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장과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들뿐이오."
1931년 9월, 마하트마 간디가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입니다.
‘간디 전집’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나는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에서 호적을 떼가야 할 때에도 빈손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이름 앞으로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것들은 물론 일상에 소요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과연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요?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가진 물건 때문에 필요 없이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主客)이 전도되면서 우리는 그 가진 것에 의해 가짐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을 흔히 자랑거리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많이 얽매여 있다는 얘기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4~5년 동안 별탈 없이 쓰던 휴대폰이 언제부턴가 꺼벅거리는가 싶더니 가끔은 먹통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한번은 주말을 이용해 모처럼 동아리 등산팀을 따라 등산을 떠났습니다. 땀동이나 쏟으며 간신히 목적지로 정했던 산 정상에 올라 한쉼 쉬고 있을 때쯤, 동아리 중 누군가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것을 보고 아차! 싶어 휴대폰을 꺼내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 휴대폰은 진작 먹통이 되어 있었습니다.
껐다가 다시 켜고, 배터리를 뺐다가 다시 끼우고, 다시 켜기를 반복했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전화한다 했는데… 혹시 그 친구 오늘 도착한다면 이거 큰일인데…!
참! 그리고 한국에서 보냈다는 택배도 오늘 내일이면 도착할 건데… 전화가 먹통이면 어떡하지?
아! 그리고 이번 주말엔 그 형이랑 한잔 하자고 약속했는데, 연락이 안 되면 날 뭐라 욕하겠어?! 안 돼! 안 돼~~
그 때, 일행 중 한 선배가 내가 안절부절 못하는 이유를 묻더니 자기는 주말에 별로 요긴한 전화가 없으니 먼저 쓰라면서, 자기 휴대폰을 선뜻 건네주었습니다.
염치불구하고 선배의 휴대폰에 내 카드를 갈아 끼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활 나갔습니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하산할 때까지… 또 버스를 타고 귀가할 때까지 기다리던 전화는 한통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 나는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휴대폰에 얼마나 집착해 있는가를…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그 휴대폰이 실은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꽁꽁 얽어매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집착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하고 한동안은 망가진 휴대폰을 수리하지도 않은 채 방치해두기도 했지만, 결국엔 얼마 못 가 새것으로 갈게 되었고, 지금도 휴대폰의 지령에 따라 이리, 저리 움직여야 하는 무가내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긴 소학생들도 휴대폰을 “필수품”처럼 소지하고 다니는 요즘이고 보면, 휴대폰을 쓰지 않는 게 오히려 쓰잘데없는 객기로 보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어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보여집니다. 그것이 진정 필요한 것이건 아니건 무조건 보다 많은 것을, 보다 새로운 것을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같은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밤낮없이 출렁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합니다. 그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의 맹방(盟邦)국가들이 오늘 와서 맞서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들을 얼마든지 보고 듣는 요즘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 관계 때문입니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틀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봅니다…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간디는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은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나누어 가질 수 있을 때에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깁니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 잊은 채 들떠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올 때처럼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가야 할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들을 소유했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교훈입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았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요.
송순(1493~1583)의 시조 한 수가 떠오릅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칸, 달 한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