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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밖에 모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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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8 ]

18    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댓글:  조회:2476  추천:0  2009-11-24
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노력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도 “하면 된다” 혹은 “할수 있다”만 강조한다. 사람마다 천부가 다르다. 그래서 어떤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수가 있다. 반대로 어떤 일은 노력을 안해도 그냥 해도 잘할수 가 있다. 이런것을 장끼 혹은 특장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따라하고 싶어도 할수 없는 것이다. 노력해도 쓸모가 없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써먹을수 없다. 자신이 하는 사업 혹은 공작과 아무런 련관도 없기때문이다. 결국 아무리 노력을 해도 긍정을 받지 못하고 상응한 대우도 받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헛수고만 하는 멍청이로 보인다. 사람마다 흥취가 다르다. 자신이 흥취를 가지는 지식을 학습해야 잘 배울수 있다. 하지만 승학을 위해선는 자신이 흥취를 가지지 않는 지식도 학습해야 한다. 흥취가 없으니 억지로 하게 되고 학습효률도 높을수 없다. 그런데도 "흥취가 없는 학과"를 "아주 재미있는 학과"라고 자아암시하면서 학습하는 사람도 있다. 하기 싫은 공부를 다른 사람의 강박에 의해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학습하는 목적은 좋은 성적을 얻고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학교에 가는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낫은 앞날을 기대하며 하는 사람도 있다. 상등인이 되기 위한 필요한 고행이라고 리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도 "하면 된다"만 강조한다. 그 목적이 교원평가제도와 관련이 되는지 모른다. 그런 경우에 교원이라도 자신의 량심에 꺼리끼는 그러나 자신의 리익에 도움이 되는 일 혹은 말을 한다. 승학시험에서 학생들의 성적이 높으면 긍정을 받을수 있도록 교원평가제도가 되여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 교원이 학생들을 동원하여 승학시험에 참가하지 않게 하거나 그 자격을 취소한다. 그러면 승학률도 높아진다. 좋은 학교 가고나면 자신이 큰 일을 했는가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이라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실은 어느 교원의 부탁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런 본보기가 있으면 누구나 다 그러한 인재로 배양할수 있는것처럼 생각한다. 혹은 어느 교원의 글을 자신의 글처럼 발표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험담을 본적도 들은적도 많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능력은 제한이 있다. 무엇이나 다 해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지금의 중소학교 교육은 무엇이나 다 가르치고 무엇이나 다 시험친다. 그렇게 강박적인 교육을 한다. 그래서인지 대학으로 갈수 있는 사람은 흔히 고분고분 말을 듣는 그런 류형의 학생뿐이다. 아무리 개성이 강해도 승학제도라는 처마밑에서는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다. 머리는 깎아서라도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는 경우 다른 선택은 직업학교이다. 한평생 학력이 낮은 사람(남보다 못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지금의 교육은 아직도 영재교육 혹은 정영교육이다. 학생에게 맞는 교육을 어떻게 하겠는가는 연구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지식을 전수하겠는가만 연구한다. 그러니 아무리 론문을 많이 써도 그 글이 그 글이고 실천은 또 자신들의 나름대로 한다. 무엇이나 다 아는것은 인재가 아니라 백과사전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무엇이나 다 준확하게 기억할 능력이 없다. 그것은 컴퓨터가 할일이다. 지금의 컴퓨터에는 아주 많은 지식을 저장할수 있다. 인터넷이 발전한 지금에는 더욱 그러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할수 있는 지식을 다 기억하느라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지금은 지식축적보다도 능력배양을 더 중시하는것이 아닌가? 교육을 하려면 모든 문제를 다 고려해야 한다. 그냥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면 어떻게 진정한 교육을 할수 있는가? 그냥 아는것이 적어서 상급의 요구라면 그대로 하고 부동한 의견도 제기하지 못하는지 모른다. 주견이 없는 사람이 주견이 있는 학생을 배양할수 있는지 모른다.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연구하지 않는다. 그냥 돈을 많이 주는 일을 골라한다. 승학시험을 고치지 않으면 교원의 평가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교육도 고칠수 없다. 나처럼 그냥 학생배양만 중시하는 사람이 몇일까 하고 생각할때도 있다. 늘 밑지는것 때문에 어리석다는 말을 잘 듣는다. 그러니 사회의 가치관도 그러하다는 뜻일것이다. 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학생에게 맞는 교육을 하려면 승학제도부터 고쳐야 한다. 그런데 10몇년을 이렇게 말해도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래도 “하면 된다”를 기억하며 그냥 해본다. 왜서일까? 2009년 11월 24일 3시 5분 하는척 하면서 안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말을 수집하여 그것을 구실로 삼아 협박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아무것도 대수럽지 않다. 그들이 나를 물어도 독을 타는 사람은 내가 아닐것이다. 그렇게 되였으니 나는 그냥 당하고만 있는것이 아니다. 전에 원세개가 그렇게 혁명당을 물어먹었다고 한다. 력사가 다시 중복될수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것이다.
17    집체신용과 개인신용의 관계 댓글:  조회:1604  추천:0  2009-09-25
집체신용과 개인신용의 관계 다른 사람의 신임을 받으려면 신용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 말하는 신용은 개인의 말로 서술한 신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평가에서 나오는 신용을 말한다. 한 사람이 “신용이 있다”거나 “신용이 없다”는 그 자신의 말보다도 다른 사람의 평가가 더 중요하다. 어는 사람의 신용정도가 어떠한가는 그 주위의 다수 사람의 평가에서 나타난다. 집체신용은 일종 제도로 실현한다. 그 제도는 일정한 기록을 통하여 그 제도의 실시정황을 반영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청가제도 등은 이러한 제도의 한가지이다. 이러한 제도의 실시는 그 집체내의 모든 성원이 다 같이 공동한 규률하에 공작을 책임적으로 사회의 신임을 받을수 있는 정도로 일을 하였다는것을 설명한다. 즉 집체적인 신용으로 개인적신용을 보충하는것이 된다. 개인신용은 개인적인 수양으로 실현한다. 어떤 경우 개인신용은 다른 사람의 감독범위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즉 개인적으로 신용을 지키지 않고도 “신용있게 하였다”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우에서 말한 청가제도 등 제도 역시 개인신용의 담보가 필요하다. 즉 유관공작을 맡아하는 사람의 개인신용이 필요하다. 만약 이런 사람이 사심이 있어 어느 사람에 대해서는 특수한 대우를 한다면 집체신용도 담보가 없게 된다. 규률앞에서는 누구나 다 평등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지금과 같이 효률을 따지는 사회에서 규률만 강조하는것도 합당하지 않다. 규률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여 규률을 자각적으로 지키는 사람도 규정에 따라 하라는것을 그 사람의 손발을 묶어놓는것과 같다. 그 사람이 어떻게 시름놓고 공작을 할수 있겠는가? 사회의 감독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사회에서 이러저러한 여론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여론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문제는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것 같다. 즉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그 일을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말을 들을때 한 방면의 말만 듣지 말고 여러방면의 말을 다 들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시간 지점 인물 사건의 경과 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아야 한다. 이런 일을 다하려면 확실히 힘들다. 그렇다고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는 말때문에 다른 사람의 공작을 간섭하는것은 합당하지 않다. 례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의 제보에 의하면 “어느 사람은 공작시간(출근시간)에 거리에서 돌아다닌다”는 제보가 있다. 그러면 그 제보를 받은후 구체적으로 “어느 시간에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확인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 그 제보한 사람의 정보를 보류해야 한다. 무턱대고 어느 사람을 무함하는 경우도 있기때문이다. 그 일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든다거나” “일이 너무 많아 할수 없다”거나 하는 리유로 단순하게 문제를 처리하면 다른 사람의 공작을 방애하거나 지어는 공작을 제한하게 된다. 규률을 지킨다 하여 필요한 공작도 하지 않고 반공실에만 앉아있을수는 없지 않는가? 집체신용과 개인신용의 관계는 더 복잡할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글을 맺으려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강요할수 없다. 그러나 나는 맞는 길을 알고 그것을 선택한 이상 끝까지 그대로 하려 한다. 2009년 10월 18일 7시 14분
16    노력이 없이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댓글:  조회:1986  추천:0  2008-12-23
노력이 없이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노력이 없이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노력을 하지 않고도 혹은 노력을 적게 하고도 성공할수 있다는 설법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쟁이 존재하는만큼 경쟁에서 이기려면 노력해야 한다. 노력을 하지 않고도 성공할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경쟁의식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지 않는지 모르겠다. 선진적인 교수방식을 취하니 아주 쉽게 리해할수 있고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도 좋은 성적을 얻을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학습을 한다음에는 시험으로 선발을 하게 되는데 노력을 하지 않고 남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을수 있을까? 그래도 노력을 하지 않고 성공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선발만 중시하는 교육이 싫다고 실패를 선택할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실패한뒤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더 노력을 해야 할것이 아닌가? 선진적인 교수매체를 사용하였으니 이제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쉽게 학습할수 있는것처럼 선전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고 어떻게 많은 사람들중에서 우수한 사람으로 지목될수 있고 경쟁이 치렬한 선발시험에서 성공자로 남을수 있을까? 그렇게 선전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냥 일부 사람은 로동자로 되여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때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원래 남보다 차해서 로동자로 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다. 설상 로동자로 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을 장악한 우수한 로동자가 된다면 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할수 있지 않는가? 선진적인 교육리념이 있으니 이제는 노력하지 않고도 성공할수 있는가? 선진적인 교육리념이 어느 한사람에게만 알려지는것도 아니니 사람들의 능력이 제고되면 다 같게 제고될것이 아닌가?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은 부분적인 학생이고 다른 일부분의 학생은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그 실패의 고배를 다른 사람에게 돌릴수 있다면 그것도 일종 성공이 아닌가? 누구나 다 대학에 가지 못한다 하여 “내가 그 대학에 못가는 사람으로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그러한 사람은 자기스스로도 자신이 남보다 차하다는것을 승인한것과 같을것이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기에 노력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면 누가 현명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할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자신의 지력이 남보다 못하다”는 말로만 들린다. “고생은 자신에게 향수는 남에게”라는 말처럼 고상한 품성을 가졌다고 칭찬을 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좋은 기회를 남에게 양보하느라고 자신은 노력을 하지 않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척 하는것일까? 노력이 없이 성공한 사람은 없다. 빌 게이츠도 반공실에서 생활하다싶이 한적이 있다. 성공한 빌 케이츠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성공하기전의 빌 게이츠를 아는 사람은 적은것이다. 그냥 마음껏 놀고 편히 휴식하였다면 오늘날의 빌 게이츠가 있을수 있었을까? 의심만 간다. 전에 나도 잠자는 시간과 운동하는 시간 몇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책보는데만 리용한적이 있었다. 그래서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지금은 “공작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맞을것이다. 휴식에 필요한 얼마간의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에 생각하는 제일 중요한 일은 공작이기때문이다. 공작을 하던 사업을 하던 “일벌레”로 불리우는 일본사람보다야 낫아야 할것이 아닌가? 주동적으로 하는 일이면 더 적극성이 나진다고 하는데 피동으로 일하는 사람보다 더 못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남을 핍박하여 일을 시키는 사람들의 작법이 맞는다”는 말이 아닐까? 나라면 실패를 생각하고싶지 않다. 그러나 성공하려면 쉽지 않다.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도 성공하고 싶지 실패하고 싶지는 않다. 노력이 없이 성공한 사람은 없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금후에도 그러할것이다. 실패한뒤에 후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금후에도 있을것이다. 그러면 내가 왜 다음번 후회하는 사람으로 되여야 하는가? 나는 성공하고만 싶다. 노력하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노력하는것은 힘들기만 하고 싫기만 하다면 실패를 하여도 그만일것이다. 남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어도 괜찮고 남에게 뒤떨어져도 괜찮고 남보다 차한 대우를 받아도 괜찮다면 실패도 좋은 선택인지 모른다. 남들이 힘들게 노력할때 잘 놀았으니 그것으로 만족인지 모른다. 학습을 노력하여 하는것도 싫은 사람이 공작을 노력하여 할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된다. 노력하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성공하려면 노력을 해야 할것이 아닌가? 2008년 12월 22일 20시 41분
15    신앙(信仰)에 대한 나의 리해 댓글:  조회:2183  추천:0  2008-04-14
신앙(信仰)에 대한 나의 리해     사전에서 신앙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믿고 받드는 일. 2 <종교>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일. ≒믿음.     내가 알기에 신앙이란 어떤 도리를 믿고 그것을 그대로 행동에 옴기는것을 말한다. 그냥 "그대로 하면 될수 있다"는 신념이 있거나 그냥 "그대로 해야 가장 좋은 결과가 있다"고 믿는것을 말한다.     나의 신앙은 진리라고 해야 맞을것이다. 어느것이 맞으면 그것을 따라하는것이다. 그 이상의 어떠한 복잡한 사상이나 복잡한 주의에 대해서는 흥취가 없다. 그냥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는것"을 기본적인 판단표준으로 한다. 그 "좋은 신앙때문에 자신의 일체를 바치는 일" 그냥 그러한 헌신정신에 대한 탄복을 하지만 따라하지는 않을것이다.     어떤 일을 하던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을 한다는것은 "닭알로 돌을 치는것"과 다를바 없는것이다. 최소한 이런 행위는 자신만을 믿는 유치한 행위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너 하나만 믿는다"는 그런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런 "네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는 말은 더구나 듣지 않는다. 할수 없는 일이면 할수 없는것이지 그렇다고 자신의 모든것을 다 버릴 정도로는 할수 없는것이다. 나는 그냥 나 자신의 능력만큼 일을 하려 한다. 그리고 될수 있는 한 자신의 노력으로 더 많은 일을 하려 한다. 그러니 어떤 일이 되지 않으면 내가 다 해주려니 생각을 하는 것은 "되지도 않을 일을 되라고 하는것"과 다를바 없다. 나의 인상에 나한테도 이런 일때문에 볓번이고 "파공(罢工)"을 한적이 있다.     자신의 주장이 맞는것이라면 그것을 믿고 따라하는 사람이 자연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한사람의 능력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능력에 의하여 공동으로 사회의 발전을 추동하는것으로 되는것이다. 사회의 발전은 우리의 념원처럼 그렇게 빨리 되는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려면 사회의 모든 사람 최저한 대다수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어떤 것을 주장해야 하는것이다. 그래야만 사회의 모든 사람들의 공동한 노력 그들의 내심으로부터 출발한 자각적인 주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진정으로 사회의 발전이 추진될수 있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저녁늦게까지 그 새로운 프로그람의 사용을 익숙히 하려고 한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전의 일로 말하면 그 한가지 내용에 대한 귀납을 잘하여 학생의 학습부담을 경감하려고 한 일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나처럼 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직책을 다 하는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 더 하는것은 자신의 사상상 인식상의 제고가 있음으로 하는 헌신적인 로동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그러한 로동때문에 보수를 더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선는 엄격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후하게 한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 말을 한어로는 "待己严格,待人宽厚"라고 하는것 같다.     신앙이 있다는것은 그런 일을 믿는척한다는것과는 다르다. 그 어떤 리익을 위하여 자신은 믿지도 않으면서 거짓으로 믿는척하는 것과는 다르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우선 신용이 있는 사람이다. 신용이 없는 사람은 신앙이 있다고 말할수 없다. 혹은 그 자신으로 어떤 신앙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믿어줄 사람이 없을것이다.     어떤 리익때문에 신앙을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신앙이 없으면 어떤 리익도 얻을수 없다는 생각떼문에 그런 신앙을 하는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말은 아주 잘한다. 그러나 행동을 하라 하면 그냥 구체적인 곤난만 제기한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믿음직하다고 한다. 그러나 말은 말대로 행동은 행동대로 하는 사람은 신앙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진정으로 그러한 신앙이 있는가는 물음표를 쳐야 할것 같다. 이러한 각도에서 어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 하여 믿음이 없는것은 아니다. 그러한 일을 완전히 리행할수 없음으로 하여 잠시 그러한것을 신앙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혹은 그냥 말만 하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것이 싫은것도 그 원인으로 될수 있다. 말은 아주 좋게 그러나 행동상에서는 일반인원과 같게 하는 그런 사람도 진정으로 신앙이 있는지 의심만 더해진다.     신앙이 있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심사숙고해야 할것 같다. 2008년 4월 15일 22시 01분  
14    주견이 있는 사람은 망종하지 않는다. 댓글:  조회:2343  추천:0  2008-03-16
주견이 있는 사람은 망종하지 않는다.       주견이 있는 사람은 아래와 같은 특점이 있다.     주견이 있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망종하지 않는다. 이것은 상급에 대한 불신임과는 다르다. 상급이라 하더라도 전문적인 책임자가 아니라면 어떤 상황에 대해서는 잘 료해하지 못할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자세하게 그리고 알아들을수 있게 해석을 해주어야 한다.     주견이 있는 사람은 망종하지 않는다. 상급의 명령이라도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경우 자신의 견해 혹은 관점을 정확한 방식으로 표달하고 전달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결책상의 실수를 형성하는것을 방지하고 손실을 조성하지 않는데 유리하다. 그러니 자신의 득실에 대해서는 고려할 필요성이 없는것이다.     주견이 있는 사람은 망종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러한것을 견지해야 할뿐만아니라 상급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는 제지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착오적인 판단 혹은 착오적인 결정을 내리는것을 제지할수 있다. 어떤 각도에서 이것도 그들에 대한 관심이라 해야 할것이다.     주견이 있다는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설명해준다.     주견이 있다는것은 옳고그름을 판단하는 표준이 있다는것을 말한다. 그러한 표준이 있음으로 하여 정확한가 아니면 틀리는가 하는것을 판단하는 표준이 있는것이다.     주견이 있다는것은 자신의 주견을 내세울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것을 말한다. 자신의 견해가 정확하다는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 더욱 큰 피동에 빠질수 있으므로 어지간히 용기가 없이는 할수 없다.     주견이 있다는것은 그 문제에 대한 깊은 사고가 있다는것을 말한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깊은 사고가 없이는 자신의 관점이 정확하다는것을 충분히 증명할수 없는것이다.     주견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한 신용이 있다는것을 말하여 준다. 그러한 신임을 형성하려면 평소의 일관화한 행위표현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신용이 없는 사람이 라면 그 주견이 옳은듯해도 그래로 실천할수 있는가가 의심당할수 있는것이다.     망종의 근원은 다음과 같은데 있다고 본다.     망종은 능력이 없는 표현의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자신의 주견이 없으니 망종밖에 할것이 없다. 상급의 명령이면 절대적으로 하는것이 그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공작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이 아닌것 같다.     망종은 책임심이 없는 표현의 한가지이다. 자신의 리익과 관계있는 상급과의 관계만을 중시하고 자신과 자신의 관리를 받는 사람사이의 관계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강권으로 해내면 자신이 능력이 있는가 하고 생각하는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그 복무대상에게 어떤 좋은점을 가져다주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는것이다.     망종은 나약한 표현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상급에 대한 정확한 건의를 제기할 용기도 없으니 절대적인 복종 혹은 망종만을 하는것이다. 상급의 포치에 의의가 있는 경우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정확하게 표달하고 전달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주견이 있는 사람은 망종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문제이다.   2008년 3월 14일 2시 1분
13    이런 일들은 힘들지 않다. 댓글:  조회:2058  추천:0  2008-03-09
이런 일들은 힘들지 않다. 鲜花名称:心甘情愿     이런 일들은 힘들지 않다. 혹은 "힘들지 않은것이 아니라 힘들지만 하고싶고 힘들지만 해내고싶은것이 있다"고 말해야 더 정확할것이다.     자신이 하고싶은 일이면 힘들지 않다. 이러한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경우"를 "어떤 일에 흥취가 있다"고 말한다. 하고싶은 일이기에 곤난이 있어도 극복하려고만 한다. 그렇게 곤난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있으니 어떤 일이라도 해낼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흥취는 언제나 잠시적이고 또 다른 새로운 흥취가 원래의 흥취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저것 다 해보지만 결국에는 어는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라면 힘들지 않다. 힘들어도 그것이 꼭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수 있는것이다. 처음에는 잘 하지 못하고 많이 하지 못하더라도 점차 잘하게 되고 많이 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차츰차츰 진보할수 있는 조건과 여론환경도 필요한것이다. 사람은 환경을 개조할수도 있고 환경에 적응할수도 있다는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자신의 장래와 관계되는 일이라면 힘들지 않다. 그것이 자신의 전도와 관계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참고 견딜수 있다. 자신의 금후의 더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지금의 잠시적인 곤난은 극복할수 있는것이다. 이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심리상태는 "따뜻한 물에서 죽어가는 청개구리"(温水煮青蛙)와 같다고 말할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것이 있다면 힘들지 않다. 그 일을 하는것으로 하여 자신의 어떤 소원을 이룰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모든 곤난을 이겨낼수 있는 동력이 생길수 있는것이다. 그러한 원하는 일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찬양을 받으려는 경우도 있고 어떤 좋은 기회를 포착하려는 경우도 있고 어떤 성과를 취득하려는 경우도 있으며 어떤 일을 증명하려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인생가치를 실현하려는 겨우도 있다. 그래서 "수요는 흥취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자신이 해낼수 있는 일이라면 힘들지 않다. 자신의 판단으로는 할수 없는 일을 그냥 억지로 하라고 하면 힘들기만 한것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할수 있고 또한 노력을 하는대로 잘할수 있다면 힘들지 않는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하는것도 중요한것이다.     어떤 일이나 다 힘든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잘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꼭 누구보다도 더 잘할수 있는것이다. 어떤 일은 그 누가 해도 그리 쉽게 잘할수 없다. 그런 일을 하는데는 누구보다도 더 큰 인내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인내성도 한 사람의 소질이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사람의 능력에는 제한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나 정력상에서도 허락되지 않는다. 아무리 능력이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방면으로 다 발전할수는 없다. 모든 방면의 모든 공작을 혼자서 다 완성한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자신의 발전목표를 잘 정하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에 노력하며 다른 방면으로 정력을 분산시키지 않도록 노력하는것도 아주 중요한것이다.     어떤 일을 하나 다 일정하게 곤난이 있다. 곤난에 부딪쳤을때에는 또 그 원인을 잘 분석하고 정황에 맞게 곤난을 극복할수 있는 대책을 대야 하는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큰 좌절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것은 어떻게 이러한 일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정확하게 대하고 정확하게 해결하는가 하는것이다.     이런 일들은 힘들지 않다. 힘들더라도 극복할수 있고 힘들더라도 꼭 해여낼수 있다. 그래서 "인생은 마음먹기"라고 하는것 같다.   2008년 3월 9일 8시 46분    
12    인생과 문제풀이 댓글:  조회:2111  추천:0  2008-03-08
인생과 문제풀이 인생은 어떤때는 문제풀이와 비슷한 특점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 인생풀이도 문제풀이와 비슷한 특점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아래에 내가 생각해보았던것들을 적어보려 합니다. 1, 선택문제 선택문제는 그 어느번의 시험에서도 거의 다 볼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문제형식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한 문제에는 일반적으로 네개 선택항이 있는데 그중의 두개 혹은 세개는 거의 비슷한것으로 합니다. 그중의 하나만이 정확한것입니다. 그 비슷비슷한 선택항중에서 맞는것을 선택해야 하는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에도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선택내용중에서 맞는다는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정확한 선택을 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틀린선택을 하게 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니 선택문제를 하는 것도 인생의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선택을 해가는 과정에 사람은 성숙되여가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확한 선택을 위하여 일정한 개인리익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 판단문제 어느것이 맞는가 아니면 틀렸는가 하는것을 판단하는것입니다. 판단을 정확히 하면 점수를 얻고 틀리게 하면 점수를 잃는것입니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맞는 판단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것이고 틀린 판단을 하면 나쁜 결과가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도 판단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판단을 잘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금 누가 말하는 사람이 없다 하여 틀린 판단을 해도 되는것이 아닌것입니다. 꼭 “틀린것은 틀렸다 맞는것은 맞는다”는 판단을 할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사회에는 전처럼 절대적인 “검은 사람” “흰 사람”은 적고 그냥 회색의 인간이 많습니다. 물론 절대적인 검은 사람 (즉 사회와 대항 하는 사람)은 사회의 배척을 받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흰 사람 (즉 사회에 대한 기여만 강조하는 사람)도 배척을 받는 데는 이상하다는 감만 느낄뿐입니다. 그러니 이 사회에는 회색인만 살수 있는것입니까? 그렇게 절대적으로 검지도 않고 그렇게 절대적으로 희지도 않고 누구나 다 어느정도의 흠집이 있는 그런 사람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좋아할것입니다. 어느 사람이나 다 약점이 있으니 그 약점이 있는것으로 하여 그냥 자신의 손에 공제된다고 생각하기때문입니다. 정말 그러한것입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서는 쓸모없을것입니다. 그냥 무슨 근거를 쥐였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것 같습니까? 3, 빈자리에 써넣기 문제풀이에서 빈자리에 써넣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보면 전반내용을 완정하게 기억할 필요가 없이 그중의 중요한 내용만 적어넣으면 되는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에 존재하는 어떤 문제의 공백을 하나 메운다는 사실도 아주 큰 일을 하는것으로 되기때문입니다. 어떤 창조도 중요하지만 어떤 한개령역의 한개 문제를 잘 해결하는것만도 아주 중요하기때문입니다. 그러니 빈자리 하나 메우는 일을 잘 하는것도 아주 중요한것입니다. 아무리 큰 기계라도 그중의 어느 하나의 나사못이 없으면 정상적으로 운행할수 없기때문이다. 4, 간단히 해답하기 문제풀이에는 간단히 해답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인생에서도 그렇게 간단히 해답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례를 들면 성명 ,나이 등을 묻는다면 그냥 사실대로 대답하면 되는것입니다. 묻지도 않는데 어째서 나이가 몇살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는것이다 5, 계산문제 인생의 어떤 일은 계산문제와 같다고 할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문제의 과정은 아주 복잡합니다. 특히 문제를 풀이하는 사로는 다종다양한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모두 시험지에 쓸수는 없는것입니다. 그렇게 쓴다면 어느 선생님이 알아볼수 있습니까? 그러니 사로를 정하고 결과를 초고지에서 얻은후 그 결과를 시험지에 잘 정리하여 써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인 경우가 인생에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때 우선 조사를 하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조사를 하기전에 그 판단부터 다 말한다면 말이 길어지는것은 물론이고 어느 사람이 그 말을 다 분석해냅니까? 그래서 말은 먼저 하지 않고 먼저 검사를 하여 문제의 답안을 얻어낸 다음 자세하게 결과를 알려주어야 하는것입니다. 6, 분석설명문제 분석설명문제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분석과정을 모두 쓰면 내용이 많아지고 알아보기도 힘들게 됩니다. 분석을 거쳐 결과를 얻은 후 그 결과를 조리있게 써야 하는것입니다. 물론 점수만을 위한 학습을 위한 경우라면 표준답을 기억하는데 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는것입니다. 그러니 점수가 높아도 능력은 없는 사람이 생기게 되는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였던 인생과 문제풀이의 비슷한점들입니다. 그냥 총망하게 쓰다보니 어떤 내용은 잘 정리하지 못하였습니다. 금후에 계속하여 수개를 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2008년 3월 8일 11시 25분
11    앞만 보고 가는 사람 댓글:  조회:1962  추천:0  2008-03-02
앞만 보고 가는 사람     “앞만 보고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한가지 일을 하게 되면 그 결과의 취득만 중시한다. 그와 관계되는 다른 일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다.    어떤 일은 그 일자체만도 매우 복잡하다. 그러니 이런 일을 할때에는 그냥 일을 성사시키려고만 하는 그런 단순한 심리상태가 수요된다. 그런 집념이 있으므로 하여 큰 성공을 취득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일을 하다보면 다른 문제도 그냥 단순하게 처리한다. 어떻게 말하면 다른 문제의 기교거나 기능같은것을 아예 중시도 하지 않는다. 례를 들면 "침식도 잃어가면서 일을 한다"는 평가를 받는것이다.    한가지 일에 너무 몰두하다보면 다른 일은 그냥 대수대수 하게 된다. 그래서 늘 결함이 많은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다. 재간을 알아보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되는것이다.    어떤 일은 해결하는 과정보다 그 결과를 얻는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어떤 일은 반드시 유효한 시간내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했다 하더라도 쓸모가 없는것이다. 경쟁으로 충만된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돌출해지는것이다.    지금의 사회를 보면 이런 사람은 그냥 모순에만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한가지 일만 중시하고 다른 문제를 중시하지 않다보니 다른일에서는 여러가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중시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이 아무리 배워주어도 기억으로 남지 않는것이다. 그럴 정도로 정보기술시대를 깨우쳤느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보라 하고 이런저런 말을 나르는 일만 하기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하여 일이 복잡해만지는것 같다.    이런 경우를 고려하여 나로 말하면 많은 일은 그 방식을 중시한다. 그리고 그 방식대로만 한다. 그리고 쓸모없는 말을 하는 장소에는 가지 않는다. 특히 한두사람만 있다는 장소는 더구나 꺼린다. 누구나 다 있는 장소라면 근심이 없는것이다. 그러면 본 사람이 많고 일이 외곡되는 경우도 적다.     이제부터 나는 학교내의 어떤 토론에도 참여하지 않을것이다. 내가 보는 견해는 여기에서만 쓸것이다. 이는 나의 선언이라고도 볼수 있다.    나는 그냥 어떤 기술을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도 지금은 유치하게 이러한 문제를 연구해야 한다. 내가 있음으로 하여 그러한 사람들이 편하게 일을 볼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그러한 사람들을 지켜주고싶은것이다. 내가 당한것만큼의 좌절을 다른 사람이 당하는것이 싫은것이다.    사회의 진보를 고려한다면 이런 단순한 사람을 보호하는 환경도 있어야 한다. 만약 이런 사람이 전문인재라면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하여 그들이 성적을 취득하게끔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 다음의 문제는 어떤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만들어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목적은 또 무엇인가? 아무튼 이것도 나의 한가지 임무로 되였다. 이제 나는 단순히 기술을 할수 없게 되다싶이 되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고싶다.     사람을 무는 것은 “개”라고 한다. 그 개를 잡아내야 할것 같다. 그리고 정의를 주장하는 그 어떤 힘을 형성해야 할것 같다. 그러자면 나 자신부터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나약한 모습으로서는 어떤 일도 할수 없지 않을까? 2008년 3월 1일 4시 43분
10    "교육을 하는데도 거짓이 필요하다" 댓글:  조회:2258  추천:0  2008-02-21
"교육을 하는데도 거짓이 필요하다" http://blog.daum.net/lienhao/2357581     "교육을 하는데도 거짓이 필요하다"고 한다. 내가 알고있는것과는 다른 리념이였다. 그사이 나는 그냥 이렇게 의문을 품은채로 교육을 하여왔다. 그리고 며칠간 블로그가 열리지 않은뒤 이런 문제의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래서 생각하였던것들을 적어보려 한다.     공자는 "수양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하고 수양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해도 듣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외에도 "자신도 바로잡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바로잡겠는가"라는 말을 한적도 있다.     中国古代教育家孔子的名言是:“其身正,不令而行,其身不正,虽令不从”,“不能正其身,何以正人?”     교원의 공작은 성적보다 더 중요한것이 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시범이고 사회에 대한 시범인것이다. 그래서 교원의 공작은 성적보다 시범작용이 더 중요한것이다. 그 성적이 교원평가의 필요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냥  시범작용만 강조할수 있는 용기도 필요한것이다. 사회상에는 성적을 위해 수분도 증가하고 거짓도 보태는 현상이 있다. 교육을 하는 사람도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 ? 혹은 교육을 하는 사람도 이런 일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为人师表具有鲜明的示范性。这是教师职业道德(二、为人师表的特征)中的一句话。     글을 쓰는데서 제일 싫은 일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것이다. 명인의 말이라도 싫은것이다. "명인이 말한것이면 도리가 있게 되고 나와 같이 이름없는 사람이 말한것이면 도리가 없게 된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게만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염오감만 느끼게 된다. 그런데도 그 말이 없으면 어떤 사람들은 설복할수 없으니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없는것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공자를 아주 숭배한다고 하니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 접수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제도 교육을 하는데도 거짓이 필요하다"고 고집할까?     실사구시라는 말이 있다. 실사구시는 모택동이 맑스주의 사상방법론의 중국화에 대한 개괄과 서술이다. 실사구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실사는 곧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고 시는 곧 객관사물사이의 내부적련계 즉 규률성이고 구는 곧 우리가 연구를 하는것이다."     “实事求是”是毛泽东关于马克思主义思想方法论中国化的概括和表述。……所谓“实事求是”,他解释说:“‘实事’就是客观存在着的一切事物,‘是’就是客观事物的内部联系,即规律性,‘求’就是我们去研究”。     이쯤 쓰면 "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서 거짓을 해야 할것인가" 하는것을 알게 될것이다. 그러면 무었때문에 실천가운데서는 아는대로 하지 못하는가? 2004년 4월 14일 4시 14분 
9    가져오기와 바꾸어놓기 댓글:  조회:1959  추천:0  2008-02-14
가져오기와 바꾸어놓기 (우리가 처한 시대)     가져오기란 다른 사람의 경험을 그대로 옴겨와 자신의 성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가져오기는 다른 사람의 선진적인 경험을 학습하는것과는 다르다. 그냥 다른 사람의 작법을 표면적으로 모방하는데 “앵무새가 말을 배우는것과 같다”고 할수 있다. 바꾸어놓기란 다른 사람의 성적을 자신의 성적으로 기록하는것을 말한다. 그냥 자신의 스스로 공인하는 대가를 지불하면 되는것이다. 영예는 자신에게 남기고 리익은 다른 사람(실제로 일을 한 사람)에게 돌려지는것이다. 그래서 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천수관음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리해할수 있다. 하나는 한 사람의 능력이 아주 강하기에 손이 천개 있는듯하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으로 말하면 아주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할 일을 혼자힘으로 다 해낸다는 뜻이 된다. 두번째로는 한 사람이 어떤 방면의 공작에 아주 숙련되였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일에 숙련되였기에 아무리 복잡한 일이라도 아주 쉽게 해결하는것 같다. 일을 많이 한 결과인것이다. 최저한 많은 일을 겪었거나 체험하였거나 보아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번째 해석은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지휘하여 일을 하는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 그 자신은 지휘나 하고 구경이나 하고 감독이나 한다. 일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다. 다른 사람을 자신의 손이나 발처럼 리용한다는 말로 리해할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어떤 경우에는 “시키는대로 하기만 하라”고 한다. “머리를 쓰지 말고 손만 움직이면 된다”는 뜻이다. 사람을 “말 할줄 아는 기계”로 보는것이 아닌가?     가져오기를 했음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하여 그 가운데 내포된 함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냥 그것이 자신에게 필요한것을 가져다 줄수 있다는것만은 잘 알고있고 그것을 실현하는것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는것만은 잘 알고있다.     바꾸어놓기를 하면 되는 일이니 더 깊이 연구할 필요는 없다. 그냥 “경험”재료를 모방하고 그중의 일부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놓으면 되는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냥 이름만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놓아도 되는것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이라야 그냥 그 “바꾸어놓기를 어떻게 하였는가”만 알아보면 되는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성공했으니 내가 해도 성공할것이 아닌가?     동시와 서시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서시의 어떤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의 찬양을 받는다고 그 겉모양을 따라 하느라 했는데 도리여 웃음거리가 되고 조소를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행동을 어떻게 하였는가만 보고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였겠는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은것이 그 원인으로 되는것이다.     마음을 잘 먹었다 하여 일을 잘 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일을 잘하려면 필요한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상응한 “대가”도 지불해야 하는것이다. 다른 사람의 신임을 받을만큼한 노력을 해야 하는것이다.     노력이 없이 하루아침에 성공할수 없다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허지만 힘든것은 싫고 편안한것만 바라는 마음이 있는것만큼 그렇게 기회만 노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갓 폭리시대를 경과한 사람들로 말하면 새로운 폭리시대의 산생을 기대하는것은 당연할것이다.     능력이 제한되니 이런 방법밖에 쓰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한 사람의 시간과 정력은 제한되여있다. 그렇게 제한된 시간에 많은 일을 하려 하니 그렇게 밖에 할수 없는것이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경우데도 그러하다. 접수도 되지 않는 일을 그냥 해야 하고 리해도 되지 않는 일을 그냥 해야 하니 적극성이거나 주동성이란 있을수 없는것이다.     편안할것만 바라니 그렇게 할수 밖에 없는것이다. 그냥 어린이다운 천성을 유지하려 하고 그로 인하여 오락을 할것만 바라니 그럴수 밖에 없는것이다. 그런 사람으로 말하면 “공작하는 가운데서 느끼는 쾌락”은 감수할수 없고 공작이 그들에게는 언제나 의무인것이다. 다른 사람의 쾌락으로부터 쾌락을 느끼는 일은 있을수 없는것이다.     자신의 생각대로만 하려 하니 그렇게 할수 밖에 없는것이다. 부동한 의견은 듣고싶지 않고 자신이 구상한대로만 하려 한다. 그러니 어린이처럼 고분고분 말을 듣는 사람밖에 접수할수 없는것이다. 이러한 사람으로 말하면 조작능력이나 강한 사람이 기술이 숙련되거나 창조적능력이 있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것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그냥 자신의 생각과 구상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면 “마음에 드는것”이다.     우리에게는 외국의 것이면 다 좋은가 하는 결함이 있다. 그래서 가져온것이면 다 좋은가 한다. 어떤 것을 가져다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다른것을 가져온다. 그래서 가져오기라는 말이 주의(拿来主义)라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것이다.     혹은 과거의것은 다 좋다고 한다. 지금의 문화에서는 좋은것을 찾을수 없으니 고대문화에서 좋은 것을 찾아내는수밖에 없는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연구도 하지 않고 그냥 계승하려고만 한다. 고대문화로 외래문화를 바꾸어놓는것을 전통을 계승하는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외국인이 아니고 고대인도 아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에게 해당되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 외국인과 다르다 하여 시대에 떨어진것이 아니고 고대인과 다르다 하여 전통문화를 버리는것이 아니다.     현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우리로서의 기회와 도전이 있는것이다. 그런 기회를 파악하고 그런 도전을 이겨내는것이 우리의 새로운 문화인것이다. 이런 현실에 적응되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여야 한다. 우리의 현실생활에 부합되지 않는 새로운 문화는 거절할수도 있고 우리의 현실생활에 부담이나 증가하는 전통문화는 버려도 되는것이다.     가져오기거나 바꾸어놓기를 할때 잘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라 하여 그냥 하여도 무방한가? “사람이 자신을 수호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人不为己,天诛地灭)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의 리익을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여도 된다"(为达目的,不择手段)는 말은 아닐것이다. 잘 생각해보아야 할것 같다. 2008년 2월 13일 9시 36분
8    은거 댓글:  조회:2158  추천:0  2008-01-28
은거(隐居)     은거에 대하여 네이버의 사전에서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은거[隱居][명사]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 그러면 그때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은거하였을까? 은거의 원인     은거하는데는 은거해야 할 원인이 있는것이다. 속세(俗世)에서는 그냥 살수 없으니 은거밖에 할수 없는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사람들은 은거할라 하면 깊은 산속에 숨어살았다. 그렇게 누구도 알수 없는 곳에서 이름까지 숨겨가면서 살았다. 그럴 정도로 그때에는 은거할만한 곳이 있었다.     지금도 은거를 추구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할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결함을 지적하려고만 한다. 그러니 그런 사람의 눈길을 피하려면 자연히 은거를 생각하게 되는것이다.     "천하에 힘든 일이 없으나 마음을 쓰는 사람이 두렵다"(天下无难事,只怕有心人)는 말이 있다. 일이 힘든것보다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 더 두렵다는 뜻이다. 또 "나쁜 일이 있는것은 두렵지 않으나 나쁜 사람이 있는것이 두렵다"(不怕没好事,只怕没好人)는 말이 있다. 이런것들도 은거를 택하는 원인의 한가지일것이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주의하지 않을수 없다. 그렇게 유명한 예수(耶稣)도 나중에는 종교의 심판을 받는다. 은거의 방식     은거의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누구도 찾을수 없는 곳에 은거하는것이 한가지이다. 그래서 누군가 찾으려 해도 찾을수도 없다.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것도 한가지이다. 그렇게 누구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를 곳에서 은거한다. 지금의 사회에서 문장에 필명(笔名)만 적는것도 한가지 은거의 방식일것이다.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역시 은거의 목적에 이를수 있는것이다. 그 다음은 능력상실처럼 위장한다. 기억력을 잃은 사람처럼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그냥 심부름이나 하는 정도로 있는다. 그러다나면 주위사람은 그냥 멍청이인가 한다. 그러면 묻는 사람도 없다.     그외에도 일부 특수한 형식의 은거가 있다. 공처(恐妻)는 한가지 은거이다. 공처가이므로 많은 일에 참여할수 없다. 자연히 말썽거리가 적어진다. 애완물을 키우는것도 한가지 은거이다. 애완물을 키우려면 일정한 시간이 들고 그로 인하여 쓸모없는 교제를 안해도 된다. 그만큼 마음도 편할것이다. 이렇게 보면 화분을 키우는 것도 일종의 은거이다. 그로 인하여 시간의 여유를 의의있게 보낼수 있는것이다. 은거할곳이 더는 없다.     지금과 같은 사회에서 은거할곳은 더는 없다. 그럴 정도로 어는 곳에나 사람이 발길이 닫지 않는곳은 없는 것이다. 옛 사람처럼 어느곳에 조용히 은거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곳이 더는 없는것이다. 아무리 깊이 숨어있는것 같아도 누구든지 다 찾아낸다.     이것뿐이 아니다. 하루라도 조용히 무엇을 연구할라 하면 누군가 찾아온다. 전화로라도 나오라고 한다. 그냥 거절할수 있는 경우 가 아주 적다. 그만큼 견결한 태도가 아니고는 안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디에 있을때나 누군가 감시하지 않는가 하는 감각이 온다. 그리고도 그것을 모를까 걱정하는지 "어느때 어떤일을 한 것을 안다"는 식으로 암시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은거할 가능성이 없다.     그냥 그렇게 혼자 있어도 누군가 그냥 감시한다. 내가 겪은 일이여서 더 잘 리해되는 일이다. 그래서 나를 신경이 너무 예민하다고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냥 그런 일이 발생한 이상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수는 없을것이다.     나와 거래한 사람중에 나의 말에서 흠집을 잡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와도 거래하지 않는다. 그냥 혼자로 지내고있다.     나의 글들은 근간에야 해볕을 본다. 그전에는 그냥 궤짝에 감추어두었다. 그 글때문에 공작에 영향을 받을까 걱정이 되였기때문다. 그런데도 그 내용들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내 생각에는 잘 감추어두었다고 생각한 그 문장을 누군가 본 사람이 있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때문에 소각해버린 문장은 얼마인지 나도 잘 모른다. 지금 블로그에 있는 문장은 다 근간에야 쓴 문장들이다.     집에서 책을 볼라 하면 주위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을수 있다. 그렇게 감시하는 사람이 있는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그냥 모르는척 해야 한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컴퓨터를 사용해도 내 컴퓨터에는 누군가 그냥 손을 댄다.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정황을 감시하는지도 모른다. 그랬다고 무엇을 보아낼수 있는지 이상하게 만 느껴질뿐이다.     이쯤 보시면 알수 있을것이다. 내 행동에 대해서는 시시각각 누군가 지켜보는것이다. 그러니 은거는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은거할 필요는 없다.     이젠 더는 은거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견해가 정확한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것이라면 그냥 그대로 써도 괜찮다. 금후의 사회는 법치(法治)의 사회이다. 그러니 법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면 다 할수 있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는것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특점이라면 살아서 의의있는 일을 하는것이다. 그냥 잘 먹고 잘 입고 구경거리를 다 하고 오락을 다 하는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 삶의 추구는 동물이나 다름없다.     유익한 일을 하는데 제일 큰 장애는 사람이다. 특히는 기득리익(即得利益)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기득리익이 손해갈가 걱정하는 사람이 제일 큰 장애이다. 전에 비해서 지금은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전처럼 이것저것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것이다. 그러니 유익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여도 괜찮은것이다.     어느 사람 혹은 어떤 관점 등은 모두 세상사람들로 말하면 선택문제(选择题)의 선택항(选项)과 같다. 자신의 관점 혹은 자신의 그런 선택을 받으려면 정확한 관점을 지녀야 하고 정확한 사람으로 되여야 한다. 그래야 선택문제에서 선택되는 그 선택항으로 되고 도태되는 선택항으로 되지 않는것이다. 맺는 말     은거는 목적이 아니다. 유용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잘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는것이다. 죽는것이 두렵지 않다 하여 죽는것을 택한다면 누가 나를 대신하여 내가 하려는 유용한 일을 하겠는가? 그러니 은거가 가장 효과있는 방법일것이다. 2008년 1월 28일 11시 55분     보충설명: 나는 력사사실같은데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 혹 기억대로 쓰면 력사사실과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때문에 그냥 력사사실의 인용은 생략한다. 그만큼 금후에 내용을 찾는대로 수개를 하려 한다.  
7    과정과 결과의 관계 댓글:  조회:3910  추천:0  2008-01-24
과정과 결과의 관계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필요한 과정이 필요하다. 과정이 없는 결과는 있을수 없다. 그러면 과정은 꼭 결과보다 중요한가? 그렇지 않다.     일부 경우 결과는 과정보다 더 중요하다. 례를 들면 대학교에 입학하여 좋은 학습기회를 취득하는것은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보다 중요하다. 노력은 하였지만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인것이다. 그래서 아래의 그림에서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것이다. 혹은 그들에게 꼭 대학교에 가야 한다는 착오적인 인식이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맞게 노력하려는 목표를 정해야 하는것이다. 능력을 초월하는 목표를 정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적은것이다.     어떤 일은 꼭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떤 기술을 숙련되게 장악하려면 반드시 부단한 련습이 필요하다. 이런 경우에 과정은 생략할수 없는 일이다. 한번 하는 것을 보면 일이 어느정도 손에 익었는가를 알수 있다. "과학은 연구하고 기술은 련마한다"는 말이 이것을 설명해준다. 컴퓨터학습에서 타자와 같은 것이 기술에 속한다. 일정한 시간의 련습이 없이는 타자속도를 빨릴수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정확한 타자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일부 빠른 속도의 문자수입을 하려면 전문적인 설비도 있어야 한다.     그러면 과정과 결과에서 어느것이 더 중요한것인가? 구체적인 문제는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절대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구체적인 문제도 해석할수 없는것이다. 2008년 1월 24일 15시 13분  
6    가리려고 한것이 오히려 더 드러나다. 댓글:  조회:2204  추천:0  2008-01-24
가리려고 한것이 오히려 더 드러나다.     "가리려고 한것이 오히려 더 드러나다"(欲盖弥彰)라는 말이 있다. 가리려고 한 일은 가능하게 "더러운 일"(혹은 "너절한 짓")(丑事)일것이다. 그러한 일이 드러난다는것은 자신에게 "매우 큰 손해"를 가져올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어떻게라도 가려야 하는것이 옳은것 같다.     가리려고 했으니 갖은 방법을 다해야 할것 같다. 아무튼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면 되는것이다. 그러나 이 "다른 사람"이 누구인가? 유관되는 인원인가 아니면 상급령도인가 또 혹은 사회인원들인가? 그냥 자신들은 "한덩어리의 철판같다"(铁板一块)고 생각하는걸까? "(바람이) 새지 않는 벽이 없다"(没有不透风的墙)고 한다. 사람이 한 일이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고 흔적이 남으면 진상이 밝혀지는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한것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한다. 아무리 비밀리에 한 일이라도 나중에는 다 드러나고 만다. 그래도 될수 있을때까지 버텨보겠다는 뜻인것 같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지 않고서는 한번 먹은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不到黄河不死心)는 뜻이 내포되여있는것 같다.     이젠 나도 감시를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낮이고 밤이고 내 행동을 감시하고 언행을 기록한다. 나도 아예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런 눈치를 알수 있는것이다. 그 목적이 무엇일까? 그 가리려고 하는 일이 또 무엇일까? 내가 한 일들을 잘 분석해보면 혹시 그들이 무었때문에 이렇게까지 긴장해하고 신경을 쓰는지 알수 있는것이다. 그러면 내가 한일에는 어떤것들이 있었는가? 아래에 렬거하여보려 한다.     1, 교육의 현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판단을 하려 하였다. 교육은 근래에 많은 문제들에 봉착하였다. 사람에 비교하여 말하면 이는 "병"에 걸린것과 같은것이다. 병에 걸렸다면 우선 정확하게 진맥하여 병의 근원을 찾은 다음 병에 맞게 약을 써야 하는것이다. "급하다고 막 덤비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病急乱投医)고 한다. 교육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하려면 우선 교육문제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판단을 하여야 한다. 그런 정확한 분석과 판단을 하려면 지금 존재하는 일부 현상들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면 이런 현상들이 일부 사람들이 가리려고 하는 일일까?     2, 근검한 생활방식을 선택하였다. 모든 일에 절약을 앞세우고 모든 일을 해결함에 돈이 적게 드는 방식을 선택하려 하였다. 소비를 추동(推动)하려는 일부 사람들의 착오적인 인식과 모순되는것이다. 그리고 그에 적응된 사람들의 소비습관과도 모순되는것이다. 그래서 그냥 공자(工资)를 높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른다. 근년에 교원공자도 일정하게 증가되였다. 이는 교육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제고되였고 교육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도 크다는것을 말한다. 허나 일부 사람들은 공자의 증가는 교원이 한 일과 관계없고 그냥 자신들이 공자증가에 대한 요구를 하였기때문이라고 한다. "우는 아이가 되여 떡 하나 더 얻어먹었다"고 한다. 나와 같이 "울지 않는 아이"가 있음으로 하여 공자제고가 늦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분인가는 나의 주위에 그렇게 "우는 아이"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도 따라서 "덕"을 본다고 한적이 있다.     3, 정확한 인생추구에 대한 사고를 하여보았다. 사람은 자신을 제고하려면 꼭 진취심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진취심은 많이는 돈을 버는 표면현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많은 재부를 축적한 사람들 모두가 간고한 노력을 투입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돈을 벌었기에 지명인사로 되였다는 일만 중시하고 그들이 어찌하여 돈을 벌게 되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는다. 결국 "갖은 방법을 다하"(不择手段)여 돈을 버는것이 유일한 목표로 되였다. 결과만 보고 과정은 보지 않는것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평론하라면 아주 잘하지만 자신에게 존재하는 결함은 보지 못한다. 서로 비판만 하고 서로 질책만 하고 서로 조롱만 하던 시대의 교육을 받은 결과일까? 아니면 그 여독이 지금껏 남아있다는 뜻일까? 나와 같은 인생추구는 그냥 때 지난것이고 실천에는 옴길수 없는 말공부(空谈)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상은 나의 최근행사에 대한 귀납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어느 하나도 틀린것이 없다. 전에 이런 실험을 한적이 있다. 먹을것을 많이 장만한후 며칠이고 집에만 있었다. 그 결과 그때 3일사이의 학습내용은 평소에 10일 본것보다 더 많았고 학습효과도 아주 좋았다. 그렇다고 종일 집안에만 있을수 없지 않는가? 나 한사람을 제한한다고 가려지는것일가?     가리려고 한다는것은 가려야 할 리유가 있을것이다. 하지만 가려서는 안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가리려는 사람이 있으면 면사포(遮羞布)를 벗기려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문제의 관건은 어느것이 더 정확한가에 있다. 가린다고 "병"이 낫는것은 아니다. 나은것 같은 그 표면현상하에서 점점 더 심해질것이다. 진정 막다른 골목에 이른 다음에는 후회해도 쓸모가 없는것이다. "가리려고 한것이 오히려 더 드러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세상은 끝이 없고 죄과를 뉘우쳐야 살길이 있다"(苦海无涯,回头是岸)는 말이 생겼을것이다. 2008년 1월 24일 3시 30분     보충설명: 글을 완성한 시람은 정확하게 3시 29분이다. 그러니 나도 그 무엇인가를 가리려고 생각했을까? 시간 1분, 그리고 29분과 30분. 그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된다고 그렇게 하였는지? 나 자신으로도 리해되지 않는 순간적인 판단이였다.
5    좌선의 함의를 적어본다. 댓글:  조회:2140  추천:0  2008-01-22
좌선(坐禅)의 함의를 적어본다.      좌선을 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할줄 아는 사람은 더욱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좌선의 함의를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좌선의 함의를 적어보려 한다.     좌선을 하는것은 그리 쉽지 않다. 다리가 시큰시큰 아파나는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일의 장애를 피면하려면 더욱 쉽지 않다. 이런 각도에서 좌선에는 인생도리가 내포되여있다고 말할수 있다. 즉 어느 한가지 일이나 쉽게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다. 고생도 할 준비가 되여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가지 주의력을 끄는 일의 장애(혹은 그 어떤 유혹)에도 참고 견딜줄 알아야 한다. 그보다 더 낳은 일이 있더라도 견지할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가지 일이라도 성사할수 있는것이다. 이것저것 다 해보았으나 어느 한가지도 성사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실례가 되지 않는가?      좌선을 하려면 참고 견딜줄 알아야 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는 그런 인내력이 있어야 한다. 세상일은 세상사람이 함께 해야 한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언제나 부족한것이다. 그러니 우국우민(忧国忧民)의 마음이 있더라도 내가 없으면 일이 안되는가 하는 마음은 갈아앉혀야 할것이다. 좌선은 인생수양과도 같다 할수 있다. 좌선을 할때만이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이 있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어떤 일도 내버려둘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못보는척하라"는 뜻은 아니다. 즉 도(度)가 있어야 하는것이다.     좌선은 하루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다. 그것이 인생수양과 같다면 매일 해야 한다. 사람은 매일매일 여러가지 일들을 겪게 된다. 그러니 그 현상이 각양각색인 일가운데서 옳고그름을 가르고 정확여부를 판단하려면 그 장소를 떠난 홀로 있는 조용한 기분속에서만 할수 있는것이다. 그래야 표면현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실질을 파악할수 있는것이다. 또 그 표면 현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정확하게 일을 판단할수 있는것이다.     좌선에는 가능하게 더욱 많은 함의가 있을수 있다. 나의 견식이 짧음으로 하여 이 정도밖에 쓸수 없다. 아시는분이 있으면 가르쳐주시길 바란다. "돌을 던져 옥을 끌어온다"는 말이 생각난다. 진정 그런 효과가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2008년 1월 22일 11시 34분
4    "책 만권을 터득하다"를 론한다. 댓글:  조회:2819  추천:1  2008-01-05
"책 만권을 터득하다"를 론한다.     한어말 성구 한마디가 있는데 그 말을 번역하는데는 저마끔이다. 나의 번역은 "책 만권을 터득하면 글을 잘 쓸수 있다.(读书破万卷,下笔如有神)"이다.  이렇게 번역하는데는 다음과 같은 원인들이 있다.     1, 이 말의 앞부분을 "책 만권을 읽는다"로 번역하면 합당하지 않다. 책 만권을 읽고도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런 경우를 두고 "도깨비 기와장 번지듯 했다"고 하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책 만권을 읽는다는것은 그냥 읽는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을 잘 기억한것으로 본다. 그래야 글을 쓸때 그중의 좋은 말들을 리용할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은 그래도 조금은 도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좋은 말은 많이 사용하였다 하여 좋은 문장이 되는것은 아니다. "책 만권을 읽는다"는 절대로 만권의 책을 읽으라는 뜻이 아니다. 그냥 부지런히 학습하고 자신의 수준을 부단히 제고하라는 뜻이다. 책은 많이 보았지만 책에서 본것은 본것이고 실천과 행동은 그냥 그전대로라면 그 책을 읽지 않기보다 못한것이다. 적어도 시간을 랑비한것으로 되니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것이 더 좋았을것이다.     2, 책 만권을 분석한다"로 번역해도 잘 맞지 않는다. 분석한다는것은 과정을 말하는것이지 결과를 말한는것이 아니다. 가능하게 이미 책의 내용을 잘 리해하였을수도 있고 아직은 잘 리해못했거나 완전히 리해를 못했을수도 있다. 그리고 분석하는데도 방법이 다름에 따라 정확하게 분석할수도 있고 틀리게 분석할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니 원말의 책내용을 완전히 리해하였다는 결과와는 차이가 있는것이다. 정확하게 분석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시간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현실정황에 맞게 적시적으로 응용할수 있어야 한다. 분석은 정확한데 언제나 사후의 제갈량(事后诸葛亮)으로 되면 실제적응용가치가 없는것이다. 가능하게 틀린 경험 교훈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빨리 변화되는 사회에서 경험과 교훈만 참고하는것은 적당하지 못한 방법일것이다.     3, "책 만권이 판난다"는 가장 어이없는 해석일것이다.그런데도 그 말은 일정한 도리와 근거가 있다고 한다. 책이 다 판날 정도 로 보았으니 몇번을 보았겠는가? 그렇게 많이 보았으니 책의 내용을 모를리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의 책은 언제나 판나있다. 진정으로 독서하는 사람은 책을 제일 아낀다. 책을 사면 그 즉시로 가위를 씌운다. 그리고 책을 볼때 손자국이라도 날가 하여 책을 보기전에는 손부터 씻는다. 그리고도 땀이 많이 날때에는 책이 어지러워질까봐 장갑을 끼고 본다. 그래서 나는 책에 손자국만 난것 만으로도 다른 사람이 나의 책을 본적이 있다는것을 안다. 책을 다보고 저장해둘때까지 그냥 새것처럼 건사한다. 두꺼운 책가위를 자리나게 겹치는것도 많이 고려한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독서인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책 만권을 터득하다"가 비교적 합리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터득하다를 나는 책의 내용, 책을 쓴 의도 등을 리해하고 파악한것으로 리해하고 있다. 여기에서 책 만권은 지금의 책 만권과 개념상에서 다르다. 옛날의 책 한권은 그 량이 매우 적었다. 지금의 책과는 비교가 되지도 않는것이다. 그럴 정도로 그전의 책들은 글자수가 될수록 적어지게 썼다. 지금의 글들은 보는 사람이 리해하기 쉽게 쓰다나니 글자수는 그전에 비하여 퍽 많다. 그러니 옛날사람이 책을 거꾸로 외울정도로 하였다 하여 지금도 그런 표준으로 요구할수는 없을것이다. 이런 각도로 말할때 책 만권이 아니라 책 몇권이라도 그 내용을 잘 리해하면 글을 잘 쓰는 목적에 도달할수 있는것이다.     글을 잘 쓰는 문제를 조금 더 말하려고 한다. 책을 꼭 만권을 읽어야 글을 잘 쓰는것이 아니다. "보아서 익힌것은 보면 알고 들어서 익힌것은 들으면 안다"는 말이 있는것 같다. 그러니 글을 잘 쓰려면 자주 써야 한다. 처음부터 긴 문장을 쓸 필요는 없다. 그냥 생각한것을 적어보면 된다. 그렇게 쓰는 과정에 쓰는 기교도 숙련되고 쓰는 방법도 익혀지게 되는것이다. 글을 쓰는것으로 다른 사람의 불만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각도로 글을 써야 한다. 인신공격이거나 그 누구를 상대하여 쓰는 글은 불필요한 모순만 형성할수 있는것이다. 글을 쓰는 목적은 대다수 사람을 교육하고 모든일을 정확한 방향에로 돌리는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 그러나 글을 쓰는것이 어느 한사람도 영향주지 않을수는 없는것이다. 그렇게 누구도 건드리지 않으려면 그냥 찬양하는 글만 써야 한다. 허나 이 사회는 아직 찬양할것만 남을 정도로 발달하지 못했다. 유용한 글을 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게 사회의 문제 자기주위의 문제를 지적하한것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을 들을것도 어떠한 압력을 받을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좋은 글은 아무나 쓰는것이 아닌것 같다. 글은 유용한것을 써야 한다. 쓰는 사람의 목적을 위하야 쓰는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리익이 될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유용한 글은 하루에 천자를 써도 된다고 한 말을 들은것 같다. 그러니 많이 쓰는것보다 유용한것을 쓰는것이 더 중요할것이다.     그래서 원말 "독서파만권, 하필여유신(读书破万卷,下笔如有神)"은 "책 만권을 터득하면 글을 잘 쓸수 있다"로 번역하는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2008년 1월 6일 완성
3    "안다" "모른다"와 "아는척하다". 댓글:  조회:2229  추천:0  2008-01-04
"안다" "모른다"와 "아는척하다".     공자는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것이 아는것이다." 이 말에서 공자는 "안다" "모른다"에 대해서는 론하였지만 "아는척하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것 같다.     "아는척하다"에는 모르면서 아는척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잘 알지 못(혹은 알뚱말뚱) 하면서 아는척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매우 간단한데 "모른다"에 속한다. 그러니 그것은 아는것이 아니라 모르는것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조금 복잡하다. 모르는가 하면 완전히 모르는것은 아니고 아는가 하면 철저히 리해한것은 아니다. 결국은 간단하게 "안다" 혹은 "모른다"라고 판단할수 없는것이다. 혹은 "안다"와 "모른다"의 사이에 처해있는것이다.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안다"고 하자니 다른 사람이 질문을 할가 걱정이 되고 "모른다"고 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아는척해야 하는것 같다. 다른 사람이 질문을 해도 괜찮다.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으면 되는것이다. 혹은 자기 나름대로의 리유가 있으면 되는것이다. 이런 경유 하는 일이 많고 다망한것도, 상급에서 포치한 일이라는것도, 나로서는 해결할수 없다는것도 다 좋은 리유가 된다. 나로서 할수 있는 일은 다하였기에 칙책을 다했다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아는척할수 있는것이다.     "안다" "모른다"는 일종 태도인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실사구시(实事求是) 혹은 사실대로 말하는(实话实说) 태도와 같은것이다. "아는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것은 모른다"고 한 일로 하여  "잘 모른다" "모른다" 혹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평가를 들을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하는것은 어떤 위험한 일을 하는것이나 다름없다. 어지간한 용기가 없으면 할수 없는것이다. 그것으로 "능력이 없다"거나 "직위에 알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게 되면 아예 자리를 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는척 하는것이 낫을것이다.     "안다" "모른다"는 알려고 하는가 아니면 모르면서도 그럭저럭 지내려 하는가 하는 태도문제를 말해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잘 모르는것도 잘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으로 잘 모르는것을 알면서도 안다고 하면 그냥 그런가고 생각해준다. 안다고 한 원인으로 하여 찬양을 받게 되게 그에 유관되는 물질적리익을 얻게 되며 지어 승진할 기회도 우선적으로 차려지는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모르는 일을 안다고 하는 경우가 있을것이다. 그리고 "안다" "모른다"에도 층차가 있다고 한다. 높은 층차에서 보면 모르는것이지만 낮은 층차에서 보면 안다고 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모르는것도 아는것이라고 할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일을 하려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 한다.     무엇이든 다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모른다고 해서 안되는것이 아니다. 모르는것은 학습을 통하여 알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학습은 다른 사람에게 서 배울수도 있고 서책을 통해서 배울수도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서도 배울수 있고 자신의 실천가운데서 배울수도 있다. 그러니 잠시 모르는것으로 하여 심리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는것이다. 모른다는것은 일을 하지 않는 리유가 될수 없다. 될수록이면 방법을 대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청하여 해결할수 있고 배우면서 해결할수 있고 실천과정에서 해결방법을 찾을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면 해결방법을 찾기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는척이라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실대로 설명을 해야 하는가?      누군가 잘 알지 못하는것도 모르는것이라고 하였다. 잘 모른다는것은 아는것도 있고 모르는것도 있다는것을 말해준다. 그러니 아는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것은 모른다고 해야 할것이 아닌가? 아는것도 모르는것도 다 아는척하기만 하니 모르는것이란다. 혹은 "자기가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안다고 할수 있겠는가?" 한다. 그러면 아는척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2008년 1월 4일 9시 15분
2    "위하여"를 론한다. 댓글:  조회:2182  추천:0  2007-12-28
"위하여"를 론한다.     "위하여"란 말은 많은 문건에서 거의 다 볼수 있는 말이다. 그 격식을 보면 대체로 "... 위하여 ... 결정한다"이다. 그 어떤 일을 포치하나 다 정당한 리유가 있다는것을 설명하여준다. 그래서인지 그 "위하여"가 어떤 경우의 술좌석에서도 쓰이게 된다. 술을 마시는것도 무엇을 "위하여" 마신다는 뜻이다.     어떤 분들을 글을 잘 쓴다. 글을 쓰는 목적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란다. 하지만 글을 쓸라치면 여러번의 수개를 거친다. 글자사용이거나 언어문법상의 문제는 아니란다. 그 목적은 유일하게 다른 사람 특히는 그 방면의 공작을 책임진 그 어느분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느라고 하는 일이다. 한 방면으로는 그리하여야 매체에 오를수 있고 또 자신에게도 불필요한 시끄러움이 더해지지 않는단다. 그러니 그런분들도 자연히 그들로서의 "위하여" 가 있는것이다.     그래서 나도 나자신으로의 "위하여"를 써본다. "교육의 건강한 발전을 촉진하고 교육에서의 형식주의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러한 잡담을 쓴다." 실은 평론이라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 글들이 다른 사람의 반감만 자아내는 잡담으로 되였다. 간단히 행정명령으로 완성할수 있는 일이 나의 그 잡담때문에 복잡해졌다는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이제는 평론이라는 말보다도 잡담이라는 말이 귀에 더 잘 들어온다. 잡담이라고 했으니 더 큰 자유공간이 있는것이다. 평론을 쓰는것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모든 방면의 모든 문제를 다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것이다. 잡담이라고 했다는것은 또 쓸테면 콱 쓰라는 뜻도 내포되여있다. 쓴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라구... 그러니 쓰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잡담이라 하더라도 쓰는 자유만은 있다는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자유를 싫다할 리유는 없는것이다.     "금은 그 어디에서나 빛을 낸다"는 말이 있다. 그런 연유로 어떤 사람은 빛을 내면 다 "금"인가고 생각한다. 실상 금이 귀중한 품질의 하나가 변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철이나 동과 같은 금속은 쉽게 변질하는 성질이 있다. 환경이 어지간하게 적합하기만 하면 그 빛을 내는 성질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금은 그렇지 않다. 대다수의 자연환경 혹은 매우 많은 특수한 조건에서도 금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금은 어디에 두어도 그 빛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땅속에 몇백년을 묻혀있더라도 해빛아래에 나타나면 그전 그대로 빛을 낸다. 그래서 금이 귀중한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한다는것은 어떤 추구나 목표가 있다는것을 말한다. 추구나 목표가 있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주동적으로 노력하는 방향이 있을것이고 적극적으로 주동적으로 노력하는 동력이 있는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한다는것은 어떤 리상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말한다. 그리고 리상을 실현하는 과정은 대다수 사람들의 리익을 발전시키는 과정과 일치되여야 한다. 그래야만 "집체적인 리익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개인의 리익을 발전시킨다"는것을 체득할수 있는것이다. 그러한 리상을 실현하는 데는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될수 없고 그 대다수 사람의 지헤와 힘을 동원해야 하는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한다는것은 그것을 위하여 그 어떤 대가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된다. 그것은 모택동어록중의 <공산당인들은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곤난을 두려워하겠는가>와도 같은것이다. 이런 각도로 말할때 "위하여"를 부른 사람은 물러설곳이 없는것이다. 이는 또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는 김학철의 말과도 같다고 할수 있다.     누구를 "위하여" 한다는것은 진정으로 그들의 리익을 도모하고 그 들의 발전을 위하여 일을 하는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남을 위하여" 하는 일은 언제나 그들자신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적극성을 최대한으로 발양할수 있는데 이는 "좋은 일을 잘하는" 전제조건이다.     누구를 "위하여" 한다는것은 주는것만 연구하고 받는것은 연구하지 않는다는것을 의미한다. 처음부터 무엇을 받기 위해 주는것이였다면 그것은 장사하는 사람의 행위이지 그 누구를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닌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한다는것은 념원상에서 남을 위하여 할뿐만아니라 사실상에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혜택을 받게 해야 한다. 말로는 남을 위하여 한다고 한 일이 그들로 하여금 사실상의 리익을 얻게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기편에 불과한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한다는것은 그 누구에게 새로운 부담을 증가하는것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자면 구체적인 정황을 잘 료해해야만 어떤 일이 유익한것으로 되고 어떤 일이 그냥 부담만으로 되는가를 알수 있다. "조사연구를 하지 않은 사람은 발언권이 없다"는 말이 여기에 잘 어울린다.     그래서 "위하여"란 말은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냥 무슨 일에나 다 "위하여"를 사용하면 그 결과는 "승냥이가 왔다"란 말과 같은 효과를 일으키게 될것이다. 이것이 내가 론하려는 "위하여"이다. 2007년 12월 29일 3시 50분
1    게으른 사람은 변하는것을 두려워한다. 댓글:  조회:2148  추천:0  2007-12-26
게으른 사람은 변하는것을 두려워한다.       게으른 사람은 변화를 싫어한다. 그냥 안일한 환경만을 추구한다.     태여날때부터 게으른 사람은 없다. 누구나 어릴때에는 어떤 사물에나 다 흥취를 가지고 또 그 호기심때문에 부지런이 움직였다. 그러니 게으름병은 후천적으로 생겼을것이다.     게을러지고 싶은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 지치고 힘들때면 누구던지 한번쯤은 게을러지고 싶다. 평소에 잘 정리하던 물건도 여기저기에 널어넣게 된다. 늘 잘하던 일도 대충 마무리를 짓는다. 그러니 게으름병은 일에 지치고 힘들때면 누구한테나 다 생기는 병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누구나 같은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힘들어도 물러서려 한다. 분명 자신의 능력으로 할수 있으면서도... 그래서 게으르다는 말을 듣는다. 어떤 사람은 어느 정도의 피로는 그냥 극복하려 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견딜수 없는 정도여도... 그래서 부지런하다는 말을 듣는다.     게으른 사람은 변화를 위기로 생각한다. 자신의 기득리익이 손해볼가 걱정만 한다. 부지런한 사람은 변화를 기회로 생각한다.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발휘할 기회라고 생각하기때문이다.     게으른 사람이 게을러지는데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어떤 원인인가는 각자 다를것이지만 모두 그 어떤 곤난에 봉착한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곤난보다 더 중요한것은 노력할 방향 분투할 목표를 잃은것이다. "나는 이제 이만하면 된다.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어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야말로 고상한 리유이다. 자신이 게을러짐은 남에게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해서란다. 그러니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해지게 하려면 새로운 목표를 찾아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할것이다.     부지런하던 사람이 게을러지는데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 뜻인즉 삶의 희망을 잃으면 게을러진다는것이다. "곤난도 시련도 그 어느 정도를 초월하면 의지를 단련하는것이 아니라 의지를 소모한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것이다.     게으른 사람이 그러한 원인이 있다면 부지런한 사람도 부지런해야만 하는 원인이 있다. 자신이 맡은 공작의 중요성을 알고있으니 부지런해야 하고 그렇게 자신을 지켜볼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부지런해야 하며 자신에게 기대를 품고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부지런해야 하고 자신의 인생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해야 한다.     힘들다는것은 그냥 나쁜 일만이 아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할수 있다는데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고 그렇게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견디여낼수 있다는데서 자신의 인내력에 탄복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힘든 일을 할때 더 많은 잠재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만이 변화를 두려워한다. 2007년 12월25일 21시 16분 초고를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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