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농촌청년 참군기념사진을 보며
확실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내가 본 집체사진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앞줄에 앉은 사람들의 대개가 친척이나 사회에서 존중을 받는 대표적 인물들이다.
어느 날 필자는 사진을 정리하다가 1969년 12월에 (徹底埋葬帝修)는 글을 새긴 집체사진에 눈길을 멈췄다.
이 집체사진은 당년에 도문시 홍광공사 수남대대 7대(달라자마을)청년 김영화의 참군을 기념하며 찍은 것이다. 그때만도 누가 참군하면 온 마을의 경사로 동네가 들썽했으니깐 말이다.
총 32명에 그중 마을의 로농대표 4명(가족포함), 마을청년 16명, 지식청년(집체호)12인데, 앞줄에9명(주인공, 가족포함)의 대표적인물이 앉았다.
오늘 필자는 앞줄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년대를 반추한다.(앞줄에 앉은 9명중 이미 6 명이 하늘나라 사람으로 되였음)
이야기는 왼쪽 첫 사람을 1번으로 9번까지 이어진다.
1, – 고 장련귀(蔣連貴,)
지난세기 60년대 나라에서는 도시의 초중이상 졸업생을 조직하여 농촌에 보냈다. 에는 이들을 이라 부르며 광활한 농촌에 가서 단련한다고 했고 때는 이라는 부르며 농촌에 내려 가서 재교육을 받는다고 하였다.
1969년 4월 우리 마을에는 도문가도에서 조, 한족으로 조직한 가 입적하였다.
장련귀(한족)는 그때 온 청년으로 말이 지식청년이지 기실은 소학생 3학년정도였다. 납자쌍둥이의 형으로 태여난 련귀는 키가 작고 체질이 약질(弱質)이며 자기의 코물마저 건사할줄을 모르는 였다. 그는 집에서 놀다가 때로는 도문농장에서 양을 몰았다고 한다.
그런데 장련귀는 생산대 대비판회의 때마다 늘 선참으로 발언을 했는데 그는 발언할 때마다 을 반복하면서 상당한 지식청년의 신분으로 대접을 받으며 기치가 선명한이란 별호를 가졌다.
문맹을 자랑으로, 대신 지식분자를 로 비판하고 로동개조를 시킨 이 사진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 사진의 최금순(중간줄 오른쪽 네번째)은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서 재교육을 받았고 반문맹인 장련귀는 으로 우쭐거렸다. 언비(言秘)에 걸린 최금순이 으로 사람들에게 무시(無視) 당하던 그 모습이 정말 측은했다.
2, -한성훈(韓成勳)
한성훈(韓成勳)은 고중을 졸업하고 철도중학교에서 한어교직에 있다가 이 라는 의심을 받고 실업을 당하고 집에서 놀았다고 한다. 그의 별호는 , 였다.
때는 을 멀리 하고 책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을 라고 의심했다.수남마을에도 중문, 조문공부에 미쳐있는 열혈청년을 로 취급한 실레가 있다.한성훈은 실로 공부에 미친 (정신병환자)였다.
그는 글씨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수영도 잘했는데 그의 위병은 그가 농촌에 와서 의학을 배우고 자체로 자기 몸에 침을 놓으면서 완치하였다.
그는 라지오를 가지고 다니며 밤 늦게까지, 새벽 일찍부터 영어, 서반아어, 세계어, 로어… 등 외국어 공부를 견지하였다. 그는 기억력이 좋고 언변이 좋아 ,을 하도 생동하게 이야기 하기에 웃동네 사람들까지 들으려 왔다. 특히 그의 속기법과 한어발음은 사람들을 놀래울 정도였다. 그가 중국공산당 9차대표대회보고를 방송을 한어로 듣고 기록하고 기록한 문장을 한자성조(聲調)까지 달면서 기록하여 대회에서 전달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때 저마다 혀를 차며 엄지를 내 흔들었다.
로동자 모집때 그는 도문벽돌공장공인으로, 다시 도문제재공장 중학교교원으로, 개혁개방이 초기에 길림성대외무역국에서 한성훈을 제 1호로 초빙해갔다.
2007년 필자가 한성훈이 에서 꾸리는 의 편집으로 초빙되였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장춘에 가서 한성훈을 찾아 뵈였다. 필자는 지금도 한성훈의 의학필기장과 독서필기장을 수장품으로 보관하고 있다.
지식분자를 로 몰던 을 생각하면 진정 소름이 끼친다.
3, (猪官叔叔) – 오기활(吳基活)
오늘 따라 필자는 처음으로 용기르 내서 를 말하고 싶다.
1963년에 필자는 도문중학(그때는 연길현4중) 제 16기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이 되겠다는 발언을 했고 뢰봉학습모범으로 학교에서 입단을 하고 회향(回鄕)하였다.
필자는 청년사업을 힘있게 틀어쥐여 달아자의 첫 단지부를 건립하고 단지부서기와 정치대장을 맡았다. 운동가운데서 전 도문시에서 제일 먼저 집체우사를 돌로 지어 전시에서 보급했고 모택동저작학습반을 잘 꾸린데서 1964년 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후 때 백부가 억울한 모자를 쓰고 망나니들에게 타살되자 정치상에서 권리를 박탈하고5년간 생산대집체양돈장의 사양원을 맡았다. 그때 달라자양돈장을 성, 주, 시 전형이였고 필자는 주, 시 모태동저작학습선진분자로 대회에서 강용(大會講用)을 했다. 그때 필자의 별명은 오대장, 오서기, 오호장(집체호정치호장)이 라고 부르지 않고 로 불렀다.
글의 9번 (쇄지-김영철)에서 당년의 배경이 보충된다.
4, 농촌의- 고 최성욱(崔成旭)
최성욱의 별명은 농촌의 먼저 (코가 큰 사람을 가르킴)였다.
사람들은 한사람의 체구나 이목구비에 비춰 그의 별명을 곧 잘 짓는데 그때 달라자에는 , , 가 있었기에 그저 라면 서로간 엇갈렸다.. 최성욱은 코큰 아버지(최석준)를 계승하여 어렸을 때부터 라 불렸다.
소학교문화수준인 최성욱은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렸고 독서를 즐기기로 조선문으로 번역된 세계명작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그때 동네서는 최성욱이 그린 화토를 빌려 가지고 다니며 화토놀이를 하였다
최성욱은 퉁소, 해금 등 악기를 잘 다뤘고 목수, 미장일도 능했다. 그래서 동네서 그의 별명을 >보다도 농촌의 라 하였다.
최성욱은 달라자의 첫 공청단원이며 민병패장, 생산대장을 지냈다. 사회주의교육운동때인 1964년에 그의 그림작품 가 수남대대 계급투쟁교양도편교재로 추천되여 타동네서 빌려다가 전시 하기도 했다.
필자보다 9년 년상인 최석준은 19살에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어 양자를 길렀는데 그의 아들이름을 필자가. 글 문(文), 밝을 철(哲)로 이라고 지었다. 최성욱은 60이 넘은 나이에 돈벌이로 한국에 가서 페암으로 진단받고 집에 돌아와 타계하였다.
5, - 고 김철국(金哲國)
나의 아버지친구인 김철국의 별명은 에 까지 둘이다.
는 그가 혈변(血便)을 본다는 질병에서, 은 지난 세기 50년대 문맹 퇴지 야학반에 다닐 때 김철국이 자기의 성 이라고 쓴다는것이 으로 쓴후부터 불려진 이름이다.
로빈농성분에 체격까지 우럭진 김철국은50년대부터 생산대 대장과 빈하중농대표로 활약하였다. 그는 기억력이 좋아 상급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기록도 없이 회의 정신을 빠짐없이 전달한데서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1958년 대약진 때 상급에서는 마을을 단위로 경쟁을 벌렸는데 붉은색기는 공산주의사회를, 노란색기는 사회주의사회를, 흰색기는 자본주의를, 검은색기는 암흑한 봉건사회를 상징하였다. 그때는 며 5년이면 영국을 릉가하고 10년이면 미국을 따라 잡는 천만군의 기세로 을 부를 때다.
그때 우리 마을의 큰길 옆에 자동차바퀴쇠가마를 높이 달아맨 종(鐘)대에 검은색기발이 펄럭거렸는데 김철국대장은 면서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는 실사구시한 사람이였다.
지난세기 60년대에 빈하중농대표인 김철국은 정치대장을 하는 필자에게 몇번이나 이런 말을 하였다.
사실은 이러했다.
1952년 조선전쟁이 폭발한후 조선의 모 밀수군이(성이 남씨로 기억됨) 밀수건으로 달라자에 있는 사돈(오세준)을 찾아 왔다. 그 때 조선전쟁때라 고도로 긴장된 대대의 간부들은 그를 (남로당)라 의심하고 다시 오면 붙잡기로 하였다.(그때 필자의 사촌형(오기품)이 그 밀수군의 심부럼으로 밀수폼을 운반해 줬다고 했다) 하루는 김철국이 배앓이병 도져서 길옆 널판자변소에 앉아 있는데 그 밀수군이 또 나타나자급히 바지춤을 올리고 나서 그자를 체포했다.
그런데 그후 신문에는 수남대대 민병련장인 송림마을의 안창렬이 달라자의 오세준세 집에있는 꿰짝속에 이틀간이 나 숨어서 그자를 기다렸다가 뛰쳐나와 직접 붙잡은 것으로 보도되였다는 것이다. 김철국의 얘기를 오랫동안 간직했던 필자는 이 글을 쓰려고 지난해 11월에 연변일보사 자료실에 가서 당년의 신문을 찾아 봤더니1952년 6월 19일자 에 지승원의 그림으로 는 련환화가 련속 3기로 발표되였다.
사진속에 한족솜옷을 입고 신끈도 없는 기운 왕바신(솜신)을 신고 등장한 김철국의 신분은 참군하는 아들의 아버지신분이다.
6 - 김영화(金英和)
김영화는 이 사진에 참군하는 주인공이다.
김철국의 큰 아들인 영화는 도문중학교(초중)를 졸업하고 회향하여 농사일을 하다가 참군, 퇴대후 농촌에서 추천받고 중등전업학교에 입학, 졸업후 도문시건설국계통에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퇴직후 영화는 한국에가서 용역으로 일했고 한국모 부문에서 조직한 응모작품에 입선되여 상금을 타기도 했다.
영화는 말수가 적고 글씨를 잘 쓰고 장기에 흥취가 있었다.
영화가 (대어른)이란 별명을 얻게 되기까지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가 한번은 동네친척집에서 차린 잔치에 갔다가 심부름꾼으로 술을 사려 도문에 갔다가 영화구경을 하고 친구 집에서 밤을 자고 이틑날에 왔다. 술을 고대히 기다리던 동네 사람들이 너무나도 기가찬 나머지 며 자기를 달랬다.
7, - 고 주성문(朱成文)
주성문은 60년대 중반에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이다. 그의 별명은 >, 둘이다. 얼굴모양이 쏘련사람 같다고 하여 라 불렀다.
주성문의 얘기는 세가지로 이어진다.
주성문은 언제나 남 먼저 남성들(그때는 자란들이라고 불렀다)의 개추렴을 발동하고는 자기는 번번히 빠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돈 때문이겠는데 술상에서 그를 라며 술안주에 올렸다.
김철국에게 당했다.
그 년대는 술이 귀하기로 는 년대였다.
어느 하루 길닦이를 하는데 주성문이 손님이 와서 아침에 술을 마였다며 술냄새를 피웠다. 그에서 술냄새에 함께 일하던 남자들이 며 서로간 올라오는 술충을 달랬다. 이에 주성문은 자기가 술을 마였다면서 고 하였다.
그런데 곁군들이 술생각을 잊어버리자 하면 그가 또 를 몇번이나 반복하였다. 이에 처음에는 미안해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로, 로 풀이를 하더니 나중에는 김철국(이 글의 5번)이 삽을 팽개치고 며 대판 싸움을 벌렸다.
장세날에 춤판을.
주성문은80로모가 사망되여 후사를 치른 날에 동네분들 앞에서 며 술상이 끝난후 먼저 나서 노래를 부르며 오락판을 벌렸다.
그때까지 모든 사망을 슬픔으로만 여겨온 필자는 주성문한테 호상(好喪)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호상이면 오락판을 벌려도 별문제인 풍속을 처음 알게 되였다.
필자는 주성문을 떠 올리면 술이 긴장하던 년대가 떠오른다.
8, - 고 최장국(崔長國)
최장국은 체격이 웅장한것으로 (키큰사람)란 별명을 가졌다.
항미원조 때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군, 퇴대후 영예군인으로 조직된 왕청현 석현진 에 배치 되였다. 그후 남양(지금의 향양)에 이사를 왔다가 또 아래 마을인 달라자에 이사를 왔다.
최장국은 성질이 콸콸하였다. 한번은 그가 돼지새끼를 팔려고 도문시장에 갔다가 팔리지 않아서 그대로 수레에 싣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서 술독이 퍼졌던지 안산다리우에서 산 돼지새끼를 몽땅 북강물에 처넣었다.
또한 최장국은 필자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필자가 수남소학교에 다닐 때인 1953년 음력 정월 초, 어느 날 오후에 내가 휴식시간에 합작사(공소사)에 가보니 바로 필자의 아버지(오호준)와 최장국이 마른 명태를 사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는 필자에게 한대에 3전짜리 싸리연필 몇대를 사주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이번 만남이 최후의 만남으로 될 줄이야!
그날 아버지는 쌀을 찧으려고 수남정미소를 갔는데 최장국이를 만나 술을 마이고 갈라졌는데 후에 아버지는 수남우물의 내리막 길에서 쌀마대를 싫은 소수레에서 떨어져 수레바퀴에 깔려 과다출혈로 이틑 날에 사망되였다. 그 후로부터 필자는 최장국이를 보면 어린 나이에도 그가 술을 함께 마이고 술동무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지난 70년대 김철국(5호인물)의 생일에 다른 술상에서 일부러 필자를 찾아 와 술을 마이던 최장국이 하며 옛이랴기를 하던 중 불시에 찰떡이 목에 메여 사망될 줄이야!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맺어진 최장국의 사망은 나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난 해 11월 23일에 필자는61년 만에 처음으로 최장국의 아들 최정록을 찾아가서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로 나누었다.(당시에 최정록이 외지에 있었다)
9. - 고 김영철(金英哲)-
필자보다 한살 우인 김영철의 애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