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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성인의 즐거움 댓글:  조회:1561  추천:81  2007-11-05
오다이여, 성인의 즐거움이 아닌 범부의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병의 근본이요, 등창의 근본이며, 화살과 가시의 근본이다. 그것은 밥[食]이 있고 생 사가 있으니 닦을 것도 아니요, 익힐 것도 아니며, 자세하게 펼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닦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다이여, 성인의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욕심이 없는 즐거움 악을 여읜 즐거움 번뇌를 쉰 즐거움 바르게 깨닫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밥도 없고 생 사도 없으니 닦아야 할 것이요, 익혀야 할 것이며, 자세하게 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오다이여, 무엇이 성인의 즐거움이 아닌 범부의 즐거움으로서, 병의 근본이요, 등창의 근본이며 화살과 가시의 근본이요, 밥이 있고 생 사가 있어 닦을 것도 아니요, 익힐 것도 아니며, 자세하게 펼 것도 아니어서, 내가 닦을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가? 만일 5욕으로 인하여 즐거움이 생기고 좋은 것이 생기면 그것은 성인의 즐거움이 아니요 범부의 즐거움이다. 그것은 병의 근본이요, 등창의 근본이며, 화살과 가시의 근본이요, 밥이 있고 생 사가 있으니 닦을 것이 아니요, 익힐 것이 아니며, 자세하게 펼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닦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192) 가루오다이경(加樓烏陀夷經)에서烏陀夷。有樂。非聖樂。是凡夫樂。病本.癰本.箭刺之本。有食.有生死。不可修.不可習.不可廣布。我說於彼則不可修。烏陀夷。有樂。是聖樂.無欲樂.離樂.息樂.正覺之樂。無食.無生死。可修.可習.可廣布。我說於彼則可修也。烏陀夷。云何有樂。非聖樂。是凡夫樂。病本.癰本.箭刺之本。有食.有生死。不可修.不可習.不可廣布。我說於彼不可修耶。若因五欲生樂生善者。是樂非聖樂。是凡夫樂。病本.癰本.箭刺之本。有食.有生死。不可修.不可習.不可廣布。我說於彼則不可修 烏陀夷。云何有樂。是聖樂.無欲樂.離樂.息樂.正覺之樂。無食.無生死。可修.可習.可廣布。我說於彼則可修耶。烏陀夷。若比丘離欲.離惡不善之法。至得第四禪成就遊者。是樂是聖樂.無欲樂.離樂.息樂.正覺之樂。無食.無生死。可修.可習.可廣布。我說於彼則可修也。烏陀夷。比丘離欲.離惡不善之法。有覺.有觀。離生喜.樂。得初禪成就遊。聖說是移動。此中何等聖說移動。此中有覺.有觀。是聖說移動。
28    수행이란? 댓글:  조회:1775  추천:84  2007-11-03
수행이란 무엇인가? 수행이란 곧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행위들을 교정(修)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행위는 악한것이며 악한것은 괴로운 과보를 가져다주기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이란 결국 괴로움에서 해탈하기위함이 목적이 된다. 행위란 곧 몸의 행위와 마음의 행위로 나누는데 마음의 행위가 몸의 행위 앞서 더 중요하다고 말할수 있겠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어서 곧 어떤 행동을 하기때문이다. (자신이 그것을 아나 모르나를 불문하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악한 생각들로 꽉 들어차있다. 탐욕 오만 성냄 시기 미움 증오 질투 비난 ... 쓸데없는 자존심 그리고 자비감 오만 겸손하지 못함   無懺無愧 害心....등등...  수행이란 바로 이러한 선하지못한 나쁘고 악한 마음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과정이다.  왜서 그것을 제거해야 하는가하면은 그런 악한 마음자체가 괴로운것이며 자신뿐만아니라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괴롭히기 때문이다. 참다운 행복을 구할줄 아는 사람이란 바로 이러한 마음의 병을 제거할줄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세상에는 이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없다.마음을 비우라는 말은 곧 제거(除 減 滅)를 가리키지 증가를 가리키는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를 성취한다면 곧 나 이외에 어떤 특별한 하나의 형상있는 무엇을 얻는 줄로만 생각하는데 너무 잘못된 생각이고 삿된 소견이다. 금강경에 이렇게 씌여져 있다. "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고자 하면 곧 삿된 길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여래를 볼수가 없다" (若以色见我,以音声求我,是人行邪道,不能见如来)  그렇다고 눈으로 볼수도 없고 귀로도 들을수 없다고하여 어떤 법을 얻는것도 아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수보리보고 이렇게 얘기했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여래는 실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는것이 아니다."(如是,如是,须菩提,实无有法,如来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많은 사람들이 수행이라하면 곧 앉아서 명상에 잠겨 어떤 경지에 빠지는것만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명상속에 어떠어떠한것이 나타났고 또 어떠어떠하였다 자랑스레 말하는데 사실은 이 모두가 相에 집착하여 뭔가 구하고자 하는 마음들이다. 부처님이 얘기 했듯이 집착하면 해탈못하고 집착하지 않으면 해탈할수가 있다고 했으니 어떠한 경지든지 뭔가 집착함이 있으면 그것은 바른 공부가 아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는 욕심을 떠난이가 적다고 한다. 우리의 마음에서는 수없는 이러한 번뇌의 마음들이 수없이 나타난다. 수행이란 수행이 안될 때 조치를 취해서 되게 하는것이 수행이라고 옛 대덕들께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법을 배우고 명상을 배우는 근본 목적은 바로 이러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는것이다.  만약 누구나 명상을 해서 아무 장애없이 근심걱정을 해결하고 해탈할수가 있다면 무슨 법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수행이란 마음을 알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워서 마음의 속박에서 해탈하는것이 곧 수행인것이다.
27    한 생을 잘못 살다 죽으면.. 댓글:  조회:1713  추천:89  2007-11-02
      한 생을 잘못 살다 죽으면..     부귀를 그리워하나 알고 보면 괴로움의 뿌리이고   고통의 뿌리이며 화근의 뿌리이고   자손만대 지옥의 뿌리도 될 수 있으니   부귀를 누리되 修道의 길속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만이 참다운 부귀영화임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현세에 복이 있다고 함부로 살지 마라.   한 생을 잘못 살다 죽으면 남는 것은 죄업 밖에 없느니라.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등은   생각 한 번 잘하고 생각 한 번 잘못한 차이이니라.   행복한 사람의 생각은   미래를 생각하고 祈禪하며 善根을 심었고,   불행한 사람의 생각은   미래를 우습게 보고 현재만 편안하면   그만 이라는 생각 때문에 허송세월을 보낸 탓이니라.   재물의 뿌리는 복에 있으며     복의 뿌리는 善根 심는데 있으니     복이 들어오면 재물이 스스로 생기고 선근을 심으면 스스로 복이 생기는 것이니   祈禪을 하지 않는 자는 운이 없는 것이며   선근을 심지 않는 자는 복이 없는 것이니라.   남을 위하여 살면 내 공덕이 되고   나를 위하여 살면 남의 공덕이 되는   이치를 알고 깨달아야 하느니라.   나만이 이 세상에서 살기가 어렵고 괴롭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萬石君 부자는 만가지 괴로움이 있고   千石君은 천가지 걱정이 있으며   百石君은 백가지 걱정이 있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걱정이 있고 괴로움이 따르게 되어 있느니라.   사람이 백 년 살면서 남과 비교하여 사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것이며   참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니라.   알고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생각에서 지나쳐 버리니   복이 될 수 없고 깨닫는 것은 마음에 이르게 되니   世世生生 福田이 되는 것이니라.   인생의 삶에 있어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남과 비교하여 행복을 찾으려 하고   남을 의식하여 체면과 겉치레로 잘난 체하며 살아가는 자이니라.       --도암 스님--
26    부처가 말하는 더 없는 행복이란... 댓글:  조회:1497  추천:85  2007-10-31
  問:“많은 신과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면서 행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뜸가는 행복을 말씀해 주십시오.” 答:“어리석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말고, 어진 이와 가깝게 지내며, 존경할만한 사람을 존경할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자기 분수에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고, 스스로 바른 서원을 하고 있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지식과 기술과 훈련을 쌓고, 그 위에 변재가 뛰어난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부모를 섬기는 것,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보시와 이치에 맞는 행위와 친족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비난을 받지 않는 행위,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악을 싫어해 멀리하고, 술을 절제하고, 덕행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존경과 겸손과 만족과 감사와, 때로는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인내하는 것, 온순한 것, 수행자를 만나는 것, 때로는 이치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수양과 깨끗한 행위와 거룩한 진리를 보는 것, 열반의 경지를 실현하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과 티가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이러한 일을 한다면 어떠한 일이 닥쳐도 실패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나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더없는 행복이다.”  
25    修行의 길 댓글:  조회:1581  추천:85  2007-10-29
  修行의  길무명(無明)의  어둠 속의  큰 등불이며,살아있는  지혜의  마음으로자기성찰(自己省察)을 통한  참다운 자기  자신을  발견 하는것이다"지금까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아 왔는가?"회의(懷疑)와 무관심(無關心) 사이를  떠돌아 다니면서.......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였던  사람인가?이 세상  눈에 보이는  형태나 모습들은반드시 무너지고  흩어지고  사라지는것을  그 흐름속에불안하고  초조해지며  자신의 마음을 잃고  끝없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악순환  그 허무 속에는  마음의 평안이 없기  때문이다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괴로운 추억이 있기마련이다이 모든것을  벗어나  사로 잡힘이없는  평안한  마음의 수행무상(無常)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괴로움에는  마음의 괴로움과  육체적인 괴로움의  두가지가 있다범부이거나  어진 이이거나   다 같이  육체적인 괴로움을 받게 되지만,성자(聖者)는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마음의 괴로움으로 까지가져가지 않는 것이다그리고  욕망의 집착과  번뇌에 벗어나  인생의  성패에 부딪치더라도자기 자신의 비굴과 자포자기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자신을  소중하게  다루고  정성을 다해서  마음의 수양을 쌓아야한다인생은  괴로운 것이다.  아니다,  즐거운 것이다.괴로움과  즐거움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  생각해 버리는  그 자체가인생의 더  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내 눈앞에  보이는것을  굳건한  마음으로  날려버리고내 소유라는  생각을 없애버렸을때이 세상의  모든것이  옮아가고  변화하여도강물처럼 흘러가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수행(修行)안에서참된  자신의 자유와 진실이  얻어지는것임을참된 마음의  수행(修行)의 길로  깨달아야한다오늘 하루를 사는 것도 修行의 길이요부모와 자식의 연이 되는것도 修行의 길이요인연의 법(法)에 따라 인연(因緣)의 도리(道理)를  다하는것도 修行의 길이요생사(生死)의  괴로움을 초월하여  욕망의 집착에서 벗어나는것도 修行의 길이요늙고 병들고 죽는 세가지 괴로움(三苦) 또한 修行의 길인 것이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0165739');
24    어머니의 손 / 범능스님노래 댓글:  조회:1640  추천:95  2007-10-27
어머니의 손 / 범능스님어머니 그 두 손에 바람이 불어와 두 손을 가를 때어머님의 맺힌 그 한이 가슴속에 사무친다살아오신 그 땅에 물기 마른 그 자리에 가뭄 들고 무서리 지는 시린 그 바람을 어머님 아시네어머니 그 얼굴에 설움이 몰려와 주름살 깊을 때어머님의 작은 그 두 눈에 맑은 이슬 흐르신다흰눈 쌓인 이 땅에 얼어붙은 그 자리에 봄이 오고웃음 꽃 피는 다순 그 손길을 우리는 알겠네
23    가장 훌륭하게 참는 법 댓글:  조회:1554  추천:88  2007-10-25
♡ 가장 훌륭하게 참는 법♡ 나는 항상 이치를 살펴서 어리석음을 다스리니 어리석은 사람이 성내는 것을 보더라도 지혜로운 사람은 침묵으로 성냄을 항복받는다. 힘이 없으면서 힘 자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의 힘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진리를 멀리 벗어나니 이치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약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참음이라 할 수 있으니 힘이 없으면 어찌 참고 용서하겠는가. 남에게 온갖 모욕을 당할지라도 힘있는 사람이 스스로 참아내는 것은 가장 훌륭한 참음이니 스스로 힘이 없어 굴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찌 참는 것이라 하겠는가.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듯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남이 나를 향해 불같은 성질을 내더라도 돌이켜서 스스로 침묵을 지켜라. 이러한 이치를 잘 지키면 스스로 이롭고 남에게도 이롭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침묵하고 참는 사람에게 자신이 이긴 것으로 여겨 오히려 험담을 하나니 모욕을 말없이 참아내는 사람이 언제나 이기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 애써 참는 것은 두렵기 때문에 참는 것이요, 자기와 같은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은 싸우기 싫어서 참는 것이며, 자기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이 가장 훌륭한 참음이다. 『 잡아함경(雜阿含經) 中에서 』 경전속의 참음-- 인욕(忍辱)바라밀비구들이여 혹은 어떤 도적이 와서 예리한 톱이나 칼로써 너희들의 몸을 마디마디 자른다고 하자. 비구들아, 만일 어떤 도적이 와서 예리한 톱이나 칼로써 너희들의 몸을 마디마디 자를 때, 혹 마음이 변하여 바뀌거나 입으로 나쁜 말을 한다면, 나는 '너희들은 그로 인해 반드시 쇠퇴하리라'고 말한다. 너희들은 마땅히 어떤 도적이 와서 예리한 톱이나 칼로써 너희들의 몸을 마디마디 자를 때에도 마음이 변하여 바뀌지 않고, 입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으며, 그 자르는 사람에게 자애로움과 슬픈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마음은 자애로움과 함께하여 1방(方)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닐고, 이렇게 2 3 4방과 4유 상하 일체에 두루하고, 마음은 자애로움과 함께하여 맺힘도 없고 원망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이, 지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는 선행을 닦아 일체 세간에 두루하여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이와 같이 불쌍히 여김과 기뻐함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마음은 평정함[捨]과 함께하여 맺힘도 없고 원망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이, 매우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는 선행을 닦아 일체 세간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이에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을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고,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해 마쳐야 한다. 너희들은 남이 좋지 못한 나쁜 말을 나에게 했을 때 내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모든 비구들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다시 모든 비구들을 찬탄하며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여야 한다.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고 나면, 너희들은 동방에서 노닐더라도 반드시 안락을 얻어 여러 가지 괴로운 재앙이 없을 것이요, 남방 서방 북방에 노닐더라도 반드시 안락을 얻어 여러 가지 괴로운 재앙이 없을 것이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여야 한다. 너희들이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한다면, 나는 너희들이 모든 착한 법에 머무른다고도 말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쇠퇴한다고 말하겠는가? 밤 낮으로 착한 법만이 자라나고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너희들은 마땅히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여야 한다. 비구들아,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고 나면, 2과(果) 중에서 반드시 그 하나를 얻을 것이니, 곧 현세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혹은 다시 남음이 있어 아나함(阿那含)을 얻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모리파군나경에서--『중아함경 』 제 50 권
22    身言書判--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 댓글:  조회:1604  추천:75  2007-10-22
◈ 신언서판(身言書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 즉  <용모>, <언변>, <문필>, <판단>을 가리킨다. 사람은첫째. 인물이 잘나야 하고, 둘째. 말을 잘 해야 하며, 셋째. 글과 글씨를 잘 써야 하고, 넷째. 판단을 잘 해야 한다는 뜻으로서 이 네 가지 조건을 구비한다면 처세해 나가는데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첫째.신(身)은 외형적으로 인물이 잘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건강한 심신의 구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의 인물이 출중하더라도 심신의 건강을 상실할 때 그 사람의 재능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영국의 존 로크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은 인생 최대의행복이라고 했으며, 영국의 베이컨도 건강한 육체는 정신의 사랑방이며, 병든 육체는 그 감옥이다 라고 갈파했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기위해 평소 건강관리를 잘 해 병들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둘째, 언(言) 은 때와 장소와 대상에 알맞게, 자기의 의사를 조리있게 전달하는 화술이다. 맹자를 비롯한 중국의 제자백가들은 말을 잘 했기 때문에 명성을 얻었고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입을 지키기를 병(甁)과 같이 하라는 금언은 입은 재앙과 근심의 문이니, 말조심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중국성언에 자기가 입에 올린 말이면 그 말에 충실하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열성과 진실로써 약속한 일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고 있다. 셋째 서(書) 는 글과 글씨를 쓰는 문필력을 가리킨다. 책을 많이 읽어서 무형의 자산인 지식을 축적하고 소화해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력을 기르고 서자심화(書者心畵) 즉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라는 말을 되새겨 글씨의 한 획 한 획을 바른 자세로 정성을 들여 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독서의 생활로 마음의 양식을쌓고, 교양을 넓혀 나가야 할 것이며, 글씨를 쓸 때는 수도자(修道者)의 자세로 바른 글씨를 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넷째, 판(判)은 사람이 공사생활(公私生活)에서 직면하는 일이나 문제를 슬기롭게 처리하기 위해서 행동방향을 결정하는 판단력을 가리킨다. 판단을 할 때는 선입견, 경솔성, 편견성, 사리사욕을 지양하고 도덕성, 합리성, 객관성, 효율성 등을 고려하여 공명정대하게 결단을내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이나 문제 해결의 성패를 좌우하는 판단을 할 때는 미시적 안목을 지양하고, 거시적 안목에서 최대공약수를 추출할 수 있도록 결단을 해야 한다. <출처 : http://blog.naver.com/sws20039>
21    빈배 댓글:  조회:1652  추천:86  2007-10-21
아침의 명상 ♤ 빈 배 ♤ - 장 자 -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배가 그의 배와 부딪히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자료출처 鄭 珉 한문학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글:김정은/ 제작:왕언니
20    인생을 낭비한 죄 댓글:  조회:2086  추천:66  2007-10-19
인생을 낭비한 죄   프랑스 / 1974년 작품 / 감독- 프랭크린 J.샤프너 / 원작- 앙리 샤리에르주연 - 빠삐용...스티브 맥퀸 / 드가...더스틴 호프만  ´나는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앙리 샤리에르는 법정에서 간절하게 절규했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한 번 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지옥의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반입이 금지된 음식을 먹다가 적발되어 독방에 갇히고 말았다. ´생사람도 잡아먹는 곳´으로 이름 붙여진 그곳은 한 줄기 햇빛도 들어오지 않아 그야말로 암흑 그 자체였다. 그곳에서 그는 고독과 허기 그리고 절망으로 점철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굶주림에 지친 그는 깜빡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지옥의 재판관을 만났다. 그는 얼음처럼 차갑게 생긴 재판관에게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곳에 오게 되었음을 하소연했다. ´재판관님! 저는 결백합니다. 저는 살인을 하지 않았어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넌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너는 살인과는 관계없다.´ ´그그렇다면 무슨 죄로 제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인간으로서 가장 큰죄, 바로 인생을 낭비한 죄이니라,!´ ´인생을 낭비한 죄?.... 그렇다면 유죄로군요, 유죄! 유죄! 유죄!´  꿈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3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았건만 무엇 하나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것도 자랑할 만한 일도 하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까지 자신이 아까운 청춘을 낭비하며 헛되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다시 과거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한번 사람답게 살고싶다는 생각이 강열하게 꿈틀거렸다. 새롭게 살고 싶은 욕망이 불타오르자 그는 어떻게든 그 지옥같은 곳을 탈출해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결국 그는 한 번 들어가면 절대 탈옥할 수 없다는 그 악명높은 감옥을 무려 9번의 시도 끝에 탈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1968년에 그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담은 한 권의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유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그소설은 1973년에 한 편의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빠삐용´이다. 빠삐용(나비)은 그의 가슴에 새겨진 나비모양의 문신을 따서 부른 그의 별명이기도 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채, 화석이 되어 있던 한마리 나비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 순간 마침내 생명을 얻고 자유의 날개를 펄럭이며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었다. 당신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가?  현재 마흔 살인 사람이 앞으로 40년을 더 산다고 했을 때, 먹고자고 일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루 8시간씩 일을 한다고 할 때 여기에만도 무려 3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출퇴근 시간을 비롯하여 일상적인 자투리 시간까지 포함하면 35년의 시간은 따로 떼어 놔야 한다.   그렇다면 남은 40년 가운데 자신이 온전히 쓸수 있는 시간은 많아야 고작 5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것이 인생이다.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은가? 만일 당신이 지금까지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왔다면 시간낭비를 줄이고 보다 효과적으로 삶을 꾸려 나가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지금 당장 종이와 펜을 준비하라. 그리고 종이 위에 직선을 그은 다음 왼쪽 끝에는 ´출발점´이라고 쓰고 오른쪽 끝에는 ´종착점´이라고 써라. 그 직선이사람의 인생이라고 한다면 방금 쓴 것은 당신 인생의 출발점과 종착점이 된다. 이번에는 지금 당신이 인생 여정의 어디쯤 가고 있는지 그 위치를 직선 위에 표시해 보라. 당신은 지금 직선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 중간보다 왼편에 있는가? 아니면 오른편에 있는가? 당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냉정히 살펴보라.   그리고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차분히 생각해보라. 당신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왜 그곳에 가려 하며 또한 어떻게 해야 그곳에 갈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얼마나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이야말로 인생의 중요한 작전타임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이제는 타이어를 점검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갈아 끼워야 한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세상에는 두 가지 타입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지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하나는 시간을 어떻게 ´투자 ´할 것인지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다.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가난해지는 반면,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부유해진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우리의 시간 속에 그대로 투영된다. 우리는 보통 바쁘다는 핑계로 소중한 뭔가를 잃고 사는 경우가 많으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써 버린다. 물론 바쁘다는 것은 할 일이 많다는 증거이니 그리 나쁠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일들이 대부분 습관처럼 반복해 온 발전성 없는 일들이라는 데 있다.  똑같은 시간을 사용하더라도 ´시간을 갖는 것´과 ´시간을 파는 것´은 다르다. 시간을 갖는 다는 것은자신의 소중한 일을하기 위해 ´시간을 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만약 소중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그 시간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이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시간을 팔았다면 그 시간은 이미 당신 곁을 떠나간 시간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팔아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할애하고 나면 하루 중에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것마저 다른 활동에 주어버린다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당신은 전혀시간을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이제라도 시간을 내야한다. 자신을 위해 쓸수 있는 시간 그리고 하고 싶은 일에 투자할 수있는 시간을 가질 때 당신은 비로소 당신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도 여전히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혹은 알고는 있지만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인생을 낭비한 죄는 언젠가 스스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19    명상 / 정강스님의 노래와 함께 댓글:  조회:1782  추천:87  2007-10-17
명상 I   일체의 작위(의도)가 없이 자신의 내면을 주시함이며, 일어나는 생각을 관찰함이며, 일체의 기억과 영상과 욕망 등을 바라봄이며, 일어나는 감정과 느낌들을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림이다.   하나의 느낌이 일어날 때, 좋다하여 붙잡거나 쫓아가거나 집착하지 아니하고, 싫다하여 외면하거나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아니하며,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느낌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고 알아차리며, 지켜봄이 冥想이요. 모든 생각과 의도가 사라지고, 일체의 느낌이 사라지고, 번뇌가 사라져서 허공처럼 모든 것이 비워졌을 때 참 자기를 깨닫는 것은 자신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며 오직 바라보는 자 아는 자만 남을 때, 아는 자를 깨달음은 冥想의 최상이며, 깨달음도 놓아버린 완전한 침묵은 冥想의 궁극이며, 침묵 가운데 행이 있고, 있으되 있음이 없으면 冥想의 완전함이다. 혜봉. 명상 / 정강스님 산 깊고 물 맑은 깊은 숲속에 고요히 눈을 감고 명상에 들면 멀리서 들리는 산새소리는 번뇌의 짚불처럼 몰려오는데 꿈처럼 흘러간 속세의 일들이 아니 아니 꿈도 싫고 사랑도 싫어 소나무 잣나무 우거진 숲속 오늘도 나무끝에 해는 저물어 내마음 깊은곳 영혼의 소리 영원한 평원 찾았을때에 산새들 어디로 가고 나홀로 앉아 오늘도 숲넘어 해는 저무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7963395');
18    명상은 그대의 존재를 치유한다 댓글:  조회:1618  추천:84  2007-10-11
명상, 각성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이름에 불과하다. 그대 안에 아무것도 동요하지 않고, 그대 안에 아무것도 파도치지 않는 그 본질의 정수는 절대 침묵이다. 그 상태에 신성이 존재한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침묵은 아니다. 그대는 아마 말을 하지 않을는지 모르나,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않을는지는 모르나, 속에는 수천가지 생각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밤낮으로 계속해서 사념들이 흐르고 있다. 마음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그대가 주시자가 되면 마음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주시는 마음과 그 속의 사념들,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몰아낸다. 그러므로 명상은 단순히 지켜봄, 깨어있음이다. 명상은 발명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발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거기에 있던 것을 발견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거기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는 문을 열고 들어가 무한한 허공과 찬란한 아름다움, 침묵, 넘치는 빛, 그 향기를 발견한다. 상처는 덮는다고 해서 치유되지 않는다. 종교는 치유다. '명상Meditation'이란 단어와 '약Medicine'이라는 단어는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약은 몸을 치료하고, 명상은 그대의 존재를 치유한다. 그것은 내면의 약이다.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두뇌를 세탁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니다. 나는 그들의 두뇌를 세탁하고 있는 게 아니다. 물론, 나는 확실히 그들의 두뇌를 세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드라이 크리닝(dry cleaning)까지 해야 안심한다.  마음이 알 때 그것을 지식이라 부른다. 가슴이 알 때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존재가 알 때 그것을 명상이라 부른다.    출처: .. 如如 ..
17    고독 -- 어느 명상수행자의 일기 댓글:  조회:1756  추천:76  2007-10-11
고독  -- 한 명상가의 고요한 하루            -- 사야도 우 조티카 고독은 계발되어야 한다. 정신적인 고독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고독도 마찬가지이다. 육체적인 고독이란 홀로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적인 고독이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깨어서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란 깊이 잠이 들었거나 멍청하게 있거나 졸음이 오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사람들은 고독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재미있게 해 주거나 자극을 줄 그 어떤 이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자극에 대한 탐욕,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지루해 한다. 육체적으로 혼자 있을 경우에도 독서 또는 텔레비전 시청, 라디오 듣기 등으로 보내거나 과거지사와 미래에 대한 일들을 생각한다. 혼자 있으면서 독서도 않고 텔레비전이나 카세트 등을 듣지 않고 아무런 생각 없이 있는 것은 결코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지혜는 고독의 산물이다. 고독은 재충전이다. 내 가슴의 깊은 고요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인생, 그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는 없다. 다른 모든 것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나는 지금 M에 있다. 이 곳에 온 지 일주일이 되었다. 아름답고 조용하며 단순한 곳이다. 이 곳에는 큰 부자들은 없고 그냥 소박한 농부들이 사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단순한 사람들이 사는 단순한 곳이다. 단지 내 마음만이 복잡하다.   이 곳에는 많은 새들이 있는데 나는 새소리 듣기를 좋아한다. 바람이 나무들 사이를 맴돌며 불어와서는 내 마음을 달래준다. 바쁘고 시끄러운 도시와는 너무도 다르다. 이 곳은 정말 명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나에게는 큰 야망이 없으며 그냥 단순하게 살고 명확하게 보는 것이 나의 생활이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겠는가? 그 어떤 사람도 심지어 내 자신조차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지켜볼 수가 있다. 내가 현명하다면 그 누구에게나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그냥 지켜볼 것이다. 내 어깨에 온 세상을 다 지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때때로 진정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갖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찾아온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마다 나를 만나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아마도 마음 챙김 훈련을 하면서 자극을 받거나 용기를 얻고 그리고 고무될지도 모른다. 또는 적어도 일상의 단조로움으로부터 일시적인 구원을 얻을 수도 있다.   이 곳에는 내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나는 내 생각을 스스로 간직하고 평화스럽게 사는 법을 터득했다.   그렇다. 세상은 미친 듯하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휘둘려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   오늘은 비가 내린다. 그러나 바람은 불지 않는다. 날씨가 나를 고요하게 만든다. 나무들은 또 작년보다 키가 많이 자랐다. 수년 내에 보기 좋은 숲이 이 수도원에 또 생겨 날 것이다. 숲 관할 부에서 내게 8에이커의 땅을 주었다. 더운 여름을 제외하고는 좋은 샘물과 좋은 날씨가 계속되고 음식도 충분하다. 주로 야채를 많이 먹는다. 나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다. 충분한 시간조차도.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가끔 수도원 운동장을 청소하기 위해서 몇몇 사람들이 찾아올 뿐이다. 내게는 모기장이 딸린 방이 있고 침대가 있으며 또한 앉기 편한 의자와 책들, 약품들, 종이와 펜이 있다. 아! 이곳에 내게 불편한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예쁜 그릇에 한잔의 좋은 차를 마시고 한껏 기분이 깨어난다. 혼자서 차시간을 축복한다. 비가 점점 심하게 온다. 내가 아는 한 이 곳은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지금은 오후 1시 15분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하다. 스님들은 자신들의 오두막에서 명상을 하고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장소는 없다. 이만하면 최상의 장소가 아니겠는가! 이 곳 사람들은 내게 친절하다. 나는 스님들이 아플 때 그들을 보살펴 드린다. 그들은 마치 나를 의사처럼 대한다. 그러나 약품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이 숲에는 세 개의 숲 속 사원이 있다. 내가 있는 곳이 가장 격리된 곳이다. 방문자는 거의 없으며 보름달이 떴을 때 몇몇 사람들이 일하러 올 뿐이다.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나는 좀 더 책을 읽고 싶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지적인 자극에 대한 나의 욕망을 놓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는 그 날이 그 날 같은 세월이다.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처럼 여겨지고 아니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 것도 변화되는 것이 없다. 우리는 밤에 산책을 나간다. 바깥세상은 혼란스러우나 이 곳은 조용하다. 아무런 할 일도 없고 중요한 일도 없다. 모든 문제는, 아니 거의 모든 문제는 상상의 것일 뿐이다.   이 곳은 정말 평화스럽다. 새들도 많이 살고 있다. 때때로 일어나는 사소한 것 말고는 아무런 갈등도 아무런 문제도 없다. 나의 건강은 양호하다. 나는 내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워 나가고 있다. 야채를 많이 먹고 기름진 음식을 삼가며 설탕도 조금만 먹는다. 평화스러움이 많은 도움을 준다.   이 곳에서의 인생은 대단히 평화스럽고 고요하다. 어떠한 싸움도 없다. 왜냐하면 여기는 아무런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조금씩 조금씩 많은 일들과 많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있다. 오늘은 구름이 많더니만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새들은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나무들은 벌거벗은 팔들을 쳐들어 비를 환영한다. 덥고 건조하기는 하나 아무 문제가 없다.   이제 추워지기 시작하는 걸로 봐서 겨울이 곧 닥칠 것이다. 하늘은 말끔히 개었고 수평선 근처에 약간의 구름 송이가 떠다닐 뿐이다.   보름달이 뜬 밤은 정말로 아름답고 평화롭다. 지난 밤 나는 홀로 산책을 나갔다. 그 어디에 걱정과 근심이 있는가? 어느 곳에도 그런 것은 없다. 내가 생각하기로 그것들은 단지 상상에 의한 것일 뿐이다.   지금은 오전 4시 45분이다. 수도원에서 살고 있는 수백 마리의 새들은 대단히 활기차 보인다. 요즘은 날씨가 비교적 따뜻하기 때문에 목욕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두 개의 작은 그릇에 물을 넣어 새들이 마시고 목욕하도록 밖에 내어놓았다. 새들은 정말로 목욕하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그들은 내게 와서 노래를 불러주고 걱정하지 말라고 내내 가르침을 준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지 말라고,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죽음 역시 어떤 순간에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고. 이 글은 우 조티카 큰스님이 법우들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인 『여름에 내리는 눈』의 제1장 「마음, 마음 챙김, 그리고 명상」에서 발췌한 것이다.
16    寒山问拾得 댓글:  조회:2243  추천:86  2007-10-10
昔日寒山问拾得曰:世间谤我、欺我、辱我、笑我、轻我、贱我、恶我、骗我、如何处治乎? 拾得云:只是忍他、让他、由他、避他、耐他、敬他、不要理他、再待几年你且看他。 寒山云:还有甚诀可以躲得? 拾得云:我曾看过弥勒菩萨偈,你且听我念偈曰: 有人骂老拙,老拙只说好;有人打老拙,老拙自睡倒。 涕唾在面上,随它自干了,我也省气力,他也无烦恼。 这样波罗密,便是妙中宝。若知这消息,何愁道不了? 人弱心不弱,人贫道不贫,一心要修行,常在道中办。 世人爱荣华,我不争场面;名利总成空,贪心无足厌。 金银积如山,难买无常限;古今多少人,那个活几千。 这个逞英雄,那个做好汉,看看两发白,年年容颜变, 日月像抛梭,光阴如射箭,不久病来侵,低头暗嗟叹, 自想年少时,不把修行办,得病想回头,阎王无转限。 马上放下手,回头未为晚;也不论是非,也不把家办, 也不争人我,也不做好汉,骂着也不觉,问着如哑汉, 打着也不理,推着混身转,也不怕人笑,也不做脸面, 几年儿女债,抛开不再见。好个争名利,转眼荒郊伴。 我看世上人,都是精扯淡。劝君即回头,单把修行干。 做个大丈夫,一刀截两段;跳出红火坑,做个清凉汉。 悟得真常理,日月为邻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혹 어떤 비구는 몸과 마음을 바루고 가부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보시를 생각한다. 즉 ‘내가 지금 보시하는 것은 보시 중의 최상이다. 뉘우치는 마음이 아주 없고 도로 받을 생각이 없으면 좋은 이익을 얻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꾸짖어도 나는 끝내 갚지 않을 것이요, 어떤 사람이 주먹으로 치면서 나를 해치고, 칼이나 막대기를 들고 달려들며 기왓장이나 돌을 던지더라도, 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켜 성내지 않을 것이다. 나의 보시하는 것과 보시하는 마음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큰 보시로서, 곧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며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는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항상 생각해 보시 생각에서 떠나지 않으면 곧 이런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若有比丘正身正意。結跏趺坐。繫念在前。無有他想。專精念施。我今所施。施中之上。永無悔心。無返報想。快得善利。若人罵我。我終不報。設人害我。手捲相加。刀杖相向。瓦石相擲。當起慈心。不興瞋恚。我所施者。施意不絕。是謂。比丘。名曰大施。便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是故。諸比丘。常當思惟。不離施念。便當獲此諸善功德。如是。諸比丘。當作是學
15    명상은 홀로 있는 마음이다 댓글:  조회:1550  추천:86  2007-10-09
안다는 것은 의지의 행위이다.의지적 행위는 결코 마음을 비워 버릴 수 없게 만든다.비어있는 마음은 어떤 요구에 의해서 지어 낼수 있는 것이 아니다.사고가 그 자체의 모든 행위를 저절로 자각할 때에 그러한 상태는 찾아 올수가 있다.사고를 하는 자가 자신의 사고를 의도적으로 자각한다는 것이 아니다.명상은 지금 여기에 있는 현존의 순수함이다.그러므로 명상은 언제나 홀로이다.철저하게 홀로여서,사고가 끼어 들지 않는 마음엔 시간적인 기억작용도 없다.그러므로 마음을 비워 버릴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현재 속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홀로 있는 마음에는 과거에서 연유한 미래가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다.명상은 결론내림이 아니라 연속된 움직이고, 그것은 획득되어져서 끝나 버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두 크리스나무리티
14    마음을 바로 알라 댓글:  조회:1647  추천:78  2007-10-08
명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바로 내면의 관찰을 거쳐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마음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수많은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수 있기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다.영웅은 천하를 다스리지만 성인은 자신을 다스린다는 말이 있다.명상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자신을 다스릴줄 아는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는 문이다.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이며 마음은 어떤것들로 구성되였는가?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물질적인 연구만 있었지 마음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것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알수가 없다. 현대에 와서 심리학이 발전하였다하지만 현대의 심리학은 근근이 인간의 표면적인 활동을 분석해서 그 내부를 추측할뿐이다. 이렇듯 유치한 과학?을 기반으로 한 현대의 교육자체는 우리의 마음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니 현대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우리들은 당연히 마음이라하면 의혹에 싸여있을뿐이다.  ....사실 현대의 과학은 고대의 철학에서 발전하였으며 고대의 철학은 종교에서 기원된것이다.  다시말해서 종교는 인간의 근본문제를 제기한 당사자인만큼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를 많이 제기하였다. 그래서 인간이 마음에 문제가 있거나 정신적으로 공허한 느낌이 들면  종교를 찾게 된다. . 다른 한 방면 현대과학이 현대인의 정신적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니깐 현대인은 종교를 찾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사회가 종교가 필요한 가장 큰 원인일것이다. ....주제와 상관없는 말은 적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종교가운데서 인간의 마음을 가장 투철하게 그리고 가장 옳바르게 해석한것은 불교밖에 더 없다. 그래서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가?불교에서의 마음이란 "대상을 알아차리는것이 곧 마음이다" 라고 정의를 내린다.여기서 주시해야 할 단어는 대상인데 "대상이 없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것이 기본 전제이다. 그 대상이란 곧 색 성 향 미 촉 법 (色聲香味觸法)6가지이다. 때문에 마음이란 곧 알아차리는 역할을 하는것이 마음이며 알고 있는 그자체가 곧 마음인것이다. 동시에 이 마음은 한순간에 일어났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으로 찰나생 찰나멸이라고 한다. 그것은 영원한것이 아닌 무상한것의 연속이며 무언가 실체가 있다고 말할수 없기때문에 무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상으로부터 일어나는 많은 마음은 이롭지못한 악하고 해로운것이 많은데 이 해로운 마음들이 수시로 일어나서 탐욕을 부리고 화를 내고 어리석으며 집착하면서 우리를 괴롭힌다.  이러한 수없는 마음들이 폭포의 물처럼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사라지니 불교에서는 차라리 흐름(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한 찰나에 8만4천번뇌가 들어있다고 말하는데 조금의 과장도 없다. 이들은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보통사람의 눈으로는 그 자체를 분간하기 어려우며 특정된 교육과 체계적인 명상수행을 거치지 않고서는 전혀 알길이 없다. 보통사람들은 마음을 알수가 없으며 언어라는 불투명한 개념에 속히우면서 마음의 표면현상인 헛것에 얼리워 칠정육욕에 감싸여 울고 불고, 코물 눈물이 범벅이되여 살아간다. 혹자는 그것이 인생이라고 하지만 불교는 그것을 고통이라 한다.  불교명상은 바로 우리에게 매찰나에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는가 하는 전부 과정과 현상을 분석하고 꿰뚫어 보게 해주며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그 방법을 직접 활용하여  내 안에서  일어나는 물,심의 여러 현상을 인식 확인할수가 있어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날수가 있는것이다.초기경전의 아비담마(법)에서는  마음이 한 대상에 머물으는 한순간에만해도 마음은 14가지 역할을 하면서 일어나고 멸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14가지 역할을 하는 마음들을 다시 일어나는 곳을 따져 분류하면 89가지(더 세밀하게 분석하면 121가지)마음이 존재한다고 한다.마음은 또 선한것과 불선한것 그리고 단순히 작용만하는것(無記) 등등으로도 분류하여 54가지를 나눌수 있는데 여기서는 간단한 몇개만 골라 해석하련다.   불선한 마음 즉 악하고 해로운 마음은 우리에게 수많은 고통을 가져다주는데 그 근본은 3독이라고 일컫는 탐진치(貪嗔痴)에 기본을 두고 있다. 이 탐진치 3독에서 탐과 진(성냄)은 서로 공존못하는데 한 마음에서 동시에 일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탐과 진에는 모두 어리석음이 잠재되여있지만 때론 어리석음이 탐과 진과 관계없이 일어나기때문에 세가지를 단독으로 근본단위로 설정하였다. 여기서 탐에 뿌리를 둔 마음은 8가지가 있고 진(성냄)에 뿌리를 둔 마음은 2가지, 치(어리석음)에 뿌리를 둔 마음도 2가지 이렇게 불선한 마음을 12가지로 나눈다. 특히 성냄에 뿌리를 둔 마음은 두가지인데 "불만족이 함께 하고, 분노와 결합되고,자극 없는 마음 하나" 와 "불만족이 함께 하고, 분노와 결합되고,자극 있는 마음 하나" 이다. 이를 간단히 분석하면 성냄에 뿌리를 둔 이 두가지 마음의 공통점은 모두 불만족인데 "분노란 바로 대상에대한 불만족으로 일어난다"로 해석할수있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내가 왜 화를 내느냐를 알고자 하면 어느 대상에 대하여 불만족하는가를 사색하면 금방 화의 원인을 찾을수가 있다. 그리고 12연기법의 이론을 겹쳐 명상하다보면 곧장 화의 뿌리를 뽑을수가 있다. 여기서의 불만족에는 낙담,우울,실의,고뇌,슬픔,비통등등의 뜻을 포함한다.다음 어리석음에 뿌리를 박은 마음도 두가지로 나누는데 "평온이 함께 하고, 의심과 결합된 마음 하나"와 "평온이 함께 하고, 들뜸과 결합된 마음 하나"이다. 이 두마음의 공통점은 평온이고 다른점은 의심과 들뜸이다. 여기서 평온이란  즐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중립적인 상태를 가리키는데  어리석음이 있을때는 즐거움과 고통스러운 이 두가지 느낌이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어리석음의 근본 원인인 의심과 들뜸(혼란,흥분)이 일어날때는 상대에 대하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 못한다.  의심이란 모르기때문에 의심이 일어나는 것이고 불안이란 역시 모종 사물에대해 알수가 없기때문에 불안해나고 무서워나고 공포가 일어나는 것이다. 12연기법에 따르면 모른다는 것은 무명이며 무명은 곧 어리석음이다. 바로 이 무명인 어리석음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고통의 뿌리가되며 수많은 번뇌를 갖다주는 원흉이된다. 이 어리석음은 바로 오직 지혜로만 대치할수밖에 없다.불교명상의 근본 목적은 지혜를 개발하는것이라해도 무방하겠다.우리는 명상을 통하여 바로 이상과 같은 여러가지 마음을 직접 자신의 몸에서 느껴야 하며 한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마음들을 분석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가에 따라 우리의 명상공부의 심도를 알수가 있다. 물론 처음부터 알수가 없으며 많이 배우고 많이 듣고 많이 사유를 해야만 그 실마리를 찾을수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무엇보다도 이 방면의 전문가인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체계적고 활용적인 명상공부를 할수있는것이다.끝으로 "오늘의 명상" 한구절 올리며 글을 맺힌다. 명상은 그대가 그것과 마주칠 때 가장 경이로운 것이라고 여길만한 어떤 것이다. 나는 그 속으로 직접 들어 갈 수는 있으나, 내가 그것에 대하여 묘사한다고 해서, 그 묘사하는 대상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대 스스로가 자신을 지켜봄으로 부터 배워야 한다. 어떤 책도, 어떤 스승도 이에 대하여 가르쳐 줄수가 없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말아라. 영적인 조직에도 참여하지 말아라. 이모든 것을 스스로 자신으로 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믿기 어려운 놀랄 만한 것들을 마음이 찾아 낼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분리가 없어야 하고, 그래서 무한한 안정성, 신속성, 기동성이 있어야 한다. 그와같은 마음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기 때문에 삶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다.                     - 지두 크리스나무리티 -
13    명상은 시작도 끝도 없다. 댓글:  조회:1728  추천:91  2007-10-07
명상은 시작도 끝도 없다. 그 속에서는 성취도 실패도 없고,점진적인 발전도 중도 포기도 없다. 그것은 끝이 없는 움직임이고, 그래서 시공(時空)을 초월한다.명상을 체험한다는 것은 명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왜냐하면 체험자는 시간과 공간, 기억과 인식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참다운 명상을 위한 기초는 수동적인 자각이다. 이것은 권위와 야심, 선망과 공포로 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전체적 자유를 말한다. 이러한 자유가 없이, 자기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명상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그리고 어떤 선택이 있는 한  자기자신에 대한 앎(眞知)은 있을 수가 없다.  선택은 " 있는 그대로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갈등을 의미한다. 어떤 개념적 환상 속에서,어떤 낭만적인 믿음과 신앙 속으로 들어가 노니는 것은 명상이라고 말 할 수가 없다. 두뇌는 모든 신화,환상,안일(安逸)함으로부터 훌훌 벗어나서 마음의 허구성(虛構性)에 대한 실체를 똑바로 직시(直視)해야 한다. 주위의 산만함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명상의 흐름 안으로 들어온다.꽃은 그것의 생김새, 향기, 색깔 등과 함께, 꽃나무  전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한번 말로 또는 손으로 꽃한송이를 조각조각 찟어 보라. 그러면 꽃한송이는 없어지고, 꽃이 아닌, 꽃이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만이 남을 것이다.  명상이란  시들기도 하고 싱싱하게 피어 있기도 하는,그 아름다움에 휩싸여 있는 전체 꽃나무와 같다. -지두 크리스나무리티-
12    명상은 자신에 대한 자각이다. 댓글:  조회:1790  추천:82  2007-10-06
 명상이란 몸과 생각에 대한 단순한 통제도 아니고 호흡등을 제어하는 행위도 아니다. 몸은 조용하며 건강하고 긴장이 없어야 한다. 느낌의 감수성은 예민한대로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마음은 그 모든 중얼거림, 혼돈, 들떠있음, 그리고 무엇인가를 항상 더듬거리며 찾아다니는 것으로 부터 그쳐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혼란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몸과 마음으로 구성된 일개 유기체(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주는 것이 아니라,좀 깊이 더 들어가서 특정 경향성의 견해 , 굳어진 선입관,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애착을 지니고 있는 마음자체만이 관찰되어져야 한다.마음은 건강하고 생기가 나며 힘이 넘칠 때에 느낌이 고양되고 극히 예민해 진다. 이런때는 습관과 욕망의 취향에 의해서 마음이 오염되지 않고,  원래 타고난 지성과 함께  몸이 해야 할 제 기능을 있는 그대로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몸이 아니고, 마음으로 부터 착수해야 한다.마음이란 알고 보면 생각들과 생각들의 다양한 움직임의 표현일 뿐이다.단순한 집중은 생각을 협소하게 제한하고 구속하지만,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각(自覺)이 있을 때는 집중이 자연스럽게 오게 된다. 이 자각(自覺)은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버리고, 집착하고, 거부하는 그 생각하는 자(에고)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 자각(自覺)은 선택이 있을 수가 없는데,외면(대상)과 내면(주체), 이 양쪽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이 둘(대상과 주체)의 공통적인 내면적 흐름이며,  그래서 내면과 외면 사이의 분리란(主,客 이원화), 자각(自覺)에 의해 끝장이 나 버린다.  생각들은 사랑(하나됨)의 느낌을 파괴해 버릴 뿐이다. 생각은 단순히 즐김만 줄 뿐이고, 이 즐김을 쫏다보면 사랑(하나됨)은 옆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다. 생각 속에서는 먹고 마시는 등의 (감각적) 즐거움들이  계속적으로 그자체를 지속시키려고 만 하는데, 생각 안에서 이러한 단순한 즐거움을 통제 또는 억압하려고 한다는 것은별다른 효과와 의미가 없으며,여러가지 형태로 갈등과 강박적인 충동만을 더욱 일으킬 뿐이다.생각이란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물질적인(파동성 의식)) 성품으로써시간을 초월한 경지를 추구할 수가 없다.생각이란 기억이고 그 기억 속의 경험들은  지난해 가을날에 떨어진 낙옆처럼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한 자각속에서 (존재에 대한)주의집중이 나오는데,이것은 부주의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나의 존재에 대한)부주의는 몸이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습관을 만들고,  (존재)느낌의 강도를 희석시킨다. 부주의(不注意) 자체가 (자기 존재에 대한) 주의로 바뀌어 질 수는 없다. 부주의에 대한 자각(自覺)이 곧 (나에 대한) 주의 집중이다. 이 의식의 복잡한 흐름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주시하는 것이 명상이며,마음의 혼란속에서는 오직 명상으로부터만 질서가 나올 수 있다. 이질서는 수학의 공식만큼이나 절대적이며,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작용이 바로 직관적 행위이다. 질서란 배열적이며, 구조적이고, 비례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야 뒤늦게 나오는 것들이다. 질서란 (기억된)개념적 내용들에 의해서 방해받거나 혼란되지 않은(고요한)마음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생각이 침묵할 때에 비움이 있고, 비움이 곧 질서인 것이다.                                                   -지두 크리스나무리티-
11    불교의 가르침의 근본 댓글:  조회:1640  추천:78  2007-10-06
집장석(執杖釋)이 세존께 물었다"사문 구담(瞿曇)이시여, 무엇으로써 가르침의 근본[宗本]을 삼고, 어떠한 법을 연설하십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집장석이여, 일체 세간과 하늘[天] 마군[魔] 범(梵) 사문(沙門) 범지(梵志) 등 사람에서 하늘에 이르기까지 서로 싸우지 않게 하고, 또 욕심을 떠나 청정한 범행을 닦아 익히며, 아첨과 거짓말을 버려 여의고 뉘우침을 없애며, 유(有)와 비유(非有)와 또한 무상(無想)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 가르침의 근본이고, 설법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에 집장석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옳다고도 아니하고 그르다고도 아니하다가, 머리를 흔들고 떠나갔다. ................ 執杖釋問世尊曰。沙門瞿曇。以何為宗本。說何等法 世尊答曰。釋。若一切世間。天及魔.梵.沙門.梵志。從人至天。使不鬥諍。修習離欲清淨梵志。捨離諂曲。除悔。不著有.非有。亦無想。是我宗本。說亦如是
10    专气致柔,能如婴兒乎 댓글:  조회:1677  추천:85  2007-10-05
老子 도덕경에  "기를 오로지하여 어린아이처럼 유연하게 할수있는가? "(专气致柔,能如婴儿乎?)라는 말이 있다. 여러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양생의 각도에서 기를 호흡으로 볼수있다. 專은 전일하다 오로지 등 집중의 뜻이 담겨있으므로  여기서 호흡을 오로지한다는 뜻으로 호흡단련을 전일하게 하다보면 내 몸과 마음도 어린아이처럼 유연하게 변화시킬수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유연성에 대해서 노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태여날때는 유연한것이고 죽을때는 딴딴해지고 굳어진다. 초목 등 만물도 태여날때는 유연한것이지만 죽을때는 마르고 굳어진다. 때문에 강하고 굳은것은 곧 죽을것이요 유연함은 태여남의 시작이다."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번역이 다소 어색하지만 한문을 읽으면 대뜸 그 뜻은 느낄수가 있듯이  유연함은 모든 생명의 원동력이 된다.  사람이 늙으면 다리부터 무거워지고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한 반편 어린아이들은 온종일 뛰여다니며 놀아도 피곤함이 없으니 젊음과 늙음의 차이는 바로 유연한가 유연하지못한가에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늙음은 누구나 싫어한다. 그리고 늙음은 누구나 피면할수 없다. 하지만 늙으면서도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할수있는 사람이 적다. 노자의 양생법은 바로 위에서 말한  专气致柔에 있는바  우리는 호흡을 잘 조절하는것만으로도 건강한 신체를 보존할수가 있다. 물론 호흡법으로 병을 치료할수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건강하지못한 신체는 여러가지 외계의 요소와 직접적으로 관계되겠지만 호흡법은 많은 양생법가운데서 첫자리를 놓아야 할 중요한 양생법이다. 도교에서의 장생불로의 효과를 볼수있을가는 각자의 행에 따라 다를수있겠지만 호흡은 우리의 신심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것만은 사실이다.  평시에 호흡에 주의깊게 관찰을 두다보면 호흡이 자연스럽게 길고 고르롭고 평화해짐을 느낄수가 있다. 결국은 몸도 마음도 고요해져 그 고요함에서의 즐거움을 느낄수가 있고 많은 건강을 해치는 요소를 차단하면서 이러한 호흡단련을 함께 하다보면 자연히 신심건강을 되찾을수가 있다. 여기서 한마디 강조하고싶은것은 氣란 호흡뿐이 아닌 우리의 마음의 작용도 응당 포함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기가 고르롭다는 뜻은 호흡이 고르롭기전에 우선먼저  우리의 마음상태가 고요해야함을 우선 념두에 두어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기를 좌우지하는것이지 기가 우리의 마음을 좌우지하는것이 아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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