극복해가는 자리에 60년대 시가 놓여 있었음을 의미한다. 60년대 시의 이런 특징들은 시사적 의의를 띠면서 동시에 극복되어야 할 과제들을 남겨놓았다. 1960년대의 여류시는 와 동인그룹을 중심으로 여류시의 질적이며 양적인 확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를 대표할 수 있는 정영자는 시어의 과감한 절제와 전통적 이미지에 집착하여 사랑의 문제를 부끄러움이라는 고통의식과 참회의식에 접맥하고 있다. 60년대의 여류시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허무감, 그리고 지향없는 그리움과 일상사에 대한 깊은 탐구의 시선을 그 공통점으로 하여 섬세한 감각과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비판의식을 앞세우고 사물을 투시하려는 지성적인 발상으로 시도되었으나 현실감의 결여와 애매성에 머물고 말았다. 이와 같은 여성시의 성장 시기에 때맞추어 허영자는 1963년『현대문학』추천으로 데뷔하였고, 30여 년 동안 전통 서정을 바탕으로 시의 운율적인 면과 언어의 간결한 압축미에 유의하면서 끈질기게 사랑을 노래한 시인으로 현대문학사에 자리잡고 있다. 오세영은 한국 시단의 경향을 리얼리즘의 시, 모더니즘의 시, 전통 서정시의 경향으로 분류하고 여류시도 이에 준한다고 평가하면서 김남조, 홍윤숙, 김후란, 김여정, 유안진, 신달자, 이향아, 문정희와 함께 허영자를 전통 서정파로 보았다. 김현자는 한국 여성시의 계보를 전통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시, 지성적 명상적 자아 탐구를 하는 시, 사물 중심의 언어 감각을 특성으로 하는 시, 일상성의 도입과 문명 비판적인 시각의 시, 현실과 사회, 역사의 수용을 중요시하는 시로 나누어 모윤숙, 김남조, 김혜숙, 추영수 등과 함께 허영자의 시를 전통적 서정파로 보았다. 대체로 한국시에서는 전통적 서정을 주조로 하는 여성성을 큰 특성으로 하여 사랑과 기다림, 한과 고독의 본질적인 인간 내면의 슬픔과 비애를 구가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허영자의 시도 이와 같은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창작 과정의 원숙한 기법과 독특한 언어 절제의 압축미를 통하여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허영자는 1963년 박목월 선생 추천으로『현대문학』을 통하여 등단하여 다섯 권의 시집과 네 권의 시선집을 내고 많은 수필집을 발간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1960년대의 대표적 여성시인이다. 시집『가슴엔 듯 눈엔 듯』(중앙문화사, 1966),『친전』(문원사,1971), (범위사,1977), (열음사,1984), (문학세계사, 1990)을 내고 시선집 (열음사,1985),(자유문학사,1989)를 내고 1972년에는 제4회 한국 시인협회상과 1986년 제20회 월탄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63년 문단 데뷔 이후 1963년 1월 그는 김선영, 김숙자, 김혜숙, 김후란, 박영숙, 추영수와 더불어 우리 나라 문학사상 처음으로 여성시인들만의 문학동인회인 청미회를 발족시켜 창립 동인으로 활약하며 한국 여성시의 발전에 기여하는 저력을 보였다. 1963년 4월, 동인지 제1집을 발간한 이후 1993년 30집까지 동인지로서는 최장수 발간을 기록하는 동안 그는 동인 활동에 적극 참가하고 있다. 최동호는 허영자를 ‘봄의 시인’이라고 지칭하였지만 전반적인 시의 흐름에서 보면 그는 분명 화사한 봄보다 가을을 더 많이 노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시집 은 연애시의 절정을 이루며 상재되었다. 그의 사랑은 독특한 그만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는 ‘부끄러움’을 동반하고 있다. 첫시집에서 네 권째 시집까지 일관되게 흐르던 에로스의 열렬한 소유론은 다섯 권째 시집 에 이르면 관조적 세계관으로 바뀌어 훨씬 더 차분하고 그리운 사랑의 말을 아끼고 있다. “이 세상 갈수록 / 목이 메어라” ( 부분)와 에서 끝끝내 풀리지 않는 난감한 의문부호로써의 남성을 노래하면서 세상과 사람에 대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의 모든 문학 정신의 근저는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갖게 되는 부끄러움이며 참회이고 구원의식이다. 때문에 속죄와 순명을 거친다. 그의 시적 전개는 관조적 정관을 주축으로 하고 있지만 강렬한 욕망을 표출하면서 열렬히 그대를 향한 소유를 주창하고 휘발유 같은 여인상을 구가하여 공격적인 사랑의 획득을 보여 준다. 시적 기교 또한 압축미와 긴장미를 이루는 격조와 간결함 속에 화사한 고독과 외로움의 정서를 형상화함으로써 따뜻한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이상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그의 사랑은 소재면에서 생명력의 절정인 꽃과 수직 상승의 나무 계열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는 뜨거운 사랑이 확산되는 육욕적인 주제를 식물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그의 시는 서정적 부끄러움의 시학이라는 특성 위에 간결한 압축미가 서정적 긴장감을 고조하여 시적 효과를 높이는 점에서, 그리고 개관적 상관물을 이용한 이미지의 추구에서 높게 평가 할 수 있겠다. 다만 이제 역사성과 현실성이 만나는 도시 서정의 새로움이 그이 정서적 변용에서 나타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투명하지만 따뜻한 정서를 거부하지 않는 가운데 허무의 시인으로 평가받아 온 강은교 시인은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70년대 동인회,1971), (민음사,1977), (창작과 비평사,1982), (문학사상사,1987), (실천문학,1982), (창작과 비평사,1992)가 있고 시선집으로는 (민음사,1974), (풀빛,1984),(문학사상사,1986) (미래사,1991)이 있다. 그의 초기 시의 세계는 삶의 허무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낯설어 보인다. 놀라운 가운데 생동하는 상상력의 율동이 그 특성이 되고 있으며, 무속적 주술성이 고요한 광기로 세련되게 절제되어 있다. 삶과 세계 속에 묻혀 있는 허무의 의미를 끊임없이 찾고 해명하는 그의 독특한 문학의 세계는 차츰 개인의 관념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작은 것에 보내는 애정과 공동체의식으로 확대되는 사회성을 가진다. 허무와 어둠, 세상보기의 객관성, 평정성, 여유 그리고 생명과 삶에 대한 인식은 진실과 공동체의식을 엮는 사회와 현실인식으로 확대된 것이다. 보잘 것 없고 부질없는 작은 생명에 보내는 뜨거운 관심과 애정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역동적인 삶과 사회에 대한 시인의 특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환상적 내용의 설정, 시어의 주술적 전개를 보여 주고 있으며 빛과 어둠의 시적 변증법으로 혹은 흐름의 상상력과 낙하의 상상력을 기초로 하는 부정적이 현실인식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평가받고 있는 그의 시는 대체로 초기 시의 평가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되어 왔다. 때문에 죽음, 허무, 소멸, 등의 내면적 관념세계가 중심을 이룬 초기시의 성과를 강은교 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 사유에서 사회로 확대된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시는 그의 세계를 더욱 확대시켰으며 시의 격을 높여 놓았다. 강은교의 초기 시의 주요한 모티브는 허무이다. 허무의식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심연을 천착해 간 그의 시는 항상 삶을 객관적으로 보는 여유와 의연함을 요구한다. 인간존재의 해명은 철학이나 문학쪽에서 끈질기게 던져 온 의문이다. 인간존재의 근원을 고통스럽게 보아 온 강은교의 해답은 허무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고통과 하무, 그리고 죽음으로 인식하 그의 부정적인 세계관의 접근은 그의 시 전반을 흐르는 분위기이다. 인간존재의 실체를 허무로 파악한 그의 세계관은 주술적. 무속적 세계의 불확실한 믿음으로 퇴행하곤 한다. 의미의 분열화 속에 고립되고 서로 소외된 현대인들에게 있어 모든 개인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 이 세계는 자기의 삶에 의미를 던지는 실존적 정황으로 관계되고 있다. 강은교 시인이 문학적 정열을 불태우던 1960년 후반은 4.19 5.16을 거치면서 산업근대화와 군사정치의 강성적인 장기집권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독재적 정치 이데올로기와 부조리한 사회현상이 팽창되면서 진정한 인간의 삶이 압박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문제되던 시기에 그의 허무주의는 현실대응의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강은교 시의 세계는 허무와 어둠을 바탕으로 하는 주술적인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의 허무는 바른 세상살기의 한 장치였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세상보기의 객관성과 평정성으로 공동체 삶의 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 허무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인식하는, 살아 있는 자의 탈욕망의 가지를 늘어뜨리고 허무의 무성한 잎들을 즐거이 쳐다보는 시각 속에는 생명과 사랑에 대한, 특히 작은 것, 보잘 것 없는 것에 보내는 애정이 유별나다. 따라서 그의 허무는 생명과 사랑에 도전하는 치열한 세상 살기의 한 방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정하리만큼 획일성과 어지러울 정도의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한 시인의 특성을 고찰한다는 것은 어렵다. 특히 그 대상 시인이 다양한 관심으로 사람과 세상, 자연을 천착해 나가는 특성을 가졌다면 더욱 근접하는 시인, 전통성 고수나 현실참여적 정치성향, 시를 통한 존재탐구, 시어 구사의 탐미성, 현실고발을 통한 사회변화의 폭넓은 관심 등은 각 시인이 부분적으로 가지는 개성이다. 문정희는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개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당야한 관심사의 확대를 통한 부드럽고 섬세한 감수성과 저돌적이고 단호한 의지를 보이고 있은 시인이다. 그는 1969년 동국대 국문과 4학년 재학중에 신인상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한국공판사,1965), (월가문학사,1973), (문학예술사,1984), (일월서각,1986), (예전사, 1987), (전예원, 1987), (나남,1988), (들꽃세상,1990), (미학사,1993)의 시집고 시극집 (민학사,1975)를 통하여 시문학의 장르적 확대를 꾀하여 온 시인이다. 또한 인기 여성시인들이 즐겨 발표해 온 수필집을 그도 많이 발표하였다. (관동출판사,1974), (관동출판사,1976), (학원사,1978), (신여원,1980), (문학사상, 1987), (현대문학,1990), (둥지,1992)에서는 삶과 사랑, 현실을 비판해 나간 그의 폭넓은 관심사가 묘사되어 있다. 김현자는 사랑. 그리움. 가난 등 다양한 주제를 보이고 있다고 문정희를 평가하였으며 오세영은 전통적 서정시 계열로 이희중은 사랑의 시인으로 김선학은 감각적 언어 구사로, 정규웅은 여성다운 섬세함과 남성적인 강한 힘으로 평가하였다. 이상호는 를 본격적 서사시로서의 가능성으로 보아 산문적 성향을 진단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진단이나 평가로 볼 때 그의 다양한 특성은 사랑 내지 여성성의 성향에 머물고 있으며, 전통서정시인으로서 여류 일반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대한 저돌성, 여성해방, 존재탐구와 현실인식, 관능적 기법고 설화적 전개, 직설적인 단호함 등으로 뚜렷한 개성을 보이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아홉 권의 시집을 고찰해 보면 내용상의 특성으로는 (1) 사랑. 고독의 정한, (2) 관조적인 인생의 성찰, (3) 현실인식과 인간성 회복,(4) 여성해방, (5) 향토성과 설화, (6) 이별. 죽음의 무상함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며 표현상의 특성으로는 (1) 단호함의 기법, (2) 관능적 기법, (3) 서사시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다. 여성시의 사랑. 고독은 모든 시인이 가지는 인간적인 본질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문정희의 시세계가 고독과 사랑을 구가하는 가장 인간적인 속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사랑은 낭만적인 사랑, 지고지순의 사랑과 함께 혈연적인 사랑, 거기에서 모성회귀를 통한 원형회복의 강렬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 대개의 사랑이 정한의 애달픔을 수반하는 사랑이지만 그의 사랑은 적극적이고 때로는 도전적인 사랑을 노래한다. 문정희는 전통서정성를 가졌으되 넓고 폭 깊은 사회적. 역사적 관심과 함께, 당당학도 꾸밈없는 직설적인 수사법으로,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 보내는 애정과 사라지고 썩어지는 것에 대한 찬사와 긍정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시인이다. 죽음과 이별을 노래하고 있으나 삶의 깊이에서 회생화는 삶에 대한 건강함이 넘치고 박진감있는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서두에는 당호한 의지를 보여 두괄식의 구성을 보이고 시의 결행에서는 언제나 미진한 여운을 가질 수 있게 풀어 놓고 있는 것이 특성이었다. 지향 없는 불안과 고독, 끝없는 사랑의 구가, 기도에서 기도로 끝나는 등의 상투적인 여성시가 아닌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의 철학이 시문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12    마광수 시평 댓글:  조회:4214  추천:0  2015-02-12
 <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 / 마광수(馬光洙)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자처럼 적(敵)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 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 안고 싶다 현실적으로 진짜 현실적  -- 시집 『광마집』(심상사, 1980) 중에서 마광수(馬光洙) 시인 1951년 경기도의 수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1983년 로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음. 1977년 《현대문학》에 ,,,,,등 여섯 편의 시가 박두진 시인에 의해 추천되어 시문단에 데뷔. 문학이론서와 평론집을 출간해오던 그는 1989년 에세이집 와 시집 를 출간함으로써 세간에 화제를 모음. 《문학사상》에 장편 를 연재하면서 소설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92년 장편소설 로 인해 구속되고, 교수이던 연세대학교에서도 해직당하지만 복직됨.  작품 해설  마광수(馬光洙) .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10일, 가족들이 1.4 후퇴로 피난가서 잠시 머물렀던 경기도의 발안에서 태어났다. 그후, 종군사진작가였던 아버지가 전사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그는 서울 청계초등학교, 대광중학교, 대광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통해 1983년 로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최초 1977년 《현대문학》에 , , , , , 등 여섯 편의 시가 박두진 시인에 의해 추천되어 시문단에 데뷔했다. 그리고 1980년 처녀시집인 『광마집』을 심상사에서 출간했다.  그는 홍익대학교 국어교육과 전임강사 시절도 있었지만 1982년 조교수로 승진한다. 1984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조교수로 취임하고, 1988년 부교수로 승진했다. 문학이론서와 평론집을 출간해오던 그는 1989년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출간함으로써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문학사상》에 장편 를 연재하면서 소설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92년 장편소설 로 인해 구속되고, 연세대학교에서도 해직당하지만 1998년 3월31일에 사면·복권되고 연세대학교 교수로 다시 복직했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교수와 작가로서의 마광수의 언행은 늘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구속\', \'수감\', 항소심\' 등이 말이 등장하는 마광수의 이력은, 그동안 그의 글들이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모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치 무슨 민주화 운동가의 이력을 보는 듯할 만큼 극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광수가 정작 자신은 자신을 \'무슨 운동가\'로 규정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물론 마광수가 자신을 규정하는 사회적 주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광수의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자신은 자신의 하고싶은 말, 옳다고 생각한 말을 했을 뿐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은 처벌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광수는 무슨무슨 운동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광수의 글과 생각은 그것이 발표될 때마다 일종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어쨌든 그처럼 발표하는 작품마다 사회적 issue가 되었던 작가는 그리 흔치 않다. 그 때문에 그를 가리켜서 이른바 \'이 시대의 광인(狂人)\'이라 論하고 있음에도 이젠 그런 애칭이 오히려 더욱 잘 어울리는 작가인지 모른다.  오늘 소개하는 는 1979년도에 발표된 시로 그의 첫 시집 『광마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우리의 근엄한 엄숙주의 밑의 속물근성을 드러내고 폭로해주는 시이다. 1980년대 후반 또 하나의 엄숙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에 시인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수필집을 내면서 법정시비에 휘말리고 대학에서 쫓겨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정작 이 시가 씌어진 것은 1970년대 후반 시인이 대학원 다니던 시절이었다. 수필집과 더불어 즐거운 사라 등 소설에 손을 대면서 한 쪽 방향으로 멀리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이 시는 나름대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화장한 여자에 대한 긍정과 화장기 없는 여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리 문화 저변에 팽배해 있는 엄숙주의적인 태도의 허위성을 비판하고 폭로해주는 시이다. 연 구분 없이 전체 23행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의미상으로 화장한 여자에 대한 예찬, 화장기 없는 여인에 대한 비판, 그리고 나도 화장하고 싶다는 내용의 세 단락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첫단락에서 시인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파격적인 발언에 이어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다음 단락의 "덕지 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로 화장의 농도를 점층적으로 강화시켜 나가면서 화장한 여자가 좋다는 주장을 과장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첫 단락의 과장적인 어조는 시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부분이 지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화장에만 신경을 쓰는 여인들의 천박한 속물성을 비꼬기 위한 언어적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의 묘미는 그러한 상식적인 논리를 뒤집어엎는 마광수 특유의 어법에서 나온다. 시인은 순진한 척 하면서(실제로 순진하다) 화장한 여자가 좋다고 우겨댐으로써 실제로는 화장기 없는 메마른 여성보다 화장한 여자를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화장한 여자를 천박하게 생각하는 엄숙주의적 태도의 이중성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리숙한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진지하고 세상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그것에 부딪칠 만한 힘이 없는 시인의 자신에 대한 씁쓸한 시선이 반어적인 어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 시인은 화장한 여자와 화장기 없는 여인을 대조시켜 화장한 여자의 얼굴에서는 순수한 얼굴이 보석처럼 빛나고 화장기 없는 여인은 독재자, 속물주의적 애국자 같다는 역설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화장은 거짓이나 감춤, 속임수 등을 상징하기 때문에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는 구절은 논리적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화장이라는 것이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의 표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표면적인 논리 이면의 또 다른 진리를 드러내게 된다. 이성 중심적 사고에서 지상적 욕망이나 감정은 부정적인 것, 또는 억압의 대상으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감정과 욕망은 생명 그 자체의 자연스런 표출이며 어떤 의미에서 생명 자체와 동일시될 수도 있는 성질의 것이다. 시인이 보석에 비유한 순수한 얼굴은 바로 이성에 의해 억압되지 않은 원시적인 발랄한 욕구와 생명력을 의미한다. 화장은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원시적 생명력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양식이기 때문에 화장한 여자는 아름다운 것이다.  억압되지 않은 발랄한 생명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거기에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완벽한 조화와 통일이 있다. 현대의 이성 중심적 사회는 그러한 조화와 통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냉정한 가슴과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만이 가득할 뿐 인간의 발랄한 생명력은 가슴 속 깊이 억압되어 묻혀 있다. 이성 중심적 사회에서 그것은 마치 땅 속 깊이 묻혀 있는 보석과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화장은 묻혀 있는 보석, 즉 억압되어 있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인간적 욕망과 감정을 드러내주는 수단인 셈이다. 따라서 화장한 여자는 욕망을 억압하고 감추는 이성 중심적인 냉정한 가슴을 의미하는 화장기 없는 얼굴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시인이 화장기 없는 여인을 독재자나 속물적 애국자와 비유하여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재자나 속물적 애국자는 그들의 획일적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자유와 욕망을 억압한다. 그들에게 지상적 욕망은 부정적이고 천박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엄숙한 얼굴을 가장한다. 그들의 엄숙주의 밑에서 지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생명과 욕망은 질식당한다. 화장을 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가장 인간적인 행위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남에게 자신을 잘 보이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와 관련된다. 따라서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과 같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만은 아니다. 화장을 기피하거나 천박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성적 엄숙성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은 여인이나 화장기 없는 여인은 인간다운 욕망이 없거나 그것을 감추고 엄숙을 가장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똑같이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을 억압하는 독재자나 속물적 애국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 단락에서 시인은 자신도 현실적으로 되어 화장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되어" 라는 구절은 시인 스스로 현실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 즉 엄숙주의적 세계에서 욕망을 숨기고 그것을 가장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인을 억압하고 있는 엄숙주의적 세계는 시인으로 하여금 자연 그대로 마광수로서의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시인의 자아는 질식당할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다.  시인은 과장적인 어조로 "화장을 덕지덕지 바르고 귀걸이 목걸이, 팔찌로 주렁주렁 몸을 감싸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데 이는 이성 중심적 사회 속에서 극도로 억압된 자아의 자기실현을 위한 애절한 몸짓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성중심적 사회에서 엄숙주의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시인의 지상적 자아는 극도로 위축되고 억압될 수밖에 없다. 분열 직전의 위축된 자아는 화장한 여자들처럼 화장을 덕지덕지 바르고 귀걸이, 팔지, 반지, 목걸이로 몸을 주렁주렁 감쌈으로써 자연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살고 싶은 것이다. 욕망이란 인간이 타고난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욕망 역시 신이 만든 것이다. 모든 욕망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도와주고 싶은 것도, 부처가 되고 싶은 것도 욕망이다. 욕망의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해서 욕망을 부정할 일은 아닌 것이다. 욕망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욕망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 즉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으며 욕망이 살아 있는 사회는 자유와 생명이 살아 넘치는 사회이고 욕망이 억제된 사회는 죽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신적인 세계관과 지상적인 세계관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 시대에 신적인 질서가 지배적이면 다음 시대에는 지상적인 질서가 들고 일어나게 된다. 신적인 질서가 지배적일 때 인간의 지상적 욕망은 억압된다. 반대로 지상적 질서가 지배적일 때 무질서와 혼돈이 초래된다. 그것은 또 다른 억압을 초래한다.  인류 역사가 시대별로 지향점을 바꾸는 이유는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신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필요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인류 역사가 두 축을 중심으로 교체되기는 하지만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지상적인 질서와 욕망에 억압이 가해지지 않는 시기는 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문학들이 성적인 자유와 해방을 외쳤던 것도 이성주의적이고 신적인 세계관의 억압으로부터 지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자유를 획득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적인 자유를 외쳤던 많은 문학들은 당대에는 외설로 지탄받고 법정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뒷날 그런 문학들은 고전으로 추앙받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훗날 문학史에 지금까지 발표했던 마광수의 많은 작품들이 어떻게 평가될지 현재로선 한마디로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주목하고 늘상 우리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도 바로 이 시와 소설 \'즐거운 사라\' 등의 작품들로 인해 구설수로 끊임없이 독자들의 입과 매스콤에 오르내리면서 사회의 비판과 혹독한 곤욕을 치루었고 \'즐거운 사라\'는 외설 소설이라는 비판과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며 또한 향후에도 논란과 비판의 대상으로 여전히 주목받는 작가라는 점이다.  
11    디지털 시대와 시의 전망 댓글:  조회:4980  추천:0  2015-02-11
  디지털 시대 시의 위상과 전망 정진명(시인) 1 한 분야가 몰락을 맞이하는 것에는 내부의 모순과 외부 환경의 변화라는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다. 어떤 환경의 변화가 들이닥쳤을 때 그런 변화에 재빨리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지 못하면 몰락에 이른다. 그 유연성은 대부분 그 분야의 흐름을 좌우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을 지도층이라고 하는 것이다. 문학이라고 해서 이 법칙의 예외일 수는 없다. 언제부터인가 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일이 낯익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담론이 무르익기도 전에 시의 몰락은 코앞에 닥쳤다. 그리고 점점 더 속도를 내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변한 데는 앞서 지적한 두 가지 요인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 두 가지 여건이란 문학계 내부의 경직성과 그러한 경직성을 악재로 만든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말한다. 문학계 내부의 경직성은 문학 스스로 택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 어떤 분야의 몰락은 외부의 힘이 아무리 강고하더라도 내부의 호응이 있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부의 문제는 내부의 논의로 두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도래 문제는 다르다. 그건 엄연히 외부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눈을 잡아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 10여년 전부터 꾸준히 문학인들의 말밥에 오르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워낙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대처는 무력하기까지 하다. 진단이 아무리 정확해도 치유할 수 없는 병이 있듯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이런 문화의 변혁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등장이다. 현실의 문제를 접근하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그 문제를 패러다임의 교체로 보고 그에 걸맞은 세계관과 이론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흐름의 방향을 논하는 방법과, 현실 속의 변화를 감지하여 새로운 전망을 찾는 방법이 그것이다. 물론 거시와 미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면 그보다 더 완벽한 대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쉽사리 일어나기 어려운 것이, 디지털 시대의 도래란 문학에게는 처음 겪는 전대미문의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그로 인한 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은 학자나 교수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현실 속의 변화를 포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변화의 핵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현실 속에 숨어있는 법이다. 현실은 관념으로 대체할 수 없고, 오직 현실 속에서만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의 변화를 논하는 것은 기준도 없고 방법도 없어서 실제로 논의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맨땅에 헤딩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수수방관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문명의 변화가 우리의 현실을 얼마나 바꾸어놓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어림짐작이라도 있어야만 그 후의 변화를 뜬구름 잡기 식으로라도 헤아려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몸부림마저 없다면 몰락은 그대로 현실이 된다. 이 글에서는 뜬구름 잡기가 되더라도 내가 겪은 디지털 시대의 양상을 정리하여 새로운 담론의 한 재료로 삼고자 한다.   2 나는 현직 교사이다. 2005년 현재 충청북도의 한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 나는 197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85년에 충북대 사범대에 입학했으며, 1989년에 졸업하여 8월에 첫 발령을 받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선생님들은 시험문제를 ‘가리방’이라는 방식으로 출제했다. 가리방이란 기름이 묻지 않는 바탕 종이에 송곳처럼 날카로운 펜으로 글씨를 써서 수동식 인쇄기에 붙인 다음, 잉크를 묻힌 롤러로 밀어 눌러서 찍는 방식이다. 그런데 내가 첫 발령을 받은 1989년에는 일본식 프린터를 들여놓고 원안지를 손으로 써서 넘겨주면 그것을 자동으로 스캔하여 복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1979년과 1989년은 10년 세월이다. 이 10년 사이에 선생님들 일의 방법이 바뀌고 그 결과 업무량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래서 B4용지에 손으로 쓰건 타자로 찍건 컴퓨터로 찍건 상관없이 시험 문제를 출제해서 행정실로 넘기면 쉽게 프린트가 되어 나온다. 이때의 교무실 환경은 컴퓨터는 없고 타자기가 몇 대 있었다. 손의 힘으로만 치는 타자기가 주종이었고, 내가 발령 받은 1989년에 처음으로 전동타자기가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전동타자기로 시험을 출제했다. 대학 때 손으로 노트에 썼던 시를 타자기로 옮긴 것도 그때였다. 육필 원고를 기계로 찍어놓으니, 어쩐지 시가 더 잘 써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활자의 마술이다. 1992년이 되자 교무실에 일대 혁신이 일기 시작했다. 다른 도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충청북도 교육청에서는 교수 방법과 교육환경을 크게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청각 기기를 학교에 엄청난 양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나는 제천상고에 있었다. 제천상고는 실업계이기 때문에 컴퓨터가 다른 학교에 견주면 일찍 들어와 있었다. 정보과가 두 학급 있었고, 이 학생들이 실습을 할 수 있도록 386 컴퓨터가 30대 가량 전산실에 들어와 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486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축제 때가 되면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을 열어놓고 그것에서 사진 보정작업을 하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고는 했다. 몇 년 뒤에 상고에서도 사라진 주판을 퉁겨서 계산하는 법을 수업하던 때의 일이다. 1993년에 인문계인 단양고등학교로 옮겼다. 실업계와는 달라서 인문계 고등학교인 이곳에는 상업과 한 학급이 개설되었는데, 그 학생들을 위해서 많은 타자기와 286컴퓨터 10대 가량이 있었다. 286은 속도가 늦는 데다가 날이 덥거나 추우면 컴퓨터가 작동이 안 되는 일도 많아서 담당 선생님이 한 겨울에 난로도 켜놓고 한 여름에 에어컨도 켜야 하는 고충을 안던 시절의 일이다. 그러다가 한 해가 지난 1993년도부터 연차로 교수학습 매체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행정실에 컴퓨터가 한 대 교무실에 두 대가 놓여 공동으로 쓰던 386 컴퓨터를 밀어내고 날로 486을 거쳐 팬티엄 급까지 불과 몇 년 사이에 컴퓨터가 보급되었다. 실물화상기와 대형 텔레비전이 학 학급 교실마다 보급된 것은 몇 년 뒤이다. 그리고 2000년을 기점으로 전 교사에게 개인 컴퓨터가 보급되었고, 전산실도 어마어마한 규모로 확대되어 학생들도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불과 10년 사이에 세상은 온통 컴퓨터 천지로 바뀌고 디지털 체계가 된 것이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컴퓨터는 국가 전체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모든 행정 업무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다 이루어지며 국가 공무원들 전체가 컴퓨터로 전자결제를 하고, 마침내 세계 최초, 최대로 전자정부를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것은 교직에 몸담은 한 개인이 바라보고 겪은 것이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10년 전의 나를 돌이켜보면 이런 변화의 물결에 근근이 올라타서 그나마 처지지 않고 따라가는 것은, 나의 능력이나 여건이 아니라 나를 담은 교직 사회의 몫이라고 본다. 실제로 개인 사업을 하거나 다른 분야에서 근무하는 내 친구들을 만나보면 이런 변화의 물결에서 한 발 비켜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정부 주도의 영향이 강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개인 기업이나 컴퓨터 업계의 변화는 정부의 이 같은 변화보다는 한 발 빨랐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기업의 생리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대중화시켜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사회 전체의 흐름으로 만든 것은 정부 주도의 정책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삶을 운영하는 우리 집의 변화를 보더라도 컴퓨터를 사는 일이나 컴퓨터를 운용하는 속도는 언제나 학교의 뒤를 따라갔고, 현재도 그렇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부가 가정을 앞질러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3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가 문학과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당연하게도 문학의 앞날과 연관된다. 문학의 앞날이란 현재의 시인들과 독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장래의 독자와 시인들이 처할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담론은 이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디지털은 이미지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것도 시각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앞으로 올 세대는 이미지로 세상을 읽고 사유하고 살기 때문에 이런 행태는 시의 독자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시는 모더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계속 시각 이미지를 강조해왔다. 물론 시각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 곧 모더니즘인 것은 아니지만, 이미지즘의 출현 이래 이미지는 시의 본류라 할 만큼 우리 시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이렇게 된 데는 시각 이미지의 유용성이 크게 작용했다. 보통의 문장이나 말은 의미전달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런 전통을 이은 시에서는 가락이 중요하다. 그러나 시의 기법과 의미전달 방식이 시각 이미지로 건너가면 시의 부분부분에서 주제가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시 전체를 읽은 다음에 한꺼번에 한 영상으로 다가오면서 이해된다. 바로 이 점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그런 극대화를 통해서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들도록 시에 장치를 해놓았다. 이른바 ‘객관적 상관물’이 강조되고, 실제로 그것을 잘 활용한 시인들이 좋은 평가를 받곤 했다. 그리하여 이런 이미지즘 기법이 이끄는 시의 흐름이 모더니즘의 전방에 배치되었다. 물론 이것은 그 전에 내려온 시의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려는 의지 내지는 욕망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변수가 등장했다. 바로 디지털 시대의 도래이다. 디지털은 이미지로 말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시의 이미지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강한 자극을 주며 생각의 굴절을 거치지 않고 직접 몸으로 와 닿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경향은 시의 존재에 가장 큰 위험이 된다. 결국 이미지 대결에서 시는 퇴장을 당할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더군다나 같은 자판을 이용하면서도 이모티콘이나 문자 도안으로 놀라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신세대의 발랄한 상상력을 보면 시가 지닌 둔중한 이미지는 수영선수의 발에 달린 모래주머니가 연상될 지경이다. 이 속도와 발랄함은 핸드폰에 와서 절정을 보여준다. 물론 시의 이미지와 디지털의 이미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그런 차이점을 구별하면서까지 시에 대해 자비를 베풀어줄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시의 이미지와 디지털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지즘의 기법이 모더니즘의 첨단에 서 있는 한 이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더니즘이 부정했던 옛날의 시 전통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폼잡고 도달한 곳에는 시의 본 영역이 사라지고,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곳에 시는 와있다. 이것이 이미지를 보약으로 택했다가 진퇴양난에 빠진 근대시의 현주소이다. 따라서 앞으로 시가 차지하는 위치는 디지털과는 다른 이미지의 영역인데, 그런 영역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미래의 독자는 디지털의 이미지로 시를 오독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오독도 시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이 있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최소한의 애정이 시의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떤 장치를 만들고 기회를 여는 것이 시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희망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시의 특성을 강제로 배우는 학창시절이다. 현직에서 중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그 중에서 시 창작을 지도하면서 느끼는 것은, ‘절망 속의 희망 찾기’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절망이라는 것은 디지털 시대의 도래라는 시대문명의 대세와 공교육 체계 안에서 시 교육이 갖는 두 가지 문제점이고, 희망이라는 것은 그런 절망 속에서도 방법에 따라서는 일말의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 창작이 아닌, 시 비평을 가르치는 학교의 현실은 이런 가능성에 대한 기대마저 물거품으로 만들고 만다. 학교 현장의 시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지적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살피는 것은 따로 새로운 장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구태의연한 문제가 디지털 시대의 도래라는 또 다른 거대한 악재와 겹치면서 생기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영상 매체 때문에 그러잖아도 어려운 시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이 소외를 안에서 부채질하는 것이 학교 현장의 시 교육이다. 실제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쳐보면 굉장히 어려워한다. 그 어려움은 우리 세대가 자라면서 느끼는 것하고는 또 다른 영역에 닿아있다. 즉 지금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텔레비전을 보고, 초등학교에 입학 전에는 게임에 빠져들다가 학교에 갈 때쯤 되면 벌써 컴퓨터의 세계로 빠져든다. 텔레비전, 게임, 컴퓨터의 공통점은 가상세계를 그림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생각할 겨를이 없다. 눈을 통해서 직접 가슴까지 연결되는 체계이다. 이들이 사춘기를 겪고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영상 이미지가 만든 세계는 이들의 현실이 된다. 이러한 매체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언어의 세계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책상 앞에 붙잡아 두는 교육 현실은 이러한 디지털의 영향을 더욱 강화시킨다.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현실의 조건마저도 학교 교육은 제거해버렸다. 시를 지도하려면 ‘이미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지가 현대시의 아주 중요한,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도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 이미지라는 말과 개념을 너무 어려워한다. ‘언어가 머릿속에 그려놓은 그림’이라고 설명을 해주어도 어려워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에게 이미지란 화면에서 그대로 가슴에 와 닿는 ‘직접전달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어라는 매개과정을 거치는 연상물이 이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줄 리 만무하다. 게다가 시의 이미지는 개인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게임이나 인터넷의 세계에서 만나는 이미지는 한 치 오차 없이 정확하다. 그리고 정교하다. 섹스 장면이나 전투 게임 장면에서 의심 가는 부분은 전혀 없다. 그대로 완전히 노출된다. 상상력이 개입할 틈을 준다는 사실 자체를 이들은 불편해하고 두려워한다. 시를 가르칠 때 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이렇게 보면 이미 언어라는 매개체는 이들에게는 불편한 구식장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광선검의 시대에 낫이나 호미를 들고 날뛰는 격이다. 이 세대는 자라면서 계속 사회의 관심을 받아왔다. 한 10여 년 전에 학교의 현장을 개탄하면서 ‘교실 붕괴’라는 말을 낳은 세대가 이들 첫 세대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라면서 계속 사회의 근간을 흔들었다. 대학에 가기보다는 컴퓨터 게이머를 꿈꾸면서 부모들과 극한 대립을 벌이더니, 이제는 군대에 가서 자신의 소대원을 향해 총을 갈기고 수류탄을 까 던지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2005년 현재 이들은 20초반에서 중반으로 막 넘어가는 그런 세대들이다. 이들을 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문화 환경이 그 이전의 세대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런 아이들을 상대로 언어라는 것을 도구로 사용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이미 한물 간 세대의 현실을 짚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 세대의 언어는 글이 아니다. 이미지이다. 바로 이 점을 시는 직시해야 한다. 이 점 때문에 문학은 존재의 큰 전환기에 와있다는 것이며, 마침내 머지않아 몰락에 이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벌써 문학의 가을은 왔다. 이제 겨울이 코앞에 닥친 것이다.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노래를 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일 아침 당장에 문을 닫지는 않을 것이다. 문화란 흐름이어서 본류가 있고 지류가 있다. 지금까지 언어가 본류였다면 이제부터는 영상이미지가 본류이고, 언어는 지류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지류의 물줄기가 얼마나 굵고 가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결국 디지털 시대에 시를 논한다는 것은 정도의 문제에 관한 것이고, 그 정도는 미래를 맞는 시인들의 태도에 달린 것이다. 말하자면 지류라고 하더라도 흔적조차 없는 그런 것이 되지 않고 본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되려면 문학 내부의 체질 개선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이때 체질 개선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당연히 대중화의 문제일 것이다. 대중화는 결국 독자 확보의 문제이다. 이것은 시가, 문학이 여태까지 이어져온 관성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끄는 활력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제도를 통한 체질개선과 디지털 시대의 틈새시장을 노리는 방향이 그것이다.   4 제도를 통한 체질 개선은 수천 년의 전통을 지닌 언어의 활용 방법을 강제하는 것이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서 문학의 사유에 익숙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학교에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의 효율성과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다른 장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강조할 것은, 지금처럼 입시 위주로 강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학생들이 문학을 스스로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삶을 바라보는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당연히 이것은 단순히 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사회, 나아가 국가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로 연계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한두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학교 교육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시에서 쓰이는 이미지를 정확히 알려주는 일이다. 그것은 디지털 이미지와는 또 다른 기능이 시의 이미지에 숨어있어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바로 그런 점을 기반으로 하여 시의 맛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시는 분명 신세대에게 쓴 약이지만, 먹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학창시절이다. 이 시절의 쓴 약을 통해서 시의 이미지를 배우지 못 하거나 잘못 배우면 시는 이들로부터 영영 멀어지고 이것은 시의 몰락을 확정하는 일이 된다. 시의 1차 생존 가능성은 학창시절에 있다. 그리고 이 1차 기회는, 틀림없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이다. 또 한 가지는 자꾸 위축되는 문예의 전통을 기관의 힘에 기대서 장려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국가의 시책에 문예가 중요한 정책으로 책정되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동시에 정치권으로 넘어가는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논의를 미룬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부의 문제, 즉 당사자인 문인들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사회는 어차피 덩어리로 뭉칠 수밖에 없다.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이 모든 사회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그 선이 어디까지냐 하는 것은 의외로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자칫하면 선이 아니라 성을 쌓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문단은 틀림없이 선이 아니라 성을 쌓아놓았다. 선은 한 발이면 넘나들 수 있지만 성은 문이 아니면 드나들 수 없게 된다. 문에는 당연히 사천왕 같은 문지기들이 지키고 서서 아무도 허가해준 적 없는 통행료를 받는다. 그런 쾌감을 즐기는 동안 스스로 폐쇄된 채 바깥 환경에 대응력을 상실하고 안에서 썩어가다가 고목처럼 쓰러진다. 현재의 시 추천 제도를 비롯한 문예지 중심의 흐름은 이러한 모습의 전형이다. 문예지와 학벌을 중심으로 끼리끼리 뭉쳐서 코딱지만한 이익을 노리는 집단들이 존재하는 한 시의 몰락은 가속도를 탄다. 이게 철부지들의 장난이라면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결과는 의외로 참담할 수 있다. 당장의 꿀맛이 좋은 자들 때문에 전체의 몰락에 이르는 법칙이 문학만을 예외로 비켜갈 리 없다. 이런 구태의연한 발상을 버리지 않으면 시는 살아남기 어렵다. 스스로 숨통을 조이는 행동을 멈추는 것만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문단의 책임 있는 자들부터 이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디지털 시대의 틈새시장이란 디지털 문화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말한다. 디지털 시대는 영상으로 존재하고 시공을 초월한다. 접속지점은 은밀한 공간이지만, 그 움직임과 양상은 다국적 기업의 생태를 닮았다. 전 세계를 순식간에 넘나들며 엄청난 양의 정보를 공유한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으로 그 정보를 재구성하여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리하여 실재하지 않는 곳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경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가상공간에서 공존한다. 이들이 현실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주 예외로 ‘붉은 악마’ 같은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특수한 경우이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현실 속으로 나온다고 해도 그들이 갖는 유대는 오늘날의 인간관계처럼 끈적할 리가 없다. 그러니 이런 존재형태가 갖는 맹점 또한 지극히 자명하다. 사람은 사회 속에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은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 또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세계의 소통방식 또한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대가 만든 가상공간의 세계 또한 현실세계로 이어지는 부분이 존재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상공간이 아무리 실감나더라도 그것은 그 역방향의 반대급부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디지털 문화가 놓치기 쉬운, 놓칠 수밖에 없는, 반대의 현실세계이다. 그 반대란 실재하는 현실세계의 자각화 운동과 소규모 문화운동이다. 문학에 국한시켜 보면 이것은 지역별 문학 모임의 활성화가 가장 중요한 대안이 될 것이다. 어느 사회든지 그 구성의 형태는 피라미드형이 가장 안정되고 오래 간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이런 틀을 바꾸어버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세대가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을 저절로 채워야만 그 꼭대기까지도 안정되는 법이다. 그러나 새로 유입되는 층이 없으면 이 피라미드 구조는 저절로 다이아몬드 구조로 바뀐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10년 전부터 갑자기 문학의 지형이 바뀌면서 현재 문학계는 다이아몬드 구조로 바뀌었다. 신세대는 문학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까닭에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을 채울 수 없다. 그런데도 문예지는 근대 문학사 이후 가장 왕성하게 불어났고, 시인 역시 엄청나게 불어나서 아파트 동마다 시인 한둘이 산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왕성해진 문학 판의 변화를 주변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학의 중앙집권화와 맞물려있다. 문학은 자생력을 갖추지 않으면 말 그대로 사상누각이다. 자생력이란 사람들 스스로 즐기는, 그래서 그 즐거움을 바탕으로 생활 속의 시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시 풍토는 추천제도와 문예지의 생존 방식에 긴밀히 맞물려있다. 시를 써서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어 하고 시 쓰는 능력을 추천제도와 문예지 지면 차지하기로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런 욕구 본능을 잘 자극시켜서 문예지는 자신들의 생존을 꾀한다. 이런 중앙 집권화가 가속화될수록 주변의 지역 문예는 생기를 잃기 마련이다. 중앙을 향해 목을 길게 늘이고 있다가 연이 닿으면 중앙의 문예지로 달려가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문예풍토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인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대안 또한 간단하다. 중앙으로 달려가는 관행을 버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에 자신의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중앙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역 문예의 활동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시 낭송회, 시화전, 사화집 발간 같은 형태의 문예운동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이것은 직접 사람을 부딪치면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디지털 문화에는 없는,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앞의 방법이 문학이 위기에 처할수록 문학다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방법이라면 오히려 디지털 문명의 이기를 문학에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가장 손쉬운 것은 인터넷 매체를 이용하여 문학의 확대를 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현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본다. 즉, 시 전문 카페나 사이트를 운영하여 시의 대중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우리의 주변으로 아주 가까이 와있다. 나 같은 인터넷 동호인 모임을 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인터넷 문화는 문학에도 호재가 될 수 있다. 문예지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작품의 소통 체계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것은 작품과 책의 구매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그런 매력을 주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나 인터넷 체계는 즉각 세계 어느 곳이든 접속된다. 따라서 시 역시 이러한 환경을 이용하여 독자에게 얼마든지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다만 전문성의 결여로 인한 질의 저하라는 문제점이 있지만, 그것은 인터넷의 본질이기보다는 운영 방식의 한계일 따름이다. 오히려 인터넷은 지나친 중앙집권화로 말기 암 환자의 상태에 이른 현재의 문단 행태를 교정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5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여 문학의 생존이 위협 당하는 까닭은 거기에 일정한 비용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인터넷 소통 과정에서는 부대비용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독자의 구매력을 전제로 하고 있는 문예지 중심의 작품 소통 방식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방식에 의존할 경우, 틀림없이 시인은 이 구태의연한 방식이 갖는 재정의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학의 생존 문제는 결국 재정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맥을 대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시인들이 취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이다. 팔리는 장사가 가능한 출판사에 의존하여 무료로 출판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정부기관을 비롯하여 각종 단체에서 지원하는 지원금(예를 들면 문예진흥기금)을 받아서 출판하는 경우이고, 세 번째는 자비로 내는 경우이다. 그러나 현저히 감소하는 독자들이 문화의 관심도를 결정하고, 관심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에 이르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경우 역시 점차 쇠락을 길을 걸을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세 번째인 경우만이 남게 될 것이다. 결국 시인 자신이 작품을 발표하는 창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설령 이렇게 한다고 해도 그것을 독자들이 읽도록 하는 일이 남는데 이 역시 결국 시를 쓰는 당사자들의 몫으로 남고 만다. 이제 시는 존재의 유형 면에서 최악의 국면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결코 원하지 않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다다랐다. 어떤 상황이 최악에 이르면 대개 최선의 방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파멸을 겨우 면하는 최악의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 되고 만다. 이 상황에서 최선의 방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인들이 구매력에 의존하는 문학의 존재 방식에 대한 환상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생존의 조건을 스스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 과정에 따르는 재정의 압박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그것만이 피라미드의 바닥을 확장하고 건전한 생존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본다면, 동인 활동을 활성화하되 거기에 두레의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다. 동인 형태는 중앙집권화에 대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다. 그리고 소규모라고 해도 스스로 독자를 확보하고 독자와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구매력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동인들 스스로 분담해야 한다. 대개 지역을 근거로 해서 결성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경우 특정 지역에 일정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성으로 대변되는 인터넷 문명에 대해 국지성이라는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이 국지성은 국제성을 담보하는 값진 조건이다. 두레의 방식이란 시인들 간의 상부상조를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촌지 문화가 아주 발달했다. 그것은 옛날의 농경 사회에서 품앗이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생긴 것인데, 이 꼬리를 잘라버리지 못하고 도시 문명사회에서도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잣대 노릇을 하고 있다. 그래서 문인들의 애경사가 있으면 돈 봉투를 들고 찾아다니는 것이 흔한 일이 돼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촌지 풍속이 작품집 발행에는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특이한 일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시인이 시집을 내면 그 주변의 시인들은 그 시집을 공짜로 받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시집을 낼 때에도 역시 공짜로 돌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런 습관은 결국 구매력이 발생하지 않는 조건에서는 시인의 부담으로 남는다. 그리고 재정이 열악한 조건이라면 시집을 내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만약에 팔리지 않을 시집은 낼 필요가 없다는 어이없는 발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의 대중화와 생존 문제는 아예 꺼낼 필요도 없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촌지문화를 시집 발간의 경우에도 적용하는 것이다. 한 시인이 시집을 내면 어떤 시인의 아들 결혼식에 돈 몇 만원을 넣어서 촌지를 주듯이 시집을 내면 그 시인에게 일정 액수의 촌지를 건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집을 내는 당사자는 재정에 대한 부담이 없이 독자의 구매력을 얼마간 미리 확보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다행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동인간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누군가 나서서 이런 일을 주선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인 활동이 중요한 것이고, 생존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매년 이라는 사화집을 내는 ‘시문관’ 동인의 경우, 회원이 13명이다. 회원 중에서 시집을 내면 모임을 운영을 맡은 ‘일꾼’이 1인 당 5만원씩 갹출을 하여 당사자에게 전달한다. 본인을 빼고 12명이면 60만원이다. 물론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이 돈이 당사자에게 주는 것은 엄청난 격려와 희망이다. 발행 비용부터 발송비용까지 모두 시인이 떠 안아야 하는 현실에서 주변 사람들의 이런 도움은 단순히 돈의 액수로 그치지 않는다. 동인이란 그런 희망을 주는 관계이어야 한다. 현재 시집 한 권에 드는 발행 비용은 200만원 정도이다. 만약에 회원이 20명이면 한 번 시집 출간에 100만원이 충당되는 셈이다. 회원이 40명이면 공짜로 낼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이런 식이라면 시집 출간도 누구나 한 번 해 볼 만한 일이 될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문학의 위기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넋 놓고 앉았기에 위기인 것이지, 행동하는 자에게 위기는 그냥 말일뿐이다. 문학판의 동인 모임은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문제이다. 대략 2-30명 선이면 적당하다. 이런 모임이 두레의 성격을 활용하여 문학의 생존을 도모한다면 디지털 문명이 아무리 높고 크게 밀려와도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본다. 또 한 가지는 시집을 받아보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하도 많은 시집이 나오다 보니 좀 유명세를 탄 사람은 도착하는 시집을 다 읽어주기도 벅찰 지경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이상의 기대를 그에게 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사람이 책을 선물로 받으면 그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그것이 자신을 기억하고 책을 건네준 사람에 대한 예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인이 보내준 시집을 몇 권 사서 주변의 문학도나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다. 한 시인이 나에게 선물을 했는데 그걸 받아서 읽고는 다섯 권을 사서 돌렸고, 그런 사람이 50명이라면 250권이, 100명이라면 500권이 간단히 소비되는 셈이다. 사서 돌리는 사람은 비용이 발생하겠지만, 그것이 문학의 저변을 확대하고 잠재 독자를 확보하는 일이 되며 나아가 문학의 생존을 좌우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 주변에서 그렇게 한다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조차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 해볼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방법은 앞서 말한, 두레의 성격을 동인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시인이 시집을 사지 않는다면 독자 역시 시집을 사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시의 몰락으로 연결된다. 그 고리를 푸는 사람은 독자가 아니라, 시인 자신이다. 또 동인 조직이 잘 운영되면 보급 문제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동인들의 손을 통해서 각 지역의 독자들에게 배포되기 때문이다. 의 경우, 2004년에 낸 제1집은, 충북지역에 150권, 충남 부산지역에 각각 30권, 대구 지역에 50권, 서울 경기 지역에 80권이 배포되었고, 인터넷 동호회로 70권, 우편으로 200부가 배포되었다. 그리고 제2집의 경우에는 회원이 전국 단위로 확대되면서 부산 100권, 대구 100권, 서울 경기 180권, 충북 150권, 대전 충남 50권, 인터넷 동호회 100권, 우편으로 200권 정도 배포되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문예지보다 훨씬 더 안정된 보급로를 확보한 셈이다. 그리고 이 책들은 중앙의 권력집단보다는 일반 독자에게 더 많이 보급되는 까닭에 시의 대중화라는 목적에도 훨씬 더 부합된다. 결국 디지털 시대에 시가 살아남으려면 발행부터 보급까지 시인 스스로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두레로 묶인 동인 활동이 가장 큰 희망이 될 수 있다.   6 인터넷 시대에 문학의 존재 방식과 근거는 가상공간을 떠도는 영혼들에게 현실의 감각을 일깨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동일한 방식으로 수천 년 동안 존재해온 시라는 양식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영혼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점과, 그것은 디지털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세대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러자면 가장 급한 것이 우리 삶의 주변에서 언제든지 부딪치고 만날 수 있는 것으로 시의 위상을 바꾸어야 한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시화전이 이루어져야 하고,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에서 시 낭송회가 열려야 하며, 자신의 시를 어렵지 않게 활자화시킬 수 있는 합동시집이나 사화집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경로와 작업이 우리 삶의 주변에서 손쉽고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주변의 사람들이 그런 풍속에 익숙해질 때 시의 대중화는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디지털 시대에 문학이 살아남는 거의 유일한 비결일 것이다. 결국 아마튜어리즘의 부활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씨름이 프로팀 운영에만 전념하다가 마침내 몰락을 맞이했듯이, 문학 또한 아마튜어리즘을 전제로 하지 않은 프로란 공염불이다. 문학의 체질을 근본부터 뜯어고치는 이 같은 일이 이루어지려면 문학을 이끄는 집단이 중앙집권화 된 형태의 질서를 스스로 헐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고질병이 된 학연과 지연, 그것도 아니면 문예지 중심으로 뭉쳐서 신라시대에나 있을 성골과 진골 그룹을 형성하여 그 특권을 바탕으로 권력과 이익을 꾀하는 유치한 발상을 버리지 않으면 문학사회 전체의 몰락은 머지않아 현실로 들이닥칠 것이다. 자신들의 둘레 밖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거대한 성을 쌓아놓고 주인행세를 하는 것은 그 바깥에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부러워 할 때에나 의미 있는 일이다. 이제는 보아줄 사람도 없는 시대가 왔다. 이끼 낀 중세의 성에서 관객도 없이 끼리끼리 꾸는 헛된 꿈을 이제는 버려야 할 때이다.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공동의 몰락을 예방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이런 일그러진 구조를 바꾸는 방법으로는 인터넷 매체의 장점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대안이다. 거꾸로 선 피라미드는 곧 쓰러지기 마련이다. 피라미드가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뒤집힌 피라미드는 쓰러져야 하며, 그 방법과 대안은 인터넷이다. 각 지역에 구축된 문학인들을 하나로 엮어서 권력화 되지 않으면서 문학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리고 제도화를 통해서 강제하는 방법 역시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이곳에서 다룰 수 없는 부분이다. 이것은 국가 행정과 연관된 부분이기 때문에 따로 장을 마련하여 당사자들의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디지털 매체로 인하여 시의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그 현실을 문학에서 얼마나 더 늦추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숙제이며, 속도를 늦춘 후에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 다음의 과제이다. 이 숙제를 풀 자들은 신세대가 아니다. 이빨 썩은 내 나는 문학권력을 틀어쥐고 그 쾌감을 즐기는 자들과 그들 주변에서 그들을 멍청히 바라보는 시인들과 이 시대 최후의 독자들이다. 100년 후 시는 과연 박물관이 아닌 현실 속에 살아있을 것인가? 그에 대한 확답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붓을 놓는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4338. 10. 28.)  
10    90년대 이후 시흐름... 댓글:  조회:5095  추천:0  2015-02-11
 1990년대 이후의 한국 시                                                                                                                                                                 정진명 1 예술은 인식과 형상으로 이루어진 약속체계이다. 문학과 시 역시 이 점에서는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부레와도 같아서 한쪽을 누르면 한쪽이 커지고, 다른 쪽을 누르면 반대쪽이 커지는 법이다. 그래서 이 무게가 어느 쪽으로 쏠리느냐에 따라서 사실주의와 현대주의의 논쟁이 불붙기도 하고, 또 길게는 문예사조의 흐름을 결정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런데 새로운 변화가 어느 쪽에서 촉발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논의의 성격 때문에 인식과 형상이라는 개념으로 갈라서 보지만, 사실 이 두 가지 요인은 따로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때문에 구조라는 틀로 형식과 내용의 상충성을 극복하려는 꾀를 발휘해보기도 하지만, 상대성의 가치체계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그 어떤 것도 없기에, 문제는 늘 그 자리를 맴돈다. 맴도는 그 자리를 치고 들어오는 것이 시대의 상황이다. 모든 예술행위가 자신의 완고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언제나 시대의 문제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래서 문제가 늘 어렵고 복잡하게 꼬인다.  형상은 늘 고정성을 수반한다. 그런 반면에 인식은 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곳을 향해서 더듬이를 뻗는다. 만약에 이미 찾아서 안주한 형상에 더 이상 안주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인식은 새로운 형상을 낳기 위해 마치 매미처럼 껍질 벗기를 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을 대부분 시대가 제공하며 그런 자극에 따라 문학은 뜻하지 않은 방향에서 새로운 모색을 한다. 그리고 그 모색이 유달리 격렬한 시대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상황은 틀림없이 문학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외부에서 가해진 충격에 따라 전개된다. 그런 전형을 1980년대에서 본다.  따라서 1990년대의 한국 시가 흘러간 방향을 더듬으려면 그 앞 세대인 1980년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그 어느 때보다도 1990년대 이후의 시는 1980년대의 반동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묘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최초의'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려준 수업시간의 가르침대로 최초의 근대시라는 주요한의 '불노리'로부터 셈한다고 해도 100년에서 조금 빠지는, 어떻게 하면 길고 어떻게 하면 짧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역동성이 가장 넘치는 두 시절을 꼽으라면 가장 먼저 눈길 가는 것이 1920년대와 1980년대일 것이다. 10년 단위로 끊는 버릇으로 끊어본 이 두 시대는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히 격동이랄 만한 변화가 감지되던 시절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문학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급박한 변화와 충격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한 갑자인 60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이 두 시대는 이상하게도 닮은 점이 많다. 경직된 지배체제가 붕괴되면서 역사의 전환점이 된 큰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 그에 따라 기존의 세계관이 몽땅 흔들려 백성들 스스로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많은 부분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점, 그 실패의 체험이 귀중한 문학의 자양분으로 작용했다는 점이 그런 것들이다.  1920년대의 정국은 당연히 1919년의 3.1운동에서 시작되었고, 1980년대는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되었다. 둘 다 조선 독립과 민주화의 가능성을 한껏 높였다가 일본제국주의의 무자비한 탄압과 미국이 묵인한 군부 쿠데타로 희망이 꺾여버렸다. 이런 사건은 당시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정신의 공황상태에 빠지게 했고, 그 와중에서 올바른 길을 찾는 방법을 두고 격렬한 사상논쟁이 벌어지면서 각기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아 나섰다.  문학에서도 이런 징후는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 1920년대의 카프와 1980년대의 노동문학은 변혁운동 전반에 돌풍을 일으키면서 당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다. 그리고 문학사에 가장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면서 문학의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창의성을 발휘했다. 이 역동성은 물론 문학 내부의 것이기보다는 당시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상의 움직임에서 파급된 것이다. 문학이 사상과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리고 이런 것은 그 이후의 문학들이 보이는 행태로부터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한 카프는 스스로 해산계를 내면서 힘을 상실했고, 사회의 밑바닥에서 활화산처럼 솟구친 변혁운동을 무력화시킨 일본제국주의 세력으로 인하여 1930년대 이후의 문학은 문학 바깥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채 문학 내부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문학으로서는 가장 치욕스런 '조선어말살'이라는 상황에 부닥쳐 대부분의 시인들이 일제의 앞잡이로 변절을 하거나,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침묵으로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상황에 이른다. 문학이 스스로 바깥과 교류를 끊고 자기만의 영역으로 퇴화할 때 어떤 결과에 이르는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일이다. 이때의 변화는 문학 내부의 선택이기보다는 바깥의 거대한 힘에 저항하는 힘을 상실하고 굴복한 경우이다.  겉으로 보면 1980년대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미국의 묵인 하에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부도덕한 정권에 대한 극심한 반발이 당시의 문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 원동력은 물론 그 이전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현실참여 문학의 확대를 뜻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문학의 주류로 바꾸어놓은 공은 당시의 사회의 부조리를 좌시하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의 문제로 받아들인 양심 세력이라 할 것이다. 1980년대를 산 문학인은 광주 앞에 모두 죄인이었고, 그 죄를 어떻게 떨어낼 것이냐 하는 것이 의식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렸으며, 그것이 새로운 문학의 동력으로 분출했다. 3.1운동의 좌절로 인하여 당시 백성들이 느낀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은 두 시대가 서로 다르다. 1930년대의 문학은 일본제국주의의 강고한 힘 앞에서 굴복한 문인들이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인 불가피한 면이 있지만, 1990년대 이후의 문학은 문학 내부의 선택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 강고한 힘을 '변화된 새 문화환경'이라고 강변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그것을 1930년대의 상황과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변화는 문학의 위축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1980년대의 왕성한 창조력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지 못한 문학 내부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여기에 작용한 '디지털 시대의 도래'라는 문제는 따로 논의해야 할 주제로 남겨둔다.) 3 문학은 사회의 산물이다. 사람은 사회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되며 그것은 문학에서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형식으로 정착한다. 그러나 사회 변화와 관련하여 문학이 현실참여 기능을 스스로 축소하거나 어떤 계기로 하여 위축되면 문학은 자신의 내부로 눈을 돌린다. 1930년대 이후에 문학이 자의든 타의든 사회 변혁에 등을 돌리고 문인들이 농촌소설이나 서구문예사조를 소개하는 것으로 자족하던 흐름은 이런 경향을 분명히 보여준다. 격렬한 사회 변화의 태풍이 쓸고 지나간 뒤에는 문학의 자기성찰이 시작된다는 공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문학의 도구성에서 예술성으로 새로운 탐색을 떠나는 것이다.  이 점 1990년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1980년대의 사회 변혁 열풍이 문학을 한 바탕 쓸고 간 뒤, 그러한 행위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반대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자기성찰이라는 해묵은 경향이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싹을 틔우는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시에 나타난 변화는 두 가지로 요약되는 바, '현실인식의 퇴조'와 '유미주의 경향의 강화'가 그것이다. 유미주의는 언어를 재료로 하는 문학이 자신의 상상력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탐닉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타고나면서부터 무언가 의미를 전달하게 되어있다. 그 의미는 곧 주제이고 관념이고 사상이다. 그런데 작품에는 이런 것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이 미일진대, 거기에 탐닉하여 언어가 지닌 본래의 기능으로부터 가장 멀리 물러나는 것을 미의 완벽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 유미주의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내용이 부실해진 것을 상상력의 빛깔로 메우려는 애절한 시도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징은 이런 변화가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급격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불과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노동문학은 한물 간 유행이나 천덕꾸러기로 간주되어 출판하기조차도 힘든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것은 출판사들의 '전향'에서 쉽게 확인된다. 1970년대부터 꾸준히 민중 민족문학 계열의 작품을 내던 '창작과비평사'와 '실천문학사' 같은 회사들이 1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경향의 작품집을 내기 시작하여 그것을 출판사 운영의 주된 사업으로 여기고 있다. 불과 10년 전의 힘찬 기백과 전망은 시집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다. 그저 옛 시절에 대한 회고나 환멸이 꼬리뼈처럼 남아 '문학사에 한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하는 정도의 정서를 환기한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의 문학사는 1980년대로부터 얼마나 멀어지느냐 하는 것에 마치 시의 성과가 있기라도 한 양 사회 변혁의 중심으로부터 잽싸게 멀어지는 발걸음들만 어지럽다. 사회 변혁에 집중했던 문학의 에너지가 그 반작용으로 문학의 내부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그런 경향들을 몇 가지로 추려서 정리해본다.  1) 곶감 빼먹기 시가 다루는 내용은 무한정이다. 시는 오래 묵은 한 형식이고 그 형식의 대상은 인간이 바라보는 모든 대상들이면서 또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인식이 시에서 사라지면 대상은 아주 단순해진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시가 발생한 이래 꾸준히 이어진 것이기도 하다. 시가 현실을 버리면 남는 것은 내면의 정서이다. 내면의 정서 중에서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은 절망, 고독, 사랑 같은 것이다.  1990년대가 1980년대의 반동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으로 본다면 이런 경향은 아주 강한 전통을 지니면서 제일 먼저 시의 전면으로 등장할 내용이다. 예상대로 그간의 변화에서 이런 점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실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의 내면에 서린 고독과 절망과 힘겨움 같은 것을 시로 그려낸 시인들이 앞 세대의 거친 현실 인식을 비웃으며 나타난다. 그 대표주자는 나희덕일 것이다.  나희덕은 첫 시집에서 나름대로 현실 인식을 성실하게 다룬 시인이다. 그러다가 두 번째 시집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변하여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고 거기서 고독을 찾아내어 좌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신의 독자로 확보한 경우이다.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을 잘 드러내었다. 그런 점에서 재주꾼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눈여겨볼 만한 시인은 장석남과 김선우이다. 장석남 시의 주제는 쓸쓸함과 원인 모를 상실감 같은 것이다. 그것을 아주 섬세한 관찰로 주변의 사물에서 읽어내어 깔끔하게 보여주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김선우의 경우는 '엎지르기 시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을 만큼 감정을 과감하게 노출하여 성공한 경우이다. 그 전까지 서정시의 미덕은 넘치는 정서를 절제하려고 사물에 빗대거나 과장을 자제함으로써 그 자제하려 애쓰는 옆모습에서 고독과 절망과 우울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김선우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버렸다. 단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시인의 기법을 엿보면서 찾아내야 하는 서정시의 전통을 넘어서 시인이 왕창 보여주는 모든 것을 느끼게 만드는 기묘한 과감성이 있다. 기존의 서정시가 슬픔을 감추려는 가운데 독자의 눈물을 짜낸 것이라면 김선우는 대성통곡을 해서 구경꾼을 함께 울린 경우가 되겠다. 이 점은 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주제를 아주 확실하게 보여줌으로 해서 얻은 효과이다.  이런 경향이 갖는 한계는 자명하다. 수천 년 동안 반복해온 내용을 또 다시 반복하는 지루함을 극복할 길이 없다. 잠시 스쳐 가는 유행가 같은 것이어서 거기에 들인 공에 비해 별로 남을 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재주가 아깝다는 탄식을 듣지 않으려면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2)상상력의 자기 만족 앞의 것이 내용에 대한 반동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와 달리 형식에 대한 반동에서 나온 시들이 있다. 이 경우에는 시가 지닌 본래의 상상력의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빠져나간 자리를 상상력의 극대화로 메워보려는 시도이다. 그런 시인 가운데 눈여겨볼 만한 경향은 이윤학, 이정록, 박정대 같은 시인들이다. 이윤학의 경우는 묘사 뒤로 자신을 숨기는 경우이다. 그 전까지 시의 특징은 대부분 화자와 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이 동시에 드러난다. 그것이 비유라는 독특한 시만의 표현법을 형성해온 것이지만,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에서 이 둘이 서로 밀고 당기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시라는 화법의 공통점인데, 이 경우에는 원관념을 될수록 줄이고 보조관념 속에 원관념이 포함되도록 한 방법이다. 그래서 시에서 화자는 냉정한 풍경 묘사 뒤로 숨어버린다. 물론 그 전에도 그런 방식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식으로 한 독특한 세계를 이룬 것은 이 시인의 큰 업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묘사의 뒤편으로 숨으면 시가 어려워진다는 점이 큰 문제이고 이것은 어렵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 본래의 기능을 제약하는 악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머지 않아 이런 경향은 시의 귀족주의화와 유미주의화를 면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런 경향을 강화하여 다른 시인들을 타자화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차별화하여 구축하려고 한다. 그런데 묘사 뒤로 숨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의 눈은 카메라가 아니다. 세상을 본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자의 관념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불가피하게 선택이라는 방법이 놓이게 된다. 이 방법은 자연이 본래 부여한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선택한 것이다. 이런 선택을 묘사 뒤로 숨기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아무리 신선한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고 해도 결국 이 부분에서는 시인 자신의 판단과 가치관이 드러나고, 이 부분에 대한 성찰과 숙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애써 이룬 성과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묘사는 방법일 뿐이다. 방법이 본질을 대체할 수는 없다.  이정록의 경우는 시의 전통 문법에 더욱 충실한 경우이다. 전통 서정시의 방법 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경우라 할 것이다. 서정시에서 가장 중요한 기법은 비유이다.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간격과 그 관계의 적절성 여부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간격이 엉뚱하고 멀수록 독자는 강한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다. 바로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파고든 시인이 이정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벌려놓았을 때의 관계가 얼마나 적절한가 하는 것이다. 비유는 본래 두 사물 사이의 공통점에 기반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 상이성을 드러냄으로써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그럴듯하게 합리화시켜주어야 한다. 바로 이 합리화 부분에서 이정록은 무리를 범하고 있다. 둘 사이의 간격을 한껏 벌려놓아서 감탄을 하는 순간, 그것을 수습하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애써 수습을 해놓은 것이 어거지로 갖다 맞춘 듯한 미숙함을 결국은 씻지 못한다. 바로 이 부분이 큰 숙제로 남은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관계로 사물을 엮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는 점은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런 경향은 한시의 영향이다. 우리나라 시인 중에서 한시의 영향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는데, 이 시인의 상상력은 많은 부분 한시에서 확인되는 발상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겠다. 추구집의 같은 상상력을 보면 이 시인이 벌려놓고자 한 두 사물 사이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발상과 긴장의 출처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시에서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이런 조충소기가 아니라 그런 엄청난 기교를 낳게 한 거대한 사상과 정신의 흔적이다. 이것을 수용하지 못한 한계로 인하여 억지춘향의 느낌을 씻을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박정대의 경우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는 모두 현실 속의 어떤 사물이나 현상과 연관을 맺고 있다. 즉 언어가 그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박정대의 경우는 시 안에 완전히 허구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특히 무가당 담배클럽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세계는 현실 속의 그 어떤 현상과도 관련이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있다. 환타지의 세계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것은 상상력이 자기 만족을 꾀하는 절정의 세계이다. 시는 더 이상 현실의 어떤 고리에 매달려있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가 또 위험한 것은 끊어진 풍선은 하늘 꼭대기로 올라감으로써 아무런 존재도 아니게 된다는 점이다. 시가 현실로부터 가볍게 떠올라서 상상력의 형태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시가 자신의 종말을 향해 치닫는 것이다.  3)관찰의 미학 어찌 보면 필연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우연 같기도 한 한 가지 경향이 큰 물줄기를 이루었다. 허만하로부터 시작된 현미경식 관찰력이 그것이다.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와 “물은 목마른 쪽으로 흐른다”라는 두 시집을 연달아 내면서 허만하는 이후 시의 한 경향을 결정해버렸다.  시는 섬세한 관찰과 명민한 시각이 요구되는 갈래이다. 특히 섬세한 관찰은 세상을 재편하는 기초가 되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의 중요성을 한껏 강조하고, 또 성공했다는 점에서 허만하의 공은 실로 만만찮다. 그리고 이런 작품으로 하여 이후의 시에서는 정밀하고 정교한 관찰이 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런 경향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시는 본래 가장 작은 사물을 통해서 가장 큰 문제를 간단히 설명하는 갈래이다. 그래서 너무 세밀한 부분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쉽게 전할 수 있는 큰 주제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이후의 시인들이 세밀함의 늪에 빠져서 정작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안 좋은 영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강화시키는 한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현실 인식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사상과 가치관이 분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야 옳고 그름이 서고 그에 따라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밀한 부분보다는 거대주제가 이들의 관심사다. 노동문학의 경우가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거대주제를 놔두고 다슬기의 껍데기 색깔에 관심을 집중한다면 적절치 못한 집중의 반대급부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인인 거대주제는 어디론가 증발하고 만다.  어쨌거나 허만하 이후에 극세밀 묘사는 문단의 한 흐름으로 정착했고, 그 흐름은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하면서 시인의 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그런 흐름 가운데서 최근에 김기택과 조용미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4)세월과 함께 사그라드는 꿈의 노래 지금까지 새 경향을 얘기했지만, 이미 그 전부터 이어져오던 경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형성했다. 전통 서정시의 문법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현실의 생활 속에서 시인의 시각을 적극 살리는 경우이다. 문정희, 박미라가 그런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 문정희는 시인의 긴장이 무엇인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시인이다. 이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소재는 모두가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삶을 중요시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상상력의 특별함이나 소재의 독특함에 의존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느낄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곳에서 삶의 의미를 한 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묘한 능력이 있다. 이 점이 사실 어려운 것이다. 일상 속에서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것보다 더 탁월한 능력도 없다. 이런 점에서 문정희야말로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에 오른 셈이다. 대시인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아깝지 않은 경우이다. 박미라의 경우는 이름이 잘 안 알려진 시인인데, 시가 모두 일상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그렇다고 늘어지지도 않는 대단한 긴장을 품고 있다. 서정시의 문법에 가장 충실한 시인이다. 서정시라는 것이 원칙에 너무 충실하면 지루한 법인데, 이 시인의 시에서는 그런 충실성이 느껴지면서도 지루함이 묻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로 정신이 긴장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 점에서 대단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런 시인을 보면 왕따가 비록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향의 시인들은 성실하다는 점이 쉽게 느껴지는데, 문제는 꿈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무기력한 일상 속의 느낌을 시로 표현하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과장 같이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태도가 전제하는 무기력증 때문이다. 이 무기력과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끝내 화합할 수 없다. 이 점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5)문명비판 노동시의 대척점에서 빛을 되비치던 경향이 문명비판이라는 넓은 명칭으로 아우르던 경향은, 노동시가 궤멸 당한 후에 유일한 절대강자가 되어 온 세상을 비추고 있다. 이 경향 안에는 생태주의, 여성주의가 모두 포함된다.  그러나 노동시의 대자로서 존재하던 경향은 그 대극점이 사라짐으로 해서 자기분화를 시작해야 했지만, 아직 그런 경향이 뚜렷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게으르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그리고 이 비판은 주류가 주류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시의 앞날을 아득하게 하는 경우이다.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여 시의 몰락이 예견되는 바, 이에 대한 책임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이 경향의 시인들의 받아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라 할 것 없이 이 경향의 시인들이라면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오규원, 황동규 같은 낡은 세대의 경향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가 하는 것이 이 경향에 대한 잣대가 되겠지만, 김정란의 수다스러움이나 이원의 장광설 가지고는 발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경향의 문제점이다.  6)실험 시의 새 경향 이런 가운데 눈여겨볼 만한 시인이 이수명이다. 이수명은 넓게 보면 실험의식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전의 실험이라면 보통 이상이나 박남철 황지우처럼 형식을 깨면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인데, 이수명의 경우는 시의 형식을 그대로 두면서도 그 안에서 시의 와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할 것이다.  이수명의 새로움은 관계의 도착과 혼란에서 비롯된다. 언어는 어차피 고정관념이다. 사회의 약속체계이기 때문이다. 시는 그러한 체계를 전제로 하고서 그 쓰임의 일부를 변용한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시이다. 그리고 그런 의도의 밑에는 시의 메시지가 관념이 아니라 정서라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  그러나 이수명의 시에서는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관계는 시인의 의식 속에서 완전히 재편된다. 그리고 시인 자신만의 질서로 바깥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드러난 관계가 독자의 눈에 제대로 비칠 리 만무하다. 이것이 이수명 시가 어려워 보이는 이유이다. 두 시집에서 이런 관계의 긴장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세 번째 시집인 “붉은 담장의 커브”에 이르면 이 시인이 실험을 포기했는가 싶을 정도로 시가 안이해졌다. 그래서 말장난이라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이것이 어쩐 연유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의 시에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큰 패착이다.  더 큰 문제는 문단에 그의 시를 제대로 평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시집 해설을 두 번 다 황현산이 썼는데, 그나마 이 평론가 정도가 이수명의 시를 좋게 봐주는 정도이다. 이 경우 다른 이들의 침묵은 채찍이 아니라 돌팔매질이다. 그러니 반성할 것은 시인이 아니라 시인 주변의 무책임한 자들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수명의 세계는 한국 시가 뚫어야 할 한 방향이다. 7)현실참여의 또 다른 방향 노동시가 지리멸렬한 가운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징후가 있다.  노동시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고 현실 인식은 거대담론으로 귀결된다. 거대담론은 거대사회를 먼저 변화시킨 다음에 그것을 사소한 삶의 영역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따라서 거대담론의 밑바탕에는 개인이 속한 현실과 그 현실의 무대인 사회가 있다. 그렇다면 시는 인생 전반의 거대담론을 거론하는 가운데,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들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제를 만나는 것이다. 이런 만남이 시에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만남은 그 개인 속한 지역과 연관되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시에서는 이런 지역과 정확한 점접을 갖고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시가 한 지역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그것의 성과 여부를 떠나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다가 시가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때 지역의 문제는 지역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한국 시의 넓은 바다와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접근법은 거대담론이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거대담론은 뿌리를 잃으면 늘 허황함을 시에 남기고 만다. 그런데 이런 허황함을 극복하는 한 방법이 바로 지역에 뿌리를 드리우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거대담론인 노동시가 썰물처럼 퇴각한 시점에서 이것은 유일한 대안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 서있는 시인이 박세현이다. 박세현은 강원도 출신이다. 저절로 강원도라는 산악지대와 연줄을 댄 셈이다. 그런 시인이 노동시가 퇴각하는 그 시점에서 원주에 정착을 하면서 원주와 정선을 잇는 강원도 지역의 현실에 시의 초점을 맞춘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지역에 드리운 역사와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시가 현실과 가장 가깝게 밀착되는 놀라운 경지를 연다. 그것은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 끌려 다니지도 않는, 현실과 시가 정확히 맞물리는 방법상의 지점이다. “정선 아리랑”의 성과를 말하는 것이다. 노동시가 지리멸렬한 시점에서 이런 절묘한 해법은 이 시인이 이룬 큰 성과라고 하겠다. 그리고 한 시인의 성과에 그치지 않고 한국 시의 새로운 방향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여러 군데서 감지되지만, 일단 눈에 들어오는 시인은 우포의 상상력을 잡고 늘어진 배한봉이 있다.  4 1990년대 이후의 시는 그 앞 세대인 1980년대의 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격렬한 사회 변혁의 의지에 휘둘렸던 시대이기에 형식의 문제보다는 인식의 문제가 시의 전면으로 떠올랐고, 인식은 종종 형식의 조건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징후가 1980년대의 가장 큰 상처이자 부족한 점일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한 것이 1990년대 이후의 시에서 보인다. 그것은 문학 내부의 상상력을 성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의 시는 그 앞 시대의 현실 인식으로부터 후퇴하여 시의 자기성찰을 깊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내용의 결핍 대신 형식의 다양성과 충실성에 시인들의 노력이 집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에 대한 집착이 1980년대의 시가 지닌 문제점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경향은 오히려 역사의 퇴보요 시의 퇴행이라고 악평을 할 수도 있다. 한 쪽이 너무 강조된다고 해서 그것을 악으로 설정하는 것은 논리상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의 시에는 그런 혐의가 너무 짙게 깔려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목청을 높였던 시인들이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로 살아있다는 점에서 이 모순에 대한 자기 책임을 어떤 식으로든 공론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90년대 이후의 시에서 보이는 가장 큰 문제점을 두 가지만 짚고서 마무리하겠다. 먼저 ‘현미경 증후군’이다. 허만하의 등장 이후, 그 방법의 명확성이 매력으로 작용했는지, 이것이 문단에 한 유행이 돼버렸다. 아주 작은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려는 경향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기법은 잘 하면 좋지만 조금만 허술하면 시 전체를 우습게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기법이 시 한 편에 발견의 재미를 주는 데 치중해 시집 전체의 큰 흐름을 답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많은 시인들이 잊는다.  시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노래하는 데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양식이다. 그러나 작은 것에 너무 집착하고 그것을 그리는데 정력을 소진하면 정작 큰 것을 담지 못하는 비극에 도달한다. 한국의 시는 지금 바로 이 마술에 걸려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시는 몇 행으로 인생을 요약하기도 하는 엄청나게 큰 양식이다. 큰 것을 담을 수 있는 데도 작은 것에 집착해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잔재주에 매달리는 것이다. 작은 것에 집착하여 그리느라 큰 것을 정작 말하지 못하는 ‘현미경 증후군’이야말로 한국시가 넘어야 할 한 벽이다. 물론 이것이 거대담론을 놓친 시대의 상황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규정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조건마저 뛰어넘지 않는다면 시인의 영혼은 죽은 것이다. 죽은 자들이 쓸 수 있는 시는 쓰나마나 한 시이다. 다음으로 ‘애늙은이 증후군’이 있다. 인생의 달관을 노래하려는 경향이 그것이다. 이것은 세밀한 것을 만들려는 앞의 경향과 맥을 대고 있다. 사회 변혁은 어찌 보면 꿈이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 친 것이 1980년대이다. 그런데 그런 몸부림을 허황한 것으로 보면 그 나머지 시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달관이나 꿈 없는 노인들의 목소리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에 꿈이 없고 늙은이들이나 볼 수 있는 희망 없는 달관의 표정들은 이런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달관들이 정말 삶의 깊은 내면에서 울린 것이라면 그것이 독자의 감동으로 이어지지만, 정말 많은 젊은 시인들의 그런 표정이 어쩐지 어거지로 만들어 낸 조작품 같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런 유행의 한 흐름을 타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젊은 시인에게 아픔 없는 꿈의 상실은 치명상이다. 시대의 그 무엇을 아파하기도 전에 달관부터 하고 60대가 된다면 누가 거기에 동의하고 함께 슬퍼하겠는가? 이 무기력한 마술을 젊은 시인들이 풀어야 할 일이다.  이 두 가지 증상은 그러잖아도 심화되는 시의 소외 현상을 자초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한국 시가 새로운 방향으로 자기 혁신을 시도하여,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이러한 내부의 무기력증부터 극복해야 할 것이다.(4338. 5. 19.)
9    재확인하는 시집 댓글:  조회:5174  추천:0  2015-02-11
  2004 시집 기상도 정진명    ■다시 시집을 읽으며   내가 이른바 등단이라는 걸 한 것이 1987년도 겨울이니까, 벌써 15년도 더 된 적의 일이다. 등단이랍시고 한 뒤로 변변한 활동도 보여주지 못하다가 1993년에 시집 두 권을 내고는 그 뒤로 세상으로부터 눈을 떼었으니, 정확히는 10년 세월을 눈감고 보낸 셈이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그것을 회복하려고 활쏘기를 배웠고, 곁들이로 배운 활에 미쳐서 문단이라는 동네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1994년 2월에 집궁을 했으니, 정확히 10년이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글쟁이의 고약한 심사가 발동하여 그 동안 내 의지와는 조금 다르게 활에 관한 책을 몇 권 썼고, 그것이 문단에 눈 돌릴 경황이 없는 원인을 제공했다. 10년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보니 활 쪽에서 내가 해야 한다고 믿었던 일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그러니 이제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 떠밀렸다.   그렇다고 해서 활을 쏘는 동안에 시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활을 쏘면서 건강이 회복되는 그 정력을 시로 분출했기 때문에 건강이 더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 수준을 유지하게 된 데는 활에서 얻은 에너지를 시 쪽으로 옮겨버린 것이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만큼 나는 시를 많이 썼다. 10년 세월 1천 편을 썼으면 결코 적은 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 생에서 내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시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동안 눈을 뗐던 세상 실정을 알아보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앞섰다. 가장 좋고 빠른 방법으로 우선 그 동안 읽지 못한 남의 시를 우선 읽기로 했고, 그 목표를 1천 권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2003년 하반기부터 읽기 시작해서 2004년 하반기로 접어드는 지금 850권 째를 통과했다.   이 작전에는 방법이고 뭐고 없다. 손에 잡히는 것을 다 읽어버리는 것이다. 이미 간행된 시집들을 닥치는 대로 순서 없이 읽으면서 보니, 내가 눈을 잠시 떼었던 지난 10년간 진행되어온 문단의 변화랄까 이런 것이 눈에 보여, 그것을 한 번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그런 작업의 뒷목인 셈이다.     ▼2004년에 보는 시집 기상도   는 말은 원래 사주 명리학의 대운을 셈하는 방법에서 나온 말이지만, 지난 10년 세월의 문단 변화에도 이 말은 적실하다. 가장 먼저, 그리고 손쉽게 눈에 띄는 것은 1980년대를 어떤 당위성처럼 몰아쳤던 노동문학의 몰락이다. 물론 이것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징후일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의 고르바초프로부터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가 그 첫 단추의 징후였으니, 이후 옐친과 푸틴 정권을 거치면서 러시아는 격동이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순식간에 체제의 변화를 겪었다. 자본주의의 전 지구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체제 변화는 그러한 체제를 꿈꾸며 사회 변혁을 시도하던 운동권 세력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것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사상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사회 변혁과 그 전망을 노래하던 시 역시 사상의 부재와 빈곤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징후는 시에서 사상운동의 맏형 노릇을 하던 창작과비평사의 변화에서 한눈에 드러난다. 반동보수화가 그것이다. 창비시선 100번까지 개괄해보면 대체로 작품성보다는 사회변혁과 양심을 가진 자들의 정직한 세계가 시집 출판의 기본 요건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100번을 넘어서면서 이런 구분점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실천문학사 같은 유사한 출판사의 시집 출판이 그런 분위기를 희석시켰을 것이다. 그러다가 200번 쪽으로 다가가면 그때는 사상성은 어디로 사라지고 작품의 완결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미 이때쯤이면 노동문학으로 대표되던 이데올로기가 시에서 힘을 잃고 그 반동으로 작품의 완결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유미주의 방향으로 흐른 것이다.   노동문학을 얘기하면서 실천문학사를 빼놓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실천문학사는 창비보다 오히려 더욱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는 노릇을 해왔다. 그리고 시집으로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니 이 잡지의 방향은 노동문학의 현주소를 잘 보여줄 수 있다. 2004년 상반기 현재 실천문학의 시집 시리즈는 156번까지 나왔다. 그런데 이 중에서 100번 이전의 시집들은 대부분 절판되어 구할 길이 없고 도종환이나 김남주 같은 유명 시인의 시집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근래에 출판된 100번 이후의 시집들 중에도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것이 있다. 이것은 실천문학사의 영업 담당자가 귀띔해준 사실이다. 그러니 이른바 노동판의 고단함과 노동자의 해방을 염원하는 작품들이 이른바 문학시장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쯤 되면 노동문학은 침체나 퇴조라는 말보다는 차라리 궤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 싶다. 시는 노동을 말하기조차 꺼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에서 남는 분야는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이다. 곶감 빼먹듯이 고독이나 우울, 절망 같은 것을 끄집어내어 영탄조로 노래하거나 낯설게 하기 수법으로 새롭게 포장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청률을 의식한 방송 편집과도 같은 것이어서 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다.   문제는 창비가 여기에 발벗고 나섰다는 점이다. 아마도 시장성 확보와 생존 전략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이런 변신이 신자유주의의 경제논리에 백기를 들고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변화된 환경 속에서 출판사가 살아남아야 그나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궁색한 논리를 앞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등뼈를 발라낸 뒤에는 사람이 설 수 없는 것처럼 창비가 추구한 민족 민중주의 정신을 빼면 창비의 시에서 건져낼 만한 것은 없다. 창비의 변신은 생존의 논리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인하여 그러한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의 근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점을 낳는다. 추종자들을 한 순간에 역사의 천덕꾸러기로 만드는 어이없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어떤 변명을 해도 창비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창비의 이런 변화는 다른 출판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창비가 잠식한 부분은 그 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꾸준하게 전담하다시피 한 부분인데, 창비쪽에서 시장을 잠식해 들어오자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방향전환을 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는 유미주의, 쾌락주의, 실험주의화로 귀결된다. 창비에게 잠식당한 시장을 실험시 쪽으로 극단화하여 자기정체성을 확보하는 방향을 택한 것이 주된 전략이다. 문학과지성시인선 200번 언저리에 포진한 시집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쉽게 확인되는 것은 김행숙, 윤병무, 함성호, 김중, 조인선, 김점용, 성기완 류의 시집들이다. 이들은 현실에 대한 문제보다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착을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또 이미지 조작을 통해서 그것을 무의식 내지는 집단무의식까지 파고들려는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는 맹랑한 것들도 있어 이런 경향들이 시의 한 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런 현상을 문지 2세대 현상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문지 1세대와 이들의 관계이다. 문지 1세대는 황동규, 오규원, 이하석, 이태수, 이기철 같은 사람들이다. 2세대에 견주면 이들은 실험시보다는 오히려 전통 서정시에 가깝다. 그것은 아마도 그 후의 작품들 때문에 실험성이 덜 심해 보여서 생긴 현상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시를 계속 쓰고 시집을 계속 내면서 2세대의 특징을 시집체계 안에서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사의 시간 누적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1970년대 중반에 창비를 필두로 문지와 민음사 세 곳에서 시리즈로 시집을 내면서 시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러다 보니 문단에 일정한 구획이 그어지고 그에 따라서 출판사 가족 비슷한 무리가 생겼다. 한 20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출판사별로 1년에 시집을 내는 권수는 제한되고, 이 식구들은 불어나면서 시집 출간의 일정량을 스스로 채워 이제는 시집을 내겠다고 청탁하는 사람들이 불필요해지는 식구 과잉이 생긴 것이다. 제 식구 챙기기에도 바쁜 상황이 벌어진 이 사태 앞에서 불리한 것은 당연히 신인들이다. 이들의 시집 출판이 어려워졌고, 이것은 그 식구들이 갖는 어떤 경향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전에는 어느 집단으로 소속되기 힘들게 되며, 그것은 신인들이 쉽게 길들여지는 아주 보기 안 좋은 결과를 유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경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문학과지성시인선이다.   그러나 문제는 창비와 문지 두 군데 모두 이러한 경향의 원칙에서 엉뚱하게 벗어나는 시집을 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작품 수준도 형편없을뿐더러 경향도 다른 시집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가족온정주의가 얼마나 끈질기고 불편한 함정으로 한국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가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런 기득권 밖의 세력들은 새로운 모색을 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같은 구도를 비집고 등장한 출판사 가운데 세계사와 문학동네의 약진이 두드러져 보인다.   세계사는 1989년 하반기에 1호를 내는 것으로 벌써 100호를 채우고 새로운 기획으로 전환했다. 무엇보다도 세계사는 선발주자인 민음사, 창작과비평사, 문학과지성사가 지닌 온정주의의 폐해를 단호하게 극복하고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시집을 기획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도시문명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기획을 하여 일정한 작품들을 엮었다. 물론 대부분 앞의 세 출판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시인들이지만 앞의 세 출판사가 자신들의 원칙을 스스로 허무는 시집들을 간간이 낸 것에 견주면 세계사의 원칙고수는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고, 어려웠을 일이며, 이것은 분명히 역사의 평가를 받을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문학과지성사의 기획과 어떤 차별성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남은 숙제이다.   문학동네는 1994년부터 시집을 기획 출판했다. 그런데 문학동네 시집의 특징은 앞의 다른 출판사들과 특별히 구별되는 바가 없다. 문명비판이나 현실 참여도 아니고 개인의 상상력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어서 후발주자로서 갖는 신선함이 다소 떨어진다. 굳이 문학동네 시집의 특징을 찾아본다면 시의 완결성에 있다는 점이다. 즉 그 이전 출판사의 시집들 중에는 형편없는 작품들이 많아서 작품의 완성도나 경향보다는 사람 때문에 시집을 내주었다는 혐의가 짙은 시집들이 많다. 그러나 문학동네의 시집을 보면, 앞 번호 쪽의 형편없는 몇 권을 제외하면, 형상화 면에서 일정한 선을 넘고 있다는 점이 나타난다. 나름대로 시의 수준을 정해놓고 좀 처진다 싶은 작품들은 제외시켜서 시집의 형상화 수준을 고르게 유지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시가 작품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판단을 하면 이러한 시도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유미주의 경향에 집착하면 때로는 시가 말장난으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것들에 대해 사상성을 고려하지 않은 선택이 가져올 후환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시의 완성도도 사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상이 곧 정치 이데올로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만 간단히 밝혀둔다.   그리고 이들보다 좀 늦었지만 새로운 시도로 시리즈 시집을 내는 출판사가 나타났다. 천년의시작사나 시와시학사, 문학과경계사, 문학판, 시선 같은 출판사들이 그런 경우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시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다양해진 시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만 써놓으면 시집 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시가 어느 정도 수준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시인들은 정말 행복한 고민을 할 때이다. 좋은 시만 쓰면 그것을 내줄 출판사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시가 점점 위축되고 독자가 줄어드는 이 세계 문명의 주된 흐름 속에서 이는 분명히 한국시의 한 특이한 현상임이 분명하다. 이에 대한 분석은 다른 장을 요구할 것이다.   ▼한국 시의 한 코미디, 신춘문예   좌주문생제라는 것이 있다. 좌주(座主)는 시험관을 말하는 것이고 문생(門生)은 그의 문하생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과거가 처음 시행되던 고려 때의 일이다. 시험관은 응시자의 당락을 결정짓는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 결과가 발표되고 나면 합격자는 자신을 뽑아준 좌주를 마치 아버지처럼 여기는 관행이다. 이것은 당시 고려사회의 귀족문벌을 견제하기 위해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은 선비들이 만든 관행이다. 그래서 성리학자인 이색도 이 제도의 좋은 점을 살리자는 논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자일 때의 문제이다. 이들이 왕의 후원을 입어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세력으로 성장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때는 권력의 중심에서 자기 권력을 확대재생산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전락하고 만다. 자기 식구 끌어주기라는 천박한 방법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고려 후기의 혼란과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이 폐단을 절실하게 느낀 태종은 정치개혁의 첫 번째 슬로건으로 좌주문생제의 폐지를 주장하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조선조에서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이 고착화될 때 이조 정랑 자리를 놓고 비슷한 소란이 반복되었다. 결국 선조조 이후에는 붕당정치라는 사색당파로 자리잡았고, 그것이 조선의 정치판도를 결정짓는 밑그림이 되어버렸다.   엉뚱하게도 좌주문생제를 거론하는 것은 이른바 추천이라고 하는 제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근대문학 형성기부터 오늘날까지 일관되게 적용되어 시인을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추천제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추천을 해주는 어떤 권력을 전제로 한다. 그 권력이 좌주문생제 초기의 취지를 살려서 이 땅에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애초에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거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문제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추천하는 세력의 경제전략과 문화 패권 전략에 맞물려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추천 제도의 좋은 점을 들추어서 그 순기능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일정 부분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추천 폐지론자조차도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제도 때문에 상처받는 자들이 존재한다면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상처는 추천 과정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활동 방향과 시의 경향을 결정하는 것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인 것이다. 추천의 문턱을 엿보는 자는 아무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스스로 그런 경향에 기대고 그렇고 그런 평가 속에서 거기에 맞는 작품을 쓰는 풍조는 한국시의 장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좌주문생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이 추천의 관행은 옛날 과거제도의 악습이 봉건제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뒷골목 문화 속에 그대로 재연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언가 권위 있는 단체에 인정을 받아야 안심되고 그런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힘을 구사할 수 있다는 유치한 발상이 문학이라는 분야에 적용된 것이 추천제도의 본질이다. 구시대의 유습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은 칭찬 받아야 할 요소보다는 비판받아야 할 요인이 더 많다. 더구나 뽑는 자와 뽑히는 자의 관계가 뽑고 뽑히는 관계로 끝난다면 그만이겠지만,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추천이라는 제도는 시인이 누려야 할 자유를 억압하는 한 기제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한 권리이면서 족쇄가 된다. 이 권리와 족쇄는 그를 뽑은 사람과 잡지가 부여하는 것이고 평생 그 짐을 벗기 힘들다는 점에서 시인에게는 가장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하면 안 된다.   추천제도가 정말 불가피한 경우라면 문학지의 경우는 그래도 덜하다. 그러나 각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는 한 마디로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들이 추천해준 문인들에게 무슨 발표지면을 할애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후원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후원을 해준다는 것은 더 이상한 일이지만.) 문단 바깥의 문밖 권력이 언론이라는 한 조건만으로 시인 딱지를 붙이고 떼고 하는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고 쓰러진 장승이 벌떡 일어설 일이다. 그런 웃기는 일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언론의 장단에 춤추며 놀아나는 이 코미디야말로 한국 시가 지닌 모순의 한 극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의 시가 진정으로 발전하려면 이런 장난을 그치고 시집 발간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 시인의 조건은 그가 지닌 타고난 재주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지구력이다. 그런데 이른바 추천제도는 그 단발성으로 인해 이 지구력을 고려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고 나서도 몇 년 뒤에는 이름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시인이 나타나는 것이다. 시의 천재가 아닌 한 평생을 두고 시를 쓸 수 있는 지구력은 시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것을 추천제도는 감당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지구력을 측정하는 방법은 여러 해에 걸쳐서 시인에게 발표지면을 할애해주면서 마침내는 시집을 내주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호기심으로 잠시 얼굴을 비쳤다가 시큰둥해져서 스스로 주저앉아버리는 뜨내기들을 얼마든지 걷어낼 수 있고, 정말 시가 좋아서 평생의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살아남아서 시집으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문단 관행으로는 절대로 이것을 이룰 수 없다. 잡지사조차도 신인상 모집을 하면서 1회 10편 안팎의 작품으로 시인을 선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반짝 재주보다는 그 시의 뒤에 서려있는 정신과 지구력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 10편 가지고는 그게 잘 나타나지 않는다. 추천자가 신통한 무당이 아니라면 알아볼 도리가 없다. 그러니 선무당이 신통한 무당이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신인들이 지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그들이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면 된다. 그것이 시단의 중진과 원로들이 해야 할 일이다. 당장 등 따시고 배부르다고 악습에 안주하는 것은 어른들이 하실 바가 못 된다.   ▼사소하나 큰 문제① : 한자표기   우리 동네에 도서관이 하나 생겼다. 새로 생긴 도서관인 만큼 모든 시설이 다 새로운 첨단이어서 대출부터 반납까지 모두 빌리는 사람 스스로 해야 하는 체제였다. 짬을 내서 돌아보고는 몇 차례 시집을 빌려다가 읽었는데 하루는 시집을 빌리려고 대출기 앞에 섰더니 컴퓨터 시스템이 고장나는 바람에 직원이 직접 접수를 받았다. 마침 그날 빌린 시집이 정희성의 였다. 대출장부에 기록을 하는 사람은 사서 아르바이트생이었는데 시집을 내밀자 표정에 곤혹스러운 빛이 잠시 스쳤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 이 아가씨가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직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대출 도서명을 적는 칸에 라고 쓰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내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왜 를 으로 읽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에 풀린 내 생각은 이렇다. 시집은 주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시집이 팔리는 상황이니, 아마도 는 사랑과 관련이 있는 말일 것이고 반납 받을 때 자신만 알아보면 되니 반납될 때 역시 이 의문의 문자를 으로 읽으면 될 일이다. 이것이 나의 추정이다.   내 추측이 맞는지 안 맞는지 그 처녀에게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왜 시에 한자를 쓰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암시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한자는 결코 시에서 용납해서는 안 될 이물질이 돼버린 것이다. 문제는 시인들의 의식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한계급이고, 그런 전통은 우리 사회가 인문학에 근거한 교양주의의 덕목을 존중하는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 정도는 어느 정도 멋으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근대시 초기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런 전통은 지금까지도 시에서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 괴상망측한 인습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이미지의 문제를 들어서 한자가 시에서 차지하는 이미지의 비중을 문제삼기도 하지만 그건 궤변 지나지 않는다. 이미지가 유독 한자에서만 버릴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이 궤변임을 증명해주기도 전에 이미 독자는 한자를 버린 것임을 도서관의 그 아가씨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미 시대는 한자의 함정을 건너 영어로 건너가 버렸다. 차라리 영어를 쓰는 것이 더 낯익다. 그것이 이 사건이 암시하는 바다. 한자를 버리지 못한 자는 시인들 자신일 뿐이다. 이미 시대는 한자를 버렸다. 옛날의 낡은 체제를 아쉬워하는 어설픈 지식이 한자로라도 권위를 한번 세워보려고 버둥거리고 있는 것이 한자 혼용의 본질이다.   게다가 시에서 한자를 쓰는 것이 이런 단순한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자를 쓰는 것은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허는 짓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한자는 봉건세계의 반영이고 청산되지 못한 낡은 시대의 굴레라는 점 때문이다.   세계사에서 상식으로 굳어진 사실이지만 한자는 중세의 공용어고 공용어와 민족어의 관계는 근대를 가르는 중요한 한 기준이 된다. 원래 근대는 중세 봉건체제가 허물어지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중세의 특징은 사상과 삶의 보편성에 있다. 그 보편성은 역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몇 가지 큰 특징을 갖는다. 전제왕권의 확립, 율령체제의 성립, 보편종교의 존재, 보편언어의 성립과 같은 것이 그런 것들이다.   따라서 중세체제란 많은 논란이 있지만 동양에서는 일정한 전제왕권이 성립되어야 하며, 그 왕권을 실행하기 위한 법과 제도가 구비되어야 하고, 그것을 뒷받침하여 정신을 순화시킬 보편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천하에 두루 전달할 문자언어가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세 보편언어란 유럽에서는 라틴어, 동양에서는 한문을 말한다. 따라서 근대란 이들의 특징이 무너지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즉 중국 중심의 세계 지배가 흔들리고 민족 중심의 국가가 탄생하며 기독교나 민중종교가 발생하여 기존의 보편종교인 유교, 불교의 체계를 흔드는 그런 시점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근대의 징후가 자국어의 확립이다.   이른바 ‘근대’가 자국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전개되었다는 것은 세계사에서 일반화된 법칙이다. 라틴어로 쓰여서 종교권력자들만이 볼 수 있던 성서가 독일어, 불어, 영어, 스페인어 같은 지방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고 그들 스스로 그것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문화면에서 볼 수 있는 근대의 징후인 것이다. 여기서 합리와 이성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정신이 싹트는 것이다. 유럽의 근대국가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성립하고 발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라틴어로 시를 써서 영어권에서 발표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것은 곧 중세언어로 시를 쓰는 광대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예외가 제 나라 시로 인정받는 나라가 있다. 한국의 오늘이 바로 그 나라이다. 역사에서도 삶에서도 이론상 중세가 이미 말끔히 청산된 이 나라의 현대시에서 아직도 중세의 유물인 한자는 그대로 생생히 살아 숨쉬는 것이다. 이 지독한 후진성과 자기모순을 예술과 문화의 선봉이라고 자부하는 시인들께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세계사의 흐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말을 아끼고 다듬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시인에게 한자표기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 언어체계에서 한자는 외국어이다. 그것도 제2 외국어로 분류된다. 영어에 제1 외국어의 자리를 넘겨준, 국민들의 선택권으로부터도 한 단계 더 떨어지는 먼 자리에 있는 문자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한자가 시의 독자층을 제한하는 아주 중요한 역기능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잖아도 시의 독자는 줄어든다. 시의 위기론은 결국 독자들이 감소한다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 위기를 가장 확실하게 부채질하는 것이 한자라는 것이다. 막말로 말해 시에 한자 한 글자를 쓰는데 수십 명의 독자가 시로부터 등을 돌리고 떠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소하나 큰 문제② : 문장부호   한자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이상하고 묘한 관행을 시인들이 반복하고 있는 문제가 문장부호이다. 산문의 경우에는 맞춤법에서 정한 규정에 따라 문장부호 체계를 정확히 지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인들은 무슨 특권을 부여받았는지 맞춤법 체계를 완전히 무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것이다. 이 현상은 한두 명한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시인들에게서 나타난다. 너무 많아서 저것이 규칙위반인지 어떤지도 잘 판단이 안 갈 정도이다. 한글표기체계를 지키지 않는 시인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의 한글표기체계는 1933년에 확립되었다. 그때 맞춤법 통일안이 조선어학회에서 채택되었고, 그것은 알려진 대로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었다. 조선어 말살 정책을 고수한 일본제국주의는 이들에게 갖은 죄목을 씌워 심한 고문을 했고, 결과는 두 명의 죽음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원들도 유죄판결을 받은 나머지 복역을 했다. 일본제국주의 경찰은 그들이 완성한 원고를 독립운동의 근거자료로 파악했고, 마녀 사냥식의 악랄한 재판이 진행되던 도중에 다행히 해방이 되어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독립운동 단체들이 거의 다 지리멸렬하던 일제 말기에 우리측의 승리로 끝난 거의 유일한 사건이 바로 이 조선어학회 사건의 전말이었다. 이 민족운동사의 위대한 승리를 스스로 까먹고 먹칠을 하는 시인들의 행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마침표라든가 쉼표, 아라비아 숫자 같은 것들은 1933년 조선어 맞춤법 체제에서 이미 우리가 써야 할 것으로 채택되었고, 그것은 비록 우리 나라에서 연원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세계사의 대세와 올바른 언어체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쓰자고 합의를 본 것이다. 그때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면 그 뒤에 한글을 표현의 도구로 선택한 자들은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 존중이란 그 표기법을 최대한 성실하게 지켜주는 것이다. 시라고 해서 유독 그들의 선택을 굳이 무시해야 할 무슨 불가피한 이유가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시인들은 왜 시에 마침표를 찍는 데 그렇게 인색한가? 그것은 현행 표기법 체계에 대한 무지 때문이거나 그에 대한 가치관의 부재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한자와 표기법 관행을 보면 시인들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정신의 문제   꽤 많은 시집을 읽으면서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묘한 의문 한 가지가 생겼다. 그것은 해방 후의 시들이 해방 전에 쓴 시들의 수준을 따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시의 수준이 후퇴했다는 말이다. 몇 번에 걸쳐서 확인하고 또 했지만, 확실히 해방 전의 시인들이 쓴 시와 그 후의 시는 보이지 않는 묘한 차이가 있다. 양은 어떨지 몰라도 질만큼은 분명한 차이가 난다. 그런데 그 양상과 이유가 분명히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또 다른 고민거리이다. 시집을 바꿔서 교대로 읽어보면 분명히 묘한 차이가 있는데, 증거는 잘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 오랫동안 의문으로 남아있다.   어떻게 보면 시를 쓰는 솜씨나 말 다루는 재주는 오히려 해방 전보다 후가 더 나은 면도 있다. 현란한 어휘 구사나 시공을 뛰어넘는 상상력, 특히 최근에 보이는, 가늠하기 어려운 시들의 언어행진을 보면 동원된 말이나 수사 기교는 읽는 사람의 기를 죽이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혼의 울림은 해방 전의 시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것이 혹시 내가 옛 시에 익숙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최대한 선입견을 없앤 다음 읽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특히 해방직후 그러니까 1950, 60년대에 활동한 시인들의 작품과 그 이전의 작품을 비교하면 그 질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따라서 내가 느끼는 의문은 단순히 개인의 능력 차이보다는 시대의 어떤 문제에서 발생하는 원인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시대를 기점으로 해서 시의 질에 변화를 가져온다고 보는 것이다.   그 정신이란 말할 것도 없이 조선시대를 지배해왔던 유교, 또는 그 주변의 문제이다. 일제강점기를 보낸 사람들은 삶과 사고에서 유교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마지막 세대이고 이것은 그들이 그 이전에 지배층의 행동과 사고에 절제력을 부여하던 세계관의 잠력을 내면에 갖고 있던 까닭에 그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무장한 그 이후의 후배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정치사상이기는 하지만 요즘 말하는 정치사상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거의 신앙에 가깝다. 신앙이라는 것은 영혼의 존재 근거를 묻는 것이고, 그것의 형식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가 현실정치에서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로 굳었지만, 그것이 한 개인에게는 행동과 사고, 나아가 믿음의 근거로 작용하는 종교 노릇까지도 떠맡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교는 단순히 자본주의라든가 민주주의라든가 하는 것과는 어딘가 다른 양상을 지닌다. 그 양상은 세계를 인식하는 형식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그 형식을 자신의 행동에 규율을 부여하는 어떤 내면의 기제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신은 거의 본능에 가깝게 세계를 해석하는 어떤 형식에 집착한다. 그 경우 그들의 의식 속에는 이기철학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주역의 음양오행이 뒤따른다.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보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지 그들의 선배들이 해온 관행의 연장선상에서 그들의 정신이 보이지 않는 어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본능의 작용에 기대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본다. 바로 이런 보이지 않는 형식과 규율에 대해 내면화된 경향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 양식이 도입된 상황에서도 작용하여, 새로운 자유시를 개척하는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런 작용이 아니라면 당시로서는 별종에 가까운 이상의 시에서도 드러나는 엄정한 형식성과, 정지용의 시에서 드러나는 깔끔한 묘사방법, 만해의 시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깊이, 그리고 이육사의 시에서 보이는 살얼음을 걷듯 하면서도 지켜지는 묘한 긴장과 엑스타시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물론 이미 여러 논자들이 이들의 근원에 대해 설명을 하고 어느 정도 그것이 성과를 이루고 있지만, 그것 가지고 그 후의 세대들이 이들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까지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그 어려움은 바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 나아가 내면화된 무의식의 형식에 대한 본능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한두 사람의 성과나 결과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관의 교체시기에 나타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본질과 그 원인을 묻는 것이다. 영혼을 울리는 시의 요소, 그것은 정신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해방 전후인 두 시기의 작품비교를 통해서 보는 것이다.   해방 후 특히 최근의 시는 해방 전의 시들보다 현란해졌고 화려해졌다. 그러나 작품이 주는 감동과 깊이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 점에서는 오히려 퇴보를 했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해방 전에 도달한 시의 경지는 1980년대의 노동문학도, 그 후의 문명비판도, 최근의 고독과 환멸 맛보기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로 우뚝 솟았다. 어떤 거대한 정신의 흔적이 아니고는 오를 수 없는 그런 경지이다. 그 거대한 정신은 유교와 조선 후기의 문화감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해방 전 세대가 이룬 놀라운 성취, 그리고 그 후의 세대가 해방 전 세대의 높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은 유교라는 거대 이념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규율이 사라지면서 정신의 공황 상태가 오고 그것이 시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아마도 누군가 그와 유사한 경지를 개척하기 전까지는 해방 전의 세대가 보여준 높이는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정신의 벽 앞에 서있는 셈이다. 그 은산 철벽을 무엇으로 넘을 것인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 하나 : 노동문학   노동문학은 그칠 수 없다. 인간이 숨쉬고 먹고 싸고 하는 행위를 그치지 않는 한 이 명제는 불변의 진리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과 인간의 관계 때문이다. 자본이 존재하는 한 그것이 인간사회에 야기한 갈등은 사라질 수 없고, 갈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자본에 대한 인간의 전쟁은 그칠 수 없는 것이다. 이때 전쟁은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한다는 것은 물질과 정신 두 측면에서 모두 자유를 쟁취한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곧 해방이라는 말과 같으며 해방이란 여러 가지 질곡을 스스로 풀고 본래 한 몸이었던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내 안에서 평화로운 관계 속에 놓는 것을 말한다. 근원에 대한 이 같은 인간 본연의 갈등을 고착화시키고 그런 갈등을 전제로 해서 특권을 가진 자에게만 무한한 물질의 자유와 영혼의 타락을 부여하고 조장하기에 자본은 인간에게 악의 화신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전쟁은 날숨과 들숨이 교차하는 그 한 순간에도 쉴 수가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자본이 현대 사회를 옥죄는 질곡의 원천이라면 그에 대한 인식과 해결 노력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데올로기 탐구가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실천하는 길이다. 그리고 문학에서 그러한 길로 드러난 것이 1980년대의 노동문학이다.   그런데 10년 세월 동안 흥기하던 이 기운이 또 10년 사이에 무슨 기피해야 할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덕꾸러기로 전락해버렸으니, 이보다 황당한 일도 없을 것 같다. 1990년대를 지나고 2000년대 중반으로 접어든 현재 이 점을 지켜보면 황당해서 할 말이 없다. 박영근, 서정홍, 이선관, 김해자 같은 몇몇 시인들만이 지난 시절의 메아리처럼 노동의 언저리에서 그 고통을 이야기할 뿐 불과 10년 전 입에 게거품을 뿜으며 노동문학의 당위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던 자들이 갑자기 도사가 되어 공중부양을 하거나 제 안의 슬픔 속으로 퇴영하여 제살 깎아먹기를 자행하고 있다.   이들이 보인 행태의 황당무계함은 자본의 문제를 반대로 물으면 입증된다. 한국 사회에 뿌리박은 자본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한국사회의 노동자들이 모두 화이트 칼라화 되어서 더 이상 자본론의 분석과 그에 따른 실천이론 창출이 불필요해졌는가? 노동과 자본의 모순은 해결되었는가?   이 대답에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자본가들 중에서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원점이라는 얘기다.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노동문학의 대열은 사라졌다? 바로 이런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말이 변절이라는 낱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시의 변절자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 사람들을 굳이 꼽을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나 이 질문이 이름 없는 촌놈의 뜽금 없는 발언이 아니라 정의와 미래를 향해서 노도와 같이 진군하는 역사의 물음이라는 것은 이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할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한국시에서 노동문학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한국 노동자의 생존과 한국시의 지형을 결정짓는 주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회색분자들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다 떠난 자리에 남을 사람만 남은 이 어려운 시대에 꼭 필요하고 목청껏 외쳐야 할 말이 있다면 바로 이 말이다.   “이제야말로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허리띠를 다시 조일 때다!”   ▼간과해도 되는 문제 : 천민자본주의   몇 년 전에 서울대의 한 경제학 교수가 자신의 글에서 무심코 던진 말이 몇 년이 지난 오늘 노동계의 한국사회 평가답안처럼 자리잡은 말이 있다.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그것이다.   한국 자본가들의 천박한 노동관과 악랄한 사기성에 치를 떨던 노동자들은 이 말이 나오자마자 한국 자본의 모순을 한 마디로 압축한 말인 양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자본을 비난하는 심정이 빚어낸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문제가 있다. 감정이 실린 이런 시각은 자본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자본은 원래 천한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을 수 없고, 끝없는 탐욕만이 동력이 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그 앞에 천하다는 말을 붙인다고 해서 원래 천한 자본의 본질이 더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감정만 자극함으로써 사태의 본질을 희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천민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스스로 모순을 갖게 된다. 그것은 자본의 본질을 민족성의 문제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런 오류는 의외로 심각한 사태를 유발할 수 있다. 다른 나라, 그러니까 미국이나 유럽의 자본주의는 천민 같지 않고 신사 같다는 인식을 은근히 유포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자본의 성격과 흐름을 냉정하게 보는 시각에 혼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얼마든지 나쁜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1980년대에 한 때 유행했던 종속이론의 경우도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초점을 잘못 맞춘 경우라는 판단 같은 것이 그것이다. 종속이론은 남미라고 하는 특수한 경제조건 때문에 생긴 것이다. 미국의 주변부에서 자본이 중심부로 이동하는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서 형성된 이론이고, 그것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그 본질을 희석시키거나 도외시했다는 비판을 받고는 썰물처럼 운동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있다.   개념의 모호성이나 방향 설정 오류는 때로 이런 커다란 문제점을 안는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는 천민자본주의라는 말도 그런 위험을 다분히 안고 있다. 자본은 민족의 문제나 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사에서 나타나는 아주 보편화된 현상이며 거기에 작용하는 지역이나 민족의 문제는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자본의 전개과정에서 그런 요인을 무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것에 가려서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진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곧장 연결되기 때문이다.     ■맺으며   한국 시는 두 가지 면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시의 시대가 가고 있다는 사실과, 여기에 부합하여 시인들이 백기를 들고 자본에 투항했다는 사실이다. 시의 시대가 가고 있다는 것은 불가항력으로 치부한다고 해도 노동문학의 궤멸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들이 노동문학을 노래하든 말든 노동자들의 궁핍한 영혼은 지금도 자본의 바퀴 밑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그러한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한 노동문학의 당위성은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명명백백한 전제가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시가 다른 분야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만이 갖는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즐겁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에 몰두하면서 그것이 시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은 인간의 순결한 영혼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를 드러내어 이 세계로부터 받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시의 행위를 한순간에 자위행위로 전락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 시는 말장난으로 떨어지고 만다. 시집으로 둘러본 현재의 한국 시는 이미 그런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야말로 그런 말장난을 넘어서 정신의 영역으로 나아가 시의 건강성을 되찾을 때다. 그 말장난과 정신의 경계에 노동문학이 흐르고 있다. 이것을 첨벙거리며 건너지 않고서 어찌 우화등선하겠는가? 새로운 감성과 지성 제1집  
8    詩壇과 그 뒷소문... 댓글:  조회:4384  추천:0  2015-02-11
시단에 떠도는 소문들에 대하여(2012년)                                     정 성 수(丁成秀)        이번엔 대한민국 시단(문단)에 떠도는 몇 가지 소문들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소문은 시단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일부에 해당되는 것이다.    언제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서나 전체가 아닌 일부의 문제는 항상 존재해 왔다. 왜냐하면 지구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불완전한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이다.     1.시인 등단에 대한 소문      잘 아시다시피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공인된 시인이 되는 데는 몇 가지 길이 있다. 우선 중앙(서울)의 각 신문사에서 공모하는 ‘신춘문예’가 있다(지방 신문 신춘문예 당선은 원칙적으로 등단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앙 일간지라 할지라도 ‘당선’이 아닌 ‘가작’ 입선은 등단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신문은 그 대중적 특성상 대량 인쇄되는 출판물이기 때문에 신춘문예에 당선하면 일단 한 시인의 등단 사실이 빠른 시간 내에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다. 거기다가 상금(원고료)도 다른 등단 관문에 비해 그런대로 두둑(?)하다.    또한 수많은 시인 희망자(응모자)들을 제치고 당선했다는 긍지와 자부심, 그 나름의 쾌감도 작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 좋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선배 시인들, 혹은 다른 사람들(아마추어)의 작품 일부를 슬쩍해서, 말하자면 남의 작품을 표절해서 당선됐다는 얘기가 가끔 심심치 않게 솟아나온다.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 신이 아닌 이상 세상에 발표되는 그 많은 시들을 평소에 한 편도 빠짐없이 모두 다 읽을 수는 없다. 그래서 표절에 관한 기본적 허점은 언제나 존재하게 마련이다.    표절이 심할 경우, 당선 취소도 되고 때로는 말만 무성했다가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그 중에는 당선 뒤 환골탈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좋은 시를 쓰거나 남기고 죽은 시인들도 없지 않다.    그런가하면 표절 시비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간판을 적절히(?) 이용, 석사나 박사 과정을 거쳐 대학 교수가 되거나 사회적 감투를 쓰거나 문단 권력층의 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본인의 터무니없는 이론과 주장과는 달리 끝까지 ‘좋은 시’는 쓰지 못한다. 그저 안정된 직장인 대학 교수로, 한 사람의 시인으로, 무슨 단체의 임원으로 적당히 사회적 대우만 잘 받다가 어느 날 이 땅에서 소리없이 사라져버린다.    살아있을 때와 달리 그는 사망하는 순간 시인의 족보에서 자동 삭제된다. 다시 말하자면 시인이나 독자, 평론가, 학자 등 그 누구도 그를 한 사람의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생존 시에 부당하게 과대평가, 과대대우를 받고 살았으니,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순리일 것이다.    또 시단(문단)에서는 이런 소문도 떠돌아다닌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춘문예 응모자와 심사위원의 사전 결탁 문제이다. 보다 젊잖게 말하자면 응모자와 심사위원간의 이심전심이다. 이것은 대학이나 문화센터나 그밖의 공적 사적인 사제지간의 경우 가장 심하고 물론 특별한 예외도 있다.    이렇게 되면 당선돼야 할 사람이 낙선하고 낙선해야 할 사람이 당선되는 우스꽝스러운 비극이 연출된다. 전자의 경우, 즉 표절의 경우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 그 시인은 당선 후에도 대개는 지지부진, 그저 평범한 시만 가끔 써서 시인이라는 이름만 겨우 유지할 뿐 그에게는 훌륭한 시인으로서의 아름다운 미래가 없다. 그래도 죽는 날까지 자신이 신춘문예 출신이라는 그 자부심만은 절대로 놓지 않는다.    아주 드물게 역시 개과천선(?), 나중에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의 경우, 이상하게도 수준 높은, 혹은 개성적인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예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우리 현대 ‘시 문학사’를 보더라도 그렇고(필자가 다른 평론에서 그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지금 생존해 있는 시인들을 봐도 역시 그렇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혹시 신춘문예 출신자들의 쓸데없는 ‘자만심’ 내지는 ‘오만’ 때문이 아닐까?    혹시라도 그것이 그들의 보다 고양되어야 할 시 작업을 망치고 있는 게 아닐까? 피나는 노력보다는 화려하게 등단했다는 긍지와 자부심, 선민의식, 뭐 이런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것들이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을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시인으로 타락시키는 게 아닐까? 이것은 나의 추측이 아니라 시단에 떠도는 소문이다.  며칠 전 대학 교수(문창과) 몇 사람과 술을 마시면서 나온 얘기도 이와 똑같다.      다음엔 ‘문예지’를 통해 시인이 되는 경우를 보자. 월간 문예지, 계간 문예지 등 전국에서 발행되는 정기 간행 문예지들이 적어도 300종이 넘는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문예지(지난 ‘80년대만 해도 중앙 문예지는 10종 내외였다)들마다 1년에 몇 번씩 시인들을 양산한다. 1년이면 엄청난 숫자이다.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시인이 돼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시인다운(?) 시인, 즉 그 나름대로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갖춘 사람이라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전제조건으로 한 경우이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점 중의 하나는 잘 아시다시피 거의 대부분의 문예지가 모두 적자 운영이라는 것이다. 지난 1980년대 말 전후에도 필자 친구인 와 (대한민국 최장수 종합 문예지)의 김필식 사장이 점심을 먹으면서 나에게 이렇게 개탄한 적이 있다.    “이 지금 1,000부(판매부수)가 안 나간다…!”  “그래에…?”    그 당시 나는 깜짝 놀랐었다. 은 자타가 공인하다시피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한국 현대문학사’가 아닌가.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자가 다시 에 추천을 받는 사건(?)이 발생할 정도였다. 그런 조차도…!    적자 운영중인 일부 문예지들이 그 문예지의 수명을 연장하는 수단으로 아직 문학독자 수준을 넘지 못한 함량미달의 평범한 문학 애호가들을 한 사람의 시인(문인)으로 무리하게 등단시키면서 해당 문예지를 100부씩(?) 강매하거나 후원금을 받는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문예지 경영난 상황이 안타깝고 속상하긴 하지만 이것은 한 마디로 말이 안 되는 짓이다. 그 무엇보다도 너무나도 당연히 우선 등단 시인(문인)은 시인(문인)으로서의 역량(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또한 한 사람의 시인(문인)을 등단시키는 해당 문예지가 자기 지면으로 등단하는 시인(문인)에게 상금이나 원고료를 건네주지는 못할망정 그 문예지를 등단 시인(문인)에게 대량으로 강매한다는 것은 글을 쓰는 소위 선비의 행위로서 너무나도 파렴치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신진시인(문인)에 대한 모독이자 시인(문인)들의 등단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누군가가 등단 희망자의 작품을 대폭 손질해 줘서 등단시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엄연히 말도 안 되는 부정행위이다.    그렇게 해서 시단(문단)에 나온들 그 시인(문인)이 제대로 좋은 작품을 쓰는 훌륭한 시인이 되겠는가. 슬프고 쓸쓸한 일이다.    또 다른 등단 방법은 ‘시집(소설집, 수필집 등)’을 출판하고 등단하는 경우이다. 8.15 해방 이후의 경우, 조병화 시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선이나 추천으로 시 1편(혹은 여러 편)을 들고 시단(문단)에 나오는 것보다 시 50~70편을 들고 문단에 나오는 것이 그 시인의 시적 능력을 평가하는 데 더욱 효과적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야말로 한 시인의 시적 역량을 정확하게 제대로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 중에는 시적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작품 수준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인정을 받았는지 하여간 무리하게(?) 등단하는 경우이다. 그런 시인들은 대개 어물어물 시인 행세만 하다가 역시 소식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때문에 시적 역량도 없이 그저 등단만 하는 것이 최선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사기일 수도 있다.    또한 ‘동인지’를 통해 등단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그 동인지의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는 시적 수준이 문제이다. 훌륭한 역량을 갖춘 동인이 한 사람의 시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문단에서 시적 역량을 인정받지 못한 동인지 출신들이 언제부터인가 문단 등단의 질서가 해이해진 틈을 타서 젊은 시절의 동인 활동이 끝나고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아무 문예지에나 대충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 그것도 신인이 아닌 중진이나 대가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우스꽝스러운 행태가 아닐 수 없다.     2.각종 ‘문학상’에 대한 소문   ‘  상은 주어서 즐겁고 받아서 즐겁다’는 말이 있다. 물론 ‘상’이란 것은 말 그대로 좋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학상에는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시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등 역사와 전통이 있는 각종 문학단체에서 제정한 문학상들이 있다.    또한 ‘예술원상’ ‘서울시 문화상’ 등 정부 산하기관에서 제정한 문학상들도 있다. 그리고 작고문인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김소월 문학상’ ‘윤동주 문학상’ ‘만해 문학상’ ‘지용 문학상’‘편운문학상’. ‘동리 문학상’ ‘목월 문학상’ 등 수많은 상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은 것은 여러 문예지에서 제정한 문학상들이다. 상의 종류도 적지 않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그 이름을 다 기억할 수도 없다. 더구나 난생 처음 들어보는 문학상이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문학상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시인(문인)들의 숫자를 당할 재간이 없다.    상을 타고 싶은 사람은 많고 상은 적다 보니 수요와 공급이 원활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상에 얽힌 여러 가지 소문들이 떠돈다.    누구는 상금은 받지 않을 테니 상만 달라고 하고, 누구는 아예 상금을 자기가 내고 상을 타겠다고 하고, 누구는 상금도 받지 않고 후원금도 낼 테니 상을 달라고 하고, 누구는 상을 주면 문단 선거운동을 잘 해주겠다고 하고…사연도 가지각색이다.    또 어떤 문학상들은 크든 작든 상금을 내걸어놓고 실제로는 상금 없이 상패만 주고 만다고도 한다. 상금용으로 수상자에게 빈 봉투만 준다고 하던가. 그야말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하지만 그 어떤 문학상이든 상금이 있든 없든 상을 탈 만한 역량을 갖춘 시인(문인)이 그 상을 탔다면 그것은 아무 하자가 없다. 문제는 상을 탈 만한 역량도 갖추지 못한 함량 미달의 시인(문인)이 문학상을 탔을 때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본적으로 너무나도 잘못된 것이다.    그런 문학상은 상 자체가 치욕이고 따라서 그 문학상을 받는 것 또한 치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상이라면 아무 거나 덮어놓고 타려고 하는 상 중독증(?) 시인(문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쓸쓸한 일이다.    모든 문학상은 상금이 많고 적고 간에 받아서 즐겁고 당당하고 영광스러워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상이 아니라 다만 구차스럽고 수치스러운 구걸 행각이자 역시 일종의 문화적 사기일 뿐이다.     3.문단 권력, 그리고 문단 선후배에 대한 소문      우리나라에는 ‘문단 권력’이라는 것이 있다. 문단 중진이나 원로로서 권위있는 각종 문학상의 심사를 자주 하는 문인들, 유수한 문예지의 주간(혹은 발행인)이거나, 문단에 적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학 교수들, 일부 유명한 평론가들, 혹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각종 문학단체의 장이나 고위직 임원을 맡고 있는 경우 등이다. 아마도 그런 문인들의 힘을 ‘정치권력’과 대비해서 ‘문단권력’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밖에도 전국 방방곡곡의 크고 작은 문학단체들은 부지기수이고 각종 문예지 또한 부지기수이다. 그쪽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문단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문인들 역시 물론 ‘문단권력’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대한민국 문단에서 일정 부분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은 그 문단권력 모두가 살신성인(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의 정신으로 한국문단에 그야말로 양심적으로 좋은 영향력만을 발휘한다면 대한민국 문단은 훨씬 더 풍요롭고 넉넉해질 것이다.    하지만 우선 먼저 문단에서 풀어야 할 시급한 문제 중의 하나가 좀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일부 문단권력들의 권력투쟁이다.    특히 권위있는 큰 문학단체들의 이사장이나 회장을 뽑는 선거에서 일부 입후보자들이 선거 과열을 넘어서 그야말로 후안무치, 상식을 초월한 중상모략, 권모술수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파렴치한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야말로 경악하게 한다.    그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하고 그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보려고 노력을 해 봐도 역시 정상적인 문인의 얼굴이 아니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부 문인들의 경우이다. 일부를 전부로 생각하거나 착각하는 것은 전혀 온당치 못하다.    그것은 마치 일부 공무원이나 일부 성직자나 일부 교육자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 일부가 저지르는 폐해는 엄청나다. 더구나 그들의 상황이 언론을 타거나 인터넷, 또는 법정 쪽으로 이동했을 때, 문인 전체, 문단 전체에 끼치는 이미지 손상, 그 악영향은 그 무엇으로도 메우기 힘들다.    더구나 나쁜 소문은 늘 확대 재생산되는 못된 습성을 지니고 있어서 더욱 큰 문제이다. 적어도 문단선거는 언제나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인이 무엇인가. 인간의 ‘아름다운 영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 세상 모든 것은 상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상식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문단의 무엇이 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은 적어도 문인의 발상은 아니다. 졸렬한 소인배 정치 모리배나 정치 야바위꾼들이나 하는 짓이다.    문단의 질서를 흐리게 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문단 선후배 관계이다. 나이 들어 뒤늦게 어물어물 문단에 나온 지 불과 몇 년밖에 안 되는 신인이 자신의 역량으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지 40년이 넘는 비슷한 나이의 대선배에게 모두 다 명찰을 달고 다니는 문인 모임에서 “당신, 언제 등단했어?”라고 묻는 해괴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오랫동안 문학을 포함하여 최소한 인문학 전반에 걸친 폭 넓은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문단 선배들의 작품을 열심히 읽어보지도 않은 채, 피나는 문학수련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어떻게 적당히 등단 절차를 마치고 문인 행세를 하면서 누가 선배인지도 모르고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작품의 가치 판단도 할 줄 모르면서 그저 여기저기 얼굴이나 내밀고 다니면서 아무 데서나 대우나 받으려고 하고 자기 혼자서 대단히 훌륭한 문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고 한다.    시인(문인)이 이승을 떠나면 남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히 오직 하나, ‘좋은 시(작품)’뿐이다. 그의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대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일종의 참고 자료일 뿐이다.    따라서 그 누구나 시인에 대한 평가는 공평하게도 오직 ‘시(작품)’ 한 가지로 받을 뿐이다. 어디로 등단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수많은 문학상 수상도, 대단한 문단권력도, 요란한 사회적 지위도, 넘치는 경제적 부유함도, 많은 나이도 모두 다 아무 소용이 없다.    김소월 시인이나 이상 시인이나 윤동주 시인이나 김영랑 시인이나 한용운 시인이나 정지용 시인이나 서정주 시인이나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들이 발표한 ‘시’로써 평가받을 뿐이다.    만약 그들의 시가 그냥 그저 그렇게 평범하였다면 지금 이 시간 아무도 그 시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시인은 아무 때나 시인이 아니라 ‘좋은 시’를 썼을 때 비로소 시인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를 남긴 시인의 그 눈부신 탄생은 영원히 반복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시(문학)’의 위대한 힘이다!               -일당산 곰지기 계곡에서
7    詩의 10개 봉우리 댓글:  조회:4355  추천:0  2015-02-11
내가 올라본 한국시의 10 봉우리                                   정진명  1.시와 정신  시집을 읽는 것은 시인의 정신을 만나는 일이다. 이 점을 잊을 때 가끔은 상상이 시의 전부가 아닐까 하는 착각에도 빠져들지만, 상상력은 연과 같아서 지상에 드리운 끈이 끊어지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그런데 나는 시집을 읽을 때마다 꼭 등산을 하는 기분이 난다. 골짜기로 들어서면 나무들만 보이고 한 골짜기를 올라서면 내가 읽어온 숲들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마침내 시집을 덮으면서 정상에 올라온 기분으로 시집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어떤 시집은 바위산처럼 무겁고 당당한가 하면, 어떤 시집은 또 침엽수가 빽빽하여 장관을 이루기도 하고, 또 어떤 시집은 험하기만 했지 정작 올랐을 때의 풍경은 볼품이 없는 경우도 있다. 밋밋한 산, 가파른 산, 깎아지른 산, 황폐한 산, 촉촉한 산, 파릇파릇한 산, 감미로운 산 이루다 헤아릴 수 없다. 이와 같이 오르고 난 뒤의 시집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여러 가지이다.  이때 돌아보는 나의 몸을 떠받치고 있는 산봉우리의 정점은 시인의 정신이다. 그러고 보니 정신은 산을 닮았다. 시의 상상력에는 높낮이가 없다. 산에서 제 각기 색깔을 내는 단풍들처럼 자기 자리에서 빛을 내면서 아롱진 무늬를 보여주는 것이 상상력이다. 그러나 정신에는 높이가 있다.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그 어떤 높이가 각기 있다. 높은 정신이 장대한 상상력을 만날 때 우리는 오르기 즐거운 한 거대한 봉우리를 본다.  시집을, 혹은 시인을 산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에는 정말 많은 산이 있다. 실제 우리나라 땅의 7할이 산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나라의 시인들이 쓴 시집은 이루 다 헬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니 그 만큼 많은 산들이 여기저기서 솟아있는 것이다.  시집이 산이라면 비슷비슷한 군락을 이룬 시집들의 행렬은 산줄기일 것이다. 실제로 시들은 시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서로 닮는 측면이 많기 때문에 줄기줄기 이어지는 산줄기로 표현해도 그리 어리석은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유추에 힘입어 한국의 근대시를 굳이 비유한다면 백두대간을 닮지 않았나 싶다. 해방 전후의 시기와 그 이후의 시기에 쓰여진 시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더욱 절실하게 한다. 해방 후의 시들이 보여주는 높이는 해방 전의 시들이 보여주는 높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해방 전의 시기는 자유시가 막 실험을 시작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형식 면에서도 내용 면에서도 불안정한 시기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시들이 그런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초의 자유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주요한의 경우에도 결국은 새로운 틀을 보여주지 못한 채 라는 엉거주춤한 수식어만 받고서는 끝내 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근대시 초기의 3∼40년 동안, 그 후에 나타날 모든 시의 원형이 완벽에 가깝게 실험되어 어떤 전형을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후에 계속 본받도록 배운 정지용, 김소월, 한용운, 이상, 이육사, 김기림, 백석, 이용악 같은 시인들이 나타나서 자유시라는 이름의 틀을 주물 지어버렸다. 그리고 시대의 탓이지만, 해방 후에는 남북 양쪽에서 불구의 모습으로 시의 역사가 진행되다가 1980년대의 노동문학을 거치면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런 흐름을 보면 꼭 백두대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백두대간은 조선후기의 이른바 '실학자'들이 설정한 지리개념이다. 한민족의 지리를 한반도로 지형을 확정지은 다음 그것을 전제로 설정한 개념이다. 그래서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하여 반도의 오른쪽을 따라 높은 봉우리들을 연결하고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면서 국토의 뼈대를 이루었다는 발상이다. 모든 줄기는 여기서 가지치면서 벌판을 지나 바다까지 달려간다.  그러니까 출발점인 백두산 천지와 그 아래쪽에 펼쳐진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원지대가 해방 전후의 시기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미 이 고원지대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어떤 정신의 형식은 거의 완성됐다. 이 시기에 시를 쓴 시인들의 정신이 너무 높아서 그 후의 시인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그러한 정신이 분화되면서 어느 한쪽으로 몰리는 경향을 띠었다. 그리고 분단 정국이라는 분위기를 타고 기우뚱한 사상의 편향에 말려들면서 시는 쇠퇴 일로를 걸어왔다. 아마도 이것이 추가령 지구대가 지나가면서 만든 낮은 산들의 지역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1980년대의 노동문학을 기점으로 산들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상상력의 백가쟁명 시대를 열기에 이르렀다. 좋게 말해 백가쟁명이지 한 마디로 어지럽다.  그렇다면 지리산은커녕 태백산 언저리에나 와있는지 어쩐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백두대간의 가장 큰 축인 지리산에 이르려면 멀어도 한참을 멀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고매한 정신이 바라보는 태평양으로 뻗은 무한한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아직 꿈도 못 꾸고 있는 것이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바라보는 시의 지형도이다.  결국 상상력이 넓이라면 정신은 높이인데, 산의 높이를 결정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은 가만히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흐른다. 그래서 정신은 시대의 한 복판을 흐르고, 그 흐름 위에서 가장 높은 파고를 만드는 것은 개인이다. 따라서 시대를 잘못 만난 시인이 자신의 능력을 초과하는 높이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딛고 있는 어떤 정신 문명의 현재 위치를 점검하지 않으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해방 전후의 시인들에게는 그 이전부터 흘러오던 유학이라는 도도한 정신의 관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라져버린 이 유학의 관성 밖 어느 곳에서 그 도도한 흐름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시대의 모순을 묻는 물음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요구하는 정신의 문제를 검토하는 일이 될 것이다.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2.시의 열 봉우리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시집 1000권을 읽었다. 말하자면 마음 단단히 먹고 등산을 한 것이다. 물론 아주 많은 봉우리가 그전에 올라가 본 곳이기는 했지만, 새로 올라본 느낌은 또한 숙고해볼 만한 것이었다. 이렇게 산을 오르면서 우리나라에도 만만치 않은 산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 즐거웠고, 이 글은 그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10개를 내 나름대로 뽑아서 간단히 정리, 소개해보자는 뜻으로 쓴다. 이런 정리만으로도 문학사를 조감하는 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가락의 창조와 완성, 김소월  근대 이전에 시는 노래의 가사였다. 이것은 시가 가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전의 전통에 반발하면서 출발한 근대시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제일 먼저 벗어 던진 것이 이 운율이었다. 그만큼 시에서 가락은 굉장한 관성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른바 '자유시'라는 이름으로 시도된 근대시를 보면 여전히 운율의 강한 구속력을 확인할 수 있다. 김동환, 김동명을 비롯하여 1920년대, 30년대에 활동한 시인들의 시를 보면 정형률에 가까운 운율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근대시는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었으므로 일부러 운율에 매달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가운데 시의 가락을 오히려 더 강하게 실험한 시인들도 있다. 김소월과 김영랑의 경우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소월은 우리 문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위치에 오른 시인이다.  유럽의 언어 같은 경우에는 액센트 언어이기 때문에 리듬이 발달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어 역시 사성이 발달해서 운율이 말에 잘 살아있다. 그런데 그런 말과 달리 우리말은 음의 고저장단이 아주 불분명한 말이다. 이런 말에서 가락을 의식하고 조절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이 호흡의 길이이고, 그것은 음수율로 나타난다. 글자수의 개수에 따라서 리듬이 결정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어떤 도식에 의존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을 김소월의 시는 아주 잘 보여준다.  김소월이 전무후무한 위치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그가 가락이 잘 살아있는 노래 시의 시대를 산 사람이라는 것과, 앞으로 오는 세대에는 김소월이 겪은 그런 가락을 겪을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시대가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앞으로 자라는 세대는 영상 이미지로 세계를 인식한다. 그러면 다른 감각이 후퇴하기 마련이다. 특히 청각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 김소월 같이 가락을 살려놓기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소월은 그 이전의 가락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 아니고, 근대시라는 한 형식의 실험기 속에서 한 정형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특징이 있다. 시가 버려야 할 근대의 속성 속에서 오히려 시가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것이 가락이라는 것을 증명한 경우이다. 민요에는 2음보와 3음보가 기본을 이루면서 우리말의 가락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 단조로운 가락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활용하여 그의 시에 적용시켰다. 우리에게 익숙한 '진달래꽃', '산유화' 같은 작품들을 보면 시에서 가락이 얼마나 잘 살아있는가 하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다. 따라서 옛날의 가락에 근거를 두면서도 그 가락을 시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 희귀한 경우이다. 그래서 전통의 계승과 창조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 가락의 전통은 해방 후로 오면 거의 후퇴한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 가락이 시에서 현저히 쇠퇴한다. 김춘수는 가락 대신 시각 이미지를 이용하는 극단의 방향을 선택하여 나아가고, 김수영은 관념화된 세계로 나아가면서 전통 시에서 느껴지던 가락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어쩌면 가락을 무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경우일 것이다. 다른 시인들도 가락을 특별히 활용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시에서 가락은 운명 같은 것이어서 그 후의 시인들에게서도 가락의 특징이 잘 살아나는 경우가 많다. 문병란, 박정만, 양성우, 정호승, 김용택, 곽재구 같은 시인들의 시에서 가락이 잘 살아나고 있다. 가락은 여전히 시에서 중요한 활력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형식이란 어찌 보면 공동사회의 조건이다. 혼자 있을 때라면 형식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둘만 모여도 의사소통의 조건은 형식을 요구한다. 시의 가락 역시 그런 형식의 일종이다. 가락이란 사회성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시의 가락이 민중시, 노동시 계열의 시인들한테서 많이 그리고 우세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런 특성과 관련이 없지 않음을 보여준다.  시각 이미지는 아주 고급스러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선승과 선비들의 시가 고도의 절제된 시각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역시 그런 속성의 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사람들의 시에서 시각 이미지가 우세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의 역사 전체를 운율 지향의 세계관과 시각 이미지 지향의 세계관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김소월은 이미 사라지는 시의 전통인 가락을 시에 아주 잘 살려서 운율의 한 모범을 보인 시인이고, 이 점 앞으로도 김소월을 뛰어넘을 만한 시인이 나오기 어렵다는 점에서 김소월은 우리 근대시의 초기에서 가장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2)새로운 의식 실험의 선봉, 이상  신비평가들이 지적한 는 역사가 짧은 우리 시에서 산삼 노릇을 훌륭히 하고 있다. 모든 시에 이런 속성이 있는 것이지만, 이 속성을 가장 강렬하게 자극하는 방법이 해방 후에 전개된 현대시의 한 줄기를 이루었고, 시인의 공력을 평하는 잣대가 되어버렸다. 이상은 이런 수법의 원조랄 수 있다.  이상의 시를 보면 당혹스럽다. 그 전에 이어진 시의 전통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판이함은 그가 일본의 시를 구경한 데서 말미암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나름대로 소화한 것을 보면 이상 역시 대단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껍데기를 핥는 데에 그치지 않고 수박의 씨까지 뱉은 사람이다.  자유시가 그 전에 이어져온 전통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에서 얻은 이름이었다면, 당시로서 이상은 가장 완벽한 자유시를 구가한 사람이다. 이전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락인데,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가락을 방해하려고 띄어쓰기를 무시한다거나 숫자나 부호를 끌어들인 것이 그런 경우이다. 김소월과는 등을 맞대고 걸어간 셈이다. 그러나 시의 형태만을 일그러뜨려서는 진정한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 자신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괴팍한 그의 삶은 그 한계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이상은 그 정신의 문턱에 도달하기 전에 삶을 마감해버린 셈이다. 유학의 전통이 단절되고 그것을 대체할 만한 것이 이상이 살면서 가고자 했던 방향의 세상에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의 수법으로 주목을 받으려는 속셈을 가진 사람들이 극복해야 할 것은 바로 이상의 시가 남긴 정신의 영역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해방 후 그런 점을 시의 목표로 설정하고 가장 과감하게 밀고 나간 사람이 오규원이다. 그리고 그 후에 형식을 흔드는 시도를 한 사람들 역시 이상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1980년대의 황지우, 이성복, 박남철과 그 이후의 문명비판에 계보를 대고 있는 시인들이 그들이다. 그러니까 이들을 평가할 때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상이 못 본 세상의 자유를 누리면서 과연 이상을 넘어섰는가?  3)정신의 절정에 서리는 무지개, 이육사  이육사는 한시의 장점을 가장 많이 살린 시인이다. 그리고 스스로 한시를 쓴 시인이다. 그래서 이나 같은 시는 아예 절구의 원리인 기승전결을 그대로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바깥 모양만을 닮은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육사의 시에서 볼 것은 그의 시에 서려있는 정신의 강렬함이다. 이 강렬함이 느닷없이 땅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굽이치는 한시의 흐름 끝에서 하늘로 치솟은 것이라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한시는 조선 지배층의 양식이다. 지배층은 나라를 통치하는 자들이고, 그들의 통치는 어떤 관념 위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관념은 이미 성리학이라는 절대 학문으로 조선을 짓눌렀다. 바로 그 무게에서 그의 시는 치솟는다. 한시는 이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 도구로 수 천 년 동안 변함없이 그들의 정서를 담아낸 형식이었다. 이 경우 형식은 아주 정제되어서 감정의 지도 노릇도 한다. 지도란 현실마저 그렇게 바꾸는 힘이 있다. 한시의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이육사의 시에 서린 그 강렬한 느낌은 일제라는 시대 상황의 산물일 것이지만, 그 바탕에는 한시의 절제된 세계관이 짙게 드리웠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 강해야 한다는 믿음과 그 강함이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관철되어 일정한 형식을 드러내는 그 지점에 이육사의 시가 서린다. 강함은 시대와 사람의 산물이지만, 형식은 정신의 산물이다. 이 경우 정신은 바깥으로 투쟁의 동력이지만, 안으로는 단련의 힘이 된다. 그 내면의 단련이 바깥으로 형식을 요구한 것이 시이다.  4)언어와 의미의 정확한 아귀 물림, 박남수.  시를 읽다보면 두 가지 방향성을 느낀다. 언어가 앞서나가는 경우와 의미가 앞서나가는 경우가 그것이다.  언어가 앞서나가는 경우는 현란하다. 의미를 될수록 감추고 상상력을 최대한 부풀려서 시의 공간을 확대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그 때문에 때로는 의미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면 언어만 남는다. 언어만 남으면 윤리를 배우지 않은 청소년들이 어떤 게 불륜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듯이 상상력의 동종교배가 이루어져서 혼란으로 빠져든다. 다행히 그 혼란의 밑바닥에 무의식의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면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차원의 문학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지러울 뿐이다.  의미가 앞서나가는 경우는 멀미난다. 언어가 희생당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달하고자 하는 그것이 잘 전달되기만 하면 언어가 어떤 형태로 일그러지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멀미가 난다. 언어가 제 자리에 정확히 자리잡지 못하고 횡설수설하기가 쉽다. 도구인 언어가 초래하는 부작용이다. 대부분 어떤 사상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진 시들이 그러하다. 1920년대의 카프 시나 1980년대의 노동시들이 그런 경향을 강하게 띤다.  그런데, 이 둘을 정확하게 양분하는 중간지점에서 이루어지는 시가 없을까? 즉 이미지가 의미를 끌고, 의미가 이미지를 밀어서 어느 한 쪽이 조금만 허물어지면 시 전체가 맥이 빠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이 경우 언어는 이미지를 따라서 전개되고 언어의 이미지는 의미의 테두리 밖으로 무리하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언어가 정해주는 테두리 안에서 의미가 살아 숨쉬고 의미가 가져가는 크기 안에서 이미지가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박남수를 그런 경우라고 본다.  물론 박남수의 경우도 실험을 계속 했기 때문에 이미지가 너무 월등해서 의미가 희생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목표지점은, 중간에 드러난 실패작들에서 보이는 이런 경우가 아니라, 언어와 의미가 정확히 맞물려서 서로 부담을 주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성공을 했느냐 못 했느냐 하는 것을 떠나서 그런 경계에 든 시인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성공한 박남수의 시에서는 의미와 언어가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물린다. 그래서 언어가 의미를 꼭 그 만큼만 싣고 가면, 의미는 또 언어에 실려 자신의 뜻만큼만 빛을 낸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시가 드러내는 것은 그 둘의 교묘한 조화와 그 조화가 빚는 빛나는 언어들의 행진이다. 아귀가 꼭 맞아서 선후를 따질 수 없는 경우이다. 이 점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박남수의 공은 어떤 시인보다도 우뚝하다.  5)민족 반역자가 노래한 신화의 세계, 서정주  서정주는 교과서 시인의 대표주자이다. 그렇기에 한국 현대시의 모순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인이기도 하다. 시의 역사성을 논할 때마다 거론되는 그의 친일행각과 그 후의 묘한 행적 때문이다.  카아의 이론을 빌지 않더라도 역사는 어떤 시각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까지 그런 시각으로 재단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회의론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런 회의론조차도 어떤 시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는 사실 없다.  그런 점에서 서정주의 시를 평가할 때 반드시 그의 행적을 소개하는 것이 시인과 독자 양자에 대한 예의이다. 그의 친일 행적을 거론하지 않고서 시만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의 시를 나 편한 대로 이해하겠다는 발상이다. 그건 수용미학으로 접근해볼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이론이 아니라면 독자는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무시하면서까지 서정주론을 쓴다면 그건 고약한 일이다.  서정주는 신화의 세계에 산 사람이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지만,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 그래서 치열한 현장으로부터 이탈하기에 치열한 현장의 정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신화가 재미있다. 게다가 신화는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울림 역시 깊다. 바로 이 점을 서정주 시에서는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의 세계가 서정주 시의 가장 핵심 세계라고 본다. 물론 시만을 놓고 보면 그 이전의 시들이 오히려 긴장감 있고, 절실한 아름다움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의 세계는 설익는 냄새가 나고 외국물도 흐른다. 그리고 과 는 유장하지만 질마재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다. 신라 어쩌구 하는 세계는 말장난이나 정신 장난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을 들어올린 신화를 빼면 서정주의 시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현실로부터 신화로 상승하기 위한 몸부림이 그의 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시의 신화가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6)한국시가 쏘아 올린 자유의 불꽃, 김수영  김수영은 4.19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는 시인이다. 얼떨결에 이루어놓고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혁명이 4.19다. 그렇기에 1년만에 다시 군홧발에 밟혀버렸지만, 행동과 사고가 자신에게서만 말미암는 의지를 자유로 규정한다고 한다면 4.19는 한국의 역사에서 자유가 처음으로 실현된 사건이었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래서 삶에서도 시에서도 자유의 개념을 분명히 알았던 김수영은 바로 이 점을 자신의 시에 담는다. 그리고 그 성공 여부를 판단하기 전에 시를 마감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판단은 지금껏 내려지지 않았다. 김수영의 시는 자유의 완성을 향해 나가는 어떤 정신의 움직임이었고 그의 문제 제기에 한국시가 답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그대로 한국시의 유산이 되어 지속되었다. 7-80년대를 갈랐던 참여와 순수 양쪽에서 그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것이 그런 징후이고, 그것은 그의 시가 완성이 아니라 과정에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김수영에게 빚지고 있는 이 양대 산맥이 한국시의 지형을 결정지은 것이라면 이후 한국시는 김수영으로부터 벗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일이 시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를 완성하는 것임은 자명해진다. 한국시는 김수영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가? 이것은 시의 물음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물음이다. 시는 현실이고, 김수영의 시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7)뿌리뽑힌 자의 길, 신경림  신경림의 시에 길 이미지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길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다. 그러니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농촌에서 도시로 옮아왔다가 다시 자신의 문제로 돌아왔다. 농촌의 풍경을 묘사하는 화자도 역시 대부분 뿌리뽑힌 떠돌이의 시각을 지닌다. 그리고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시의 행로 전체가 길과 맞물린 것까지는 좋은데, 그 원인이 자신의 방랑벽에 있지를 않고 사회의 변화에 있다는 점이다. 농촌이 붕괴되면 자연히 사람들은 도시로 몰리고 도시는 도시대로 농촌은 농촌대로 격심한 변동을 겪는다. 신경림의 시는 바로 그 점을 잘 잡아내고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은 우리 사회의 수 천 년 약속이고 근거였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너지는 지점이 근대이고, 그 근대의 한 복판에 시인이 서있으며, 그 붕괴의 완성은 1994년 우르과이라운드 타결이고, 현재는 그 지진의 여진이 남은 자들의 삶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상태이다. 바로 이 변화를 그의 시는 잘 보여준다. 그의 시는 방법론에서도 분명하다. 철저하게 묘사 중심으로 시를 이끈다. 그래서 자칫 흥분하기 쉬운 내용도 냉정한 시각으로 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변혁 운동과 연계된 시들이 필요 이상의 목소리를 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든 것과는 달리 신경림의 시는 자신의 내면 성찰까지 연결시켜서 육화된 사상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방법의 일관성은 지키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큰 시인한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일이다. 그 방법 속에 무엇을 담느냐는 시인의 몫인데, 그는 자신의 선택에 충실한 경우이다.  8)노동해방의 진군나팔, 백무산  자본이 발생한 이래, 노동 해방은 인류의 가장 큰 숙제가 되었다. 그것은 소수의 독점을 다수에게 돌려준다는 명제인 만큼 소유가 유발하는 투쟁의 한 복판에 시가 서게 됨을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1920년대의 카프 운동과 1980년대의 현실 참여 논쟁이다. 해방 전의 운동은 냉전으로 이상하게 종식되었지만, 1980년대의 문제는 여전히 남한 문학의 숙제로 진행 중이다. 백무산은 그 가운데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시인이다. 물론 그 직전에 박노해가 있지만, 노동해방의 진의에 비추어 볼 때 백무산이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있다.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시를 파악할 때 시는 선전선동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해방 전의 카프 시인들이 쓴 작품을 보면 카프 시의 대표라고 칭찬 받은 임화마저도 형편없는 시들을 써댔다. 이것은 시인들의 능력이 없는 것도 한 이유겠지만, 그들이 시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이 다른 시인들의 생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노동 투쟁의 현장에서 선동을 잘 하는 것이 시의 본 임무라고 보는 시인들에게 무슨 수사가 필요하고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백무산의 시는 이런 단계를 넘어서 성숙한 노동자들의 정신을 대변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까지 갖추었다. 목적이 있지만, 그 목적 때문에 의상을 상하지 않고 오히려 의상을 잘 차려입음으로써 그 목적마저 빛나게 하는 성취를 이룬 것이다. 노동 문학의 단계를 한층 끌어올린 그 정점에 백무산이 서있다. 노동 해방의 현장에서는 계속 같은 이야기의 시가 반복되겠지만, 백무산은 그런 이야기들의 정점에서 새로운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세력에게 희망을 노래하는 진군나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9)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은 시인, 기형도.  철학 쪽에서 사회학 쪽으로 옮겨간 개념 중에 '소외'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주체의 왕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가 주체 밖의 조건에 의해 따돌림당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마르크스 쪽으로 오면 만든 물건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그 물건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왕따가 정신의 영역이든 사물의 영역이든 현대 사회의 가장 흔한 징후가 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 그런 문제점을 개인의 생활 속에서 가장 처절하고 철저하게 보여준 경우가 기형도이다. 기형도는 이 문명을 흉기로 파악한 듯하다. 그리고 그 흉기 앞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말하자면 난도질당하는 자신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시라는 양식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점이 참 불사사의한 일이다. 한 인간이 삶에 대한 자신의 욕구와 본능을 포기하고 그런 자세로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 만큼 그는 이 문명의 폐해 앞에 정면으로 서서 그것을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욕망의 가장 강력한 의지인 '표현'을 했다. 자신을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내던진 자가 이 점마저 포기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시에 나타난 상황을 보면 죽음에 대한 어떤 의지, 말하자면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망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역시 기형도한테서 느끼는 두 번째 불가사의이다.  그렇다고 죽음을 어떻게 해보자고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 가운데 그의 시에서 줄기차게 느끼는 정서는 외로움이다. 그것도 뼈저린 외로움. 그런데 외로우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을 하기 마련인데, 그의 시에서는 별로 그런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그 뼈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관찰하고 관조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의 시가 그리는 냉정한 묘사의 이면에는 그런 것이 엿보인다. 바로 이 점이 아무나 따를 수 없는 부분이다. 뼈저린 외로움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삶이든 시간이든 현실이든 사상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황폐한 쪽으로 몰고 가는 문명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한 이 뼈저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외는 이 문명의 구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형도 이후 한국시에서는 외로움을 말하지 말 일이다. 젊은 시인들로부터 시작되어 중견시인들까지 가세한 최근의 '곶감 빼먹기 파' 모두 합쳐봤자 기형도 높이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는 외로워서 죽은 사람이다. 죽은 척하는 자들하고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기형도 이후 새로운 시의 방향은 송찬호의 시에서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송찬호는 지금 새로운 방향만 바라보며 그대로 멈추어있다.  10) ?  지금까지 아홉 명을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한 명을 더 결정하려고 할 때 언뜻 떠오른 시인은, 윤동주, 한용운, 백석 같은 옛 시인들 말고도 시삶일여(詩-一如)의 문정희, 해골빛 자기 관조의 최승호, 숙명의 그물을 드러내려는 송찬호, 밑바닥 훑기의 김신용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시에서는 무언가 2% 부족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끝내 거둘 수 없었다. 나머지 2%를 채울 때까지 기다려 볼 일이다.  게다가 나머지 한 명까지 결정해버린다면 스스로 우리나라의 최고라고 생각하던 많은 시인들이 실망할 것 같아서 마지막 한 칸은 비워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이 나머지 한 명을 채우기 바란다.  3.맺으며  시집 뒤에 붙어있는 해설을 읽다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해마다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해설의 내용은 훌륭한 시인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작 노벨 문학상은커녕 외국에 우리 시의 현황을 제대로 알릴 기회조차 없는 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해설에 훌륭한 시만 나타나는 것은 해설가의 능력이 너무 탁월한 까닭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정실비평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결론에 지나지 않는다. 장사도 잘 안 되고 읽을 사람도 별로 없는 판국에 좀 그럴 듯하게 설명한들 어쩌랴 싶은 생각도 들 수 있다는 동정론에 동정을 표하고 싶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나, 좀 더 길게 내다보면 그런 동정론과 정실비평이 결국 자신이 들어갈 무덤자리를 파는 짓이 된다는 것은 정신을 차려도 될똥말똥 한 디지털 시대 앞에서 단순한 기우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가 현실을 직시하는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솟구친 정신이 이루는 우람한 산이라면 이런 동정론은 시인들에게 현실에 안주하도록 하는 달콤한 속삭임에 지나지 않는다. 속삭여주면 좋아하는 자들은 소인배들이다. 소인배들의 특징은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칭찬을 좋아하는 것이고, 그들의 허영심에 맞장구를 쳐주는 자들이 있을 때 시는 가서는 안 될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결과는 그들만의 몰락이 아니라 전체의 몰락에 이른다는 점이 사람 사는 사회의 속성이다. 이 사실을 시인들만이 모를 까닭이 없다.  세상에 칭찬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칭찬과 아첨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에게 칭찬이란 복어의 맹독과도 같다. 복용한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독을 뿌려 감성의 싹을 말려버린다. 그러니 자신에게 돌아오는 쓰디쓴 말을 넉넉히 받아들여 자신의 시에 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시인의 태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쓴 소리 비평이 너무 없다. 쓴 소리를 하면 그것을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의 후진성이 그런 풍토를 만든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 주저 물러앉는 것은 늪에다가 돗자리를 펴는 것과 같다. 자신에 대한 채찍만이 한국시의 구원이 될 것이고, 그것이 바닥 없는 질퍽한 현실로부터 저 고고한 정신의 산으로 솟구치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여기 10 봉우리처럼.     
6    동시와 기호학 댓글:  조회:4907  추천:0  2015-02-04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 / 김재수     1. 들어가면서  흔히 요즘을 정보화 시대라 한다. 이는 컴퓨터의 출현과 인터넷이 서로 연결됨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러한 정보들은 어제의 지식이 오늘은 쓸모없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새로운 지식들이 수없이 양산되고 있다. 이와 발맞추어 컴퓨터와 인터넷에 관계된 새로운 용어들도 매일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용어들은 우리말로 바꾸는 걸림 작용을 거치지 않고 외래어나 신조어 그대로 사용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정보화 사회에서 왕따가 될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 상에 활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언어들 가운데 컴퓨터를 활용하기위해서 사용하는 언어와 채팅에서 사용하는 특정언어들이 나타나 우리를 황당하게 하고 있는데 흔히 이를 컴퓨터․채팅언어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는 일상적인 언어에 비해 아직은 언어(言語)라기보다 은어(隱語)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은어들이 컴퓨터나 채팅에서는 이미 언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관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은어 가운데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 용어 말고도 특정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기호도 생산되고 있는데 인터넷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는 통신회사(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하이텔 등)에서 제공하는 채팅방을 통해 리얼타임으로의 나타나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에서부터 개발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음성채팅, 한걸음 나아가 영상채팅까지 가능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채팅을 위해서는 워딩 작업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워딩 작업은 채팅자의 능력에 따라 속도의 차이가 현저하고, 지금처럼 인터넷 전용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전화선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므로 전송속도가 한계가 있어, 장시간의 채팅은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을 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경제적, 시간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점차 채팅을 즐기는 동호인들은 자신들만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긴 단어를 함축하여 생략하거나 특수한 기호를 사용하여 나름대로의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채팅자들의 전유물처럼 사용되던 채팅용어는 어느 사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고, 우리 국어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비사회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도 하나의 언어현상으로 자리 메김 하는 결과를 낳았다. 흔히 언어의 역사성이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언어는 사용하는 시대의 문화에 따라 살아남기도 하고 죽어 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에 대해서 옳고 그럼을 떠나 한번 쯤 관심을 가지는 일도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인터넷상의 대화 언어 중, 시로서 차용이 가능한 기호 언어를 살펴봄으로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미 우리 시단이나 해외에서는 실험정신이 강한 이들이 숫자나 기호를 이용해 시를 쓴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아동문학에서는 ‘아동문학’이라는 특성과 한계가 바른 언어사용에 대해 효용성이나 교육성에 배치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환영받지 못했거니와 ‘채팅’이란 용어가 주는 어감이 아직은 부정적인 까닭에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예는 드물었다고 본다. 다만 낱말의 크기, 형태, 배치의 방법, 글자의 방향을 변경 등 문자가 자리할 지면이라는 평면 환경에 변화를 주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 하려는 경우는 있지만 본격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해 왔음은 사실이다.  “그 누가 새 붓을 잡아 강물 위에 저렇게 새을(乙)자를 썼나??”  이 시는 고려시대 문장가인 정지상이 어린 시절에 쓴 시의 한 구절이다.  강물에 헤엄을 치는 물오리들을 보면서 한자의 ‘乙’자를 연상했으니 가히 동심의 눈으로 포착한 기막힌 발상이 아닌가?  이 외에도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가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3’이라는 아라비아 숫자와 같다”라고 표현한 프랑스의 르나르라는 시인의 관찰력도 그리고 개미와 ‘3’이라는 숫자와 관계 지음도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천재시인 이상도 일찍이 이러한 시도를 했지 않았던가?  시는 감동의 형상화를 거쳐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시적 감동을 이미지 화 해야 시로서 생명력을 얻는다. 이를 위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감각기관을 총 동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도 결국은 시각적인 문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부딪친다. 이럴 경우 일반적인 문자보다 형상화 된 기호를 사용함으로서 이미지의 포착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2. 인터넷 채팅 언어들의 종류  우리가 일반적으로 채팅에서 사용하는 특정언어에 대해 채팅언어라고 말하고 있지만, 채팅언어에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 용어 말고도 특정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기호도 포함되어 있다. 즉, 채팅언어와 채팅문자를 하나로 묶어 채팅용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채팅용어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조아(좋아)" "만타(많다)" "어뜨케(어떻게)" "추카추카(축하축하)" 등 소리 나는 대로 쓰기이다.  둘째,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의 단순 줄임이나 음절 축약의 경우이다.  강퇴:강제퇴장, 천랸:천리안, 방장:대화방의 대장, 안냐세요: 안녕하세요  비번:비밀번호, 낼:내일, 몰팅:몰래하는 채팅, 야녀:야한여자, 번개off-line:깜짝 만남  셋째, 현재 컴퓨터상에 사용되는 각종 이모티콘(emoticon)이나 기호를 하나의 언어로 인식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컴퓨터의 자판에 나와 있는 기호들을 조합함으로 새로운 느낌의 기호를 만든 경우이다.  ^^ = 미소, *^^*, ^_^, ^.^ = 스마일, 웃음, :-), :-( :*< : 에그머니나  1919 : 아이구아이구  20000 : 이만  2929 : 에구에구  50쇼 : 어서 오십시오  8-) : 안경잡이  -ㅅ- : 황당하다  BF : Best Friend. 좋은 친구  DB : 담배  GG : 좋은 게임. good game 의 약자  IBM : 이미 버린 몸  KIN : 즐(세워서 보면 한글 ‘즐’)  OTL : 좌절. 무릎을 꿇고 좌절하는 모습의 상형자.  P방 : 피시방  RG : 알지?  T_T, !_! : 우는 모습,  ☜=이쪽으로  ⁂=눈 내림  ☆=별  ☎=전화  ☼=해  ☾=달  ✉=편지  ㄱ- : 절망  ㄱ-- : 절망  ㄱㅅ : 감사  감4 : 감사  근D : 그런데  ㄳ : 감사  ㄴㄴ : 노노.,아니에요  ㅂㅂ :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ㅂㅂ,ㅂ2-잘가, 빠이빠이  ㅂㅅ : 병신  밥5 : 바보  ㅅㄱ = 수고 하세요,  ㅆㅂ : 씨발 (또는 ㅅㅂ)  ㅇ,ㅇ : 긍정적  ㅇㄷ? : 어디 위치를 뭇는 거  ㅗ : 엿 이라는 뜻 ㅋ 욕할 때  ㅜㅜ ,ㅠㅠ : 그냥 우는 거, 슬플 때  ㅜㅜ : 절망  ㅜㅡㅜ : 왠지 귀엽게 우는 표정  ㅉㅉ : 쯧쯧  ㅊㅋ : 축하  ㅋㅋ, ㅎㅎ : 웃을 때  ㅎ2 : 안녕  ㅎ2 : 하이 의 숫자와 한글 조합한 거  ㅎㄷㄷ : 후덜덜 무서울 때..  ㅎㅎ : 호호, 후후, 허허, 히히  4. 기호 언어로 쓴 동시  필자는 동시를 쓰면서 이미지의 선명함을 위해 문자나 기호를 사용해 본 경험이 있다. 다음 두 편의 시는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이다.  목련  새들이 수다를 떨어  아침을 열고 간  담장  무슨 소릴 하고 갔기에  그랬을까?  밤새  퉁퉁 부은 눈망울로  입 다물던 꽃가지마다  참다 참다가  한꺼번에 터져 버린  하,하,하,하,하,  하, 하,  하,하,하,  하  하,하, 하,하, 하,하,하  목련꽃의 모습을 ‘하’라는 웃음과 ‘하얗다’라는 꽃이 주는 색의 이미지와 점점 많이 피어나는 꽃송이를 ‘하’라는 문자로 이미지화 한 경우이다.  눈 오는 날  이메일을 열었다  깜박이는 커서가  반가움으로 다가온다  창밖을 보며  키보드를 친다  톡톡  톡톡톡  자판으로  네 마음을 두드린다  . .  .. ...  ...  .... ....  ...... ....  까만 역상의 화면에  하얀 글씨가  소복소복 쌓인다.  위의 경우는 까만 하늘에 하얗게 내리는 눈을 형상화 해 본 것인데 컴을 다루는 솜씨가 미숙해서 그 효과는 좀 그렇다.  위 두 편을 쓴 이후 보다 효과적으로 시각화 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상주의 방언’을 연구하면서 ‘사회적 방언’에 눈길이 갔고 이 사회적 방언에서 요즘 유행하는 은어(隱語)를 정리하던 중 컴퓨터 대화 언어를 발견하였다.  다음 작품은 이를 바탕으로 최근에 의도적으로 쓴 시이다.  호박꽃  “너도 꽃이니?”  빨간 홍초가 놀려도  “ ^^ ”  “색깔도 촌스러워라”  장미가 빈정거려도  “ ^^~ "  “ 이 정도는 돼야지 ”  다알리아가 뽐내도  “ ^*^ ”  환하게 웃으며 꽃등만 달더니  “ ^^, ^^~, ^*^ ”  웃음만큼 조롱조롱 번지는  토담 위 호박꽃.  도토리(1)  떼구르르-  내 앞에 와서 멈춘다.  허리를 굽혀 주우려는데  누가 보는 것 같다  데록데록  오물오물  다람쥐와 눈이 마주쳤다.  “ ^*^ ”  “ ~^@^~ ”  못 본채 돌아서서  걸었다.  “ ~^@^~  안 봐도 보인다.  오물오물  좋아 하는 거.  도토리(2)  “톡-”  도토리 하나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쉿!  나무도 풀도 갑자기 숨을 멈춘다.  바람도 잠시 멈춰 섰다.  땅이 천천히 팔을 벌리고  앉아 쉬기 편하도록  자리를 펴고 있었다.  ☞ ◉ ☜  편안해 보였다.  봄  온 몸이 자꾸  간지러웠다.  어디 뾰루지라도 나려나  † ‡  @*@, #*# ...  여린 싹이 흙을 뚫고 나왔네  땅이 갈라지느라고  그랬나 보구나  풀과 나무 잎에도  총총  이슬이 맺혔다  --;  1919  힘들었나보구나.  전화  ☎~~~  ☎~~~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내 목소리가 달려간다.  금방  네 목소리도 달려온다.  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보인다.  ^*^ ?  >*< ?  =_= ?  내 얼굴도 보일까봐  ^*^  ㅋ ㅋ ㅋ  가을걷이  손바닥 만 한  텃밭에 앉아  할아버지 할머니  타작을 하신다.  “나 여기 있어요.”  “나도 여기 있어요.”  들깨도 콩도  깍지에서 튀어 나온다.  ...˚․˚.  . ... .  .. .. ..  깨알은 쓸어 모아  ✉,  ○○○ ○  ○○ ○○○  까만 콩도 쓸어 모아  ✉✉✉  봉지는 달라도  두 분은 마주보며  ~^*^, ^*^~  맺는 말  시도한다는 건 조금은 용기가 필요하다. 더구나 은어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모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은어들이 현실 생활에서 이미 생활언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호로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생활에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 말은 이 언어들이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언어의 역사를 볼 때 생명력을 가진 언어는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죽어버린 경우를 많이 보고 있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를 향유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많고 사회적으로 확산 될 때 생명을 가지는 것처럼. 앞으로 이런 추세라면 이러한 은어들이 새로운 언어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써 온 것이라는 것을 밝힌다.  * 이 글은 신지영 동시인이 "오늘의 동시문학" 2010년 봄호에 위 글에 대한 "반론 토론"으로 제시한 글입니다. 토론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에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  -김재수 시인의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를 읽고  신지영(동시인)  들어가며  2009년 ‘오늘의 동시문학’ 겨울호에 실린 김재수 시인(이하 경칭 생략)의 기고문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에서 제기된, 문자 기호 이외의 기호를 사용하는 문제는, 동시 표현 방법의 외연 확대에 관한 것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화두라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동시 쓰기의 방법 모색은, 필연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해야만 하는 시인들이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는 과제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동시 쓰기를 위한 방법 모색에 앞서 염두해야 할 점은 외연을 넓히는 실험에 있어서 그것이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 내에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숙고라 할 것이다. 격변하는 시대에 도태되지 않는 새로운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장르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간 그 작품은 더 이상 그 장르의 내부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더 이상 그 장르의 이름표를 붙일 수 없게 된다. 김재수는 기고문에서 자신의 ‘기로 언어’라고 표현한 것을 제시하며 그것을 다섯 가지 분류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로 제시된 ‘조아(좋아)’, ‘만타(많다)’ 같은 표현들은 단순한 연철(連綴)이나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하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고, 두 번째 제시된 ‘강퇴(강제퇴장)’, ‘천랸(천리안)과 같은 줄임의 말의 경우는 특정 언어 사용 집단의 은어(隱語)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는 그 본질이 언어적 문자기호로서, 비언어적 기호와는 그 차이를 달리하는 선상에 존재하고 있다.  또한 그 활용 여부 역시 시적 허용 범주 하에 기성 시단에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어, 어떤 새로운 양식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특별히 논의의 대상으로 볼 수는 없으며, 김재수 역시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제시한 아이소타이프(Isotype)는 그 본질상 이모티콘과 동일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비언어적 시각기호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모티콘의 허용 여부와 동일하게 평가하면 될 것이다.  이하 본 글에서는 첫 번째로, 문맥상,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혼돈을 줄 수 있는 ‘기호’라는 개념에 대해 우선적으로 통일 된 정의를 내린 다음 음성 기호의 시각적 변환인 언어적 문자 기호와 비언어적 감성 기호로서의 이모티콘을 구분하기로 하며, 그 후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허용 여부와 한글 자음으로만 구성된 초성조합이 허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나아가 동시가 아닌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 단계에서 그러한 비언어적 기호들의 사용 여부와, 보론(補論)으로 아동문학과 대비되는 지위로서의 성인문학에서 소위 해체시라 불리는 것들이, 동시에 있어 허용 가능하지의 여부에 대하여 논의를 펼쳐나갈 것이다.  1. 기호와 이모티콘의 정의  (1) 기호의 정의와 용어의 통일  기호는 어떠한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이는 부호, 문자, 표지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음성, 표정, 몸짓, 문자, 그림, 음악, 이모티콘 등 지식, 의지,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 일체가 기호의 부분집합에 해당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기호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수단이며, 따라서 모든 기호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사용 될 수 있다 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기호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언어적 기호, 비언어적 기호를 모두 포함하지만, 김재수의 기고문에서 세 번째로 제시된‘기호언어’의 의미는 문맥상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통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의 논의에서 필요한, ‘기호 언어’라고 제시된 것 중 세 번째 위치하는 이모티콘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정의하는 대로 비언어적 시각 및 감성 기호로 표기하기로 한다.  (2) 이모티콘의 정의 이모티콘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대중문화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환경이 접목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모티콘(Emoticon:emotion과 icon의 합성어)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이 합성어는 새로운 형태의 시각 기호인 동시에 메시지에 포함되어 있는 발신자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감성 기호로서 인터넷 채팅이나 휴대전화 문자 발신 시에 그 의미 작용과 역할을 수행한다.1)  2.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활용여부  아동문학이 문학이라는 이름표를 부착하고 있는 이상, 그것 역시 국문학의 하위 범주에 포함된다. 국문학이라 함은‘한국인이 한국어를 사용하여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예술 작품’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문학의 정의를 기호학적으로 접근할 때 의미있는 부분은 바로 ‘한국어를 사용하여’라는 부분이다. 한국어란, 음성 기호이자 언어기호로서 우리 겨레가 쓰고 있는 구체적인 말을 의미하며, 음성 기호를 기록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세종이 창제하여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문자 기호이자 언어 기로호서의 한글을 포함한다.(단 국문학의 범주에는 한글이 범용되기 이전의 향찰, 이두, 한문도 포함하다.)  그러기 때문에 일단 구비 전승되는 시가(詩歌), 전설(傳說)이 아닌 이상에야 국문학은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로 이루어져야 하며, 마찬가지로 아동문학 역시 한글로 된 문자 기호로 이루어져야 한다(단 전체적으로 한국어로 씌어졌다고 볼 만한 분량의 작품에서 음성으로 전환될 될 수 있는 소량의 외국어, 아라비아 숫자 등은 사용되어도 국문학으로 본다.) 이제 이모티콘이라는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지와 비언어 기로호서의 이모티콘과는 다르게, 본질적으로 언어 기호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한글 자모의 단독 사용이 과연 한글의 음소문자로서의 성격과 관련하여 동시에 허용되는지 여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동시에 있어 독음(讀音)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의 사용 여부  국문학상의 시의 정의는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을 의미한다. 또한 국문학상에서 동시의 정의는 ‘주로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하고 어린이의 정서를 읊은 시’를 의미한다. 이 정의에서 볼 수 있듯 동시 역시 어니이의 정서를 읊음과 동시에 ‘시’의 범주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시의 조건을 그대로 충족하여야 한다. 따라서 동시 역시 시가 가져야 될 핵심 징표인 ‘gkaa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라 무엇이가? 운율이란 ‘시문(詩文)의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이나 유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고 정의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 유음의 반복 등 운율을 의미하는 것의 필수적인 선행조건은 바로 문자 기호의 소리 기호로의 전환, 즉 한국어의 음성 기호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동시 또는 시에서 독음을 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하는 것은, 태생적으로 운율을 가질 수 없는 기호로서, 운문이라는 존재 징표를 필요로 하는 시의 구성 요소로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아가 ‘함축적 언어’라는 부차적 시의 징표에서도, ‘언어’라는 문자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는 시의 구성 요소로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시의 본령이라고 볼 수 있는 동요로 전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활용 면에서도 그 이점이 크지 않다. 그러므로 이코티콘은 감정 전달이나, 이미지 전달에 있어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보다 어느 측면에선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동시라는 장르의 한계 밖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운율을 가질 수 없는 이모티콘이라는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라고 하여도, 그것이 왜 동시가 아닌지에 대한 논증 근거를 우리는 가질 수가 없다. 이는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실험이, 오히려 동시의 존립 근거를 사라지게 만드는 우려를 가져오게 할 수도 있다.  (2)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 배치 허용 여부  동시 역시 국문학이고 입말문학(口碑文學)이 아닌 기록된 형태의 문학이기 때문에 한글이라는 언어-문자 기호로 기술된다. 또한 동시는 대체적으로 아동이 시초부터 일정 부분까지 한국어와 한글을 익힐 때 그 수단으로 사용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장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시는 예술적 완성도와 함께 어린이에게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와 그 문자 기호를 음소에 따라 발음을 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특수한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한글을 포함한 대부분 문자는 표음문자이고, 한글은 그 안에 반드시 소리를 구성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음소문자이다. 한글을 포함한 대부분 문자 체계에서 음소들은 자음과 모음으로 나뉜다. 문자의 발전사를 살펴 볼 대, 초기의 음소문자 체계는 히브리어에서와 같이 자음만으로 이뤄졌고 그 사용에 있어 매우 불편하였다. 예컨대 ‘ㅂ ㅂ’이라는 표기를 접했을 때, 김재수는 ‘ㅂ ㅂ’을 처음에는 ‘바이바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고, 그 다음 목차에서는 ‘ㅂ ㅂ’를 ‘바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듯이, 불안전하고 그 발음에 혼란을 가져오는 기호 체계였다. 그런 후에 인류의 지성이 발달하고, 문자가 발전함에 따라 모음문자가 나타나게 되며, 각 문화권의 음소에 적절히 추가되었고, 그러한 추가가 완성된 후 페니키아 문자를 비롯한 각종 알파벳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글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음소문자는 자음과 모음이 규칙적으로 조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알파벳이 처음부터 어떤 규칙성을 가지고 창제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필요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지금의 문자 구성을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church"같은 모음 하나에 자음이 다섯 개인 1음절의 소리는 알파벳의 성질로부터 어떠한 발음 규칙을 추측해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알파벳 사용자들은 모음과 결합하지 않은 새로운 신조어가 나왔을 경우, 그 발음은 누군가가 정의해 주기 전까지 통일된 발음을 이끌어 낼 수 없는 원시적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창제한 한글만큼은 이런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서 어떤 자음이든지 혼자만으로는 발음할 수 없고, 반듯이 모음과 어울려서 발음하도록 규정한 최초의 문자 체계이다. 세종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발음은 중성 모음 단독, 초성 자음, 중성모음, 종성 모음의 4가지 조합으로 가능하며, 그 조합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이 조합의 배열에 숙련된 경우, 한글 사용자는 한글로 구성된 어떠한 배열이 나와도 그것을 동일하게 읽고, 발음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한글이 매우 진보된 문자 체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글에서는 ‘church"를’ ‘ㅊ ㅓ ㄹ ㅊ’라고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누구든지 한글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자는 ‘처치’라고 쓰고 ‘처치’라고 발음하여야 그 용법에 혼란이 없다. 이러한 탁월한 언어학적 성취는 한글이 세계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로 선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글 제자 원리로 자음과 모음의 조형을 접하고, 그 조형에 따른 음성 기로호서 한국어 발음으로의 전환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동시이다. 그러기 때문에 동시에서는 그 내용과 더불어 또 한 가지의 중요한 목표로서, 어린이의 국어 능력 소양의 발달에 일정부분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감흥 뿐 아니라 국어 능력 고양이라는 이중적 역할이 필요한 바, 국어사용 능력이 완전하지 못한 어린이에게 있어 최우선 순위의 의미 전달 기호는 올바른 의미의 한글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제자 원리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동시의 목표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어린이가 일정 정도의 국어 능력을 갖추기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올바른 국어 생활을 위해서는 한글의 적확(的確)한 사용과 그 사용례를 가르치는 것이 아동문학의 목표 중 하나인 것이다.  ‘시인은 오직 모국어 속에서만 시인이다’ 라는 유종호의 선언처럼, 동시인 역시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은 모국어의 정련일 것이다. 한글이라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 체계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시에서 한글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는 음소의 단독 사용은 장려받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3. 컴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  어린이를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범주는 매우 다양하다. 언어 기호로서 음성 기호와 문자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문학뿐 아니라 몸짓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극과 무용, 문자 기호와 회화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 그림책, 음악 기호와 소리 기호의 결합인 동요 등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 관련된 분야에서 커뮤니케이션에 사용될 수 있는 기호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의 범주 안에서는 모든 종류의 기호가사용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모티콘이라는 시각 감성 기호 역시 아동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의사 전달 수다으로 사용될 수 잇다. 예를 들어 한글을 모르는 외국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바디랭귀지와 같은 몸짓 기호나,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은 그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활용은 언어 기호의 사용이필수적인 동시의 영역에서는 활용이 어렵지만, 그 외의 커뮤니케이션의영역에서는 김재수의 제언처럼 의사 전달의 측면에서 강력하게 활용될 소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연구하는 것 역시 아동문학인으로서 역할 중 하나라 할 것이고, 그러한 새로운 양식의 개척이 곧 아동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모티콘은 다른 문자 기호나 시각 기호에 비하여 감성 표현의 측면에서 강하지만,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기호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감정표현의 명확성, 메시지 이해의 편자, 메시지 내용 전달의 효용성 등 보완점이 필요하다.2)  본론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 여부  김재수의 문제 제기와 더불어, 아동문학에 대비되는 지위로서의 성인문학에서는 이미 이러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시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소위 해체시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다. 해체(Deconstruction)란 프랑스의 쟈크 데리다가 주도한 비평 방법으로 서양의 형이상학적이며 로고스적인 ‘말 중심주의(Logocentrism)"의 허와 실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언어를 개념과 대상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시도했다.  데리다에게 해체란 뮈토스와 로고스를 엄격히 구별하는 플라톤 이래 모든 철학이 문학적인 것에 집요하게 반대 해온 투쟁의 종말이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이 작업을 통해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특정한 분야의 전문적인 텍스트마저도 시적이며 창조적으로 변형시킴으로서 무한한 자유놀이를 하는 텍스트로 번안해 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3)  한국문학에서는 1980년대 박남철과 황지우 등에 의해 씌어진 기존의 시 형태를 파괴한 아방가르드 실험 시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김준오가 1992년 펴낸 에서 사용되었다. 구체적인 작품으로는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시의 어느 날’ 같은 것이 있다. 이 시(?)는 작품의 중간에 시사만화가 안의섭의 ‘두꺼비’라는 신문 만평을 그대로 지면에 옮겨 놓았다. 언어 기호가 아닌 시각 기호로서 회화 기호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시의 개념 징표로서 필요한 ‘운율을 가진 간결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를 시라 불러야 할지에 대해 논의가 있으나 필자는 이 작품을 시라고 부르기 보다는 행위 예술적 측면에서 하나의 퍼포먼스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본다. 작품의 행위자 황지우 본인의 표현대로, 황지우의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4)는 것처럼. ‘말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음성 기호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말을 하는 양식을 파괴하겠다는 것은 곧 시의 조재 증명인 운율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황지우의 행위 예술은 시라는 양식을 해체함으로써, 파괴라는 새로운 양식을 설정한 것이고, 그것이 시가 아닌 해체시라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따라서 황지우의 이 행위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떠나, 이 행위는 이미 시의 범주를 넘어선 새로운 양식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더 이상 전통적인 시를 읽는 독법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해체시 역시 시의 한 갈래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바, 이러한 견해를 다를 때, 과연 동시에서도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사용하여, 해체 동시(?) 라는 양식을 인정할 수 있는가의 가상적 논의 역시 한번쯤은 필요할 것이다. Deconstruction, 즉 해체라는 것은 Construction, 즉 건축한 것을 제거하는(De-)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해체를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무언가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 시에 적용한다면 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동시에 있어 해체 동시가 필요하다면,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동시의 개념 징표에서와 같이, 동시는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한 시이다. 그러므로 시인 자체는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을 수 있지만 독자인 어린이는 아직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동시의 역할은 시에 대한 이해태도를 갖추기 위한 구축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직 시에 대한 이해도가 완숙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해체를 먼저 배우라는 것은 걷기도 전에 뛰는 법을 배우라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문학에서의 해체 동시라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나오며  급속도로 변화되는 현대에서 모든 예술은 시대의 정보와 유연성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며 동시대를 비평하거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거나 융합된다. 예술은 고유한 가치인 자신만의 아우라를 지켜내며 지나간 시대의 형식을 답습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이유는 예술이 갖고 있는 태생적인 천성 때문일 것이다. 고루해지지 않으려는 본능, 상투적인 인습과 제도의 틀에 갇히지 않으려는 자유로움, 결코 시대를 변명하지 않는 자존감 등은 예술이 자신을 지켜내는 독자적인 생존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여서 발현할 때 한 가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가장 근본적인 장르의 틀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일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 자신이 이미 자신을 버리고 다른 대상의 이름을 취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지킬 수 없게 된다. 새로움에 목말라 자칫 잊기 쉬운 이 기본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 아래 글은 동시인 신지영씨의 토론에 다시 반론으로 쓴 글입니다. 동시에서 기호언어 사용과 해체시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의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를 읽고  김재수  들어가면서  2009년 ‘오늘의 동시문학’ 겨울호(28호 p110~p123)에 “기호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란 제목의 글을 기고한바 있다. 이 글을 기고하면서 ‘채팅용어’가 사회적으로 아직은 긍정적으로 수용되지 않는 상태이고 이런 용어들로부터 만들어진 기호언어들이 아직 은어(隱語) 수준이며 더구나 아동문학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모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은어들이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어른들도 즐겨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 국어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언어현상으로 자리 메김 하고 있는 현실이다.  아동문학에서 이러한 기호언어의 사용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이냐에 대해서는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이러함에도 이 글을 편집자와 의논하여 기고하게 된 까닭은 이를 계기로 그동안 우리 아동문학계에 뜸했던 토론의 장이 열릴 것 같고 동시가 보다 새롭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이 글이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도 등재되면서 온라인상에서 몇몇 분들이 격려와 우려의 댓글을 달아 관심을 가졌는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그러다 2010년 봄호(29호 p168~178)에 신지영 동시인이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의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가 토론의 주제로 게제 되어 고맙기도 하고 다행스러웠다.  신지영 동시인(이하 경칭생략)은 매우 논리정연하게 ‘기호와 이모티콘의 정의’를 시작으로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활용 여부’, 특히 ‘동시에 있어 독음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의 사용여부’,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 배치 허용 여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에 대해 해박한 시론과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였다. 그런데 필자의 견해에 다소 비판적인 측면에서 자기의 주장을 제시 하였다.  하여, 필자의 의도와 다른 견해는 다시 설명하고 간혹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할 부분은 지적하여 오해를 바로 잡고자하며 편의상 신지영이 제시한 논의의 순서를 따라 이 글을 풀어나가고자 한다.  1.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에 대하여  신지영은 이 글의 서두에서 기호언어 사용이 동시 쓰기를 위한 방법의 모색이라 해도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 내에 있는지 여부를 고려해야 하고 새로운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장르의 범주를 넘어서면 그 작품은 장르의 이름표를 붙일 수 없게 됨을 우려하였다.  우리나라 동시의 출발을 계간 ‘오늘의 동시문학’은 1908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점으로 잡고, 2008년을 ‘한국동시100주년’에 대해 집중 조명하였다. 이로 보면 우리 동시의 역사는 이제 100년에 불과하다. 동시라는 이름표를 달고 본격 동시가 씌어 지기 전엔 전래동요가 유일했고, 1923년 소파가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여기에 ‘형제별’, ‘늙은 잠자리’를 발표하면서 동요가 창작되기 시작하였는데 1925년 이전까지는 주로 창가 형식의 동요가 대부분이었다가 1933년 윤석중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가 나온 후 비로소 동시의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동시의 장르 문제는 전래동요 이후 요적(謠的) 동요, 시적(詩的) 동요라는 과도기적 형식에 머물러 있기도 했고 창작동요, 동요 시, 동시의 형태를 거쳐 오늘의 동시문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래동요, 창작동요, 동요시, 동시, 아동시가 장르적 경계를 확연하게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어왔다. 그러다가 이원수로부터 ‘동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시 된 1969년(이원수 아동문학전집 29권 동시작법 1969)을 전후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여러 아동문학가들-예컨대 이오덕, 이재철, 신현득, 김종상과 평론가 최지훈 등에 의해 정리되면서 최근에는 동요와 동시와 아동시를 각각의 장르로 구별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동요는 최지훈에 의해 동요시와 동요가사로 나누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신지영이 서두에서 동시의 장르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아마도 ‘기호언어를 사용한 동시쓰기’와 이를 바탕으로 쓴 6편의 동시가 자신의 동시라는 장르의 기준에 미흡했거나 모호했기에 서두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함에도 필자는 예의 5편 동시가 동시라는 장르적 틀에서 벗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탈 장르의 의미는 내 작품이 구체적으로 동시가 제시하는 장르적 기준에 맞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신지영의 말대로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에 벗어났다면 내 작품은 동시가 아닌 아동시 이거나 동요라는 말이 된다. 또한 이도 저도 아니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생아적 작품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품 속에 기존의 언어와 다른 생소한 기호언어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동시의 장르까지 벗어났다고 예단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 아닐까 한다.  2. 독음(讀音)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이모티콘)활용 여부  신지영은 아동문학도 문학임에 국문학의 하위 범주이어야 하고 국문학의 정의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동시도 한국어 사용과 또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 즉 음성으로 전환 될 수 있어야 함에 역점을 두었다. 이 역점은 곧 동시가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야 함을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비언어적 시각기호인 이모티콘이 사용될 수 있는지와 언어 기호의 성질은 갖고 있으나 한글 자모의 단독 사용이 과연 동시에 허용되는지 여부를 살폈다.  가. 비언어적 기호는 운율을 표현할 수 없는가?  그는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란 무엇인가 묻고 ‘운율이란 시문의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이나 유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라는 정의를 덧붙이면서 운율을 나타내려면 필수적 선행조건이 바로 문자 기호를 소리 기호로의 전환해야 함으로 독음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는 운문이라는 존재 징표를 필요로 하는 시의 구성 요소로 들어가기에는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지영은 운율에서 음성언어만을 강조한 나머지 운율을 가져오게 하는 또 다른 요인들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  첫째, 과연 소리를 낼 수 없는 기호는 운율로 표현 될 수 없는 것인가?  대부분의 문학작품(시와 산문을 포함해서)은 필수적으로 음성 언어 외에도 여러 가지 기호들을 사용하고 있다. 바로 ‘문장부호’이다. 문장부호는 분명히 음성으로 표현 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이다. 그러나 비언어적 기호인 문장부호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시의 운율은 현저히 달라진다. 적당한 곳에 자리 잡은 쉼표(,), 또는 느낌표(!), 줄임표(.....)가 시의 운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시인이라면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다.  둘째, 시에서 운율을 이루는 요인에는 음성 언어 이외에도 또 있다.  다시 말하면 시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행과 연이다. 행과 연은 시각기호도 언어기호도 아닌 시인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운율의 공간이다. 마치 한국화의 여백이 감상자로 하여금 무한한 회화적 상상을 하게 하는 것처럼. 흔한 말로 자유시가 이용할 수 있는 운율의 원천은 기호소리 뿐만 아니라 문장 구성 방식, 소리와 낱말 및 어구, 행과 연의 체계적인 반복, 중간휴지(행의 중간에서 말의 흐름이 잠시 뚜렷하게 끊어지는 것), 행의 길이, 그 밖에 속도를 결정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인해 이루어지고 있지 단순히 음성 언어만으로 결정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행과 연도 없고(물론 산문시는 없을 수도 있다) 아무런 문장부호도 없는 동시를 마주한다면 갑자기 낯 선 사람을 만났을 때의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나. 동시의 동요로 전환 불가능에 대해  그리고 그는 비언어적 기호는 동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동요로 전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활용 면에서도 그 이점이 크지 않다고 했다. 이런 논리라면 모든 동시는 동요로 전환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동시가 동요로 전환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동시가 초기 동요로부터 파생된 것은 사실이나 동요가 반드시 동시의 본령으로 전환해야 된다고 말 할 수 없다.  더구나 오늘 날 동요와 동시는 성격이 분명히 다른 장르의 문학이다. 다시 말하면 동시와 동요는 그 발상부터 다르며 운율 표현 형식도 같지 않다. 따라서 동시를 일부러 동요로 전환해야할 이유나 필요가 없고 본다. 물론 동시도 동요처럼 노래로 작곡이 되어 불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래로 불리는 동시가 반드시 좋은 동시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노래로 불리지 않는 동요는 또 얼마나 많은가.  다. 비언어적 기호와 회화기호에 대한 오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의 구성요소로 인정하게 된다면 회화기호로서 그림을 동시라고 하여도 그것이 왜 동시가 아닌지에 대한 논증 할 수 없어 동시의 존립 근거를 사라지게 만드는 우려가 있다고 했다.  생각해 보자. 화가는 여러 가지 시각기호들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 이미 보편화 되었다. 그러나 시인, 특히 동시인이 한 장의 그림을 그려놓는다거나 여러 가지 시각기호들로만 늘어놓고 이것이 동시라고 발표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고 행여 있다면 그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필자가 예를 들어 쓴 작품 속에 나타난 몇 개의 기호로 인해 이것은 시가 아니라 그림이라고 오해 할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오늘의 동시문학’ 봄호(29호 p192~p193)에 권영상 동시인은 이 계절의 동시 평 ‘익숙한 방식의 틀을 버린 시들’에서 ‘어린이들이 당당한 네티즌이 되었고 네티즌들이 즐겨 쓰는 온라인 부호나 기호를 동시 속에 접목해 본 이런 시도들은 분명 동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 글을 인용하는 것은 권영상 동시인이 내 작품에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서가 아니라 신지영이 불안해하는 내 시를 그는 한 장의 그림으로 인식하지 않고 여전히 한편의 동시로 봐 주고 있다는 반가움 때문이다.  우리 지역의 예술인(문인, 화가)들에게 예의 시들을 제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게 웬 그림이냐?’라고 질문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신지영의 견해는 기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3.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배치 허용 여부  가. 동시는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장르인가  신지영은 동시를 아동이 일정 부분까지 한국어와 한글을 익힐 때 그 수단으로 사용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장르라 했다. 아울러 동시를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지영은 세대 차이로 보면 나보다 어린이들의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을 것은데 오히려 요즘의 어린이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듯하다. 동시를 읽는 수준의 아이들에게 한글을 익힐 수단으로 동시를 읽힌다는 건 어딘가 맞지 않을 성 싶다. 요즘 어린이들은 대부분 조기교육 덕분(?)에 유아원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으며 늦은 경우라도 유치원에서는 읽고 쓰기뿐만 아니라 셈하기까지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초등학교에서 기성 작가들이 쓴 동시를 읽고 낭송해야 할 정도이면 동시를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수준에도 걸맞지 않는다.  왜 그런 오해를 하고 있을까?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살펴봐도 동시는 어린이의 정서와 감정을 시로 표현하고, 표현 된 시를 자신의 정서에 맞게 느낄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도록 한다고 했지 동시를 통해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이 되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나. 교육적 기능수행으로서의 동시  그리고 동시를 어린이에게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와 그 문자 기호를 음소에 따라 발음을 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조합되지 않은 자모의 활용, 예를 들어 ‘ㅋ ㅋ’, ‘ㅎ ㅎ’, ‘ㅂ2 ㅂ2’ 등의 사용은 교육적 기능 수행에 역기능이라는 우려를 나타내었다.  맞는 말이다. ‘시인은 모국어로 시를 쓰는 일이 하나의 사명이다’라고 할 만큼 모국어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나 자신도 시를 쓸 때 외래어나 한자어를 삼가고 되도록 우리말로 풀어쓰거나 우리의 말을 찾는데 고심한다. 뿐만 아니라 성인 시와 달리 어린이들의 감정과 생각을 나타내야 하는 소재와 주제의 제약과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써야 하는 표현 언어의 특수성이 있다. 그러므로 필요 이상 어려운 말이나 이미지의 비약은 동시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는 교육적 기능 수행의 한 부분일 뿐 전부는 아니다. 자칫 지나친 동시의 효용성 강조는 도덕 교과서처럼 일상적인 언어만을 고집하게 되어 시는 경직되고 재미가 없게 된다.  다. 동시의 재미  그래서 동시도 문학 작품인 만큼 재미를 관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효용성과 서로 맞물려 경중에 관한 균형의 문제가 된다면 나는 효용성 보다는 재미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그러기 위해 재미를 찾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시인 전병호는 ‘동시에서 재미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어린이들이 느끼는 재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살펴보면 동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반성을 하게 될 때가 많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가 동시의 효용성을 강조하다가 저지르는 실수를 지적하는 말일수도 있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사용하는 언어를 시어라 부른다. 그 까닭은 일상적 언어는 언어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이 사전적 의미로 지시적 기능에 국한되지만 시어는 관습적인 때가 벗겨진,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의미의 언어이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시인은 아동의 세계(관념적인 동심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아동의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는 물론 아동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고 어린이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말을 찾는 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어린이는 보다 친근하게 시적 정서에 와 닿을 수 있다.  여기에서 어린이들이 현실적으로 즐겨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지영이 우려한 조합되지 않은 자모의 활용들인 ‘ㅋ ㅋ’, ‘ㅎ ㅎ’, ‘ㅂ2 ㅂ2’ 등은 국어교육이라는 효용성으로 보면 문제가 있지만 요즘 어린이들이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에 즐겨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이 용어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기네들끼리는 소리 낼 수 있고 이해하는 것들이다. 그러하여 오히려 동시에 접근하는데 거부감보다는 친밀감을 더 할 수 있는 용어들이라고 생각한다.  라. 자음만의 음소는 소리 낼 수 없거나 이해 불가능한가?  신지영은 한글은 그 안에 반드시 소리를 구성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음소문자임을 강조하면서 자음만으로 이루어 진 ‘ㅂ ㅂ’가 처음에는 ‘바이바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고, 그 다음 목차에서는 ‘ㅂ ㅂ’가 ‘바보’의 소리를 가진 것으로 표기하여 그 발음이나 이해에 혼란을 가져온다고 했다. \그러나 신지영이 잘 못 본 내용이다. 실제 필자의 원고에는 ‘ㅂ ㅂ’가 두 번 사용되지 않았다.(p113 위에서 18줄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p115 위에서 22째 줄부터 ‘ㅂ ㅂ’,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23째 줄 ‘ㅂ ㅂ’, 또는 ‘ㅂ2’, ‘잘 가, 빠이빠이’, 24째 줄, ‘ㅂ ㅅ’, ‘병신’, 25째 줄, ‘밥5’, ‘바보’였다) 아마 ‘ㅂ ㅂ’와 ‘ㅂ ㅅ’을 혼돈 했거나 ‘밥5’, ‘바보’를 잘못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지영의 표현대로 이것들이 무작위로 나열되어 있거나 하나의 독립된 표현으로 떼어 놓고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자음들이 문장 안이나 시의 행 안에 들어 있을 때는 단어나 행, 연, 문장의 상호작용을 통해 분명히 이해된다.  예를 들어 보자.  아무리 눈짓을 해도  눈만 껌벅이는 너는  아이 참  ㅂ ㅂ  라는 시가 있다고 하자. 이 때 어린이들은 ‘ㅂ ㅂ’를 모음이 없다고 해서 소리 낼 수 없을까? 아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소리를 낸다. 그리고 ‘바이바이’라고 말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 정말 바보가 아니라면. 당연히 글의 문맥으로 ‘바보’로 소리 내고 이해한다.  또 하나 더 보자.  헤어지기 싫어  얼굴은 돌리지만  발길은 차마 떨어지지 않아  무거운 손  빈 하늘에 들어 본다  ㅂ ㅂ  라는 글에서 마찬가지로 ‘ㅂ ㅂ’를 ‘바이바이’라고 소리 내고 이해하지 ‘바보’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종은 참 우리글을 우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떤 자음 혼자만으로는 발음할 수 없고 반드시 모음과 어울려서 발음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영어의 ‘church’를 ‘ㅊ ㅓ ㄹ ㅊ’라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처치’라 쓰고 ‘처치’라고 발음하여야 그 용법에 혼란이 없게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꼭 자모를 조합하지 않아도 자음만 단순히 나열 된 것마저 어려움 없이 모음을 불러와 소리 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마. 동시의 역할이 어린이 국어 능력 소양 발달인가  동시 뿐 아니라 모든 문학 작품이 국어와 관련되고 또 국어 학습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신지영은 동시가 한국어 발음으로서의 전환을 배울 수 있는 곳이고, 동시가 중요한 목표로서 국어 능력 소양 발달에 일정부분 책임을 지고 있고,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감흥 뿐 아니라 국어 능력 고양이라는 이중적 역할의 필요와 또한 한글 제자 원리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동시의 목표 중 하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국어 교육과정상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문법, 문학 영역 중 문법 영역에 관한 목표는 될 지언 정 문학 즉 동시가 담당해야 할 역할은 아니라고 본다.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 올라있는 진선희의 ‘시 텍스트에 대한 초등학생들의 학년별 인식 및 선호 양상 연구’ 중 ‘ 1. 시 교육에서의 텍스트’ 첫머리에 “시교육의 목표를 범박하게 말하면 ‘시적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시’라는 개념 혹은 문화적 관례, 가설들이 존재함과 독자가 그것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교육적임을 전제로 한다.” 라고 밝히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2007-79호(별책 2) 초등학교 교육과정과 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2007-79호에 따른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Ⅲ)(교육과학기술부.2008. 4.1)가운데 문학부분, 그 중에서도 시와 관련된 내용을 학년별 작품의 수준과 범위도 살펴보았다. 하지만 신지영이 제시한 동시의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면관계로 구체적인 수준과 범위, 성취기준, 내용요소는 생략하기로 한다.  결국 신지영의 주장은 동시의 역할에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바. 자음만의 음소와 이모티콘이 과연 불필요한 시도인가  신지영은 한글이라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 체계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고 장려 받지 못한다는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하고 넘어 가야 할 것은 자음들로 이루어 진 몇 가지 용어들이나 필자가 차용하여 동시에 사용한 것들은 대부분 글 전체에서 극히 제한적이고 보조적 이미지로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시나 산문에서 모든 단어나 문장이 모음을 무시한 자음만으로 글을 썼다면 이미 작품이 될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이다.  신지영이 밝힌 바처럼 우리글이 우수한 자모관계를 가진 문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오늘 날 어린이들이 ‘ㅂ ㅂ’, ‘ㅋ ㅋ’, ‘ㅎ ㅎ’를 모음이 뒤에 붙어 있지 않는다고 해서 소리 내어 읽지 못하지 않는다. 글을 읽는 이는 자연스럽게 문맥의 흐름에 맞추어 ‘크크’, ‘쿡쿡’, ‘킥킥’, ‘호호’, ‘하하’, ‘호호’ 등으로 오히려 자모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크크’, ‘하하’라는 글자보다 더한 다양하게 읽고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시라는 장르에서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고 장려 받지 못한다고 확대 해석하거나 매도 할 수 있을 것인가?  신지영이 말하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체계인 훈민정음도 맨 처음 만들어 졌을 때는 스물여덟 글자였다. 그러나 이 문자 체계도 시대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사라진 것이 네 글자나 있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각각 시대마다 사용한 문자와 말들이 오늘날 엄청나게 소멸, 생성하며 변화해 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에 대해  커뮤니케이션의도구로서 이모티콘의 활용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즉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은 그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역시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활용은 언어 기호의 사용이 필수적인 동시의 영역에서는 활용이 어렵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우리의 일상을 살펴보면 필수만 존재하지 않는다. 필수가 존재하는 곳에는 당연이 선택도 있기 마련이고 필수를 보조하는 또 다른 역할들이 있게 마련이다. 동시가 언어기호 사용이 필수라 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시적 이미지의 표현에 필요하다면 동시에도 선택적 보조 자류가 필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있어서 컴뮤니케이션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작가와 독자가 작품을 통해 서로가 소통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동시의 문제는 작가와 독자의 눈높이 문제, 생각의 차이, 문화와 경험의 차이로 인해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대 있다. 신지영이 긍정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이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단순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라 하더라도 동시가 독자와 가까워지고 소통하는 일에 일조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5. 기호 언어와 낭송 동시에 대하여  신지영의 지적과 궤를 달리하지만 결과적으로 같이 논의해야할 ‘낭송’의 문제도 이 기회에 그 견해를 밝히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 다음과 같은 눈둥그리님의 댓글이 달린 적이 있다.  “새로운 시도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는 낭송할 때 그 느낌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고 시의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데 기호언어들은 어떻게 낭송해야 할지 좀 고민이 됩니다. 09.12.16 11:45 ”  눈둥그리님의 우려는 ‘동시가 낭송될 때 음성기호가 아닌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있다. 좋은 지적이다. 특히 시낭송은 동시가 낭송자를 통해 청중과 완벽한 컴뮤니케이션을 이루어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위해서 낭송자는 청중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보다 입체적으로 전달하기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기에서 음성기호가 아닌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에 대한 우려는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자. 낭송자는 최선의 낭송을 위해 배경음악, 음성의 고저장단, 강약의 조절 등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다. 이때는 주로 음성에 관한 것들이다. 하지만 낭송자는 음성기호가 아닌 것에도 유의한다. 다시 말해 표정, 몸짓, 그리고 행과 연의 휴지부문, 그리고 작품 속에 그려진 문장부호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이미 위에서 밝힌 대로 센스가 있는 낭송자라면 자음 만 있거나 자음에 아라비아 숫자가 곁들여 있는 정도라면 낭송자가 자기의 개성이나 작품의 분위기에 따라 낭송이 가능할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 -_-, 등과 같은 표정 기호까지도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표현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표정으로도, 음성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회화적 기호가 있을 수 있는데 이때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좋은 동시가 좋은 낭송시로서의 조건을 갖춘다면 금상첨화이지만 꼭 낭송하기 좋은 동시가 좋은 동시는 아니지 않는가.  작가는 작품을 쓰는 일에 자유로워야 한다. 작가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시적 감흥이 일어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직관으로 쓰는 것이지 첨부터 무엇을 목적에 두고 시를 쓴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된다. 많은 동시 가운데 기호 언어로 쓰여 진 시가 아니어도 낭송에 적합하지 않는 시는 이외로 많이 있음을 본다.  6.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 여부  다양하게 전개되는 현대 시론과 무관하게 창작해 온 나에게 갑자기 얼굴을 드려 민 ‘해체시’라는 용어 는 나를 당황하기에 충분했다. 창주문학상과 소년지 동시 추천으로(1974년) 등단한 필자는 의도적으로 작품에 논리적 접근을 하지 않은 채 작품을 써왔다. 물론 시론에 관계되는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변명 같지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시론에 내 감성과 직관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나와 같이 시론에 취약한 까닭은 논리를 생명으로 하는 평론과는 생태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미술 작품의 창작을 위해서는 회화나 디자인에 통일, 변화, 비례, 균형, 대비, 대조 등과 같은 원리들이 있다. 그러나 작가들은 첨부터 이 원리나 요소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나타난 직관을 통해 창작 할 뿐이다. 다시 말해 작품을 창작하면서 이곳은 비례이고, 저곳은 통일이라는 등의 요소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면 작품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원리와 요소들이 잘 어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작가의 예리한 직관이 미치지 못한 부분이 될 것이고 이는 또한 수정보완이 이루어지게 된다. 마치 시인이 퇴고를 하듯. 다시 말하면 내가 시를 씀에 있어 첨부터 시론이나 원리에 집착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신지영은 내 작품 속에 표현된 몇 가지 비언어적 시각기호에 대해 ‘해체시’라는 틀을 갖다 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해체시가 필요한가? 묻고 아직 시에 대한 이해도가 완숙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해체를 먼저 배우라는 것은 걷기도 전에 뛰는 법을 배우라는 것과 동일하다고 내 작품을 일단의 행위예술적인 퍼포먼스로 취급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필자는 신지영을 통해 첨으로 해체시와 아주 낯선 대면을 할 수 있었다. 한국문학에서는 1980년대 박남철과 황지우 등에 의해 씌어 진 기존의 시 형태를 파괴한 아방가르드 실험 시들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도, 김준오가 1992년에 펴낸 ‘도시와 해체시’에서 사용되었다는 것도, 황지우의 행위예술은 시라는 양식을 해체함으로써, 파괴라는 새로운 양식을 설정한 것이라는 것도, 또한 데리다로 부터 출발한 해체시에 대해 그 생성과 성격, 즉 기존의 제도, 전통, 관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 굳어져 있으니 이를 해체(d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목표와 방향성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해체시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신지영이 깨우쳐 준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도 동시가 해체동시가 되려면 몇 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첫째, 기존의 동시들에 대한 부정이다.  둘째, 기존의 표현 형식에 대한 파괴이어야 한다.  셋째, 이를 위한 구체적인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 작품이 기존의 동시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 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동시가 갖는 이미지의 명징성 확보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기호언어를 사용하고자 하였을 뿐이지 기존 동시를 부정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둘째, 내 작품이 기존의 표현 양식을 파괴할 만큼 위험했다는 것인가? 자세히 살펴보면 문장부호는 세종이 한글 창제 때 함께 창제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느 때인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졌고 지금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해 비해 최근에 생산된 이모티콘이 기성세대와 일반인에게 생경하다고 해서 과연 표현양식을 파괴하는 요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가끔 어린이 사생대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적어도 중학생이 되어야 사용하던 수채물감을 요즘은 초등학교 저학년도 사용하고 있다. 아이들 중에는 밑그림을 연필이 아닌 수성 싸인 펜으로 그린 후 그 위에 수채물감으로 채색하여 싸인 펜이 번지는 효과를 잘 이용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 때 우리는 밑그림을 연필이 아닌 싸인 펜으로 그렸다고 해서 수채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인가?  셋째, 필자는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이라는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없어 그의 작품 중간에 시사만화가 안의섭의 ‘두꺼비’라는 신문만평이 어떤 의도로 들어 있는지 모른다. 추측하건데 분명히 그 만화는 시의 내용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기존의 운율을 파괴하고자 하는 의도였거나 말하는 양식을 파괴하겠다는 선언으로 삽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시도는 시라는 양식이 생태적으로 다양한 실험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가능하지만 동시는 그 특성상 어렵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의 ‘기호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는 기존 동시를 부정하거나 파괴하기 위한 사상적, 이론적 근거조차도 마련되지 않았다. 거듭 말하거니와 동시의 명징성 확보를 위한 하나의 표현 방법이지 동시 표현의 방식을 파괴하려는 구체적이고 의도적인 행위가 아님을 분명히 하며 신지영의 ‘해체동시’ 운운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오면서  신지영의 토론 주제를 읽고 답글을 다는 일을 조금은 망설였다. 그 이유는 문학 이론에 대해 지극히 일천한 내가 과연 논리적인 해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고, 명료하지 못한 해명으로 신지영의 글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모처럼의 이루어 진 토론의 장에 한 번쯤 답변하는 것이 예의가 될 성도 싶어 용기를 냈다. 내 견해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덧붙였지만 충분한 설명이나 명쾌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며, 경우에 따라 의도와는 다른 곁길로 가 버린 경우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한 점은 너그럽게 이해 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묘한 감정 하나를 지울 수 없다. 사실 맨 첨 이 글을 시도를 하면서 원로 아동문학가들로부터 질책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그것은 회갑을 넘긴 사람이 주책에 가까운 객기를 부린 건 아닌가 했는데 이외로 문학의 효용성이라는 틀로 인해 퓨전(fusion)시대에 걸 맞는 자유로운 사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도한다는 건 조금의 용기가 필요하다. 더구나 은어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분명 모험이다. 그러나 필자는 당분간 여기에 더 머물러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호 언어들과 함께 소통하며 내 작품의 영역을 넓혀 볼 작정이다.    [출처]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 / 김재수|작성자 옥토끼  
5    명동시와 그 해설(1, 2, 3, 4) ㅡ최룡관 (시인, 동시인, 평론가) 댓글:  조회:5388  추천:0  2015-02-04
  한국명동시 감상시리즈 1                                      최흔     시를 어떻게 쓸가? 시는 참 재미있는건데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시가 또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시라하면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앞이 새까매 나죠. 기실 시는 읽기도 재미나지만 쓰기도 재미나는거야.   시를 쓰자면 책을 많이 봐야 하지만 어떻게 하면 시를 쓰게 되는가를 생각할줄 알아야 해. 마음 준비가 있어야 하는거야. 한국의 김완기 시인님은 이런 시를 썼단다.   시를 쓸 때면 김완기   시를 쓸때면 내 귀는 청진기가 된다   새이야기 꽃이야기 돌이야기 벌레들의 숨소리 나무들의 맥박소리   시를 쓸 때면 내 눈은 만원경이 된다 해이야기  별이야기 눈이야기   무지개가 보인다 옥토끼가 보인다     요 시가 시 쓰는 비결을 알려주잖니. 시를 쓸 때 귀는 청진기가 되고 눈은 현미경이 되여야 한다는 거야. 귀가 청진기가 되여 남들이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듣고 눈은 현미경이 되여 남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아내는 거야.자기가 새로 듣고 자기가 새로 본 것을 쓰면 시가 되는 거야.  피ㅡ 새가 울지 어디 이야기를 하니? 울지. 입도없는 꽃이 또 어떻게 이야기를 하니? 그 땅땅한 돌이 무슨 말을 하니? 풀벌레들의 숨소리를 듣는 사람이 어디 있니? 나무가 뭐 동물이니? 피가 있니? 동물도 아니고 피도 없는데 어떻게 맥박이라는 게 있니? 맥박이라는 게 없는데 어떻게 맥박이 뛰는 소리를 듣니? 피ㅡ 다 거짓말이야. 그리구 해며 별이며 눈이며를 보는거지 어떻게 하면 그것들의 이야기를 본다고 하니? 이야기라는 건 듣는 거 아니야. 무지개는 보이지만 옥토끼야 어디 보이는 거니? 옛말에 그저 그런게 있었다는 얘기지. 으음 알았다. 시라는게 그래 거짓말 할래기구나!    얘 봐라. 그게 어디 거짓말이니? 그게 상상이라는거다. 상상이라는게 뭐니? 생각한다는거야. 상상한다는 것도 없는 것을 말하는 거면 거짓말이 아니고 뭐니? 거짓말이라는건 남을 깜박 속이기 위해 하는 나쁜 일이지만 상상한다는건 남들에게 아름다움을 주기 위하여 엉뚱한 생각을 해서 그것을 시로 쓴다는거야. 그러니까 거짓말과 상상은 완전히 성질이 다른거란다. 거짓말은 나쁜 습관을 배양하며 우리들을 잘못되게 만들지만 시를 상상해 낸다는건 우리들의 사고력을 키워주고 총명해 지게하고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해지게 하고 우리들을 훌륭한 리상을 추구하게 하고 분발하게 하고 우리들을 곱게 자라나게 한단 말이다  그러니까 거짓말과 시적상상은 물과 불처럼 다른거야    야!ㅡ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상상이라는게 좋기는 좋구나. 나도 눈을 현미경으로 만들고 귀를 청진기로 만들어야겠다 해해해,,,,                                          2     얘, 내 눈을 현미경으로 만들고 하고 내 귀를 청진기로 만들었는데 왜 시가 보이지 않니? 해해해... 임마 웃기지마. 눈을 크게 뜨면 현미경이 되고 귀를 도사리면 청진기가 되는 줄 아니. 요 아담아를 써야 해. 그래 시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말이지. 시는 어디나 다 있는거야. 니게도 있고 내게도 있고 ,풀에도있고, 돌에도 있고, 나무에도 있고, 새에게도 있고, 하늘, 땅, 해, 달, 병, 바다, 강, 시내물, 하여튼 없는 곳이없고 무슨 물건에나 다 있는거야 거짓말이라구? 신현득시인님이 시를 어떻게 쓰셨는가 볼가. 그분은 [시를 잡아라]는 시를 이렇게 쓰고있어.     시를 잡아라       신현득    풀잎에 파란색이 있듯이 풀에는 풀로 된 시가 숨었다   도랑물에 졸졸졸 소리가 나듯 물속에는 물로 된 시가 숨었다   꽃속에는 향기로운 냄새가 있듯 꽃에는 꽃으로 된 시가 숨었다   아이들아 너희 눈으로 풀잎의 시를 잡아라   너의 귀로 물속의 시를 소리 들어라 꽃속의 시를 냄새 맡아라   아이들아! 들판을 달리며 나비를 잡듯 시를 잡아라        어때. 시가 어디 있는지 좀 알리지. 물에는 물로 된 시, 풀에는 풀로 된 시, 꽃에는 꽃으로 된 시가 있다 그랬지 뭐야. [들판을 달리며 나비를 잡듯/ 시를 잡아라/]라고 했지 뭐야. 이건 어디나 어떤 사물에나 다 시가 있다는 말이야. 그런데 왜 보이지 않지. 그건 우리 눈이 아직 현미경이 안 되였고 우리 귀가 아직 청진기가 못 되였다는거야. 어떻게 현미경이 되고 어떻게 청진기가 되냐고? 거기엔 문장이 많아. 많은 문장에서 가장 주요한것은 상상이야.    상상이란 일종 기억을 떠올리는거야. 지나간 일을 생각해 떠올리는거야. 강하면 자기가 알고있는 강의 색갈, 모양, 소리, 특성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뿐만 아니라 그 강의 위치, 흐름새 및 주위의 사물 그리고 주위사물들과의 관계랑 많구두 많다. 우린 이런걸 많이 생각해 낼수 있는데 그게 바로 상상이라는거야. 으응 그런거구나. 나도 그만쯤한 것은 생각할수 있는데 시를 쓰자면 안 되드라. 그래, 그런것을 생각할수 있으면 시가 되는것이아니야. 그것들을 적당하게 잘 주어 맞추어야 하는거야. 다시 말하면 그런것들을 생각한 다음 상상을 더해서 새로운 느낌을 더 생각해내야 되는거야. 아무도 느껴보지 못한 니만의 느낌을 말이다    야야야, 골이 아프다. 무스게 그렇게 복잡하니? 야, 시 쓰는것도 학문인데 복잡하지 않겠니! 복잡하길래 누구나 다 시 쓰는거 아니야. 꽥꽥거리지 말고 참고 들어봐. 응, 듣는다. 말해. 기억해. 새로운 느낌이 떠오르면 그느낌에 의하여 자기가 상상한것들을 다시 조합, 배렬하면서 수요되는 것은 쓰고 수요되지 않는 것은 버리는거야.나두 단김에 똑똑히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시를 공부하노라면 차차 알게 될거야.                                         3     봄이 왔구나. 개학도 하고 참 좋구나. 따스한 봄날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다닌다는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니! 공부를 하고 들판에 나가면 아지랑이가 아롱거리고 들에도 나무에도 파아란 새싹들이 뾰족뾰족 돋아나고 따스한 바람이 머리를 살살 간지른다.  강물도 시내물도 새봄을 맞았다고 허리를 쭈욱 펴고 자유롭게 흘러가지. 이따금 노란 나비 갈색 나비들이 한들한들 하늘을 난다. 산기슭에 가면 다람쥐들이 제  세상을 만났다고 쪼르르 달아다닌다 오늘은 뒤산으로 진달래 구경을 가고 래일은 앞산으로 살구꽃구경을 다고 짝자궁을 친다. 진달래가 활짝핀 산에 가서 산아래를 굽어보면 아빠랑 엄마랑 봄일을 하는것이 환히 보이거든. 만물이 소생하고 생기를 띠는 이봄이 어떻게 왔으며 누가 보냈는가를 생각하면 고마운 생각에 눈물이 날지경이야. 이런 봄을 시로 쓴다면 얼마나멋지겠어. 얼결에 이런 생각이 들었지 뭐야. 또 멋진  시가 떠올랐어. 그런데 제목을 봄이라고 달지 않고 [온실]이라고 달았지뭐야 읽어보라구? 그래 읽을게   온실 김진태   봄이 큼직한 온실을 만들었다 집 보다도 공원보다도 산보다도 더 큰 온실이다   유리로는 덥개를 할수 없다 하늘도 파아란 뼁기칠한 하늘로 덮었다   때 맞추어 물을 준다 새순이 다치지 않게 고이고이 보슬비로 물을 뿌린다   엄마젖같은 단비물 촉이 솟는다 아가도 덩달아큰다     어디서 그런 시를 가져왔니? 야ㅡ멋있다! 그래 멋있지. 김진태선생님이 쓰신거야. 얼마나 잘 썼니 봄이 온 대지를 온상이라고 하였단말이다. 그렇지 집보다 공원보다 산보다 더 큰 온실, 그 온실유리는 파아란 뼁기칠한 하늘, 새싹에 내린는 비는 어머니 젖처럼 달콤한 비물, 풀싹들이 냠냠 맛있게 받아먹고 나무잎들이 냠냠 맛있게 받아머고 꽃봉오리들이 냠냠 맛있게 받아먹고 빨강꽃 노랑꽃 하얀꽃들을 히히 흐드러지게 피운단말이다. 새싹이랑꽃이랑 얼마나 좋겠니! 그것들만 좋겠니 우리도 좋지, 그래 우리도 좋지. 그래서 [아가도 덩달아 큼다]고 했단말이다.    [봄이 큼직한 온상을 만들었다]는것도 멋있지만 온실이 너무 커서 덮을 유리가 없으니까 [파아란 뼁기칠한하늘로] 온상을 덮었다는것도 상상이 묘하다야 하늘로 온상덮대를 하였다니까 우리 사는 대지가 온상이 되였단 말을 아니해도 온상이라는것을 금방 알수있지? 그렇지? 으응 어디 그뿐이니. 아빠랑 엄마랑 온상에서 새싹들에게 물초롱으로 물을 주는것을 생각하고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여 새순들에게 때를 맞추어 물을 준다고 하였재. 그것도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것처럼. 얘 그런데 [촉]이란게 뭐야? 만년필촉처럼 뾰족한걸 [촉]이라 하거든.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촉은 새싹을 말하는거야. 새싹도 뾰족하게 돋거던 .맞다 그러고 보니까 시라는게 결국은 비기며쓰는게 아니야.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을  서로 비기면서 쓰는것같아. 글세 그런같기도 한데 잘 므르겠다. 이제 시를 많이 읽고 배우면 알게 될거야.                     4     얘, 봄에 대해서 세가지로 나누는 같다 이른봄 ,봄 ,늦은봄 이렇게 말야. 내게 봄에 대한 시가 네것보다 다른게 있단다. 보자 . [이른봄]. 그래 이른 봄도  있지.  어떻게 썼는가보자     이른 봄      최춘애    암탉이 알을 품듯  봄님이 온 세상을 품고 있다 안개 낀 아침   닭의 체온으로 보송보송 예쁜 병아리가 깨이고   봄님의 품안에서 병아리처럼 고렇게 예쁜 연두빛 새싹들이 깨일테지   조올졸 내리는 비는 새 싹의 젖줄   새 싹이 눈을 감고 강아지처럼 젖줄을 빤다     야, 세상에. 김진태시인님은 봄을 [온실]이라던데 최춘애시인님은 이른 봄을 암탉이 알을 품는다고 했구나.암탉이 알을 품으면 병아리가 나오는것처럼 봄이 대지를 품고있으면 병아리처럼 예쁜 새싹들이 나온다고 했구나.정말 근사하구나. 맞아. 정말 근사하다. 참 묘하고 재밋다. 비를 쓰는것도 두시인님이 다 젖이라고 했는데 조금씩달라. 김진태 시인님은 엄마젖같은 비물을 뿌린다고 했지만 최춘애시인님은 .아예 비를 새싹의 젖줄이라면서 새싹이 눈을 감고 강아지처럼 빨아먹는다고 했재. 나는 춘애시인님이 쓴것이 더 재밋다. 강아지가 에미젖을 빨아먹는것처럼 새싹이 자기 어머니 하늘이 내려보내는 젖을 쫄쫄 빨아먹는것을 보는 것 같단말이다    옳지 그렇지! 뭐가 옳지 그렇지야? 전번에 우리 말한것이 맞단말이다. 시를 쓴다는것이 이사물과 저사물을비기면서 쓰지 않았나 했지 뭐냐. 이제 보니 정말 그렇단말이다. [온실]에선 봄을 온실이라고 했재. 그리고 하늘을 온실덮개라 하고 새싹을 촉이라 했재. 이게 그래 두 사물을 비기면서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만들어 쓴게 아니고 뭐야. [이른 봄]도 그래 이른봄을 알을 까는 암탉에 비기고 병아리와 새싹을 비기면서 썼고 비와 젖을 비기면서 쓰고 싹이 비물에 젖는것은 강아지가 에미젖을 빨아먹는것과 비기면서 썼재.    그것만도 아니다. 또 있다. 뭐야? 상상으로 짝을 맞추어 쓰는거야. [봄]과 [온실]을 짝을 맞추고 [하늘]과[온실덮개]를 짝을 맞추고 [비]와 [젖]을 짝을 맞추고 [새싹]과 [촉]을 짝을 맞췄다.  맞다. 그건 김진태시인님이 [온실]에서 짝을 맞춘거고 최춘해시인님은 [이른 봄]에서 [이른 봄]과 [암탉]을 짝을 맞추고 [새싹]과 [병아리]를 짝을 맞췄지뭐야. 그래 이러한 짝은 명사적으로도 짝을 맞출뿐만 아니라 비슷한 사실과 사실로도 짝을 맞추어 쓰고있는거야 [이른 봄]에 나오는 마지막이 그래,.  병아리 깨이듯이 [연두빛새싹]이 봄의 품속에서 깨여나온다는거나 새싹이 빗물에 젖는것을 [강아지처럼 젖줄을 빤다]고 한것들은 모두 사실과 사실을 짝을 맞추어 쓴거란말이다.     야!ㅡ 그럼 시 쓰기가 짝 맞추기라면 너무 틀리는것은 아니겠다. 그렇구말구. 짝을 맞추자면 짝을 찾아야하고 짝을 찾자면 상상을 잘 해야 한다. 히히 시란건 사람의 상상이 쓰는거구나 상상을 잘 하는 애가 시를 잘 쓰겠구나.                                                                    5      얘, 짝이 아니 드러나게 쓰는 시도 있다. 어느 시나 다 짝이 드러나는것은 아닌거야. 짝을 맞춘다는건 상상을하는 주요한 한가지 방법일뿐이야. 기어코 짝이 다 드러나야 된다는건 아니야. 피ㅡ 변작도 많구나. 우리가 이제까지 봄에 대한 시를 공부하였으니까 같은 봄이란 시를 례를 들어볼가 그럼 꼭 짝이 드러나게 쓴다는것이 아니라는걸 알게 돼. 보자       봄       허동인   누가 이처럼 세심하고 부지런 하리오   나무마다 풀마다 빠뜨리지 않고. 꽃 피우게 하고 잎 피우게 하고   땅속에 묻쳤던 씨앗들은 하나하나 움트게 하고   누가 이같은 엄청난 사랑을 지녔으리오   겨우내 잠들었던 곤충들의 알, 번데기 흔들어 눈뜨게 하고   땅속에 숨었던 뱀, 개구리들도 모두모두 일깨워주고     야ㅡ고게 재밋다. 그런데 정말 고게 누기야? 무르는가 해서. 고게 누긴 누구겠니? 고게 봄이지. 봄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입을 꼭 다물고 말한마디 하지 않지만 우린 알아. 봄이란걸.   봄이면 나무마다 풀마다 잎이 피여나고  꽃이 피여나고 흙에 파묻쳤던 씨앗들도 죄다 싹 튼다는걸 누가 모를라고. 봄이면 곤충들의 알이 곤충으로 깨여나고 번데기들은 살때가 왔다고 땅속에서 기여나오는걸 누가 모를라고.봄이면 뱀이랑 개구리랑 겨우내 동면하던 많은것들이 잠에서 깨여나 밖으로 어정어정 나온다는걸 누가 모를라구.웃기재이. 그외에도 많지 물새랑 옌지새랑, 개미랑, 기러기랑, 제비랑 다 겨울에는 보이지 않던것들이 봄이 되면모두 다시 나타나서 봄은 생생 끓는단다.    이 시에 어느게 짝이 있니? 없다. 그래 없지.이 시에 나오는 나무도 짝이 업고 풀도 짝이 없고 씨앗도 짝이없고 곤충의 알도 번데기도 뱀도 개구리도 모두 짝이 없는 외동고지들이야. 그런데 왜 재미 있지? 봄을 맞아 이러한것들이 살아나는것을 누군가가 부지런히 하고있다는바람에 재미가 무척 나게 된거야.  봄이 오니까 자연스럽게되는걸 가지고 어떤 대단한 사람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놓는것처럼 시인이 상상하는바람에 우리가 저도 모르게시속으로 끌려들어갔지 뭐야    맞아 봄이란건 기후가 춥던데로부터 따스해지는것이 봄이거든. 기후가 따사로와지니까 얼었던것이 다시 살아나고 땅속에 들어가 추위를 피하여 죽은체 하고 있던것이 다시 나오고 강남에 갔던 철새들이 다시 돌아오고 하지. 엄마랑 아빠랑 새해농사를 시작하지. 봄은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멀리 갔다가 다시 온걸 우리들에게 알려주는거란 말이다   이 시가 참 묘하다. 시인은 짝을 생각하고 있으면서 짝을 드러내지 않고있지 뭐야. 봄의 짝을 누군지 알수 없는 사람으로 설정했단말야. 이 짝이 뭘가? 기실 사람은 아닌데. 하늘일가? 땅일가? 아니면,,,                                                  6     한국에  오순택시인님이 봄비를 어떻게 썼는지 알아, 참 재밋게 썼어. 봄비라 하면 시인님들이 오금을 못쓰는가봐. 거이 모든 시인님들이 봄비를 쓰고 계시거든. 봄비야 좋기는 좋지 농민들이 밭에다 씨앗을 심어놓으면 싹이 나오지 않다가 하루밤만 봄비가 오면 밤사이에 밭이 새파랗게 되는거야 길가에 풀들도 파랗게 돋아나고. 그런날 아침은 기분이 나재.     왕청같은 말을 했재. 오순택시인님의 시를 본다하구선     봄비    오순택   나직나직 꽃의 말에 귀 기울이는 봄비   꽃잎에  고운  발자국 놓고 간다   알몸이 되어 푸르르 푸르르 떨고있는 풒잎에 앉으면 초록 구슬이 되는 봄비   연못엔 음표를 놓고 간다       야ㅡ요고야 정말 깜찍하네. 어떻게 요렇게 깜찍한 상상을 끌어냈을가? 이제 좀 따져보자   나직나직  꽃의 말에 귀 기울이는 봄비   꽃잎에 고운 발자국 놓고 간다      요 1,2련이 한개 내용이구나.  소곤소곤 나직이 속삭이는 꽃의 말을 듣고 봄비가 꽃잎에 고운 발자국을 놓고 간다는것이 기막히게 재밋재. 봄비와 꽃이 짝궁이 같단말이다. [고운/발자국 놓고 간다]는 발자국이란게 뭐겠니? 봄비가 꽃잎에 내리면서 떨어지다 남은 이슬이지. 그런데 그것을 사람이 걸으면서 남기는 발자국이라고 했지뭐야. 정말 깜찍해. 고것들이 나직나직 말을 주고 받으며 하는짓이 시샘이 나! 두번째 내용이 어떤가 볼가   알몸이 되어 푸르르푸르르 떨고있는 풀잎에 앉으면 초록 구슬이 되는 봄비     첫두련은 봄비와 꽃의 사실을 표현하고 세번째련은 봄비와 풀의 사실을 표현한거야. 그래 비방울이야 옷이 따로 없으니까 알몸일수밖에 없지 [푸르르푸르르 떨고있는 풀잎]이라는것도 표현이 새롭재. 풀잎에 있는 비방울이[초록 구슬]이 된다는것도 재미나게 짝을 찾은거야 이 세번째련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우리앞에 펼쳐주고있지뭐야.   연못엔 음표를 놓고 간다      네번째련은 요렇게 두줄이지만 쟁쟁 소리가 나게 여물었지 뭐야. 비오는 날 연못가에 서서 비방울이 떨어지는것을 바라보면 비방울이 떨어지면서 숫한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연못물이  살작살작 튕기지. 그 동그라미와 튕기는 물을 도레미파솔라시를 펴현하는 음표라고 했지 뭐야. 시인이 관찰이 얼마나 세심하고 짝을 맞춘것이 얼마나기발하고 재미있는지 모르겠어    얘, 이 시에는 짝을 맞추는것보다 더 중요한것이 있재. 짝도 잘 맞추었지만 전반시에 등장하는 비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구나 [귀 기울이는 봄비]라든지 [발자국을 놓고 간다]든지 [알몸]이라든지 [풀잎에 앉는다]든지 [음표를 놓고 간다]든지 모두가 사람처럼 표현하였단말이다. 비를 사람처럼 만들어놓으니까 참 비가 친구처럼사랑스럽고 다정하고 친절해 보이재. 마치 네나 나의 짝궁이 같단 말야    그래 의인법이라고 배워주던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뭐야. 의인화수법을 쓰면 말도 부드러워지고 재미도난단말이다. 야, 이재 보니까 의인법을 잘 쓰면 재미나고 좋은 시가 되는거 아니야. 맞다! 마땅히 그래야 해. 우리와 세상 사물은 모두가 이 지구에서 함께 사는 친구거던. 사물을 의인화하는것도 히히 좋은 시를 쓰는 방법의한가지야.                                    7     시가 어디 있는가? 누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지만 시는 우리들이 있는곳에는 다 있는거야. 문제는 시가 있는것을 볼줄 모르고 캘줄 모르는거야. 시인들은 시시한것같은 일상생활에서 무우밭에 가서 무우를 뽑아내는것처럼시를 쑥쑥 뽑아내고 있는거야. 문제는 사물이나 사실을 어떻게 보는가와 관계된단 말이다.    이른 아침이나 비가 온뒤에 빨래줄에 비방울이 쪼르르 달리지. 그 빨래줄에 제비랑 참새랑 앉았다가 날아가면 물방울들이 주르르 떨어지지. 너 이런걸 보고 시를 쓸만 하니? 그게 어떻게 시가 되느냐고? 그래 우리는 못쓰거나 쓰기 바쁘지만 시인들은 우리가 보기에 시시한 이런 사건을 가지고 재미 있는 시를 썼단 말이다 김희정시인님이 쓴 시 [비 내린 아침]을 한번 읽어볼가.   비내린 아침 김희정    소리 없이 내린 이슬비 은빛 찬란히 빛난다   빨래줄의 수정구슬 하나하나에 작고 어여쁜 무지개가 선다   아침해살에  눈을 뜬 참새는 수정구슬 튕기며 포르르 날아간다        어떻니? 재밋니? 그래  재밋지. 무척 재미있는 시야. 그런데  이 시에는 특별한 언어도 보이지 않아.그저 수수한 언어로 구수하게 엮어내려갔어 무기교가 기교라는 말을 이런 시를 두고 말하는걸거야 [비방울]을 [구슬]이라는것쯤은 누구나 다 할수있는 말이잖아 물방울 하나하나에 [무지개가 선다]는것도 모르긴 해도 김희정시인이 발견한건 아닐거야. 시를 보느라면 이따위들은 많고도 많지뭐야. 다 수수한데 어떻게 좋은 시가 되느냐고? 수수한것 같지만 수수하지 않은 곳이 있지. 그건 이 시의 제3련이야 다시 읽어볼가   아침해살에 눈을 뜬 참새는 수정구슬 튕기며 포르르 날아간다       어떻니? 보이는게 있지 않니? 그렇지. 시골의 아름다운 아침이 보이재. 해살이 부채살처럼 산으로부터 마을로 내리비치는데 빨래줄의 이슬들이 해빛에 반짝인다. 금방 잠을 깬 참새들이 빨래줄에 조롱조롱 앉았다. 내가문을 열고나간다. 참새들이  포르릉 날아가며 째재잭 운다. 빨래줄에선 물방울이 아니라 구슬이 그것도 수정같이맑은 구슬이 해빛에 찬란한 구슬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 아니 많이 주르르 떨어진다. 황홀한 정경이 아니고 뭐야!    참새! 고놈의 참새를 등장시키는것이 김희정시인님의 재치야. 참새가 날아가는 바람에 구슬이 떨어졌거던.실생활에 이런 일이 많단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특징을 잡아서 표현하는가가 중요해.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시인자신만이 아름답게 체험한 생활을 가장 적절한 자리에 가져다 써먹는거야. 그러기만 하면 평소에 보기에는 아무리 수수한것일지라도 금빛 은빛이 반짝반짝 나지 뭐야. 고런 시는 한번 읽어보면 마음이 고소해 나고 두번 읽어보면 기억에 남는거야. 한두번 읽오봐서 아무런 느낌이나 재미가 나지 않는 시는 안돼.  여러번 읽어봐도 그저 그렇구나 하는 감정이 들면 그 시는 빵점이지 뭐야. 어디서 듣던 소리같은 시, 어디서 보던 같은 시, 한마디도 새로운 말이 없는시, 이러한 시는 아무리 말을 곱게 다듬어도 빵점이지 뭐야       8     봄이 오면 우리가 제일 감사하게 생각되는게 많지만 우선 봄바람이 감사하재.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면 겨우내 그렇게 지겹게 입고 다니던 솜옷을 활활 벗어서 팽개치는것만 하여도 거뜬한 심정이지뭐야. 봄바람이 솔솔 불면 아지랑이가 나울나울 춤을 춘다. 그러면 산골애들은 삽을 메고 밭으로 달려간다. 뭘 하냐고, 메를 파지. 삽으로 땅을 푹푹 파서 슬슬엎어놓으면 하얀 메뿌리가 나오지. 실한것은 손가락처럼 실해. 흙을 싸악 털어버리고 꽁꽁 씹어먹으면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맛있어. 봄바람은 이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생활과 생기를 줄뿐만 아니라 이 크나큰 자연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단말이다    리효선시인님이 쓴 시  [봄바람이]  어떻게 씌였는가를 한번 볼가   여보세요!여보세요! 그만 눈을 뜨셔요 봄바람이 버드나무가지를 쥐고 흐든다 어서 파란 싹을 틔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만 잠을 깨셔요 봄바람이 개나리가지를 잡고 흔든다 어서 노란꽃을 피우라고   여보세요!여보세요! 내말을 좀 들어보셔요 봄바람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낼모레면 개나리가 필거라고     어떻니? 이 시의 내용에는 별로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어. 그렇지만 재미있는거야.봄을 노래할 때 새싹이요 꽃이요 봄비요 하는것들은 누구나 다 쓰는 사물이니까 시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사실은 모두 수수한것들이야. 더구나 이 시에서는 상상으로 짝을 새롭게 맞추었거나 신비한 비유를 끌어온것도 없단말이다. 그런데 왜 요리 재미있을가?    왜 골을 빽빽 돌리니? 그렇지 바로 그게란말이다. [여보세요!여보세요!]하고 감동적으로 부르는거야. 요 언어가 참 매력이 기막힌거야. 봄바람이 버드나무가지를 쥐고 흔들며 어서 파란 싹을 틔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개나리를 붙잡고 어서 꽃을 피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랠모레 개나리가 필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는것이얼마나 친절하고 매력적인지 모르겠다 한번 읽어보면 우리 가슴을 따스하게 하고 우리마음에 소올솔 차분하게 러든단말이다 마치 누나가 따뜻하고 정다운 목소리로 말하는것같잖아    비결이 어디에 있을가? 그렇지! 그래. 바로 그거야. 봄바람이 버드나무가지며 개나리 가지며를 다정하게 흔들며 직접 그들을 이깨워주기 때문이야 마지막련에서는 자기가 일깨워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처럼 랠모레 개나리가 필거라고 으쓱해서 속삭이기까지하지 뭐야      그러니까 시를 쓸 때 내용도 주요하지만 형식도 주요하단말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형식이 따라가지 않으면 감칠맛이 약하거나 없게 된단말이다. 그런데 형식을 면바로 리용하면 수수한 내용도 재미있게 엮어진단다. 그렇다고 형식만 부려서 된다는건 아니야. 텅빈 내용은 아무리 좋은 형식이래도 안돼. 재간 있는 색시도 쌀이 없으면 밥을 못짓는다재.    형식과 내용의 통일, 이게 바로 동시에서 추구해야 하는거야. 형식이란건 어떤 수법으로 시를 쓰는가 하는것이고  내용이란건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을 가지고 시를써야 한다는거야. [봄바람]에서 리효선시인님은 [여보세요!여보세요!]하는 감동적인 언어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고있지 뭐야. 처음 [여보세요]를 읽어보면 전화를 거는것같은감이 들지만 아래를 읽어보면 그런것이 아니지 뭐야. 친절하게 착각을 주었다가 독자를내용에로 끌어들이는것도 이 시의 또 하나의 성공의 비결이야.   우린 이 시에서 의인화수법의 매력과 위력에 다시 한번 깊은 감동을 받지 뭐야. 동시는 그래 .외로 쓰던 모로 쓰던 시에 의인화수법이 용해되여 있어야 해. 그래야 친절하고 감동적이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목적에 도달되는거야.   한국명동시 감상시리즈 2     9       봄에 대한 시를 한수 더 볼가. 엉? 무슨 봄에 대한 시가 그리 많으냐고. 그래 봄에 대한시가 많아. 그건 시인마다 봄에 대한 느낌이 다르기때문이야. 같은 느낌이라도다르게 표현하면 좋은 시가 되거든. 그럼 리건호시인님이 쓰신 [봄]이라는 시를 한번 읽어볼가     봄     리건호   한마리  두 마리 ,,,,,,,,,,,,, 전기줄에 제비가 앉는다   하나 둘 까만 음표가 늘어간다   오르며 찌지굴 내리며 쪼조글 음표보고 부르는 종달새 노래   보리싹이 큰다 살구꽃이 핀다.     얼마나 재밋니.? 우리  이제부터 한개련씩 어떻게 쓰였는가 보자. 모두 네개련인데첫련은이렇게 썼어.    한 마리  두 마리 ,,,,,,, 전기줄에 제비가 앉는다      여기서 우린 두가지를 알수있어. 한가지는 시인이 봄을 쓰는데 제비를 노래하는것으로써 봄을 노래하려 한다는것을 알수있고 다른 한가지는 이 련에 있는 줄임표에서 한두마리 제비가 아니라 많은 제비를 노래하려 한다는것을 알수있단 말이다. 첫련은 한마디로 말하면 제비가 전기줄에 많이 날아와 앉는다는것을 쓴거야. 시인이 무엇을 쓰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표현했을뿐이야. 시적으로 말하면 이런것을 계기라고 해. 이런 시적계기는 시마다 다 한개련씩 차지하고 있는건 아니야. 시는 일반적으로 계기가 있지뭐야.계기는 모두 첫련에 있는데 한줄이 될 때도 있고 한개단어가 될 때도 있는거야. 구체적인건 후에 말하자.   제2련은 이렇게 썼어.   하나 둘 까만 음표가 늘어간다     음표란게 뭐지. 제비야. 제비가 2련에 와서 음표가 돼버렸지 뭐야. 왜 제비를 음표로둔갑시켰지. 짝을 찾은거야. 어떻게 찾은거냐고? 전기줄이 여러갈래가 쭉쭉 뻗어간것은오선보와 비슷한거고 그 전기줄에 제비가 앉은건 도레미파 솔라시 하는 음표와 비슷한거야. 그러니까 전기줄에 앉은 제비를 음표라고 했지 뭐야. 야, 거 묘하다. 제비가 5선4간에 있는 음이 되였구나! 정말 근사하다.    오르며 찌지굴 내리며 쪼조글 음표 보고 부르는 종달새 노래    이것이 제3련이야. 2련에서는 전기줄에 앉은 제비를 음표라 하고 3련에서는 그 음표를보고 종달새가 [찌지굴] [쪼조글] 노래를 부른다고 했지 뭐야. 제비는 음표가 되구 종달새는 그 음표를 보면서 노래를 부른다 얼마나 묘하고 재밋니!   리진호시인은 묘돌이야. 어쩜 이보다 더 재미있을수가 있겠니.봄이면 종달새가 봄이왔다고 즐겁게 우는것을 보고 제비가 전기줄에 앉은것을 음표로 알고 노래한다는 상상이야말로 신비하고 독창적이재.    마지막 4련은 간단하면서도 참 잘 썼어.[보리싹이 큰다/살구꽃이 핀다] 하고 말이야. 화창한 봄날의 아름다움과 생기가 우리 눈앞에 한폭의 수채화로 확 안겨오잖아. 이젠 우리도 별로 봄같은 제목으로 시를 쓸것 같지. 돌아가 한번 써볼가. 정말 쓰자면 바쁠지도 모르겠지만 별로 쓸것만 같아.                                      10      봄이 오느라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리운것들이 많지. 그중에서도 제일 그리운것이 제비라고 할수있어. 폭발적인 새소식은 딴거야. 봄에 제비는 올 때 고작은 날개에다봄을 가득 싣고 와서 산과 들에다 부리우거든. 제비가 오면 나무잎들이 앞장 다투어 피여나고 꽃들이 앞장 다투어 피여나는거야. 제비야말로 천사지. 봄을 실어오는 천사란말이다. 그래서 봄이 오면 우리는 은근히 제비를 기다리게 되는거야.   아이들의 이런 심정을 표현한 시가 있어. 서덕출시인님이 쓰신 [봄편지]야. 어떻게썼는냐구? 한번 읽어볼가.       봄편지         서덕출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모두 여덟줄로  된 시야. 참새는 작아도 오장륙부가 다 있듯이 시는 짧아도 기승전결이 다 있어. 뭐? 기승전결? 듣지 못한 소린데. 그래 듣지 못한 소릴수도 있어. 이는옛사람들이 시를 분석해 보던 방법이야. 기승전결을 사전에다 이렇게 해석했더라. 시를짓는 격식인데 [시의 첫머리를 기, 이를 되받는것을 승, 중간에 뜻을 한번 바꾸는것을전, 전편을 거두어서 맺음을 결이라함] 이것이 기승전결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투철한해석이야. 이 방법으로 이시를 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거야.    연못가에 새로핀  버들잎을 따서요     이 시의 첫련이야.  이 시에서 연못가의 새로 돋은 버들잎을 딴다는것이 시의 시작이지뭐야. 사전에서 말하는 첫머리이며 [기]에 속하는거야. 이것이 앞에서 우리가 말했던 시의 계기와 같은거야. 이 시에서 새로운 버들잎을 씁니다 하고 알려주는거란 말이다. 그럼 버들잎을 따서 뭘 할가 하는 의문이 들지 뭐야. 그것을 2련에 쓰게 마련돼 있는게 아니겠니? 그래 2련을 보자.   우표 한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이것이 2련이야. 버들잎에다 우표를 붙여서 먼먼 남방으로 보낸다는거야. [기]를 받는것을 [승]이라고 했재. 2련이에서 버들잎을 편지로 만들어 강남으로 보낸대. 버들잎이편지로 돼버린거야. 버들잎이 편지로 되였다는것이 [기]를 받은 [승]이란거야. 쉽게 말하면 기는 쓰려는 사물이나 사실을 제시하는거고 승이란 그런 사물이나 사실을 한보 발전시키는거야. 버들잎을 발전시켜 편지라고 한것처럼 우리가 앞에서 말한대로 하면 상상으로 짝을 찾은거야. 버들잎의 짝이 편지가 된거야.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이 제3련이 [전]이란거야. [전]이란 중간에 뜻을 한번 바꾸는것을 [전]이라 했재.버들잎 편지를 보냈지. 편지를 보내면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할거 아니야. 그 받는 사람이제비야. 편지던게 제비가 나왔으니까 내용이 바뀄지뭐야. 그래서 3련을 전이라고 해.   조선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마지막련이지. 이 마지막련이 [결]이란거야. 결은 총결인데 작자의 뜻이 있거든. 이시에서 작자의 뜻은 제비가 조선이 그리워다시 찾아온다는것을 통하여 제비도 조선을 그리워 하는데 조선사람으로서 어찌 조선을 그리워하지 않으랴 하는 애국주의 정신을 쓴거야. 결은 괘괄성이 있는거야. 일반적으로 결은 시의 전반 내용을 종합표현하는 작용을한다고 할수있어.     11      얘, 어떤 시를 보면 너무도 묘해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너무너무아름다워서. 피ㅡ어디 그런 시가 있니? 있다. 바로 김사림시인님이 쓴 시가 그래. [꽃비]라는 제목으로 썼는데 제목부터가 너무너무 아름다운 언어지 뭐야. 세상에 비라는 말과 꽃이라는 말은 있지만 꽃비라는 말은 없단말이다. 꽃비라는 말은 김사림시인님이 만들어낸것이 틀림 없어. 꽃이 너무너무 많이 피니까 그것을 꽃비로 표현한거지 뭐야! 언어를 새로 조합한것이 돋보인단  말이다. 시인이 시를 쓰면서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것은 이러한 언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니. 꽃과 비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을 나타내는 언어이지만 하나로 묶어놓으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그래 언어라는것은 워낙 어떠한것을 나타내는 표징이야. 고대로부터 흘러내려온표징인데 우리는 지금 그 표징들을 쓰고있잖아. 너나 나의 이름도 그렇지. 우리가 금방태여났을 때 네이름 순희를 해옥이라고 지었더라면 너는 지금 순희인것이 아니라 해옥일거야. 옛날에 제일 처음 지금의 아빠를 엄마라고 부르고 엄마를 아빠라고 불렀더라면 우리는 엄마와 아빠를 바꾸어서 부를거야. 그래도  아무런 불편함도 없을거야. 그러니까사회가 발전하고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말이 생길뿐만 아니라 언어와 언어를 새로 조합하여 [꽃비]처럼 고운 언어들을 많이 만들어낼수록 좋단 말이다. 아야, 말이 너무 빗나가재. 이만큼하고 김사림시인님이 쓴 [꽃비]의 원문을 보자.       꽃비        김사림    먼산에 꽃비 비그르르 돌아   마을에 내려서 살구꽃 된다   살구꽃 환한 마을을 비그르르 돌아   뜨락에 내려서 나비가 된다.      요렇게 깜직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울수가 없어. 언어가 물 흐르듯 조르르 흘러내려가재. 그것도 말짱 비단처럼 부드러운 언어가. 토라는게 ㄴ,ㄹ,ㅊ 세개가 있는데 [ㅊ]는꽃이라는 명사에 붙은것이여서 할수 없지만 나머지 둘은 모두 유향자음이여서 기막히게부드럽고 친절하단말이다. 첫두련을 먼저 보자. 첫두련은 한가지 내용을 표현하고 있어.   먼 산에 꽃비 비그르르 돌아   마을에  내려서 살구꽃 된다     봄이면 산에 하얀꽃, 빨간꽃, 노란꽃 벼라별 새갈의 꽃들이 가득 피는거야. 산은 꽃이불을 포옥 쓰고 있는거 아니겠니. 그런 오색찬란한 꽃들이 비그르르 돌면서 마을로 내려와 살구꽃이 된다하니 현실인게 아니라 아름답고 황홀한 동화세계지 뭐야. 그 꽃들이또 어쩌지? 삼련과 사련을 보면 알아.   살구꽃 환한 마을을 비그르르 돌아   뜨락에  내려서 나비가 된다       꽃비는 살구꽃을 마을에 가득 피워놓고 환한 마을을 비그르르 돌고 돈 다음 뜨락에 내려서 나비가 된다는거야.  이것도 동화지뭐야. 동화래도 이렇게 아름다울수가없어. [비그르르 돌아]를 발음할때 입안에서 사탕알이 사르르 녹는 같지 뭐야. 나비란뭐겠니? 꽃잎이 떨어진거지. 꽃잎의 짝이 나비인거야. 꽃잎이 다 떨어져 나비가 되면 살구나무에 애기살구들이 가득 열리지. 얼마나 평화롭고 아늑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니! 한번 이런 마을에서 살아보고싶잖니?                                    12     봄이요, 꽃이요 하는 봄에 대한 시들을 많이 보았는데 이번을 강에 대한 시를 보자.강이란 어떤거니? 봄이면 얼음을 깨고 나와 마가을까지 흘러가는 놀이터야. 낮이면 해랑구름이랑 와서 놀고 밤이면 달이랑 별이랑 와서 놀고. 어디 그뿐이야. 산도 제얼굴이 어떤가 비춰보고 새도 날아지나며 제모습이 어떤가 비춰보재. 물속에는 여러가지 고기들이자유로이 헤염치고 가재랑 물벌거지랑 벌벌 기여다니재. 산에서 노루가 내려와 물을 마시며 빙그레 웃고 우리들은 물장구치며 목욕하재. 이 세상 모든 사물이 물을 떠나면 살수 없는거야. 물은 모든 사물을 낳고 키우는 어머닌거야.    이런 물이 흐르는 강을 어떻게 쓰면 재미있을가? 강현호시인님이 해답을 주고있는거야.어떻게? 보면 알거야.       강물      강현호   작은 고기들이 떼를 지어 강물의 겨드랑이를 간지르고 있다.   강물은 온 몸을 뒤척이며 깔깔거리고 있다.   이따금씩 입술사이로 은이발이 몇 개 반짝이고있다.      이렇게 모두 세개련이야. 리건호시인님이 [봄]을 쓸 때 제비를 가지고 쓰던것처럼강현호시인님도 강을 쓰면서 물고기를 쓰고있지 뭐야. 그러니까 제목이 크더라도 그 제목에 포함되는 내용을 다 쓰는것이 아니라 자신있게 표현할수있는 한두가지 사실만 잘쓰면 되는거야. 우리 함께 기억하자.   작은 물고기들 떼를 지어 강물의 겨들랑이를 간지르고 있다      첫련이야. 히히 고기들이 물에서 헤염치는걸 [강물의 겨드랑이를 간지르고있다]고? 매짜다! 땡땡 여물었지뭐야. 강물엔 겨드랑이라는것이 없지만 강물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겨드랑이가 있을게 아니야.  고기들이 몸을 흔들거리며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헤염치니까 겨드랑이를 간지른다는것이 자연스럽재. 겨드랑이를 간지르니까 어찌겠니? 웃지. 그럼  강물이 어떻게 웃는가 보자. 그건 2련에 썼거던.   강물은 온 몸을 뒤척이며 깔깔거리고 있다      이 2련이 강물이 웃는 모습이야. 그저 웃는것이 아니라 [온 몸을 뒤척이며/깔깔거리고] 웃는거야. 강물은 흐를 때 모든 물이 다 흐르는거야. 한방울도 정지상태에 있는건없거든. 정말 온 몸으로 흐른단말야. 흐르느라면 몸을 마악 뒤번지게 되는거야. 흐르면서 소리를 내지 쐇솨ㅡ하고. 그것을 의인화해서 [깔깔]했지 뭐야. 강물이 대단히 간지러웠던 모양이야.   이따금씩 입술사이로 은이발도 몇 개 반짝인다      이것이 마지막 3련이야. 강물의 웃는 모습을 한번 더 자세하게 보여주는것으로 시를 마치고있어. 은이발도 몇 개  반짝인다 했어. [은이발]이란게 뭐지? 그렇지. 물이흐르면 물결이 일고 물결이 일면 하얗게 물이 부서지게 마련이지. 그 하얗게 부서지는짝을 찾은것이 [은이발]이야. 강물이 흐를 때 온 강물이 단김에 물결이 부서지는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부서지거든. 그래서 [은이발이 몇개/반짝인다]고 한것이 아니겠니! 사람도 웃으면 이발이 보이니까 그렇게 한거지뭐야. 강현호 시인님은 강물을 쓰면서 강물이어떻게 웃는가 하는 한가지를 표현하였고 리건호 시인님이 을 쓸 때도 바줄에 앉은 제비만 썼어. 한 사물에서의 어느 한 측면을 틀어쥐고 잘 쓰는 것이 동시를 잘 쓰는비결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해봐야겠어.                                        13     우리가 봄철의 동시를 어떻게 쓰는가를 보는 사이에 어느새 여름이 왔구나. 이제부터 그럼 여름에 대한 시들을 어떻게 썼는가 보자.    여름은 모든것이 무성하게 자라는 계절이야. 나무도 풀도 물도 곡식도,,,뭐나 다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계절이야. 시를 쓸것도 엄청나게 많은 계절이야. 먼저 리국재시인님이 쓴 [여름산]부터 보자.     여름산      리국재   여름산은  아직 덜익은 풋풋한 과일이다   한줄기  소나기 쏟아질 때마다 조금씩 익어가고 조금씩 커가고   얼마만큼 익었는지 한번쯤 두들겨 보고싶다 쪼개여 보고싶다        어때?, 참 멋있지. 시인의 상상이 대단하지 뭐야. 일련에서 여름산의 짝을 [아직/덜익은/풋풋한 과일]이랬단말이다. 산을 어떻게 상상하면 [풋풋한 과일]이 되는거야?정말 미치겠다  급해할것 없어. 벌판에 산이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멀리서 보면평평한 곳에 둥그런것이 아니겠니. 우리가 여름에 수박밭에 가보자. 큼직한 수박이 달려있는것도 평평한 곳에 둥그런게 아니겠니. 둘이 다 둥그런것이니까 산을 수박이라고 할수있고 수박을 산이라고 할수있는거야. 수박이 과일에 속하니까 산도 과일이라고 해서안될거 없단말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모양으로 짝을 찾은거야. 문학적 언어로 말하면 이러한것을 모양으로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였다고 하는거야. 또 산을 과일로 변형시켰다는거야.  왜 이제야 말하느냐고? 이런 말은 리해하기 바쁘니까 짝이라고 한거지. 모양으로 짝을 찾는다하면 얼마나 알기 쉽니? 기억하자 꼭 알았지. 히히ㅡ알았다!!   한줄기 소나기  쏟아질 때마다 조금씩 익어가고 조금씩 커가고    두번째 련이다. 여기서는 과일이 소나기를 맞으며 익어가고 커간다고 하재. 수박이랑여름에 커가고 익어가는데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오재. 그러서 소나기 올 때마다 조금씩익기도 하고 크기도 한다는거야. 세번째련을 보자.   얼마만큼 익었는지 한번쯤 두들겨 보고싶다 쪼개여 보고싶다      이 마지막련에서 과일이 익었는가 두드려보고 쪼개여 보고싶다고 하였어. 어째 요런 표현을 썼느냐고? 그래 고것이 문제지. 수박이나 참외밭에 가면 사람들은 수박이나참외가 익었는가를 판정할 때 보통 참외나 수박을 두드려 보지 뭐야. 두드려 봐서 맑고쟁쟁한 소리가 나면 익은거고 무겁고 둔중한 소리가 나면 그건 익지 않은 생거야. 산을과일이라고 하였으니까 익었는가를 알기위하여 두드려본다는거지 뭐야. 그러나 수박같은것이 확실이 익었는가를 판정하는데는 속을 보아야 하는거야. 여름에 수박장사군들이 수박을 팔 때 수박을 칼로 쪼개여서 손님들한테 빨간 속을 보이는건 자기 수박이 잘 익었다는것을 증명하는것이 아니겠니. 그래서 시인도 과일을[쪼개여 보고싶다]고 한거야. 그럼 과일을 수박이라고 할거지. 그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그렇다는건 수박이라고하면 확실히 더 좋은것은 맞아. 아니라는건 과일상점에는 남방에서 나는 야자랑도 있을거야. 아마 야자랑도 익었는가를 판정할 때 두드려보는지 몰라.  전면성을 기하기 위해그랬는지 몰라. 과일이라는건 류개념이여서 뻥뻥하재. 수박은 종개념이여서 인차 영상이떠오르지 뭐야. 시를 쓸 때면 종개념에 속하는 언어를 쓰는것이 제일이야.                                    14       얘, 시를 쓸 때 뭐가 제일 중요한건지 아니? 히히, 그걸 누가 모르게, 시적발견이지. 맞다.시적발견이란게 뭔지 아니? 같은 제목이라도 남보다 따게, 새롭게 쓰는게지.맞다. 남보다 따게 새롭게 쓰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아니? 그야 남들이 못쓴것을 쓰면 되지. 맞다. 남들이 못쓴것을 쓰자면 어떤 방법으로 하지? 얘, 네가 날 심문하니? 글쎄 맞춰봐. 새로운 짝을 찾는거야. 맞다. 남들이 한번도 찾아내지 못한 새로운 짝을 찾아쓰는 시가 좋은 시고 그런 시인이 훌륭한 시인일거야. 시를 많이 쓰는게 시인인것이아니라 새로운 시를 쓰는게 시인이야.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말 새로운 시를 쓴다는건 쉬운일이 아니야. 그런 시를 봤니? 봤다. 누구걸? 문삼석시인님걸. 제목이 뭐야? [이슬].   밝음을 토해내는 밝은 눈   맑음을 토해내는 맑은 눈.       요리 짧은거. 응, 짧아. 짧은게 시가 안되는것이 아니라 길어도 시적발견이 없거나짝이 없는게 시가 안되는거야. 이슬에 대해서 많은 시인들이 시를 썼지만 눈이라고 한시인은 없었어. 모두가 구슬이요 보석이요 진주요 하고 썼지만 눈이라고 한 시인은 없었지 뭐야. 문삼석시인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이슬을 눈이라고 했을가? 두가지 원인이 있어. 한가지는 이슬이 눈처럼 밝기때문이고 다른 한가지는 이슬이 티 하나 없이 눈처럼맑기때문이야. 또 한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어. 눈도 모양이 동그랗고 이슬도 모양이 동그랗기 때문이야. 이 시는 문삼석시인님이 모양으로 짝을 찾은 시야.   문삼석시인님은 모양으로 짝을 찾는 능수야. 전문적으로 코풀레기 애들을 대상한 시를 쓰기를 즐기면서 모양으로 짝을 찾는데는 이골이 튼 시인이거든. 원숭이라는 시 한수를 더 보자.    원숭이   원숭이는  날 때부터 할아버지래 주름살  오글오글  할아버지래     원숭이는 새끼원숭이래도 이마에 주름살이 쪼글쪼글해. 우리 할아버지들도 늙으면이마에 주름살이 쪼글쪼글해. 문삼석시인님은 주름살이 쪼글쪼글한것이 같은것을 보아내시고 원숭이의 시적짝을 할아버지를 찾은거지 뭐야. 어때, 근사하니?   모양으로 짝을 찾는다? 전번에 말할 땐 좀 알빤하던게 인제 똑똑히 알려. 참 묘하구나! 세상 사물이 모양이 얼마나 많니? 생김새가 모두 다르거던. 우리들이 사는 집만 봐도 여러가지가 아니고 뭐야. 우리 친구들도 그렇지. 얼핏 보면 비슷한것 같지만 따지고보면 백이면 백이 다 다른거야. 같은 사물도 이렇게 다른데 다른 사물사이이야 더 이를데 있니? 그래 세상 사물의 모양이 각각이여서 세상이 아름다운거야. 모양이 다 같으면얼마나 따분하겠니.   시를 쓸 때 짝을 찾는것도 딱 같은것으로 찾으려하면 안돼. 모양이 비슷하면 되는거야. 그렇잖구. 어디에 백프로 같은게 있니? 아무데 다르나 조금씩 다르게 마련이지.   리건호시인님이 쓴 [봄]에서 제비를 [음표]라 한것도, 리국재시인님이 쓴 [여름산]을 과일이라 한것도, 문삼석시인님이 [이슬]을 눈이라 한것도 [원숭이]를 [할아버지]라한것도 모두 모양을 보고 짝을 찾은거야. 그러니까 널반대기에다 못을 딱 박아놓는것처럼 기억해.  알겠니?                                    15   여름이 오면 나무랑 풀이랑 무성하게 자라고 시내물도 강물도 모두 자라지 뭐야. 시골애들이 학교를 다닐 때 뚝뚝 뛰여넘던 개울물도 비가 자주 오는바람에 뛰여넘을수 없게 됐지 뭐야. 그래서 어느 마음이 고운 애가 신을 벗고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개울물에뛰여들어 돌다리를 놓았지 뭐야. 그런 돌다리 몇 개를 보고 시를 쓴 시인이 있어. 함께볼가?    징검다리  리석장   개울물 오선지에 그려진  하나, 둘, 셋, 넷... 음표들   잠자리가 앉아서 무슨 음표일가 고개만 갸웃하다 그냥가고    앞산 소나무들이 들어보란 듯 몸까지 흔들며 솔솔솔   일곱 살 순이가 음표 하나씩 밟으며 도레미파... 팔짝팔짝 건너오며 도시라솔...   순이 친구 삽살이 따라부른다고  캉캉캉캉    얘, 동시란게 정말 재밋지. 읽으면 생각지도 못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 1련부터 볼가.   개울물 오선지에 그려진  하나, 둘, 셋, 넷... 음표들       1련에서 리석장 시인님은 개울물에 놓여진 징검다리의 짝을 찾고 있지 뭐야. 개울물을 오선지라고 돌다리는 개울물에 그려진 음표라고 했지 뭐야. 비슷하재. 첫련에서징검다리를 음표라고 하면서 이제부터 음표를 표현한다는 것을 알려 준거야. 아래의 련들은 음표에 대한 부동한 사물들의 반응을 표현한거야. 처음에는 잠자리가 앉아서 무슨 음표인가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숑 날아간 것을 쓰고 , 두 번째는 앞산소나무들이 제가 안다로 몸까지 흔들며 솔솔솔솔 한다고 썼지 뭐야. 기실 소나무도 잠자리처럼모르는거야. 시인이 바람이 불면 소나무가 흔들리는소리가  음표의 음 쏘처럼 소리난다고 생각되여 솔솔솔이라고  표현한거야. 세 번째는 순이가 징검다리를 팔짝팔짝 건너갔다 건너왔다 하는 것을 음표를 하나씩 밟으며 도레 미파 하고 시창을 부른다고 썼지 뭐야. 네 번째는 삽살이가 순이를 따라서 도레미 소리를 낸다는게 캉캉캉캉 짓는다고 그랬지 뭐야.     호호호...우습지. 실은 음표를 알이는 순이 밖에 없어.  음표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치기 위하여 상징적으로 만들어 놓은거니까 . 그런데 시인은 소나무며 삽사리며가 아는 것처럼 의인화를 하는바람에 재밋게 됐지야. 잠자리는 소리를 못내니까 고개만 갸웃거렸다는거야.    리건호 시인님이 을 쓸 때 전기줄에 앉은 제비들을 라고 표현한적이 있잖니. 이번에는 리석장 시인님이 또 징검다리를 라고 표현했단다. 부동한  사물에서 똑같은 짝을 찾은게 아니고 뭐니. 이래도 되니? 되고말고. 두시인님이 찾은 짝은 같지만 표현하려는 사물이 다르거든. 또 표현하는 내용도 완전히 다르단 말이다. 그러니까 괜찮은거야. 만약 비슷한 사물이거나 비슷한 내용으로 쓰면 그건 문제야.그럴 땐 모방성이  있는거야. 시내물이 꼬불꾸불 흘러가니까 장난꾸러기라고 하고 오솔길이 꼬불꼬불 산으로 넘어가니까 장난꾸러기라고 하는 것 같은 것은   삼가하는것이좋아. 제일 좋기는 아무도 써먹지 않은 것으로 짝을 찾는거야. 그래야  최고 좋은거야.                  16     여름에는 모든 것이 푸르다. 산도 푸르고 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해도 푸르고달도 푸르다. 물도 푸르고 지어는 바위도 푸르다. 그래서 여름은 푸르른 계절인거야. 푸르른 계절을 노래한 시가 있어. 김종영 시인님이 쓰신 시야. 내가 한번 읽을게 들어봐   여름의 문을 열고 푸른 나라를 걸어간다   초록빛 바다가 우쭐대며 가슴에 들어서 출렁이고 어깨동무 푸른 산이 정답게 가슴에 앉아 날개친다.   길을 가도 푸른 눈 책을 봐도 푸른 마음 꿈을 꿔도 푸른 생각   나는 이 여름 사람들속을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빛 심는 푸른 나라 푸른 새 되련다.      어때? 특색이 있지. 그래 여름의 모든 것을 푸르게 표현한 것이 특색이야. 시는그래 보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야. 생활에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새롭게 표현하는거야. 표현한다는게 어떤거지. 자기가 본것이나 느낀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런 본것이나 느낀 것을 표현할수  있는 새로운 사물이나 사건이나 사실을 찾아서 쓴다는거야. 잘 알아 못듣겠다고. 제일 간단하게 말하면 짝을 찾아서 쓴다는거야. 그럼 그렇다고 할거지 왜 다람쥐 채바퀴돌 듯 뱅뱅 도니? 그건왜 자꾸만 짝을 찾아야 하는가 하는 도리를 강조하여 은이 배기에 하자는거야.    여름의 문을 열고  푸른 나라 걸어간다      첫련이야. 김종영 시인님은 처음부터 푸른 여름을 새롭게 표현하고 있지 뭐야. 이니 니 뭐니 하고 있잖아. 어디에 여름이란게 문이 있고 나라라는게 있니. 여름의 문을 열고는 여름이 왔다는 뜻이고 푸른 나라를 걸어간다는건 여름철이 온통푸르다는걸 표현한거야 . 이 첫련은 시의 기승전결의 기에 속하는것이고 시의 계기로서 시인이 여름의 푸르름을 노래한다는 표징이지 뭐야.   초록빛 바다가 우쭐대며 가슴에 들어서 출렁이고 어깨동무 푸른산이 정답게 가슴에 앉아 날개친다       이 두 번째 련은 여름날의 움직임을 표현한거야. 두가지를 틀어쥐였는데 한가지는 벌이고 한가지는 산이야. 벌은 초록빛 바다 산은 어깨동무로. 벌은 바다니까 출렁거릴건 사실인데 가슴에 들어와 출렁거린다고 했지 뭐야. 산을 어깨동무라 한 것은 의인화한 것이야. 산이 가슴에 와 날개친다는 것은 또 다른 맛이야. 산이라는건 봉우리가 제일높은것이고 봉우리밖의 줄기는 봉우리보다 낮게 멀리로 뻗어나간것인데 어찌보면 새가날개를 퍼덕인다고 할수도 있는거야. 가슴에 들어와 바다가 출렁이고 가슴에 앉아 산이날개친다는 것은 산이나 들과 가까이 노는 우리들 마음의 표현, 넓은 흉금의 표현인거야.   이 동시에서 2련은 승이고 3련은 전이고 4련은 결이야. 전에서 이라고 전개시키지 않고  등 언어와 길, 책, 꿈을 련계시킨 것은 여름의 푸르름을 우리와 더 가깝게 하고친절하게 하기위한 표현이야. 이런 표현을 함으로써 여름이 어린이들의 것이라는 것을알려주려는거야.   4연은 결이니까 종결이지. 사람들에게 푸른 노래 푸른 빛을 심어주는 푸른 새가 되어 날아다니겠다고 했지 뭐야. 왜 새가 되겠다고 했을가 ? 왜 심어준다고 했을가 ? 절로생각해봐.            17   이런 시가 있어. 리동식 시인님이 쓰신  동시야. 제목은 야.   내가에 갔었다 바람 따라 물길따라    동동 개나리꽃 하나 떠내려간다 외나무다리밑으로   하얀 나비가 떠가는 꽃위에 사쁜 앉았다   개나린 개나린 노란 배가 되었다 나비는 나비는 노란 손님되였다   물길따라 떠간다 멀리 멀리 떠간다      얘, 이 시의 특점이 뭐야?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시제목이 짝을 찾은거야.  하고. 개나리 짝을 노란 배라고 설정했어. 그러니까 제목부터 의문을주거던. 왜 개나리를 노란 배라고 했을가 하는 의문을 말이다. 그래서 인차 독자를 흡인하고 있어. 한번 읽어보면 답은 풀리는거야. 으응, 노란 개나리가 다리밑으로 떠내려가니까 개나리를 노란 배라 하였구나. 노란 나비는 노란 개나리가 떠내려가는데 앉았으니까 노란 손님으로 되었구나. 물이 개나리꽃을 싣고 멀리 멀리 가니까 로 결말을 지었구나. 이러한 시의 내용은 인제 한두번만 읽어봐도 알수있는거죠? 그렇죠.     이 동시에서 배울점은 짝을 찾는것보다 다른 것이 있어. 한가지는 짝을 찾을 때자연물의  짝을 인위적인 사물에서 찾는거야. 인위적인 사물이란 사람이 만든 것을 말하는거야. 개나리는 자연물이고 배는 사람이 만든 것을 말이다. 그러니 자연물의 짝을인위적인  사물에서 찾은 것이 아니고 뭐야. 이렇게 짝을 찾으면 찾은 짝이 우리와 가까이 있는사물이여서 더 친절해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이재.    두 번째로 배워야 하는 것은 이 시의 치명적인 결함이야. 결함에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시를 잘 쓰려면 남의 쓴 시의 우점도 알아야 하거니와 그 시의 단점도 알아야 해.우점은 따라 배워 자기가 시를 쓸 때 발양하고 단점은 시를 쓸 때 그런걸 범하지 않는거울로 삼는거야. 시는 기승전결이 우에서 있다고 말했는데 이건 옛날 리론 같지만 매우중요하단 말이다. 개나리 노란 배는 기에 문제가 있어.  이것이 시의 1,2연인데 문제가있어. 시란 가장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는거야. 언제 느렁뱅이처럼 천천히 할사이가 없어. 이 시를 쓰려는 것은 노란 개나리가 노란 배로 되고 노란 나비가 노란 손님이 되어노란 배에 노란 손님이 앉아간다는 것을 쓰는거란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화자가 어떻게강가로 갔는가하는 따위는 알릴것도 없는 것을 알리고 있다는거야. 표현하려는 대상이개나리와 나비인데 한 개련이나 할당해서 쓸데 없는 미사려구를 쓰고있단 말이다. 만약내가에 간 것을 꼭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제2련의 의 앞에 를넣어서 하면 그만이지 뭐야. 이쯤만 하여도 큰 허물이 없이 시가 간결해지였다고 말할수 있겠진만 더 엄격하게 따지면 이것도 안되는거야. 필요없어. 1연의 언어는 한마디도 필요 없다는거야. 1련을 통채로 뽑아던져도 시적표현에는 안무런 손상이없지 뭐야. 2연부터 시작해 써도 이 시에서 표현하려는 시적대상이 나왔단 말이다. 2연의 내용이면 시적계기나 기승전결에서의 기가 충분하단 말이야. 그런데 1연을 해서 뭘하겠니. 뱀을 기다랗게 그려놓고 뱀한테 발을 그려넣는거나 마찬가지야.                                      18     여름산에 가면 청포도가 두룽기두룽기 달려있지 뭐야. 콩알같은 포도알들이 오롱조롱 달려있는게 정말 희한하지 뭐야. 포도원에 가면 더 굉장하지. 열콩알같은 포도알들이가득 달린게 보기만 해도 입안에 시쿤물이 확 돌거든. 우리 주먹 두 개만한  포도송이들이 두룽기 두룽기 드리워서 구경거리가 대단하단 말이다. 포도알들은 날때부터 고로로한게 정말 귀엽기도 하지. 이런 청포도를 정형택 시인님이 시로 썼어. 한번 읽어보자.   청포도 정형택   꼬오옥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동글동글  모나지 않은  마음   쉬엄쉬엄 꿈을  키워갑니다.   도란도란  꿈이 같은 애들끼리   초롱초롱  파아란 눈망울로   주렁주렁  꿈 엮어 매답니다.     동시는 재미있어야 하는데 이 동시도 참 고소한거야.   꼬오옥 고만곤만한 애들끼리      요게 첫련이야. 이란 자를 느려서 쓴거야. 크기가 비슷한 포도알들이 포도송이에 빽빽하게 달려있으니까 서로서로 끌어안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꼬오옥 고만곤만한 애들이라고 묘사한거야.  작은 포도알들이니까 아이들이라고 의인화한거아니겠니! 아이들이라건 포도알의 짝이야. 시는 짝을 찾은 다음 원래의 사물과 관계있는사물들을 합리하게 결합시켜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단 말이야. 원 사물을 쓰는 것같지만 짝을 쓰고 짝을 쓰는 것 같지만 원 사물을 떠나지 않게 말이야. 정형택 시인님은바로 이런 방법으로 시를 전개하고 있지 뭐야.   동글동글  모나지 않는 마음     이게 2련인데 동글동글은 두가지 의미가 있어. 한가지는 포도알이 동글동글 하다는의미이고 다른 한가지는 애들이 마음이 모나지 않은 동그란 마음이라는거야. 왜 모가 나지 않는 동그란 마음이랬을가? 애들의 마음은 순하고 깨끗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기때문이야. 모가 나면 어떻겠니? 마주 치면 아프지. 애들이 마음은 동그래서 마주쳐도 아프지 않거던. 그래서 싸우다가도 다시 돌아서면 희희 웃지 . 언제 다퉜거나싶게  싸웠나싶게 금방 서로 마음이 통하는거야.   3,4련은 서로 련계된단다.   쉬엄쉬엄 꿈을 키워갑니다   도란도란  꿈이 같은 애들끼리      포도들도 천천히 크고  애들도 천천히 크니까  했지 뭐야. 그들은서로 자기의 꿈이야기를 속삭이며 쉬엄쉬엄  자라는거야. 꿈이란게 뭐냐고? 포도들은커서 달콤하게 익을 궁리를 하고 아이들은 자라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거지. 청포도나애들이나 다 창창한 앞날이 있는거야. 그게 바로 꿈인거야.   5,6련도 한가지 내용이니까 함께 보는 것이 옳아.   초롱초롱  파아란 눈망울로   주렁주런  꿈 엮어 매답니다      초롱초롱은 포도알을 가리키기도 하고 애들의 눈을 가리키기도 해. 포도도 동그랗고 애들의 눈도 동그랗단 말이다. 이라고 한건 포도알의 색깔도 나타내지만희망찬 애들의 눈에 대한 표현이기고 한거야.   주렁주렁  꿈을 엮어 매답니다      마지막 련인데 참 잘 표현했어. 얼핏 보기에는 주렁주렁 달린 포도송이를 말한 것같지만 실제상에서 는 애들을 표현한거야. 애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며 자기 절로 자각적으로 자기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겠니! 어디서 그런 의미가 나타나느냐고? 에서야. 자각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로 표현하였을 거야.                                    19                                   백두산 폭포를 본 기억이 나니? 얼마나 장쾌하고 어마어마한 폭포였니. 금벽과 옥벽사이로 하아얗게 부서지며 쏟아져 내리는 폭포. 하늘 땅을 울리는 장쾌한 폭포소리는 우리민족의 발걸음 소리같고, 하아얗게 일어나는 물안개는 우리 할머니들의 치마자락을 날리는 것 같단 말이다. 우리는 또 조물주의 재간도 보는거야. 어쩜 이런 폭포를 백두산에다만들어 놓아 수천수만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당기고 있는가. 폭포는 아무곳에 있으나 모두 자연의 경관을 이루기에  그곳은 자연적으로 유람지로 되는거야. 이런 폭포를 어린이들의 마음에 맞게 쓴 동시가 있어. 한번 읽어보자.   폭포 정춘자   떠밀지마! 겁먹은 소리로 애원을 해도   사정 없이 떠밀어대는 장난꾸러기들   으아아! 아이쿠!   엎어지고 자빠져도 아파할 사이 없이   산이 떠나갈듯한 웃음 하아얗게 부서지는 웃음      제목은 지만 지문에는 폭포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고 폭포의 짝으로 내세운 애들이 어떻게 장난질을 하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을뿐이야. 이런 짝을 의인화수법으로 찾았다고 하는거야. 누구 말이지. 당연히 내 말이야. 의인화의 수법으로 짝을 찾을때, 동시의 경우에는 그 짝을 아이들로 설정하는 것이 좋아. 왜냐하면 동시의 대상이 아이들일뿐만 아니라 동시는 아리들의 심미세계를 그리기 때문이야. 어른들을 찾는 경우도있지만 일반적으로 아이들을 설정하는 경우가 많아.   구체적으로 시를 볼가.   떠밀지마  겁먹은 소리로 애원을 해도   사정 없이 떠밀어대는 장난꾸러기들       이것이 첫두련이다. 시인은 폭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장나꾸러기들의 떠밀내기를 쓰고있어. 밀지 말라는데 자꾸 밀어부치는거야. 남은 무섭다고 애원해도 상관 없어.마구잡이로 사정 없이 민다는거야.  장난이 심해도 한심하게 심한거야. 애들의 이 장난이 바로 뒤물결이 앞물결을 밀며 물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의 폭포현상을 표현한거지 뭐야. 물은 낮은 곳으로 떨어지게 마련이야. 낭떠러지는 낮은 곳에 있단말이다. 떨어지기 싶어도 떨어지고 떨어지고 싶지 않아도 떨어진단 말이다.   으아아! 아이쿠!     이 3련의 표현이 얼마나 새치스럽니! 갑자기 놀라고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지만 그속에는 기쁨이 넘친다는 것이 환히 보이지 않고 뭐야.   4,련이야말로 정채로운 표현이야.   엎어지고 자빠져도 아파할 사이도 없이      정말 그래 . 언제 떨어지며 아파할 사이가 있겠니! 뒤물결이 마구 앞물결을 밀며쏟아져 내리는데야. 정춘자시인님은 마지막련에다 이렇게 쓰고있어.   산이 떠나갈듯한 웃음 하아얗게 부서지는 웃음       이건 절창이야. 폭포의 소리에서 웃음을 찾은거야. 폭포를 웃는다고 표현하는것은 아무나 구사해낼수 있는 것이 아니야.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자세하게 말하겠어.폭포가 어떻게 웃음으로 둔갑할수있는가는 잠시 비밀이야. 뭐 시뚝한다고. 아니야. 우선여기서는 시인의 기발한 상상을 보아내는 것이 중요해. 기발한 상상이란 아무도 보아내지 못한 것을 보아내고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것을 들어내는거야. 폭포를 쓴 시를 적잖게 보았는데 폭포를 웃는다고 한시는 이번이 처음이지 뭐야. 제일 처음 글에서 우리는시를 쓰려면 눈은 현미경이 되어야 하고 귀는 청진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어. 그게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야.                                  20   야, 요기 재밋는 시가 또 있다. 무슨 시야. 해바라기야. 누가 썼니? 서효석 시인님이야.어떻게 썼나 보자.   해바라기     서효석   흙돌담위에  고개를 얹어놓고 빈 집을 지키는 해바라기   담 넘어로 얼굴 내민   빠알간 대추 누가 와서 따갈가봐 보살펴주고  추석 차례상에 올려질 홍시 행여나 떨어질라 쳐다봐 주고     하루종일 혼자서 살피느라고  눈알이 많아진 해바라기       어때 ? 특점이 있어. 사실 해바라기는 엄마랑 아빠랑 부탁을 받고 집을 지키고있는 아이로 되어있지만 서효석 시인님은 그렇다는 말씀은 한마디도 없단말이다. 이런뜻을 이미지로 밝히고 있는거야. 첫련에서부터 해바라기를 의인화시켜 놓아서 해바라기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되었지 뭐야. 나가 놀지도 못하고 대추랑 홍시랑 지키는외로운 아이가 되어 뜨락에 갇쳐있는 불상한 애가 되었단말이다.     1령에서 서효석  시인님은 해바라기가 어떤 해바라기인가를 밝히고 있는거야.    홁돌담위에  고개를 얹어놓고 빈집을 지키는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절로 자라나는 해바라기인 것이 아니라 흙돌담위에   택을 고이고 빈 집을  지키고 있는거야. 집사람들은 모두  일하러가고 강아지도 없어. 닭들이 노는것도보이지 않는 빈집에서 해바라기만이 외롭게 서있는거야. 무엇 하느라고 혼자서 있을가?그건 2련에 해석 이 있어.   담 넘어로 얼굴 내민 빠알간 대추 누가 와서 따갈가봐 보살펴 주고   추석  차례상에 올려질 홍시 행여나 떨어질라 쳐다봐 주고   해해해...왜 웃니? 해바라기가 한다는 일이 우습지 뭐야. 담 넘어에 열려있는 대추를 누가 따가는가고 보초를 서고, 추석 차례상에 오를 익은 감이 떨어지는가를 쳐다본다재.웃을게 아니야. 서효석 시인님은 추석전야의 시골의 풍요롭고 아늑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우리들의 눈앞에다 그려주고 있는거야. 그건 그래.   하루종일 혼자서 살피느라고  눈알이 많아진 해바라기      마지막 련이 정채롭단 말이다. 해바라긴 열심히 일하고 있는거야. 하루종일 혼자서 대추랑 감이랑 지키지 뭐야. 그러는 사이에 눈알이 많아졌다는거야. 얼마나 묘하니.눈알이 많아졌다는건 해바라기가 다 여물었다는 얘기야, 그런걸 눈알이 많아졌다고 했어. 꼭 여문 해바라기알을 알마다 집을 지키느라고 부릅뜬 눈이라고 한건 기막힌 절창인거야. 어찌 열심히 대추랑 감이랑 지켰으면 숱한 눈알이 생기였겠니.    동시를 배우면서 한가지 알아둘것이 있어. 시인은 자기의 의도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이미지속에다 용해시켜 넣어야 한다는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이 시는 추석전의  시골마을의 평화롭고 아늑한 풍경을 쓴것이지만 그렇다는 말은 한마디도없는거야. 재간 없는 시인이라면 꼭 아름다운 시골이니 시골은 포근하다느니 하고 개념적인 말을 써넣었을 거야. 동시라는건 자기가 쓰려는 시적대상을 잘 그려놓으면 되는거지 의도적인 언어가 끼여들면 안 되는거야. 우리의 동시들은 개념을 끼워넣는 일이 너무많단 말이야. 우리의 동시가 한국의 동시보다 재미 없는건 바로 이때문이기도 해. 우리의 동시는 애들이 시를 보고 저절로 무엇을 느끼게 하고 게발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시인자신이 나서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어떤 의도를 내리멕이려 하는거야.선전을 하고 교육을 하고. 참 싱거운거지.   한국명동시 감상 시리즈 4
4    하이퍼시에 대한 탐색 ㅡ 최룡관 (시인, 평론가) 댓글:  조회:3994  추천:0  2015-02-04
       최룡관 - 중국작가협회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연변인민출판사    한국미래문화사 출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북경 민족출판사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리천록공저)연변인민출판사  (종합시집)한국정보출판   한국정보출판   한국미래문화사   네권[제1권 시집. 제2권 시론평론. 제3권 아동문학. 제4권 에세이, 기행등]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하이퍼시(다선시)에 대한 탐색                                                     최룡관 들어가는 말 필자의 저서 [이미지시창작론]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여 있다.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 방법은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필자는 이 일곱가지 방법을 치중하여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 일곱가지 방법은 어떤 근거를 잡으면서 한 방법이다. 그러나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데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는것들이 있다. 이미지란 현실을 초월하여 쓰는것이 중점의 하나인데 무슨 근거가 필요한가? 이 말은 맞는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것은 지적인 지위를 삭감해버리는것으로서 우리들이 연구할과제라고 생각된다. 당대 영미 초현실주의자들이 이에 속한다고 생각 된다. 그들은 환상적이고 몽상적인 이미지를 제작해내고 파편문체를 많이 쓰는데 필자는 그런 이미지에 대한연구가 너무 천박하여 여기에서 피력하지 못하고 과제로 남기면서 독자들에게 량해를 구하는 바이다.] [이미지시창작론]을 쓰기 시작해부터10년이 지난후인 2007 년에 필자가 한 말이다. 그로부터 어느덧 또 여러해가 지난 2013년이 돌아왔다. 오늘은 2013년 2월 20. 오늘부터 [독자들에게 량해를 구하던것을] 나름대로 풀어보려고 펜을 들었다. 그답을 한국의 하이퍼시클럽시인들과 그들의 시에 대한 글에서 찾게 되였고 그 원천적인 근거를 조지P 란도의 [하이퍼텍스트]에서 찾아볼것 같다. 2011년에 한국의 김규화와 심상운이 편찬출간한 시집 [하이퍼시]시집과 심상운시론 및 문덕수의 많은 시론들이 해답을 주었다고 생각되여 나는컴퓨터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게 되였다. 그 고리는 다선 한국의 하이퍼시클럽에는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들이 [하이퍼시] 시집을 묶어낸데는 20명시인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들로는 강영은, 고종목, 김규화, 김금아, 김기덕, 김영찬, 김은자, 박이정, 손해일, 송시월, 신규호, 신진, 심상운, 안광태, 위상진, 이선, 이솔, 정연덕, 조명제, 최진영이다. 한국에 시인이 만명이라고 하는데 이20명시인들은 사막속에 있는 한알의 모래알에 불과할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혁신은 언제나 다수가 하는 일이 아니다. 언제나 한줌도 안되는 혁신자, 개혁자들이 먼저 시작을 하게되는것이다. 지금 연변도 그렇다. 다선시를 하는 시인들이 열명정도이다. 비례를 따지면 한국보다 많지만 한국보다 우리가 더 어려운것이다. 한국은 그래도 시문학이란 잡지를 거점으로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시잡지가 없는 연고로 다선시를 연구하고 창작하는 시인들이 독안에 갇겨있다고 할수 있겠다. 갇겨있고싶어서가 아니라 여러가지 문화여건이 따라가지못하고있다. 다선시의 개념을 어떻게 인식할것인가? 다선시라는 언어는 우리로 말하면 너무 생소하다고 할수 있겠다. 하지만 확실히 다선시가 존재하였으며 존재하고 있다. 다선시라는 말은최근에 한국의 시인이며 리론가인 심상운이 내놓은것으로 알고 있다. 다선시는 지금 여러가지 명제로 해석되고 있는 같다. 하이퍼시라고도 하고 디지털시라고도 한다. 다선이란 쉬운 말로 하면 선이 여러개란 말이 되겠다. 한수의 시에서 한가지 이미지를 둘러싸고 쓰는 재래종의 시인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여러가지로 나타난다는 말이 되겠다. 필자가 알건대는 다선시를 제일 왕성하게 쓴 시인은 프랑스의 S.J 페르스인것 같다. 물론 보들레르나. 랭보나 몰리에르나 발레리나 엘리아르와 같은 시인들한테서 다선적인 시들이 나왔지만 다선으로 시를 쓰고 시집을 내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은 생종.페르스가(1960년노벨문학상) 아닌가 싶다. 독일 류학을 하고 외교관 시험에 합격되여 북경, 조선, 외몽골 등 나라에서 사업한적이 있는 외교관 생종페르스는 전문적으로 다선시를창작한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는) 독일의 후고. 프리드리히 말씀을 들어보면 오늘의 다선시를 당년의 파편문체시로 해석되는 같다. 필자는 다선시=파편문체시라고 생각한다. 2011년 수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그의 시도 파편문체로 된 다선시였다. 그러고 보니 21세기 시의 시대는 다선시 시대가 도래한것이 아닐가 하고 필자는 생각해본다. 먼저 생종. 페르스의 시 [비]의 전문을 보기로 하자. 비 생종페르스 비의 용수(榕树)는 거리에 뿌리 내리고 때이른 호수가의 탁한 물속의 벌레들, 산호의 혼인을 향해 솟아오르고 그물로 싸우는 투우사와 같이 벌거벗은 ‘사고’ 공중의 뜰에서 헝클어진 녀인의 머리카락을 빗긴다. 파도의 웨침에 주제의 절박함을 노래하라 시여, 파도의 출렁거림에 도망하는 주제를 노래하라 시여 예언하는 처녀들의 허리에 지나친 애욕 밤에 황갈색의 늪에서 부화하는 금빛의 알 오 기만이여! 이같은 꿈의 기슭에도 나의 정돈된 잠자리 그곳에서 음란한 장미는 시로 선명히 자라 바퀴되여 돌기 시작한다. 나의 비웃음인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것은 짐승의 고기맛에 김 뿜는 땅과 처녀수밑의 과부의 점토, 잠 못 이룬 내 사내의 발에 다져진 땅이니 포도주처럼 가까이 가 냄새를 맡을 때 그 땅은 진정 기억의 상실을 시인할것인가? 주여, 내 비웃음의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것은 층을 이룬 바다의 겹쳐진 부분의 높은 모래언덕의 응답과 같은, 지상에서 표현되는 꿈, 여기 이곳에 있는 땅은 모두 씁쓸한 땅 새로 태여남의 시간, 그리고 알수 없는 모음의 방문을 받는 나의 령혼. 생종페르스의 [비]를 읽노라면 무엇이 무엇인지 알수 없다. 시행마다 거이 모두가 이질적인 이미지로 라렬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는 련계되는것이 아니라 서로 단절되여 있고, 그런 단절들이 모여서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어떠한 통일적인 해석을 요구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는것이다. 프랑스의 외교관이였지만 시에서 그가 추구한것은 어떤 윤리도, 사상도, 철학도 아니다. 그저 그의 령혼에 떠오른 이미지들을 집합하여 한수의 시로 만들었을뿐이다. 한국 태학당에서 출판한 생종페르스의 시집은 [이국의 녀인에게 바치는 시]라는 제목으로 되였는데 모든 시가 다 이런 파편문체의 시 즉 다선시다. [감각적 비 실재성이란말은 생종페르스 시에도 유용한 말이다. 그의 시를 내용상으로 리해하기란 거이 불가능하다] 하고 독일의 석학 후고 프리드리히는 론하고 있다.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생소한 이미지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반짝이는 이미지들이 장엄한 소리를 내면서 독자를 아연해지게 한다. 그것은 상상력에 대한 자극이다. 이미지들은 조밀하게 배렬되여 어느 한 이미지도 부정할수도 없다. 령혼속에서 끓고 있는 이미지들은 낯설고도 환각 적이여서 이방의 나라에서 온 사물들의 움직임이라고 밖에 할수 없다. 아래에 201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를 한수 보기로 하자 기상도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월 바다가 신기루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경기의 백색 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슴프레한 호박빛이 마을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위의 대기중에 그려진 상형문자다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 멋대로 떨어진다. [기상도] 전문이다. 기상도란 날씨를 알려주는 도해라고 해석할수 있다. 그런데 날씨를 알려준다는것이 오늘은 몇도며 바람이 몇급이며 구름이 어쩌며 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비가 오는가 눈이 오는가 하는 말따위도 물론 없다. 기상도를 보면서 10월의 바다, 요트경기, 호박빛, 개짓는 소리, 정원의 과일나무들을 쓰고 있다. 사실 이러한 사실들은 또 너무 낯선 사물들로 변형되고 있다겠다. 10월의 바다는 신기루등지느러미로, 요트경기는 백색현기증으로, 호박빛은 음향으로 , 개짓는 소리는 상형문자로, 과일은 나무를 바보로 만드는것으로 변형되고 있다. 각련들은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데 이미지들마다 어떤 련계성도 보이지 않는다. 각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각자의 독존이 집합되여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한국의 조향의 시 [바다의 층계]도 이러하다. 바다의 층계 조향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手话机 녀인의 허벅지 낚지 까만 눈동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웅에 손을 흔드는 하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끝에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의 전문이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는 단절되여 있고 아무련 련계성도 없다.. 우리는 아주 괴상하고 기이한 그림앞에 서있게 된다. 여러가지 기이하고 괴상한 사물들이 모여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다겠다. 여기서 그 어떤 사상을 추구한다는것은 거이 불가능하다. 시인의 의식의 뛰여다니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을뿐이라겠다. 의식은 그 어떤 장애도 받지 않고 한순간에 자유자재로 번개처럼 하늘을 가를수도 있고 산처럼 솟을수도 있고 물처럼 흐를수도 있고 천년만년을 거스를수도 있고 고금중외를 빛의 속도보다도 더 멀리 날아다닐수도 있는것이다. 조향의 가 바로 이런한 시라고 볼수 있을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의 생종페르스의 나,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의  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시라고 볼수 있겠다. 이러한 시를 필자는 후고프리드리히 말로 하면 파편문체시라고 할수 있고 심상운의 말대로 하면 다선시라고 할수 있겠다. 모두어 말하면 시에 등장하는 사물이 하나인것이 아니라여러가지이다. 이 여러 가지 사물들은 다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미지들은 각각 홀로걷기를 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한수의 시에 하나의 주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주제가 동시에 병존하고, 여러가지 주요 인물(혹은 사물)들이 활동한다고 하겠다. 뒤의 이미지는 앞의 이미지와 아무런 련계성도 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미지들은 물결이 흘러가는것처럼 흘러간다고 하겠다. 료리로 말한다면 순수한 닭고기로만 된 료리인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고기와 여러가지 채소로 된 잡탕료리라 하겠다. 과거에 우리는 이러한것을 구성이 흩어졌소 째이지 못했소 이런 시가 어떻게 시로 되오 하면서 나무리였다. 그런데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할 시가 오늘은 탐구되고 있다. 이러한 시를 심상운 시인과 김규화시인은 [하이퍼시발간사]에서 이렇게 긍정하고 있다. [한국현대시를 오래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벗어나 다선구조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서술을 객관적이미지로, 정적이미지를 동적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개혁성(改革性)이 들어있다.] 두 시인은 재래의 현대시와 하이퍼시(다선시)와의 다른점 6가지를 론하였는데 우리가 심사숙고할만한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할수 있다. 이 여섯가지 구별을 잘 인식하고 리해하는것은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에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오늘의 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되는가를 가리켜준다고 생각된다. 다선구조시를 일종 하이퍼시라고도 하는데 하이퍼시란 어떤것인가? 이에 대한 문덕수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면 꽤도가 올것같다. 문덕수는 [하이퍼(hyper)란 말은 ‘과도(过渡)한’, ‘과다(过多)한’, ‘초월하여’, ‘넘어서’, ‘초(超)…’, ‘3차원보다 높은’ 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일종의 련결어]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해석하고있다. [하이퍼는 본의의 세계에서 유의의 세계로 뛰여넘는(초월해서), 현실세계의 상식을 초과할 때 일컫는 일종의 하이퍼적특징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 하는것은 시의 본질적구조자체를 부정하는것과 같습니다… 하이퍼시는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불연속성적 균열을 초월하여 ‘’상상세계’’와 연결하는 작시에서 얻어진것입니다… 하이퍼시는 초월세계와 연속하려고 하는 정신적, 언어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시 209쪽) 문덕수는 하이퍼시에서의 현실과 초월의 관계를 극명하게 밝히면서 하이 퍼시에 대한 사유방식은 시의 본질적구조에서 나온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특성은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불연속성격 균열을 초월하는것이며 현실과 초월세계를 연속하는것이라고 하였다. 재래의 현대시는 이렇지 못하였다. 유추되는 사물이 꼭 어떤 련계성이 있어야 하고 한수의 시는 하나의 단선구조로 되여야 하였다. 시력사를 보면 우리 시가 백여년을 (아니 수백년동안이래도 과언이 아닐것임) 단선구조를 추구하여 왔다고 할수 있다. 오늘 21세기 디지털시대를 맞으면서 우리 시에도 그것을 타파하라는 나팔소리가 울리였다. 나팔소리는 그렇듯 우렁차다. 이는 시에서의 신생사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신생사물은 력사의 근본 흐름을 대표하는것으로서 낡은것은 그앞에서 점차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게 될것이다.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시]에서 조향의 [바다의 층계]와 문덕수의 [마릴린 몬로] 등 시를 례로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론리적맥락이나 인과를 맺지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가진다…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게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게에서 형의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게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결합방식은 김춘수의 ‘무의미시의 기법’과는 다른 ‘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할수있다](하이퍼시224-225쪽)심상운은 하이퍼시를 아주 쉽게 [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이라고 명명하고있다. 초월성과 의식의 건너뛰기가 하이퍼시의 핵심이라고 해도 무방할것이다. 현대시와 다선시는 어떤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는가를 살펴보는것은 다선시를 리해하는데 큰 도움으로 될것이다. 문둥이 서정주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시 [문둥이]에서는 전반시에 하나의 사물의 이미지에 대한 서술만 있는것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시는 문둥이가 어쩌는가만 쓰고있는것이다 아마 서정주시의 다른 시들도 이렇게 한가지 사물을 둘러싸고 씌여져있는 같다. 하지만 오늘의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는 이와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문둥이가 아주 짧은시니까 [하이퍼시]시집에서 짧은 시 한수를 보자 북소리 김은자 Scene# 8 고무줄놀이를 한다 엄마는 장사 나가고 저녁이 줄을 뛰여넘는다 나는 엄마를 기다린다 지구를 한바퀴쯤 돌면 아빠가 나올가 이 시는 [문둥이]보다 한줄이 더 많다. 하지만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단선이 아니라 다선이다. 소제목부터 야릇하다. 영어에다 우물정자같은 글이 아닌 부호에다 아라비아수자8을 조합하여 쓴것이 이색적이 아니라 할수 없다. 시가 시작되자 북소리가 고무줄놀이를 한다는 변형부터 창의적이다. 청각을 시각화한 공감각의 응용이 이채롭다. 그아래에 엄마가 나오고 저녁이 나오고 지구가 나오고 아빠가 나온다. 시의 행마다 성질이 다른 사물들이 나타난다. 이 성질이 다른 사물들 자체가 련계성보다도 분리성이 강하다. 시에서 이런이미지들의 횡적배렬을 파편문체라고 할것이며 다선시라고 하지 않을가 생각된다. 이질적인 사물들의 이미지라렬이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이미지와 이미지사이에는 일상적인사유로는 넘지 못할 벽이 장용하고 있다겠다. 북소리가 줄뛰기를 한다는것은 청각적이미지를 시각적이미지로의 전환이 이색적 이다. 그다음은 엄마는 장사 나가고 했으니 뒤에 엄마에 대한 해설이 있으려니 했는데 저녁이 줄뛰기를 한다고 한다. 엉뚱하다. 그담 엄마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다음에 나오는것은 지구를 한바퀴도는 일이나오고 기다 리는 엄마대신 또 아빠가 나온다. 시를 통하여 어느 하나도 [나]라는 사람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는것이 없다. 좌절에 좌절을 거듭하다 생을 마감하게 되는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시라고 할가. 시의 구성이 여러가지 색갈의 쪽을 묶어서 하나의 담요를 만든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쪽들의 색갈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현현이라는것이다. 다선시의 합리성 다선시가 왜 오늘에 우리의 훈민정흠시단에 나타나게 되는가를 필자는 생각해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아래와 같은 원인이 아닐가 생각한다 다선시는 오늘의 시대에 부응하는 시적구조가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해본 다. 지금은 생산이 다국적인것이 많다. 자동차공장하면 여러나라에서 부속을 끌여들여 하나의 차를 만드는가 하면 한나라에서 생산하는것도 여러지구에서 부속품들을 모아서 조립하는 경우가 있는같다. 유리는 어디서 생산하고 바퀴는 어디서 생산하고 엔징은 어디서 생산하고 모형은 어디서 생산하고 등등. 아마 어느 자동차공장이 한공장에서 모든 부품을 생산하여 차를 만드는 공장은 아마 없을것이다. 어느 한 나라에 어떤 큰 일이 벌어져도 영향이 그 나라에만 미치는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반응을 일으키거나 세계적인 참여를 초래하게 되는경우가 많다. 이런 이미에서 한시인이 시를 쓰자면 여러가지 인소들이 작동 하게 되는것이고 여러가지 사물과 사건들이 현실을 초월하여 상상도 되고 환상도 되는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사고의 바탕이 되여서 그런 같다.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다선적이다. 한사람이 동시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는것이다. 누구와 대화하면서 그가 아닌 어떤 사람의 어떤 모습이나 일을 생각할수도 있고, 미국의 뉴욕이나 오스트라리아의 사자, 중국의 고궁…. 이러한것들을 거이 동시에 생각할수도 있고 련속적으로 생각할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떠오른 사물들은 실제상 아무런 련계도 없고 성질이 완전히 이질적인것들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다각적이고 다시점이라고 할수 있다. 그것이 오늘의 다선시에 사유의 기교를 주지 않을가고 생각된다. 자연도 다종적으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다. 한마을이 있다고 하자. 거기에 사람이 있고 물이 있고 나무가 있고 흙이나 돌이 있고 또 도야지가 있고 닭이 있고 개가 있고 소가 있고,,,,,,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들을 종합하여 버들골이요 남평이요 도문이요 하고 말하게 된다. 손바닥만큼 자그마한 땅의 구조도 그렇게 된다. 거기엔 흙이 있고 풀이나 나무가 있고 또 귀뚜라미나 개미같은것, 지렁이, 혹시 토끼도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여러가지 사물을 통칭해서 어느한 자그마한 곳이 어떤 개념으로 존재하게 되는것이다. 다선시란 이런 자연의 특성과 무관한것이라고 말할수 없을것 이라고 생각할수 없게 된다. 인간의 문화는 또한 다층차적이다. 연길하면 고층건물이 즐비한 거리가 있고 거리에선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다니고 여러가지 백화나 가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게 된다. 백화에 들어가면 적어도 수천종에 달하는 여러가지 상품들이 있는데 이러한 상품들은 다 성질도 다르고 용처도 다르다는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진렬해 놓은 과자와 옷들, 전기제품들, 악세사리들, 시계들… 다 상품이라는 이름으로도는 통용으로 명명하겠지만 그 한종한종의 상품들의 용도와 성격들은 각각 다른것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선시는 현실문화에 부응하는것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눈, 귀, 코, 입, 귀, 눈섭 등이 보인다. 이 눈귀코입눈섭은 다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모임이라고 할수 있으며 이것들이 모여 얼굴이라는 명명을 받게된다. 어느 한가지를 가지고는 얼굴이라는 이름을 받지 못할것이다. 한수의 시에도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고 눈섭이 있게 되는것이 오늘의 다선시라고 생각하게 되는것이 아닐가. 얼굴의 오관은 겉으로는 살에 의하여 련결되였고 안으로는 뼈에 의하여 련결되였다. 살에 의하여 련결되였다는것은 누구나 다 직감할수 있지만 뼈에 의하여 련결되였다는것은 조금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것, 보아내는 사람과 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다선시의 이미지들이 어떤 련관성이있는가를 보아내는 사람과 보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마 따로 있을것 같다. 실제는 이러한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사물은 모두 각자의 개성이 있지만 모두 이 세상에서 살아 간다는것만으로 벌써 련계되여 있는것이다. 더 나아가 말한다면 광활한 우주속에 있는것이며 한시인의 령혼속에서 산생되는 상상이나 환상일것이다. 사유하는 방법, 추구하는 예술기교가 다를뿐이라고 해야할것으로 알고있다. 오늘의 시대는 디지털시대라고 하는데 이 디지털시대는 컴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컴은 인간의 사유를 초월한 마술을 부리고있다하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것이다. 쑤뾰로 툭 찍으면 술이 나오기도 하고 노루가 나오기도 하고 나비가 나오기도 하고 삼국연회소설이 나오기도 하고 북경이 나오기도 하고 미국이 나오기도 하고 단마르크가 나오기도 한다. 그외에도 현실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모든 상황이 그것도 미세한 상황까지 다 드러낸다. 이렇게 바뀌는 시간은 정말 눈깜박할사이이다. 툭찍으면 변하니까. 이러한 컴은 우리에게 다시각, 다시점 사유를 부여한다고 하겠다. 이것도 다선시의 한개 기초가 되지 않을가 나오는 말 21세기는 21세기의 문학이 있어야 하고 시가 있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다선시가 21세기 시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 조지P란도와 한국의 다선시주창자들의 어록이나 일부문장들을 중요한 참고서로 절록해 본다. 《하이퍼텍스트3.0>>의 말씀 조지p 란도 하이퍼텍스트와 문학리론에 관한 글을 쓴 [자크데리다. 롤랑 바르트, 데오도오 넬슨 안드리에스 반담을 가리킴.] 많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 네명은 중심, 주변, 위계구조와 선형성에 대한 생각에 바탕을 둔 개념체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중선형성, 노드, 링크, 네트워크중의 하나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사고에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런 패러다임이다[2쪽]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 리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많은 네트워크가 상호작용 하며 그중 하나가 다른것보다 우위에 서지 못한다. 이 텍스트는 기의의 축조물이 아니라 기표의은하계이다. 이것은 시작이 없으며 되돌아갈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출입구를 통해 이 텍스트에 접근할수 있으며, 그 경로중 어떤것도 주된 출입구라고 강변할수 없다.[3쪽] 하이퍼텍스트[넬슨이 1960년도에 만들어낸 말]라고 할때 나는 비연속적인 쓰기를 의미한다. 즉 분기점이 있어서 독자가 선택할수 있도록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다른 경로를 제공하는 링크들로 련결된 일군의 텍스트덩어리이다. [4쪽] 하이퍼텍스트는 비선형적, 아니 좀더 적절하게는, 다중선형적 혹은 다중순차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동상] 사람의 마음은 … 련상에 따라 움직인다. 한가지 생각을 부여잡게 되면 련상을 통해 제시되는 다음 생각을 바로 붙잡게 된다. 이때 뇌세포가 수행한 흔적들의 복잡한 거미줄구조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16쪽] 하이퍼텍스트는 현대문학과 기호학리론의 일부 주요 론점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갖고있다. 특히 탈중심성에 대한 데리다의 강조, 읽기텍스트와 쓰기텍스트라는 바르트의 개념이특히 그렇다. 실제로 하이퍼텍스트는 바르트와 데리다의 두 개념과 당혹스러울 정도로 유사한 문학적형상들을 창조해냈다. 그리곤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낸 문학적 형상물은 그개념들, 통찰과 력사적관련[혹은 새겨넣기]의 흥미로운 결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80쪽] 하이퍼텍스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용과 분리가능성에 대한 암시는 데리다가 다음과 같이 추가할 때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주어진 문맥과의 관계를 끊을수 있으며, 전적으로 제한이 없는 방식으로 새로운 문맥을 무한대로 만들어낼수 있다[82쪽] 바흐친은 다의적문학에 대해 ”한가지 감각으로 구성한뒤 다른 감각을 객체로 끼워넣는 방식으로 구성된것이 아니라 여러감각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한다 감각들중 어떤것들도 다른 감각의 객체가 되는 일은 없다.” [86쪽] 하이퍼텍스트는 무제한으로 재중심화할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 시스템에서 일시적인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는것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독자가 된다. 하이퍼텍스트의 기본적인 특징의 하나는 조직의 중심축이 따로 없이 링크로 련결된 텍스트 몸체들로 구성되여 있다는 점이다. [87쪽] 데리다는 “민족학은 탈중심이 생기는 순간에만 과학으로 탄생할수 있다” [89쪽]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련결접속되여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91쪽] 하이퍼텍스트의 읽기와 쓰기의 하나는 –인쇄본이 보관된 도서관을 탐구하는 것처럼- 아무곳에서나 시작해 서로 련결할수 있다는 점이다.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처럼 “각고원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읽어도 상관 없으며, 이들은 다른 고원들과 서로 련결되여 있다.” 이런 특징적인 조직 [혹은 그것의 결여]은 리좀이 기본적으로 위계질서와 반대되는 특징, 즉 들뢰즈와 가타르가 나무에서 발견했던 구조적형태로부터 유래된것이다.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련계된다. 하지만 리좀의 특질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특질들과 련계되는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다른 기호체계들, 심지어는 비-기호상태를 작동시킨다.” [92쪽] 하이퍼텍스트는 위계보다는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어떤것을 구현한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는 가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정보를 결합하며, 또 가끔은 우리가 독립된 인쇄텍스트와 장르, 형태라고 리해하고 있는것을 위반하면서 “어떤 지점을 다른 지점과 련결한다” … 다의성은 리좀적이며, 그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수목적인 사이비다의성을 드러낸다. 객체에서 주측역활을 하거나 , 주체를 나눌수 있는 독립성은 없다”하는 들뢰즈, 가타리의론점에서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따라서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려되는 하이퍼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리좀은 어떤 구조적 혹은 발생적모델에 순종적이지 않다. 계보학축이나 심층구조라는 생각에는 낯선 존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설명하듯이 리좀은 “지도적이지 사본이 아니다” 【94쪽】 리좀을 담론의 한 모델로 묘사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의미작용이 없는 단절의 원리 즉 근본적으로 예측불가능하며 불련속적인 경향을 불러온다….들뢰즈와 가타리가 리좀은“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중간뿐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성장하고 넘친다” [95-96쪽] 푸코는 사물의 질서에세 자신의 프로젝트는 동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은 “찬양받을 론쟁”을 거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동시적인 그리고 외견상으로 모순된 의견이 상호작용할수 있도록 하는 사고의 일반적인 시스템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논쟁이나 문제를 가능하게 만들고 , 지식의 력사성을 떠맡도록하는 조건을 규정하는것은 바로 이 시스템이다” [99쪽] 전자컴퓨팅, 특히 하이퍼텍스트와 과거 30,40년의 문학리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힐리스 밀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 관계는… 다중적이며, 비선형적, 비인과적,비 변증법적이고 몹시 과잉결정적이다. 그것은 관계를 결정하는 대부 분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는 맞지 않는다”[101쪽] 하이퍼텍스트는 두가지 방식으로 텍스트를 조각내고 , 흩어놓고 원자화한다. 첫째, 인쇄물의 선형성을 제거함으로써 개별구절을 단일한 순서로 배치해야 한다는 원칙 -즉 련속성-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해서 텍스트를 혼란상태로 바꿔놓는것이다. 둘째, 하이퍼텍스트는 고정된 단일한 텍스트라는 개념을 파괴한다. 조각은 첫번째 형태를 만들어내는 부품과 관련하여 전체 텍스트를 고려하며, 변형적읽기와의 련관성상에서 그것을 고려하게 되는것이다. [152쪽] 텍스트를 설정하는 방식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텍스트 다형태성은 텍스트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있으며, 변화하고 , 역동적이며, 열린 형태를 갖게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167쪽]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그리고 경험]은 선형성을 암시한다. 선형성의 주된 지배를 받지 않는 텍스트성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이퍼텍스트성에는 선형성과 련속성이란것이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다중련속성을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엔 여러개의 시작과 끝을 갖고있다는것이 앞의 질문에 대한 한가지 대답이 될것이다.[169쪽] 간단하게 말해서 시작은 일반적으로 결과로 나타나는 의도라는 의미를 포함하는것이다. [171쪽] 마지막 단어라는것은 없다. 마지막판본, 마지막 생각도 없다. 항상 새로운 관념과 아이디어, 재해석이 있다. … 바흐친에게 전체는 종결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관계이다.따라서 전체는 종결지을수도 무시할수도 없다. 전체가 실현될 때 개념상으로는 벌써 변화를 면할수 없다…. 하이퍼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용어들로 규정하고 묘사하기 어렵다. [172-173쪽] 글쓰기는 결코 존재하기를 멈춰서서는 안되는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즉 하나의 부속물, 사건, 그리고 잉여로 말이다. …. 우리는 플라톤적인 텍스트, 즉 그자체로 닫혀있으며 내부와 외부를 갖고있는 완성된 테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텍스트라고 불리곤 했던것, 한때 이 단어가 동일시한다고 생각했던것-즉 작품의 시작과 끝, 한가지 총체의 통일성, 제목, 여백, 쪽지표시, 기본구성의 바깥에 있는 참고문헌령역 등- 의지속적인 경계를 형성하는 모든 한계를 무력화 한다.[174-175쪽] 중심성이란것은 오로지 순간적으로 존재한다. [189쪽] 하이퍼텍스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저자를 재구성-재작성-한다 [190쪽] 상징으로서의 유추는 그것이 뛰여넘는 경계로부터 힘을 얻는다. 경계가 없다면 링크에 의해 만들어진 링크들은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것이다. … 내가 빈약하거나 비효률적이라고 한것은 그것들이 명백하게 선형적인 텍스트에 멋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308쪽] (소설에서) 개별 렉시아((돌진, 급격한 증가)는 독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부가적인 링크들을 따라가길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국 하이퍼텍스트는여전히 텍스트이며, 글쓰기이다. 우리는 좋은 글쓰기의 많은 장점들과 링크가 있는 글쓰기를 구분한는것이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말로 하면 뛰여난 하이퍼텍스트는링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것은 아니라는것이다. 링크를 둘러싸고 있는 텍스트가 또한 문제로 된다. 왜냐하면 개별 렉시아안의 글쓰기와 이미지의 품질이 하이퍼텍스트의품질에핵심적인 역활을 하기때문이다. 특정 렉시아의 콘텐츠(내용, 목록)에 만족한 독자가 그 렉시아에서 다른 렉시아로 향하는 링크를 따라가고싶어 하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작가든, 아니면 단순한 텍스트 작가든, 작가라면 누구나 직면하는 문제는 단순하게 정의하면 어떻게 하면 독자를 계속 읽게 만들것이냐로 요약할수 있다.[309쪽] 하이퍼텍스트시를 써왔던 월리엄 디키는 다음과 같은것들이 하이퍼텍스트시의 훌류안, 혹은 유용한 특징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하이퍼텍스트시는 그것의 부분, 연, 이미지 중어떤것으로부터 시작한 뒤 시의 다른 부분이 그것을 이어갈수 있을것이다. 이런 조직체계는 어떤 한 카드에 기술되는 시의 부분은 그 시에 포함된 다른 어떤 진술의 뒤나 앞에 나올 때도 시적의미를 생성할수 있도록 충분히 독립적인 진술이 되여야 한다 ” [340쪽] 시의 목적은 텍스트의 조건을 보여주는것이다. 시는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의 텍스트적활동을 자신의 기본주제로 삼는것이다. …시는 또한 하이퍼텍스트 웹내에서 가장예기치 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399-400쪽] 아래에 에서 인용한 하이퍼시 한수 영웅의 얼굴 조슈아 래파포트 늙은 바이나모이네넨이 노래부른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지구가 흔들리며 구리산이 떨어진다 억센 옥석들이 덜커덕 굴러가며 절벽이 둘로 갈라지고 돌들이 해변을 철썩 때린다 그는 젊은 요우카하이넨을 노래한다 그의 칼라활에 묘목을 얹고 말의 멍에엔 버드나무 관목 발자국끝에는 호랑버들 그의 금테 두른 썰매를 노래하며 바닷가에 있는 갈대에 구슬로 매듭지은 그의 채찍을 노래한다 바이나모이넨; 영원한 현자라는 뜻, 칼레라바의 주인공 요우카하이넨; 바이나모이넨의 라이벌. 둘은 노래 경연을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면 녀동생을 바이나모이겐에게 주기로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고 그의 녀동생이 자살을 택하자요우카하이넨은 바이나모이넨을 죽이려고 하나 성공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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