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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한심한 뻐스표값, “나는 모른다”는 한심한 차장 댓글:  조회:6503  추천:5  2013-10-11
지난 10일, 필자는 도문-석현뻐스를 타고 달라자에 다녀왔다.  도문- 석현선로뻐스는 도문→안산→달라자→향양→수남→송림→동흥→석현순으로 표값이 4원이다.그런데 도문-달라자간의 뻐스값이 정말 한심했다.  필자가 도문시발점에서 뻐스를 타고 달라자에서 내리려고 하니 값이 3원이란다. 하여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어 “석현까지 4원인데 어찌하여 3원을 받는가? 같은 거리에 도문-곡수(2대)는 1원인데…(비록 곡수는 시내 선로뻐스라고 하지만)”라고 반문하니 차장은 무뚝뚝한 어조로 “나는 모른다”는 단마디 대답이다. 도문-달라자의 거리는 도문-석현의 근 3분의 1 거리다. 그런데 도문-달라자의 뻐스값이 도문-석현전액의 4분의 3이라니 얼마나 한심한가?! 물론 필자는 몇 년에 한두번씩 다니는 곳이니깐 뻐스값이 비싸거나 억울해도 넘겨지날수는 있지만 뻐스를 교통도구로 하는 당지 농민들은 결코 계속 당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물론 응당히 내야 할 돈이라면 얼마라도 내야 하지만 부당한 돈이라면 1전도 내지 말아야 한다. 그 누가 “그까짓 돈을 가지고…”하면서 “시시하다”고 하거나 “짠돌이”라고 비웃는다면 그 사람은 유권(維权)의식이 없는 법맹(法盲)이라 하겠다. 민생에 관계되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없다. 려객의 물음에 “나는 모른다”로 답하는 차장은 려객들의 알권리를 무시하는것으로 차장자격이 없고 직업도덕이 없는 “불합격차장”이라 하겠다.
119    한권의 책이 심어준 꿈 댓글:  조회:7072  추천:2  2013-09-30
일전에 필자는 모 사장에게 필자의 작품집을 선물하면서 인사말로 고 했더니 뜻밖에도 고 답하는 것이였다. 상상외의 대답이라 섭섭하거나 불쾌감 먼저 대방의 무지(無智)함를 모르고 성의를 표한 필자가 오히려 무지라 느껴지며 반성이 따랐다. 책을 읽는것은 결코 취미만이 아닌 생활의 일부분이고 인생의 필수라 하겠다. 그래서 이며 는 명언이 있다.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은 전쟁의 포성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고 52년간 8천여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808년 독일 문학의 인 괴테는 나폴레옹을 만나 동서고금을 종횡으로 누비는 그의 견문을 듣고서 국적마저 다른 전쟁광에게 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나폴레옹도 괴퇴를 만나고 나서 하는 묘언을 남겼다고 한다. 실로 일각에서는 당대 최고의 영웅이며 천재로 칭송되던 나폴레옹이 괴테를 자신에 버금가는 인물로 인정한것이야 말로 최상의 찬사로 문학담, 인생담 등 할것없이 막힘없이 풀어 가는 괴테의 독서힘에 감복한것이라 필자는 생각된다. 19세기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한권의 책으로 고고학계의 큰 족적을 남긴 대표적인 인물이다. 슐리만이 소년시절, 아버지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라는 책이 있었다. 이 책은 어린이의 흥미를 돋구는데 알맞게 삽화도 곁들어 있었다. 그 삽화 중 하나가 바로 희랍군의 침략을 받아 불타고 있는 트로이시를 묘사한 것이였다. 이때 소년인 슐리만은 책읽기를 멈추고 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 후로부터 슐리만은 그 꿈의 실현을 위하여 준비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신화 또는 전설에 불과한 그런 얘기가 실재했을리가 없다며 그를 조롱하기도 하였지만. 생활이 빈곤한 슐리만은 잡화상 점원을 하면서 부지런히 돈을 모았는데 그가 발굴에 필요한 자금을 겨우 마련했을 때 그의 나이 47세, 계속하여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백방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곳이 지금의 토이기지방인 소아세아 서해안 히사트리크 언덕이라고 확증을 얻어 내기까지 59세 나이에 결혼, 안해와 함께 히사트리크로 길을 떠난것은 1870년, 목적지에 도착하여 1년 동안 줄곳 땅을 파니 사람들은 그를 정신병자로 취급했다. 그러나 슐리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하여 흙과 돌을 파헤치다가 트로이 전쟁의 실재를 증명하는 으로 알려진 조개무늬 금관이 발견되여 막막하기만 하던 그의 50년 집념이 제 길을 찾았다. 이렇게 되자 유럽각국에서는 초국가적으로 그를 지원하기 시작, 발굴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여 히사트리크언덕 전체에서 일곱개의 트로이 유적지가 매몰되였음이 드러났다. 슐리만은 평생을 트로이 발굴에 바쳤을 뿐만 아니라 품베이 발굴에 나섰다가 68세에 객사하였다.(1876년에 미케네를, 1880년에 오르코메소스를, 1884년에 티린즈를 발굴) 한권의 책이 사람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전 인생을 좌우한다. 세계 고고학계의 가장 큰 별의 하나인 슐리만을 발굴의 화신으로 만든 것은 그가 어린 시절에 읽은 동화집 속에 담긴 신화, 한권의 책이였다. 책은 미지의 세계로의 길을 찾고 바르게 현실을 걷도록하는 리정표다.슐리만의 일례가 책의 위대함, 독서의 위대함, 인간 집념의 위대함을 말해준다. 우리는 항상 책을 가까이 하여 책향기에 흠뻑취해 마음을 살찌워야 한다.그런데 조사 결과 지난해 18~70세의 중국인의 독서량이 일인당 평균 6.7권(이 조사에 수분 없는지 의심된다), 한국이 10.8권, 미국이 15권으로 밝혀져 너무 수치스럽다..
118    "세계변소의 날"을 맞으며 댓글:  조회:6774  추천:4  2013-09-16
지난 7월 24일 제 66차 유엔대회에서는 매년 11월 19일을 "세계변소의 날"로 정하고 사람마다 문명하게 변소를 사용할것을 권장했다. 2001년 11월 9일에 30여개 나라와 지역의 500여명 대표들이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변소"를 국제적인 화제로 "인류가 어떻게 변소를 잘 사용할것인가?"을 토의했다. 유엔이 밝힌 통계에 따르면 지금 세계인구 65억중 25억이 변소가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고 11억 인구가 아무 곳에서나 대소변을 본다고 한다. 인류가 변소위기를 겪는 것은 인구가 증장에 비춰 공공변소가 줄어들고 물 결핍으로하여 24억 인구가 변소사용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변을 보면 공공변소가 없어서, 공공변소가 어지러워서 아무 곳에나 대소변을 보는 현상이 너무나도 보편적이다. 2011년 6월 1일 "중조청소년서화경연"때 조선서 온 10여명의 대표선수들이 도문 두만강광장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해 할수 없이 중국안내원의 지시로 두만강유보도의 가장자리에서 숱한 행인들을 등에 돌리고 소변을 봤다. 심지어 도문 국문(國門)정상에 올랐던 관광객이 국문정상에서 소변을 봐 갑을간에 큰 언쟁까지 이르켰다.  실로 "국제망신"이 아닐수 없다. 중한수교의 전기인물 한성호박사는 태산에 다녀오고 "관광명소의 화장실이 더러워 중국망신, 태산에 오줌똥이 넘쳐나니 태안(太安)은 영원히 불안(不安)"이란 글을 발표, 이 글을 읽고 막진규태안시당위서기가 직접나서 "화장실혁명"을 이르켜 3개월간 2216개의 화장실을 개조하였다. 필자가 본 일본은 쓰레기상자는 눈에 잘 띄우지 않았지만 어디에 가나 화장실은 유표하여 불편이 없었다. "인생은 먹어야 하고 싸야 한다. 먹는 것만 알고 싸는 걸 모른다면 인생을 모르는것이다"(한성호) 화장실도 관광명소다. 일본 동경다이바에 있는 한 공공화장실은 옥상은 "천지"요 둘레는 폭포로 많은 유람객들와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나라 광주에도 800만원을 투자한 화장실(舒心阁)이 있다. "서심각"은 6성급무료화장실로 실내장식에 황금(한 근)까지 사용하였다. 이밖에 필자가 돌아본 로씨아, 일본, 한국은 화장실이 무료였다. 몇 년전 연변경제문화고찰단으로 한국을 동행한 연변작자협회서진정부주석은 한국의 깨끗한 무료화장실을 곁들며 "그 좋은 화장실을 왜 무료로 제공하는가? 우리 고장에서는 청소공들의 공자 해결한다며 돈을 받겠는데…"하며 리해하지 못했다. 화장실무료제공이 얼마나 우세기에 도문국문남쪽에 자리한 도봉호텔에서는 한기간 "도봉호텔은 커피, 관광기념품, 무료화장실로 당신을 환영합니다"는 거폭의 프랑카트를 걸고 손님을 끌었겠는가. 필자는 해당부문의 결책자들은 "인생은 먹어야 하고 싸야 한다. 먹는 것만 알고 싸는 걸 모른다면 인생을 모르는 것이다"를 명기하고 해마다 맞는 "세계변소의 날"을 계기로 "막진규식화장실혁명"(태안시당위서기)을 할것을 권장한다. 필연코 백성들이 옹호할것이다. 아래는 필자가 추천하는 일본의 화장실이다.
117    누가 국가의 "3농부축자금" 향수하지? 댓글:  조회:7136  추천:5  2013-09-06
수남촌 당지부서기의  물음 구경 누가 국가의 을 향수하는가? 근년에 필자는 도문시월청진과 석현진의 부분적 농민, 촌간부들이 찾아와 국가의 3농부축자금향수에 관한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다. 지난 8월 23일 도문시석현진수남촌당지부서기(김진섭,65)는 필자를 만나 며 며 이런 문제를 반영했다.  지금 나라에서 많은 정책과 자금으로 을 한다. 그런데 국가의 정책들이 기층에까지 하달되는데 문제가 많다. 례하면 나라에서 농민들이 자기집에 채색양철기와를 올리려면 호당 4000원을 보조한다. 내가 알아 보니 120평방되는 집에 채색양철기와를 올리려면 전문양철가공부에서 말하는 것이 재로비와 수공비를 합쳐서 8000원 좌우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국가에서 보조해 주는 4000원외 개인이 4000원을 보태면 된다. 그런데 3농부축자금을 하달하는 부문에서 하는 말이 채색양철기와를 올리자면 꼭 자기들이 지정한 시공대에 일을 맡겨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시공대를 찾아가서 물어보니 120평방좌우 되는 집에 1만 2000원, 심지어 그 이상이 든단다. 그러니까 국가에서 보조해 주는 돈 외에 개인이 8000원을 부담해야 한다는 말이다. 김서기가 하는 질문이다. 필자는 해당부문에서 새농촌건설에서 통일설계, 통일관리, 통일감독을 위하여 어느 기업소나 시공대에 위탁하는 것은 가이 마땅하다고 본다. 문제는 새농촌건설에 관한 모든 공사(집짓기, 기와씌우기, 길닦기, 가로등장치,울바자를 세우기 등)를 진행함에 있어서 어느 부문에서 자기들의 리익관계로 모 시공대를 정해놓을 것이 아니라 일을 공개적이고 평등한 경쟁(재료경쟁, 가격경쟁, 인건비경쟁)기제로 시공대를 선택한다면 진정한 농촌주인들의 감독과 협조하에서 농민들의 의견이나 불만이 없이 모든 일이 순리적으로 진척될것이라고 생각된다.   
116    안전검사로부터 본 미국과 중국의 관념차이 댓글:  조회:6850  추천:2  2013-08-27
안전검사로부터 본 미국과 중국의 관념차이 일전에 필자는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햔회사 조광훈총리가 안전검사를 화제로 한 이런 하소연을 들었다.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한회사는 미국독자기업으로 10여 년간이나 미국측의 6가지 종합고찰에서 880점 이상을 따내 미국서도 흔치 않는 로 평을 받고있다(미국독자기업이지만 회사는 100% 내국인이 운영함). 조광훈의 말이다. 미국측의 검사는 품질 외 안전, 환경보호, 로동법집행검사다. 안전은 불이 못나게 하는 예방(防)조치검사와 불이 나면 무조건 도망하라는 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재산손해는 보험으로 보상받고 사람이 살고 기계가 돌면 화재손실은 재생하면 된단다. 미국측고찰단의 검사는 전면적이고 매우 세심했다. 상기 세가지 검사에 2달간 체류하며 매일 2시간 이상의 작업을 했다. 그런데 중국은 어떤가? 한마디로 중국해당부문의 검사는 방후(放后)조치검사였다.물론 고는 하지만 대체로 가 검사내용이다. 례하면 불이나면 단 얼마라도 공장실내기둥이 타는 것을 연장하기 위하여 기둥에 방화도칠을 하라(기실은 도칠냄새에 질식할수 있는데), 불이 나면 저 문을 막으라, 저 간이 창고를 당장 허물라는 등등의 지시다. 검사는 대체상 겉에서 보이는것에 대한 검사고 검사시간도 20여분이면 족하다. 그리고 좀 거슬려하는 눈치면 생산을 정지하라는 등의 행정명령으로 정상적인 생산을 영향주고 불필요한 재투자로 미국측에서 접수하기 어려워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중국은 혁명적인 가치관의 표현이라면 미국은 예방과 이인위본(以人为本)의 가치관의표현이다. 조광훈의 말에서 필자는 비록 단적이나마 화재를 대처하는 미국과 중국의 관념차이를 비교할수 있었다.
115    다시 오는 "비판과 자아비판"을 마중하자 댓글:  조회:6750  추천:2  2013-08-20
올해에 당중앙에서는 >, , 반대 등 당의 작풍개진을 심화할 조치들을 잇따라 대고 있다. 이에 비춰 최근 중공중앙 정치국동지들은 군중로선을 견지할데 관한 당중앙의 력대 중요문헌을 학습하고 작풍건설강화, 본보기역할발휘를 둘러싸고 반성하고 분석하며 스스로 발언제강을 작성, 중앙군위에서까지 특정민주생활회를 소집하고 면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부분석하고 비판과 자기비판을 적극 전개하며 작풍건설을 제도적으로 강화할 조치를 대고있다는 등 민심을 흥분시키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간고분투하는 작풍, 군중과 밀접히 련계하는 작풍, 비판과 자기비판의 작풍은 당의 우량한 3대작풍이다. 습근평동지는 며 고 지적하였다. 이는 근간에 거의 들어보지 못하던 반가운 소식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을 는 제목을 달았다.  필자와 동배의 사람들에게는 이 그렇게 생소하지 않은 말이다.  지난세기 60년대 필자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규약과 중국공산당당장학습에서 비판과 자기비판이란 사업작풍을 배우고 비판과 자기비판을 자기를 개조하는 사상무기로 배웠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황당하나 여러가지 정치운동은 말고도 하는 때까지는 이 귀에 쟁쟁했다. 그때 우리 생산대에서 말이 없이 일을 잘하는 로동모범인 전순옥녀성마저 년말사원대회에서 며 울면서 어느 날 옥수수가을을 하고 퇴근하는 길에서 주은 통옥수수 한이삭을 집체에 바칠 대신 자기 집에 가져왔다며 자기를 비판을 하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들어보면 유치하긴 하나 그 시대에 아주 말단 사원마저 그만큼 을 했다는 말이고 실례다.  그런데 특히는 개혁개방후 의 무기가 점차 꼬리를 감추더니 지금은 , , , 들의 이나 독선으로 이어지고있다.  하급은 상급을 감히 비판하지 못하고 상급은 자기비판은 멀리하고 하급을 훈계하고 비평하기만 하는 것 같다. 이런 결과로 하급은 상급에 입발린 미사구려(美詞句丽)로 찬송가만 불러대며 만 하면서 손바닥만 비벼대기에 라는 신조어까지 나돈다. 비판과 자기비판에 대하여 모택동주석은 로 비판의 의의와 비판을 받는 대상을 요구했다면 습근평주석은 로 자기비판(자아정화, 자아완벽, 자아혁신, 자아제고)의 목적과 자세를 요구했다. 필자는 비판과 자기비판을 함에 있어서 모택동주석의 처방과 습근평주석의 처방을 잘 결합하면 각급 당정지도자들의 사업작풍에 새로운 모습(毛习)이 나타날 것임이 불보듯하다.     는 속담이 있다. 는 로 정언, 직언을 말한다. 정언, 직언은 인민군중들의 주인공적 권리의 행사로 정부나 지도자에 대한 바람, 의견, 건의와 비판이다. 습근평주석은 이번 당의 군중로선교양실천활동의 대상이 현, 처급이상 지도기관, 지도부, 지도간부라고 명백하게 밝혔다. 필자는 현, 처급이상 지도기관, 지도부, 지도간부들에게 을 대청소하는 비판과 자기비판의 민주생활회의에서 서로간 미사려구로 듣기 좋은 말을 말고 상대가 누구든지 감히 정언, 직언을 하는 참다운 민주생활회의로 당중앙에서 요구하고 백성들이 갈망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14    도문 쌍둥이 고층건물 국제친선빌딩으로 바꾸지 못할가? 댓글:  조회:8307  추천:5  2013-08-01
저 쌍둥이 고층건물을 국제친선빌딩으로 바꾸지 못할가? 이 3년간에 도문시민들의 말밥에 올랐던 한창 시공중인 도문시정부와 도문시당위쌍둥이청사 건축공정이 최근에 시공을 중지했다.  자금이 쫄리여서 중지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필자는 도문시당정지도자들이 습급평동지를 위수로한 과 중공중앙 판공청과 국무원 판공청에서 최근에 발표한 정신에 따라 과단히 선택한 명지한 결책이라 하겠다.  중공중앙과 국무원판공청의 통지는   실로 당중앙과 국무원에서 도문에 비춰 내린 지당하고 제때적인 시책인듯 하다.  도문시민들이 도문서 새로 짓는 당정기관고급공용건물에 불만이 있는것은 대개 이런 세가지 원인이다. 첫째; 새로 짓는 두개고급건물은 그 돈이 국가돈이든 지방재정돈이든 도문의 경제형편에서 거금을 투자해 시정부와 시당청사를 지을 형편이 못된다.   도문시정부청사는 몇 년전에 보수까지 한데서 여전히 멀쩡하고 시당위청사는 몇 년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주용기총리시대는 여러지방에서 정부청사를 팔아 지방경제건설을  돕는다는 신문소식이 빈번하였는데 지금은 시민살림살이나 지방경제가 변변치 못한 신세에 거금을 투자하여 정부와 시위에서 11층짜리고층청사를 짓는다니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 하필이면 왜 도문을 홍보하는 얼굴이고 도문의 노랑자위로 불리는 그 금터에 시정부와 시당위청사를 짓는가? 셋째: 새로 짓는 고층건물이 도문당정기관청사라는 것을 집터를 선정했을 때부터 시민들이 알고 떠들었는데 왜 건축현장에 세운 에 건설단위를 도문시공안국이라고 했는가? 그래 도문시민들이 도문시공안국을 새로 지은 것을 모른단 말인가? 만약 국가에서 공안국을 지으라고 내려보낸 돈이라고 해도 그 돈으로 꼭 정부나 시당위청사를 지어야만 하는가? 국가돈도 국민의 세금으로  모은 돈인데 말이다.   특히 새로 짓는 시정부와 시당위청사집터는 도문해관, 도문통상구, 전주청년들이 모금하여 세운 친선탑과 한마당을 이룬 곳으로 많은 시민들이 이 몇 년간에 도문서 를 주제로 을 크게 펼치니 도문해관 앞의 낡은 구조물(旧造物)을 빨리 청리하고 그 자리에 도문통상구광장이나 아니면 도문을 홍보하는 국제적쇼핑몰을 신축할것을 제의, 필자더러 시민들의 마음을 담은 글을 시지도부에 반영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여 필자는 몇 년전에 를 서면으로 작성하여 도문시당위서기와 시장한테 올렸더니 2008년4월20일에 시정부판공실에서 필자에게 감사를 표하며 도문해관청사앞 관련건설이 이미 도시건설 전망규획에 들었다고 답신하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시정부청사와 시당위청사를 짓는다니 시민들의 불만의 있을수밖에 없다.  필자는 중앙과 국무원의 통지정신에 비춰 시에서 저 쌍둥이고층건물을 시정부나 시당위청사로 짓지못함이 불보듯하며 그 쌍둥이 고층건물의 위치상으로 보아 그 건물을 시민들의 바람대로 호텔, 쑈핑, 력사, 문화, 관광, 등 시설이 구전한 종합적인 국제친선빌딩으로 돌리자는 건의다.  만약 그 금터에 규모화, 현대화한 국제친선빌딩이 선다면 국제도시 도문을 홍보하는데 유조하고 도문의 정치, 경제, 문화, 관광, 투자유치, 그리고 국제친선이벤트 등 모두에 유조할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113    감동인물에게 올리는 뒤늦은 글 댓글:  조회:7774  추천:4  2013-07-23
지난 7월 13일, 필자는 에서 는 제목의 길림성인대전임부주임리정문동지의 사적을 읽고 큰 감동을 받고 즉석에서 (내가 읽고, 듣고, 본 감동받은사실로 리정문에게 올리는 글을 쓰겠다.)고 작심했는데 지난 19일에 인터넷길림신문에서 윤수범의 를 읽고 리정문이 에 실린 그 이틑날인 14일에 애석하게도 타계한것을 알게 되였다. 실로 너무 비통하고 안타까운 비문이였다. 그래서 필자는 원래 이 글을 로부터 로 개명하였음을 밝힌다.  리정문은 원래 도문서 사업한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리정문의 그때 그일을 외운다.  아래에 필자는 내가 읽고 듣고 만났던 순으로 글을 계속한다. 내가 읽은 리정문 와 란 글에서 필자는 리정문동지야말로 우리 민족의 감동인물, 감동간부임을 더욱 느꼈다. 아래는 두편글에서 필자가 감동을 받은 몇 단락이다. 리정문주임은 촌사업시찰 때 먼저 생활이 제일 어려운 집 3가구를 알려달라고는 그들을 한집한집 찾아서 200원씩 건네면서 생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수 있기를 바란다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나중에야 촌지부서기를 찾아 마을의 정황을 알아봤다. 장춘에 돌아온후 우평이 그 600원을 결산해주려고 하니 그는 《내 개인의 명의로 드렸는데 그럼 안되지.》라면서 되려 우평이를 교육하였다.   한번은 리주임이 눈병때문에 치료로 혼자서 북경으로 떠났다. 그만한 위치에서 다른 간부들 같으면 앞뒤에서 수행인원들이 모시고 전용차나 비행기로 가련만 그는 침대표는 고사하고 좌석표도 없이 서서 가는 표를 겨우 사서 홀몸으로 렬차에 올랐다.   리주임은 성인대에 간후 아침운동을 위하여 50원짜리 눅거리 자전거를 샀다. 그는 아침전에는 그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하고 퇴근후는 그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일을 보고 그 자전거를 타고 출근도 하였다. 이 일이 행정관할 판공청부청장에게 발견되여서야 그의 전용차와 운전기사가 배치되였다.   성인대 상무위원회의 부주임으로 선거된 다음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리정문이 여러차례 이렇게 말했다.《나보다 덕재가 구비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소수민족〉이라는 덕을 봤을 뿐입니다.》   그의 딸 리해단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무슨 일이 그렇게도 많으신지 새벽에 제가 일어날 때마다 탁상등을 켜놓고 앉아서 뭘 쓰기도 하고 조용히 사색에 잠겨있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글을 다 써놓고 가끔 어린 저와 ‘해단아, 제목을 이렇게 달면 좋을가, 아니면 바꾸는것이 나을가, 네가 생각하기엔 어떠냐.’ 라고 물어보시기도 했습니다. 어린 제가 뭘 안다고... 》 부인 한금옥은 이렇게 말한다.  6남매중 맏이로 그는 관직이 어느 위치에 있든간에 자녀와 부모, 동생들을 위해 조직과 다른 사람들에게 단 한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남의 일에는 발벗고 나서는 그였지만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누구한테도 알리지 않았다. 일가친척들외 소식을 알고 부랴부랴 찾아온 문상객들까지 합해 20여명 정도였다. 그의 생일도 안해와 자식들끼리 조용히 한끼 식사로 끝마치는것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읽을수록 감동된 나머지 (그런 위치에서 그가 진짜 그렇게 했을가?)는 의혹까지 가질 정도였다. 이에 비춰 너무나 인상이 깊던 란 제목의 김봉관의 풍자만화가 내눈 앞에 서서히 떠올랐다. 내용인즉 남편이 국장이니 안해가 안하무인으로 온 동네서 우쭐대고 그의 아들, 딸 들은 물론 그 집 개까지 으르렁거리며 으스대는 만화다. 내가 들은 리정문 리정문의 처형딸 김향단의 말이다.   지난 80년대에 나는 리정문의 이런 을 구전(口傳)으로 듣고 한때 리정문을 본따 리정문시늉을 하기도 했다. 이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배움의 자세다.. 이미 례로한 리정문의 딸 리해단의 말이 아버지가 남긴 을 증명한다. 유태인의 우수성은 으로 불리는 유태민족이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부모따라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과 아버지의 과 련결된다고 한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며 유태인으로 첫 미국 국무장관인 기신거박사는 고 했다. 리정문의 아들(리무림)딸(리해단)의 오늘의 모습과 그들의 성장사가 그들의 을 썩 잘 설명한다. 내가 만난 리정문 《리주임은 성인대에서 자신을 간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을 낮췄습니다. 그는 언제나 찾아온 사람들게 여러 부문에 련결해주며 문제를 해결하도록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는 늘 자기는 인대임직원들의 뒤근심을 덜어주는 복무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그 누구에게 일이 생기면 언제나 자기 일처럼 달려가서 도와줬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더욱 존경하였으며 우러러 봤습니다.》 이는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 판공청 부주임, 래신래방국장을 지낸 정년퇴직간부 왕국의가 리정문을 회포하며 하는 말이다. 바로 필자가 리정문의 덕목의을 직접 수혜한 사람중의 하나다. 2001년 9월 하순에 필자는 출국을 했다가 돌아오니 해당부문으로부터 오기자가 연변자치주정부일본고찰방문수행기자로 출국수속을 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때 이번 고찰방문단의 다른 단원들은 이미 일본비자를 받은 뒤였다. 이에 필자는 관련부문의 특별취급으로 주에서 당일에 출국수속을 끝내고 이틑날에 장춘에가서 성외사판공실을 찾아 출국수속을 하려고니 국경절공휴가 당금이여서 정상공무출국수속을 접수하지 않았다. 이에 안달아 난 필자는 이리 저리 고려중 떠 오르는 분이 성인대 리정문비서장이였다. 그래서 사처로 수소문하여 리비서장과 겨우 전화만남으로 도움을 청했다.리비서장은 전화로 지금은 손님접대중이니 15분후에 다시 전화를 하란다. 하여 꼭 15분후에 전화를 했더니 그는 이미 성외사판공실의 아무개와 련계를 했으니 그를 찾아 가란다. 그래서 그분을 찾아 갔더니 그는 방금 리비서장한테서 전화가 왔더라며 그렇게도 열정것 도와주고는 또 다른 도움이 필요없는가고 물었다. 그 시각 필자는 리비서장이 얼마나 감사한지 일구난언으로 말할수 없었다. 모든 수속을 가급으로 끝낸 필자가  하고 시름을 놓는 한숨을 내 쉬는데  리비서장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일이 원만했는가, 도와드릴 일이 더는 없는가, 일본에 다녀온뒤 연변을 위해 좋은 글을 많이 써 달라고 부탁하는외 국경휴가를 잘 보내라는 다감한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그번 일은 필자의 인생에서 가장 깊고 가장 감동을 받은 마멸할 수 없는 일로 필자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만약 모든 당, 정간부들이 리정문처럼 인민의 공복이 된다면 우리의 당은 백성들이 따르는 당, 우리의 정부는 백성들이 시름을 놓는 정부로 될것이 의심치않다. 리정문은 명실공히 일생을 正文에 바쳤고 한생동안 正을 지킨 우리 민족의 감동인물이라 하겠다. 그래서 >(인테넷길림신문)를 쓴 저자는 리정문을    로 종필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된다. 리정문, 그는 우리민족간부의 훌륭한 감동인물이다. 필자는 고 리정문동지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112    조선족을 위한 '민족공정'에 동참 하고저 댓글:  조회:5842  추천:3  2013-07-22
근래에 저는 여러 친지와 동사자들이 나더러 자서전이 아니면 칼럼집을 출판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이에 나는 책을 낼만한 자격도, 도 없다며 번번히 외면하였다. 그렇게 지나오던 중 저는 에서 중화인민공화국창건 60주년 특별기획으로 계렬보도한《60주년에 만난 60인》을 민족출판사에서 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의 출판발행기념식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전임주임이 한 발언을 신문에서 읽었다. 리덕수동지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60주년에 만난 60인》은 건국후 사회주의건설과 개혁개방에서 조선족을 위해 기여를 한분들이다.《길림신문》은 큰 일을 해냈고 좋은 일을 해냈다. 책의 출간은 민족형상을 잘 세우는 한차례 이다. 우리는 이들을 선전하고 선전하고 또 선전해야 한다. 선전하지 않고 사회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것이라 해도 가치가 없다. 가치는 부단히 사회에 용납되고 인정받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저는 《60주년에 만난 60인》의 출판이 조선족을 알리는 으로서 조선족의 형상을 수립하는 활동이고 창의이라는 리덕수주임의 이한 발언에서 깨우침을 받고 이 에 적극 참여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근 기자사업 30년간 인터뷰한 300여명의 인물들중에서 100명을 선정하였는데 어떤 주인공들을 빼자니 너무 아쉬워서 53(군체를 포함)명을 더 보충하였다. 그리고도 30년간에 쓴 칼럼문집도 함께 출판하기로 하였다. 2011년 3월 나는 이 두책의 원고를 가지고 연변인민출판사를 찾아 가니 리성권사장이 라며 한꺼번에 두책을 내지 말고 한해에 한권씩 출판한다면 출판사에서 출자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나는 나의 두책은 조선족이라는 한 으로조선족의 양과 음을 반영하는 자매편으로 함께 출판하겠다고 하였다. 하여 출판비용이 2만 7천원에 달하는 는 출판사의 출판으로 신화서점발행을 하고 출판비용이 2만 8천여원 되는 은 나의 출자로 출판하여 개인 발행을 하게 되였다. 이것이 내가 두 책을 함께 출판하게 된 시도와 경로다. 두 책의 주인공들은 우리나라의 개혁개방의 시대와 함께 숨을 쉰 사람들로 지금 다시 읽어도 사회의 맛, 시대의 맛, 집단과 사회의 주인공맛이 풍겼다. 더욱 흥분된것은 책의 주인공들중 타계한 6명을 제외한외 지금도 거의 모두가 사회의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이였다. 나는 이에 부인도 동원하여 원고타자를 시켯는데 타자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 부부는 우리가 주변에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들이 너무나 많다는것을 즐감했고 우리도 책의 주인공들처럼 가치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압력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훌륭한 분들을 많이 갖고 있는것으로 고 몇번이나 외웠다. 나는 기자업에 종사하면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온 사회에 홍보하고저 적극 노력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바탕이 슴배여 있다.  나는 모주석의 지난 6, 70년대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며 모주석의 이란 저서의 를 해석한 주은래총리의 는 서평, 그리고 구전되는 는 모택동주석의 말씀에서 우리 조선족은 위대한 민족이고 선진적인 민족이며 영예로운 민족임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우리는 조선민족의 이런 영예를 지켜나가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되였다. 한편 모든 사물이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장단점이 있듯이 우리민족에게도 장단점이 있는데 우리 민족의 장점을 확보하려면 우리 민족의 단점과 렬근성과 극복하고 폭로하고 비판하며 반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래서 이 우리 민족의 양면이라면 는 우리 민족의 단점과 렬근성을 폭로한 음면이라고 나는 여긴다. 말하자면 인터부문집에 있는 라는 제목의 국가민족사무위워회 전임 주임 문정일, 1990년 제 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에 100만원을 기부한 중국의 록음악황제 최건, 80년대의 산뢰봉-고만길, 조선민족의 저명한 시인 윤동주누님, 1985년에 전국 전투영웅모범회보단을 접대한 도문시홍광향 달라자촌 조선족농민들의 군상, 연변의 독서왕 송해숙, 민족정신을 이어가는 북경의 조선조로인들 등 수많은 작품과 칼럼문집에 있는 , , , , , , , , , ,  등등의 수두룩한 비판, 건의, 바람의 문장들이 우리 민족의 오늘의 장, 단점을 설명해 준다. 나는 이한 에 참여하여 우리 민족의 양과 음을 어떻게 사회에 알리고 후대에 전해져 우리의 후세들에게 우리 민족이 지킬 것은 무엇이고 버릴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저 나의 두책을 주 도서관, 시도서관, 시로간부국, 시교육국산하 모든 조선족학교에 기증하였다. 현실을 정시해보면 배금주의, 조선족이동, 다문화가정, 결손가정, 민족동질 등 여러모로 우리 민족의 번영과 발전은 고험과 세레를 받고있다. 이한 고험과 세례를 어떻게 극복하고 지혜롭게 이겨 나가느냐는 우리 모두의 공동한 몫이다. 우리 민족은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고 근면하고 용감하며 창조적인 민족이다. 이런 우수 민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을 어떻게 접목시켜 우리 민족이 중화민족의 대가정속에서 우수민족으로 부상되는가의 관건은 선배들의 본보기다운 행동과 그에 따르는 휴대양성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민족이 갖고있는 정면을 사회에 알리고 선전하는 것이 이라면 우리 민족의 음면을 폭로하고 제때에 반성하는 것도 우리 민족을 위한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으로 우리의 후대들에게 를 알려주는 것을 하나의 급선무로 선배들에게서 이어 받은 우리 민족의 보귀한 계주봉을 정확히, 제때에, 재치있게 후대들게 넘기자는 바람이다. (본 문장은 지난 7월 12일 도문시새일대관심위원회에서 주최한 에서 한 필자의 서면발언임- 편자)
111    동포라고 하면서 왜? 댓글:  조회:10749  추천:11  2013-07-10
사전에 따르면 이라고 했다. 1996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가니 한국의 평민들이나 국가공무원들이 가 왔다면서 그렇게도 친절하게 접대했다. 그후 계속 다니다 보니 전철표도 국내인 로인들과 똑 같이 무료로 제공했다. 그런데 지난 5월에 근 한달간 한국에서 느낀 것이 는 한마디다. 그제 날 전철표를 국내인의 로인들과 동등하게 대해주던 것이 지금은 한국에 등록한 `까지 있는 로인(67)인데도 고 거부당했다.   사람들도 바뀌웠다. 이왕에는 한국서도 중국에서도 하며 돌아치던 사장들이 전화약속을 해놓고는 다시 소식이 감감한 로 변했다. (나라도 변하고 국민들도 변했구나!) (변하는 것은 옳은데 변화는 좋은쪽으로 해야 하는데…)는  생각으로 리해가 안갔다.  일전에 33살부터 부터 지금까지 한국나들이를 하며 열심히 자영업을 하는 백운산사장(59세)이 필자와 하는 말이다. 이런 화두로 시작한 백사장의 말이 꼭 내 생각과 같았다. ㅡ 한국에서 우리를 동포라고 하면서도 대하는 것을 보면 정말 섭섭합니다. 서울 목동출입국사무소에 가보십시요. 1층은 국내인과 기타 외국인을 대상하고 2, 3층은 중국인을 대상하는데 거기서 제공하는 1회용컴을 보면 1층의 종이컵은 제법 종이컵이데 중국인을 대상하는 2, 3층의 종이컵은 종이컵이 아니라 랍니다. 중국사람들을 이렇게 차별있게 대하니 접대가 로 생각히며 기분이 상합데다. ㅡ 한번은 출입국사무소에 가니 안내원들이 너무나 대충대충 알려주기에며 반발했더니 고 하더란다. 너무 어처구니 없어 말이 안 나가더라.하필이면, 좋은것과 비하고 선진적인것과 비해야지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비하고 자기네 보다 못한 곳과 비하는가? ㅡ 한국의 려행사에 자주 다니다 보면 일본사람은 앉으라며 자리를 권하는데 중국사람에게는 자리도 안 권합데다… 이렇게 련줄포를 쏘던 백사장은 지금 한국에서 많은 조선족들이 돈 때문에 지하실이나 반지하실에서 사는데 한국의 지하, 반지하실은 70년대 전쟁에 대처하기 위힌 방공호로서 아주 습하다며 재한조선족들의 건강을 우려했다. 백사장의 하소연을 듣고 나니 1999년에 연변제비필름유한회사 한국측대표 리종호사장이 하던 말이 생각된다. 그때 필자는 (어디를 가나 자기 나라가 잘 살아야지 자기민족이 잘 살아서는 인정을 못받는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때만 해도 내가 하던 그 사장이 를 받았으니 말이다.. 지금 한국에 재한 중국동포(조선족)가 50만명에 달해 한국 국민의 1%, 재한 외국인의 3분의 1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다. 어느 한국 사장의 말이다.  그런데 왜 중국동포라고 하면서 를 하는지 정말 섭섭하다. 한국의 신현준교수가 쓴 책 의 한 단락이다. > 다행이도 지난 6월에 취임한 재외동포재단신임리사장 조규형씨의 말에 기대를 걸어본다.  
110    나는 <<띠띠지죠>>다 댓글:  조회:6816  추천:5  2013-07-09
나는 술상에서  이런 말로 우스개를  잘한다. >  ((斤斤計較)(滴滴 計較) 여기에서 직평은 직위나 직함을 말하고 수평은  능력을 말하고 주평은  주량을 말하한다. 그리고 는 근을 단위로 옴니암니 따지는 소인을 말하고 는 斤이 아닌 방울((滴)로 따지는 을 말한다.  나는 확실히 방울로 따지며 술을 아끼는 좁쌀이며 짠돌이다. 술을 아끼는 정도는 술병에서 마지막 술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술을 붓고 술잔을 털면서 마실 정도다.  술을 쌀물이니깐 쌀알마냥 술방울을 아낀다.  만일 술상에서 혹간 술잔이 번져지면 날랜솜씨로 밥상가장자리에 술잔을 대고 수저로 쏟아진 술을 싹싹모아서 쏟아진 술의 거의 80%를 구해낸다. 남이야 웃든 말든 관계치않는다. 지난 70년대에 수리공정에서 일하던 때 일이다.  한번은 추운 겨울저녁에 술이 너무 차다고 장물가마에 넣고 찬숨을 죽인다는 것이 그만 술병마개를 빼지 않은데서 한병술이  뜨거운 장물가마 안에서  터지고 말았다.   그때만도 공소사가 멀다보니 술상을 차려놓고 다시 술을 사려 간다는 것이 말이 아니였다. 하여 내가 너무나도 맹낭해서 머리를 극작거리니 년세가 지긋한 허성철이 라며 국가마에 밥소래를 띄워놓고 쇠가마두껑을 번져져 덮어놓고 그 위에 눈이며 얼음을 잔뜩 쌓아 놓고는 센불을 때란다. 그러면 술이 물보다 가볍기 때문에 먼저 증발하는 김이 찬 가마뚜껑에 부딪쳐 술방울로 되여 솥뚜껑쪽지를 따라 소래에 떨어진단다. 이에 나는 희망을 품고 시키는 대로 센불을 때서 받아낸 술이 얼마가 안되기는 물론 맛을보니 술인지 물인지 알리지 않았다. 나는 한때 카라오케에 가서도 아가씨들이 매장고를 올리기 위하여 마구 깡통맥주통를 마구대고 터뜨리는 것을 못하게 하였다. 돈이 아까워서보다도 아가씨들이 먹지않고 버리는 맥주가 아까워서 말이다. 1999년 12월에 한국에 갔을때다.  한국분들이 우리를 소양강땜관광관을 시키고는 화려한 술집으로 안내하였다. 이미 아가씨에 양주를 차려놓고  대기하었다.  그런데 술상에서 볼라니 아가씨들(3명)이 얼음을 탄 양주를 마시는척하면서 늘 우리의 눈을 피해 쏟아버리는 것이였다. 이에 나는 라며 우격다짐으로 주권(酒权)을 행사했다. 나는 양주를 마시는 법을 모르는척하며 술에 얼음이나 광천수를 못 타게 하고(촌놈이라고 웃건 말건)는 를 거론하며 술을 한분씩, 그것도 꼭 마이게끔 다정다감하게 권하며 한국분 남녀를 몽땅(5명) 쓸어 눕혔다. 그래서 는 평을 들었다. 그때도 술아까워서였지 술값이 아까워서가 아니였다. 대방에서 우리를 초대하니깐. 나는 식당에서 남은 술을 늘 를 한다. 술병을 들고 나오기가 불편하거나 면구하면 빈 광천수병에다 담으면 되니깐. 기실 술값도 아깝다.  남방에 가보면 채값보다도 술값이 더 비쌌다.. 1975년에 대채참관을 갔을 때다. 태원시의 어느식당에서 그때까지 명주라고 들어만 본 을 병으로 사자니 값이 아름차서 못사고 요행 사정을 하여 한잔에 70전씩 석 잔을 사서 마시던 일이 잊어지지 않는다. 지난번 조카의 결혼식후 사돈인사로 차린 술상이 채값은 350원인데 술값이 750원(5병)이였다. 비록 술값이 비쌌지만 누구도 술을 버리지 않았기에 아까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술상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술을 못한다는 사람에게 술을 권하지 않는다. 좋은 음식은 좋게 마셔야 한다는데서. 단 그들에게 요구라면 술을 못(안) 마이되 절대 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어떤 사람은 남몰래 술을 버리고는 큰 재간처럼 자랑을 해댄다. 기실은 돈을 주고 산 음식을 버렸으니 책벌을 받아야 하는데 말이다. 만약 그 술이 현금이라면 당신이 버리겠는가?    술은 기분으로 마시고 멋으로 마신다. 술상에서 못한다는 사람들게 억지로 술을 권하면 권하는 사람도, 사절하는 사람도 모두 불편하고 술상의 기분이 잡친다. 술을 못하는 분들은 처음부터 정당하게 성명하고 광천수나 음료로 찾거나 그저 못한다고 하지 말고 웃으면서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해도 좋다. 술은 정으로 마시는 점잖고 값진 음식이다. 그런 만큼 술을 절대 버리지 말아야한다.  특히 방울을 단위로 따지는 내 앞에서는 제발 술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술을 버리는 것을 보기만하면 눈에 가시가 돋는 느낌이  드니깐 말이다.  오기활  
109    경종 그리고 거울 댓글:  조회:8740  추천:5  2013-07-01
지난 6월 20일 도문시총공회 C부장이 하던 말이다. 이번 참관활동이 간부들에게 울려준 경종으로, 스스로 자기를 비춰준 거울로 되였다니 조직자들의 예기한 목적에 도달하였다고 필자는 믿는다. 도문시 당,정기관간부들의 간수소 참관에 비춰 언젠가 안휘성에서 당정간부들의 생동한로 수뢰죄로 유기징역 15년에 언도된 원 안휘성림업청청장 당희만을 으로 강당에 는 기사가 떠올랐다. 정면교육도 교육이요 반면교육도 교육이니 말이다. 최근 개최된 에서 습근평총서기는 >고 제시하였다. 필자는 도문시에서 기관간부들을 조직해 간수소를 참관하게 한 활동이 바로 우리 당의 성질과 취지에 위배되는 을 대청소를 하기 위한 활동내용의 하나로서 참관자들로 하여금 하는 의 좋은 활동이라 생각된다. C부장이 말하는 이 바로 이를 답한다. 필자는 당중앙에서 현 처급이상 지도기관, 지도부, 지도간부를 중점대상으로 한 대청소활동에서 모든 현 처급이상 간부들이 습근평총서기가 진맥한 이 임을 가슴 깊이 명기하고 의 마당에서 저마다 을 기대해 본다.
108    "기자가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라구?" 댓글:  조회:9543  추천:6  2013-06-24
연변인민출판사 리성권사장이 필자를 라며 필자가 30년간 발표한 칼럼집(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을 무료로 출판하여 지난해 12월부터 신화서점에서 발행하기 시작한 뒤를 이어 지난 6월 18일 동북아예술연구원에서(원장 연변대학예술학원 남희철교수) 이 책의 출판기념좌담회까지 마련한데서 필자는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그런데 18일의 출판기념좌담회소식이 인터넷신문들에 실리자 이런 댓글이 올랐다. ㅡ 참 별 회괴한 제목을 다 봤다. 뭘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라구? 기자가 어떻게 사회의 병을 진맥하냐? 기자는 가치중립의 차원에서 평의하게 국민이 알 권리를 취재하는 것인데… ㅡ 의사는 진맥만이 아니고 병을 고쳐야 하는데... 의 저자인 필자는 독자들이 출판기념관련기사를 읽어 준 것에 감사하고 또 이런저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 역시 감사하다. 독자들의 이런 질의에 필자가 이 글로 필답한다. 사회가 발전하려면 고. 즉 기자가 찾아내는 문제를 정부가 해결하며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론리로 필자는 기자를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로, 정부는 사회의 문제를 치료하는 라 한다. 의학에는 생리학과 병리학, 진단학과 치료학이 따로 있다. 또 의사도 진맥을 잘하는 의사와 치료를 잘하는 의사가 다르다. 고로 기자는 진단을, 정부는 그 진단에 따라 치료하는 라는 말이다. 기자의 활동무대와 활동능력은 전 사회를 대상하여 존재하는 문제를 발견, 폭로, 비평하는 정도이다. 기자의 폭로와 비평을 제때에 받아 드리냐 외면하냐, 기자가 폭로한 존재한 문제를 제때에 개정(치료)하느냐 안 하느냐는 정부의 몫이고 정부의 힘에 달렸다. 두 가지 실례로 이를 설명한다. 몇 년전 도문시는 도문도심에 있는 백탑(쏘련홍군기념탑, 동북해방기념탑이라고도 함)을 옮기기로 하고 옮길 자리까지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즉시 력사유물은 그 자리에 보전되여야 한다는 등 내용으로 2006년 11월 28 일 길림신문 에 톱기사로 를 발표하고 그 신문을 도문시 시장과 당위서기에게 직접 보냈다. 그 후부터 도문백탑천이 문제가 즘즘했는데 2년 전에 또 백탑천이문제가 화제로 거론되였다. 이에 필자는 도문시건설국허국장을 찾아가서 사실을 확인하니 고 말했다.  이에 필자는 력사유물이 갖는 력사적인 의의와 현실적가치를 설명하면서 고 반문하니 하며 건설국국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후에 도문시는 백탑을 옮길 대신 백탑에 새옷도 입히고 올해에 백탑주변을 록화단장까지 하였다. 다음은 지난 6월 11일에 필자는 부분적 시민들의 원성에 따라 도문 두만강공원유보도에 있는 여러 과 기타 도문시제2소학교 주변의 꼴불견들을 모아 는 기사를 사진까지 배합하여 12일에 인터넷길림신문에 올렸다. 이 기사는 지난주 독자들이 많이 본 뉴수로 사회적인 반향이 비교적 컸다. 그후 10일 후인 지난 22일에 필자는 다시 다니며 보니 해당부문에서 즉시 조치를 대여 두만강유보도의 을 몽땅 메워 버린데서 시민들이 며 며 기뻐했다. 근 30년간 기자로 지낸 필자에게는 이런 생동한 실례가 너무나 많다. 기자의 힘은 제때에 문제를 발견하는 여론의 강약에 있고 정부의 힘은 그 여론을 제때에 수용하여 개정하는데 있다. 그래서 그리고 기자의 진맥에 따라 정부가 그 병을 고쳤다면 는 데서 이기도 하다. 기자는 사회의 제1목격자, 공익과 민의를 뒤받침한 백성의 고발자, 당과 정부의 뜻과 기원을 서로 전달해주는 다. 기자는 사실에 충실하고 높은 사회적책임감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병을 찾아내고 불의와 도전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기자는 오늘에 살고 사회의 비리를 비판하기에 존재한다. 신문은 백성의 과 이며 지도자의 다.  입에 들어오는 것은 食(식)이요 입으로 나가는 것은 說(설)이다. 백성의 은 민식(民食), 민설(民說), 민생(民生)을 말한다. 질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재앙은 입안의 혀로 나간다. 입(口)에 가시(木)가 들면 곤(困)난하다. 살 활(活)을 파자(破字)하면 물(氵)과 혀(舌)로 된다. 그러니까 생명체는 혀가 젖어야 산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 말하는 필자는 백성들의 에 든 를 제때에 뽑고 마르는 에 생명수와 활력수를 급여하면서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혈관 속에 잉크가 흐르는 로 되고저 한다.  때에 맞게 지난 출판기념회에서 한정일부사장(길림신문)이 는 말에 올해 67세인 필자는 라 40대의 정력을 찾은 듯한 기분에 젖어 있다.  
107    어린아이 부모들에게 보내는 글! 댓글:  조회:8129  추천:1  2013-05-24
언론인으로 사회에 대한 책임감에서 이 글을 쓴다. 기실 집안에서 발생한 끔찍하고 불미스러운 일을 묵묵부답하며 세월을 으로 흘러 보내야 할 것인데 말이다. 지난 4월 말 필자는 한국에서 왕청 둘째누님의 큰손녀가 7층 아빠트에서 투신자살을 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접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15살짜리 애가 투신자살을 했다니, 그것도 는 유서를 남기고도 여러 친구와 사촌언니에게 핸드폰으로 는 메시지를 보내고 투신자살을 했다니 말이다. 당금 전화로 조카한테 딸애의 자살원인을 물었더니 친부모들도 딸애의 자살원인을 모르겠단다. 조카에 따르면 딸애가 죽기 전날 학교에서 돌아와서 오늘 선생님한테 꾸지람을 들었다며 연길로 전학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는 별일 없었고 이틑 날에 제시간에 학교에 갔는데 무슨 생각에서 학교에 안가고 근처에 있는 모 학원에 갔다가 투신자살을 했단다. 조카는 딸애가 이왕에 선생님한테서 큰 을 먹었어도 별 일이 없었다며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일이란다. 필자는 조카의 말을 듣고 손녀의 자살원인을 여러모로 분석하던중 서울서 50대 외조카를 만나 왕청일을 말하며 자살원인을 곁들었다. 이 조카는 지난 80년대에 북경사범대학생물학과를 졸업했고 또 한동안 중의공부를 하다가 지금은 서울서 건강식품관련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둘이서 엄모의 자살원인을 화제로 하자 조카는 첫 말로 그가 병으로 서약을 많이 먹지 않았는가, 아니면 평상시에 매식을 많이 하는가고 물었다. 이에 앓은 적은 없고 어려서부터 매식에 매달렸다고 하니 조카가 단도직입적으로 자살원인이 매식에 있다고 했다. 조카에 따르면 지금 식품첨가제(조미료)가 600여종 되는데 문제는 많은 조미료에 인체에 해를 주는 유해성분이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부덕한 식품생산업체에서 사람들(특히 어린이들)의 에만 신경을 도사리고 인체에 해를 주는 유해성을 멀리 하니 말이다. 자료에 따르면 우리가 먹는 라면에 28가지나 되는 조미료가 들어 있단다. 조카는 한국의 명배우 최진실네 오누이의 자살을 실례로 설명을 가했다.  식품속에 함유된 미량유해물질들이 오랜시간을 통하여 인체내에 적치되면 나중에 생명체의 심신을 해치는 병인으로 된다. 례하면 뜨거운 물그릇에 산 물고기를 넣으면 물고기가 직감적으로 물이 뜨겁기 때문에 펄떡 뛰여 나오기때문에 살게 된다. 그러나 미미하게 따스한 물그릇에 산 물고기를 넣으면 물고기가 뛰여 나오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천천히 죽어버린다. 그러니까 엄모가 10여년간 매식한 식품속에 있는 유해성분이 그의 자살원인으로 되였다는 말이 된다. 자료에 따르면 우울증환자는 죽고 싶어하고 공포증환자는 죽을 가봐 겁나한단다 조카의 해석에 비록 깊이는 아니라도 의학을 배운 필자는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즉시 가까운 친척들게 전화로 경종을 울려줬다. 그리고 며칠 후 필자가 한국대통령의 어의를 지낸 한성호박사(86세)를 만나 그의 장수를 곁들었더니 며 건강은 마음가짐이라며 약해(药害)를 설명했다. 일전에 필자는 왕청조카내외를 직접 만나 딸애의 자살원인이 이라고 했더니 중의(中医)인 조카도 공감을 했다. 조카네 내외는 자식을 욕을 안하고 자식이 먹겠다는 것을 다 사주는 것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했다고 실토했다. 딸애가 부모곁을 떠난 그날 아침에도 엄마가 이미 딸에게 소비돈(10원)을 줬는데 아버지가 또 주니(20원) 딸애는 라며 좋아하면서 집을 나섰단다.  필자는 확실한 의학적인 검증이 없어 손녀의 자살원인이 100%로 에 있다고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지금 많은 식품이나 가축사료(사람들이 첨가제를 넣은 사료를 먹인 고기, 우유, 가금알을 먹으니깐)에 우리들의 생명체를 해치는 유해물질이 많게 적게 함유되여 있다는 것,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게 매일소비돈으로 몇원씩 주고 있다는 것만은 확신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 >으로 되지 않을가 우려된다. 최근 신화사는 소비자의 96%가 는 조사보고와 중국의 화확농약용량이 세계 평균용량의 2.5ㅡ5배라는 무서운 조사보고를 보도했다. 몸서리를 치는 , , …꼬리를 이어대는 로 대체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먹어야 할가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지금 자국 분유를 믿지 못해 해외에서 사들이는 수입산 우유가 중국분유시장의 70%이상을 점유한다니 말이다. 이 밖에 필자는 는 서란시 문인성(78), 주영숙(75)부부의 글을 읽고 젊은 부모들에게 귀여운 자식에게 , 로 자식들이 을 대처하는 능력이나 면역력을 키워줬으면 한다. 아무튼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106    한국기업 왜 조선족 채용 '벅차다'고 할가? 댓글:  조회:9096  추천:1  2013-05-02
    한국사장들이 왜 중국교포를 채용하기 벅차다는가를 알아 본다. 지난 4월 30일 기자는 한국 강원도 강릉시주문진읍에서 마젤란, 헤르메스펜션(가정호텔)을 운영하는 구철서사장을 만나 한국업주들이 왜서 재한 중국조선족들을 채용(고용)하기 벅차다는 원인을 알아보았다. 구철서(60)사장은 20대에 서울, 강릉 등 도시 류통업계에서 소장, 사장을 지내며 예지한 눈길과 발 빠름으로 곁인들의 눈길을 모은 능력자였다. 몇년 전에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하여 한국에 관광객이 30% 줄고 는 한숨 소리가 거세찰 때에도 구철서사장은 자기만의 노하우로 불황을 모른 자영업자다. 이하는 재한 중국조선족에 대한 그의 일가견이다. ㅡ 지금 재한 중국교포들이 정신적이나 물질적으로 크게 바뀌여졌다. 몇 년간의 알찬 노력으로 대부분 조선족교포들의 경제생활수준이 비교적 넉넉하다. 심지어 일부 교포들의 생활수준이 한국 소형업체사장들보다 높다. 몇 년전까지만도 재한 조선족교포들이 한국인들한테서 당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찬밥 더운밥을 가리지 않고 그만큼 순수했다. 그런데 지금은 교포들에 대한 법정보증도 많아 져 교포들은 억울함에 굴하지 않고 법을 찾아 호소하며 합법적 권리를 찾으려고 하기에 한국인들과의 인간관계가 퍼그나 팽팽해 졌다. 그래서 한국사장들이 재한조선족교포를 채용하기가 벅차다고 말한다.    지금은 많은 교포들이 한국에 오다 보니 그 중에 얼마는 안된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안 좋은 사람들로 하여 조선족교포들의 의미지가 전보다 낮아졌다. 그래서 나도 한국생활체험이 없거나 적은 순수한 조선족교포를 채용하려 한다. 한국사람들은 중국교포들을 채용하는 리유는 얼마라도 덜 주고 교포들이 자기에게 져 주기를 바라는것인데 지금의 교포들이 시간 지킴이나 인적, 물적으로 많이 린색해 진데다가 안 져주고 덜 주면 고발하니 그들을 채용하기가 시끄럽고 귀찮아 한다. 오히려 한국사람들을 채용하면 일한만큼 주고 주는 만큼 일하니까 서로간 분쟁이 없기에 한국사람을 채용한단다. 총적으로 한국인들은 중국교포들이 덜 받고 더 잘해주기를 바라는데 지금은 서로간 덕을 보려고 하지만 서로간 덕을 볼수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생활하기가 외롭고 언어가 안통하여 일자리를 찾기 힘들기에 한국사람들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려는 제3국(동남아사람)사람들을 채용한다. 그들은 잘 져 주면서도 일을 잘하고 또 그들에게 필요이상의 요구를 제출해도 잘 들어주니깐 말이다. 이 밖에 구칠서사장은 소개를 통해 착한 중국교포를 채용하려고 해도 교포들이 한정된 시간내에 돈을 많이 벌려는 욕심에서 오려고 안하는것이 안타깝단다. 자기는 주숙을 제공하고 하루 일이(방청소나 빨래 일) 기껐해야 몇 시간 (어떤 날에는 일이 없음)밖에 안되지만 130만씩 지불하는데도 말이다. 구사장은 자기집에서 일하면 3년간에 4000만은 쉽게 번단다. 구사장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재한 조선조들의 유권의식(维权意識)이 높아졌다고 할가, 아니면 시간의 흐름으로 지금 한국인과 재한 조선족간의 거리가 줄어 들었다고 할가, 또 아니면…?
105    만남이란? 댓글:  조회:7483  추천:1  2013-04-29
  , , ,         요즘 우리 가정의 화제는 만남, 사랑, 행복이다.   그도 그럴것이 아들의 대학입학, 일본류학으로 근 20년만에 처음 부모자식이 4개월이나 함께 생활을 하니깐 말이다. 게다가 0살짜리 손녀의 울음, 웃음소리에 며느리의 흥타령에서 고부간에 따뜻한 심장과 행복한 눈동자를  마주치며 말이다.    는  아들의 말에 니 아들은 이번에 부모님들게  바른 말을 너무 했다며 자보했고 며느리는 라며 을 자보했다.    아들며느리의 반성을 담은 응석의 말이라 하겠다.    이번 4개월간의 만남은 사랑과 행복을 주제로 한 로  마무리를 지었다.   만남음 정말 소중한것이다.   한국 인천시동암동 김해균네는 친족간의(일곱 가족에 21명) 정을 위한 를 설립하고 10 년째 활용하고있다.    핵가족이 기본인 현실에서 대체상 가족은 사촌이내로, 친족은 8촌이내로 한다. 종래의 가족은 부모, 형제에 대한 효성과 사랑이고 종래의 친족간은 서로간의 래왕, 보탬이였다.    가족애, 친족정, 친구우정, 이성애정, 그리고 이웃정은 만남으로 이뤄지고 만남에서 두터워진다.    해균씨(비서장)는 살다 보면 뜻밖의 사별이 닥칠수 있고 새사람과의 만남이 계속되는 실정에서 정이 오가기에 는 것이 이들 를 세운 공식(共識)이란다.    이들의 은 매인당 월3만원(한화, 비서장이 통일 관리함), 만남은 3개월에 한번씩, 만남의 장소는 순회적으로 한집씩 당번, 당번집에서 음식을 차린외 에서 10만원을 지출해준다.     요즘처럼 메마르고 건조한 삶속에서 육체적피로와 정신적피로로 서로간 얼굴을 보기가 힘들 때 친족간의 만남이 참으로 귀한것이다. 인격적으로 삭막하다고 말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하고 리해함으로써 정이 넘치는 공동체가 이뤄진다.      이렇게 말하는 해균씨는 자기네 만남장소는 동남아에까지(관광)넓어질것이란다.   만남은 한뿌리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함께 나누다 보면 서로가 한뿌리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만남은 앉아서 기다리면 찾아오는것이 아니라 열심히 찾아나선 사람에게 미소와 함께 다가온다.    공자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은 인의지례 (仁義智禮)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仁)은 사람이 둘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는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고 혼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조선족연구학회 리강철회장은 자기의 체험으로 만남의 소중성을 말한다.   ㅡ인간은 만남을 통하여 새로운 인생이 열려지고 만남을 통하여 행복이 주어진다. 태여나서 부모, 형제들과의 만남, 성장하면서 친척들이나 친구들과의 만남, 사회에 진출하여 귀인들과의 만남, 이런 만남들이 바로 나의 행복과 성공의 원천이였다.  제가 아무리 총명하고 잘났다고 해도 만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진짜 행복의 향수를 느낄 수 없고 진짜 성공을 할 수 없다. 또한 제가 잘났다고 해서 유명한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자기에게 리득이 되는 사람만 만난다면 그는 불쌍한 사람이며 인간존경을 받을 수 없다. 가난한 사람이나 불우한 사람 자기가 인생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해야만 자기도 똑 같은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어디에 가서나 고 소개한다. 그러니 북경서 대학의 식당복무원들과도 친근해졌고 일본서 청소부들과 고락을 함께했으며 농사하는 할머니들과도 재미있게 지냈다. 한편 일본의 정치가, 학자들과도 똑 같은 마음으로 교류를 한다.   나는 일본의 정치가, 국회의원, 총리급인물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상상도 못했고 일본서 중국, 조선, 한국, 몽골, 러시아, 유럽, 미국의 정치가, 외교관, 학자들과 만날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했다. 그런데 빈번한 만남과 함께 늘  자세를 낯추는 과정에서 세계 30여개 나라에 친구가 있게 되고 세계(지구촌)시민을 만들어가는 네트워크 활동도 빈번하다. ㅡ 만남은 나의 인생을 즐겁게하고 나의 인생가치를 보람있게 하였다. 그러니까  만남이 내인생을 개변하고 만남이 내인생을 행복하게 한 것이다.    만남은 약이다.   웃음으로 반겨주는 아이들은 피로회복제, 챙겨주고 아껴주는 형제애는 다종 비타민, 늘 걱정해주고 앞길을 인도하는 부모님은 만병통치약, 참다운 우정은 울타리를 튼튼히 하는 안정환(定心丸)이다.   만남이 가정을 행복하게 하고 만남이 사회를 조화롭게 만들고 만남이 사회를 살맛 나는 인정미로 넘치게 한다.    우리 삶의 터전에 더 많은 만남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 맺기를 기대해 본다.  
104    숨쉬는 신문기자는 왜 신문에 못낼가? 댓글:  조회:9284  추천:11  2013-04-11
 지난 청명날(4일)부터 인터넷길림신문은 는 기사를 계속 실어 길림신문 연변지사장 고 박금룡동지를 추모하고 있다. 필자는 길림신문편집부가 참 잘한다고 두손들어 찬성한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시각( 4월 10일)까지 인터넷길림신문의 를 보면 가 오늘과 이번주의 제1위로, 이번 달의 제3위로 통계되였고 고박금룡기자를 추모하는 독자들의 댓글도 49건이나 된다. 댓글에는 박금룡의 아들(박진청)이 올린 감동의 글도 있다. 이는 한 네티즌의 글이다. 실로 (길림신문사 추도사) 그런데 필자가 리해되지 않는것은 지금까지 신문에서 살아 있는 기자들의 생동하고 감동적인 사적을 보지 못한 점이다. 아직 우리나라에 신문법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무튼 살아 있는 기자는 선전하지 못한다는 법이나 규정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가지 실례다.  1988년 2월 16일 연변일보 1면에 이란 제목으로 도문시인민정부에서 연변일보주재기자를 기공 표창(記功表彰)한 사실을 짤막한 소식으로 실렸는데 그 기사를 쓴 김승길주임(연변일보사 조문군중사업부)이 필자와 하는 말이 고 하였다.  그로부터 필자는 살아 있는 기자는 신문에 못 나는줄로 알고 있었다. 사실 또한 그랬다.   2001년 12월 27일 연변일보농촌부 남대성기자가 고혈압병 으로 불시에 사망(53세)했다. 그는 사망전 날까지 돈화에 취재 를  갔다가 돌아와서 이라는 1 면 톱기사를 써바치고 사망하였다. 필자는 그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듣고서야 남대성기자가 10년간 간고한 농촌부기자로 분투했고 그는 주로동모범, 주우 수당원으로 2000년 중국 농민일보에서 추천, 선발한 전국 10 대우수기자라는것을 알았다. 추도식이 끝난후 필자는 조선문을 책임진 부주필을 찾아가 는 건의를 제출하여 동의를 얻고 남대성기자를 추모하는 기사를 써 바쳤다. 나의 글을 읽어 본 부주필은 일개기자의 명의로가 아니라 경제부의 명의로 추모글을 쓰자며 남대성기자 추모기사를 경제부에서 쓰 라고 맡겼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는 남대성기자를 추모하는 글이 연변일보에서 볼수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남대성기자가 사 망한 2년 후에야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기관지 (20 03 년 12호)에 를 발표했다.   또 한가지 실례라 하겠다. 2011년 12월 22일에 45세 나이에 과로한 탓으로 자기의 사무실책상에서 사망한 길림모바일신문주필 양광(杨光)의 사적도 그랬다. 양광은 전기적 색채가 짙은 《흔월의 동화》로부터 모든 아파트복도의 어둠을 몰아낸 《광명행동》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감동시킨 4살짜리의 존엄》으로부터 《못난 안해를 21년 지킨 금보다 귀한 정》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이름인 양광 그대로 가슴속의 해빛을 사방에 빛내 언론사업자의 량심으로 사랑의 홰불을 인간세상에 전한 숭고한 기자며 출중한 주필이였다. 그런데 그의 감동적인 사적도 그의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하고 그가 타계한 후에야 란 제목으로 신문에 실려 독자들에게 아쉬움과 유감을 남겨주었다.  이 밖에도 필자로서는 영문을 모를 일이 지금 보면 여러 신문에서 타신문의 기사를 곧 잘 퍼가는데 무슨 필자가 흘려지내 버렸는지는 몰라도 는 기사는 조글로에서 로 올린 외 다른 매체들은 올리지 않는 것이다. 독자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기자의 사적인데 말이다. 이런 실례로 필자는 숨을 쉬는 엘리트기자의 사적은 누가 쓰며 또 기자들의 선진사적은 꼭 죽은 후에야 홍보해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 아니면 기자들의 선진사적을 신문에서 보도하려면 어느 상급부문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그 누구라도 살아 있을 때 사회적으로 자기의 인생가치를 인정을 받으면 기뻐할 것인데 말이다. 필자는 신문계통에서 매년 기자절에 , 등으로 평의만을 할 것이 아니라 훌륭한 기자들의 사적을 제때에 신문에 실어 독자들의 마음에 숭고한 기자의 형상을 심어주는 한편 그에 비춰 많은 기자들이 독자들부터 직업적인 감독을 받게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103    50대 기자의 값진 인생 댓글:  조회:8561  추천:5  2013-04-05
고 박금룡기자를 추모하여 3월 27일 필자는 타국땅에서 《길림신문》연변지사 안상근주임으로부터 제일 기다리면서도 제일 듣고싶지 않은 겁난 소식을 접하였다. 《오랜만에 소식 전하는군요. 말이 떨어지지는 않지만 어제 26일 새벽에 박금룡동지가 사망했습니다. 어제 이미 장례를 치렀고 추도식도 가졌습니다. 참 아까운 사람이 사망하여 모두들 마음 아파하고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시다.》 아니, 박금룡지사장이 끝내 사망하다니?! 박금룡이 급병에 걸리자 필자는 (혹시나?) 하는 불감으로 박금룡을 기리기 위하여 당금 출판하는 필자의 두권의 책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ㅡ오기활의 일사일언집》의 머리말에 《이 책의 출판에 많은 조언과 제시를 준 박금룡 등 여러 동료들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ㅡ오기활이 만난 그때 그 사람들》에는 제282페지,424페지의 사진을 급히 바꾸어 넣었다. 그런데 필자의 출국으로 박금룡지사장이 이미 출판된 필자의 두 책을 보지 못하고 저세상에 갔다니 필자의 마음이 칼로 도려내는듯 아프기로 그지없다. 하늘이 무정하기로 49살 나이에 첫병(림파암)에 걸려 아직 50살을 석달도 못 살아본 언론계의 솟아오르는 새별을 별찌로 만들어 이 땅에 버리다니? 아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더니 아마도 하느님이 박금룡의 짧은 인생사를 기리려고 사람들에게 별찌로 조물하여 하사한것이리라. 박금룡의 짧은 인생사를 돌아보며 그의 추도식에서 올린 《길림신문》의 추도문을 읽어보았다. ㅡ박금룡동지는 길림신문사 인터넷신문개혁을 책임지고 밤낮이 따로 없이 고심해오던중 불행하게도 지난해 9월 몹쓸 병마에 걸려 수개월간 병마와 박투해오다가 끝내는 이기지 못하고 2013년 3월 26일 새벽 1시 10분에 50세를 일기로 영영 우리곁을 떠났습니다. 실로 청천벼락과도 같고 우리의 마음을 찢어주는 비보입니다. ㅡ이 세상에는 총명하고 재질이 뛰여난 사람이 많고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 일생이 다 빛나는것은 아닙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고 사회와 이웃을 위함에 몸과 마음, 슬기와 힘을 아낌없이 이바지하는 사람만이 진정 삶의 보람이 있고 존재의 가치를 느끼는것입니다. 고 박금룡동지는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드팀없이 수행해왔습니다... 필자와 박금룡의 첫 만남은 지난 세기 90년대초 그가 쓴 글 《온주에서 온 상인》을 보고 하도 좋아서 그를 찾아가 치하를 한 그날부터다.그후 그가 적자운영을 하는 《종합신문》주필을 맡고 근 10만원이라는 사재를 팔면서 《종합신문》편집시설과 환경을 개선하며 끈질긴 노력과 자기만의 노하후로 흑자경영을 시작할 때 그를 도와 수만원의 기업협찬을 조직해주었다. 고 박금룡지사장간의 공석에서의 《최후의 만찬》은 지난해 9월 10일 교원절 축하파티였다. 교원절 저녁에 박금룡주임이 연변언어장애훈련쎈터교원들을 위하여 교원절축하파티를 마련했는데 그날 저녁에 박금룡이 요즈음에 오른팔을 올리기가 힘들다고 말하기에 필자가 아마도 《오십견》이 왔는가보다며 병원에 가보라고 권하였는데 그 이틑날에 연변병원서 림파암진단을 받았다. 필자는 박금룡주임과 많은 일을 손잡고 해보자고 약속하였다. 그중의 하나가《한줄기》기부문화를 전 사회적으로 추진하자는것이다. 2011년 12월 어느날, 필자가 박금룡지사장을 찾아 《연변언어장애인현황과 대책마련 세미나》에서 전 사회적으로 《한줄기(한끼를 줄여 장애사업에 기여)》기부문화활동을 발기할것을 건의했더니 과연 12월 23일 《연변언어장애인현황과 대책마련세미나》는 《한줄기활동을 펼치자》는 창의로 마감하였다. 그후부터 박금룡을 비롯한 우리 몇몇 동사자들은 시간만 있으면 《한줄기》를 《한줄기 소원》, 《한줄기 희망》, 《한줄기 해빛》으로 뻗어나 《한줄기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타오르리라》로 구상하여왔다. 하여 박금룡주임은 《한줄기》기부활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작성하였다. 이렇게 많은 할 일들이 박금룡주임을 기다리고 박금룡주임이 해야 할 일들이 그렇게도 많은데 무정하게도 박금룡이 이세상을 떠나다니. 실로 하늘이 통곡할 일이다. 필자는 고 박금룡의 일생을 한마디로 살아서 책임감을 다한 일생이였다고 귀결한다. 그는 사회에 대한 책임, 가정에 대한 책임, 동지에 대한 책임, 불우이웃돕기에 대한 책임에서 사랑을 키웠고 그 사랑에서 언론인의 책임을 앞세웠다. 책임이란 자기의 삶에 힘을 주는 배경이고 모든 일의 출발점이다. 책임은 어떠한 사건과 환경도 그것이 내 마음의 거울임을 깨닫고 반응하게 된다. 책임은 뜻에 의한 선택이고 삶의 원동력이다. 필자는 박금룡의 죽음을 그 많은 책임을 한몸으로 감당한 그가 단 자기의 신체에 대한 무책임으로 인한 과로로 빚어진것이라 생각한다. 자기의 신체에 대한 책임은 본인만이 아닌 가정에 대한 책임이고 사회에 대한 책임인데 말이다. 박금룡동지는 우리의 곁을 영영 떠났다. 살아있는 우리가 이미 떠난 그의 목숨은 되살릴수 없지만 그의 뜻은 늘 되살릴수 있을것이고 그의 뜻을 살리는것은 남은 살아있는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이 《몫》이라는 숙제를 어떻게 훌륭히 완성을 하느냐가 바로 박금룡의 죽음에 대한 행동하는 추모이고 추억이며 그의 짧은 삶을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이 간직하는 계속이다. 필자는 박금룡과의 약속을 어떻게 마무리를 할것인가를 고민하고있다. 오늘도, 래일도… 고 박금룡동지는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것이다. 고 박금룡동지여 고이고이 잠드시라! 고 박금룡동지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2013년 4월 2일 , 일본에서  
102    감동을 주는 어록 댓글:  조회:6547  추천:2  2013-04-02
지난 3월 26일 며 아들이 메일로 보내온 한국 국가대표 피겨수케이팅선수 감연아의 어록이다. ㅡ훈련을 하다보면 근육이 터져버릴듯한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순간, 주저 앉아 버리고 싶은 순간… 이런 순간이 오면 가슴속에서 뭔가가 말을 걸어온다 하는 속삭임이 들린다. 이런 유혹에 문득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때 포기하면 안한것과 다를바 없다. 99도까지 열심히 온도를 올려 놓아도 마지막 1도를 넘기지 못하면 영원히 물은 끓지 않는다고 한다. 물을 끓이는 마지막 1도, 포기하고 싶은 바로 그 1분을 참아내는 것이다. 이순간을 넘어야 다음 문이 열린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갈수있다. ㅡ그저 꿈꾸는것만으로 오래 행복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 꿈을 이루고 싶었다. 승부욕이 강한 나는 1등을 하고 싶었고 그것이 꿈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의 경쟁대상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걸 모조리 먹어 버리고 싶은 나, 조금 더 자고 싶은 나, 친구들과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나, 아무 간섭도 안 받고 놀러 다니기 싶은 나, 하루라도 연습을 좀 안 했으면 하는 나, 내가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은 다른 누가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였던 것이다. 이런 나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 즐겁게 하자,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런 구애 없이 한참 놀고 싶을23살 나이에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뼈를 갈고 근육이 터져 버릴듯한 고통을 이겨내고 지구촌의 최고 피겨수케이팅선수로 된 김연아에게 머리가 숙여진다. 에 이 어록만으로도 답이 확실하고  충분하다. 그는 23살 나이에 인생성공의 철학을 터득해 냈다. 그렇다, 승리가 가장 가까울 때 가장 동요하기 쉬운 때다. 1도를 위해 1분을 참아 내는 김연아의 보귀한 이 그로하여금 성공의 대문을 열고 원하는 세상에 갈수있게 하였다.  인생의 적은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있는 사람이고 자기를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김연아는 강한 사람이였기에 힘이 센 남을 이겼다. 그리고 하는 일을 즐겁게 했기에 최대가 아닌 최고로 되였다. 김연아의 어록을 읽고 지난 날을 반추, 반성하며 는 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101    “방법은 문제보다 많다” 댓글:  조회:7230  추천:11  2013-03-26
“해결할 문제가 하나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문제보다 많다. 나는 이를 진리라고 한다” 이는 2급 지체장애자 도문시 최원이 늘 말하는 “어록”이다. 필자는 이 말을 수학에서 “표준답은 하나지만 표준답을 구하는 방법은 하나 이상”인 수학계산식에 비춰 “방법>문제”란 “공식”으로 정의하였다. 층계를 오르자면 돌아 앉아서 엉뎅이를 한층한층 올려야 하는 최원(51,녀,조선족)은 “방법>문제”를 좌우명으로 하고  분투한데서 소학교4년(한,조반 각각 2년)밖에 안다는 공부밑천으로 일어, 영어수료증과 연변대학본과 졸업증을 따냈고 결혼후 세식구가9평짜리 세집에서 남편의 인력거수입에 매달려 살던 무로부터 지금은 120평짜리 아빠트에서 “최원단란글방”(일,영,한,조4국어글방)과 240평짜리  목욕탕을 운영하는 유룰 창조한데서 인생의 강자, 마음의 부자로 불린다. 최원은 또 한족총각과 결혼한후 이 “공식”을 활용해 남편의 흠연, 도박습관과 살림이 구차하고 몽매하기로 말이 아니던 시집편의 형제, 부모, 친척들의 경제생활과 화목, 효도, 자녀교육 등 여러모로 릉곡지변(陵谷之变)시킨데서 그의 남편(류봉군)이 “우리 류씨가문에서는 최선생을 주석이라고 부릅니다”며 자랑한다. 최원은 “방법 > 문제”를 주선으로 자서전 “휄치어의 노래 “(조,한문)를 쓰기까지 하였다. 최원의 사적을 알고 한국 NBC에서 드라마를 찍으려고 하였는데 연변TV에서 찍겠다기에 계획을 접었다. 필자는 “방법 > 문제”를 진리라는 최원의 말에 동감이다.  9년 전 필자가 화책 “성공을 향하여”를 출판할 때 일이다. 문장의 원문은 “일일신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인데 인쇄공장의 인쇄는”일일신우일신(   )”으로 되였다. 하여  필자가 인쇄공장에 질의를 제기하니 공장측에서 “3000부나 되는 책을 이미 인쇄까지 끝냈으니 별책이 없다”며 인쇄비가격을 조절하자고 했다. 이에 필자는 “문제 < 방법”이란 단마디를 주면서 타협은 없다고 딱 잡아 뗐더니 공장에서 별수없이 日日新又日新을 수작업으로 전부 보충하였다.   “방법 > 문제”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말한다. 례하면 돈이 1원이 남았다고 하자.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아직도 1원이 있다”며 그 1원을 어떻게 활용할가를 궁리 하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은 “일원 밖에 없다”며 그 1원에 목이 매워 벌벌 떤다. 우리 말 속담에 “바로 가나 돌아가나 서울에 가면 된다”, “꿩 잡는게 매다”는 인생의 항로는 여러 갈래고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수다함을 말하고 “한 나무만 보고 수림을 못 본다”, “주는 떡도 못 먹는다”는 있는것도 못 보고 주는것도 못 먹는 소극적이고 굳어진 인생살이를 말한다. 우리는 운명을 명운이라고 한다. 필자는 명운(命运)을 “명령대로 운이 만들어 진다”로 풀이한다. 자동차가 운전자가 핸들을 꺽는 쪽으로 달리듯이 명운도   명령자의 뜻대로 방향이 정해진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의지와 신념이 강한 사람은 살아가는 방법이 많고 과정도 다단하다. 허나 의지도 신념도 없는 사람은 일단 어려운 일이 생기면 병든 닭처럼 풀이 죽는다. 운명, 명운의 주인은 바로 내다. 그러니까 스스로에게 자신있게 명을 하라. “나는 할수 있다”  “나는 꼭 해내고 만다”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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